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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삼웅 칼럼] 갈 길은 먼데 날은 저물고

    쇠털같이 많던 날이 하루 이틀 지나고 이제 40여일 정도만 남았다. 1999년이 그렇고 20세기가 그렇고 1000년대가 그렇다. 갈 길은 먼 데 날은 저문다. 일모로원(日暮路遠)- 남들은 저만치 언덕에서새천년 준비에 밤을 지새는 데 우리는 미몽의 골짜기에서 진흙싸움에 영일이없다. 100년 전에도 그랬다. 남들은 이양선(異樣船)을 만들고 비행기를 날릴때 우리는 쇄국과 개화, 상투와 단발령의 논쟁이나 하다가 외적에 먹히고 말았다. 그랬으면 역사가 남긴 교훈을 새기면서 달라져야 하거늘 어찌하여 지금 정치인들의 행태는 100년전과 저리도 닮았는가. 못난 정치인들 때문에 개화에 뒤지고 망국을 겪고 분단과 동족상쟁과 군사독재에 시달리다가 50년만에 수평적 정권교체를 통해 정통성 있는 정부를 세웠다. 그랬으면 여야가 힘을 모아 새로운 정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국정을쇄신하고 새천년을 준비해야 하지 않겠는가. 구정권이 남긴 국제통화기금(IMF)관리체제로 지금 법정최저생계비(23만4,000원)에도 못미치는 소득으로 한달의 생계를 꾸려가야 하는 사람이 무려 1,000만명이 넘고 그 가운데 아무런 사회보장 조차 받지 못한채 절대빈곤에 노출된 국민이 550만명에 이른다. 이들에 대한 생계와 취업문제등이 시급한 과제다. 또한 사회전반에 걸쳐 구시대적 관행과 부정비리의 척결과 정치를 비롯하여개혁해야 할 분야와 시급히 처리해야 할 법안이 500건이 넘는다. 이대로는안된다는 것이 IMF의 체험이고 소급하면 현대사의 모순과 국권상실의 교훈이다. 설혹 지난날 정치노선이 달랐더라도 국난을 극복하고 새천년을 준비하고 달라진 국제환경에서 통일의 길을 열기 위해서는 여야가 힘을 모으고 새로운정치의 패러다임을 만드는 것이 정치인들의 일차적 과제요 본분일 것이다. 더구나 ‘집권경험’이 있는 야당이고 ‘만년야당’의 시련을 겪어온 여당이기에 서로 입장을 바꿔 생각하면서 과거의 잘못을 바로 잡고 멋진 새정치를 할만도 하지 않는가. 말로는 새정치, 큰정치, 생활정치 운운하면서 하는꼴은 구정치, 꼼수정치, 공리공담을 일삼으니 나라 운명은 어찌되고 21세기거센 파고의 국제경쟁력에는 어떻게 뒷받침할 것인가. 가장 용서받기 어려운 부류가 지역갈등을 조장하면서 반사이익을 노리는 사람들이다. 노적가리에 불질러 튀밥줍겠다는 고약한 자들이다. 군사독재가 파놓은 갈등을 매우기보다 여기에 시멘트 칠을 하고 덫을 놓아서 순박한 주민들의 정서를 담보로 금배지를 달고 정권을 되찾겠다고 나선 자들은 그야말로나라를 팔고 찢어서라도 일신 일파의 영달을 추구한 한말의 매국노와 해방후분단세력과 다를 바가 없겠다. 일부 정치인 중에는 아직도 정권을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정신나간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3년만 참자”라는 따위의 망발을 계속하면서 지역주의를 선동한다. ‘천하공물(天下公物)’인 정권을 마치 특정지역의 전유물인양착각하면서 지역감정을 선동하는 자들이야 말로 민족분열의 공적(公敵)으로단죄받아 마땅하다. 군사독재의 음습한 늪에서 단물을 즐기면서 민주화를 가로막고 민족화해를훼방하고 민주인사를 용공으로 조작하는 공작정치의 전문가들이 아직도 절대권력의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한채 망언·망동을 거듭한다. 우리정치의 비극이고 국민의 불행이다. 조식(曺植)의 ‘7보시(七步詩)’가 아니더라도 ‘콩깍지로 콩볶는’잔인성을 지양해야 한다. 남북간에도 반세기 동안 콩깍지로 콩볶는 아픔과 비극의세월을 살아온 겨레가 그것도 모자라 동서간에 똑같은 짓을 한대서야 될법이나 한가. 남쪽끼리만이라도 화합과 단결을 이루어 갈라진 북쪽 동포를 포용하면서 새천년을 여는 것이 정치인들의 몫이다. 그리는 못하더라도 걸핏하면 특정지역으로 몰려가 원초적 감정을 자극하는 망발을 서슴지 않는 정치인들은 조비(曺丕)의 부끄러움을 깨달아야 한다.조식의 ‘7보시’를 듣고 그래도 조비는부끄러움을 알고 자기도 모르게 달려가 아우를 마주 안고 함께 울었다고 한다. 천년이 저무는데 정치인들이여! 일하지 않고 그냥 세비만 축내더라도제발 지역갈등만은 조장시키지 말아다오, 콩깍지로 콩삶는 아픔과 비극을 새기면서 말이다./주필
  • [의열 독립투쟁] (11)박열 의사

    일제 강점기 항일투사들의 최대 목표는 국적 일왕(日王)을 처단하는 일이었으나 철통같은 경비를 뚫고 일왕을 처단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그러나 항일투사들은 틈을 노렸다.그 중 한 분이 1932년 1월8일 관병식을마치고 돌아가는 히로히토에게 도쿄 사쿠라다몬 앞에서 수류탄을 던진 이봉창(李奉昌) 의사이며,이보다 앞선 의거는 박열(朴烈·1902∼1974) 의사가 일왕 부자(父子)의 처단을 준비하다가 체포된 거사이다. 박의사는 1923년 9월 일본 왕세자 결혼식 날에 일왕 부자를 한꺼번에 폭살하려고 폭탄입수를 계획하다가 비밀이 누설되어 검거되었다.일왕 부자 폭살기도사건으로 일본인 부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여사도 함께 구속된다.두 사람은 사형선고를 받고 무기징역형으로 감형되어 수감 중 가네코 여사는의문의 죽음을 당하였고,박의사는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23년을 일제 감옥에서 보냈다. 박의사의 옥중생활을 날수로 따지면 8,091일,햇수로는 22년 2개월 1일이 된다.세계감옥사에 전과범의 옥중 생환자 중에 일수를 따져 22년의 생환기록은 있으나 ‘대역사건’이라는 일죄일범(一罪一犯)으로 햇수로 23년이란 감옥생활을 일관한 혁명가가 살아서 나온 기록은 당시까지만 해도 유례없는 일이다. 흔히 박의사를 ‘무정부주의자’라고 부른다.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인 일왕을 처단하여 조선의 자주독립으로 만민평등의 사회를 만들겠다는 것이 박의사의 생각이자 사상이었다.박의사는 이 계획을 추진하기 위해 의열단원 김한(金翰)을 통해 상해 의열단측으로부터 폭탄을 입수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못했다.다시 일본인 선원 스기모토에게 부탁했으나 역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자신의 추종자이며 같은 ‘불령사(不逞社)’회원인 김중한(金重漢)에게 부탁했는데 이것이 사전 발각의 빌미가 되었다. 김중한의 일본인 처가 경찰에 밀고하여 관동대진재의 와중에 박의사와 가네코를 비롯,불령사 동지들이 체포돼버린 것이다.일제강점기에 수많은 항일투사가 일제의 법정에 섰지만 박의사 부부처럼 당당하게 자신들의 소신,즉 일제타도의 당위성을 피력한 사람은 흔치 않았다.그것도 적도(敵都) 도쿄법정에서. 박의사 부부는 1925년 9월 이른바 ‘대역사건’의 주범으로 일본 대심원 특정법원에 섰다.박의사는 공판에 앞서 4가지 조건을 법원에 제시했다.첫째,조선민족을 대표하는 입장에서 조선의 왕관·왕의를 착용토록 할 것.둘째,법정에 서는 취지를 선언토록 해줄 것.셋째,조선어를 사용토록 통역을 준비할 것.넷째,피고의 좌석을 일인 판사의 좌석과 동등하게 만들 것 등이었다.박의사가 제시한 4가지 조건 중 일제는 첫째,둘째 조건은 들어주고 셋째는 거부,넷째는 재판장의 간청으로 철회했다. 이렇게 하여 박의사는 조선의 국왕을 상징하는 의관을 갖추고 법정에 서서일왕 부자 폭살의 이유를 진술하여 일본열도를 소용돌이에 몰아넣었다.긴 재판 끝에 박의사 부부에게 사형이 선고되고 이어 무기로 감형되었다.옥중의‘괴사진’사건으로 일본내각이 붕괴되는 등의 파란을 겪으면서 가네코는 옥중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고 박의사는 일본에서도 가장 심하다는 아키다형무소 등에서 복역하다가 일제 패망과 함께 맥아더사령관의 정치범 석방조치로1945년 10월27일석방되었다. 석방 이후 일본에서 신조선건설동맹위원장 등 민단 건설에 노력하던 박의사는 48년 8월 정부수립 기념행사 참석차 귀국했다가 6·25 때 서울 장충동에서 인민군에 납북되었다.납북 후 북한에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회장 등을 역임하다가 1974년 1월18일 74세로 타계,평양 근처 애국열사능에 안장되었다. 박의사는 1902년 2월 경북 문경에서 태어나 경성고등보통학교 때 3·1 만세운동에 참가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신문배달,막노동꾼 등의 일을 하면서 세이소구(正則)영어학교에 다녔다.이 무렵 일본의 사상가이며 아나키스트인 오스키,이와사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인생관과 사회관을 형성하게 되었다. 3·1운동을 전후하여 일본에는 한국인 노동자·유학생이 4만여명에 달했다. 유학생은 매국노 자제를 비롯한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노동하면서 공부하는고학생이 대부분이었다.박의사도 고학을 하면서 정태성·조봉암 등과 진보적 사회단체인 ‘흑도회(黑濤會)’를 조직,재일한국인의 권익옹호와 조국해방운동에 나섰다.조직을 ‘흑로회(黑勞會)’‘흑우회(黑友會)’로 바꿔가면서 항일운동을 벌인 박의사는 부인과 ‘현사회’와 ‘불령선인’ 등 기관지를발간했지만 일본경찰은 닥치는 대로 압수·소각했다. 박의사의 ‘대역사건’이 발표되자 일본의 언론은 대서특필로 이를 보도하고 도쿄의 조선유학생 학우회가 총궐기 태세로 수감중인 박의사를 지원하고나섰다.그러나 국내언론은 검열과 통제로 사건내용을 구체적으로 보도하지못했다.박의사의 일왕 부자 폭살계획은 폭탄의 입수과정에서 차질과 정보누설로 좌절되었다.또한 이것이 관동대진재의 와중에 정치적으로 이용되어 ‘대역사건’으로 포장되고,조선인 대량학살을 호도하는 데 악용되었다.남쪽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항일운동을 하다가 북쪽에서 사망한 박의사는 20세기 민족사의 비극을 상징한다.89년 3·1절에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지만 아직도 그의 독립투쟁과 아나키즘사상에는 ‘흑도(검은 파도)’가 덮여있는 실정이다.생가나 향리 어디에도 박의사의 추모비 하나가 세워져 있지 않다.비운의 애국투사이다. 김삼웅 대한매일 주필·‘박열 평전’저자 kimsu@*박열 의사 부인·후손들 박열 의사의 첫 부인이자 아나키즘운동의 동지였던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여사는 박의사와 함께 대역죄 혐의로 1926년 3월 사형선고를 받고 복역 중열흘 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그런데 이로부터 4개월 후인 7월 가네코 여사는 형무소에서 의문사하였는데 유해는 경북 문경 박의사의 선산에 안장됐다.지난 73년 일본측에서 가네코 여사의 유해를 옮겨가려고 했으나 정화암·양일동 선생 등 아나키스트들의 반대로 무산됐다.박의사와 가네코 여사는 정식 결혼식을 올리지는 않았으며 슬하에 자식도 없었다. 박의사가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린 부인은 지난 76년 타계한 박의숙(朴義淑·본명 張義淑)여사이다.두 사람이 결혼한 것은 1947년.당시 박여사는 도쿄여대 일어과를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로 일본 국제신문 기자로 근무했는데 출옥 1주년 맞아 박의사의 인터뷰를 갔다가 인연이 돼 결혼하게 됐다.박의사는 47세,박여사는 29세였다.박여사는 결혼 1년 만에 장남 영일(榮一·51·육군 준장)씨를,이듬해에장녀 경희(慶姬·현재 일본거주)씨를 낳았다.그러나 행복도 잠시,6·25 와중에 박의사는 납북됐고 가족들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이때 박여사는 남편의 뜻을 따른다는 뜻에서 성을 장씨에서 박씨로 바꾸었다.장남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당시 북한에 있던 박의사로부터 장남을 한국으로 데려가 교육시키라는 편지를 받고 박여사는 장남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67년)시켰다.박의사의 장남 영일씨는 현재 군 정보계통에 근무중이며 97년 장성으로 진급했다.현재 영일씨의 가족은 서울에 살고 있다. 정운현기자 jwh59@
  • 김중권실장 대구서 특강

