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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만세’전국서 재현

    3·1독립운동 80주년을 맞아 3·1운동을 재현한 거리공연이 펼쳐지는 등 다채로운 기념 행사가 거행된다. 정부는 1일 오전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3부 요인,애국지사를 비롯한 광복회원,각계 인사,청소년,시민대표 등 4,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식을갖는다.기념식에 이어 세종문화회관앞 거리에서는 3·1독립만세를 외치는 모습을 재현하는 거리공연이 鞠守鎬국립무용단장의 안무로 펼쳐진다. 지방에서도 시·도 단위로 기념식과 3·1독립운동 사적지별로 만세운동을재현하는 등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진다. 朴賢甲 eagleduo@daehanmail.com
  • 「3·1운동-臨政수립 80돌」주요 기념행사

    오는 3월 1일은 일제에 맞서 세계만방에 ‘조선독립’을 선포하고 만세운동을 펼친 지 80년이 되는 날.이날을 맞아 정부 및 자치단체,관련 단체·기관들은 다양한 기념행사를 갖고 백척간두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하려고 독립선언을 선포했던 3·1정신을 되살려 제2의 건국운동으로 계승할 것을 다짐한다. 이날 경복궁 덕수궁 창경궁 등 전국의 고궁(창덕궁 제외)과 능·원,현충사,칠백의총 등이 무료로 개방된다. 3월 1일 오전 10시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는 3부 요인,광복회원 및국가유공자 단체장,정당대표,시민대표 및 청소년 등 4,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기념식이 열린다. 상오 11시 서울 남산 국립국장 입구 공원에서는 광복회(회장 尹慶彬) 및 3. 1독립운동기념탑건립위원회(위원장 李壽成) 주관으로 3.1독립정신을 기리기위해 21억2,000만원의 국민성금으로 건립된 높이 19.19m(1919년 상징)의 기념탑이 제막된다.이어 33인 유족대표와 광복회원 등 4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3·1운동 희생선열 합동 추모제전이 거행된다. 서울시는 낮 12시 서울 종로구 종로2가 보신각에서 3·1운동의 주역이었던독립유공자 대표와 후손 등을 초청,타종행사를 갖는다. 만세운동 재현행사는 충남 천안시 아우내장터를 비롯,경기도 화성군 발안장터,강원 횡성군 3·1공원,제주 북제주군 조천만세동산 등 전국 10개 시·도15개 지역별로 3월1일부터 4월까지 80년전 만세운동이 일어난 날에 맞춰 펼쳐진다.독립운동서 낭독,햇불시위,봉수제,봉화제 등의 행사는 물론 길놀이,마당굿,대동놀이 등 민속행사가 함께 펼쳐져 애국심과 공동체의식을 함양하는 축제의 한마당이 될 전망이다. 특히 80년전 ‘조선독립만세’를 앞장서 외쳤던 종교지도자들은 2월부터 8월까지를 ‘범종교 3·1정신 현창(顯彰)기간’으로 정하고 ‘제2의 3·1운동’을 펼친다. 국내 7대종교지도자들의 모임인 한국종교지도자협의회는 우선 3월1일 80주년 기념식을 80년전의 모습대로 성대히 꾸민다.각 종단 관계자들은 견지동조계사,저동 영락교회,경운동 천도교 중앙대교당,원불교 원남교당,천주교 명동성당,명륜동 성균관,사직단 장충단등에서부터 가두행진을 하며 종로3가탑골공원에 집결,오전 11시 팔각정 앞에서 기념식을 갖는다.기념식에서는 기미독립선언서와 ‘제2의 3·1선언서’가 낭독되고 각 종단의 3·1운동 80주년 메시지도 발표된다.‘극단 모시는 사람들’과 염광여상 취주대의 선열 추모공연과 김덕수패의 사물놀이도 펼쳐진다. 이날 정오 전국의 사찰과 성당,교당,교회,향교 등에서도 일제히 ‘제2의 3·1선언서’를 낭독하는 한편 전국 200여곳에 종단별 가두홍보대를 설치,3월 1일을 전후한 3∼4일 동안 대국민 알림운동을 전개한다. 종교지도자협의회는 또 3·1독립정신을 기리는 기념조형물을 제작,오는 27일 ‘기미독립선언서’를 인쇄했던 서울 종로구 수송동 보성사(普成社) 터에서 제막식을 갖는다. 이밖에 3·1정신 계승을 위한 범종교인 학술발표회를 비롯,청소년 국토순례,연극 ‘우리로 서는 소리’ 공연,3·1정신 계승방안 공모,3·1정신 현창도서 간행,3·1정신 현창미술전시회 등의 행사가 잇따라 열린다. 이어 4.13 임시정부수립 기념일을 맞아 4월 13일 서울 및중국 상해,중경에서는 제80주년 기념식 및 학술토론회 등이 열린다. 4월11일∼17일 7박8일간의 일정으로 해외거주 독립유공자 후손 및 사료연구위원 등 30명을 국내로 초청,기념식 및 학술회의를 개최한다.
  • 3·1 만세운동 전국15곳서 재현/보훈처 80주년 기념행사

    80년 전 만세시위를 하던 종교인 29명이 일제 군경에 의해 참살당한 경기도 화성군 발안장터를 비롯,충남 천안시 아우내장터,강원 횡성군 3·1공원,제주 북제주군 조천만세동산 등 전국 15개 지역에서 오는 3월1일부터 4월까지지역주민,학생 등이 참석한 가운데 3.1독립만세운동이 재현된다. 국가보훈처는 24일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80주년에 즈음한 민족정기 선양사업을 확정,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3월1일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3부요인,광복회원 및 국가유공자 단체장,정당대표 등 4,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식이 열린다. 특히 이날 오전 11시 서울 남산 국립극장 입구에서는 광복회(회장 尹慶彬)및 3·1독립운동기념탑건립위원회(위원장 李壽成) 주관으로 3·1독립정신을기리기 위해 21억2,000만원의 국민성금으로 건립된 높이 1,919㎝(1919년 상징)의 기념탑 제막식이 거행된다. 4·13 임시정부수립 기념일인 4월13일에는 서울 및 중국 상해,중경에서 제80주년 기념식 및 학술토론회가 열린다. 4월11일에는 중국 미국 일본 러시아 대만 카자흐스탄 등 해외거주 독립유공자 후손 및 사료연구위원 등 30명을 7박8일 일정으로 초청,국내의 역사현장및 사적지 등을 돌아보도록 할 계획이다.국내 원로 애국지사 및 사학자 등 20여명은 4월13일을 전후해 중국 상해와 중경 광주 진강 항주 장사 등 임시정부 유적지를 탐방,임정선열들의 고귀한 애국애족정신을 되새기게 된다.
  • 서대문형무소 역사관/李炫熙 성신여대 교수·한국근현대사(대한광장)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 예전 서대문형무소 자리에 최근 역사관이 개관됐다. 빼앗긴 조국을 다시 찾겠다고 목숨을 바쳐 싸우다가 체포되어 악명 높았던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거나 그 곳에서 순국한 민족독립지사들의 애국활동을 기리기 위해 형무소 자리에 역사관을 만든 것이다. 서울시 서대문구청은 95년부터 3년간의 준비를 거쳐 지난 11월5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란 역사의 산교육장을 개관했다. 그 지역의 유지와 전문학자·관리 등 15명이 자문위원으로 참가하여 서대문형무소를 살아있는 민족교육장과 민족정기 고양을 위한 역사의 현장으로 가꾸는 데 크고 작은 정성을 쏟았다. ○민족정기 일깨우는 산 교육장 필자는 서대문형무소의 기능이 서울구치소라는 이름으로 의왕시로 옮겨간 직후 독립공원 조성 자문위원으로 참여했을 때 옥사와 사형장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 민족지사인 ‘죄수’들이 입고 신고 쓰던 물건들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것을 보고 그것들을 보존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분뇨 및 식기·숟가락·고무신 등이혐오스럽다며 모두 쓰레기로 처리됐다. 이 곳을 역사관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필자는 근현대사·독립운동사를 공부하고 있는 연유로 자문위원과 2명의 감리위원 중 한 명으로 위촉되어 활동했다. 해외에까지 돌아다니면서 자료를 수집·정리하기도 했으며,역사관 개관을 위해 외국의 전시기법과 첨단기술 등도 도입됐다. 역사관은 1908년에 경성감옥으로 문을 연 이후 1945년 해방될 때까지 일어났던 의병투쟁,3·1운동,6·10만세운동,수양동우회 및 독서회사건 등에서 개별투쟁에 이르기까지 항일독립투쟁의 처절했던 역사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인영 김구 손병희 양한묵 유관순 이신애 강우규 이신호 이규창 등 당대의 뛰어난 민족독립지사 수만명이 이곳에 투옥되어 저항하다가 고문으로 순국하거나 반신불수,만신창이가 됐다. 그러나 그들의 저항정신은 조국독립의 밑거름이 됐다. 역사관을 개관한 이래 보름동안 2만9,477명(하루 평균 1,965명,최대 4,325명)이 관람했다고 이정규 서대문구청장이 최근 밝혔다. 관람시민의 설문결과에 따르면 조국에 대한 올바른 역사관의 정립과 선열의 자주독립정신을 일깨우는 산 교육장이 되었다고 경탄하면서 이웃의 독립문·독립관 등과 함께 문화유적의 ‘답사 벨트’로서 관람할 가치가 높다는 반응을 보인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청소년들이 애국애족의 참맛을 배우고 올바른 가치관을 정립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日人들도 침략의 역사 배우게 앞으로 일정 기간마다 기획 아이템을 바꾸어 전시함으로써 늘 ‘거듭나며 생동하는 역사관’이 되게 해야 계속적으로 관람객을 유치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430평에 달하는 전시공간에 교대로 새로운 형무소의 이미지가 살아 움직이게 꾸며 생산성 있는 역사관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일본인의 방문을 적극적으로 유도하여 독립투사들에 대한 일본의 가혹한 고문의 실상을 보여 줌으로써 자라나는 일본의 젊은 세대들이 침략의 역사를 올바르게 배우도록 할 필요도 있다. 역사관은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언제나 문이 활짝 열려 있다.
  • 친일의 군상:16/金羲善(정직한 역사 되찾기)

