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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종면 기자의 시사 고사성어] 讀書亡羊(독서망양)

    오는 12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유력 후보들의 사무실을 두드리는 대학 교수들이 크게 늘고 있다고 한다. 어떻게든 권력에 줄을 대보려는 ‘정치교수’, 이른바 ‘폴리페서(polifessor)’들이 제철을 만난 것이다. 이쪽저쪽 캠프를 시계추처럼 오가며 권력을 구걸하는 ‘양다리형’도 적지 않다고 하니 참으로 딱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의 천박한 행태가 독서망양(讀書亡羊)이라는 옛 말을 떠올리게 한다. 옛날 중국에 장(臧)과 곡(穀)이라는 사람이 양을 치며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두 사람 모두 양을 잃어버렸다. 사람들이 장에게 물었다. “당신은 무슨 일을 하다 양을 잃어버렸습니까?” “댓가지를 끼고 책을 읽고 있었지요.” 이번엔 곡에게 물었다.“그러면 당신은 어떤 일을 하고 있었나요?” “주사위 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을 했든 본업을 태만히 해 귀중한 양을 잃어버린 것은 같다. ‘장자-외편(外篇) 변무(拇)’에 나오는 이야기다. 독서망양은 바로 이 고사에서 유래했다.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본래의 중요한 일을 소홀히 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국민으로서 정치에 관심을 갖는 것 자체를 나무랄 수는 없다. 그러나 교수가 본업인 연구와 강의보다 권력게임에 더 관심이 많다면 그것은 한마디로 본분을 망각한 것이다. 일찍이 공자도 ‘천하유도즉현(天下有道見) 무도즉은(無道隱)’이라고 했다.‘논어’ 태백편(泰伯篇)에 있는 말로, 천하에 도가 있으면 나타나 벼슬을 하고 도가 없으면 은거해야 한다는 뜻이다. 지식인의 현실참여에 대한 준거로 흔히 인용되는 말이다. 스스로 지식인이라고 여기는 교수라면, 정치판을 기웃거리기 전에 장자와 공자의 말씀쯤은 한번 되새겨 볼 일이다. jmkim@seoul.co.kr
  • [이 한권의 책]‘자유의 역사’ 아이티 부활을 꿈꾸다

    우리가 식민지를 경험했듯이 지구의 4분의 3 이상이 식민지를 경험했다. 그 대부분은 지금 독립했으나 식민지 과거의 상처를 완전히 씻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경험한 36년의 열배에 가까운 장기간 식민지를 경험한 경우 특히 그렇다. 그런 식민지 이후의 상황을 포스트 콜로니얼(Post colonial)이라고 한다. 침략지배자인 제국이 아니라 피지배자의 입장에서 식민지와 식민지 이후를 주체적으로 분석하는 것을 포스트 콜로니얼리즘이라고 한다. 포스트 콜로니얼리즘 이론가로 우리나라에 일찍 소개된 프란츠 파농과 에드워드 사이드와 함께 중요하면서도, 그들 모두에 선구적인 사람이 C.L.R. 제임스(1901∼1989)이고 그의 대표작이 ‘블랙 자코뱅’이다. 1938년에 나온 그 책이 70년 만에 우리나라에 소개되는 것은 그야말로 역사적 의의를 갖는 것이다. 동시에 우리가 포스트 콜로니얼리즘에 대해 얼마나 무관심했는가를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1791년의 세계 최초 흑인 노예혁명, 나아가 당대 세계 최대 열강이었던 스페인, 영국, 프랑스 연합군을 흑인노예들이 격파하고 1804년 1월1일 세계 최초의 흑인공화국이자 아메리카 대륙에서 미국 다음으로 오래된 아이티공화국을 수립하는 역사적 과정을 다룬 최초의 책이다. 나아가 그것을 우리나라에 최초로 소개한다는 점에서도 역사적이다. 촘스키가 강조했듯이 아이티는 서구 유럽 제국주의 체제에 대해 저항한 ‘자유인’들이 세운 ‘최초의 자유국가’였다. 그 땅이나 인구가 한반도의 10분의 1도 안되는 매우 작은 섬나라이자 남미에서도 가장 가난하며 유독 흑인만의 나라인 아이티. 우리에게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아이티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역사 소개라는 점에서도 이 책 번역의 의의는 크다. 그러나 19세기 후반부터 아이티에 미국자본이 진출하고 1915년부터 1934년까지는 미국이 점령했다. 그 뒤 최근까지 미국의 지원을 받는 독재정권이 악순환했다는 점에서 포스트 콜로니얼의 전형적 사례로 촘스키가 ‘아이티의 비극’이라고 부른 것이었다. C.L.R. 제임스가 그 미국 점령 하에서 ‘블랙 자코뱅’을 쓴 것은,20세기 아이티 사람들을 비롯한 구식민지인들에게 그 100년 전의 위대한 역사가 침략자들에 의해 은폐되고 망각되었던 점을 일깨워 준다. 또한 새로운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 찬란한 자유의 역사를 부활시켜 역사에 제대로 자리매김해야 자신들이 목표로 삼는 미래를 추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는 에드워드 사이드가 강조하듯이, 유럽의 사상과 문화를 배타적으로 거부하지 않고 주체적으로 받아들여 식민지 역사를 세계적으로 해석했다는 점에서도 중요했다. 즉 그는 아이티혁명을 제국주의에 저항한 흑인노예의 반란이라는 전형적인 독립운동만으로 묘사하지 않고, 대서양을 무대로 한 보편적 혁명으로 묘사했다. 제국과 식민지라는 대립적 인식을 넘어 그는 그 대립을 대서양이라고 하는 세계로 확대하여 새롭게 말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여기서 흑인노예란 서양역사의 아웃사이더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인사이더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흑인역사를 단순히 억압이라는 소극적인 측면이 아니라 독자적 문화의 주체이자 세계사의 주체라는 적극적 측면으로도 볼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중요했다. 우리의 식민사나 역사에 대한 인식도 이제는 세계사 속에서 주체적으로, 특히 서양과 동등한 동양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박흥규 영남대 법학과 교수
  • 일해공원 NO 전국확산

    일해공원 NO 전국확산

    경남 합천군이 밀레니엄 기념사업을 한다며 도비 30억원 등 98억원을 들여 조성한 ‘새천년 생명의 숲´을 준공 3년도 안돼 ‘일해공원’으로 바꾸기로 하자 시민·사회단체의 반발이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다. 경남에 이어 광주·전남지역 시민·사회단체도 ‘전두환공원 반대 대책위’를 결성, 반대운동에 동참했다.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도 합천군의 결정에 유감을 표시하며 명칭변경을 요구하고 나서 불똥이 정치권으로 튀고 있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합천 시민단체 불복종 운동 네티즌들은 합천 농산물 불매운동과 황강마라톤대회 불참운동을 벌이는 등 파장이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합천군청 홈페이지에는 일해공원 명칭결정을 비난하는 글 1000여건이 올라 있다. ‘전두환공원 반대 경남대책위’는 일해공원으로 명칭을 변경하는 것을 ‘시대의 폭거’로 규정하고 이에 앞장선 합천군수와 부군수, 합천군의회, 합천군 실·과장, 암묵적 지지를 표방한 한나라당을 ‘시대의 오적’으로 지목한 뒤 “반드시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경남대책위는 1일 한나라당 중앙당사를 항의 방문하고 2월 초에는 대규모 반대집회를 개최할 계획이다. 한편 경남도는 파문이 확산되자 지난달 31일 합천군의 일해 공원 명칭 변경에 대해 도비가 당초 목적대로 사용됐는지 여부를 조사한 뒤 이를 어겼다고 판단되면 도비 30억원을 환수하기로 했다. 그러나 ‘전두환 전 대통령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과 대한노인회 합천군지회 등은 군의 결정을 지지했다. ●광주·전남, 시민단체 반대 운동 광주·전남 대책위는 31일 성명에서 “일해공원으로 명칭을 바꾸는 것은 과거로의 회귀이고,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모든 국민에게 비수를 꽂는 행위”라며 “합천군은 5·18 민중항쟁의 역사적 교훈을 망각하고, 민주주의를 배신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또 광주시의회와 전남도의회도 공동성명을 통해 “일해공원 명칭은 정의실현에 역행한 처사로 즉각 철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민사회단체도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박근용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팀장은 “말도 안 되는 짓이다.”면서 “역사적·법적으로 전두환씨가 정통성있는 지도자가 아님에도 그를 기념하는 공원을 만드는 것은 합천군민뿐만 아니라 국민 전체의 입장에서 납득할 수 없는 일”이라고 밝혔다. ●정치권으로 파문 확산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은 성명에서 유감을 거듭 표시하고 공원 명칭 변경을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민주노동당은 “합천군민을 모욕하는 일이자 전 국민을 우롱하는 처사”라며 “광주학살의 책임자이자 민주주의를 왜곡한 독재자를 찬양하고 미화하겠다는 합천군의 망동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공식 논평을 내지 않기로 하는 등 침묵으로 일관했다. 한편 31일 경남을 방문한 한나라당 대권주자인 손학규 전 경기지사는 “민주화가 됐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상처가 치유되지 않았다.”면서 “신중을 기했으면 좋았을 것”이라며 합천군의 결정을 비판했다. 전국종합 창원 이정규기자 jeong@seoul.co.kr
  •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글_ 장영희 그림_ 유준재 <샘터>의 오랜 독자들은 나를 기억할지도 모른다. 2003년 12월 ‘아름다운 빚’이라는 글로 나는 당시 4년간 연재하던 ‘새벽의 창’을 닫았다. 그리고 꼭 3년 만에 나는 이렇게 다시 나타났다. ‘다시 나타났다’는 말을 쓰니 정말 홀연히 바람처럼 사라졌다가 불현듯 모습을 드러낸 느낌이 드는데, 어쩌면 나의 ‘공백기’를 설명하기에 가장 적합한 말인지도 모른다. 그리 짧지도, 그렇다고 그다지 긴 시간도 아닌 3년. 젊은 사람들에게 3년은 인생의 드라마를 창출할 만큼 긴 시간이다. 새로 군대에 간 남학생이 전역할 만한 시간이고 새 신부가 아기 둘을 낳을 만한 시간이고, 신참 사원이 잘하면 대리가 될 수 있는 시간이고, 아, 그리고 우리 학생들을 보면 누군가를 만나 사랑하고 아픈 이별을 하고 또다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하기에도 충분한 세월일 만큼, 3년이라는 기간은 의미심장할 수 있다. 하지만 내 나이에 3년이란 세월은 그렇지 않다. 신상에 무슨 커다란 변화를 기대하기보다 이미 오랜 세월에 걸쳐 설정된 삶의 자리가 그냥 ‘조금 더’ 깊어지는 기간이다. ‘조금 더’ 늙어가서 ‘조금 더’ 눈가에 주름살이 잡히고 ‘조금 더’ 내 살아가는 모습에 길들여지고, ‘조금 더’ 포기하고 ‘조금 더’ 집착의 끈을 놓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샘터>에서 사라졌던 지난 3년 동안 나는 내 인생의 가장 큰 변화를 겪었다. 칼럼을 닫고 나서 얼마 후에 나는 척추암 선고를 받고 2004년 9월 8일 갑작스레 병원에 입원했고, 2006년 5월, 도합 스물네 번의 항암치료를 마칠 때까지, 거의 2년에 가까운 시간을 나는 긴긴 투병생활로 보냈다. 돌아보면 그 긴 터널을 어떻게 지나왔는지 새삼 신기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지난 3년이 마치 꿈을 꾼 듯, 희끄무레한 안개에 휩싸인 듯, 선명하게 내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통증 때문에 돌아눕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침대에 누워 있던 일, 항암치료를 받기 위해 백혈구 수치 때문에 애타 하던 일, 온몸에 링거 줄 떼고 샤워 한번 해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일, 방사선치료 때문에 식도가 타서 물 한 모금 넘기는 것이 고통스러워 밥그릇만 봐도 헛구역질하던 일, 그런 일들은 마치 의도적 기억상실증처럼 내 기억 한편의 망각의 세계에 들어가서 가끔씩 구태여 끄집어내야 잠깐씩 회생되는 파편일 뿐이다. 그 세월은 단지 가슴 뻐근한 그리움으로만 기억될 뿐이다. 네 면의 회벽에 둘러싸인 방에 세상과 단절되어 있으면서 나는 바깥세상이 그리웠다. 밤에 눈을 감고 있을라치면 밖에서 들리는 연고전 연습의 함성소리, 그 생명의 힘이 부러웠고, 창밖으로 보이는 파란 하늘 아래 드넓은 공간, 그 속을 마음대로 걸을 수 있는 무한한 자유가 그리웠고, 무엇보다 아침에 일어나 밥 먹고 늦어서 허둥대며 학교 가서 가르치는, 그 김빠진 일상이 미치도록 그리웠다. 그리고 그런 모든 일상--바쁘게 일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누군가를 좋아하고 누군가를 미워하고--을, 그렇게 아름다운 일을, 그렇게 소중한 일을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태연히 행하고 있는 바깥세상 사람들이 끝없이 질투 나고 부러웠다. 하루는 저녁 무렵에 TV를 보는데 유명한 보쌈집을 소개하는 프로가 방영되었다. 보쌈 만드는 과정을 소개한 다음, 손님 중 어느 중년 남자가 목젖이 보일 정도로 입을 한껏 크게 벌리고 큰 보쌈을 입에 가득 넣고 씹어서 꿀꺽 삼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상갓집에 가면 보통 육개장, 송편, 전 등, 자금자금한 음식들이 나오고 상추쌈이나 갈비찜처럼 큰 덩어리 음식은 나오지 않는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는데, 상갓집에서 입을 크게 벌리고 먹는 것은 죽은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한다. 미련을 남긴 채 이 세상을 하직하고 이제는 아무리 하찮은 음식일지라도 하나도 먹을 수 없는 망자 앞에서 보란 듯이 입을 크게 쩍 벌리고 어적어적 먹는 것은 무언의 횡포라는 것이다. 그만큼 나도 보쌈을 먹고자 입을 크게 벌리는 그 남자의 탐스러운 식탐, 꿀꺽 삼키고 나서 그의 얼굴에 감도는 그 찬란한 희열, 그 숭고한 삶의 증거에 지독한 박탈감을 느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난 바깥세상으로 다시 나가리라. 그리고 저 치열하고 아름다운 일상으로 다시 돌아가리라. 그리고 난 이렇게 다시 나타났다. 나의 본래 자리로 돌아왔다. 다시 강단으로 돌아왔고, 아침에 밥 먹고 늦어서 허겁지겁 학교 가는 내 일상으로 돌아왔고, 목젖이 보이게 입을 크게 벌리고 보쌈도 먹고 상추쌈도 먹고 갈비찜도 먹는다. 뿐인가, 2007년의 시작과 함께 그동안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이렇게 3년 전에 끝냈던 ‘새벽 창가에서’ 칼럼까지 다시 시작한다. ‘어부’라는 시에서 김종삼 시인은 말했다. “ 바닷가에 매어둔 작은 고깃배. 날마다 출렁인다. 풍랑에 뒤집힐 때도 있다. 화사한 날을 기다리고 있다. (중략)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 맞다. 지난 3년간 내가 살아온 나날은 어쩌면 기적인지도 모른다. 힘들어서, 아파서, 너무 짐이 무거워서 어떻게 살까 늘 노심초사하고 고통의 나날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는데, 결국은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열심히 살며 잘 이겨냈다. 그리고 이제 그런 내공의 힘으로 새해에는 더욱 아름다운 기적을 만들어갈 것이다. 내 옆을 지켜주는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다시 만난 <샘터> 독자들과 함께 삶의 그 많은 기쁨을 누리기 위하여…. 장영희_ 서강대 영문과 교수입니다. 번역자이자 수필가, 칼럼니스트로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수필집 <내 생애 단 한 번>에 이어, 문학이 세상을 아름답게 한다는 믿음을 나누고자 <문학의 숲을 거닐다> <생일> <축복>을 펴냈습니다. 월간<샘터>2007.1
  • [김종면 기자의 시사 고사성어] 操刀傷錦 조도상금

