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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J “日의 방만무도 시정돼야 친선 기초 가능”

    DJ “日의 방만무도 시정돼야 친선 기초 가능”

    망명 당시 “日, 지배·종속밖에 몰라” 메모 옥중서신엔 “다음세대 화목한 이웃으로”“한일국교의 새로운 판국에 처해서 우리는 단호히 일본의 옳지 못한 태도의 시정을 얻음으로써만이 진실로 영원한 양국 친선의 튼튼한 기초를 닦을 수 있는 것.” 김대중 전 대통령은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이 13일 최초 공개한 1953년 10월 ‘한일우호의 길’이란 제목의 기고에서 “공산 침략으로부터 양국 민족을 구하기 위해서는 일체의 난관을 극복하여 양국민의 우호단합이 엄숙히 요청된다”면서도 “현재의 방만무도한 태도마저 눈감은 채 악수의 손을 내민다는 것은 민족의 자존심이 불허함은 물론 양국의 우호협조를 위해서도 결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바는 못 되는 것”이라고 했다. 일본의 경제보복에 따른 한일 갈등이 이어지는 가운데 도서관은 ‘김대중전집 전30권 출판기념회’를 열고 김 전 대통령의 대일 인식을 엿볼 수 있는 생전 사료들을 공개했다. 1953년 기고에 대해 도서관 측은 “냉전 시기 한국의 안보와 국익적 관점에서 한일 관계 정상화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며 “이렇게 되려면 과거사 문제에 대한 일본의 진정성 있는 사과와 실천이 필요하다고 봤다”고 설명했다. 유신 정권에 맞서 일본에서 망명 투쟁을 하던 김 전 대통령은 1973년 4월 10일 친필 메모에서는 “일본의 경제력, 팽창-재군비, 핵무장-대국야욕, 그들은 지배냐 종속밖에 모른다. 연결될 것인가?”라고 적었다. 1983년 ‘옥중서신’ 일본어판 서문 친필 초안에서는 박정희·전두환 군사정권으로부터 정치적 박해를 받았던 시절 본인의 구명운동을 전개했던 일본 인사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몇 겹으로 닫힌 한일 양국민 사이의 문을 뜻 있는 동지들과의 협력으로 하루속히 열어젖혀야 한다”며 “우리의 다음 세대만이라도 서로 이해와 협력 속에 화목한 이웃으로서 살아가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도서관 측은 “진정한 한일 연대를 지향하는 일본 내 양심적 세력들이 영향력을 발휘해 우경화를 저지하고 동북아 평화를 위해 일본이 건설적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자 했다”면서 “이런 인식은 현재 한일 관계 문제를 해결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강윤혁 기자 yes@seoul.co.kr
  • 세계화·환경·난민 ‘NO’… 국익만 챙기는 글로벌 스트롱맨

    세계화·환경·난민 ‘NO’… 국익만 챙기는 글로벌 스트롱맨

    ‘세계화’, ‘지구촌’…. 이런 단어들을 싫어하며 이와는 반대 방향으로 국정을 운영하는 지도자들이 최근 세계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이들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나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처럼 나라의 옛 영광을 재현하겠다는 거창한 구호를 앞세워, 냉전이나 제국주의 시대에 누렸던 국제적 지위를 되찾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환경이나 자원, 난민 등 전지구적인 문제보다는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먼저 고려하는 성향을 가졌다. 이런 지도자들을 비판하는 쪽에선 이들을 반세계주의자(Anti-globalist)라고 부른다. 가디언은 최근 칼럼에서 이들을 묶어 국가주의자 혹은 국수주의자(nationalist) 등으로 표현했다. 포퓰리즘 공약으로 집권한 뒤, ‘압제자’(strongman) 소리를 듣기도 한다는 것 역시 이들의 공통점이다. ●反세계주의 대표주자 트럼프 美대통령 소개될 지도자들 중 상당수는 ‘○○의 트럼프’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트럼프 대통령은 대표적인 반세계주의, 국수주의자다. 그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구호를 앞세워 2016년 대선에서 승리한 뒤 “미국을 계속 위대하게”라는 구호로 내년에 재선에 도전한다. 그만큼 ‘미국 우선주의’는 그의 성향과 국정운영 기조를 가장 잘 설명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당선 직후부터 강력한 보호무역을 실시했다. 관세를 무기로 한국과 중국 등 주요 교역국들로부터 이익을 뽑아냈다.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국가들에 더 높은 방위비 분담금을 요구했으며, 국익을 내세워 중동 지역에 파견했던 병력을 대부분 철수시켰다. 강력한 반이민 정책을 추진하며 멕시코 국경장벽을 강화하는 법안을 밀어붙이고 있다. 중동의 무력 분쟁을 악화시킨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사우디아라비아 등에 무기를 수출하기 위해 의회 결의안에 거부권을 행사하기도 했다. 국익을 앞세워 미국이 앞서 체결한 각종 국제 조약에서 탈퇴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최근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는 197개국과 맺은 파리기후협약에서 탈퇴했다. 지난해엔 2015년 이란 등과 맺은 핵합의에서 발을 뺐고, 2017년 취임 직후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탈퇴를 위한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존슨 총리 “브렉시트가 英을 다시 위대하게” 최근 영국의 새 총리가 된 보리스 존슨은 대표적인 ‘브렉시트’ 옹호자로 오랜 시간 동안 영국을 유럽연합(EU)에서 탈퇴시켜 ‘대영제국’을 재건하겠다는 주장을 해 왔다. 2016년 브렉시트 국민투표에서 탈퇴 진영을 이끌었던 그가 유력 후보로 거론되면서부터 EU의 핵심 국가가 연합에서 탈퇴할 것이라는 우려는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인용 부분을 조작한 기사를 써서 일간지 타임스에서 해고된 존슨은 2016년 캠페인 당시에도 가짜뉴스를 이용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그가 당시 내건 슬로건은 “우리는 일주일에 3억 5000만 파운드를 EU에 보낸다”였다. 실상 영국은 이 금액 중 대부분을 돌려받고 있었지만 그는 이를 묻어 뒀다. 런던시장 시절에도 이와 관련한 괴담 수준의 가짜뉴스를 퍼뜨렸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국민투표 당시 그가 이끌던 캠프의 기본 메시지는 “브렉시트가 영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 것”이었다. 그로부터 5개월 뒤 미국 대선에서 매우 비슷한 메시지를 들고 나온 후보가 대통령이 되는데 그의 이름은 도널드 트럼프다. ●‘브라질의 트럼프’ 보우소나루 대통령 존슨 총리는 ‘영국의 트럼프’란 별명을 갖고 있는데 CNN 등은 트럼프 대통령과의 차이점을 설명하며 그가 별명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자신의 아들을 미 대사로 임명하고 싶어 하는 자이르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브라질의 트럼프’라는 별명을 가장 좋아할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보다 더 강력한 막말, 범죄자를 경찰이나 일반인이 살해할 경우 면책하는 법안을 추진하려는 일 등이 그의 성향을 대변한다. 보우소나루는 독재자, 포퓰리스트, 극우주의자 등으로도 불린다. 그는 ‘지구의 허파’인 아마존 열대우림을 자국 경제 이익만을 위해 파괴하는 이기적 정책을 펴고 있다. 지난 7일(현지시간) 가디언에 따르면 브라질 국립우주연구소는 세계 최대 규모 열대우림들이 파괴되고 있으며 이 중 60%가 브라질에서 일어났다고 발표했다. 발표에 따르면 특히 지난 7월 아마존 열대우림 파괴 규모는 약 2254㎢인데 이는 제주도 전체 면적의 약 1.2배이며 지난해 7월 아마존에서 파괴된 596.6㎢의 378%에 해당한다. 보우소나루의 무분별한 열대우림 파괴에 대해 국제 환경단체는 물론 독일, 프랑스 등 유럽과 교황청 등도 우려를 표했다. 하지만 그는 조롱과 무시로 일관한다. 그는 “아마존은 모든 외국 변태들이 손에 넣고 싶어 하는 처녀”라고 말한 적도 있다. ●‘日 최대 극우단체 회원’ 아베 총리 국수주의자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를 뺄 수 있을까. 그가 최근 한국에 가하는 경제보복 역시 제국주의 시절 국가가 저지른 범죄를 부인하고, 그 죄를 가벼워 보이게 만드는 데 노력하는 전형적인 일본 국수주의자들의 행태다. 경제보복을 제외하더라도 핏줄(외할아버지)부터 강경 국수주의자인 데다 일본 최대 극우단체인 일본회의 회원인 그를 설명할 사례는 차고 넘친다. 아베 총리의 지상 목표는 일본이 방위군 이상의 군대를 보유하지 못하도록 한 평화헌법을 뜯어고치는 것이다. 최근 실패하긴 했지만 그는 참의원 선거에서 3분의2 이상 의석을 확보해 야당의원을 설득할 필요 없이 개헌을 단행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평화헌법은 2차 세계대전 전범국으로서, 다시 위험천만한 제국주의 국가가 되지 않겠다는 일종의 약속인데 중국의 해군력 증강을 빌미로 이를 파기하겠다는 얘기다. 또 취임 직후 약속했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결국 강행했다. 공영 방송국 NHK 이사진에 측근을 투입해 난징 대학살을 부정하는 등의 보도를 하도록 조장했다. ●이민 정책 강화 모리슨 호주 총리 스콧 모리슨 호주 총리는 한국 등 많은 나라에서 ‘이민자의 천국’으로 인식되고 있는 호주의 이민 정책을 까다롭게 만든 장본인이다. 한국인을 비롯해 호주 영주권을 획득하기 위해 기존 정책에 맞춰 산업 현장에서 일하던 외국인들이 그의 취임 뒤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2007년 연방의원이 된 뒤 2013년 이민국경보호국 장관이 됐다. 당시 외국에서 바다를 통한 망명 시도를 막는 법안을 시행했는데 지지자들은 이로 인해 많은 사람의 죽음을 막았다고 평가했다. 그는 그 뒤 2010년 호주령 크리스마스섬에서 48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벌어졌을 때 당시 줄리아 길라드 정부가 유가족들의 교통비를 제공하겠다고 했을 때 반대했다. 그는 동성결혼 합법화를 위한 역사적인 하원 투표에서 기권한 소수 의원 중 한 명이다. 현지 언론은 모리슨 총리가 정치적 이익을 위해 외국인 혐오와 인종차별적 두려움을 부추겼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탈리아 막강 실세 마테오 살비니 부총리 이탈리아에서 총리보다 막강한 ‘실세’ 마테오 살비니 부총리 겸 내무장관은 어떤 자국 항구에도 난민 구조선이 입항하지 못하도록 봉쇄하고 있다. 아프리카 등 난민들에게 중요한 이탈리아 항구가 봉쇄돼 많은 구호선이 공해상을 떠돌고 있다. 최근엔 난민 구조단체를 도우며 자신을 비판한 할리우드 배우 리처드 기어에게 “그들을 할리우드로 데려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입항을 강행한 구호단체 관계자를 일시 구속하기도 했다. 국내에선 감세 등 포퓰리즘 정책으로 지지를 모으고 있다. 김민석 기자 shiho@seoul.co.kr
  • 중세 유럽의 화려함, 한 곳에 담은 광장