    ◎상해 臨政에 ‘위장취업’/독립운동 진영에 타격/일본육사 졸업… 구한말군대 간부지내/독립운동 ‘길목’서 체포된뒤 변절/3·1운동후 임정가담… 1922년 재차 변절/1980년 국민장 서훈… 96년 재심서 취소 지난 96년 10월 黃昌平 당시 국가보훈처장은 국정감사 답변을 통해 “역대 독립유공자 가운데 徐椿 등 5명에 대해서 독립유공자 예우를 배제키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유는 이들의 친일행적이 확인됐다는 것. 이에 앞서 재야역사학계를 중심으로 역대 독립유공자 가운데 친일경력자가 상당수 포함돼 있다는 주장이 수 차례 제기돼 왔었다. 그러나 당국이 이를 공식 확인하여 해당자들의 독립유공자 예우를 박탈한 것은 처음있는 일이다. 독립유공자에 대한 ‘예우 박탈’이란 서훈취소는 물론 연금지급 중단 등 당국의 각종 보훈혜택을 취소하는 것을 말한다. 당시 보훈처가 독립유공자 예우 박탈대상자로 발표한 5명 속에는 金羲善(김희선)이라는 이름이 들어 있다. 그는 상해 임시정부 군무부 차장을 거쳐 대한독립군 참의부에서 활동하다가 일본군과전투중 ‘사망했다’는 이유로 건국훈장을 추서받았다. 63년 내각사무처가 독립유공자를 심사,포상할 당시 그는 훈장급이 아닌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그러나 보훈처의 공적 재심사를 거쳐 80년 그는 국민장(3등급,현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국민장이라면 柳寬順 열사나 임정요인급이 받은 등급이니 그의 독립운동 공적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간다. 그런 그가 서훈이 취소됐다면 친일경력이 문제됐다는 얘긴데 과연 진상은 무엇인가? 김희선(1875∼1950)은 평안남도 강서 출신으로 본관은 전주,호는 옥봉(玉峯)이다. 일본 육사를 졸업(11기)하고 귀국하여 한말 구한국군 육군참령(현 소령)으로서 시위기병대장,시종무관을 지냈다. 1907년 일제의 군대해산에 격분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한 그는 1910년 도산 安昌浩가 주도한 청도회담(靑島會談)에 참석하였다가 중국본토로 가는 도중에 일본 관헌에 체포돼 강제로 귀국당하였다. 독립운동으로 나선 첫 길목에서 좌절당한 셈이다. ○사이토총독 3차례 면회 이무렵 일제는 광범위한 회유정책을 전개하고 있었다. ‘한일병합’ 직후 일제는 조선내에서 그들의 식민정책을 효과적으로 펴나가기 위해 직업적 친일분자를 정책적으로 육성하였는데 여기에 그가 걸려들고 말았다. 1913년 2월8일자 조선총독부 ‘관보(官報)’에 따르면 그는 동년 2월4일부로 조선총독부 군수(평안남도 개천군수,고등관 6등)에 임명되었다. 1915년 5월18일자 ‘관보’에는 동년 5월12일부로 평안남도 안주군수에 임명된 것으로 나와 있다. 물론 그는 임명만 된 것이 아니라 실지로 두 곳의 군수직에 취임했었다. 일제는 김희선과 같은 변절자들에게 경력을 참작하여 각기 능력에 걸맞는 대우와 임무를 부여하였다. 그에게는 군수자리와 거액의 하사금이 내려졌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그와 같이 변절한 申泰鉉은 간도(間島)방면에서 농장 경영권을 부여받았다. 그 대가로 독립운동가를 투항하도록 권유하는데 이용됐다. ‘사이토(齋藤實)문서’에 의하면 김희선은 1919년 8월부터 1921년말 사이에 사이토(齋藤實) 총독을 3차례 면회한 것으로 나와 있는데 이 수치는 친일파 尹德榮·李夏榮·尹致昊·申錫麟 등이 사이토를 면회한 횟수와 동일하다. 안주 군수 재직중 1919년 3·1만세의거가 터지자 김희선은 총독부 군수 신분으로 만세운동을 지원하다가 마침내 군수직을 버리고 상하이(上海)로 탈출하였다. 그가 만세운동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지원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상하이로 탈출한 것만은 분명하다. 그는 3·1운동후 상하이에서 조직된 임시정부에서 군무부 차장 겸 육군무관학교 교장,군무총장 대리 등을 역임하였다. 또 1922년 1월에는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이 되기도 했다.(‘독립유공자공훈록’,제5권,국가보훈처 발행) 그러나 그는 어떤 연유에선지 1922년경 두 번째로 다시 친일,변절의 길로 들어서고 만다. “김희선은 아(我)정부에서 중(重)히 등용하여 우우(優遇,우대)하여 왔는데 은의(恩義)를 망각하고 변심하여 드디어 적에게 투귀(投歸,투항)하였다. 그 죄 사면(赦免)하기 어렵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관보격인 ‘임시공보’ 제2호(1922년 2월25일) 내용중 김희선 관련부분만 발췌한 내용이다. 그의 변절사실을 확인할만한 자료는 또 있다. 상해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獨立新聞)’ 기사를 보면 그의 변절은 인간적인 면에서도 파렴치한 배신이었던 모양이다. 기사내용중 일부를 옮겨보자. ○30여년간 독립유공자로 둔갑 “병학(兵學)배운(김희선이 일본육사를 졸업한 사실을 지칭한 것임) 애국자로 이름높은 김희선은 총독부의 군수노릇 내버리고 반정(反正)하매 그 전과(前過)를 용서하고 그 지기(志氣)를 가상히 여겨 동지들이 그를 채용하여 군무차장(軍務次長)시켰더니 목욕시킨 돼지가 감귤맛을 못 잊어서…제 계집년 도망할제 왜놈에게 재항(再降)하고 귀화장(歸化狀,항복문)을 써 바쳤다.…3년(1919년부터 1922년까지 그가 임정에 참여했던 기간을 지칭함),냄새나는 송장놈을 차장(次長)시킨 책임자의 잘못이다.그 놈 욕해 무엇하리. 이런 놈은 죽은 개니 육시처참(戮尸處斬)할까 말까”(‘독립신문’,1922년 5월6일,제124호) 결국 그가 1920년대 초반 잠시 임시정부에 참여한 것은 순수한 독립운동 차원이 아니라 일제의 스파이 노릇을 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초창기 독립운동 진영에 참여하다가 도중에 변절한 사례는 더러 있다. 그러나 김희선처럼 두 번씩 변절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가 두번째 변절한 이후의 친일행적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밝혀진 자료는 별로 없다. 그러나 일제가 그를 다각적으로 회유하려고 노력한 사실이나 임시정부에서 그의 변절사실을 이례적으로 관보·기관지에 게재,공개한 것으로 봐 그의 변절은 민족진영에 큰 타격을 준 것으로 보인다. 1930년 ‘한일병합’ 20주년 기념으로 일본 천황이 조선내 친일파들에게 내린 대례기념장(大禮記念章)을 그가 받은 사실로 봐도 그의 친일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간다. 놀라운 사실은 그의 이같은 친일행적이 보훈처가 간행한 ‘독립유공자공훈록’에 모두 언급돼 있다는 사실이다. 독립유공자의 행적에 조그마한 의문점만 있어도 서훈을 보류해온 보훈처가 그에 대해서는 특별한 배려를 한 셈이다. 독립유공 공적으로 대통령표창(63년)에 이어 다시 80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받은 그는 96년 보훈처가 서훈을 취소할 때까지 30여년간 독립유공자로 둔갑돼왔었다. 뒤늦었지만 보훈처의 ‘서훈취소’는 그를 제자리로 돌려놓은 셈이다. 해방후 고향에 머물다가 월남한 김희선은 서울시 임시정부추진회 부회장,육군상이군인유가족회장 등을 지내다가 6·25 발발 후인 50년 9월29일 서울 근교 공릉(현 노원구 공릉동) 근처에서 사망했다. ◎사망일자에 얽힌 치졸한 사연/순국선열 유족 연금 지급/해방전 사망땐 손자까지 혜택/손자 金宗彦 연금수혜 노려 김희선 사망날짜 조작 김희선의 사망일자는 과연 언제인가? 김희선의 사망일자는 서류마다 제각각인데 모두 세가지 설이 있다. 63년 당시 독립유공자 공적심사를 담당했던 내각사무처가 작성한 공적조서에는 ‘1925년 3월 대한독립단 참의부에서 활동중 집안현에서 일본군과 교전중 전사’한 것으로 나와 있다. 80년도에 국민장(현 독립장)으로 훈격이 상향조정될 때 주무부서인 원호처가 작성한 공적조서에도 사망일은 역시 동일하다. 그러나 89년 보훈처가 펴낸 ‘독립유공자공훈록’(제5권)에는 그의 사망일이 광복 직전인 45년 7월6일로 나와있다. 나머지 하나는 그의 후손이 세운 묘비에 적힌 것으로 여기에는 ‘1950년 9월29일 卒’로 나와 있다. 실제 사망일은 그의 묘비에 후손이 새긴 날짜다. 1987년에 출간된 ‘강서군지(江西郡誌)’에도 그렇게 나와 있다. 김희선의 사망일자가 이처럼 여럿인 이유는 보훈당국의 자료조사 부실에다 그의 손자 金宗彦(70)의 ‘장난질’ 때문이다. 현행 국가유공자예우법에는 해방전에 사망한 순국선열은 손자까지,해방후에 사망한 순국선열은 자식까지만 연금수령 자격을 인정하고 있다. 결국 조부 김희선의 훈장에 대한 연금을 타기 위해 김희선의 사망일자를 조작한 셈이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두 번씩이나 친일로 변절한 그 할아버지에 그 손자라고나 할까?
  • 정부수립 50돌에 보는 태극기 옛모습

