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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北 삼지연 읍지구 준공 크리스마스 마을 연상케, 최룡해 콧물 준공사

    北 삼지연 읍지구 준공 크리스마스 마을 연상케, 최룡해 콧물 준공사

    북한 관영방송이 3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참석한 삼지연군 읍지구 준공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조선중앙TV는 이날 오후 3시 방송에서 김 위원장의 삼지연군 준공식 참석 소식을 22분 40초 분량의 녹화 영상으로 보도했다. 영상에 잡힌 삼지연군 읍지구는 경사가 가파른 지붕의 건물과 하얀 눈이 쌓인 모습이 유럽 산악 마을을 연상케 했다. 특히 초록색과 빨간색 지붕이 많아 크리스마스를 연상케 했다. 조선중앙통신은 김 위원장이 “건물들의 외장재와 철판 지붕재의 색깔을 건물의 용도와 특성에 맞게 선정하여 구획이 명백히 구분되게 하며 외부마감을 백두의 천연수림과 잘 어울리게 점잖은 색으로 하도록 지시했다”고 전했다. 또 “민족성과 현대성, 북부 고산지대의 특성을 잘 살리고 실용성과 다양성, 조형 예술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함으로써 삼지연군 읍지구를 현대문명이 응축된 산간 문화도시의 전형으로 일떠세웠다”고 덧붙였다. 영국 BBC는 강제 노역이 성행했고 북한의 다른 지역에서는 식품과 연료, 전력, 물 등 부족으로 고통받고 있는데 이곳은 유럽의 스키 마을을 연상케 하는 삼지연 읍지구가 준공됐다고 지적했다.‘백두혈통’의 성지인 삼지연군은 김 위원장이 체제 우월성 홍보 등을 위해 야심 차게 재개발을 추진해온 곳으로 준공식에는 매서운 추위에도 많은 주민들이 몰렸다. 재개발에 참여한 군인과 건설자, 주민 등 수백명이 김정일 국방위원장 동상 앞 삼거리를 가득 메웠고, 동상 앞 단상에는 김 위원장 등 노동당 고위 간부들을 위한 자리가 마련됐다. 김 위원장은 가죽 소재로 보이는 검은색 더블 버튼 코트 차림으로 근처 건물에서 걸어나왔고, 주민들이 만세를 외치며 손뼉을 마주쳤고, 인공기를 흔들며 색색의 풍선을 띄웠다. 여성 근로자와 군인 건설자, 돌격대원이 각각 꽃다발을 김 위원장에게 건넸다. 김 위원장의 의전을 담당하는 현송월 당 부부장 겸 삼지연관현악단장이 꽃다발을 넘겨받고 의자를 뒤로 빼주는 등 분주히 움직였다. 그동안 비교적 가벼운 옷차림을 선보인 김 위원장은 이날 검은색 가죽 장갑까지 꼈다. 북한은 일반적으로 김 위원장의 행보를 행사 다음 날 보도하는데 전날 삼지연군 백두산의 최저 기온은 영하 23도, 최고 기온은 영하 15도였다. 단상 위 간부들 모두 털모자를 썼고, 주민들도 두꺼운 옷과 귀마개, 장갑 등으로 무장했다. 그런데도 대부분 볼과 코 등이 빨갰으며, 장갑을 끼지 않은 군인들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준공사를 맡은 최룡해 국무위원회 제1부위원장은 콧물을 흘리면서도 미동도 하지 않고 원고를 읽어내려갔다. 행사는 김 위원장이 황금색 가위로 준공 테이프를 자르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주민들은 인공기와 꽃다발을 흔들며 환호했고, 2·16사단 건설자들이 단상 앞으로 행진하자 김 위원장이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인민대중 중시의 우리나라 사회주의 제도 만세!’, ‘백전백승의 불패의 당 조선로동당 만세!’ 등을 적은 현수막이 풍선에 매달려 떠 있고, 축포가 울려 퍼졌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미래유산 톡톡] ‘서울로7017’ 동서 연결 효과… 그곳엔 공동체가 있다

    [미래유산 톡톡] ‘서울로7017’ 동서 연결 효과… 그곳엔 공동체가 있다

    서울 미래유산인 서울역 앞 ‘서울역광장’은 1919년 3·1운동의 주요 거점이었다. 또한 만세운동 이후 새로 부임한 사이토 마코토 총독에게 강우규 의사가 폭탄 세례를 안겨 준 항일의 근거지다. 해방 이후 1960년대에는 무작정 상경하는 사람들로 붐볐고 1980년과 1987년에는 민주화를 위한 외침이 메아리쳤던 곳이다. 이 두 지역을 연결해 주는 게 서울시장 김현옥에 의해 만들어진 ‘서울역고가도로’다. 이 또한 서울미래유산이다. 서울역고가도로는 40여년 만에 철거돼 2017년 ‘서울로7017’로 새롭게 태어났다. ‘서울로7017’은 서울역고가도로가 1970년에 개통돼 2017년에 서울로로 바뀐 것을 의미한다. 서울역 고가도로를 설치한다고 처음 발표할 때 많은 사람들이 반대했다. 건축협회를 비롯해 전문가들은 교통 흐름에 큰 변화가 없을 것이고 나중에 흉물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고가의 설치로 이 지역 교통 흐름은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왔고, 나뉘었던 동과 서가 연결되는 효과가 생겼다. 이를 통해 서울역 서쪽에는 새로운 산업군이 형성됐다. 남대문과 명동 쪽 의류를 납품하던 봉제공장들이 회현동과 후암동에서 월세와 인건비가 싼 서계동, 만리동 쪽으로 대거 유입되기 시작한 것이다. 상대적으로 여성복을 납품하던 이들이 이쪽 지역으로 옮겨 오면서 서계동 유역은 소규모 가내공업 형태의 봉제공장들이 우후죽순 늘어 갔다. 서부권의 봉제공장이 얼마나 있는지 아직도 정확히 파악이 안 되는 실정이다. 이 봉제공장들이 이 지역의 생활 흐름을 바꿔 놨다. 기무사 수송대였던 곳에 국립극단이 옮겨 오고 ‘백성희, 장민호 극장’이 들어서면서 문화적으로도 많이 보완됐다. ‘서울역 일대 도시 재생 프로젝트’로 새롭게 들어선 지역 공동체 거점인 ‘감나무집’, ‘은행나무집’도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청파로를 수없이 다니면서도 이곳의 정체성을 아는 사람들은 드물다. 과감하게 차에서 내려 서계동 골목에 나서 보자. 그러면 아직 변질되지 않은 공동체의 모습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철길 저쪽에는 ‘살아내려는 사람들’이 있고, 이쪽에는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한이수 서울도시문화지도사
  • [흥미진진 견문기] 근·현대 사이 회색지대… 색다른 ‘80년대 이전 모습’

    [흥미진진 견문기] 근·현대 사이 회색지대… 색다른 ‘80년대 이전 모습’

    서울역광장은 떠나는 사람과 기다리는 사람, 모이는 사람 등으로 북새통이었다. 근현대의 시간 속에 많은 의미를 담은 이곳은 지금 ‘문화역 서울 284’로 사용되고 있다. 1919년 삼일만세를 외쳤던 사람들, 1980년 5월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던 민주주의의 함성이 메아리치던 곳이다. 서울역 앞 고가를 일종의 스카이워크로 바꾼 ‘서울로7017’을 지나갔다. 1970년대에 만들어진 고가도로를 2017년 17개의 길로 바꾸었는데, 그 높이가 17m라는 의미를 가진 이름이다. 고층 빌딩숲 사이로 254종의 대형 화분들이 놓여 있는 이색적이 공간이 펼쳐졌다. 철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철길들을 바라보며 인천, 부산, 만주 등 일제가 우리나라를 통해 중국으로 진출하기 위한 통과지로서의 기반시설로 철로를 냈다는 해설자의 설명에 마음이 씁쓸했다. 철조망에 걸려 있던 수없이 많은 기차 모양 열쇠고리에서는 통일을 염원하며 평화열차가 달리기를 바라는 시민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화려한 빌딩들을 등지고 서계동으로 가는 길, 후미진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니 간판도 없는 낙후된 건물들이 보였는데 대부분 영세한 봉제공장들이었다. 2000여개나 밀집돼 있다고 했다. 공장 건물이 있던 자리 한가운데로 도로가 나면서 두 동강 난 건물이 신기했다. 가파른 청파언덕 위에서 바라본 서울역 주변은 근대와 현대가 부딪치는 회색지대였다. 도시재생 프로젝트에 따라 오래된 가옥을 사들여 은행나무집이나 감나무집과 같은 이름을 내걸고 마을 공동체 공간을 만들고, 지역 주민들이 자유롭게 들락거리면서 육아와 교육, 취미의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멀리서도 한눈에 보이던 체리 빨강 건물인 국립극단은 넓은 대지에 단층 구조로 된 것이 특이했는데 과거 국군기무사령부 수송대 자리를 활용한 것이라고 했다. 1981년 당시 막사와 사무실, 전기창고, 차고 등으로 쓰여 주변에 높은 건물을 올리지 못하게 했다고 했다. 이 일대가 1980년대 이전의 모습으로 머물러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강렬한 컬러를 입히고 인조잔디를 깔았지만 다소 어둡다는 분위기를 지울 수 없었다. 이지현 책마루독서교육연구원
  • 여운형의 일본行...상하이 임시정부 의견 분분했던 이유는

