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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 국회의원 “전쟁으로 독도 되찾자” 망언 물의

    일본 국회의원 “전쟁으로 독도 되찾자” 망언 물의

    일본의 한 국회의원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전쟁으로 독도를 되찾자. 불범점거자를 쫓아내자”는 망언을 해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 1일 교도통신에 따르면 ‘NHK에서 국민을 지키는 당’ 소속 마루야마 호다카(丸山穗高·35) 중의원 의원은 한국 의원들의 독도 방문과 관련해 자신의 트위터에 “전쟁으로 되찾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라고 적었다. 마루야마 의원은 “‘다케시마’(竹島·일본이 주장하는 독도의 명칭)도 정말로 협상으로 돌아오는 것이냐”면서 “한반도 유사시에 우리(일본) 고유의 영토에 자위대가 출동해 불법점거자를 쫓아내는 것을 포함한 다양한 선택지를 배제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전날 국민민주당의 다마키 유이치로(玉木雄一郞) 대표가 한국 국회의원들의 독도 방문을 “경박한 퍼포먼스다.한국에도,한미일 연대에도 마이너스일 뿐”이라고 비판한 데 대해서도 “이 발언이야말로 퍼포먼스일 뿐”이라고 비난했다. 지난달 31일 더불어민주당 설훈 최고위원과 우원식·박찬대·이용득 의원, 무소속 손금주·이용주 의원 등 국회의원 6명은 독도를 방문해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를 규탄했다.그는 “우리(일본) 고유의 영토인 ‘다케시마’가 불법 점거자들에게 점거돼 있는 데다 상대측(한국)이 저런 상황(한국 의원들의 독도 방문)”이라며 “각종 유사시에 자위대를 파견해 불법점거자를 배제하는 것 이외에 어떻게 되찾을 수 있을까”라고 적기도 했다. 마루야마 의원은 지난 5월 러시아와의 영토 갈등 지역인 쿠릴 4개 섬(일본명 북방영토)을 방문한 자리에서 전쟁을 해서라도 되찾아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해 물의를 일으켰던 인물이다. 당시 보수 야당 일본유신회 소속이었던 그는 이 발언으로 당에서 제명됐고, 이후 신생 정당 ‘NHK에서 국민을 지키는 당’에 입당했다. 조현석 기자 hyun68@seoul.co.kr
  • 친일발언 보은군수, 주민소환 추진된다

    친일발언 보은군수, 주민소환 추진된다

    “우리가 세끼 밥도 못먹던 가난한 시절 한·일협정때 일본이 준 돈으로 한국이 발전했다. 중국, 필리핀도 위안부로 끌려갔지만 보상금을 받은 것은 한국뿐이다. 대통령이 사인을 했으면 지켜야 하는데 그것을 무효화 하고 ‘돈 가져와라’ 그러면 약속을 안 지킨다고 일본사람들이 그런다. 일본사람들이 한국 물건 사주는 게 두배 많아 일본제품 불매운동을 하면 우리가 손해본다고 대학교수가 말했다.” 지난 26일 열린 이장단 워크숍 특강에서 친일 성격 발언을 쏟아낸 정상혁(78·자유한국당) 보은군수 비난여론이 거세지고 있다. 정 군수가 사과했지만 주민소환이 추진되고 정 군수의 또다른 부적절한 행보까지 폭로되는 등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 보은지역 시민단체인 보은민들레희망연대와 전교조 보은지부 등은 30일 오전 보은읍 중앙사거리에서 정상혁 보은군수 퇴진 촉구 기자회견을 가졌다. 희망연대는 “이장단 워크숍에서 친일발언을 하며 자발적인 국민 불매운동까지 폄훼하는 정 군수 모습을 보고 수치스러움을 느꼈다”며 “정 군수는 무릎꿇고 사과한 뒤 즉각 군수직에서 물러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은 “자진사퇴를 거부하면 주민소환을 추진할 방침”이라며 “지금 분위기면 주민소환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정 군수를 압박했다. 이들은 추석연휴가 지나면 거리연설 등을 통해 지속적인 퇴진투쟁에 나설 방침이다.희망연대는 이날 정 군수의 불통·갑질행정도 폭로했다. 정 군수가 선거때 자신을 도운 측근 소유 농지에 수천만원을 들여 수로공사를 해줬고, 60여억원이 투입된 훈민정음 마당에 설치된 범종에 금장으로 군수 이름을 새겨놓았다는 것이다. 희망연대 김원만 사무국장은 “관내 관공서, 소방서, 노인회관 건물 등 100개가 넘는 곳에 정 군수 이름이 새겨진 것으로 알고 있다. 보은 소녀상 표지석에도 자기 이름을 넣어달라고 해 시민들이 거부했다”며 “보은에 사드를 배치한다면 찬성한다는 말도 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고 전했다. 보은군청 홈페이지는 정 군수 비난글로 도배되고 있다. 한 네티즌은 “정군수가 사퇴하기 전까지는 보은에서 생산된 모든 상품 구매를 거부하겠다”는 글을 올렸다. 또다른 네티즌은 “역사 왜곡을 하고있는 군수는 당장 사퇴해야 한다. 저뿐만 아니라 저의 친척들, 직원들 모두 앞으로 보은 여행은 무조건 보이콧 할 생각이다. 이런곳에 가서 돈 쓰고 싶은 생각 전혀 없다”고 적었다. “보은군민들이 뽑았으니 그들이 주민소환제로 매듭을 지어야한다”, “단풍철에 속리산 입구에서 ‘친일파 정상혁 아웃’ 전단지라도 돌려야겠다”는 글도 있다.충북 3.1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 100주년 기념사업 범도민위원회와 광복회 충북지부도 지난 28일 오전 충북도청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정 군수 즉각 퇴진’을 요구했다. 이들은 “현실도 모르는 시대착오적 망언”이라며 “지역 사회지도층인 단체장이 망언을 했다는 점에 경악하지 않을수 없다”고 비난했다. 이어 “일본은 조선을 침략해 밥그릇까지 약탈해가고, 강제징용 100만명, 위안부 성노예 8만명 등 조선 사람들을 끌고가 인권을 유린했다”며 “어떻게 이를 외면하고 일본이 준 보상금으로 경제발전을 이뤘다는 말을 할 수 있냐”고 따졌다. 이들은 “정 군수 발언은 자주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한 선열을 모독한 행위”라고 지적했다. 정의당 충북도당과 더불어민주당 충북도당도 성명과 기자회견을 통해 정군수 망언을 규탄했다. 정 군수는 30일 두번째 사과문을 냈다. 정 군수는 이날 “독립유공자와 가족, 위안부 피해 할머니 등 모든 국민께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며 머리 숙여 사과드린다”며 “앞으로 일본 탄압과 극우파 아베 일당 만행을 규탄하고 역사 바로 알리기 사업을 적극 펼쳐 나가겠다”고 밝혔다. 지난 28일에는 “보은군민이 아베정권을 잘 알고 규탄하자는 뜻에 그간의 사례를 설명하고 일본사람 만난 얘기도 했던 것인데 일부 언론이 앞뒤를 생략하고 보도해 유감”이라며 “일본인에게 들은 얘기를 전한 것인데 마치 내가 한 얘기처럼 알려졌다”고 해명했다. ‘일본에서 받은 5억달러가 한국경제발전의 초석이 됐다’는 자신의 발언에 대해선 “도움이 됐다는 것은 부정할수 없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일본 사람이 우리 생각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며 “심려를 끼친 점은 깊이 사과드린다”고 했다. 정 군수는 3선으로 전국 최고령 단체장이다. 농촌진흥청 공무원, 충북도의원 등을 지냈다. 보은 남인우 기자 niw7263@seoul.co.kr
  • 日 제1야당 대표 “고노, 韓얼굴에 먹칠… 교체하라”