    김중권(金重權) 대통령비서실장은 9일 대구지역을 방문, 대구 문화예술회관과 교원연수원에서 이 지역 새마을운동 관계자와 초·중·고교 교장들을 대상으로 특강을 했다. 김 실장은 세계 각국의 2000년 맞기 채비를 소개하는 것으로 강연을 시작했다.미국의 ‘과거를 존중하고 미래를 그려보며’와 일본의 ‘21세기를 향한새로운 경제사회 구축’,영국의 ‘멋진 영국’,프랑스의 ‘인류를 위한 새시대 길잡이 마련’,독일의 ‘미래지향의 21세기 건설’ 등을 소상히 설명했다. 그는 “우리의 제 2건국운동이 바로 새로운 천년 맞기 준비운동과 궤를 같이 한다”며 동참을 호소했다. 그 연장선에서 김실장은 국민통합과 박정희(朴正熙) 전대통령의 기념관 건립사업에 대해 소회(所懷)를 털어놨다.먼저 “민족의 명운이 좌우되는 국가적 과제를 눈앞에 두고 지역갈등을 부추기는 행위는 매국적 행위”라고 규탄했다.이어 “현해탄 위에서 생사의 문턱까지 넘나들었던 분이 박 전대통령과의 인간적 화해를 말한 것은 숱한 내면적 고민과 갈등을 겪은 뒤 내린 용서와화해의 결단”이라고 김 대통령의 화해 노력을 강조했다. 양승현기자 yangbak@
  • [한진·통일그룹 탈세] 2. 어떤 수법 동원했나

    한진그룹은 항공기 도입과정에서 생겨난 거액의 리베이트를 해외유출하거나국내로 일부 반입, 사주의 개인목적에 사용한 것으로 국세청 조사결과 드러났다.일성건설 등 통일그룹 계열사는 허위계약서를 작성하는 수법 등으로 세금을 탈루했다. ■ 한진그룹?리베이트 사용(私用) 대한항공은 91∼98년 중 외국 A,B사(가명)의 항공기를 구매할 때 C사의 엔진을 장착하는 조건으로 받은 리베이트(엔진가격 할인금액)의 일부인 1,685억원을 국내로 들여와 조중훈(趙重勳) 회장과 조양호(趙亮鎬) 회장 등이 개인적으로 사용했다. 실제로 600만달러의 리베이트를 97년 11월26일 국내로 들여오고 98년 7월29일에 이 중 18만달러(2억5,000만원)를 개인 목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3개를당좌수표로 나눠 찾았다.원래 리베이트는 자산으로 계상해 법인세를 내야 한다. ?해외 현지법인에 재산 빼돌리기 리베이트를 조세회피지역(Tax Haven)인 아일랜드 더블린에 100만달러를 출자해 설립한 현지법인 KA사로 넘겼다.국내본사가 받아 장부에 올려야 하는데 해외현지법인에 넘김으로써대한항공 재산 1억8,400만달러가 해외현지법으로 이전돼 814억원의 세금이 누락됐다. 97∼98년 중 중고항공기를 외국기업의 서류상 특수목적회사(SPC) 등에 시가의 70%에 팔고 다시 임차하면서 리스계약 종료후 항공기소유권이 현지법인인 KA사로 넘어가도록 했다.즉 저가양도로 인한 차액 30%(1억9,000만달러)가 KA사로 넘어갔다. 또 외국사의 항공기를 구매하기 위해 96년부터 선급금 형식으로 8,200만달러를 지급하고 이 항공기를 KA사가 금융리스 방법으로 다시 구매토록 하면서선급금 중 2,200만달러만 대한한공이 회수했다.미회수금 6,000만달러는 KA사로 빼돌렸다. ?계열사 부당지원 대한항공은 자금사정이 어려워진 계열 한진투자증권이 발행한 후순위채 170억원을 고가로 사들였다.또 주가가 3,100원이던 한진투자증권의 유상증자에 참여,94만2,193주를 주당 5,000원에 취득해 대한항공 이익을 부실계열기업에 넘겼다. ?변칙증여 한진그룹 조중훈 회장은 90년 이후 자녀들에게 회사자금 1,579억원을 유출시켜 계열사 주식 취득자금으로 썼다.조회장은 94년10월 대한항공주식 75만주를 팔고 이 대금을 5개은행 지점에서 수표로 찾아 본인 명의의종합금융사 어음관리계좌(CMA)에 분산관리하다 95년 1월 조양호 등 6명의 수익증권 계좌에 입금시켰다.이 돈을 유상증자 대금으로 사용했으며 이러한 수법으로 총 967억원의 소득세와 증여세를 내지 않았다. ?해외위장 송금 한진해운은 거래은행에 해외송금을 의뢰했다가 취소하는 방법으로 96? 이후 16차례에 걸쳐 회사자금 38억원을 인출해 빼돌렸다.특히해외에 이미 지급한 컨테이너 임차료 40만4,000달러의 증빙서류를 복사해 사용함으로써 이 만큼이 추가로 송금된 것으로 위장했다. ?취득원가 과다계상 한진종합건설은 취득했던 매립지를 양도하면서 취득원가를 정상가액 567억원보다 높은 827억원으로 과다계상함으로써 양도차액 260억원을 적게 신고,특별부가세 64억원을 내지 않았다. ■ 통일그룹?일성건설 95∼98 사업연도 중에 공사현장 노무비를 거짓으로 산정해 공사원가를 실제보다 22억원 많게 계산했다.94년에는 공사대금으로 받은 부동산을 관계사에 23억원에 팔고도 17억원으로 매각한 것처럼 허위계약서를 작성해 차액 6억원을 현금으로 받아챙겼다. ?세계일보 광고국 특별판촉비 14억원을 접대성 경비로 사용한후 회사 주변음식점에서 받은 간이영수증으로 대체해 결손금을 늘렸다.94∼98 사업연도중 판매국에서 신문유가지 확장사업을 하면서 지급한 수당 61억원을 노무비로 처리했다.97∼98년에는 재단에서 무상으로 지원받은 739억원을 이익으로잡지 않았다. ?한국티타늄공업 계열사 대출금 이자 158억원을 수입으로 계상하지 않았고95년7월 공장신축때는 보상비를 지급한 것처럼 서류를 위조해 회사자금 2억원을 유출시켰다. 추승호기자 chu@ -최대위기 맞은 '한진패밀리' 한진그룹이 창사 54년만에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한진은 지난 45년 한진운수로 시작해 6·25전쟁의 특수속에 트럭운수사업으로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66년 대한항공의 전신인 대한항공공사(KNA)를 인수한 뒤 현재 해운·금융·중공업 분야에서 16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재계 6위 그룹으로 성장했다. 한진은 재계에서도 유명한 혈족경영체제로 조중훈(趙重勳)회장 일가가 핵심계열사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다.조회장은 지난 4월 잦은 항공사고의 책임을지고 대한항공 회장직에서 물러났지만 여전히 그룹의 총수로 군림하고 있다. 92년부터 네 아들에게 계열사를 물려줬지만 아직도 한진이 ‘1.5세대 기업’으로 불리는 이유다. 조회장의 장남인 양호(亮鎬·50)씨가 대한항공 회장을 맡고 있는 것을 비롯,차남 남호(南鎬·49)씨는 부친이 회장으로 있는 한진건설 부회장을 맡고 있다.3남 수호(秀鎬·45)씨는 한진해운사장,4남 정호(正鎬·41)씨는 한진투자증권사장으로 있다.조회장을 정점으로 4남이 그룹 핵심 계열사를 이끌고 있다.더구나 조회장 일가는 여전히 대한항공의 지분 25.3%를 보유하며 후선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지난 4월 대한항공 사령탑에 심이택(沈利澤) 사장을 내세웠지만 외형상으로만 전문경영인체제일 뿐 실제로는 족벌경영을 해 온 셈이다. 당시 대한항공이 잇따른 사고로 조회장의 퇴진이란 극단적인 상황에까지 내몰린 것을 두고 건교부 안팎에서는 “경영진이 화(禍)를자초했다”고 입을모았다.조회장은 지난 88년 아시아나항공이 등장하기 전까지 정권과 밀착관계를 유지하며 대한항공을 외형상 세계 10대 항공사로 키웠다.그러나 독점이란 이름아래 서비스 개선에는 늘 뒷전이었으며 항공기 조종사들의 상벌규정을 만들어 무리한 운항을 부추겼다.또 승객의 안전을 도외시한 채 수익성만좇는 경영으로 지난 30여년간 숱한 항공사고를 냈다. 팔순이 다 된 조회장의 권위주의적인 사고방식도 문제점으로 거론된다.대한항공 직원들은 “최고경영자가 (우리를) 먹여살리는 존재로 여긴 나머지 군림하려 드는 것이 가장 섭섭하다”고 털어 놓을 정도다.지난해 8월 회사측은김포활주로 이탈사고 뒤 조회장과 조종사간의 간담회를 추진했다.그러나 조회장은 “그런 것 하면 (조종사들의) 기(氣)만 살려주게 된다”며 이를 거부한 것이 단적인 사례다. 조회장은 평소 “창업자에게 은퇴란 없다”는 말을 즐겨 썼다.대한항공회장직에서 물러나면서도 수렴청정(垂簾廳政)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놓았다.심복 중의 한 사람인 심사장을 내세워조씨 일가가 경영을 좌지우지할 수 있게해 놓았다.실제로 ‘조중훈-조양호-심이택 라인’은 지금도 물밑에서 가동을 계속하고 있다는 게 업계 분석이다. 박건승기자 ksp@ -통일그룹은 어떤회사 통일그룹은 통일교가 ‘선교를 위한 경영’을 내세우며 운영해온 기업이다. 그룹의 모태는 교주인 문선명(文鮮明)목사가 59년 인천에 세운 ‘예화(銳和)산탄공기총 제작소’로 나중에 그룹의 주력사인 통일중공업이 됐다.60년대후반부터 사업확장을 시작,일성종합건설·일신석재·한국티타늄·㈜일화·선도산업·통일실업·세계일보 등이 그룹 계열사로 합류했다.최대주주는 통일교의 재산을 관리하는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 유지재단’이며 현재 그룹총수는 황선조(黃善祚) 세계일보 부회장이 맡고 있다. 그러나 통일그룹은 만성적인 경영부진과 방만한 경영,복잡하게 얽힌 계열사간 지급보증 등으로 IMF관리체제 이후 급격히 동반몰락의 길을 걸어왔다.특히 지난해 말 통일중공업이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대상에서 탈락한 것이 결정적이었다.현재 통일중공업·한국티타늄·일신석재·일성건설 등 주력 4개사가 법정관리 인가를 기다리고 있다. 그룹 관계자는 탈세조사 발표에 대해 “법정관리 결정을 기다리는 상황에서터진 이번 일로 그룹 경영정상화가 더욱 힘들어지지 않을까 모르겠다”고 우려했다. 김태균기자 windsea@
  • [특별기고] 역사학계에 묻는다

