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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중현:下(금지문화 금지인생 이제야 말한다:3)

    ◎‘한국적 록 만들기’ 父子 한길 큰 위안/‘대마초’이후 23년 무대 잃은 음악 인생/궁핍보다 더한 고통으로 좌절·방황/분별없는 외래가요 범람 못내 가슴아파 “형광등이 비추는/천장을 보면서/눈을 떴다가 감았다/밤을 새우네/그여자는 지금쯤/무얼하고 있을까/이리둥굴 저리둥굴/혼자 생각하네/아침이 오면/붉은 태양이/나의 마음을/달래 줄텐데/길고 긴 이밤이/언제나 지나가나…” 기다림이 애틋하게 사무친 申重鉉씨의 노래 ‘긴긴 밤’. 마치 3년뒤 영어의 몸이 될 것을 예견이라도 한 듯 답답한 심경을 담아낸 72년도 발표곡이다. 노래말처럼 붉은 태양과 함께 아침이 밝았으면 좋으련만 운명의 신은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다. ‘대마초 가수’로 서울 서대문 구치소에 갇혀 있던 기간은 4개월. 4개월이 마치 4년만 같이 여겨졌다. 수많은 밤을 뜬 눈으로 보내야만 했던 지난 날들이 악몽만 같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했던가. 마른 하늘에 뜬금없이 내려친 날벼락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예고된 비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76년4월. 지난 연말 구치소에 들어갈 때의 추위는 가시고 봄기운이 온누리에 퍼져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예전의 자유로움을 용납하지 않았다. 가요계,방송국,음악감상실…,그가 설 땅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빼어난 작곡가이며 기타연주가이기도 했던 록 가수 申重鉉의 인생은 그렇게 저물어가고 있었다. 가수에게 활동중지는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것. 유신정권의 혹독한 간섭 아래서 금지인생을 살아내기란 여간 힘든게 아니었다. 모든 공연이 철저히 막혔고 방송에서도 그의 목소리는 들을 수가 없게 됐다. 구속 전부터 1∼2곡씩 방송에서 사라지더니 구속과 동시에 통째로 금지곡이 돼버렸다. 당연히 음반판매도 막혔다. 어쩔 수 없이 악기를 몽땅 팔아야 했고 반포동 28평짜리 아파트를 청산해 동작동,방배동,문정동 셋방을 10여차례 옮겨 다녔다. 노래뿐만 아니라 작사·작곡에서도 한창 인기를 누리다가 좌절을 맛본 터라 하루하루를 견뎌내기가 더욱 힘이 들었다. 사람을 피해 낚시터와 산을 다니며 마음을 달래려 했지만 쉽지가 않았다. 용산 미8군 무대에 다시섰다. 끼니를 마련하기 위해 부르는 노래가 슬펐다. 3개월만에 그만두고 경기도 송탄으로 잠적,음악을 함께하던 친구들과 어울리며 시름을 달랬다. 기지촌의 미군들을 상대로 가끔씩 노래를 불렀는데 간섭이 없어 마음은 편했다. 감옥에서 나온지 3년이 지난뒤인 79년 활동중지가 풀렸지만 세상은 너무나도 많이 변해 있었다. 우선 생활이 쪼들리다 보니 음악활동을 시작할 여유가 없었다. 악기도 남아 있는게 없었다. 무엇보다도 독재정권의 탄압이 가져온 삭막함이 견디기 힘들었다. “방송이 들려줄 이렇다할 대중음악이 없었어요. 금지의 태풍 속에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지요. 당연히 흘러간 노래나 뽕짝풍이 판을 쳤고 대중들의 귀도 이런 음악에 순치돼 있었습니다. 50년대의 문화가 다시 살아났다고나 할까요” 대학가에도 춤곡과 디스코 선풍이 몰아쳤고 춤추는 문화의 유행으로 대중음악 자체가 표류했던 시기. 외래문화와 트로트가 휩쓸리면서 방향을 잃고 흘러만 가던 상황이었다. 신씨가 끼어들 틈새가 보이지가 않았다. 이미 가수 신중현이 설 땅은 허물어졌던 것이다. “당시 방송국에서 저와 제 음악을 이해하던 몇몇 프로듀서들이 저의 재기를 위해 무던히 애를 썼지만 허사였습니다. 잊혀진 가수와 음악을 되살리기가 그렇게도 힘들 줄 몰랐습니다. 아니 어찌보면 그런 음악환경에서 제자신이 멀어지기를 바랐다고 할 수도 있지요” 79년 이후 공식적인 콘서트는 단 한번도 열리지 못했다. 그러니까 75년 겨울 ‘구치소 신세’를 질때부터 지금까지 23년간 신중현의 무대는 없었던 셈이다. 방송엔 ‘가뭄에 콩나기’식으로 가끔씩 출연했다. 지금은 출연제의가 완전히 끊겨 있다. 방송국 입장에서도 사연많은 ‘대마초 가수’에 걸맞는 프로그램을 마련하기란 쉽지 않은 것이다. 87년 그의 음악이 해금된지 올해로 11년째. 수원여대에서 주2회씩 현대음악 강의를 맡고 있고 밤에는 가락동 50평짜리 지하 작업실에서 자신이 만들고 불렀던 곡들을 녹음·정리하고 있다.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200여명의 출연진이 무대에 서는 대형 록 콘서트를 지난해 말부터 준비해왔는데 IMF바람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음악인생을 결산하는 마지막 콘서트를 꿈꾸고 있지만 여의치가 않다. 그나마 아들 3형제가 아버지의 뜻을 따라 한국적인 록만들기에 뜻을 두고 한 길을 걷는게 큰 위안이다. “세살짜리 꼬마부터 80세 노인까지 모두 좋아할 수 있는 대중음악이라면 어떨까요. 그러려면 수준이 있어야 하고 음악성도 갖춰야 합니다. 방송이 주도하는 요즘 대중음악은 상업성에 치우쳐 문화적인 측면을 무시하기 일쑤지요” 한국적인 가락을 록에 담기 위해 평생토록 고민했다는 신씨. 그는 분별없는 외래문화 유입이 독재정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거침없이 말한다. “문화의 맥이 순탄하게 이어졌으면 지금 이처럼 혼란스럽진 않을텐데…. 국적없는 음악은 위험합니다. 우리만의 고유성을 담은 음악이 필요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과거 독재정권의 문화탄압은 치명적이었다고 봅니다” ◎사연들/4t트럭 분량 악기 생계위해 팔아치워/레코드社 박대 서운 동료 손가락질 처연 75년 신씨가 구속되기 전만 하더라도 학생층이 주로 모이던 ‘이브’를 비롯,서울 명동과 종로의 음악감상실 5∼6곳에서는 고정적으로 신씨의 콘서트가 열렸다. 그러나 묶이고 난뒤엔 사정이 달랐다. 업소들은 신씨의 접근을 아예 봉쇄했고 레코드회사와 방송국은 문전박대로 일관했다. J레코드사와 K레코드사는 30대 이상의 연령층이면 지금도 기억하는 당시의 내노라는 음반사들. J사는 유류파동때 어려움을 겪다가 ‘미인’히트로 살아났고 K레코드사 역시 신씨의 노래들로 유명해진 대표적 레코드사다. 셋방을 전전할 때 레코드사를 찾아가 몇차례 도움을 청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방송국도 마찬가지. 신씨가 묶이자 신씨의 노래들을 앞다투어 뺐고 녹화 필름도 모두 폐기해 버렸다. KBS,MBC 등 3개 공중파 방송사엔 신씨의 구속전 필름,레코드 등 관련자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생활고에 지쳐 마침내 악기를 팔기 시작했다. 농군에게 소가 가장 큰 재산이라면 음악인에겐 악기가 그럴 것이다. 당시 국내에서 신씨만큼 귀한 악기를 많이 갖고 있던 음악인도 드물었다. ‘먹고 살기’위해 청산한 악기만도 1톤짜리 트럭 4대분은 족히 된다고 한다. 73년 영국에서 사들여온 530와트 용량의 ‘마샬’ 앰프를 팔땐 며칠간 잠을 못이루었다고 한다. 마샬은 당시 국내에 1대밖에 없었다. ‘미인’을 히트시킨 ‘신중현과 엽전들’이 쓰던 것으로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가장 참기 힘든 것은 자신의 처지를 가장 잘 이해해야 할 동료 음악인들의 배신. 우연히 커피샵에서 만난 동료들이 정보부 요원과 함께 자신에게 손가락질하며 능멸할 땐 회의감마저 들었다고 한다. 서울 가락동 신씨의 지하 작업실 한 쪽 벽엔 시계가 거꾸로 매달려 있다. 시간에 얽매이기 싫어서 아무렇게나 걸어 놓은 것이라는게 신씨의 설명. 그러나 억울하게 빼앗긴 시간들을 애써 찾으려는 듯한 인상이 짙다. ◎금지곡 연보 ▲69년 9월27일 ‘어떻게 해’(김상희 노래) ▲70년 7월6일 ‘미칠듯한 마음’(임성훈) ▲71년 7월25일 ‘못 견디겠어’(지연) ▲74년 12월7일 ‘나는 몰라’(신중현과 엽전들) ▲75년 7월5일 ‘거짓말이야’(김추자) ‘나비같은 사랑’ ‘두 남편’ ‘저기 저 소리’(장미리)‘세상에 만약 여자가 없다면’(김명희 서영옥 이다연) ▲75년 7월6일 ‘미칠듯한 마음’(임성훈) ▲75년 8월4일 ‘가나다라마바’(김정미) ‘너와 나’ ‘담배꽁초’‘바람’ ‘이건 너무 하잖아요’(김정미) ‘미인’ ‘생각해’ ‘저 여인’ ‘할 말도 없지만’ ‘나는 너를 사랑해’(신중현과 엽전들) ‘그리워’(김명희) ▲83년 11월7일 ‘설레임’(신중현과 엽전들)
  • 컵라면 먹어야하나 말아야하나/소비자는 불안하다

