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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親日의 군상:6/‘친일파 1호’ 金麟昇(정직한 역사 되찾기)

    ◎日帝 침략선 타고와 모국 침탈 앞장/1875년 ‘운양호사건’ 전후 日에 침략정보 제공/日 통역으로 강화도조약 체결에 결정적 역할/日本식 두발·복장에 ‘皇國 절대 충성” 다짐/한때는 선비정신 소유자/日 속셈 모르고 매국 행위/背族 대가는 日의 멸시뿐 1876년 2월4일 강화도 초지진(草芝鎭) 앞바다에 일본 군함 한 척이 출현했다.1월6일 일본 시나가와만(品川灣)을 출발,부산을 거쳐 온 이 배에는 일본 정부의 특명전권변리공사(特命全權辨理公使)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일행이 타고 있었다.구로다 일행은 6개월 전에 발생한 ‘운양호(雲揚號)사건’을 빌미로 조선과 강제로 수교조약을 맺으러 오는 길이었다. 구로다를 포함해 무려 800여 명에 달하는 일행 가운데 일본인 복장을 한 조선인 한 명이 끼어 있었다. 그의 이름은 金麟昇(생몰연대 미상). 그는‘운양호사건’ 이전부터 일본측과 내통하면서 일본을 도와오다가 이제 그 마무리 작업인 조약(강화도조약)체결을 돕기 위해 동행한 통역이었다. 임진왜란 때도 일본에 협력한 ‘친일파’는 있었지만근대적 의미에서 金麟昇보다 앞서는 친일파는 없다.친일파 연구가 고(故) 林鍾國씨 역시 그를 ‘친일파 1호’로 꼽았다.조선조 말기 양반계층의 지식인이었던 그가 친일의 길을 걷게되는 과정은 이후에 등장하는 친일파들의 행태와 유사한 점이 없지 않다.그의 친일행적 연구는 일제하 친일파 연구의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金麟昇의 친일행적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그는 해외에서 일제의 외국인 고문(顧問)으로 고용돼 비밀리에 활동한 까닭에 국내에는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林鍾國씨 조차도 그의 글에서 ‘김인승’이라는 이름 석자만을 기록했을 뿐이다.몇몇 역사학자 역시 논문에서 그를 언급한 바는 있으나 친일활동의 전모를 밝히지는 못했다. 金麟昇의 친일행적은 지난 96년 2월 성신여대 具良根 교수(당시 도쿄대 외국인 연구원)가 발표한 한 논문을 통해서 그 전모가 드러났다.具교수는 일본 외무성 사료관에서 입수한 3건의 자료를 토대로 ‘일본외무성 7등출사(七等出仕·일본의 구식 관직명) 세와키 히사토(瀨脇壽人)와 외국인고문(顧問)金麟昇’이라는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친일파의 ‘선구자’격인 金麟昇의 친일행적을 추적해 보자. 金麟昇은 함경북도 경흥(慶興)태생으로 본관은 김해(金海).7대조 때 경흥으로 이사한 뒤로 그의 집안은 토반(土班,지방의 양반)으로 전락하였다.그는 16세 때부터 경흥부(慶興府)에 근무하면서 상당한 직책을 맡기도 했다.그러나 이 지역에 대홍수와 기근이 몰아치던 1869년 그는 모종의 일로 이 지역 수령과의 의견충돌 끝에 관직을 그만두고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땅 니콜리스크(당시 한국명 吹風,블라디보스토크 북방 50리)로 탈주하였다. 이곳에는 그 뒤 식량을 찾아 월경(越境)한 조선인 유랑민이 대거 몰려들었는데 한학실력이 출중했던 그는 여기서 학교를 열고 생도들을 가르쳤다.그러던중 여기서 다케후지 헤이가쿠(武藤平學)라는 한 일본인과 사귀게 된다.다케후지는 원래 양학(洋學,서양의 신학문)을 공부하려고 집을 나왔다가 블라디보스토크까지 흘러오게 된 사람이었다.바로 이 다케후지가 나중에 그를 친일의 길로 이끈 첫 안내자가 된다.한편 이무렵 러시아가 부동항(不凍港)을 찾아 남진(南進)정책을 강행하자 1875년(明治 8년) 4월 일본정부는 외무성 7등출사 세와키 히사토(1822∼78)를 블라디보스토크와 포셋 지방에 파견,러시아와 교섭을 갖게 하였다. 세와키는 공식적으로는 일본 외무성이 블라디보스토크에 무역사무소를 개설키 위해 파견한 외교관이었지만 사실상 정탐꾼이었다. 일본 외무성이 그에게 준 ‘출장명령서’(1875년 4월4일)의 임무 부분은 ‘탐색’,‘정탐’인데 이 중의 절반은 의외로 조선에 대한 것이었다.명령서에는 구체적으로 ‘조선인을 고용하여 조선땅으로 들어가서 토지·풍속 등을 탐색하고 올 것’ 등이 명기돼 있다.그러나 어떤 연유에서인지 세와키는 조선에 들어가지 못했다.대안을 모색하고 있던 세와키는 여기서 일본인 다케후지를 만나 문제의 金麟昇을 소개받는다.金麟昇의 학식과 경험을 높이 산 세와키는 귀국길에 그를 일본으로 데리고 갔다. 이무렵 일제는 다수의 외국인 고문을 고용하고 있었는데 1874∼75년에는 그수가 약 2,000명에 달했다.운양호사건(1875년 9월20일),강화도조약(1876년)이 체결되기 바로 직전의 일이다.당시 일제는 조선에 ‘황국(皇國)의 군현(郡縣)’을 설치하여 이를 근거로 대륙을 침공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외국인 고문 채용은 이를 대비하기 위한 사전포석이었다.그리고 그 첫 군사행동이 바로 ‘운양호사건’이었다. 1875년 7월 세와키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간 金麟昇은 운양호사건 발생직전 1차로 3개월간(8월1일∼10월30일) 일본정부와 외국인 고문 고용계약(日給 1원)을 맺었다.당시 일본 외무성이 그를 고용한 목적은 ▲만주지방 지도작성 ▲북방사정 탐색 ▲조선 침략용 지도작성 ▲기타 필요한 사항에 대한 자문 등.이중에서 金麟昇이 일본측에 크게 도움을 준 부분은 조선에 관한 사항이었다. 1875년 일본 육군참모국이 조선 침략용으로 작성한 ‘조선전도(朝鮮全圖)’는 金麟昇의 자문을 받아 작성된 것이다.지도 하단부에 적힌 ‘조선 함경도인 모(某)씨에게 친히 그 지리를 자문받고…’의 모씨는 바로 金麟昇을 지칭한 것이다.지도 외에도 당시 조선사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계림사략(鷄林事略)’ 역시 그의 자문을 받아 출간됐다. 한편 1차 계약기간중인 10월부터 金麟昇의 급료가 월급제로 바뀌면서 금액수 두 배로 늘어났다.당시 일본 외무경(현 외상) 데라시마(寺島宗則)는 태정 대신(太政大臣,총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조선어는 물론 한학,시문(詩文)이 능통하여 아주 유용한 인물로…한지(韓地,조선)에서도 쉽게 구할 수 없는 인물입니다…’라고 그를 평가하였다.일제는 강화도조약 체결을 앞두고 그를 적절히 활용할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실지로 그는 강화도조약 체결(1876년 2월27일) 이후까지 거의 1년동안 도쿄에 머물면서 조선침략을 위한 갖가지 정보와 조언을 일본측에 제공했는데 결정적인 공헌은 역시 강화도조약 체결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1876년초 강화도조약 체결을 앞두고 일본정부의 대표 구로다 특명전권공사가 그에게 동행을 요구하자 그는 ‘이번 수행에서도 만약 머리를 깎지않고 의복을 바꾸지 않으면 이는 제가 조선인을 자처하는 일이며 일본인의 입장에 처하는 것이 아니니 어찌 황국(皇國,일본)의 신임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라며 황송해 했다.심지어 ‘끓는 물,타는 불 속이라도 어찌 고사하겠는가’라며 일제에 충성을 맹세하였다. 1876년 2월4일 강화도에 도착한 구로다 일행은 1주일만인 2월10일 강화부(江華府)에 상륙하여 다음날 11일부터 담판에 들어갔다.조약이 체결되기까지는 보름 이상이 걸렸다.이 기간동안 그는 강화도 앞바다에 정박한 일본군함에 머무르면서 공문의 한문번역과 수정책임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그는 조약체결 과정에서 수시로 일본측에 조언을 해주었는데 구로다에게는 조선관리설득방책 18개항을 서면으로 제출하기도 했다.여기에는 전신기(電信機)사용을 권장하는 내용에서부터 ‘여러 말 할 필요없다.청국(淸國,청나라)은 그처럼 인구가 많고 땅이 넓은데도 먼저 일본에 강화조약을 청하여 맺었다.두루살펴 깊이 생각하라’(18항)는 등 공갈·협박성 문귀도 들어 있다. ‘직량(直亮)’한 성격에 동포애도 강한,조선의 전통적 선비정신의 소유자였던 金麟昇.당시 그는 일본의 속셈을 헤아리지 못한 채 ‘일본과 조선은상맹상통(相盟相通)의 나라’로 보고 일본의 강화도조약 체결 추진에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조약 체결후 일본으로 돌아간 그는 얼마후 러시아로 되돌아갔는데 도쿄에서 남긴 한 편지에서 ‘거리에서 듣기 불편한 말들이 들리고 길을 걸으면 조심스럽고 두려운 마음이 든다’고 적었다.‘친일파 1호’가 배족(背族)의 대가로 일본인들로부터 받은 보상은 멸시와 증오였다.그 이후 대개의 친일파들이 그러했듯이. ◎강화도 조약/日,운양호사건 고의 유발뒤 강제 체결/총 12조… 韓日간 맺어진 첫 불평등조약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은 병자년에 체결됐다고 해서 일명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으로도 불리는데 정식명칭은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조선과의 국교를 줄기차게 추진해온 일본은 조선정부의 쇄국정책으로 교섭이 난항에 빠지자 1875년 9월 20일 해안측량을 빙자하여 ‘운양호사건’을 고의로 유발했다.이를 빌미로 일본은 군함과 함께 구로다를 전권대사로 파견,1876년 2월 27일 조선측 대표 판중추부사 申櫶을 상대로 수교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였다. 총 12조로 구성된 이 조약은 ▲부산 이외에 원산·인천 추가 개항 ▲조선연해 측량권 허용 ▲개항장 내 조계(租界)설정·일본인의 치외법권 인정 등 일본측에 유리한 내용들 뿐이다.이 조약은 국제법적 토대 위에서 양국간에 이뤄진 최초의 외교행위이자 최초의 불평등 조약이기도 하다.
  • 親日의 군상:1­2/외국의 민족반역자 처벌(정직한 역사 되찾기)

