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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석호필·매켄지… 독립운동 도왔던 외국인 5명 재조명

    캐나다 수의사 프랭크 스코필드(1889~1970) 박사는 1916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수로 우리 땅을 밟았다. 한국어를 공부해 선교사 자격을 얻은 그는 ‘바위같이 굳은 의지와 호랑이의 마음으로 한국을 돕는 사람이 되겠다’는 의미로 ‘석호필’이란 한국명을 받았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운동 현장을 사진에 담아 기록했으며, 화성 제암리 교회 학살사건 등 충격적인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기도 했다. “한국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긴 그는 1970년 외국인으로는 유일하게 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100년 전 독립을 위해 힘든 싸움을 했던 우리 선조들 옆엔 국적을 떠나 폭력에 항거하고 진실을 마주했던 외국인들도 있었다. 서울시는 23일부터 다음달 31일까지 시청 시민청 시티갤러리에서 ‘한국의 독립운동과 캐나다인’ 특별전을 연다고 밝혔다. 서울시와 주한캐나다대사관 주최, ㈔스코필드기념사업회와 키아츠(KIATS·한국고등신학연구원) 주관이다. 전시에는 스코필드 박사 외에도 영국에서 ‘한국친우회’를 조직해 한국의 독립운동을 후원한 프레드릭 매켄지(1869~1931), 병원·학교·교회 등을 설립하며 애국계몽운동을 벌인 로버트 그리어슨(1868~1965), 중국에서 독립만세운동 사상자 치료와 희생자 장례식을 개최한 스탠리 마틴(1890~1941), 명신여학교를 세워 교육에 힘쓴 아치발드 바커(?~1927) 등 캐나다 출신 독립운동가의 활동 모습을 담은 사진과 관련 일러스트, 글, 영상 등 50여점이 공개된다. 스코필드 박사가 촬영한 독립만세를 외치는 민중들 사진도 만날 수 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한민족의 의지를 세계에 알린 데다 의료·교육 발전을 이끌며 헌신한 분들의 정신을 기억하고 되새기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희리 기자 hitit@seoul.co.kr
  • “부천 계남면 만세운동을 아십니까”

    “부천 계남면 만세운동을 아십니까”

    1919년 3월 삼천리강산은 뜨거웠다. 일제 야욕에 항거하는 독립만세운동은 들불처럼 번져나갔고 마침내 부천에서도 항일 시위가 이어졌다. 100년 전 그날 우리는 민족독립의 새날을 꿈꿨다. 3·1운동 100주년. 부천시는 그때의 함성과 뜨거운 가슴을 기억하고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을 되새기기 위해 다양한 기념행사를 갖는다. ■부천에서 만나는 3.1운동 발자취… 부천 계남면 만세운동 1919년 3월 24일 3·1 만세운동 여파가 부천에도 불어 닥쳤다. 당시 부천군 계남면 중리(현 심곡동·중동 일대) 주민들이 일제의 농민 수탈정책에 불만을 품고 계남면사무소를 습격해 유리창과 벽체·집기류·서류 등을 부수거나 훼손하는 거사를 일으켰다. 당시 계남면사무소 직원들은 다음날인 25일 아침부터 인접 부내면사무소에서 집무했다. 27일에는 소강상태에 들어가자 면사무소 부근 민가를 일시 빌려서 집무했다. 이런 사실을 당시 부내면 서기 이경응이 경찰서에 밀고했다는 소문이 돌자 시위 군중들이 이경응의 집을 습격해 가옥·가구 등을 모두 파괴해 가옥은 네 기둥과 지붕만 남고 벽과 창문 등은 모두 파괴됐다는 기록이 있다. 부천의 항일 만세운동 사적지인 당시 계남면사무소 자리는 현재 경원여객 차고지(경인로 244-5)로, 최근 항일유적지임을 알리는 바닥돌과 안내판이 세워졌다. 이 밖에도 부천에는 1927년 10월 일본 지주들의 횡포에 대항해 농민조합운동이 있었던 부평수리조합 터(부천군 소사면 심곡리), 1927년 9월 24일 당시 소사역 하역노동자들이 일본인 역장의 부당한 처사에 항거해 동맹파업을 일으킨 소사역 하역노동자 동맹파업지(현 심곡본동 부천역사) 등 항일운동 사적지가 있다. ■안중근공원에서 열리는 ‘3·1운동 100주년 기념식’ 항일 민족정신을 기리는 대표적인 장소로 20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에서 반입된 안중근 의사 동상을 유치해 조성한 부천의 안중근공원을 꼽을 수 있다. 시는 오는 3월 1일 이곳에서 3·1운동 100주년 기념행사를 연다. 독립선언서 낭독, 국가유공자 표창, 기념사, 삼일절 노래 제창, 만세삼창 등이 진행된다. 기념공연으로는 부천의 독립운동을 다룬 초이스 뮤지컬 컴퍼니의 연극 공연이 마련된다. 기념식 후에는 시민들과 함께 손태극기를 흔들며 3.1 만세운동을 재현하는 거리행진을 벌인다. 행진은 안중근공원부터 부천우체국, 뉴서울아파트 등을 지나 시청 잔디광장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부대행사로는 시청 1층 로비에서 ‘3.1운동, 부천과 만나는 100년’ 전시회가 열린다. 부천의 독립운동과 3.1운동 기념사업을 소개하는 전시는 3월 1일부터 8일까지 진행된다. 한편 안중근공원에서는 매년 3월 26일 안중근 의사 추모제가 열리고 10월 26일에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의거일 기념행사가 개최된다. ■3·1운동 기념 만화벽화, 특별강연, 영화상영, 기념마라톤 등 다양한 기념사업 부천시는 이 외에도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의 의미를 되새기는 다양한 기념사업을 추진한다. 한국만화박물관 광장 외벽에는 3·1운동 기념 만화벽화를 조성한다. 박물관 관람객과 시민들의 캐리커처로 3·1 만세운동을 벽화로 재현해 3월 1일부터 8월까지 전시한다. 3월 1일 박물관 로비에서는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태극기 그리기 체험을 진행하고 1층 상영관에서는 윤동주 시인의 생을 그린 영화 ‘동주’를 상영한다. 항일운동 코스튬 플레이어의 만세 퍼포먼스도 열릴 예정이다. 상동도서관에서는 역사릴레이 강연 ‘역사의 그날-시민과 소통하다’를 연다. 3월 2일, 9일에는 한국근현대사 및 민족운동 연구자로 저명한 박환 수원대학교 사학과 교수가, 16일에는 ‘단박에 한국사’, ‘헌법의 상상력’ 등 베스트셀러 역사도서를 집필한 심용환 역사N교육연구소 소장이 강연한다. 심곡도서관에서도 3월 8일 3·1운동 100주년 기념 특별강좌 ‘인물로 배우는 역사, 독립운동가 대 친일파’를 개최하고, 3월 1~10일 도서관 로비에서 항일저항 작품을 전시하는 3·1운동 100주년 도서 전시전을 연다. 일제강점기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기 위한 무료 영화 상영도 진행한다. 22일 영화 ‘밀정’을 시작으로 3월 8일 ‘박열’, 3월 15일 ‘귀향’, 3월 22일 ‘암살’이 시청 어울마당에서 저녁 7시에 상영된다. 삼일절에 부천종합운동장에서는 ‘3·1절 100주년 기념 부천마라톤대회’가 열린다. 이명선 기자 mslee@seoul.co.kr
  • 김포교육지원청, 새학기 평화·통일·민주시민 양성 교원역량 강화 연수

    김포교육지원청, 새학기 평화·통일·민주시민 양성 교원역량 강화 연수

    경기도 김포교육지원청은 지난 14~15일 청내 아라홀에서 김포 교원을 대상으로 신학기 전 민주시민 교육역량 강화 연수를 실시했다고 19일 밝혔다. 5명의 강사가 나서 진행된 연수는 학생자치 담당교사 역량을 강화하고, 교육과정을 연계한 평화로운 학급 만들기 프로젝트 사례를 공유·실행하는 학습과 통일교육에 대한 이해 향상을 목표로 진행됐다. 먼저 최종철 검산초등학교 교감은 학생자치회 담당교사들에게 학생들이 자치회를 실질적으로 계획·운영하는 방법과 학교자치 및 민주적인 학교문화, 생활인권규정, 교권 등에 대해 안내했다. 무엇보다 민주적인 학급 문화는 학교 내 인권이 상호 존중되는 가운데 싹트고 발전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음날에는 ‘교육과정 연계한 평화로운 학급만들기’ 주제로 연수가 진행됐다. 초등교원 대상으로는 이혜미 운유초교 교사가 학생들과 1년 교육과정을 구성하는 방법을 강의했다. 중·고등학교 교원에게는 곽은주 관교중학교 교사와 강균석 수주중 교사가 학교폭력 구조와 예방활동에 대해 안내했다. 이 밖에 김진향 개성공업지구 지원재단 이사장이 통일교육 강의를 실시했다. 북미정상회담 등 한반도 평화 분위기가 달아오르고 있는 시기에 학교 통일교육 길잡이가 되는 유익한 시간이었다. 특히 “통일운동은 독립운동이다”라는 김구 선생 말이 크게 와닿았다는 평가다. 이날 연수에 참가한 한혜정 김포제일고교 교사는 “북한과 통일문제에 더 관심을 갖고 학생들에게 우리나라 공식 통일 방안을 정확히 지도해야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경기도 김포교육지원청은 평화·통일 교육방안으로 학생이 중심이 돼 3·1절과 임시정부 100주년 수립 행사에 다양하게 참가할 예정이다. 이달 고교 학생회장단 모임을 시작으로 김포시와 함께 오라니장터 만세운동 재현에 500여명 학생 참여한다. 임시정부 수립·활동에 대한 다양한 연구를 진행하는 등 올해 학생활동이 어느 때보다 기대된다. 이명선 기자 mslee@seoul.co.kr
  • #3·1운동 100주년… #강남에서 시작한다