    2012년부터 고등학교 2·3학년의 필수과목군을 5개에서 7개로 확대하기로 한 교육부의 교육과정 개편안이 오락가락하고 있다. 학생과 학부모들은 학습부담이 늘어난다며 반발하고, 과학계는 과학교육이 국가경쟁력의 핵심임을 망각한 ‘부실’ 개편안이라며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필수 과목을 늘린 것은 일부 교사들의 밥그릇 싸움에 휘둘린 것 아니냐는 시선도 만만찮다. 이와 관련, 김신일 교육부총리는 최근 “교육과정 개편은 이해관계가 얽힌 권력투쟁”이라며 “가급적 기존 교과과정 체제를 유지하겠다.”는 ‘수세적인’ 입장을 밝혔다. 그의 말대로 교육과정 개편은 그야말로 권력투쟁이기에 이를 어거할 ‘부총리급’ 교육부 수장이 있는 것이고, 확고한 비전과 책임있는 리더십이 필요한 것이다. 그럼에도 김 부총리는 이렇다 할 주의·주장없이 풍타낭타(風打浪打)하는 듯한 모습이어서 안타까움을 안겨주고 있다. 교육과정을 바꾸는 데 고려할 요소는 한두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세계가 지금 과학교육에 일로매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 버지니아주 토머스제퍼슨과학고 학생들은 인공위성까지 만들고 있다고 하지 않는가.‘자잘한’ 이해관계를 떠나 국가의 미래를 열어가는 교육적 혜안이 절실하다. 기자는 이 지점에서 중국 춘추시대 정(鄭)나라의 명신(名臣) 자산(子産)의 고사에 나오는 조도상금(操刀傷錦)이란 말을 떠올려본다. 마름질도 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 비단을 맡겨 재단술을 배우라고 할 수는 없는 법. 칼을 다루다가 귀한 비단을 상하게 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피할 수 없다면 당사자는 보다 전향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주는 게 도리다. jmkim@seoul.co.kr
  • ‘공판중심주의 재판’ 현직검사 강력비판

    현직 부장검사가 박사학위 논문을 통해 사법부의 공판중심주의와 일련의 영장기각 사태를 정면 비판했다. 서울중앙지검 형사8부 차동언 부장검사는 19일 동국대 대학원에 제출한 ‘공판중심주의 확립을 위한 전문법칙의 재정립’ 논문에서 “공판중심주의를 실현할 인적·물질적 토대가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명분에 사로잡혀 공판중심주의를 도입할 경우 혼선을 빚게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특히 법원이 피의자가 법정에서 동의하지 않을 경우 검찰 진술조서의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데 대해서는 “가능한 한 모든 증거를 법정에 못내게 하는 법원의 태도는 공판중심주의의 기본원칙을 망각한 행위”라면서 “진실을 밝히기 위해 수사를 보장하고, 그 과정에서 획득한 증거는 법정에 제출돼야 한다.”고 했다.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서울광장] 사고무친 노무현/진경호 논설위원

    [서울광장] 사고무친 노무현/진경호 논설위원

    #1.첫째, 그는 돌출적인 행동과 무분별한 발언으로 항상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둘째, 그는 우물 안 개구리요, 핵 장난의 위험을 외면하는 철부지다. 셋째, 그는 감정의 기복에 따라 언제 무슨 깽판을 벌일지 모른다. #2. 신체 허약하나 두뇌 명철함. 행동은 불안한 거동이 많으며 악화의 우려조차 엿보임. 지나치게 자만심이 강하여 타(他)와 비협조적임. 진작 이 경구를 놓치지 말았어야 했다. 사회 변혁을 외치는 화려한 언술 뒤로 잔뜩 응어리진 분노와 독선, 그 유아독존적 아집을 흘려보지 말았어야 했다. 노무현 변호사를 정계에 입문시킨 선배 변호사 김광일 전 국회의원이 2002년 12월 대선 직전 기자회견에서 내지른 외마디(#1)를, 이보다 훨씬 앞서 노 대통령의 중학교 3학년 생활기록부에 담임교사가 조심스레 남긴 글귀(#2)에 한번쯤 귀와 눈을 열었어야 했다. 경구는 현실이 됐다.“대통령 못 해먹겠다.”로 시작한 ‘무분별한 발언’은 “미국이 없었더라면 북한 수용소에 있었을 것”에서 “미국 엉덩이 뒤에서 형님만 믿는다고 하는 게 자주 국민의 안보의식이냐.”“흔들어라. 난데없이 굴러 들어온 놈…”으로까지 나갔다. 형용모순의 ‘좌파적 신자유주의’를 내세운 정책 행보 또한 왼쪽 오른쪽 광폭으로 넘나들다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제의로까지 갔다. 국민들은 그런 감정의 기복과 명철한 두뇌와 불안한 거동의 부조화에 가슴을 졸여야 했다. 하지만 이조차 맛보기였던 모양이다. 지난 연말 두 팔을 내지르던 민주평통 연설이 예사롭지 않더니 새해 들기가 무섭게 노 대통령의 입이 불을 뿜기 시작했다.“할 말 꼬박꼬박 하겠다.”며 국민들의 평가부터 내동댕이쳤다. 공무원들에게는 “가장 부실한 영역이 미디어”라며 언론과의 일전을 독려하고 나섰다. 그를 권력의 정점에 세우고도 등을 돌리게 돼 괴로운 국민들에게 ‘앞으론 당신들이 뭐라 하든 개의치 않겠어.’라고 외치는 노 대통령에게서 40여년 전 경남 김해시 진영 시골마을의 소년 노무현이 오버랩된다. 고무와 천으로 만들어진 부잣집 아이의 책가방을 칼로 북북 찢어댔고,‘나만 가난했던 것도 아닌데 유독 가난을 심각히 여기며 자랐고’, 잘 사는 읍내 아이들에 맞서 가난뱅이 시골 아이들의 대장이 됐던 노무현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뿌리칠 수 없는 그 피해의식이 마구 터져 나오는 듯하다. 임기말 대통령의 숙명도, 권력의 무상함도 아니다. 편가르기 정치, 뺄셈정치의 잔해일 뿐이다. 하나를 갈라 반을 얻고, 이를 또 쪼개 그 반을 취하고, 다시 나누고, 홀로 남고, 결국엔 자신마저 갈라 놓는 정치 말이다. 그 정치가 지금 국민 10명 중 9명을 등지게 하고 자신에게 우호적이던 언론마저 돌려 세운 것이다. 그런 정치이기에 언론이 국민과 자신을 가르는 불량품이 되고, 그런 불량품에 속아 소비자 주권을 망각하는 불량국민이 되는 것이다. 여당의 많은 인사들조차 노무현 때리기에 나선, 고립무원의 노 대통령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건 부질없을 듯 하다. 들을 의사도, 여유도 없거니와 덧셈정치에 익숙지 않아 실천할 능력도 없어 보인다. 차라리 국민들이 움직이자. 그는 결코 ‘왕따’가 아니며, 지난 4년 많은 것을 이뤘으며,2008년 2월24일 자정까지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대통령임을 일깨우도록 하자. 따뜻한 편지 한 통을 보내자. 그의 친구가 되자. 경구를 흘려 들은 모두의 책무다. 진경호 논설위원 jade@seoul.co.kr
  • 투사하는 제국 투영하는 식민지/김려실 지음

    활동사진 또는 팔딱사진, 움직사진이라고 불렸던 영화는 언제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작됐을까.‘투사하는 제국 투영하는 식민지(김려실 지음 삼인 펴냄)’는 1901∼1945년 한국영화사를 되짚은 기록이다. 영화와 문학의 관계에 대한 연구로 학문활동을 시작한 저자는 일본 교토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천착하고 있는 연구주제는 식민지 조선에서 상영된 외국영화가 어떤 맥락에서 수입되고 수용되었는가이다. 이 책은 그간 연구의 결실이다. 1919년 콜레라가 유행하자 위생 관념을 보급하기 위해 조선인의 손으로 처음 연쇄극 ‘호열자(콜레라) 예방에 관한 활동사진’이 제작됐다. 연쇄극은 활동사진을 신파극 상영 도중 영사하는 양식으로 ‘연극도 영화도 아닌 통조림 연극’ ‘신파극의 변태’ ‘영화로 보기에는 무리한 연극의 변형양식’ 등으로 불렸다.1945년 일본이 패전할 때까지 조선인은 약 180편의 영화를 제작했으나 해방기의 혼돈과 6·25전쟁을 겪으며 대부분 소실됐다.1998년 일본 도쿄국립근대미술관 필름센터가 전후 소련이 수집한 일본영화 가운데 ‘심청(1937년)’ ‘어화(1938년)’ 등 조선영화를 발견한다. 한국영상자료원은 이후 러시아와 중국에서 ‘망루의 결사대(1943년)’ ‘군용열차(1938년)’ 등을 발굴한다.2005년 2월28일 국회에서 28분간 편집된 발굴영화 하이라이트가 상영되자 한국영화 전공자들은 고분을 발견한 고고학자처럼 흥분했다고 기억한다. 하지만 저자는 발굴된 한국영화를 실제로 보고 낙담하고 말았다고 고백한다. 식민지 시대 영화 중 일부가 친일영화란 것은 이미 알고 있있지만, 그 시대의 광기를 스크린으로 마주하는 것은 괴로운 경험이었다고 술회한다. 심지어 일제의 만행을 고발했다고 평가받던 영화에서도 일장기가 게양되고 황국신민서사가 제창됐다. 저자는 이제 한국 영화학자가 해야 할 일은 기억을 날조한 학문적 패러다임을 냉정히 평가하고, 은폐되고 망각된 역사를 복원하는 것이라고 밝힌다.1937년 ‘서울에 딴스홀을 許하라’고 레코드회사 사장, 기생, 영화배우 등이 경무국장에게 공개탄원서를 보낼 만큼 일제시대에도 문화와 예술에 대한 열망은 뜨거웠다. 꼼꼼한 자료 분석과 사진 등으로 채워진 일제시대 카메라에 담겼던 필름에 대한 기록은 때로 재미있고 때로 한탄스럽다.1만 8000원.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서울신문 신춘문예-평론 당선작] ‘시적 에피파니’를 위하여-이장욱론/이찬

