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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트럼프, 멜라니아와 前부인 장례식…2m 넘은 막내아들[포착]

    트럼프, 멜라니아와 前부인 장례식…2m 넘은 막내아들[포착]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20일(현지시간) 첫째 부인인 이바나 트럼프의 장례식에 가족과 함께 참석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과 현재 아내인 멜라니아 트럼프는 20일(현지시간) 이바나의 장례미사가 치러진 뉴욕시 맨해튼 어퍼이스트의 한 성당에 모습을 나타냈다. 트럼프 전 대통령과 이바나 사이에서 태어난 도널드 주니어, 이방카, 에릭 등 세 자녀는 금색으로 장식된 고인의 관을 따라 성당에 들어섰다. 두 번째 부인 말라 메이플스에게서 태어난 티파니 트럼프도 가족과 함께 장례식에 참석했다. 현재 부인 멜라니아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 아들 배런 트럼프도 참석했다. 2006년생으로 올해 16세지만 188cm인 트럼프보다 훨씬 큰 모습이었다. 배런의 키는 2m가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장례미사에는 폭스뉴스 진행자 지닌 피로, 이방카의 시아버지인 찰스 쿠슈너, 고인의 오랜 친구인 디자이너 데니스 바소 등도 참석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장례미사 직전 자신의 소셜미디어 플랫폼인 ‘트루스 소셜’을 통해 “매우 슬픈 날이지만 동시에 멋지고 아름다운 삶을 기념하는 날”이라며 애도의 뜻을 표했다. 앞서 발표한 성명을 통해서는 “이바나는 아름답고 훌륭한 여인이었다”며 조의를 표했다.모델 출신 이바나…사업가로 인정 체코 태생인 이바나는 1970년대 초반 모델로 활동하다 1976년 뉴욕에서 부동산 개발업에 종사하던 트럼프를 만나 이듬해 결혼했다. 결혼 후에는 트럼프그룹에서 인테리어 디자인을 담당하며 맨해튼의 트럼프타워와 뉴저지 애틀랜틱시티의 카지노 개장을 주도하는 등 사업가로서의 능력도 인정받았다. 1980년대 뉴욕에서 유명한 ‘파워 커플’로 이름을 날렸으나, 1992년 이혼 후에는 각자 새 배우자를 만났다. 이바나는 1992년 트럼프와 이혼한 뒤 이탈리아 사업가인 리카르도 마주첼리와 결혼했고, 2008년에는 20세 이상 연하인 이탈리아 모델 로산노 루비콘디와 세 번째 결혼했지만 1년 후 이혼했다. 이바나는 지난 14일 맨해튼의 자택에서 사고로 인한 외부 충격으로 향년 73세로 사망했다. 공식적인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소방당국은 그가 심장마비를 일으킨 것으로 보고 있다.전 남편 향해 “골프나 쳐야” 쓴소리 이바나는 2020년 대선 결과에 불복하는 전 남편 트럼프를 향해 “패배자로서의 좋은 모습이 아니다”라며 “트럼프는 돈이 많고, 갈 곳도 살 곳도 있다. (퇴임 이후) 인생을 즐길 수 있다. 플로리다주 팜비치 마러라고 리조트로 내려가 골프를 치며 평범하게 사는 것이 트럼프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확신하건대 트럼프는 패배자가 되는 걸 싫어한다. 트럼프는 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싸우고, 싸우고 또 싸우려 할 것”이라며 “어쨌든 이 모든 일이 끝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내가 낳은 아이들이) 워싱턴DC가 아니라 그냥 뉴욕으로 가서 평범하게 살기를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 오은영 만난 ‘무속인’ 정호근 “아들·딸 사망…세상 떠나려 했다”

    오은영 만난 ‘무속인’ 정호근 “아들·딸 사망…세상 떠나려 했다”

    배우 정호근이 무속인이 된 이유를 털어놓는다. 15일 오후 방송 예정인 채널A ‘오은영의 금쪽상담소’에서는 배우 겸 무속인 정호근의 고민이 공개된다. 30년 차 베테랑 배우에서 8년 차 무속인이 된 정호근과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오은영의 역대급 만남이 성사된 것이다. 이날 정호근은 무속인 상담가로서 “힘든 이야기만 듣고 사니, 삶이 지친다”라는 고민을 털어놓으며 오은영의 공감을 산다. 그러나 정호근은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몸소 영적 기운을 느끼면서 겪는 다양한 몸의 고통으로, 밥알이 모래알처럼 씹힐 만큼 기력을 잃어간다고 호소한다. 또한 정호근은 나도 모르게 예언을 내뱉어 버리고 불안한 마음에, 뱉은 말을 책임질 수 있도록 신에게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며, 가슴 졸이는 일화들을 고백해 예상치 못했던 무속인으로서의 고민을 털어놔 오은영과 수제자들을 놀라게 했다고. 이에 오은영은 정호근이 강박적으로 타인에게 도움을 주려는 사람이라고 지적하고 나보다 ‘타인이 우선인 삶’을 살며 타인의 운명까지 책임지려고 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정호근의 책임감의 근원을 찾기 위해 배우 정호근과 아빠 정호근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 오은영은 그가 첫째 딸과 막내아들을 먼저 떠나 보내고 죄책감에 죽음을 선택하려고 했던 일화를 알게 되는데. 오래전 가족을 잃고 느꼈던 뼈저린 아픔이 정호근의 강박적 책임감의 시작이 아니었을지 짚어낸다. 이에 정호근은 “내가 (신을) 받지 않으면 자식들에게 내려간다고 하더라”라며 신내림의 이유를 고백하기도 했는데. 한편 정호근은 하루아침에 배우에서 무속인이 된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고, 인정해주는 늠름한 아들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을 표현하며, 무속인이 된 이후 직업에 대한 편견과 오해가 많았음을 토로한다. 무속인이 되자마자 홍해 갈라지듯 흩어진 인연들과 끊겨버린 드라마 캐스팅에 대해 고백하며 박수 받던 배우에서 이유 없이 손가락질 받는 무속인이 된 지난 10년간의 삶이 뼈저리게 외로웠음을 털어놓는다. 이에 오은영 박사는 “너무나 외롭고 고립된 삶이었다”라며 ‘인간 정호근’으로서의 삶을 응원해 모두의 감탄을 자아냈다는 후문이다. 한편 ‘오은영의 금쪽 상담소’ 정호근 편은 15일 오후 9시30분 방송된다.
  • 택배기사 사칭해 ‘신변보호女 가족 살해’ 이석준 1심 무기징역

    택배기사 사칭해 ‘신변보호女 가족 살해’ 이석준 1심 무기징역

    흥신소 통해 거주지 알아낸 뒤 택배기사 사칭여성 어머니 흉기 살해, 13살 남동생도 중상범행 4일 전 女감금·성폭행 혐의로 경찰 조사檢, 사형 구형… “가족 노린 보복성 계획범죄”경찰의 신변 보호를 받던 여성의 가족을 무참히 살해한 이석준(26·구속)이 1심에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검찰은 사형을 구형했었다. 서울동부지법 형사합의12부(이종채 부장판사)는 21일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보복 살인,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된 이씨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이씨는 지난해 12월 10일 경찰의 신변 보호를 받던 A씨의 서울 집에 찾아가 A씨 어머니(49)를 흉기로 살해하고 남동생(13)에게 중상을 입힌 혐의로 구속기소 됐다. 이씨는 범행 나흘 전인 같은 달 6일 대구에서 A씨를 감금하고 성폭행한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았다. 이에 A씨가 경찰에 신변 보호를 요청하자 앙심을 품고 흥신소를 통해 거주지를 알아낸 뒤 택배기사를 사칭해 범행한 것으로 드러났다.앞서 검찰은 지난달 17일 이석준의 결심 공판에서 법정 최고형인 사형을 구형했었다. 검찰은 또 위치추적 전자장치(전자발찌) 부착 10년과 신상정보 공개, 아동·청소년 기관 및 장애인 복지 시설 취업제한 10년, 성폭력 치료 프로그램 이수 명령도 요청했다. 검찰은 “A씨만을 살해할 목적이었다면 A씨가 귀가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범행을 해야 했다”며 A씨가 가족을 노려 보복성 계획범죄를 저질렀다고 판단했다. 또 이석준이 A씨와 연인 관계였다고 주장하는 데 대해서도 “이씨의 일방적 생각”이라며 “이씨의 소유욕과 지배욕으로 말미암아 벌어진 범죄로 A씨의 존엄성이 훼손됐다”고 밝혔다. 이씨는 최후진술에서 “저 때문에 돌아가신 피해자분에게 죄송하다. 평생을 반성하며 살겠다”고 말했다. A씨 아버지는 공판 후 기자들과 만나 “어머니가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본인도 흉기에 찔린 막내아들은 20년, 30년 후 이씨가 가석방으로 나와 보복을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 살고 있다”면서 “법정 최고형인 사형을 선고해 사회로부터 영원히 격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 조혜련 동생 귀농 고민…母 “며느리도 같이 가서 간호사 해라”

    조혜련 동생 귀농 고민…母 “며느리도 같이 가서 간호사 해라”