    ◎食藥廳 “10분내 먹으면 환경호르몬 안전” 발표/시민·업계 “무해라더니 번복… 확실히 판정을” ‘도대체 컵라면을 먹어도 됩니까,안 됩니까’ 컵라면 용기에 끓는 물과 라면,스프를 넣고 실시한 용출시험 결과 환경호르몬(내분비계 장애물질)으로 의심되는 물질이 검출됐다는 식품의약품안정청의 발표가 나오자 소비자들은 물론 제조업체들까지 일대 혼란에 빠졌다. 8일 시중 슈퍼나 편의점 등에는 컵라면을 찾는 소비자들의 발길이 뚝 끊어졌고 제조 및 유통업체,용기 제조업체들은 비상대책 마련에 나섰다. 컵라면은 어린이로부터 노인층까지 즐겨찾는 기호식품이며 특히 성장기의 청소년이 많이 먹는다는 점에서 충격이 크다. 소비자들은 컵라면 뿐 아니라 같은 재질의 용기를 사용하는 어묵류,차류,만두류 등 다른 제품까지 기피하고 있다. 식약청의 이번 발표는 환경호르몬으로 의심되는 물질이 검출되지 않았다는 1차시험 결과를 번복한 데다 내용 자체도 애매해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가 높다. 식약청은 ‘문제의 물질이 인체에 해롭다는 사실이 입증되니 않았으며 20분 이상 경과한 뒤에댜 미량 검출됐으므로 10분 이내에 조리해 먹으면 안전하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환경단체들은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았다고 모두 안전하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따라서 소비자 및 업계에서는 ‘현재의 컵라면 용기를 사용하지 말라’든지 ‘사용해도 절대 안전하다’든지 하는 분명한 정부측의 판단을 요구하고 있다. 회사원 李美英씨(25·여·회사원·중랑구 면목동)는 “정부가 검출된 양이 극히 적고 10분까지는 검출되지 않았다고 밝혔지만 이랬다 저랬다하는 조사 결과를 어떻게 믿고 먹을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컵라면 용기 재료인 발포스티렌(ESP) 성형업체 삼진화학 鄭連煥 영업과장(40)은 “환경호르몬 문제가 처음 제기된 뒤 판매량이 10∼20%정도 줄었는데 정부의 이번 번복 발표는 설상가상”이라고 말했다. 때 맞춰 이날 명동 서울YWCA에서는 정부,학계,업계,소비자 대표들이‘환경호르몬과 소비자안전’을 주제로 열띤 토론을 가졌다. 소비자문제 시민모임 文恩淑 실장은 “스티렌트리머,스티렌다이머 물질의 검출량이 극히 적다는 정부 발표는 체내 축적 가능성을 고려하면 의미가 없는 것”이라면서 “정부와 업계,민간단체가 참여한 가운데 투명하고 신속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컵라면에서 환경호르몬이 검출됐다고 발표,논쟁을 불러일으켰던 강원대 환경학과 金萬九 교수는 전자레인지에서 끓인 검사방법을 지나친 고온에서의 가혹실험이라고 한 식약청의 지적에 대해 “실제 컵라면에 끓는 물을 부을 때 보다 전자레인지에 넣고 끓일 때 물의 온도가 더 낮다”고 반박했다.
  • 관심끄는 “빅3” 매각

    ◎포항제철/작년 순익 7천억 “알짜기업”/1인 지분 3%로… 5대 재벌 참여 가능 포철은 1차 민영화 대상 공기업 중 덩치가 가장 큰 알짜배기 공기업이다. 지난 해 매출액이 9조7,181억원,당기 순이익 만도 7,290억원에 이르렀다. 임직원 수는 1만9,294명.현재 지분률은 총주식 9,990만주 가운 데 외국인이 30%로 가장 많고 일반주주 28.7%,산업은행 23.6%,한일 등 4대 시중은행 7.5%,기업은행 6%,정부 3.1%,대한중석 0.8%,우리사주 0.3% 등이다. 이달 중에 정부는 산업은행 주식을 합친 지분 26.7%를 국내 기업은 물론 외국기업에게도 팔기로 했다.5대 재벌도 막판에 참여를 허용했다.1인당 지분한도도 현행 1%에서 3%로 올려 이 범위내에서 살 수 있다.외국인 투자한도는 곧바로 폐지하며 2001년에는 동일인 소유한도도 없애기로 했다. 매각방법은 상당부분을 뉴욕증권거래소에 DR(예탁증서)방식으로,포철의 우리사주에 일부 팔고 나머지는 일반에 공매하기로 했다. ◎한국중공업주식회사/발전설비 독점했던 공룡/공개입찰방식 매각… 외국인에 팔릴 듯 가만두면2∼3년내 부실덩어리가 될 판이라는 게 정부 판단이다.한국전력에 대한 발전설비 공급독점이 96년 해제됨에 따라 경영이 어려워졌다. 지난해 말 현재 자본은 1조600억원인 반면 부채는 2조3,275억원에 달했다. 인원은 7,751명.이달부터 지분매각을 통해 완전 민영화가 추진된다. 내외국인을 대상으로 공개입찰 방식으로 매각되며 우리사주조합원에게도 주식의 일부를 팔 예정이다. 매각가치를 높이기 위해 자산재평가를 실시하기로 했다. 해외업체에 매각될 가능성이 높다. ◎한국담배인삼공사/올해는 홍삼사업만 매각/법령 고쳐 2000년까지 완전 민영화 담배인삼공사는 매각방식을 놓고 진통이 컸다.3만8,200가구에 달하는 엽연초 농가와 10만여 소매상들의 이해가 얽혀 대통령이 지대한 관심을 표명하기도 했다. 우선 하반기에 홍삼사업이 실사 뒤 공개 매각된다.2단계로 내년까지 동일인 소유한도(7%)안에서 정부지분 25%를 내외국인에게 공개입찰로 팔 계획이다. 3단계로는 제조창 등의 매각에 걸림돌이 되는 법령 개정을 거쳐 2000년까지 나머지 정부지분 43.8%와 은행 현물출자분이 모두 처분된다.인력 감축과 시설 현대화,제조창 통폐합 등의 구조조정도 끝내기로 했다. □공기업 민영화 일정 98년 하반기 99년 2000년 2001년 포항제철 1인한도 → DR(주식예탁증서)발행+→ 소유·투자한도 1∼3% 우리사주+일반매각 폐지 한국 자산재평가→ 공개입찰→ 중공업 우리사주 담배인삼 홍삼부문매각→정부지분 매 →은행출자 매각 공사 각+우리사주
  • 직장 못 믿고 은행 못 믿고…/퇴출銀 신드롬 확산

    ◎2차 퇴출 앞두고 인수은 직원도 위기감/수표·신용카드 거부… 신용거래 금가고/“원리금 보장 해주나”… 고객 문의 늘어 ‘6·29 은행 퇴출’ 이후 은행원들과 고객들 사이에서는 실직과 예금에 대한 불안 심리가 날이 갈수록 확산되고 있다. 또 수표나 신용카드를 받지 않는 업소들이 늘어나는 등 신용거래 질서에도 균열이 생기고 있다. 2차 퇴출을 앞둔 다른 은행 직원들이나 인수은행 직원들까지도 실직의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또 더 안전한 은행을 수소문해 거래 은행을 바꾸거나 아예 은행과 거래하지 않겠다며 은행에서 돈을 빼내는 사례도 늘고 있는 실정이다. 국민·주택은행 등 인수은행 직원들은 퇴출은행 직원들의 고용승계가 자칫 자신들의 실직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인수은행측도 이미 지점망이 전국에 촘촘히 깔려 있어 퇴출은행의 직원들을 승계하더라도 지점들은 거의 폐쇄될 수 밖에 없어 자리는 늘어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국민은행 尹모 과장(45)은 “일자리는 늘지 않고 고용승계로 인력만 늘어난다면 추가 감원은 불보듯 뻔한 것”이라면서 불안해 했다. 다른 은행 직원들도 위기감은 마찬가지. S은행 대리 韓모씨(34)는 “실직 공포에 시달리느니 차라리 직장을 그만두고 싶은 심정”이라면서 “얼마전부터 공무원 시험과 소자본 창업에 대해 알아보고 있다”고 말했다. 예금주들도 혹시 예금을 찾지 못할까봐 우량은행으로 예금을 빼돌리는 사례가 빈번하다. 경영상태가 좋은 것으로 알려진 몇몇 은행에는 “거래 은행을 옮기려고 하는데 원리금이 확실히 보장되는 예금을 소개해 달라”는 등 문의가 잇따르고 있다. 주부 李모씨(48·서울 서초구 반포동)는 “퇴출은행과 거래하던 친구가 예금 인출 관계로 애태우던 모습을 보고 적금 등을 모두 우량은행으로 옮겼다”고 밝혔다. 서울 동대문에서 의류업을 하는 朴모씨(57)는 “은행퇴출이 마무리될 때까지 은행거래를 하지 않고 속 편하게 현금을 갖고 있겠다”고 말했다. 서울 지역 일부 상점에선 수표 받기를 꺼려해 손님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일도 잦다. 서울 남대문시장의 일부 상가에는 ‘당분간 모든 수표를 받지않습니다’라고 써붙여 놓고 현금만 받고있다.
  • “햇볕” 기조 유지돼야(사설)

    동해에서 나포된 북한 잠수정이 군당국의 조사결과 특수공작요원을 침투시키기 위한 것으로 밝혀졌다. 인양한 잠수정 안에서 집단자살한채 발견된 9구의 시신은 4명의 공작조가 5명의 승조원을 사살한 뒤 자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침투용 장비들도 다수가 발견돼 이 잠수정이 공작원들을 침투시키려하다 그물에 걸렸던 것이 명백해졌다. 잠수정이 나포되자 ‘훈련중 표류’라고 했던 북한측의 주장도 사건을 발뺌하려는 거짓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북한 잠수정이 침투를 목적으로 우리 영해를 침범한것은 정전협정과 남북 기본합의서를 명백히 위반한 도발행위로 정부는 당연히 유엔사·북한군 장성급회의를 비롯한 모든 공식 통로를 통해 강경대응해야 할것이다. 북한측의 사과와 함께 재발방지에 대한 확실한 약속을 반드시 받아내야 한다. 북한도 사건 다음날 판문점에서 열렸던 첫 장성급회의에서 ‘자세히 알아보고 대답하겠다’는 종전과 다른 반응을 보였던 것과 관련,이번에는 책임을 전가하려는 억지를 쓰지말고 확실하게 사과하여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길 기대한다. 그것이 국제사회에서 북한의 신뢰를 높이는 길이며 남북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이번 사건의 바람직한 해결책이라고 보기때문이다. 이번 북한잠수정침투사건으로 북한의 이중성(二重性)에 대한 경계심과 불신이 한결 높아졌다. 鄭周永 현대그룹명예회장일행과 소떼가 판문점을 넘어가고 그리던 금강산관광도 가을부터 시작된다는 기대속에 남북간에 모처럼 화해분위기가 조성되고있는 때라 실망감은 더욱 크다 하겠다. 당장 화해의 손짓을 그만두라는 소리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정부는 대북 3대원칙에 따라 북의 군사적 도발에는 강경대응하되 교류와 협력은 계속해 갈것임을 밝히고 있다. 과거 정부와는 사뭇 달라진 변화이며 ‘햇볕정책’을 기조로 한 대북정책에 자신감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사실 남북이 진정한 화해와 협력을 이루기까지는 앞으로도 이번 사건과 같은 숱한 장애물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때마다 정책의 기조를 바꾸어서는 아무런 성과도 얻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북측의 전술에 휘말릴 가능성이 많다. 돌출되는 장애물들은 상황에 따라 적절히 대응하면서 정해진 방향으로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이번 북한잠수정침투사건에서 또한가지 우리가 명심해야 할것은 ‘햇볕정책’을 편다고 하더라도 안보태세는 항상 물샐틈 없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언제 어떠한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빈틈없이 대응할 수 있어야한다. 그래야 ‘햇볕 정책’도 더욱 강력한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 이번 사건의 대응에는 허술하고 엉성한 점이 보여 국민들을 불안하고 걱정스럽게 만든 것이 사실이다. 다시한번 안보태세를 철저히 점검하여 크고 작은 모든 허점들을 완벽하게 보완해야 할것이다.
  • 회사채무 회장이 보증전담/李雄烈 코오롱 회장 명의 변경 지시