    여운형의 일본行...상하이 임시정부 의견 분분했던 이유는

    “내가 이번에 온 목적은 일본 당국자와 그 이 식자(識者)들을 만나 조선 독립운동의 진의를 말하고 일본 당국의 의견을 구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100년 전이던 1919년 11월 27일, 몽양 여운형 선생은 일본 도쿄제국호텔에서 이렇게 연설을 시작했다. “나에게는 독립운동이 평생의 사업”이라고 밝힌 몽양은 “한인이 민족적 자각으로 자유와 평등을 요구하는 것은 신이 허락하는 바인데, 일본 정부가 이것을 방해할 무슨 권리가 있는가”라고 꾸짖었다. 1919년 3·1 만세운동에 놀란 일본 정부는 몽양을 독립운동 대열에서 이탈시켜 친일 자치주의자로 회유하고자 일본으로 초청했다. 그러나 34세 식민지 청년 독립운동가는 당당하게 조선 독립을 주장하며 오히려 일본 제국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몽양의 연설은 그저 당당한 쾌거에만 그치지 않는다. 몽양의 100년 전 일본행이 임시정부의 급격한 독립운동 노선 분화를 예고하는 사례라는 주장이 나와 눈길을 끈다. 윤대원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연구원은 27일 도쿄 연설 100주년을 맞아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가 연 ‘3·1운동의 대단원, 몽양 여운형 도쿄 제국호텔 연설’ 학술 심포지엄에서 이렇게 밝혔다. 윤 연구원은 1919년 11월 14일부터 12월 10일까지 4주간에 걸쳐 상하이 한인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몽양의 도일 기사들을 통해 당시 임시정부 동향을 설명했다. 몽양의 도일이 상하이 한인사회에 알려진 것은 그가 떠난 다음 날이었다. ‘독립신문’은 11월 15일 “일본정부 당국자의 간청으로”, “여운형씨는 14일 오전 8시 발” 도일의 길에 올랐다고 전했다. 도일의 목적에 관해 “일본정부 당국에 대하여 독립운동에 대한 한족(韓族)의 의사를 설명함이요”라고 했으며, 도일의 의미에 관해서는 “순전히 개인의 자격으로 함이요 우리 정부와는 물론 내가 관계한 단체와도 상관이 없다”고도 했다. 상하이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는 “여씨 이하 2인의 차행(此行)은 순전히 단독적 행동이요 임시정부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포고 제1호를 반포하기도 했다. 여기에 신채호, 한위건, 원세훈, 옥관빈, 신국권 등이 몽양을 비판하는 선언문을 작성, 반포했다. 이에 반박해 곧바로 안창호의 측근인 이광수는 ‘독립신문’에 “공적 많고 유위(有爲)한 동지를 경솔히 공격하여 그 명예와 전도를 해함은 너무 각박 불인정한 일이고, 포고문은 총장도 차장들도 잘 모르는 국무총리 일인의 독단으로 함은 이해할 수 없다”며 비판했다. 세 차례의 국민대회가 이어지고, 반박과 재반박이 오갔지만, 조선 독립을 주장한 몽양의 연설 내용이 알려지고 몽양이 상하이로 돌아오며 파열음은 이내 잦아들었다. 윤 연구원은 이와 관련 “여운형 개인의 도일문제였지만 찬반 논쟁 과정에서 임시정부가 이후 급격한 독립운동 노선의 분화를 예고함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도일을 계기로 적극적으로 임시정부 특사로 소련 방문을 주장하고 상해 공산주의운동에 참여하게 되는 활동을 모색하는 계기가 됐다”고 강조했다. 이날 함께 기조발제한 미쓰이 다카시 도쿄대 총합문화연구과 교수는 몽양의 도쿄행이 일본 제국의 조선 통치 모순을 드러냈다고 설명했다. 일본이 ‘조선 자치’를 이유로 몽양을 초청했지만, 사실상 그럴 의도가 없었다는 뜻이다.미쓰이 교수는 당시 일본 수상이었던 하라 다카시의 의견서 ‘조선통치사견’(1919) 등을 들어 “일본의 초청은 애당초 여운형의 배경에 있는 임정의 방침과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와 관련 “제국호텔 연설에서 몽양이 조선의 ‘자유 독립’의 필요성을 당당히 말함으로써 결국 실패한 초청이었다. 여운형의 도쿄행이 가져온 효과는 일본 제국의 조선 통치 모순을 드러낸 것에 있다”고 강조했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종교계 “3·1운동 민족대표는 33인 아닌 50인이었다”

    종교계 “3·1운동 민족대표는 33인 아닌 50인이었다”

    ‘불교, 천도교, 기독교 세 종교가 단일한 목적하에 연합한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 흔히 1919년 일제에 항거한 3·1운동을 놓고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각 종교의 입장과 이해에 치우친 과정과 역사의 해석 탓에 3·1운동 정신은 제대로 빛을 발하지도, 계승되지도 못한다는 지적을 받기 일쑤이다. 그런 상황에서 불교, 천도교, 기독교가 머리를 맞대 3·1운동의 모든 것을 다시 점검하고 평가한 공동자료집이 출간돼 종교계 안팎의 눈길을 끈다. 3개 종교의 역사학자들이 3년여의 공동 작업 끝에 낸 자료집은 8권의 방대한 분량이다. 1~2권이 당시 언론에 보도된 3·1운동을 소개하고 있다면 3~7권은 3·1운동에 참여한 민족대표에 얽힌 자료를 세밀하게 담고 있고 마지막 8권은 민족대표들의 묘소와 생가 등 유적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사진 자료로 엮었다. 자료집의 가장 큰 특징은 3·1운동의 시작과 과정을 어느 한 종교에 치우치지 않은 시선으로 집대성했다는 점이다. 자료집은 우선 3·1운동이 종교계의 주도로 시작된 항거였음을 못 박고 있다. 1910년 일제가 강제합병을 한 이후 정치단체와 사회단체 모두를 폐지시켜 사실상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단체는 종교단체와 교육단체뿐이었다. 그러므로 “종교단체와 교육단체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고 밝히고 있다. 보다 전반적인 지지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종교 지도자들은 3·1운동을 계획하면서 먼저 민중의 신망을 가진 인물을 전면에 내세워야 한다는 판단 아래 박영효, 윤치호, 한규설, 김윤식, 윤용구, 송병준 같은 인물들과 교섭해 동참하기를 시도했지만 실패한 채 결국 종교단체와 학생들의 연합으로 3·1운동을 일으켰다.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은 민족대표가 50인이었음을 밝혀낸 점이다. 지금까지 3·1운동 민족대표는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공동자료집을 보면 3·1운동이 전개되기까지 더 많은 사람들의 숨은 노력이 있었다. 3·1운동과 관련해 출판법, 보안법 위반 혐의로 재판을 받은 사람은 총 48명이다. 여기에 독립선언서에 서명은 했지만 중국 상하이로 이주해 해외 독립운동을 벌인 김병조와 옥중 순국한 양한묵까지 더하면 3·1운동 민족대표는 50인이다. 불교계의 참여와 관련한 해석도 색다르다. 민족대표 중 불교계는 용성 스님과 만해 스님 두 명뿐 대다수가 천도교 외 기독교 인사였지만 불교계가 참여하면서 종교 운동이 아닌 민족운동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가 바로 그것이다. 실제로 자료집에는 범어사와 해인사, 통도사, 동화사, 마곡사 등 사찰 스님과 신도 대중들이 주도한 만세 운동 등 불교계의 활동을 자세히 확인할 수 있다. 이 대목에서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인 법현 스님은 “이번 자료집이 민간에서 만든 최초의 종합 집대성 자료라는 의미에 더해 불교도 정확히 제 몫을 했음을 증명하는 근거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한편 자료집에 따르면 민족대표의 유적지가 가장 많은 곳은 서울(57곳)이었고 다음은 충청권(26곳)이었다. 이에 비해 제주도 지역엔 1910년 말 안악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된 남강 이승훈 선생의 유적지만 남아 있어 비교된다.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는 이와 관련해 “제주도에는 제주 해녀들의 항일유적지와 3·1운동 1년 전 일었던 항일운동 발생지가 있다”며 “이들 유적지는 3·1운동 이전의 유적지이지만 기념할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설명했다. 이홍정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는 “우리는 급변하는 동북아의 생명 환경 속에서 안전과 안락보다는 위기와 도전을 선택하며 책임적 신앙인으로 응답할 것을 요청받으며 살아가고 있다”며 “이번 출판된 공동자료집은 이 시대를 향한 우리들의 책임 있는 응답의 준거요, 지향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정치권, 사소한 논란 키워 국민 둘로 분열… 성찰의 공간 회복 절실