    중세 유럽의 화려함, 한 곳에 담은 광장

    벨기에는 누구나 알지만 또 누구도 잘 알지 못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1인당 1년에 8㎏ 이상의 초콜릿을 소비하는 나라, 와플이 맛있는 곳, 스머프와 오드리 헵번,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고향,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와 유럽연합(EU)의 본부가 있는 곳. 19세기 말부터 서양권을 휩쓸었던 예술사조 아르누보의 발원지. 이 모든 것이 벨기에 이야기다. 수도 브뤼셀은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를 병용해, 바일링구얼리즘(2개 언어를 함께 씀)을 실현한 보기 드문 도시다. 브뤼셀 구도심에 도착하니 ‘작은 파리’라는 표현이 들어맞을 정도로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풍겨왔다. 역시나 이곳도 자갈길이다. 이런 데서 캐리어를 끌고 가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지만 언젠가부터 생각을 바꿨다. ‘덜컹거리는 바퀴소리는 귀족들이 타던 마차 소리다’라고. 30㎏에 육박하는 짐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금빛이 번쩍 새어 나오는 골목을 지나니 바로크풍의 건물이 직사각형으로 에워싼 광장이 마법처럼 펼쳐졌다. 브뤼셀의 심장이자 여행의 시작인 그랑 플라스 광장이다. 찬란해서 눈이 부셨다. 건물은 유럽상인들이 브뤼셀에 모여 만든 동업자 조합인 길드 하우스다. 난간과 지붕, 기둥은 금으로 장식했다. 조각상은 집요함이 느껴질 정도로 세밀하다. 가만히 손을 대보았다. 중세 무역업자들의 지위와 부가 느껴졌다. 제빵 길드, 목공 길드, 양복업자 길드, 기름 길드, 가구 길드, 사냥꾼 길드, 장신구 길드 등 중세 유럽에서 중요한 산업의 동업조합이 모두 이곳에 모여 있었다. 시청사 옆 벨기에 맥주 박물관은 원래 맥주 길드하우스였다. 벨기에 맥주가 유명한 이유이기도 하다.벨기에는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룩셈부르크와 맞닿아 있다. 뱃길을 통하면 영국이 있고, 북해를 따라 덴마크와 스웨덴, 동유럽의 여러 나라와도 교역이 가능한 천혜의 위치다. 지리적 이점 덕분에 13세기부터 브뤼셀에는 대형 시장이 발달했고 무역이 성행했다. 길드하우스가 광장을 형성하게 된 배경이다. 일반적으로 유럽의 광장은 예배당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데 반해 그랑팔라스는 종교 건축물 하나 없이 상업시설인 길드 하우스와 행정시설인 시청사 건물로만 이뤄진 독특한 형태를 띤다. 중세 유럽 성공한 상업 도시의 원형을 간직한 사례로 199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나폴레옹 3세를 피해 브뤼셀로 망명을 온 프랑스 작가, 빅토르 위고는 그랑 플라스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이라고 극찬했다. 망명자의 애정이 담긴 과장이겠지만 유럽에서 가장 우아한 것은 사실이다. 야경은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브뤼셀의 상징인 오줌싸개 소년 동상(마네켄피스)이 광장 언저리에 있다. 김진 칼럼니스트·여행작가
  • 명동성당 앞에서 비수로 거사… 공범 묻자 “2000만 동포가 도왔다”

    명동성당 앞에서 비수로 거사… 공범 묻자 “2000만 동포가 도왔다”

    한자까지 똑같은 동명이인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알아도 이재명 의사(李在明 義士)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완용을 처단하려다가 실패한 독립운동가 정도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 드물다. 이 지사는 우연히도 의사의 의거일이 자신의 생일과 같은 날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매국노를 죽이려다 스물셋 꽃다운 나이에 교수형을 당한 의사에 대한 인식과 대접이 이렇다. 의사에게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지만, 직계 후손이 없어 훈장을 국가보훈처가 보관하고 있었다. 고향도 평북 선천이라 생가나 일가붙이를 찾을 수도 없다. 형이 집행된 후 시신도 수습되지 않아 유골의 행방도 묘연하니 묘소도 있을 리 없다.잊혀진 의사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것은 종친회였다. 이 의사의 본관은 진안인데 진안 이씨는 전북 진안을 비롯해 의사의 고향인 평북 등지에 집성촌이 있다. 또한, 진안 마이산은 1907년 이석용이 조직한 호남 의병 창의동맹단의 집결지였다. 진안에는 1925년 유림들이 일제에 항거해 순국한 의사와 열사 등 79위를 배향한 사당인 이산묘(耳山廟)도 있다. 말의 귀를 닮은 마이산 두 봉우리의 서쪽이다. 이산묘 영광사(永光祠)에는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의사 등과 더불어 이 의사도 모셔져 있다.그런 인연으로 의사의 동상과 기념관이 고향에서 천 리 길이 넘는 먼 곳 진안에 자리잡게 되었다. 진안군청에서 마이산도립공원으로 들어가다 보면 도로 오른쪽에 이재명 의사 기념관이 있다. 2001년 종친회와 정치인들이 이재명 의사 추모사업회를 결성해 진안읍 군하리 6500여㎡ 부지에 조성한 시설이다. 그러나 금요일에 찾아간 기념관과 사업회의 문은 자물쇠가 굳게 채워져 관람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홍살문은 나무가 삭아 홍살이 떨어져 뒹굴고 있고 마당에는 잡초가 무성했다. 이러니 방문객은 있을 리도 없고 간혹 지나가다 들러도 관람을 할 수 없다. 몇 해 전 수리를 요청하는 민원이 제기됐지만, 군청에서는 토지보상금 사용 승인이 나지 않았다고 답했다. 뜻을 모아 거액을 들여 지은 기념관이 보상금 갈등과 무관심, 예산 부족으로 방치되고 있는 것이다. 기념관 옆 타향 땅에 세워진 의사의 동상은 더 쓸쓸해 보였다. 이 의사는 1887년 10월 16일 선천에서 태어나 8살 때 평양으로 이사 가서 그곳에서 성장했다. 의사는 평양 일신학교를 졸업하고 1904년 미국 노동 이민회사의 모집에 응해 미국 하와이로 갔다. 1906년 3월에는 공부를 더 할 목적으로 미국 본토로 옮겨가 안창호가 중심이 돼 창립한 공립협회에 가입했다. 이듬해 일제는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정미7조약’을 체결하는 한편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켰다. 이에 공립협회는 매국노 처단을 결의하고 실행자를 선발했는데 거기에 지원한 사람이 바로 이 의사다.●이토 암살 실행 무산되자 이완용 죽이기로 의사는 그해 10월 9일 일본을 거쳐 고국으로 돌아왔다. 때를 엿보던 의사는 1909년 1월 평안도 순시를 떠난 한국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려고 평양역에서 기다렸다. 그러나 거사를 실행하지 못했다. 안창호가 이토와 함께 다니던 순종 황제의 안전을 위해 만류했기 때문이었다. 이토는 10월 26일 안중근 의사에게 하얼빈역에서 사살됐다. 의사는 원래 목표대로 을사 5적을 비롯한 매국노들을 처단할 계획을 세웠다. 여러 동지와 야학당에 모여 이완용은 이 의사와 김병록· 이동수가, 이용구는 김정익이 죽이기로 했다. 그러던 중 이완용이 12월 22일 종현 천주교당(명동성당)에서 벨기에 황제 레오폴드 2세의 추도식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당시 양심여학교 학생이던 아내 오인성씨와 마지막 작별의 밤을 지냈다. 오씨는 울지 않았고 남편의 거사를 만류하지 않았다고 한다. 날이 새자 김병록, 이동수와 함께 의사는 명동성당으로 향했다. 그날 오전 11시 30분쯤 의사는 성당 밖에서 군밤장수로 변장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이완용이 인력거를 타고 앞으로 지나갔다. 의사는 비수를 들고 달려들었다. 인력거꾼 박원문이 제지하려 하자 그를 찔러 숨지게 하고 이어 이완용의 허리 쪽을 공격했다. 혼비백산한 이완용이 달아나려 하자 다시 3곳을 더 찔렀다. 거사 직후 의사는 현장에서 일경에게 체포됐다. “오늘 우리의 공적(公敵)을 죽였으니 정말 기쁘고 통쾌하다”고 외치며 만세를 불렀다. 그러나 이완용은 치명상을 입지는 않고 목숨을 건졌다. 이완용은 자신의 집으로 가서 의사를 불러 응급 치료를 받았다. 일본 경찰은 이 의사를 이완용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 와 있던 농상공부대신 조중응이 “네가 흉행(兇行)을 한 자냐”고 물었다. 이에 의사는 눈을 치켜 뜨며 “너 조중응은 귀중한 인사를 이 모양으로 하대하느냐”며 오히려 추상과 같이 꾸짖었다. 그러면서 옆에 있던 일경에게 “더러운 냄새가 코를 찌르니 권연초 한 개를 가져오라”고 하여 유유히 피웠다.●“내 목숨 빼앗을 수 있으나 충혼은 못 빼앗아” 경시청에서 조사를 받은 의사는 일경이 “공범이 있느냐?”고 묻자 “이러한 큰 일을 하는데 무슨 공범이 필요하냐. 공범이 있다면 2000만 우리 동포가 모두 나의 공범이다”고 말했다. 이듬해 4월 열린 재판에서도 “도와준 자를 말하라”는 일본인 재판장 스가하라에게 “이완용을 죽이는 것을 찬성한 자는 우리 2000만 동포 모두며 방조자는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엄숙한 목소리로 역적 이완용의 8개 죄목을 거론하며 통렬하게 비판했다. “공평치 못한 법률로 내 목숨을 빼앗을 수는 있으나 나의 충혼, 의혼(義魂)은 절대 빼앗지 못할 것이다. 한번 죽음은 슬프지 않다. 생전에 이루지 못한 일이 한심스러울 뿐이다. 내 결코 죽어서 그 원한을 갚을 것이다.” 의사는 1910년 5월 18일 경성지법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 의사는 사형 선고를 받고 꼿꼿한 자세로 재판장을 꾸짖으며 이렇게 최후 진술을 했다. 부인 오씨는 ‘국적 이완용이 아직 죽지 않고 살았는데 우리 가부(家夫)는 왜 사형에 처하느냐’며 눈물을 흘렸다. 의사는 총독부 체제 발족 바로 전날인 1910년 9월 30일 순국했다. 의사는 의거를 공모한 사람들은 아무 관련이 없다고 보호하면서 끝까지 단독 범행임을 주장했다. 그러나 김병록 등 동지 10여명도 최고 징역 15년형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이 의사는 부인 오씨를 성모여학교 교사인 함마리아의 소개로 만나 1907년 겨울 부부의 연을 맺었다. 오씨도 경찰에 끌려가 혹독한 심문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변호인을 선임하는 등 남편 뒷바라지에 열성을 다했다. 남편이 죽은 뒤 오씨도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중국 길림성과 상해 등지로 돌아다니며 독립운동을 도왔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오씨는 귀국했다가 일경에 체포됐다. 증거와 단서가 없어 석방되었지만, 미행과 감시를 받았다. 오씨는 다시 망명을 도모하다 병을 얻어 29세에 요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인 외과 의사의 집도로 수술을 받은 이완용은 53일 동안 입원했다. 순종과 고종은 이완용이 퇴원하는 날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시종을 보내 안부를 묻고 거액의 위로금을 보냈다. 전국의 관찰사와 군수들로부터도 위로금이 답지했다고 한다. 퇴원 후 충남 온양에서 휴양을 한 이완용은 총리직으로 복귀해 데라우치 통감과 한일합방조약에 서명했다. 그 4일 후 순종 황제로부터 대한제국 최고훈장인 금척대수훈장을 받았다. 이완용은 일제의 보호 속에 백작 작위를 받고 호의호식하면서 부귀영화를 누리다 1926년 68세로 사망했다. 사인은 의사의 칼을 맞아 폐를 다친 후유증이었다고 한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사진의 이 난민 소녀는 56년 뒤 라트비아 대통령이 됩니다