    ◎박영효 가옥·광주 등 3곳서 전시/김구 선생 서명 태극기 등 선보여 정부수립 50년을 기념하는 태극기 전시회가 남산골 한옥마을과 전쟁기념관 등 서울 2곳과 광주에서 열리고 있다.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이 한옥마을 내의 구한말 정치인 박영효 가옥(266­6937)에서 20일까지 계속되는 ‘태극기 옛모습전’에는 구한말,임정시대 독립운동,한국전쟁 등 중요한 역사의 고비 때 활용한 태극기 36점의 사진을 공개한다. 선열들이 품 속 깊이 간직하거나 목숨을 걸고 지킨 것들로 실물은 독립기념관에 보관돼 있다. 전시품 가운데 ‘김구 서명 태극기’는 백범선생이 1941년 도산 안창호의 딸 안수산에게 기증한 것이다.‘태극기 목각판’은 1919년 3·1만세운동 때 태극기를 대량으로 찍느라 만든 것이고,‘미국시위 태극기’는 같은 해 4월16일 재미교포들이 필라델피아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시위행진을 할 때 사용했다. 또 ‘박영효 태극기’는 1882년 당시 특명전권대신으로 임명된 박영효가 제3차 수신사로서 메이지마루호를 타고 일본으로 가던 중 만든 것이다. 대한민국 국기선양회가 전쟁기념관 2층 중앙홀에 마련한 ‘태극기 변천사전시회’는 15일까지 열린다. 갖가지 태극기 실물 35점을 전시했으며 기념관 입장료는 어른 2,000원,학생은 1,000∼1,500원 이다. 광주광역시 동구문화원에서는 30여명의 화가가 참여한 ‘제1회 우리 태극기 무궁화 대전’을 25일까지 연다.
  • LG상남재단 ‘일제시대 압수기시모음’ 펴내

    ◎민족언론 항일기사 ‘햇빛’/일어로 된 비밀자료 토대 원문 발굴/1년 작업 통해 1,061건 기사 수록/보도기사·논설·만화·시가 등 망라 일제시대 조선총독부에 의해 압수된 민족언론의 항일기사가 햇빛을 보게 됐다. LG상남언론재단(이사장 안병훈)은 정부수립 50주년을 맞아 ‘일제시대 민족지 압수기사모음’(전 2권,정진석 엮음)을 발간했다. ‘일제시대 민족지 압수기사모음’은 당시 발간된 3개 민족지(동아일보,조선일보,시대일보­중외일보­조선중앙일보)의 압수기사 원문을 발굴해 정리·해설한 것이다. 1920년부터 중일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1936년까지 압수된 보도기사를 비롯,논설 및 해설,만화,시가(時歌),기명기사 등이 실렸다. 이들 압수기사에는 6·10만세운동,광주학생 운동,폭탄과 권총으로 일제를 응징했던 김상옥과 라석주 의거 보도 등 민족언론의 진수가 포함돼 있다.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언론신문 차압기사 집록’‘조선의 언론과 세상’‘조선 출판경찰개요’등 일본어로 된 비밀자료를 토대로 원문을 찾아냈으며,원문이 소실된 기사의 경우 일본어 자료를 번역해 실었다. 총 1억원을 들여 1년의 작업 끝에 발간된 이 모음집에는 1,061건의 기사가 수록돼 있다. 일제가 우리 신문에 삭제처분을 내리기 시작한 것은 1904년 2월 러일전쟁 직후부터. 1920년 민간지가 허가된 뒤에도 인쇄된 신문을 먼저 총독부 경무국 도서과에 납본하는 방식은 마찬가지였다. 신문을 인쇄하거나 배포하는 중에도 도서과의 지시가 있으면 인쇄를 중단하고 문제된 기사를 삭제해야 했다. ‘출판법’에 의해 발행되는 잡지는 원고의 사전검열,조판된 잡지의 대장검열,납본검열 등 3중 통제를 받았지만 신문은 사전검열을 생략하는 대신 ‘납본검열’을 시행했던 것이다. 편저자인 한국외국어대 정진석 교수(언론사)는 “일제치하의 항일언론은 우리가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치열한 것이었다”며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민족언론을 지키려는 이러한 불굴의 정신은 한말 이래의 전통인 저항의식과 맥을 같이 한다”고 말한다. 3773­2161
  • 봄나들이/가족과 함께 ‘선열의 얼’ 되새기자