    오은영 정신건강학박사가 배우 조지환의 아내 박혜민과 시어머니의 갈등의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13일 방송된 MBC ‘오은영 리포트-결혼지옥’ 4회에서는 코미디언 조혜련 동생 배우 조지환과 그의 아내 박혜민 부부가 심각한 생활고로 갈등을 빚고 있다며 오은영 박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결혼 8년차 잉꼬부부인 두 사람은 지난해 한 프로그램에 출연해 금슬 좋은 모습으로 관심을 받았지만, 현실은 꿈과 생계 사이에서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인생의 갈림길에서 서로에게 날카로운 비수가 되는 말을 쏟아내는 이들 부부의 진짜 속내가 낱낱이 공개된 것. 기름값 5만원이 없어 지인에게 돈을 빌릴 정도로 심각한 경제 상황을 고백한 조지환 박혜민 부부. 수입이 불안정한 남편 대신 7년간 간호사로 일하며 가정의 생계를 책임졌던 아내가 진짜 ‘꿈’인 쇼호스트에 도전하며 생계에 공백이 생겼다. 가정 경제가 심각하게 흔들리자 조지환은 내심 아내가 간호사로 돌아가 안정적인 소득이 생기길 바라는 눈치. 반면 아내는 이제 남편 뒷바라지에서 벗어나 진짜 자신의 꿈과 커리어에 전념하고 싶다고 팽팽하게 부딪혔다. 박혜민은 조지환을 향해 배우로서 메리트가 없다고 했고, 조지환 역시 아내의 일하는 모습을 비난했다. 조지환의 생일을 맞아 집에 온 시어머니는 아들이 변변한 생일상도 못 받고 떡볶이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모습에 화가 나 며느리가 간호사로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드러냈다. 시어머니는 귀농을 고려하는 아들의 편을 들며 “쇼호스트는 접고 천안에 내려가서 간호사를 해라, 그러면 충분히 살 수 있다”라고 했다. 이에 박혜민은 “오빠는 배우를 10년 넘게 도전하는데 저는 왜 1년, 2년도 안 되는 것이냐, 오빠도 배우로서 희망이 없다. 저도 인정하고 싶지 않다”라고 말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남편을 도와줘야 하는데 안사람이 남자를 깔아 뭉개는데 (남자가) 뭐가 사회생활이 되고 성공을 하겠나”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에 돌아가는 길 시어머니는 “(남편을) 인정을 안 해준다”라며 며느리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조지환이 “엄마가 예쁘게 좀 봐줘라, 변변한 것도 없는 상황에 와서 8년째 월세 아닌 월세처럼 살고 있는데 엄마가 잘 봐줘”라고 하자, 어머니는 “ 계속 아내만 두둔할 거면 내 집에 발 딛지마라”고 엄포를 놨다. 오은영은 “어머니를 이해하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 같다, 요즘 젊은 여성들은 ‘어머 이런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라고 말을 꺼냈다. 이에 조지환은 오은영의 솔루션을 받기 전에 자신의 어린 시절을 고백했다. 폭력적인 성향의 아버지로 인해 어머니가 힘든 시절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오은영은 “그 시절에 경찰을 부르고 법정에 가는 일이 쉬웠겠나, 그런 삶을 살다가 자식을 낳았는데 딸을 일곱을 낳았다, 그 시절 경상도 사람인 어머니에게 딸을 일곱을 낳은 후에 얻은 막내아들이란 자식 이상의 의미일 거다”라며 “가정이 어려울 때 여자가 (짐을) 짊어내는 걸 당연하다고 생각하시는 거고, 며느리가 아니라 딸에게도 그렇게 대하셨을 것 같다”고 했다. 또 조지환이 대화할 때 주체를 ‘아내가~’가 아닌 ‘내가~’로 말해야 한다며 대화법을 바꿔야 한다고 조언했다. 조지환은 “자존심이 상해서 어려울 것 같다”라고 했지만 이내 “그게 사실이다”라며 인정했다.
  • 풍경 숨긴 너른 옷깃

    풍경 숨긴 너른 옷깃

    서울 금천구의 한문 이름은 ‘衿川’이다. ‘옷깃 금(衿)’ 자에 ‘내 천(川)’를 쓴다. 우리 전통 한복의 너른 옷소매처럼 넓은 강이 흐르는 고을이라는 의미다. 여기서 옷소매처럼 너른 강이 뜻하는 건 금천구를 관통하는 안양천이다. 해마다 봄이면 수만 마리의 잉어가 소상하는 안양천 주변에 숨겨진 명소들이 많다. 서울관광재단이 8일 금천구의 비경 몇 곳을 소개했다.●‘패션 아웃렛 거리’ 금천구는 1995년 구로구에서 분구됐다. 구로구와 마찬가지로 금천구는 산업화와 함께 성장하고 발전했다. 지금도 그 흔적들을 기억하고 있는 공간이 많다. 금천구 여행의 들머리는 ‘패션 아웃렛 거리’다. 옛 구로공단 2단지 일대의 봉제, 섬유 공장들이 밀집했던 곳이 지금은 거대한 패션 단지로 변모했다. ‘롯데팩토리아울렛’부터 ‘마리오아울렛’, ‘W아울렛’, ‘만승아울렛’, ‘현대시티아울렛’ 등이 한 블록마다 어깨동무한 듯 늘어서 있다. 지하철 7호선과 1호선 환승역인 가산디지털단지역에서 가까워 승용차 없이도 쉽게 방문할 수 있다.●구로노동자생활체험관, 순이의 집 아웃렛들이 현재의 금천구를 보여준다면, ‘순이의 집’은 196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금천구의 과거를 기억하는 공간이다. 여성 노동자들의 거주 시설을 재현한 전시관이다. 과거 구로공단에는 ‘공순이’라 낮춰 불리던 나이 어린 여성 근로자가 많았다. 10대 때 서울로 상경해 섬유, 가발, 봉제 등의 일을 하루에 12시간씩 했다. 이들은 한 건물에 방 한 칸과 조그만 부엌이 있는 쪽방에 살았는데, 이런 쪽방들이 적게는 20개, 많게는 50개씩 모였다고 해서 ‘벌집’ 또는 ‘닭장집’이라고 불렸다. ‘순이의 집’은 이러한 쪽방을 재현해 놓았다. 패션방, 문화방, 공부방, 추억방, 봉제방, 생활방 등의 테마로 꾸며진 쪽방은 당시 여성 노동자의 생활과 문화, 애환을 잘 보여주고 있다.●인크커피 가산 플레그십 스토어 옛 구로공단의 공장을 인수해 현대적 감각으로 리모델링한 카페다. ‘직선의 건물 속 자연을 표방한다’는 테마로 꾸민 공간이 돋보인다. 1층에 원형 통로가 있고 가운데로 물이 흐르는 작은 분수가 있어 이국적인 느낌이 든다. 2층과 3층은 깔끔하게 정돈된 정원에 온 것처럼 꾸며져 있다. 커피 원두는 현지 커피 농장에서 수입한 것이다. 카페에서 직접 로스팅 한다.●아트센터 ‘예술의 시간’ 아트센터 ‘예술의 시간’도 과거 구로공단의 시설을 현대적으로 재탄생시킨 문화 공간이다. 구로공단 노동자들이 거주했던 옛 건물이 시각 예술품을 감상하는 전시관으로 탈바꿈했다. 1층은 여전히 공장으로 운영 중이고, 기숙사로 사용했던 2~4층을 전시관과 카페로 리모델링했다.●금천구 여행의 쉼표, 안양천 금천구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안양천은 광명시와 경계를 이룬다. 안양천 주변에 산책로와 자전거도로가 잘 정비돼 있다. 안양천은 봄날의 벚꽃길로 유명하다. 특히 산란기를 맞은 숭어 수만 마리가 안양천 상류로 이동하는 4월 무렵엔 장관이 펼쳐진다. 꼭 봄날이 아니어도 안양천은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삭막한 도심의 빌딩 숲속에 사는 시민들의 안식처가 되어준다. 산책로 곳곳에 장미, 금계국, 양귀비 등이 피어나 걷는 이의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6월 중순이 지나 햇볕이 따갑고 기온이 오르면 산책로 주변에 그늘이 없으므로 되도록 해가 질 무렵에 노을을 바라보며 걷는 것을 추천한다.●오래된 중국집, 동흥관 동흥관은 1951년에 문을 연 중국집으로 금천구의 터줏대감 같은 음식점이다. 금천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이곳에 와서 짜장면을 먹어본 추억이 있는 장소로 2013년에 ‘서울의 미래유산’으로 선정됐다. 중국 산둥성 화교 출신의 1대 사장에 이어 현재는 2대 막내아들이 운영하고 있다. 화교 출신의 주방장만 고용해 현지의 조리 방식을 유지하고 있다. 짜장면 소스는 사골 육수로 만들어 느끼하지 않고 구수한 맛을 낸다. 글 손원천 기자·사진 서울관광재단
  • 품에 폭 안긴 송중기, 그렇게 좋아? 완전 끌어안았네

    품에 폭 안긴 송중기, 그렇게 좋아? 완전 끌어안았네

    배우 송중기가 배우 조한철과 친근함을 과시하는 사진이 공개됐다.  23일 인스타그램에 따르면 배우 조한철은 지난 22일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인 인스타그램을 통해 “중기랑 같이 받은 커피차 #박재범작가님 #송중기 #커피차 #재벌집막내아들 #빈센조 사랑합니당!!!”이라는 글과 함께 사진들을 게재했다. 이번에 공개된 사진에는 tvN 드라마 ‘빈센조’ 박재범 작가가 JTBC 새 드라마 ‘재벌집 막내 아들’ 촬영현장에 보낸 커피차 앞에서 즐거워하고 있는 송중기, 조한철의 모습이 담겨 있다. 무엇보다 송중기는 조한철 품에 안겨 있고, 조한철은 입술을 쭉 내밀며 애정을 뽐내고 있어 훈훈함을 자아냈다. 한편 ‘재벌집 막내아들’은 재벌 총수 일가의 오너리스크를 관리하는 비서 윤현우(송중기)가 재벌가의 막내아들로 회귀해 인생 2회차를 사는 판타지 드라마다.
  • 송중기, 한식당서 포착…핸드폰엔 ‘손가락걸이’

    송중기, 한식당서 포착…핸드폰엔 ‘손가락걸이’

    배우 송중기가 훈훈한 외모를 자랑했다. 송중기는 24일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별다른 코멘트 없이 사진을 게재했다. 사진에는 한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송중기의 모습이 담겼다. 송중기는 깔끔하게 정리된 헤어에 셔츠를 입어 훈훈한 외모를 드러냈다. 한편 송중기는 차기작 JTBC ‘재벌집 막내아들’로 돌아올 예정이다.
  • [STOP PUTIN] 마리우폴 빠져나온 엄마 “다섯 살 아들 지금도 빵 감춰요”

    [STOP PUTIN] 마리우폴 빠져나온 엄마 “다섯 살 아들 지금도 빵 감춰요”

