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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심은 봉지라면인 ‘안성탕면’을 컵형태의 용기면으로 만든 ‘안성탕면 사발면’을 내놓았다. 안성탕면 본래의 구수하고 진한 국물맛과 부드럽고 쫄깃한 면발을 살렸다. 중량 88g, 가격은 650원. ●풀무원은 고기 함량은 반으로 줄이고 9가지 야채를 넣은 ‘야채가득물만두’를 출시했다. 두부·브로콜리·새송이 버섯·부추·당근·양파 등이 들어 있다. 찹쌀가루에 천연 시금치가루를 넣어 만든 프리미엄 건강 만두피로 빚어 쫄깃함을 더했다. 중량 720g, 가격은 7400원. ●보령수앤수는 키토올리고당을 주원료로 한 건강기능식품 ‘보령 키토올리고당’을 선보였다. 회사측은 이 제품이 면역력 증강, 콜레스테롤 개선, 항균작용을 돕는다고 회사측은 설명했다. 가격은 300mg 360캅셀이 29만 8000원이다. ●옥시는 ‘옥시싹싹 곰팡이제거’의 알뜰 사이즈 900g을 출시했다.‘옥시싹싹 곰팡이제거 900g’은 거품 타입으로 흘러내리지 않으며, 헹굼도 편리하다. 변기 뒤쪽이나 구석진 곳에 스프레이를 뿌려 놓고 물로 가볍게 헹궈내면 된다. 가격은 5900원, 리필 팩(900g)은 3900원에 판매한다. ●LG생활건강은 모발 관리 제품 ‘리엔’을 선보였다. 한국의 고려인삼·흑미, 중국의 룽징차, 일본의 검은콩 성분 등이 들어갔다. 샴푸(350㎖) 6400원, 린스(200㎖) 4100원, 트리트먼트(200㎖)는 6600원이다. ●한국 코카콜라는 ‘네스티 아이스’와 ‘네스티 레몬그린티’를 선보였다.‘네스티 아이스’는 레몬맛 아이스티의 상큼한 끝맛을 살렸고,‘네스티 레몬그린티’는 녹차의 깔끔한 맛을 더했다.2가지 모두 480㎖에 가격은 1100원선.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상반기 결산-취재 뒷이야기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상반기 결산-취재 뒷이야기

    서울신문이 올해 연중기획으로 1월10일 시작한 ‘2005 재계인맥·혼맥 대탐구’가 연재 5개월을 넘기며 ‘4대 그룹’을 소화했습니다.23회 동안 소개된 원고지는 1200장이 넘는 방대한 분량입니다. 그동안 해당 기업은 물론 구청으로, 오너일가 주변으로 뛰어다니며 취재에 열을 올렸던 기자들이 방담을 통해 중간 점검을 했습니다. ●수십년만의 ‘진실´ 재벌들의 인맥과 혼맥은 그동안 신문 시리즈 기사나 책으로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만, 의외로 잘못 알려졌던 ‘팩트’가 적지 않았습니다. 재계 총수를 3명이나 배출했다고 해서 화제가 됐던 경남 진주의 지수초등학교에 대한 오해가 대표적입니다. 지금까지 삼성 창업주인 고 이병철 회장,LG 창업주인 고 구인회 회장, 효성 창업주인 고 조홍제 회장이 지수초등학교 1회 졸업생으로 알려졌지만 조 회장은 이 학교에 다니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1910년생인 이 회장은 서당을 다니다 1922년 3월 지수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했습니다.1907년생인 구 회장 역시 서당을 다니다 1921년 지수보통학교 2학년에 편입했기 때문에 둘은 같은 학년이었던 셈입니다. 구 회장은 실제 이 회장과 한때 같은 반에서 책상을 나란히 맞대고 공부하던 사이라고 회고했습니다. 하지만 이 회장은 그해 9월 서울의 수송보통학교로 전학했고 구 회장도 1924년 상경, 중앙고보를 다녔기 때문에 같이 지수초등학교를 졸업한 것도 아닙니다. 1906년생으로 이 회장의 형인 병각씨와 동갑인 조 회장은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 1922년 상경, 중동학교를 다녔습니다. 조 회장은 이듬해 협성실업학교로 옮기는 바람에 1923년 중동학교로 옮긴 이 회장과 같이 학교를 다니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구 회장의 자서전에도 조 회장과 축구로 교우를 쌓았지만 같이 학교를 다니지는 않았다고 나와 있습니다. 효성그룹 관계자는 “언제부터인지 선대 회장과 이병철 회장, 구인회 회장이 지수보통학교 동기동창으로 소개됐지만 조 회장은 지수보통학교에 다니지 않았다.”면서 “처음에 어떤 신문사의 기자가 잘못 쓰는 바람에 계속 세 사람이 동문이라고 나와 그 때마다 기사를 고쳐달라고 요구했지만 요즘은 아예 포기한 상태”라고 털어놨습니다. 세 사람이 같은 학교를 졸업하지는 않았지만 사돈관계(이 회장·구 회장)와 동업(이 회장·조 회장)으로 이어진 것을 보면 남다른 교분이 있었던 것만큼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출신학교는 물론 이름까지 잘못돼 현대그룹의 경우, 대학 재학 시절 빼어난 미모로 캠퍼스가 떠들썩했다는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넷째며느리 이행자(고 정몽우 현대알루미늄 회장)씨는 한양대 출신으로 굳혀져 있었지만 확인 결과 숙명여대 졸업생이었습니다. 이화여대를 나온 것으로 알려졌던 맏며느리 고 이양자(고 정몽필 인천제철 사장)씨도 수도여대를 나온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의 4남인 구본식 희성전자 사장의 부인도 그동안 조향아씨로 알려졌지만 사실 조경아씨였습니다. 누군가 한자를 잘못 읽어 빚어진 오기였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사인을 두고 말이 엇갈렸던 정몽우 회장의 ‘우울증’에 대해서도 현대가측으로부터 확인이 가능했습니다. 일각에서는 고등학교때 머리를 다친 후유증이 우울증으로 번졌다는 관측이 파다했지만 사실 무근이었습니다.‘교통사고다.’ ‘지병이다.’ 등으로 설이 분분했던 정 명예회장의 다섯째 동생 신영씨의 사인도 독일유학중에 얻었던 ‘병’이 악화됐던 것으로 유가족으로부터 직접 확인했습니다. 정몽헌 회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유는 아직도 정확히 밝혀지고 있지 않지만 적어도 ‘순간적인 결심’이었던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혈압에 좋다며 집에 와서 순두부를 즐겨 찾았는가 하면 세상을 등진 바로 다음날에 중요한 약속을 잡아놓았던 사실이 드러났으니까요. 모 그룹 오너의 경우, 학부를 졸업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재학 중 결혼한 탓에 학교 규칙상 더 이상 대학을 다니지 못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오너 일가의 딸이나 며느리 가운데는 이화여대 재학중에 결혼한 사례가 적지 않았는데 이대의 과거 학칙때문에 대부분 졸업을 못했더군요. 또 아들과 며느리들이 어머니를 회사뿐 아니라 집에서도 어머니라 하지 않고, 회사 직함으로 불렀다는 사실도 새롭게 밝혀낸 사실입니다. 현대중공업 정몽준 대주주의 차남 예선군의 이름 유래가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축구 예선전이 한창일 때 태어나서 이름을 예선이라고 지은 것으로 그동안 알려져 있었지만 정 의원의 부인 김영명씨는 ‘예수님이 주신 선물’이라는 의미와 돌림자 ‘선’을 합친 의미가 더 크다고 밝혀왔습니다. 본지가 이번에 ‘정설처럼 굳어진 오보’를 바로잡을 수 있었던 것은 재벌 총수나 2·3세와 직접 인터뷰를 했고 자서전 등 방대한 과거자료를 일일이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몇십년전에 모 기자가 잘못 쓴 내용을 후배기자들이 그대로 인용하면서 오보가 사실로 굳어졌다.”며 인터뷰를 자청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룹 홍보실도 비상 민감한 가족사를 다루다 보니 취재는 물론 사진을 구하는 일이 보통 어렵지 않았습니다. 서울신문의 기획 의도와 배경을 설명해도 막무가내로 안 된다는 오너가의 답변은 ‘내가 싫다는데 너희가 왜 쓰느냐.’는 사적인 태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렇지만 사생활을 들춰내자는 것도 아니고, 망신을 주자는 것도 아닌 한국 재벌가의 혼맥과 인맥을 있는 그대로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서울신문의 의도를 오해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모 그룹의 홍보임원은 ‘오너’로부터 “내 사진이 실리면 목내놓을 각오를 하라.”는 말을 듣기도 했지요. 실제 이 오너의 사진은 언론에 공개된 적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우여곡절끝에 사진을 구해 내보냈지만 천만다행으로 그 홍보임원을 서울신문이 ‘책임’질 일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이야 웃으면서 얘기하지만 당시로서는 정말 심각했습니다. 모 그룹은 기사 게재 3일전까지 “무조건 빼라.”는 오너의 지시로 홍보실뿐 아니라 회장실에도 비상이 걸렸었습니다. 그룹 회장이 미국에 있는 모친을 이해시키기 위해 수시로 전화 설득에 나섰지만 돌아온 답은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홍보실 임원은 “내 목은 서울신문에 달려 있다.”며 통사정을 했습니다. 또 다른 그룹은 비서실이나 홍보실에서 오너 일가의 사진을 확보해 두지 않아 회장의 자택을 ‘습격’해야 했습니다. 회장 집무실부터 자료실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사진이 나오지 않자 운전기사에게 부탁, 자택에 걸려 있는 액자사진을 다시 찍는 ‘작전’을 감행한 것이지요. 모 그룹을 취재할 때는 오너가 직접 본사 임원에게 전화해 “우리는 빠지면 안되겠느냐.”고 부탁을 하기도 했습니다. 특별히 파헤쳐 문제가 될 만한 것도 없는데 오너가 무조건 버티기로 나오니 아래 직원들은 당연히 누구 하나 취재에 협조해주지 않더군요. 가족 사진은 그만두고라도 얼굴 사진을 내주는 것조차 꺼리다가 경영에서 물러난 1세 경영인의 허락을 받아 겨우 가족 사진을 싣기도 했습니다. 모 그룹은 가족사진이 나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사진설명에서 누가 누구인지는 밝히지 말아달라고 ‘읍소’하기도 했습니다. 여성지, 주간지 등에서 결혼 소식을 집중 추적하고 있는 회장의 ‘고명딸’ 얼굴이 세간에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밖에 서울신문에 소개된 사진중에는 오너일가나 그룹을 통하지 않고 본지 기자가 과거 취재과정에서 찍어뒀던 사진도 있었고 각사 ‘사사(社史)’를 일일이 뒤져 찾아낸 것도 있습니다. ●“아가, 니 사진은 왜 빠졌냐?” 가족사가 속속들이 공개되는 것에 대해 부담을 느끼던 오너들도 일단 기사가 나가자 ‘폭발적인’ 관심을 보였습니다. 현대그룹 현정은 회장은 현대가(家) 첫 회 ‘창업주 고 정주영 회장 일가’편이 나간지 며칠이 지난 어느날 자필로 직접 ‘사후 교정’을 본 3월14일자 서울신문을 편집국으로 보내주는 특유의 세심함을 보여줬습니다. 예컨대 정몽구 현대차 회장의 장녀 성이(남편은 선두훈 대전 선병원 이사장)씨의 맏딸 이름이 ‘선가령’이 아닌 ‘선아영’, 정 회장의 둘째딸 명이(남편은 정태영 현대카드·현대캐피탈 사장)씨의 자녀 명단에 정유진양과 정준군이 누락된 점 등입니다. 또 가계도에 정몽근 현대백화점 회장의 손자인 창덕군이 빠진 점도 놓치지 않았습니다.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장남인 고 몽필씨의 맏딸 은희씨가 미국에 머물지 않고 귀국한 지 오래됐다는 점 등도 바로잡아줬습니다. 이는 일가가 아니면 도저히 알 수 없는 것들이지요. 가문에 대한 현 회장의 관심과 애정이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케 해줬습니다. 한솔그룹 조동길 회장은 지난 2월27일 ‘한솔그룹편’의 서울신문 대장(신문 발행전의 인쇄용지)이 나오자 직원을 보내 ‘사전 교정’을 보기도 했습니다. 그 날이 일요일인데도 직원을 통해 장충동 자택으로 대장을 가져오도록 해서 여조카의 이름을 바로잡기도 했지요. 그 조카는 얼마전에 개명을 했다고 합니다. 조 회장이 교정을 본 대장에는 연필로 줄을 그어가며 읽은 흔적이 선명했습니다. 본지 시리즈의 첫 회를 장식한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은 구조조정본부 홍보팀을 통해 본지를 통째로 한남동 자택으로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도 구조본 팀장회의 석상에서 본인과 관련된 아주 ‘사소한’ 부분이 잘못 소개됐다고 언급할 정도로 관심을 보였습니다. LS그룹 구자홍 회장은 LG그룹 첫 회에서 자신의 ‘연애결혼’이 집안의 반대에 부딪혔다고 소개되자 ‘반대’까지는 아니라며 미국 유학시절 부인과의 ‘러브스토리’를 직접 공개하기도 했습니다. 구 회장의 아버지인 LS전선 구태회 명예회장은 ‘LS그룹편’에 막내 며느리 사진만 빠져 있자 “왜 막내만 빠졌냐.”며 경위를 물어오기도 했습니다. 모 그룹 홍보실은 신문 가판이 나온 뒤 미국에 있는 오너에 바로 전달하기 위해 서울신문을 항공 특급 우편으로 보내기도 했습니다. ●당사자도 착각한 사실 독자가 알려줘 독자들의 관심도 대단했습니다. 중간에 이번 시리즈를 접한 독자들이 첫 회는 언제 나갔는지,1회부터 연재분을 모두 구할 수 없는지 집요하게 물어오는 사례가 적지 않았습니다. 언제 책으로 출판되는지 물어오는 ‘성급한’ 독자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출판사들도 이미 소개된 그룹만이라도 모아서 책을 내자고 제안해 왔습니다. 오너 일가들도 착각한 사진 속의 장소를 독자들이 바로잡아준 일도 있었습니다. 현대그룹편을 소개하면서 현정은 회장이 남편인 고 정몽헌 회장과 아들과 딸들, 이렇게 온 가족이 호주 시드니로 휴가를 떠난 사진을 실었었는데 기사가 나간 뒤 사진속의 배경이 ‘캐나다 밴쿠버 같다.’는 독자들의 의견이 잇따랐습니다. 현 회장측에 확인한 결과 호주가 맞다는 답신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밴쿠버라는 독자들의 의견이 이후로도 끊이지 않아 재차 확인한 결과 사진 속의 장소는 밴쿠버가 맞았습니다. 현 회장측은 “고 정몽헌 회장이 사진찍기를 워낙 싫어해 몇년전 휴가가 가장 최근의 가족사진이다 보니 착각한 것 같다.”고 해명해왔습니다. ●제발 이것만은…. 오너일가들이 가장 부담스러워 하는 내용은 가족들의 ‘이혼·재혼’이었습니다. 정용진 신세계 부사장과 탤런트 고현정씨처럼 이미 세간에 널리 알려진 사실은 어쩔 수 없지만 나머지 사실만이라도 막으려고 필사적이었습니다. 아예 “이 부문만 빼주면 나머지는 알아서 쓰도록 하겠다.”는 협상(?)도 들어왔습니다. 모 그룹 회장은 아내가 사고사를 당해 재혼했는데 그 사실을 막무가내로 빼 달라는 것이었지요. 결국 “독자들이 볼 때 나이 차이가 워낙 커 ‘세컨드’로 오해할 수도 있으니 밝혀줘야 한다.”고 설득하자 아무 말을 못하더군요. 또 다른 그룹 회장 동생도 부인이 지병으로 사망한 뒤 재혼을 했는데 그룹측에서는 한사코 부인의 나이를 빼달라고 요구해왔습니다.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났기 때문이지요. 사실 이 오너 부인이 사망한 사실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 전 부인 사진이 그대로 나갈 뻔했습니다. 재혼 사실이 알려지지 않고 그대로 나갔다면 현재 부인이 ‘기절초풍’할 노릇이었지요. 모 그룹 회장의 할머니를 둘러싸고도 실랑이가 있었습니다. 이 그룹 회장의 친 할머니는 오래전에 사망했는데 워낙 옛날 분이라 이름도 정확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가계도’에는 재혼한 할머니 이름으로 나가야 했는데 그룹측에서는 아예 할머니쪽은 소개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 그룹 회장의 아버지 입장에서는 ‘친어머니’가 아닌지라 불편했던 것이지요.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의 딸 가운데 한명은 이혼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번 취재과정에서 전 남편과 다시 결합해 잘 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끼리끼리’는 있어도 정략은 없었다? 과거 개발독재 시대에는 재벌과 권력층의 혼사가 비일비재했습니다. 실제 40대 이상 오너 일가들은 청와대, 국회의원, 장관 등 ‘권문세가’를 시가나 처가로 둔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3세로 내려올수록 ‘정략결혼’의 흔적은 점점 사라져가고 있었습니다. 우리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재벌들이 더 이상 권력에 기대어 ‘혜택’을 보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2·3세들은 유학시절에 만나 연애결혼한 사례도 적지 않았고 유력한 집안이라고 해도 주로 재계쪽에 집중됐습니다. 또 사돈이라고 해서 사업적으로 도움을 주고받는 경우도 거의 없었습니다. 오히려 삼성과 LG,LG와 두산처럼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직접 만나본 2·3세들의 공통된 느낌은 1세들과 달리 어려움없이 자란 때문인지 무척 솔직하고 거침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때로는 너무 솔직해서 못다 쓴 얘기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좀 더 흐르면 얘기할 날이 오겠지요. 물론 오너일가의 작은 부분이 소개된다고 해서 그룹 임원의 ‘목’이 왔다갔다할 정도로 오너들이 ‘황제’처럼 군림하는 모습을 직접 확인할 때는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지면을 빌려 ‘목을 내놓고’ 취재에 협조해 준 각 그룹 홍보팀 임직원들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ukelvin@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김성곤차장 안미현·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사설] 툭하면 기업돈 챙기려는 정치권