    日불화수소 韓 수출량 급감… 규제 여파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의 ‘적반하장’식 언동이 잇따르는 가운데 일본 제1야당 대표가 한일 관계가 이렇게까지 나빠진 데는 고노 외무상의 책임이 크다며 사퇴를 요구하고 나섰다. 29일 아사히신문 등에 따르면 에다노 유키오 입헌민주당 대표는 전날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한국이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을 중단하기로 한 것은 분명히 지나치다”면서도 “그동안의 과정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타협의 여지를 보이기도 했지만 일본 정부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일관했다”고 비판했다. 또 “특히 고노 외무상의 대응은 한국을 (지소미아 종료 결정으로) 몰아붙였다”며 “책임이 크기 때문에 외무상을 교체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외교에서는 상대방의 체면을 일정 수준 세워 주지 않으면 안 되는데도 고노 외무상은 한국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듯한 일을 지나치게 했다”고 지적했다. 고노 외무상은 지난달 19일 남관표 주일 한국대사를 초치해 항의하는 자리에서 남 대사에게 “잠깐 기다리라”며 말을 끊은 뒤 “극도로 무례하다”고 공격했고, 지난 27일 기자회견에서는 “한국이 역사를 바꿔 쓰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고 망언을 했다. 요라 마사오 마이니치신문 전문편집위원도 이날 자 기명칼럼에서 “한국의 지소미아 파기는 지나치다고 생각한다”고 전제한 뒤 “그러나 지난 15일(광복절) 문 대통령의 연설은 일본에 대한 비판을 억제한 내용이었다. 이를 아베 신조 정권은 좀더 높이 평가하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음을) 한국에 전달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그는 특히 차기 총리 후보 중 한 명인 이시바 시게루 전 자민당 간사장이 한국의 지소미아 종료와 관련해 자신의 블로그에 “일본이 패전 후 전쟁 책임을 정면으로 마주해 오지 않았던 것이 여러 문제의 밑바탕에 있고, 이것이 다양한 형태로 표면화되고 있다”고 밝힌 데 대해 전적으로 공감을 나타냈다. 한편 일본 재무성이 이날 발표한 무역통계에 따르면 지난 7월 한 달간 한국으로 수출된 반도체 세정용 불화수소(에칭가스) 물량은 479t으로, 전월 대비 83.7% 감소했다. 일본의 경제보복에 따른 수출 물량 감소가 일본 정부 통계로 확인된 것은 처음이다.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이해찬·나경원도 ‘18원’ 후원금 받았다

    이해찬·나경원도 ‘18원’ 후원금 받았다

    부동산 투기 의혹 손혜원 상반기 1위 나경원엔 응원 의미 ‘1004원’도 입금 특정 욕설을 연상시키는 ‘18원’ 후원금이 올해 여야를 가리지 않고 의원들에게 입금된 것으로 나타났다. 18원 후원금은 유권자들이 의원들에게 불만을 표시하는 방식 가운데 하나다. 28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2019년 상반기 국회의원 후원금 모집현황’에 따르면 올해 1~6월 후원금 1위인 무소속 손혜원 의원은 1월에만 2500여건의 18원 후원금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때는 손 의원의 목포 부동산 투기 의혹이 불거진 시기로 당시 손 의원과 설전을 벌였던 목포 지역구의 박지원 의원도 18원 후원금을 10여 차례 받았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망언을 한 자유한국당 김진태·이종명·김순례 의원에게도 18원 후원금이 쏟아졌다. 김진태 의원은 18원·36원·54원 등 18의 배수로 된 후원금을 받기도 했다. 김순례·이종명 의원도 각각 18원 후원금이 30건가량 입금됐다. 딸 부정채용 의혹을 받는 한국당 김성태 의원은 18원 22건, 28원 2건을 받았다. 여야 지도부도 18원 후원금을 받았다.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는 18원 7건, 이인영 원내대표는 18원 14건, 홍영표 전 원내대표는 18원 9건이 각각 입금됐다. 홍익표 수석대변인은 18원 9건, 이재정 대변인은 18원 76건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는 18원 6건, 28원 2건을 받았다. 나 원내대표에게는 응원의 의미를 담은 ‘1004원’ 후원금도 3건 들어왔다. 김현아 원내대변인은 18원 15건을 받았다. 현역 의원이기도 한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은 3기 신도시 지정으로 지역 내 비판을 받으면서 18원 6건을 받았다. 김진아 기자 jin@seoul.co.kr
  • “친일매국 망언 정상혁 보은군수 퇴진하라”

    “친일매국 망언 정상혁 보은군수 퇴진하라”

    일본 경제도발로 반일감정이 악화된 가운데 정상혁(78·자유한국당) 보은군수가 특강을 하며 일본 옹호성 발언을 해 파문이 커지고 있다. 시민단체와 정치권은 정 군수 공개사과와 퇴진 촉구에 나섰다. ‘아베 앵무새’라는 비판도 나온다. 충북 3.1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사업 범도민위원회와 광복회 충북지부는 28일 오전 충북도청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정 군수 즉각 퇴진’을 요구했다. 이들은 “현실도 모르는 시대착오적 망언”이라며 “지역 사회지도층인 단체장이 망언을 했다는 점에 경악하지 않을수 없다”고 비난했다. 이어 “일본은 조선을 침략해 밥그릇까지 약탈해가고, 강제징용 100만명, 위안부 성노예 8만명 등 조선 사람들을 끌고가 인권을 유린했다”며 “어떻게 이를 외면하고 일본이 준 보상금으로 경제발전을 이뤘다는 말을 할 수 있냐”고 따졌다. 이들은 “정 군수 발언은 자주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한 선열을 모독한 행위”라며 “보은 군민과 국민에게 무릎끓고 사죄하라”고 촉구했다.범도민위원회 정지성 집행위원장은 “정 군수는 보은 소녀상 제막식에 참여했고, 위안부 추모공원을 만들겠다는 말까지 했었다”며 “지금 돌이켜보니 권력을 위한 위선이었다”고 꼬집었다. 정 위원장은 “특강 동영상을 보면 일본 지인의 말을 자주 인용하는데, 정 군수 본인의 생각”이라며 “보은지역 시민단체와 협의해 1인시위 등을 추진하겠다”고 덧붙였다. 정의당 충북도당과 더불어민주당 충북도당도 성명과 기자회견을 통해 정군수 망언을 규탄했다. 정 군수의 문제성 발언은 지난 26일 자매결연 지자체인 울산 남구에서 진행된 ‘2019 이장단 워크숍’에서 나왔다. 정 군수는 이 자리에서 “우리가 세끼 밥도 못먹던 가난한 시절 일본 돈 받아 산업단지 만들었다”며 “한일 국교 정상화 때 5억달러를 받았는데, 일본은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나라를 대표하는 대통령이 사인을 했으면 지켜야 하는데, 그것을 무효화 하고 돈 가져와라 그러면 공인된 약속을 안 지킨다고 그런다”며 “한국만 아니라며 계속 사과하라는 건 납득할 수 없다는 게 일본사람 생각”이라고도 했다. 불매운동도 비판했다. 일본이 한국 물건 팔아주는 게 두배 많아 일본 상품 불매하면 우리가 손해를 본다는 것이다. 중국, 필리핀 여성들도 위안부로 끌려갔는데 보상금을 받은 국가는 한국 뿐이라는 말도 했다. 그러나 정 군수는 언론탓을 했다. 정 군수는 이날 “보은군민이 아베정권을 잘 알고 규탄하자는 뜻에 그간의 사례를 설명하고 일본사람 만난 얘기도 했던 것인데 일부 언론이 앞뒤를 생략하고 보도해 유감”이라며 “일본인에게 들은 얘기를 전한 것인데 마치 내가 한 얘기처럼 알려졌다”고 해명했다.  ‘일본에서 받은 5억달러가 한국경제발전의 초석이 됐다’는 자신의 발언에 대해선 “도움이 됐다는 것은 부정할수 없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일본 사람이 우리 생각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며 “심려를 끼친 점은 깊이 사과드린다”고 했다. 정 군수는 3선으로 전국 최고령 단체장이다. 농촌진흥청 공무원, 충북도의원 등을 지냈다. 글 사진 청주 남인우 기자 niw7263@seoul.co.kr
  • 고노 “한국, 역사 바꿔 쓸 수 없어” 망언…정부 “일본, 큰 고통을 준 과거 직시해야”