    “아들 녀석이 지금도 빵을 자꾸 감추더라.” 우크라이나 마리우폴에 살며 세 아이를 키우다 지난달 중순 서부 르비우로 함께 탈출한 주부 나디아 데니센코(39)의 말이라고 영국 BBC가 3일(이하 현지시간) 전했다. 르비우는 이따금 러시아 군의 공습을 받긴 하지만 그래도 돈이 있으면 빵을 살 수 있는 곳인데 다섯 살 막내아들이 한사코 빵을 감추더란 것이다. 전기도 수도도 가스도 끊긴 채 3주 동안 포위된 도시에 살다가 가까스로 빠져나왔다고 했다. 며칠째 먹을 것이 없었고, 무엇보다 마실 물이 바닥 나자 탈출을 감행해야 했다. 나디아가 열네 살과 다섯 살 두 아들과 열두 살 딸을 데리고 친척 집을 찾아갔는데 “병에 든 물이 있다는 것을 알고 아주 기뻐했다. 하지만 몇 초 가지 않았다. 전쟁이 시작했을 때 막내아들이 ‘엄마, 빵이 좀 있으면 좋겠어요’ 하더라”며 기막혀 했다. 마리우폴 안에서 그들은 낮에는 두꺼운 벽 뒤에 딱 붙어 지냈고, 지하실에서 밤을 새웠다. 보통 새벽 5시면 잠을 깼다. 폭발 굉음 때문이었다. 먼 거리에서 들리기도 했지만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기도 했다. “지옥이었다. 그냥 지옥. 아침에 눈을 뜨면 어디인지도 모르는 곳에서 며칠을 살아냈다.” 마리우폴은 러시아 침공으로 가장 극심한 피해를 입은 곳이다. 수천명이 목숨을 잃었고, 하늘과 지상, 바다에서 포탄이 날아들었다. 거리나 건물이나 성한 것을 찾기가 힘들다고 했다. 나디아는 “심하게 폭격을 당했다. 그들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 우리 아들이 내게 묻길 ‘왜 폭발음이 들려요?’라고 묻더라. 그러면 난 ‘아들아 걱정 마. 그냥 폭죽놀이야’라고 답했다”고 말했다. 막내아들은 “왜 그들이 우리를 죽이려고 해요?”라고 묻곤 했다. 이웃들은 거리로 나와 얼마 안되는 음식을 조리하곤 했다. 외신 사진을 보며 왜 그러는가 싶었는데 나디아는 “집안보다 오히려 바깥이 따듯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마리우폴에 머물던 마지막 이틀 동안 먹을 것이 남아 있지 않았다. 시리얼도 오트밀도 떨어졌다. “돈을 갖고 있느냐가 문제가 아니었다. 도시에 음식이 남아 있는 게 없었다.” 탈출을 마음먹고 나왔을 때 차들이 모여 있는 곳이 있어 소개 집결지라고 생각했다. 러시아군의 포격이 시작됐다. “의도적이었다. 심한 폭격이 이어졌다.” 나디아는 한 남성이 자신과 아이들을 “반려견들처럼” 파괴된 건물 안에 밀어넣었다. 그나마 보호받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결과였다. 그러다 떠났을 때 “우리는 끔찍한 뭔가를 목격했다.” 자동차가 포탄에 한방 맞았다. 나디아 가족 등을 태우고 도시를 빠져나가려던 한 병사 운전자가 머리를 다쳐 사람들이 그를 지하실에 데려갔다. 의사도 아닌 한 소녀가 병사에게 실과 바늘을 주며 스스로 꿰매라고 했다. “이 모든 것을 보고 집에 돌아왔을 때 막내아들이 ‘엄마, 그들이 왜 우리를 죽이려고 해요?’라고 묻더라. 내가 뭐라고 했겠느냐. ‘낸들 알겠니’ 말했다.”며칠이 흘러 지난달 17일, 가족은 민간차량에 몸을 실어 마리우폴을 빠져나왔다. 망구시란 마을에 먼저 닿은 뒤 베르단스크로 향했는데 그곳도 이미 러시아 수중이었다. 해서 자포리자로 가는 버스를 탔다. 그 길에는 러시아군과 친러 반군이 세운 검문소가 즐비했다. “검문을 하며 특히 남자들과 휴대폰을 꼼꼼히 단속했다.” 나디아는 미리 마리우폴에서 찍힌 사진들을 모두 지워버렸다. “그 도시를 떠날 때 난 이미 더럽고 진흙 투성이였다. 샤워 한 번 하지 못했다. 마실 물도 없으면 사워 생각이 나지 않는다.” 자포리자에서 서부 르비우까지 오는 데 닷새나 걸렸다. 그나마 러시아군의 포격을 덜 당한 곳이었다. 물론 이곳에서도 공습 사이렌이 울리긴 했다. 하지만 하루에 몇 차례 뜸한 편이었다. “우리는 안전하다. 음식도 살 수 있다. 하지만 우리아들은 지금도 빵과 캔디를 감춘다. 지금 머무르는 작은아파트의 다른 곳에 숨겨두고 있다. 왜 그러느냐고 물으면 아들은 그래야 내일 먹을 게 있으니까 라고 답한다.” 자녀들이 트라우마를 잘 이겨낼 것이라고 나디아는 생각한다고 했다. 딸은 한사코 인터뷰 에 나타나고 싶지 않다고 했다. 활달한 아이였는데 새 도시에서 친구들을 사귀지도 않는다고 했다. 전쟁이 끝나 마리우폴이 재건되면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맥도날드 가게가 없는 점만 빼면 완벽한 도시였는데 모든 게 파괴돼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고 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를 못하겠다. 그들은 왜 이러는 거냐?”
  • [월드피플+] “엄마, 죽기 싫어요. 죽기에 전 너무 어려요” 6살 우크라 소년의 죽음

    [월드피플+] “엄마, 죽기 싫어요. 죽기에 전 너무 어려요” 6살 우크라 소년의 죽음

    “엄마, 죽기 싫어요. 죽기에 전 너무 어려요.” “무슨 소리야,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몇 시간 후, 6살 우크라이나 소년 막심 프랑코는 엄마 무릎 위에서 숨을 거뒀다. 지난달 26일(이하 현지시간)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 러시아군 포탄이 떨어졌다. 키이우 한 아파트에 살던 소년 막심의 가족은 서둘러 피란길에 올랐다. 소년의 어머니 안나 체첼니츠카(31)는 “근처 사는 친척 초대를 받아 놀러 간 사이 폭격이 심해졌다. 아이들을 데리고 친척 가족과 함께 다른 친척이 사는 리브네 지역으로 향했다. 아이들이 불안해했다”고 밝혔다. 특히 안나의 막내아들 막심은 “죽기 싫다”며 두려움을 감추지 못했다. 죽기에 자신은 너무 어리다며 공포에 떠는 아들을 엄마는 ‘아무 일 없을 것’이라고 다독였다.가족 6명은 차 한 대를 함께 타고 계속 서쪽으로 달렸다. 겨우 키이우 외곽 우크라이나군 검문소 앞에 도착한 그때, 러시아군의 무차별 포격이 시작됐다. 빗발친 러시아군 총탄에 운전대를 잡은 안나의 친척 남성 올렉산드르는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조수석에 앉아있던 그의 아내 나탈리아는 총 10발을 맞고 쓰러졌다. 뒷좌석에 탄 안나와 아이들도 모두 총에 맞았다. 안나는 머리에 총을 맞았고, 안나의 딸 알리나(13)는 오른손과 왼쪽 무릎에 총상을 입었다. 친척 어린이 보보(13) 역시 얼굴과 몸에 5발의 총알을 맞았다. 일대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여기저기서 비명이 쏟아졌고 사람들은 우왕좌왕했다. 안나는 무릎에 앉힌 아들을 안고 필사적으로 차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아들 막심은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어머니 안나는 22일 데일리메일과의 인터뷰에서 “우리가 막심을 끌어냈을 땐 이미 사망한 뒤였다. 나는 아들 시신을 끌어안고 비명을 지르며 돌아다녔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의식을 잃었다”고 설명했다. 안나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 곁은 딸이 지키고 있었다. 이후 안나는 누군가 부른 구급차를 타고 딸과 함께 병원으로 옮겨졌다. 다행히 안나도, 딸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같은 병원으로 이송된 친척 여성과 그의 아들도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안나는 부상과 아들을 잃은 슬픔으로 넋을 놓고 말았다. 안나는 “입원 첫날 나는 누구와도 의사소통할 수 없었다. 심지어 다친 내 딸을 밀쳐내기까지 했다. 내 아들 어디 갔느냐고 소리를 질렀다”고 말했다.그 사이, 아들의 시신은 병원 바닥에 방치됐다. 전쟁통에 시신을 수습해줄 이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데일리메일은 소년 막심의 시신이 상자로 대충 덮여 있었다고 전했다. 안나는 며칠 뒤에야 영안실로 옮겨진 아들의 시신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아들이 옆구리와 등에 총 7발을 맞았더라. 내가 아들을 구했어야 했다. 아들을 보호하는 게 엄마인 내 의무였지만 실패했다. 내가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가슴을 쳤다.지난 8일, 안나는 우크라이나 서부 르비우의 한 병원으로 옮겨져 머리에 박힌 총알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그동안 아들 막심의 시신은 안나의 전 남편이 수습했다. 안나는 “딸 알리나의 아버지, 전남편이 막심을 묻어줬다. 막심의 친아버지도 아닌데 그렇게 해줬다”고 설명했다. 이어 “아버지가 러시아의 침공 직전인 지난달 내 생일 때 돌아가셨는데, 아들은 그 옆에 묻혔다”고 덧붙였다. 안나는 현재 르비우 오빠 집에 머물며 회복 중이다. 부상도 부상이지만, 아들을 잃은 슬픔으로 거의 제정신이 아니다. 그러나 안나는 전쟁의 참혹함을 세상에 알리고자 인터뷰에 응했다. 안나는 “이혼 후 어렵게 살았다. 돈이 궁했고, 청소 일을 하며 겨우 먹고 살았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자란 아들은 나이보다 성숙했다”고 말했다. 이어 “겨우 6살이었지만 아들은 늘 어른스럽게 행동했다. 방 청소며 설거지며 늘 나를 도와주려 했다. 잔소리하지 않아도 알아서 숙제를 했다”고 오열했다.안나는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겠다. 우리가 왜 총에 맞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차 유리는 투명했다. 누구든 여자와 아이들이 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심지어 운전도 천천히 했다”고 토로했다. 안나는 “가여운 딸 알리나가 머리를 다친 나보다 더 많이 그날 일을 기억하고 있다”며 전쟁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우크라이나 어린이의 상황을 설명하기도 했다. 안나는 이어 “코끝에서 아들 냄새가 난다. 아들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꿈에 자꾸 아들이 나온다”면서 괴로움을 드러냈다.
  • 김치 품은 아프간 할랄 한 상… “우릴 구해 준 한국서 잘살 겁니다”[나를 살리는 밥심]

    김치 품은 아프간 할랄 한 상… “우릴 구해 준 한국서 잘살 겁니다”[나를 살리는 밥심]