    #3·1운동 100주년… #강남에서 시작한다

    서울 강남구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빛 날려라! 태극기’ 캠페인을 한다고 18일 밝혔다. 구 관계자는 “전 구민과 한국을 찾는 외국인들이 3·1운동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도록 휴대전화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캠페인을 마련했다”고 전했다. 스마트폰 배경화면을 태극기로 물들이는 ‘디지털 태극기 게양 캠페인’을 한다. 디지털 태극기 인증 사진을 찍은 후 해시태그(#빛날려라_태극기, #내손안의_태극기, #삼일운동_100주년, #강남에서시작한다)를 달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게재하면 된다. 손가락을 이용해 3과 1을 표시하고 인증하는 ‘핑거사인’ 캠페인도 곁들인다. 젊은이들이 쉽게 동참할 수 있도록 네이버와 유튜브, 트위터 등을 통해 행사 내용을 알린다. 역삼글로벌빌리지센터와 펀데이코리아네트웍스의 커뮤니티를 통해 지역 내 거주 외국인들의 참여도 추진한다. 태극 엠블럼도 제작됐다. 너와 나 그리고 우리, 남과 북이 하나 돼 3·1절 100주년의 문을 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디지털 태극기와 엠블럼은 인스타그램(www.instagram.com/gangnam_3.1)을 통해 내려받을 수 있다. 구는 올 3·1절 기념행사를 1일 밤 12시 개최한다. 삼성동 코엑스 앞 SM타운 외벽에 설치된 국내 최대 전광판(가로 82m·세로 22m)을 비롯해 32개 옥외전광판에 31분간 태극기를 띄운다. 구 관계자는 “1919년 들불처럼 번졌던 그날의 함성과 애국의 물결이 어둠에서 빛으로 재현된다”고 했다. 정순균 강남구청장은 “이번 행사는 100년 전 기미년 만세운동을 SNS상에 구현하고 이 땅의 독립을 위해 희생한 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기획됐다”며 “단순히 태극기 게양에 머물렀던 3·1절 기념행사를 강남만의 문화적 자산으로 자랑할 수 있는, 뜻깊은 축제로 디자인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백발 할머니 학생 8명 초등학교 6년 영광의 졸업, 경남 초교 2곳 이색 졸업식

    백발 할머니 학생 8명 초등학교 6년 영광의 졸업, 경남 초교 2곳 이색 졸업식

    경남지역 초등학교 2곳에서 14·15일 뜻깊은 졸업식이 열렸다. 평균 80세가 넘는 할머니 8명이 6년간 정식으로 학교를 다니며 초등교육 과정을 모두 마치고 정식 졸업장을 받았고 독립운동가 2명이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경남도교육청은 15일 하동군 고전면 고전초등학교에서 지난 14일 열린 제 87회 졸업식에서 평균 80세가 넘는 할머니 학생 8명이 졸업을 했다고 밝혔다.올해 고전초 졸업생은 이들 할머니 학생이 전부다. 졸업생 할머니들 연세는 71세부터 86세 까지 평균 80이 넘는다. 모두 학교 인근에 거주한다. 이들 할머니들은 배우지 못한 한을 풀겠다며 6년 전인 2013년 3월 5일 입학식을 하고 고전초등학교 학생이 됐다. 백발 할머니들은 배움에 대한 강한 의지 하나로 6년 동안 책가방을 들고 등교하며 열심히 공부해 나이는 뛰어 넘은 끝에 마침내 영광스런 초등학교 졸업장을 받았다.14일 졸업식에는 학교 주변 주민들도 대거 참석해 졸업식장은 마을 잔치 행사장이 됐다. 6년 세월을 이겨낸 졸업생 할머니들의 얼굴에는 기쁨의 웃음이 떠나지 않았고 자녀들과 손주들도 꽃다발을 건네며 할머니들의 졸업을 축하했다.박종훈 경남도 교육감도 졸업식에 참석해 할머니 졸업생 한분 한분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박 교육감은 할머니들의 졸업을 ‘추운 겨울을 견디고 피어난 매화’에 비유하며 “배움의 길에는 나이가 없다는 가르침을 주진 할머니들께서 우리 모두의 스승이시다”고 축하했다. 15일 경남 밀양시 밀양초등학교에서 열린 제109회 졸업식에서는 올해 졸업생 122명 졸업식과 함께 독립운동가 김상득 선생과 한봉삼 선생의 명예졸업식이 열려 두 독립운동가에게 명예졸업장이 주어졌다. 두 선생의 명예 졸업장은 각각 윤일선 밀양독립운동사 연구소 소장과 한봉삼 선생의 조카며느리인 조현주씨가 받았다.1910년 밀양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한 김상득 선생은 의열단을 이끌었던 약산 김원봉 장군과 함께 1911년 11월 3일 일왕 히로히토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에 반대해 일장기를 화장실에 버린 일로 퇴학당했다. 그 뒤 김상득 선생은 1919년 3·13밀양만세운동을 주도하는 등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한봉삼 선생은 1917년 밀양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해 1919년 3월 학생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퇴학당한 뒤 의열단 단원이었던 형제들과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옥고를 치르고 후유증으로 1933년 순국했다. 박종훈 교육감은 이날 밀양초등학교 졸업식에 참석해 졸업생들을 격려하고, 김상득 선생과 한봉삼 선생의 명예졸업을 축하했다. 박 교육감은 “지난해 김원봉 장군 명예졸업장 수여에 이어 두 분 독립운동가에 대한 명예졸업장 수여가 우리 아이들의 역사교육에 이바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동·밀양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 1919년 3월 ‘독립만세운동’ 주도적으로 외친 수원 기생들

    1919년 3월 ‘독립만세운동’ 주도적으로 외친 수원 기생들

    술과 웃음을 파는 여성으로 잘못 인식돼온 기생들이 독립만세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주권 침탈과 치욕적 건강검진에 분노한 수원기생 33명은 김향화(당시 23세) 주도로 기생으로서는 처음 1919년 3월 29일 화성행궁 봉수당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일제는 조선 왕조 별궁인 화성행궁을 식민지 통치를 위한 행정기구와 병원으로 사용하는 방식으로 민족의 자존심을 짓밟았다. 사진은 독립운동에 참여한 수원 기생으로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경성일보가 1918년 발간한 ‘조선미인보감’에 소개한 프로필이다. 일제는 잔치나 술자리에 나가 노래와 춤 등으로 흥을 돕던 기생을 매음녀인 창기(娼妓)와 동일하게 취급하면서 폄훼했다. 원래 기생은 ‘해어화’(解語花·말을 알아듣는 꽃)로 불렸다. 예술적 능력뿐 아니라 학문, 사회적 이슈에도 밝았다. 김향화도 가곡, 가사, 시조, 경성잡가, 서관소리, 검무와 승무, 정재(궁중무용)에 능한 데다 서양악기였던 양금도 잘 쳤던 것으로 알려졌다. 연합뉴스
  • [포토] ‘용감한 조선미인들’…만세운동 벌인 수원기생 33인

    [포토] ‘용감한 조선미인들’…만세운동 벌인 수원기생 33인

    일제강점기인 1919년 3월 29일 수원기생 33명이 수원화성의 봉수당에서 만세운동을 벌였다. 사진은 독립운동에 참여한 수원 기생들의 모습으로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경성일보가 1918년 발간한 ‘조선미인보감’에 소개한 프로필 사진. 수원시 제공/연합뉴스
  • 움켜 쥔 시신의 손엔 독립선언서… 아우내 만세운동 ‘진짜 주역’

    움켜 쥔 시신의 손엔 독립선언서… 아우내 만세운동 ‘진짜 주역’

