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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의 눈] 국산차, 국산맥주가 욕 먹는 이유/오달란 산업부 기자

    [오늘의 눈] 국산차, 국산맥주가 욕 먹는 이유/오달란 산업부 기자

    신문 지면뿐 아니라 인터넷에도 기사가 실리면서 독자의 반응을 댓글로 즉시 확인할 수 있게 됐다. 보통은 내 기사에 달린 댓글에 크게 신경을 안 쓰는 편이다. 저마다 생각은 다른 법이니까. 기자 생활 5년째 접어드니 웬만한 ‘악플’(악성 댓글)은 보고 넘길 수 있는 ‘맷집’도 생겼다. 그런데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는, 자꾸 신경 쓰이는 댓글이 있다. 국산 자동차와 국산 맥주에 대한 기사에 달린 악플들이다. 먼저 자동차다. 국산 자동차라 했지만, 표적은 국내시장(수입차 제외)의 약 80%을 차지하는 현대·기아자동차다. 지난달 현대차 미국 판매법인을 다녀와서 ‘소득 줄면 차 반납하세요. 따뜻한 마케팅, 미 소비자 사로잡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썼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 실직자 등을 대상으로 현대차가 차 할부금리를 대신 내주거나 차를 반납할 수 있도록 한 판매 전략으로 미국 시장에서 바람을 일으켰다는 내용이었다. 기사에 달린 댓글은 이랬다. ‘남의 집에서 하지 말고 우리나라에서 좀 해봐라’, ‘미국에만 따뜻한 현기차’, ‘우리는 버려진 민족’ 등 국내 소비자는 홀대한다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맥주는 어떤가. 역시 지난달 서울신문 기자들을 상대로 국산 맥주와 수입 맥주의 이름을 가리고 시음하는 ‘블라인드 테스트’에 대한 기사를 썼다. 수입 맥주와 국산 맥주의 맛을 구별하기 어려우므로 국산 맥주가 맛없다는 건 편견이라는 내용이었다. 한 포털 사이트에 걸린 이 기사에는 3200개가 넘는 댓글이 달렸다. ‘국산은 탄산가스를 주입하는 쓰레기 맥주’, ‘수입 맥주 많이 뜨니 날뛰는 국내 맥주회사들, 언플(언론플레이) 말고 맛으로 승부하자’ 등이었다. 현기차나 국산 맥주나 우리 소비자들의 미움을 단단히 산 게 틀림없다. 왜 이렇게 욕을 먹을까. 두 제품 모두 국산이 내수시장을 장악하는 상황에서 ‘땅 짚고 헤엄치기 식’으로 쉽게 장사해 왔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경쟁자가 없으니 국내 소비자를 ‘봉’으로 대했다는 괘씸죄가 적용된 것이다. 최근 수입차나 수입 맥주가 국내시장에 공격적으로 진출하면서 이런 의견이 더 두드러졌다. 미국 수출용 차에 쓰이는 강판이 내수용보다 두껍다거나 같은 차종이어도 미국 차가 훨씬 싸다는 건 소비자들 사이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현기차가 “예전엔 그랬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다. 미국에서 제값 받기 전략을 고수하고 있다”고 해명해도 통하지 않는다. 맥주도 마찬가지다. 국내 주세법상 맥아 함량 비율이 10%만 넘으면 맥주로 인정받기 때문에 이 비율이 66.7%인 일본, 100%인 독일보다 맥주 맛이 싱겁다는 게 여론이다. OB맥주와 하이트진로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반박하지만 이를 믿는 소비자는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런 따가운 질책을 업체들이 꽤 달게 받고 있다는 것이다. 억울한 면이 없지 않으나 오해를 만든 책임도 자신들에게 있다는 반응이다. 소비자의 마음을 돌리는 것도 자신들의 몫이라고 말한다. 악플의 긍정적인 측면이 아닐까 싶다. 아, 또 악플이 달리려나. dallan@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6·25 북한군 남침, 9·28 서울 수복 1보 방송한 전설의 아나운서 위진록

    [김문이 만난사람] 6·25 북한군 남침, 9·28 서울 수복 1보 방송한 전설의 아나운서 위진록

    [상황 1] 1950년 6월 25일 오전 7시. “임시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임시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새벽 북한 공산군은 38선 전역에 걸쳐서 전면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안심하십시오. 우리 국군이 건재합니다. 거듭 말씀드리겠습니다….” [상황 2] 1950년 9월 28일 일몰 직전. “여기는 서울중앙방송국입니다. 여기는 서울중앙방송국입니다.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 그리고 서울시민 여러분, 오늘 새벽 유엔군과 대한민국 국군은 대한민국 수도 서울을 완전히 탈환하고 패주하는 공산군을 추격하며 북진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자유를 되찾았습니다….” 6·25전쟁 당시 북한군의 남침과 서울 수복의 소식을 가장 먼저 알린 제1성은 이렇게 다급했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당시 KBS 아나운서 위진록(85)씨. 북한군이 점령한 서울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전쟁의 현장을 생생하게 전달했다. 또한 1950년 11월 도쿄에 자리한 유엔군총사령부(VUNC) 아나운서 생활을 하면서 우리나라 격동의 현대사의 물줄기와 함께 파란만장한 삶의 길을 걸었다. 그의 이력을 얼핏 들여다봐도 알 수 있다. 일제 강점기인 1928년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나 가난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성장한다. 월남한 뒤 경성역(서울역)에서 역부로 근무하다가 8·15 해방을 맞이하고 만 19세때 서울중앙방송국(KBS)의 아나운서 시험에 합격한 이후 대한민국 정부수립 초창기의 현장 일선에서 활약했다. 김구 선생 장례식 실황중계, 이승만 대통령의 수행기자 등 현대사의 한복판을 지켰던 것이다. 현재 미국 LA에 거주하고 있는 위씨가 잠시 귀국했다. 자서전 ‘고향이 어디십니까’의 출판기념회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지난 15일 그를 만났다. 나이보다 훨씬 젊어보인다고 인사를 건네자 “규칙적인 생활과 생각, 그리고 책을 읽고 독후감을 꾸준히 기록한다. 아마 늙지 않는 비결인 것 같다”면서 웃는다. 주로 어떤 책을 읽느냐는 질문에 “번역물도 읽고 영어와 일어로 된 책도 읽는다”고 대답한다. 그는 평소 메모하는 습관이 있다. 최근 펴낸 자서전도 그동안 열심히 메모해둔 결과물이다. 그는 불혹을 넘긴 나이에 미국 이민길에 올라 LA 해변에서 햄버거 장사를 하면서 고군분투하며 살았다. 지금은 현지에서 수필가, 방송인, 클래식 음악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그동안 수필집과 음악 에세이집을 출간하기도 했다. 어떻게 해서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됐을까. 한창 전쟁중인 1950년 11월 일본 도쿄와 오키나와에 있는 유엔군총사령부 방송 아나운서로 가게 된 배경부터 설명한다. “연희송신소(당시 고양군 연희면)에서 기거하면서 방송을 할 때였습니다. 하루는 도쿄의 맥아더사령부 심리작전국 방송담당자 매튜 중령을 만났습니다. 그는 제 방송을 자주 듣는 편이며 2차대전때 종군 아나운서로 이름을 날린 CBS의 월터 크롱가이트와 목소리가 아주 닮았다고 했습니다. 이어 ‘한국전쟁도 이제 끝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면서 한달정도 도쿄에 가서 방송일을 할 생각이 없느냐고 제안하더군요. 생각할 것도 없이 그 자리에서 좋다고 대답했지요.” 맥아더 사령부의 심리작전국은 6·25전쟁이 일어나자마자 도쿄에 유엔군총사령부 방송국을 창설하고 NHK 방송망을 통해 이미 방송을 시작하고 있던 터였다. 남한과 북한으로 보내는 별도의 송신소가 작동이 됐음은 물론이다. 방송은 NHK 본사의 여러 스튜디오를 필요에 따라 사용했다. 방송은 전쟁에 관한 뉴스가 최우선이었고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소식, 스탈린 독재하의 소련의 내막, 김일성이 소련에 이용당하고 있다는 해설 등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또한 방송원고는 모두 미국인이 작성한 것을 우리말로 번역했다. “서울을 떠난 지 2주도 채 지나지 않아 아군 수중에 있던 평양에 공산군이 다시 들어왔습니다. 그러자 평양시민들이 대동강 철교를 더듬으며 필사적으로 피난하는 모습을 보도하게 됩니다. 그리고 흥남 지역에서 미 해병1사단의 해상탈출 등을 보도하면서 한달 예정이었던 체류기간이 무기한 연기 됐지요. 그렇게 도쿄에서 8년을 보낸 뒤 오키나와 사령부로 옮겨 14년을 더 근무하고 자식들 교육을 위해 식구들과 미국 이민을 가게 됐습니다.” 그는 오키나와 시절을 회고하면서 베트남 전쟁과 연관된 일화를 떠올린다. 1968년 가을 한달동안 종군기자로 베트남에 파견된다. 이때 비둘기 부대가 주둔한 나트랑 외에 맹호와 청룡부대 주둔지 등을 두루 방문했고 사이공에서는 주월한국군 채명신 사령관과 수차례 만나기도 했다. 또 베트남 전쟁이 확전되면서 한국군의 파병은 계속됐다. 자연스럽게 오키나와는 베트남에 주둔해 있는 한국군을 위해 위문차 오가는 연예인들이 자주 들르는 곳이 됐다. 이때 길옥윤과 패티 김 등 여러 연예인들과 친분을 맺기도 했다. 얘기를 다시 ‘6·25 남침 제1성’으로 돌렸다. 방송국장의 지시로 38선상(경의선의 한 중간역)에 있는 여현역에 도착한 것은 1950년 6월 10일이었다. “민심을 살피기 위해 38선이 보이는 지점에 중계차를 세우고 38선을 오가는 사람들과 인터뷰를 진행하는 일을 했지요. 특이 동향은 없었습니다. 그러던 6월 24일 밤 저는 아나운서실 숙직을 맡고 있었습니다. 후배 아나운서와 11시에 야간방송을 끝내고 다음날 아침 방송순서를 점검하고 숙직실로 쓰고 있는 제2 스튜디오로 가 잠을 청했습니다. 그런데 퉁탕거리는 소리에 눈을 뜬 것은 새벽 5시 10분이었습니다. 방송국 수위와 육군대위가 스튜디오에 급히 들어왔던 것이지요.” 육군대위는 종이 한장을 내밀면서 즉시 방송하라고 명령하듯이 말했다. 종이에는 ‘오늘 새벽 북한 공산군이 38선 전역에 걸쳐 공격을 시작했다. 국군은 모두 원대에 복귀하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방송시작이 6시 30분이고 이렇게 중요한 내용을 상부의 허락 없이 방송할 수 없다고 했다. 잠시후 민재호 방송국장이 국방부 정훈국장에게 확인한 뒤 원고를 급히 작성하고 제1보를 내보냈다고 위씨는 회고했다. “서울수복이 됐는데도 그해 6월 말에 이미 행방불명되거나 처형됐다고 알려진 선배 아나운서들의 소식은 여전히 알 수 없었습니다. 평양에서 온 방송요원을 상대로 열성적으로 도운 아나운서들은 그들과 함께 도주하듯이 북쪽으로 갔고 자백서를 쓰고 포섭당해 그들 밑에서 방송한 아나운서들은 자취를 감춘 상태였으니까요.” 필사적으로 숨어 다니며 살아남은 그는 동료와 선배들이 하던 일을 도맡아 하는 등 한동안 연희송신소에서 기거하면서 열심히 방송을 하게 된다. 이국땅에서 60여년을 살고 있지만 그 기억의 편린까지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 그는 가난한 집안의 2남 9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군청 토지측량기사로 일하던 아버지는 42세때 늑막염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들과 평안북도 선천으로 이사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가난 때문에 직업전선에 뛰어들 생각이었지만 돈이 없어도 학교에 갈 수 있다는 말에 평양사범학교에 입학했다. 이때 좋은 목소리와 뛰어난 노래 실력을 인정받아 합창과 독창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학교 브라스 밴드에서 트럼본 연주를 했다. 아울러 문학서적에 심취했다. 그러나 사춘기에 접어들자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는 등 학교생활에서 일탈, 모란봉 주위를 쏘다녔다. 결국 학교에서 담배를 피우다 발각돼 3학년때 퇴학당했다. 이후 형이 있는 남신의주역으로 가서 역부로 생활한다. 톨스토이와 헤르만 헤세 등의 문학서적은 꾸준히 손에서 놓지 않았다. 얼마 후 어머니와 누이가 살고 있는 서울에 온 그는 낙원동 근처의 한 회사에서 사환으로 일하다 경성역의 역부로 취직한다. 이어 해방이 되면서 누이가 종로2가 근처에 술집을 열자 외상값 받으러 다니는 일을 하게 된다. 1947년 서울중앙방송국에서 ‘방송극 연구생’ 모집공고를 보고 응시해 합격한다. 그후 2주일 만에 방송드라마에 출연한다. 당시 동기생으로는 장민호, 민구, 송영란, 윤길숙 등이었다. 같은 해 아나운서 시험에 응시하면서 아나운서의 길을 걸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그는 “20세기 격동기를 한 마리 늑대처럼 멀리에서, 가까이에서 조국을 바라보며 살아왔다. 아직도 내 마음의 눈물 줄기에는 희망의 꽃망울이 살아 있다”면서 ‘백년동안의 고독’을 쓴 남미의 작가 마르케스와 비슷한 삶을 살았다고 말한다. 또한 유대교 랍비이자 시인인 사무엘 울만의 말처럼 “청춘이라고 하는 것은 인생의 어떤 기간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가 아니냐”라고 했다. 선임기자 km@seoul.co.kr >>위진록은 1928년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입학하던 해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개성, 평북 선천 등을 전전하며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1940년 평양사범학교에 입학하고 1942년 3학년때 중퇴했다. 남신의주역 역부, 서울의 한인회사, 일본광고회사 대리점 등의 사환을 거쳐 서울역 역부로 일하면서 1945년 해방을 맞았다. 1947년 KBS 제1회 ‘방송극 연구생’ 모집에 합격했다. 장민호, 민구, 조남사 등과 라디오 드라마에 출연했다. 같은 해 9월 KBS 아나운서 모집에 합격해 만 19세로 최연소 아나운서 기록을 세운다. 1948년 KBS 제1회 방송극 대본 공모에 입선했으며 김구 선생의 장례식 중계 등 격동기의 방송 일선에서 활약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 남침, 9월 28일 서울수복의 제1보를 방송한 아나운서로 기록에 남아 있다. 그해 11월 일본 도쿄의 유엔군총사령부방송(VUNC)에 파견돼 22년동안 도쿄와 오키나와에서 근무하다 미국으로 이민했다. LA에서 햄버거 장사 10년, 서점 등을 경영하면서 동네 신문을 발행했다. 재미 방송인협회 고문 등을 지냈다. 주요 저서로는 수필집 ‘하이! 미스터 위’(1979년), ‘잃어버린 노래’(1993년), ‘낙타의 속눈썹’(1997년), ‘위진록의 커먼센스’(1999년), ‘클래식, 내마음의 발전소’(2011년) 등이 있다.
  • 교학사 外 오류 많지 않은데… 8종 한꺼번에 수정 권고 적절했나