    1. ‘인공정원’ 으로서의 ‘시’를 넘어서 시인은 자신의 기억 속에 아로새겨진 어떤 체험의 순간을 지금-여기로 다시 불러오는 존재이다.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시작품들 가운데, 이 순간을 상투적인 표현들로 재생하고 있는 경우는 없다. 구체적인 체험 속에 깃들어 있는 고유한 생(生)의 순간들과 그 감각적 비의(秘義)들은 관례화된 문법을 통해서는 결코 표현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시’ 장르의 전래적인 형식과 표현을 충실하게 계승하고 있는 ‘전통적인 서정시’가 되었든, 지금까지 ‘시’가 보존해 온 관습적 전범을 파괴하면서 새로운 시의 문법을 과격하게 실험하는 ‘전위적인 현대시’가 되었든, 이러한 ‘상투성’으로부터의 이탈은 ‘문학’(literature)이라는 현대적인(modern) 산물에 요구되었던 필수불가결한 조건이자 ‘문학’이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자신을 보존할 수 있었던 근원적인 힘이다. 이장욱의 시는 세계에 존재하는 사물과 사건과 풍경들을 1인칭 화자의 감정과 의식과 가치를 표상하기 위한 대리물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기왕(旣往)의 관례화된 ‘시’의 문법으로는 이해될 수 없다.“서정은 만상을 일인칭의 내면적 고도(高度)에 걸어두는 방식이다.”(‘꽃들은 세상을 버리고’,《창작과 비평》,2005년 여름,70쪽)라는 그의 진술은 우선 ‘시’(‘서정’) 장르의 일반적 원리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더불어 통상적인 ‘시’ 문법에 대한 그의 반감(反感)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장욱이 재래(在來)의 ‘시’의 문법에 대해 품고 있는 회의와 반감은 그것이 필연적으로 이 세계의 ‘만상’들을 1인칭 화자의 자기 동일적인 영혼을 표상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유(專有)하며, 마침내는 ‘천변만화’하는 세계의 다양하고 풍요로운 실상을 “하나의 가치와 체계로 휘발시키는”, 조작된 ‘인공정원’의 숙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인식으로부터 비롯된다. 더불어 이러한 ‘인공정원’으로서의 ‘시’(‘서정’)가, 세계의 그 풍요로운 다양성을 또한 사물과 사건 그 자체가 지닌 고유한 육체적 질감들을 “하나의 가치와 체계로 밀폐된 서정적 우주”로 복속시켜 버리거나 혹은 그 바깥으로 추방시킨다는 확신으로부터 나온다. 결국 그에 따르면, 통상적이고 관례적인 ‘시’의 문법은 ‘세계의 풍요로운 실재성’을 표현하기는커녕 시인의 ‘일관된 가치와 의미와 정서’에 의해 세계의 만상들에 얼룩져 있는 ‘혼탁한 사물성’을 그 바깥으로 밀어내는 ‘폭력적’이고 ‘권위적’인 ‘조화’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는 1인칭 화자의 나르시시즘적인 ‘인공정원’이 가공될 수 있을 뿐, 세계 그 자체의 참다운 실상들이 발견될 수 없다. 2. 표상의 외부와 마주침의 유물론 “객관적인 아침/나와 무관하게 당신은 깨어나고/나와 무관하게 당신은 거리의 어떤 침묵을 떠올리고/침묵과 무관하게 한일병원 창에 기댄 한 사내의 손에서/이제 막 종이 비행기 떠나가고 종이 비행기,/비행기와 무관하게 도덕적으로 완벽한 하늘은/난감한 표정으로 몇 편의 구름, 띄운다./지금 내 시선 끝의 허공에 걸려/구름을 통과하는 비행기와/종이 비행기를 고요히 통과하는 구름./이곳에서 모든 것은 단 하나의 소실점으로 완강하게 사리진다./지금 그대와 나의 시선 바깥, 멸종 위기의 식물이 끝내/허공에 띄운 포자 하나의 무게와/그 무게를 바라보는 태양과의 거리에 대해서라면./객관적인 아침. 전봇대 꼭대기에/겨우 제 집을 완성한 까치의 눈빛으로 보면/나와 당신은 비행기와 구름 사이에 피고 지는/희미한 풍경 같아서.”(‘객관적인 아침’ 전문) ‘객관’(object)이란 철학적 인식론에서 주체의 의식 바깥에 놓여 있는 외부 대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주체의 시선과 지시작용(designation)의 테두리를 벗어나 있는 어떤 미지(未知)의 영역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곧 ‘객관’이란 주체의 의식 바깥의 공간을 점유하는 사물 혹은 세계이기는 하나, 주체의 시선과 자기의식에 의해 호명되고 포획되어, 이미 ‘있다’고 알려진 어떤 인식적 대상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장욱에게 ‘객관’은 이렇게 인식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객관적인 아침’은 ‘나’와 ‘당신’과 ‘침묵’과 ‘종이 비행기’가 서로 ‘무관하게’ 자신들의 사건들을 발생시키는 시간이다. 따라서 ‘객관적인 아침’이라고 명명(命名)된 것은 주체의 시선과 사유에 이미 포착되어 있는 어떤 외부적 대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주체의 자기회귀적인 의식의 궤도로 환원되지 않는 세계의 풍요로운 실재성 또는 사물 그 자체가 지닌 복수적 다양성을 표현한다. 기왕(旣往)의 장르적 문법에 충실한 시작품의 경우라면, 위의 시작품 속에 등장하는 여러 사물들은 ‘단 하나의 소실점’을 위해 봉사하였을 테지만, 그리고 그것은 시인의 내면 풍경의 표상(表象)들로 고용되었을 것이지만, 여기에서 그것들은 시인이 설정한 ‘소실점’과는 ‘무관하게’ 그 자신의 존재를 보존한다. ‘내 시선의 끝’에서는 모든 사물이 “단 하나의 소실점으로 완강하게 사라진다.” 그러나 지금 ‘그대와 나’라는 인간의 ‘시선 바깥’에선 ‘멸종 위기의 식물’이 생명을 잉태하기 위해 ‘허공’에 ‘포자’를 ‘띄우’고 있는 중이다. 또한 ‘까치의 눈빛으로 보면’ 인간이 설정한 세계의 위계질서와 그것의 ‘소실점’ 역시 하나의 ‘희미한 풍경’에 지나지 않는다.‘하늘’이라는 자연물이 ‘도덕적으로 완벽한’ 까닭은 분열되고 오염된 우리의 경험 세계와는 ‘무관하게’ 존재하는 ‘마음의 도원(桃園)’을 표상(表象)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1인칭의 유토피아적 영혼은 자기 내부에서 발아한 동일자의 표상(representation)들만을 세계로부터 수집할 따름이며, 그 바깥에 존재하는 위(僞)와 악(惡)과 추(醜)를 볼 수 없으며, 그것들과 결코 마주칠 수 없다. 이 영혼은 자신이 알고 싶은 것만을 보며, 보고 싶은 것만을 고백하며, 고백하고 싶은 것만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등뒤에 있다”는 ‘절규’의 첫 구절은 시인 이장욱이 가진 인식론적 지평을 축약하여 드러낸다. 이것은 그의 시에서 다양한 상징적 편린(片鱗)들로 산포되어 나타난다. 이 편린들은 예컨대 “고백은 지겹다. 모든 고백은 거짓이다”(‘감상적인 필름’),“두 그루 전신주는 아름답고 밤눈은 내리고 녹슨 제 땅에서 제 어둠을 파 내려갔으므로 단 한 번도 송신할 생애를 갖지 못한 그 오래된 이야기”(‘이상한 나라’),“꽃은 15층 베란다에 서서 까마득한 지상을 가늠하는 자와 그 흐린 눈을 마주치지 않음으로써 꽃은, 오로지 나무일뿐 인 무서운 나무들 사이에서 아직도 견고한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다.”(‘사라지는 꽃’),“하지만 너무 흔한 최면처럼 아직도 나를 중심으로 돌고 있는 하늘이 너무 흔한 최면처럼 실편백에 내리는 빗물이, 다시 나를 이끈다는 것 돌아온다는 것은 얼마나 상투적인가 돌아오지 않기 위해 내가 치를 수 있는 무엇이, 더 있었을 것이다”(‘너무 흔한 풍경’) 등과 같은 것들이다. 이 시구들은 1인칭의 나르시시즘적인 영혼이 웅변하는 ‘기억’과 ‘고백’과 ‘이야기’가 ‘거짓’이거나, 세계의 풍요로운 실상과 ‘송신할 생애를 갖지 못한’ 폐쇄적인 ‘아름다움’에 불과하다는 이장욱의 인식론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1인칭의 유토피아적 영혼이 볼 수 있는 것은 반복적으로 순환하는 자기 자신일 뿐이며, 그것이 도취하고 열망하는 자연의 풍경은 ‘너무 흔한 최면’일 따름이다.‘하늘’이 “나를 중심으로 돌고 있”지 않을 때에만, 그리하여 모든 자연과 사물의 풍경이 ‘나’로 ‘다시’ ‘돌아오지 않을’ 때에만, 시인은 ‘너무 흔한 풍경’을 재생하지 않을 수 있고,‘이 당대적 상투성의 거리’(‘상투적’)를 벗어날 수 있다. 이 벗어남은 1인칭의 고백적 화법이 마련한 자기 동일적인 표상체계 바깥으로부터 느닷없이 밀려닥치는 우발적 사건과 그것에 수반되는 ‘낯선 것의 폭력’을 통해 시작된다. 세계의 혼탁하면서도 풍요로운 실재성과의 마주침은 바로 이 순간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나는 뚜레쥬르 베이커리를 지나간 것이다. 뚜레쥬르 베/이커리를 지나가는 하오의 육신 쪽으로 수직 낙하하는 겨/울 잎, 겨울 잎 안에서 천천히 사라져간 햇빛도 있었던/것이다. 물론 나는 내가 겨울 잎의 풍경 속을 지나간다고/는 생각지 못했으나./그것은 무성하고 울울한 저 너머, 횡단 보도 앞에서 푸/른 신호를 기다리는 여자가 오래도록 통과할 숲의 풍경./나무에 깃들여 사라진 벌레들을 나는 보지 못했지만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지나가는 아이의 어젯밤 꿈속을 나는 거/닐었는지도. 말하자면 그 꿈속의 눈 내리는 거리를./그러므로 이곳은 겨울 잎과 햇빛과 벌레들이 이루는 세/계. 뚜레주르 베이커리의 문을 열고 나오는 늙은 사내는/어젯밤의 아주 쓸쓸한 수음에 대해 생각했던 것이다. 그/와 나는 떨어지는 겨울 잎에 눈을 두고 지나쳐갔으나 우/리가 그 겨울 잎이 기억하는 햇빛과 벌레와 바람을 떠올/렸던 것은 아니다.”(‘의심의 여지가 없는 겨울 잎’ 부분) 이미 드러나 있는 세계는 아직 드러나지 않은 무수한 사태들의 일부로서 성립된다. 우리가 그 자신들의 눈앞에 어떤 사물과 사건의 잔상(殘像)조차 데려다 놓지 못한다고 해서, 그 사물과 사건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이 시의 화자가 ‘지나가는’ ‘겨울’의 ‘거리’에 드러나 있는 것은 ‘겨울 잎’이나,‘겨울 잎 안’에는 ‘천천히 사라져간 햇빛도 있었던 것이’며,‘우리’가 ‘떠올리지 않’는 ‘햇빛과 벌레와 바람들이 이루는 세계’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은 모든 1인칭의 시점(視點) 내부에 선재하는 명석 판명한 대자의식(對自意識)으로서의 ‘나’의 확실성이 아니라,1인칭 주체의 시선으로 포착되지 않는 세계의 다양한 만상들이며 그것들이 이루는 변화와 이행의 과정이다. 결국 시인 이장욱이 보고 느끼고 감각하고자 하는 것은 뚜렷한 형태와 공간적 점유들로 구분지어진 사물과 사건의 가시적(可視的) 외면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 구분의 경계들을 횡단하는 힘들의 배치이며, 모든 존재자들이 지닌 복수(複數)의 가면(假面)으로서의 ‘자세’와 ‘포오즈’이며,‘지나가’고,‘사라지’고,‘통과하’는 것으로서의 세계의 실재성이다.‘겨울 잎’ 속에는 ‘사라진 햇빛’이 ‘있었’듯이,‘나’와 ‘그대’의 ‘생’에는 ‘사라져가’고 ‘흘러간’ 것으로서 ‘무성한’ ‘잎 새’와 ‘숲’과 ‘천천히 사라진 햇빛’도 ‘있었던 것’이다. 설혹 그것이 우리 자신의 명징한 감각과 사유가 아니라,‘꿈속을 거닐었는지도’ 모를 상상(想像)을 통해서만 겨우 감지될 수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이 ‘있었던 것’들이다. 위의 시에서 자주 활용된 ‘지나가다’,‘사라지다’,‘통과하다’ 등등의 동사들은 어떤 사물과 사건의 고정된 상태를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뚜렷하게 어떤 경계를 구분지울 수 없는 사태의 진행 과정을 나타낸다. 따라서 이 동사들은 ‘시’ 장르의 통상적인 화법 내부에 선재하는 자기의식의 투명성을 표상하는 언어가 아니라, 그것 외부에 존재하는 세계의 다양성과 그 변화의 과정을 나타내는 언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여러 시편들에서 빈번하게 활용된 ‘지나치다’,‘건너가다’,‘흐르다’,‘멀어지다’,‘스쳐가다’ 등과 같은 동사들 역시 세계의 ‘천변만화’하는 실재성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또한 모든 사물과 존재자들의 다양성과 이질성들을 1인칭 화자의 자기 표상적인 감정과 가치로 바꾸어버리는 ‘시’ 장르의 관례화된 문법을 벗어나기 위한 그의 시적 전략의 하나이다. 3. 假面과 ‘脫’ 인격적 주체로서의 화장 이장욱의 시가 ‘시’ 장르의 통상적인 문법에 내재되어 있는 ‘유토피아적 자기회귀’라는 ‘상투적’인 ‘최면’을 벗어나기 위해서 자주 활용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시적 화자’를 단일한 감정과 의식을 지닌 하나의 인격체로 전제하는 관례적(慣例的) 설정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것은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정적 자아’의 단일한 목소리를 ‘시적 화자’의 분열적이고 다수적(多數的)인 목소리로 전환시키는 것이며,‘서정’의 화법에 내재하는 나르시시즘적인 순결성과 엄숙한 고백체를 조롱하고, 그것 속에 은폐되어 있는 숱한 가면(假面)들을 폭로하는 것이다. “감정은 어떤 포우즈 금홍아 금홍아 마당귀 화단에 잘린 벽돌들 녹슬어 고요한 철대문, 어쩌다 딱딱한 것들과 친해졌는지 (중병에 걸려 누웠으니 얼른 오라)고 금홍아 금홍아 나는 네게 엽서를 띄우고 싶어 이십세기와 (짱껭뽕)을 해서라도 금홍아 금홍아 나는 네 품에 안기고 싶네 하루 종일 내 딱딱한 그림자는 어디 가서 나를 어떻게 하려는 음모에 골몰중인지 다만 나 자신을 위조하는 것이 할만한 일일뿐 금홍아 금홍아아 하지만 디테일 때문에 속는다거나 해서야 되겠니?”(‘금홍아 금홍아’ 부분) 이 시의 화자는 표면적으로 ‘이상’(李箱)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의 경험적 역사 속에 존재했던 단 하나의 인격체로서의 ‘이상’과 그의 작품들 속에서 ‘나’로 표기되는 여러 작중 화자들이 동일한 존재일 수 없듯이, 이 시의 화자는 ‘이상’(李箱)이면서 ‘이상’이 아니며, 또한 ‘이장욱(李章旭)이면서 ‘이장욱’이 아니기도 하다. 다시 말해,‘이상’의 작품들 속에 등장하는 화자 혹은 주인공으로서의 ‘나’는 이 세계의 유일한 인격적 실체로서의 고유명사 ‘이상’(李箱)이 아니라, 그가 어느 한 시점(時點)에서 취한 하나의 정념과 태도로서의 ‘나’(假面)일 뿐이듯이, 이 시의 화자는 인격적 자기동일성을 전제하는 고유명사 ‘이상’(李箱)이거나 혹은 ‘이장욱’(李章旭)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정황과 그 순간적 배치 속에서만 존재하는 하나의 정념(情念)과 태도로서의 ‘나’일 뿐이다. 더불어 이러한 ‘나’는 그 정황과 배치의 변화에 따라 무한히 변양(變樣)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시의 부기(附記),“금홍이는 시인 이상의 애인이다.箱(1910-1937)과 나(1968-)의 불편한 관계를 표시하기 위해 그의 소설 ‘날개’,‘逢別記’,‘終生記’ 등에서 몇 구절을 차용했다.”에서 ‘箱과 나의 불편한 관계’란 하나의 자기 동일적인 인격체로서의 ‘이장욱’이 ‘이상’이라는 또 다른 인격체로서의 시적 화자를 차용하거나 혹은 ‘이상’(李箱)의 목소리를 재연(再演)하는 데 있어서, 어떤 불화(不和)가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이상’의 목소리 속에 ‘이장욱’의 목소리가, 또는 ‘이장욱’의 정념(情念) 속에 ‘이상’의 정념이 서로를 전제하면서 공명(共鳴)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 공명은 ‘이상’과 ‘이장욱’이라는 경험적 인격체 전반이 공유하는 동일성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또한 이 둘이 여전히 ‘불편한 관계’일 수밖에 없는 것은 이 공명이 어떤 특정한 한 순간에만 존속(存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나 자신을 위조하는 것이 할 만한 일일뿐”이라는 구절은 ‘시적 화자’, 더 나아가 모든 발화의 상황 속에 놓인 화자의 존재론적 특성을 축약하여 표현한다. 이에 따르면, 통상적으로 ‘시’ 장르가 전제해왔던 화자의 자기 동일성은 실상 ‘위조’된 것일 뿐이며, 화자는 시인의 전(全) 인격체 그 자체가 아니라, 단지 특정한 시적 정황과 맥락 속에서 구성되어지는 하나의 가면(정념)에 불과하다. 이장욱의 시에서, 화자의 이러한 변양과 분열을 의식하지 못하는,1인칭 고백체의 화법은 ‘사기’,‘거짓’이라는 명칭을 부여받는다.“사기치지 말라,高手는 그냥 느낀다, 그대 생을 증거하는 단 하나의 표식은, 그대의 육체이다”,“고백은 지겹다. 모든 고백은 거짓이다.”(‘감상적인 필름’),“당신이 당신을 증언하고 있으니 그것은 참된 증언이 못됩니다.”(‘편집증 환자가 앉아있는 광장’) 등은 이장욱이 1인칭 화자의 자기애적(自己愛的) 순결과 정직을 신뢰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모든 1인칭의 발화 속에 잠재되어 있는 ‘위조’와 ‘위장’과 ‘가장’을 들추어내려 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그의 거의 모든 시 속에 스며있는 위악적(僞惡的) 포즈와 하드보일드 문체(hard-boiled style)는 1인칭의 발화 상황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고백적 화법의 위선(僞善)에 대한 그의 근원적인 혐오로부터 나온다. 이러한 위선을 거부하거나 회피하기 위하여, 그의 시에서 빈번하게 활용된 시적 방법은 두 가지이다. 그 하나는 시적 화자를 자기의식(自己意識)의 명석 판명함을 입증할 수 있는 합리적이고 정상적인 주체로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정상성의 외부로 추방될 수밖에 없는 병리적(病理的)이거나 환상적(幻想的)인 혹은 괴물과 같은 존재자들로 설정하는 것이다. 그의 시에 등장하는 ‘편집증 환자’,‘투명인간’,‘킬러’,‘도플갱어’,‘뱀파이어’,‘좀비’ 등과 같은 화자들이 바로 이러한 사례에 해당된다. 다른 하나는 화자의 진술 자체를 신빙성(信憑性)이 결여되거나 불명료한 어사(語辭)들로 구성함으로써, 시작품 내부의 단일한 ‘의미화’(signification) 주체로서의 화자를 그 중심의 자리에서 주변부로 밀어내는 것이다. “내가 어느 이상한 날에 그를 지나 그녀를 지나 그대를/지나 내가 어느 이상한 날에 정오를 지나 새벽을 지나 오/후 네 시를 지나 그리고 어느 이상한 날에 빈 공터와 당구/장과 동대문 운동장을 지나 문득 흥겨운 술집의 죽은 친/구의 화사한 여자들의 기나긴 과거를 걸어가는 어느 이상/한 날”(‘결국,’ 부분) “그렇지. 나는 어쩌면 모든 일을 예견하고 있었는지/도, 혹시 모른다. 행복할 리도 황폐할 리도 없는 바람들/이 애초에 공릉동의 주민이었는지도 혹시 모르지. 이곳/에서 모든 빛들은 현재형으로 명멸한다. 너무 상투적인/가? 하지만 그때 한 마리 늑대가, 월계동 쪽의 불빛 속으/로 천천히 사라지는 것을 나는 보았다. 문득 망망한 비가/내렸는지도, 혹시 모르지. 그의 마른 등을 향해 몇 장의/ 낡은 신문이 날아들었는지도.”(‘공릉동의 바람 속으로’ 부분) “어두운 골목을 지난 적 있다. 어떤 생각이 나를 사로잡/아, 나는 더 이상 걸을 수 없었다. 어쩌면 여행중이었던/거야, 아니 맥주를 사러 가게로”(‘생각하는 사람’ 부분) 위의 시편들에서, 화자들은 자신의 감정이나 사유를 명징하고 확실한 것으로 진술하지 않는다. 아니, 그들은 ‘결국,’에서처럼, 특정한 공간과 시간을 나타내는 ‘동대문 운동장’과 ‘정오’와 ‘오후 네 시’라는 구체적 지시어들을 능동적으로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이상한’이라는 형용사의 집요한 반복에 의해 정상적인 언어의 체계 혹은 일상적인 개연성의 세계로부터 추방된다. 또한 ‘공릉동의 바람 속으로’에서 볼 수 있듯이, 화자는 과거 추측의 의미를 지닌 어미(語尾),‘-이었는지도’의 반복과 기억의 불명확성을 표현하는 ‘모른다’라는 서술어의 반복에 의해 자기의식의 자명성을 상실한다. 결국 그의 시의 화자들은 이러한 어법들로 인해 자신의 어떤 감정이나 기억, 이야기 등과 같은 의식 내용을 능동적으로 진술할 수 있는 지위를 박탈당하게 된다. “어두운 골목을 지난 적 있다. 어떤 생각이 나를 사로잡아 나는 더 이상 걸을 수 없었다.”라는 ‘생각하는 사람’의 한 구절은 화자인 ‘나’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각’이 화자를 ‘사로잡아’ 그를 지배하는 것처럼 언술됨으로써, 시의 의미화의 ‘소실점’으로서의 화자(주관)와 그 구성 요소로서의 대상(객관)의 관계를 역전(逆轉)시킨다. 이 시에서 여러 번 반복된 “어쩌면 여행 중이었던 거야. 아니 맥주를 사러 가게로”라는 구절 역시, 화자의 진술을 합리적으로 독해될 수 없는 ‘이상한’ 것으로 만들면서, 화자의 의식으로부터 기원하는 어떤 의미의 계열도 자명하지 않은 것이 되게 하거나 또는 어떤 신비에 둘러싸인 미지(未知)의 것이 되게 한다. 결국 이러한 어사(語辭)들의 반복적 활용은 전래의 시적 관습에서 전제되었던 단일한 의미화의 ‘소실점’으로서의 화자를 그 의미화의 중심에서 주변으로 물러나게 하는 시적 효과를 발생시킨다고 할 수 있다. 이장욱의 시는 재래의 ‘시’ 장르에서 화자에게 관례처럼 부여되어왔던 의미화의 지배권을 박탈함으로써, 화자의 단일한 감정과 의식과 가치가 아니라,‘脫’인격체로서의 시적 주체의 복수적인 가면들과 정념들, 그리고 사물들 그 자체의 다양한 변양들을 시의 새로운 의미 내용으로 새겨 넣는다. 아마도 그는 ‘천변만화’하는 세계의 실재성과 마주칠 수 있는 하나의 유력한 방법으로 이러한 시적 화법을 고안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4. 비선형적 시간과 존재의 주름 이장욱의 시에서, 화자를 자기의식의 자명성을 의심하고 회의하는 분열적 주체로 조형하는 또 다른 방법의 하나는 바로 시제(時制)이다. 그의 시는 시간의 일정한 단위 분절을 통해서만 수립되는 ‘현재’의 시제 속에 ‘이미 지나간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중첩시킨다. 즉 어떤 특정한 외연(外延)으로 수렴되는 ‘현재’라는 시간 속에 그 외연을 넘어서 존재하는 비동시적인 사건들을 병치시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그의 시에서는 (과거-현재-미래)로 연속되어지는 선형적(線形的) 시간의 투명성이 사라지게 되며, 그것의 명료한 경계 분할이 흐릿해지게 된다. “나는 오로지 지금 이곳에 있다./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시작된다./단 하나의 생각이 나를 결박한다./ 나는 얼어붙는다./오 분 전과 머나먼 미래가 한꺼번에 다가온다./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결정’ 부분) “최선을 다해 개인적인 관계들을 생각하자/드디어 당신과 나는 10년 후의 야구를 이해한다./누군가 플레이 볼이라고 외치자/나는 있는 힘껏 배트를 휘둘렀다./그리고 10년 후의 1루 베이스를 향해/필사적으로 달려갔다”(‘10년 후의 야구장’ 부분) “자꾸 다르게 보여/당신은 이미 태어났는데/당신은 사랑을 했었는데/당신은 지난해의 가을을 여행 중인데/당신은 오래 잊고 있었던 무엇인가를/막 떠올려 미소 지었는데”(‘정확한 질문’ 부분) ‘결정’에서 ‘오 분 전’과 ‘머나먼 미래’는 ‘다가온다’라는 현재시제 동사의 주어가 됨으로써 ‘지금 이곳’에 공존하는 것으로 나타나며,‘10년 후의 야구장’에서는 ‘1루 베이스’가 ‘10년 후’의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시점에서,‘달려갔다’는 과거시제 동사의 목적어가 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또한 ‘정확한 질문’에서는 ‘지난해의 가을’이라는 과거 시점의 명사가 ‘여행 중인데’라는 현재진행형의 동사와 결합되는 시제의 혼란이 나타난다. 이러한 시제의 혼란과 비동시적인 것들의 동시적 공존은 어떤 특정한 현재적 사태 속에 감싸여져 있는 잠재성(virtuality)의 차원을 시의 표면으로 솟아오르게 한다. 위의 시들에서 표현된 ‘생각’과 “오래 잊고 있었던 무엇인가”는 화자의 자기동일성을 구축하는 명징한 자기의식과 기억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과거-현재-미래)라는 선형적 시간 위에서 구축되는 주체의 실존적 동일성과 연대기적 서사(narrative)를 일그러뜨리는 존재의 주름들이자 아직 현실화되지 않은 잠재성의 차원들이다. 이 잠재성의 차원에서 시제의 구분은 의미가 없다. 예컨대,“일어나지 않았던(일어났던)”이라는 과거시제나 “일어나지 않을(일어날)”이라는 미래시제는 모두 현실성(actuality)의 척도를 통해서만 측정되고 구분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미 드러나 있는 것들로 구성되는 현실성의 차원은 실상 아직 드러나지 않은 잠재성의 차원들 가운데 그 일부가 선택되거나 배제됨으로써 성립된다고 할 수 있다. 잠재성의 차원은 그러므로 일정한 외연을 가진 어떤 ‘현재’로 수렴되지 않으며, 선형적이고 연대기적인 시간으로 귀속되지 않는다. 그것은 ‘과거’에나 ‘현재’에나 ‘미래’에나 늘 존속(存續)하고 있는 것이며, 하나의 주어진 물질적 사태로서 아직 현실화되지는 않은 것이지만, 항상 ‘실재하는 것’(reality)이라 할 수 있다. “그때 그 오래된 눈빛은 우연한 것이었으나 아, 이런 바/람은 괜찮은데, 모든 우연을 우리는 미리 알고 있었네 삼/년 전의 문 열리고 삼십 년 전의 그대, 마른 등 보이네/눈뜨면 그때인 듯 상한 눈발 날리고 모래처럼 우연한 노/래들 내 잠 깊은 모래산, 모래산에 쌓이네//용서를 빌러 그곳에 갔네 그곳에 오래 앉아 있었으나/깔깔한 모래들 아직도 내 잠 속 떠나지 않네 삼 분 전의/잠에서 깨어 삼 일 전의 기슭을 배회하는 자 삼 일 전의/잠에서 깨어 삼 년 전의 독백을 기억하는 자 그리고 모래/산 바람 부는 그대의 모래산”(‘삼 분전의 잠’ 부분) 이 시를 단지 특정한 ‘잠’ 속에 나타난 잡다하고 무질서한 꿈의 내용 혹은 그 환상적 이미지들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의 많은 부분들을 놓치게 될 것이다. 오히려 이 작품은 화자의 현실적 의식으로 포착되지 않는 망각과 오해와 무의식의 무한한 잠재성을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꿈속에서 우리는 ‘삼 분 전의 문’과 ‘삼십 년 전의 그대’와 ‘삼일 전의 기슭’이 동시에 결합되거나 병치되는 상황을 체험하게 된다. 꿈속에서 ‘일어났던 것’(과거)과 ‘일어나고 있는 것’(현재)과 ‘일어날 것’(미래)은 선형적인 질서를 벗어나 한데 뒤엉키며, 시간은 산술적 단위로 분명하게 구분되는 연대기(年代記)를 벗어난다. 이것은 곧 꿈의 본질적 특성이 비선형적(非線形的) 시간의 조합에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삼 분 전의 잠에서 깨어 삼 일 전의 기슭을 배회하는 자 삼 일 전의 잠에서 깨어 삼 년 전의 독백을 기억하는 자”라는 구절은 이 시의 의미가 단지 화자의 ‘잠속’에 나타난 꿈 이미지들의 재구(再構)를 통해서만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네 번이나 반복된 ‘잠에서 깨어’는 이 시의 화자가 위치하고 있는 공간이 ‘잠’의 안쪽만이 아님을 보여주기 때문이다.“모래산에 쌓이네”에서 ‘쌓이네’라는 술어(述語)는 ‘모래산’이 퇴적(堆積)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게 한다. 또한 ‘내 잠 깊은 모래산’은 그것이 화자의 신체에 부수되는 어떤 행위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것임을 알려준다. 내면적인 것인 동시에 퇴적의 의미를 지니는 것은 ‘기억’이다. 따라서 ‘잠’이 비단 현실적인 ‘잠’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면,‘내 잠 깊은 모래산’은 ‘내 안에서 잠자고 있는 기억’ 혹은 ‘나의 의식에서 지워져버린 망각들’로 해석된다.‘기억’ 또한 의식 주체의 선택과 배제를 통해서 가공되고 재구성되는 것이므로 세계의 실상 그 자체일 수 없다. 그것은 오히려 인칭과 시점에 따라 상이하게 구축되는 개연적 서사(허구)에 가깝다. 따라서 ‘기억’의 내부에는 망각되고 삭제된 그 무엇이 여전히 어떤 잉여로서 남아있게 된다. ‘잠재성’의 차원은 단지 환상이나 몽상의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아직 현실화되지는 않은 것이지만, 이미 실재하는 것이다. 잠속의 꿈과 의식되지 못한 무의식과 기억의 사슬에 무수하게 주름 잡혀 있는 망각들이 바로 그러한 것들이다.‘내 잠 깊은 모래산’에 무수한 망각과 오해와 왜곡이 기거하고 있듯이 ‘바람 부는 그대의 모래산’ 또한 인칭과 시점을 달리한 숱한 망각과 오해와 왜곡으로 점철되어 있음은 자명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자명성은 주체의 의식과 기억의 자명성이 아니라, 주체에게 의식되지 않고 기억되지 않는 잠재성의 차원들이 실재한다는 것의 자명성이며, 주체의 단일한 의식(기억)이 조작된 서사와 허구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의 자명성이다. 모든 1인칭들은 자신들의 기억을 그들의 처지와 욕망과 권력에 따라 서로 다르게 구성하기 때문이다. 1인칭 주체의 자기의식은 그것을 구성하는 내용이 아무리 많이 추가되고 보충된다고 하더라도, 결코 이 세계 그 자체의 실상을 포착할 수 없다. 또한 그 어떤 충만한 기억도 ‘모래산’처럼 부서지기 쉬운 공허(空虛)와 무의미(無意味)를 동반할 수밖에 없다.“모든 우연을 우리는 미리 알고 있었네”는 삶의 근원적인 공허와 무의미를 이미 깨달아버린 자의 언어이며, 이러한 현자(賢者)만이 지닐 수 있는 지혜와 여유를 표현한다. 현실성의 내부에 잠재성이, 의식의 내부에 무의식이, 기억의 내부에 망각이, 무한한 주름들로 감싸여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자에게만,‘우연’은 이 세계의 진상을 목도(目睹)할 수 있는 어떤 에피파니(epiphany)의 순간을 가져다줄 것이기 때문이다. 5. 시적 에피파니’를 위하여 “서랍 속으로 사라진 것들이/어느 날 문득 서랍 속으로 돌아오듯/어느 날 다시 돌아오는 오래전의 목소리./……/어느 순간 너를 습격하는 상형문자들./너의 내부에서 드디어/다른 목소리들이 흘러나오는 날이 있다./혹은 돌아오는 날.”(‘복화술사’ 부분) ‘시적 에피파니’가 도래하는 시간은 시인이 어떤 신비를 능동적으로 예감하는 시간이 아니다. 그것은 ‘너를 습격하듯이’ 밀려닥치는 우발성의 시간이며,‘상형문자’로서의 시적 언어가 시인의 관습적 감각과 사유를 폭력적으로 뒤흔들어 놓으면서 섬광처럼 스쳐지나가는 순간이다. 이 순간은 그러므로 능동태(能動態)의 시간이 아니라 수동태(受動態)의 시간이다. 또한 이 시간은 시인에게 이미 알고 있다고 여겨졌던 세계의 만상들이 그 자신들의 풍요로운 다양성을 열어젖히는 순간이다. 따라서 이 순간은 “너(시인)의 내부에서 드디어 다른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날”이기도 하며 ‘돌아오는 날’이기도 하다. 이 ‘목소리’는 이미 실재하고 있었던 것이지만, 시인의 명징한 의식과 관습적 표상작용에 포착되지 않았던 것이기에,‘돌아오는 목소리’(반복)인 동시에 ‘다른 목소리’(차이)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반복되는 것(‘돌아오는’)은 이미 실재하고 있었던 세계의 풍요로운 만상들이며, 이 반복을 통해 차이(‘다른’)를 발생시키는 것은 ‘너의 목소리’ 곧 시인의 관례적인 감각과 도식들이다. 김수영이 ‘絶望’에서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救援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絶望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라고 표현한 것처럼, 모든 미학적 실천과 시적 창조의 공간에서 우리들 자신의 관례적 감각과 도식을 매번 혁파하기 위해서는, 섬광처럼 우리를 헤집고 지나가는 모든 우발성들을 용기 있게 승인해야 하며, 이 우발성들이 우리들에게 가해 오는 ‘낯선 것의 폭력’과 과감하게 마주쳐야만 한다. 이장욱의 말처럼 “이 고투를 통과한 자에게만”,‘시적 에피파니’는 비로소 그 자신을 개방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이 고투를 체험하지 않은 자에게는 그 어떤 ‘에피파니’의 순간도 도래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장욱의 시에서 인간 내면에 깃들어 있는 충직한 순결성을, 일상적 경험 속에서 피어나는 순박한 인간애를, 그 아름다운 빛으로 충만해 있는 시적 감동의 순간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에게 있어서, 이러한 것들은 세계 그 자체의 실상이 아니라 1인칭의 자기애적인 영혼이 미리 전제하고 있는 어떤 관념적인 조화이자 이상적인 도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시는 이것들이 배제하거나 은폐하고 있는 세계의 잔인한 리얼리티를 포착하려는 지점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의 이러한 관점과 태도가 진정으로 한국시의 미래를 위한 새로운 혜안(慧眼)과 비전을 담지하고 있는 것인지는 쉽게 단언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의 시가 우리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그 무수한 가면과 정념을, 우리를 포함한 모든 존재자들의 그 혼탁하면서도 풍요로운 만상을, 현대적 일상의 그 지루한 반복과 권태를, 저토록 리얼하고 또 잔인하게 묘사해준다면, 그의 시는 하나의 예술로서 그것이 존재해야 할 이유와 근거를 충분히 입증하게 될 것임에 틀림없다. 이찬
  • [강태규의 연예 in] 폭행으로 얼룩진 연예인 커플의 비애

