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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명만세(외언내언)

    새학기초 국민학교 4학년교실에서 있었던 일이다.반이 새로 편성돼 낯선 급우들이 처음 만난 자리.선생님이 출석을 부르기 시작했다.「차용달」이란 이름을 부르자 교실은 갑자기 웃음바다가 돼 버렸다.짓궂은 남학생들은 「용달차」라고 떠들어 댔다.이름이 불려진 차용달양은 얼굴이 뻘게진채 고개를 들지 못한다.그 소녀는 놀림감이 된 자신의 이름을,그리고 그런 이름을 지어준 부모님을 얼마나 원망했을 것인가. 항렬따라 한문으로 이름을 짓다보면 발음이 욕설이 되거나 놀림감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이무식 나죽자 김창녀 등은 수모를 겪는 대표적 이름.이름에서 오는 열등감을 평생 지고 살아야하니 당사자들의 마음의 상처는 오죽하겠는가. 옛날에는 천한 이름을 붙이면 반대로 귀해지고 건강하게 자란다해서 「바우」니 「개똥이」이니 「간난이」따위의 이름을 지어 불렀다. 아들을 바라는 간절한 소망이 딸의 이름에 얹히기도 했다.「제발 딸은 이제 그만 낳으라」해서 붙여진게 「딸그만」 「딸막이」 「딸근이」(딸은 끝이라는 뜻).아들로 이어지라해서 「후남」이란 이름도 지었다.아들 못낳으면 「칠거지악」에 해당되는 시대였으니 작명의 눈물겨움을 족히 이해할만 하다. 일제때 창씨개명을 강요하니까 당시 유명한 만담가(지금의 개그맨)가 개명한 이름이 「에하라 노하라」(강원야원).지독한 풍자와 반일감정을 담은 걸작이다. 여자 이름에 「자」자를 붙인것도 일제의 잔재.순자 영자 숙자등등….그래서 개성없는,같은 이름을 양산하게 되었다. 이름은 부르기 좋고 좋은 뜻이 함축되어 있으면 그만이다.요즘 신세대 부부들은 자녀들에게 한글 이름을 많이 지어주고 있다.국민학교 학생들중에 14.5%가 넘는다고 한다. 대법원은 내년 1년동안 국민학교 학생의 개명을 허용하고 절차도 간소화하기로 했다.이름 때문에 고통받는 수많은 어린이에게 큰 선물을 안겨준 셈이다.듣기싫은 이름의 멍에를 벗게 되었으니까.
  • “북은 국군포로 송환하라”/조창호중위,전역식서 목멘 호소

    ◎“대한민국 만세” 43년 군생활 마감/“군인의 길은 대장부 보람” 후배에 당부/8천여 참석자,호국정신에 박수갈채/최장기 복무·최후의 6·25참전 현역 기록 『군번 212966 육군중위 조창호,저는 대한민국 소위로 43년을 보내고 오늘 하루 중위로 보내는 것을 끝으로 청춘을 바쳤던 국군의 품을 떠납니다』 26일 상오 10시30분 서울 태릉 육군사관학교 연병장에서 성대하게 거행된 전역식에서 「돌아온 노병」조창호중위(64)는 감회어린 목소리로 전역사를 낭독했다.청춘을 북녘땅에서 잃고 돌아온 노병이 중위진급 하루만에 최장 현역복무군인 및 최후의 6·25참전용사 기록을 세우고 군문을 떠나는 순간이었다. 화랑대를 몰아치던 초겨울 바람속에 1시간여 부동자세로 서있던 육사·해사·공사생도와 조중위의 모교인 연세대학군단 학생들은 한서린 「전역사」가 낭독되는 순간 솟구치는 감동에 추위도 잊은 표정이었다.그의 전역사는 한구절 한구절마다 「군인의 지표」가 되어 예비소위들의 폐부를 찔러 들어왔다. 전역식에 참석한 이병태국방장관·황명수국회국방위원장과 장병 등 8천여명은 조중위의 「불굴의 군인정신」에 내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이날 행사장의 열기는 조중위가 가슴에 보국훈장 통일장을 달고 간호장교의 부축을 받으며 단상에 오르면서 달아올랐다.행사진행을 맡은 합참 최경식대령은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에 이어 가진 귀환보고에서 『북한의 끈질긴 전향공작과 고문 등을 이겨내고 조국의 품에 귀환한 조중위는 전후세대에게는 상무정신을,기성세대에게는 호국의 정신을 일깨운 참군인』이라고 조중위를 소개했다. 조중위는 전역명령 낭독이 끝나자 『육군중위 조창호는 94년 11월26일부로 전역을 명 받았읍니다』라고 이국방장관에게 신고한뒤 이장관과 함께 열병차에 탑승,3사관학교 생도와 연세대학군단을 10여분간 열병했다.열병도중 조중위의 어깨에 부착된 다이아몬드 2개의 중위계급장은 햇빛에 더욱 반짝거렸다. 조중위는 전역사에서 『나라를 위해 어머니의 권유에 따라 자원입대했으나 적의 포로가 돼 북한공산집단을 대상으로 길고 긴 전투가 시작됐다』고 말문을 연뒤 『왼쪽눈을 실명하고 아오지탄광에서 규폐증까지 얻으면서도 43년간 자신과 투쟁할 수 있었던 것은 전쟁터에서 배운 「죽어도 항복하지 않겠다」는 군진수칙과 신앙심 때문』이라고 말했다. 『군인의 길이 비록 힘들고 어렵다하더라도 사내대장부로 태어나 가장 보람찬 길임을 명심해달라』고 후배들에게 당부하는 조중위의 눈시울은 어느새 붉어졌으며 목소리도 잠겨들었다. 조중위가 『지난 43년간 가장 불러보고 싶었던 것』이라면서 『대한민국 만세.대한민국 국군만세.대한민국 국군소위 만세』를 외치자 행사장을 가득 메운 장병들은 박수와 환호로 화답했다. 조중위는 이어 북한에 보내는 호소문을 통해 『이산가족의 아픔을 덜기 위해 남북적십자 회담에 응하고 제네바협약을 준수,국군포로를 송환하라』고 목메어 촉구했다. 전역증을 받아쥔 조중위가 헌병싸이카와 선도차의 안내 아래 누나 창숙씨(74)의 서울 서초동집으로 떠난 한참후까지도 참석자들은 조중위의 「인간승리」를 화제로 삼아 연병장을 떠날줄 몰랐다.
  • 「우리의 선택」 성공해야 한다/현승일(특별기고)