    ◎佛,나치 협력자 15만명에 실형/대만­비밀경찰조직 軍統局서 명단 작성/중국­‘인민의 적’ 규정… 인민재판 통해 처단 2차대전 종전은 4년에 걸친 세계대전의 종막을 고함과 동시에 준엄한 단죄의 서곡이기도 했다.종전후 승전국들은 ‘전범재판’을 통해 패전국의 전쟁지도자들을 처단했으며,일부 피지배국가들은 자국내의 민족반역자들에게 준엄한 단죄를 하였다. 유럽의 ‘뉘른베르크재판’과 일본의 ‘도쿄재판’이 전범재판이라면,프랑스를 비롯한 일부 유럽국가와 중국 대만 등이 외세협력자를 처단한 것은 반민족행위자 재판이라고 할 수 있다.이들 국가는 종전 직후 민족반역자들을 법정에 세움으로써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암울했던 피지배의 역사를 극복할 수 있었다.반면 우리는 해방후 제헌국회에 구성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친일파들의 방해로 도중에 와해,친일파 척결은 ‘미완의 역사’로 기록돼 왔다.외국의 반민족행위자 단죄의 실상을 알아본다. ○150만∼200만명 연루 ▷프랑스◁ 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처단은 1944년 드골장군이 나치협력자 처단은 전담재판소 개설과 ‘비(非)국민제도’ 창설을 골자로 하는 훈령 발포로 본격화됐다.저항작가 장 포랑의 연구에 따르면,이 숙청조치에 관련된 사람은 모두 150만∼200만명으로 추산된다.이들중 죄상이 경미한 99만명은 1개월 이내에 풀려났으나 15만여명은 실형을 선고받았다. 나치에 협력한 비시정권의 원수격인 페탱을 포함,3부요인 등 고위인사를 특별심판한 최고재판소는 1960년까지 계속된 재판에서 총 108건을 처리,18명에게 사형,25명에게 징역형을 선고하고,15명에게 공민권 박탈조치를 내렸다. 페탱은 고령이라는 이유로 사형집행정지 처분을 받았으나 감옥에서 자살하였다. ○지식인 대부분 중벌 일반법원은 총 취급건수 14만건중에서 4만여건을 시민법정에 이송하고 나머지 5만7천건을 재판하여 6,763명에게 사형,2,777명에게 종신 강제노동형,2만6,529명에게 유기 강제노동형,3,678명에게는 공민권 박탈을 선고했다.사형선고를 받은 자 가운데 779명은 실제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또 지방법원은 총 12만건을 재판에 회부,4,783명에게 사형선고를 내렸으며 이들중 3,000여명의 사형이 집행됐다.시민법정 역시 다수의 나치협력자를 처단하였다.11만5,000여건을 취급하면서 9만5,000명에게 ‘비국민 판정’을 내렸다.비국민 판정은 선거권 박탈,공직진출자격 박탈,무기 소유·휴대 금지 등 사실상 시민의 권리를 박탈한 준 사법적 조치로,이는 반역자들을 매장하고 그들의 재부상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해 고안한 프랑스 특유의 ‘발명품’으로 불린다. 드골정부는 특히 나치에 협력한 언론인과 작가 등 지식인을 대부분 사형·무기징역 등 중벌로 다스렸다.나치지배하 비시정권에 협력한 원로언론인 6명이 사형선고를 받은 것을 비롯해 저명한 작가·시인들도 예외없이 준엄한 심판을 받았다. ○2년5개월 漢奸재판 ▷중국·대만◁ 전후 중국과 대만은 각자 친일파를 처단하였는데 처단방식에서는 서로 차이가 있었다.우선 중국은 1946년 4월부터 2년5개월에 걸친 ‘한간재판’(중국에서는 친일파를 한간이라 부름)에서 ‘인민재판’ 방식을 취했다.피의자에 대해 검찰의 조사가 끝나면 민중들로 구성된 배심원들이 공개된 장소에서 민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재판을 진행,군중들의 참여를 유도하였다.중국공산당 정부는 인민재판을 통해 민중들의 울분을 정화시키고 민심을 살 목적으로 이 방식을 취하였다.특히 중국공산당 정부는 친일파를 ‘인민의 적’으로 규정,한간재판을 통해 봉건세력을 제거하고 동시에 혁명의 기반을 닦는 계기로 활용하였다. ○‘유전무죄’ 유행하기도 한편 蔣介石의 국민정부는 국가가 공권력을 동원,피의자를 체포·기소·재판하는 ‘규문(糾問)주의’방식을 취하였다.국민정부는 비밀경찰조직인 군통국(軍統局)이 작성한 한간 명단을 근거로 ‘한간사냥’을 진행하였는데,가정부로 위장해 근무해오던 특무요원이 그 주인을 체포한 예도 있었다. 국민정부는 그러나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유행어가 나돌 정도로 관련 공무원들의 부패가 심했던데다 1심판결로 사형을 집행하는 등 감정적 처리가 빈발했었다.또 재판관중에 친일파가 포함된 사실이 밝혀져 국민정부의 신뢰가 땅에 떨어진데다 국민정부측이 汪精衛(일제의괴뢰정부인 남경정부의 주석)의 무덤을 폭파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민중의 거센 반발을 사기도 했다. ◎한국의 경우/친일파 청산 ‘용두사미’/반민특위 의욕적 출발… 사형선고 1명마저 석방 49년 1월 8일 화신백화점 사장 朴興植의 검거를 시작으로 본격 활동에 들어간 반민특위는 8월말 업무를 마감할 때까지 8개월동안 총 682건(여자 66명 포함)을 처리하였다. 이중 반민특위는 중추원 참의 등 당연범 198건을 포함,408건에 대해 영장을 발부하여 이들중 305명은 체포(자수 61명 포함)하였고 미체포자는 173명이었다.또 반민특위는 이들중 84건을 석방하고 559건을 검찰에 송치하였는데 221건이 기소되었다. 기소사건 가운데 특별재판부에서 재판이 종결된 건수는 38건으로 이중 체형선고는 12건이었다.최고형인 사형은 일제 고등경찰 출신의 金悳基가 유일하였는데 그는 6·25 직전 감형으로 풀려났고 나머지 유죄판결자 역시 이같은 경로로 전부 풀려났다.결국 반민법 해당자로 처단된 자는 아무도 없는 셈이다. 당초 반민특위는 반민족행위자를 7천명 정도로 잡고 왕성한 의욕을 보였으나 친일파의 방해와 인력부족,중도에 공소기간 단축으로 친일파 청산은 결국 용두사미로 끝나고 말았다. ◎친일 문제 반드시 청산돼야/민족통일과 연결… 새 역사 출발점으로/姜萬吉 고려대 교수·한국사 해방후 반세기가 지난 지금 일제 강점시대의 친일파들은 대부분 죽었다.따라서 아직도 친일문제가 논의되어야 하는가,친일파 문제가 과연 현실문제인가 하는 의문이 있을 법도 하다.그러나 친일문제는 엄연히 현실문제요,지금부터라도 반드시 청산되어야 할 문제다. 역사교육 및 사회정의 차원에서 친일파 문제는 청산돼야 하며 그것은 오늘의 현실적 과제이다.역사에서 李完用 등은 분명히 매국노라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그 매국행위로 얻은 재산은 고스란히 후손들에게 전해져 있는 게 현실이다.그밖의 친일행위자들도 그 자신이 단죄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친일행위로 얻어진 정치·경제·사회적 기반이 후손들에게 전해져서 그대로 누려지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매국재산 버젓이 상속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역사교육이란 것이 왜 필요하며,사회정의라는 말이 왜 있어야 하는가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반세기가 아니라 1백년이 지났다 해도 반민족행위에 대한 역사적 청산이 불가피함을 알게 된다. 친일파 문제가 청산되지 않음으로써 친일 논리가 청산되지 않은 또 다른 중요한 과제가 남아 있다.李完用을 비롯해서 크고 작은 친일파들은 그때 그때마다 저들의 친일행위를 합리화하는 논리들을 내놓았다. 그것을 요약하면,한 시대 한 민족의 주권이 누구에게 있는가,그 역사를 누가 주체가 되어 움직여 가는가,그 사회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전진해 가는가 하는 문제보다 주인이야 누구든,폭압통치가 자행되건 말건,그 사회가 물량적으로 ‘풍부’해지고 경제적으로 ‘발전’하기만 하면 역사가 발전된 것으로 봐야 한다는 식의 논리라 할 수 있다.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하던 시기,그들에 의해 조작되었던 이 되지 못한 논리가 이른바 한·일 국교 재개 이후 일본 학계에서 다시 살아나더니,어느 틈에 우리 학계의 일각에서도 동의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이렇게 된 원인의 하나는 해방 후 반세기가 지나도록 친일파들의 자기합리화 논리를 우리가 이론적으로 극복하지 못한데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이래도 친일파 문제가 현실문제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친일 논리를 극복하지 못하는 한 그것은 언제나 현실문제로 되살아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친일문제 청산은 일본과의 문화교류 확대를 위한 전제조건으로서도 중요한 문제다.지금 우리는 일본 대중문화를 개방하려 하고 있다.그런데도 일본은 아직 과거의 침략행위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고 가르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군국주의 찬양 문화물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일본 대중문화에 대해 벽을 쌓고 지낼 수는 없다.우리의 문화적 주체성을 확립하려면 그 벽을 낮추어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일본문화 개방 폭을 넓히는 전제조건으로서,또 우리의 문화 주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방법으로서,일제시대 반민족행위에 대한 역사적 청산은 불가결하다. ○日 문화개방 전제조건 친일문제 청산이 민족통일문제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도 매우 중요하다.통일이 어느정도 전망되고 있지만,통일의 시점이 바로 민족사의 새로운 출발점이 될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그 출발점에서 중요한 문제의 하나로 부각될 일이 바로 식민지 잔재 청산일 것이다. 이미 교환된 남북합의서는 어느 한 쪽에 의한 흡수통일이나 우위통일이 아니라 분명 남북 대등통일을 약속하고 있다.통일이 이루어지는 시점에서 분단시대 청산은 바로 일제시대 청산과도 연결될 것이며,이 점에서도 남북 양쪽이 대등한 조건을 갖추는 일이 중요하다.이렇게 보면 친일파 청산은 현실적 문제일 뿐만 아니라 미래지향적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 親日의 군상:1­1/시리즈를 시작하며(정직한 역사 되찾기)

