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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사와 세계사 한눈에 ‘확’

    청소년들에게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을 때 우리나라에서는어떤 일이 있었을까’라고 물어봤을 때 제대로 답변할 수 있는 학생은 과연몇명이나 될까. 초·중·고교를 거치면서 무려 12년간이나 국사와 세계사를 공부했지만 이질문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은 몇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오랫동안 국사와 세계사를 따로 배워 두 역사간의 연관성을 모르기 때문이다. 특히 역사를 이해하기 보다는 우선 외우고 보자는 식으로 공부를 해온 우리청소년들에게 올바른 답변을 기대하기는 더더욱 어려운 실정이다. 최근 한국사와 세계사를 한 눈에 ‘확’ 잡을 수 있는 청소년용 비쥬얼 역사 교양서들이 잇달아 출간돼 이같은 고민을 조금이나마 덜게 됐다. ‘새 먼 나라 이웃 나라’의 이원복교수가 쓴 ‘나란나란 세계사 도란도란한국사’(김영사)는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세계사와 한국사의 주요 장면을만화로 재미있게 그렸다. 이 교수는 단군왕검의 고조선 개국(기원전 2333년)에서 김대중 정부 출범까지를 다룬 한국사 100장면과 기원 전 고대 문명 시작부터 아시아 금융위기까지를 다룬 세계사 1 00장면을 비교했다. 그 뒤 1년여동안 자료 수집과 연구를 거쳐 ‘발해를 찾아서를 부르는 서태지’‘스케이트보드를 타고 고구려에 오는 전진의 사신’ 등 신세대 감각에 맞는 역사 만화책을 완성했다. 특히 역사적 사건을 쉽게 기억할 수 있도록 ‘3.1운동 때 독립만세운동이일구일구-1919’‘영국이 권리장전을 만드니 인류 두 팔 들고-1689’ 등 연상기억법을 도입한 놀이형 연대표를 실어 학습 효과를 높였다. ‘이순신이 갈릴레이를 만났다면’(현공숙 엮음 청아출판사)도 우리가 같은시대를 살아 온 두 사람이 마치 다른 시대에 살았던 것으로 여기는 잘못을깨우쳐 주고 있다. 이 책은 기원 전부터 1900년대까지를 100년 단위로 나눠 한국사와 세계사를같은 페이지에 수록,대조해 볼 수 있도록 했다. 특히 각 단락 뒷 부분의 ‘백년의 인물란’에서는 그 시대 우리나라와 세계사를 빛낸 대표적 인물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김명승기자 mskim@
  • [오늘의 눈] ‘3·1절’을 ‘독립절’로 바꾸자

    어제는 새 천년 들어 처음 맞는 ‘3·1절’이었다.오전 10시 세종문화회관에서는 대통령 내외와 3부 요인,그리고 독립유공자·시민·학생 등이 ‘3·1운동’ 81주년 기념식을 갖고 그날의 독립·자주정신을 기렸다. ‘3·1운동’은 일제에 국권을 침탈당한 지 9년째인 1919년 3월1일 거족적으로 전개한 항일 만세시위의거이다.위로는 민족대표에서부터 아래로는 초동급부,남녀노소에 이르기까지,지역적으로도 국내는 물론 만주·연해주 등 해외에서도 이에 동참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 편찬한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3월1일부터 4월말까지 만 두달 동안 전국 212개 군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는 약 110만명이참가했으며 사망 7,509명, 부상 1만5,961명,피검자는 46,948명인 것으로 나와 있다. 우리는 이날의 ‘만세시위의거’를 ‘3·1운동’이라고 부르고 있다.그러나과연 ‘운동’이라는 용어가 적절한 것인지 따져볼 일이다. 3·1만세의거는전국 방방곡곡에서 온 국민이 일제의 폭압 통치에 항거해 비폭력적 방법으로전개한 항일 투쟁임이 분명하다.그런데도 이를 마치 ‘새마을운동’ ‘ 의식개혁운동’과 같이 ‘운동’이란 용어로 표현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마땅히 ‘3·1만세의거’ 또는 의거의 형태를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3·1만세시위의거’로 고쳐 불러야 한다.1926년의 ‘6·10만세운동’ 역시 같은차원에서 ‘6·10만세의거’로 고쳐야 할 것이다. 그동안 ‘만세시위의거’를 ‘운동’으로 불러온 것은 해방 후 학계의 식민사관과 독립운동가 진영의 몰역사적인 역사관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된다.지금까지 나온 역사 서적은 전문서나 대중서 할 것 없이 거의 ‘운동’으로표기돼 있다.심지어 정신문화연구원이 펴낸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역시 ‘3·1운동’ 일명 ‘기미독립만세운동’으로 표현하고 있다. ‘3·1절’ 역시 명칭 개정을 재고해야 한다.현 ‘3·1절’은 1949년 ‘국경일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생겨난 것인데 다른 국경일,즉 제헌절·광복절·개천절 등은 모두 그날의 의미를 명칭에 담고 있는 반면 유독 ‘3·1절’만 날짜를 명칭으로 삼고 있다. 3·1만세의거는 조국 독립을 위해 전 민족이 만세시위를 벌인 날이니 ‘독립절’ 또는 ‘만세절’로 고쳐부르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 정운현 특집기획팀 차장
  • [대한광장] 시민단체의 선거참여

    부패한 돈으로부터 정치를 해방시키려는 시민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제도정치권이 크게 긴장하고 있다.분명한 것은 시민운동 세력이 총선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그동안 정치에 환멸을 느껴온 시민들이 마음을 돌리고 다시 눈을 부릅뜨고 정치를 개혁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되찾았다는 점이다. 이 때에 정부가 공권력을 동원해 시민운동이 성장할 계기를 봉쇄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선진국에서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인 형사법 상의 ‘명예훼손죄’라는 칼날을 들이대며 시민운동단체들을 위협하고있는 데다 정치입법으로 위헌 가능성마저 보이는 선거법 조문을 동원해 주권의 위탁자인 모든 국민에 대한 탄압도 불사하려는지 염려스럽다. 총선시민연대의 활동과 관련해 박원순 변호사가 검찰 소환에 응하면서 고백한 글을 읽으며 필자는 한 줄기 맑고 깨끗한 샘물로 썩어 빠진 정치를 개혁하려던 이들마저 도도한 흙탕물 정치의 와중에 휩싸인 듯하다는 느낌에 전적으로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세계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시민단체들은 각급 선거에서 시민들의 정치의식을 고양하고 정치개혁을 선도하는 데 앞장선다.미국 시민운동단체 가운데 하나인 PFAW는 최근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나선 매케인 진영의 선거운동 고문인 리처드 퀸의 해임까지 요구하고 나섰다.그들이 수집한 증거에 따르면 리처드 퀸은 극우파로 킹목사의 흑인 해방운동과 만델라의 민주화운동을 폄(貶)하는 기사를 썼는가 하면 KKK단 지도자를 공개 옹호하는 글도 썼다는 것이다.우리가 보기엔 주제넘은 이유로 선거참모에 불과한 사람까지 공격을 받은것이다. 우리나라 시민단체들이 특정인을 거명하며 낙천과 낙선운동을 벌이거나 공천철회 압력을 가하는 일쯤은 정치적 의사의 하의상달이 쉽지 않은 우리의실정에서 시민의 정당한 참정권 행사에 해당하는 일이다.또한 시민단체가 인터넷을 통해 의견을 공시하거나 이와 관련된 언론보도를 행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라는 헌법상의 기본권과도 합치할 뿐만 아니라 국민의 법 정서와도 부합하는 행동이다. 진작 역사의 심판을 받아야 했거나 스스로 군사독재 가담자 또는 부정부패의 죄로물러났어야 마땅한 수구세력들이 건전한 민주시민운동을 마오쩌둥(毛澤東) 시대의 홍위병을 동원한 문화대혁명에 빗대어 공격하니 적반하장도유분수다.이것이 ‘색깔논쟁’을 다시 일으키려는 음모가 아니라면 모든 국민에 대한 모욕이요,시민운동에 대한 명예훼손이다.문화대혁명은 군중심리를 이용한 마오쩌둥 주석 만세운동이며 홍위병을 동원해 지식인·금융자본·외세 등을 일거에 매도하고 중국의 사회발전을 마비시킨 커다란 실수였음을 오늘날의 중국 위정자들은 하나같이 인정한다. 그런데 양식 있는 시민과 더불어 진정한 대의민주정치 시대를 열어보려는시민운동을 중국의 역사상 큰 과오였던 홍위병 난동시대에 빗대 빈정대는 무리들을 못본 체하거나 공권력을 앞세워 단속하려는 것은 정부의 판단력 부족이거나 시대착오적인 정치인을 독려하는 일중 하나로 귀착되고 말 것이다. 이번 총선을 대중선전이 관철되는 명목만의 자유선거가 아니라 시민의 이성적인 판단에 기초해 강력한 국가권력과 원자화된 개인 유권자를 연결하는 진정한 민주정치 시대를 열어가려는 기회로 삼겠다면 시민운동단체의 활동은더욱 자유롭게 보장돼야 한다. 옥에도 티가 있듯 부패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정의 실현에 충실하지 않은시민운동단체들이 있어 함부로 국민을 선동하거나 자신들과 무관한 지식인이나 시민을 무료(無料)로 이용하는 일도 더러 있을 것이다.그래서 바라건대시민운동가들은 행여 자기발등에 도끼를 찍는 일이 없도록 스스로의 도덕성을 다시 한번 추슬렀으면 한다. 柳一相 건국대 교수·신문방송학
  • [기고] 민주인사 명예회복 이제 시작