    고노 “한국, 역사 바꿔 쓸 수 없어” 망언…정부 “일본, 큰 고통을 준 과거 직시해야”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은 27일 한국이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 등과 관련한 역사를 바꿔 쓸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정부는 “일본이야말로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여러 국가와 국민들에게 심대한 고통을 초래했던 어두운 역사를 제대로 직시하고 있는지 의문”이라고 반박했다. 고노 외무상은 기자회견에서 외국인 기자가 “한국 정부가 ‘일본은 역사문제에 이해가 부족하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질문하자 “한국이 역사를 바꿔 쓰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고 답했다고 마이니치신문 인터넷판이 보도했다. 그러면서 “한일 간 가장 중요한 문제는 65년의 협정에 관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는 강제징용 배상 문제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을 통해 해결된 것이라는 일본 정부의 입장을 되풀이한 것이다. 하지만 ‘역사를 바꿔 쓸 수 없다’는 표현은 아베 신조 정권이 과거 식민지배와 침략을 부정·미화하는 데 대해 한국 등 일본의 침략을 받은 국가나 일본 내 양심적 지식인이 비판할 때 주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고노 외무상의 발언은 무지하거나 적반하장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마이니치는 한국 내에서는 1910년 한일합병을 중심으로 한 한일 관계에 대해 일본에서 ‘역사 수정주의’가 강해지고 있다는 견해가 있다며 고노 외무상의 발언이 한국의 반발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 외교부는 “이러한 어둡고 불행한 역사를 부정하고 다시 쓰려는 (일본의) 시도야말로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임을 지적하고자 한다”고 비판했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이영훈 등 ‘반일 종족주의’ 저자들, 모욕죄로 조국 고소

    이영훈 등 ‘반일 종족주의’ 저자들, 모욕죄로 조국 고소

    조국 “구역질 나는 책” 비난에 저자들 “책 읽지도 않고 친일파로 매도”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 등 ‘반일 종족주의’ 저자들이 책에 대해 “구역질 난다”고 평한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를 모욕죄로 고소했다. 이영훈 전 교수를 비롯한 저자 6명(김낙년·김용삼·주익종·정안기·이우연)은 20일 오전 서울중앙지검에 조국 후보자에 대한 고소장을 제출했다. 조국 후보자는 지난 5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책 ‘반일 종족주의’를 두고 “이들이 이런 구역질 나는 내용의 책을 낼 자유가 있다면, 시민은 이들을 ‘친일파’라고 부를 자유가 있다”고 썼다. 또 “(‘반일 종족주의’에서 제기한 것과 같은) 주장을 공개적으로 제기하는 학자, 이에 동조하는 일부 정치인과 기자를 ‘부역·매국 친일파’라는 호칭 외에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고도 했다. 이영훈 전 교수 등은 “조국씨는 책은 읽지도 않고 한국일보의 한 칼럼을 인용해 필자들이 일제 식민지배 기간에 강제동원과 식량 수탈, 위안부 성 노예화 등 반인권적·반인륜적 만행은 없었으며, 많은 젊은이가 돈을 좇아 조선보다 앞서 일본에 대한 로망을 자발적으로 실행했을 뿐이라 썼다고 비난했다”면서 “그러나 ‘반일 종족주의’ 어디에도 일제 식민 지배 기간에 반인권적·반인륜적 만행이 없었다는 변호는 없다”고 밝혔다. 이들은 “‘반일 종족주의’는 기존 한국인의 일반적 통념과 다른 새로운 주장을 담았지만, 이는 수십년에 걸친 필자들의 연구 인생의 결과를 담은 것으로 진지한 학술적 논의와 비평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조국씨는 아무런 근거 없이 이 책을 ‘구역질 난다’고 비방하고 필자들을 ‘부역 매국 친일파’로 매도하여 학자로서의 명예를 크게 훼손하고 인격을 심히 모독했다”고 했다. 저자들을 대리하는 ‘한반도 인권과 통일을 위한 변호사 모임’은 “‘매국, 친일파’ 등의 표현으로 모욕죄로 처벌된 사례는 매우 많다”면서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형법 교수로서 이러한 법리를 모를 리 없는 조국 후보자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명백히 형법상의 범죄에 해당하는 망언을 쏟아내는 것은 법률을 무시하는 태도로, 법무부 장관으로서의 자질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권성우의 청파동 통신] 어떤 우정의 역사

    [권성우의 청파동 통신] 어떤 우정의 역사

    지난 12일 저녁 역사문제연구소에서 서경식과 다카하시 데쓰야의 대화록 ‘책임에 대하여’ 북 토크가 열렸다. 한일 사이에 첨예한 갈등이 계속되는 이 미묘한 시기에 두 비판적 지식인은 20여년간의 우정을 회상하며 연대(連帶)의 의미에 대해 말했다. 한국 지식사회에 신선한 자극을 선사한 재일 디아스포라 논객 서경식과 일본에서 역사 왜곡과 인권 문제를 통렬하게 지적해 온 도쿄대 교수 다카하시가 한국 독자들 앞에서 대화를 나누었다는 사실 자체가 인상적인 장면이다. 이들은 공저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2002)로부터 잡지 ‘젠야’(前夜) 창간(2004), ‘후쿠시마 이후의 삶’(2013)을 거쳐 ‘책임에 대하여’에 이르는 오랜 세월 동안 서로에 대한 두터운 우정과 신뢰 속에서 일본 사회의 퇴행과 역사수정주의, 천황제, 우경화 흐름에 대해 시종일관 비판하고 저항해 왔다. 일본 지식사회의 지형에서 보면 이 둘은 소수자 중의 소수자다. 둘의 주된 비판 대상이 때로 균형 잡힌 지식인으로 인식되는 가토 노리히로(‘사죄와 망언 사이’ 저자)를 위시한 일본 리버럴파의 퇴락이라는 점에서 이들의 입지가 얼마나 쉽지 않은지를 알 수 있다. 나는 두 사람의 투철한 비판정신, 손해를 기꺼이 감수하는 지성의 힘을 통해 한 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수행하는 논객이 갖춰야 할 태도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저항하지 않고 패배하기보다는 저항하다 패배하는 쪽이 훨씬 낫다”, “어떤 어두운 시대에도 어둠에 저항하며 사고하고…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타자들을 향해 목소리를 낸 사람들이 있었다”는 다카하시의 태도가 바로 그 점을 보여 준다. 서경식은 ‘책임에 대하여’ 한국어판 서문에 “한국의 독자들도 일본에 다카하시씨와 같은 지식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런 인물들을 격려해 주기 바란다”고 적었다. 실상 “다카하시 선생처럼 자신이 중심부 일본 국민이면서, 말하자면 자기 성찰적으로 그것을 비판한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이 둘은 일본인과 재일 조선인이라는 각기 다른 포지션의 차이를 딛고 누구보다도 서로 깊이 연대했다. 이들의 우정에 지난 4일 도쿄 신주쿠에서 열린 아베 반대 집회에서 ‘NO 아베’라는 팻말을 들고 ‘니칸렌타이’(일한연대)를 힘주어 외쳤던 일본 시민들의 목소리가 겹쳐진다. 그 자리에서 일본의 참의원인 야마조에 다쿠는 한국 시민과의 연대를 강조하며, 아베 정부에 가장 가깝고 오래된 이웃 나라와 제대로 대화할 것을 절박한 목소리로 요청했다. 이즈음 한일 연대를 주창하는 담론을 지켜보며 식민지시대의 비평가 임화와 일본 시인 나카노 시게하루 사이의 문학적 우정과 연대에 대해 떠올렸다. 나카노는 1929년 ‘비 내리는 시나가와역’이라는 시에서 조선인 노동자와 일본인 노동자의 연대를 형상화했다. 그가 보기에 ‘조선의 사나이’는 “머리끝 뼈끝까지 꿋꿋한 동무”에 해당하는 뜻깊은 존재다. 임화는 나카노의 시에 대한 화답으로 ‘우산 받은 요코하마의 부두’를 발표했다. 그 시에서 연인이자 동지인 양국의 노동자는 “우리는 다만 한 일을 위하여/ 두 개 다른 나라의 목숨이 한 가지 밥을 먹었던 것이며/ 너와 나는 사랑에 살아왔던 것이다”라고 묘사됐다. 그 동지적 유대는 역사의 거대한 파고와 군국주의 파시즘 속에서 점차 내셔널리즘에 자리를 내준다. 그로부터 90년의 세월이 흐른 이즈음 다시 한일 연대의 목소리가 퍼져 나온다. 내셔널리즘의 프레임을 돌파한 평화와 공동선을 지혜롭게 실천할 수 있을 때, 그 연대를 향한 주장은 당위가 아니라 현실을 움직이는 구체적인 힘으로 구현되지 않을까. 서경식과 다카하시가 함께한 20여년의 세월은 한일 연대의 모범과 우정의 역사를 보여 준 귀한 예로 기억돼야 하리라. 이들의 목소리가 교착상태인 한일 관계에 의미 있는 돌파구를 만드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 이영훈 또 망언 “위안부 원류는 조선시대 기생”

