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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英 찰스 왕세자 부부 쿠바 첫 방문… 반체제 인사들과 회동 안 해

    英 찰스 왕세자 부부 쿠바 첫 방문… 반체제 인사들과 회동 안 해

    영국 찰스 왕세자와 부인인 카밀라 왕세자빈이 영국 왕실 일원 중 처음으로 쿠바를 방문했다. 찰스 왕세자 부부는 24일(현지시간) 쿠바 수도 아바나에 도착한 뒤 혁명광장에서 독립영웅 호세 마르티 영정에 헌화한 뒤 나흘간의 공식 일정을 시작했다. 쿠바비시온방송 등 현지 매체들은 이날 찰스 왕세자가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음악 스튜디오를 방문한 뒤 태양공원 등 재생에너지 현장, 유기농 농장, 생물 의학 연구소 등도 참관했다고 전했다. 찰스 왕세자는 평소 환경보호 활동에 적극 참여해 왔다. 그는 또 영국 클래식 자동차 소유자들과 만날 예정이다. 왕세자 부부는 이날 미겔 디아스카넬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 주최 공식 만찬에도 참석했다. 그러나 라울 카스트로 공산당 총서기와는 만나지 않을 것으로 전해졌다. 찰스 왕세자는 또 이번 방문 기간에 공산당 일당 체제를 비판하는 반체제 인사들과의 면담 계획을 갖고 있지 않아 쿠바 출신 망명자들과 미국 보수 진영의 비판을 사고 있다고 AP통신은 전했다. 영국 왕실 대변인은 찰스 왕세자의 쿠바 방문에 대해 “양국 관계 증진과 문화 교류 확대를 도모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영국 외무부는 이번 방문에 대해 “인권문제 등에 대해 솔직한 대화를 나누고 쿠바에 대해 관여하려는 오래된 접근정책의 일부”라고 설명했다. 이석우 선임기자 jun88@seoul.co.kr
  • 탁신 전 총리 “태국 총선, 부정·조작 선거”

    탁신 전 총리 “태국 총선, 부정·조작 선거”

    24일 치러진 태국 총선에 대해 탁신 친나왓 전 총리가 ‘부정·조작 선거’라고 주장했다. 탁신 전 총리는 25일(현지시간) AFP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태국에서 그리고 국제사회에서 태국 총선을 관찰한 누구라도 각종 불법이 저질러졌다는 걸 안다”고 말했다. 그는 이날 미국 일간지 뉴욕타임스 기고문을 통해서도 군부 정권이 선거를 조작했다고 주장했다. 탁신 전 총리는 기고문에서 “군부가 권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걸 알았지만 그들이 일요일(24일) 선거를 조작하기 위해 얼마나 심하게 했는지 믿을 수 없을 정도”라고 썼다. 2006년 쿠데타로 축출된 탁신 총리는 두바이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다. 앞서 이날 태국 선거관리위원회는 95% 개표 결과 탁신계 푸어타이당이 지역구 전체 350석 가운데 137석을 얻었다고 발표했다. 이는 비례대표를 반영한 전체 500석 기준으로 과반에 미달한 것이어서 군부정권이 연장될 것으로 전망됐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체포된 전 인터폴 총재 부인, 마크롱 대통령에 편지

    체포된 전 인터폴 총재 부인, 마크롱 대통령에 편지

    인터폴(국제형사경찰기구)의 첫 중국 출신 총재였던 멍홍웨이(孟宏偉)의 부인이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에게 프랑스를 국빈방문하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남편 문제를 상의해 달라는 편지를 보냈다.AFP통신은 25일 약 6개월 동안 남편이 실종됐다며 멍 전 총재의 부인 그레이스 멍이 지난 21일 엘리제궁으로 “남편이 어디에 있고 어떻게 지내는지 물어봐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고 전했다. 그레이스 멍은 인터폴의 본부가 있는 프랑스 리옹에 머물고 있으며 지난해 9월 멍 전 총재는 중국 출장을 갔다가 실종됐다. 멍 전 총재는 지난해 10월 7일 인터폴에 편지로 사직 의사를 알렸으며 이 편지는 그의 체포 직후 보내졌다. 중국 당국은 멍 전 총재를 부패 혐의로 체포해 조사 중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중국 내에서는 부동산 재벌 궈원구이 등 해외에서 중국 공산당 지도부의 비리를 폭로하는 이들을 잡아들이라는 시 주석의 지시를 이행하지 못해 멍 전 총재가 체포됐다는 분석이 파다하다. 그레이스 멍은 “변호사 접견이 허용돼 남편을 도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면서 “프랑스가 이같은 메시지를 시 주석과의 만남에서 전달해 주기를 촉구한다”고 말했다. 유럽을 순방 중인 시 주석은 이날 마크롱 대통령과 프랑스 남부 니스 지역에서 만찬을 함께 한 뒤 25일(현지시간) 파리로 이동해 공식 일정을 소화할 예정이다. 멍 전 총재는 지난해 9월 25일 본국인 중국으로 출장을 간다면서 인터폴 본부가 있는 프랑스 리옹의 자택을 나간 뒤 연락이 끊겼고, 중국 공안은 지난해 10월 8일 멍 전 총재가 뇌물수수 혐의로 국가감찰위원회의 조사를 받고 있다고 공식 발표했다. 중국 당국은 피의자에 대한 정보 제공이나 변호사 접견 허용 없이 6개월간 가둘 수 있다. 현재 프랑스 경찰로부터 신변 보호를 받고 있는 그레이스 멍은 지난 1월 프랑스에 망명을 신청했다. 2005년 멍 전 총재와 재혼한 그는 중국민주건국회 칭다오시위원회 부주임을 역임했고 기업 대표 등으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베이징 윤창수 특파원 geo@seoul.co.kr
  • 태국 군부 정치에서 손 떼나

    태국 군부 정치에서 손 떼나

    3·24 태국 총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2014년 5월 쿠데타 이후, 군부 통치 5년만에 총선거이다. 전국 선거로는 2011년 7월 조기 총선 이후 8년 만이다. 정권을 장악해 왔던 군부가 전면에서 물러날 지 아니면, 민간 정당들이 정권교체를 이룰 지가 이번 선거의 초점이다. 특히, 1932년 입헌군주제도를 채택한 뒤, 19번의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정치 전면에 나와있던 군부의 거취가 주목된다. 민간 정당들이 승리했을 경우, 군부는 순순히 물러날까? 그동안 선거에서 특정 정당이 승리했더라도, 군부는 자신들의 잣대를 갖고 쿠데타를 일으켜 국회를 해산하고, 새로 선거를 실시하면서, 자기 입맛대로 정국을 주도해 왔다. 동남아시아국가연합, 아세안의 대표국가의 하나인 태국 총선의 궁금증을 살펴봤다. - 선거에서 패배하면 군부는 순순히 물러날까. “ 당장은 승복하고 정국 추이를 보겠지만, 자신들의 기준과 잣대에 따라 또다시 쿠데타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 19번의 쿠데타라는 기록이 보여주 듯, 태국 정치에서 군부의 정치 개입은 변수가 아닌 상수다. 정치에서 손을 떼기 어렵다는 의미이다.” - 최근 10여년동안 군의 역할이 더욱 활발해 졌는데. “군부는 2006년 9월 쿠데타를 일으켜 당시 농민과 도시 근로자 등 서민계층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던 탁신 친나왓 총리를 실각시켰다. 그 뒤 2007년 12월, 탁신 지지자들이 중심이 돼 설립한 민중권력당(PPP)이 다시 총선에서 승리했지만, 1년 뒤인 2008년 12월 해산됐다. 이에 굴하지 않고, 탁신 지지자들이 중심이 된 푸어 타이당이 총선에서 이겨, 탁신의 여동생인 잉락 친나왓을 총리로 추대했다. 그러나 군부는 이를 그냥 두지 않았다. 2014년 쿠데타를 일으켜 잉락 친나왓 당시 총리를 실각시켰다. 잉락도 오빠인 탁신과 함께 해외 망명중이다. - 군부의 정치개입을 국민들은 순응했나. “탁신 지지자들의 시위와 불복종 운동들이 일어났다. 탁신 전 총리가 창설을 주도하고, 탁신을 따르는 정치인들이 운영해 온 탁신계 정당들이 2001년 이후 선거에서 무패 기록을 갖고 있다. 이는 탁신 지지자들과 탁신을 따르는 농민, 노동자 계층들이 군부 정권을 불신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와중에서 2009년 4월에는 친탁신파 ‘레드셔츠’들이 방콕 등에서 거리 시위와 점거 농성을 벌이다 군대와 충돌하면서, 정치 혼란을 겪기도 했다. 이번 선거에 앞선 방콕대학 등의 여론조사에서 유권자의 절반가까이가 자신의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는 것도 억압적인 정치 분위기를 보여준다.” - 군부의 정치개입의 논리는 무엇이고, 어떤 입장을 펴고 있나? “태국 군부는 자신들이 국가와 왕실, 민족주의의 수호자이며, 근대화와 국가안정을 이뤄낸 주역이라고 자부하는 엘리트 집단이다. 이들은 정치 불안정과 사회 갈등 상황에서 자신들의 쿠데타가 이를 해소하고, 국가사회 안정을 지키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지지자들도 태국적인 특수성을 강조하면서, 사회정치적 갈등을 푸는 태국식 민주주의의 한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태국의 엘리트 계층과 왕실·군부·재벌 등 기득권층이 하나로 엮어있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 왕실은 군부 편인가? “입헌군주주의 제도아래 태국의 국왕은 정치 불간섭 및 중립을 표방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상 정치 막후에서 깊이 개입해 왔다. 2016년 10월 서거한 푸미폰 아둔얏데 전 국왕은 재위 70년 동안 정치적 막후 조정자 역할을 하며 절묘한 ‘정치 안정판’ 역할을 했다. 개인적인 역량과 카리스마, 노력한 정치 감각을 바탕으로 국민적인 사랑도 한 껏 받았다. 그를 계승한 마하 와치라롱껀 국왕의 역할은 아직 미지수이다. 왕실은 전통적으로 엘리트 군부를 지지해 왔다. 왕실은 군부, 엘리트 관료, 기업인, 도시민 등에 친화적이란 평을 받아왔다. 그렇지만, 현 국왕은 왕세자 시절부터 탁신 및 탁신계 정치인들과 깊은 친분 관계를 유지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떤 상황이던지 그 역시, 조정자 및 중재자 역할을 하려고 노력할 것으로 보인다.” - 탁신 친나왓 전 총리가 막후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탁신계 정당인 푸어타이당이 집권하면 깨끗한 정치, 정치 안정이 가능할까? “2001년 1월부터 2006년 9월 쿠데타로 실각하기 전까지 집권했던 탁신 전 총리는 농민 및 서민 친화적인 정책으로 이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농민들로부터 쌀 등 농산물에 정부 보조금을 얹혀 높은 가격에 사들였다. 싸고 광범위한 국민의료보험을 실시해 인기를 얻었다. 그 뒤 군부 정권이 들어선 뒤 농산물 가격 하락, 양극화 심화 등으로 탁신에 대한 향수가 커졌다. 그러나 반면, 엘리트 및 탁신의 비판자들은 돈을 뿌리는 정책이 결국 국가 재정을 파탄으로 몰고 가고, 경쟁력을 떨어뜨릴 것이라면서 그를 대중선동주의자라고 비판해 왔다. 이 같은 계층적 골, 이해관계의 차이와 함께 지역적 대립 등도 정치안정을 이루기 어려운 요소로 꼽힌다. 게다가 경찰관 출신의 성공한 기업로, 통신 재벌을 일궜던 탁신은 깨끗한 정치가란 이미지 보다는 수완적인 사업가의 이미지가 강하다.” - 탁신의 푸어타이당의 집권 등 정권교체가 가능할까? “ 푸어타이당은 지금까지 여론조사에서 근소한 차이로 선두이고 군부 정권의 집권 팔랑쁘라차랏당이 이를 추격하고 있는 형세이다. 그러나 어느 당도 과반 의석을 넘지 못하는 상황에서 연립 여당구성이 예상된다. 현재 지지 정당을 밝히지 않은 부동층도 유권자의 절반 가까이가 된다. 식상한 젊은이들은 젊은 기업인이 창당한 퓨처포워드당에 지지를 많이 보내고 있다. 결국 선거 이후 4개의 주요 정당들이 어떤 선택(연립 구성)을 할 지가 관건이다. 이석우 선임기자 jun88@seoul.co.kr
  • ‘서민층 지지’ 탁신계 불안한 선두… 군부 연장 가능성도