    1900년대를 일컬어‘야만과 광기의 시대’라고들 한다.정말 이 땅에도 인간으로서 상상하기 어려운 야만과 광기의 폭력이 자행되었다. 그것도 지배권력에 의해서.일제 36년이 그랬고,미군정이 그랬고,또 정부 수립 이후 역대 위정자들이 그래 왔다. 이들에게는 인류에 대한 호혜평등이나 나라와 겨레의 안위라고는 안중에도없었다.만일 이들에게 아무도 항거하지 못했다면 1900년대의 역사는 그저‘야만과 광기의 시대’로만 규정되었을지 모른다.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그들의 억압 속에서 우리 겨레는 신음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는 수많은 항쟁이 있어 왔다.일제시대의 3·1 만세운동을 비롯한 크고 작은 운동들,미군정 시기의 4·3항쟁으로 대표되는 운동들,정부 수립 이후 4·19혁명,유신반대운동,광주민중항쟁,6월항쟁,노동자대투쟁 등.그리고 이런 항쟁 외에도 일제시대부터 의·열사들이 자신의 목숨을 바치며 항거하였고,70년대 이후에도 300여분의 민족민주열사,희생자들이 의·열사들의 전통을 이어 나라와 겨레를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바쳤다. 이 과정에서 지배권력은 더 포악한 야만과 광기의 총칼을 휘둘렀지만 역사는 전진해가고 있다. 그래서 나는 1900년대를‘야만과 광기에 맞선 민중들의 투쟁의 시대’라 부르고 싶다.소수를 위한 다수에 대한 착취와 억압이 야만과 광기를 불렀다면이에 대한 항거는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고자 함이었다. 우리는 이런 희생을 딛고 지금 세기 말에 서 있다.그런데 우리는 너무 쉽게 잊어버렸다.바로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바쳤던 열사·희생자들은 아직도 과거의 역사가 씌워놓은 범법자의 굴레를 벗지 못하고 있고,안기부 등 국가권력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자살이나 사고사로 은폐된 의문의 죽음으로 남아있는데,우리는 모른 체하고 있었다. 열사들의 명예회복과 의문사 진상규명법 제정은 바로 우리 국민이,여야 정치인들과 정부 당국자들이 먼저 나서서 해야 할 일이었다.그러나 그렇지 않았다.그래서 열사들의 부모님들이 420일이 다 되도록 천막농성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2000년대를 불과 며칠 앞둔 지금,우리는 이 법의 제정을 통해‘야만과 광기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게 되기를 바란다.이것이 바로 열사들과 국민 모두의 염원이라 여겨진다. 그리고 새 천년에는 열사들이 목숨을 바쳐 염원했던 그 어떤 탐욕도 없는‘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렇게 되게 하기 위해서는 자칫 보상 중심으로 흐를 수 있는 것을 경계하고,열사들의 진정한 명예회복이 이뤄지는 방향으로 시행돼야 할 것이다.의문사 진상규명 과정에서도 가해자들이 저항해 이를 가로막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진상규명을 철저히 이루어내는 일은 다시는 이 땅에 그러한 죽음들이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법 제정도 중요하지만 법 제정 이후 올바로 시행될 수 있도록 더 많은 국민적 관심이 모아져야 할 것이다. 바로 우리 모두가 아름다운 세상에 사는 새 천년으로 만들기 위해서. [김학철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 단체연대회의 집행위원장]
  • 백범 김구 ‘못다한 사랑’ 가수 김원중이 부른다

    지난 11일 서울 은평천사원의 강당.백범 김구 서거 50주년을 맞아 12월 4∼6일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될 창작뮤지컬 ‘못다한 사랑’(작시 고은,연출 박인배)의 연습이 한창이었다.3·1만세운동후 상해로 건너와 임시정부 주석으로 독립투쟁을 계속하던 중 아내의 부음을 접한 백범.쫓기는 몸이라 병원에도 가보지 못하는 애절한 심정을 절절한 노래에 담아 부르는 극중의 백범은 뜻밖에도 ‘바위섬’의 가수 김원중이었다. “역사적으로 존경받는 인물을 무대에서 형상화하기가 쉽지 않습니다.더욱이연기경험이 전혀 없는 저로서는 부담이 훨씬 크지요.”난생 처음 서보는 뮤지컬 무대에,그것도 김구라는 큰 인물을 연기한다는 게엄두가 나지 않아 처음엔 여러차례 사양했다.그러나 “연습하면 충분히 할수 있다”는 연출자의 집요한 설득에 못이겨 결국 ‘엄청난 배역’을 떠맡게됐다. “연습에 들어가기 전 ‘백범일지’를 읽고 그동안 그분에 대해서 몰라도 너무 몰랐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제가 그분의 정치적인 신념과 인품을 제대로표현할 수 있을지두려운 마음이 앞섭니다.”걸음떼기도 어려웠던 초기에 비해서 연기에는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이때문에 배역 부담은 갈수록 커진다는 설명이다. 남북평화협상을 위해 홀홀단신 38선을 넘는 김구를 현재화함으로써 ‘통일운동의 선구자’로서의 의미를 재조명하게 될 ‘못다한 사랑’은 여러면에서기존 뮤지컬과는 다른 시도를 했다.민요 대중가요 독립군가 가곡 트로트 등한국 대중음악사의 모든 장르를 일관된 테마 아래 다양하게 변주해 ‘대중적이면서도 아카데믹한 음악’을 지향하는 한편,각설이의 등장과 빠른 장면전환 등 마당극을 활용한 연출기법으로 새로운 ‘한국형 뮤지컬’을 지향한다. 80년대 ‘바위섬’‘직녀에게’를 히트시킨 김원중은 한동안 고향인 광주에서만 활동하다 최근 새앨범을 낸 뒤 라이브무대를 중심으로 활약하고 있다. 이 작품에 출연하느라 예정된 일본 7도시 순회 콘서트를 포기하고 하루 12시간씩 연습에 땀흘리는 그는 “과장되지 않은 내면 연기로 백범의 모습을 충실히 보여주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못다한 사랑’은 12월 서울 초연이후 전주·광주 등 전국 5도시를 순회하고,일본공연도 초청받았다.(02)720-9272. 이순녀기자 co
  • [의열 독립투쟁] (11)박열 의사

