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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체장 동정] 임병택 시흥시장, 드론복합교육훈련센터 설립 업무협약식 참석

    [단체장 동정] 임병택 시흥시장, 드론복합교육훈련센터 설립 업무협약식 참석

    임병택 경기 시흥시장은 14일 시청 다슬방에서 한국교통안전공단과 함께 드론복합교육훈련센터 설립을 위한 업무협약식에 참석했다. 이번 협약식은 드론 복합교육훈련센터 인프라를 구축해 드론 관련 산업 활성화를 위한 공동 협력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마련됐다. 시는 드론 복합교육센터 구축에 필요한 부지를 제공하고 인프라 조성과 인허가 행정지원 등 사업 수행에 필요한 제반 편의사항을 제공할 예정이다. 드론복합교육센터는 내년 상반기 준공을 목표로 오는 하반기 착공한다. 이어 임 시장은 오후 4시부터 매꼴공원에서 열리는 독립지사 장수산 기념 제막식에 참석했다. 시는 3·1만세운동에 참여해 국가로부터 훈·포상을 받은 독립지사 5인 기념비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해 김천복 지사 기념비를 죽율동 생금어린이공원에 건립했고 올해 윤동욱 지사 기념비를 건립한 바 있다. 세 번째로 기념비가 건립되는 장수산 지사는 군자면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계획해 ‘비밀통고’라는 제목의 격문을 장곡·장현·월곶리에 전달하다 사전에 발각돼 일제에 체포됐다. 지난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됐다. 이명선 기자 mslee@seoul.co.kr
  • [서울포토] 서울 중앙고에 열린 ‘6.10 만세운동 기념식’

    [서울포토] 서울 중앙고에 열린 ‘6.10 만세운동 기념식’

    10일 서울 중앙고등학교에서 열린 6.10 만세운동 기념식에 참석한 학생들이 당시를 기리며 만세를 외치고 있다. 2019.6.10 박지환 기자 popocar@seoul.co.kr
  • 감사·화합·단결… 호국보훈 되새기는 영등포

    서울 영등포구가 6월 한 달을 추모의 기간으로 지정하고 호국보훈을 되새기는 다양한 추념 행사를 개최한다. 영등포구는 보훈 의식과 애국정신을 고취하고 나라를 위한 숭고한 희생과 헌신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11일부터 20일까지를 ‘감사의 기간’, 21일부터 30일까지를 ‘화합과 단결의 기간’으로 정했다. 21일에는 롯데시네마 영등포점에서 보훈단체와 함께하는 문화행사를 연다. 평소 문화생활이 어려운 국가유공자를 위해 영화를 상영하며 문화 향유의 기회를 확대한다. 이어 평화의 메시지 퍼포먼스가 25일 당산공원에서 열린다. 이는 보훈단체 회원들과 주민들이 모여 화합을 도모하는 자리로, 퍼포먼스 내용은 당일 공개돼 주민들에게 큰 울림을 선사하게 된다. 감사의 기간에는 학생들의 편지를 국가유공자들에게 전달하는 시간을 마련했다. 초등학생들이 직접 편지를 써 국가유공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고 애국심을 드높인다. 6월 한 달간 구청과 동주민센터로 전화 연결 시 호국보훈 관련 멘트가 흘러나온다. 주민들이 통화연결음을 들으며 숭고한 희생을 기릴 수 있도록 추진하는 것이다. 아울러 지역 보훈지도를 제작해 초·중·고교, 복지시설 등에 배포한다. 영등포 지도에 반공순국용사 위령탑, 만세운동을 펼쳤던 장소 등을 표시 및 소개해 주민들의 역사의식을 고취시킨다. 채현일 구청장은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그들의 고귀한 희생을 잊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라면서 “영등포구에서는 국가유공자가 존경받을 수 있는 보훈 문화 확산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강국진 기자 betulo@seoul.co.kr
  • 여성해방 진두지휘, 6·10만세운동 주도…파란만장했던 ‘최고 미인’