    ◎계열사 사장 보증부담 벗어나 경영전담 李雄烈 코오롱그룹 회장이 회사채무를 자신이 모두 지겠다고 선언했다. 李 회장은 최근 사장단회의에서 “앞으로 발생하는 계열기업의 회사채무에 대해 사장들은 보증을 설 필요가 없다”며 “회사보증을 회장인 내가 책임질 수 있도록 그룹내 관련규정을 정비하라”고 지시했다. 李 회장은 “이미 섰던 보증도 만기가 돌아오면 내 명의로 바꿔달라”고 했다. 李 회장의 이같은 ‘보증전담 선언’은 계열사 사장단들이 보증부담에서 벗어나 경영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전문경영인들이 회사채무에 보증섰던 관례에 비추어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진다. IMF체제 이후 기업 부도로 전문경영인들이 재산을 날리는 일이 빈발하자 일부 경영진들 사이에서는 “재산을 날리느니 차라리 사장을 그만두겠다”는 풍조가 확산돼왔다. 코오롱 관계자는 “李 회장의 결단으로 보증부담을 느껴온 계열사 사장들이 한층 자유롭게 경영에 임할 수 있게 돼 경영분위기가 일신될 것”이라고 전했다.
  • 중견회사 崔 대리의 가계살림(IMF 200일 달라진 세태:1)

    ◎봉급 55% 깎여 ‘적자인생’/작년 3,400만원서 올 1,5000만원으로/적금 등 모두 해약… 과외·외식 생각못해/“실직 친구에 비하면 그나마 다행” 위안 IMF 체제가 20일로 꼭 200일이 됐다.그런데도 터널의 끝은 아득하기만 하다.상황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실직자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가정마다 졸아든 수입에 살림을 맞추느라 한숨만 내쉬고 있다.일부 기업은 구조조정의 선을 넘어 퇴출을 당하는 비운을 맞았다.IMF 체제 이후의 세태변화를 시리즈로 짚어본다. “생활 수준이 10년전으로 돌아갔습니다” H컨설팅회사 崔相鎬씨(35·가명·서울 노원구 공릉동).대리 직급인 그는 지난 해 연봉 3,400만원의 평균 이상 소득자였다.그러나 올해 崔씨가 받을 연봉은 1,500만원 밖에 안된다.입사 때보다도 적다. 崔씨의 가계 명세표를 보자.입사 5년차로 지난해 한달 평균 봉급은 280여만원이었다.같은 나이의 친구들에 비해 적지 않았다.딸(7)과 아들(4)의 교육비와 생활비,승용차 유지비를 제하고도 한달에 100만원 이상을 저축했다. 21평짜리 전세 아파트에 살면서 내집 마련의 꿈을 키우며 주택청약예금도 꼬박꼬박 부었다.1,500㏄ 준중형 승용차도 장만했다.주말에는 아내와 두 아이를 데리고 가끔 외식을 했고 부모님께는 한달에 10만원씩 용돈을 드렸다.넉넉하지도 쪼들리지도 않는 가계를 꾸려나가는 평범한 가장이었다. 봉급의 55%를 깎인 요즘 崔씨는 씀씀이를 전면 수정했다.지출을 줄이지 않고는 버틸 방법이 없었다.다달이 80만원씩 붓던 정기적금을 해약했고 20만원씩 넣던 주택청약예금 적립도 일시 중단했다.웅변학원과 놀이방에 다니던 딸과 아들도 그만 두게 했다.가슴이 아팠지만 부모님 용돈도 5만원으로 줄였고 승용차도 꼭 필요할 때만 타고 있다.그래도 딸의 유치원 만큼은 그만두게 할 수 없었다. 예상치 못한 지출도 생겼다.빚 2천만원에 대한 이자 지출이 30만원에서 50만원으로 늘었다.게다가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친구의 빚 1천만원을 보증섰다가 부도가 나는 바람에 한달에 20만원씩 물고 있다.‘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지출을 절반으로 줄였는데도 한달에 20여만원씩 적자를 내고 있다.적금을 해약해 생긴 2천여만원으로 빚을 곧바로 갚지 못하고 부족한 생활비에 충당하고 있다. 생활은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고 느낀다.물가가 오르고 소비 수준을 더 줄이기 어렵기 때문이다.崔씨는 “생활비와 교육비,대출금 이자를 감당하기가 점점 버거워지는 것 같다”면서 “미래에 대한 계획은 생각할 수도 없고 하루하루 살기가 급급하다”고 말했다. 그래도 실직했거나 부도를 낸 친구들에 비하면 행복하다고 생각한다.그는 “인생의 위기로 생각하고 참고 이겨낼 것”이라고 말했다.
  • ‘대선후 외면’에 앙심 범행/金賢哲씨 피랍

    ◎주범 吳씨 집근처 다방앞서 연행/5인조 군용폭발물·가스총까지 준비/경찰복차림 공범 등산 길목서 차세워/3명은 운전사 끌어내려 딴차로 납치/현철씨 상황 직감… 차문 박차고 탈출 金賢哲씨 피랍 탈출 사건은 사전준비 과정을 거친 조직적인 범행이었다.주범 吳順烈씨는 87년과 92년 대통령 선거 때 물심양면으로 도왔지만 따돌림을 당한데 대한 개인감정 때문에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알려졌다.吳씨는 하오 3시45분쯤 경찰에 “인천 경인고속도로 도화인터체인지인데 곧 자수해서 사실을 밝히겠다”고 무선전화를 건 뒤 10시40분쯤 자신의 집 근처인 주안역근처 다방에서 붙잡혔다.이번 사건은 대선과 얽혀 있는 것으로 확인돼 앞으로 상당한 파문이 예상된다. ▷검거◁ 경찰은 吳씨의 가족들을 통해 吳씨가 평소 자주가던 곳을 알아낸 뒤 잠복 근무를 하다 10시40분쯤 주안동 근처 상가의 한 다방에서 나오는 吳씨를 검거했다.吳씨는 검거 과정에서 저항을 하지 않았다. ▷피랍◁ 賢哲씨는 15일 상오 9시30분쯤 등산을 하러 운전사 延濟廣씨(44)와 함께 쏘나타Ⅱ 승용차를 타고 북한산 주차장으로 향했다.9시40분쯤 구기파출소에서 300m쯤 떨어진 건덕빌라 입구에 이르렀을 때 경사 계급장을 단 경찰복장의 범인이 차를 세우고 다짜고짜 延씨에게 “당신은 수배 중이니 조사를 받으러 가자”면서 운전석에서 내리게 했다.이 때 주범 吳씨가 뒷좌석에 앉아 있던 賢哲씨의 오른쪽 옆자리에 올라 탔고 또다른 1명은 운전석에 앉아 구기터널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이기본,임원택,최모씨 등 나머지 범인 3명은 차에서 내린 延씨를 자신들이 타고온 부산27바 5467호 소나타Ⅲ 승용차 뒷좌석에 강제로 태웠다.2명은 延씨 좌우에 앉아 수갑을 채웠고 차는 자유로를 거쳐 일산방향으로 달렸다. ▷탈출◁ 賢哲씨는 범인들에게 “너희들은 누구냐,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면서 몸싸움을 했다.이 때 옆좌석에 있던 범인이 선글라스를 벗으며 “나 모르겠소.오순열이요”라고 말했다. 이 때 賢哲씨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재빨리 왼쪽 차문고리에 손을대 문을 약간 열었다.운전석의 범인은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은 것을 알고 문을 닫기 위해 구기터널을 빠져 나와 차를 길가에 세웠다. 이 순간 賢哲씨는 발로 문을 박차고 나와 길 건너 편으로 달렸다.탈출 과정에서 목 부분 두 곳에 직경 2㎝ 가량의 피멍이 들었고 다리에는 찰과상을 입었다.범인들은 賢哲씨를 쫓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황급히 녹번사거리 쪽으로 차를 몰아 달아났다.차는 賢哲씨가 내린 지점에서 200여m 떨어진 국립환경연구원 앞에서 발견됐다.賢哲씨는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 경찰에 신고했다. 延씨를 태우고 일산으로 가던 다른 범인들은 핸드폰으로 “賢哲이가 도망갔으니 운전사를 풀어주라”는 연락을 받고 한 고등학교 근처에서 延씨를 내려주며 “현철이에게 오순열이가 가만두지 않겠다고 전하라”라고 말하고 달아났다. ▷수사◁ 경찰은 나머지 공범 4명도 인천 일대에 있을 것으로 보고 吳씨에게 이들의 소재를 추궁 중이다.이에 앞서 경찰은 범인들이 버리고 간 賢哲씨 승용차에서 가스총과 전자충격기,녹음기,길이 17㎝ 지름 2㎝의 군용 다이너마이트 4개 짜리 두묶음을 발견했다.이와 함께 차에서 지문 18개를 채취,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감식을 의뢰했다.
  • 대한적십자 부총재에 張貞子 현대학원 이사장

    ◎鄭周永 명예회장 계수… 83년부터 韓赤과 인연 鄭周永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계수인 張貞子 현대학원 이사장이 대한적십자사의 부총재로 선임됐다. 한적은 11일 중앙위원회를 열고 보건복지부장관에 취임한 金慕妊 부총재의 후임에 張貞子 현대학원 이사장을 선출했다.張貞子 부총재는 鄭명예회장의 6형제중 다섯째인 信永씨의 부인이다.鄭信永씨는 언론사 기자를 하다 그만두고 독일에서 유학을 하던 중 62년에 별세했다.鄭夢爀 현대정유사장(현대석유화학 사장 겸임)은 信永씨의 아들이다. 張부총재는 서울대 음대를 졸업한 뒤 독일 뮌헨 국립음악대학과 함부르크국립음악대학을 졸업했다.83년부터 한적 본사 여성봉사 특별자문위원을,95년부터 서울지사 상임위원을 맡고있어 적십자와 인연도 있는 편이다.鄭명예회장이 이달 중 판문점을 거쳐 소 떼를 몰고 북한을 방문하는 것에 맞춰 張貞子씨가 한적의 부총재에 선임된 것도 ‘묘한 인연’이다.
  • 밥 굶게 돼야 힘든 일 하려나/실직 늘어도 3D업종은 구인난