    결혼 12일 만에 폭행으로 얼룩진 연예인 커플 이민영과 이찬의 책임공방을 둘러싼 전개과정이 점입가경이다. 죽도록 사랑하겠다던 맹세속에 파국으로 돌아서면 모르는 남보다 더 큰 상처를 남겨주고야 말겠다는 서늘함이 느껴진다. 물론 당사자들의 아픔은 얼마나 더할까마는, 인기와 이미지로 살아야 하는 이 커플이 앞날을 생각했다면 이 결과는 그야말로 최악의 경우를 선택했다는 생각이다. 연예인 매니지먼트에서 매체의 캐스팅 영향력을 발휘하는 일보다 위기 대처능력, 즉 리스크 매니지먼트가 더 중요한 시기를 맞은 지 오래되었다. 연예인도 사람이다. 실수를 범한다. 그러나 그 실수의 대가가 내일 당장 어떻게 펼쳐질지 예측하지 못한다면 대중에게 사랑받는 일은 포기해야 한다. 사건 직후 대중의 일반적인 판단과 여론의 움직임을 예측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최선의 해법은 있다. 그 예측을 할 수 없다면, 벼랑 끝에 서있는 것과 같다. 2005년 클릭비의 김상혁과 원타임 송백경의 음주운전 사건은 리스크 매니지먼트의 전형적인 대조를 이룬 사례다. 젊은 가수가 똑같은 실수를 저질렀으나 여론은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었다. 사고후 대처능력이 판이하게 달랐던 탓이었다. 김상혁 소속사 관계자의 ‘젊은 친구가 술 한잔하고 실수했는데 왜이러는지 모르겠다.’라는 푸념섞인 멘트가 전파를 타자, 여론은 질타로 이어졌다. 이에 반해 송백경의 소속사는 대표가 직접 나서 발빠르게 공식성명을 통해 사죄했다. 소속사의 교육과 관리부재를 깊이 사죄하며, 향후 공식활동을 모두 중단하고 자숙의 시간을 갖겠다고 했다. 그 내용은 네티즌들로 하여금 동정의 여론을 들끓게 했다. 결국 여론을 미리 감지한 매니저의 말 한마디가 소속 가수의 생명력을 재생시키고 다시 대중의 품으로 복귀하는 단서가 된 것을 우리는 지켜보았다. 격앙된 감정을 추스르고 냉정을 되찾는 일은 자신을 아끼는 대중을 위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앞날이 걸려있는 일이기도 하다. 이 간단한 사실을 왜 망각하고 있는지 씁쓸할 따름이다.대중문화평론가
  • [사설] 일본에 역사공부 충고한 슈미트 전 총리

