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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T’ 김수로, 영어교사로 추석 대박 노린다

    ‘ET’ 김수로, 영어교사로 추석 대박 노린다

    역시 대화에서 가장 좋은 추임새는 웃음이다. 김수로(38)를 만나고 나니 그런 생각이 확실히 들었다. 인터뷰 내내 들었던 ‘하하핫’이라는 그의 너털웃음이 웃음 바이러스처럼 전염되면서 아무리 참으려해도 웃지 않고는 배길 수없었다. 술 한잔 먹지 않았는데 만취한 듯 왁자지껄 수다를 떨고 말았다. 남을 잘 웃기는 사람은 자신이 먼저 잘 웃어야 된다는 말. 그리고 웃는 자에게 복(福)이 온다는 말. 김수로는 그런 고전적인 격언들을 다시 실감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그런 김수로가 새 영화를 들고 찾아왔다. 오는 11일 개봉되는 ‘울학교 이티’. 엉뚱한 체육교사(김수로)가 우여곡절 끝에 영어교사가 돼가는 과정을 그린 코믹 영화다. 경기 침체로 울상인 국민과 연이은 흥행 부진으로 잔뜩 찡그린 한국 영화계에 웃음 폭탄을 터뜨릴 수 있을까. 한가위 추석 선물로 웃음보따리를 준비한 ‘코믹 지존’에게 출사표를 들어봤다. -요즘 TV에서 활약이 대단합니다. 사실 영화 쪽에서는 조금 부진했었는데. ‘울학교 이티’에 거는 기대가 남다르겠군요. 아이고~ 아파라. 아픈 곳을 콕 찌르시네. 사실 제가 영화 두편 ‘잔혹한 출근’과‘쏜다’를 말아먹었잖아요. 하하핫. 제가 워낙 웃고 다니니까 별 걱정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요. 사실 충격도 크고 고민도 많았어요. 엎친데 덮친 격으로 영화판도 힘들어졌잖아요. 들어오는 시나리오도 확 줄더라구요. 주변에서는 TV에도 출연하면서 숨 좀 고르라고 하는데 사실 처음엔 선뜻 내키지는 않았어요. 그래도 ‘패밀리가 떴다’가 제목이 좋아서 그런지 예상 외로 빨리 뜨고 나니 자심감도 조금씩 생기더라구요. 이번 ‘울학교 이티’는 시사회 반응도 좋고. 나름대로 영화팬들에게도 부끄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영화까지 망하면 다시는 주인공 안하겠다고 큰소리도 뻥뻥 쳐놨습니다. -일각에서는 영화보다 TV 예능쪽에서 더 주가가 높다는 평가도 있는데요. 그런 점에서는 영화인으로서 아쉬움도 생길 것 같습니다. 사실 TV 예능 프로그램 출연도 영화를 위한다는 생각으로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제 주변에서는 좀 더 많은 영화인들이 대중과 소통하는 게 필요하다고 충고를 내놓는 사람들이 많답니다. 하지만 영화배우로서의 이미지를 갉아먹지 않도록 분명한 선을 긋는 것은 중요하죠. 최근 ‘패밀리가 떴다’가 뜨면서 많은 인터뷰 요청을 받았지만 고사를 했던 것도 모두 그런 생각 때문입니다. 예능인으로서의 저의 모습은 이미 TV를 통해 모두 보여드렸거든요. 참. 오랜만에 인터뷰를 하는 김에 정정보도를 하나 내야겠군요. 얼마전 ‘무릎팍 도사’에서 제가 광산 김씨의 대종손이라고 밝혀 화제가 된 일이 있거든요.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뒤 광산 김씨 대종가로부터 항의전화를 한통 받아서 혼쭐이 났답니다. 사실을 알고보니 대종손과 그냥 종손의 차이점을 착각해서 생긴 실수더라구요. 역시 TV 방송에서는 작은 실수 하나라도 생기지 않도록 더 신경써야겠어요. 이 자리를 빌어 정중히 사과드립니다. 하하핫. -‘패밀리가 떴다’를 보면 후배 연기자들과의 사이가 참 ‘돈독’합니다. 실제로는 어떤가요? 아이고. 제가 ‘계모’ 노릇을 하는 건 모두 프로그램을 위해서죠. (이)천희랑 친하지 않고서야 그렇게 못살 게 굴 수가 없지 않겠어요. 천희는 오래전부터 아끼던 후배라서 격의가 없구요. 사실 신성록은 고교시절에 제가 입시 과외 선생님을 맡아서 더 각별해요. 입시 실기를 위해 연기를 가르쳤는데 신성록 외에도 송창의 역시 제 제자 중 한명이지요. 얼마전에는 가수 전진의 생일파티에 간 일도 보도돼서 화제가 되었잖아요. 사실 ‘패밀리가 떴다’를 함께 녹화하다가 생일 파티에 놀러오라고 해서 가벼운 저녁 식사 자리인 줄 알았죠. 그런데 웬 걸? 한·중·일 1000여명의 팬들이 모여서 이벤트를 하는데. 정말 깜짝 놀랐어요. 아이들 스타의 인기를 제대로 실감했죠. 나는 언제쯤 그런 생일 파티를 해보나. 이거 참~. 이들 외에도 조인성과는 무명 시절부터 꾸준히 연락을 주고 받으면서 친하게 지내고 있구요. 조한선도 연예인 축구단에서 만나서 친분을 쌓고 좋은 후배로 지내고 있습니다. -후배들 외에 가족에 대한 애정도 남다르다고 소문이 자자한데요. 요즘 가족들의 근황은 어떤가요? 저희 가족이라고 별다를 게 있나요. 아버님께서 일찍 돌아가셔서 남은 식구들끼리 서로를 조금 더 챙기는 정도죠. 첫째 여동생은 ‘쉬리’ ‘화산고’ 등에서 함께 출연한 경력도 있고 해서 아무래도 연기 활동에 미련이 많은 것 같은데. 제가 잘~ 만류하고 있죠. 하하핫. 아기가 벌써 다섯살이나 됐거든요. 그래도 미스코리아(경기 선) 출신이라 그런지 아줌마 티가 안나서 CF에는 계속 출연하더라구요. 사실 그게 더 부러워요. 막내 동생은 일찌감치 결혼해서 벌써 아기가 둘이랍니다. -조카도 많은데 슬슬 2세 계획도 세울 때가 된 것 같네요. 좋은 소식은 언제 들려줄 건가요? 아내(이경화)는 이번에 SBS에서 방영되는 ‘바람의 화원’으로 오랜만에 TV에 출연한다는군요. 문근영의 어머니 역할이라고 하는데. 집에서 두다리 뻗고 살려면 방송 놓치지 말고 열심히 봐야겠죠? 하하핫. 그러고보니 오는 10월 1일이 결혼기념일인데 벌써 2년이 지났군요. 주변에서는 2세 계획도 많이 물어보시는데. 이제 슬슬 준비할 때가 된 것 같아요. 지난해에는 아내와 해외여행을 장기간 다니면서 신혼생활을 즐기느라 2세를 준비할 여유가 별로 없었어요. 일단 한명만 낳기로 계획을 세웠는데. 아들이건 딸이건 모두 좋아요. 다만 이름만큼은 저처럼 훌륭한 걸로 지어주고 싶어요. 제 이름이 가야국의 시조인 김수로왕과 똑같잖아요. 어려서부터 이름 덕을 좀 봤죠. 그래서 김수로 주니어도 위인의 이름을 따서 지을까 생각중이랍니다. 남자라면 배우도 좋고 운동선수가 된다고 해도 좋을 것 같구요. 여자라면 곱게 키워서 미스코리아나 아나운서는 어떨까요? 단. 외모는 엄마를 닮아야겠죠. 하하핫. -‘한국의 주성치’ 혹은 ‘한국의 짐 캐리’라는 말을 들을 때가 많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어떤 캐릭터를 더 좋아하나요? 이거 참. 과분한 칭찬이죠. 아직 그 분들 따라갈려면 한참 멀었잖아요. 개인적으로는 주성치가 좀 부럽습니다. 연기는 물론이고 연출까지 하잖아요. 그리고 무엇보다 영화 제작도 직접 맡을 정도로 ‘쩐’이 많은 것도 샘나구요. 하하핫. 짐 캐리는 참 대단한 코믹 배우죠. 영화는 물론 실제 삶에도 유머가 넘치잖아요. 왜. 얼마전 해변가에서 여자친구의 수영복을 입고 활보한 일도 있잖아요. 저라면 엄두도 못내요. 굳이 롤 모델을 말하자면 아담 샌들러를 들 수 있겠네요. 뭐랄까. 스타라는 괴리감보다는 친한 친구처럼 편안한 느낌이 들잖아요.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마주쳐도 어색해하지 않고 농담을 주고 받을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느낌? 더우기 제가 할리우드에 견학갔을 때 아담 샌들러를 실제로 만난 일도 있어서 더 친근하죠. 시민들이 편안하게 느낀다는 점에서는 저 역시 마찬가지구요. 그냥 친구처럼 어깨동무를 하기도 하고. 사실 저도 연예인이니 조금은 어려워하셔도 되는데 말이죠. 하하핫. -코믹 연기의 외길만 파고 있는데요. 배우로서 다양한 연기 변신에 대한 갈증은 없을까요? 아직도 갈길이 멀었습니다. 제가 지금껏 보여준 건 약 60% 정도랄까요. 영화 속에서도의 제 코믹 연기는 실제 생활에서 제가 보여주는 유머의 반도 안되는거죠. 연기 변신도 물론 욕심이 생기지만 그건 코믹 연기를 완성한 다음의 문제입니다. 그 때까지는 계속해서 코믹 배우로 살아갈 계획입니다. 차기작으로는 사극 한편을 고민하고 있는데요. 그 작품 역시 코믹이랍니다. 사실 코믹 배우라는 게 쉬우면서도 어렵거든요. ‘개그 콘서트’가 재미는 있지만 감동을 느끼기는 힘들잖아요? 웃음과 감동을 동시에 주는 것. 관객을 웃기고 울리는 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저 김수로 대한민국 모든 국민이 배꼽을 잡으면서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그날까지 쭉 가겠습니다. 지켜봐 주세요. 한국영화 파이팅 기사제휴=스포츠서울 김도훈기자@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불교계 “고강도 대정부 투쟁”

    이명박 정부의 종교편향에 맞서 27개 종단이 참여하는 사상초유의 범불교도대회에 이어 전국 사찰에서 규탄 법회가 열리고 스님의 자해 사건이 발생했는데도 불구하고 정부가 무반응으로 일관하는 데 대해 불교계가 지역별 범불교도대회를 여는 등 강도높은 투쟁을 벌여나갈 것을 선언했다. 범불교도대회 봉행위원회(봉행위)는 1일 조계종 총무원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지난달 27일 범불교도대회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사과와 종교차별 재발 방지를 거듭 요구했지만 반응이 없다.”며 3일 오후 범불교도대회 대표자회의를 열어 향후 대책과 불교도대회 일정을 최종 결정키로 했다고 밝혔다.3일 대표자회의에선 봉행위를 상설기구인 ‘종교편향 이명박 정부 규탄 대책위원회’(가칭)로 전환하는 한편 대구·경북, 부산·영남, 호남·충청 범불교도대회 등 지역별 불교도대회 일정과 불교 원로들이 함께하는 전국승려대회 개최 여부도 결정할 예정이다. 지난달 30일 조계사 앞에서 자해한 삼보 스님은 서울광장 범불교도대회 직전 대회 현장에서 자해할 뜻을 밝혔지만 총무원과 봉행위의 만류로 미뤘다가 청와대의 뉴라이트 관계자 초청 만찬에 격분해 할복한 것으로 알려졌다.승원 스님은 이와 관련,“전국 사찰과 선원에서 종교편향과 관련한 스님들의 소신(燒身), 단지(斷指) 등 극단적인 움직임이 우려된다.”며 “정부가 끝까지 불교계의 요구를 묵살한다면 이후 불행한 사태의 모든 책임은 대통령과 정부가 져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윤하 “팬들에 텔레파시 전할래요”

    윤하 “팬들에 텔레파시 전할래요”