    여성해방 진두지휘, 6·10만세운동 주도…파란만장했던 ‘최고 미인’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로 대표적인 인물은 이동휘(대통령장,1995년) 선생이다. 2005년 3·1절에 몽양 여운형(대한민국장) 등 사회주의 계열 54명에게 건국훈장이 추서되는 등 2007년까지 다수의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이 훈장을 받았다. 그중에 주세죽이 있다. “남로당 총책 박헌영의 부인. 코뮤니스트. 당대의 ‘얼짱’. 3·1만세운동과 6·10만세운동에 참여한 항일투사. 여성해방운동가.” 주세죽의 일생은 파란만장하고 비극적이다. 주세죽에 대한 언급은 금기시돼 왔다. 수년 전 손석춘 작가의 ‘코레예바의 눈물’과 조선희 작가의 ‘세 여자 이야기’를 통해 생애가 알려졌다. ‘코레예바의 눈물’은 손 작가가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로 여행을 갔다가 발견한 주세죽의 자필 기록을 토대로 쓴 소설이다.주세죽은 함남 함흥에서 태어났다. 호적상으로는 1901년생이다. 중농 집안에서 태어난 주세죽은 영생여학교 고등과에 다녔고 피아노 실력이 출중했다고 한다. 1919년 3월 3일 함흥 장날,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주세죽도 참가했다가 붙잡혔다. 한 달 동안 입에 담기 어려운 모멸적인 성고문을 받고 출소했다. 풀려난 주세죽은 함흥 시내 병원에서 간호 보조원으로 일했다. 일본인 의사의 성추행에 또다시 진저리를 친 주세죽은 중국 상하이 유학을 결심했다. 그곳에는 한 살 아래 친구 허정숙이 먼저 가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피아노를 공부하러 간 상하이에서 주세죽의 운명은 바뀌게 된다. 허정숙의 소개로 박헌영을 만났다. 박헌영, 김단야 등은 주세죽이 오기 한 달 전인 1921년 3월 고려공산청년회를 결성했다. 박헌영은 책임비서였고 주세죽도 고려공청에 가입해 기관지 ‘올타’를 편집하는 등 사회주의 활동을 벌였다.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동지들이 참석한 가운데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박헌영을 뒤따라 주세죽은 1922년 3월 조국으로 돌아왔다. 조국에서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을 벌이겠다는 의지에 불타 있었다. 먼저 갔던 박헌영과 허정숙의 남편 임원근, 김단야는 귀국 정보를 알아낸 일경에 체포되고 말았다. 세 사람은 각각 징역 1년 6개월 형을 받고 평양형무소에 수감됐다. 주세죽은 여성해방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당대 조선 최고의 미인으로 통했다. 박헌영의 친구인 소설가 심훈은 대리석으로 깎은 얼굴이라고 했다. 주세죽을 모델로 ‘동방의 애인’이라는 소설도 썼다. 주세죽, 허정숙, 김단야의 동거녀 고명자를 당시 언론은 여성 트로이카라고 불렀다. 박헌영, 김단야, 임원근은 남자 삼총사였다. 주세죽과 허정숙은 반봉건, 여성해방의 뜻으로 단발머리를 했다. 주세죽은 허정숙, 정종명 등과 함께 1924년 5월 서울 천도교회관에서 조선여성동우회 창립총회를 열었다. 여성 노동자들의 인권 향상을 위한 조직이었다. 고무공장, 비단공장, 정미소를 찾아다니며 강연회와 토론회를 열었다. 여성 항일운동단체 근우회에도 동참했다. 1925년 5월 조선공산당이 출범했다. 조선공산당을 추동할 조직인 고려공산청년회도 창립했다. 박헌영이 고려공청 책임비서를 맡았고 주세죽은 후보위원이 되었다. 그러나 그해 11월 우발적인 술자리 사고로 조직이 탄로 났다. 김단야만 피신했고 주세죽, 박헌영, 임원근, 허정숙이 검거됐다. 주세죽은 증거 부족으로 한 달 만에 풀려났다. 순종의 국장일인 1926년 6월 10일, 주세죽은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또 보름 만에 풀려났다. 주세죽은 만세운동을 기획한 공청 중앙위원이었지만, 박헌영이 아니라고 보호했기 때문이다. 박헌영은 심한 고문을 받았고 정신이상자가 됐다. 그러나 이는 위장이었다. 박헌영은 병보석으로 석방됐다. 주세죽과 박헌영은 요양을 이유로 함흥으로 간 뒤 소련 블라디보스토크로 배를 타고 탈출했다. 임신한 주세죽은 도착하자마자 딸 영(影)을 낳았다. 1928년이었다. 그해 11월 두 사람은 시베리아 횡단 철도로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김단야가 먼저 가 있었다. 김단야는 코민테른(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조선담당관이었다. 주세죽은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박헌영은 국제레닌학교에 입학했다. 박헌영은 주세죽에게 ‘코레예바’라는 러시아식 이름을 지어줬다. 고려의 여성이라는 뜻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두 사람은 1932년 초 딸을 국제유아원에 맡겨놓고 상하이로 갔다. 영에게 ‘비비안나’라는 다른 이름을 지었다. 상하이에서 주세죽은 박헌영과 조선공산당 활동을 지원하고 기관지를 국내로 들여보냈다. 이듬해 7월 박헌영은 체포됐다. 그 사이 주세죽과 김단야는 도망쳤다. 김단야는 박헌영이 고문으로 죽었다고 말했다. 주세죽을 연모한 김단야의 거짓말이었다. 그러고는 사랑을 고백했다. 둘은 1934년 1월 모스크바로 돌아갔다. 박헌영이 죽었다고 믿은 주세죽은 김단야와 결혼했다. 1937년 소련은 일제의 스파이라는 혐의를 씌워 김단야를 체포했다. 이성태란 사람의 모함이었다. 이듬해 2월 13일 석 달 만에 사형이 집행됐다. 주세죽도 5년 유배형을 받았다. ‘제1급 범죄자의 아내로서 사회적 위험분자’라는 죄목이었다. 1938년 5월 주세죽은 유배지 카자흐스탄으로 떠났다. 김단야와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은 유배지에 도착하자마자 병에 걸려 죽었다. 유배지 크질오르다는 사할린에서 활동하던 홍범도 장군이 강제이주를 당한 곳이기도 하다. 광복 후 지하에서 활동하던 박헌영은 월북한 뒤 1946년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주세죽은 프라우다지에 난 기사를 보고 박헌영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당시 18세이던 비비안나에게 아버지임을 알렸다. 박헌영은 주세죽이 유배된 사실을 알고 최대한의 배려를 요청했다. 주세죽은 그다음 날 거주 제한이 풀렸다. 박헌영은 비비안나를 만났다. 그러나 주세죽을 만날 의사는 없었다. 주세죽은 스탈린에게 조선으로 보내달라는 청원서를 보냈다. 스탈린은 거부했다. 주세죽은 딸에게로 가다 병에 걸려 숨을 거두었다. 휴전 회담이 한창이던 1953년 나이 52세 때였다. 두 남자를 똑같이 사랑한다는 말을 남겼다. 박헌영은 김일성에게 미제의 간첩으로 몰려 3년 후 죽임을 당했다. 주세죽의 첫 남편은 미제 스파이, 두 번째 남편은 일제 스파이로 몰려 죽은 것이다. 허정숙은 북한 문화선전상, 최고인민회의 부의장, 남북적십자회담 대표 등을 지내고 1991년 89세로 사망했다. 고명자는 일제의 고문으로 원치 않는 전향을 했다가 친일적인 글을 쓰기도 했고 6·25 전쟁 중에 사망했다.1989년 소련 당국은 주세죽과 김단야를 사면했다. 1991년 박비비안나는 한국을 방문했다. 박헌영의 고향 충남 예산에서 가져간 흙을 주세죽의 묘비에 뿌려줬다. 비비안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무덤이라도 있는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행복한 편입니다.” 비비안나는 무용수와 대학교수로 활동하다 2013년 사망했다.우리 정부는 2007년 주세죽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김단야에게는 독립장을 추서했다. 임원근은 앞서 1993년 애국장을 받았다. 중국 태행산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사망한 윤세주(독립장)와 진광화(애국장)도 건국훈장을 받았다. 님 웨일스 ‘아리랑’의 실제 주인공 김산(장지락)에게도 2005년 애국장이 추서됐다. 그러나 아직도 복권되지 못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이 많다. “‘빨갱이’에게 무슨 훈장이냐”는 우파의 공격을 받고 있다. 전쟁과 분단을 겪은 현실에서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이념의 무덤에서 독립유공자를 파내는 일을 멈춰선 안 된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항일 투쟁 신돌석 장군 고향서… 새달 1일 ‘의병의날’ 행사

    구한말 경북 북부·동해안을 무대로 항일의병투쟁을 벌이며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태백산 호랑이’ 신돌석(1878∼1908) 장군의 출생지인 경북 영덕에서 올해 ‘의병의날’ 기념행사가 열린다. 영덕군은 ‘제9회 대한민국 의병의날’ 공식 기념행사를 다음달 1일 영덕 축산면 도곡2리에 있는 신돌석 장군 유적지에서 개최한다고 22일 밝혔다. 올해 의병의날 기념행사 개최지 결정은 3·1독립만세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전국 지자체 공모로 이뤄졌다. 대한민국 의병의날은 정부 법정기념일로 2010년부터 해마다 6월 1일 기념행사를 한다. 이번 기념행사는 의병 정신을 기리는 기념식과 다양한 부대행사, 전시·체험행사로 펼쳐진다. 사회는 독도 지킴이로 유명한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가 맡는다. 영덕군이 1999년 사업비 19억원을 들여 조성한 신돌석 장군 유적지(부지 1만 8531㎡)에는 생가 복원과 함께 목조 와가로 교육관과 사당인 충의사 등의 건물이 세워졌다. 한편 서 교수는 올해 의병의날을 앞두고 영덕군의 역사 유적지를 탐방할 참가자를 모집한다. 다음달 1일 오전 서울에서 출발해 영덕에서 진행하는 의병의날 기념식에 참가한 뒤 역사탐방을 하고 다시 올라오는 코스다. 비용은 무료이며, 참가 희망자는 이름과 전화번호,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계정, 참가자 수를 작성해 메일(cby-jd@daum.net)로 보내면 된다. 개인과 아이를 동반한 가족이 신청할 수 있다. 영덕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6월 1일 ‘의병의 날’ 기념행사…영덕 신돌석장군 유적지서

