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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 대통령 대국민담화 전문/쇄국보다 개국이 우리의 나아갈길

    ◎네탓 내탓 말고 이제는 힘 합쳐야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그동안 우리 쌀을 지키기 위해 대통령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해 왔습니다. 그러나 국민에게 한 저의 약속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는데 대하여 그 책임을 통감하면서 국민 앞에 진심으로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한계상황의 선택 그동안 우리 쌀을 지키기 위하여 전국의 방방곡곡에서 성원해 준 국민 여러분께 더욱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저와 우리 정부는 어떻게 하든 쌀만은 지켜야 하겠다는 신념으로 있는 힘을 다해 왔습니다. 우리와 같은 처지에 있는 나라들이 많이 있었지만 오직 우리나라만이 미련하리 만큼 홀로 남으면서까지 비장한 각오로 노력 했습니다. 정말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가 국제적으로 고립될 수 밖에 없는 그 마지막 벼랑에까지 우리는 갔었습니다.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는 한계상황에서 우리는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쌀을 지키기 위해 GATT 체제를 탈퇴하고 국제적 고아로 혼자 살아갈 것이냐,아니면 GATT 체제를 수용하면서 세계화·국제화·미래화의 길로 나아갈 것이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서 저는 과연 국가 이익이 무엇인지를 놓고 대통령으로서 불면의 밤을 지새우며 고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실보다 득 많을것 저는 두가지 길 가운데서 국제사회 속에서의 고립보다는 GATT 체제 속의 경쟁과 협력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부존자원이 없는 우리나라로서는 자유무역을 통해 경제적 성장과 국부를 신장시켜 나갈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국제적인 고아가 되어서는 결코 살아남을 수도,발전할 수도 없다고 보았습니다. 문을 닫고 지키는 쇄국보다는 문을 열고 나가는 개국이 우리 민족의 나아갈 길일 수 밖에 없습니다. 개방과 개혁,바로 거기에 민족의 활로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조건을 고려할 때 우루과이 라운드 타결로 분명히 우리가 잃는 것 보다는 얻는 것이 더 많습니다. 저는 진실로 『이제 이 길 밖에는 없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결단을 내렸던 것입니다.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의 타결이 우리 민족에게 하나의 시련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이 시련을 이겨내기만 한다면 그것은 우리 민족의 거대한 도약과 발전의 전환점이 될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저는 국민 여러분께서 이와 같이 우리가 처한 상황을 충분히 헤아리신다면 그동안 제가 겪어야 했던 고충과 진실을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또한 협상에서 유리한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서 UR협상의 흐름과 그에 따른 정부대책과 노력을 그때 그때 소상하게 알려 드리지 못한 점을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일일이 다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저와 우리 정부는 그동안에도 할 수 있는 방법과 수단을 다 동원하여 민족의 피와 살인 쌀을 지키려고 보이지 않는 노력을 계속해 왔습니다. 쌀 개방을 피할 수 있는 길이 있는데 정부가 먼저 쌀을 개방하려 한다는 말은 터무니 없는 주장입니다. 그런 방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를 협상대표로 하는데 주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만 정부는 지금 이 순간도 UR협상에서 마지막 하나라도 더 유리하게 끌어가기 위해서 최후까지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국민 앞에 보고 드립니다. ○마지막까지 최선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쌀수입 개방을 완벽하게 막지 못한데 대하여 거듭 국민 앞에 진솔하게 사과 드립니다. 저는 쌀수입개방 반대를 외치는 농민을 비롯한 이 나라 국민의 실망과 아픔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 옛날 병자호란 때 삼전도에 나아가 항복할 것이냐,아니냐를 놓고 벌인 주화파와 척화파의 논쟁을 연상케 됩니다. 주화파인 최명길선생은 이 나라가 오랑캐의 말발굽에 더 이상 짓밟혀서는 안된다고 항복문서를 썼습니다. 척화파인 김상헌선생은 오랑캐한테 항복할 수는 없다고 그 항복문서를 찢었습니다. 최명길선생은 찢어진 항복문서를 주워서 다시 붙였습니다. 후세 사람들이 이르기를 항복문서를 찢는 사람도 없어서는 안되고,찢겨진 항서를 다시 주워 붙이는 사람도 없어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열파자 불가무,보습자 불가무). 그 모두가 애국적 충정에서 비롯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찬반양론 역시 나라를 사랑하고,농민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오는 목소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개방론자는 매국노요,반대론자는 애국자라는 이분법은 국론을 분열시킬 위험이 있습니다. 부득이한 개방과 그에 대한 반대가 정쟁으로 번져서도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힘을 합해 개방에 대비할 일이지,네탓 내탓을 따지면서 편 싸움을 할 일은 아닙니다. 국제사회는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세계를 직시하고,나라와 겨레의 내일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머리를 맞대고 함께 대비책을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진실로 국민 여러분께서 우리가 처한 상황과 저의 충심을 이해해 주신다면,어떻게 하면 이 어려운 시대를 슬기롭게 헤쳐나갈 수 있을까 하는 데에 우리의 모든 힘과 지혜를 모아 주시리라 믿습니다. 오늘의 치열한 국제경쟁 앞에서 우리 내부의 국론분열과 정쟁은 우리 민족의 진취적 에너지를 스스로 소진하는 일일 뿐더러 변화와 개혁이라는 세계사의 큰 흐름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낙오하게 만들 뿐입니다. UR는 우리에겐 개방과 국제화로 나아가는데 반드시 거쳐야 할 하나의 관문입니다. 국제경쟁력 강화를 위한 절대절명의 기회가 우리에게 주어진 것으로 담담하게 받아 들였으면 합니다. 정치·경제·사회·교육 등 모든 분야에 있어서 높은 비용,낮은 효율을 극복하는 새로운 시작의 계기로 삼았으면 합니다. 개방후의 농촌생존 대책을 수립하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농촌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키고 개조하는 일입니다. 우리 모두의 고향이요,마음의 안식처인 농촌을 새롭게 건설하는 계획을 수립하고 실천하는 일입니다. ○농민고통 분담을 농어촌 구조개선을 앞당기는 것,농산물 개방과 관련한 이익을 농민에게 돌리고 우루과이라운드로 생기는 이익을 농촌에 환원하는 것은 물론,농가보상,농지를 비롯한 농업 관련 제도와 구조의 개혁 등 종합적인 대책을 강력히 추진해 나가겠습니다. 저는 관계 부처로 하여금 결코 미봉책이 아니라 실제로 농민이 피부로 달라지는 것을 실감할 수 있도록 우리 농업,우리 농촌,우리 농민 대책을 착실하게 집행하도록 할 것입니다. 저는 대통령으로서 우루과이 라운드협상에 대비,농업구조 개선사업을 앞당겨 실시토록 하는 등 농업경쟁력 강화에 노력해 왔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쌀개방을 감내할 만큼 충분한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데 대해 매우 안타깝고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이제 정부를 비롯해서 우리 모두가 쌀 개방만은 한사코 막아야 하겠다는 그 열정과 애국심으로 개방속의 우리농촌을 구해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농촌,우리 농민을 돌보지 않으면서 외국이 우리의 농촌,우리 농민을 지켜주길 바랄 수는 없습니다. 부득이한 개방으로 피해를 입을 수 밖에 없는 농민의 고통을 모두가 나누어 져야 합니다. 농촌과 농민을 향해 아픔을 함께 나누는 국민적 지원이 각 분야에서 자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한국형 농업의 개발 등 자구책도 마련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우리 농산물과 농토를 사랑하고 우리 쌀을 우리가 먹는 정신이 필요한 때입니다. 사막을 옥토로 만든 나라도 있습니다. 우리 밀 살리기 운동이 벌어지고 있듯이 우리 농업을 살릴 수 있는 방안을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 농업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만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패배주의와 내부분열,그리고 책임의 전가입니다. 저는 대통령으로서 그 책임을 솔직히 인정하면서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스스로 다 하고자 합니다. 이제 우리는 세계 속에서 고립되지 않고 어떻게든지 힘을 합해 이 어려운 시대를,냉엄한 국제현실을 이겨나가야 하겠습니다. ○패배주의 경계를 결코 패배주의에 사로잡혀서는 안되겠습니다. 시련 앞에서 국론이 분열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되어서 이 시련을 극복해야 하겠습니다. 오히려 무서운 각오로 다함께 경제를 살리고,농촌을 새롭게 일구는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농업의 끝이 아니라,우리 농업의 새로운 출발이 되게 해야 합니다. 저는 대통령으로서 쌀 수입개방을 막지 못한 죄책감을 가지고 더욱 더 국가와 국민을 위하여,그리고 이 나라를 일으켜 세우기 위하여 열심히 일하겠다는 겸허한 약속을 국민 앞에 드리는 바입니다.
  • “토지 소유제한 없애 경쟁력 강화”/이희일(쌀정책을 말한다)

    7년여에 걸친 우루과이라운드(UR)협상이 마무리단계에 이름에 따라 우리의 쌀시장 개방문제도 이제 그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쌀에만 너무 치중 구체적인 내용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으나 「쌀시장개방 불가」라는 원칙은 지킬 수가 없게 되었고 다만 개방의 속도를 어떻게 조절하느냐의 문제만 남은것 같다.그래서 작금에는 나라전체가 이 문제로 시끄럽다.쌀시장 개방문제는 우리농민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이고 가능한한 최대의 보호를 해야 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UR문제를 너무 쌀에만 치중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는다.UR협상내용에는 쌀 이외에도 쇠고기를 비롯한 많은 농산물뿐만 아니라 공업 및 서비스부문에 이르는 경제전반에 관한 많은 문제들이 있는 것이므로 UR협상내용 전체가 우리에게 주는 이해득실을 면밀히 따져 그 기초위에서 이문제를 논의했어야 했다. 물론 정부관계부처에서는 이 문제를 종합적으로 분석 검토하였지만 이것이 국민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잘못 인식하고 있는것 같다. 대외지향적이며 자유무역을 경제정책의 기본으로 하고 또 그렇게 해야만 우리경제가 발전할 수 있는 입장에서 볼때 UR문제는 쌀의 어려움이 있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유익한 부분도 많이 있기 때문에 UR협상자체를 거부하고 GATT체제에서 이탈할 수는 없는 것이다.그렇다면 쌀시장개방을 막기위한 최대한의 노력은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개방을 하지 않을 수 없게되며 따라서 여기에 대한 많은 논의를 하고 필요한 대책이 마련되었어야 했다.그런데 그와같은 과정이 거의 없었던 것이 매우 아쉽게 생각된다. 정부관계부처에서 처음부터 쌀시장을 개방하겠다고 나설 수는 없지만 교수나 연구기관 그리고 언론에서 이러한 문제들의 종합적인 분석과 이해득실을 따져 논의를 하면서 국민에게 이해도 시키고 또 정부로 하여금 대책도 수립하게 했어야 옳았다고 본다. 그동안 가끔 이런 문제가 산발적으로 논의되기는 하였지만 그럴때마다 우리의 여론은 너무도 일방적으로 그것을 비난하였고 심지어는 쌀시장개방의 불가피성을 이야기하는 사람을 매국노라고까지 매도하였기 때문에 이 문제를공개적으로 토론할 수 없었던 것이며 이것이 우리사회의 커다란 병폐의 하나다. ○선심정책 나열 곤란 어쨌든 우리가 UR협상을 거부할 수 없는 입장이고 따라서 쌀시장도 점진적으로 개방하지 않을 수 없는 현 상황에서 개방반대만을 부르짖을 것이 아니라 늦기는 했지만 지금부터라도쌀시장개방후의 농촌대책을 다각도로 강구해야 할 것이다.그렇다고 당장 급한 마음에 또 농민의 감정을 일시적으로 완화하기 위해 실현불가능한 방안들을 마구 나열해서도 안될 것이다. 정부가 농어촌 구조개선대책을 마련하여 시행하고 있는데 이것을 효과적으로 추진해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농업의 경쟁력을 향상시키는 대책들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원예작물이나 화훼류의 수출대책같은 것도 필요하지만 일본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시도하여 많은 성과를 올리고 있듯이 지역특성에 따른 좋은 쌀을 생산한다든가 또는 쇠고기의 경우 양질의 고급한우를 생산하는 등 여러가지 방안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그렇게 하면 소비자들도 가격이 다소 비싸더라도 그런 쌀이나 쇠고기를선호하게 될 것이다. 쌀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토지의 소유제한을 철폐해야 된다고 본다.현재와 같은 3정보의 토지소유상한제 아래서는 경쟁력을 아무리 높일래야 높일 수가 없다.20정보 또는 30정보 이상의 대규모로 기계화를 하고 또 반드시 자기가 땅을 소유하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의 땅을 임차하여 기업적으로 영농할 수 있는 바탕을 만들어야 한다. ○소비자 기호에 맞게 우리농촌은 이미 영농인력이 모자라는 상태여서 농사를 지으려 해도 사람이 없는데 언제까지 경자유전의 원칙만을 지켜야 할 것인가? 영농을 대규모화하여 기계화하고 인력도 고용하여 소비자의 기호에 맞는 상품을 생산하는 식의 상업적 영농으로의 신속한 전환이 필요한 것이다.이밖에도 많은 방안들이 있을 수 있으니 지금이야말로 지혜를 짜내어 좋은 대책을 강구할 때다.
  • 인기에 급급한 민주의총/김경홍 정치부기자(오늘의 눈)