    교학사 外 오류 많지 않은데… 8종 한꺼번에 수정 권고 적절했나

    “결국 교육부가 ‘역사전쟁’의 방아쇠를 당긴 셈이다.” 21일 교육부가 고교 한국사 교과서 8종의 수정·보완 권고사항을 전격 발표하면서 역사학계의 이념 논쟁이 한층 격화될 전망이다. 교육부는 수정 권고를 따르지 않는 출판사에 수정명령 등 행정권을 발동하기로 선언하면서 긴장감을 더했다. 교학사 이외 7종 교과서 집필진은 “교육부 수정 권고에 무조건 따르지 않겠다”며 맞서고 있다. 앞서 2008년 금성출판사의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좌 편향 논란 당시나 2011년 ‘민주주의’에서 ‘자유민주주의’로 집필기준 수정 논란이 일었을 때에도 교육부 개입이 진보-보수 간 대립을 격화시킨 선례가 있다. 교육부가 8종의 오류 829건을 발표한 뒤 다시 부각된 쟁점은 크게 세 가지이다. 우선 교학사를 뺀 다른 교과서 7종의 오류 건수는 62~112건으로 평소 다른 과목에서 발견되는 오류에 비해 과도하게 많지 않은데, 8종 전체가 수정 권고를 받는 게 적절한 지 의문이 제기됐다. 교학사 오류 건수는 251건으로 다른 교과서의 2~4배에 달했다. 심은석 교육부 교육정책실장은 “2014학년도 고교 신입생부터 한국사를 수능 필수로 공부하게 된다”면서 “사실 오류, 표현·표기 오류, 서술상 불균형, 국가정체성 왜곡할 수 있는 내용이 실린 교과서를 수정해 올바른 역사인식을 심기 위해 불가피했다”고 설명했다. 교육부는 8종 교과서를 한꺼번에 분석, 8종이 공통적으로 오류를 범한 경우나 서로 다른 사관을 채택해 학생들을 혼란스럽게 할 수 있는 대목을 찾아냈다고 설명했다. 교과서별로 ‘장보고 사망연대’를 841년이나 846년으로 다르게 기술했거나, 고려 시대 ‘안승’과 ‘보장왕’의 관계에 대해 아들·조카·서자 등 이설을 교과서마다 각각 다르게 서술한 부분을 찾아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정도 오류 수정을 위해 고교 현장의 교과서 채택 일정을 연기시키는 초유의 사태를 감수해야 했는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됐다. 두 번째로 진보 진영에 교학사에 대해 제기한 우 편향 지적과 보수 진영이 나머지 7종에 대해 제기한 좌 편향 지적을 교육부가 모두 수렴해 수정·보완 권고를 내리면서 오히려 양 진영 모두 불만이 더 고조될 가능성이 제기됐다. 공교롭게도 교육부가 권고한 교학사 수정 권고 건수는 앞서 지난달 역사학계에서 지적한 오류 건수 293건과 비슷한 수준이다. 나머지 7종과 관련해 ‘국가 정체성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교육부가 무더기로 수정 권고를 한 내용은 국정감사에서 새누리당 의원들이 지적한 내용을 많이 반영하고 있다. 예를 들어 금성·천재·비상교육·두산동아 등 4개 출판사는 북한의 주체사상에 대해 ‘사람 중심 세계관이고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혁명사상’이라고 북한 자료를 그대로 인용했다가 수정 권고를 받았다. 앞서 여당 의원들이 지적했던 대목이다. 금성출판사는 ‘소련의 치스차코프 포고문’과 ‘미국 맥아더 포고령’을 단순 비교하느라 소련 포고문의 기만성을 서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교육부 수정 권고를 받았는데, 앞서 14일 교육부 국정감사에서 김희정 새누리당 의원이 지적했던 내용 그대로이다. 세 번째로 교육부가 ‘집필기준 준수 여부’를 수정 권고 기준으로 내세웠지만, 정작 명확한 집필기준을 설명하지 못하는 점도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심 실장은 “비상교육 등 3개 출판사의 교과서에 북한 주민 인권문제 서술이 누락시킨 점은 집필기준에 위배됐다”고 했지만, 이 교과서들은 “북한이 인권문제로 인해 국제사회의 지탄을 받고 있다”는 식의 간략한 언급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출판사 측에선 “북한 인권문제에 대해 얼마나 할애해 어떻게 쓰라는 말인지 기준이 없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또 교육부가 국사편찬위원회의 ‘부실 검정 의혹’을 방관하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수정 권고 사항 892건을 찾아냈다는 말은 곧 검정 책임을 맡은 국사편찬위원회 검정이 부실했다는 지적으로 이어졌지만, 교육부는 “여력이 없다”며 검정과정에 대한 조사를 거부했다. 홍희경 기자 saloo@seoul.co.kr
  • [서울광장] 20세기 영·러·일, 21세기 미·중·일/문소영 논설위원

    [서울광장] 20세기 영·러·일, 21세기 미·중·일/문소영 논설위원

    전 세계 식민지 개척으로 ‘해가 지지 않는 나라’임을 자랑하던 영국은 19세기 말부터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상당히 신경질적 반응을 보였다. 1885년 영국 해군이 거문도를 불법 점령한 이유도 조선과 러시아 간 밀약설(1884년 조러수호조약)이 흘러나온 탓이었다. 요즘 ‘외교의 달인’처럼 소개되는 고종은 당시 국제정세에 둔감했다. 청일전쟁 후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를 끌어들이더니 러시아공사로 아관파천(1896년)을 했고, 1904년까지 친러정책을 폈다. 영국 입장에서 역린(逆鱗)이었다. 조선이 러시아의 손에 떨어지길 원하지 않았던 영국은 러시아 견제를 위해 일본을 끌어들였다. 영국이 먼저 1901년 7월 주영 일본공사를 불러 1902년 1월 제1차 영일동맹을 맺었다. ‘한국에 대한 일본의 이익 보호’는 받아들여졌다. 제1차 영일동맹은 1905년 8월 제2차 영일동맹으로 강화됐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늑약 3개월 전으로,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당시 세계 최강국이었던 영국에 한국 지배를 외교적으로 용인받은 것이다. 이 동맹은 비극으로 끝났다. 1차 세계 대전에서 영국과 함께했던 일본은 2차 세계 대전에서는 영국을 배신했고 세계의 평화와 인류의 안전을 위협했다. 21세기 최강국 미국의 신경을 건드리는 나라는 G2로 떠오른 중국이다. 소련을 중심으로 한 냉전시대는 20세기 말에 막을 내렸지만, 미국의 힘이 상대적으로 줄어든 상황에서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중국의 팽창은 또 다른 위협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G2 중국의 등장 이후 동북아시아에서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미국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올 초부터 아베 정부는 제2차 세계 대전의 패전국으로서 받아들인 일명 ‘평화헌법’을 개정해 집단 자위권을 획득하겠다는 입장을 꾸준히 주장했다. ‘보통국가’가 되겠다는 의미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나라가 되겠다는 것이다. 한데 평화헌법은 맥아더 장군이 2차 세계 대전의 책임을 물어 패전국 일본에 부여한 것이다. 아베 총리는 과거 침략전쟁에 대해 사과하기는커녕 “침략의 정의는 학계에서도, 국제적으로도 정해지지 않았다. 국가 간의 관계에서 어느 쪽으로 보느냐에 따라 다르다”는 요설을 늘어놓았다. 잘못된 역사 인식에 기반한 아베 정부의 일본 재무장에 대해 일제에 피해를 입은 한국과 중국의 우려와 반발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 자신감의 배경은 미국의 지지였다. 한국의 ‘혈맹’ 미국은 한국정부와 국민의 우려, 걱정에 동조하지 않고 일본의 손을 들어준 것 같다. 미 존 케리 국무장관과 척 헤이글 국방장관은 지난 3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미·일 안전보장협의위원회(2+2)에서 “미국은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포함한 일본의 방위력 증강 구상을 환영한다”고 공동성명을 내 일본의 재무장을 공식화했다. 집단적 자위권은 일본이 직접 공격받지 않아도 미국이나 한국 등 동맹국이 공격을 받으면 반격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아베 총리가 주장하는 바 “적극적 평화주의”인 것인데, 한반도 유사시에 일본군대가 진주할 수도 있다는 의미다. 미·일 안전보장협의위원회 결과를 두고 우리 정부나 외교부 등은 ‘아차’ 싶겠지만, 이미 깨진 항아리다. 한국인들의 반발을 우려한 우리 정부는 “아니다”라고 반박하지만 설득력이 떨어진다. 안보를 강조하는 한국의 보수는 아이러니하게도 본인은 물론 자녀도 군 복무를 기피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정부는 전시작전권도 미국에서 찾아가라고 하는데 연기를 요청했다. 전시작전권 연기와 연계해 미국의 미사일방어(MD) 체계에 편입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중국에 던져줘 갈등의 소지도 남겼다. 복잡하게 변화하는 국제정세를 제대로 읽고, 대처할 수 있는 외교적 능력이 절실한 시기이다. 100여년 전 개항 과정에서 잘못된 판단과 선택으로 겪은 어려움을 21세기에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 symun@seoul.co.kr
  • 부자들이 절대 하지 않는 ‘5가지’

