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마오쩌둥
    2026-03-24
    검색기록 지우기
  • 여경 자살
    2026-03-24
    검색기록 지우기
  • 정무부지사
    2026-03-24
    검색기록 지우기
  • 삼성 가전
    2026-03-24
    검색기록 지우기
  • 견본주택
    2026-03-24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1,339
  • [홍순영 칼럼] 한·중관계의 재인식

    [홍순영 칼럼] 한·중관계의 재인식

    1.동서 탈냉전 이후의 세계는 미국의 유일 초강대국 시대를 뒤로 하고 다자연대·다자협력의 시대로 들어서고 있다. 미국의 유일 초강대국 지위에 대한 도전은 중국, 유럽연합(EU), 러시아, 인도 등의 점진적이고 확실한 강대국 등장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미국은 당면한 지구촌의 여러 과제에 대응하고 해결하는 데 있어서 미국 혼자만의 역량(정치력, 경제력, 군사력, 과학력)만으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테러와의 전쟁, 핵 비확산 문제, 에너지자원 문제, 환경보존 문제 등을 놓고 미국은 다른 강대국들의 지지와 협력을 구하여야 하는 입장에 있다. 그러나 미국은 강대국 중 제1번 국가이다. 미국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선도하는 나라이며, 세계화의 큰 흐름을 주도하는 나라이다. 세계 평화와 번영의 질서를 유지·증진하여야 한다는 정치적·도의적 책임의식을 가진 나라이다. 세계의 평화체제 그리고 시장경제체제의 성장과 전파를 위한 국가적 책임을 느끼고 있는 나라이다. 미국은 그 책임을 계속 다하고자 할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는 미국의 지도자 국가로서의 지위는 변함없이 선두 강대국일 것이다. 2. 다자협력 시대를 내다볼 때에 중국이 자유화와 세계화의 큰 물결을 외면하고 독자적으로 공산당 일당정치 하의 사회주의적 민주주의 노선을 추구할 것인가. 그럴 경우 어떻게, 얼마나 오랫동안 추구할 것인가 하는 것이 중국의 장래를 예측하기 위한 중요한 질문이 될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1978년 덩샤오핑(鄧小平) 등장 이후 시장경제로의 역사적 전환을 거쳐 세계경제 대국으로 등장한 자본주의 국가이다.10년 임기의 정권교체를 법제화하여 1인 평생독재의 틀을 폐기하고 경제 번영→민주주의 발전의 틀로 나가고 있다. 경제대국이 되어 정치대국으로 등장하면서 개도국·비동맹외교의 구호를 뒤로 하고 강대국 외교에 임하고 있다. 강대국 외교의 핵심은 세계 평화질서, 시장경제 질서를 유지·증진하는 데 참여하고 기여하는 것이다. 그 중심에 미국과의 관계를 건설적 동반자 관계로 유지·발전시킨다는 요구가 있다. 중국은 테러와의 전쟁, 핵 비확산, 평화유지군, 자유무역 협정, 자유와 인권존중 등의 지구촌 과제에서 높은 도덕수준을 과시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중국은 홍콩의 민주화 요구, 티베트의 자립 요구, 대만의 독립주장 등 역내문제를 다루는 데도 마오쩌둥(毛澤東) 시대와는 달리 강대 선진국다운 사고와 자세로 임하고 있음을 본다. 중국은 이제 100년의 시간표가 아니고 20∼50년의 시간표를 놓고 자유화·세계화를 지향하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이 이러한 자유화의 길에 있다고 하면 미국과 중국은 큰 틀에서 건설적 동반자 관계를 지향하는 것이다. 3. 한국은 미·중 양국이 건설적 동반자 관계를 지향하는 과정에 중대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 미·중간의 동반자 관계는 아시아의 평화와 번영 그리고 아시아공동체의 등장을 촉진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한반도에는 자유민주주의에 기초하는 통일한국의 등장이 가능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택일하여야 하는 부담이나 재량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미·중 관계가 자유지향의 동반자 관계를 지향하도록 권장·촉구하여야 하는 과제를 갖고 있다. 4. 그러나 이 외교에 선행하여야 하는 것은 우리나라가 자유와 인권을 중시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요 약진하는 시장경제의 모델국가임을 이 세상에서 공인받는 일이다. 그러한 기초 위에서 우리는 미국과 중국의 동반자시대, 그리고 평화와 번영의 새로운 아시아시대 도래를 촉진할 수 있을 것이다. 전 외교부·통일부 장관
  • [68혁명 40돌] (2) 혁명은 살아있다-佛 대표적 68세대 이냐시오 라모네 교수 인터뷰