    정치권, 사소한 논란 키워 국민 둘로 분열… 성찰의 공간 회복 절실

    1945년 12월 30일 새벽 6시 원서동 74 송진우 자택에서 13발의 총성이 울렸다. 건넌방에 있던 양자 송영수, 외사촌 양신묵이 쫓아갔지만 고하는 얼굴과 심장 등에 6발의 총을 맞고 절명해 있었다. 송진우는 당시 동아일보 사장이자 지주와 친일파가 주를 이루고 원세훈 등 독립지사들이 일부 참여한 한국민주당(한민당) 수석총무(지금의 대표최고위원)였다. 당색으로 보면 조선공산당과 대척점에 있는 극우 정치세력을 대표하지만, 송진우 개인적으로는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로서 충칭 임시정부 봉대론을 주장하던 중간파였다. 송진우는 전날 오후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을 만난 뒤, 그날 밤 경교장의 반탁운동 방향을 논의하는 자리에 참석했다. 좌우익은 물론 중간파 주요 인사들이 모여 있었다. 김구 등 충칭 임시정부 관계자들은 미군정과 실력대결까지 주장했고 송진우는 신중론을 개진했다. 송진우는 평소 미군이 2년쯤 머물러야 한다는 ‘훈정론’을 펴 왔던 터였다. ●하나의 조국 꿈꾸던 이들 암살·투옥·납북당해 12월 27일 동아일보 등의 ‘신탁통치 가짜뉴스’로 말미암은 반탁운동은 해방정국을 급랭시켰다. 송진우 암살은 좌우 극단세력의 테러와 유혈 충돌의 본격화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송진우 피살 12시간 전인 12월 29일 자칭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의 기관지 조선인민보가 수류탄 테러를 당했다. 해방 후 언론사에 대한 첫 테러였다. 다음날 송진우가 암살당하고, 이듬해 1월 2일 한민당 기관지 동아일보가 좌익에 의해 테러를 당했다. 6일엔 중도적 서울신문까지 습격을 당했다. 좌파 성향의 중앙신문도 당했다. 7일엔 극우 성향의 대동일보가 피습됐고, 8일엔 좌익 성향의 자유신문사 공장에 다이너마이트가 날아들었다. 1월 2일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이 3상회의 지지로 돌변하는 성명을 내면서 대결 정국은 극단으로 치달았다. 그제야 충칭 임정은 ‘신중한 방법론’을 모색했다. 김규식 임정 부주석, 한국국민당의 안재홍, 조선인민당의 여운형 그리고 임정 안의 조소앙·김원봉 등 비주류가 포함된 중간파들은 이미 정국의 안정을 위한 해결책 마련에 나서고 있었다. 이들은 공산당과 한민당 내 중간파들과 개별적인 회합 끝에 7일 전체 모임을 갖고 4당 코뮤니케(공동성명서)를 발표했다. “(3상회의 결정에 따라) 탁치는 우리 (임시)정부가 수립된 후에 자주독립 정신에 의하여 해결하고”, “정쟁의 수단으로 암살과 테러 행동은 국가 독립을 방해하는 자멸행동이므로 절대 반대한다.” 당시 긴급하고 중요한 것은 남북 단일의 임시정부 수립이었다. 코뮤니케에 서명한 대표들은 인민당의 이여성·김세용·김오성, 한민당의 원세훈·김병로, 국민당의 안재홍·백홍균·이승복, 공산당의 이주하·홍남표 등이었다. 하지만 잉크가 마르기도 전인 8일 한민당 주류는 이를 거부했다. ‘반탁 정신이 선명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공산당 역시 코뮤니케가 마치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전면 지지하는 것으로 선전했다. 해방 후 첫 남북단일정부 수립을 위한 좌우연합체를 형성할 수 있는 계기는 그렇게 극단세력의 방해로 무산됐다. 안재홍은 그 전말을 이렇게 정리했다. “탁치 문제는 임시정부 수립 후 독립정신에 준하여 해결하기로 한 약정을 (한민당은) 어구가 철저치 못하다고 취소를 발표하고, (공산당 측은) 4당 전부가 3상 결정 전면지지에 기울어진 것처럼 선전하여 민중의 의혹과 불만을 조장하였다”, “4당 코뮤니케가 불발로 끝난 것은 1차적으로 한민당, 2차적으로 공산당에 책임이 있다.” 반탁과 찬탁의 대결은 해방공간을 ‘애국과 친일의 대결’에서 좌우익의 대결 구도로 바꿔 버렸다. 우파는 비상국민회의로 집결했고, 좌파는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으로 결집했다. 좌우합작에 의한 통일국가 건설을 추구하던 중간파의 공간은 좁아졌다. 대신 허약했던 이승만, 한민당 등 극우세력은 확고한 기반을 확보했고, 좌익도 중도좌파의 광범위한 기반을 약화시켰다. 그렇다고 물론 자주적인 통일국가 건설에 대한 국민적 여망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대다수 국민은 극좌·극우의 패권주의가 아니라 중도파의 합작활동에 주목했다. 일제하에서는 비타협적 항일독립투쟁을 벌였고 해방 후엔 민족, 민주, 자주, 통일국가 건설을 추구하는 데 목숨을 건 이들이었다. 소련과 미국에 기대 집권하려던 좌우 극단주의자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미군정은 1946년 8월 해방 1년을 맞아 8000여명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한국인이 추구하는 정치형태는 대중정치(대의정치) 85%, 계급독재 3%였으며, 한국인이 원하는 체제는 사회주의 70%, 자본주의 14%, 공산주의 7%이었다. 앞서 1945년 11월 우익 성향의 선구회가 서울시민 978명을 상대로 실시한 ‘조선을 이끌어 갈 지도자’ 조사에선 중도좌파의 여운형이 33%로 가장 앞섰다. 그 뒤가 이승만(21%), 김구(18%), 박헌영(16%), 김일성(9%), 김규식(5%)이었다. 이승만을 밀던 미군정은 1946년 3월 자문기구인 민주의원 의장을 이승만에서 김규식으로 바꿨다. 1차 미소공동위가 결렬되자 여운형·김규식 등 좌우합작을 추진하던 중간파를 지원했다. 당시 미군정은 김구·이승만 등을 극우로, 김규식·원세훈 등을 중도우파, 여운형·김성숙·장건상 등을 중도좌파, 박헌영 등을 극좌로 분류하고 있었다. 합작위원회는 7월 19일 김규식(우파 주석)·원세훈·김붕준·안재홍·최동오(이상 우파), 여운형(좌파 주석)·허헌·정노식·이강국·성주식(이상 좌파)를 대표로 출범했다. 합작 원칙을 놓고 옥신각신하던 끝에 10월 4일 7원칙을 발표하고 활동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번에도 양극단이 발목을 잡았다. 한민당은 토지개혁 원칙(몰수 혹은 체감몰수 및 무상 분배)을 문제 삼아 탈퇴를 선언했다. 조선공산당은 좌파 3개 정당의 합당 공작을 통해 합작위원회의 중도좌파를 무력화시키려 했다. 1947년 5월 2차 미소공동위가 열리면서 다시 좌우합작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그러나 이번엔 7월 19일 여운형이 암살당했다. 좌우합작 활동은 사실상 좌초하고, 통일정부 수립에 대한 기대감도 멀어졌다. 이후 하나의 조국을 꿈꾸던 이들은 김구처럼 암살을 당하거나, 안재홍·조소앙·원세훈·조완구·김약수·김원봉처럼 납북됐거나 북행했고, 남에선 김창숙·김성숙·장건상처럼 끝없는 감옥살이를 견뎌야 했다. ●중간 지대 없애 억지·폭력에 의지하게 만들어 가짜뉴스에서 시작된 신탁통치 논란은 한국인을 좌와 우로 단절시켰다. 38선에 중립지대가 없었던 것처럼, 좌우 극단 이외의 중간지대를 없애 버렸다. 그 후유증은 해방정국과 남북의 극우·극좌 정권 수립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성찰과 대화 대신 억지와 폭력에 의지하게 만들었다. 지금도 정치권은 사소한 논란조차 증폭시켜 국론과 국민을 둘로 분열시킨다. 가짜뉴스로 대중의 눈을 멀게 하고, 거짓 선동으로 대중을 동원한다.●檢개혁·조국사퇴 집회 공감 합친 수치도 97.9% ‘조국 사태’는 73년 전의 분열을 떠올리게 하는 좋은 실례였다. 8월 말 조국 법무장관 후보자 때부터 장관에 임명되던 9월 초까지 리얼미터의 조사에서 찬반 응답자는 전체의 93.7%(8월 23일), 96.8%(9월 8일)이었다. 10월 초 조국의 장관직 사퇴 여부를 묻는 조사에서 찬반 응답자는 전체의 96.8%였다. 서초동의 검찰개혁 집회와 광화문의 조국 사퇴 집회에 대한 공감도를 합친 수치도 전체의 97.9%였다.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지지율에도 중간지대는 사라졌다. 긍정과 부정을 합치면 8월 셋째 주(96.8%), 9월 셋째 주(97.2%), 10월 둘째 주(97.5%) 모두 100%에 가까웠다. 앞선 대통령의 집권 3년차 2분기의 경우 김영삼 69%, 김대중 64%, 노무현 87%, 이명박 90%, 박근혜 90%였다. 이런 현상도 나타났다. 이른바 ‘빤쓰 목사’가 “대한민국에서 보수의 중흥을 이끄는 지도자”(뉴욕타임스 아시아판)로 언급됐다.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그가 벌이는 ‘문재인 퇴진’ 농성장에서 ‘만세’를 외쳤다. 이른바 진보 논객들은 성찰이 아니라 진흙탕 싸움에 몰두했다. 사실 ‘조국 문제’는 좌건 우건 정쟁과 시비에 앞서 성찰의 문제였다. 지금 우리에겐 숨쉴 틈이 없다. 이편 아니면 저편이어야 한다. 생각할 공간도 없다. 옳고 그름을 두부모 자르듯 쪼개야 한다. 숨쉬고 생각하고 성찰하는 공간은 과연 회복될 수 있을까? 논설고문 kbc@seoul.co.kr
  • 쇄신 뭉갠 채 돌발 단식… ‘리더십 위기’ 황교안의 구태 정치

    쇄신 뭉갠 채 돌발 단식… ‘리더십 위기’ 황교안의 구태 정치

    제1야당 대표 단식 투쟁 역대 세 번째 靑 농성 장소 불허에 부랴부랴 국회로 강기정 “옳은 방향 아니다” 단식 만류 한국당 총선 생환 위기 수도권 의원들“쇄신 촉구에 책임 회피… 단식이 웬 말” 홍준표 “단식한다고 해결될 문제인가”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가 장외투쟁과 삭발에 이어 20일 무기한 단식 농성에 돌입하면서 당 대표에 취임한 지 9개월밖에 안 된 정치 신인이 한국 정치가 극복해야 할 구시대적 투쟁 방식에만 매달리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정치권에서 제기된다. 황 대표는 단식 명분으로 한국당을 제외한 여야 4당의 선거법과 검경수사권 조정안 등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일방 처리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종료 저지를 내세웠지만, 현재 그가 처한 당 안팎의 위기와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당대표 9개월 새 장외투쟁·삭발 이어 단식 시점상 뜬금없기까지 한 단식은 리더십에 대한 의구심을 잠재우기 위한 황 대표의 승부수라는 것이다. 앞서 황 대표는 내년 총선을 앞두고 ‘공관병 갑질 논란’의 당사자인 박찬주 전 육군대장을 첫 인재 영입 케이스로 밀어붙이다 철회했다. 보수대통합 논의가 지리멸렬한 가운데 김세연 의원이 지난 17일 불출마를 선언하며 지도부 사퇴를 촉구했지만 황 대표는 “내년 총선에서 패배하면 책임지겠다”며 거부했다. 지난 19일에는 청년정책 비전을 발표했지만, 내용과 형식 모두 “청년 눈높이에 맞지 않는다”는 비판에 휩싸였다. 대안신당에서 활동하는 무소속 박지원 의원은 페이스북에 “드디어 황 대표께서 21세기 정치인이 하지 않아야 할 세 가지 중 두 가지 이행에 돌입한다”며 “제발 단식하지 말라”고 했다. 홍준표 전 한국당 대표도 “문재인 대통령이 야당을 얕잡아보고 있는데 단식을 한다고 해결될 문제인가. 문 대통령은 코웃음을 칠 것”이라고 했다. 반면 한국당 박맹우 사무총장은 “우리가 지금 몸을 던지는 것 말고 방법이 있나. 정치공학적인 것은 절대 아니다”라며 “야당 책임자로서 늘 책임감을 느끼는 것”이라고 해명했다. 황 대표의 청와대 앞 단식은 청와대가 경호상 이유로 천막을 칠 수 없다고 해 맨바닥에 매트를 깔고 앉아 시작됐다. 처음에는 외투는 걸치지 않은 양복 차림이었지만 10여분 뒤 패딩 점퍼를 입었다. 이후 황 대표는 농성 장소를 변경하기 위해 의원들과 함께 ‘문재인 하야 범국민투쟁본부’가 주최하는 집회를 찾아 전광훈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회장을 만났다. 현장에서 전광훈 목사의 ‘만세’ 소리에 맞춰 황 대표에게도 ‘만세’가 쏟아졌다. 황 대표는 연단에 올라 “전 목사 말씀대로 여러분(문재인 하야 범국민투쟁본부) 모두 수고 많았다”며 “제가 할 일을 여러분이 다 했다”고 했다. 황 대표가 단식투쟁에 들어가자 강기정 청와대 정무수석이 찾아가 “이런 건 옳은 방향이 아닌 것 같다”며 만류했다. 강 수석은 인근에서 집회 중 농성장을 찾은 전 목사도 만났다. 강 수석은 “(황 대표가) 날을 여기서 지새울 것 같다고 생각해서 대통령에게 보고드렸다”고 했다. 보고를 들은 문 대통령은 “가서 어쨌든 찾아봬라. 어떤 의미에선 집 앞에 온 손님”이라고 말했다고 강 수석이 전했다. ●黃 충분한 사전 검토·논의 없이 단식 결정 강 수석은 황 대표가 단식투쟁을 하면서 제시한 3가지 조건 중 한일 지소미아 종료 철회에 대해 “지소미아는 국익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정치권이) 힘을 모아야 한다”고 설득했다. 황 대표가 지난 18일 영수회담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한 데 대해 강 수석은 “(회담 제안을) 사전에 못 들었다. 사후에도 못 들었고”라고 해명했다. 황 대표는 청와대 앞 농성 여부를 놓고 갈팡질팡했지만, 이날 오후 8시 40분쯤 국회 본청 앞으로 옮겨 텐트를 치고 단식 농성을 이어 갔다. 황 대표가 단식에 나서자 내년 총선에서 ‘전멸’할 수 있다는 위기감에 휩싸인 수도권 의원들을 중심으로 “대표가 도대체 뭘 하는지 모르겠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이날 황 대표의 단식투쟁 결정은 충분한 사전 검토나 논의 없이 즉흥적으로 이뤄졌다. 심재철 의원은 당 대표 및 최고위원·중진의원 연석회의 뒤 “황 대표가 (비공개회의 때) 단식투쟁 얘기를 했다”며 “그 얘기를 듣고 말리기보단 워낙 큰일이라 다들 놀라는 분위기였다”고 했다. 특히 내년 총선 생환이 불투명한 수도권 의원들의 볼멘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한 수도권 재선 의원은 통화에서 “의원들이 잇달아 불출마를 선언하며 쇄신을 촉구했으면 당 대표가 그 문제에 집중해야지 도대체 단식은 왜 하는 건가”라며 “이런 식으로 책임을 피하면 당 쇄신은 물론이고 개혁보수 진영과의 보수대통합도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고 했다. ●“당 쇄신·보수대통합 더 어려워질 것” 또 다른 수도권 의원은 “단식 시점이 굉장히 좋지 않다. 이렇게 시작을 해 버리면 당장 퇴로가 없지 않나”라며 “쇄신은 곧 보수통합의 전제 조건인데 당 대표가 물밑 접촉 대신 단식을 택한 건 오판이다. 이런 식으로 모든 걸 혼자 판단하면 안 된다”고 했다. 반면 영남권 재선 의원은 “쇄신과 보수통합 논의는 어차피 패스트트랙 법안 처리 결과가 나와 봐야 구체화할 수 있다”면서 “지금은 정부의 정책 대전환을 요구하며 국민 지지를 얻는 게 맞다”고 밝혔다. 최근 20년간 제1야당 대표가 단식투쟁에 나선 건 2003년 최병렬 당시 한나라당 대표, 2009년 정세균 당시 민주당 대표에 이어 세 번째다. 최 대표는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측근비리특검 관철, 정 대표는 이명박 정부의 미디어법 처리 저지를 내걸고 단식했다.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 “죽기를 각오” 黃…텐트 불허·한파에 국회로 돌아가