    ◎친일파 청산 ‘참된 역사’의 출발/日帝 앞잡이 기득권층 형성… 反통일세력화/민족자존 위해 더 미룰수 없는 ‘금세기 숙제’ 20세기 우리 현대사에 등장한 용어중 ‘친일파’만큼 불명예스런 것도 없다.‘친일파’로 한번 낙인찍히면 씻을 수 없는 오욕으로 영원히 남아 왔다. ‘친일파=매국노=반민족행위자’라는 등식으로 인식되는 친일파문제는 지금에 와서도 민감한 사안으로 남아 있다.이 문제는 그동안 쉽게 손대기가 어려웠고 학계에서조차 ‘쓰이지 않은 역사’로 방치돼 왔다. ○‘쓰이지 않은 역사’로 방치 친일파문제는 그 죄상(罪狀)에 대해 단죄는 물론 역사적 평가도 없이 오늘에 이르렀다.간헐적으로 친일논쟁이 터질 때마다 우리사회에서 과민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직도 불씨가 남아 있다는 증거다.수 년전 매국노 李完用 후손의 ‘땅찾기 소동’은 친일파문제가 얼마나 민감한 이슈인가를 잘 보여주었다. 민감한 이슈를 이 시점에서 다시 거론하는 것은 왜인가?그 이유는 해방 반세기가 지나서도 마치 ‘역사의 미라’처럼 온존해 있는 친일파문제를 금세기내에 매듭짖고 정의가 살아있는 정직한 역사를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그동안 우리 사회는 해방후 친일잔재를 척결하지 못한 탓으로 민족정기가 땅에 떨어지고 가치관의 혼란도 극심했었다.일부 친일파들은 독립유공자로 둔갑해 훈장을 받기도 하고 심지어 독립유공자들의 공적을 심사하기도 했다. 친일 문인의 작품이 최근까지 교과서에 버젓이 실렸는가 하면 국립묘지에는 아직도 친일 경력자가 묻혀있다.친일파연구가 고(故) 林鍾國 선생은 친일파청산의 의의를 “철저하게 짓밟혀 버린 민족자존을 회복하고 자손만대에 민족정기가 살아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라고 지적했다. ○親日 논리·행적 기록 남겨야 일제 앞잡이 친일파들은 해방후 이승만 정권의 비호아래 신생 대한민국의 새로운 지배층으로 변신하였고 다시 군사 독재정권에 와서는 ‘영원한 기득권층’으로 자리잡았다.이들중 대다수는 극우·반공논리로 무장하여 반(反)통일세력을 형성해왔고 또 독재권력옹호자,매판자본가,어용지식인,심지어 한·일 외교무대에서 굴욕외교에 앞장서기도 했다.이런 상황에서는 통일과 민족정기를 논할 수 없다. 이제 친일파 청산문제는 더이상 다음 세기로 미룰 수 없다.이제라도 역사학계와 연구자들은 그들의 친일논리와 행적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그러나 이같은 작업은 개인에 대한 단죄차원보다는 과거사 청산과 올바른 가치관 확립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동국대 법학과 韓相範(64) 교수는 “우리사회의 부패·모순구조는 해방후 친일파 척결을 하지못한데서 기인한 것”이라고 분석하고 “금세기가 가기전에 우리사회가 친일파 청산작업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친일파의 정의와 범주/매국노·식민정책 협력자 통칭/독립신문 7개 부류 첫 거론/제헌국회 反民法 구체 규정 보통명사‘친일파’의 사전적 의미는 ‘일본과 친하게 지내는 개인이나 무리’정도로 풀이할 수 있다.그러나 우리 근현대사에 등장하는 ‘친일파’의 경우 그들이 활동한 시기와 일본과 친하게 지낸 정도 면에서 차이가 있다.후자의 경우 ‘을사조약을 전후하여 해방전까지 일본제국주의와 가깝게 지내면서 매국(賣國)에 가담했거나 또는 일제강점하에서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협력한 자’들을 통칭한 것이다.따라서 이 경우 ‘친일파’는 매국노,반민족행위자,민족반역자 등과 같은 뜻으로 통용되고 있다. 20세기 전반 외세지배를 겪은 나라들은 대개 우리의 ‘친일파’와 유사한 의미의 용어를 가지고 있다.중국은 일제에 협력한 자들을 ‘한간(漢奸)’이라고 부른다.‘중국인으로서 적과 통모(通謀)하여 반역죄를 범한 매국노’라는 뜻이다.프랑스는 나치정권에 협력한 반역자를 ‘나치협력자’로 부르고 있다.이같은 용어들은 ‘민족반역자’라는 의미를 공통적으로 담고 있는데 전쟁범죄자인 ‘전범(戰犯)’과는 의미가 다르다. ‘친일파’는 구체적으로 어떤 자들을 가리키는가.친일파의 범주에 대한 첫 거론은 1920년 상해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이 보도한 ‘칠가살(七可殺)’이다.이는 당시 독립진영에서 처단대상자로 지목했던 매국적(賣國賊)·친일관료·밀고자 등으로 7개 부류로 대단히 포괄적인 내용이었다.친일파의 범주가 구체적으로 논의된 것은 해방후의 일이다.미군정하 남조선과도정부 입법의원은 1947년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간상배에 대한 특별조례법’을 만들면서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규정하였다.이 법은 민족반역자와 부일협력자를 따로 구분하고 있으며 8·15 이후의 간상배까지 처벌대상으로 삼고 있다.부일협력자의 경우 악질적인 친일파는 물론 일본인과 결혼한 자,일본말을 상용한 자,또 민족반역자의 경우 만주에서 활동한 경찰관까지 포함하고 있다. 한편 제헌국회가 제정한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은 친일파의 범주를 보다 구체적이고 한정적으로 규정하였다.이 법은 제1조∼5조에 걸쳐 친일파의‘죄’를 규정하고 있는데 매국노·수작자·고급관료·악질분자 등을 대상자로 규정하고 있다.서울대 사회학과 신용하(愼鏞厦) 교수는 “반민법에서 규정한 친일파는 제한된 직위와 악질적인 반민족행위자만을 대상으로 했다”고 지적했다. □제헌국회 제정 반민족행위처벌법 조 항 반민족행위자 분류 현 황 제1조 ①일본과 통모(通謀)하여 ①사형또는 무기징역 한일병합에 적극 협력한자 ②그 재산과 유산의 ②한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전부 혹은 2분의1 조약 또는 문서에 조인하거나 이상 몰수 모의한 자 제2조 ①일본정부로부터 작위(爵位)를 ①무기징역 또는 5년 받은자 이상의 징역 ②일본제국의회의 의원이 된 자 ②그 재산의 전부 혹은 2분의 1이상 몰수 제3조 ①독립유공자나 그 가족을 ①사형,무기징역 또는 악의적으로 살해,박해한 자 5년 이상의 징역 ②또는 이를 지휘한 자 제4조 ①습작(襲爵)한자 ①10년 이상의 징역 ②중추원 부의장,고문 또는 참의를 ②또는 15년 이하의 지낸 자 공민권 정지 ③칙임관 이상의 관리를 지낸 자 ③그 재산의 전부 ④밀정행위로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 혹은 일부 몰수 ⑤독립운동을 방행할목적으로 단체를 조직했거나 그 단체의 수뇌간부로 활동한 자 ⑥군,경찰의 관리로서 악질적인 행위를 한 자 ⑦비행기,병기,탄약 등 군수공업을 책임경영한 자 ⑧도(道),부(府)의 자문 또는 결의기관의 의원을 지낸 자 ⑨관공리로서 직위를 이용하여 민족에게 해를 가한 악질분자 ⑩각종 친일단체의 수뇌간부를 지낸 자 ⑪친일 언론·저작활동을 한 문화계 인사 ⑫개인으로서 일제에 적극 협력한 자 제5조 ①고등관 3등급 이상,혹은 ①반민법 공소시효 훈5등급 이상을 받은 관리 결과전까지 공무원 ②헌병,헌병보,고등경찰을 지낸 자임용금지(단,기술관 은 제외) ◎‘친일의 군상’ 자문위원 12명 위촉/객관·공정성 검증… 반론권 보장합니다 서울신문사는 미래지향적 차원에서 친일파 청산을 위해 기획한 ‘친일의 군상’시리즈를 보다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보도하기 위해 12명의 자문위원을 위촉했습니다. 자문위원은 역사학자·변호사·종교가·언론인 등 관계 분야의 저명한 인사들로 구성됐습니다.모든 글은 자문위원들의 검증과 명예훼손 등 법적 검토를 거쳐 게재됩니다.자문위원은 인물 선정에도 참여하며 정기적으로 만나 시리즈의 내용을 종합 평가하고 앞으로의 방향 등에 대해 조언할 것입니다. 서울신문사는 특히 보도된 내용에 대한 반론권을 보장합니다. 자문위원명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金祐銓 전 광복회 부회장 ▲姜萬吉 고려대 교수(한국사) ▲韓相範 동국대 교수(법학) ▲李炫熙 성신여대 교수(한국사) ▲朴鍾淳 충신교회 담임목사(한국기독교총연합회 공동회장) ▲李泰鎭 서울대 교수(한국사) ▲姜昌一 배재대 교수(한일관계사)▲朴元淳 변호사(참여연대 사무처장) ▲朴은慶 광운대 강사(정치학) ▲林大植 외국어대 강사(한국사) ▲金三雄 서울신문 주필(친일문제연구가) ▲崔光一 서울신문 제작이사
  • 국난 극복을 위하여/金承均 남북민간교류협의회 이사장(서울광장)

    K형. 담시 오적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병보석으로 출감하여 형의 근무처인 민주전선을 찾은 것이 어제 같소 그려. 그때 민주전선 편집국장도 함께 구속되었기에,아니 김세영 선생이 특별히 사상계와 민주전선에 애착을 갖고 있어서 인사차 방문했었고,그때 K형은 감옥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불려가서 심하게 조사받고 오적시가 게재되어 있던 민주전선이 몽땅 압수되었다고 비분강개하던 것이 기억에 생생하오. 나는 그 후 천관우·함석헌·김재준·이병린 선생님을 모시고 민주수호국민협의회 일을 했지 않았소. 독재를 물리치려면 선거나마 공정하게 치러야 한다면서 선거참관단을 조직,전국에 파견하던 그 기개와 그 장엄함,살벌하던 독재에 항거하여 민주수호의 기치를 높이 들고 불호령하던 노지사들의 모습이 아련한데 그 분들은 모두 이 땅에 계시지 않는 구려. ○새로운 가치질서 확립 그 분들의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고결한 인품,해박한 지식,불굴의 기백,절절한 국가민족에 대한 사랑과 인류애는 후학의 추종을 불허하는 경지의 어른들인데 소홀히 대접받고 있다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아쉬움을 털어내려는 듯 서울신문이 친일매국노를 단죄하고 민주열사들의 자서전을 연재하여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데 기여하겠다 하니 이 어찌 가슴 설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 수백만에 이르는 실업자들과 고통을 분담하기 위하여 명망 높은 성직자들과 시민단체가 발 벗고 나섰다는 보도는 “우리는 아직도 희망이 있구나”라고 자위를 하게도 합니다. 그런데 정부가 성취해야 할 두 마리의 토끼,즉 개혁과 통합이 방향을 잘못잡았다는 우려가 못내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습니다. 국민의 정부는 개혁을 전제로 탄생한 정부입니다. 국가부도의 원인이 정경유착에 의한 부정부패,관치금융,기업의 버블과 불투명성,이로 인한 국제투기꾼들의 외화 인출에 의한 유동성 부족이었다고 볼때 개혁은 하지 않으면 안되는 엄숙한 명제입니다. 통합도 그렇습니다. 어떻게 통합을 지역적 안배 차원에서만 바라볼 수 있겠습니까? 김영삼 정부 시절 역사 바로 세우기 차원에서 온국민의 지지 속에 처단했던 최규하·전두환·노태우에게 면죄부를 쥐어주면서 통합의 상태로 끌어올릴 수 있겠습니까? 낡은 권위주의,부정부패 등 전도된 가치관을 과감히 청산하고 민족문화를 창달함은 물론 새로운 가치 질서를 세워야 합니다. 권위주의시대 방식의 명망가 운동은 이제 약효가 없습니다. 그러한 방식은 살벌한 군사독재 시절 국민이 숭앙하던 지조 높은 어른이 나서야 국민이 용기를 내어 감히 독재에 항거할 수 있었던 시절의 한 모습니다. 이제는 지역단위 중심의 실업자 구호운동이 필요한 때입니다. ○실업자 구호운동 펴자 K형. 우리는 4·19혁명을 일궈낸 세대입니다. 혁명의 와중에서 반공청년연맹이 불탔습니다. 만약 혁명정부가 반공청년연맹을 부활시키려 했다면 국민정서가 받아드릴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새마을운동본부를 개조한다는 보도가 있습니다. 국민운동이 필요하면 새 운동을 일으키고 새마을운동 하던 사람들도 실사를 거쳐 구제하여 참여시키는 것이 좋습니다. 새마을운동 하면 우선 전 아무개의 이미지와 독선·억압·부정부패의 온상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국민정서에 어떻게 투영되어 있는지를 면밀히 고려해야 합니다. 단체의 정체성을 무시하면 게도 구럭도 잃는 결과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의식의 구조조정이 절실할 때입니다.
  • 공공기관 SW 정품구입 의무화

    ◎조달청,PC살때 아래아한글 등 일괄 구입 말 많던 정부 부처 내 컴퓨터 소프트웨어(SW)의 불법 복제품 사용 관행(본보 7월24일자 24면 보도)이 조만간 사라질 전망이다. 조달청이 정부의 SW 불법 복제품 사용을 근원적으로 막을 특단의 조치를 취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조달청은 4일 정부가 SW 불법복제품 근절에 앞장서기 위해 행정전산망용 컴퓨터와 행정업무용 SW에 대한 기존 계약 방법을 개선해 5일부터 시행키로 했다고 밝혔다. 조달청이 마련한 ‘소프트웨어 불법 복제품 사용 방지를 위한 제도개선책’은 정부나 공공기관이 새로 컴퓨터를 구입할 때 반드시 필요한 SW를 함께 구입토록 하고 있다. 컴퓨터 10대를 구입하려면 업무상 필요한 ‘아래아한글’ 등 SW 프로그램도 반드시 10개를 동시에 구입신청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를 어길 경우 해당기관은 조달청에 다시 컴퓨터 조달요청을 해야 한다. 현행 ‘조달사업에 관한 법률’은 정부기관이 5,000만원 이상의 물품을 구입할 때 반드시 조달청을 통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조달청이 먼저 대금을 지급하고 정부부처가 나중에 조달청에 돈을 지불하는 형식이다. 지금까지는 정부 부처가 컴퓨터를 구입코자 할 때 컴퓨터만 따로 구매요청을 할 수 있었다. 조달청 金衡律 구매국장은 “현행 제도하에서는 정부 부처가 컴퓨터만 사가고 SW는 안사가는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면서 “이번 조치가 SW 정품 사용 관행을 정착시키는 계기로 발전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조달청은 이를 통해 민간부문에까지 SW 합법사용을 촉진시키는 효과가 나타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한글과컴퓨터 등 국내 SW 업체들은 그동안 정부부처와 공공기관이 불법복제품 사용에 앞장서왔다는 주장을 끊임 없이 제기해왔다.
  • 일본 음악·뮤직 비즈니스…/우메다 가츠지 지음(화제의 책)

    ◎일본 음반유통·저작권 문제 다뤄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음반판매국가인 일본의 선진 음악업계를 소개. 음반평론가인 지은이는 특히 일본에서 음반은 어떻게 유통·판매되며,레코드회사와 가수 그리고 기획자들을 둘러싼 저작권 비즈니스는 어떻게 이뤄지고 있는가를 살핀다. 일본 음반매장은 정보발신기지로서 역할을 중시한다. 한 예로 79년 일본에 상륙한 미국의 거대 CD매장인 ‘타워 레코드’는 매장을 미디어 개념으로 파악,음반에 관한 정보를 제공한다. 또 레코드회사와 제휴하는 ‘프로모션 패키지’ 전략을 통해 홍보효과를 거두고 있다. 이 책은 최근 관심을 끌고 있는 디지털 복제 문제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다. 일본에 대한 문화개방의 핵심은 가요시장 개방이다. 이 책은 이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방안을 찾도록 도와준다. 김형찬 옮김 새로운 사람들 8,500원.
  • 오늘의 러시아