    일상에 균열이 생겨도, 예기치 못한 일로 무너져 내려도 먹어야 삽니다. 시간이 지나 눈물 속에 먹던 음식이 ‘솔푸드’로 기억되기를, 살기 위해 억지로 먹은 밥이 일상을 되찾는 먼 훗날 성장의 밑거름이 되기를 막연히 기대하면서 오늘도 우리는 밥심으로 삽니다. 서울신문 사건팀이 밥심의 현장을 찾아 응원합니다. 이번에는 지난해 8월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을 피해 한국으로 온 무함마드 나위드(31)씨와 자마니 타예브(31)씨의 가족 밥상에 함께했습니다. 이들은 나름대로 자신의 문화를 지키면서도 한편으론 한국의 문화에 적응하며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 온 가족이 바닥에 둘러앉아 식사 지난 12일 경기 남양주에 있는 낡은 5층짜리 아파트. 이곳은 한국에 자리잡은 아프가니스탄 특별기여자 나위드씨와 그의 아내, 두 아들과 두 딸이 사는 보금자리다. 서툰 한국어로 ‘나위드 집’이라 적힌 현관문을 열고 집 안에 들어서자 아프가니스탄 대중가요가 방 안에서 흘러나왔다. 올해 5살인 딸은 한국 유치원에서 배운 동요 ‘반짝반짝 작은별’을 한국어로 불렀고 각각 9살·7살인 두 아들은 여느 한국 아이처럼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못한 채 수다를 떨었다.주말 오후 1시부터 비대면으로 한국어 강의를 듣는 부부는 조금 일찍 점심을 준비했다. 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그 위에 음식을 차린 후 가족이 주변에 빙 둘러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아프가니스탄 식문화는 좌식 문화다. 바닥에 카펫과 쿠션을 깔고 그 위에 앉아 음식을 먹는다. 돗자리 가운데에는 아프가니스탄식 볶음밥인 ‘커블리 팔라우’(Kabuli Palaw)가 놓였다. 한국 쌀과는 다른 긴 쌀(안남미)과 소고기 또는 양고기, 채 썬 당근과 건포도 등을 함께 조리해 먹는 요리다. 그 옆에는 밀가루 반죽을 얇게 구운 ‘블러니’(Bolani), 시금치 무침과 비슷한 반찬인 ‘사브지’(Sabzi), 아프가니스탄인들이 한국의 밥처럼 주식으로 먹는 빵이 차려졌다. 집에서 직접 만든 아프가니스탄식 플레인 요거트 ‘머스트’(Mast)와 우유 푸딩과 비슷한 디저트인 ‘프리니’(Feereny)까지 풀코스 요리였다. 나위드씨의 식사 자리에는 김치도 올라왔다. 나위드씨는 “한국 음식 중 야채 위주로 만든 김치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나위드씨 가족은 다행히 집에서 차로 15분 거리에 아랍 식재료와 ‘할랄 푸드’(무슬림이 먹을 수 있는 음식)를 살 수 있는 가게가 있다고 했다. 이들은 이곳에서 재료를 사서 대부분의 반찬을 만들어 먹는다.이튿날인 13일 인천 서구에 사는 타예브씨 가족의 식사 자리에서도 현지 음식을 맛볼 수 있었다. 사브지와 프리니 대신 미트볼을 넣고 끓인 국인 ‘슈르바’(Shurwa)와 야채를 넣고 끓인 국인 ‘숄라’(Shola)가 눈에 띄었다.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주식인 빵을 머스트나 슈르바에 찍어 먹는다. 커블리 팔라우와 고기 등을 싸서 함께 먹기도 한다. 네 아이를 둔 타예브씨 가족의 식사자리는 전쟁터였다. 부부는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7살 큰딸과 한 살 아래인 둘째 딸이 접시에 남긴 음식을 마저 먹었고 이제 겨우 2살인 셋째 딸이 온 입과 옷에 머스트를 묻히자 닦아 주기 바빴다. 태어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은 막내아들이 배고파 울자 타예브씨 부인은 식사를 멈추고 아이에게 달려갔다. ●“이사 앞두고 한국어 서툴러 걱정” 나위드씨는 아프가니스탄 바그람 공군기지 한국직업훈련원에서 자동차를, 타예브씨는 영어를 가르쳤다. 아프가니스탄에 탈레반 정권이 들어서면서 외국 정부를 위해 일한 자들을 잡아들인 탓에 한국 정부의 도움을 받아 아내와 아이들만 데리고 한국으로 왔다. 타예브씨는 “한국으로 온 후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의 우리집을 수색했다”면서 “어머니 등 남은 가족이 두려움에 떨었다”고 급박했던 당시 상황을 전했다. 나위드씨와 타예브씨 가족은 한국 생활에 많이 익숙해졌다. 나위드씨는 한국의 선진적인 정보기술(IT) 시스템이 가장 좋다고 했다. 그는 “한국은 GPS(위성항법장치)가 잘돼 있어 지도를 보기 편하고 스마트폰이나 대중교통, 은행 현금자동인출기(ATM) 등 시스템이 너무 잘돼 있다”고 극찬했다. 한국 음식에도 점차 적응해 가고 있다. 타예브씨는 “한국 음식은 건강한 방식으로 조리돼서 너무 좋다”고 했다. 타예브씨는 지난달 설날을 맞이해 직장에서 동료와 함께 떡을 나눠 먹기도 했다. 한국 정부의 초청으로 2010~2014년 매년 한국을 방문했던 나위드씨, 2016년 한국에 3주간 연수를 왔던 타예브씨와 달리 가족은 한국이란 나라가 처음이다. 나위드씨의 부인과 생후 10개월인 막내딸은 이달 초 코로나19에 걸렸으나 잘 이겨 냈다. 나위드씨의 두 아들과 타예브씨의 첫 딸은 3월부터 한국 초등학교에 다니는 중이다. 아직 익숙지 않은 한국어는 이들 가족에게 큰 장벽이다. 나위드씨는 “가족이 6명인데 이 인원으로는 택시를 탈 수 없다. 한국 운전면허를 따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겠다”면서 “곧 새집을 구해 이사도 해야 하는데 한국어를 잘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타예브씨는 “현재 한국어 강좌를 따로 듣고 있지 않다”면서 “직장 일이 바빠 여수에서 받은 한국어 책을 한 페이지도 펼쳐 보지 못했다”고 우려했다. ●“북적북적했던 대가족은 그리워” 지난해 8월 탈레반을 피해 급히 한국으로 입국할 당시 타예브씨 부인은 임신 중이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선 아이를 낳은 여성은 20일간 산후조리를 한다. 그사이 여성의 어머니가 와서 산후조리를 돕는다. 타예브씨는 “아내가 몸을 회복하고 있지만 아프가니스탄에서만큼 돌봄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아이를 낳으면 미역국을 먹듯이 아프가니스탄은 ‘야크니’(Yahni)를 먹는다. 돌봐 줄 가족도 마음 편히 회복할 여유도 없지만 야크니만은 고국에서처럼 만들어 먹으며 출산 후 몸을 돌보고 있다. 이들은 아프가니스탄에 남겨 둔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도 싸워야 한다. 나위드씨와 타예브씨 모두 고국에 부모님과 다른 형제가 남아 있다. 부모·형제들과 대가족을 이루고 사는 아프가니스탄인에게 부부와 어린 자녀로만 구성된 핵가족 문화는 외로움을 자아냈다. 나위드씨는 “아프가니스탄은 가족이 많아서 북적였던 점이 좋았다”면서 “지금은 한국에서 같은 동네에 사는 다른 아프가니스탄 특별 기여자 6가구와 함께 주말마다 만나며 가족을 대신하고 있다”고 말하며 미소 지었다. 그러면서도 한국에 온 지 8개월째 된 이들은 한국 정부에 감사를 표했다. 타예브씨는 “옷 두 벌만 들고 아프가니스탄을 급히 떠나 왔다. 우리의 집, 재산 등 모든 걸 잃었다”면서 “아프가니스탄의 급박한 상황에서 우리 가족을 구해 줘서 한국 정부에 너무 고맙다”고 말했다. 나위드씨는 “미국 정부와 일했던 사람들은 미국의 도움을 받아 미국 땅으로 갔다”면서 “미국으로 간 동료와도 종종 연락하는데 미국보다 한국의 지원이 훨씬 좋아서 자랑했다”고 말했다. 이제는 한국에 잘 정착해서 가족과 행복하게 사는 것이 이들의 꿈이다. 타예브씨는 “우리 아이들을 위해 햇빛이 드는 집으로 이사하고 아이들을 훌륭히 교육시키고 가족들을 잘 돌보고 싶다”며 한국에서의 목표를 전했다. 요리를 좋아하는 나위드씨는 언젠가 한국에 음식점을 내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에서 가족들과 직원이 25명이나 되는 큰 음식점을 운영했었다”면서 “나중에 한국에서도 아프가니스탄 음식점을 열고 싶다”고 말했다.
  • ‘한국 생활 7개월차’ 아프간 기여자…팔라우와 김치의 절묘한 조화로 푸짐한 한끼