    “죽기를 각오” 黃…텐트 불허·한파에 국회로 돌아가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20일 “죽기를 각오하겠다”며 청와대 앞에서 무기한 단식 투쟁에 들어갔지만, 첫 날부터 경호상 이유로 텐트 설치가 허용되지 않은데다 강추위가 닥치면서 결국 국회로 돌아갔다. 이날 회색 셔츠와 빨간색 니트, 회색 정장 재킷을 입은 황 대표는 청와대 앞에서 대국민 호소문을 발표하고 무기한 단식 투쟁에 들어갔다. 황 대표는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파기 철회,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치법 포기, 연동형 비례대표제 선거법 철회 등 3가지 요구사항을 제시했다. 그는 “협상 제의가 있으면 언제든지 응하겠다”면서도 “죽기를 각오하겠다”며 3가지 요구가 받아들여질 때까지 단식을 이어가겠다고 말했다. 기자회견 후 황 대표는 보도블록 위에 스티로폼 돗자리를 깔고 앉아 투쟁을 시작했다. 한국당은 당초 청와대 앞 분수대 광장에 텐트 2동을 설치하려고 했지만 경호상 텐트 설치가 불허되면서 농성 계획은 처음부터 꼬였다. 결국 한국당은 약식으로 스티로폼 돗자리를 깔고 네 모서리를 모래주머니로 고정해 자리를 마련했다. 왼쪽에는 태극기, 오른쪽에는 당기를 세워 자리를 갖추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날씨가 문제였다. 오후 늦게 날씨가 영하로 떨어지는 등 강추위가 몰아치자 결국 텐트 없이 24시간 농성을 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한국당은 청와대 앞 투쟁을 이어가기 어려울 것으로 보고 이날 저녁부터 단식 투쟁 장소를 국회로 변경하기로 했다. 국회 단식 천막에는 ‘총체적 국정실패 이게 나라입니까?’라는 문구가 적힌 현수막이 걸렸고 작은 책상 하나와 전열기 2대, 이불 등이 준비됐다. 21일 당 최고위원회의도 천막 앞에서 열기로 했다.황 대표는 장소 변경 결정이 내려진 뒤에도 한동안 털모자 등을 갖춘 뒤 청와대 앞에서 농성을 이어갔고 오후 8시 35분 국회로 떠났다. 지지자로 보이는 한 여성은 호피 무늬 목도리를 황 대표에게 둘러주기도 했다. 황 대표는 텐트 없이 청와대 앞에서 밤을 보내겠다고 고집했지만 참모진이 설득에 설득을 거듭해 여의도로 발걸음을 돌렸다. 이 과정에 황 대표가 청와대 앞에 머물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지지자와 참모진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날 황 대표는 인근에서 열린 ‘문재인하야범국민투쟁본부’(범투본) 집회에 들렀다가 총괄대표인 전광훈 목사의 손에 이끌려 김문수 전 경기지사와 함께 연단에 오르기도 했다. 황 대표는 전 목사와 손을 잡고 좌중을 향해 손을 흔들고 ‘만세’를 외쳤다. 황 대표는 “좌파독재로 가는 길, 우리가 반드시 막아내야 하는데 이 정부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며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못 이기겠나. 우리는 이길 수 있다. 여러분들이 이미 이기고 있다”고 말했다. 전 목사는 황 대표와 함께 연단에 서서 “이렇게 많이 모인 것은 하나님의 능력”, “여기 온 언론 중 90%는 주사파 언론, 평양에서 온 언론. 정신나간 사람들”, “주사파는 정치할 자격이 없다”는 등의 거친 비난을 쏟아냈고 황 대표는 이를 듣고 있었다.그러나 전 목사가 “우리 황 대표는 기도하는 사람이다. 사람의 말만 듣지 않고 하나님하고(도) 교통한다. 왜 여러분들이 자꾸 다른 길로 끌고가냐”고 말하자 황 대표는 “아이고”라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또 전 목사가 “내년 4월 15일에 한 사람도 국회의원 안 시킬 것이다. 국회의원 배지 달려고 눈 뒤집어서 다니지 말고 공부 좀 하라. 오늘 밤부터 당신들도 옆에 같이 누우란 말이야”라며 목소리를 높이자, 황 대표는 전 목사의 등에 손을 얹어 만류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황 대표는 단식 투쟁을 시작하면서 기독교 집회에 참석한 것이 적절했냐는 지적에 “어떤 특정 종교에 편향돼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을 걱정하는 모든 분들이 힘을 모으자는 뜻”이라고 해명하기도 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악덕 친일 부호 장승원 사살… 세금 수송 마차 털어 독립운동 자금 조달

    악덕 친일 부호 장승원 사살… 세금 수송 마차 털어 독립운동 자금 조달

    “한 잔 술을 차려 놓고 ‘우리 상진아’ 하고 가슴을 치면서 고한다. 네가 죽던 날, 시신을 수레에 싣고 돌아왔을 때는 성안에 있는 네 친구들이 모두 너를 어루만지면서 울음을 터뜨렸었다.(…) 길거리에 가득한 남녀들이 상여를 따라 통곡하자, 길을 가던 남모르는 나그네까지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의사(義士)의 삼년상을 마치던 날 대한제국 홍문관 교리였던 생부(生父) 박시규가 비통한 심정으로 지은 제문 앞부분이다. 고헌(固軒) 박상진은 1884년 12월 6일(음력) 울산 북구 송정동에서 태어나 큰아버지에게 양자로 들어갔고 3세 때 경북 경주 녹동으로 가 성장했다. 의사의 집안은 조부와 생부, 양부가 모두 급제했고 재산이 7000석이나 됐던 명문가였다. 종형을 따라 경북 청송 진보에 갔다가 그곳에서 왕산 허위를 만나 사제의 인연을 맺은 것이 운명을 바꾸게 됐다. 왕산은 구한말 평리원장(대법원장 격)에 올랐다가 개화사상을 수용하고 의병 투쟁을 벌인 혁신유림이었다.스승을 따라 상경한 의사는 21세에 양정의숙에 들어가 안희제 등 동지를 만나 국권 회복의 열망을 키웠다. 양정의숙을 졸업한 해인 1908년 왕산은 교수형을 당했고 서대문형무소로 들어가 버려진 스승의 시신을 포대기로 감아 안고 나오면서 의사는 무력투쟁을 다짐했다. 교남교육회, 달성친목회 등에 가입하고 의사는 투쟁 계획을 세워 나갔다. 나라를 잃은 1910년 판사시험에 합격, 평양법원 판사로 발령받았지만 곧바로 사직하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1911년 의사는 스승과 가까웠던 안동 유림 이상룡, 김동삼이 설립한 만주 서간도의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방문해 지원 활동을 시작했다. 중국 단둥에 안동여관을 설치했는데 독립운동 연락기관이었고 나중에 광복회의 거점이 됐다. 이듬해 귀국한 의사는 대구에 상덕태상회라는 곡물회사를 차렸다. 곡물 거래는 해외를 드나들고 독립운동 자금을 보내는 데 감시를 덜 받는 이점이 있었다. 국내외에 연락 거점을 마련한 의사는 1915년 8월 25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풍기광복단 등 독립운동 단체들의 연합체 격인 대한광복회 출범식을 가졌다. 7개 강령의 첫째는 친일 부호의 의연금을 받아 내고 일인이 불법 징수하는 세금을 압수한다는 것이었다. 일제 고관과 한인 반역자를 처단하는 내용도 있다. 겉으로는 회(會)였지만 사령관, 사령부, 지휘장 등 군대식 조직과 전국 각지에 지부를 갖춘 무장투쟁 단체였고 박 의사는 총사령이었다.대한광복회는 거사에 나섰다. 박 의사의 명령을 받은 우재룡은 1915년 12월 24일 엄동설한에 경주 광명동 효현교(나무다리) 일부를 파괴한 뒤 풀숲에 숨어 기다렸다. 일제가 악랄하게 징수한 세금 수송 마차가 대구로 가려면 효현교를 건너야 했다. 전날 권영만은 마부를 찾아가 대구 병원에 치료받으러 가야 한다며 애걸복걸해 짐칸에 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 냈다. 마침내 효현교에 이른 마차가 부서진 다리를 보고 속도를 늦추자 그 틈을 타 권영만은 당시로선 거액인 8700원이 든 세금 행낭을 들고 유유히 빠져나왔다. 1917년 11월 10일 밤 경북 관찰사를 지낸 장승원의 경북 구미 집에서 권총탄 소리가 터졌다. 7만 5000석을 수확하는 당시 최고의 부자이면서 악명이 높았던 장을 처단하는 총소리였다. 그는 왕산의 추천으로 관찰사가 됐는데 자금을 대겠다는 약속을 어겼을뿐더러 밀고까지 해 광복회원 채기중과 강순필이 사살한 것이다. “조국 광복을 하자는 것은 하늘과 사람의 같은 뜻이니 이 큰 죄를 성토하노라.” 거사 후 두 사람은 담벼락에 이런 격문을 붙여 놓았다. 장은 광복 후 미군정 수도경찰청장과 3대 국무총리를 지낸 장택상의 아버지다. 장택상은 아버지 일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고 노덕술 등 친일 경찰을 군정 경찰로 받아들였다.“우리 2000만 민족은 노예로 변하여 섬 오랑캐의 악정 폭행은 날로 더해 가고 날로 거듭해 간다. 생각하면 피눈물이 샘솟는다. 각 동포는 능력에 따라 이를 도와….” 광복회원들은 친일 행각, 재산 규모에 따라 부호들에게 이런 포고문을 보내고 모금액을 통고했다. 불응하는 친일 인사는 사살했다. 악질 친일파 도고면장 박용하, 벌교 부호 서도현, 보성의 양재성 등이다. 조선총독 암살, 직산과 상동 광산 습격도 시도했다. 박 의사도 대구 부호 서우순 처단에 직접 가담했다가 발각돼 징역 6개월 형을 받았는데 이른바 ‘대구 권총 사건’이다. 장승원 처단 후인 1917년 겨울부터 박 의사와 광복회 조직원들은 일제의 추적을 받았고 1918년 1월 충남 천안 헌병대에 주요 회원들이 체포돼 광복회의 전모가 드러나고 말았다. 의사는 망국(亡國)에 분개해 단식으로 순국한 이만도의 아들인 경북 안동 이중업의 집에 은신했다. 의사를 보살펴 준 사람은 이중업의 부인이며 3·1만세운동을 주도했다가 체포돼 고문으로 실명한 여성 독립운동가 김락이다.숨어 있던 의사는 뜻밖에도 생모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자식으로 태어났으니 도리가 아니겠는가”라며 만류도 뿌리치고 경주 집으로 갔다. 의사가 도착했을 때 생모는 눈을 감은 뒤였다. 1918년 2월 1일 장례를 치르는 중에 일경 수백명이 출동, 의사를 포박하려 했다. 의사는 “나는 내 할 일을 정당하게 했다. 너희에게 포박당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내 몸에 손대지 마라”고 꾸짖으며 백마를 타고 유유히 일경에 앞서 나아갔다. 물고문, 불고문과 3년이 넘는 재판 끝에 의사에게 사형 확정판결이 내려졌다. 사형 집행 며칠 전 면회 온 가족에게 의사는 “울 까닭이 없다”며 태연히 미소를 지었다. 1921년 8월 11일 오후 1시 대구감옥에서 의사는 순국했다. “어머님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나라님 원수도 갚지 못했네. 빼앗긴 국토마저 되찾지 못했으니 무슨 면목으로 저승길을 갈까.” 이 유시(遺詩)와 전해지지 않는 4장의 유서, 사진 1장을 남기고 간 36년 8개월의 짧은 삶이었다. 시신이 옮겨지던 청천역(경북 경산)에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통곡했다. 일제는 새벽부터 기마대를 보내 길가에 줄지어 오는 조문객들을 휘몰아 쫓는 등 조문을 방해했다. 의사 집안은 195만평이나 되던 광대한 땅을 모두 날리고 풍비박산이 났다. 경주 최부잣집의 최준(의사의 처사촌)이 농간을 부려 재산을 빼앗아 갔다며 송사를 벌였지만 패소하고 말았다. 의사의 생부는 “일곱 집안 100여 식구가 갑자기 모두 거지가 되어 사방으로 떠돌아다니고, 나도 혼자서 이 옛집을 지키고 있다가 며칠 동안 굶어서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고 썼다. 의사의 묘소는 경주 내남면 노곡리 등운산 기슭에 있다. 농로를 지나 작은 개울을 건너고 산길을 따라가다 오른쪽의 가파른 경사지를 100m 남짓 올라가니 어두컴컴한 숲속에 묘소가 나타났다. 잠시 묵념을 올렸다. 정부는 1963년 의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생가도 복원되고 동상이 세워졌으니 조금이나마 원혼을 달래 줄 것이다. 송정동 생가는 증손자 박중훈(65)씨가 돌보고 있다. 비가 내리는 날 찾아간 생가에서 박씨는 의사의 일생과 여태 끝나지 않은 장승원가와의 악연, 후손들의 비참한 삶을 들려주었다. 박씨는 의사의 일대기이자 평전인 ‘이루지 못한 혁명의 꿈’을 펴냈다. 평생 고통을 겪은 증조할머니, 할머니, 어머니의 일생도 정리해 따로 책으로 펴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는 박씨는 최현배 선생을 비롯한 울산 지역 독립운동가를 함께 기리는 기념관이 건립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악덕 친일 부호 장승원 사살… 세금 수송 마차 털어 독립운동 자금 조달