    사진의 이 난민 소녀는 56년 뒤 라트비아 대통령이 됩니다

    이 다섯 살 난민 소녀는 56년 뒤 옛 소련의 영향권이었던 나라 가운데 최초의 여성 국가 지도자가 된다. 사진이 찍힌 곳은 1942년 라트비아 리가였다. 바로 전 해 나치 독일군이 침공했고 2년 뒤 옛 소련의 붉은 군대가 진주했다. 철 모르던 소녀는 행진하는 소비에트 병사들을 보며 멋있다고 환호했다.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딸에게 그러지 말라고, 라트비아에 슬픈 날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일곱 살이던 1944년, 소녀는 가족과 함께 조국을 탈출, 초토화된 독일 북부 뤼벡으로 건너간 뒤 프랑스가 통치하던 모로코를 거쳐 캐나다에 안착했다. 54년 가까이 타국을 떠돌다 예순이던 1998년 조국 라트비아에 돌아와 여덟 달 만에 대통령에 올랐다. 영국 BBC 사운즈는 바이라 비케 프라이베르가(82) 전 라트비아 대통령의 “운명의 장난과도 같은” 인생 드라마를 4일 ‘그녀의 얘기, 역사를 만들다(Her Story Made History) 시리즈 2의 첫 편으로 소개해 눈길을 끄는데 27분 분량이다. 군 수송선을 이용했는데 어뢰 공격을 받으면 몰살될 수 있었지만 공산 치하를 벗어나겠다는 이들은 목숨을 내놓고 탔다. 그녀의 10개월 밖에 안된 여동생도 폐렴으로 잃었다. 1년도 안돼 어머니는 또다시 남동생을 출산했는데 같은 방에는 마찬가지로 아이를 막 출산한 18세 소녀가 누워 있었다. 그 소녀는 아이 이름을 지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러시아 병사들에게 집단 강간을 당해 낳은 아이였기 때문이었다. 그 불쌍한 아기에게 여동생 이름 마라를 붙여줬다. 그 때부터 어린 프라이베르가는 세상이 너무 불공평하다고 느꼈다. 열한 살 때 모로코 카사블랑카로 이주했다. 밤에 트럭에서 내던져졌을 때 마치 미니어처 지구촌 같았다. 아버지의 아랍인 동료가 지참금 1만 5000프랑에다 당나귀 두 마리, 젖소를 줄테니 그녀를 결혼시키라고 했다. 부모들이 학교를 다녀야 한다고 하니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책임지겠다고 했는데 어찌어찌해 말렸다.그녀는 열여섯에 은행에 취업, 밤에는 학교를 다녀 토론토 대학에 입학했다. 대학에서 라트비아 망명자 이만츠 프라이베르그를 만나 결혼했다. 심리학을 전공해 1965년 박사 학위를 땄다. 대놓고 여성을 비하하는 발언을 하던 교수 밑에서 사내들보다 더 나은 삶을 살겠다고 이를 악물고 공부해 학위를 땄다. 다섯 언어에 능통하고 책을 10권 썼다. 몬트리올 대학에서 33년 일한 뒤 예순 살이던 1998년 석좌 교수가 되면서 은퇴했다. 어느날 라트비아 총리가 전화를 걸어와 라트비아 연구소를 이끌어달라고 요청했다. 사람들은 라트비아 문화도 이해하고 서구 정신도 이해하는 여러 언어를 소화할 수 있는 디아스포라를 원한다며 그녀를 적격이라고 했다. 그러고 난 뒤 얼마 안돼 대통령 선거에 나서 최초의 이 나라 여성 대통령이 됐다. 2003년 두 번째 임기를 시작했는데 가장 높았을 때 지지도가 무려 85%였다.이듬해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와 유럽연합(EU)에 모두 가입하는 데 앞장섰다. 그녀로선 쉽지 않은 일이었다. 무엇보다 언론은 그녀를 불신했다. ‘다른 나라들을 떠돌다 이제 와 조국에 헌신하겠다는 거냐’는 식이었다. 해서 국민들에게 직접 호소했다. 또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에게도 NATO 확대가 왜 필요한지 힘주어 강조했다. “여자라서 이점도 있었다. 이스탄불 NATO 정상회담 때 부시 대통령이 내 어깨를 부축해줬다. 하이힐을 신었는데 자갈이 깔린 길이었다. 해서 함께 천천히 걸으며 최선을 다해 그에게 NATO 가입이 왜 필요한지 설명할 수 있었다.” 두 번째 임기는 2007년 일흔 번째 생일을 몇달 앞두고 끝났다. 그 뒤 전직 국가 지도자들의 모임인 클럽 마드리드를 함께 창립해 민주 리더십과 거버넌스를 증진하는 데 힘을 합치고 여성 권익 신장에 주력하고 있다. 캐나다 교수님에게 시달렸을 때처럼 여전히 여성들의 권익을 신장하는 싸움은 승리와는 거리가 멀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사우디 여성들도 남편이나 아버지 없이 혼자 해외여행 가능

    사우디 여성들도 남편이나 아버지 없이 혼자 해외여행 가능

    이제 사우디아라비아 여성들도 남편이나 아버지, 남자 친인척을 동반하지 않고 혼자 해외로 떠날 수 있게 됐다고 영국 BBC가 전했다. 사우디 왕실은 2일 칙령을 발표해 21세 이상의 여성은 남성 인솔자를 승인받지 않고도 여권을 신청할 수 있다고 밝혔다. 아울러 여성이 출생 신고와 결혼과 이혼 등록을 할 수 있게 허용했고, 취업 기회를 남성과 동등하게 허용하기로 했다. 새 칙령에 따르면 사우디의 모든 국민은 성별이나 장애, 연령에 관계 없이 어떤 차별도 받지 않는다고 보장했다. 지금까지 사우디 여성들은 남편이나 아버지, 남자 친인척과 함께가 아니라면 여권 발급도 해외 여행도 할 수 없었다. 왕세자이자 실질적 통치자인 무함마드 빈살만이 여성의 운전면허 발급을 허용하는 등 개방적이고 개혁적인 조치를 펼쳐 온 연장 선이다. 2016년에 그는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 비중을 22%에서 2030년까지 30%로 끌어올려 경제 구조를 개혁하겠다는 비전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런 개혁 조치에도 성차별과 억압을 주장하며 캐나다 같은 나라로 망명을 원하는 상류층 여성들이 늘어났다. 지난 1월 캐나다가 망명을 허용한 18세 소녀 라하프 무함마드 알쿠눈이 대표적이다. 조국을 탈출해 호주로 건너가려던 그녀는 태국 방콕 공항에서 본국 정부의 송환 요청을 따르려던 태국 당국 관리들과 오랜 대치 끝에 풀려나 호주행 꿈을 이룬 뒤 캐나다에 안착했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법정 나타난 ‘별거’ 두바이 왕비…“두 자녀 후견권 달라”

    법정 나타난 ‘별거’ 두바이 왕비…“두 자녀 후견권 달라”

    결혼으로 맺어졌던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 왕자와 이웃나라 요르단 공주가 머나먼 이국땅 영국에서 법정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법정 공방이 오가면서 아랍 왕족의 가정사 일부가 조금씩 베일을 벗고 있습니다. 동화처럼 사랑으로 가득 찬 현실이 아닌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두바이 통치자의 별거 중인 부인이자 요르단 공주가 영국 런던 고등법원에 신청한 강제 결혼 보호 명령 사건의 예심에 30일(현지시간) 출석했다고 BBC와 가디언 등이 보도했습니다. 공주는 UAE를 떠날 때 데리고 왔던 두 자녀 후견권과 강제 결혼 보호 명령 및 괴롭힘 방지 명령을 신청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법정에 출석하지 않았지만 두 자녀의 두바이 귀환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올해 칠순인 두바이 통치자 셰이크 무함마드 빈 라시드 알 막툼과, 부인이자 현재 요르단 국왕의 이복누이인 하야 빈트 알 후세인이 그 주인공입니다. 이들은 2004년에 결혼했으며, 하야 공주는 그의 여섯번째 부인이 됐습니다. 당시 이들 부부의 나이가 스물다섯살 차이여서 화제가 됐답니다. 이들이 파경에 이르기 전에는 완벽한 커플로 묘사되면서 종종 국제 행사에 같이 등장하곤 했습니다.두바이 왕자와 요르단 공주의 가정사는 이달 초 하야 공주가 “생명의 위협” 때문에 영국 런던에 들어왔다는 보도가 나면서 불거졌습니다. 국제적으로 광범위하게 보도된 이후 커플은 성명에서 “소송은 두 자녀의 안녕이 관심이지만 이혼과 금전은 관심사가 아니다”고 발표했습니다. 요르단에서 태어난 하야 공주는 영국 왕실과도 가까운, 타계한 후세인 압둘라 요르단 국왕의 딸입니다. 현재 통치자인 국왕 압둘라 2세의 배다른 누이입니다. 영국 사립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옥스포드대에서 철학과 정치, 경제학을 공부했습니다. 국제올림픽위원회의(IOC)에서 봉사했으며, 유엔 세계식량프로그램(WFP) 친선대사로 활동했습니다. 반면 셰이크 무함마드는 UAE 부통령이자 총리이며 두바이의 통치자입니다. 고돌핀 경마장을 소유한 억만장자이며, 지난달에는 그의 말이 로열애스콧 대회에서 우승하면서 여왕으로부터 트로피를 받기도 하였다고 가디언이 전합니다. 그러나 승마 애호가인 하야 공주는 그 대회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른 부인들에게 모두 23명의 자녀를 둔 것으로 전합니다. 하야 공주가 달아난 뒤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이름을 쓰지는 않았지만 아랍어로 배신과 반역의 여성을 비난하는 시를 게재하기도 했습니다. 하야 공주는 이달 초 런던 중부 켄싱턴궁 근처의 8500만 파운드의 타운하우스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처음에 독일로 달아나 그곳에 망명을 신청하려 했으나 마음을 바꿔 영국으로 간 것이죠. 지금은 하야 공주가 영국에 머무르고 싶어 합니다. 남편이 계속 그녀의 두바이 귀환을 요구하면 UAE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영국으로선 외교적 골칫거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공주의 측근들은 하야 공주가 최근에 셰이크 무함마드의 딸들 가운데 한 명인 셰이카 라티파가 지난해 두바이로 돌아온 미심쩍은 사건에 대한 충격적인 사실들을 알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세이카 라티파는 어떤 프랑스 사람의 도움으로 선박을 이용해 UAE를 탈출했습니다만 인도 연안에서 무장한 대원들에 의해 붙잡혀 두바이로 귀환됐습니다.이 사건에 대해 하야 공주는 당시에 셰이카 라티파는 “이용당하기 쉽고” “지금 두바이에서 안전하다”고 주장하면서 두바이의 평판을 옹호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인권 옹호단체들은 셰이카 라티파 공주가 그녀의 의지와는 반대로 유괴당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나중에 하야 공주는 이 사건과 관련된 새로운 정보를 파악하게 됐고, 남편 가족들로부터 적의와 학대가 점점 증가해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고 느낀 것으로 측근들이 전합니다. 앞서 2000년 7월 셰이크 무함마드의 또 다른 딸인 셰이카 샤므사 알 막툼이 집을 탈출했습니다. 그녀는 당시 19살이었지요. 대저택의 끝까지 랜드로버를 몰고가서 차를 버리고 담을 빠져나와 도망쳤습니다. 당시 머리기사가 다뤄졌으며, 1년 뒤 영국 케임브리지에서 포착됐다는 보도가 있었으나 두바이로 돌아갔습니다.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오바마 판사vs트럼프 판사… 엇갈린 ‘이민’ 판결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이민자 행렬(캐러밴)을 막고자 도입한 반(反)이민 규정 시행에 제동이 걸렸다. 워싱턴포스트 등은 24일(현지시간) 미 캘리포니아 북부 연방지방법원의 존 타이가 판사가 미 법무부와 국토안보부가 과테말라와 멕시코 등 경유국에서 먼저 정치적 망명 신청을 하도록 한 새 규정(IFR)에 대해 일종의 가처분 조치인 ‘예비적 금지명령’을 내렸다고 전했다. 지난 16일 발효된 새 규정은 제3국에 망명 신청을 한 뒤 거부된 이민자에게만 미국 망명 신청을 허용하도록 해 사실상 미 남부 국경을 통한 미국 망명을 원천 차단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타이가 판사는 “새 규정이 국제법에 규정된 이민자의 권리를 부정하고 본국으로 돌려보내 폭력과 학대에 노출되도록 할 수 있다”며 조치의 배경을 설명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지명한 타이가 판사의 판결에 앞서 같은 날 트럼프 대통령이 지명한 티머시 켈리 워싱턴DC 연방지법의 판사는 행정부의 손을 들어주는 결정을 내렸다. IFR의 시행을 막아 달라며 시민단체 ‘캐피털 에이리어 이민자 권리 연대’가 제기한 소송을 기각한 것이다. 그러나 타이가 판사의 예비적 금지명령에 따라 이민자 망명 신청에 대한 새 규정 시행은 당분간 중단될 것으로 전망된다. 한편 트럼프 행정부의 반이민 정책에 반기를 드는 주 정부의 움직임도 구체화하고 있다. 시카고를 포함하는 일리노이주의 JB 프리츠커 주지사가 이날 연방 이민 당국의 추방 대상자 자녀를 보호하는 2개 법안에 서명한 것이다. 이에 따라 부모가 연방세관단속국에 의해 구금되거나 추방된 아동이 법원 승인을 거쳐 단기 후견인을 둘 수 있는 기간이 1년에서 2년으로 즉각 연장된다. 민나리 기자 mnin1082@seoul.co.kr
  • 중러 군용기 5대, 농락하듯 6시간 50분간 KADIZ·영공 넘나들어