    6월 1일 ‘의병의 날’ 기념행사…영덕 신돌석장군 유적지서

    경북 영덕군은 ‘제9회 대한민국 의병의 날’ 공식 기념행사가 다음 달 1일 영덕 신돌석(1878∼1908) 장군 유적지에서 개최된다고 21일 밝혔다. 올해 의병의 날 기념행사 개최지 결정은 3·1독립만세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전국 지자체 공모를 통해 이뤄졌다. 대한민국 의병의 날은 정부 법정기념일로 2010년부터 해마다 6월 1일 기념행사를 갖고 있다. 이번 기념행사는 의병 정신을 기리는 기념식과 다양한 부대행사, 전시·체험행사로 펼쳐진다. 특히 기념식은 유공자 표창수여·기념사·추모사·헌시낭독·의병의 노래 합창 등 순으로 진행된다. 사회는 독도 지킴이로 유명한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가 맡는다. 기념식 전날인 31일엔 큰별샘으로 유명한 최태성씨가 예주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에서 ‘영덕 의병역사 토크 콘서트’라는 제목으로 의병 역사를 강의한다. 영덕이 고향인 신돌석 장군은 명성황후시해사건과 을사늑약 이후 경상도와 강원도 일대에서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준 의병장이다. 한편 서 교수는 올해 ‘의병의 날’을 앞두고 영덕군의 역사 유적지를 탐방할 참가자를 모집한다. 6월 1일 오전 서울에서 출발해 영덕에서 진행하는 ‘의병의 날’ 기념식에 참가한 뒤 역사탐방을 하고 다시 상경하는 코스다. 비용은 무료이며, 참가 희망자는 이름과 전화번호, SNS 계정, 참가자 수를 작성해 메일(cby-jd@daum.net)로 보내면 된다. 개인과 아이를 동반한 가족이 신청할 수 있다. 영덕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달콤한 사이언스]국내서만 14만명 사망자 낸 스페인독감 원인 알고보니…

    [달콤한 사이언스]국내서만 14만명 사망자 낸 스페인독감 원인 알고보니…

    1918년 초여름 프랑스에서 주둔하던 미군 병영에서 때아닌 독감환자가 발생했다. 일반적인 감기증상과 비슷해 보여 별로 주목을 끌지 못했지만 그해 8월 첫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 때부터 빠르게 퍼지기 시작해 유럽을 휩쓸었고 1차세계대전에 참전했던 미군들의 귀환으로 미국까지 확산됐다. 1918년부터 1920년까지 2년 동안 전세계에서 2500만~5000만명이 죽었고 3·1만세운동이 일어나기 직전 겨울부터 1919년까지 740만명이 감염됐고 이 중 14만명이 사망했다. 14세기 유럽을 휩쓸었던 페스트로 인한 사망자보다 더 많은 사망자가 발생해 인류 최악의 재앙으로 불리며 전 세계를 공포에 떨게 만든 바로 ‘스페인 독감’이다. 문제는 발병 당시 바이러스를 분리해 보존하는 기술이 없어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2005년 미국 연구팀이 어렵게 스페인독감 바이러스를 분리해 A형 독감의 일종이었다는 사실을 밝혀냈지만 강한 독성의 원인과 메커니즘이 밝혀지지는 않았었다. 이런 가운데 연세대 생명공학과 성백린 교수, 건국대 의학전문대학원 김균환 교수 공동연구팀이 스페인 독감의 독성 원인과 메커니즘을 규명했다고 29일 밝혔다. 이번 연구결과는 생물학 분야 국제학술지 ‘엠보저널’ 최신호(4월 12일자)에 실렸다.연구팀은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를 구성하고 있는 단백질 중 ‘PB1-F2’에 돌연변이가 있다는 것에 주목했다. 이를 분석한 결과 돌연변이 PB1-F2 단백질이 인체의 항바이러스 역할을 하는 인터페론 베타를 차단해 사망에 이르게 할 정도로 바이러스의 독성을 증가시킨다는 것을 밝혀냈다. 구체적으로는 돌연변이 PB1-F2 단백질은 인터페론 신호전달에 관여하는 필수단백질인 DDX3를 분해시켜 인터페론 베타가 분비되는 것을 막는다. 또 연구팀은 PB1-F2 단백질의 68번째와 69번째 아미노산에 생긴 돌연변이가 이러한 특징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도 확인했다. 김균환 건국대 교수는 “이번 연구는 스페인 독감의 새로운 병인 기전을 밝혀낸 것으로 새로운 형태의 고(高)위험성 인플루엔자 치료제 개발에 응용될 수 있을 것”이라며 “특정 위치의 돌연변이가 스페인 독감 같은 고위험성 바이러스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알아낸 만큼 이런 고위험군 바이러스를 조기엑 검출하고 예측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성백린 연세대 교수도 “스페인 독감은 인류가 경험한 감염성 질환 중 최악의 사례로 최근 스페인 독감과 유사한 유전적 변이와 중증 감염을 유발시키는 바이러스들이 나타나고 있는 상황에서 이번 연구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설명했다. 유용하 기자 edmondy@seoul.co.kr
  • 김해시 지역 독립운동 현장 4곳에 표지석 설치

    김해시 지역 독립운동 현장 4곳에 표지석 설치

    경남 김해시는 26일 김해3·1독립운동기념사업회와 함께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지역 독립운동 발원지와 독립운동가 생가 등에 표지석을 설치했다고 밝혔다. 시는 지난달 28일 한림면을 시작으로 같은달 31일 진영전통시장, 지난 13일 장유무계시장, 지난 15일 동상시장에 각각 독립운동 표지석을 설치하고 제막식을 했다.독립운동 표지석은 가로 80㎝, 세로 90㎝, 높이 150㎝ 규모로 본체는 화강암, 받침대는 오석으로 만들었다. 표지석 전문에는 만세운동을 이끈 독립운동가들의 이름과 공적, 만세운동 과정 등을 새겼다.김해지역에서는 1919년 3월 30일 김해읍내 만세운동을 시작으로 31일 진영기미독립의거, 4월 12일 장유 무계리 독립만세운동 등 곳곳에서 독립만세운동이 격렬하게 이어졌다.시는 독립운동 표지석 설치를 계기로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김해지역 독립운동사와 독립운동가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이 높아질 것으로 기대했다.시 관계자는 “독립운동 표지석 설치로 김해지역 독립만세운동 현장과 독립운동사를 시민에게 널리 알려 나라를 위해 희생한 순국선열의 나라사랑정신이 후손들에게 이어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시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지난 2월 13일 학술회의에 이어 3·1운동 100주년 기념식을 하고, 오는 6월에는 독립유공자 가족과 지역 초·중·고 학생 대상으로 독립운동 유적지 순례행사, 8월에는 자료집 제작 등 기념사업을 이어간다. 김해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 화성시, ‘4.15 100주년 화성 제암·고주리 학살사건 희생자 추모제’ 개최