    [68혁명 40돌] (2) 혁명은 살아있다-佛 대표적 68세대 이냐시오 라모네 교수 인터뷰

    |파리 이종수특파원|“모든 종류의 권위주의와 싸웠던 68혁명의 정신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이 30주년이니 40주년 하면서 68혁명을 자꾸 ‘의례화’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프랑스의 대표적 앙가주망(현실 참여) 지식인으로 불리는 이냐시오 라모네(65) 파리7대 교수는 68혁명 40돌을 맞이한 심정이 약간 착잡한 듯했다.2일(현지시간) 파리 13구 ‘비판적 저널리즘의 상징’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건물에서 만난 그는 68혁명의 ‘계승’을 거듭 강조했다. 그래서인지 혁명 주역들의 ‘변신’을 뼈아프게 꼬집었다.“당시 학생운동 리더였던 다니엘 콘-벤디트가 녹색당의 일원으로 유럽의회에 진출한 것은 흥미로웠다. 그러나 정작 그가 한 일은 무엇인가. 현재의 그는 정치적 부르주아에 불과하다.” 68혁명 당시 마오쩌둥(毛澤東)주의자로서 비판의 칼을 빼들었던 철학자 앙들레 글뤽스만에 대한 평가는 더 혹독했다.“그는 아예 신보수주의로 돌아섰다. 미국의 이라크 공격을 지지하더니 지난해에는 사르코지를 공식 지지했다. 그의 모습에서 타락·부패를 연상했다. 깨끗하지 못한 ‘늙음의 형태’라고나 할까.” 인터뷰 도중 그의 휴대전화가 끊임없이 울렸다.1997년부터 10여년간 맡았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주간직을 지난 3월에 그만뒀지만 여전히 분주했다. 프랑스의 대표적 68세대로서 68혁명의 정신을 가장 잘 실천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그에게 68혁명의 본질과 현대적 의미를 물어보았다. 그는 차분한 어조(이제껏 인터뷰 한 인사 가운데 가장 듣기 쉬운 프랑스어였다는 느낌이었다)로 68혁명의 어제와 오늘을 정리해줬다.“68혁명은 20세기에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정치적 혁명이라기보다는 ‘삶을 변화시키자.’는 문화 혁명이었다. 칼 마르크스는 ‘세계를 변혁시키자.’고 했지만 68세대는 ‘삶을 바꾸자.’고 거리로 나섰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현대 서양사가 68혁명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이어 68혁명의 현대적 계승에 대해서는 “여전히 할 일이 많다. 특히 세계화라는 거센 물결과의 싸움은 매우 중요하다. 각국의 경제 주권을 훼손시키는 국제 자본의 거대한 야망과 싸우는 것은 68혁명과 맥이 닿는다.” 그는 1990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와 인연을 맺은 뒤 세계화를 비판하는 날카로운 기고문을 남겼다. 또 세계화에 반대하는 시민운동단체 ATTAC(Association for a Taxation of financial Transactions in Assistance to the Citizens)를 세워 세계화와 싸우고 있다.ATTAC는 지난해 5월 미국산 쇠고기 광우병 위험등급을 결정하는 국제수역사무국(OIE) 총회장 앞에 항의 시위를 하러 왔던 한국 농민단체와 함께 지지 시위를 했다. 이어 68혁명의 현재적 의미와 관련, 최근 벌어지고 있는 고교생들의 시위를 주목했다.“교원 정원 감축에 항의하는 고교생들의 시위는 겉으로 보면 교사들의 권익을 옹호하는 것 같지만 실제는 일방적으로 감원안을 밀어붙이는 정부 입장에 반발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68혁명의 정신을 이어받은 움직임이다.” 당시 상황을 설명해달라는 기자의 요청에 “지방 도시 보르도에서 공부하고 있어서 파리 시위 현장에는 없었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 전역이 혁명의 열기에 휩싸였다. 보르도에서 열린 시위와 정치 논쟁에 참가했는데 ‘새 사회’의 대안으로 마오쩌둥주의, 체게바라주의자 등 다양한 이념들이 분출됐다. 당시 열기는 혁명적 낭만주의에 비유할 수 있다.” 이어 68년 5월혁명의 정점이었던 5월 ‘바리케이드의 밤’에 참여한 많은 친구들의 경험담을 들려줬다.“경찰과의 대치 속에 팽팽한 긴장이 오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시위 현장에 참여한 남녀노소가 모두 하나가 돼 갔다.”고 들려주었다. 화제는 프랑스의 현안으로 넘어갔다. 기자가 지난해 대통령선거 2차 국면에서 사르코지 대통령이 “프랑스가 발전하려면 68혁명의 유산을 청산해야 한다.”고 도발적인 주장을 해 거센 논란이 일었다고 환기시켰다. 그러자 라모네 교수는 즉각 냉소적 표정으로 “사르코지 대통령이 68혁명의 유산을 청산하자고 한 것은 자가당착이다.”라고 맞받았다. 구체적 이유를 묻자 “68혁명이 발생하지 않았으면 이혼 경력이 있고 이민자 출신의 가정에서 태어난 그가 프랑스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프랑스와 한국 등 최근에 일고 있는 실용주의 ‘열풍’에 대한 우려도 잊지 않았다. 그는 한국을 네차례 방문할 정도로 한국의 시민운동에 관심이 많았다. “한국과 프랑스 대통령이 모두 ‘실용주의’를 주창하고 나섰는데 실용주의가 무엇인가. 돈이 되면 다 한다는 것 아닌가. 연대와 공동체 정신이 훼손될 가능성이 많아 걱정스럽다. 또 한 국가의 경제가 쉽게 개선될 수 있는가. 한 국가의 경제는 국제 경제와 맞물려 있다.” 그 연장선에서 자신이 비판해온 세계화가 첫 위기에 직면했다고 진단했다.“미국 서브프라임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파동에서 시작한 세계 금융 위기는 결국 세계화의 위기를 의미한다. 또 석유·곡물 가격의 폭등과 환경 파괴 등 악재가 동시다발적으로 맞물려 있어 국제 경제의 사이클이 달라지는 시기에 직면했다. 이와 관련 미국 대통령 선거가 주목된다.” vielee@seoul.co.kr ●이냐시오 라모네는? 프랑스에서 68혁명 정신을 실천하고 있다고 평가받는 대표적 지식인.1943년 스페인 레돈델라에서 출생. 기호학자 롤라 바르트의 제자로 파리 고등사회과학연구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파리7대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로 임용됐다.1997년부터 지난 3월까지 국제문제 전문 월간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편집주간으로 활동. 이 신문에 실은 세계화에 대한 날카로운 기고문으로 유명하다. 피델 카스트로 쿠바 전 국가평의회장과 단독 인터뷰를 할 정도로 친분이 두텁다. 한국에도 번역 출간된 ‘커뮤니케이션의 횡포’를 비롯 ‘상업의 제물, 커뮤니케이션’‘세계의 새로운 권력과 지배자’‘조용한 프로파간다-대중, 텔레비전, 영화’‘마르코스, 반역의 존엄성’ 등 다수의 책을 펴냈다.
  • [데스크시각] 중국식 지도자 검증이 부러운 이유/이석우 국제부장