    과반 의석 못 넘고 ‘연립여당’ 구성될 듯 군인총리 가능성… BBC “혼합민주주의” 태국이 24일 총선을 치른다. 아세안 대표국가의 하나인 태국 총선의 궁금증을 Q&A로 살펴봤다. -8년 만에야 총선이 치러지는 이유는. “2014년 5월 쿠데타 이후 군부 정권이 선거를 미뤄 왔다. 군부 집권 5년 만이고 2011년 7월 총선 이후 8년 만이다.” -탁신 친나왓 전 총리가 선거 중심에 있다는 말은 왜 나오나. “해외 망명 중이지만, 그의 영향력과 인기는 여전하다. 치앙마이 등 북부지역 기반에다 농민·도시 근로자 등 서민 계층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고 있다. 이를 기반으로 한 푸어타이당과 군부 인사들이 만든 팔랑쁘라차랏당의 첨예한 대립은 양극화 속에서 ‘계층과 지역으로 갈라진 태국’을 상징한다.” -탁신의 푸어타이당 집권 등 정권교체 가능한가. “탁신계 정당들은 최근 여론조사에서 근소한 차이로 선두를 달리고 있다. 어느 당도 과반 의석을 넘지 못하는 상황에서 연립 여당 구성이 예상된다. 보수 색채의 민주당, 젊은 기업인이 창당한 퓨처포워드당이 선거 이후 어떤 선택(연립 구성)을 할지가 관건이다.” -마하 와치라롱꼰 국왕의 역할은. “2016년 10월 서거한 푸미폰 아둔야뎃 전 국왕을 계승한 그의 역할은 아직 미지수이다. 입헌군주제이지만 푸미폰 국왕은 정치적 막후 조정자 역할을 하며 ‘정치 안정판’ 역할을 했다. 왕실은 군부, 엘리트 관료, 기업인, 도시민 등에 친화적이다. 현 국왕은 탁신과도 친분 관계를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주목된다.” -선거가 자유롭고 공정하게 치러질 수 있나. “휴먼라이트워치는 지난 19일 언론·집회·결사 자유를 제약하는 억압적인 법률, 언론 검열, 독립성 없는 선거위원회 등과 함께 상원(250석) 전원을 군정이 낙점하는 것을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의원내각제면서도 의원이 아니더라도 총리가 될 수 있다. 군인 총리의 길을 열어 놓은 셈이다. BBC는 이를 ‘혼합(하이브리드) 민주주의’라고 비꼬았다.” -군부는 태국 민주화의 암적 존재인가. “1932년 입헌군주제 이후 19차례 쿠데타를 일으켰다. 군부는 왕실과 함께 근대화와 국가안정을 이뤄 낸 국가의 수호자라고 자부한다. 지지자들은 태국의 쿠데타는 사회·정치적 갈등을 푸는 태국식 민주주의의 한 방법이라고 강변한다.” -한국 정부의 신남방정책에서 태국의 위치는. “인도네시아에 이은 동남아 제2경제체로서 아세안 전자산업의 중심지이자 물류·교통 등 동남아 내륙의 중심국이다. 한국의 동남아 진출과 한류 확대의 교두보 역할을 해 왔다. 소비시장은 동남아의 시험대 역할을 한다.” 이석우 선임기자 jun88@seoul.co.kr
  • [월드피플+] 노숙자 쉼터 사는 8살 소년, 뉴욕 ‘체스 챔피언’ 오르다

    [월드피플+] 노숙자 쉼터 사는 8살 소년, 뉴욕 ‘체스 챔피언’ 오르다

    머나먼 이국땅의 노숙자 쉼터에서 살아온 8살 소년이 체스대회를 우승하며 곤경에 처했던 가족을 일으켜 세웠다. 지난 20일(현지시간) 미국 CNN등 현지언론은 초등부문 뉴욕 체스 챔피언이 된 8살 홈리스 소년 타니톨루와 아데부미(이하 타니)의 기적같은 승리를 일제히 보도했다. 타니는 지난 10일 또래의 아이들이 자웅을 겨루는 뉴욕 체스대회에 참가해 무패의 성적으로 커다란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놀라운 점은 타니가 최악의 상황을 딛고 이뤄낸 그야말로 기적같은 승리라는 사실이다. 나이지리아 출신의 타니와 그의 가족은 지난 2017년 6월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 보코하람의 공격을 피해 뉴욕으로 넘어왔다. 문제는 뉴욕 땅에서 정부와 주위의 도움없이 먹고 살 방법이 없다는 점으로 유일한 희망은 망명 신청이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타니가 새로운 미국 문화에 어렵지 않게 적응한 점이다. 비록 '노숙자' '거지' 등의 놀림을 친구들로부터 받았지만 타니는 뉴욕의 한 공립 초등학교에 다니며 적응해나갔다. 타니가 체스를 배우게 된 계기는 학교에 있는 체스동호회 덕이다. 이번 체스대회에 우승하기 불과 1년 전의 일이다. 체스 지도교사인 숀 마르티네스는 "타니는 뛰어난 전술로 체스를 두며 기억력도 대단하다"면서 "이번에 타니가 우승하게 된 것은 단순히 재능을 넘어 쉬지않고 연습한 것이 원동력"이라고 밝혔다.실제로 타니는 방과 후 노숙자 쉼터 바닥에 누워 온종일 체스를 연습했다. 특히 체스를 두는 다른 아이들이 주로 개인 교습을 받는 고급 사립학교 학생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타니의 성과는 그야말로 눈이 부시다. 여기에 타니의 체스 우승은 가족에게 큰 행복을 가져왔다. 딱한 상황에 처한 타니 가족을 돕는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 ‘고펀드미’(GoFundMe)에 나흘 만에 무려 19만 달러(약 2억 1400만원) 이상이 모금됐기 때문이다. 또한 한 독지가가 타니 가족을 위한 아파트를 기부했으며 주위에서 법률서비스와 자동차를 제공하겠다는 도움의 손길도 이어졌다. 타니의 부친은 "아들이 체스 대회에 나서 우승한 것만 해도 너무나 기쁘다"면서 "모금된 돈은 재단을 통해 우리 가족과 같은 난민과 이민자를 위해 사용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모든 행복을 가져온 타니는 "체스는 정말 깊은 사고를 필요로 해 좋아하게 됐다"면서 "언젠가는 꼭 최연소 체스 그랜드마스터가 되고싶다"며 웃었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왜 군화를 혀로 핥지? ‘lame suela’의 정확한 맥락 알려주세요

    왜 군화를 혀로 핥지? ‘lame suela’의 정확한 맥락 알려주세요

    19일 출근하며 서울신문 국제면을 펼쳐 보다 당혹스러웠다. 웬 여성이 벌건 대낮에 남의 군화를 혀로 핥고 있어서다. 베네수엘라 예술가 데보라 카스티요가 17일(이하 현지시간) 브라질 상파울루 파울리스타 거리에서 ‘라메 주엘라(Lamezuela)’란 제목의 행위예술을 선보이는 도중 경찰과 정치인, 군인으로 분한 세 명의 남성이 신고 있는 신발들에 혀를 갖다대 핥은 것이다. 라메 수엘라(lame suela·부츠를 핥는 사람)란 스페인어권 관습에다 고국인 ‘베네주엘라(Venezuela)’를 갖다붙여 살짝 비튼 것이었다. 제6회 상파울루 국제연극제에 참여한 카스티요는 니콜라스 마두로 정권의 전체주의와 억압을 폭로하고자 하는 것이 이날 공연의 목적이었다. 그런데 라메 수엘라의 원래 뜻, 남의 신발을 혀로 핥는 행위가 무얼 의미하고 무얼 정확히 겨냥하는지가 궁금했다. 인터넷 서핑을 해봤다. 스페인어 사전을 들춰보는 게 가장 좋은 방안이지만 기자가 스페인어를 모르니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영어로 부츠를 핥는 사람이란 뜻의 ‘bootlicker’를 검색하니 두 가지 뜻으로 풀이된다. 첫째는 남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스스로를 낮추는 이, 둘째는 자존감 따위는 없는 것처럼 구는 사람이란 설명이다.스페인어를 구사하는 이들의 문화에서 이런 풍자와 조롱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알고 싶었지만 능력 부족으로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이슬람권에서는 종종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견해를 피력하는 정치인, 심지어 조지 W 부시 미국 전 대통령을 향해서도 신발을 투척하는 행위가 보도되지만 그에 견줘 신발이 똑같이 등장하는 이 풍자는 정반대되는 의사표현 방법으로 여겨진다. 둘째 풀이는 한나라 고조가 되는 유방의 가랑이 일화와도 일맥상통해 보인다. 확장된 의미로는 개인적 이득을 취하기 위해 입에 발린 말을 하는 사람, 다시 말해 아첨꾼(toader)이란 해석도 가능하다. 포털 야후!를 통해 영어 문서나 뉴스 등을 검색하는 것으로는 라메 수엘라의 정확한 맥락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풍자나 조롱의 뜻이라면 구체적으로 이 행위가 시위나 저항의 의사 표현으로 기능한지를 알고 싶었다. 스페인어와 문화에 정통한 이들의 조언을 기다릴 따름이다. 한편 베네수엘라 정국은 혼돈이 걷힐 조짐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미국의 제재 대상에 오른 사회보장청장 출신 카를로스 로톤다로 육군 장군이 콜롬비아로 망명했다고 로이터 통신이 소식통들을 인용해 18일 보도했다. 로톤다로 장군은 콜롬비아로 몰래 달아난 뒤 먼저 망명해 마두로 정권 퇴진 운동을 이끄는 루이사 오르테가 전 검찰총장 측에 합류했다고 한 소식통이 전했다. 또 콜롬비아 외교부는 지난달 이후 베네수엘라 군경 약 1000명이 탈영해 자국으로 입국했다고 밝혔다고 AP통신이 전했다. 그러나 러시아와 중국 등의 지지를 받는 마두로 대통령은 미국이 후안 과이도 국회의장을 앞세워 쿠데타를 벌이고 있다고 주장하며 군부의 지지를 토대로 여전히 국가기관을 통제하고 있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 [글로벌 인사이트] 군부 연장 vs 민정 복귀… 쿠데타 5년 만에 태국 운명 가를 총선