    중러 군용기 5대, 농락하듯 6시간 50분간 KADIZ·영공 넘나들어

    中전폭기 2대, 오전 6시 44분에 첫 침범 8시 33분 러 폭격기 2대와 함께 다시 남하 7분 뒤 4대 폭격기 동시에 KADIZ 진입 항로 미세 조정하며 총 24분간 함께 비행 軍, F16 등 18대 출격… 20여회 경고통신 러 조기경보기, 30분간 영공 2차례 침범 軍, 1㎞ 앞에서 바다 향해 360발 경고사격23일 중국과 러시아의 전략폭격기 4대의 한국방공식별구역(KADIZ) 침범과 러시아 조기경보통제기 1대의 한국 영공 침범은 발생부터 종료까지 총 6시간 50분간 이어졌다. 피 말리는 시간 동안 중러 군용기는 KADIZ와 한국 영공을 농락하듯 넘나들었으며, 한국 공군이 경고사격을 하는 아슬아슬한 장면이 펼쳐졌다. 합참에 따르면 중국 전략폭격기 H6 2대는 오전 6시 44분 이어도 북서쪽으로 KADIZ에 진입했고 오전 7시 14분 이어도 동방으로 KADIZ를 벗어난 뒤 대마도 남쪽을 지나 북상했다. 오전 7시 49분 KADIZ에 재진입한 H6는 이후 울릉도와 독도 사이를 지나 북진했고, 8시 20분 KADIZ를 이탈했다. 이어 H6는 8시 33분 남쪽으로 기수를 돌리더니 이례적으로 러시아의 TU95 전략폭격기를 대동해 남하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TU95는 H6와 항로를 맞추려는 듯 미세하게 방향을 조정한 흔적도 남겼다. 8시 40분 TU95 2대를 앞세워 편대 형태를 이룬 4대의 전략폭격기는 동시에 KADIZ에 진입했다. 마치 정해진 계획대로 비행 훈련을 실시하는 모습이었다. 합참 관계자는 “러시아와 중국의 폭격기는 약 2~3마일(약 3~5㎞) 거리를 두고 비행했다”고 설명했다. 8시 44분 북방한계선(NLL)을 남하한 4대의 폭격기는 울릉도와 독도 사이를 통과해 남쪽으로 계속 남하했으며 9시 4분 KADIZ를 벗어나 사라졌다. 그런데 이들 폭격기가 KADIZ를 벗어나기 3분 전인 오전 9시 1분 러시아 조기경보통제기 A50 1대가 동쪽에서 갑자기 나타나 KADIZ에 진입한 뒤 9시 9분 독도 동쪽 5마일(약 8㎞) 영공으로 들어왔다. 이후 한국 공군 F16 2대가 차단비행과 경고통신을 보냈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자 F16 1대가 1차 침범 당시 회피용 플레어(적 미사일을 피하기 위해 발사하는 유도 물질) 10여발과 경고사격 80여발을 실시했고 A50은 9시 12분 영공을 벗어나 남쪽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물러간 줄 알았던 A50은 9시 33분 다시 영공을 침범했으며 독도 서쪽 7마일(약 11㎞) 지점까지 접근했다. 이에 다시 F16 1대가 회피용 플레어 10여발과 경고사격 280여발을 가했고 9시 37분 A50은 영공을 벗어나 사라졌다. 경고사격은 A50 1㎞ 앞에서 바다를 향해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합참 관계자는 “2차 경고사격의 경우 절차를 준수하며 조금 더 단호하게 대응하는 등 총 3회에 걸쳐 사격을 실시했다”며 “자위권 차원에서 격추 사격도 할 수 있었던 상황이지만 러시아 A50은 고도와 속도가 일정했고 비무장이기 때문에 실시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상황이 종료된 듯했으나 오전 9시 4분 사라졌던 4대의 중러 폭격기 중 러시아 폭격기 2대가 낮 12시 1분 KADIZ에 재진입해 북상한 뒤 1시 34분 최종적으로 벗어나면서 모든 상황이 종료된 것으로 전해졌다. 중국과 러시아의 폭격기가 함께 비행한 시간은 총 24분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과정에서 한국 공군 전투기 F16과 F15K 등 총 18대가 네 시간 가까이 대응을 위해 출격해 차단 비행을 실시했으며 중러 폭격기에 대해 각각 20여회의 경고통신을 실시했다. 합참 관계자는 “중국 폭격기는 한국 전투기의 경고에 ‘국제법상 문제가 없는 비행’이라고 응답했으며 러시아 폭격기는 응답이 없었다”고 했다. 러시아와 중국 폭격기는 한때 일본방공식별구역(JADIZ)에도 진입해 일본의 전투기도 JADIZ 내에서 차단비행을 실시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합참에 따르면 중국 군용기나 민항기 등이 과거 망명을 위해 영공을 침범하는 사례는 있지만, 정상적 상황에서 타국 민항기의 영공 침범은 이번이 처음이다. 또 영공을 침범해 실제로 경고사격을 실시한 것과 두 나라의 군용기가 동시에 KADIZ를 침범해 비행한 것도 처음으로 분석됐다. 합참 관계자는 “이번 중국과 러시아의 비행을 이례적으로 평가하고 있다”면서 “왜 이런 비행을 했는지는 추가적인 정보와 전략적인 분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올해 중국은 총 25차례, 러시아 군용기는 13차례 KADIZ를 진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중국 측은 폭격기가 KADIZ에 진입할 당시 군함도 동시에 전개한 것으로 파악됐다. 합참 관계자는 “중국과 러시아 군용기가 KADIZ를 침범한 시간대에 포항 동쪽 148㎞, 제주 남쪽 64㎞ 해상에서 중국 호위함 각 1척이 식별됐다”고 말했다. 통상 중국 군용기가 KADIZ를 침범할 때는 군함도 함께 동행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
  • 광복군 대원 이병돈은 홀대…친일 밀정 송세호는 유공자 둔갑

    광복군 대원 이병돈은 홀대…친일 밀정 송세호는 유공자 둔갑

    경기 김포에 사는 이예숙(57)씨는 독립운동가 아버지에 대한 서훈을 거부하던 과거 보훈 당국의 태도에 지금도 화가 난다. 부친 이병돈(1914~2005)은 함경남도 신흥에서 태어나 선진 영농기술을 배우려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1942년 1월 산시성 시안에서 광복군 제2지대 뤄양지구 초모공작(광복군 모집) 담당자를 만나 곧바로 광복군에 입대했다. 군에서 안중근(1879~1910)의 5촌 조카인 안춘생(1912~2011) 등과 함께 축구대회에도 출전해 중국군관학교 팀을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당시 광복군은 미군과 함께 한반도 진공 작전을 추진했다. 미 중앙정보국(CIA)의 전신인 전략사무국(OSS·1942~1945)과 손잡고 한반도와 일본 본토에 침투해 지하공작에 나서려고 했다. OSS 특수훈련을 받은 광복군 대원을 국내에 잠입시켜 교란작전 등을 펼칠 계획이었는데, 이를 ‘독수리 작전’이라고 불렀다. 영화 ‘군함도’(2017)에서 독립운동 인사를 구하고자 일본 나가사키현 하시마섬(군함도)에 잠입한 박무영(송중기 분)이 광복군 소속 OSS 요원이다. 이병돈은 1945년 4월 OSS 훈련반에 들어가 특수무기반을 수료했다. 국내정진군 사령관 이범석(1900~1972) 휘하에서 한반도 진격 명령을 기다리다가 작전 개시 일주일을 앞두고 광복을 맞았다. 예숙씨에 따르면 부친은 1946년 6월 귀국해 충북 청주에 정착했다. 정부가 독립유공자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곤궁하게 살았다고 한다. 1985년 9월 광복군 제2지대 직속상관이던 안춘생 당시 독립기념관 건립 추진위원장이 TV에 출연한 것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그에게 연락했다. 안 위원장은 부친의 서훈을 돕고자 직접 인우보증(다른 사람 행적의 사실 여부를 보증하는 것)을 서 줬다. 광복군 출신 인권변호사 태윤기(1918~2012)가 쓴 독립운동 수기 ‘회상의 황하’(1975)에도 부친의 이름이 광복군으로 소개돼 있어 유공자 지정에 어려움이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정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부친을 탈락시켰다. “객관적 사료가 부족하다”는 이야기만 앵무새처럼 반복할 뿐 구체적인 사유는 알려주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처음 서훈을 신청한 지 6년이 지난 1992년에야 어렵사리 건국훈장 애국장(4등급)을 받을 수 있었다. 현재 부친의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에 있다. 예숙씨는 “내가 아는 어떤 유공자의 후손은 ‘부친이 일본경찰을 위협하려고 삽을 휘둘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서훈을 받았다. 그런데 보훈 당국은 광복군에서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한 부친의 서훈 여부에 대해서는 늘 고압적 자세로 일관하며 제대로 된 설명 한 번 해 주지 않았다”면서 “정부의 무성의한 행정에 서운함이 크다. 지금이라도 사과를 원한다”고 전했다. ●친일파로 드러난 독립유공자 송세호·서춘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년을 맞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청산하지 못한 가짜 독립유공자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우리 정부의 부실한 검증이 빚어 낸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간 보훈 당국이 서훈을 잘못 승인하거나 거부한 사례가 적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18일 학계에 따르면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돼 있는 독립유공자 송세호(1893~1970)의 친일 의혹 규명 논란이 거세다. 그는 경상북도 선산에서 태어나 중국 상하이로 망명한 뒤 1919년 3·1운동 직후부터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임정에서 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했고 대한민국청년외교단 상하이지부장에도 선출됐다. 1931년에는 상하이에서 연초공장을 운영하며 임정에 군자금을 제공하기도 했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4등급)을 추서받았다. 그러나 최근 그가 1930년대부터 친일파로 돌아섰다는 증거가 나오고 있다. 1939년 7월 상하이에 근거한 독립의열단체 ‘남화한인청년연맹’ 관계자가 체포됐는데, 이때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보고된 ‘남화한인청년연맹 관계자 검거의 건’에는 송세호가 ‘일찍부터 일본의 밀정 행위에 종사한 친일 조선인’으로 기재돼 있다. 특히 그는 상하이에서 일본군 위안소로 추정되는 ‘극동 댄스홀’을 경영했다. 당시 일본은 신원이 검증된 민간인에게만 위안소 운영을 허가했다. 이들 자료가 사실이라면 우리 정부는 위안부 동원에 가담한 친일 밀정을 독립유공자로 서훈한 것이 된다. 가짜 독립유공자 송세호가 득세하고 진짜 독립운동가 이병돈이 홀대받던 현실을 우연으로 볼 수 있을까. 가짜 유공자가 생겨난 것이 단순 행정 착오나 일부 유공자 후손의 일탈로만 치부할 사안일까. 전문가들은 친일파가 자신의 과오를 씻고 독립유공자로 포장되는 데 저간의 사정이 있다고 설명한다.●“유공자 심사는 첫 단추부터 잘못 꿰어졌다” 지금의 독립유공자 포상제도는 박정희(1917~1979)가 정권을 잡고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이끌던 1962년 시작됐다. 대한민국 독립에 기여한 이들을 찾아내 부족한 정치적 정당성을 만회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하고 만주국군에 배치돼 항일무장세력을 토벌하던 친일 행적자다. 그가 최고회의 의장이 돼 독립유공자 서훈에 나서다 보니 자연스레 친일파 출신 학자·전문가도 유공자 선정 과정에 일부 참여했다. 유공자 심사가 ‘첫 단추부터 잘못 꿰어졌다’고 볼 수 있다. 친일문제 전문가인 정운현 국무총리비서실장이 1990년 월간 ‘말’에 기고한 ‘독립유공자로 둔갑한 친일파들’이란 글에는 당시의 실태가 자세히 묘사돼 있다. “독립유공자에 대한 첫 정부 포상이 실시된 1962년 문교부 독립유공자 공적조사위원회 위원 7명(위원장 포함) 중에는 (친일파) 신석호와 이병도가 들어 있었다. 이듬해인 1963년에는 내각사무처 독립운동유공자 상훈심의회가 심사에 나섰는데 심사위원 22명 가운데 고재욱과 신석호, 유광렬, 이갑성 등 4명이 친일 인사였다. 1968년에는 총무처 독립유공자 상훈심의회가 심사를 맡았는데 위원 21명 가운데 고재욱과 백낙준, 신석호, 유광렬, 이병도, 이선근, 홍종인 등 친일 인사가 7명이나 됐다. 1977년에는 원호처 독립유공자 공적심사위원회가 심사를 했는데 위원 11명 가운데 유광렬·이은상 등 2명이 친일파 출신이었다.” 우리 사회 전반에 친일청산 분위기가 퍼지면 자신을 지키기 힘든 친일파들이 독립유공자를 제대로 평가하려고 노력했다고 보기 어렵다. 이병돈의 사례처럼 이들이 진짜 독립운동가를 심사할 때는 더 까다롭고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 탈락을 유도한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제기된다.●친일파끼리 과오 덮고 유공자 포장 의혹도 또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을 받은 서춘(1894~1944)은 1919년 2·8 독립선언에 참여했지만 훗날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주필 등을 지내며 일제의 침략전쟁을 미화했다. 당시 그에 대한 서훈을 심사한 독립운동유공자 상훈심의회가 이런 사실을 몰랐을 리 없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심의회는 서춘의 친일 행적을 외면하고 그를 독립유공자로 인정했다. 이는 지금도 친일파가 같은 친일파를 챙겨 주고자 서훈 제도를 악용한 것으로 의심받는 사례 가운데 하나다. 독립운동사 전문가인 김주용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교수는 “가짜 유공자들이 누리던 온갖 영예와 혜택을 걷어내 우리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봉오동전투 최진동, 임정 김희선… 민낯 드러난 가짜 유공자