    [데스크시각] 중국식 지도자 검증이 부러운 이유/이석우 국제부장

    중국내 티베트(시짱·西藏) 독립 요구 시위가 유혈 사태로 번지던 지난 16일 베이징에선 후진타오(胡錦濤) 집권 2기가 공식적으로 돛을 올렸다.‘중화인민공화국 주식회사’의 회장격인 국가주석에 후진타오가,‘총괄 사장’인 총리에 원자바오(溫家寶)가 재신임되면서 다시 5년동안 ‘중국 호(號)’의 조타수가 됐음을 확인했다. 시진핑(習近平)과 리커창(李克强), 차세대 양대 축이 전면에 등장한 것도 놓쳐선 안될 ‘사건’이었다. 쉰다섯의 시진핑은 국가 부주석에 선출돼 차기 국가주석 영순위 후보가 됐고 쉰셋으로 상무 부총리에 뽑힌 리커창은 차기 총리를 준비하게 됐다. 앞서 중국공산당은 지난해 10월말 기업의 등기이사 격인 정치국 상무위원 9명 가운데 4명을 물갈이, 최고정책기구에 새로운 피를 수혈했다. 이로써 후-원 체제가 막을 내릴 2012년 이후 차기 집권 구도의 포석을 공식화한 셈이다. 후진타오나 그에 앞선 3세대 집단지도체제 핵심 장쩌민(江澤民) 등은 모두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덩샤오핑(鄧小平)의 낙점으로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그렇지만 장이나 후로 상징되는 3·4세대 지도자들은 덩의 낙점만으로 정상에 오르지는 않았다. 오랜 세월 경쟁과 검증을 거치며, 실적과 성취로 존재를 입증해 온 그런 사람들이다. 장쩌민이 비누공장 등을 거치며 일찍부터 수완을 과시하며 두각을 나타낸 것이나 후진타오가 편벽한 깐수(甘肅)성 현장에서 실적을 이뤄낸 것도 마찬가지 예다. 마오쩌둥(毛澤東)의 독단과 후계구도 불안정의 악영향을 몸소 겪고 느꼈던 덩 등 2세대 지도자들은 후계구도의 안정성에 대해 정책적 우선 순위를 두고 접근했다. 그 고민은 최소한의 합리성을 바탕으로 한 검증과 합의라는 과정을 통해 예측 가능성과 투명성을 높일 때만 인사구도의 안정성이 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일당 독재의 한계속에서도 그런 모습을 그려내려는 안간힘으로 이어져 왔다. 덩샤오핑은 1980년대 중·후반 과감하게 20·30대들을 간부로 기용했다.90년대 중반엔 검증과 실적 싸움에서 살아남은 일부가 중앙의 중견 간부나 중·소도시 시장, 당서기들로 자리잡으며 중국 정치의 세대교체를 이뤄내는 원동력이 됐다. 이런 과정에서 나이, 계파, 당에 대한 충성도 및 대중 지도력 등이 고려됐지만 실적을 중시하는 ‘실사구시’원칙은 철저하게 지켜졌다.‘사원 주주’ 공산당원 사이에서지만 공감과 수긍은 확산됐고 엘리트의 건강한 충원과 자칫 깨지기 쉬운 집단지도체제의 유지 가능성을 발견하게 됐다는 평도 얻었다. 엊그제 입후보 등록이 마감되면서 18대 국회의원 선거전이 본격적으로 달아오르고 있지만 공천을 둘러싼 정당성 시비는 잦아들기는커녕 확산일로에 있다. 공천 시비로 인한 분란으로 선거 판세가 달라지고 선거후 분당 등 거센 후폭풍 가능성마저 엿보인다. ‘일당(一黨)의 국가’ 중국의 지도자 충원 방식을 감히 민주국가 한국의 선거와 비교하는 일은 불경스럽고 불손한 일인지 모른다. 그렇지만 요사이 선거판을 보고 있노라면 차라리 중국의 검증과 합의 수준에 부러움과 유혹을 느낄 정도다. 앞선 ‘실용정부´ 초대 각료 인사 검증도 한숨 나오기는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몇 사람의 지도자가 바뀌면 당이 생겼다 없어지는 한국적인 ‘하루살이 정당체제’에서 요즘 같은 공천 파동과 시비가 잦아들 것 같지도 않다. 인물과 정책 검증이 시원찮은 상황에선 한바탕의 흥행을 위한 바람몰이만이 성공의 지름길인 까닭에서일까. 원칙과 대화가 소통되지 못하는 곳에선 상황논리와 임기응변만이 활개칠 따름이다. 신진대사가 이뤄지듯 변신해 나가는 중국 지도부의 진화에 유혹마저 느끼는 ‘황당한 상황’속에서 피를 흘리며 쌓아올린 우리 민주화의 성취가 선거를 거칠 때마다 무색해질까 두렵다. 이석우 국제부장 swlee@seoul.co.kr
  • [박기철의 플레이볼] 야구의 세계화와 중국

    한국 야구가 베이징올림픽 출전권을 따내기 위해 남아공, 독일 등과 어깨를 겨루는 동안 베이징 야구장에선 메이저리그 시범경기가 열리고 있었다. 야구는 올림픽 예선이 열린 타이완에선 국기인 데 견줘 중국 본토에선 여전히 생경한 스포츠일 뿐이다. 외신 보도에 따르면 메이저리그 사상 처음 중국에서 열린 시범경기에는 매진이나 다를 바 없는 1만명 이상의 관중이 들어왔지만 이들은 파울볼에 환호를 보내거나 7회를 앞두고 노래 ‘야구장으로 날 데려다주오’가 흘러나와도 무덤덤하게 앉아 있을 뿐이었다. 야구가 중국에 소개된 것은 한국(1905년)보다 훨씬 빨랐다. 메이저리그 자료에 따르면 헨리 윌리엄 분이란 미국 선교사가 1863년에 상하이 야구클럽을 창단했다. 그러나 역사와 인기는 별개. 처음 도입 이후 50여년 동안 중국 야구는 나름대로 성장하고 있었다.1913년 극동경기대회가 창설됐을 때 중국은 3위를 차지했다. 베이브 루스를 비롯한 메이저리그 올스타팀도 중국에 들러 상하이 팬더스란 팀과 시범경기를 가졌다.1940년대엔 인민해방군에도 팀이 생겨났고, 1959년 첫 전국대회가 열렸을 때는 전국에서 23개팀이 참가할 정도로 열기도 있었다. 그러나 1965년 11월부터 시작된 문화대혁명은 야구를 미국문화의 잔재로 몰아붙이며 그 싹을 잘라버리고 말았다. 다시 중국에서 야구가 시작된 것은 마오쩌둥이 눈을 감은 1975년 이후. 특히 1980년 LA다저스 구단주 피터 오말리는 지도자를 파견한 데 이어 6년 뒤에는 야구장까지 세웠다. 오말리가 은퇴한 뒤로는 메이저리그 사무국 차원에서 짐 레파브아를 대표팀 감독으로 파견했고 데이브 윈필드, 칼 립켄 주니어, 조 토레 등이 코치 연수교실을 여는 등 지원을 계속했다. 메이저리그가 국제화에 눈을 돌린 것은 1888년 알렉산더 스폴딩이 자신의 팀을 이끌고 세계일주 여행을 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세월에 견줘 성과는 미미했다. 메이저리그의 국제화가 우리 생각과 다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세계를 선수 공급원으로 여기면서 동시에 중계권을 포함한 상품을 판매할 시장으로 여기고 접근한다. 메이저리그는 중국 야구에 지원을 하면서 이미 선수 협정을 체결했다. 우수한 선수가 나올 경우 메이저리그가 우선적으로 데려갈 권리를 확보한 것이다. 반면 우리가 생각하는 야구의 국제화는 야구 월드컵이 월드컵축구만 한 인기를 얻는 일이다. 조금이라도 국제화의 방향을 우리 생각에 가깝게 끌어올 길은 없을까?스포츠투아이 전무이사 cobb76@gmail.com
  • [씨줄날줄] 상하이 코뮈니케/황성기 논설위원