    헬무트 슈미트 전 서독 총리가 역사를 모르고, 망각하고, 심지어는 역사 왜곡을 일삼는 일본에 따끔한 충고를 가했다. 지난 5일 일본 아사히 신문에 게재된 인터뷰를 통해서다. 그는 아베 신조 총리를 거명하며 “일본 국민에게 자국이나 다른 나라의 역사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고 말해야 한다.”고 했다. 이어 “한자나 유교, 선종 같은 정신문화가 고대 중국에서 혹은 한반도를 통해서 일본에 전래됐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일본인이 적지 않다.”면서 “중국, 한국이 일본을 불신하는 뿌리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에 걸친 일본의 행동에 있다는 점을 배우지 않는 사람도 있다.”고 지적했다. 슈미트 전 총리는 일본을 수십차례 오간 독일 내 손꼽히는 지일파다. 여든일곱의 존경받는 노 정치가이자 역사비평가인 그는 일본의 오랜 친구이지만 일본에 반성을 충고하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2001년 도쿄 강연 때는 더 신랄했다.“독일은 피로 얼룩진 침략을 했다. 일본도 같은 침략국이다. 일본에서는 그것을 미화하는 역사교과서가 등장하는데 인간은 침략을 되풀이하지 않는다는 공통의 책임을 진다.”고 비판했다.‘새역사교과서를만드는모임’의 왜곡 교과서를 용인한 일본 정부와 망언을 해대는 일부 정치가의 맹성을 촉구한 것이다. 아베 총리는 저서 ‘아름다운 나라로’에서 일본의 식민지배와 침략역사에 대해 침묵하다시피 했다. 독일의 과거를 뼛속 깊이 뉘우치는 슈미트 전 총리의 진심 어린 충고를 아베 총리를 비롯한 일본인들이 겸허히 받아들였으면 한다.
  • [길섶에서] 불 꺼진 바둑판/우득정 논설위원