    ‘한국 생활 7개월차’ 아프간 기여자…팔라우와 김치의 절묘한 조화로 푸짐한 한끼

    일상에 균열이 생겨도, 예기치 못한 일로 무너져 내려도 먹어야 삽니다. 시간이 지나 눈물 속에 먹던 음식이 ‘솔푸드’로 기억되기를, 살기 위해 억지로 먹은 밥이 일상을 되찾는 먼 훗날 성장의 밑거름이 되기를 막연히 기대하면서 오늘도 우리는 밥심으로 삽니다. 서울신문 사건팀이 밥심의 현장을 찾아 응원합니다. 이번에는 지난해 8월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을 피해 한국으로 온 무함마드 나위드(31)씨와 자마니 타예브(31)씨의 가족의 밥상에 함께 했습니다. 이들은 나름대로 자신의 문화를 지키면서도 한편으론 한국의 문화에 적응하며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가족이 빙 둘러앉아 식사…인근 할랄 푸드 가게서 구입 지난 12일 경기 남양주시에 있는 낡은 5층짜리 아파트. 이곳은 한국에 자리 잡은 아프가니스탄 특별기여자 나위드씨와 그의 아내, 두 아들과 두 딸이 사는 보금자리다. 서툰 한국어로 ‘나위드 집’이라 적힌 현관문을 열고 집 안에 들어서자 아프가니스탄 대중가요가 방 안에서 흘러나왔다. 올해 5살인 딸은 한국 유치원에서 배운 동요 ‘반짝반짝 작은별’을 한국어로 불렀고 각각 9살·7살인 두 아들은 여느 한국 아이처럼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못한 채 수다를 떨었다. 주말 오후 1시부터 비대면으로 한국어 강의를 듣는 부부는 조금 일찍 점심을 준비했다. 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그 위에 음식을 차린 후 가족이 주변에 빙 둘러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아프가니스탄 식문화는 좌식 문화다. 바닥에 카페트와 쿠션 깔고 그 위에 앉아 음식을 먹는다. 돗자리 가운데에는 아프가니스탄식 볶음밥인 ‘커블리 팔라우(Kabuli Palaw)’가 놓였다. 한국 쌀과는 다른 긴 쌀(안남미)과 소고기 또는 양고기, 채 썬 당근과 건포도 등을 함께 조리해 먹는 요리다. 그 옆에는 밀가루 반죽을 얇게 구운 ‘블러니(Bolani)’, 시금치 무침과 비슷한 반찬인 ‘사브지(Sabzi)’, 아프가니스탄인들이 한국의 밥처럼 주식으로 먹는 빵이 차려졌다. 집에서 직접 만든 아프가니스탄식 플레인 요거트 ‘머스트(Mast)’와 우유 푸딩과 비슷한 디저트인 ‘프리니(Feereny)’까지 풀코스 요리였다. 나위드씨의 식사 자리에는 김치도 올라왔다. 나위드씨는 “한국 음식 중 야채 위주로 만든 김치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나위드씨 가족은 다행히 집에서 차로 15분거리에 아랍 식재료와 ‘할랄 푸드(무슬림이 먹을 수 있는 음식)’를 살 수 있는 가게가 있다고 했다. 이들은 이곳에서 재료를 사서 대부분의 반찬을 만들어 먹는다.이튿날인 13일 인천 서구에 사는 타예브씨 가족의 식사 자리에서도 현지 음식을 맛볼 수 있었다. 사브지와 프리니 대신 미트볼을 넣고 끓인 국인 ‘슈르바(Shurwa)’와 야채를 넣고 끓인 국인 ‘숄라(Shola)’가 눈에 띄었다.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주식인 빵을 머스트나 슈르바에 찍어 먹는다. 커블리 팔라우와 고기 등을 싸서 함께 먹기도 한다. 네 아이를 둔 타예브씨 가족의 식사자리는 전쟁터였다. 부부는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7살 큰 딸과 한 살 아래인 둘째 딸이 접시에 남긴 음식을 마저 먹었고 이제 겨우 2살인 셋째 딸이 온 입과 옷에 머스트를 묻히자 닦아주기 바빴다. 태어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은 막내아들이 배고파 울자 타예브씨 부인은 식사를 멈추고 아이에게 달려갔다. “한국 선진 시스템에 놀라…한국어 익숙하지 않아” 나위드씨는 아프가니스탄 바그람 공군기지 한국직업훈련원에서 자동차를, 타예브씨는 영어를 가르쳤다. 아프가니스탄에 탈레반 정권이 들어서면서 외국 정부를 위해 일한 자들을 잡아들인 탓에 한국 정부의 도움을 받아 아내와 아이들만 데리고 한국으로 왔다. 타예브씨는 “한국으로 온 후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의 우리집을 수색했다”면서 “어머니 등 남은 가족이 두려움에 떨었다”고 급박했던 당시 상황을 전했다. 나위드씨와 타예브씨 가족은 한국 생활에 많이 익숙해졌다. 나위드씨는 한국의 선진적인 정보기술(IT) 시스템이 가장 좋다고 했다. 그는 “한국은 GPS(위성항법장치)가 잘 돼 있어 지도를 보기 편하고 스마트폰이나 대중교통, 은행 현금자동인출기(ATM) 등 시스템이 너무 잘 돼있다”고 극찬했다. 한국 음식에도 점차 적응해가고 있다. 타예브씨는 “한국 음식은 건강한 방식으로 조리돼서 너무 좋다”고 했다. 타예브씨는 지난달 설날을 맞이해 직장에서 동료와 함께 떡을 나눠먹기도 했다.한국 정부의 초청으로 2010~2014년 매년 한국을 방문했던 나위드씨, 2016년 한국에 3주간 연수를 왔던 타예브씨와 달리 가족은 한국이란 나라가 처음이다. 나위드씨의 부인과 생후 10개월인 막내딸은 이달 초 코로나19에 걸렸으나 잘 이겨냈다. 나위드씨의 두 아들과 타예브씨의 첫 딸은 3월부터 한국 초등학교에 다니는 중이다. 아직 익숙지 않은 한국어는 이들 가족에게 큰 장벽이다. 나위드씨는 “가족이 6명인데 이 인원으로는 택시를 탈 수 없다. 한국 운전면허를 따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겠다”면서 “곧 새집을 구해 이사도 해야 하는데 한국어를 잘 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타예브씨는 “현재 한국어 강좌를 따로 듣고 있지 않다”면서 “직장 일이 바빠 여수에서 받은 한국어 책을 한 페이지도 펼쳐보지 못 했다”고 우려했다. “북적했던 대가족은 그리워…아프간 음식점 열고 싶다” 지난해 8월 탈레반을 피해 급히 한국으로 입국할 당시 타예브씨 부인은 임신 중이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선 아이를 낳은 여성은 20일간 산후조리를 한다. 그 사이 여성의 어머니가 와서 산후조리를 돕는다. 타예브씨는 “아내가 몸을 회복하고 있지만 아프가니스탄에서 만큼 돌봄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아이를 낳으면 미역국을 먹듯이 아프가니스탄은 ‘야크니(Yahni)’를 먹는다. 돌봐줄 가족도 마음 편히 회복할 여유도 없지만 야크니만은 고국에서처럼 만들어 먹으며 출산 후 몸을 돌보고 있다.이들은 아프가니스탄에 남겨둔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도 싸워야 한다. 나위드씨와 타예브씨 모두 고국에 부모님과 다른 형제가 남아 있다. 부모·형제들과 대가족을 이루고 사는 아프가니스탄인에게 부부와 어린 자녀로만 구성된 핵가족 문화는 외로움을 자아냈다. 나위드씨는 “아프가니스탄은 가족이 많아서 북적였던 점이 좋았다”면서 “지금은 한국에서 같은 동네에 사는 다른 아프가니스탄 특별 기여자 6가구와 함께 주말마다 만나며 가족을 대신하고 있다”고 말하며 미소지었다. 그러면서도 한국에 온 지 8개월째 된 이들은 한국 정부에 감사를 표했다. 타예브씨는 “옷 두벌만 들고 아프가니스탄을 급히 떠나왔다. 우리의 집, 재산 등 모든걸 잃었다”면서 “아프가니스탄의 급박한 상황에서 우리 가족 구해줘서 한국 정부에게 너무 고맙다”고 말했다. 나위드씨는 “미국 정부와 일했던 사람들은 미국의 도움을 받아 미국 땅으로 갔다”면서 “미국으로 간 동료와도 종종 연락하는데 미국보다 한국의 지원이 훨씬 좋아서 자랑했다”고 말했다. 이제는 한국에 잘 정착해서 가족과 행복하게 사는 것이 이들의 꿈이다. 타예브씨는 “우리 아이들을 위해 햇빛이 드는 집으로 이사하고 아이들을 훌륭히 교육시키고 가족들을 잘 돌보고 싶다”며 한국에서의 목표를 전했다. 요리를 좋아하는 나위드씨는 언젠가 한국에 음식점을 내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에서 가족들과 직원이 25명이나 되는 큰 음식점을 운영했었다”면서 “나중에 한국에서도 아프가니스탄 음식점을 열고 싶다”고 말했다.
  • 도산의 마지막 핏줄, 3·1절 앞두고 눈감다

    도산의 마지막 핏줄, 3·1절 앞두고 눈감다

    일제에 맞서려 美 해군 복무LA한인사회 정신적 지도자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 선생의 막내아들이자 LA 한인사회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안필영(미국명 랠프 안) 선생이 지난 26일(현지시간) 별세했다. 96세. 현지 한인단체 대한인국민회기념재단과 LA 한인회는 안 선생이 이날 밤 LA에서 눈을 감았다고 전했다. 그는 최근까지 숙환으로 병원 입원 중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도산 선생의 3남 2녀 중 셋째 아들인 고인은 생존한 유일한 핏줄이었다. 그는 아버지인 도산이 미국에서 해외 독립운동의 기틀을 닦은 뒤 활동처를 중국 상하이로 옮겼을 때인 1926년 LA에서 태어났다. 캘리포니아주립대학 졸업 후 진주만 공습을 감행한 일본군에 맞서 싸우기 위해 미 해군에 입대해 복무했다. 2차 대전 종전 이후에는 독립유공자이자 한국계 미국인 배우로 활약한 큰형 안필립 선생의 영향을 받아 배우로 활동했다. 한국전이 배경인 1950년대 영화 ‘배틀서커스’, ‘미션 오버 코리아’ 등에 출연했고 2000년대 중반까지 다양한 영화, TV 드라마에서 한국계 배우로 등장했다. 또 캘리포니아주 고등학교 체육 교사로도 재직하며 학생을 가르쳤다. 고인은 특히 부친의 유지를 받들어 형제들과 함께 LA 한인사회에서 독립운동의 역사를 증언하는 등 정신적 지도자 역할을 했다. 최근까지도 3·1절 및 광복절 기념 행사 등에 빠짐없이 참석하는 등 부친의 독립운동 정신을 기렸다. 윤효신 대한인국민회기념재단 이사장은 “고인은 우리의 기둥이었다”고 애도했고, 제임스 안 LA 한인회장은 “3·1절을 앞두고 돌아가셔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고 말했다. 유족으로 부인과 두 딸이 있다.
  • 가족밴드 ‘작은별 가족’ 강문수 감독 별세

    가족밴드 ‘작은별 가족’ 강문수 감독 별세

    1970∼80년대 인기를 누린 가족 밴드 ‘작은별 가족’으로 유명한 영화감독 강문수씨가 별세했다. 99세. 14일 대중음악계와 영화계에 따르면 강 감독은 이날 숙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1923년 함경남도 흥남에서 태어난 고인은 국내 최초 TV 방송인 HLKZ-TV를 비롯해 KBS·MBC·TBC 등에서 작가 겸 연출가로 일했으며 1949년 ‘늙은광대’를 통해 영화감독으로 데뷔했다. 고인은 1975년 한국판 ‘사운드 오브 뮤직’인 가족 영화 ‘작은 별’이 인기를 끌면서 밴드 작은별 가족을 결성했다. 서울대 성악과 출신인 아내 주영숙씨와 6남 1녀의 자녀들과 함께한 9인조 가족 밴드다. 이듬해 발표한 TV 만화영화 주제곡 모음집과 1977년 데뷔 음반도 인기를 끌었다. 당시 밴드에서 활동한 외동딸 강애리자는 1988년 솔로곡 ‘분홍 립스틱’을 히트시켰고, 막내아들 강인봉은 포크 그룹 자전거탄풍경에서 활동하고 있다. 1970년대 ‘유괴’, ‘레인보우’ 등을 연출한 이후 공백기를 가졌던 고인은 1991년 복귀작 ‘어허 어이 어이 가리’로 대종상영화제 특별작품상을 받았다. 이후 ‘불의 태양’(1994), ‘미친것들’(1997), ‘핫 썸머’(2002) 등의 작품을 선보였다. 빈소는 서울 성동구 한양대병원 장례식장이며 발인은 16일 오전 5시 20분이다.
  • 한국판 ‘사운드 오브 뮤직’…‘작은별 가족’ 강문수 감독 별세

    한국판 ‘사운드 오브 뮤직’…‘작은별 가족’ 강문수 감독 별세

    1970∼80년대 인기를 누린 가족 밴드 ‘작은별 가족’으로 유명한 영화감독 강문수씨가 별세했다. 99세. 14일 대중음악계와 영화계에 따르면 강 감독은 이날 숙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1923년 함경남도 흥남에서 태어난 고인은 국내 최초 TV 방송인 HLKZ-TV를 비롯해 KBS·MBC·TBC 등에서 작가 겸 연출가로 일했으며 1949년 ‘늙은광대’를 통해 영화감독으로 데뷔했다. 고인은 1975년 한국판 ‘사운드 오브 뮤직’인 가족 영화 ‘작은 별’이 인기를 끌면서 밴드 작은별 가족을 결성했다. 서울대 성악과 출신인 아내 주영숙씨와 6남 1녀의 자녀들과 함께한 9인조 가족 밴드다. 이듬해 발표한 TV 만화영화 주제곡 모음집과 1977년 데뷔 음반도 인기를 끌었다. 당시 밴드에서 활동한 외동딸 강애리자는 1988년 솔로곡 ‘분홍 립스틱’을 히트시켰고, 막내아들 강인봉은 포크 그룹 자전거탄풍경에서 활동하고 있다. 1970년대 ‘유괴’, ‘레인보우’ 등을 연출한 이후 공백기를 가졌던 고인은 1991년 복귀작 ‘어허 어이 어이 가리’로 대종상영화제 특별작품상을 받았다. 이후 ‘불의 태양’(1994), ‘미친것들’(1997), ‘핫 썸머’(2002) 등의 작품을 선보였다. 작은별 문화센터 회장, 주식회사 작은별 대표이사, 재단법인 한일문화협회 한국협회장 등을 역임했다. 빈소는 서울 성동구 한양대병원 장례식장이며 발인은 16일 오전 5시 20분이다.
  • [월드피플+] “엄마!” 불난 집서 코로나로 후각 잃은 부모 살린 아기