    일제 강점기 항일투사들의 최대 목표는 국적 일왕(日王)을 처단하는 일이었으나 철통같은 경비를 뚫고 일왕을 처단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그러나 항일투사들은 틈을 노렸다.그 중 한 분이 1932년 1월8일 관병식을마치고 돌아가는 히로히토에게 도쿄 사쿠라다몬 앞에서 수류탄을 던진 이봉창(李奉昌) 의사이며,이보다 앞선 의거는 박열(朴烈·1902∼1974) 의사가 일왕 부자(父子)의 처단을 준비하다가 체포된 거사이다. 박의사는 1923년 9월 일본 왕세자 결혼식 날에 일왕 부자를 한꺼번에 폭살하려고 폭탄입수를 계획하다가 비밀이 누설되어 검거되었다.일왕 부자 폭살기도사건으로 일본인 부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여사도 함께 구속된다.두 사람은 사형선고를 받고 무기징역형으로 감형되어 수감 중 가네코 여사는의문의 죽음을 당하였고,박의사는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23년을 일제 감옥에서 보냈다. 박의사의 옥중생활을 날수로 따지면 8,091일,햇수로는 22년 2개월 1일이 된다.세계감옥사에 전과범의 옥중 생환자 중에 일수를 따져 22년의 생환기록은 있으나 ‘대역사건’이라는 일죄일범(一罪一犯)으로 햇수로 23년이란 감옥생활을 일관한 혁명가가 살아서 나온 기록은 당시까지만 해도 유례없는 일이다. 흔히 박의사를 ‘무정부주의자’라고 부른다.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인 일왕을 처단하여 조선의 자주독립으로 만민평등의 사회를 만들겠다는 것이 박의사의 생각이자 사상이었다.박의사는 이 계획을 추진하기 위해 의열단원 김한(金翰)을 통해 상해 의열단측으로부터 폭탄을 입수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못했다.다시 일본인 선원 스기모토에게 부탁했으나 역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자신의 추종자이며 같은 ‘불령사(不逞社)’회원인 김중한(金重漢)에게 부탁했는데 이것이 사전 발각의 빌미가 되었다. 김중한의 일본인 처가 경찰에 밀고하여 관동대진재의 와중에 박의사와 가네코를 비롯,불령사 동지들이 체포돼버린 것이다.일제강점기에 수많은 항일투사가 일제의 법정에 섰지만 박의사 부부처럼 당당하게 자신들의 소신,즉 일제타도의 당위성을 피력한 사람은 흔치 않았다.그것도 적도(敵都) 도쿄법정에서. 박의사 부부는 1925년 9월 이른바 ‘대역사건’의 주범으로 일본 대심원 특정법원에 섰다.박의사는 공판에 앞서 4가지 조건을 법원에 제시했다.첫째,조선민족을 대표하는 입장에서 조선의 왕관·왕의를 착용토록 할 것.둘째,법정에 서는 취지를 선언토록 해줄 것.셋째,조선어를 사용토록 통역을 준비할 것.넷째,피고의 좌석을 일인 판사의 좌석과 동등하게 만들 것 등이었다.박의사가 제시한 4가지 조건 중 일제는 첫째,둘째 조건은 들어주고 셋째는 거부,넷째는 재판장의 간청으로 철회했다. 이렇게 하여 박의사는 조선의 국왕을 상징하는 의관을 갖추고 법정에 서서일왕 부자 폭살의 이유를 진술하여 일본열도를 소용돌이에 몰아넣었다.긴 재판 끝에 박의사 부부에게 사형이 선고되고 이어 무기로 감형되었다.옥중의‘괴사진’사건으로 일본내각이 붕괴되는 등의 파란을 겪으면서 가네코는 옥중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고 박의사는 일본에서도 가장 심하다는 아키다형무소 등에서 복역하다가 일제 패망과 함께 맥아더사령관의 정치범 석방조치로1945년 10월27일석방되었다. 석방 이후 일본에서 신조선건설동맹위원장 등 민단 건설에 노력하던 박의사는 48년 8월 정부수립 기념행사 참석차 귀국했다가 6·25 때 서울 장충동에서 인민군에 납북되었다.납북 후 북한에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회장 등을 역임하다가 1974년 1월18일 74세로 타계,평양 근처 애국열사능에 안장되었다. 박의사는 1902년 2월 경북 문경에서 태어나 경성고등보통학교 때 3·1 만세운동에 참가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신문배달,막노동꾼 등의 일을 하면서 세이소구(正則)영어학교에 다녔다.이 무렵 일본의 사상가이며 아나키스트인 오스키,이와사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인생관과 사회관을 형성하게 되었다. 3·1운동을 전후하여 일본에는 한국인 노동자·유학생이 4만여명에 달했다. 유학생은 매국노 자제를 비롯한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노동하면서 공부하는고학생이 대부분이었다.박의사도 고학을 하면서 정태성·조봉암 등과 진보적 사회단체인 ‘흑도회(黑濤會)’를 조직,재일한국인의 권익옹호와 조국해방운동에 나섰다.조직을 ‘흑로회(黑勞會)’‘흑우회(黑友會)’로 바꿔가면서 항일운동을 벌인 박의사는 부인과 ‘현사회’와 ‘불령선인’ 등 기관지를발간했지만 일본경찰은 닥치는 대로 압수·소각했다. 박의사의 ‘대역사건’이 발표되자 일본의 언론은 대서특필로 이를 보도하고 도쿄의 조선유학생 학우회가 총궐기 태세로 수감중인 박의사를 지원하고나섰다.그러나 국내언론은 검열과 통제로 사건내용을 구체적으로 보도하지못했다.박의사의 일왕 부자 폭살계획은 폭탄의 입수과정에서 차질과 정보누설로 좌절되었다.또한 이것이 관동대진재의 와중에 정치적으로 이용되어 ‘대역사건’으로 포장되고,조선인 대량학살을 호도하는 데 악용되었다.남쪽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항일운동을 하다가 북쪽에서 사망한 박의사는 20세기 민족사의 비극을 상징한다.89년 3·1절에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지만 아직도 그의 독립투쟁과 아나키즘사상에는 ‘흑도(검은 파도)’가 덮여있는 실정이다.생가나 향리 어디에도 박의사의 추모비 하나가 세워져 있지 않다.비운의 애국투사이다. 김삼웅 대한매일 주필·‘박열 평전’저자 kimsu@*박열 의사 부인·후손들 박열 의사의 첫 부인이자 아나키즘운동의 동지였던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여사는 박의사와 함께 대역죄 혐의로 1926년 3월 사형선고를 받고 복역 중열흘 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그런데 이로부터 4개월 후인 7월 가네코 여사는 형무소에서 의문사하였는데 유해는 경북 문경 박의사의 선산에 안장됐다.지난 73년 일본측에서 가네코 여사의 유해를 옮겨가려고 했으나 정화암·양일동 선생 등 아나키스트들의 반대로 무산됐다.박의사와 가네코 여사는 정식 결혼식을 올리지는 않았으며 슬하에 자식도 없었다. 박의사가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린 부인은 지난 76년 타계한 박의숙(朴義淑·본명 張義淑)여사이다.두 사람이 결혼한 것은 1947년.당시 박여사는 도쿄여대 일어과를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로 일본 국제신문 기자로 근무했는데 출옥 1주년 맞아 박의사의 인터뷰를 갔다가 인연이 돼 결혼하게 됐다.박의사는 47세,박여사는 29세였다.박여사는 결혼 1년 만에 장남 영일(榮一·51·육군 준장)씨를,이듬해에장녀 경희(慶姬·현재 일본거주)씨를 낳았다.그러나 행복도 잠시,6·25 와중에 박의사는 납북됐고 가족들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이때 박여사는 남편의 뜻을 따른다는 뜻에서 성을 장씨에서 박씨로 바꾸었다.장남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당시 북한에 있던 박의사로부터 장남을 한국으로 데려가 교육시키라는 편지를 받고 박여사는 장남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67년)시켰다.박의사의 장남 영일씨는 현재 군 정보계통에 근무중이며 97년 장성으로 진급했다.현재 영일씨의 가족은 서울에 살고 있다. 정운현기자 jwh59@
  • 金대통령“청년들 자유·정의 의지 격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3일 광주를 방문한다.광주일고에서 이날 열리는‘제70주년 학생독립운동 및 학생의 날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일제때인 지난 29년 광주고보 학생들의 ‘만세운동’을 계기로 전국에 확산된 학생 독립운동의 의의를 되새기고 20세기 마지막 학생의 날을 전국 규모의 행사로 기념하겠다는 의지가 실려있다. 학생의 날 기념식에 현직 대통령이 참석하기도 35년만이다.64년 당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참석이 마지막이었다. 기념식에서 김 대통령은 학생운동이 민족독립과 민주화 등 한국사회의 발전에 끼친 공로를 높이 평가하고,21세기 청년학생운동의 새 방향을 강조할 것으로 알려졌다. 김 대통령은 최근 정치·사회등 모든 분야에서 ‘극단주의’가 쇠퇴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학생운동에 대해서도 새로운 운동방향과 방법을 찾을 것을 촉구해온 터여서 이날 어떠 대안을 제시할 지 주목된다. 박준영(朴晙瑩) 청와대대변인은 2일 김 대통령의 기념식 참석에 대해 “청년들의 자유와 정의에 대한 의지를 발전·계승할 뿐 아니라 이것이 앞으로우리 사회를 발전시키는 힘이 될수 있도록 격려하는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양승현기자 yangbak@
  • ‘퇴계원산대놀이’ 60년만에 복원

    일제의 탄압으로 소멸됐던 ‘퇴계원 산대놀이’가 60여년만에 완전 복원돼선보인다.25일 오후4시 예술의전당 야외극장.(02)580-1132. 예술의전당이 마련한 ‘전통예술 기획 시리즈-한강’프로그램의 하나로 퇴계원산대놀이 보존회 민경조 회장과 회원 29명이 출연,전체 12마당(과장)중 5마당을 선보인다. 산대놀이는 서울 경기 지역에서 발생,전승된 탈놀이로 발생지역에 따라 퇴계원·송파·양주 별산대놀이로 나뉜다. 내용과 춤사위에는 큰 차이가 없으나 탈모양이 지역에 따라 확연하게 다르다.퇴계원 산대놀이에는 19종류의 탈이 등장한다. 파계승놀이와 양반놀이,서민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놀이로 크게 나눌 수 있다.파계승,몰락한 양반,만신,사당,하인의 등장을 통하여 현실폭로와 풍자,호색,웃음과 탄식을 보여준다. 길놀이로 시작,팔먹중놀이(제6마당)노장놀이(제7마당)신장수놀이(제8마당)취발이놀이(제9마당)신할아비와 미얄할미놀이(제12마당)를 선보이는 공연시간은 2시간이 조금 넘는다. 길놀이는 산대놀이의 시작을 알리는 것으로,출연진이 가면과 의상을 갖춰입고 풍물을 연주하면서 동네를 돌아 관중을 공연장으로 인도하는 구실을 한다.팔먹중 놀이는 중들이 인가로 내려와서 불도를 이탈하는 내용을 담아 파계승들을 풍자한다. 노장놀이는 노장이 본격적으로 파계하는 마당으로 팬터마임 형식의 춤을 보여준다.신장수놀이는 유일하게 동물이 등장하는 마당으로 원숭이의 행동과춤이 해학적인데 극적인 연출이 많다. 취발이놀이는 노장과 여인들이 놀아나는 것을 풍자한 마당으로 걸쭉한 재담과 야한 부분이 많다.신할아비와 미얄할미놀이는 죽음을 위한 굿.또한 놀이전체의 마무리 마당으로 축원굿,화해굿,대동굿의 상징적인 의미가 들어 있다. 송파·양주 별산대놀이는 중요무형문화재로 선정됐다.퇴계원 산대놀이가 유독 일제탄압을 받은 까닭은 당시 퇴계원 산대놀이 연희자들이 3·1 만세운동 등 일제 저항운동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여 반일 감정이 확산되는 것을 꺼린 일제가 탈과 의상,악기 등을 빼앗아 불태우면서 완전히 소멸됐다.지난 90년 산대놀이 연희자중 생존자인 백황봉옹(89)의 제보로 복원작업이 시작됐다. 지난 97년 남양주문화원에 퇴계원산대놀이 보존회가 설립됐고 같은 해 열린경기도 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장려상을 받으면서 점차 알려지게 됐다. 강선임기자 sunnyk@
  • [외언내언] 6월 항쟁