    봉오동전투 최진동, 임정 김희선… 민낯 드러난 가짜 유공자

    2017년 8월 우리 사회에 놀라운 소식 하나가 전해졌다. 한 70대 시민이 ‘자신의 증조할아버지가 가짜 독립유공자였다’는 사실을 솔직히 밝혀 정부로부터 이를 인정받은 것이다. 조상의 독립운동을 부풀리는 사례는 허다했지만, 그 반대로 조상의 허위 공적을 스스로 바로잡은 것은 처음이었기에 화제가 됐다. 주인공은 독립유공자에 이름을 올렸던 김정필(1846-1920)의 증손자 김종갑(77)씨. 그는 2015년 용기를 내 광복회 대전충남지부 김영진 감사를 찾아가 오랜 세월 숨겨온 이야기를 털어놨다. 국가보훈처의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따르면 김정필은 충남 대덕 출신으로 1907년 의병장 한봉수(1883~1972)의 밑에 들어가 경기 용인, 여주 등에서 격전을 치렀다. 중국 만주로 망명한 뒤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에 참가했다가 일본 경찰에게 살해됐다. 1968년 김씨의 당숙(아버지의 사촌형제)이 서훈을 신청했고 정부는 대통령 표창을 수여했다. 1991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4등급)도 추서했다. 하지만 종갑씨는 모든 것이 이상했다. 자신의 증조부가 그토록 엄청난 활동을 했는데도 집안 사람 누구도 이를 알지 못했다. 증조부가 봉오동 전투에 참가했던 나이도 75세로 격한 신체활동을 하기 힘들 때였다. 공훈록에는 그가 1920년 사망했다고 나오지만 실제 증조부는 1925년 세상을 떠났다. 알고 보니 당숙이 보훈 연금을 타내려고 똑같은 행적의 동명이인 공훈을 가로채 서훈을 신청한 것이었다. 진실을 알게 된 종갑씨는 고민 끝에 국가보훈처에 “증조부에 대한 서훈을 취소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사실이 아닌 것을 묻어두는 것이야말로 선대를 욕보이는 죄악이다. 정부가 유공자 전수조사를 실시한다는 소식이 들리는데 ‘가짜 유공자’ 논쟁을 없애는 계기가 돼야 한다”면서 “가짜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하루빨리 서훈을 자진 반납하고 역사를 바로잡는 데 동참하길 바란다”고 전했다. ●공식적 서훈 취소 ‘가짜 유공자’는 39명 과거를 청산하고 미래로 나아가자는 목소리가 높지만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올해에도 독립유공자를 둘러싼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이름 없는 독립운동가들을 발굴하는 작업도 중요하지만 ‘가짜’들을 솎아내 역사의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도 소홀히 해선 안 된다고 학계와 시민사회는 입을 모은다. 아직도 수많은 가짜 독립운동가가 버젓이 예우받는 것이 ‘불편한 진실’이기 때문이다.●보훈처, 서훈자 1만 5180명 전수조사 17일 보훈처가 내놓은 ‘독립유공자 서훈 취소 현황’을 보면 지금까지 공식적으로 서훈이 취소된 ‘가짜 독립유공자’는 39명이다. 2011년에는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2005~2009)가 내놓은 반민족행위자(1006명) 명단을 토대로 허위 공적자 19명에 대한 서훈을 취소했다. 2017년에도 동일인 중복 서훈 등 가짜 유공자 15명을 추려냈다. 지난해 2월에는 동아일보 설립자 김성수(1891~1955)의 서훈이 박탈됐다. 학계에서는 아직도 드러나지 않은 가짜 독립유공자가 100명이 넘을 것으로 본다. 이용창 민족문제연구소 편찬실장은 “과거 자료가 워낙 부실하다 보니 같은 공적으로 이중 포상이 이뤄진다거나 흠결이 있는 분들까지도 잘못 서훈된 사례가 많았다”고 설명했다.●공적 도용 등 가짜 유공자 30~40명 추가 가짜 유공자 논란이 끊이지 않자 보훈처는 지난해 11월 “서훈자 1만 5180명에 대해 전수조사를 벌이겠다”고 약속했다. 1976년 이전 서훈자 가운데 우선 검증 대상 587명에 대한 1차 조사 결과를 먼저 발표한다. 이들 587명은 1949~1976년에 당시 문교부와 총무처가 서훈한 독립유공자 가운데 1990년 재검증에서 빠진 이들이다. 과거에는 건국훈장이 3등급(중장, 복장, 단장)이었다가 1990년부터 5등급(대한민국장, 대통령장, 독립장, 애국장, 애족장)으로 확대됐다. 이때 보훈처는 새로 생겨난 4~5등급(애국장, 애족장)에 해당하는 이들을 선정하고자 일부 유공자에 대해 재검증 작업을 벌였다. 그간 유공자 전수조사를 주장해 온 윤석경 전 광복회 대전충남지부장은 “이번이야말로 역사를 바로 세우고 보훈처가 신뢰를 얻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강조했다. 학계에 따르면 보훈처는 이번 조사에서 독립운동 행적이 지나치게 부풀려지거나 남의 공적을 도용한 가짜 유공자 30~40명 정도를 추가 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주요 인물로는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고위직을 지낸 김희선(1875~1925)과 봉오동 전투의 주역으로 알려진 최진동(1883~1945) 등이다. ●김희선의 상하이 임시정부 행적 지나치게 과장 김희선은 조선 말기 육군참령(소령)으로 활동하다가 1907년 일제가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하자 항전을 주도했다. 평안도 안주군수로 있다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관직을 버리고 중국 상하이로 탈출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해 군무부차장(국방부차관)을 지냈고 1920년 만주로 건너가 대한청년단연합회·대한독립단·서로군정서를 통합한 대한광복군총영을 설치했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이 추서됐다. 그는 1925년 지린성 지안현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백범일지에는 그가 “임정 군무부차장 때 일본군에게 항복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고 적혀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중국에서 그의 행적이 지나치게 과장됐다”고 주장해 왔다. 최진동은 함경북도 온성 출생으로 중국 만주로 망명해 1919년부터 청년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켰다. 1920년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 제19사단 보병부대와 교전해 500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뒀다. 이후에도 북간도와 시베리아 등지에서 무장항일운동을 이어 갔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이 추서됐다. 하지만 그는 1937년 중일전쟁에서 일본의 위력을 확인한 뒤 돌연 친일파로 변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군 토벌대의 선두가 돼 항일무장세력 진압에 앞장섰고 자신의 독립운동 과거를 속죄하고자 일제에 거액의 국방헌금을 냈다는 의혹도 있다. 막대한 재산으로 독립운동과 친일행각을 동시에 벌인 것으로 의심받는 인물이다. 이에 대해 최진동의 유족은 “(친일 의혹은) 몇몇 학자들이 감정에 기반해 작성한 그릇된 자료가 바탕이 됐다”면서 “특히 일제의 비행기 제조를 돕고자 헌금을 했다는 일부의 주장은 터무니없다”고 반박했다. 정부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올해 가짜 유공자 전수조사에 착수했다. 하지만 친일 행적 인물들의 현충원 안장 문제는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되고도 국립묘지에 묻히는 이들이 해마다 늘고 있다. 보훈처와 민족문제연구소 등에 따르면 현재 서울현충원에만 친일 인사 37명이 안장돼 있다. 이 가운데는 국가기관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된 인물도 7명이나 있다. 이들은 공식적으로 친일 행위가 확인됐음에도 여전히 현충원에서 진짜 독립유공자들과 함께 있다. 7명 가운데 한 사람인 이종찬(1916~1983)은 일본육군사관학교를 나와 1942년 2월 일본군 최고 영예인 금치훈장을 받을 정도로 일제에 협력했다. 그럼에도 해방 이후 육군참모총장을 지냈다는 이유로 현충원에 묻혔다. 2015년 9월 안장된 김홍준(1915~1946)은 만주국이 세운 간도특설대에서 항일무장세력을 소탕하는 데 가담했다. 하지만 그 역시 대한민국 국방경비대총사령부 근무 경력을 인정받아 국립묘지 안장 자격을 얻었다.●‘김구 암살 배후 의혹’ 김창룡도 국립묘지에 대전현충원에 안장된 친일인사 28명을 더하면 그 수는 65명으로 늘어난다. 대전현충원에 있는 친일 인사 가운데 일본군 헌병 오장(분대장) 출신 김창룡(1920~1956)은 김구(1876~1949) 암살의 배후에 있었다는 의혹을 받는다.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 관계자는 “현충원에 반민족·민주행위자들이 버젓이 묻혀 있는 것은 민족정기를 훼손하는 것”이라며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을 하루빨리 개정해 이미 안장돼 있는 자도 이장을 강제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美 “제3국에 먼저 망명 신청하라”… 주변국에 캐러밴 떠넘기기

    멕시코 “美 일방적 조치 동의 못해” 반발 시카고도 “불법 체류자 검거 협조 안 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자국으로 들어오는 중미 이민자 행렬(캐러밴)로 하여금 제3국에서 망명 신청을 하도록 함으로써 사실상 미국 망명을 제한하는 규정을 내놨다. 관련국들은 강력하게 반발했다. 15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NYT) 등 외신은 미 법무부와 국토안보부가 공동 성명을 통해 중미 이민자들의 망명 신청을 대폭 제한하는 새로운 규정(IFR)을 발표했다고 전했다. 월리엄 바 법무부 장관은 성명에서 “미국은 관대한 국가지만 남쪽 국경의 수십만명의 외국인을 체포하고 처리하는 부담에 완전히 압도됐다”면서 “새 규정이 시행되면 미국에 입국하고자 망명 시스템을 이용하는 이들이 줄어들 것”이라고 강조했다. 케빈 매컬리넌 국토안보부 장관대행도 “미국 이민을 촉발하는 주요 요인을 줄이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새 규정이 마련되면 온두라스·엘살바도르 이민자들은 과테말라나 멕시코에서, 과테말라 이민자들은 멕시코에서 정치적 망명 신청을 해야 한다. NYT는 “이민자가 최소 1개국에 망명을 요청했다 거부당했다는 증빙이 있으면 미 남부 국경에서 미국으로의 망명 신청을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멕시코는 이러한 조치에 즉각 반발했다. 마르셀로 에브라르드 멕시코 외교부 장관은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미국의 일방적인 조치에 동의하지 않는다”면서 “미국에 거부당한 망명 신청자들을 위한 쓰레기 처리장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미국과 ‘안전한 제3국’ 협정을 체결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하면서도 이를 위해서는 의회의 사전 승인이 필요하다고 언급하며 한발 물러서는 모양새를 보였다. 멕시코 현지에서는 미국이 자국으로 망명하려는 이민자를 관세 부과 등 경제력을 이용해 주변 약소국에 떠넘기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한편 트럼프 행정부가 지난 13일 미국 9개 대도시를 대상으로 대대적인 불법 체류자 검거 작전에 나선 것에 대해 뉴욕과 LA에 이어 시카고에서도 협조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로리 라이트풋 시카고 시장은 워싱턴포스트에 보낸 공개서한을 통해 “트럼프 행정부는 현재 추진하고 있는 ‘유해한 정책’을 재고해 달라”고 촉구했다. 민나리 기자 mnin1082@seoul.co.kr
  • ‘남한판 황장엽’ 아들 월북… “北서 거주”