    ◎천안 유관순 열사 추모각­봉화대­생가 등 유적지 인접/홍성 한용운·김좌진 장군 생가도… 하루 코스로 적격 79년전 우리 선조들은 3월1일을 시발로 일제에 맞서 근 3달간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그래서 3월은 우리들에게 설레임보다는 숙연하게 다가온다. 절기상으로는 봄이지만 봄나들이를 나서기에는 아직 이르다.3월을 맞아 독립투사의 생가 등 항일운동 유적지를 둘러보는 것도 뜻있는 일이다. 독립투사들의 생가를 보려면 충남으로 가야한다.유관순 열사는 천안에서 태어났고 윤봉길 의사는 예산,김좌진 장군과 만해 한용운은 홍성출신이다.충남에 독립운동가들이 많은 것은 충청도가 예로부터 충절의 고향이었기 때문이다. 천안시 병천면 탑원리에 있는 유관순 열사 유적지는 추모각,봉화대,생가가서로 가까이에 있어 순회코스로 안성마춤이다.천안시내에서 독립기념관으로가는 21번 국도로 나가 18㎞정도 가면 아우내장터가 나오고 이 곳에서 500m 떨어진 곳에 열사의 영정을 모신 추모각이 있다.추모각을 구경한뒤 추모각 뒷편의 매봉산에올라 독립운동 거사를 알리기 위해 봉화를 피운 봉화대를 둘러보고 능선을 타고 내려오면 생가가 나타난다.모두 다 둘러보는데 1시간이면 된다. 김좌진 장군과 만해 한용운의 생가가 있는 홍성은 인근의 용봉산과 천수만 방조제를 연계하면 하루 단위 나들이길로 적격이다.먼저 충남 서부의 소금강으로 불리는 홍북면 용봉산으로 가 1∼2시간 땀을 흘린다.하산길에 점심식사를 하고 생가터로 발걸음을 옮긴다.갈산면 행산리에 있는 김좌진 장군의 생가터에는 24평 규모의 생가와 기념관이 있다.기념관에는 국내 및 해외활동과 관련된 유품과 함께 영상자료가 전시돼 있다.이 곳에서 승용차로 10분 거리에는 한용운 생가가 있으며 생가를 거쳐 방조제로 가면 된다. 윤봉길 의사는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출생했다.시량리에는 윤의사가 태어나서 4살때까지 살던 광현당,중국으로 가기 전인 23살때까지 지냈던 저한당,윤의사의 사당을 모신 충의사와 유물전시관,충의관 등이 4만2천여평의 경내에 보존,관리되고 있다. 서울에는 종로구 인사동 태화관,종로2가 탑골공원,서대문구 현저동 독립공원이 있다.3·1운동의 발상지인 탑골공원은 1897년에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공원이다.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팔각정을 중심으로 국보2호인 원각사지 10층석탑,원각사비 등의 문화재와 3·1운동 기념탑,3·1운동 벽화,의암 손병희 선생 동상과 한용운 선생 기념비 등이 있다.서대문 독립공원은 일제시대 유관순,손병희 등 애국지사가 수감돼 있었던 곳으로 지난 92년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하면서 조성된 곳이다.감옥 7동,사형장,지하옥사 등이 복원됐으며 독립문,3·1운동기념탑,순국선열 추념탑 등이 자리하고 있다. ◎의인 대거 배출된 충청도 충청지역은 예로부터 충절의 고향이라고 불려 왔다.이러한 사실은 실제로도 입증된다.1900년부터 1973년까지의 명사 150인을 분석한 한 조사에 따르면 충남은 독립운동가 부문에 6명(유관순,윤봉길,김좌진,한용운,이범석,조병옥)이 올라 10명인 서울 다음으로 2위에 올랐다.조사 당시 서울인구가 충남인구의 두배가 넘는 것을 감안하면 인구비례로는 충남이 서울보다 훨씬 높은 셈이다. 충남에서 의인이 많이 배출된 것은 역사적으로도 뒷받침된다.사육신인 성삼문(홍성),박팽년(대전)을 비롯,북벌론을 주장한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우암 송시열이 회덕출신이다.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구한 이순신 장군이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실질적인 고향은 아산이고 구한말 의병운동이 가장 먼저,가장 강하게 일어난 곳도 충청지역이다. 이로 미루어볼 때 충청지역은 일찍부터 충절 또는 민족의식이 저변에 강하게 깔려 있었고 이러한 전통이 독립운동가 배출로 이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물론 이렇게 된 데에는 송시열로 대변되는 기호학파가 200여년간 지배세력이었다는 것도 간과할수 없다.즉 나라를 잃은데 대한 책임의식이 그만큼 강할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한편 충청인의 기질을 보면 ‘충청도 양반’이라는 말처럼 대체로 행동이 점잖고 느린 편이다.이 말은 뒤집어 보면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지만 행동은 신중한 것으로 해석된다.즉 충동적이기 보다는 심사숙고하며 결정을 내리고 행동을 하는 것으로 볼수 있다.바로 이러한 요인이 어려운 상황에서 살신성인의 모범을 보여주게 된 동인이었는지도 모른다.
  • 납북 제헌의원 ‘영혼장례식’

    ◎독립운동가 구중회 선생 100세 맞아 임진각서 “아버님께 올리는 우표없는 이 편지가 바람타고 훨훨 날아서라도 북쪽의 아버님께 전달되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10일 낮 12시 경기도 파주시 임진각 망배단에서는 6·25전쟁때 납북된 독립운동가이자 제헌국회 헌법기초위원이었던 구중회 선생의 영혼장례식이 치러졌다.가족은 선생이 살아 있을 것으로 믿고 이제껏 제사도 지내지 않다가 100세가 되는 올해 영혼장례식을 치르게 됐다. “아버님을 그토록 기다리던 어머님께서 돌아가시던 날 저희 형제들은 아버님을 원망하기도 했습니다…”아버님 전상서를 읽어 내려가는 둘째 아들 자호씨(58·서울예술단 이사장)의 주름진 눈가에는 어느덧 눈물이 맺혔다. 1897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난 선생은 3·1운동 당시 24명의 결사대를 조직,고향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옥고를 치렀다.석방된 뒤 주시경 선생이 운영하던 조선어강습원에 다니다가 일본 와세다대 영문과에 입학했다. 1926년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고향에서 조선어강습 야학당을 운영하는 등 교육을통한 독립운동에 전념하다 해방후 경남 창녕에서 제헌의원으로 당선됐다.하지만 50년 7월 서울 장충동 집에서 인민군에게 납치돼 북으로 갔다. 가족은 경남 창녕군 영산면 선산 부인 허점분씨의 묘에 선생을 합장키로 했다.
  • 제암리 진혼곡(외언내언)