    그대는 가는가/어딜 가는가/그대 등 뒤에 내리깔린 쇠사슬을/마저 손에들고 어딜 가는가/이끌려 먼저 간 그대 뒤를 따라/4천만 형제가 함께 가야 하는가/아니다/억압의 사슬을 두 손으로 뿌리치고/짐승의 철퇴는 두 발로 차버리자/그대 끌려간 그 자리 위에/민중의 웃음을 드리우자/그대 왜갔는가/어딜 갔는가/그대 손목 위에 드리워진 은빛 사슬을/마저 팔찌 끼고 어딜 갔는가/ 87년 6월9일 교내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직격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연세대 이한열(20·경영학과 2년)군은 사고 전 자신의 운명을 예견이라도 한 듯 군사독재의 참담한 현실에 대한 자기성찰과 다짐을 담은 습작시를 남겼다. 그는 27일간의 혼수상태 끝에 7월5일 새벽 스무살의 짧은 생애를 거뒀다.민주제단에 온몸을 바친 것이다. 연세대에서 열린 영결식장에서 이군의 어머니 배은심씨가 단상으로 올라와“젊은이들이여!우리 한열이가 못다 이룬 민주화를 꼭 성취해주세요”라고울먹이면서“살인마 물러가라,살인마 물러가라”고 오열,영결식장을 눈물바다로 만들었던 때가 어제같다. 이한열군을 필두로 수많은 젊은이들의 희생은 잠자던 국민의 양심을 일깨우고,봇물처럼 흘러넘친 민중의 힘은 마침내 독재의 철옹성을 깨뜨리는 데 성공했다.6월26일의 민주헌법쟁취국민평화대행진에 전국 33개 시,4개 군의 180만명이 참가하는 거대한 민중의 힘 앞에 독재세력은 6·29항복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6월항쟁은 1926년 6월10일 조선 마지막 임금 순종의 장례식을 기해 일어난독립만세운동과 함께 민족해방과 반독재민주화운동이 우연찮게 같은 날에 접목되는 우리 근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꾼 날이기도 한다. 6월민주항쟁 12주년에 즈음하여 행사추진위원회(공동대표 김승훈 신부)는각계 610인 선언을 발표하고 정부에 강력한 개혁을 촉구했다.또 여러가지 행사를 통해 항쟁의 정신을 기린다.이와 함께 민주재단 및 민주화운동기념관추진위가 구성되어 지금까지 여러 갈래로 나누어진 민주화운동사업 추진 주체를‘민주화운동기념사업추진준비위원회’로 통합하고 기념관 건립과 민족민주열사 합동추모제,민주상 제정,연구소 등을 세워 민주화운동 계승과 민주인사 지원사업을 벌이기로 했다. 6월행쟁을 모태로 하여 태어난 김대중(金大中)정부는 개혁을 통해 그 정신을 잇고 각종 사업에 적극 협력해야 할 것이다.
  • 새음반

    ◆사랑하는 마음테너 임웅균(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의 첫 독집앨범.타이틀곡인 ‘사랑하는 마음’은 임씨가 주창해온 대중가곡 장르에 속하는 곡으로 듣기 편하면서 친근감을 준다.‘세월의 저편’,‘초우’ ‘웨딩드레스’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 중 ‘공주는 잠못이루고’ ‘상록수’ 등도 실려있다.최선용지휘,경기도립 오케스트라 연주로 녹음했다.트러스타.(02)569-9501◆유관순 전열사 유관순의 생애를 애절하게 그린 판소리를 여류 명창 오정숙의 소리로담았다.‘유관순 전’은 1952년 김연수명창에게 배운 ‘유관순 전’을 토대로 했다.고수 김청만의 장단에 맞춰 녹음한 이 음반에는 단가 ‘벗님가’와함께 유관순의 출생과 성장에서부터 3.1만세운동 준비과정과 당시 상황,헌병대장에 항변하는 모습,옥중 생활과 투쟁 그리고 순국 때까지 일대기를 그린18대목이 담겨있다.신나라 뮤직.(02)927-0050
  • 石吾 李東寧선생 오늘 59주기 일대기

