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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P “北 국제 보험사기로 달러 조달”

    │워싱턴 김균미특파원│북한이 국제 재보험 사기로 지난 수년간 수억달러의 달러화를 벌어들였다고 워싱턴포스트가 미 전직 관리와 탈북자, 서방 보험회사 관계자들과의 인터뷰, 법원 기록 등을 인용해 18일자 인터넷판에서 보도했다. 신문은 국제적인 재보험 사기 수법은 마약 등의 불법 생산 및 거래, 100달러짜리 위폐 유통, 가짜 담배 유통 등과 함께 북한의 경화 조달 수단으로 자리잡았다고 주장했다. 북한의 조선국영보험공사(KNIC)와 싱가포르에 있는 자회사 은행 부문에서 관리자로 활동하다 지난 2003년 한국으로 망명한 김광진은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2003년 2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생일 직전 싱가포르에서 미화 2000만달러(약 252억원)를 두개의 가방에 넣어 베이징을 경유해 평양으로 직접 부쳤다고 주장했다. 김씨는 자신이 평양의 KNIC에서 일하는 6년간 이같은 돈가방은 싱가포르와 스위스,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에서 매년 들어왔다고 밝혔다. 김씨는 현재 1년 계약으로 워싱턴의 비영리단체인 북한인권위원회에 컨설턴트 자격으로 부인, 딸과 함께 머물고 있다. 부시 전 행정부에서 불법활동 조사팀을 총괄했던 데이비드 애셔 전 국무부 동아태담당 선임자문관은 “재보험 사기는 북한의 불법 경화 자금조달원으로 자리잡았으며, 정확한 규모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kmkim@seoul.co.kr
  • [씨줄날줄] 형제의 난/진경호 논설위원

    성경이 전하는 인류 최초의 범죄는 살인이다. 아담과 이브가 낳은 맏아들 카인이 동생 아벨을 죽였다. 하느님의 사랑을 독차지한 동생에 대한 질투가 살인을 불렀다. ‘하느님의 사랑’을 ‘권력’의 이웃말로 둔다면 질투, 즉 권력을 독점하려는 욕망이야말로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태초의 원형질인 셈이다. ‘권력 없이는 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는 괴테의 말처럼 인류 역사는 끊임없는 권력 쟁투의 역사였다. 그 가운데서도 2대째 인류, 카인과 아벨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형제의 난’이야말로 동서고금을 통틀어 가장 뿌리 깊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권력투쟁사를 엮어왔다. 우리만 해도 고구려와 백제의 창건이 모두 형제의 난에서 비롯됐다. 주몽이 북부여에서 낳은 아들 유리를 태자로 삼자, 그의 배 다른 형들인 비류와 온조는 화(禍)를 피해 남으로 내려갔고, 여기서 또 갈라진 둘이 제각각 세운 나라가 삼국사기가 전하는 십제와 백제 아니었나. 고구려 연개소문의 세 아들, 남생 남산 남건의 피비린내 나는 권력싸움 역시 대표적 형제의 난으로 꼽힌다. 연개소문 사후 막리지가 된 맏형 남생이 요동으로 떠난 사이 둘째 남산이 쿠데타를 일으켜 막리지에 오르자 남생은 목숨을 건지려 적국인 당(唐)으로 건너가 투항했고, 훗날 당의 고구려 침공 때 앞 길을 열어 고국을 패망케 한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그런가 하면 고구려를 패망시킨 당 태종 또한 태조 이연의 다섯째 아들로, 다른 형제들을 죽여 권력을 잡은 인물이다.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후계자로 떠오른 3남 김정운의 측근들이 이복 맏형 김정남을 암살하려 했고, 중국 당국의 보호 덕분에 목숨을 건진 김정남이 곧 마카오로 망명을 신청할 것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김정운이 지난 10일 중국을 방문, 후진타오 주석을 만나 후계자 내정 사실을 통보했다는 보도도 뒤를 이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권은 로동자, 농민, 근로인테리와 모든 근로인민에게 있다.’(사회주의 헌법 1장 4조)는 북한, 아니 3대 세습에 나선 21세기 북조선의 현주소다. 1300여년 전 고구려 그 비운의 역사가 어른댄다. 진경호 논설위원 jade@seoul.co.kr
  • [월드이슈] 중앙정부 통제 취약해 세력확장 온상

    [월드이슈] 중앙정부 통제 취약해 세력확장 온상

    흔히 중동에서 벌어지는 테러라면 이라크나 팔레스타인, 아프가니스탄의 테러가 떠오른다. 하지만 최근 중동의 테러 거점은 이들 지역은 물론 동아프리카 지역으로 확대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런 흐름의 중심에는 14일(현지시간) 한국인 엄영선씨 등 외국인의 피랍 및 살해 사건이 벌어진 ‘예멘’과 사건의 배후단체로 지목된 무장조직 ‘알카에다’가 있다. 알카에다는 세계 곳곳에 느슨한 형태의 세포 조직처럼 퍼져 있다. 9·11 테러로 촉발된 서방 국가들의 ‘테러와의 전쟁’으로 인해 그 세력이 약화된 면도 없지 않지만, 그보다는 힘을 한 곳으로 응축시키면 존재가 쉽게 노출되는 까닭이다. 대부분의 중동 국가들이 친(親) 서방 정책을 펴고 있어, 이들은 중앙정부의 통제가 약한 아프가니스탄지역 등에 숨어 세력을 유지해 왔다. 하지만 이들은 거점 지역을 예멘으로 점차 확대하고 있는 모양새다. 예멘은 친미 노선을 표방하는 알리 압둘라 살레 대통령이 통치하고 있지만 실권은 부족장들에게 있기 때문에, 중앙 정부의 영향력이 미약해 무장세력들이 거점으로 삼기에 최적의 조건을 가지고 있다. 로이터통신은 “지역을 통치하는 부족장들과 중앙 정부는 서로 반목하는 경우가 많으며 심지어 중앙 정부를 위협하기 위한 카드로 외국인을 납치하는 경우가 많다.”고 보도했다. 알카에다는 예멘의 이런 혼란한 상황을 통해 부족장들과 협력, 중앙 정부의 통제권을 최대한 벗어나 세력을 확대하고 있다. 또 국민의 대부분이 이슬람 근본주의자(와하비즘)인 까닭에 같은 근본주의자이자 예멘 출신인 빈 라덴에 대한 신뢰는 매우 높다. ●알 와하시 총책임자 취임후 테러 탄력 특히 알카에다는 테러 거점의 무게 중심을 예멘으로 이동하면서 내부적 힘을 보강하기 위해 과감한 구조조정을 실행했다. 알카에다는 지난 1월 사우디와 예멘 지부를 통합, 수장 오사마 빈 라덴의 비서 출신인 나시르 알 와하시를 총책임자(아미르)로 임명했다. 예멘 젊은이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알 와하시가 취임하면서 알카에다는 조직원들을 대거 끌어들이기 시작했고, 테러 활동에도 탄력이 붙었다. 지난 3월 한국인이 희생된 시밤의 자살 폭탄 테러도 알카에다가 배후로 알려져 있다. 예멘 정부는 “알카에다가 조직의 건재함을 과시하고 이를 홍보하기 위해 이 같은 테러를 저질렀다.”고 밝힌 바 있다. 한국인이 희생된 이번 피랍 사건의 배후에 알카에다가 지목되는 것도 이런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알카에다의 거점 확장은 단순히 예멘에 그치지 않는다. 최근에는 예멘을 비롯해 수단과 소말리아에 이르는 ‘트라이앵글 거점’을 구축해 나가고 있다. 수단과 소말리아 모두 예멘과 마찬가지로 중앙정부 통제력이 취약, 무장세력들이 간섭을 받지 않고 힘을 키울 수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빈 라덴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국가들이기도 하다. 최근 다르푸르 내전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수단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추방된 빈 라덴이 1991년부터 1996년까지 망명생활을 했던 곳이다. 당시 빈 라덴은 권력 다툼에서 밀려나 아프간으로 망명했지만 빈 라덴의 애착이 강한 곳으로 전해진다. 최근 알카에다는 전범 혐의로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의해 체포영장이 발부된 오마르 알 바시르 현 대통령에게 “서방의 십자군이 흉악한 송곳니를 드러냈다. 훈련과 장비구축을 통해 장기적인 게릴라전을 철저히 준비하라.”고 촉구하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알카에다가 수단에서 이슬람 조직 복원에 나설 것이란 예측도 나오고 있다. 소말리아에서는 이미 세력 확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외국으로 이민간 소말리아 청년들은 이슬람 세력에 힘을 보태기 위해 암암리에 귀국하고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미 정부는 지난 12일 파키스탄의 알카에다 조직원들이 소말리아로 이동한 정황을 포착하기도 했다. ●이슬람 근본주의자와 연대 강화도 예멘에서 내부적 힘을 결속하고 소말리아와 수단으로 서서히 그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알카에다는 반(反) 서방 노선을 걷고 있는 다른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 연대를 강화하고 있다. 대표적인 게 소말리아의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인 알샤바브다. 알샤바브는 알카에다와 손잡고 친 서방 정권인 샤리프 셰이크 아흐메드를 축출하기 위해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빈 라덴은 지난 3월 음성 메시지를 통해 “소말리아의 이슬람 전사들은 아흐메드 소말리아 대통령을 권좌에서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했을 정도로 초국가적 대응을 촉구했다. AP통신은 최근 “소말리아에는 파키스탄이나 예멘 등지에서 강경파 전투원들이 모여들고 있다.”고 보도했다. 통신은 이집트 알라흐람재단의 칼릴 알 아나니의 말을 인용,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소말리아의 분쟁을 이용해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퍼뜨리고 있다.”면서 “소말리아는 이미 파키스탄이나 예멘 등지에서 강경파 전투원을 끌어들이는 곳이 됐다.”고 밝혔다. 이경원기자 leekw@seoul.co.kr
  • 관타나모 안과 밖 어느 쪽이 惡할까

