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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美군사 최전방 스위치 켜자… 센카쿠엔 빨간등, 韓·日은 파란등

    美군사 최전방 스위치 켜자… 센카쿠엔 빨간등, 韓·日은 파란등

    미국 태평양사령부(PACOM)는 호놀룰루 시 외곽 코올라우 산 중턱의 캠프 스미스에 자리 잡고 있다. 사령부 본부인 니미츠 맥아더 빌딩 4층 테라스에서 바라보니 진주만 해군기지와 히컴 공군기지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진주만에 정박한 함정들 너머로 태평양의 푸른 파도가 넘실거렸다. 히컴 공군기지에서 막 이륙한 전투기가 태평양 상공으로 돌진하는 모습이 보였다. 태평양사령부 브리핑룸의 한쪽 벽에는 대형 LCD 모니터 3대가 걸려 있었다. 모니터에 미군 각 지역사령부의 관할 지역이 표시됐다. 미군은 전 세계를 6개 지역으로 나눠 관할하고 있다. 태평양·유럽·중부(중동)·남부(남미)·북부(북미) 그리고 최근 신설된 아프리카 사령부다. 여기에 전략, 수송, 특수작전 등 세 개의 기능사령부가 지원하는 시스템이다. 미국은 인류 역사상 최대 강국이다. 로마도, 몽골도 지구 전체를 관할 지역으로 삼지는 못했다. 모니터 속 한반도 지도를 보며 묘한 기분이 들었다. 태평양사령부의 고위 관계자는 “할리우드(미 서해안)에서 발리우드(인도)까지, 남극에서 북극까지가 우리 관할 지역”이라고 말했다. 태평양사령부 안에 육군, 공군, 해군 및 해병대 예하사령부가 있다. 태평양사령관은 물론 예하 육·해·공군 사령관이 모두 대장이다. 태평양사령부 내에 4성 장군만 네 명이나 되는 것이다. 태평양사령부 관할 지역에는 36개의 나라가 있고, 전 세계 면적의 52%를 차지한다. 관할 지역에 중국과 인도, 인도네시아, 방글라데시 등이 포함됐으니 인구는 굳이 따질 필요도 없을 것 같다. ●“북핵 실험 징후 있지만 공격은 못할 것” 모니터 속 태평양사령부 관할 지역에 13개의 빨간 불빛이 반짝거리는 것이 보였다. “가장 긴박한 이슈가 있는 지역”이라고 한다. 북한에도 붉은 등이 점멸했다. 북한 핵과 미사일이 주는 위협 때문이다. 이와 함께 중국과 일본이 충돌 중인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인도·파키스탄, 중국·베트남 접경 지역이 13대 이슈 지역에 포함돼 있었다. 관계자가 모니터 스위치를 누르자 이번에는 관할 지역 지도 위에 30개의 파란불이 들어왔다. 잠재적 안보 이슈가 있는 지역들이라고 했다. 그 가운데는 한국과 일본의 잠재적인 충돌 가능성도 포함돼 있었다. 태평양사령부의 안보 위협 평가는 계속 바뀐다. 고위 장성은 5월 21일 현재 관할 지역의 3대 이슈로 ▲남중국해의 긴장 ▲중국의 사이버 공격 ▲러·중의 동지나해 공동 훈련을 꼽았다. 태평양사령부 고위 관계자는 “북한이 새로운 핵실험을 할 징후가 있다”면서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언제 하느냐의 문제”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북한이 단기적으로 핵과 미사일의 동시 실험, 즉 핵을 탄두에 장착한 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다”면서 “북한의 핵 보유는 지정학적 안정을 깨뜨리기 때문에 미국은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태평양사령부에서 만난 미군 장성이나 한반도 전문가들과의 대화에서 북한 핵 문제 해결에 대한 절실함은 느끼지 못했다. 북한이 미국을 상대로 핵이나 미사일 공격을 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것 같지도 않았다. ●“위안부 공감하지만… 日에 너무 비판적” 미 태평양사령부의 우선적인 관심사 가운데 하나는 한국과 일본 간 관계 개선,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한·일 간의 군사협력 확대 문제였다. 태평양사령부 해군 고위 장성과의 간담회에서 이른바 ‘5개의 눈’(5 Eyes) 얘기가 나왔다. 미국과 군사비밀을 공유하는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를 일컫는 용어다. 태평양사령부 고위 관계자는 “한·미·일 군사정보협력협정이 이뤄진다면 5 Eyes와 같은 성격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 태평양사령부의 고위 공군 장성은 “현대전에서는 제공권을 가지면 이긴다”면서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의 제공 및 미사일 통합 방어 시스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한국 측의 미사일방어(MD) 체계 합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태평양포럼의 브래드 글로서먼 소장은 “한국과 일본 사이에 추한(Ugly) 역사가 있는 것은 알지만 가까운 파트너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시아·태평양안보연구소와 하와이대 동서문화센터의 한반도 전문가들도 한·일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가급적 ‘중립적’ 입장에서 한·일 양국 관계를 비평했다. 한 전문가는 “위안부 문제는 (한국 측 입장에) 공감하지만 가끔씩 한국 내의 여론이 너무 멀리 간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수단에 파견된 한국군 평화유지군이 일본 측으로부터 실탄을 임시로 공급받는 것까지 비판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일부 전문가의 비평은 너무 멀리 간 느낌을 줬다. 한 전문가는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의 행동이 끔찍했다는 사실에 동의한다면서도 “이는 특정 시기 집권정부의 문제”라면서 “일본이 다른 나라를 공격할 국가는 아니라고 본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역사를 돌아볼 때 일본은 한반도의 삼국시대부터 일관되고 지속적으로 한반도와 중국을 약탈, 침략해 왔다는 사실을 미국이 알아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태평양사령부의 고위 장성에게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에 대한 입장을 물었다. 그는 “일본 국민이 결정할 몫”이라면서도 “미국이 혼자서 세계 각 지역의 정세 변화에 대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일본의 역할 확대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 며칠 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발표한 신개입주의 외교정책과 일맥상통하는 말이었다. 5월 22일 진주만과 애리조나 호 국립묘지를 탐방했다. 진주만 박물관에는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공습으로 인한 피해와 이후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 과정들이 문서와 사진, 또 영화로 자세하게 기록돼 있었다. 진주만을 찾는 관광객의 다수는 일본인. 그들이 반드시 순례한다는 곳이 버지니아 호. 일본이 항복 문서에 서명했던 함정이다. 그러나 역사보다 중요한 것이 현실일까. 호놀룰루의 대표적인 호텔과 고급 저택은 대부분 일본인 소유다. 미국인들은 이런 현상을 어떻게 볼까. 히컴 공군기지에서 정치 자문관으로 일하는 전직 외교관은 “하와이의 주 수입원은 관광과 (태평양사령부의) 군비 지출”이라면서 “일본 사람이 많이 찾아오고, 일본 기업들이 많이 투자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호놀룰루(미 하와이) dawn@seoul.co.kr
  • 아이젠하워의 ‘롤렉스 시계’ 경매…무려 10억원

    아이젠하워의 ‘롤렉스 시계’ 경매…무려 10억원

    역대 제작된 롤렉스 중 가장 중요하다고 평가받는 시계가 경매에 나온다. 최근 미국 회사 PR 경매는 과거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착용한 롤렉스 시계가 오는 9월 경매에 나올 예정이라고 밝혔다. 지난 1951년 스위스 롤렉스사가 제작한 이 시계는 정확히 이 회사의 15만 째 제품이다. 기념비적인 이 시계는 당시 나토(NATO)군 최고사령관을 지냈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1890~1969)에게 기증됐다. 이유는 당시 아이젠하워가 전세계적으로 알아주는 최고의 전쟁 영웅이었기 때문이다.지금으로 부터 70년 전인 1944년 6월 6일 연합군 최고사령관이었던 아이젠하워 장군은 독일 치하에 있던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에 사상 최대의 상륙작전을 감행해 성공시킨다. 바로 제 2차 세계대전 승리의 결정적 계기가 된 작전명 ‘오버 로드’(Operation Overlord)로 알려진 노르망디 상륙작전이다. 이후 아이젠하워는 미 육군참모총장과 나토군 최고사령관을 거쳐 1952년 미국의 제34대 대통령에 올랐다. 특히 아이젠하워는 우리나라하고도 인연이 깊다.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맥아더 장군의 참모 출신인 그는 대통령 당선 직후인 1952년 12월 한국을 방문했으며 이듬해 7월 이승만 대통령의 반대에도 한국전쟁을 휴전으로 마무리했다. 이번에 경매에 나온 롤렉스 시계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재임시 공식 초상화와 1952년 라이프 잡지와의 사진 촬영시 실제로 착용했던 것이다. 이 시계는 사후 유언에 따라 절친한 육군 동료에게 넘겨진 후 30년 전 그의 미망인이 유명한 백악관 전문 수집가에게 판 것이다. PR 경매 부회장 바비 리빙스턴은 “이제까지 만들어진 롤렉스 중 가장 가치가 높은 시계” 라면서 “대략 100만 달러(10억 2000만원) 이상에 경매될 것으로 추산된다”고 평가했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중앙대도 ‘대학 훌리건’ 고소

    엇나간 애교심으로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서 경쟁 대학을 비방하는 ‘대학 훌리건’에 대한 피해 학교들의 대응 수위가 높아지고 있다. 일부에서는 ‘대학 훌리건’을 둘러싼 학교 간 갈등 양상마저 빚고 있다. 4일 대학가에 따르면 중앙대는 온라인 커뮤니티인 디시인사이드 등에 대학과 재단에 대한 근거 없는 소문을 퍼뜨리고 학교의 이미지를 깎아내린 13개의 인터넷주소(IP) 사용자를 모욕과 명예훼손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3일 고소했다. 중앙대 홍보팀은 대학 공식 커뮤니티인 청룡광장에 13개의 IP를 쓰는 대학 훌리건에 대한 고소 배경을 설명하며 “모 대학(한양대)의 고소에 대해서는 우리도 대응하지 않을 수 없다는 판단으로 최근 몇 개월 사이에 극단적인 표현으로 대학과 재단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글에 대해 강력히 대응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앞서 한양대는 한양대를 제2차 세계대전 패전국인 일본의 히로히토 일왕으로, 중앙대를 승전국인 미국 맥아더 장군으로 합성한 사진을 올리는 등 수십 차례에 걸쳐 비방글을 쓴 중앙대 학생 A(25)씨를 검찰에 고소한 바 있다. <서울신문 5월 31일자 6면> 파문이 커지자 A씨는 지난달 31일 해당 사이트의 한양대 게시판에 ‘한양대학교에 진심으로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라는 사과문을 올렸지만, 고소는 취하되지 않았다. 그는 “서울신문 기사와 800여개의 댓글을 일일이 읽어보며 잘못을 돌이켜 보고 가슴이 아팠다”면서 “한양대 구성원들과 한양대에 사죄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경쟁 대학 비방·모욕… 도 넘은 ‘대학 훌리건’

    경쟁 대학 비방·모욕… 도 넘은 ‘대학 훌리건’