    지난봄 어느 새벽 고향의 누나로부터 전화가 왔다.‘집에 다녀간 지 1주일밖에 되지 않았는데’하는 생각과 동시에 순간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스친다. 누나는 “아버지가 사람을 전혀 알아보지 못한다.”며 연방 울먹인다. 다행스럽게도 아버지는 한달여에 걸친 입원 끝에 헝클어진 기억의 실타래가 조금이나마 제 위치를 찾기 시작했다. 그래도 매일 하는 안부전화를 하루라도 거르면 “요즘 막내에게서 통 전화가 없다.”고 푸념한단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급속도로 기억력이 감퇴되는 아버지를 보며 어떤 책에서 본 ‘불 꺼진 바둑판’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사람의 기억이라는 바둑판은 나이가 들면서 하나씩 불이 꺼지면서 그 부분은 망각의 늪으로 사라진다는 얘기다. 어머니와 관련된 60년의 기억들을 억지로 지우려다 보니 아버지 뇌 속의 바둑판이 한꺼번에 정전소동이 빚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는 1년이 넘도록 어머니 얘기를 단 한번도 꺼내지 않았다. 혹시 아버지는 자식들 몰래 어머니의 기억 회로에 불을 켜고 그때의 추억을 곱씹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득정 논설위원 djwootk@seoul.co.kr
  • [김형효 교수의 테마가 있는 철학산책] (48)공간과 시간

    [김형효 교수의 테마가 있는 철학산책] (48)공간과 시간

    외국 여행을 하다 보면, 공간과 시간에 따라 사람들의 팔자가 달라진다는 것을 역력히 체험한다. 무엇이 시간이고 공간일까? 인생살이에서 공간과 시간을 철학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한 두 사람의 철학자가 있다.18세기 독일의 칸트와 20세기의 하이데거다. 칸트는 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공간과 시간을 인생의 경험을 가능케 하는 선천적 조건으로서, 직관의 형식이라고 생각했다. 즉 공간과 시간은 다 인생의 모든 경험을 가능케 하는 제약으로서의 선천적 조건이라는 것이다. 즉 공간과 시간이 경험적인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감각적 경험을 가능케 하는 선천적 조건에 해당한다. 즉 공간의 지리적 조건과 시간의 역사적 조건은 경험적으로 형성된 관념이 아니라, 모든 경험적 관념이 그 조건 위에서 자란다는 것이다. 즉 시공이 없는 경험을 생각할 수 없다. 한국인은 한국인의 지리적, 역사적 조건을 떠나서 한국인의 경험이 생성될 수 없다. 모든 한국인의 사고방식의 기저에는 다 한국적 지리와 한국적 역사의 선천적 조건이 이미 스며들어와 있다. 대평원에서 자란 사람들의 경험과 산악지대에서 자란 사람들의 심리가 다르듯이, 남을 지배해 본 경험이 있는 나라의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나라의 사람들이 동질적인 문화를 향유할 수 없다. 또 칸트는 공간과 시간이 개념이 아니라 직관이라고 규명했다. 개념은 많은 다른 것들을 먼저 전제해서 그 다른 것들을 모아서 공통적인 의미를 추출해서 형성된 것이다. 이를테면 나무라는 개념은 소나무, 잣나무, 버드나무 등 여러 가지 나무들을 다 모아서 공통적인 요소를 뽑아 나무라는 개념을 만든 것이다. 그러나 공간과 시간은 다양한 공간과 시간들을 모아서 공통적 의미로서의 개념을 형성한 것이 아니고, 감각적으로 모든 공간과 시간이 이미 전체에서 무한대로 하나의 공간적 연속이고, 하나의 시간적 연장이라는 것을 단번에 깨닫게 된다는 점에서 직관이라는 것이다. 공간과 시간이 감성적으로 일견하여 알아보는 직관이되, 그것이 선천적으로 이미 인간의 경험의 장을 가능케 하는 주어진 터전과 같으므로 칸트는 공간과 시간을 감성의 선천적 직관의 형식이라고 불렀다. 즉 감성적 경험의 내용은 그 터전 아래서 이루어지는 생활의 질료와 같으므로 공간과 시간은 그 경험의 내용을 성립시켜 주는 선천적 형식과 같다는 것이다. 칸트가 말한 선천적(apriori)이라는 낱말의 뜻은 천부적이라는 것이 아니고, 대상적 경험보다 앞서는 형식적 조건이라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나 공간과 시간이 다 경험을 가능케 하는 감성적 직관의 형식(조건)이라 할지라도, 공간과 시간의 차이가 있다. 칸트는 공간의 조건을 외적 현상을 보는 형식이고, 시간은 내적 현상을 보는 형식이라고 구분했다. 공간은 의식의 감성적 측면의 외적 현상과 접촉하는 형식이고, 시간은 감성적 의식의 내면적 측면으로 의식내의 개념적 인식을 가능케 하는 오성의 현상과 만나는 형식을 말한다. 여기서 칸트의 인식이론을 더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좌우간 칸트의 인식이론은 세상을 어떻게 인간이 과학적 지식으로 인식하게 되는가를 알려주는 의식철학의 금자탑인 것은 사실이다. 칸트의 인식철학의 기본정신은 경험에서 출발하는데, 그 경험적 인식은 경험을 가능케 하는 선험적(先驗的=transcendental=경험에 앞서 그것을 논리적으로 정립시켜 주는) 인식의 형식적 조건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공간과 시간은 경험적으로 실재하지만, 그 실재는 사실상 과학적 지식을 가능케 하는 의식의 선천적 조건인 형식에 의하여 가능한 선천적 관념성과 다른 것이 아니다. 이 점을 잘 기억해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공간과 시간은 의식의 선천적 형식과 조건이 없으면 실재하지 않는다. 이런 시공에 대한 칸트의 의식철학이 하이데거에게 변용되어 전해진다. 공간과 시간을 의식의 선천적 직관 형식의 산물이라고 보는 칸트의 사상이 하이데거에게는 공간과 시간이 마음의 탈자성(脫自性=자기를 벗어나 바깥으로 향하는 본성)의 표현으로 변질되어 나타난다. 칸트의 의식이 하이데거에게 무의식적 마음으로 변용된다. 하이데거는 이미 의식의 철학자가 아니다. 그것은 하이데거가 칸트처럼 세상을 과학적 대상으로 읽고 있지 않음을 말한다. 하이데거의 무의식적 마음은 의식의 과학세계보다 더 깊이 내려간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해석된다. 하이데거는 그의 ‘존재와 시간’에서 현존재(Dasein=인간존재)로서의 마음의 본질을 관심(care)이라고 해명했다. 마음이 관심이라는 것인데, 그 관심은 불교적인 의미에서 연려심(緣慮心=인연을 맺으려는 생각)이나 능연심(能緣心=인연을 걸려는 마음)과 유사하다. 즉 마음은 계기만 있으면, 바깥으로 인연의 고리를 걸고 싶어하는 그런 탈자적 운동과 같다. 마음은 인연을 맺고 싶어하는 능연심이므로 우선 공간도 그 탈자적 능연심의 관심을 벗어나지 않는다. 하이데거는 마음의 능연심이 방향을 잡아 나가면서 거리를 좁히려는 관심과 욕망의 산물로서 공간을 해석했다. 좌·우라는 방향잡기도 먼저 좌우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방향을 잡으려 하는 관심의 결과에서 생기는 현상이다. 그리고 마음이 능연적 관심이기에 공간을 마음의 거리에서 가급적 좁히려는 생각이 일어난다. 그래서 거리를 좁혀 공간을 단축하려는 모든 과학기술의 탄생도 다 마음이 세상으로 나아가 공간을 좁히려는 인연의 결과다. 마음은 주관도 아니고 객관도 아니다. 마음은 세상으로 인연을 맺으려는 욕망이므로 하이데거는 마음을 주관과 객관의 사이에 해당한다고 읽었다. 마음은 주관적인 것도 아니고, 세상에 대한 모든 관심의 전체다. 그래서 마음이 가는 곳에 그 공간의 방향도 정해지고 공간의 거리도 마음과 가까이 맺어지기 위하여 공간의 거리가 단축된다. 그래서 능연심으로서의 마음이 세상으로서의 공간을 수놓는다. 시간도 마음의 관심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현존재로서의 마음은 자신의 관심을 끊임없이 앞으로 내보내면서 시간 속에 자기를 전개시켜 나간다. 즉 마음은 시간적으로 미래를 향하여 관심을 투사해 나가면서 늘 ‘아직∼아니다’(not∼yet)의 미완성과 ‘더 이상∼아니다’(not∼more)라는 죽음의 사이에서 살아간다. 인생의 미완성은 달이 초승달로서 보름달을 기다리는 것과 다르다. 초승달은 미완성이지만 이미 보름달의 완성을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과일의 죽음은 과일의 완전 성숙으로서의 종결을 말하지만, 인생의 죽음은 과일의 완성과 다르다. 인생은 마음의 존재에서 늘 시간적으로 가능성을 갖고 죽음을 향하여 달려가면서 살아간다. 이 가능성을 하이데거는 스스로 마음이 관심을 앞으로 던진다고 말한다. 미래를 향하여 앞으로 달려가되 마음은 자기의 미래적 기획기도가 과거의 습기가 주는 마음의 경향과 무관하지 않다고 느낀다. 미래적 모든 기획에 과거의 업의 무게가 작용하고 있음을 느낀다. 마음은 자기의 미래적 구상이 과거의 ‘습기의 경향성’(mood)과 무관하다고 보지 않는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마음의 관심인 능연심을 과거의 습기와 미래적 가능성의 사이에서 오가는 왕복운동을 한다고 본다. 이런 이중적 시간을 품고 있는 마음을 하이데거는 ‘던져진 기획’(thrown projection)이나 ‘사실적 기능성’(factual possibility)이란 용어와 같이 서로 상반된 의미를 한 단위로 엮어서 표현하고 있다. 시간은 절대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명사가 아니라, 마음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기 자신을 시간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마음이 자신을 스스로 시간화한다. 여기서 그래도 인생의 마음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미래적인 가능성의 시간이다. 하이데거는 여기서 마음의 본래적 관심의 시간성과 비본래적 관심의 시간성을 구분한다. 마음의 본래적 관심은 마음이 세속의 소유적 이익에 얽매이는 관심을 끊고 죽음이 마치 ‘나의 면전에 서 있는 것’(impending)처럼 마음이 죽음의 순간에 직면하는 마음가짐을 말한다. 그 순간에 마음은 모든 세속적 소유의 탐욕을 끊어버린 자세로 변하면서 마음이 우주적 존재일체와 상응하는 자세로 되돌아간다. 이 죽음 앞의 순간적 결단을 통하여 인간의 마음은 자신의 가장 본래적인 본성에로 되돌아간다고 하이데거는 진단한다. 하이데거가 말한 본성은 불교적 불성이기도 하고, 자연성이기도 하고, 신학적 의미에서 그리스도성이기도 하겠다. 본래적 본성으로 돌아가는 마음의 시간성을 그는 ‘순간’(moment of vision)이라고 불렀다. 이 순간을 불교식으로 옮기면, 돈오(頓悟)라고 불러도 괜찮겠다. 이 ‘돈오의 순간’은 마음이 자신의 유한성을 철저히 자각하는 것과 동시적이고 또 과거의 업으로서의 ‘흠’(indebtedness)에 대한 철저한 참회를 수반한다. 본래적 미래를 기도하는 마음만이 과거의 흠을 현재완료형으로 생생하게 느낀다. 이와는 반대로 하이데거는 비본래적 마음의 시간을 ‘현재화’(making present)라고 불렀다. 그런 현재화의 시간은 과거마저 망각하고 세속적으로 어떤 소유를 지금 기대하는 시간을 말한다. 현재화는 현재에 바라는 것을 미래에 기대하는 것(expecting)을 뜻한다. 비본래적 마음은 미래적 소유의 기대를 현재만들기(현재화)의 전부라고 보기에 현재를 자연히 모두 미래적 소유의 기대로서 채울 뿐이다. 그래서 그런 소유적 미래가 올 때까지 비본래적 마음은 늘 현재적 관심을 연장시키는 함닉의 타락된 시간을 보낸다. 이때에 타락된 시간은 도덕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존재론적인 각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마음이 본성의 존재를 찾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소유론적 일상의 이해관계만을 따진다. 현재화는 속물적 목적을 채우기 위한 기대의 시간이다. 오늘도 내일도 모래도 꼭 같다. 이런 인생의 시간을 꼭 도덕적으로 타락된 것이라 보기는 어렵다. 단지 존재를 망각하고 오직 소유에만 탐닉할 뿐이다. 하이데거가 생각한 시간성(temporality)은 현존재인 마음이 스스로 시간화(temporalizing)한 것이다. 시계의 시간, 달력의 요일 등도 다 마음의 시간화가 정한 부산물이다. 마음의 관심이 시간적으로 나타나기에 이 세상에 시간이 도입되었고, 공간도 마음의 친소감과 그 방향성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다. 칸트에게 경험적 인식의 형식적 조건인 시공성이 하이데거에 와서는 마음의 욕망-본래적이든 비본래적이든-을 나타내는 현상이 되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철학
  • 음성·변칙영업 근절책 미흡