    [글로벌 인사이트] 군부 연장 vs 민정 복귀… 쿠데타 5년 만에 태국 운명 가를 총선

    “군정 연장과 민정 복귀의 갈림길에 섰다.” 태국이 오는 24일 2014년 5월 쿠데타 이후 군부 통치 5년 만에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거를 치른다. 전국 선거로는 2011년 7월 조기 총선 이후 8년 만이다. 이번 선거의 관전 포인트는 탁신 친나왓 전 총리가 창당한 푸어타이당이 집권당 자리를 탈환할 수 있을지 여부다. 탁신계 정당들은 2001년 이후 선거에서 무패 기록을 갖고 있다. 군인 및 군사 정권 인사들이 주축이 돼 만든 ‘사복의 군인정당’인 팔랑쁘라차랏당은 집권 유지를 위해 총력전을 펼쳐 왔다. 뚜렷한 제1당의 독주가 없는 상황에서 선거 이후 주요 정당들의 연립을 통한 합종연횡이 정국 방향을 결정하게 될 전망이다. ‘친탁신 대(對) 반탁신’, ‘친군부 대 반군부’라는 대립이 그 중심에 있다.지난 10년 동안 태국 정국은 서민층을 대변해 온 ‘레드셔츠’(붉은색 셔츠를 입고 시위 등에 나선 데서 유래)와 왕실·군부 등 기득권층을 대변하는 ‘옐로셔츠’로 대립해 왔다. 북부 대 남부의 지역 대립과 골도 역력하다. 해외 망명 중이지만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영향력과 인기는 여전하다. 고향인 치앙마이 등 북부 지역 기반에다 농민 및 도시 근로자 등 서민 계층 지지 기반 위에서 푸어타이당 등은 그의 영향력 아래 있다. 2001년부터 2006년까지 집권했던 탁신 전 총리는 농민들로부터 쌀 등 농산물을 정부 보조금을 얹혀 높은 가격에 사들였고, 농민 등 저소득층을 위한 싸고 광범위한 국민의료보험 등 친서민 정책을 실시해 인기를 얻었다. 군부 및 도시 엘리트들은 탁신을 “국가를 있는 자와 없는 자, 남부와 북부 등으로 찢어놓고 국가 재정을 파탄으로 몰아가고 있는 대중선동주의자”라고 비판해 왔다. 2009년 7월 탁신의 여동생 잉락 친나왓이 총선거에서 승리, 집권했지만 2014년 쿠데타로 실각하고 역시 망명 중이다. 탁신 지지자들은 민주주의 회복을 강조하고 있고 군부 지지세력은 안정과 발전을 주장하며 맞서고 있다.최근 각종 여론조사 결과 4개 주요 정당의 세 확대 경쟁이 치열하다. 탁신 전 총리의 푸어타이당과 군사 정권 인사들이 주축이 된 팔랑쁘라차랏당, 보수적 왕실 지지세력인 엘리트 중심의 민주당이 치열한 경쟁을 벌여 왔다. 거기에 40대 억만장자 타나톤 중룽레앙낏이 창당한 퓨처포워드당(미래전진당)이 판을 흔들어대고 있다. 지난 3일 방콕대의 여론조사 결과 “총선에서 투표하고 싶은 정당”은 푸어타이당(11.7%), 민주당(10.6%), 팔랑쁘라차랏당(10.2%), 퓨처포워드당(9.8%) 순이었다. 그러나 “지지 정당을 결정하지 않았다”는 유권자가 51.7%였다. 방콕 폴 여론조사에서는 푸어타이당(12.8%), 팔랑쁘라차랏당(11.6%), 민주당(7.6%), 퓨처포워드당(5.7%) 순이었다. 유권자의 절반가량이 입장을 정하지 않은 유동적인 상황에서 쁘라윳 왕수완 부총리는 최근 “상원을 통제할 수 있어 총선 후 차기 정부 구성에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며 자신감을 보였다. 태국 국회의 상·하원 전체 정원은 750명. 하원 의원 정수 500명 가운데 350명은 직접 투표로, 나머지 150명은 비례대표로 각각 뽑는다. 상·하원 의석의 과반인 376표 이상을 얻으면 집권당이 된다. 2017년 개정 헌법은 군정 최고기구인 국가평화질서회의(NCPO)가 250명의 상원의원을 직접 뽑도록 했다. 군사정부가 상원 250명을 확보한 상황에서, 하원에서 126석만 얻으면 집권당이 된다. 태국 정가에서는 집권 팔랑쁘라차랏당과 민주당이 이번 총선에서 각각 70~80석 안팎을 얻을 것으로 내다봤다. 팔랑쁘라차랏당이 보수 성향의 민주당을 껴안으면 하원 126석 확보는 거뜬하다. 정권 탈환을 시도하는 푸어타이당으로서는 이념적 성향이 비슷한 퓨처포워드당이나 소수정당인 세리루암당 등과 연정을 추진해 집권당으로 복귀하려 하고 있다. 당초 친탁신 인사들은 푸어타이당의 ‘자매정당’, ‘아들 정당’으로 불리는 타이락사차트당을 지난해 말 창당했다. 이 정당은 탁신계 거대 정당인 푸어타이당이 후보를 내지 않는 선거구를 중심으로 후보를 내, 중소정당에 유리하게 제도가 바뀐 비례대표 의석에서 탁신계가 다수를 차지하려는 전략에 따른 것이었다. 그런데 타이락사차트당이 지난 7일 헌법재판소 결정으로 해산되면서 이 같은 전략에 차질이 생겼다. 타이락사차트당은 지난달 8일 우본랏 라차깐야 공주를 당의 총리 후보로 지명,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푸미폰 전 국왕의 첫째 딸이며 마하 와치랄롱꼰 국왕의 누나이다. 이 같은 결정은 곧 국왕의 공개 반대에 이어 헌재의 정당해산 명령으로 창당 4개월 만에 무산됐다. 군부 정권과 세 대결 중에 탁신계 정당의 한 축이 무너지면서 탁신 지지자들의 정권 탈환 시도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이런 상황에서 푸어타이당은 현임 쁘라윳 짠오차 총리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는 민주당의 아피싯 웨차치와 대표를 설득하며 막판 뒤집기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 팔랑쁘라차랏당도 질세라 도농 간 격차를 줄이기 위한 인프라 건설과 저소득 가정을 위해 100만 가옥 건설을 약속했다. 보수 왕당파 정당인 민주당 역시 최저 연봉 12만 밧(약 424만원)을 보장하겠다고 나섰다. 이 같은 약속들은 인구의 40%를 차지하는 농민과 도시 노동자들의 불만 해소와 표심을 겨냥하고 있다. 이석우 선임기자 jun88@seoul.co.kr
  • 소박함만 한국의 美라더냐… 고려의 호방함 서린 ‘독립운동 성지’

    소박함만 한국의 美라더냐… 고려의 호방함 서린 ‘독립운동 성지’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으며 가장 주목받는 문화재는 단연 경북 안동의 임청각(보물 182호)이다. 경술국치 직후 집주인 이상룡은 일가 친족을 이끌고 서간도로 망명했다. 막대한 재산을 처분한 자금으로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무장독립운동의 주역들을 양성하고, 임시정부 제3대 대통령 격인 국무령을 역임했다. 오랫동안 방치되던 임청각은 독립운동의 성지가 되어 대대적으로 복원 정비할 예정이다. 이 집은 올해 창건 500주년을 맞으며, 고려 주택의 전통을 가진, 매우 드물고 소중한 건축 유산이기도 하다.●고성 이씨 법흥파종택… 이명이 1519년 창건 임청각은 고성 이씨의 한 분파가 안동 법흥동에 건립한 파종택이다. 하나의 옛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가문의 역사를 들추는 수고를 해야 한다. 집은 곧 인격의 표현이고, 종택은 오랜 시간의 축적물이기 때문이다. 고성 이씨의 시조는 고려 문종 때 호부상서를 지낸 이황이다. 그는 거란의 침략을 막아 내는 큰 무공을 세워 철령군(철령은 경남 고성의 옛 이름)에 봉해졌다. 이 가문은 고려조에 정승급만 5명이나 배출한 명문가로 성장했고, 조선 초 좌·우의정을 지낸 이원이 용헌공파를 이루게 된다. 그의 아들들은 전국에 걸쳐 번성했는데, 6남인 이증(1419~1480)은 안동부 남문 밖으로 이주해 안동 지역의 입향조가 됐다. 그의 차남인 이굉은 낙동강 건너 현 정상동에 귀래정을 지었고, 이 일대는 고성 이씨의 씨족 마을로 발전했다. 이증의 3남 이명은 1519년 영남산 남록, 법흥동의 낙동강변에 정자를 지어 임청각이라 이름하니, 현재의 군자정 건물이다. 1540년, 여기에 본격적인 살림채와 가묘를 세워 파종택으로 정착시킨 이는 이명의 6남인 또 다른 이굉이다. 임청각 정착의 역사는 한 가문이 어떻게 명문가로 성장하는지, 그리고 어떤 건축적 장치가 필요했는지를 보여준다. 소수 귀족만이 성씨를 가졌던 고려시대에는 국가적 공헌을 이뤄 성씨를 하사받았다. 성씨와 동시에 일정 지역을 식읍으로 받는데, 곧 본관이 된다. 왕조가 바뀌는 조선 초는 기존 명문가들의 명암이 엇갈리는 시기였다. 새 왕조에 참여한 가문은 더욱 번창하게 되지만, 반대의 경우 멸문지화를 입던지 재야의 향반으로 전락하게 된다. 조선 초의 향촌은 고려적 장원 체제가 해체되고 새로운 체제로 전환하는 큰 변혁기를 맞았다. 이 시기에 번창한 가문의 자손들은 전국 각지의 새로운 소유지를 찾아 분파하게 되며, 파종가들이 출현했다. 종가가 되려면 종택을 짓고, 시조를 제사할 사당을 세워야 한다. 또한 향촌의 절경 곳곳에 개인 소유의 정자를 세운다. 지역의 경관을 소유하는 자가 바로 지역의 세력가가 되기 때문이다. 임청각은 별장인 정자로 시작해서 살림집과 사당을 가진 종택으로 확장한 경우다. 가문을 연지 500년 만의 결실이며, 그로부터 또 다른 500년이 흘렀다. ●고려 한옥의 또 다른 흔적, 온돌이 드문 2층집 우리의 건축들은 임진왜란 때 거의 파괴되어 현존하는 대부분은 17세기 이후에 지어진 것이다. 임란 이전의 것으로 임청각같이 큰 집이 온전히 남은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이 집은 오래되고 거대할 뿐만 아니라 후대의 다른 살림집과 확연히 구별되는 중요한 특징을 갖는다. 남아 있는 부분만도 1층 50칸, 2층 12칸의 큰 규모로 후대의 한옥이라면 적어도 5채의 독립 건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이 집은 별채인 군자정을 제외한 모든 살림채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하늘에서 보면 마치 불완전한 용(用)자와 같이, 5개의 안마당을 중심으로 기와지붕의 선들이 이어진다. 평면 구성만도 밀집되고 복잡한데, 경사지를 활용한 3차원적 구성은 더욱 복합적이다.임청각의 눈에 띄는 특징은 2층 구조가 주를 이룬다는 점이다. 현재 2층 공간은 12칸이 남아 있지만, 원래는 20여 칸이나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머리가 부딪힐까 걱정해야 하는 다락이 아니라 충분히 생활이 가능한 정식 2층 공간이다. ‘한옥은 단층’이라는 상식은 임청각에서 여지없이 깨진다. 김시습의 ‘금오신화’ 중 ‘이생규장전’은 고려 말 개성을 무대로 전개되는 연애기담이다. 2층루가 있고 이들을 은밀한 복도가 연결하는 것으로 여주인공의 집을 묘사했다. 아마도 이 소설을 쓴 조선 초까지, 개성과 한양의 큰 살림집의 일반적인 모습이었을 것이다. 임청각의 2층 바닥은 물론 1층 대부분도 마루 바닥이었다. 한옥의 가장 큰 특징이라는 온돌은 총 70칸 중 5칸에 불과했다. ‘한옥은 온돌’이라는 상식도 깨진다. 후대에 온돌로 개조한 부분까지 다해야 겨우 10칸이다. 서울 종로의 공평지구 재개발 때 조선 전기의 한옥 마을을 발굴하게 되었다. 보통 10여 칸 집에 단 1칸만 온돌방이며 마루가 주된 바닥을 이룬 집들이었다. 온돌이 한옥의 주된 바닥형식이 된 것은 17세기 이후이다. 이 집의 창호들 역시 후대의 것과는 확연히 차이가 있다. 창틀이 벽 가운데 떠 있는 것 같이 보이는 이른바 ‘액자창’들이 대부분이며, 아예 벽의 일부에 창을 끼운 것 같은 붙박이창도 여럿이다. 2짝 여닫이창들은 예외 없이 가운데에 문설주를 둔 ‘영쌍창’들이다. 이러한 액자창, 붙박이창, 영쌍창은 고려시대부터 내려온 전통이며, 18세기 이후의 한옥에서는 보기 힘든 오래된 기법들이다.한마디로 임청각은 고려 살림집의 전통을 간직한 호방하고 웅장한 집이다. 흔히 한국적 미학이라 일컫는 ‘소박하고 단순한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다. 송나라 사신 서긍이 고려 수도 개성의 풍물을 그린 ‘고려도경’의 묘사와도 같이 입체적이고 복합적인 건축이다. 13칸 행랑채의 수평적 장대함, 거의 3층 높이 안채의 수직적 당당함, 오래된 창호형식의 고졸함, 낙동강의 풍경을 감싸 안는 군자정의 넉넉함…. 이제는 거의 사라져 임청각만이 간직하고 있는 우리 건축의 또 다른 전통이다. ●보수 속 혁신… 남자는 군자정·여자는 살림채 써 임청각의 500년 세월 가운데 수차례 대대적 수리를 했지만, 후손들은 선조의 유산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러나 털끝 하나도 건드리지 않는 원론적 보수는 아니었다. 골격을 유지하면서도 마루들을 온돌방으로 개조했다. 남자 주인들은 별당인 군자정을 거처로 삼아, 살림채 대부분의 사용권을 여자 가족과 하인들에게 넘겨주었다. 옛 형식은 지키되, 새로운 내용을 수용한 은밀한 혁신의 결과다.석주 이상룡(1858~1932)은 이 가문의 가장 혁신적인 인물이다. 퇴계학파의 정통을 이은 안동의 큰 유학자로서 을사늑약 때부터 의병활동과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섰다. 1911년 노비를 해방하고 조상들의 위패를 묻은 뒤 서간도에 망명, 만주 땅에서 74세로 운명할 때까지 무장독립 투쟁에 헌신했다. 노비 해방과 제사 철폐는 정통 유림에게 있을 수 없는 패륜이다. 심지어 종손으로서 종가인 임청각을 팔아 독립운동 자금으로 썼다. 그러나 그는 군자정의 주인답게 진정한 ‘군자’였다. 군자란 누구인가? 세상의 문제와 해답을 깨달은 사람, 더 나아가 깨달음을 온몸으로 행하는 지행합일의 인간이다.1700년대 언저리, 이 집안의 두 형제가 분가해 임청각 좌우로 탑동파종택과 평지파종택을 세웠다. 1941년 일제는 고성 이씨 3형제 동네 앞에 중앙선 철도를 부설했다. 임청각의 대문채 등이 파괴되었고, 탑동파종택 앞의 법흥사지7층전탑(국보16호)은 기울어졌으며, 철도 노선에 포함된 평지파종택은 아예 흔적이 사라졌다. 일가족 10명이 독립유공자로 추서된 불령선인의 가문에 대한 야만적 보복이었다. 1913년 임청각을 한 일본인에게 2000원(현 가치 200억원 추산)에 팔았는데, 이를 알게 된 고향의 일가들이 합심하여 3000원에 곧 되사 보존할 수 있었다. 이 거액 매입을 주도한 이는 석주의 20촌 동생인 평지파종택의 이태희였다. 그는 일제 식민 치하의 수모를 감내하며 자신의 방법으로 고향과 가문을 지켰다. 보수와 혁신은 한몸이었다. 정통 유림이 무장투쟁가로 변신하고, 해방된 노비가 독립군이 됐다. 망명해 딴 나라에서 순국한 이도 있고, 고향에 남아 은밀히 독립운동을 도운 이도 있다. 비록 모두를 추서할 수는 없어도, 모두가 애국자이다. 280억원의 예산으로 임청각 일대를 복원 정비한다고 한다. 철도 이설과 임청각 정비뿐 아니라 사라진 평지파종택을 비롯해 외거 노비들의 가랍집까지 복원해야 한다. 이들 모두가 보수의 전통 속에서 혁신을 꿈꾸고 몸 바쳤던 역사이기 때문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건축학자
  • 폭탄 거사는 스스로 실행한 것…미처 몰랐던 윤봉길 의사