    국회 정치개혁특위는 차라리 없는 게 나을 정도로 개혁과는 거꾸로 가는 행태를 보였다. 정개특위는 그제 현행법에서 금지하고 있는 법인과 단체의 정치자금 기부에 대해 정당이나 개인에게 직접 주는 것은 계속 금지하되 중앙선관위에 정치기탁금을 내면 의석비율에 따라 정당에 나눠주는 비지정공탁제를 부활하기로 슬그머니 합의했다가 어제는 또다시 뒤집고 말았다. 속셈은 기업의 정치자금 허용이지만 여론의 따가운 질책 때문에 후퇴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말로만 정치개혁을 앞세우고 틈만 나면 후퇴하려는 행태는 그만두어야 한다. 기업의 정치자금 기부를 금지한 것은 돈 안 드는 깨끗한 정치풍토를 조성하자는 국민적 염원에서 비롯됐다. 선거공영제 확대를 통해 선거자금의 국고보조가 늘어났고, 지구당 폐지 등 제도적 보완도 이루어졌다. 그런데도 국민의 세금을 펑펑 쓰면서 그것도 모자라 기업들의 정치자금을 받겠다는 발상은 한심하기 짝이 없다. 돈이 없어서 정당이 문을 닫고 국회의원직을 포기한 사례가 있는지 묻고 싶다. 쓰임새를 줄이고 법에 따라 자금을 쓰면 그만이다. 또 국회의원 상당수가 개인후원회에서 모금한 정치자금을 다 쓰지도 못하고 남겨두고 있는 상황이다. 여야가 뒤늦게나마 기업의 정치자금 기탁허용 합의를 철회했지만 적어도 17대 국회에서만큼은 이 문제를 재론하지 말아야 한다. 기업의 정치자금 허용 문제는 여야가 결정할 것이 아니라 반드시 국민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이제부터는 국민을 속일 생각은 버리고 정당과 국회의원이 무슨 돈을 어디에다 어떻게 쓰는지, 모자란다면 왜 모자라는지를 명백히 밝혀야 할 것이다. 그래서 정치자금이 모자란다고 국민들이 납득한다면 그 필요한 돈은 기업이 아니라 국고로 부담해야 할 것이다.
  • [빚탈출 희망찾기-김관기 채무상담실] 파산시 ‘세금 체납’ 면책되나

    Q5년 동안 전자상가에서 유통업을 했습니다.2년 전부터 장사가 안되기 시작해 결국 손을 들었습니다. 밀린 납품대금과 종업원 임금은 겨우 갚았는데, 세금 1000만원과 금융채무 1억원을 못갚았습니다. 월급이 170만원 정도 되는 새 직장에 취직했는데, 식구 3명이 먹고 살기에도 빠듯합니다. 채권자들이 월급을 압류해 이 직장도 그만두게 될까봐 겁이 납니다. 그리고 파산을 해도 세금은 면책이 안 된다는데, 파산을 하는 게 옳은 선택일까요. -김영진(37) A파산을 선택한 채무자는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전반적인 금융채무를 면책받지만, 체납세금은 면책대상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세금은 개인이 거래를 하면 국가가 강제적으로 일정 금액을 자기 몫으로 챙기는 것입니다. 세금이 면책대상이 아닌 것은 국가 우월적인 발상 때문이 아닙니다. 국가는 스스로 채무자의 신용을 심사할 기회가 없으므로, 면책을 거절할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따라서 김영진씨가 파산절차를 밟더라도 체납세금에 대해서는 면책의 효력이 미치지 않아 세금을 내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세금을 내기 어려울 때까지 사업을 계속한 대가는 매우 크다고 하겠습니다. 대안은 개인회생입니다. 원칙적으로 5년 이내 또는 금액이 클 경우 8년까지 생계비 지출액을 뺀 금액을 채권자에게 갚고 나머지 채무에 대해서는 면책을 얻는 것입니다. 물론 개인회생에서도 세금을 면책해 주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순차적으로 체납세금을 100% 갚는 것으로 변제계획안에 포함시켜 계획대로 이행을 하면 체납세금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면에서 면책과 다름 없습니다. 김영진씨의 경우 3명의 생계비로 135만원 정도를 인정해주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소득이 170만원이므로 135만원을 뺀 35만원씩 60개월, 총 2100만원을 갚는 것으로 채무해결이 가능합니다. 다만 이 중에서 체납세금을 정산한다면, 채권자의 몫이 줄어들게 됩니다.2100만원 가운데 1000만원을 체납세금을 갚는 데 쓰면 나머지 1100만원으로 금융채권자에게 나누어야 하니 채권자는 이의를 제기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경우 채무자는 생계비를 좀 더 아껴 35만원 이상의 월부금을 갚거나 변제기간을 최고 96개월까지로 늘림으로써 타협을 시도하시기 바랍니다. 체납세금을 정산하지 않을 경우 직장생활을 계속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조금이라도 변제받으려면 채권자로서도 이의를 고집하면 불리합니다. 그러면 채무자는 파산을 선택할 수밖에 없고 채권자는 전액을 잃게 됩니다. <
  • 한·일합의 하루만에 실종?

    |도쿄 이춘규특파원|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20일 정상회담뒤 “새로운 평화추도시설에 대해 검토하기로 했다.”라고 밝히자마자 21일 일본 각료들이 잇따라 사실상 반대론을 쏟아내 정상회담 발표를 무색케 하고 있다. 이런 발언들은 정상회담 합의사항을 사실상 묵살하는 데다, 노 대통령의 “일본 집권당의 각료와 핵심지도자들은 발언에 각별히 유의하면 좋겠다.”는 주문에도 정면으로 반하는 내용이어서 한·일관계는 정상회담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냉각기를 가질 수밖에 없음을 예고해주는 것으로 외교소식통이 평했다. 일본의 전몰자 추도시설은 야스쿠니신사와 지도리가부치 전몰자(무명용사) 묘역 등 2곳이다. 내각 각료서열 1위인 아소 다로 총무상은 이날 새로운 추도시설에 대해 “야스쿠니에 모시는 것을 우리의 형편이나 타국의 사정(요구)으로 그만두는 것은 돌아가신 분들의 기분에 안맞는다.”며 사실상 반대했다. 새 추도시설을 만드는 것은 야스쿠니를 없애는 것과 마찬가지라고까지 주장했다. 일본 정부 대변인격인 호소다 히로유키 관방장관도 새로운 추도시설 문제에 대해 야스쿠니신사의 대체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하며 “국민 이해가 깊어지는 것이 소중하다.”고 여론동향에 따르겠다는 신중론을 폈다.taein@seoul.co.kr
  • 日파친코회사 ‘마루한’ 한창우 회장

    日파친코회사 ‘마루한’ 한창우 회장

    |도쿄 이춘규특파원|1945년 10월22일 밤 11시 일본 시모노세키 해안. 얼굴에 보송보송한 솜털이 남아있던 열다섯살 한국 소년이 주위를 살피며 밀항선에서 조심스럽게 내렸다. 손에는 고향의 모친께서 쥐어준 쌀 두 말과 영어사전 뿐이었다. 그것으로 거친 일본생활을 헤쳐가야 했다. ‘일본 파친코 제왕’으로 불리는 재일교포 1세 한창우(75) 마루한 회장의 60년 전 모습은 이랬다. 상전벽해. 일본어판 포브스지는 지난달 순자산 1200억엔(약 1조 2000억원) 이상 되는 일본의 거부 명단을 발표했다. 한국계로는 정보통신(IT) 재벌 손정의 소프트뱅크 사장이 순자산 4730억엔으로 8위였고, 한 회장은 1210억엔으로 24위에 랭크됐다. 한 회장은 포브스가 지난 3월 발표한 전세계 갑부 순위에서도 584위를 기록한 바 있다. 지난해 마루한의 매출은 1조 2778억엔, 순이익은 210억엔이었다.2010년 매출목표는 5조엔이다. ●도쿄 한복판에 우뚝 선 밀항소년 스스로를 “한국의 보트피플 1호”라고 말하는 한 회장이 도쿄 한복판에 우뚝 섰다. 도쿄역이 발아래 내려다 보이는 초현대식 빌딩의 28층에 있는 마루한 도쿄 본사에서 그를 만났다. 건물 벽면이 대형유리로 돼 있어, 일왕궁도 일부 보이는 요충지다. 임대료가 평당 4만 4000엔인 일본의 심장부에 밀항소년이 우뚝 서있는 것이다. 그의 경상도 사투리는 구수하고, 유창했다.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시고, 지금 고향 삼천포에는 동생이 살고 있다.3남 2녀 중 차남으로 일제 때 징용으로 끌려가 벽돌쌓기 일을 했던 형을 따라 밀항선을 탔다. 한때 사천시로 변경됐다가 삼천포라는 옛 지명을 되찾은 것을 모른 그는 “삼천포라는 명칭을 왜 없애냐고 고향의 선·후배들에게 따졌다.‘삼천포로 빠졌다.’는 것보다 ‘삼천포에 가자.’라는 긍정적인 면을 선전하면 오히려 지역발전에 도움이 될 것 아닌가. 그게 내 철학”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말을 들으며 차별이 심한 일본사회에서 역경을 이겨낸 긍정적 사고방식을 느낄 수 있었다. 밀항 뒤 혼란스러운 일본에서 검정고시로 고졸 자격을 딴 뒤, 호세대학 경제학부를 마쳤다. 호세대학은 당시 일본내 마르크스경제학의 총본산이었다. 그도 마르크스나 엥겔스, 레닌, 마오쩌둥을 접하며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래서 귀국해 정치가가 되겠다는 꿈도 있었지만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접어버렸다. 이후 관심도 마르크스에서 패션으로 옮겨갔다. 대학을 졸업한 뒤 취직하려 했지만 안돼 프랑스로 패션 유학을 떠나기 위해 교토의 미네야마에서 파친코를 하던 매형을 찾아간 것이 인생 항로를 바꿔버렸다. 여비를 빌리러 갔다가 매형이 한사코 파친코 일을 돕게 하는 바람에 주저앉았다. 업체간 경쟁이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매형이 사업을 그만두려고 하자 “성공하면 두배로 드리겠다.”며 인수했다. 그것이 마루한의 모태가 됐다. 이후 미네야마에서 클래식 음악다방도 개업해 성공했고,1967년에는 당시 인기를 끈 볼링장 사업에도 뛰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이 시련이 될 줄은 까맣게 몰랐다. ●“매일 자살하려 했었다” “시즈오카에 120레인 볼링장을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볼링 열기가 식으면서 경영상태가 악화됐고,5년 뒤에는 60억엔이라는 천문학적인 빚을 지고 말았다. 빚 독촉은 심하고, 갚을 길은 없어 매일 자살을 생각했지만 아이들 얼굴을 보니 못하겠더라.” 마음을 다잡았다. 택시운전이나 라면가게라도 해서 빚을 갚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행히 채권은행측이 “독촉을 안할 테니 천천히 갚아라. 신용·노력을 인정한다.”고 해 인감까지 은행에 맡겨놓고 뛰어다녔다. 새 사업을 물색하던 중 나고야 교외의 수천평 벌판에 주차시설까지 갖춘 파친코를 보고 힌트를 얻어 교외형 대형 파친코를 열기로 했다. 볼링장을 처분한 돈과 사채와 곗돈 등으로 시작했다. 자동차시대 도래를 정확히 예측한 사업 전략 덕분에 히메지, 고베 등에 세운 파친코점에 손님들이 물밀듯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호사다마일까. 이즈음 미국으로 영어연수를 갔던 당시 고교 2학년이던 장남이 요세미티 국립공원 계곡서 탁류에 휩쓸려 숨지는 액운을 당한다. 충격으로 열흘 정도 식음을 전폐하다시피하고 울고 또 울었다. 충격은 2년가량 이어졌다. 그래도 사업은 급성장,10년만에 60억엔 부채도 청산했다. 파친코의 선입견을 바꾼 영업전략이 주효했다. 손님을 최우선적으로 배려했다. 돈을 많이 잃은 고객에게는 구슬을 융통해주고 담배로 위로했다. 담배냄새 제거시설이나 샤워시설도 갖춰 카페식 분위기를 연출했다. 입소문이 퍼지면서 급성장,1995년에는 도쿄 입성의 꿈을 이루고 현재는 전국 180여개 점포에 종업원만 7000명에 달한다. 이 중 한국인은 100여명. 도쿄증권거래소에 상장도 추진 중이다. ●파친코, 이제는 폭력배와 무관 “파친코 하면 폭력조직과 검은돈을 연상한다.20∼30년전만 해도 폭력배들이 귀찮게 했었다. 청소해줄 테니 한 달에 얼마씩 달라는 정도가 있었지만 10여년전 법이 한층 강화되면서 그마저도 없어졌다. 가끔 행패를 부리려는 폭력배가 있지만 즉각 체포된다.” 한 회장은 파친코의 이미지를 바꿔 거대기업 반열에 올려놓은 인물로 평가받는다. 파친코 사장중 한국계가 70%라고 소개했다. 매년 250∼300명의 신입사원 중 대졸이 200여명에 이르고, 도쿄대 출신도 도쿄 본사에만 3명이 근무하고 있는 것은 파친코의 이미지가 바뀐 방증이란다. 그는 일본내 차별을 뛰어넘기 위해 수익금의 1%는 지역사회 봉사용으로 내놓는다.3년 전 일본에 귀화했지만 ‘한국계 일본인’으로 만족한다. 조국에 대한 끈끈한 정은 여전해 1년에 서너차례는 꼭 한국을 찾는다.22일에는 도쿄 인근 지바에서 한국인 150여명 등 7000∼1만명을 초청해 대규모로 ‘매출 1조엔 돌파 기념행사’를 갖는다. 비용만 15억엔이나 들였다. 7남매를 낳아 현재 딸 둘, 아들 넷인 한 회장은 교토의 저택에서 부인, 막내 아들(31)과 함께 살고 있다. 손주들만 7명으로 다복한 편이다. 파친코 제왕의 파친코 실력은 얼마일까. “7∼8번 가볍게 해 본 경험밖에 없다.”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taein@seoul.co.kr
  • [지역플러스] ‘복지만두레’ 홈페이지 개설

