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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교육 바꿔? 버려?

    공교육 바꿔? 버려?

    교육감의 행보가 어지간한 정치인의 그것보다 주목 받는 요즘, 한국의 공교육 문제를 다룬 두 권의 책이 나란히 출간됐다. ‘우리 학교가 달라졌어요’와 ‘학교를 버리고 시장을 떠나라’다. 두 책은 ‘아이들을 바르게 길러 내자.’는 목적은 같지만, 이를 수행하는 방법에서는 다른 길을 걷는다. 전자는 학교를 변화시키자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따라서 현실적이고 체제 순응적이다. 반면, 후자는 학교를 버리라는 입장이다. 다분히 체제 비판적이고 이상적이다. 정답은 뭘까. 분명한 것은 우리 공교육은 현실에서건 이상에서건 변화의 단초를 찾아야 한다는 점이다. ●가즈히로 교장의 학교개선 분투기 기업체 경영 일선에 있던 인사들이 교육 현장에 투신하는 경우가 우리나라에서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교직 경력이 전혀 없는 르노삼성자동차회사 부사장이 지난해 부산 자동차고 교장에 취임해 화제가 됐고, 올 초에도 풍산금속 기술고문이 울산 정보통신고, LG전자 상무가 구미 전자공고 교장으로 각각 영입되면서 이목을 끌었다. 2001년부터 일찌감치 교장직을 개방한 일본에서는 이른바 ‘CEO(최고경영자)형 교장’들이 돌풍을 일으키며 교육 개혁의 선두주자로 나서고 있다. ‘우리학교가 달라졌어요’(후지하라 가즈히로 지음, 전선영 옮김, 부키 펴냄)는 2003년 일본 도쿄도(東京都) 스기나미 구립 와다중학교에 도쿄도 최초의 기업인 출신 교장으로 취임, 화제를 모았던 후지하라 가즈히로(藤原和博) 교장의 ‘좋은 학교 만들기 분투기’다. 교장 재임 시절 아사히 신문 등에 연재했던 글을 정리했다. 취업정보회사인 리크루트에서 25년간 일한 기업인 출신의 후지하라 교장은 취임 후 5년만에 와다중학교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학생 수가 모자라 폐쇄 직전에 이른 학교가 전국 67개 지역 초·중등학교 가운데 입학 희망 개선도 2위에 오르는 인기 학교가 됐고, 학생들의 학력 또한 지역 1위에 올랐다. 그가 학교에 내린 처방은 어떤 것이었을까. 입시학원과 연계한 ‘방과 후 수업’, 수준별 맞춤 수업인 ‘토요 글방’, 지역 주민들이 참여하는 ‘세상 수업’, ‘농사체험 수학여행’ 등이다. 우리 학교에서 시행하고 있는 프로그램들과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인다. ‘4학기제’를 운영해 한 학기를 제대로 보내지 못한 학생에게 만회 기회를 준다거나, 교장문고를 운영해 학생들과 대화의 시간을 갖는 것 등이 다소 신선하게 느껴질 정도다. 해답은 프로그램 실행의 진정성에 있다는 얘기다. 2008년 5년 임기를 마치고 퇴임한 뒤 현재 오사카부 교육 특별고문으로 활동 중인 그는 “그릇(학교)은 관계없다.”며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학교에서 풍요로운 세계관과 인생관을 배울 수 있느냐 없느냐다.”라고 강조한다. 1만 2000원. ●‘학벌없는 사회’ 학벌타파 투쟁기 이 나라에 살고 있는 학부모인 이상, 자신의 자녀를 정규 학교가 아닌 대안 학교에 보내는 것을 한번쯤은 생각해 보지 않았을까. 다만 그로 인해 인생의 중대한 변곡점을 지나게 될 자녀의 미래에 대한 ‘확신’이나 ‘담보’가 없고, 그 탓에 실행할 ‘용기’도 갖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터다. ‘학교를 버리고 시장을 떠나라’(김상봉 외 7명 지음, 메이데이 펴냄)는 이런 고민을 안고 사는 학부모들에게, 그리고 학생들에게 ‘결단’하고, ‘저항’하며, ‘연대’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학벌 타파 운동을 벌이고 있는 시민단체 ‘학벌없는사회’가 단체의 이름을 내걸고 벌인 시리즈 중 첫 번째인 책은 더 이상 이 땅에 학교는, 공교육은 없다고 단언한다. 학교는 교육이 아니라 반교육을 하는 곳이고, 지금 학교를 망치고 있는 주범은 교육에 침투한 시장경쟁의 논리라는 것이 그 이유다. 책 전반부에 저자들의 생각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한국의 학교처럼 나쁜 공간도 없다. 야수적 경쟁과 폭력의 전시장이 오늘날 한국의 학교”이니 “가능하면 학교를 다니지 않는 것이 좋다.”고 충고한다. 학교를 나온 뒤에는 “대안학교에 가는 것이 좋은데, 그럴 수 없을 경우에는 (학교보다) 차라리 학원을 찾으라.”고 권한다. 책은 공교육이 무너지고 있는 현상과 원인은 물론 대책도 분석적으로 논한다. 체제의 요구 일체를 거부하는 ‘내부로의 망명’ 떠나기, 학교밖 청소년에 주목해 다양한 학교 밖 배움터 만들어내기, 국립대 서열 없애기, 입사원서에 학력란을 없애는 ‘블라인드 채용’ 의무화 같은 제도적 개선책과 학벌체제를 거부하는 학생과 학부모의 자세 등을 새로운 탈출구 전략으로 제시하고 있다. 우리는 이미 공교육의 위기를 인식하고 있다. 책은 우리에게 결단을 강권한다. 자, 결단의 시점은 어느 때라야 옳을까. 우리 아이들 세대? 아니면 그 다음 세대? 1만 3000원.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 마르크스 탈고 뒷얘기

    마르크스 탈고 뒷얘기

    ‘자본’은 마르크스가 정치경제학 연구에 착수한 지 거의 20년 만에 내놓은 미완의 역작이다. 1867년 마르크스가 직접 탈고한 책은 1권뿐이고, 2권과 3권은 엥겔스가 마르크스의 원고를 모아 사후에 엮은 것이다. ‘자본’의 기본 구상이 이루어진 1850년대 말에서 1860년대 초 사이, 마르크스는 스스로의 표현을 빌리자면 ‘미친 사람’처럼 연구와 집필에 몰두했다. 하지만 집필 환경이 좋았던 것은 아니다. 망명지에서의 생활고 때문에 자식도 잃었고, 약한 폐와 엉덩이 종기로 집필을 중단하기도 했다. ‘자본’의 마지막 몇 페이지는 종기 때문에 아예 일어서서 썼다고 한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그의 아내도 감탄할 만한 유쾌한 정신의 소유자였다. ‘자본’ 집필을 마친 후 그는 원고를 직접 함부르크에 있는 출판사에 가져가려 했다. 하지만 입고 갈 옷과 시계가 전당포에 있었다. 정작 원고는 썼는데 옷이 전당포에 있어 갈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는 마르크스의 처신을 통해 볼 때, 비극이기보다는 가난한 자의 코믹한 일상에 가까웠던 것 같다. 마르크스는 엥겔스에게 돈을 받아 전당포에 감으로써 ‘자본’ 출판의 첫 번째 실무를 수행했다. 출판사에 원고를 넘긴 뒤 교정지를 받기까지 한 달 동안, 마르크스는 자신의 팬이었던 쿠겔만의 집에 머물렀다. 거기서 그는 온갖 익살과 농담, 박식을 뽐내며 쿠겔만의 가족과 이웃을 즐겁게 해주었다. 그는 사람들을 즐겼고 사람들은 그를 즐겼다. 그 와중에 비스마르크가 보낸 사절이 와서 독일을 위해 그의 두뇌를 써줄 수는 없는지 묻기도 했다. 그런데 유머를 잃지 않던 그가 딱 한 번 분노를 터뜨린 적이 있다고 한다. 어느 방문객이 ‘공산주의에서는 누가 구두를 닦느냐.’고 물었을 때였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쏘아붙였다. “당신이 닦으쇼.” 쿠겔만 부인이 마르크스 같은 귀족적 인물이 평등사회에서 살아갈 모습을 상상하기 어렵다고 하자 그는 말했다. “나도 상상할 수 없소. 그런 시대가 반드시 오겠지만, 그 때 우리는 이미 세상에 없을 거요.” 서울신문·수유+너머 공동기획
  • 한획두획… 역사를 담고 신념을 말하다