    화성시, ‘4.15 100주년 화성 제암·고주리 학살사건 희생자 추모제’ 개최

    “3.1운동을 미래 지향적인 역사로 만들어야 한다” 경기 화성시는 15일 제암리 3·1운동 순국유적지에서 ‘4.15 100주년 화성 제암·고주리 학살사건 희생자 추모제’를 개최했다. 이날 추모제에는 국가유공자와 보훈단체, 세계평화연대 도시 대표단을 비롯해 서청원·이원욱·권칠승·송옥주·안민석 국회의원, 염태영 수원시장, 곽상욱 오산시장, 나치만 경기남부보훈지청장과 시민 등 400여명이 참석해 일제에 의해 학살당한 주민들을 추모했다. 제암·고주리 사건은 항일 독립운동 사상 가장 잔혹한 일제의 보복 학살이 자행된 사건이다. 100년전 화성지역 주민 2500여명은 대규모 만세운동을 벌이는 과정에서 화수리 경찰관 주재소를 공격해 일본 순사 가와바타를 처단했다. 이 일에 대한 보복으로 일제는 군대를 투입해 제암리 마을 주민 23명을 교회에 가둔 채 총살했고 독립운동가 김흥렬과 그 일가족 6명을 처참히 학살하는 등 제암·고주리 학살 만행을 저질렀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용선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이 대독한 추모사를 통해 “평온한 농촌 마을의 가장 평범한 사람들이 화성 3·1 독립운동의 주역이었다”며 “그 어떤 무자비한 탄압도 내 나라를 되찾고 싶다는 평범한 사람들의 열망을 꺾지는 못했다”고 밝혔다. 이어 “외국인 선교사들을 통해 전 세계에 3·1독립운동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그중에서도 제암·고주리 학살사건은 평화와 인류애를 존중하는 세계인의 공분을 자아내 국내외 독립운동을 활성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덧붙였다.서철모 화성시장은 개회사를 통해 “3.1운동을 미래 지향적인 역사로, 일제의 잔악한 탄압에 굴하지 않은 치열한 민중사이자 진취적인 민족사로 재조명해야 한다”면서 “이날을 기점으로 평화와 번영의 100년을 만들겠다”고 강조했다. 이어 “제암·고주리 학살사건에 대한 일본의 책임을 묻고 사과를 받아야 하지만, 민족 수난사에만 머물러 새로운 미래 100년의 준비에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면서 “3·1운동을 미래지향적인 역사로 만들어야 한다”고 제언했다. 화성시는 전날인 14일 신텍스에서 세계평화연대 도시 대표단과 국내 석학들이 자리한 가운데 ‘4.15 100주년 국제심포지엄’을 개최하고 화성 3.1운동과 제암리 학살사건의 역사적 가치를 세계에 알렸다. 김병철 기자 kbchul@seoul.co.kr
  • ‘예심제도’ 만들어 거짓 조서 용인… 판결은 통과의례 불과했다

    ‘예심제도’ 만들어 거짓 조서 용인… 판결은 통과의례 불과했다

    100년 전 봄, 빼앗긴 나라를 되찾자는 염원을 담아 태극기를 든 조선인들을 일제는 무참히 탄압했다. 일제의 헌병과 경찰은 만세를 외치는 조선인들을 향해 총검을 겨눴고, 생존자들은 체포한 뒤 수사를 빌미로 가혹하게 고문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산하에 있던 사법부는 이들을 그저 치안을 어지럽히고 혼란을 일으킨 범죄자로 규정했다. 일제의 혹독한 핍박은 판결문에서 철저히 가려졌다. 10일 국사편찬위원회 3·1운동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1919년 3월 1일부터 5월 31일까지 일어난 만세운동은 전국 각지와 만주·연해주 등 해외 99건을 포함해 총 1692건, 참가자들은 103만 73명으로 추정된다. 기록에 드러난 것만 100만여명으로 실제 참가자는 훨씬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 육군성이 발간한 ‘조선 소요사건 관계서류’에는 1919년 3월 1일부터 5월 10일까지 전국에서 3·1운동에 참여했다 체포된 조선인이 2만 6812명이라고 기록됐다. 이 가운데 1만 1846명이 검사에게 송치돼 3695명은 훈계방면 조치를 받았고 9436명은 태형(8697명)과 구류(511명), 과료(228명) 등으로 즉결 처분됐다.일제는 1912년 치안 유지를 명목으로 조선태형령을 제정해 즉결 심판 대상이 되는 행위를 한 조선인들에게 태형을 실시하도록 했다. 특히 3·1운동 참가자들이 너무 많아 일제는 이들을 신속하게 처벌하기 위해 1919년 4월 15일 ‘정치에 관한 범죄처벌의 건(제령7호)’도 제정했다. 이들을 수용할 공간과 비용이 턱없이 부족해지자 비교적 혐의가 가볍다고 판단된 독립운동 참가자들은 태형으로 처벌했다. 주로 동네 주민들에게 만세운동에 참가할 것을 독려(판결문엔 ‘협박·선동’으로 표기)한 경우 태형 90대의 처벌을 받았다. 일제 사법부는 법에 정해진대로 재판을 진행했다. 3·1운동을 주도하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민족대표 33인은 1920년 8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재판의 관할권 문제로 ‘공소불수리’ 결정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는 조선인들에게만 적용한 여러 특례조항을 둬 독립운동가들을 옥죄었다. 대표적으로 예심제도가 꼽힌다. 1912년부터 조선에서 전면 실시된 예심제도는 검사의 신청으로 예심판사가 사건을 먼저 심리한 뒤 객관적으로 범죄 성립에 확신이 있을 때만 재판을 시작하도록 한 제도다. 혐의가 불분명한데도 검사가 함부로 기소하는 것을 막기 위한 인권보호 차원의 제도였으나 일제는 이를 조선인들을 핍박하는 수단으로 변질시켰다. 예심 단계에서 검사나 사법경찰은 피의자를 무기한 붙잡아 둘 수 있었고, 이들이 작성한 조서가 재판에서 중요한 증거로 쓰였다. 인권을 보호하려고 만든 제도를 자백을 할 때까지 가둬놓고 갖은 고문을 가해 거짓조서를 만들어 낸 도구로 활용한 셈이다. 그러면서 사법경찰권은 강화시켰고 공판 절차를 간소화해 예심제도는 더욱더 독립운동가들의 숨통을 조였다. 도면회 대전대 교수는 ‘근대 사법제도와 일제강점기 형사재판’에서 “일본 형사소송법에서는 현행범만 제한적으로 검사가 범죄 현장에서 예심 판사에게 속하는 강제처분을 하도록 했으나 조선형사령에서는 현행범의 경우 검사뿐 아니라 사법경찰도 예심 판사에 속하는 처벌을 할 수 있었고, 비현행범도 검사나 사법경찰이 ‘수사의 결과 급속한 처분을 요하는 것으로 생각할 때’ 공소 제기 전에 영장을 발부해 각종 검증 및 수색, 신문을 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1919년 9월 남대문역 인근에서 새로운 총독으로 부임할 사이토 마코토의 마차를 향해 폭탄을 던진 강우규(60) 의사의 1920년 2월 25일 경성지방법원 판결문에서 강 의사의 공소사실을 인정한 근거는 대부분 예심 신문조서였다.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강 의사는 법정에서 폭탄을 갖게 된 경위 등을 자백한 것으로 판결문에 드러나 있을 뿐 그 외에는 강 의사의 폭탄을 옮겨주다가 공범으로 지목된 피고인 2명을 비롯해 거사 현장에 있던 증인 13명의 예심 신문조서로 유죄를 인정했다. 항소·상고 모두 기각돼 강 의사는 그해 11월 사형에 처해졌다. 청년외교단과 애국부인회 주도자들의 1920년 6월 29일 대구지방법원 판결문에는 당사자들의 법정 진술을 인용한 내용이 아예 없다. 2심인 그해 12월 27일 대구복심법원 판결문에서는 김마리아를 비롯한 피고인 3명의 공판정 진술만 인용됐을 뿐 여전히 1심과 같이 조서들이 핵심 근거로 쓰였다. 조서로만 판단하고 재판을 서둘러 끝낸 것으로 보인다. 수사와 예심 단계에서 작성되는 신문조서에 독립운동가들의 자백을 담기 위해 일제는 모진 고문과 가혹행위를 가했다. 김마리아 열사는 너무 심한 고문을 당해 1심 판결 선고 전인 1920년 5월 22일 병보석으로 석방되기까지 했다. 유관순 열사는 병원 치료조차 허용되지 않아 끝내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다. 허백윤 기자 baikyoon@seoul.co.kr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
  • [현장 행정] 명패는 작지만 희생은 큽니다