    옥중 투쟁을 하다 잔혹한 고문을 받고 순국한 유관순 열사가 독립운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지대하다. 열사가 1919년 4월 1일 충남 천안 아우내장터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의 주역이었음도 분명하다. 유관순은 3·1운동과 동일시되고 있고 항일의 표상이다. 그러나 유독 유 열사만 부각된 데는 정치적 배경이 있다는 연구 논문이 여러 편 있다. 친일·우익 인사들이 광복 직후 자신들의 과거를 정화하여 정치적·도덕적 권위를 찾으려고 열사를 ‘한국의 잔다르크’로 형상화했다는 것이다. 유관순의 항거는 이화여중 동문 박인덕과 교장 신봉조 등이 기념사업회를 발기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일제에 저항했다가 친일로 돌아선 인물로 광복이 되자 자신들의 행적을 덮으려고 유관순을 이용했다고 한다. 또 하나는 우익 인사들의 유관순 기념사업이다. 미 군정하인 1947년 9월 결성된 유관순기념사업회는유관순 기념비, 영화를 만들고 ‘조선의 잔다르크’라는 제목의 전기를 간행했다(정상우, ‘3·1운동의 표상 유관순의 발굴’).그중에는 유관순기념사업회 명예회장을 맡은 조병옥이 있다. 조병옥은 광주학생운동 배후 조종 혐의로 3년 동안 복역해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독립운동가이기도 하지만 친일 의혹도 함께 받고 있다. 조병옥은 유관순과 두 집 건너 살던 이웃으로 그의 아버지 조인원도 아우내 만세 시위를 주도했다. 대한민국 정부 경무부장이던 조병옥은 정부의 정통성을 찾는 방편으로 유관순을 한국의 잔다르크, 해방의 여전사로 부각시켰다(전해주, ‘성공회 병천교회의 3·1 아우네 만세운동에 대한 기여’). 이런 연유로 아우내장터 시위를 주도한 다른 인물들의 공적은 거의 파묻혔다. 실제 주동자로 현장에서 총에 맞아 숨진 김구응 의사(義士)도 그런 사람이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발간된 신한민보는 아우내 만세운동을 유관순이 아닌 김구응, 박종만이 주도했음을 밝히고 특히 모친까지 학살당한 김 의사를 비중 있게 보도했다. “천안군 병천시(川市·아우내장터)에서 의사 김구응이 남녀 6천4백인을 소집하야 독립을 선언할 새 일경이 아민(我民)의 기수(旗手)를 자(刺)코져 하거늘 기수는 적수(赤手)로 검도(劍刀)를 집(執)하니 유혈이 임리(淋·뚝뚝 흘러 흥건하게 떨어짐)할 시에…” 김병조 선생이 쓴 ‘한국독립운동사략’에 이렇게 씌어 있다. 박은식 선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도 거의 똑같이 서술하면서 주모자를 김구응이라고 했다.김 의사는 임진왜란 진주대첩의 명장 김시민 장군의 12대손으로 1887년 7월 27일 천안 병천면 가전리 99번지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한학을 깨우친 의사는 청신의숙, 장명학교를 거쳐 병천 진명학교 훈도(교사)로 일하며 제자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유관순의 오빠 유관옥과 조인원의 아들 조만형은 그의 제자였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충청 지역에서도 만세운동이 들불처럼 번졌다. 김 의사는 서울 이화학당에 다니다 3월 13일 고향 병천에 내려온 유관순과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 조인원 등과 만세운동을 벌일 계획을 치밀하게 짰다. 유관순과 지역의 학생, 교인들은 진명학교와 교회 등에서 밤낮으로 태극기를 만들었다. 일본 관헌의 눈을 피하기 위해 나이 어린 유관순에게 최일선 연락 책임을 맡긴 것도 김 의사였다. 그는 천안 동부 6개 면과 오창, 청주, 진천, 연기 등 각지와 비밀 연락망을 짜고 봉화 신호에 맞추어 일제히 총궐기하도록 밀령을 전달했다. 유관순이 연락과 봉화 책임자라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면 의사는 전체 계획을 짠 리더였다. 조인원은 현장에서 군중을 이끈 행동대장 격이었다. 김 의사의 어머니 최정철 여사도 장년층과 노년층을 설득하고 부녀자를 동원하는 역할을 했다. 1919년 3월 그믐날 밤 유관순은 매봉산에 올라 봉화를 올렸다. 이를 필두로 천안 주변의 총 24개 봉우리에서 봉화가 타올랐다. 거사 일로 정한 4월 1일 아침 아우내장터에는 전날 밤 타오른 횃불을 보고 장꾼을 가장한 군중 3000여명이 모여들었다. 군중은 점점 불어나 오후 1시가 넘어가면서 6000명을 넘어섰다. 김 의사는 두루마리로 된 독립선언문을 펴 낭독했고 유관순은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했다. 불과 50보 거리의 지척에 헌병주재소가 있었다. 만세운동은 극히 평화적이었다. 군중이 점점 늘어나고 만세 소리는 천지를 진동할 정도로 커졌다. 오후 2시쯤 천안헌병분대에서 헌병들이 트럭을 타고 도착했다. 헌병들은 군중을 향해 총을 쏘고 칼을 휘둘렀다. 유중권을 포함해 여러 사람이 사망했다. 발포에 놀라 군중은 일단 흩어졌지만, 오후 4시쯤 발포와 살인에 항의하는 시위가 이어져 1500여명이 주재소로 몰려갔다. 김 의사는 독립선언문을 말아 들고 대열의 선두에 섰다. 헌병들은 깃발을 들고 있던 기수를 칼로 찌르려 했고 기수가 맨손으로 칼을 잡자 그대로 찔러 숨지게 했다. 의사는 그들의 잔인무도함을 비난하며 꾸짖었다. 황망한 중에도 정연한 논리로 대응했다. 일본 헌병은 논리에서 밀리자 김 의사를 총으로 쏴 쓰러뜨리고는 총검으로 머리를 짓이겼다. 의사는 시신이 되어서도 독립선언서를 손에 말아 쥐고 있었다. 오후 6시쯤이었다. 가까운 곳에서 아들이 참살당한 말을 들은 의사의 어머니 최 여사가 달려왔다. 여사는 헌병의 멱살을 잡아채며 “이놈들아, 내 자식이 무슨 죄가 있느냐. 내 나라 독립을 찾겠다고 만세를 부르는 것도 죄가 되느냐”고 울부짖었다. 그러자 헌병은 사정없이 총을 쏘아 즉사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총검으로 마구 찔렀다. 김 의사의 나이 32세, 최 여사의 나이 66세였다. 아우내장터 시위로 김 의사 등 19명이 죽고 적어도 30명 이상이 크게 다쳤다. 가족들은 장례를 치르지도 못하고 병천면 가전리 뒷산에 의사의 시신을 묻었다. 김 의사의 사후 가정은 풍비박산이 났다. 선생의 손자 김운식(70)씨에게 들은 가족사는 비극적이다. 김 의사는 아들 셋을 뒀는데 맏아들이 열 살이었다. 살길이 막막해지자 김 의사의 부인, 즉 김씨의 할머니는 아이들을 데리고 경기 안성 친정으로 갔다고 한다. 의사의 맏아들은 그 후 일본으로 밀항했다가 돌아와 인천에서 조선기계제작소라는 작은 공장에 취업했다. 광복 후에는 좌익 활동을 했다. 김씨는 “아버지는 친일파들은 위세를 떨치고 김원봉 같은 독립운동가는 도리어 빨갱이로 내몰리는 현실에 대한 저항감에 좌익 사상에 빠졌다”고 말했다. 맏아들은 6·25가 터진 후 공장 인민위원장이 됐다. 하지만, 자신이 생각했던 이상적인 공산주의와는 다르다고 판단해 9·28 수복 후 국군에 자수했다. 자수했지만 방면되지 않고 인천감옥에 수감됐다. 몇 달 뒤 1·4후퇴 때 국군이 후퇴하면서 인천감옥의 좌익사범들을 총살했는데 그때 희생되고 말았다. 시신도 찾지 못했다. 다른 후손들도 천안을 떠나 곳곳을 전전하며 가난에 시달렸다. 칼바람이 몰아치는 날 아우내장터를 찾았다. 두 개의 내(川)를 아우른다(竝)는 뜻인 아우내를 일본인들이 병천(竝川)이라는 한자어로 지명을 바꿨다. 근처엔 유관순기념관도 있고 해마다 만세운동을 기리는 행사가 열린다. 그러나 만세운동 현장임을 알려주는 표지도 없고 순댓집 간판만 즐비했다. 단지 시장 입구 헌병주재소가 있던 곳엔 ‘아우내독립만세운동기념공원’이 있다. “아우내에는 순대만 있고 역사는 없다”는 말이 딱 들어맞았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자치광장]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문석진 서울 서대문구청장