    6일 열린 민주당 의원총회의 의제는 쌀시장개방과 공전국회대책이었다. 쌀시장 개방에 대한 대책은 여야를 막론하고 얼마든지 머리를 맞대도 지나친 일이 아니다. 그래서 민주당 의총에서는 애국적인(?)발언이 쏟아져 나왔다.서로 발언하려고 다투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정부의 협상대표를 매국노라느니,심지어 할복할 각오로 쌀개방정국에 대처하자는 용감한 발언까지 나왔다. 김영삼대통령이 클린턴대통령과의 회담에서 영어를 잘 몰라 쌀개방에 동의했으니 청와대에 영어개인교사를 파견해야한다는 짙은 농담도 있었다. 이 정도까지는 좋다.국민들의 아픈 마음을 야당이 나서서 카타르시스적 대변을 했다는 측면에서 이해할수 있다.또 국민여론에 편승해 정국의 주도권을 행사해 보겠다는 야당의 당략적 입장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대목까지만을 국회내의 유일한 비판세력인 야당의 역할로 받아들이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한마디로 대안이 없는 것이다. 이날 의총에서 안기부법개정안의 협상창구인 박상천의원이 협상진행상황을 보고하려 했으나 민주당의원들은 『나라가 망하는데 안기부법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라는 이유로 보고를 제지했다. 하루가 시급한 현안인 새해 예산안의 처리도 『민자당이 날치기하도록 내버려 두라』고 했다. 국민여론이 예산안처리의 법정시한을 넘긴 추태국회에 비판적일 때 민주당은 협상 쪽으로 방향을 전환했다.쌀과 예산심의는 분리한다고도 했다.그러나 쌀정국이 국민의 불안감을 고조시키고 있는 지금 민주당은 또 국회협상을 뒷전으로 미루고 거리에서 국민을,농민을 부추기려 한다.국정현안의 우선적 판단과 정책대안을 제시하기 보다는 국가적 위기상황을 틈타 책임회피와 인기전술에 급급하고 있다는 지적을 면하기 어렵다. 여야협상은 아직도 교착상태에 빠져있다.안기부법과 추곡수매안에 대한 여야협상은 풀릴듯 풀릴듯 하다가도 안풀리곤 한다. 민주당의 협상태도에 대해 「말타면 경마잡히고 싶어한다」는 표현을 하는 사람도 있다.조금 더 얻으려다 전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나온다 지금은 예산안도,개혁입법도 가능한대로 빨리 마무리짓고 쌀문제에 초당적으로 대처해야 할 때라고 할 수 있다. 시간이 없는 것이다. 소모성 정쟁으로 허비한 시간보다 열배 스무배나 바쁘게 움직여야 할 때가 아닌가.
  • 「바로 잡아야 할 우리역사 37장면」 출간

    ◎왜곡된 역사의 진실규명에 초점/37개 주요사실 시기·쟁점별로 정리/일제·극우반공독재때의 오류 규명/친일파와 독립유공자가 뒤바뀐 사실등에 “눈길” 『친일파들이 독립유공 포상을 받게 된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친일방송선전협의회간사와 경성배일동지회평의원,국민총력조선연맹참사 등으로 친일사회활동에서도 제1선에 섰던 서춘의 예를 보자.서춘이 대통령표창을 받은 19 63년 상훈심사위원중에는 4명의 친일파가 있었다.…역대 독립유공자 상훈심사에 참여했던 친일파는 19 62년 2명,19 64년 4명,19 68년에는 무려 8명에 이른다.…독립유공자가 제 손으로 공적을 써내고 제 손으로 포상을 신청하는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다.이 제도가 독립운동가사회를 질서도 예절도 없는 사람들의 집단으로 전락시켰다.이 제도는 또 너무도 정치적으로 오염되어 왔고 다분히 산 사람에게 치우쳐 시행하다 보니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제치고 먼저 상을 받는 경우도 비일비재하게 됐다』 「바로 잡아야 할 우리역사 37장면」(역사비평사간)은 이처럼 우리역사에서 잘못 알려져 왔거나 감추어졌던 역사사실을 올바르게 전달하기 위해 씌어졌다.두권으로 묶여진 이 책은 특히 가까운 과거인 일제 식민지하와 극우반공독재체제하에서 왜곡된 역사의 진실을 규명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현실감을 느끼게 한다.앞서 인용한 「독립유공자 다시 선정해야 한다」는 글도 최근 뒤바뀌어진 친일파와 독립유공자의 문제가 사회적으로 관심을 모으고 있어 더욱 눈길을 끈다. 이 책은 역사문제연구소에서 내는 계간「역사비평」에 연재된 「우리 역사 바로 알자」는 난을 통해 소개된 글들을 시기별 쟁점별로 한데 묶은 것이다.37편의 글은 모두 해당 분야의 전문학자 37명에 의해 씌어졌다. .역사문제연구소 측은 이 책을 펴낸 이유에 대해 『일본이 한국역사를 왜곡하는것에 대해서는 조금도 경계를 늦추어서는 안된다.그러나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역사를 크게 왜곡해 왔다면 더욱 날카롭게 비판해야 할 것이다.남의 잘못만 지적하고 자신의 문제를 은폐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자기 기만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 책은 「한말·일제시기­애국인가 매국인가」,「상해임정­이승만정권을 바로 알자」,「해방전후­8·15 유엔 그리고 분단」,「친일파·독립운동가에 대한 대접 바뀌어야 한다」,「6·25를 다시 생각한다」,「19 60년대­4·19와 한일협정」,「한국문학의 거장 3인을 다시 읽는다」,「TV사극에 문제있다」,「우리의 반쪽,북한을 바로 알자」는 9개의 큰 타이틀로 엮어졌다.이 아래 다시 「동아일보 조선일보는 민족지였나」,「동작동 국립묘지에 묻힌 사람들」,「한일협정에서의 청구권,배상인가 구걸인가」,「북한은 백두산을 중국에 팔아넘겼다」 등 각 시기마다 가장 잘못 알려졌거나 드러나지않은 37개의 역사적 사실이 쉽고 간결하게 정리됐다. 이책은 「역사상실증」에 빠진 요즈음 독자들에게 우리의 근·현대사에 대한 이해를 높일수 있는 교과서이자 우리 역사의 참모습을 직시하게 하는 교사의 역할을 충실하게 할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 이달의 독립운동가 나철선생(다시 새기는 그 충절)

    ◎서울신문사·국가보훈처 공동선정/을사5적 처단 실패후 대종교 창시/32세때 관직 버리고 유신회 조직… 항일/합방후 “민족정기수호” 단군신앙 포교/“암흑시대 겨레의 횃불”… 독립운동 정신적 지주로 대종교 창시자인 나철 선생은 1863년 12월 2일 전남 낙안현 남상면 금곡리(현 보성군 벌교읍 금곡리)에서 부친 나용집씨와 모친 송씨 사이에서 3형제중 둘째아들로 출생했다.족보명은 두영이었으나 인영으로 개명한뒤 대종교 창교후 철로 바꿨다. ○전남 보성서 출생 1902년 29세때 문과에 장원급제한 선생은 32세때 징세서장으로 있다가 일제의 침략야욕이 내정간섭으로 나타나자 1905년 5월 일제부패관리의 실상을 좌시할 수 없다며 관직을 사임했다.그뒤 강진출신 오기호지사등을 중심으로 비밀결사인 유신회를 조직,구국운동에 앞장선다.그해 미국 포츠마츠에서 노일전쟁의 종전을 위한 강화회담이 열리게 되자 우리의 입장을 미국조야에 호소하기 위해 도미할 것을 결심,미국행을 시도했으나 일본측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6월 유람을 빙자,일본 도쿄에 가게 된다.거기서 그는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가 조선정부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특별전권대사로 조선에 파견된다는 보도를 접하고 그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진정한 평화를 위해 노력해 줄 것을 촉구했으나 회신을 받지 못하자 일왕궁성 앞에서 3일동안 단식하며 항쟁하기도 했다. 선생은 우여곡절 끝에 을사5조약이 체결됐다는 소식을 듣고는 오기호와 함께 『매국노를 모두 죽이면 국정을 바로 잡을 수 있다』며 칼 2자루를 행낭에 감추어 11월30일 귀국한다.이듬해 1월 선생과 오기호는 학부대신리완용 외부대신박재순 군부대신리근택 내부대신리지용 농상공부대신권중현등 세칭 「5적대신」을 일시에 처단할 것을 계획했다.동지들을 규합,자금도 모으고 권총 8정도 구입했다.각국에 보내는 공문과 내외국민들에게 보내는 포고문도 작성했다.첫번째 거사일을 음력 정월 초하루(2월13일)로 정하고 5적이 신년하례를 드리기 위해 입궐하는 기회를 이용,처단하려 했으나 결사대들이 제때에 도착하지 않아 실패했다.이후 4차례에 걸친 처단시도는 이런저런이유로 뜻대로 되지 않았다.체포된 동지 한명이 고문에 못이겨 거사전말을 실토하면서 동지들이 차례로 붙잡혀가자 선생은 제발로 일제 수사기관에 출두,1907년 7월3일 유배 10년형을 받는다.그는 지도로 유배지가 결정돼 헌병의 엄중한 호위를 받으며 29일 인천을 출발했다.그러나 운이 좋았던지 유배 4개월여만에 오기호등과 함께 특사로 풀려난다. 1910년 8월 경술7조약 체결로 일제는 우리나라의 통치권을 완전히 빼앗았다.너무도 치욕적인 조약이어서 선생은 새로운 구국운동과 민족중흥의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나라가 이 지경에 이른 원인은 무엇보다 오랫동안 사대사상에서 비롯된 교육의 잘못에 있음을 깨닫게 됐다.선생은 흔들리는 민족전통정신을 바로잡기 위해 단군의 정신을 널리 알리는 작업에 착수했다.단군의 정신으로 민족고유의 종교역사를 완성하고 민족정기를 새롭게 하여 보국안민과 제인구세를 기해 보자는 의도였다. 선생은 1909년 정월 15일 평소 뜻을 같이 하던 오기호등 수십명과 함께 서울 제동 취운정에서 제천의식을 갖추고 단군교를공식 종교로 공표하고 통상의 건국기원에 1백24년이 앞선 4366년을 개천의 기념으로 삼았다. ○초대교주로 추대 모든 교인들로부터 교주인 도사교로 추대된 선생은 1910년 7월30일 칙령을 발표,그때까지 한얼교 또는 천신교로 불리던 단군교를 대종교로 개명하고 대종교의 창시자가 된다.대종교는 이후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되고 구심점이 돼 급속도로 발전한다.선생은 대종교의 도사교가 되면서 이름을 인영에서 철로 바꾼다. 선생은 경술7조약이후 일제침략세력을 몰아내는 일이 어렵게 되자 성지순례의 길을 나서게 된다.그 옛날 단군이 남긴 손길과 발자취를 몸소 알고 역사와 교훈을 깨달아 겨레의 나아갈 길을 믿아보려고 한 것이다.두만강을 건너 백두산 아래의 중국 동삼성에 이르러서는 대종교의 확대포교를 구상하게 된다.이 곳이 고대로부터 우리 민족이 살던 곳이었고 수많은 애국독립지사가 정착하고 있었던 곳이었기 때문이었다.선생의 노력으로 대종교는 이 곳에서 크게 번창했다.선생은 한편으로 교인과 교포들의 자녀교육을 위해 교육시설도마련,민족교육을 실시하면서 독립정신을 고취시켜 나갔다. 선생의 이같은 행동은 일제의 대종교에 대한 탄압을 불러 일으키게 했다.국내에서는 탄압이 더욱 심해져 마침내 선생은 총본사가 있던 화룡면 청파호에서 귀국을 서두르게 된다.당시 일제는 신포교규칙에 의한 종교등록을 강요하고 있었는데 대종교에서는 완벽한 서류를 냈으나 군소종교단체는 모두 등록을 받아주면서도 대종교의 등록서류는 신교가 아니라는 이유로 반송했다.가증스런 종교탄압이었다.선생의 신변도 위협해왔다.창교이래의 최대의 시련이었다. ○구월산에서 순교 선생은 순교와 수도의 길중 택일을 위해 매일을 기원했다.이윽고 구월산 삼성사 참배계획을 공지하는데 이는 단군 성적지를 믿아 순교하려는 결단이었다.1916년 음력 8월4일 참배길을 떠나 이틀뒤 삼성사에 도착한다.8월 한가위 동네 교인들과 제례를 올린 선생은 『오늘부터 3일간 절식수도에 들어갈 것이니 절대로 문을 열지 말라』고 방문을 봉하게 하고는 순교의 길을 택한다.다음날 제자들이 선생을 믿았을 때는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여러 유서들이 나왔으나 모두 죽음으로써 침략자들에게 항쟁한다는 뜻이었다.선생의 나이 54세. 정부는 이같은 선생의 항일공훈을 추앙하여 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 대한매일신보에서 서울신문까지(겨레의 맥박으로 89년:17·끝)

