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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잊혀진 3·1절] 아우내장터가 아우내순대길로… 3·1운동 흔적 지운 도로명주소

    [잊혀진 3·1절] 아우내장터가 아우내순대길로… 3·1운동 흔적 지운 도로명주소

    “우리 동네에서 만세운동요? 난생처음 듣는 소립니다.” 27일 경기 성남시 낙생고 정문 앞. 왕복 10차선 도로에는 3·1절을 기념한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낙생고 정문 앞은 예전 낙생면사무소 터로 1919년 3월 27일부터 29일까지 사흘간 1000여명이 만세시위를 벌였던 곳이지만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이곳의 도로명 새 주소는 ‘대왕판교로’. 주민은 물론 주민센터 직원들도 지역 역사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주민 정모(61)씨는 “평생 이곳에서 살았는데 전혀 몰랐다”며 “3·1운동 관련 표식은 물론 기념행사를 진행하는 것도 본 적 없다”고 말했다. 주민센터 관계자도 “낙생고 앞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다”고 설명했다. 2014년 안전행정부(현 행정자치부)는 기존 지번주소 체계가 일제강점기 당시 토지 수탈을 위해 도입됐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운데 대부분이 도로와 건물에 따라 주소체계를 정비해 사용하고 있다며 새 주소체계를 도입했지만, 정작 역사성을 담아 내는 일에는 소홀했던 셈이다. 전국에 3·1운동과 연관된 새 주소는 경기 화성의 ‘3·1만세로’, 충남 보령의 ‘만세운동길’, 전남 목포의 ‘만세로’ 등 20여곳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은 종로의 ‘3·1대로’ 한 곳에 불과하며 충남 천안의 대표적 만세 시위지인 아우내장터의 새 이름은 ‘아우내순대길’인 것으로 확인됐다.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사무국장은 “3·1만세운동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어났지만 새 주소에는 대표적인 만세운동 장소조차 포함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시민사회단체들은 행자부의 몰역사성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행자부 민간협력과가 지난해 12월 시민단체 2000여곳에 콘퍼런스 초청장을 보내면서 사용한 관용봉투에는 일본식 우편기호가 표시돼 있다는 것이다. 행자부 관계자는 “일본식 우편 기호 표시는 당시 인쇄소에 업무를 일임하는 과정에서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윤수경 기자 yoon@seoul.co.kr
  • 금반지 팔아 자금 댄 통영 기생들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형

    금반지 팔아 자금 댄 통영 기생들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형

    “통영 기생조합 정막래(21)와 이소선(20)은 대정 8년(1919년) 4월 2일 오후 3시 30분쯤 공모하여 금반지와 금비녀를 팔아 상복(喪服) 차림으로 독립운동에 앞장서 목소리를 보탰다. 이들은 경찰관의 제지에 응하지 않고 선두에 서서 3000여명의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운동을 하여 치안을 방해한 자로서 보안법을 위반, 징역 6개월형을 선고한다.” 일제 강점기 때 부산지법 통영지청은 이렇게 판결을 내렸다. 판사도 아닌 가마다 사부로 검사가 의사봉을 쳤다. 26일 행정자치부 국가기록원이 펴낸 ‘독립운동 판결문 자료집 3·1운동 (2)’에 나온다. 두 여인은 2008년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경남 밀양 공립보통학교(현재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강덕수(당시 15)는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식수기념일이던 같은 해 4월 3일 전북 남원군 덕과면 신양리 이석기(당시 39)는 집집마다 적어도 1명씩 마을 뒷산으로 모이라고 알렸다. 이어 800여명과 함께 나무심기 행사를 마친 뒤 탁주를 마시고 흥이 오를 때를 기다려 솔선해 조선독립 만세를 외쳤다. 광주지법 남원지청은 “헌병으로부터 제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따르지 않고 오히려 군중을 교사하여 만세를 외치게 하며 거리를 행진했다”며 징역 1년 6개월을 때렸다. 그도 70년을 훌쩍 넘긴 1991년 정부로부터 애족장을 받았다. 이들처럼 만세운동에 나선 손태옥(당시 24)·승옥(21) 형제는 광주지법 장흥지청에서 태형 90대를 선고받았다는 등 이채로운 기록도 엿볼 수 있다. 이번 자료집은 서울에 이어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진 영남과 호남, 제주도의 3·1운동 전개양상을 소개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의 판결문 원문 50건을 번역문과 함께 실었다. 자료집에 소개된 판결문 외에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원문과 번역문도 기록원 홈페이지(archives.go.kr) ‘독립운동 관련 컬렉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송한수 기자 onekor@seoul.co.kr
  • [서울 방방곡곡에 퍼지는 3·1절 숭고한 의미] 3·1운동 발상지 봉황각 정신 나누고

    [서울 방방곡곡에 퍼지는 3·1절 숭고한 의미] 3·1운동 발상지 봉황각 정신 나누고

    “3·1운동의 발상지인 봉황각을 애국교육의 장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26일 강북구 봉황각에서 만난 이범창(68) 천도교의창수도원장은 “15년간 이곳을 관리했는데 12년 전 강북구청이 3·1 만세운동 재현 행사를 하기 전까지 정작 발상지가 외면을 받는다는 느낌이 있었다”면서 “봉황각은 1912년부터 1919년까지 483명의 독립지도자를 키워낸 곳이며 3·1 독립혁명을 기획하고 준비한 의미 깊은 곳”이라고 밝혔다. 봉황각은 손병희 천도교 3대 교조가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자 10년 이내 되찾겠다면서 건축했다. 당시에는 심산유곡이었던 우이동에 땅을 사 봉황각과 여러 건물을 완공했지만 현재는 봉황각과 내실만 남아 있다.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33인 중 15명이 이곳에서 교육을 받았고 대중화·일원화·비폭력화라는 3·1 운동의 3대 기본원칙도 이곳에서 확산됐다. 서울시 유형문화재 2호이다. 손병희 교조는 이곳에서 “우리가 만세를 부른다고 당장 독립되는 것은 아니지만 겨레의 가슴에 독립정신을 일깨워 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꼭 만세를 불러야 한다”는 유명한 설법을 했다. 구는 다음달 1일 ‘제12회 봉황각 3·1독립운동 재현행사’를 개최한다. 오전 10시 흰색 두루마기를 착용한 구청장, 주민대표, 단체대표 등이 민족대표 33인을 추모하는 의미로 도선사에서 타종식을 한다. 이후 길놀이 및 태극기 거리행진을 연다. 흰색 저고리·검정 치마·농민복 등을 입은 학생 자원봉사자 900여명이 우이동 솔밭공원에서 봉황각까지 이동하며, 도선사 타종식에 참여한 주민들은 도선사에서 봉황각까지 태극기를 휘날리며 걷는다. 이들은 봉황각 수련원에서 만나 독립선언서 낭독, 3·1절 노래, 만세삼창 등의 본행사를 하게 된다. 이경주 기자 kdlrudwn@seoul.co.kr
  • 96년 전 만세함성, 역사의 공간서 다시 울린다