    이영훈 또 망언 “위안부 원류는 조선시대 기생”

    친일 식민사관 논란 ‘반일 종족주의’ 저자“광복 이후 한국군·미군 위안부 형태로 존속”MBC 기자 폭행 사과하면서도 “정당 방위”친일 식민사관 논란을 일으킨 베스트셀러 ‘반일 종족주의’의 저자 이영훈 전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교수가 “일본군 위안부의 원류는 조선시대 기생제이며 해방 이후에도 한국군·미군 위안부 형태로 존속했다”고 주장했다. 남성의 여성성 착취가 일제강점기만의 문제는 아니며 오히려 광복 이후 위안부의 실상이 더 참혹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이승만학당 교장으로 있는 이 전 교수는 16일 유튜브 채널 ‘이승만TV’에 올린 영상 ‘반일 종족주의 독자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에서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자기 소신을 밝혔다. 그는 “‘대한민국 이야기’를 펴낸 2007년에는 위안부 연구를 주도한 요시미 요시아키 학설을 채택해 위안부제는 일본군 전쟁범죄이며, 위안부는 성노예였다고 정의했다”면서도 이후 12년간 연구하면서 남성이 여성의 성을 착취한 것이 일제강점기 문제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설명했다.이 전 교수는 “일본군 위안부의 원류는 조선시대 기생제이며, 이 제도는 해방 이후 민간 위안부, 한국군 위안부, 미군 위안부 형태로 존속했다”며 “위생 상태, 건강 상태, 소득수준, 포주와 관계는 (일제강점기 이후가) 일본군 위안부보다 훨씬 참혹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일제강점기 군인과 노무자 경력이 있는 인물 50여명 인터뷰 ▲동남아시아 일본군 위안소에서 관리인으로 근무한 사람의 일기 ▲일본에서 나온 공창·위안소 제도 연구 성과 ▲서울대 보건대학원 학생들이 1964∼1967년에 발표한 논문 ▲한국 정부가 작성한 보건사회통계연보 등을 통해 이런 결론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이 전 교수는 지난 4일 MBC 기자를 폭행한 것과 관련해서는 “원숙한 인격이었다면 피할 수 있는 불미스러운 일이었다”며 “개인적으로 기자에게 사과의 말씀을 전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는 “상대방 동의를 받지 않고 마이크를 들이대거나 촬영하는 것 역시 정당화될 수 없는 폭력”이라며 인격권과 초상권을 무시한 처사에 대한 정당방위였다고 항변했다. 오달란 기자 dallan@seoul.co.kr
  • 한일 우여곡절 끝 국교 재개 합의했지만… 기로에 선 ‘1965년 체제’

    한일 우여곡절 끝 국교 재개 합의했지만… 기로에 선 ‘1965년 체제’