    폭탄 거사는 스스로 실행한 것…미처 몰랐던 윤봉길 의사

    윤봉길 평전/이태복 지음/동녁/332쪽/1만 6000원 “더 할 말 없다. 이대로 빨리 집행하라.” 영화를 본다면 이 같은 대사부터 나오는 장면이 먼저 떠오른다.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의거를 일으킨 윤봉길 의사의 마지막 처형 장면에서 시작하는 그의 평전을 읽으며 든 생각이다. 같은 해 12월 처형된 윤 의사의 유해는 일본군 유족들이 오가는 입구의 쓰레기 버리는 곳에 암장돼 유해가 발굴되기까지 13년간 짓밟혔다. 사실 윤 의사에 대한 연구나 책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김구나 안중근 등 다른 유명 독립운동가에 대한 서적은 수백권씩 나왔지만, 윤 의사에 대한 책은 어린이 위인전 등을 포함해도 20~30권에 불과하다. 이 같은 평가절하의 배경에는 ‘행동대원 프레임’이 있다. 김구의 지시에 따라 윤 의사의 거사가 있었다는 ‘백범일지’ 등의 기록을 근거로 그동안 윤 의사는 김구의 그늘 아래 있었다. 하지만 상하이 거사 당시 윤 의사는 어떤 조직에도 속하지 않았다. 거사를 누구와 모의했는지에 대한 윤 의사의 1·2차 심문조서가 뒤바뀐 이유, 광복군 홍보 책임자 김광의 증언 등을 토대로 보면 윤 의사는 스스로 거사를 계획해 실행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윤 의사가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 남긴 편지 ‘장부출가생불환’(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는 익히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가 아들에게 쓴 편지가 오히려 인간 윤봉길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는 4살 아들에게 ‘너는 아비가 없는 것이 아니라 (아비는) 이상의 열매를 따기 위해 집을 떠나 있을 뿐’이라는 편지를 남기고 떠난다. 흔히 윤봉길을 얘기하면 떠오르는 ‘도시락 폭탄’에 대한 ‘팩트체크’도 흥미를 끈다. 실제로 윤 의사가 던진 것은 물통 폭탄이었고, 도시락에 숨긴 폭탄을 연이어 던지기 직전 체포되고 말았다는 설명이다. 이 같은 ‘청년 윤봉길’에 대한 대중의 부족한 이해는 저자가 평전을 쓴 이유가 됐다. 저자는 이밖에 농촌운동가, 시인, 야학 선생님이었던 윤 의사의 또 다른 모습도 함께 소개한다. 저자는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낸 비(非) 역사학도다. 그가 밝힌 윤 의사의 이면은 아직 우리 학계가 밝히지 못한 독립운동사가 여전히 많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안석 기자 sartori@seoul.co.kr
  • [서울광장] 가자! ‘달빛 동맹’ 넘어…/송한수 부국장·사회2부장

    [서울광장] 가자! ‘달빛 동맹’ 넘어…/송한수 부국장·사회2부장

    1960년 3월은 봄을 기다리던 우리 2500만 국민에게 참 잔인했다. 자유당을 이끈 이승만(1875~1965)은 품었던 억지 대권을 그대로 움켜쥐려고 애썼다. 대통령과 부통령을 뽑은 15일은 ‘검은 화요일’이었다. ‘선거비리 백화점’으로 불러도 좋았다. 엉뚱한 핑계를 대 야당 참관인을 내쫓은 틈에 투표를 조작했다. “선거에 익숙하지 않은 국민을 지도한다”며 3~7명을 한 조로 묶어 함께 투표하라고 윽박질렀다. 미리 매수한 사람에게 여당 후보들을 찍는지 감시하라고 시킨 일이다. 심지어 세상을 뜬 이들을 선거인 명부에 실었다. 개표함 바꿔치기, 야당 표 빼돌리기 수법도 썼다. 오죽하면 부통령 득표율이 처음엔 115%로 집계됐다지 않은가. 너무나 혼탁해 일찌감치 도드라진 동티에 들불처럼 들고일어난 곳이 있었다. 바로 2월 28일 대구(옛 달구벌)다. 까까머리 고교생 1200여명이 야무지게 결의를 밝혔다.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신성한 권리를 위해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고 외쳤다. 4·19혁명을 잇는 최초 민주화운동이었다. 민심을 된통 거스른 이승만은 거센 저항에 부딪혀 4·19 일주일 뒤 대통령 자리를 내놨다. 1~3대 통틀어 12년을 버티던 터였다. 그리고 한 달을 채 견디지 못하고 미국 하와이로 줄행랑을 놓고 말았다. 망명자 신세로 펄썩 주저앉은 것이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유명한 말을 남긴 장본인이다. 아쉽다고나 할까. 교훈을 심지는 못한 듯하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던 연설은 과연 무엇을 겨냥한 셈인가. 해방 후 친일파 청산을 부르짖던 사람들이 이를 결속 구호로 쓴 친일파들에게 도리어 적폐 세력으로 내몰렸던 사실을 떠올리게 만든다. 2·28의거는 어언 20년 세월을 건너 광주(빛고을)에서 봇물처럼 터진 5·18민주화운동에 가닿는다. 힘을 앞세운 ‘아닌 것’과 어기차게 맞선 전통으로 만난다. ‘달빛 동맹’이 곧 열 돌을 맞는다. 달구벌과 빛고을에서 딴 명칭이다. 그저 머릿속으로 그리기만 해도 푸근해진다. 2009년 박광태 전 광주시장과 김범일 전 대구시장이 정부 공모사업인 의료산업 공동 유치에 지혜를 모으면서 싹을 틔웠다. 교류협력 협약을 맺어 광주 5·18기념식과 대구 2·28기념식에 시민들과 함께 번갈아 참여하고 있다. 나란히 시민 15명씩 꾸린 민간협력위원회도 돛을 올렸다. 공동 현안 해결과 교류협력 과제를 발굴, 추진하는 공식 기구로 해마다 지역을 오가며 정례회의를 갖는다. 민선 7기 이용섭 광주시장은 “자유한국당 의원들의 5·18 망언 사태 때인 지난달 16일 광주범시민궐기대회 직후 권영진 대구시장으로부터 ‘광주시민들께 사과 말씀을 드린다’는 글을 받고 형제 도시라는 뿌듯함에 짜릿했다. 두 도시민들의 성숙한 자세를 확인해 기쁘다”며 활짝 웃었다. 그는 2·28 기념식을 찾아 “이럴 때일수록 대구와 광주시민 사이의 연대를 강화해 역사 왜곡과 분열 정치를 막아야 한다”고 화답했다. 광주시는 또 두 도시의 연대를 상징하도록 228번 시내버스를 운행하기로 했다. 대구에선 518번 버스에 민주화운동의 의미를 부여하는 방안을 꾀하고 있다. 두 단체장은 다음달까지 연쇄 방문 강의를 통해 정서적 유대와 상호 이해를 넓힐 생각이다. 두 도시의 소통과 교류는 지역 균형발전을 상징하는 것으로 풀이한다. 정서적으로 가까워지려면 물리적 거리도 단축돼야 한다. 이 시장은 “190㎞에 불과한 거리인데 승용차로 2시간 30분이나 걸린다. 늦어도 2027년 달빛 내륙철도 건설을 마무리하면 1시간 이내에 오갈 수 있다”며 “우리 두 도시끼리 형제애를 두껍게 쌓아서 분열과 갈등을 극복해 나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권 시장도 “영호남을 대표하는 내륙 중추 도시로서 경제적 협업에 적극 나서야 한다”며 “짙고도 많은 동질감을 바탕으로 사회간접자본(SOC), 경제, 산업, 문화, 체육 등 5개 분야 30개 공동협력 과제를 활발하게 추진하겠다”고 입을 앙다물었다. 갈수록 커지는 수도권과의 격차를 줄이고 남부권 공동 번영, 지역 균형발전을 이끌기 위해 두 지역의 협력과 교류는 반드시 필요하다. 더불어 두 지역 동맹을 통한 협력과 교류는 지역감정 해소를 거쳐 국민 대통합에도 큰 몫을 해낼 것으로 기대된다. 국민들은 제2, 제3의 ‘달빛 동맹’ 탄생을 기다린다. 그래서 ‘남남 갈등’을 이기고 ‘남북 화합’을 다지는 힘으로 거듭나길 바란다. 어렵게 여겨지는 화합이야말로 반갑고 고맙다. onekor@seoul.co.kr
  • “임정, 온전한 조국 독립 꿈꿨는데… 통일이 진정한 광복 완성”

    “임정, 온전한 조국 독립 꿈꿨는데… 통일이 진정한 광복 완성”