    경기도 수원시청에서 서남쪽으로 20㎞쯤 달리면 화성군 향남면 제암리에 닿는다.400여명의 주민이 오순도순 모여 살고 있는 이마을 시장터옆에 마을이름을 딴 조그마한 교회 하나가 우뚝 서 있다.제암리교회.농어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시골예배당 모습이지만 이곳은 3·1운동때 일제가 저지른 만행을 생생하게 증언해주고 있는 비극의 현장이다. 화성군일대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것은 서울보다 꼭 한달뒤인 4월1일.이날 하오7시 장안면 수촌리 뒷산에서 봉화가 오르면서 시작됐다.이튿날 시위군중은 2천명으로 불어났고 3일에는 시위군중일부가 주재소를 습격하기도 했다.사태가 급박해지자 조선총독부는 헌병대를 파견,시위를 진압했고 15일에는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23명을 제암리교회에 가둔뒤 불을 지르고 무차별총격을 가했다.그리고 같은 날 제암리 옆마음인 고수리에서도 천도교신자 6명을 무참히 살해,불태웠다. 이 만행으로 사람과 가축·곡식 등이 타는 냄새가 10㎞밖까지 퍼져 나갔다고 한다.학살사건이 일어난후 신자나 일반주민은 일본경찰의감시 때문에 사건현장에 얼씬도 못했지만 캐나다 의료선교사 스코필드박사가 찾아와 불탄교회에서 유골을 수습,공동묘지에 묻었다.제암리교회가 복원된 것은 1952년.정부의 도움과 주민의 성금으로 옛터에 옛모습 그대로의 교회가 지어졌고 유족회관도 건립됐다. 성탄절 전날인 지난 24일밤 제암리교회에서는 조촐하지만 감동적인 음악회가 열렸다.일본 히로시마(광도)슈도(수도)대학 나카우네 미노리 교수(50·여)가 3·1운동때 학살된 영혼들의 명복을 빌고 일제의 만행을 속죄하기 위해 마련한 「진혼연주회」.이 연주회에서 나카우네 교수는 바이올린으로 11곡의 진혼곡을 연주했고 「아리랑」 「봉선화」 「고향의 봄」 등 우리 가곡을 주민 200여명과 합창하기도 했다. 진혼연주회는 작은일이다.그러나 그 뜻은 매우 크다.이런 일들이야말로 한·일 두나라 관계를 보다 가깝게 하는 큰걸음이 아닌가 싶다
  • 최고령 독립운동가 김경하옹

    3·1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옥고를 치른 최고령 애국지사 김경하옹이 29일 하오3시 서울보훈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향년 101세. 유족으로는 아세아연합신학대 교환교수인 득렬씨(69) 등 2남4녀. 발인은 11월1일 상오 9시30분 서울 신촌 장로교회에서 하며 장지는 대전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 연락처는 475­7499.
  • 13개 시·군합창단 열띤 경연/유관순음악제 성료

    ◎서울신문사·서산장학재단 주최 서울신문사와 서산장학재단(이사장 성완종·대아건설 회장)이 공동 주최하고,문화체육부와 유관순열사 기념사업회가 후원하는 「제1회 유관순음악제」가 8일 천안시민회관 대강당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아우내장터의 독립만세운동을 이끈 유관순열사의 숭고한 민족혼을 기리기 위해 새로 마련된 이번 음악제에는 시민과 학생 등 1천5백여명이 강당을 가득 메운 채 3시간동안 진행됐다. 충남도내 13개 시·군의 합창단이 참가해 경합을 벌인 음악제에서 주최측은 우열을 가리지 않고 참가팀에게 상금과 기념패를 공동시상해 축제분위기를 자아냈다. 서울대 박인수 교수(테너)의 사회로 진행된 음악제는 시·군을 대표한 합창단들이 다양한 의상으로 무대에 올라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켰고 주부로 구성된 중·고교 어머니합창단이나 교회 성가대가 출전해 「꽃구름속에」「선구자」「Love Story」등 친숙한 가곡과 영화음악을 2곡씩 불러 청중을 매료시켰다. 청중들은 자기지역의 합창단이 무대에 오르면 힘차게 환호했고 음악제가끝날 때까지 자리를 뜨지않고 성원했다.〈천안=이천렬 기자〉
  • 「학교종이 땡땡땡」 출간차 귀국/김메리 할머니 특별 인터뷰