    윤하는 올해 스무살이 됐다. 하지만 실력과 내공면에서는 또래 여가수와 다르다.2004년 일본에서 먼저 데뷔한 윤하는 국내에서 첫 앨범을 선보인지 2년여만에 가요계에 자신의 존재를 분명히 드러냈다. “한국에서 활동한 지난 2년이 지금껏 살면서 가장 바쁜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일본에선 미성년자 노동법이 있어서 오후 8시 이후엔 쉴 수 있었는데, 한국에선 새벽까지 이어지는 살인적인 스케줄의 연속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뭐든지 빨리빨리 해내는 ‘순발력’을 배울 수 있었다며 활짝 웃는다. 그녀가 지난해 각종 신인상을 휩쓸며 승승장구한 이유로 앳된 외모 뒤에 숨겨진 시원한 가창력과 무대매너를 꼽는 이가 많다. 가수가 되겠다는 꿈 하나로 고등학교 1학년때 자퇴,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시부야 등지의 공연장을 돌며 갈고 닦은 실력이다. ●타이틀곡 ‘텔레파시´로 인기몰이 “마지막에 자퇴서를 내는 순간까지 아버지가 교문앞까지 데려다 주시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며 만류하셨어요. 지금 생각하면 왜그랬는지 모르겠는데, 당시엔 (서)태지 오빠를 잇겠다는 영웅심리가 있었던 것 같아요.(웃음)” 하지만 열여섯 소녀의 ‘무모한 도전’은 결국 해피엔딩인 셈이 됐다. 말이 서툴러 불법체류자로 몰린 일본에선 2005년 발매한 앨범이 오리콘 차트 10위에 진입했고, 외모 때문에 오디션에 낙방하기 일쑤였던 한국에선 ‘피아노 록’을 내세운 정규 1집 앨범 타이틀곡 ‘비밀번호 486’이 크게 히트했기 때문이다. “제가 피아노를 치며 록을 부르는 모습이 신선하게 보인 것 같아요. 하지만 혹시라도 ‘음악신동’으로 비쳐지는 것은 부담스러워요. 전 아직도 대중교통이 편하고, 스타라는 수식어가 어색한 신인일 뿐인데….” 선배가수들이 먼저 알아본 그녀의 음악성은 토이, 에픽하이 등 각종 신보의 피처링 작업으로 이어졌고, 지난달 28일 1년 반만에 내놓은 2집 앨범 ‘섬데이’에도 수많은 작곡가와 연주자들이 앞다퉈 참여했다. “좋은 곡이 많이 들어와서 정작 녹음은 한달밖에 못했어요. 이번 앨범의 컨셉트는 음악적 다양성과 성숙해진 감수성이에요.2집에서는 사운드에 좀더 욕심을 내서 록에 정면승부를 걸었어요.” 윤하는 이번 앨범에서 피아노 록의 계보를 잇는 타이틀곡 ‘텔레파시’를 비롯, 웅장함이 돋보이는 프로그레시브록 ‘히어로’, 화려한 현악 오케스트라와 어우러진 록발라드 ‘섬데이’, 재즈 피아니스트 송영주가 작곡한 ‘빗소리’, 타블로와 함께 부른 일렉트로니카풍의 ‘기억´ 등을 통해 팔색조 매력을 뽐냈다. ●“인순이 선배처럼 되고싶어요” “‘텔레파시’와 발라드 ‘미워하다’의 가사만 보더라도 1집 때는 순수하고 일방적인 짝사랑이 많았지만 2집때는 이별 등 대상이 있는 사랑 노래나 미래에 대한 고민을 담은 곡이 많아요. 무엇보다 국내에서 유독 어렵게 인식된 록이 대중적으로 다가갔으면 좋겠어요.” 윤하는 올해 3월 일본에서 영화 ‘이번 일요일에’의 촬영을 마쳤다. 일본에서 영상을 공부하는 한국 유학생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으로 윤하는 일본 감독이 자신을 두고 시나리오를 썼다는 말에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인간애를 바탕으로 사랑과 우정사이의 미묘한 감정을 그렸어요. 만능 엔터테이너 보다는, 노래를 표현할 때 도움이 되는 선에서 연기하고 싶어요.” 인순이 선배처럼 오래도록 노래하다, 무대에서 죽는 것이 목표라고 말하는 윤하.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맑고 씩씩한 목소리의 비결을 묻자 “어릴 때 귀가 잘 안들리시는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목청이 커진 것 같다.”며 웃는다. 영락없는 스무살 대학생이었다. 글 이은주기자 erin@seoul.co.kr 사진 남상인기자 sanginn@seoul.co.kr
  • [2008 美대선]오바마 참모습 제시 ‘출발 성공적’

    |덴버 김균미특파원| 25일(현지시간) 민주당 덴버 전당대회 첫 날은 에드워드 케네디(76) 상원의원과 미셸 오바마(44)의 밤이었다. 전당대회장인 펩시센터는 8년 만에 백악관을 되찾을 수 있다는 자신감과 기대가 넘쳐나는 축제의 장이었다.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이 민주당 대의원 및 전국 유권자들에게 친숙하게 다가설 수 있는 자리로 기획된 이날 행사는 암투병 중인 케네디 의원의 깜짝 참석으로 열기를 더했고, 오바마 의원의 부인인 미셸의 감동적인 연설로 방점을 찍었다.2만명이 넘는 자원봉사자들은 전당대회장을 찾은 사람들을 일일히 손바닥을 마주치며 환영했다. 이날 행사는 미국 동부시간 기준으로 밤 8∼10시에 맞춰 주요 행사들이 진행됐다. ●‘변화’ 물결에 휩싸인 펩시센터 민주당 전당대회장인 펩시센터는 오바마 의원의 캐치프레이즈인 ‘변화’의 물결로 넘실댔다. 전당대회에 참석한 전국 대의원들은 끝없이 이어지는 연사들의 연설에 ‘변화’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경쾌한 음악에 맞춰 쉼없이 흔들며 호응했다. 펩시센터 중앙 무대를 가득 메운 대의원들은 때로는 환호하고, 때로는 흥겨운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며 축제분위기에 흠뻑 취했다. ●암투병 케네디 깜짝 등단에 열기 더해 서서히 열기를 더해가던 전당대회장은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의 외동딸인 캐롤라인 케네디가 암투병 중인 삼촌 케네디 의원을 소개하면서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다. 대의원들은 “테디(케네디 의원의 애칭), 테디!”를 연호하며 정치 거인을 뜨겁게 환영했다. 몸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연단에 기댔지만 목소리는 힘이 넘쳐났다.“새로운 세대의 지도자 오바마에게 새로운 희망을 발견했다.”면서 오바마와 함께 새로운 미국을 만들어 나가자고 강조할 땐 곳곳에서 눈시울을 붉혔다. 존경하는 정치 거목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대의원들은 케네디라고 적힌 파란색 플래카드를 흔들며 화답했다. 지난달 10일 의료보험 관련법안 표결에 참석하기 위해 상원 본회의장에 나타났던 케네디가 이번에는 대의원 자격으로 오바마 의원에게 ‘한 표’를 주겠다며 매사추세츠에서 전날 밤 덴버로 왔다. 방사선 치료 등으로 면역체계가 약화되면서 다중이 모인 곳에 가는 것은 위험하다는 주변의 만류를 물리치고 전당대회 참석을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당 경선초반 오바마에 대한 케네디가의 지지를 선언하며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던 케네디 의원은 역사적인 현장에 모습을 드러내며 오바마의 든든한 후견인 역할을 다했다. ●미셸 전국무대 성공적 데뷔 이날 전당대회의 관심은 단연 미셸 오바마다. 과연 어떤 모습으로 남편인 오바마는 물론 자신의 모습을 내보일지 연설 전부터 화제였다. 미셸은 유명인이나 엘리트가 아닌 딸들과 부모·형제를 사랑하고 걱정하는 평범한 미국 시민의 모습으로 유권자들에게 다가갔다. 너무 세련되지 않으면서도 자신과 가족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로 보통 미국인들과 연결고리를 만들어 나갔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한 이야기, 여성으로서 쉽지 않았던 사연 등을 털어놓을 때는 눈물을 흘리는 여성 대의원들의 모습이 비치기도 했다.19년 전 처음 만났을 때 모습 그대로인 오바마 의원 이야기를 할 때는 환호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여성 참정권 획득 88주년을 거론하면서 힐러리 의원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는 것도 빼놓지 않는 정치감각도 발휘했다. 정치평론가 데이비드 거겐은 “미셸은 오바마의 가장 중요한 자산”이라며 “미셸이 민주당 전당대회 첫날 행사를 구했다.”고 평할 정도로 미셸은 전국무대에 성공적으로 데뷔했다. ●2% 부족했던 첫날 행사 정치전문가들의 첫날 총평은 ‘성공적’이다.‘오바마 피로증’이 나타날 정도로 민주당 경선 과정에서 언론 노출이 잦았지만 여전히 오바마에 대해 잘 모르는 상당수 유권자들에게 오바마의 참 모습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당대회의 본래 취지를 살리지 못했다는 비판도 있다. 민주당 대의원들만의 축제가 아닌 대선 승리를 위해 부시 행정부의 실정에 대한 공격이 실종됐다는 지적이다. 일부 정치평론가들은 귀한 시간만 허비했다고 일침을 가했다. ●“오바마 저격시도 일당 체포” 오바마를 저격하려던 일당 4명이 콜로라도주 경찰에 긴급 체포됐다고 미국의 CBS방송이 26일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체포 당시 백인우월주의 그룹의 일원으로 추정되는 이들은 망원경이 달린 고성능 라이플 2정과 방탄조끼, 마약 등을 지니고 있었다.kmkim@seoul.co.kr
  • [심층 인터뷰] 전재희 “건보 당연지정제 유지… 연금공단 개편 시기 일러”

    [심층 인터뷰] 전재희 “건보 당연지정제 유지… 연금공단 개편 시기 일러”