    부자와 보통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 언뜻 보면 일상에서의 행동에 별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꼼꼼히 살펴보면 큰 차이가 있다고 전문가들은 의견을 모은다. 다음은 최근 미국 허핑턴포스트에 실린 부자와 보통사람들의 차이점이다. 부자들이 절대 하지 않는 행위 5가지를 소개한다. 1. 항상 승진을 추구한다? 초고소득자들이 좌천을 경계하고 있지만 항상 승진만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구직사이트 래더스닷컴의 전문가 아만다 어거스틴은 조사에서 연봉 10만달러(약 1억원) 이상의 사람들은 연봉이 같거나 감소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한다. 이는 사내 보직 변경은 물론 이직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잠시 대우가 나빠져도 향후 성장이 기대되는 일에 종사하거나 출퇴근 비용을 절약하는 등의 이유로 이직하기도 한다. 2. 오전 6시 이후 일어난다? 미국 국립수면재단에 따르면 한창 일할 나이인 30~45세 직장인의 평균 기상시간은 오전 6시다. 하지만 대기업 CEO 대부분은 오전 5시에 일어나고 있다고 영국 일간 가디언은 보도한 바 있다. 하지만 일반인은 그들이 그 시간에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 이는 로라 반더캄이 2012년 출간한 ‘가장 성공한 사람들이 아침먹기 전에 하는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데 부자들 중 어느 누구도 그 시간에 이메일을 확인하거나 페이스북을 하지 않는다. 3. 빚내서 집산다? 미국 역시 많은 사람들이 내집 마련을 꿈꾼다. 하지만 당신이 그 집에 앞으로 5년간 거주하지 않는다면 사지 말아야 한다는 ‘5년 규칙’이 재기되고 있다고 트룰리아의 부동산 전문가이자 엑스트라티비 ‘맨션스 앤 밀리어네어스’의 진행자인 마이클 코베트는 말한다. 부자들 사이에서도 집을 사는 것보다 빌리는 것이 인기라고 그는 덧붙였다. 저명한 경제학자 로버트 쉴러는 최근 맥아더재단 조사에서 미국인 61%는 집을 빌리는 것도 꿈을 이룬 것이라고 동의했다고 밝혔다. 4. 물건 값은 비교하지 않는다? 올해 1분기 미국 부유층은 연봉 10만달러 이하인 사람들보다 인터넷 쇼핑몰 이용률이 47% 높았다고 마티니 미디어와 컴스코어가 최근 시행한 조사에서 나타났다. 흥미로운 점은 부유층일수록 고가의 상품을 취급하는 사이트보다 중저가 사이트를 이용하는 비율이 높았다는 것. 인터넷 쇼핑몰은 충동 구매하는 경향이 높은데 부유층은 인터넷상에서 제대로 가격을 비교하고 구매하고 있다. 5. 남들과 똑같이 은퇴한다? 미국의 평균 퇴직연령은 61세(갤럽 조사)인데 비해 고소득자들은 최소 70세(스펙트럼그룹 조사)까지 일한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 심지어 이 중 연봉 7만5000달러(약 7980만원) 이상 버는 사람들 중 절반은 “일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 일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물론 이들 대부분은 신체에 부담이 적은 사무직이지만 ’퇴직은 없다’는 생각은 부자가 되는 비법 중 하나일 것이라고 안드리아니 기자는 설명했다. 이어 그는 퇴직을 선택하기 보다 스트레스가 적은 직책이나 임시직으로 물러나는 것이 좋으며, 사회보장연금제도(국민연금과 비슷한 제도)가 있지만 일을 계속해야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첫맛과 끝맛의 조화!’세계 최고 식감의 맥주 탄생

    ‘첫맛과 끝맛의 조화!’세계 최고 식감의 맥주 탄생

    당신이 그 어떤 술보다 맥주를 유독 사랑하는 애주가라면… 영국서 열린 2013 세계 최고 맥주상(World Veer Awards)에서 세계 각국의 경쟁주(酒)를 꺾고 소규모 공장의 맥주가 1위에 뽑혔다. 영국 일간지 데일리메일의 9일자 보도에 따르면 1위를 차지한 맥주는 요크셔 동쪽에 생산지를 가진 그레이트 뉴섬 맥주공장(Great newsome Brewery)의 것으로, 가족끼리 모여 소규모로 경영하는 이 회사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맥주를 생산하는 것이 특징이다. 2013 세계 최고 맥주상 대회에는 독일, 미국, 캐나다, 프랑스, 일본 등 세계 30개국에서 온 맥주 600종이 참가했다. 심사는 블라인드테스트로 이뤄지며, 심사위원으로는 기자, 일반인, 맥주전문가 등이 포함돼 있다. 이 회사의 역사는 ‘고작’ 6년 반 정도지만, 정통맥주라 불러도 부족하지 않은 깊고 진하며 독특한 맛이 심사위원들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심사위원단은 “오렌지 향의 시큼한 맛과 식감, 그리고 부드러운 맥아(麥芽)의 맛이 일품”이라면서 “첫맛과 끝 맛이 조화로운 것도 특징”이라고 평가했다. 그레이트 튜섬의 관계자는 “우리는 소비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들으며 한편으로는 한결같은 맛을 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솔직히 말하면 대회에 참가했다는 사실 조차 잊고 일에 열중하다가 1위 소식을 들어 매우 놀랐다”면서 “지난 해 런던올림픽 때 우리 맥주를 맛본 많은 사람들이 맛을 잊지 못하고 멀리서도 주문을 한다”고 덧붙였다.   나우뉴스부 nownews@seoul.co.kr
  • ‘보안업계 거물’ 맥아피 “도청방지 휴대기기 개발”

    보안업체 맥아피의 창업자 존 맥아피(68)가 최근 폭로된 미국 정보기관의 민간 사찰 프로그램 ‘프리즘’을 겨냥해 정부 도청 방지용 휴대장치를 개발한다고 밝혔다. 28일(현지시간) 미국 일간 새너제이머큐리뉴스에 따르면 맥아피는 이날 미국 캘리포니아주 새너제이 맥에너리 컨벤션 센터에서 열린 ‘C2SV(크리에이트, 컨버지 실리콘 밸리) 테크놀로지 콘퍼런스’에 참석해 손바닥만 한 크기의 휴대용 보안장치인 ‘디센트럴’의 설계가 어느 정도 진척됐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이 장치는 탈중앙집중화, 유동성, 로컬 네트워크 등이 특징”이라며 “이용자의 스마트폰, 태블릿PC 등이 정보기관의 사찰 시도에 뚫리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맥아피가 향후 6개월 뒤 시제품을 만들겠다고 공언한 이 제품의 가격은 100달러(약 10만원)이하로 책정될 예정이다. 최훈진 기자 choigiza@seoul.co.kr
  • “푸대접 맥아더 동상, 美로 옮겨 오겠다”

    “푸대접 맥아더 동상, 美로 옮겨 오겠다”

    재미동포 정치인이 인천 월미도에 있는 더글러스 맥아더(1880~1964) 장군 동상이 푸대접을 받고 있다며 미국으로 옮겨 가겠다고 나서 주목된다. 미국 오리건주에서 5선 상원의원을 지낸 임용근(78) 세계한인정치인협의회 회장은 11일(현지시간) “인천 월미도 맥아더 동상을 오리건주 한국전쟁 기념공원으로 옮겨 오겠다”며 “동상 부지도 마련했고 경비도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임 회장은 “월미도 맥아더 동상을 철거하라며 시위가 벌어지는 상황에서 인천시가 맥아더 동상을 부담스럽게 여긴다면 우리가 옮겨 와서 잘 관리하겠다는 뜻”이라며 “조만간 인천시에 정식으로 제의하겠다”고 밝혔다. 2001년 오리건주에서 가장 큰 도시인 포틀랜드와 주도 샐럼 사이에 있는 윌슨빌에 미 서부 최대 한국전쟁기념공원을 조성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임 회장은 “이미 지역 인사들과 향군 조직 등을 중심으로 맥아더 동상 이전에 대한 공감대가 이뤄졌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임 회장은 “인천시가 맥아더 동상을 잘 관리하고 이전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이전 계획은 없던 일로 하겠다”며 “다만 맥아더 동상 이전을 포기하게 될 경우 윌슨빌 한국전쟁기념공원에 5년 내에 월미도 동상과 같은 맥아더 동상을 세울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5m 높이의 이 동상은 6·25전쟁 발발 80일 만에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역전시킨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을 기념하기 위해 1957년 건립됐다. 진보 단체가 최근 철거 시위를 벌이면서 이념 논쟁에 휘말리고 있다. 김미경 기자·연합뉴스 chaplin7@seoul.co.kr
  • [포토 다큐 줌인] ‘하우스 맥주’ 나들이

    [포토 다큐 줌인] ‘하우스 맥주’ 나들이

    유난히 더웠던 올여름. 하얀 거품 가득한 시원한 맥주 한 잔이 유독 그리웠던 여름도 끝물이다. 맥주의 유래는 약 6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4000년경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벽화에 인류가 맥주를 만들어 마신 흔적이 남아 있는가 하면, 클레오파트라가 맥주 거품으로 머리를 감았다는 등 고대부터 인류는 다양하게 맥주를 즐겼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현재 전 세계에서는 인디아페일에일, 람비크, 헤페바이젠, 둥켈, 바이젠비어, 필스너, 슈타우트, 슈바르트, 엑스포트, 라거 등 수많은 종류의 맥주가 다양한 방법으로 제조되고 있다. 미국의 소규모 맥주 생산 업체는 2000개 정도이고, 맥주의 본고장 독일에서는 중소 규모의 맥주 생산 업체가 1300곳에 이르며 제품도 1000개가 넘는다. 일본에는 지비루라 불리는 소규모 맥주 업체가 있는데 240곳 정도 된다. 우리나라 맥주는 대기업이 생산하는 라거가 대부분이다. 최근 국산 맥주와 북한의 대동강 맥주가 비교되면서 이슈가 되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맥아가 67% 이상 포함돼야 맥주로 인정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맥아 함량이 10% 이상이면 맥주로 인정된다. 성분비는 기업 기밀에 속해 맥주 맛에 대한 소비자의 궁금증은 더해만 간다. 이러한 라거 일색의 국내 맥주 시장에 내년부터 소규모 제조 업체의 맥주가 나온다. 내년부터 이들 업체도 일반음식점과 마트, 편의점에 맥주를 유통할 수 있게 돼 맥주 애호가와 소규모 생산자들의 기대가 커지고 있다. 맥주 선택의 폭이 넓어지는 것이다. 경기 김포에서는 지역 특산물인 쌀과 인삼을 원료로 만든 김포인삼쌀맥주가 이미 외국에서 호평을 받고 있다. 지금까지는 관광객을 상대로만 판매했는데 김포 지역을 시작으로 농협 유통망을 통해 전국으로 판매망을 넓힐 계획이다. 전북 익산 벼맥류연구소에서는 보리 종자를 받아 수확하는 등 국내 농특산물을 이용해 경쟁력 있는 한국 맥주 내놓을 준비가 한창이다. 일제시대 맥주 제조 면허를 제외한다면 세븐브로이는 한국의 맥주 제조 면허 1호라 할 수 있다. 이 회사도 국내 맥주시장에 신선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인디아페일에일, 필스너, 슈타우트 등 다양한 맥주를 생산하고 있으며 맛으로 승부를 걸겠다는 입장이다. 그런가 하면 전남 순창에서는 장앤크래프트브루어리가 독일식 맥주 생산 설비를 갖추고 양산에 대비하고 있다. 하지만 집 근처 슈퍼마켓에서 다양한 국내 맥주들을 접하려면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점이 많다. 세금이 가장 큰 걸림돌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은 대부분 알코올 도수를 기준으로 세금(주세)을 부과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맥주의 알코올 도수가 4.5도로 저도주임에도 35~40도에 이르는 양주와 같은 72%의 세금을 부과해 왔다. 막걸리의 경우 도수는 맥주보다 조금 높은데도 전통주 육성 차원에서 세율은 5%에 그치고 있다. 최근 들어 맥주에 대한 과세표준을 20% 낮췄지만 업계는 여전히 미흡하다는 입장이다. 주세의 면세 한도가 외국에 비해 낮아 중소업체의 원가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차보윤 한국마이크로브루어리협회장은 “중소기업도 어느 정도 성장할 때까지 세금 혜택이 주어지는데 맥주는 대기업보다 3~4배 높다”면서 “세금 단계를 다양화해 소규모 맥주 제조 업체들이 자생력을 갖출 수 있도록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또한 한국은 주세가 종가세인데 반해 일본은 종량세다. 유통 구조도 한국의 중소 맥주기업 성장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세븐브로이 김교주 이사는 “대기업에서 수입하는 외국산 맥주는 대형 마트와 소형 슈퍼마켓 등에 직접 납품할 수 있지만 국내에서 생산되는 맥주는 도매상을 거쳐야 한다. 유통 과정의 투명성 확보를 위해 만든 제도지만 한 단계를 더 거쳐야 하는 중소 업체의 맥주는 그만큼 가격 경쟁력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외국산 맥주의 시장 점유율은 10%에 이른다고 한다. 자유무역협정(FTA)의 영향으로 외국산 맥주 가격이 떨어진 측면도 있겠지만 국민들의 다양한 입맛에 맞추지 못한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다소 늦은 감은 있지만 지금부터라도 설비와 양조 기술을 발전시킨다면 우리나라에서도 다양한 맥주를 마실 수 있다. 나아가 세계 유명 맥주들과 견줘 전혀 손색없는 우리나라만의 맥주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글 사진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
  • 하이트진로 퀸즈에일 새달 출시