    [자치광장]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문석진 서울 서대문구청장

    1919년 3월 1일 함성이 울려 퍼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한 지 한 세기가 흘렀다. 100년 전 그날 서대문형무소에는 3000여명의 3·1운동 참여자들이 수감돼 옥고를 치르면서도 독립의 열망을 멈추지 않았다. 3·1운동은 유례없는 대규모 평화시위였다. 당시 인구 1750만명 중 200여만명이 전국 각지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는데, 세계 혁명사에서도 전체인구의 10% 이상이 시위에 참여한 사례는 찾기 어렵다. 당시 검거된 사람들은 조사에서 “내가 만세를 부르면 독립할 수 있다고 해서 불렀다”고 답했다고 한다.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미래 100년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역사를 제대로 평가해야 할 때다. 독립운동가 개개인에 대한 평가도 다시 이뤄져야 한다. 무엇보다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를 위해 서대문구는 매년 광복절마다 잊혀진 독립운동가를 발굴하고 직접 모셔 풋프린팅을 하며 업적을 기록해왔다. 특히 올해는 100주년을 맞이해 3·1운동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사람 가운데 수형기록카드가 남아 있는 1000여명의 기록을 모아 ‘서대문형무소 3·1운동 수감자 자료집’을 발간한다. 당시 전국 각지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됐는데, 이를 지역별로 분류함으로써 지역단위 3·1운동의 학술적 고증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이 중에서 아직 국가로부터 공훈을 받지 못한 342명을 추가 발굴해 서훈의 기본자료로 활용한다. 자료집은 그동안 조명되지 않은 북한 3·1운동 수감자 230여명도 포함하고 있다. 지난해 9월 평양공동선언을 통해 3·1운동 100주년 남북공동행사를 추진하기로 한 만큼, 이들을 새롭게 발굴하고 기념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이후 한 세기가 지난 2019년 한반도는 그들이 그토록 원했던 자유와 평화의 시기를 맞았다. 한마음으로 투쟁한 100년 전 그들처럼 이제 소통과 화합으로 미래 100년을 준비해야 한다. 우리의 미래 100년은 바로 100년 전 그날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 충북범도민위원회 출범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 충북범도민위원회 출범

    ‘3·1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 충북 범도민위원회’가 8일 출범했다. 도내 보훈, 종교, 시민사회, 장애인, 여성, 문화, 노동, 농민 등 각 분야 150여개 단체가 참여했다. 서상국 광복회 충북도지부장, 곽동철 충북민주화운동 계승사업회 이사장, 음태봉 충북기독교연합회장, 유철웅 충북민간사회단체 총연합회장, 정승희 충북여성연대 대표, 이화련 충북새마을회 회장, 임승빈 충북예총 회장 등 33명이 상임공동대표로 추대됐다.이들은 과거 기록, 현재의 성찰과 기념, 새로운 미래 100년 비전제시 등을 활동목표로 잡았다. 이를 위해 다음달 1일 청주 일원에서 만세행진과 도민대회를 개최한다. 오는 4월11일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식을 갖는다. 역사바로세우기 운동, 새로운 100년 실천방안 시군 순회 토론회, 3·1 운동 역사순례도 진행한다. 3·1운동 자료 발굴 및 지역 만세운동 역사기록 편찬, 기록화 작업, 청주장터 만세공원 조성과 기념조형물 건립, 독립투사 추모제도 추진한다. 이들은 도민들의 폭넓은 참여를 위해 오는 4월까지 참여단체 및 추진위원을 모집한다. 개인추진위원은 1만원 이상, 단체 회원은 3만원 이상 회비를 내야 한다. 정지성 공동대표는 “100주년이라 100개 단체 참여를 목표로 했는데 예상보다 반응이 뜨겁다”며 “개인회원은 1000명 이상을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청주 남인우 기자 niw7263@seoul.co.kr
  • 대구시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2~3월 집중 추진

    대구시는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2~3월을 기념사업 집중 추진 기간으로 정해 다채로운 시민 참여 행사를 펼치기로 했다. 2 ~ 3월에 추진될 주요 사업과 행사는 일본군위안부 주제 연극 ‘할머니의 방‘이 남구 소극장 함세상에서 2월 19일에서 2월 23일 사이 무료 공연한다. 국채보상운동과 2?28 민주운동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2월 21일부터 2월 28일까지 동성로와 2·28기념공원 등에서 ‘2019 대구시민주간’ 행사를 개최하며, 2월 22일에는 기념 뮤지컬 갈라공연이 동성로 야외무대에서 진행된다. 2월 26일에는 대구콘서트하우스 그랜드홀에서 대구시립교향악단의 ‘100주년 기념 음악회’를, 2월 28일에는 3?1절 전야행사인 대구YMCA 주관의 대구만세운동길 걷기 행사 ‘떨리는 밤, 함성전야’를 선착순 1000명 모집, 무료참가 행사로 개최된다. 3월 1일에는 100주년 3?1절을 기념하기 위해 9시에서 10시 30분 사이 달성공원 1000명, 청라언덕 2000명, 반월당 보현사 2000명 등 총 5000명이 3개 경로에서 출발하여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으로 집결하는 만세재현 거리행진을 펼친다. 이어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화합의 광장에서 10시 30분 100주년 3·1절 기념식을 개최하며, 12시에는 국채보상기념공원 종각에서 타종식이 이어진다. 이와 함께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일원에서는 17시까지 민족영웅 VR가상체험, 근대 대구풍경사진과 태극기역사 전시, 국채보상운동과 2·28민주운동 교육·홍보관, 독립선언서 탁본·태극기 바람개비 만들기 독립운동가 의상과 음식 체험, 대구여성 플래시몹, 서예 퍼포먼스 등 시민참여 프로그램이 다양하게 펼쳐진다. 이를 통해 대구시는 시민에게 우리지역 역사·문화 전통을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게 할 계획이다. 또 중구를 제외한 7개 구·군에서도 관내 지정 장소에서 만세재현 거리행진 등 기념행사를 개최하며, 두류공원 일원에서는 100주년 기념 마라톤대회를, 대구스타디움 일원에서는 장애·비장애인이 함께하는 어울림 자전거대회를 개최한다. 3월 이후에도 우국시인 현창 문학제, 상설문화관광프로그램, 명사초청 강연회,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포럼, 대구청년상화학교, 청년도시탐험대, 시민토론회, 호국보훈대상 시상 등의 다양한 기념사업이 시민 참여를 기다린다. 대구시는 앞으로 더욱 다양한 매체를 통해 기념사업 추진을 홍보하여 시민 참여를 확대하고 3?1운동 및 임정수립 100주년을 시민과 함께 기려 대구의 시민정신을 드높이고 시민에게 애국애족, 애향심을 고취할 계획이다. 권영진 대구시장은 “올 한 해가 뜻 깊은 3?1운동 및 임정수립 100주년이 될 수 있도록 많은 시민의 적극적인 관심과 자발적인 참여를 부탁한다”며, “일회성이 아닌 지속적으로 잘 관리하여 지역사랑, 나라사랑운동과 지역공동체 통합과 화합의 운동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지혜와 역량을 모아 나가 대구 역사의 전통을 대구시민이 인식할 수 있게 관련 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대구 한찬규 기자 cghan@seoul.co.kr
  • [색다른 인터뷰] “3·1독립선언, 현대적 관점서도 탁월한 동아시아 평화선언문”

    [색다른 인터뷰] “3·1독립선언, 현대적 관점서도 탁월한 동아시아 평화선언문”

