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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꼬깃꼬깃 몇천원 종묘 미니식당들

    꼬깃꼬깃 몇천원 종묘 미니식당들

    미국작가 데이비드 샐린저의 자전적 장편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은 이제 막 소년기에서 청년기로 넘어가는 주인공 홀든 콜필드를 통해 사회의 거짓이나 위선이 어떻게 한 젊은 영혼을 소외시키고 끝내 파멸로 몰아가는가를 진지하게 묻고 있다.1980년 비틀스의 멤버 존 레넌을 암살한 마크 체프먼의 손에 들려 있었던 ‘호밀밭의 파수꾼’은, 그의 암살 동기가 바로 거짓과 위선에 대한 콜필드의 절규 때문이라는 증언으로 인해 더욱 유명해지고 급기야 영미 문화권에 ‘콜필드 신드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노인들만의 놀이터로 변한 종묘공원 고등학교에서 퇴학당하고 뉴욕의 밤거리를 방황하던 주인공 홀든은 무심코 택시운전수에게 센트럴 파크의 연못에서 살고 있는 오리들에 대해 묻는다.“겨울이 되어 연못에 얼음이 얼면 오리들은 어디로 가는지 혹시 알고 계세요?”. 어쩌면 홀든으로서는 자신을 뉴욕이라는 연못에서는 더 이상 살 수 없는 한 마리 오리로 여겼는지도 모른다. 이제 막 초겨울의 을씨년스러운 풍경이 펼쳐지기 시작한 종묘공원에 들어서서, 추위에 그대로 노출된 채 여기저기 삼삼오오 떼를 지어 웅숭그리고 있는 70,80대의 노인들을 바라보자, 나는 어쩔 수 없이 홀든의 질문을 기억에 떠올렸다. 그리고 덧붙였다. “겨울이 깊어지고 종묘공원에 추위가 몰려오면 노인들은 어디로 갈까?” 애오라지 노인들만이 모여 노인들만의 놀이터로 변한 종묘공원은 얼핏 훔쳐보면 그다지 보기에 좋은 정경은 아니다. 비가 오거나 눈이 내려도 몸을 가려줄 만한 변변한 지붕 하나 없는 노천의 벤치에서 어떤 이들은 바둑이나 장기판에 여념이 없고, 어떤 이들은 시국에 대한 이야기로 목청을 높이고, 어떤 이들은 맨땅에 주저앉아 소주나 막걸리를 마시고, 어떤 이들은 낡은 노래방 기기의 노랫가락에 맞추어 한껏 몸을 흔들어대며 막춤에 몰두해 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떤 이들은 눈에 뜨이게 남루한 행색으로 아예 맨땅에 몸을 웅숭그린 채 대낮부터 죽음처럼 혼곤한 잠에 빠져 있기도 하다. 우연히 종묘공원에 들른 젊은이들이나 아직 노인 축에 끼어들기에는 어정쩡한 40,50대의 중년들은 노인들의 여러 모습에 흡사 못 볼 것이라도 본 양, 서둘러 얼굴을 돌리며 발걸음을 빨리 한다. 그런가 하면 아예 눈살을 찌푸리며 도전적인 기세로 노인들을 휘둘러보는 이도 없지 않다. 노인들의 여러 모습 중에 어느 하나도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그 중에서도 젊은이들일수록 혐오의 기색마저 숨기지 않는다. 사회며 가정 어디에서도 소외되어 마침내 종묘공원 이외에는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노인들의 집단이 젊은이들로서는 어쩐지 무익하게 여겨지는 느낌인 것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 사회는 10년 20년 후가 아니라 벌써부터 고령화 시대에 접어들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듯이 고령화 시대의 노인문제가 누구도 외면할 수 없는 바로 우리 자신의 문제가 되어 있는 것이다. 종묘공원에 와서 한 나절만 노인들과 함께 시간을 지낸다면, 비록 젊은 청춘의 나이일지라도, 그대는 이미 노인들이 겪어내는 저 막막한 황혼의 시간이 검붉은 노을처럼 그대의 가슴에 무겁게 덮쳐오는 것을 절감할 터이다.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잉여의 시간? 나이 60을 넘어서 70,80을 넘기고 자칫하면 90에서 100까지 넘겨야 하는 저 캄캄하고 무료하며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잉여의 시간. 그리하여 벌건 백주대낮부터 종묘공원을 찾아 바둑이나 장기, 혹은 소주 한 잔이며 낡은 유행가 가락에 맞추어 몸을 흔들게 하는 잉여의 시간. 이 잉여의 시간은 정말로 그렇듯 어둡고 부정적인 의미밖에 없을까. 시인이며 구도자이기도 한 유도혁은 일찍이 ‘하느님 비오는 날에’라는 시에서 하느님을 전혀 뜻밖의 모습으로 묘사했다. 구주죽이 내리는 비/비닐우산으루 가리우고/골목길을 지나시는 하느님. 빗물에 젖은 바짓가락처럼/썰렁한 어깨./슬그머니 들어오시어/따끈한 시래기국, 막걸리잔으루/목이나 축이구 가셨으면…. 시인 유도혁의 눈에 비친 하느님은 저 높은 천상의 어디에선가 우리를 굽어보며 지고지순한 은총을 베푸는 하느님이 아니라, 오히려 가난한 시인이 시래기국에 막걸리 한 사발이라도 대접해야 할 춥고 배고픈 하느님이다. 그리고 시적 정경으로 보아 하느님은 결코 젊은 나이가 아니며 오히려 노인에 가깝다. ●얻어 마신 술기운으로 막춤도 춰보고… 비단 유도혁이 묘사한 하느님이 아니더라도, 계룡산이며 지리산 혹은 히말라야의 깊은 곳에서 마음공부를 하는 이들 중에서는 이 시대의 하느님은 저마다 거지며 지체부자유자의 행색으로 세상의 낮은 데를 두루두루 돌아다니며 온몸으로 세상의 악기(惡氣)를 빨아들이고 있다고 믿는 이들이 드물지 않다. 그런 하느님은 어쩔 수 없이 일상의 우리가 그토록 혐오해 마지않는 소외된 인생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70,80년대 종로 5가 기독교 회관에서는 매주 금요기도회가 열리고는 했다. 이 금요기도회에는 바로 군사정권에 맞서 싸우다가 감옥에 끌려간 소위 양심수들을 위한 기도회였다. 그리고 기도회 석상에서 겁 없는 목사들은 감히 목소리를 높여 부르짖고는 했다.“여러분, 지금 우리나라에 하느님이 와계십니다. 불의한 권력에 맞서 투쟁하고 있는 이 땅의 모든 소외된 민중들이 바로 하느님인 것입니다.” 어떤가, 이런 식의 낮은 하느님이라면 어렵사리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다. 오늘 종묘공원에 삼삼오오 떼를 지어 웅숭그리고 있는 이들이 다름 아닌 다중의 하느님이 아니랴. 아침 일찍부터 삼양동이나 상계동, 혹은 천호동이나 구로동에서 무료 전철이며 버스를 타고 나와서 12시가 되면 무슨 종교기관에서 나누어주는 무료급식으로 끼니를 때우는 하느님. 바둑을 두는 이들에게 바둑 훈수를 하고, 장기훈수도 하고, 우국지사의 시국에 대한 열변에는 이따금씩 고개도 끄덕이는 하느님. 어쩌다 마음씨 좋은 이웃을 만나면 돼지머리고기 한 점에 소주 한 잔을 얻어 마시고, 그 기운으로 다른 이들의 노랫소리에 맞추어 몸을 흔들며 막춤을 추는 하느님. 이윽고 황혼의 시간이 되어 종묘공원에도 땅거미가 스며들면 저마다 뿔뿔이 흩어져가는 일행들의 꽁무니를 따라 어디론가 종적을 감추는 하느님. 마음공부를 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주장한다. 새로운 개벽이야말로 물질개벽이 아닌 정신개벽이며 그 개벽의 요체는 바로 무소유(無所有)라고. 무소유야말로 자본주의가 과학과 더불어 이루어낸 물질개벽의 악기를 몰아낼 유일한 힘이라고. 그이들의 주장대로라면, 세상살이에 더 이상 욕심내어 아등바등할 것도 없고 세상살이에 더 이상 더하거나 뺄 것도 없이, 이제는 다만 한 끼니의 무료급식과 한 잔의 소주, 혹은 부침개 한 점에 배를 채우고 낡은 노래방 기기의 가락에 따라 막춤을 추는 종묘공원 노인들의 저 잉여의 시간 속에도, 무소유가 새로운 정신개벽의 힘으로서 푸르게 싹트고 있는지도 모른다. ●뒷골목엔 없는게 없는 색다른 먹을거리 그대가 종묘공원에서 어느 새 노인들과 정이 들었다면 그대는 우선 저녁 어스름이 시작되는 무렵에 종로 3가 보도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포장마차로 가라. 거기에는 역시 노인들을 상대로한 온갖 먹을거리들이 흔히 생각하는 상식적인 포장마차보다 화려하고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다.3마리에 5000원하는 메추리,2마리에 5000원하는 꽁치,2마리에 1000원하는 양미리 외에도 장어·곰장어·꼬막·전어·곱창·생굴·부침개·돼비불고기·허파볶음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그대가 아무 먹을거리나 고른들 5000원에서 1만원 사이다. 종묘공원 매표소 왼쪽 일대에는 수구레라는 약간 색다른 먹을거리를 파는 종로수구레, 미니식당, 대명식당 등을 만날 수 있다. 소껍질로 만든 수구레(3000원)를 위시해서 닭발·돼지껍질·북어찜·두부김치·생선구이·오징이볶음·순두부술국·순대술국·소내장술국·넙치찜·모듬전·해물탕·생선매운탕·닭도리탕·감자탕 등 없는 것이 없다. 가격 또한 비싸지 않아 3000원,5000원에서 1만원 안팎인데,1만원짜리는 서너 사람이 먹을 양으로 충분하다. 이밖에도 파고다공원으로 가면, 공원 담벼락을 밖에서 따라 도는 뒤편에 역시 노인들을 상대로 하는 식당들이 몇 군데 있다. 풍년집, 신토불이식당, 초원식당 등이 그곳인데, 먹을거리가 저마다 약간씩 다르다. 이를테면 풍년집은 3000원짜리 홍어찜에 홍어회·계란탕·삶은 오징어·생굴·순두부·조기·동태찌개 등이 3000원에서 5000원 사이이다. 신토불이식당은 2000원짜리 황태해장국·콩비지·소뼈선지해장국에 2500원짜리 닭육개장 등이 있고, 초원식당은 우거지국이 1500원에, 닭 반 마리 2500원, 고등어자반 2000원, 계란말이 2000원, 묵무침 2000원, 계란프라이 1000원, 알배추 1000원 등이다. ■ 온몸으로 무소유 실감 만일 그대가 종묘공원 어디에고 널려있는 저 많은 잉여의 시간들 속에서 무소유를 온몸으로 실감하고 싶거든, 주차장 사무소 옆에 숨어있는 천막집으로 가라. 주로 노인들만이 이용하는 천막집에서 1500원짜리 소주나 막걸리에 3000원짜리 돼지머리고기나 2000원짜리 부침개 한 접시를 사들고 주변의 맨땅에 퍼질러 앉아라. 그리고 아무 노인이라도 붙들고 소주 한 잔에 돼지머리고기 한 점을 권해라. 비단 그대가 아니라도 일대를 둘러보면 결코 혼자서 아구아구 먹고 마시는 노인들은 없다. 마침내 술병이 비거든 가까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춤판에 그대 또한 서슴없이 끼어들어라. 젊은 그대가 끼어든들 노인들 중의 누구 하나 흘겨보거나 시비하지 않을 터이다. 그렇게 끼어들어 즐기는 틈틈이 옆에 있는 노인들의 표정을 훔쳐보아라. 저마다 흥에 겨워 눈에 초점마저 사라진 신명의 노인들은 이미 조금 전까지 그대가 상식으로 알던 저 잉여시간 속의 노인들이 아니다. 세상살이에 더 이상 더하거나 뺄 것도 없이, 세상살이의 시시비비는 훌쩍 벗어나 애오라지 낡은 노랫가락 하나에 인생 전체를 실은 채 흔들거리는 신명의 노인들. 그 노인들이야말로 다름 아닌 무소유 자체이다. 어떤가, 무소유를 온몸으로 실감한 그대 또한 이미 무소유하지 않으랴.
  • 노빠 vs 김빠 연기금 사이버전쟁… 막말·저주 도배

    노빠 vs 김빠 연기금 사이버전쟁… 막말·저주 도배

    “누가 감히 ‘노무현 짱’님을 비판해?(노사모 마음) “너나 명개남이나 정말 웃긴다.”(수구) “아이고 애쓰십니다.”(막걸리) “한심한 뇌사모 알바 막걸리여.”(노무현) “뭐 이런 기 다있노.”(×발로마) “×발로마=뇌사모, 이게 노사모입니다.”(뇌사모) 지난 21일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의 인터넷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실린 글들이다. 지금 인터넷에서는 노무현 대통령 지지자와 김근태 장관 지지자들 사이에 ‘전쟁’이 한창이다. 속된 표현으로,‘노빠(노무현 오빠부대) 대 김빠(김근태 오빠부대)의 ‘사이버 대전(大戰)’으로도 불린다. 주요 전쟁터는 김 장관의 홈페이지다. 지난 19일 김 장관이 연·기금을 ‘한국형 뉴딜 정책’에 투입하는 데 대해 반대 입장을 밝힌 이후 불이 붙기 시작해서 3일이 넘도록 식을 줄을 모르고 있다. 김 장관의 발언이 알려진 19일 오후부터 22일 오후(5시 현재)까지 3일 동안 무려 900건이 넘는 글이 김 장관의 홈페이지에 쏟아졌다. 하루 평균 300건 이상이 실린 것이다. 18일 이전에 하루 평균 50여건이 올라온 것과 비교하면 6배 이상이 늘어난 셈이다. 김 장관을 비판하는 네티즌들의 공습에 김 장관 지지자들이 즉각적으로 반격에 나서면서 게시판이 도배되고 있는 것이다. 양측은 처음엔 비교적 논리적인 공방으로 맞섰으나,21일 노 대통령의 열렬 지지자인 명계남씨가 김 장관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글을 게재한 이후 자존심 싸움으로 비화하는 양상이다. 김 장관의 지지자들이 “명계남 바보”“명계남이는 말조심해라.”라는 인신공격성 비난을 쏟아내자, 반대편에서는 김 장관을 가리켜 “양아치XX”라는 욕설과 함께 “‘근조’ 김근태”라는 저주에 가까운 글까지 무차별적으로 올리고 있다. 22일에는 ‘지티짱’이라는 아이디의 네티즌이 “명계남씨 오늘 장관실로 오시오. 무릎꿇고 사과하시오.”라고 공격하자,‘딴지’라는 네티즌이 즉각 “조폭입니까? 무릎꿇어라니….”라고 반격한 글이 실리기도 했다. 일부 김 장관 지지자들은 아예 청와대를 기습 공격하기도 했다.‘김재훈’이라는 네티즌은 청와대 홈페이지로 쳐들어가 “노사모, 맹개남, 당신들이 노 대통령의 대변자가 되려하지 마라.”고 분풀이를 해놓았다. “인신공격, 감정싸움을 하지 말자.”고 자성론을 내놓는 네티즌도 있지만, 감정이 상할 대로 상한 양측의 험악한 기세를 누르기엔 역부족이다. 어떤 네티즌은 한나라당 지지자들이 익명으로 양측의 갈등을 조장한다는 주장도 한다.‘허허허’란 네티즌은 “딴나라(한나라당) 알바들이 노빠를 가장해 노빠와 김근태 지지자를 이간질시키는 몰지각한 짓을 하고 있으니, 확실히 박멸하자.”고 했다. 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 만취승객 버려둔 죄 1년6개월형

    술에 취한 승객을 자동차 전용도로에 버려두는 바람에 교통사고로 숨지게 한 택시기사에게 유죄가 선고됐다. 박모(32)씨는 지난 해 7월 서울 강서구 김포공항 앞에서 고교동창생들과 저녁을 먹으며 소주1병반과 막걸리 한 사발 반 정도를 마셨다. 친구 김모씨는 취한 박씨를 택시기사 박모(42)씨의 차에 태우며 집 위치와 택시번호를 휴대전화에 저장했다. 택시기사 박씨는 박씨의 집인 경기도 고양시 일산을 향해 자유로를 달리던 중 박씨가 택시의 뒷문을 여닫아 운전석에 경고등이 들어오자 차를 세웠다. 차가 멈추자 박씨는 아무말도 없이 택시 문을 열고 갓길을 따라 서울방향으로 걸어갔다. 박씨는 1시간이 지난 뒤 택시를 내렸던 곳에서 2㎞쯤 떨어진 자유로에서 승용차 2대에 잇따라 부딪혀 숨졌다. 서울고법 형사3부(부장 신영철)는 21일 “박씨가 방향감각도 없이 1시간동안이나 자유로 부근에서 길을 헤메고 다녔고, 택시 안에서 문을 여닫는 등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상태였다.”며 택시기사 박씨에게 유기치사죄로 징역1년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김효섭기자 newworld@seoul.co.kr
  • 4년만에 연작소설집 ‘모구실’ 낸 서정인