    인터넷 커뮤니티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에서 대학 서열 논쟁을 일삼는 이들을 가리키는 ‘대학 훌리건’의 폐해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엇나간 애교심으로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 경쟁 대학에 대한 지속적이고 악의적인 글들을 쏟아낸 대학 훌리건을 급기야 상대 대학에서 검찰에 고소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한양대 관계자는 30일 “온라인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에서 활동하고 있는 중앙대생 A(25)씨를 최근 동부지검에 고소해 경찰이 A씨를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A씨가 한양대를 비방하고 모욕하는 내용을 담은 글 1000여건 이상을 2012년부터 지속적으로 올려 학교의 명예가 크게 훼손됐다”면서 “학생들이 A씨에 대한 처벌을 강하게 요구해 고소까지 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경찰이 조사하고 있는 A씨의 게시물은 모두 70여개다. ‘11대 명문 대학 서열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등 주로 한양대와 중앙대의 서열을 비교하는 글이 대다수다.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국과 패한 일본을 빗대 ‘중아더(중앙대=맥아더) 장군과 한망히토(한양대=히로히토 일왕)’라고 표현하며 학교 심벌 마크를 합성한 게시물이 문제가 됐다. A씨는 서울신문과의 통화에서 “즐겁게 풍자하거나 희화한 글이 대부분”이라며 “한양대 일부 학생들도 ‘두산 그룹이 중앙대에서 손을 떼려 한다’는 등의 허위 사실을 적시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학교의 명예를 방어하자는 차원에서 글을 올리는 과정에 지나친 표현이 일부 들어간 것”이라고 해명했다. 도를 넘은 대학 훌리건에 대한 법적 대응은 처음이 아니다. 2012년에는 경희대 국제캠퍼스 총학생회가 경희대의 본·분교 문제와 입시 순위에 대해 지속적으로 비방한 5명을 경찰에 수사 의뢰하기도 했다. 아주대와 이화여대도 학교와 관련해 악의적인 비난을 퍼부은 네티즌을 경찰에 고소한 사례가 있다. 한국외국어대 홍보팀 관계자는 “입시철이 되면 대학 훌리건들이 경쟁 대학에 대한 비방 글을 많이 올린다. 대학 이미지가 훼손되고 입시에도 악영향을 미친다”고 밝혔다. 이화여대 홍보팀 관계자도 “최근 일베(일간베스트 저장소) 등에 이대생을 비하하는 글이 많아 곤혹스럽다”고 토로했다. 김수한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대학 훌리건들은 모교에 지나친 자긍심을 지닌 학생들이 대부분”이라며 “상대 대학을 비하하면 모교의 위상이 높아진다고 생각해 이런 일을 벌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미모 카운셀러, 남학생에게 ‘야릇한 상담’ 체포

    미모 카운셀러, 남학생에게 ‘야릇한 상담’ 체포

    학생들의 상담을 맡고있는 여성 카운셀러가 남학생과 성관계를 가진 혐의로 체포됐다. 최근 미국 휴스턴 경찰은 지역 내 위치한 앨다인 맥아더 고등학교에서 근무하는 카운셀러 엘렌 워멜링(32)을 학생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혐의로 구속했다. 엘렌의 혐의는 학생들의 정신적 상담을 맡는 카운셀러로서는 믿기지 않을 만큼 엽기적이다. 경찰에 따르면 그녀는 지난 2월 말 소셜네트워크 사이트 ‘인스타그램’을 통해 신원이 공개되지 않은 12학년(고등학교 3학년 해당) 남학생에게 ‘추파’를 던졌다. 여기에 마음을 뺏긴 남학생은 엘렌의 집을 방문해 은밀한 시간을 보냈으며 이같은 행위는 이후 몇차례나 계속됐다. 결국 이들의 심상치 않은 관계에 대한 소문이 학교에 퍼지기 시작했고 결국 경찰에 의해 꼬리가 잡혔다. 그러나 엘렌은 “학생에게 인터넷 메시지를 보낸 적이 없으며 부적절한 관계를 맺지도 않았다”며 일체의 사실을 부인했다. 그러나 경찰은 학생의 증언과 사건 이후 인스타그램 계정이 삭제된 점을 들어 그녀를 구속했다. 현지언론에 따르면 현재 엘렌은 보석금을 내고 석방돼 재판을 받을 예정이며 학교에서의 업무는 중지됐다.      나우뉴스부 nownews@seoul.co.kr   
  • [씨줄날줄] 어벤져스 2/문소영 논설위원

    블록버스터 영화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이 어제 서울 마포대교를 시작으로 4월14일까지 2주일간의 서울 로케이션을 시작했다. 통칭 ‘어벤져스 2’로 불리는 이 영화 촬영에 대해 조현재 문화체육관광부 제1차관은 지난 18일 “싸이의 강남스타일에 이어 한국을 다시 한 번 세계에 알리는 계기”로 “국내 관광 수요가 늘어날 것으로 예상”했다. 서울시와 정부는 영화 상영에 따른 광고 효과 1566억원, 미디어 노출로 인한 간접광고 효과 2200억원, 관광수입 증대 효과 327억원 등 약 4000억원의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영화산업에서 국내 스태프 일자리 창출이나 해외영화의 국내 촬영 활성화 가능성 등을 포함한 국가브랜드 가치가 최대 2조원이라는 평가도 있다. 정부와 서울시, 한국 영화계는 마블 스튜디오에 촬영 편의와 제작비를 지원하고, 마블 스튜디오는 대한민국을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각 국내 기관에서 영화의 장면을 활용한 홍보영상물 제작을 허용했다. 이 계약이 한류 확산에 얼마나 효과적일까는 2015년 4월 영화가 개봉돼야 정확한 계산이 나올 것이다. 정부의 기대와 달리 비판적인 시각도 만만치 않다. 뉴질랜드의 대자연을 즐길 수 있었던 영화 ‘반지의 제왕’ 시리즈나 노르웨이의 눈 덮인 산을 찾아 오르고 싶은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에서는 관광지로서의 공감대가 형성됐지만, 어벤져스2는 서울의 개성을 강화하기보다 최첨단 현대적 건물을 파괴하는 등의 액션영화이기 때문에 매력적인 관광지로 연결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게다가 서울 마포구 상암동 디지털미디어시티(DMC), 청담대교, 강남대로, 문래동 철강단지 등의 촬영지는 거의 온종일 교통통제를 하기 때문에 시민불편을 고려하면 한국이 제작비 지원까지 하면서 영화를 찍어야 하느냐며 불평한다. 해외영화에서 한국의 이미지는 주로 6.25 전쟁과 관련된 전쟁고아 또는 우울한 폐허였다. ‘모정’이나 ‘맥아더’와 같은 영화가 그랬다. 최근에 조금 나아졌는데 배우 배두나가 출연한 ‘클라우드 아틀라스’에서처럼 중국의 어수선한 시장과 일본의 퇴폐미를 뒤섞어놓은 이미지다. SF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 표현된 최첨단이란 일본의 이미지조차 없다. 중국 일본과 다른 독자적인 문화가 표출되지 않고, 한국인이 좋아하는 ‘한강의 기적’ 같은 이미지는 더욱더 없다. 사실 어벤져스2의 서울 로케이션이 유럽이나 미국 쪽의 관광객을 끌어오는 데는 역부족일 수 있다. 하지만 중국과 동남아시아 관광객에게는 매력적일 수 있다. 또 가난한 전쟁의 나라라는 과거의 대중적 이미지를 탈피하는 데는 도움이 될 수도 있다. 너무 앞서서 부정적으로 재단할 필요가 없다.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사랑할 수밖에 없는 잉글랜드