    ◎지령회복의 정당성/서울신문기원은 1904년 7월18일/「항일선봉」·「친일곡필」 모두 인정해야 정직/최고의 역사… 오늘로 28764호인셈/45년 혁신속간땐 지령 계승… 59년 41년간의 족적 삭제 서울신문은 조국광복과 함께 매일신보의 지령을 계승하여 속간되었다.또한 일제시대 통감부 기관지이던 매일신보는 한말의 구국지이자 민족대변지이던 대한매일신보의 지령을 계승해 발행된 신문이다.따라서 서울신문은 그 뿌리를 한말 최대의 구국민족지이던 대한매일신보에 두고있는 셈이다. 서울신문의 뿌리 대한매일신보(이하 신보)는 항일언론의 최선봉에서 국권회복을 위해 가장 과감하게 언론구국운동을 전개한 대표적인 신문이었다. 이 신문은 런던의 크로니클 통신기자였던 영국인 배설(ErnestThomasBethell)과 한말 언론을 주도했던 논객겸 우국지사 양기탁등 민족진영의 인사들이 합세해 창간했다. 창간 날짜는 1904년 7월18일이다. ○일 국권위협에 맞서 이 무렵은 일본의 한국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이 증대되어 고문정치를 통한 외교 및 내정을 간섭하는등국운이 풍전등화 상태에 놓이던 시기였다.신보는 이러한 암울한 시기에 창간되어 통감부의 기관지로 매수되기까지 일제의 온갖 회유와 핍박에도 불구하고 국권수호운동에 앞장서온 것이다. 신보의 국권수호를 위한 언론구국운동은 동시대 다른 신문과는 현저히 다를만큼 특징적이었다. 창간호부터 항일논조로 일관,갖가지 폭로 고발기사로 사라져 가는 민족혼을 일깨우는데 횃불을 당겨온 것이다.일제의 황무지개관권 요구에 대한 부당성을 지적,한반도 침략음모를 널리 알린 일이며 황성신문의 정간 및 장지연의 구속사건 대서특필,일제의 날조와 허위를 폭로한 고종의 밀서사진 전재등은 그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그뿐만이 아니다.민족지들의 방향을 주도하는 일방 친일지와 친일파,매국노와 친일매국단체에 대해서도 준엄하고 통렬한 규탄을 서슴지 않았다. 신보의 언론구국운동은 이러한 비판 및 고발에 그치지 않고 민족의 애국투쟁정신을 고취하는데에도 매우 적극적 이었다.고종량위반대·정미7조약반대의 시위운동고취를 비롯해 장인환,전명운의 친일미국인 스티븐스(통감부 고문)처단과 안중근의 이등박문처단을 애국의사의 애국투쟁으로 보도,민족의 분발과 투쟁운동의 치성을 고취한 것이다. ○국채보상운동 주도 또 백년대계의 교육구국운동이며 의병운동,그리고 국권회복을위한 애국계몽운동에까지 나서 선각민족언론으로서의 소임을 적극 전개한 점도 빼놓을수 없다.특히 애국계몽운동의 하나인 국채보상운동은 직접적인 대국민캠페인을 통한 거족적 국민운동이었다는 점에서 신보의 언론구국정신을 한눈에 가늠케 하는 것이다. 신보가 이처럼 과감한 구국운동을 전개할수 있었던 것은 이 신문의 발행인이 외국인이어서 치외법권의 보호를 받은때문이다.그러나 양기탁 박은식 신채호 장도빈등 애국민족투사들의 구국정신이 그같은 논조와 운동을 주도했다는데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민족진영의 언론보루로서 국권수호운동을 펼치던 신보는 그러나 일제 통감부의 집요한 탄압끝에 배설의 상해옥살이와 양기탁의 구속으로 풀이 꺾이기 시작했다.그리고 영·일간의 외교문제를 꺼리던 주한영국총영사 헨리보나르와 통감부의 회유 및 압력을 받아 끝내 통감부에 매각되기에 이른다.국권회복의 상징적 존재였던 대한매일신보가 마침내 종언을 고한 것이다. 이때의 지령은 제1461호(국한문판)였다.그뒤 대한매일신보는 한일합병 이틋날인 1910년 8월30일부터 제호 가운데 국가를 상징했던 「대한」의 두자를 잘렸다.결국 「대한」을 빼앗겨버린 「매일신보」는 일제의 의도대로 통감부의 기관지로 변신된 것이다.그러면서도 「매일신보」는 「대한매일신보」의 국한문판 종간호인 제1461호(1910년 8월28일)의 지령을 계승,제1462호부터 국한문판을 발간했다. 이 날짜의 사설제목 「동화의 주의」가 상징하듯 얼굴을 바꾼 매일신보(이하 매신)는 일본 제국주의 식민정책의 첨병으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당초 매신은 총독부 일문 기관지인 경성일보에 흡수 통합,경일편집국의 한부서로서 운영되었으며 철저하게 일제의 입장에서 만들어져 편집방향은 「내선일체」를 고수했다.이를위해 총독정치의 선전과 홍보가 위주였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일제의 한반도 침략을 합리화하고 식민통치의 모순을 은폐하는 한편 일제에의 복종과 충성을 강요한 것이다. 민족말살을 호도,한국과 일본을 순치의 관계로 묶어서 주장한 민족동화의 논리는 물론 식민통치의 기반구축을 위해 사회환경의 일본식 개량 또한 부추겼다.또 식민경제수탈을 위해 산업의 개량과 일본경제체제로의 예속화,그리고 한국의 자주성 및 전통문화를 단절시키기위한 문화말살에도 앞장섰다.이밖에도 학교와 사회,가정에 이르기까지 「황국신민화」를 위한 식민지교육을 강화하는 한편 독립운동 탄압에 가세하는등 식민논리로 일관했다. ○해방조선 대변자임 매신은 이처럼 각 방면에 걸쳐 일제의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고 이를 선전하는등 총독부 기관지로서의 대변역활을 수행한 것이다. 이와같은 일제옹호논조는 매신이 기구를 확대해 경성일보에서 분리,1938년 4월16일 독립언론기관으로서 제호를 매일 「신」보로 개제해 출발한(지령은 매신을 계승)이후에도 변함없이 이어져 왔다. 그러나 일제는 패망했다.그리고 매신은 지난날 오욕의 역사를 청산하고 「해방조선의 대변기관」으로서 「서울신문」으로 거듭 나기위해 대대적인 개편수술을 받게된 것이다.서울신문으로의 개편작업이 본격화하기는 1945년 11월10일 미군정청이 매신에 정간명령을 내리면서였다. 이날이 바로 치욕의 매신이 종간된 날로서 지령은 제13737호로 돼있다.그뒤 새로운 간부진용이 구성돼 매신의 시설과 사옥은 물론 6백여 사원을 그대로 흡수,「서울신문」제호의 혁신호를 이땅에 선보였다.초대 사장은 지조 높은 선각언론인이자 애국지사인 위창 오세창이었다. 이날이 1945년 11월22일(발행날짜는 11월23일)이었으며 지령은 매신을 그대로 계승해 제13738호로 기록되어 있다.이 발행호수는 서울신문이 매일신(신)보의 발행기록 12276호와 그 이전 대한매일신보의 발행기록 1461호를 합친 숫자를 기준삼아 지령을 계산한데 따른 것이다.이는 매일신(신)보가 대한매일신보의 지령을 계승한데 따른 자연스런 결과였다.이에따라 서울신문은 이 두신문의 종합지령을 승계한 제13738호로 기록하게 된것이다.서울신문이 대한매일신보­매일신보­매일신보의 계보위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속간된 것이다. 이 지령은 1959년 3월22일까지 그대로 계승,제18214호를 기록하기에 이른다.그러나 서울신문은 지금 이 지령을 쓰지않고 있다.59년 3월23일 당시 사장이던 고 손도심이 근대 신문사에 대한 자체적인 사적평가를 진행하고 회사전체의 의견을 종합,그동안 사용해오던 구지령을 버리기로 결정한 것이다.이에따라 1945년 11월23일자로 된 속간호를 제1호로 기산,이날짜(1959년 3월23일)의 지령을 제4477호로 쓰게됐다 ○속간호 1호로 기산 서울신문은 이로써 저 멀리 대한매일신보로부터 이어온 지령 13737호와 41년의 역사를 스스로 잘라버렸다.그러나 이는 서울신문 역사의 기원을 그르치는 사실왜곡에 다름 아니었다.근대사에 각기 공과 과의 지울수 없는 족적을 남긴 두 신문과 서울신문의 맥락은 앞에서 보듯 연면히 이어져온 때문이다. 역사는 정직해야 한다.서울신문이 스스로 도려낸 구지령을 되찾아 바로 잡는 것은 역사에 정직하기 위한 길이다.이는 서울신문의 역사뿐만 아니라 한국언론사의 재정립이라는 면에서도 그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다.따라서 서울신문 역사의 기원은 1904년 7월18일 제1호로 창간된 대한매일신보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이날을 기준으로 역산하면 서울신문의 역사는 현존하는 한국의 신문중 가장 오래인 89년이 된다.그리고 잘라버린 지령 13737호를 다시 이으면 오늘 1993년 5월5일자로 제28764호가 되는 것이다
  • 이완용 재산몰수 시민대회

