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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꽂이]

    ●100권의 금서(니컬러스 캐럴리드스 등 지음, 손희승 옮김, 예담 펴냄) 서양문명에서 대표적인 서적 검열의 역사는 가톨릭 교회의 ‘금서목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1559년 교황 파울루스 4세가 처음 펴낸 후 42번째 목록까지 총 4126권을 수록한 교황청 ‘금서목록’은 1966년 로마 교황청이 이를 폐지할 때까지 400여년간 가톨릭 교도를 구속하는 역할을 했다. 그중엔 베르그송, 데카르트, 칸트 등 서양을 대표하는 지성들이 쓴 고전도 포함돼 있다.1928년 독일에서 발간된 레마르크의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국가사회주의자들이 내세우는 조국과 민족의 이상을 훼손했다는 이유로 시민 4만명이 보는 앞에서 화형식에 처해졌다.2만 2000원.●페이비언 사회주의(조지 버나드 쇼 등 지음, 고세훈 옮김, 아카넷 펴냄) 페이비언(Fabian)이란 말은 로마 장군 파비우스(Fabius)에서 유래됐다. 그 자체가 일반명사이기도 한 이 말은 라틴어로 ‘지연자’라는 뜻. 파비우스는 한니발이 이끄는 카르타고와의 전쟁에서 적당한 때가 올 때까지 참을성있게 기다리되, 일단 때가 되면 사정없이 내리치는 전법을 구사했다. 이에 주목해 버나드 쇼를 비롯한 잉글랜드 일부 지식인들이 1884년 ‘페이비언 협회’를 창립했다. 페이비언주의는 철저한 합리주의와 ‘점진성의 불가피성’을 이념적 목표로 삼는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 점진적으로, 그러나 기회가 오면 그것을 놓치지 않고 달성하겠다는 것이다.2만 2000원.●조르조 바사리-메디치가의 연출가 (롤랑 르 몰레 지음, 임호경 옮김, 미메시스 펴냄) 16세기 이탈리아 미술의 개화기를 이끈 조르조 바사리(1511∼1574)의 삶과 예술을 조명.‘르네상스’와 ‘고딕’이라는 표현을 처음 사용한 것으로도 잘 알려진 그는 피렌체 두오모 대성당의 천장 프레스코화, 베키오 궁의 벽화를 그렸으며 바사리 화랑, 우피치 궁을 설계한 건축가였다. 또한 코시모 1세가 군림하던 피렌체 공국의 문화·예술사업들 주도한 유능한 행정가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치마부에,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등 르네상스시대 거장들의 일생을 기록한 세계 최초의 본격 미술사책 ‘미술가 열전’의 저자로 유명하다.2만 8000원.●플루타르코스 영웅전-그리스를 만든 영웅들(플루타르코스 지음, 천병희 옮김, 숲 펴냄) 플루타르코스는 그리스 중동부 출신으로 말년 30년간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서 사제노릇을 하며 로마의 명사들과 교우했다. 플루타르코스는 트라이야누스 황제 때 두번 집정관을 지낸 소시우스에게 ‘비교열전’을 헌정했다. 이 책이 바로 오늘날 ‘영웅전’으로 불리는 책이다. 그리스 문학이 쇠퇴기에 접어들 시기에 탄생한 ‘영웅전’은 23쌍의 그리스 영웅들과 로마 영웅들의 전기를 다룬다.1만 5000원.
  • 김홍도 ‘행려풍속도’ 6폭 병풍 경매

    해외에 소장되어 있어 그동안 사진으로만 볼 수 있었던 단원 김홍도의 ‘행려풍속도’ 6폭 병풍이 경매를 통해 국내에 처음 공개된다. 미술품 전문 경매회사인 서울옥션은 오는 26일 진행되는 제101회 경매에서 김홍도의 6폭짜리 ‘행려풍속도 6첩병’(연도미상)이 경매된다고 21일 밝혔다. 비단에 수묵으로 그린 이 작품은 단원 말년의 원숙한 필치가 돋보이며, 밭갈이, 낚시질, 나룻배, 양반가, 나그네, 모내기 등 여섯 장면을 담고 있다. 경매 시작가는 12억원으로, 지난 2월23일 서울옥션 100회 경매에서 16억 2000만원에 낙찰된 ‘철화백자운룡문호’의 국내 경매사상 최고가 기록을 경신할지 주목된다. 이번 경매에는 단원 작품을 포함해 고미술품 123점, 근현대 미술품 66점, 해외미술품 24점 등 총 213점의 작품이 출품된다.26일까지 서울 평창동 옥션하우스에서 전시된다.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영화처럼 살다 간 ‘한국영화 큰 별’

    영화처럼 살다 간 ‘한국영화 큰 별’

    11일 80세의 일기로 타계한 신상옥 감독의 삶은 그가 남긴 75편의 영화 만큼이나 극적이었다. 작품성과 흥행성을 고루 갖춘 작품들을 꾸준히 발표하며 한국영화계를 이끈 그는 톱배우 최은희씨와의 결혼, 납북과 탈북 등 한편의 드라마 같은 삶을 살았다. 전후 혼란기의 열악한 제작환경에서도 감독은 다양한 스펙트럼의 작품세계를 일궈냈다. 김광주 원작 ‘양공주’를 영화화한 데뷔작 ‘악야’를 통해 추악한 현실을 고발했던 감독은 이후 문학작품을 바탕으로 한 ‘무영탑’(1957) ‘동심초’(1959)에서부터 ‘돌아온 사나이’‘로맨스 빠빠’(1960) 등 대중성과 사회성을 겸비한 작품들을 발표했다. 1953년 영화계 간판스타였던 최은희씨와의 결혼으로 그는 대중의 집중적 관심을 받았다.‘성춘향’‘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연산군’ 등 민족정서가 깃든 작품들로 해외에서 주목받으며 감독으로서의 최고 전성기를 구가했던 시기는 1960년대.‘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는 당시 드물게 일본과 베니스국제영화제에 소개되기도 했다. 영화제작 시스템의 기초를 다진 주역으로도 그는 한국영화사의 한 페이지를 메운다.1963년 안양촬영소를 인수해 66년 당시 국내 최대 영화사인 신필름을 설립,1970년까지 운영하며 숱한 작품들을 쏟아냈다. 그러나 감독으로서의 운명은 더이상 순탄치 않았다.1978년 최은희씨가 홍콩에서 납북된 뒤 그 역시 6개월만에 납북돼 86년 탈북하기까지 8년여를 북한에 억류됐다. 그의 영화 마니아로 알려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정치적 목적으로 강제납북된 감독은 그곳에서 김 위원장의 전폭적 지원으로 신필름영화촬영소를 운영하며 ‘돌아오지 않는 밀사’(1984)‘소금’‘불가사리’‘심청전’(1985) 등을 제작했다.‘소금’으로 최은희씨는 모스크바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돌아오지 않는 밀사’로 신 감독은 체코 카를로비바리영화제 감독상을 각각 받기도 했다. 그의 영화열정은 탈북 이후 2001년까지 미국에 머무는 동안에도 변함없었다.KAL기 폭파사건을 그린 ‘마유미’(1990),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실종사건을 다룬 ‘증발’(1994) 등을 발표했다.2002년 치매노인 문제를 다룬 신구 주연의 ‘겨울이야기’를 75번째 작품으로 찍었으나, 미공개 유작으로 남았다. 2003년 안양신필름영화아카데미를 설립하고 동아방송대 석좌교수로 재직하는 등 말년에도 후배양성과 한국영화 발전에 변함없는 애정을 쏟았다.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26년 함경북도 청진 출생 ●45년 일본 도쿄 미술전문학교 졸업 ●51년 영화예술협회 설립 ●52년 영화 ‘악야(惡夜)´로 감독 데뷔 ●53년 최은희씨와 결혼 ●55∼76년 ‘춘희´ ‘로맨스 빠빠´ ‘성춘향´ ‘연산군´ 등 수십편의 영화 감독 및 제작. 대종상, 아시아영화제, 스테즈영화제(스페인) 등에서 수상 ●78년 최은희씨와 함께 납북. 북한에서 ‘탈출기´ ‘돌아오지 않는 밀사´ ‘불가사리´ 등 제작 ●86년 탈북 ●94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 ●2000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심사위원장 ●2002년 프랑스 도빌아시아영화제 심사위원장 ●2003년 안양 신필름 아카데미 이사장 ●2004년 동아방송대 석좌교수
  • 하버드대 노인병 전문의의 ‘우아하게 늙는 법’

    ‘구차한 생명연장 장치보다는 가족과의 시간을 늘려라.’ 미국 하버드대 노인병 전문의인 뮤리엘 R 질릭(54)의 고언(苦言)이다. 뉴스위크 10일자는 ‘늙음에의 거부’를 출간한 질릭 교수와의 인터뷰를 통해 ‘우아하게 늙는 법’을 소개했다. 박정경기자 olive@seoul.co.kr ■ 1 노화를 부정하지 마라 질릭 교수는 먼저 늙음을 부자연스럽게 여기는 생각부터 바꾸라고 조언한다. 노화나 죽음을 부정하거나 피하지 말고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자는 것. 성형을 하거나 부질없는 치료에 매달려 헛돈을 쓰기보다 운동과 사교생활에 정력을 쏟는 게 의미있다고 말한다. 가령 50세에 전립선암 검사를 받는 것은 합리적이지만 85세에는 ‘난센스’다. 전립선암에 걸려 숨지기 전에 다른 일로 숨질 확률이 높다. 또 그 나이에 전립선암 수술은 성불능이나 요실금이란 비참한 말로를 안겨줄 수 있다. ■ 2 남은시간 원하는일 하라 노년에는 골다공증을 예방하거나 치료하는 것에 자원을 집중할 필요가 있다. 낙상을 조심하고 엉덩이 골절에 주의해야 한다. 중증 치매나 폐질환을 앓는 90세의 노인이 인공호흡기를 끼고 집중치료를 받는 것보다 더 당황스러운 일은 없다. 물론 연령은 사람마다 의미가 다르다.82세에 심장 절개수술이 적절한 이도 있을 것이다. 의사는 상식에 맞는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흔히 가족들은 말한다.“내게 어머니의 사형집행인이 되라고 하는군요.”라고. 그러나 부담을 주는 값비싼 수술로 생명을 조금 늘리기보다는 부모를 잘 보살펴 드리는 일이 중요하다. 부모가 진정 원하는 것을 하라고 질릭 교수는 강조한다. ■ 3 채식·운동을 가까이하라 미국인은 1년에 60억달러(약 6조원)를 각종 ‘노화방지 비책’에 쓴다. 그러나 비타민 E를 다량 복용하면 수명이 는다는 가설은 입증되지 않았다. 비타민 E를 복용하는 것보다는 자전거를 사서 운동하는 등 늘 활동성을 유지해야 한다. 질릭 교수의 책에 따르면 122세까지 살아 역사상 최고령이었던 프랑스 여성은 말년에 잘 보지도 듣지도 못했지만 정신만은 총기가 넘쳤다.110세까지 담배도 피웠다. 그녀의 장수 비결은 100세까지 탄 자전거와 늘 잃지 않은 유머감각이다. 생선과 채식을 즐기는 일본 오키나와섬 주민들은 10만명당 34명이 100세를 누린다. 미국에선 10만명당 10명만이 그런 행운을 갖는다.
  • ‘김형욱 사건’ 비밀 영영 묻히나

    1979년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납치살해 사건에 깊이 연루된 것으로 알려진 이상열 전 프랑스 주재 공사가 지난 3일 지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77세.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국정원 과거사위)는 지난해 5월 김형욱 사건의 중간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이씨를 현지에서 김씨 살해를 지시한 장본인으로 지목했지만, 이씨는 면담조사에서 “노(No)라고 했다고 기록해 달라.”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이에 따라 김형욱 사건의 완전한 규명은 힘들게 됐다. 과거사위는 당시 중정의 프랑스 책임자였던 이씨가 김재규 당시 중정부장의 지시를 받아 김씨를 파리 상젤리제 거리로 유인했으며 파리에 체류 중이던 중정 어학연수생 2명과 제3국인에게 김씨를 납치, 살해토록 지시한 것으로 추정한 바 있다. 이씨는 군 출신으로 1963년 ‘원충연 대령 반혁명사건’ 처리 과정에 김씨와 인연을 맺어 중정에 발을 들여 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미얀마·리비아·이란 대사를 지냈으며 서울 근교에서 은둔해오다 최근 폐렴이 악화돼 병원에 입원한 것으로 알려졌다.2004년 말 외아들을 잃었고 과거사위의 김형욱씨 사건이 보도된 뒤 큰딸마저 쓰러지는 등 불행한 말년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발인은 5일 분당 서울대병원에서 치러졌다.김수정기자 crystal@seoul.co.kr
  • [책꽂이]