    사랑할 수밖에 없는 잉글랜드

    잉글랜드의 북서부를 여행했다. 만나기 전 설레었고, 만나서는 빠져들었고, 지금 그 도시들의 기억을 열병처럼 더듬고 있으니, 이건 사랑이 분명하다. London 런던 섬광과 같던 런던의 밤 북반구의 겨울 해는 오후 3시를 넘긴 런던을 벌써 어둠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버스는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 옆을 천천히 지나간다. 엘리자베스 2세 즉위 60주년을 기념해 엘리자베스 타워Elizabeth Tower로 개명한 빅벤Big Ben의 당당한 위용, 푸른빛을 뿜고 돌아가는 런던아이London Eye도 템스강과 제법 잘 어울렸다. 빨간 2층 버스가 사람들을 활기차게 실어 나르고 저녁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트라팔가 광장으로 모여들 무렵, 우리가 향한 곳은 샤드The Shard다. 2013년 2월에 개장한 서유럽에서 가장 높다는 약 310m의 이 빌딩은 세계적인 건축가 렌조 피아노Renzo Piano의 작품으로 1만1,000장의 특수 유리가 6도의 경사를 이루며 빌딩을 감싸고 있다. 이름처럼 날카로운 조각을 연상시키는 외관이 고풍스러운 런던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우려도 있었다지만 샤드는 이미 런던의 명소로 급부상 중이다. 68층에서 내려다보는 런던의 야경 속에 템스강, 타워브리지, 세인트폴 성당도 함께 반짝인다. 영국에 가면 밥은 굶어도 뮤지컬은 보라는 말이 있다. 웨스트엔드West End는 뉴욕 브로드웨이와 함께 세계 뮤지컬의 중심이다. 세계 4대 뮤지컬로 꼽히는 <캣츠>, <오페라의 유령>, <레미제라블>, <미스 사이공>은 모두 영국 뮤지컬이다. 런던에는 연극과 뮤지컬 전용극장만 100개가 넘는다. 그중 500석 이상의 대규모 뮤지컬 극장 40여 개가 이곳 웨스트엔드에 몰려 있다. 저녁 7시면 런던의 모든 뮤지컬 극장에서 일제히 공연이 시작된다. 그중 우리가 선택한 것은 10년간 롱런하고 있는 <위키드Wicked>다. 서둘러 도착한 아폴로 빅토리아 극장Apollo Victoria Theatre은 초록 마녀 엘파바의 기운으로 가득했다. 1부 끝 무렵, 마법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며 부르던 ‘중력을 넘어서Defying Gravity’는 화려한 무대효과와 엄청난 가창력이 어우러져 소름끼칠 정도다. 본토에서 오리지널 뮤지컬을 대하는 이 감동이라니. 더 샤드 www.the-shard.com oxford 옥스포드 옥스퍼드 대학은 없다 런던에서 1시간 30분 거리의 옥스퍼드는 고풍스럽고 온화한 기품이 넘쳐 흘렀다. 흐린 날씨는 옥스퍼드의 클래식함을 더 고고하게 받쳐 줄 뿐 일정에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영어권에서 가장 오래된 하버드, 캠브리지와 함께 세계 최고의 명문으로 꼽히는, 역사와 전통 속에서 무수한 인재를 배출한,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영예로운 장학금인 로즈 장학금을 수여하는 대학. 일반적으로 기억하는 옥스퍼드 대학은 이렇다. 더하자면 12세기 헨리2세가 영국 학생들의 파리 유학을 금지하면서 옥스퍼드에 흩어져 있던 대학들을 통합해 설립한 것이 옥스퍼드 대학의 시작이다. 옥스퍼드 대학University of Oxford College은 옥스퍼드에 있는 37개 칼리지와 6개의 사설학당의 연맹체를 통틀어 일컫는 것일 뿐, 옥스퍼드 대학교라는 것은 없다. 그러나 영국 문예부흥운동의 중심이자 빅토리아 여왕 때는 종교적 논쟁의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곳으로 아웅산 수치, 마가렛 대처, 토니 블레어, 간디, 빌 클린턴 등 46명의 노벨상 수상자와 25명의 영국 총리를 배출한 곳도 옥스퍼드다. 세계를 움직이는 엘리트들의 산실인 만큼 도시를 관통하는 학문적인 자부심을 쉽게 체감할 수 있다. “걷는 것만큼 옥스퍼드를 잘 둘러볼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옥스퍼드 공인 가이드로 자랑스럽게 그린 배지를 가슴에 단 하이디 선생은 걷는 것이야말로 옥스퍼드 최고의 여행법이라고 했다. 옥스퍼드 공식 가이드 워킹투어 College & Historic City Centre Tour 다양한 종류의 테마투어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투어라고 할 수 있다. 셀도니언 극장, 보들리안 도서관, 크라이스트처치 등을 약 2시간 이상 돌아본다. www.visitoxfordandoxfordshire.com Stoke-on-Trent 스톡 온 트렌트 영국 도자기의 본고장 런던 북서쪽에 자리한 스톡 온 트렌트는 영국 도자기의 주요 생산지다. 지역에만 25개가 넘는 도자기 팩토리 숍이 있고,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웨지우드, 포트메리온, 버리, 앤슬리, 무어크래프트 등의 브랜드가 이곳에서 나왔다. 1759년 창립된 웨지우드는 가장 영국적인 품위를 지닌 도자기다. 특히 여왕의 자기Potter to Her Majesty라고 불리는 ‘웨지우드 파인 본차이나’ 제품은 세계적으로 웨지우드의 명성을 증명하는 제품이 됐다. 영국 자기 본차이나Bone China는 중국 자기의 우수성을 캐기 위한 영국 도공들의 집념의 결과다. 장석과 고령토에 동물의 뼛가루를 섞어 반투명한 백색을 띠고 단단하다. 천재적인 도공 웨지우드Josiah Wedgwood가 훗날 영국 도자기산업의 중심지가 된 스톡 온 트렌트에 도자기 공장을 세운 것이 1759년. 웨지우드를 아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재스퍼Jasper를 떠올린다. 재스퍼는 유약 대신 산화물을 첨가해 만들어낸 매혹적인 색깔의 바탕에 고전적인 무늬나 초상화를 장식한다. 웨지우드 박물관에서는 웨지우드 홈 세라믹 생산의 250년 역사를 볼 수 있고, 팩토리 숍에서는 웨지우드의 다양한 브랜드를 최대 70% 할인된 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다. 웨지우드에서 약 20분 거리에 자리한 1851년 설립된 버얼리Burleigh는 웨지우드와는 다른 분위기다. 세월이 느껴지는 삐걱대는 건물도 그대로다. 대량생산이 아니라 영국 전통기법으로 핸드프린팅하고 무독성 제품을 고집한다. 수작업이라 문양도 일정하지 않다. 잔잔하거나 고풍스러운 꽃문양 패턴으로 덮인 제품들은 아주 세련되고 우아하다. 한국에서는 아직 생소할지 모르지만 영국 왕실에서도 사용하는 유명제품으로 특히 영국 젊은 주부들 사이에서 인기다. 그 명성이 한국으로 이어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웨지우드 방문자센터 & 박물관 www.wedgwoodvisitorcentre.com 스톡온트렌트 www.visitstoke.co.uk Chester 체스터 중세로의 여행 맨체스터에서 불과 30분, 영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중 하나라는 체스터는 기대 이상이었다. 대영제국의 상흔과 영광을 모두 품은 이 작은 도시의 역사는 1세기로 거슬러 오른다. 체스터는 웨일즈 지방 침략을 위한 로마인들의 거점도시였다. 곳곳에 당시의 유적들이 남아있는데, 가장 체스터다운 풍경은 튜더양식의 상가건물이다. 하얀 벽과 검은 나무가 어우러진 튜더양식의 건물들은 헨리7세부터 시작된 튜더왕조 때 지어진 것으로, 고딕양식에 르네상스 건축의 화려함이 더해졌다. 체스터는 구 시가지를 에워싸고 있는 성벽에 동, 서, 남, 북으로 자리한 네 개의 성문과 이스트게이트 스트리트Eastgate St., 워터게이트 스트리트Watergate St., 노스게이트 스트리트Northgate St. 그리고 남쪽의 브릿지 스트리트Bridge St. 네 개의 메인거리로 되어 있다. 이 4개의 거리가 교차하는 크로스The Cross를 중심으로 로우즈The Rows가 있다. 로우즈는 13~19세기에 형성된 쇼핑가로 소위 중세시대의 아케이드 거리라 할 수 있다. 비가 와도 우산을 사용하지 않고 쇼핑을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보통 2층까지는 상가이고 위층은 주택인데 로우즈 안으로 올라가면 거리로 면해 있는 발코니와 중앙 복도 그리고 안쪽으로는 상점들이 늘어서 있고 겉과 달리 내부는 사뭇 현대적이다. 노르만, 로마네스크, 고딕 등 다양한 건축양식이 혼재되어 있는 체스터 대성당Chester Cathedral과 로마시대부터 있어 왔던 성벽City Walls 주변은 고즈넉했다. 이 성벽의 동쪽 문에는 체스터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정교한 시계탑이 서 있다. 1897년,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년을 기념해 만들어진 것으로,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건축물과 사람들의 행렬은 아무리 봐도 지루하지 않다. 글·사진 Travie writer 이세미 취재협조 영국항공 www.britishairways.com, 잉글랜드관광청 www.britholic.com ▶travie info 체셔 오크 디자이너 아웃렛 빌리지 Cheshire Oaks Designer Outlet Village 맨체스터 사람들이 체스터까지 와서 쇼핑을 하는 이유는 8개국 총 21개 아웃렛 매장을 운영하는 유럽 최대 규모의 맥아더글렌 아웃렛McArthurGlen Designer Outlets 중 하나로 영국에서 가장 큰 체셔 오크 디자이너 아웃렛 때문이다. 버버리, 폴로, 마이클 쿠어스, 휴고 보스와 같은 럭셔리 브랜드부터 나이키, 아디다스 등의 스포츠 브랜드와 마크 앤 스펜서, 넥스트 등의 하이스트리트 브랜드까지 145개의 브랜드를 최대 60% 할인된 가격으로 구입 가능하고, 10개가 넘는 레스토랑과 카페도 산재해 있다. 쇼핑마니아라면 유럽에서는 쇼핑만 잘해도 본전을 찾고도 남는다는 말을 체스터에서는 충분히 실감할 수 있다. 맥아더글렌 디자이너 아웃렛 www.mcarthurglen.com
  • 우주에 나홀로?…NASA ‘그래비티 영상’ 공개

    우주에 나홀로?…NASA ‘그래비티 영상’ 공개

    몸을 지탱해줄 안전장치 없이 홀로 우주 공간에 남겨진 심리적 공포를 담은 영화 ‘그래비티’, 그런데 이런 상황이 실제로 일어났던 것일까? 최근 NASA가 공개한 영상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총 1분 33초 길이의 해당영상의 첫 장면은 국제우주정거장(International Space Station)의 모습이다. 20초가량 지난 후 정거장 외곽의 문이 열리더니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다. 해당 문에서 나온 우주비행사 1명이 아무런 연결 장치 없이 우주 공간으로 떨어져나가기 때문. 비상상황인 것 같지만 NASA의 카메라는 그저 해당 우주비행사를 묵묵히 비춰주기만 한다. 1분 30초가 넘어가는 동안 이 우주비행사는 계속 우주공간으로 빨려 들어가며 정거장과는 점점 멀어진다. 도대체 무슨 상황인 것일까? 사실 이 우주비행복 속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것은 ‘SuitSat-1’이라는 NASA의 인공위성 프로젝트 중 하나였던 것이다. 지난 2006년, 국제 우주정거장에 근무 중이던 한 러시아 승무원이 첨단 소재로 만들어진 우주복을 인공위성으로 재활용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이는 당시 우주비행사로 정거장에 근무하던 빌 맥아더, 발레리 툴레어에 의해 구체화됐다. 이들은 우주복 속에 라디오 송신기, 온도 센서, 3개의 배터리를 장착했고 여기에 ‘SuitSat-1’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말 그대로 ‘우주복 인공위성(suit satellite)’이었다. 이 인공위성은 영상처럼 지난 2006년 2월 4일 우주정거장을 떠나 지구 궤도를 돌게 됐다. 초기에 이 인공위성은 성공적인 행보를 보였다. 해당 위성의 내장센서는 6개의 언어로 데이터를 전송할 수 있었는데 이는 지구 각지의 아마추어 무선 수신자들과 성공적으로 교류했다. 세계 각국 학교로 실시간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했다. 하지만 2주 후 이 인공위성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지구 궤도에 여러 번 진입하다 결국 대기권에 떨어졌고 남 호주 상공에서 장렬히 산화해버린 것이다. 이후 우주 정거장 측은 충전 배터리와 지구 영상을 실시간 촬영·전송 할 수 있는 ‘SuitSat-2’ 개발 계획에 착수했고 지난 2011년 8월 3일 첫 우주 유영을 진행했다. 해당 실험은 아직 효과는 미약하지만 ‘저비용 고효율 인공위성’ 구축 계획에 긍정적 가능성을 불어넣었다는 의미가 있다. ☞☞동영상 보러가기 동영상·사진=유튜브/NASA 조우상 기자 wscho@seoul.co.kr
  • UFO를 소환?…수십명 모인 곳에 뜬 UFO

    UFO를 소환?…수십명 모인 곳에 뜬 UFO

    미확인비행물체(UFO)를 소환한다? 일반인들에게는 황당하고 불가능해 보이는 행동이지만 실제로 세계의 일부 UFO 마니아들은 이런 일에 도전하고 있는 듯하다. 최근 미국에 있는 한 공원에서 열린 UFO 소환 행사에서 많은 사람이 모인 가운데 하늘에 UFO로 추정되는 물체들이 관측돼 이를 촬영했다는 주장과 함께 관련 영상들이 동영상 사이트 유튜브를 통해 공개돼 화제가 되고 있다. 각각의 유튜브 채널과 해외 유명 UFO 사이트인 UFO사이팅스데일리에 따르면 지난달 23일(현지시간) 캘리포니아주(州)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맥아더공원 상공에 둥근 원형의 UFO가 여러 사람의 카메라에 포착됐다. UFO 마니아들 사이에서 ‘UFO 소환사’로 불리는 로버트 빙햄이란 남성이 올해 2회째 개최한 이 행사에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모였던 것으로 전해졌다. 공개된 영상을 살펴보면 행사에 모여 하늘을 관측하는 여러 사람을 볼 수 있으며 여기에는 이날 촬영됐다고 주장 중인 동화상의 UFO도 고스란히 담겨 있어 의문을 더하고 있다. 사진=UFO사이팅스데일리/유튜브 캡처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서세원 “빨갱이로부터 나라 지키자” 파문

    서세원 “빨갱이로부터 나라 지키자” 파문

    개그맨 출신 목사 서세원이 공식석상에서 “빨갱이들로부터 나라를 지키자”라는 발언을 해 논란이 되고 있다. 서세원은 13일 서울 광화문 프레스센터에서 영화 ‘건국대통령 이승만’ 제작을 위한 시나리오 심포지움을 열었다. 이날 참석한 김길자 대한민국사랑회 회장, 애국총연합회 이상훈 전 국방부장관 등은 11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변호인’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미화한 영화”라고 비판했다. 이어 서세원은 갑자기 “빨갱이들로부터 이 나라를 지켜보자”면서 “우리가 정신 똑바로 안 차리면 우리 자녀들이 큰일 난다”는 발언을 했다. 서세원은 또 “좌익도 다 망했다”면서 “북한은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라 독재 국가다. 사회주의를 꿈꾸는 자들은 다 망했다. 민주주의도 잘못돼가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인다. 우리나라는 이념을 버리고 하나가 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서세원은 후폭풍을 예상한 듯 “이념 싸움은 하지 말자. 좌익, 우익 하는 것은 부끄럽다”며 수습에 나서기도 했다. 서세원은 고 이승만 전 대통령을 시작으로 백범 김구 선생,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이야기도 영화에 담을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건국대통령 이승만’은 자유평화통일재단·불교애국단체총연합회·기독교이승만영화추진위원회·대한민국사랑회 등 보수 단체들이 제작에 나서는 영화로, 서세원은 ‘도마 안중근’(2002) ‘젓가락’(2010) 이후 또 다시 영화감독으로서 출사표를 던졌다. 서세원은 주인공인 이승만 대통령 역은 국내 배우들 중에 오디션을 통해 선발할 예정이며, 영부인인 프란체스카 여사 역할은 미국과 독일 배우 중에서 캐스팅하려고 접촉 중이라고 밝혔다. 맥아더 장군 역할은 할리우드 유명배우를 섭외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입학사정관제, 공교육 내실화 땐 건재… 공정 시비 못 풀면 위축