    3·1독립만세운동 74주년을 맞아 1일 하오 부산역 광장에서 열린 「일본의 전쟁범죄 진상규명과 군국주의 부활저지를 위한 3·1국제연대집회 및 매국노 이완용 재산몰수를 위한 특별법제정촉구 시민대회에서 시민들이 이완용의 초상화를 불태우고 있다.
  • 대한매일신보에서 서울신문까지(겨레의 맥박으로 89년:9)

    ◎64일간의 대립/“양기택 석방하라” 영,대일압력/배설 추방 실패… 일제,양 총무 전격구속/대영보복 간주… 총영사 강력항의/양국 외교관 경질요청으로 비화 을사조약이 강제로 맺어진 이후부터 1910년 한일합방때까지의 통감정치 5년은 일제의 한반도 침략야욕이 구체적으로 가시화되던 시기였다.매국적 친일인사들로 들어찬 대한제국정부는 이미 꼭두각시로 전락돼 있었다.국제적으로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무적의 상황을 맞은 일제는 기고만장했다.이무렵 대한매일신보(이하 신보)는 일제의 한반도 강점을 가로막는 유일한 걸림돌이 아닐 수 없었다. ○“한국병합 걸림돌” 한국병합이 착착 진행돼가고 있던 시점에서 의표를 찌르는 신보의 예리한 보도와 논설은 일제를 당황케 만들었다.또 국채보상운동을 비롯해 의병운동,교육구국운동,민족산업육성등 신보가 앞장선 일련의 항일구국계몽운동은 일제의 한반도정책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까지 받아들여졌다. 일제가 신보에 탄압을 가하기 시작한 것은 침략정책상 당연한 것이었다.그러나 일제의 신보탄압정책은 엉뚱하게 영국과 일본간의 외교분쟁으로 비화되었다.당시 영국과 일본은 두차례의 영 일동맹(1902·1905)을 통해 중국에서의 영국의 배타적 권리와 한국에서의 일본의 배타적 권리를 상호 인정하는등 긴밀한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다.그럼에도 일제의 신보탄압을 위한 양기탁총무의 구속사건에서 비화된 양국간의 외교마찰은 전시에나 가능한 외교관대표 사이의 「통신기피」 단계에 까지 이를정도로 악화되었다. 1906년 2월 정식으로 발족된 통감부는 적극적으로 배일논조를 펴온 신보의 발행을 금지시키기 위해 2단계 공작을 폈다.첫단계로는 사장 배설의 추방을 시도,일본과의 관계를 의식한 영국측이 그에게 두차례의 근신형과 3주의 금고형등을 가했다.그러나 배설은 상해에서 형을 복역한뒤 다시 한성으로 돌아왔다.신보는 폐간은 커녕 오히려 배일논조를 더욱 강화시켰다.더욱이 전국적으로 전개되고 있던 국채보상운동의 총본산이 되어 이운동을 진두지휘했다.이에 불안을 느낀 일제는 다음 단계로 제작을 실질적으로 총괄하던 양기탁을 구속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양기탁이 경시청의 와타나베경부에 의해 전격 연행된 것은 1908년7월12일밤 회사안에서 였다.국채보상운동수집금 일부를 횡령했다는 혐의내용이다.급보에 접한 당시 신보사장 만함(A W Marnham·그해 5월27일 부임)은 이를 곧 헨리 콕번 영국총영사에게 알렸다.이 사건을 배설의 영구추방에 실패한 일제의 영국에 대한 보복행위로 간주한 콕번총영사는 통감부 외사과장에게 즉시 그의 석방을 요구하는 공문을 보내는 동시에 화이트서기관을 직접 보내 다음날인 13일 하오7시까지 석방할것을 통보하는등 강력하게 항의했다. ○약속 위반에 분노 콕번이 양총무의 석방을 강력하게 요구할수 있었던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불과 27일전에 열렸던 배설재판에서 재판장이었던 자신이 통감부 외무부장 나베시마로부터 확약을 받아낸 사항이 이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배설의 증인으로 출두한 어떤 한국인도 대한제국정부나 통감부의 탄압을 받지 않는다는 확약을 일제가 파기했던 것이다. 통감부는 영국측의 뜻밖의 강경태도에 당황,본국에는 양기탁이 자진출두한 것이라고 허위보고하고 경시청으로 하여금 양의 기소를 서두르게 했다.이에따라 경찰은 18일 양을 정식기소,황급히 경성재판소에 송치했다.영국정부는 이같은 일본측의 행위에 항의,다음날인 19일 도쿄의 맥도날드대사를 데라우치외상에게 보내 공판 전이라도 양기탁을 바로 보석할 것을 요구했다. 이처럼 양기탁구속사건이 양국간 외교문제로 비화되자 휴가차 본국에 와있던 통감 이등박문은 22일 부통감 소네에게 이 문제를 신중하게 다루도록 지시하기에 이른다. 영·일양국간에 신경전이 오가는 가운데 종로서 유치장에 수감중이던 양기탁을 면회한 만함이 감방의 위생불량과 양기탁의 쇠약을 콕번총영사에게 호소했다.콕번은 8월1일 경성이사청의 미우라이사관에게 감방 상황및 양기탁의 건강상태를 공문으로 조회하면서 인도적 입장에서 즉각 보석허가를 요청하고 나섰다.도쿄의 맥도날드대사도 이등박문에게 이례적으로 사신을 보내 양기탁의 보석을 요구했다. 마침내 이등박문은 만약의 경우 양기탁이 사망할 경우를 우려,입원치료 허락 뜻을 밝혔다.그러나 미우라이사관이나 소네부통감등 한성의 보고는 한결같이 『감방상태도 많이 좋아졌으며 양기탁의 건강도 전과 다름없으므로 보석이 불필요하다』는 것이었다.결국 이등박문이 단안을 내려 8월10일 양기탁의 입원을 긴급지시,11일 하오5시 양기탁은 대한의원에 입원하기 위해 종로서에서 일단 풀려났다. 그러나 문제는 이때 발생되었다.양기탁이 호송경찰들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이용,그길로 대한매일신보 사옥으로 피신했던 것이다.발칵뒤집힌 통감부와 경성이사청은 만함 사장과 콕번 총영사에게 양총무의 인도를 정식으로 요구했다.그러나 콕번은 본국정부의 훈령이 도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절하였고 15일로 예정돼 있던 양의 공판을 연기해달라고 미우라와 맞섰다. 그 유명한 콕번과 미우라 사이의 이른바 「미우라기피사건」은 이때 양기탁의 인도를 둘러싼 서로간의 오해에서 비롯됐다.미우라는 콕번에게는 공판연기 불가를 밝혔으나 막상 사건을 담당한 검사장에게는 공판연기를 청구해놓았던 것이다.이때문에 15일 하오영국정부로부터 훈령이 도착,콕번이 양기탁 인도를 미우라에게 통고했을때는 이미 공판은 연기된 뒤였다. 여기서 콕번은 미우라가 진실이 아닌 거짓을 말하는 자라고 규정한뒤 당일인 8월15일부터 그와의 통신을 일체 기피했다.또 17일에는 통감부로 공한을 보내 대화상대를 교체해줄 것도 요청했다.그러자 통감부는 즉각 반발에 나섰고 일본의 언론들도 영국총영사에 대한 신임장을 취소해야 한다는등 여론을 일으켰다.통감부는 21일자 보고서에서 『미우라이사관의 행동에는 비난할 점을 발견치 못했기 때문에 미우라의 경질을 요구하는 영국측의 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고 오히려 콕번의 경질을 영국측에 요구할 것』을 건의했다. ○두달뒤 무죄선고 그러나 당시 군사동맹을 맺고 있던 양국간에는 이같은 문제로 인한 긴장관계 발생을 서로 원치않고 있었다.결국 영국정부가 한발 양보,콕번총영사에게 양기탁의 공판에 협조토록 훈령을 내림으로써 양은 21일 대한의원에 입원케 됐다.그는 이 병원에서 이상없다는 판정을 받고 27일 경찰서로 다시 이감되었으며 8월31일 첫공판이 개정되었다.그후 다섯차례의 심리가 더있은후 9월29일 양기탁은 증거불충분이라는 이유로 무죄선고를 받았다.이로써 양기탁 구속으로 말미암은 영·일 양국간의 64일간의 숨 막히는 드라마는 끝을 맺게 되었다. *참고문헌:「한국신문사론고」(최준·일조각 1976) 「대한매일신보와 배설」(정진석·나남 1987) 「일제의 문화침탈사」(한기언외·민중서관 1970)
  • 이완용 재산몰수 특별법 제정 촉구/33개 민족운동 단체

    독립유공자협회,민족정기수호협의회등 33개 민족운동단체회원 1백여명은 20일 하오 2시 서울 종로구 신문로1가 한글회관에서 「매국노 이완용 토지몰수 촉구를 위한 반민족행위척결 민족운동단체연합」 결성식을 가졌다. 회원들은 결의문을 통해 이완용의 증손자 이윤형이 매국의 대가로 받은 토지를 되찾겠다는 것은 민족정기를 무시하는 몰염치한 작태라면서 반민족행위자 재산몰수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할 것을 주장했다.
  • 「매국노의 유산」을 찾겠다니…/박화진(정경문화포럼)