    국내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는 어느 서양인 교수가 ‘한국은 역사왜곡이 일상화된 사회’라고 비판한 글을 본 적이 있다.이러한 지적은 대단히 불쾌하고 모욕적인 것이지만 딱부러지게 반박할 수만도 없는 것이 우리의 실상이다.그가 말하는 ‘역사왜곡’의 상당 부분은 우리 역사학계의 지나친‘애국심’에서 비롯된다. 애국심에 넘치는 일부 역사 학자들이 우리 역사의 부끄러운 부분을 감추고,우리의 잘못을 남의 탓으로만 돌리며,특정한 사건이나 인물을 터무니 없이 미화하거나 깎아내리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행동은 얼핏 대단히 애국적인 것처럼 보인다.그러나 진실이 아닌 것에서 역사의 교훈을 얻을 수 없으며,진실이 아닌 것에서 진정한 애국심을 기대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들의 역사 왜곡은 결코 애국적인 것이 될 수 없다. 필자는 ‘이완용평전’을 쓰면서 이 서양인 교수의 지적이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수없이 확인했다. 우리역사에서 이완용은 탐욕스럽고 패륜적이며 배은망덕한 인간 말종의 전형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가 술도 마실줄 모르고여자도 밝히지 않았으며 오로지 시문과 서예를 낙으로 삼은 전형적인 조선 선비의 풍모를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러한 덧칠 속에 가려져 왔다.또 그가 독립협회 전체 존속기간의 3분의 2이상 동안 위원장과 회장으로서 사실상 협회를 이끌었으며,학부대신으로서 이 땅에 최초로 의무교육제도를 도입했다는 사실 역시 우리 역사의어디에도 나타나 있지 않다. 결코 매국노 이완용의 알려지지 않은 애국활동을 들춰내 그를 찬양하자는것이 아니다.매국노라고 해서 ‘며느리와 사통했다느니,고종에게 양위를 강요하면서 칼을 들이댔다느니’하는 식의 저급하고 근거없는 풍문 수준으로그를 매도만하는 한 우리는 영원히 ‘이완용’이라는 매국노의 실체에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의 애국활동은 애국활동대로,매국행위는 매국행위대로 사실대로 기록해야한다. 이런 가운데서 우리는 한 때의 애국자가 만고의 매국노로 전락하게 된그 비극적 과정과 배경, 변신의 논리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작업을 통해서만이 제2의 이완용이 나타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1895년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새벽 대원군이 일본 낭인들과 조선군 훈련대 군졸들을 이끌고 경복궁에 쳐들어와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대궐을 장악하자 학부대신 이완용은 그날로 정동의 미국공사관으로 피신한다.친러 배일파로서 민비편에 붙어있던 그는 대원군의 보복이 두려웠던 것이다.이른바 민비시해사건은 당시 조선주재 일본공사 미우라의 주도 아래 실행된 것이 사실이지만 사건의 주범은 명백히 대원군이었다. 사건이 일어나기 4일전 대원군은 자신의 마포 공덕리 별장 사랑으로 찾아온일본인 궁내부 고문관 오카모토 류노스케와 명성황후 시해와 관련한 4개항의각서에 자필로 서명했다.그리고 사건 당일 새벽 3시 대원군은 일본 낭인들과 조선군 훈련대 군졸들의 호위를 받으며 그의 별장을 떠나기에 앞서 자신의 거사이유를 밝히는 고유문을 발표하고 이를 서울 시내에 게시하게 했다.사건이 진행되는동안 그는 경복궁내 강령전에 머물며 난입자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했다는 보고까지 받았다. 대원군이 명성황후 시해의주범이라는 데는 당시 조선에 주재하고 있던 서구국가 외교사절들 사이에도 이론이 없었다.사실 명성황후 시해는 대원군과명성황후의 22년간에 걸친 이성을 잃은 권력투쟁의 종결편이라는 성격을 간과하고는 이해될 수 없는 사건이다. 그런데도 우리 역사학계는 명성황후 시해와 관련해 대원군의 역할은 쏙 빼버리고 일본을 비난하는 데만 열을 올리고 있다.이런 식의 역사인식이 계속되는 한 우리는 역사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을 수 없을 것이다.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나는 역사학계에 묻는다.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역사를 왜곡해서 쓰고 가르칠 것인가. 그것이 애국인가. 언제까지‘을사5적’이라는 비이성적인 역사용어를 사용할 것이며, 고종이 을사조약에 ‘끝까지’ 반대했다는 사실과 다른‘신화’를 만들어낼 것인가. 역사학계는 이런 문제제기에 대해 분명히 답변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올바른 역사인식의 토대 위에서 건강한 민족사 창조를 위해. [尹德漢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
  • [독자의 소리] 친일인사 인명록 발간 노력에 박수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사 3,000여명을 10여권의 사전에 담는 대 사업을진행중이라 한다.전국교수 1만여명의 지지서명을 받았다고도 한다. 해방이 된지 50년이 지났지만 오늘까지 우리는 진정한 해방을 이루지 못했다고 생각한다.그것은 아직도 사회지도층에 도사리고 있으면서 정의롭지 못한 권력을 휘두르는 친일파들을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이는 선열들은 물론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도 부끄러운 일임에 분명하다.민족문제연구소의 이러한 노력이 그래서 더욱 고귀하다. 친일매국인사 청산은 마지막 한 사람까지 완벽하게 진행되어야 한다.이번에도 제대로 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광복되지 못한 부끄러운 나라를 후손에게 물려주는 셈이 될 것이다. 김석영[경기도 수원시 매탄2동]
  • [義烈 독립투쟁](1-2) 李在明 의사