    ‘조금은 힘이 없어 보이는 듯한 흰색의 북극 곰.보드카 술병을 옆에 끼고 있는 옐친 대통령과 ECONONY(경제)가 씌어진 블록으로 놀이를 하고 있는 아기옷의 키리옌코 총리’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최근 풍자 만화를 통해 묘사한 러시아의 현주소다. 탈냉전과 더불어 구소련이 해체되면서 탄생한 러시아는 지금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엄청난 곤경에 처해 있다. 거덜나다시피한 최악의 경제 상황이 이를 말해준다. 러시아는 지난 13일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220억달러의 구제금융을 받아야만 했다. 한때 미국과 함께 양극체제의 한축이었던 러시아의 체면이 여지없이 구겨진 셈이다. ‘IMF 신탁통치’에 들어간 러시아 경제와 이로 인해 추락한 러시아의 국제 위상을 짚어본다. ◎경제 현주소/6년 개혁 공염불 ‘북극곰’/이젠 IMF 구제로 지탱/아시아 금융위기 여파 외국자본 ‘썰물’/루블화 폭락… 보유달러만 25% 소진 ‘겨우 급한 불은 껐다’.러시아와 국제통화기금(IMF)이 13일 220억달러에 달하는 구제금융 지원 협정을 체결한직후 국제금융 전문가들의 반응이었다. 시장경제로의 전환 이후 6년동안 쌓아온 개혁 성과가 물거품이 되기 직전의 위기에서 가까스로 살아났다는 분석이다. IMF와 합의 직후 러시아 RTS주가는 전날보다 7.18% 치솟아 그같은 기대 심리를 반영했다. 러시아는 지난해 아시아권에 경제위기가 몰아친 이후 줄곧 금융·외환불안에 시달려 왔다.아시아에서 발을 뺀 국제 금융자본이 러시아에서도 속속 이탈하기 시작한 탓이다. 금제금융계의 ‘큰손’들이 그렇지 않아도 취약한 러시아 경제를 들쑤셔 놓은데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주 수출품인 가스와 석유가격마저 급락했다. 이로 인해 지난해말 200억달러였던 외환보유고는 최근 150억달러선까지 떨어졌다. IMF지원금 타결전까지 러시아 주가는 연초보다 60%나 곤두박질쳤다. 올해초 달러당 5.998루블이던 환율은 6.212까지 주저앉았다. 정부는 빠져나가는 외국투자자를 붙들기 위해 지난해 10월 21%선이던 단기금리를 150%로 올리는 극약처방을 썼다. 대외부채는 1,450억달러,상환해야할 국채 이자만도 2001년 총예산의 12.3%인 585억루블(97억5,000만달러)이다. 실업문제는 특히 심각하다. 전문가들이 쿠데타로 이어질 만한 위험수위라고 할 정도다. 지난해 말 정부 공식 실업률은 9.3%,실업자 수는 약 650만명이다. 그러나 통계상으로 취업자이나 일거리가 없는 사실상 실업자는 2,000만명에 이른다. 러시아 정부는 IMF의 구제금융을 얻어내기 위해 최근 국세청장을 경질하면서 징세 강화를 천명했다. 특히 65억달러의 정부지출 삭감방침을 발표하는 등 긴급 위기 대응책을 내놨다. 그러나 이 정도로 러시아 경제를 수렁에서 건질 수 있을 지는 미지수다. 정실·권력에 좌우되는 낙후된 금융제도의 대수술과 단기적으로 실업난을 악화시킬 수도 있는 구조조정 등을 잘 해낼수 있느냐가 경제회생의 관건이다. ◎바뀐 사회상/월수입 큰 격차… 갈등 커져/모스크바 한끼밥값 월평균 수입 맞먹는 식당 즐비/유색인종에 집단 테러 등 혼란… 공산당 지지 늘어/임금체불 공무원도 파업… 뇌물로 연 수백억불 낭비 남자 58세,여자 71세.러시아인의 최근 5년간 평균 수명이다.종전의 64세,74세에서 뚝 떨어진 이 수치야말로 암울한 러시아 사회의 오늘을 고스란히 비추는 거울인 셈이다. 미국과 겨루던 초강대국이 부도위기 직전의 나라로 가라앉으면서 러시아인들은 정체성 혼란을 겪고 있다.시장경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데 따른 좌절감,높은 범죄율,공공보건 시스템 약화로 인한 열악한 영양상태 등이 그들을 괴롭히고 있다. 더욱이 시장경제의 성과가 일부 신흥재벌과 노멘클라투라로 불리는 옛 소련시절 관료층으로 흘러들어가면서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도 만만찮다.모스크바인의 한달 수입은 250달러선.한끼 200달러가 넘는 레스토랑들이 거리에 즐비한 현실이고 보면 사회적 갈등이 증폭되기에 충분하다. 최근 ‘신(新)나치주의자’들의 유색인종에 대한 적대행위도 꺾인 자존심에서 나온 반발이란 분석이다.지난 4월20일 히틀러 생일땐 이들이 ‘유색인종 살인주간’을 설정,흑인·아시아인들에게 집단테러를 가하기도 했다. 외신들은 최근 러시아 사회를 ‘혼돈 그 자체’로 표현한다.상황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사회주의체제로 되돌아갈 수도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실제로 구공산당 지지자들도 늘고 있다.정부의 국영기업체 직원이나 공무원에 대한 임금지불이 가장 큰 문제다.시베리아 횡단열차 선로를 점거한 국영 철도 노동자들의 시위도 일상화됐다.국경수비대가 나라의 파수꾼이기를 포기할 지경에 이르렀다. 사회주의 시절 뿌리내린 뇌물관행도 여전하다.옐친 대통령의 수석 정책보좌관을 지낸 게오르기 사토로프씨는 각종 부패로 한해 수백억달러가 낭비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국제적 위상/옛 초강국 위력 핵에만 잔영/G8회원·내년 WTO 가입… 나토의 코소보개입 반대/경제난으로 옛 영화 재현은 꿈… 21세기 미·중에 뒤질듯 국제사회의 초 강대국으로 군림했던 소련의 그림자가 러시아에 얼마나 남아 있을까. 엄청난 국토와 자원,그리고 소비에트연방의 유산이었던 막강한 군사력으로 2차대전 이후 냉전시대에 획득한 국제적 위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러시아는 구소련 붕괴후 시장경제를 받아들인 7년 동안 악착같은 ‘실리외교’를 펼쳐왔다. 좀처럼 성장·안정기미를보이지 않는 경제를 위해 서방과 IMF등 국제 기구들의 자금지원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과거 사회주의의 맹주로서 펼쳐 왔던 힘의 외교는 사라졌다. 단지 핵무기 등 아직도 사뭇 위협적인 군사력으로 강대국의 지위를 그럭저럭 꾸려가고 있을 뿐이다. 러시아는 지난해 5월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와의 기본협정서에 서명,나토의 동진을 용인했다. 대신 서방선진 7개국그룹(G7)에 가입을 요구,지난 5월 G8의 이름으로 영국 버밍엄에서 서방선진국들과 형식상으론 어깨를 나란히 했다.내년엔 세계무역기구(WTO)에까지도 가입을 보장받아 놨다. 러시아는 지난 2월 이라크 사태에서 프랑스와 함께 미국의 강경제재안에 반대하며 중재에 나섰다.지난달에는 나토의 코소보 무력개입을 경고하는 등 국제사회에서의 지위를 만회하기 위한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국제무대에서 위상이 이미 추락한 러시아가 옛 영화를 되찾기란 쉽지만은 않을 듯하다.올초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2030년경엔 미국과 중국이 세계 2강으로 자리잡을 것으로 내다봤다.러시아는 외교력의 기준이 되는 정부의 효율성과 외교정책에 대한 국민 지지도,군사력 유지에 필요한 경제력에서 낙제점을 얻었다. 더욱이 미국이 대주주인 IMF 관리체제안에 편입됨으로써 세계 지도국으로 다시 비상하려는 러시아는 한쪽 날개가 꺾인 형국이 됐다. ◎유력 지도자/키리옌코­35살 총리… 기업체 사장 역임한 청년 개혁파/넴초프­유력한 차기 대선후보… 탈세 근절 강력 추진/추바이스­철저한 시장경제론자… IMF지원 이끌어내/주가노프­공산당 당수… 최근 설문 차기 대통령감 1위에 러시아를 이끄는 인물들은 옐친 대통령을 제외하곤 하나같이 젊다.대부분이 30∼40대.지방에서 교수·연구원 생활을 하다 지방정부 및 체르노미르딘 내각에서 시장경제 개혁에 참여해 성과를 본 실전 경험파들이 주류다. ▲세르게이 키리옌코 총리=35살.지난 3월 경질된 아나톨리 추바이스 뒤를 이어 총리로 입각했다.차세대 지도자로 주목받는 보리스 넴초프 부총리와 함께 확실한 청년개혁파로 분류된다.노르시석유회사 사장(96년)과 에너지장관(97)을 거쳤다. ▲보리스 넴초프 부총리=39살.청년 개혁파의 대부.강력한 차기 대선 후보다.고리키 국립대 출신.97년 러시아 제1부총리와 연료에너지 장관을 지냈다.최대 천연가스회사 가즈프롬과 4개 석유업체 등의 탈세근절을 선언하면서 전면개혁에 나섰다. ▲아나톨리 추바이스=43살.낮은 인기 탓에 키리옌코에 자리를 물려준지 석달 만에 부총리급의 국제금융담당 특사로 재임용돼 이번 IMF협상을 타결시킨 ‘돌아온 장고’.해박한 시장경제 이론과 유창한 영어실력,철저한 개혁주의자로 서방에서 인기가 높다.‘시장개혁의 아버지’‘러시아를 서방에 팔아먹는 매국노’등 평가가 엇갈린다. ▲보리스 베레조프스키=52살.러시아 최대 재벌.자금력과 언론 동원력으로 크렘린궁 막후 실력자로 불린다.안보회의 부서기 출신.옐친의 둘째 딸 타티야나의 재정후원자이다.지난 4월 독립국가연합 사무총장으로 임명되면서 정치 전면에 나섰다. 옐친 품안의 이들 외에 그의 잠재적 경쟁자들도 부상중이다.크라스노야르스크 주지사로 2000년 대선의 강력한 후보인 알렉산드르 레베드 전 안보회의서기,경제난이 악화된 최근 여론조사에서 대통령감 1위로 거론되는 게나디 주가노프 공산당 당수와 유리 루츠코프 모스크바 시장 등이 그들이다.
  • 대통령 주재 수출회의 매월 열어야(수출 이렇게 풀자:5­1)

    “어려운 사정을 하소연해 봤자 입만 아픕니다”“도대체 현장에 나와서 애로사항을 진지하게 들으려는 정부당국자가 아무도 없어요”“은행장부터 아랫사람에 이르기까지 금융인들은 모두들 수출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 보신에만 신경쓰는 것 같아요”“수출을 많이 한 사람이 물론 애국자지만 수출을 못하게 하는(금융지원을 안해주는) ×이야말로 바로 매국노 아닙니까?” 빈사상태에 빠져있는 일선 수출현장에서는 지금 이처럼 수많은 아우성들이 쏟아지고 있다. 서울신문이 국제통화기금(IMF)체제하의 우리 경제를 살리기 위해 지난 11일부터 시작한 특집 ‘수출­이렇게 풀자’를 5차례 연재하면서 취재반이 느낀 현실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고 우려할 만한 수준이었다. 가장 먼저 충격을 던져준 일은 일선공단 취재과정에서 일어났다. 반월공단 등 주요 공단의 공장에서 취재진을 맞아 공장 문을 열어주지 않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업자들이 만나는 것은 물론 전화로 얘기하는 것부터 거절했다. 어려운 사정을 말해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는데 무슨말을 하느냐는 반응이 주류를 이뤘다. 개발경제 시대부터 맨손으로 씩씩하게 경제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해왔던 수출역군들의 냉담한 반응은 우리나라 수출산업의 무기력과 의욕상실을 의미한다. 은행대출이 여의치 않다 보니 주요 금융기관의 기업인 상담건수도 형편없이 떨어졌다. 수출주문을 받아놓고도 은행으로부터 신용장(L/C)을 개설받지 못해 발만 동동 굴렀던 기업인들이 이제는 아예 은행을 찾지도 않는다는 반증이다. 은행들이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을 채우지 못하게 되자 지난 넉달 동안만 해도 2,000만달러 이상의 대출금을 기업들로부터 회수했고 더 이상 돈을 쓸 수 없게 된 기업들 사이에서는 이제 ‘NBJR(내배째라)’는 자포자기식 은어가 유행할 정도였다. 다음으로 지적할 문제는 정부의 현장점검 방식에 문제가 많다는 점이다. 현장에 아예 나와보지 않는 관료들이 많지만 어쩌다가 청와대와 산업자원부,중소기업청 등의 ‘높은신 양반’들이 몇차례 공단을 다녀가면 자기들의 말만 잔뜩 늘어놓고는 이런 저런 서류를 보내달라고요구해 일감만 만든다는 것이다. 시늉만 내는 전시행정의 전형이다. 그래서 정부의 현장점검 방식에 대부분의 기업인들은 대단히 냉소적이었다. 안타깝게도 지금 이 시간에도 IMF이전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우리의 수출기업들이 하나 둘씩 쓰러져 가고 있다. 수출현장이 활력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지금 우리 국민들이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세가지는 “박찬호와 박세리, 그리고 수출 뿐”(張炳珠 주식회사 대우 사장)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수출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수출은 우리 경제가 IMF를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돌파구인 것이다. 취재반이 만난 어떤 기업인들은 정부가 기업과 은행의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하면서 수출을 촉진하는 정책상의 모순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이율배반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기업인들은 IMF체제 아래서 경제개혁과 구조조정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면서 다만 다른 정책과 수출과의 우선순위를 확정,수출에 대한 확실한 정책적 지원을 계속해 달라고 강조했다. 또 적지 않은 기업인들이“수출 많이 하는 사람이 애국자”라고 한 金大中 대통령의 발언을 상기시킨 뒤 현재 매 분기마다 하는 대통령 주재 무역진흥확대회의를 과거 朴正熙 대통령 때처럼 매달 열고,대통령이 전면에 나서 매일매일 직접 수출을 챙겨야만 수출이 확실히 살아난다고 했다. 수출현장의 애끓는 목소리가 ‘경제와 민주주의’의 양립을 강조한 金 대통령에게 오죽하면 정치를 희생시키고 경제제일주의로 매진한 朴 대통령을 닮아야 한다고 강요하는 상황으로까지 발전했는지 우리의 수출현실이 너무도 애처롭게 느껴진 특집취재였다.
  • 사회지도층 비리 엄단하라(사설)