    “선생은 재덕(才德)이 출중하나, 일생을 자기만 못한 동지를 도와서 선두에 내세우고, 스스로는 남의 부족을 보충하고 고쳐 인도하는 일이 일생의 미덕이었다. 최후의 한순간까지 선생의 애호를 받은 사람은 오직 나 한사람이었다.”김구선생이 ‘백범일지’에서 石吾 李東寧선생을 기리며 쓴 내용이다.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석오만큼 폭넓고 헌신적이며 종시일관 독립운동에 생애를 바친 분도 흔치 않다. 그에 비해 평가와 관심이 크게 뒤진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실제로 임시정부는 석오의 애국심과 포용력으로 유지된 바 크다고 하겠다. 8·15해방까지 임정이 유지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한 것은 석오의 공이 절대적이었다. ‘후계자’백범은 석오에 의해 발탁되고 지도되었다. 두사람은 7년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혈맹의 義’관계에서 항상 석오가 백범을 발탁하고 지도하는 입장이었다. 석오가 아니었다면 백범의 존재는 나타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1904년 석오는 항일청년단을 만들면서 무명청년 백범을 상동교회 청년회에 가입시켰다. 이때부터 두 사람은 혈맹의 동지가 되었다. 1919년 4월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된지 며칠후 백범은 임정의 문지기라도 하겠다고 석오를 찾았고 그의 노력으로 당시 내무총장이던 안창호 밑에서 경무국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이(利)를 보면 겸양을 생각하고 의(義)를 보면 위험을 무릅쓰는” 석오의 인품을흠모해온 백범은 항상 그와 함께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이런 인연으로 해방후 백범은 아들 信을 시켜 중국땅에 외롭게 묻힌 석오의 유해를 고국으로봉환하여 서울 효창공원에 안치하였다. 석오의 생애는 국내에서 선각적 개화운동의 전기와 임정을 이끌면서 망명생활로 생애를 마친 후기로 나눌 수 있다. 만민공동회의 연사로 나서 잘못된정치를 탄핵하다가 이준·이승만과 함께 옥고를 치루고, ‘제국신문’논설위원, YMCA운동, 을사조약 반대 결사대로 대한문 앞에서 연좌시위, 안창호·양기탁등과 신민회조직, 안창호·이회영과 전국에 교육단을 조직하고 ‘대한매일신보’발행 지원, 상동학교 설립 등 37세때까지 국내에서 구국운동에 앞장섰다. 한일합병 뒤 만주로 망명,서간도에서 이회영·이시영 등과 한국인 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와 신흥학교를 설립한데 이어 한국군관학교를 세우다가투옥되는 등 만주지역의 항일투쟁을 주도하다가 3·1항쟁후 임시의정원 초대의장으로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석오는 망명길에 나서면서 자식들에게“우리가 이제 합병의 참변을 당하였으니 왜놈들은 우리를 금수와 같이 다룰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도 아버지를따라 중국으로 망명의 길을 떠나자. 나라없는 백성은 어디를 가나 서럽고 비참한 것이다. 만리타향 객지에서 고생할 각오를 한 몸, 그러나 내가 죽기 전에 조국이 광복되는 것을 볼 수만 있다면 나는 그 이상의 더 큰 소망이 없겠다.”고 당부하면서 다시 못올 고국을 떠났다. 석오는 임정의 내무총장, 대통령직무대행, 국무령, 주석 등 요직을 지내고 백범과 함께 임정을 이끌었다. 1935년에는 한국국민당을 조직, 당수로 추대되어 항일 구국투쟁을 지도하였다. 1940년 3월 13일 중국 사천성 기강현 임시정부 청사의 초라한 이층방에서한 많은 생애를 접을 때그의 나이 72세였다. 임정은 간소한 국장으로 그의장례를 치렀다. 해방은 그러고도 5년 뒤에야 찾아왔고 석오의 유해는 3년 뒤에야 그리던 고국에 안장되었다. 뒤늦게나마 석오선생의 독립정신과 애국혼이 선양되어 정직한 역사가 쓰였으면 한다. 김삼웅주필kimsu@- 李東寧선생 연표 ●1869년 충남 천안서 출생●1892년 국가고시 응제진사에 합격●1897년 독립협회 활동으로 7개월간 옥고 치름●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항의,연좌데모로 2개월 옥고치름●1907년 신민회 조직에 참여●1910년 만주서 신흥학교 설립,초대소장 취임●1919년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장,국무총리,내무총장 ●1926년 임시정부 국무령●1929년 한국독립당 이사장·의정원 의장●1935년 임시정부 세번째 주석 취임●1939년 임시정부 네번째 주석 취임,전시내각 구성●1940년 급성폐렴으로 치장서 타계,임시정부 첫 국장(國葬)지냄●1948년 유해봉환,사회장으로 효창원에 안장 - 손자 李奭熙씨 및 후손 근황 “어릴 때부터 조부님께서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치셨다는 얘기를듣고 자랐습니다만 그동안 기업경영에 전념하느라고 손자로서의 도리를 다하지 못해죄스럽습니다.이제는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으니 조부님의 기념·현창사업에 여생을 바칠 생각입니다.” 석오 이동녕 선생의 손자인 李奭熙(67)(주)대우 상담역은 석오 선생 기념사업에 관한 포부로 말문을 열었다.경기고·서울대 법대를 졸업(55년)후 중소기업체에 근무하다가 68년 대우실업에 입사한 그는 대우개발 사장·대우자동차 회장·대우 부회장·경총 부회장·대우증권 회장·대우통신 회장·대우일본법인 회장 등 대우그룹 주요계열사의 최고경영자를 두루 거친 ‘대우맨’이다. 그의 부친,즉 석오 선생의 아들 李義植씨(1900년생)는 유명한 내과전문의였다.일제때 보성전문학교의 교의(校醫)를 지낸 그의 부친은 미군정 당시 민주의원·한독당 조직부장 등 정계에서 활동하기도 했다.또 반민특위의 특별검찰관으로도 활동했으며 이듬해 6·25 와중에 납북됐다. 2남3녀의 형제 가운데 그는 차남이다.그의 형 喆熙씨(75년 작고)는 경기고·보성전문 출신으로 보사부장관비서관,문교부 편수국장·기획관리실장,서울교대 학장 등을 지냈다. 그동안 그는 석오 선생의 독립운동 공적을 널리 알리기위해 소리없이 많은일을 해왔다.우선 그는 ‘이동녕연구’의 일어판(94년)·중국어판(98년)을사재로 출간했다.89년에는 ‘백범일지’의 필사본을 책으로 출간,앞서 출간된 ‘백범일지’가 원본의 상당부분을 누락시킨 사실도 밝혀냈다.또 작년에는 석오 선생이 상해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의 초대의장(현 국회의장격)을 지낸 사실을 토대로 국회의사당 내에 석오선생의 흉상을 건립하였는데 그는 이를 큰 보람으로 여기고 있다. 정운현- '臨政 의 거인' 李東寧 석오(石吾) 李東寧(1869∼1940) 선생은 임시정부 탄생의 주역이자 임정의‘기둥’이었다.임시정부가 공식출범하기 직전인 1919년 4월 10일 임시의정원의 초대의장으로 선출된 선생은 국호(國號)와 임시헌법·관제(官制)를 제정,3일후인 4월 13일 임시정부 수립을 만천하에 선포하였다.선생은 임시의정원 초대의장을 비롯해 의정원 의장 3회,주석(主席) 4회 등 무려 일곱 차례나 임정의요직을 역임하였는데 이는 임시정부사를 통털어 선생만이 유일한 기록이다. 석오 선생이 임정내 이념·계파간의 갈등 속에서도 별다른 ‘잡음’없이 요직을 중임한 것은 선생이 공명정대한 업무처리와 온후한 인품으로 존경을 한 몸에 받은 때문이다.이 때문에 선생은 임정이 내부갈등이나 일제의 탄압으로 난국을 맞을 때마다 중책을 맡아 임정을 위기에서 구하곤 했다.일제는 이러한 선생을 회유,이용하기 위해 조선인 관리 洪承均을 시켜 선생에게 추파를 던졌으나 이를 즉석에서 일축,이 일로 선생의 부친이 원산에서 일경에 체포돼 옥고를 치뤘다. 합리주의자였던 선생은 출신지역·계급을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였다.기호(畿湖)지방의 양반출신들이 주축을 이루던 신민회(新民會)에 황해도 출신의‘무명인사’ 백범 金九를 추천하여 가입시킨 것이 대표적 사례다.이 일로두 사람은 남다른 ‘관계’를 맺게 되었다.백범은 ‘백범일지’ 곳곳에 선생의 행적과 개인적인 친분에 대해 언급해놓고 있는데 이는 평소 백범이 선생을 독립운동계의 선배 이상으로 예우한 것으로 보인다.48년 ‘남북협상’차북한을 다녀온 백범이 아들 信을 시켜 모친(곽낙원)과 처자(최준례·김인)의 유해를 봉환해오면서 이 때 같이 봉환해온 분이 바로 석오 선생과 임정 국무위원겸 비서장 출신 車利錫 선생이었다.62년 선생은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추서받았는데 이를 두고 적절치 못하다는 지적이 많다.임정 정부수반급은 대개 1등급을 받았으며 심지어 李承晩의 비서 출신 임병직씨도 1등급을 받았다. 임정요인 출신 趙擎韓 선생은 생전에 “선생은 지위나 돈 따위를 탐내지 않는 순결무구한 분으로 모든 독립운동가들의 으뜸이었다”고 회고했다. 정운현- 李東寧 선생 효창공원 묘소서 오늘 추모식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80주년을 맞아 임시정부 주석과 임시의정원 초대의장을 지낸 石吾 李東寧 선생의 ‘제59주기 추모식’이 13일 오전 11시 서울용산구 효창공원 석오선생 묘소에서 열린다. 석오선생 기념사업회(회장 姜英勳)가 주최하는 이 추모식은 추모기도와 석오선생 약사보고,추모사·추념사,추모가 제창,헌화분향의 순으로 진행된다. 행사 진행을 맡은 석오기념사업회 金錫營 부회장(69)은 “3·1독립만세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80주년을 맞아 거행하는 올해의 추모식은 감회가남다르다”고 말했다.60주기인 내년에는 추모 학술세미나를 개최하고 재정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장학사업도 추진할 계획이다. 추모식에는 崔圭鶴 국가보훈처장, 高建 서울시장,尹慶彬 광복회장,朴維徹독립기념관장,국민회의 張在植·李錫玄·鄭漢溶의원,자민련 李東馥의원,한나라당 李漢東·吳世應·徐廷和·朴明煥의원,李奭熙 석오선생 유족회장,李元範 3·1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李榮載 대종교 총전교,金信 백범선생기념사업회고문을 비롯한 각계 인사 300여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이상록
  • 내일 부산 구포장터 3·1만세운동 재연

    부산 구포장터에서 벌어졌던 3·1만세 운동이 13일 오후 1시30분 북구 구포시장 일대(구포만세거리)에서 80년만에 재연된다. 참가규모는 지역상인과 주민,학생 등 2,400여명에 이른다.부산지방보훈청과 부산북구청이 주관하고 북구 낙동문화원이 주최한다. 참가자들은 구포여중에 모여 3곳으로 나눠 구포역 광장까지 30여분간 행진하며 80년전의 감격을 되새긴다. 만세운동은 5일장인 구포장이 열렸던 1919년 3월 29일(음력 2월 28일)일어났다.경성의학전문학생 楊奉根씨가 평소 친분이 있던 구포면 서기 林鳳來씨와 함께 지역 청년들과 상인들을 설득하면서 불을 지폈다. 밤새워 독립선언서와 태극기 ‘대한독립만세’라고 적힌 대형 플래카드를만들었다. 당일 장을 보러나온 사람들과 상인 등 1,200여명이 독립을 외쳤다.일경의발포로 9명이 부상했으며 42명이 투옥돼 옥고를 치렀다. 부산l金政韓jhkim@
  • ‘3·1만세’전국서 재현

    3·1독립운동 80주년을 맞아 3·1운동을 재현한 거리공연이 펼쳐지는 등 다채로운 기념 행사가 거행된다. 정부는 1일 오전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3부 요인,애국지사를 비롯한 광복회원,각계 인사,청소년,시민대표 등 4,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식을갖는다.기념식에 이어 세종문화회관앞 거리에서는 3·1독립만세를 외치는 모습을 재현하는 거리공연이 鞠守鎬국립무용단장의 안무로 펼쳐진다. 지방에서도 시·도 단위로 기념식과 3·1독립운동 사적지별로 만세운동을재현하는 등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진다. 朴賢甲 eagleduo@daehanmail.com
  • 「3·1운동-臨政수립 80돌」주요 기념행사