    정부가 24일 발표한 사행성 게임장 경품제도 폐지와 사이버머니 환전업 금지를 골자로 하는 ‘사행성 게임 근절대책’은 성인 도박을 막기 위한 고육책의 성격이 짙다. 대책의 성패는 결국 얼마나 실효를 거두느냐에 달려 있다.●과연 실효를 거둘까 우선 사행성 게임을 단속하는 데는 일정한 효과를 거두겠지만 게임산업 전반의 위축을 불러올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 김명곤 문화관광부 장관은 “현재 태스크포스를 구성해 게임산업 진흥방안을 마련 중”이라며 “게임산업뿐 아니라 전반적인 콘텐츠 진흥방안을 함께 논의하고 있다.”고 고민의 일단을 내비쳤다. 또한 이번 정부의 사행성 게임 근절대책이 지나치게 규제 위주라는 지적도 만만찮다. 게임산업은 전체 문화콘텐츠산업 중에서도 특히 주목받는 신성장 동력산업임을 망각한 처사라는 것. 한 예로 한국의 온라인 게임은 지난해 5억 6500만달러의 수출실적을 기록, 세계 온라인게임시장의 25%를 차지하는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또 하나의 문제점은 기존 성인게임장이 당분간은 폐업이나 전업을 서두르겠지만 변칙적이고 음성적으로 변모할 가능성이다. 현재도 정부의 강력한 단속으로 전체 사행성 게임장의 84%,PC방의 98%가 문을 닫은 상태다. 그러나 성인도박장의 특성상 이들이 가정이나 스몰 카지노바 형태로 음성화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또한 상품권을 금지하더라도 유사상품권이나 귀금속, 인형 등 종전 형태대로 대가를 지급하는 전철이 되풀이될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이에 대해 정부는 검찰과 경찰, 지자체와 더불어 합동단속을 강화할 계획이나 240만명에 달하는 도박중독 인구가 과연 순순히 손을 뗄지는 미지수이다.●게임산업 자체는 육성해야 또한 상품권 업자들의 도산여부도 관심거리이다. 이에 대해 서울보증보험은 지난 7월 ‘바다이야기’ 사건이 터진 이후 상품권 발행한도를 지속적으로 낮춰왔기 때문에 재정적인 어려움에 처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상품권 발행한도를 7월 9600억원에서 11월 3900억원으로 계속 줄여왔고, 내년 4월이면 한도를 ‘0’으로 맞추게 된다는 것. 또한 서울보증보험은 발행업자들을 상대로 담보를 설정해 업자들이 고의부도를 내도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번 근절대책에는 베팅이나 배당을 내용으로 하는 ‘사행성’ 게임물에 대해 게임물등급위원회에서 등급분류를 거부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이 포함돼 있다. 이에 따라 사이버머니를 현금으로 환전하는, 보드게임 사이트들에 대한 규제 가능성도 대두되고 있다. 문제는 과연 어느 선까지를 도박으로 보느냐 하는 것이다. 도박 여부에 따라 규제대상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아이템 거래에 대해서도 이를 전면 금지할지, 법의 테두리 내에서 허용할지 하루빨리 결론을 내려야 한다. 김기만 게임물등급위원회 위원장은 “현재 법적 테두리 밖에 있는 아이템 거래문제에 대해 업계 의견을 수렴 중”이라며 조만간 입장을 발표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규제를 통해 건전한 게임산업을 육성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만큼, 정부는 이제 구체적인 진흥방안을 마련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됐다.김종면 이종락기자 jmkim@seoul.co.kr
  • [김종면 기자의 시사 고사성어] 負重致遠 부중치원

    유비의 모사(謀士) 중에 방통(龐統)이라는 사람이 있다. 봉추(鳳雛), 즉 봉황의 새끼라 불릴 만큼 지략이 뛰어나 제갈공명과 쌍벽을 이룬 인물이다. 방통이 어느 날 자신의 친구인 오나라의 대도독 주유가 병으로 죽자 조문을 갔다. 방통이 오나라에 당도하자 육적과 고소, 전종 등 지역의 명사들이 그를 찾았다. 문상이 끝나자 방통을 위한 환송연이 마련됐고, 방통은 이 자리에서 참석자들에 대한 인물평을 했다. 육적이 잘 달리는 말과 같은 인재라면, 고소는 힘든 일을 이겨내며 일하는 소와 같다. 전종은 지혜는 좀 떨어지지만 역시 당대의 인재다. 이 말을 듣던 사람이 방통에게 물었다.“그렇다면 육적의 재능이 고소를 능가한다는 말입니까.” 방통은 이렇게 대답했다.“말은 민첩하여 빨리 달릴 수 있지만 한 사람밖에 태우지 못합니다. 그러나 소는 하루에 삼백리를 갈 수 있지요. 뿐만 아니라 짊어진 짐의 무게가 어찌 한 사람 몸무게밖에 되지 않겠습니까.” ‘삼국지-촉서 방통전’에 실린 고사다. 부중치원(負重致遠)이라는 말은 바로 방통의 이야기에서 나왔다. 중요한 직책을 맡은 것을 가리키는 성어다. 이재정 통일부 장관 내정자가 내정 꼬리표를 떼기도 전에 “부시 행정부는 북한의 체제 붕괴를 유도하는 정책을 포기해야 한다.”는 어설픈 대미 훈수로 구설수에 올랐다. 미국이 공언해온 대북정책이 ‘체제붕괴’가 아니라 ‘체제변환 유도’라는 점을 망각한 발언이라는 것이다. 명실상부한 북한 전문가조차 벅찬 통일부 수장 자리에 내정된 그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소처럼 부중치원할 수 있기를 바란다. jmkim@seoul.co.kr
  • [세이프 코리아] (끝) 특별 좌담회

    [세이프 코리아] (끝) 특별 좌담회

    “내년은 재해·재난 발생의 최대 위기이자 기회가 될 것이다.” 서울신문과 소방방재청이 최근 공동으로 주최한 ‘세이프 코리아-안전한 나라를 만듭시다’ 특별좌담회에서 문원경 소방방재청장, 조원철 연세대 토목환경공학부 교수, 김찬오 서울산업대 안전공학과 교수, 이재복 강원대 소방방재학부 교수 등 참석자들은 이같이 입을 모았다. 서울신문 조덕현 차장 사회로 진행된 좌담회에서 참석자들은 소방방재청 개청의 성과와 문제점, 자연재해 및 인위재난을 최소화하기 위한 전망과 과제 등에 대해 열띤 토론도 벌였다. 이로써 안전문화 확산을 위해 지난 1월1일부터 연재한 연중기획 시리즈는 특별좌담회를 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하지만 서울신문과 소방방재청은 앞으로도 안전문화 확산 캠페인을 지속적으로 펼쳐나갈 계획이다. ■ 전망 - 기상이변 날로 심해져 발생빈도·강도 증가세 ●문 청장 올해는 장마가 길었고, 장마 기간에 태풍도 왔다. 하지만 피해규모는 줄었다. 하늘이 도운 것이 아니고, 노력한 성과다. 재해·재난관리는 리스크를 줄이는 게임이다. 다만 한 해 결과만으로 평가하기는 무리다. ●조 교수 동의한다. 통계적으로 우리나라 자연재해는 4.5년을 주기로 반복하는 경향이 짙다. 지난해가 재해·재난 발생이 가장 적었으며, 올해는 발생 빈도와 피해 규모가 늘어나는 주기의 첫 해였다. 내년은 피크가 될 것이다. ●김 교수 기상이변이 심해지면서 기존 피해패턴을 따라가지 않고, 빈도와 강도 모두 상승하고 있다. 피해를 완벽하게 막을 수 없다. 하지만 재해를 예측하고 대비하는 노력을 기울인다면 최소화할 수는 있다. 방재도 과학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교수 응급대처 능력과 체계는 잘 갖춰져 있다고 본다. 이제는 방재분야에서도 연구개발(R&D)에 대한 투자를 늘려야 한다. ●조 교수 재해·재난 현장에 가면 모두가 전문가다. 보편화되지 않은, 정리되지 않은 전문성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현장에 대한 통제·관리 시스템을 보다 체계화해야 한다. 언론의 지적대로라면 재해·재난 복구 과정에서 제대로 하면 ‘늑장 행정’, 빨리 하면 ‘날림 공사’다. 응급복구 상태에서는 재해·재난이 반복해서 발생할 수 있고, 개량복구(항구복구)를 위해서는 시간과 예산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이 교수 올해 강원도는 강한 바람과 너울성 파도로 해안 피해가 컸다. 예전에는 소규모 항구가 많이 필요했을지 모르나,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항구가 생기면 물길이 달라져 해안 침식을 유발한다. 침식을 방지하기 위한 콘크리트 구조물은 연안류의 속도를 증가시키고, 생태계를 파괴하는 원인이 된다. 강릉 경포대가 대표적인 사례다. 반면 소나무숲이 피해를 걸러준 양양의 경우 백사장이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 항구를 집중화해 해안 피해를 줄이는 방안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 피해 최소화에 식물을 활용하는 등 근본적인 대책도 마련해야 한다. ■ 과제 - 항구의 집중화등 통해 해안 피해 최소화 절실 ●김 교수 우리나라의 안전불감증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국민 안전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사건이 발생해도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관심조차 없는 ‘조기 망각’ 현상이 나타난다. 국민들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안전문화가 형성되려면 교육이 뒷받침돼야 하나, 제대로 된 교육시스템이 없는 실정이다. ●조 교수 우리나라의 케치프레이즈는 ‘다이내믹 코리아’이다. 국민들이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기도 한다. 이같은 역동성의 그림자는 불안정성이며, 불안정성은 안전불감증을 낳는다. 교육대학 교과과정에 안전교육을 의무화하고, 군대에서도 안전문화 체험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안전문화 확산을 위한 안전평가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이 교수 안전불감증을 우리 국민들의 특성으로 간주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오히려 경제성장 과정에서 안전문제를 소외시켜오면서 누적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문 청장 안전문화 확산을 위해 한국재난안전네트워크 형성을 지원하고 있지만, 이벤트성 행사에 그치고 있다. 수백만명에 이르는 회원들이 체계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마련할 것이다. 국민들에게 안전문제를 자율적으로 맡길 수도 있지만, 교육이나 인센티브·페널티제도를 통해 학습효과를 높이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확생들의 사회봉사활동에 안전체험도 포함시켜야 한다. ●사회 곳곳에 위험물이 방치돼 있다. 우리나라 안전지수를 5점 만점으로 평가한다면. ●조 교수 보행권 확보가 가장 큰 문제다. 입간판과 간이매점, 노상변압기 등은 엄청난 문제를 안고 있다. 불법시설물이 많은 상태에서 안전확보는 요원할 수밖에 없다. 안전에 대한 희망은 4점, 실천은 2점 정도다. ●김 교수 1.5점이다. ●이 교수 2.5점이다. ●문 청장 시설만으로 안전을 평가하기는 어렵다. 부실공사나 대형사고는 대폭 줄었다. 적어도 안전관리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다는 것만은 틀림없다. 이제는 체계적으로 어떻게 잘 관리하느냐가 중요하다. ●김 교수 인위재난은 다양한 보험과 연계된 반면, 자연재해에 대비한 풍수해보험은 도입 단계다. 풍수해보험을 활성화하려면 정부 주관으로 보험을 운영한 뒤 안정되면 민영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피해보상 차원을 넘어 국민들의 생존권 보장 취지에서 특별재난지역은 의미가 있다. ●조 교수 특별재난지역의 ‘특별’은 사행심을 조장할 수 있다. 정부 지원이 달라진다면 형평성의 문제가 심각할 수 있다. 국민 입장에서 보면 똑같은 피해다. 특별재난지역을 사후에 지정하는 것보다, 예상지역을 대상으로 사전에 선포하는 것이 나을 수 있다. 예방 활동을 통해 국민들의 경각심을 키울 수 있어야 한다. ●문 청장 올해 풍수해보험 가입자가 9800원만 내고 1500만원의 보상을 받기도 했다. 민간보험회사는 수익성이 떨어져 풍수해보험을 적극적으로 판매하기 어려운 만큼 행정에서 보완할 것이다. 현재 재해·재난 발생 이전에는 재난사태 선포제도를, 이후에는 (특별)재난지역 지정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이 교수 재난관리 전문인력을 양성해야 한다. 대학에 관련 교육과정이 우후죽순처럼 늘었지만, 맞춤형 인재양성은 미흡하다. 소방산업은 중소기업 위주여서 기술개발이나 국제경쟁력에서 뒤지고 있다. 방재산업을 국가전략산업으로 육성하고,IT 기술과 접목하면 ‘블루오션’이 될 수 있다. ●조 교수 소방관련법만 무려 122개다. 아무리 우수한 방재·소방장비도 법령에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방재안전 분야는 통합기술이 적용되는 만큼 법령 정비도 시급하다. 방재·안전관리는 국민 복지, 국가 안보의 초석인 만큼 위상과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 ●문 청장 우리가 장점을 지닌 IT분야와 방재분야를 접목시켜 국가전략산업으로 발전시킬 경우 안전산업의 새로운 시장을 개척할 수 있을 것이다. 환경변화에 대응하려면 과학방재가 필요하다. ■ 성과 - 소방방재청 개청 2돌 피해줄어 ‘절반의 성공’ ●문 청장 지난 7월 태풍 ‘에위니아’와 집중호우로 62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이와 비슷한 규모의 1987년 태풍 ‘셀마’와 2002년 태풍 ‘루사’의 인명피해 178명,246명에 비해 대폭 줄었다. 재산피해도 감소하고 있다.2004년 6월 소방방재청 개청의 성과다. 모든 문제를 해결한 것은 아니지만, 독립된 재해·재난관리기관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재난관리 통합행정시스템에는 미흡한 점이 있고, 사후복구가 아닌 사전예방 체계도 보완해야 한다. 지진해일 등 비정형적 재해·재난 대응체계를 갖추고, 안전의식도 높여야 하는 과제도 남아 있다. ●조 교수 국가 안보의 관점에서 국방·외교가 저만치 있다면, 방재·안전은 국민들 코앞에 있는 문제다. 독립적으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소방방재청을 설립한 것은 긍정적이다. 다만 기능적으로 통합행정을 실현하고 있다고 보기에는 이르다. 앞으로 방재업무는 복구중심에서 예방중심으로 옮겨가야 하며, 이는 경제성 분석이 전제돼야 한다. 예컨대 1000억원을 들여 7000억원의 피해를 4000억원으로 줄였다면 2000억원 이익이 났다는 식으로 인식을 전환해야 한다. ●김 교수 예산과 인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지방재난관리조직 확충 등 많은 일을 했다. 재해·재난관리업무가 범국가적 사무로 인식되는 계기도 마련했다. 그러나 사후관리가 통합적으로 이뤄지는 반면 사전관리는 개별·산발적으로 이뤄지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사전대비가 부족할 경우 같은 유형의 재난이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등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어렵다. 소방방재청이 사전·사후관리를 총괄조정할 수 있도록 제도적인 뒷받침이 돼야 한다. ●이 교수 소방방재청 개청으로 국가재난관리업무가 체계화됐지만, 아직 지방자치단체 등 하부 조직의 경우 혼선이 빚어지기도 한다. 정리 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 儒林(737)-제6부 理氣互發說 제3장 君子有終(18)