    4년만에 연작소설집 ‘모구실’ 낸 서정인

    중진작가 서정인(68)씨가 4년 만에 새 창작집 ‘모구실’(현대문학 펴냄)을 내놓았다. 그런데 그의 새 책은 팬들에게만 반가운 게 아닐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문학이 ‘실종’됐다는 시대. 지리멸렬한 줄 알았던 소설에도 활어처럼 팔딱팔딱 뛰어오를 힘이 남았다는 사실을 서가에서 두고두고 웅변해줄 소설이다. 작품을 낼 때마다 조금씩 그래왔듯 이번에도 소설장르를 실험한 흔적은 여실하다. ●14편 이야기 모은 실험소설 14편의 이야기가 고리를 건 소설은 명백히 연작소설의 틀거리를 빌렸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 보면 평범한 연작 형식과는 거리가 멀다. 엇비슷한 유형의 인물과 내용이 시간이나 환경변화에 따라 맥을 이어 나가는 연작소설의 장르적 통념을 싹 뭉개 버렸다. 등장인물이나 주변상황이 똑같은 색채로 반복되는 게 아니라 때론 전혀 생경하게 ‘지능적’으로 이미지를 바꿔 버린다. 첫번째 작품 ‘모구실’과 14번째 끝 작품 ‘불나방’은 과연 이야기의 원천이 같았나 의심스러울 만큼 생김새가 달라져 버리는 식이다. 이를 두고 평론가 김윤식은 “한 작품이 증식을 일으켜 자기성장을 이루어 내는 ‘자기증식형 연작소설’”이라고 평했다. 소설은 쉰을 넘긴 등산복 차림의 ‘그’(천수건)가 산간벽촌 모구실을 찾아가는 설정으로 운을 뗀다. 사내는 모구실의 보건소장으로 일하는 딸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하지만 작가는 그런 자질구레한 사실들을 친절하게 일렬로 나열해 줄 생각이 없다. 왜 그가 지금 딸을 만나야 하며, 딸의 소식을 새까맣게 모르고 산 이유가 뭔지 독자들은 알 길이 없다. 급한 독자는 애가 끓겠으나, 모호한 상황에서도 ‘그’는 짐짓 뜸만 들인다. 칠순 노파가 홀로 지키는 허름한 점방에 들러 막걸리잔을 기울이며 세상사를 놓고 이런저런 한담을 주거니 받거니 할 뿐이다. 무대로 치면 영락없는 실험극이다. 공연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아 서두를 것 하나 없는. 딸(천미리)을 만나지만 천수건은 딸의 냉대에 보건소를 나서고 폐교를 지키는 서존만, 점방 아들 조성달과 다시 술판을 벌이며 ‘본론’을 꺼낸다. 소소한 집안내력에서부터 동서양 고전과 신화를 녹인 철학담론을 쏟아내는 천수건(작중 직업은 대학교수)은 유장한 논객이 되곤 한다. ●판소리 한마당 연상하게 하는 대사 통속적 개념의 소설읽는 재미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묘사보다는 운율감 있는 대사들로 채워지다시피 한 글은, 때로 남도 사투리를 걸지게 풀어내는 판소리 한마당 같다. 꼼꼼하고 성실하게 정독하는 독자 쪽이 유리하다. 건성건성 책장을 넘기다가는 번번이 맥락에서 비켜나 소설 속에서 길을 잃는다. 태만한 수행자의 어깨에 죽비를 내리꽂듯 작가는 불호령을 속으로 삼키고 있음에 틀림없다. 아직도 소설이 그리 만만해 보이냐?! 노림수가 곳곳에서 의미심장하다. 책이 나오기 무섭게 짧은 여행길에 올라버린 작가는 책머리에 그 흔한 서문 한줄 달지 않았다.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13일 TV 하이라이트]

    ●활력충전 36.5(MBC 오전 8시10분) 50대에 접어들면 특별한 이유 없이 찾아오는 불청객, 오십견의 모든 것을 알아본다. 요즘에는 장시간 앉아서 일하는 20∼30대 젊은이들도 어깨 통증을 호소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오십견과 구분이 어려운 어깨 유사질환의 종류를 살펴보고 구별법을 알려준다. ●라이프n조이(YTN 오전 9시20분) 전통마을 고유의 멋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선비촌과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 고등교육 기관인 소수서원이 있는 곳. 선비의 높은 기개와 깊은 학문의 열정이 살아 숨쉬는 경북 영주를 소개한다. 매력 만점의 이색체험장, 타조와 함께 추억을 만드는 경기도 화성의 타조사파리를 소개한다. ●꿈은 이루어진다(EBS 오후 5시10분) ‘미래사회로 가는 열쇠’라 불리는 RFID(무선 전자인식태그)를 알아본다. 생활의 편리함을 두 배로 느낄 수 있는 IT신기술 RFID를 정보통신연구진흥원 이윤덕 연구원과 한양대학교 정보통신학부 강민수 교수,IT체험단(숭문고, 영상고 고등학생)과 함께 집중 분석해 본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스페셜 (북극해의 라이벌)(iTV 오후 10시20분) 알래스카의 케이프 피어스. 몸집이 육중한 바다코끼리 두 마리가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며 패권다툼을 하고 있다. 칼처럼 뾰족한 이빨이 서로의 두꺼운 피부 속을 꿰뚫기도 한다. 더불어 북극지방의 동토에서 살아가고 있는 북극곰, 범고래 등을 만나본다.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SBS 오후 9시45분) 현우는 집에서 수진과 약혼을 발표하고, 그 시간 은수는 집에서 현우를 그리워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은수는 현우가 있는 회사 주주총회장에서 현우를 발견하고는 쫓아가 아는 척을 하지만, 현우는 은수를 알아보지 못한 채 경비원들에게 제지를 당해 헤어진다. ●공개수사 실종(KBS2 오후 10시5분) 지난 9월, 여섯살 난 정선이가 사라졌다. 정선이는 큰엄마 식당 앞에서 혼자 놀고 있었고, 옆에서는 동네 아저씨들이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술병을 따던 한 아저씨 얼굴에 막걸리가 튀자 눈물로 오인한 정선이는 휴지를 갖고 아저씨에게 달려갔다. 그 후 정선이를 다시 볼 수 없었다. ●불멸의 이순신(KBS1 오후 9시30분) 순신은 지과라는 검명에 담긴 스승의 뜻을 가슴에 새기며 곤양마을 사람들 속에 젖어든다. 원균은 그런 순신을 찾아와 힘이란 무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권력에도 있는 것이라며 순신에게 무과를 볼 것을 권한다. 그러나 순신은 무관이 되기에 앞서 진정한 무인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 낙엽길따라 - 선암사 · 남이섬 · 상림

    낙엽길따라 - 선암사 · 남이섬 · 상림

    지는 가을을 만나러 길을 나섰습니다. 가을색 짙은 목소리가 매력 만점인 가수 최헌의 노래가사처럼 그리움이 눈처럼 쌓이는 곳으로 말입니다. 어디 그리움뿐이겠습니까. 그 곳에선 정말 새털처럼 가벼운 요즘 젊은이들의 사랑이 바싹 마른 이파리가 되어 팔랑팔랑 굴러다녔습니다. 삶의 무게가 버거운 양 애처롭게 처진 중년 남성의 서러움도, 야윈 늦가을 햇살을 쪼이는 노인의 쓸쓸함도 하나 둘 내려앉고 있었구요. 그래도 눈처럼 쏟아져 날리는 이파리들은 팍팍한 일상을 사느라 헛헛해진 가슴속을 푸근히 채워 주었습니다. 아이들은 소담스럽게 쌓인 샛노란 은행잎을 하늘 높이 뿌리며 동화를 꿈꾸고 있었지요. 호젓한 선암사 오솔길과 함양 상림, 그리고 춘천 남이섬. 지는 가을이 그림처럼 아름다운 세 곳으로 안내합니다. 글 사진 선암사·남이섬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선암사 11월 늦은 오후에 찾은 선암사엔 반쯤 진 가을이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1500년 연륜의 고즈넉한 사찰 뒤로 얼기설기 난 오솔길은 아직 단풍 반 낙엽 반. 바람이 불 때마다 쏟아져 내리는 낙엽에 ‘어머 어머!’하고 여자들의 탄성이 터진다. 역시 남자보다는 여자의 감수성이 예민한가 보다. 선암사 뒤 낙엽 산책길은 대략 네 갈래다. 선암사∼운수암, 삼인당∼대승암, 매표소∼삼인당 그리고 선암사∼송광사 코스 등. 각각 독특한 운치를 지니고 있다. 우선 삼인당∼대승암 길로 가보자. 인공연못인 삼인당 갈림길에서 왼쪽의 대승암·송광사 길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 삼인당(三印塘)은 길쭉한 알 모양의 인공연못이다. 신라 경문왕때 도선국사가 축조했다고 전해진다. 알속의 노른자처럼 연못 안에 작은 섬을 두고 있는 것이 독특하다. 삼인당 주위의 붉게 물든 단풍, 그리고 낙엽이 수면을 덮은 풍광이 제법 화사하다. 부도탑을 지나 왼쪽으로 난 다리를 건너면 곧바로 옹달샘과 함께 낙엽길로 들어선다. 여기서 직진하면 대승암, 오른쪽의 큰 길을 따라가면 송광사로 넘어가는 등산로가 이어진다. 대승암으로 이어지는 낙엽 오솔길은 약간의 오르막이다. 길 왼쪽으로 하늘 높이 솟은 삼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들리는 것은 사각사각 밟히는 낙엽소리뿐. 암자까지 외길인지라 등산객을 만나기 어려워 더욱 호젓하다. 선암사∼운수암길은 선암사 오른쪽으로 나 있다. 강선루를 막 지나면 나오는 첫번째 부도탑에서 오른쪽 오솔길을 따라가면 된다. 이미 황갈색 낙엽이 길을 뒤덮고 있다. 5분쯤 비탈길을 올라가니 운수암에 닿는다. 새파란 하늘을 머리에 이고 있는 암자. 암자 마당에서 내려다보는 풍광은 만추의 절정을 보여준다. 양지쪽이어선지 맞은편 산등성이는 아직 오색단풍이 한창이다. 암자 아래로 내려가는 사람들이 마치 불타는 단풍 속으로 뛰어드는 것 같다. 매표소∼삼인당 길은 선암사를 찾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통과해야 하는 곳으로 가장 널찍하다. 왼쪽 아래는 맑고 투명한 계곡. 조계산을 붉게 물들였던 가을이 계곡물을 타고 아래로 아래로 흘러 내려간다. 발걸음은 승선교 앞에서 자연스럽게 멈춘다. 승선교는 선암사에서도 손꼽힐 만큼 아름다운 곳. 자연석을 이용해 만든 무지개 모양의 다리다. 다리 일부에 균열이 생겨 지난 1년여간의 해체 보수를 거쳐 최근 제모습을 찾았다. 승선교(昇仙橋)는 글자 그대로 신선이 하늘로 오를 때 발을 디딘다는 다리. 반대로 승선교 앞에 버티고 서 있는 2층 높이의 강선루(降仙樓)는 신선이 내려온 누각이라고 한다. 승선교 아래엔 항상 사진작가들이 다리 아래서 올려다보이는 선암사 풍광을 잡기 위해 진을 치고 있다. 시간이 넉넉하다면 조계산 능선을 넘어 송광사까지 가는 낙엽 트레킹에 도전해 보자. 선암사∼선암굴목재∼송광굴목재∼송광사 등의 순으로 대략 8.5㎞쯤 된다. 단풍과 낙엽의 운치를 즐기며 천천히 걸으면 3시간 정도 걸린다. 자동차를 가져왔다면 길을 되짚어 오거나 송광사에서 택시를 타고 선암사 주차장까지 와야 한다. 왕복 트레킹에 5시간은 족히 걸린다. 호남고속도로 승주IC에서 빠져 22번 국도와 857번 지방도를 차례로 탄 뒤 선암사 이정표를 따라가면 된다. 나들목에서 차로 10분 정도면 선암사 주차장에 닿는다. 열차를 이용할 경우 순천역에서 내려 1번 또는 100번 시내버스를 타면 선암사까지 갈 수 있다. 선암사 아래 길상식당(061-754-5599)의 한정식이 깔끔하고 맛도 괜찮다.3인 기준 1인 1만 2000원. 장원식당(754-6362)의 산채비빔밥도 유명하다.5000원. 주변에 새조계산장(751-9200), 산암장여관(754-5666) 등 여관이 많다. ■남이섬 이번이 세 번째다.20년 전 대학시절 여름 MT 왔던 게 첫번째, 지난 여름 확 달라졌다는 남이섬을 확인하러 온 게 두 번째다. 처음 왔을 때는 인공숲이 빈약해 그저 널찍한 잔디밭에서 친구들과 막걸리를 마시던 생각밖에 안 난다. 지난 여름에 와선 거대한 숲의 섬으로 변한 것을 보고 깜짝 놀랐고, 아기자기한 산책로가 참 마음에 들었었다. 하지만 단언컨대 남이섬의 진수는 이번 세번째 나들이에서 본 것 같다. 단풍이 반쯤 진 남이섬. 연인들이 걷는 오솔길이든 아이들이 뛰노는 잔디밭이든 땅바닥은 그야말로 오색 도화지다. 나무를 떠난 이파리가 이토록 아름다운 줄 미처 몰랐다. 11월의 오후. 짧아진 가을햇살에 고목이 긴 그림자를 벗한다. 사각거리는 낙엽을 밟으며 살아온 날들을 반추하는 듯한 노부부, 날아갈 것처럼 숲길을 누비는 10대,20대 커플, 자전거를 타고 바람같이 내달으며 쌓인 낙엽을 날리는 아이들. 남이섬은 신기하게도 이처럼 모든 세대를 아우르며 품는다. 반달 모양의 남이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400여m의 잣나무 길. 늘푸른 잣나무는 녹슨 꼬마열차 궤도를 벗한 채 아직도 여름을 꿈꾼다. 잣나무 길 양쪽으로 널찍한 잔디밭이 이어지고, 그 너머엔 갖가지 단풍나무들이 오색찬란한 가을빛을 내뿜는다. 드라마 ‘겨울연가’의 촬영지로 유명한 메타세쿼이아 길은 잣나무 길과 연결되는 십자로의 오른쪽에 있다. 황갈색 옷으로 갈아입은 메타세쿼이아 터널 너머로 햇빛에 반사된 강물이 하얗게 넘실댄다. 메타세쿼이아 길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는 은행나무와 잣나무길엔 ‘연인들의 산책로’란 이름이 붙었다.80년대 중반 젊은이들의 눈물샘을 꽤나 자극했던 영화 ‘겨울나그네’가 촬영된 곳. 추풍낙엽이라고 했던가. 느낄듯 말 듯한 가벼운 바람도 버티지 못하고 은행잎이 쏟아져 내린다. 햇살을 받으며 눈부시게 반짝거리는 낙엽비.2인용 자전거를 타고 샛노란 비를 맞는 연인들의 연가가 아름답다. 섬 동쪽으로 이어지는 강변 산책로엔 튤립나무와 자작나무숲이 이국적 자태를 뽐낸다. 숲 사이로 자리잡은 삼각형 모양의 방갈로 지붕위로 단풍잎이 수북이 쌓여 있다. 간간이 놓인 나무벤치는 어김없이 연인들의 차 지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는 은행나무와 단풍나무 오솔길은 남이섬에서 가장 운치 있는 곳. 은행잎은 벌써 7할쯤, 단풍잎은 반쯤 졌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한번쯤은 멈춰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한다. 숲속은 동물들의 세상이다. 아이들의 뜀박질에 화들짝 놀란 청설모들이 잽싸게 기어올라간다. 잿빛 토끼 한 마리는 멀찌감치서 잔뜩 긴장한 자세로 사람들을 주시한다. 국도 46번 경춘국도를 따라 달리다가 청평읍, 가평을 거쳐 경춘주유소 4거리에서 우회전해 2.4㎞ 정도 들어가면 남이섬 선착장이 나온다. 주차료는 4000원, 도선·입장료를 합해 왕복 5000원(어린이 2500원). 드라마카페 ‘戀家之家(연가지가)’의 ‘옛날 벤또 도시락’은 남녀노소, 특히 연인들이 좋아하는 메뉴. 양철 사각 도시락통에 밥을 담고, 그 위에 김치와 계란 프라이를 얹어 뚜껑을 덮은 뒤 연탄난로 위에서 데워 먹는다. 먹기 전 두꺼운 장갑을 낀 손으로 도시락을 들어 사정없이 흔드는 게 ‘요리’의 포인트.4000원. 문의 남이섬 관리사무소 서비스센터(031-582-5118). ■상림 경남 함양 상림(上林)은 ‘낙엽의 천국’이다. 산도 아닌 벌판 한 가운데를 크고 작은 활엽수들이 가득 덮고 있는 곳. 여름이면 하늘을 가려 한 줌 햇살도 허용치 않을 만큼 무성했던 이파리들이 지금은 반쯤 졌다. 숲 가운데의 큰 길은 물론 사이사이 난 오솔길은 온통 낙엽 천지. 길이 아닌 숲속으로 들어가니 발목까지 빠지는 낙엽더미가 부스럭거리며 낯선 손님을 경계한다. 상림은 1100여년 전 조성된 인공활엽수림이다. 통일신라 말 진성여왕 때의 대학자 고운 최치원 선생이 천령군(함양의 옛이름) 태수 부임후 조성했다고 한다. 마을을 가로지르던 위천(渭川) 범람을 막기 위한 호안림(護岸林)이다. 당시 심은 나무들이야 늙어 죽었지만 그들이 뿌린 씨앗은 대를 이어 1000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 귀중한 활엽수림으로 남았다. 상림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국내 유일의 활엽수림이다. 당시엔 상림과 하림을 합쳐 6만여평이었으나, 지금은 길이 1.4㎞, 폭 200m,2만 7000여평만 남아 있다. 상림엔 수십년에서 수백년 수령의 110여종 2만여 그루의 나무가 자란다. 졸참나무, 느티나무, 팥배나무, 사람주나무, 감나무 등이 주요 수종. 나무의 종류가 다양하고 굵기도 제각각이어서 통일신라 때 조성됐던 숲이라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낙엽색깔도 조금씩 다르다. 참나무 계통은 떨어질 때부터 갈색이지만, 느티나무나 감나무 이파리는 떨어진 뒤에도 마르기 전까지는 붉거나 노란 색깔을 유지하고 있다. 인근 유치원에서 아이들이 소풍을 나왔나보다. 어른들에겐 사색의 대상인 낙엽도 아이들에겐 그저 놀이의 수단일 뿐. 두 손 가득 낙엽을 집어 뿌려대는 아이들 표정에 천진함이 넘친다. 상림엔 숲을 가로지르는 실개울과 군데군데 세워진 함화루, 초선정, 화수정 등 정자들이 있어 운치를 더한다. 숲 한편엔 최치원 신도비와 척화비 등 함양에서 선정을 베푼 위정관들을 기리는 비석들을 모아놓았다. 또 최치원을 비롯해 연암 박지원, 김종직 등 함양에서 태어났거나 살았던 대학자 11명의 흉상을 세워놓은 인물공원이 조성돼 있다. 경부고속도로∼대전·통영고속도로∼88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함양IC 표지판이 보이면 빠져나와 우회전해 5분쯤 가면 함양읍이다. 가던 길로 직진해 읍내를 지나가면 위천이 나온다. 위천을 건너기 전 우회전해 천변 도로를 5분쯤 달리면 상림과 만난다. 동서울터미널에서 함양까지 고속버스가 5회 출발한다. 함양읍에서 택시를 타면 상림까지 기본요금에 간다. 상림 주변 및 함양읍내에 별궁장여관(055-963-9241∼3), 상림장여관(055-963-1170) 등 여관이 많다. 상림에서 24번 국도를 타고 거창 방면으로 가다 보면 안의면사무소 소재지가 나온다. 안의고추갈비찜으로 유명한 곳. 매콤달콤하면서 부드럽고 쫄깃한 맛이 일품이다.‘옛날할머니 갈비식당’(055-962-0163) 등 갈비찜을 내는 식당이 도로변에 늘어서 있다.1접시 2만 5000원(2인)∼3만 5000원(3인).
  • [뒷골목 맛세상] 가평의 자연과 맛