    ◎이완용증손의 눈먼 과욕,국민감정 불용/국기보존차원 특별법 만들어 몰수 마땅 잘못되어도 대단히 잘못되었단 생각이 든다.매국노 이완용의 유산이 남아있었다니 말이다.그것을 이완용의 증손인가 하는자가 겁도 없이 찾겠다며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이다.정부등을 상대로 당당히 소송까지 제기하고 있다고 한다.88년부터 지금까지 17건의 유산부동산 환수소송을 제기해 6건의 승소판결로 이미 60억원상당의 땅을 되찾는 재미까지 보고 있다는 것이다.정말이지 기가찰 노릇이다. 이완용이 누구이며 그 유산이란 것이 무언가.나라와 민족을 통째로 일제에 팔아먹은 5천년민족사의 전무후무한 매국역적 1호다.그 대가로 일제의 백작·후작칭호에 엄청난 돈과 특전의 혜택을 받은 민족반역자다.그 매국의 돈으로 만든 자산이요 유산아닌가.그것을 일부일망정 광복50년이 가깝도록 제대로 몰수처리도 않고 방치해 하늘무서운줄 모르는 후손이 찾아가게 버려두고 있는 것은 정말이지 우리의 무능이요 태만이며 수치가 아닐수 없다. 법률전문가들은 증손자 이윤형의 이완용땅찾기소송은 법적하자가 없는 합법적인 것이어서 막을수 없다고 한다.후손에게 죄가 있는것도 아니고 그럴지도 모른다.그렇더라도 그냥둘 수는 없지 않는가.법이론이전에 국민감정과 정서가 용서하지 않는다.법이 잘못되었다면 진작에 고쳤어야 할것이며 뒤늦게 알았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헌법을 고쳐서라도 바로 잡을것은 잡아야 할 것이다.악법도 법이라며 독배를 마신 소크라테스가 될일은 따로 있다. 이윤형의 이완용유산찾기문제는 온세상을 경악시킨 대학입시부정의 위기상황보다 경우에 따라선 훨씬더 중요하고 근본적이며 반드시 해결의 매듭을 조속히 지어야할 심각한 문제다.그것은 국기와 관련되는 문제일수 있다.매국노의 후손이 매국의 유산을 찾아 다시 번영을 누리게 버려둔다는 것은 국가와 민족양심의 문제이기도 하다.조상은 물론 아이들과 후손들에게 아니 우리 자신에게도 설명하고 변명할 말을 찾을수가 없다. 이데올로기분단과 대립의 피치못할 사정은 있었지만 그렇지 않아도 우리는 친일및 부일파에 대한 청산이 제대로 되지않은 심각한 후유증의 괴로움을 당해왔다.민족반역의 친·부일파 후손들은 부모·조상들의 민족반역 덕분에 계속 부귀와 번영을 누리고 조국광복을 위해 모든것을 바친 독립지사의 후손들은 몰락의 고난을 감수하지 않을수 없었던 현실을 안타까워해온 우리다.그 모든 국가·민족·후손희생의 근본적 원인을 제공한 원흉이 바로 이완용아닌가. 왕조시절의 역적은 3주을 멸하는것이 원칙이었다.다시는 그런짓 못하게 뿌리뽑기 위해서였을 뿐아니라 일벌백계를 노린 참혹한 형벌이었다.왕조에 대한 거역도 그러하였거늘 그보다 훨씬더 크고 중요한 민주에 대한 반역의 처벌은 어떠해야 마땅하겠는가.우리는 원통하게도 광복이 늦어 살아있는 이완용을 충분히 응징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그후손들의 잠적도 허용하고 말았다. 물론 지금와서 후손들을 잡아다 3주을 멸하자는 소리는 아니다.조상 잘못만난 탓이지 그들에게 죄가 있는것도 아닐 것이다.그러나 그것은 속죄하는 마음으로 조용히 숨어살때의 이야기일 것이다.그래도 용서할수 없는것이 민족의 양심일 것이다.나라위해 목숨을 바치는 속죄의 희생을 자청해도 부족할 그들이 감히 고개들고 매국유산 찾겠다고 나섰다니 말이되는 소린가.그 조상에 그 후손이란 탄식을 금할수 없다.아무리 합법적이며 민주화의 사회적분위기라도 그렇다.그냥둘수 없고 두어서도 안될 것이다. 매국의 유산은 재산만이 아니다.민족반역의 죄업도 포함되는 것이다.유산을 찾고 상속하겠다는 것은 매국의 죄업도 상속하겠다는 소리 아닌가.그렇다면 징벌도 함께 상속되어야 할것이다.재산을 찾아 명예회복과 불우이웃돕기등 뜻있는 일을하는 재단설립등에 쓰겠다는 말도 했다고 한다.이무슨 해괴하고 건방진 망언인가.명예는 무슨놈의 명예이며 이완용매국유산의 도움이라면 불우이웃도 거절할 것이다.특별법이라도 만들어 국가가 몰수해야 한다.어려운 독립지사 후손들을 위해 써야한다는 소리도 있으나 그것은 모독이다.그분들은 어디까지나 나라와 우리가 도와야 한다.독립기념관에 이완용등 매국노들의 죄업을 자손만대에 전하고 경계시킬 「역적관」이라도 하나 만들면 어떻겠는가.그런데밖에쓰지못할 돈이다. 아무튼 새정부와 국회는 제아무리 어렵고 또 무슨일이 있다 하더라도 이문제만은 바로잡아 주었으면 한다.그것은 저지운동을 벌이고 있는 광복회·극일운동시민연합뿐아니라 온국민의 일치된 소망일 것이다.해이된 나라기강과 전도된 가치및 무디어진 민족적양심을 바로세우는 한국병치유는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할것이란 생각을 한다.
  • 이완용 땅 소송파문 확산/증손 이윤형씨,17건 제소… 6건 승소

    ◎대다수 국민,“매국대가 재산 몰수해야” 우리나라를 일본에 팔아넘겼던 이완용의 후손이 벌이는 재산찾기작업이 법논리와 국민감정 사이에서 파문을 일으키고 있어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이완용의 증손자로 법적상속인인 이윤형씨(59·서울 도봉구 쌍문동)는 지난88년부터 17건의 이완용이 소유했던 토지관련 소유권 소송을 제기,이중 6건을 승소해 2천1백70평(시가 60억원)의 소유권을 인정받았다. 이는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당시 받은 15만원과 총리대신퇴직금 1천4백여원으로 매입한 전국에 걸친 수백만평의 부동산 가운데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이윤형씨는 이에따라 법률자문을 맡고있는 박성귀·유선호변호사 및 전문토지브로커들의 도움을 받아 재산복원작업을 가속화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같은 움직임이 언론에 보도돼 사회적 우려와 반대 움직임이 확산되자 정치권에서도 대책마련에 골몰하고 있다. 민주당의 김원웅·제정구의원은 지난달 26일 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을 몰수하는 특별법의 제정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하고 사법부가 법제정때까지 이와관련된 소송의 판결을 연기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들 의원은 『이윤형씨가 스스로 형성한 재산이라면 법률로서 보호돼야 하지만 그 증조부인 이완용이 매국의 대가로 형성한 재산은 결코 법으로 보호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두 의원이외에도 민자당의 성무용·구천서·박명환의원과 국민당의 원광호의원등이 이같은 취지에 동참,입법준비를 위한 실무회의를 갖는 한편 법원등에서 관련자료를 수집하고 있으나 별다른 진전은 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법조계 및 정치권에서는 이완용의 재산을 몰수하기 위한 특별법의 제정은 좀더 신중히 검토해야될 문제라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특별법이 소급입법이 될 수 밖에 없는데다 사유재산권의 침해라는 지적도 나타날수 있다는 설명이다. 민주당내에서는 이씨의 행위가 「3·1운동으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는다」는 헌법정신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사안이기 때문에 법률문제를 논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정치권의 입법과 사법부의 법적용은좀더 두고봐야겠으나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치부한 재산을 그 후손이 물려받겠다는 일은 도저히 용인할수 없는 것이 국민의 전반적인 감정인 것으로 나타나고있다. 민주당의 박우섭부대변인은 이와관련, 『이윤형씨가 지금이라도 소송을 포기하는 것이 「대를 이어 반민주행위를 한다」는 지탄을 조금이나마 면하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 “대입부정 엄정 처리 도덕심 회복 계기로”/김 차기대통령 강조

    김영삼차기대통령은 3일 대학입학부정사건과 관련,『이는 개인의 양심마비,가치관의 전도등에서 비롯되었다기 보다는 사회전체의 기강이 해이된 결과』라며 『이번 입시부정을 엄하게 다스려 사회 신풍진작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차기대통령은 『이같은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심한 충격을 금할수 없다』면서 『이는 우리사회가 부분적으로 병에 걸려있는 것이 아니라 총체적으로 질병에 걸려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차기대통령은 『이번 사건은 엄하게 다스려 경종을 울려야 하겠지만 이를 계기로 도덕심을 회복하는 새로운 출발점으로 삼아야 할것』이라면서 『이를 위해서는 국민전체가 나서 새로운 각오로 출발해야 한다』고 밝혔다. 김차기대통령은 『이처럼 양심이 녹슨 사례는 최근 매국의 대가로 취득한 토지를 되찾겠다는데서도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면서 『이러한 일련의 현상들은 양심과 도덕이 황폐한 결과이며 총체적 기강해이로서 한국병이라고 진단하지 않을 수 없다』고 덧붙였다.
  • 대한매일신보에서 서울신문까지(겨레의 맥박으로 89년:4)

    ◎매신의 항일논조/을사조약 다음날 즉각 “무효” 보도/일진회의 합병주장 사흘에 걸쳐 통박/“매국의 자유는 없다”… 친일지 정면비판/황성신문과 공동보조… 민족지의 방향 주도 20세기 초반의 국운은 풍전등화 그것이었다.일제의 만행을 지켜보면서도 그저 「침묵」만이 금과옥조로 여겨지던 암울한 시기이기도 했다.그러나 대한매일신보(이하 신보)가 깨어있는 언론으로 날카로운 배일논조를 통해 사라져가는 민족혼을 불러일으켰다.또 다투어 일제 찬양에 앞장서고 있던 친일지들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논조뿐 아니라 기사는 물론 연재소설까지 총체적으로 일본침략에 맞섰기 때문에 친일적 사회분위기에 늘 경종을 울렸다. ○타지의 논조 감시 1904년 발발한 노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제는 이 땅에 배타적 지배권을 따내는데 성공했다.이듬해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통감부를 설치한 일제는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를 초대 총감에 앉혔다.그리고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몰수하고 민족의 분열을 획책하는등 조선을 합병키위한 온갖 탄압통치를 자행하고 나섰다.이같은 상황에서 당시 대한매일신보는 민족의 자주독립을 주장하며 민족 단합의 기치를 올렸다.황성신문 제국신문 만세보등 민족지들은 이에 동조했지만 국민신보 대한신문등 친일지들은 통감부에 추파를 던지면서 아부까지 일삼았다.민족혼을 일깨우는 일방 친일지들의 논조와 태도를 감시하는것 또한 민족지들의 중요한 임무가 될수밖에 없었다. 신보는 민족지들 가운데 통감정치에 대한 대항과 친일지들을 비판하는데 선봉장 이었다.주필 양기탁을 비롯하여 박은식 신채호 장도빈 황희민등 논설기자를 주축으로한 당시 신보의 필진은 신랄한 필봉으로 통감부및 대한제국의 친일내각 정부를 규탄했다.그래서 신보의 논조는 일제침략의 두려움과 조정의 무능에 실망을 느끼고 있던 국민들에게 각성제가 되었다.결국 환영받는 신문으로 다투어 구독함으로써 당시 다른 신문들의 발행부수가 2천부내외에 불과했던 것과는 달리 신보는 1만부를 돌파하기에 이른다. 1905년 11월17일 을사조약의 체결은 대한매일신보로 하여금 배일논조의 강도를 더높이게 하는계기가 됐다.조약체결 바로 다음날인 11월18일자를 보면,이 조약의 무효를 공공연히 제기한다.『한국황제께옵서는 한국 독립을 중념하사 정대한 의리로써 거절하시고 칙어로써 불윤하셨다』는 대목이 그것이다①. 이어 신보 21일자는 황성신문 20일자에 장지연사장의 사설 「시일야방성대곡」과 을사조약이 강제로 맺어진 경위를 폭로한 기사인 「오건조약청체전말」등의 게재로 벌어진 황성신문사태를 보도한다.이 기사는 황성신문이 일군의 검열을 받지않고 배포함으로써 사장을 비롯한 10여명의 사원이 체포되고 무기정간 당한 사실등을 상세히 보도했다.또 23일자에는 장지연에 대한 수사 속보와 함께 「황성긍지」 제하의 사설에서 황성신문의 매국적들에 대한 규탄을 찬동하면서 일제의 언론탄압과 친일지들의 침묵을 강력히 비난하고 있다. 이같은 대한매일신보의 논조는 통감부가 보면 눈의 가시처럼 여겨졌으나 사장 배설이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섣불리 손을 댈수도 없었다.2년후인 1907년 전국적으로 전개된 국채보상운동과정에서 신보의 논조는 국민들의항일구국의지에 또한차례 불을 댕겼다.이 문제를 사설로 처음 다룬것은 이해3월1일자 「한인충애」란 표제의 글이다.여기서 신보는 『국채보상운동은 일본으로부터 면탈하려는 인민의 제의이다.이를 성취시켜야겠다는 것과 신문이 이러한 가찬할만할 일을 돕는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다』라고 일제의 비위를 긁어버린다.이는 결과적으로 이 운동에 국민들이 적극 동참,애국운동으로 발전시키는데 큰 역할을 다한다②.일제는 점차 두려움을 느껴 이 운동에는 배일사상이 개재돼 있으며 미국이 이를 배후조정하는 것이라고 공격하면서 탄압을 가중해오거나 회유책을 쓰는등 갖가지 방법을 동원했다.그러나 신보는 이에 정면으로 반발하고 나섰다. ○일제회유책 거부 1909년12월4일 한일합병을 주장해온 일진회가 소위 「일진회합병성명서」를 발표하자 당시 민족지는 물론 일반국민들의 격분은 극에 달했다.이때 신보는 「한일합병론자에게 고함」이라는 반박사설을 연3일에 걸쳐 실을 정도로 강력히 항의했다. 대한매일신보는 또 1906년 1월 국민신보에 이어 이듬해대한신문,1909년 9월 시사신문등 친일지들이 잇달아 창간되자 그 필봉을 더욱 날카롭게 갈았다.그들의 매국적 보도태도를 감시하고 지적하는데 한시도 눈을 팔지 않았다.1907년 12월17일자에 보도된 「위국민대한양신문초혼」 제하의 사설은 친일지들의 신보 비판에 대한 답신의 성격을 띤 것이었다.당시 친일지들이 전국 각지에서 일고 있는 의병을 「폭도」라고 보도하는데 대한 김정익이라는 독자의 반박문을 신보가 게재했다.그러자 친일지들은 「대마두매일보」「대화태매일보」등 사설로 일제히 신보를 비판했던 것이다.장문의 이 신보의 사설은 『공격도 자유고 비판도 자유다.그러나 매국하는 자유는 있을 수 없다』는 논지를 펴며 조목조목 친일지들의 반성을 촉구했다③. 이어 1910년 4월1일자의 「고·시사신문」제하의 사설은 시사신문이 일제에 아부하는 비천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데 대해 서슴없이 경고한다.특히 시사신문이 사내에 관광계를 설치하여 일본관광단을 모집하고 있는데 대해 강력한 비난을 퍼부었다.『일본관광의 목적이 선진실업을 수입하여 실업개발을 이룩하자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그것은 한국인을 일본인화 시키려는 일제의 획책에 빠져드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그러면서 관광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할것을 촉구했다.그밖의 경고성 사설들을 보면 「본보의 우인과 적혐자」(07·5·11)「부국민신보」(7·18)「대한신문마기자아일람」(12·8)「국민보마기자아」(09·5·21)「국민대한양마두상각일봉」(5·23)「파외파의 담계」(6·6)등 수를 헤아릴수 없이 많다. 대한매일신보의 배일은 논조나 기사를 통해서만 나타난것이 아니라 해학과 풍자가 가득한 신문소설을 통해서도 나타난다.대표적인것으로는 「소경과 앉은뱅이 문답」(1905년 11월17일부터 12월13일까지 연재)이 있다④.무기명으로된 이 작품은 미신타파와 단발령선포등 사회개혁으로 생활기반을 상실당한 소경 점쟁이와 앉은뱅이 망건쟁이의 대화형식을 빌려 구성한 것이다.수구파와 개화파로 갈라지는 신구세력의 대립,외세의 가열한 침투,무능한 정부의 외세의존,자유주의사상 전래등 급격한 변혁으로 인한 현실비판이 주요골격이다.이들의 대화중에는 을사오적에 대한 규탄도 있고 관리들의 부정부패에 대한 비분강개도 나온다.또 「이태리국 아마치전」에서는 이탈리아의 건국영웅 아마치의 구국투쟁 편력을 서술함으로써 은연중에 애국사상을 고취시키기도 했다. 대한매일신보의 이같은 적극적 배일 태도는 1909년 5월 사장 배설이 죽고 만함(Marnham)이 사장직을 이어받은 후에도 1년여간 계속되었다.그러나 1910년 6월 이장훈에게 양도된 이후 그 예리한 필봉이 비운을 맞는다.그래서 역사는 수레바퀴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①정진석,일제하한국언론투쟁사(정음사 1975)PP26∼32◎최준,한국신문사론고(일조각 1976)PP113∼117 ②이해창,한국신문사연구(성문각 1983)PP405∼406 ③이재선,한말의 신문소설(한국일보 1975)PP40∼47
  • 언론입국에 생애바친 선각자/서울신문 초대사장 위창 오세창선생