    96년 전 만세함성, 역사의 공간서 다시 울린다

    1919년 3월 1일 서울을 비롯한 6개 도시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됐다.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종로와 서울역, 정동, 이화학당, 서대문 등을 행진하며 시위를 벌였다. 이후 항일독립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돼 수개월간 지속됐다. 일제강점기에 일어난 최대 규모 민족운동이었다. 96년 전 나라의 독립을 외친 그날의 함성이 2015년 서울에서 울려 퍼진다. 서대문구는 3·1절을 맞아 다음달 1일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서대문, 1919 그날의 함성!’ 행사를 연다고 24일 밝혔다. 서대문형무소는 유관순 열사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옥고를 치른 역사의 현장이다. 독립만세운동 재현을 통해 나라사랑 정신을 높이고 독립운동가들의 희생정신을 되새기기 위해 마련됐다. 만세운동은 오전 11시 30분부터 30분간 재현된다. 만세행진은 역사관 정문에서 독립관을 거쳐 독립문까지 400여m 구간에서 열린다. 참가자들은 현장에서 나눠 주는 소형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한다. 앞서 오전 11시부터는 서문대역사어린이합창단이 ‘독립군가’, ‘독도는 우리땅’, ‘삼일절노래’ 등을 부르고 지역 어린이 33명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다. 역사관 곳곳에서 다양한 체험 행사도 펼쳐진다. 참가자들은 직접 독립군이 돼 활쏘기, 태극기 책 만들기, 독립선언서 등사, 독립운동가 추모 글쓰기 등을 할 수 있다. 독립운동가 옷차림을 한 배우들은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역사관 10옥사에서는 ‘강병인의 글씨로 듣는 독립열사의 말씀’ 기획전시회가 열린다. 4월 안중근, 안창호, 김구 등 독립운동가들의 말과 글을 캘리그래피(멋 글씨 예술)로 표현한 20여점의 작품을 4월 14일까지 만날 수 있다. 문석진 구청장은 “선열들의 애국애족 정신을 되새기고 어린이, 청소년에게는 역사 정체성을 높이는 행사가 될 것”이라며 “행사일에는 역사관을 무료로 개방하는 만큼 많은 시민이 참여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홍혜정 기자 jukebox@seoul.co.kr
  • [격동의 한·일 70년] “독립 70년 지나도 유공자 후손은 행복하지 못해”

    [격동의 한·일 70년] “독립 70년 지나도 유공자 후손은 행복하지 못해”

    경기 양평군에서 지역 유지로 풍족하게 살아왔던 양옥모(74) 할머니의 가족이 어려워지게 된 것은 1919년 3·1운동 직후부터다. 당시 일제강점에 대항해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양 할머니의 조부인 고 양건석씨도 태극기 100여개를 만들어 거리로 뛰쳐나갔다. 이후 건석씨는 주모자 색출을 벌이는 일본 순사를 피해 전답을 헐값에 처분한 뒤 중국 지린(吉林)성으로 떠났다. 건석씨는 만주 벌판에서 독립운동에 힘썼다.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뒤 1920년 김좌진 장군 휘하에서 청산리 전투에 참가했다. 건석씨는 이 전투에서 왼쪽 어깨에 총상을 입은 후에도 배재고보 4학년에 재학 중이던 아들 고 양승만씨까지 만주로 데려와 함께 조국 해방을 위해 힘썼다. 하지만 건석씨는 평생 청산리 전투 총상 후유증으로 고생하다 병이 악화돼 1937년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아들 승만씨도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독립운동을 펼쳐 나갔다. 해방이 되고 나서도 승만씨는 만주를 떠나지 않고 고국으로 돌아가는 동포들을 도왔다. 이 과정에서 중국 정부와 마찰이 발생해 36일간 구금되기도 했지만 승만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1986년 11월 고국에 돌아와 만난 독립운동 동지가 ‘왜 혼자만 귀국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우리 동포가 모두 귀국한 후에야 귀국하겠다는 결심 때문”이라고 말할 정도로 승만씨는 투철했다. 양 할머니가 한국으로 돌아온 것은 2011년이다. 정부에서 지원한 정착금으로 서울 용산구 동빙고동의 한 주택 반지하에 세를 들어 살면서 70대의 몸으로 식당이나 병원을 돌며 일을 했다. 독립유공자 연금도 둘째 언니가 받고 있어 결국 양 할머니는 모아 둔 돈 조금과 매달 나오는 20만원의 기초노령연금으로 근근이 버티고 있다. 이제 양 할머니에게 남은 소원은 중국에 있는 자녀의 식구를 한국에 데려오는 것이다. 자녀의 초기 정착금을 구하기 위해 간간이 돈을 모으고 있다. 양 할머니는 “탈북자의 경우 직업을 구하기 전 자격증을 따거나 공부를 할 수 있게끔 지원해 준다고 들었는데 독립유공자 후손들에게는 이러한 배려가 다소 부족한 것 같다”며 “자녀가 한국에 와서 제대로 정착할 수 있을지 조금 걱정이 된다”고 말했다. 담담히 힘들었던 지난날을 털어놓을 때도 동요하지 않았던 눈시울이 자녀들 얘기에는 금세 붉어졌다. 독립 70년이 지난 지금도 독립유공자 후손인 양 할머니는 아직 행복하지 못하다. 한재희 기자 jh@seoul.co.kr
  • [명인·명물을 찾아서] 제주섬 굽이굽이 길에 서린 진한 삶의 향기를 느끼다

    [명인·명물을 찾아서] 제주섬 굽이굽이 길에 서린 진한 삶의 향기를 느끼다

    제주 올레길이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과 속살을 보여 준다면 제주 유배길은 유배 문화에 빠져 볼 수 있는 역사의 길이다. 조선시대 제주 섬은 대표적인 유배지였다. 500년 동안 200여명이 제주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한번 가면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절망의 제주 유배길, 치열한 당파 싸움에서 밀려난 사람들의 패배 역사가 유배다. 하지만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유배된 제주에서 추사체를 완성했고 걸작 세한도를 남겼다. 추사에게 제주 유배는 패배의 시간이 아니라 완성과 창조의 시간이었다. 당대 내로라하는 인물들의 유배 흔적을 찾아가는 제주 유배길은 제주 올레길과는 또 다른 매력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제주 유배길은 추사 유배길과 제주성안 유배길, 면암 유배길 등 세 곳이 있다. 추사 김정희를 찾아가는 추사 유배길은 제주의 대표 유배길이다. 추사 김정희는 헌종 6년(1840) 9월 당시 정치권력이었던 안동 김씨의 음모에 의해 제주에 유배된다. 군신 사이를 이간질한다고 능지처참을 당한 윤상도와 그 아들의 상소문을 추사가 작성했다고 안동 김씨 세력이 주장하면서 유배돼 헌종 14년(1848) 12월까지 8년 3개월 동안 제주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추사 김정희는 70 평생 벼루 10개를 갈아 닳게 했고 1000자루의 붓을 다 닳게 했다고 한다. 추사 유배길은 그의 집념을 엿볼 수 있는 길이다. 추사 유배 1길은 제주 대정읍 인성리 추사 유배지를 중심으로 추사기념관, 정난주 마리아 묘, 대정향교를 거쳐 다시 추사 유배지로 돌아오는 8㎞의 순환코스로 3시간 정도 걸린다. 제주추사관은 제주에서 유배 생활을 한 추사 김정희를 기리기 위해 세운 기념관이다. 그의 걸작 세한도를 본떠 지어졌다. 제주 유배 생활에서 추사가 쓴 글씨와 그림 등이 전시돼 있어 추사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제주에 와 추사가 머물렀던 추사 유배집 강도순의 제주 초가집은 복원돼 있다. 추사 김정희는 이곳 한 평 남짓한 비좁은 방에서 추사체를 완성했고 세한도를 그렸다. 추사가 매일 바라봤던 박쥐가 날개를 편 모습인 바굼지 오름(단산)도 볼거리다. 추사 2길에선 추사의 한시, 편지, 차 등을 통해 추사의 인연들을 떠올려 볼 수 있다. 추사 유배지에서 시작해 오설록 녹차밭까지 이어지는 8㎞의 코스로 3시간이 소요된다. 제주 전통 옹기를 만들었던 도요지가 있어 제주의 옹기 문화를 엿볼 수 있다. 추사 3길인 사색의 길에선 산방산과 안덕계곡을 따라 제주의 바다, 오름, 계곡의 풍광을 느낄 수 있다. 대정향교에서 시작, 산방산을 거쳐 안덕계곡까지 이어지는 10㎞에 4시간 정도 걸린다. 제주시내 구도심에는 제주성안 유배길이 있다. 옛 제주성을 중심으로 유배인들의 유적지를 둘러보는 성안 유배길은 제주목 관아에서 시작해 유배지를 거쳐 다시 제주목 관아로 돌아오는 3㎞ 순환코스로 1시간 정도 걸린다. 제주목 관아는 탐라국에서부터 조선시대까지 제주의 정치, 행정, 문화의 중심지였다. 유배인이 제주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향하는 곳이 제주목 관아였다. 광해군, 우암 송시열, 추사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인사들도 이곳에 들러 일개 제주목사에게 자신의 당도를 아뢰어야만 했다. 당장은 유배인이지만 정치범인 이들은 다시 중앙정계에 화려하게 복귀할 가능성이 있어 제주목사는 이들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반면 제주목사와의 잘못된 인연은 유배의 고통을 더했다. 정조 때 유배인 조정철은 원수 집안 사람인 김시구가 제주목사로 내려오면서 험난한 유배 생활을 했다. 그를 돌봐 주었던 제주 여인 홍윤애는 목숨을 잃었고 훗날 유배에서 풀려난 조정철은 제주목사로 부임해 그녀의 묘를 돌보며 안타까워했다. 성안 유배길에서는 광해군의 인목대비 폐위에 반대하다 제주에 유배돼 5년을 지낸 간옹 이익(?~?), 흥선대원군의 실정을 상소했다가 탄핵된 면암 최익현(1833~1906)의 유배 흔적도 만날 수 있다. 왕세자 책봉을 반대했다가 숙종의 노여움을 사 1689년(숙종 15년) 83세 고령의 나이로 제주에 유배된 우암 송시열(1607~1689), 제주 유배인 가운데 유일하게 왕이었던 광해군(1575~1641)은 5년의 유배살이 끝에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제주의 마지막 유배인인 3·1만세운동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인 남강 이승훈(1864~1930)의 제주 유배 이야기도 전해진다. 조선 선비의 마지막 자존심 면암 최익현이 걸었던 면암 유배길은 제주시 오라동 연미마을에서 조설대~정실마을을 거쳐 방선문에 이르는 5.5㎞의 코스로 2시간 정도 소요된다. 1873년 11월 제주 유배길에 오른 면암 최익현은 제주목 관아 부근에 있던 아전 윤규환의 집에서 유배 생활에 들어간다. 면암 최익현은 1875년 3월 제주에 온 지 1년 3개월 만에 유배에서 풀려나 자유의 몸이 되지만 곧바로 돌아가지 않고 한라산에 오른다. 제주성 남문에서 출발해 방선문을 거쳐 지금의 관음사 코스인 탐라계곡~개미목~삼각봉~용진각으로 백록담에 올랐다. 그는 한라산에 오르면서 들른 방선문 계곡과 백록담, 영실, 오백 장군 등을 구경한 소감을 ‘유한라산기’에 기록해 놓았다. 영주 십경의 하나인 방선문 마애명에는 면암 최익현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 그가 유배 당시 이곳에 왔음을 보여 준다. 제주 유배길을 개설하고 이야기를 더한 스토리텔링연구센터 소장 양진건 제주대 교수는 “유배라는 고난의 시기에도 자신을 다스리며 삶의 큰 발자취를 남긴 유배인에게 유배는 자신의 신념을 찾아가는 여행이기도 했을 것”이라며 “제주 유배길에서는 그들의 진한 삶의 향기를 느껴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제주 황경근 기자 kkhwang@seoul.co.kr
  • [현장 행정] 유관순 열사 유해 묻혔던 곳 아시나요