    3·1 운동 100주년을 맞은 올해, 한국과 일본은 과거보다 더 높고 두터운 장벽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성난 얼굴로 응시하고 있다. ‘피해’와 ‘가해’라는 역사의 대척점에서 상대를 바라보는 방향과 관점이 극명하게 엇갈리기 때문이다. 두 나라 사이의 어두운 과거를 정리하고 발전적인 미래를 추구한다는 당위론적 명제는 갈등과 대립 속에 좀체 현실화하지 못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한·일 연구에 오랜 시간 천착해 온 도노무라 마사루(53) 도쿄대 교수(한국학연구센터장)를 지난 24일 도쿄 메구로구 고마바 캠퍼스 연구실에서 만나 100년 전 한국 독립선언과 만세운동의 의미와 발전적인 양국 관계를 위한 제언을 들어 봤다. 도노무라 교수는 지난해 국내 번역된 책 ‘조선인 강제연행’을 비롯해 활발한 저술활동을 펴고 있다.→오랫동안 일제강점기 한반도 연구를 해 오셨는데, 3·1 독립운동의 의미를 요약한다면. -3·1 독립선언은 현대적 관점에서 봐도 탁월한 내용이 담긴 동아시아 평화선언문이라고 할 수 있다. 군사력을 바탕으로 다른 나라를 강압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동양의 전통이 아닌데도, 일본이 조선을 힘으로 누르며 그 평화적 전통을 깨고 있음을 지적했다. 일본의 지배하에서는 조선 사람들이 행복해질 수 없기 때문에 독립을 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당시나 지금이나 3·1 독립선언서를 제대로 읽어 본 일본인은 거의 없다.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무엇을 주장하는지 알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아쉽다. →3·1 독립선언은 ‘우리 민족이 우리의 힘으로 살아가는 정당한 권리’를 특히 강조했는데. -독립선언서는 자신들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독립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밝히고 있다. 한국인들 스스로 자립의 길을 걷겠다는 선언이었다. 관련해서 일본이 한국을 기만해서는 안 된다는 점도 지적했다. 일본의 통치로 조선이 발전하고 있다는 일본 측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당시 일본은 철도와 도로가 놓이고 근대적인 학교와 병원이 세워지고, 농업생산이 늘었음을 통계적으로 보이며 조선 통치를 정당화하려고 했다. 그러나 독립선언서는 그것이 조선인이 추구하는 행복의 본질과는 무관한 것임을 강조했다. →당시 3·1 독립운동을 보는 일본 내 분위기는 어땠나. -일본 언론에서는 ‘천도교라는 미신을 믿는 불온한 사람들이 무지하고 어리석은 한국의 대중을 선동해 만세를 외친 사건’ 정도로 보도했다. 일본은 “천황(일왕) 아래에서는 일본인도 조선인도 평등하다”고 선전했지만, 그렇다면 왜 조선인들이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요구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3·1 운동은 일본에서 어떻게 기억돼 왔나. -식민통치 기간 중에도 3·1 운동을 기념하려는 움직임은 일본 당국의 거센 탄압 속에서도 지속됐다. 특히 당시 공산주의자들은 민족해방을 계급투쟁 혁명에서 매우 중요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해마다 3월 1일을 전후해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전단지 배포나 집회 개최 등을 시도했다. 일본 경찰들은 이것이 또 다른 민중운동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경계했고, 193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이에 대한 탄압이 한층 강화돼 거의 대부분 공공장소에서 3·1 운동을 기념하는 활동이 불가능해졌다. →1945년 일본의 패전 후에는 어땠는가. -전쟁이 끝나면서 3·1 운동을 기념하는 움직임이 되살아났다. 1947~48년 신문을 보면 재일 조선인들이 3·1 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모임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일본 진보진영에는 3·1 운동을 세계혁명을 위한 기념비적 사건으로 평가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를 전후로 과거 한국 식민지배 문제를 다시 돌아보게 된 일본인이 늘면서 3·1 운동이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조선의 독립에 대한 일본사회의 분위기는 어땠나. -일본이 근대화하는 과정에서 대다수 일본인들은 타국에 대한 식민지배에 찬성했던 것이 사실이다. 국민을 소중히 여기고 국민들의 생활을 최우선으로 여겨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1894년 청·일 전쟁 이후 제국주의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가 압도적으로 높아졌다. 1930년대 이후가 되면 대다수 일본 국민들이 침략전쟁을 적극 지지하게 된다. 하지만 침략에 대해 반대했던 사람들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주변국을 침략하는 것은 일본의 전통이 아니며, 소국주의와 평화주의를 견지해야 한다는 이념을 바탕으로 식민지배에 반대한 정치인과 언론인도 있었다. 물론 소수에 지나지 않았고 자기 주장을 드러낼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라는 한계는 있었다. 패전 후 조선에 대한 불평등한 지배 관계를 깨닫고 이를 반성하며 속죄 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했던 일본인들도 있었다. 이를테면 ‘식민자(植民者) 2세’로 불리는 한반도 출생자로 유명 소설가였던 가지야마 도시유키는 ‘이조잔영’과 같이 식민시대 조선의 아픔을 그린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최근 일본에서 과거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 분위기가 이전보다 약해졌다는 평가가 많다. -과거 ‘무라야마 담화’가 나오던 때는 물론이고 자민당의 하시모토 류타로, 오부치 게이조 총리 등 시절만 해도 과거사와 관련해 반성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자민당 소장파가 세력을 얻은 후에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역사수정주의 책들이 많이 나온 가운데, 1990년대 말 이후 보수우파의 현실참여 활동이 부쩍 늘어난 것 등도 이유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최근 한·일 관계 악화의 주된 이슈는 일제 징용 노동자에 대한 한국 법원의 배상 판결이다. 강제동원 문제는 어떻게 봐야 하나. -‘징용’이라는 말은 오해를 부를 수 있기 때문에 ‘전시노무동원피해자’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 조선인 노무동원의 피해는 매우 광범위하다. 직접 노동을 했던 당사자만이 아니다. 동원됐던 사람의 가족들, 강제동원을 피해 산골에 은신하느라 인간답게 못 살았던 사람들도 모두 피해자다. 특히 미쓰비시니 신일철이니 장소와 시기를 기억하고 있는 피해자들은 재판이라도 받을 수 있으니 다행인 경우다. 당시 조선은 학교교육을 받지 못해 일본어는 물론이고 한글조차 못 배운 사람이 대다수였다. 그렇다 보니 자신이 홋카이도에 있었는지, 규슈에 있었는지, 언제부터 언제까지 강제노동을 했는지를 전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소송을 제기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보상을 받을 수 없다. 어찌 보면 가장 큰 피해자일 수 있는 사람들이 재판 시도조차 못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피해까지 다 고려해 구제하려면 많은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한·일 관계 미래에 대해 한 말씀 하신다면. -일본에는 정치인이나 보수언론을 중심으로 한국의 3·1 운동 100주년 기념을 통해 일본에 대한 반감과 반일 행동이 강화될 것으로 우려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보다 3·1 운동은 동아시아의 평화를 응원하고 한국인들 스스로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벌인 독립운동이라는 점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일본의 중년 이후 세대에게 한국은 경제적으로 낙후되고 오랫동안 군사독재가 지배했던 나라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젊은 세대에게 한국은 경제적으로 잘사는 민주주의 국가로서 이미지가 강하다. 이는 미래 한·일 관계에 희망을 주는 부분이다. 글 사진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도노무라 교수는 누구 1966년 일본 홋카이도 출생. 와세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와세다대 사회과학연구소,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등을 거쳐 2007년부터 도쿄대 대학원 종합문화연구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전공은 일본근대사. 주요 저서와 논문으로 ‘재일조선인 사회의 역사학적 연구’(2010년 국내번역), ‘식민지 시기에 있어서 재일조선인의 문화활동’ 등이 있다.
  • 충주시 새 보훈회관 짓는다

    충주시 새 보훈회관 짓는다

    충북 충주시가 국가유공자와 유족들의 복지 향상을 위해 다양한 정책을 추진한다. 시는 보훈단체 회원들의 숙원사업인 충주보훈회관 건립이 추진된다고 25일 밝혔다. 지난해 이종배 국회의원이 확보한 국비 5억원과 지방비 등 총 38억원이 투입돼 지상 3층, 연면적 990㎡ 규모로 지현동에 건립될 예정이다. 위치는 노인복지관 근처가 좋다는 의견에 따라 결정됐다. 시는 올해 6월까지 건축설계용역을 완료하고 8월 착공한다는 계획이다. 시 관계자는 “사용중인 보훈회관이 낡아 새 부지에 신축하는 것”이라며 “8개 보훈단체 사무실과 회의실, 헬스장 등으로 꾸며질 예정”이라고 말했다.보훈예우수당 지급 대상자도 확대된다. 시는 이번에 공상군경 유족 중 배우자(65세이상), 특수임무 유공자, 보국수훈자(65세 이상)를 대상에 추가하기로 했다. 이를 위한 근거가 상반기에 마련되면 하반기부터 매월 5만원의 수당이 지급된다. 그동안 공상군경의 경우 본인만 수당을 받았다.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광복회원들의 중국 상해임시정부 현지 방문도 추진된다. 4월에는 신니면민 만세운동 기념행사와 독립의 횃불 전국 릴레이행사 재현에 동참한다. 동락전승지 조경공사 및 무공수훈자 공적비 개보수 등 현충시설을 정비하고 현충일 추념식, 6.25전쟁 첫 전승 기념행사 등도 열린다. 충주 남인우 기자 niw7263@seoul.co.kr
  • 이해찬 “3·1운동, ‘3·1혁명’으로 불러야”…명칭 변경 추진

