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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스 다큐 시선] 공중전화가 본 세상

    [뉴스 다큐 시선] 공중전화가 본 세상

    ‘시선(視線)’은 ‘눈이 가는 길, 또는 눈의 방향, 주의 또는 관심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이달부터 화요일마다 기존의 ‘라이프&’과 격주로 연재될 ‘뉴스다큐 시선’ 역시 누군가의 ‘눈이 가는 길’을 독자 여러분과 함께 따라가는 것입니다. 하나의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은 수없이 많고 서로 얽히고 설켜 있습니다. 그 가운데 관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시선들을 표현할 것입니다. 한순간을 포착하기보다는 뉴스다큐라는 이름처럼 오랜 시간을 지켜보며 충분한 사실·느낌·생각을 전달하겠습니다. 독자 여러분도 세상의 많은 시선들과 함께 긴 여운을 느껴 보세요. ‘뉴스다큐 시선’의 첫 주인공은 공중전화가 들려주는 세상이야기입니다. 휴대전화에 밀려 늘 퇴출될 위기 속에 있지만 묵묵히 사람의 손길을 기다리는 공중전화는 경기침체의 터널을 지나야 하는 우리네 처지와 비슷합니다. 새해 첫날과 이튿날 서울 가리봉동 외국인노동자촌, 서울역, 영등포경찰서 민원실에 있는 공중전화를 통해 본 사람들은 저마다 아련한 사연을 안고 있었으며,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싶어 했습니다. 그들에게 공중전화는 차가운 도시에서 느낄 수 없는 정감어린 소통의 수단이었습니다. “일용직 외국인 노동자들이 저를 많이 찾아요. 불황이 심각해지면서 휴대전화나 집전화 요금이 버거워진 사람들이 주로 저를 이용하죠. 수입은 월 20만원이 넘고요. 사람들은 늘 저를 필요로 하지요. 항상 바쁘지만 사라질 염려가 없어 맘이 편해요.”-가리봉동 외국인노동자촌 공중전화 “저는 ‘신상’ 공중전화기랍니다. 휴대전화처럼 문자메시지까지 보낼 수 있는 최신형이죠. 제 옆에는 현금자동입출금기(ATM)까지 있어요. 하지만 첨단이면 뭐합니까. 제 발밑에는 항상 노숙자들이 자고 있어요. 저에게 들인 돈이 아까워 당장 철거되지는 않겠지만 언젠가는 없어지겠죠.”-서울역 최신형 공중전화 “월 1000원도 못 번답니다. 회사는 늘 저를 퇴출시키려고 노려보고 있죠. 하지만 경찰서 안에 있기 때문에 버틸 만해요. 공공성 때문에 섣불리 저를 제거할 수 없답니다. 동료 전화기들은 저를 철밥통이라고 부러워하지만 매일 외줄 타는 기분이에요.”-영등포경찰서 민원실 공중전화 ●불황에 중국 가족에게 전화 횟수도 뜸해져 중국동포 밀집지역인 서울 가리봉동 시장 입구에는 공중전화 3대가 나란히 있다. 이 전화기들은 매일 일용직 외국인 노동자들이 고국의 가족들과 나누는 애틋한 대화를 엿듣는다. 1일 오전 7시부터 오후 10시까지 30여명이 공중전화를 찾았다. 중국동포 박모(52)씨는 고향에 있는 가족에게 새해 안부를 전했다. 박씨의 눈은 전화기 액정화면에 뜨는 전화카드 잔액에 고정돼 있었지만 귀는 가족과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하고 싶은 듯 수화기에 꼭 붙어 있었다. 그는 “요금을 못내 두 달 전에 휴대전화가 끊겨 공중전화를 이용한다.”고 말했다. 2007년말 한국에 와서 건설현장에서 일용직으로 일하는 박씨는 고향에 있는 가족과 1년에 두세 번밖에 통화하지 못 한다. “한국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100만원을 보내면 8000위안은 됐는데, 지금은 몇달을 모아 200만원을 보내도 1만위안밖에 안 돼 전화비도 부담스럽습니다.” 중국 옌지에서 온 성모(36)씨는 중국에 있는 친구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한국에서의 일자리가 여의치 않아 다시 들어가야 할지 상의했다. 그 역시 요금이 부담돼 휴대전화는 쓰지 않았다. “이 동네 공중전화는 외로움을 달래는 소중한 수단이죠. 전화를 걸러 나왔다가 아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고, 전화부스가 약속장소가 되기도 하지요.” ●전화기 앞에서 고개 숙인 사나이 1일 오전 7시 이경수(46·일용직근로자)씨는 가리봉동 시장 공중전화기의 버튼을 만지작거렸다. 정작 전화는 걸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는 1988년 결혼했지만 경마에 빠져 전 재산 3억 5000만원을 탕진했고, 2001년 이혼하고 가족들과도 연락을 끊었다. 이씨는 “새해 첫날 어머니께 안부 전화를 할까 망설였는데, 7년이 지났지만 아직 전화드릴 면목이 없어서 그냥 끊었다.”고 힘없이 말했다. 불황이 깊어지면서 알뜰족도 눈에 띄었다. 이해중(55·회사원)씨는 “휴대전화가 있지만 요금을 아끼기 위해 일반전화번호로 걸 때는 공중전화를 고집한다.”고 말했다. “겨울이라 춥다고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휴대전화를 쓰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건 다 낭비죠.” 이씨가 자리를 뜨고 30여분이 지나자 한 할아버지가 전화기를 일일이 수색(?)했다. 자세히 보니 카드투입구나 동전반환구에 쓰다 남은 카드나 동전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이 할아버지 바로 뒤에 전화기를 쓴 김모(24·여)씨는 “온라인 게임 아이템을 결제하느라 휴대전화 요금이 49만원이나 나왔는데, 이 돈을 결제하지 못해 결국 휴대전화가 끊겨 어쩔 수 없이 공중전화를 사용한다.”고 말했다. ●외화내빈 공중전화의 고민 서울역 광장에 있는 공중전화는 현금자동입출금기와 나란히 서 있다. 빨간색 가로기둥이 산뜻한 느낌을 준다. 공중전화로 문자메시지를 보낼 수도 있다. 하지만 정작 하루 종일 지켜봐도 이 전화기를 이용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다만 오후 5시가 되자 노숙자 3명이 전화기 밑에 앉아서 막걸리를 마셨다. 밤이 깊어지면 노숙자들의 잠자리가 됐다. 서울역 광장 종합관광안내소에서 일하는 직원마저도 신형 공중전화가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주위 상인들은 “기능과 디자인이 아무리 좋아도 유동인구도 별로 없는 곳인데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말했다. 김포 해병대 2사단에 근무하는 김모(23) 병장은 부산에 계신 어머니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이병 때는 부대 내 공중전화를 아예 붙잡고 살았다.”면서 “군대 오기 전에는 공중전화를 쳐다보지도 않았지만 부대 안에서는 정말 소중하더라.”고 말했다. 엄경헌(22) 상병은 “공중전화를 쓰면서 잊어버렸던 전화번호를 많이 외우게 됐다.”면서 “편리함은 종종 사람의 능력을 퇴화시킨다.”고 말했다. ●수익성과 공공성 사이에서 지난 2일 오전 7시부터 오후 4시까지 서울 영등포경찰서 민원봉사실에 있는 공중전화를 사용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공중전화를 관리하는 KT링커스측은 “월 1000원 미만의 수익을 내는 곳으로 공중전화 한 대당 연간 관리비가 100만원인 것을 고려하면 효율성이 최악인 전화기”라고 말했다. 하지만 경찰서 측은 공공성을 위해 이 전화기가 꼭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등포경찰서 경무계장은 “노인들, 휴대전화를 집에 두고 왔거나 배터리가 떨어진 민원인들, 정액제 요금을 다 사용해 휴대전화가 먹통인 중고생들에게는 이 전화가 없어서는 안 된다. ”면서 “수익성을 따지자면 당연히 수지가 안 맞겠지만 한 명의 민원인이라도 전화가 필요하다면 전화기를 유지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한 경찰은 “요즘 유행하는 구조조정과 마찬가지로 수익성으로만 보면 세상에 남아날 것들이 얼마나 되겠냐.”면서 “치안서비스처럼 평소에는 잘 모르지만 평생에 단 한 번 필요하지만 없어서는 안 되는 무언가가 세상에는 정말 많다.”고 말했다. 글 사진 이경주 김민희 장형우기자 kdlrudwn@seoul.co.kr ■ 석춘호씨의 80년대 공중전화 추억 “구멍가게 번성 일등공신… 시위학생 방패막이였죠” “1980년대에는 상점마다 공중 전화를 서로 가까운 데 놔달라고 전쟁을 벌였죠.” 1983년 10월에 입사해 2000년까지 서울 영등포구, 동작구 등지에서 공중전화 설치, 유지보수 등의 업무를 담당한 KT링커스 총무팀 석춘호(44) 팀장은 5일 ‘공중전화 전성시대’였던 80년대를 추억했다. 다이얼을 돌려야 하는 기계식 전화는 요금조절 장치가 너무 조여지면 동전을 넣어도 통화가 안 되고 느슨하면 돈을 넣지 않고도 무료로 통화가 가능하기도 했다. 석씨는 “상점 주인들은 공중전화가 주위에 있어야 장사가 잘된다고 서로 가게 가까이 놔달라고 졸랐다.”고 회상했다. 요즘은 가게 앞에 공중전화를 설치하면 가게 출입문을 가리니 옮겨달라고 항의한다. 그래도 아직 보람을 느끼는 것은 사람들이 비상수단으로 공중전화를 찾는다는 것. 하지만 도서지역이 아닌 경우에는 공공성을 명목으로 설치하기가 힘들어 늘 안타깝다.1987년 서울대 공중전화를 관리하러 오토바이를 타고 올라가다가 급작스럽게 터진 최루탄에 잔디밭을 데굴데굴 구르기도 했다. 데모를 하던 여학생들이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주었다. 남학생들은 정문 쪽에 있던 전화부스를 눕혀 바리케이드로 사용했다. 석씨는 “데모가 끝나면 전화기를 전부 수리하고 교체하는 것이 일상이었다.”고 회상했다. 80년대 여의도 국회의사당 1층에 있는 공중전화는 흥행의 보증수표였다. 특히 국정감사 시기가 되면 1층에 공중전화를 쓰려는 공무원들과 기자들이 긴 줄을 섰다. 석씨는 “당시에는 비상근무조가 있어 24시간 근무했지만 요즘은 아예 당직도 없어졌다.”면서 “공중전화가 추억이 되는 것을 보면서 말 그대로 시원섭섭하다.”고 말했다. 이경주기자 kdlrudwn@seoul.co.kr [서울신문 다른기사 보러가기] 워싱턴 입성 오바마 출발 전부터 삐걱 역술인 이철용 “흙기운 센 해…무리하면 불벼락” 박근혜 “국민에 고통”에 “그동안 뭘했다고” 미네르바 “난 악마의 도구…IMF때 도움 못 돼 조국에 죄송”
  • [뉴스 다큐 시선] 공중전화 속의 세상