    입학사정관제, 공교육 내실화 땐 건재… 공정 시비 못 풀면 위축

    대입 전형 간소화 정책이 추진되며 2015학년도 대입에서 ‘입학사정관 전형’이란 말이 사라졌다. 간소화 정책은 학교생활기록부, 대학수학능력시험, 논술, 실기 등 4가지 전형 요소를 조합해 대학 전형방법을 구성하되 대학별로 수시에서는 4가지, 정시에서는 2가지 전형방법만 허용한 정책이다. 2007년 10개 대학에서 시범 시행한 뒤 지난해 125개 대학으로 확대될 정도로 지난 이명박 정부에서 입학사정관 전형을 빠르게 뿌리내리게 한 원동력인 재정지원 사업에서도 ‘입학사정관’이란 말은 빠졌다. 교육부는 기존의 ‘대학의 입학사정관 역량 강화 지원사업’을 지난해부터 ‘공교육 정상화 기여대학 지원사업’으로 확대, 개편했다. 입학사정관 전형에 대한 전망은 크게 두 쪽으로 갈린다. 명칭이 사라진 것처럼 내용적인 측면에서도 입학사정관 전형이 위축될 것이란 전망과 대학의 입학사정관들이 입시뿐 아니라 대학별 인재양성 시스템 전반에 영향을 끼치는 존재로 진화할 것이란 전망이다. 전망이 엇갈리는 이유는 그동안 입학사정관 전형에 대한 평가가 엇갈렸기 때문이다. 사교육 유발, 고 스펙 경쟁처럼 입학사정관 전형의 어두운 측면이 부각되기도 했지만 병폐 수준의 성적 위주 서열화로 점철된 우리 대입 체제에서 입학사정관 전형이 변화의 시작이 됐다는 호의적인 평가도 여전히 많다. 한국대학교육협의회와 한국대학입학사정관협의회가 지난주 대전 유성호텔에서 개최한 ‘대입제도 변화에 따른 입학사정관제 발전 방안 세미나’에서는 입학사정관 전형의 앞날에 대한 논의가 총망라됐다. 이틀에 걸쳐 이뤄진 세미나 내용을 27일 지상 중계한다. 마치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말처럼 세미나 참석자들은 당장 2015학년도 입시에서 입학사정관 전형이 건재하다는 데 공감대를 형성했다. 김무봉 동국대 교수는 “대입전형 간소화 논의 속에서 입학사정관 전형은 학생부 중심 평가제도로 공교육 정상화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새로운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면서 “입학사정관 전형이 학생부 종합전형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전형 내용과 운영이 전반적으로 변경돼야 할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2015학년도 학생부 종합전형 모집인원은 37만 9013명으로 전년 입학사정관 전형 인원보다 345명 늘었다. 총 정원 대비 모집비율 역시 2014학년도 13.0%에서 2015학년도 17.7%로 늘었다. 대입 전형 간소화 정책이 시행되면 입학사정관 전형이 사라질 것이란 예상이 양적인 측면에서는 빗나간 셈이다. 그렇다면 학생부 종합전형은 어떤 형태로 운영될까. 김 교수는 대학 입학처장 및 실무책임자 29명, 입학사정관 73명, 고교 교사 125명 등 227명 대상 설문조사 결과를 공개했다. 우선 입학 실무자의 55.2%, 입학사정관의 42.5%, 교사의 52.0%는 학생부 종합전형을 ‘입학사정관 등이 참여해 학생부 교과와 비교과, 자기소개서, 추천서 등을 통해 학생을 종합평가(50% 이상)하고 면접 평가를 일부 반영한 전형’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김 교수는 설명했다. 학생부 종합전형의 전형요소로 대학과 고교 측 모두 학생부 교과 성적, 비교과 활동, 자기소개서, 면접 등을 가장 많이 선택했다. 또 세 집단 모두 학생부 종합전형 선발 비중에 대해 21~30%를 적정한 수준으로 꼽았다. 입학사정관 전형이 살아남더라도 내용 측면에서의 변화는 불가피하다는 의견도 많은 지지를 받았다. 박동훈 강원대 입학사정관은 “입학사정관 전형이란 용어가 사라지고 재정지원 방식이 달라지면서 대입전형 환경에 변화가 온 것은 사실”이라면서 “공교육 정상화 기여대학 지원 사업에 따라 현 정부의 대입 제도에서 정부주도형 관리체계는 더욱 강화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공교육 정상화라는 목표 속에서 학생부 종합전형의 틀이 만들어질 것이란 관측이다. 박 사정관은 “입학사정관으로서 자기소개서 심사를 하며 이상하게 느낀 점은 학생들이 자신의 진로를 탐색·발견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을 정규수업 활동이나 수업 과정에서 거의 하지 못한다는 점”이라면서 “왜 학생들은 배우고 싶은 것을 수업 시간에 제대로 배우지 못한 채 정규 수업이 아닌 동아리 활동이나 개별적인 발표와 토론 및 실험실습 등을 통해 익혀야 하느냐”고 되물었다. 이어 “학교에서 정규 수업이 살아나도록 하는 것이 고교교육 정상화의 올바른 방향이자 핵심”이라면서 “학생부 종합전형은 고교교육 활동의 활성화를 촉진하는 평가이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예를 들어 지금까지 대입에서 국어·수학·영어 성취 수준으로 평가해 학생을 선발함에 따라 이 과목을 제외한 다른 과목이 파행 운영됐다면, 학생부 종합전형에서는 국어·수학·영어를 제외한 다른 과목에 대한 몰입도 등을 평가해야 한다는 얘기다. 김종우 전국진로진학상담교사 협의회장도 입학사정관 전형의 확대재생산이 공교육 정상화에 기여할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김 협의회장은 “지난 몇 년 동안 입학사정관제와 진로 교육으로 인해 학교는 새로운 분위기를 만들어 가고 있다”면서 “새 정부 초기 입학사정관제에 대한 부정적인 분위기가 사라지고 입학사정관 제도의 정착에 긍정적인 분위기로 변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이어 “학생부 종합전형이 정착된다면 더 많은 입학사정관이 필요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기존 입학사정관 전형 운영과정에서 제기된 사교육 유발, 합격 예측 가능성 저하, 공정성 시비 등의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조희건 경희대 선임입학사정관은 자기소개서의 정형화를 거론하며, 학생부의 신뢰도를 높여야 한다고 제안했다. 조 사정관은 “우리나라 고교 현실에서 본인만의 차별화된 활동과 경험을 쌓는 건 녹록지 않다”고 했다. 그나마 입학사정관 전형에서 가장 치열한 경쟁을 벌인 언론정보학과만 해도 대부분이 신문편집반 동아리 활동이나 각종 사용자제작콘텐츠(UCC)와 립덥(lip dub·립싱크 뮤직비디오 형식의 영상물) 제작 경험을 쓰거나 방송반 동아리 시험에 떨어져 자체적으로 동아리를 만들어 활동하는 경험 등이 주를 이룬다는 얘기다. 조 사정관은 또 “학교생활 중 배려, 나눔, 갈등관리 등을 실천한 사례를 자기소개서에 쓰라고 하면 학교에서 친구와 싸운 다음 갈등하다가 화해했다는 에피소드, 학교 축제 때 반 전체가 참여하는 합창이나 댄스 프로그램을 정하거나 연습할 때, 체육대회 반 티셔츠 디자인 선정 과정에서 일어난 갈등을 대화와 설득으로 해결했다는 내용처럼 정형화된 몇 가지 사례가 주를 이뤘다”면서 “자신만의 인성과 사회성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를 찾기 어려운 상황에서 오히려 학생부의 행동특성과 종합의견란이 지원자 인성을 가늠하는 데 도움이 됐다”고 털어놨다. 학생부에 기재된 행동특성 등의 영향력이 커지는 추세이지만 ‘학생부 부풀리기’나 ‘붕어빵 학생부’ 문제가 해결돼야 학생부의 신뢰도가 높아진다고 조 사정관은 설명했다. 학생부 부풀리기란 학생부 분량을 늘리거나 학생부를 좋은 내용으로 꾸미는 것으로 나태한 학생이라면 ‘여유로운 성격을 지녔다’라고, 이기적인 학생이라면 ‘자신의 일에 몰두하면 다른 것에 거의 신경을 쓰지 못한다’라고, 괴팍하고 엉뚱하다면 ‘창의력이 뛰어나고 용기 있다’라고 기록하는 일이라고 한다. 붕어빵 학생부는 교사가 좋은 뜻의 5~10개 예시문장을 만들어 학생에 따라 골라서 기입하는 학생부를 말한다. 김성구 전남대 입학사정관은 “학생부 종합전형이 정착하려면 교과 부문에서도 정성적인 평가가 가능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문과 출신 여학생이 영양사가 되고 싶어 관련 학과로 진학하는 사례를 예로 들었다. 대학 입학처에서 기존 방식대로 이 학생을 대상으로 면접을 실시한다면 ‘몇 등급, 몇 점짜리 학생이냐’라고 묻겠지만, 학생부 종합전형에서라면 ‘학생은 화학에 관심이 많거나 화학 심화 교과를 이수했느냐’라고 물어야 한다는 것. 김 사정관은 “영양사를 꿈꾸는 학생에게 화학 공부를 했는지를 묻는 질문의 뜻을 이해한 학생이라면, 사정관은 이 학생을 선발할 것”이라면서 “입학사정관들이 결코 형식적인 숫자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진로 목적대로 자신의 삶을 가꿔 온 학생을 선호한다는 점을 명확히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김 사정관은 또 “고교교육에서 단순하게 형식화된 숫자가 아닌 자신의 진로에 맞도록 충실한 교육 과정을 이수하는 것이 대학 입학의 지름길이자 대학 이후 자신의 삶을 존중하는 태도라는 점을 일깨워야 한다”고 덧붙였다. 홍희경 기자 saloo@seoul.co.kr
  • “北 영화 월미도 김일성 충성심 형상화” “북한도 전쟁의사 없고 반전·평화 촉구”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 등의 ‘내란 음모 사건’ 재판에서 피고인들이 북한의 대표적인 전쟁 영화인 ‘월미도’를 본 것을 놓고 검찰과 변호인 간 공방이 벌어졌다. 월미도는 6·25전쟁 당시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에 맞서다 전사한 월미도 북한군 중대의 무용담을 그린 영화다. 14일 수원지법 형사12부(부장판사 김정운) 심리로 열린 36차 공판에서는 제보자 이모씨와 홍순석, 한동근 피고인 등 3명이 음식점과 수원새날의료협동조합 등에서 이른바 ‘3인 모임’ 대화를 담은 녹음 파일 5개에 대한 증거 조사가 이뤄졌다. 녹음 파일에 따르면 이씨와 피고인들은 지난해 1월 23일부터 4월 5일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경기 수원시의 한 음식점과 커피숍에서 모였다. 또 한 피고인이 대표로 있는 수원새날의료협동조합 사무실에 함께 모여 월미도 영화를 보고 소감을 말하는 내용도 담겨 있다. 검찰은 “피고인들은 영화를 보고 ‘장군님 때문에 해방이 된 후 행복한 조국이 됐다. 장군님을 지키는 것이 조국을 지키는 것’이라고 소감을 밝혔는데 김일성에 대한 충성심을 형상화한 영화를 보고 어떻게 반전 평화 운동을 할 수 있는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또 검찰은 “홍 피고인이 ‘한반도 전쟁 발발 시 세 가지 지침이 왔다’고 말했다”면서 “이는 연대조직 결성과 대중적 행동 등 RO(혁명조직)의 전쟁 대비 3대 지침”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변호인 측은 “검찰은 피고인들이 영화를 본 것을 비상상황 시 목숨까지 바치려는 결의대회라고 주장하지만 영화는 10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봤고 전쟁 시 폭동을 준비하자는 게 아니라 북한도 전쟁 의사가 없다는 점을 일깨워 주기 위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또 “3대 지침은 진보당과 진보연대가 앞으로 전개할 합법적인 반전·평화 운동에 관한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김병철 기자 kbchul@seoul.co.kr
  • [열린세상] 아베 정권의 탈선과 우리의 선택/김경민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열린세상] 아베 정권의 탈선과 우리의 선택/김경민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아베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함으로써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고야 말았다. 침략의 전범들이 합사돼 있는 야스쿠니 신사는 한국과 중국이 가장 싫어하는 역사의 현장인데 일본을 대표하는 총리가 참배하는 것은 과거 침략의 역사를 부인하는 의미가 된다. 이런 일본의 앞날을 예측했던가. 일본을 항복시킨 맥아더 원수는 일본을 점령하자마자 중요한 몇 가지 정책을 펼쳤다. 첫째, 지독하리만큼 독한 일본의 보수세력들의 결합을 끊는 일이었다. 맥아더는 일본이 침략전쟁을 일으킨 원동력을 군벌과 재벌의 결탁이라고 보았다. 군국주의를 내세운 군벌은 결집된 재벌의 자본력을 배경으로 항공모함, 가미카제 전투기 등 수많은 무기로 무장할 수 있었다. 그래서 맥아더는 점령정책의 첫째를 군사력 해체, 두 번째를 재벌 해체로 정책목표를 삼았다. 그리고 군국주의에 물든 국민들의 사상을 바꾸기 위해 민주화를 단행시켰다. 그래서 일본은 패전한 지 70년 가까이 되는 기간 동안 나름대로 민주주의를 경험하면서 미국과의 동맹하에 조용히 경제발전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일본의 보수세력의 생각은 경제력뿐만 아니라 정치·군사력으로 강대국이 되는 염원을 간직하고 있었고 그 속마음이 북한의 대포동 미사일 발사와 중국의 센카쿠 위협으로 수면 위로 부상해 본격화되는 것이다. 어느 나라나 보수세력은 존재하는데 일본의 보수세력은 성격이 다르다. 한국이나 중국이 일본의 침략전쟁을 비판하면 잘못되었다고 진정하게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두 나라가 그 당시 국력이 약해 자신들의 나라를 못 지킨 것일 뿐 침략전쟁이 잘못됐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60년 이상 사과와 반성에 대한 서로 다른 주장이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것이다. 나치 학살의 독일은 지금도 침략의 역사를 인정하며 주변국들과 동행하려 한다. 작년 봄 베를린의 중심가 브란덴부르크 문 옆에 나치 학살의 잘못됨을 수많은 관 모양의 건축물로 만들어 놓은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독일 뮌헨 근처에는 최초의 강제수용소 다카우가 있고 베를린 근처에는 나치가 생체실험을 했다는 작센 하우스가 있어 과거 나치 만행의 시설을 보존하며 반성에 반성을 거듭하고 있는데, 수도 중심가에 어쩌면 흉물스럽기도 한 진회색의 관들로 건축돼 있는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은 독일을 신뢰받게 한다. 일본은 독일과 일본을 비교하지 말라고 손사래를 친다. 비겁한 일이다. 세계는 동북아 세 나라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을 부러워하기도 하고 두려워도 한다. 각각의 한 나라가 세계의 어느 국가와도 견줄 만큼 경제력이 발달한 나라들이다. 서로가 평안하여 협력하면 인류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동북아를 만들 수 있는데 소아적인 생각에 머물러 값비싼 무기를 사들이는 군비경쟁에 휩싸여 있다. 일본은 침략 역사를 부정하며 우경화의 길을 가고 있고, 중국은 센카쿠(중국명 댜오위다오)를 넘보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평온 상태를 깨뜨리려 한다. 그러면 한국은 어떻게 해야 하나. 우선 일본의 침략 역사 부정에 대해서는 인내심을 갖고 꾸준히 주장해야 한다. 36년의 식민지배를 당한 한국은 직접적인 피해자이며 일본의 침략 역사를 그 누구보다도 잘아는 당사자다. 독일은 교과서에 나치 만행을 제대로 쓰고 정권이 바뀌어도 피해자들을 어루만져 주기 때문에 후세들이 선대의 잘못에서 자유로운 것이다. 반면에 일본의 후세들은 제대로 역사를 배우지도 못해 한국이나 중국을 여행하면서 선조들의 잘못을 알게 되는 수치를 당하는 것이다. 일본의 지도자들이 역사를 바르게 가르치지 못하면 중국이 방공식별구역을 확대하며 센카쿠를 넘보는 것에 국제사회의 협력을 얻어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 하나는 한국 외교의 역할이다. 일본의 보수우익화가 더욱 강화되는 것은 중국의 위협이 근저에 깔려 있다. 일본과 중국의 무기 사재기는 한국에도 영향을 미쳐 재정적자에 허덕이는 한국 경제에 주름이 지게 하고 있다. 동북아의 군비경쟁 축소라는 화두를 갖고 한국이 선제적 외교에 나서야 동북아 평화의 미래가 있다.
  • 6·25때 잃어버린 국새 ‘황제지보’ 60여년만에 고국 돌아온다