    이해찬 “3·1운동, ‘3·1혁명’으로 불러야”…명칭 변경 추진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22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3·1운동·임시정부 100주년 기념특위 출범식에서 “3·1운동을 ‘혁명’이라 부르는 것이 맞다”고 말했다. 이해찬 대표는 이날 축사에서 “3·1운동은 대한제국에서 민주공화제로 바뀐 큰 가치의 전환이자 국가 기본의 전환”이라며 “한반도 모든 곳의 국민이 만세운동을 벌였기 때문에 ‘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겠다는 생각”이라고 밝혔다. 이 대표는 “올해는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일 뿐 아니라 앞으로 100년을 시작하는 첫해라 볼 수 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어 “앞으로 100년은 우리 민족이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으로,문화적으로 성숙하고 경제적으로 부강한 민족으로 나아갈 수 있는 100년”이라며 “분단체제를 극복해 한반도가 섬이 아니라 북방으로 나아가는 전초기지라는 나라의 성격을 잘 살려가는 100년을 만들겠다”고 강조했다.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선생의 손자인 이종걸 특위 위원장은 “특위의 목표는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의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라며 특위의 구체적인 사업 계획을 설명했다. 특위는 기존의 ‘3·1운동’ 명칭을 ‘3·1혁명’으로 변경하는 등 한국 독립운동사의 역사용어 정명(正名)에 나서고, 독립운동사를 매개로 북한과 교류하는 사업도 진행할 예정이다. 특위에는 이종걸 의원이 위원장으로, 강창일·우원식·권칠승·김정우·박경미·박주민·소병훈·전재수 의원 등 29명이 위원으로 참여했다. 고문으로는 이종걸 의원처럼 우당의 손자인 이종찬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건립위원회 위원장과 임채정·김원기 전 국회의장 등이 위촉됐다.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100초 인터뷰] “뮤지컬 ‘여명의 눈동자’는 잊지 말아야 할 이야기를 하는 것”

    [100초 인터뷰] “뮤지컬 ‘여명의 눈동자’는 잊지 말아야 할 이야기를 하는 것”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위안부 문제를 비롯해 강제 징용과 징병 등 뭐하나 제대로 정리된 것이 없다. 특히 친일 부역자 문제는 아직 손도 못 댄 상태인 것 같다. 이러한 문제들을 공론의 장으로 끌어내 진지하게 논의할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김용한(48) 영화감독이 뮤지컬 ‘여명의 눈동자’를 기획한 이유는 비장했다. ‘여명의 눈동자’는 김성종 작가가 쓴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뮤지컬로, 1943년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까지, 비극적인 한국 현대사를 다룬 대작이다. 영화 ‘돈 크라이 마미’(2012년)를 연출했던 김용한 감독이 이번 작품에서는 기획과 드라마트루기(작가나 연출가의 의도가 작품 속에서 잘 살아날 수 있도록 극작술적인 면에서 조언을 해 주는 것)를 맡았다. 김 감독의 뮤지컬 ‘여명의 눈동자’ 제작 출발점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다. 우연한 기회에 수요집회에 참가한 김 감독은 그 자리에서 “위안부 문제를 언젠가, 내가 어떤 형태로든 이야기해야겠다고 다짐했다”고 고백했다. 이후 그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 관련 이야기를 찾다가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가 떠올랐다”며 “평소 친분이 있던 변숙희 프로듀서와 노우성 연출가가 프로젝트 합류를 결정하면서, 그들과 함께 김성종 원작자와 송지나 각색자를 찾아다니며 어렵게 허락을 받았다”고 밝혔다. 1977년 10권으로 완성된 대하소설 ‘여명의 눈동자’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그리고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통한의 역사 속 젊은이들의 모습을 섬세하게 그려 많은 사랑을 받았다. ‘위안부’ 문제와 제주도 ‘4.3사건’, 해방전후 ‘이념대립’ 등 현대사의 민감한 문제들을 진정성 있게 건드린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다. 김 감독은 “당시 여자들은 위안소로, 젊은 남자들은 군대로, 그리고 어른들은 영화 ‘군함도’에 나온 것처럼 징용되고 수탈당했다. 이런 아픈 역사를 지금이라도 계속, 꾸준히 이야기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뮤지컬 제작 배경을 설명했다. 더불어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대본을 개발하면서 남북 간 좌우대립 역사를 보니, 3.1운동부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더라”며 “같이 만세운동을 했지만, 한반도 평화를 바랐던 두 이데올로기가 시작된 게 어쩌면 3.1운동부터라는 점, 이러한 좌우대립의 시작을 보여주고 싶은 욕심이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뮤지컬 ‘여명의 눈동자’를 “기억해야 할 이유, 상기시켜야 할 이유를 말하는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이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일본이 사과하겠나? 나는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10년 내외면, 할머니들이 모두 돌아가실 수도 있는 상황”이라며 흐르는 시간과 사과하지 않는 일본의 태도에 대해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그러면서 김 감독은 “‘여명의 눈동자’ 같은 작품을 통해 중요한 역사적 이슈가 반복되고, 이러한 문제를 지속적으로 기억하고, 상기시킨다면,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해결되리라는 바람을 갖고 있다”고 덧붙였다. 김 감독은 평소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은 편이라고 고백했다. 그러한 그의 경향은 청소년 성범죄를 화두로 내세운 2012년 작품 ‘돈 크라이 마미’로 드러난 바 있다. 작품을 통해 부조리한 현실과 부당한 사회적 시스템에 대해 세상에 질문을 던진 김 감독은, 성폭력 피해자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또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을 때 피해자와 그 가족이 겪어야 할 고통이 얼마나 큰지를 이야기했다. 그는 뮤지컬 ‘여명의 눈동자’를 마친 뒤, 친일파를 찾아 처단하는 SF장르영화를 준비 중이다. 이에 앞서 영화 ‘헝그리’ 촬영이 예정돼 있다. 김 감독은 “뮤지컬 ‘여명의 눈동자’를 잘 마무리하고, 기회가 되면 영화 ‘여명의 눈동자’를 만들고 싶다”는 소망을 전했다. 뮤지컬 ‘여명의 눈동자’는 2월 22일부터 4월 14일까지 두 달간 서울 신도림 디큐브아트센터에서 공연된다. 글 문성호 기자 sungho@seoul.co.kr 영상 박홍규, 문성호, 김민지 기자 gophk@seoul.co.kr
  • “3·1운동 기폭제 된 고종 승하 100주년 몰라 안타까워”

    “3·1운동 기폭제 된 고종 승하 100주년 몰라 안타까워”

    항일운동 구심점이던 고종 ‘日 독살설’ 백성들 공분… 장례일 계기로 3·1운동 당시 황제에게만 사용했던 경칭 ‘만세’ 국호와 더불어 ‘대한독립 만세’ 외친 것“올해는 고종 황제 승하 100주년이 되는 해다. 대개 3·1 만세운동 100주년인 것을 알면서도 만세운동의 도화선이자 기폭제가 된 고종황제 승하 100주년은 모르는 사람이 많다. 황사손(皇嗣孫·대한제국 황실의 적통을 잇는 사람)으로서 부끄럽고, 역사 교육이 부족한 점이 정말 안타깝다.”고종의 증손자인 이원(57·본명 이상협) 대한황실문화원 총재는 20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고종 사망 100주년 소회를 묻자 “만감이 든다”며 이렇게 답했다. 이 총재는 2005년 영친왕계인 이구 황태손(皇太孫·황제의 적장손)이 타계한 이후 양자로 입양돼 황가의 법통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제5대 대한제국 황실의 수장으로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총재도 맡았다. 또 조선시대 왕이 직접 참여한 종묘대제, 사직대제, 환구대제, 조경단대제, 조선왕릉 제향의 ‘초헌관’으로도 참여한다. 고종 황제는 1919년 1월 21일 오전 6시 30분쯤 사망했다. 건강하던 고종황제가 식혜를 마신 지 30분도 채 안 돼 심한 경련을 일으키며 사망해 일부 역사학자와 법의학자를 중심으로 일제에 의한 독살설이 제기됐다. 이런 소문은 전국으로 퍼져 나가 3·1 만세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고종의 후손인 이 총재는 이 독살설을 정설로 보고 있다. 그는 “고종 황제가 경운궁(현재의 덕수궁)에서 한약, 식혜, 커피를 마신 지 30여분 만에 시해됐다”며 “항일 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기에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역적 매국노들이 눈엣가시 같은 고종을 독살했다”고 견해를 밝혔다. 고종이 억울하게 죽으면서 대한제국의 자주독립을 염원한 백성의 공분을 일으켰고, 고종 장례일을 계기로 3·1 만세운동이 터졌다는 것이다. 이 총재는 “친일 역사학자들이 고종을 어리석은 군주로 묘사했지만, 최근에는 재조명되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대한독립 만세’라는 구호에 대해 그는 “요즘은 만세가 축하나 환호할 때 외치는 소리이지만, 그때만 해도 황제에게만 사용하는 경칭”이었다며 “국호가 ‘대한제국’이었으니 자연스럽게 ‘대한독립 만세’라고 외쳤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총재는 21일 오전 11시 30분 경기 남양주시에 있는 홍릉에서 ‘고종황제 100주기’ 제향을 거행한다. 홍릉은 고종과 명성황후를 합장한 무덤이다. 그는 “종묘대제와 종묘제례악처럼 사직대제, 환구대제, 왕릉제향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며 “고종의 주치의였던 호러스 알렌 박사의 후손들을 설득해 작년에 다 돌려받지 못한 유물들을 환수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 “올해는 3·1운동 기폭제 된 고종 승하 100주년…모르는 사람 많아 안타까워”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 “올해는 3·1운동 기폭제 된 고종 승하 100주년…모르는 사람 많아 안타까워”