    악덕 친일 부호 장승원 사살… 세금 수송 마차 털어 독립운동 자금 조달

    “한 잔 술을 차려 놓고 ‘우리 상진아’ 하고 가슴을 치면서 고한다. 네가 죽던 날, 시신을 수레에 싣고 돌아왔을 때는 성안에 있는 네 친구들이 모두 너를 어루만지면서 울음을 터뜨렸었다.(…) 길거리에 가득한 남녀들이 상여를 따라 통곡하자, 길을 가던 남모르는 나그네까지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의사(義士)의 삼년상을 마치던 날 대한제국 홍문관 교리였던 생부(生父) 박시규가 비통한 심정으로 지은 제문 앞부분이다. 고헌(固軒) 박상진은 1884년 12월 6일(음력) 울산 북구 송정동에서 태어나 큰아버지에게 양자로 들어갔고 3세 때 경북 경주 녹동으로 가 성장했다. 의사의 집안은 조부와 생부, 양부가 모두 급제했고 재산이 7000석이나 됐던 명문가였다. 종형을 따라 경북 청송 진보에 갔다가 그곳에서 왕산 허위를 만나 사제의 인연을 맺은 것이 운명을 바꾸게 됐다. 왕산은 구한말 평리원장(대법원장 격)에 올랐다가 개화사상을 수용하고 의병 투쟁을 벌인 혁신유림이었다.스승을 따라 상경한 의사는 21세에 양정의숙에 들어가 안희제 등 동지를 만나 국권 회복의 열망을 키웠다. 양정의숙을 졸업한 해인 1908년 왕산은 교수형을 당했고 서대문형무소로 들어가 버려진 스승의 시신을 포대기로 감아 안고 나오면서 의사는 무력투쟁을 다짐했다. 교남교육회, 달성친목회 등에 가입하고 의사는 투쟁 계획을 세워 나갔다. 나라를 잃은 1910년 판사시험에 합격, 평양법원 판사로 발령받았지만 곧바로 사직하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1911년 의사는 스승과 가까웠던 안동 유림 이상룡, 김동삼이 설립한 만주 서간도의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방문해 지원 활동을 시작했다. 중국 단둥에 안동여관을 설치했는데 독립운동 연락기관이었고 나중에 광복회의 거점이 됐다. 이듬해 귀국한 의사는 대구에 상덕태상회라는 곡물회사를 차렸다. 곡물 거래는 해외를 드나들고 독립운동 자금을 보내는 데 감시를 덜 받는 이점이 있었다. 국내외에 연락 거점을 마련한 의사는 1915년 8월 25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풍기광복단 등 독립운동 단체들의 연합체 격인 대한광복회 출범식을 가졌다. 7개 강령의 첫째는 친일 부호의 의연금을 받아 내고 일인이 불법 징수하는 세금을 압수한다는 것이었다. 일제 고관과 한인 반역자를 처단하는 내용도 있다. 겉으로는 회(會)였지만 사령관, 사령부, 지휘장 등 군대식 조직과 전국 각지에 지부를 갖춘 무장투쟁 단체였고 박 의사는 총사령이었다. 대한광복회는 거사에 나섰다. 박 의사의 명령을 받은 우재룡은 1915년 12월 24일 엄동설한에 경주 광명동 효현교(나무다리) 일부를 파괴한 뒤 풀숲에 숨어 기다렸다. 일제가 악랄하게 징수한 세금 수송 마차가 대구로 가려면 효현교를 건너야 했다. 전날 권영만은 마부를 찾아가 대구 병원에 치료받으러 가야 한다며 애걸복걸해 짐칸에 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 냈다. 마침내 효현교에 이른 마차가 부서진 다리를 보고 속도를 늦추자 그 틈을 타 권영만은 당시로선 거액인 8700원이 든 세금 행낭을 들고 유유히 빠져나왔다.1917년 11월 10일 밤 경북 관찰사를 지낸 장승원의 경북 구미 집에서 권총탄 소리가 터졌다. 7만 5000석을 수확하는 당시 최고의 부자이면서 악명이 높았던 장을 처단하는 총소리였다. 그는 왕산의 추천으로 관찰사가 됐는데 자금을 대겠다는 약속을 어겼을뿐더러 밀고까지 해 광복회원 채기중과 강순필이 사살한 것이다. “조국 광복을 하자는 것은 하늘과 사람의 같은 뜻이니 이 큰 죄를 성토하노라.” 거사 후 두 사람은 담벼락에 이런 격문을 붙여 놓았다. 장은 광복 후 미군정 수도경찰청장과 3대 국무총리를 지낸 장택상의 아버지다. 장택상은 아버지 일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고 노덕술 등 친일 경찰을 군정 경찰로 받아들였다. “우리 2000만 민족은 노예로 변하여 섬 오랑캐의 악정 폭행은 날로 더해 가고 날로 거듭해 간다. 생각하면 피눈물이 샘솟는다. 각 동포는 능력에 따라 이를 도와….” 광복회원들은 친일 행각, 재산 규모에 따라 부호들에게 이런 포고문을 보내고 모금액을 통고했다. 불응하는 친일 인사는 사살했다. 악질 친일파 도고면장 박용하, 벌교 부호 서도현, 보성의 양재성 등이다. 조선총독 암살, 직산과 상동 광산 습격도 시도했다. 박 의사도 대구 부호 서우순 처단에 직접 가담했다가 발각돼 징역 6개월 형을 받았는데 이른바 ‘대구 권총 사건’이다. 장승원 처단 후인 1917년 겨울부터 박 의사와 광복회 조직원들은 일제의 추적을 받았고 1918년 1월 충남 천안 헌병대에 주요 회원들이 체포돼 광복회의 전모가 드러나고 말았다. 의사는 망국(亡國)에 분개해 단식으로 순국한 이만도의 아들인 경북 안동 이중업의 집에 은신했다. 의사를 보살펴 준 사람은 이중업의 부인이며 3·1만세운동을 주도했다가 체포돼 고문으로 실명한 여성 독립운동가 김락이다.숨어 있던 의사는 뜻밖에도 생모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자식으로 태어났으니 도리가 아니겠는가”라며 만류도 뿌리치고 경주 집으로 갔다. 의사가 도착했을 때 생모는 눈을 감은 뒤였다. 1918년 2월 1일 장례를 치르는 중에 일경 수백명이 출동, 의사를 포박하려 했다. 의사는 “나는 내 할 일을 정당하게 했다. 너희에게 포박당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내 몸에 손대지 마라”고 꾸짖으며 백마를 타고 유유히 일경에 앞서 나아갔다. 물고문, 불고문과 3년이 넘는 재판 끝에 의사에게 사형 확정판결이 내려졌다.사형 집행 며칠 전 면회 온 가족에게 의사는 “울 까닭이 없다”며 태연히 미소를 지었다. 1921년 8월 11일 오후 1시 대구감옥에서 의사는 순국했다. “어머님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나라님 원수도 갚지 못했네. 빼앗긴 국토마저 되찾지 못했으니 무슨 면목으로 저승길을 갈까.” 이 유시(遺詩)와 전해지지 않는 4장의 유서, 사진 1장을 남기고 간 36년 8개월의 짧은 삶이었다. 시신이 옮겨지던 청천역(경북 경산)에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통곡했다. 일제는 새벽부터 기마대를 보내 길가에 줄지어 오는 조문객들을 휘몰아 쫓는 등 조문을 방해했다. 의사 집안은 195만평이나 되던 광대한 땅을 모두 날리고 풍비박산이 났다. 경주 최부잣집의 최준(의사의 처사촌)이 농간을 부려 재산을 빼앗아 갔다며 송사를 벌였지만 패소하고 말았다. 의사의 생부는 “일곱 집안 100여 식구가 갑자기 모두 거지가 되어 사방으로 떠돌아다니고, 나도 혼자서 이 옛집을 지키고 있다가 며칠 동안 굶어서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고 썼다. 의사의 묘소는 경주 내남면 노곡리 등운산 기슭에 있다. 농로를 지나 작은 개울을 건너고 산길을 따라가다 오른쪽의 가파른 경사지를 100m 남짓 올라가니 어두컴컴한 숲속에 묘소가 나타났다. 잠시 묵념을 올렸다. 정부는 1963년 의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생가도 복원되고 동상이 세워졌으니 조금이나마 원혼을 달래 줄 것이다. 송정동 생가는 증손자 박중훈(65)씨가 돌보고 있다. 비가 내리는 날 찾아간 생가에서 박씨는 의사의 일생과 여태 끝나지 않은 장승원가와의 악연, 후손들의 비참한 삶을 들려주었다. 박씨는 의사의 일대기이자 평전인 ‘이루지 못한 혁명의 꿈’을 펴냈다. 평생 고통을 겪은 증조할머니, 할머니, 어머니의 일생도 정리해 따로 책으로 펴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는 박씨는 최현배 선생을 비롯한 울산 지역 독립운동가를 함께 기리는 기념관이 건립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국가 큰일 때 ‘땀’ 흘리는 밀양 표충비 18일 1리터 땀