    ◎독립운동·저술 등서 뚜렷한 발자취/23세에 첫발… 필봉으로 민족혼 고취/팔순고령에도 본지서 해방조국 정론기개 불태워 『매일신보는 이제 혁신되어 이름조차 새로운 「서울신문」으로 냅떠 나서게 되었다.…우리는 일당일파에 기울이지 않고 언론보도에 공정하고 적확할 것은 물론이거니와 민족총력의 집결통일과 독립완성의 시급한 요청에 맞추어 단호매진하는 동시에 국내를 비롯하여 연합우방의 동업기관과 더불어 민주주의적 질서수립을 위해 상응한 노력을 기울이려 한다…』19 45년 11월22일 혁신사란 이름의 서울신문 창간사중 일부이다. 언론입국의 기치를 이같이 내걸고 새로 태동한 서울신문에 초대사장으로 추입,격랑의 그 어려운 시절을 이끌던 이는 바로 위창 오세창선생이었다. 큰 체구에 근엄한 표정,그리고 절고의 기품과 해박한 지성으로 명성 높은 원로 민족인사였다.위창은 33인(3·1운동)의 한사람이자 불굴의 독립투사로 더 이름이 높다.또 근대미술사의 한 획을 긋는 탁월한 서예인이었다.그의 행적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개화사상 일찍 눈떠 개화운동및 개화사상가,언론인,종교인,전각가·저술가·고서화 수집가를 덧붙여야 할 만큼 다각적인 발자취를 남긴 민족근대화의 선각자였다.특히 개화사조의 계몽과 주권의식의 고취를 민족에 불어넣기 위해 벌였던 개화및 언론활동은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인식을 새롭게 할 만큼 빛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위창은 개화사상에 일찍이 눈을 뜬 부친 오경석과 은사 유대치의 감화를 받아 일찍부터 개화및 진보적 사고를 지니게 되었다.자신의 개화사상이 곧 민족의 근대화를 이루는 지름길로 여겨 개화운동의 전면에 나선 것이 약관 23세이던 18 86년의 일이다.박문국의 주사로서 당시 관보였던 「한성주보」의 기자를 겸하면서 처음 언론을 대했다. 정치적 격변의 시대이기도 했던 그무렵 위창은 지위를 높여 영화를 누릴 기회도 많았으나 이를 마다하고 필봉의 길을 택했다.언론을 통해 민족에 개화의식을 심어 끝내는 국권회복의 길을 앞당기려는 깊은 뜻을 품었기 때문이었다.기자생활은 18 88년 7월 한성주보가 폐간될때까지 1년8개월간에 불과했다.그러나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민족을 일깨우는데 집념을 불태운 그 세월은 결코 짧은 것이 아니었다. 그뒤 31세이던 18 94년 국군기무처의 낭청(총재비서관)자리에 관직을 얻은 그는 당시 영의정이던 김홍집의 3차내각이 무너지기까지 의정부주사·농상공부 참사관·통신국장을 지내면서 줄곧 정부시책을 통해 또다른 민족근대화 작업을 집요하게 폈다. 위창의 민족개화운동은 도쿄 망명중 동학교주 손병희를 만나 입교하면서 그 날개를 더 달았다.19 06년에는 항일구국운동을 위한 신문 「만세보」를 손병희의 재정적 후원으로 창간,사장에 취임하면서 본격화 하기 시작했다.당시 위창은 주필로 국초 이인직을 취임시켰다.이인직의 신소설 「혈의 누」가 처음 발표된 것도 바로 「만세보」지면을 통해서였다. ○「만세보」 사장 취임 그러나 만세보는 경영난에 빠져 이듬해에 폐간되는 비운을 겪었다.위창은 권동진·장지연·김가진등과 「대한협회」를 조직,사회개혁과 항일운동을 계속했다.그러면서 이상재·김규식·안창호등과 「대한학회」발기인으로활동한 위창은 19 05년 5월 대한협회의 기관지 성격으로 「대한민보」를 창간,다시 사장으로서 항일언론을 지속하는등 민족을 위한 투쟁을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대한민보는 창간 이듬해 한일합병으로 사라지고 말았으나 당시 매우 획기적이고 용기있는 신문편집을 단행한 것으로 유명하다.창간호부터 1면에 청년화가 이도영이 붓으로 그린 비판적 시사만화를 연재한 것도 이때다.시사만화는 미련한 놈이 도끼로 나무를 찍다가 자루가 빠지는 바람에 도끼날이 제 발등에 떨어져 찍히는 내용이었다. 이 만화의 설명은 당시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이미완용(이미완용)자부상피(자부상피)」라는 설명이 그것인데 당시 「매국대신 이완용이 자부와 상피붙었다」는 소문을 풍자한 내용이다.대한민보에는 이밖에도 일제통감의 침략행위와 일인들의 악행을 풍자한 만화도 등장했다.또 우리군대가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당한뒤에도 군복을 입고있는 이완용내각의 군부대신 이병무의 모습을 그려놓고 「벌거벗고 군도차기」라고 꼬집은 만평이 게재되기도 했다. 이 모든 비판적 만평은 위창의 항일언론정신에 바탕한 것은 물론이다.당시 그같은 통렬한 설명도 위창이 직접 붙인것으로 알려져 있다.매우 엄격하고 불의에 타협않는 단호한 성품의 소유자였던 위창은 과묵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기도 했다.말과 행동을 늘 은인자중하여 심중을 알기 어려울 정도였으나 기회를 얻으면 결코 방관하지 않는 기민성을 보이기도 했다. 생전에 술과 담배는 즐겼다.19 19년 3월 민족대표 33인중 한사람으로 왜경에 체포,실형을 받은뒤 술을 끊기까지 두주불사에 줄담배였다. 한국서화사연구의 혁혁한 공로자로서도 언론인 못지않게 이름이 높다.김석학의 대가이던 부친 적매 오경석의 아들답게 근대적 미술가단체의 효시인 서화협회의 발기인이자 민족서화계의 정신적 지도자로 큰 폭의 활동을 했다.위창이 서화사연구와 전서쓰기및 전각에 전념하기는 통한의 국망을 본 이후 천도교도사로 은거하면서였다. ○서화사연구에도 열성 그리고 고서화수집가로도 유명했다.한학과 김석학에 깊은 조예가 없이는 손대기 어려운 전서에 뛰어났다.전서로당대의 일인자였던 그는 예서를 씀에도 고격하여 독보적인 존재이기도 했다.전서의 높은 경지와 함께 전자를 돌도장에 새기는 전각에서도 근대이후 일인자로 꼽히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가 남긴 미술사적 공적은 「근역서화징」의 편저이다.「근역서화징」은 삼국시대이후 3백92인의 화가와 5백76인의 서가,그리고 시·화를 겸했던 1백49인의 기록을 시대순으로 정리한 책자를 말한다.필생의 대업적인 「근역서화징」은 오늘에도 그 방면의 유일하고 거의 완벽한 사전으로 학계와 사회의 길잡이가 돼있다. 육당 최남선은 이 책자가 출간되었을때 『암흑한 운중의 전광』이라는 표현으로 그 업적을 극찬할 정도였다.위창은 또하나의 편저업적인 「근역인수」를 남겼다.조선시대 초기부터 근대에 이르는 서화가 8백56인의 성명·아호·별호·자·이명의 도장 약3천8백종을 실제의 날인본으로 모은 것이다.한국전각예술의 역사적 흐름과 실제 사용의 행적을 보여주는 최대의 자료집성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밖에도 1천1백16점의 글씨와 그림을 묶은 「근묵」이며삼한의 와당을 모은것등 많은 문화재를 수집 정리했다.위창이 명현석유를 비롯한 옛서화가들의 필적을 이처럼 모아 정리한것은 단순한 취미에서가 아니었다.선인들의 문화유품이야말로 민족의 정신적 생명으로 인식,이를 아끼는 마음에서 였다.그것은 위창의 애국애족정신과도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그의 이러한 정리작업은 광복을 맞기까지 지속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뒤 일제가 패망하고 국권을 찾으면서 위창은 팔순의 고령으로 서울신문 사장에 추대되었다.광복의 땅에서 우리말로 정론을 펴는 서울신문 초대사장에 취임한 그는 얼마 안되는 세월이었지만 노후의 기개를 불태웠다. 8·15 1주년을 맞아 지난날 일제에 빼앗겼던 대한제국 황제의 옥쇄를 민족을 대표하여 인수했던 위창­.그는 6·25로 가족과 함께 내려간 피란지 대구에서 1953년 4월 세상을 떠났다.그때의 나이 천수를 다한 90세였다.
  • 주대만 한국공관 한달내 철거 요구/대만성 공매국