    이런 삶을 살아온 이가 있다.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이하 임정) 청사 옆에서 도산 안창호(1878~1938) 등의 축하를 받으며 태어났다. 상하이~항저우~난징~창사~광저우~류저우~치장~충칭으로 이어지는 중국 대륙을 임정과 함께 풍찬노숙하며 횡단했다. 한국인임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김(金)씨 대신 진(陳)씨로 성을 바꿔 학교를 다녔고, 백범 김구(1876~1949)와 김치에 거친 밥을 겸상했다. 석오 이동녕(1869~1940)과 성재 이시영(1869~1953)을 할아버지라 부르며 졸졸 따라다니던 소년이었다. 1930년대 중국 영화 황제 미남배우 김염(1910~1983)이 드나든 집에서 자란 이 소년은 훙커우공원 폭탄의거의 윤봉길(1908~1932)이 “내 아들과 동갑”이라고 사탕 사주며 예뻐했다. 엄마 손잡고 약산 김원봉(1898~1958)의 부인이자 여성 독립운동가인 박차정(1910~1944)이 폐병으로 세상을 뜨기 전 병문안 다니곤 했다.이 소년은 열아홉 되던 해 광복을 맞았다. 올해로 91세인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의 이야기다.만주군 장교에서 일제 패망 직후 광복군으로 신분을 바꾼 박정희(1917~1979)와 거의 같은 시기 미군 수송선을 타고 임정 식솔과 함께 상하이에서 부산으로 왔다. 귀국 뒤 이승만(1875~1965)에게 세배를 갔고, 결혼식 주례는 해공 신익희(1894~1956)가 섰다. 의용군으로 끌려가다 겨우 도망쳤더니 아버지는 전날 납북돼 영원한 이별을 하고 말았다. 조선일보 수습 1기 기자로 일하며 모스크바 3상회의에 대한 역사적 오보를 바로잡는가 하면, 박정희 정권에 의해 ‘사법살인’을 당한 뒤 훗날 무죄로 판결난 조용수(1930~1961)와 함께 민족일보 창간멤버로서 진보언론의 꿈을 키우기도 했다. 그의 삶 곳곳에는 현대사 교과서에 등장하는 숱한 인물들이 출몰한다. ●모스크바 3상회의 역사적 오보 바로잡아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역사의 한복판에서 부침을 함께한 김 회장. 대한제국 법무대신 등을 지내다 가솔을 이끌고 임정으로 망명한 뒤 독립운동에 나섰던 동농 김가진(1846~1922)이 그의 할아버지고,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김의한(1900~1964)과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정정화(1900~1991)가 그의 아버지, 어머니다. 2019년 임정 수립 100주년을 맞은 감회는 누구와 비교할 바 아니다. 지난 1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임시정부기념사업회 사무실에서 김 회장을 만났다. 2017년 12월 문재인 대통령 부부와 함께 충칭 임정 청사를 방문해 당시의 삶과 활동을 설명할 정도로 기력이 좋았지만, 지금은 거동이 좀더 불편해졌고, 청력도 많이 약해졌다. 그래도 여전히 기억은 또렷했고, 또박또박 짚어내는 임정의 가치와 정신은 청춘처럼 빛났다. -올해 임정 수립 100주년을 맞은 소회 먼저 말씀해 주십시오. “임정은 조국의 독립을 꿈꿨습니다. 하지만 지금 같은 반쪽짜리 독립은 아니었습니다. 분단은 진짜 독립이 아닙니다. 분단이 있는 한 광복은 미완성입니다. 1946년 제가 귀국할 때만 해도 분단이 이렇게 오래가리라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70년 동안 분단이 고착됐으니 짧은 시간 내에 통일은 어려울 듯합니다. 일단 남북의 평화로운 공존이 필요하고, 자유롭게 교류하고 협력하는 모습 자체가 통일의 과정이지요.” -젊은 사람들은 물론 많은 사람이 임정 100주년의 의미나 혹은 독립운동 자체에 대해 별 감흥이 없는 듯합니다. 그런 반응을 접하면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감흥이 없는 게 당연하지요. 그렇다고 젊은 세대를 탓할 것은 아닙니다. 국가와 정치가 하기에 달려 있는 부분이고 그만큼 잘 못했다는 얘기입니다. 대한민국은 헌법에서 밝히고 있듯 임정의 법통을 이어 왔습니다. 광복 이후 그 부분을 좀더 정확히 밝히고 임시정부의 목표와 강령을 실천했다면 그렇지 않았겠죠. 정치를 통한 실현을 위해 노력하고, 교육을 통해 이를 후세와 공유해야 합니다.” -최근 정부가 임정 수립일인 4월 11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하려다 사실상 백지화하기로 한 것도 이런 흐름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쉽습니다. 한때 건국절 등 논란이 일기도 했던 만큼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만, 대통령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시대인 만큼 어쩔 수 없죠. 교육기관 등을 통해 항일투쟁의 역사, 친일 인사들의 행적, 일제의 침략 역사 등을 정확히 배울 수 있게 하고 임정의 가치를 잘 공유하면 됩니다.” ●남북관계 복원 난관… 곧 좋은 소식 있을 것 기대 -통일이 광복의 완성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최근 북미 정상회담 흐름 등 한반도 분위기가 나쁘지는 않지만 지난달 베트남 회담에서 확인됐듯 여전히 뿌리 깊은 북미 상호 불신을 드러낸 부분 또한 있습니다. 일본과의 관계도 악화일로고요. “일단 남과 북이 서로를 통일의 주체로 인정해야 합니다.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유소년 시절 서구에서 유학하는 등 서구문화의 영향이 분명히 있을 것이며, 그로 인해 안목 또한 좁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지난 10년 동안 완전히 망쳐 놓은 남북 관계를 복원하는 작업인 만큼 난관이 있더라도 곧 좋은 소식이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야 우리의 통일에 관심이 없겠지만, 자신의 명망을 높이는 일이거나 미국에도 이익이 되는 일이니 북미 관계 정상화 및 한반도 평화를 외면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일본이야 기대할 부분이 별로 없고, 당분간 집권당도 안 바뀔 것 같고…. 훼방하지 않도록만 우리가 잘 관리해야죠. 내 생전에 통일까지는 아니라도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남북의 모습은 꼭 봤으면 좋겠습니다.” 김 회장은 임정의 정신과 교훈을 얘기하며 평화와 통일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실제 임정은 공화주의를 지향한 좌우합작 정부였다. 좌익, 우익, 아나키스트, 유림까지 모두 모인 용광로 같은 곳이었다. 우익 인사인 백범이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며 평양을 찾은 것도 이 같은 배경에서다. 임정의 정신이 통일 지향으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다음달 11일 열리는 임정 수립 100주년 기념식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 선포식’도 치러질 예정인데 이 기념관 건립은 어떤 의미를 갖게 될까요. “독립운동 관련 단체들이 한자리에 모이고, 그 선양사업을 체계적으로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현재는 아무개 선생, 아무개 선생 등 개별 후손 중심으로 기념사업이 진행되고 있는데 그러다 보니 후대로 넘어갈수록 먹고살기 바쁘고 관심도 시들해져 흐지부지될 수밖에 없습니다. 기념관이 만들어지면 국가가 체계적으로 독립운동 관련 자료도 한데 모으고 개별 독립운동가들의 뜻과 업적을 기릴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2021년 완공 예정인데, 늠름히 서 있는 모습을 꼭 보고 싶어요.” -꼭 그러셔야죠. 그런데 조심스럽습니다만, 말씀하신 임정의 진정한 독립 정신을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제대로 이어 가지 못한 채 과거 독재정권과 타협하는 일도 제법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을 탓할 수만은 없어요. 시대가 그랬고, 교육이 그랬으니까요. 또 후손들이라고 아버지, 어머니와 똑같을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물론 타협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이 광복회를 만들어서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을 권력 주변으로 많이 포섭했습니다. 유공자 서훈도 원칙과 기준 없이 남발하다시피 했고요.” 실제 김 회장의 조부(동농 김가진)는 항일 비밀조직인 조선민족대동단을 결성해 활동했고 망명 뒤 임정 고문, 북로군정서 고문을 맡았으며, 그의 장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장으로 치러졌다. 하지만 아직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 밖에 약산 김원봉 또한 독립유공 서훈이 없다. 반면 이승만 전 대통령의 비서 출신인 임병직 전 외무부 장관은 가장 높은 서훈인 대한민국장을 받아 원칙과 기준에 대한 의문을 낳게 했다. 지난 13일 국가보훈처가 독립유공자 포상 보류자 2만 4737명에 대해 재심사를 하겠다고 밝힌 만큼 투명하면서도 체계적인 서훈이 내려질 것인지 기대를 모으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임정 건국강령 21세기 복지국가정책 닮은 꼴 임정이 1941년 발표한 건국강령은 21세기 복지국가들이 표방하는 정책과 다를 바 없다. 1948년 제헌의 내용적 기초가 됐으며 2019년 현재도 여전히 유효한 실천적 과제를 담고 있다. 의료비 면제, 학비 면제, 최저임금제, 노동자 대표 경영관리 참여권 보장, 실업보험, 사형제 폐지, 노동자와 이익을 나누는 이익균점제, 몰수 재산 무산자 이익 위한 국영기관 이전 등을 주 내용으로 삼았다. 김 회장과의 얘기가 깊어질수록 100년 전 임시정부가 꿈꾼 나라를 우리가 잘 만들어 가고 있는지 스스로 돌아보게 된다. youngtan@seoul.co.kr
  • “고종은 망국 책임자… 대중문화가 돈벌이 위해 역사왜곡”

    “고종은 망국 책임자… 대중문화가 돈벌이 위해 역사왜곡”