    관타나모 안과 밖 어느 쪽이 惡할까

    미국은 1898년 스페인과 전쟁을 벌이던 중 160㎢ 면적의 쿠바 관타나모를 해외기지로 차지했다. 1903년부터 매년 일정액을 주는 조건으로 쿠바 정부로부터 기지를 빌렸다. 미국과 쿠바의 국교가 단절된 뒤에도 관타나모는 계속 미국의 관할로 유지됐다. 2001년 9·11테러 이후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관타나모 수용소를 아프가니스탄에서 잡은 사람들을 억류하는 시설로 이용하고 있다. ●현상금에 희생당한 수감자들 관타나모 수용소는 세계의 관심사이다. 부시 행정부 시절에는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온갖 가혹 행위가 자행되면서 ‘21세기의 홀로코스트’, ‘인권 유린의 상징’이라는 악명 높은 별칭까지 붙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관타나모 수용소를 1년 내에 폐쇄하라는 행정명령을 내리고, 수감자들이 정식 재판을 받도록 했다. 지난 9일에는 관타나모 수감자가 처음 민간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다. 그러나 ‘형태를 알 수 없는’ 미국의 안보를 주장하는 공화당은 이를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 과연 관타나모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전 국방부 장관 도널드 럼즈펠드의 말처럼 이곳의 수감자들은 ‘최악 중의 최악인 자들’인가. 파시툰계 이민 2세인 저널리스트 마비시 룩사나 칸은 ‘나의 관타나모 다이어리’(이원 옮김, 바오밥 펴냄)에서 우리가 알지 못하고, 알 기회도 없는 관타나모의 속살을 까발린다. 2005년 마이애미대 로스쿨에 다니던 칸은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미국의 건국 정신과 법적 정의에 상반되는 일들이 벌어지는 것을 알고 통역봉사를 자원해 관타나모 수용소를 접하기 시작했다. 관타나모 수용소에는 ‘악’이라고 해도 무방한 사람도 있다. 9·11테러를 주도한 칼레드 셰이크 모하메드와 예메니 람지 비날시브, 1999년 요르단과 로스앤젤레스에서 세기말 폭탄테러를 기도한 아부 주바이다 등이다. 그러나 수감자들의 단 5%만이 미국 정보 당국이 직접 체포한 이들이고, 대부분은 탈레반이나 알카에다 조직원을 신고하면 주는 5000~2만 5000달러 현상금의 희생양이다. 아프가니스탄 가르데즈의 명망 있는 가문 출신의 소아과 의사 알리 샤 무소비는 조국 재건을 위해 망명생활을 끝내고 조국으로 갔다가 탈레반과 협력하고 반군에 자금을 제공했다는 혐의로 체포됐다. 최고령 수감자 하지 누스랏 칸은 위험한 존재이기는커녕 보행기가 없으면 움직이지도 못한다. 알자지라 방송의 카메라 기자 사미 알 하즈는 오사마 빈 라덴을 인터뷰해 부시 정부의 눈 밖에 나 이곳에 잡혀 왔다. 9·11테러 이후 탈레반의 기자회견을 주재하던 전 탈레반 대사 압둘 살람 자이프도 이곳을 거쳐 갔다. ●구타와 고문… 누구를 위한 자유인가 관타나모 수용소는 이들에게 일련 번호를 붙여 놓고, 물건 취급을 하며 구타와 고문을 일삼는다. 그러나 이들은 몇 년 동안 보지 못한 자식들의 모습을 담아온 비디오테이프를 보며 “은혜를 잊지 않겠다.”면서 눈물을 흘리고, 어린 딸이 빽빽하게 적은 편지를 보고 또 보는, 그저 누군가의 가족이고, 아버지이며 찾고 싶은 아들일 뿐이다. “관타나모만에 도착하면 ‘자유를 수호하는 명예’라는 글귀가 새겨진 커다란 명판이 사람들을 맞는다. 나는 그것을 볼 때마다 저 거대한 시설을 책임지는 사람들이 명예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있는지, 혹은 자유가 미국인만의 권리가 아니라 보편적인 권리일 수 있다는 개념을 갖고 있는지 늘 궁금했다.”(215쪽) 칸의 목소리는 수감자들이 모두 무고하다는 ‘순진한 주장’이 아니다. 인권과 자유를 위한 공정한 재판을 요구하는 ‘가장 기본적인 주장’이다. 책은 수감자들 이야기 사이에 관타나모 수용소의 통관 수속, 기지 본부와 수용소 캠프 등 전체 모습을 파노라마처럼 보여 준다. 또 무소비, 칸 등 몇몇 석방된 수감자들과의 감격적인 재회를 그린 에필로그도 담겨 있다. 1만 2000원.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 [부고] 애국지사 김학선 선생 별세