    여성 최초의 행정고시 합격, 중앙부처 국장, 민선시장. 전재희(59) 보건복지가족부 장관의 이름 앞에는 늘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대선에서 제2공약위원회 위원장으로 이명박 대통령의 복지분야 공약작업을 주도했던 전 장관은 지난 6일 취임사에서 ▲고령화·저출산 ▲먹거리·의약품 안전 ▲건보·연금개혁 ▲저소득층 지원 ▲국민의사 반영 ▲정책 일관성 등 6가지 과제를 제시했다. 전 장관의 행정 스타일을 두고 “특유의 추진력으로 의지를 관철시킬 것”이란 긍정론과 “여당 정책위의장 출신으로 정책기조를 진두지휘했기에 규제완화(민영화)라는 큰 흐름을 거스르지 못할 것”이란 비관론이 맞서 있다.‘성장’과 ‘복지’중 한축을 담당한 전 장관은 임기 내에 반드시 ‘능동적 복지’를 가시화시켜야 한다는 짐도 짊어지고 있다. ▶6개 과제 중 최우선으로 꼽은 것은. -고령화·저출산 문제해결이다. 이에 앞서 계획됐는데도 지켜지지 않은 정책들을 찾아 끝까지 완수하도록 하고, 부처 산하 조직이 정보를 공유해 일하도록 할 것이다. 건보·국민연금 누락자 정보공유는 물론 위험한 혈액을 미리 수혈금지시키는 시스템 등이다. 반드시 고쳐나갈 것이다. ▶저출산·고령화를 해결할 국가주도의 보육체계 강화 방안은. -대선공약을 ‘확행’하도록 정부 내에서 역할하면 자연적으로 이뤄질 것이다. 국정과제 선택과 자원배분 회의가 모두 끝난 뒤 취임했다. 그런데 국가재정을 이유로 충분히 반영되지 않아 엄청난 수정·보완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다. 요즘 이를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건보 이원화, 민영의보 활성화 등 기획재정부측에서 ‘태클’거는 부분이 많다.‘엇박자’라는 지적도 있는데. -재정부가 하는 얘기가 맞으면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러나 복지부 현실을 모르고 하는 얘기라면 우리가 이해시켜야 한다. 국민의 건강과 삶, 가족의 가치를 지키는 데 옳다고 느끼는 것은 자리를 걸고라도 열심히 설득하겠다. 결정된 것을 놓고 달리 해석하면 엇박자이지만, 어떤 주제에 대해 결정되기 전까지 치열하게 토의하는 것은 사회가 민주적으로 가기 위해 필요하다. 다양성과 총체적 지혜를 모으는 기회다. ▶기획재정부 강만수 장관과의 의견조율은. 식사라도 했나. -함께 밥먹을 시간은 없었다.(웃음)강 장관을 1차로 만났고 앞으로도 끊임없이 만나 대화할 것이다. ▶공단 박해춘 이사장이 너무 공격적 투자에 나서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많다. -연기금의 여유자금 운용은 안정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수익을 추구해야 한다. 아울러 연기금이 우리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점도 명심해야 한다. 주식시장이나 경제에 파장을 미칠 만한 발언과 발표는 대단히 신중하게 해야 한다. ▶박 이사장이 입장을 계속 고수한다면 복지부 차원에서 제재조치가 있나. -(단호하게)나는 원칙을 지키도록 할 것이다. ▶국민연금공단은 징수기능과 기금운용이 분리되는 반면 건보는 거대화된다. 산하조직 개편은. -너무 멀리가는 얘기다. 엊그제 온 사람이 정확한 답을 할 수 있겠나. 그때 가서 얘기해야 한다. 다만 국민연금의 경우, 기초노령연금이라는 새로운 업무가 생겼다. 기금운용은 본래 따로 조직돼 있고 이를 독립시킨 것이다. ▶새 정부 핵심 수뇌부로서 건보 당연지정제 폐지에 반대한다는 소신을 피력했는데. -당연지정제가 폐지되면 중환자나 난치환자들이 가고 싶은 병원이 과연 건보 환자를 기꺼운 마음으로 진료하겠는가. 이는 이상이지 현실이 아니다. 소신은 변함없다. ▶17대 국회에서 약제비 적정화 방안을 관심있게 지적해왔는데. -약제비 절감은 할 수 있는 데까지 해야 한다. 전임장관이 해오던 방법을 일관성 있게 지켜나갈 것이다. 하지만 획기적 재정안정화까지 가는 데는 한계가 있다. 절차의 민주성과 투명성을 확보할 것이다. ▶최근 보건의료단체장과의 만남에서 ‘약가인하와 관련해 외부에서 압력을 받는다.’고 말했는데. -최근 감사원에서 약가와 관련한 감사결과를 발표했고, 많은 언론이 (건보재정에서) 약가 비중을 좀더 낮췄으면 좋겠다고 얘기한다. 이를 단체장들께 전한 것뿐이다. 그분들은 지금 약값 내리면 안 된다고 얘기하고 있지 않은가. ▶최근 감사원이 약가문제에 대해 지적했다. -‘의약품정보관리시스템’을 올 10월부터 도입한다. 제약회사가 A라는 약을 생산해 도매상에 넘겨주면 도매상이 그 제품을 얼마에 어디에 몇개 팔았느냐를 추적하는 식이다. 보험약제인 경우에는 최종 결과가 심평원으로 오지 않느냐.2∼3년 내에 완전히 정착되면 ‘데이터마이닝기법’을 활용해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다. ▶17대 국회에서 ‘의약품 처방조제지원’(DUR)시스템을 계속 추진하라고 복지부에 독촉했었다.(의료계 반대에도)계속할 방침인가. -약의 부작용을 줄이고 국민건강 보호하려는 조치다. 약을 섞어 먹으면 치명적인 환자에게 부작용을 일으키는 약을 섞어 먹지 않도록 주의를 주는 것이 국가의 기본 기능이고 책무다. ▶취임식 때 행정의 일관성과 예측성 외에도 역사성을 강조했다. -일관성과 상통하는 얘기로 보면 된다. 전임자가 하던 일에 대해 소홀히 하면 득보다 실이 크다. 부처의 고유 직능이 널뛰기해서는 안 된다. 정책이 제대로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후임자도 노력하고 변화가 필요할 때에는 과감히 변화하면 된다. ▶역사에 한획을 긋겠다는 뜻은 없나. -그런 거창한 것보다 먼 미래를 보지 못하는 계획은 안 세웠으면 좋겠다. 좋은 예가 아파트다. 옛날에 지은 아파트는 지하주차장이 없고 지상주차장만 있잖은가. 자동차는커녕 사람도 못 다닌다. 복지부 일중 대표적인 게 저출산 문제다. 산아제한은 성공적이었지만 어느 시점이 오니까 오히려 부담으로 작용했다. 미래에 대한 통찰력, 전체를 보는 포괄성, 과거에 해왔던 일을 안착시키려는 노력이 병행돼야 한다. ▶17대 국회에서 대기업 건보료 체납 등을 지적했다. 건보 재정의 건전성을 유지하면서 보장성을 확대할 복안은. -새 건강보험공단 이사장이 오면 상의해 조치하겠다. 복잡한 것은 안 한다. 지출을 줄일 수 있는 항목을 이사장과 건보공단이 먼저 발굴하고 이후 복지부에서 조력할 것이다.‘경증질환에 대한 자기 부담을 줄여 중증질환 보장으로 갈 것이냐, 아니면 보험료를 올려 보장성을 높일 것이냐.’이제 두 가지 가운데 선택해야 한다. 선택권 보장을 위해 시뮬레이션을 만들겠다. ▶새 정부가 국민과의 ‘소통’에서 자연스럽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건보재정과 관련해 취임사에 드러난 ‘국민의사 반영’을 적용한다면. -여러 ‘시뮬레이션’이 나오면 언론과 인터넷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알리겠다. 이후 국민이 얼마나 알고 있는지, 어떻게 생각하는지 외부 전문기관에 ‘여론조사’를 의뢰할 것이다. ▶여론조사를 통한 정책결정을 뜻하나. -여론조사 방식도 해보고 전문가 의견도 들어보고 공청회도 하면 자연스럽게 공감대 형성되지 않겠나. 과거 내부과정은 국민에게 제대로 공개하지 않았다. 결정된 뒤 ‘내년에 보험료율이 몇 퍼센트가 오른다.’거나 ‘보장성은 어떻게 된다.’고 알려주기만 했다. 전 단계부터 국민에게 모두 알리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여론조사 내용을 가감없이 공개하겠다는 건가. -여론조사가 반드시 정책결정을 좌우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국민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보겠다는 것이다. 적어도 국민에게 저녁식사를 먹는 자리에 함께 모여 대화하고 생각할 시간을 줘야 하지 않겠나. ▶사회적 안전망이 확충되지 않은 상황에서 ‘능동적 복지’나 ‘일하는 복지’를 추진하면 잠재적 노숙자 등이 늘어나지 않겠느냐는 우려도 있다. -그것(사회적 안전망 확충)을 잘한다는 전제 하에서 앞으로 나가는 능동적 복지이고 보편적 복지이며 예방적 맞춤형 복지라는 뜻이다. 제대로 잘 다져 토대로 만들어야지 소홀히 하진 않는다. ▶(안전망 확충하려면)예산이 문제다. -예산은 투쟁이다. 대한민국을 2개의 축으로 나누면 ‘성장의 축’과 성장의 과실을 국민에게 돌리는 ‘복지의 축’이 있다. 앞쪽(성장의 축)이 제대로 안 되니 이쪽도 제약받고 있다. 경제성장과 발전이 복지와 대립각이 아니고 대단히 보완적 관계에 있다. 어려운 사람을 더 어렵게 만드는 일은 어떤 정부도 하지 않는다. 국가재정 등의 이유로 하고 있던 사업을 축소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능동적 복지’라는 새 정부 복지이념을 만드는 데 일조했나. -대선 당시 선대위에서 복지 공약을 만들었는데 이를 압축한 말이 ‘능동적 복지’가 됐더라. 기초생활 보장 대상자, 차상위 계층 등 국민가운데 선별하는 복지가 아닌 보편적 복지를 지향했다. 가난해지기 전에 미리 나서 도와주자는 예방적 복지도 말했다. 그때 만들었던 대표적인 게 ‘생애디딤돌 7대 프로젝트’다. 청년기, 장년기, 노인기 등 생애 전환기별로 필요한 복지수요에 맞춰 맞춤형 복지를 제공하자는 것이다. 정리 오상도기자 sdoh@seoul.co.kr 사진 안주영기자 jya@seoul.co.kr ■프로필 ▲경북영천(59) ▲영남대 법정대 ▲노동부 직업훈련국장 ▲경기 광명시장 ▲16,17,18대 국회의원 ▲한나라당 정책위의장 ▲한나라당 최고위원 박 이사장 불도저식 경영 ‘경고’ ■전 장관 기금운용 언급 왜 전재희 장관은 왜 연기금 운용에 대해 지적했을까. 전 장관은 서울시 계동청사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연금 고갈문제를 수익률을 높여 풀어보겠다.’는 박해춘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의 운영방식에 조심스럽게 이견을 제시했다. 복지부 안팎에선 이날 발언에 대해 민간 금융사 최고경영자(CEO)시절의 불도저식 경영을 연기금 운용에 도입하려는 박 이사장에게 적절한 시점에 경고 메시지를 보냈다고 풀이했다. 조기에 논란을 진정시키겠다는 의도도 포함됐다는 분석이다. 이번 논란은 연기금이 상반기 주식투자로 4조 3000억원의 원금손실을 본 가운데 박 이사장이 한 기자간담회에서 420조원의 연기금 가운데 40%인 160조원을 주식에 투자하겠다고 밝히면서 비롯됐다. 노동계, 학계, 시민단체 등은 앞다퉈 우려의 목소리를 높였고 정치권에선 벌써부터 박 이사장의 진퇴가 거론되고 있다. 전문가조차 “박 이사장이 기금 수익을 높이면 보험료를 안 올려도 된다는 식으로 논의를 진행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꼬집고 있다. 박 이사장은 복지부 내에서 조차 “청와대에서 받쳐주는 실세 이사장”으로 불린다. 사실 박 이사장의 ‘2013년 주식투자 비중을 40%로 늘리겠다.’는 계획은 현 시점에서 이사장에게 결정권조차 없다는 지적이다. 유시민 전 복지부 장관도 최근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박 이사장의 발언은 기금운용을 결정하는 기금위원회를 무시한 월권적 발언”이라고 반발했다. 연기금을 어떻게 굴리느냐는 원칙적으로 ‘기금운용위원회’라는 공적기구에서 결정토록 돼있다. 위원회 위원장은 복지부 장관이다. 게다가 시장상황이 유동적인데다 최종 결정은 2012년 기금운용위가 결정하게 돼 있다. 올 상반기 기준으로 연기금 적립액은 228조 5000억원이며 국내와 해외주식에 40조 9000억원(18%)이 투자되고 있다. 오상도기자 sdoh@seoul.co.kr 중학생때 부터 4남매 어머니 노릇… 민선시장·3선의원서 장관직 올라 ■전재희 장관은 누구 전 장관은 비오는 날이 좋다고 했다.“빗소리에는 리듬이 있기 때문”이란다.“비가 오면 더욱 생기가 도는데,(내가)‘비오는 날의 난초’ 같지 않냐?”고도 했다. 빗소리를 들으며 진행된 인터뷰에서 여성 특유의 섬세한 감성을 유감없이 드러낸 전 장관은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를 유난히 좋아한다.1976년 결혼해 지금까지 1년에 7∼8번씩 치르는 제사상을 손수 준비할 만큼 인간적 면모도 남다르다.73년 24세 나이에 여성 최초로 행정고시에 합격한 뒤, 승승장구해 온 ‘엘리트’로만 알려진 전 장관이다. 하지만 4남매의 장녀로 일나간 어머니를 대신해 중학생 때부터 어머니 노릇도 했고, 책값이 없어 책방에서 몇시간씩 서서 책을 읽던 불우한 어린시절도 있었다. 새 정부 초기 복지부 장관으로 하마평에 오를 때 남다른 열정을 품고 있었다.17대 국회에서도 오랫동안 보건복지위에서 활동한 바 있다. 그는 “그때 (장관직)제안을 받은 것은 사실”이라며 “하지만 총선 출마 전이라 당에서 경기도 전체 판세에 영향을 준다고 만류해 결국 출마를 선택했다.”고 털어놨다. 장관직에 대해선 “굉장히 무거운 자리라 결코 자원하고 싶은 곳은 아니다. 소명감을 가지고 부름에 따랐을 뿐”이라고 말했다. 전 장관은 독실한 가톨릭신자로도 유명하다. 남편 김형률(전 조달청 차장)씨의 세례명은 ‘요셉’이고 전 장관은 ‘마리아’다. 오상도기자 sdoh@seoul.co.kr
  • [20 & 30] 나의 취업 도전기

    [20 & 30] 나의 취업 도전기

    대학가에선 가을 졸업식이 이어지고 있지만 취업의 높은 문턱을 넘기 위한 취업준비생들의 노력에는 졸업이 없다. 심심찮게 들려오는 하반기 기업 공채와 공무원 채용 인원 감축 소식에 마음만 무거워진다. 1998년 경제위기 이후 만성화된 취업난 속에 5년 만에 대학을 졸업하는 친구들을 ‘조기졸업’이라고 부르는 자조섞인 농담도 일반화됐다. 하지만 지난 10년간 두 배 가까이 뛰어오른 등록금 때문에 무작정 졸업을 미루는 것도 능사가 아니다. 답답한 현실속에 희망을 접지 않고 자신의 꿈을 위해 잠을 줄이고, 살을 빼고, 자존심마저 버린 2030의 취업 도전기를 들어 보자. ●1차 관문 서류전형 영어의 벽을 넘어 대학시절 기자가 되고 싶었던 이모(30)씨는 한글을 누구보다 사랑했으나 영어와는 친하지 않았다. 아무리 공부해도 토익은 늘 700점대를 면치 못했다. 언론사의 1차 관문인 서류전형을 통과하기 위해선 적정 수준의 토익점수가 필요했으나 낮은 토익성적 때문에 이씨는 번번이 탈락했다. 미국에 6개월 어학연수도 다녀왔으나 귀국 후 본 토익 성적은 고작 30점 올랐을 뿐이었다. 외신기자도 아닌데 왜 토익이 중요하냐며 늘 신세한탄만 하던 이씨. 이씨는 너무나 기자가 되고픈데 영어 실력 때문에 자신의 글쓰기 실력조차 뽐낼 기회를 갖지 못한 현실을 넘기 위해 이를 악물고 넉달간 토익공부만 했다. 그 결과 토익 점수가 955점이나 나왔다. 이후 그는 자신감이 붙어 여러 언론사에 도전했다. 예전에 비해 언론사 공채 1차 전형의 승률이 꽤 높아졌다. 하지만 언론사 시험엔 고득점의 토익만이 능사가 아니었다.2차 필기시험에서 떨어지기를 20여회. 드디어 한 언론사로부터 필기전형 합격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접해본 언론사 면접과정은 그에겐 너무 낯설었다. 버벅거리기만 하다 떨어진 이씨. 이후 약 2년간 면접만 7군데를 보고 언론사 시험 준비 4년 만에 신문사 기자가 됐다. 이씨는 “7전8기 정신으로 버텼다.”면서 “한 언론사를 상대로 평균 3번씩은 원서를 냈던 것 같다.”고 말했다.“시간이 걸릴 뿐, 포기하지 않으면 노력이 배신하진 않습니다.” ‘덜렁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회사원 김모(30·여)씨는 ‘직원과 회사는 궁합이고 팔자고 운명이다.’고 말한다. 김씨는 2년간의 백수생활 끝에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기업 입사에 성공했다. 김씨는 자신의 입사실패 이유를 ‘너무 꼼꼼이 준비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영어면접에는 100개가 넘는 예상질문에 일일이 영어로 답을 달아 외웠다. 최종면접에는 회사의 인지도 조사 등 시키지도 않는 발표를 했다. 시험 내내 잠도 안자고 자료를 준비했다.6개월 동안 각종 시험에 떨어지고 ‘인문학 전공자’여서 취업에 실패한다는 생각에 대학원에 진학했다. 인문학도로서 공부로 끝장을 보겠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공부는 만만치 않았고 결국 1년 만에 휴학을 하고 다시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다.“솔직히 부모님이 공부로 성공할 싹이 안 보인다고 학비를 끊었어요.” 절망의 끝에서 본 시험은 더욱 세밀하게 준비했다. 하지만 영어면접을 대비해 정리한 파일을 어머니가 쓰레기인 줄 알고 버렸다. 김씨는 오히려 준비 없이 간 영어면접에서 더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했다. 또 ‘덜렁이’답게 최종면접에서는 발표 파일을 두고 갔다. 그리고 묻는 질문에만 충실히 답했다. 결국 합격의 영광을 안았다.“왜 붙었는지 모르겠어요. 회사 선배들은 적성시험에서 영어면접·최종면접까지 비슷한 점수여서 붙었다는데 어리둥절했죠.” ●‘5당 6락´ 정신으로 끊임없이 채찍질 최근 취업에 성공한 박모(29)씨는 ‘불굴의 사나이’로 정평이 나 있다. 일자리를 얻기 위해 죽는 것 빼고는 다해 봤기 때문이다. 박씨는 2005년 제대 후 복학했다. 졸업을 2년 앞둔 시점이었다. 외환위기 이후 10년이 다 됐지만 취업 시장은 여전히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박씨는 남다른 자세만이 취직의 비결이라 믿었다. 그는 남은 학기 동안 ‘5당6락’의 자세로 일관했다.‘5시간 자면 취직,6시간 자면 낙방’이라는 정신으로 자신을 채찍질하며 알찬 나날을 보냈다. 우선 토익 성적부터 올려야 했다. 복학하던 그해 처음으로 토익을 봤지만 670점을 얻는데 그쳤던 것이다. 그는 학원 수업도 열심히 듣고, 대학 내 스터디 모임에도 활발히 참가했다.1년여가 지났을 즈음에는 900점대를 가뿐히 돌파했다. 학기 중에는 주유소, 편의점, 음식점 등 여러 곳에서 일하며 다양한 사회 경험을 쌓았다. 방학 때는 기업 인턴 생활도 했다. 학교 성적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졸업할 때 4.5점 만점에 4.2점을 받았다. 졸업을 앞두고서는 전문 학원에서 면접 교육도 따로 받았다. 스피치부터 언어 교정, 옷차림 등에 대해 두루 배웠다. 그는 모든 것이 준비됐다고 생각했다. 취업 전 졸업은 자살행위라는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지난해 2월 졸업했다. 그때부터 박씨는 좌절의 연속이었다. 정규직의 꿈이 요원했던 것이다. 아무리 따져 봐도 다른 입사지원자들보다 뒤지는 게 없는데 번번이 떨어졌다.1년 넘게 백수로 지내면서 심신이 피폐해졌다. 대인관계를 기피하는 등 성격도 침울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중소기업에 다니는 친구를 만났다. 그는 자신보다 능력이 뛰어난데도 대기업이 아닌 중소기업에 자원했다. 그에게서 “어느 곳에서든 경력을 쌓아 몸값을 불린 뒤 더 좋은 곳으로 옮겨가는 게 요즘 추세”라는 말을 들었다. 순간 박씨는 자신이 국내 굴지의 기업과 공기업에만 지원서를 넣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박씨는 눈높이를 낮춰 중소기업에 지원했고, 결국 지난 6월 취업했다.“단번에 높은 곳에 올라 모든 걸 움켜쥐려고 서두르다 보니 의욕이 너무 앞서 잘 안 됐던 것 같아요. 하나씩 밟아 나간다는 자세로 임하니 취업으로 통하는 문이 열리더군요.” 대학생 임모(26·여)씨는 ‘한방’으로 유명하다. 모두가 어렵다는 취직의 문턱을 단 한 번 응시로 가뿐하게 넘었기 때문이다. 임씨는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취업을 위한 4단계 계획과 세부 실천 사항을 면밀히 작성했다.1단계는 영어의 달인이 되는 것이었다. 토익 성적 900점대는 기본이고 외국인과 자유롭게 의사소통을 하는 게 목표였다. 그는 1년 동안 학원과 학교 수업을 통해 어느 정도 영어에 자심감이 붙었다.2학년이 되던 해 실전 경험을 쌓기 위해 캐나다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그곳에서 이를 악물고 노력한 결과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 능수능란하게 대화할 수 있게 됐다. 2단계는 입사를 희망하는 회사에 대해 면밀히 파악하고, 인맥을 두텁게 쌓는 것이었다. 그는 기업 내 학맥을 이용했다. 대학 선배를 통해 기업 분위기, 입사 절차, 면접 방법 등을 두루 들었다. 선배의 소개로 인턴 생활도 했다.1년간 인턴으로 지내면서 회사 내 여러 팀을 돌아다니며 임원진들에게 눈도장을 받았다. 3단계는 외모 관리였다. 취업에 과외나 아르바이트를 통해 얻은 수입을 과감히 외모 가꾸기에 투자했다. 치아교정, 라식수술 등을 통해 얼굴을 돋보이게 했고, 헬스클럽에도 꾸준히 나가 매력적인 몸매 라인을 만들었다.4단계는 완벽에 가까운 학점 관리였다. 임씨는 4.5점 만점에 4.4점이라는 경이적인 학점을 받았다. 이 모든 과정을 깔끔하게 소화해낸 임씨는 올 2월 졸업과 동시에 바라던 대기업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사했다. “취업을 위해 친구들과의 어울림이나 이성교제 등 대학시절 낭만을 포기했어요. 하지만 남들이 부러워하는 곳에 입사하고 나니 친구들에게서도 더 자주 연락이 오고, 남자 소개도 많이 들어오더군요. 지난 세월 공들인 대가를 충분히 보상받고 있습니다.” ●1년동안 18㎏ 몸무게 줄이며 무한도전 승무원이 되고 싶었던 김모(25·여)씨의 대학시절 몸무게는 평균 63㎏이었다. 김씨의 키는 168㎝였지만 우람한 체격 때문에 ‘스튜어디스가 꿈이다.’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웠다. 그녀는 몸매가 안되면 실력이라도 키우자는 마음으로 어학공부에 매진했고 900점이 넘는 토익점수,4.5만점에 평점 4.0의 학과 성적을 일궈 냈다. 승무원 학원에 다니면서 반드시 살을 빼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김씨는 약 1년간 18㎏의 몸무게를 감량했다. 하루에 3시간씩 운동을 하고 식이요법으로 일궈낸 결과였다. 이후 김씨는 원하던 항공사에 입사했다. 그녀는 현재 국제선을 타고 비행하며 탑승객들에게 편안한 비행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김씨는 “정말 스튜어디스가 되겠다는 일념 하나로 줄곧 실패해 왔던 다이어트에 성공했다.”면서 “나와의 싸움을 이겨내 소원이었던 스튜어디스가 된 것은 스스로 너무 대견하다.”고 말했다. 김씨는 취업을 위해서라기보다 원하는 꿈을 일궈 내기 위해선 무언가에 미친 듯이 정성을 쏟아야 한다고 강조했다.“인생, 한 번밖에 못사는 거잖아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극성을 부려줘야죠.” 2003년 입사한 이모(32)씨는 10개가 넘는 기업의 최종면접에서 떨어졌다. 그는 “첫 시험에서 최종면접까지 올라가 자만에 빠졌다. 하지만 1년6개월이 지속되자 다른 사람들은 지상에 있고, 나 혼자만 지하에 있는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이씨는 토익 930점에 학점도 좋았다. 그는 자신이 기업에 합격할 결정적인 무기가 없다는 것을 ‘낙방생활’ 1년 만에야 알았다. 해외연수도 인턴 경험도 없었다. 자격증도 없었다. 단지 자신감만 있었던 것이다. 이씨는 “뒤돌아 보니 난 무모한 돈키호테였다.”고 말했다. 지원을 너무 많이 하다 보니 원서 첨부 서류를 다른 회사에 내러 가기도 했다. 다른 이들은 우편으로 보내지만 이씨는 성의가 없다고 비난하면서 직접 내러 간 것이다.“인사부 직원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쳐다보더라고요. 전 다른 회사인지도 모르고 원서 안 받는다고 항의까지 했는데 그 창피는 말로 못하죠.” 하지만 그의 합격소식은 무작정 모든 시험에 참가한 데서 왔다.S기업에 한 해에 3번이나 시험을 보게 됐고, 인사담당자 및 실무진이 그의 정성을 높이 산 것.“기업은 좋은 인재를 뽑아야 하지만 저 같은 무모한 사람을 뽑아 주면 인생을 구제해 준 기업에 충성을 다한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황비웅 김정은 장형우기자 zangzak@seoul.co.kr
  • [20&30] 솔로탈출 감동의 러브스토리