    2000년 10월 미 백악관을 방문한 북한의 조명록 인민군 차수는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을 만나 ‘워싱턴 코뮈니케’를 이끌어낸다. 빌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 준비를 위해 올브라이트 장관이 평양을 방문한다는 내용이었다. 성명 발표 11일 뒤 올브라이트 장관은 미 국무장관으로는 처음으로 평양을 찾는다. 서로에게 칼을 겨누던 북·미가 적대적 관계를 청산할 것이라는 전망이 넘쳐났다. 그러나 조지 부시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코뮈니케는 약속의 절반만 이행한 채 휴지조각이 됐다. 2002년 9월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방북으로 나온 ‘평양 선언’ 4항은 미사일 발사 유예조치를 연장한다고 했으나 북한은 미사일 발사는 물론 핵실험까지 강행했다. 합의를 어겨 선언이 무력화됐으나 아직 북·일 어느 쪽도 선언의 무효를 주장하지 않고 있다. 북·미 관계가 호전되면 1항의 국교정상화 실현과 2항의 식민지배 배상 등 평양 선언이 규정한 큰 틀에 따라 국교 수립이라는 최종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국제법상 공동선언은 공동 코뮈니케나 공동 성명보다는 무게가 있고 기속력이 강하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가벼운 코뮈니케가 양국 관계의 기반을 닦는 유효한 수단이 되는 ‘상하이 코뮈니케’ 같은 사례도 있다. 1972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1주일간 중국에 머물면서 마오쩌둥 주석과 회담을 가졌다. 대화는 순조로웠지만 타이완 문제를 놓고 의견이 맞섰다. 그래서 타이완은 중국의 1개 성이라는 중국 주장과 중국의 일부라고 간주하는 것을 인지한다는 미국 입장을 상하이 코뮈니케에 나란히 싣는 기발한 절충점을 찾는다. 이를 바탕으로 양국 관계는 급진전하고 79년 수교에 이른다. 13,14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리는 북·미 6자회담 수석대표 회동은 중국의 절충안이 관심의 초점이다. 최대 난관인 핵신고를 놓고 엇갈리는 양측의 입장을 병기하자는 상하이 코뮈니케 방식의 묘안이다. 절충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미국은 북한의 수용 여부를 기다리는 셈이다. 비핵화로 가는 중차대한 갈림길에서 북·미가 ‘제네바 코뮈니케’의 새 장을 열기를 기대한다. 황성기 논설위원 marry04@seoul.co.kr
  • [부고] AP 中특파원 로더릭 사망

    AP통신의 중국 특파원으로 맹활약해온 존 로더릭이 11일(현지시간) 미국 하와이주 호놀룰루 자택에서 심장질환과 폐렴으로 별세했다.93세. 로더릭은 1940년대 중반 마오쩌둥(毛澤東), 저우언라이(周恩來), 펑더화이(彭德懷), 장칭(江靑) 등 문화혁명의 주역이 된 인물들과 그들의 은신처 옌안(延安)에서 7개월간 함께 생활하며 인터뷰를 성사시켜 이름을 떨쳤다. 그는 이후 국공합작과 문화혁명, 개혁개방 등 중국 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세계에 알렸다. 저우언라이 전 총리는 “외국 언론을 향해 중국 사회의 ‘문’을 열어준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중국 외에도 요르단, 일본, 영국 런던, 프랑스 파리 등을 누비며 수많은 특종을 일궈냈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정종욱 월드포커스] 개혁 개방 30년과 제11기 전인대

    [정종욱 월드포커스] 개혁 개방 30년과 제11기 전인대

    금년은 중국에서 개혁 개방이 시작된 지 만 30년이 되는 해이다. 개혁 개방은 마오쩌둥(毛澤東)의 정치적 유산을 신성불가침한 것으로 간주하던 당시로서는 정치적 생명을 건 엄청난 도박이었다. 개혁 개방은 마오쩌둥의 유산을 타도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걸 해낸 사람이 바로 덩샤오핑(鄧小平)이다. 그가 마오쩌둥 시대의 최대 수혜자이자 동시에 최대의 피해자라는 사실 때문에 그는 반쪽이나마 마오쩌둥을 비판하고 부인할 수 있었다. 마오쩌둥의 유산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도 역시 덩샤오핑이었다. 그래서 그는 계급투쟁을 부정하고 인민공사를 해체했다. 계급 대신 개인을 경제활동의 주체로 만들었고 불평등한 부의 축적을 인정했고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교류협력 문호도 활짝 열어놓았다. 이런 것들을 실용주의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했다. 그러나 말이 실용주의이지 사실상 자본주의를 철두철미하게 받아들였다. 공산당의 권력 독점을 빼고는 사회주의를 미련 없이 버렸다. 그가 실용주의이면서 동시에 국가의 역할을 중시하는 레닌주의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 중국은 개혁 개방의 미래를 놓고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다. 국가주의적 실용주의 덕분에 세계 3위의 경제대국이 되었지만 동시에 엄청난 문제들이 생겨났고 이제는 더이상 이 문제들을 덮어둘 수 없는 임계점에 도달했다. 계층과 지역간 격차가 심화되어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한 사회라는 오명을 쓰게 되었다. 이는 아직 사회주의 간판을 내세우는 중국으로서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개인주의와 국가주의가 결합해서 생긴 부정부패는 이제 레닌주의의 핵심인 공산당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 이미 중국에서는 국가나 정부가 맘대로 정책을 결정하던 시기는 지나갔다. 덩샤오핑의 국가주의가 더이상 신통력을 발휘하기 힘든 상황이 되었다. 경제성장의 축이 공공 부문에서 민간 부문으로 이동하면서 정부의 활동공간이 엄청나게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민간 기업인 수가 억대에 육박하고 있고 이들이 담당하는 국가예산도 전체의 3분의1을 훨씬 넘고 있다. 그만큼 국가와 사회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변했다. 한마디로 이제 개혁 개방의 기본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할 시점이 되었다. 그러나 대안 모색이 쉽지 않다. 그 대안 모색이 지금 베이징에서 열리고 있는 제11차 전국인민대표자대회(전인대)에서 진행 중이지만 현재로서는 큰 기대를 하기 힘든 상황이다. 전인대 개막 첫날 원자바오(溫家寶) 총리가 행한 정부 보고의 기조는 한마디로 긴축과 안정이었다. 은행대출 통제와 초긴축 예산을 통해 물가를 안정시켜 서민생활 안정을 약속했다. 성장속도도 작년의 11% 수준에서 올해는 8%선을 제시했다. 정부조직도 축소해서 현재의 28개 부처가 21개 정도로 줄어들 전망이다. 그러나 총리의 정부 보고에는 근본적 개혁방안이나 새로운 패러다임이 보이지 않는다. 특히 정치개혁에 관한 언급이 없었다.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확실한 것은 언젠가는 불가피한 근본적 문제와의 정면대결이 이번에도 불발되었다는 점이다. 국가주석 후진타오(胡錦濤)의 임기는 11기 전인대와 마찬가지로 2013년까지이다. 그때까지 정면 대결을 피해갈 수 있을지에 중국의 미래가 달려 있다. 그래서 앞으로 5년 동안 세계는 숨을 죽이고 중국와 후진타오를 주목하게 될 것이다. 서울대 국제대학원 초빙교수
  • [경제 살린 세계의 지도자] (4) 덩샤오핑 전 中국가주석