    [현장 행정] 유관순 열사 유해 묻혔던 곳 아시나요

    “유관순 열사 추모비로 용산구 근현대사를 바로 세웁니다.” 18일 용산구 이태원부군당역사공원을 찾아 업무보고를 받은 성장현 용산구청장은 내년에 이곳에 유관순의 추모비를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유관순이 1919년 3월 1일 만세독립운동, 4월 1일 아우내 독립만세운동 이후 징역 5년을 선고받고 1920년 9월 28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한 이야기는 유명하지만 사후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구가 유관순의 추모비를 추진하는 이유다. 성 구청장은 “유관순 열사의 장례식은 1920년 10월 14일 정동교회에서 열렸고 이번에 추모비를 조성할 지역인 이태원의 공동묘지에 안장됐다”며 “이후 1936년 일본이 군용기지 조성 목적으로 그의 묘를 이장하면서 유골이 사라진 상태”라고 설명했다. 당시 이태원 공동묘지는 지금은 이태원 이슬람사원 인근의 사유지다. 따라서 구는 추모비에서 유관순 열사의 옛 묘를 바라볼 수 있는 장소를 물색했고, 그 결과 이태원부군당역사공원이 선택됐다. 구는 지난달부터 추모비 태스크포스(TF)를 운영 중이며 추모비가 건립되면 정기적으로 추모 행사를 개최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추모비 개막식 일정과 추모비 모형 등은 66명의 역사 전문가로 이뤄진 추진위원회가 정하게 된다. 성 구청장은 유관순 열사의 추모비가 수년간 추진해 온 ‘구 근현대사 바로 세우기’의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는 “이곳이 유관순 열사의 유해가 마지막으로 묻혔던 곳이라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고 말했다. 성 구청장은 지난해 말 360페이지에 이르는 역사 사료집 ‘우리가 잘 몰랐던 용산의 역사를 찾아서’를 펴냈다. 지난 7월에는 ‘용산기지’를 특정해 옛이야기를 담은 ‘용산의 역사를 찾아서’를 발간했다. 100년간 외국군 부대가 주둔하며 역사의 베일에 숨어 있던 용산 아방궁(일제 시기 조선 총독 연회장), 충혼비(만주사변 시 일본군 전사자 기념비가 현재는 미군 전사자 기념비로 쓰임) 등을 다뤘다. 매년 심원정터, 용산신학교, 새남터성당, 효창원 등을 방문하는 구 역사 탐방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용산신학교는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 건물이며, 효창원은 백범 김구를 포함해 의·열사 7명의 위패가 있는 곳이다. 성 구청장은 “개발하고 발전하는 것도 후세의 몫이지만 역사가 사라지지 않도록 하는 것도 중요한 임무”라며 “후세들이 역사를 발판으로 새로운 미래를 설계하도록 돕기 위해서 더욱 그렇다”고 말했다. 이경주 기자 kdlrudwn@seoul.co.kr
  • [서울대 추천 도서 100선-읽어라, 청춘] 친일파 낙인… ‘애증’의 근현대 문학 선구자

    춘원 이광수(1892~1950)는 한국 근현대사에서 ‘애증’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인물이다. 이광수는 한국 근대문학 운동을 이끈 선구자이자 뛰어난 작가인 동시에, 독립운동가에서 변절한 친일파라는 낙인이 찍힌 인물로 평가가 엇갈린다. ‘한국 근현대사의 가장 논쟁적인 인물’이라고 부르는 학자들로 적지 않다. 3·1 독립만세운동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2·8 독립운동 당시 이광수는 도쿄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모인 600여명을 이끌었다. 그는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 ‘최후의 1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는 등의 내용을 담은 독립선언문을 작성하고 이를 영어로 번역, 세계에 알렸다. 이후 친일로 방향을 바꾼 이광수는 민족주의와 친일 사이에서 줄타기를 거듭했다.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글을 쓰면서 저명한 독립투사의 회고록을 윤문하기도 했는데, 이 책이 김구의 백범일지다. 실제로 백범일지는 쉽고 간결한 문체로 출간되자마자 큰 반향을 일으켰는데, 이광수의 필력이 큰 힘을 보탰다는 것이 후대 학자들의 평가다. 실제 삶과는 별개로 이광수가 한국 문학계에 미친 영향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이광수는 횡보 염상섭, 육당 최남선과 함께 근대 개화기를 대표하는 3대 지식인이자 문인으로 꼽힌다. 이 중 염상섭만이 친일의 길을 걷지 않았다. ‘명량’으로 대표되는 충무공 이순신에 대한 ‘구국영웅적 평가’ 역시 이광수와 단재 신채호에서 비롯됐다는 시각이 많다. 신채호는 1908년 대한매일신보에 이순신전을 연재하면서 “지금 이순신전을 선택해 고통에 처한 우리나라 국민에게 양식으로 삼게 하노니…. 제2의 이순신을 기다리노라”라고 적었다. 이광수는 1931년부터 2년간 동아일보에 이순신전을 연재하며 ‘조선 500년에 처음이요 나중인 큰 사람 이순신’이라고 평가했다. 박건형 기자 kitsch@seoul.co.kr
  • 대성황 이룬 ‘렉쳐 남은혜 아리랑’ 공연, 청중 극찬