    “일용직 외국인 노동자들이 저를 많이 찾아요. 불황이 심각해지면서 휴대전화나 집전화 요금이 버거워진 사람들이 주로 저를 이용하죠. 수입은 월 20만원이 넘고요. 사람들은 늘 저를 필요로 하지요. 항상 바쁘지만 사라질 염려가 없어 맘이 편해요.”-가리봉동 외국인노동자촌 공중전화 “저는 ‘신상’ 공중전화기랍니다. 휴대전화처럼 문자메시지까지 보낼 수 있는 최신형이죠. 제 옆에는 현금자동입출금기(ATM)까지 있어요. 하지만 첨단이면 뭐합니까. 제 발밑에는 항상 노숙자들이 자고 있었요. 저에게 들인 돈이 아까워 당장 철거되지는 않겠지만 언젠가는 없어지겠죠.”-서울역 최신형 공중전화 “월 1000원도 못 번답니다. 회사는 늘 저를 퇴출시키려고 노려보고 있죠. 하지만 경찰서 안에 있기 때문에 버틸 만해요. 공공성 때문에 섣불리 저를 제거할 수 없답니다. 동료 전화기들은 저를 철밥통이라고 부러워하지만 매일 외줄 타는 기분이에요.”-영등포경찰서 민원실 공중전화 ●불황에 중국 가족에게 전화 횟수도 뜸해져 중국동포 밀집지역인 서울 가리봉동 시장 입구에는 공중전화 3대가 나란히 있다. 이 전화기들은 매일 일용직 외국인 노동자들이 고국의 가족들과 나누는 애틋한 대화를 엿듣는다. 1일 오전 7시부터 오후 10시까지 30여명이 공중전화를 찾았다. 중국동포 박모(52)씨는 고향에 있는 가족에게 새해 안부를 전했다. 박씨의 눈은 전화기 액정화면에 뜨는 전화카드 잔액에 고정돼 있었지만 귀는 가족과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하고 싶은 듯 수화기에 꼭 붙어 있었다. 그는 “요금을 못내 두 달 전에 휴대전화가 끊겨 공중전화를 이용한다.”고 말했다. 2007년말 한국에 와서 건설현장에서 일용직으로 일하는 박씨는 고향에 있는 가족과 1년에 두세 번밖에 통화하지 못 한다. “한국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100만원을 보내면 8000위안은 됐는데, 지금은 몇달을 모아 200만원을 보내도 1만위안밖에 안 돼 전화비도 부담스럽습니다.” 중국 옌지에서 온 성모(36)씨는 중국에 있는 친구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한국에서의 일자리가 여의치 않아 다시 들어가야 할지 상의했다. 그 역시 요금이 부담돼 휴대전화는 쓰지 않았다. “이 동네 공중전화는 외로움을 달래는 소중한 수단이죠. 전화를 걸러 나왔다가 아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고, 전화부스가 약속장소가 되지도 하지요.” ●전화기 앞에서 고개 숙인 사나이 1일 오전 7시 이경수(46·일용직근로자)씨는 가리봉동 시장 공중전화기의 버튼을 만지작거렸다. 정작 전화는 걸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는 1988년 결혼했지만 경마에 빠져 전 재산 3억 5000만원을 탕진했고, 2001년 이혼하고 가족들과도 연락을 끊었다. 이씨는 “새해 첫날 어머니께 안부 전화를 할까 망설였는데, 7년이 지났지만 아직 전화드릴 면목이 없어서 그냥 끊었다.”고 힘없이 말했다. 불황이 깊어지면서 알뜰족도 눈에 띄었다. 이해중(55·회사원)씨는 “휴대전화가 있지만 요금을 아끼기 위해 일반전화번호로 걸 때는 공중전화를 고집한다.”고 말했다. “겨울이라 춥다고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휴대전화를 쓰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건 다 낭비죠.” 이씨가 자리를 뜨고 30여분이 지나자 한 할아버지가 전화기를 일일이 수색(?)했다. 자세히 보니 카드투입구나 동전반환구에 쓰다 남은 카드나 동전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이 할아버지 바로 뒤에 전화기를 쓴 김모(24·여)씨는 “온라인 게임 아이템을 결제하느라 휴대전화 요금이 49만원이나 나왔는데, 이 돈을 결제하지 못해 결국 휴대전화가 끊겨 어쩔 수 없이 공중전화를 사용한다.”고 말했다. ●외화내빈 공중전화의 고민 서울역 광장에 있는 공중전화는 현금자동입출금기와 나란히 서 있다. 빨간색 가로기둥이 산뜻한 느낌을 준다. 공중전화로 문자메시지를 보낼 수도 있다. 하지만 정작 하루 종일 지켜봐도 이 전화기를 이용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다만 오후 5시가 되자 노숙자 3명이 전화기 밑에 앉아서 막걸리를 마셨다. 밤이 깊어지면 노숙자들의 잠자리가 됐다. 서울역 광장 종합관광안내소에서 일하는 직원마저도 신형 공중전화가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주위 상인들은 “기능과 디자인이 아무리 좋아도 유동인구도 별로 없는 곳인데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말했다. 김포 해병대 2사단에 근무하는 김모(23) 병장은 부산에 계신 어머니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이병 때는 부대 내 공중전화를 아예 붙잡고 살았다.”면서 “군대 오기 전에는 공중전화를 쳐다보지도 않았지만 부대 안에서는 정말 소중하더라.”고 말했다. 엄경헌(22) 상병은 “공중전화를 쓰면서 잊어버렸던 전화번호를 많이 외우게 됐다.”면서 “편리함은 종종 사람의 능력을 퇴화시킨다.”고 말했다. ●수익성과 공공성 사이에서 지난 2일 오전 7시부터 오후 4시까지 서울 영등포경찰서 민원봉사실에 있는 공중전화를 사용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공중전화를 관리하는 KT링커스측은 “월 1000원 미만의 수익을 내는 곳으로 공중전화 한 대당 연간 관리비가 100만원인 것을 고려하면 효율성이 최악인 전화기”라고 말했다. 하지만 경찰서 측은 공공성을 위해 이 전화기가 꼭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등포경찰서 경무계장은 “노인들, 휴대전화를 집에 두고 왔거나 배터리가 떨어진 민원인들, 정액제 요금을 다 사용해 휴대전화가 먹통인 중고생들에게는 이 전화가 없어서는 안 된다. ”면서 “수익성을 따지자면 당연히 수지가 안 맞겠지만 한 명의 민원인이라도 전화가 필요하다면 전화기를 유지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한 경찰은 “요즘 유행하는 구조조정과 마찬가지로 수익성으로만 보면 세상에 남아날 것들이 얼마나 되겠냐.”면서 “치안서비스처럼 평소에는 잘 모르지만 평생에 단 한 번 필요하지만 없어서는 안 되는 무언가가 세상에는 정말 많다.”고 말했다. 이경주 김민희 장형우기자 kdlrudwn@seoul.co.kr ■ 석준호씨의 80년대 공중전화 추억 “구멍가게 번성 일등공신… 시위학생 방패막이였죠” “1980년대에는 상점마다 공중 전화를 서로 가까운 데 놔달라고 전쟁을 벌였죠.” 1983년 10월에 입사해 2000년까지 서울 영등포구, 동작구 등지에서 공중전화 설치, 유지보수 등의 업무를 담당한 KT링커스 총무팀 석춘호(44) 팀장은 5일 ‘공중전화 전성시대’였던 80년대를 추억했다. 다이얼을 돌려야 하는 기계식 전화는 요금조절 장치가 너무 조여지면 동전을 넣어도 통화가 안 되고 느슨하면 돈을 넣지 않고도 무료로 통화가 가능하기도 했다. 석씨는 “상점 주인들은 공중전화가 주위에 있어야 장사가 잘된다고 서로 가게 가까이 놔달라고 졸랐다.”고 회상했다. 요즘은 가게 앞에 공중전화를 설치하면 가게 출입문을 가리니 옮겨달라고 항의한다. 1987년 서울대 공중전화를 관리하러 오토바이를 타고 올라가다가 급작스럽게 터진 최루탄에 잔디밭을 데굴데굴 구르기도 했다. 데모를 하던 여학생들이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주었다. 남학생들은 정문 쪽에 있던 전화부스를 눕혀 바리케이드로 사용했다. 석씨는 “데모가 끝나면 전화기를 전부 수리하고 교체하는 것이 일상이었다.”고 회상했다. 80년대 여의도 국회의사당 1층에 있는 공중전화는 흥행의 보증수표였다. 특히 국정감사 시기가 되면 1층에 공중전화를 쓰려는 공무원들과 기자들이 긴 줄을 섰다. 석씨는 “당시에는 비상근무조가 있어 24시간 근무했지만 요즘은 아예 당직도 없어졌다.”면서 “공중전화가 추억이 되는 것을 보면서 말 그대로 시원섭섭하다.”고 말했다. 이경주기자 kdlrudwn@seoul.co.kr @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행정구역 개편을 말한다] 행정구역개편 가상 시나리오

    [행정구역 개편을 말한다] 행정구역개편 가상 시나리오

    새해 아침,지리산 정상인 천왕봉(해발 1915m).산 아래 마을인 함양,산청,하동,남원,구례 등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내뱉는 구수한 사투리로 영·호남 사람들이 모이는 화개장터처럼 왁자지껄했다.천왕샘에서 약수물을 떠서 건네며 “와따 친구 반갑네잉.올해는 소원풀이 하소잉. 니도 복 많이 받어뿌라마.” 잠시 후 먼 산 너머에서 이글거리는 불덩어리가 불끈 솟아 햇살을 비추자 환호하는 메아리가 울림으로 되돌아왔다.경제권,생활권,개발권을 중심으로 경상도와 전라도를 아우르는 ‘지리산’ 통합시가 생겨나면서 지역감정이 눈 녹듯 사라지고 이웃 사촌끼리 트고 지내는 미풍양속이 되살아났다.행정구역 개편에 따른 일상을 가상 시나리오로 엮어봤다. ●지리산처럼,섬진강처럼 포근하게 산을 내려온 몇몇이 하동군 화개면 화개장터에 모여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덕담을 건넸다.“우리들끼리 언제 경상도,전라도가 있었나.그래서 인자 맘이 놓이네.”화개장 손님들은 구례군 토지면과 구례읍 사람들이 더 많다.반대로 화개면 주민들은 하동장이 아닌 구례읍장 단골손님들이다. 구례 토박이인 구제훈(64·토지면 기촌마을)씨는 “마을에서 2㎞ 떨어진 화개장터는 어릴 때부터 자주 다닌 장이고 거기 사는 서재근,정재은이가 친구여서 늘 만난다.”고 자랑했다.토지면과 화개면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서로가 분별없이 잘 지내다가 지역감정으로 조금 꺼림칙했으나 이런 거 저런 거 다 사라지니까 다들 좋아한다.”고 전했다.같은 생활권인 구례와 하동,함양군 등 산사람들이 지리산 품처럼 통크게 합쳐지면서 부쩍 내왕이 잦아지고 농산물 판매량이 늘었다. ●먼 친척보다 이웃사촌 “지역감정 몰라요” 구례읍사무소에서 20년 넘게 근무하던 이모(50)씨는 새해부터 경남 함양군 마천면사무소로 출근했다.이씨는 “마천면에 홀로 사시는 장모님이 거동이 불편해 외동딸인 아내가 병수발을 맡기로 했다.”고 설명했다.광양시 다압면사무소도 새해부터 사무실 분위기가 한결 밝아졌다.섬진강 다리 건너 하동읍에 사는 신참 여직원 2명이 기능직에 배치되면서부터다.구례군 토지면 이일권(54·중기마을)씨는 “우리 마을 40가구 가운데 대여섯 가구는 경상도에 처가가 있고 행정구역이 통합되면서 영·호남이 한 가족이 된 느낌”이라고 말했다. 지리산 칠선계곡을 사이에 두고 위아랫마을인 경남 함양군 마천면과 전북 남원시 산내면도 교류가 잦아졌다.함양에는 남원댁이,남원에는 함양댁이 적잖다.마천면사무소 남자 직원은 “주민 가운데 50대 후반만 하더라도 두 지역에서 혼사를 자주 했는데 1980년대 후반부터 지역감정으로 거의 막혀 아쉬웠다.”고 웃었다. ●아직까지는 영~ 어색하구먼 많게는 4~5군데 군이 합쳐져 통합시가 됐지만 주민들은 여전히 어색하다.전남 중·남부권인 고흥·장흥·보성·화순군이 합쳐졌으나 일부는 “어디 사냐고 물어보면 통합시를 말해야 할지 나고 자란 고향을 내세워야 할지 모르겠다.”고도 불평했다. 1000여명에 이르던 전남도청 직원들도 대부분 고향과 연고지의 시·군청으로 전진배치됐다.고위 직급은 한정되고 직원들이 넘치면서 눈치보기,편가르기,연고찾기가 더 심해졌다.예산을 맡은 한 공무원은 “옛날에는 도청을 통해 국비를 받아 쓰니까 일하기가 편했는데 정부에서 직접 예산을 관장한 뒤로는 현지 사정도 모른 채 까다롭게 군다.”고 불만을 터트렸다.통합시장은 지역별 재경 향우회가 통합이 안 되고,그대로 유지되면서 참석에 부담을 느낀다고 하소연했다.연례행사였던 읍·면·동별 체육대회는 군 대항으로 규모가 커지면서 횟수가 줄었고 주변 상인들의 거친 항의로 통합 이전 군 단위로 돌아가면서 열린다. ●‘2012년 여수 세계박람회´ 남해안축제로 발돋움 전남 여수시가 2007년 말 2012년 세계박람회 개최지로 결정되면서 한동안 경남 쪽에서 “우리가 들러리냐.”는 등 볼멘소리가 들렸다.그러나 지금은 정반대다.호화 유람선이 그림 같은 남해안 일대를 오가면서 육지와 바다를 잇는 거점별 테마 관광이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김용우(52) 여수시 기획계장은 “여수 세계박람회 방문객들이 여수는 물론 순천,광양,고흥과 경남 하동,진주 나아가 부산까지도 찾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하승완(57·지방자치) 조선대법대 교수는 “행정구역 통합은 예산을 통한 중앙정부 직접 통제 강화로 풀뿌리 지방자치를 뿌리째 흔드는 잘못된 일”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무안 남기창기자 kcnam@seoul.co.kr
  • 무자년 ‘마지막 첫’ 전철 ‘또하나의 가족’