    ◎좋았던 옛날만 생각 “조건 나쁘다” 포기/공공 취로사업 참가자도 중도하차 속출 ‘밥을 굶기 전에는 힘든 일은 못하겠다’ 실업대란으로 실직자는 넘쳐나는데도 일이 힘든 3D업종은 사람을 구하지 못해 쩔쩔매는 이상현상이 지속되고 있다.실직자들이 전에 일하던 직장보다 낮은 임금과 힘든 일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농번기를 맞은 농촌의 일손 부족 현상도 여전하다.특히 일부 중소기업은 외국인 근로자들마저 빠져 나가 심각한 구인난을 겪고 있는 실정이다.3D업종이나 농촌을 기피하는 이유로 실직자들은 ‘일이 너무 힘들다’거나 ‘일은 할만 해도 임금이 너무 낮다’는 점을 내세운다. 인천에 있는 중소섬유업체인 심도산업은 직원을 구하지 못해 애태우다 올초 사무직 출신 실직자 7명을 채용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보름을 넘기지 못하고 회사를 그만두었다.이틀만에 그만둔 전직 건축회사 직원 尹모씨(35)는 “75만원의 월급에도 만족할 수 없었고 일도 전에 하던 것과 비교해 너무 힘들었다”고 말했다.이 회사는 앞으로 외국인 근로자는쓰더라도 사무직 실직자는 고용하지 않을 생각이다. 농협의 ‘농촌 일손돕기’ 행사에 참여했던 李모씨(45·서울 성북구 삼선동)는 경기 남양주시 농가의 비닐하우스에서 농사일을 했다.그러나 사흘만에 그만두었다.대기업 총무부장으로 있다가 지난 2월 명예퇴직한 李씨는 “하루 3만원의 임금은 적지만 받아들일만 했으나 하루 10시간씩의 농사일은 안해본 일이라 그런지 허리가 끊어질 정도로 힘들었다”고 말했다. ‘농촌 일손돕기’는 5월말 현재 4만여명이 지원,농촌에 투입됐으나 70∼80%는 2∼3일만에 탈락했다. 선반공으로 일하다 지난 3월 명예퇴직한 金모씨(39·서울 금천구 시흥2동)는 산림청이 주관한 ‘숲가꾸기 공공근로사업’에 참여했다.지난 달 1일부터 금천구 시흥동 삼성산에서 하루 8시간씩 3만3,000원을 받고 일했으나 1주일만에 그만 두었다.그는 “기계로 나무를 베고 목재를 옮기는 일이 생각보다 무척 힘들었다”고 말했다. ‘숲가꾸기’는 고되지만 3만3,000∼4만원의 일당을 받으며 1년동안 일할 수 있어 실직자들에겐 좋은 조건이다.그런데도 등록한 818명 가운데 15% 가량인 120여명이 1주일도 되기전에 ‘중도하차’했다. 산림청 관계자는 “먹고살기 힘들어졌다고는 하지만 아직 극한 상황에 몰리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러는 것 아니겠느냐”고 꼬집었다.
  • 98 미스코리아 재심사 소동 계기 거센 비판

    ◎“미인대회 없애야” 전국이 시끌/여성 상품화 등 근본적 문제 제기/“국가행사냐” 공중파 생중계 비난 지난달 23일 공중파 방송으로 생중계된 98 미스코리아 선발대회가 컴퓨터처리 오류로 재심사를 하는 소동을 빚자,이를 계기로 미인대회 무용론이 들끓고 있다.미인대회 자체도 문제지만 무슨 국가적 행사라고 번번이 공중파방송에서 이를 생중계하느냐는 비판이 여성계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결과가 잘못됐다는 게 방송 당일에 알려지고 나자 비판의 글들이 컴퓨터통신 화면을 하얗게 뒤덮었다.많은 이들이 공정성을 불신했으며 칫수를 멋대로 정해 놓고 여성 신체를 상품화하는 대회의 본질에 문제를 제기했다. “어차피 명동의 유명 미용실과 끼리끼리 짜고 하는것 아니냐” “얼굴 뜯어고치고 요즘 좋아진 의술에 몸매까지 손보고,나이어린 애들이 나와서 하는 말이 다 각본에 있는 말,그 나이에 뭘 알겠나”“네가 제일 예쁘니까 돈 이만큼 받고 너는 그 다음이니까 요만큼 받고….아름다움이란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것”“자본주의 쓰레기같은 소모적 미인대회를 양대 방송에서 해마다 나눠먹는 것 우습다”“‘PD수첩’으로 미인대회 공화국 비판했던 MBC는 중계 그만두고 밝은사회 만드는 방송이나 하라” 등등 비난이 빗발쳤다. 여성단체들은 무엇보다 공영방송이 공중파로 미인대회를 중계하는 것을 문제로 꼽는다.여성단체협의회 권수현 여성정책부장은 “미인대회 하는 건 주최측 자유지만 대중에게 책임있는 공중파 방송에서 여성은 외모가 최고며 신데렐라가 될 수 있다고 무의식중에 주입시키며 건강한 여성상을 왜곡할 수 있는가”라고 되물었다. 연세대 사회학과 조혜정 교수는 “서구 미인대회는 대기업 판촉책으로 심심한 사람들 볼거리일 뿐이다.우리처럼 국가대표 뽑듯 난리를 벌이지 않는다.국제 타이틀 붙인 대회도 온갖 게 다 있다”고 꼬집었다.미인대회 뽑혀 국위선양 한다는 말의 허구는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뻔히 보인다는 얘기다. 90년대 들어 각종 특산물 선전 등을 내걸고 미인대회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한국여성민우회 조사에 따르면 96년 지역별로 열리는 미인대회는 100여개에 이른다.조사결과 아연하게도 이런 대회에 지방자치단체들이 비용까지 지원하고 있었다. 미인대회가 사회 공해인 것은 그 자체에서 끝나지 않고 취업,대학 입시 현장에까지 연결되기 때문.미인대회 입상이 인기 연예인으로 가는 급행표가 된지는 이미 오래. 얼마전 입시에선 대구 몇몇 전문대학 관광학과에서 미인대회 입상자를 특례입학시켰다.여성계에선 얼마전 철도청이 사원채용 면접을 하면서 여성 응시자에게 반팔,무릎위 스커트 차림으로 일정거리를 걸어 보게 한 것도 미인대회 선발 방법과 다를 바 없다고 주장한다. 지난달 29일 MBC 정문 앞에서 미인대회 중계 반대 시위를 한 여성단체연합 관계자는 “여연에선 미인대회 방송중계 및 지자체 예산지원 중단 등을 이번 지자체 선거를 비롯,선거의 쟁점으로 삼겠다”고 밝혔다.
  • 자원봉사자 구하기 별따기/식사제공도 못받고 상대측 감시 곤욕

    ◎가족·친척·동문이외 대부분 중도 포기 선거 자원봉사자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자원봉사자에 대한 선거법 규정이 너무 까다로워 자원봉사를 하려는 사람도 적고 하던 사람들도 그만 두고 있다. 자원봉사자들은 선거법상 후보자로부터 돈은 물론 한 끼의 식사대접이나 음료수를 받아 마셔도 안되게 돼있다.유권자들에게 차나 술 한잔을 하자고권유하거나 요구해도 제3자 기부행위 금지 조항에 해당돼 처벌받는다.등록된 선거사무원과 달리 후보자의 이름이 새겨진 어깨띠 표찰 완장 마스코트 등을 달아도 처벌받는다. 서울 K모 구청장 후보의 자원봉사자로 나섰던 朴모씨(32·상업·서울 관악구 신림동)는 상대후보측의 따가운 감시 눈길을 견딜 수 없어 최근 그만두었다.잘못하다가는 전과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원봉사자들이 그만두거나 형식적으로 선거운동에 나서 후보자들도 고심하고 있다.그나마 정당공천 후보들은 유급선거운동원을 쓸 수 있지만 무소속 후보들은 상당수가 선거운동을 포기한 상태다. 서울 D구청장에 출마한 한 후보는처음 자원봉사자 160여명을 모집했지만 대부분 그만 두고 현재 20여명만이 뛰고 있다.남아있는 사람들은 가족이나 친척,친한 동문들 뿐이다.지방선거 후보자들은 “식사제공도 못받으면서 힘든 선거운동을 하는데 까다로운 선거법으로 감시까지 하면 누가 자원봉사를 하려 하겠느냐”고 반문했다.이들은 “자원봉사자들에게도 선거운동원처럼 최소한 실비를 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네팔 카트만두(세계 문화유산 순례:72)