    [뒷골목 맛세상] 가평의 자연과 맛

    경춘선 국도를 따라가다 보면 남양주에서 가평으로 접어드는 어름에 ‘어서 오세요. 자연을 가슴에 담아가는 가평’이라는 선전문구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나는 그 아름다운 문구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덜컥, 하고 가슴에 걸리는 느낌이었다. 자연을 가슴에 담아가라고?하기는 가평이야말로 산과 물 같은 자연이 빼어나게 아름다운 고장임에 틀림없다. 군내를 관통하여 흐르는 북한강과 그 강이 군데군데 빚어놓은 청평호반이며 남이섬, 그리고 대성관광지 같은 절경들, 거기에 어울려 함께 이어지는 유명산과 운악산, 축령산, 명지산 등의 장려한 산자락들은 얼마든지 둘러보아도 결코 싫증나지 않는 풍광이다. 그러나 내 가슴에 덜컥, 걸린 자연은 그러한 풍광들보다는 그 뒤에 숨어있는 또 다른 자연이었다. 일찍이 노자는 세상살이의 지혜로 무위자연(無爲自然)을 말하였다. 한자를 그대로 풀이하자면 ‘꾸밈이 없이 저절로 그러하게’이다. 그 무위자연에 노자는 덧붙인다. 상선약수(上善若水), 살아가는 일을 물 흐르는 것처럼 해라. 아아, 단 한번이라도 나는 자신의 삶을 ‘꾸밈이 없이 저절로 그러하게’ 놓아둔 적이 있으며,‘물 흐르는 것처럼’ 흘려준 적이 있으랴. 계절마저도 가을이 깊어지고 어느 날 아침에 하얗게 무서리가 내린 끝에 저마다 제 빛깔이며 향기를 뽐내던 저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은 시든 대만 남긴 채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렇듯 무릇 생명 있는 것들의 마지막이란 시들어 말라붙다 못해 앙상한 형해(形骸)만으로 바둥대다가 끝내는 거친 시간의 바람 속으로 한 줌 먼지가 되어 사라지게 마련일 터이다. 불과 엊그제까지도 불붙듯 온 산에 붉고 혹은 노랗던 단풍들마저 낙엽이 되어 하릴없이 산야에 뒹굴고, 거기에 추수를 끝낸 빈 들판들도 덧없이 적막감에 싸인 채 보는 이의 눈을 시리게 한다. 언뜻 돌이키면 늙는다는 것은 저렇듯 적막한 늦가을의 풍경과 다름 없다. 비단 사추기(思秋期)의 여인만이 아니라, 자신의 살아낸 삶 속에서 무엇 하나 손에 잡히는 것 없이 허방을 짚는 듯한 이에게는 늙어서 마침내 죽음에 이르는 길이란 더더욱 적막하고 허무한 풍경이나 다름 없을 터이다. 그리하여 화려한 빛깔과 향기 대신에 시든 대로만 남은 저 많은 생명들 또한 자신의 삶처럼 처연하다 못해 추하게마저 여겨질지도 모른다. 만일 그대 또한 자신의 살아낸 삶이 처연하다 못해 추하게마저 여겨진다면,‘가슴에 자연을 담아가라’는 가평의 여행길에 나서기를 권하고 싶다. 가평에서도 운악산 가는 어름에 있는 ‘꽃무지풀무지’(031-585-4875)라는 야생 수목원에 들르기를 권하고 싶다. 그리하여 한나절을 좋이 늦가을의 햇살 아래 수목원 여기저기 한가롭게 거닐기를 권하고 싶다. 그러다 보면 누가 알랴. 번쩍 그대의 눈이 열려 그대가 전혀 몰랐던 그대의 자연을 만나게 될지. 원래 꽃무더기 풀무더기라는 뜻인 ‘꽃무지풀무지’에는 지난 계절 내내 야생 수목원을 원색으로 한껏 장식했을 온갖 야생화들의 빛깔이며 향기는 더 이상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대신 수목원 가득히 펼쳐져 있는 것은 저마다 천명을 다하고 시들어 버린 꽃대들만이 지난 화려했던 시절의 증거처럼 남아서 잿빛 풍경을 이루고 있을 뿐이다. 수생식물원을 지나고, 습지원을 지나고, 향기, 붓꽃, 나리원을 지나, 산채원이며 덩굴식물원을 지나도 그대를 기다리는 것은 역시 잿빛 풍경뿐이다. 어거지로 찾아낸다면 수목원 가장 위쪽 그늘진 곳에 숨어있는 국화원의 한 쪽에서 쑥부쟁이 몇 다발만이 애잔하게 보랏빛 잔명을 이어가고 있을 뿐이다. 야생 수목원의 어디를 둘러보아도 그대가 위안을 받을 만한 풍경은 없다. 동자꽃, 노인장대, 맥문동, 제비꽃, 은방울꽃, 둥글레, 용담, 앵초, 금불초, 초롱꽃, 비비초, 애기기린초, 금강초롱, 말나리, 하늘나리, 참나리, 털중나리, 꼬리풀, 금낭화, 노루삼, 산작약, 마타리, 패랭이, 구절초, 해국, 울릉국화, 한라구절초, 모싯대…. 그 모든 야생화들은 이제 한낱 푯말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뿐인가. 수목원의 뭇 야생화들은 정말이지 그대에게 아무런 의미도 남기지 않고 잿빛 풍경 속으로 속절없이 사라진 것뿐일까. 아니리라. 결코 그것뿐만은 아니리라. 그대가 흡사 자신의 처연한 삶이라도 어루만지듯 푯말과 함께 남아있는 야생화들의 시든 꽃대를 어루만지는 순간, 그대는 벼락처럼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시든 꽃대는 결코 시든 꽃대로만 끝나지 않는다. 시든 꽃대는 시든 꽃대대로 그 안에 길을 열고 있다. 그리하여 그대가 시든 꽃대가 안에 열린 길을 따라 어디론가 들어가게 된다면, 그대는 마침내 그대 안에 있는 또 다른 자연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만일 그대가 그대 안에 있는 또 다른 자연만 만나게 된다면, 그대는 다시 한번 깨닫게 될 터이다. 늙는 것처럼 아름다운 일은 없다, 늙어서 그대 또한 시든 꽃대가 되면, 그때에서야 그대는 비로소 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알게 될 터이다. 그렇게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야말로 모든 생명의 현상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신비로운 일이다.은방울꽃의 시든 꽃잎 안으로 들어가 보라. 안으로 들어가 보면 바로 거기에는 다가올 어느 봄날 아침에 그다지도 화려하고 향기롭게 피어날 수천수만의 새로운 은방울꽃들을 만나게 되리라. 하늘나리의 시든 대 속으로 들어가 보라. 거기에는 이미 내년 봄에 새로운 줄기로 살아날 수천수만의 하늘나리들이 더없이 아름답고 신비한 모습으로 벌써부터 그대를 기다리고 있을 터이다. 아아, 늙어서 시들어진다는 것이야말로, 그리하여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그리하여 오래 잊었던 자신의 자연을 만나고, 마침내 ‘꾸밈이 없이 저절로 그러한’ 지혜의 물을 만나서 비단 그대만이 아닌, 모든 생명 있는 것들과 함께 영원한 강이 되어 흘러간다면, 어떠한 늙음이며 죽음이 더 이상 그대를 홀로 적막하게 하랴. 세상살이라는 것을 그대와 나는 자칫 저마다 가득히 채워야만 할 무슨 항아리 같은 것으로만 여겨오지는 않았을까. 그리하여 태어나서 죽는 날까지 그대와 나는 애오라지 항아리를 채우는 일에만 애면글면하지는 않았을까. 남보다 더 많이, 남보다 더 넓게, 남보다 더 가득히…. 그것이 결국은 밑이 빠져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항아리라는 것조차도 모른 채. 그리하여 마침내 자신마저도 잃어버리고 흡사 무슨 굶어죽은 아귀라도 씌인 것처럼 헛된 일에만 매달려 아등바등 하지는 않았을까. 아아, 무릇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은 비운 다음에야 비로소 더욱 가득히 채워진다는 것을 그대와 나는 왜 몰랐던 것일까. ‘꽃무지풀무지’는 11월 중순경까지는 문을 연다. 비록 겉보기에는 아무 것도 없는 적막하고 처연한 잿빛 풍경일 터이지만, 그 잿빛 풍경 안에서 만일 그대가 그대의 또 다른 자연을 만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벌써 그대의 가을 여행은 온몸 가득히 충만해지리라. ‘꽃무지풀무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운악산 등산로 입구가 있고, 거기에 손두부집들이 올망졸망 촌락을 이루며 몰려있다. 그 중에서 할머니손두부가 유명하지만 어느 집을 들어가도 늦가을의 허기를 채우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따끈한 손두부(5000원)에 묵은 김치를 가닥으로 싸먹는 맛도 일품이지만, 거기에 가평의 명산품 잣막걸리를 한 잔 곁들이면, 꽃무지풀무지에서 이미 충만해져온 그대에게 더 이상 무엇이 부족하랴. 손두부 이외에도 순두부(3000원), 두부버섯전골(1만 2000원), 순두부백반(5000원) 등이 있다. 꽃무지풀무지에서 포천으로 가는 길목에는 현리에 국수호박을 전문으로 하는 시골마당(031-585-2309)이 있다. 이 국수호박은 호박을 국수로 만든 것이 아니라 호박 자체가 삶으면 국수처럼 줄줄이 면발이 되어 나오는 것으로, 여기에 양념장만 곁들이면 그대로 요리가 되는 100% 천연국수인 셈이다. 물국수호박과 비빔국수호박이 각각 5000원인데, 가평을 지나다가 출출하다 싶으면 한 그릇 뚝딱 먹어치우는 재미가 그야말로 별미일 터이다. 그대가 좀 더 가을 여행을 만끽하고 싶다면, 이번에는 신청평대교를 건너 유명산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설악면의 들풀(031-585-4322)을 찾을 것을 권하고 싶다. 블루베리 스파랜드라는 온천으로 가는 쪽에 여유롭게 자리 잡고 있는 들풀은 된장이며 청국장을 직접 담가서 팔기도 하고 요리로도 만들어내는 청국장 전문집이다. 들풀은 마당으로 들어서자마자 사람 키를 두 세배는 훌쩍 넘을 것 같은 콩 낟가리를 쌓아놓아 벌써부터 왠지 마음이 푸근해져오는 기분인데, 주인이 직접 농사를 지어 수확한 것이다. 콩 낟가리를 지나면 이내 항아리가 30,40개가 넘는 커다란 장독대에 다다르는데, 해마다 된장과 청국장 제조용으로 100여 가마씩 사용하고 있다. 들풀의 김용옥씨와 김안나씨 부부는 함께 주방일도 하고 서빙도 하면서, 주로 콩요리를 위주로 한 1만원짜리 정식을 한 상 차려낸다. 청국장찌개, 된장찌개, 생청국장, 두부부침, 된장부치미에 황태구이, 더덕구이, 잡채, 들풀무침 그리고 깻잎장아찌, 더덕장아찌, 황태장아찌에 각종 나물이 곁들여져 한 상 가득히 채우고 있다. 한 상 중에서도 특별한 맛을 내는 것은 생청국장으로, 고스란히 생으로 먹게 내온 것이다. 밑에 깻잎이나 머위, 상추, 김 등을 깔아 한 잎에 싸 먹게 되어있는데, 생청국장 위에 고명으로 얹은 보랏빛 오디가 주인의 살가운 마음씨를 엿보게 한다. 흔히 청국장이라면 아무리 몸에 좋다고 해도 우선 그 역한 냄새 때문에 먹는 것 자체가 고역스러운데, 여기에서는 매실을 넣고 검정콩가루를 섞어 발효시키는 비법으로 냄새를 해결한 것이다. ■ 된장찌개에 마늘은 ‘NO’ 들풀에서는 요리와 함께 청국장과 된장도 직접 판매한다. 청국장은 800g에 1만원, 된장은 3년 숙성된 것만으로 파는데,1㎏에 1만 5000원이다. 부부는 청국장과 된장을 팔기에 앞서 먼저 청국장이며 된장을 보다 맛있게 끓이는 법을 친절하게 일러주는데, 이들의 말에 따르자면 절대로 마늘을 넣지 말 일이다. 청국장에 무, 호박, 대파, 신김치, 양파, 청양고추, 두부를 준비해서 우선 무, 호박, 양파, 대파는 썰고, 신김치는 속을 털고 썰어서 꼭 짠 뒤 기름에 살짝 볶는다. 여기에 황태나 멸치를 우려낸 육수를 붓고 두부와 청양고추를 넣은 다음에 청국장을 알맹이 그대로 넣어서 걸쭉하게 끓이는데, 채소만 익었다 싶으면 금방 불을 끈다. 청국장은 유산균이나 비피더스균처럼 장을 깨끗이 하는 작용과 면역력을 키우는 효과가 있는데 자칫 오래 끓이면 이런 좋은 효소와 균이 파괴되기 때문이다. 된장찌개 역시 마늘을 넣지 않고 청국장에 들어가는 재료 외에 감자와 표고버섯을 곁들이는데, 된장을 체에 걸러 풀어서 청국장보다 2배 정도의 시간을 들여 푹 끓여내는 식이다.
  • [2일 TV 하이라이트]