    ◎“지금은 문민정부 격려할때”/정통성 있기에 개혁 가능… 「저의 있는 비판」 삼가야 우리나라 민주주의 전개에 있어서,가장 뜻깊은 일은 대한민국의 건국이었으며,그 다음번으로 뜻깊은 것은 YS 문민정부의 탄생일 것이다. 건국에서는 우리나라의 국체를 민주주의로서 기본틀을 삼았다는 점에서 중요하며 문민정부 탄생은 사상 처음으로 민주주의 원리에 따라 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지니는 것이다.이 두사건 사이의 시간적 간격은 50년이었다. 민주주의 전개가 이만큼 힘든 일이고,앞으로도 과거에 겪었던 우여곡절을 또 겪게될지 모른다고 하더라도 우리나라가 정치사적으로 나아갈 방향은 결국 민주주의의 전개인 이 방향일 것이다. 이것은 서구에서 민주주의 전개역사가 가장 험난하였던 프랑스에서 조차도 결국에는 첫단추를 끼웠던 대혁명의 원리대로 민주화의 길을 걸었던 예에서 보는 바와 같다. ○자작없는 정권 YS문민정부 이전까지 민주주의가 잘 되지 못했던 것은 민주주의의 핵심요소인 국민의 정부선택권이 유린된 사실이었다.일찍이 자유당때도 헌법조작,부정선거 따위로 국민의 정부선택권을 제약해 왔었으나 박정희씨 이래로는 군부의 일부 강자들이 숫제 정권을 자작해 버렸던 것이다. 그러한 자작정권 아래서 야기되는 문제는 정부에 대한 국민의 복종에 관한 문제였다. 즉 정통성이 없는 정권에 대해서도 국민이 복종할 이유가 있는가 하는 심각한 문제였던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해답 그자체 보다는 정부는 정통성을 지녀야 한다는 인식으로 정리되었고 이것은 곧 국민의 정부선택권을 요구하는 민주화투쟁으로 연결되었다. YS정권의 성립으로 실로 오랜만에 정통성 있는 정부를 갖게 되었으며 과거 정통성 부재에서 야기되었던 정부의 대내외적 약점들을 일시에 극복할 수 있게 되었다. 내치에 있어서 이제 정부는 정의의 문제,도덕의 문제,반역의 문제를 다룰수 있게 되었다.정부가 국가와 사회의 기본에 관련된 이러한 문제를 다루지 못한다면 정치를 한다고 할수 없는 것인데도 자작정권들은 자신들이 먼저 거기에 저촉되기 때문에 거론부터가 곤란한 문제였다.그러므로과거 정권들은 정치의 성과를 정량적 척도의 향상에 두어 언제나 생산성·효율성·실적등을 지나치게 강조하였고 반면에 정의·도덕·법통·권위등과 같은 삶의 올바른 지혜와 덕성과 아름다움에 관련된 상위가치등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 버렸다. ○민주투쟁의 결정 YS정부가 공직사회의 정의로움을 위해 사정과 재산등록을 실시하고 검은 돈의 거래와 번식을 막기위해 금융실명제를 실시하고 타락·금권선거를 타파하기 위해 새로운 선거법을 채택하고 군부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특권적 사조직부터 배제시킨 개혁조처 등은 정권의 정통성이 없이는 도저히 수행할 수 없는 사안들이었다. 이러한 개혁조처들에는 불가피하게 부작용도 따르고 있지만은 부작용이 있다고 해서 이러한 정책들의 본질적 가치가 저하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래에 들어 YS정부는 많은 비판과 공격을 당하고 있다.공격재료는 대개 다음의 몇가지다.즉 공무원의 복지부동 현상등 개혁의 부작용에 관한 비판,혹은 개혁이 퇴색해가고 있다는 정책 비일관성에 관한 비판,부처간의 정책이 조율이 안된채 튀어 나온다는 정책조율부족에 관한 비판,인사가 적절하지 못하여 패착이 자주 일어난다는 비판,국제화·지방화등에 좀더 적극적으로 대비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 등이다. 여기에 덧붙여 국가에 불행한 사태가 발생할 때마다 정부는 당한다.불행으로 인한 원망과 비판의 심리를 정부로 향하도록 공격을 전이시키는 의도가 작용하기도 한다.얼마전 성수대교가 무너졌을때 모일간지는 『이런 정부를 믿고 어떻게 사나』하는 제목을 크게 달았다.성수대교가 무너진 것은 복합적인 원인,국민전체가 반성하고 책임져야 할 해묵은 원인들에 의해 무너진 것이라고 보는 것이 보다 정직할 것인데,언론이 이런식으로 나오는 것은 참으로 옳지않은 태도라 하겠으나 그렇게 하였다. YS정부가 비판·공격받고 있는 사안의 내용들을 보면,과거의 정권에서 문제되었던 것들에 비해 치유와 개선이 훨씬 용이한 성격의 것들이다.과거 정권에서는 권력형 부정부패,정경유착,인사에 있어서 특정지역독식,범죄와의 전쟁사태,친인척비리 등이 주조로서 권력핵심부에 관련된 문제가 대부분이어서 치유가 훨씬 어려운 문제들이었다.그럼에도 현재 YS정부가 받고 있는 공격의 강도는 과거보다 강하며 또한 훨씬 더 조직적인듯 하다. YS정부를 의도적으로 공격하는 부류는 대개 3종이다.첫째는 북한의 지령에 따라 움직이거나 동조하는 친북세력,둘째는 YS정권으로부터 소외되었다고 생각하거나 섭섭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기득세력,셋째는 차기의 집권을 겨냥하는 야권세력등이다. 첫째 북한은 김일성 사망전에도 그랬지마는 특히 사망이후 한국을 교란시킬 전략을 강화하여 대남 3대 목표로 공언하고 있는데 「김영삼 정권타도」「UR반대」「연방제통일」이 그것이다.김일성을 승계한 김정일은 그의 건강상의 이유 등으로 주석직에 취임조차 하지 못하는 내부적 약점을 은폐하기 위해서인지,혹은 남한의 안정과 성장을 두려워한 때문인지는 분명치 않으나,김영삼정부의 타도와 퇴진운동을 전개할 것을 친북세력에게 선동·지령하고 있다. ○왜 공격 하는가 둘째,3공이래 집권층에 속했던 기득세력은 대선전에 민주화에의 동참과 국민대화합의 차원에서 정치권에서 YS진영과 3당 통합을 하였으나,대선직전에 노대통령및 그의 최측근 인사의 이탈로 말미암아 구 기득세력은 YS정권창출에서 장자노릇을 할 수가 없었다.따라서 구 기득세력은 YS정권창출에서 거듭 태어나지 못하고 여당의 비주류 집단처럼 되어버렸다.정치권에서 3당통합이 이와같이 기득세력의 기득권확보로 연결되지 못하자 기타의 기득세력들은 YS정권의 사정개혁 등에 대해 경계심을 갖게 되었으며 잠재적인 반 YS세력으로서 약점만 잡혔다하면 강도높은 비판의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셋째,야당의 정부비판은 당연하며 더 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과연 YS정부가 비판의 목소리 크기만큼 잘못하고 있는가? YS정부가 과거 정권보다 더 못한다는 말인가? 광주사태와 같은 천인공로할 만행을 저지르고,정권연장을 위한 내각제 개헌에만 골몰하여 세상만사가 물에 떠내려가고,오합지졸의 집단 이기심으로 사업장마다 파업으로 해가 뜨고 해가 지던 과거의 정부가 더 잘 했단 말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그러하나잘 해왔다고 하더라도 YS정부는 더 잘해야 하고,잘 못해왔다고 하더라도 더 잘해야 한다.이유는 자명하다.건국 50년만에,긴긴 민주화 투쟁끝에 성취된 문민정부가 실패로 끝난다면 인간 삶에 있어서 사회적 이상과 도덕적 지조와 희생적인 노력의 의미는 어떻게 되어버린다는 말인가! YS문민정부가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이탈하려는 원칙을 다시 바로 세우고 불만세력을 좀더 포용하며,악의 세력에 대해서는 좀더 단호해야하며,미래에 대비하여 좀더 적극적이고 좀더 창조적이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2차대전이후 서독에서 아데나워정부가 성공을 거둠으로써 독일 국민의 의식으로부터 과거 나치스정권의 효율성에 대한 향수를 씻어낼 수 있었고 민주주의의 가치들이 자리잡아 갔던 것이다.이 나라의 장래를 진정으로 걱정하는 국민이라면 YS문민정부가 아데나워 정부처럼 성공을 거둘수 있도록 격려하고 돕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 말련 페낭대교/윤명오(세계의 명소 걸작건축 감상:5)