    [현장 행정] 명패는 작지만 희생은 큽니다

    “일제 식민지배에 맞서 피 흘리며 싸운 독립유공자들이 있었기에 대한민국 국민들이 외국에 나가서 어깨 펴고 살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김선갑 서울 광진구청장이 지난 8일 조상묵(81) 광복회 광진구지회장 현관문에 독립유공자 유족이 사는 집을 표시하는 명패를 달아준 뒤 머리 숙여 인사했다. 김 구청장은 이날 행사를 시작으로 독립유공자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국가보훈처와 협력해 유족들의 현관문에 ‘명패 달아드리기’ 행사를 이어나갈 예정이다. 행사에는 어린이집 어린이 20여명이 참석해 손에 든 태극기를 흔들며 ‘아리랑’을 합창해 독립유공자의 희생과 공헌 정신을 되새겼다. 조 지회장은 부친과 조부가 모두 독립유공자다. 부친 조복선씨는 1982년 대통령표창을 받았고 1990년 건국훈장 5등급 애족장으로 승격됐다. 조부 조기수씨 역시 지난달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조 지회장은 “광진구에서 이렇게 신경을 써주니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지하에서 기뻐하실 것”이라며 감격스러워했다. 조 지회장에 따르면 조부와 부친은 1919년 경북 안동 임하면에서 함께 3·1만세운동을 벌이다 체포됐다. 특히 부친은 주재소와 면사무소 등을 점령하는 등 만세운동을 주도했다가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조 지회장은 “아버지는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니 일을 못하고, 돈이 없어 병원 치료를 못 받았다”면서 “어린 시절 경찰과 친일파들이 찾아와서 행패를 부리곤 했다”고 회상했다. 김 구청장은 이날 행사에서 연말까지 구 차원에서 독립유공자 유족을 비롯해 민주유공자, 상이군경, 참전유공자, 무공수훈자들을 찾아뵙고 명패를 달아 드릴 계획이라고 밝혔다. 김 구청장에 따르면 광진구에 있는 독립유공자 유족은 모두 47가구다. 광진구는 지난 2월부터 국가유공자에 대한 예우와 복지 향상을 위해 보훈예우수당(월 3만원)도 별도 지급하고 있다. 대상은 광진구에 주민등록을 두고 3개월 이상 거주하는 국가보훈대상자나 유족으로, 참전명예수당과 국가유공자 생활보조수당 지급 대상자를 제외한 1800명이 대상이다. 김 구청장은 “명패 자체는 작을지 모르지만 순국선열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한 구민들의 정성을 상징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순국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면서 “그것이 바로 대한민국이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강국진 기자 betulo@seoul.co.kr
  • [특파원 생생리포트]남북 동시 참가 베이징 엑스포 북한관엔 미사일 대신 비둘기

    [특파원 생생리포트]남북 동시 참가 베이징 엑스포 북한관엔 미사일 대신 비둘기

    오는 29일 개막하는 베이징 세계원예박람회에 한국과 북한이 동시에 고유 정원의 특징을 담은 국가관을 선보인다. 베이징 엑스포로도 불리는 세계원예박람회는 베이징 외곽 옌칭에서 10월 7일까지 열린다. 만리장성 아래 펼쳐지는 꽃과 식물의 향연에는 세계 110개국이 참여하며 규모는 503만㎡로 중국의 유명 관광지인 이화원의 1.5배에 이른다.베이징 엑스포 한국관은 ‘연자루’(燕子樓)란 이름의 고려 시대 양식 정자다. 연자루는 실제 전남 순천 죽도봉공원에 있는 2층 누각으로 고려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최초 건립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고려시대에 손억이라는 이가 승평부사로 부임하여 호호란 관기와 사랑을 맺었는데 영전하여 순천을 떠났다가 훗날 다시 찾으니 호호는 이미 늙어 있었다는 사연이 전해 내려온다. 물 위에 걸터앉은 2층 다락집 형식의 실제 누각을 재연해 한국적 아름다움을 과시할 예정이다. 연자루는 1919년 3·1운동 당시 독립만세운동이 벌어진 곳으로 1930년 일제에 의해 철거됐다가 1978년 순천 출신 재일교포 김계선씨의 성금으로 원형대로 복원됐다.북한관의 경우 지붕은 기와지만 건축 양식은 좀 더 현대적이다. 조형탑에는 미사일 대신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가 장식되어 있다. 국가관은 한국관과 북한관 외에도 카타르관, 인도관, 미얀마관, 일본관 등이 조성된다. 중국관은 고전미를 뽐내는 날렵한 곡선의 지붕에 태양 전지판을 설치해 친환경적인 건물로 완성할 예정이다. 현재 베이징 엑스포의 공정은 90% 정도 완료됐다. 방문객 숫자가 1600만명으로 예상되는 베이징 세계원예박람회의 입장권 가격은 평일 120위안이다. 글·사진 베이징 윤창수 특파원 geo@seoul.co.kr
  • 영등포서 출발해 100㎞… 역사를 걷다

    영등포서 출발해 100㎞… 역사를 걷다

    채현일 서울 영등포구청장을 비롯한 ‘탁 트인 국토대장정’ 참가자들이 지난 1일 천천히 태극기와 영등포구 깃발을 앞세우고 엄숙하게 독립기념관으로 걸어갔다. 유관순 열사를 비롯한 민초 수천명이 100년 전 이날 아우내장터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것을 떠올리며 순국선열들에게 묵념했다.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해 영등포구청 공무원 100명이 3박 4일 동안 구청을 출발해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까지 릴레이로 100㎞를 걷는 국토대장정을 마무리하는 순간이었다. 채 구청장이 국토대장정을 구상한 건 올해 초 자매결연한 중국 상하이를 방문했다 황포구에 있는 임시정부 청사를 찾았던 게 계기가 됐다. 채 구청장은 처음엔 혼자서 걷는 걸 구상했지만 취지를 살려서 다 함께 걸어보자는 의견을 받아들여 하루씩 교대로 걷는 방식으로 바꿨다. 채 구청장을 비롯해 윤준용 영등포구의회 의장 등 구청과 유관기관 직원 등 100여명이 함께했다.국토대장정은 지난달 29일 오전 8시 30분 구청광장에서 출정식을 한 뒤 출발해 경기 안양과 군포, 화성, 평택을 거쳐 지난 1일 독립기념관에 도착했다. 참가자를 4개 조로 나눠 하루 평균 24~39㎞씩 걸었다. 국토대장정 중간중간 독립운동 유적지를 둘러보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화성 제암리 양민학살사건은 3월 31일,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은 4월 1일 있어서 현장 방문의 의미를 더했다. 채 구청장은 지난달 31일 합류해 1박 2일 동안 전체 일정의 절반 가까이 걸으며 구청 공무원들과 함께했다. 채 구청장은 “영등포구청에서 독립기념관을 향해 같은 방향을, 함께 속도를 맞춰서, 서로 격려하고 손을 잡아주는 연대로 여기까지 왔다”면서 “구청에서 독립기념관까지 100㎞ 국토대장정을 함께한 구청 공무원들이 자랑스럽다”고 강조했다. 이어 “서울에서 독립기념관까지 걸으며 자유와 평등, 평화를 후손들에게 물려줘야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구청장으로서 초심을 다지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독립기념관에서 열린 국토대장정 해단식에는 양승조 충남도지사와 이근식 독립기념관장이 국토대장정 단원들을 격려했다. 이 관장은 채 구청장에게 소나무 묘목을 기념으로 전달했다. 이 나무는 식목일을 맞아 오는 5일 구청 앞 당산공원에 심을 예정이다. 양 지사는 “다 함께 100㎞를 걷는 탁 트인 행정을 보니 마음이 든든하다.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강국진 기자 betulo@seoul.co.kr
  • 안성시 3·1운동 100주년 기념행사...‘4·1 만세항쟁, 2일간의 해방’