    [20&30] 솔로탈출 감동의 러브스토리

    ‘다른 사람들은 잘도 결혼하는데 난 왜 못할까.’ 결혼은 하고 싶은데 뜻대로 되지 않는 미혼 남녀의 공통된 의문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자신보다 못났다고 여겨지는 이들도 짝을 만나 결혼식을 올린다. 직장이 안 좋은 걸까, 돈이 없어서일까.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 봐도 뾰족한 답이 나오지 않는다. 여론조사에서도 결혼을 못해 시달리는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문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많은 것으로 드러났다. 결혼정보회사 듀오가 최근 결혼적령기의 20대 후반∼30대 미혼남녀 410명(남성 192명, 여성 218명)을 설문 조사한 결과, 전체 응답자 가운데 83.4%가 결혼을 위해 전문가의 조언을 얻고 싶어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런 이들을 위해 기혼 남녀의 결혼성공담을 들어봤다. 그들의 감동적인 ‘러브 스토리’에서 결혼에 이르는 비법을 찾아보자. ●“사랑을 위해서라면 내 모든 것을 드리겠어요” 대부분의 연인들은 자신을 낮추고 상대에게 아낌없이 주는 ‘희생 정신’이 결혼에 이르는 지름길이었다고 회고했다. 직장인 최모(30·여)씨는 사랑을 위해 미국 유학을 중도에 포기했다. 공부보다 남자친구와의 결혼을 택했다. 최씨는 대학 입학과 동시에 과 동기인 김모씨와 눈이 맞았다. 김씨가 군 복무를 하던 2년 남짓을 빼곤 8년 동안 늘 붙어 다녔다. 그러다 2006년 초 대학원을 졸업한 최씨는 ‘미국 박사’를 바라는 부모의 강권에 못 이겨 김씨를 남겨둔 채 홀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김씨와 헤어져 지구 반대편으로 건너간 최씨는 외로움에 눈시울을 적시는 날들이 적지 않았다. 언제나 곁에서 힘이 돼준 김씨가 그리웠다. 그의 소중함도 뼈저리게 느꼈다. 그해 겨울, 더는 사무치는 그리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서둘러 귀국했다.“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남자친구 회사로 찾아가 ‘더 이상 떨어져 살 수 없다.’며 당장 결혼하자고 했어요. 그때 남자친구의 감동에 찬 표정은 지금도 선명해요. 부모님은 대경실색했지만 제 마음을 이해하시고는 결혼을 승낙했습니다.” 학원강사 임모(34)씨는 전형적인 ‘경상도 사내’다. 여성은 순종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재미와는 담을 쌓은 무뚝뚝함까지 겸비했다. 친구들은 그런 임씨가 절대 결혼하지 못하리라 장담하곤 했다. 하지만 예언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친구들 가운데 가장 먼저 반려자를 찾은 것이다. 임씨는 5년 전 같은 학원에서 강사로 일하던 한 여인을 만났다. 그녀의 자태에 임씨의 굳은 마음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이후 새벽부터 출근해 그녀의 책상 위에 장미꽃 한 송이와 절절한 연모의 마음이 담긴 쪽지를 남겼다.‘꽃과 글’로 사랑의 마음을 전한 지 한 달째 되던 날 그녀에게 데이트를 신청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는 듯 빙그레 웃으며 승낙했다. 그녀와의 첫 데이트 이후 임씨는 매일 강의가 끝나면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줬다. 함께 있는 동안에는 절로 온갖 유머가 튀어나왔다. 그런 임씨에게 위기의 순간이 찾아왔다. 여자 쪽 부모가 잘나가는 변호사와 맞선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그녀에게 이 소식을 들은 임씨는 경상도 사내의 뚝심과 배짱을 발휘할 때가 닥쳤음을 직감했다. 그는 문지방이 닳도록 그녀의 집을 드나들었다. 온갖 감언과 선물 공세로 부모의 마음을 얻는 데 성공했다. “당시엔 뭔가에 홀렸던 것 같아요. 사랑이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듣긴 했지만 제가 180도로 확 바뀔지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지금도 당시를 떠올리면 절로 웃음이 나옵니다.” ●“집안 반대에도 우리 사랑 변치 않아” 집안 반대에도 끝까지 사랑을 지켜내 결혼에 성공한 이들도 적지 않다. 교육업계에 종사하는 이모(39)씨는 지금도 부인을 생각하면 눈시울이 젖는다. 숱한 고비를 이겨낸 끝에 그녀와 하나가 됐기 때문이다. 이씨는 1992년 제대 뒤 복학했다. 그해 첫 전공수업 시간에 새내기로 들어온 과 여자후배를 알게 됐다. 서로 이야기가 통하고 취미나 생각이 비슷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했다. 늘 함께 지내며 서로를 위해주고 챙겨줬다. 두 사람은 같은 해 졸업했고, 나란히 중견기업에 취직했다. 남은 건 결혼뿐이었다. 하지만 시련이 닥쳤다. 이씨의 부모가 쌍수를 들고 반대했다. 여자친구가 무남독녀로 홀아버지 밑에서 자랐고, 집안이 너무 가난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심한 상처를 받은 나머지 회사도 그만두고 자취를 감췄다. 며칠 뒤 이씨도 사직하고, 그녀를 찾아나섰다. 우선 그녀의 고향인 경남 창원으로 향했다. 다행히 그녀는 아직 그곳에 있었다. 곁에 머물며 그녀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줬다. 이씨는 그곳에서 취직한 뒤 자리를 잡았다. 그녀를 도저히 떠날 수 없었다.1년 남짓 지났을 무렵 부모에게 “결혼을 허락하겠다.”는 연락이 왔다.“그때 여자친구가 어디에 있든, 몇날 며칠이 걸리든 꼭 찾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녀 말고 다른 그 무엇도 의미가 없었죠.” 증권회사에 다니는 이모(29·여)씨는 대학 선배인 박모(34)씨와 일심동체가 돼 양가 부모의 반대를 이겨내고 결혼에 성공했다. 양쪽 부모는 모두 두 사람의 결혼을 극구 말렸다. 집안 형편이 서로 맞지 않다는 게 이유였다. 이씨의 집은 공직에 복무하는 아버지 덕에 풍족한 편이었다. 반면 박씨는 편모슬하에서 힘들게 컸고 가정형편도 좋지 않았다. 그러나 이씨는 4년 동안 변함없이 사랑했던 박씨와 헤어질 수 없었다. 박씨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매일 양쪽 집안을 오갔다. 좋아하는 음식을 사들고 가는 등 부모들의 마음을 돌리고자 노력했다. 문전박대를 수없이 당했지만 굴하지 않았다. 6개월간 끈질기게 달라붙은 결과 그토록 차갑기만 하던 부모들의 마음이 녹기 시작했고, 지난해 9월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다.“양쪽 집안에서 고작 가정형편을 이유로 반대하고 나섰을 땐 정말 마음이 아팠어요.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어떡하겠어요. 죽을 힘을 다해 양가 부모님들을 설득했죠.” 수년에서 수십년 동안 한 사람을 바라보며 키워온 사랑이 결실을 맺은 이들도 있다. 직장인 김모(36·여)씨는 1996년 대학 졸업 뒤 곧바로 취직했다. 하지만 남자친구는 이듬해 졸업하고도 취업하지 못했다. 외환위기 여파로 취직은커녕 아르바이트 자리도 구하기 힘들었다.‘백수’로 지낼 수밖에 없었다. 남자친구는 취업 스트레스로 불면의 나날을 보내면서 점점 수척해져 갔다. 김씨도 마음고생이 심했다. 부모가 “내일 모레면 서른이다. 더 늦기 전에 결혼하라.”며 압박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김씨는 이런 어려움을 무심결에 남자친구에게 털어놨다. 그러자 남자친구는 대뜸 “좋은 남자 만나라.”며 이별을 통보했다. 하지만 김씨는 그가 아니면 그 누구와도 함께 살 수 없다고 생각했다. 김씨는 여행 가방에 옷과 생필품을 챙겨 넣고 무작정 그의 자취방으로 달려갔다. 방문을 열자 남자친구는 생라면을 안주 삼아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김씨는 그 모습을 보자 눈물이 왈칵 솟구쳤다. 부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한 달간 남자친구의 자취방에 머물며 그의 마음을 어루만져 줬다. 그녀의 지극 정성은 그해 겨울 결혼으로 빛을 발했다.“당시 집에서는 난리가 났지만 남자친구와 도저히 헤어질 수 없는데 어떡하겠어요. 그때 제 행동이 지금도 옳았다고 자부해요.” ●초등 동창생 중·고·대학까지 곁에서 돌봐 직장인 김모(33)씨는 20년 동안 한 여자만 바라봤다. 초등학교 동창이었다. 예쁜 외모와 밝은 성격 때문에 어릴 때부터 남성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김씨는 중·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에 이르기까지 줄곧 그녀 곁을 지켰지만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하지는 못했다. 대학시절 그녀는 친구들과 술을 마실 때면 “돈이 없다. 데려다 달라.”며 전화하곤 했다. 그때마다 김씨는 군말 없이 차를 몰고 가 계산을 치르고 해장국까지 먹인 뒤 집에 바래다 줬다. 그녀의 ‘주사’는 직장인이 되고나서도 여전했다. 그런 어느 날 그의 지성이 통했던지 그녀에게 변화가 감지됐다. 돌보듯 하던 무덤덤한 태도에서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따뜻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다른 남자와의 연애 이야기는 쑥 들어가고 그에게 “잘 생겼다.”,“여자 마음을 잘 살펴봐라.”는 등의 말을 늘어놨다. 김씨는 그녀의 말과 눈빛에서 그녀의 마음을 읽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참고 참았던 사랑을 고백했다. 김씨는 지난해 봄 그녀와 결혼했다.“결국 그녀 곁에 제가 남게 되리라 생각했어요. 미인은 강한 자가 아니라 인내심이 많은 자와 백년가약을 맺게 되리라고 확신했거든요.” 직장인 신모(28·여)씨는 짝사랑으로 오랜 가슴앓이를 했던 남자와 다음달 결혼한다. 신씨는 빼어난 외모 덕에 직장 동료나 선후배들 사이에 인기가 좋았다. 하지만 신씨는 자신을 좋아하고 쫓아다니는 남자들은 마다하고 언제나 냉랭하기만 한 선배에게 묘한 매력을 느꼈다. 선배의 관심을 끌기 위해 아침마다 커피를 타주거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건네는 등 온갖 교태(?)를 부렸지만 그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초조한 마음에 친한 동료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에게 ‘선배가 해외지사 지원을 위해 아침마다 중국어회화 학원을 다니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신씨는 무작정 같은 반을 신청했다가 첫날부터 선배가 보는 앞에서 창피만 당했다. 선배가 수강하던 반은 고급반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아침마다 꿋꿋하게 나가 선배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선배도 신씨의 마음을 알았는지 한 달쯤 지나자 대하는 게 달라졌다. 출근 시간 전까지 중국어도 가르쳐주고, 아침도 같이 먹었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나면서 두 사람은 연인 사이로 발전했고, 결국 한 집에서 살게 됐다.“매일 새벽 5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학원에 갔어요. 어머니가 ‘잠도 많은 애가 웬일이냐.’며 신기해 하셨는데, 요즘 남편과 친정에 갈 때면 그때 일을 들먹이며 놀리곤 하세요. 중국어 실력이야 당연히 ‘꽝’이죠.” 김정은 황비웅 장형우기자 kimje@seoul.co.kr
  • “판정 왜이래?”…불신 치닫는 베이징 올림픽