    ◎삶도 죽음도 없는 ‘지혜의 사원’/스와얌부나트 스투파에 새긴 ‘부처의 눈’/만물을 꿰뚫어 보는 ‘all­seeing eyes’/살아있는 여신 쿠마리는 종교 초월 숭앙받고/황금사원 옆에는 영원을 흐르는 바그마티강이… 【카트만두(네팔)=金鍾冕·金明國 특파원】 히말라야의 준봉을 우러러보고 있는 네팔왕국의 수도 카트만두. 네팔 사람들은 지금도 카트만두에 가는 것을 “네팔로 간다”고 말한다. 산간오지의 네팔인들에게 카트만두 분지는 곧 동경의 땅이자 마음의 주인이다. 그곳에는 깍아지른 듯한 계단식 밭을 오르내리지 않아도 농사 지을 땅이 있고 유서깊은 사원들 또한 즐비하다. 전설에 따르면 카트만두 분지는 원래 하나의 커다란 산정호수였다.그런데 만주슈리 즉 문수보살이 나타나 ‘지혜의 칼’로 산허리를 자르고 물을 퍼낸 뒤 육지로 일궈냈다는 것이다.그때 맨처음 수면 위로 빛을 내뿜으며 떠오른 곳이 바로 카트만두의 성지 스와얌부나트이다. ○룸비니 버금가는 성지 스와얌부나트는 지금부터 2천여년 전에 세워진 불교사원이다.카트만두 시내에서 서쪽으로 2㎞쯤 떨어진 구릉지대에 자리잡고 있다.사원 입구에 가루다상이 버티고 서 있는 것을 보면 힌두사원도 겸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가루다는 힌두교의 신 비슈누가 타고 다닌다는 상상의 새이다.사원은 온통 야생 원숭이들의 울음소리로 왁자했다.‘멍키 템플’로 불릴 정도다.스와얌부나트로 오르는 길은 300개가 넘는 가파른 돌계단으로 이어져 있다.카트만두의 평균 고도가 1천400m라는 데 생각이 미치니 숨이 더욱 차올랐다. 쏟아지는 햇살을 온몸에 받으며 허위단심 사원에 올랐다.요란하게 치장된 거대한 탑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네팔 불교에서 룸비니 동산 다음으로 신성시되는 스와얌부나트 스투파였다.솔도파(率堵婆)라고도 불리는 스투파는 불사리를 봉안하거나 절의 장엄함을 나타내기 위해 쌓은 탑을 말한다.하지만 이곳의 스와얌부나트 스투파는 여느 스투파와는 달랐다.무엇보다 눈길을 끈것은 스투파 상단부 4면에 새겨진 사방을 응시하는 부처의 눈이었다.만물을 꿰뚫어 본다는 뜻에서 사람들은 그것을 ‘올 싱 아이즈(all­seeing eyes)’라고 부른다.대승불교에서는 과거겁과 현재겁,그리고 미래겁에 걸쳐 각각 1천명의 부처가 출현한다고 한다.이곳의 스투파는 과거겁의 한 부처인 본초불(本初佛)을 위해 세워진 것이다. 스투파 주변은 참배객들로 북적댔다.특히 부처의 가르침을 좇는 사람들은 스투파의 둘레를 몇번이고 돌고 또 돌았다.스투파를 한바퀴 돌면 불경을 1천번 읽는 것만큼의 공덕을 쌓는 일이라는 게 그들의 믿음이다.스투파 옆에 죽 늘어서 있는 기도용 휠 ‘마니차’ 주위에도 순례자들의 행렬은 이어졌다.그들은 라마교의 진언(眞言)인 ‘옴마니반메훔’이 새겨진 원형의 마니차를 연신 돌려댔다.마니차를 돌리는 것은 불경을 외우는 것과 같은 공덕행(功德行)이라고 믿기 때문이다.이 수수께끼 같은 사원에 서면 누구라도 성자가 되고 현자가 될 법했다. 스와얌부나트 스투파의 ‘예지의 눈’을 멀리서 다시 보았다.순간 네팔의 살아 있는 여신 쿠마리의 이마에 붙인 티카(tika)가 떠올랐다.쿠마리에게 있어 그것은 삼라만상의 이 법을 훤히 꿰뚫는 ‘제3의 눈’이다.기자는어느새 쿠마리의 자장(磁場)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발걸음은 이미 쿠마리가 살고 있는 쿠마리 바할로 향하고 있었다.카트만두 시내의 남쪽 뉴 로드라 불리는 신생 거리를 지나 바산트풀 광장에 닿았다.쿠마리 바할이 모습을 드러냈다.작은 창이 달린 3층의 낡은 목조건물이 세월의 무게를 전해줬다. ○불경 1천번 읽는 공덕 고대 경전을 보면 쿠마리의 신체조건은 까다롭기 짝이 없다.쿠마리의 신체는 반얀(banyan,벵골 보리수의 일종)나무와 같고,허벅지는 사슴의 그것과 같으며,목은 고둥 같아야 하고,눈꺼풀은 소의 그것과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쿠마리 바할에서는 쿠마리를 볼 수 있지만 사진촬영 만큼은 엄격히 금했다.영화에서나 보던 쿠마리는 실제 어떤 모습일까.사원의 종이 울리고 비둘기 몇마리가 푸드덕 날아오르더니 마침내 2층 창문으로 쿠마리가 얼굴을 내밀었다. 석류꽃같이 빨간 입술에 조붓한 어깨,호리호리한 목선,게다가 기품까지 갖췄지만 표정이라곤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쿠마리.아침이슬처럼 잠시 나타났다 이내 몸을 숨겨버리는 쿠마리는안쓰러움 바로 그것이었다.네와르족의 어린 소녀 중에서 선발되는 쿠마리는 힌두교 탈레주 여신의 현신(現神)으로 여겨지지만 종교를 초월해 두루 숭배받는다.나이가 들어 초경을 치르면 쿠마리는 사원을 떠나야 한다. ‘목조의 절’이라는 뜻을 지닌 카트만두에서는 어디를 가도 사원과 마주친다.그 중에서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곳이 힌두교의 성지 파슈파티 사원이다.카트만두 시내에서 동쪽으로 5㎞ 지점에 위치한 이 황금빛 2층 사원은 힌두교도가 아니면 들어갈 수 없다.정면에는 시바신이 타는 성스러운 소 ‘난디’상이 수호신처럼 웅크리고 있다.이곳은 힌두교의 성인 사두(sadhu)나 요기들에게는 메카와 같은 존재다. 그러나 파슈파티를 한층 성스럽게 만드는 것은 사원을 휘감고 흐르는 바그마티 강이다. 이 강은 흘러 흘러 인도의 강가(Ganga,갠지스강)와 만난다.바그마티 강 역시 강가처럼 가트(ghat,화장장)로 성역시된다. 매캐한 화장 연기속에서 태연히 머리를 감는 여인,식기를 닦는 아낙,의지가지 없이 병들어 누워있는 노인…. 이들에게는 더이상 죽음도 삶도 없다. 삶과 죽음을 뛰어넘는 종교의 비의(秘義)만 숨쉴 뿐.바그마티 강은 오늘도 영원을 안고 흐른다. ◎여행 가이드/대여 자전거 이용 편리/통행규제 심해 주의를 카트만두 시내를 여유 있게 둘러 보려면 대여 자전거를 이용하거나 자전거를 개조한 오토 릭샤를 이용하는 것이 편하다.카트만두 시내의 일방 통행로는 자동차뿐만 아니라 자전거도 규제를 받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스와얌부나트로 가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하나는 카트만두 시내 서쪽에 있는 국립박물관 앞을 거쳐 가는 것이고,또 하나는 구왕궁 앞 듀버 광장에서 서쪽으로 비슈누마티 강의 조교(弔橋)를 건너서 가는 것이다.이국정취를 만끽하고 싶다면 후자를 택하는 것이 좋을 듯.카트만두에는 많은 여행사들이 밀집돼 있다.이들은 카트만두 성지 순례 외에 트레킹이나 래프팅 등도 주선해준다.
  • 5월의 역사적 의미/姜萬吉 고려대 교수·한국사(특별기고)

    민족사니 세계사니 하는 것도 결국 인간들의 일상 생활 하나 하나가 쌓여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그 속에는 크고 작은 마디가 있게 마련이며,역사가(歷史家)란 사람들은 또 이 마디에다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게 마련이다.우리 역사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에게는,지금도 5월만 되면 역사의 마디가 가지는 엄숙성 같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李承晩정권이 권력 연장을 위한 개헌(改憲)을 했다가 망해 간 역사를 보고,다시는 3선 개헌하는 어리석은 통치자가 나오지 않으리라 생각했다가 朴正熙정권의 3선 개헌을 겪었다.10·26 궁정동사건에서 ‘유신’대통령 朴正熙의 최후를 보면서 쿠데타 일으키는 어리석은 군인이 다시는 안 나오리라 생각했다가 12·12 ‘군사쿠데타적 사건’과 ‘광주 학살’을 겪었다.이 참에 역사선생 영영 그만두는 것이 옳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광주사태’가 ‘민주화운동’으로 또 ‘민중항쟁(民衆抗爭)’으로 이름 바뀌는 과정을 겪었고,희생자들의 명예가 회복되고 그 묘소가 성지가 되는 한편,‘군사쿠데타적 사건’을 주동해서 권력의 정상에 올랐던 사람들이 감옥에 가는 것을 보면서,역사선생 그래도 할 만하다고 자위했던 일이 기억된다. ○역사의 엄숙성 또다시 절감 금년에는 또 ‘광주사태’때의 ‘내란음모사건’주모자가 대통령이 되어 다시 그 5월을 맞게 되었다.이렇게 되면 역사선생 할 만하다는 정도를 넘어서,역사의 마디들이 가지는 엄숙성(嚴肅性)과 정직성(正直性)을 다시 한번 절감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왜 ‘광주사태’가 ‘민주화운동’으로 또 ‘민중항쟁’으로 되고,‘폭도(暴徒)’가 ‘영예로운 전사’나 ‘민주열사‘가 되며,‘폭도’를 처치하고 대통령이 되었던 사람들이 감옥에 가고,‘내란음모 주동자’요 사형수였던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가 하고 묻는다면,그것에 대답해야 할 짐은 결국 역사선생이 지게 마련인 것이다. 이런 질문에 대한 여러가지 답이 있을 수 있겠지만,그리고 좀 막연(漠然)한 표현이 될지 모르지만,그것은 인간의 역사가 기어이 가고 마는 길이나 방향 같은 것이 있기 때문이라 하는 것도 대답의 하나가 될수 있지 않을까 한다. ○‘광주항쟁’ 영예로운 전사로 어떤 사람들이 그 역사의 길이나 방향에 맞게 섰다면,설령 한 때는 역사왜곡으로 ‘폭도’가 되었다가도 결국 그리고 기어이 ‘영예로운 전사’나 ‘민주열사’가 되게 마련인 것이다.반대로 그 역사의 길이나 방향에 역행했다면 설령 한 때 권력의 정상(頂上)에 섰다 해도,그 권력이 끝나고 역사가 제길로 들어서게 되면 실정법적(實定法的) 판결뿐만 아니라,역사의 심판에서도 기어이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역사의 길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고 묻게 될 것이다.만고불변(萬古不變)한 역사의 길은 한 마디로 말해서 이 세상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더 자유로워지는 길,경제적으로 더 고루 풍부하게 되는 길,사회적으로 만민평등이 되는 길,문화적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자유가 더 넓어지는 길이라 할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 처절했던 광주항쟁이 있은 5월이 우리에게 주는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가.앞에서 든 네가지 길에 섰던 ‘폭도’가 ‘영예로운 전사’요 ‘민주열사’가 되고,‘내란음모 주동자’사형수가 대통령이 되는 반면,그 길에 역행했던 ‘쿠데타적 사건’의 주동자들이 기어이 감옥으로 가고 또 역사의 죄인이 되고만다는 진리를 가르쳐 주는데 있다고 할 것이다.
  • 소설가 金周榮(이세기의 인물탐구:168)