    ●부바르와 페퀴셰(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진인혜 옮김, 책세상 펴냄)프랑스 사실주의문학의 대가인 플로베르의 유작.‘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한 백과전서’라는 부제에서 짐작되듯 진리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엉뚱한 소동을 통해 인간의 어리석음과 과학에 대한 환상을 꼬집는다.플로베르가 말년에 엄청난 공력을 기울였지만 생전에 끝맺지 못하고 사후에 출간됐다. 전 2권, 각권 6900원.●앙드레 지드의 콩고여행(김중현 옮김, 한길사 펴냄)50대의 앙드레 지드가 1925년 7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아프리카 콩고지역을 여행하며 겪은 일들을 기록한 일기. 식민지 원주민들의 참혹한 현실과 마주한 저자는 당시 누구도 언급하기를 꺼린 프랑스 식민 정책의 잔인성을 고발한다.1만 5000원.●당신은 이미 소설을 시작했다(이승우 지음, 마음산책 펴냄)‘생의 이면’‘미궁에 대한 추측’등의 작가이자 조선대 문예창작과 교수인 저자가 들려주는 소설창작론.‘이 세상에 태어나는 한편의 소설은, 그 소설이 탄생하는 순간까지 그 작가의 삶의 총체’라는 저자는 창작의 기술이나 방법보다는 태도를 강조한다.9800원.●한시의 세계(심경호 지음, 문학동네 펴냄)한시(漢詩)구성의 기본원리에서부터 한시 미학의 핵심적인 개념들, 한시에서 즐겨 다루는 소재, 한시 창작의 방법론 등을 20여편의 다채로운 한시를 곁들여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고려대 교수인 저자는 ‘김시습 평전’‘한시기행’등 고전 한문학의 현대화에 남다른 관심을 기울여왔다.1만 5000원.●소망, 그 아름다운 힘(최민식·하성란 지음, 샘터 펴냄)국내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1세대인 최민식이 1950년대부터 근작까지 50년간 찍은 사진들을 추린 흑백 작품집에 소설가 하성란이 향기로운 글을 보탰다.‘타인’‘길’‘균형’‘노동’등 일곱개의 키워드속에 두 작가의 아름답고 풍요로운 교감이 오롯이 드러난다.1만 1000원.
  • 1~3급 ‘희색’ 4급이하 ‘투덜’

    오는 7월 출범하는 고위공무원단을 놓고 공무원들이 제각각 해석을 내리고 있다. 고위공무원단에 포함되는 1∼3급은 ‘아전인수’격으로 유리하게 해석하는 반면, 고위공무원단 진입에 앞서 엄격한 역량평가를 거쳐야 하는 3급 과장이나 4급 공무원들은 공직생활 말년이 힘들게 됐다고 볼멘소리다.●정부 국장급이상 1582명 새 제도 적용 고위공무원단이 도입되면 기존의 1∼3급은 계급이 없어진다. 하지만 3급 과장은 고위공무원단에 포함되지 않고 그대로 남는다.이에 따라 현행 1∼9급의 계급체계는 고위공무원단과 3∼9급으로 바뀐다. 현재 3급 중 국장급 직위에 있는 공무원은 고위공무원단에 편입되지만 3급 과장은 일반공무원으로 남는다. 이에 따라 고위공무원단에 포함되는 대상은 행정부의 일반직·별정직 계약직·외무직·시도 부지사·부교육감 등 국장급 이상 1582명이다. 눈길을 끄는 점은 해당 공무원들 대부분이 유리하게 해석을 내리는 등 낙관적이라는 점이다. 처음에는 새 제도 도입에 바짝 긴장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정부가 제도의 연착을 위해 현재 직위에 있는 공무원들은 검증절차 없이 그대로 편입시키기로 하면서 ‘서로 잘됐다.’고 해석한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해당 공무원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지나치게 양보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우선 1급은 일반 공무원 가운데 최고위 직급이다. 각 부처의 차관보나 정책홍보관리본부장 등 핵심요직으로 중앙부처에 64명이 있다.1급이 근무하는 기간은 대략 3∼4년이다. 국가공무원법에 신분보장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정년이 남아도 ‘용퇴’형식으로 물러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정권 교체기에는 대폭 물갈이 형식으로 공직을 떠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고위공무원단이 도입되면서 1급도 정년 및 신분이 보장된다.60세까지 버텨도 누가 뭐라고 할 수 없다. 밀려날 시기에 정년과 신분보장이 되면서 오히려 유리하게 해석하는 1급들이 많다.물론 국가공무원법 68조에는 여전히 신분보장을 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이는 다른 기관의 공무원을 위한 규정이다. 2·3급도 손해볼 것 없다고 생각한다. 계급이 없어지면서 1급 승진을 위해 치열하게 다툴 필요가 없어졌다. 그동안 1급에게만 주어졌던 ‘차관’ 발탁의 기회가 2·3급에게도 주어지게 됐다. 자기관리만 잘하면 바로 ‘정무직’으로 발탁이 가능해졌다.●“말년 진급경쟁 치열해졌다” 볼멘소리 반면 3급 과장과 4급 이하 공무원들은 공직 말년이 힘들게 됐다고 불만이다. 우선 이들이 고위공무원단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역량평가’라는 힘든 과정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성과평가가 강화될 것이 뻔하다. 이에 대해 중앙인사위 관계자는 “1급들이 신분보장이 되면서 유리한 측면도 있을 수 있다.”면서 “하지만 앞으로 성과에 따라 보수와 대우의 차등이 커져 기존의 1∼3급도 좋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조덕현기자 hyoun@seoul.co.kr
  • 복권당첨은 불행의 시작?

    복권당첨은 불행의 시작?

    |워싱턴 이도운특파원|복권 당첨은 행운이 아니라 비극의 시작일 수도 있다고 미국의 USA투데이가 27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이 신문은 복권 당첨자들의 삶을 분석한 결과 행복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고 전하며 “누구도 그같은 횡재를 거절하진 않겠지만 그것이 천국에 이르게 하지는 않는다.”고 지적했다. 1988년 펜실베이니아주에서 1620만달러(약 160억원)짜리 복권에 당첨된 윌리엄 포스트는 유산을 노린 형제로부터 살해 위협을 받고 갖가지 음해에 시달리다가 결국 재산을 모두 날리고 말았다. 포스트는 말년에 사회보장 연금에 의존해 연명하다 지난달 쓸쓸하게 삶을 마감했다고 신문은 전했다. 1997년 텍사스주에서 3100만달러(약 310억원)짜리 복권에 당첨된 빌리 하렐은 2년여만에 자살했다. 하렐은 고급 자동차와 부동산을 사고, 가족과 교회·친구들에게 마구 돈을 뿌렸으나 정작 죽고난 뒤에는 유산으로 남겨진 부동산 세금을 낼 돈조차 없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2001년 남편과 함께 1100만달러(약 110억원)의 복권 당첨금을 탄 빅토리아 젤은 재산을 다 날리고 미네소타주 교도소 신세를 지고 있다. 젤은 2005년 3월 약물과 술에 취한 상태에서 운전하다 한 명을 숨지게 하고, 다른 한 명에겐 중상을 입히는 사고를 낸 혐의로 구속됐다. 1985년과 1986년 두 차례에 걸쳐 총 540만달러(약 50억원)어치의 복권에 당첨된 뉴저지주의 이브린 애덤스는 도박으로 돈을 다 날리고 2001년부터 트레일러에서 살고 있다. 이밖에 2001년 4100만달러(약 410억원)짜리 복권에 당첨된 메인주의 패트리샤 부부는 직장 동료들로부터 이 복권은 공동구입한 것이라는 소송을 당했다. 또 알지도 못하는 친구라는 사람들과 투자회사 등의 공세에 시달리고 있다. 복권당첨자나 운동선수, 연예인 등 갑작스럽게 떼돈을 번 사람들을 연구해온 텍사스공대의 게리 바이어 교수는 “돈을 다 써버리면 빈털터리가 된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깨닫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dawn@seoul.co.kr
  • 시라크 “돌아오라”

    |파리 함혜리특파원 서울 임병선기자|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이 보름 이상 아라비아해 해역을 떠돌고 있던 자국의 핵 항공모함 클레망소호를 본국 해역에 돌아오도록 조치하라고 15일 지시했다. 이날 지시는 프랑스 최고 행정법원인 참사원에서 클레망소호의 인도행을 중지시키는 결정이 나온 직후 내려졌다. 19일 예정된 인도 방문을 앞두고 양국의 외교 현안에 걸림돌을 제거하겠다는 의중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한때 프랑스 해군의 자존심으로 불리며 36년간 활약했던 클레망소호는 9년 동안 여러 바다를 떠돌아 다니던 ‘불행한 말년’을 연장하게 됐다. 우여곡절 끝에 지난해 말 툴롱 항을 떠나 인도의 알랑 폐선소를 향해 떠났지만 이번에도 역시 해체되지 못하게 된 것이다.●해체시 석면 등 오염물질 쏟아질까 우려 프랑스는 1990년대 말부터는 폐암을 유발하는 것으로 알려진 석면 사용을 금지했지만 클레망소호가 건조될 당시에는 석면 사용이 특별히 문제가 되지 않았다. 따라서 내부 곳곳에 석면이 사용됐다. 오염된 물질도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정부는 접근이 불가능한 곳에 약 45t의 석면 오염물질이 남았다고 밝혔지만 환경단체 그린피스는 클레망소에 석면 오염 물질 500∼1000t이 여전히 실려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환경단체들은 “석면 절연체가 들어있는 항모를 관계 법령과 시설이 미비된 곳에서 해체하면 근로자들의 폐암을 유발할 수 있다.”며 저지에 나섰다.●프랑스 의원들까지 가세 인도 대법원도 클레망소에 내장된 석면의 규모에 대한 실사를 지시하며 최종판결이 내려질 때까지 클레망소의 인도 입항을 금지했다. 대법원은 인도내 클레망소 해체가 위험 폐기물 처리에 관한 국제협약과 인도 환경법에 저촉되는지 여부도 가릴 예정이다. 프랑스 의회 의원, 과학자, 환경운동가, 예술가 등 100여명은 시라크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 인류 및 환경 재앙을 피하기 위해 클레망소를 프랑스로 귀환시키라고 촉구했다. 야당인 사회당과 공산당은 클레망소와 관련한 모든 정보를 공개할 것을 요구했다. 클레망소는 이미 2003년 10월 스페인에서의 석면 제거 작업을 위해 툴롱 항을 떠났다가 하청업체인 스페인 업체와의 계약이 파기되면서 시칠리아 해역에도 한달 이상 머무른 적도 있다.lotus@seoul.co.kr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제2의 4전5기’ 엮는 홍수환씨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제2의 4전5기’ 엮는 홍수환씨