    대성황 이룬 ‘렉쳐 남은혜 아리랑’ 공연, 청중 극찬

    퇴색되어 가는 우리의 소리가 다시 돌풍을 일으키며 대중들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는 바로 중요무형문화재 제 57호 경기민요 이수자(치르치크아리랑 무형문화제) 남은혜 명창’ 이다. 남은혜 명창은 지난 6월 12일 서울 서초구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렉처 남은혜•아리랑’ 무대를 연이어 개최해 화제를 낳았다. 지난 3월 공주아리랑보존회 주관으로 제15회 ‘공주아리랑제’를 열어 큰 성공을 거둔데 이은 것이다. 제자, 가족 등 동원성 관객이 아닌 순수 관객만이 객석을 가득 메운 이번 ‘렉처 남은혜•아리랑’은 각각의 아리랑을 부르게 된 배경을 대화하듯 청중에게 전달하고, 정선아리랑, 공주아리랑, 북간도아리랑, 치르치크아리랑, 아리랑 산천에 등 다양한 아리랑을 열창하여 청중들에게 극찬을 받았다. 긴아리랑을 시작으로 다양한 아리랑을 맛깔스럽게 소화해 낸다는 평을 받고 있는 남 명창의 대표인 정선아리랑으로 첫 무대를 시작한 공연은 다양한 아리랑 외에 한오백년과 앵콜곡 긴아리랑으로 꾸며져 90분 무대를 각 작품에 담긴 사연을 보조 해설자와 함께 나누며 진행했다. 관객 중에는 진도아리랑 사업의 산 증인 전 진도문화원 박병훈 원장, 평화나눔재단 소현영 총재, 미국에 본부를 둔 ‘AIRANG INSTITUT’ 한국지부장 마이클 선생, 서예가로 국악계에서 무게 있는 평을 하는 열암 송정희,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고된 삶을 겪고 성공한 긍지를 표현한 초연작 치르치크아리랑의 작곡가 이병욱 교수, ‘진품명품’ 의 감정가 김영복선생, 공연기획자 창덕국소극장 박종철 대표 등 다양한 계층의 인사들이 참석해 관심 있게 지켜봤다. 아리랑 완창을 한다는 각오로 준비했다는 남 명창은 “각 아리랑이 선율과 주제 면에서 내가 왜 아리랑을 부르고 무엇을 관객들에게 전해줄 것인가를 아리랑으로 답해보자는 취지에서 이번 무대를 준비했다”고 소감을 밝혔다. 아울러 이번 공연된 아리랑들은 신나라레코드가 제작하여 ‘남은혜 아리랑 음반’(2매 1. 공주아리랑 2. 북간도아리랑)으로 출시되어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 얼마 전 타계한 경기소리 1세대 명창이자 국악의 거장 묵계월(1921~2014) 선생의 음반을 제작한 바 있는 원로 기획자 김무성 선생은 “묵계월 선생의 무겁지만 힘차고, 기교를 쓰지 않으면서도 구수한 맛이 특징인 법제(法制)를 남 명창이 아리랑에 반영해 어떤 소리꾼 못지않은 자기 소리를 내는 명창이라”고 평했다. 전체적으로 자신의 장기인 통성의 메나조 긴소리를 유감 없이 표현했다는 평이다. 묵계월 선생의 제자인 남 명창은 세계적으로 문화제적 가치를 인정받은 우리의 아리랑을 재구성해 공주아리랑, 북간도아리랑, 치르치크아리랑 등을 선보여 국내는 물론 미주 및 중앙아시아 음악인들과 동포들에게 큰 인기를 누리며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국내 현존하는 경기민요 명창 가운데 한 명인 남 명창은 그동안 문화체육관광부의 후원으로 유네스코 등재 1주년 기념하여 우즈베키스탄에서 열린 ‘한국 실크로드 아리랑 축제’ 등 수많은 해외 공연을 통해 대한민국의 국악과 문화를 세계에 알려 국위선양에도 크게 기여해 왔다. 그녀는 10여년전 서울 종로에서 ‘남은혜 경기민요전수관’을 꾸려 소리꾼으로서의 사명과 열정을 후학지도와 다양한 공연을 통해 관객과 호흡하고 있다. 이제 그녀에게서 아리랑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다. 한편, 공주아리랑보존회 회장을 맡고 있는 남 명창은 매년 3월1일 공주민요연구회와 공주아리랑보존회가 주관하는 ‘공주아리랑제’를 충남 공주에서 개최해 공주의 독립만세운동과 유관순 열사를 기린다. 1935년 김지연의 ‘조선민요 아리랑’에 기록된 공주아리랑과 봉현리, 복룡리 등지에 전해지고 있는 공주의 토속아리랑인 ‘산아지타령’, ‘긴아리랑’, ‘엮음아리랑’, ‘잦은아리랑’이 무대에서 재현됐다. 공주를 비롯한 부여 등지의 지역민들과 남은혜 명창이 노래했다. 15년째 열어온 올해 공주아리랑제에서는 아리랑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을 기념, 공주아리랑보존회가 충청도를 대표하는 공주아리랑의 위상을 높이고자 새로 만든 공주아리랑을 공주시 문예회관에서 처음으로 공개했다. 쌀의 고장 경기도 여주에서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남 명창은 18세에 상경해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 28호 재담소리 예능보유자 백영춘 선생에게서 민요의 기초를 닦고, 22세에 중요무형문화재 제 57호 경기민요 예능보유자 묵계월 선생에게 경기좌창 학습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나우뉴스부 nownews@seoul.co.kr
  • [당신의 책]

    [당신의 책]

    생존의 한계(케빈 퐁 지음, 이충호 옮김, 어크로스 펴냄) 극한 상황에서 과연 우리는 어디까지 견뎌내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 심장까지 얼어붙게 만드는 추위, 온몸이 녹아내릴 것 같은 화염, 기계적 지원이 없이는 생존 불가능한 우주 등 적대적 조건에서 인체가 어떤 영향을 받으며 어떻게 반응하고 버텨내는지, 그리고 그 한계를 인류가 어떻게 확장했는지 추적하는 교양과학서다. 마취와 집중치료 전문의사로 미국 항공우주국(NASA) 의학연구원으로 장기 우주여행이 인체의 생존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한 케빈 퐁 런던대 생리학 교수가 썼다. 수련의 시절 처음 목격한 가슴절개 시술 장면, 얼음물에 빠져 2시간 동안 심장이 멈췄던 환자를 살린 의료진의 경험이 저체온 기술 심장수술의 토대가 된 이야기 등을 박진감 넘치게 전한다. 후반부는 항공우주의학에 할애된다. 인간의 생존을 보장하는 정밀한 공학의 위력과 취약성을 세밀하게 묘사한다. 생소하지만 흥미진진한 얘기들을 생생하고 긴박감 넘치게 소개한다. 344쪽. 1만 6000원. 한국독립운동사(박찬승 지음, 역사문제연구소 기획, 역사비평사 펴냄) 일본의 한국병합 과정에서 우리 민족은 동학농민군, 의병 등으로 결집해 치열한 저항운동을 펼쳤다. 병합 이후에는 만세운동, 무장투쟁, 외교운동, 의열투쟁, 노동쟁의와 소작쟁의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한양대 사학과 교수인 저자는 일제 강점기를 시기별로 구분해 독립운동 양상과 그 배경이 된 일제의 지배 정책을 정리했다. 1910년대 국내외 독립운동의 출발, 3·1 운동과 임시정부 출범, 1920년대 국내 독립운동의 좌우 분화와 상호 연대, 1930년대 독립운동 진영 재편, 중일전쟁·태평양전쟁 시기 독립운동 세력의 결집 등 5개 시기로 구분했다. 1980년대 이후 학계 안팎에서 대두한 민족주의 세력 중심론, 민족협동전선(민족통일전선) 세력 중심론, 사회주의 세력 중심론처럼 특정 세력을 독립운동의 주류로 설정하는 태도를 피하고 여러 진영의 독립운동사를 균형 있게 서술하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역사비평사가 2007년부터 출간해 온 ‘청소년과 시민을 위한 20세기 한국사 시리즈’ 9번째 책이다. 408쪽. 1만 6000원. 사회를 바꾸려면(오구마 에이지 지음, 전형배 옮김, 동아시아 펴냄) 세월호 참사로 촛불집회가 곳곳에서 이어지는 이즈음, 제목부터 절로 시선을 잡아끄는 책이다. 영국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의 말을 인용한 책의 부제는 ‘세상은 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행동하라!’ 일본 게이오대 역사사회학 교수인 저자는 사회를 바꾸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고찰하고, 사회를 바꾸는 작업을 역사·사회구조적으로 성찰한다. 오늘날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데모, 사회운동, 공개, 대화 등 직접 행동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근대 정치·경제는 주체가 객체를 지배하고 민중을 조작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므로 새로운 관계를 구축하려면 반드시 직접적인 사회운동이 전제돼야 한다는 것. 2011년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 당시 일본 국민들을 분노케 했던 일본 정부의 불투명한 정보 제공과 대응 방식, 사고 이후의 사회운동 과정 등을 자세히 설명한다. 440쪽. 1만 9000원. 뮤지컬 사회학(최민우 지음, 이콘 펴냄) 현대 문화산업을 이야기할 때 뮤지컬은 빼놓을 수 없는 예술장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우리나라의 뮤지컬 시장은 외국들과는 사뭇 다른 면모를 보이고 있다고 지적한다. 무엇보다 티켓 값이 해외보다 상대적으로 비싸고, 주인공이 여러 명 번갈아 무대에 오르고, 세계적으로 대박을 친 작품이 유독 우리나라 관객들에게는 먹히지 않을 때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한 해 무대에 오르는 신작 뮤지컬은 150여편. 한국 뮤지컬 시장의 독특한 생리를 현장 기자의 시각으로 다각도로 분석한 책이다. 뮤지컬이 만들어지는 과정, 유통과 소비가 이뤄지는 행태, 국내 시장의 특수성 등을 두루 짚는다. 소소한 의문들도 풀어준다. 객석을 메우는 주 관객이 여성들인 이유, 유럽 뮤지컬이 한국시장에 강한 이유 등이 흥미롭다. 319쪽. 1만 4000원.
  • 부산 좌천동 일대 ‘역사마을’로 재탄생