    한획두획… 역사를 담고 신념을 말하다

    ‘서여기인(書如其人)’이라 했다. 글씨는 곧 그 사람과 같아 인격과 성정이 서체에 고스란히 배어난다는 뜻이다.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이 한·일 강제병합 100주년 특별전으로 23일 개막하는 ‘붓 길, 역사의 길’은 이런 전제에서 출발한 흥미로운 기획이다. 망국의 시기를 전후해 역사의 흐름을 좌지우지한 주역들의 필적을 통해 근현대사의 굴곡을 반추하겠다는 자못 야심찬 시도다. 한획두획… 역사를 담고 신념을 말하다 척사와 개화, 매국과 순절, 친일과 항일 등 역사의 굽이마다 대척 관계에 섰던 인물 70여명의 필적 100여점을 한자리에 모아 비교하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이다. 이를 테면 이토 히로부미의 칠언시에 차운(남이 지은 시의 운자를 따서 시를 지음)을 한 박제순, 조중응 등 을사오적과 이와 정반대 입장에서 순절을 택한 민영환, 안중근 등 애국지사의 필적을 대비하는 식이다. 전시를 기획한 이동국 수석 큐레이터는 “글씨는 그 사람인 동시에 그 인물이 생존한 시대와 사회의 산물”이라면서 “필적이야말로 사회 현실을 가장 정확하게 증언하는 자료”라고 말했다. 일례로 이토 히로부미가 1908년 5월 귀국을 앞두고 쓴 칠언시는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것으로, 당시 매국에 앞장섰던 인물들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토 히로부미가 ‘뭇 사람들과 헤어지자니 더욱 더 아쉬워/고운 얼굴에 흰 머리는 바로 신선들이다/교린의 기월이 맹단에 남아 있으니/양국에 화기가 오랫동안 맴돌리라’는 칠언시를 쓰자 이 자리에 함께 있던 조중응은 ‘동풍에 돛을 달아 귀국하시고 나서도/큰 꿈이 이따금 접역에서 뒤척이시라’는 답시를 썼다. 박제순은 ‘세상에 우뚝 선 풍모는 스스로 탁월하셔서/물러나 쉬는 즐거운 곳에서 신선이 되시었네’라며 낯뜨거운 찬양가를 덧붙였다. 을사오적 중 한 명인 이완용은 초대 일왕인 신무를 기리는 칠언절구를 남겼다. 반면 민영환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명함에 ‘우리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하면 죽은 몸도 저승에서 기뻐 웃으리라.’는 유서를 쓰고 자결했다.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은 옥중에서 ‘국가안위 노심초사’라는 명필을 남겼다. 이동국 수석큐레이터는 22일 “이완용은 서체에 변화가 심해 상황에 따라 성정이나 기질이 달라진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는 반면 안중근은 송곳 같고 칼 같은 필체로 직필(直筆)의 표본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해방 공간에서 남북공동정부 수립과 남한단독정부 수립을 놓고 대립했던 김구와 이승만의 필체도 뚜렷이 구분된다. 김구는 차돌처럼 단단하고 강직한 서체인 데 비해 이승만은 서체가 부드러워 자유주의자로서의 기질이 드러난다는 평이다. 이 밖에 흥선대원군의 ‘묵란’, 민영익이 상해 망명 당시 기거했던 집인 천심죽재를 그린 그림, 갑신정변의 4인방 필적, 만해선사와 여운형의 필적 등 처음으로 공개되는 작품들이 상당수다. 문창국 예술의전당 전시사업부장은 “이번 전시는 우리의 과거와 현재·미래를 망국·분단·통일의 관점에서 조망하는 3부작 시리즈의 하나로, 내년 초 분단과 통일을 다룬 전시회를 열 계획”이라고 말했다. 8월31일까지. (02)580-1300.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사설] 日, ‘약탈문화재 반환’ 실천으로 이어지길

    일본정부가 한·일 강제병합 100년이 되는 오는 8월29일 발표할 총리 공식 담화문에서 우리 문화재의 반환 방침을 밝히는 것을 검토 중이라고 한다. 조선왕실의궤를 우선 반환 대상으로 고려하고 있으며 이후 다른 문화재들도 유출과정의 불법성을 확인한 후 순차적으로 추가 반환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고 한다. 해외유출 문화재 반환 문제는 학계·시민단체에서 꾸준히 제기돼 온 것이며, 이 문제에 대해 일본 내 방침도 아직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섣부른 예측을 경계해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실현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라고 본다. 센고쿠 요시토 일본 관방장관이 최근 일본정부의 기존 입장과 다른 취지의 발언을 한 점에 우리는 주목한다. 센고쿠 장관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전후처리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됐지만 한·일관계 개선을 위해 필요하다면 개선 가능한 방침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구체적인 보상과제의 하나로 한국에서 유출된 문화재 반환문제를 거론했다. 현재 일본에는 공식적으로 6만 1000여점의 문화재가 반출돼 있다. 이 중 상당수가 강점기에 불법으로 유출된 것이다. 일본 왕궁 도서관인 궁내청에 보관된 조선왕실의궤는 1922년 조선총독부의 기증형식으로 반출된 것이다. 한국과 일본 두 나라가 과거사를 청산하고 진정한 동반자가 되기 위해서는 선언적 의미에 그치는 담화보다는 구체적인 행동이 필요하다. 제국주의 시대에 약탈해 간 문화재를 원소유국에 돌려주는 것이 국제적 추세다. 두 나라 정부가 조금씩만 양보하고 노력하면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자존을 상징하는 문화재들이 ‘망명생활’을 마치고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다. 일본 정부는 빼앗아간 문화재를 돌려줌으로써 강제병합에 대한 사과의 진정성을 보여줘야 한다. 정부도 소극적 태도를 버리고 문화재 반환에 가능한 모든 역량을 집중해 줄 것을 당부한다.
  • 두 스파이의 엇갈린 운명

    두 스파이의 엇갈린 운명

    ■ 고국 러시아서 영웅대접 “안나 채프먼 국회로” 미국에서 간첩 활동을 하다 체포된 뒤 러시아로 송환된 안나 채프먼(28)이 고향 볼고그라드(옛 스탈린그라드)에서 영웅 대접을 받고 있고, 러시아 국가 두마(하원의원)에 출마할 가능성도 있다고 미국 시사주간 뉴스위크가 16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뉴스위크는 국가주의 성향이 강한 러시아 자유민주당(LDPR)이 오는 2012년 차기 총선에서 채프먼을 두마 후보로 내세울 가능성을 거론했다. 알렉산드르 포타포프 자유민주당 볼고그라드 지부장은 “채프먼이 관심을 보인다면 2012년 차기 총선에서 그를 두마 후보로 추대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자유민주당은 지난 2006년에도 영국으로 망명한 전직 연방보안국(FSB) 요원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를 독살한 혐의로 영국 정부가 송환을 요구한 안드레이 루고보이를 두마에 진출시킨 전력이 있다. 뉴스위크는 러시아 집권당인 통합러시아당조차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와 염문설이 나돈 체조 선수를 비롯해 발레리나, 누드모델 출신 연예인을 영입한 사실을 거론하며 “오늘날 두마는 채프먼에게 꼭 맞는 일자리가 될 것”이라고 꼬집었다.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 美국무부 각종기밀 쿠바로 마이어스 부부 종신형 30년 넘게 쿠바를 위해 간첩 활동을 했던 전직 미국 국무부 관리와 공범인 그의 부인이 16일(현지시간) 법원에서 각각 종신형과 6년9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월터 켄달 마이어스(73)는 은행원이던 부인 그웬덜린(72)과 함께 1977년 쿠바 정부에 포섭돼 각각 ‘요원 202’와 ‘요원 123’이란 암호명을 부여받았다. 이후 유럽의 민감한 정보를 비롯해 각종 특급 기밀문서에 접근할 권한을 가진 국무부 해외국 선임 분석관으로 승진한 마이어스는 적잖은 기밀정보를 쿠바 정부에 넘겨줬다. 마이어스 부부는 1995년 쿠바를 방문해 당시 피델 카스트로 국가평의회 의장을 면담하기도 했다. 2007년 국무부를 은퇴한 마이어스 부부는 지난해 연방수사국(FBI) 요원들에게 체포돼 구속됐다. 마이어스 부부는 감형을 조건으로 유죄를 인정했다. 미 연방 지방법원은 마이어스가 국무부에서 재직하며 받은 월급 170만달러를 몰수하라고 판결했다. 이에 대해 마이어스 부부는 “우리가 간첩활동을 한 것은 돈을 벌 목적으로 한 것도 아니고 미국에 반대하려는 것도 아니었다.”면서 “쿠바 사람들이 혁명의 성과를 지킬 수 있도록 돕기 위한 것이었다.”고 항변했다.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 첩보전 중심 동쪽으로