    하이트진로 퀸즈에일 새달 출시

    하이트진로는 국내 대형제조사 최초로 에일 맥주 신제품인 퀸즈에일을 다음 달 5일 출시한다. 국산맥주의 맛 논란을 불식하고 국내 주류시장을 잠식해 온 수입맥주에 정면대응하는 차원이다. 퀸즈에일은 맥주연구소 덴마크 알렉시아와 기술제휴를 통해 3년간 연구 끝에 내놓은 프리미엄 페일 에일 맥주다. 100% 보리(맥아)를 원료로 하며, 과실 향과 아로마 향이 진하고 풍부한 것이 특징이다. 블론드(1900원)와 엑스트라비터(2100원) 등 2가지 맛으로 출시되며 병맥주(330㎖), 캔맥주(355㎖, 500㎖)로 선보인다. 오달란 기자 dallan@seoul.co.kr
  •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⑧ 1950~60년대 : 파괴와 재건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⑧ 1950~60년대 : 파괴와 재건

    “도시는 기억으로 살아간다”(The city lives by remembering)고 미국의 시인 랠프 왈도 에머슨은 읊었지만, 서울은 600년 고도의 기억이 별로 없다. 마치 신흥도시 같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통에 불타고 약탈당했으며, 일제강점기 도읍에 대한 자취는 강제적으로 지워졌다. 조선총독부-경성시청-남산 조선 신궁을 상징 축선으로 하는 식민 도시로 치장됐다. 한국 전쟁통에 그나마 남은 것 대부분이 파괴됐다. 1960년대 이후 개발독재시대의 무지막지한 개발 광풍을 타고 또 한 번 뭉개졌다. 역사의 향기는 흩어졌다. 한강 이남으로 영역을 확대한 서울은 사실상 한국전쟁 이후 새로 건설된 신도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대문 안에는 표지석만 어지럽게 남았을 뿐이다. 전쟁과 대사건은 도시를 재건한다. 한국전쟁 당시 서울 폭격을 앞둔 맥아더는 “원래 도시란 천재지변이나 전쟁을 겪고 나면 그전에 비해 몇 곱절 더 크고 좋은 새 도시로 부흥된다. 미국이 재건을 도울 것이니 서울은 앞으로 이상적인 현대 도시로 탈바꿈할 것”이라고 큰소리쳤다. 실제 1644년 대화재로 도시의 80%가 타 버린 영국 런던은 옥스퍼드대 건축가 크리스토퍼 렌 교수에 의해 오늘의 런던으로 재건됐다. 일본 도쿄도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잿더미가 됐지만 탁월한 도시계획가 고토 신페이(後藤新平) 도쿄시장의 주도로 세계 도시계획 사상 유례가 없는 시가지 개조를 통해 새로 태어났다. 런던과 도쿄는 세계대전으로 또 한 번 타격을 입었지만, 옛 도시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서울의 재건은 성공작일까? 서울을 역동적인 현대 도시로 평가할 수는 있지만, 역사 도시로 평가하기엔 머쓱하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서울이라는 도시의 정체성은 꽤 혼란스럽다. 서울은 네 번 결정적인 상처를 입었다. 16세기 일본과 중국 군대에 의해 약탈당했으며, 근대 일제강점기엔 성곽을 허물고, 상징 축을 강제로 바꾸는 방법으로 도시 형태가 조작됐다. 한국전쟁기 유엔군과 한국군의 청야(淸野)작전(적이 이용하지 못하도록 농작물이나 건물 등 지상에 있는 것들을 말끔히 없애는 작전)을 통해 철저하게 파괴됐다. 1960~70년대 우리 손으로 남은 문화재를 헐어서 치워 버렸다. 맥아더의 말처럼 기회는 있었다. 1952년 전후 복구 차원의 첫 도시계획안을 마련하면서 세종로 등 39개의 큰길을 확장하거나 신설하고, 광화문광장·서울시청광장·남대문광장 등 19개의 광장을 만드는 과감한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재정부족 등을 이유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유럽의 오래된 도시처럼 구도심(사대문 안)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사대문 밖이나 강남 신시가지를 개발하겠다는 코페르니쿠스적인 발상의 전환이 없었다. 한국전쟁 이후 ‘광적’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서울 집중이 기회를 날려 버렸다. 집중을 막으려고 온갖 정책을 동원했지만 약효가 듣지 않았다. 해방 전후 100만명대였던 서울 인구는 1966년 380만명, 1970년 540만명을 넘어서더니 1990년 1000만명을 돌파해 버렸다. 수도 서울 행정은 집 지을 땅을 확보하고, 도로를 넓히고, 교통수단을 늘리고, 수돗물을 공급하고, 쓰레기를 치우는 것에 매달렸다. 만약 그때 인구의 서울 집중을 막을 수 있었더라면 서울은 한가롭게 전차가 다니며, 꼬불꼬불한 골목길이 정겨운 기와집이 빼곡한 도시로 남았을 것이다. 한강과 북한산이 주는 자연의 세례를 맘껏 누리는, 풍광이 뛰어난 성곽 도시로 유지됐을 것이다. 1950년대 서울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손정목 전 시립대 교수의 ‘서울도시계획이야기’를 기본으로 사대문 밖 풍경을 상상해 보자. 동쪽으로 동대문을 나서면 신설동 큰 길가까지 집이 들어 차 있지만, 바깥은 논밭 천지다. 신당동에 집이 드문드문했을 뿐 금호동·옥수동 일대는 산이었다. 왕십리를 지나 한양대 일대는 미나리꽝이었고 성동교의 나무다리가 삐꺽거렸다. 남쪽 한강대교에 이르는 동빙고동과 서빙고동 주민은 1000명 안팎이었고, 원효로 일대는 대부분 논밭이었다. 노량진, 상도동, 대방동, 영등포는 큰 길가조차 목가적인 전원 풍경을 연출했다. 서쪽으로 신촌을 지나 마포 전차 종점을 벗어나면 벌거숭이 산과 논밭이 펼쳐졌다. 동북쪽은 미아리고개, 서북쪽은 독립문과 현저동이 경계였다. 지금의 강남·서초·송파·강동·강서·관악·구로·금천·도봉·노원·은평구 등은 모두 경기도였다. 서울의 고층 건물은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최고층 건물은 지금의 롯데호텔 자리에 있던 8층짜리 반도호텔이었다. 이웃 조선호텔과 한국은행 모두 일제가 남긴 건물이었다. 1955년에 종로 사거리에 2층짜리 신신백화점이 신축됐고, 1957년 광화문 사거리와 을지로 1가에 3층짜리 국제극장과 5층짜리 개풍빌딩이 각각 들어섰다. 1958년 남대문에 7층짜리 그랜드호텔이 문을 열자 구경 인파가 몰렸다. 당시 서울 도심부의 평균 층 높이는 2층이 채 되지 않았다. 도심부를 고층화하려고 주요 간선도로변의 건물 높이를 3~5층 이상으로 정할 정도였다. ‘한강의 기적’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된 1962년부터 약 20년간의 고도성장기를 일컫는다. 이 기간 서울은 경천동지할 변화를 겪는다. 서울의 공간 변화는 1966년부터 1980년까지 15년간 거의 이뤄졌다. 주택지·도로·상하수도·지하철 등 현대 서울의 하부구조가 이때 거의 갖춰졌다. 박정희 대통령이라는 절대권력자의 ‘분부’를 이행한 김현옥·양택식·구자춘이라는 3명의 ‘충복’ 서울시장이 재직한 기간과 일치한다. 서울의 얼개는 박 대통령의 구상과 지시에 의해 거의 결정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6년 서울도시기본계획안이 세워졌다. 서울의 균형 발전을 꾀하려고 사대문 안에 집중된 입법·사법·행정부의 기능을 분산시키려는 계획이 눈에 띈다. 입법부는 남서울(강남·서초구), 사법부는 영등포, 행정부는 용산 일대, 세종로 지역은 대통령 관저 및 직속기관 배치 지역으로 정했다. 지금 와서 보면 입법부와 사법부의 입지가 맞교환됐고, 서울시청이 용산으로 옮겨가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다. 교통계획을 보면 서울역~청량리(1호선), 서소문~을지로~성동(2호선), 갈현동~종로2가~을지로2가~퇴계로~천호동(3호선), 우이동~종로4가~퇴계로~말죽거리(4호선) 등의 지하철 4개 노선 건설계획이 잡혀 있다. 10년 뒤 구자춘 시장에 의해 2호선이 을지로와 영등포~영동을 잇는 순환선으로 변경되는 등 엄청난 노선 변화가 일어났지만, 지하철 4개 노선에 대한 기본 구상이었다. 이 밖에 4개 순환선과 14개 방사선을 간선도로망으로 7개의 고속도로를 건설한다는 계획과 노면 전차는 철거하고 광화문 사거리와 시청 앞 광장에는 지하차도를 만들고, 시청 앞 광장 지하는 지하도시화한다는 계획도 포함돼 있다. 도심 재개발과 강남·송파 등 남서울개발, 뚝섬·창동·망우 등 동서울개발, 불광·성산·김포·시흥지구의 서서울개발 등 신시가지개발 계획이 들어 있다. 1년 예산이 170억원에 불과한 서울시가 20년 앞을 내다보고 인구 500만명을 예상해 3235억원의 천문학적인 예산을 투입한다는 야심 찬 계획이었다. 언론으로부터 ‘즉흥계획’ ‘실현성 없는 독단’ ‘재무계획 없는 무지개’ 등등 융단폭격을 맞았다. 그러나 격변의 15년 중 7년을 서울시 도시계획국장, 기획관리실장 등을 지내며 계획을 수립하고 집행한 손정목 전 교수는 “꿈도 환상도 아니었다. 최초의 기본계획이었다는 점, 도심부 재개발이니 고도지구, 미관지구 개념이 도입돼 일반에 공개됐다는 점, 70~80년대 전국 모든 도시가 수립한 도시계획의 모델이 됐다는 점 등에서 의미가 있다”고 회고했다. 불완전하나마 서울시 장기계획의 틀이 된 것이 사실이다. 일제 말기인 1940년부터 1965년까지 서울은 잠자는 도시였다. 1937년 중·일 전쟁과 1941년 태평양전쟁이 터져 건축자재를 구할 수 없었고, 한국전쟁이 이어지면서 건축 행위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부분 건물이 목조건물 수명 30년을 다한 상태였다. 장충동, 신당동 일대와 남대문로, 충무로, 을지로 등 일본인 주거지에 정원이 딸린 일본식 저택과 주택이 밀집해 있었다. 가회동·명륜동·동숭동·북아현동 일대에는 한옥촌이 빼곡하게 형성돼 있었다. 마포, 왕십리, 동대문을 벗어난 지역은 논밭이었다. 사대문 안과 독립문, 신촌, 신설동, 돈암동, 신당동, 용산이 서울의 전부였다. 노면 전차 노선을 기준으로 보면 동쪽으로 청량리·왕십리, 남쪽으로 노량진·신길동·영등포, 서쪽으로 마포·신촌, 서북쪽으로 독립문, 동북쪽으로 돈암동 전차 종점까지가 서울이었다. 지방에서 무작정 상경한 사람들의 주거인 무허가 판잣집이 도심에서 가까운 하천변이나 산비탈을 차지했다. 1966년 당시 13만여채의 판잣집이 서울 곳곳에 달동네를 이루고 있었다. 서울은 개발행 특급 열차가 출발하기 직전의 폭풍전야였다. joo@seoul.co.kr
  • 제주산 프리미엄 맥주 출시