    6·25때 잃어버린 국새 ‘황제지보’ 60여년만에 고국 돌아온다

    한국전쟁 중 미군이 불법 반출한 대한제국과 조선 왕실의 국새, 어보 9점이 60여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다. 문화재청은 한국전쟁 기간 중 미군이 덕수궁에서 불법 반출한 인장 9점을 지난 18일(현지시간) 미국 국토안보부 수사국(HSI)이 샌디에이고의 한 가정집에서 압수했다고 21일 밝혔다. 이번 수사는 한국전 참전 군인인 A(사망)씨의 사위 B씨가 인장의 가격을 알아보기 위해 골동품 가게를 찾았다가 덜미를 잡힌 게 단초가 됐다. HSI는 지난 9월 이 같은 사실을 문화재청에 알려 왔고 문화재청은 관련 기록을 검토해 인장 9점이 조선왕실과 대한제국의 것임을 확인, 대검찰청을 통해 지난달 21일 미국 수사당국에 수사를 요청했다. HSI는 몰수 절차 등을 거쳐 내년 6월쯤 인장을 한국으로 반환할 계획이다. 황제지보(皇帝之寶)는 1897년 대한제국 선포와 함께 고종 황제의 명으로 제작돼 외교 문서 등에 사용한 국새다. 고려·조선 왕조 때 중국 황제로부터 하사받은 국새를 왕위 계승이나 외교 문서 등에 사용하던 전례에서 벗어나 자주독립의 정신을 담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중국의 제후국임을 뜻하는 거북이 아니라 황제만이 사용하던 용을 문양으로 썼다. 압수된 인장은 황제지보 외에도 순종이 고종에게 태황제라는 존호를 올리면서 제작한 수강태황제보(壽康太皇帝寶), 조선 왕실에서 관리 임명에 사용한 유서지보(諭書之寶)와 준명지보(濬明之寶), 조선 헌종의 서화 감상인인 향천심정서화지기(香泉審定書畵之記), 조선 왕실에서 사용한 우천하사(友天下士), 쌍리, 춘화(春華), 연향(硯香) 등이다. 국립고궁박물관 관계자는 “대한제국 국새는 황제지보 외에 대한국새(大韓國璽) 등 13개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면서 “이 중 통신조서에 사용한 칙명지보(勅命之寶), 관리 사령장에 사용한 제고지보(制誥之寶), 군대의 통수에 사용한 대원수보(大元帥寶) 등 3점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돼 있다”고 전했다. 국권 침탈 뒤 고종이 만든 황제어새(皇帝御璽)는 고궁박물관에 있으나 국새로 인정받지 못한다. 대한제국 국새는 일제강점기에 강탈됐다가 1946년 맥아더 미군 사령관이 한국 정부에 반환했으나 한국전 당시 대부분 자취를 감췄었다. 앞서 지난 9월에는 한국전 때 미국으로 불법 유출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지폐인 호조태환권(戶曹兌換券)의 인쇄 원판이 한·미 수사 공조를 통해 반환된 바 있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6·25 북한군 남침, 9·28 서울 수복 1보 방송한 전설의 아나운서 위진록