    안성시 3·1운동 100주년 기념행사...‘4·1 만세항쟁, 2일간의 해방’

    경기 안성시는 3·1운동의 성지로 손꼽힌다. 경기도내에서 가장 많은 독립 운동가 316명을 배출했으며 3·1운동으로 단일 지역에서 가장 많은 127명이 기소됐다. 자발적으로 참여했던 주민들도 6000명에서 1만여명에 이른다. 특히 격렬한 만세항쟁을 펼쳐 일제의 통치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2일간의 해방’을 이뤄냈다. 안성시는 2일 원곡면 칠곡리 안성3·1운동기념관에서 이같은 ‘4·1만세항쟁, 2일간의 해방’ 기념식을 개최했다. 안성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주관으로 개최된 이날 기념식에는 독립운동가 유족, 안성시민, 학생 등 약 3000여 명이 참석했다. 특히 3·1운동 전국 3대 실력항쟁지인 북한의 황해도 수안군 수안면, 평안북도 의주군 옥상면과의 교류협력을 희망하는 차원에서 남한에 정착한 새터민과 이북민이 다수 참여해 눈길을 끌었다. 기념행사는 100년 전 원곡과 양성에서 만세고개를 넘어 격렬하게 만세운동을 전개해 ‘2일간의 해방’을 이뤄낸 안성 선조들의 만세운동을 재현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새터민과 이북민, 안성시민이 남북평화와 번영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차원에서 전국 3대 실력항쟁지를 의미하는 무궁화 3그루를 함께 심는 식수행사도 선보였다. 이 무궁화는 남북통일이 이루어졌을 때 북한의 실력항쟁지 2곳으로 보내질 예정이다. 이어 주요 내빈들이 무대에 올라와 안성의 독립운동가 퍼즐을 맞추어 안성시 지도를 완성하는 세레모니를 진행했으며 3·1절 노래 제창과 만세삼창, 성악가 성희진·염진원의 축하공연으로 마무리했다.특히 이날 행사에서는 안성의 독립운동가 유족과 후손, 새터민, 이북민들을 초청해 선열들의 위훈을 기리는 간담회와 ‘남북평화와 3·1운동’ 주제의 역사 토크 콘서트가 마련됐다. 우석제 안성시장은 기념사를 통해 “안성은 남한에서 유일한 전국 3대 실력항쟁지이자 ‘2일간의 해방’을 이뤄낸 만세운동으로 전국 방방곡곡에 이름을 떨 친 곳”이라며 “오늘 행사를 통해 순국선열들과 애국지사의 뜻을 기리고, 우리 모두의 가슴에 담아 힘차게 내일을 열어나가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안성시는 2일간의 해방을 이뤄냈던 1919년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 정부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시민들이 참여하는 다양한 100주년 기념사업을 연중 내내 실시한다. 기념사업으로는 ‘안성 3·1운동 100주년, 만세 운동의 주역을 기억하다’라는 주제로 안성 3·1운동기념관에서 특별기획전이 열리며, 청소년들의 역사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연중으로 관내 초·중·고등학생 대상의 ‘찾아가는 나라사랑 교육 프로그램’이 운영된다. 이밖에 독립운동 국내외 사적지 탐방 및 독립운동 기념관 교류활동, 안성 3·1운동 주제 창작 뮤지컬 등이 선보일 예정이다. 김병철 기자 kbchul@seoul.co.kr
  • 온몸 난자당하면서도 “독립만세”… 익산 1만명 핏빛 저항 이끌다