    제주도개발공사는 24일 제주시 연동 바오젠거리 인근인 옛 신제주종합시장 1층에서 제주 청정 지하수와 제주산 보리로 만든 프리미엄 맥주인 제스피(Jespi) 출시행사를 열어 500㎡ 규모(150석)의 전용매장을 개관한다고 17일 밝혔다. 제스피는 생맥주 4종(필스너, 페일에일, 스트롱에일, 스타우트), 병맥주 1종(필스너)이다. 가격은 생맥주 350㎖들이 4000원, 500㎖들이 5500원이며 병맥주 330㎖들이 2병 세트 8000원, 3병 세트 1만 2000원이다. 제스피는 전분 등 기타 첨가물을 넣지 않고 제주산 맥아를 100% 사용해 진하면서도 구수한 정통 유럽 스타일의 맥주 맛을 살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자연을 지향하는 제주의 정신이라는 영어(Jeju spirit)를 줄인 이름이다. 제주개발공사는 2011년 7월 시제품 개발용 생산설비를 구축하고 소규모 맥주 제조면허를 취득했다. 출시행사에 앞서 제주도 홍보대사인 미국 여자프로골프(LPGA) 메이저대회 3회 연속 우승자 박인비(25·KB금융그룹)가 팬 사인회를 연다. 제주 황경근 기자 kkhwang@seoul.co.kr
  •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⑤광화문광장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⑤광화문광장

    >>광화문의 어제:육조거리의 부활을 기다리며 조선시대 국가의례·행사 열린 정치·행정·문화의 중심광장 세종로는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심장에 해당하는 국가 중심도로다. 시대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조선시대 사료에는 육조대로, 주작대로라는 이름이 기록돼 있다. 주요 행정관청인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 등 6개 관청이 있는 거리라는 뜻에서 육조(六曹)거리라고 불린 듯하다. 흔히 어가(御街)라고 지칭됐으며 일반인들은 육조거리, 육조 앞, 해태 앞이라는 지명을 주로 썼다. 관청가인 육조대로가 세종로의 본디 이름인 셈이다.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을 중심으로 의정부와 삼군부, 육조, 한성부, 사헌부 등 주요 관청이 좌우로 길게 늘어서 있었다. 육조거리에는 광장의 개념까지 포함됐다. 국가의례나 문화행사가 열리는 정치·행정·문화의 중심 광장이었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보기 어려운 폭 58m, 길이 200m의 큰길이었다. 노면이 고르고 배수가 잘 됐으며 바람이 불어도 먼지가 날리지 않는 멋진 길이었다. 중국, 일본의 사신이나 개항 이후 방문한 백인 외교관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다. 조선팔도고금총람도, 수선전도, 조선경성도 등을 보면 육조거리의 관아는 위계에 따라 배치됐다. 의정부가 광화문 왼쪽 맨 앞자리인 현재의 광화문 열린 광장 자리에 있었고 이조, 한성부, 호조가 뒤를 이었다. 반대쪽 정부서울청사 쪽에는 삼군부, 예조, 사헌부, 병조, 형조, 공조가 차례로 터를 잡았다. 서울역사문화연구소 이상협 소장의 논문 ‘조선시대 육조거리에 대한 고찰’을 보면 의정부와 예조 등 모든 관아가 육조거리에 직각 방향으로 있으며 육조거리의 공간 구성과 관아 배치는 경복궁에서 임금과 신하가 한자리에 있는 공간 구성의 틀과 일치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건물 조성 당시의 배치 구조와 규모를 확인할 수 있는 건물이 한 채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이 아쉽다. 다만 1900년대 전후에 촬영한 사진과 관아 그림 등으로 유추해 볼 때 양쪽의 긴 담장이 도로를 따라 이어져 있었다. 긴 행랑 때문에 육조를 흔히 육조장랑(六曹長廊)이라고도 지칭할 정도였다. 일제는 조선의 행정관청인 육조라는 명칭을 소멸시킬 목적으로 거리 이름을 광화문통으로 바꿨다. 육조장랑은 뜯겨 나갔고 그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금기시됐다. 1926년 경복궁 근정전 앞에 총독부 신청사를 짓자마자 앞을 가리는 광화문을 해체해 건춘문 옆으로 옮겨 버리고 나서는 총독부 광장이라고 호칭했다. 어용 군중집회가 주로 이곳에서 열렸다. 미 군정기에는 군정청이 입주하면서 군정청 광장이라고 불렸다. 정부 수립 기념식이 개최됐다. 해방을 맞았지만, 육조거리로 복권되지 못하고 세종로라는 이름이 붙여져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나 우리는 이 거리를 광화문이나 광화문광장이라고 즐겨 부른다. 세종로라는 작위적 지명보다 현존 구조물인 광화문이 더 친숙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게다가 세 번이나 옮겨지고, 두 번이나 불탄 광화문 수난사가 마음속에 새겨진 탓인지도 모른다. 이름 하나가 역사적 사고를 지배하기도 한다. 1946년 해방 직후 구성된 지명위원회는 국가 중심가로의 역사성을 간과했다. 일제가 붙인 광화문통을 세종로로 바꾸는 데 급급했다. 육조대로라는 지명을 원상회복할 기회를 놓쳤다. 세종로가 100m의 도로폭을 갖게 된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맥아더의 호언장담처럼 종전 후 서울도 이상적인 도시계획의 기회를 잡았다. 1945년부터 1956년까지 11년 동안 서울시 도시계획과장을 맡은 한국인 1호 도시계획가 장훈씨가 1952년 고시된 최초의 서울 도시계획에서 광화문사거리~중앙청까지 500m 길이 도로의 폭을 기존 53m에서 100m로 확장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폭 12m에 길이 2750m이던 청계천을 폭 50m의 도로 부지로 확장해 오늘의 청계천을 있게 했다. 광화문광장, 시청 앞 광장, 숭례문광장 등 주요 광장 부지도 확보했다. 대담한 도시계획에 맞춰 건물과 토지를 매수하고 수용해야 했지만 서울시의 재정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내버려둘 수도 없고 매수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민원이 빗발치자 가건축 허가를 내줘 가건물을 짓도록 했다. 도로 확장은 1966~1979년 계획대로 실행했지만, 광장 부지는 확보하지 못했다. 손정목 전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는 “세종로사거리를 기점으로 반지름 150m의 광장이 계획대로 실현됐다면 현재의 동아일보 사옥과 광화문 우체국, 교보빌딩과 KT빌딩은 들어서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1962년 건설부고시에 따라 광화문광장계획선은 반으로 쪼그라들었다. 그러나 세종로와 태평로를 연결하는 광장계획선 안에 일부 건물이 건재하다. >>광화문의 오늘:주요 건물의 부침사 정부서울청사 옛 삼군부·예조 자리에… 개인건물은 4채뿐 광화문을 중심으로 왼쪽에 광화문시민열린마당·대한민국역사박물관·주한미국대사관·KT빌딩·교보빌딩·비각이 차례로 서 있다. 오른쪽으로는 정부서울청사와 별관·세종로공원·세종문화회관·삼보빌딩·현대해상화재·세광빌딩 등이 자리 잡았다. 폭 100m, 길이 500m의 광장구조 거리에 공공건물 5채와 대기업 건물 3채, 개인건물 4채, 문화재 1개, 공원 2곳뿐인 쾌적한 구조다. 해방 이후 육조거리를 복원하지 않은 탓에 건물들의 격렬한 부침(浮沈)이 이곳에서 벌어졌다. 세종로를 폭 100m로 확장하는 과정에서 많은 건물이 헐렸다. 먼저 1967년 의정부 자리를 꿰차고 있던 경기도청과 국제전신전화국 일부가 철거됐다. ‘서울 한복판에 웬 경기도청’이냐고 하겠지만, 옛 경기도청은 행정구역 개편을 통해 경성부(서울)를 경기도의 일개 지방도시화한 일제가 의정부를 헐어 내고 지은 건물이었다. 조선이라는 나라를 기억에서 지우기 위한 식민통치의 음모였다. 한 때 치안본부 등으로 쓰였다. 정부는 이 자리에 정부 제2종합청사를 지으려고 계획을 세웠지만 1995년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에 고무된 이원종 당시 서울시장이 ‘국가 중심가로 구상안’을 김영삼 대통령에게 보고하면서 백지화됐다. 서울시는 이 부지를 정부로부터 매입해 광화문 시민열린 마당을 조성했다. 부지를 지킨 것은 잘한 일이지만 명칭을 의정부 광장이나 육조마당, 육조광장으로 붙이지 못한 것은 두고두고 질책받을 일이다. 서울의 면모를 일신한다는 방침에 따라 대대적인 도시 개조 사업이 벌어졌다. 이른바 ‘서울재건’이라는 이름 아래 정부가 외국 원조 자본을 끌어들이거나 민간 자본이 속속 건물을 지었다. 1961년 10월 완공된 현재의 대한민국역사박물관과 주한 미국대사관은 쌍둥이 건물이다. 역사박물관은 이조, 미국대사관은 한성부 터다. 이 건물은 미국대외경제원조처(USOM)가 500만 달러의 원조자금을 대고 필리핀에 건축을 의뢰해 지어졌다. 정부청사용 건물을 짓고도 280만 달러가 남자 건물을 한 채 더 지었는데 여기에 대사관이 입주한 것이다. 역사박물관 건물은 5·16 이후 국가재건최고위원회 건물로 사용됐다. 경제기획원과 재무부 청사로 쓰이다가 문화공보부, 문화체육부, 문화체육관광부를 거쳐 지난해 448억원의 예산을 들여 역사박물관으로 리모델링했다. 전시 내용과 건물의 구조 등이 박물관으로 맞지 않는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KT 광화문 빌딩은 1981년 국제전신전화국 자리에 세워졌고 체신부와 함께 입주했다. 이후 잦은 정부 조직 개편으로 소관 부처가 체신부, 정보통신부, 방송통신위원회로 바뀔 때마다 간판을 변경했다. 1998년 한국전기통신공사가 체신청으로부터 분리, 공사가 된 이후 2002년 민영화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개관 당시 체신부가 갖고 있던 이 건물의 12~14층까지 3개 층의 소유권도 방통위에서 기획재정부로 넘어갔다. 교보빌딩은 호불호가 엇갈리는 대표적인 건물이다. 건축가 등 전문가 그룹은 ‘짝퉁’ 건물이라고 깎아내리고, 일반인들은 건물 외관의 대형 걸개 글판과 시내 한복판 책방인 교보문고의 존재를 달가워한다. 왜 그렇까? 이 건물의 정체성 때문이다. 일본 도쿄 주일미국대사관 건물의 디자인을 빼닮았다는 이유다. 미국 건축가 시저 펠리에게 같은 건물을 지어 달라고 부탁했고 이 디자인을 교보의 전국 지사 건물로 복제했다. 최근 한 건축 잡지는 해방 이후 최악의 건물 리스트에 올렸다. 층수와 용도를 둘러싸고 뒤탈도 많았다. 설계 당시 40층을 계획했지만 23층에 그쳤다. 완공 단계에서 정부청사보다 낮은 17층 이하로 지으라고 행정 당국이 종용하자 당시 신용호 회장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완공 단계의 건물을 자르라면…. 내가 광화문 복판에서 배를 자르겠다”는 격한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또 용도를 호텔로 변경하라고 권하자 “정부청사 앞에 술과 밥을 파는 숙박업소를 짓는다는 것은 나라 체면을 먹칠하는 것”이라고 거절한 사연도 자서전에 남아 있다. 교보빌딩은 2009년부터 2년 동안 건물의 뼈대만 남겨 두고 건물 옆면 일본식 다다미 모양을 유리로 교체하는 등 리모델링했다. 짝퉁 논란에서 벗어날지 두고 볼 일이다. 정부서울청사는 1970년 옛 삼군부와 예조 자리에 들어섰고, 별관인 외교부청사는 2002년 옛 교통방송국 터에 자리 잡았다. 1966년에 정부서울청사 자리에 있던 서울전신저금보험관리국, 경찰기동대 순찰반이 헐렸고, 지금의 세종문화회관인 시민회관 자리에 있던 종로보건소와 광화문전화국이 철거됐다. 시민회관은 이승만 대통령의 아호를 따 우남회관으로 지어졌지만 4·19혁명 이후 시민회관으로 이름을 바꿔 1961년 개관했다. 1972년 불타 버리는 바람에 1978년 현재의 모습으로 신축했다. 세종문화회관 옆 17층짜리 현대해상화재빌딩은 현대그룹의 성장사를 상징하는 건물이다. 1976년 현대건설 본사로 지어져 1983년 현대건설이 계동으로 옮겨 가기 전까지 현대그룹 본사 건물이었다. 고 정주영 회장은 중동특수를 누린 이 건물에 애착이 강했다. 1992년 대선에 출마하면서 국민당 당사로 썼다. 현대해상은 그룹 계열에서 분리되기 직전인 1999년 이 건물을 현대건설로부터 인수했고, 2004년 대대적으로 개보수했다. 대한민국 심장부에 빌딩을 보유하고 있는 회사는 KT와 교보, 현대해상화재뿐이다. 그보다 엄청난 격랑을 헤치고 최고의 요지에 끝까지 살아남은 개인 빌딩 4채의 존재감이 더 빛난다. joo@seoul.co.kr
  • [주말 영화]