    한일회담은 한국이 승전국이 아니라는 이유 등으로 샌프란시스코 대일강화조약의 서명국 참가가 좌절된 것으로부터 시작됐다 할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이 한국을 대일강화조약 서명국에서 제외하겠다는 방침을 확정하자, 조약에 일본과의 양자협의를 개최할 수 있는 근거(제4조 a항)와 일본의 한국 내 재산의 포기를 확인하는 조항(4조 b항) 등을 추가해 줄 것을 미국에 요구했고, 결국 성사시켰다. 제4조 a항은 ‘재산 및 채무를 포함한 청구권의 처리는 일본과의 특별협정으로 결정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이 조항에 근거해 미국의 주선으로 마련된 예비회담이 1951년 10월 20일 일본 도쿄에 위치한 최고사령부에서 시작되었고 중단에 중단을 거듭하다 7차 회담을 통해 1965년 6월 22일 마무리됐다. 1개의 조약과 4개의 협정이 체결됐다.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재일 한국인의 법적 지위 및 대우에 관한 협정 ▲어업 협정 ▲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 등이다. 양국 국회에서 비준된 뒤 1965년 12월 18일 양국 정부가 비준서를 교환함으로써 정식 발효됐다. 이날부로 양국 국교가 재개되었고 이른바 1965년 체제가 성립된 것이다. ●1차 회담(1951~1952년) ‘대한(對韓)청구권’ 문제가 핵심 쟁점이었다. 해방 후 미 군정청은 ‘법령 33호’를 통해 한반도 내 일본 정부와 기관 등의 공공재산과 사유재산을 전부 몰수했다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인 1948년 9월 11일 한국 정부와 ‘재정 및 재산에 관한 최초 협정’을 체결하고 인계했다. 회담이 시작되고 일본은 1907년 헤이그 조약 46조의 ‘사유재산은 몰수할 수 없다’는 규정을 근거 삼아 역(逆)청구권을 주장했다. 일본은 패망 시점 일본의 한반도 내 재산을 702억여엔(당시 환율로 대략 47억 달러)으로 집계해 이 재산으로 한국의 대일청구를 상쇄하고 연합국 배상에도 충당하려 했다. 역청구권 주장이 계속되자 한국은 “일본이 청구권을 철회하지 않는 한 회담은 계속하지 않는다”는 성명을 냈고, 일본은 무기연기를 제의했다. ●2차 회담(1953년) ‘어업 문제’로 인해 일본은 회담 재개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앞서 1차 회담이 시작되기 1개월 전 이승만 대통령은 해상에 ‘이승만 라인’을 설정하고 이를 침범한 일본 어선을 ‘마구잡이’로 나포했다. 일본은 나포된 어선과 선원들을 송환받기를 원했다. 1953년 4월 15일 도쿄에서 열렸지만 일본은 이승만 라인의 철폐를, 한국은 일본의 대한청구권 주장의 철회를 서로에게 일방적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기본관계 ▲재산청구권 ▲재일한인의 국적 처우 ▲어업 ▲선박 등에서 5개 위원회가 설치되어 돌아가던 중 6·25전쟁 휴전이 성립되자 서로 회담을 뒤로 미루기를 원했다. ●3차 회담(1953년) 구보타 망언 파문으로 양국 간 감정 대립이 격화하고 회담이 장기간 표류했다. 일본의 식민통치가 한국에 유익했다는 이른바 ‘식민지 시혜론’이 한국 여론을 들끓게 했다. 일본 측이 역청구권을 포기하지 않자 재산청구권 위원회에서 한국 측 홍진기 대표가 “일본이 36년간의 축적을 반환하라고 한다면, 36년간의 피해를 상각하라고 요구할 수밖에 없다”고 하자 일본 측 구보타 수석대표는 “한국에서 민둥산을 녹화한 일, 철도를 깔고 항만을 건설하고 논을 조성한 일, 대장성이 1000만~2000만엔을 지출해 한국 경제를 배양한 일을 한국 측 요구와 상쇄했을 것”이라고 한 데 이어 “(한반도에) 일본이 가지 않았다면 중국이나 러시아가 들어왔을 수 있다”고 말했다. “카이로선언에서 사용된 ‘조선인의 노예 상태’라는 단어는 연합국이 전시 흥분 상태였기 때문에 나온 표현”이라고도 했다. 회담은 개시 2주 만인 10월 21일 결렬됐다. ●4차 회담(1958~1960년) ‘재일조선인’의 북송 문제가 파란을 일으킨 회담이었다. 앞서 회담 휴지기에는 상당한 진전이 이뤄지기도 했다. 1954년 구보타 망언이 철회되었고, 미국의 강력한 개입으로 일본이 역청구권을 포기한다. 한일회담에서의 최초의 합의였다. 문화재도 일부 ‘인도(반환이 아닌)되었다. 1958년 4월 15일 회담이 개최되었지만 6월 북한과 일본이 북송에 합의하자 한국은 한일무역을 단절했다. 그럼에도 미국의 적극적 중재와 양측의 필요성이 회담을 추동해 4차례 본회의를 열었으나 1960년 4·19혁명과 대통령의 하야로 회담은 보류됐다. ●5차 회담(1960~1961년) 경제협력 방식을 통한 청구권 문제의 해결 방안을 일본이 본격 제기했다. 한국은 이 방안은 수용할 수 없었지만 비공식 관련 회담에는 응했다. 장면 내각은 적극적인 대일 정책을 천명했다. 한국의 경제건설을 위해 일본과의 경제 협력이 필요하다고 봤다. 일본도 1950년대 호황기를 지나 침체기에 접어들면서 한국을 생산기지 겸 시장으로 바라보고 경제협력 구축의 필요성을 느꼈다. 1960년 9월 6일 일본 외상이 친선사절단으로 방한, 회담 재개에 합의했다. 해방 후 일본 고위관리의 첫 한국 방문이었다. 5차 회담은 5·16을 맞으면서 중단된다. ●6차 회담(1961~1964년) ‘김·오히라 메모’로 청구권의 액수와 공여 방식을 결정했다. 앞서 양국은 실무협상만으로는 타결이 어렵다고 보고 고위급 정치회담을 개최, 1962년 3월 최덕신 외무장관·고사카 외상 간 이른바 제1차 정치회담을 열었다. 이때 청구권 금액은 한국 7억 달러 대 일본 7000만 달러(차관 2억 달러 제시)로 편차가 컸다. 1962년 10~11월 2차 정치회담에서는 김종필 부장과 오히라 외상이 만났다. 앞서 배의환·스기 수석대표 간 10차례에 걸친 예비회담을 통해 상대방이 염두에 두고 있는 수치가 무엇인지 탐색했다. 메모는 ‘무상공여 3억 달러, 유상원조 2억 달러, 자금협력 1억 달러+@’로 정리되었다. 김·오히라 메모 합의 후 오히라 외상은 그 명목을 “한일국교 정상화를 축하하고 한국의 경제발전에 기여하기 위하여”라고 주장했다. 이후 일본은 청구권이 아닌 경제협력을 위한 자금으로 할 것을 회담 내내 고집했다. ●7차 회담(1964~1965년) 회담이 마무리되기까지는 2년 반이 더 소요됐다. 어업 문제, 기본조약 문제 등 나머지 현안에 대한 교섭이 남아 있었는데 일본은 특히 어업 문제를 청구권 문제의 미해결 사안과 연계시켰다. 1963년부터 김·오히라 메모에 대한 극심한 반대로 한국이 큰 혼란을 겪은 탓도 컸다. 1964년 12월 7차 회담이 재개되었다. 1965년 2월 17~20일 방한한 시나 에쓰사부로 외상이 김포 도착 성명에서 “양국 간의 오랜 역사 중에 불행한 기간이 있었던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로서 깊이 반성하는 바이다”라고 한 것은 회담 타결 분위기 조성에 도움이 되었다. 일본은 조인식 직전까지 몇몇 표현에 집착했다. 예컨대 ‘청구권’이라는 단어를 끝까지 거부했고, ‘문화재’라는 명칭을 피하려 ‘문화상 협력에 관한’이란 표현을 제시했다. 최종적으로는 ‘청구권 및 경제협력협정’, ‘문화재 및 문화협력 협정’ 등의 이름으로 타협됐다. 6월 22일 이동원 장관이 일본 총리관저에서 국교정상화를 위한 1개의 조약과 4개의 협정, 2개의 의정서에 조인한 뒤 총 27건에 이르는 조약, 협정, 부속문서가 조인되거나 교환됐고 각각 국내 비준절차를 거쳐 12월 18일 발효되었다. jj@seoul.co.kr
  • [씨줄날줄] 수요시위 1400회/이순녀 논설위원

    [씨줄날줄] 수요시위 1400회/이순녀 논설위원

    집회 30분 전에 도착했는데도 현장 주변은 이미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섭씨 35도를 오르내리는 폭염도 몰려드는 행인의 발길을 막지 못했다. 누군가 나눠준 나비 모양 색종이가 손에서 손으로 전해졌다. 바닥에 주저앉은 시민들의 머리와 어깨에 어느새 노란 나비의 물결이 일렁였다. 어제 정오에 열린 1400회째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시위’의 열기는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김학순(1924~1997) 할머니가 1991년 8월 14일 위안부 피해 사실을 최초로 공개 증언한 것을 계기로, 이듬해 1월 8일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와 배상 등을 요구하며 집회를 시작한 지 꼬박 27년. 서울 종로구 옛 주한 일본대사관이 있던 곳, 지금은 평화의 소녀상이 의연히 자리한 곳에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결같이 외쳐 왔을 기억과 연대의 함성을 떠올리니 숙연함이 밀려왔다. “일본 군대 위안부로 강제로 끌려갔던 김학순입니다. 신문에 나고 뉴스에 나오는 걸 보고 내가 결심을 단단하게 했어요. 아니다. 이거는 바로잡아야 한다. 도대체 왜 거짓말을 하는지 모르겠단 말이오. 그래서 내가 나오게 되었소.” 김학순 할머니의 피맺힌 증언은 숨죽여 지내던 다른 위안부 피해자들의 연쇄 증언으로 이어졌고, 이는 국제사회에 일본 정부의 반인권적 범죄 행위를 널리 인식시켰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등 여성단체들은 2012년 12월 대만에서 열린 ‘제11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의’에서 매년 8월 14일을 ‘세계 위안부 기림일’로 정하는 성과를 거뒀다. 또한 콩고민주공화국, 우간다, 코소보 등 내전국의 전시 성폭력 범죄 피해자들과도 연대하는 등 인권·평화 운동으로 뻗어 나가고 있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1400회 수요시위에는 해외 11개국 24개 도시의 시민들이 동참해 공감과 지지를 나타냈다. 한국 정부는 뒤늦게 법을 제정해 지난해부터서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날’을 공식 국가기념일로 기리고 있으니 부끄러운 일이다. 현재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중 생존자는 20명이다. 지난 1월 별세한 김복동 할머니를 비롯해 올해 세상을 떠난 이들만 벌써 다섯 분이다. 남은 생존자들이 더는 억울함 속에 눈을 감지 않도록 가해자로부터 진정한 사과와 배상을 받아 낼 책임과 의무가 한국 정부에 있다. 안타까운 것은 국내에서도 위안부를 부정하는 망언을 일삼는 극우 지식인과 단체들이 늘고 있다는 점이다. “위안부 강제 동원은 없었다”는 일본 정부와 우익 세력의 주장을 앵무새처럼 따라 한다. “내가 증인”이라는 생존자의 외침이 이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지 참담할 뿐이다. coral@seoul.co.kr
  • 한국지사 사과했지만… DHC TV ‘막말’ 계속