    대전시는 20일 복지공동체 네트워크인 ‘복지만두레’ 통합 홈페이지(www.mandure.net)를 개설했다. 복지만두레는 지난해부터 시가 옛 두레의 상부상조 정신을 바탕으로 생활보호대상자에서 제외된 복지사각지대의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해 운영하고 있으나 홈페이지는 따로 두지 않았었다. 홈페이지에는 81개 복지만두레 조직운영과 활동상황, 시민참여방법과 사회복지시설안내, 복지공급자와 수요자정보 등 복지관련 정보가 모두 담겨있다. 시는 이 홈페이지와 80개동에 별도로 복지만두레 홈페이지를 구성, 시민이면 누구나 회원등록 절차를 거쳐 어려운 이웃을 위해 손쉽게 봉사의 현장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 출장비행기 도서관삼아 20년 영어공부

    국내 대그룹 임원이 ‘한영표현사전’(수학사刊)을 펴내 화제다. 주인공은 올 3월 LG전자 베이징 정보통신 마케팅 담당 상무를 그만두고 LG베이징타워 건설 마케팅 담당(CMO) 임원으로 있는 김만식(56)씨. 웬만한 영어 전문가들도 엄두조차 내기 힘든 작업에 기업인이 도전장을 낸 것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영어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던 그는 1979년 금호실업 영국지사에 근무할 때부터 최근까지 틈틈이 메모하거나 수집해온 영어 관용표현 가운데 5000여개를 뽑아 책으로 냈다. 일상생활 현장에서, 국제회의 석상에서, 사업 파트너와의 협상 테이블 등에서 외국인들이 직접 쓰는 표현들을 모아 놓았기 때문에 현장감과 정확도가 높은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20여년 전부터 꼭 한번은 해보고 싶어 차곡차곡 틈나는 대로 준비했던 일인데 막상 이렇게 책으로 나오니까 욕심만큼 안돼 아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부끄럽다.”고 겸손해 했다. 대기업 임원, 그것도 해외마케팅 담당 임원으로 있으면서 언제 자료들을 모으고 정리할 시간이 있었을까 궁금했다. “해외마케팅을 담당하다 보니 미국과 유럽 등 외국 출장이 잦았다. 기내에서 보내는 12∼16시간을 최대한 활용해 자료를 정리했다.”고 밝혔다. 때문에 그의 출장 가방에는 항상 두꺼운 사전 두 권이 회의 자료와 함께 들어 있었다고 한다. 기내에서 꼬박 새우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김씨는 LG전자 내에서도 자타가 인정하는 ‘영어통’이었다. 외국인 상대와 영어로 협상할 때 절대로 밀리지 않았던 것으로도 유명하다.협상을 성공시키거나 상대방의 제의를 완곡하게 거절하기 위해서는 상황에 맞는 ‘정확한 영어 표현’이 필수적이라고 판단, 철저하게 사전에 준비했다. 이래저래 모아놓은 자료가 사과박스로 15개가 넘는다. “자료를 혼자만 참고하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내가 아는 것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LG전자 미국지사장·법인장·해외사업담당 임원을 지낸 김씨는 영어전문가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것이냐는 질문에는 “글쎄요.”라고 얼버무렸다.김균미기자 kmkim@seoul.co.kr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76)알려지지 않은 바다 지킴이들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76)알려지지 않은 바다 지킴이들

    우리 바다를 지킨 사람들을 꼽아보라면 대충 장보고와 이순신이 앞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위인전 반열에 있는 그 분들보다 ‘서열’은 낮을지 몰라도 또 다른 인물들이 별처럼 흩어져 있다. 그 중 세인들이 관심을 두지 않는 인물 3인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규원과 김려, 박제가가 오늘의 주인공이다. 사실 독도를 확실하게 우리의 영토로 만든 이는 이규원이다. 김려는 정약전의 자산어보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한국 최초의 본격 어보를 펴냈다. 박제가는 무역입국 시대에 외롭게 해외 통상론을 주창한 드문 인물. 그런데 전문가들 말고는 이들에 대해 관심조차 없다. 우리 사회의 지나친 영웅사관 탓이다. 이규원은 누구일까. 우선 ‘울릉도 검찰사’란 경력이 눈에 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세인들은 울릉도와 독도 지킴이로 안용복은 기억해도 이규원은 잘 모른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재주와 지혜가 있으며, 청렴 결백하여 칭송이 자자했다. 당하관으로 일곱 고을의 부사를 지냈지만 관직을 그만두고 향리로 돌아올 때는 반드시 쌀을 꾸어 먹었다.”고 적었으며, 덧붙여 “성품이 무인답게 담솔하여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았으며, 전후 수십 곳의 목민관으로서 가는 곳마다 휼륭한 치적을 남겼다.”고 이규원을 평했다. 그가 벼슬 산 곳을 살펴보면 울릉도 제주도 함흥 단천 풍천 진도 통진 등 바닷가 고을이 유난히 많다. 바다 사정을 잘 알았음이 분명하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인들의 울릉도 침탈이 극성을 부리자 통리기무아문에서는 즉각 울릉도를 더 이상 빈 땅으로 버려두지 말고 개척해야 한다며, 이규원을 검찰사로 현지에 파견해 상세히 조사부터 시키자는 결정을 내린다. 그는 이 때 국왕으로부터 특별한 지시를 받는다. 드러난 지시 사항은 울릉도에 잠입한 일본인의 동태를 파악하고 울릉도 개척을 위한 현지 조사였지만 그 외에도 중요한 사항이 있었다. 고종은 울릉도에 인접한 섬, 즉 독도에 대한 소상한 조사와 정보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 이규원 검찰사의 검찰 목적은 단순히 일본인의 월경과 을릉도 개척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독도의 소재 및 개척 가능성에도 초점이 맞취져 있었다. 검찰사 일행이 울릉도에 도착한 것은 1882년 4월 30일이었고, 도착 지점은 소황토구미였다. 실제로 소황토구미, 현재의 울릉군 이곡면 학포에 가면 ‘울릉도’라 쓴 암각문이 남아있으니 이 때 검찰사 일행이 남긴 직명이 선명하다. 이 각석문은 근세 울릉도 개척사를 입증하는 귀중한 자료다. 이규원 일행은 이튿날부터 탐사에 들어가 5월 8일까지 육로로 섬의 구석구석을 답사했으며,9일과 10일은 선편으로 섬을 일주하면서 조사작업을 했다. 그는 국왕과의 약속을 지키려고 성인봉 정상까지 올랐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가 방문했을 때는 독도를 육안으로 관찰하기 어려워 결국 독도 탐사는 실패하고 만다. 이규원의 감찰 결과, 울릉도는 사람이 살기 적합하며, 많은 사람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가 직접 확인한 사람들은 크게 조선인과 왜인으로 나뉘는데, 이 중 전라도인 103명, 경상도인 26명, 경기도인 1명, 거주지 미상 40∼50여명 등 총 172∼182명의 조선인을 현지에서 직접 만나거나 구두로 확인했다. 울릉도 장기 거주자는 대구 출신의 박기수와 함양 출신의 김석유였으며, 나머지는 대개 단기간 거주하면서 미역이나 연죽을 채취하거나 선박 건조 등에 종사했다. 특이한 것은 전라도 흥양의 섬에서 미역 채취와 배 건조를 위해 울릉도 출입이 많았다는 사실이다. 일본인은 78명이 들어와 마치 자신들의 영토나 되는 양 활개를 치고 다녔다. 조선 정부는 이듬해인 1883년 4월부터 백성들을 이주시켜 이곳을 개척하기 시작한다. 해금정책으로 주민의 거주를 불허한지 무려 450여년 만의 일이다. 개척은 급속하게 진전된다. 드디어 광무 4년(1990)10월 27일 관보에 실린 칙령 제41호 제2조는 “군청의 위치는 태하동으로 정하고 구역은 울릉 전도와 죽도 석도를 관할”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석도가 바로 독도이다. 석도, 즉 독도가 울릉군의 부속 도서로 편입된 배경에는 울릉도 시찰위원 우용정의 건의도 중요하게 작용했지만, 울릉도 검찰사 이규원의 보고가 결정적이었다. 이규원은 명을 받은 공인으로서 공무에 충실했다. 그가 공무를 게을리하지 않아 조선 정부는 울릉도와 독도에 관한 광범위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가 만약 얼렁뚱땅 조사하고 보고했더라면, 상황은 지금과 크게 달랐을 것이다. 잘라 말하자면, 국록을 받는 공무원들이 일을 적당히 할 경우 민족의 화근을 키우는 일이 될 수도 있음을 독도 영유권의 역사가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규원을 다시 생각해 보자는 것은 오늘날 점차 심각해 가는 독도 문제에서 우리 국가 공무원들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를 깨닫는 기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담정 김려는 누구인가? 그는 뛰어난 문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잘 못 만난 탓인지, 아니면 너무 일찍 태어난 탓인지 일생을 귀양살이로 불우하게 지냈다. 그럼에도 그의 박진감 넘치는 문장과 담려한 필치는 후대 문인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그는 순조 3년(1803년)에 ‘우해이어보(牛海異魚譜)’라는 어류 관찰지를 펴낸다.1801년 천주교 박해로 2년 반 동안 진해에 유배되었을 당시, 어부인 동자를 데리고 매일 근해에 나가 각종 어류의 형태와 습성, 번신, 효용 등 생태를 세밀히 조사, 관찰하여 이를 책으로 엮은 것이다. 그는 집필 경위를 이렇게 적고 있다. “진해에 귀양간 지 만 2년 동안 어개류(魚介類)를 벗삼아 지냈다. 주인집 어정(漁艇)을 얻어 타고 12세 가량 되는 동자 어부와 더불어 가까이는 5∼7리에서 멀리는 수십, 수백리까지 바다로 나가 어느 때는 돌아오지 못하고 배 안에서 잠을 자기까지 했다. 이렇게 매년 사시사철 바다로 나간 것은 고기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도 듣도 못한 물고기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아는 것을 낙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물고기의 종류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으며, 그 중에는 고약하게 생긴 것도 있고 신기하게 생긴 것, 신령스럽게 생긴 것도 있고 놀랄 만한 것도 있어 한가한 날에 이를 묘사하고 그 형색을 기록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어류의 이름들을 알지 못하여 일일이 다 기록할 수 없을 뿐더러 그 지방의 방언조차 이해할 수 없어 어려움이 많았으나 이를 다시 정리해 우해이어보로 이름 붙이게 되었다. 내가 이 책을 저술한 것은 박식함을 자랑코자 함이 아니라 은혜를 입어 다시 고향에 갈 수 있다면 농부, 나무꾼과 더불어 경험한 옛 풍물을 말하고자 함이다.” 그는 책에서 어류 52종, 갑각류 7종, 조개류 4종, 소라류 6종을 다루었다. 정약전의 자산어보가 흑산도에서 주로 전라도를 중심으로 관찰했다면, 그는 경상도 남해안을 주로 서술하였다. 따라서 자산어보의 뛰어남은 충분히 인정하고도 남지만, 자산어보만 가지고 당시의 물고기 시정을 평하는 것은 사태의 일면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사실 예나 지금이나 어업의 강도가 높고 인구가 많았던 곳은 오히려 경상도였으니 그의 책을 유심히 읽을 일이다. 책에는 거제도에서 항아리에 담근 자리젓을 팔러 오는 어민, 부산의 왜관으로 상어 껍질을 팔아넘기는 어민, 이른바 죽방렴이라는 것의 원조로 불릴 만한 ‘항’이란 어법이 엄청난 규모로 이루어지던 실태 등이 세세히 서술돼 있다. 하나의 물고기를 다루고 난 다음에는 반드시 우산잡곡이라 하여 시를 붙여 당대의 풍물을 노래하였다. 그가 주목한 고기들은 주로 이어(異魚), 즉 별난 물고기들이었다. 같은 조개라도 이종을 모두 찾아내 일일이 수록했다. 오늘날로 치자면 ‘종다원성’의 원칙을 확실하게 지킨 책인 셈이다. 자산어보와 우해이어보는 한국어보의 쌍벽을 이루는 책으로, 각각 전라도와 경상도를 대표하여 양 지방을 다루고 있다. 저자들은 공히 귀양을 간 인물들이다. 간난의 세월을 이기기 위해 어민과 벗하면서 어보를 썼다. 고산 윤선도가 고급 취향의 문화 속에서 어부사시사를 썼다면 이들은 민중 속에서, 민중의 문화를 기록한 것이다. 초정 박제가는 실학자로 알려졌지만 그의 무역입국론은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그는 해금정책의 시대에 지극히 드물게 해외 통상을 주창한 인물이다. 그의 주장대로 바다를 통한 대외 개방의 준비를 차근차근 해나갔더라면, 열강에게 그런 수모를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시 아시아의 모든 국제정보가 모여들던 중국 연경을 네 번이나 다녀온 철저한 북학론자 박제가는 토정 이지함과 반계 유형원의 영향을 받아 해외통상론을 전개하였다.‘쌀이 창자라면 수레와 배는 혈맥’이라고 강조하면서 통역관을 양성하고 사족들의 무역 참여를 주장했다. 불행하게도 초정의 통상개국론은 정책에 반영되지 않았지만 우리나라 ‘개국론의 횃불’이었던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그의 존재 자체가 우리 사상의 ‘기적’인 것이다.200여년 전에 이미 무역입국론을 주장한 초정 같은 인물이 있었고, 이를 열렬히 지지한 반계 유형원 같은 인물들이 있었건만 이러한 정책이 실제로 받아들여져 괴물처럼 다가오는 해외 열강의 압력에 서서히 대응하는 준비 자세는 ‘기적’처럼 오지 않았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밖에도 우리 바다를 지키려 한 인물들이 왜 더 없을까. 무엇보다 바다를 지켜온 무지랭이 어민들이 가장 소중하다 할 것이다. 이순신의 가장 든든한 원군도 지역 어민들이지 않았는가. 지역의 지리환경을 잘 알고 있어서 능히 이기는 전술을 구사할 수 있었으며, 어선 짓던 갯가의 목수들을 즉각 함선 제조에 투입할 수 있었으니 무지랭이 민초야말로 이순신 승전의 숨은 주역인 셈이다. 근래 장보고를 비롯한 영웅사관의 도래를 우려스러운 눈길로 지켜본다. 넓은 바다는 외롭게 영웅 혼자서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이규원이나 박제가, 김려, 정약용과 정약전처럼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켜온 이들이 바로 우리가 기려야 할 바다지킴이들이 아니겠는가.
  • 남학생과 가장 많이 상담한 여교수