    ■열혈남아(OBS 일요일 밤 10시 15분) 재문(설경구·왼쪽)은 소년원에서 만난 민재와 한 조직에 몸을 담고 운명을 함께하게 된다. 조직의 임무를 수행하다가 둘은 실수로 엉뚱한 사람을 죽이게 되고 그 대가로 재문은 가장 의지하던 민재를 눈앞에서 잃고 만다. 죽어가는 민재를 두고 뒷걸음질쳐야만 했던 재문은 조직의 염려와 만류를 뒤로 한 채 민재를 죽인 대식에게 복수할 결심을 하고, 조직에 갓 들어온 치국(조한선)을 앞세워 벌교로 향한다. 도내 태권도 대회에서 메달까지 땄던 치국은 어머니의 병환으로 조직에 발을 들이게 되고, 첫 임무로 고향인 벌교에서 재문의 복수계획에 동참하게 된다. 치국은 인정머리 없이 냉혹하지만, 내면에 외로움과 따뜻함을 지닌 재문에게 측은함을 느낀다. 한편 점심은 생사를 모르는 둘째 아들 같은 느낌이 드는 재문이 왠지 낯설지가 않다. ■독립영화관-나는 노래하고 싶어, 보청기(KBS1 토요일 밤 1시 5분) 한국에 이주해 온 이주민과 선주민이 함께 모여 꾸려진 다문화 다국적 노래단 ‘몽땅’의 단원들은 12월 첫 프로모션 공연을 앞두고 한창 바쁘다. 미얀마, 필리핀, 인도네시아, 중국 등 다양한 출신과 배경을 지닌 단원들은 매일 모여 발성 연습을 하고, 새로운 곡을 만든다. 아직은 한국어도 서툴고, 서로 문화가 낯설지만, 그들은 다른 문화 속에서 하나의 노래를 만드는 과정이 행복하기만 하다(나는 노래하고 싶어). 암 선고를 받고 죽음 앞에 서 있는 노인. 귀가 먹어 아무것도 듣지 못한다. 그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딸 지현은 노인에게 보청기를 맞춰 드리기로 한다. 하지만 제주도가 초행길인 보청기 기사의 방문은 지연되기만 하고, 지현은 안타깝다(보청기). ■미드나잇 인 파리(EBS 토요일 밤 11시) 약혼녀 이네즈(레이첼 맥아덤스)와 파리로 여행 온 소설가 길(오웬 윌슨). 파리의 낭만을 만끽하고픈 자신과는 달리 파리의 화려함을 즐기고 싶어하는 이네즈에게 실망한 길은 결국 홀로 파리의 밤거리를 산책하게 된다. 매일 밤 12시, 시간을 넘나드는 로맨틱 야행이 시작된다. 12시 종이 울리는 순간 홀연히 나타난 클래식 푸조에 올라탄 길이 도착한 곳은 놀랍게도 1920년대 파리. 그곳에서 그는 평소에 동경하던 헤밍웨이, 피카소, 달리 등 전설적 예술가들과 친구가 되어 매일 밤 꿈 같은 시간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헤밍웨이와 피카소의 연인 애드리아나(마리옹 코티아르)를 만나게 된 길은 예술과 낭만을 사랑하는 매혹적인 그녀에게 빠져들게 된다.
  • [씨줄날줄] 켈로 부대와 카투사/손성진 수석논설위원

    6·25의 전황을 반전시킨 인천상륙작전과 중공군의 남하를 지연시킨 장진호 전투. 유엔군이 주도한 두 작전에는 숨은 한국군 영웅들이 있었다. 바로 켈로 부대원들과 카투사다. 켈로 부대로 불리는 KLO 부대는 미군이 1949년 6월 조직한 비정규 첩보부대였다. 1950년 9월 14일 저녁 7시. 켈로 부대원들은 팔미도 등대의 불을 밝히라는 맥아더 장군의 명령을 받았다. 최규봉 대장과 미군들은 어둠을 뚫고 팔미도에 침투해 치열한 전투 끝에 인민군이 점령하고 있던 팔미도를 손에 넣었다. 9월 15일 0시 12분, 이들이 등댓불을 밝힘으로써 261척의 유엔군 함정이 상륙작전을 개시할 수 있었다. 첩보부대의 성격상 그들은 존재조차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한국원자력학회장을 지낸 원자력 학계의 원로 이창건 박사는 서울대 전기공학과 1학년에 다니다 이 부대의 기획참모로 참전했다. 이 박사는 몇년 전 ‘KLO의 한국전 비사’라는 책을 써 활약상을 알렸다. 8000여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됐지만 켈로 부대원들은 군번이나 계급, 군적이 없다. 최근 정부가 부대원들이 점호를 받는 모습, 침투하기 직전 모습, 작전지도 등을 확보해 보상을 받을 길이 열렸다. 6·25 전투 중 가장 처절한 전투로 남은 장진호 전투. 1950년 10월 19일 압록강을 건넌 중공군은 동부전선 장진호 주변 산악에 매복하고 있었다. 미군은 계곡을 따라 북진하다 11월 27일 밤부터 중공군 7개 사단의 포위 공격을 받았다. 병사들은 철수 명령을 받고 후퇴하면서 12월 1일까지 혹한 속에서 적의 공격을 막아냈다. 살아 돌아온 미군은 385명뿐이었다. 장진호 전투는 병력 손실이 컸지만, 중공군의 진출을 2주나 지연시키는 전과를 남겼다. 이 전투에서 한국인 카투사 875명도 숨졌다. 카투사들은 아리랑을 부르며 싸우고 얼어붙은 발걸음을 재촉했다고 한다. 카투사(KATUSA)는 주한미군에 배속된 한국군이다. 첫 카투사병은 대구와 부산 등지에서 징집됐다. 이들은 1950년 8월 16일부터 일본 후지산 근처에서 훈련을 받았다. 한달도 안 되는 훈련을 마친 카투사들은 곧바로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했다. 한국 지형을 잘 아는 카투사들은 말이 잘 안 통했지만 미군들에게는 중요한 존재였다고 한다. 카투사는 혜산진 점령, 펀치볼 전투 등에서도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참전 당시 갓 스물의 나이였던 켈로 부대와 카투사 용사들은 정전 60년이 지난 지금 팔순을 넘겨 이미 상당수가 고인이 되었다. 더불어 그들의 전공(戰功)도 점점 잊히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손성진 수석논설위원 sonsj@seoul.co.kr
  • 특전사 모체 6·25때 켈로부대 기록물 첫 공개

    특전사 모체 6·25때 켈로부대 기록물 첫 공개

    특전사의 모체이지만, 특수부대라 기록이 없어 국가유공자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6·25 전쟁 당시의 미군 산하 8240부대(일명 켈로부대) 관련 기록물이 처음 공개됐다. 24~30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그날의 시선으로 본 기록’ 전시회를 여는 국가기록원은 24일 6·25를 맞아 미국, 국제연합(UN), 러시아 등에서 수집한 6·25전쟁 관련 희귀 기록물을 소개했다. 특히 이 가운데 미국 국가기록관리청에서 입수한 6·25때 비정규군으로 특수임무를 수행한 8240부대 기록물은 최초로 공개되는 것으로 최소 수천명의 8240부대원들을 확인할 수 있을 전망이다. 8240부대는 미국 극동군사령부가 1949년 북한 출신으로 조직한 북파 공작 첩보부대로 ‘주한연락처’(Korea Liaison Office)의 영문 머리글자를 따서 붙인 이름인 켈로부대로 널리 알려졌다. 함경도 출신이 대부분을 차지한 켈로부대는 1951년 8240부대, 1952년 8250부대로 확대 개편되었으며 주로 후방의 유격활동과 첩보활동을 맡았다. 정부는 이들을 국가유공 대상자로 인정했지만 8240부대원들은 계급도 군번도 없이 활동해 그동안 유공자 선정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번에 공개된 작전명령서들은 1952년 8월 12일 미군 아이비스 대령의 명령에 의해 8240부대 부관참모가 8240부대원들에게 내린 것 등으로 당시 작전에 참여한 8240부대원들의 명단을 최초로 확인할 수 있다. 산악지대에서 지게와 조랑말로 무기를 수송하는 장면, 전쟁 당시 제주도에서 이뤄진 생생한 신병훈련교육모습, 서울수복 뒤 이승만 대통령이 맥아더 장군의 호위를 받으며 중앙청으로 들어오는 모습 등의 희귀 영상도 함께 공개됐다. 미국 시청자들에게 한국 문화를 소개하고자 드라마 형식으로 만든 영상 ‘코리아 앤드 유’(Korea and You)에는 데뷔 전의 영화배우 최무룡과 김지미의 출연 장면이 있어 눈길을 끈다. 카투사로 출연한 최무룡과 선생님을 연기한 김지미는 동시 녹음된 영상에서 영어 대사를 능숙하게 소화하고 있다.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 잔인한 전쟁 너머 ‘휴머니즘’의 속살