    ●김용만 신동엽의 즐겨찾기(SBS 오후 11시5분) 염정아, 이지훈, 신화 에릭, 신혜성, 김동완, 이민우, 전진, 앤디가 출연한다. 스타들의 숨겨진 모습을 보여 주는 ‘셀카짱 콘테스트’에서 염정아, 이지훈, 신화의 깜짝 영상을 공개한다. 경악할 만한 에릭의 표현연기, 전진과 앤디가 함께 선보이는 기상천외의 쇼 등을 보여 준다. ●세계 세계인(YTN 오전 10시40분) 프랑스가 낳은 대표적인 인상파 화가 모네가 그린 ‘런던의 국회 의사당’이 백년 만에 뉴욕 경매장에 나왔다고 하는데 그 현장을 찾아가 본다. ‘런던의 국회 의사당’ 유화 시리즈는 모두 19점으로 이번에 경매에 부쳐진 작품은 다른 그림보다 많은 건물을 담고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문화 문화인(EBS 오후 11시40분) 80∼90년대 대중가요뿐 아니라 대학가에서 인기 싱어 송 라이터로 활동했던 백창우. 그런 그가 언젠가부터 이른바 잘 팔리지는 않지만, 세상의 자양분이 되는 실험적이고 독특한 음반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의 노래에는 무엇이 담겨 있을까? 가수이자 작곡가인 백창우를 만나 본다. ●리얼 스토리 ‘실제상황’(iTV 오후 10시50분) 평소 자기관리가 철두철미한 이 여인의 부재는 가족과 회사동료에게 커다란 의문과 걱정을 남긴다. 실종자의 통화내역을 수사하던 형사들은 그녀의 주변에 머물던 두 명의 남자를 주목하게 된다. 태국 여행 중 만난 두 남자와 한 여자, 그들은 대체 어떤 관계였을까? ●TV특종 놀라운 세상(MBC 오후 7시20분) 하루 세끼 밥 대신 막걸리를 먹는 별난 할아버지의 막걸리 사랑 속으로 들어가본다. 인터넷에 올라온 놀라운 사진 속에는 손가락이 뒤로 꺾인 채 손등에 닿는 사람,90도 직각의 브이가 되는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팔꿈치에 혀닿기’를 할 수 있다는 사람까지 나타났다고 한다. ●용서(KBS2 오전 9시) 수민은 6년간 사귀며 결혼을 약속했던 찬기가 아무런 연락도 없이 다른 여자와 결혼했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는다. 한편 연락을 끊은 채 공항에 나타나지 않은 인영 때문에 제주행 비행기에 홀로 오른 형우는 착잡하다. 그러던중 옆 자리에 대낮부터 술에 취한 채 앉은 아가씨에게 눈길이 가게 된다. ●금쪽같은 내새끼(KBS1 오후 8시25분) 진국 생모의 산소에 진수를 데리고 간 희수는 외출했던 덕배와 영실을 부르고, 영실은 희수에게 시어머니를 가지고 논다며 노발대발한다. 깨어나지 않는 지혜와 절망감에 빠져 있는 재민을 위해 선자는 입양기관을 찾아가 자신이 갓난아기의 대리모가 되겠다고 자청한다.
  • [교육in] 숲을 닮은 학교 여주제일고

    [교육in] 숲을 닮은 학교 여주제일고

    학생과 교사, 학부모, 지역 주민들이 함께 30여년 동안 나무를 가꿔온 ‘숲을 닮은 학교’가 있다. 학생들의 인성교육을 위해 한 그루 한 그루 심기 시작한 것이 이젠 조그만한 숲이 됐다. 학생들은 나무를 가꾸면서 나무의 올바른 심성을 배운다. 튼튼하고 강하게 자라는 나무처럼 실력도 쌓아간다. 교사들은 나무에게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법을 배운다. 나무와 함께, 나무 속에서 생활하며, 나무를 통해 가르치고 배우는 그런 학교였다. 경기도 이천 요금소를 나와 3번 국도를 따라 20여분을 달리자 숲 그림자 짙은 건물 한 채가 눈에 들어왔다. 행정구역상 경기도 여주군 가남면 심석1리 여주제일고는 지난 69년 실업계 고교로 개교했지만 2002년부터 지역민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인문계 2개반을 편성, 종합고로 운영되고 있다. 교문에 들어서자 손님을 처음 맞아준 것은 대학 교정을 떠올리게 하는 큰 정원이었다. 가을햇살이 간지러운듯 잘 익은 가을 모과가 가늘게 흔들리고 있었다. 은행나무에 매달린 작은 은행들은 가지마다 줄줄이 사탕이었다. 낙우송과의 낙엽 침엽 교목인 메타세쿼이아는 학교 울타리를 따라 가을 하늘을 향해 긴 팔을 뻗어올리고 있었다. 조경을 한껏 뽐내는 정원이 아니었다. 한 그루 한 그루마다 정성이 가득했다. 정재석(60) 교장은 메타세쿼이아를 쓰다듬었다.“33년 전에 심었는데 벌써 이렇게 컸습니다.” 5층 건물 높이의 나무 밑동을 어루만지는 그의 손이 마치 학생들 머리를 쓰다듬듯 했다. 그가 학교에 나무를 심기 시작한 것은 197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교사로 첫 발을 뗀 초임 교사였던 그는 교장과 교감에게 학교에 나무를 심을 것을 제안했다. 인성교육을 위해서 나무만큼 좋은 것은 없다는 확신에서였다. 교장과 교감은 쓸데없는 일을 벌인다며 반대했다. 그러나 그는 재단이사장을 직접 만나 설득에 성공했다. 여주제일고는 서울에서 한국세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는 회계사 김연수 이사장이 지난 1969년 세웠다.1968년 여주제일중이 서울 사람에게 팔릴 위기에 놓이자 이 곳이 고향인 김 이사장이 34살의 나이에 중학교를 인수한 뒤 그 옆에 고교를 세웠다. 지방 교육을 외지 사람에게 맡길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고향의 후학 양성에 관심이 많았던 김 이사장은 당시 평교사였던 정 교장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정 교장은 서울 천호동 묘목원에서 메타세쿼이아 어린 나무 200그루를 사다 심기 시작했다. 대학에서 농공학을 전공한 것이 큰 도움이 됐다. 그는 “당시에는 회초리 같은 작은 나무였지만 지금은 한 그루를 옮기려면 30t 트럭으로도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나무를 가꾸는 그의 노력에 다른 교사들과 학부모들도 동참했다. ●30여년간 나무심어… 감성교육에 큰 도움 매년 식목일이 되면 학부모들과 지역 유지, 졸업생들이 나무를 심었다. 가꾸는 일은 학생과 교사들의 몫이었다. 각자 맡은 나무에 물을 주고 거름을 줬다.1980년에는 중학교 앞 운동장 9000㎡를 아예 공원으로 꾸몄다. 설립 이념을 살려 ‘개척공원’이라고 이름 붙인 이 공원에 뿌리를 내린 나무들은 전나무와 향나무, 목련, 은행, 대추, 산수유, 소나무, 느티나무, 단풍나무 등 수십종, 수백 그루에 이른다. 지금도 매년 4월5일이 되면 졸업생과 지역민들은 학교에 모여 나무를 심는다. 학부모들은 막걸리와 떡을 장만해 손님을 대접한다. 학교의 정성이 알려지면서 군부대도 나무심기를 도왔다.99년 자매결연을 맺은 육군 제3221부대는 중장비를 동원해 생태학습장 조성을 도왔다. 학교 전체는 서서히 공원으로 탈바꿈했다. 개척공원과 소나무숲, 야생화 꽃길, 연못, 생태학습장 등을 고루 갖춘 ‘숲속의 학교’였다. 학생과 교사가 나무를 가꾸면서 학교 분위기도 달라졌다. 교사들은 학생들을 꾸짖기 전에 함께 교정을 산책하며 얘기를 나눈다. 박흥모(42) 교사는 “나무 아래서 대화를 나누다 보면 교사인 나부터 감정을 추스를 수 있고, 학생들도 마음을 터놓고 얘기를 하게 된다.”면서 “전인교육과 감성교육에 큰 도움이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2학년 정유진(18)양은 “공부하다 머리가 아프거나 짜증이 나도 창 밖 나무를 보면 금세 기분이 풀어진다. 무엇보다 학교 분위기가 마음에 든다.”고 했다. 이 학교의 인성교육은 나무 가꾸기에 그치지 않는다. 가정적으로 고민이 많은 아이들에게는 교직원과 학생이 일대일 자매결연을 맺어 지도하고 있다.‘도울학생 자매결연’ 프로그램이다. 정 교장은 “걱정거리가 많은 학생들에게 ‘학교에 내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선생님 한 분이 있다.’는 생각을 갖도록 해 즐겁게 학교생활을 하도록 하자는 취지”라면서 “한 그루의 나무를 가꾸듯이 교사들도 아이들을 맡아 가꿔 올바르게 키우자는 생각에서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나무를 기르듯 학생을 가르치면서 학생들의 생활은 몰라보게 달라졌다. 가장 두드러진 성과는 결석이 거의 사라졌다는 점이다. 지난 2002년 1년 동안 개근한 반은 전체 24개반 가운데 4개에 불과했지만 지난해에는 21개반 중에 9개로 늘었다. 올해는 현재 18개반 가운데 11개반이 전원 개근을 기록하고 있다. 전교생으로 따지면 616명 가운데 607명이 결석 없이 학교를 다니고 있다. ●교사 먼저 공부… 논문 30여편·논문집 4권 인성교육을 강조하지만 그렇다고 학생들의 실력을 쌓는 데 소홀한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교사들이 솔선수범이다. 이 학교 교사들은 모두 논문을 쓴다. 교사들은 3∼4년에 한 차례 아이들 교육에 도움이 될 만한 연구성과를 논문으로 써서 돌려읽는다. 현재 발간된 논문은 30편, 논문집만 4권에 이른다. 방학이 되면 전 교사가 1박2일 연수를 받는다. 교사들은 ‘되돌아본 나의 학교생활’이라는 주제 발표를 통해 한 학기의 경험을 나누고 반성한다. 매달 한두 차례 동료들의 수업을 평가하고 평가받는 동료장학과 자신의 수업장면을 비디오로 촬영해 스스로 평가해 보는 자기장학도 교사들의 실력을 올리는 비책이다. 교사부터 스스로 공부하는 분위기다. 교사들은 학생들을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사교육을 접하기 어려운 ‘시골 학교’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다. 각 교과별 교사가 매일 한 문제씩 출제, 매년 책으로 엮어 나눠주는 문제집은 웬만한 시중 참고서보다 알차게 만들어졌다. 대학 진학을 원하는 실업계 학생들을 위해 2학년 때부터 실업계 4개반 가운데 1개반을 ‘계속형 학급’으로 운영하고 있다. 이 반에서는 실업계 전공과 함께 대학 진학을 위한 수능 준비를 별도로 할 수 있다. 이 학교에 배치받은 예비 고1을 위한 위한 선행학습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중학교 마지막 겨울방학 중 한달 반 동안 국·영·수를 중심으로 선생님들의 강의를 들을 수 있게 했다. 입학한 뒤에는 성적이 우수한 학생 가운데 희망자를 받아 기숙사를 제공한다. 도서관과 교실은 학생들에게 24시간 개방된다. 공부를 하려는 학생들에게 학교가 모든 것을 해줘야 한다는 정 교장의 소신 때문이다. 지난 4월부터는 중국어 원어민 교사 한 명을 초빙, 교과재량 및 특기적성 시간을 활용해 전교생에게 중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내년부터는 희망자를 받아 기숙사에서 중국어 교사와 함께 생활하는 연수반을 별도로 운영할 계획이다. 공부하는 교사에게 배우는 학생들이 공부를 게을리 할 리 없다. 교장과 교사들의 노력은 실력있는 학생이라는 열매를 거두고 있다. 올해 첫 졸업생을 배출하는 인문계에서는 수시 1학기에서만 한국외국어대와 건국대, 단국대, 숙명여대, 숭실대 등에서 37명의 합격자가 나왔다. 실업계는 지난 99년부터 5년 연속 100% 취업률을 기록하고 있다. 워드프로세서 1급과 정보처리, 컴퓨터기능사 등 자격증 취득률도 200%에 육박한다. 학생 한 명이 평균 2개의 자격증을 따서 졸업하는 셈이다. 학교의 노력이 알려지면서 이 학교로 진학하려는 중학생도 적지 않다. 현재 중학교 내신 상위 55% 안에 들어야 이 곳으로 진학이 가능하다. 최인규 교감은 “매년 여주와 이천 등 인근 중학교 교사들로부터 진학 상담이 들어올 정도로 학교의 인기가 높다.”고 말했다. 익명의 졸업생은 매년 1000만원을 학생들의 장학금으로 내놓고 있다. 사단법인 아름다운학교 운동본부는 최근 전국 초·중·고를 대상으로 한 공모전에서 올해의 아름다운 학교로 여주제일고를 선정했다. 학생과 교사, 학부모가 뜻을 합쳐 아름다운 학교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노력을 인정한 것이다. 여주 김재천기자 patrick@seoul.co.kr
  • [수도권 in] ‘풍빠사모’를 아시나요

    [수도권 in] ‘풍빠사모’를 아시나요

    문학자 가람 이병기(1892∼1968) 선생은 점심 반주(飯酒)로 막걸리를 마시다 조용히 세상을 등졌을 정도로 술을 즐겼다. 고서(古書) 몇권 갖추지 않은 집을 측은하게 여겼다. 가람은 1954년 ‘원광문예’에 발표한 수필 ‘풍란’(風蘭)에서 ‘썩은 향나무 껍질에 옥(玉)같은 뿌리를 서려 두고/청량(淸凉)한 물기를 머금고 바람으로 사노니‘라고 읊었다. 가람의 후예라 하면 지나칠까. 풍란을 너무 좋아해 뭉친 이들이 있다.‘풍란에 빠진 사람들의 모임’(풍빠사모)이다.2000년 8월 조직된 뒤 회원 2496명을 거느렸다. 백과사전에는 풍란에 대해 ‘나무줄기나 바위에 붙어서 자라는 착생란.7월에 순백색 꽃이 아름답게 피어 오래 전부터 재배되고 있으며, 한국·중국·일본 등지에 분포한다.’라고 써놓았다. 서해안 등 바닷가에서 주로 자란다. 깊은 산속에서 자라는 다른 품종과 달리 모진 바닷바람과 눈보라 속에서도 자태를 잃지 않는 데 매력이 있다. 회원 김주봉(48·서울 성북구 석관1동)씨는 “심성을 가꾸려는 뜻에서 처음엔 동양란을 살펴봤는데 굳이 높은 가격이 필요할까 하는 생각에 풍란으로 바꿨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면서도 물컵 크기만한 화분에 옮겨다 놓으면 앙증맞은 모양이 인기를 모으기에 충분하다.”면서 “희귀종이냐에 따라 수천만원 하기도 하지만, 초심자용은 한 포기에 5000원∼1만원 정도면 된다.”고 귀띔했다. 정보 교환과 친목을 목적으로 한 모임이기 때문에 대표를 따로 두지 않았다. 대신 전체를 총괄하는 담당과 수도권, 충청, 호남, 영남, 강원 등 지역별 총무를 통해 수시로 연락한다. 회원 가운데에는 한의사, 약사를 비롯해 전문직이 많지만 회사원과 평범한 주부 등 여성들도 더러 끼여 있다. 이계주(42·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야탑동)씨는 “풍란 중에는 일본에서 들여온 것들이 많다.”면서 “주인장이 너무 부지런 떨면 죽이기도 하는 게 정설”이라고 설명했다. 한여름 무더운 날씨에는 갑자기 물을 줄 경우 뜨거운 수증기가 발생해 태워 죽일 수 있으며, 겨울에는 얼어 죽이기 때문에 기온이 알맞은 시간대를 택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고급 품종일수록 손을 너무 많이 타다 보면 죽일 가능성이 크지만 풍란은 평범한 데다 면역력도 강해 우리네 서민과 걸맞다고 했다.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서울·김일성대총장 만났다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을 대표하는 서울대와 김일성대학 총장이 한자리에서 만났다.22일 서울대 관계자는 정운찬 서울대 총장이 21일 러시아 국립극동대학 개교기념식 행사에 성자립 김일성대 총장과 함께 참석, 오찬장에서 환담했다고 밝혔다. 정 총장은 극동대학의 공식 초청을 받아 개교기념식 행사에서 명예박사학위를 수여받았고 김일성대 총장의 참석 사실은 사전에 알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성자립 김일성대 총장은 지난 2002년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극동지역 방문을 계기로 김일성대와 학술교류를 맺은 것이 인연이 돼 초청된 것으로 알려졌다. 두 총장은 이날 기념식 행사 직전 극동국립대 귀빈 대기실에서 만났으며 정 총장이 대기실에 들어온 성 총장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고, 성 총장은 “먼 타국에서 동포를 만나 반갑다.”고 화답했다. 성 총장은 “서울대생들은 위스키를 마시고 고려대생들은 막걸리를 마신다던데 사실이냐.”고 물었고 정 총장은 “고려대생들이 막걸리를 마시는 것은 맞지만 서울대생들이 위스키만 마시지는 않는 것 같다.”고 답했다. 김효섭기자 newworld@seoul.co.kr
  • [비즈&피플] 워크아웃, 우린 이렇게 졸업했다