    남학생과 가장 많이 상담한 여교수

    남몰래 털어놓는 비밀은「성의 고민」이 으뜸 <말하는 이> 정희경(鄭喜卿)씨 : 성균관대학교 여학생처장 「기대」의 중압감 때문에 30%가「노이로제」증세 - 그 동안 맡으셨던 상담 실례는 대략 몇 건쯤 되나요? 『2백건은 훨씬 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여학생처장이란 행정직에 있어 심한「케이스」만을 다루고 있지만 일선 상담역을 맡았을 때도 하루에 3명 이상을 만난 때도 있었고 주(週)평균 10명은 만났으니까요』 - 상담해 오는 남녀학생의 차이는? 『남학생이 훨씬 적극적으로 상담을 청해 옵니다. 여학생은 거의 상담을 원하지 않고 있는 듯해요』 - 젊은이들의 대표적인 문젯거리는 대개 어떤 것일까요? 『학교에 따라서 또는 환경에 따라서 문제가 사뭇 달라집니다. 세칭 1류교 학생들은 주위에서 거는 기대의 중압감 때문에 거의 30%의 학생이「노이로제」증상이고 심한 경우는 발작마저도 일으키더군요. 또 중압감 때문에 능력 있는 학생들이 열등감에 빠져 있는 경우가 흔합니다. 반대로 2류대학에서는 하고 싶은 것을 못했다, 가고 싶은데 못갔다는 등으로 우울감, 열등감에 빠져「콤플렉스」를 느끼는 경우 등 문젯거리가 다양합니다』 춘화(春畵)필름 훔쳐보고 사창(私娼) 출입한 고관아들 - 그들이 남몰래 털어놓는 비밀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상담 실례를 들어주셨으면. 『상담 실례는 들지 않도록 되어 있는데…. 일반적이고 대표적인 경우 하나만 들어 보겠습니다. 1류대학 1류학과에 다니는 고관의 아들이었어요. 자살소동을 몇 번 일으켰던 학생인데 찾아왔더군요. 아버지가 첩을 두었어요. 따라서 가정불화가 잦은 집에서 자랐고 부모들과의 거리감을 느끼며 자라난 학생이었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어른들이 보는 춘화「필름」을 훔쳐보게 된 후부터 심한 자위행위를 시작했다고 하더군요. 고등학교 3학년 때 학교 갔다 오는 길에 창녀에게 붙들려가서 첫 성 경험을 가졌답니다. 그 뒤부터 창녀집 만성출입자가 되고…. 갈 때는 정신없이 가지만 돌아올 때는 심한 죄의식으로 머리가 썩어가는 것 같고 자책감 때문에 자살소동을 부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일에 의욕을 잃고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한 학생을 1년 반쯤 상담, 정신과 의사와 협력하여 치료한 일이 있습니다』 대학가의 두통거리는 의외로 이런 성의 고민으로부터 시작된다. 80% 이상(밝히지 말기를 부탁)으로 추산되는 남학생이 성 경험을 갖고 있다는 것. 불행히도 대상이 애인이나 부인이 아니고 창녀에 의한「강제」로 시작되기에 이들은 더욱 괴로와 하고 있다는 것이다. 생각이나 이론에서는 기성세대보다 무척 보수적인 요즘 젊은이들은 실제로는 무척 개방적이며 무방비상태라는 이야기. 「성적(性的)긴장」풀어주는 「프로그램」만들어야 - 젊은이의 남녀관계에서 오는 문젯거리를 해결하는 방법은? 『그들은 가장 혈기가 왕성한 층이기 때문에 성적 긴장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 긴장을 해소시킬 수 있는 바람직한「프로그램」을 많이 만들어 줘야 합니다. 요즘 YWCA나 YMCA에서 하는 민속춤, 사교춤 등의 모임이 그런 의미에서 좋은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밖에도 명작에 나오는 연애 얘기를 읽음으로써 또 적당한 운동으로써 해소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성은 무척 상징적인 것이므로 승화시킬 수 있는 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교수엔 불신·부정적 졸업 때까지 이름 몰라 - 그들의 교수와의 관계는 어떤지요. 『교수들이 이해하지 않으려 하고 있고 또 어떤 면에서는 그들을 무서워 하기 때문에 교수에 대해선 무척 부정적이고 또 불신합니다. 대학 4년 동안 교수와 학구적인 면이나 인격적으로 면담한 학생은 거의 없습니다. 심지어는 졸업할 때까지 교수의 이름도 모르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학점이나 결석일수를 교수와 흥정하는 외에는 거의 만나기도 싫어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 교우관계는? 『고교에서 원만한 인간관계를 맺기 위한 교육을 전혀 못 받았기 때문에 친구간에 또는 사회생활 하는 방법이 외국에 비해 무척 졸렬합니다』 반항원인 95%가 가정 기숙사제도 꼭 필요해 - 학생들의 문제 중 근본적인 원인이 가정이나 부모와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내가 만난 학생의 95% 이상이 반항의 원인이 가정이나 부모의 문제였습니다. 가정은 외적인 조건보다는 분위기가 중요한 것입니다. 가족관계가 조밀해서 지나치게 어린애 취급을 받기 때문에 성인으로서의 역할을 못합니다. 또는 하숙을 하는 데서 오는 문제, 자취, 친척집에서의 기거 등 가족관계나 주택문제가 인격형성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대학에서는 기숙사 제도가 꼭 필요합니다. 자기집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 하니까요』 - 결혼관은? 『남자들은 말로는 사랑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합니다』 여학생은 의존심 강한 게 병 꿈은 좋은 차·예쁜 아내·집 그러나 상담 실례를 보면 그렇지도 않아 외부적인 조건들을 많이 따진다는 것. 조건 자체는 결혼에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게 정교수의「어드바이스」. 여학생에게는『의존심이 강하다』는 게 가장 큰 병이다. 『상대방 남자가 싫어져 그만두는 경우도 찔찔거리고 우는 바보 같은 짓을 예사로 한다』는 것. 여대생쯤이면 자기 나름의 삶이 있을 텐데 좋은 남편감을 고르는 게 더 큰 관심거리고 고르는 것도 부에 치중하는 경향이라는 것. 처음부터 가정을 지키겠다는 태도가 아니라 다른 것(취직·유학) 등을 해 보다 안되면 결혼한다는-. 4, 5년 전만 해도 심각한 문제였던 전망이 없다는 데서 오는 불안감이나 고민은 차차 적어지는 것 같은 경향이란다. 자기만 똑똑하면 취직을 할 수 있으리라는 신념을 갖기 시작했다는 이야기. 『중요한 것은 인간관계이며 적어도 애인이나 부부간에는 서로 나쁜 점을 고친다는 생각은 금물입니다. 있는 그대로 장점만을 취해서 살아야-』 현실을 부정적으로 보는 이들의 태도는 선도의 힘만 있다면 긍정을 전제로 한 것이므로 염려할 것은 못 되는 것. - 젊은이들의 꿈은 어떻게 변해 왔나요? 『전에는 허황하기는 했어도 국가적이고 세계적이었던 꿈이 개체화하는 현실에 알맞도록 변해가고 있습니다. 서구식으로「좋은 차·예쁜 아내·좋은 집」이 최상의 꿈이 되어 버렸습니다』 열등감 위장한 겉 꾸밈 양면적인 성격을 띤 젊음 - 여대생의 허영은? 『여자들은 어려서부터 심한 열등감을 느끼며 살아옵니다. 그것이 마음 속 깊이 숨어있어 그 열등감을 위장하기 위해 겉 꾸밈이 필요한 것입니다. 나무랄 이유는 하나도 없다고 느껴집니다』 기성세대보다 오히려 보수적이고 비판적인 가치관을 가진 요즘의 젊은이들은 실제 행동에서는 반대로 전위적으로 나타나 양면적인 성격을 띠우고 있는 게 현대 한국의 대학생들이라는 결론이다. [ 선데이서울 68년 10/27 제1권 제6호 ]
  • 어머니눈물 닦아준 女검사

    20대 정신질환 여성을 납치해 6년간 동거하면서 수차례 낙태를 시킨 50대 남자가 허술한 법규정으로 법망을 빠져나갈 뻔 했으나 여검사의 끈질긴 노력으로 쇠고랑을 차게 됐다. 장모(여ㆍ당시 29세)씨는 지난 1999년 9월 집 근처 공원에서 산책을 하던 중 노점상 성모(당시 52세)씨에게 납치됐다. 전문대 졸업후 직장생활을 하던 장씨는 1998년 3월 교통사고로 직장까지 그만두고 정신병원에서 편집성 정신분열증세로 치료를 받던 상태였다. 성씨는 이런 장씨를 데리고 서울, 제주 등 사는 곳을 옮겨 다니며 3차례나 임신중절 수술을 받게 했다. 장씨의 어머니는 경찰서에 가출신고를 하고 성씨의 주거지를 수소문했지만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성씨를 찾을 수 없었다. 장씨는 다행히 지난달 중순 길거리를 헤매다 경찰에 발견돼 6년 만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장기간 납치생활에 따른 충격으로 정상적인 의사소통마저 불가능했다. 검찰은 성씨를 구속기소하려고 했지만 뜻하지 않은 문제에 부딪쳤다. 형법상 결혼을 목적으로 사람을 약취, 유인한 ‘결혼 유인죄’는 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수 있지만 피해자의 고소가 있어야 하는 ‘친고죄’이기 때문. 장기간의 납치생활로 정신질환이 악화돼 입원치료중이고 의사 소통도 힘든 장씨가 정식으로 성씨를 고소하기는 어려웠다. 사건을 맡은 서울중앙지검 형사4부(부장 김수남)의 김학자(38·사시36회) 검사는 정신적 약자인 한 여성의 삶을 짓밟은 성씨가 아무런 응징도 받지 않은 채 자칫 자유의 몸이 될 수도 있다고 판단, 고민 끝에 묘안을 찾아냈다. 김 검사는 장씨 어머니에게 관련 법률의 허점을 자세히 설명하고 장씨가 ‘한정치산선고’를 받도록 설득했다. 선고가 내려지면 직계 혈족 등이 후견인이 돼 법정 대리권을 행사, 피의자를 고소할 수 있다. 김 검사는 장씨 어머니를 설득한 뒤 직접 법원과 병원에 다니며 한정치산 선고신청과 감정 절차를 대신 밟고 보통 1∼2개월이 걸리는 법원의 선고도 1주일 만에 이끌어냈다. 정상적인 절차를 따르면 성씨가 구속기간 만료로 풀려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검찰은 장씨 어머니의 고소권 행사로 성씨를 구속 기소할 수 있었다. 검찰 관계자는 “피고인이 정신 질환 등의 이유로 소송 능력이 없으면 특별대리인을 선임할 수 있지만 피해자에게는 이런 규정이 없어 가해자를 기소하기가 어렵다.”면서 “피해자도 특별대리인을 선임할 수 있는 입법 보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김효섭기자 newworld@seoul.co.kr
  • 鄭대주교·黃교수 ‘생명’ 대화 50분