    한해를 보내는 연말 지하철 첫차의 풍경은 어떨까. 유별나게 어려웠던 2008년 말 새벽을 여는 이웃은 어떤 표정일까.한해를 48시간여 남긴 30일 꼭두새벽에 지하철 첫차를 타봤다.  새벽 5시쯤 출발하는 첫차는 ‘생계형 지하철’로 불린다. 인력시장에 나가는 일용직들,야쿠르트 아주머니와 빌딩들의 청소 아주머니들이 반쯤 감긴 눈으로 어깨를 잔뜩 웅크린 채 모인다 하여 붙여진 별칭이다.  첫차의 풍경은 작업복 차림의 승객들로 우중충할 것이란 지레짐작을 여지 없이 깨뜨렸다. ‘치열하거나 혹은 빠듯한’ 일상의 군상들일 게 분명하다고 여겼는데 보기 좋게 빗나갔다.  새벽 5시30분 지하철에 올랐다. 삶의 무게에 짓눌려 경직돼 있을 것만 같았던 첫차에는 가족 같은 훈훈한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첫차란 인연이 만들어낸 ‘가족’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삶이 팍팍하기에 더불어 생겨난 풍경일까.  “십수년을 지하철 첫차를 타며 지내왔는데 (정이) 오죽 하것소.” 청량리로 가는 두 아주머니가 던져준 말이다. ●아버지의 재발견-새벽 4시30분  30일 신도림역 2호선 첫차를 운행한 이무일 기관사의 하루는 새벽 4시30분에 시작됐다. 안전 점검 등을 위해 열차 출발 시간보다 1시간 먼저 일어났다고 했다. 그는 승객들이 오르기 전 자동문 시험 등을 통해 무사운행을 기원했다.  새벽 첫차에는 의외로 빈 자리가 없다. 이 기관사는 “첫 차를 타는 승객들은 남들보다 어렵게 일하는 사람들로 주로 일찍 출근하는 편”이라며 “그걸 알고 있으니 더 신경 쓰인다.”고 말했다.  “배차 간격이 상대적으로 긴 새벽 시간에는 뛰어오는 사람이 보이면 태우려고 기다리는 편”이라는 그의 마음 씀씀이도 이 때문이다.  시민들이 하루를 무탈하게 시작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그는 승객들의 아버지였다. ●형제의 재발견-새벽 4시45분  “아저씨 청량리행 첫차 몇시에 있어요?” “야 그것 봐 아니래잖아.” “에이 괜히 일찍 왔네.” 왁자지껄하다.첫차와 어울리지 않는 아주 ‘수상한’ 모습들이었다.  신도림역.혈관이 터질듯 혈기가 왕성한 청년 댓명이 양손 가득 비닐봉지를 들고선 역사 안으로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과자,음료수 등이 가득 찼다.  올해 수능을 치렀다는 윤호영(19)군 등 8명은 “춘천의 강촌으로 10대의 마지막을 불사르러 가는 길”이란다.이성 친구들이 없어도 아쉽지 않다고 했다.이들은 ‘친구’에서 ‘형제’로 거듭나기 위해 차가운 새벽 기온에서도 첫차를 기다리는 설렘으로 가득했다.  새벽 5시35분 신대방역. 빨간색 등산 점퍼에 커다란 배낭을 멘 중년 남성 2명이 눈에 띄었다.둘은 각각 5,7년째 첫차를 타고 산행을 즐기다 의형제를 맺었다고 한다. 서로 형님과 아우님 하는 폼세가 실제 형제인 양 다정하다.눈이 쌓인 산의 모습은 돈 주고도 못 볼 만큼 절경이라는 이들은 산행 후 막걸리 한 사발씩 하기로 약속했다. ●자매의 재발견-새벽 5시2분  “어~오늘은 좀 늦었네.혼자 왔어?”  신도림역에서 5시2분 출발하는 1호선 상행선을 기다리던 윤옥순(75)씨는 우순자(59)씨를 보자 무표정한 얼굴에도 따스한 인사를 건넨다. ‘지하철 10년지기’라고 했다.  “이 언니는 못 묶는 게 없어.선수야 선수” 윤씨는 지하철로 청량리까지 간 다음 승합차에 몸을 싣고 포천으로 이동,파와 미나리 등을 단으로 묶는단다. 23년째 이 일을 하고 있다.  일상을 고스란히 전하는 이들의 대화에는 친근함이 듬뿍 묻어난다.”매일 보다가 하루 안 보이면 섭섭하지.왜 안 보이나 궁금하고 어디 아픈가 걱정도 되고….“  나이 차가 띠동갑이 넘는 이들을 자매로 묶어준 건 첫차만의 특별한 힘이었다. ●어머니의 재발견-새벽 5시40분  “어이 나 그 신문지 한장 줘봐.” “이 떡 좀 먹어봐.” ”난 그거(유가환급금) 24만원 다 나왔던데.”  열차의 맨 끝 칸에서 신문지를 깔고 바닥에 앉은 중년 여성 예닐곱명이 눈에 들어왔다. 쥐죽은 듯 조용한 새벽 첫차에서 보기 드문 장면이다.  기자가 ‘이야기 좌판’에 끼어들었다. 기자 일행에게 신문지 한장을 쑥 빼주며 편히 앉으란다. “옳다! 잘 됐다.어르신네들 살아온 곡절이나 들어보자.” 느닷없이 “아이고,우리 아들”이란다. 역시 이들 아주머니들도 새벽 지하철에서 만난 우리의 엄마요 이모였다. ●새해엔 지하철 안에 정이 가득했으면  바삐 타고 나면 피곤하기만 한 일상의 아침 지하철.  이 공간은 사적인 시간을 공유하지 않는 ‘아주 이기적인’ 곳, 이어폰을 꼽거나 신문을 읽으며 혹은 잠을 청한 채로 지나쳐가는 도시문명의 산물로 매도된다. 하지만 2008년을 이틀 남긴 아침 이 외로움의 공간 속에는 ‘가족의 정’이 더없이 피어났다. 살기가 팍팍해도 ‘삶의 온기’는 살아 있다는 증거다.  아침마다 만나는 얼굴이 있다면 새해 첫 날, 첫 출근 만큼은 먼저 말을 걸어보자.“아침 공기가 상쾌합니다.” “오늘도 일찍 나가시네요.” [관련기사] ☞ 종점 다음 역은… 새로운 출발 인터넷서울신문 최영훈 박성조기자 taiji@seoul.co.kr@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무자년 ‘마지막 첫’ 전철 ‘또하나의 가족’

    무자년 ‘마지막 첫’ 전철 ‘또하나의 가족’