    ‘남한판 황장엽’ 아들 월북… “北서 거주”

    73세 최인국 “부모님 간곡한 유지대로 조국 통일 위업 실현에 여생 바치겠다” 12차례 방북… 이번엔 정부 승인 안 받아 박정희 대통령 시절 외무장관 최덕신 1976년 美망명… 10년 뒤 부인과 월북1986년 월북해 북한 고위직을 지낸 최덕신·류미영 부부의 차남 최인국(73)씨가 지난 6일 북한에서 영원히 살기 위해 입북했다고 북한 대남선전매체 ‘우리 민족끼리’가 7일 보도했다. 최씨는 평양 도착 소감을 통해 “선친의 유해가 있는 공화국에 영주하기 위하여 평양에 도착했다”며 “부모님의 간곡한 유지대로 경애하는 김정은 국무위원장님의 영도를 받들어 조국통일 위업 실현에 여생을 다 바치려 한다”고 밝혔다고 매체는 전했다. ●부모·조부·수양외조부 등 평양 애국열사릉에 최덕신은 1945년 해방 후 한국에서 육군사관학교 교장과 제3사단장, 제1군단장을 거쳐 육군 중장으로 예편했다.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집권하자 그해 10월 외무부 장관에 임명됐다. 1963년부터 4년간 서독주재 대사를 지냈다. 이후 박 전 대통령과의 갈등 등으로 1976년 아내 류미영과 미국으로 망명했으며 1986년 아내와 함께 월북했다. 그는 북한에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장 등으로 활동했으며 1989년 숨졌다. 류미영은 남편 사망 후 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장 등을 지냈으며 2000년 8월에는 북한 이산가족 방문단 북측 단장을 맡아 서울을 방문했다. 당시 류미영은 한국에 있던 차남 최인국씨와 막내딸 최순애씨를 만나기도 했다. 최덕신·류미영 부부는 2남 3녀를 뒀는데 장남 최건국씨는 독일에 거주하다 숨졌으며 세 딸은 현재 외국에 살고 있고 한국에는 최씨만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류미영은 2016년 11월 폐암 투병 중 숨졌다. 최씨의 부모와 조부, 수양 외조부, 이모할머니 등 다섯 명은 평양 애국열사릉에 안치돼 있다. 최씨의 할아버지 최동오는 임시정부 법무부장 등을 지냈고 수양 외할아버지 유동열은 광복군 참모총장으로 활동했다. 류미영은 유동열의 수양딸이다. 류미영의 이모 류영준도 항일단체 근우회를 조직했으며 북한에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 등을 역임했다. ●최씨, 가족 상봉·성묘하러 18년간 방북 한국 국적을 갖고 있는 최씨는 2001년 이후 가족 상봉과 성묘 목적으로 모두 12차례 방북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6년 류미영이 숨지기 직전 임종을 지키려 방북했으며 2017년과 2018년 류미영의 1·2주기 행사 참석차 다시 북한을 찾았다. 최씨는 지난 12차례 방북과 달리 이번에는 정부의 승인을 받지 않았다고 정부 관계자는 전했다. ●남쪽서 월북자 자식으로 낙인찍혀 어렵게 생활 최씨는 한국에서 ‘월북자의 자식’으로 낙인찍혀 정권의 감시하에 직장생활도 제대로 못하며 어렵게 살아 왔다. 십수년 전 부인과 이혼하고 슬하의 아들 둘하고도 오래전 인연이 끊긴 것으로 전해졌다. 최씨는 최근까지 천도교 산하 동학민족통일회 대외협력위원장으로 활동했다. 동학민족통일회 관계자는 “최씨가 최근 개인 사업을 했지만 생계는 어려웠던 것으로 알고 있다”며 “북한이 고향이기도 하고 부모님 묘도 있으니 여생을 그곳에서 보내고자 북한에 자발적으로 간 것 같다”고 했다. 한국 국민이 공개적으로 북한으로 영주한 것은 이례적이다. 1997년 오익제 전 천도교 교령이 공개 월북한 후 북한은 최근 자진 월북한 한국 국민을 대부분 돌려보냈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또다른 난민 구호선 伊 람페두사 입항 “견딜 수 없는 상황”

    또다른 난민 구호선 伊 람페두사 입항 “견딜 수 없는 상황”

    이탈리아 정부의 입항 금지 조치에도 불구하고 또다른 난민 구호선 알렉스가 41명의 이민 희망자들을 태우고 람페두사 항구에 들어와 닻을 내렸다. 알렉스 호 선장은 위생 상태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상황이 됐다며 그동안 머무르던 국제 수역을 떠나 시칠리아 섬 바로 위에 있는 람페두사 항만에 접안하는 데 성공했다. 다만 아직 이민 희망자들이 하선하지는 않은 상태라고 영국 BBC가 6일(현지시간) 전했다. 이 배는 난민을 돕는 메디테라니아 자선재단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이 재단은 트위터를 통해 지칠 대로 지친 선원들이 믿기지 않는 상황에 살고 있으며 이렇게 대기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불필요한 잔인함”이 가중된다며 당국의 불허 결정을 무릅쓰고 입항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지난해부터 마테오 살비니 이탈리아 부총리 겸 내무장관은 난민을 구조하는 선박의 이탈리아 항만을 불허하고 이를 위반해 허가를 받지 않고 해역을 항해하는 모든 이에게 벌금을 물리겠다고 공언했다. 앞서 2주 동안 국제수역에 머무르던 난민 구호선 시 와치(Sea-Watch) 3호가 지난주 람페두사 항에 입항한 지 일주일 만에 알렉스 호가 같은 항구에 닻을 내린 것이다. 독일인 여자 선장 카롤라 라케테는 입항 과정에 경찰 순시선을 들이받으려 했다는 이유로 체포됐다가 법원의 결정으로 풀려났지만 여전히 인신매매, 공무 집행 방해 등의 혐의로 기소된 상태다.독일의 자선재단 시 아이(Sea-Eye)가 운영하는 또 다른 비정부기구(NGO) 선박인 알란 쿠르디도 이민 희망자 65명을 태운 채 람페두사 항만 밖 국제수역에 머무르고 있다. 지난 2월 현지 언론 보도에 따르면 지난해 8월부터 올해 1월까지 이탈리아 정부가 망명을 불허한 사례가 2만 4800건이나 된다. 또 일간 코리에레 델라 세라가 6일 보도한 바에 따르면 살비니 부총리의 난민 구호선 입항 금지 조치를 찬성하는 이탈리아 국민은 전체의 59%를 차지한다. 이탈리아는 유럽에서 생활하는 것을 유일한 삶의 탈출구로 여기는 아프리카 출신 이민 희망자들이 지중해를 건너오는 주요 통로로 삼고 있어 이를 차단하고 통제하는 데 골머리를 앓고 있다. 최근 들어 이민 브로커들이 아예 이들 난민 구조선이 기다리는 리비아 앞 바다에 이민 희망자들이 표류하거나 조난하는 사고를 방관하거나 유도하고 난민 구조선에 태워 유럽 대륙에의 첫발을 이탈리아에 딛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시각을 이탈리아 정부나 국민들이 갖게 됐다. 지난달부터 이탈리아 항구에 허가를 받지 않고 입항한 난민 구호선 등에 물린 벌금은 5만 유로에 이르렀다. 국제이민기구(IOM)는 올해 들어 지중해에서 681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426명이 리비아와 튀니지를 통해 이탈리아로 입국하려던 이들이었다. 한편 호르스트 제호퍼 독일 내무장관은 이날 살비니 부총리 겸 내무장관에게 서한을 보내 난민구조선에 항구를 개방해달라는 요청을 했다고 dpa 통신이 보도했다. 제호퍼 장관은 서한을 통해 “지중해에 떠 있는 선박이 들어갈 항구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구조된 난민을 태운 선박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유럽에서 우리는 공통적인 기독교적 가치를 갖고 있다”면서 “선원과 선박이 어느 국적인지, 이주자들이 어떤 단체에 구조됐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대만 정부 “홍콩시민 이민 문의 쇄도… 정치적 망명 신청 없어”

    대만 정부 “홍콩시민 이민 문의 쇄도… 정치적 망명 신청 없어”

    홍콩 대학생, 정부의 “조용한 대화” 요구 거절홍콩 정부 “강경 시위자 ‘순교자 각오’로 나서”‘범죄인 인도 법안’(일명 송환법)에 반대하는 홍콩 시위 이후 대만의 중국 담당부처에서 홍콩 시민의 대만 이민 등에 관한 문의가 늘고 있다고 밝혔다. 대만의 중국 담당부처인 대만 대륙위원회의 추추이정(邱垂正) 대륙위원회 대변인은 4일 오후 정례브리핑에서 대륙위원회와 주홍콩 ‘타이베이경제문화판사처’가 대만 이민과 거주 관련 문의를 전화와 이메일로 받았다고 말한 것으로 연합보 등 대만언론이 보도했다. 추 대변인은 이는 최근 홍콩의 불안한 상황과 함께 앞으로 인권, 자유, 법치의 훼손에 대한 우려 때문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하지만 반중 시위 이후 정식으로 ‘홍콩·마카오 관계 조례’의 18조에 의한 정치적 망명을 신청한 개별 사례는 아직 없다고 덧붙였다. 홍콩·마카오 관계 조례 제18조는 정치적 원인으로 안전과 자유에 긴급한 위험과 피해를 입은 홍콩이나 마카오 거주민에 대해 필요한 지원을 한다. 추 대변인은 홍콩인의 사회적 역량과 자유민주를 쟁취하려는 결의에 경의를 표한다면서 홍콩 정부와 각계가 이성과 평화적인 대화를 통한 합의 도출로 홍콩의 번영과 안정을 유지하길 바란다고 언급했다.일각에서는 홍콩인의 대만 이민 등의 행렬이 실제로 나타난다면 ‘하나의 중국’ 원칙을 고수하는 중국의 대만에 대한 압박이 더욱 강해질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이와 관련해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에 따르면 홍콩 정부는 학교 행정 당국을 통해 홍콩과기대(HKUST)와 홍콩중문대 학생 대표들과 대화하자고 제의했다. 이에 대해 중문대 학생회장인 잭키 소는 “우리는 그것(대화)이 단지 홍보 쇼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며 “우리 요구가 수용될 때에만 (대화에 응하는 것을) 고려할 수 있다”고 말했다. 대학생들이 홍콩 당국과의 사적인 만남을 사실상 거절한 것이다. 한편, 홍콩 정부는 소수의 강경 시위 그룹이 ‘순교자’가 될 각오로 시위에 나서고 있다면서 이들이 향후 입법회 점거보다 더욱 대담한 행동에 나설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SCMP가 별도 기사에서 전했다. 한 정부 소식통은 “앞에 선 시위대는 희생을 작정한 듯이 너무나 폭력적이었다”며 “그들은 경찰이 그들에게 고무탄이나 빈백 사격 같은 공격적 행동을 하기를 원했다”고 말했다. 빈백 건은 알갱이가 든 주머니 탄으로 공격 상대방에 타박상을 입힐 수 있는 무기다.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노르웨이 前장관 “영주권 줄게” 동성 성폭행 파문