    儒林(737)-제6부 理氣互發說 제3장 君子有終(18)

    제6부 理氣互發說 제3장 君子有終(18) 꿈에서 깨어났지만 그 내용이 너무나 선연하여 두향은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꿈속에서 치마폭을 벌리고 받은 그 큰 별이 아직도 몸 위에 감촉으로 살아있는 듯하였다. 무슨 꿈인가. 두향은 누운 자세 그대로 꼼짝도 않고 생각하였다. 캄캄한 어둠 속을 맨발로 달려가고 밤하늘에서 별똥별이 흐르고 그 유성을 받으려고 애를 쓰다가 결국 제자리만 맴돌 뿐, 꿈에서 깨어나는 악몽은 지금까지 습관적으로 꾸던 꿈의 내용이었다. 그런데 어이된 일인가. 이번에는 내가 떨어지는 별을 두손으로 받았다. 치마폭을 벌려 그 별을 분명히 받았으며 행여 그 별이 튕겨져 나갈까 치마폭을 감싸 쥐고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땅을 뒹굴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두향은 숨죽여 생각하였다. 언제나 생각하고 있었듯 하늘에서 유성이 흐른다면 지상에서는 큰 인물이 죽는다는 징조가 아닐 것인가. 꿈속에서 보았듯 감히 쳐다볼 수 없을 만큼 찬연한 광채를 뿜어대고 있는 별이야말로 단 한사람, 나으리를 가리키고 있음이 아닐 것인가. 그 큰 별이 그런데 어째서 내가 달려가지도 않았는데 제 스스로 내게로 다가와 떨어져 두손으로 치마폭을 벌리자 내 몸속으로 흘러들어왔는가. 아아, 그렇다면. 순간 두향은 소스라쳐 놀라며 몸을 일으켜 앉았다. 바로 지금 이 순간 나으리께서는 연세하신 것이 아닐까. 이승을 떠나면서 나으리께서는 내게 마지막으로 기별을 전해오신 것이 아닐 것인가. 나으리께서는 그 옛날 헤어질 무렵 치마폭에 써주셨던 ‘죽어 이별은 소리조차 나오지 않고 살아 이별은 슬프기 그지없더라.’라는 정표의 내용 그대로 이제 소리 없는 죽음으로 이별하게 되었으니, 나으리께오서는 꿈속에서 큰 별로 나타나 두향의 치마폭을 향해 떨어짐으로써 자신의 죽음을 알려 오신 것이 아닐 것인가. 두향은 방문을 열었다. 동지섣달이라 하더라도 아직 유시였으므로 땅거미가 내리지 않은 어둑 저녁이었다. 그새 잠깐 낮잠이 든 모양이었다. 하늘에서는 눈이 펄펄 내리고 있었다. 낮잠을 자는 짧은 순간에 함박눈이 내려 어느덧 설편(雪片)은 온누리를 뒤덮고 있었다. 사방은 소리 하나 없고, 산야는 다같이 깊은 망각 속에 갇혀서 아득한 정적 속에 잠겨 있었다. 강물은 지난 며칠 새의 엄동으로 꽝꽝 얼어붙어 있었으나 그 위로 내리는 꿈과 같은 눈발은 난분분 난분분 서로 엉겨 붙어 춤추면서 내려오다 지치고 피로해 한 빛에 만가지 모양을 하고 지붕과 나무, 뜨락이며 장독대 위를 한결같은 손길로 어루만지고 있었다.
  • 중국 현대미술 대표주자 만나볼까

    중국 현대미술의 명실상부한 대표주자인 장샤오강이 서울에 왔다.1일부터 서울 인사동 갤러리 아트싸이드에서 열리고 있는 그의 한국 첫 개인전을 보기 위해서다. 장샤오강은 중국 현대미술의 사조로 일컬어지는 `정치적 팝´이나 `냉소적 사실주의´ 노선과 달리 중국의 정서를 반영하는 독자적 회화세계를 구축함으로써 세계 미술계로부터 각광을 받아왔다.그의 `대가족 시리즈´ 작품이 얼마 전 영국 크리스티 경매에서 13억 8000만원에 거래된 것을 비롯, 최근 유명 경매에서 장샤오강 작품은 10억원대를 훌쩍 넘어선다.1993년부터 작업해온 `대가족´ `혈연´ 시리즈나 이번에 선보이는 `망각과 기억´ 시리즈는 개혁 개방 전 `중국다운 것´에 대한 향수가 강하게 묻어 있다. 작가는 “세계화와 맞물려 먹는 것, 입는 것 등 일상의 모든 것에서 차이가 사라지고 있다. 그래선지 예전의 기억이 갈수록 소중하게 여겨진다.”고 말한다. 그만의 스타일로 왜곡된 작품 속 인물들은 딱딱한 자세와 무표정하고 공허한 표정을 하고 있다. 하지만 눈빛만은 깊고 또렷하며 때로는 감정이 극에 달한 듯 눈물을 머금고 보는 이들에게 소리없는 울림을 자아낸다. 책과 필기구, 백열전구 등 그가 예전에 사용했던 물건들을 등장시킴으로써 이미 사라진 기억을 살려내기도 한다. 그는 “지금까지 베이징 등 4개 도시에서 주로 생활했다. 한데 어딜 가도 예전 길을 찾을 수 없다.”고 아쉬워한다. 또 이런 현실과 기억 중 어느 것이 더 진실한 것인지, 이같은 급변이 과연 진보인지 소멸인지 분간이 안 된다고 혼란스러움을 토로한다.아랫도리는 어린아이의 `고추´를 드러내고 있지만, 위쪽은 부모가 기대하는 어른 복장을 한 인물을 담은 작품 `기억과 망각의 일주일´은 이같은 작가의 심리를 잘 드러낸다. 이번 전시에선 올해 제작한 대형 신작 유화 4점을 포함해 유화 13점과 판화 15점을 선보인다.20일까지.(02)725-1020.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씨줄날줄] ‘11월 3일’의 부활/염주영 논설실장

    1929년 11월3일은 메이지(明治) 일왕의 생일이자 개천절이었다. 명치절 행사에 강제 소집된 광주고보생들은 신사참배를 집단거부했다. 이 일로 일본인 학생이 광주고보생 한 명을 칼로 찌르며 시비가 일었다. 일본경찰은 광주고보생들만을 일방적으로 가해자로 몰아 해산시켰다. 이를 계기로 식민지 교육의 참담한 현실에서 쌓인 분노가 일시에 폭발했다. 광주고보와 광주농업학교의 비밀 학생조직인 성진회와 광주여고보의 소녀회, 광주지역 독서회 등 수천명의 학생이 거리시위에 나서 ‘한국인 본위의 교육 실시’와 ‘식민지 노예교육 철폐’ 등을 외쳤다. 광주학생들의 항일시위는 순식간에 전국과 만주·중국·일본으로 파급됐다. 구호도 ‘약소민족 해방 만세’와 ‘제국주의 타도 만세’로 바뀌면서 점차 전국 단위의 학생독립운동으로 확산됐다.2년간 212개 학교에서 5만 4000여명이 궐기에 참여했으며,1460명이 검거됐다. 때때로 자랑스러운 역사가 정치적 이유 등으로 망각 속에 버려지기도 한다.‘11월3일’이 바로 그런 경우다. 일제치하에 묻어둘 수밖에 없었던 이날의 역사는 정부수립 5년뒤에야 ‘학생의 날’이란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다. 당시 우익 이승만정부하에서 이 운동이 지닌 민족주의적 성격은 이념장벽을 넘지 못했다. 엄연한 ‘학생독립운동’이 성격이 애매한 ‘학생의 날’로 격하되었다. 군사독재정권은 유신 이듬해인 1973년 이마저도 국가기념일에서 제외시켰다. 독재정권에 ‘학생’과 ‘운동’은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1929년 11월3일의 거사가 77년만에 제 이름을 찾아 부활한다. 정부는 이날을 ‘학생독립운동 기념일’로 제정해 다채로운 기념행사를 갖는다.3일 오전 10시 교육부총리 주관으로 서울 유관순기념관에서 기념식이 개최된다.2일에는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학생독립운동기념일제정추진위원회가 주관하는 전야(前夜) 연회도 열렸다. 그러나 행사만으로 역사가 부활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 이 일은 교육부가 할 일이다. 자신이 나라를 사랑하려면 나라의 역사를 배우고, 남이 나라를 사랑하게 하려면 나라의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 염주영 논설실장 yeomjs@seoul.co.kr
  • [한종태 정치전문기자의 정가 In&Out] 천정배의 ‘허언(虛言)’

    [한종태 정치전문기자의 정가 In&Out] 천정배의 ‘허언(虛言)’

    열린우리당이 너무 시끄럽다. 국정운영을 책임진 집권여당으로서의 책무는 망각한 채 정계개편 소용돌이의 한 복판에 서 있다. 민주당과의 통합을 염두에 둔 ‘통합신당론’과 도로 민주당은 안된다는 ‘재창당론’으로 나뉘어 친노(盧) 그룹과 반노·비노 그룹간의 첨예한 세대결 양상이 펼쳐지고 있는 형국이다. 한마디로 당 해체냐, 당 사수냐의 선택이다. 당청 갈등도 위험 수위를 오락가락한다. 급기야 김한길 원내대표는 노무현 대통령이 현실정치에서 손을 떼줄 것을 요구하는 ‘하극상’의 모습까지 연출했다. 이처럼 당내 갈등 국면이 심화된 데는 대권 예비주자인 천정배 의원의 지난달 29일 발언을 빼놓을 수 없다. 주지하다시피 천 의원은 2003년 열린우리당을 창당할 때 주춧돌 역할을 한 ‘천·신·정’ 트리오의 한 명이다. 개혁 성향이 돋보인다 해서 원내 제1당의 원내대표로 선출됐고 노 대통령 밑에서 법무부 장관까지 지냈다. 더욱이 그는 노 대통령이 2002년 대통령후보 경선의 깃발을 들었을 때 이를 지지한 유일한 현역 의원이었다. 우리당이 출범하기 전 민주당 신·구주류간 갈등이 치열할 때는 노 대통령의 뜻을 가장 충실히 실천한 ‘향도’역이란 얘기도 들었다. 그만큼 노 대통령과 천 의원은 동지적 관계였다. 당시 천 의원은 미국의 공화당이나 민주당, 영국의 노동당이나 보수당처럼 100년 이상 지속하는 정당을 만들겠다고 장담한 것으로 기억한다. 그는 특히 지역주의 극복과 아래로부터의 공천을 골자로 한 정당 개혁을 반드시 실천하겠다고 누누이 강조했었다. 비스름한 시기에 이광재 청와대 상황실장의 경질을 주장하면서는 “노무현 정부는 수십년, 아니 수백년간 민초들이 피흘리고 싸우고 희생해서 가까스로 만든 정부”라고 했던 천 의원이다. 그런 그가 당의 간판을 내리는데 앞장서고 있다. 통합신당 논의를 공식 제안한 지난달 29일 기자회견을 통해서다. 그 많은 명분을 국민들에게 제시하며 산고 끝에 당을 만들어 놓고 3년도 채 안된 시점에서 사실상 당을 해체하는 쪽에 섰으니 국민들은 어리둥절할 뿐이다. 그것도 3년 전 낯 뜨거울 정도의 난투극 끝에 이혼한 민주당과 재결합을 추진하고 있으니 말이다. 정치 도의적 측면에서 한번쯤은 당의 간판으로 대선이나 총선을 치러야 하지 않느냐는 반론도 적지 않다. 천 의원은 그 전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목포 방문행사에도 참석했다. 대권까지 노리는 그로선 호남이란 전략적 요충지를 버릴 수 없는 현실 때문이었으리라. 하지만 이런 것들은 포말 정당의 주역이었음을 자기고백하는 것에 진배 없다.100년 정당을 만들겠다고 큰소리쳐 놓고는 어떤 이유에서 3년 만에 간판을 내리겠다고 하는지 천 의원은 대국민 속죄록부터 써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정치사의 망령인 지역주의 복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물론 이렇게까지 이른 데는 노 대통령의 잘못이 크다. 국민들의 커다란 실망감과 경제적 낭패감은 상상 이상이다. 그럼에도 오로지 대선과 총선을 겨냥한 이합집산은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더구나 지금은 북핵 실험으로 남남갈등 양상마저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국민이 납득할 만한 명분과 원칙, 이념적 좌표는 갈수록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정치는 결국 정도(正道)로 가야 훗날 훌륭한 평가를 받게 된다. jtha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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