    국가 큰일 때 ‘땀’ 흘리는 밀양 표충비 18일 1리터 땀

    나라에 큰 일이 생기기 직전에 땀을 흘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경남 밀양시 무안면 홍제사 경내 사명대사 표충비가 18일 오전 땀을 흘린 것으로 확인돼 관심이 쏠린다.18일 밀양시와 홍제사에 따르면 사명대사 표충비에 이날 새벽 4시부터 오전 9시쯤 까지 1리터쯤 땀이 흘렀다. 홍제사 범철 주지는 “이날 오전 5시쯤 표충비각에 예불을 드리러 갔더니 표충비에서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고 말했다. 정성현 무안면사무소 총무담당은 “표충비가 땀을 흘린다는 주민들의 전화를 받고 현장으로 나가봤더니 비 앞뒤와 옆 등 4면에서 한출 현상이 보였다”고 말했다.경남도 유형 문화재 제15호인 표충비는 임진왜란때 승병을 이끌고 왜병을 크게 무찌른 사명대사의 높은 뜻을 새긴 비석이다. 사명대사의 5대 법손(法孫) 남붕(南鵬)이 경산에서 갖고 온 돌로 만들어 1742년 세웠다. 국가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특히 땀방울이 글자의 획 안이나 머릿돌과 받침돌에는 맺히지 않는것으로 전해져 신비함을 더한다. 전문가들은 ‘표충비각 땀’ 현상에 대해 주변 기후환경 때문인지 비석 자체의 결로 현상에 따른 것인지 등에 대해 연구를 하고 있으나 과학적으로 아직 밝히지 못하고 있다. 홍제사와 무안면사무소 등에 따르면 표충비는 2018년 1월 밀양세종병원 화재 참사 직전에도 땀을 흘렸다. 1894년 동학농민 운동때,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 1945년 8·15 해방, 1950년 6·25 전쟁, 1985년 남북고향 방문때도 땀을 흘린 것으로 기록돼 있다. 최근에는 2009년 김수환 추기경 선종, 2010년 천안함 침몰, 2017년 대통령 탄핵심판때 등에도 각각 땀을 흘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밀양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 국가보훈처, 김희식 선생 등 독립유공자 136명 포상

    국가보훈처는 오는 17일 제80회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독립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른 김희식 선생 등 136명을 독립유공자로 포상한다고 13일 밝혔다.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 김 선생은 평범한 농민으로 1919년 4월 1일 경기 안성 원곡면사무소 등지에서 일어난 독립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돼 징역 5년을 선고받고 고초를 겪었다. 보훈처는 “만세운동 사건으로는 이례적으로 중형을 받은 사례”라고 했다. 현 정부 들어 재조명되고 있는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활약도 이번에 재평가됐다.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 최영보 선생은 1919년 11월 평양에서 대한애국부인회에 참여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후원하고자 독립운동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돼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기독교 여성으로서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한 사례로 꼽힌다. 건국포장이 추서된 송계월 선생도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세 차례나 투옥됐다. 이번에 포상되는 독립유공자는 건국훈장 31명(애국장 7, 애족장 24), 건국포장 9명, 대통령표창 96명 등이다. 포상자 중 생존 애국지사는 지익표(95) 선생뿐이며, 여성 포상자는 28명이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더 높은 곳, 더 큰 왕의 기운… ‘철강 르네상스’ 경북 고령 대가야

    더 높은 곳, 더 큰 왕의 기운… ‘철강 르네상스’ 경북 고령 대가야

    1600년 전 강력한 철기문화를 앞세워 영호남 지역을 호령했던 ‘경북의 가야문화권’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앞두고 21세기 세계인의 주목을 받고 있다. 경북의 가야문화권은 삼국유사 등 문헌에 경북의 고령(대가야), 성주(성산가야), 상주(고령가야)로 전해지며, 그 중심에는 4~6세기 고대 가야 연맹의 맹주였던 대가야가 있다.●4~6세기 연맹국… 전기는 금관가야, 후기는 대가야 중심 가야라고 하면 흔히 그 대표 세력으로 김해의 ‘금관가야’를 머릿속에 먼저 떠올리지만 가야가 역사의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4세기 전반부터 신라에 의해 562년 멸망할 때까지 그 중심 세력은 고령에 근거를 둔 ‘대가야’였다. 광개토왕비, 송서(宋書), 일본서기 등 문헌과 사료 대부분이 대가야에 집중돼 있고 고고학적 사료들도 대가야의 국력이 가장 컸던 정치세력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 때문에 일부 학계에서는 ‘전기 가야는 금관가야 중심, 후기는 대가야 중심’이라는 통설을 부정한다. 대가야는 철 생산을 통해 경제적·군사적으로 급성장하면서 5세기 후반에는 고령뿐만 아니라 경남 합천·거창·함양, 전북 남원·장수, 전남 순천까지 세력을 넓혀 백제·신라와 대등한 단계로 발전했다. 삼국 사이에서 뛰어난 철제기술을 바탕으로 ‘철의 왕국’으로 일컬어지는 찬란한 고대문명을 꽃피웠다. 대가야는 신라가 전체 가야를 멸망시킨 후 중심지였던 지금의 고령 지역을 대가야군으로 편제한 데서 위상이 드러났다. 적대국이었던 신라까지도 인정한 이름이었다. 경북도와 도내 가야문화권 시군들은 이처럼 융성했던 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재현해 가야 르네상스를 여는 것은 물론 특히 대가야의 문화유산인 지산동 고분군 세계유산 등재를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다.12일 경북도에 따르면 도내 가야문화권의 주요 문화유적으로는 148곳(국가지정 5곳, 도지정 3곳, 비지정 140곳)이 있다. 지역별로는 고령·성주 각 73곳, 상주 2곳 등이다. 고분과 산성이 주를 이룬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유적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가 추진 중인 고령군 대가야읍의 ‘대가야 지산동 고분군’(사적 제79호)이다. 고령에는 이 외에도 ▲‘주산성’(사적 제61호) ▲가야 유일의 벽화 고분인 ‘고아동 벽화고분’(사적 제165호), ▲대가야 왕들이 마셨던 우물인 ‘어정’ ▲대가야 가실왕(?~?)과 우륵(?~?)이 창제한 가야금 등이 있다. 2013년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됐고, 2015년 3월엔 ‘우선등재 추진대상’에 선정된 지산동 고분군은 대가야읍을 병풍처럼 감싸는 주산(해발 310m) 주능선을 따라 길게 분포한 대가야시대 최대 고분군이다. 이곳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발굴된 순장 묘 왕릉인 지산동 제44·45호분을 비롯해 왕족과 귀족 무덤으로 추정되는 크고 작은 704기의 무덤이 분포한다. 특히 2010년 지표조사 결과 이 일대에는 1만기가 넘는 고분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고, 한반도 최대의 삼국시대 고분군으로도 인정받았다. 대가야가 성장을 시작한 400년쯤부터 멸망할 때까지 만들어진 대가야의 무덤으로 화려했던 역사와 문화를 대변해준다. 무덤은 해발 160∼180m 구간에 직경 20m 이상의 대형분, 해발 100∼160m 구간에 직경 10∼15m의 중형분이 집중돼 있다. 위로 올라갈수록 규모가 큰 것을 볼 때 왕의 힘이 점점 커지면서 더 높은 곳에, 더 큰 무덤을 만들려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능선 높이에 상관없이 대형분의 주위와 능선 사면에는 봉분이 없는 소형 무덤이 광범위하게 자리잡았다.●능선 704기·흔적만 1만기…자산 고분군 세계유산 자신 경북도는 지산동 고분군의 세계유산 등재에 자신감을 보인다. 고분군이 대가야 문화를 대표하는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보유한 데다 보존 상태가 양호하고, 규모와 내용 면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인접한 성산 가야고분군(사적 제86호)도 관심을 끈다. 성주의 진산인 성산 능선에 3~6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353기의 분묘가 있다. 성주지역 최대 규모이자 중심 고분군이다. 대부분 중·대형 고분군에 속하며 성산가야 지배계층의 무덤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지금까지 정식 발굴된 5기의 출토 유물과 묘제(墓制)의 형식이 신라 형식과 거의 유사해 학계에서는 가야의 일원으로 보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성산가야의 정체성 규명이 가야 연구의 주요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성산가야는 ‘삼국유사’에 나라 이름만 있을 뿐 발전 과정이나 내부 구조, 멸망 시기 등의 역사적 사실 기록이 전혀 없다. 현재까지 미지의 나라인 셈이다. 상주시 함창면 증촌리에는 고령가야왕릉으로 전해지는 유적이 있다. 200m 거리를 두고 2개의 큰 능이 존재하고, 재사인 만세각이 있는 것으로 미뤄 왕릉으로 추정된다. 함창의 가야는 얘기로 전해지는 역사라서 공식적으로는 전(傳) 고령가야국이다.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은 ‘함창은 본래 고령가야국이었는데 신라가 빼앗았다’고 기록했다. 이들 지역 고분군에 대한 발굴조사는 일제강점기 때인 1910년대 후반부터 일본인에 의해 몇 차례 이뤄졌으나 본격적인 학술조사가 아닌 침략사관에 기초한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증명하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뤄졌다.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이 고대 한반도 남부 가야 지역에 식민 국가를 건설했다는 주장이다. 이 때문에 학술적인 보고서가 작성되지 않았으며, 출토된 대부분 유물은 일본으로 유출됐다.● 독특한 ‘고분축조·장의문화’ 우리 손에 의한 발굴조사는 1977년 처음 시작됐다. 대가야고분군의 정화사업에 따른 제44·45호분의 조사였다. 44호 고분에서 32기나 되는 순장덧널이 발견됐고, 45호 고분에서도 11기의 순장덧널이 확인됐다. 이듬해부터 지산동 32~35호분 등을 발굴 조사하면서 대가야 문화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뤄지기 시작했다. 특히 2007년 3월 30년 만에 발굴조사가 재개되면서 신라와 구별되는 대가야식 고분 축조방식이 확인됐다. 여러 명을 석곽에 함께 순장한 것으로 보이는 대가야의 순장 문화도 입증됐다. 지산동 고분군의 가치가 본격적으로 드러나게 됐다. 고령 대가야 지역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거나 확인된 주요 유물로는 가야금관 및 부속 금제품(국보 218호)과 1978년 고령 지산동 32호분에서 출토된 금관(보물 제2018호) 등이 있다. 올해 3월 고령 지산동 고분군(사적 제79호) 내 소형 석곽묘에서 출토된 가야 건국설화 그림이 새겨진 토제방울도 고대사 특히 가야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문헌으로만 전하던 고대 건국설화를 시각화한 유물이 발견되기는 국내에서 처음이기 때문이다. 지산동 고분군 발굴로 얻은 소중한 가치는 ‘독특한 고대 장의문화’다. 세계유산 잠재목록에 등재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704기라는 세계적 규모인 데다 ▲고분군 위에 인공 구조물을 짓지 않은 자연친화적인 장의문화 ▲고분군이 생전 거주지가 보이는 곳에 형성된 점으로 미뤄 엿볼 수 있는 이승과 저승이 구분되지 않는 내세관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순장곽 배치 등이다.●대가야·왕릉·우륵 테마박물관, 효율적 문화재 보존·관리 경북도와 고령군은 지산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문화재의 효율적인 보존과 관리 등을 위해 2000년 4월에 왕릉전시관을 개관했다. 왕릉전시관은 국내 최초로 확인된 순장 무덤인 지산동 제44호분 내부를 재현해놨다. 대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일반인들이 더 쉽고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차원이다. 관람객이 직접 들어가 무덤의 구조와 축조 방식, 주인공과 순장자들의 매장 모습, 껴묻거리의 종류와 성격 등을 직접 볼 수 있다. 또 2005년과 2006년 연이어 대가야역사관, 우륵박물관을 개관했다. 대가야역사관은 대가야 고분군 발굴과정에서 출토된 유물 1만여점을 전시·소장한 국내 유일의 대가야사 전문역사관이며, 우륵박물관은 전시실과 가야금제작체험장·가야금전수교육관 등의 시설을 갖춘 전국 유일의 ‘우륵과 가야금’ 테마박물관이다. 지금까지 왕릉전시관 등 3곳을 다녀간 관람객은 모두 443만명에 이른다. 이런 가운데 2017년 6월에는 고령 대가야읍 고령향교 인근을 발굴 조사하는 과정에서 가야를 통틀어 왕들이 살았던 ‘대가야 궁성지’를 증빙할 수 있는 해자(폭 6∼8m, 깊이 최대 1m, 길이 16∼17m)와 성벽(폭 7m, 길이 16m)이 처음으로 발굴돼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이곳의 해자, 성벽 등은 대가야 중요 거점인 궁성지를 효율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시설로 보인다. 당시 나선화 문화재청장은 발굴 현장을 찾아 관심을 보이며 “대가야 궁성지 발굴·정비를 적극 지원하고 주산성 복원 정비계획 수립 시 예산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경북도 등은 문재인 정부의 100대 국정과제로 선정된 가야사 연구 및 복원사업에 적극 나서고 있다. 우선 도는 내년까지 ‘가야사 연구 복원을 위한 기본계획 수립 용역’을 끝낸 뒤 관련 사업을 본격 추진할 계획이다. 또 2022년 가야고분군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도록 고령에 있는 ‘가야고분군 세계유산 등재 추진단’을 중심으로 행정력을 집중할 방침이다. 2017년 경북도, 경남도, 전북도 관계자와 학예연구사 등으로 구성된 추진단은 가야의 문화유산을 대표하는 가야고분군을 세계유산에 등재하기 위해 국제학술대회, 해외전문가 자문, 연구자료집 발간 등의 업무를 총괄하는 독립 기관이다. 도는 이와 함께 2028년까지 총사업비 2192억원 투입하는 기존의 가야고분군 및 산성 등의 정비 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며, 도내 가야문화권의 실체 규명을 위한 문화재 조사 및 연구 활동을 적극적으로 벌여 나가기로 했다. 이철우 경북도지사는 “가야는 신라·유교와 더불어 경북 3대 문화의 한 축을 구성할 뿐만 아니라 정체성까지 확보하고 있다”면서 “문재인 정부의 가야사 연구복원 사업은 우리 도가 추진해온 가야 부활 프로젝트에 날개를 달아 준 셈이 됐다. 호기를 맞아 가야 유적 발굴 복원과 관광자원 기반 구축사업을 연계 추진해 지역의 신성장 동력을 창출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고령·성주·상주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LG하우시스, 독립유공자 후손 자택 개보수