     한해를 보내는 연말 지하철 첫차의 풍경은 어떨까.유별나게 어려웠던 2008년 말 새벽을 여는 이웃은 어떤 표정일까.한해를 48시간여 남긴 30일 꼭두새벽에 지하철 첫차를 타봤다.  새벽 5시쯤 출발하는 첫차는 ‘생계형 지하철’로 불린다.인력시장에 나가는 일용직들,야쿠르트 아주머니와 빌딩들의 청소 아주머니들이 반쯤 감긴 눈으로 어깨를 잔뜩 웅크린 채 모인다 하여 붙여진 별칭이다.  첫차의 풍경은 작업복 차림의 승객들로 우중충할 것이란 지레짐작을 여지 없이 깨뜨렸다.‘치열하거나 혹은 빠듯한’ 일상의 군상들일 게 분명하다고 여겼는데 보기 좋게 빗나갔다.  새벽 5시30분 지하철에 올랐다.삶의 무게에 짓눌려 경직돼 있을 것만 같았던 첫차에는 가족 같은 훈훈한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첫차란 인연이 만들어낸 ‘가족’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삶이 팍팍하기에 더불어 생겨난 풍경일까.  “십수년을 지하철 첫차를 타며 지내왔는데 (정이) 오죽 하것소” 청량리로 가는 두 아주머니가 던져준 말이다.    ●아버지의 재발견-새벽 4시30분  30일 신도림역 2호선 첫차를 운행한 이무일 기관사의 하루는 새벽 4시30분에 시작됐다.안전 점검 등을 위해 열차 출발 시간보다 1시간 먼저 일어났다고 했다.그는 승객들이 오르기 전 자동문 시험 등을 통해 무사운행을 기원했다.  새벽 첫차에는 의외로 빈 자리가 없다.이 기관사는 “첫 차를 타는 승객들은 남들보다 어렵게 일하는 사람들로 주로 일찍 출근하는 편”이라며 “그걸 알고 있으니 더 신경 쓰인다.”고 말했다.  “배차 간격이 상대적으로 긴 새벽 시간에는 뛰어오는 사람이 보이면 태우려고 기다리는 편”이라는 그의 마음 씀씀이도 이 때문이다.  시민들이 하루를 무탈하게 시작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그는 승객들의 아버지였다.  ●형제의 재발견-새벽 4시45분  “아저씨 청량리행 첫차 몇시에 있어요?” “야 그것 봐 아니래잖아.” “에이 괜히 일찍 왔네.” 왁자지껄하다.첫차와 어울리지 않는 아주 ‘수상한’ 모습들이었다.  신도림역.혈관이 터질듯 혈기가 왕성한 청년 댓명이 양손 가득 비닐봉지를 들고선 역사 안으로 들어왔다.자세히 보니 과자,음료수 등이 가득 찼다.  올해 수능을 치렀다는 윤호영(19)군 등 8명은 “춘천의 강촌으로 10대의 마지막을 불사르러 가는 길”이란다.이성 친구들이 없어도 아쉽지 않다고 했다.이들은 ‘친구’에서 ‘형제’로 거듭나기 위해 차가운 새벽 기온에서도 첫차를 기다리는 설렘으로 가득했다.  새벽 5시35분 신대방역.빨간색 등산 점퍼에 커다란 배낭을 멘 중년 남성 2명이 눈에 띄었다.둘은 각각 5,7년째 첫차를 타고 산행을 즐기다 의형제를 맺었다고 한다.서로 형님과 아우님 하는 폼세가 실제 형제인 양 다정하다.눈이 쌓인 산의 모습은 돈 주고도 못 볼 만큼 절경이라는 이들은 산행 후 막걸리 한 사발씩 하기로 약속했다.  ●자매의 재발견-새벽 5시2분  “어~오늘은 좀 늦었네.혼자 왔어?”  신도림역에서 5시2분 출발하는 1호선 상행선을 기다리던 윤옥순(75)씨는 우순자(59)씨를 보자 무표정한 얼굴에도 따스한 인사를 건넨다.‘지하철 10년지기’라고 했다.  “이 언니는 못 묶는 게 없어.선수야 선수” 윤씨는 지하철로 청량리까지 간 다음 승합차에 몸을 싣고 포천으로 이동,파와 미나리 등을 단으로 묶는단다.23년째 이 일을 하고 있다.  일상을 고스란히 전하는 이들의 대화에는 친근함이 듬뿍 묻어난다.”매일 보다가 하루 안 보이면 섭섭하지.왜 안 보이나 궁금하고 어디 아픈가 걱정도 되고….“  나이 차가 띠동갑이 넘는 이들을 자매로 묶어준 건 첫차만의 특별한 힘이었다.    ●어머니의 재발견-새벽 5시40분  “어이 나 그 신문지 한장 줘봐.” “이 떡 좀 먹어봐.” ”난 그거(유가환급금) 24만원 다 나왔던데.”  열차의 맨 끝 칸에서 신문지를 깔고 바닥에 앉은 중년 여성 예닐곱명이 눈에 들어왔다.쥐죽은 듯 조용한 새벽 첫차에서 보기 드문 장면이다.  기자가 ‘이야기 좌판’에 끼어들었다.기자 일행에게 신문지 한장을 쑥 빼주며 편히 앉으란다.”옳다! 잘 됐다.어르신네들 살아온 곡절이나 들어보자.” 잠시···,느닷없이 “아이고,우리 아들”이란다.역시 이들 아주머니들도 새벽 지하철에서 만난 우리의 엄마요 이모였다.    ●새해엔 지하철 안에 정이 가득했으면  바삐 타고 나면 피곤하기만 한 일상의 아침 지하철.  이 공간은 사적인 시간을 공유하지 않는 ‘아주 이기적인’ 곳,이어폰을 꼽거나 신문을 읽으며 혹은 잠을 청한 채로 지나쳐가는 도시문명의 산물로 매도된다.하지만 2008년을 이틀 남긴 아침 이 외로움의 공간 속에는 ‘가족의 정’이 더없이 피어났다.살기가 팍팍해도 ‘삶의 온기’는 살아 있다는 증거다.  아침마다 만나는 얼굴이 있다면 새해 첫 날,첫 출근 만큼은 먼저 말을 걸어보자.“아침 공기가 상쾌합니다.” “오늘도 일찍 나가시네요.”    인터넷서울신문 최영훈 박성조 기자 taiji@seoul.co.kr
  • 축구로 찾는 내 인생 첫 승리

    ‘평균 연령 56세의 ‘할머니 축구단’이 떴다!’ EBS TV ‘다큐 인’은 8~9일 오후 10시40분 ‘돌격! 할머니 축구단’을 방송한다.창단 6개월째인 경남 산청군 생초면의 할머니 축구단을 조명한 것.‘할머니 축구단’은 2001년 태풍 셀마로 마을이 폐허가 되면서 생겨났다.마을이 풍수해 특별지구로 지정되면서 동네에 잔디구장이 들어선 것이다.어려운 마을을 홍보하고,건강도 챙기겠다고 할머니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처음에는 그저 취미와 건강을 위해 시작했던 축구는 요즘 할머니들에게 인생 최고의 즐거움이 됐다.남들은 할머니 축구단이라며 실력을 우습게 생각해도 이들에게 축구는 진지한 스포츠다.축구를 하면서 출렁이던 뱃살도 쏙 들어간 기분이 들고,무엇보다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할머니 축구단의 눈에는 모든 사물이 공으로 보인다.수건을 꽁꽁 묶어 공을 만들어 차기도 한다.식당을 하는 춘자 할머니는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마는 시간도 아깝다. 평균 연령 56세의 할머니 축구단이 평균 연령 7세 유소년 축구단 ‘고봉우 축구단’에게 도전장을 냈다.아직 한 번도 이긴 적이 없는 할머니 축구단은 조금은 만만해 보이는 조무래기들이라도 꼭 한번 이기고 싶은 마음에 ‘1승’을 향한 의지를 불태운다. 할머니 축구단이 도전장을 낸 또 다른 팀이 있었으니,바로 이장 팀이다.동네 이장들이 모여 축구팀을 결성했다.경기 당일,할머니 축구단은 달콤한 승리를 맛보기 위한 비밀 계책을 세웠다.이장들에게 막걸리를 먹여 취중 경기를 유도하겠다는 것인데,페어플레이 정신에 조금 어긋나더라도 할머니 축구단에겐 승리의 기쁨이 더 소중하다.시골마을 할머니들에게는 커다란 행복이기 때문이다. 축구에 대한 열정이 이렇게 대단한 것은, 바로 ‘나’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평생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왔지만,갈수록 더 힘들어지는 농사일에 한숨 짓는 영남 할머니는 나이든 시어머니와 얼마 전 돌아가신 102살 치매 시할머니까지 모시며 꿋꿋하고, 효심 깊은 며느리의 삶을 살았다.이런 할머니 축구단에게 축구는 다시 찾은 행복이며,인생의 활력소다.그들에게 1승은 항상 가족의 승리를 먼저 빌어 온 할머니의 심정에서 처음으로 나 자신의 승리를 바라는 작은 욕심이자,마음 설레는 행복이다.과연,할머니 축구단은 인생의 첫 승리를 위해 골망을 흔들 수 있을 것인가. 이은주기자 erin@seoul.co.kr
  • 美작가 윌 킨이 쓴 한국 여성의 삶 ‘엄마열전’

    美작가 윌 킨이 쓴 한국 여성의 삶 ‘엄마열전’

    27일 오후 서울문화재단 대학로 연습실. 극단 차이무의 ‘엄마열전’(12월16~31일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연습팀을 찾아 안으로 들어서니 부침개 냄새가 진동한다. 바닥에 주저앉은 배우와 스태프가 부침개를 안주로 막걸리를 마시며 왁자지껄 떠들고 있다. 비도 오고 해서 연습을 접고 쉬는 것일까, 어리둥절해하니 한창 연습 중이란다. 그러고 보니 여배우끼리 그냥 수다 떠는 줄 알았던 얘기가 모두 희곡 대사다. 막걸리를 마시는 장면도 극에 나오는 내용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실제 공연에선 부침개 대신 김장 김치가 버무려진다는 것.이 연극이 무대에서 어떤 분위기로 펼쳐질지 대번에 감이 왔다. ‘엄마열전’은 직설적인 제목 그대로 한국 엄마들의 얘기다.민씨 집안의 네 며느리가 큰집 앞마당에 모여 한바탕 수다를 떠는데 그 사연이 구구절절 우리네 엄마들의 희로애락 그대로다.모시고 살던 엄한 시어머니를 떠나보내고 새로운 목표를 찾아 대학에 진학한 맏며느리,딸 걱정에 한숨 끊일 날 없는 둘째,귀엽고 낙천적인 셋째,소매치기에 회사공금을 날릴 뻔한 막내 며느리.그리고 이들의 입을 통해 전달되는 또다른 엄마들의 이야기는 이들이 버무리는 김장 김치속처럼 매콤하고 알싸하다. 극중 사연 하나하나가 지극히 현실적이고,공감 가는 내용인데 뜻밖에도 작가는 미국인 남성 윌 킨(43)이다.시카고에서 극작가로 활동하던 중 한국과 인연을 맺은 그는 우연히 한 여성으로부터 어린 시절 손에 화상을 입었지만 할머니가 여자란 이유로 수술을 못하게 했다는 얘기를 듣고 한국 여성의 삶에 관심을 갖게 됐다.이후 찜질방,성매매 여성보호기관,사회복지기관 등을 돌아다니며 각계각층 여성을 인터뷰한 내용을 희곡으로 엮었다.그는 “고통의 역사를 끈질기게 이겨낸 한국 여성들은 호랑이같다.”고 말했다.영어 제목을 ‘Moth- ers and Tigers’라고 지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배추와 무를 다듬으며 시어머니의 흉을 보던 며느리들은 김장이 마무리될 때쯤 시어머니를 이해하고 존경한다고 입을 모은다.가부장제 아래 차별받으면서도 강인함과 넉넉함으로 한평생을 살아낸 한국 여성들에게 바치는 헌사다.‘누구 엄마’란 호칭에 익숙했던 며느리들이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고,표창을 하며 끈끈한 동지애를 발휘하는 대목은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맏며느리역의 배우 신혜경(46)은 “나도 시집살이를 힘들게 했는데 어느 순간 시어머니도 여자란 사실을 깨달으면서 모든 게 이해되더라.”고 했다. 민복기 연출은 “수다와 슬픔이란 두 개의 감정이 자연스럽게 교차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면서 “김장 담는 이웃집 담장을 넘겨다 보는 듯한 편안하고 재밌는 연극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일상 연기에 강한 차이무 간판 배우가 대거 출연한다.신혜경,이지현,전혜진,김수정,정예진 등 다섯 여배우와 더불어 최덕문,정석용,오용 등 남자 배우가 1인 다역으로 번갈아 무대에 선다.공연마다 10여포기의 김장을 해서 관객에게 선사하는 아이디어도 고려 중이다.1만 5000~2만 5000원.(02)747-1010.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Let´s Go] 술 익는 마을