    [월드피플+] “엄마!” 불난 집서 코로나로 후각 잃은 부모 살린 아기

    코로나19 후유증으로 타는 냄새조차 맡지 못한 부모를 2살 아기가 구했다. 28일(이하 현지시간) 워싱턴포스트는 불 난 집에서 제일 먼저 위험을 감지한 ‘가족의 영웅’ 네이슨 달(2)을 소개했다. 지난 15일, 미국 텍사스주 포트워스시 외곽 와이즈카운티의 작은 마을 앨보드에서 주택 화재가 발생했다. 불은 삽시간에 번졌고, 6년간 일가족의 보금자리였던 집은 겨우 뼈대만 남았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인명 피해가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모두, 이 집에 살던 2살 아기 네이슨 덕이다. 이날 새벽 4시 30분쯤, 단잠에 빠져있던 카일라 달(28) 부인은 아들이 깨우는 소리를 들었다. 부인은 “침대로 온 아들이 발을 두드리더라. 처음에는 잠옷을 벗겨달라는 줄 알았다”고 밝혔다. 하지만 부인이 아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눈앞은 시뻘건 불길과 연기로 가득했다.네이슨은 “엄마, 뜨거워요(Mama, hot)”라는 말을 반복했다. 괜한 잠투정이 아니라, 집에 불이 났다는 걸 알리러 온 것이었다. 부인은 “아들이 기침하며 뜨겁다고 내 발을 두드렸다. 애들을 데리고 무조건 여기서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고 설명했다. 부인은 남편과 함께 네이슨 등 자녀 다섯 명을 데리고 가까스로 불 난 집을 탈출했다. 일가족 7명이 탈출하자마자 불길은 집 전체를 휘감았다. 잠잠하던 화재경보기는 그제야 위험을 알렸다. 부부는 코로나19 후유증으로 미각과 후각을 상실했다. 두 사람 모두 집 안을 가득 채운 연기 냄새를 맡지 못한 이유다. 게다가 정기 점검에서는 멀쩡했던 화재경보기까지 하필 이날 오작동했다. 하마터면 일가족 모두 목숨을 잃을 뻔한 것이다.부인은 “막내아들 네이슨은 원래 형과 같이 잔다. 그런데 불이 난 날 몸이 좋지 않아서 부부 침실과 이어진 거실에 재웠다. 우리는 냄새를 못 맡아 불이 난 줄도 몰랐는데, 네이슨이 화염으로 가득 찬 거실을 빠져나와 침실로 왔다. 기적이다. 신의 은총이다”라고 감격스러워했다. 이어 “우리 가족이 6년간 산 집이 한순간에 잿더미가 됐다. 차 두 대도 전소됐다. 모든 것이 사라졌다. 앞으로 험난한 삶이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네이슨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막내아들이 우리를 살렸다. 자신은 물론 가족 모두를 구했다”고 기특해했다. 임시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인터넷 모금함을 설치한 이들 가족은 다음 주말 막내아들을 위해 작은 파티를 열 생각이다. 부인은 “아들은 아직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 잘 모르는 것 같다. 하지만 자신에게 쏟아지는 많은 관심은 즐기고 있다”고 웃어 보였다.텍사스주에서는 꼭 1년 전에도 비슷한 사고가 있었다. 지난해 1월 텍사스주 와코 지역 한 가정집에서는 코로나19로 후각을 상실한 일가족 3명이 불이 난 집에서 잠을 자다 겨우 탈출했다. 일가족은 잠시 집에 신세를 지고 있던 친척 소녀 덕에 목숨을 건졌다. 소녀는 그 집에서 유일하게 코로나19에 걸리지 않은 사람이었다. 최근 미국 유전자 분석 기업 ‘23앤드미’ 연구에 따르면, 코로나19에 걸렸던 사람 6만 9841명 중 4만 7298명이 냄새나 맛을 잘 느끼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국제학술지 ‘셀’(Cell)에 발표된 논문에 따르면, 코로나19로 인한 후각 장애는 바이러스가 ‘지지세포’를 감염시키기 때문으로 드러났다. 콧속 비강에는 냄새를 감지하는 후각상피가 있다. 후각상피는 후신경세포, 지지세포, 기저세포 등으로 구성돼 있다. 후신경세포는 냄새를 신경 신호로 뇌에 전달하며 지지세포는 이런 후신경세포를 지지한다. 독일과 벨기에, 미국 공동연구팀은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이 지지세포를 감염 시켜 후각 장애가 일어나는 것으로 분석했다.
  • 英 ‘두 아이 아빠’가 찾은 희귀 금화, 8억원 넘는 거액에 팔려

    英 ‘두 아이 아빠’가 찾은 희귀 금화, 8억원 넘는 거액에 팔려

    영국에서 두 아이의 아버지가 찾은 희귀 금화가 우리 돈으로 8억원이 넘는 거액에 낙찰됐다. 24일(현지시간) 데일리메일 등 현지매체 보도에 따르면, 지난해 9월 데번주 헤묘크의 한 농경지에서 마이클 리맬러리가 발견한 희귀 금화가 최근 런던에서 열린 경매에 나와 54만 파운드(약 8억 7200만원)에 낙찰됐다. 낙찰자는 익명의 개인 수집가다. 그는 중계 수수료를 더해 총 64만 8000파운드(약 10억 4600만원)를 냈다. 리맬러리는 앞서 인터뷰에서 금속 탐지기를 사용해 옛날 동전 찾기에 나섰다가 금화를 발견했고, 최근 소셜미디어 서비스(SNS)에 사진을 공개하기 전까지 금화의 가치를 알지 못했다고 밝혔다. 금화는 런던 경매업체 한 전문가가 우연히 사진을 보게 돼 세상에 존재가 드러났다.리맬러리는 경매 수익금을 토지 소유자와 절반으로 나누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가 받는 돈은 27만파운드(약 4억 3600만원)다. 수익금은 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하고 싶어하는 큰딸 에밀리(13)와 역사 마니아인 막내아들 해리(10)의 미래를 위해 쓸 계획이다. 희귀 금화는 1257년 잉글랜드의 왕인 헨리 3세(재위 1216~1272) 통치 당시 처음으로 주조됐던 것 중 하나다. 당시 약 5만 2000개의 금화가 주조됐지만, 헨리 3세가 죽은 뒤 유통이 중단됐고 대부분 녹여서 다른 용도로 쓰였다. 금이 당시 화폐보다 훨씬 더 높은 가치를 지녔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헨리 3세 당시 금화는 이번에 발견된 것까지 총 8개다. 나머지는 런던 대영박물관 등과 개인 수집가가 소장하고 있다. 금화 주조에 들어간 금은 북아프리카에서 수입한 것이며, 금화 앞면에는 턱수염을 기른 채 왕관을 쓴 왕의 모습과 이름이, 뒷면에는 긴 십자가와 꽃 등이 새겨져 있다. 화폐 전문가들에 따르면 해당 금화는 영국 역사상 왕의 얼굴을 가장 사실적으로 담은 것으로 꼽힌다.
  • 카불공항 미군에 건네진 뒤 사라진 갓난 아기, 넉달 만에 외조부 품에

    카불공항 미군에 건네진 뒤 사라진 갓난 아기, 넉달 만에 외조부 품에

    왼쪽이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에서 택시 운전사로 일하는 하미드 사피(29)다. 지난해 8월 19일(이하 현지시간) 형 가족을 공항에 데려다주고 돌아오다 공항 바닥에서 혼자 울고 있는 갓난 사내아이를 발견하고 집으로 데려와 길렀다. 아들이 없었던 그에겐 이 아기가 하늘이 내린 선물처럼 여겨져 애지중지 키웠다. 그런데 이 아기는 탈레반의 재장악에 겁을 먹고 조국을 떠나려던 이들이 아비규환을 이룬 카불공항의 철조망 너머 미군 병사에게 건네졌다 실종된 아기 중 한 명이었다. 사피는 지난 8일 오른쪽 외할아버지 무함마드 카셈 라자위에게 아기를 돌려주며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9일 로이터 통신의 단독 보도로 아기가 넉 달 만에 외할아버지 품에 안기게 된 극적인 사연이 처음 알려졌다. 당장 영화로 만들어도 될 만큼 많은 얘기가 담겨 있다. 미르자 알리 아흐마디(35)와 수라야(32) 부부는 17세, 9세, 6세, 3세, 그리고 생후 두 달 된 소하일 등 다섯 자녀를 데리고 그날 카불공항에 도착했다. 아흐마디는 카불 주재 미국 대사관에서 10년 동안 경비원으로 일한 경력 때문에 탈출해야만 살 수 있다고 믿었다. 철조망 너머 미군 병사가 도움이 필요하냐고 물었고, 부부는 막내아들 소하일이 군중에 떠밀려 압사할 것을 우려해 팔을 위로 들어 아기를 건넸다. 아흐마디는 “입구가 불과 5m 앞이라서 곧바로 아기를 되찾을 것으로 생각해 건넸는데, 갑자기 탈레반이 피난민들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반대편 입구를 찾아 공항에 들어갈 때까지 30분 넘게 걸렸다”고 당시를 돌아봤다. 부부는 공항 안에 들어간 뒤 사흘 동안 필사적으로 소하일을 찾았지만 아무도 소식을 알지 못했고, 결국 소하일 없이 가족들은 카타르와 독일을 거쳐 미국 텍사스주의 난민촌에 도착했다. 소하일이 미군에 건네질 당시 사진은 찍히지 않았다. 같은 날 공항 철조망 너머 미군에 건네지는 모습이 촬영된 생후 16일된 여아 리야는 가족과 곧바로 상봉해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의 친척 집에서 부모와 함께 지내고 있다. 소하일의 부모는 미국에 도착한 뒤에도 계속해서 아들을 찾아달라고 부탁했고, 한 지원단체가 지난해 11월 초 소하일의 사진을 넣은 ‘실종 아기’ 게시물을 만들어 소셜미디어에 옮겨 날랐고, 이를 보도한 로이터 통신 보도가 하나의 계기가 됐다. 같은 달 말 한 카불 시민이 사진의 아기가 이웃집에 입양된 아기 같다고 제보했던 것이다. 알고 보니 사피는 페이스북에 소하일의 사진까지 버젓이 올려놓고 있었다. 사피는 “난 딸만 셋을 뒀는데 어머니가 죽기 전 소원이 손자를 보는 것이라 하셨다”며 “그래서 내가 키우기로 하고, 집으로 데려와 ‘무함마드 아베드’란 이름을 붙여줬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도 소하일을 발견한 뒤 부모를 찾아주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소용이 없어 할 수 없이 집에 데려와 키우기로 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소하일의 친부모는 아프간에 남아있는 친척들에게 소하일을 찾아가봐달라고 부탁했고, 북동부 바다크샨 지방에 멀리 떨어져 사는 소하일의 외할아버지 등이 카불의 사피를 찾아가 양과 호두, 옷가지 등을 선물로 주며 아이를 돌려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사피는 거부하고 자신과 가족들도 미국으로 함께 갈 수 있게 해달라고 매달렸다. 그 바람에 7주남짓 두 가족은 밀고당기기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소하일의 친부모는 국제 적십자사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소용이 없자 결국 소하일의 외할아버지가 탈레반 경찰에 도움을 요청했다. 경찰은 ‘아기 납치 사건’으로 수사하지 않는 대신 두 가족의 협상을 중재해 경찰이 지켜보는 가운데 소하일이 외할아버지의 품에 안겼다. 그동안 정이 많이 든 사피 부부는 아기를 돌려주면서 많은 눈물을 쏟아냈다. 소하일의 가족은 다섯 달 동안 아기를 돌본 대가로 사피에게 10만 아프가니(약 115만원)를 지급하기로 했다. 영상통화로 소하일의 얼굴을 본 친부모는 도와준 모든 이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이른 시일 안에 소하일을 미국으로 데려오고 싶다는 희망을 밝혔다. 외할아버지 라자위는 현재 미시건주에 정착해 살고 있는 사위가 “아들 얼굴을 다시 보게 된 기쁨에 취해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더라”고 전했다.
  • “아직 살아 있어요!” 터키 사산아, 장례 직전 ‘응애’…산 채로 묻을 뻔