    [김문이 만난사람] 6·25 북한군 남침, 9·28 서울 수복 1보 방송한 전설의 아나운서 위진록

    [상황 1] 1950년 6월 25일 오전 7시. “임시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임시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새벽 북한 공산군은 38선 전역에 걸쳐서 전면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안심하십시오. 우리 국군이 건재합니다. 거듭 말씀드리겠습니다….” [상황 2] 1950년 9월 28일 일몰 직전. “여기는 서울중앙방송국입니다. 여기는 서울중앙방송국입니다.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 그리고 서울시민 여러분, 오늘 새벽 유엔군과 대한민국 국군은 대한민국 수도 서울을 완전히 탈환하고 패주하는 공산군을 추격하며 북진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자유를 되찾았습니다….” 6·25전쟁 당시 북한군의 남침과 서울 수복의 소식을 가장 먼저 알린 제1성은 이렇게 다급했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당시 KBS 아나운서 위진록(85)씨. 북한군이 점령한 서울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전쟁의 현장을 생생하게 전달했다. 또한 1950년 11월 도쿄에 자리한 유엔군총사령부(VUNC) 아나운서 생활을 하면서 우리나라 격동의 현대사의 물줄기와 함께 파란만장한 삶의 길을 걸었다. 그의 이력을 얼핏 들여다봐도 알 수 있다. 일제 강점기인 1928년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나 가난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성장한다. 월남한 뒤 경성역(서울역)에서 역부로 근무하다가 8·15 해방을 맞이하고 만 19세때 서울중앙방송국(KBS)의 아나운서 시험에 합격한 이후 대한민국 정부수립 초창기의 현장 일선에서 활약했다. 김구 선생 장례식 실황중계, 이승만 대통령의 수행기자 등 현대사의 한복판을 지켰던 것이다. 현재 미국 LA에 거주하고 있는 위씨가 잠시 귀국했다. 자서전 ‘고향이 어디십니까’의 출판기념회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지난 15일 그를 만났다. 나이보다 훨씬 젊어보인다고 인사를 건네자 “규칙적인 생활과 생각, 그리고 책을 읽고 독후감을 꾸준히 기록한다. 아마 늙지 않는 비결인 것 같다”면서 웃는다. 주로 어떤 책을 읽느냐는 질문에 “번역물도 읽고 영어와 일어로 된 책도 읽는다”고 대답한다. 그는 평소 메모하는 습관이 있다. 최근 펴낸 자서전도 그동안 열심히 메모해둔 결과물이다. 그는 불혹을 넘긴 나이에 미국 이민길에 올라 LA 해변에서 햄버거 장사를 하면서 고군분투하며 살았다. 지금은 현지에서 수필가, 방송인, 클래식 음악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그동안 수필집과 음악 에세이집을 출간하기도 했다. 어떻게 해서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됐을까. 한창 전쟁중인 1950년 11월 일본 도쿄와 오키나와에 있는 유엔군총사령부 방송 아나운서로 가게 된 배경부터 설명한다. “연희송신소(당시 고양군 연희면)에서 기거하면서 방송을 할 때였습니다. 하루는 도쿄의 맥아더사령부 심리작전국 방송담당자 매튜 중령을 만났습니다. 그는 제 방송을 자주 듣는 편이며 2차대전때 종군 아나운서로 이름을 날린 CBS의 월터 크롱가이트와 목소리가 아주 닮았다고 했습니다. 이어 ‘한국전쟁도 이제 끝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면서 한달정도 도쿄에 가서 방송일을 할 생각이 없느냐고 제안하더군요. 생각할 것도 없이 그 자리에서 좋다고 대답했지요.” 맥아더 사령부의 심리작전국은 6·25전쟁이 일어나자마자 도쿄에 유엔군총사령부 방송국을 창설하고 NHK 방송망을 통해 이미 방송을 시작하고 있던 터였다. 남한과 북한으로 보내는 별도의 송신소가 작동이 됐음은 물론이다. 방송은 NHK 본사의 여러 스튜디오를 필요에 따라 사용했다. 방송은 전쟁에 관한 뉴스가 최우선이었고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소식, 스탈린 독재하의 소련의 내막, 김일성이 소련에 이용당하고 있다는 해설 등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또한 방송원고는 모두 미국인이 작성한 것을 우리말로 번역했다. “서울을 떠난 지 2주도 채 지나지 않아 아군 수중에 있던 평양에 공산군이 다시 들어왔습니다. 그러자 평양시민들이 대동강 철교를 더듬으며 필사적으로 피난하는 모습을 보도하게 됩니다. 그리고 흥남 지역에서 미 해병1사단의 해상탈출 등을 보도하면서 한달 예정이었던 체류기간이 무기한 연기 됐지요. 그렇게 도쿄에서 8년을 보낸 뒤 오키나와 사령부로 옮겨 14년을 더 근무하고 자식들 교육을 위해 식구들과 미국 이민을 가게 됐습니다.” 그는 오키나와 시절을 회고하면서 베트남 전쟁과 연관된 일화를 떠올린다. 1968년 가을 한달동안 종군기자로 베트남에 파견된다. 이때 비둘기 부대가 주둔한 나트랑 외에 맹호와 청룡부대 주둔지 등을 두루 방문했고 사이공에서는 주월한국군 채명신 사령관과 수차례 만나기도 했다. 또 베트남 전쟁이 확전되면서 한국군의 파병은 계속됐다. 자연스럽게 오키나와는 베트남에 주둔해 있는 한국군을 위해 위문차 오가는 연예인들이 자주 들르는 곳이 됐다. 이때 길옥윤과 패티 김 등 여러 연예인들과 친분을 맺기도 했다. 얘기를 다시 ‘6·25 남침 제1성’으로 돌렸다. 방송국장의 지시로 38선상(경의선의 한 중간역)에 있는 여현역에 도착한 것은 1950년 6월 10일이었다. “민심을 살피기 위해 38선이 보이는 지점에 중계차를 세우고 38선을 오가는 사람들과 인터뷰를 진행하는 일을 했지요. 특이 동향은 없었습니다. 그러던 6월 24일 밤 저는 아나운서실 숙직을 맡고 있었습니다. 후배 아나운서와 11시에 야간방송을 끝내고 다음날 아침 방송순서를 점검하고 숙직실로 쓰고 있는 제2 스튜디오로 가 잠을 청했습니다. 그런데 퉁탕거리는 소리에 눈을 뜬 것은 새벽 5시 10분이었습니다. 방송국 수위와 육군대위가 스튜디오에 급히 들어왔던 것이지요.” 육군대위는 종이 한장을 내밀면서 즉시 방송하라고 명령하듯이 말했다. 종이에는 ‘오늘 새벽 북한 공산군이 38선 전역에 걸쳐 공격을 시작했다. 국군은 모두 원대에 복귀하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방송시작이 6시 30분이고 이렇게 중요한 내용을 상부의 허락 없이 방송할 수 없다고 했다. 잠시후 민재호 방송국장이 국방부 정훈국장에게 확인한 뒤 원고를 급히 작성하고 제1보를 내보냈다고 위씨는 회고했다. “서울수복이 됐는데도 그해 6월 말에 이미 행방불명되거나 처형됐다고 알려진 선배 아나운서들의 소식은 여전히 알 수 없었습니다. 평양에서 온 방송요원을 상대로 열성적으로 도운 아나운서들은 그들과 함께 도주하듯이 북쪽으로 갔고 자백서를 쓰고 포섭당해 그들 밑에서 방송한 아나운서들은 자취를 감춘 상태였으니까요.” 필사적으로 숨어 다니며 살아남은 그는 동료와 선배들이 하던 일을 도맡아 하는 등 한동안 연희송신소에서 기거하면서 열심히 방송을 하게 된다. 이국땅에서 60여년을 살고 있지만 그 기억의 편린까지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 그는 가난한 집안의 2남 9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군청 토지측량기사로 일하던 아버지는 42세때 늑막염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들과 평안북도 선천으로 이사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가난 때문에 직업전선에 뛰어들 생각이었지만 돈이 없어도 학교에 갈 수 있다는 말에 평양사범학교에 입학했다. 이때 좋은 목소리와 뛰어난 노래 실력을 인정받아 합창과 독창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학교 브라스 밴드에서 트럼본 연주를 했다. 아울러 문학서적에 심취했다. 그러나 사춘기에 접어들자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는 등 학교생활에서 일탈, 모란봉 주위를 쏘다녔다. 결국 학교에서 담배를 피우다 발각돼 3학년때 퇴학당했다. 이후 형이 있는 남신의주역으로 가서 역부로 생활한다. 톨스토이와 헤르만 헤세 등의 문학서적은 꾸준히 손에서 놓지 않았다. 얼마 후 어머니와 누이가 살고 있는 서울에 온 그는 낙원동 근처의 한 회사에서 사환으로 일하다 경성역의 역부로 취직한다. 이어 해방이 되면서 누이가 종로2가 근처에 술집을 열자 외상값 받으러 다니는 일을 하게 된다. 1947년 서울중앙방송국에서 ‘방송극 연구생’ 모집공고를 보고 응시해 합격한다. 그후 2주일 만에 방송드라마에 출연한다. 당시 동기생으로는 장민호, 민구, 송영란, 윤길숙 등이었다. 같은 해 아나운서 시험에 응시하면서 아나운서의 길을 걸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그는 “20세기 격동기를 한 마리 늑대처럼 멀리에서, 가까이에서 조국을 바라보며 살아왔다. 아직도 내 마음의 눈물 줄기에는 희망의 꽃망울이 살아 있다”면서 ‘백년동안의 고독’을 쓴 남미의 작가 마르케스와 비슷한 삶을 살았다고 말한다. 또한 유대교 랍비이자 시인인 사무엘 울만의 말처럼 “청춘이라고 하는 것은 인생의 어떤 기간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가 아니냐”라고 했다. 선임기자 km@seoul.co.kr >>위진록은 1928년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입학하던 해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개성, 평북 선천 등을 전전하며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1940년 평양사범학교에 입학하고 1942년 3학년때 중퇴했다. 남신의주역 역부, 서울의 한인회사, 일본광고회사 대리점 등의 사환을 거쳐 서울역 역부로 일하면서 1945년 해방을 맞았다. 1947년 KBS 제1회 ‘방송극 연구생’ 모집에 합격했다. 장민호, 민구, 조남사 등과 라디오 드라마에 출연했다. 같은 해 9월 KBS 아나운서 모집에 합격해 만 19세로 최연소 아나운서 기록을 세운다. 1948년 KBS 제1회 방송극 대본 공모에 입선했으며 김구 선생의 장례식 중계 등 격동기의 방송 일선에서 활약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 남침, 9월 28일 서울수복의 제1보를 방송한 아나운서로 기록에 남아 있다. 그해 11월 일본 도쿄의 유엔군총사령부방송(VUNC)에 파견돼 22년동안 도쿄와 오키나와에서 근무하다 미국으로 이민했다. LA에서 햄버거 장사 10년, 서점 등을 경영하면서 동네 신문을 발행했다. 재미 방송인협회 고문 등을 지냈다. 주요 저서로는 수필집 ‘하이! 미스터 위’(1979년), ‘잃어버린 노래’(1993년), ‘낙타의 속눈썹’(1997년), ‘위진록의 커먼센스’(1999년), ‘클래식, 내마음의 발전소’(2011년) 등이 있다.
  • 교학사 外 오류 많지 않은데… 8종 한꺼번에 수정 권고 적절했나