    잔인한 전쟁 너머 ‘휴머니즘’의 속살

    정전 60년을 맞아 한국전쟁을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본 두 권의 책을 소개한다. 중국 최고의 전쟁 논픽션 작가로 불리는 왕수쩡의 ‘한국전쟁’과 권헌익 영국 캠브리지대 석좌교수의 ‘또 하나의 냉전’이다. 전자는 적국의 시선으로 본 한국전쟁이란 점에서, 후자는 인류학자의 시각에서 한국전쟁과 그 전후의 고통과 폭력의 역사를 통해 우리에게 냉전이란 무엇인지를 되묻는다는 측면에서 주목된다. [한국전쟁] 왕수쩡 지음/나진희·황선영 옮김/글항아리/1000쪽/4만원 ‘한국전쟁에 대해 중국이 말하지 않았던 것들’이란 부제가 붙은 이 책은 1999년 중국에서 초판이 출간됐고, 2009년 개정판이 나왔다. 국내에선 첫 번역 출간이다. 14년의 시차에 담긴 의미는 꽤 함축적일 터이다. 1970년 이전까지만 해도 중국에서는 한국전쟁을 ‘항미원조전쟁’이라 불렀다. 적군인 미군을 향한 대항적 성격으로 한국전쟁을 규정하는 하나의 관점을 유지해왔다. 그러나 저자는 ‘한국전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국제정치적 맥락이나 이념적 시각으로 한국전쟁을 분석하는 태도에서 벗어난다. 이는 저자가 정치학자나 군사학자가 아니라 팩트를 추적하는 논픽션 작가라는 지점과 맞닿아있다. 치밀한 자료 수집과 수많은 관련자 인터뷰 등 방대한 취재량이 압도적이다. 저자는 한반도에 진입했던 중국국 소속 15개군이 전후에 정리한 전쟁사, 전쟁 종식 뒤 귀국한 참전 장병이 쓴 수많은 회고록, 전쟁 당시 한반도 전장에 있던 중국군 지휘부와 베이징의 지휘자들 간에 교환한 모든 문서와 전보를 열람했다. 또한 미국 역사학자 모리스 이서먼의 ‘한국전쟁’을 비롯한 서구의 다양한 관련서와 더글러스 맥아더의 회고록 등도 참조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저자는 한국전쟁의 발발부터 정전 협정까지의 긴박하고 참혹했던, 때로는 무기력했던 순간들을 하나하나 복원해낸다. 1950년 10월 8일 중국이 ‘중국인민지원군’을 출병하는 대목에서 출발한 책은 전장에 버려진 서적을 통해 적군의 작전 의도를 파악하려는 치열한 정보전과 피말리는 심리전, 각국이 구사하는 전술·전략의 유래와 전개 양상 등에 대한 꼼꼼한 기술을 거쳐 또 다른 전쟁의 양상을 보였던 정전 협상의 체결에서 끝을 맺는다. “병사란 전쟁 속에서 가장 평범하면서도 가장 중요하고 수적으로 가장 많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내가 ‘한국전쟁’을 집필하는 유일한 동력이 되었다.”는 저자의 말처럼 책을 관통하는 핵심은 휴머니즘이다. 하지만 대령 계급의 국가 1급 작가라는 저자의 또 다른 타이틀은 중국 중심의 서술이란 한계를 피할 수 없게 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접하기 어려웠던 중국 내부의 자료들을 통해 한국전쟁의 한 축이었던 중국의 당시 상황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건 이 책만의 장점이다. 이순녀 기자 coral@seoul.co.kr [또 하나의 냉전] 권헌익 지음/이한중 옮김/민음사/256쪽/1만 8000 세계사에서 한국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 간 냉전의 역사선상에 놓인다. 1945년 조지 오웰이 처음 언급한 ‘냉전’은 실제적으로 전쟁은 일어나지 않지만 정치·외교·이념상의 갈등이나 군사적 위협의 잠재적인 권력투쟁을 의미한다. 서구에서는 냉전이 “오랜 평화이자 상상의 전쟁”이었다. 하지만 해방공간이 분단으로 이어지고, 한국전쟁을 전후해 전쟁과 폭력의 시대를 살아낸 우리에게 이 시기는 과연 냉전일 수 있을까. 2010년 컬럼비아대에서 영어로 출간된 이 책은 이 같은 질문의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즉 한반도 해방공간의 역사가 세계 냉전사와 틀을 같이하는가 달리하는가, 한국전쟁의 역사는 냉전의 역사안에 있는가 아니면 밖에 있는가에 대한 분석이다. 정확히 얘기하면 이 책은 한국전쟁을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제주 4·3사건과 베트남 전쟁을 통해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에서 냉전이 폭력전 내전과 그와 관련된 반공주의 역사라는 형태로 전개되는 양상에 초점을 맞춘다. 인류학자인 저자는 냉전을 내전으로 경험한 사회에서 냉전이 얼마나 큰 고통을 주었는지를 인류학의 핵심 조사방법인 참여관찰법을 이용해 접근한다. 저자는 제주 4·3사건으로 분열된 하귀리 마을 사람들이 최근에서야 학살자들을 기리는 추모제를 자유롭게 열 수 있게 되면서 화해에 이르는 과정에 주목한다. 또한 베트남전쟁 당시 형은 혁명군에, 동생은 미국편에 가담해 총을 겨누고 싸워야 했던 가족이 어느 한 명을 추모할 권리를 박탈당하는 고통의 역사를 들여다본다. 저자는 말한다. “한반도의 해방공간이 그러했듯이 한국전쟁의 역사는 냉전의 역사 안에도 있고 또 밖에도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역사가 세계사의 영역에서는 생경해지는 상황은 불행한 일이며 이제는 이 잘못된 구도가 고쳐져야 한다. 그 첫 걸음은 냉전의 역사에 안과 밖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 즉 또 하나의 냉전이 있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7쪽) 베트남전 양민학살을 종교인류학적으로 접근한 책 ‘학살, 그 이후’와 전쟁의 후유증을 기록한 ‘베트남전쟁의 영혼’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저자는 최근 한국전쟁의 새로운 연구 틀을 형성하고자 하는 ‘한국전쟁을 넘어서’국제연구사업단을 이끌고 있다. 이순녀 기자 coral@seoul.co.kr
  • 이승만, 대통령이 되려고 맥아더 장군에 로비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되려고 맥아더 장군에 로비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을 비판한 다큐멘터리 ‘백년전쟁’에 대한 보수·진보 간 맞짱토론이 이뤄진다. 보수 성향 단체인 시대정신은 백년전쟁을 제작한 민족문제연구소와 오는 24일 서울 강서구 목동 CBS스튜디오에서 심포지엄을 연다고 20일 밝혔다. 시대정신은 지난 3월 28일 민족문제연구소에 공개토론을 제의했지만 이승만 기념사업회 측이 민족문제연구소를 사자(死者)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고소하는 등 곡절을 겪으며 토론이 미뤄져 왔다. 조세열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총장은 “당초 4~6회 분량의 다큐멘터리 백년전쟁을 기획했는데 소송에 대응하느라 아직 1회밖에 만들지 못했다”면서 “공개 토론에 응하는 한편 나머지 제작을 서두르겠다”고 말했다. 지난해 11월 유튜브 등에 공개된 백년전쟁은 한국 근현대사가 외세에 부역한 친일 세력과 민족을 지키려 한 독립 세력 간 투쟁으로 이뤄졌다는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고 민족문제연구소는 설명했다. 1회에서 이 전 대통령의 친일 행적과 개인비리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는 내용을 다뤘고, 전체 시리즈는 문민정부 이전까지의 역사를 다룰 계획이다. 이 연구소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제개발 계획이 미국 시나리오대로 진행됐다는 의혹을 제기하는 ‘프레이저보고서’도 제작했는데, 이는 백년전쟁 시리즈의 번외편이라고 설명했다. 시대정신 등 보수 진영은 백년전쟁이 200만건 이상 조회수를 기록하자 ‘생명의 길’을 제작해 반박했다. 해방 이후 북한이 죽음의 길을 밟은 반면 우리는 생명의 길을 걸었고,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이 이 길을 이끌었다는 시각을 담고 있다. 유재길 시대정신 사무처장은 “생명의 길에서 백년전쟁의 12가지 오류를 지적했다”면서 “심포지엄에서 조목조목 따지겠다”고 말했다. 시대정신 측은 토론자로 한국현대사학회 회장인 권희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와 생명의 길 제작에 참여한 박성현 뉴데일리 주필을 내세웠다. 권 교수는 최근 ‘우파 교과서 논란’의 장본인으로 그가 관여한 교학사의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는 국사편찬위원회의 최종 검정 심사 단계에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측은 박한용 교육홍보실장을 토론자로 정했다. 양측은 ▲이승만의 기독교계 미국 대학 석·박사 학위 취득 경위 ▲이승만이 미국 신문에 ‘식민지 근대화론’과 비슷한 주장을 펴며 친일을 했는지 여부 ▲한인 여성과의 추문으로 인한 미국 당국의 조사 진위 ▲하와이 국민회 성금과 상해 임시정부 자금 횡령 여부 등에 대한 논지를 입증할 사료를 챙기고 있다. 홍희경 기자 saloo@seoul.co.kr
  •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① 프롤로그-변천사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① 프롤로그-변천사