    ◎한국인 긍지 높인 세계 3번째 긴다리/페낭섬­본토 연결 14.5㎞… 중앙의 사장교 장관/현대건설 85년 완공… 성수대교도 이처럼 멋지고 튼튼하게 만들었으면… 말레이시아 북서쪽 말라카해협에 떠있는 페낭섬에 도착한 관광객은 우선 물씬 풍겨오는 열대의 정경에 매료된다.단정한 해안을 향해서 고개를 길게 빼고 있는 야자수와 산기슭에 펼쳐 일렁거리는 파초와 바나나잎의 싱그러운 풍경이 천혜의 관광도시를 감싸고 있다. 필자는 말레이시아를 방문하는 우리나라 관광객들에게,그리고 좀 무리하더라도 이른바 동남아지역에 나선 분들 모두에게 꼭 이곳 페낭에 들러보기를 권한다.그래서 그곳에 머무르는동안 부디 페낭섬과 말레이 본토를 연결하는 페낭브리지를 찾아보면 이국적인 자연의 정취와 함께 한국인으로서 남다른 감동의 체험을 맛보게 되리라고 확신한다.그곳에서 우리는 이미 현지인들에게 신화가 되어버린 우리의 「피」와 「땀」「눈물」그리고 고도의 기술력이 결집된 세계 최대급의 아름다운 구조물을 만나게 된다.진입로를 포함하여 전장 14.5㎞,수면위 40m를 달리는 바다위의 고속도로.중앙부 사장교 구간 4백40m.당시 세계3위의 이 다리는 멀리서보면 바다위를 가르는 섬세한 피아노선과 같은 모습으로 반짝거린다.일단 다리위로 진입하는 순간 탁 트인 시야와 함께 운전자가 물위를 달리는 듯한 멋진 분위기를 맛볼수 있다.말레이시아인 운전기사는 여러분이 잠자코 있어도 「페낭 브리지」,「코리안 넘버 원」을 외치며 마구 가속기의 페달을 밟아 댈 것이다. ○한국기술자 94만명 건설기술과 전혀 무관한 독자라면 그 규모를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이 다리의 공사에는 보통 크레인의 10배에 가까운 능력을 가진 3백t급 해상 크레인을 비롯하여,항공모함에 버금가는 1만5천t급 바지선과 5백60여대의 육상·해상장비가 투입되었다.투입인력은 우리 기술자 연 94만명과 현지인 1백76만명.공사원가의 최소화를 위해 당시 중동지역에서 우리건설업체가 보유하고 있던 건설장비를 집결시켰다.이 거대한 기념비적인 프로젝트의 수주는 물론 입찰 41개업체중 끝까지 남은 대만과 치열한 경쟁을 이겨낸 현대건설의기술력과 정보분석능력의 결과임에 틀림없다.그러나 좀더 넓게 보면 당시까지 열사의 중동사막과 알래스카등 극한지에서 피눈물로 쌓아올린 한국인의 신뢰와 의지력에 대한 보상인 것이다.당시의 서류에서 현대건설은 첫째 「페낭대교 공사를 수주하여 단순이익을 챙기기보다는 말레이시아를 위하고 말레이시아속에 한국을 심는다는 긍지로 입찰에 임할 것이며」,둘째로 「지구상에 현대건설의 걸작을 남겨놓겠다」는 야심찬 목표를 내부방침으로 세워놓고 입찰에 응하고 있었다.그리고 이 목표는 82년1월부터 85년2월까지의 36개월의 공사기간내에 실현되었다. 사실 중동건설경기가 수그러들던 81년 당시 3억달러에 가까운 페낭대교 입찰에는 선진 각국도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그중 복병과 같이 등장한 프랑스의 캉페농 베르나르사는 현대건설보다 무려 2천만달러가 싼 금액으로 응찰했다.현대건설은 입찰결과 2위로 고배를 마셔야 했다.입찰에서는 2등으로 떨어졌든 41등으로 떨어졌든 마찬가지다.그러나 현대건설은 「부조리척결」을 부르짖고 탄생한 신정권의 다토 마타하르 총리에 대한 집요한 설득을 계속했다.입찰이 다 끝난 다음의 협상과정에서 입찰 각사의 서류를 끈질기게 정밀 검토하였고 그 결과 현대건설이 제시한 공법을 적용함으로써 공기단축은 물론,2천만달러의 비용 차이를 보상하고도 남는 국익을 말레이시아에 보장해준다는 설득이 관철되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막판뒤집기의 기적」이 연출되었다.말레이시아 정부가 내걸었던 교량건설의 취지로서 첫째로 페낭섬을 세계적인 관광지로 발전시키기 위한 상징적 건축물의 확보,둘째로 페낭섬과 본토를 연결하여 중국계 주민이 장악하고 있는 페낭섬의 경제권을 본토에 이입시키고,셋째로 페낭섬 동해와 본토 서해지역을 연계하여 무역항과 공업단지로 발전시킨다는 경제개발계획의 추진이라는 세 항목은 그 관건인 페낭대교의 완공을 통하여 실현되었다. ○인간과 자연을 연결 페낭섬의 한 가운데 페낭힐이라는 산이 있다.덜컥거리는 사면전차를 타고 오르면 몇개의 매점과 전망대가 있는 정상이 나타난다.점심이 조금 지났을 때,주변이 플래시 라이트를 켜야할 정도의 암흑으로 바뀌더니 동이로 물을 들이붓듯 스콜이 쏟아졌다.관광객중에는 놀라다 못해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리는 이들도 보인다.그리고 어떤 순간 먹구름이 비디오의 「화면고속전진」 조작상태처럼 황급히 걷혀버리고 본토를 향해 화살처럼 수면을 스치는 페낭대교의 자태가 드러난다.방금전 오르막 전차에서 열대의 유실수와 원숭이 무리의 수작에 정신팔려 있던 모두가 바라보는 페낭대교는 자연을 거스르는 무모함의 상징이 아니라 본토와 페낭섬을,그리고 인간세상과 자연을 연결하는 날렵하고 질긴 젖줄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페낭대교 건설과 관련하여 확인된 자료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귀신소동」에 관한 이야기다.1985년 이 다리가 개통되자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나 에펠탑에서와 같이 연이은 투신자살사건이 발생하였다.그리고 현지에서는 밤중에 오토바이로 달리다보니 목잘린 사람이 뒤에 타고 있더라는 이야기가 퍼졌다.결국 현지의 무당을 총동원하여 굿을 한 결과 귀신소동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각국에 명작 수두룩 요즈음 우리 주변에는 건설구조물에 관한한 최악의 시나리오가 전개되고 있다.페낭대교의 몇분의 1 규모인 올림픽대교며 행주대교가 공사중 붕괴되어 엄청난 사회적 비용의 피해를 발생시켰다.그리고 얼마전 사용중인 성수대교가 붕괴되었다.우리의 길지 않은 산업사를 돌아보면 건설업은 우리의 자존심임에 틀림없다.혹자는 무리한 공기단축과 가혹한 인력 가동,덤핑 수주를 우리 건설업의 본질인양 주장하지만,경제 성장의 버팀돌로 오늘의 한국경제를 일구어 낸 건설산업이 해외에서 치러온 전과는 믿고 인정해야 한다.대규모의 기술집약적 프로젝트에 대한 기술력이 선진국에 비해 뒤처진 것은 사실이지만,뒤집어 말하면 우리 건설산업의 상대는 「선진국」인 것이다.지속적인 합리화와 기술 선진화의 노력이 절실한 시점이다.그러나 아직도 선뜻 이해되지 않는 몹시 아쉬운 부분이 있다.왜 이국땅에서 우리 한국인이 건설한 건축물은 세계의 명소가 되어 오늘에 이르건만 국내에서 건설된 구조물은 이렇듯 부실한 것인가.건설물에 관한한 메이드 바이 코리안(made by Korean)은 영광을 가져다 주건만 「메이드 인 코리아(made in Korea)」는 가히 최악의 지경임을 부인할 수 없다.최종제품의 질이 만들어진 장소나 풍토에 의해서 이토록 좌우된다면,우리는 그 책임을 모두 함께 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건설 풍토를 오염시킨 구조를 바로잡지 않고 건설작업의 주체만을 엄히 다스린다면 우리는 얼마가지 않아 역전의 명장을 모두 잃게 되는 건설인력 고갈의 상황을 맞게 될 것이다. 1971년에 준공된 「알래스카의 허리케인 다리」는 해발 6천1백90m 매킨리산의 협곡을 가로지르는 가장 험난한 지역에 위치한 가장 아름다운 교량의 하나다.섭씨 75도(여름 25도·겨울 영하50도)의 연교차를 수용하는 아치트러스는 양단부에서 조립되어와서 태극기와 성조기가 휘날리는 가운데 만세의 함성에 묻혀서 놀라운 정확도로 연결되었다. 이밖에도 진한 감동을 맛보게 하는 우리의 역작은 세계 도처에 널려 있다.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의 건설산업에 대한 깊은 애착을 가지고 「메이드 인 코리아」와 「메이드 바이 코리안」의 개념을 일체화시켜야 한다.
  • 동토유랑 3년… “자유 만세”/탈북벌목공 김호 서울 오기까지

    ◎한때 북요원에 잡혀 압송직전에 탈출/올4월 본지서 「빠삐용 행로」 집중보도 탈출 벌목공 김호가 마침내 자유의 품에 안겼다. 지난 91년 8월24일 러시아 극동에 위치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재쏘 림업대표부 제1련합기업소」의 튀르마 벌목장을 탈출한 뒤 올해초 러시아 정부로부터 공식 망명허가를 받기까지 김씨는 북한 정보요원들의 추적을 피해 러시아 극동과 시베리아,모스크바,중앙아시아,중국 만주 등지를 떠돌며 필사의 탈출극을 벌여왔다.이 과정에서 김씨는 두차례나 북한 정보요원들에게 붙잡혔으며 북한으로 압송되기 직전,자해를 하고 혈투를 벌이며 극적으로 탈출한 바 있다. 김씨는 이러한 눈물겨운 탈출행로가 러시아 사회에 알려지면서 지난해 모스크바로부터 임시거주 허가를 받았다.김씨는 그즉시 모스크바의 한국대사관에 망명을 요청했으나 당시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또 올해 4월 서울신문이 김씨등 탈출벌목공들의 어려운 생활을 집중 보도,벌목공들의 송환문제가 정부의 중요 정책현안이 되었을 때도 블라디보스토크에 정식으로망명요청을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김씨는 최근까지도 본사 기자와의 전화통화를 통해 서울에 가고 싶은 간절한 희망을 피력해왔다.『서울에 오면 눈이 뒤집힐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씨에게는 중앙아시아 도피생활중 카자흐공화국에서 만나 결혼한 고려인(한국계 러시아인) 마야씨와 아들,딸이 있다.이들도 곧 서울에 데려올 예정이다. 김씨는 북한 공군장교 출신이며 아버지가 교사,형이 연구인,누나가 의사인 비교적 성분이 좋은 집안에서 생활했다. 김씨가 그토록 희망하던 서울에서 와서 어떠한 생활을 펼쳐 나갈지 매우 주목된다.많은 사람들이 주시할 것 같다.
  • “주체사상은 새빨간 거짓말”/박일 전김일성대학 총장(인터뷰)