    ◎“요즘 부모들 「가르침없는 자유」 주는게 문제”/「뭐든지 배워라」 어머님 말씀 내인생의 좌표/우리교과서 만들며 작곡… 50년 애창 큰 보람/20년만 젊어도 그림 배울텐데… 서울신문 초대에 감사드려요 □대담=임영숙 문화부장 「학교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신다」 우리 국민에게 애국가 다음으로 친근한 노래 「학교종」의 작사·작곡가 김메리할머니(92·미국 뉴욕거주).격동의 한 세기를 현대여성도 엄두를 못낼 도전과 모험으로 치열하게 살아 온 「영원한 젊은이」이기도 하다.자서전 「학교종이 땡땡땡」의 출판기념회와 어린이날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귀국한 김할머니를 2일 임영숙 문화부장이 만나 보았다.〈편집자 주〉 ­자서전을 단숨에 읽었습니다.재미있고 감동적이더군요. 『고마워요.할 이야기가 많아서 「속 학교종이 땡땡땡」을 써야 할까봐요.처음엔 영어로도 쓰려고 했는데….우리 딸 귀인(조귀인 미국 뉴욕타임스 매거진 편집국장보)이가 「학교종이 땡땡땡」을 영어로 다시 쓰기로 했어요.미국에서도 책이 나올거예요』 숙소인 남산의 힐튼호텔을 찾은 이날 상오,김할머니는 진분홍 꽃무늬가 돋보이는 하늘색 옷에 같은색 스카프,브로치를 단 흰 털실 베레모 차림으로 햇볕 가득한 방에서 일행을 맞이했다.뉴욕에서 서울까지 13시간의 비행에도 아랑곳없이 꼿꼿한 자세에 웃음을 잃지 않고 80여년전의 일까지 하나하나 기억해 얘기하는 모습은 거의 「소녀」에 가깝다.아직도 마음은 25∼29세라고 말했다. ○남산 신사참배 “생생” 『일제때 저 남산언덕배기에 학생들이 신사참배를 했어요.한달에 두번씩 신촌에서 이화학당 학생들 20여명이 함께 걸어와 저기서 절 한번하고 또 신촌까지 걸어갔습니다.지금 남산을 보니 그때 가슴아팠던 것이 사라지는군요.아주 시원해요』 ­한국이 많이 변했지요. 『나쁜쪽으로 보다 좋은쪽으로 변화가 더 많아요.이제 남은 것은 북한이 문제인데 통일도 곧 될거라고 생각해요』 ­지금 불리는 「학교종」의 가사가 원래와 달라졌다고 어제 공항에서 말씀하셨는데… 『아동문학가 윤석중씨가 나중에 바꾸었어요.문법상 문제가 있다면서.그래서 미국에서 전화를 걸어 「내가 한국에만 있었어도 가만두지 않았다」고 항의를 해서 사이가 멀어지기도 했죠.그러나 지금은 좋아졌어요.그리고 올해부터 미국 뉴욕주 국민학교 음악책에 「학교종」이 실리는데 종소리가 「딩딩딩(Ding)」으로 번역돼 좀 우스워요.』 ­해방직후 이화여전 음악과장 시절 현제명 김성태씨등과 음악교과서를 만들면서 20여곡을 작곡하셨다는데 「학교종」말고 다른 작품은 남아있지 않습니까. 『당시 교과서가 있으면 찾을 수 있을텐데 안타까워요.1950년 미국에서 내 손으로 직접 써서 출판한 「한국민요집」은 아직도 미시간의 도서관에 남아 있는데…』 「학교종」이 지난 95년부터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리지 않고 교사용 지도자료에만 소개되고 있다는 사실에도 매우 섭섭해 했다. ○김규식씨가 사촌오빠 ­「학교종이 땡땡땡」을 읽다 보면 나이와 조건에 구애받지 않고 항상 새로운 삶을 사는 선생님의 모습이 인상적입니다.구한말 명문가의 규수로서 결혼하기 싫다고 만주로 도망가고,이화여전을 졸업한 뒤 장학생으로 미국유학을 떠나 전공인 영문학대신 음악학으로 석사학위를 받고,귀국후 이화여전 음악과장이 됐다가 학칙을 어긴 고위층 자녀 학생을 유급시킨 일로 말썽이 나자 음악과장 자리를 박차고 다시 미국으로 떠나 화학과 미생물학 석사가 돼 49세부터 미국 병원실험실에서 임상병리사로 일하고,정년퇴직후 70세가 넘은 나이에 평화봉사단이 되어 아프리카로 떠나고,80세에 서예를 새로 배워 전시회를 열고….그런 에너지가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합니다 『살면서 어머니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어요.어머니는 늘 나에게 무엇이든 배우라 하셨어요.도둑질 빼고 무엇이든지요.항상 남을 도우라는 말씀도 하셨어요.또 그 시대의 여성치고는 개방적이어서 내가 하려는 일이 옳으면 막지 않으셨어요.소학교때 선생님의 얘기도 가슴 속에 살아 있어요.한 사람이 나뭇가지에 올라갔는데 그 나뭇가지가 약해서 부러지러 하자 빨리 그 옆의 든든한 가지로 옮겨 살았다는 거예요.우리의 삶도 「좀 더 나은길」을 찾아 부단히 움직야 합니다』 ­지금도 새로 하고 싶은 일이 있으신가요. 『하고 싶은 일을 거의 다 했는데 한가지만 아직 못했어요.그림 그리는 일이예요.79세때 뉴욕대학 평생교육 과정에 들어가 3년간 소설 쓰는법도 배웠어요』 ○공부하고 싶어 만주로 ­어린시절 이름은 지금과 달랐지요. 『셋째딸이라 해서 삼식이었지요.그러나 기독교신자인 어머니가 메리(Mary)라고 부르셨습니다.아버지(김익승)는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일본유학을 한 뒤 일본어,영어에 능통해 외무대신까지 지냈고 김규식박사가 사촌오빠됩니다.보통학교를 나온 뒤 배화학교를 다녔으나 졸업반이던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 졸업은 못했지요.그러나 그때 교사들이 잡혀가 보통학교 졸업반 학생이 임시교사가 됐어요.나도 15세 되던 해 논산의 보통학교에 교사로 부임했는데 17,18세나 되는 남자학생들이 가득찬 학교에 도착하니 「아기선생 왔다」며 놀려대는 것 아니겠어요』 ­지금까지 살아 오시면서 가장 힘들었던 때는 언제였습니까. 『만주에 3년간 있을때 였어요.논산에서 6개월만에 올라 오니 아버지가 결혼하라고 하시더군요.당시 궁중전의였던 다섯째 삼촌이 고종황제가 독살됐다는 소문을 역이용한 일본인들때문에 만주로 떠나게 돼 영어사전 하나만 달랑 챙겨들고 따라갔어요.삼촌의 병원 일을 도우면서 영어사전을 통째 외우고 교회에서 풍금반주를 하기도 했는데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없다는 것이 괴로웠어요』 ○74세에 아프리카 봉사 ­만주에서 돌아 와 이화학당에 입학하셨을 때의 동급생이나 후배들 얘기 좀 해주시죠. 『이화학당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는데 그때 동기중 이기붕씨의 부인이 된 박마리아가 있어요.1,2등을 다투는 라이벌이었죠.하지만 이씨와의 결혼은 내 중매로 이루어졌어요.게다가 한 학년 밑에는 모윤숙 백낙준씨의 부인이 된 최이권 등이 있었는데 이들도 여간 극성이 아니었어요.학생회장도 선배인 우리들을 제치고 서로 맡겠다고 난리였어요』 ­미국으로 다시 떠나서 뒤늦게 전공을 바꾸신 이유는…. 『안정된 직업을 갖기 위해서 였어요.70세까지 병원 실험실에서 일했어요.75년 남편(조오흥)이 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이어 벙원에서도 정년퇴임 하고 나자 이제는 또 무얼할까 하다가 74세가 되던 1978년 미국 평화봉사단에 지원,아프리카 라이베리아로 떠났어요.2년동안 그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80년 4월 라이베리아에 쿠데타가 일어나 미국으로 돌아왔지요』 ­대단하십니다.건강유지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음식과 운동이예요.매일 동네를 3블록씩 산보하고 비가 오는 날은 집안에서 자전거등 운동기구로 운동을 해요.아침은 과일주스나 과일,보리죽과 볶은 가루에 우유를 타서 먹든지 달걀반숙을 먹어요.점심은 좀 양이 많은데 7첩반상으로 차려먹죠.맵지않게 만든 김치와 깍두기,생선,나물무침,전을 즐기지요.돼지고기,닭고기는 안 먹고 일주일에 세번 생선국,두번 야채국을 먹어요.외식은 안해요.또 뇌세포 생성을 돕기 위해 매일 TV 교양프로의 토론을 보며 받아쓰기도 하지요.아직 돋보기도 안쓰고 바느질도 직접 해요.지난 89년 뇌일혈로 한때 쓰러졌던 적이 있어요.그때도 기억력,시력을 그대로 유지해 의사가 「신비하다」고 말했어요.지난해 기억력테스트를 해보니 25∼29세 연령의 기억력으로 나오더군요.「호랑이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는 우리 옛말의 그 정신으로 삽니다』 ○주일학교 교사 맹활약 ­요즘은 어떻게 지내고 계십니까 『지금은 주일학교에서 한국인 어린이들의 교사로 일해요.「서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도와주면 좋은 인물됩니다」라는 노래를 직접 만들어 우리말,영어로 가르쳐주기도 하죠.월요일이면 하루종일 드러누워야 할 정도로 육체적으로는 힘들지만 가르치는 동안에는 생기가 나요.20년만 젊다면 더 많은 봉사활동을 할 수 있을텐데…』 ­마지막으로 할머니의 노래를 배우고 자라는 우리 어린이들과 부모님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요즘 한국이나 미국이나 어린이들이 가짜 동물,식물만 보면서 놀잖아요.그게 못마땅해요.자연에서 진짜 동물,식물을 보면서 놀아야 배우는 것도 많아요.그리고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자유는 무제한으로 주지만 지도를 안하는 것 같아요.지도하면서 자유를 주어야합니다』 ­서울에 얼마나 머무실겁니까 『2∼3주일 있을 생각이예요.떠나기전에 서울신문을 방문하겠습니다.서울신문에서초대 해 줘서 고마워요』〈정리=서정아 기자〉
  • 국가유공자 가족 의료인 정신대할머니 무료 진료(조약돌)

    ○…국가유공자 가족으로 구성된 의료인들이 정신대 할머니들을 무료진료해주는 등 의료봉사 활동을 펴고 있어 화제. 국가유공자 자녀로서 국가로부터 학비지원 등의 혜택을 받아 성장한 의료인들로 구성된 의료봉사단인 「소금회」는 이달부터 일제때 정신대로 끌려가 고통을 당한 할머니들에게 무료로 치과 질환을 치료해주고 틀니도 제공.이 모임의 대표로 3·1운동 당시 경북 상주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성해식선생(1899∼1939)의 손자인 성백균 박사(52)는 지난 86년 소금회를 결성,산간벽지와 도시 빈민촌을 돌면서 1만7천여명에게 사랑의 인술을 베풀어 왔다는 것.〈황성기 기자〉
  • 걸인·기생 「독립만세」 진주서 77년만에 재현

    1919년 3월 경남 진주에서 있었던 걸인과 기생들의 독립만세운동이 29일 77년만에 재현됐다. 진주 문화사랑모임(회장 이영달)과 망진산 봉수대 복원추진위원회(위원장 이순기)가 일본의 독도망언에 대한 진주시민들의 분노를 보여주기 위해 공동으로 마련한 이날 행사에는 4천여명의 시민과 학생들이 참가했다. 망진산 봉수대 복원기공식을 마친 참가자들은 남강 둔치에 모여 망진산 봉수대의 봉화불에 맞춰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일본의 독도망언을 규탄했다. 3·1운동 당시 진주에서는 3월18일 걸인 1백여명이 『왜놈들이 재산을 빼앗아가 밥을 빌어먹고 있다』며 『독립하지 못하면 2천만 동포는 거지가 될 것』이라고 외치면서 만세운동을 펼쳤다.이어 19일에는 진주의 권번(기생들의 조합)소속 50여명의 여자들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남강에서 촉석루까지 행진했었다.
  • 101세 독립투사 김경하옹의 광복 50돌 기원