    鄭대주교·黃교수 ‘생명’ 대화 50분

    황우석 서울대 교수와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대주교가 15일 오후 명동성당 주교관 대주교 집무실에서 만나 배아줄기세포 연구의 윤리적 문제 등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약 50분가량 비공개로 진행된 회동이 끝난 뒤 정 대주교는 “황 교수가 불치병 치료를 위해 바친 평생의 헌신에 대해 감사 드리며, 좋은 성과를 거두어 국위를 선양한 데 대해 경축과 존경의 마음을 전한다.”고 말했다. 황 교수도 “꾸지람을 받으러 왔는데 큰 축복과 가르침만 받았다.”며 “인간 본성과 생명의 귀중함에 대해 깊은 숙고를 바라는 대주교님의 가르침을 성심성의껏 받들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곧이어 주교관 대회의실에서 진행된 브리핑에서 양측은 여전히 시각 차이가 뚜렷함을 보여주었다. 회동이 끝난 후 배포된 발표문에 따르면 정 대주교는 “교회는 수정을 인간 생명의 시작으로 보기 때문에 배아 파괴를 인간 파괴로 여기고 있으며, 이번 황 교수의 줄기세포 역시 인간배아로 규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황 교수는 “난치 환자로부터 직접 얻은 피부세포를 체세포 핵이식이라는 기술로 유도한 서울대 연구팀의 줄기세포는 난자와 정자의 결합이라는 수정의 과정을 일절 거치지 않았으며, 또한 착상의 가능성이 전혀 없어 생명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설명했다. 또 배아줄기세포 대신 윤리적 문제가 없는 성체줄기 세포 연구가 필요하다는 정 대주교의 의견에 대해 황 교수는 “성체줄기세포 연구와 배아줄기세포 연구는 상호 보완관계에 있으며, 만일 성체줄기세포가 배아줄기세포를 대신할 수 있다는 것이 규명되면 언제든 배아줄기 세포 연구를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회동에 동석했던 서울대교구 홍보실장 허영엽 신부와 서울대의대 안규리 교수는 “배아줄기 세포 연구의 윤리문제에 대한 양측의 시각 차이는 달라진 게 없다.”며 “이번 회동은 연구의 윤리성에 대한 어떤 합의 도출이 아니라 양측의 입장을 서로 확인하고,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세상에 이런일이] 性급한 청혼 NO~총각

    성 매매 여성에게 반해 “빚을 갚고 결혼하자.”며 2000만원을 건네준 30대 노총각이 고스란히 돈만 날리는 사기를 당했다. 9일 전주 중부경찰서에 따르면 지난달 중순 회사원 A(34)씨는 술에 만취해 전주시 완산구 서노송동 집창촌을 찾았다. 노총각으로 지내던 A씨는 이곳에서 ‘문 양’이라 불리는 20대 중반의 상대 여성을 보고 첫 눈에 반했다. 성격과 미모를 봐 평생을 함께 살아도 되겠다고 생각한 A씨는 문씨에게 “일을 그만두고 함께 살자.”고 제안하게 됐고 이후 A씨는 낮 시간을 이용해 문씨와 연애를 했다. 문제는 문양의 선불금. 청혼의 순간 “빚이 있어 일을 그만둘 수가 없다.”는 대답을 들은 A씨는 지난 7일 오후 집창촌 인근 은행에서 현금 2000만원을 인출해 문씨에게 건넸다.하지만 ‘빚을 갚고 짐을 챙겨 나오겠다.’는 문씨는 결국 나타나지 않았다. 뒤늦게 ‘아차’하는 A씨는 업소를 찾았지만 “이미 짐을 챙겨 떠났다.”는 대답뿐이었다. 결국 A씨는 경찰에 신고한 뒤 후회의 눈물을 흘렸다. 경찰은 문씨의 인상착의를 파악해 수사에 나섰지만 진전되지 않고 있다.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美 금융계 CEO ‘수난시대’

    美 금융계 CEO ‘수난시대’

    월가(街) 최고경영자(CEO) 수난 시대가 이어지고 있다. 회계부정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으면서 지난 3월 회장직에서 물러난 모리스 그린버그 AIG 전 회장이 최근 이사직에서도 사임한 가운데 13일(현지시간)에는 세계적 금융그룹 모건 스탠리의 필립 퍼셀(61) 회장 겸 CEO가 전·현직 임원들과의 갈등을 이유로 사퇴 의사를 밝혔다. 퍼셀은 ‘측근 인사’에 따른 사내 반발을 또 다른 ‘측근 인사’로 맞서다 주가 하락과 인재 유출을 불러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인신공격” vs “경영악화” 퍼셀은 이날 “후임자가 임명되면 바로 사퇴할 것”이라면서 “늦어도 내년 3월 정기 주주총회 전에는 그만두겠다.”고 말했다고 파이낸셜타임스가 전했다. 퍼셀은 이날 직원들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나에 대한 인신공격이 이어지는 가운데 이것(사임 발표)이 여러분과 고객, 주주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결정이라는 것이 명백해졌다.”고 밝혔다. 그동안 퍼셀을 비판한 전·현직 모건 스탠리 임원들은 지도력 부재와 경영실적 악화를 거론했다. 다음달 22일 발표 예정인 2·4분기 주당순이익이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15∼20%가량 떨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 등을 주요 근거로 들었다. ●인재 유출에 주가하락이 결정타 하지만 지난해 주가 하락에도 불구, 그룹 자체의 경영성적이 좋았고 주가 전망도 긍정적이었다는 점에서 실질적 반발의 원인은 인사 문제였던 것으로 분석된다.1997년 당시 금융기업 딘 위터의 회장이었던 퍼셀은 딘 위터가 모건 스탠리와 합병하면서 모건 스탠리 회장 겸 CEO가 됐다. 이후 딘 위터에서 근무하던 심복들을 하나 둘 불러 요직에 앉히면서 퍼셀에 대한 불만이 쌓인 것으로 알려졌다. 올 3월 전직 임원들이 언론 광고 등을 통해 퍼셀을 비판하자 같은 달 말 인사를 단행,5명의 이사들로 구성된 경영위원회 위에 심복 두 명을 공동 사장으로 앉혀 이사들의 집단 사임을 불러왔는데 이것이 결정적 반발의 계기가 됐다. ●퍼셀 사임 발표후 주가 반등세로 3월 60달러를 웃돌던 모건 스탠리 주가는 5월 한때 40달러대로 곤두박질쳤고 지난 10일에만 9명의 주식 전문가들이 경쟁사로 옮기는 등 인재 유출도 잇따르면서 퍼셀을 압박했다. 주가는 퍼셀의 사임 발표가 나온 뒤 반등세로 돌아섰다. 하지만 퍼셀이 후임 CEO를 선출할 때까지 자리를 공석으로 두기로 하면서 경영진이 그룹을 매각하려는 것 아니냐는 얘기도 흘러나오고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은 보도했다.. 한편 퍼셀은 CEO에서 ‘스스로 물러나는 대가’로 주식과 연금자격권 등 6230만달러(623억원)를 받을 것으로 알려졌다. 강제로 해고될 경우엔 2760만달러(276억원)에 그친다. 황장석기자 surono@seoul.co.kr
  • 儒林(367)-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儒林(367)-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인산이 끝나기도 전에 고향으로 돌아가 버린 퇴계의 태도에 대해 그 ‘출처대의(出處大義)’가 의심된다고 여론이 들끓자 당시 홍문관의 응교(應敎)로 있던 기대승은 일반여론의 분위기를 편지로 전한다. 이때 퇴계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답장을 보내고 있다. “…나의 처신은 참으로 어렵다. 왜냐하면 나는 첫째로 대우(大愚:크게 어리석음)하고, 둘째는 극병(劇病:병이 심함)하며, 셋째로 허명(虛名:빈 이름)만 내었고, 넷째로 오은(誤恩:그릇되게 임금의 은총을 받음)만 받아왔다. 이 네 가지가 한 곳에 몰려 서로 모순되고 방해되니 옛사람에 비춰보아도 나처럼 어리석은 사람이 없었고 지금사람에 견주어보아도 나처럼 병이 심한 사람이 없다. 허명을 피하려 하면 허명이 매양 따라오고 오은을 사퇴하려 하면 오은이 오히려 더 가해진다. 그렇다고 해서 대우로써 허명을 채우려하나 그것은 망령된 일이요, 극병으로써 오은을 받아 당하려 하니 그것 또한 염치없는 짓이다. 염치없는 자로서 망령된 일을 한다는 것은 덕에 있어서 상서롭지 못하고 사람에게 있어서 길한 것이 아니요, 나라에 있어서도 해가 되는 것이다. 내가 벼슬맡기를 꺼려하고 항상 물러서려 하는 것이 어찌 다른 뜻이 있겠는가. 오직 이 네 가지 결함과 두 가지 걱정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퇴계는 자신이 세운 중요한 원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부연설명하고 있다. “…. 옛 군자는 진퇴의 명분이 밝아서 조금도 함부로 하지 않았다. 맡은 직책을 조금이라도 다하지 못하면 반드시 몸을 들어 그 자리에서 떠나는 것이다. 그 임금 사랑하는 점에 있어서는 차마 하지 못할 일이지만 그러나 이 때문에 물러감을 그만두지 않는 것은 그 의에 있어서 몸을 그대로 둘 수 없으니 반드시 그 몸을 물러나게 해야 의에 따르는 것이 되지 않겠는가. 이런 때를 당하면 차마 못하는 정이 있다 하더라도 의에 굴하지 않을 수 없다….” 명종이 승하하였을 때 인산이 끝나기도 전에 곧바로 귀향해버린 자신에 대해 나쁜 여론이 들끓자 퇴계는 변명하기보다는 오히려 단호하게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것이다. 퇴계의 편지에 나오는 ‘옛 군자는 진퇴명분이 밝아서 조금도 함부로 하지 않는다.’는 구절 역시 죽령고개를 넘을 때 퇴계가 깨달은 중요한 진리였다. 이는 주자가 편찬한 ‘송명신언행록’이라는 책 속에 나오는 옛 군자들의 진퇴를 퇴계가 심사숙고하고 이들의 태도를 본받은 것이었다.주자가 편찬한 ‘송명신언행록’은 송나라 때의 유명한 신하들의 언행을 기록한 책으로 제왕학의 교재로서 널리 읽힌 책이었다. 여기에는 두범(杜範)이란 명신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두범은 자기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임금 이종(理宗)에게 이를 항의하는 상소문을 쓰고 즉시 물러가기를 청하였다. 임금은 정성껏 만류하였으나 두범은 오히려 더 물러가기를 마지않았기 때문에 임금은 두범을 막기 위해서 성문을 닫을 것을 명령하였던 것이다. 이는 공자의 불사가(不俟駕)정신에 위배되는 불충한 신하로서의 태도였다. 그러나 보다 큰 대의를 위해서는 임금의 어명이라 할지라도 이를 단호히 물리칠 수 있는 용단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퇴계는 비로소 깨달았던 것이다. 그러나 퇴계의 제자들은 이에 대해 여전히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제자들은 퇴계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고 언행록은 기록하고 있다. “벼슬하는 사람으로서 의로써 마땅히 물러나야 할 경우에는 임금이 비록 만류한다고 하더라도 글만 올리고는 그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가 버릴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임금에게 나아가는 것이 옳겠습니까”
  • [성공시대] 남대문시장 남성니트점

    [성공시대] 남대문시장 남성니트점

    “‘조르지오 아르마니’ 부럽지 않아요.” 남대문시장 안 삼익패션타운의 남성복매장 ‘투·쓰리’를 운영하는 문평일(64)사장은 “내가 만든 니트 브랜드 ‘알마니아’의 인기가 ‘아르마니’ 못지않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는 이곳에서 17년간 남성용 니트류를 제작 및 판매해왔다. ●17년간 제작·판매… 10여평 매장서 월 수익 수천만원 10평 남짓한 매장을 보아선 그의 말을 믿기 어렵지만, 한달 판매량을 알고 나면 그의 자랑이 괜한 ‘허풍’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삼익패션타운 5층 한 모퉁이에서 그가 니트를 팔아 벌어들이는 수익은 한 달에 수천만원대. 한창 잘 팔릴 때는 한 달만에 억대를 벌었다고 한다. “고급 원단을 사용해 나만의 디자인으로 옷을 만드니 날개돋친 듯 팔리더군요.” ●고급 原絲·튀는 디자인… ‘문씨표 니트’ 단골 상인만 100여명 문씨는 실을 직접 골라 원단을 주문하고, 디자인도 직접 해 완성복을 만든다. 원단은 최상급을 고집해 완성된 니트는 도매가가 한 장에 5만원 정도, 소매가는 10만원이 넘는다. 비교적 고가임에도 하루 40장이 넘게 팔려 나간다. 부산·광주·대전 등 전국 각지에서 ‘문씨표 니트’를 정기적으로 사러 오는 단골 상인만 100명을 웃돌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씨는 의상 디자인을 공식적으로 배운 적이 단 한번도 없다. 농고를 졸업한 그는 20살때 빈손으로 무작정 시골에서 상경했다. 그런 그가 이처럼 대단한 사업가가 된 비결은 무엇일까. 그는 “‘한 우물을 파라.’는 옛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면서 “인생 역정 속에서도 무조건 한 길만 판 것이 성공의 원인”이라고 말했다. ●45년 전 무일푼 상경… 옷가게 점원으로 ‘첫 발’ 45년 전, 서울에 올라온 문씨는 우연히 무대용 의상을 판매하는 옷가게 점원으로 일하게 된다. 손님들이 어떤 옷을 좋아하는지 눈여겨 본 그는 옷을 판매하는 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 직접 옷을 만들기로 한다. “고향 선배한테 130만원을 꿔서 유명 원단회사에서 ‘땡처리’로 나온 최고급 면을 트럭째로 사들였어요.” 그는 원단을 가지고 봉제 공장으로 가 상상했던 디자인을 설명해 옷을 주문했다. 완성품은 보따리째 싸들고 걸어다니며 옷가게에 홍보했다. 문씨는 “처음엔 시큰둥했지만, 고급 원단을 싼 값에 파니 점점 옷이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다.”며 30여년 전을 회상했다. 그러나 시련도 있었다. 남대문 시장에 정착해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두자 욕심이 커진 문씨는 잠시 ‘악마’의 손길에 넘어갔다.1990년대 들어 이른바 ‘짝퉁’ 옷을 만들어 수익을 올리는 상인이 늘자 그도 점점 그 세계에 빠져들었다. ●짝퉁 팔다 벌금 낸 ‘아픔’이 ‘오늘날’ 가져와 “내가 개발한 옷보다 유명 메이커를 단 옷이 훨씬 쉽게 팔려 나갔어요. 한 벌만, 두 벌만 만들어 팔자던 생각이 열 벌, 스무 벌로 점점 불어났죠.” 결국 경찰의 단속에 걸린 문씨는 2000만원이라는 벌금을 물어야 했다. 그러나 위기는 오히려 기회로 바뀌었다. 그는 “그 이후론 단 한 벌도 ‘짝퉁’을 만들지 않았다.”면서 “그 일 덕분에 내 옷을 꾸준히 개발해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도 동대문에서 직접 실을 골라 원단을 주문한다. 한때 디자이너를 두기도 했지만 그의 안목을 따라오지 못한다는 판단에 그만두게 하고 직접 디자인을 했다. 실 고르기부터 제작·판매까지 총괄하다 보니 쉴 틈이 없다. ●환갑 넘기고도 하루 2~3시간 자며 시장조사까지 밤 11시에 열어 다음 날 오후 4시가 넘어야 문을 닫는 가게를 지키고, 짬을 내 시장 조사와 공장도 다녀온다. 그러다 보니 하루 2∼3시간 자고, 일주일에 6일은 꼬박 일한다. “내년 쯤에는 아들에게 모든 일을 넘겨주고 떠날 생각”이라는 문씨는 “그러나 현업에서 떠나도 아들을 도와 ‘옷세계’를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계획을 밝혔다. 그런데 하필이면 브랜드 이름이 ‘알마니아’일까.“상표 이름이 ‘아르마니’와 비슷한데 스타일을 따라하냐.”고 기자가 묻자 그는 “‘알마니아’는 ‘아르마니’와 이름만 비슷할 뿐 스타일도, 의미도 전혀 다르다.”고 해명했다.‘알마니아’는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는 의미라는 것. 스타일도 그가 추구하는 정장풍 니트와는 차이가 있어 따라하지 않는다고 한다. “정직하고 올곧게 한 길을 걷다 보면 언젠가 좋은 날이 옵니다.” 이씨는 피곤하지만 괴롭지 않은 표정으로 또다시 남대문의 밤을 열었다. 서재희기자 s123@seoul.co.kr
  • [일본을 다시본다] (2)부활의 날갯짓하는 굴뚝산업