    교학사 外 오류 많지 않은데… 8종 한꺼번에 수정 권고 적절했나

    “결국 교육부가 ‘역사전쟁’의 방아쇠를 당긴 셈이다.” 21일 교육부가 고교 한국사 교과서 8종의 수정·보완 권고사항을 전격 발표하면서 역사학계의 이념 논쟁이 한층 격화될 전망이다. 교육부는 수정 권고를 따르지 않는 출판사에 수정명령 등 행정권을 발동하기로 선언하면서 긴장감을 더했다. 교학사 이외 7종 교과서 집필진은 “교육부 수정 권고에 무조건 따르지 않겠다”며 맞서고 있다. 앞서 2008년 금성출판사의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좌 편향 논란 당시나 2011년 ‘민주주의’에서 ‘자유민주주의’로 집필기준 수정 논란이 일었을 때에도 교육부 개입이 진보-보수 간 대립을 격화시킨 선례가 있다. 교육부가 8종의 오류 829건을 발표한 뒤 다시 부각된 쟁점은 크게 세 가지이다. 우선 교학사를 뺀 다른 교과서 7종의 오류 건수는 62~112건으로 평소 다른 과목에서 발견되는 오류에 비해 과도하게 많지 않은데, 8종 전체가 수정 권고를 받는 게 적절한 지 의문이 제기됐다. 교학사 오류 건수는 251건으로 다른 교과서의 2~4배에 달했다. 심은석 교육부 교육정책실장은 “2014학년도 고교 신입생부터 한국사를 수능 필수로 공부하게 된다”면서 “사실 오류, 표현·표기 오류, 서술상 불균형, 국가정체성 왜곡할 수 있는 내용이 실린 교과서를 수정해 올바른 역사인식을 심기 위해 불가피했다”고 설명했다. 교육부는 8종 교과서를 한꺼번에 분석, 8종이 공통적으로 오류를 범한 경우나 서로 다른 사관을 채택해 학생들을 혼란스럽게 할 수 있는 대목을 찾아냈다고 설명했다. 교과서별로 ‘장보고 사망연대’를 841년이나 846년으로 다르게 기술했거나, 고려 시대 ‘안승’과 ‘보장왕’의 관계에 대해 아들·조카·서자 등 이설을 교과서마다 각각 다르게 서술한 부분을 찾아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정도 오류 수정을 위해 고교 현장의 교과서 채택 일정을 연기시키는 초유의 사태를 감수해야 했는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됐다. 두 번째로 진보 진영에 교학사에 대해 제기한 우 편향 지적과 보수 진영이 나머지 7종에 대해 제기한 좌 편향 지적을 교육부가 모두 수렴해 수정·보완 권고를 내리면서 오히려 양 진영 모두 불만이 더 고조될 가능성이 제기됐다. 공교롭게도 교육부가 권고한 교학사 수정 권고 건수는 앞서 지난달 역사학계에서 지적한 오류 건수 293건과 비슷한 수준이다. 나머지 7종과 관련해 ‘국가 정체성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교육부가 무더기로 수정 권고를 한 내용은 국정감사에서 새누리당 의원들이 지적한 내용을 많이 반영하고 있다. 예를 들어 금성·천재·비상교육·두산동아 등 4개 출판사는 북한의 주체사상에 대해 ‘사람 중심 세계관이고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혁명사상’이라고 북한 자료를 그대로 인용했다가 수정 권고를 받았다. 앞서 여당 의원들이 지적했던 대목이다. 금성출판사는 ‘소련의 치스차코프 포고문’과 ‘미국 맥아더 포고령’을 단순 비교하느라 소련 포고문의 기만성을 서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교육부 수정 권고를 받았는데, 앞서 14일 교육부 국정감사에서 김희정 새누리당 의원이 지적했던 내용 그대로이다. 세 번째로 교육부가 ‘집필기준 준수 여부’를 수정 권고 기준으로 내세웠지만, 정작 명확한 집필기준을 설명하지 못하는 점도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심 실장은 “비상교육 등 3개 출판사의 교과서에 북한 주민 인권문제 서술이 누락시킨 점은 집필기준에 위배됐다”고 했지만, 이 교과서들은 “북한이 인권문제로 인해 국제사회의 지탄을 받고 있다”는 식의 간략한 언급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출판사 측에선 “북한 인권문제에 대해 얼마나 할애해 어떻게 쓰라는 말인지 기준이 없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또 교육부가 국사편찬위원회의 ‘부실 검정 의혹’을 방관하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수정 권고 사항 892건을 찾아냈다는 말은 곧 검정 책임을 맡은 국사편찬위원회 검정이 부실했다는 지적으로 이어졌지만, 교육부는 “여력이 없다”며 검정과정에 대한 조사를 거부했다. 홍희경 기자 saloo@seoul.co.kr
  • [서울광장] 20세기 영·러·일, 21세기 미·중·일/문소영 논설위원

    [서울광장] 20세기 영·러·일, 21세기 미·중·일/문소영 논설위원

    전 세계 식민지 개척으로 ‘해가 지지 않는 나라’임을 자랑하던 영국은 19세기 말부터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상당히 신경질적 반응을 보였다. 1885년 영국 해군이 거문도를 불법 점령한 이유도 조선과 러시아 간 밀약설(1884년 조러수호조약)이 흘러나온 탓이었다. 요즘 ‘외교의 달인’처럼 소개되는 고종은 당시 국제정세에 둔감했다. 청일전쟁 후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를 끌어들이더니 러시아공사로 아관파천(1896년)을 했고, 1904년까지 친러정책을 폈다. 영국 입장에서 역린(逆鱗)이었다. 조선이 러시아의 손에 떨어지길 원하지 않았던 영국은 러시아 견제를 위해 일본을 끌어들였다. 영국이 먼저 1901년 7월 주영 일본공사를 불러 1902년 1월 제1차 영일동맹을 맺었다. ‘한국에 대한 일본의 이익 보호’는 받아들여졌다. 제1차 영일동맹은 1905년 8월 제2차 영일동맹으로 강화됐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늑약 3개월 전으로,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당시 세계 최강국이었던 영국에 한국 지배를 외교적으로 용인받은 것이다. 이 동맹은 비극으로 끝났다. 1차 세계 대전에서 영국과 함께했던 일본은 2차 세계 대전에서는 영국을 배신했고 세계의 평화와 인류의 안전을 위협했다. 21세기 최강국 미국의 신경을 건드리는 나라는 G2로 떠오른 중국이다. 소련을 중심으로 한 냉전시대는 20세기 말에 막을 내렸지만, 미국의 힘이 상대적으로 줄어든 상황에서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중국의 팽창은 또 다른 위협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G2 중국의 등장 이후 동북아시아에서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미국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올 초부터 아베 정부는 제2차 세계 대전의 패전국으로서 받아들인 일명 ‘평화헌법’을 개정해 집단 자위권을 획득하겠다는 입장을 꾸준히 주장했다. ‘보통국가’가 되겠다는 의미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나라가 되겠다는 것이다. 한데 평화헌법은 맥아더 장군이 2차 세계 대전의 책임을 물어 패전국 일본에 부여한 것이다. 아베 총리는 과거 침략전쟁에 대해 사과하기는커녕 “침략의 정의는 학계에서도, 국제적으로도 정해지지 않았다. 국가 간의 관계에서 어느 쪽으로 보느냐에 따라 다르다”는 요설을 늘어놓았다. 잘못된 역사 인식에 기반한 아베 정부의 일본 재무장에 대해 일제에 피해를 입은 한국과 중국의 우려와 반발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 자신감의 배경은 미국의 지지였다. 한국의 ‘혈맹’ 미국은 한국정부와 국민의 우려, 걱정에 동조하지 않고 일본의 손을 들어준 것 같다. 미 존 케리 국무장관과 척 헤이글 국방장관은 지난 3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미·일 안전보장협의위원회(2+2)에서 “미국은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포함한 일본의 방위력 증강 구상을 환영한다”고 공동성명을 내 일본의 재무장을 공식화했다. 집단적 자위권은 일본이 직접 공격받지 않아도 미국이나 한국 등 동맹국이 공격을 받으면 반격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아베 총리가 주장하는 바 “적극적 평화주의”인 것인데, 한반도 유사시에 일본군대가 진주할 수도 있다는 의미다. 미·일 안전보장협의위원회 결과를 두고 우리 정부나 외교부 등은 ‘아차’ 싶겠지만, 이미 깨진 항아리다. 한국인들의 반발을 우려한 우리 정부는 “아니다”라고 반박하지만 설득력이 떨어진다. 안보를 강조하는 한국의 보수는 아이러니하게도 본인은 물론 자녀도 군 복무를 기피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정부는 전시작전권도 미국에서 찾아가라고 하는데 연기를 요청했다. 전시작전권 연기와 연계해 미국의 미사일방어(MD) 체계에 편입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중국에 던져줘 갈등의 소지도 남겼다. 복잡하게 변화하는 국제정세를 제대로 읽고, 대처할 수 있는 외교적 능력이 절실한 시기이다. 100여년 전 개항 과정에서 잘못된 판단과 선택으로 겪은 어려움을 21세기에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 symun@seoul.co.kr
  • 부자들이 절대 하지 않는 ‘5가지’

    부자와 보통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 언뜻 보면 일상에서의 행동에 별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꼼꼼히 살펴보면 큰 차이가 있다고 전문가들은 의견을 모은다. 다음은 최근 미국 허핑턴포스트에 실린 부자와 보통사람들의 차이점이다. 부자들이 절대 하지 않는 행위 5가지를 소개한다. 1. 항상 승진을 추구한다? 초고소득자들이 좌천을 경계하고 있지만 항상 승진만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구직사이트 래더스닷컴의 전문가 아만다 어거스틴은 조사에서 연봉 10만달러(약 1억원) 이상의 사람들은 연봉이 같거나 감소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한다. 이는 사내 보직 변경은 물론 이직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잠시 대우가 나빠져도 향후 성장이 기대되는 일에 종사하거나 출퇴근 비용을 절약하는 등의 이유로 이직하기도 한다. 2. 오전 6시 이후 일어난다? 미국 국립수면재단에 따르면 한창 일할 나이인 30~45세 직장인의 평균 기상시간은 오전 6시다. 하지만 대기업 CEO 대부분은 오전 5시에 일어나고 있다고 영국 일간 가디언은 보도한 바 있다. 하지만 일반인은 그들이 그 시간에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 이는 로라 반더캄이 2012년 출간한 ‘가장 성공한 사람들이 아침먹기 전에 하는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데 부자들 중 어느 누구도 그 시간에 이메일을 확인하거나 페이스북을 하지 않는다. 3. 빚내서 집산다? 미국 역시 많은 사람들이 내집 마련을 꿈꾼다. 하지만 당신이 그 집에 앞으로 5년간 거주하지 않는다면 사지 말아야 한다는 ‘5년 규칙’이 재기되고 있다고 트룰리아의 부동산 전문가이자 엑스트라티비 ‘맨션스 앤 밀리어네어스’의 진행자인 마이클 코베트는 말한다. 부자들 사이에서도 집을 사는 것보다 빌리는 것이 인기라고 그는 덧붙였다. 저명한 경제학자 로버트 쉴러는 최근 맥아더재단 조사에서 미국인 61%는 집을 빌리는 것도 꿈을 이룬 것이라고 동의했다고 밝혔다. 4. 물건 값은 비교하지 않는다? 올해 1분기 미국 부유층은 연봉 10만달러 이하인 사람들보다 인터넷 쇼핑몰 이용률이 47% 높았다고 마티니 미디어와 컴스코어가 최근 시행한 조사에서 나타났다. 흥미로운 점은 부유층일수록 고가의 상품을 취급하는 사이트보다 중저가 사이트를 이용하는 비율이 높았다는 것. 인터넷 쇼핑몰은 충동 구매하는 경향이 높은데 부유층은 인터넷상에서 제대로 가격을 비교하고 구매하고 있다. 5. 남들과 똑같이 은퇴한다? 미국의 평균 퇴직연령은 61세(갤럽 조사)인데 비해 고소득자들은 최소 70세(스펙트럼그룹 조사)까지 일한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 심지어 이 중 연봉 7만5000달러(약 7980만원) 이상 버는 사람들 중 절반은 “일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 일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물론 이들 대부분은 신체에 부담이 적은 사무직이지만 ’퇴직은 없다’는 생각은 부자가 되는 비법 중 하나일 것이라고 안드리아니 기자는 설명했다. 이어 그는 퇴직을 선택하기 보다 스트레스가 적은 직책이나 임시직으로 물러나는 것이 좋으며, 사회보장연금제도(국민연금과 비슷한 제도)가 있지만 일을 계속해야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푸대접 맥아더 동상, 美로 옮겨 오겠다”

    “푸대접 맥아더 동상, 美로 옮겨 오겠다”