    “아직 살아 있어요!” 터키 사산아, 장례 직전 ‘응애’…산 채로 묻을 뻔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기가 매장 직전 울음을 터트렸다. 사산아라는 병원 말만 믿고 사망진단서까지 뗀 부모는 “하마터면 산 채로 아기를 묻을 뻔했다”며 아연실색했다. 지난 2일(현지시간) 터키 중남부 아다나주 유레기르의 한 병원에서 사산아가 나왔다. 하산 서트(34)와 멜렉 서트(32) 부부는 “이름까지 지어두었는데 막내아들이 죽어서 태어났다”고 밝혔다. 아기 엄마 멜렉은 “임신 5개월 만에 조산했다. 의사는 아기가 죽었다고 했다”고 설명했다.부모는 빛도 보지 못하고 숨진 아기를 위해 정성껏 장례를 준비했다. 인근 근린공원에 장지도 봐뒀다. 그런데 매장 직전, 시신 가방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기 아빠 하산은 “병원에서 아기를 작은 시신 가방에 넣어줬다. 그런데 운구 길에 아내가 아기 울음소리가 난다더라. 착각한 거로 생각했는데, 나도 아기 울음소리를 들었다. 시신 가방을 열자 세 번째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기가 아직 살아있었다”라고 밝혔다.부모는 구조대와 함께 아기를 급히 병원으로 옮겼다. 엄마는 그때야 아기 얼굴을 확인했다. 아기 엄마는 5일 터키 관영 아나돌루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출산 때는 아기 뒤통수밖에 보지 못했다. 이번에 병원에서 아기 얼굴을 처음 봤다. 손도, 발도 모두 정상이고 심장도 뛰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부모는 병원을 상대로 고소장을 접수했다. 아기 아빠는 “멀쩡히 살아있는 아기를 죽었다고 하는 바람에, 하마터면 산 채로 아기를 묻을 뻔했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사망진단서를 발급받고 묏자리까지 팠다며 병원 측을 강하게 비난했다. 관련 당국은 병원 과실이 있었는지 조사에 착수했다.현재 아기는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서있다. 상태가 위중해 경과는 지켜봐야 한다. 아기 엄마는 “아기가 살아있는 건 확인했는데, 의사 말로는 아기가 위독하다고 한다. 더 이상의 정보는 없다. 아기가 무사하길 기도하며 기다릴 뿐이다”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아기가 무사히 고비를 넘기면 원래 지어뒀던 ‘이브라힘’이라는 이름 대신에 ‘사바쉬’라는 이름을 붙여줄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사바쉬는 투쟁, 전투라는 뜻의 남자이름이다.
  • 압류 딱지 넘어 홀로 아이 셋 키운 모정…“상담 주저하지 마세요”

    압류 딱지 넘어 홀로 아이 셋 키운 모정…“상담 주저하지 마세요”

    [2022 희망을 찾아 빚을 넘은 사람들 : 2회] 빚더미에 깔려 생긴 마음의 병1500만원 대출 겨우 갚았더니아들 다치며 또 병원비 필요해“힘든 상황이라면 상담받길”8801만원. 우리나라 가구당 평균 부채액(2021년 3월기준)이다. 자신이나 가족의 병원비가 급하게 필요해서, 일을 해서 번 돈으로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는 지독한 가난 탓에, 어떻게든 사업을 이어가보려 돈을 꿨다가 제때 갚지 못해 ‘채무 불이행자’ 딱지가 붙는 일은 생각보다 흔하다. 지난해부터 확산한 코로나19로 빚에 허덕이는 이들은 더 많아졌다. 빚에 무너진 삶을 다시 세우는 건 버겁긴 해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서울신문은 새해를 맞아 빚의 굴레를 끊고 새 삶을 찾은 이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모두 서민금융 제도의 도움과 강한 의지 덕에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 서울신문은 희망을 찾아 빚을 넘은 이들의 이야기를 좀 더 다양하게 담아내고자 서민금융진흥원과 한국웹툰협회의 도움을 받아 웹툰으로도 이야기를 그렸다. 이번 회 주인공은 본인의 요청으로 익명 처리했다. “‘엄마, 우리 감옥 가요?’라고 묻는 큰아들의 전화에 급하게 택시를 타고 갔더니 애들 셋이 떨고 있더라고요.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아요.” 홀로 아이 셋을 키운 정지수(60·가명)씨는 이혼과 경제적 어려움이 겹쳤던 지난 2007년을 떠올리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집에 압류 딱지가 붙은 날만은 선명하게 기억에 새겨진 상태였다. 당시 첫째 아들은 초등학생에 불과했다. 압류 딱지가 붙었지만 집계된 전 재산은 11만원. 정씨는 “돈이 되는 물건이 없어서 그런지 물건을 가지고 가지도 않더라”고 말했다. 아이들이 커 갈수록 식비, 교육비 등 필요한 돈은 많아졌다. 지인들에게 빌린 돈으로 어렵게 몸을 누일 곳을 구했지만 임대사업자의 부도로 보증금 800만원을 날렸다. 시중은행 대출을 받고도 추가로 3곳에서 카드론을 받아야 했다. 정씨가 감당해야 했던 대출금리는 연 14%대가 넘었다. 그렇게 2002년부터 불어난 빚이 1500만원이었다.아르바이트는 물론 공공근로까지 돈을 벌 수 있다면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하지만 죽어라 일해도 수중에 들어오는 돈은 100만원 남짓이었다. 매달 수입도 일정치 않아 갚아야 할 돈은 늘어났다. 그렇게 3년이 지나고 빚 독촉이 시작됐다. 좀처럼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고, 우울감이 온몸을 뒤덮었다. 정씨는 “창밖을 보고 있으면 뛰어내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했다. 정씨가 녹록지 않은 상황으로 힘들어하는 모습을 지켜본 지인은 파산을 권유했지만, 정씨는 “내 자식 먹이느라 빌린 돈만은 직접 갚아야 아이들이 잘될 것 같다”며 꿋꿋이 빚을 갚아 나갔다. 더 나은 일을 찾기 위해 틈틈이 딴 자격증만 15개인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압류 집행관은 정씨의 사정을 듣고 신용회복위원회 상담을 권했다. 정씨는 신용회복위를 통해 매달 15만원씩 빚을 갚아 나갔다. 8년 동안 연체 한 번 없이 1500만원 빚을 모두 청산했다.하지만 시련은 또 한꺼번에 정씨를 덮쳤다. 2018년 막내아들이 넘어져 꼬리뼈를 다치면서 급하게 병원비를 구해야 했다. 아들의 사고에 마음을 쓰던 정씨도 뒤이어 화장실에서 쓰러지면서 치아를 다쳤다. 정씨는 쓰러지는 순간까지 몸 상태보다 나가야 할 돈이 더 걱정됐다. 아들이 아프고 정씨마저 몸이 성치 않아 3개월간 일을 할 수 없었다. 용돈 한번 제대로 챙기지 못했던 정씨의 어머니도 같은 해에 세상을 떴다. 다시 우울감이 드리워 올 즈음 정씨는 서민금융진흥원 미소금융을 통해 저금리 대출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신문 광고를 통해 알게 됐고, 생계자금 1200만원을 대출받았다. 8년 동안 신용회복위 도움을 받으면서 빚을 모두 청산했던 경험은 정씨에게 힘이 됐다. 매달 22만원씩 갚아나가는 대출금은 과거 받았던 카드론에 비하면 부담이 적었다. 그는 월급을 받으면 가장 먼저 대출금을 떼어놓는 습관이 생겼다. 상환해야 할 금액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상황에서 벗어난 정씨에게는 신체적, 정서적, 경제적 안정이 찾아왔다. 새벽에 일어나 운동을 하고 매주 이웃을 위한 봉사를 하기 시작했다. 정씨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나듯 미소금융 저리대출이 저에겐 빛과 같은 존재였다”며 “힘든 상황에 처하신 분들이 있다면 주저 말고 상담을 받아 보길 바란다”고 말했다. 웹툰을 감상하시려면 이곳으로(웹툰 감상)
  • 빚 뚫고 빛 찾은 사람들… 싱글맘·경단녀→당당한 사장님