    ‘황사손’ 이원이 말하는 고종 승하 100주년“올해가 고종광무태황제 승하 100주년입니다. 3·1만세운동 100주년인 것을 알면서도 만세운동의 직접적 도화선이 된 고종 황제의 붕어 100주년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황사손으로서 안타깝고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고종 황제는 1919년 1월21일 오전 6시30분쯤 일제에 의해 독살되셨습니다. 올해도 마찬가지이지만 해마다 이날 정오에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홍릉에 가서 제향을 봉행합니다. 고종 황제가 당시 독립운동의 구심점이었는데, 나라를 잘 못 이끌었다는 오해를 아직도 받고 있습니다. 역사교육이 잘 못된 점이 매우 안타깝습니다.” 21일 정오 고종 왕릉인 남양주서 ‘홍릉제향’ 봉행 그를 만나면 무엇부터 질문할까 고민했다. ‘군주국이 아닌 나라에서 황위 계승자 제1순위로서의 삶’을 먼저 물어볼까하다 ‘고종 사망 100주년의 소회’를 물었다. 황사손(皇嗣孫·(대한제국)황실의 적통을 잇는 후손) 이원(57·본명 이상협)은 20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만감이 교차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제5대 대한제국 황실의 수장으로, 사단법인 대한황실문화원 총재,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총재도 겸하고 있다. 고종의 증손자인 이원 총재는 2005년 영친왕계의 이구 황태손이 타계한 이후 3년상을 치르고 그의 계자(系子)로 입양돼 황가의 법통을 이어가고 있다.- 고종 황제의 승하 당시 어땠나요. -> 고종이 항일 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기에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역적 매국노들은 눈엣가시 같은 고종을 독살했든 겁니다. 1919년 1월 21일 아침 6시 경운궁(현재의 덕수궁)에서 한약·식혜·커피를 드시고 30여분만에 시해되셨습니다. ‘윤치호 일기’에 의하면 황제는 식혜를 마신지 30분도 안 되어 심한 경련을 일으켰고, 사후에 보니 혀와 치아가 타 없어지고, 30cm 가량 되는 검은 줄이 목 부위에서 복부까지 길게 나 있었으며, 온몸이 퉁퉁 부어올라 있었다는 것입니다. 독살됐다는 확실한 증거 기록입니다. “고종, 21일 아침 6시 한약·커피·식혜 마시고 승하심한 경륜 후…혀·치아 타 없어져 독살 시해 증거고종 시해 이유…항일독립 망명정부 차단하려고”- 고종 승하에 백성들은 왜 ‘만세(萬歲)’라고 외쳤을까. -> 만세가 요즘이야 축하나 환호할 때 외치는 소리이지만, 그때만 해도 황제에게만 사용하는 경칭이었고, 죽음이란 단어를 꺼렸습니다. 국호가 ‘대한제국’이었으니 자연스럽게 ‘대한독립 만세’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의 수장이었던 황제가 억울하게 독살당하자 대한제국의 자주독립을 염원한 백성들이 공분을 일으킨 것입니다. 고종의 항일 투쟁의 뜻을 기리는 백성들이 인산일(因山日·왕과 왕가의 장례일)인 3월 3일에 앞서 자발적으로 모여 만세를 외쳤던 것입니다. 인산일에 맞추려다 국장날 소요는 예가 아니다고 미루고, 전날인 3월2일은 일요일이어서 하루 늦췄다고 합니다. 결국 1일로 날짜가 맞추진 것이 3·1독립만세운동입니다. - 고종의 독립운동 가운데 일반인이 잘 모를 법한 이야기는. ☞ 고종 황제는 1897년 황제국을 선포한 것도 지금보면 여러모로 의미있는 일입니다.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을 1894년 갑오개혁때 공식적인 국문 즉 ‘나랏글’로 선포하셨습니다. 이는 근대 문명의 초석이 된 겁니다. 한글을 이용한 잡지와 신문 발간도 적극 권장했지요. 서울신문 전신인 대한매일신보도 출간도 가능했던 겁니다. 또 일본보다 2년 빠른 1884년 미국 에디슨전기회사와 협약해 창덕궁에 전기등소를 설치하고 종로에 전차를 도입했습니다. 종로를 아시아에서 가장 번쩍이며 화려한 명소로 탈바꿈시키셨던거죠. 친일역적 매국노들이 고종 황제를 철저히 암군(暗君·어리석고 아둔한 군주)으로 묘사했지만 최근 학자들에 의해 개명군주(開明君主)로서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고종, 한글 공식 나랏글 선포…개명군주 역할 많아대한광복군정부 수장…항일 구국 독립운동 구심점- 대한광복군정부에 대해 설명하면. ☞ 고종 황제는 1907년 헤이그밀사 사건으로 황위에서 강제로 퇴위되셨습니다만 1914년 이상설(1871~1917)을 중심으로 설립된 첫 망명 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의 수장이 되어 항일구국 운동을 지원하셨습니다. 대한광복군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정규군으로, 다시 대한민국국군의 모체가 됩니다. 간접적인 독립활동에 한계를 느끼신 황제는 이상설과 이회영(1867~1932)의 계획 아래 중국에 망명해 항일구국 독립투쟁을 적극적으로 주도하려 하셨습니다. 이런 망명 계획을 첩보로 입수한 조선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와 민병석·송병준·이완용·윤덕영·한상학이 고종의 망명을 차단하려고 암살을 한 겁니다. - 군주국이 아닌 공화국에서 황사손의 역할은. ☞ 가장 대표적인 직무는 종묘대제·사직대제·환구대제(대한제국 황실 선포 및 국태민안 기원 제사)·조경단대제(조선왕실 시조 즉 전주이씨 시조묘 제사) 그리고 연중 66회의 왕릉제향의 초헌관(初獻官)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쉽게 설명하면 연간 70번 거행되는 제사에서 왕과 왕비 신위에 술잔을 처음으로 올리는 제관 역할을 하는 겁니다. 왕실 초헌관은 조선시대 때부터 국왕이 그 역할을 했습니다만 이구 황태손 저하를 이어 제가 그 역할을 다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조선왕실과 대한제국황실의 그 유구한 역사·문화적인 유산을 지금도 계승하고 있으며, 대한제국황실이 그 정통성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공화국이 된 나라에서 황제 계승자라는 직위는 다른 분들에겐 사실 설명하도 이해를 잘 못하는, 그래서 외로운 면이 있습니다. “황사손 역할, 연중 70회 대제·제향 초헌관 맡아유구한 역사 계승…대한민국 정통성 뒷받침 자부”- 황실 최고령인 이해경씨 환국은. ☞ 제게는 고모님이 되시는 해경 황녀님은 1930년 태어나셨서 올해 구순이 됩니다. 고종 황제의 다섯째 왕자이신 의친왕(1877~1955)의 5녀입니다. 조선왕실 법도로 보면 의친왕의 공주가 되고, 대한제국 황실 법도로 보면 황녀가 됩니다. 1956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신 이후 뉴욕 컬럼비아대학에서 한국학 사서로 조선의 기록을 많이 발굴해 내셨습니다. 1996년 정년퇴직하신 이후 뉴욕의 한 아파트에서 홀로 거주하고 계십니다. 뉴욕의 한인사회 주요 행사에 참석하시며 교민들에게 정신적 구심점이 된다 들었습니다. 뉴욕에서는 황녀라는 호칭보다 ‘한국 공주님’이라는 애칭으로 불리고 계십니다. 독립한 조국이 있는데 이역만리에서 홀로 생활하시는 게 너무 마음에 걸립니다. 더 늦기 전에 환국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환국시 친모이신 의친왕비가 생활하셨던 안동별궁이나 사동궁이 좋겠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습니다. 황실의 상징성을 고려해 이구 황태손 저하와 영친왕비, 그리고 덕혜옹주께서 기거하셨던 창덕궁 낙선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 황사손으로 보람을 느꼈던 일은. ☞ 2017년과 작년 미국 수도 워싱턴D.C에 있는 스미스소니언박물관 관계자들과 오하이오주에 사는 고종 황제의 주치의였던 호러스 알렌 박사 후손들을 만났습니다. 제가 소개되자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관계자들은 저를 ‘His Imperial Highness’(저하)로 경칭해 놀랐습니다. 또 알렌 박사의 고향에선 ‘한국의 황태자가 온다’는 소문에 알렌 박사의 증조카 며느리의 집에 동네사람들이 저를 만나려 몰려왔습니다. 그들도 저를 ‘Your Highness’로 높여 불러주었습니다. 한 이웃은 오찬 음식점까지 자신의 자녀들을 데려와 소개시켜주면서 “오늘 한국의 황태자를 알현하는 것은 저희 가족에게는 큰 영광이 됩니다”라고 했습니다. 대한제국 황실의 수장으로서의 뿌듯한 마음을 갖게 됐고 또한 큰 위로도 받았습니다. 황사손에 대한 마땅한 영어가 없어 고민하던 차에 해외왕실교류수석위원이신 김영관 박사는 제1위 황위 계승자이니 영어로 ‘The Crown Prince His Imperial Highness’(황태자 저하)로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고, 현재 영어로는 그렇게 호칭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8월 알렌 후손들로부터 환수된 문화재는 서울시에 기증하였습니다. “황실 최고령 이해경 황녀, 늦기 전에 환국해야사직대제·환구대제·왕릉제향 유네스코 등록 추진”- 앞으로 중점적으로 추진할 계획은. ☞ 올해는 특히 국민을 섬기며 대한민국의 문화 융성에 이바지하려고 합니다. 종묘대제와 종묘제례악이 200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된 가장 큰 이유는 역사·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은 것입니다. 즉, 민주공화정에서도 종묘에 모셔진 역대 왕과 왕비의 직계손이 제향에 초헌관으로 참여함으로서 그 뿌리와 원형이 인정될 수 있었다는 겁니다. 사직대제와 환구대제 그리고 왕릉제향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수 있도록 올해도 지속적인 노력을 이어갈 계획입니다. 뉴욕한인축제나 에딘버러축제에서 어가행렬을 재현하는 행사도 계획하고 있습니다. 종묘제례악이나 어가행렬은 단순한 제례의식의 절차를 뛰어 넘어 대한민국만이 보유한 역사·종교·문화 유산으로서 그 가치가 지대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대한민국 청소년들은 우리의 역사문화 유산에 큰 자부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또 알렉 박사의 후손들을 올해 직접 방문해 작년에 환수하지 못한 나머지 유물 환수와 숨겨진 역사적 사실들은 발굴할 계획입니다. 이런 여정을 영상으로 남길까합니다. 그는 황사손이라고 하지만 궁궐이 아니라 서울 성북동의 한 아파트에 산다고 했다. 황사손이 되기 전에는 그도 평범한 샐러리맨이었다. 1962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상문고와 뉴욕공과대(NYIT)를 마치고 미국 케이블사 홈박스오피스(HBO)의 PD로 일하다 1990년 귀국했다. 금강기획을 거쳐 현대방송 PD, 현대홈쇼핑 디지털방송본부장으로 있다가 황사손으로 선정됐다. ‘직장인으로 승승장구했는데, 미련이 많겠다’고 하자 그는 “하늘의 부름이죠”라며 말끝을 흐렸다. 글·사진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김기중 기자의 책 골라주는 남자] 임정 수립 100주년 역사서 옥석 가리기