    [비즈&피플] 워크아웃, 우린 이렇게 졸업했다

    벼랑끝에 몰린 9회말 투아웃. 다들 자리를 뜨며 ‘결국 이렇게 끝나는구나.’하는 순간,“경기는 끝나지 않았다.”며 모래알처럼 흩어진 정신력을 하나로 모아 역전에 성공, 우리 곁에 돌아온 기업들이 있다. 몰락한 ‘명가(名家)’로, 환란의 ‘주범(主犯)’으로 세간의 손가락을 받았던 크라운제과, 대우인터내셔널, 쌍용건설 등이 차례로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 꼬리표를 떼고 ‘명가 부활’을 선언했다. 그러나 지금의 모습이 있기까지 이들이 받은 수모와 서러움, 눈물 등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더욱이 한때는 재계를 호령했던 ‘명가의 자손’들이었으니….‘이대로 무너질 수 없다.’며 이들을 지탱시킨 힘은 ‘주먹 불끈’이었다. 실추된 명예와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달라진 세상의 인심을 속으로 삭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들이 부활의 불씨를 지필 수 있었던 것은 막판 위기에서 승부의 흐름을 바꾼 ‘구원투수(CEO)’와 한몸처럼 믿고 따라온 ‘야수(임직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퇴직금 턴 ‘사원의 힘’-김석준 쌍용건설 회장 19일 서울 송파구 향군회관에서 열린 쌍용건설 창립 27주년 행사장에 선 김석준 회장의 얼굴에는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김 회장은 “그동안 허리띠를 졸라매고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거치면서도 동요하지 않고 회사를 살린 직원들의 노고에 감사드린다.”며 5년 8개월에 걸친 워크아웃 졸업을 자축했다. 생일과 동시에 워크아웃을 끝낸 쌍용건설 임직원들도 “고등학교 3년의 입시전쟁과 군복무를 한꺼번에 마친 기분”이라며 기뻐했다. 다른 기업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쌍용건설의 워크아웃 ‘졸업기’도 피눈물로 얼룩졌다. 1997년만 해도 2400명에 달했던 직원은 2000년 700명선으로 줄었다. 당장 이익 내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사업부가 무더기로 없어졌고 회사 돈으로 해외유학가서 박사학위까지 받아 온 ‘우수인재’들마저 내보내야 했다. 자고 일어나면 없어지는 동료 때문에 타 부서에 전화하기가 두려울 정도로 살벌한 구조조정을 단행했지만 직원들의 살림살이는 갈수록 쪼그라들었다. 한때 업계 최고수준인 상여금 800%를 받던 직원들이 98∼2000년 단 한푼의 상여금도 집에 가져가지 못했다. 대리 5년차의 세전 연봉이 1400만원에 불과했다. 당시 사내게시판에는 “오늘이 아들 생일이었는데 버스정류장에 마중나온 아들에게 뭐라도 쥐어주려고 주머니를 뒤졌더니 1200원밖에 없었다. 초코파이와 풍선으로 생일상을 대신했다.”는 가장의 사연이 올라와 사무실이 울음바다에 빠지기도 했다. 김 회장이라고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쌍용그룹 회장으로 있다 98년 채권단의 요청으로 5년만에 회사로 돌아온 김 회장은 “앞으로 나를 회장이라 부르지 말라. 나는 CEO일 뿐이다.”라며 몸을 낮췄다. 추석, 설 명절때는 한번도 빠짐없이 베트남, 인도, 중동 등 해외건설현장을 찾아 고향에 가지 못한 직원들과 함께했다. 회생의 디딤돌이 된 서울 내수동 ‘경희궁의 아침’ 분양때는 스스로 태스크포스팀 팀장이 돼 미국 LA로 건너가 교민들을 상대로 200여 가구를 분양하기도 했다. 지난해 유상증자가 필요할 때 직원들이 퇴직금을 털어 당시 2500원이던 주식을 5000원에 매입하자 김 회장도 유일한 재산인 서울 이태원동 자택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주식을 샀다. 대신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채권단 지분 25%에 대한 ‘우선매수청수권’은 직원들에게 양보했다. 김 회장의 솔선수범은 직원들의 자신감을 일깨워줬다. 전 직원이 출퇴근시간 지하철역에 어깨띠를 두르고 나가 분양전단지를 나눠주며 광고비를 아꼈고 경쟁사가 분양을 포기한 아파트도 인근 주민들을 파고드는 집념으로 100%분양에 성공했다. 김 회장이 회사로 돌아온 98년 자본잠식 상태로 7704억원의 적자를 기록했던 쌍용건설은 올해 1조 2050억원의 매출에 626억원의 이익을 바라보고 있다. 부채비율은 160%에 불과하다. 류길상기자 ukelvin@seoul.co.kr ●‘인적 네트워크’ 승리-이태용 대우인터내셔널 사장 “어제의 수출역군이 하루아침에 죄인 취급을 받을 때는 말할 수 없이 참담한 심정이었습니다. 더욱 비참한 것은 ‘종합상사의 생명줄’인 거래선의 이탈과 젊은 직원들의 이직이었습니다.” 이태용 대우인터내셔널 사장이 워크아웃 기간을 회고하다 내뱉은 첫 마디였다. 그가 사장에 취임한 뒤 며칠간 했던 업무는 떠나는 직원들의 사표 수리였다. 회사의 미래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이들을 잡을 명분이 없었던 것. 이 사장은 “이대로 쓰러질 수밖에 없나.”하고 밤잠을 설치기가 일쑤였다고 했다. 당시 대우인터내셔널이 ㈜대우로부터 분리될 때만 해도 부채비율이 940%, 채무액은 1조 3000억원을 웃돌아 회생이 불가능해 보였다. 그는 우선 월례조회를 부활하고, 조직 안정을 위해 사보를 재창간해 회사 소식을 임직원 가족들이 알 수 있도록 했다. 이어 주말마다 직원들과 북한산을 등반,CEO와 직원들간의 신뢰 회복에 나섰다. 이 사장은 또 채권단을 일일이 찾아가 “대우의 해외 네트워크는 대우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재산이다. 이를 포기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수출 기반을 잘라내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설득했다. 그 결과 해외 네트워크 유지에 부정적인 채권단이 돌아서게 됐으며, 대우인터내셔널 회생에 결정적인 기반이 됐다. 그러나 워크아웃 기업이라는 점 때문에 문전박대도 다반사였다. 이 사장은 인도 국영석유공사의 회장을 만나기 위해 수차례 ‘노크’를 했지만 결국 무위로 끝났다. 국내에서도 거래 포기가 잇따른 가운데 유상부 포스코 당시 회장이 대우와의 거래를 유지하라는 ‘특명’이 소문나면서 다른 거래선들이 확보됐을 정도. 이 사장은 “돈줄이 보여도 투자자 모집이 안 되거나 투자를 할 수 없을 때가 가장 큰 고통이었다.”고 밝혔다. 직원들의 어려움도 이에 못지 않았다. 상여금 동결은 기본이고 사소한 경비 지출도 일일이 채권단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관계자는 “필요한 사무실 집기 교체에도 쓸데없는 곳에 돈 쓴다는 채권단의 쓴소리를 들을 때는 참담할 지경이었다.”고 털어놓았다. 이런 가운데 이 사장은 그야말로 ‘단비’ 같은 소식을 접했다.2000년 대우그룹의 몰락으로 다들 몸을 사릴 때 미얀마 정부가 대우의 적극적인 법인활동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성공 가능성이 큰 미얀마 ‘A-1’광구의 개발권을 준 것. 이 사장은 지난해 말부터 미얀마 가스전의 성공과 행운을 기원하는 마음에서 ‘황금색 넥타이’만을 매고 다녔다. 그의 바람이 통한 것일까. 지난 1월 미얀마 가스전 발견은 대우인터내셔널의 도약에 결정적인 발판이 될 것으로 보인다.2010년부터 매년 1000억∼1500억원의 배당수익을 안겨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대우인터내셔널은 현재 부채비율 168%, 상반기 매출은 2조 4612억원, 순이익 904억원을 기록할 정도로 내실있는 기업으로 탈바꿈했다. 김경두기자 golders@seoul.co.kr ●‘크로스 마케팅’ 결실-윤영달 크라운제과 사장 크라운제과 윤영달(59) 사장이 회사를 부도상태에서 구해낼 수 있었던 무기는 ‘크로스 마케팅’과 ‘등산경영’이었다. 1998년 부도가 난 크라운제과는 오로지 외형확장만을 좇은 우리 기업들의 전형적 실패담이었다. 윤 사장은 “외환위기가 오기 전에 몸집 부풀리기에만 치중하는 경영을 했다. 이익규모내에서의 투자가 아니라 빚을 늘려가며 껍데기만 키우는 바보짓을 했다.”고 후회했다. 윤 사장은 창업주인 고 윤태현 회장의 장남으로 연세대 물리학과 석사과정을 졸업한 이공계 출신 최고경영자(CEO).1967년 처음 경영에 참여한 이후에는 72년 ‘조리퐁’이란 대히트작을 내기도 했다.77년부터는 한국자동기라는 공장자동시설 생산업체를 운영하고, 풍력발전을 연구하는 등 개인사업을 하다 95년 다시 회사경영에 복귀했다. 그리고 외환위기를 만난 것이다. 채권단회의에서 화의결정이 확정되자 윤 사장은 골프에서 손을 뗐다. 명동에 골프연습장을 지을 정도로 골프광이었다. 담배도 끊고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100㎏대의 몸무게를 가진 그에게 등산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5분을 가면 15분을 쉬어도 숨이 가라앉지 않았다. 이제는 아침 8시에 나가 저녁 9시까지 하루종일 직원들과 북한산을 탈 정도로 체력을 길렀다. 등산을 마치면 직원들과 같이 목욕탕에서 등을 밀었다. 직원의 신발이 떨어지면 사장이 직접 뛰어가서 새로 사왔다. 점심때 산 중턱에서 직원들과 함께 걸치는 막걸리는 단단한 응집력으로 연결됐다. 물론 극도의 구조조정 과정속에서 1200여명의 직원은 800여명으로 줄었고,20여명의 임원은 단 한명만 남았다. 직원들의 사기를 일으키고 단결을 일궈낸 것이 ‘등산경영’이었다면 ‘크로스 마케팅’은 매출을 일으키는 발판이 됐다. 크로스 마케팅도 땀흘리는 등산 중에 나온 아이디어였다. 크로스 마케팅이란 국적을 뛰어넘어 동종의 경쟁 업체들끼리 생산, 판매 등을 분담하는 전략적 제휴를 뜻한다.2000년부터 타이완 2위의 제과업체 왕왕의 쌀과자를 들여와 팔았다. 지금까지 누적 판매량은 800억원어치에 달한다. 타이완 1위의 제과업체인 이메이와의 크로스 마케팅을 통해 ‘美인블랙’이란 제품을 지난해 11월 내놓았다. 출시 100일 만에 매출 100억원이란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크라운제과의 제품도 이들 업체를 통해 타이완으로 수출 중이다. 결국 회사는 2002년말 5년여만에 화의에서 졸업하지만 아버지인 윤 회장은 회사의 재기를 보지 못하고 99년 노환으로 별세한다. 윤 사장은 크로스 마케팅을 타이완에 이어 중국, 일본, 홍콩, 호주, 스페인으로 확대 중이다. 국내에서는 해태제과를 인수하기 위한 자금 확보에 주력하고 있다. 해태제과 인수에 성공하면 크라운제과는 다시 국내 2위의 제과업체로 복귀하게 된다.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도봉구청장·구민 ‘산행 대화’

    도봉구청장·구민 ‘산행 대화’

    “산을 오르면서 구청장님과 대화를 나누니 구 행정이 보다 쉽게 와 닿네요.” 서울 도봉구는 지난 15일 오전 8시 도봉산 일대에서 ‘2004 가을철 도봉구민 등산대회’를 열었다. 도봉동 성균관대 야구장에서 출발해 도봉산 은석암·만월암·도봉산장을 거쳐 되돌아오는 7.5㎞ 코스로, 약 4시간이 소요되는 만만찮은 코스였지만 참가자가 1200여명에 이를 정도로 호응도가 높았다. 대회는 5명이 한 팀을 이뤄 산을 오르면서 주요 지점에서 산악 문제풀이, 구호 외치기, 쓰레기 줍기 등을 기준으로 점수를 합산해 상품을 나눠주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특히 최선길 도봉구청장이 대회에 직접 참가해 눈길을 끌었다. 최 구청장은 출발장소에서 동단위로 모인 참가자들과 기념촬영을 한 뒤 참가자들의 뒤를 따랐다. 산을 오르며 최 구청장은 참가자들과 구정과 관련된 여러가지 대화를 나눴다. 최 구청장이 “경제가 어려워 요즘 살림살이 많이 힘드시죠? 도봉구 행정은 마음에 드십니까?”라며 묻자, 참가자 최옥자(60·도봉1동)씨는 “그래도 도봉구가 발전기반을 하나씩 만들어가서 다행”이라고 답하기도 했다. 20년 넘게 등산으로 건강관리를 했다는 최 구청장은 험한 바위를 오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손을 내밀어 이끌어주는 여유를 보이기도 했다. 오후가 되자 출발장소에 다시 도착한 참가자들은 흥겨운 뒤풀이를 가졌다. 동별로 설치한 차양막 아래 모인 참가자들은 감자탕, 수육, 차돌박이 구이 등 준비한 음식을 나눠 먹었다. 갈증을 해소해주는 시원한 막걸리 사발도 돌고, 노래자랑 행사가 열리는 등 행사는 서울 도심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정겨웠다. 최 구청장과 구청직원들은 주민들과 함께 자리하며 주민들의 생생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법조타운을 유치하는 등 도봉구가 옛날보다 많이 발전했다.”는 칭찬도 들었고,“뉴타운 지역선정 등에서의 주민갈등을 잘 치유해 달라.”는 당부를 듣기도 했다. 고금석기자 kskoh@seoul.co.kr
  • [삶과 경영 이야기] (30) 너무나 한국적인 외국인 솔로몬 메트라이프생명 사장