    최근 미국과 러시아 간의 스파이 맞교환이 전 세계 이목을 집중시켰지만, 양국은 더 이상 첩보전의 중심이 아니다. 21세기 ‘간첩 게임’은 중동 등 수천마일 동쪽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AP통신이 15일 보도했다. 알 카에다 이중 스파이가 미 중앙정보국(CIA) 요원을 살해하고 이란의 핵 과학자들이 사라지거나 의문의 죽음을 맞고 있다. 미국의 첩보 활동 역시 냉전 종식과 함께 이란, 북한, 시리아, 알 카에다등을 향하고 있다. 비밀 정보 수집은 기존 강대국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중국은 좀더 정교한 사이버 기술을 이용해 강국들을 감시하고 있다. CIA 간부출신인 미 육군참모총장 특별보좌관 마크 세이지먼은 “중국은 그 어느 때보다 활발히 우리들의 정보를 캐내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와 비교하면 지난 9일 미국에서 추방된 러시아 스파이 10명이 갖고 있었던 기술은 과거 니키타 후루시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도청을 당하지 않기 위해 신발로 책상을 치던 것만큼이나 구시대 유물인 것이다. 전 세계 스파이들의 활동 중심지는 여전히 오스트리아 빈이다. 냉전 시대와는 달라졌지만, 아직도 이곳에서 각 국가의 스파이들의 정보 거래가 이뤄진다. 또 이들은 각국 대사관이나 국제원자력기구(IAEA) 본부에 침투, 정보를 빼내고 있다. IAEA의 경우 첩보 활동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IAEA가 첩보전에서 얻은 정보를 이용하기도 한다. 이란의 핵 개발 의혹도 이란에서 밀반출한 노트북 컴퓨터에 담겨 있던 정보들에서 비롯됐다. 또 다른 첩보전의 무대는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이다. 미국은 인력과 첨단 기술을 이용해 탈레반과 알 카에다 반군을 공격하고 있다. 반면 반군은 스파이들을 잠입시켜 미군의 ‘허’를 찌르고 있다. 지난해 12월 아프간 내 CIA 지부에서 요르단 의사 출신인 알 카에다 이중 첩자가 자살 폭탄 테러를 자행, CIA 요원 7명과 요르단 정보장교가 사망한 바 있다. 이처럼 스파이 활동은 과거와 다름 없이, 정보를 교환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암살된 이란의 핵 과학자 마수드 알리 모하마디의 경우처럼 스파이들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는 납치와 살해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1년 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사라졌다가 최근 모습을 드러낸 이란의 핵과학자 샤흐람 아미리의 경우 ‘자진 망명’과 납치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나길회기자 kkirina@seoul.co.kr
  • ‘납치설’ 이란 핵 물리학자 실종 1년만에 美서 나타나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실종됐던 이란의 핵 물리학자가 실종 1년여 만에 미국에서 나타나 이란으로 보내달라고 호소, 미 정보당국의 납치설을 둘러싼 파장이 커지고 있다. 테헤란 말렉 아시타르 대학에서 근무하던 핵 물리학자 샤흐람 아미리(32)는 지난해 5월31일 성지순례차 다른 일행과 함께 사우디를 방문했지만 3일 후 메디나의 호텔에서 외출한 뒤 실종됐다. 그의 행방이 6개월이 넘도록 묘연했던 가운데 이란 외무부는 지난해 12월 “여러 정황을 고려할 때 미국 정보당국이 아미리를 납치했으며 사우디 정보당국도 미국의 납치행위를 도왔다.”며 미국의 납치설을 최초로 주장했다. 그러나 지난 3월 미국의 ABC방송은 아미리가 미국에 망명했고, 이란의 비밀 핵프로그램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고 중앙정보국(CIA) 관계자들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지난달에는 자신을 아미리라고 주장한 남성의 발언이 담긴 영상들이 잇따라 공개되면서 납치설을 둘러싼 논란이 더욱 증폭됐다. 이란 외무부는 영상들이 공개되자 아미리가 미국에 의해 납치된 것이라고 재차 강조하며 미 대사관 업무를 대행하고 있는 테헤란 주재 스위스 대사를 소환해 항의하기도 했다. 13일 BBC방송에 따르면 아미리는 결국 지난 12일 밤 워싱턴 주재 파키스탄 대사관의 ‘이란 구역’에 도착한 뒤 이란으로의 송환을 요구하고 있다고 파키스탄 외무부가 확인했다. 미국 정부는 이번 사건과 관련해 공식적인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BBC 방송은 아미리가 본국 송환을 강력하게 요구함으로써, 미국 납치설을 제기해 왔던 이란의 주장이 더 설득력 있게 작용할 수 있게 됐으며 미 정보당국에는 크나큰 당혹감을 안겨 줬다고 전했다. 이석우기자 jun88@seoul.co.kr
  • [씨줄날줄] 스파이 교환/이춘규 논설위원

    1962년 2월10일 독일 베를린과 포츠담을 잇는 그리니커 다리 동·서쪽 끝에 각각 한 사람이 섰다. 이들은 다리를 건너가 자국 인수팀에게 갔다. 미국과 소련의 첫 스파이 교환. 미국은 뉴욕에서 고정간첩 활동을 하다 검거한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대령 루돌프 아벨을 풀어줬다. 상대는 소련 영공에서 스파이 활동을 하다 미사일을 맞고 추락한 미 중앙정보국(CIA)의 U-2기 조종사 프랜시스 게리 파워스였다. 이런 스파이 교환은 양국의 복잡한 계산이 맞아떨어질 때 가능하다. 69년에는 영국 스파이 제럴드 브룩과 소련 스파이 피터 크루거 등의 교환이 이뤄졌다. 81년에는 동독 비밀경찰 권터 기욤과 서방 스파이의 교환이 이뤄졌다. 85년에는 동구권에 수감됐던 미국 스파이들과 폴란드 스파이 마리안 자차르스키가, 86년에는 러시아 반체제 인사 샤린스키를 포함한 3명의 서방 스파이와 KGB 스파이 코처 부부가 교환됐다. 냉전체제가 붕괴된 뒤에는 전형적인 스파이 교환보다는 외교관 맞추방으로 대체됐다. 스파이는 국가나 단체의 비밀정보를 대립관계에 있는 다른 국가 또는 단체가 이용할 수 있도록 주는 사람으로 간첩이라고 한다. 스파이는 인류 역사와 함께한다. 모세를 이은 유대 지도자 여호수아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여리고에 2명의 첩자를 파견했다는 구약성서 내용도 있다. 김춘추의 목숨을 건 고구려 첩보전과 백제 왕실에 미녀 스파이를 침투시킨 신라의 교란전이 없었다면 삼국통일은 어찌 됐을지 모른다. 9일 미국과 러시아 간 스파이 교환이 오스트리아 빈에서 이뤄졌다. 미국에서 활동하다 체포된 미녀 스파이 안나 채프먼 등 러시아 스파이 10명과 러시아에서 활동하다 체포된 미국 스파이 4명이다. 스파이 스캔들이 장기화될 경우 양국이 입을 외교적, 경제적 피해를 감안해 적절한 타협점을 찾은 것. 냉전 종식 이후 최대 규모의 스파이 교환이다. 교환장소로 왜 빈이 등장할까. 19세기 말부터 오스트리아 빈은 세계 정보유통의 중심이었다. 빈은 동서유럽의 중간지대다. 1차대전을 전후한 유럽의 혼란기 때는 망명객과 난민들이 빈으로 쏟아져 들어와 정보를 교환했다. 2차대전 후 냉전체제 아래서의 빈은 중립국 수도였기 때문에 동·서독이 대치하던 독일 베를린과 함께 유럽대륙의 양대 스파이 중심지였다. 냉전이 종식된 현재도 빈에는 2000~3000명의 스파이들이 산업, 기술, 외교안보 분야에서 암약 중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춘규 논설위원 taein@seoul.co.kr
  • [중국의 아킬레스건 티베트를 가다] 중국의 티베트, 티베트의 중국

    [중국의 아킬레스건 티베트를 가다] 중국의 티베트, 티베트의 중국

    라싸(拉薩)의 대표적 티베트 유적 포탈라궁 앞 광장에는 20여m 높이의 ‘해방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1950년 10월 중국 인민해방군이 봉건주의 농노 상태의 티베트인들을 평화적으로 해방시켰다는 기념물이다. 이 기념탑으로부터 20여m 앞에는 베이징 톈안먼(天安門) 앞 광장과 마찬가지로 중국 국기인 오성홍기 게양대가 설치돼 있다. ‘포탈라궁-베이징중로-국기게양대-해방기념탑’ 구도는 베이징 중심가의 ‘자금성(紫禁城)-창안(長安)대로-국기게양대-혁명열사기념탑’ 배치와 닮았다. 작은 베이징이 연상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중국은 국제사회에서 티베트나 달라이 라마 문제만 거론되면 ‘핵심이익’에 대한 침해라며 강력 반발하고 있다. 프랑스의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이 2008년말 중국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달라이 라마를 면담하자 중국은 프랑스와의 모든 교류를 끊었다. 프랑스가 여러 차례 화해사절단을 보낸 뒤에야 중국은 마지못해 손을 내밀었다. 올 초 중국과 미국의 관계가 긴장된 이면에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달라이 라마 면담 등 티베트 문제가 끼어있다. 중국은 왜 이처럼 티베트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일까. 티베트 취재를 떠나기 전 베이징에서 만난 중국 공산당 중앙통일전선공작부의 한 간부는 “오랫동안 서방 언론들은 티베트의 진실을 왜곡해 왔다.”며 “서방 언론의 티베트 보도와 중국인들의 티베트에 대한 생각은 너무나 다르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그는 “티베트의 독립을 원하는 중국인은 0.01%도 안되고, 중국인의 99.9%는 중앙정부의 소수민족 정책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항변했다. 중국 정부는 티베트 문제가 타이완, 남중국해 등과 함께 중국의 주권과 영토보존에 관한 ‘핵심이익’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티베트의 독립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티베트 제2도시인 시가체의 상하이실험학교 황융둥(黃永東) 교장도 이 같은 내용을 학생들에게 적극적으로 교육시키며 달라이 라마 등 분리주의 세력의 ‘반(反)애국적인 행동’의 실태를 여과없이 전달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렇다면 티베트인들은? 결론부터 말하자면 현지에서 만난 티베트인들은 민감한 질문에 대부분 입을 닫았다. 오히려 중앙정부의 티베트 지원에 대한 기대감을 밝히는 현지인들이 많았다. 물론 취재진이 티베트인들을 만나는 현장에는 어김없이 현지의 사복 기관원들이 눈길을 번뜩이고 있었지만 대체로 현지인들은 그런 문제에는 큰 관심이 없는 듯 했다. 강경한 목소리는 인도 다람살라에 있는 티베트 망명정부 등 해외에서 나오고 있다. 1959년 라싸 봉기 이후 티베트인들을 이끌고 망명한 14세 달라이 라마는 75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왕성한 해외활동을 통해 티베트 문제를 국제쟁점화하는데 진력하고 있다. 티베트의 열악한 인권상황을 알리는데 주력하면서 망명정부에 대한 지지와 서방권의 대중국 압력행사를 호소하고 있다. 문제는 티베트 세력간에도 독립과 자치를 놓고 이견이 존재한다는 것. 달라이 라마 등 망명정부 인사들은 독립보다는 ‘고도자치’를 내세운다. 쓰촨, 윈난, 간쑤성 일부분과 칭하이성 등 중국이 쪼개놓은 옛 티베트 땅을 한데 묶어 티베트인들에 의한 자치를 허용하라는 것이다. 중국은 독립이 아닌 자치를 요구하는 달라이 라마에 대해서도 “종교를 가장해 조국을 분열시키려는 분리주의자”라고 힐난하고 있다. 중국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국제사회의 여론을 의식, 티베트 망명정부와의 대화를 시작했다. 하지만 양측의 대화는 서로간의 입장 차이만 확인한 채 공전을 거듭하고 있다. 오히려 중국은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티베트의 안정에 더 큰 공을 들이고 있다.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자칭린(慶林) 주석은 7일 베이징에서 열린 티베트 관련 회의에서 “앞으로 일정기간 티베트와 4개 성(쓰촨, 윈난, 간쑤, 칭하이)의 티베트 지역 업무는 경계를 뛰어넘는 발전 및 지원과 사회질서와 안정을 유지하는 것에 모아져야 한다.”고 주문했다. 주요 2개국(G2)으로 커진 국력을 바탕으로 국제사회의 여론을 잠재우면서 균형발전을 통해 내부의 안정을 꾀해야 한다는 취지다. 베이징·라싸 박홍환특파원 stinger@seoul.co.kr
  • [부고] 伊 성악가 체사레 시에피