    [경제 살린 세계의 지도자] (4) 덩샤오핑 전 中국가주석

    역사적 전환기, 덩샤오핑(鄧小平)은 ‘때’를 놓치지 않았다. 당시 중국 군부의 원로 예젠잉(葉劍英)의 표현대로 실로 ‘산은 첩첩 물은 겹겹 길이 있을까 걱정’이던 때. 덩샤오핑은 건국의 지도자 마오쩌둥(毛澤東)의 사망과 10년간의 비극 문화대혁명 등의 혼란을 수습하며 개혁·개방의 외길을 내고 중국 현대화의 길을 닦았다. 1980년대 미국과 소련은 각각 ‘레이거노믹스’와 고르바초프의 ‘정치·경제 신사고’로 당면한 어려움을 헤쳐나가려던 즈음, 그는 ‘덩샤오핑 이론’을 확립해 나갔다. 오늘날 경제대국으로서의 중국을 만들어낸 총설계자이자 총감독으로서 그의 가치가 빛나는 이유다. |베이징 이지운특파원|“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기준이다.” 1978년 12월 중국 공산당 11기 3중전회에서 덩샤오핑은 경제건설을 지상 최고의 과제로 등장시킨다. 국가와 당의 중점 사업을 정치에서 경제로 옮긴 것이다. 이로부터 중국은 ‘공업화 초기 1인당 평균소득 2배 증가’를 9년만에 달성한다.‘한강의 기적’을 일군 한국이 11년 걸렸던 일이다. ●실사구시의 실질 회복 덩샤오핑은 우선 이데올로기와 계급 투쟁에 젖은 중국인에게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을 회복시켰다.‘사회주의의 잡초를 심을지언정 자본주의의 싹을 키워서는 안 된다.’는 마오쩌둥의 ‘잡초론’을 ‘고양이론’으로 대체시켰다. 이른바 흑묘백묘(黑猫白猫)론이다. 그는 “왜 시장이라 하면 곧 자본주의이고, 계획이라 하면 사회주의라고 말하는가. 일본에도 기획청이 있고 미국도 계획을 한다. 계획과 시장은 모두 필요하다.”며 사고의 전환을 요구했다. 사상 해방의 시작이었다. 나아가 그는 평등의 상징 ‘다궈판(大鍋飯·한솥밥)’을 깼다.“일부 사람이 열심히 일해서 먼저 부유해지는 것은 정당하다.”며 선부론(先富論)을 제시했다. 닻을 올린 개혁·개방은 1981∼83년 농촌에서부터 본격화된다.84년 무렵부터 도시로 확산돼 88년까지 빠른 성장을 이어간다. ●지속적인 방향 제시 그가 이끄는 개혁·개방호가 풍랑없이 순항한 것은 아니다. 특히 1989년 천안문 사태 등 정치 파동과 국제사회에서의 고립은 개방정책의 최대 시련이었다. 앞서 80년대 초반과 중반에는 2차례에 걸쳐 경제특구 설치의 필요성과 가능성 등에 대해 치열한 사회 논쟁이 야기됐으며 1990년대 중반에도 개혁·개방의 향후 방향성을 놓고 격론이 벌어졌다. 개혁 개방의 성(姓)이 사회주의의 ‘사씨’냐 자본주의의 ‘자씨’냐를 묻는 ‘사씨자씨’(社氏資氏) 논란도 이때 빚어진다. 일련의 과정에서 그는 “오늘날 세계는 하루에 천리를 간다. 지금 문을 닫고 되돌아가서는 과학기술은 따르려 해도 따라갈 수가 없다.”며 개혁·개방의 당위성을 끊임없이 설파했다. 개혁·개방에 대한 국민적 회의가 깊어지고 있던 1992년 덩은 베이징-우한(武漢)-선전-주하이(珠海)-상하이(上海)를 돌고는 ‘남순강화’를 내놓는다.“개혁·개방을 견지하지 않고 인민 생활을 개선하지 않으면 오직 죽음의 길밖에 없다. 기본 노선은 백년이 가도 동요될 수 없다.” 이는 중국이 이후 갖은 흔들림 속에서도 ‘사회주의 시장노선’을 견지할 수 있었던 힘이 된다. ●부단한 현실 인식의 심화 이같은 덩샤오핑의 성과 뒤에는 나라 안팎과 시대에 대한 냉철한 현실 인식이 자리잡고 있었다. 일단 그는 ‘극좌 노선’으로 인해 국민경제가 거의 붕괴됐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마오쩌둥의 대약진을 ‘좌의 착오’로, 문화대혁명을 ‘대재난’으로 규정했다. 1980년 그는 “왜 아프리카의 많은 국가들이 사회주의를 하면 할수록 가난해지는지를 연구해 보라.”는 말로 국제 공산주의 운동과 사회주의에 대한 반성을 우회적으로 표시했다. 옛 소련의 니키타 흐루시초프 공산당 서기장이 ‘감자 곁들인 쇠고기 볶음’을,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이밥에 고깃국’을 현실화하겠다고 호언장담하던 시절이다. 덩은 1977년 12월 당시 미국과 소련의 현실을 정확히 파악한 뒤 “국제 정세는 유리하다. 우리는 당분간 전쟁을 안 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고 평가했다. 이후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이어진 냉전 구도 속에서도 적어도 20세기 마지막 20년은 세계 대전은 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요지의 발언을 여러차례 했었다.“전쟁과 평화에 대한 정확한 판단은 전면적 개혁의 전제”라는 게 그의 신조였다. 중국은 개혁·개방의 길을 달려온 지난 30년 동안 GDP는 세계 평균보다 3배 빠른 성장으로 64배 증가했으며, 개혁·개방이 시작된 1978년 381위안이었던 인민들의 1인당 GDP는 2006년 1만 6084위안으로 42.2배가 뛰었다. jj@seoul.co.kr ■ 덩샤오핑 경제 성장의 그늘 |베이징 이지운특파원|개혁·개방의 영광이 덩샤오핑(鄧小平)에 조명되는 만큼, 발전에 따른 부작용 역시 일정 부분은 그의 몫이 될 수밖에 없다. 특히 ‘양극화’로 대변되는 중국 사회의 극심한 갈등은 덩샤오핑 개혁의 아킬레스건이다. 일부에서는 지금 중국이 당면한 도시-농촌간, 연안-내륙간, 계층간 갈등의 시발점을 그가 주창한 ‘선부론’에서 찾는다. 실제 본격적인 사회 문제는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의 재임기간 본격화된 측면이 있음에도 선부론을 엄청난 수입 격차, 저소득 집단의 확대의 출발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국민총생산(GDP) 증가 수치의 중시와 이에 따른 인사 고과는 발전 지상주의를 낳았다. 이로 인해 야기된 환경 파괴, 자원 낭비는 지금 거꾸로 GDP를 갉아먹고 있다. 이에 대한 문제점이 인식된 지금에도 그 원인은 해소되지 않고 있다. 각급 지방정부의 지도자들의 상당수에게는 아직도 ‘성장’과 그에 대한 치적이 최대 목표로 자리잡고 있다. 1990년대 말부터 중국 사회는 사회 불안정이 급증한다. 거의 모든 사회 조사에서 빈부격차와 실업 부정부패가 가장 심각한 사회 문제로 꼽혔다. 세계은행의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의 지니계수가 0.5에 근접해 있다.0과 1 사이의 값에서 소득 분배의 정도를 나타내는 지니계수는 0.5를 넘으면 불균형이 매우 심각한 것으로 평가된다. 브라질을 비롯해 남미 대부분 나라가 0.5를 넘는다. 개혁·개방 이전 중국의 지니계수는 0.16이었다. 후진타오(胡錦濤)국가주석을 중심으로 한 5세대 지도그룹이 ‘과학발전관, 조화(和諧·허셰)사회’를 강조하고 있는 것은 이같은 성장통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다. 사회의 양극화를 막고, 서부와 중부 등 낙후지역에 투자를 확대하며, 농업세를 폐지하고 농촌 의무교육 확대와 의료제도 개선을 추진하고 있다. 후진타오 지도부는 집권 이후 연속 5년간 새해 처음으로 발표하는 중앙 문건에서 농촌과 농업 문제를 다뤘다. 개혁·개방이 시작되던 30년전에도 새해 첫 중앙 문건은 연속 5년간 농촌과 농업이 주제였다. 그러나 30년전은 사회발전의 추동력으로서 농촌 건설과 발전을 설정했지만, 최근 5년은 농촌의 재건과 회복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개혁·개방 30년간 중국 공산당의 기반인 농촌이 얼마만큼 소외돼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경제개혁의 또 다른 부작용은 그에 걸맞은 정치개혁을 이뤄내지 못한 데서도 찾을 수 있다. 이미 1987년 10월 13차 당 대회에서는 권력의 지나친 집중, 관료주의의 심각성, 봉건주의적 영향의 잔존 등이 지적됐다. 중국 경제와 개혁·개방 노선을 심각한 위험에 빠뜨렸던 1989년 천안문 사태나 중국 경제의 암처럼 존재해온 국유기업과 은행의 부실 문제의 상당 부분은 여기에 기인한다. 최근 중국 경제는 인플레이션과 중국산 제품의 안전 논쟁, 널뛰기 증시와 부동산 거품 등 고속 성장의 한계점에 서 있다. 새 노동법, 새 기업소득세법 신설, 독점법·환경세 등의 발효 등 경제 여건은 과거와는 다른 차원의 변화에 직면해 있다. 지난 개혁·개방 30년간 중국 경제가 어떤 ‘체력’을 비축했는지 조금씩 드러나게 될 것이다. jj@seoul.co.kr
  • 새로운 지구를 위한 에너지 디자인/바츨라프 스밀 지음