    [삶과 경영 이야기] (30) 너무나 한국적인 외국인 솔로몬 메트라이프생명 사장

    참 많이 웃었다. 영어 인터뷰에 대한 부담은 그가 한국말을 한국사람보다 더 잘한다고 귀띔받았을 때 이미 떨쳐 버렸지만 이 정도로까지 유쾌하게 대화를 나누게 될 줄은 예상 못했다. 우리 나이로 57세. 하지만 연방 터지는 웃음이 안 그래도 젊어뵈는 얼굴에서 나이를 열살쯤 더 덜어낸다. 가장 한국적인 외국인 최고경영자(CEO)라는 스튜어트 솔로몬 메트라이프생명 사장. 옛 도자기와 고가구의 훈기가 가득한 서울 강남구 삼성동 사무실에서 지난 34년간 한국, 그리고 한국인과 맺어온 삶과 경영 얘기를 들어봤다. ●평화봉사단으로 시작한 34년 인연 -1995년 10월 초 김포공항에서 바라본 가을하늘은 잉크처럼 파랬고, 가을공기는 더없이 상쾌했다.17년 만에 찾아온 세번째 한국근무. 첫번째는 대학을 갓 졸업하고, 두번째는 사회 초년병으로, 이번에는 보험회사 임원. 서울 거리는 80∼90년대 급성장으로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하지만 지하철에서 어른들에게 자리를 내주는 젊은이들의 마음씨나 콩비지·순두부의 깊은 맛은 예전 그대로였다. 그로부터 또다시 만 9년이 흐른 지금, 한국과의 인연은 내 나이의 3분의2를 채워가고 있다. -뉴욕 시러큐스대(생리학)를 졸업하고 의대 진학을 준비 중이던 71년, 우연찮게 평화봉사단(Peace Corps)에 자원하게 됐다. 전세계 개발도상국에서 2년간 봉사활동을 하는 일이었는데, 그게 ‘코리아’와 인연의 시작이었다. 대개 영어 가르치는 일이 맡겨졌던 다른 봉사단 친구들과 달리 나는 대학전공 때문에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에 배치됐다. 각지의 보건소를 돌며 결핵 예방과 치료, 의료장비 이용교육을 하는 일이었다. 생소한 나라였지만 전국 방방곡곡을 도는 동안 애정과 호기심이 싹터갔다.“이렇게 작은 나라에서 이렇게 말투와 음식, 생활방식이 다를 수가 있을까.”북한산 정상에서의 점심요리, 시골 다방마담과의 커피 한잔, 야간 통행금지로 고생했던 에피소드 등은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는 청년시절의 추억이다. -당시 나는 서울 연희동에서 하숙을 했는데 하숙집 아줌마와의 인연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재미 있는 것은 당시 예뻐했던 아줌마의 서너살짜리 아들이 지금 우리 회사의 프로영업조직(FSR)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현재 ‘100만달러 원탁회의’(MDRT·실적 높은 설계사들의 전세계 모임) 회원이다. -73년 평화봉사단 활동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가 외환은행 뉴욕지점에 잠깐 있다가 이듬해 다시 한국으로 나왔다. 미국 기계부품회사의 바이어로 부산 사상공업단지에서 일했는데, 퇴근 후 해운대에서 수영을 하고 먹었던 막걸리와 홍합의 맛은 절대로 못 잊을 것 같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 것은 79년. 부산에서 알게 된 외환은행 지점장의 제의로 외환은행 뉴욕지점에 재입사했다. 자산운용을 담당했는데 당시 급성장하던 수출한국의 최일선이자 무역결제가 집중됐던 이곳은 나에게 금융에 대한 눈을 뜨게 해 주었다. 근무 17년째인 95년, 한국에서 일할 임원을 뽑고 있던 메트라이프 본사에 지원서를 냈다. 보험인으로서 출발점이었다. ●“세종대왕은 정말 대단한 양반” -많은 사람들이 내 한국말 실력에 놀라곤 한다. 이미 결혼식 주례도 몇차례 섰다. 사실 이건 순전히 한국말이 가진 매력 때문이다.‘살갑다’‘아침햇살’‘보듬다’ 같은 말을 보라. 은근한 정과 풍부한 감성이 느껴지지 않는가. 한글은 과학적이기도 하다. 정말 세종대왕은 대단한 양반인 것 같다. -도자기는 내 생활의 일부다. 나이 들수록 더 도자기에 미쳐가는 것 같다. 한국 도자기의 단순함과 편안함은 중국·일본 도자기가 절대로 범접할 수 없는 맛을 지녔다. 도자기 동호회인 ‘문월회’에 외국인으로는 유일하게 가입해 활동하고 있다. 이천, 강진, 여주 등의 도요지는 물론이고 중국내 고구려 유적지에도 다녀왔다. 특히 도자기를 알아가는 과정은 한국의 역사를 배워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도자기와 함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고가구다. 도자기는 반닫이 같은 것이 뒷받침돼야 제격이다.(사무실 곳곳에 놓인 도자기와 고가구를 가리키며)내 개인 소장품들이다. 한남동 작은 아파트에 더 이상 놓을 데가 없어 사무실로 들고 나왔다. 이제 그만 도자기 사는 걸 자제할 때도 된 것 같은데, 그게 안 된다. 옛날 한국사람들은 정말로 작품에 혼을 담았던 것 같다. 하지만 정작 한국사람들이 그걸 모른다. 박물관에 들어가도 사람이 없다. 내년에 새 국립박물관이 완성되면 그때는 많이들 가려나. 서울 가회동 등 일부지역을 빼놓고는 한옥이 거의 사라져 버린 것도 비슷하다. 서양에서는 옛 건물들을 이렇게 무분별하게 없애지 않는다. 발전도 중요하지만 장구한 역사를 너무 쉽게 버리는 것은 아닌지. 조깅도 빼놓을 수 없는 취미다. 지금도 동호회원들과 매주 문산, 오산 등 서울근교를 찾아다니며 조깅을 한다. 보통 5㎞쯤을 뛰는데 그러는 동안 그 지역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된다. 뛰고 나면 맥주를 한잔씩 하는데, 사실 이 맛에 뛴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 같다. -미국에 가면 열흘 정도는 괜찮은데 그 이상 지나면 김치 생각에 통 식사를 못한다. 다행히 고향집이 있는 뉴저지에 한국식당이 많다. 제일 먼저 찾는게 곰탕과 김치다. 지금도 점심식사때 직원들과 회사 맞은 편 먹자골목을 답사하듯 돌아다닌다. 얼마전에는 사내 맥주파티 자리에서 “백김치는 너무 싱거워서 고들빼기 김치가 더 좋다.”고 했더니 직원들이 “사장님 전생은 한국사람이었던 것 같다.”며 웃었다. 나로서는 유쾌할 따름이다. 한국음식은 대개 건강식품이다. 콩비지, 삼계탕, 비빔밥, 쌈밥, 된장찌개, 김치찌개, 순두부 같이 맛도 좋지만 몸에도 좋은 음식들이 널려 있다. 홍어회, 곱창은 물론이고 사철탕까지 먹어 봤다. 어차피 세상 한번 사는 건데 어떤 음식이 어떤 맛인지는 느껴봐야 하지 않겠나. -회사에서 석달에 한번씩 맥주파티를 연다. 신입사원 신고식도 하고 장기자랑도 한다. 한잔씩 서로 따라주며 마시다 보면 금세 친해진다. 젊었을 때 소주 두병은 가볍게 마셨던 술 실력이다. 내 방문은 항상 열려 있다. 아이디어나 개선사항, 불만이 있으면 말하라는 것이다. 나는 ‘예스맨’을 굉장히 싫어한다. 상사가 시키는 대로 하는 시대는 지났다. 영어실력을 테스트해 보고 싶을 때에도 내 방으로 오라고 한다. 직원에게는 물론이고 나에게도 도움되는 일이다. ●“미래에 대한 최고의 투자는 교육” -97∼98년 외환위기는 한국도 그렇지만 나로서도 난생 처음 겪는 고통이었다. 당시 우리 회사는 튼튼한 채권만 갖고 있었기 때문에 크게 불안할 게 없었지만 아무래도 최악의 사태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의 피말랐던 경험 때문에 지금도 우리 회사는 위험한 채권에 절대 손을 안 대는, 철저한 안전위주 자산운용을 하고 있다. -교육이야말로 미래에 대한 최고의 투자다. 미국 본사 외에 중국, 인도 등 아시아 현지법인간에도 긴밀하게 교육프로그램을 운용하고 있다. 대주주가 미국회사다 보니 영어실력도 중요하다. 회사에서 매주 3∼4회 아침·점심으로 영어교육을 시킨다. 또 모든 업무교육이 인터넷을 통해 동영상으로 제공된다. 우리의 노하우가 집적된 자산이어서 외부에는 구체적인 내용이 비밀에 부쳐져 있다. 종합자산관리사(AFPK), 국제공인재무설계사(CFP) 등 업무관련 시험을 준비하는 비용도 회사가 부담한다. 우리 회사의 합격률이 업계에서 가장 높은 이유다. -한국사회는 예나 지금이나 너무 급하다. 항상 ‘빨리빨리’다. 다들 성공하고 싶어하지만 일정한 선을 넘어서면 개인도 기업도 넘어지게 된다. 지금의 대규모 신용불량 사태가 이를 잘 보여주지 않는가. 자기가 처한 상황을 잘 알고 분수에 맞게 살지 않으면 큰코 다치게 된다는 것을 사랑하는 한국사람들에게 꼭 말해주고 싶다. 김태균기자 windsea@seoul.co.kr ■ 솔로몬 사장은 누구 스튜어트 솔로몬(56) 메트라이프생명 사장은 2001년 6월 취임 이후 줄곧 ‘한국적 영업’을 강조해 왔다. 이는 메트라이프라는 글로벌기업을 국내에 빠르게 연착륙시킨 원동력이 됐다. 물론 솔로몬 사장 자신이 한국문화와 정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메트라이프생명은 미국 최대 생보사(보유계약고 기준)인 메트라이프의 한국내 자회사.1989년 코오롱-메트생명으로 출발했으나 98년 코오롱그룹 지분을 모두 사들여 지금의 경영체제가 됐다. 이듬해인 99년부터 지난해까지 5년 연속 흑자를 냈고, 그 사이 전국 지점 수는 40개에서 94개로 늘었다. 업계 최초로 보험금 청구당일 지급을 시행했고, 현재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변액유니버설보험을 지난해 국내 최초로 선보였다. 직원들에 대한 대규모 교육투자로 올해 변액보험 판매자격 시험에서 업계 평균(37%)의 두배인 74%의 최고 합격률을 기록했다. 최근 메트라이프는 SK생명 인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인수가 마무리되면 시장점유율 4%대로 국내 생보업계 4위를 다투게 된다. 지난 8월에도 세이에셋코리아자산운용을 인수하는 등 확장경영을 가속화하고 있다. 기업윤리를 기반으로 고객·직원·주주 등 3자를 모두 만족시키는 회사를 목표로 하고 있는 그는 “직원들이 너무나도 열심히 일해주는 게 고마울 따름”이라고 말했다.
  •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전영우 지음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전영우 지음

    600여년 전 조선이 개경에서 한양으로 수도를 옮길 때 목멱산에 심은 소나무. 그것은 지금 애국가의 한 구절로 남아 ‘남산 위의 저 소나무’로 널리 불린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겐 정이품 벼슬이 붙은 소나무, 토지를 소유한 부자 나무로 국가로부터 납세번호를 부여받기도 한 석송령 소나무도 있다. 소나무에 관한 한 우리는 어느 나라보다도 풍부한 문화를 가꿔온 민족이다. 지난 수천년 동안 우리 문학과 예술, 민속, 풍수사상 속에 자리잡은 소나무는 이 땅의 풍토와 절묘하게 어우러져 우리의 정신과 정서를 살찌웠다. 소나무의 역할은 정신적 면에만 그치지 않는다. 궁궐을 비롯한 옛 건축물의 자재는 물론 거북선·판옥선·사신선·조운선 등 한선(韓船)은 모두 소나무로 만들었다. 우리의 자랑거리인 조선백자도 경기도 광주 일대에 소나무 숲이 무성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예로부터 백자가마에서는 숯이나 재가 남지 않고 충분한 열량을 낼 수 있는 소나무를 연료로 사용했다. 불티가 남지 않는 소나무는 백자 표면에 입힌 유약을 매끄럽게 해 질 좋은 백자를 굽는 데 최상이었다. 이 백자가마용 땔감을 도공들은 ‘영사’라고 부른다.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소나무’(현암사 펴냄)는 숲해설가로 활동하며 산림운동 정착에 앞장서고 있는 전영우 교수(국민대 산림자원학과)의 소나무숲 현장답사 보고서다. 소나무숲은 한때 우리 산림의 60% 이상을 차지했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겨우 25% 정도로 줄어들었다.‘소나무 에이즈’라 불리는 재선충병 등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소나무 전염병으로 앞으로 100년 뒤에는 한반도에서 소나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한다. 이 ‘겨레의 나무’를 살리기 위해서는 소나무를 알아야 한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우리 소나무는 잎이 두 개이며, 수피와 겨울눈이 붉다. 굽이치고 옹이진 것은 모진 환경을 견뎌낸 흔적이다. 살기 좋은 환경에서는 소나무가 곧게 높이 자란다. 책에는 소나무와 관련된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듬뿍 담겼다. 소나무를 의미하는 ‘솔’은 나무 가운데 우두머리를 뜻하는 ‘수리’에서 나왔으며, 송(松)이라는 한자는 중국의 황제가 내려준 목공(木公)에서 유래했다는 얘기, 우리 국보 83호인 금동미륵반가사유상과 일본 고류사의 목조 미륵보살상이 닮은 까닭, 소나무에 막걸리를 주는 이유, 우리 나라의 대표 수종인 소나무가 외국에서 ‘일본적송’이라 불리는 연유 등 다채로운 소나무 이야기가 펼쳐진다.1만 9500원.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남산소나무 군락지 탐방로 개장