    현직 판사와 서울시 전·현직 서울시 국장,전·현직 은행장,국영기업체 간부와 한국마사회 전직 경영진 등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지도층 인사들이 직무와 관련,거액의 돈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 서민들을 한없이 허탈하게 한다. 지금 국가가 처한 위기상황이 어느 정도로 심각하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다수 국민들의 노력이 얼마나 처절한지를 이들은 과연 모른단 말인가.자기 직분에 충실함으로써 이 국난(國難)을 극복하는 데 앞장서야할 사람들이 오히려 피땀 흘리며 일하는 사람들의 발목을 잡고 용기를 꺾는 짓을 했다면 분명 매국노(賣國奴)들이다.사정당국은 철저한 조사와 함께 비리 사실이 확인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도록 해야 할 것이다. 사실 여부를 떠나 투철한 봉사정신과 자기희생으로 우리 사회를 이끌어 나가야 할 각 분야의 지도급 인사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 서글프다.정의를 바로 세우고 오직 법에 따라 심판해야 할 법관이 돈을 받고 구속피의자를 풀어주었다는 혐의로 검찰의 조사를 받고 사표를 냈다는 사실앞에서는 할말을 잃게 된다.법조비리를 척결하겠다는 법조계 자체의 결의는 물론 불과 하루전에 변호사법 개정안을 발표하며 법조계를 개혁하겠다고 나선 정부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됐다. 그래도 참고 기다리며 신뢰를 버리지 않았던 국민들의 실망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청구그룹 張회장의 ‘張壽弘리스트파문’으로 일컬어지는 여야 고위 정치지도자들의 뇌물수수설도 심각하다. 검찰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철저히 수사해 엄정한 법의 심판을 받게해야 할것이다.정치권이야말로 지금 민생현안은 뒷전인 채 당리당략에만 매달려 있는 집단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국민의 심판도 뒤따를 것이다. 환란(換亂)의 주범이라 할 수 있는 금융계의 비리혐의도 포착됐다.전·현직 은행장 4명이 대출커미션으로 수천만원에서 수억원을 받아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것이다.이들은 이 돈으로 행장 연임운동이나 비리수사 무마용으로 정치권에 1인당 수천만원대의 금품을 제공한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다는 소식이다.여기에 전·현직 서울시 국장 2명을 포함,지자체 고위간부 3∼4명이 대형공공사업과 관련해서 업체로부터 거액의 뇌물을 받거나 이권에 개입했으며 국회의원이던 전직 마사회장 2명은 10억∼20억원의 경마수입금을 빼돌린 혐의로 조사를 받고있다.이들 외에 국난을 외면한 채 자기 몫만 챙기는 부류의 사람들도 지탄의 대상이긴 마찬가지다.고통을 나눠가질 때 지금 우리가 겪고있는 이 혹독한 시련도 빨리 극복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 국고 살찌운 조달청 모범공무원·부서/잠자던 外貨 7억 찾았다

    ◎외자1과 安秉宣 서기관 조달청이 국민재산 400억원을 찾아서 국고로 환수해 칭찬에 인색한 감사원으로부터 ‘극진한 칭찬’을 받았다. 특히 구매국 외자1과의 安秉宣 서기관(49)은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던 조달청 소유 휴면계좌를 뒤져 7억6천만원 어치의 외화를 찾아내 국고에 입금,적자재정과 달러난에 시달리는 정부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 安서기관은 71년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이후 줄곧 외국 물자를 구매하는 업무를 맡아온 조달통. 잠시 다른 부서 근무를 거쳐 지난해 4월 외자1과로 돌아온 安서기관은 연말에 외환위기가 발생하자 오래전의 기억에서 ‘외화 거주자 계정’이란 것을 생각해 냈다. 조달청이 각 기관으로부터 요청받은 자재를 외국에서 구입하다 보면 신용장을 개설하고 달러와 원화를 바꿔가며 물품대금을 지급하는 과정에서 자투리 돈이 남기 마련이다. 지금은 개인도 외화를 소유할 수 있지만 10년전만 해도 개인의 외화 소유가 불가능했다. 따라서 그 당시 발생했던 자투리 잔액은 그대로 은행에서 잠자고 있었던 것이다. 安서기관은12월16일부터 외환은행 등 12개 금융기관에 조달청 명의의 예금 잔액이 있는가를 확인했다. 지난 70년 2월부터 87년 8월까지 외화예금을 한 뒤 중단된 휴면예금이 228건이나 됐다. 미화가 44만3,483 달러,일본화가 143만9,373엔,독일화가 1,953 마르크,스위스화가 9,137 프랑 등이었다. 우리돈으로 환산하니 무려 7억5,678만2,790원이었다. 어떤 통장에는 단 25센트가 남아있었다고 한다. 安서기관이 발견한 외화는 모두 조달특별회계 세입으로 입금됐음은 물론이다. ◎물자비축국 물자관리과/기관보유 미술품 382억 확인 물자비축국의 물자관리과(과장 申三澈)는 지난해 5월부터 조금씩 경제 위기의 징후가 나타나자 ‘물자 사랑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물자 사랑 운동의 하나로 중앙 행정기관을 상대로 소장 미술품도 조사하자는 아이디어도 나왔다. 정부 각 기관의 청사에 가보면 좋은 그림들이 많지만,관리 실태가 엉망이란 지적을 들어왔던 것이다. 각 기관이 기증받은 그림을 기관장 등 개인이 소유한다는 얘기도 들렸다. 1년 정도 각 기관의 구석구석을 조사하니 3만135점의 미술품이 발견됐다. 그림값을 따지면 382억2,000만원에 이른다. 예상했던 일이지만,이번에 조사된 대부분의 그림이 85년 이후의 작품이었다. 그전에 정부가 소유했다가 사라진 그림은 문서가 남아있지 않아 찾을 수가 없었다. 물자관리과는 지난해 11월14일 정부미술품보관관리규정도 만들었다. 정부가 소유한 모든 그림은 물론 그림에 찍힌 낙관까지도 별도로 촬영하고,전시 공간이 변경될 때마다 일일이 보고하도록 했다. 물자관리과의 이같은 노력으로 지난달 9일부터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정부가 소장한 우수 미술품 전시회가 열렸던 것이다. 물자관리과는 지난 2월 부산과 경인 지역에 정부물품 재활용 센터를 설치한 뒤 4,234점을 수집,판매해 4,337만원의 수입을 올리기도 했다.
  • 궁중의 숙청(秘錄 南柯夢:16)

    ◎“궁궐안 정씨 모두 해직” 어명/황제총애 받는 시종자리 이권·인사청탁 쇄도/오적 이지용 상중에도 여인보내 벼슬 부탁/“모든 정씨 국가에 유해” 상소에 “나가 기다려라”/시종 정환덕 궁내사건 예언시 적중하자 복직 1899년 8월에 선포된 대한국제(大韓國制)는 대한제국의 헌법이었다.이 법에 따르면 황제는 입법·사법·행정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전권을 장악한 전제군주였다.말하자면 서양의 절대왕권을 한국에 그대로 이식한 셈인데 고종을 루이 14세처럼 만들어 버린 것이었다.누구의 장난인지는 몰라도 당시의 세계 대세로 보아도 너무나 시대착오적인 체제였다고 할 수 있다. ○시종원 막강권부 부상 이처럼 모든 권력이 고종황제에게 집중되었으니 덕수궁 중화전(中和殿)이 권력의 핵심부가 될 수밖에 없었고 고종의 최측근인 시종원 시종들이 막강한 힘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대한민국의 역대 청와대 비서실보다 더하면 더 했지 못하지 않았다. 정환덕은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었으므로 모든 이권과 인사청탁이 그를 통해 이루어지게 마련이었다.지방 군수나 관찰사는 물론 중앙의 대신 자리까지도 일개 시종에 지나지 않는 정환덕을 거쳐야만 성사되었다.군부대신 이지용(李址鎔)의 경우가 그 좋은 사례였다. 전 군부대신 이지용은 평양의 명기 죽향(竹香)을 소실로 삼고 있었는데 광무 6년8월 생부가 죽어 상중에 있을 때 죽향을 우리(정환덕)집으로 보냈다.내외를 하느라 나는 발을 치고 죽향을 만나 보았는데 용건은 다름 아니라 “영감께서는 우리 대감(이지용)을 모르십니까? 대감께서는 방금 거상(居喪)중이시라 한번만 문상을 와주시면 천만번 다행이라 하옵니다”는 것이었다.이에 대답하기를 “이 몸이 국사(國事)에 바빠 밤낮없이 함녕전 대청에서 폐하를 모시고 있는 처지라 여가를 낼 수가 없습니다.그러나 예까지 부인을 보냈으니 한번 짬을 내어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옛부터 부모의 상중에는 벼슬을 하지 않는 것이 자식의 도리요 바깥 출입까지 삼가하여야 했는데,감투욕에 불탄 이지용은 정한덕에게 미인계를 써서 기어이 기복(起復=상중에 벼슬을 하는 것)하려 했던것이다. 이지용은 이층 양옥집에 살고 있었다. 문상을 마치고 이지용에게 인사말을 건네기를 예전에 대감이 군부대신으로 계실 때 한번 찾아 뵌 일이 있었는데 그 때는 손님이 집에 가득하고 마당에는 수레와 말이 벌려 있었습니다.그런데 지금은 문정(門庭)이 적막하고 포저(예물)가 뚝 끊기어 있으니 보기에 민망스럽습니다”하였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감투란 것은 쓰고 있을 때 즐거울 뿐 벗고나면 허전하기가 이를 데 없는 것이다.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줄 알면서도 한자리 하려고 버둥거리고 그것이 역사의 강물이 되어 도도히 흐르게 마련이다.이지용은 이름난 을사오적의 한 사람이요 탐관오리였다.부모가 돌아가셨는데도 미인계를 써서 벼슬을 하여 집안의 불효자가 되었고 나라를 팔아 매국노가 되었다. 물론 정환덕은 이지용이 그런 인물이 될 줄은 모르고 그를 임금께 천거했던 것이지만 어느 해 추상같은 상소가 올라와 궁중 숙청이 단행되었다.전 동부승지(同副承旨) 홍병섭(洪丙燮)의 소장(疏章)이었는데 거기에는 무서운 말이 들어 있었다. 상감께서 물으시기를 “소장의 내용은 무엇이냐” 하시었다. 아뢰기를 “궁궐안을 숙청하라는 내용입니다”하였다.상감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런 상소는 금후 궁내부에서 받아 물리쳐 버리고 짐에게는 보이지 말라”고 하시었다. 이때 문득 생각하기를 상감의 총애가 날로 융성하고 흡족해지고 있는데 나라일은 날로 어려워지고 있어 보필하는 신하로서 한자 한치의 공도 세우지 못하고 있는 탓이라 여겼다. 이야말로 시위소찬(尸位素餐:하는 일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것)하는 것이라 자책하였다.그래서 대궐문 밖으로 나가 사모관을 벗고 머리를 조아리고 상감께 사죄하니 상감께서는 “네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하시면서 만류하시었다. “소신은 본래 초야에 있어야 할 몸이온데 이처럼 분에 넘치는 자리에 앉아 밤낮으로 대전을 모시다가 이렇게 탄핵을 받게 되었으니 마땅히 소신에게 과실이 있사옵니다.그러하오니 소신을 초야에 돌아가 살게 하옵소서”하고 간청하였다.그러나 상감께서는 다시 말씀하시기를 “너는 본래 국가를 배반하지 않았고 임금에게숨긴 일이 없었다.너는 또 재주를 부려 남을 헐뜯거나 어진이를 투기하여 중상모략한 일도 없었다.너는 아래 사람에게 통통촉촉(洞洞燭燭)하였고 윗사람에게 주야로 성의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너는 참으로 충신이라 할 것이다”하시면서 도리어 정삼품직을 하사하셨다. ○“초야로 돌아가겠다” 주청 그러나 시종원 시종 자리란 그렇게 늘 쉽사리 지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그 뒤 얼마나 지났을까.난데없이 궁안에서 종사하는 모든 정씨(鄭氏)는 남녀를 가릴 것 없이 해직시킨다는 어명이 떨어졌다.청천병력과 같은 일이었다.아무 죄도 없이 정씨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궁궐을 나가야 한다는 것이니 어처구니 없는 처사였다.그러나 그것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어느날 궁중에 “鄭씨 姓을 가진 자는 남녀를 불문하고 국가에 유해하니 모조리 해직하여 쫑아내야 합니다”라는 상소가 올라왔다.내사해 본 결과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은 상궁(尙宮)이 여섯 명이고 내시(內侍)가 열명이고 무감(武監)이 세명,주사(主事)가 세명이었는데 거기다 노비 28명을 합하면 궁중에정씨 성을 가진 사람이 63명이나 되었다.이 사람들을 모두 해직시켜 일시에 궁안에서 내쫑아 버린다는 것인데 나(鄭煥悳) 역시 거기에 끼여 있었다. 상감 부자께서 나를 부르시더니 “너는 잠시 너의 본집에 가서 머물러 있다가 처분을 기다리라.너무 바깥 출입을 하지 말도록 하라”고 하시었다.그리고 “혹시 내가 너에게 문의할 일이 있으면 봉서(封書=임금의 私信)로 통지할 터이니 어느 놈이 우리 군신 사이를 이간할 수 있겠느냐”고 하시었다.이에 나는 “예식관 이용태(李容泰)를 통해 하명하시면 즉시 올라와 뵈옵도록 하겠습니다”하면서 절하고 물러났다. ○“군신 이간질 가당찮다” 상감 부자께서는 서운해 하실 뿐만 아니라 상궁과 시녀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고 말없이 물러나는 나를 지켜 보았다.나도 또한 여러 해 동안 밤낮으로 가까이 모시고 있다가 까닭없이 사퇴하게 되니 옛날 당나라 시인 두공부(杜工部)가 지은 시 “성상께서 늘 사랑하심이 있는데 조정을 물러나니 의지할곳이 없네”는 귀절이 가슴을 쳤다. 어떤 자리를 막론하고 한번 앉았던 자리를 물러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물러나 본 사람이라면 다 아는 일이요 인생의 비애이기도 하다.하물며 무상의 권부를 물러나는 정환덕의 심정이야 오죽했겠는가. 대궐을 물러나 집으로 돌아와 보니 무엇을 잃은 것처럼 허전하기만 하였다.이에 글 한줄 지었으니 “내일 모레 사이 서늘한 밤 자정 달이 서산에 숨을 때 동쪽 정원에 꽃 한송이 떨어질 것입니다(明再明間 凉夜三更 月隱西山之時 花落東園中). 이 글을 봉투에 넣어 이용태에게 주어 상감께 드리도록 했다.아니나 다를까 궁중에 사건이 일어났는데 야밤중에 김상궁이 측간(厠間=변소)에 빠져 죽은 것이다.정환덕은 이 예언 때문에 다시 궁안에 들어와 복직되었다. 상감께서는 “과연 수(數)를 맞히기는 정환덕만한 사람이 없도다“하시면서 나를 칭찬하셨고 궁녀들은 모두 박수갈채를 보내 한번 수(數)보기를 바랐으나 상감이 엄히 금지하셨다.
  • 러 “印에 원자로 2기 판매”