    [일본을 다시본다] (2)부활의 날갯짓하는 굴뚝산업

    |특별취재팀|도쿄 남단에 자리한 오타구 공단은 무뚝뚝한 스모 선수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서울의 구로공단쯤에 해당된다는 이 중소공단 지역을 찾은 때는 지난달 18일 오후였다.5000개가 넘는 공장들의 육중한 몸매는 높다란 담에 가려져 있었고, 행인과 차량도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거리 풍경만으로 경기를 대략 짐작할 수 있을 것이란 욕심은 무산될 수밖에 없었다. 급한 김에 택시기사에게 ‘청진기’를 들이댔다. “요즘 이곳 경기가 좋아졌다는데….” “5∼6년전보다 좋아진 것 같다. 거리를 오가는 트럭이 전보다 늘었다.”스야마 아키히로(順山明彦)라는 이름의 이 기사는 다만 “큰 공장만 좀 살아나는 것 같고 작은 공장은 아직….”이라는 단서를 붙였다. 현황이 간단치는 않은 것 같았다. 택시가 회색빛의 무표정한 공장 숲을 이리저리 헤집어가며 목적지인 오타구 산업진흥협회에 도착했을 때 눈앞에 나타난 것은 뜻밖에도 최첨단 건물이었다. 말끔한 양복 차림의 30대가 나왔다. 명함에는 ‘데자와 마사토(手澤雅人) 오타구 산업진흥협회 기획홍보담당 코디네이터’라고 돼 있었다. 마치 첨단 벤처기업에 온 기분이 들었다. ●업종, 규모따라 회복 체감도 차이 데자와는 “1990년대 후반 이곳 공장들이 1년에 100개씩 도산했다고 치면, 지금은 절반 수준인 50개 정도로 떨어졌다.”면서 제조업 경기가 회복 징후를 보이고 있다는 데 동의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렇다고 완전히 부활했다고 하기엔 시기상조”라며 신중한 자세를 견지했다. 그는 “중국에 진출했다가 비용 문제가 안 맞아 일본으로 되돌아오는 공장이 있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부 대기업 얘기일 뿐 중소 공장이 대부분인 이곳에서는 발견하기 힘든 케이스”라고 말해 얼핏 택시기사와 비슷한 얘기를 했다.“중소공장은 여전히 규모와 비용 경쟁에서 대기업에 밀려 고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날 대기업 사정을 직접 듣기 위해 일본전기(NEC) 본사를 찾아갔다. 일본의 대표적 대기업인 이 회사의 홍보부장 아라이 도시노리(荒井俊則)는 “중국에 진출했던 대기업 공장들이 다시 돌아오고 있다는 소문이 맞느냐.”란 질문에 “신문에서만 봤다.”면서 “그런 사례는 극히 일부에 불과할 뿐, 대세는 역시 일본에 모(母)공장을 두고 해외에 설치한 자(子)공장과 연계하는 시스템일 것”이라고 했다.NEC의 경우 일본내 공장은 핵심 노하우 개발과 첨단부품 생산에 치중하고, 중국과 동남아 등의 해외공장은 저임금을 토대로 한 대량생산에 주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역할분담 체계가 일반적이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이런 상황은 밑바닥 시장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시부야의 대형 카메라 전문점인 ‘요도바시 카메라’에 진열된 카메라의 가격은 공장의 소재지에 따라 천양지차였다.‘메이드 인 재팬’이 부착된 소니 카메라는 7만 5800엔에 달하는 반면,‘메이드 인 필리핀’의 펜탁스 카메라는 2만 7300엔 하는 식이다. 이 상점의 점원은 “손님들이 주로 중국이나 동남아산의 값싼 제품만 찾는다.”고 귀띔했다. 아라이 NEC 홍보부장은 “일본의 공장들이 생산혁신을 통해 변신에 성공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제조업이 부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면서도 “하지만 1980년대식의 부흥은 다시 올 수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반면 학계나 정부쪽 시각은 좀 더 긍정적이다. 일본종합연구소 다카하시 스스무(高橋進)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5년전만 해도 이러다가 일본이 다 망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컸지만 제조업이 부활하면서 일본경제가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면서 “중국의 싼 제품에 밀려 고전하던 일본 제조업체들이 소니 등 고부가가치 제품을 중심으로 서서히 체력을 회복해가고 있다.”고 분석했다. 나쓰오 후토시(奈須野太) 경제산업성 지적재산정책실 과장은 “영업비밀이 새나갈 우려가 있는 중국보다는 인건비가 비싸더라도 지적재산권을 보호받을 수 있는 일본 안에서 공장을 운영토록 정부가 장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NEC 공정 단축… 2년간 8조원 절감 정작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이 무뚝뚝한 스모 선수의 겉으로 드러난 몸집이 아니라, 유니폼 속에 숨겨진 기초체력이다.1990년대 ‘잃어버린 10년’의 풍상을 겪으면서 공장들의 체질은 엄청나게 강인해졌다. 이 스모 선수의 회복 징후는 대증적인 영양주사에 의한 게 아니라, 운동과 식이요법 등 근본적인 체질개선에 따른 것이란 얘기다.NEC만 하더라도 5년 전에 비해 체질이 획기적으로 개선됐다.2000년부터 시작한 ‘생산혁신활동’이 수훈갑이다. 이것은 불필요한 공정을 잘라내 전체 생산기간을 단축시킴으로써 부품 재고율을 낮추는 개혁방안이다. 이 제도의 도입으로 2003년 3월 ‘43일’이던 부품 회전일수가 지난해 3월엔 ‘40일’로 줄었다.NEC는 이 제도를 국내외 공장에 두루 적용한 덕택에 2003년과 2004년 2년 동안 무려 8000억엔(8조원) 가량의 생산비를 절감했다고 한다. 아라이 부장은 “잃어버린 10년을 통해 얻은 교훈은, 일본은 더 이상 싼 노동력으로 대항할 수 없으며 구조혁신을 이뤄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인식을 갖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오타구 산업진흥협회 데자와 코디네이터도 “중요한 것은 90년대의 힘든 시기를 거치면서 저력과 노하우가 강해졌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산·학연계나 기술특화, 디지털화에 성공하지 못하는 기업은 살아남기 힘든 시대가 됐다.”면서 “오타구 공단내 공장의 70% 이상이 1개 업종만 특화한 곳”이라고 설명했다. carlos@seoul.co.kr ■ 견학 명소 기타지마 제작소 |특별취재팀|오타구 공단 안에 있는 (주)기타지마 시보리 제작소에 처음 들어서는 순간 방문객은 일단 ‘실망’할 각오부터 해야 한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를 비롯한 국내외 유명 인사들이 줄줄이 찾아와 사진을 찍고 가는 곳이라고 해서 뭔가 거창한 공장이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좀 심하게 말하면, 첫 인상은 그저 시골의 허름한 대장간 같다고나 할까.20명도 채 안 되는 직원들이 작은 공장 안에서 뚝딱뚝딱 쇳덩어리 비슷한 것을 두드리거나 간단한 기계를 작동하는 광경은 영락없는 ‘아날로그식’이다. 겉모양은 이래도 1947년 세워진 이 곳은 주로 알루미늄을 재료로 ‘못 만드는 게 없는’ 공장이다. 항공기나 로켓 부품에서부터 화분이나 파라솔 부품까지 만들어 팔아 한달 평균 4000만엔(4억원)의 매출을 올린다. 올해 67세인 기타지마 가즈토시(北嶋一甫) 사장의 설명을 듣다 보면 어느새 실망은 ‘경탄’으로 변한다.“왜 자동화시설이 안돼 있느냐.”는 질문이 떨어지기 무섭게 “손으로 하는 게 기계보다 더 정확도가 높다.”는 간명한 대답이 돌아온다. 그러면서 기타지마 사장이 알루미늄 재료로 직접 화분을 만드는 시범을 보인다. 회전틀에 재료를 끼워 형체를 만들어 내는 작업은 도자기를 굽는 장면과 기막히게 흡사하다. 단단한 알루미늄 재료가 틀에 끼워져 돌아가기 시작하면 진흙처럼 이렇게 저렇게 형체가 변하면서 어느새 도자기처럼 말쑥한 완제품으로 탈바꿈한다. 기타지마 사장은 “우리는 남들이 어렵다는 90년대에 오히려 경기가 더 좋았다.”고 말했다. 성공 비결은 “우리는 무엇이든 만들어낸다.”는 기타지마 사장의 말 속에 있다.“고객이 아무리 까다로운 주문을 해도 절대 안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피해가지 않았고 그래서 기술이 향상됐다.”는 것이다. 이곳엔 영업부가 따로 없고 사장이 직접 주문을 받는다. 그래야 고객이 원하는 바를 정확히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기타지마 사장의 권유에 못 이겨 기자는 알루미늄 화분 제작에 도전했다. 재료를 틀에 끼운 뒤 쇠막대로 형체를 빚어내는 작업은 보기보다 훨씬 많은 체력을 요구했다. 대충 사진만 찍고 그만두려는데, 사장은 “제대로 만들 때까지.”를 외치면서 놓아주지 않았다. 결국 3전4기 끝에 그럴듯한 작품을 만든 뒤에야 땀이 흥건해진 작업복을 벗을 수 있었다. carlos@seoul.co.kr ■ 도움을 주신 분들 <2> ▲데자와 마사토(手澤雅人) 오타구산업진흥협회 기획홍보 코디네이터 ▲히키다 와타루 교토대 기초물리학연구소 박사과정(우주물리학 전공) ▲사카이 마사요시 경제산업성 상무정보정책국 정보정책과 과장보좌 ▲이소 가오루 도쿄전력 노무인사부 노무그룹 매니저 ▲시게미 사토시 혼다자동차 아시모 수석 엔지니어 ▲후쿠오카 다카오 2005 아이치박람회 도요타관 부관장 ▲히라쓰카 다이스케 아시아경제연구소 지역통합연구그룹장 ▲후쿠다 노리오(福田紀夫) 인사원 기획법제과장 ▲와카바야시 시게요시(若林成嘉) 내각관방 우정민영화준비실 기획관 ▲니타 유키오(新田行男) 일본우정공사 우편국 부국장 ▲나카지마 히사하루(中島久治) 일본우정공사 IR담당 부장 ▲다니가키 구니오(谷坦邦夫) 일본우정공사 경영기획부 전략담당부장 ▲가와타 다카시(川田隆) 도쿄전력 노동조합 중앙서기장 ▲마스다 기사부로(增田喜三郞) 일본우정공사 노동조합 국제부장 ▲신도 무네유키(新藤宗幸) 지바대학 법경제부 교수 ▲히구치 도루(口徹) 문부과학성 고등교육국 국립대학법인지원과 사무관 ▲야시로 나오히로(八代尙宏) 일본경제연구센터 이사장 ▲요시타케 히로미치(吉武博通) 국립대학법인 쓰쿠바대학 학장특별보좌(교수 겸임) ▲사쿠와 도루(佐桑徹) 재단법인 경제홍보센터 국내홍보부장 ▲고토 이스케(厚東偉介) 와세다대학교 상학부 교수 ▲다카하시 스스무(高橋進) 일본종합연구소 수석 이코노미스트 ▲스즈키 마사토(鈴木聖人) 신일본제철 홍보과장 ▲스티븐 윌하이트 닛산자동차 수석부사장 ▲아키야마 스스무(秋山進) 인디펜던트 컨트랙터 협회 이사장 ▲나카하라 에이노스케(中原英之助) 혼다자동차 책임 연구위원 ▲이시즈나 데쓰하루(石綱哲治) 미즈호은행 국제금융법인부 아시아담당 조사역 ▲시오자키 야스히사(崎恭久) 중의원 의원(자민당) ▲고바야시 유타카(小林溫) 참의원 의원(자민당) ▲마쓰이 고지(松井孝治) 참의원 의원(민주당) ▲스즈키 다카히로(鈴木崇弘) 자민당 당개혁실행본부 싱크탱크 준비실장 ▲오타 가즈히코(太田和彦) 도호쿠 예술공과대학 교수 ▲하라다 다케오(原田武夫) 하라다 다케오 국제전략정보연구소 대표 ▲쇼지 마사히코(庄司昌彦) 고쿠사이대학 글로벌 커뮤니케이션센터 연구원 ▲호소다 야스베(細田安兵衛) 주식회사 에타로소혼포 사장 ▲벳푸 마코토(別府允) 주식회사 지쿠요테 사장 ▲나카무라 오사오(中村治夫) 주식회사 야마모토노리텐 참여 ▲야마모토 가즈오(山本一雄) 주식회사 사루야 사장 ▲구로카와 미쓰히로(黑川光博) 주식회사 도라야 사장 ▲다케다 야스히로(武田安弘) 도쿄신문 정치부장 ▲미즈노 마사토(水野正人) 경제산업성 환경정책과 과장보좌 ▲이마제키 아쓰노리(今關重義) 도카쓰 테크노플라자 소장 ▲고바야시 다카시(小林崇志) 도카쓰 테크노플라자 부소장 ▲와쿠다 하지메(和久田肇) 경제산업성 상무정보정책국 문화정보관련산업과 과장보좌 ▲나쓰노 후토시(奈須野太) 경제산업성 지적재산정책실 과장보좌 ▲야마다 신(山田伸) 지바현 상공노동부 산업진흥과 부과장 ▲이와타 요이치(岩田庸一) 일본디지털콘텐츠협회 기획추진본부장 ▲나미코시 노리코(浪越德子) 일본디지털콘텐츠협회 기획추진본부 기획조사부 국제실 과장대리 ▲고노 히로키(河野博樹) NEC 공보과장 ▲하마모토 요시코(浜本佳子) 니혼유센주식회사(NYK) 공보과 매니저 ▲가시마 나호(鹿島奈帆) 니혼유센주식회사(NYK) 공보과 ▲사카쿠라 다카히토(坂倉隆仁) 카오 컴퍼니 홍보부 과장 ▲이노우치 미야비(井內雅妃) 후생노동성 고용균등 아동가정국 직업가정양립과 육아 개호휴업추진실 취업원조계장 ▲다나카 아쓰히토(田中敦仁) 재단법인 2005년 일본국제박람회협회 공보보도실 부실장 ▲오카모토 아유미(岡本步室) 재단법인 2005년 일본국제박람회협회 공보보도실 과장대리 ▲데시가와라 아이(勅使河原愛) 2005 아이치박람회 일본관 홍보담당 ▲나카노 히데아키(中野秀秋) 2005 아이치박람회 아이치현관 부관장 ▲야마시타 요시노리(山下義順) 2005 아이치박람회 전력관 관장대리 ▲혼다 도루(本田徹) 2005 아이치박람회 전력과 홍보부 과장 나종일 주일 한국대사 ▲신태철 KOTRA 도쿄무역관 차장 ▲윤민호(尹敏鎬) 국제금융정보센터 아시아제1부 특별연구원 ▲장병효(張炳孝) 포스코재팬 사장 ▲유성(柳誠) 포스코재팬 경영기획부장 ▲장화경 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 ▲조영수 KOTRA 아이치엑스포 한국관 부관장 ▲진창수 세종연구소 일본연구센터 소장 ▲최병하(崔秉夏) 현대차 도쿄지사장/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SK家 ①-창업 최종건·종현씨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SK家 ①-창업 최종건·종현씨