    [부고] 伊 성악가 체사레 시에피

    이탈리아 출신의 성악가 체사레 시에피가 5일(현지시간) 87세 나이로 미국 애틀랜타에서 숨졌다고 AFP 통신이 이탈리아 언론을 인용, 6일 보도했다. 1923년 밀라노에서 태어난 시에피는 무솔리니 집권 당시 스위스로 망명했으며 이후 줄곧 미국에서 생활해 왔다. 1941년 베르디 오페라 ‘리골레토’의 스파라프칠레 역으로 데뷔한 그는 19세기 이탈리아 레퍼토리와 모차르트 오페라 전문가로 꼽힌다.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의 피가로 역, ‘돈 지오반니’의 돈 지오반니 역을 포함해 18개 역할을 연기했으며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 무대에 379차례나 올랐다. 이경원기자 leekw@seoul.co.kr
  • 초등교실부터 애국 재교육… ‘독립의식 싹 자르기’

    초등교실부터 애국 재교육… ‘독립의식 싹 자르기’

    티베트 취재는 어렵게 이뤄졌다. 중국 외교부는 신청자가 많다는 이유로 서울신문 등을 배제했다가 거센 항의를 받고 나중에 추가시켰다. 취재에는 전 세계 22개 매체 28명의 기자가 참여했다. 막대한 자금투입으로 고원지대 곳곳에 거미줄처럼 깔리고 있는 교통망 등 서부대개발의 현실을 목도할 수 있었다. 5차례에 걸쳐 티베트 민중들의 삶, 환경보호와 경제발전의 틈에 낀 티베트의 빛과 그림자, 중국 정부의 고민 등을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통해 다룬다. “달라이 라마가 국가의 통일을 위협하는 행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학생들에게 교육시키는 것은 당연합니다. 한국이나 서방국가에서는 국가분열 행위자들을 옹호하는 교육을 하나요.” 티베트 제2도시 시가체(日喀則)의 상하이실험학교 황융둥(黃永東) 교장은 지난 1일 이른바 ‘애국교육’의 필요성을 적극 강조했다. 달라이 라마가 이끄는 망명정부가 국가 영토보존을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도 학생들에게 교육시키고 있다고 덧붙였다. 상하이실험학교는 상하이시 정부가 5800만위안(약 104억원)을 지원, 2005년 개교한 시가체의 대표적인 교육시설이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1471명의 학생이 재학하고 있다. 교사는 모두 123명, 이 가운데 58%가 티베트인이다. 지난봄 상하이에서 이 학교로 부임한 황 교장은 “티베트어와 중국어, 수학, 과학, 영어, 역사 등 17개 과목이 개설돼 있다.”면서 “티베트어와 중국어 이중언어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이날 오후 둘러본 초등학교 3학년 교실에서는 티베트인 교사가 어린이들에게 티베트 민속음악을 가르치고 있었다. 학교 측에서 중점을 두는 교육 부문은 티베트 언어다. 티베트인인 창충(倉窮) 부교장은 “티베트어 교육이 우선”이라면서 “수학 등도 티베트어로 번역된 교재를 이용해 가르치고 있다.”고 말했다. 창 부교장은 티베트의 근·현대사에 대한 교육도 소홀함이 없도록 신경쓰고 있다고 했다. 특히 티베트가 역사적으로 중국의 일부분이었고, 농노 상태의 티베트인들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면적으로 해방시켰다는 사실을 중점적으로 교육하고 있다고 밝혔다. 종교의 자유와 관련해선 “학교에서 특정 종교활동을 허용하고 있진 않지만 휴일에 학생들이 부모와 함께 어딜 가든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서 “학생들이 티베트 불교 등 신앙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말했다. 황 교장은 학생들의 낮은 진학률을 높이는 게 관건이라고 애써 강조했다. 중학교 진학률은 100%이지만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비율은 50%에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치구 정부는 5년 이내에 고교 진학률을 80%까지 끌어올린다는 계획 아래 학부모들을 상대로 계몽활동을 펼치고 있다. stinger@seoul.co.kr
  • 티베트불교사원 “黨의 영도따라…”

     라싸의 조캉사원(大昭寺)과 시가체의 따시룬포사원(紮什倫布寺)은 티베트 불교의 대표적인 양대 사원이다. 특히 조캉사원은 2008년 유혈시위 때 승려들이 적극 참여하면서 중국 정부의 신경을 건드린 바 있다. 두 사원에서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를 지지하는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사원을 안내한 승려들은 한결같이 중국 정부의 티베트 불교 정책을 옹호했다.  따시룬포사원 관리위원회 주임인 승려 녠자는 여러차례 “당(공산당) 중앙의 영도”를 강조했다. 녠자는 “당 중앙의 영도에 따라 민족 및 종교 정서가 잘 보호되고 있다.”면서 “특히 티베트 불교에 대해서는 중앙정부가 매우 큰 관심을 갖고 보호하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 공산당의 티베트 불교계 고위인사 지명과 관련해서는 “공산당이 신앙을 믿지 않는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하지만 중국 공산당은 56개 민족의 문화와 종교를 존중하며 신앙 활동을 보장하고 있다.”고 지지를 표명했다.  따시룬포사원은 달라이 라마와 함께 티베트 불교의 대표적 활불(活佛)인 판첸 라마와 밀접한 사원이다. 중국 중앙정부는 달라이 라마가 지명했던 11세 판첸 라마인 초에키 니마를 인정하지 않고, 기알첸 노르부를 세워 티베트 불교계 고위인사로 키우고 있다. 이에 대해 녠자는 “11세 판첸 라마는 종교의식에 따라 인정받았고, 정부의 비준도 받았다.”면서 “현재의 판첸 라마는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밝혔다. 달라이 라마가 지명했던 초에키 니마에 대해서는 “우리는 인정할 수 없다.”며 “해마다 따시룬포에 와서 법회를 주재하는 현재의 판첸 라마가 우리의 최고 지도자”라고 말했다. 또 다른 승려인 뚸포징은 “따시룬포 사원은 3·14 시위 때도 안정됐었다.”고 귀띔했다.  조캉사원의 승려들도 마찬가지였다. 민족사무회 승려인 라바는 사원 곳곳을 안내하며 “3·14 시위 이후에도 사찰과 승려들에게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며 당국의 배려를 강조했다. 젊은 승려 노르깃은 “달라이 라마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승려 개인의 자유지만 나는 하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포탈라궁 관계자도 정부의 역할을 강조했다. 포탈라궁 관리처 창바거상 처장은 “2002년 6월 이후 지금까지 중앙정부가 2억위안의 자금을 투입해 포탈라궁의 유지·보수를 도와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1990년 포탈라궁을 방문한 장쩌민(江澤民) 당시 공산당 총서기는 ‘민족 단결을 수호하고, 민족 문화를 선양하자.’는 글귀를 남겼다. 포탈라궁은 이 글귀를 편액으로 만들어 방문객들이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곳에 내걸었다.  인도에 망명중인 14세 달라이 라마의 후임자가 이곳에 거주할 수 있을지에 대해 창바거상 처장은 “정치적인 문제라 답할 수 없다.”며 화제를 돌렸다. 포탈라궁은 원래 달라이 라마의 겨울 거주지였다.  라싸·시가체 박홍환특파원 stinger@seoul.co.kr
  • “후임 달라이 라마 정부 비준받아야”