    한국지사 사과했지만… DHC TV ‘막말’ 계속

    “韓 불매운동 상식 밖… 자유 언론 봉쇄 앞으로도 굴하지 않을 것” 공식 입장문혐한 방송으로 논란의 중심에 선 일본 화장품 기업 DHC의 한국지사 DHC코리아가 최근 공식 사과했지만 일본 DHC TV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한국을 비방하는 ‘막말’을 쏟아내는 방송을 계속해서 내보내고 있다. DHC TV는 아예 공식 입장문을 발표해 한국에서 일어나는 불매운동 및 자사에 대한 비판에 대해 “자유로운 언론 활동을 봉쇄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난 13일 DHC코리아 김무전 대표는 “‘DHC 텔레비전’ 관련 문제로 물의를 일으킨 점, 깊이 사죄드린다”며 “과거의 발언을 포함한 ‘DHC 텔레비전’ 출연진의 모든 발언에 대해서 DHC코리아는 동의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DHC 텔레비전’과는 다른, 반대의 입장으로 이 문제에 대처할 것임을 공식적으로 말씀드린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사과는 금방 무색해졌다. DHC TV의 시사프로그램 도라노몬뉴스에 출연한 우익 정치평론가 사쿠라이 요시코가 이날 방송에서 “한국이 뭘 하든 일본에는 별로 영향이 없다. 한일 사이 이런 일이 생기면 한국 손해가 상당히 크다”고 비아냥거렸기 때문이다. 망언은 14일 방송에서도 이어졌다. 우익 성향 산케이신문의 아비루 루이 논설위원은 켄트 길버트 미국 캘리포니아주 변호사와 함께 출연해 최근 한일 갈등과 관련, “한국은 정말 어리석다고 생각한다”며 “일본은 제대로 이유를 들어 제재를 가했지만 한국은 논리도 없이 제재를 가했다”고 말했다. DHC TV는 이날 역사왜곡 방송이라는 한국 언론의 비판을 정면 반박하는 입장문도 홈페이지를 통해 발표했다. ‘한국 미디어의 DHC 관련 보도에 대해’라는 제목의 입장문에서 야마다 아키라 대표는 “한국 언론은 (우리)프로그램 내용이 어디가 어떻게 혐한적인지, 역사 왜곡인지 구체적인 사실로 지적해 줬으면 좋겠다”면서 “말할 것도 없지만 한국 DHC가 제공하는 상품과 서비스는 DHC TV 프로그램 내용과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그러한 상식을 넘어 불매 운동이 전개되는 것은 언론 봉쇄가 아닌가라는 우려를 금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어 “DHC 그룹은 앞으로도 자유롭고 공정한 사회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자유로운 언론의 장소 만들기를 계속할 것”이라며 “모든 압력에 굴하지 않고 자유로운 언론의 공간을 만들어 지켜나가고 싶다”고 밝혔다. 심현희 기자 macduck@seoul.co.kr
  • ‘5·18 망언’ 이종명 주최 토론회서 쏟아진 ‘건국론’ 주장

    ‘5·18 망언’ 이종명 주최 토론회서 쏟아진 ‘건국론’ 주장

    5·18 민주화 운동을 “폭동”으로 매도해 당으로부터 제명 징계 처분을 받은 이종명 자유한국당 의원이 주최한 토론회에 건국의 뿌리를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찾지 않고 1948년 수립된 이승만 정부에서 찾는 인사들이 모여들었다. 토론회에서는 “건국 100주년은 사기”라는 등 대한민국 헌법 정신을 부정하는 발언들이 쏟아지는가 하면, 광복 당시 국민을 ‘짐승’에 비유하는 발언도 나와 논란이 되고 있다. 이종명 의원은 지난 13일 서울 영등포구 국회의원회관에서 ‘광복절, 제자리를 찾자’라는 이름의 토론회를 주최했다. 이 의원은 인사말에서 “광복절은 1945년 일본 제국주의 압제에서 해방된 날이자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최초로 수립된 건국기념일”이라면서 “그동안 광복절 행사를 보면 본래 의미와는 달리 단순히 일제로부터 해방을 뜻하는 날로만 기억된 것은 아닌지 자책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국가라는 지위를 획득한 건국기념일로서의 광복절이 최근엔 좀 이상하게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토론회 참석자들은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난 1945년 8월 15일을 기념하는 광복절을 남한에 단독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 15일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1948년 건국론’을 주장하는 뉴라이트 계열의 학자들이었다. 이주천 전 원광대 사학과 교수는 “광복은 빛이 밝혀지며 주권이 회복됐다는 뜻인데 1945년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면서 “1948년 우리 손으로 건국한 것이 중요하다. (1919년 임시정부 수립을 기점으로 하는) 건국 100주년은 역사적인 사기”라고 발언했다. 이주천 전 교수는 또 1945년 8월 15일은 노예 상태에서 해방이 된 것이라며 “방목한 짐승들이 주인도 없이 길거리에, 들판에 막 돌아다니는 그런 상태”였다고 표현했다. 광복 당시 국민을 ‘짐승’에 비유한 것이다. 또다른 참석자인 김병헌 국사교과서연구소장은 “1945년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난 것은 광복이 아니라 해방”이라면서 “1945년에 우리는 주권을 찾지 못했다. 주권 회복은 1948년 8월 15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헌법 전문을 보면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한다는 표현이 나온다. 즉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있다는 뜻이다. 또 ‘1948년 건국론’ 주장은 과거 친일 인사들을 건국 공로자로 둔갑시키고 그들에게 면죄부를 준다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앞서 박근혜 정부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수립’이라고 표현한 국정 역사교과서, 당시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은 건국절 법제화를 추진했다. 그러자 당시 광복회는 성명을 통해 ‘건국론’ 주장이 “항일 독립운동을 폄하하고 선열 모두를 모독하는 반역사적·반민족적 망론”이라고 강하게 비판한 적이 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들로 구성된 광복회는 2016년 8월 23일 발표한 성명에서 “국가구성 3요소(국민, 영토, 주권) 불비설이나 유엔 등 국제적 불인정을 들어 대한민국의 건국 시기를 1948년 정부 수립 시기로 보는 주장은 식민지 항쟁의 위대한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는 바른 역사관이 결코 아니다”라면서 “일부 학자들의 학설에 불과한 국가구성 3요소를 어떻게 건국의 요소들로 동일시 할 수 있으며, 각 나라마다 역사가 다르고, 환경이 다르고, 건국의 동기와 원인이 다른데, 국가구성 요소의 잣대로만 우리의 역사를 판단할 수가 있는가. 지구상에는 이 잣대의 기준 없이 건국된 국가들이 너무도 많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미국을 예로 들었다. 광복회는 “우리의 우방국가인 미국을 보면 1776년 7월 4일에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미합중국(United States of America)’이라는 국호로 독립선언을 발표했다. 뉴라이트 학자가 주장하는 미국의 건국절은 이 독립선언일(Independence Day, 독립기념일)을 말하고 있다”면서 “당시 미국은 영국의 식민지로 국가, 영토, 주권이 없었다”고 설명했다. 광복회는 또 국정교과서 현장검토본이 공개된 직후인 2016년 11월 28일에 “‘반민족 친일파 청산’을 ‘친일청산’으로, ‘친일파’를 ‘친일인사’로 바꾸어 기술하는 것 또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정 역사교과서로서 올바른 표현이 결코 될 수 없다”면서 “이는 친일행위에 대한 반민족적 범죄인식을 약화시키고, 매국행위를 개인적 사안으로 이해케 함으로써 친일세력에 의한 집단적 조직적 범죄를 은닉시키려는 기만적인 행위와 다름없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한편 이종명 의원은 ‘5·18 망언’으로 자유한국당 중앙윤리위원회로부터 제명 징계 처분을 받았지만, 당 지도부가 의원총회 추인 표결을 미루면서 아직도 징계가 확정되지 않았다.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우리 땅’ 독도에서 태극기 휘날리며

    ‘우리 땅’ 독도에서 태극기 휘날리며

    광복절을 이틀 앞둔 13일 경북 울릉군 독도를 찾은 관광객들이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우기는 일본 정부의 망언에 맞서 태극기를 들고 사진을 찍고 있다. 독도 연합뉴스
  • ‘우리 땅’ 독도에서 태극기 휘날리며