    근대역사의 보물창고인 부산 동구 좌천동 일대가 ‘산복도로 휴먼빌리지’로 재탄생한다. 부산시는 산복도로 르네상스 4차연도 좌천·수정·주례구역의 시범마을 조성사업을 공모한 결과 ‘좌천동 역사마을 조성사업’이 최종 대상지로 선정됐다고 9일 밝혔다. 좌천동은 임진왜란 때 정발장군을 기리는 정공단, 3·1 만세운동을 주도한 일신여학교, 1891년 설립된 부산진교회, 6·25 전쟁 때 부상자를 치료한 일신기독병원, 김말봉 문학가 집필지 등 역사자원과 지역연계자원이 풍부한 곳이다. 이에 따라 시는 근대역사 보물창고인 이 지역을 산복도로 휴먼빌리지로 재생하기로 했다. 휴먼빌리지는 기존 문화예술의 마을 재생 방식에서 태양열 같은 친환경에너지와 폐가 또는 공지 등에 소공원 등의 녹색사업을 추가하는 것이다. 시는 시범사업으로 일제 강점기 무기고로 사용하던 동굴 2곳을 복원해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한다. 근현대 한국문학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여성 작가이자 대표적인 신여성으로 활발하게 여성운동을 한 김말봉 작가가 작품 ‘찔레꽃’을 집필했던 곳의 주변 빈집을 고쳐 집필책 전시와 함께 게스트하우스를 조성한다. 주변 계단 길을 찔레꽃 길로 조성하는 등 문학마을 풍경으로 만들고, 좌천동 도시철도역에서 일신여학교에 이르는 골목길도 정비한다. 이와 함께 인근 자개 골목에서 체험공방을 운영해 관광객 유치와 자개 공예 브랜드를 홍보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할 방침이다. 이종원 시 창조도시본부장은 “마을이 새로운 관광자원으로 개발돼 관광객이 유입되고 주민 공동체가 활성화돼 활력을 되찾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부산 김정한 기자 jhkim@seoul.co.kr
  • 하동에 3·1정신 계승 터전 생겼다

    하동에 3·1정신 계승 터전 생겼다

    경남 하동군은 28일 일제강점기 하동 지역에서 활발하게 전개됐던 독립운동과 항일독립 투사들의 정신을 기리기 위한 하동독립공원이 완공돼 1일 독립공원에서 준공식과 함께 제95주년 3·1절 기념식을 한다고 밝혔다. 하동독립공원은 하동읍 동광언덕 4620㎡에 국·도비와 군비 등 12억원을 들여 2011년 3월 1일 착공했다. 독립공원에는 높이 8.5m인 항일독립운동기념탑과 독립선언서 비석, 하동 출신 독립운동 서훈자 52명의 조형석 등이 건립됐다. 여러 역사 자료에 따르면 하동 지역에서는 3·1운동 이전부터 하동읍과 고전면·화개면·악양면·옥종면 등에서 의병활동을 비롯한 항일투쟁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펼쳐지는 등 대한민국 독립운동에 큰 기여를 했다. 1919년 3월 18일 하동 장날을 맞아 박치화 선생 등 12명이 자체적인 대한독립선언서를 공포하고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 당시 재판기록 등에는 현장에 2000여명이 모인 것으로 기록돼 있다. 상하이 임시정부에 거액의 독립자금을 제공하고 1920년 하동청년회가 결성돼 야학경영 군민 계몽 강연 등의 활동도 했다. 하동군과 하동 항일독립운동기념사업회는 앞으로 하동독립공원이 3·1절 기념행사장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항일독립운동정신을 후세에 널리 알리는 역사의 산 교육장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하동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 “고려인도 항일운동… 외국인 아닌 동포예요”

    “고려인도 항일운동… 외국인 아닌 동포예요”

    지난 27일 오후 10시 경기 안산시 단원구 땟골마을의 고려인(구한 말과 일제 강점기에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한 동포들의 후예) 동포 지원단체 ‘너머’ 사무실. 고된 하루 일과를 마친 시간, ‘너머’가 운영하는 한글야학 교실에는 30여명의 고려인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칠판에 적힌 한글을 한 자씩 더듬더듬 읽는 학생들의 얼굴에는 피곤함보다 배움에 대한 열의가 가득했다. 우즈베키스탄 출신 박알렉산드라(왼쪽·60·여)씨는 “3·1절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은 창피한 일”이라며 수줍게 말문을 열었다. 그는 “한번도 고려인이란 사실을 잊은 적이 없다”면서 “이번 ‘3·1 만세 기념식’에 참여해 역사적 의미에 대해 제대로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2006년 일자리를 찾아 홀로 한국에 온 박씨는 “한글은 책과 TV를 보면서 배웠지만 역사에 대해 배울 기회는 없었다”면서 “고려인들에게 한국의 기념일을 소개하고 역사를 알려주는 행사가 많았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3·1절을 맞아 안산에서는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유익수, 윤동욱 선생 등 독립유공자 묘역을 참배하고 선언서 및 기념사를 낭독하는 ‘안산 3·1 만세 기념식’이 열린다. 안산 지역사 연구모임과 ‘고려인 이주 150주년 기념 및 문화복지 지원을 위한 안산시민 원탁회의’가 주최한 이 행사는 항일운동의 후예인 고려인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동시에 고려인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환기시키기 위해 마련됐다. 김종천 안산미디어공동체 사무국장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고려인을 동포가 아니라 외국인 노동자로 취급한다”면서 “일제 강점기에 고려인들이 러시아에서 독립을 위해 항일 운동을 벌였다는 역사적 맥락을 알아야 고려인을 같은 민족으로 보듬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연해주를 독립운동의 전초기지로 삼으며 항일 투쟁을 벌인 고려인들은 1937년 구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등 중앙아시아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다. 올해는 제정러시아 당국이 고려인들의 러시아 이주를 공식 허가한 지 150주년이 되는 해다. 국내에 거주하는 고려인은 약 3만명으로 주로 안산, 동대문, 부산, 광주 등에서 일하고 있다. 특히 시화·반월공단이 있는 안산에는 5000명 이상의 고려인 동포들이 모여 산다. 2003년 한국에 왔다는 고려인 임이고리(오른쪽·53)씨는 “한국인 고용주들이 고려인들을 상대로 월급을 두세 달 체불하는 것은 예삿일”이라면서 “같은 민족으로서 서로에 대한 믿음을 쌓았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김승력 ‘너머’ 사무국장은 “고려인 동포들은 모국어를 잃어버렸다는 것에 대한 자괴감이 커서 다른 외국인에 비해 한글 공부를 열심히 한다”면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이들이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우리의 몫”이라고 강조했다. 글 사진 안산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한국사는 이해가 중요…역사흐름 알면 답 찾는 데 도움