    노르웨이 前장관 “영주권 줄게” 동성 성폭행 파문

    노르웨이 유력 정치인이 권력을 이용해 동성 망명 신청자 3명에게 성관계를 강요한 혐의에 대해 유죄판결을 받았다.4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NYT) 보도에 따르면 노르웨이 법원은 어업부 장관, 트롬스 주지사를 지낸 스벤 루드빅센(72)에게 27일 징역 5년을 선고했다. 루드빅센 전 주지사는 주지사 시절 자신이 망명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없음에도 권한이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법정 증언에 따르면 그는 2011~2017년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온 세 남성을 성적으로 학대했는데 이들 중 한 명은 루드빅센을 처음 만났을 때 17살에 불과햇으며, 다른 한 명은 지적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피해자들은 자신들이 추방을 당하거나 노르웨이 영주권을 얻을 수 있을지는 루드빅센의 요구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확신했다. 인권단체들은 재판에서 드러난 성적 학대가 세계에서 인권 지도자로서 자질을 홍보하는 나라인 노르웨이에서 이민자 학대의 광범위한 문제를 보여주는 극단적인 예라고 설명했다. 앤 매그리트 오스테나 노르웨이 난민기구 사무총장은 “이번 판결은 젊은 망명 신청자들과 난민들의 취약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판결”이라면서 “루드빅센의 행동은 폭력적인 신뢰 위반”이라고 지적했다. 루드빅센은 2001~2005년 중도우파 정부에서 어업부 장관을 지냈으며, 2006~2014년 정계 은퇴까지 노르웨이 북부 트롬스 주지사로 일했다. 법원은 루드빅센에게 징역형과 별도로 피해자들에게 총 74만 3000 노르웨이크로네(약 1억원)를 배상하라고 명령했다. 루드빅센의 변호인은 이번 판결에 항소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에 대한 징역형은 이르면 연말 항소심이 끝나야 시작될 것으로 전망된다. 김민석 기자 shiho@seoul.co.kr
  • 美법원 北대사관 습격 크리스토퍼 안 보석 허가, 곧바로 풀어주진 않아

    美법원 北대사관 습격 크리스토퍼 안 보석 허가, 곧바로 풀어주진 않아

    지난 2월 스페인 주재 북한대사관 습격에 가담한 한국계 미국인 크리스토퍼 안(38)의 보석 요청이 미국 법원에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곧바로 풀려나지는 않았다. 로스앤젤레스(LA) 연방지방법원의 진 로젠블루스 판사는 2일(현지시간) 100만 달러(약 11억원)의 보석금을 내면 크리스토퍼 안이 풀려날 수 있다고 조건부 허용했다. 로젠블루스 판사는 스페인에 그를 인도하면 목숨을 잃을 위험이 있다는 점도 인정했다. 또 그가 법정에 출석하지 않으면 그와 가까운 3명을 형사기소할 수 있다는 조건도 붙였다. 로젠블루스 판사는 “북한 정부가 크리스토퍼 안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는 점을 연방수사국(FBI)이 확인했다. 그는 독재정권의 명백한 살해 표적”이라며 보석 허가 이유를 밝혔다. 이어 그가 스페인으로 송환되면 “북한 측의 암살이나 상해 위협을 느낄만한 이유가 있어 보인다”고 덧붙였다. 미국 폭스뉴스는 크리스토퍼 안이 소속된 반북단체 ‘자유조선’이 북한 고위급 인사의 망명을 돕고 임시정부를 자처해 왔기 때문에 북한 정권으로부터 사실상 ‘사형 선고’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전직 미국 해병대원인 크리스토퍼 안은 북한대사관 습격 사건에 가담한 7명의 용의자 중 한 명으로 지난 4월 LA에서 체포됐다. 그의 변호인인 임나은 변호사는 “실제 석방까지 거쳐야 할 단계가 많이 남았지만, 법원의 조건부 석방 결정이 아주 기쁘다”면서 “앞으로 열릴 신병 인도 공판에서 적극적으로 이의를 제기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어 “스페인의 인도 요청 문서는 크리스토퍼 안의 혐의 대부분이 북한 고위 당국자의 입증되지 않은 진술에 근거한다”며 “(습격 당시) 누가 묶여 있었으며, 어떻게 (대사관 직원들이) 전부 풀려났는지 등 많은 모순점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자유조선의 변호인단도 북한 외교관들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크리스토퍼 안과 습격 주도자로 알려진 에이드리언 홍 창의 폭력 혐의를 꾸며냈다며 강하게 비난했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 UAE 두바이 통치자의 부인 하야 공주, 왜 런던에 숨어 지낼까

    UAE 두바이 통치자의 부인 하야 공주, 왜 런던에 숨어 지낼까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 통치자(에미르)의 부인이 목숨을 잃을 것이 두려워 영국 런던에 머무르고 있어 밀접한 두 나라 외교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다고 영국 BBC가 2일(이하 현지시간) 전했다. 2004년 셰이크 무함마드 알막툼(69)과 결혼한 요르단 왕실의 하야 빈트 알후세인(45) 공주가 주인공. 남편의 여섯 번째 부인이자 가장 어린 배우자였다. 남편은 여러 부인들과의 사이에 23명의 자녀를 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국 도셋의 브랸스톤 학교를 다닌 뒤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할 정도로 영국 생활이 익숙하다. 압둘라 요르단 국왕의 배다른 누이이기도 하다. 영국 여왕이 매번 참석할 정도로 권위있는 경주마 대회인 애스콧 대회에 2012년 나란히 참석해 여왕 부부와 인사를 나눴다. 영국에서 유명한 경주마 마굿간 고돌핀의 주인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금은 남편으로부터 달아나 런던에서 숨어 지내며 두바이에 돌아가면 목숨을 잃을지 모른다고 얘기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실제로 남편 셰이크 무함마드는 인스타그램에 이름을 밝히지 않은 여인으로부터 “반역과 배신”을 당했다는 분노의 시를 올려놓은 적이 있다. 하야 공주는 올해 초 독일로 달아나 망명을 신청했다. 지금은 런던 한복판 켄싱턴 팰리스 가드의 8500만 파운드(약 1252억원) 나가는 타운하우스에서 지내고 있다. 그녀는 대법원에 소송을 걸 준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방송은 전했다.그러면 그녀는 왜 두바이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마다하고 런던에서 숨어 지낼까? 남편의 딸들 가운데 한 명이자 지난해 아버지로부터 달아나 각국 언론의 화제가 된 셰이카 라티파가 고국에 돌아오는 과정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된 것이 계기가 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라티파 공주는 한 프랑스 남자의 도움을 받아 바다를 통해 UAE를 떠나는 데 성공했으나 인도 앞바다에서 무장군인에게 붙잡혀 두바이로 돌아왔다. 두바이 당국은 공주가 “이용당하는 데 취약했다”며 “지금은 두바이에서 안전하다”고 밝혔지만 인권단체들은 딸의 의사와 관계없이 강제로 끌고 간 것이라고 비난했다. 당시 두바이 당국이 어쩔 수 없다고 공개적으로 나서 변호하기도 했던 하야 공주는 그 뒤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고 남편 집안과도 계속 관계가 틀어지고 험악해지자 더 이상 두바이가 안전하지 않다고 여기게 됐다는 것이다. 그녀와 가까운 소식통은 자신도 라피나 공주처럼 납치당해 두바이로 송환될까봐 두려워하고 있다고 말했다. 런던 주재 UAE 대사관은 부부 사이의 일이라 언급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녀의 런던 체류는 조금 더 복잡한 국제관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선 셰이크 무함마드가 하야 공주를 UAE로 돌려보낼 것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어 영국 정부는 골머리를 앓고 있다. 요르단 왕실도 난감하기 짝이 없다. UAE에서 일하며 본국으로 송금하는 요르단인이 25만명 가까이 되기 때문이다. 두바이와 갈등을 감당해낼 자신이 없는 것이다. 요르단으로선 두바이에 시집 간 공주가 얌전히 남편 곁으로 돌아가는 것이 최상인 상황이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하녀…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50여년 전 걸작들이 쏟아졌다