    한국광복군 대원으로 독립운동을 한 애국지사 김학선 선생이 9일 별세했다. 88세. 선생은 평북 의주 출신으로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중국으로 망명, 시안(西安) 등지에서 활동하던 조선의용대에 가입했다. 김원봉이 주도한 조선의용대는 1939년 좌우 통합운동이 결렬되자 화베이(華北)와 충칭(重慶)으로 양분됐다. 선생은 충칭에 잔류하며 항일운동을 펼쳤다. 1942년 7월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의 제1지대로 편입되자 광복군으로 활동하면서 초모(대원 모집) 공작원을 각지에 파견하는 임무를 했다. 유족은 청남씨 등 2남. 발인은 11일 오전 6시30분. 빈소 서울보훈병원 (02)483-3320.
  • “정운이, 아버지 꼭 닮아 무척 마음에 들어한다”

    │도쿄 박홍기특파원│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장남 김정남은 6일 김 위원장의 후계자로 지명된 것으로 알려진 자신의 동생 정운에 대해 “아버지가 무척 마음에 들어한다.”며 지명 가능성을 강하게 내비쳤다. 김정남은 이날 체류 중인 마카오에서 일본 요미우리신문 계열의 니혼TV와 인터뷰를 갖고 후계 문제와 관련, “아버지가 결정할 일”이라면서 “(자신은) 과거에도, 앞으로도 관여하지 않을 것”이라며 선을 그었다. ●“닮은 게 후계지명 이유중 하나” 김정운의 후계자 지명설과 관련, “뉴스를 통해 알고 있다. (보도에 대해) 나는 확인할 수 없다.”라고 말한 뒤 “그러나 노(NO)라고도 말할 수 없다.”라며 전면부인은 하지 않았다. 이어 ‘김정운이 김 위원장을 닮았느냐.’는 질문에 “그렇다. 아버지가 동생을 후계자로 지명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그것이다. 아버지는 동생을 무척 마음에 들어한다.”며 정운에게 후계축이 기울고 있음을 드러냈다. ●중국망명설 전면 부인 김정남은 자신의 측근들이 숙청됐다는 소문에 대해 “나와 가까운 사람들은 북한 내가 아니라 해외에 체류하고 있다.”면서 “그들이 체포됐는지는 나도 모른다.”고 말했다. 자신의 망명설 보도와 관련, “완전히 가짜이며 진실하지 않다.”면서 “나는 북한의 시민권을 갖고 중국이나 마카오에 머물고 있다. 북한으로부터 망명하는 일은 결코 없다.”고 강조했다. 앞서 산케이신문은 북한이 김정운을 정점으로 하는 새 체제 구축을 위해 김정남 주변인사들의 숙청에 들어갔으며, 김정남은 마카오에 머물면서 중국에 망명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도했었다. 김정남은 북한의 2차 핵실험에 대해 “나는 북한의 어떠한 정치적 문제에도 관계하지 않아서 대답할 수 없다.”고 언급을 피했다. hkpark@seoul.co.kr
  • ‘안네의 일기’ 안네 프랑크 80세 사진 공개

    ‘안네의 일기’ 안네 프랑크 80세 사진 공개

    전 세계인의 필독서 ‘안네의 일기’의 작가 안네 프랑크가 살아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1929년 6월 12일에 태어난 안네 프랑크는 나치가 유대인 학살이라는 만행을 벌인 1930년대에 네덜란드로 망명해 은신하면서 ‘안네의 일기’를 썼다. 작은 몸집과 큰 눈, 아름다운 미소와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안네 프랑크는 문학과 자유를 사랑하는 소녀였으나 16세 때인 1945년 수용소에서 안타깝게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안네의 서적과 기념행사 등을 맡고 있는 안네 프랑크 협회는 그녀의 탄생 8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안네의 가상 사진을 공개했다. 실종자 사진 전문 제작사가 만든 이 사진은 과학과 예술의 결합으로 탄생했다. 여기에는 안네의 엄마와 언니의 얼굴, 그리고 나이가 든 얼굴을 미리 짐작할 수 있는 컴퓨터 프로그램이 이용됐다. 백발이 성성하고 얼굴 곳곳에 주름이 폈지만 아름다운 미소만은 여전한 80세의 안네는 그녀의 작품에 감동한 전 세계 독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안네 협회의 총 책임자 길리엄 월네스는 “안네의 삶이 전쟁으로 희망을 잃은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희망이 되길 바란다.”며 기획 의도를 밝혔다. 안네의 가상사진을 최초로 접한 안네의 이복 언니 에바 쉴로스는 “믿을 수 없다. 그녀가 정말 살아있는 것 같다.”며 “안네는 나이가 들어도 아름답고 상냥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고 전했다. 한편 안네는 1945년 3월 16세의 나이에 유대인 강제수용소 베르겐 벨젠에서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텔레그래프(사진 위는 가상의 안네, 아래는 안네의 실제 생전 사진) 서울신문 나우뉴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특파원 칼럼] 톈안먼 주역들의 안타까운 절규/김균미 워싱턴특파원