    안중근(安重根)의사가 중국 하얼빈역에서 일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한 지 채 두 달이 못돼 국내에서는 한 애국청년이 ‘을사오적’의 하나인 이완용(李完用)을 노상에서 습격,치명상을 입힌 의거가 일어났다. 을사조약 체결로 한국은 일제에게 외교권을 박탈당하였고 한국 땅에는 일제의 통감부가 설치되어 사실상 한국정부를 대신하였다.1907년 ‘헤이그밀사사건’으로 고종황제가 강제 폐위당한 데 이어 한국군의 해산 등 일제의 한국침략은 갈수록 강도를 더해 갔다.이에 전국에서 의병이 궐기해 일제에 대해무력항쟁을 시도했으나 병력과 물자에서 역부족이었다.여기서 돌파구로 모색된 것이 바로 개별단위의 의열투쟁이었다.이는 일제의 침략 주동자와 친일적신들을 처단함으로써 그들의 침략의지를 분쇄시키고 동시에 동포들에게 구국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함이었다.이완용처단의거도 그 연장선상에서 시도된 것이었다. 1909년 12월22일 오전 이완용은 5일 전인 12월17일 사망한 벨기에 황제 레오폴트 2세의 추도식이 열리고 있는 서울종현(鐘峴) 천주교회당(현 명동성당)내 추도식에 참석하고 있었다.11시 30분경 식이 끝나자 이완용은 저동(苧洞) 자택으로 돌아가기 위해 인력거에 올라 교회 오른쪽 언덕길을 막 오르려던 참이었다.이때 갑자기 한 청년이 인력거 뒤에서 달려오더니 품 속에서 단도(短刀)를 꺼내 순식간에 이완용의 왼쪽 어깨(左肩)를 내리 찔렀다. 졸지에 습격당한 이완용이 인력거 아래로 고꾸라지자 청년은 따라내려가 그를 타고 앉아 이번에는 오른쪽 허리(右便腰部)를 찔렀다.이완용은 이내 의식을 잃고 길바닥에 쓰러졌다.이를 지켜보던 인력거 차부(車夫) 박원문(朴元文)이 달려들어 제지하려 하자 청년은 그의 어깨를 찔러 쓰러뜨리고는(박원문은 왼쪽 폐를 찔린 후 나중에 사망함) 다시 이완용에게 달려들어 오른쪽 신장(腎臟)부분을 난자하였다(이완용의 생질로 그의 비서관을 지낸 김명수(金明秀)가 1927년 간행한 이완용의 전기 ‘일당기사(一堂紀事)’에서 인용).길바닥은 유혈이 낭자하고 순식간에 일대는 아수라장이 돼버렸다. 소기의 성과를 달성했다고 판단한 청년은 그때서야 ‘대한독립 만세!’를외쳤다.때마침 인근에서 호위하던 순사들이 달려들어 체포하려 하자 청년은칼을 휘두르며 대항하였다.그러나 중과부적으로 일경의 칼에 하체에 상처를입고 붙잡히고 말았다.이 의거로 결국 이듬해 처형된 청년이 바로 이재명(李在明)의사로 검거 당시 23세였다. 이 의사는 평양 출신으로 13세때 예수교에 입교하였으며 평양 일신(日新)학교를 졸업하였다.1904년 미국 노동이민회사의 이민모집에 응모,하와이에서농부로 일하다가 1906년 3월 재미한인 독립운동단체인 공립협회(共立協會)에 가입,활동하기도 했다.1907년 공립협회에서 매국적(賣國賊) 숙청을 결의하자 자원,그 해 10월 배로 일본을 거쳐 귀국했다.귀국 후 중국과 노령(露領,러시아령) 등 각지를 돌며 동지를 규합하고 일제의 침략 원흉들과 매국노의처단을 결심한 이 의사는 1909년 1월 순종황제의 서도(西道,평안도) 순시때이토(伊藤博文)가 동행한다는 사실을 접하고 평양역에서 이토를 처단하기 위해 동지 몇 사람과 정거장에서 대기했다.그러나 이토가 자신의 신변의 위협을 우려해 순종황제에게 붙어다니므로 이토를 향해 발포하다가 자칫 순종황제의 안전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도산 안창호의 만류로 이 계획은 미수에그치고 말았다.그러나 이토를 처단하기 위해 원산을 거쳐 해삼위(海蔘威,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기회를 엿보던 중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그를 처단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하였다. 일제와의 무력항쟁이 어려운 상황에서 일제 침략괴수보다는 매국노들을 먼저 처단하는 것이 국권수호의 첩경이라고 생각한 이 의사는 이완용 등 을사오적을 처단 대상으로 지목하였다.그들 가운데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은 첫번째 대상인물이었다.거사 1개월 전인 11월 하순경 이 의사는 동지들과 숙의끝에 자신은 이동수(李東秀)·김병록(金丙祿)과 함께 이완용을,김정익(金貞益)·조창호(趙昌鎬)는 일진회 회장 이용구(李容九)를 처단하기로 결의하였다.12월7일 최종모임에서 일행은 역할분담을 확정하였다.거사 결행자 이외에 오복원(吳復元)·박태은(朴泰殷)·이응삼(李應三) 등 3인은 거사자금 조달을,조창호·전태선(全泰善)은 거사에 필요한 권총·단도를 준비하여 서울로운반하는 책임을,그리고 김용문(金龍文)은 먼저 서울로 올라가서 이완용과이용구의 동정을 탐지하기로 했다. 12월12일 상경한 이 의사는 당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기사를 통해이완용이 벨기에 황제 추도식에 참석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거사 당일 아침 군밤장수로 변장,성당 정문 앞에서 군밤을 팔며 동태를 살폈다.오전 11시30분경 추도식을 마친 이완용이 인력거에 오르자 이 의사는 그를 응징하고는 현장에서 체포돼 이완용 저택 보호순사실로 끌려갔다. 의거현장에서는 이 의사 이외에 여인 2명도 같이 체포되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은 이 의사의 부인 오인성(吳仁星)여사였다.권총을 휴대한 채 성당 문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동수와 조창호는 이 의사가 체포된 후 현장에서 도주하였다.이 사건으로 이 의사 등 13명이 이듬해 3월13일 정식 기소되었다. 첫 공판이 열린 5월13일 오전 9시30분경 이 의사 등 일행을 태운 3대의 호송차가 신축한 지방재판소에 도착하였다.중키에 짧게 깎은 머리,흰색 죄수복을 입은 이 의사가 동지 일행과 함께 출정하자 10시5분 개정에 이어 검사의기소장 낭독이 끝나고 재판장의 심문이 시작됐다. 문:공모자는 모두 몇 명이나 되는가?답:한 사람도 없다. 문:찬성자도 없었는가?답:2천만 동포가 모두 찬성자다. 문:거사는 언제부터 준비했나?답:을사조약 체결 후 미국에 있을 때부터 준비했다. 문:왜 이완용을 죽이려고 했나?답:죄목은 8개조(條)다.그 첫번째가 을사조약 체결이다. 거사현장에서 압수된 권총·단도 등 거사용품을 가리키며 재판장이 물었다. 문:행흉(行凶)에 사용된 무기는 이것들인가?답:행흉이라니,나는 행의(行義)를 했다.(‘일당기사’에서 인용) 18일 선고판결에서 이 의사에게는 ‘교(絞)’,즉 교살형이 선고되었고 김정익·김병록은 징역 15년,자금조달책인 이응삼에게는 최저형인 징역 5년이 선고되었다. 6월30일 경성공소원(京城控訴院)에서 열린 2심 공판에서 검사는 “1심판결은 ‘완전무결’한 것”이라며 1심대로 판결을 내려줄 것을 재판부에 요청하였다.8월 최종선고에서 사형이 확정되자 이의사는 “너희 법이 불공평하여나의 생명은 빼앗지만 나의 충혼은 빼앗지 못할 것이다.나를 교수형에 처한다만 나는 죽어 수십만 명의 이재명으로 환생해 너희 일본을 망하게 할 것이다”라며 엄숙히 경고하였다. 9월13일 사형집행에 앞서 기독교 신자인 이 의사는 “내가 보던 찬미(讚美,찬송가)책이나 갖다 달라”고 하여 207장 ‘예수가 나를 기다리심’을 1절부터 끝까지 읽고는 조용히 순국하였다. 한편 이 의사의 습격을 받은 후 다량 출혈로 사경을 헤매던 이완용은 일제당국의 각별한 치료 덕분에 이듬해 2월14일 퇴원하였다.그가 입원해 있는 동안 그의 병실이 있던 대한의원(현 서울대병원 구관)에는 통감부 소속 일본인 고관을 비롯해 고종·순종황제가 보낸 칙사,한국정부 고관,심지어 한국거류 일본인들의 병문안 발길이 끊일 날이 없었다. 퇴원 후 내각 총리대신으로 복귀한 이완용은 이 의사 순국 20여일 전인 8월22일 한국통감 데라우치(寺內正毅)와 마침내 ‘한일병합조약’을 체결,강토와 국권을 일제에 내주고 말았다.금산(錦山)군수 홍범식(洪範植)은 이 소식을 듣고 뒷산에 올라가 목을 매 자결하였고 매천 황현(黃玹)은 ‘절명시’를 남기고 음독,순국하였다.1910년대 의열투쟁은 이로써 또하나의 출발점에 서게 되었다. 정운현기자 jwh59@
  • [광복회 주최 학술대회] 친일파 청산과 민족정기선양

    친일파 척결의 의의는 과거사 청산과 그로 인한 민족정기 선양으로 압축할수 있다.그러나 해방 54주년이 되는 현 시점에서 돌이켜 볼 때 두가지 모두만족스럽지 못했다.해방된 조국에서 친일파 척결은 단순히 과거사에 대한 회고나 보복차원이 아니라 민족과 국가의 장래를 위한 일종의 ‘정언적(定言的)명령’이었다.다시말해 일제하 민족반역자들에 대한 처단은 새 시대를 맞는 입장에서 결연한 의지의 표현이자 시대적 당위였다고 할수 있다. 북한정권이 해방직후 친일파를 처단하면서 국가차원의 보훈정책을 편 것은바로 이 때문이었다.반면 남한은 친일파 처단은 물론 독립운동가들에 대한보훈정책 역시 6·25 이후에야 겨우 시작됐다.그러나 이 역시 군·경찰을 위주로 하고 있고 독립운동가들은 여기서도 뒷전이었다. 현재 우리정부의 보훈예산은 전체 국가예산의 1%에 불과한데 이는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수치다.특히 독립유공자들이 받는 예우수준이 예비역 장성·영관급 장교들보다 낮은 것은 우리의 보훈정책이 얼마나 왜곡됐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이다.이같은 사정으로 우리사회에는 일제잔재문제에 대해 거의 몰역사적·무비판적 견해가 팽배해 왔다.일제의 입장에서사용한 이조(李朝)·의병토벌·정신대·징용 등의 용어가 아무 비판없이 통용되고 있으며 심지어 매국노의 후손들이 친일의 대가로 획득한 선조의 땅을 되찾겠다고 나서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우리 국회는 매국노의 재산환수를 골자로 한 특별법 제정은 외면하고 있으며 사법부는 실정법 만능의 법정신에서 매국노의 재산을 보호해주는판결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사정이 이러고 보니 일본군 장교출신의 독재자가 ‘근대화의 기수’로 미화되고 있으며 친일파들이 사죄·반성은 커녕 역사왜곡조차 서슴지 않고 있다.‘시작은 언제나 늦지않다’는 서양격언을 되새기며 몇 가지를 제안한다.우선 순국선열의 생애와 애국정신을 담은 역사교육,국립묘지에 묻힌 친일파 제거,보훈업무의 재정비,친일파 청산을 위한 특별위원회 구성 등이 필요하다고 본다. 정리=정운현기자 jwh59@
  • 윤덕한씨 첫 인물평전 펴내

    ‘친일 매국노’의 대명사 이완용(李完用·1858∼1926)의 평전이 출간됐다. 윤덕한씨(54·전 경향신문 정치2부장))가 쓴 ‘이완용 평전-애국과 매국의두 얼굴’이 바로 그것이다.(도서출판 중심 1만원). 윤씨는 “일본에서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 관한 저술이 단행본만도무려 200여 종에 달하는 데 반해 국내에서는 ‘만고의 역적’이라고 욕하는이완용에 대해 제대로 된 연구서 한 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이 책을 쓰게 됐다”고 집필동기를 밝히고 있다. 그러나 집필을 개시한 직후 윤씨는 큰 혼란에 빠지게 됐다고 말한다.지금까지 알려진 것과는 전혀 다른 이완용의 모습이 윤씨 앞에 속속 나타났기 때문이다.이완용은 ‘을사오적’의 한 사람으로 매국노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는 며느리와 간통을 할 정도의 패륜아도 아니었고 고종에게 칼을 들이댈 만큼 배은망덕한 인간도 아니었다.오히려 반대로 주색도 모르고 시문과서예를 낙으로 삼은 전형적인 조선조 선비였고 일제에 협력하면서도 조선왕실에 끝까지 충성을 바친 ‘충신’이었다는 것이다.윤씨는 특히 “이완용은 독립협회의 위원장·회장으로 활동하였고 학부대신 시절 의무교육제도를 처음으로 도입,법제화한 인물”이라고 밝혔다. 그렇다면 한 때 이토록 애국적이었던 인물이 왜,어떻게 해서 우리가 현재알고 있는 것처럼 만천하의 매국노로 전락하게 되었을까. 이 책에서 그가 결론적으로 발견한 이완용의 매국의 논리는 ‘대세상 어쩔수 없었다’는 ‘대세순응주의’다.좋은 집안 배경에다 뛰어난 머리로 공부를 잘 해서 일찍 출세한 그가 현실 속에서 만난 ‘종착점’은 당시 상황으로선 ‘친일’이 최선이라는 것이었다. 정운현기자 jwh59@
  • [김삼웅 칼럼] 정치새틀짜기의 전제