    올해는 3·1 만세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정부에서 지난해부터 기념사업회를 만들어 분위기를 띄우고 있습니다. 출판계도 최근 여기에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말부터 관련 서적이 간간이 보이더니, 최근에는 인문·사회 분야뿐 아니라 어린이 책과 소설 분야에서 활발히 책이 나옵니다. 관련 정보는 물론 일제강점기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직접 좇은 책, 독립운동가를 소재로 한 소설 등이 눈에 띕니다. 책을 접하면 우선 반갑다는 생각이 듭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솔직히 지난해까지만 해도 다들 별 관심 없었으니까요. 다양성 측면에서 이런 책은 많이 나와야 합니다. 다만, 최근 경향에 맞춰 이벤트성으로 낸 책들도 눈에 보입니다. 역사는 역사가만 다루라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조사하지 않고 불분명한 사실을 마치 사실인 양 기술하거나 왜곡하는 일, 제대로 된 조사 없이 자료를 마구 짜깁기해 책으로 내놓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게다가 이런 책일수록 재미가 없고 구성도 투박합니다. 이벤트에 맞춰 급하게 내놓으려면 자료 조사도 미흡했을 것이고, 당연히 재미가 떨어질 겁니다. 기본적인 사실이 어긋나고 주장을 내세우면서 결국 엄숙하고 비장하라고 강요합니다. 장기적으로 볼 때, 독자들은 이런 분야 자체에 등을 돌릴 가능성이 큽니다. 지난주 읽었던 ‘베를린, 기억의 예술관’(반비)은 역사를 어떻게 다루느냐를 보여 준 책이었습니다. 도시 전체가 예술관이라 불리는 독일 베를린시의 역사 기억 방식을 보여 주는 조형물들을 소개하는 책입니다. 조형물, 광고물 하나에도 오랜 기간을 들인 까닭에 굉장히 세련된 느낌을 줍니다. 버스 광고 형식으로 소개한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에 관한 정보라든가, 2700여개가 넘는 유대인 추모비 등은 직접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단지 100주년이어서, 그저 광풍처럼 한 번 쓸고 가는 게 아니라 오래 노력하고 공들인 책을 만나고 싶습니다. 다행히 출판사 몇 곳이 이런 책을 준비 중이라 하니, 책골남이 옥석을 골라 다음 기회에 소개하겠습니다. gjkim@seoul.co.kr
  • 애국지사 박영관 선생 생가·공적비 국가현충시설 지정

    전북폭발단사건의 주역 박영관 선생의 생가 등이 국가 현충시설로 지정돼 관리된다. 전북 고창군은 무장면에 있는 애국지사 송와 박영관(1899∼1975) 선생의 생가와 공적비가 국가 현충시설로 지정됐다고 11일 밝혔다. 박영관 선생은 일제 강점기인 1919년 3월 고창 무장읍내 만세운동을 주도했고 독립운동 군자금을 모아 상해 임시정부로 전달한 독립운동가다. 일제의 ‘동양척식 이리지� � 습격을 모의하다 발각돼 모진 고문을 받기도 했다. 조국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친 공을 인정받아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현충시설로 지정되면 국가가 관리비, 보수비 등을 지원한다. 전주 임송학 기자 shlim@seoul.co.kr
  • 유관순 열사 서훈 격상 재추진

    유관순 열사 서훈 격상 재추진

    청와대 청원·설명회… 상훈법 개정 각오 행안부 “영속성 상실… 재심할 수 없다”3·1독립운동의 상징 유관순 열사(1902~1920)의 낮은 국가서훈 등급이 도마에 올랐다. 이승만(1875~1965) 초대 대통령, 대만 초대 총통 장제스(蔣介石)와 부인 쑹메이링(宋美齡)의 1등급에 비교된다. 9일 충남도와 천안시 등 유 열사의 고향 자치단체에 따르면 3·1운동 100주년인 올해 서훈 격상 작업을 벌이기로 했다. 충남도는 다음달 28일 천안에서 열리는 3·1만세운동 재현 행사에서 대정부 및 국회 설명회를 열어 서훈 상향을 위한 사회적 공감대를 이루고 등급 조정을 막는 상훈법 개정을 이끌겠다고 벼른다. 350억원을 들여 천안 열사기념공원에 3·1운동 기록 보존을 위한 ‘3·1평화운동 백년의 집’도 짓는다. 조경찬 도 주무관은 “지난해 5월 열사 기념사업회가 청와대 국민청원에 서훈 격상을 바라는 글을 올렸는데 노년층으로선 접근에 장벽을 느껴 3만 1255명에 그쳤다. 많이 모일 때 직접 서명을 받겠다”고 말했다. 이혜훈(서울 서초갑·바른미래당) 의원이 사업회장이던 2014년, 제향 때 대통령 헌화에서 빠진 데 의문을 품으면서 운동이 촉발했다. 김은혜 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은 “전국 학생을 설문했는데 유 열사를 고향인 천안에서만 아는 정도여서 놀랐다. 이젠 교과서에도 빠져서인지 잘 모르더라. 그래서 유 열사는 왜 3등급이냐고 행정안전부와 국가보훈처에 따졌다”고 덧붙였다. 대통령 헌화도 2등급 이상이어야 한다. 행안부 관계자는 “지금 못마땅하다고 해서 시대 변화에 따라 달리 가치를 매기면 서훈의 영예·영속성을 잃는다. 현 시점에서 다시 심사하는 게 있을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현재 상훈법 개정안 4건이 국회에 발의돼 있으나 상임위 심사조차 없다. 충남도 관계자는 “서훈을 받은 1962년엔 여성인 점과 정치적인 면에서 영향을 끼치지 않았겠느냐. 2등급을 받았다가 지난해 친일행위 인정으로 박탈된 동아일보 창업자 김성수 등 여러 사례로 볼 때 꼼꼼하게 등급을 결정했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홍성 이천열 기자 sky@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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