    ‘신화창조’라 한다. 온갖 역경과 어려움을 딛고 일궈낸 ‘성공’에서 비롯된다. 벅찬 감동과 흥분, 위대한 성공 스토리가 있기에 ‘신화’라는 두 글자에 각별히 담아낸다. 그래서 한 시대를 풍미하며 오랜 세월동안 불굴의 용기와 희망의 표상으로 남는다. 최근 미프로풋볼리그(NFL)의 ‘슈퍼볼’에서 최우수 선수(MVP)를 거머쥔 한국계 미국인 하인스 워드 선수도 이에 다름 아니다. ‘4전5기’의 신화, 아직도 우리 귀에 생생하다. 춥고 암울했던 1970년대에 실로 가슴 벅찬 감동을 온 국민에게 선사했다. 가난하고 불우한 청소년들에겐 우상으로 다가갔다. 홍수환(56)씨. 현역 시절 세계권투협회(WB A)밴텀급과 주니어페더급 두 체급을 석권, 세계적인 복서로 명성을 날렸다.74년 7월4일 저 멀리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챔피언 벨트를 허리에 차고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오냐, 대한민국 만세다.”라는 모자지간 나눈 격정의 대화는 전 국민의 심금을 울렸다.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회자된다. 지난달 20일 경기도 성남에서 ‘2005년 MBC 권투 신인왕’ 선발대회가 열렸다. 여기에서 MVP를 차지한 고교생 김유신 선수는 소감을 묻는 질문에 “저는 꼭 홍수환 선수처럼 되겠습니다.”라고 큰 소리로 대답해 눈길을 끌었다. 설령 이름모를 체육관일지라고 어디에선가 권투 글러브를 끼고 비지땀을 흘리는 미래의 챔피언들에게는 여전히 우상임을 입증했다. ●복싱 은퇴후 실패와 좌절 겪어 홍씨는 요즘 제2의 ‘4전5기’ 인생길을 걷고 있다. 은퇴후 파란곡절을 겪으며 실패와 좌절도 있었지만 현역시절의 오뚝이처럼 일어나 방송인으로, 전국에서 찾는 명강사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것. 흔히 은퇴한 복싱선수들을 가리켜 ‘하나같이 말년이 안좋아.’라 속설이 있다. 영광과 좌절이란 말처럼 화려했던 챔피언 생활을 끝낸 뒤 적지 않은 유혹과 시련에 부닥쳐 사회적응에 실패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도 하다. 홍씨의 경우도 은퇴후 험난한 인생역정을 걷는다. 지난 80년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염동균씨와 고별 매치를 끝으로 권투계를 떠났다. 이 무렵 이혼의 아픔을 겪는다. 홍씨는 돈을 벌기 위해 무작정 미국으로 건너갔다. 로스앤젤레스 지역에 머물면서 신발장사와 자동차 세일즈 등, 온갖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알래스카에서 택시운전사도 했다.92년 귀국후 체육관과 식당일에 손을 댔으나 실패했다.2년 뒤에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그러던 99년 2월 ‘조직폭력배의 해결사로 연루됐다.’는 기사가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된다. 검찰에서 1년7개월 구형을 받았다. 다행히 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이미 잃어버린 것이 너무 많았다. 말 그대로 방황과 좌절의 연속이었다.2000년초 우연히 춘천시 공무원을 상대로 ‘4전5기’를 주제로 강연을 하게 됐다. 이때 스스로 젊은 날의 열정과 삶의 의욕을 새삼 강하게 느꼈다. ●2000년 ‘4전5기´ 강의하다 새삶 찾아 홍씨는 요사이 무척 바쁘게 지낸다. 매일 저녁 6시10분부터 1시간40분동안 KBS 2라디오 ‘해피FM 홍수환, 이승연의 라디오 챔피언’ 진행을 맡고 있다. 제목에서 시사하듯 복싱 챔피언에서 ‘라디오 챔피언’으로 살아가는 셈. 또한 이틀에 한번꼴로 ‘4전5기’를 주제로 강의를 나간다. 공무원, 부인회, 각 지방단체 등 전국 안다니는 곳이 없다. 지난 주말 서울 여의도에서 홍씨를 만났다. 얼굴이 무척 밝아보였으며 한껏 여유와 자신에 가득찬 모습이었다. 방송 진행을 맡은 지 10개월째.‘∼라디오 챔피언’은 퇴근길 교통정보, 가벼운 시사 이슈와 스포츠 화제 등을 다룬다. 먼저 방송 진행도 챔피언이 아니냐고 했더니 “주위에서 그렇게 말한다.”며 웃는다. 이어 청취자들의 반응을 묻자 “방송 도중 ‘난 구수한 홍수환이 좋다.’는 메시지가 자주 온다.”며 기분 좋은 표정이다. 아울러 방송진행 파트너인 이승연씨의 자랑이 이어진다. 워낙 매끄럽게 잘 이끌어가 오히려 자신이 실수해도 매력으로 돋보일 때도 있다고 했다. 그래서 이승연씨에게 보면 볼수록 매력이 있다고 해서 ‘볼매’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권투인은 결국 방송과 궁합이 맞아요. 유명우, 김광선, 변정일도 방송을 했거든요. 보세요, 김광선은 얼마나 해설을 잘 합니까. 주위에서 권투선수들의 말년이 좋지 않다고들 해요. 그러니 저라도 열심히 해야지요. 권투인은 깨어있구나 하는 것을 보여줄랍니다. 특유의 순수와 열정이 있거든요.” ●요즘은 ‘방송 챔피언´ 목표로 분주 홍씨는 최근 K1 이종격투기로 전향선언을 한 최용수 전 WBA슈퍼페더급 챔피언에 대해 언급했다.“용수는 제일 좋아하는 후배다. 나보다는 더 멀리(아르헨티나) 가서 챔피언을 땄다.”고 각별한 애정의 무게를 둔다. 이어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나중에 ‘너는 아주 잘 해낼 수 있어.’라는 말로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우리나라 복싱선수가 K1에서 통한다는 걸 충분히 보여달라는 당부도 했다. “용수는 대단한 놈이죠. 오토바이 사고 나서도 시합장에 가는 친구에요. 반드시 성공합니다. 빠르거든요. 까짓거 복싱과 달리 K1은 4분 3회 뛰는 겁니다. 먼저 진출한 최홍만 선수는 용수한테 상체 쓰는 법을 배우면 더 좋아집니다.” 시원시원하고 자신에 차 있다.“인생 자체는 도전이다. 다만 뭘로 도전하느냐, 프로정신으로 하느냐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홍씨는 3년전 ‘누구에게나 한방은 있다.’는 단행본을 출간했다. 자신의 경험과 도전정신을 담은 이 책은 스테디셀러로 그동안 10만부가량 팔렸다고 귀띔했다. 프로정신과 도전정신 전령사로 나선 지 올해로 6년째. 그동안 강연 횟수만 무려 800회를 넘는다. 특히 직장 신입사원들한테는 단연 인기가 높다.“사람들이 왜 아직도 나를 기억하는가. 쉽게 이겼다면 또 쉽게 잊혀졌을 것이다. 맞고 쓰러졌지만 다시 일어나 이겼기 때문에 나를 기억한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어렵지만 노력한 사람은 포기 못한다. 또 그런 사람을 기억해준다. 복싱할 때도 맞고 쓰러져도 준비한 것이 아까워서 다시 일어났다.”는 식으로 다가가기 때문이다. 아울러 ‘지지 않는 대한민국’을 강조한다. ●젊은이들에 ‘프로정신 전령´ 역할 톡톡 홍씨는 6.25전쟁 중에 태어났다. 모친도 출산일을 정확히 몰라 생일을 5월26일(서류상),7월4일(74년 밴텀급 획득),11월27일(77년 주니어페더급 획득) 등 세번을 지낸다. “인생은 백스텝이 없어요. 링보다 인생이 더 무섭거든요.” 2남4녀를 둔 홍씨는 경기도 의왕 자택에서 부인 옥희씨, 막내 아들과 함께 오붓하게 살고 있다. 건강관리를 위해 요즘도 줄넘기를 하루 200여회씩 한다. 주말매거진 We팀장 km@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50년 서울 출생 ▲69년 프로데뷔 ▲71년 밴텀급 동양챔피언 ▲74년 WBA 밴텀급 타이틀 획득 ▲77년 WBA주니어페더급 타이틀 획득▲81년 김철호 장정구 트레이너 ▲82∼92년 미국 이민 ▲95년 KBS 권투해설위원 ▲2002년 공군사관학교 권투 특별강사 ▲03년 영화 ‘최후의 만찬’ 출연 ▲05년4월∼현재 KBS2라디오 해피FM 홍수환, 이승연의 라디오챔피언 진행 ▲저서 ‘누구에게나 한방은 있다’(03년)
  • 아랍전쟁 영웅서 ‘평화지킴이’ 자처

    아리엘 샤론(77) 이스라엘 총리는 군인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해 성공 가도를 달렸다. 자신이 무공을 세워 점령한 땅을 말년에 스스로 팔레스타인에 내주는 ‘온건파’로 변모해 중동평화 지킴이로 자처했다. 샤론 총리는 영국의 과도통치 기간인 1928년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나 14살에 지하 군사조직에 가입했다. 아랍 국가들과 싸워 오늘날 이스라엘 지도를 완성한 제 3차 중동전쟁 때는 혁혁한 공을 세워 ‘전쟁영웅’으로 떠올랐다. 이후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의 유대인 정착촌 건설에도 앞장섰다. 1973년 리쿠드당 창당에 참여해 정치에 뛰어든 그는 이후 국방·통산·외무장관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국방장관 시절 레바논 베이루트에 있던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본부를 무단 공격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1999년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총선에서 패한 뒤 리쿠드당 당수를 승계한 샤론은 2001년 총선을 승리로 이끌고 총리직에 올랐다. 가자지구 철수를 강행한 지난해 9월에는 네타냐후 등 강경파의 도전을 물리치고 조기 재신임에 성공해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강경파의 흔들기는 계속됐고, 연정 파트너인 노동당의 시몬 페레스마저 낙마해 연정이 붕괴될 위기에 놓이자 샤론은 돌연 리쿠드당을 탈당했다. 페레스와 손잡고 중도 신당인 ‘카디마(전진)’ 창당을 선언했다. 샤론의 정치생명이 사실상 끝나면서 주목받는 정치인은 네타냐후(55) 신임 리쿠드당 당수이다. 가자지구 철수에 반발해 재무장관직을 박차고 나온 그는 ‘젊은 피’를 내세워 올해 차기 총선에서 샤론과 맞붙을 참이었다. 네타냐후는 이미 45살에 이스라엘 사상 최연소 총리로 취임했었다.총리 권한대행을 맡은 에후드 올메르트(60) 부총리는 신당이 승리할 경우 샤론을 이을 제 1의 후계자이다.10년간 예루살렘 시장을 지내다 2003년 내각에 참여한 샤론의 최측근이다.박정경기자 olive@seoul.co.kr
  • [데스크시각] 체육계 수장과 정치인/김민수 체육부장

    수장(首長)이라는 말이 있다. 주재(主宰)하는 사람에서 비롯됐지만 근래에는 특정 집단의 우두머리를 일컫는 데 쓰여왔다. 그런데 수장은 과거 부족사회에서 자질이나 인격에 바탕을 둔 비공식적 지도자인 장로(長老) 등과는 다소 다르다. 그렇다고 정치적으로 큰 권력을 쥔 존재와도 구분된다. 과거에는 이런 수장의 건강 상태가 사회와 자연의 질서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여겼다. 수장이 노쇠하거나 병들면 수장을 살해하고 새로 수장을 선출하는 관습도 있었다고 한다. 또 이상 기후나 흉작도 수장의 탓으로 돌리는 일도 드물지 않았단다. 어쨌든 최근 수장의 개념을 제도틀 안에서 막강 권력을 휘두르기보다는 인격과 지혜로 집단을 이끄는 리더라고 정의해도 무방할 듯하다. 수장이라는 말이 일반에 널리 통용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스포츠계에서는 경기단체장 등을 수장이라고 즐겨 불러왔다. 아마도 경기인들이 앞서 정의한 리더가 돼 주길 원해서가 아닐까 싶다. 특히 지난해에는 수장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했다. 연초에는 체육계 수장인 대한체육회장 자리를 놓고 ‘음모설’로 잡음이 일더니 세밑에는 프로야구의 수장인 총재 자리를 둘러싸고 ‘사전 내정설’로 시끄러웠다. 국민들에게 꿈과 희망, 용기를 불어넣겠다는 스포츠계가 팬들에게 큰 실망을 안겼으리라 본다. 작금의 체육계 잡음은 현 정치권과 경기인 등 비정치권의 자리 다툼 양상이다. 누가 자리에 앉아도 스포츠 발전에 매진한다면 불협화음은 일지 않는다. 하지만 그동안 체육계 수장에 올랐던 상당수 정치인들은 일보전진을 위해 와신상담하는 자리, 또는 말년의 소일거리 정도로 여겨왔던 게 사실이다. 이들 선배 탓에 정치인 출신들이 환대를 받지 못해왔다. 그 밥그릇에 그 나물이 아니냐는 얘기다. 서구의 스포츠는 1900년을 전후해 이 땅에 상륙했다. 이후 선교와 교육의 목적으로 학원스포츠로 발전했고 각 동호회는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그 결과 대한체육회의 전신인 조선체육회가 1920년에 발족했다. 당시 장두현 회장 등 수장들은 오로지 스포츠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쏟아냈다. 이후 한국스포츠는 서울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으로 큰 전기를 맞았다. 당시 수장들은 정치·경제계 거물들이 맡아 재력을 바탕으로 두 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러냈다. 재벌 수장 덕분에 흥청거렸던 체육계가 지금껏 당시를 그리워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이후 각 단체들은 착실한 자구책 마련보다는 손쉬운 ‘재벌 수장 모시기’에 열중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두번째 전환기는 1998년 ‘IMF직격탄’을 맞으면서 찾아왔다. 기업들이 스포츠에서 하나 둘씩 발을 빼면서 종목마다 팀해체가 속출, 최대의 시련을 겪었다. 재력있는 수장 모시기가 쉽지 않자 각 협회는 ‘돈줄’을 끌어올 정치 실세 영입에 박차를 가했다. 스포츠 문외한인 정치인들은 언론에 노출빈도가 높은 스포츠 종목 수장 자리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해당 종목에 애정이 없는 데다 이따금 얼굴만 내미는 ‘얼굴 마담’에 불과했다. 이에 염증을 느낀 각 단체들은 사단법인화를 통해 뒤늦게 살아남기에 나서는 긍정적인 효과도 가져왔다. 최근 세번째 바람이 불었다. 몇년전부터 여권 인사들이 줄지어 체육단체장에 오르기 시작해 체육회 회장으로 이어졌다. 체육회장과 국민체육진흥공단, 아마추어 4개 종목은 물론 농구와 배구 등 프로스포츠에서도 정치인들이 자리했다. 경기인들은 불만의 소리를 높였지만 뚜렷한 대안을 찾지 못하고 있다. 정치인 출신 수장의 대미는 지난해 말 프로야구판에서 장식됐다. 두산그룹 ‘형제의 난’으로 오는 3월 수장의 자리에서 물러나려던 박용오 총재가 신상우 전 국회부의장의 사전 내정설이 불거지자 서둘러 사퇴했다. 네티즌과 시민단체들은 ‘또 낙하산 인사’라며 분노했지만 결국 한국야구위원회는 마땅한 후보를 내세우지 못해 신 전 부의장의 취임이 굳어졌다. 진정 마땅한 후보가 없었을까. 서로의 눈치를 보며 앞서서 고양이목에 방울을 달지 않겠다는 의도가 엿보이는 것은 무엇일까. 주어진 권리를 애써 외면하는 야구계의 오랜 악습이 되살아나는 것 같아 씁쓸함을 지울 수 없다. 초창기 선배 수장들처럼 순수한 열정과 애정으로 땀흘리는 모습을 정치인 출신 단체장들에게 또 기대해본다. 김민수 체육부장
  • [사진으로 본 전통의 숨결] 한지공예와 지승장(紙繩匠)