    “달라이 라마가 무슨 말을 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행동을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시짱(西藏·티베트)자치구 하오펑 부주석은 지난달 29일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와의 대화 여부에 대해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 분리독립 시도를 그만두고, 하나의 중국 원칙을 받아들인다면 대화의 문은 언제든 열려 있다.”고 말했다. 또 “티베트의 각 민족은 3·14 시위 이후 단결과 안정없이 경제발전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모두 잘 인식하고 있다.”면서 “우리는 티베트를 안정시킬 능력이 있고, 경제발전을 이룰 자신이 있다.”고 강조했다. ●“독립 포기땐 언제든 대화” 하오 부주석은 달라이 라마 후임자 선정에 대해 “종교의식에 적합하게 선정해 중앙정부의 비준을 받아야 한다.”고 말해 현재 인도에 망명중인 14세 달라이 라마 사망 뒤 후임자 선정에 중국 정부가 관여할 계획임을 시사했다. ●주민시설에 2800억위안 투입 또 다른 활불(活佛)인 11세 판첸 라마와 관련, 1995년 달라이 라마가 지명했던 초에키 니마를 인정하지 않고, 기알첸 노르부를 임명한 조치에 대해서는 “달라이 라마는 외국에서 종교의식과 부합하지 않게 불법으로 판첸 라마를 지명했기 때문에 국무원이 무효라고 선언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초에키 니마는 현재 좋은 가정환경에서 잘 교육받고 있다.”면서도 그의 행방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오 부주석은 중국 중앙정부가 10년간 티베트에 2800억위안(약 50조원)을 투입했다는 사실을 내세운 뒤 “도로, 교통, 에너지, 수자원 등 주민생활과 밀접한 분야에 투자가 집중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환경운동가 15년형 적절” 티베트인들에 대한 차별 여부와 관련, “2006년부터 공개모집한 공무원 1만 5000여명 가운데 70%를 티베트인으로 선발했다.”고 일축했다. 종교 자유에 대해서는 “티베트 주민들도 정부의 정책을 지지하며 종교의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고 밝혔다. 최근 티베트 환경운동가에 대해 징역 15년형의 중형이 선고된 것에 대해 “본인도 형량에 만족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적절한 양형이라고 생각한다.”고 적극적으로 답변했다. 라싸 박홍환특파원 stinger@seoul.co.kr
  • 차기 달라이 라마 선정 中·티베트 갈등 재점화

    ‘달라이 라마의 후계는 우리가 정한다.’ 75세의 고령인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의 후계 문제가 국제적 관심사로 떠오른 가운데 중국 정부가 후계자 선정에 관여할 뜻을 분명히 했다. 이에 따라 티베트 망명정부와의 갈등이 한층 첨예해질 전망이다. 1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티베트 자치구 하오펑 부서기는 외신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살아 있는 부처’로 불리는 달라이 라마의 후계자 선정은 역사에 근거한 절차에 따라야 하며 이는 중앙 정부의 최종 승인을 받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제11대 판첸 라마도 이 같은 절차에 따라 선정됐다면서 차기 달라이 라마 선정도 이에 따를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달라이 라마는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다.”고 말을 아꼈다. 그러나 티베트 불교 2인자 격인 판첸 라마 납치 사건과 같은 일이 재연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은밀하게 후계자 물색을 진행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중국 정부와 티베트 망명정부의 티베트 불교 후계자 세우기 다툼은 1995년 중국 정부가 별도의 판첸 라마를 옹립하면서 불거져 나왔다. 인도 망명 중인 달라이 라마 14세는 겐둔 치에키 니마를 11대 판첸 라마로 지명했으나 중국 정부는 그를 외부와 격리시킨 뒤 다른 인물을 판첸 라마로 옹립했었다. 이 때문에 티베트 망명정부는 겐둔 치에키 니마가 진짜며 중국 정부가 임명한 판첸 라마는 가짜라고 주장해 왔다. 이석우기자 jun88@seoul.co.kr
  • 난민 1500만명 지구촌 떠돈다

    지난 2008년 7월, 물류회사에 다니던 26살의 아프가니스탄 청년 사예드 알리 얀은 와닥 지역의 외국계 회사에 석유를 배달하러 길을 떠났다. 카불의 집에서는 임신한 어린 아내 샤이다가 부모가 함께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그들에게 찾아든 건 사예드가 아니라 끔찍한 불행이었다. 어디선가 나타난 탈레반 무리가 귀갓길의 사예드를 끌고가 가둬 버린 것이다. 영문도 모른 채 두 달 동안 갇혀있다가 간신히 탈출해 집에 돌아온 그를 맞은 것은 아내의 유산과 아버지의 사망 소식뿐이었다. 탈레반은 탈출한 사예드를 계속 쫓았고, 그는 아프간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집을 팔아 1만 4000달러(약 1700만원)를 마련한 부부는 파키스탄에서 말레이시아로 밀입국했다. 허름한 여관에서 아내는 다시 임신했고, 딸을 낳았다. 최종 목적지인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로 향하는 작은 배를 타기 위해 여권과 시계, 휴대전화까지 모두 내놓아야 했다. 미국 시사주간 타임이 27일(현지시간) 전한 전 세계 망명자들의 상황은 참혹했다. 사예드 가족이 머물고 있는 자카르타 외곽의 망명자 수용소는 이미 움직일 틈조차 없을 정도로 꽉 차있다. 종교단체와 유엔의 도움으로 사예드 가족은 방 한 칸을 얻고 딸을 병원에 보낼 수 있었지만, 수중에는 이미 한 푼도 없다. 사예드는 “미리 알았다면 차라리 아프간에 남아서 죽는 길을 택했을 것”이라고 한탄하곤 했다. 유엔난민기구(UNHCR)에 따르면 지난해에만 전 세계에서 1500만여명이 넘는 난민들이 발생했고, 이 가운데 82만 6000명이 망명을 위해 떠돌고 있다. 타임은 “이들 중 절반 이상이 아시아인이고, 22%는 아프리카인”이라며 “이들의 정부는 경제적, 정치적으로 국민을 보호할 능력이 부족하고 내전에 시달리고 있다.”고 전했다. 당초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흩어진 유럽인들을 고국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만들어진 UNHCR은 이제 가난과 유혈참사를 피해 도망치는 수백만명을 돌보는 역할을 맡고 있다. 이탈리아,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일부 국가는 밀려드는 망명자들로 인해 포화상태를 맞고 있으며 이들 국가 국민 대부분은 더 이상 망명을 받지 않기를 원하고 있다. 타임은 “망명자들이 제3국에서 새로운 인생을 얻는 것은 정말 어려운 꿈이 되고 있다.”면서 “2008년 1050만명의 망명 희망자 중 고작 8만 8000명만이 망명에 성공했다.”고 분석했다. 망명 허가를 받기 위해 5년 이상 기다리는 것은 흔하고, 알제리 등 일부 국가에서는 30년 넘게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실낱같은 희망을 잡는 사람들도 있다. 자카르타의 사예드 가족도 며칠 전 인도네시아 정부에서 망명 허가를 받았다. 인터뷰 약속조차 잡지 못하고 절망하던 이들에게는 뜻밖의 행운이었다. 타임은 “극히 일부만이 이처럼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있다.”면서 “한 가족에게는 즐거운 시작이지만,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끝을 알 수 없는 지옥이 계속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 ‘망명설’ 北 축구선수들, 혹독한 군사훈련 받을 것

    ‘망명설’ 北 축구선수들, 혹독한 군사훈련 받을 것

    남아공월드컵 본선 조별리그에서 단 한 경기도 뛰지 못한 북한선수 4명이 귀국 후 가혹한 군사훈련을 받을 것이란 외신보도가 나와 사실 여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영국의 일간지 ‘데일리 익스프레스’는 28일(이하 한국시각) “북한축구팀은 불확실한 미래를 가지고 그들의 나라로 가게 됐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월드컵 실패로 고국으로 돌아가는 북한 선수들의 미래가 무섭고도 불투명하게 됐다.”고 보도했다.이 매체는 영국 주재 한국대사관 대변인의 말을 인용해 “적어도 4명의 선수가 군대에서 군사훈련을 받을 것이 유력하며 북한 대표팀을 이끈 김정훈 감독은 해임될 것”이라고 덧붙였다.4명의 선수는 김명원(FW.압록강 체육단), 안철혁(FW.리명수 체육단), 김금일(FW.4.25 체육단), 박성혁(DF.소백수 체육단)으로 이들은 브라질과의 조별리그 1차전에서 ‘잠적설’에 휘말렸던 선수들이다.당시 국제축구연맹(FIFA)이 출전선수 명단에 이들이 경기에 ‘불참’했다고 기록해 논란이 일었고 일부에선 ‘망명설’까지 나돌았다. 하지만 확인 결과 스타트 리스트에 4명의 선수 이름은 인쇄하는 과정에서 잘못돼 불참 선수로 표기된 것일 뿐, 실제 선수들은 경기장에 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남아공월드컵 조별리그 3경기를 모두 소화한 북한 수비수 차정혁(압록강 체육단)은 스위스로 진출할 것으로 보인다. 스위스 에이전트이자 북한 선수들의 유럽 진출에 대한 이적 대행권을 갖고있는 칼 머설리는 지난 27일 독일 dpa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차정혁이 스위스 2부 리그인 윌(Wil)에 입단한다.”면서 “윌에서 6개월 뛴 후엔 더 큰 구단으로 보낼 계획도 갖고있다. 이와 관련한 협상이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사진 = 다음 서울신문NTN 김민경 인턴기자 cong@seoulntn.com
  • [당신들과 우리들의 대한민국] (1) ‘국제인권의 잣대’ 난민