    ◎46∼48년 김에 마르크스·레닌사상 가르쳐/빨치산으로 활약했다던 지점 못찾아내 『김일성이 만들었다는 「주체사상」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지난 46년9월부터 48년3월까지 만 1년6개월동안 김일성대학 총장을 지낸 박일씨(83·알마아타 거주)는 2일 『주체사상은 북한에 주둔한 소련공산당과 김일성측근이 만들어낸 허구』라고 말했다. 46년10월 하순부터 48년1월초순까지 김일성의 개인교수로도 일한 박씨가 김일성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조선어와 러시아어를 구사하는데다 철학을 전공했기 때문이다. 러·일전쟁때 부모들이 이주한 연해주에서 태어난 박씨는 37년 레닌그라드 국립교육대학에서 철학을 전공,졸업 뒤 키르기스공화국내 한 교육대학에서 마르크스·레닌 강사로 일하다 소련이 2차세계전쟁에 참전하면서 러시아교수들이 여기에 동원되는 바람에 철학교원이 없던 알마아타국립대 철학교수로 임명돼 44년부터 87년까지 일했다. 박씨는 해방과 함께 북한에 주둔한 소련군이 정책수행을 위해 동원한 지식인 가운데 유일하게 러시아어와 조선어를유창하게 구사,김일성대학 총장에 임명됐다. 박씨는 『대학총장 취임 3개월 뒤인 46년12월 어느날 북한주둔 소련군 참모부 민정장관이던 로마넨코 대장으로부터 김일성과 김일성대학 명예총장으로 있던 조선공산당 인민위원회위원장 김두봉에게 마르크스·레닌사상을 가르치라는 지시를 받고 김일성을 가르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당시 35세였다는 박씨는 『동갑이던 김일성에게 스탈린이 지은 「소련공산당약사」라는 책자를 교재로 46년10월 하순부터 묘향산밑 김일성숙소에서 매일 아침 7시55분부터 1시간씩 강의를 하며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핵심부분을 비롯,책내용을 가장 알기 쉽게 설명했으나 이해를 잘 못해 결국 사회·인민·공산주의·사회주의·철학등 기본개념을 무려 2개월간이나 가르쳐야 했다』고 회상한다. 박씨는 47년5월까지는 하루에 한번씩 개인교습을 하다 이후로는 1주일에 3번씩 가르쳤으나 흥미를 잃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김일성 지도를 맡은 소련군의 레베제프 대장으로부터 『「김일성은 조선인민의 위대한 수령」이라는 내용을 담은 김일성혁명투쟁사를 김일성과의 좌담을 통해 책으로 만들라』는 지시를 받고 1년4개월동안 1주일에 2∼3번 김일성의 휴식시간인 하오6시부터 7시까지 좌담을 해 큰 노트 4권분량의 자료를 러시아어로 만들었으나 그 내용이 가짜인데다 허점투성이여서 결국 책을 출판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박씨는 『김일성은 빨치산으로 활약했다는 지점을 지도에서 지적하지 못하는가 하면 「유라(김정일의 러시아어 이름)가 어디서 태어났습니까」라는 질문에도 「알아서 뭐하겠느냐」며 대답을 회피했다』고 말했다. 박씨는 대학총장으로 있을 때 평양 및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마르크스·레닌강연을 하면서 「김일성만세」를 청중과 함께 외치지 않은데다 허가 없이 대학에 조선학과를 개설하고 소련군 장군들을 상대로 태극기에 대한 설명을 했다는 이유로 북한에서 쫓겨났다. 6·25전쟁에 대해 『소련공산당 식민지정책의 부산물』이라고 잘라 말한 박씨는 『한국의 청년들은 안중근의사가 지닌 민족정신을 갖고 북한의 청년들이 「눈을 뜨도록」 도와줘야 한다』면서 『정치·사회적으로 유익한 일을 하기 위해선 무식해선 안된다며 배우고 또 배워야 한다』고 당부했다. 『통일되는 날까지 살아 동포들과 함께 만세를 부르고 싶다』는 박씨는 지난달 하순 서울에서 열린 북한민주화회의에 참석차 내한했다 3일 알마아타로 떠난다.
  • 김부자 우상화로 유명산 “신음”(오늘의 북한)

    ◎자연바위 글발/구호 새긴 나무/금강산 등 기암괴석에 찬양문구 4만자/나무껍질 벗겨 음각도… 산야훼손 가속화 금강산·묘향산·백두산 등 한반도통일 이후 국제적 관광지로 명성을 얻을 북한지역의 세계적 명산들이 김일성부자 우상화 작업으로 계속 훼손되고 있다. 북한당국은 최근 또 다시 묘향산과 금강산 등에 김일성을 찬양하는 글을 천연바위에 새긴 것으로 밝혀져 심각한 자연파괴의 우려를 자아내고 있는 것이다. 북한 중앙방송은 최근 묘향산 유선폭포 옆 1천2백여㎡의 대형 자연바위에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1994년 7월8일 새김」이라는 문구를 새겼다고 보도했다.이 문구는 김일성이라는 글자의 경우 한 글자가 높이 3.2m,너비 2.5m이며 나머지 글자는 높이 3.0m,너비 2.3m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북측은 이에 그치지 않고 최근 금강산 내금강 만폭구역 법귀봉에 있는 천연바위에 묘향산에 새겼던 것과 똑같은 문구를 새긴 것으로 북한 선전매체들이 전하고 있다.이번에는 한 술 더 떠 김일성 이름의 경우한자의 높이가 무려 10m,너비가 8m에 이르는 초대형인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이같은 북한의 자연훼손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북한은 김일성 60회 생일인 72년부터 각지의 명산이나 명소에 이른바 「자연바위 글발」이라고 불리는 김부자 찬양문구를 새기는 작업을 계속해 왔다. 이로 인해 지금까지 각인된 우상화 문구는 북한전역에 걸쳐 글자수로 무려 4만자가 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새겨진 문구도 「주체사상 만세」,「그 이름도 빛나는 김일성 장군」따위의 유치하기 짝이 없는 내용들이다. 이같은 찬양문구가 가장 많이 새겨진 곳은 금강산과 묘향산 등 기암괴석이 많은 명산들이다.금강산 지역에는 만물상·구룡연·삼일포·만폭동 등 인근 64개소에,묘향산에는 상원동·만폭동 등 26개소에 새겨져 있다. 북한당국은 『자연바위 글발은 「경애하는 수령님」의 위대성과 혁명업적을 칭송한 집약화된 표현형식을 취하면서 심오한 사상을 담고 있다』고 자랑하고 있다.그러나 붉은 페인트로 칠해져 흉한 모습으로 북한의 명산을 뒤덮고 있는 「자연바위 글발」들은 제거하기도 매우 어렵게 돼있어 통일 이후 상당한 고민거리가 될 전망이다. 이 문구들은 대부분 바위 깊숙이 음각되어 있기 때문이다.특히 이들은 김정일이 지시한 「기념비 서예의 원칙」에 따라 명승지마다 가장 눈에 잘 띄는 곳들에 새겨져 있다는 점에서 심각성을 더해주고 있다.이른바 「구호나무」도 자연바위 글발과 함께 북한의 산야를 훼손하는 요인이다. 구호나무란 백두산 등 북한 산야의 나무 껍질을 벗겨 김일성 찬양문구를 새겨놓은 것으로 북한당국은 20∼30년대 김일성을 따르던 빨치산대원들의 작품으로 조작하고 있다.이 구호나무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87년 김정일의 45회 생일 무렵이었으며 이후 91년 2월까지만 해도 북한 각지에서 무려 1만2천여점이 「발굴」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 황영조 「히로시마 영웅」 됐다/2시간11분13초

    ◎92년 올림픽 이어 마라톤 제패/한국,금메달 7개 추가… 31개로 2위 행진 【히로시마=특별취재단】 바르셀로나 올림픽 「몬주익의 영웅」 황영조(24·코오롱)가 다시 감격적인 월계관을 썼다.제12회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8일째인 9일 히로시마광역공원의 빅아치를 출발,평화기념공원까지의 42.195㎞ 코스는 황영조의 마라톤황제 등극을 축하하는 영광의 꽃길이었다. 2시간11분13초.황영조가 일본의 하야타 도시유키(2시간11분57초)를 따돌리고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의 결승테이프를 끊는 순간 결승점을 지키고 섰던 선수단 임원들과 원정응원단,수많은 재일동포들이 만세를 불렀다. 이로써 한국은 아시안게임 마라톤에서 사상 처음 2연패를 달성하며 통산 4차례 우승을 이뤘고 황영조는 91년 유니버시아드와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포함,참가한 국제종합대회를 모두 휩쓴 선수가 됐다. 김재룡(28·한전)은 2시간13분12초로 동메달을 추가했다. 여자부에서는 지난해부터 일본 실업팀에서 활약중인 중국의 종환디가 2시간29분32초로 우승했고 한국의 정영임(코오롱)은 2시간38분43초로 4위에 랭크됐다. 한국선수단은 이날도 힘찬 금메달 레이스를 펼쳤다. 한국은 배드민턴 여자 단체전과 볼링 남자 5인조에서 금메달을 따냈고 태권도에서는 웰터급 정광채(22·한국체대)와 헤비급 김제경(24·상무)이 나란히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은 태권도에 4체급이 출전,모두 금메달을 따내 종주국의 자존심을 지켰다. 또 남자양궁 개인전에서도 박경모(19·인천제철)와 정재헌(20·대구중구청)이 금·은메달을 획득,세계최강임을 재확인했다. 레슬링 자유형에서는 남자 선수단 주장 김태우(32·주택공사)가 100㎏급에서 우승,대회 2연패의 영예를 누렸다. 한국선수단은 이날 마라톤을 합쳐 금메달 7개를 보태 모두 금메달 31개로 6개의 금메달을 추가한 일본을 3개차로 제치고 2위를 굳게 지켰다. ◎김 대통령,축하전화 김영삼대통령은 9일 일본 히로시마에서 벌어진 제12회 아시아경기대회 남자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황영조선수에게 전화를 걸어 우승을 축하하고 격려했다.
  • 이달의 독립운동가 조성환선생/서울신문사 보훈처·독립기념관 선정