    【대북=최병렬특파원】 주대만 한국대사관 부지의 소유주인 대만성공매국(전매청)은 24일 한국대사관에 공문을 보내 ▲대사관 건물을 1개월내에 철거하고 ▲올1월부터 체불된 땅임대료 2백3만원(한화6천만원)을 조속히 지불할 것등을 촉구했다.
  • 해고 노조간부 2명/노동위서 복직명령/전라일보 기자

    【전주】 전북지방 노동위원회는 29일 전라일보사(회장 최상렬)가 이 회사노조위원장 김영묵기자(33)와 노조감사 한기봉기자(35)등 노조간부 2명을 해고한 것을 부당 노동행위라고 판정,이들을 즉각 원직에 복직시키라고 회사측에 명령했다. 전북지방 노동위원회는 이날 명령서에서 『회사측이 기자로 입사한 김기자와 한기자를 인사 기준 없이 판매국등 일반직으로 전보시킨 뒤 인사 발령을 거부했다는 이유등으로 해고조치 한 것은 부당하다』고 밝혔다. 전라일보사는 지난 3월18일 제14대 총선과 관련,공정보도를 요구한 이들을 판매국과 광고국으로 각각 전보 발령한 뒤 회사 명령에 불복종 하고 근무 성적이 나쁘다는 이유를 들어 지난 4월22일 해고했었다.
  • 규장각 자료서 드러난 일제의 날조 파장/긴급좌담

    ◎“을사조약등 무효” 대일 공식통보를/5년간의 의병희생등 추가배상 마땅/두나라 교과서등 역사기술 새로해야/학계도 일자료 의존 탈피,원전연구 나설때 ▷참석자◁ 윤병석 인하대교수·역사학 신용하 서울대교수·사회학 백충현 서울대교수·법학 일본은 일제의 한국 침략이 이른바 「을사보호조약」 「정미7조약」등 두 나라사이의 국제조약에 의해 합법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해 왔다.우리 국민역시 일제의 역사왜곡에 의해 대한제국이 무력하게 국권을 내어 준것으로 잘못 알아왔다.그러나 서울대 규장각 소장자료 정리·분석과정에서 을사조약을 비롯,대한제국말기의 각종 조약과 칙령 등이 황제의 승인없이 일제에 의해 날조된 것(서울신문 12일자 보도)으로 밝혀짐에 따라 원인무효의 조약에 의한 일제36년의 청산문제가 다시 제기되고 있다.역사적 사실의 재정립 및 대일피해보상 등 한·일간의 새로운 현안들을 짚어보는 전문가 좌담과 조약체결과정에대한 박성수교수의 글을 싣는다. ○“체결”로 거짓 발표 ▲신용하교수=일제가 지난 1905년 조선에 강요한 을사조약과 1907년의 정미7조약등 각종 조약과 식민지법령이 당시 조선황제인 고종의 인준을 받지못했을 뿐만 아니라 상당수가 일제에 의해 황제의 서명이 위조된 것이라는 서울대 규장각의 발표는 국민들에게 상당히 충격적인 일이었을 겁니다.먼저 제가 1905년 을사조약체결과정과 이를 둘러싼 조선조정의 대응등 역사적인 배경을 살펴보는 것으로 오늘 대담을 시작하겠습니다.일제는 1905년 러·일전쟁에 승리한 뒤 조선의 국권을 빼앗기 위해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려고 모든 수단을 동원했습니다.일제는 을사조약을 만들어 일본 헌병대를 동원해 대신들을 위협하고 강제로 체결하려다 고종의 완강한 거부로 고종의 인허·수결·옥새·날인 어느 것도 받지 못해 조약체결에는 실패했는데도 불구하고 일제는 조약이 체결된 것처럼 거짓으로 발표해버렸습니다.당시 대한제국은 전제군주국가로서 모든 외국과의 조약과 칙령에는 황제의 친필서명과 옥새의 압인이 필수요건이었으므로 을사조약은 무효인 것이지요.이 과정에서 당시 참정대신 한규설은 조약체결에 반대해 헌병들에게 멱살이 잡힌채 밖으로 끌려나갔고 민영기 이하영등도 이를 막아보려 했습니다.이밖의 국내상황은 어떠했습니까? ▲윤병석교수=당시에는 국내의 친일파들 말고도 미국·영국·독일등 제국열강들 조차도 일제의 불법을 자국의 이익에 따라 묵인한 상태여서 일제의 조선침략은 계획대로 진행됐죠.이는 바로 우리가 역사에서 얻어야 할 교훈인데 지금도 달라진 것은 크게 없습니다.물론 일부에서는 1세기전에 국가간 조약을 체결하면서 지금처럼 철저하게 법적절차를 거치고 그에 대한 인식이 있었겠느냐고 의문을 가질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예를들어 「양국간의 통상을 시작한다」는 내용을 담은 1876년의 강화도조약만해도 조약체결 당사자들의 서명은 물론 이들의 도장 왼쪽에 양국통치권자의 서명·날인이 돼있습니다.하물며 한나라의 국권을 좌우할 수 있는 중요한 조약에 통치권자의 서명·날인이 없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신=이들 조약들이 법적효력이 없다는 것이 확인됐는데 그럼 무엇이 달라지고 지금 우리가 취할수 있는 대응책은 어떤 것들이 있겠습니까? ▲백충현교수=을사조약이 형식적인 요건을 갖추지 못하고 공표됐다는 것은 학계내부에서는 알려져있었지만 우리의 원본으로 공식확인된 것은 상당히 의미있는 일입니다.그리고 정미7조약과 같은해 12월에 반포된 48개의 칙령등에 순종의 수결이 위조됐다는 사실은 이번에 처음 발견된 것이라는 것도 분명히 해야합니다.외교권박탈과 통감부설치에 의한 조선지배등을 규정한 을사조약이 무효이므로 이후 일본이 외국과 체결한 간도협약(1909년)이나 내치를 위해 반포했던 일체의 식민지법도 모두 무효가 됩니다.여기에서 지난 65년 체결된 한일기본협정에서 일본측이 취했던 입장을 짚고넘어가야 합니다.일본측은 1910년 한일합방을 합의했던 것자체가 무효가 아니라 당시 조선황제의 동의를 얻어 제정·반포된 법에 근거해 합법적이라고 주장해왔습니다. ○전세계에 알려야 그러나 을사조약자체가 무효라는 것이 판명된 이상 물적배상의 차원을 떠나 사실은 사실대로 기록되어야하며 이는 역사의 잘못된 반복을 막으며 장래한일양국관계의 정상화에도 기여할 것입니다. ▲신=저도 백교수님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저는 이밖에도 선언적인 의미에 그칠지는 몰라도 을사조약이 체결도 안된 것으로 무효라는 사실을 전세계에 알려야 한다고 봅니다.또 이사실을 사후에라도 언제든지 확인할 수 있도록 우리 정부가 공식문서로 작성해 일본정부에 전달해야 합니다.한일교과서의 내용도 「일제는 1905년 을사조약을 강제체결하였다」는 서술을 「일제는 1905년 소위「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려다가 실패하자 체결되지도 않은 조약을 체결된 것처럼 제멋대로 거짓 반포하였다」로 고쳐써야 할 것입니다.또한 지난65년 한일기본조약체결때 1910∼1945년에 대한 배상만을 논의했는데 1905∼1910년사이 일제침략에 무참하게 학살된 수만명의 의병들의 희생에 대해서도 추가로 배상을 요구해야 합니다. ▲윤=저는 신선생님의 제안에 몇가지를 덧붙이고자 합니다.이번 기회에 일제침략의 악랄함과 간교함,기만적인 부분들을 국민들에게 제대로 알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그리고 일부에서는현재의 한일관계가 수교이후 가장 불편하다는 점을 들어 감정적인 대응을 경계해야 한다고도 하지만 그것은 어느 한시점에 근거한 단견입니다.국제관계란 때로는 소원해질수도 있고 가까워질수도 있는거니까요.일본이 과거에 저지른 만행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오히려 양국 모두에 도움이 되며 아직까지도 계속 거론되는 친일잔재 역시 하루빨리 완전청산돼야합니다. ○주권지켜낼 정도 ▲백=규장각 자료분석작업에 직접 관여하면서 저를 포함해 학계가 반성해야한다고 절실히 느꼈습니다.우리는 여러이유로 자료들이 제대로 보관돼있지 않아 일본자료를 그대로 인용하는 풍토가 만연돼있습니다.그렇기 때문에 사실을 왜곡하고 굴절된 시각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이번경우도 규장각에 소장돼있던 자료를 정리하다 우연히 발굴된 겁니다.우리 학계는 이제 간접자료가 아닌 원본에 근거한,원칙에 충실한 연구자세를 지향해야하며 우리의 문헌을 창고에 방치하지 말고 근본적인 자료에 눈을 돌리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마지막으로이번에 새롭게 밝혀진 역사사실이 우리사회에 던진 충격에서 벗어나 잘못 알려져온 역사는 바로잡고 이로인해 손상당한 우리 민족정기를 바로세우며 또한 일본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더불어 최근 일본에 치우쳐있는 국민들의 무비판적인 관심을 한번 거르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또 우리민족이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상처를 치유하고 민족적 자긍심을 갖도록 역사사실을 알려 최근 물밀듯 상륙하고 있는 일본의 경제·문화침략에 제대로 대응할 수 있는 판단력을 지니도록 해야하는데 이는 바로 우리의 주권과 문화적인 자주성을 지켜나가는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고종,“순할지언정 인허 못한다”/을사조약 이등협박에 끝까지 불응/박성수 정문연교수·역사학(특별기고)/이완용등 오적변절… 대신회의서 “가” 결정/황제,“적자 모두 일어나라” 국민항쟁 촉구 1905년의 을사조약이 조약당사국의 최고통수권자인 대한제국 광무황제(고종은 일제의 명명)의 비준없이 체결되고 1907년의 정미조약도 융희황제(순종)의 위조된 수결로 체결된 사실이밝혀져서 이 시기의 모든 법령은 물론 1910년의 소위 합병조약(경술조약)까지도 무효임이 밝혀져 이 시기에 관한 기존의 역사 기술에 근본적인 재검토가 요구되고 있다. 1905년 11월17일 광무황제의 재가 없이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일이다.국권탈취의 원흉 이등박문이 서울역에 도착한 것은 1905년 11월9일 하오.이튿날 낮12시 덕수궁의 황제를 알현,소위 일본천황의 친서를 전달하면서 1차로 협박하고 2차 알현을 요구하였으나 황제가 거절,15일에 가서야 2차 협박에 성공했다. 그러나 얻어낸 결과는 죽는 한이 있어도 인허할 수 없다는 대답이었다. ▲이등=만약 폐하가 이 조약을 거절하면 중대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황제=이 조약은 국가중대사이므로 짐이 단독으로 결정할 수 없다.국민의 의사를 물어 봐야 한다. ▲이등=국민의 의사 운운하심은 국민을 선동하여 일본에 반항하려는 것이 아닙니까? ▲황제=이 조약을 인허하는 것은 망국이나 같은 것이니 짐이 종사에 순할지언정 절대로 인허할 수 없다. 죽으면 죽었지 이 조약은 받아 들일 수 없다는 황제의 태도는 그 뒤에도 변함이 없었다.5월17일 이등박문이 불법으로 소집,주재한 대신회의에서 이완용등 오적이 변절하여 「가」라고 대답했을 때 황제는 그들의 배신행위를 「천재의 유한」이라 개탄하면서 『짐의 적자는 모두 일어나 이 슬픔을 함께 하라』고 말했으며 피를 토하여 통곡하였다.황제의 뜻이 이러하였으므로 을사조약에 수결했을 리 만무하다.따라서 이 조약은 원천적으로 무효일 뿐 아니라 일제는 이 조약 자체를 위배하고 있다.즉 한국의 외교권만을 침탈하기로 되어 있는 조문을 무시하고 한국의 모든 내정권을 유린하고 있다.이것도 명백한 불법이다. 광무황제는 이보다 먼저 1904년 러 일전쟁 발발 직전에 국외중립을 선언한 바 있으나 이것도 일제가 불법적으로 묵살하였다.1907년 해아특사를 파견하여 만국평화회의에 친서를 전달하게 되는데 그 요지가 을사조약의 무효선언이었다. 『짐은 최근 한국과 일본간에 체결된 소위 보호조약은 무력협박과 감금속에서 강요된 것이므로 무효를 선언한다.짐은 이조약을 절대 승인한 바 없으며 장차도 그럴 의사가 없다』 헐버트에게 보낸 전신에서 황제는 이렇게 명언하고 있다.이 사건으로 황제는 강제 퇴위 당하나 그 때도 퇴위아닌 황제대리를 선언하였다.그러나 일제는 또다시 이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양위를 발표하였다.그리고 한국군 해산을 골자로 하는 정미조약을 체결했다.이것마저도 융희황제의 재가없이 강행하였다면 당연히 무효이다. 이등의 주구였던 이완용의 매국내각을 인정할 수 없듯이 1904년 러일전쟁 발발이후 1910년 경술조약까지의 모든 법령,안중근의사에 대한 사형판결까지도 모두 원천적으로 무효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그런 전제하에서 한일 두나라 교과서는 물론 모든 역사기술을 재검토하여 새로이 집필되어야 할 것이다.특히 일본은 1931년 이후 소위 15년간의 침략통치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고 그 이전의 한국침략을 합법적이었다고 보는 어처구니 없는 역사관을 버리고 솔직하고 겸허하게 진실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 「백범암살 재조명」 계기 책출간·연구모임 잇따라