    온몸 난자당하면서도 “독립만세”… 익산 1만명 핏빛 저항 이끌다

    이틀 후면 ‘익산 4·4만세운동’ 100주년이 된다. 전북 익산 지역민들이 장터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일제의 수탈을 규탄한 만세운동이다. 그 중심인물인 문용기 열사를 취재하러 익산을 찾았다. ‘익산4·4만세운동기념사업회’ 전영철 회장이 마중을 나왔다. 만세운동 현장에서는 100주년 행사 준비가 한창이었다. 만세운동의 전말에 대한 설명을 듣고 역사의 현장을 둘러보았다. 전 회장은 “문 열사와, 함께 순국한 다섯 분의 열사들은 긴 세월 묻혀 있었다”면서 “기념공원이나 기념관 하나도 없는 현실이 죄스럽고 부끄럽다”고 말했다.만세운동이 벌어졌던 솜리장터를 돌아보고 운동의 중심체 역할을 한 남전교회를 방문했다. 남전교회는 산이 보이지 않는 너른 들판 한가운데에 있었다. 박종규 장로는 “살아남은 주동자들도 일제의 탄압을 견딜 수 없어 만주 등지로 뿔뿔이 흩어져 최근 재판기록을 통해서야 김치옥 열사 등의 존재를 확인했다”고 했다. 차를 타고 왠지 쓸쓸한 겨울 벌판을 달리니 문 열사의 고향 마을인 관음마을이 나타났다. 열사의 생가는 사람이 살지 않는 듯 마치 폐가처럼 보였다. 생가임을 알려 주는 표지판도 없어 찾기가 쉽지 않았다.전북 지역에는 19세기 말부터 미국 남장로교에서 파견한 선교사들에 의해 일찍이 교회가 들어섰다. 남전교회는 1897년 문 열사의 고향 이웃마을인 익산 오산면 남전리에 미국인 선교사 전킨이 세운 교회다. 오산면의 위치는 익산 도심의 서쪽, 호남평야의 북쪽이며 아래로 만경강과 접해 있다. 기름진 옥답을 일제가 가만둘 리 없었다. 궁벽한 농촌이었던 익산을 일제는 신도시로 만들어 수탈 기지로 이용했다. 일본인들은 빼앗은 토지에 농장을 세워 한국인을 소작농으로 부리며 착취했다. 문 열사는 1878년 5월 19일 오산면 오산리에서 태어났다. 한학을 공부해 서당에서 훈장을 하던 열사의 인생에 전환점이 된 것은 기독교 귀의였다. 남전교회 평신도로 교회 일을 돕다 군산영명학교 보통과에 입학했다. 이때 나이가 24세였다. 훈장 경력을 인정받아 한문 교사를 겸했다. 30세 되던 해에는 목포 왓킨스 중학교에 진학해 늦깎이로 신학문을 공부했다. 열사는 이승만과 인연이 있다. 선생보다 세 살 위인 이승만은 미국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해 YMCA 활동을 하면서 지방 강연을 다녔는데 이때 열사와 만났다. 두 사람은 여관방에서 시국을 토론했으며 이승만의 강연에 열사는 찬조 연설을 했다고 한다. 이승만은 광복 후 익산으로 가서 열사를 찾았지만, 순국한 사실을 알고 몹시 애통해하면서 일필휘지로 순국열사비 비문을 썼다. 1911년 학교를 졸업한 열사는 상당한 영어 실력을 갖추게 됐다. 함경도 갑산의 미국인 금광에 취직해 통역사로 일한 것도 영어 실력 덕이었다. 열사는 8년 동안 근무하며 받은 적지 않은 보수를 만주와 상하이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에게 보냈다. 금광에서 열사는 3·1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열사는 급히 고향으로 내려왔다. 독립운동을 돕던 그가 만세 시위를 주도적으로 모의한 것은 당연했다. 남전교회 집사 김치옥과 박성엽이 열사를 찾아왔다. 기다렸던 일이었다. 두 집사는 거사를 조직화하는 일을 맡았고 열사는 도남학교 학생 박영문, 젊은 교인들과 재학생들을 설득했다. 익산 인근의 교회에도 연락해 동참하겠다는 응낙을 받았다. 거사일은 솜리(이리·裡里) 장날인 4월 4일로 정했다. 사흘 밤낮을 뜬눈을 새우다시피 하며 수천 개의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만들었다. 드디어 1919년 4월 4일 오전. 남전교회에 교인과 마을 사람들 150여명이 모였다.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한 묶음씩 받아 여자들은 허리춤에, 남자들은 바짓가랑이 속에 숨기고 솜리장터로 향했다. 먼발치서 지켜보았던 아낙네는 뭉게구름이 들녘을 하얗게 뒤덮는 듯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고 증언했다. 몇 시간 후 정오. 장터 네거리에 빨간 글씨로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이 펄럭였다. 교회 교인들, 천도교 지도자, 민족운동지도자들도 참가했다. 도남학교 등 수백명의 어리고 젊은 학생들도 모여들었다. 이들은 모여든 장꾼들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눠 주었다. 군중은 금세 1000여명으로 불어났다. 낮 12시 30분쯤. 흰색 두루마기를 걸친, 기골이 장대한 40대 남성이 군중 앞에 섰다. 문용기 열사였다. 오른손에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을 들고 있었다. 열사는 우렁찬 목소리로 연설하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조선독립만세, 조선독립만세….” 군중은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께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다. 열사는 시위대를 이끌고 수탈의 핵심부 대교농장으로 향했다. 군중은 순식간에 1만여명으로 불어났다. 농장을 지키던 헌병대는 군중이 정문으로 접근하자 공포를 쏘았다. 급기야 맨손으로 만세를 부르던 군중을 향해 실탄 사격을 시작했다. 일본인 소방대와 농장원 수백명도 칼과 곤봉, 갈고리를 닥치는 대로 휘두르고 찍어댔다.군중은 일시 흩어지며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열사는 군중을 독려하며 더 큰 목소리로 만세를 불렀다. 이때 일본 헌병이 칼을 빼 들더니 태극기를 들고 있던 열사의 오른팔을 내리쳤다. 순간 비명을 질렀으나 열사는 왼팔로 태극기를 집어 들고 만세를 외쳤다. 그러자 헌병은 왼팔마저 자르고는 가슴과 복부를 찔러 열사를 숨지게 했다. “여러분 여러분, 나는 이 붉은 피로 우리 대한의 신정부를 음조(陰助)하여 여러분들이 대한의 신국민이 되게 하겠소”라고 힘겹게 외치고는 고개를 떨구었다. 열사의 나이 41세였다. 일제도 보고서에 “수모자(首謨者)의 1인이 절명에 이르기까지 만세를 창(唱)했다”고 적시했으니 그가 문 열사였다. 열사의 죽음을 목격한 지도자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시위대를 이끌었다. 도남학교 학생 박영문과 남전교회 청년 신도 장경춘이 총에 맞아 “억” 하면서 쓰러졌다. 54세로 춘포면의 어른이었던 ‘박참봉’ 박도현과 서정만도 총탄에 맞았다. 이충규도 순국했다. 20여명은 크게 다쳤고 39명이 체포됐다. 유족들은 일경이 방해하는 바람에 한밤중에 도둑처럼 시신을 거둬 거적에 말아 묻었다. 살아남은 주모자 가족들은 일경의 감시를 피해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며 유랑생활을 하다시피 했다.“나물 많이 캐 오세요.” 거사일 아침, 집을 나서는 노모와 아내에게 열사는 이런 마지막 말을 남겼다. 사망 소식을 들은 부인 최정자 여사는 남편의 시신을 거둬 뒷산에 묻었다. 피로 얼룩진 한복 저고리와 두루마기는 보관하고 있다가 해방 후 멍석에 펴 놓고 가족들과 예를 올리고 대성통곡했다. 열사가 최후의 순간에 입었던 이 혈의(血衣)는 며느리 정귀례 여사가 기증해 현재 독립기념관에 보관돼 있다. 그런데 옷소매가 잘린 흔적이 없다. 양팔이 잘렸다는 내용은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들어 있다. 이에 대해 주명준 전주대 명예교수는 “이준 열사가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서 할복하여 내장을 꺼내어 던지고 순국했다는 말과 동일한 경우”라면서 “과장 어린 표현을 써서 민족감정을 불러일으켰으니 터무니없다고 나무랄 일은 아니다”라는 견해를 밝혔다. 어쨌든 여러 군데를 난자당해 숨진 것은 분명하다. 김치옥, 박동근, 전창여, 강성원 등 주동자들은 목숨을 건졌지만 체포돼 재판을 받았다. 이들은 법정에서 “우리가 조선의 독립만세를 부른 것이 죄가 되는가”라고 부르짖었다. 김치옥은 잔인한 고문으로 사경에 이르자 석방됐지만, 후유증으로 정신이상을 일으키고 반신불수가 됐다고 한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안현모 목소리로 전하는 ‘유관순, 그리고 8호실의 기억’

    안현모 목소리로 전하는 ‘유관순, 그리고 8호실의 기억’

    방송인 안현모씨가 유관순 열사의 서대문 감옥 수감 생활과 옥중 만세운동을 보여주는 영어 영상에 목소리를 재능기부 했다. 서경덕 교수는 유관순 열사가 주도한 천안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아 ‘유관순, 그리고 8호실의 기억’을 주제로 한 영어 영상에 방송인 안현모씨가 내레이션에 참여했다고 1일 밝혔다. 영상은 이날 유튜브(https://youtu.be/OnxwpL9TE70)를 통해 공개됐다. 영어 내레이션을 재능기부한 안현모는 “독립운동가 전 세계 알리기 캠페인에 동참할 수 있어 기쁘다”며 “이번 영상을 통해 해외 네티즌들에게 유관순 열사가 널리 알려지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4분짜리 영상은 지난 2월 서경덕 교수팀과 영화 ‘항거:유관순 이야기’ 팀이 배우 고아성의 내레이션을 입혀 제작한 영상을 영어 버전으로 새롭게 제작한 것으로, 유관순의 서대문 감옥 수감 생활과 3.1운동 1주년을 맞아 옥중에서 진행한 만세운동 과정을 상세히 다뤘다. 특히 이번 영상에는 개성 만세운동의 주역인 권애라, 수원에서 기생 30여 명을 이끌고 만세운동을 주도한 김향화, 만삭의 몸으로 파주 만세운동을 주도한 임명애 등 잘 알려지지 않았던 8호 감방 동료들을 함께 소개했다. 서경덕 교수는 “세계사적으로 보기 드문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이번 영상을 통해 일제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리고, 유관순의 독립의지와 평화정신을 해외 네티즌들에게 널리 알리고 싶었다”고 소개했다. 한편 서 교수팀은 대한민국 대표 독립운동가들을 영상으로 제작해 전 세계에 꾸준히 알리고 있다. 오는 5월부터는 서영해, 조명하 등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을 재조명하는 캠페인을 펼칠 예정이다. 문성호 기자 sungho@seoul.co.kr
  • 100년 전 울려퍼친 ‘군포장 만세운동’ 재연 행사 개최