    ◎날로 확대­심화해온 소설세계/봇짐장수 삶 그린 ‘객주’ 5년간 본지에 연재 호평/대작 ‘임꺽쩡’ 등에 비견되는 역사소설 주로 집필 180센티의 큰키에 언제나 말이 없고 진실한 이미지가 작가 金周榮의 모습이다. 그와 절친한 소설가 이문구에 의하면 그는 ‘어진 사람’‘법없이도 사는 사람’이며 ‘교통순경과 방범대원을 구별하지 못할만큼’ 아는 것은 알지만 모르는 분야는 깜깜하다. 그는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작품세계의 확대(擴大)와 심화(深化)를 끊임없이 이룩해왔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 ‘분단소설의 지평을 개척하는가하면 성장소설의 아름다움과 민중적 역사소설의 높은 봉우리를 역력(歷歷)하게 정복’해 왔다. 그리고 지금도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 소리가 메아리져 돌아오는 생의(生意)의 소설’을 쓰고 있다. ○분단소설 지평 개척 그의 초기소설은 주로 ‘상경한 촌놈이 겪는 도시의 세상물정’이 주류를 이룬다. ‘멀쩡하던 사람들이 타관의 물을 먹고나면 진솔하고 소박한 모습은 간데없이 사라지고 이해타산과 세파에 시달려 속된 인간으로 변모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나머지 이를 풍자하고 비판하는 시각을 지켰다. 이러한 풍자는 단편소설에서는 ‘경쾌한 속도감, 재치의 반전으로 소설적 재미를 가속화시키는 반면 촌철살인(寸鐵殺人)의 구성의 묘(妙)로써 문학적 향기’를 뿜어내고 장편소설에서는 ‘걸쭉한 입담과 해박한 풍물묘사에 의존한 특유의 지구력으로 수준높은 세태풍속’을 그려나간다.그중에서도 그가 유년의 시골장터에서 목격한 봇짐장수들의 고달프고 강인한 삶을 그린 ‘객주(客主)’는 79년부터 5년간 서울신문에 연재되어 근현대 역사소설의 빛나는 업적들인 ‘임꺽정’과 ‘장길산’ 등에 비견되기도 한다. 그 무렵의 그는 녹음기와 카메라를 갖춘 취재가방을 둘러메고 장이 서는곳마다 찾아다니면서 현장에서 채집한 언어들로 문학적 생동감을 소설속에 되살려내고 있다. 그와 한평생을 어울려 지낸 소설가 이문구는 김주영이 소설을 쓰기 위해 깨알같이 메모해둔 노트를 보고 ‘이것은 피다.이것은 피를 흘리는 김주영의 모세혈관(毛細血管)’이라고 쓴적이 있다.그의 문학생활에서 가장 센세이셔널한 사건은 89년의 ‘절필선언’을 들수 있다. 정상을 달리던 한 중견작가가 갑자기 ‘절필’을 선언하고 일간신문연재를 중단해버리자 문단은 온통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때 평론가 정현기와의 한 대담에서 그는 지금까지의 자신의 소설을 돌아볼때 ‘동어반복(同語反復)이 너무 심하다는 것’, 근 10년동안 줄기차게 신문연재에 매달리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상업적 측면에 침식되어가고 있다’는 경각심과 신문소설이 요구하는 반문학적 요소들이 ‘자신의 문학적 성채(城砦)를 집요하게 공격하여’ 마침내 절박감에 다다를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고백하고 있다. ○상업성 우려 89년 절필 ‘나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내자신에게 가하는 나의 검증’이며 ‘비평가들의 비판이나 상찬이나 독자의 갈채도 나는 두렵지 않았다’고 했다. ‘오랜 글쓰기의 경험으로 독자를 교묘하게 속일수 있다손 치더라도, 그러나 도대체 그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원고료와 인세가 나의 생활인가.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아야한다. 그럴수는 없다’는 절규가 그것이다. 그의 이러한 선언은 문학하는 이들의 양심에 칼날이 되어 타성적인 문학행위에 충격을 가하는 계기가 되었고 ‘껑충한 허우대와 맑고 박(撲)한 성정, 씩씩한 소년티를 벗지못한 소탈한 모습’에서 ‘눈크고 키큰 용량만큼이나 외로운 자기자신을 가누기 힘들어하는 천부적 질박함이 그의 문학적 원형질’임을 실감할수 있게 했다. 그는 경북 청송군 진보면의 배고프고 외진 마을에서 태어났다. 군청에 다니던 金海允씨의 2남1녀중 장남. 가난과 더불어 ‘말문이 트이기 시작하면서’ 혹독한 굶주림에 시달려왔고 ‘이틀돌이’로 품앗이를 다니는 어머니를 동구밖에서 기다리는 핍색(逼塞)의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의 청소년기는 ‘길가의 잡초’였고 ‘시’를 쓰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을 간직한채 16살때 대구로 와서 ‘풍찬노숙(風餐露宿)’을 일삼으며 대구 농림고를 졸업, 다시 서울에 올라와 친구집에 기식한채 서라벌예대에 입학하자 서정주 박목월등 기라성같은 스승들을 만나면서 비로소 문학의 앞길에 서조(瑞兆)가 비치는 듯했다.그러나 박목월씨로부터 ‘시보다는 소설’을 쓸것을 권유받았고 이후10년간은 연고지가 아닌 안동에 내려가 엽연초생산조합에 취직하고 있었다.가족은 고향에서 유년기를 함께 보낸 부인 金震得씨와의 사이에 3남2녀. ○단편 ‘휴면기’로 등단 조직이란 사회에 일단 자신을 내던지게 되면 ‘그들과 비슷한 모습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에서 그는 ‘중뿔나게 아는체도 고독한체도 하지 않았고 무사하게 살아남기 위해 대세를 따르는 가운데 날이 갈수록 가슴에 응어리가 쌓이는 바람에 자기자신을 술자리로 데리고 갈수밖에 없었다’고 술회한다. 이 시기에 겪었던 정신적 고통과 자기학대는 결국 ‘문학에 대한 끊이지않는 욕구’때문이며 회사를 그만두고 71년, 단편 ‘휴면기(休眠期)’로 문단에 등단하자 ‘숨결이 야무지게 살아있는 언어’‘호흡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일정한 밀도를 유지하는 문장력’으로 주변의 시선을 끌기 시작했다. 취미는 낚시에다 절륜의 술실력. 노래판이 벌어지면 ‘개화창가에서 신구잡가, 신체유행가’를 거침없이 노래부르고 재담 농담에도 능하다. 그는 전9권에서 5권의 역사소설전집만을 주로 내다가 최근 한 10년만에 한권짜리 장편소설인 ‘홍어’를 출간했다. 이 소설은 ‘중견작가의 빛나는 감수성으로 눈이 시릴 정도의 박꽃같은 순백한 사랑을 순정미학(純正美學)의 진수(眞髓)로 그려낸다’고 평가된다. 인생의 긴 도정을 지나 그는 그의 삶의 결핍된 부분들을 인간적 정서와 무르익은 인간미로 채우는 시기다. 결국 그의 문학은 우여곡절을 지나 정상에 오르게 되었고 문학에 대한 심한 갈등과 의혹과 고뇌를 되풀이하는 어쩔수없는 작가의 자세를 지킨다. 그는 처음에도 정직하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더니 오늘도 여일하게 진실한, 이 시대 ‘대기거영(大器巨影)’의 얼굴이다. □연보 ▲1972년 소설 ‘휴면기(休眠期)’(월간문학)로 등단 ▲1976년 경향신문에 첫장편소설 ‘목마위의 여자’ 연재 ▲1979년부터 서울신문에 ‘객주(客主)’연재 ▲1983년부터 중앙일보에 ‘활빈도(活貧盜)’ 연재 ▲1988년 한국일보에 ‘화척(禾尺) 7년 계약, ‘중국기행’연재 ▲1991년 동아일보에 ‘야정(野丁)’ 연재 ▲1995년 서울신문에 아프리카기행 연재 장편소설 ‘객주’ 전9권 (81년 창작과 비평사) ‘아들의 겨울’(82년 전예원) ‘천둥소리’(86년 민음사) ‘활빈도’ 전3권(87년 중앙일보사) ‘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88년 민음사) ‘외설 춘향전’(94년민음사) ‘화척’ 전5권 (95년 문이당) ‘야정’ 전5권(96년 문학과 지성사) ‘홍어’(98년 문이당)출간, 단편집 ‘겨울새’(83년 민음사) ‘새를 찾아서’(87년 도서출판 나남)등 소설문학상(82년) 유주현문학상(84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93년) 이산문학상(96년)
  • 개방의 물결 흑룡강省(黑龍江 7천리:30)