    ◎광복조국 밝은 모습 뿌듯/민족통일이 마지막 소원/“서대문 형무소 붉은 담장 아직도 눈에 선해”/김좌진 장군 딸등도 함께 감회 젖어 늙은 독립투사가 15년만에 다시 들러 바라다본 광복 50주년의 조국땅은 밝고 힘에 가득차 있었다.살아있는 최고령 독립투사인 김경하옹. 평북 강계가 고향인 김옹의 올해 나이는 1백1세. 그의 정확한 생년월일은 금세기가 아닌 19세기말인 1895년 3월 24일이다. 그러나 아직도 열혈청년의 정열이 남아있는 듯 김옹은 광복 50주년 기념식을 하루 앞둔 14일 상오 서울 독립공원에서 기자들에게 큰 소리로 소회를 피력했다.『70여년전 서대문형무소의 붉은 벽돌 담장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나라 잃은 청년의 비애같은 것이 느껴집니다.그러나 오늘 이 땅에 사는 청년학생들이 밝고 힘에 넘쳐 가슴 뿌듯합니다』 김옹은 조국이 자기를 잊지않고 광복 50주년 기념행사에 초청해 준 게 무척 흡족한 모습이었다. 김옹이 독립투사로 형극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3·1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번진 기미년 4월8일 강계 장날.당시강계 영실중 교사로 재직중이던 김옹은 동료 교사들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다 일본 기마헌병에 붙잡혀 징역 2년6월형을 받고 평양감옥에 수감된다.그러나 고문 후유증으로 병보석 되어 풀려나자 만주로 피신,선교활동을 통한 항일운동을 계속했다. 우연한 인연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40여년동안 목사로 활동을 해오고 있다.『조국사랑은 누구나 당연한 것이며 결코 자랑거리가 안되는데…』. 김옹의 곁에는 김옹처럼 국가보훈처의 초청으로 조국 땅을 밟은 김좌진 장군의 외동딸 김순옥(68·중국 연변)씨와 전명운 의사의 둘째딸 전경영(72·미국 로스앤젤레스)씨,그리고 외국인이면서 우리의 독립을 위해 고종황제의 밀사로 외교활동을 했던 호머 헐버트의 손자 리처드 헐버트(67·뉴욕 캐미컬뱅크 직원)씨가 자리를 함께 했다.그들의 표정도 김옹과 같이 감회에 젖어 있었다. 『우리의 아버지들이 이렇게 자랑스런 일을 한 줄은 몰랐어요.살면서 고생은 했지만 정말 자랑스러워요』 청산리전투의 영웅 김좌진장군의 딸 김순옥씨는 아버지는 물론 어머니의얼굴조차 모른다.독립운동 뒷바라지에 고생만 하던 어머니는 그녀를 낳다 세상을 떠나 아버지의 부하였던 김기철에 의해 키워졌다고 했다. 『어떻게 소문을 듣고 일본경찰들이 찾아와 여러차례 매를 때리곤 했어요』.농사를 짓고 살면서 숱하게 죽을 고비를 넘기는 고생을 했다는 그녀는 이번에 장군의 외손녀인 위연홍(45)씨와 함께 처음으로 조국땅을 밟았다. 미국의 외교고문자격으로 친일 행각을 노골적으로 벌이던 스티븐스를 향해 총을 뽑았던 전명운의사의 딸 전경영씨는 『영원히 아버지를 사랑하고 자랑스러워 할 것』이라고 말했다.어릴적 부터 미국에서 자란 탓에 우리말은 서툴지만 사회사업을 하는 애국지사의 후손답게 힘차고 또렷또렷하게 얘기했다. 묵묵히 듣고있던 최고령 독립투사 김옹은 『이제 바라는 게 있다면 남이든 북이든 한자리에 모여 오래오래 사이좋게 번영하는 민족의 통일,통일을 이룩하는 것입니다』.이 말을 뒤로 김옹의 눈에는 「간절한 소망」의 이슬이 맺혔다.
  • 순국 독립유공자 후손/2백43명 어제 입국/미·중 등 15개국서

    제50주년 광복절을 맞아 해외에서 순국한 독립유공자 후손 2백43명(생존 유공자 1명 포함)이 오는 15일 광복절 경축식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중국등 15개국에서 국가보훈처 초청으로 11일 입국했다. 이날 방한한 사람 가운데에는 3·1만세운동에 참여한 1백1세의 생존 애국지사 김경하 선생(미국거주)과 고종의 외교고문으로 헤이그밀사파견을 도운 호머 헐버트선생의 아들 리처드 헐버트씨(67),청산리전투에서 일제를 크게 이긴 이범석장군의 아들 이인종씨(58·미국거주),친일파 스티븐스를 저격한 전명운의사의 아들 전경영씨(72·미국거주)등이 포함돼있다. 이에 앞서 이동휘 선생의 손녀 리 루드밀라(62·카자흐스탄거주)씨는 10일 밤 입국했다.
  • 민족시인(외언내언)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시인 상화 이상화의 동상이 광복 50돌을 맞아 오는 15일 대구 두류공원에서 제막된다.「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싶다」던 그는 1920년대 일제하의 암울했던 시대를 이렇게 절규한다.「그러나 지금은­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시비는 많았어도 우리 시인의 동상이 세워지기는 처음이다.그 자신 3·1운동당시 대구에서 학생만세운동을 주도했고 의렬단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던 항일시인.90년에 건국훈장을 추서받기도 한 민족시인이다. 시인은 한 시대의 예언자라고 한다.형형한 예지와 통찰력으로 미래를 투시한다.선지자 이사야가 2700년전 예언과 시로 이스라엘민족을 질타했던 것처럼.나라잃은 암흑의 시대에 우리 민족시인들은 조국의 광복을 위해 저항시로 싸웠다.민족지도자 33인의 한분인 만해 한용운은 대표적 인물.「님의 침묵」으로 유명한 만해는 나라잃은 슬픔을 「님은 갔습니다/아아 사랑하는 님은 갔습니다」라고 영탄하지 않았는가.성북동 집을 지으면서 조선총독부쪽을 향하는게 싫어 남향을 마다하고 북향집을 고집했던 기개 드높은 민족시인이다.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기원하던 윤동주는 어두운 시대의 절망과 분노사이에서 괴로워하며 주옥같은 시편을 남겼다.「이제 새벽이 오면/나팔소리 들려올게외다…」라며 조국광복을 애타게 기다리던 그는 1945년 2월16일 그 「새벽」을 못보고 일본 후쿠오카감옥에서 숨을 거둔다. 북경의 조선군관학교 출신인 시인 이육사는 만주땅을 누비며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독립투사.일본 헌병대에 붙잡혀 해방 1년전 북경에서 옥사한다.「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광야에서 목노아 부르게 하리라」던 그 우렁찬 노래를 육사는 끝내 듣지못하고 만 것이다. 우리민족의 광복에는 이렇게 민족시인들의 희생이 있었음을 알아야 한다.
  • 독립유공 1,442명 발굴·포상/광복 50돌 맞아

    ◎사회주의 계열 이동휘선생 포함/광복군 김광석옹 등 생존자도 28명 국가보훈처는 광복50주년을 맞아 오는 15일 건국훈장 대통령장 등의 훈·포장을 수여할 이동휘 선생 (상해임시정부 국무총리·1873∼1935)등 독립유공자 1천4백42명의 명단을 8일 발표했다. 이날 발표된 독립유공자 명단 중에는 이선생을 비롯,임시정부 외무총장과 한국독립당 비서장을 지낸 박용만(1881∼1928·대통령장),독립운동자금을 제공한 유일한(1894∼1971·독립장·유한양행 설립자),안중근의사 친동생인 안공근(1841∼미상·독립장),소설 상록수의 실제 모델이었던 최용신선생(1909∼1935·애족장)등이 포함돼 있다. 이와함께 일제하 일본 도쿄에서 비밀학생결사체인 「우리들」을 결성,활동했던 홍영기국회부의장(77·애족장),6·10만세운동을 주도했던 문창모국회의원(87·건국포장),3·1운동 당시 경북 안동지역의 시위를 주도,일경에 의해 살해된 황영남선생(1885∼1919·애국장) 등도 명단에 들어있다. 특히 보훈처는 이동휘선생이 1921년 고려공산당을 결성하는 등 사회주의계열의 독립운동가로 알려져 그동안 독립유공자로서 포상을 받지 못했으나,이선생이 공산주의자라기 보다는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회주의활동을 한 것으로 판단돼 이번에 독립유공자로서 포상키로 했다고 밝혔다.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가 우리 정부에 의해 포상을 받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날 발표된 포상대상자들은 대통령장 4명,독립장 95명,애국장 5백44명,애족장 4백30명 등 건국훈장 1천73명이며 건국포장 1백5명,대통령표창 2백64명 등이다. 또한 이들중 생존 독립유공자는 광복군의 일원이었던 김광석선생(77·애족장) 등 28명이며 여성독립유공자는 항일 무장독립투쟁을 벌였던 박차정선생(1910∼1944·독립장)을 비롯,26명이다.
  • 선각의 땅 「명동촌」(두만강 7백리:27)