    새천년이 열리기까지는 5개월이 남았다.이 기간은 어찌보면 20세기 영욕의역사를 마무리하는 시간이며 다른 한편 새천년을 준비하는 마지막 기회이다. 짧은 시간에 마무리하고 준비해야 할 큰 과제의 하나가 새틀의 정치개혁이다. 지금 상태의 정당과 정치구조로 새천년을 맞기에는 국가의 운명이 너무불안하다.100년 전에도 준비없는 지도자들의 우물안 개구리같은 정세인식과권력의 진흙싸움으로 20세기를 맞았지만 5년만에 을사조약,10년만에 합방조약으로 망국의 비극을 겪어야 했다. 1899년 독립협회측은 만민공동회 등 시민운동을 중심으로 개혁과 개방을 추진하고,수구세력은 보부상의 황국협회 조직등을 통해 이에 맞서 첨예하게 대결하다가 이런 틈새를 파고든 일제에 국권을 빼앗겼다. 당시 지도자들은 국제정세나 새시대에 대한 안목과 연구가 전혀 없이 오로지 명분싸움과 권력쟁탈에 시종하다가 매국노 아니면 망국노의 신세로 전락했다. 지금 우리 실상은 어떤가.특히 정치 집단의 인식과 행태는 어떠한가.어렵게 IMF터널을 벗어나고 있지만 정치는오히려 국난극복과 개혁의 걸림돌이 되고 정당은 국론분열과 지역주의의 온상이 된지 오래다. 20세기초 제국주의의 양육강식 지배보다 훨씬 냉혹한 무한경쟁의 논리가 새천년 초두의 세계질서인데 우리는 과연 국제경쟁에서 살아남을 준비를 하고있는가.정치 경제 과학 기술 대학 어느분야에서 국제경쟁력을 갖추고 있는가 자문하게 된다. 국가경영과 국민통합의 구심이 돼야 할 정치가 19세기적 사고와 행태로 국가발전을 가로막고 있다. 끝없는 정쟁과 부패,정파이기주의는 국민의 정치불신과 정치혐오증을 가중시킨다. 정치의 틀과 주체가 바뀌어야 한다. 국민회의의 새정당창당, 자민련의 보수인사영입,한나라당의 외부인사수혈,김영삼 전대통령과 5,6공세력의 정치재개 움직임 등 최근 급박한 정치변화의 흐름은 그야말로 구태의연한 ‘정계개편’일뿐 새천년에 대비하는 새틀의 정치개혁과는 거리가 먼 것 같다. 맨날 ‘그밥에 그나물’식의 인물군으로는 비빔밥을 만들거나 한정식을 차리거나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문제는 정치의 새틀을 짜고 많은 전문가와 신인이 참여하고 지역주의 극복과 새시대 이념을 제시하는 정치의 패러다임을바꾸는 일이다. 먼저 지방토호,부패인물,정권순례자, 과대포장자,환란책임자,인권탄압자,공작정치인,사생활문란자 등 정치적 법적 도덕적으로 문제가 많은 인물은 설혹 선수(選數)나 명망,득표력이 있더라도 여야 공히 이번 기회에 정계에 발을붙이지 못하도록 해야한다. 그러지 않고 온갖 잡탕을 끌어모아 덩치키우기나 실패한 정치인들의 정계복귀용 정계개편이어서는 ‘실패의 반복’이 될 뿐이다. 일제말기 일본의 대정익찬회(大正翼贊會)나 5공의 민정당 그리고 1990년 3당통합과 같은 원칙없는 잡탕식 세불리기는 국민이 바라는 정치개혁이나 새시대를 담당할 정치주체 형성이 될 수 없다. 정치개혁과 정치의 새틀을 짜는 역할은 김대중대통령이 주체일수밖에 없다. 김대통령은 40년 정치활동의 마지막 사명감으로 21세기를 내다보고 지역통합과 평화통일 그리고 국제경쟁력에 대비하는 여당의 새틀을 짜야 한다. 이상적인 정당의 새틀을 짜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기득권자의 반발과 지역주의를 악용하려는 세력의 도전,‘당근과 체찍’을 갖지못한 정권의 한계 등 여러 난제가 가로막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기회에 정치의 새틀을 마련하지 못하면 20세기 초기에 우리가 당한 시련과 고난을 되풀이할 지 모른다. 정치의 새틀에는 몇가지 전제가 요구된다.첫째는 노장청 세대의 조화이고둘째는 인재의 지역적 형평성이며 셋째는 남녀 성별의 배합이다.여기에 때묻지 않는 새로운 인재수혈과 각계 전문 인력의 영입 그리고 새시대를 이끌 이념과 정책이 정립돼야 한다.정당구조와 국회기능을 크게 바꾸는 것도 시급하다.정치개혁에는 야당도 상응한 변화가 따라야 한다.
  • 대한매일신보 직원출신 임치정·이교담 선생 사진 첫공개

    한말 항일민족지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의 직원출신 임치정(林蚩正)· 이교담(李交담)선생의 활동 당시 사진이 후손에 의해 처음 공개됐다. 15일 이교담 선생의 손자 이정원(李貞園·50)씨는 본지 창간 95년을 맞아언론학자인 정진석(鄭晋錫·신문방송학)한국외국어대 교수를 통해 이 사진을본지에 공개했다. 사진 오른쪽에 앉은 사람이 임치정 선생으로 임선생은 1904년 미국에 건너가 도산 안창호 등과 함께 교포단체인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조직하였으며 1907년 귀국하여 대한매일신보의 부총무 겸 회계사무 책임자를 지냈다.이교담 선생 역시 도산과 함께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공립협회의 기관지 ‘공립신보(共立新報)’의 인쇄인으로 활동하였으며 귀국해서는 대한매일신보의 업무직 사원으로 근무하였다.정진석 교수는 “흔히 대한매일신보라고 하면 발행인 배설(裵說)과한국인 논객 양기탁·박은식·신채호 선생 같은 분들만 떠올리기 쉬우나 임·이 두 선생은 이 분들을 도와 신보의 운영을 이끌어온 행동파였다”며 “이들은 일찍이 서구의 신학문을 공부하거나 외국에 다녀온 경험이 있어 진보적인 사상을 지닌 지식인이자 애국지사”라고 설명했다. 한편 이번에 공개된 사진은 두 사람의 복장과 사진 하단에 기록된 내용으로 봐 1907년 8월 이후에 촬영된 것으로 보인다.사진 하단의 ‘한국경성(京城) 천연당사진사(天然堂寫眞師) 김규진(金圭鎭)’이라는 기록은 천연당 소속사진사 김규진이 촬영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대한매일신보 1907년 8월20일자 광고란에는 천연당의 개업광고가 실려있다.또 두 사람의 복장은 1906년에 개정된 대한제국 장교의 정장차림으로 앉은 사람(임치정)의 계급은 정령(正領·현 대령),서있는 사람(이교담)의 계급은 부위(副尉·현 중위).군대경력이 없는 두 사람이 어떤 연유로 장교복장을 하고 사진을 찍었는지는 정확히알 수 없다.그동안 이 사진을 소장해온 이교담 선생의 손자 이정원씨는 “할아버지께서 미국서 찍은 다른 사진과 함께 이 사진을 보관해 왔으나 할아버지의 군대경력에 대해서는 할머니로부터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정진석 교수는 “군대해산(1907.8.1) 직후 구 한국군을 기념해 사진관에서 복장을 빌려 촬영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추측했다. 두 사람은 언론활동 이외에 항일투쟁사에서도 이름을 남겼다.임선생은 1907년 신민회(新民會)가 결성되자 총감독(당수) 양기탁 선생 밑에서 재정간사를 지냈으며,‘안명근(安明根) 사건’,‘105인 사건’ 등에 연루돼 수년간 옥고를 치렀는데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이 추서됐다. 또 이선생은 1910년 1월 매국노 이완용(李完用)암살미수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렀으며 양기탁 선생 등과 함께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이선생은 후손이 보훈당국에 서훈을 신청해 놓은 상태다. 정운현기자 jwh59@
  • 국정홍보처 차장 이규석씨 내정

    정부는 17일 국정홍보처 차장에 이규석(李圭錫) 전 동아일보 판매국장을 내정했다. 이 차장 내정자는 경남 진주 출신으로 중앙대를 졸업한 뒤 동아일보에 입사,영남취재본부장,편집국 부국장 등을 지냈다.
  • 역사소설「거상 여불위」진시황 生父 파란많은 일대기

    중국 진(秦)나라의 재상이자 섭정왕으로 천하에 권세를 떨친 ‘왕관 없는왕’,재사(才士)와 능사(能士)를 모으고 군대와 정권을 장악하는 법을 알았던 지략가,시공을 초월하는 고전 ‘여씨춘추’의 편찬자,한 시대를 풍미한권력가였지만 결국 자신의 아들에게 죽음을 강요당해 자살로 생을 마감한 인물….여불위(?∼BC 235년)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는 그대로 한편의 드라마다. 최근 솔출판사에서 펴낸 ‘거상 여불위’(정 시앙밍 지음,김하림 옮김)는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을 세운 진시황의 생부 여불위의 삶과 죽음을 다룬 역사소설로 관심을 모은다. 여불위는 한(韓)나라 양책(陽翟,지금의 허난성)의 상인으로 중국의 전국시대를 대표하는 실업가다.어느날 여불위는 조나라 수도 한단에 들어갔다가 우연히 그곳에 인질로 잡혀 있던 진나라의 서공자(庶公子) 이인(異人,훗날의진 장양왕)을 만난다.천하를 얻을 수 있는 기회임을 간파한 그는 상인 특유의 지략과 수단을 발휘,이인을 앞세운 정권찬탈의 대장정에 나선다.10여년에 걸친 장대한 계락 끝에 이인을 왕으로만드는 데 성공한 그는 13년동안 재상을 지내면서 전국시대 말기 제후국 중 가장 강대했던 진의 실제 통치자로군림한다.여불위는 장양왕의 옹립에 성공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아들 영정(영政,훗날의 진시황)을 임신한 애첩 조희를 장양왕의 정실로 삼음으로써 자신의 핏줄이 대국을 통치하는 세상을 실현한다.그러나 여불위는 결국 자신의 존재에 위협을 느낀 아들 진시황에게 죽음을 강요당한다. 이 소설은 ‘여불위는 진시황의 친아버지였다’는 전제에서 출발,역사의 이면에 가려진 여불위의 흔적을 좇는다.여불위는 10년동안 진나라의 왕관없는왕 노릇을 하며 조야(朝野)를 뒤흔들었다.그러나 여불위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이 소설엔 한낱 보석상에 불과했던 여불위가 진나라 재상직에 오르고 한족의 역사를 새로 쓰도록 하기까지의 거침없는행적이 그대로 묘사돼 있다.특히 ‘일자천금(一字千金)’의 수를 동원해 전국의 인재들로 하여금 ‘여씨춘추’를 편찬하게 하는 과정,정국거(鄭國渠)란 대수로를 만들게 되는 이야기,열두살짜리 사자 감라를 기용하는 배짱,조희의 손아귀에 가짜 내시 노애를 들여보내는 대목 등은 독자들에게 소설 읽는재미를 안겨준다. 작가에 따르면 여불위는 악비 같은 영웅도,진회 같은 매국노도 아니다.이원·조고 등이 국가의 죄인·방탕아·소인배로 지탄받았던 반면 여불위는 국가에 손해를 끼치지 않았으며 오히려 강토를 넓히는 등 업적을 남겼다는 것.다만 여불위의 잘못은 음모를 꾀했으면서 그렇지 않은 체했고,진 왕의 혈통을바꿨으면서 바꾸지 않은 체한 ‘거짓’에 있다는 게 작가의 견해다.작가는여불위가 ‘사기’의 ‘열전’에는 들어있지만 ‘세가’에 기록되지 못한 것도 그런 연유 때문이라고 밝힌다. 역자인 김하림교수(조선대 중국학과)는 “진시황이 왕위를 계승할 때 그는겨우 13세의 어린 아이였다.진나라의 정책이나 제도의 대부분은 여불위가 나이 어린 진시황 대신 진나라의 섭정왕으로 군림하면서 기초를 닦아 놓은 것이었다.진시황은 이를 계승 발전시켰을 따름이다.그런 점에서 여불위는 보다객관적이고 공정한 평가를 받을 만하다”고 말한다. 김종면기자 jmkim@
  • [외언내언] 프랑스의 대숙청