    ◎30억弗 규모… 잠수함·미사일도 제공 약속 【뉴욕 연합】 미국이 최근 핵실험을 단행한 인도에 대해 경제제재를 호소했음에도 불구,러시아는 30억달러 상당의 원자로 2기를 인도에 판매하기로 했다고 미 뉴욕 타임스가 23일 보도했다. 러시아 원자력부의 이같은 결정은 미국이 인도에 대한 제재조치를 취해 줄것을 세계 각국에 호소하고 있는 가운데 나온 것이어서 미국에는 중요한 시험이 되고 있다며,특히 클린턴 행정부가 보리스 옐친 정부에 제한된 영향력만을 발휘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타임스는 지적했다. 이 신문은 민간 원전 건설이 군사적 중요성은 거의 없지만 미국 관리들은 러시아의 대(對)인도판매가 핵무기 보유를 열망하는 국가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국제사회의 중요한 원칙을 위반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고 강조했다. 또 러시아 관리들은 인도가 현재 세계 제2위의 러시아제 무기 구매국이라고 밝히고 있으며,앞으로 인도에 잠수함과 대함 미사일,기타 무기를 판매하기로 약속했다고 타임스는 전했다. 신문은 애지트 구마르 인도국방차관은 러시아제 SU­30 전폭기와 수십억달러 상당의 다른 무기 구매를 논의하기 위해 지난주 모스크바를 방문했다고 말했다.
  • 병무비리 관련자 명단 밝혀라(사설)

    전·현직 군 고위 간부와 국회의원 등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연루된 병무비리 커넥션이 드러나 수사가 진행중이라는 보도는 충격적이다.이와 관련,국방부장관이 대국민사과 성명까지 발표하기에 이르렀으니 엄청난 사건임에 틀림없다.신성한 국방의무를 누구보다 앞장 서 지켜야 할 지도층 인사 자제들이 거액을 주고 군복무를 면제받거나 편한 자리를 얻는 것은 몰염치한 매국행위다.이번에야말로 그 명단을 빠짐없이 밝혀 우리 사회에서 추방해야 마땅하다고 본다.군당국은 병무비리가 어느 특정지역에 국한되지 않은 전국적 현상임을 강조하고 수사를 확대하는 한편 민간인 관련자들에 대한 수사는 검찰에 의뢰했다고 한다.당연한 처사며 모든 역량을 집중해 망국적인 병무비리를 반드시 뿌리 뽑아야 할 것이다. 도대체 이렇게 썩은 구석이 아직도 우리 군과 사회에 남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다.하루가 아까운 젊은 나이에 군대생활 3년은 누구에게나 부담스럽지 않을 수 없다.그러나 이는 조국수호와 국민의 생존을 위해 건장한 청년이면 누구나 지켜야 하는 의무다.여기에 예외가 있을 수 없다.그래서 대다수 젊은이들은 비록 군복무가 힘들다 하더라도 이 의무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기꺼이 수행한다.그렇지만 일부 부유층이나 사회지도층 인사들은 오래 전부터 권력과 돈을 총동원해 자제들을 빼내고 있다.조국의 운명이 풍전등화(風前燈火)처럼 위태롭던 6·25전쟁 때도 유학 명목으로 미국 등지로 달아난 인사들이 많았다.우리나라 국회의원의 25%,그들 아들의 15.5%,재벌총수 아들의 52.4%가 군대에 가지 않았다는 한 조사결과에서 우리는 허술하기 짝이 없는 국방의무의 현실을 본다. 예부터 전쟁이 나면 왕실가족 등 상류층에서 앞장 서 전쟁터로 달려가는 서구 선진사회의 전통과는 너무 대조적이다.오늘의 선진국 사회는 지도층 인사들의 이와 같은 희생과 솔선수범 정신이 바탕을 이루고 있기에 가능했다.사회지도층 인사로서 지켜야 할 의무를 그들은 성실히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해 대통령선거 기간동안 병역면제 문제가 큰 논란을 빚더니 이번에는 조직적인 비리의 실체가 드러났다.어떻게 육군본부의 준위정도가 이 엄청난 비리의 중심인물이 될 수 있는 지 개탄을 금할 수 없다.더구나 병역면제 5천만∼1억원,공익근무요원 판정 2천만원,카투사 선발 5백만∼1천만원,주특기 부여 및 입영연기 1백만원 등의 공정가격까지 정해져 10억여원이나 챙겼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성역없이 색출해 명단을 공개하고 근본적인 재발방지책을 강구하겠다는 국방부장관의 약속대로 병무비리를 완전히 뿌리뽑아 전화위복(轉禍爲福)의 계기로 삼아야할 것이다.
  • 명동성당 100돌과 민권운동(사설)

    오는 29일은 명동성당 축성 100돌이 되고 金壽煥 추기경이 서울 대교구장에 착좌(着座)한지 30년이 되는 날이다.한국 천주교회로서는 겹경사를 맞은 셈이다.우리는 이 날이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서도 의미 깊은 날이라고 본다.명동성당과 金추기경이 한국 현대사에서 차지하는 비중 때문이다. 명동성당은 지난 한세기동안 영욕의 한국사를 함께 해 왔다.대한제국 말기 이곳에서 李在明 의사가 매국노 李完用에게 칼침을 놓았다.그러나 일제강점기엔 천주교 신자였던 安重根 의사가 당시 서울교구장이었던 프랑스인 뮈텔 주교에게 항의했을 만큼 일제의 폭압에 침묵했다. 일제시대부터 비롯된, 세상과 무관하고 현실에서 고립된 천주교회의 모습은 70∼80년대 들어 크게 변모한다.이 시기 명동성당은 한국 민주화의 성지(聖地)로서 부도덕한 권력에 대항하는 구심점이 됐다. 지난 74년 민청학련 배후 조종혐의를 받았던 池學淳 주교가 이곳에서 양심선언을 하고 당국에 연행됨으로써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결성돼 한국 민주화운동의 촉매가 됐다.또 76년 金大中 대통령을 비롯한 당시 재야인사들이 독재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3·1 시국선언을 발표한 곳도 이곳이다.87년 6월 항쟁의 근거지 또한 명동성당이었다. 이처럼 명동성당은 불의한 권력에 대한 저항자,쫓기는 사람들의 피난처,억울한 이들의 대변자,거짓에 대한 고발자로서 민중과 함께 있어 왔다.암담한 역사의 어둠을 밝히는 빛이자 세상을 썩지 않게 하는 소금의 역할을 명동성당은 충실히 해 온 것이다. 이런 명동성당의 모습은 金壽煥 추기경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지난 68년 명동성당 축성 70주년이 되는 날 서울대교구장에 착좌한 金추기경은 “교회의 높은 담을 헐고 사회속에 교회를 심어야 한다”는 취임사를 했을만큼 교회쇄신과 현실참여에 큰 관심을 보여 왔다.金추기경은 69년 제3공화국 시절 朴正熙 대통령의 3선개헌 지지 요구를 단호히 거절했고 현대사의 고비마다 미사 강론을 통해 우리가 나아갈 길을 제시했다. 민주화가 이루어진 지금 명동성당과 金추기경의 역할은 줄어든 것처럼 보인다.그러나 구제금융시대의 아픔을 껴안는 모습으로 명동성당은 다시 가난하고 소외받은 이들 곁으로 다가서고 있다.또 한국 천주교회의 평양교구장서리이자 황해도를 관할하는 서울대교구장으로서 金추기경의 민족화해와 통일을 위한 역할도 기대된다.
  • 건전한 비판과 양비론(金三雄 칼럼)