    [특파원 칼럼] 톈안먼 주역들의 안타까운 절규/김균미 워싱턴특파원

    “우리가 중국을 떠나 망명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중국에서 잊혀졌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4일 미국 워싱턴 시내에서는 아침부터 톈안먼(天安門) 사태 20주년 행사들이 잇따라 열렸다. 이날 오전 내셔널프레스빌딩에서는 대학생 시위를 주도했던 왕단(王丹) 등 톈안먼 주역 50여명이 기자회견을 갖고 중국 정부와 인권 탄압 및 언론 통제 등을 하는 중국 정부에 ‘침묵’하는 미국 정부를 함께 비판했다. 그런가 하면 의회에서는 ‘톈안먼의 세 영웅들’로 불리는 톈안먼 주역들이 청문회에 출석했다. 루더청(德成), 위즈젠(余志堅), 위둥웨(喩東岳)는 1989년 5월23일 톈안먼 광장에서 중국 공산당의 상징이었던 마오쩌둥(毛澤東) 초상화에 물감 달걀을 투척, 수년간 수감생활을 한 뒤 미국과 캐나다로 망명한 중국 반체제 인사들이다. 미 의사당 앞에서는 중국 반체제 운동가와 미 의원들이 미 정부에 중국의 민주화를 위해 지원을 늘릴 것을 요구했다. 이들은 중국이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루며 국제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졌지만 20년 전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며 외친 정치적 민주화와 개혁은 제자리걸음이라고 지적했다. 또 국제적 경제위기와 기후변화, 북핵 위기 등을 해결하는 데 중국의 역할을 의식해 미국 등 서방 선진국들이 중국에 유화정책을 펴고 있는 것은 잘못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잇따라 열린 톈안먼 20주년 행사들을 지켜보면서 톈안먼 주역들의 정치적 요구나 비판보다 더 오래, 더 깊이 귀에 남아 있는 말이 있다. 바로 “우리가 중국인들에게서 잊혀지고 있다.”는 절규다. 재결합 행사에 참여한 톈안먼 주역들은 자신들이 중국인들, 특히 ‘포스트 톈안먼 세대’인 20대에게 낯선 존재라는 사실을 지적했다. 일부는 경제적·사회적 성공에만 집착하는 20대, 돈만을 좇는 중국의 젊은 세대들의 세태를 안타까워했다. 이들의 지적처럼 중국은 지난 20년간 괄목할 만한 경제적 성장을 이뤘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1978년 이후 연평균 9% 이상의 경제성장률을 이어왔다. 1인당 국민소득도 55달러에서 2008년 6000달러로 109배나 급증했다. 이 과정에서 개인주의가 팽배하고 있다. 이 같은 톈안먼 주역들의 안타까움이 묻어 있는 주장들을 들으면서 “중국만의 일은 아닌데…”하는 생각이 스쳤다. 한국에서도 1980년대 민주화를 이끌었던 이른바 ‘386세대’들은 지금 젊은 20대에 대해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다. 미국에서도 1960~70년대 민권운동과 반전시위에 참여했던 세대들은 요즘 젊은 세대들을 보면서 정치적 무관심을 문제로 지적하곤 한다. 하지만 이런 우려들은 기성 세대의 눈으로 젊은 세대를 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소통방식과 표현양식은 달라졌지만 젊은 세대들의 정치참여는 꾸준히 늘고 있다. 한국이나 미국 모두 대통령 선거에서 젊은 유권자층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더욱이 지난해 미 대통령 선거에서 미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을 탄생시킨 저변에는 젊은 세대의 적극적인 선거 참여가 깔려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런 가운데 기회 있을 때마다 젊은 층의 사회참여를 적극 독려하는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의 행보는 눈여겨볼 만하다. 1960년대 평화봉사단과 1990년대 아메리코에 이어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떨어지는 교육현장에 젊은 세대의 참여를 요구하고, 이를 정책적으로 지원하는 계획도 밝혔다. 말로만 ‘나’만이 아닌 ‘우리’를 생각하라고 독려할 게 아니라 정책으로 뒷받침하며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기성세대가 할 몫이 아닌가 싶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김균미 워싱턴특파원 kmkim@seoul.co.kr
  • 대부분 망명… 왕단, 英 옥스퍼드대 객원연구원

    대부분 망명… 왕단, 英 옥스퍼드대 객원연구원

    │베이징 박홍환특파원│20년이 흐른 지금, 당시 20대 초중반이었던 시위 주역들은 장년이 돼 중국 밖에서 톈안먼을 거론하고 있고, 당시 60~70대였던 진압 주역들은 대부분 세상을 뜨거나 은퇴했다. 21명의 학생 지도자 가운데 서방에 망명한 인사는 왕단(王丹) 등 11명이며, 중국에 남아 있는 10명 중 3명은 행방이 묘연하다. 톈안먼 사태의 상징적 인물인 왕단은 10년간 중국에서 수감생활을 하다 1998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하버드대학에서 역사학 박사과정을 마친 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객원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오는 9월부터 타이완 국립정치대에서 조교수로 강의를 시작할 예정이다. 신장(新疆)위구르자치구 출신의 우얼카이시(吾爾開希)는 프랑스와 미국에서 유학한 뒤 ‘해외중국민주전선’을 결성, 민주화운동을 계속하다가 타이완에 정착해 TV 사회자로 활동하고 있다. 여학생 지도자 차이링(柴玲)은 하버드대 경영학 석사과정을 마친 뒤 금융회사에서 일하고 있고, 공산주의청년단(共靑團) 소속이었던 왕쥔타오(王軍濤)는 1991년 체포된 뒤 13년형을 선고받고 수감생활을 하다 1994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맨 몸으로 4대의 탱크를 막았던 왕웨이린(王維林)은 타이완으로 피신, 타이베이(臺北) 고궁박물관의 고문으로 있다. 1992년 홍콩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 현재 미군 소속 목사로 목회 활동을 하고 있는 슝옌은 홍콩 시민단체의 초청으로 2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최근 17년만에 홍콩을 방문했다. 무력진압의 책임자들은 대부분 사망했다. 최고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은 은퇴 후에도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다가 1997년 2월 세상을 떴고, 군부를 움직였던 양상쿤(楊尙昆)과 천윈(陳雲), 리셴녠(李先念) 등 보수파 지도자들 역시 1990년대에 모두 사망했다. 하지만 당시 총리였던 리펑(李鵬)은 1998년 권력 핵심에서 물러난 뒤에도 최근 10권의 책을 쓸 정도로 건강하다고 딸인 리샤오린(李小琳)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위원이 전했다. stinger@seoul.co.kr
  • 왕단 “中 근육만 있고 두뇌가 없다”

    │베이징 박홍환특파원│1989년 톈안먼(天安門) 민주화운동 20주년을 앞두고 시위 주역들의 목소리가 중국 본토가 아닌 홍콩에서 잇따라 흘러나오고 있다. 당시 베이징대 역사학과 학생으로 학생시위를 주도한 왕단(王丹)은 31일 홍콩 명보(明報)와의 인터뷰에서 “중국은 강대국이지만 근육만 있고, 두뇌가 없다.”며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민주화가 뒤처진 중국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그는 “현재 중국은 날마다 경제발전을 하고 있지만 나는 아직 중국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며 “정신문명이나 정치문명이 발전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톈안먼 민주화운동의 실패 여부에 대해서는 “민주화를 추진하라는 학생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면서도 “공민사회(公民社會) 발전의 계기가 됐다는 측면에서는 실패했다고만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시민단체 등 각종 민간단체의 부상을 톈안먼 민주화운동의 성과 가운데 하나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왕단은 톈안먼 사태 후 두 차례에 걸쳐 7년 동안 수감생활을 하다 1998년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의 중국 방문을 앞두고 석방됐다. 이후 미국으로 망명, 하버드대에서 역사학 박사과정을 마친 뒤 지난해 10월부터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객원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오는 9월 타이완 국립정치대 조교수로 임명될 예정이다. 한편 17년 만에 홍콩을 방문한 슝옌도 이날 홍콩 언론들과의 인터뷰에서 “중국인들이 미국인들처럼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슝옌은 옥고를 치른 뒤 1992년 미국으로 망명, 현재 미군 소속 목사로 재직 중이다. stinger@seoul.co.kr[다른 기사 보러가기] ☞꽃게는 잡지만 7년 전 악몽이 ☞핵우산 명문화 추진 왜 ☞장병은 줄어드는데 ★들은 늘어 ☞”소통이 곧 민주주의” 정부가 솔선해야 ☞유족들 대국민 감사글 전문 ☞민속마을 고택 사들여 술판 ☞뽀송뽀송하게 운전하려면 ☞”분양권 뜬다던데” 큰코 안 다치려면  
  • [시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남긴 마지막 선물/박명호 동국대 정치학 교수