    남산소나무 군락지 탐방로 개장

    교과서와 애국가 속에 갇혔던,꿋꿋한 ‘한민족 기상의 상징’ 남산 소나무가 국민들 곁으로 바짝 다가선다. 16일 오전 탐방로 개장을 하루 앞두고 둘러본 남산 소나무 군락은 이같은 말을 실감케 하기에 충분했다. 소나무 가지 사이사이로는 멀리 북한산과 인왕산이 어느 새 어엿한 모습으로 손에 잡힐듯 말듯 다가섰다.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져 쌀쌀한 기운이 감도는 가운데 고층건물들 사이로 시내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영욕의 세월 거쳐 철갑을 두른 듯 36년만에 ‘해금’ “특히 나라가 어렵다는 요즈음 남산 소나무가 지닌 상징성을 살리고,시민들에게 그 특유의 성격을 알려 왜 애국가에까지 등장하게 됐는지를 생각하게 하려는 뜻이 숨었습니다.” 서울시 박인규 공원녹지관리사업소장은 1968년 도로변 철책을 둘러치면서 출입을 금지해온 남산 소나무 군락지를 개방하게 된 취지를 이렇게 말했다.도심은 물론 국내 어디와 견줘도 뒤지지 않는 남산 소나무 군락 아래를 거닐며 심신을 닦고,우거진 녹지의 참맛을 즐기도록 한다는 뜻도 담겼다. 탐방로는 남산 북측 순환로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나타나는 국립극장 뒤편 계단으로 2∼3분 정도 안내판을 따라 올라가면 나온다. 대표적 소나무 군락 6곳 가운데 시민들이 이용하기 쉬운 길이 200m,약 5000평 규모를 개방했다.코스가 짧아 아쉬움을 주지만 36년만에 개방되고,1000년의 세월이 녹아 있다는 역사성에 생각이 미치면 머리를 숙이게 된다.매주 월·수·금요일 오후 1시,2시 소나무 탐방로에서 남산 소나무의 유래,소나무와 생태계의 관계 등을 소개하는 ‘남산 소나무 교실’을 개최한다.참가비는 무료이며 서울의 공원 홈페이지(parks.seoul.kr)에서 접수한다. 개장식에서는 이명박 시장과 초등학생,환경단체 관계자 등 4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올빼미와 황조롱이 등 야생동물을 방사하고 소나무에 해로운 외래식물을 뽑는 행사도 벌인다.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鐵甲)을 두른 듯/바람 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무∼궁화 삼천리‘ 국민이면 누구나,특히 어린 시절 따라부르노라면 눈시울이 뜨거워지도록 하는 애국가 2절이다.전국에 많고 많은 소나무 가운데서도 남산 소나무가 범상치 않다는 점을 일러준다. 오랜 옛날부터 소나무는 불멸(不滅)을 상징한다.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색깔이 변함 없는 잎을 봐도 그렇다.그만큼 토양이 척박하고 울퉁불퉁한 곳에서도 꿋꿋하게 잘 자란다.‘바람 서리 불변함’이란 이처럼 나쁜 환경에서도 씩씩하게 자란다는 의미다. 남산 소나무 관리 문제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고려 때다.10대 임금 중종은 당시 양주(楊州)였던 서울 주변의 빽빽한 소나무 숲을 보호하기 위해 금양(禁養=나무와 풀 베는 일을 금지함) 명령을 내렸다. 이번 탐방로 개설은 무려 1000년 세월이 흐른 뒤에야 ‘늘푸른 친구’로 시민들 곁에 되돌아왔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후 역사책에는 1411년 조선 태종이 장병 3000여명을 동원,20일간 남산에 소나무를 심었으며,2년 뒤인 1413년 들어서는 금양법을 공포,시행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그런데 왜하고 많은 소나무 가운데 남산 소나무인가 지금 남산에는 4만 9300여그루의 소나무가 민족의 기상을 뽐내며 끗꿋하게 자라고 있다.남산 전체 산림면적 245.4㏊ 가운데 17.7%인 43.5㏊에 이른다. 비탈진 곳이나,메마른 땅에서도 잘 버틴다는 게 소나무의 특성이다.반면 유달리 햇빛을 좋아한다는 것은 우리 민족의 낙천적 성격과도 연결되는 것으로 학자들은 풀이한다. 여기에는 특유의 지형·지세·기후 외에도 재미있는 사연이 깃들었다. 서울을 수도로 삼은 조선시대의 역대 왕들은 전국에서 좋다는 소나무란 소나무는 모두 모셔와 심도록 지시했다.따라서 비슷한 위치에 서 있는 소나무라도 씨앗은 다를 수 있다.하지만 ‘낯’을 가리지 않고 저마다 잘 자라 남산이 ‘화합의 땅’임을 알리고 있는 셈이다.“이는 지난 5∼8월 산림청이 실시한 ‘소나무 유전자 분석’에서 증명됐다.”고 공원녹지관리사업소 최병언 녹화팀장은 귀띔했다. 모양도 갖가지다.곧게 뻗은 녀석이 있는가 하면 위로 자라다가 누워버리다시피 옆으로 뻗은 뒤 다시 위로 커간 것도 있다.색깔도 조금씩 차이가 난다.붉은 빛이 고운 적송(赤松)과 검은 흑송(黑松),그 사이사이에 스펙트럼이 매우 다양한 게 특징이다. 최 팀장은 “솔방울이 유난히 많이 달린 소나무는 병색(病色)이라고 보면 거의 들어맞는다.”면서 “죽음을 앞두고 서둘러 자손을 남기려는 본능적 생존전략”이라고 설명했다. 활엽수 등 다른 식물들이 침범해 살아남으려고 햇빛을 찾아 방향을 틀어가며 자라다 보니 꾸불꾸불한 모양이 된 소나무에 이르러서는 우리 민족이 주변국 외침(外侵) 등 역사의 질곡 속에서 얼마나 끈끈한 생명력을 발휘했는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남산소나무 수난·보존의 역사 ‘남산 소나무 그늘 아래 늙은 여우 들락날락,천백(千百)가지 괴상한 소리 무슨 일을 만들어내려나?’ 1910년 발행된 서북학회보에는 이런 글이 나온다.작자는 알려지지 않았다.하지만 일제가 우리 민족의 기상을 상징하는 남산 중턱의 소나무를 뽑고 1907년 그 자리에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하는 등 기세(氣勢)를 눌러버리려 한 만행을 풍자한 것으로 국문학계에서는 해석하고 있다.통감부가 있던 곳은 지금의 예장동 대한적십자사 자리로,일본인들은 이곳에서 떠들썩하게 모임을 자주 벌였다고 전해진다. 일본은 또 한·일간 화합을 다지는 공동공원을 만든다는 미명 아래 1908년 지금의 남산식물원에서부터 남대문에 이르는 약 30만평 규모의 땅을 무상으로 약탈,청학정(靑鶴亭),전관정(展觀亭) 등 휴게시설을 갖추면서 남산 위 소나무들을 마구 잘라냈다. 1925년에는 일본의 조상들을 받드는 신궁(神宮)을 만들면서 12만 7900평을 훼손했다. 하지만 광복 이후에도 남산 소나무가 망가지기는 마찬가지였다. 1963년 국회의사당터 미화사업에 따라 남산에 야외음악당과 어린이놀이터가 들어섰다.68년 장충수영장(1818평),외국인아파트(4만 7030평),시민아파트(6600평) 등이 잇따라 생기면서 타격은 더해만 갔다. 같은 해 남산공원관리사무소가 세워졌으나 사정은 또 나빠졌다.70년 육영재단의 18층짜리 어린이회관 건립과 73년 국립극장 완공이 좋은 사례다. 게다가 정부는 녹화사업을 외치면서도 식생에 대한 연구를 전혀 하지 않아 소나무에 치명적인 아카시 나무를 잔뜩 들여놓는 우를 범한다. 바야흐로 남산 소나무들이 대우를 받는 계기는 1991년 싹튼다.‘남산 제모습 찾기’ 사업 덕분이다.2000년까지 3235억원을 들여 의욕적으로 벌였다.외인 아파트를 허물고,옛 안기부 청사가 사라진 것도 바로 이 무렵이다. 박인규 소장은 “막걸리를 물과 2대 8 비율로 희석해 뿌리에 뿌리는 등 소나무 관리에 매우 신경쓰고 있다.”면서 “이를 시민들이 참여하는 이벤트로 연결하고 학계에 식재생태 연구를 의뢰하는 등 다각적인 노력에 시민들의 협조가 절실하다.”고 말했다.농도 1%의 막걸리를 주면 잔 뿌리가 무성해지고,자란 나무에 10∼20%로 희석해 뿌려주면 생장을 촉진시킨다고 그는 덧붙였다.곡주인 막걸리에는 칼슘,마그네슘,철,비타민 등 소나무가 좋아하는 성분이 많다.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길섶에서] 술의 낭만에 관해/오풍연 논설위원

    한겨울 설악산에 올랐다.눈이 많이 와 하산을 못하고 산장에서 하룻밤을 신세지게 됐다.주인과 개 등 셋뿐.밤 늦도록 산장 주인과 막걸리 술잔을 기울였다.문득 난로 옆의 개가 처량해 보였다.장난기가 발동한 객(客).개와 2차대작을 했다.송아지만한 셰퍼드는 주량도 대단했다.그러기를 두어시간.개는 흥이 났는지 앞발을 들고 춤을 췄다.고주망태가 된 객은 개처럼 기어다니며 장단을 맞췄다. 통금이 있던 시절.한 무리의 교수들이 대학 근처에서 술잔을 주고받았다.한잔 두잔 건네다 보니 자정을 훨씬 넘겼다.학교 근처 교수집으로 몰려가 2차를 하기로 작당했다.그런데 파출소를 통과해야 하니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한 교수가 반짝 아이디어를 냈다.대여섯 명의 교수들은 개처럼 기어 파출소 앞 통과를 시도했다.아뿔사 경찰에 들키고 말았다.“술 먹으면 개지.”라는 해명을 들은 경찰.빙긋이 웃으며 그대로 통과시켰다. 옛날에는 이처럼 낭만이 있었다.그러나 요즘은 어떤가.무미건조한 술자리만 이어질 뿐이다.대학시절 은사가 들려준 술에 관한 낭만이 이 가을과 함께 가슴을 파고든다. 오풍연 논설위원 poongynn@seoul.co.kr
  • 부산의 맛·볼거리 - 이것도 꼭

    부산의 맛·볼거리 - 이것도 꼭

    ■ 안보고 가면 절대 후회! 부산 지하철 1,2호선을 이용하면 해운대,광안리,남포동,서면 등에 쉽게 갈 수 있다.지하철 부산역에서 30∼40분이면 어디든 갈 수 있다.지하철(800원)을 이용해 태종대,을숙도,범어사도 한번은 들러 볼 만하다. ●태종대 울창한 해송들과 기암괴석의 절벽이 푸른 바다에 둘러싸여 있는 곳이다.깎아지른 바위절벽과 탁 트인 바다의 절경이 너무 아름다워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이 이곳의 해안 절경에 심취했다고 해서 ‘태종대’로 불린다고 한다.이곳 풍광이 너무 아름다워서일까.한때 사람들이 자살을 하러 태종대를 많이 찾았다는 아픈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현재 모자상이 있는 전망대가 한때 자살바위로 불리던 곳이다.자살을 예방하기 위해 전망대를 세웠는데,다시 한번 어머니를 생각하라는 의미다. 태종대 중턱에는 폭 6m의 순환관광도로가 4.3㎞에 걸쳐 있으며 망부석,신선바위,전망대 휴게실(자살바위),병풍바위 등 절경이 이어진다.태종대를 걸어서 구경하는 데 보통 1시간30분이면 넉넉하다.입장료 1인당 600원,승용차는 탑승객 수에 상관없이 차 1대당 3000원.셔틀버스가 없어져 걸어서 다니거나 승용차를 이용해야 한다.하지만 버스정류장 앞에서 택시를 이용하면 4명까지 3000원에 전망대까지 데려다 준다. 또 태종대 주변을 도는 유람선은 어른 6000원,아이 4000원,약 40분이 걸린다. 근처에 바이킹 등 12종의 놀이기구와 조류원 등이 있는 자유랜드(405-0043)나 태종대 온천(404-9001) 등 한나절 나들이로 좋다. 가는 방법은 1호선 남포동역에서 6번 출구로 나와 8,13,30,88번을 타면 30분 정도 소요된다. ●을숙도 우리나라 최대 철새도래지로 낙동강 하구에 있다.사계절 먹이가 풍부하고 겨울에도 물이 얼지 않는 넓은 갯벌과 갈대가 우거져 있어 철새들의 쉼터와 잠자리가 되고 있다.겨울이면 철새로 장관이지만 지금도 쇠제비갈매기,딱새과의 개개비,뜸부기류인 쇠물닭 등도 눈에 띈다.요즘은 하얗게 핀 갈대꽃이 장관이다. 을숙도 위쪽에는 넓은 주차장과 간이축구장,잔디광장,휴게소 등 각종 편의시설이 갖추어져 있다.을숙도 안에는 자전거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자전거를 빌려주는 곳이 7군데다.2인용 자전거는 시간당 5000원,1인용은 3000원.갈대 숲에서 연인과 자전거를 타면 영화 주인공이 된 착각에 빠질 정도다. 부산지하철 1호선 하단역에 내려 마을버스를 이용하면 5분 거리. ●범어사 합천 해인사,양산 통도사와 함께 영남 3대 사찰 중 하나이다.부산 금정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며 약 1300년 전 신라 고승 의상이 창건했다.삼국시대의 유물인 삼층석탑과 대웅전이 보물이다. 임진왜란 때의 승병장 서산대사,경허,용성,동산 스님 등 고승을 배출한 호국불교의 전당이기도 하다.다른 절과 다른 독특한 형태의 일주문,독성각 입구의 아치문 등도 눈여겨봐야 한다. 일주문 왼쪽의 등나무 군락지는 천연기념물 176호로 안 보면 후회하게 된다.등나무 400여 그루가 참나무,소나무 등과 어울려 사는 모습은 멋지다.참나무,소나무의 줄기를 휘어감고 사는 등나무,등나무의 등쌀에 못 이겨 말라죽은 소나무,2∼3줄기가 서로 뒤엉켜 흡사 뱀처럼 바닥을 기어가고 있는 등나무가 음산한 듯 장엄하다. 지하철 1호선 범어사역을 이용할 것.부산역에서 지하철로 40분 정도.범어사역에서 범어사 매표소까지 시내버스 90번이 다닌다.운행간격 15분. ■ 꼭!!! 맛 보고 가이소 국내 해산물 최대 집산지인 부산.온갖 종류의 회가 다 있지만 요즘 미식가들을 색다르게 유혹하는 음식이 아귀회다.부산 연제구 목화예식장 맞은편 국민은행 뒤쪽 4거리의 팔팔횟집(865-1518)은 자연산만 취급해 아귀도 회로 떠준다. 메뉴판에는 아귀회가 없고,아귀 코스가 있다.아귀 코스를 주문하면 아귀회와 아귀수육,아귀탕이 차례로 나온다.깔끔하게 차려진 밑반찬과 함께 전채처럼 나오는 아귀회는 아귀의 꼬리 부분의 살점을 회로 뜬 것.광어회처럼 밝은 색이 돌면서 껍질 부분은 붉은 빛이 난다.한 동행인은 “살이 물컹거릴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고 졸깃하다.”고 말했다.약간 미끌거리면서 씹히는 질감이 어찌보면 복어회와 비슷했다.회는 이 집에서 별도로 마련한 간장 소스에 찍어 먹어야 제맛이다.간장소스는 간장에 고추냉이와 풋고추 등을 넣어 만들었다. 이어 나오는 것이 아귀수육.수육은 흔히 먹는 콩나물이 가득한 아귀찜과는 차원이 다른 음식이다.회를 하고 남은 부분을 그대로 쪄 낸 것으로 아귀가 수북하다.테이블에서 아귀 뼈를 발라 앞접시에 들어준다.아귀 내장도 고스란히 나온다.아귀 내장은 거위간인 푸와그라와 맛과 질감이 비슷해 미식가들이 무척 즐기는 부위다.복 수육보다 더 담백하면서 맛이 깔끔하다.마지막으로 나오는 것이 아귀탕.맑은 국물이 시원하다.밥을 말아 먹어도 좋다. 아귀 코스의 가격은 시가.4년 전부터 아귀회를 시작해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는 주인 류순이씨는 “살아있는 아귀를 구하기 위해 통영·고성·삼천포·여수 등 남해안을 샅샅이 헤매고 다닌다.”며 “어떨 땐 하루 700㎞ 이상 다닌다.”고 말했다.이렇다보니 가격이 만만찮다.요즘은 비교적 많이 나는 편이어서 2인분은 5만∼6만원,4인분은 8만원.산 아귀를 다듬는 데 시간이 걸려 예약하는 것이 좋다. 동래구청 뒤쪽의 동래할매파전(552-0791)도 한번은 찾을 만하다.부산민속음식점 1호답게 고가구가 예스럽게 꾸며져 있다.부산의 뿌리인 동래는 광복 전까지 장꾼들이 들끓었다.“파전 먹는 재미로 동래장에 간다.”는 말이 전할 정도로 파전은 인기 메뉴였다. 4대,70년째 가업인 파전을 잇는 김정희씨는 “파는 향이 진하고 유기농으로 재배한 기장산을 쓴다.”며 “여기에 바지락·새우·굴·홍합 등을 찹쌀가루와 멸치 육수에 섞어 걸쭉한 반죽으로 개어 유채꽃기름에 부쳐내는 것이 특징”이라고 자랑했다.부드러우면서 파의 향이 진하다.신선한 해물과 향기 좋은 파를 구하기가 힘들어 분점 개업을 꺼린단다.파전 1만 8000원.논고둥찜(2만원)도 좋다.직접 빚는 동동주(6000원)를 곁들이면 금상첨화다. 서부 경남에서 부산으로 들어오는 관문인 사상시외버스터미널에서 구포쪽으로 가는 길목의 유명갈비(313-3392)는 와인삼겹살(5500원)로 내공이 깊다.삼겹살에 한약재인 정향·월계수잎과 함께 포도주에 하루 동안 대나무통에 절여 둔 것이다.약간 두툼하지만 돼지고기 특유의 냄새가 나지 않고 부드러워 입에 착착 감긴다.버스터미널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즐겨 경남지역에서 더 많이 알려진 집이다.갈매기살(6000원)은 쇠고기와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맛이 좋다.식사로 나오는 영양돌솥밥(3000원)에는 잣·콩·밤·대추 등이 많이 들어 있다.밑반찬도 깔끔하다.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광안리해수욕장 옆의 민락씨랜드 7층의 경포횟집(752-9393)은 자연산만 고집하는 몇 안 되는 집이다.주인 이영철씨는 2대째 30년 동안 민락동에서 횟집을 운영해온 토박이인 까닭에 다른 업주들은 구하기 힘든 자연산 고기를 쉽게 구한다.그래서 자연산은 끊이질 않는다.요즘엔 게르치 회가 싱싱하다.서비스로 나오는 오징어순대도 그만이다.산 오징어를 통째로 40분가량 삶아 나오는 것으로 먹물과 내장이 그대로 들어 있어 쌉싸래한 맛이 나지만 식욕을 돋운다. 부산에서 시간이 난다면 금정산에 한번 올라보는 것도 괜찮다.어느 쪽에서 오르든 2시간가량이면 정상에 오를 수 있다.부산항과 바다,김해평야가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전망도 좋다. 금정산 안쪽의 산성마을에는 흑염소불고기 전문점들이 있다.대표적으로 산성창녕집(517-6288)을 들 수 있다.달콤·매콤하게 양념한 염소불고기(2만 5000원)는 염소 특유의 노린내가 전혀 나지 않고 부드럽다.민속주 1호인 산성막걸리(5000원)와 함께 먹어야 제맛이다.전화를 하면 차량을 보내준다.
  • 5대째 막걸리 제조 박관원 배다리 박물관장