    “판정 왜이래?”…불신 치닫는 베이징 올림픽

    스웨덴의 아라 아브라하미안은 14일 레슬링 그레코로만형 84㎏급에서 동메달을 따고 시상대에 올랐지만 메달을 매트에 내팽개치고 나가버렸다. 판정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 2004아테네올림픽 은메달리스트 아브라하미안은 준결승에서 안드레아 미구치(이탈리아)에게 패한 뒤 심판에게 소리를 내지르며 강하게 항의했고 만류하는 코칭스태프를 뿌리치고 매트를 떠났다. 그는 동메달 결정전에서 멜로닌 누몬비(프랑스)를 꺾은 뒤에도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설치된 바리케이드를 치는 등 계속 강한 불만을 나타냈다. 미구치는 결승에서 졸단 포도르(헝가리)를 물리치고 금메달을 차지했지만 시상대에서 아브라하미안과 함께 사진 촬영을 할 수 없었다. 미구치는 아브라하미안의 항의 퇴장에 대해 “나의 우승을 위한 세리머니를 망친 짓이다. 누구라도 심판 판정에 의문을 가질 수 있지만 스포츠에서는 스포츠맨십을 보여줘야하고 그 결과를 받아들여야 한다”며 불쾌해했다. 아브라하미안은 “나는 이 (동)메달에 관심이 없다. 이번이 나의 마지막 경기가 되는데 나는 금메달을 원했다. 이번 올림픽은 실패라고 생각한다”고 말했고 레오 밀라리 감독도 판정에 대해 “그것은 모두 정치적인 것이다”라고 거들었다. 2008베이징 올림픽에서 불거진 판정 시비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판정 시비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호주는 13일 수구 여자 B조 예선 헝가리전에서 단 4초를 남기고 7-7 동점을 허용해 결국 무승부를 기록한 뒤 역시 심판 판정에 강한 불만을 표출했다. 호주가 승리했다면 준결승 진출을 확정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호주 선수가 종료 직전에 퇴장당한 뒤 헝가리에 동점골을 허용한 것에 대해 호주 그렉 맥파든 감독은 “심판은 바보다. 헝가리 선수가 우리 선수를 잡았는데 오히려 우리가 퇴장 당했다. 모두 쓰레기들이다”라고 욕설을 퍼부었다. 체조 남자 개인종합에서 한국의 양태영이 마지막 도마 연기에서 13.70이라는 터무니없이 낮은 점수를 받은 뒤 비디오판독을 거친 것이나 배드민턴 여자 복식 8강전에서 한국의 이경원 이효정 조에게 승부처에서 계속된 서비스 폴트를 준 중국인 심판의 판정, 한국과 중국의 야구 경기서 나온 이상한 판정 등이 꼭 ‘아전인수’격의 해석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기사제휴/스포츠서울 박정욱기자@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동메달 안받아!”…판정 불만 시위 스웨덴 레슬러

    “동메달 안받아!”…판정 불만 시위 스웨덴 레슬러

    ”동메달 안받아!” 2008베이징 올림픽에서 스웨덴의 레슬링 선수 아라 아브라하미안이 동메달 수상을 거부해 논란이 예상된다. 지난14일 중국 베이징 중국농업대 체육관에서 열린 레슬링 그레코르만형 84kg급에서 아브라하미안은 심판 판정으로 인해 준결승전에서 패했다고 주장하며 동메달 수상을 거부했다. 메달 시상식에서 아브라하미안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동메달을 바닥에 놓은 뒤 식장을 빠져나갔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은메달리스트인 그는 이번 올림픽에서는 이탈리아의 안드레아 미구치에게 패하며 결승 진출이 좌절됐다. 이에 경기 직후부터 “심판의 판정이 편파적이었다”고 주장하며 만류하는 코칭스태프도 뿌리치며 매트를 떠났다. 아브라하미안은 “내가 원한 건 오로지 금메달이었다.”고 당당히 밝혔으며 준결승에서 아브라하미안을 이긴 안드레아 미구치는 여세를 몰아 금메달을 획득했다. 한편 아브라하미안이 거부한 동메달은 올림픽 운영위원회에 반납됐다. /나우뉴스팀@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베이징 플러스]

    판정에 불만을 품은 레슬링 선수가 시상대에서 메달을 던지고 사라지는 소동이 빚어졌다. 소동의 주인공은 스웨덴의 아라 아브라하미안. 아브라하미안은 14일 베이징 중국농업대 체육관에서 열린 그레코로만형 84㎏급 시상식에서 시상자로부터 건네받은 메달을 던지고 나가버렸다. 아테네올림픽 은메달리스트인 아브라하미안은 준결승에서 이탈리아의 안드레아 미구치에게 진 뒤 소리를 지르며 심판 판정에 항의했다. 코칭 스태프의 만류도 뿌리치고 경기장을 나간 아브라하미안은 동메달 결정전에서 이겨 동메달을 걸게 됐지만 분이 채 풀리지 않았던 것. 기자회견에서도 질문에 대답은커녕 애꿎은 바리케이드에 분풀이를 했다. 결국 아브라하미안을 꺾은 미구치는 금메달을 목에 걸었지만 시상대에서 아브라하미안과 함께 사진을 찍지 못하고 내려와야 했다. ●스페인 남자농구팀 동양인 비하 사과 스페인 남자농구 대표팀의 간판 스타 파우 가솔이 결국 동양인 비하 논란을 빚은 광고에 대해 사과했다. 미프로농구(NBA) LA레이커스에서 뛰고 있는 가솔은 14일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문제의 광고 사진을 촬영할 때 우리도 편하지 않았다. 누구 하나라도 불쾌하게 생각했다면 진정으로 사과한다.”고 말했다. 스페인 대표팀은 스포츠신문 마르카에 실린 광고에서 손으로 두 눈가를 잡아당겨 찢어진 눈을 표현, 동양인을 비하하려 했다는 구설수에 올랐다. 그러나 가르시아 레네세스 스페인 감독은 “사과할 생각 없다. 단지 가벼운 농담으로 이해해 달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쿠바는 야구와 연애중 야구라면 사족을 못 쓰는 쿠바 국민들이 피델 카스트로 국가평의회 전 의장의 82번째 생일도 잊은 채 올림픽 야구에 빠져 있다.AFP통신에 따르면 장 출혈로 투병하고 있는 카스트로 전 의장은 13일 생일을 맞았는데 예전 같으면 수도 아바나 도심에서 시끌벅적한 행사가 이어졌지만 이번 생일만큼은 국민들의 관심을 야구에 양보해야 했다. 특히 풀리그 첫 경기에서 쿠바가 난적 일본을 4-2로 꺾자 많은 국민들이 승리의 기쁨에 도취돼 생일을 잊었다고 통신은 전했다. 베이징 올림픽특별취재단
  • ‘고속도로 트로트 천왕’ 최세월 “딸(바다)을 위해…”

    ‘고속도로 트로트 천왕’ 최세월 “딸(바다)을 위해…”

    46년 소리꾼 인생을 살아온 가수 바다(본명 최성희·28)의 친아버지 최세월(본명 최장봉·60)씨가 ‘부모·자녀’ 가수를 바라보는 편견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했다. 최세월 씨는 최근 인터뷰를 통해 “오랫동안 트롯트 메들리 가수로 사랑받아 왔지만 정식 가수로 데뷔하는 데는 크고 작은 어려움이 따랐다.”며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딸에게 행여 영향이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로 조심스러웠던 것이 사실”이라고 고백했다. ‘고속도로 트로트 4대 천왕’이란 예명으로 익히 알려진 최세월 씨는 사실 지금껏 7장의 앨범을 발매하고 총 4백만장이 판매고를 올린 ‘원조 소리꾼’이다. 7월 말 발매한 첫 정식 앨범 ‘정들었네’는 전통 가요에서 9곡의 자작곡에 이르기까지 그의 오랜 음악적 내공을 고스란히 담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최세월 씨의 음악 활동이 주로 ‘고속도로 트롯트 메들리’라는 음지 시장에 국한돼 있었던 까닭에 공중파 음악 프로그램을 통해 음악을 접하는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 그의 데뷔 소식은 “가수 자녀의 후광을 업은 것이 아니냐”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 대대로 국악집안, 호랑이가 ‘호랑이 새끼’를 낳는다 한결 같은 음악 인생을 걸어왔던 최세월 씨는 이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는 “엄밀히 말하자면 ‘가수 최성희(바다)가 소리꾼 최세월의 딸’이라는 표현이 옳은 표현이지요.”라며 아버지다운 푸근한 미소를 지어 보냈다. “호랑이는 호랑이 새끼를 낳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저희 집안은 대대로 국악 집안이였어요. 제 경우 16살 때 전남 콩쿨에 입상하면서 소리꾼의 길을 걷게 됐지요. 바다 역시 음악인의 피를 고스란히 물려 받았는지 어린시절 부터 재능을 보였습니다.” ◆ ‘가수 피’ 물려받은 바다의 꿈, 만류했다 “선천적으로 소리가 탁 트인 아이였어요. 제가 노래 하는 모습을 늘 접하며 자란 탓에 자연스레 가수의 꿈을 가지게 된 듯 하고요. 중 2시절 처음 가수의 꿈을 얘기했는데 제가 단호히 만류했어요. 제가 겪은 어려움을 딸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은 아버지의 심정이었죠.” 최세월 씨는 99%의 가수가 성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가수는 스포츠와 같다.”며 “2등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라면서 불확실한 경쟁 세계에 뛰어드는 딸에게 걱정이 앞섰다고 털어놨다. “바다가 가수의 꿈을 밝혔을 때 가수가 아닌 아버지로서 가로막게 되더군요. 내가 이 길을 겪고 있는데 너까지 잘 안되면 어떡하냐는 솔직한 우려가 있었고요. 다른 부모들처럼 탄탄히 뒷받침 해 줄 수 없는 마음도 아팠습니다.” 최세월 씨는 “사실 바다가 예고 입학 시험에서 떨어졌으면 하는 마음이 절반이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피는 속일 수 없는 법. 바다는 예고에 이어 대형 기획사 오디션 합격까지 척척 연달아 이뤄냈고 그제서야 최세월 씨도 바다의 꿈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가수라는 직업은 하늘이 정하는 것이라 생각해요. 가수 집안에서 가수가 나오는 것은 재능 탓 일 수 있지만 어렸을 적 부터 노래 부르는 환경에 자연스럽게 노출됐기 때문이죠. 바다에게 노래를 가르칠 때도 그랬어요. 기초가 되는 소리법, 호흡법 부터 차근차근 가르쳤죠.” ◆ ‘바다父 최세월’ 아닌 ‘바다가 최세월 딸’임을 입증할 것 아이돌 그룹 출신 가수 중 가창력 면에서 으뜸이라는 평을 받았던 바다 뒤에는 ‘소리꾼’ 아버지의 가정생활 속 음악수업이 자리 잡고 있었다. 최세월 씨는 바다를 가르켜 “딸이기 전에 후배 가수”라며 딸보다 뒤늦게 가요계에 정식 출사표를 던진만큼 ‘부녀의 선전’을 희망했다. “46년 음악인생 끝 예순에 들어서야 ‘가수’의 꼬리표를 달았어요. 한 평생 소리꾼의 길을 걸었던 아버지인데 이제는 많은 대중들에게 아버지의 음악을 들려주라는 바다의 적극적인 지지가 있었고요. 효녀죠. (웃음)” 지난 3월 바다는 아버지의 예순 생신을 맞아 그의 음악인생을 담은 ‘로맨스 첫번째 DVD 앨범’ 을 발매해 진한 효(孝)를 엿보인바 있다. 최세월 씨 역시 이번 흥겨운 타이틀 곡 ‘정들었네’를 통해 가족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드러내기도 했다. 최세월씨는 “대중들에게 ‘바다의 아버지, 최세월’이 아닌 ‘아, 바다가 최세월에게서 태어나서 실력이 있었구나’하는 평을 이끌어 낼 수 있도록 그간 걸어왔던 음악 인생의 열정을 한꺼번에 쏟아내는 모습을 보여 주겠다.”는 각오도 잊지 않았다. 서울신문NTN 최정주 기자 joojoo@seoulntn.co.kr / 사진 = 조민우 기자@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통일부, 전교조 방북 불허