    ‘시대를 잘못 타고난 개혁군주 고종(1852~1919), 조선을 지키려다가 억울하게 살해된 명성황후(1851~1895), 일본에 끌려온 조선인에게 독립의식을 키워 준 덕혜옹주(1912~1989).’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은 지금 대한민국의 영화와 드라마, 소설, 뮤지컬이 보여 주는 조선 황실 인물의 모습이다. 이들은 열강의 조선 침탈 압박에도 나라를 구하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한 것으로 그려진다. 문제는 이런 내용이 대부분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일부 문화계가 돈벌이를 위해 부끄러운 우리 역사까지 항일이라는 이름으로 세탁하고 있다. 학계에서는 “문화 콘텐츠의 특성상 어느 정도 자유로운 상상이 허용되지만 일부 작품은 가히 역사 창조 수준”이라고 비판한다. 조선 황실의 과오를 희석시키고자 망국의 책임을 일본에게 모두 전가하는 ‘분노 마케팅’의 산물이라는 설명이다. 우리는 일본이 위안부 강제 동원 책임을 인정하지 않아 “역사 왜곡을 일삼는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우리 역시 또 다른 의미의 ‘역사 왜곡’에 동참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조선 황실 남성들 日장교 돼 일왕에 충성” 지난해 큰 인기를 얻은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조선의 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초대 황제인 고종은 항일 운동 자금을 지원하고 의병과 긴밀히 소통하는 ‘우국(憂國) 군주’의 모습으로 나왔다. 이태진(76) 서울대 국사학과 명예교수도 “개혁가로서 그의 진면목을 재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패하기는 했지만 광무개혁(1896~1904) 등을 통해 청과 일본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주국가를 만들려고 애썼다는 설명이다. 이런 이미지는 다양한 작품에 투영돼 고종을 ‘비운의 군주’로 인식하게 만든다. 하지만 학계 대다수는 이런 현상에 매우 회의적이다. 다른 나라들이 입헌군주제로 전환해 민주주의로 나아갈 때 오직 고종만이 조선을 전제군주제로 되돌려 망국을 재촉했기 때문이다. 청일전쟁(1894~1895) 때는 미국 공사관으로, 러일전쟁(1904~1905) 땐 프랑스 공사관으로 피신하며 비싼 대가를 치렀다. 갑신정변(1884)과 을미사변(1895) 등 변고가 생길 때마다 자신을 외세에 의탁하기 바빴다. 1898년 독립협회가 의회 개설 등 개혁을 요구하자 세계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이들을 탄압한 것도 큰 과오다. 당시 조선사회를 기록한 외국인들도 그를 ‘무능한 군주의 전형’으로 여겼다. 1910년 중국의 대표적 개혁가 량치차오(1873~1929)는 “조선 멸망의 최대 원인은 궁정 자체에 있었다”고 개탄했다. 조선이 입헌군주제 국가로 탈바꿈하지 못해 세계 발전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했고 이로 인해 결국 일본에 병합됐다는 것이다. 망국의 가장 큰 책임이 왕 자신에게 있다는 ‘불편한 진실’이다. 무엇보다 고종은 자신의 안녕을 위해 조선 민족 전체를 일본에 넘긴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는 13일 “고종과 황실은 사회적·경제적 지위를 지키고자 조선의 식민지화에 앞장서 협력했다”며 “조선 황실은 식민지 기간 내내 (백성의 고통에 아랑곳하지 않고) 일본이 제공하는 특권을 누렸다. 이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반민족 행위”라고 꼬집었다.실제로 조선 황실은 1910년 경술국치 뒤로 별다른 국권 회복 노력에 나서지 않았다. 이들은 일본으로부터 ‘이왕가’(李王家)로 책봉된 뒤 막대한 재정 지원을 받으며 살았다. 경술국치 때 작성된 한일병합조약에는 조선 황실의 지위를 보장하기 위한 조문이 빼곡히 담겨 있다. 황실 인사들은 일본식 고등교육을 받았고 특히 남성들은 일본군 장교가 돼 일왕에 충성했다. 그나마 1919년 의친왕 이강(1877~1955)이 중국 상하이로 망명을 시도한 것이 유일한 항일 운동이었다. 3·1운동 시위에 참가한 학생의 기록에는 “주민들은 가난 때문에 고통스러워 하는데 (고종 사망을 계기로) 그간 조선 황실이 너무도 호화롭게 지내 온 사실을 알게 돼 크게 실망했다”고 나온다. ●백성들에게 ‘늙은 여우’로 조롱받은 명성황후 “내가 조선의 국모다”라는 대사로 유명한 명성황후 역시 매스컴에 의해 이미지가 조작된 대표적 황실 인사다. 일부 문화계 인사들은 그를 ‘조선의 잔다르크’로 칭송한다. 국민들의 인식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개인적 원한 때문에 시아버지인 흥선대원군(1821~1898)과 권력 다툼을 벌여 많은 사람을 희생시켰고 무속 신앙에 심취해 국가 재정을 파탄 낸 ‘세기의 악녀’로 평가한다. 일부에서는 그가 “조선의 국가 규모를 감안할 때 프랑스의 마리 앙투아네트(1755~1793)를 넘어서는 사치를 부렸다”고 지적한다. 1895년 시해 때 일본 자객들은 명성황후를 ‘늙은 여우’라고 칭했는데, 이는 일본인이 만든 별명이 아니다. 조선 민중들이 그의 악행에 분노해 스스로 지어낸 것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그럼에도 명성황후는 소설과 드라마, 영화, 뮤지컬, 무용, 뮤직비디오 등에서 조선을 지키려고 싸우다가 희생된 애국자로 등장한다. 그의 최후가 너무 비극적이어서 대중의 안타까움이 과잉 이입된 탓이다. 역사 전공자들은 “(그런 사정을 감안해도) 명성황후 미화가 도를 넘었다”고 비판한다. 익명을 요구한 한 문화평론가는 “명성황후가 대중에게 좋은 이미지로 포장된 것은 2001년 KBS에서 그의 삶을 드라마로 방영하면서부터다. 국민에게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전달해야 할 공영방송이 되레 망국의 주범을 구국의 위인으로 탈바꿈시켰다. 제대로 된 고증 없이 시청률 지상주의에 매몰돼 ‘조선은 선(善), 일본은 악(惡)’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로 문화 콘텐츠를 생산한 결과”라고 지적했다. ●“덕혜옹주 조선에 살 때부터 기모노 입어” 2016년 개봉 당시 600만명 가까운 관객을 모은 영화 ‘덕혜옹주’도 역사 왜곡 논란으로 입방아에 올랐다. 조선의 마지막 황녀인 이덕혜는 1912년 고종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1925년 강제로 일본 유학을 떠났고 1931년 쓰시마번주 귀족과 원치 않는 결혼을 했다. 1962년 정신질환 상태로 한국에 돌아와 1989년 창덕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인간 이덕혜’는 분명 우리 역사의 안타까운 희생물이다. 영화 속 그는 시대 상황을 마음 깊이 고민하고 일제에 지속적으로 저항했다. 일본 옷 입기를 거부하고 조선인 유학생들과 항일 교류 모임을 가졌다. 일본에 끌려온 조선인 노동자들을 격려하는 연설도 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돕고자 중국 상하이 망명도 추진했다. 그러다가 일제의 지속적인 괴롭힘으로 정신병을 얻어 힘든 말년을 보냈다. 하지만 실제 덕혜는 조선에 살 때부터 기모노를 입었다. 정신질환도 일본의 압박이 본격화되기 전인 10대 때 나타났다. 그가 일본에서 독립운동에 나섰다는 기록이나 증거는 없다. 영화 속 내용은 모두가 원작소설 ‘덕혜옹주’를 바탕으로 허진호 감독이 머릿 속에서 만든 상상의 소산이다. 역사소설가 이원규(72)씨는 “대중 문화계에 근대 역사 왜곡이 심각하다. 어떤 작품에서는 살아있는 왕에 대해 ‘우리 고종께서…’라며 묘호(죽은 뒤 왕에게 내려지는 이름)를 썼다”면서 “최소한의 지식도 없는 작가들이 역사의 궤를 반대 방향으로 돌려 놓으려는 듯한 콘텐츠를 생산해 우려스럽다. 문화계 내부에 문제의식은 있지만 ‘동업자 정신’ 때문에 비판이 쉽지 않다”고 말했다.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바레인 송환될까 떨었던 난민 축구선수 알아라이비 “이제 호주인”

    바레인 송환될까 떨었던 난민 축구선수 알아라이비 “이제 호주인”

    “이제야 100% 안전해졌음을 느낍니다. 이제 누구도 날 미행하지 못할 것이다.” 태국 방콕에서 억류돼 조국으로 강제 송환될 위기에 처했다가 각국의 반대 캠페인이 이어져 호주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던 바레인 출신 난민 축구 선수 하킴 알아라이비가 호주 국적을 얻었다. 알아라이비는 12일 스콧 모리슨 호주 총리가 참석한 가운데 멜버른에서 진행된 귀화인 환영 행사에 다른 200명의 귀화인들과 함께 참석해 새 국적을 취득한 기쁨을 만끽했다. 그는 2014년 바레인을 탈출해 호주에 신청한 정치적 망명 요청이 받아들여져 멜버른을 연고로 한 호주 프로축구 파스코 베일 FC 선수로 뛰고 있었다. 지난해 겨울 태국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가 국제형사경찰기구(인터폴)가 발부한 영장에 의거해 태국 당국에 76일 동안이나 억류돼 있었다. 태국은 그를 바레인으로 송환하려 했다. 바레인 정부는 그가 2011년 아랍의 봄 봉기 때 경찰서 시설을 약탈했다는 이유로 인터폴에 영장을 청구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조국에 송환하면 고문을 받거나 죽임을 당할 수 있다며 버텼고 호주 축구 레전드 크레이그 포스터 등이 이끈 송환 반대 캠페인이 각국 누리꾼들의 호응을 얻어 태국 당국은 입장을 번복, 그를 호주로 돌려보내기에 이르렀다. 그가 멜버른 공항에 도착하자 수백명의 지지자가 몰려나와 환영했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인터넷 검열·이동 추적·여행 제한…통제받는 티베트 독립운동 60주년

    10일은 티베트 독립운동 여파로 망명정부 지도자 달라이 라마(83)가 중국에서 인도로 쫓겨 간 지 60주년이 된 날이었지만 600만 티베트인들은 어느 때보다 살벌한 통제에 시달리고 있다. ●외국인들 티베트 여행 4월 1일까지 금지 오는 15일까지 열리는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에 참석한 티베트 공산당 대표는 “많은 말썽을 일으키고 있다”며 공개적으로 달라이 라마를 비난했고, 달라이 라마의 영향력에 대한 외신기자들의 질문에는 “그런 사람은 없다”며 궤변을 늘어놓았다. 중국 시짱(티베트)자치구는 지난 1월 30일부터 4월 1일까지 외국인 여행이 제한되고 있다. 이는 이례적으로 긴 기간이다. 우잉제 시짱 당서기는 전인대에서 미 의회가 지난해 12월 통과시킨 ‘티베트 상호 여행법’에 대해 내정 간섭이라며 비판한 뒤 외국인 여행 제한은 고산병 때문이라고 항변했다. 1959년 시짱자치구 수도 라사에서는 8만 7000여명의 티베트인이 사망하고 10만명이 난민 신세가 됐다. 이후에도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져 중국 당국은 엄격한 감시를 벌이고 있다. 인터넷에 티베트 독립에 대한 내용을 퍼뜨리면 당장 처벌받는다. 라사의 택시·버스에는 얼굴인식과 실시간 이동을 파악할 수 있는 위성항법장치(GPS)가 도입됐다. 시짱자치구 내에서의 이동도 철저하게 통제되며 14일까지 티베트인들은 실시간 추적이 가능하도록 항상 휴대전화를 켜 놓아야만 한다. ●티베트 단체 美서 정부 건물에 국기 달아 이런 가운데 티베트 독립을 주장하는 단체 티베트행동기구는 지난 8일 미국 보스턴에서 행진을 벌였으며 오는 14일까지 미 정부 건물에 티베트 국기를 달기로 했다. 미국 등 서방 국가들에 티베트 실상을 알리겠다는 것이다. 한편 달라이 라마는 망명 60주년을 맞아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티베트인의 유일한 대리인으로 중국이 선택한 후계자는 티베트인을 대표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베이징 윤창수 특파원 geo@seoul.co.kr
  • [황제의 옥새2]충신 다 쫒겨난 조선...정해진 망국의 운명