    “과거는 어디까지나 과거일 뿐이다. 과거는 역사 속에 묻어버려야 한다.” ‘인간도살자’ 별명을 가진 나치 게슈타포(비밀경찰) 바르비가 1985년 프랑스 정보기관에 체포되었을 때 남긴 말이다. 바르비의 이 말은 한국에서 가장 잘 먹혀든다.과거가 ‘어두운’ 사람일수록 ‘과거청산’을 거부하거나 두려워한다.그러면서 현재가 중요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데도 할 일이 많은데 언제까지 과거타령이냐며 여론을 왜곡한다. 이들은 한술 더 떠서 ‘미래지향’을 내세우고 마치 선각자연한다. 따지고 보면 우리처럼 ‘청산’해야 할 과거가 많은 국가도 흔치 않을 것이다.나라를 판 매국노와 친일파들로부터 군사독재 원흉,그들에 빌붙어 인권을 짓밟고 언론을 유린한 지식인·언론인,IMF환란을 불러온 책임자들에 이르기까지 한번도 제대로 청산을 하지 못했다. 그 결과 오늘날 사회정의가 바로 서지 못하고 새정부의 개혁작업이 그들의발목잡기에 시달리게 되었다.만년 양지족(陽地族),기회주의자들의 농간 또한 만만치 않다. 프랑스는 달랐다.4년여의 짧은 기간나치의 지배를 받았지만 드골 정부의과거청산 작업은 준엄했다.1940년 6월 프랑스는 패전과 함께 남북으로 분할되어 북부는 나치 독일군, 남부는 페텡의 비시 괴뢰정권이 다스렸다.비시 정권은 온갖 방법으로 나치에 협력하면서 조국을 배반했다. 해방과 함께 망명정부 자유프랑스를 이끈 드골은 나치 협력자 숙청에서부터 새나라 건설을 시작했다.나치 협력자 779명이 처형되고 2,777명이 종신징역,26,529명이 유기징역,3,678명이 공민권박탈형을 선고받았다.드골은 “국가가 애국자에게는 상을 주고 배반자나 범죄자에게는 벌을 주어야 국민을 단결시킬 수 있다”는 신념으로 나치 부역자들을 단호하게 처벌했다. 비시 정권의 페텡은 개인적으로는 드골의 스승이었지만 무기징역이 선고되고 옥중에서 자살했다.드골 정부는 나치 부역자 중 언론인·출판인·작가·지식인 그룹을 가장 가혹하게 다스렸다.드골은 “지식인은 도덕의 상징이기때문에 제일 먼저 죄를 물었다”고 밝혔다.친일파와 군사독재,환란 책임자청산에 손대지 못한 우리 처지에서 프랑스의 나치청산은 훌륭한 교훈이 된다.우리는 그동안 ‘프랑스의 교훈’을 떠올리면서도 막상 프랑스의 나치 숙청에 관련한 저서 한권,번역서 한권도 나오지 못한 황무지 상태였다.이 한가지 사실로도 우리 지성풍토가 얼마나 과거청산에 소극적이었는가를 보여준다. 언론인 주섭일(朱燮日)씨가 ‘프랑스의 대숙청-드골의 나치 협력 반역자 처단 진상’을 펴낸 것은 이런 의미에서 뜻깊은 일이다.남들은 반세기 전에 끝낸 일을 우리는 이제야 ‘교훈’으로 읽어야 하는가. 김삼웅주필
  • [독자의 소리] 위조상품 수출은 매국행위

    최근 미국 프랑스 일본 등 주요 교역 상대국들의 관세청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한국이 세계 최대 위조상품 수출국으로 잇따라 지목되고 있다고 한다.위조상품 원조국으로 낙인찍힐 경우 다른 수출상품의 대외 이미지에도 치명적인 타격을 줄 뿐만 아니라 통상마찰 요인이 될 것으로 우려된다.국내에는 지적재산권에 대한 인식이 희박한 데다 유명상표에 대한 소비자의 선호도가 높아 위조상표를 만드는 사람이 많다.그러나 수출품까지 위조상표가 붙었다면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이는 단순한 경제적 범죄행위를 떠나 국가위신을 추락시키는 매국적 행위인 것이다. ‘고아수출국’이나 ‘교통사고 다발국’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많이 갖고 있는 데다 ‘위조상품 수출국’이라는 오명까지 붙는다면 국제사회에서우리의 모습이 너무나 부끄럽게 될 것이다.정당한 상표가 붙은 제품만 구입해 가짜상표를 발붙이지 못하게 지혜가 필요하며 유명상표만 찾는 허황된 소비행태도 개선해야 한다. 황진문[경북 포항시 북구 죽도동]
  • [金三雄 칼럼] 부끄러움을 모르는가

    “냉정히 인식하는 자의 눈으로 볼 때 인간은 볼이 붉은 동물에 불과하다. 왜 볼이 붉어졌는가.그것은 인간이 너무 수치를 겪었기 때문이다.수치,수치….이것이 인간의 역사다.”― 초인의 철학자 니체의 잠언이다. 수치를 순수 우리말로 바꾸면 부끄러움이다.니체는 사람의 볼이 붉어진 것을 부끄러움을 겪었기 때문이라고 상징적인 해석을 남겼다. 이에 앞서 맹자는 “부끄러움을 모르는,그게 바로 가장 뼈아픈 부끄러움이다”라고 가르쳤다.우리 사회를 돌아볼 때 ‘부끄러움’을 모르는 후안무치들이 너무 많다. 장삼이사들이야 그렇다 치고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낯두꺼운 언행을 그냥 보아넘기기가 어렵다. ‘도덕불감증’ 또는 ‘도덕적 해이’에서 나타나는 현상일 수도 있겠지만근원적으로는 역사적인 산물이라고 하겠다.정치사회적으로 변화와 격동이 심한 사회에서 ‘과거청산’이 거의 이루어지지 못함으로써 ‘악의 유산’이선과 정의를 짓밟고 행세해 왔다. 송(宋)나라 조보(趙普)는 “형(刑)은 악을 징벌하고 상(賞)은 공에 보답하기 위해 있다”고주장했다.그런데 우리 사회는 형과 상이 제 역할을 못했다.형을 받을 자가 상을 받고 상을 받을 사람이 형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이런 가치전도의 사회 질서가 지속되다 보니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 설치는사회상이 되고 말았다. 일찍이 관자(管子)는 ‘사유’(四維)에서 예의·정의·염치·수치를 인간의 4대 본성이라고 설파했다.염치를 알고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란 지적이다. 러시아의 문인·철학자 솔로비요프는 인격에는 세 개의 독특한 감정이 있는데,측은의 감정,경건해할 줄 아는 감정과 함께 ‘수치의 감정’을 들었다. “인간은 인격체이기에 스스로 부끄러워할 줄 안다.모든 존재중 유일하게 사람만이 부끄러워할 줄 아는 존재다.창피를 당했을 때 얼굴을 붉히는 것이 인간이다”고 지적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세태 가운데 으뜸은 정치인들의 수치불감증이다.국세청을 동원해 천문학적 선거자금을 거둔 한나라당 서상목(徐相穆)의원은 국회체포동의안이 부결되자 ‘정의의 승리’라고 소회를 밝혔다.국가징세권을 도용해 선거자금을 모은 행위에 대해 참회나 부끄러움이 아니라 ‘정의’ 운운하는 뻔뻔함이 수치불감증의 현주소다. 안기부 대공수사단장시절 박종철씨 고문치사사건의 축소·은폐지시와 공작정치,재야인사들 고문 혐의를 받고 있는 정형근(鄭亨根)의원이 비정부기구(NGO) 대표자격으로 유엔인권위원회에 참석한 것도 수치불감증 현상이기는 마찬가지다.구조조정 반대와 체력단련비 인상 등을 요구하며 연중행사처럼 시민의 발을 묶는 서울지하철노조의 파업행위나 이를 지지하는 일부 지도층 인사들의 행위 역시 부끄러움을 모르는 처신이다. 최근 정치 코미디의 특종감이라면 전직 대통령들과 그 주변 사람들의 언행을 들 수 있겠다.5공 양민학살세력의 핵심이 재·보궐선거 출마와 관련 ‘명예회복’ 운운하더니 일부 인사는 차기 총선에 나서겠다고 서두른다.이들을‘영입’하려는 세력도 있다. 그들이 무슨 ‘명예’를 회복하겠다는 것이며 누구를 위해 선량이 되겠다는 것인지,우리사회가 이렇게 원칙없이 부끄러움을 묻어둔 채 흘러가도 괜찮은지 부끄럽다. 국가부도 위기를 불러온 ‘전직’의 경우도 마찬가지다.대기업 빅딜을 지역문제로 엮으면서 지역감정을 부채질하는 언사는 환난에 고통을 겪는 국민을외면하는 부끄러운 행동이다. 이들뿐만 아니다.전과 12범의 망설을 대변하는 야당 정치인들이나 이를 액면대로 보도하는 언론인들,국내 최대 재벌기업인 현대중공업과 현대상선이주가를 조작해 거액의 이득을 취한 몰염치나 ‘언론학살’의 주범이 언론사사장에 취임하는 등 그야말로 ‘막가파’와 ‘BZR’(배째라)식 행태는 도덕불감증 아닌 ‘도덕파괴’의 단면들이다. 소매(笑罵)란 말이 있다.‘비웃고 침뱉는다’는 뜻이다.국민이야 소매를 하든 말든 자신의 이익과 집단이기주의만을 위해 행동하는 인사들 때문에 우리 사회가 어지럽다. 박은식(朴殷植) 선생은 매국노와 망국노가 설치던 시절 “나라 잃고도 살아 있으니 부끄러움을 모르는 인간”이라 자책하면서 ‘무치생’(無恥生)이란자호(自號)로 독립운동과 역사짓기에 생애를 바쳤다.이런 뜻을 따르진 못해도 인간으로서 부끄러움을 알고 국민으로부터 소매를 당하지않는 지도층이돼야 한다./주필
  • [정직한 역사 되찾기 34] 친일의 군상