    빚 뚫고 빛 찾은 사람들… 싱글맘·경단녀→당당한 사장님

    8801만원. 우리나라 가구당 평균 부채액(2021년 3월 기준)이다. 본인이나 가족의 병원비가 급하게 필요해서, 일을 해서 번 돈으로는 도저히 헤어 나올 수 없는 지독한 가난 탓에, 어떻게든 사업을 이어 가 보려 돈을 꿨다가 제때 갚지 못해 ‘채무 불이행자’ 딱지가 붙는 일은 생각보다 흔하다. 지난해부터 확산한 코로나19로 빚에 허덕이는 이들은 더 많아졌다. 빚으로 무너진 삶을 다시 세우는 건 버겁긴 해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서울신문은 26일 새해를 앞두고 빚의 굴레를 끊고 새 삶을 찾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인터뷰를 통해 전한다. 이들 모두 ‘미소금융 창업·운영자금’과 ‘근로자 햇살론’ 등 서민금융진흥원이 운영하는 서민금융제도의 도움과 강한 의지 덕에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 이들의 이야기는 서울신문 홈페이지 온라인 연재기사와 웹툰(www.seoul.co.kr/SpecialEdition/kinfatoon2021)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 연리 23% 빚 연 1%대로 대출받아 상환… “미소 상담 멘토가 큰 힘” #1 ‘미소금융’으로 일어선 박지선씨“지선아, 너도 이제 나이가 있고 엄마도 얼마나 남았을지 모르니 우리 남은 날들이라도 같이 살자.” 수화기 너머 친정어머니의 간곡한 애원에 박지선(45·가명)씨가 고향인 강원 강릉으로 되돌아온 것은 2019년 2월이었다. 7년간 지옥 같던 결혼 생활을 마무리하고 직장도, 쌓아 놓은 기반도 포기한 채 유치원생 딸만 데리고 도망치듯 고향으로 향했다. 박씨는 강릉 중앙시장 인근 9평 남짓한 공간에 자리를 잡고 친정어머니와 호떡 장사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제법 반응이 좋았다. 하루에 20만원 남짓은 벌 수 있었다. 그러다 날씨가 점차 따뜻해지면서 매출은 10만원대로, 다시 한 자릿수로 떨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코로나19가 터지면서 하루 꼬박 장사를 해도 손에 쥐는 돈이 만원이 안 되는 날들이 이어졌다. 가게 임대료만 월 50만원. 재료비까지 합치면 매달 100만원 이상이 꼬박 빠져나갔다. 가게를 열면서 받은 고금리대출도 박씨의 발목을 잡았다. 모두 3000만원의 빚을 졌는데, 그중 2금융권에서 연 23%의 고금리로 받은 1500만원의 대출이 큰 부담이었다. 대출 원금과 이자로만 매달 90만원 정도를 내야 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통장 잔고는 늘 0원이었다. 우연히 은행 직원의 안내로 서민금융상품의 존재를 알게 된 박씨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미소금융(신용등급이나 소득이 낮은 사람에게 담보 없이 저리 대출해 주는 프로그램)의 문을 두드렸다. 연 1% 후반의 낮은 금리로 약 1600만원을 대출받아 2금융권 대출을 모두 상환할 수 있었다. 빚의 그늘에서 벗어나자 행운도 뒤따랐다. 지난해 1월 호떡가게 운영비에 보태려고 근처 옷가게에서 임시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박씨는 지금은 자신이 일하던 옷가게의 사장이 됐다. 성실하고 적극적인 박씨의 모습을 눈여겨본 사장이 박씨에게 가게 인수를 제안했고, 지금은 남편이 된 든든한 고향 오빠가 인수 자금을 선뜻 빌려준 덕분이다. 미소금융은 멘토가 돼 줬다. 미소금융 상담위원은 종종 박씨에게 전화해 가게 매출은 괜찮은지, 영업에 애로사항은 없는지 살폈다. 전문 컨설팅 프로그램을 연계해 준 덕에 네이버지도 서비스에 가게를 등록하고, 판매 물품을 효과적으로 배치하는 방법 등을 배울 기회도 생겼다. 박씨는 옷가게 앞에 친정오빠를 위한 호두과자 가게를 차리고, 얼마 전 부모님 집 수리비를 보태기도 했다. ‘이제야 내가 한 사람 몫의 베풂을 할 수 있구나’ 하고 감회가 새로웠다. 무엇보다 친정어머니 또래의 고객들이 어울리는 옷을 찾으며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는 게 가장 기쁘다는 박씨는 “이제야 내 적성을 찾은 것 같다”며 웃었다. 내년 3월이면 미소금융 상환도 끝난다. 박씨는 “신용이 낮아 은행마다 퇴짜를 맞고 2금융권을 기웃거렸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신용등급이 3등급까지 올라 더는 미소금융을 이용할 수 없다더라”면서 “코로나19 여파로 어려운 자영업자들이 늘어난 요즘, 힘든 시기에 누군가가 손을 잡아 준다는 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몸소 느꼈다”고 말했다. ■ 카드빚에 짓눌려 ‘한 달살이’로 생활… 도움의 손길 남아 있어 ‘희망’ #2 햇살론 갈아탄 김경희씨저축은행·카드론 등 3곳을 합쳐 2000만원. 31세 김경희(가명)씨의 인생을 짓누르던 빚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빚이 김씨의 인생을 덮친 건 5년 전인 2016년 11월. 김씨의 어머니는 갑작스럽게 쓰러졌고, ‘지주막하출혈’(뇌출혈) 진단을 받았다. 어머니는 수술을 무사히 마쳤고, 김씨 가족에겐 입원비와 수술비 수천만원이 남았다. 김씨는 2011년 고등학교 졸업 이후 줄곧 손에서 일을 놓은 적이 없다. 동네 빵집을 시작으로 사무보조, 쇼핑몰 전화상담(CS)까지 10년간 네 번 정도 직장을 옮겼다. 월급은 늘 최저임금 수준이어서 일을 한다고 해서 형편이 크게 나아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 아버지, 오빠까지 네 가족이 모두 일을 하는 터라 빚을 지고 살 정도로 모자라지도 않았다. 갑작스런 어머니의 수술로 김씨는 처음으로 은행 대출 창구를 찾았다. 그리고 “이 정도 신용등급으로는 저희 은행에서 대출받을 수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 김씨는 “직장을 다니고 있고, 돈을 떼어먹지 않고 갚을 의지가 있어서 당연히 대출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참 순진한 생각이었다”고 했다. 결국 김씨는 저축은행 대출과 카드론으로 급한 돈을 해결했다. 김씨는 “당장 돈이 급하니 소금물인지 물인지 모른 채 일단 들이켜야 하는 상황이었다”며 “대출이자가 몇 프로인지 또 한 달에 내야 하는 원리금이 얼마인지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매달 갚아야 하는 원리금뿐 아니라 투병 중인 어머니의 치료비와 생활비까지. 숨만 쉬는데도 돈이 나갔다. 저축은행 한 곳에서 추가로 대출을 받았고, 빚은 줄어들기는커녕 더 늘어나 어느새 2000만원이 됐다. 최저임금 수준의 월급 중 100만원 이상을 빚 갚는 데 썼지만 원금은 쉽게 줄어들지 않았다. 그렇게 3년을 꼬박 빚에 허덕이며 살던 김씨는 “저금리로 대출 갈아타기를 해 준다”는 보이스피싱의 타깃이 되기도 했다. 이상 징후를 감지한 카드사 직원이 “보이스피싱이니 개인정보를 입력해서는 안 된다”는 전화를 하지 않았다면 악착같이 빚을 갚았던 김씨의 3년은 사라질 뻔했다. 김씨는 “삶에서 희망이라고는 찾을 수 없었다”며 “이달을 넘기면 다음달 빚은 또 어떻게 갚을까라는 생각만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 ‘한 달살이’ 인생이었다”고 말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서민금융진흥원의 존재를 알게 된 김씨는 전화상담을 거쳐 햇살론을 이용했다. 2년 전 햇살론으로 갈아탄 김씨는 지금은 처음 대출받았던 금액의 절반 이상을 갚은 상태다. 빚의 무게는 덜었지만, 김씨의 인생이 극적으로 바뀐 것은 아니다. 김씨는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불어나는 빚에 극단적인 생각도 했었지만, 지금은 무거운 옷을 입고 있다가 하나씩 벗는 것처럼 삶의 무게를 덜어 내고 있다”며 “나를 도와주는 마지막 손길이 남아 있어서 지금은 희망이라는 걸 생각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 압류 딱지 넘어 홀로 아이 셋 키운 모정 “상담 주저하지 마세요” #3 신용회복위 도움받은 정지수씨“‘엄마, 우리 감옥 가요?’라고 묻는 큰아들의 전화에 급하게 택시를 타고 갔더니 애들 셋이 떨고 있더라고요.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아요.” 홀로 아이 셋을 키운 정지수(60·가명)씨는 이혼과 경제적 어려움이 겹쳤던 지난 2007년을 떠올리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집에 압류 딱지가 붙은 날만은 선명하게 기억에 새겨진 상태였다. 당시 첫째 아들은 초등학생에 불과했다. 압류 딱지가 붙었지만 집계된 전 재산은 11만원. 정씨는 “돈이 되는 물건이 없어서 그런지 물건을 가지고 가지도 않더라”고 말했다. 아이들이 커 갈수록 식비, 교육비 등 필요한 돈은 많아졌다. 지인들에게 빌린 돈으로 어렵게 몸을 누일 곳을 구했지만 임대사업자의 부도로 보증금 800만원을 날렸다. 시중은행 대출을 받고도 추가로 3곳에서 카드론을 받아야 했다. 정씨가 감당해야 했던 대출금리는 연 14%대가 넘었다. 그렇게 2002년부터 불어난 빚이 1500만원이었다. 아르바이트는 물론 공공근로까지 돈을 벌 수 있다면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하지만 죽어라 일해도 수중에 들어오는 돈은 100만원 남짓이었다. 매달 수입도 일정치 않아 갚아야 할 돈은 늘어났다. 그렇게 3년이 지나고 빚 독촉이 시작됐다. 좀처럼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고, 우울감이 온몸을 뒤덮었다. 정씨는 “창밖을 보고 있으면 뛰어내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했다. 정씨가 녹록지 않은 상황으로 힘들어하는 모습을 지켜본 지인은 파산을 권유했지만, 정씨는 “내 자식 먹이느라 빌린 돈만은 직접 갚아야 아이들이 잘될 것 같다”며 꿋꿋이 빚을 갚아 나갔다. 더 나은 일을 찾기 위해 틈틈이 딴 자격증만 15개인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압류 집행관은 정씨의 사정을 듣고 신용회복위원회 상담을 권했다. 정씨는 신용회복위를 통해 매달 15만원씩 빚을 갚아 나갔다. 8년 동안 연체 한 번 없이 1500만원 빚을 모두 청산했다. 하지만 시련은 다시 정씨를 덮쳤다. 2018년 막내아들이 넘어져 꼬리뼈를 다치면서 급하게 병원비를 구해야 했다. 정씨는 서민금융진흥원 미소금융을 통해 저금리 대출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신문 광고를 통해 알게 됐고, 생계자금 1200만원을 대출받았다. 8년 동안 신용회복위 도움을 받으면서 빚을 모두 청산했던 경험은 정씨에게 힘이 됐다. 매달 22만원씩 대출금을 갚고 있는 정씨는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어려움을 이겨 낼 수 있었다”며 “힘든 상황에 처하신 분들이 있다면 주저 말고 상담을 받아 보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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