    [시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남긴 마지막 선물/박명호 동국대 정치학 교수

    이번 주는 우리에게 참담한 시간이다. 퇴임 대통령의 불행한 모습을 또 보기 때문이다. “망명, 암살, 소환, 구속, 그리고 투신자살…” 이제 더 이상은 없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더는 대한민국의 비극이 되풀이돼선 안 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가 앞으로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줄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예상할 수 없는 강도와 방향의 후폭풍이 예상된다는 것.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다를 게다. 원망과 비난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고, 이번 일을 자성의 계기로 삼아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사회로 진화할 수도 있다. 증오의 악순환을 반복하느냐, 아니면 화해와 공존으로 나아가느냐는 ‘노무현 가치’에 대한 이해와 실현 여부에 달려 있다. ‘노무현 가치’는 무엇인가? 정치인 노무현은 시대를 앞장서 개척하고 시대정신을 대표했다. ‘바보 노무현’이라고 불릴 정도로 우직했다. ‘노무현 가치’는 민주화와 인권, 기득권 타파를 통한 평등과 기회의 확대, 그리고 남북화해와 공존이다. 특히 지역주의 정치구조를 해체하고 정책대결의 정당정치를 이루고자 그는 부단히 노력했다. 물론 그의 시도가 항상 현실적 결과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사회적 편 가름은 더욱 심해지고, 갈등과 대립은 격화되었고 일상화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노무현 가치’가 부정당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의 가치가 실현되지 않았을 뿐이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마감하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극단적 선택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추모하는 것은 바로 그가 생전에 실현하고자 했던 ‘노무현 가치’ 때문이다. 그는 끝까지 살아남아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어야 했다. 그것이 자신의 진정성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영원한 비주류로서 노 전 대통령은 특권배제와 사회적 약자를 위해 노력했다. 한 동안 노무현은 대한민국의 변화와 개혁을 상징했다. 그가 실현하고자 했던 것은 민주주의의 완성이고, 대한민국 공동체의 실현이다. 따라서 그의 죽음을 계기로 대한민국은 증오와 분열의 악순환을 끝내고 국민통합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그의 비극적 죽음을 승화시키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노 전 대통령의 서거를 정략적으로 이용하려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그의 죽음이 정쟁을 격화시킬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누구 책임이냐를 놓고 격한 정치적 대립이 벌어질 것이 분명하다. 만약 정상적 국정진행에 영향을 줄 정도면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부패와 비리의 고리를 제거할 수 있는 제도적 보완책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 제왕적 성격의 대통령제에서 분권과 견제, 그리고 균형의 정치제도로의 변경도 대안이다. 보다 근본적으론 정치문화의 후진성 극복이 중요하다. 퇴임 후를 걱정하지 않고 국가원로로서의 역할에 충실한 ‘전직 대통령 문화’가 만들어져야 한다. 동시에 새 정부의 정당성을 과거정권 두들기기에서 찾는 퇴행적 관행도 사라져야 한다. 정치인 노무현은 지사형(志士型)이다. “굴하지 않고, 굽히지 않으며 실패할 때 결국 홀로 목숨 놓는 삶을 고귀한 것”으로 인식한 이가 노 전 대통령이다. 이러니 그는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항상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치는 현실과 이상의 조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소통과 합의의 정치복원을 통한 국민통합을 이루라는 것이 노무현의 마지막 선물이다. 박명호 동국대 정치학 교수
  • [열린세상]못다 이룬 꿈 하늘에서 펼치시라/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 교수

    [열린세상]못다 이룬 꿈 하늘에서 펼치시라/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 교수

    “어릴 적 배고픈 꿈을 가꾸던 김해 봉하마을의 봉화산 부엉이 바위 위에 다시 선다. 인생의 고비마다 마음을 다지러 올랐던 곳 아닌가. 동이 터 오르는 하늘을 쳐다본다. 2002년 대통령으로 당선된 기쁨이 한 번 더 느껴진다. 아쉽다. 국가와 민족, 그리고 통일을 위하여 보다 더 많은 업적을 낼 수 있었는데. 모두 미안하다. 내 주장보다 다른 이들의 말에 좀 더 귀를 기울이지 못했다. 특히 김대중 전 대통령이 퇴임 뒤 대북송금 특검으로 이처럼 힘들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 무엇보다 퇴임 뒤 내 생명과 같은 가족과 친구, 그리고 나의 도덕성과 자존심을 지키지 못했다. 삶과 죽음이 자연의 일부이므로 나는 이렇게 먼 길을 떠난다.” 오욕으로 점철된 한국의 대통령사를 돌이켜보면 더 이상 반복되지 말아야 할 일이 또 벌어졌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망명지에서 세상을 떠났고, 윤보선 전 대통령은 5·16쿠데타로 자리를 내주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아끼던 심복의 흉탄에 운명했고, 전두환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은 퇴임 뒤 감옥에 들어갔다. 이제까지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은 큰 탈이 없었지만 대신 아들들이 감옥을 들락거렸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이렇게 돌을 던질 수 있었나 싶다. 과연 돌을 던질 만한 사람이 돌을 던졌느냐는 말이다. 퇴임 전에 결코 ‘집’에서라도 600만달러를 받지 말았어야 했다. 이론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과 폭탄주를 즐기고 전별금도 두둑하게 챙겼으며 골프를 함께 친 인사를 내부에 두고 있었던 검찰이 이렇게까지 전임 대통령을 압박했어야 했을까. 천신일 세중나모 회장에 대한 검찰의 수사는 아직도 머뭇거리고 있는데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혐의 사실은 친절하게 있는 거 없는 거 다 공표해 버렸다. 그리고 일부 언론들은 앞을 다투어 사실을 부풀리고 온갖 추측으로 전임 대통령이자 한 인간에게 갖은 수치와 모멸을 안겨주었다. 정치란 사회의 제한적인 자원을 권위적인 방식으로 분배하는 것이라고 한다. 쉽게 말해 권력을 가진 사람이 사회의 자원을 나눠주는 방식을 정하고 이에 따르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는 대화와 타협을 필요로 하지만 때로는 복종이나 굴복까지 요구한다. 전자를 택하는 정치가 민주적이라면 후자는 힘에 기초하는 후진적 정치이다. 한국의 정치는 아직 후자 쪽에 가까워 전임 대통령에 대한 예우에 인색하다. 게다가 ‘민주주의 2.0’이니 뭐니 하면서 정치와 직간접적으로 발을 담가두려던 노무현 전 대통령은 매우 부담스러운 존재였을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직 인수 때부터 전임 대통령을 최선으로 예우하겠다고 하고 이 난리를 치르고 세상을 떠나보낸 뒤 다시 예우를 다하겠다고 말만 하면 무슨 소용인가. 한국 정치가 예측불가능하기 때문에 미래를 내다보기 쉽지 않지만 앞으로도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는 당분간 기대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그랬듯이 전통이란 하루아침에 쉽게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 항간에는 필부였던 ‘봉하대군’에 비하여 상당기간 세력가로 군림한 ‘영포대군’에 줄을 대려는 사람이 많아도 한참 더 많았다는 소문이 자자하다. 유력한 차기 대선주자에게는 진정성과 신뢰에 큰 의심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잘 가시라, 노무현 전 대통령. 사나이 한 평생 화통하게 사시고 누구도 원망하지 말라며 이렇게 떠나가시게 해 국민으로서 마음이 무겁다. 때로 의심하고 가혹하게 대한 세상을 모두 다 용서하고 훌쩍 가신 당신에게 평화만 있으라. 그곳에서 당신이 꿈꾸던 멋있는 세상을 만드시라. 마을 한편에 작은 비석 하나 세워달라고 했지만 온 국민의 마음에 남아 있으리라.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삼권분립에 앞장섰다고.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 교수
  • [씨줄날줄] 풍운아(風雲兒)/오일만 논설위원