    ‘우리 땅’ 독도에서 태극기 휘날리며

    광복절을 이틀 앞둔 13일 경북 울릉군 독도를 찾은 관광객들이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우기는 일본 정부의 망언에 맞서 태극기를 들고 사진을 찍고 있다. 독도 연합뉴스
  • 군포시 산본도서관, 인문학 강좌 ‘역사문제와 한일관계’ 개설

    경기도 군포시 산본도서관은 오는 20일부터 ‘역사문제와 한일관계’라는 주제로 인문학 강좌를 개설한다고 13일 밝혔다, 다음달 10일까지 총 4회에 걸쳐 강의를 진행한다. 동북아역사재단 한일관계연구소장이 강사로 나설 이번 강연은 ‘한일 역사문제란 무엇인인가‘, ‘조선인 강제동원 문제’, ‘일본군 위안부 문제’, ‘야스쿠니신사 문제’와 관련한 정보를 접할 수 있다. 특히 최근 무역 갈등으로 관심이 더 고조되는 일본 정부 역사 인식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아본다. 또 일본 정치가는 왜 망언을 하는지, 일제 강점기에 조선인은 강제 동원돼 어떤 피해를 보았는지 정보를 자세히 알 수 있다. 한편 산본도서관은 컬러테라피스트와 그림책테라피스트를 초청해 ‘컬러와 그림책의 치유’라는 주제의 인문학 강좌도 마련했다. 이번달 29일 첫 강의를 시작, 다음달 26일 끝난다. 시민에게 색과 그림책을 이용한 자아 찾기와 마음 치유 기회를 제공하는 강연이다. 바쁜 일상을 사는 현대인들이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장성수 산본도서관장은 “8~9월 도서관에서 다양한 인문학 강좌를 통해 지식여행을 하며 신체적·정신적 휴식을 하고 동시에 삶의 질을 향상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남상인 기자 sanginn@seoul.co.kr
  • 정유미 공식입장 “DHC 모델 중단 요청+재계약 절대 없다”[전문]

    정유미 공식입장 “DHC 모델 중단 요청+재계약 절대 없다”[전문]

    일본 화장품 브랜드 DHC의 자회사인 ‘DHC 텔레비전’이 혐한 방송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가운데, DHC 광고 모델로 활동하고 있는 배우 정유미에게도 불똥이 튀었다. 정유미 측은 12일 “개인 SNS를 통해 무차별 욕설과 비난 쏟아져 당사자도 힘든 상황”이라고 정유미의 심경을 전하며 “국민감정을 잘 알고 있다. 다각도로 대책 방안을 고려 중이다”라고 전했다. 이후 정유미 측은 “DHC 본사 측 망언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한다”며 “당사는 DHC KOREA와 정유미의 뷰티 모델 계약을 2018년에 체결했다. 정유미 SNS에 게재된 DHC제품 사진은 기존 광고 계약에 포함된 조항이었다”고 설명하며 “하지만 이번 DHC 본사 측 발언에 중대한 심각성을 느껴 정유미의 초상권 사용 철회와 모델 활동 중단을 요청했다. 정유미 SNS 내 DHC 관련 게시물도 삭제한 상태”라고 설명했다. 이어 “해당 기업과의 재계약 역시 절대 없을 것임을 알려 드린다”고 공식입장을 밝혔다. 앞서 DHC가 운영하고 있는 DHC텔레비전의 시사 프로그램 ‘진상 도라노몬 뉴스’는 지난 10일 한국의 일본 제품 불매운동에 대해 “한국은 원래 금방 뜨거워지고 금방 식는 나라”라고 비난하며 일본이 한글을 만들어서 배포했다는 역사 왜곡 발언을 해 논란이 일었다. 이뿐 아니라 위안부 평화의 소녀상에 대해 “내가 현대 미술이라고 소개하면서 성기를 내보여도 괜찮은 거냐”고 비하하는 발언을 해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네티즌들은 DHC 코리아 측에 해명과 사과를 요구했으나 DHC 측은 해명과 사과 대신 SNS 계정의 댓글을 비활성화하며 대응을 하지 않고 있다. 이에 DHC 불매 운동까지 번진 상태다. <이하 정유미 소속사 공식입장 전문> 안녕하세요, 에이스팩토리입니다. 정유미 DHC 광고 계약과 관련해 당사의 공식 입장 보내드립니다. 먼저, DHC 본사 측 망언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합니다. 당사는 DHCKOREA와 정유미의 뷰티 모델 계약을 2018년에 체결했습니다. 정유미 SNS에 게재된 DHC제품 사진은 기존 광고 계약에 포함된 조항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DHC 본사 측 발언에 중대한 심각성을 느껴 정유미의 초상권 사용 철회와 모델 활동 중단을 요청했습니다. 정유미 SNS 내 DHC 관련 게시물도 삭제한 상태입니다. 더불어 해당 기업과의 재계약 역시 절대 없을 것임을 알려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에이스팩토리 드림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금방 식는 나라” DHC 망언에 서경덕 “재고 日에 돌려보내자”

    “금방 식는 나라” DHC 망언에 서경덕 “재고 日에 돌려보내자”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는 11일 일본 화장품 브랜드 DHC의 혐한 방송 논란에 대해 “이젠 더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느냐. 우리 불매운동으로 DHC를 자국으로 돌려보내야 할 것 같다”고 주장했다. 서 교수는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DHC는) 늘 이렇게 해왔기에 이젠 새롭지도 않다. DHC의 요시다 요시아키 회장은 극우 혐한 기업인으로 악명이 높다”며 이같이 밝혔다. 최근 DHC의 자회사인 인터넷방송 ‘DHC테레비’의 시사프로그램 ‘진상 도라노몬 뉴스’는 한국 불매운동에 대해 “한국은 원래 금방 뜨거워지고 금방 식는 나라”라며 “일본은 그냥 조용히 두고 봐야 한다”고 비아냥 거리는 출연자의 발언을 내보내 큰 논란을 일으켰다. 이 방송에 출연한 또 다른 패널은 “‘조센징’들은 한문을 썼는데 한문을 문자화시키지 못해 일본에서 만든 교과서로 한글을 배포했다. 일본인이 한글을 통일시켜 지금의 한글이 됐다”는 막말도 내보냈다. 이 프로그램은 종종 한국에 대한 혐오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내용을 내보내 큰 논란을 일으켰다. 지난해에는 유튜브의 방송 정지 조치까지 받기도 했다.서 교수는 이에 대해 “이젠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느냐”라며 “우리의 불매운동으로 DHC를 자국으로 돌려보내야 할 것 같다. 아무튼 ‘잘가요 DHC’ 해시태그 캠페인을 SNS 상에서 여러분과 함께 펼친다면 더 빠른 효과를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라고 제안했다. 그는 또 “한국의 모든 제고품들을 DHC 요시다 오시아키 회장 앞으로 다 전해 주자”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편 DHC는 과거에도 혐한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켰다. 요시다 회장은 2016년 자사 홈페이지에 재일교포를 겨냥해 “사이비 일본인은 필요 없으니 모국으로 돌아가라”는 글을 올려 파문을 불렀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DHC, 믿었던 회사의 가짜 뉴스 “일본인이 한글을 통일”

    DHC, 믿었던 회사의 가짜 뉴스 “일본인이 한글을 통일”