    우리에게 서울이란 무엇인가. 한강 기슭에 터 잡은 한성백제 이후 2000년의 역사가 어린 한민족의 고향쯤이기도 하고, 북악 아래 도읍을 정한 지 600년을 훌쩍 넘긴 조선의 심장부이기도 하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유린당했지만 정체성을 지켰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일본은 민족정기 말살을 노리는 대못을 구석구석 박았다. 근대화라는 이름 아래 자행된 일제의 식민 경영에 의해 서울은 심각하게 왜곡됐다. 한국전쟁의 포연 속에서 서울시내 건물의 3분의1이 파괴됐다. 사대문 안 문화재는 가까스로 살아남았지만, 전쟁이 끝났을 때 서울은 폐허에 가까웠다. 그런 서울이 ‘한강의 기적’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걸린 시간은 60년. 전 세계를 통틀어 가장 압축적인 성장과 변화가 휩쓸고 갔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얻은 것은 무엇이고 잃은 것은 무엇인가. 장기 개발독재와 불도저식 행정가의 밀어붙이기 도시계획에 따른 엄혹한 고통을 묵묵히 감내한 서울시민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견뎌 내지 못했더라면 인도의 뭄바이, 멕시코의 멕시코시티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서울은 진화 중이다. 진화는 상실을 수반한다. 기억하고 남겨야 할 가치마저 토건의 흙먼지 속에 숱하게 사라졌다. 개발 연대의 기록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숨가쁘게 달려온 길이 보인다. 험하고 불편했지만, 기억 속에서는 정겨운 시절이기도 하다. ‘서울 택리지’(擇里志)는 지금 우리 옆에 남아 있는 건물, 도로, 장소, 풍광의 생성과 소멸 그리고 재생 과정을 도시계획적 관점에서 살펴봄으로써 우리가 잊고 지내 온 것들을 되새김하고자 한다. ■서울 2000년사 새로 써야 하나 미국의 도시설계가 케빈 린치는 “도시는 랜드마크(landmark)와 구역(district), 통로(path), 접점(node), 경계(edge)로 인지된다”고 ‘도시의 이미지’를 정의했다. 서울을 도시건축적 시각에서 보면 다섯 가지 키워드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본 서울은 만감이 교차하는 상념의 뿌리 같은 곳이다. 서울의 진짜 나이는 몇 살일까. 우리는 ‘서울은 600년 역사를 지닌 도시’라고 알고 있고, 서울을 소개하는 대부분 책에 그렇게 적혀 있다. 1978년 ‘서울 600년사’가 편찬됐고, 1994년에는 서울 정도 600년 행사를 성대하게 치렀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서울의 기원과 역사에 관한 정설은 흔들리고 있다.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는 2009년 ‘서울 역사 2000년’을 내놓으면서 서울의 공간을 확장했고, 역사도 1400년 늘렸다. ‘온조가 위례에 자리 잡았다’는 삼국사기의 백제 건국설화에 따라 서울의 기원을 기원전(BC) 18년으로 본 것이다. 결과적으로 한성백제시대 493년이 서울의 역사로 편입됐고, 한강 이남까지 영역이 확장됐다. 위례는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일대다. 백제는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을 받아 수도를 웅진(공주)으로 옮겼으므로 백제 수도로서의 서울 역사는 500년 가까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석촌동 일대에는 백제 초기 적석총 10여 기가 남아 있는데 이 중 3호분을 13번째 왕 근초고왕(?~375)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곧 한성백제 493년에,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가 서울을 남경(南京)으로 삼은 기간까지 더하면 수도 서울의 역사는 물경 2000년에 이른다는 것이다. 로마, 아테네, 바빌론, 이스탄불, 다마스쿠스, 테베에 이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의 반열이다. 900년 설도 있다. 조선의 수도 한양은 18㎞ 사대문 안과 사방 십리(城底十里)를 의미하는데 위례는 경기도 지역으로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서울에 속한 곳이므로 역사적으로 전혀 다른 지역이라는 것이다. ‘오래된 서울’을 펴낸 최종현·김창희씨는 “서울의 기원을 위례에서 잡을 것이 아니라 고려 숙종의 남경 천도로 잡는 것이 맞다”고 주장한다. 숙종이 경복궁 근처에 남경행궁을 만들어 행차한 1104년을 서울의 기원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서울의 역사는 919년이 됐다는 얘기다. 묵을수록 좋다고 하지만 서울의 나이를 무한정 늘리는 것에 대한 반론도 만만찮다. 1392년 조선 건국과 한양 천도를 한민족 수도 서울의 주춧돌로 보는 것이 일반의 통설이다. ■고려 286년 동안 5차례 시도된 한양 천도 한양 천도에도 알려지지 않은 얘깃거리가 많다. 고려 건국 후 서울은 양주(楊州)로 불렸으며 지방 호족이 할거했지만, 지정학적 중요성을 고려한 문종은 1067년 남경으로 승격시켰다. 개경(개성), 서경(평양)과 함께 고려의 3대 도시로 삼은 것이다. 한양 천도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역성혁명 성공과 이에 따른 지배층 정리 차원에서 이뤄진 것으로 역사 교과서는 소개하고 있지만, 천도는 고려 중기부터 끊임없이 시도됐음을 알 수 있다. 1308년 충선왕은 남경을 한양부(漢陽府)라고 고쳤다. 1357년 공민왕은 남경 천도를 본격화했다. 수도를 옮김으로써 국내외 혼란을 바로잡고자 했다. 그러나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혀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송도(개경)의 지덕이 다해 나라 안팎의 우환이 끊이지 않는다는 지리도참설이 도읍을 옮기도록 부추겼다. 1382년 우왕은 한양 천도를 단행했지만, 이듬해 개경으로 돌아갔다. 1390년 공양왕은 한양으로 옮기면서 백관들이 양쪽에서 나눠 근무하게 함으로써 6개월짜리 ‘반쪽’ 수도에 그쳤다. 천도는 태조가 조선을 건국한 지 3년 만인 1395년 6월 6일 한양부를 한성부로 바꾸면서 완성됐다. 고려의 한양 천도는 1104년 숙종 때 처음 시도된 이래 충선왕, 공민왕, 우왕, 공양왕 등 5명의 고려왕이 시도했지만, 무위로 돌아갔고, 결국 조선 태조에 의해 291년 만에 실행에 옮겨졌다. 고려왕조 476년의 절반을 넘는 286년 동안 고려의 마음은 개성을 떠나 한양을 기웃거렸다. ■‘서울특별시’의 탄생 비화 서울은 지명이 아니라 도읍을 이르는 용어다. 서울은 고려 때 한양으로 불렸으며 조선시대 공식 지명은 한성부(漢城府)였다. 중국이 지금까지 서울을 한성(漢城)이라고 호칭하는 까닭이다. 일제는 경성부(京城府)로 개칭, 경기도 내 행정구역의 하나로 깔아뭉갰다. ‘서울’이라는 지명은 1946년 8월 14일 미 군정청 특별발표에서 처음 등장한다. 손정목 전 시울시립대 명예교수에 따르면 미 군정장관 아처 러치 소장이 광복 1주년 기념 선물로 서울을 경기도에서 독립시켜 특별시(영문 표기는 독립시)로 승격시켰다고 한다. 서울특별시는 군정 법령의 효력이 발생한 1946년 9월 28일을 기해 공식 지명이 됐다. 서울 사대문 안이 미군의 무차별 공습에서 벗어나 문화재를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하게 된 비화도 전해진다. 한국전쟁 당시 주일대표부 전권공사를 지낸 김용주(1905~1985)는 ‘나의 회고록, 풍설시대 80년’에서 도쿄사령부로 맥아더 장군을 찾아가 설득한 경위를 밝혔다. 그는 5대 궁과 사대문을 포함하는 지역을 작전지도에 표시하면서 폭격 대상에서 제외해 달라고 요청했고, 맥아더는 “좋은 조언을 해 줘 대단히 기쁘다.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이다. 김용주는 후에 전남방직을 창업했고 경총회장을 지냈다. ■이중환은 ‘서울 택리지’를 어떻게 쓸까 나라에 사(史)가 있으면 고을에는 지(志)가 있다. 이것이 우리의 문화 전통이다. 지리지(地理志)는 지역의 역사, 지리, 인물, 풍속 등을 기록한 책이다. 지리지도 정사의 일부였다. 중국의 경우 반고는 한서(漢書)에 지리지를 포함했고, 삼국사기와 고려사도 각각 지리지를 갖추고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1690~1756)이 펴낸 택리지(擇里志)는 동국여지승람과 함께 우리나라 지리지를 대표한다. 동국여지승람이 행정중심적 백과사전이라면 택리지는 생활권과 지역권의 시각으로 서술한 근대 지리학의 맹아라고 할 수 있다. 이중환은 30여년간 전국을 떠돌면서 살 만한 곳을 찾아 헤맸다. 공자가 논어에서 ‘군자는 살 만한 곳을 찾아 거한다(可居地)’는 그곳, 동양의 유토피아였다. 특히 사람이 살 만한 곳의 입지 조건으로 지리(地理)와 생리(生利), 인심(人心), 산수(山水) 등 4가지를 꼽았다. 이중환은 살 만한 곳을 찾았을까? 택리지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신택리지’의 저자 신정일은 “끝내 살 만한 땅을 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서울은 살 만한 곳인가?’ 서울은 ‘연식’은 오래된 도시이지만 ‘마일리지’는 환갑을 넘지 못한다. 지구상에서 가장 다이내믹하게 변화한 도시다. 조선 말 20만명이 살던 도성은 해방 전후 100만명으로 늘어났고, 1990년 1000만명 시대에 접어들었다. 대한민국의 모든 것은 광적으로 서울에 몰렸다. 개발 연대기 서울 행정은 인구 분산과 교통난 해소, 택지개발, 아파트 건설에 맞출 수밖에 없었다. 서울은 늘 만원이고, 늘 공사 중이었다. 개발의 와중에서 역사와 애환이 서린 ‘그때 그곳’은 보호받지 못했고, 달랑 표지석으로 남은 곳이 숱하다. 그런 서울이 사람 위주의 환경도시로 옷을 갈아입고 있다. 개발 연대를 대표하는 청계고가의 철거와 청계천 복원이 터닝포인트였다. 2013년 서울은 수도권 주민 등 3000여만명이 드나들고, 대한민국 5000만 국민이 지향하며, 외국인 관광객 1000만명이 찾는 ‘동방의 메트로폴리스’가 됐다. 불과 반 세기 만에 일어난 경천동지할 변화다. 이중환이 현대 서울을 보았다면 택리지의 후편으로 ‘서울 택리지’를 집필했을 것이다. 그는 무엇이라고 쓸까. joo@seoul.co.kr
  • [시론] 일본의 역사인식, 우리의 역사교육/방민호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

    [시론] 일본의 역사인식, 우리의 역사교육/방민호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

    얼마 전 하네다 공항을 통해서 들어간 도쿄는 새로운 활기가 엿보였다. 엔저 정책으로 일본의 자동차 산업이 활기를 되찾고 있다는 뉴스 때문에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른다. 공사가 끝난 하네다 공항은 말끔해 보였다. 전철 환승역에 북적거리는 사람들은 활황을 향해 나아가는 일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내가 하룻밤을 묵게 된 요코하마의 뉴그랜드 호텔은 미국의 맥아더 장군이 점령군 사령부를 차린 곳이다. 그때, 일본의 주전파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자고 했다. 이미 숱한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내몬 그들이었다. 1945년 8월 14일 밤이 되어서야 항복하기로 최종 결정을 했고 이를 연합국 쪽에 통보했다. 8월 15일 정오, 일본 국왕의 목소리가 라디오 방송을 탔다. 일본인들은 그때 처음으로 일왕의 목소리를 들었다. 이날 텔레비전에서는 오사카의 젊은 시장 하시모토 도루에 관한 기사가 흘러나왔다. 위안부 관련 발언으로 지지도가 추락했다고 했다. 젊은 시장으로 인기를 등에 업고 일본유신회라는 ‘고풍스러운’ 정당을 만든 인물이었다. 그의 의식구조가 젊은 정치인답지 않게 시대착오적이라는 사실이 드러났지만, 이 텔레비전 보도조차 완전히 믿을 수는 없다. 하시모토 발언을 “어불성설”이라고 한 미국 쪽 반응에 당황한 일본 언론이 급조해낸 여론조사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시모토는 이 발언 탓에 옹색한 처지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야스쿠니 신사를 미국의 알링턴 국립묘지에 비유한 아베 신조 총리, 태평양전쟁을 침략전쟁이 아니라고 한 이시하라 신타로 일본유신회 공동대표, 위안부를 매춘부에 비유한 정신없는 의원까지, 일본은 지금 시대착오적인 우익들이 그득하다. 경제 회복 때문에 이들은 더 자신 있어 한다. 국민 지지를 업고 있다고 생각한다. 국제적으로야 어떤 비판에 시달릴지언정 이들은 뼛속 깊이 우편향이다. 유신회 같은 ‘새끼’ 정당의 지지도는 출렁거릴지언정 자민당 지지세는 흔들리지 않는다. 잠시 주도권을 잃었을 뿐 일본은 다시 자민당 체제로 귀결되어 버렸다. 일본 안에도 비판적 지식인, 양식을 가진 시민은 있다. 그러나 자기 신조를 평생 버리지 않는 것이 덕목일 뿐, 대중들로부터는 고립되어 있다. 대다수 일본인들은 자민당과 아베 신조를 따른다. 미국의 반응에는 불안해한다. 그러나 한국을 향해서는 자신만만하다. 그동안의 한류에 자존심 다친 젊은이들은 인터넷 공간 같은 곳에서 한국인 따위는 어떻게 되어도 좋다고들 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한국을 생각하면, 역사교육이라는 한 단어밖에 떠오르는 것이 없다. 일본인들을 향해 정신 차리라고 한들 한가한 푸념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 스스로가 바짝 정신 차려야 한다. 무엇보다 중·고등학교 과정의 역사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지금 고등학교에서 ‘국사’는 선택과목이다. 수능시험 사회탐구 영역의 선택 가능한 11개 과목 중 하나일 뿐이다. 이마저 시험공부가 까다롭다고 생각한 나머지 응시 학생수가 해마다 격감하고 있다. 왜들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다. 학생들의 수업 부담을 줄이는 게 능사가 아니다. 우리는 ‘작은’ 나라다. ‘국어’와 ‘국사’를 잊어버리면 나라가 반드시 위태롭게 되는 법이다. 일본도, 중국도 모두 무서운 자기 논리를 가지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최근 10여년간 학계에서는 민족주의 비판이 능사가 되었다. 대학에서도 ‘국어’와 ‘국사’를 추방해 나가고 있다. 그런 필수 교양과목이 왜 필요하냐고들 한다. 민족주의 비판이 곧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에게 늘 자기 논리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라는 것이다. 시인 김수영은 이사벨라 비숍의 여행기를 읽으며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고 했었다. 이 역설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이웃한 나라가 진정한 친구가 되는 일은 정말 어렵다. 무엇보다 우리 자신이 우리 스스로를 부단히 제대로 직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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