    역사 속 인물 중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풍운아들이 어찌 한둘이겠는가. 난세와 혼돈의 시기에 뛰어난 역량으로 세상을 뒤흔들다가 권력 투쟁의 암투 속에서 비극적으로 생을 마친 인물들이 대부분이다. 역사적 평가는 아직도 엇갈리지만 이들이 겪어야 했던 환희와 고통의 느낌은 생생하게 우리에게 전달된다. 중국인들에게 가장 많이 회자되는 풍운아는 단연 항우(項羽·BC 232∼BC 202년)이다. 진나라 말기 천하를 놓고 유방과 다투다 ‘사면초가’의 매복에 걸려 비극적 생을 마친 서초패왕. 하해 전투에서 자결로 30세의 생을 마감했다. 국가주석 류사오치(劉少奇·1898∼1969년)는 문화혁명을 조종한 마오쩌둥(毛澤東)의 질시와 음모 속에서 주자파(走資派)로 몰려 차디찬 지하 감방에서 죽는다. 세기의 풍운아 체 게바라(1928∼1967년)는 낭만적 혁명가의 대명사다. 그는 쿠바 혁명 성공으로 부귀영화를 약속받지만 세계 혁명에 뛰어들어 목숨을 던진다. 우리의 역사도 만만치 않다. 삼봉 정도전은 조선조가 낳은 최대의 풍운아다. 고려말 급진 개혁파였던 그는 10년간 유배생활의 고초를 겪는다. 역성혁명에 성공한 후 조선의 ‘기초 설계사’로서 모든 개혁을 추진하다가 왕자의 난을 주도한 태종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한다. 정암 조광조는 비운의 정치인이다. 중종에 의해 개혁정치 전면에 등장하지만 ‘개혁 피로감’에 지친 중종에게 버림을 받는다. 훈구파가 일으킨 기묘사화에 연루돼 사약을 받았다. 근대사로 넘어가선 풍운아의 대표자리는 김옥균이 차지한다. 개화 사상의 신봉자로서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켜 전권을 쥐나 ‘3일 천하’로 막을 내린다. 일본으로 망명해 울분의 나날을 보내다 1894년 상하이에서 자객 홍종우에게 죽고 그의 시체는 능지처참형을 받는다. 노무현 전 대통령 역시 ‘풍운의 정치인’이라고 부른다. 1988년 한국 정치판에 혜성처럼 나타나 지역주의 타파와 새로운 정치를 외치며 대권을 거머쥔다. 퇴임 이후 자신이 쌓아올린 정치적 자산들이 하나하나 ‘물거품’으로 변하는 고통의 아픔도 겪는다. 자살이라는 극단적 방법으로 생을 마감한 ‘인간 노무현’을 역사가들은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오일만 논설위원 oilman@seoul.co.kr
  • [노무현 前대통령 서거] 전직 대통령 수난사

    역대 대통령의 비극적인 운명은 대한민국 현대사에 끊이지 않았다.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전 대통령부터 23일 서거한 노무현 전 대통령까지 9명의 전직 대통령 대부분은 하야, 시해, 가족 구속, 검찰 수사 등 수난과 비운에 시달렸다. 전직 대통령의 수난사는 이승만 대통령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민주주의 체제의 싹을 틔운 이 전 대통령은 장기 집권을 이어가다 4·19혁명으로 하야했다. 그는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하와이로 망명, 결국 이국 땅에서 생을 마감했다. 4·19혁명 후 대통령직을 수행한 윤보선 전 대통령은 5·16군사쿠데타로 도중 하차했다. 윤 전 대통령은 박정희 정권 시절 반유신 운동 등으로 모두 3차례에 걸쳐 사법처리돼 최초로 법정에 선 대통령으로 기록됐다. 5·16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2년 ‘10월 유신’으로 종신 집권 체제를 구축했으나 18년 장기집권 끝에 1979년 10월26일 측근인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절명했다. 박 전 대통령은 근대화의 틀을 마련하고 경제발전을 견인했지만 그의 권력욕은 대한민국 현대사에 ‘현직 대통령 시해’라는 초유의 기록을 남겼다. 박 전 대통령 서거 후 집권한 최규하 전 대통령은 1980년 신군부의 권력 탈취로 8개월 만에 하야했다. 그는 1989년 신군부의 쿠데타에 대한 증언을 거부하다 국회 광주특위에서 국회모독죄로 기소됐고, 1996년 12·12쿠데타 및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해 항소심 공판에 강제구인됐다. 군부를 업고 대통령직에 오른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은 반란 및 내란 수괴죄로 각각 사형과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전 전 대통령은 육사 11기 동기이자 자신의 뒤를 이어 대통령직을 물려받은 노 전 대통령에 의해 백담사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민주화 시대를 연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은 재임 중 아들이 구속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는 재임 중인 1997년 한보 비리 사건에 연루돼 구속됐고 2004년에는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다시 구속됐다. 김 전 대통령 자신도 2004년 안기부 예산의 선거전용 의혹 사건인 ‘안풍(安風) 사건’의 증인으로 채택됐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재임 중 차남 홍업씨와 3남 홍걸씨가 금품을 수수한 혐의로 구속 기소되는 아픔을 겪었고 대국민 사과를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퇴임 후 ‘박연차 게이트’에 연루되면서 가장 큰 정치적 자산인 ‘도덕성’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그는 검찰 수사가 진행되던 중 갑작스럽게 서거해 비운의 역사를 이어갔다. 안동환기자 ipsofacto@seoul.co.kr
  • DJ 목숨 구한 ‘교황 편지’ 첫 공개

    1980년 신군부에 의해 ‘내란음모’ 주동자로 몰려 사형이 확정됐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목숨을 건지는 데 당시 교황이 크게 기여했음을 짐작케 하는 문서가 처음 공개됐다. 19일 광주일보가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받은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 자료에 따르면 고(故) 요한 바오로 2세는 1980년 12월11일 서울 주재 교황청 대사관을 통해 김 전 대통령의 감형을 요청하는 메시지를 제5공화국 정부에 보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1981년 1월5일자 ‘회답서신’을 통해 “(김대중은) 어떠한 정치적 이유가 아닌, 오직 불법적인 방법과 폭력에 의한 합법 정부의 전복 기도를 포함한 반국가적 범죄로 인하여 재판을 받고 있다.”고 선을 그으면서도 “(교황) 성하의 호소가 순전히 인도적 고려와 자비심에 의거한 것임을 유념하겠다.”고 답했다. 이 후 김 전 대통령의 형량이 무기징역으로 낮춰진 것은 교황이 첫 편지를 보낸지 43일 만인 1981년 1월23일 이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1981년 2월14일자 친서를 통해 “최근 사형이 감형된 김대중에 대해 순수하게 인도적 이유로 자비를 베풀어주실 것을 요청했습다.”며 “(전두환) 각하께서 신속히 배려(감형)해 주신 데 대해 감사드린다.”고 밝혔다. 김 전 대통령은 대법원에서도 사형이 확정됐지만 교황을 비롯한 국제사회에서 구명 운동을 벌이고 미국 등이 ‘김대중 사형은 지나치다.’며 군사정권을 압박한 결과 무기징역으로 감형됐었다. 김 전 대통령은 다시 징역 20년으로 감형되고 나서 1982년 형 집행정지를 받고 미국 망명길에 올랐으며, 1987년 사면·복권되고 대통령 임기를 마친 2003년 내란음모 사건에 대한 재심을 청구해 이듬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와 관련, 김 전 대통령의 한 측근은 “당시 국제 사회의 구명운동이 결정적인 역할을 해 김 전 대통령이 사형을 면할 수 있었다.”고 회고하며 “구명운동에 교황청이 적극적으로 동참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자료”라고 말했다.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은 1980년 신군부가 정권 탈취과정에서 발생한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 5·18 민주화운동이 ‘김대중 일당’의 내란음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조작한 사건으로, 김 전 대통령을 비롯해 고 문익환 목사와 이해찬 전 총리 등 당시 민주화 인사 24명이 연루돼 고초를 겪었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미얀마 군정, 아웅산 수치 여사 구금