    “윤원아, 신원아, 월요일자 신문 꼭 봐라. 우리 회사가 크게 나온다.”(고 최종건 SK 창업주) “아버지, 뭔데요. 말씀해 보세요.”(최신원 SKC 회장) “그때 보면 알 수 있어, 이놈들아.”(고 최종건 창업주) 최신원 SKC 회장이 공개한 워커힐호텔 인수 직전 부자간에 오갔던 대화다.1973년 1월 선경(현 SK)은 정부로부터 서울 워커힐(현 쉐라톤 워커힐)호텔을 26억 3200만원에 인수하며, 당당히 재벌 반열에 들어선다. 선경이 국민과 재계에 던진 ‘무명의 반란’이었다. 최종건 선경(현 SK) 창업주가 맨손으로 선경직물을 일으킨 지 20년만의 일이다. 그러나 최 창업주는 같은 해 11월 폐암으로 별세,‘섬유에서 석유까지’라는 원대한 꿈을 동생인 고 최종현 SK(당시 선경직물 부사장) 회장에게 맡긴 채 ‘짧고 굵은’ 인생을 살다갔다. 그의 나이 48세였다. 최 창업주가 20년간 SK의 섬유를 책임졌다면 25년간 SK를 이끈 고 최종현 회장은 ‘석유’를 개척하고,‘이동통신’의 길을 터놓았다. 고 최종현 회장의 50년 지기(知己)인 언론인 홍사중씨가 본 형제는 이렇다.“형(최종건)은 좋은 의미의 ‘보스형’이었다. 의논할 상대가 없었던 탓도 있었지만 그는 모든 일에 혼자 결정을 내렸다. 동생(최종현)은 ‘리더형’이었다. 형제는 그렇게 서로의 장단점을 보완하는 좋은 짝이었다.” 소리없이 일을 꾸미는 사람은 동생이요, 밖에서 뛰는 사람은 형이었다. 그래서 회사 돌아가는 내용을 잘 아는 사람들은 형을 가리켜 ‘용장’이라 했고, 아우를 가리켜서 ‘지장’이라 했다. 형제는 그야말로 ‘격동의 세월’을 거치며,SK를 자산규모 재계 4위의 대그룹으로 일궈냈다. ●‘원조 불도저’ 최종건 창업주 최근 재계 CEO(최고경영자) 가운데 강한 추진력과 남다른 승부 근성 때문에 ‘불도저’라 불리는 이가 적지 않다. 그러나 실상 불도저라는 애칭은 최 창업주가 ‘원조’라고 할 수 있다. ‘의리파, 불같은 추진력, 강한 뚝심’은 최 창업주의 트레이드 마크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밀어붙이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장비’ 같은 성격에 ‘조조’의 꾀도 많았다. 이런 점을 잘 드러낸 에피소드 하나.1966년 선경직물은 차관 도입 문제로 일본 정부와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일본 정부는 중소기업에 불과한 선경직물의 상환 능력을 의심하며 차관 제공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더 이상 안 되겠다.’싶었던 최 창업주는 일본 대사관 관계자들을 단골 술집으로 초청했다. 그는 약속시간보다 먼저 나가 술집 마담에게 거짓말을 해줄 것을 요청했다. 술자리가 무르익을 무렵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전화가 왔다고 하라는 것. 술집 마담은 때가 되자 그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이며, 전화가 왔다고 말을 건넸다. 최 창업주는 일본 관계자 앞에서 “급한 일이 있으니 잠깐 나가겠다.”고 밝힌 뒤 2시간 가량 단잠을 자고 돌아왔다. 그러면서 그는 “이거, 죄송합니다. 저 위에 좀 다녀 오느라 늦었습니다.”고 설명했다. 일본 관계자들은 최 창업주가 정부 최고위층의 부름을 받고 나간 것으로 모두 오해했다. 그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선경직물이 정부로부터 대단한 신임을 받고 있구나.’를 암시하며, 차관 도입 문제를 깨끗하게 처리했다. 그의 장비 같은 성격은 또 이렇다. 최 회장의 지인들은 그가 다혈질인 데다 성미가 급하고, 감정을 폭발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화가 나면 앞뒤 생각없이 퍼부었다. 그러나 뒤끝은 없었다. 이 때문에 그가 화난 얼굴로 “누구 불러오라.”고 불호령을 내리면 서울에 있으면서도 일본으로 출장갔다고 곧잘 거짓말을 했다고 회고한다. 최 창업주는 1926년 수원에서 최학배 공과 이동대 여사의 4남4녀(양분, 양순, 종건, 종현, 종분, 종관, 종순, 종욱)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1944년 경성직업학교 기계과를 졸업하고 당시 일본인이 운영하던 선경직물에 견습기사로 취직, 사회 첫 발을 내디뎠다.24세 때인 1949년에는 교하노씨인 노순애(77) 여사와 결혼했다. 그는 결혼과 동시에 다니던 선경직물을 그만두고, 자기 사업을 시작했다. ●상반된 스타일의 ‘안주인’ 노순애 여사가 넉넉한 시골 인심을 느끼게 한다면, 최종현 회장의 부인인 고 박계희 여사는 세련된 도시 여성의 이미지를 풍긴다. 노 여사는 시동생과 시누이 등을 거느린 대가족의 맏며느리로 시집살이를 만만치 않게 했다. 차남 최신원 SKC 회장의 얘기다.“100마지기 농사 일에 집안 대소사를 다 챙기셨으니 고생이야 말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게다가 부친은 사업 때문에 공장에서 먹고 자며, 한달 가까이 집에 들어오시지 않은 적도 있었으니…. 전형적인 한국 여인이었습니다.” 노 여사의 조용하고, 얌전한 태도에 반한 최 창업주의 누나 최양분(83) 여사는 그를 맏며느리감으로 적극 추천했다고 한다. 고 박 여사는 박경식 전 해운공사 이사장의 넷째딸로 1953년 경기여고를 졸업한 뒤, 미국 뉴욕 베네트칼리지를 거쳐, 칼라마주대학을 졸업했다. 최종현 회장과 만났을 때는 시카고 미술대학에서 응용미술을 공부하던 중이었다. 그는 내성적이고, 자기 의사를 좀처럼 드러내 보이지 않았지만 강단있는 여성이었다. 그리고 이태원에 가서 1만∼1만 5000원짜리 옷을 사 입을 정도로 검소하고, 깍쟁이였다. 고 박 여사가 모일간지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이다.“내가 ‘이태원표’ 옷을 입고 있으면 모두들 몇십만원짜리로 아는데, 그래서 더욱 그런데 가서 사 입어도 불편한 게 없어요.” 최 회장도 부인을 깍쟁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병마와 씨름하던 그는 먼저 간 박 여사를 두고 “자기 성격 따라 깍쟁이처럼 죽었다.”고. 박 여사는 1997년 6월18일 최 회장의 폐암 수술 경과가 좋다는 소식을 듣고, 그날 밤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두 ‘안주인’은 상반된 스타일에도 불구하고, 공통점도 적지 않았다. 말수가 적고, 나서는 것을 무척 꺼려했다. 특히 가정 일에는 소홀함이 없었다. 박 여사가 미술관에서 일하면서도 최 회장이 일찍 퇴근하면 아무리 중요한 미술관 행사를 주재하는 중이라도 남편 뒷바라지를 위해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최재원(42) SK엔론 부회장은 “모친은 외출도 좋아하시지 않고, 조용한 성격”이라며 “두 분께서 같이 하시는 것 중에 하나가 골프였다.”고 말했다. ●최종현 회장의 연애론과 혼맥 고 최종현 회장의 연애론은 이렇다. 그가 죽음을 몇 달 앞두고 마지막으로 손질을 한 책 ‘마음을 다스리고 몸을 움직여라’에서 “나는 미국에서 학교를 다닌 적이 있다. 그 때 지켜본 바에 따라 나는 남녀간의 연애과정을 이렇게 정리해 본다. 연애는 ‘date→steady date→I love you’, 이렇게 세 단계로 진행된다. 처음에 호감을 가지고 ‘데이트’를 하다가 다른 사람과는 데이트를 하지 않는 ‘스테디 데이트’를 하게 되고, 그것이 발전되면 ‘아이 러브 유’가 되어 결혼을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헤어진다. 여기서 한 단계 더 들어가면 ‘너 없이는 못살아.’가 되는데 이것은 병이다.” 최 회장 본인의 경험 때문일까. 최씨가의 2세들은 정략이나 중매 결혼이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다. 특히 최종건 전 회장이 일찍 별세한 이후 최종현 전 회장이 사실상 10남매의 가장 역할을 자임했던 만큼 ‘큰집’ 조카들도 이같은 영향을 많이 받았다. 최신원 SKC 회장은 “숙부는 자식들 결혼과 관련해서 복잡한 것을 굉장히 싫어하셨다.”면서 “예물 등도 가능한 한 안 주거나 받지 않는 주의였다.”고 설명했다. 장남인 최태원(45) SK㈜ 회장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딸인 노소영(44) 아트센터 나비 관장과 결혼했다. 부친과 똑같이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노 관장을 만나 연애했다. 차남인 최재원(42) SK엔론 부회장의 부인은 영어교사였던 채희경씨의 맏딸 채서영(41) 서강대 영문과 교수다. 막내딸 최기원(41)씨는 당시 ㈜선경정보시스템 차장으로 근무하던 김준일(46)씨와 만나 결혼에 골인했다. ‘큰집’인 고 최종건 회장의 일가 혼맥도 학계부터 권력층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형성하지만 정략적인 냄새는 없어 보인다. 장남인 고 최윤원 전 SK케미칼 회장은 김이건 전 조달청장의 딸인 채헌(51)씨와 결혼했다. 장녀 정원(50)씨의 남편은 고학래 전 사상계 고문의 아들인 고광천(54)씨며, 차녀 혜원(48)씨는 박주의 전 금융인 아들인 박장석(50) SKC 사장과 결혼했다. 막내 아들 최창원(41) SK케미칼 부사장은 변호사 집안인 최유경(38)씨와 결혼했다. 4녀 예정(43)씨의 남편인 이동욱(43)씨가 최종건가(家)에서는 눈에 띈다. 현재 개인사업을 하고 있는 이씨의 부친이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이다. 최 창업주와 이후락 전 중정 부장은 서로 호형호제를 할 정도로 막역했던 사이였다. 양가가 둘의 결혼을 일찍이 약속을 했고, 결혼은 최 창업주 사후에 이뤄졌다. 고 최종건 회장이 각별하게 지냈던 재계 인물로는 김용산 전 극동건설 회장이었으며, 언론계에서는 고 방일영 조선일보 고문과 ‘형님 동생’하는 사이였다. 방계로 넘어가면 장녀 최양분 여사는 한때 종건·종현 형제의 가정교사였던 고 표현구 전 서울대 농대 학장과 결혼했다. 표문수(52) 전 SK텔레콤 사장이 그의 아들이다.3녀 최종분(73) 여사는 고 이한용 신아포장 대표와 혼인했으며, 막내 사위인 정재현(46)씨는 현재 SK C&C 전무로 일하고 있다. 차녀 최양순(82) 여사는 고 여운창 경기개발 대표와 결혼했으며,4녀 최종순(69) 여사는 해군 중령 출신인 고 조제동씨에게 시집갔다. 3남 최종관(71) 전 SKC 고문은 장명순(71) 여사와의 사이에 1남 6녀를 두었다. 이 가운데 3녀 경원(42)씨가 김연준 전 한양대 이사장 아들인 김종량(55) 한양대 총장에게 시집갔다. 또 4녀 은성(40)씨는 나웅배 전 부총리 아들인 나진호(42)씨와 짝을 이뤘다. 장녀 순원(47)씨는 존 캐리 퍼크너(47)씨와 국제 결혼했다. 장남인 최철원(36) 마이트엔메인 대표이사는 한숙진(34)씨와 인연을 맺었다. 4남 최종욱(66) 전 SKM 회장은 조효원 전 서울대 교수 딸인 조동옥(59)씨와 결혼했다. 조씨의 남동생이 조동성 서울대 교수다. 미혼인 장남 준원(30)씨는 현재 SK C&C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차녀 윤선(29)씨도 통신·방송장비 전문업체인 SK텔레시스에서 일하고 있다. ●섬유에서 석유…정보통신 SK그룹의 모기업인 선경직물(현 SK네트웍스)은 1930년대 일본인이 조선에서 만주 일대를 대상으로 직물을 수출하던 선만주단(鮮滿綢緞)과 일본의 교토(경도)직물(京都織物)이 합작해 설립한 회사였다. 교토직물은 현물출자하고, 선만주단은 공장 부지를 비롯한 건물 공사비 등을 투자했다. 상호도 선만주단의 ‘선’자와 교토직물의 ‘경’자를 따서 ‘선경(鮮京)’이라고 지은 것이다. 고 최종건 회장은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선경직물을 재건하기 위해 1953년 부친 몰래 빼낸 땅문서로 공장을 불하받는다. 이후 선경직물은 나일론 생산을 계기로 본격적인 섬유기업으로 탈바꿈한다. SK의 성장사는 하드웨어 측면에서 보면 3단계로 나눠진다.1단계는 아세테이트 원사공장과 폴리에스터 원사공장(현 SK케미칼) 건설.2단계는 유공(현 SK㈜) 인수,3단계는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 인수다. 소프트웨어로 볼 때 최종현 회장의 경영 참여와 이순석과 손길승, 김항덕 등 1세대 전문경영인의 합류 등이다. 1980년은 유공 인수로 선경의 숙원 사업을 달성한 해이다. 고 최종건 회장이 울산을 오가며 국내 유일의 정유사였던 유공을 넘본 지 10년 만이다.‘섬유에서 석유까지’라는 사업의 수직계열화를 위해 매진한 결과, 돌아온 보상이었지만 당시 재계에서는 “새우가 고래를 먹었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 정도였다. 선경은 유공을 손에 넣자 정보통신사업 진출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사실 선경이 정보통신사업 진출을 구상한 것은 80년대 초반까지 올라간다. 당시 국내 어느 기업도 정보통신사업에 대해 꿈도 꾸지 않을 때, 고 최종현 회장은 미국 방문길에서 통신사업에 진출할 것을 결심하고, 미국 현지에 경영기획팀을 만든다. 이것이 훗날 한국이동통신 인수와 CDMA(코드분할다중접속) 방식을 세계 최초로 상용화하는 데 성공하는 밑거름이 됐다. golders@seoul.co.kr ■ 풍수지리 거부한 최씨 형제 “집터보다 내 기가 더 세니까 염려들 말어.” 국내 재벌가(家)가 최근 서울 한남동과 이태원동에 둥지를 트는 까닭은 풍수지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곳은 남산을 베개삼아 한강으로 다리를 곧게 쭉 뻗어 복록과 자손복이 대대로 넘치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터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요즘엔 아예 재벌가 ‘집성촌’으로 불린다. 이처럼 집터의 풍수지리를 꼼꼼히 따지는 재벌가에서 유독 이에 무관심한 집안이 있다.SK그룹 최씨가이다. 고 최종건 회장이 1968년 서울 삼청동에 새 집을 마련했을 때의 일이다. 일본 데이진 오야 사장의 부인이 풍수지리를 잘 안다면서 여러 각도에서 찍은 삼청동 자택의 지형 사진을 보내달라고 연락해왔다. 당시 최 회장과 오야 사장은 비즈니스를 떠나 개인적으로 매우 절친한 사이였다. 오야 사장은 당시 일본 정·재계의 거물로 최 회장의 호탕한 성격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오야 사장 부인은 매우 까다로운 성격 탓에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잠옷만 두 박스를 가지고 왔으며, 매일 밤 우유로 목욕을 하는 습관이 있었다. 최 회장은 이들이 한국에 머물 때 불편함이 없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사진을 본 오야 사장 부인은 “지형이 사나워 좋지 않다.”며 “다른 집으로 이사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최 회장은 이를 무시하고 예정대로 이사했다. 그런데 공교롭게 삼청동 자택은 화재로 가정부가 화상을 입어 숨진 데 이어 여름 장마철에 큰 물난리를 겪었다. 이 때문에 주변에서는 집터의 기가 세서 그런 것이니 이사가는 게 좋다고 자주 권했다. 그래도 최 회장은 “내 기가 집터보다 더 세니 염려말라.”고 했다고 한다. 고 최종현 회장도 집터와 관련된 고집은 ‘그 형에 그 동생’이었다. 암 수술을 마치고 돌아온 1997년 11월. 풍수지리 학자인 최창조 전 서울대 교수가 최 회장이 사는 서울 워커힐 호텔 내 빌라가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 광나루 쪽을 찌를 듯 달려드는 곳인 탓에 풍수학적으로 좋지 않다며 이사를 권했다. 그는 “그런 곳은 일시 머물며 휴식을 취하기에는 적합하지만 장기간 머물며 살기에는 문제가 많은 곳”이라고 설명했다. 두 사람의 인연은 최 전 회장이 풍수지리 연구를 위해 교수직을 내던진 최 전 교수의 소식을 듣고, 아무런 조건 없이 연구비를 지원하면서 맺어졌다. 최 회장은 그러나 “집이란 어차피 일시 머물다 떠나는 곳”이라며 “나는 이곳이 좋기 때문에 그런 이유로 집을 옮길 수 없다.”고 완강히 거부했다. 최 회장은 훗날 “형님처럼 기가 세다는 이유로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면서 “여기서 산 지가 15년이 넘었는데 그동안 행복하게 잘 살았으면 됐지, 뭘 더 바라겠느냐.”며 껄껄 웃었다고 한다. golders@seoul.co.kr ■ 1세대 전문경영인 3인방 ‘그룹부흥 한몫’ “손길승 실장은 단순히 내가 부려먹는 사원이 아니라 나의 비즈니스 파트너, 동업자입니다.” 고 최종현 회장은 1995년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문제로 검찰에서 조사 받을 때 일개 그룹 기획실장이 거액의 정치헌금을 다룰 수 있느냐는 검사의 추궁에 이렇게 대답했다. 그가 손 회장을 경영 참모가 아닌 동반자로서 얼마나 믿고, 의지했던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당시 정태수 한보 회장의 ‘머슴론’과 비교되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SK그룹이 오늘날 재계 서열 4위의 위상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뒤에서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던 이순석 전 ㈜선경(현 SK네트웍스) 부회장과 손길승 전 SK 회장, 김항덕 고문 등 1세대 전문경영인 3인방의 역할이 컸다는 평가다. 이들의 역할은 이 전 부회장이 ㈜선경, 김 고문은 유공(현 SK㈜), 손 전 회장은 경영기획실로 나눠진다. 특히 손 전 회장은 20년간 기획실에서만 근무해 직업이 ‘기조실장’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이들은 공교롭게도 59학번 서울대 상대 동기 출신으로 때로는 ‘맞수’로 경쟁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이 전 부회장이 1995년 가장 먼저 SK를 떠났으며, 한때 ‘좌(左)길승, 우(右)항덕’으로 불렸던 전문경영인 체제도 결국 손 전 회장의 단독 체제로 마침표를 찍게 된다. 김 고문은 손 전 회장이 당시 그룹 회장에 오를 수밖에 없었던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최종현 회장이 돌아가시고 난 뒤 그룹 회장을 누가 맡을 것인가에 대해 격론을 벌인 결과, 그룹 전반을 꿰찬 사람은 손길승 전 회장 밖에 없다는 것이었어요. 명분이나 이치에도 맞았고요. 그리고 나는 사심없이 회사를 도울 준비가 돼 있다고 했습니다.” 손 전 회장은 1998년 그룹 회장에 취임한 뒤, 야인으로 물러났던 김 고문을 회장대우 상임 고문으로 영입했다. 그는 회장 집무실 옆에 자신의 방과 똑같은 크기의 공간을 김 고문에게 제공했고, 경영 현안이 있을 때마다 그와 상의했다. 그러나 3인방 가운데 ‘SK호’에 가장 먼저 탑승한 사람은 이 전 부회장이다. 그는 1965년 4월 고 최종건 회장의 설득에 못이겨 선경직물에 입사했다. 수원 출신으로 최종욱 전 SKM 회장과는 초등학교 동기다. 김 고문은 일본 이토추상사에서 근무하다가 69년 선경으로 말을 갈아탔다. 그는 39세 때 대한석유공사의 수석 부사장에 올라 재계를 놀라게 했다. 이 전 부회장의 강력한 권유로 65년 12월에 입사한 손 전 회장은 지난 40년간 고 최종현 회장의 평생 동지이자, 경영 전도사였으며, 일을 통해 스트레스를 풀 정도로 ‘지독한 일벌레’였다. 그는 대졸 신입사원으로 입사해 그룹 회장에 오른 최초의 전문경영인인 동시에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도 역임했었다. golders@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김성곤차장 안미현·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사설] 당국이 앞장선 불량 농·축산물 유통