    오는 3월 1일은 일제에 맞서 세계만방에 ‘조선독립’을 선포하고 만세운동을 펼친 지 80년이 되는 날.이날을 맞아 정부 및 자치단체,관련 단체·기관들은 다양한 기념행사를 갖고 백척간두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하려고 독립선언을 선포했던 3·1정신을 되살려 제2의 건국운동으로 계승할 것을 다짐한다. 이날 경복궁 덕수궁 창경궁 등 전국의 고궁(창덕궁 제외)과 능·원,현충사,칠백의총 등이 무료로 개방된다. 3월 1일 오전 10시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는 3부 요인,광복회원 및국가유공자 단체장,정당대표,시민대표 및 청소년 등 4,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기념식이 열린다. 상오 11시 서울 남산 국립국장 입구 공원에서는 광복회(회장 尹慶彬) 및 3. 1독립운동기념탑건립위원회(위원장 李壽成) 주관으로 3.1독립정신을 기리기위해 21억2,000만원의 국민성금으로 건립된 높이 19.19m(1919년 상징)의 기념탑이 제막된다.이어 33인 유족대표와 광복회원 등 4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3·1운동 희생선열 합동 추모제전이 거행된다. 서울시는 낮 12시 서울 종로구 종로2가 보신각에서 3·1운동의 주역이었던독립유공자 대표와 후손 등을 초청,타종행사를 갖는다. 만세운동 재현행사는 충남 천안시 아우내장터를 비롯,경기도 화성군 발안장터,강원 횡성군 3·1공원,제주 북제주군 조천만세동산 등 전국 10개 시·도15개 지역별로 3월1일부터 4월까지 80년전 만세운동이 일어난 날에 맞춰 펼쳐진다.독립운동서 낭독,햇불시위,봉수제,봉화제 등의 행사는 물론 길놀이,마당굿,대동놀이 등 민속행사가 함께 펼쳐져 애국심과 공동체의식을 함양하는 축제의 한마당이 될 전망이다. 특히 80년전 ‘조선독립만세’를 앞장서 외쳤던 종교지도자들은 2월부터 8월까지를 ‘범종교 3·1정신 현창(顯彰)기간’으로 정하고 ‘제2의 3·1운동’을 펼친다. 국내 7대종교지도자들의 모임인 한국종교지도자협의회는 우선 3월1일 80주년 기념식을 80년전의 모습대로 성대히 꾸민다.각 종단 관계자들은 견지동조계사,저동 영락교회,경운동 천도교 중앙대교당,원불교 원남교당,천주교 명동성당,명륜동 성균관,사직단 장충단등에서부터 가두행진을 하며 종로3가탑골공원에 집결,오전 11시 팔각정 앞에서 기념식을 갖는다.기념식에서는 기미독립선언서와 ‘제2의 3·1선언서’가 낭독되고 각 종단의 3·1운동 80주년 메시지도 발표된다.‘극단 모시는 사람들’과 염광여상 취주대의 선열 추모공연과 김덕수패의 사물놀이도 펼쳐진다. 이날 정오 전국의 사찰과 성당,교당,교회,향교 등에서도 일제히 ‘제2의 3·1선언서’를 낭독하는 한편 전국 200여곳에 종단별 가두홍보대를 설치,3월 1일을 전후한 3∼4일 동안 대국민 알림운동을 전개한다. 종교지도자협의회는 또 3·1독립정신을 기리는 기념조형물을 제작,오는 27일 ‘기미독립선언서’를 인쇄했던 서울 종로구 수송동 보성사(普成社) 터에서 제막식을 갖는다. 이밖에 3·1정신 계승을 위한 범종교인 학술발표회를 비롯,청소년 국토순례,연극 ‘우리로 서는 소리’ 공연,3·1정신 계승방안 공모,3·1정신 현창도서 간행,3·1정신 현창미술전시회 등의 행사가 잇따라 열린다. 이어 4.13 임시정부수립 기념일을 맞아 4월 13일 서울 및중국 상해,중경에서는 제80주년 기념식 및 학술토론회 등이 열린다. 4월11일∼17일 7박8일간의 일정으로 해외거주 독립유공자 후손 및 사료연구위원 등 30명을 국내로 초청,기념식 및 학술회의를 개최한다.
  • 3·1 만세운동 전국15곳서 재현/보훈처 80주년 기념행사

    80년 전 만세시위를 하던 종교인 29명이 일제 군경에 의해 참살당한 경기도 화성군 발안장터를 비롯,충남 천안시 아우내장터,강원 횡성군 3·1공원,제주 북제주군 조천만세동산 등 전국 15개 지역에서 오는 3월1일부터 4월까지지역주민,학생 등이 참석한 가운데 3.1독립만세운동이 재현된다. 국가보훈처는 24일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80주년에 즈음한 민족정기 선양사업을 확정,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3월1일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3부요인,광복회원 및 국가유공자 단체장,정당대표 등 4,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식이 열린다. 특히 이날 오전 11시 서울 남산 국립극장 입구에서는 광복회(회장 尹慶彬)및 3·1독립운동기념탑건립위원회(위원장 李壽成) 주관으로 3·1독립정신을기리기 위해 21억2,000만원의 국민성금으로 건립된 높이 1,919㎝(1919년 상징)의 기념탑 제막식이 거행된다. 4·13 임시정부수립 기념일인 4월13일에는 서울 및 중국 상해,중경에서 제80주년 기념식 및 학술토론회가 열린다. 4월11일에는 중국 미국 일본 러시아 대만 카자흐스탄 등 해외거주 독립유공자 후손 및 사료연구위원 등 30명을 7박8일 일정으로 초청,국내의 역사현장및 사적지 등을 돌아보도록 할 계획이다.국내 원로 애국지사 및 사학자 등 20여명은 4월13일을 전후해 중국 상해와 중경 광주 진강 항주 장사 등 임시정부 유적지를 탐방,임정선열들의 고귀한 애국애족정신을 되새기게 된다.
  • 서대문형무소 역사관/李炫熙 성신여대 교수·한국근현대사(대한광장)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 예전 서대문형무소 자리에 최근 역사관이 개관됐다. 빼앗긴 조국을 다시 찾겠다고 목숨을 바쳐 싸우다가 체포되어 악명 높았던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거나 그 곳에서 순국한 민족독립지사들의 애국활동을 기리기 위해 형무소 자리에 역사관을 만든 것이다. 서울시 서대문구청은 95년부터 3년간의 준비를 거쳐 지난 11월5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란 역사의 산교육장을 개관했다. 그 지역의 유지와 전문학자·관리 등 15명이 자문위원으로 참가하여 서대문형무소를 살아있는 민족교육장과 민족정기 고양을 위한 역사의 현장으로 가꾸는 데 크고 작은 정성을 쏟았다. ○민족정기 일깨우는 산 교육장 필자는 서대문형무소의 기능이 서울구치소라는 이름으로 의왕시로 옮겨간 직후 독립공원 조성 자문위원으로 참여했을 때 옥사와 사형장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 민족지사인 ‘죄수’들이 입고 신고 쓰던 물건들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것을 보고 그것들을 보존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분뇨 및 식기·숟가락·고무신 등이혐오스럽다며 모두 쓰레기로 처리됐다. 이 곳을 역사관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필자는 근현대사·독립운동사를 공부하고 있는 연유로 자문위원과 2명의 감리위원 중 한 명으로 위촉되어 활동했다. 해외에까지 돌아다니면서 자료를 수집·정리하기도 했으며,역사관 개관을 위해 외국의 전시기법과 첨단기술 등도 도입됐다. 역사관은 1908년에 경성감옥으로 문을 연 이후 1945년 해방될 때까지 일어났던 의병투쟁,3·1운동,6·10만세운동,수양동우회 및 독서회사건 등에서 개별투쟁에 이르기까지 항일독립투쟁의 처절했던 역사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인영 김구 손병희 양한묵 유관순 이신애 강우규 이신호 이규창 등 당대의 뛰어난 민족독립지사 수만명이 이곳에 투옥되어 저항하다가 고문으로 순국하거나 반신불수,만신창이가 됐다. 그러나 그들의 저항정신은 조국독립의 밑거름이 됐다. 역사관을 개관한 이래 보름동안 2만9,477명(하루 평균 1,965명,최대 4,325명)이 관람했다고 이정규 서대문구청장이 최근 밝혔다. 관람시민의 설문결과에 따르면 조국에 대한 올바른 역사관의 정립과 선열의 자주독립정신을 일깨우는 산 교육장이 되었다고 경탄하면서 이웃의 독립문·독립관 등과 함께 문화유적의 ‘답사 벨트’로서 관람할 가치가 높다는 반응을 보인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청소년들이 애국애족의 참맛을 배우고 올바른 가치관을 정립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日人들도 침략의 역사 배우게 앞으로 일정 기간마다 기획 아이템을 바꾸어 전시함으로써 늘 ‘거듭나며 생동하는 역사관’이 되게 해야 계속적으로 관람객을 유치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430평에 달하는 전시공간에 교대로 새로운 형무소의 이미지가 살아 움직이게 꾸며 생산성 있는 역사관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일본인의 방문을 적극적으로 유도하여 독립투사들에 대한 일본의 가혹한 고문의 실상을 보여 줌으로써 자라나는 일본의 젊은 세대들이 침략의 역사를 올바르게 배우도록 할 필요도 있다. 역사관은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언제나 문이 활짝 열려 있다.
  • 친일의 군상:16/金羲善(정직한 역사 되찾기)