    [당신들과 우리들의 대한민국] (1) ‘국제인권의 잣대’ 난민

    ‘다문화 사회’가 유행어처럼 번지지만 다문화인이 꿈꾸는 대한민국은 아득해 보인다. 한국인의 시각으로 다문화 사회를 설계하기 때문이다. 실천 없는 구호처럼 다문화 정책이 헛도는 이유다. 서울신문은 다문화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려 ‘당신들과 우리들의 대한민국’을 싣는다. 1회는 ‘국제인권의 잣대’ 난민이다. 국제사회가 다문화 사회에 주목한 것은 전 세계가 난민 문제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하면서부터다. 우리나라도 한국 전쟁으로 유민 사태를 겪었다. ‘과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 김대중 전 대통령….’ 그들도 한때 난민이었다. 정치적, 사상적 차이로 박해를 당해 조국을 탈출해 낯선 땅으로 망명했다. 자유를 향해 떠나온 순례자를 낯선 땅은 따뜻하게 받아들였다. 그래서 일부는 ‘제2의 조국’에 공헌하며 여생을 보냈다. 유엔 사무총장을 배출한 우리나라에도, 희망을 품고 찾아온 난민들이 있다. 20일 유엔이 정한 ‘세계 난민의 날’을 맞아 ‘대한민국에서 난민으로 산다는 것’을 문답으로 정리했다. 난민 신청을 하거나 인정을 받은 마웅저(미얀마) 로넨(방글라데시) 빅토르(가명·나이지리아) 카카나(방글라데시) 코와인(미얀마) 쇼네(가명·토고) 등 6명이 인터뷰에 응했다. 일부는 안전상 이유로 가명을 요청했다. →조국을 왜 떠났나. 전사(戰士)가 아니라 시민(市民)으로 살고 싶었다. ‘인종 청소’를 하는 방글라데시 정부에 맞서 생존을 위해 피 흘리며 싸웠다. 약탈과 방화, 성폭행이 일상인 나라에서 한 살배기 아들을 키우고 싶지 않았다. →왜 한국을 선택했나. 민주주의를 이뤄낸 나라가 아닌가. 군부 독재를 시민이 무너뜨렸고, 5·18 광주민주화운동도 ‘8888 버마민중항쟁’과 비슷해 민주화 과정을 배우고 싶었다. 경제·사회적으로 발전한 국가,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국가라는 믿음도 있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김대중 노벨평화상 수상자를 배출한 나라라면 국제인권을 보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난민이 됐나. 난민 지위를 인정받는 걸 우리는 “하늘의 별을 딴다.”고 부른다. 대한민국의 난민 인정률은 8.7%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개국, 유엔 난민협약 가입국 가운데 최하위다. 법무부에서 불인정 처분을 받고 행정소송을 냈다. 법원이 승소 판결했는데 법무부가 대법원까지 상소했다. 8년 만에 별을 땄다. →심사가 까다로운가. 무성의하고 무관심하다. 전문 통역인도 없고 난민 국가의 상황도 파악하려 하지 않는다. 이주노동자의 불법 체류를 단속하는 법무부 직원들이 면담을 하니까 당연하다. 다른 나라는 외교부가 난민을 인정한다. 직원은 ‘한국에서 일하고 싶으면 그냥 일하다가 잡히면 되는 거지, 왜 난민 신청을 하느냐.’ 이렇게 묻는다. →난민으로 인정받으면. 박해받을 조국으로 내쫓기지 않으니 내 목숨을, 가족의 삶을 구한 거다. 그게 고맙다. 외국인 차별은 심각하다. 취업지원이나 쉼터 제공이 없어 힘들다. 아인슈타인도 대한민국으로 망명했다면 공장에서 일했을 것이다. 그래도 내 아이는 박해에서 벗어나 평화 속에서 자랄 수 있다. →무엇을 꿈꾸는가. 미얀마 군부 독재의 실상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싶다. 아웅산 수치 여사가 이끄는 ‘버마민족민주동맹’ 한국지부를 만들었다. 작은 불교 사찰을 세워서 민주화 운동에 쓸 자금을 모으고, 국내 이주노동자 인터넷 방송을 진행하고 있다. 강제송환되더라도 마지막 순간까지 희망을 놓지 않을 것이다. 정은주·임주형기자 ejung@seoul.co.kr [용어 클릭] ●난민 인종, 종교, 국적, 극심한 빈곤, 정치적 의견 또는 특정 사회집단의 구성원이라는 이유로 박해를 받을 우려가 있고, 그로 인해 조국을 떠난 사람들을 말한다. 1951년 ‘난민의 지위에 관한 협약’, 1967년 ‘난민 지위에 관한 의정서’ 등 국제법으로 국제사회는 난민을 보호한다. 우리 정부는 1992년에 가입했다.
  • [당신들과 우리들의 대한민국] “내 이름은 야 인마… 툭하면 맞아도 꿈☆ 포기 못해”

    [당신들과 우리들의 대한민국] “내 이름은 야 인마… 툭하면 맞아도 꿈☆ 포기 못해”