    [Let´s Go] 술 익는 마을

    여행과 전통주.궁합이 잘 맞는 짝이다.특히나 요즘처럼 스산한 겨울 날씨엔 더더욱 그렇다.여행 도중 정감 넘치는 시골마을에 들어가 그 고장 전통주를 마시며 온몸에 훈훈한 온기를 채운다면 겨울 여행의 맛을 제대로 만끽하는 것일 터.술 익는 마을과 겨울 풍경이 잘 조화를 이룬 여행지들을 소개한다. # 청류 품은 ‘포천(抱川)’에서 술과 함께 노닐다  물맛 좋기로 소문난 경기도 포천에는 두 곳의 술 명가가 있다.화현면 화현리 운악산(해발936m) 아래 배상면주가와 이동면 도평리 백운산(해발904m) 아랫자락의 이동막걸리가 바로 그 곳.주종은 달라도 화강암을 뚫고 올라 온 물을 원료로 사용하는 것만은 똑같다.   배상면주가에서 운영하고 있는 전통술박물관 산사원은 주조도구 전시장과 시음장,가양주빚기체험장 등을 갖추고 있는 정갈한 술 문화 체험공간이다.2002년 문을 연 이래 해마다 2만명 안팎의 관람객이 방문할 만큼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다.특히 직접 술 빚는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가양주프로그램은 사람들의 관심이 많아 반드시 예약을 해야 한다.soolsool.co.kr,031)531-9300. # 달콤한 소곡주에 취하고 갈대밭에서 밀회도 즐기고  술 익는 마을이 있고,노을 물든 황금빛 갈대밭에 더해,떼 지어 날아오르는 철새들의 비상을 만날 수 있는 충남 서천은 명품 겨울여행지라 부를 만하다.서천의 대표 명주인 한산 소곡주는 1300년 전 백제왕실에서 즐겨 마시던 술로 알려져 있다.최고급 찹쌀로 빚어 100일 동안 숙성시켜 만든다.단맛과 함께 들국화 향기 비슷한 향을 갈무리하고 있다.한산면 지현리 한산모시전수관 맞은 편에 소곡주 제조과정 등을 엿볼 수 있는 전시장이 마련돼 있다.소곡주의 달큰함을 맛본 뒤엔 신성리 갈대밭을 방문해 보자.폭 200m,길이 1㎞에 달하는 광활한 갈대 군락지다.솜털처럼 부드러운 하얀 꽃이 선선한 바람 장단에 맞춰 춤사위를 펼치는 이맘때 가장 아름답다.겨울을 나기 위해 찾아든 수만 마리의 철새와 만나는 것도 이때쯤이다.한산소곡주 sogokju.co.kr,041)951-0290.  # 정성이 빚고 세월이 담근 맛, 완주 송화백일주    전북 완주의 송화백일주는 수도승들이 고산병 예방을 목적으로 즐겨 마셨다는 곡차(穀茶)에서 유례를 찾는다.송홧가루와 솔잎, 산수유,구기자 등 다양한 재료로 빚은 밑술을 증류해 얻는 증류식 소주. 송홧가루의 황금빛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간혹 알레르기 때문에 송홧가루를 기피하는 사람도 있지만,고추장 등 발효음식에서 송홧가루처럼 귀한 대접을 받는 것도 드물다.송홧가루가 방부제 역할을 해 우리 몸에 좋은 효모와 효소가 잘 살 수 있도록 도와 주기 때문이다.그래서 송화백일주는 오래 두고 먹을수록 깊은 맛이 우러난다.  송화백일주와 더불어 완주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대둔산(877.7m)과 모악산(793.5m) 이다.이 두 명산은 겨울에 찾아야 제 맛이다.‘호남의 소금강’이라 불리는 대둔산 설경과 ‘모악춘경(母岳春景)’이란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아름다운 모악산 설경이 여행자를 경이로운 세계로 이끈다.송광사에서 동상호를 거쳐 대아호에 이르는 741번 호반도로는 드라이브 코스로 소문났다.송화양조 songkwangsa.org,063)221-7047. # 제주의 과거를 맛보다,오메기술  무속신앙이 성행하던 옛 제주도에서 당신(堂神)에게 제사지낼 때 쓰던 술이 오메기술과 이를 맑게 증류시킨 고소리술이었다.‘오메기’라 부르는 좁쌀로 만든 떡에 누룩과 물을 넣고 밀봉해 두면 술이 빚어진다.제조과정에서 ‘청주’,혹은 ‘세주’로 물리는 맑은 술은 위로 뜨고,밑으로는 탁한 막걸리가 가라앉는다.이 막걸리가 바로 오메기술이다.  흔히 좁쌀막걸리라 불리는 오메기술을 제대로 맛보려면 성읍민속마을로 가야 한다.제주시내에서 간다면 1131번 도로변 마방목지(마방터)의 드넓은 초지에서 제주말을 구경한 뒤,삼나무길(1112번 도로)을 거쳐 산굼부리에 들르는 코스가 좋겠다.폐교에서 예술공간으로 재탄생한 두모악 김영갑갤러리도 성읍민속마을에서 가깝다. 성읍민속마을보존회 seong eup.net,064)787-1179.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 자료제공 한국관광공사
  • [속삭임 ⑩] 메뚜기

    [속삭임 ⑩] 메뚜기

    꿈이 자꾸 흐트러진다. 근거 모를 꿈들이 잠 속으로 수없이 왔다가 사라진다. 몇 번이고 되짚어 보지만 알 수 없다. 계절 탓인가? 마음이 자꾸 산만해 지는 건. 아침 일찍 카메라를 메고 집을 나섰다. 늘 해왔던 것처럼 무작정 차를 몰고 도심을 빠져나갔다. 차창을 열었다. 어젯밤 잠보다 더 달콤한 바람이 폐부 깊숙이 들어온다.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이 온통 노랗다. 지금은 다 팔고 고향을 떠났지만 할아버지가 농사를 지으시던 다랑논이 있는 고향으로 달려갔다. 벌써 노랗게 익은 벼 이삭들이 할아버지 허리만큼이나 휘어 있다. 할아버지가 허리를 펼 때마다 놀라 투두둑 튀어 도망가던 메뚜기들. 그 소리가 메뚜기가 내는 소린 줄만 알았던 그 시절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할아버지, 메뚜기 잡으러 왔어요.” “오냐 많이 잡거라.” 살금살금 발을 옮길 때마다 후다닥 도망가 버리는 메뚜기를 이리저리 쫓아다니다 보면 어느새 허리춤에는 강아지풀 뀀지가 서너 개로 늘어났다. 논둑마다 메뚜기가 지천이었다. 놀이 삼아 잡아도 잠깐이면 4홉 소주병이나 한 되들이 막걸리 주전자에 가득 채울 수 있었다. “얘야 그만 집에 가자!” 일손을 멈추고 나서도 좀처럼 똑바로 펴지지 않던 할아버지의 등. 종종걸음으로 할아버지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오던 날, 휜 등으로 쓸쓸하게 내려앉아 점점 깊어가던 어둠. 몇 십 년 전의 그 어둠을 지켜보고 있다. 메뚜기는 다 어디로 갔을까? 금방이라도 할아버지의 목소리에 놀란 메뚜기들이 어둠 속으로 몸을 감추는 소리 들릴 것 같은데…. 끝내 할아버지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일어나 엉덩이를 털고 논둑길을 돌아 나온다. 강아지풀 하나를 뜯어 입에 물었다. 빈손으로 파고드는 어둠이 자꾸 추억에서 나의 등을 민다. 어둠과 추억은 왜 모두 슬픔에 기대어 있을까? 글·사진 문근식 시인       월간 <삶과꿈> 2008년 10월호 구독문의:02-319-3791                    
  • “어찌 사나…” 돈 걱정 가득

    “어찌 사나…” 돈 걱정 가득

    경기침체로 주머니 사정이 팍팍해지면서 포장마차를 찾는 서민들이 부쩍 늘고 있다. 가을비가 내린 지난 22일 밤 서울 남대문시장과 종로구 광장시장에서는 즐비한 포장마차에 서민들이 여기저기 앉아 소주 잔을 기울였다. 그들과 함께 소주를 마시며 세상얘기를 나눠봤다. ●손님은 늘어도 수입은 줄어들어 저녁 8시 광장시장에 들어선 60여개의 포장마차에는 직장인들과 부부, 연인들로 가득해 빈 자리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손님이 늘어 좋아할 줄 알았지만 포장마차 주인들은 오히려 매출이 줄었다고 하소연했다. 공짜로 주는 오뎅국을 안주삼아 마시는 알뜰형 손님들이 늘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소주 1병과 4000원짜리 빈대떡 한 장을 놓고 1시간 이상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이 많았다. 빈대떡집을 운영하는 강모(58·여)씨는 “술값을 나눠서 내는 사람도 많고, 한 사람이 평균 3500원을 낸다.”면서 “손님은 15명씩 꽉 들어차는데 매출은 하루 5만원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포장마차 주인 윤모(53·여)씨는 “연초까지만 해도 하루에 소주를 60병을 팔았는데 지금은 20병 정도 나간다. 주머니 사정 아는 단골에게 안주라도 넉넉히 퍼주다 보면 수지를 못 맞추는 날도 있다.”고 전했다. ●“이혼하고 싶어도 위자료가 없다” 밤 10시를 넘기자 몇몇 애주가들만 남았다. 친구와 단 둘이서 막걸리를 3병째 마시던 문모(51·도봉구 방학동)씨는 용산 전자상가에서 일본산 카메라를 팔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요즘 그는 부인과 별거 중이다. 갑자기 급등한 환율로 수입이 지난해 35%에서 10%대로 떨어지면서 집에 돈을 가져다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수입이 줄었는데도 아내는 각각 월 70만원이 넘는 보험료와 아이들 사교육비를 줄이지 않았다.”면서 “이혼하고 싶어도 위자료가 없다.”며 술잔을 들이켰다. 광고제작팀에서 10년간 근무해온 김모(29·중랑구 묵동)씨는 “이틀밤을 꼬박 새워도 야근 수당 한 번 받지 못하고 버텼다.”면서 “나 같은 일용직은 비정규직도 부럽다.”고 말했다. 남대문 시장 포장마차에서 만난 최모(57)씨는 1998년 명예퇴직을 하고 개인택시를 몰고 있다고 했다. 그는 “아버지는 하루에 15시간씩 운전해 겨우 6만~7만원 버는데 미국에서 공부하는 딸은 돈이 부족하다고 언제나 불평한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넥타이부대´ 단란주점에서 포장마차로 ‘넥타이 부대’들은 단란주점이나 노래방이 아닌 포장마차에서 빈대떡을 안주로, 젓가락 박자에 맞춰 노래를 부르며 회식을 하고 있었다. 한 출판사 직원들은 일본에서 들여온 책의 판권료가 지난해 48억원에서 올해 78억원으로 오르면서 회사가 빚더미에 올랐다고 걱정했다. 손모(54·서초구 우면동)씨는 “1년 전에 넣었던 주당 2만 5000원짜리 펀드가 지금은 5700원까지 떨어졌다.”면서 “경제대통령 찍었더니 대기업프렌들리만 있고 중소기업프렌들리가 없다.”고 말했다. 옆에 있던 정모(44·성동구 왕십리)씨는 소주 잔을 내려놓으면서 “책상머리에 앉아 부자들을 위한 대책만 내놓으니 서민들만 점점 어려워지는 것 아니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경주 황비웅기자 kdlrudwn@seoul.co.kr
  • 한국산, 세계인 입맛 사로잡는다