    LG하우시스, 독립유공자 후손 자택 개보수

    LG하우시스가 순국선열의 날인 오는 17일을 앞두고 독립유공자 후손 6명의 자택을 개보수했다고 12일 밝혔다. LG하우시스는 이날 경기 성남의 독립유공자 후손 안창호씨의 자택에서 허현 광복회 부회장, 이동주 LG하우시스 상무 등이 참석한 가운데 ‘독립유공자 후손 주거환경 개선’ 기념식을 열었다. LG하우시스는 고(故) 안도용 선생의 아들인 안씨를 비롯한 후손 6명의 자택의 개보수 공사를 지난달 말 시작해 최근 마무리했다. 안 선생은 1919년 3월 22일 경북 영일군 장터에서 군중을 모아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 만세를 외치다 옥고를 치렀다. LG하우시스는 현재까지 총 9곳의 독립운동 관련 시설을 개보수했으며 독립유공자 및 국내외참전용사 26명의 주거환경 개선을 지원했다. 강신 기자 xin@seoul.co.kr
  • ‘항일의병의 날 조례’ 제정… 김포 항일운동 새로 조명해야

    ‘항일의병의 날 조례’ 제정… 김포 항일운동 새로 조명해야

    경기 김포시 3·1만세운동 기념사업회와 재령이씨 문헌공파 김포종친회는 지난 7일 김포시독립운동기념관에서 ‘애국지사 이종근 항일의병의 삶과 김포의 정체성·과제’를 주제로 학술심포지엄을 공동 개최했다. 12일 김포시 3·1만세운동 기념사업회에 따르면 이날 발표회에 김두관·홍철호 의원을 비롯해 신명순 시의회의장, 심상연 김포시 문화복지국장 등 정·관계 및 언론계· 재령이씨 문헌공파 종친회 등 300여명 지역시민들이 참여해 성황을 이뤘다. 먼저 이날 심철기 독립기념관 박사의 ‘김포강화지역 의병활동의 전개와 성격’에 대한 주제 발표가 있었다. 이어 이회수 재령이씨 문헌공파 김포종친회 이사가 ‘김포항일의병 이종근 선생의 삶과 정신계승방안’을 주제로 발표에 나섰다. 이 이사는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원회 부의장으로 항일애국지사 이종근 의병의 후손이다. 그는 “일본의 경제침략이라는 국난시기를 맞아 지금이라도 김포시가 김포항일의병운동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 올바로 평가하고 항일독립운동 전반에 대한 올바른 역사문화정책을 재정립해 나가려면 ‘항일의병의 날 조례’를 제정하고 김포가 항일독립운동 고장으로서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역사문화정책을 통합해 세워나갈 것”을 제안했다. 이에 대해 신명순 의장은 민간 의견을 수렴해 시의회 차원에서 깊게 논의해 ‘김포 의병의 날’ 조례제정을 추진하겠다고 화답했다. 특히 한국의 근현대 정치사 전문가인 이 이사는 김포 항일의병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인 이종근 의병의 삶과 발자취에 대해 독립운동사 자료와 종중사료를 토대로 1907년부터 3년간 전개된 항일의병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새롭게 조망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이번 학술심포지엄에서는 3·1만세운동 100주년과 상해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은 시기에 일본의 경제침략이 노골화되고 일본제품 불매운동과 애국계몽운동이 확산되면서 일제 강점기 이전 항일의병운동이 주목을 받았다. 일본에 다시는 질 수 없다는 시대적 상황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던 김포지역 항일의병운동 이슈를 본격 조명했다는 점도 높이 평가받았다. 이명선 기자 mslee@seoul.co.kr
  • 일왕 향해 ‘만세 48창’ 찬반 논란…인기 아이돌 아라시도 “만세!”

    일왕 향해 ‘만세 48창’ 찬반 논란…인기 아이돌 아라시도 “만세!”