    ◎상해 臨政에 ‘위장취업’/독립운동 진영에 타격/일본육사 졸업… 구한말군대 간부지내/독립운동 ‘길목’서 체포된뒤 변절/3·1운동후 임정가담… 1922년 재차 변절/1980년 국민장 서훈… 96년 재심서 취소 지난 96년 10월 黃昌平 당시 국가보훈처장은 국정감사 답변을 통해 “역대 독립유공자 가운데 徐椿 등 5명에 대해서 독립유공자 예우를 배제키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유는 이들의 친일행적이 확인됐다는 것. 이에 앞서 재야역사학계를 중심으로 역대 독립유공자 가운데 친일경력자가 상당수 포함돼 있다는 주장이 수 차례 제기돼 왔었다. 그러나 당국이 이를 공식 확인하여 해당자들의 독립유공자 예우를 박탈한 것은 처음있는 일이다. 독립유공자에 대한 ‘예우 박탈’이란 서훈취소는 물론 연금지급 중단 등 당국의 각종 보훈혜택을 취소하는 것을 말한다. 당시 보훈처가 독립유공자 예우 박탈대상자로 발표한 5명 속에는 金羲善(김희선)이라는 이름이 들어 있다. 그는 상해 임시정부 군무부 차장을 거쳐 대한독립군 참의부에서 활동하다가 일본군과전투중 ‘사망했다’는 이유로 건국훈장을 추서받았다. 63년 내각사무처가 독립유공자를 심사,포상할 당시 그는 훈장급이 아닌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그러나 보훈처의 공적 재심사를 거쳐 80년 그는 국민장(3등급,현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국민장이라면 柳寬順 열사나 임정요인급이 받은 등급이니 그의 독립운동 공적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간다. 그런 그가 서훈이 취소됐다면 친일경력이 문제됐다는 얘긴데 과연 진상은 무엇인가? 김희선(1875∼1950)은 평안남도 강서 출신으로 본관은 전주,호는 옥봉(玉峯)이다. 일본 육사를 졸업(11기)하고 귀국하여 한말 구한국군 육군참령(현 소령)으로서 시위기병대장,시종무관을 지냈다. 1907년 일제의 군대해산에 격분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한 그는 1910년 도산 安昌浩가 주도한 청도회담(靑島會談)에 참석하였다가 중국본토로 가는 도중에 일본 관헌에 체포돼 강제로 귀국당하였다. 독립운동으로 나선 첫 길목에서 좌절당한 셈이다. ○사이토총독 3차례 면회 이무렵 일제는 광범위한 회유정책을 전개하고 있었다. ‘한일병합’ 직후 일제는 조선내에서 그들의 식민정책을 효과적으로 펴나가기 위해 직업적 친일분자를 정책적으로 육성하였는데 여기에 그가 걸려들고 말았다. 1913년 2월8일자 조선총독부 ‘관보(官報)’에 따르면 그는 동년 2월4일부로 조선총독부 군수(평안남도 개천군수,고등관 6등)에 임명되었다. 1915년 5월18일자 ‘관보’에는 동년 5월12일부로 평안남도 안주군수에 임명된 것으로 나와 있다. 물론 그는 임명만 된 것이 아니라 실지로 두 곳의 군수직에 취임했었다. 일제는 김희선과 같은 변절자들에게 경력을 참작하여 각기 능력에 걸맞는 대우와 임무를 부여하였다. 그에게는 군수자리와 거액의 하사금이 내려졌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그와 같이 변절한 申泰鉉은 간도(間島)방면에서 농장 경영권을 부여받았다. 그 대가로 독립운동가를 투항하도록 권유하는데 이용됐다. ‘사이토(齋藤實)문서’에 의하면 김희선은 1919년 8월부터 1921년말 사이에 사이토(齋藤實) 총독을 3차례 면회한 것으로 나와 있는데 이 수치는 친일파 尹德榮·李夏榮·尹致昊·申錫麟 등이 사이토를 면회한 횟수와 동일하다. 안주 군수 재직중 1919년 3·1만세의거가 터지자 김희선은 총독부 군수 신분으로 만세운동을 지원하다가 마침내 군수직을 버리고 상하이(上海)로 탈출하였다. 그가 만세운동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지원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상하이로 탈출한 것만은 분명하다. 그는 3·1운동후 상하이에서 조직된 임시정부에서 군무부 차장 겸 육군무관학교 교장,군무총장 대리 등을 역임하였다. 또 1922년 1월에는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이 되기도 했다.(‘독립유공자공훈록’,제5권,국가보훈처 발행) 그러나 그는 어떤 연유에선지 1922년경 두 번째로 다시 친일,변절의 길로 들어서고 만다. “김희선은 아(我)정부에서 중(重)히 등용하여 우우(優遇,우대)하여 왔는데 은의(恩義)를 망각하고 변심하여 드디어 적에게 투귀(投歸,투항)하였다. 그 죄 사면(赦免)하기 어렵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관보격인 ‘임시공보’ 제2호(1922년 2월25일) 내용중 김희선 관련부분만 발췌한 내용이다. 그의 변절사실을 확인할만한 자료는 또 있다. 상해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獨立新聞)’ 기사를 보면 그의 변절은 인간적인 면에서도 파렴치한 배신이었던 모양이다. 기사내용중 일부를 옮겨보자. ○30여년간 독립유공자로 둔갑 “병학(兵學)배운(김희선이 일본육사를 졸업한 사실을 지칭한 것임) 애국자로 이름높은 김희선은 총독부의 군수노릇 내버리고 반정(反正)하매 그 전과(前過)를 용서하고 그 지기(志氣)를 가상히 여겨 동지들이 그를 채용하여 군무차장(軍務次長)시켰더니 목욕시킨 돼지가 감귤맛을 못 잊어서…제 계집년 도망할제 왜놈에게 재항(再降)하고 귀화장(歸化狀,항복문)을 써 바쳤다.…3년(1919년부터 1922년까지 그가 임정에 참여했던 기간을 지칭함),냄새나는 송장놈을 차장(次長)시킨 책임자의 잘못이다.그 놈 욕해 무엇하리. 이런 놈은 죽은 개니 육시처참(戮尸處斬)할까 말까”(‘독립신문’,1922년 5월6일,제124호) 결국 그가 1920년대 초반 잠시 임시정부에 참여한 것은 순수한 독립운동 차원이 아니라 일제의 스파이 노릇을 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초창기 독립운동 진영에 참여하다가 도중에 변절한 사례는 더러 있다. 그러나 김희선처럼 두 번씩 변절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가 두번째 변절한 이후의 친일행적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밝혀진 자료는 별로 없다. 그러나 일제가 그를 다각적으로 회유하려고 노력한 사실이나 임시정부에서 그의 변절사실을 이례적으로 관보·기관지에 게재,공개한 것으로 봐 그의 변절은 민족진영에 큰 타격을 준 것으로 보인다. 1930년 ‘한일병합’ 20주년 기념으로 일본 천황이 조선내 친일파들에게 내린 대례기념장(大禮記念章)을 그가 받은 사실로 봐도 그의 친일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간다. 놀라운 사실은 그의 이같은 친일행적이 보훈처가 간행한 ‘독립유공자공훈록’에 모두 언급돼 있다는 사실이다. 독립유공자의 행적에 조그마한 의문점만 있어도 서훈을 보류해온 보훈처가 그에 대해서는 특별한 배려를 한 셈이다. 독립유공 공적으로 대통령표창(63년)에 이어 다시 80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받은 그는 96년 보훈처가 서훈을 취소할 때까지 30여년간 독립유공자로 둔갑돼왔었다. 뒤늦었지만 보훈처의 ‘서훈취소’는 그를 제자리로 돌려놓은 셈이다. 해방후 고향에 머물다가 월남한 김희선은 서울시 임시정부추진회 부회장,육군상이군인유가족회장 등을 지내다가 6·25 발발 후인 50년 9월29일 서울 근교 공릉(현 노원구 공릉동) 근처에서 사망했다. ◎사망일자에 얽힌 치졸한 사연/순국선열 유족 연금 지급/해방전 사망땐 손자까지 혜택/손자 金宗彦 연금수혜 노려 김희선 사망날짜 조작 김희선의 사망일자는 과연 언제인가? 김희선의 사망일자는 서류마다 제각각인데 모두 세가지 설이 있다. 63년 당시 독립유공자 공적심사를 담당했던 내각사무처가 작성한 공적조서에는 ‘1925년 3월 대한독립단 참의부에서 활동중 집안현에서 일본군과 교전중 전사’한 것으로 나와 있다. 80년도에 국민장(현 독립장)으로 훈격이 상향조정될 때 주무부서인 원호처가 작성한 공적조서에도 사망일은 역시 동일하다. 그러나 89년 보훈처가 펴낸 ‘독립유공자공훈록’(제5권)에는 그의 사망일이 광복 직전인 45년 7월6일로 나와있다. 나머지 하나는 그의 후손이 세운 묘비에 적힌 것으로 여기에는 ‘1950년 9월29일 卒’로 나와 있다. 실제 사망일은 그의 묘비에 후손이 새긴 날짜다. 1987년에 출간된 ‘강서군지(江西郡誌)’에도 그렇게 나와 있다. 김희선의 사망일자가 이처럼 여럿인 이유는 보훈당국의 자료조사 부실에다 그의 손자 金宗彦(70)의 ‘장난질’ 때문이다. 현행 국가유공자예우법에는 해방전에 사망한 순국선열은 손자까지,해방후에 사망한 순국선열은 자식까지만 연금수령 자격을 인정하고 있다. 결국 조부 김희선의 훈장에 대한 연금을 타기 위해 김희선의 사망일자를 조작한 셈이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두 번씩이나 친일로 변절한 그 할아버지에 그 손자라고나 할까?
  • 정부수립 50돌에 보는 태극기 옛모습