    하녀…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50여년 전 걸작들이 쏟아졌다

    1960년대는 한국영화의 중흥기로 명명된다. 아직 텔레비전이 대중화하지 않은 시기, 영화는 대중문화 영역에서 가장 사랑받는 매체였고 한국의 할리우드라 불린 서울의 충무로3가 일대는 제작자와 지방흥행업자, 감독과 각 분야의 스태프 그리고 스타와 스타를 꿈꾸는 젊은이들로 활기가 넘쳤다.‘르네상스’라는 이름에 걸맞게 1960년대는 무려 1500편이 넘는 한국영화가 만들어졌다. 1962년 113편이었던 제작편수는 1965년 189편을 기록했고 1968년부터는 한 해에 무려 200편이 넘는 영화가 제작됐다. 이러한 양적 성장을 뒷받침한 것은 다양하게 시도된 장르였다. 멜로드라마, 코미디, 스릴러액션 등 대중적 장르영화부터 한국식 작가주의 영화라고 할 문예영화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영화들이 만들어져 한국영화의 황금기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하지만 그 이면에 국가 주도의 영화기업화 정책이 가동되고 있었던 것도 놓치지 않아야 한다. 이번 연재는 1960년대 전반기의 한국영화계를 살펴본 후 1960년대 초부터 두각을 나타낸 한국영화사의 거장 신상옥, 유현목 그리고 김기영의 작품 세계를 소개하기로 한다. ●4·19와 5·16 사이 제작된 ‘오발탄’ 등 시대 반영 1960년 4·19 혁명과 1961년 5·16 군사정변 그리고 1년 7개월간의 군정에 이은 1963년 12월 제3공화국의 출범까지, 영화계 역시 한국 근대사의 정치적 격변기와 연동될 수밖에 없었다. 먼저 4·19와 5·16 사이,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영화계는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1960년 8월 영화윤리전국위원회가 만들어져 영화검열 업무가 민간으로 이관된 것이 결정적이다. 위원장 이청기, 부위원장 이진섭, 전문위원 허백년, 최일수 등의 이름에서 당대 문화계 지식인들이 대거 참가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한국영화사상 처음으로 설립된 민간 자율 심의기구는 5·16 군사쿠데타와 함께 해체되고 만다. 그간 한국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작품들이 등장한 것도 이 시기의 주목할 지점이다. 대표적으로 ‘오발탄’(유현목), ‘마부’(강대진),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신상옥), ‘삼등과장’(이봉래), ‘현해탄은 알고 있다’(김기영) 등 한국영화사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작품들이 1961년의 관객들과 만났다. 이 영화들은 기존의 한국영화를 넘어서는 현실 비판적 주제와 대담한 표현으로 관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한편 전통과 근대적 가치가 경합하는 양상을 포착하며 깊은 공감을 끌어냈다. 특히 ‘오발탄’은 5·16 이후 상영 중지 등 정치적 고초를 톡톡히 겪었다. 당시 심의 서류에 따르면 영화 전반의 어두운 분위기 즉 “예술적인 견지에서는 우수하나 5·16 이전의 사회악과 국민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그대로 노출”한 것이 문제가 됐다. ●급격한 근대화에 기반한 성장… 내면은 부실 군사정권은 강력한 국가 주도의 산업화를 추진했고 영화계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1961년 9월 군소 영화제작사 72개사를 16개사로 통합한 데 이어 1962년 1월 20일 최초의 영화법이 제정·공포됐다. 1963년 3월 영화법 1차 개정은 영화산업의 기업화를 정부가 주도하는 제도적 근거가 됐다. 목표는 안정적인 제작 시스템 구축이었지만 실질적인 체질 개선이 힘들다 보니 정부 주도의 인위적인 정책이 대신했다. 대표적인 것이 영화사 등록 요건의 강화이다. ‘35밀리 이상 촬영기, 조명기, 건평 200평 이상의 견고한 시설로 된 스튜디오, 녹음기, 전속의 영화감독·배우 및 기술자’를 구비해야 영화업자로 등록할 수 있었고 연간 15편 이상의 제작 실적을 유지하지 못할 경우 등록을 취소당할 수 있었다. 이에 1963년 6월 21일 한국의 영화사는 순식간에 극동, 한양, 한국영화, 신필름의 4개사로 정리되고 만다. 국책에 의한 영화기업화는 여러 부작용을 낳았다. 등록된 영화사들은 등록 유지를 위해 형식적으로만 조건을 채우기 일쑤였고 개인 프로덕션의 자율적인 창작 활동은 원천적으로 봉쇄됐다. 사실 영화법에 의해 등록된 영화사가 서류상 올린 감독, 배우, 기술진은 대부분 허위였고 연간 15편 이상의 극영화 제작 실적은 등록제작사의 자체 제작보다는 군소 프로덕션의 ‘대명제작’으로 채우는 것이 현실이었다. 즉 등록이 힘든 영화사가 등록된 제작사와 계약해 그 회사의 이름으로 영화를 만드는 것이 당시 한국영화계의 가장 일반적인 제작 방식이었다. 급기야 영화인협회가 중심이 된 영화법폐기촉진위원회가 1964년 3월 영화법 폐기를 건의하며 나섰고 결국 1966년 8월 영화법 2차 개정 때 가장 현실성이 없었던 녹음시설 및 감독, 배우, 기술자 전속제에 관한 규정만 삭제된다. 이처럼 1960년대 한국영화의 전성기는 국가 주도의 근대화에 기반하고 있었다. 한국영화계 역시 급격히 확대된 외양에 비해 그 내면은 부실한 상황을 연출하며 이른바 한국식 근대화의 특징적 모습들을 공유하고 있었다. 특히 흑백 시네마스코프(와이드스크린)나 후시녹음 등 기술적인 부분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서구영화의 일반적인 기준인 컬러 시네마스코프 화면은 1960년대 후반에야 정착할 수 있었고 영화 속 인물들의 목소리는 실제 촬영 현장의 배우가 아닌 녹음실 성우들의 후시녹음으로 대체됐다. 하지만 이는 당시 한국의 경제 상황에 맞게, 영화계가 가장 합리적인 제작 방식을 모색한 것으로도 평가할 수 있다. 이제 1960년대 초에 두각을 나타낸 한국영화사의 특별한 감독 세 명을 살펴볼 차례다.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상업성과 예술성 어느 쪽도 놓치지 않는 대중적 작가주의를 실천하며 1960년대 한국영화계를 주도하게 된다. 바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의 신상옥, ‘오발탄’(1961)의 유현목 그리고 ‘하녀’(1960)를 연출한 김기영이다. 이들은 한국영화사의 걸작들로 평가받는 작품들을 내놓으며 1960년대 르네상스의 폭과 깊이를 두루 만족시키고 있었다.●영화산업의 ‘최전선’에 섰던 감독 신상옥 신상옥(1926~2006)은 영화사 신필름의 대표이자 감독으로 1960년대 한국영화계를 주도한 인물이다.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나 외국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에 거부감이 없었던 그는 나운규와 찰리 채플린을 영화적 스승으로 꼽을 정도로 어릴 적부터 영화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고 한다.그가 직접 가르침을 받은 감독은 최인규다. 해방 직후 ‘자유만세’(1946)를 보고 감명을 받은 그는 ‘죄없는 죄인’(1947) 등 최인규의 이후 작품에 참가해 영화를 배운다. 감독 데뷔는 6·25전쟁 시기 피란 도시 대구에서 완성한 ‘악야’(1952)였다. 피란지 작가의 암울한 일상을 그린 ‘악야’는 현재 필름이 남아 있지 않지만 이탈리안 네오리얼리즘과 장르 영화의 화법을 결합해 전후 사회의 공기를 포착한 그의 1950년대 대표작 ‘지옥화’(1958)를 통해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다. 홍성기의 ‘춘향전’과 경쟁한 ‘성춘향’(1961)이 흥행에 성공하면서 신상옥의 ‘신필름’은 1960년대 한국영화계의 중심으로 당당히 진입했다. 사실 주식회사 신필름은 당시 정권이 제시한 영화기업화 정책에 가장 부합하는 영화사였다. 덕분에 감독 신상옥도 영화제작자로서의 기반을 다짐과 동시에 영화작가로서 이름을 찾는 데 열중할 수 있었다. 1975년 ‘장미와 들개’ 검열 사건으로 정권과 사이가 멀어졌고 신필름 역시 영화사 등록이 취소됐다. 1978년 그의 페르소나이자 부인이었던 최은희가 북한으로 납치됐고 이어 신상옥도 납북됐는데, 그들의 동지적 관계는 1983년 이후 북한 신필름 촬영소에서도 계속됐다. 둘은 ‘소금’(1985) 등 7편의 작품을 함께하다 1986년 베를린 국제영화제 참석을 기회로 미국으로 망명했다. 할리우드에서 신(Sheen) 프로덕션을 설립해 ‘닌자 키드’ 시리즈를 흥행시키기도 했던 신상옥은 ‘겨울이야기’(2004)를 유작으로 남겼다.●충무로 시스템 속 ‘작가주의’ 감독 유현목 유현목(1925~2009)은 1960년대 한국영화에서 예술영화의 지분을 가장 많이 확보하고 있던 감독이다. 특히 ‘김약국의 딸들’(박경리 원작·1963), ‘카인의 후예’(황순원 원작·1968) 등 소설을 원작으로 한 그의 문예영화는 이 시기 한국영화의 예술성을 책임지고 있었다. 그는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 태생으로, 동국대 국문과 2학년 때 영화예술연구회를 조직해 ‘해풍’(1948·45분)을 연출했고 ‘최후의 유혹’(1953·정창화)의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다. 이후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1955) 조감독을 거치는 등 현장 경험을 충분히 쌓은 후 ‘교차로’(1956)로 데뷔했다. 평생의 동반자인 서양화가 박근자와 결혼한 때는 1958년이다. 1950년대 후반 유현목은 ‘그대와 영원히’(1958) 등 그만의 미장센이 뚜렷한 멜로드라마를 선보였고 13개월에 걸쳐 제작한 ‘오발탄’을 공개하며 독보적인 작가주의 감독으로 등극한다. 6·25전쟁 이후 한국의 빈곤한 현실과 정신적 불안을 영상화한 한국영화사의 걸작이다. 그는 1980년대 초반까지 ‘순교자’(1965), ‘막차로 온 손님들’(1967), ‘분례기’(1971), ‘장마’(1979), ‘사람의 아들’(1980) 등의 문예영화를 통해 예술영화 감독으로서 위치를 확고히 했다. 뿐만 아니라 ‘아낌없이 주련다’(1962) 등의 흥행용 멜로드라마, ‘공처가삼대’(1967) 같은 세련된 코미디, ‘수학여행’(1969) 같은 아동드라마로 장르 불문하고 뛰어난 연출력을 입증했다. 또한 그는 충무로 영화계에서는 드물게 극장 개봉을 위한 실험영화 ‘춘몽’(1965)을 연출해 음화제조 혐의로 벌금형을 받기도 했다. 1970년 ‘한국소형영화동호회’, 1978년 독일문화원을 중심으로 한 ‘동서영화연구회’를 이끌며 실험영화 제작과 영화 연구를 병행하던 그는 1976년부터 1990년까지 동국대 연극영화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 양성에도 힘썼다. ●한국영화사에서 가장 독창적인 감독 김기영 김기영(1919~1998)은 1960년대 한국영화에서 독특한 영역을 개척한 인물이다. 본인이 설립한 영화사에서 가장 경제적인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면서 그만의 미학과 주제 의식을 놓치지 않았고 이 영화들은 대중 관객과의 소통에도 성공했다. 평양고보 시절 문학, 미술, 음악 등 예술 전 분야에 두각을 나타냈던 그는 1940년 졸업 후 일본 교토로 건너가 독학으로 연극과 영화를 공부하는 ‘문화방랑객’으로 살았다. 해방 후 경성대 의학부에 진학해 이후 서울대 최초의 통합 연극반을 이끌었고, 이때 동창이자 연극반원이었던 김유봉과 결혼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피란지 부산의 미공보원(USIS)에 소속돼 ‘리버티 뉴스’를 만들었고 1955년 ‘주검의 상자’를 연출하며 상업영화 감독으로 데뷔했다. 두 번째 작품 ‘양산도’(1955)로 김기영 영화 세계의 원형을 제시한 후 ‘초설’(1958)과 ‘십대의 반항’(1959)에서 네오리얼리즘의 영향을 드러냈다. 김기영이 본격적으로 자신의 영화 세계를 알린 것은 1960년에 발표한 ‘하녀’에서다. 스릴러 장르로 대중성을 취하는 동시에 당시 한국영화의 절대적 가치라 할 리얼리즘 양식을 과감히 거부한 작품이다. 김기영 영화의 진수인 ‘하녀’ 속 인물 구도는 ‘화녀’(1971)와 ‘화녀’(1982)로 변주됐고 또 다른 결인 ‘충녀’(1972)는 ‘육식동물’(1984)로 변형되면서 당대 사회의 불안한 공기를 담아냈다. 인간의 본능과 욕망을 심연까지 파헤치는 그로테스크한 세계관, 영화 속 공간으로 계급 구조를 묘사하는 뛰어난 연출력 등 봉준호 같은 후배 감독들이 그를 칭송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1997년 제2회 부산국제영화제 회고전을 계기로 젊은 관객들에 의해 재발견된 김기영은 1998년 ‘하녀’ 시리즈의 90년대식 변주인 ‘악녀’의 연출을 앞두고 평생의 지지자 김유봉과 함께 불의의 사고로 사망했다.정종화 한국영상자료원 선임연구원
  • 익사한 이민자 부녀 사진 파장에...美의회, 5조원 긴급예산 승인

    익사한 이민자 부녀 사진 파장에...美의회, 5조원 긴급예산 승인

    미국 정착을 위해 강을 건너다 익사한 엘살바도르 부녀의 비극적인 사진이 안팎으로부터 큰 파장을 몰고 오면서 미 의회가 5조원이 넘는 이민자 긴급 지원 예산안을 전격 통과시켰다. 미국 하원은 27일(현지시간) 본회의를 열어 미국과 멕시코 국경에서 붙잡힌 이민자 보호를 위해 46억 달러(약 5조 3000억원)의 긴급 구호 예산을 지원하는 법안을 찬성 305명, 반대 102명으로 가결했다. 이 법안은 전날 상원에서도 찬성 84표와 반대 8표라는 압도적 표 차이로 통과됐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서명하면 곧바로 발효된다. 법안은 구금된 이민자들의 열악한 생활 여건을 개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미 보건복지부에 인도된 이민자 아동을 돌보는 데 30억 달러, 국경순찰대에 붙잡힌 이민자의 임시 주거와 식사에 10억달러 이상이 각각 투입된다. 당초 민주당 일인자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과 진보 성향의 민주당 하원의원들은 이민자 아동의 시설 수용기간을 3개월 이내로 제한하고, 이민세관단속국(ICE) 예산을 감축하는 내용의 수정 입법을 추진했으나 백악관과 공화당의 반대에 밀려 이를 포기했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이날 표결에서도 민주당 하원의원 235명 중 진보 성향 의원 71명은 끝까지 반대표를 던졌다. 미치 매코널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는 민주당의 우려를 해소하기 위해 백악관이 일부 행정상 보완조치를 할 수 있단 뜻을 밝혔다. 실제 마이크 펜스 부통령은 본회의 전 펠로시 의장과의 통화에서 구금시설에서 이민자 아동이 사망할 경우 24시간 이내에 의회에 통지하고, 이민자 아동의 시설 수용 기간을 90일 이내로 제한하겠다고 구두로 약속했다고 통신은 전했다. 외신들은 엘살바도르 출신 오스카르 알베르토 마르티네스 라미레스(25)와 23개월 딸이 리오그란데강에서 꼭 끌어안은 채 익사한 사진과 이민자 아동 수용시설의 열악한 주거 실태에 관한 언론 보도가 이날 법안 통과의 원동력이 된 것으로 분석했다. 이 사진과 보도로 국경 위기에 시급히 대처해야 한다는 여론에 불이 붙은 덕분에 미 의회가 다음달 4일 독립기념일을 맞아 열흘 간의 휴회에 들어가기 전 법안을 처리해야 한다는 압박을 강하게 받았다는 것이다. 이날 법안 통과 소식에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참석차 일본 오사카를 방문 중인 트럼프 대통령은 트위터를 통해 “남부 국경을 위한 초당적인 인도주의 지원법이 방금 통과됐다. 아주 잘 됐다”라며 “이제 우리는 망명 제도를 고치고 구멍을 없애기 위해 일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최훈진 기자 choigiza@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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