    ‘섬뜩하다·집요하다’ vs ‘축하의 뜻·일체감 느꼈다’전문가 “만세는 일왕숭배·군국주의 방책이었다” 지난 9일 일본 왕궁(고쿄·皇居) 앞 광장에서 열린 나루히토 일왕 즉위 축하행사(국민제전) 때 일왕 부부가 행사장을 떠난 뒤에도 왕을 향한 만세가 수십 차례 이어진 것을 놓고 일본 내에서 논쟁이 오가고 있다. 12일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3만여명이 모여든 가운데 열렸던 당일 행사에서 일왕 부부가 현장을 떤나 뒤에도 만세 삼창이 최소 16번이나 이어져 ‘만세 48창’이 이뤄졌다. 이부키 분메이 전 중의원 의장이 ‘세계평화를 기원하며’라는 설명과 함께 선창하자 참가자들이 일제히 만세를 따라 불렀다. 인기 아이돌 그룹 ‘아라시(嵐)’ 멤버 5명도 양손을 치켜들고 만세를 외쳤다. 이후에도 주최 측의 선창으로 ‘양 폐하 만세’, ‘일왕 만세’의 함성이 계속 이어졌다. 이 행사는 TV로 생중계됐다. 그러자 SNS에 관련 투고가 줄을 이었다. ‘끝없는 만세가 무섭다’거나 ‘집요하다’, 젊은 병사가 일왕만세를 외치며 죽어간 2차 대전을 언급하며 ‘섬뜩한 느낌밖에 들지 않는다’는 비판도 많았다. 반면 ‘경의와 축하의 뜻을 전하는 거니 좋지 않으냐’거나 ‘일체감을 느꼈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의견도 나왔다. 축하행사는 이부키 전 중의원 의장이 회장을 맡고 있는 ‘봉축의원연맹’과 게이단렌 등 민간단체로 구성된 ‘봉축위원회’가 주최했다. 위원회에는 개헌을 목표로 내걸고 있는 보수계 단체 ‘일본회의’도 참가했다.홍보 담당자는 만세는 “축하하는 자연스러운 마음”에서 이뤄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날 행사에서는 일왕 부부가 모습을 드러내기 전 실존 여부는 확인되지 않지만 초대 진무(神武天皇) 일왕 ‘즉위’ 이후 2600년 이상의 역사가 있었다는 설명과 현존하는 일본 최고(最古)의 역사서인 고지키(고사기·古事記)에 나오는 일본 건국신화가 소개되기도 했다. 행사의 마지막을 장식한 것이 ‘만세’였다. 만세의 역사는 메이지 22년(1889년) 대일본제국헌법 공포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메이지 왕의 마차를 향해 만세를 부른 것이 처음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총리를 지낸 와카쓰키 레이지로가 저술한 ‘메이지·다이쇼·쇼와 정계비사-고풍암회고록-’에 따르면 이때까지는 일왕을 환호하는 단어가 없어 공손하게 인사만 했으나 존경과 친애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대학 교수 등이 고안해 낸 단어가 ‘만세’였다고 한다. 지난달 22일 나루히토 왕의 즉위를 대내외에 알리는 의식인 ‘소쿠이레이세이덴노기’는 국가 행사로 진행됐다. 아베 신조 총리의 만세삼창 선창을 참석자들이 따라서 불렀다. ‘일왕폐하 만세’를 부르기에 앞서 ‘즉위를 축하드리며’라는 말을 붙였다. 국민주권을 규정한 현행 헌법 하에서 이뤄진 첫 왕위 교대 행사였던 ‘헤이세이(平成)’ 때의 의식을 답습했다. 만세가 계속되자 SNS에서는 정작 일왕이 ‘곤란해 하지 않았을까’라는 글도 올라왔다. 현장을 지켜본 하라 다케시 방송대 교수(일본 정치사상사)는 “참가자들이 직접 스크린을 통해 일왕 부부의 표정을 잘 볼 수 있었을 텐데 두 분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생각하지 않고 만세를 계속하는 건 이상했다”고 말했다. 가와니시 히데야 나고야대 대학원 교수(역사학)는 “세계대전 전처럼 왕의 권위를 높이고 싶어 하는 보수파의 생각이 장시간 만세를 계속 부른 데서 나타났다”고 분석했다. 또 행사에 인기 아티스트 등을 참석시켜 왕실에 흥미가 없는 층도 끌어 들이려는 계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도 했다. 그는 “‘만세’라는 단어는 전에 일왕 숭배나 군국주의를 추진하기 위한 방책이었다는 걸 생각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화성 독립운동기념관 설계공모 당선작 선정

    화성 독립운동기념관 설계공모 당선작 선정

    100년 전 일제의 제암·고주리 학살사건이 있었던 경기 화성시 3·1운동 순국유적지에 들어설 ‘화성 독립운동기념관’ 설계공모 당선작이 확정됐다. 화성시는 16건의 응모작 중 ㈜건축사사무소 아이앤의 작품(사진)을 당선작으로 최종 선정했다고 7일 밝혔다. 당선작은 돌, 물, 풀이라는 테마를 활용해 지하 1층이지만 모든 내부공간에 빛과 바람이 들어갈 수 있도록 설계됐다. 외부에서 내부로의 동선체계와 짜임새 높은 공간구성이 눈에 띄며, 기념관 전면에 긴 벽을 둬 그 자체만으로도 웅장한 기념비와 같은 인상을 준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화성 독립운동기념관은 연면적 5000㎡, 지하 1층 규모로 내년 말 착공해 2022년 12월 준공 예정이다. 지하 1층에는 유물을 보관하는 수장실과 전시실, 교육실 등이 갖춰진다. 백영미 문화유산과장은 “당선작에 제암리 주민과 관련 전문가 의견을 담아 보다 완성도 높은 기념관을 만들 계획”이라며, “그 어느 지역보다 치열한 독립운동이 벌어진 화성시가 독립운동의 성지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화성 제암·고주리 학살사건은 100년 전 화성 만세운동 과정에서 주민들이 화수리 경찰관 주재소를 공격해 일본 순사 가와바타를 처단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일제가 군대를 투입해 제암리 마을 주민 23명과 독립운동가 가족 등 총 29명을 학살한 사건이다. 김병철 기자 kbchul@seoul.co.kr
  • 반칙 유도에 울고 웃는 KBL…할리우드 액션왕은 오누아쿠

    반칙 유도에 울고 웃는 KBL…할리우드 액션왕은 오누아쿠

    툭하면 만세·비명… 대놓고 다이빙 DB 10차례로 최다 구단 ‘불명예’오누아쿠 5개로 개인 최고 기록 오리온·모비스는 0건으로 깨끗“으악.” 프로농구 경기 중 코트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들린다. 소리만으로는 부족했는지 2m 안팎의 건장한 선수들이 두 팔을 번쩍 드는 만세 제스처로 심판의 파울콜을 유도한다. 영상을 다시 돌려보면 가벼운 몸싸움이었거나, 신체가 아닌 공을 건드린 정당한 수비인 데도 마치 치명상을 입은 듯 얼굴을 감싸쥔다. 때로는 상당한 통증이 온 듯 오만상을 지으며 동료들의 부축을 받는다. 하지만 심판의 휘슬이 울리지 않으면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잽싸게 일어난다. 농구 코트는 순식간에 할리우드 액션 연기를 경쟁하는 눈속임 무대가 된다. 페이크(가짜) 파울은 경기 흐름을 중단시킬 뿐 아니라 정당하지 않은 자유투나 공격권으로 승패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심판들은 ‘플라핑’(flopping·시합 중 선수가 과장된 몸짓으로 쓰러지거나 다친 척을 해 심판 파울콜을 유도하는 행위)이 분명해 보일 경우 쓰러진 선수들에게 일어나라고 지시한다. 한국농구연맹(KBL)이 5일 올 시즌 프로농구 1라운드에서 적발된 ‘페이크 파울’ 29건의 영상과 해당 선수들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KBL은 2018~2019시즌부터 경기 후 영상 판독을 통해 페이크 파울을 적발했지만 비공개했다. 김동광 KBL 경기본부장은 “스포츠맨십에 어긋나는 선수들의 행위에 경각심을 주기 위해 올 시즌부터 공개를 결정했다”면서 “국제농구연맹(FIBA)도 페이크 파울을 금지하는 등 깨끗한 경기는 세계적 흐름”이라고 말했다.지난 1라운드에서 가장 많은 페이크 파울이 적발된 팀은 원주 DB 프로미로 모두 10차례였다. 만화 ‘슬램덩크’의 주인공처럼 독특한 자유투 자세로 눈길을 끈 외국인 선수 치나누 오누아쿠(23)가 5개로 팀 전체의 절반에 달했다. 지난달 31일 원주종합체육관에서 열린 창원 LG 세이커스와의 경기에서 선보인 플라핑 행위로 공식 사과까지 했던 ‘연봉킹’ 김종규(27)도 포함됐다. KBL은 페이크 파울 명단 공개가 효과가 클 것으로 기대한다. 김 본부장은 “일회성이 많지만 공개되고 경고를 받은 만큼 2라운드부터 대폭 줄어들 것으로 전망한다”고 말했다. 1라운드에서 2회 이상 적발돼 벌금을 낸 선수는 오누아쿠 등 4명이다. 팀별로는 DB 다음으로 서울 SK 나이츠와 전주 KCC 이지스, LG가 4회를 기록했고, 안양 KGC인삼공사, 서울 삼성 썬더스, 부산 KT 소닉붐이 각각 2회로 나타났다.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와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는 단 1건도 없는 ‘깨끗한 농구’를 했다. 김승현 SPOTV 해설위원은 “이번 공개를 통해 심판도, 팬도 더이상 선수들에게 농락 당하지 않도록 페이크 파울이 근절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류재민 기자 phoem@seoul.co.kr
  • 최초 사립 간송미술관 ‘서울 보화각’ 문화재 된다

    최초 사립 간송미술관 ‘서울 보화각’ 문화재 된다

    문화재청은 1938년 지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미술관인 간송미술관의 건물 ‘서울 보화각’을 문화재로 4일 등록 예고했다. 미암 유희춘의 서적 보관 시설인 ‘담양 모현관’, 윤동주 시인이 생활했던 ‘연세대 핀슨관’, 송기주씨가 개발한 ‘송기주 네벌식 타자기’도 문화재가 된다. 서울 보화각은 ‘문화재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간송 전형필(1906∼1962)이 우리 미술품 보존과 활용을 위해 건립했다. 일제강점기 때 우리의 문화유산을 지켜낸 곳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담양 모현관은 보물 제260호 ‘유희춘 미암일기 및 미암집 목판’을 비롯해 미암 유희춘(1513∼1577) 관련 서적을 보관한 수장시설이다. 미암 후손들이 한국전쟁 이후인 1957년 혼란한 분위기에서도 문화유산을 보호하고자 건물을 세운 사실을 높이 평가했다. 연세대 핀슨관은 1922년에 준공했다. 윤동주 시인을 포함한 근현대 주요 인물들이 생활한 기숙사 건물이다. 20세기 초반 건축 형태·구조·생활환경을 보여 주는 드문 자료로서 가치가 높다. 송기주씨가 개발해 1934년 공개한 송기주 네벌식 타자기는 현존하는 한글 타자기 가운데 가장 오래됐다. 한글 기계화의 초창기 역사를 보여 주는 자료다. 한편 문화재청은 경북 영덕군 성내리 일대 1만 7933㎡에 이르는 ‘영덕 영해장터거리 근대역사문화공간’(762호)을 이날 문화재로 등록했다. 한국인의 생활상을 보여 주는 장터거리로, 주민 3000여명이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곳이다. 1899년 군산항 개항, 1914년 동이리역 건립 등을 거쳐 번화했던 전북 익산시 주현동·인화동 일대 2만 1168㎡ 규모 ‘익산 솜리 근대역사문화공간’(763호)도 이날 문화재로 등록했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광주서 제90주년 학생독립운동기념식…李총리 “정부가 학생들 정신 구현할 것”

    일제의 차별과 불의에 항거한 학생들의 항일운동을 기리는 ‘제90주년 학생독립운동기념식’이 3일 광주에서 열렸다.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광장에서 개최된 기념식에는 이낙연 국무총리와 유은혜 교육부총리, 독립유공자, 유족, 학생, 시민 등 3000여명이 참석했다. 과거에는 교육부 주관으로 각 지역교육청에서 열렸지만, 지난해부터 정부 기념식으로 격상되면서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치러졌다. 이 총리는 기념사에서 “정부는 국가를 바로 세우려는 학생들의 정신을 구현하며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만들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다”며 “정의와 공정으로 사회가 움직이도록 더 세심하면서도 더 강력하게 추진하려 한다”고 밝혔다. 학생독립운동은 1929년 10월 30일 광주~나주 통학 열차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조선 여학생들을 희롱해 광주고등보통학교(광주제일고) 학생들과 충돌한 것을 계기로 일어났다. 학생들은 일왕 생일인 11월 3일 광주 시내에서 독립만세운동을 했고 이듬해 3월까지 전국 300여개 학교에서 5만 4000여명의 학생이 동맹 휴교와 시위운동에 참여했다.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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