    미얀마 군정, 아웅산 수치 여사 구금

    미얀마 민주화의 상징으로 13년 동안 가택 연금돼온 아웅산 수치 여사가 이제는 수감될 위기에 처했다. 미국인 남성이 잠입한 사건에 연루돼 연금 중이던 수치 여사가 14일 집을 떠나 옛 수도 양곤에 있는 악명 높은 정치범 수용소인 인세인 교도소로 이송됐다고 AP통신 등이 보도했다. 그가 주도하는 야당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의 니얀 윈 대변인은 “수치 여사가 가정부 2명과 함께 수용소에 구금됐으며, 당국은 그를 기소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수치 여사의 기소 혐의는 아직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으나, 미얀마 망명단체들은 그가 7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해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현재 알려진 기소 혐의는 그가 미국인 국적의 한 남성에게 자택 방문을 허용했다는 것이다. 앞서 지난 5일 윌리엄 이타우란 이름의 미국인은 호숫가에 있는 수치 여사의 집에 잠입해 이틀간 머문 뒤 새벽에 몰래 빠져나오다 보안군에 체포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의 변호사 치 윈은 “수치 여사가 미국인 남성을 집으로 불러들인 사실이 없다.”고 부인했다. 이와 관련, 일각에서는 군정이 수치 여사의 연금기간을 연장하기 위한 술책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의 가택연금은 오는 27일 끝날 예정이었다. 수치 여사는 1988년 민주화 운동에 투신한 이래 군부에 의한 연금과 해제가 반복돼 지금까지 연금된 기간만 만 13년에 이른다. 가택연금 중에도 NLD를 이끌어 1990년 5월 선거에서 압승을 거뒀으나, 군부는 선거 결과를 인정하지 않았다. 2003년 5월 그를 세 번째로 가택 연금한 군정은 그와 국민 간의 접촉을 우려해 이후 해마다 연금기간을 연장하고 있다.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슬프지만 유머도 좀 있어… 내 영화 잘 관찰하고 웃어라”

    “슬프지만 유머도 좀 있어… 내 영화 잘 관찰하고 웃어라”

    올해 전주국제영화제(8일까지)가 회고전의 주인공으로 초청한 감독은 유럽 최고의 거장으로 꼽히는 폴란드 출신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71) 감독이다. 지난 2일 방한 첫날, 전주 고사동 한 카페에서 만난 스콜리모프스키 감독은 장시간 비행과 시차 때문에 피곤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내내 눈빛은 형형하고 목소리에는 힘이 넘쳤다. 이번 회고전에서 상영되는 작품은 1960년부터 2008년까지 그가 연출한 22편의 영화 가운데 ‘출발’(1967년·베를린영화제 금곰상), ‘외침’(1978년·칸영화제 심사위원 대상), ‘문라이팅’(1982년·칸영화제 각본상) 등 주요작 9편과 그의 인생을 담은 다미앙 베르트랑의 다큐멘터리 1편(2003년 ‘영화감독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 등 모두 10편이다. 그는 “전주영화제가 내 작품을 상영해 매우 기쁘고 영광이다.”면서 “중요한 작품이 거의 다 들어가 있으며, ‘등대선’만 추가됐더라면 더 좋을 뻔했다.”고 말했다. 다만 상영작 ‘페르디두르케’에 대해서는 “내가 싫어하는 영화”라며 “비톨트 곰브로비치의 소설을 영화화했는데, 번역이 불가능한 폴란드 소설을 영어로 제작했기 때문에 애초 시도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다.”고 밝혔다. ●반스탈린주의에 상영금지돼 망명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 감독의 작품 여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손들어!’(1967년)가 반스탈린주의적 성향 때문에 자국에서 상영금지되자 해외로 정치적 망명을 떠나야 했다. 이후 이탈리아, 독일, 영국 등지를 떠돌면서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만들었으며, 현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거주하고 있다. 그는 “‘딥 엔드’, ‘외침’ 등을 찍은 영국에서 영화적 지식을 숙련되게 쌓았고 자신감이 많이 생겼다.”고 말했다. ●한때 영화 증오… 17년간 화가 활동 1991년 ‘페르디두르케’를 찍은 이후 17년 동안은 오직 전업화가로만 활동했다. 그는 “‘페르디두르케’를 끝내고 그 영화를 거의 증오하게 돼 영화작업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오랜 영화계 공백기는 그의 말에 따르면 “예술가로 재탄생하는 시간”이었다. 그는 “그림에 집중하면서 열정을 되찾게 됐으며, 진정한 화가가 되려는 야망도 채울 수 있었다.”면서 “배우 잭 니컬슨, 데니스 호퍼를 비롯해 많은 개인 컬렉터들과 박물관이 내 그림을 소장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내놓은 복귀작 ‘안나와의 나흘 밤’은 2008년 칸영화제에서 “과연 거장”이란 찬사를 이끌어 냈다. 감독은 유럽의 영화혁명인 누벨바그와 교류하는 등 동시대 감독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당시 누벨바그는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유행하고 있었다.”면서 “1965년 이탈리아 페사로에서 열린 뉴시네마 페스티벌에서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마르코 벨로키오, 밀로스 포먼, 얀 네메치, 폴커 슐렌토르프, 알렉산더 클루게 등 각국의 감독들을 만난 적이 있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스타일은 분명 공통점이 있었지만, 사실 모두들 누벨바그를 독립적으로 재창조하려 했었다.”고 설명했다. ●초면 주연배우에 12번이나 침뱉은 일화도 감독은 다수의 작품에서 배우로 활약하기도 했다. 지난해는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이스턴 프라미스’에 출연했다. 당시 에피소드를 묻자 첫 촬영에서 주연 비고 모텐슨에게 침을 뱉어야 했는데 테이크(take)를 여러 번 가서 초면인 그에게 침을 12번이나 뱉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의 영화 열정은 현재진행형이다. 이르면 올해에도 제작자 제레미 토머스와 함께 새 영화 ‘에센셜 킬링’을 선보일 예정이다. 자신의 작품을 감상하는 법에 대해 거장이 제시한 해답은 간명했다. “슬프지만 약간이라도 미소 지을 만한 유머감각이 있을 것이다. 관찰하고 웃어라.” 글ㆍ사진 강아연기자 arete@seoul.co.kr
  • 해공 신익희 53주기 추모식