    한국산, 세계인 입맛 사로잡는다

    한국 고유의 술인 막걸리가 일본으로 첫 수출되고 우리 입맛에 맞게 개량된 호박고구마도 유럽식탁에 오르는 등 특산물들이 잇따라 해외 시장을 두드리고 있다. 19일 전남 강진군과 해남군에 따르면 강진산 복분자 막걸리와 동동주에 이어 해남 밤고구마가 외국으로 각각 수출된다. 강진군은 “병영면 병영주조장에서 걸러진 청자골 복분자 막걸리 1만병과 청자골 동동주 6500병 등 3000만원어치를 24일 일본으로 첫 수출한다.”고 밝혔다. 수출품은 일본인의 깔끔한 취향에 맞도록 막걸리에 건강식품인 복분자를 더해 단맛을 내고 도수와 용량을 조절해 저온처리했다. 용기도 플라스틱 병에서 유리병으로 바꿔 도안을 새겨 넣었다.22일 병영 주조장에서 황주홍 강진군수와 기관단체장, 주민 등이 참석해 시음회를 겸한 수출선적 기념행사를 한다. 병영주조장 김견식 사장은 “이번 수출을 위해 저온살균기와 자동상표 부착기를 새로 설치했다.” 며 “앞으로 복분자 막걸리에 대한 수요가 급증할 것에 대비해 복분자 재배도 늘릴 계획”이라고 말했다. 강진군은 민속주 수출을 계기로 농·수산 가공품에 대한 수출을 적극 지원하기 위해 제품 개발농가는 물론 수출회사도 지원하는 방안을 검토중이다. 고소득 작물인 해남 호박고구마도 유럽을 공략한다. 지난 8월 해남고구마를 수입하기로 결정한 유럽 수입 실무협상단이 최근 해남 고구마 주산지를 찾았다. 협상단(단장 찰스 프랜시스 세계기업 대표)은 해남고구마생산자협회(협회장 오상진 화산농협조합장)와 고구마 수출에 대한 세부사항을 논의하고 네덜란드 현지에서 시식 행사를 하기로 결정했다. 유럽으로의 첫 수출 물량은 8t으로 11월 초에 배에 실린다. 세계기업 대표는 “해남에서 호박고구마를 처음 맛보았는데 지금까지 유럽인들이 생채로 즐기던 습관을 바꿀 수 있을 만큼 단맛에 반했다.”며 “해남고구마의 우수성을 느낀 만큼 현지 판매에 적극 나서 수입물량을 점차 늘려갈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강진·해남 남기창기자 kcnam@seoul.co.kr
  • 마포나루에 전국 새우젓 다 모인다

    마포나루에 전국 새우젓 다 모인다

    마포나루가 되살아난다. 황포돛배가 뜨고 새우젓 냄새가 강변을 적신다. 강나루에 들어선 난전과 주막에서는 갈비내음과 막걸리가 뒤섞여 질펀하다. 거리 곳곳에서는 주민들이 엿치기, 떡메치기, 용두레질, 제기차기로 흥겨움을 더한다. 신영섭 마포구청장은 “새우젓 등 각 지역의 특산물이 유통되는 마포나루를 통해 지역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높여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마포나루의 명품 새우젓 오는 16∼17일 이틀 동안은 옛 마포나루 일원이었던 월드컵공원이 새우젓 냄새로 뒤덮인다. 마포구가 마련한 ‘제1회 한강마포나루 새우젓 축제’가 열린다. 새우젓은 조선말까지만 해도 전국의 배들이 마포나루를 드나들며 거래하던 대표적인 상품이다. 마포나루의 옛 영화를 대표하는 브랜드인 셈이다. 축제 감독자 류재현씨는 “100년 전 항구였던 마포의 향취를 21세기 문화포구로 거듭나게 꾸밀 것이다.”고 말했다. 이 기간 마포농수산물시장 주차장에서는 전국의 유명산지로부터 출품된 큰 새우젓 장터가 열린다. 강경, 광천, 신안, 강화, 소래 등에서 올라온 젓갈들이 서울 시민의 입맛을 끌어당기게 된다. 이 명품 새우젓은 축제기간 중 산지가격으로 저렴하게 판매된다. 특히 16일 오후 3∼4시,17일 오전 11∼오후 1시에는 경매도 열린다. 신 구청장은 “새우젓 축제가 세계적인 관광콘텐츠 개발과 지역의 경제적 효율성 측면 등을 고려한 것으로 앞으로 유사한 축제들을 통합, 확대해 나갈 방침”이라며 “마포만이 갖는 나루의 색깔로 주민이 참여·체험할 수 있는 지역문화 축제를 만들어 갈 것”이라고 말했다. ●체험과 추억이 있는 축제 축제 기간중 마포나루의 옛 정취를 흠뻑 느낄 수 있다. 황포돛배가 마포나루임을 알리고 강나루에는 초가집, 기와집, 장터 등이 재현된다. 장터에는 만물상, 노점상, 좌판, 잡화상, 음식점, 짚신가게까지 등장해 옛 장터의 흥을 돋우게 된다. 또 마포나루의 풍경을 알려주는 사진전과 홍대거리미술전에 참여했던 학생들의 미술작품전시회 등도 열려 과거의 영화를 보여준다. 홍대앞 거리미술전에서는 마포학당의 붓글씨와 동양화 그리기 체험행사가 열리는 등 행사장 곳곳에서는 젓갈 담그기 등 무려 101가지의 체험행사가 열려 어른뿐 아니라 아이들도 흥겹게 참여할 수 있다. 월드컵공원 평화의 광장에서는 마포구 16개 동에서 주민들이 갈고 닦은 북춤, 고전무용 등을 선뵌다. 이동구기자 yidonggu@seoul.co.kr
  • 막걸리 한말 마시고 용궁으로 간 거북이

    구랍 17일 상오 10시쯤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가진리 김일록(金日角)씨(47) 등 5명의 어부는 해변에서 1km쯤 떨어진 바다 가운데에서 고기잡이를 하다 길이 2m, 너비 80cm의 거북 1마리가 그물에 걸려들어 사로 잡았는데. 어부들은 거북을 팔려고 마을까지 끌고 왔으나 김일록노인(72) 등 20여명의 동네 노인들이 『그대로 죽이면 동네에 재앙이 떨어진다』고 반대, 다시 바다로 돌려보냈다고. 마을 사람들은 김노인의 주장에 따라 거북을 놔주기 전에 술을 대접했는데 거북은 막걸리 1말가량을 마신뒤 유유히 바다속으로 사라졌던 것. <고성(高城)> [선데이서울 72년 1월 2일호 제5권 1호 통권 제 169호]
  • 한가족이 77명

    한가족이 77명

    상주(尙州) 박(朴)씨 중형(重衡)영감님하면 전남승주(全南昇州)군내에서 그 기록적인 다산성(多産性) 가문의 장노(長老)로 명망이 높다. 75년전 외톨박이 독자로 태어난 박옹은 56년전 첫아이를 본후로 1년에 1명이상씩 무성하게 자손을 퍼뜨리고도 그 자손을 대부분을 한 부락안에서 살게끔한 부족사회적「리더십」을 훌륭히 발휘한 것. 즐거운 새해 세배 가족을 찾아가 보면-. 구랍 22일 밤늦게 박옹은 논산(論山)에 살고 있는 4남 남석(湳錫)씨(46)로부터「아들출산」이란 반가운 전보를 받았다. 박옹은 서둘러 가족부난에 적어넣고, 새끼를 꼬아 대문앞에 금줄을 달아 걸었다. 자손들이 출산할 때마다 대문에 금줄을 거는 것이 박옹의 최대의 행사이자 기쁨이다. 『이번 금줄이 예순번째여라우. 아직도 10번쯤은 내 손으로 걸 수 있을 것이오』 믿을 수 없게 건강한 박옹은 찬바람을 맞받으며 씽긋 웃는다. 새해를 맞으면 박옹은 걱정스런 행복에 잠긴다고도 했다. 20살이하의 어린 자손들만 30명(외손은 제외)이니 세뱃돈을 작년엔 1백원균일로 하고서도 3천원. 금년에는 15살이상된 아이들에겐 인상해줄 작정이라했다. 『그러니께 내가 14살에 장가들었는디 첫애가 올해 쉰여섯이지요잉. 19살에 아들을 보았것지 않았소? 그 뒤로 지금까지 예순녀석이 태어난 셈이라우. 여기다 외손허고 외손손까지 합하면 77명이 될것이오』 「외손손」이 뭐냐고 물었더니 허허 웃고 난 박옹은「외증손」을 뜻한다고 대답. 까닭인즉 그의 3대조 할아버지 이름에 증(曾)자가 들어 있어서「증손」「외증손」의 증자는 기자(忌字)로 간주, 증자를 사용하지 않고 외손손·손손으로 표기한다는 설명이다. 세뱃돈 올릴 행복한 걱정 박옹 일가가 살고 있는 곳은 전남 승주군 상사(上沙)면쌍지(雙之)리부락. 순천(順天)시에서「택시」로만 1시간20분. 궁벽하기 짝없는 노령산맥 휘어지는 산골동네다. 박옹 선조대대 2백년전부터 자리잡아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 그래서 쌍지리부락 52호 가운데 40여호가 박씨문중이다. 이중에서 박옹의 가족만 8호. 박옹의 자손을 보면 1남 창석(昌錫)씨(56), 2남 동석(東錫)씨(54), 3남 민석(玟錫)씨(49), 4남 남석(湳錫)씨(46), 5남 종석(宗錫)씨(35), 장녀 순심(順心)씨(39). 모두 5남1녀로 돼있다. 2대 3대 4대 이르는 동안 별표와 같이 늘어나 박옹의 자녀가 5남1녀, 손자가 13남15녀, 증손이 10남6녀로 모두 59명(며느리·손부9명·본인제외)이 된것. 이들의 거주지를 보면 고향을 떠나 있는 가족은 박옹의 4남 남석씨가 논산에서 농업을, 5남 종석씨가 인근부락인 낙안(樂安)동국민학교 직원으로 2남 동석씨의 두아들과 딸1명이 서울에서, 장증손인 현모(玄模)군(18)이 역시 서울에서 각각 직장을 다니고 있고, 창석씨의 4남 홍용(烘龍)씨와 5남 홍춘(洪春)군(19)이 현재 군에 복무중이어서 총18명이 객지로 나가 있다. 『지금까지 한 녀석도 세상에 태어나 병을 앓거나 죽어본 일이 없는 것이 자랑이면 자랑이지요. 작년에 마누라(양낙유(梁洛囿)여사)를 먼저보낸일 외에는 아직까지 제 후손의 장례는 한번도 치르지않았지라우』 작년 6월6일 박씨 가문의 장로인 양여사가 노환으로 사망하자 그 장례식이 화젯거리가 됐다. 직계자손은 물론 사위와 손자사위까지 동원돼 실로 70여명의 대가족이 장례행렬을 이루었고 어른들만 입은 삼베옷이 자그마치 50필(4백50m). 그 삼베옷을 만들기 위해 2일동안「미싱」5대를 10사람이 밤낮으로 돌려서야 간신히 끝냈다는 것. 막걸리만 70말, 소주가 2상자, 쌀이 10여가마 축났다는 것이니 시골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대사였다. “적령 20살전”의 조혼가풍(早婚家風) 며느리 환갑잔치 베풀고 40살에 증조부(曾祖父) 소리들어 『금년 2월에 며느리(창석씨 부인 신선업(申善業)여사 환갑잔치를 했당게요. 아마 며느리 환갑을 보는 것도 드물 것이오』이토록 이해할수 없는 신기록 수립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그건 간단하다. 조혼을 가풍으로 존중해온 덕. 박옹 자녀들의 결혼적령기는 20살전으로 돼있다. 창석씨가 15살에, 동석씨가 17살에, 민석씨가 18살에, 남석씨 역시 18살, 종석씨가 19살. 다음 창석씨의 자녀들 가운데 홍기(洪基)씩 17살에, 홍난(洪爛)씨가 20살에, 홍민(洪玟)씨가 역시 20살, 홍용(洪龍)씨도 20살. 이렇게 조혼을 하다보니 갖가지 웃기는 사건도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즉 박옹의 장증손인 현모군이 3살때 종석씨는 19살. 종석씨는 말하자면 총각할아버지가 된셈인데, 그때 종석씨는 현모군이『할아버지』하면 창피하다고 도망치기 일쑤였다는 것. 『내 손으로 고손자녀석 금줄을 달아 볼라우. 이렇게 건강하니 5년은 충분히 살것지 않것소?』 박옹의 말하는 품으로 미루어 보면 18살인 현모군을 20살까지도 기다릴 필요없이 장가보낼 심산인듯 하다. 박옹의 가족들에 대한「리더십」은 거의 절대적이다. 모든 수입·지출이 박옹의 명령에 따른다. 40~59대 아들들도 절대로 박옹 앞에서 담배를 피우지 못한다. 박옹이 새벽 5시에 일어나 농사일을 돌아보고 설치는 통에 가족중 아무도 게으름을 피울 수가 없다. 박옹은 이곳에서 상당한 부농, 25마지기 정도의 논을 가지고 있으니까 자식을 얼마든지 낳아도 먹이고 키우는데는 걱정이없다. 장수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그는 고개를 흔든다. 『잘먹고 열심히 일하는 것뿐이지요. 담배·술 모두 다하고, 고기도 잘 먹지요. 못먹는 것이 없어라우』 박옹의 생일이 1월 하순께. 그래서 이집의 가장 큰 잔치는 설맞이를 미뤘다가 그날에 한다. 76살 기념잔치를 위해 흩어진 가족들까지 다 모이면 흔한말로「민박」이라도 해야할 판이다. <순천에서 박안식(朴安植)·오정묵(吳亭默)기자> [선데이서울 72년 1월 2일호 제5권 1호 통권 제 169호]
  • [단독] 지명 쓴 음식점 상표등록 등촌 칼국수는 ‘되고’ 일동 막걸리 ‘안 되고’