    ◎“친일청산” 학계논의 활발/친일파 인명사전·역사강좌 등장/“일시적관심 아닌 현대사정립 계기로” 지적 백범 김구선생의 암살사건 배후에 친일경력을 지닌 지배세력이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친일청산에 대해 학계는 물론 일반인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백범의 일생과 친일문제를 다룬 책들을 찾는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고 재야사학자 고 임종국씨가 정리한 친일관련자료집 「친일파 인명사전」「임종국전집」「친일파총사」등이 잇따라 발간될 예정이며 이문제를 특집으로 다룬 잡지가 발간되고 시민역사강좌가 열린다. 역사문제연구소(소장 이리화)는 오는 23일부터 6월4일까지 연구소 강연실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친일파·민족반역자 열전」이라는 주제로 한국사교실를 개최한다.매주 목요일 하오 7시에 열리는 한국사교실은 모두 7차례에 걸쳐 친일파집단의 형태를 유형별로 나눠 대표적인 인물들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오는 23일 서중석교수(성균관대)의 「친일파를 다시 본다­친일파·민족반역자에 대한 역사적 평가」라는 제목의 강의로 시작되는 이번 「친일파강좌」는 이리화소장의 「영원히 씻을 수 없는 매국노의 오명­이완용·송병준」,문학평론가 임헌영씨의 「친일을 애국으로 착각한 지식인들­이광수·최남선」,박현채교수(조선대)의 「비행기를 헌납한 친일기업인들­박흥식·문명기」,미술평론가 윤범모씨의 「일제를 위해 붓을 잡은 화가들­김기창·김은호」,강정숙씨(영남대 강사)의 「이땅의 아들 딸을 전쟁터로 몰아낸 여성명사들­김활란·모윤숙」,그리고 방기중연구실장의「8·15이후의 친일파집단­이승만정권을 떠받친 경찰·관료·지식인들」순서로 진행된다. 서중석교수는 『근·현대사를 연구하는데 있어 친일파의 문제를 항상 걸림돌이 되어왔다』고 전제하고 『해방을 맞은지도 반세기가 되어가는 시점에서 과거사에 대한 처벌보다는 잘잘못을 학문적으로 정확히 분석하고 특히 이들이 친일행위를 하게 된 동기와 배경및 구체적인 과정을 규명해내는 일은 현대사를 제대로 이해하는 길』이라면서 이번강좌의 기획의도를 설명했다. 그동안 일본문제를 자주 다뤄온 격월간지 「순국」도 이와같은 맥락에서 3·4월호에 「한국현대사를 움직인 친일군상」이라는 특집을 실고 친일문인과 친일교육계인사,친일화가·음악가·영화인 그리고 언론인등으로 분야를 나눠 친일파문제를 다루고 있다. 지난 2월말 반민족문제연구소(소장 김봉우)가 주최한 「식민지배 청산문제의 민족사적 이해」라는 주제로 열린 3·1절기념학술심포지엄에서도 친일파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됐는데 이 자리에서 참석자들은 친일파문제를 비롯,식민지배의 청산은 민족의 주체적·평화적 재통일의 방향을 설정하는데 불가결한 밑거름이라는데 의견을 모으고 연구에 박차를 가할 것을 다짐했었다. 그러나 친일파연구는 친일파의 대명사격인 이완용이라는 인물을 분석해놓은 논문 한편 없을 정도로 아직은 미진한 상태이다. 이에대해 서중석교수는 『현재 학계의 연구가 초보단계에 머물러있지만 관련자료도 풍부하고 연구의 필요성에 인식이 모아져 일단 연구만 시작되면 해방전후 우리 현대사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의 기초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학계의 연구와 함께 최근 정신대문제와 MBC­TV에서 방영되고 있는 「분노의 왕국」등을 둘러싼 한일양국간의 외교적인 갈등,일본의 재무장·군사대국화의도의 표면화,그리고 백범 김구선생의 암살배후에 대한 새롭게 밝혀진 사실등이 맞물리면서 고조된 친일파와 일본에 대한 국민적인 관심은 일시적인 호기심의 차원이 아니라 진정한 과거청산의 계기가 되어야한다는 지적이 많다.
  • 일­북한 조기수교 추진에 불만/가네마루 피격사건 배경

    ◎우익단체의 협박전화·화염병투척 불씨 일본의 막후 실력자 가네마루신(김환신)자민망부총재 저격사격은 일·북한국교정상화를 서둘러야 한다는 그의 대북한정책에 대한 불만의 표시로 보인다. 가네마루는 그동안 일본의 우익단체들로부터 「나라를 팔았다」는 등 많은 비판을 받아 왔다.지난해 11월1일에는 그의 자택에 화염병이 투척되었으며 협박전화와 투서등이 끊이질 않았다.이번의 저격미수범도 우익단체 회원으로 밝혀졌다. 가네마루에 대한 이같은 비난은 그가 지난 90년 9월 다나베(전변)당시 사회당부위원장(현위원장)과 북한을 방문,북한로동당과 「3당 공동선언」을 발표한 이후부터 계속되어왔다.이 공동성명은 「조선은 하나」라고 명시하고 전후 45년간 일본이 북한을 적대시한데 대한 보상의무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가네마루의 3당공동선언은 일본에서 즉각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일본에서는 외교문외한들에 의한 「매국외교」니 「굴욕외교」니 라는 비판이 한동안 시끄러웠다.일본외무성도 『정당간의 성명이 정부에 구속력을 행사하지 못한다』고 반발했다. 가네마루의 북한방문은 이같이 일본에서 큰반발을 불러 일으켰지만 북한과 일본이 국교정상화 회담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 여야수뇌부 휴일유세 이모저모/“동서·남북화합이 3당 통합정신”

    ◎“깨끗한 선거는 유권자 손에 달렸다”/민자/“YS바람 차단할 묘안 없을까” 고심/민주 여야수뇌부는 일요일인 23일 각각 수도권과 지방에서 지원유세를 계속하며 지지를 호소했다. ▷민자당◁ ○…자신의 「텃밭」인 부산 경남지역 지원활동에 나선 김영삼대표는 23일 경남거창(위원장 이강두)지구당개편대회와 진주(〃 조만후)지구당 당원단합대회에 참석,3당통합의 당위성을 다시한번 역설하며 민자당에 대한 압도적인 지지를 당부하는 것으로 3박4일간의 일정을 마무리. 김대표는 이날 진주지역이 야세가 강한 곳임을 감안,『동서화합의 「지역포용」,통일을 앞당기기위한 「남북포용」,그리고 능력있는 인재들을 끌어모으는 「인재포용」이 3당합당의 기본정신』이라고 강조하면서 이곳에서 하순봉전의원(민정계)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민주계의 조의원을 적극 밀어줄 것을 당부. 김대표는 또 거창대회에서 이지역 출신으로 민주계 2인자였던 고금동영정무장관의 탁월한 정치적 능력을 회고하면서 연설도중 잠시 울먹여 숙연한 분위기를 연출. 김대표는 『고금장관은 앞으로 엄청난 일이 많이 남아있는 이때,잃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인물』이라며 그의 분신인 이강두신임위원장의 압도적인 승리를 호소. 한편 김대표는 이날 민주당의 이기택대표가 진주에서 지구당창당대회에 참석,강한 대여포문을 열며 「야도」로서의 명예회복을 촉구했음인지 민자당의 집권능력,야당측 주장의 허구성 등을 유난히 강조해 눈길. ○…김종필최고위원은 이날 수유리 세일극장에서 열린 도봉갑지구당(위원장 신오철)대회에서 행정편의주의를 막기위한 국회의 권한강화와 통일정국을 대비하기 위한 인물육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유권자들의 현명한 판단을 호소. 김최고위원은 『우리보다 40년 정도는 뒤떨어진 북한을 아무런 준비도 없이 끌어안자는 것은 같이 자빠지자는 것과 다를바 없다』며 관념적 통일론을 경계하며 「통일대비론」을 역설. 김최고위원은 또 『돈 안쓰는 선거를 위해선 당원동지 여러분들이 돈을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뒤 『국회가 잘 되느냐 못되느냐의 책임은 바로 유권자에게 있다』고 강조. ▷민주당◁ ○…김대중·이기택공동대표는 23일 각각 수도권과 경남일원의 지구당을 순회하며 선거지원활동을 계속. 특히 이대표는 이날 경남지역에 대한 첫 지원유세로 진주시(위원장 김재천) 진양군(〃 강갑중)지구당대회행사에 참석,「야당전통」의 부활을 호소하는 등 이 지역을 순회중인 김영삼 민자당대표에 대항한 맞불작전. 김대표는 경기 의정부(위원장 문희상) 고양(〃 이교성) 마포을(〃 김현규)지구당대회에서 『극심한 교통난과 항만체선은 이 정권의 무능을 단적으로 드러낸 예』라고 교통문제를 중점거론하며 제2경부고속도로건설등 5대 교통공약을 제시. 이대표는 진주 남강회관에서 열린 지구당대회 지원연설을 통해 『3당야합한 김영삼씨는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 이완용과 다름없다』고 인신공격을 퍼부으며 『야도의 전통을 간직한 진주시민이 김영삼씨를 심판해 달라』고 정면공세. 민주당측은 이날 바로 옆장소에서 열린 민자당진주지구당대회를 의식,김정길 노무현의원등 부산·경남북일원 지구당위원장및 청중 2천여명을 동원하는 등 전력투구했으나 이 지역에 일기 시작한 「YS바람」때문에 고심하는 표정이 역력했는데,이대표도 『YS바람을 누그러뜨릴 묘안이 없겠느냐』고 답답한 심정을 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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