    ◎임정 무장단체 「광복진선」 결성/중국시찰 가쓰라 일본총리 암살기도/만주서 교포에 문맹퇴치운동도 펼쳐 청사 조성환선생(1875년7월9일∼1948년10월7일)은 일제의 침략으로 국운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이자 항일구국운동에 뛰어들었다. 25세때인 1900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교해 군복을 입은 선생은 일부 선배군인들이 주요보직을 차지하기 위해 일제와 야합을 일삼는데 분개,숙군을 외치다 군을 떠나게 됐다. 선생은 『썩은 군대는 나라를 망친다』면서 부패군인의 제거를 주장,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복역 3년만에 특사로 풀려나온뒤 신민회에 가담함으로써 본격적으로 항일구국운동에 투신했다. 1907년 결성된 비밀결사 신민회에는 선생과 같은 무관출신,양기탁등 언론인,이회영등 교육자,민족자본가,안창호등 해외국권회복 운동가등이 참여하고 있었다. 이동휘·노백린등 다른 무관학교 출신자 14명과 함께 신민회에 가입한 선생은 독립운동의 터전을 확보하기 위해 자주 북간도를 돌아보았으며 1910년 국권침탈을 맞아 민족종교인 대종교를 믿기시작했다. 단군을 숭배하는 대종교는 나철이 창시한 종교로 일제의 탄압을 피해 국내에서 만주 동삼성으로 자리를 옮겨 포교중이었다. 선생은 1912년 중국 동북지방을 시찰하는 일본 총리대신 가쓰라 다로를 암살하려다 사전에 붙잡혀 거제도에서 1년동안 유배생활을 지내기도 했다. 유배를 마친뒤 곧바로 중국으로 망명한 선생은 동료 독립운동가들과 청소년교육에 몰두하던중 1918년 만주길림에서 「대한민족의 자주독립을 선언」하는 대한독립선언서의 서명자 가운데 1명으로 참여했다. 다음해인 1919년 국내에서 발발한 3·1만세운동에 자극을 받아 독립운동가 사이에 임시정부 수립 움직임이 활발해지자 이에 적극적으로 힘을 쏟았다. 선생은 4월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범함에 따라 군무부 총장 이동휘와 함께 군무부차장에 임명됐으며 4개월후 동만주에서 활동중인 중광단에 참가,무장독립운동을 벌였다. 선생은 이와 별도로 대종교도들을 규합,정의단을 조직하기도 했다. 선생은 이어 1920년 청산리 봉오동전투에서 참패한 일제관동군이 추격에 나서자 이를 피해 노령 이만으로 이동,이곳에서 이청천·홍범도·안무등과 함께 고려의용군을 결성하고 의용군을 모집해 훈련을 시켰다. 그러나 선생은 일제의 꾐에 넘어간 소련이 독립군을 무장해제하기 위해 기습해오자 동료들과 다시 만주로 돌아오게 된다. 북만주로 돌아온 독립군단체들은 1923년 재통합에 나서 군정서·의군부·혈성단·독립단·광복단·국민회·신민단·대진단·의민단등 9개 단체로 각 단체의 통합을 위한 군사연합회 준비회의를 열었으며 선생은 이 과정에서 연락책을 맡았다. 선생은 이 모임이 진척을 보이지않자 김좌진을 중심으로 창설된 신민회에 참여,중앙집행위원회 외교부위원장에 임명됐다. 군정서를 모체로 하는 신민부는 백두산에서 흑룡강,장춘에서 구참까지를 활동무대로 정하고 이 지역에서 살고 있는 한족을 대상으로 문맹퇴치운동을 펼치면서 민족반역자의 징계,일본기관 습격등을 주임무로 삼았다. 선생은 이런 가운데 정의부·한국독립유일당촉성회 조직운동등을 통해 흩어져있는 독립운동단체를 통일시키기 위해 수년동안 힘을 쏟았으나 정당의 이합집산이 심해 뚜렷한 진전을 얻지 못했다. 선생은 1938년에 이르러 비로소 뜻이 맞는 이동녕·차이석·엄항섭등과 함께 임시정부의 외곽무장단체인 한국광복진선을 결성하는데 성공했다. 선생은 같은해 이청천등과 함께 독립군 군사학편찬위원회 주임위원으로 임명돼 군사관련 교재를 번역하기도 했으며 1년뒤 1939년 임시의정원 의원과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선임됐다. 선생은 1939년 임시정부가 독립운동 3개년 계획을 세우고 본격적으로 광복군을 양성키로 한데 따라 11월 임시정부 군사특파단장으로 서안에 파견돼 광복군설립의 기초를 닦았으며 1940년9월17일 마침내 광복군이 창설되자 최고원수부의 판공처장으로 임명됐다. 선생은 42년에는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있으면서 중국측의 광복군 무력화 움직임을 무산시켰으며 43년에는 국무위원에 올라 대일전쟁을 지도했다. 선생은 45년 들어 임시의정원 제4과 군무·교통위원으로 일하다 8·15해방을 맞아 같은해 12월 동료 임정요인들과 함께 환국했다. 선생은 환국 이후 대한독립촉성회 위원장·성균관 부총재등을 지내다 48년 서거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적을 기려 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 경제개방 “가속”… 외교원칙 “고수”(변화하는 중국:중)

    ◎수교후 2년간 대한인적교류 3배로/한국전엔 “침묵”… 제3세계 대부 자처 건국 45주년을 맞는 중국의 수도 북경에서는 어느 곳에서고 「세계민족 대단결만세」라고 쓴 현수막을 대하게 된다.이 구호는 중국의 개혁·개방으로 인한 외형상의 변화에도 불구,변치않고 유지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중국은 옛 소련과 달리 지금도 「피압박」제3세계국가에 대한 후견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북한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피로 맺어진 인적관계」가 중국 혁명1·2세대의 사망에 따라 엷어지고 있다고 하지만 한국과의 수교전과 별다름없는 유대를 과시하고 있다.중국의 주북한대사는 중국정계의 거물급 인사인데 비해 주한국대사는 외교부의 부국장급에서 발탁된 실무형 관료다. 경제분야는 크게 변화하고 있지만 정치와 외교분야에서는 기존 원칙을 고수하면서 중국의 입지를 최대한 확보할 수 있도록 조금 더 융통성을 두는 정도다.이러한 맥락에서 남북한에 대한 등거리외교라는 기본틀안에서 북한중시 외교와 의전관행을 계속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특히북한핵문제 발생이후 북한카드를 최대로 이용,국제적인 입지와 우리에 대한 교섭력을 강화하고 있다. 한·중수교이후 우리는 외교분야에서 상당한 정도로 중국의 영향력을 받기 시작한데 비해 경제적인 수단에도 불구,이를 적절한 외교력으로 전환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중국의 중고등학교 역사교과서등에는 한국전쟁이 남한의 침략으로 돼 있고 우리는 아직 한국전개입에 대한 중국정부의 해명을 받지못한 상태다.다만 수교당시 노재원 주중대사가 국민들에게 중국측이 사죄했다는 거짓 답변으로 소동을 일으켰을 뿐이다. 지난 29일 중국 중한우호협회의 초청으로 북경방문중인 황인성전총리는 이날 하오 예정됐던 이붕총리와의 면담에 대한 연기를 통보받았다.이날 저녁 조어대에서는 북한의 이종옥부주석과 강택민주석의 회동이 이루어졌다.황전총리와 이붕총리의 면담은 다음날로 순연됐다.북한에 대한 외교적 배려라고 외교가에선 말한다. 외교방면의 벽에도 불구하고 두나라의 경제협력발전은 급속하다.지난27일 북경의 한 호텔에서는 럭키금성의 계열사 사장등 임원 30여명이 구본무그룹부회장 주재로 중국 진출을 위한 전략회의를 열었다.이 회의에선 오는 2000년까지 해외매출액의 4분의1,현재 매출액의 6배인 60억달러를 중국시장에서 달성하겠다는 계획이 수립됐다.중국은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수출전선이며 기업의 명운을 결정하는 놓칠수 없는 시장이라는 것이다. 중국시장 개척에 대한 강박관념은 다른 기업들도 마찬가지다.삼성의 중국지사는 최근 이건희회장의 첫 방중계획으로 비상이다.각료등 거물급 인사들과의 회동을 주선,그룹의 중국진출계획을 보증받고 구체화하겠다는 것이다.대우 김우중회장의 중국출장이 잦아졌고 상주일수도 늘어났다. 국교 수립 만2년만에 우리는 중국의 6번째 교역대상국이 됐고 중국은 우리의 3번째 상대국이다.올 상반기 대중 수출은 28억9천달러.전년 같은기간에 비해 21%가 늘어났다.수입도 25억6천달러로 40%가 급증했다. 또 같은 기간중 두나라의 교역신장률은 59.5%.중국이 멀지않아 우리의 제1교역대상국이 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지난 6월 두나라 상공장관은 97년까지 교역은 3배,투자는 4배이상 늘려나가기로 합의했다. 중국은 기계류·시설재·중간재등을 싼가격에 수입하면서 산업경쟁력을 확보하고 있고 우리는 철강·석유화학·자동차등을 수출하면서 활로를 개척하고 있다.중형항공기·전전자교환기(TDX)·고화질텔레비전·자동차의 공동개발에 관한 두나라 정부사이의 구체적인 실무협의가 다음달 6일부터 25일까지 북경등에서 이루어진다.경쟁과 협력관계로 한중관계는 접어들고 있다.주중대사관의 현정택경제협력관은 섬유·직물·의류·신발·완구 등은 이미 중국이 세계시장에서 비교우위를 점하고 있고 식료품·원료성재료·잡제품등도 중국이 우위에 선 상태로 경합중이라고 설명한다. 또 텔레비전수상기와 세탁기·냉장고등 가전제품분야에서도 한국의 시장점유율을 깎아먹기 시작했다.그러나 중국과의 경제적인 관계는 현재 상당히 보완적이며 우리의 산업고도화만이 문제해결의 방법이라고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인적교류도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중국을 찾는 한국인은 국교수립이전인 지난 90·91년도에 각각 5만7천명과 8만7천명선이었으며 지난해엔 11만2천명으로 늘었다.중국쪽에서의 방한은 4만명선에서 15만2천명으로 급증했다.특히 올해는 3배이상 는 50만∼60만명을 거뜬히 넘을 것으로 보인다.중국의 한국인 유학생은 3천명선에 이른다.일본 학생에 이어 두번째다. 교포들 뿐 아니라 일반 중국인들에게 한국은 실제보다 더 잘사는 것으로 과대평가돼 있고 한번 가보고 싶은 나라로서 자리잡고 있다.그러나 무엇보다 우리의 경제력을 외교적 교섭력으로 전환시켜 중국과 외교무대에서 대등한 게임을 할 수 있는 것이 시급한 과제다.
  • 에밀레종 보호/지건길 국립경주박물관장(굄돌)