    한국사는 이해가 중요…역사흐름 알면 답 찾는 데 도움

    대입 수험생과 마찬가지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에게 한국사는 꼭 넘어야 할 벽이다. 암기해야 할 내용이 많아 어렵게 느껴지지만, 완벽하게 준비하지 않으면 ‘2% 부족’의 고배를 마셔야 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 자주 출제됐던 부분을 정리하고, 지난해 7급 필기시험 한국사 과목에서 100점 만점을 맞은 합격자의 조언을 듣는다. 우선 5급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은 응시 전까지 한국사능력검정시험 2급 이상(고급) 성적을 미리 받아 놓아야 한다. 검정시험 성적표가 있어야 5급 시험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검정시험은 연중 네 차례 시행된다. 올해 첫 시험(제22회)은 오는 25일 전국 52개 지역에서 치러진다. 결과는 다음 달 11일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누리집(historyexam.go.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권용기 에듀윌 강사는 “한국사 기출 문제를 분석했을 때 이번 시험에서도 수험생들에게 물어볼 주제는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면서 “고급 문제의 경우 50문제 중 전·근대 시기 관련 문제는 30개, 근대 이후의 문제는 20개 정도의 비율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책·고시·취업>최신 뉴스 보러가기 권 강사는 선사시대 내용에서는 구석기·신석기·청동기·철기 시대 구분하기, 단군신화 및 8조법금 분석, 고조선 발달사 등이 주로 다뤄진다고 설명했다. 삼국시대는 6가야 연맹과 금관가야, 대가야 비교, 고구려·백제·신라 발전사, 임나일본부설 비판, 신라의 왕호 변천사, 수도·중심지 이동, 통일신라와 발해의 중앙행정 조직 등이 자주 등장한다. 고려시대의 경우 호족 정책, 지배세력의 변천사, 무신집권기 정치·경제·사회상, 공민왕의 개혁 정치, 대외 관계, 서경 천도 운동 등이 출제될 가능성이 높다. 삼국시대만큼이나 숙지해야 할 내용이 많은 조선시대에는 세종과 성종의 편찬사업, 고려와 조선의 지방행정 조직 비교, 성균관·서원·향교·서당 등의 구분, 붕당정치, 인조반정 이후 친명배금 정책과 광해군의 중립정치 비교, 영조와 정조의 개혁 정책, 세도정치 등이 수차례 활용됐다. 근대기에서는 흥선대원군의 개혁,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의 비교, 강화도 조약,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의 전개 과정,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등의 출제 빈도가 높다. 일제강점기는 시기별 일제 통치·경제 정책, 3·1운동과 6·10만세운동, 항일운동 간 비교, 임시정부 활동, 중일전쟁 이후 광복군·의용군 활동 등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현대사에서는 모스크바 3상 회의, 정부 수립 과정, 6·25전쟁, 4·19혁명 및 5·16 군사정변, 유신 체제와 신군부 등장, 광주민주화운동과 더불어 6·10항쟁, 7·4 남북공동성명과 관련된 지식을 학습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아영(28·여·일반행정직)씨는 지난해 시험 한국사 과목에서 만점을 받았다. 하지만 그 전 시험에서는 15점을 받고 크게 낙심한 바 있다. 박씨는 “2010년 생애 첫 공무원 시험에서 한국사 점수가 15점이었다”면서 “비록 시험 준비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치른 것이라고 하지만 성적이 너무 나빠서 내가 우리나라 국민이 맞나 하는 생각도 했다”면서 웃었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면서 영어 다음으로 힘들었던 과목이었을 만큼 한국사가 번번이 발목을 잡았다”고 말하는 그가 만점을 받은 비결은 ‘많이 푸는 것보다 제대로 이해하는 것’에 있었다. 박씨는 처음 한국사를 공부할 때 주변에서 추천하는 학습법을 그대로 따랐다. 요약 노트를 만들 시간에 기본서를 한 번이라도 더 읽고 기출 문제를 많이 풀어 보라는 게 주위의 조언이었다. 2년 동안 같은 방법으로 공부했지만 점수는 늘 70~80점에 머물렀다. 변화가 필요했다. 그는 기본서를 바꾸는 일부터 시작했다. 박씨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으로 주제가 나뉜 가운데 역사적 사실이 시대별로 기술된 기본서를 골랐다”면서 “시간 순으로 적힌 책이 한국사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리는 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시험을 앞두고 15차례 이상 반복해 기본서를 정독했다. 또 법원직·경찰직·소방직 공무원 시험 등에 출제된 한국사 기출 문제도 풀어 보면서 나름의 정리 작업을 병행했다. “문제를 풀면서 확실히 이해한 지문과 그렇지 않은 지문, 헷갈리기 쉬운 지문과 주의해야 할 지문을 따로 표시한 뒤 엑셀 파일로 정리했다”는 박씨는 “문제를 많이 푸는 일도 좋지만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고 푸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수험생활 3년차에 비로소 깨달았다”고 덧붙였다. 암기가 필요한 내용을 골라 공책에 담았다. 또 암기 내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이른바 ‘연표식 정리’를 활용했다. 그는 “역사적 사건들을 먼저 세기별로 크게 분류한 뒤 몇몇 주요 사건이 발생한 연도를 외우면서 공부했다”면서 “역사 흐름을 알면 어떤 사건이 언제 일어났는지 정확히 몰라도 문제를 풀 수 있지만 제한된 시간 안에 답을 빨리 찾으려면 주요 사건의 발생 연도는 암기하는 게 편하다”고 했다. 박씨는 네 차례 도전 끝에 공직에 진출했다. 그는 한국사 점수를 높이려 노력했던 경험을 떠올리며 “제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방법을 찾아내는 공무원이 되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20대女 시험 계속 떨어지자 택한 방법이…