    ◎박영효 가옥·광주 등 3곳서 전시/김구 선생 서명 태극기 등 선보여 정부수립 50년을 기념하는 태극기 전시회가 남산골 한옥마을과 전쟁기념관 등 서울 2곳과 광주에서 열리고 있다.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이 한옥마을 내의 구한말 정치인 박영효 가옥(266­6937)에서 20일까지 계속되는 ‘태극기 옛모습전’에는 구한말,임정시대 독립운동,한국전쟁 등 중요한 역사의 고비 때 활용한 태극기 36점의 사진을 공개한다. 선열들이 품 속 깊이 간직하거나 목숨을 걸고 지킨 것들로 실물은 독립기념관에 보관돼 있다. 전시품 가운데 ‘김구 서명 태극기’는 백범선생이 1941년 도산 안창호의 딸 안수산에게 기증한 것이다.‘태극기 목각판’은 1919년 3·1만세운동 때 태극기를 대량으로 찍느라 만든 것이고,‘미국시위 태극기’는 같은 해 4월16일 재미교포들이 필라델피아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시위행진을 할 때 사용했다. 또 ‘박영효 태극기’는 1882년 당시 특명전권대신으로 임명된 박영효가 제3차 수신사로서 메이지마루호를 타고 일본으로 가던 중 만든 것이다. 대한민국 국기선양회가 전쟁기념관 2층 중앙홀에 마련한 ‘태극기 변천사전시회’는 15일까지 열린다. 갖가지 태극기 실물 35점을 전시했으며 기념관 입장료는 어른 2,000원,학생은 1,000∼1,500원 이다. 광주광역시 동구문화원에서는 30여명의 화가가 참여한 ‘제1회 우리 태극기 무궁화 대전’을 25일까지 연다.
  • LG상남재단 ‘일제시대 압수기시모음’ 펴내

    ◎민족언론 항일기사 ‘햇빛’/일어로 된 비밀자료 토대 원문 발굴/1년 작업 통해 1,061건 기사 수록/보도기사·논설·만화·시가 등 망라 일제시대 조선총독부에 의해 압수된 민족언론의 항일기사가 햇빛을 보게 됐다. LG상남언론재단(이사장 안병훈)은 정부수립 50주년을 맞아 ‘일제시대 민족지 압수기사모음’(전 2권,정진석 엮음)을 발간했다. ‘일제시대 민족지 압수기사모음’은 당시 발간된 3개 민족지(동아일보,조선일보,시대일보­중외일보­조선중앙일보)의 압수기사 원문을 발굴해 정리·해설한 것이다. 1920년부터 중일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1936년까지 압수된 보도기사를 비롯,논설 및 해설,만화,시가(時歌),기명기사 등이 실렸다. 이들 압수기사에는 6·10만세운동,광주학생 운동,폭탄과 권총으로 일제를 응징했던 김상옥과 라석주 의거 보도 등 민족언론의 진수가 포함돼 있다.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언론신문 차압기사 집록’‘조선의 언론과 세상’‘조선 출판경찰개요’등 일본어로 된 비밀자료를 토대로 원문을 찾아냈으며,원문이 소실된 기사의 경우 일본어 자료를 번역해 실었다. 총 1억원을 들여 1년의 작업 끝에 발간된 이 모음집에는 1,061건의 기사가 수록돼 있다. 일제가 우리 신문에 삭제처분을 내리기 시작한 것은 1904년 2월 러일전쟁 직후부터. 1920년 민간지가 허가된 뒤에도 인쇄된 신문을 먼저 총독부 경무국 도서과에 납본하는 방식은 마찬가지였다. 신문을 인쇄하거나 배포하는 중에도 도서과의 지시가 있으면 인쇄를 중단하고 문제된 기사를 삭제해야 했다. ‘출판법’에 의해 발행되는 잡지는 원고의 사전검열,조판된 잡지의 대장검열,납본검열 등 3중 통제를 받았지만 신문은 사전검열을 생략하는 대신 ‘납본검열’을 시행했던 것이다. 편저자인 한국외국어대 정진석 교수(언론사)는 “일제치하의 항일언론은 우리가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치열한 것이었다”며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민족언론을 지키려는 이러한 불굴의 정신은 한말 이래의 전통인 저항의식과 맥을 같이 한다”고 말한다. 3773­2161
  • 봄나들이/가족과 함께 ‘선열의 얼’ 되새기자

    ◎천안 유관순 열사 추모각­봉화대­생가 등 유적지 인접/홍성 한용운·김좌진 장군 생가도… 하루 코스로 적격 79년전 우리 선조들은 3월1일을 시발로 일제에 맞서 근 3달간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그래서 3월은 우리들에게 설레임보다는 숙연하게 다가온다. 절기상으로는 봄이지만 봄나들이를 나서기에는 아직 이르다.3월을 맞아 독립투사의 생가 등 항일운동 유적지를 둘러보는 것도 뜻있는 일이다. 독립투사들의 생가를 보려면 충남으로 가야한다.유관순 열사는 천안에서 태어났고 윤봉길 의사는 예산,김좌진 장군과 만해 한용운은 홍성출신이다.충남에 독립운동가들이 많은 것은 충청도가 예로부터 충절의 고향이었기 때문이다. 천안시 병천면 탑원리에 있는 유관순 열사 유적지는 추모각,봉화대,생가가서로 가까이에 있어 순회코스로 안성마춤이다.천안시내에서 독립기념관으로가는 21번 국도로 나가 18㎞정도 가면 아우내장터가 나오고 이 곳에서 500m 떨어진 곳에 열사의 영정을 모신 추모각이 있다.추모각을 구경한뒤 추모각 뒷편의 매봉산에올라 독립운동 거사를 알리기 위해 봉화를 피운 봉화대를 둘러보고 능선을 타고 내려오면 생가가 나타난다.모두 다 둘러보는데 1시간이면 된다. 김좌진 장군과 만해 한용운의 생가가 있는 홍성은 인근의 용봉산과 천수만 방조제를 연계하면 하루 단위 나들이길로 적격이다.먼저 충남 서부의 소금강으로 불리는 홍북면 용봉산으로 가 1∼2시간 땀을 흘린다.하산길에 점심식사를 하고 생가터로 발걸음을 옮긴다.갈산면 행산리에 있는 김좌진 장군의 생가터에는 24평 규모의 생가와 기념관이 있다.기념관에는 국내 및 해외활동과 관련된 유품과 함께 영상자료가 전시돼 있다.이 곳에서 승용차로 10분 거리에는 한용운 생가가 있으며 생가를 거쳐 방조제로 가면 된다. 윤봉길 의사는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출생했다.시량리에는 윤의사가 태어나서 4살때까지 살던 광현당,중국으로 가기 전인 23살때까지 지냈던 저한당,윤의사의 사당을 모신 충의사와 유물전시관,충의관 등이 4만2천여평의 경내에 보존,관리되고 있다. 서울에는 종로구 인사동 태화관,종로2가 탑골공원,서대문구 현저동 독립공원이 있다.3·1운동의 발상지인 탑골공원은 1897년에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공원이다.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팔각정을 중심으로 국보2호인 원각사지 10층석탑,원각사비 등의 문화재와 3·1운동 기념탑,3·1운동 벽화,의암 손병희 선생 동상과 한용운 선생 기념비 등이 있다.서대문 독립공원은 일제시대 유관순,손병희 등 애국지사가 수감돼 있었던 곳으로 지난 92년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하면서 조성된 곳이다.감옥 7동,사형장,지하옥사 등이 복원됐으며 독립문,3·1운동기념탑,순국선열 추념탑 등이 자리하고 있다. ◎의인 대거 배출된 충청도 충청지역은 예로부터 충절의 고향이라고 불려 왔다.이러한 사실은 실제로도 입증된다.1900년부터 1973년까지의 명사 150인을 분석한 한 조사에 따르면 충남은 독립운동가 부문에 6명(유관순,윤봉길,김좌진,한용운,이범석,조병옥)이 올라 10명인 서울 다음으로 2위에 올랐다.조사 당시 서울인구가 충남인구의 두배가 넘는 것을 감안하면 인구비례로는 충남이 서울보다 훨씬 높은 셈이다. 충남에서 의인이 많이 배출된 것은 역사적으로도 뒷받침된다.사육신인 성삼문(홍성),박팽년(대전)을 비롯,북벌론을 주장한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우암 송시열이 회덕출신이다.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구한 이순신 장군이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실질적인 고향은 아산이고 구한말 의병운동이 가장 먼저,가장 강하게 일어난 곳도 충청지역이다. 이로 미루어볼 때 충청지역은 일찍부터 충절 또는 민족의식이 저변에 강하게 깔려 있었고 이러한 전통이 독립운동가 배출로 이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물론 이렇게 된 데에는 송시열로 대변되는 기호학파가 200여년간 지배세력이었다는 것도 간과할수 없다.즉 나라를 잃은데 대한 책임의식이 그만큼 강할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한편 충청인의 기질을 보면 ‘충청도 양반’이라는 말처럼 대체로 행동이 점잖고 느린 편이다.이 말은 뒤집어 보면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지만 행동은 신중한 것으로 해석된다.즉 충동적이기 보다는 심사숙고하며 결정을 내리고 행동을 하는 것으로 볼수 있다.바로 이러한 요인이 어려운 상황에서 살신성인의 모범을 보여주게 된 동인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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