    경주박물관의 정문을 들어서면 맨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뜨락 오른편의 종각에 매달려 있는 성덕대왕신종이다.「에밀레종」으로 더 잘 알려진 이 범종은 그것이 만들어진 역사적 배경이나 뛰어난 미술품으로서의 가치보다는 오히려 만드는 과정에서의 애틋한 사연으로 더욱 많은 사람의 기억 속에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사연의 실마리를 되새기면서 막상 이 거종을 대하는 이들은 우선 오랜 세월 속에서 이토록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는 모습에 놀라게 된다.더욱이 박물관으로 옮겨져 자리잡기까지 천수백년동안에 이 범종이 겪어온 갖은 풍상을 아는 이들은 이러한 모습을 기적처럼 여기고 있다. 이 종이 박물관으로 옮겨진 뒤에도 해마다 섣달 그믐날 자정에 맞추어 그 장중하면서도 신비스런 제야의 종소리가 온누리에 울려 퍼졌다.그러나 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비바람에 시달려온 이 종을 아무런 진단도 없이 엄동설한의 혹한기에 서른세번씩이나 타종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고 할 수 밖에 없다.겉으로는 별탈이 없어 보인다고는 하지만내부상태를 전혀 알지 못한채 타종한다는 것은 이만저만한 모험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재작년 이후 박물관에서는 이 제야행사를 중단하고 일단 정밀한 진단을 기다리고 있다.진단 결과 별다른 탈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그 이상 다행스러울 수가 없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더 이상의 타종은 곤란할 것이다.우리 국보중의 국보라 할 수 있는 이 종은 오늘의 우리것이 아니라 천년만년 이어질 우리 후손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박물관에서는 지난 봄부터 야외음향시설을 갖추고 하루에 네차례씩 시각에 맞추어 타종녹음을 방송하고 있다.보다 안전한 에밀레종의 보존을 위해서 우리는 실제 소리와 별반 다를 바 없는 기계음으로 만족하면서 이 종이 만세에 전해지길 기원해야겠다.
  • 김정일 만성결석 앓고있다/서울신문,평양주재 구소대사 극비보고서입수

    ◎「후계」 85년 확정… 당·정·군 장악/“60층보다 높은 빌딩 짓겠다” 대남경쟁의식 대단 【모스크바=이기동특파원】 지난 85년 미하일 슈브니코프 당시 평양주재 소련대사가 김정일에 관해 본국 당중앙위원회에 제출한 극비보고서가 서울신문사에 입수됐다.총 15페이지의 이 보고서는 그해 10월 12,13일 양일간 슈브니코프대사가 원산의 휴양지에서 김정일과 장시간에 걸쳐 가졌던 대화를 토대로 작성한 것으로 당시 소련공산당 중앙위에 즉각 극비문서로 보고돼 정치국원들에게 회람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보고서는 『김정일이 이미 당,국가의 인사권을 포함한 국가정책전반에 걸쳐 지휘감독권을 행사해 사실상 후계자로서의 확고한 지위를 구축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어 김정일체제의 앞날을 점치는데 좋은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김은 슈브니코프대사와의 대화에서 당·국가의 인사,경제계획수립,대남관계를 비롯,당중앙위 소집문제까지 자신이 직접 관장한다고 밝혔다.특히 당정치국원의 인사에까지 거의 전권을 행사했고 군고위직의 인사,군사정책,군수산업분야까지 김정일이 모두 장악한 것으로 이 보고서는 적고 있다. 김은 당시 인민무력부장 오진우를 비롯한 군지도부와도 매우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통일문제와 관련,김은 고려연방제,남북한·미국간 3자회담개최등에 강한 집착을 보였으며 『남한이 60층짜리 빌딩을 지었으니 우리는 그보다 더 높은 빌딩을 지어야한다』고 말하는등 남한체제에 강한 경쟁의식을 보인 것으로 이 보고서는 적고있다.김은 특히 당시 폴란드등 동구사회의 변화에 대해 매우 못마땅해하는 반응을 보이며 사회주의에 대한 강한 신념을 피력한 것으로 이 보고서는 밝히고 있다. 김정일의 건강에 대해 이 보고서는 김일성일가 모두가 신장결석에 잘 걸리는 체질로 김정일도 만성적인 신장결석에 시달리고 있으나 당시로서 그 이상의 질환은 없는 것으로 밝히고 있다. ◎“추도분위기 여전/승계행사 못한다”/김정일 【내외】 김정일의 공식 권력승계가 지연되고 있는 것은 북한주민들은 김일성에 대한 추도분위기가 아직 진정되지 않고 있는 점을 고려한 김정일의뜻에 따른 것이라고 평양방송이 23일 보도했다. 평양방송은 이날 김정일이 『우리들의 절절한 애도감정이 아직도 가라앉지 않고 있는데 어떻게 추대행사를 조직하고 만세를 부를 수 있겠는가.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밝혔다면서 김일성에 대한 추도분위기가 가라앉으면 당과 국가수뇌의 공식추대행사가 자연스레 열릴 것이라고 밝혔다.
  • 시·음악·무용의 이색만남/「가을저녁 시축제」 오늘 국립극장분수대서

    시와 춤 음악이 함께하는 「가을저녁의 시축제」가 24일 하오 6시 분수대광장에서 펼쳐진다. 국립극장이 마련한 「가을저녁…」은 한국시단의 대표시인들과 무용인 배우 음악인들이 출연하는 보기드문 대형 문화축제.이날은 지난 4월23일부터 매주 토요일 열린 국립극장 문화광장의 올해 마지막 행사이기도 하다. 「가을저녁…」은 국립합창단의 「시인만세」「추억」으로 막을 열어 한국시단을 대표하는 시인들이 대거 나서 자작시를 낭송할 예정.서정주가 「국화 옆에서」,조병화가 「내일」,김남조가 「풍경」,신달자가 「가을편지」,구상이 「강가에서」,이근배가 「풀꽃」,허영자가 「9월」,이경희가 「가장 가고싶은 곳」을 소개한다. 시와 음악 무용과의 결합도 다채롭다.한용운의 시 「알 수 없어요」를 국립창극단의 차세대 유망주 정미정이 창으로 부르면 최영미의 시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박해준·육미영 부부의 현대무용과 국립극단 배우 이경성의 낭송으로,윤동주의 「별 헤는 밤」을 이명진무용단의 「사이섬」과 국립극단의 중견 배우 김재건의낭송으로 선보인다. 소프라노 김인혜의 「내마음」「달밤」,바리톤 최상규의 「이별의 노래」「그리운 금강산」은 가을 정취를 더욱 무르익게하는 대목. 「가을저녁…」은 국립발레단의 화제작 「카르미나 브라나」에 나오는 여성군무 「목장에서」로 2시간 축제의 막을 내린다.274­1151.
  • 러 군부소요에 대비/옐친,특수부대 창설

    【모스크바 AFP 연합】 보리스 옐친 러시아대통령은 군대내 불만세력들의 소요 가능성에 대처하기 위해 모스크바 주변에 독자적인 지휘체계를 갖는 새로운 엘리트 군조직망을 구성하도록 지시했다고 러시아의 네자비시마야 가제타지가 14일 보도했다. 새로운 군조직망은 특히 독일과 발트해 연안국가들로부터 최근 철수한 군인들의 불만에 따른 행동을 진압하게 될 것이라고 이 신문은 강조했다.
  • 안무장군/봉오동·청산리대첩의 얼굴없는 주역(이달의 독립운동가)