    ◎88년부터 개방… 국경엔 러 장사꾼 북적/하얼빈·흑하·무원 등 통상구 25곳/92년부터 96년까지 5년간/러시아 관광객 130만명 다녀가 지난해 12월 6일 무원에 도착한 때는 저녁 아홉시였다.무원현 민족사무위원회에서 예약한 호텔 부근의 사우나에서 목욕을 하고 돌아와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눈이 내렸다.도시의 거리와 지붕이 새하얀 면사포를 쓴 것처럼 하얀 빛인데 낙엽진 가로수 가지에도 눈꽃이 하얗게 폈다. 출근시간이 되자 거리에는 삽과 빗자루를 든 사람들이 눈을 쓸었다.‘눈이 오면 문앞의 눈을 치는 것’은 흑룡강성 시민들의 의무사항이다.눈이 멎으면 사람들은 어떤 명령을 받은 군인들처럼 자발적으로 나와서 길을 쓰는 것이 관례로 되어있다. 청나라 선통원년(宣統元年·1909년)에 수원주(綏遠州)가 설치,1913년 수원현이 되었다가 1929년에 무원현으로 되어 줄곧 가목사시에 예속되어온 현의 면적은 6천200㎢,인구는 겨우 4만여명이고 현성인구가 1만여명이라고 한다.러시아와의 통로가 열린 후로 외지 유동인구가 급증해서 사람도많아지고 거리도 많이 번성해졌다고 하지만 산간도시로 한산한 기분이 없지 않았다. ○전국 통상구의 10%나 차지 강변으로 갔다.‘1993’이라고 분명히 새겨진 국경비가 강둑에 세워져 있었는데 국장(國章) 아래 ‘중노국경’이라 쓰고 ‘258(1)’이라고 새겨져 있다. 하늘은 맑았고 바람 한 점 없는 두나라 대지에는 햇빛이 가득했다.백설을 덮고 누운 무연한 강의 수면과 평야는 한빛으로 눈이 부시게 시야로 달려왔다.그물을 어깨에 멘 어민이 강판으로 걸어가고 있었다.인적이 없는 해관뒤의 강면에서 어린아이들이 썰매를 타기도 하고 팽이를 치기도 했다. 5월에 강이 풀리면 10월까지 해관은 매일 2천여명의 러시아 장사꾼들로 북적댄다.중로무역성(中俄貿易城)에는 양국의 장사꾼들로 꽉 찬다.흑룡강성에는 국가의 비준을 거쳐 대외개방을 실시한 통상구가 25개나 있다.그것은 전국 동류의 통상구 총수의 10%,광동성 다음으로 전국 제2위이다.1988년말 흑하시가 처음으로 관광업무를 시작한 뒤부터 수분하,가목사,동녕,동강,무원,손극,나북,부금,요하,호림,밀산,하얼빈,목단강 등 17개 통상구에서 러시아와의 관광업무를 취급하는데 지난 92년부터 96년까지의 통계만 하더라도 1백30만명이나 된다.햇수로는 만 5년이지만 관광계절이 겨우 반년밖에 안된다는 것을 감안하면 2년반만의 기록인 셈이다. 11월이 되어 일단 강이 얼기 시작하면 강을 오가던 중국의 화물선과 유람선들은 가목사부두로 가고 러시아 배들은 하바로브스크로 떠나간다.그때부터 흑룡강과 우수리강 통상구들은 수로왕래가 끊어진다.무원은 완전히 동면에 들어간다.말하자면 일년에 반년은 동면하는 곳이라 하겠다. 용강의 문화는 겨울에 있다.매혹적인 겨울의 눈과 얼음속에 있다.흑룡강성 소재지 하얼빈을 ‘빙성(氷城)’이라고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누군가는 ‘빙성’에 시의(詩意)를 부여하여 ‘은도(銀都)’라고 했다.은은 눈의 별칭이고 순결을 뜻하기도 하면서 고대 화폐를 연상시켜서 부유한 도시라는 뜻도 내포한다. 역사기록에는 벌써 상주(商周)시기에 눈에서 스키를 타면서 수렵을 했다는 기록이 있고 12세기에는 겨울에 스케이트와 같은 오라활자(烏羅滑子·신밑에 쇠칼을 댄 것)를 타고 전쟁을 하고 17세기 누르하치때에도 스케이트와 중국식 스키가 군사용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매년 1월 빙등유원회 열려 해마다 1월 중순이면 하얼빈 조린(兆麟)공원에서는 빙등유원회(氷燈游園會)가 열린다.옛멋이 다분한 당나라 성곽이며 진나라 병마용이며 웅위로운 장성(長城)이며 번화한 시중심에 우뚝 솟은 소피아 천주교회당이며 12띠 짐승과 꽃,식물,명인들을 복제한 것 같은 얼음조각들은 절묘하기 이를데 없다.마치 일본 야마가타현 자오국정공원 지역에 해마다 스키시즌 때면 나타난다는 기기묘묘한 스노 몬스터를 통째로 옮겨온 듯했다.그리고 태양도공원에는 눈으로 조각한 예술품들이 전시되었는데 마치 안데르센이나 입센의 동화세계에 이른듯한 황홀한 감을 주었다. 지난해 말 나는 가족을 데리고 하얼빈으로 빙등구경을 갔다.22일 저녁 조린공원에서 빙등을 구경하고 차량통행이 금지된,러시아식 건물들이 길 양켠에 늘어서 이국의 풍치가 흐르는 중앙대가의 돌을 깐 옛거리를 걸어서 호텔로 돌아오면서 얼음음식에 대해 직감으로 공부했다. 어른·아이 할 것 없이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고 길옆 식당에는 손님들이 붐볐다.그리고 중앙대가를 벗어나 경위로(經緯路)에 접어드니 언 배,언 감,언 두부,언 남새,언 만두,언 물고기 등 언 음식과 과일을 파는 난전들이 즐비했다.뼈를 에는 추운 겨울에 이곳 사람들이 더운 음식을 즐길 것이라고 넘겨짚는다면 착각이다.추운 곳이면서 찬음식을 즐기는 이곳 사람들의 식성을 이해 할 수가 없었다. 북방의 빙설은 집집의 베란다를 천연 냉장고로 만들었다.아파트에서는 베란다에 매달린 물고기며 채소를 볼 수 있었다.청나라때부터 북방사람들은 황어 등 귀한 물고기에 물을 부어 얼음덩이로 만든 다음 그것을 황궁에 보냈는데 얼음을 깨내면 여전히 신선했다고 한다.긴긴 겨울 밤 사람들은 텔레비전을 보면서 언 배나 언 감을 녹여 먹고 밤이 되어 시장하면 얼려둔 만두를 펄펄 끓는 솥에 넣어 끓여서 먹는다.얼음음식은 그 종류에 따라 맛이 다르지만 신선하게 보관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같다. 용강문화는 ‘얼음을 먹고 얼음에서 놀며 얼음을 감상’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 탈북자 중국서 집단살인극/“가출아내 행적대라” 조선족 3명 살해

    【베이징 연합】 1년6개월전 아내와 중국으로 탈출한 30대 후반의 북한인이 다른 남자와 달아난 아내 문제로 주점 종업원인 3명의 조선족 여성을 살해한 사건이 최근 랴오닝(遼寧)성 잉커우(營口)시에서 발생한 것으로 5일 전해졌다. 이날 북경에 배달된 遼沈晩報 3일자에 따르면,96년 9월 아내 최운옥씨를 데리고 탈북한 김택민씨(39)는 지난달 14일 새벽 같은 탈북자 백용철과 함께 잉커우시 부산주점에 들어가 조선족 여종업원 3명에게 아내가 간곳을 대라며 흉기로 위협하다 거절당하자 이들을 모두 살해한후 달아났다. 탈북후 이 주점 종업원으로 일하던 최씨는 주점을 그만두고 다른곳에서 일하라는 남편 요구를 거절,여러차례 구타를 당했으며 그동안 지린(吉林)성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 옌지(延吉)에서 왔다는 조선족 남자와 눈이 맞아 함께 자취를 감췄다는 것이다. 김씨는 범행 후 푸순(撫順)시 고향집에 가 있던 부산주점 주인 裵모씨(여·조선족)에게 아내의 행방을 물으러 갔다가 범행 3일만인 17일 붙잡혔으며 공범 백용철은 선양(瀋陽)에서 체포됐다고 신문은 전했다.
  • 두 가족 신장 맞기증 새 삶 찾았다

    ◎애타는 사연 듣고 장기이식상담실서 알선 두 가족끼리 신장을 교환이식해 만성신부전증을 앓던 환자들이 새 생명을 얻었다. 가톨릭대학교 의정부성모병원에서 만성신부전증으로 혈액투석치료를 받던 李明勳씨(32).부인 朴敬姬씨(30)는 직장도 그만두고 1년 넘게 투병하는 남편을 위해 신장을 떼어 주고 싶었다.하지만 자신의 혈액형은 B형인데 남편은 A형.이식은 불가능했다. 같은 대학 강남성모병원에서 만성신부전증으로 7년 넘게 병상에 누워 있던 李相律씨(52)도 비슷한 처지.신장이식외에는 치료방법이 없었다.아들 泳培씨(20)도 진작부터 아버지를 위해 신장을 기증하기를 원했지만 자신의 혈액형은 A형인데 아버지는 B형.애당초 이식은 할 수 없었다. 이런 사연은 강남성모병원 장기이식상담실에 알려지면서 의외로 쉽게 해결책이 나왔다.朴씨의 신장은 李相律씨에게,泳培씨의 신장은 李明勳씨에게 교환이식하기로 한 것. 신장이식을 위한 여러 가지 검사결과,이식수술을 해도 양쪽 다 거부반응이 없을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2월23일과 26일 의정부성모병원과 강남성모병원에서 수술은 각각 성공적으로 시행됐다.
  • 여순반란사건(대한민국 50년:12)