    ‘매천필하에 무완인(梅泉筆下無完人)’이라 했던가.한말의 시인이며 학자였던 매천 황현선생의 울연한 비판정신에 매국노 부패관리들이 벌벌 떨고,발분의 문장이 아주 매서웠기 때문에 생긴 말이다. 그러나 매천 또한 당시의 시대상황을 벗어나기는 어려워 ‘매천야록’에서는 동학군을 ‘비도(匪徒)’라 부르는 등 비판받을 대목이 없지 않지만 그의 평필은 예리하고 공정하기 그지없었다. 최근 회자되는 말로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스캔들’ ‘내가 받으면 선물이고 남이 받으면 뇌물’ ‘내가 하면 차선변경이요 남이 하면 끼어여들기’라고 자신은 변명하는 대신 남은 쉽게 비판한다.모두가 어찌하기 어려운 인간의 자기보호 본능 때문이다. 그렇지만 공적인 비판활동의 경우는 다르다.비판자가 시시비비를 가려야 정의로운 민주사회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우리 사회의 취약점 가운데 하나는 추상열일(秋霜烈日)의 비판자가 드물다는 점이다. 참다운 비판은 여나 야를 고르게 때리는 것이 아니다.시(是)와 비(非)를 정확하게 가리면서 진실을 밝히고 정의에 접근하는 행위를 말한다. 산술적 평균이나 양시 양비론으로 진실을 도출하기는 불가능하다.모름지기 비판(批判)이란 시(是)와 비(非)를 반(半)으로 쪼개어(刀) 보여준다(示)는 뜻을 담고 있다. 어떤 사실이나 사상,또는 행위 진위 우열 가부 시비 선악 미추 등을 판정하여 그 가치를 밝히고 평가하는 인간 고유의 고등적 활동이 비판이다. 맹자는 ‘비시지심(非是之心) 지지단야(智之端也)’라 하여 옳고 그름을 따지는 마음이 슬기라는 인간 본성의 단서가 된다고 했는데,이때의 ‘비시지심’이 바로 비판정신의 근본이다. 황희 정승 식으로 ‘너도 옳고 자네도 옳고 당신도 옳다’는 말은 한 가정의 덕목은 될지언정 결코 국가나 사회를 이끄는 가치가 될 수는 없다. ○양비론의 지식인들 한국 지식인의 비판정신은 일제와 군사독재를 거치면서 대단히 무뎌졌다.대세 영합주의와 함께 양비론적 보신주의가 전통처럼 이어졌다. ‘두 개의 잘못이 하나의 옳음을 만드는 오류’라는 말이 있다.양쪽 모두에 잘못이 있음을 지적함으로써 모두의 잘못을문제삼지 않는 오류를 말한다. 지금 이 땅의 양비론 생산자들은 대부분이 유신과 군사정권 주변에서 독재정권을 옹호해온 곡필언론 어용지식인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들은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고 초점을 흐려 국민으로 하여금 선택을 포기할 논리적 도피처를 제공하면서 그것 자체로 특정 세력을 도와준다. 이들은 민주세력과 독재세력,개혁세력과 반개혁세력,경제를 망친 세력과,이를 살리고자 노력하는 세력을 동일시 하거나 희석시키면서 공동책임론을 전개한다. 예컨대 지난 대선 때 북한과 내통하면서 정권을 잡고자 했던 측과 이를 막고자했던 측을 ‘정치권의 북풍커넥션’ 운운하면서 사건의 본질을 희석시켜 버린 것이나,국가부도 위기사태를 불러온 환란책임도 ‘정치권의 공동책임’으로 둔치시킨다. 여기에 북풍 음모자들에 대한 검찰의 수사를 정치보복으로,환란책임에 대한 감사원의 감사와 검찰수사를 표적사정으로 비판한다. 이처럼 책임의 원인과 소재를 규명하지 않고 총체적 책임론으로 정치권 전체를 비판하다보면 결국은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무책임론으로 종결되고 만다. 이같은 형태는 정치혐오와 정치허무주의만 부채질한다.내우외환죄로 다스려도 시원찮을 범죄자들이 양비론의 가면 속에서 꼬리를 감추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양비론은 가치의 척도와 사물의 본말은 전도시키고,선과 악을 유사화(類似化)시키는 반지성의 해악행위이다. ○본질을 찾아 비판해야 서경(書經)에 ‘화염곤강 옥석구분(火炎崑岡 玉石俱焚)’이란 말이 있다.곤강산에 불이 나면 그 산의 옥석을 가리지 않고 전부 태워버린다는 뜻이다. 양비론자들은 이처럼 옥석을 가리지 않고 불태운다.지엽말단적인 문제,절차상의 문제를 본질적인 문제인 것처럼 호도하고 국민의 판단을 흐리게 하면서 초점을 흐린다. 이런 양비론이 위세를 떨치는 풍토에서는 개혁이나 정치민주화를 이루기가 쉽지 않다.일체의 가치가 전도되고 오로지 기회주의만 판을 치게 된다. 50년만의 정권교체의 새 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지식인 사회의 허위의식,즉 양비론의 당의정부터 벗겨야 한다. 그리하여 선악과 진위가 분명하게 가려지는 민주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 月尾島 매각사건(秘錄 南柯夢:11)

    ◎“뇌물 먹고 나라 땅을…” 高宗 대경실색/열강들 强占 야욕 드러내는데 조정 속수무책/외채 갚는다며 광산채굴·관세징수권 등 양도/이틈 타 日公使 앞잡이에 15만원 받고 넘겨줘/“위 아래 막히고 안팎 따로인데 어찌 수습할까” 스스로 전성기라고 느낄 때가 가장 위태로운 법이다.1902년은 대한제국의 바로 그런 해였다고 할 수 있는데,안타깝게도 최고통치자인 고종 황제와 정부 각료들은 위기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설혹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방법을 몰랐고 방법을 알았다 하더라도 뇌물 먹는데 여념이 없었기에 결과는 마찬가지였으리라. ○위기 몰랐던 황실과 정부 그 틈을 이용,일본인들은 들쥐처럼 우리의 광산·철도·산림·어로·관세 그리고 도서(島嶼)에 이르기까지 정신없이 집어먹고 있었다.월미도(月尾島)사건의 배경은 이처럼 심각했고 문제 자체가 중대한 주권문제,즉 영토문제와 관련되어 있었다. “인천이 검은 먹구름에 싸여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왜냐하면 어느 놈이 귀신도 모르게 월미도를 팔아먹었기 때문이다. ‘신은 인천 감리(監理)로 있으면서 이 사실을 알지 못하였사오니 죽어 마땅합니다.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신에게 엄벌을 내리시옵소서.두려운 마음 그지없사옵니다.’ 인천감리 하상기(河相冀)로부터 이같은 보고를 받은 고종 황제께서는 얼마나 화가 나고 놀라셨는지 어찌할 바를 몰랐다.” 황제즉위 40주년이라 하여 덕수궁에 3천명을 모아놓고 잔치를 벌이고 있을때 이런 엄청난 보고가 들어온 것이다.인천은 수도 서울의 현관이라 할 수 있는데,월미도는 그 현관에 딸린 대문이나 다름없었다.지금의 월미도는 육지와 연결된 육계도(陸繼島)이지만 원래는 북쪽의 큰 섬(대월미도)과 남쪽의 작은 섬(소월미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영국인이 처음 보고 너무도 예뻐 장미섬이라 이름붙인 월미도는 당시 한국의 급소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월미도를 차지하는 나라가 곧 한국을 차지하는 것이었다.그래서 열강은 앞다투어 이 섬에다 거점을 만들고자 발광을 했다. 본시 일본이 대월미도에 해군 석탄창고를 만들어 일본 깃대를 꽂았었는데 그 뒤 1897년에는 러시아가 소월미도에 석탄창고를 지어 러시아 깃발을 휘날렸다.배가 인천항으로 들어서면 대월미도와 소월미도 사이의 좁은 해협을 통과하도록 되어 있었는데,그 양쪽에 일본과 러시아의 국기가 나부꼈으니 마치 남의 대문에 두나라 문패를 나란히 걸어놓은 격이었다.러시아는 부산의 영도에도 석탄창고를 만들어 깃발을 올렸으니 당황한 것은 일본이었다.일본은 러시아 세력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한국을 독점하기 위해 서둘러 영국과 동맹(英日동맹·1902년)을 맺는 한편 한국정부에 압력을 넣어 어떻게든 월미도를 차지하려 애썼다. “인천 월미도 사건의 자세한 내용을 살펴보니 훈척(勳戚)의 신하인 전판서 모씨가 외국인에게 30만원을 받고 몰래 섬을 팔아버리고 달아난 것이다.대체로 이런 큰 사변은 조선왕조 500년을 내려오면서 처음 있는 일이다.한자의 땅도 나라 땅이고 한 치의 땅도 국가소유인데 감히 어느 누가 사고 팔 수 있단 말인가.사건이 너무 중대하고 난감하여 듣는 사람이 모두 몸을 떨며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일어로 된 ‘인천부사’(仁川府史)에 보면 월미도 매수사건의 전모가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즉 일본인 요시카와(吉川佐太郞)란 자가 민영주(閔泳柱),이제순(李齊純) 등 한국의 고위관료에게 거액의 뇌물을 바쳐 뒤를 보게 한 뒤 김준희(金俊熙),임원상(林元相) 명의로 월미도 개간권을 사들였다.이때 담당관리인 궁내부 수륜과장(水輪課長) 강면희(姜冕熙)는 요즘으로 말하면 청와대 비서인 셈인데 뇌물을 먹고 월미도를 팔아먹은 것이었다.그때 요시카와가 사들인 월미도 값은 15만원이었다.요시카와는 앞서 전남 목포 앞바다의 고하도(高下島)를 사들이려다가 실패한 전과자였으므로 배후 조종자는 일본공사였던게 확실하다. ○1904년 日 군사기지로 한국정부는 뒤늦게 이 사실을 알아내고 1만6천원을 일본공사 앞으로 보내 개간권 말소를 요구하였으나 일본공사는 요시카와가 말을 듣지 않는다는 핑계로 돈을 반환했다.알고 보니 이미 일본공사는 극비리에 요시카와에게 3만원을 지불,월미도 개간권이 일본정부에 넘어가 있었다.힘없는 한국정부로서는 더이상 이 문제를 거론하지못했고 1904년 8월 러·일전쟁이 벌어지자 재빨리 일본군이 월미도를 점령,포대를 설치하고 군사기지로 만들어 버렸다.그뒤 월미도는 일본땅이 되더니 1945년 8·15 후에는 미군기지가 돼야 하는 수난을 겪었다. “지난 1891년에도 충청도의 백모씨가 외국인에게 콩 5천석을 팔았다가 돈만 받고 물건을 주지 않아 그 외국인이 대궐문 앞에 나타나 소란을 피운일이 있었다.그때 황제께서는 부득이 충청도에 명하여 당해도에서 징수한 세금으로 외국인 빚을 갚아주도록 했고 이로써 겨우 덕수궁 앞 소란을 진정시켰다.이러하니 우리 황실이 얼마나 쇠약해졌는지 알 만하다.지금 또다시 월미도사건이 일어났는데 일견 충청도 백씨사건과 별다를 게 없다.그러나 본질적으로는 크게 다른 점이 있으니 월미도건은 비록 우리가 돈을 돌려준다 하여도 저들이 받지 않는다면 돌려주기도 어렵다는 것이다.그래서 황제께서는 어떻게 조처해야 할지 알지를 못하고 계시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1902년의 위기를 다시 겪고 있는 것이다.그때 대한제국 정부는 극심한 외채에 시달리고 있었고 견디다 못해 광산채굴권,철도부설권,산림벌채권,어업권 그리고 관세징수권까지 외국인에게 팔아넘겨 재원을 조달하고 있었다.요즘의 이른바 기업매각(M&A)과 다름이 없었다.이러한 국난 상황을 이용,고위공직자와 매국노들은 서로 손을 잡고 국토의 일부를 외국인에게 넘겨주고 있었던 것이다.부산의 영도와 목포의 고하도,그리고 인천의 월미도가 외국인의 손에 넘어가면 우리나라의 앞뒤 대문이 다 막히고 마는 것이다. “이 사건(월미도사건)의 근본적인 원인은 결국 위와 아래가 통하지 않는 상하불통 때문이며 안과 밖 또한 끊어진 내외격절(內外隔絶)의 상태 때문이다.나라 안에 임금을 보필할 신하가 없고 밖으로는 나라를 방어할 장수가 없기 때문이다.더욱 위태로운 일은 누누이 말한 바와 같이 군자가 조정에 있어야 하는데 조정에는 소인들만 득시글거리고 군자는 모두 재야에서 수수방관하고 있는 것이다.그래서 나라 일은 날로 악화되고 있다.무슨 일이든지 사건이 터지기 전에 미연에 방지하여야 수습이 쉬운 법이고 이미 터진 이후에는 방지하기 어려운 것이 아닌가.”
  • 언론의 두가지 편견/安秉峻 국제부장(데스크 시각)