    ◎국민회군 조직,김좌진·홍범도와 연합/회령·강양동 일군 습격… 국내 진입 시도/모아산서 일기습받아 피랍… 42세 순국 안무장군(1883년 6월29일∼1924년 9월7일)은 김좌진·홍범도장군등과 함께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대표적인 무장항일투사이다. 호가 청전인 안장군은 함북 경성에서 출생,1889년 대한제국 진위대 병사로 입대해 하사관을 거쳐 교련관으로 근무한 정규군인이다. 안선생은 1907년 8월1일 일제가 대한제국군을 강제해산한데 따라 잠시 고향에서 체육교사로 일하다 1910년 8월 경술국치를 맞아 북간도로 망명,독립운동가로 나서게 됐다. 선생은 이동휘가 활약하고 있던 북간도 명동에 도착한뒤 동지들과 대한국민회를 조직하고 예하에 국민회군 3백명을 편성,사령관으로 취임했다. 선생은 1919년 만세운동으로 독립운동의 열기가 높아지자 다른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힘을 모아 본격적으로 무기반입·독립군 훈련을 펼쳤다. 당시 대한국민회는 북간도 각지에 10여개의 지방회와 80여개의 지회를 두는등 한창 세력을 확대해가고 있었다. 대한국민회는 세력이 확산됨에 따라 산하 군사조직으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선생의 국민회군등 2개 조직을 두게 된다. 바로 이 부대들이 항일무장투쟁사에서 가장 빛나는 전투의 하나로 손꼽히는 북간도 봉오동 전투를 치른 주역이다. 봉오동 전투는 일제가 중화기를 동원,국내진입을 꾀하는 독립군부대를 토벌하려는데 맞서 독립군이 일제를 일패도지시킨 전투이다. 1920년 5월28일.무장독립단체들은 국내진입작전을 펼치기 위해 대한군북로도군부를 조직하고 병력을 화룡현 봉오동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당시 모인 병력은 홍범도와 안무계의 5백50명등 모두 1천2백명이었으며 무기는 기관총 2문·총기 1천1백정·수류탄등 1백개등에 불과했다. 먼저 이들 무장독립군은 같은해 5·6월 두차례에 걸쳐 함북 회령과 강양동의 일제초소를 공격,국내진입 가능성여부를 타진했다. 일제는 이에 따라 나남 주둔 19사단의 보병대대 및 기관총대 1개대대로 「월강추격대대」를 편성,중국땅으로 건너와 「독립군토벌작전」을 감행했다. 독립군은 공격에 나선 일제의 주력을봉오동으로 유인,4시간여에 걸친 포위전 끝에 일제를 물리치는데 성공한 것이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 정무원은 『적군의 사자 1백57명·중상 2백여명·경상 1백여명이요,아군의 사자 4인·중상 2인』이라고 피아 피해상황을 밝혔다. 안장군이 이 전투에서 맹활약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 봉오동 전투는 일군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일제는 이 전투를 계기로 독립군의 전력을 재평가,이른바 「간도지방 불령선인 초토계획」을 본격적으로 수립하게 됐다. 일제의 대대적 작전을 감지한 독립군은 안장군의 국민회부대를 화룡현 이도구지역으로 이동시키고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등도 이도구와 삼도구 서북지방의 밀림지대로 기지를 옮기도록 했다. 당시 집결한 병력은 사상 최대규모인 2천여명에 이르렀다. 독립군은 이런 배치로 유명한 청산리대첩에 대한 준비를 갖춘 것이다. 청산리대첩은 김좌진·홍범도·안무 3장군의 부대등이 연합,이·삼도구 서북쪽 심산 밀림지대에서 일제 「토벌군」2만여명과 밤낮 구별없이 6일동안 치른 전투이다. 독립군은 이 청산리대첩에서 일제를 철저히 괴멸시키는 대성공을 거두었으나 일제 19사단이 추가로 출동할 움직임을 보임에 따라 다시 더멀리 밀산으로 이동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독립군은 밀산이 너무 비좁은 지역이라 장기주둔하기 곤란하다는 판단아래 러시아 연해주 자유시(하바로스크 위쪽 알렉세호스크)로 이동했다가 일제와의 불화를 우려한 러시아로부터 큰 타격을 받고 주력을 잃는 비극을 겪게 됐다. 러시아는 1921년 6월 일제의 요구에 따라 독립군을 무장해제키로 하고 장갑차를 동원해 갑자기 독립군부대를 공격한 것이다. 당시 피해상황에 대해 간도지방 한국독립단에서 발표한 「자유시사변에 대한 성토문」은 『독립군 2백72명이 전사하고 9백17명이 포로로 붙잡히는 대참변을 당했다』고 적고 있다. 이 가운데서도 안장군의 부대는 별다른 피해를 받지 않고 북간도로 돌아왔다. 안장군은 독립군의 재기를 위해 활약하던중 1924년 9월6일 일경의 습격으로 모아산부근에서 총격전을 벌이다 총상을 입고 체포된뒤 다음날 42세의 일기로장렬하게 순국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영정마저 남기지 못하고 조국광복의 제단에 목숨을 받친 선생의 일생은 무장독립운동사에 길이 빛나리라.
  • 김자경 만세(외언내언)

    지난 5월 이화여대에서 열린 「이화 21세기 재도약선언 대축연」에서 사회자는 그를 「이팔청춘의 영원한 소녀」로 소개했다.이날 「자랑스러운 이화인」으로 소개된 여러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많은 박수갈채와 환호성을 받은 그는 올해 희수(77세)를 맞은 원로성악가 김자경씨. 빨간 구두와 무릎길이의 타이트 스커트 차림이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이팔청춘」은 너무한것 같아 「방년 28세」로 고쳤다』며 소녀처럼 수줍게 미소짓던 그가 희수기념 독창회를 9일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갖는다.다른 사람이라면 놀라운 일이겠지만 그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지난 75년부터 해마다 한국가곡 독창회를 가져와 올해로 18회째 한국가곡 독창회를 갖는 것이다. 『진짜 성악가라면 우리 노래를 먼저 알아야 한다』는 선친의 말씀을 뒤늦게나마 따르기 위해 91년엔 한양대 대학원 국악과에 입학했다.그동안 배운 민요들로 프로그램을 짠 졸업독창회도 올 겨울이나 내년 봄에 가질 계획. 『공부에는 나이가 없고 생을 마치는 그 순간까지 닦고 배우는 것이 인간의 본분』이라고 그는 말한다.지난 62년 사별한 남편 심형구화백과의 결혼50주년 기념독창회도 91년 가진 바 있다.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미국 카네기 홀에서 독창회(50년)를 가진 이 「영원한 소녀」에겐 「오뚝이」라는 별명이 또 있다.한국 최초의 오페라 「춘희」(48년)의 여주인공 비올레타로 화려하게 오페라 무대에 데뷔한 그가 한국의 첫 민간오페라단인 김자경오페라단을 창단(68년)하고 지금까지 40여편의 작품을 공연하면서 얻은 인고의 훈장인 것이다. 오페라 제작을 지휘하는 한편 『오페라가 무어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직접 표를 팔러 다니기도 한 그는 살아있는 한국의 오페라사이자 오페라의 전도사인 셈.이화여대 음대에 38년동안 재직한 그의 제자사랑은 유별난데 이번에도 함께 출연할 제자들이 『얼마나 열심히 연습하는지…』자랑을 잊지 않는다.영원한 소녀 김자경 만세!
  • 참삶 뼈삶 빛삶/오동춘(굄돌)

    여름방학이 될 무렵 전철안에서 제자 하나를 만났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다가 뜻한 바 있어 직장을 곧 사임하고 부산에 있는 어느 신학교에 다니고 있다고 했다.프랑스로 유학가기 위해 서류 준비차 상경했다는 것이다.그는 대화중에 『선생님!참삶,뼈삶,빛삶을 잊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하며 밝은 표정을 지었다.벌써 30대 청년이 되었는데 내가 힘주어 심어 준 참삶,뼈삶,빛삶의 정신을 잊지 않고 살다니 반갑고 기쁜 일이었다.그와 헤어질 때 『참삶,뼈삶,빛삶의 훌륭한 목회자가 되길 바라네.기도하겠네』하며 다시금 중학시절의 국어시간에 가르치던 나의 교육철학을 심어 주었다. 선생이란 인생의 밝은 길잡이이므로 나는 강의 첫시간에 교실이 떠나가게 거짓없는 참삶,주체성 있는 목표를 두고 사는 뼈삶,빛을 쌓는 빛삶의 길로 살아가야 한다고 꿈이 새파란 제자들을 큰소리로 가르친 것이다.만나는 제자마다 참삶,뼈삶,빛삶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말을 한다.받는 제자의 편지마다 참삶 뼈삶 빛삶의 길로 달려가고 있다고 쓰여 있다. 심은 대로 거둔다고 하였으니 나는 제자들이 참삶,뼈삶,빛삶의 큰 아름드리 나무로 자라서 이 나라의 큰 기둥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박제상,정몽주,사육신 등은 나라에 충성과 지조의 뼈삶을 밝게 보여주었으며 성춘향은 열녀로서의 뼈삶을 굳게 나타내어 춘향전을 만고 명작으로 만든 것이다.세종의 뼈삶은 중국의 간섭을 받지 않는 자주독립 국가를 만들기 위해 어려운 한자를 물리치고 천하에 배우고 익히기 쉬운 한글을 만든 것이다.유관순,충무공의 빛삶은 저 하늘에 길이 푸르지 않는가?안중근의사의 독립만세 소리가 우리 귀에 지금도 들려오지 않는가? 교실에 들어서면 가득찬 푸른 눈동자가 한없이 사랑스럽다.제자들을 만나는 기쁨은 이루 말할수 없다.씩씩한 새싹들의 얼굴에 나라의 장래가 튼튼해 보인다.나는 오늘도 새싹2밭에 참삶,뼈삶,빛삶의 꿈을 심는다.
  • 추석 대목을 잡아라/주류 판촉전 “후끈”