    통일부가 전교조의 방북을 불허했다. 전교조는 7일 “오늘 오후 통일부로부터 ‘금강산 문제가 해결된 다음에 가라.’고 구두 통보를 받았다.”면서 “공식 공문은 오늘 저녁이나 내일 오전 중으로 보내겠다고 했다.”고 밝혔다. 전교조는 오는 10∼14일 북한에서 남북 교육자 상봉모임을 갖기 위해 지난달 26일 통일부에 69명에 대한 방북 신청을 했다. 그동안 통일부는 전교조의 방북 신청에 대해 ‘현 상황에서 대규모 방북은 적절치 않다.’며 만류해왔다.박홍환기자 stinger@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83) 다시 화친을 시도하다(Ⅰ)

    [병자호란 다시 읽기](83) 다시 화친을 시도하다(Ⅰ)

    남한산성에서 고단한 나날을 보낸 것이 어느덧 17일, 병자년(丙子年)이 저물고 정축년(丁丑年)이 밝아 왔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상황은 오히려 더 악화되었다. 청 태종 홍타이지는 탄천(炭川)에 진을 쳤다. 청군 병력이 30만이나 된다는 소문이 돌았다. 산성에 대한 청군의 정찰은 훨씬 강화되었다. 홍타이지까지 산성 근처로 다가와 자리를 잡았으니 청군은 이제 모든 역량을 다해 조선 조정을 압박할 요량이었다. 조선군 근왕병들이 산성으로 접근하는 것은 더 어려워졌다. 남한산성에서는 다시 화친을 시도해야 한다는 주장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최명길·김상헌 사신 파견 싸고 대립 1월1일 원단. 인조는 백관들을 거느리고 서쪽을 향해 망궐례(望闕禮)를 마쳤다. 이어 2품 이상의 신료들이 인조에게 새해 인사를 올렸다. 새해를 맞아 광주목사(廣州牧使) 허휘(許徽)가 쌀로 떡을 빚어 인조께 진상했다. 신하들에게도 얼마간씩 떡이 돌려졌다. 성첩을 지키는 장졸들에게도 ‘새해 선물’로 특식이 주어졌다. 삶은 콩과 말고기였다. 나만갑(羅萬甲)은 떡을 대하니 아침부터 눈물이 난다고 적었다. 하지만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무엇인가 돌파구가 필요했다. 조정은 비변사(備邊司) 낭청(郎廳) 위산보(魏山寶)를 청군 진영으로 보냈다. 이번에도 술과 고기를 들려 보냈다. 신년 인사를 겸하여 적정을 살펴보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청군 장수들이 조선 사신 일행을 대하는 태도가 영 달랐다. 사신 일행이 도착했을 때, 어떤 자가 위산보의 머리채를 잡아끌고 들어가려 했다. 다른 자가 만류하여 겨우 멈췄지만, 태도는 여전히 뻣뻣했다.“황제께서 산성을 순찰 중이시니 우리가 함부로 받을 수 없다.”며 위산보 일행을 퇴짜놓았다. 이제 조선이 사신을 보내는 여부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투였다. 위산보가 돌아온 직후 인조는 신료들을 불러모았다. 먼저 청군의 군세(軍勢)를 놓고 논란이 빚어졌다. 김류, 이홍주(李弘胄), 홍서봉(洪瑞鳳) 등 상당수 신료들은 청군이 군세를 과장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산성에서 내려다보면 청군이 별 것 아닌 것 같은데, 그들이 조선을 기만하기 위해 세력을 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료들은 홍타이지가 왔다는 것도 사실이 아닐 것이라고 했다. 참으로 갑갑한 현실 인식이었다. 완전히 포위된 상황에서 적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소치이기도 했다. 최명길의 의견은 달랐다. 그는 청군이 이전부터 누차 ‘황제가 올 것’이라고 말해 왔던 것에 주목했다. 최명길은 ‘황제가 왔으니 조선 실정을 알리려 한다.’는 명목으로 청군 진영에 사신을 다시 보내 적정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상헌은 하루에 두 번씩이나 사신을 보내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김신국은, 근왕병들이 사신이 적진을 왕래하는 것을 보면 마음이 해이해질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역시 반대했다. 하지만 인조는 최명길의 의견에 동조했다. ●‘최악의 상황´ 예상 못한 화친론 김신국(金藎國)과 이경직(李景稷)이 다시 청군 진영에 가서 화친을 청했다. 청장 마부대(馬夫大)는 역시 황제가 순찰 중이라는 핑계로 즉답을 피했다. 이튿날에도 조선 조정은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할 지 여부를 놓고 논란을 벌였다. 황제가 진짜 왔는지, 황제가 온 것이 사실이라면 그를 만났을 때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지, 황제가 왔다는 것을 이유로 인조에게 출성(出城)하라고 강요하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논의가 분분했다. 김신국, 이경직, 홍서봉 세 사람이 청군 진영으로 다시 가기로 결정되었다. 인조는 그들에게 실언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당부했다. 최명길은 나라가 보전된 뒤에야 와신상담(臥薪嘗膽)도 할 수 있다며 그들에게 공손한 태도를 보이라고 주문했다. 김상헌은 적정을 정확히 알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지레 ‘와신상담’ 운운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다시 반박했다. 하지만 인조 또한 “강국도 약국에 거만하게 대할 수 없는데 하물며 약국이 강국에 뻣뻣하게 굴 수 있냐.”며 최명길을 두둔했다. 논란 끝에 예상되는 청의 요구 가운데 두 가지만은 따를 수 없다는 방침이 결정되었다. 하나는 인조에게 성에서 나오라는 요구이고, 다른 하나는 왕세자를 입송(入送)시키라는 요구였다. 이식(李植)은 화친을 추구하되, 그 내용은 철저하게 기존의 형제관계를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어쨌든 이제 청과 화친하겠다는 방침은 다시 확고해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청이 과연 조선의 바람대로 따라줄 것인가. 결과적으로 보면, 인조와 왕세자의 출성 거부를 ‘마지노선’으로 삼은 것은 그저 조선의 ‘희망 사항’일 뿐이었다. 홍타이지가 몸소 탄천까지 내려와 산성에 대한 압박을 독려하는 상황에서 청이 ‘인조의 출성 불가’를 용인할 리 만무했다. 그럼에도 당시까지 비변사 신료들은 ‘최악의 상황’이 닥쳐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일부 신료들은 여전히 근왕병에 대한 기대감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김신국 등은 청군 진영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마부대 등을 만나자 황제에게 전하는 문안 인사를 건넸다.‘황제께서 풍설(風雪)을 무릅쓰고 먼길을 오셨으니 10년 형제의 의리상 염려가 되어 이렇게 찾아왔다.’며 분위기를 살폈다.‘형제관계’를 강조하면서 그들의 반응을 탐색하려는 의도였다. 잠시 후 용골대가 나와 누런 종이를 내밀며 황제의 조유(詔諭, 황제가 신료들에게 내리는 조서와 유시문)라고 일컬었다. 그러면서 조선 사신들에게 네 번 절한 뒤에 가져가라고 강요했다. 분위기에 압도된 김신국 등은 결국 네 번 절하고 그것을 갖고 돌아왔다. 참담한 심정이었다. 정묘호란 이후 후금과 형제관계를 유지해 왔지만, 조선 지식인들은 마음 속으로는 의연히 그들을 ‘오랑캐’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 ‘오랑캐의 칸(汗)’이 황제가 되고, 그가 내민 쪽지가 ‘조유’가 되고 ‘칙서(勅書)’로 변한 기막힌 현실을 직접 목도했다. ●형제→신하관계로 바뀐 현실에 경악 김신국 등은 인조를 알현했을 때, 모두 죽지 못하고 돌아와 송구스럽다고 머리를 조아렸다. 홍타이지가 보낸 편지는 ‘대청관온인성황제(大淸寬溫仁聖皇帝)가 조선 국왕에게 초유(招諭)한다.’는 문구로 시작했다. 내용은 과거의 국서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자신들은 조선에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았는데 조선이 명에 붙어 자신들과 적대했다는 것’ 등을 비롯하여 조선에 대한 섭섭함을 열거했다.‘청은 강하다고 뻐긴 적이 없는데, 약소국인 조선이 왜 대드냐?’는 것이 내용의 핵심이었다. 홍타이지는 특히 자신을 황제로 추대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리러 왔던 몽골 버일러들을 만나주지 않은 것을 질책했다. 과거 고려(高麗) 시절 요·금·원(遼金元) 세 나라에 신하를 칭하고 머리를 숙였던 조선이 지금은 왜 그리 뻣뻣하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사신을 보내기 전부터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것이기는 하지만 막상 홍타이지의 ‘조유’를 접했을 때 신료들은 경악했다. 답서를 보내는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인조가 회의를 소집했을 때, 신료들은 머뭇거렸다. 누구도 섣불리 의견을 제시하지 못했다. 김상헌이 나섰다. 지금 사죄해 봤자 저들의 노여움을 풀 수 없을 것이니 차라리 군사들에게 적서(賊書)를 보여주어 적개심을 고취시키자고 촉구했다. 그러자 최명길이 막아섰다. 홍타이지가 온 이상 대적하려 할 경우, 나라가 망할 뿐이라고 신중한 대응을 촉구했다. 홍서봉이 절충안을 내놓았다. 답서에서 홍타이지를 부르는 명칭을 ‘제형(帝兄)’이라고 쓰자고 했다. 일각에서는 최명길, 장유(張維), 이식 세 사람에게 답서를 쓰게 하되, 그 중 하나를 선택해서 보내자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결론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다. 엄혹한 현실에 밀려 화친을 다시 추진하기로 결심했지만, 막상 오랑캐가 ‘황제’와 ‘조유’를 운운하는 또 다른 ‘현실’을 직접 마주했을 때 조선 조정은 고민했다. 그리고 그 고민은 다시 망설임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시간은 조선 조정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불교계 ‘황우석 박사 지지’ 논란

    불교계 ‘황우석 박사 지지’ 논란

    ‘불교계는 황우석 박사 편? 황우석 박사가 이끄는 수암생명공학연구원이 보건복지가족부에 신청한 인간체세포 배아연구에 대한 승인 시한(8월2일)이 이틀 앞으로 닥친 가운데 불교계가 황 박사 지지를 놓고 엇갈린 입장을 보여 주목된다. 전국의 교구본사 주지들은 황우석 박사의 편을 쌍수 들고 나섰고 종단의 대표기구인 총무원은 이에 대해 “마뜩지 않다.”며 한 걸음 물러나 눈치를 살피고 있다. 문제의 발단은 지난 24일 26개 교구본사 주지회의에서 황 박사의 줄기세포 연구를 승인해줄 것을 정부에 촉구하는 내용의 결의문을 채택한 것.“황우석 박사팀의 연구를 부당한 이유로 억제하고 있는 현실을 개탄하며 더 큰 생명을 구하기 위해 정부가 줄기세포 연구를 승인해야 한다.”는 게 결의문의 요지다. 주지들은 이 결의문을 당일 주지회의장에서 발표할 예정이었으나 총무원의 만류로 잠시 늦췄다가 29일 결국 관철했다. 은해사 주지 법타 스님은 황 박사의 줄기세포 연구 재개를 촉구하는 내용의 현수막 1000여장을 조계종 26개 교구본사에 전달했다. 교구본사 주지들이 이처럼 ‘과학 윤리 위반’과 관련한 비판이 여전한 가운데 당사자인 황 박사를 적극 지지하고 나선 것은 무엇보다 불교계의 ‘친황우석’ 정서를 수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조계종 산하 여러 단체들이 불교 신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서도 대체로 황 박사의 연구 재개 쪽 의견이 우세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 불교계 스님과 신도들을 대상으로 한 황 박사측의 지지 호소 운동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지난 24일 교구본사 주지회의에 황 박사 건을 상정한 것도 법타 스님을 비롯해 황 박사와 친밀한 관계를 맺어온 몇몇 스님들이 목소리를 낸 데 따른 것이다. 회의에서 결의문을 채택할 때도 이렇다 할 반대의견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총무원측은 공식적인 입장을 내지 않은 채 불만을 쏟아내고 있다. 주지회의의 결의는 총무원과는 전혀 무관하며 조계종단 전체의 견해를 대변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성명을 내기도 했다. 종전 주지회의의 결과를 대체로 수용했던 것과는 영 딴판이다. 총무원은 특히 황우석 박사가 지난 24일 주지회의 말미에 총무원에 알리지 않은 채 참석, 지지를 호소했다는 점에 불만을 감추지 않고 있다. 불교종단 자정센터와 참여불교 재가연대를 비롯한 불교 단체들도 교구본사 주지들의 행보에 대해 “불교계에 ‘친황우석’ 정세가 우세한 것은 사실이지만 전국 사찰을 사실상 관할하는 본사 주지들이 집단으로 황 박사를 공식 지지하고 나선 것은 지나치다.”는 입장을 내놓고 있다. 총무원의 한 관계자는 “조계종뿐만 아니라 불교계 전체를 볼 때 종교적인 문제와 거리가 먼 황우석 박사 연구 재개와 관련한 의견들이 분분한데도 주지회의가 일방적으로 지지를 선언해 조계종단이 눈총을 받고 있다.”며 “조만간 갈라진 입장들을 종단 차원에서 정리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女공무원 ‘묻지마 살인’