    100년 전 울려퍼친 ‘군포장 만세운동’ 재연 행사 개최

    경기도 군포시는 30일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군포역 일원에서 ‘군포장 만세운동’ 재연 행사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100년 전 이 지역에 울려 퍼진 거주민 수천명의 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해서다. 시는 1919년 3월 31일 일본군의 탄압에 맞서 항일 독립 만세운동을 전개한 안양·군포·의왕 지역 주민 2000여명의 애국심을 기리는 기념식을 개최했다. 공식 기념식에 이어 100년 전 만세운동을 재연한 거리극 공연을 했다. ‘군포에 울려 퍼지는 대한독립만세’라는 주제로 전문 배우와 200여명 시민이 참여한 기념공연도 막을 올렸다. 이어 군포 시립여성합창단이 출연하는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이라는 주제로 기념음악회. 지역 청소년의 플래시몹 공연 등 다양한 기념 행사가 펼쳐졌다. 온종일 100년 전 지역 주민의 독립 열망을 느껴볼 수 있는 시간을 마련했다. 한편 국가보훈처와 국사편찬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100여년전 이곳 군포장에서는 독립을 열망하는 인근 지역 주민들이 모여 만세운동을 펼쳤다. 이들은 군포장(현 안양시 동안구 호계3동)에서 군포장역(현재 전철 1호선 군포역)앞의 일본 경찰관 주재소를 행진했다. 일제는 경찰 외에도 군 병력까지 동원해 총을 쏘고 폭력으로 군중을 해산했다. 주민들은 사전에 매우 조직적이고 치밀한 계획을 세워 대대적인 시위운동을 전개한 것으로 알려졌다. 군포장은 세 지역의 경계이자 당시 서울~수원 가도에서 과천, 안산으로 갈라지는 상업 요지여서 시장 중심으로 인근 주민의 참여가 자연스럽게 이뤄질 수 있었다. 한편 시는 2016년 5월 군포역 광장에 항일 독립 만세운동을 펼친 시민의 애국심과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높이 11의 기념탑을 세웠다. 남상인 기자 sanginn@seoul.co.kr
  • 100명의 실험정신… 3·1운동 100년을 만나다

    100명의 실험정신… 3·1운동 100년을 만나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인사동마루 갤러리’는 오는 5월 7일까지 ‘공인전 [오브제·다다이스트]’전을 연다. 3·1 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아 마련한 연작 사진 전시회다. ‘다다이스트’라는 주제에 걸맞게 사진작가 탁기형의 개인전 ‘The Blue’ 등 실험정신으로 충만한 사진전들이 연이어 열린다. 이번 연작 사진전은 기업가 지승룡이 100명의 작가들에게 무료로 개인전을 열어 주겠다는 취지로 마련됐다. 총 11주 동안 다양한 분야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된다. 전시는 인사동마루 갤러리 G3에서 오전 10시 30분~오후 7시 30분 열린다. 관람은 모두 무료다. 탁기형 작가의 사진전 오프닝 파티는 오는 31일 오후 6시에 같은 장소에서 열린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우리 동네 뒷산이 3·1운동 유적지래요”

    “우리 동네 뒷산이 3·1운동 유적지래요”

    “부모님과 함께 오르던 마을 뒷산이 3·1운동 때 만세를 불렀던 유적지인데, 엄마도 그 사실을 몰랐대요. 저희가 만든 표지판으로 마을 주민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니 힘든 줄도 몰랐어요.”(이승윤, 고촌중 2학년) 지역의 독립운동 유적지를 알리는 표지판을 직접 만들고 세운 초·중학생들이 있다. 경기 김포시 고촌읍 학생들이다. 경기교육청이 마을교육공동체 사업으로 각 지역에서 진행하는 ‘꿈의학교’ 소속인 이 학생들은 지난해 5월부터 1919년 만세운동이 있었던 ‘당산미’ 등을 지나는 ‘우리동네 둘레길 만들기’ 활동을 하고 있다. 김포시에 따르면 고촌읍에 위치한 작은 뒷산인 ‘당산미’(행정지명 옥녀봉)는 1919년 3월 24~25일 농민 50여명이 횃불을 들고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한 곳이다. 학생들은 지난해 5월 꿈의학교 꿈지기교사 허신영(60)씨의 제안으로 ‘우리동네 둘레길 만들기’(우동들)를 조직해 당산미를 비롯한 지역 둘레길 만들기에 나섰다. 활동 과정에서 지역의 역사를 알아가고 직접 확인하면서 표지판을 제작해 이를 알리자는 의견을 냈다. 우동들 조장을 맡은 이승윤(15)군은 “처음에는 ‘생활기록부에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으로 나섰는데, 나중에는 우리가 먼저 현장에 나가자고 할 정도로 자세가 바뀌었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지난해 5~12월 주말이나 휴일 등을 이용해 15번 이상 현장을 찾았다. 작명팀, 코스팀, 디자인팀으로 각자 역할도 나눴다. 무더운 여름 땀을 뻘뻘 흘리며 현장을 찾은 아이들은 길 옆으로 미나리가 가득한 길을 ‘미나리마을’이라 하는 등 각 코스의 이름도 붙였다.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해 코스의 거리를 직접 측정해 표지판에 넣었다. 김포교육지원청과 김포시청 등에서 활동 내용이 담긴 사진전도 열었다. 이 같은 과정을 통해 나무판자에 직접 글씨와 그림을 그려넣고 표지판을 만들었지만 설치 허가가 관건이었다. 아이들은 교사 허씨의 도움을 받아 지난해 7월 김포시로부터 표지판을 직접 관리하겠다는 조건으로 설치 허가를 받았다. 현재 아이들이 임시로 줄에 메달아 놓은 표지판은 정식으로 만들어져(가로 120㎝, 세로 90㎝) 오는 24일 지역에서 열리는 만세운동 100주년 기념행사와 함께 설치될 예정이다. 허씨는 “어찌보면 작은 일이지만 지역 아이들이 어른들도 생각하지 못한 일을 직접 해냈다는 것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박재홍 기자 maeno@seoul.co.kr
  • 울산 마을 다니며 역사 배운다

    ‘마을 다니며 역사 배운다.’ 울산박물관이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울산노동역사관 1987’과 공동으로 울산 3·1운동과 근현대사를 이해할 수 있는 ‘울산 근현대사를 품은 마을 기행’을 운영한다고 11일 밝혔다. 마을 기행은 매월 울산의 마을을 선정해 마을 단위 사건이나 인물과 관련된 장소를 탐방하고, 예술공연을 함께 경험하는 복합문화체험 프로그램이다. 매회 성인 40명을 대상으로 지난 2월부터 오는 7월까지 매월 넷째 주 토요일에 오전 9시부터 오후 1시까지 진행한다. 지난달 23일 울주군 언양 답사에 이어 오는 23일에는 중구 병영을 답사한다. 병영은 조선 태종 때 울산 경상좌도 병영성이 설치된 후 오랜 시간 군사기지 역할을 했다. 또 병영청년회 청년들이 주도해 1919년 4월 4일부터 이틀간 3·1 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이다. 평생을 한글을 알리고, 지키고자 힘쓴 한글학자 외솔 최현배 선생 생가와 기념관이 있다. 참여자들은 오는 23일 울산박물관에서 출발해 울산 경상좌도병영성, 병영 만세운동 시작점인 병영초등학교(옛 일신학교), 독립운동 선열 위패가 있는 삼일사를 거쳐 외솔기념관을 탐방한다. 참여 희망자는 울산박물관 누리집에서 12일부터 신청할 수 있다. 울산박물관 관계자는 “우리나라 근현대라는 큰 역사 흐름을 이해할 좋은 기회”라고 말했다. 울산 박정훈 기자 jhp@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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