    친일파 가운데는 부자,형제,부부,사돈간 등 일가족이 집단으로 친일대열에섰던 경우가 더러 있다. 부자간에 친일을 했던 인물로는 ‘조선어 전폐론’을 폈던 현영섭과 그의 부친 현헌(중추원 참의),일진회 회장으로 ‘병합청원서’를 제출했던 이용구와 그의 아들 이석규,그리고 부자가 모두 일제하 고급관리를 지낸 손지현-손영목 부자가 대표적인 예다. 형제로는 고급관리 출신의 송문화-송문헌 형제,‘밀정형제’로 유명한 선우순-선우갑 형제 등이 있으며 부부간에는 만주에서 일본군 밀정을 지낸 이종형-이취성 부부와 초기 애국부인회 간부로 활동하다가 변절,밀정을 지낸 오현주-강낙원 부부가 유명하다. 또 사돈간에 친일을 한 집안으로는 매국노 송병준과 을미사변의 주역으로 나중에 중추원 참의를 지낸 구연수가 서로 사돈간이며 구연수의 아들 구용서는 일제하의 은행원 출신으로 해방후 초대 한국은행 총재를 지냈다. ‘을사5적’의 하나인 이하영은 한일병합후 중추원 고문을 지냈는데 그의 손자 이종찬은 일본육사 49기생으로 나중에 육군참모총장을 지냈다. 부자간에 친일을 한 경우로는 민병석-민복기(전 대법원장) 부자도 빼놓을수 없다.민병석(閔丙奭·1858∼1940)은 여흥 민씨 출신으로 명성황후의 척족이다.좌찬성 민영휘의 손자이며 민경식의 아들로 충남 회덕에서 태어났다.1879년 문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예문관 검열로 벼슬길에 오른 그는 1882년 임오군란때 명성황후를 호위한 공로로 척족 가운데서는 일찍부터 권력의 핵심에 든 사람이다. 1884년 성균관 대사성에 이어 승정원 도승지,예조참판,규장각 직제학을 거쳐 1889년 11월 평안감사로 임명돼 1894년까지 재직하였는데 이때 당오전 발행을 남발,민중들로부터 원성을 샀다.평양시절 그는 대원군 계열로 몰려 당시 평남 순천에 유배중이던 우범선(禹範善)을 알게 돼 그를 장위영 영관으로 천거하였다.우범선은 나중에 친일훈련대 대대장으로 ‘명성황후시해사건’,즉 ‘을미사변’의 주역이 되었는데 그를 추천한 사람이 민씨 집안의 척족이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한편 1895년 일본 낭인집단의 손에 명성황후가 시해된 후 민씨 척족의 정치세력은 급격히 쇠퇴하였다.그러나 그만은 여전히 지위를 보전하였다.이듬해2월 그는 정2품 궁내부 특진관(칙3)에 임명됐으며,1898년 이후 농공상부·궁내부·학부·내부대신 등 요직을 두루거쳤다.처세술에 비범한 재간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친일·친러정권을 넘나들며 승승장구하였다.이런 그를 두고 고종은 “민병석은 짐이 부르려고 할 때는 이미 와 있고,내치려고 할 때는 이미 떠나있다”고 얘기한 바 있다. 민병석의 대표적인 친일은 대한제국 황실의 척족으로서 ‘을사조약’과 ‘한일병합’에 앞장선 사실이다.‘을사조약’ 강제 체결에 앞서 그는 조정의반대를 무릅쓰고 일본으로 건너가 한국침략의 원흉인 이토(伊藤博文)를 초빙해왔다.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그 공로로 그는 육군부장·표훈원총재·시종원경 내대신 등을 역임하였으며 1907년 10월 대훈이화대수장(大勳李花大綬章)을 수여받았다.1909년 이토가 안중근 의사에 의해 처단되자 그는 궁내부 대신으로 정부측 조문사절로 도일,이토의 장례식에 참석하기도 하였다.1912년에는이강공(李堈公)을 수행하여 일왕 메이지(明治)의 장례식에 참석한 적도 있다. 1910년 한일병합 당시 그는 궁내부 대신으로 요즘으로 치면 청와대 비서실장직에 있었다.당시 청와대 경호실장격인 시종원경은 낙선재 윤비(순종의 황후)의 백부 윤덕영(尹德榮)이었는데 이 둘은 이완용(李完用)과 통감 데라우치(寺內正毅)의 회유와 사주를 받고 ‘병합반대론’을 무마,조정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정부 대신담당이 이완용이었다면 이 둘은 궁중담당이었다.‘한일병합’의 1등공신인 이들은 병합후 모두 일왕으로부터 작위와 은사금으로 매국공채를하사받았다.이때 민병석은 훈1등 자작(子爵)과 매국공채 10만엔(현 시가 10억원 정도)을 받았다. 일제치하 1911∼19년까지 이왕직 장관을 지낸 그는 1925년 7월부터 14년 3개월동안 중추원 고문을 지내다가 1939년에 중추원 부의장으로 승진하였다. 이듬해 사망 직전까지 그는 일생을 친일로 일관했다.공직 이외에 그는 틈틈이 친일단체에서 활동하기도 했다.중일전쟁 직후 귀족·고급관리 부인들의금비녀 수집을 목적으로 결성된 애국금차회(愛國金釵會)의 발기인으로 참가하기도 했고,조선사편수회 고문·왕공족심의회 심의관·조선귀족세습재산 심의회원을 지내기도 했다.또 서예,특히 행서에 일가견이 있었던 그는 선전(鮮展)의 심사위원도 지냈다.사망 직전 종2위 훈1등까지 올랐던 그는 1940년 8월 6일 도쿄 스가모(巢鴨)의 강락(康樂)병원에서 설암(舌癌)으로 사망하였다.그의 나이 82세 때였다.그의 자작 작위는 동년 11월15일 장남 민홍기(閔弘基)가 습작하였다. 역대 정권에서 법무차관·장관,검찰총장,대법원 판사,대법원장(5·6대 연임)을 지낸 민복기(閔復基·창씨명 岩本復基·1913∼생존)는 민홍기의 동생이다.1937년 경성제국대학 법과를 졸업후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38년 3월 사법관 시보로 법조계에 몸을 담았다.이후 40년 5월 경성지방법원 판사를 거쳐 해방 직전인 45년 6월 경성복심법원 판사로 승진하였다.평소 얘기할때 입가에 거품이 생겨 ‘민(閔)사이다’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그는 해방전후를 통틀어 법조계에서 가장 관운이 좋은 사람으로 불린다. 그는 법조계 내외에서 온화하고 겸손한 성품의 소지자로 알려져 있다.그러나 사법부의 수장(首長)으로서는 그의 말대로 ‘제삿상의 대추·밤’ 정도의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2대에 걸친 친일집안은 이제 역사속으로 막을 내리고 있다.이 집안이 명문가로 불리는 것이 마땅한지는 후세의 역사가 판단할 것이다.
  • [정직한 역사 되찾기] 친일의 군상(30)