    일본 화장품 기업 DHC 자회사인 인터넷방송 ‘DHC 테레비’에서 한국의 불매 운동을 비하하거나 한글을 왜곡하는 등 혐한 방송을 해 논란이 일고 있다. 일본의 화장품 회사 DHC가 일본 내 자회사를 통해 극우 성향의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면서 한국에 대한 비하와 망언을 일삼은 것으로 11일 드러났다. 해당 프로그램에서는 한국의 일본제품 불매운동과 평화의 소녀상을 폄하하고, ‘일본인이 한글을 만들었다’는 가짜 뉴스까지 퍼뜨렸다. DHC의 자회사인 인터넷방송 DHC테레비(텔레비전)의 시사 프로그램 ‘도라노몬 뉴스(ノ門ニュース)’는 지난달 30일자 방송을 통해 한국에서 벌어진 일본제품 불매운동에 대해 “한국은 원래 금방 뜨거워지고 금방 식는 나라”라면서 “일본은 그냥 조용히 두고 봐야 한다”고 비아냥대는 출연자의 발언을 내보냈다. 또 다른 출연자는 “조센징(한국인 비하 표현)들은 한문을 썼는데 한문을 문자화시키지 못해 일본에서 만든 교과서로 한글을 배포했다. 일본인이 한글을 통일시켜 지금의 한글이 됐다”는 막말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 프로그램은 이달 8일에도 극우 세력의 협박으로 일본 아이치 트리엔날레 전시가 중단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평화의 소녀상’을 두고 “그럼 내가 현대아트라고 소개하면서 성기를 내보여도 되는 건가”라고 막말을 이어갔다. 논란을 일으킨 도라노몬 뉴스는 시사 프로그램이라곤 하지만 평소에도 한국에 대한 혐오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내용을 주로 내보내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에는 유튜브의 라이브 방송 정지 조치까지 받기도 했다. 구독자 수는 현재 45만명에 달한다. DHC의 회장인 요시다 요시아키 역시 과거 혐한 발언을 일삼아 논란이 된 바 있다. 3년 전에는 공식 홈페이지에 재일교포에 대해 “사이비 일본인” “나라에 나쁜 영향을 끼치니 모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DHC는 일본에서 화장품과 건강식품을 판매하는 회사로 2002년 4월 DHC KOREA 한국 법인을 세우고 국내에 진출했다. 요시다 요시아키 DHC 회장은 예전부터 재일동포를 비하하거나 극우 정당을 지원하는 등 극우 혐한기업인으로 알려졌다. DHC 측은 이와 관련된 jtbc 보도에 “드릴 말씀이 없다”는 입장만 밝힌 상태다. 이 때문에 국내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DHC 기업인의 이중성이 드러났다. 불매 운동을 왜 하느냐. 한국에서 영구히 철수해야 한다”는 등 비판의 목소리를 쏟아냈다. 사진 = 서울신문DB 김채현 기자 chkim@seoul.co.kr
  • [서울광장] ‘대한 청구권’처럼 준비했을까?/이지운 논설위원

    [서울광장] ‘대한 청구권’처럼 준비했을까?/이지운 논설위원

    청구권(請求權)이 우리가 일본에 요구할 것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일본 측의 ‘대한(對韓) 청구권’이란 게 있었다. 참 어이없다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우리는 이 문제로 일본에 한참을 시달렸다. 전쟁통에도 일본과 마주 앉아야 했던 1951~1952년 1차 한일회담 테이블을 뒤엎은 건 대한 청구권 문제였다. 우리 땅에 있는 모든 것이 우리 것이라는 건 당연한 일이고, 일본 패망 후 결론도 그렇게 났다. 1945년 9월 20일 남쪽에 설치된 미 군정청은 12월 6일 발표한 ‘법령 33호’를 통해 한반도 내 일본인 재산권 취득에 관한 문제를 다루었다. ‘제2조 1945년 8월 9일 이후 일본 정부, 그의 기관 또는 당해 국민, 또는 … 이 소유 관리하는 … 모든 종류의 재산 및 수입에 대한 소유권은 1945년 9월 25일부로 미 군정청이 취득하고 소유한다’는 내용이다. 일본은 반발했다. 1907년 헤이그조약 46조의 ‘사유재산은 몰수할 수 없다’는 규정을 근거 삼아 한반도 내 일본인 재산의 반환을 주장했다. 그리고 패망 직후부터 이를 대비했다. 해방 후 채 보름도 안 된 1945년 8월 27일 조선총독부는 종전사무처리본부를 설치하고 ‘일본인의 조선 내 기업경영, 소유재산, 조선인에 대한 채권채무, 투자’ 등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이 재산으로 한국의 대일 청구를 상쇄하고 연합국 배상에도 충당하려 했다. 집계 결과 해방 시점 일본의 한반도 내 재산은 702억여엔. 당시 환율로 대략 47억 달러였다. 다행스러운 건 한국도 일본인들의 치를 떨게 한 무기를 개발한 것이었다. 1952년 대통령 선언으로 확정한 ‘이승만 라인’ 또는 ‘평화선’이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맥아더 장군이 설정한 일본 해역보다 더 일본 쪽으로 선을 긋고 영해로 선언해 버린 것이다. 본회담 개시 1개월 전이다. 이종원 일본 와세다대 한국학연구소장은 1994년 논문에서 “한일회담에서 미국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게 되자 그에 대체되는 유리한 교섭재료를 만들어 내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분석했다. “일본을 반공의 보루로 삼으려는 미국이, 한국이 일본에 대해 과도한 요구를 하고 있다고 보고 한국을 억제하려던 시점이었다”고 보았다. 1953년 2차 한일회담은 어업 문제에서 결렬됐다. 당시 일본 외무성에는 이승만 라인의 철폐를 조건으로 대한 청구권을 포기할 생각도 있었다 하니, 참으로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던 모양이다. 한국이 이승만 라인을 침범한 일본 어선을 ‘마구잡이’로 나포하고 있다며 일본 국회에서는 미군의 출동을 요구하는 목소리까지 나왔다. 아이젠하워 전 미 대통령이 1954년 미국을 찾은 이승만 전 대통령에게 라인의 철폐를 요구하자 이 전 대통령은 아예 회담을 결렬시켜 버린다. 귀국하자마자 일본 어선의 나포를 강화했으며, 일본과의 경제 단교 조치를 내리기에 이른다. 대한 청구권은 대략 이즈음 소멸의 길을 걷는다. ‘구보타 망언’으로 종료된 3차 한일회담 이후 휴지기를 거치며 일본에서 청구권의 포기가 거론된다. 우리 협상력의 결과물이면 좋았으련만 그렇지는 않았다. 일본 경제는 한국전 특수로 펄펄 끓으면서 1950년대 중반도 못 돼 전쟁 이전의 수준을 회복하고 고도성장 단계로 진입했다. 청구권을 논하느니, 한국으로 경제 진출을 꾀하는 편이 이득이 크다고 판단한 것이다. 경제력을 회복하고 국제 정세에 힘입은 일본은 회담 중재에 나선 미국의 압박을 여러 차례 물리치기도 했다. 대한 청구권 논란은 국가 간 갈등과 논쟁을 대비하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는 걸 보여 준다. 일본 대장성은 1차 요시다 내각 아래 1946년 9월 대장성 관리국 부속기관으로 ‘재외재산조사회’를 설치해 297명을 동원, ‘일본인의 해외활동에 관한 역사적 조사’라는 극비 또는 취급주의 문서를 대량으로 만들어 낸다. 35권짜리 책으로 인쇄돼 보관된 것 가운데 조선편이 10권이다. 뒤에 피징용자 협상중 일본이 한국 측에 숫자의 근거를 제시하라고 강요하며 “피해자 명부가 있느냐”고 비아냥댔을 때 우리 협상단은 쩔쩔맬 수밖에 없었다. 언필칭 ‘전쟁 중’이라 하니 따져 보게 된다. ‘대한 청구권’처럼 준비했을까? 일본에도, 우리에게도 적용해 볼 일이다. 또 하나 짚을 게 있다. 오늘날의 ‘이승만 라인’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당시 이것으로 대략 300여척의 일본 선박을 나포했고, 4000명가량의 일본인 선원들이 옥고를 치르거나 구금 조치됐다. 1965년 최종 한일협정 조인 때까지 살아남아 일본을 괴롭혔다. 끝으로 미국, 그리고 국제 정세의 변화가 당시에도 고비마다 협상을 좌우지했음도 기억해야 한다. jj@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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