    미얀마에서 온 마웅저(41)가 한국에서 얻은 첫 직장은 인천의 한 도색 공장. 하루 12시간 일하고 한 달에 50만원을 받았다. 한국인의 반밖에 되지 않았다. “야 인마.” 이게 공장에서 마웅저를 부르는 호칭이었다. 결코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다. 함께 일했던 미얀마 친구는 걸핏하면 사장에게 얻어맞았다. 7개월을 일했는데, 월급은 5개월치밖에 못 받았다. 이듬해 경기 부천의 구두 형틀 만드는 공장으로 옮겼지만 사정은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 한번은 TV로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를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동료가 채널을 돌렸다. “너 같은 건 우리나라 여자 쳐다볼 자격이 없어.” ●힘겨운 난민의 삶 2000년에는 정식으로 난민 신청을 했다. 법무부로부터 신문과 비슷한 인터뷰를 받았지만, 돌아온 것은 ‘불허한다’는 통지. 그것도 신청한 지 5년이 지나서였다. 법원은 다행히 마웅저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법무부는 계속 상소를 하며 ‘발목’을 잡았다. 결국 2008년 대법원에서 승소하면서 난민으로 인정받았다. “하늘의 별을 땄다.” 난민으로 인정된 직후 어떤 기분이 들었느냐고 묻자 마웅저는 이렇게 말했다. 방글라데시 소수민족 ‘줌머족’ 로넨(42)의 삶도 ‘코리안 드림’과는 거리가 멀었다. 택시를 탔다. 외국인인 걸 눈치챈 기사. “어디 가냐?” “5000원이다. 내놔.” 서른을 훌쩍 넘긴 로넨이었지만, 초등학생 대하듯 했다. 난민 인정에 인색한 정부 탓에 처음 몇 년간은 불법 체류자 신분으로 공장을 전전할 수밖에 없었다. 나이지리아 선교사 빅토르(가명·46)는 우리나라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해 있다. 입국과 동시에 난민신청을 했지만 불허됐고, 1심 재판에서도 졌기 때문이다. 위협을 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밝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경찰이나 무슬림으로 추정되지만 입증할 방법이 없다. 8월 2심 재판이 열리지만, 결과가 바뀐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내 이름은 (나이지리아) TV에도 많이 나왔기 때문에 돌아가면 바로 들킨다. 한국 정부는 내가 죽기를 바라는 것일까요.” 미얀마 출신 코와인(42)은 원래 변호사였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공장 행을 면할 수 없었다. 사실 그는 일을 해서는 안 됐다. 난민 신청 기간 중에는 취업이 금지돼 있기 때문. 하지만 난민 신청을 한 지 4년이 지나도록 결과를 받지 못했다. “I need too much money for living expenses, so should I work.(생활비 때문에 일을 안 할 수가 없었어요.)” 코와인이 눈물을 흘리며 털어놓은 하소연이었다. ●‘꿈’을 안고 대한민국으로 왔지만 1988년 8월8일. 세계사에 ‘8888 버마민중항쟁’으로 기록된 날이다. 수도 양곤의 고등학생이었던 마웅저. ‘군부 독재 정권 물러나라’라는 피켓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갔다. 대학생 형, 스님들과 어깨동무를 한 채 목 터져라 “민주주의”를 외쳤다. 항쟁은 서슬 퍼런 군부의 총부리에 밀려 실패했지만, 마웅저의 투쟁은 계속됐다. ‘버마전국학생연합(ABSFU)’에 가입해 ‘지하운동’을 했다. 탄압이 시작됐다. 생사를 함께하기로 결의했던 동료들은 하나 둘 경찰에 잡혀갔다. 이름을 바꾼 채 공사판을 전전해야 했다. 어머니와 다름없던 누나가 마웅저를 부른 것은 1992년. “망명해라.” “여권도 비자도 없는데….” “브로커를 쓰자. 돈은 내가 댈게.” 누나는 푼푼이 모았던 21만차트(Kyat·미얀마 화폐단위)를 내놓았다. 우리나라 돈으로 하면 350만원쯤 된다. 큰돈이다. 마웅저는 대한민국을 골랐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이 8888항쟁과 비슷하다고 생각해 마음이 끌렸다. 2년 뒤 마웅저는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한국이 미얀마 민주화를 도울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줌머족’ 로넨은 ‘인종 청소’를 하는 정부에 맞서 무장단체에서 활동했다. 산악지대인 치타공에서 종족의 생존을 걸고 싸우다 체포됐다. 3년간 옥살이를 하고 마을로 돌아왔지만, 탄압은 더 심해졌다. 마을에는 1㎞마다 하나씩 검문소가 들어섰다. 대원들은 지나가던 사람들을 ‘심심하면’ 때렸다. 1999년에는 대규모 약탈과 방화가 있었고, 여성들이 집단으로 성폭행당하기도 했다. 로넨은 이듬해 고향을 떠났다. 한 살배기 아들을 품에 안은 채 한국으로 왔다. 한국인이 같은 몽골계고, 불교신자가 많다는 점에 끌렸다. 경제·사회적으로 발전한 중견국이라는 믿음도 있었다. ‘전사(戰士)’가 아닌 ‘시민(市民)’으로 살 수 있다는 꿈이 가슴을 매웠다. 빅토르는 나이지리아 ‘오순절협회(PEN)라는 곳에서 선교활동을 했다. 강연에 나가 나이지리아의 부패한 경찰을 강하게 비난했다. 낯선 남자의 전화가 걸려왔다. “하고 있는 일 그만둬라.” “누구냐?”고 물으면 끊었다. 험악한 인상을 한 사람들이 집으로 찾아와 가족을 위협했다. 운전기사가 괴한에게 폭행당하고 차를 빼앗기기도 했다. 그는 2005년 한국에 왔다. 처음에는 미국을 생각했지만, 총이 없는 한국을 선택했다. 기독교도가 많고,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난민으로 인정받으면 가족들도 불러 ‘제2의 삶’을 꾸릴 계획이었다. ●여전히 꿈 키우는 난민들 그러나 난민들은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 먹고살려는 게 아닌 신념과 양심, 존엄을 지키기 위해 온 것인 만큼, 다양한 활동을 하며 꿈을 키워가고 있다. 마웅저는 1998년 아웅산 수치 여사가 이끌고 있는 ‘버마민족민주동맹(NLD)’ 한국지부를 만들었다. 미얀마 대사관 앞으로 가 시위를 하고, 틈 날 때마다 길거리로 나가 우리나라 사람에게 미얀마의 실상을 알리고 있다. 2004년부터는 우리나라 시민단체에서 활동했고, 다음달에는 자신이 직접 단체를 만들 예정이다. 단체명은 ‘버마민주화를 돕는 단체’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한국인 동료 100여명이 함께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코와인은 2003년 인천에 작은 미얀마 불교 사찰을 세웠고, NLD 회원들과 민주화운동에 쓸 자금을 모으고 있다. 국내 이주노동자 인터넷 방송을 진행하고 있으며, 매주 화요일에는 미얀마 대사관 앞에서 1인 시위를 한다. ‘주한미얀마 소수민족 연합회’ 회장이기도 하다. 한때 대사관이 그를 외국환거래법을 위반했다는 트집을 잡아 검찰에 고발했지만, 투쟁은 멈추지 않는다. 카카나(27·여)는 얼마 전부터 일요일에는 출근하지 않는다. 공장에서 나오라고 해도 “절대 안 된다.”며 버틴다. 일요일만큼은 ‘재한줌머인연대’ 사무실에 나가 한국어를 배우기로 결심했다. 말을 어느 정도 익히면 미용기술을 배울 계획이다. 빅토르는 한남동의 한 교회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다. 강제 송환을 당하더라도 마지막 순간까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할 것이다. 동생이 정치 운동을 하는 바람에 연좌제에 걸려 2005년 한국에 온 쇼네(가명·40·토고)는 8월 둘째를 낳는다. 병원비가 걱정이었는데 다행히 최근 난민에게도 의료 혜택을 확대하는 정책을 발표해 시름을 놓았다. 새로 태어날 아이는 한국을 보고 느끼며 자랄 것이다. 임주형기자 hermes@seoul.co.kr
  • 북한 대표선수 4명, 돌연 남아공 ‘잠적’…왜?

    북한 대표선수 4명, 돌연 남아공 ‘잠적’…왜?

    북한 축구대표팀 선수 4명이 남아공월드컵 브라질과의 조별 예선 1차전 당시 경기장에조차 나오지 않은 것으로 뒤늦게 밝혀졌다. 지난 16일(한국시각) 요하네스버그 엘리스파크 스타디움에서 열린 북한과 브라질전에 북한팀 엔트리 23명 가운데 4명이 나오지 않아 이들의 행방에 궁금증이 커지고 있다. 피파(FIFA) 홈페이지에는 안철혁 김명원 김경일 박성혁이 빠진 것으로 표시돼 있다. 이들은 비주전 선수이긴 하지만 월드컵에서는 엔트리 23명이 모두 경기장에 나와 벤치에 앉아있는 것이라 이들이 왜 경기장에 나오지 않았는가에 대한 의문은 더욱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주남아공 한국대사관도 뒤늦게 이 사실을 접하고 경위 파악에 나섰다. 이들이 경기장에 나오지 않은 것이 단순히 건강상의 이유라면 큰 문제가 없지만 팀을 무단이탈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일각에서는 이들이 단체로 팀을 빠져나와 망명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조심스레 흘러나오고 있다. 한편 FIFA 미디어채널에 따르면 북한 대표팀은 18일 자정 요하네스버그 마쿨롱 스타디움에서 예정됐던 훈련도 취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21일 포르투갈과 조별예선 2차전을 가질 예정이다. 사진 = 다음 서울신문NTN 김민경 인턴기자 cong@seoulntn.com@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한국전쟁 60주년 기획] 中 초기 피말린 권력투쟁… ‘對美전쟁’을 돌파구로