    [사진으로 본 전통의 숨결] 한지공예와 지승장(紙繩匠)

    우리 선조들은 한지를 오랜 옛날부터 실생활 속에서 다양한 용도로 활용해왔다. 한지 공예도 그 중의 하나다. 한지 공예의 바탕이 되는 제지(製紙)기술은 삼국시대에 불교와 함께 한반도에 들어온 것으로 전해진다. 우리 고유의 한지(韓紙)는 닥나무를 원료로 만든다. 지질이 엷으면서도 부드럽고 질긴 특성이 있다.“지천년(紙千年)견오백(絹五百)”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이처럼 종이는 여러 겹 붙이면 화살도 뚫지 못할 정도로 질기고 견고해 한지 공예에 활용됐다. 한지공예는 안방의 살림살이 가운데 특히 여성들이 사용하는 생활용구를 만드는 데 주로 활용됐다. 이는 한지의 부드러운 질감이 여성들의 정서에도 잘 맞았기 때문일 것이다. 한지공예는 크게 색지(色紙)공예, 지승(紙繩)공예, 지호(紙糊)공예 등 세 갈래로 나뉜다. 지승공예는 종이를 좁고 기다랗게 오려 손으로 비벼 종이끈을 만든 뒤, 이것을 엮어 여러 가지 생활용품을 만드는 공예다. 지호공예는 종이를 물에 불린 뒤 풀을 고루 섞어 절구에 찧어 만든 종이점토로, 그릇이나 가면 등을 만드는 공예 기법이다. 한지로 만들 수 있는 작품으로는 색지상자, 반짇고리, 패물상자, 색실상자, 고비, 연상, 예단함, 부채, 붓통, 갓집, 지통, 색실첩, 동고리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한지공예는 자연미와 실용미가 결합된 환경 재활용 공예품이라 할 수 있다. 과거에는 종이가 생산도 적게 되고 비싸기도 해서 대단히 귀한 물건이었다. 따라서 일반 서민들은 문살에 바르고 남은 창호지 따위의 버려진 종이를 모아 갖가지 소품을 만들었다. 못 쓰게 된 서책을 뜯어 손으로 꼬아 ‘노엮개’라는 끈을 만들고, 조각 종이를 겹겹이 붙여서 그릇 등의 유지(油紙)제품을 만들었다. 폐지 재활용 측면이 강조된 부분이다. 한지가 공예품의 소재로 등장되면서 장식을 위한 다양한 색상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고대로부터 전해온 음양오행 사상에 근거한 적, 청, 황, 흑, 백의 전통 색채문화는 생활 속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요소로 사용되었다. 또 여러 가지 색깔의 한지로 다양한 문양을 파서 공예품을 장식했는데, 목기나 나전칠기품이 갖지 못한 담백하고 화려한 멋을 문양과 함께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이다. 한지는 우리 민족을 닮았다. 작은 충격에도 쉽게 구겨지고 찢어지고 상처를 받는다. 반면에 두드릴수록 탄탄해지고 모일수록 질겨지며 공을 들이면 명품(名品)으로 완성되는 모양이 마치 우리네 민족성처럼 느껴진다. 이처럼 우리 고유의 색과 문양을 사용하여 만드는 한지 공예에는 민족의 뚜렷한 개성이 녹아 있다. 글 사진 이언탁기자 utl@seoul.co.kr ■ 무형문화재 지승장 최영준씨 “씨줄·날줄 한지로만 해야”“원래는 씨줄과 날줄을 모두 한지(韓紙)로만 해야 합니다.” 지승공예가 최영준(55·여)씨는 요즘 와서 날줄로 매듭실을 사용해 만드는 제품이 못마땅하다. 최씨가 지승공예와 인연을 맺은 것은 지난 1973년. 결혼과 함께 충남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였던 시조부(김영복·1986년 작고)로부터 관련 기법을 배웠다. “정갈한 마음으로 노엮개를 해야 한다.”며 항상 나무라기만 하시던 시할아버지.“눈치보며 노엮개를 배운 기간이 족히 5년은 될 거예요.” 그래도 힘들게 배운 덕에 솜씨를 인정받아 그녀도 1986년 대를 이어 인간문화재로 지정받았다.“할아버지는 말년에 의식이 없으신 상태에서도 노엮개를 흉내내시며 뭔가 제게 자꾸 주는 시늉을 하셨어요.” 붓글씨가 쓰여진 한지를 찢어 노엮개를 엮어내고 있는 그녀는 지금 장인(匠人)의 맥을 한올 한올 잇고 있는 것이다.
  • 중국여성작가 장아이링 소설집 경성지련·첫번째 향로

    “내 작품에는 전쟁이 없고, 혁명이 없다. 나는 사람들이 연애할 때가 전쟁이나 혁명할 때보다 더 소박하고 더 대범하다고 생각한다.” 중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여성 작가 장아이링(張愛玲,1920∼1995)의 대표 소설집 ‘경성지련’과 ‘첫번째 향로’(김순진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가 나란히 번역 출간됐다. 국내에서는 영화 ‘반생연’의 원저자로 알려졌을 뿐 ‘번역하기 힘든 독특한 문체’로 인해 그녀의 작품이 소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불우한 유년시절을 거친 그녀는 이데올로기나 혁명에 복무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대신 현대인의 일상, 남녀간의 애정문제 등 개인적 성향의 작품을 당당히 발표해 주목을 받았다. 1940년대 초 ‘경성지련’‘붉은 장미와 흰 장미’등을 잇따라 발표하며 명성을 얻었지만 1949년 중국 공산당이 수립한 신정부를 거부하고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면서 그녀의 작품은 오랫동안 사장됐다. 그러다 이국 땅에서 쓸쓸히 숨진 뒤에야 타이완, 홍콩 등지를 중심으로 열광적인 환호를 받게 됐고, 그 열풍은 대륙으로까지 번져나가 루쉰과 더불어 중국을 대표하는 현대 작가의 반열에 들었다. 소설집 ‘경성지련’에는 ‘도시를 무너뜨린 사랑’이란 뜻의 표제작을 비롯해 ‘붉은 장미와 흰장미’‘황금 족쇄’등 7편이, 소설집 ‘첫번째 향로’에는 ‘재스민 차’‘유리기와’등 9편이 실렸다. 시골뜨기 상하이 처녀가 학업을 위해 영국화된 홍콩의 고모집에 머무르면서 겪는 충격과 변화를 그린 ‘첫번째 항로’나 봉건적인 집안에서 탈주하는 방법으로 결혼을 선택하는 여성이 주인공인 ‘경성지련’등 그녀의 소설에는 불안한 시공간에 놓인 나약한 인간의 실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미국 이민 이후 시나리오와 번역 작업에도 힘썼던 그녀는 말년에는 ‘홍루몽’연구에 몰두했으며,1994년 타이완의 ‘중국시보’로부터 ‘시보문학상’과 ‘특별성취상’을 받았다. 각 권 1만원.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儒林(494)-제5부 格物致知 제1장 疾風怒濤(16)

    儒林(494)-제5부 格物致知 제1장 疾風怒濤(16)

    제5부 格物致知 제1장 疾風怒濤(16) 율곡이 길을 떠난 성주는 그의 장인이었던 노경린이 목사로 있던 곳. 노경린은 이곳에 연봉서원을 세워 유학을 크게 장려하였으며,6년 동안이나 크게 선정을 베풀어 조정으로부터 포장을 받기도 하였던 명신이었다. 그가 세운 서원은 훗날 이퇴계가 천곡서원(川谷書院)으로 명명할 만큼 크게 성장하였다. 성주는 정인지(鄭麟趾)가 기문에서 ‘성주는 고을의 생긴 것이 산천이 수려, 기이하고 인물이 번성하여 상주, 진주, 경주, 복주와 더불어 서로 상하를 다툰다.…성주는 큰 고을이어서 국가에서는 반드시 진신(搢紳) 가운데 영준한 사람을 뽑아서 목사로 보내니 이 선발에 응하는 사람은 참으로 강명(剛明) 준걸한 인재들이다.’라고 표현할 만큼 역사적으로도 유서가 깊은 곳이었다. ‘진신’이란 벼슬아치를 통틀어 지위가 높고 행동이 점잖은 사람을 일컫는 말인데, 율곡의 장인 노경린이야말로 진신이었던 것이다. 성주는 원래 가야의 땅으로 ‘성산가야(聖山伽倻)’가 있었던 본향이었다. 정인지가 기문에서 표현한 대로 ‘성주에 땅이 산천이 수려하고 기이한’ 중요원인은 서남쪽 48리에 있는 가야산(伽倻山) 때문이다. 가야산은 해인사가 있는 명산으로 유명한데, 특히 우리나라가 낳은 최고의 문장가였던 최치원(崔致遠)이 말년에 어지러운 난세를 비관하여 해인사 경내에 은둔하면서 들고 다니던 지팡이를 땅에 꽂고 ‘내가 살아 있다면 이 지팡이도 살아 있으리라.’하고 읊으며 사라졌던 곳. 그리하여 가야산 홍류동에서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로 유명한 고장이었던 것이다. 율곡의 장인 노경린이 이곳에 서원을 세운 것은 우리나라에 최초로 ‘주자서(朱子書)’를 베껴오고 공자와 주자의 진상(眞像)을 모시고 들어와 성리학을 도입한 안향(安珦:1243-1306) 때문이었다. 안향은 일찍이 충렬왕과 공주를 호송하여 원나라의 원경에 들어가 주자전서를 필사하여 돌아옴으로써 우리나라의 주자학이 들어오게 한 유학의 비조(鼻祖)였다. 원나라에서 돌아온 안향은 섬학전(贍學錢)이란 육영재단을 설치하고 국학대성전(國學大成殿)을 낙성하여 공자의 진영을 비치하는 한편 제기, 악기, 육경, 제자(諸子), 주자신서(朱子新書) 등의 경전을 구비하여 유학진흥에 큰 공덕을 남긴 태두였던 것이다. 안향은 그가 남긴 ‘회헌실기(晦軒實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 일찍이 중국에서 주회암(朱晦菴:주자)의 저술을 얻어 보니 성인의 도를 가르치고 선불의 학을 물리친 것으로, 그 공이 족히 중니(仲尼:공자)에 비할 수 있다. 중니를 배우려면 먼저 주자를 배우는 것이 제일이다.” 공자의 학문을 배우려면 먼저 주자를 통해야만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던 안향. 주자를 경모하여 주자의 화상을 항상 벽에 걸어 놓았으며, 자신의 호도 주자의 호인 ‘회암(晦菴)’의 ‘회’를 따서 ‘회헌(晦軒)’으로 삼았던 안향. 이처럼 안향이 도입한 성리학은 한국 유학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여 쇠퇴하고 어지러웠던 고려의 불교세력과 대항하고 마침내 불교를 압도함으로써 조선시대의 건국이념으로까지 성장하였으니, 그런 의미에서 안향은 우리나라에 있어 ‘제2의 주자’였던 것이다.
  • [씨줄날줄] 최태영과 이병도/ 이용원 논설위원