    [황제의 옥새2]충신 다 쫒겨난 조선...정해진 망국의 운명

    올해는 3·1운동 발발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서울신문은 100주년 기획 시리즈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조선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영국인 독립운동가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을 주인공으로 한 해외소설 두 편을 발굴했습니다. 글쓴이는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로버트 웰스 리치(1879~1942)입니다. 100여년 전 발간된 이들 소설은 일제 병합 직전 조선을 배경으로 베델이 조선인을 위해 기꺼이 모험에 나서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1900년대 초 대한제국을 배경으로 하는 거의 유일한 해외 소설이어서 사료적 가치도 큽니다. 서울신문은 ‘황제 납치 프로젝트’(1912년 출간·원제 The cat and the king)에 이어 ‘황제의 옥새’(1914년 출간·원제 The Great Cardinal Seal)를 연재 형태로 소개합니다.앞서 나는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기 직전 단행한 첫 번째 모험 때 조선 황제(고종)와 함께 한강에서 요트로 한반도를 떠나려고 했다. 하지만 황제가 탈출 직전 마음을 바꿨다. 도착 예정지인 중국 상하이의 러시아 피난처(당시 러시아 비밀정보기관인 ‘상하이 서비스’로 추정)에는 나와 소녀(이 소설의 전편 ‘황제 납치 프로젝트’에 등장한 러시아 스파이)만 가게 됐다. 러시아의 거물급 정치인(당시 러시아 극동총독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알렉세예프로 추정)이 그녀에게 내린 비밀 임무는 수포로 돌아갔다. (번역자주: ‘황제 납치 프로젝트’에서 주인공인 빌리와 베델, 소녀는 러시아 정보당국의 도움을 받아 고종을 중국으로 망명시키려고 합니다. 고종의 해외 망명 시도는 러시아 기밀 문서가 공개돼 최근에야 세상에 알려진 극비 사안입니다. 100여년 전 작가는 조선에 직접 와서 베델을 취재해 소설을 썼습니다. 아마도 베델은 러시아가 추진하던 고종 망명 계획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상하이에 머물던 나는 마음 속에서 타오르던 무모한 충동에 이끌려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일제가 나를 어떻게 대할 지도 궁금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일본은 나에게 아무 조치도 내리지 않았다. 일본 총독은 조선 황제의 대담한 탈출 작전에 내가 관여한 증거를 찾지 못한 것 같았다. 어쩌면 그들이 일부러 모른 척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내 조국인 미국과의 관계를 감안해 공식적으로 나를 잡아 가두기보다는 어느 날 어둠 속에서 내 등에 칼을 꽂아 조용히 제거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듯 싶기도 하다. 아무래도 이 추론이 더 정확한 판단이겠지...나는 일본인들의 감시 속에서도 서울에서 나름 즐겁고 활기차게 지냈다. 밤에도 혼자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했다. 강철로 된 셔츠가 내 몸 전체를 휘감고 있다고 스스로 최면을 걸면서 말이다. 내 모습이 옛날 그리스의 독립운동가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1792~1828) 같다고 여겼다. (번역자주: 입실란티스는 그리스의 혁명 지도자로 러시아의 장군이었지만 고국 그리스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습니다. 1821년 독립전쟁을 일으켰고 8년 뒤인 1829년 그리스는 오스만 투르크에게서 해방됐습니다.) 조선 황제를 은밀히 도피시키려던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지 2년쯤 지난 1907년 여름이었다. 먼지로 뒤덮힌 서울의 최고 지도자는 이토 히로부미(1841~1909) 후작이었다. 일본은 만여명의 총검으로 조선을 손쉽게 점령했다. 불쌍한 황제는 왕궁(덕수궁)에 갇혀 무기력하게 지냈다. 그는 하기와라(당시 일본 공사관원으로 훗날 외무성 통상국장이 되는 하기와라 슈이치·1868~1911)의 허락 없이는 재채기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신세였다. 왕자(순종·1874~1926)는 한 나라를 감당하기에 너무 나약했다. 그는 내전(內殿·왕비가 거쳐하던 곳)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하루 종일 바둑으로 시간을 보냈다. 나라를 위해 고민이라는 걸 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조선을 구하려던 충신들은 모두 쫓겨났다. 남은 신하들은 녹봉만 잘 챙겨주면 됐다. 이들에게 조선의 흥망은 관심이 아니었다. 신하들은 일본인들의 명령을 거부할 힘이 없었다.서울을 지키던 대한제국의 군대는 탄약이 들어가지 않는 소총과 약실이 없는 포를 부여잡고 힘겹게 버텼다. 일본인들은 이런 군대를 대놓고 비웃곤 했다. 이들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커튼을 걷어내고 새로운 무대를 올릴 준비가 돼 있었다. 아...안타깝지만 대한제국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일본은 자신이 원할 때 언제라도 황제를 바닥으로 끌어내릴 수 있었다. 일제의 음모는 마치 또아리를 튼 독사처럼 500년 역사의 암물한 왕좌를 휘감고 있었다. ‘황제의 옥새’는 3회로 이어집니다. 번역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유엔 “평화·비핵화 회담에 인권 연계해야…이산상봉 장기 지속돼야”

    유엔 “평화·비핵화 회담에 인권 연계해야…이산상봉 장기 지속돼야”

    유엔 북한인권특별보고관이 북한 인권 문제를 평화·비핵화 회담에 연계해 다룰 것을 한국 정부에 거듭 촉구했다. 토마스 오헤아 킨타나 보고관은 11일(현지시간) 열리는 유엔인권이사회 회의에 앞서 제출한 보고서를 통해 이같이 밝히고 북한과의 경제적·인도주의적 협력에서도 인권을 바탕으로 한 기본 틀이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북한에는 인신매매 피해자들을 포함해 송환된 이들이 처벌받지 않도록 보장할 것을 촉구하고, 이산가족 상봉도 지속적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당사자들의 관점에서 접근할 것을 요구했다. 한국인 억류자 6명의 석방과 국제노동기구(ILO) 가입도 촉구했다. 킨타나 보고관은 북한의 인권 상황이 여전히 개선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하며, 법적 절차 없이 반국가 범죄로 수용소에 보내져 고문과 학대 등을 당하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에 따라 오는 5월 북한을 대상으로 하는 유엔 인권이사회의 정례 검토가 인권 문제를 개선할 중요한 기회라며 이를 계기로 국제사회가 관련 책임 규명에 나설 것도 촉구했다. 그는 북한에서는 출신 성분에 따라 삶이 결정되고 많은 사람이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 소규모 시장(장마당)에 의존하고 있으며 법적 절차 없이 반국가 범죄로 수용소에 보내지는 일이 여전히 있다고 지적했다. 인민보안성·국가보위성이 관리하는 수용시설에서 고문과 학대가 광범위하게 저질러지고 있으며 수용소로 보내지는 사람들은 가족과 만날 수 없고 사회로 돌아갈 가능성도 거의 없다고 우려했다. 킨타나 보고관은 중국 정부에는 북한을 이탈한 주민들을 강제송환하지 말도록 할 것과 탈북자들에게 개별적 심사를 통해 망명자 지위를 부여할 수 있는 법적·정책적 시스템을 채택하는 방안을 고려할 것을 촉구했다. 이런 가운데 22일 폐막하는 유엔인권이사회는 올해도 북한인권결의안을 컨센서스(만장일치)로 채택할 전망이다. 유럽연합(EU)과 일본은 올해 인권이사회에도 결의안을 제출했다. EU와 일본이 공동 작성하는 북한인권결의안은 2003년 유엔인권이사회 전신인 유엔인권위원회에서 처음 채택된 이래 해마다 채택되고 있다. 김규환 선임기자 khkim@seoul.co.kr
  • 트럼프 통제에도… 지난달 불법 이민자 7만 6000명 국경 넘었다

    11년 만에 최고… 자녀 동반 가족들 많아 100명 이상 함께 적발 사례도 70건 넘어 “제도적 수용 한계… 안보·인도주의 위기” 미국에서 지난달 멕시코와 인접한 남서부 국경을 허가 없이 넘어온 불법 이민자수가 7만 6000명을 넘어섰다고 AP통신 등이 5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2배 이상 늘어난 수치로 도널드 트럼프 정부의 반(反)이민 정책이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케빈 맥알레넌 미 국토안보부 세관국경보호국(CBP) 국장은 이날 “적법한 절차 없이 국경을 넘은 이민자수가 11년 만에 최고치”라며 “제도적으로 더이상 수용할 수 없는 한계점에 와 있다. 이것은 분명 국경 안보와 인도주의 둘 다 위기에 처했음을 보여 준다”고 밝혔다. 트럼프 정부는 국경을 통한 불법 이민자 유입을 차단하기 위해 장벽 건설을 추진하는 한편 불법 입국자를 전원 기소해 구금하는 등 강경책을 펴고 있지만 가족 단위 불법이민 시도는 오히려 증가하는 추세인 것이다. 당국은 그 이유에 대해 “자녀를 동반하는 경우 상대적으로 더 쉽게 국경을 넘을 수 있다는 인식이 중미 전역에 퍼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과거 국경에서 체포된 이들 대다수는 멕시코 남성이었으나 이제는 중미 각국 출신들이 가족 단위로 집단을 이뤄 국경을 넘다 체포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으로 조사됐다. 집단으로 국경을 넘는 이민자들의 수도 급격히 늘었다. 100명 이상이 함께 국경을 넘다 적발된 사례는 지난 몇 달 사이에만 70건에 달했다. 이런 사례는 지난해 13건, 2017년 2건에 불과했다. 미 정부의 강경한 이민 정책에도 가족 단위 불법 이민자수가 급격히 증가한 것을 두고 뉴욕타임스(NYT)는 “(불법 이민자에 대한 현 정부의) 기소 강화, 망명, 그리고 더 가혹해진 구금 정책이 폭력과 가난을 피해 고국을 탈출해 미국에 정착하려는 이민자들의 의지를 누그러뜨리진 못한다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최훈진 기자 choigiza@seoul.co.kr
  • [곽병찬의 역사앞에서 묻다] 박순부·허은·이은숙 여사…그들은 ‘독립군의 어머니’였다