    ◎민족의 아품 간직한 숱한 유적 곳곳에/일지사 길러낸 학교·교회당 보이고 윤동주시인 생가 6간 기와집 복원/장재촌 사자산 아래동네는 인재배출 명동 1995년은 우리 민족이 해방을 맞은지 꼭 반세기가 되는 해다.한반도에 살고있는 민족들에게도 물론 감회가 깊겠지만,연변조선족들의 올해 8월15일은 더욱 각별할 수 밖에 없다.나라 잃은 설움을 삼키면서 북만주 황무지를 일궈 생명을 부지하면서도 항일독립운동의 본거지 구실을 했던 땅이 바로 오늘의 연변이었기 때문이다.그 해방 이후에도 대륙의 격변속에서 민족을 지키고 살아온 사람들 또한 연변 조선족인 것이다. 그래서 연변에는 민족과 아픔을 같이한 유서 깊은 지역들이 숱하게 널려있다.용정시 지신향 명동촌은 빼놓을 수 없는 독립운동의 요람이다.나는 함경북도 회령 대안의 삼합(옛 이름은 게사처)에서 그 옛날 이주민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오랑캐령을 넘고 달라즈를 지나 용정으로 가는 길목 육도구의 명동촌에 닿았다.본래 청국인 대지주 동한의 땅이었는데 1899년2월 두만강을 건너온 함경도사람들이 사들였다. 그 명동촌을 사들인 사람들은 김약연(1868∼1942년)을 비롯한 네 양반가문의 대소 스물두집이었다고 한다.1백41명의 식솔과 함께 눌러앉았다.교육구국의 뜻을 품었던 김약연은 규암재라는 서당을 꾸린데 이어 19 08년4월27일 서당을 명동서숙으로 바꾸었다.그리고 다음해 명동학교를 세웠다.이상설이 용정에 세운 서전서숙이 그가 헤이그로 떠난 이듬해 1906년 폐교되는 바람에 학생들은 명동으로 몰려들었다. ○김약연 선생이 설림 이에따라 명동학교는 반일구국 인재양성을 목표로한 민족공동체의 자리를 굳힐 수 있게 되었다.이동휘 등의 독립운동가들이 명동학교를 드나들었고,이동휘의 딸 이의순은 교편을 잡았다.1928년까지 1천여명의 학생을 배출했는데 국내 3·1만세운동의 연속인 연변의 3·1운동,광주학생 성원운동의 주역들이 모두 명동학교 출신들이었다.나운규,윤동주,송몽규 등도 명동학교가 배출한 인재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명동학교는 오간데가 없고 그 자리에는 담배가 자라고 있었다.다만 그가 세우고 성도들을 위해 직접 설교를 했던 명동교회당 건물이 시야로 들어왔다.서울의 금성출판사 김낙준회장의 협찬으로 복원된 명동교회당은 85년전 모습으로 복원되었다.그동안 문화대혁명과 같은 숱한 격변을 겪었던 교회당은 한 때 정미소가 들어앉은 적도 있다.마침 교회당 안에서는 「반일민족 독립투사 김약연,저항시인 윤동주 사진전」이 열리는 참이었다. 김약연을 기리는 공덕비가 교회당 동쪽에 서 있다.이 역시 80년대에 요행히 흙무더기속에서 파낸 것이다.명동사적지 복원에 따라 이제야 비각안에 세워진 공덕비는 해방 후에 김약연일가의 성분이 지주로 낙인찍힌 바람에 모진 수모를 당했다.뿌리째 뽑아 내동이 쳤기 때문에 귀퉁이 한쪽이 깨진채 발굴되어 자리를 잡았지만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그래도 세월이 약이라,그를 다시 알아주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른다. ○공덕비 뒤늦게 발굴 시인 윤동주의 생가도 복원되었다.명동교회당 서쪽으로 꽤 떨어진 옛 집터에 복원된 그의 생가는 육간 기와집이다.운동장 같이 넓은 뜰안에 남향으로 앉았다.봉당과 부엌이 딸리고 정주간을 복판방에 배치한 함경북도식 구조를 한 전통가옥이다.네모칸 문살이 촘촘한 지게문을 시인이 열고 나올법도 한 착각이 든다.마루에 올라 문을 열었더니 새하얀 벽지가 눈부셨다.시인의 집은 그렇게 복원했다. 이제 발걸음을 명동의 윗동네인 장재촌으로 옮길 차례가 되었다.어딘가 김약연의 발자국이 찍혀있을 길을 따라 장재촌으로 향했다.남으로 동실동실한 봉우리들이 이마를 맞댄 오봉산이 바라보이는 사자산자락 아랫동네가 장재촌이다.장재촌에서 바라본 사자산은 한마리 용맹한 사자가 휘우듬 허리를 꼬고 돌아앉은 형국이다.또 선바위를 용머리로 본다면 거대한 용이 뛰는 형국이기도 하다. 장재촌의 이종순(70)노인의 설명을 들어보면 그 사자산은 사자가 돌아앉아 대변을 보는 형국인데,대변도 보통 것이 아니고 금변이라는 것이다.그래서 사자산 아랫동네는 영웅과 인재가 우후죽순처럼 나오는 명당자리로 여겼다.바로 여기 김약연목사의 집자리가 있다.집은 허물어져 없어졌지만 명동학교에서 퇴직한 조광춘(69)노인이 그자리에 초가 팔칸을 지었다.집 울타리 밖에 나무판자테를 두른 우물만이 옛모습 그대로라고 했다.그의 회고담은 아주 감격적으로 들렸다. ○일인들도 빈소 찾아 『김약연 목사님은 국어를 손수 가르치셨댔습니다.그런데 작문에 반일이나 독립이라는 말이 없으면 점수를 주지 않았다고 기래요.또 수업시간에 학생이 한눈을 팔면 학생을 벌하시는 대신 자기 종아리를 치셨다는 겁네다.분명히 학생 탓인데도 자기가 강의를 잘못 했다는 뜻에서 그렇게 한 것이디요.훌륭한 스승이셨던 모양입네다』 김약연의 장례날에는 수백명의 조문객이 장재촌을 메웠다고 한다.가족은 물론 제자들과 애국인사,그의 인격을 높이 샀던 일인들도 빈소를 찾았다는 것이다.그리고 통곡소리가 고을을 메웠다.그도 그럴것이 김약연의 죽음은 간도 조선인사회의 대들보가 무너진 것과 다름 없었기 때문이다.용정의 일본 총영사는 질서유지를 명목으로 헌병과 순사를 데리고 나와 반일의 사태를 대비했다. 김약연의 유택은 장재촌 서쪽 산언덕에 마련되었다.나는 묘소에 참배하고 담배 한개비를 물었다.우리민족의 풍속대로면 묘를 남북방향으로 써야 옳았을 것이다.그런데 시신은 동서로 누어계셨다.문득 소설가 우광훈선생이 언젠가 들려준 이야기가 생각났다. 『풍수지리설에 좌청룡 우백호란 말이 있디요.마을에서 보면 사자산 선바위가 용의 상이고 좌측이 됩네다.이 자리가 선바위 등성이니 좌청룡이고,사자와 범이 다가 동물의 왕인지라 사자산을 백호로 보아도 낭패는 없소.김약연선생께서는 정동으로 누우셔서 한반도 모양으로 가꾸고 무궁화를 심어놓은 마을을 굽어보고 계신거디요.그리고 멀리 바라보이는 오봉산은 오복을 뜻하는 것이고,그 복이 나라의 독립으로 실현되길 기원한 것으로 보면 좋을 것입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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