    ○“책임의 70%는 언론에…” 택시를 탔다.기사가 느닷없이 흥분하기 시작했다.“우리나라를 이꼴로 만든 책임의 70%는 언론에게 있어요”.그는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았다.너무 격앙된 상태였다.부끄러워진 기자는 보통의 봉급장이인 양 신분을 감추고,고개만 주억거리며 빨리 시간이 흘러가기만 바랬다. 오늘은 신문의 날이다.세상을 두루 알 택시기사의 말에는 분명 뼈가 있을 터였다.소위 언론인과,언론에 글을 쓰는 오피니언 리더들은 누구인가.왜 그들이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인가.‘언론의 사회적 기능과 책임’을 항상 달고다니는 그들에게는,국제통화기금(IMF)과 국제화·자본주의 시대에 걸맞지않는 지사적(志士的)·관료적·청백리적(淸白吏的)·권선징악적(勸善懲惡的)기질이 남아 있다. 그러한 기질들이 오늘의 시대상황에 역기능을 하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볼 일이다.우선 두가지 문제만을 거론한다.하나는 가진 자들에 대한 편견이고,또 하나는 외국·외국인에 대한 집단히스테리적 반응이다. ○가진 자에 돌만 던져서야 선진국의 부자들은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는다.카네기·록펠러 등이 그러하고,젊은 부자 빌 게이츠도 존경의 대상이다.최근에는 펩시사 로저 엔리코 회장이 그의 연봉 90만달러를 펩시 직원 자녀들을 위한 장학금으로 기부했다.그들은 누가 요청하지 않았는데도,스스로 벌어들인 거액의 돈을 불우한 이웃들에게 기증하고,부(富)를 사회에 환원한다.강대국 미국의 도덕성의 하나인 청교도 정신­기부·기증(Donation)이 자연스럽게 행해지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부자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가무의 명인으로 평생동안모은 1천억원의 재산을 지난해 12월 사회에 기증한 김영한(81)여사가 대표적이다.또 평생 김밥장사로 번 돈을 대학교에 기증한 할머니들도 있다.이런 부자들은 존경받아 마땅하다.이런 ‘존경받는 부자’들이 많을수록 좋은데 현실은 그러하지 않다. 한국은행 통계에 따르면,97년말 현재 5억원 이상을 예치한 구좌는 모두 9만2천개라는 것이다.우리나라 인구 4천5백만 중에서,이들 예금주는 적어도 ‘부자’들이라 할 수 있다.그들과 그들 주변사람들이 골프장을 가고,외제 승용차를 타고,룸살롱 등 고급업소를 이용하고,호텔을 드나들고,외제품은 물론고급 국산품을 이용하는 주고객들이라 할 수 있다.‘돌고 돈다’는 뜻에서 생겨난 돈을 마음놓고 쓰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런데,그들에게 돌을 던진다.“온국민이 금모으기를 하는데,금괴를 내놓지 않는다” “흥청망청 돈을 써 위화감을 조성한다” “외제품을 마구 써 외화를 낭비한다” “지금이 어느 땐데 룸살롱을 다녀”하는 식으로-.돌을 던지게 하는 분위기 조성은 누가 하는가.언론인들과,언론에 글을 쓰는 오피니언 리더들이 한다.결과적으로 이들은 돈을 돌지 못하게 만든다.여론과 사회 분위기가 그리되니 부자들은 꽁꽁 숨는다.부자들은 돈과 금괴를 더욱 깊숙이 감추고,이불 속에서만 웃는다.가진 사람들을 대우하기는 커녕,강한 스트레스를 주고있는 것이다.스트레스 받는 부자들에게,예를 든 외국의 부자들과 같은 기증과 사회봉사를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다. ○‘외국’이라면 일단 거부감 두번째,외국인·외국기업에 대한 폐쇄적·쇄국적 사고방식이다.외제·외국인에 대한 배타성(排他性)은 어떻게 해서 형성된 것인가.학자들은 자조적인면에서 이렇게도 설명한다.‘지정학적 특성 때문에 우리나라는 5천년 역사에서 960회 가까운 침략을 받았다.평균으로 환산하면 5년 남짓에 한번 꼴의 침략을 받은 셈이다.그래서 우리 국민의 유전자 속에는 외국인에 대한 경계심과 부자들에 대한 막연한 오기가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IMF가 닥쳐 외화가 모자란다 하니 외국제품을 사용하는 자는 모두 매국노(賣國奴)로 몰고,달러를 주고 사온 외국담배들을 모아 화형식을 가지며 박수를 친다.외제품을 한국에서 판매하는 대리인들은 매판(買辦)자본가로 몰린다.글로벌 빌리지(Global village)시대의 희한한 광경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우리들은 3월 청와대 무역투자진흥대책회의에 참석했던 아드리안 폰멩가슨 BASP코리아 사장의 말에 귀기울일 때가 되었다. “한국에서 사업을 하다보면 직·간접적 무역장벽을 느끼는데 이는 언론 때문이라 본다.비판적 언론·학교가 외국인 투자에 긍정적으로 보도록 해줘야 한다.외국기업도 한국과 한 배를 타고 있다.언론의 헤드라인이 반(反)외국인 감정을 유발시키고 있다” 42회 신문의 날 표어는‘자성하는 언론,믿음주는 정론’과 ‘미래를 읽는신문,21세기를 개척한다’이다.
  • ‘한국과 일본,왜곡과 콤플렉스의 역사’ 출간

    ◎왜곡으로 얼룩진 한일역사/‘칠지도’ 논쟁 등 54가지 주제 해부/춘추필법 정신살려 객관적 고찰 한·일 관계를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한국과 일본은 고대의 적극적인 국가교류에서 중세의 소극적인 접촉,근세의 상호교린,근대 이후의 갈등과 대립의 관계로 변화해왔음을 알 수 있다.그 관계는 가히 숙명적이라고 할 만큼 여러 방면으로 깊숙히 얽혀있다.그러나 두 나라 국민의 역사인식의 벽은 영원히 넘을 수 없을 정도로 견고하고 높다. 최근 도서출판 자작나무에서 펴낸 ‘한국과 일본,왜곡과 콤플렉스의 역사’(전2권,한일관계사학회 지음)는 한일간의 역사적 쟁점을 객관적 시각에서 다룬 역사교양서로 주목할 만하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논쟁적인 주제는 모두 54가지.이 가운데 하나가 헌상품인가 하사품인가를 놓고 논쟁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칠지도 문제다.특히 칠지도를 둘러싼 미스터리는 최근 TV방송을 통해 집중 조명돼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칠지도는 일본 나라현 텐리시의 이소노카미 신궁(석상신궁)에 보관돼 있는 일본의 국보다.이 칠지도에대해 대부분의 일본학자들은 백제 조정의 헌상품이라는 주장을 편다. 그 배경에는 ‘일본서기’ 신공황후조의 삼한정벌 기록을 사실로 뒷받침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칠지도의 진실은 무엇일까.이와 관련,이 책의 공동저자인 이영식 교수(인제대)는 칠지도에 새겨진 61자의 금상감 명문에 대한 해석을 토대로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4세기 중·후엽 백제는 왜와 우호관계를 맺기 위해 이전까지 왜에서는 볼 수 없었던 특수한 모양의 칼을 만들어 보냈다” 이 책은 또한 그 제작자와 제작 장소를 놓고 오랜 논쟁에 시달려온 우리나라의 금동반가사유상과 일본의 국보 1호인 고류지(광륭사) 보관 반가사유상,임진왜란때 조선에 귀화한 왜장 김충선의 실존여부를 둘러싸고 일본 학계에서 벌어진 논란에 대해서도 소상히 살핀다. 일본 교토의 우즈마사(태진)에 있는 고류지라는 절에는 나무로 만든 2구의 불상이 안치돼 있다.침울하게 우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어 ‘우는 불상’이라고 불리는 1구의 미륵반가상과,이와는 달리 소박하고 단순한 모양이지만 한일 고대 불교미술사에서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또 다른 1구의 미륵반가상이 그것이다.그런데 이 반가사유상은 우리나라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국보 83호인 금동미륵반가사유상과 마치 쌍둥이처럼 닮아 논란을 빚고 있다. 일본 것은 나무이고 우리 것은 금동이라는 재질의 차이가 있을 뿐 그 양식이나 조형적인 감각이 너무 비슷하다. 이 책은 이런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720년에 완성된 일본의 역사서 ‘일본서기’를 비롯한 문헌에 대한 연구가 이뤄져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그런 다음에 백제 제작설이나 신라 제작설,그리고 한국의 금동반사유상을 일본이 본떠 만들었다는 모작설 등이 규명돼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에 귀화한 항왜의 한 사람인 김충선을 둘러싼 논란도 관심을 끌만한 대목.본명이 사야가인 김충선은 임진왜란 때의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 휘하의 좌선봉장으로 조선을 침략했다가 귀화한 인물이다.그는 조선인이 된 뒤에는 여진의 침구를 막아내고 이괄의 난과 호란 때도 공을 세우는 등 조선을 위해 충성을 다했다.현재 대구 우록동에는 그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으며,우록서원은 후손들의 배움터 구실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야마지 조이치(산도양일)·가와이 히로타미(하합홍민)·아오야기 츠타나로(청류강태랑) 등 일본의 사가들은 김충선의 저서인 ‘모하당집’은 위작이며 사야가는 매국노라고 강변한다. 이 책은 김충선의 사후 행해진 일본의 엄청난 역사왜곡상을 빈틈없이 소개,우리들로 하여금 일제 식민지 시대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한다. 이 책은 최근 한일간의 쟁점이되고 있는 일본의 일방적인 어업협정 파기에 대해서도 언급한다.요컨대 한·중·일 3국이 공동으로 연안국주의,즉 조업단속 권한을 어선의 소속국이 아닌 연안국이 갖는 원칙을 채택하자는 것이다. 부산에서 대마도까지의 최단거리는 53㎞.맑은 날이면 부산에서 대마도의 산이 보일 정도로 가깝다. 그러나 고구려 광개토왕비에서 최근의 어업분쟁에 이르기까지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여전히 갈등의 골이 깊이 패여 있다.이것은 한일관계의 역사적 문제를 객관적으로 이해함으로써만해결될 수 있다.이 책의 미덕은 무엇보다 한일관계에서 특히 빠져들기 쉬운 국수주의적 역사관을 버리고 춘추필법의 정신을 살려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 현대 연구원에도 동업 제의/반도체 스파이 사건

    ◎핵심 정형섭 이사 이미 대만 도주/삼성·LG 2명 추가 소환 삼성전자와 LG반도체의 기술 해외유출사건을 수사중인 수원지검 특수부(부장검사 곽무근)는 4일 이 사건의 핵심인물중 한명인 (주)KSTC이사 정형섭씨(40·전 삼성반도체 연구원)가 지난달말 타이베이로 출국한 사실을 확인했다. 검찰은 “정씨의 행적을 추적한 결과 지난달 30일 상오 타이항공편으로 김포공항을 빠져나간 것으로 확인됐다”면서 “정씨는 현재 타이베이의 반도체회사인 NTC사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정씨는 사건발생 당시 이 사건과 관련이 없는 것으로 검찰의 수사대상에서 제외됐었다. 검찰은 이와함께 이천 현대전자 연구원인 홍권씨(32·반도체 사업부)로부터 지난달 8일 대학선배인 KSTC 연구원 김종복씨(35·구속)가 외국기업에 기술을 자문해 주는 회사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의를 했다는 진술을 받아냈다. 홍씨는 “우리가 많은 돈을 들여 개발한 첨단기술 유출은 매국행위”라며 거부했다. 검찰은 KSTC측 관계자들과 접촉한 것으로 알려진 삼성과 LG반도체현직 연구원 2명을 추가로 소환했다.
  • 산업 스파이 누가 막나(사설)

    삼성전자와 LG반도체의 전·현직 연구원들이 첨단기술을 빼돌려 대만에 팔아 넘긴 사건은 충격적이다.이들이 사리사욕을 위해 빼낸 64메가D램 반도체 기술은 삼성전자가 지난 6년동안 500여명 연구원과 7천억원 연구개발비를 투입해 성공한 뒤 LG반도체와 현대전자 등이 차례로 개발한 우리의 핵심 수출전략상품이란 점에서 이들의 행위는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 짓이 아닐 수 없다. 우리와 함께 이를 생산하는 일본은 2년동안이나 투자를 소홀히 하며 생산량을 늘리지 않고 있어 더욱 우리 수출효자 상품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따라서 이 제품이야말로 지금 경제난국을 타개할 주력상품으로 보고 올해 수출목표도 지난해 보다 16% 늘어난 1백60억달러로 잡고 있을 정도다.그러나 이 목표도 이번 사건으로 큰 차질을 빚게 됐다.만약 올 연말에나 64메가D램 생산이 가능한 대만이 이번에 빠져나간 우리 첨단기술로 앞당겨 양산체제에 돌입한다면 공급과잉으로 가격이 폭락하게 돼 국내업체가 입을 손실은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니다. 산업스파이들은 이미 오래전 부터우리 산업현장에 침투했으나 부정경쟁방지법만 있을 정도로 우리의 제도적 산업기밀 보호대책은 미흡하기만 하다.이번 기회에 기업은 기업대로,정부는 정부대로 우리 실정에 맞는 보안관리체계를 세워야할 것이다.선진국처럼 국가 정보기관이 산업기밀을 보호하는 방안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겠다.그랬다면 이번에 기술을 직접 대만에 팔아넘긴 전 삼성전자 상무가 지난해말부터 대만을 10여차례나 다녀왔고 팩스밀리로 정보를 유출하는 범법행위 정도는 체크됐을 것이다.기업의 구조조정으로 산업현장을 떠나는 첨단분야 연구원들에 대한 관리도 정보기관이 맡아 할 수 있을 것이다.아울러 정부는 대만정부와 관계회사에 보상을 포함한 법적·외교적 대응조치를 취해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다짐을 받는 문제도 신중히 검토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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