    재미동포 정치인이 인천 월미도에 있는 더글러스 맥아더(1880~1964) 장군 동상이 푸대접을 받고 있다며 미국으로 옮겨 가겠다고 나서 주목된다. 미국 오리건주에서 5선 상원의원을 지낸 임용근(78) 세계한인정치인협의회 회장은 11일(현지시간) “인천 월미도 맥아더 동상을 오리건주 한국전쟁 기념공원으로 옮겨 오겠다”며 “동상 부지도 마련했고 경비도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임 회장은 “월미도 맥아더 동상을 철거하라며 시위가 벌어지는 상황에서 인천시가 맥아더 동상을 부담스럽게 여긴다면 우리가 옮겨 와서 잘 관리하겠다는 뜻”이라며 “조만간 인천시에 정식으로 제의하겠다”고 밝혔다. 2001년 오리건주에서 가장 큰 도시인 포틀랜드와 주도 샐럼 사이에 있는 윌슨빌에 미 서부 최대 한국전쟁기념공원을 조성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임 회장은 “이미 지역 인사들과 향군 조직 등을 중심으로 맥아더 동상 이전에 대한 공감대가 이뤄졌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임 회장은 “인천시가 맥아더 동상을 잘 관리하고 이전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이전 계획은 없던 일로 하겠다”며 “다만 맥아더 동상 이전을 포기하게 될 경우 윌슨빌 한국전쟁기념공원에 5년 내에 월미도 동상과 같은 맥아더 동상을 세울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5m 높이의 이 동상은 6·25전쟁 발발 80일 만에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역전시킨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을 기념하기 위해 1957년 건립됐다. 진보 단체가 최근 철거 시위를 벌이면서 이념 논쟁에 휘말리고 있다. 김미경 기자·연합뉴스 chaplin7@seoul.co.kr
  •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⑧ 1950~60년대 : 파괴와 재건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⑧ 1950~60년대 : 파괴와 재건

    “도시는 기억으로 살아간다”(The city lives by remembering)고 미국의 시인 랠프 왈도 에머슨은 읊었지만, 서울은 600년 고도의 기억이 별로 없다. 마치 신흥도시 같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통에 불타고 약탈당했으며, 일제강점기 도읍에 대한 자취는 강제적으로 지워졌다. 조선총독부-경성시청-남산 조선 신궁을 상징 축선으로 하는 식민 도시로 치장됐다. 한국 전쟁통에 그나마 남은 것 대부분이 파괴됐다. 1960년대 이후 개발독재시대의 무지막지한 개발 광풍을 타고 또 한 번 뭉개졌다. 역사의 향기는 흩어졌다. 한강 이남으로 영역을 확대한 서울은 사실상 한국전쟁 이후 새로 건설된 신도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대문 안에는 표지석만 어지럽게 남았을 뿐이다. 전쟁과 대사건은 도시를 재건한다. 한국전쟁 당시 서울 폭격을 앞둔 맥아더는 “원래 도시란 천재지변이나 전쟁을 겪고 나면 그전에 비해 몇 곱절 더 크고 좋은 새 도시로 부흥된다. 미국이 재건을 도울 것이니 서울은 앞으로 이상적인 현대 도시로 탈바꿈할 것”이라고 큰소리쳤다. 실제 1644년 대화재로 도시의 80%가 타 버린 영국 런던은 옥스퍼드대 건축가 크리스토퍼 렌 교수에 의해 오늘의 런던으로 재건됐다. 일본 도쿄도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잿더미가 됐지만 탁월한 도시계획가 고토 신페이(後藤新平) 도쿄시장의 주도로 세계 도시계획 사상 유례가 없는 시가지 개조를 통해 새로 태어났다. 런던과 도쿄는 세계대전으로 또 한 번 타격을 입었지만, 옛 도시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서울의 재건은 성공작일까? 서울을 역동적인 현대 도시로 평가할 수는 있지만, 역사 도시로 평가하기엔 머쓱하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서울이라는 도시의 정체성은 꽤 혼란스럽다. 서울은 네 번 결정적인 상처를 입었다. 16세기 일본과 중국 군대에 의해 약탈당했으며, 근대 일제강점기엔 성곽을 허물고, 상징 축을 강제로 바꾸는 방법으로 도시 형태가 조작됐다. 한국전쟁기 유엔군과 한국군의 청야(淸野)작전(적이 이용하지 못하도록 농작물이나 건물 등 지상에 있는 것들을 말끔히 없애는 작전)을 통해 철저하게 파괴됐다. 1960~70년대 우리 손으로 남은 문화재를 헐어서 치워 버렸다. 맥아더의 말처럼 기회는 있었다. 1952년 전후 복구 차원의 첫 도시계획안을 마련하면서 세종로 등 39개의 큰길을 확장하거나 신설하고, 광화문광장·서울시청광장·남대문광장 등 19개의 광장을 만드는 과감한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재정부족 등을 이유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유럽의 오래된 도시처럼 구도심(사대문 안)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사대문 밖이나 강남 신시가지를 개발하겠다는 코페르니쿠스적인 발상의 전환이 없었다. 한국전쟁 이후 ‘광적’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서울 집중이 기회를 날려 버렸다. 집중을 막으려고 온갖 정책을 동원했지만 약효가 듣지 않았다. 해방 전후 100만명대였던 서울 인구는 1966년 380만명, 1970년 540만명을 넘어서더니 1990년 1000만명을 돌파해 버렸다. 수도 서울 행정은 집 지을 땅을 확보하고, 도로를 넓히고, 교통수단을 늘리고, 수돗물을 공급하고, 쓰레기를 치우는 것에 매달렸다. 만약 그때 인구의 서울 집중을 막을 수 있었더라면 서울은 한가롭게 전차가 다니며, 꼬불꼬불한 골목길이 정겨운 기와집이 빼곡한 도시로 남았을 것이다. 한강과 북한산이 주는 자연의 세례를 맘껏 누리는, 풍광이 뛰어난 성곽 도시로 유지됐을 것이다. 1950년대 서울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손정목 전 시립대 교수의 ‘서울도시계획이야기’를 기본으로 사대문 밖 풍경을 상상해 보자. 동쪽으로 동대문을 나서면 신설동 큰 길가까지 집이 들어 차 있지만, 바깥은 논밭 천지다. 신당동에 집이 드문드문했을 뿐 금호동·옥수동 일대는 산이었다. 왕십리를 지나 한양대 일대는 미나리꽝이었고 성동교의 나무다리가 삐꺽거렸다. 남쪽 한강대교에 이르는 동빙고동과 서빙고동 주민은 1000명 안팎이었고, 원효로 일대는 대부분 논밭이었다. 노량진, 상도동, 대방동, 영등포는 큰 길가조차 목가적인 전원 풍경을 연출했다. 서쪽으로 신촌을 지나 마포 전차 종점을 벗어나면 벌거숭이 산과 논밭이 펼쳐졌다. 동북쪽은 미아리고개, 서북쪽은 독립문과 현저동이 경계였다. 지금의 강남·서초·송파·강동·강서·관악·구로·금천·도봉·노원·은평구 등은 모두 경기도였다. 서울의 고층 건물은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최고층 건물은 지금의 롯데호텔 자리에 있던 8층짜리 반도호텔이었다. 이웃 조선호텔과 한국은행 모두 일제가 남긴 건물이었다. 1955년에 종로 사거리에 2층짜리 신신백화점이 신축됐고, 1957년 광화문 사거리와 을지로 1가에 3층짜리 국제극장과 5층짜리 개풍빌딩이 각각 들어섰다. 1958년 남대문에 7층짜리 그랜드호텔이 문을 열자 구경 인파가 몰렸다. 당시 서울 도심부의 평균 층 높이는 2층이 채 되지 않았다. 도심부를 고층화하려고 주요 간선도로변의 건물 높이를 3~5층 이상으로 정할 정도였다. ‘한강의 기적’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된 1962년부터 약 20년간의 고도성장기를 일컫는다. 이 기간 서울은 경천동지할 변화를 겪는다. 서울의 공간 변화는 1966년부터 1980년까지 15년간 거의 이뤄졌다. 주택지·도로·상하수도·지하철 등 현대 서울의 하부구조가 이때 거의 갖춰졌다. 박정희 대통령이라는 절대권력자의 ‘분부’를 이행한 김현옥·양택식·구자춘이라는 3명의 ‘충복’ 서울시장이 재직한 기간과 일치한다. 서울의 얼개는 박 대통령의 구상과 지시에 의해 거의 결정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6년 서울도시기본계획안이 세워졌다. 서울의 균형 발전을 꾀하려고 사대문 안에 집중된 입법·사법·행정부의 기능을 분산시키려는 계획이 눈에 띈다. 입법부는 남서울(강남·서초구), 사법부는 영등포, 행정부는 용산 일대, 세종로 지역은 대통령 관저 및 직속기관 배치 지역으로 정했다. 지금 와서 보면 입법부와 사법부의 입지가 맞교환됐고, 서울시청이 용산으로 옮겨가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다. 교통계획을 보면 서울역~청량리(1호선), 서소문~을지로~성동(2호선), 갈현동~종로2가~을지로2가~퇴계로~천호동(3호선), 우이동~종로4가~퇴계로~말죽거리(4호선) 등의 지하철 4개 노선 건설계획이 잡혀 있다. 10년 뒤 구자춘 시장에 의해 2호선이 을지로와 영등포~영동을 잇는 순환선으로 변경되는 등 엄청난 노선 변화가 일어났지만, 지하철 4개 노선에 대한 기본 구상이었다. 이 밖에 4개 순환선과 14개 방사선을 간선도로망으로 7개의 고속도로를 건설한다는 계획과 노면 전차는 철거하고 광화문 사거리와 시청 앞 광장에는 지하차도를 만들고, 시청 앞 광장 지하는 지하도시화한다는 계획도 포함돼 있다. 도심 재개발과 강남·송파 등 남서울개발, 뚝섬·창동·망우 등 동서울개발, 불광·성산·김포·시흥지구의 서서울개발 등 신시가지개발 계획이 들어 있다. 1년 예산이 170억원에 불과한 서울시가 20년 앞을 내다보고 인구 500만명을 예상해 3235억원의 천문학적인 예산을 투입한다는 야심 찬 계획이었다. 언론으로부터 ‘즉흥계획’ ‘실현성 없는 독단’ ‘재무계획 없는 무지개’ 등등 융단폭격을 맞았다. 그러나 격변의 15년 중 7년을 서울시 도시계획국장, 기획관리실장 등을 지내며 계획을 수립하고 집행한 손정목 전 교수는 “꿈도 환상도 아니었다. 최초의 기본계획이었다는 점, 도심부 재개발이니 고도지구, 미관지구 개념이 도입돼 일반에 공개됐다는 점, 70~80년대 전국 모든 도시가 수립한 도시계획의 모델이 됐다는 점 등에서 의미가 있다”고 회고했다. 불완전하나마 서울시 장기계획의 틀이 된 것이 사실이다. 일제 말기인 1940년부터 1965년까지 서울은 잠자는 도시였다. 1937년 중·일 전쟁과 1941년 태평양전쟁이 터져 건축자재를 구할 수 없었고, 한국전쟁이 이어지면서 건축 행위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부분 건물이 목조건물 수명 30년을 다한 상태였다. 장충동, 신당동 일대와 남대문로, 충무로, 을지로 등 일본인 주거지에 정원이 딸린 일본식 저택과 주택이 밀집해 있었다. 가회동·명륜동·동숭동·북아현동 일대에는 한옥촌이 빼곡하게 형성돼 있었다. 마포, 왕십리, 동대문을 벗어난 지역은 논밭이었다. 사대문 안과 독립문, 신촌, 신설동, 돈암동, 신당동, 용산이 서울의 전부였다. 노면 전차 노선을 기준으로 보면 동쪽으로 청량리·왕십리, 남쪽으로 노량진·신길동·영등포, 서쪽으로 마포·신촌, 서북쪽으로 독립문, 동북쪽으로 돈암동 전차 종점까지가 서울이었다. 지방에서 무작정 상경한 사람들의 주거인 무허가 판잣집이 도심에서 가까운 하천변이나 산비탈을 차지했다. 1966년 당시 13만여채의 판잣집이 서울 곳곳에 달동네를 이루고 있었다. 서울은 개발행 특급 열차가 출발하기 직전의 폭풍전야였다. jo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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