    ◆前한성은행장 韓相龍2,3년전 평소 알고 지내는 고서점에서 일제말기에 출간된‘창남수장(暢楠壽章)’이라는 문집 한 권을 구입한 적이 있다. 문집 이름에 ‘수(壽)’자가 들어간 것은 흔히 문집 주인공의 환갑잔치를 기념하여 만든 것이 보통이다. 일제 당시 환갑잔치에 문집까지 낼 정도라면 고관대작이나 후학이 많은 거유(巨儒) 정도에게나 있을 법한 일이다. 이 문집 역시 그런 정도로 생각하고 첫 장을 넘겨 보니 당시 미나미(南次郞)총독의 축하 휘호가 나타나더니 뒤 이어 일본인 육군대장의 글씨와 궁내부대신을 지낸 민병석(閔丙奭)의 서문이 곁들여져 있었다. 다시 축하시 모음란에는 당대의 명사들이자 유명한 친일파들이 대거 운집해있었다.황족 친일파인 윤덕영(尹德榮)·좌옹 윤치호(尹致昊)·후작 이항구(李恒九·李完用 아들)·중추원 참의 김사연(金思演)·은행가 민규식(閔奎植)등등. 이런 수준의 인물들이 문집 주인공의 환갑잔치를 위해 시를 보낼 정도였다면 그의 수준·성향도 짐작이 간다.알고 보니 문집의 주인공은 일제당시 경제계의 대표적인 친일파였던 한상룡(韓相龍·1880∼?)이었다. 한때 ‘조선 금융계의 황제’로 불렸던 한상룡은 1880년 규장각 부제학 출신 한관수(韓觀洙)의 3남으로 태어났다.17세때 관립외국어학교 입학을 계기로 신학문에 눈뜬 그는 미국유학을 위해 일본으로 밀항을 하였으나 외숙 이윤용(李允用)의 주선으로 대신 사립 성성(成城)학교에 입학(1899년)하면서군인의 길을 택하였다. 이듬해 그는 한국정부의 관비유학생으로 선발되었으나 장티프스로 학업을중단하고 1901년 귀국하였다.귀국후 그는 사립 중교의숙(中橋義塾)의 영어교사로 일하다가 이 해 경부철도 기공식에서 고종의 종형인 이재완(李載完)의영어통역을 담당한 것이 인연이 돼 공직(평식원 총무과장)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그의 공직생활은 그리 길지 않았다.그는 자신을 둘러싼 ‘좋은 여건’을 배경으로 야심을 키워가고 있었다.당시로선 근대문물에 대한 견문과 영어·일어 구사능력을 갖춘 인재였던데다 그의 뒤에는 당대 제일의 권력자인두 외숙(이윤용·이완용 형제)이 받쳐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1903년 12월 그는 한성은행(漢城銀行) 총무 취임을 계기로 금융계와 인연을 맺게 된다.‘한일병합’ 직후인 1910년 9월 이 은행의 전무취체역으로 취임한 그는 일제당국에 로비를 하여 당시 조선인 합방공로자에게 지급한 은사공채(恩賜公債)를 흡수,자본금을 300만원으로 10배나 증자하면서 비약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한성은행이 조선 귀족들의 은행이라는 소문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며 3·1의거 당시 민중들의 표적이 된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이 무렵 그는 40여년 동안 일본 제일은행의 최고책임자로서 일본 재계의 거두로 군림해온 시부자와(澁澤榮一)를 우상으로 숭배하고 있었다. 그는 정치에서는 이토(伊藤博文),경제에서는 시부자와,건설에서는 통감부시절 재정고문을 지낸 메가타(目賀田種太郞)를 ‘조선에서 영원히 기억해야할 3대 은인’이라고 하면서,특히 시부자와에 대해서는 ‘일본은 물론 동양에서 공전 절후의 위인’이라고 극찬하였다.그는 시부자와의 좌우명 ‘일생일업(一生一業)’을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기까지 했다.그가 대부분의 친일파들 처럼 정계로 나아가지 않고 실업계로 진출한 것은 시부자와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가 매국에 가담한 친일파들에게 준 공채를 토대로 발전을 도모한 한성은행은 1923년 그가 두취(頭取,현 은행장)로 취임한 직후부터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관동대지진의 여파에 이어 영업부진·경영악화가 계속됐다.이듬해 총독부는 이 은행을 정리대상으로 지목하였으며 28년 마침내 조선식산은행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나의 한성은행인가,한성은행의 나인가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한 관계’에 있었으며 ‘한성은행에서 나고,자라고 그로써 거기에서 죽는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애착을 가졌던 한성은행을 잃게 되자 그는 병석에 눕고 말았다.식민지 예속자본의 말로는 바로 이런 것이었다. 이밖에도 그는 한성은행 재직시절 금융계 내에서의 지위를 이용하여 조선내 각종 기업·회사 설립에 중개자로 참여하였는데 실권은 전혀 가지지 못한채 명목상의 감투만 여럿 쓰고 있었다.이런 그를 두고 정신문화연구원 김경일 교수는 “‘한상룡의 경력은 반도 재계사의 축도(縮圖)’라는 표현처럼그는 제국주의 권력과 식민지 예속경제 사이에서 일종의 브로커 역할을 했던 정상배”였다고 평가했다.금융계에 평생을 바치고자 했던 그의 포부는 한성은행의 경영권 양도와 뒤이어 신탁회사 운영에서 배제되면서 날개를 접고 말았다. 한편 그의 친일이 겉으로 표면화되기 시작한 것은 그가 한성은행에서 물러나 사회활동을 본격 시작하면서 부터라고 할 수 있다.우선 그는 조선에 업적(?)을 남긴 주요 일본인들의 동상·기념비 건립을 시작으로 친일대열에 본격 합류하였다. 첫 사업은 통감부시절 재정고문을 지낸 메가타의 동상을 제작,1929년 10월파고다공원(현 탑골공원)에서 제막식을 가졌으며,이 해 12월에는 이토(伊藤博文)기념회의 조선측 발기인 총대를 맡기도 했다.33년 2월에는 평소 자신이 숭배해온 시부자와의 기념비 건립을 추진,12월 장충단에서 제막식을 가졌는데 이는 전적으로 한상룡의 발의와 주동에 의한 것이었다. 또 35년 5월에는 ‘조선개화의 은인이자 일한합병의 공로자’인 데라우치(寺內正毅)의 동상건설회 발기인 및 실행위원으로 참여하여 총독부 청사내홀 우측에 그의 동상을 건립하였으며,이듬해 2월 소위 ‘2·26사건’으로 사이토(齋藤實) 전조선총독이 사망하자 부민관에서 추도회를 개최하고 39년 4월 그의 동상을 총독부 청사내 홀 좌측에 건립하였다.이밖에도 그는 러일전쟁 당시 한국주재 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정무총감 출신의 시모오카(下岡忠治) 등의 동상건립에 참여하면서 식민통치자들의 업적 찬양에 열을 올렸다. 한편 한상룡이 군국주의 일제통치하에서 40여년간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보다 군부와 밀월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한성은행에서 물러난 후 그는 군부관련 분야에서 두드러진 활약상을 보였다.31년 일제의 만주침략 이후 조선내 각지를 돌면서 강연·담화 등을 통해 그는 일제의 침략전쟁을 옹호하였다. 또 33년 4월 경성국방의회에 발기인으로 참가한 것을 비롯해 조선국방의회연합회 설립준비위원 및 감사(34.4),조선국방비행기헌납회 고문(34.12),해군협회 조선본부 창립위원(35.4)등을 맡아 활동하였다.37년7월 중일전쟁 발발 직전에는 관동군사령부 사무촉탁(칙임관 대우,근무기간 37.7.1∼40.7.1)으로 임명돼 군사령부를 방문,조선실업구락부 및 자신의 명의로 국방헌금을 하였다. 당시 그는 후방 전쟁지원단체인 경기도군사후원연맹 부회장이자 경성군사후원연맹 고문으로 있으면서 ‘애국금차회’ 창립을 주도,조선여성들에게 전쟁물자로 노리개 금붙이마저 내놓으라고 강요하였다.41년 태평양전쟁 개전으로일제의 인력·물자동원이 거세지자 그는 이 역시 전면에 나서서 협력하였다. 특히 43년 징병제가 실시되자 그는 ‘훌륭한 군인이 되자’라는 글에서 “반도에 불타는 애국심과 적성(赤誠)으로 말미암아 드디어 약진 반도의 통치사상에 획기적인 징병제도가 실시되었다”며 조선청년들을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내모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27년 중추원 참의(칙임관 대우)에 첫 임명된 이래 해방 때까지 그는 만18년 4개월동안 줄곧 중추원의 참의·고문을 지냈다.해방 1년전인 44년 4월 그는 윤치호·박중양(朴重陽·중추원 참의)·이진호(李軫鎬·총독부학무국장)·이기용(李琦鎔·황족·백작) 등과 함께 일본 귀족원 의원에 선임됐는데 마지막까지 일제에 협력한 결과이자 끝까지 일제에 끌려다닌 형상이라고도 할 수있겠다. 그는 한성은행 경영권 양도를 비롯해 일제로부터 수 차례에 걸쳐 의도적 배제를 당했지만 그 때마다 변신과 일관된 친일노선으로 버텨냈다.한마디로 일제하 그의 생존논리는 철저한 예속과 굴종이었다.그를 ‘친일 예속 자본가의 전형’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해방후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鄭雲鉉 jwh59@
  • [외언내언] 문화재 도굴

    문화재 도굴범은 수많은 ‘실전’을 통한 경험을 밑천으로 삼고 있다. 도굴범들의 대부분은 산세만 보고도 보물이 묻혀 있는 곳을 직감으로 알아낸다. 지난 96년 경주 흥덕왕릉을 도굴하려다 붙잡힌 범인도 ‘산세만 보고 도굴위치를 잡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번에 적발된 100억원대 문화재 도굴·밀매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경주 기림사에서 보물 958호인 석가모니불상의 어깨를 드릴과 칼로 뜯어내어 뱃속에 있는 복장(伏藏)유물을 훔쳐내고 순천 선암사에서 국가지정문화재인 후불탱화를 훔쳐냈다고 한다. 골동품상까지 버젓이 운영하면서 일본인들이 주고객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상당수의 문화재가 해외로 유출되고있음을 입증하고 있다. 문화재 도굴이나 절도는 문화재에 관한 전문지식과 도굴기법 등 고도의 테크닉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아무나 할 수 있는 범죄는 아니다. 그래서 이들은 묘자리와 보물매장터를 찾아내는 방법으로 매장문화재 도굴법을 터득하고 이른바 ‘스승’ ‘대가’들에게 ‘기술’을 전수받아 범행을 저지른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더구나 사찰이나 사당은 경비가 허술하다. 담만넘으면 억대의 문화재를 손에 넣을 수 있다는 허황된 꿈에 젖어 도굴이나 절도사건은 끊이지 않는다. 일제시대의 도굴이 일본인들의 우리 문화 말살이었다면 60년대 이후 사회적 부(富)에서 비롯된 고미술 수집붐으로 인한 무작위 도굴은 우리 손으로 우리 문화재를 학살한다는데 문제가 있다. 무분별한 수집이 문화 말살을 부른다는 우려의 소리가 드높다. 이런 물건을 사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도굴범이 양산된다는 점에서 사는 사람도 철저히 가려낼 필요가 있다. 개인의 사유재산 관리에 국가가 개입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문화재에 관한 한 소유자의 허술한 관리에 대한 책임도 물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도굴품일 가능성이 높은유물은 탐내지도 말고 사지 말고 국가에 신고해야 한다. 도굴범이 징역 1∼2년에서 기백만원의 벌금을 물거나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현행법으로는 도굴범의 근절은 어렵다. 문화재는 그 민족이 살아온 역사의 축적이자 예술적 재능의 상징이다. 민족자산을 해외로빼돌리는 악덕 상혼은 역사의 약탈이라는 점에서 매국노로 지탄받아 마땅하다. 민족문화를 모독·훼손하는 문화재 사범은 용서받지 못할민족적 중죄라는 인식으로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 그래서 끊임없는 한탕주의인 문화재 도굴·도난이라는 악순환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 이세기 논설위원
  • [사설]군기밀유출 수사 철저히

    햇볕정책과 국가안보는 동전의 앞뒷면이다.햇볕정책의 추진으로 국가안보는 오히려 더욱 강조되고 있는 느낌을 받는다.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이런 때에 적발된 군기밀유출 사건은 예사로워 보이지 않는다.꼭 휴전선이나해안이 뚫려야 안보에 구멍이 났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군기밀이 새어 나가는 것도 안보에 큰 구멍이 났음을 말해 준다. 국군기무사는 지난 9일 대형 군기밀유출 사건을 발표했다.이 사건에 예비역 장교 출신 등 무기중개상 5명과 현역군인 10명이 관련돼 있다.기무사는 업자 등 5명은 긴급체포했다.현역군인에 대해서도 무기중개상들에게 기밀을 넘겨준 혐의에 대해 수사중이며 수사범위를 확대하고 있다.두말할 것 없이 철저한 수사를 해야 한다.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느낌이 안 드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사건의 재발을 막기 위해 소는 잃었지만 외양간은 고쳐야 한다. 군기밀을 팔아 넘기는 것은 매국행위다.더군다나 국가안보의 중추인 현역장교들이 이에 개입되는 것은 우려할 사태다.지난해 10월에도 비슷한 사건이있었다.백두사업으로 불리는 첨단정찰기 도입계획과 관련된 기밀을 미국 업체에 팔아 넘긴 사건이다.이처럼 유사한 사건이 연달아 터지고 있는 것에 국민은 충격을 받고 있다.불안감을 감추지 못한다. 군은 이번 사건을 군의 기강과 국가관을 재확립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이런 사건은 군의 명예와 신뢰를 결정적으로 실추시킨다.비록 몇 사람이 일을저지르긴 했지만 전체가 피해를 입는다.방죽물을 흐려놓는 데는 미꾸라지 한 마리면 족하다.철저한 수사를 강조하는 것도 군의 명예와 신뢰회복을 위해서다.한 점 의혹도 남도록 해서는 안된다.그런 다음 관련자들을 일벌백계(一罰百戒)로 다스려 교훈으로 남겨야 한다.할 일은 그것만이 아니다.군 보안체계의 허점을 찾아내고 전면 정비해야 한다.이를 통해 비슷한 사건이 다시는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하며 국민을 안심시켜야 한다. 매사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보다 중요한 것은 예방이다.지난번 사건이나이번 사건도 일어나지 않도록 할 수 있었다고 본다.구매사업은 별의별 유혹이 다 있을 수 있다.예방적 감시와 관찰 그리고 교육이 있었어야 했다.더구나 무기중개상은 대부분 전역 고급장교들이다.그만큼 현역 취급자들과 쉽게유착될 수밖에 없다.이 점이 소홀히 됐던 것 같다.따라서 사건은 예고됐던것이나 마찬가지다.이 점 사건 재발방지 노력에 참고해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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