    임시정부 법무총장 등을 역임하고 광복 후 국회의장을 지낸 해공 신익희 선생 53주기 추모식이 5일 오전 11시 서울 수유리 묘소에서 거행된다.해공 신익희선생 기념사업회(회장 류기정) 주관으로 열리는 추모식에는 이종정 국가보훈처 차장과 광복회 승병일 부회장, 이성우 국민대 총장 등 300여명이 참석한다. 신익희 선생은 1919년 상하이로 망명한 후 국호, 관제, 정부 관원 및 임시헌장 등을 의결 선포하는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탄생에 기여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돼 국회의장에 선출됐고 1956년 민주당 공천으로 대통령에 입후보, 당선이 유력했으나 유세 중 서거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안동환기자 ipsofacto@seoul.co.kr
  • 15년 만에 연주회 나선 뚜레 증후군 피아니스트

    지난달 28일 저녁(현지시간) 런던 슬로얀 광장에 있는 카도건 홀 무대에선 한 피아니스트의 뜻깊은 콘서트가 열렸다.주인공은 데이비드 패리가 지휘하는 잉글리시 챔버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닉 반 블로스(41).세계적인 오케스트라와 함께 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무엇보다 이 공연이 각별했던 것은 블로스가 다른 이의 귀에 피아노 선율을 들려준 것이 무려 15년 만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영국 일간지 ‘이브닝 스탠더드’는 블로스가 26세 때인 1994년에 건반을 두드리는 걸 그만 두고 포르투갈 리스본으로 떠나 혼자 오두막에 칩거해왔다고 전했다.어쩌다 문 앞에 음식을 가져다주는 나이든 이웃 여성이 있었는데 그녀는 귀머거리였다.신문은 블로스가 ‘내면으로의 망명’를 마침내 끝냈다고 썼다.  블로스는 보통 사람에게 낯설게 여겨지는 ‘뚜레 증후군’이란 장애를 갖고 태어났다.영화 ‘샤인’의 실제 주인공인 호주 출신 피아니스트 데이비드 헬프갓이 앓았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도 이 질환을 갖고 있었다면 쉽게 증상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흔한 증세는 눈 깜박임.그는 하루에 무려 4만 번이나 눈을 깜박였던 시절이 있었다.또 얌전히 앉아 있거나 대화 도중에 갑자기 “뻑뻑” 등의 괴상한 소리를 지르곤 했다.미국 드라마 ‘보스턴 리갈’에 대인기피 증후군의 일종으로 긴장하면 갑작스레 괴성을 지르는 장애를 갖고 있는 변호사가 나오는데 전형적인 이 증후군 장애 유형이다.  영국 BBC가 지난해 제작한 ‘심리학-미쳤지만 복받은(Mad but glad)’ 다큐멘터리에 블로스가 집중 소개됐는데 동영상 공유 사이트 유튜브에 5회로 나눠 게시돼 있어 아래 링크를 건다.   ☞동영상 보러가기    어릴 적부터 괴이쩍은 행동 탓에 친구들로부터 ‘왕따’를 당했던 블로스는 일곱 살 때 우연히 정원에서 피아노 건반을 만지작거리게 됐고 열 살때부터 본격적으로 피아노 레슨을 받았다.당시에는 뚜레 증후군인지 몰랐지만 블로스는 “근육 하나하나를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고 마치 내 몸 안의 낯선 어떤 것들이 나를 자꾸 떠미는 것 같았는데 피아노 의자에 앉으면 음악을 정말 즐길 수 있었어요.그 모든 것(낯선 것)을 꼼짝 못하게 만들 수 있었던 거지요.”라고 말했다.  ”연주하기 전 몇 초 동안 전,멋진 말,’정상’이란 단어를 떠올릴 수 있었거든요.”  수년 동안 이 증상과 싸워가면서 그는 로열 칼리지 오브 뮤직에 입학했다.빛나는 재능을 뽐내던 형이 마약 중독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등의 시련을 견뎌내며 전문 연주자 수업을 받아 어느 정도 그 꿈에 다가선 듯했다.  그러나 20대 중반에 스페인 발렌시아의 한 콩쿠르에 참여했던 그는 도저히 손가락 마디마디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음을 확인하고 낙담,은퇴를 결심하기에 이르렀다.”관중들은 일제히 한숨을 내쉬더군요.전 속으로 ‘그래 당신들이 이겼어.난 실패야.’라고 생각했어요.”  15년이란 간단치 않은 세월,그는 오두막에서 오직 피아노 건반하고만 씨름했고 이제 청중 앞에 설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그래서 이날의 무대가 마련된 것.  그는 무대에 서기 전 자신 안의 악령을 묻어버리고 싶다고 했다.”부정을 긍정으로 바꾸고 싶어요.뚜레 증후군은 한때 적이었지만 오늘날의 나를 음악인으로 만든 힘이기도 하다는 점을 받아들이게 됐어요.저주받은 동시에 축복받은 거지요.” 인터넷서울신문 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씨줄날줄] 미술관과 갤러리/함혜리 논설위원

    왕족과 귀족, 부유층의 전유물이던 예술품을 대중이 향유할 수 있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18세기 말의 시민혁명이다. 봉건사회에서 근대 시민사회로 넘어가면서 유럽의 대부분 궁궐들은 왕과 시민이 함께 즐기는 공공 박물관으로 탈바꿈했다. 프랑스의 루브르박물관도 혁명정부가 궁전의 일부를 ‘예술 박물관’으로 만들어 왕실 소유 미술품, 성직자 및 종교단체와 망명자 재산에서 압수한 예술품을 시민들에게 공개한 것이 그 시작이다. 당시 박물관은 단순한 미술 전시관의 차원을 넘어 ‘학교’로서 공적인 성격이 강했다. 프랑스의 박물관에 대한 이같은 접근방식은 구미 각국에 곧바로 전파돼 국립박물관 및 미술관 설립을 촉발시켰다. 미술관·박물관을 시민들의 여가활동 및 교육을 위한 공공재로 가장 충실하게 활용하고 있는 나라는 영국이다. 영국에서는 보다 많은 시민들이 예술을 향유할 수 있도록 모든 국립 박물관 및 미술관을 무료로 운영한다. 국립미술관인 내셔널갤러리를 보면 얼마나 그 원칙에 충실한지를 쉽게 알 수 있다. 13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서유럽의 대표적 회화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내셔널갤러리는 런던의 중심부 트라팔가 광장에 위치한다. 런던의 부유한 지역인 웨스트엔드와 가난한 지역인 이스트엔드의 한가운데에 미술관을 두어 신분, 교육, 수입, 거주지의 구애 없이 모든 시민이 예술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미술관이 비영리적이고 교육적인 성격이 강한 반면 갤러리는 판매를 위해 그림을 전시하는 상업화랑을 가리킨다. 미술관에 전시된 그림이나 작품은 사고파는 것이 아니지만 갤러리는 작품을 발굴해서 소비자에게 연결하는 미술 마케터의 역할을 한다. 상업적인 갤러리들이 한데 모여 여는 미술장터가 아트페어다. 배순훈 국립현대미술관장이 소격동 기무사터에 들어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첫 전시로 아시아 대학생·청년작가들의 아트페어인 아시아프(ASYAAF)를 열겠다고 밝혔다. 기무사터를 미술관으로 전환하는 데 앞장섰던 시민들과 미술계는 극구 반대하지만 소귀에 경 읽기다. 미술관과 갤러리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걱정이다.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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