    새로운 지구를 위한 에너지 디자인/바츨라프 스밀 지음

    명제 하나, 에너지는 전쟁이다! 화석 에너지 보유국은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전 지구적 화약고가 됐고, 국가간 에너지 확보 노력은 첩보전이자 전면전 양상을 띠고 있다.1970년 이후 거듭돼 온 중동전쟁,80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91년 걸프전,2003년 이라크전 등은 현대 문명을 탄생시킨 석유가 ‘문명의 파괴자’가 된 현실을 보여준다. 명제 둘, 에너지는 패권이다! 연료와 전력이 끊이지 않아야 굴러가는 고(高)소비형 사회는 막대한 에너지를 국가와 개인이 맞물려 돌리는 권력의 톱니바퀴 틈마다 윤활유로 뿌려댔다. 미국 부시가(家)와 에너지기업 및 사우디아라비아와의 밀월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석유를 무기화해 서구 선진국과 생존게임을 벌이고 있고,‘배고픈 블랙홀’ 중국과 인도는 경제대국 꿈을 향해 에너지 확보 전쟁의 한복판에서 무한질주를 하고 있다. ●에너지 사용패턴 허와실 분석 문명이란 반쪽의 얼굴과 전쟁과 패권이란 또 다른 반쪽의 얼굴.‘새로운 지구를 위한 에너지 디자인’(바츨라프 스밀 지음, 허은녕 등 옮김, 창비 펴냄)은 에너지의 ‘아수라’(만화영화 ‘마징가제트’에 나오는 두 얼굴의 백작)적 얼굴을 탐색하며 지난 1세기 동안 전 세계가 그려온 에너지 그랜드 디자인(에너지 사용 패턴과 에너지 선택과정)의 허실을 분석한다. 책 전반을 관통하는 시각은 비관론이다. 세계 각국은 에너지 디자인을 통해 에너지 위기 극복을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해왔지만 결과는 대부분 실패로 끝났다는 인식이다. 학자로서의 전 생애를 에너지 연구에 바친 저자 바츨라프 스밀(캐나다 매니토바대 환경학부 특훈교수)은 풍부한 실증자료를 바탕으로 에너지 예측이 어떻게 어긋났는지, 에너지 소비를 줄이기 위한 과학적 노력들이 어떻게 실패했는지 하나하나 드러낸다. 대개 비슷하고 뻔한 결론(근본적 태도 변화가 필요하다)을 향해 달리는 에너지·환경·생태 관련 서적의 논지는 ‘그래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게 부각되지만, 저자는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를 정치·경제·환경·식량·인구 문제를 망라한 방대한 학제연구로 설득하고 있다. 에너지와 환경위기를 다룬 고만고만한 책들 속에서 이 책이 돋보이는 이유다. 저자는 “과거 100년 이상에 걸친 에너지 문제 관련 예측들은 몇 가지 유명한 예외를 제외하고는 모두 명백한 실패의 기록”이라고 단언한다.‘비례 함수’라고 굳건히 믿어져온 에너지 사용량과 경제발전 수준은 어떤 계량적 비례관계도 나타내지 않았고,1차 에너지 총공급과 국내총생산 사이에도 규범적 결론을 도출할 수 없었으며, 삶의 질을 담보하려면 어느 정도의 에너지가 필요한지도 확인된 바 없다는 것이다. 실패한 예측들도 제시했다. 마오쩌둥 당시보다 개혁·개방을 택한 덩샤오핑 시대에 중국 경제의 에너지 집약도가 높아질 것이라 예측했지만 실제로는 약 40% 감소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미국의 에너지 수요가 증가할 것이라 점쳤지만 결과는 예상치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전력기구와 연료기관의 에너지 효율을 높이는 연구는 발전을 거듭했지만 에너지 소비량이 동반 감소하지 않았음은 명백한 수치로 입증됐다. ● “에너지 디자인 새 대안 필요” 저자는 “거듭된 실패는 근본적인 새 출발을 요청한다.”고 말한다.▲수력, 바이오매스, 풍력, 태양열·광, 수소, 원자력 등 비화석 에너지로의 전이 ▲낮은 에너지 효율과 밀도를 높이기 위한 집중 및 저장 기술 개발 등의 기술적 대안도 제시한다. 반면 저자의 핵심 메시지는 의외로 단순하다. 에너지와 관련한 지배적 관습과 태도의 변화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현재 또는 미래의 에너지 전환 비용을 정량화하는 방법은 아무리 세심하게 고안해도 한계가 있다.”면서 ‘도덕적 각성’을 주문한다.“고소득 국가에서 미래의 에너지 사용 행태를 결정하는 것이 도덕의 문제이지 기술이나 경제의 문제가 아니란 사실”을 각종 연구가 증명했다는 것이다.▲고소득 국가는 1인당 에너지 사용량 최소 25∼30% 감소 ▲소비수준을 한 세대 전으로 되돌려 환경파괴 축소 ▲소비의 세계적 평등성 증가 등 도덕적 실천 방식도 내놓는다. 허무한 듯한 결론이 거의 유일한 대안일 수밖에 없을 만큼 현실전망은 밝지 않다. 하여 결론적 명제, 에너지는 도덕이다! 3만원.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모던 타임스/조윤정 옮김