    ‘등촌칼국수’는 되고,‘일동막걸리’는 안 되고…. 지명을 포함한 음식점 명칭을 상표로 등록할 수 있을까. 법원은 최근 샤브칼국수로 유명한 ‘등촌칼국수’를 둘러싼 상표권 분쟁에서 먼저 등록한 사업자의 손을 들어줬다. 등촌동이 유명하지 않기 때문에 ‘등촌칼국수’는 상표등록이 가능하다는 취지에서다. 이는 먼저 등록한 사업자 말고는 상표를 사용할 수 없다는 의미다. 특허법원 제5부(부장 김명수)는 ‘J등촌 칼국수’ 대표인 주모씨가 ‘Y등촌 샤브칼국수’의 대표 이모씨를 상대로 낸 상표등록 무효결정에 대한 취소 소송에서 원고패소 판결했다고 29일 밝혔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J등촌 칼국수’가 먼저 등록된 ‘Y등촌 샤브칼국수’와 구분되지 않아 상표등록을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특히 등촌동이 유명한 지명이라 상표로 등록할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등촌동은 일반 수요자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유명한 지명으로 볼 수 없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원고 쪽은 대법원에 즉시 상고해 최종 판단이 주목된다. 상표관련 사건의 한 전문가는 “이번 판결은 ‘등촌’을 상표로서의 식별력이 있다고 인정한 것이므로, 대법원에서 최종 확정되면 먼저 등록한 사람 말고는 어떤 종류의 음식점이든 ‘등촌’이라는 이름으로 상표를 등록할 수 없게 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송추 컨트리클럽’,‘일동 막걸리’,‘강남약국’,‘남주동 해장국’ 등도 상표등록이 가능할까. 대법원은 송추와 일동은 널리 알려진 지역 명칭이라며 상표로 등록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누구나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강남과 남주동의 상표등록은 허용했다. 강남의 경우 서울 강남이라고 널리 알려져 있지만, 강의 남쪽이나 제비가 날아간다는 중국 양쯔강 이남의 지방을 이르는 말로도 사용돼 고유한 지명이라 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남주동도 충북 청주의 행정구역 명칭이지만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지리적 명칭이라 볼 수 없다고 했다. 정은주 오이석기자 hot@seoul.co.kr
  • 특주라고 마신술 알고보니 양잿물

    E = 동대문구 제기동 판자촌의 대규모 밀주 적발사건은 주당들에 「쇼킹」한 「뉴스」였지. 밀주를 만들때 밀가루에 공업용 색소를 썼고 심지어 양잿물과 횟가루까지 섞었다니. C = 이날 압수한 밀주만도 50섬이나 된다니 엄청난 양의 유해밀주를 애주가들이 마신셈이야. 이들은 겉으로 보기엔 초라한 팟잣집인데 안으로 들어가면 비밀 통로를 거쳐 집밑에 대규모 지하실을 만들어 두었기 때문에 외부사람이 쉽사리 알수없게 된거야. D=제기천에 「펌프」관을 묻어 막걸리 만들때 쓰는 물을 거기서 끌어다 썼다니 특주마시면 배탈이 난다는 말을 이제 알수있겠지. B = 10년동안이나 버젓이 밀주를 만들었다니 누가 봐주지 않고서야 이렇게 해먹을 수 있을지 의문스런 사건이야. 특히 양잿물은 방부제로,횟가루는 불순물을 가라앉히고, 쓴맛을 내게하는 약품을 섞고, 색소는 누른 색깔을 내게했다니 극형에 처해야지. [선데이서울 71년 12월 12일호 제4권 49호 통권 제 166호]
  • “막걸리 마시면 고혈압 예방”

    “막걸리 마시면 고혈압 예방”

    우리의 전통주인 막걸리가 대표적인 성인병 중 하나인 고혈압 예방에 탁월한 것으로 나타났다. 신라대 식품영양학과 배송자 교수팀은 10일 막걸리로 ‘항고혈압 저지실험’에 대한 연구를 한 결과 막걸리가 고혈압 예방에 효과가 뛰어난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연구팀은 막걸리를 거르고 남은 찌꺼기(지게미)의 발효층에 고혈압 유발 효소를 저지하는 물질이 함유돼 있는 것을 발견했다. 통상적인 고혈압 치료제인 캡토프릴의 경우 10㎍/㎖당 90%가량의 고혈압 유발 효소 저지효과가 있는데 막걸리 지게미에는 80%의 저지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팀은 고혈압 유발 효소 저지물질이 지게미에 많이 함유돼 있는 만큼 막걸리를 마실 때는 흔들어 마시는 게 좋으며 막걸리에는 손상된 간 조직을 회생시키고 혈류를 개선시키는 효과도 있다고 설명했다. 이번 연구 결과는 술이 고혈압 등 각종 성인병의 주범이라는 통념을 깨고 막걸리를 적당하게 마실 경우 오히려 건강에 이득이 될 수 있음을 입증한 것이다. 배 교수는 “막걸리는 순수 미생물에 의해 발효된 자연식품으로 술이기도 하지만 영양성분이 많은 건강음료”라며 “앞으로 항고혈압 기능성 막걸리를 개발해 출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부산 김정한기자 jhkim@seoul.co.kr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대한민국 술박물관’ 관장 박영국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대한민국 술박물관’ 관장 박영국