    ‘세상이 싫다.’는 이유로 애꿎은 사람을 해치는 이른바 ‘묻지마 살인’이 또 발생했다. 22일 오후 1시10분쯤 강원 동해시 천곡동 동해시청 민원실에 흉기를 든 최모(36·무직)씨가 난입해 시청 고객봉사과 직원 남모(37·여·기능 9급)씨를 흉기로 네 차례 찔러 그 자리에서 숨지게 했다. 최씨는 또 난동을 만류하던 다른 직원 이모(37·여·7급)씨에게도 흉기를 휘둘러 팔 등에 상처를 입혔다. 동해경찰서는 이날 살인 등의 혐의로 최씨의 구속영장을 신청했다.●말리던 다른 여직원도 팔에 상처 최씨는 점심식사를 마친 시청 직원들이 듬성듬성 앉아 있는 민원실에 들어와 “여기 있는 사람이 공무원들 맞냐.”고 고함을 친 뒤 출입문에서 3번째 자리(토지관리부문)에 앉아 있던 남씨에게 다가와 종이에 싸 갖고 온 흉기로 마구 찔렀다. 남씨는 최씨가 흉기를 꺼내자 “왜 이러세요.”라고 소리를 질렀으나, 최씨가 순식간에 흉기를 휘두르는 바람에 화를 피하지 못했다. 직원 이씨가 최씨에게 달려들었으나 제지하지 못하고 본인도 다쳤다. 최씨는 범행을 저지른 뒤 서둘러 민원실을 나서다 남자 직원들에게 뒷덜미를 붙잡혀 경찰에 넘겨졌다. 최씨는 경찰에서 “흉기는 동해시 효가동 모 생활용품점에서 구입했다.”면서 “세상이 싫어 교도소에 가려고 범행을 저질렀다.”고 말했다. 최씨는 흉기를 1자루 더 갖고 있었다. 최씨는 또 범행 전날 동해시 지흥동 자신의 원룸 월세를 정산해 신변까지 정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씨는 “큰 건물에 사람이 많을 것으로 생각해 들어가 아무나 살해하려고 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범행을 목격한 한 시민(41)은 “피해자가 바닥에 쓰러져 실신하자 (범인이) 돌아나오는 듯하다 되돌아가 다시 흉기로 찔렀다.”고 설명했다. ●범행 전날 신변정리… 2년전엔 `묻지마 방화´최씨는 2006년 11월에도 부산시 모 전자제품 대리점에 아무런 이유없이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러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전과가 있다. 숨진 남씨는 13년간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동해시 망상동사무소에 근무하고 있는 남편(40·행정7급)과 함께 아들(12)과 딸(10)을 키우며 단란하게 살다가 변을 당했다. 경찰대 표창원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예전에는 사회 부적응자들이 불만을 해소하기에 관공서가 크고 무서운 존재였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면서 “세상에 대한 삐뚤어진 복수심을 쏟아내는 대상이 연약한 여성에서 국가 재산, 공무원 등으로 옮아가고 있어 주목된다.”고 말했다.동해 조한종기자 bell21@seoul.co.kr
  • 곽경택 “공동 연출, 대신 혼날 각오로 참여”

    곽경택 “공동 연출, 대신 혼날 각오로 참여”

    2001년 영화 ‘친구’를 통해 800만 관객을 사로잡은 곽경택 감독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로 스크린에 도전한다. 곽경택 감독은 21일 오후 서울극장에서 열린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감독 곽경택,안권태ㆍ제작 태원엔터테인먼트)의 기자간담회에 참석해 공동연출에 대한 속내를 드러냈다. 후배 안권태 감독과 함께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공동 연출한 곽경택 감독은 후반 작업에 참여하면서 주요 액션 장면을 완성해냈다. 곽경택 감독은 “초반작업을 했던 안권태 감독의 바통을 넘겨 받으면서 고민을 많이 했다. 사제지간인 안 감독이 재능 있는 감독이란 걸 알기 때문에 마무리 작업을 해달라고 부탁했을 때 주저 없이 바통을 이어받았다.”고 전했다. 이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영화가 잘 돼야 본전’이라고 만류 했지만 만약에 영화가 잘못되면 내가 대신 혼나도 되자 않나라는 생각에 참여했다.”고 덧붙였다. 또 곽 감독은 “시나리오를 보면서 돈 이라는 것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다. 돈이라는 것이사회에 어떤 가치인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관객들이 영화를 보면서 돈이 자신에게 어떤 존재인지 진지하게 고민하면 재미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곽 감독은 “한국영화의 위기 속에서 ‘강철중’이 할리우드 영화에 맞서 선전포고를 했고 ‘놈놈놈’이 흥행에 불을 붙이고 있다. 개봉을 앞둔 ‘님은 먼곳에’가 할리우드 영화를 향해 칼날을 휘두르고 ’눈눈이이’가 한국 영화의 멋진 마지막을 장식했음 하는 바램”이라고 전했다. 한편 백전 백승 형사 한석규와 천재적인 지능범 차승원의 숨막히는 대결이 기대되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는 7월 31일 개봉한다. 서울신문 NTN 정유진 기자 jung3223@seoulntn.co.kr / 사진=조민우 기자@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아픔이 희망이 되다

    아픔이 희망이 되다

    모두가 잠든 새벽 1시. 오늘따라 전직 읍장이라는 3층 환자의 고함 소리도 들리지 않고, 어제 저녁까지도 나를 힘들게 했던 우리 층의 환자들도 조용하다. 나는 나이 오십에 요양보호사로 일하고 있다. 환자 수발하느라 밤잠 못 자는 이 직업이 행복하다면 남들은 이상하게 보겠지만 나는 이 순간이 정말 행복하다. 10여 년 전 나는 남편의 외도로 인한 배신감으로 삶의 의욕을 잃었다. 죽고 싶어 내 몸을 망가뜨렸던 일들이 당뇨병, 갑상선기능저하증, 망막증, 고지혈증, 고혈압 폐결핵으로 돌아왔다. 남편과 합의하에 헤어지게 되었을 때 나는 술에 의지했고, 병자 몸으로, 술도 못 먹는 주제에 폭음하여 응급실에서 깨어나기를 수차례. 딸들의 눈물 어린 만류도 들리지 않았다. 그나마 늦둥이 아들이 발목을 잡아 생목숨을 끊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 아들마저 남편에게 보내게 되자 세상을 떠날 준비를 했다. 그러던 중에 생명의 전화 마산지부에서 일하시는 숨은 봉사자 분들을 만나며 사랑을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초등학교 동창회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나 그 사람의 헌신적인 사랑과 정성으로 조금씩 건강을 되찾게 되었다. 아들에 대한 그리움, 죄책감으로 힘들었을 때 딸의 권유로 봉사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아들이 그리울 때면 소외된 곳을 찾아 봉사했고, 마음이 더 힘들어질 때면 자격증을 따기 위한 공부를 더 열심히 했다. 그냥 평범하게 살았더라면 나는 세상의 쾌락과 안락함 속에서 잘난 체하다가 지금쯤 무덤 속 주인이 되어 있을지 모른다. 이제와 돌아보니 그 세월은 사람답게 살다 오라고 신이 내게 주신 마지막 기회였다. 평범하지 않았던 인생은 봉사를 가르쳐주었고, 그것은 수많은 자격증과 건강으로 돌아왔다. 지금도 저녁마다 인슐린 주사를 맞고 한 달에 한 번 이상 병원에 가서 검진을 받고 독한 약들을 먹고 있지만, 나는 건강하게 오래 살 거라고 자신한다. 남편의 큰 사랑과 세상에 대한 사랑,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있으니까. 아직은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2008년 7월
  • 노회찬 “與, 이권 미끼로 HID 폭력 방조” 의혹제기

    노회찬 “與, 이권 미끼로 HID 폭력 방조” 의혹제기

    노회찬 진보신당 공동대표는 지난 1일 진보신당 당사에 난입,기물을 파손하고 당원을 폭행한 오모(48)씨와 김모(27)씨가 속해있는 대한민국 특수임무수행자회(HID)가 “한나라당과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의심된다.”며 한나라당 배후 의혹을 제기했다.노 대표는 이들의 연행 과정에서 보인 경찰의 미온적인 태도와 최근 한나라당 의원들이 제출한 HID 이권사업 보장법안을 이유로 들었다. 그는 3일 평화방송 라디오 ‘열린세상 오늘! 이석우입니다‘에 출연,“HID회원들의 당사 난입을 막던 당원 8명이 부상을 입었고,이중 2명은 중상으로 영등포 병원에 입원 중”이라며 “그 외에 당사 현판이 파괴되고 사무집기들이 손상을 입었다.”고 피해 상황을 설명했다. 노 대표는 HID회원에게 폭행을 당한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의 상태를 묻자 “심각한 상해를 입은 것은 아니지만 경찰이 바로 옆에 있는 상황에서 얼굴을 수 차례 주먹으로 맞았다.”고 답했다.그는 또 진 교수의 신변이 위험하지 않겠느냐는 질문에는 “진 교수를 지목해서 폭행을 시도했다는 점과 난입 다음날 HID가 진보신당 당사 앞에서 항의집회를 가지겠다고 한 점 등을 미뤄볼 때 진 교수에 대한 물리적 위협이 예견되고 있어 경찰에 신변보호를 요청한 상태”라고 밝혔다. 사건 당시의 상황에 대해 노 대표는 “오후 10시 20분에 HID 사람들이 난입을 해서 폭행하기 시작했고,이를 만류하던 남성 당원들도 심하게 폭행을 당했다.”며 “신고한지 30분이나 지나서야 경찰이 출발했다.”고 전했다.이어 “경찰서와 당사 사이의 거리를 놓고 보면 10분 안에 도착해야 마땅한데 30분이나 지나서 도착했고,출동한 경찰이 첫 마디는 ‘정당 간의 싸움에 개입하기 싫다.’였다.”고 말한 뒤 “우리 남성 당원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폭력을 방지하고자 개입했는데 경찰은 ‘이 사람들(HID 회원들),건드리기 어려운 사람들이다.’ 라며 손을 놓고 있었다.”며 경찰의 미온적인 대응을 비판했다. ‘진 교수가 평소 자신들을 비하하는 발언을 하는 것에 항의하기 위해 간 것’이라는 HID측의 해명에 대해 그는 “밤 10시가 넘어서 무단으로 침입한 것 자체가 정상적인 항의 절차를 밟은 거라고는 볼 수 없다.”고 강조한 뒤 “항의를 하려면 공문을 보내거나 책임자를 만나자고 요청한 뒤 자기 뜻을 전해야 하는데,밑에서 망을 보고 소화기를 던져가면서 난입한 것은 전혀 납득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노 대표는 연행된 HID 사무총장 오모씨가 자신이 이명박 대통령의 대선캠프에서 안보특위 공동위원장을 맡았다고 말하고 다닌 것에 대해 “오씨의 주장이 사실임을 확인했다.”며 “오씨는 그 사실을 계속해서 과시하고 다녔다.난입 현장에 떨어진 (오씨의)수첩에서 ‘대통령님 힘내세요.저희들이 있잖아요’,‘촛불 뒤에 용공빨갱이 세력이 있다.’라고 쓴 메모들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이 대통령에 대한 과잉충성이 현 시국에 대한 그들의 태도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 같다.”고 분석했다. 이어 “HID가 대통령과 연관이 있다고 암시를 주면서 각종 이권사업에 개입하고,무단으로 폭력을 행사했다.”고 비난하며 “경찰 수사를 봐도 과거 경력과 집권당과 연관성 등을 강조하면서 비호를 받은 것은 사실”라고 덧붙였다. 그는 “이명박 정부의 정책에 반발하는 사안마다 개입해서 사설폭력단처럼 활동해 왔는데 왜 한 번도 경찰이 제지를 하지 않았나.”라고 반문한 뒤 “HID가 대천 해수욕장 경비용역을 체결하고 모 쇼핑몰의 특정 이권사업에도 강압적으로 개입했다.”고 주장했다. 노 대표는 특히 “한나라당 의원들이 HID의 수익사업을 법적으로 보장해 주는 법안을 최근 제출했다.”고 밝히며 “(한나라당이)이권을 미끼로 사용해 이들의 폭력행위를 방조하거나 용인해 온 것 아니냐.”며 한나라당 배후 의혹을 제기했다. 그는 끝으로 “한나라당은 이번 정치테러와 연관성이 있다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며 “한나라당은 관계가 있든 없든간에 태도를 분명히 하고,또 온갖 폭력을 주도하고 있는 조직의 수익사업을 보장하는 법안을 제출했는지 해명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편 진보신당 당사 난입 사건에 대해 통합민주당·민주노동당·진보신당 등 야당은 책임자 처벌과 이명박 대통령의 사과를 촉구했지만 한나라당은 이와 관련된 언급을 일체 하지 않고 있다. 인터넷서울신문 맹수열기자 guns@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78) 남한산성의 나날들 Ⅱ