    모던 타임스/조윤정 옮김

    ‘지식인의 두 얼굴’ ‘근대의 탄생’ 등을 저술한 영국의 석학 폴 존슨(80)의 베스트셀러 ‘모던 타임스’(전2권, 조윤정 옮김·살림 펴냄)가 국내 출간됐다. 책이 영국에서 초판된 것은 1983년. 이후 ‘20세기 대표 역사서’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고, 초판 이후의 10년을 논의 범주에 추가해 1991년 개정판을 냈다. 국내에 선보인 이번 책은 개정판이다. 폴 존슨이 파악한 20세기 세계사의 동력은 정치였다.20세기는 그대로 정치의 시대였다.192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70여년의 역사를 조명한 책은 평범한 연대기식 서술방식이 아니라 인물들을 부표로 삼아 주요사건을 재해석했다는 점이 우선 주목할 만하다. 각권이 700여쪽에 가까운 방대한 분량임에도 주눅들지 않고 몰입할 수 있는 까닭이다. 저자가 선언한 ‘모던 타임스’의 시발점은 1919년 5월29일이었다. 그날 서아프리카와 브라질에서 촬영된 일식 사진이 젊은 유대계 과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증명했다. 상대성 이론을 혼동한 산물, 즉 “세계는 보이는 그대로가 아니다.”라는 상대주의적 시각이 세계 정치무대에 만연했다. 기존의 인식은 더 이상 믿을 수 없는 것이 돼버렸고, 사회에는 개인적 책임감과 객관적 도덕규범이 무너져 내렸다.“구질서가 종말을 맞고 방향을 잃은 세계가 상대주의적 우주 속을 떠도는 상황”을 자양삼아 권력의지로 중무장한 독재자들이 세계무대 위로 속속 올라올 수 있었다고 짚는다. 레닌, 스탈린, 히틀러, 무솔리니, 마오쩌둥 같은 인물들이 출현한 태생적 배경이 이렇듯 상대성 이론에 뿌리를 대고 있었다는 주장이다. ●레닌은 종교적 혁명가, 히틀러는 낭만적 혁명가 20세기 주요 인물들을 불러내되 그들을 세밀화처럼 정밀묘사한 재담이 독자들에겐 무엇보다 두드러진 흥미포인트이다.1권에서는 권력을 장악하기까지 제각각으로 발현됐던 정치가들의 개인적 성향을 일일이 짚어 보인다. 지나치게 냉담했다는 평가를 들은 레닌. 혁명만을 위해 살았던 그의 외골수 기질 자체가 러시아 혁명과 볼셰비키당의 색깔로 고스란히 이어졌다. 히틀러는 어땠을까. 레닌이 종교적 혁명가라면, 그는 “낭만적 혁명가”였다. 화가로 성공하지 못한 히틀러였지만 위축될 때나 혹은 어떤 일에 적극적으로 매달릴 때는 예술가의 행동양상을 보였다. 그런 개인적 성향이 독일인의 기질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독일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는 분석을 내놓는다. 4개 국어를 구사하는 탁월한 언어능력으로 뮌헨회담의 스타로 떠오른 무솔리니는 따져보면 허영심 많은 야망가에 나르시시스트였다는 주장도 덧붙인다. 저자에 따르면 이탈리아의 파시즘은, 여론에 극도로 민감했던 무솔리니의 성향과 천재적 모방능력에 폭력성이 더해져 빚어진 복합적 산물인 것이다. ‘인물’과 ‘사건’의 접점에서 역사를 재평가하는 시각은 상당부분 통념을 뒤집는다. 루스벨트는 “순전히 운이 좋아 미국을 구한 대통령”이었고, 마오쩌둥은 “난폭하고 세속적이며 인정머리 없는 농부”였다. 무솔리니는 “특이한 능력으로 평생 웅장한 오페라와 코미디 사이를 불안하게 오간” 인물이었으며, 처칠은 “대공황 직전 한몫 벌어보려 투기를 하고 객장을 어슬렁거리던” 인물이었다. 비폭력 운동의 상징어가 된 간디에 대해서도 지은이의 평점은 후하지 않다.“간디의 기행은 신성한 기인을 숭배하는 인도인의 마음을 사로잡았지만 그의 가르침은 인도의 문제와 인도의 소망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 물레를 돌리는 일은 직물을 대량생산하는 나라에서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그가 생각한 식량 정책을 추진했다면, 아마 많은 인도인이 굶어 죽었을 것이다.” 간디가 가난한 생활을 유지하는 데에도 엄청난 돈이 들었다는 등 인물 퍼레이드를 통해 아슬아슬한 통념 전복의 묘미가 이어진다. ●“마오쩌둥은 난폭하고 인정머리 없는 농부” 당대 지성인들을 바라본 시선에도 날이 서 있기는 마찬가지다. 스탈린의 러시아, 마오쩌둥의 중국 실정을 서구에 전했던 당시 지식인들의 시각이 신랄히 까발려지기도 했다. 노동수용소를 두고 “인간을 개조하는 소비에트의 방식은 매우 유명하고 효과적”이라고 찬양한 지식인도 있었다. 저자의 개인적 신념으로 이어지는 서술방식에 논쟁의 여지는 물론 많다. 그러나 20세기 ‘정치 실험’의 폐해를 전방위로 반박한 비판적 사유체계는 오만한 세계 위정자들의 각성제가 되기엔 여전히 유효하다. 각권 2만 5000원.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데스크시각] 아이작 스턴의 訪中과 뉴욕필의 北공연/이석우 국제부장