    지난달 30일 105세로 타계한 최태영 박사는 한국 법학계의 선구자였다. 서울법대 초대 학장을 지낸 그는 이승만 정권때 법무부장관·대법관 자리를 여러 차례 제의받았지만 모두 거절하고 학문과 교육에 일생을 바친 참 지성인이었다. 제헌 헌법의 초안을 만들었고 훗날 고려대 총장과 야당 당수를 지낸 유진오(1906∼87)가 그보다 6살 연하이자 학계 후배이니 어느정도 원로인지 짐작할 만하다. 그런 그가 77세 되던 해 법학을 버리고 한국상고사를 연구하겠다고 공식 선언했다. 최 박사가 뒤늦게 상고사 연구에 뛰어든 까닭은 ‘식민사학을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나의 세대까지만 해도 단군과 고조선을 의심한 일은 없다.”고 했다. 자신이 한국인이고 최씨인 것처럼 단군이란 존재는 그에게 논란의 대상이 아니라 원형질 자체였던 것이다. 아울러 그의 상고사 연구 선언은 수십년 지기(知己)인 두계 이병도(1896∼1989)에 대한 선전포고이기도 했다. 일본 유학시절에 처음 만난 두 사람은 광복후 서울대에서 교수로 함께 있으면서 더욱 가까워졌다. 법대 학장과 사학과 교수로 선 자리는 달랐지만 존경과 우정을 나누었다. 최 박사가 법학자로서 마지막 남긴 역저 ‘서양 법철학의 역사적 배경’(1977년간)의 서문을 두계가 써줄 정도였다. 하지만 상고사에 관한 한 최 박사의 두계 비판은 매서웠다.102세에 출간한 저서 ‘한국 고대사를 생각한다’에서 최 박사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사편수회를 이끈 일본학자 이마니시 류를 “학문은 보잘것없는 자가 편찬자가 된 것을 기화로 천하 대담한 짓을 했다.”고 비판했다. 이어 “이병도는 그런 이마니시와 배짱이 맞아 조선인 정신 빼는 역할을 맡음으로써 천추에 욕먹을 짓을 했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그래도 두 사람의 우정은 변치 않았고 이를 토대로 최 박사는 말년의 두계에게 단군과 고조선의 존재를 인정케 했다. 그 성과는, 둘이 1989년 ‘한국 상고사 입문’을 함께 써 발표하는 것으로 가시화했다. 최 박사는, 두계도 결국 단군을 인정했는데 후학들은 아직도 실증주의에 매달려 단군을 알지 못한다고 안타까워했다. 이제 최 박사마저 떠났으니 어찌 해야 단군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까 답답하기만 하다. 이용원 논설위원 ywyi@seoul.co.kr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교보생명-故신용호 창립자家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교보생명-故신용호 창립자家

    “이 사통팔달, 한국 제일의 목에 방황하는 청소년을 위한 멍석을 깔아줍시다. 와서 사람과 만나고, 책과 만나고, 지혜와 만나고, 희망과 만나게 합시다. 이곳에 와서 책을 서서 보려면 서서 보고, 기대서 보려면 기대서 보고, 앉아서 보려면 앉아서 보고, 베껴 가려면 베껴 가고, 반나절 보고 가려면 반나절 보고, 하루종일 보고 싶으면 하루종일 보고, 그리고 다시 제자리에 꽂아 놓고 사지 않아도 되고, 사고 싶으면 사 들고 가도 좋습니다.” 고 신용호 교보생명 창립자는 ‘대산(大山) 신용호’라는 평전에서 당시 세인의 반대를 무릅쓰고 금싸라기 땅인 종로 1가 1번지 교보빌딩 지하에 교보문고를 세운 일에 대해 이같은 논리로 동의를 이끌어냈다고 밝혔다. 한국의 미래를 모토로 만든 교육보험에도 청소년들의 지적 수준과 나라의 성장은 비례한다는 확신이 담겨 있다. 창업 이념도 국민교육진흥과 민족자본 형성이다. ●독립운동 집안에서 태어난 다섯째 아들 신 창립자는 1917년 8월 전남 영암군 덕진면 노송리 솔안 마을에서 부친 신예범 선생과 모친 유매순 여사의 6남 중 5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며 잦은 옥살이를 하는 바람에 어머니가 가장 노릇을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일곱살 때는 폐병에 걸려 죽는다는 선고도 받았다. 열살 즈음 병이 나았지만 학교를 가진 못했다. 형편이 어려운 데다 형들이 각종 애국 운동으로 집안을 돌보지 않아 어린 마음에도 그가 살림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낮에는 밭에서 일하는 대신 ‘책속에 길이 있다.’는 어머니의 가르침에 따라 밤에는 책을 읽었다. 동생의 책은 물론 주변에 보이는 책은 닥치는 대로 가져다 보았다. 겨울엔 잠과 싸우기 위해 방에 불도 때지 않고 책을 읽다 동상에 걸리기 일쑤였다. 당시 ‘천일독서’를 목표로 각종 위인전, 철학서, 고전, 사서를 섭렵했다. 비록 학교 문턱에는 가지 못했지만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 독서철학으로 스스로 내실을 다졌다. 함께 교보생명 창업을 도운 막내 동생 신용희(83) 전 회장을 제외하고 다른 형제들은 대부분 애국운동에 몸담았다. 큰형인 고 신용국옹은 일제시대에 항일운동을, 광복 후에는 청년 노동운동을 했다. 그 큰아들인 신동재씨가 2000년까지 교보의 부동산관리 전문 자회사인 교보리얼코의 회장을 지냈다. 둘째 형 고 신용율씨도 항일운동에 몸담았으며, 그의 둘째 아들 신평재(67)씨가 현재 교보생명 교육문화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다. 한일은행 상무로 재직하다 1991년 제의를 받고 교보생명 사장 등을 역임했다. 셋째 형 신용원옹은 도쿄 음악학교를 졸업한 뒤 항일음악가로 활동하다 납북했다. 넷째 형 고 신용복옹은 일제 당시 조선생명지사장을 지냈다. 막내 동생 신용희 전 회장은 목포상고를 나와 산업은행에서 일하다 한국전쟁 이후 줄곧 신 창립자를 도와 함께 일했다.1967년 교보생명 창립 이후에는 30년간 교보에 몸담으며 부사장, 회장 등을 지냈다. 그의 아들인 신인재(39) 보드웰 인베스트먼트 사장(8%)과 함께 교보생명 지분을 13.25% 갖고 있다. 신 사장은 고 신 창립자로부터 경영권을 승계받은 큰아들 신창재(52) 교보생명 회장으로부터 함께 일하자는 제의를 받기도 했지만 자신의 길을 고집했다. 신 사장은 최근 이동통신사에 솔루션을 공급하는 코스닥 상장업체 무선인터넷솔루션 회사인 필링크의 대표이사 직함도 얻게 됐다. ●교육열을 사업으로 연결한 기지…교육보험의 탄생 문학가를 꿈꿨지만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사업에 뜻을 세웠다. 약관이 되던 해에 서울로 갔고 이어 1936년 중국에서 양곡 수송 사업을 벌였지만 광복과 함께 10년간 닦은 기반을 버리고 빈손으로 귀국했다.1946년. 귀국후 첫 사업으로 전북 군산에 ‘민주문화사’란 출판사를 냈으나 외상 책값이 회수되지 않아 간판을 내렸다. 그렇게 몇 차례 사업에 실패한 뒤 문득 중국에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지만 한국에서는 논 한 뙈기 없어도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강한 교육열이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한국 부모들의 교육열은 무형원자재인 것이다.‘생·로·병·사’중 유일하게 보험이 빠져 있는 ‘생’ 부문에 교육보험을 끼워넣어 상품화하기로 했다. 당시 보험에 대한 인식은 형편 없었다. 일제시대 보험은 수탈 방식이자 보신(保身) 방편이었다. 더욱이 당시 1인당 국민소득이 50달러도 미치지 못해 보험에 들 여유가 없었다.1954년 정부가 보험업을 재개시켰으나 기존 생명보험 회사들이 대부분 휴면상태에 있을 만큼 보험업은 쑥대밭이었다. 그러나 세상이 험난해서인지 국민의 80%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때 그의 재기가 번뜩였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을 찾아가 “담배를 끊고 그 돈으로 보험을 들면 아들을 대학에 보낼 수 있다.”고 설득한 것이다. 창업 당시에는 ‘교육보험’이란 이름을 넣지 못했다.1958년 종로1가 60번지 2층짜리 건물에서 직원 46명과 함께 먼저 ‘태양생명보험주식회사’를 설립했다. 교육보험이란 업종상 생명보험으로 분류돼 상호에 교육보험이란 이름을 넣을 수 없었다. 교육열을 자원으로 만든 상품이었고 당시 생명보험에 대한 인식도 열악해 ‘교육보험’이란 이름을 포기하지 않았다.1958년 1월 창업한 뒤 관계 공무원을 끊임없이 설득, 같은 해 7월 상호변경 승인을 얻어 ‘대한교육보험’(현 교보생명)을 출범시켰다. ●슬하 2남2녀의 혼맥 1943년. 중국에서 한창 양곡수송 사업을 크게 벌이던 신 창립자는 당시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급히 귀국했다. 도착해 보니 아버지는 건강한 모습으로 그를 맞아주셨다. 더욱 놀라운 것은 “내일 모레가 네 장가가는 날이다.”는 아버지의 한마디. 결혼을 시키려고 거짓 소식을 보낸 것이다. 당시 남자 26세는 혼기를 놓친 나이였지만 그는 벌인 사업 때문에 아직 결혼할 때가 아니라고 여겼다. 도망칠 마음까지 먹었다고 고백하며 배려를 바랐으나 아버지가 식음을 전폐하고 드러눕는 바람에 결혼식을 치렀다. 부인 유순이(81)씨는 당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2년제 전수학교까지 마친 명문가 출신 규수. 사업에 전력을 쏟느라 가정에 소홀했던 남편을 탓하지 않고 어려운 형편 속에서 묵묵히 2남2녀를 길러냈다. 자녀들의 혼사도 그와 비슷하다. 막내 아들을 제외하고 모두 중매 결혼이다. 명문 대가와의 정략 결혼은 눈에 띄지 않는다. 큰딸 신영애(56)씨는 전 서울대학교 의과대 의학과 마취과학교실 교수 함병문(58)씨와의 사이에 현진(32), 지훈(31), 세훈(25) 등 2남 1녀를 두었다. 신영애씨는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은 지분 평가로 지난 2004년부터 단번에 350억원대 자산을 보유, 연말마다 언론에서 선정하는 여성 부호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둘째 딸 신경애(54)씨는 법조인에게 시집가 1남1녀를 낳았다. 남편 박용상(61)씨는 서울대 법대에서 박사까지 마친 뒤 사법시험에 합격, 서울고등법원 등에서 판사로 활약한 뒤 방송위원회 위원, 헌법재판소 사무처장, 국회 공직자윤리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변호사박용상법률사무소를 운영중이다. 박용상씨의 큰형 용설씨는 내외빌딩관리㈜ 대표, 동생 용삼씨는 내외엔지니어링 대표다. 고 신 창립자의 자리를 이어받은 큰 아들 신창재(52) 교보생명 회장은 부인 정혜원(48) 봄빛여성재단 이사장과의 사이에 중하(24)·중현(22) 두 아들을 두고 있다. 서울대 의대 교수 출신인 신 회장은 불혹이던 지난 1993년 교보에 발을 들여놓은 뒤 현재 직계 중 유일하게 교보에서 일하고 있다. 정 이사장은 이화여대 영문과를 나왔다. 막내 신문재(44)씨는 이정숙(44)씨와의 사이에 딸 혜진(18)을 두고 있다. 형제들 중 유일한 연애 결혼이다. 미국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그는 1991년부터 2005년 8월까지 광화문 교보문고내 문구 액세서리 음반 팬시용품 등을 판매하는 400여평 매장의 문보장을 비롯해 전국 6개 교보문보장을 운영해 왔다. 교보문고가 직접 문보장을 운영하기 위해 신씨로부터 지난 8월 문보장 사업권을 회수했다. 현재 새 사업을 구상중이다. ●지독한 완벽주의와 파격 인사 고 신용호 창립자는 지독하다 싶을 만큼 완벽하고 집요하다는 평을 받는다. 땅을 고를 때도 좋은 날, 궂은 날, 비온 다음날 등 두루 살피는 완벽주의자다.77년 명예회장,85년 창립자 등으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뒤에도 1990년대 후반까지 신입사원 면접에 직접 들어왔다. 사업을 시작한 지 3년이 지나도 실적이 저조해 본사 부장, 실장, 중역까지 나서 손을 들라고 권하자 그들을 나가게 한 뒤 ‘급료는 후불로 주겠다.’는 광고를 통해 간부 사원을 다시 구한 일화는 아직도 회자된다. 창업 10년 만인 1967년 회장으로 물러난 뒤 2000년 아들 신창재씨가 교보생명 회장에 취임하기까지 33년간 무려 사장이 19번이나 바뀌었다. 평균 수명이 1.7년이었다. 경영 안정을 위해 최고경영진을 쉽게 바꾸지 않는 업계의 관행과는 다른 것이다. 교보의 임원 인사는 상식을 뛰어넘어 기발하고 파격적이란 평이 나오는 이유다. 신창재 회장의 인사 스타일도 재계 안팎의 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 2002년 5월 취임한 장형덕 대표이사 사장의 경우 사장직을 폐지하는 형식으로 취임 10개월 만에 퇴임시켰다. 단일 지도체제가 더 효과적이라며 사장을 없애고 대신 부사장 3명을 임명해 집단경영체제로 개편했던 것. 그때부터 ‘대표이사 회장’ 밑에 ‘대표이사 사장’ 없이 ‘대표이사 부사장’ 체제로 가고 있다. 이어 지난 2004년 2월 박성규 부사장을 선임,‘집단경영체제’는 다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맨손으로 생나무를 뚫어라’ 고 신용호 창립자는 ‘죽고 나면 손해’란 보험에 대한 당시 인식을 바꾸는데 초점을 맞춰 교육보험 1호인 ‘진학보험’을 세계 처음 내놓았다. 죽어야 혜택을 주는 게 아니라 부모가 돈을 적립해 자녀가 초·중·고등학교를 진학할 때마다 학자금을 주는 상품이다. 먼저 단체들을 공략했다. 군인 단체 저축성 보험인 일명 ‘화랑계약’을 고안했다. 잦은 군의 이동에 탈락계약이 늘어 성과는 없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군 이동에도 추적·관리되는 시스템을 도입,1967년 육군과 170억원의 단체 계약을 맺었다. 파죽지세로 해군·한전 등 대형 단체들과 꾸준히 계약하는 개가를 올리며 승승장구했다. 판매 창구도 강화했다. 종로기독청년회관(YMCA)에서 대학생을 모아 보험강좌를 실시한 것을 계기로 대학지부를 설치, 대학생도 판매 채널로 끌어들였다. 지방유지를 직접 찾아다니며 기관장으로 영입하기도 했다. 상품에도 그의 기지가 엿보인다. 암 상품은 그가 처음 개발했다. 뿐만 아니라 보편적인 성인병도 하나씩 보험상품으로 만들었다. 보험업계 전산화 발상을 추진한 최초의 인물도 바로 그였다.1974년 학자금 선지급 업무를 처음 전산화했고 “컴퓨터를 모르면 간부가 될 수 없다.”며 전 사원을 상대로 ‘컴퓨터 활용능력 자격인증제’도 실시했다. 그가 인생을 이야기할 때 전반은 ‘맨손가락으로 생나무를 뚫는 과정’이고 후반은 ‘생나무 뚫는 것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보인 과정’이라 비유했다. 인생은 장애의 연속이지만 강한 정신력만 있다면 아무리 높고 힘든 목표라도 달성할 수 있다는 게 그만의 철학이다. 이같은 열성과 집념으로 1958년 당시 6대 생보사 중 막둥이로 태어난 교보생명은 창립 5년 만에 보유계약 56억원으로 업계 3위,1964년엔 보유계약 100억원 돌파로 업계 2위에 오른 뒤 1967년 설립 9년 만에 업계 정상에 섰다.‘맨손가락으로 생나무를 뚫은’ 쾌거가 아닐 수 없다. ●인생의 다른 한 축…교보문고 교육 보험은 대세가 아니었다.80년 들어 경제성장과 함께 늘어나는 사교육비를 감당할 수 없는 시절이 오면서 보험만으로 교육비를 해결할 수 없게 됐다. 변하는 고객 욕구에 따라 양로보험, 종합보장생활보험 등 일반 생명보험 상품의 비중이 커졌다. 교육보험만으로 경쟁력이 떨어지자 1995년 ‘교보생명’으로 사명을 바꾸었다. 삼성생명의 약진으로 교보는 1974년부터 업계 1위에서 2위로 밀려났다. 자산이 늘어나면서 관련 계열사도 속속 설립했으나 모두 보험으로 맡긴 고객의 돈을 운용하기 위한 금융 계열사였다. 부동산관리 전문회사인 교보리얼코(1979), 교보증권(1994) 등 총 9개 자회사를 세우면서 교보를 오늘날 35조원 규모의 금융 자본으로 성장시켰다. 그 중 금융과 동떨어진 업종이 하나 있다. 바로 교보문고(1980)다. 교육을 통한 민족부흥을 창업 이념으로 삼고 있는 만큼 따지고 보면 업종의 본질은 같다는 설명이다. 1980년 종로 1가 1번지에 사옥 교보빌딩이 세워지자 그는 지하에 서점 설립을 제안했다. 온갖 연줄을 동원하며 지하아케이드 자리 쟁탈전이 벌어지던 때였다. 간부들은 채산성이 약하다며 서점이 들어서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다는 의견을 냈고, 손해가 나면 보험회사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당시 허가관청인 재무부도 반대하고 나섰다. “우리 회사가 돈벌이를 목적으로 한다면 이 자리에는 당연히 으리으리한 고급상가를 들여야 합니다. 하지만 이 값진 땅에 책방을 크게 열어 청소년과 시민이 자유롭게 이용토록 한다면 그 효과가 어느 정도나 될지 상상해 보시오.” 손해가 나더라도 청소년의 정신역량을 키우는 일인 만큼 자신이 떠맡겠다고 설득했다.1985년에는 일반 독자뿐 아니라 학자들을 위해 80만종의 세계 논문도 공급했다. 지방사옥이 세워질 때마다 학생과 시민들이 교보문고 지점 설치를 요구했을 정도다. 대전, 성남, 대구, 부산, 부천, 강남 등에 속속 지점을 열었다. 광화문에 있는 교보문고를 찾는 고객 수는 일평균 4만 5000여명, 연간 1500만명에 달한다. 삶의 두 축이 교보생명과 교보문고라고 지적했을 정도로 애착도 컸다. 그러나 말년을 맞아 또다시 병마가 찾아 왔다.77세가 되던 1993년. 회사 정기건강 검진에서 간 기능에 석연치 않은 증후가 발견됐다. 담도암이었다. 의사들은 그에게 맛있는 음식 많이 먹고, 기운 있을 때 여행을 다녀오라는 처방을 내렸다. 사형 선고였던 셈이다. 그는 암과 싸우며 여생을 보내느니 살든 죽든 결판을 내겠다고 마음먹고 불가능하다는 담도암 수술을 감행했다. 수술후 그는 중환자실에서 목에 구멍을 뚫고 2개월이나 암흑 속에서 지내야 했다. 중환자실에서 나온 뒤 재활물리치료 반년 만에 골프장에 다시 나갈 수 있었다. 근력운동과 식이요법으로 건강을 유지하면서 90년대 후반까지 업무를 보고받는 등 경영에 관여했다. 그러나 8년 뒤 암이 간으로 전이되면서 몸이 약해졌다. 결국 2003년 9월 19일 오후 6시1분 서울대병원에서 노환으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86세였다. jhj@seoul.co.kr ■ 신창재회장과 정혜원 여사 “내조만 하며 살아온 탓에 사회공헌 사업은 꿈도 꿔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남편의 제의로 사회공헌 사업을 시작하게 됐지요. 내조와 아이들 뒷바라지에도 벅차지만 소명으로 여기며 열심히 하고 있어요.” 신창재(52) 교보생명 회장의 부인 정혜원(48)씨는 요즘 사회활동에 바쁘다. 그는 남편과 두 아들을 돌보는 일에 전념해온 전업 주부였다. 남편 신 회장으로부터 사회공헌 사업을 해보라는 제의를 받고 2004년 4월 성매매 피해여성 보호단체를 지원하는 봄빛여성재단을 창립,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순전히 남편 신 회장의 사재로 시작한 사회공헌 사업이다. 서울 종로구 적선동 사무실로 매일 출근하면서도 아이들이 완전히 홀로서기할 때까지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며 걱정이 많다. 그는 한사코 취재를 거부했다. 사회 활동은 하고 있지만 언론 대응 능력이 부족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이화여대 영문과 출신인 그는 소탈하면서도 적극적인 성격으로 책임감이 강하다는 평을 받는다. 중매를 통해 남편을 만났다고 밝혔다. 평범한 집안에서 데려온 며느리라고 스스로를 소개했다. 고 신용호 창립자의 수수함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는 남편 신 회장이 양복도 맞추러 갈 시간이 없을 만큼 바쁘다고 했다. 실제로 신 회장은 아버지의 유업인 교보문고와 교보생명을 어떻게 발전시킬 수 있을지 고민이 많다. 아버지만큼 골프를 좋아하지만 교보로 옮긴 이후 거의 필드에 나가지 못할 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다. 교보생명은 지난 2000년 5월 신 회장 취임과 함께 ‘질´경쟁을 선언하면서 업계 2위에서 3위로 밀려난 뒤 여전히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먼저 교보문고는 교보생명이 증자해 전자책 등 문화 콘텐츠를 생산하는 지식문화 전문회사로 거듭나도록 하겠다는 포부다. 출판업이 사양산업으로 전락하다 보니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하다는 판단에서다. 교보문고는 현재 부채비율이 416%로 은행으로부터 신규 여신이 어려운 처지다. 교보생명은 기존 주주가 여력이 없어 제3자 배정 방식으로 5000억원을 증자할 계획이다. 다른 생보사보다 상대적으로 지급여력비율(160%)이 낮다. 자기자본 확대가 이유다. 그러나 2대 주주인 자산관리공사가 난색을 표명하고 있어 문제다. 자산관리공사 소유·관리지분(41.26%)의 가치가 희석되지 않는 상태에서 잘 팔릴 수 있도록 협조해야 증자에 동의한다는 조건을 내세우고 있다. 업계는 신 회장이 과연 이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예의주시하고 있다. 교보생명의 한 임원은 신 회장에 대해 “아버지를 닮은 완벽주의자”라고 말했다. 경기고, 서울대 의대를 나와 서울대 의대 산부인과 교수로 살아오다 불혹이던 지난 1993년 아버지 고 신용호 창립자의 뜻에 따라 그간 배운 의학 공부를 포기하고 대산문화재단 이사장으로 교보생명에 발을 들여놓았다.1996년 11월 교보생명 부회장,2000년 5월 교보생명 회장으로 취임한 뒤 변화와 혁신을 기치로 삼고 전력 질주 중이다. 박성규 교보생명 부사장은 “과연 의사 출신이 기업을 어떻게 경영할지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를 보면 답이 나온다.”고 전했다. 의사 출신답게 깊은 통찰력과 분석력을 갖춘 데다 책을 많이 읽는 덕분에 멀리, 넓게 보는 안목이 있다고 평가했다. jhj@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 차장 이종락·이기철·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교보 사옥 ‘광화문 글판’ 15년째 명물