    5대째 막걸리 제조 박관원 배다리 박물관장

    ‘막걸리 막걸리/우리나라 술/삼천리 강산에/우리나라 술∼’ ‘간다간다/나는 간다/막걸리 두잔에/나는 간다/칠월 홍사리에/횡재를 하고∼’ 1980년대 대학가 주변에서 많이 들어봤음직한 노랫말이다.전자는 ‘무궁화꽃’이라는 전래동요이고 후자는 각설이타령 등 전래민요의 후렴구에 자주 등장한다.풍성한 수확철을 맞아 하루 농사일을 끝내고 막걸리 한 사발을 벌컥 들이켠 다음 ‘크’하는 통렬한 트림이 생각나는 계절이다.막걸리는 이처럼 토속적인 냄새로 향수에 젖게 한다. 한평생 ‘막걸리와의 춤을’ 추며 살아온 사람이 있다.특히 그가 빚어낸 막걸리는 청와대에 14년 동안 배달됐다.또 북한의 주석궁에 3차례에 걸쳐 들어가 까다로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입맛을 감동시키기도 했다. ●10·26사건 당일 2차로 막걸리 주문 #상황1.박정희 전 대통령은 살아 생전에 막걸리를 무척 즐겼다.1979년 10·26사건 당일에도 양주 시바스리갈 파티가 끝나면 2차로 막걸리를 마시게 돼 있었다.그날도 외부로부터 막걸리를 주문했던 것으로 확인되기 때문이다.만약 1차부터 막걸리를 마셨다면 상황은 어땠을까.쓴 양주와 새콤달콤한 막걸리는 술자리의 분위기를 얼마든지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상황2.2000년 6월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방북한 정몽헌 현대아산회장에게 “막걸리 약속 어케 된 기야요.”하면서 다음 번 방북 때에는 박 전 대통령이 즐겨 마셨다는 막걸리를 꼭 갖다줄 것을 거듭 요청했다.얼마 뒤 김 위원장은 주석궁에 도착한 남한의 막걸리를 마셨다.그는 “과연 소문대로구먼.”하며 크게 웃었다. 역사의 현장을 오고간 막걸리는 어디에서 빚어질까.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성사1동,원당 전철역 6번 출구로 나와 북쪽으로 5분쯤 걸어가면 길가 오른쪽에 ‘배다리박물관’이 나온다. ‘배다리’는 ‘주교(舟橋)’의 토속어.이 박물관은 ‘배다리 술도가’(능곡양조장)의 4대째 가업을 잇는 박관원(72) 사장이 지난 7월 자신의 사재를 털어 만들었다.건축가로 활동 중인 아들 상빈씨가 설계와 시공을 맡았다.이후 박 사장은 박물관 관장으로,아들 상빈씨가 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5대째 대물림이 된 셈이다.국내에서는 유일한 ‘막걸리 박물관’이라는 점에서 애주가들의 관심이 높다. 3공화국 시절 10년 동안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김정렴씨 회고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박 대통령이 특별보좌관과 청와대 식당에서 회식을 할 때 술은 주로 경기도 원당에서 가져온 막걸리를 마셨다.박 대통령에게 막걸리는 술 이상의 의미가 있다.농촌에서 자란 박 대통령은 막걸리가 단순한 술이 아니라 허기를 달래주는 음식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박 대통령이 시해 당한 궁정동 만찬장에는 시바스리갈이 있었지만 그렇게 양주를 마시는 술자리는 청와대내에 별로 없었다.’ ‘원당에서 가져온 막걸리’가 바로 배다리의 막걸리다.자세한 사연은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6년 초여름의 어느날.능곡양조장에 낯선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사장 좀 바꾸시오.” “예,제가 사장입니다.” “여기 청와대요. 곧 갈테니 좀 기다리쇼.” 이때 박관원 관장이 능곡양조장 사장이었다.청와대에서 갑자기 왜 온다는 것일까.그의 궁금증은 청와대 관계자를 만나본 뒤에야 풀렸다. 그해 봄날이었다.박정희 대통령은 김현옥 서울시장 등 일행과 함께 원당의 한양컨트리클럽에서 골프라운딩을 했다.청와대로 돌아가는 길에 박 대통령 일행은 삼송리 ‘실비옥’ 앞에서 갑자기 멈춰섰다.목이 컬컬해 막걸리 한사발을 마실 생각이었다.‘실비옥’은 주변 20호 가운데 납작한 양철지붕으로 된 허름한 실비식당으로 노부부가 운영하고 있었다. 김 서울시장이 앞서 들어서면서 주인을 불렀다. “오늘은 안 합니다.할망구가 일요일이라 예배당에 갔어요.” 칠순이 다 된 할아버지가 귀찮은 듯 대답했다.그러자 김 시장은 낮은 목소리로 “주인 어른,밖에 대통령 각하께서 와 계시오.”라고 말했다. “우리 집에 대통령이 오긴 왜 와.일 없어요.” 때마침 교회 갔던 할머니가 막 들어왔다.그제서야 할어버지가 밖으로 나와 대통령 행차를 확인했다.박 대통령은 갈색 작업복 차림에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노부부는 부랴부랴 대통령 일행을 안으로 들게 했다.이어 박 대통령의 주문대로 막걸리 한 주전자와 북어 두 마리,고추와 된장이 놓여진 주안상이 급히 마련됐다. 박 대통령은 막걸리 한사발을 쭉 들이켜더니 “막걸리 맛이 참 좋습니다.어디 양조장에서 가져오나요.”하고 물었다.할머니는 손가락을 가리키며 “저쪽,원당양조장.”이라고 대답했다.원당양조장은 능곡양조장을 말한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실비옥은 유명세를 톡톡히 치렀다.빚 20만원 때문에 문닫을 위기에 놓여 있던 ‘실비옥’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또 능곡양조장의 박 사장은 한달여 후에 청와대 관계자의 전화를 받게 되면서 14년동안 거래가 이루어지게 됐다. ●김정일위원장 “과연 소문대로구먼” “대통령이 마시는 술은 별도의 사양실에서 빚어졌습니다.일반 상품과 섞어 만드는 것이 송구스러웠지요.청와대에도 그렇게 알렸더니 허락을 하더군요.막걸리는 일주일에 한두 말씩 정보과 형사를 통해 청와대에 꼬박꼬박 배달됐습니다.” 박 관장은 대통령 술 전용 사양실을 아담하게 조성했다.그런 다음 잠금장치를 하고 술을 빚어 넣은 뒤에 숙성될 때까지 기다렸다.열쇠는 자신이 관리했다.이쯤 되자 박 관장은 ‘현대판 양온서(釀署,궁중에서 술을 빚던 관청)’를 떠올리며 혼자서 웃는 일이 많아졌다.이 사실을 함부로 외부에 알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1974년 능곡양조장이 고양탁주합동제조장으로 편입됐지만 대통령 막걸리의 제조·관리는 박 관장이 계속해서 맡았다.10·26사건이 있던 날 오후까지 그가 빚은 막걸리는 계속 청와대로 배달됐다. “무슨 특혜나 이권은 전혀 없었습니다.그저 대통령이 좋아하는 술을 만든다는 보람이었죠.나중에 입소문이 나자 인근 군부대에서 장병들 회식때 자주 이용했다는 것뿐입니다.” 박 관장은 시달림도 많았다고 한다.기관의 정보 담당자들이 수시로 들러 정보수집을 해갔으며 나중에는 관할 경찰서 정보과장이 열쇠관리를 해 사양실 문을 마음대로 열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박 관장은 당시를 회고하면서 능곡양조장 김진석 공장장의 각별한 정성이 있었기에 14년 동안 일관된 술맛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특히 공장장은 10·26때 대통령 서거 소식을 듣고는 사양실 촛불을 켜놓고 두문불출 혼자 앉아 있을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고 귀띔했다. “1999년 겨울이었지요.정주영 현대회장이 방북했을 때 김 위원장이 대화도중 ‘박 전 대통령이 마셨던 막걸리를 맛보고 싶다.’고 요청했답니다.그후 정몽헌 회장 방북때 다시 거론됐지요.그래서 2000년 6월부터 8월까지 모두 세 차례에 걸쳐 60말 분량의 막걸리가 현대측에 의해 주석궁으로 배달됐습니다.” 북으로 가던 날 박 관장은 ‘통일막걸리’로 상표를 붙여 조촐한 행사를 가졌다.이때서야 ‘고양막걸리’가 14년 동안 청와대에 납품됐던 사실이 알려지게 됐다. ●청와대 납품됐던 술 한 주전자 1500원 박 관장은 1915년 배다리 지역에서 술도가인 ‘인근상회’를 창업했던 박승언 사장의 4대손.그는 자신의 막걸리에 대해 “다른 막걸리처럼 살균주가 아닌 보존기간이 5일 정도의 생주로 쓴맛·단맛·신맛과 시원한 맛 등 7가지 맛이 고스란히 살아 있다.”고 자랑했다. 박물관 야외공간에는 ‘막걸리 카페’가 있으며 청와대에 납품됐던 막걸리를 한 주전자에 1500원이면 마실 수 있다.주말에는 300여명의 관람객이 이곳을 찾으며 박물관 입구에 있는 100년 된 대형 술통이 눈길을 끈다. 김문기자 km@seoul.co.kr
  • 100년 맛 이어받은 전성근 ‘이문설농탕’ 주인

    100년 맛 이어받은 전성근 ‘이문설농탕’ 주인

    ●설렁탕 서울을 대표하는 토속음식이다.조선시대 왕이 동대문 밖 선농단(先農壇)에서 몸소 쟁기를 끄는 친경례(親耕禮)를 하면서 60세 이상의 노인에게 곰국을 대접하면서 비롯됐다고 한다.왕은 친경례에서 수고한 백성에게 석잔의 술과 음식을 내려줬다.이때 내린 것으로 술은 막걸리,음식은 설렁탕이었다.설렁탕은 현장에서 쟁기질 하던 소를 잡아 끓인 것이 아니다.소를 마구 잡는 법이 아닌데다 설렁탕은 국물이 제대로 우러나오려면 하루는 족히 끓여야 하기 때문이다.쇠고기는 성균관 인근에서 살면서 서울의 쇠고기를 독점 생산,판매하던 반촌(泮村)의 반인들이 댔다고 한다. ■“손기정·김두한·박헌영씨도 한때 단골” “맛을 한결같이 유지하는 게 100년 장수의 비결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음식점으로 알려진 서울 종로구 공평동 종로타워 뒤쪽 이문설농탕 주인 전성근(田聖根·59)씨는 역사의 비결을 묻는 물음에 “오래 됐다고 손님들이 오는 게 아니라 맛이 똑같기 때문에 옵니다.”라고 말했다. 1907년 개업,한 자리에서 98년째 문을 열고있는 최고의 음식점 주인 말치곤 너무 담담해서 오히려 신선하다.하지만 그 말 속에는 너무 빨리 변해가는 세상에 대한 예리한 지적이 담겨있음을 읽을 수 있다. 우리의 역사가 반만년이 넘는다곤 하지만 100년 가까운 식당은 참으로 드물다.일제시대와 한국전쟁 등 치열했던 근세사를 건너기가 쉽지 않은 탓일 것이다. 최근 외식산업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취업도 어렵고,정년도 짧아진 세태에서 쉽게 생각하고 창업하는 것이 ‘먹는 장사’다.한 집 건너 새로 문을 열고 그만큼 간판을 내리는 업종이 외식업이다. ●70대는 ‘어린’단골 이런 까닭으로 최고(最古)의 이문설농탕이 주목받는다. 이문설농탕은 전씨 집안이 전적으로 일으킨 가업은 아니다.전씨의 어머니 유원석(2002년 작고)씨가 1960년,양모씨로부터 이문설농탕을 인수해 지켜오다 아들인 전씨에게 물려줬다. 이문설농탕의 간판을 처음 단 사람은 홍모씨로 알려져 있고 그뒤 양씨가 인수해 운영해왔다.이들은 이름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창업 연도도 여러 갈래다.당시 경복궁 주위의 경기·배재·중앙·휘문고보 등을 다녔던 노인들의 기억에 따르면 멀게는 1902년부터 짧게는 1907년까지 거슬러 간다.그래서 전씨는 가장 짧은 1907년을 개업 연도로 삼고 있다. 전씨는 “옛날에 이 부근에서 학교를 다녔던 학생들이 할아버지가 돼 손자들 손을 잡고 오시지요.3·4대째 단골이 많지요.저희 집에선 70대는 청춘이고 90대가 돼야 어른 대접을 받습니다.60∼70년 단골이 부지기숩니다.”라며 은근히 자랑한다. 70년대 초 건국대 농대를 졸업한 전씨는 경기도 수원에서 부친과 함께 목장을 운영했다.목장이 사실은 할아버지(田熙哲)대부터 내려온 가업.할아버지는 목원대 전신인 감리교 대전신학원 초대교장을 지낸 목회자였다. 전씨가 식당일에 나선 것은 어머니를 돕기로 한 1981년부터.2∼3년 ‘잠시’ 돕겠다고 식당에 나왔다.“당시만해도 식당일을 한다는 것은 사회적 선입견이 달갑잖았지요.”하지만 식당일을 계속하면서 그의 생각이 달라졌다.“이집은 보통 집이 아니야.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음식점이야.”하는 노인들의 격려에 힘을 얻은 전씨는 식당 운영에 본격적으로 팔을 걷어붙였다. 그는 오늘의 이문설농탕이 있게 한 공로를 어머니께 돌렸다.그의 어머니 유씨는 1930년대에 이화여전 가사과를 나온 당시의 ‘신여성’이었다.동기로는 세계적인 지휘자 정명훈씨의 어머니 이원숙씨가 대표적이다.한국전쟁중이던 50년대 초 부산 광복동에서 유씨는 이씨와 동업으로 식당을 운영하기도 했다.유씨는 이후 음식점 운영의 길을 걸었다. 이 집은 오랜 역사만큼이나 단골들도 역사의 한 자락을 차지했다.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영웅 손기정,이시영부통령,국어학자 이희승박사,남로당 거물 박헌영,주먹천하의 김두한 등이 단골이었다.김두한은 10대때 한때 종업원으로 일했다고 전해온다. 80년대는 먹성좋은 운동선수 특히 유도 복싱 레슬링 등 격투기 선수들이 많이 찾았다.당시 유도대표 선수들은 YMCA 체육관에서 연습을 했고,유도선수들의 소개로 복싱 레슬링 선수까지 이어진 것이다.유도의 하형주,복싱의 김광선 문성길 등이 대표적이다. 단골이 많은 이 집의 한결같은 맛은 100년 전이나 똑같은 설렁탕을 끓여내는 방식에 있다.단지 장작이 연탄에서 액화석유가스(LPG)로,다시 액화천연가스(LNG)로 바뀌었고,무쇠솥이 압력솥으로 변한 것 뿐이다.건물도 일제시대 그대로다. ●퓨전을 이기는 전통의 맛 이 집의 설렁탕은 소의 거의 모든 부위를 넣고 15시간 푹 곤다.국물이 뽀얗고 맛이 담백하면서도 짙다.그래서 설농탕(雪濃湯)이라고 부른다. 농후한 국물 맛을 내기 위해 국물에 분유나 프림 등을 섞는다는 소문이 나돌아 한때 많은 집들이 타격을 입었다.하지만 제대로 끓여내는 것으로 단골로부터 인정을 받아온 이문설농탕은 오히려 더 장사가 잘됐다. “음식을 엉터리로 만들면 손님이 먼저 알아차립니다.”그는 돈을 벌게 해주겠다는 유혹도 많지만 맛에 대한 고집으로 프랜차이즈나 분점도 내지 않고 있다. 상호는 1970년대에 이미 등록했다.“요즘 젊은 사람들이 ‘국적없는’ 퓨전 음식을 찾지만 이들도 나이가 들면 우리 고유의 음식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이문설농탕은 일본 언론매체가 특집으로 다루면서 10여년 전부터 일본 관광객도 많이 찾는다.특히 아침 손님은 일본인이 더 많다.전씨는 이런 이유로 이문설농탕은 이제 자신 개인소유의 식당 차원을 넘어서고 있다고 생각한다.역사의 명소이자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점이 된 까닭이다.“저희 집은 값도 마음대로 못올립니다.단골 어르신들에게 먼저 의향을 여쭤봅니다.”설농탕 보통 한 그릇에 5000원.수십년째 가격에 못이 박혔다. 뽀얀 국물처럼 햇빛에 바래 역사가 쌓이고 있는 이문설농탕.“전통을 잇는 장인의 각오로 이 자리를 지켜나가겠습니다.”라는 전씨의 입가에 미소가 퍼졌다. 이기철기자 chul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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