    대입 수험생과 마찬가지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에게 한국사는 꼭 넘어야 할 벽이다. 암기해야 할 내용이 많아 어렵게 느껴지지만, 완벽하게 준비하지 않으면 ‘2% 부족’의 고배를 마셔야 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 자주 출제됐던 부분을 정리하고, 지난해 7급 필기시험 한국사 과목에서 100점 만점을 맞은 합격자의 조언을 듣는다. 우선 5급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은 응시 전까지 한국사능력검정시험 2급 이상(고급) 성적을 미리 받아 놓아야 한다. 검정시험 성적표가 있어야 5급 시험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검정시험은 연중 네 차례 시행된다. 올해 첫 시험(제22회)은 오는 25일 전국 52개 지역에서 치러진다. 결과는 다음 달 11일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누리집(historyexam.go.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권용기 에듀윌 강사는 “한국사 기출 문제를 분석했을 때 이번 시험에서도 수험생들에게 물어볼 주제는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면서 “고급 문제의 경우 50문제 중 전·근대 시기 관련 문제는 30개, 근대 이후의 문제는 20개 정도의 비율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권 강사는 선사시대 내용에서는 구석기·신석기·청동기·철기 시대 구분하기, 단군신화 및 8조법금 분석, 고조선 발달사 등이 주로 다뤄진다고 설명했다. 삼국시대는 6가야 연맹과 금관가야, 대가야 비교, 고구려·백제·신라 발전사, 임나일본부설 비판, 신라의 왕호 변천사, 수도·중심지 이동, 통일신라와 발해의 중앙행정 조직 등이 자주 등장한다. 고려시대의 경우 호족 정책, 지배세력의 변천사, 무신집권기 정치·경제·사회상, 공민왕의 개혁 정치, 대외 관계, 서경 천도 운동 등이 출제될 가능성이 높다. 삼국시대만큼이나 숙지해야 할 내용이 많은 조선시대에는 세종과 성종의 편찬사업, 고려와 조선의 지방행정 조직 비교, 성균관·서원·향교·서당 등의 구분, 붕당정치, 인조반정 이후 친명배금 정책과 광해군의 중립정치 비교, 영조와 정조의 개혁 정책, 세도정치 등이 수차례 활용됐다. 근대기에서는 흥선대원군의 개혁,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의 비교, 강화도 조약,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의 전개 과정,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등의 출제 빈도가 높다. 일제강점기는 시기별 일제 통치·경제 정책, 3·1운동과 6·10만세운동, 항일운동 간 비교, 임시정부 활동, 중일전쟁 이후 광복군·의용군 활동 등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현대사에서는 모스크바 3상 회의, 정부 수립 과정, 6·25전쟁, 4·19혁명 및 5·16 군사정변, 유신 체제와 신군부 등장, 광주민주화운동과 더불어 6·10항쟁, 7·4 남북공동성명과 관련된 지식을 학습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아영(28·여·일반행정직)씨는 지난해 시험 한국사 과목에서 만점을 받았다. 하지만 그 전 시험에서는 15점을 받고 크게 낙심한 바 있다. 박씨는 “2010년 생애 첫 공무원 시험에서 한국사 점수가 15점이었다”면서 “비록 시험 준비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치른 것이라고 하지만 성적이 너무 나빠서 내가 우리나라 국민이 맞나 하는 생각도 했다”면서 웃었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면서 영어 다음으로 힘들었던 과목이었을 만큼 한국사가 번번이 발목을 잡았다”고 말하는 그가 만점을 받은 비결은 ‘많는 푸는 것보다 제대로 이해하는 것’에 있었다. 박씨는 처음 한국사를 공부할 때 주변에서 추천하는 학습법을 그대로 따랐다. 요약 노트를 만들 시간에 기본서를 한 번이라도 더 읽고 기출 문제를 많이 풀어 보라는 게 주위의 조언이었다. 2년 동안 같은 방법으로 공부했지만 점수는 늘 70~80점에 머물렀다. 변화가 필요했다. 그는 기본서를 바꾸는 일부터 시작했다. 박씨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으로 주제가 나뉜 가운데 역사적 사실이 시대별로 기술된 기본서를 골랐다”면서 “시간 순으로 적힌 책이 한국사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리는 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시험을 앞두고 15차례 이상 반복해 기본서를 정독했다. 또 법원직·경찰직·소방직 공무원 시험 등에 출제된 한국사 기출 문제도 풀어 보면서 나름의 정리 작업을 병행했다. “문제를 풀면서 확실히 이해한 지문과 그렇지 않은 지문, 헷갈리기 쉬운 지문과 주의해야 할 지문을 따로 표시한 뒤 엑셀 파일로 정리했다”는 박씨는 “문제를 많이 푸는 일도 좋지만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고 푸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수험생활 3년차에 비로소 깨달았다”고 덧붙였다. 암기가 필요한 내용을 골라 공책에 담았다. 또 암기 내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이른바 ‘연표식 정리’를 활용했다. 그는 “역사적 사건들을 먼저 세기별로 크게 분류한 뒤 몇몇 주요 사건이 발생한 연도를 외우면서 공부했다”면서 “역사 흐름을 알면 어떤 사건이 언제 일어났는지 정확히 몰라도 문제를 풀 수 있지만 제한된 시간 안에 답을 빨리 찾으려면 주요 사건의 발생 연도는 암기하는 게 편하다”고 했다. 박씨는 네 차례 도전 끝에 공직에 진출했다. 그는 한국사 점수를 높이려 노력했던 경험을 떠올리며 “제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방법을 찾아내는 공무원이 되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일제·전쟁속 나환자 사랑에 헌신한 목자의 삶

    일제·전쟁속 나환자 사랑에 헌신한 목자의 삶

    일제강점기에 신사참배 거부 운동을 벌이고,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양자로 받아들이며,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나환자들을 돌보다 생을 마감한 사람. 손양원(1902~1950) 목사의 삶은 민족주의자나 성자, 나환자의 친구 등 어떤 수식어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그의 삶의 폭과 깊이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단어는 ‘사랑’이다. 좌우 경계를 넘어 오직 신의 편에 섰던 그는 한평생을 낮고 그늘진 곳에서 사랑을 베풀며 살았다. 그의 삶을 한 편의 동화와 다큐멘터리로 담아낸 성탄특집 프로그램이 방송된다. KBS 1TV에서 25일 밤 10시 방영되는 ‘죽음보다 강한 사랑 손양원’은 성자나 위인이 아닌 인간 손양원의 행적과 내면을 들여다본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아버지의 만세운동을 이유로 다니던 중학교에서 쫓겨났다. 일본 도쿄의 중학교로 유학을 떠나 학업을 계속한 뒤 조국으로 돌아온 그는 신학공부를 하면서 순례자와 같은 목회를 시작했다. 1926년 부산 감만동교회에서 나환자를 위한 삶을 꿈꿨으며,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나환자들이 있는 전남 여수 애양원에 부임했다. 나환자들의 상처에 입을 대고 고름을 빨아들이는, 가족들도 차마 할 수 없는 일을 마다하지 않으며 세상 가장 낮은 곳으로 몸을 낮췄다. 신사참배 거부 운동을 벌여 옥고를 치른 기간만 제외하고 순교하는 날까지 애양원의 나환자들과 함께했다. 1948년 10월 여순사건에서 손 목사는 두 아들을 잃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아들들을 총으로 쏜 원수 청년을 위해 구명운동을 벌이고, 결국 그를 양자로 삼았다. 그리고 2년 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손 목사는 애양원의 나환자들을 두고 피란을 갈 수 없다며 교회에 남아 있다가 끝내 목숨을 잃었다. 그의 48년간의 짧은 삶은 그 자체가 용서와 사랑, 구원에 대한 대답이었다. 불과 60여년 전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삶을 증언해 줄 이들 대부분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프로그램은 여수 애양원에서 그에게 세례와 학습을 받은 나환자 노인, 손양원의 마지막 순교 상황을 목격한 유일한 증언자, 그의 두 아들이 여순사건으로 희생될 당시 목격자 등의 인터뷰를 담아냈다. 손 목사의 희생적인 삶은 숭고했으나, 그 딸의 가슴에는 깊은 상처로 남았다. 제작진은 그의 맏딸인 손동희씨의 회고록을 통해 가족이 감수해야 했던 말 못할 고통도 되짚었다. 김소라 기자 sora@seoul.co.kr
  • [단체장 발언대] 365일 태극기를 휘날리게 하자