    서울 종로 1가 1번지에 위치한 교보생명 사옥은 2006년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계획하고 있다.지난 1980년 준공 이후 처음이다.25년이란 세월의 흔적이 믿기지 않을 만큼 여전히 세련된 멋을 풍기는 이 빌딩 곳곳에는 고 신용호 창립자의 아이디어와 손길이 묻어 있다. 답답한 도심속 명상의 여유를 제공한 ‘광화문 글판’은 15년째 이 지역 명물로 자리잡고 있다. 기업 홍보 플래카드나 걸었을 법한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면 창립자의 글판 아이디어는 매우 독특하지 않을 수 없다.그가 문학과 예술분야의 타고난 기질을 경영에 접목시킨 ‘감성경영의 선도자’란 평가를 받는 이유다. 그는 유달리 건축에 관심이 많았다. 사옥 설립 계획을 세우며 외국 건축물 견학에 나서기도 했고, 아예 전문통역관을 두고 외국의 유명 건축가들을 초청해 강의를 듣기도 했다.교보빌딩 3층의 집무실 책상에는 생전에 즐겨 봤던 건축 관련 도서들과 습지에 그렸던 설계도면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실제로 그는 사옥의 엘리베이터 자재까지 일일이 챙기는 열성을 보였다. 세계 10대 건축가인 마리오 보타에게 1987년 맡긴 강남 교보타워 설계는 1996년에야 완성될 수 있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깐깐한 관여와 완벽성 때문에 무려 열일곱 번이나 전문가의 설계를 퇴짜놓은 일은 건축에 대한 그의 전문성과 집착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어릴 땐 병마와 싸우느라 고향 친구를 사귀지 못했고 학교 문앞에도 가보지 못해 동창생이랄 만한 이도 없었지만,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가 이끌었던 골프모임인 ‘수요회’를 통해 각계 인사들과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그곳에서 만난 고 월전 장우성 화백은 교보빌딩의 색깔을 정해준 그의 40년 지기로 꼽힌다. 예술을 사랑해 이육록 화백의 후원자로 활동하며 골프장 회원권까지 선물로 주었을 정도다. 이 화백이 그린 436점의 수채화는 광화문 교보빌딩과 연수원인 천안 계성원 곳곳에 걸려 있다. 그는 말년까지 170㎝의 올곧은 서구적 체형을 유지하며 색조와 무늬가 유별날 만큼 깔끔하고 똑 떨어진 옷차림으로 눈길을 끌었다. 그에게 심미적 감각이 배어 있다는 평가가 그래서 나온다.jhj@seoul.co.kr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애경그룹-장영신 회장家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애경그룹-장영신 회장家