    [한국전쟁 60주년 기획] 中 초기 피말린 권력투쟁… ‘對美전쟁’을 돌파구로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은 절대로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마오쩌둥은 거의 잠을 이루지 못하고 동이 틀 때까지 줄담배를 피웠다.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를 기다리듯 중국과 한국 지도를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하지만 갈수록 중국이 참전해야 한다는 생각이 뚜렷해졌다. 타이완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미군과 정면충돌을 피하고 싶었다. 그는 이번 전쟁의 승패가 가져올 정치적 여파를 꼼꼼히 계산했다. 미군이 참패를 맛볼 것이라고 확신했다. 국공내전을 치르느라 쇠약해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퓰리처상을 받은 언론인이자 역사가인 미국의 데이비드 핼버스탬이 한국전쟁의 감추어진 역사를 속속들이 파헤친 ‘콜디스트 윈터’에서 묘사한 중국 참전결정의 전야(前夜)이다. 중국 주력부대의 압록강 도하 시간은 1950년 10월19일 오후 5시30분이었으니 18일 밤 상황인지도 모른다. 진위를 떠나 핼버스탬은 마오쩌둥의 번민을 마치 소설의 한 장면처럼 묘사했다. 중국군 개입은 한반도 내전을 순식간에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전시킬 수 있는 도화선이었다. ●마오 결정은 중국을 위한 선택 한국전쟁에서 중국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마오쩌둥은 왜 한국전쟁에 개입했을까. 숱한 해석과 이론이 난무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중국을 위한’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중국이 내세우는 한국전쟁 참전의 대의명분은 ‘미국에 대항해서 북한을 돕는’ 항미원조(抗美援朝)전쟁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제7함대를 파견해 타이완해협을 봉쇄하고, 프랑스의 베트남 지배를 지지한다는 내용의 6월27일 미국 트루먼 대통령의 성명에 정면대항하는 이른바 ‘미·중 전쟁’의 선전포고였다. 중국을 목표로 한반도, 타이완, 베트남 등 3개 루트를 통해 침투하려는 미국의 ‘삼로향심우회(三路向心迂回)’ 전략에 맞서려는 의도였다. 마오쩌둥은 미국이 이들 3개 지역을 차지하고 나서 궁극적으로는 중국본토를 노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중국의 참전 배경과 결정과정은 그동안 일반에 알려지지 않았다. 스탈린과 김일성의 설득에 따라 공산진영을 지키려는 마오쩌둥의 고독하고 영명한 결정이라는 정도밖에. 그러나 최근 공개된 러시아와 중국 측 비밀자료를 보면 마오쩌둥은 신생 중화인민공화국과 자신의 운명을 건 주사위를 한국전쟁을 향해 내던졌음을 알 수 있다. 전쟁은 마오쩌둥의 독단적 선택이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중국은 이 같은 사실을 오랫동안 공개하지 않았다. 전쟁의 명분과 결과만 얘기했다. 중국의 한국전쟁 개입의 실마리는 ‘조선인 사단’의 귀환 동의에서 찾을 수 있다. 개전 초 김일성이 파죽지세로 낙동강 전선까지 공격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해방군에서 귀환한 3만 5000명 규모의 조선인 장병의 공이 컸다. 마오쩌둥은 1949년 중국 동북 3성 거주 조선족으로 구성된 2개 사단(2만명)을 통째로 북한에 넘겼다. 이들은 인민군 5, 6사단으로 편성됐다. 1950년에는 나머지 부대원 1만 5000명을 또 귀환시켰다. 이들은 국공내전에서 실전을 쌓은 백전노장들, 인민군의 3분의1에 해당하는 엄청난 전력이었다. ‘마오쩌둥, 스탈린과 한국전쟁’을 쓴 화동 사범대 선즈화 교수는 “북한에 대한 마오쩌둥의 동정과 지지를 보여준 조치”라고 분석했다. ●조선인 해방군 3만여명 北에 넘겨 본격적인 참전준비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7월부터 치밀하게 이뤄졌음이 중국 측 자료에 의해 새롭게 드러났다. 참전이 최종 결정된 10월19일까지 넉 달 가까이 피 말리는 내부투쟁이 중국 지도부 사이에서 벌어졌다. 7월7일 ‘미국의 조선 무장침략 후의 정세분석과 중국의 국방 증강대책’이라는 국방군사 회의가 열렸다. 13일에는 한국에 투입될 30만명 규모의 동북변방군 창설이 결정됐다. 가상 적국은 미국이었다. 8월4일 당 중앙 정치국회의에서 마오쩌둥은 “미국은 한반도와 타이완, 베트남에서 움직이고 있다. 우리는 한반도에서 미국과 교전할 작정이다. 미국이 계획하고 있는 전투규모가 크든 작든 혹은 원자폭탄을 사용하든 우리는 최후까지 싸울 수밖에 없다.”라고 결사항전의 비장한 선언을 했다. 동북변방군은 출동할 때 ‘의용군’이란 명칭을 사용했다. 조선인민군 복장을 착용하며, 인민군의 깃발을 내걸고, 주요 간부의 이름도 조선인 이름으로 바꿨다. 해방군 정예부대인 제4야전군이 주축이 된 의용군은 ‘준비된 군대’였다. 참전 초기 연합군을 무서운 속도로 밀어내며 연전연승한 것은 연합군의 실책도, 운이 좋아서도 아니었다. 매복, 위장 등 한반도 북부 산악지형에 맞는 전술을 훈련을 통해 몸에 익혔기 때문이었다. 30만 의용군이 오로지 인해전술로 북진 중이던 13만 연합군을 물리쳤다는 건 냉전시대 교육의 산물이다. 9월 참전 구상이 세워졌지만 시기는 계속 연기됐다. 마오쩌둥도 저우언라이 총리와 린뱌오 등 지도부의 거센 반대를 모른 체할 수 없었다. 중국의 문서보관소인 당안관(?案館)자료와 내부적으로 발간된 ‘건국 이후 마오쩌둥의 문고(文矯)’ 등에 따르면 중국 지도부는 혼란을 겪었다. 린뱌오는 “중국 자체의 존립이 위협받을지도 모르고, 승리 가능성이 작다.”라는 이유로 출병을 반대했다. 다들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일본 도요가쿠엔대학 지안롱 교수는 저서 ‘모택동의 한국전쟁’에서 10월4일과 5일 정치국 회의 참가자 중 찬성과 반대의 세력분포에 대해 재미있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찬성자는 마오쩌둥 혼자뿐이었고, 불명확한 사람은 저우언라이 총리와 펑더화이 사령관 두 명이었으며, 나머지 7명은 반대했다는 것이다. ●中 독자출병 소식에 스탈린 눈물 그러나 마오쩌둥은 10월5일 정치국 회의에서 “어떤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어떤 곤란이 있더라도, 미군이 평양을 점령하기 전에 출병해야 한다.”라고 밀어붙였다. 펑더화이를 의용군 총사령관에 추천한다고 발표해 버렸다. 세 번이나 번복된 참전이 최종 결정됐다. 이후 냉전체제가 해체돼 한국전쟁의 주역인 스탈린과 마오쩌둥, 그리고 김일성 사이에 오간 극비문서들이 공개되기 전까지 중공군 참전과정의 진실은 서고 속에 묻혀 있었다. 김일성에게 베이징의 개입은 유일한 희망이었다. 크렘린은 계속 베이징 지도자에게 미루고 있었다. 중국의 참전소식은 나흘 뒤인 10월8일에야 평양에 전해졌다. 초대 평양 대리대사를 지낸 차이청원은 회고록에서 ‘김일성은 “그것 잘됐다, 잘됐어.”라고 몇 번이나 말했다. “마오 주석과 당 중앙에 나와 조선 당, 인민의 깊은 감사의 뜻을 전해 달라.”라고 기뻐했다고 적고 있다. ’ 앞서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으로 패주하면서 중국 망명정부 수립을 준비 중이던 김일성은 10월1일 ‘경애하는 마오쩌둥 동지’ 앞으로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는 이 위험상태를 극복할 수 없다. 중국인민해방군이 직접 출동해 지원해 달라.”라고 애걸복걸하는 편지를 보낸 상태였다. 중공군의 참전결정이 차일피일 늦어진 것은 소련군의 공군지원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였다. 보병은 중국, 공군은 소련이 맡는다는 것이 애초 양측의 합의사항이었다. 기다리다 못한 마오쩌둥은 저우언라이 총리를 모스크바에 보내 공군지원을 요청했으나 ‘준비 불충분’을 이유로 거절당했다. 중국 측 연구자들은 이를 ‘스탈린의 배신’이며 추후 중·소 갈등의 뿌리가 되었다고 본다. 또 소련공군의 지원이 없는 상태에서 중국의 독자출병소식을 들은 스탈린은 눈물을 흘렸다고 중국의 역할을 강조했다. 몇 년 뒤 마오쩌둥은 “스탈린은 나를 (자국이익만 생각하는) ‘유고슬라비아의 티토’로 의심했지만 항미원조전쟁이 시작된 1950년 겨울부터 이 의심은 사라졌다.”라고 회고했다. 마오쩌둥은 한국전쟁에 러시아어 통역장교로 자원입대한 장남 마오안잉(28)을 미 공군기의 폭격으로 잃었다. 마오안잉의 묘는 평남 회령군 ‘지원군 열사능원’에 있다. 36만명에 이르는 중국군 전사자들과 함께 묻혀 있다. 마오쩌둥은 만류하는 측근들에게 “내 아들이 가지 않는다면 인민 누구도 가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또 전쟁이 끝나고 나서 “전쟁은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중국과 북한 양국의 우의는 혁명열사들의 선혈로 맺어진 것이다.”라고 말했다. ●中, 3년간 500만명 병력 투입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국 의용군의 규모는 어느 정도였을까. 중국 측 자료에 따르면 79개 보병사단과 12개 공군사단, 16개 포병사단, 10개 공병사단, 10개 전차연대 등 모두 합치면 200만~300만명에 이른다. 최고조에 이른 1953년 4월부터 7월까지는 일시에 130만명의 병력이 투입됐다고 한다. 3년 동안 연인원 500만명이 동원됐다는 서방 측 자료도 있다. 중공군 희생자는 공식적으로 36만 6000명이지만 비전투 사상자를 더하면 사실상 60만~90만명으로 추정된다. 미군 전사자 3만 3000명과는 비교 불가한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한국전쟁 참전은 중국 대외정책의 기본이 됐다. 우리는 천안함 사건에 대한 중국의 일방적인 북한 편들기를 비판하지만, 중국 지도부의 생각은 60년 전에 비해 크게 바뀌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미국- 일본-타이완-한국전선에 대항하고 완충지대를 갖기 위해서는 설령 사고뭉치라고 하더라도 북한을 붙들고 있을 수밖에 없는 사정이라는 것이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나서 김일성의 우상은 스탈린에서 마오쩌둥으로 바뀌었다. 결정적인 순간 소련이 아니라 중국이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전쟁 전 소련 위주의 북한정책이 전쟁 후 중국위주로 전환됐다. 지안롱은 “정전협정 뒤 중국과 북한 수뇌는 언제라도 서로 털어놓을 수 있는 특수한 관계가 계속됐다.”라고 설명했다. 집단지도체제를 유지하던 마오쩌둥에게 한국전쟁은 터닝 포인트였다. 한국전쟁에 개입함으로써 소련과의 동맹을 공고히 했고, 북한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미국이 함부로 못하는 위협적 존재가 됐다. 인도차이나반도 문제 등에 대한 국제적 지위를 부여받았다. 1971년 타이완을 내쫓고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 자리를 차지하는 발판이 됐다. 비록 ‘비기는 전쟁’으로 끝났지만 마오쩌둥의 도전과 모험은 성공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마오쩌둥은 1953년 스탈린 사후 자신이 사망한 1976년까지 중국과 공산진영에서 ‘살아있는 신’으로 군림했다. 노주석 논설위원·윤샘이나 기자 jo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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