    [단체장 발언대] 365일 태극기를 휘날리게 하자

    태극기는 우리 역사와 함께했다.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 당시 2000만 겨레의 손에 들려 자주독립과 국권회복의 의지를 세계에 알렸다. 1960년 4·19혁명 땐 독재에서 민주화로 역사의 물줄기를 바꿨다. 1998년 외환위기 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내걸었던 태극기는 서로에게 ‘마음을 모으면 어떠한 국난도 능히 헤쳐 나갈 수 있다’는 위로를 안겨줬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땐 서울시청 광장에, 거리 곳곳에, 시민들의 목과 팔과 허리에서 나부끼며 한국인들의 역동성을 전 세계에 뽐냈다. 하지만 요즘 태극기 물결이 사라지고 있어 아쉽다. 국경일조차 태극기를 단 가정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현실이 안타까워 구청장 취임 초부터 태극기 달기 운동에 많은 힘을 쏟았다. 도선사길, 4·19길, 솔샘터널 앞을 태극기 상시 게양 구간으로 정해 1년 365일 걸도록 했다. 이런 노력으로 국경일 태극기를 단 가정이 늘어난 것 같아 참 다행이다. 특히 강북구는 3·1독립운동의 발상지인 봉황각과 조국 독립에 헌신하신 순국선열·애국지사 16위 묘역, 국립 4·19민주묘지가 자리한 애국애족의 고장이 아니던가. 이번 운동이 더 뜻깊게 다가온다. 최근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국들은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이라는 보편적 대의를 망각한 채 국가이기주의와 자국중심의 역사인식을 강화하는 등 심상찮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일본은 독도 침탈의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군국주의 부활을 가속화하면서 총리, 내각, 국회의원들은 앞다투어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강행하는 등 우경화로의 회귀를 꾀한다. 중국 또한 동북공정을 통해 고구려를 비롯해 발해는 물론, 백제와 신라까지 자국의 역사로 편입하려 들고 있다. 우리가 투철한 애국심으로 정신무장하지 않으면 우리의 찬란했던 과거가, 우리의 희망찬 미래가 송두리째 사라질지도 모른다. 국가 없는 개인의 미래는 생각할 수 없다. 일제강점기 나라를 빼앗겨 만주, 연해주, 상해 등지를 떠돌아 다녀야만 했던 선조들의 서글펐던 역사가 증명한다. 우리가 뼈아픈 역사를 반복하지 않고 후손들에게 영광된 미래를 물려주려면 국민 하나하나가 먼저 나라 사랑의 마음을 갖는 게 중요하다. 그 시작은 나라 사랑의 가장 근본인 태극기 달기여야 한다. 아울러 태극기 달기뿐 아니라 태극기에 담긴 음과 양, 하늘과 땅, 물과 불의 통일된 조화를 통해 인류 평화에 이바지하고자 했던 조상들의 숭고한 정신도 잊지 말아야겠다. 국기는 단순한 깃발이 아니다. 한 나라의 역사와 문화, 민족혼이 망라돼 있다. 강북구의 노력이 불씨가 되어 1년 내내 거리마다, 집집마다, 5000만 대한겨레의 가슴마다 태극기가 힘차게 펄럭이기를 기대한다. 박겸수 서울 강북구청장
  • 쿨투어·시빌리제이션 어떤 차이가 있을까?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2월 취임사에서 ‘문화’를 19번 이야기했다. 박근혜 정부 국정운영의 키워드로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문득 궁금하지 않나, ‘문화’가 뭐지? 탈춤인가? 싸이의 시건방춤인가? 한자의 한반도 전래와 함께 최소 2000년은 써온 말인가? 등등. 이 궁금증은 역사전문 출판사 푸른역사가 최근 펴낸 ‘한 단어 사전, 문화’(야나부 아키라 지음, 한림대 한림과학원 기획, 박양신 옮김)를 통해 풀어볼 수 있겠다. 19세기 비자발적 개항을 한 일본은 서양의 이질적인 개념들을 번안 했다. 문화도 그중 하나다. ‘한 단어 사전’ 시리즈는 문학을 비롯해 천(天), 인권, 개인 등의 개념이 동서양의 이질성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수용됐는지를 시공간적인 맥락에서 추적했다. 문화(文化)는 영어의 컬처(culture)나 시빌리제이션(civilization)을 번역한 말로 이해됐다. 그러나 이 두 단어는 살짝 차이가 있다. 문화는 독일의 쿨투어(Kultur)에서 유래됐다. 구와키 겐요쿠가 1915년 쿨투어를 ‘문화’로 번역하면서 일본에 들어왔다. 쿨투어는 경작하다는 뜻이 있기 때문에 자연과 반대되는 언어로 사용된다. 이후 서양풍의 주택을 ‘문화주택’으로 부르고, 조선에서 3·1 만세운동이 벌어지자 ‘문화 정치’를 펼치는 등 문화가 정치·사회의 전면에 나섰다는 것이다. 문화생활도 있다. 그럼 시빌리제이션은 무엇인가? 후쿠자와 유키치는 1867년 집필한 ‘서양사정 외편’에서 ‘문명개화’로 번역해 확산시켰다. 진보, 발전을 향한 보편적 활동이라는 의미다. 시빌리제이션은 시민(civilis)에서 파생된 것으로 성 안에 사는 사람,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말이다. ‘야만인’과 상대되는 이 말은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를 통해 크게 유행하고, 전 유럽으로 확산됐다. 흥미로운 것은 독일의 쿨투어가 프랑스의 시빌리자시옹(시빌리제이션)과 이데올로기 경쟁을 했다는 점이다. 독일 철학자 니체는 1901년 ‘권력에의 의지’에서 “쿨투어의 위대한 시점은 도덕적으로 말해 언제나 부패한 시대이고, 반대로 인간을 가축으로 길들이려 하며 강제하는 치빌리자치온의 시기는 더없이 정신적이고 대담한 정신의 소유자에게는 견딜 수 없는 시대”라고 서술했다. 역시 독일인 슈펭글러는 ‘서구의 몰락’(1918년)에서 “인류 역사상의 문화는 계절의 변화처럼 필연적으로 쇠멸해 간다. 그 쇠멸의 단계가 시빌리제이션”이라고 했다. 즉 쿨투어(문화)를 시빌리제이션(문명)보다 위 단계로 놓는 우리의 습관은 여기서 시작된 것이다. 1995년 일본 삼성당에서 기획출판한 책을 번역한 것으로, 이런 ‘개념사’ 접근은 역사와 사회를 새롭게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된다.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4월의 독립운동가 김붕준

    4월의 독립운동가 김붕준

    국가보훈처는 29일 김붕준(1888~1950) 선생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1919년 서울에서 3·1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중국 상하이로 망명한 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해, 군무부 서기와 참사, 국무원 비서장 등을 역임했다. 1939년 임시의정원 15대 의장을 맡아 독립운동 세력의 단결에 힘썼다. 1944년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선임되고 1945년 신한민주당을 창당하는 등 조국 광복에 헌신했다. 광복 후 신탁통치반대와 통일민족국가 건설운동에 전념하다가 1950년 6·25 전쟁 때 납북돼 전란 속에서 타계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선생의 공로를 기리어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 유관순 열사의 고독한 외침 되새긴다

    유관순 열사의 고독한 외침 되새긴다

    서울 서대문구는 유관순 열사를 비롯한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옥고를 치렀던 서대문형무소 여옥사를 원형 그대로 복원해 다음 달 1일 개관식을 갖는다고 27일 밝혔다. 여옥사는 1918년 일제가 서대문형무소에 여성 독립운동가를 별도 수감하기 위해 신축했다. 1979년 서울구치소로 운영할 당시 여옥사는 철거됐고 교도관들 사이에서 여옥사 터에 대한 내용이 구전으로만 전해져 내려왔다. 1990년 정부가 여옥사 터를 발굴해 지하공간을 확인하고 1992년 지하감옥이 복원됐다. 2008년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종합 보수 정비 과정에 일제 강점기 당시 여옥사 관련 설계도면이 발굴됐다. 구는 2011년 도면에 따라 문화재청과 서울시 예산을 지원받아 복원사업을 진행해 왔다. 구는 복원사업과 함께 175명의 무명 여성독립운동가를 새로 발굴하는 성과도 거뒀다. 여성 독립운동이 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공훈을 받은 여성은 170여명으로 전체 독립운동가 1만 6000여명 가운데 1.7%에 불과했다. 구는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상징하는 유관순 조각상을 설치하고 세브란스 간호사로 재직 중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한 노순경, 수원지역 기생 출신 독립운동가 김향화, 버스 차장으로 독립운동으로 투신했다가 모진 고문으로 순국한 고수복 등 여성 독립운동가의 사진자료도 새로 발굴해 전시한다. 구는 개관식에서 여옥사 복원 직무유공 표창, 극단 서라벌의 상황극 ‘재현 1919’, 이정희 명인의 ‘도살풀이춤’ 등 기념공연을 펼친다. 문석진 구청장은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제 점령한 뒤 항거하는 수많은 애국지사를 투옥시키기 위해 지은 감옥이 서대문형무소”라면서 “여성 독립운동가의 얼을 기리고 독립·자유·평화·민주 정신을 기리는 교육의 현장으로 우뚝서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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