    [병자호란 다시 읽기] (78) 남한산성의 나날들 Ⅱ

    남한산성을 공략하려는 청군 지휘부의 계책은 치밀했다. 그들은 성 주변에 참호를 파고 목책을 설치했다. 이미 1631년 홍타이지가 명의 대릉하성(大凌河城)을 공략할 때 사용했던 전술이었다. 성을 외부로부터 완전히 격리시켜 그야말로 고사(枯死)시키려는 작전이었다. 그러면서 때때로 홍이포(紅夷砲)를 발사하여 돈대(墩臺)와 성첩(城堞)을 파괴하면 성안의 공포심은 극에 이르게 된다. 군량은 나날이 줄어드는데 보충할 방도는 없고, 학수고대하는 외부 구원병은 오는 족족 청군 복병들에 의해 궤멸되었다. 명장 조대수(祖大壽)로부터 항복을 받아냈던 그 전술이 남한산성에서 재연될 판이었다. ●김류, 인조의 탈출을 건의하다 청군의 압박은 날이 갈수록 가중되는데, 구원군의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고립된 산성에 갇힌 인조와 신료들은 외부로부터 전해지는 소식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했다. 청군 진영을 다녀온 사절들이 들고 온 소식에 조정의 분위기는 극과 극을 달렸다. 능봉수 일행이 ‘이제 세자를 보내지 않으면 화친을 논의할 수 없다.’는 소식을 가져오자 조정의 분위기는 다시 침울해졌다. 화친이 물 건너가고 말았다는 절망감 때문이었다. 화친이 불가능하다면 무엇보다 시급한 것이 산성의 방어 태세를 확고히 하는 것이었다.1636년 12월17일 도체찰사 김류는 성첩(城堞)을 지킬 병력이 부족하다며 상을 내걸어서라도 병사들을 빨리 모집하라고 촉구했다. 병사 한 명이 아쉬운 상황이었다. 이런 판국에 도원수 김자점과 부원수 신경원(申景瑗)은 도대체 그 많은 병력을 이끌고 어디 가서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휘하 병력을 이끌고 달려와 산성 방어에 힘을 보태야 할 것이 아닌가? 인조는 답답했다. 급히 두 사람에게 교서(敎書)를 보냈다.‘거가(車駕)가 바야흐로 포위된 성안에 있는데 안으로는 믿을 만한 형세가 없고 밖에서는 개미 새끼 한 마리 구원하러 오지 않는다. 나라의 존망이 경각에 달렸는데 화사(和事)는 이미 끝장났다. 경은 속히 병력을 이끌고 들어와 구원하라.’ 하지만 김자점 등은 오지 않았다. 초저녁 무렵 김류를 비롯한 중신들이 인조에게 뵙기를 청했다. 김류는 인조에게 이제 탈출을 시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날랜 병사들을 뽑아 적을 기습하여 길을 열고, 인조가 옷을 갈아입고 탈출하자는 복안이었다. 인조는 반대했다. 적이 도성에 들어와도 화살 1발 제대로 쏴보지 못한 처지에 탈출 작전이 가능하겠냐고 반문했다. 김류는 남송(南宋) 고종(高宗)의 고사를 들고 나왔다. 고종은 1126년 금군(金軍)이 송의 수도인 개봉(開封)을 유린했을 때(정강의 변), 탈출에 성공했던 강왕(康王) 조구(趙構)를 가리킨다. 당시 포로가 되어 금으로 끌려갔던 휘종(徽宗)의 아홉째 아들이었던 그는 이후 제위에 올라 양자강 남쪽에서 송의 종사를 잇는 데 성공했다. 김류는 고종의 고사를 강조하면서 인조의 결단을 촉구했다. ●주화, 척화 논쟁이 다시 가열 인조는 다시 난색을 표했다. 청군의 복병이 곳곳에 깔려 있어 섣불리 시도할 경우 위험하다는 점을 들었다. 그러자 장유(張維)가 화친을 다시 시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청군이 ‘왕세자 운운’ 한 것은 그들에게 화친할 의사가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낙관론을 폈다. 화친을 포기하면 고립된 성에 앉아 죽을 날을 기다리는 수밖에 방법이 없다고 했다.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장유도 이제 공공연히 주화론을 들고 나온 것이다. 장유의 발언을 계기로 대신들의 분위기가 다시 바뀌는 조짐을 보였다. 김류는 인조에게 종사를 위해 화(禍)를 완화시킬 계책을 빨리 내놓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조는 “위로는 종사를 위하고 아래로는 백관들을 위해 내가 할 일은 이미 다했다. 이제 대책은 경들에게 달렸다.”고 응수했다. 마치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있는 것 같은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인조가 다시 대책을 묻자 장유가 말끝을 흐렸다. 그는 ‘차마 입밖에 내지 못할 일’이 있다고 했다. 왕세자를 인질로 보내자는 내용이었다. 김류는 ‘인질을 보내는 것은 예로부터 있던 일이고, 설사 세자를 적진에 보내도 심양으로 끌려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낙관론을 폈다. 인조는 한숨을 내쉬며 신하들의 뜻이라면 세자를 아끼지 않겠다고 했다. 왕세자 입송론(入送論)이 제기된 뒤 홍문관과 시강원(侍講院) 신료들이 인조에게 달려왔다. 이시해(李時諧)는 적은 지구전을 획책하려 들지 결코 화친을 꾀하려 하지 않을 것이라며 인조를 만류했다. 그러면서 딴생각하지 말고 성을 지키며 적과 싸울 의지를 다지라고 촉구했다. 신료들은 왕세자를 오랑캐 진영으로 보내라고 주장한 자를 색출하라고 촉구하며 일제히 통곡했다. 그들은 예로부터 간신들이 나라를 망치는 것은 화의(和議)에서 비롯되었다며 주화론자들을 다스리지 않으면 국사를 망칠 것이라고 극언했다. 인조는 홍문관과 시강원 신료들이 물러간 뒤 대신과 비변사 당상들을 불러들였다. 그들을 보자마자 인조는 울음을 터뜨렸다.‘재덕이 변변치 못한 내가 본래는 잘해 보려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며 인조반정을 언급했다.‘아, 폐조(廢朝) 시절에도 없었던 일을 당하고 말았구나! 나라의 윤기(倫紀)가 사라졌을 때, 여러 어진 이들과 함께 반정하여 보위에 오른 지 이제 14년인데 끝내는 견양금수(犬羊禽獸)의 지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변변치 못한 나 때문에 망극한 일이 벌어졌으니 경들은 어찌할 것인가?’라며 울먹였다. 김류를 비롯한 신료들도 같이 통곡했다. ‘폐조’란 광해군 시절을 가리킨다.‘명에 대한 의리를 외면하고 명과 후금 사이에서 양단을 걸쳤다.’는 것을 빌미로 광해군을 권좌에서 끌어내렸던 인조였다. 그런데 이제 ‘패륜아’라고 매도한 광해군조차 겪지 않았던 ‘견양금수의 늪’에 자신이 빠지게 될 줄이야? 인조가 무엇보다 뼈아파했던 점이 바로 이것이었다. 감정이 북받친 인조는 척화신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날렸다.‘연소한 자들이 깊이 생각하지 않고 과격한 논의로써 끝내 이같은 화란을 부른 것이다. 당시에 만약 저들의 사자를 박절하게 배척하지 않았더라면 화란의 형세가 이 지경까지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인조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당시에는 자신도 척화신들의 주장을 정론(正論)으로 여겼으니 누굴 원망하겠느냐며 말끝을 흐렸다. 인조의 생각이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인조 “왕세자 보낼 수 있다” 인조는 홍서봉에게 청군 진영에 가서 적장을 만나 보라고 지시했다. 그러면서 전날의 일을 사과하고, 청군이 조금 물러나면 왕세자라도 보낼 수 있다고 제의하라고 했다.‘왕세자를 보낼 수도 있다.’는 인조 발언을 계기로 화친론이 다시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이성구(李聖求)가 인조를 찾아왔다. 그는 다른 입장을 제시했다. 사방의 근왕병을 불러들여 적과 결전을 벌일 태세를 갖춰야 적도 두려워하는 바가 있어 화친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지 않고 말로만 화친을 청할 경우 오욕이 있을 뿐이니 군신 상하가 결사항전의 태세부터 갖춰야 한다고 촉구했다. 김상헌 또한 결전이 없이는 화의를 기대할 수 없다고 동조했다. 맞는 말이었다. 고립무원에 군량마저 고갈되어 가는 상황이 지속된다면 청군은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싸움이었다. 이성구 말대로 이쪽에서 적을 위협할 만한 최소한의 ‘카드’가 있어야만 적을 움직일 수 있는 법이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은 ‘무장들이 화의에 미혹되어 군량 걱정만 하고 있다.’며 비난했다. 그러면서 이미 부귀가 극에 이른 무장들에게 적진을 함락시키기를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질타했다. 12월17일 조정의 입장이 오락가락하는 와중에 적이 성을 향해 접근하고 있었음에도 조선군은 발포하지 않았다. 어쨌든 화의를 추진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적진에 갔던 홍서봉 일행이 돌아와 화의를 추진하기가 어렵겠다고 보고했다. 이어 청군이 증강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하자 인조는 그만하라고 역정을 냈다.“방바닥이 너무 차서 늙고 병든 자들이 견디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인조의 짜증처럼 산성의 하루하루는 점점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62세 할머니의 바람을 잡아주오”

    “62세 할머니의 바람을 잡아주오”

    환갑 진갑 다 지난 할머니가 바람나자 40년을 함께 산 할아버지는 타이르고 애원하고 갖은 수단을 다 썼단다. 하지만 「소귀에 경읽기」더라는 것 - 참다못해 경찰에 고소장을 들고 왔는데…. 궁합도 잘맞던 원앙부부 슬하엔 아들넷이 주루룩 최덕겸(崔德兼)노인(가명·70·서울 영등포구 상도동)이 김덕남(金德男)노파(가명·62)와 『여보』사이가 된것은 만 39년전. 그러니까 최노인이 31세, 김노파가 23세때. 이보다 먼저 최노인은 18세때 자기보다 5세 아래인 정(鄭)모여인과 정식 결혼, 딸을 하나 얻었으나 아들을 낳지 못해 별거생활을 하고 있었던것. 김노파 역시 결혼은 일찍했으나 남편이 돈벌러간다고 일본으로 건너간뒤 소식이 끊어져 죽은것으로 단정해버리고 마땅한 자리가 나면 개가를 할 속셈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당시 최노인의 따분한 처지를 잘알고 있던 이웃집 노파가 어느날 최씨집에 들러 김여인에 관한 이야기를 건네자 즉석에서 중매를 서줄것을 부탁받게 됐던 것. 며칠이 지나자 최씨와 김여인이 한자리에 앉게 되었고 한평생을 함께 할 약속이 쉽게 이뤄졌다. 그래서 김여인은 최씨집 안방에 들어앉게 되었다. 『그 사람이 젊을때부터 색을 좋아하기는 했읍니다』 그래도 그때가 좋았던지 얼굴에 홍조까지 띠며 옛날얘기를 했다. 둘사이엔 용케 궁합이 맞았던지 바라던대로 사내아이만 넷을 얻었다. 지금은 다 자라 올해 32세된 큰아들은 서울에 살고 있고, 막내아들은 군에 복무중. 최노인은 원래 서울 토박이였으나 일제때 전남 장흥으로 피난갔다가 거기서 기반을 잡아 살게되었다. 영감님 중풍들자 찬바람 세든 40대 장년과 드디어 거기서 열심히 일한 보람으로 양복점과 양화점을 직접 경영하게 되었고, 새살림을 차린뒤에도 사업은 날로 번창해 생활은 넉넉했다고 한다. 또 나이도 비교적 젊은때라 그런대로 잠자리의 만족을 줄수 있었다는 것. 68년봄. 나이를 먹고보니 아들도 자라 가정도 가져야할 처지에 놓였고 자신도 고향으로 돌아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바로 가산을 정리해 서울 정릉으로 이사를 했다.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하던 최노인에게 비극의 서장이 올려진것은 서울로 이사한 이듬해 여름. 어느날 비탈길을 걸어가다 길에서 미끄러져 넘어졌다. 그뒤 다친 상처가 점점 악화되어 결국 중풍이 되었고, 오른쪽 팔과 다리를 제대로 쓰지못하는 불구가 되면서 부터. 그날로부터 몸이 말을 듣지않게 되었다. 찰떡같은 부부사이가 차츰 금이 가기 시작했다. 아내는 바가지를 긁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제대로 부부간의 잠자리가 이루어 지지않게되니 있을법도 한 일이라고 이해를 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자 날이 갈수록 바가지의 도는 더해 가기만했다. 생각다 못한 최노인은 『피차 늙은 몸이니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이 진짜 사랑이 아니겠소』하며 타이르고 분위기를 바꿔볼 생각으로 지난해 봄 공기도 맑고 조용한 상도동으로 이사를 했다는 것. 그러나 이것이 파탄의 결정적인 화근이 될줄이야. 집도 넓고 너무 적적한것 같아 아랫방에다 세를 주었다. 고물상을 한다는 김(金)모씨(42)가 들었다. 김씨는 15년전 결혼했다가 5년전 아내를 병으로 잃고 13세된 딸 하나와 사는 홀아비였다. 김씨가 최노인집에 들어온 뒤인 지난해 가을이었다. 하루는 최노인이 바람쐬러 밖에 나갔다가 밤11시쯤 들어왔더니 아내가 김씨방에서 황급히 옷자락을 여미며 나오더라는 것. 얼핏 보기에도 이상한 예감이 들었지만 『아들같은 사람에게 설마 그럴리가…』하는 생각으로 덮어두었다. 그런일이 있은 뒤 김노파는 거의 매일 저녁 김씨방으로 들어갔다. 어떤날은 아예 김씨방에서 자고 새벽에 돌아오기도했다. 어느날 아침 최노인은 피로한 안색을 한채 아침에야 방으로 돌아온 김노파에게 『어디에서 무엇하고 이제 돌아오는거냐?』고 다그쳐 물었다. 그러나 너무나 엉뚱한 대답-. “나를 즐겁게 해주는 사람 찾아가는게 뭐가 나빠요” 『당신은 병든 몸이지만 김씨는 정력이 넘치는 사람이오. 나를 즐겁게 해주는 사람, 찾아가는 것이 잘못이오?』 최노인에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 최노인은 할 말조차 잃었다. 완전히 미쳐버렸구나 하는 생각이든 최노인은 그날부터 온갖 방법을 다 써가며 설득을 시키고 다시 마음을 돌릴것을 하소연했다는 것. 그러나 최씨의 간곡한 하소연도 쓸데 없는 말이었다. 김노파의 아랫방 출입은 날이갈수록 뜨거워져 가기만했다. 최노인은 마누라에게 만류를 해도 듣지 않자 비장한 각오를하고 타협점을 찾기로했다. 『초저녁엔 가지말고 새벽에 가서 일만 치르고 오던지 해달라』고 - 제의를 했다는 것. 김노파는 새벽에만 가기로 약속을 했지만 그것도 잠시뿐 얼마가지않아 다시 초저녁부터 가고있다는 것이었다. 『막내며느리가 한집에 살았지요. 남편이 제대할때까지 우리들 뒷바라지 해주기로하고. 그렇지만 눈치를 챈 며느리마저 동네가 부끄럽다고 친정엘 가버렸읍니다』라며 최노인은 한숨을 짓는다. 『지금 생각하니 본처가 좋았읍니다. 말없고 얌전하고. 단지 그게 사내를 낳지못한것이 흠이었단 말입니다. 만약 지금까지 살아있었다면 내가 이렇게 처량하지는 않을텐데 말입니다. 아마 내가 벌을 받은 모양이지요』본처가 그리운 모양이다. <유창하(柳昌夏) 기자> [선데이서울 71년 9월 19일호 제4권 37호 통권 제 15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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