    “엄마, 걱정마. 이 앞에서 학생들 상대로 뽑기장사하면 되잖아!” 어린 마음에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엄마가 실의에 빠져 있는 모습이 안쓰러웠던 모양이다. 자기도 잘 먹던 뽑기장사해서 먹고 살면 되니 엄마보고 걱정 말란 것이다. 너무나 대견하고 안쓰러워 큰아들을 끌어안고 그때 처음 울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울지 않는 엄마, 강한 엄마가 되어 내 아이들을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자랑스러운 아버지의 자식들로 키울 것을 결심했다. 아이들이 클 때까지 아버지의 유업을 잘 지키고 있다가 성년이 되면 물려주리라. 이렇게 생각을 발전시켜 애경을 내가 맡아 아이들과 똑같이 건실하게 성장시키기로 다짐했다. 국내 최초의 여성 최고경영자(CEO)인 장영신(69) 회장이 자서전 ‘밀알심는 마음으로’에서 남편이 죽고 회사를 떠맡게 된 이야기를 이렇듯 생생하게 되짚었다. 아이들을 잘 키워야겠다는 강한 모성, 남편의 유업을 버려둘 수 없다는 아내로서의 의리, 애경 종업원들에 대한 책임감이 경영참여 이유라고 덧붙였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장 회장은 1970년 막내 아들을 낳은 지 사흘 만에 남편 고 채몽인 사장을 심장마비로 잃으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3남1녀의 어머니로 살림만 하며 지내던 12년차 주부가 국내 대표 생활용품 브랜드의 수장으로 거듭난 것이다. 애경 창립 17년 만의 일이다. 장 회장은 1971년 남편 타계 1주기가 끝나자마자 경리학원에서 복식과 부기를 배웠고 이듬해인 1972년 8월1일부터 출근했다.1954년 6월 남편 고 채몽인씨가 5000만환으로 세운 ‘애경유지공업주식회사’가 현재 LG그룹의 모태인 비누제조사 락희화학과 경쟁을 벌이며 사업확대에 박차를 가하던 시기다. 장 회장이 경영참여를 선언하자 시댁과 친정 가족은 물론 회사 임원들까지 반대하고 나섰다.“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부터 “그만두겠다.”고 협박하는 임원들도 있었다. 주변에서는 “애경이 얼마 가지 않아 망하겠다.”는 말도 했다. 남편이 죽은 뒤 사장 자리를 맡고 있던 둘째 오빠 고 장성돈씨는 장 회장이 취임하자 회사를 나가버리기도 했다. 당시의 심경에 대해 장 회장은 “잠자리에 들면서 ‘이대로 영영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회고했다. 매일 일감을 집으로 가져와 밤늦도록 공부했고, 관청에선 담당공무원의 질문에 솔직하게(?) 답한다는 이유로 동행했던 회사 임원으로부터 책상 밑으로 구둣발에 차이기도 했다. 경제인 모임에서는 홀로 여자라는 자격지심에 기둥 뒤에 숨어 몇시간이나 서 있다 오는 일도 다반사였다. 잘해보겠다는 일념으로 겁없이 뛰어들었지만 기업환경도 나쁜 것뿐이었다. 경영에 참여한 1972년 말부터 오일쇼크에 따른 전반적인 경기 침체가 시작됐다. 그러나 장 회장은 더욱 힘을 냈다. ‘불황에 투자하라.’를 모토로 공장을 지방으로 확대 이전하는 한편 남편이 계획만 했던 석유화학 원료제조 분야를 애경의 미래 지표로 삼아 애경유화·애경화학·애경PNC(전 애경공업)·애경정밀화학·코스파 등 관련 회사를 속속 설립했다. 비누 산업에는 한계가 있지만 본격적인 화학공업은 가능성이 무한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분야는 지금까지도 애경에서 매출 비중 50% 이상을 차지하는 주력 사업군이다. 남편이 설립한 비누회사도 소홀하지 않았다. 제품을 고도화시키는 데 집중했던 만큼 히트 상품도 꾸준히 내놓았다.1975년에는 분말 합성세제인 ‘크린업’을, 이듬해에는 액체세제 ‘써니’를,1980년 들어서는 세제 ‘스파크’를,90년 들어서는 클렌징 화장품인 ‘포인트’ 등을 잇달아 히트시켰다. 트리오도 이름은 같지만 세척력을 높이고 공해도를 낮춰 지금까지도 1등 주방 세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수줍은 소녀…‘터프우먼 마담 장(張)’으로 장 회장은 어머니 고 문금조씨와 아버지 고 장회근씨의 4남4녀중 막내딸이다.1936년 7월22일 서울에서 태어나 종로구 명륜동 1가 등에서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당시 일본 와세다대에서 영문과를 졸업한 대지주의 아들. 어머니 문 여사도 당시 일본 귀족학교인 쓰다여대 영문과를 나온 재원이다. 장 회장은 혜화동성당 유치원을 나온 뒤 혜화국민학교를 다녔다. 노래를 잘해 전국 콩쿠르에서 상도 자주 받았다. 건강하고 공부도 잘해 반장을 도맡기도 했다. 부모님의 학구열이 강한 덕에 형제들 모두 공부를 잘했다. 큰오빠 고 장윤옥씨는 일본대 전문부 상과를 졸업한 뒤 감사원에 들어가 5국장(부이사관)까지 지냈고, 미국으로 이민간 큰언니 장영옥(81)씨는 서울대 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했다.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한 둘째 오빠 고 장성돈씨는 애경유지 사장을 지낸 바 있고, 서울대 정외과 출신의 셋째 오빠 고 장위돈씨는 서울대 정외과 교수, 고 박정희 대통령 시절 청와대 정치담당특별보좌관, 이집트 총영사, 에콰도르 대사를 지내는 등 이력이 화려하다. 애경유지 이사를 지낸 넷째 오빠 장기돈(75)씨는 성균관대 상대 출신이다. 장 회장의 집안은 일제시대 유학을 갔을 정도로 부유했지만 광복 후 실시된 토지개혁으로 가세가 기울었고 6·25가 터지자 집안 형편은 더욱 어려워졌다. 아버지마저 사망하자 경기여중을 졸업하고 경기여고에 재학중이던 그는 돈 안들이고 대학을 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마침 고등학교 시절부터 외국어 재능을 인정받아 교장선생님이 일찌감치 유학을 준비시켰다. 전액 장학금을 받는 조건으로 1955년 미국 필라델피아 체스넛 힐 대학 화학과에 진학했다. 대학시절에도 합창단원으로 활동했고 당시 교내에서 오페라 하우스와 협연한 나비부인의 프리마돈나를 맡기도 했다. 애경이 쉘, 유니레버 등 다국적기업과의 합작을 무리없이 진행했던 배경에는 유학 생활로 다져진 영어실력과 당시 익혔던 외국 풍습에 대한 이해가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피란시절 여고생 신분으로 부산에서 사과장사를 한 적도 있다. 좌판을 벌여놓고 사과를 예쁘게 쌓아놓았지만 막상 손님이 와서 얼마냐고 물어보면 먼산 바라보기 일쑤였다. 부끄러움이 많았던 탓에 장사꾼이 아닌 척한 것이다. 그러나 애경을 경영하면서 그에게는 ‘호랑이’‘터프우먼’‘마담장’ 등의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80년대 들어 새로운 돌파구로 외국계와 합작에 집중했을 당시 그쪽에서 공동대표를 요구하면 그는 “여기는 한국 회사다. 너희가 한국에 대해 뭘 아느냐. 한국 문화를 이해할 때까지 너희들은 뒤에서 지켜봐라.”고 충고했다. 합작 기념식에서 태극기를 달지 말라고 요구받으면 애국가 봉창, 국기에 대한 맹세까지 순서대로 진행했다. 당시 외국인들은 이런 장 회장을 놓고 ‘마담장 터프우먼’이라고 외쳤다. 사내에서는 ‘호랑이’로 통했다. 화가 나면 직설적으로 퍼붓는 성격과 한번 결정하면 매몰차게 추진해 나가는 돌파력 때문이란 설명이다. 물론 풀어주는 것도 그의 몫이다. 그래서 ‘너그러우면서도 불같다.’는 평을 받는다. ●남편과는 어릴적 이웃사촌 장 회장과 남편 채몽인씨는 이웃사촌으로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다. 고 채씨는 장 회장이 미국으로 유학가기 전부터 애정 공세를 퍼붓다 미국까지 따라가 무려 3년11개월 동안 구애 공세를 펼쳤다. 공개청혼으로 남편의 존재는 대학내에도 다 알려져 수녀 교수들로부터 “왜 저 좋은 사람과 결혼하지 않느냐, 이해를 못하겠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그는 졸업후 약속대로 서울로 돌아와 23세이던 1959년 6월 신당동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자식들(3남1녀)의 혼사는 장 회장보다 더 빠르다. 대부분이 대학시절에 결혼을 모두 끝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모두 연애 결혼이다. 큰아들인 채형석 애경그룹 부회장(45)은 1982년 성균관대 경영학과 4학년 재학 당시 학교에서 만난 홍미경(43)씨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 친구로부터 소개받아 교제 1년 만에 결혼했다. 당시 부인은 1학년에 재학중인 생활미술학과 새내기. 채 부회장은 1983년 졸업후 미국 보스턴대에 MBA를 받은 뒤 1985년 애경산업 생산부 마케팅부 등을 섭렵했다. 부인 홍씨도 함께 유학을 떠나 보스턴대에서 미술을 전공했다. 홍씨는 전공을 살려 현재 종로에서 갤러리 ‘사간’을 운영 중이다. 불혹을 넘긴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출중한 미모가 인상적이다. 장 회장을 잘 아는 사람들은 그가 평소 “우리 큰애(큰며느리)는 얼굴도 예쁘고 마음도 정말 착하다.”는 말을 자주 한다고 전한다. 인천교대 음대 교수를 지낸 장인 고 홍종수옹은 서울시립교향악단,KBS교향악단 등에서도 활약한 음악가다. 장 회장의 맞손녀이자 큰아들인 채 부회장의 딸 문선(19)양은 할머니의 성악 실력과 외할아버지의 음악 재능을 모두 물려받아 현재 미국 맨해튼 음악학교에서 성악을 공부하고 있다. 유통부문을 맡고 있는 둘째 아들 채동석(41) 애경백화점 사장은 성균관대 철학과 3학년 때 미팅으로 만난 동갑내기 이정은(41)씨와 결혼해 졸업하기 전 1년 동안 학생 부부로 지내기도 했다. 채 사장은 미국 조지 워싱턴대 국제경영학 석사 과정을 마친 뒤 1991년 애경에 합류했다. 현재 애경백화점,AK면세점, 수원애경역사, 평택역사 등 애경의 유통부문을 맡고 있다. 서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이씨는 현재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서 프랜치 퓨전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다. 이씨의 아버지 이병문(75)씨는 고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예편한 4성 해병대 사령관 출신으로 아세아시멘트 회장을 지냈다. 큰딸 채은정(42)씨는 외숙모가 같은 아파트에서 살던 안용찬(46) 애경 사장을 소개해줘 결혼한 경우다. 안 사장이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 MBA과정 재학 당시 잠시 한국에 들렀을 때 채씨 외숙모의 권유로 은정씨를 만났다. 은정씨도 대학 3학년때 결혼했다. 은정씨는 이화여대 조소학과를 나와 미국 애크리하트대에서 그래픽을 전공한 뒤 1998년 애경산업에 들어왔다. 애경 마케팅지원부문 상무를 맡고 있다. 채 부회장과 연세대 경영학과 77학번 출신인 안 사장은 이미 대학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다. 채 부회장은 “안 사장이 나의 고등학교 동창들과 친구 사이여서 이미 대학시절부터 안 사장을 알고 지냈다.”면서 “성실하고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보니 여동생의 남자친구가 되어 있었고 유학을 끝낸 뒤 애경으로 꼭 와줄 것을 내가 청했다.”고 말했다. 안 사장은 1987년 애경산업 마케팅부에 입사하기 이전 유학을 마치고 미국 폰즈사에서도 마케팅 담당 업무를 맡았다. 통역 장교 1기 출신인 안 사장의 아버지 안상호(76)씨는 육군 참모총장 수석 보좌관, 미국 엔지니어링 회사 플로 코리아의 한국 대표 등을 지냈다. 막내 아들 채승석(35) 애경개발 부사장은 50만평 18홀 규모의 경기도 광주시 중부 컨트리클럽을 운영하는 애경개발을 맡고 있다. 애경개발은 1987년 출발 당시부터 애경의 계열사중 유일하게 주력인 세제·화학과 동떨어진 업종이다. 미스코리아 출신으로 한때 SBS아나운서로도 활동했던 한성주(31)씨와 99년 6월 결혼,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단국대 사학과 89학번인 채 부사장은 형제들 중 유일하게 어머니를 닮아 노래를 잘한다. 당초 친정에서 장 회장의 경영참여를 반대했지만 앙금은 남아 있지 않다. 조카들도 여럿 애경에 몸담고 있다. 둘째 오빠인 고 장성돈 전 애경유지 사장의 큰아들인 장인규(53)씨는 과거 애경PNT(전 경신산업) 사장으로 일하다 미국으로 이민갔고, 둘째 아들 장인원(49)씨는 계열사인 코스파 사장으로 재직 중이다. 장 회장의 셋째 오빠인 고 장위돈씨가 낳은 3형제 중 큰아들인 우영(37)씨는 애경 화장품사업부장으로 있다. ●애경백화점에 남다른 애착 장 회장은 회사를 맡은 이후 많은 시련을 겪었지만 한번도 울어본 적이 없다. 그러나 큰아들 채 부회장이 1993년 9월10일 애경백화점 개점식 인사말에서 “이 백화점을 돌아가신 아버님께 바칩니다.”라고 말한 순간 ‘마음이 온통 눈물로 범벅이 됐다.’고 회고했다. 애경백화점 본점인 서울 구로구점은 창업자인 남편 고 채몽인씨가 타계하는 순간까지 비누를 만들었던 창업 터전이다.1958년 우리나라 최초의 미용 비누인 ‘미향’을 만든 곳으로 70년대까지 ‘트리오’ 등 세제를 만들다 공장이 대전으로 옮겨가면서 계속 창고로 써왔다.“아버지가 물려준 땅이니 잘 연구해서 활용해보라.”고 맡긴 지 3년 만에 1만평 부지가 백화점으로 거듭났다. 장 회장은 애경백화점을 두고 ‘아버지와 아들의 만남´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지금도 두 아들이 사이좋게 이 백화점 5층에서 함께 사무실을 쓰고 있다. 장 회장이 시간이 날 때마다 백화점을 다녀갈 정도로 남다른 애정을 보이는 이유다. 장 회장은 즐기는 인생을 살아본 적이 없다. 채 부회장은 장 회장에 대해 “희생하는 삶만 사신 분”이라면서 “항상 어머니를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아왔다.”고 말했다. 장 회장은 여름휴가를 가본 적이 없고 남들이 취미를 물으면 ‘빨래’라고 대답할 정도로 아직도 집안 일을 혼자 한다. 말년에 잠시 정치에 참여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크게 어긋나는 길은 아니란 평이다.1997년 고사해 오던 여성경제인연합회 회장직을 맡으면서 여성들이 기업하기 불편한 환경을 고쳐야 한다고 마음먹었다.1999년 민주당 신당창당 준비위원 공동대표로 영입된 뒤 백화점이 있는 구로를 텃밭삼아 16대 국회의원으로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왜 정치를 하느냐. 이미지 버린다.”는 우려가 많았지만 여성경제인들을 도와야 한다는 선배로서의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더이상 정치에 참여할 뜻은 없다. ●가족간 우애는 애경의 힘 장 회장은 경영에서 손을 뗐다. 애경 창사 50주년을 맞았던 지난 2004년 구로동 본사 회장실을 비웠고 결재도 큰아들에게 모두 맡기고 보고도 받지 않는다. 애경복지재단 일에 관여하며 무역협회 부회장직만 맡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취미삼아 중국어를 배우고 있고, 순환기계통이 안 좋은 탓에 홍콩에 침을 맞으러 다니고 있다. 살아오면서 가장 보람된 일로는 “아이들이 잘 자라주고 화목하게 지내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가족간 볼썽사나운 재산 분쟁이 많은 재계에서 애경가문 형제들은 함께 회사를 키워가며 우애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채 부회장과 동생 채동석 사장은 10년 넘게 한 사무실을 쓰고 있다. 채 부회장은 “인맥이랄 만한 사람들을 알지도 못하고 술을 먹거나 함께 어울리는 대상이 모두 형제들이다.”면서 “네 남자가 모여 술을 자주 먹는다.”고 말했다. 며느리들도 친하다. 큰동서와 작은 동서도 단짝 친구 같다. 형제들이 화목할 수 있는 주요 원인이란 지적이다. 채 부회장은 1985년 입사한 뒤 점차 그룹의 덩치를 키우는 데 주력했다.1993년 애경백화점 구로점을 열며 유통업계에 뛰어든 뒤 AK면세점(2001년) 애경 2호점인 수원애경역사(2003년)로 확대했고 3호점 평택역사는 2009년 완공된다. 제주도와 함께 설립한 ㈜제주항공을 통해 2006년 6월부터 민간항공 사업도 벌인다. 채 부회장은 그룹 전체를 아우르는 역할을 맡고 있으며, 동생 채동석 사장은 유통부문을, 처남인 안용찬 사장이 생활용품 부문을 키우고 있다.2세대에 와서 생활용품과 기초화학의 양축을 키워가는 한편 유통과 항공으로까지 영역을 확대하고 있는 것이다. 채 부회장은 고혈압이 있어 거의 매주 등산을 즐기고 있다. 유아세례를 받고 결혼식도 명동성당에서 올린 천주교 신자이지만 산을 자주 찾는 탓에 항상 절을 찾아 기도를 드리는 습관이 생겼다. 그는 산사를 찾을 때마다 “가족 모두 건강하고 화목하게 지내는 것에 항상 감사드린다는 내용으로 기도를 드리고 있다.”면서 “애경의 힘은 형제간의 우애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말했다. jhj@seoul.co.kr ■ 장회장 ‘유별난 시간개념’ 애경가(家) 사람들은 시간관념이 유별나다. 장영신 회장은 약속 시간보다 최소한 10분 먼저 도착하는 습관을 갖고 있다. “나는 사업상으로나 개인적으로 약속을 하면 꼭 10분 전에 나가 상대방을 기다린다. 약속 시간보다 단 5분이라도 늦는 사람은 첫 대면부터 뭔가 부족한 사람이란 평가를 하게 된다. 나는 부하 직원들을 평가할 때도 시간관념을 하나의 척도로 삼는다. 시간 하나 제대로 못지키는 사람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게 내 생각이다. 시간은 비즈니스를 포함한 모든 인간 관계에서 성패를 좌우하는 첫 관문이다. 약속 시간을 지키는 작은 사실 하나가 그 사람의 성격과 인격을 대변한다.”(자서전 ‘밀알심는 마음으로’에서) 그가 경영일선에 있을 때는 ‘나인 투 파이브’ 원칙을 지켰다.9시에 출근해 5시에 퇴근하는 게 아니라 늦어도 10시에 잠자리에 들어 새벽 5시면 기상하는 것이다. 일어나자마자 조간 신문을 읽고 그날의 주요 업무를 점검하고 계획했다. 새 사업이나 프로젝트를 기획하는 것도 아침 시간을 이용한다. 회의도 결재도 오전에 처리한다. 관청과 은행이 문을 여는 아침 9시 이전에는 하루 계획을 세워야 한다. 일을 놓은 지금도 새벽에 일어나는 습관은 그대로다. 그래서 애경에는 오전 8시만 되면 결재를 받기 위한 줄이 이어지고, 오전 9시면 그날 결재받는 것은 포기해야 할 정도라는 말이 나온다. 철저한 시간관념은 애경가 사람들에게도 그대로 배어 있다. 아들 딸은 물론 며느리 사위 모두 새벽형 인간이다. 채형석 부회장은 한술 더 떠 새벽 4시면 일어나 아침밥을 꼭 챙겨먹고 출근한다. 약속 시간을 지키는 것도 마찬가지다. 식구들끼리 밥을 먹기로 하거나 아버지 산소에 가기 위해 모일 때는 아예 30분 먼저 나갈 정도다. 채 부회장은 “식사 시간을 통해 가족 모임이 주로 이뤄지는데 식당 문을 여는 시간이 바로 우리 가족이 만나는 시간”이라면서 “예컨대 6시에 모이기로 해도 식당이 문을 여는 오후 5시 30분이면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여 있다.”고 전했다. 급한 성격 탓에 식사를 시작하면 1시간내에 모두 끝내고 일어선다. 한 번은 막내인 채승석 부사장이 아버지 산소에 가기 위해 약속한 정시에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었더니 이미 식구들이 모두 제사를 지낸 뒤 산에서 내려오고 있더라는 일화도 있다. jhj@seoul.co.kr ■ 장영신 회장과 제주와의 인연 장영신 회장의 ‘제주 사랑’은 남다르다. 그의 제주 인연은 1970년 창업주인 남편 고 채몽인 사장이 타계하면서 더 각별해졌다. 장 회장은 남편의 조의금 전액을 제주도 재경장학회에 기증했다. 장학회는 이 돈으로 지금까지 매년 30명, 모두 1300여명의 제주 출신 대학생을 후원했다. 제주도는 고 채 사장의 고향이다. 큰아들 채형석 부회장도 최소한 1년에 세차례 이상 제주도에 간다. 선산이 모두 중문 색달동에 있다. 꼭 성묘가 아니더라도 아이들과 함께 가끔 간다. 채 부회장은 “제주는 아버지의 고향이지만 저도 국민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건강이 안 좋아 제주도에 요양을 가셨을 때 동행했기 때문에 한동안 지낸 기억이 있어 친근하다.”면서 “할아버지가 조선시대 제주도에서 현감을 지내기도 했다는데 증조 할아버지까지만 기록이 있어 뿌리를 찾아보고 싶다.”고 말했다. 장 회장도 제주에서 지낸 시절이 있다. 경기여고 재학시절 6·25때 제주로 피란가 1년간 지냈다. 장 회장은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제주도 여성들을 보면서 여성이 얼마나 강한지를 깨달았다.”고 회고한 바 있다. 애경은 제주도와 손잡고 내년 6월부터 도민의 숙원인 저가항공 시대 대열에 동참한다. 애경은 제주도와 합작해 저가항공사인 ㈜제주항공을 만들었다.㈜제주항공의 왕복 비용은 기존 항공비용의 70% 수준인 11만원선.㈜제주항공의 애경 지분은 75%다. 채 부회장은 “이윤이 크게 나는 사업은 아니지만 중국과의 경쟁에서 영향을 받지 않을 영역이라고 보고 사업을 결심했다.”고 말하지만 주변에서는 “장 회장의 제주 사랑과 무관치 않다.”고 평가했다. jhj@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 차장 이종락·이기철·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儒林(478)-제4부 百花齊放 제2장 性善說(54)