    ◎20개월 앞서 치른 ‘6·25 리허설’/진압에 미군 고문단 관여… 한국전 미 개입 레일 깐셈/주한미군 철수 연기·국가보안법 제정 촉발한 효과/좌파세력의 투쟁방식 게릴라전으로 전환한 계기로 “경찰이 쳐들어 오고 있다” 1948년 10월19일 여수시 신월동 국군 제14연대.늦가을의 어둠이 짙게 깔린 하오 8시쯤 14연대의 연병장에서는 고함소리가 적막을 갈랐다.연대 인사계 지창수 상사의 목소리였다. “경찰을 타도하자.조선인민군이 남조선해방을 위해 38선을 넘어 남진중에 있다”.지상사의 선동에 연병장에 모여든 장병들은 “옳소”를 연발했다.반대한 하사관 3명은 즉석에서 사살됐다.연병장에 모인 2천5백여명의 병력은 순식간에 무장하고 시내로 뛰쳐나갔다.여순사건은 이렇게 일어났다. ‘경찰이 쳐들어 온다’는 선동으로 일어난 여순사건은 당시의 시대상황 탓이다.해방 5개월뒤인 46년 1월부터 각 시도별로 연대 창설 및 모병업무가 시작됐다. ○병력 절반 이상이 좌익 이른바 ‘향토경비대’.14연대는 여순사건 5개월전에 창설됐지만 당시의 경비대는 경찰의 보조기관에 불과하다는 게 일반인들의 인식이었다.특히 경찰은 허술하게 조직된 경비대원들을 오합지졸로 간주하는 시선을 감추지 않았고 군인들은 일제의 주구였던 경찰이 자신들을 폄하하는 것이 못마땅했다.게다가 무기·장비·복장·급식 등 모든 처우에서 경찰에 비해 크게 뒤떨어져 불만은 팽배해 있었다. 46년부터 48년 사이에 많은 젊은이들이 군에 지원했다.새 조국의 건설을 위해,친일경력의 면죄부를 받기 위해,또는 공산혁명을 일으키기 위해 군을 선택했다.향토경비대 입대과정에서는 신원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처우 등의 불만때문에 군을 그만두거나 탈영하는 이가 적지 않아 충원작업은 어려움을 겪었다. 14연대가 여순사건의 진원지였던 까닭은 병력의 절반이상이 좌파였기 때문이다.미군정의 무장단체 해산령과 남로당의 조직적 침투로 군은 적화돼 있었던 것이다.군정의 해산령은 좌익계열의 분열을 가져왔으며 좌파들은 경찰의 추적을 피해 군대로 물려들었다.남로당은 사병들에게 ‘반경의식’을 고취시켜 미군정의 물리적 기반인 경찰과 군의 반목을 조장하려 했다.다시말해 군을 정치투쟁의 공간으로 활용하려 했다는 것이다. 지창수 상사가 연병장에 서기 직전,당세포 40여명과 함께 무기고를 미리 점령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좌익세력때문에 가능했다.좌익은 비상계엄령이 발령된 제주치안 확보를 위해 연대가 출동하기 전날밤에 여순사건을 일으켜 좌익반란을 본토에 확대하려 했다는 게 당국의 시각이다.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인 이범석은 여순사건 진압 직후 “공산주의자들은 여수에서 반란을 일으켜 제주사태를 남한 각지에서 전개하려 했다”고 지적했다. 거리로 뛰쳐 나간 반군들이 여수시가지로 진입한 것은 5시간여 뒤인 20일 새벽 1시20분.이들은 여수읍내 좌익단체와 학생단체에 무기를 지급했고 상오 3시쯤에는 여수경찰서를 점령했다.반란군은 이어 주요기관을 완전 장악했으며 거리에는 온통 인공기의 물결을 이뤘다.여수 인민위원회가 복구됐고 인민재판소는 체포된 경찰,국군장교,지주,그리고 우익인사들을 처형했다.이 때숨진 경찰관은 5백여명.반란군은 식량창고를 개방해 쌀배급을 실시했으며 창고에서 흰 고무신을 꺼내 주민들에게 나눠줬다.이런 인민행정은 14연대 병력이라기 보다는 남로당과 연계된 토착 좌익세력에 의해 이뤄졌다.보복정책과 동시에 선심정책이 이뤄졌던 것이다. ○식량창고 탈취 쌀 배급 반란군은 상오 8시 순천행 통근열차를 타고 북상하기 시작해 순천읍을 장악했다.이어 광양,곡성,구례,고흥 등 동부 전남지역을 손아귀에 넣었고 경찰은 반군이 오기도 전에 도망하는 일도 벌어졌다.군인들의 봉기는 토착 좌익세력들과 어울려 거대한 민중봉기로 발전했다. 반란군이 순천에 진입할 즈음 서울에서는 긴급히 비상회의가 소집됐다.국방장관 이범석,주한미군 임시군사고문단 로버츠 준장,경비대총사령관 송호성 준장 등이 참석한 회의는 작전지도부를 광주에 급파하기로 했다.21일에는 송호성 사령관이 반군토벌사령관으로 임명됐다.전군 지도부가 총력대응 태세로 대응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토벌군은 반란 사흘째인 22일 계엄령을 선포한 가운데 진압작전에 나섰으나 초기에는 별다른 성과를얻지 못했다.군 자체가 지휘불능과 병력 붕괴상태가 나타나기도 했다.가까스로 순천 탈환작전에 성공한 토벌군은 23일 여수 진압에 나섰다.송호성 사령관은 부산에서 급파된 병력 지원을 받아 바다에서 박격포 포탄을 쏟아 부었다.하지만 박격포 포사격의 미숙과 반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엄청난 사상자만 낸 채 실패하고 말았다. ○AP통신기자도 사망 송사령관은 24일 2차 여수진압작전을 직접 폈으나 오히려 자신이 반군의 기습으로 부상만 입었다.AP통신기자가 총탄에 맞아 숨진 것도 이 때였다.두차례의 실패를 맛본 토벌군은 반란 8일째인 26일 대대적인 여수 탈환작전에 나섰다.이날 정오쯤 경비정 6척이 여수반도를 포위한 채 배위에서 엄청난 박격포 포격을 가했다.여수시내는 불바다로 변했고 5분의 3은 잿더미로 바뀌었다.하지만 토벌군의 작전이 개시될 즈음 반란군들은 모두 시내를 빠져나간 뒤였으며 학생들과 좌익단체 회원들만 남아 있었다.27일에야 여수 시내를 완전 탈환함으로써 9일동안의 여순사건은 진압됐으나 2천3백여명의 목숨을 앗아갔다.2천8백여명이 군사재판에 회부됐다. 여순사건으로 국가보안법이 제정됐으며 주한미군 철수도 연기됐다.전남 동부지역을 휩쓴 여순사건은 좌파세력의 투쟁방식이 대중투쟁에서 게릴라투쟁으로 바뀐 것 뿐이었다.지리산으로 들어간 반군세력 주력들은 벌교 등지에서 유격전으로 빨치산 투쟁을 벌였다.해방후 좌우익이 반란과 진압으로 대규모 충돌한 여순사건은 2년뒤 한국전쟁을 예고하는 전주곡이었다.다시말해 여순사건은 한국전쟁의 리허설이었고,전쟁은 사실상 이미 시작됐던 것이다. 50년이 지난 오늘도 여순사건의 상흔은 여전히 지워지지 않고 여수·순천주민들에게 남아 있다.여수·순천 시민들은 여순사건을 ‘여순병란’으로 바꿔 불러주기를 바라고 있다.시민들의 봉기가 아니라 ‘향토 경비대 14연대’의 반란이라는 것이다. ◎미군기 정찰­진압 병력 수송 참여/주한 미 24군 ‘G­3보고서’ 입수 확인 여순사건에서 미국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다.주한 미군의 보고서는 당시의 상황을 사태발생과 진압 등 5개 분야에 걸쳐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기록자는주한 미24군 G­3.제목은 ‘여수와 대구 등지에서의 반란사’로 돼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주한미군은 이승만 대통령의 승인없이는 사건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워 놓고 있었다.주한미군 임시군사고문단(PMAG)의 로버츠 단장은 미국인들이 직접적인 전투에 참여하지 말 것을 명령했다.따라서 미군은 지휘역할을 맡았다. 주한미군 군사고문단 G­3의 제임스 하우스만 대위,G­2의 존 리드 대위 등은 미군의 직접 개입없이 가장 빠른 시일내 반란군을 포위·진압할 수 있는 작전을 수립했다.이에따라 하우스만 대위와 리드 대위 등은 송호성 경비대총사령관,육본 정보참모부장 정일권,정보국장 백선엽 등과 함께 광주로 직접 내려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미군의 C­47 수송기는 한국군 병사,무기,기타 물자를 대구에서 실어 날랐으며 주한미군 군사고문단의 정찰기들은 반란기간 내내 여순지역을 감시했다. 미군 비행사들은 여수의 반란 세력이 2개의 군 중대와 1천여명의 민간인으로 구성돼 있는 것으로 보고했다.여순사건이 2년뒤 한국전쟁의 리허설이었듯이 미군의 한국전 참전 조짐도 이때부터 시작됐던 것이다.
  • ‘어부사시사’의 무대 남해 보길도 세연정

    ◎윤선도가 꾸민 정원… 자연과 어우러진 절경/인공연못에 변화무쌍한 바위 발길따라 풍경 달라/회수담 노송·무도­유도암의 조화 고산 풍류 느끼게/섬주위엔 해수욕장·천연기념물 상록수림 등 장관 【보길도=임태순 기자】 신선이 되어 취해보자.무대는 쪽빛 남해바다 다도해상의 섬.‘지국총 지국총 어사화’라는 후렴구가 나온다. 전남 완도군 보길도의 세연정이 그 곳이다.조선 중기 단가문학의 대가 고산 윤선도가 꾸민 정원이다. 세연정은 인공으로 만든 연못에 바위가 주요 구성품이다.멀리서 바라보면마음 심자 모양을 하고 있는 세연지라는 연못에는 바위가 절묘하게 배치돼 있다. 세연정은 또 보는 이의 시각을 철저히 차단,정원 전체를 한눈에 굽어보는것을 허용하지 않는다.여기저기가 바위 또는 나무로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발길을 옮길 때마다 풍경은 수시로 바뀐다. 세연정은 또 바위가 변화무쌍함을 더해준다.크고 작은 바위가 반쯤 물에 잠겼는가 하면 우람한 몸체를 그대로 드러낸다.완전히 물에 잠긴 암반도 있다.‘지국총 지국총어사화’하며 노를 저으면 물에 잠긴 바위는 물살에 밀려물고기가 뛰노는 것처럼 보인다. 고산 풍류의 진수는 세연정 정자 앞에서 맛볼수 있다.정면 3칸,측면 3칸의 정사각형 단층 정자인 세연정 앞에는 회수담이라는 섬이 고송과 함께 외로이 떠 있다.이 섬은 고산의 관념의 세계를 상징한다.섬 주위에는 두개의 바위가 있다.무도암과 유도암이 바로 그것으로 무도암은 이름 그대로 춤추는 바위다.고산은 한발짝 건너 유도암에서 무희의 춤을 즐겼다.수면에 드리워진 고송을 배경으로 춤사위가 끊어질 듯 이어질 듯 여울져 나간다.고산은 심산유곡의 폭포를 평지로 끌어 내렸다.세연지 하류의 판석으로 만든 탄석보는 평상시는 물막이 역할을 하지만 물이 넘쳐나면 그대로 폭포가 된다. 세연정 앞산으로 15분 정도 올라가면 옥소대라는 넓은 바위가 나타난다.옥소대는 세연정의 간접배경으로 무희가 이곳에서 춤을 추면 세연정에 그림자가 비춘다.또 옥소대에서 피리를 불면 소리가 공명돼 산울림으로 퍼져 나간다.이밖에 고산의 흔적은 세연정에서 조금 떨어진 부용리에서 볼수 있다.고산이 다도를 즐긴 동천석실이 산중턱에 있으며 책을 읽었다는 낙서재터도 남아 있다.동천석실에서 차를 끓이기 위해 저녁에 피어올리는 연기는부용동 8경가운데 제1경으로 꼽히는 곳이지만 아직 복원이 안돼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고산 유적지를 구경하고 나면 해변가로 발길을 돌리자.섬 남쪽의 예송리 해수욕장은 천연기념물 40호로 지정된 상록수림과 새알만한 조약돌로 이루어진 해변이 압권이다.반달모양의 중리해수욕장은 예송리와는 달리 고운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다.보길도의 또 하나의 절경은 서남쪽 바닷가 마을 보옥리.송곳같이 뽀족한 모양의 보족산 정상에 오르면 맑은 날에는 멀리 제주도가 보이고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파도가 부딪히는 모습이 가슴을 후련하게 한다.4월이 되면 산벚꽃이 장관을 이룬다. ◎고산과 보길도/제주도 가는길 풍랑 만나 대피한 곳/산수 빼어나 14년간 섬에 눌러 앉아 고산은 병자호란이 일어난 이듬해인 1천637년 보길도와 인연을 맺는다.벼슬을 그만두고 전남 해남에 낙향해 있던 고산은 인조를구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켜 해로로 남한산성으로 가던중 인조가 화친을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뱃머리를 제주도로 돌린다.도중에 풍랑을 만나 보길도에 대피했다 산수가 빼어난 그 곳에 그대로 눌러 앉는다.그의 나이 51세때였다. 이후 왕의 간청으로 다시 벼슬길에 나섰다 귀양길에 오르는 등 부침을 거듭하던 그는 85세를 일기로 부용동에서 생을 마감하는데 보길도에서 지낸 기간은 14년쯤 된다.고산은 보길도에서 어부사시사를 남기는데 당대의 송강 정철이 연군을 노래한 것과는 달리 주로 자연에 대해 읊었다. 오랫동안 방치돼 오던 고산 유적지는 지난 78년 고산 윤선도 유적보존회(회장 강종철씨·63)가 만들어지면서 빛을 보게 된다.보존회는 고증작업을 거쳐 군지정문화재를 도지정문화재(84년),국가지정문화재(92년)로 격상시킨다.강회장은 세연정 인근에 백록당이라는 집을 지어놓고 유적지보존은 물론 관광객들의 길잡이 역할을 해주기도 한다.(0633­54­6321). 보길도는 땅끝 갈두항과 완도에서 들어갈수 있다.갈두항에서는 아침 8시30분부터 하루 3차례 출발하며 40분 걸린다.완도항에서는 아침 7시30분부터 하오 4시30분까지 하루 5차례 있으며 1시간30분이 소요된다.모두 승용차 도선이 가능하다.직항편이 끊겼으면 노화도로 가 사선을 타고 보길도로 들어갈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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