    한해 중 가장 취기 오른 달이 막 떠오르려 한다. 휘영청 중추만월이다. 어찌할 거나, 물에 비친 달을 건지려다 빠져 죽었다는 이백(701∼762)의 시 한 수를 감상해 보자.‘하늘이 만약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주성(酒星)이란 별이 없을 것이오. 땅이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주천(酒泉)이란 곳이 마땅히 없어야 할 것이로다. 하여, 술을 좋아함을 어찌 부끄러워하리. 옛날에 청주를 성(聖)이라 했고 탁주를 현(賢)이라 했다네. 현도 성도 벌써 술을 즐겨 했는데 굳이 신선을 찾을 필요 뭐 있겠는가.’ 달 그림자와 자작하는 ‘월하독작(月下獨酌)’에 나오는 대목이다. 시를 읊은 속내를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아마 술을 예찬했다기보다 술의 ‘진의’를 노래했으리라. 붓을 한번 휘두르면 불후의 명작들을 줄줄 써낸 ‘천상의 시선’이기에 말이다. 민족 최대의 명절 한가위! 이번 주는 이런 분위기다. 만나는 사람마다 고향 가느냐고 안부를 묻는다. 오곡백과가 푸짐한 주안상에 가족 친지들이 정답게 모여앉을 터. 뭔가 꼬인 게 있다면 재미있는 술 얘기로 술술 풀어보면 어떨까.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 개산리에 위치한 ‘대한민국 술박물관’을 수소문 끝에 지난 주 찾았다. 야트막한 언덕을 끼고 6600㎡의 부지에 2층 건물의 실내전시장과 야외전시장으로 구성돼 있다. 박물관 마당으로 들어서자 덩치 큰 성인만 한 시석(詩石)이 떡 버티고 있었다.‘날씨야, 네가 아무리 추워봐라, 내가 옷 사입나 술 사먹지.-소야 신천희 짓고 아무아무개 쓰다.’ 제목이 ‘술타령’으로 애주가들의 심정을 간단명료하게 그렸다. 박영국(53) 관장의 안내를 받아 실내전시장에 들어섰다. 제1전시실은 ‘민속품 전시관’‘우리술 전시관’이었다. 어디서 모았는지 전통술을 빚는 데 쓰이는 여러 양조도구들, 술 관련 고서와 각종 자료 등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박 관장은 이 가운데 조선시대의 주법이 담긴 ‘향음주례홀기(鄕飮酒禮笏記)’를 펼쳐 보이며 “옛날 선비들은 ‘남의 집에 가서 일곱잔 이상 마시지 말고 술잔을 깨끗이 닦아 올린다.’고 돼 있다.”면서 당시의 주법이 엄격했음을 잠시 설명한다. 아울러 조선시대 주조역사를 기록한 ‘조선주조사’ 원본, 전통술 제조의 온갖 비법이 담긴 ‘규중세화’ 등 문화재급 희귀본들에 대한 설명도 이어진다. 뿐만 아니다. 일반 가정에서 술 빚는 것을 금지했던 1910년대, 한 시골 가장이 여동생의 결혼을 앞두고 군수에게 ‘혼사를 앞둔 만큼 술을 빚게 해 달라’고 탄원한 ‘자가양조허가 소원서’, 대한민국 교통부장관이 지정한 ‘관광 민속주’, 비상계엄때 육군 대령의 이름으로 발표한 술에 관한 담화문과 경고문 등도 역시 눈길을 끄는 자료들이다. 술을 다룬 소설책이나 수필·시집 등도 족히 1000여권은 돼 보였다. 그 중 천경자 화백이 쓴 ‘캔맥주 한잔의 유희’도 있었다. 이런 자료들 사이로 전시실 벽에는 술과 관련된 글들이 쭉 붙어 있었다.‘술의 어원을 아시나요’라는 제목에는 ‘술이란 열을 가하지 않아도 부글부글 끓어오르면서 거품이 괴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을 보고 수블-수을-수울-술 등으로 변해져 왔다.’고 적혀 있다. 또 ‘중추절에 마시는 술은 신도주(新稻酒)입니다. 한해 농사의 풍년에 감사하고, 가장 큰 만월을 맞이하며 신도주와 송편을 빚어 조상께 감사하고’라는 글귀에도 눈길이 멈춘다. 바로 옆에는 ‘인생에는 술항아리 앞보다 좋은 것이 없고 인생 백년을 보내는 데 술만 한 것이 없으니 술잔이 돌아가거든 남기지 마라.’라는 시구가 절로 주흥을 돋운다. 2층의 제2전시실에는 우리나라 소주, 맥주 등의 변천사와 팔도 막걸리 상표와 홍보물, 각종 도자기와 술 항아리 등도 가득 놓여 있었다. 박 관장이 들려주는 에피소드 한 토막. 하루는 일본 관람객이 찾아왔다.‘군은(君恩)’이라고 이름을 붙인 항아리를 보자 일본인은 일왕(日王)이 하사한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대뜸 “이건 우리 술항아리인데”라고 했다. 그러자 박 관장은 항아리 뒷면을 보여주었다. 거기엔 전남 목포에서 만들었다는 제작 이력이 적혀 있었다. 머쓱해하는 일본인에게 우리 술 문화가 일본의 그것보다 왜 우수한지를 한참 설명했다. 이곳에는 외국인들도 소문을 듣고 가끔 찾아온다. 하루 관람객은 보통 100∼200명이다. 허영만 화백의 식객 중 ‘소주의 눈물’편도 이곳에서 시작됐으며 시대극을 찍는 드라마나 영화 관계자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는다. 주조회사 관계자들도 찾아와 박물관을 팔면 어떻겠느냐고 제의하지만 한사코 거절한다. 어떻게 해서 애지중지 이 박물관을 만들었을까. 술부뚜막과 술방이 있는 야외 전시장 의자에서 박 관장과 마주 앉았다. ▶왜 술 박물관을 만들었나요. “외국에는 술문화를 중요한 관광상품으로 접목시킵니다. 축제도 많지요. 우리나라를 잘 알릴 수 있는 것도 술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여러 전통술과 전국에 흩어져서 사라져가는 희귀자료들을 모아야 함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또 춥고 배고팠던 그때 그시절을 알려면 바로 그 술, 경제나 사회, 정치 등 여러 시대상황이 켜켜이 녹아들어 있는 술문화를 봐야 합니다.” ▶비용도 많이 들어갔을 텐데, 처음부터 그런 생각으로 준비했는지요. “군 제대를 하면서 처음에는 먹고살려고 구멍가게를 했습니다. 그런데 가게에 들어오는 술이 천태만상이더군요. 옛날에는 007소주, 이젠백 맥주 등도 있었습니다. 하루는 술이 도대체 무엇이냐 하는 생각에 이르렀지요. 내친김에 술도매상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전국을 돌아다니게 되고 술과 관련된 자료들을 하나 둘씩 모으기 시작했지요.” 박 관장은 1980년대 초반부터 수원에서 주류 도매상을 했다. 그때만 해도 술박물관을 세운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동생과 함께 전국의 고물상과 양조장을 뒤지다 보니 제법 흥미가 붙었다. 추억 어린 술병과 간판, 그리고 소주 고리(소주를 증류하는 도구), 남들이 관심을 두지 않은 막걸리통도 몇푼씩 주고 사들였다. 사라질 뻔했던 조선시대의 술제조 방법을 기록한 책자나 서류 등도 찾아냈다. 그러는 사이 무려 4만점이나 됐다. 보관해 둘 곳이 마땅치 않아 고민하던 중 부모님의 고향인 안성에 터를 장만했다. 이때가 2004년 11월. 개관한지 얼마 안돼 한 시인이 찾아와 ‘술박물관’이란 이름 앞에 ‘대한민국’을 붙여도 손색이 없다고 했다. 이후 ‘대한민국술박물관’이 됐다. 특정 술에 대한 박물관은 몇 군데 있지만 ‘한국의 술’을 종합세트화한, 그러면서 팔도 주당들의 애환을 가득 담은 유일한 박물관으로 존재의 이유를 드러냈다. 건물 설계도 박 관장이 직접 맡았다. 이곳에 전시된 1만 8000여점 외에 2만여점을 창고에 보관 중이다. 이들도 옛 주막을 재현해 놓은 언덕 위의 전시장에 곧 선보일 예정이다. ▶우리의 술문화를 어떻게 봅니까. “원래 우리 술은 집에서 직접 빚어 어른을 대접하거나 조상 제사를 모시는 엄숙한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1907년 조선총독부가 주세령(酒稅令)을 포고하면서 이 풍습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집에서 빚던 가양주(家釀酒)가 이 때문에 자취를 감췄지요. 이후 여러 곡절을 겪은 뒤 1982년에 와서야 전통주 장인들을 무형문화재로 지정하는 등 장려에 나섰지만 많은 장인들과 우리의 전통 술들이 세월 속으로 사라진 뒤였습니다.” 박 관장은 이제라도 명맥 끊긴 전통주들을 복원하고 적극적으로 마케팅에 나선다면 와인이나 위스키 못지않게 세계시장에서 호평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1∼2년 사이에 술박람회를 꼭 개최할 생각입니다. 그때는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주당들이 한 곳에 모여 질펀한 소동을 벌이겠지요. 이런 보람 있는 일을 한 뒤 박물관을 국가에 헌납할 생각입니다.” 인물전문기자 km@seoul.co.kr 사진 류재림기자 jawoolim@seoul.co.kr ■박영국 관장은 ▲1955년 수원 출생. ▲75년 수원공고 졸업. ▲80년 수원에서 구멍가게 운영. ▲80∼93년 술도매상 운영. ▲89년 술 관련자료 수집 시작. 현재까지 4만여점 수집. ▲98년 경기도 핸드볼협회 회장. ▲2004년 경기도 안성에 ‘대한민국술박물관’ 개관. 향음주례홀기, 조선주조사 등 문화재급 자료와 각종 양조도구 1만 8000여점 전시. #찾아가는 길 평택∼제천고속도로 남안성 나들목에서 나와 중앙컨트리클럽 방향으로 가다가 금광농협 개소지점 근처(031-671-3903)
  • 창원 국내 첫 자전거문화센터 개장

    자전거도시 창원에 자전거 관련 종합 교육시설인 자전거 문화센터가 건립돼 5일 문을 연다. 창원시는 4일 창원시 두대동 창원경륜장에 자전거 종합문화공간인 창원시자전거문화센터가 준공돼 5일 개장식을 한다고 밝혔다. 창원경륜장 기존 시설과 부지를 활용해 조성한 자전거문화센터는 자전거 교육·정비·대여·전시·홍보·공영자전거 운영 등의 업무를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다. 주요 시설은 자전거교실 및 자전거 주행교육장 각 2곳, 정비소, 보관소, 전시장, 자전거 안내소, 시민공영자전거운영센터, 시민공영자전거 터미널, 바이크 라운지 등 다양하다. 실내교육장과 전시공간은 창원경륜장 데크 아래 공간을 이용해 마련했다. 실기 코스는 창원경륜장 앞에 소나무 조경과 경륜장 2층 데크를 활용해 송림황토자전거 코스와 S코스 등 다양한 곡선 코스를 설치했다. 교육은 초급·중급반, 청소년과 직장인을 위한 특별반 등으로 구분해 반별로 20∼30명씩 편성해 10일간 무료로 자전거 교육을 한다. 자전거 관련 법규·예절·기초상식 등을 배운 뒤 실제 자동차 도로와 같은 신호체계를 갖춘 실기코스에서 자전거 타기 능력을 키운다. 정비코너에서는 고장난 자전거를 실비의 부품 대금만 내면 고쳐준다.또 전시공간에는 사이클 국내 양대 업체인 삼천리자전거와 코렉스 회사가 참여해 다양한 최신 자전거를 전시한다. 한편 개장식에는 일제시대 자전거 선수로 이름을 날렸던 엄복동 선수가 탔던 1920년대 자전거를 비롯해 창원에서 가장 오래된 자전거, 막걸리 배달용 자전거, 가장 비싼 자전거 등 각종 자전거를 전시하는 ‘바이클 쇼’가 펼쳐진다. 박완수 창원시장은 “전국에서 처음으로 문을 여는 창원시자전거문화센터가 안전하고 편안한 자전거 타기 문화를 확산하는 중심 역활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강원식기자 kws@seoul.co.kr
  • 추석 벌초때 ‘벌’ 조심하세요

    추석 벌초때 ‘벌’ 조심하세요

    “묘지 옆에 농구공만한 큰 벌집이 있는데, 무서워서 벌초를 할 수 없습니다. 도와주세요.”추석 성묘철을 맞아 전국이 ‘벌떼와 전쟁’을 치르면서 119소방대에는 전화통에 불이 났다. 올해 벌떼가 부쩍 증가하면서 ‘벌쏘임’ 사고와 벌집 제거를 요청하는 신고전화가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전국에서 벌 관련 신고는 하루 최고 500여건에 이른다. ●전국 ‘벌떼 신고’ 하루 568건 3일 소방방재청에 따르면 지난 8월 한달간 전국에서 벌쏘임 신고를 받고 119구급대가 출동한 건수는 568건으로 집계됐다. 벌쏘임 사고는 벌초·성묘객이 많은 주말에 집중적으로 발생하고 있다.8월 첫 주말인 2∼3일 23건,9∼10일 44건,16∼17일 45건,23∼24일 93건, 지난주 말인 30∼31일에는 126건 발생했다. 지난달 31일 오전 대구시 달성군 논공읍에서 벌초하던 손모(43)씨가 말벌에 온 몸을 쏘여 숨졌다. 지난달 24일 오전에는 경북 포항 구룡포에서는 정모(45)씨 등 5명이 벌에 쏘여 입원·치료를 받았다. 전북 지역에서는 올 4월부터 8월 말까지 벌 쏘임과 벌집 제거 신고가 총 1761건 접수됐다. 이 같은 신고건수는 지난해 같은 기간 1089건보다 672건이 늘어난 것이다. ●남원군은 벌집제거 전담반 운영 특히 7월에는 389건,8월에는 1274건 등 두달 동안 1663건이 접수됐다.8월에는 하루 평균 45회나 출동했고 벌에 쏘인 환자만 62명이나 된다. 벌 관련 신고가 늘자 남원군 등 일부 자치단체에서는 벌집제거 전담반을 편성, 운영하고 있다. 올해는 농촌 지역뿐 아니라 아파트 발코니, 대형 건물 현관 등 도시에서도 많은 신고가 들어온다. 올들어 벌 관련 사건·사고가 크게 증가한 이유는 무더위가 오랫동안 지속되고 장마철이 짧았던 탓에 벌들이 번식할 수 있는 생육 환경이 좋아 개체수가 크게 증가했기 때문이다. 도심 공원과 아파트단지 등에 숲이 많이 조성된 점도 도시 발생건수를 끌어올렸다.119소방대원들의 활약상에 힘입어 신고 자체가 증가한 까닭도 있다. ●도시 출몰도 부쩍 늘어 전북도소방본부 하재기 상황실장은 “지난 여름 폭염 등 기상여건의 변화로 말벌 등 곤충의 번식이 예년보다 20∼30% 늘었다.”면서 “벌초나 성묘 때 안전수칙과 응급조치 요령을 숙지해달라.”고 당부했다. 성묘나 등산할 때에도 벌을 자극하는 원색 옷(노랑·흰색)을 피하는 것이 좋다. 향수, 화장품 등 강한 냄새도 벌을 불러 모으는 요인이다. 성묘 후 막걸리, 과일 등을 주변에 방치하면 벌떼를 유인하는 꼴이다. 벌떼의 습격을 받으면 현장에서 신속하게 벗어나 낮고 그늘진 곳에서 기다려야 한다. 벌에 쏘이면 신용카드 등으로 피부를 밀어 벌침을 제거한 뒤 얼음찜질을 해야 한다. 전국종합 전주 임송학기자 shl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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