    儒林(478)-제4부 百花齊放 제2장 性善說(54)

    제4부 百花齊放 제2장 性善說(54) 맹자는 평소 자신에게 엄격하였다. 맹자의 엄격한 이상주의를 엿볼 수 있는 것은 그가 남긴 다음과 같은 말을 통해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구인(九 )의 깊이까지 우물을 팠다 해도 샘물이 솟아나는 곳까지 파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물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掘井九 而不及泉 猶爲棄井也)” 즉 우물을 깊이 파들어 가더라도 수맥에 도달하기 전에 끝이 나면 그것은 우물을 포기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뜻인 것이다. 일찍이 ‘그만두어서는 안 될 때 그만두어버리는 사람은 그만두지 않는 일이라고는 없을 것이다.(於不可已而已者 無所不已)’라고 말하였던 맹자였으므로 말년에 맹자는 고향에서 제자들과 함께 수맥이 나올 때까지 우물을 파고 또 파는 학문의 길에 정진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맹자는 유가의 우물에서 수천 년 동안 마르지 않는 수맥을 파헤쳐 동양정신의 갈증을 채워주는 영원한 샘물을 퍼 올리게 하였으니, 맹자야말로 인류가 낳은 참스승인 것이다. 그리하여 맹자는 BC289년 1월15일 마침내 고향에서 숨을 거두게 된다. 이때 맹자의 나이는 84세. 그러나 맹자의 마지막 모습은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역설적으로 그가 죽은 후에 무덤도 알려진 바가 없고 그 후 1300여 년이 흐를 때까지 망각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맹자가 이처럼 아성이었으면서도 1300여 년 동안 역사의 뒤안길에서 잊혀진 존재로 망각되어질 수 있었던 것은 맹자가 항상 공자와 더불어 역사의 부침 속에 때로는 각광을 받고, 때로는 몰락하였던 운명을 함께하였기 때문이었다. 맹자의 무덤이 처음으로 발견된 것은 북송(北宋)의 초기시절이었던 1037년. 그것은 송대에 이르렀을 때야 유학은 다시 큰 변전을 일으켜 성리학(性理學)으로 거듭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송대 이후에 일어난 새로운 방법의 유학은 성리학. 따라서 이 때의 유학을 신유학(Neo-confucianism)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인 것이다. 송대로 들어오면서 많은 학자들이 도교와 불교에 영향을 받은 인간의 이성과 논리에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으며, 이제껏 유가들이 기울여 온 인간의 문제에서 한 차원 더 높은 형이상학적 문제에까지 시선을 돌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신유학자들은 앞을 다투어 그들의 학문적 지주인 맹자의 무덤을 찾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처음으로 발견한 것은 맹모지(孟母池)라는 연못. 맹자를 위해 세 번이나 이사를 하였던 어머니 급씨의 이름을 딴 맹모지라는 연못이 있으면 그곳 어딘가에 맹자의 무덤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였던 유학자들은 마침내 산둥성 추현 북쪽 30리 사기산(四基山)에 묻혀 있던 맹자의 무덤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산둥 추현시 동북쪽 12.5㎞ 지점인 사기산 서쪽 기슭에 위치한 맹자의 무덤 이름은 맹림(孟林). 맹자의 무덤이 발견됨과 동시에 명묘를 건설하고,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기 시작함으로써 맹자는 역사적으로 복원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이후 원나라 문종은 서기 1330년, 맹자에게 ‘추국아성공(鄒國亞聖公)’이란 칭호를 내림으로써 맹자는 불멸의 스승으로 부활하게 되었으니, 맹자야말로 온갖 사상의 꽃들이 한꺼번에 피어난 백화제방(百花齊放)에서 단연 돋보이던 만세일화(萬世一花)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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