    불량식품 파동이 날 때마다 공적(公敵)으로 지목되는 것은 식품업체였다. 만두파동이 났을 땐 만두제조업체에 비난이 집중됐고 불량급식이 문제됐을 땐 학교와 어린이집 등이 도마 위에 올랐다. 그러나 감사원이 발표한 식품과 농·축산물 검사제도 운영실태를 보면, 농림부와 보건복지부, 식약청, 지자체 등 규제당국의 관리부실도 업체 못지않게 한심하다. 재료 단계의 불량품 유통도 제대로 막지 못하면서 최종 먹을거리 생산업체에만 악덕업체니 뭐니 하며 칼날을 휘두른 꼴이다. 감사결과로 유추해 보면 항생물질이 기준치를 넘은 돼지고기, 잔류농약 범벅인 시금치 등이 시장에 그대로 유통됐을 가능성이 크다. 간이검사에서 항생물질 양성반응이 나온 돼지고기에 대해 정밀검사도 하지 않고 출하금지 조치도 하지 않은 탓이다. 농약 시금치의 경우도 해당 도매시장에 적발 사실이 통보되지 않아 한 달동안이나 같은 농가 제품이 유통됐다. 유통중인 식품의 위생점검을 백화점 등 대형유통점 위주로 한 데 대한 변명은 어이없기만 하다. 재래시장은 위생상태가 훨씬 취약한 곳인데도 수거비용 카드결제가 어려워 점검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래가지고서야 어떻게 식품 안전을 보장할 수 있겠는가. 정부는 불량식품 파동이 나자 식품위생법을 강화하고 식품안전기본법안을 내놓는 등 법규정비에 열을 쏟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강력한 법규도 당국이 시행을 소홀히 한다면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다. 오늘도 ‘꿀꿀이죽’논란 때문에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낸 부모들이 울분을 삭이지 못하고 있다. 당국은 각성해야 한다.
  • “산소 자주 찾으려 산양삼 심었는데…대박”

    “산소 자주 찾으려 산양삼 심었는데…대박”

    “산을 훼손하지 않고 산에서 이만큼 소득을 올리는 웰빙작물이 있나요.” 충남 서천군 판교면 금덕리 천방산에서 산양삼(山養蔘)을 기르는 ‘천방농산’ 회장 권오만(48)씨는 “전 작물 가운데 최고의 경쟁력을 갖고 있는 게 산양삼”이라며 이같이 반문했다. 산양삼은 밭에 산삼 씨앗을 심어 수확하는 장뇌삼과 달리 산에서만 기른 것을 말한다. 권씨는 지난해 산양삼을 수확해 25억여원의 매출을 올렸다. 그는 30만평에 이 삼을 기르고 있다. 권씨가 산양삼을 재배하기 시작한 것은 1983년. 고향 부여에 있던 아버지 묘를 천방산의 문중 땅으로 옮기면서 주변에 산양삼을 심었다. 그는 “삼을 심어 놓으면 산소를 자주 찾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심었다.”라고 말했다. 당시에는 고구마 농사를 짓고 있었다. 밭을 개간하면서 장비가 늘자 엉뚱하게 건설업에 손을 댔지만 부도가 났고 그는 서울의 건설업체에 취직했다. 직장을 다니면서 묘 주변에서 캔 산양삼을 주변에 팔았다.‘돈이 되겠다.’고 생각한 그는 97년 아예 직장을 그만두고 삼 재배자로 변신했다. 수입이 짭짤하자 주변 농민들에게 권해 지금은 지역주민 20여명이 산양삼을 기르고 있다. 권씨도 재배면적이 늘자 종업원을 9명으로 늘렸다. 대형 식품회사에 잘 다니고 있던 전문경영인도 스카우트, 농장의 기업화를 추진했다. 그는 매년 250㎏의 산삼 씨를 농장에 뿌리고 12년산 산양삼을 캐 제약회사 등에 판다. 한 뿌리에 10만∼12만원으로 인삼보다 훨씬 비싸다. 농장에는 산양삼을 사거나 재배술을 배우려는 이들이 하루 100명 정도 찾는다. 권씨는 말기 암환자들을 돌보는 청주성모꽃마을에 산양삼을 매년 무료로 공급한다. 그는 “건설업을 하다 부도가 났을 때 인근 성당에 있던 프랑스 신부님이 큰 도움을 줬는데 떠났다.”면서 “신부님께 빚을 갚지 못한 게 한이 돼 그리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권씨는 “논밭 농사로는 풍족한 농촌생활이 힘들다.”면서 “산양삼이 일반화돼 서민도 싸게 사 먹을 수 있는 때가 오면 좋겠다.”라고 바랐다. 서천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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