    ◎품목다양화… 대부분 2만∼5만원/위스키세트가 주종 판매목표 늘려/안동소주 등 민속주도 “일전채비”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인 추석을 앞두고 오비씨그램과 진로 등 주류업체들이 다양한 선물세트를 선보이며 판촉경쟁에 나섰다. 민속주의 판매전도 뜨겁다.민속주는 선물용으로 알맞기 때문에 추석과 설날이 특히 대목이다.외국산 위스키와 코냑도 예외가 아니다.추석특수를 맞아 소주·민속주·청주·양주 등 모든 주류의 판매경쟁이 뜨거워지는 셈이다. 올해에는 업체들마다 고객의 취향에 맞춰 선물세트(품목)를 다양하게 만든 것이 특징이다.대부분 2만∼5만원짜리 세트들이다. 오비씨그램은 41종의 위스키세트를 준비했다.지난해에는 24개종이었다.5천∼7만원으로 값이 다양하다.특급위스키인 패스포트는 18만1천세트,섬싱스페셜은 8만6천5백 세트,골드는 2만7천5백세트를 준비했다.판매목표는 70억원으로 작년의 65억원보다 소폭 늘려 잡았다. 같은 두산계열인 백화는 청주와 고려인삼주 등으로 10종의 선물세트를 마련했다.25만세트로 전년보다 13.6%를 늘렸다.매출목표도 전년보다 5억원 늘어난 30억원이다. 진로는 소주 15종,위스키 20종 등 모두 35종을 마련,20만5천세트를 팔 계획이다.소주는 1만∼7만원,위스키는 2만5천∼7만원선이다.위스키세트중 가장 비싼 것은 원액 숙성기간이 12년된 프레미엄급인 임페리얼 클래식 7백㎖ 2병을 모은 것.판매목표는 32억원이다. 해태산업은 코냑과 포도주 등 모두 27종에 걸쳐 30만세트를 내놓을 계획이다.목표액은 30억원으로 지난해보다 10%쯤 높였다.가장 비싼 것은 코냑 기마상으로 7만원이다. 지방소주업체중에는 보배가 가장 적극적이다.지난해 잘 팔렸던 3만원대의 선물세트를 보다 다양화했다.전통 증류식소주인 옛향과 천지 12종,도자기병 제품 4종,미륵사지탑 1종 등 모두 17종을 준비했다.가격은 1만∼4만원.목표는 20억원으로 작년보다 1백50%나 늘렸다. 전통술인 민속주의 판매량도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안동소주·국화주(경남 함양)·이강주(전북 전주)·김천 과하주·한산 소곡주·계룡 백일주 등 대표적인 민속주들이 고객들을 기다리고 있다.값은1만7천∼7만원. 세계적으로 유명한 양주도 백화점에서 쉽게 볼 수 있다.위스키로는 밸런타인,조니워커,로열 살루트,시바스 리갈,글렌피딕,올드 파,딤플,화이트 호스,스윙 등 이름있는 것은 다 있다.코냑으로는 루이 13세,레미 마르땡,까뮈,에네씨,꾸르부아지에 등이 있다. 외국술의 값은 역시 비싸다.루이 13세는 1백85만원,레미 마르땡 엑스트라급은 70만원,밸런타인(30년)은 50만원,조니워커 블루는 40만원이다.보통사람으로서는 설사 선물로 받는다해도 황송해서 감히 마시기 어려운 술이다.
  • 패러글라이딩/푸른 가을하늘 새처럼 “훨훨”

    ◎5∼6시간의 조작훈련만으로 비행 가능/강습회 잇따라… 헬멧·무전기등 안전장비 갖춰야 초가을에 접어들면서 새처럼 하늘을 날고 픈 인간의 꿈을 실현하는 인조들이 부쩍 늘고 있다. 특히 높고 푸른 가을하늘을 오색으로 점점이 수놓으며 나는 기쁨을 만끽하는 패러글라이딩이 가장 각광을 받고 있다. 한국활공협회와 레저이벤트업체인 코니언등이 오는 9월4일 패러글라이딩 강습회를 여는 것을 비롯,각 단체와 레저이벤트업체들이 본격시즌을 맞은 패러글라이딩의 동호인유치에 일제히 열을 올리고 있다. 패러글라이딩은 행글라이딩의 높은 활공성과 조종성에 패러슈팅(낙하비행)의 안전성·편리성등 장점만을 효과적으로 접목시킨 항공레포츠.특히 행글라이딩이 시속 80∼1백㎞인데 반해 패러글라이딩은 시속 30㎞안팎에 불과,보다 안전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국활공협회 강효림씨(28·여)는 『비행을 위해서는 3∼5㎏의 장비를 등에 지고 산에 올라야하므로 체력단련은 물론 단체활동을 해야하기 때문에 현대인들에게 부족하기 쉬운 공동체정신 함양에도 도움을 주는 레포츠』라고 말했다. 패러글라이딩을 처음 배우는 초보자의 경우 5∼6시간동안 비행원리에 대한 간단한 이론과 수신호·방향조작·이륙및 착륙요령등 지상훈련을 통해 배우면 비행이 가능한데 이후 비행은 지상에서 50∼70m 높이에서 5∼10분간이면 적당하다.강습비는 20만∼25만원선. 비행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안전한 이륙.「테이크오프 코드」를 앞으로 잡아 당기면서 서서히 달려 나가다 일단 날개부위가 머리위로 떠 오르면 더욱 빨리 달리면서 테이크오프코드를 앞으로 충분히 당겨 이륙한다.완전히 이륙한 후에는 테이크오프코드를 놓고 「브레이크코드」만을 이용해 활공한다.브레이크코드를 잡아당기면 내려가고 반대로 만세를 부르는 자세처럼 양손을 머리위로 올리면 떠 오른다.6개월 배우면 4시간정도 비행이 가능한데 그때의 짜릿한 기분은 활공인만의 전유물이다. 패러글라이딩 전문강습기관인 「에어맨스쿨」 이영옥스쿨장(29·여)은 『대부분의 초보자들은 교육을 받은 뒤 생각했던 것보다 비행이 쉽다고 느껴지기 때문에 규칙을어기고 비행을 시도하다 다치기 일쑤다』라면서『강사의 지시를 잘 따르고 헬멧과 무전기등 안전장비를 반드시 갖춰야 하며 시속15㎞이상의 바람속 비행은 금물』이라고 강조했다. 현재 국내에는 한국활공협회에서 공인한 30곳을 포함,모두 60여곳의 패러글라이딩단체가 있으며 국내 동호인은 1만5천여명에 달한다.활공장으로는 경기도 광주 매산리 공군부대와 양평 유명산,포천 국망봉등이 유명하다.장비 가격은 1백50만원정도면 구입할 수 있으나 빌려 탈 수 있다. 에어맨스쿨(578­9763)등 패러글라이딩단체,한국활공협회(514­77 60)와 코니언(723­7237)등에서는 수시로 패러글라이딩 행사를 연다.
  • 「쿠바난민 홍수」 재발에 쐐기/미의 입국 불허 의미

    ◎“올7천명 넘어 위기” 판단,정책변경/카스트로 불만세력 내부폭발 노림수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19일 발표한 쿠바난민의 입국 일절불허방침은 일단 대규모 난민유입사태를 막기 위한 조치로 평가된다. 지난해 미국으로 들어온 쿠바 탈출자는 3천6백여명이었으나 올해들어서는 8개월도 채 안된 현재 7천2백명을 넘었다.이 며칠사이엔 하루 5백명을 웃도는 등 경고수위를 훨씬 넘고 있었다. 지금까지 미국은 카스트로 공산정권치하의 쿠바탈출인들을 「자유의 투사」로 간주해온 66년 제정된 쿠바조정법에 따라 처리했다. 1백44㎞의 해협을 건너 플로리다에 당도한 쿠바난민들은 특별한 중범죄자와 전염병자가 아닌이상 정치적 망명으로 간주,미국내 친인척 및 후견인의 보호를 조건으로 미국내 체류를 허용해왔던 것이다. 최근의 쿠바난민러시는 지난 80년대 「마리엘 보트난민사건」의 재현을 우려할 정도로 심각해져 18일에는 로즈 차일즈 플로리다주지사가 난민비상사태를 선포하기도 했다. 지난 80년 5개월동안에 쿠바의 마리엘항을 떠나 미국으로 몰려간인원은 12만5천명이나 되었고 당시 카스트로가 조장한 이 난민가운데는 상당수의 정신병자와 범죄자가 포함되었었다. 이번 경우에도 쿠바당국은 자국민들의 출국을 방조하고 있었다. 클린턴의 정책전환에는 카스트로정권의 종말이 눈앞에 다가온이상 「귀순자」들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이같은 저항세력이 내부에서 결집해 폭발력을 가지도록 유도하려는 전략도 깔려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북한과 더불어 세계에서 「유이」한 스탈린식 공산국가인 쿠바는 구소련의 와해를 계기로 실업률 40%,상품교역량 75% 감소,전력배급제,공장조업중단등의 막다른 골목에 들어섰다.쿠바인들의 대탈출과 함께 발생한 최근의 반정부 폭동 등은 카스트로체제붕괴의 본격적인 신호로 풀이되고 있다. 미국은 해상에서 구조한 쿠바난민들을 쿠바의 관타나모 미해군기지에 수용할 계획이라고 밝히고 있으나 이 기지는 이미 아이티난민 1만5천명으로 차있어 쿠바난민들을 계속 수용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라는 것이다.어쨌던 관타나모 기지에 수용된 쿠바난민들은 유사시 카스트로 정권 전복의 전위대가 될 가능성이 크다. 이번 쿠바난민사태와 클린턴행정부의 정책전환은 향후 한반도의 상황변화에 따라 북한주민들의 남한유입가능성을 상정해 볼때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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