    [곽병찬의 역사앞에서 묻다] 박순부·허은·이은숙 여사…그들은 ‘독립군의 어머니’였다

    “네 어머니와 아내를 무겁게 대하라.” 지난달 8일 시인 이윤옥씨의 ‘서간도에 들꽃 피다’ 10권 완간 기념 ‘책 잔치’가 열렸다. 권마다 20명의 여성 독립운동가의 삶을 시와 산문으로 담은 책이다. 속표지에는 이런 짧은 헌사가 실려 있다. “이 책을 이 땅의 모든 남성에게 바칩니다.” 이유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만하다. 다음은 지은이의 머리말 일부. “원고 뭉치를 들고 백방으로 뛰어다녀봤지만 선뜻 이 책을 찍어 준다는 곳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독립운동이 남성의 전유물이 돼 버린 풍토에서 여성독립운동가만의 책을 출간하는 것은, 독립운동처럼 십시일반의 정성을 모아야 가능했다.3·1운동 100주년을 맞는 올해 여성 독립운동가 이야기가 홍수를 이뤘다. 그동안 여성의 역할을 액세서리 정도로 평가절하했던 것에 대한 반성의 결과라고 믿고 싶다. 하지만 반성치고는 너무 피상적이었다. 양적으로만 늘었지 질적으로는 달라지지 않았다. 선택 기준은 언제나 ‘남성 못지않은 활동상’이었다. 삼종지도의 억압구조 속에서 수행했던 여성 혹은 어머니의 희생과 헌신은 외면당했다. 건국훈장 서훈자 1만 5537명 가운데 여성 독립지사가 전체의 2.3%(357명)에 불과한 현실이나, 5등급의 건국훈장 가운데 대부분 마지막 등급인 애족장을 서훈했거나, 훈장이 아닌 건국포장이나 대통령 표창을 받은 것은 이런 기준 때문이었다. 일송 김동삼 선생의 며느리 이해동 여사는 1987년 독립운동기념관 개관식 때 보훈처 초청으로 중국에서 잠시 귀국했다. 개관식 치사에선 온통 일송 이야기뿐이었다. 행사가 끝난 뒤 이 여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시아버지께 공이 있다면 반 이상은 시어머니(박순부 여사) 몫이었다. 독립운동도 의식주가 있어야 가능한데,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는 건 온전히 여자의 몫이었다. 여자들은 하루 스무 시간씩 일하며 밥해 먹이고 옷 지어 입히고 땔감 마련해 추위를 피하게 했다. 공산주의 나라에서도 남녀를 동등하게 대하는데, 왜 한국에서는 여성의 역할을 하찮게 보는지 모르겠다.” 박순부 여사는 만주 벌판을 호랑이처럼 떠돌며 항일투쟁에 나섰다가 옥사한 남편 일송과 그 동지들의 후방을 말없이 지키다가 만주에서 쓸쓸하게 돌아갔다. 이 여사 역시 1989년 영구귀국할 때까지 77년간 여러 남매를 낳아 키웠지만, 둘째 중생을 제외하고는 모두 먼저 떠나보내야 했다. 상하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 선생의 맏아들 이준형은 출소한 뒤 “일본 놈들 밑에서 하루라도 더 사는 것은 치욕”이라며 자결했다. 다음은 그가 남긴 네 가지 유언 가운데 하나. “독립운동을 하면서 여자들의 고생이 심했다. 여성을 대할 때 보통으로 대하지 말고 무겁게 대하라.” 허은 여사는 조부 허형, 재종조부 허위 등 집안이 모두 독립지사였다. 어른들을 따라 1915년 만주로 망명한 허 여사는 1922년 석주의 손자 이병화와 결혼한 뒤 끝없이 찾아오는 독립군을 수발하는 ‘독립군의 어머니’ 역할을 했다. 시집온 첫해 집에서는 서로군정서 회의가 서너 달 계속됐다. 만주의 독립지사치고 그의 집을 드나들지 않은 사람은 없었으며, 따듯한 밥 한 그릇 먹지 않은 이가 없었다. “집에는 항상 손님이 많았는데 땟거리가 부족해 삼시세끼가 녹록지 않았다. 양식이 없을 때는 좁쌀 쭉정이로 죽을 끓였다.” “의복도 단체로 만들어서 조직원들에게 배급했다. 부녀자들이 동원되어 흑광목과 솜뭉치를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대량생산을 했다. (중략) …김동삼, 김형식 어른들께 손수 옷을 지어드린 것은 지금도 감개무량하다.” 고생이 얼마나 심했던지 밥 짓다가 기절해 가마솥 안으로 고꾸라질 뻔하기도 했다. “시집온 이듬해, 한번은 감기에 걸렸으나 누워서 쉴 수가 없었다. 무리했던지 부뚜막에서 죽 솥 안으로 쓰러지는 걸 마침 시고모부가 보시고는 잡아 떠메고 방에 눕혔는데 꼬박 24시간을 혼절했다.”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에서) 시조부, 시부에 이어 남편도 7년간의 옥고 탓에 일찌감치 세상을 떴다. 남겨진 5남2녀를 키우고 가문을 지키는 것은 온전히 허 여사의 몫이었다. 형제들이 때론 고아원에도 가고, 보육원에도 보내진 것은 그 때문이었다. 4남1녀는 허 여사보다 먼저 세상을 떴다. ‘혁명 가족의 안주인’ 이은숙 여사의 간난신고는 ‘고초당초’보다 매웠다. 결혼 당시 지금 시세로 수천억 혹은 수조 원에 달한다는 남편 우당 이회영 여섯 형제의 재산은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경학사 등을 경영하는 데 모두 썼다. 불과 몇 해가 지나지 않아 “하루 잘해야 일중식이요, 한겨울에도 절화하기(불피우지 못하기)를 한 달이면 반이 넘”었다. ‘매일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했다. “언젠가 이을규 형제분과 백정기, 정화암 네 분이 오셨다. 그날부터 먹으며 굶으며 함께 고생하는데 짜도미라고 하층민들이 먹는 곡식조차 살 수 없었다. 강냉이로 멀건 죽을 쑤어 연명했다. 내 식구는 오히려 걱정이 안 되나, 노인과 사랑에 계신 선생님들에게 너무도 미안하여, 죽을 쑤는 날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상을 가지고 나갈 수가 없었다.”(‘서간도 시종기’에서) 이 여사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해야 했다. 고무공장 직공으로, 부잣집 침모로, 심지어 유곽 여인네의 옷을 수선하는 삯바느질까지 했고, 몇 푼 벌면 송금했다. 이 사실이 드러나 경찰서로 불려가곤 했다. 이 과정에서 두 손녀와 아들 규오가 성홍열로 차례로 죽어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규숙, 현숙 자매는 천진 부녀구제원에 보내야 했고, 외손녀 현덕은 늑막염으로, 딸 현숙은 폐렴으로 그리고 외손자는 영양실조로 사망했다. 둘째 아들 규학은 친일파 암살 과정에서 체포돼 고문으로 청력을 잃었고, 셋째 아들 규창 역시 13년형을 받았다. 이 여사 자신은 마적떼의 총격으로 어깨에 관통상을 입어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 우당은 1932년 일제의 감옥에서 고문당한 끝에 세상을 떴고 첫째 시숙 이건영은 질병으로, 조선 10대 갑부로 꼽히던 둘째 시숙 이석영은 영양실조로, 셋째 시숙 이철영은 풍토병으로, 여섯째 시숙 이호영은 일본군에 의해 가족 전체가 몰살당했다. 함께 망명했던 식솔 60여명 가운데 살아서 귀국한 이는 다섯째 시숙 이시영 선생 포함 20여명뿐이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부인 박자혜 여사는 살아서는 일제의 핍박에 시달리고, 죽어서는 단재의 호적에도 오르지 못했다. 망명 전 박 여사는 조선총독부 의원에서 간호부로 일하던 엘리트였다. 파업 태업 등을 주도해 불령선인으로 낙인찍힌 터였기에 1922년 귀국한 뒤 온갖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 그럼에도 나석규 의사 등 국내로 잠입한 독립운동가들의 거사를 뒤에서 도왔다. 단재는 1936년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고 둘째 아들은 1942년 영양실조로 사망했으며, 그 자신은 잦은 체포와 고문 후유증으로 1944년 단칸방에서 홀로 세상을 떠났다. 단재는 일제의 호적을 거부한 탓에 2009년 가족관계등록부가 생기기까지 무국적자였다. 가족관계부가 생기고도 혼인관계를 확인할 수 없다 하여, 단재의 가족관계부에는 지금도 아들과 손주 이름만 달랑 올라 있다.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고, 일경 15명을 사살한 김상옥 의사의 어머니 김점순 여사도 세 아들을 조국의 독립에 바쳤다. 김 여사는 평소에도 잠입한 독립지사들을 숨겨 주고, 먹여 주고, 입혀 줬다. 백범의 부인 곽낙원 여사는 시장에 버려진 배추 겉껍질을 모아 김치를 담갔고, 그것은 임시정부 요인들의 둘도 없는 반찬이 되었다. 베트남에는 ‘어머니 영웅’이란 칭호가 있다. 항불, 항일, 항미 독립전쟁에 자식을 바친 어머니들에게 주어지는 ‘서훈’이다. 세상에 어머니를 배반할 자식은 없다. 베트남이 물질적으로는 풍부하지 않아도 정신적으로는 여전히 견고한 것은 그 덕분일 것이다. 2018년 허 여사에게 건국훈장이 추서되자 아들 이항증씨는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가사노동에 대한 첫 서훈이며 음지에서 피와 땀과 눈물을 쏟은 여성 독립지사에 대한 첫 훈장입니다.” 이제 우리에게도 ‘어머니 영웅’, ‘아내 영웅’이 있어야 한다. 어머니와 아내가 없었다면 안중근도 이회영도 이상룡도 김동삼도 김구도 여운형도 신채호도 없었다. 논설고문 kbc@seoul.co.kr
  • [황제의 옥새1]일제 맞서 조선 구하려는 두 명의 서양인

    [황제의 옥새1]일제 맞서 조선 구하려는 두 명의 서양인

    올해는 3·1운동 발발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서울신문은 100주년 기획 시리즈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조선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영국인 독립운동가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을 주인공으로 한 해외소설 두 편을 발굴했습니다. 글쓴이는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로버트 웰스 리치(1879~1942)입니다. 100여년 전 발간된 이들 소설은 일제 병합 직전 조선을 배경으로 베델이 조선인을 위해 기꺼이 모험에 나서는 내용입니다. 1900년대 초 대한제국을 배경으로 하는 거의 유일한 해외 소설이어서 사료적 가치도 큽니다. 서울신문은 ‘황제 납치 프로젝트’(1912년 출간·원제 The cat and the king)에 이어 ‘황제의 옥새’(1914년 출간·원제 The Great Cardinal Seal)를 연재 형태로 소개합니다.다음은 러일전쟁(1904~1905)이 끝난 뒤 ‘조선의 형제’를 자처하며 한반도 침탈에 나선 일본이 벌인 일들에 대한 기록이다. 또 수백년 간 조선의 왕들이 비밀리에 간직해 온 유물이자 종종 왕국에서 위대한 일을 해 낸 옥새에 대한 비화이기도 하다. <제1장> 헝클어진 곱슬머리 중년 여인 한때 명쾌하고 정곡을 찌르는 지혜가 가득했지만 지금은 얼간이가 된 나(이 소설의 두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미국인 빌리)는 하등 관계도 없는 작은 나라가 위험에 처하자 조상의 지혜가 담긴 격언에 도전장을 던졌다. 바로 “불에 데인 개는 불을 무서워한다”라는 말을 거스르기로 한 것이다. 이 말은 “매를 아끼면 아이를 망친다”거나 “될성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 본다”처럼 수많은 이들에게 회자된다. 하지만 나는 이 의견에 반대한다. 개도 개 나름이고 불도 불 나름이니까. 내가 아는 ‘해피’(Happy)라는 이름의 개가 있다. 전에 자동차에 치어 눈과 다리를 다친 적이 있다. 그런데 휘발유로 움직이는 마차가 또 한 번 해피에게 달려간다고 하자. 과연 그 녀석은 괴물을 보고 저 멀리 도망깔까. 아니다. 남은 3개의 다리와 한 쪽 눈으로 다시 한 번 그놈과 맞부딪히려고 할 거다.나와 베델은 그런 부류의 인간이다. 우리는 러일전쟁이 끝난 뒤부터 ‘조선의 형제’를 자처한 일본이 대한제국에 지른 불에 심하게 데였다. 그럼에도 다시 한 번 불 속으로 뛰어들 생각이다. 또 한 번 크게 다칠테지만 그래도 괜찮다. 우리는 우둔하지만 행복하고(happy) 유쾌한 개니까. 그 불이 너무 매혹적이어서 가만 보고만 있을 수 없으니까. (번역자주: 소설 속 화자인 빌리가 ‘불에 심하게 데였다’고 말하는 것은 이 소설의 전편인 ‘황제 납치 프로젝트’에서 두 주인공 베델과 빌리가 조선의 황제를 중국으로 망명시켜 을사늑약 체결을 막으려다가 실패한 것을 뜻합니다.) 오랜 세월 쌓아 올린 선조들의 지혜를 거스르는 건 분명 어리석은 일이다. 오직 우리처럼 바보같고 혈기왕성한 청년들만 이런 짓을 한다. 나는 집(뉴욕 브루클린 소재 고급 아파트) 근처 작은 도서관에서 저 아래 아파트에 사는 여자가 축음기로 ‘겨자가 너무 많아요’(20세기 초 발매된 미국 재즈음악)를 듣고 있을지 가늠해보고 있었다. 이곳은 너무도 평화롭고 무료했다. 문득 내 오랜 친구 베델이 슬픔에 잠긴 ‘고요한 아침의 나라’(조선)에서 다시 한 번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려고 마음먹은 것 같아 걱정이 됐다. 이제 다시 한 번 그를 도와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우리는 친구니까.흔히 보험업자들은 증서 뒷면에 “신의 행위나 화재, 홍수, 공공의 적의 도발” 등에는 지불 의무가 없다는 면책 조항을 적곤 한다. 과연 이들은 일본에게 점령당한 조선 땅으로 다시 들어가 분란을 일으키려는 우리를 받아줄까. 바보가 아닌 이상 그럴 리 없겠지. 몇 년 전 우리는 조선의 황제(고종)를 중국 상하이로 모셔가려고 했다. 나와 소녀(전편에 등장하는 러시아 스파이), 베델은 황제와 함께 서울 성벽을 넘어 자유를 향해 달아나다가 앞에서 소개한 격언이 말해 주던 일(고종이 일본에 지레 겁을 먹고 조선 탈출 직전 망명을 포기)을 실제로 겪었다. 우리가 기획한 ‘황제 납치 프로젝트’는 수포로 돌아 갔다. 이것이 우리의 첫 번째 모험이었다. 일부 아는 분도 있겠지만 나는 최근 이 이야기를 잡지에 발표했다. (번역자주: 이 소설의 전편인 ‘황제 납치 프로젝트’는 1912년 12월 미국의 ‘포퓰러 매거진’에 실렸습니다.) 베델은 조선에서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데일리뉴스’(KDN)를 발간하며 일본을 지독하고도 신랄하게 비난했다. 일본은 늘 그를 감시했다. 영국 대사관을 압박해 징역 1년형을 선고받게도 했다. 그는 중국 상하이에서 옥살이를 했다. 하지만 석방되자마자 서울로 돌아와 신문 되살리기에 열을 올렸다. 끝없이 비틀거리던 제국의 주인(고종)이 한반도를 빠져 나가 전 세계를 상대로 일본을 비난할 수 있도록 다시 한 번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번역자주: 실제로 베델은 1907~1908년 영국 대사관에서 두 차례 재판을 받았습니다. 첫 번째 재판에서는 6개월 근신형을, 두 번째 재판에서는 3주간 금고형 뒤 6개월 근신형에 처해졌습니다. 당시 조선에는 영국인 구금시설이 없어 베델은 두 번째 재판 뒤 중국 상하이에서 옥살이를 했습니다.) ‘황제의 옥새’는 2회로 이어집니다. 번역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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