    세계적인 미국의 바이올리니스트 아이작 스턴은 1979년 6월3일 중국 땅을 처음 밟았다. 베이징 공항에서 정중하게 맞이하는 회색 중산복(인민복) 차림의 중국 관리들에게 그는 “음악을 여권삼아 왔다.”며 화답했다. 중국이 ‘10년간의 동란’으로 불리는 문화대혁명의 혼란을 수습하고 덩샤오핑(鄧小平) 주도로 개혁·개방의 발을 디딘지 반년이 갓 지났을 참이었다. 외교부장 황화(黃華)의 초청으로 이뤄진 그의 방문은 막 시작된 개혁·개방 정책에 대한 중국 지도부의 확고한 의지와 중국인들의 열망을 미국과 세계에 전달하는 가교 역할을 했다. 당시 개혁·개방 여정이 어디로 이어질지 아무도 가늠하기 어려웠고 외부세계에선 의심에 가득찬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문화대혁명의 내전상태로 다시 곤두박질칠지, 열리기 시작한 ‘죽의 장막’을 다시 걸어잠글지…. 그런 속에서도 중국인들은 마오(마오쩌둥·毛澤東)의 오랜 주문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보여줬다. 하얀 연미복을 입은 스턴. 엄숙한 중산복 차림의 베이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단원들. 서로 마주보고 모차르트의 자유분방한 작품들을 연주해내며 호흡을 맞추는 모습은 이런 변화를 상징했다. 베이징 필하모닉, 상하이 음악학교와 협연에 앞서 스턴은 이들과 공개 리허설을 가졌고 각급 음악학교들을 방문, 어린이를 비롯한 젊은 음악도들의 연주를 듣고 조언하며 대화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어린이들의 연주엔 ‘브라보’를 연발하고 “세계 수준급”이란 칭찬을 아끼지 않으면서도 스턴은 청년 연주자들에 대해선 따끔한 훈계와 혹독한 비판도 쏟아부었다. “어린이들의 재능이 20∼30대에 와선 꽃피지 못한 채 사그라진다. 그 아이들에게 10여년 새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가.” 제도와 시스템, 중국적 질서와 권위를 질책하는 듯한 지적에도 중국 음악인들은 겸손하게 마음을 열었고 키 작은 유태계 음악가의 모차르트 선율에 환호하고 열광했다. 마치 딱딱한 껍질 속에 감춰져 있던 중국인들의 감성과 자유분방함을 스턴의 선율에 맞춰 드러내 보이는 듯했다. “그들의 서구 음악에 대한 통로는 극히 제한돼 있었다. 열정과 다양한 색채를 갖고 연주하는 것에도 익숙지 않았다.”고 스턴은 회고했다. 절정기를 누리던 거장의 3주간 활동은 1980년 아카데미 기록영화상을 받은 ‘마오에서 모차르트까지, 중국에서의 아이작 스턴’으로 남겨졌다. 다음달 25일부터 2박3일 동안 이어지는 뉴욕 필의 평양 공연은 29년 전 스턴의 중국 방문과 닮은 점을 많이 지녔다. 개혁·개방을 막 시작했던 중국, 국제사회로 나가는 문고리를 잡고 좌고우면속에 있는 북한. 음악과 체육 등 민간교류를 통해 개혁·개방에 대한 확고한 입장을 알리고 바깥 세계와 접촉 면을 넓히려는 지도층…. 29년 전 스턴이 베이징과 상하이를 돌면서 그랬듯, 뉴욕 필의 이번 방문에서도 공개 리허설과 뉴욕 필 단원들이 북한 음악도들의 연주를 평가하고 바로잡아주는 ‘음악 교실’도 예정돼 있다. 스턴의 공연 때처럼 관객들의 설레는 표정과 가슴에서 터져나오는 듯한 열정어린 환호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동평양대극장에서의 공개 리허설과 음악 교실에서도 스턴과 같은 직설적이고 날카롭지만, 우정어린 지적이 나오고 이에 대한 북한 음악인들의 열린 마음의 조응을 기대할 수 있을까. 29년 전 스턴이 마오를 넘어 모차르트까지 감싸안으려 했던 중국을 목도했듯이 이제 뉴욕 필 단원들은 ‘주체’를 넘어 세계를 품으려는 북한을 확인할 수 있었으면 한다. 중국의 개혁·개방이 30년만에 점(點)에서 선(線)으로, 선에서 면(面)으로 확대돼 나갔듯이 북한의 개혁실험도 번져나갈 수 있도록 국제사회가 진일보한 행동들을 모아나가는 한 해가 됐으면 한다. 이석우 국제부장 jun88@seoul.co.kr
  • [열린세상] ‘잃어버린 세월’은 없다/김형태 변호사

    [열린세상] ‘잃어버린 세월’은 없다/김형태 변호사

    10년만에 정권이 바뀌었다. 진보쪽에 있는 많은 이들은 감정적으로 보수정권을 받아들이지 못한다.“거짓말 하고 재벌 편드는 사람에게 왜 가난뱅이들이 앞장서 표를 찍었느냐.” 어리석은 국민이라 탓한다. TV도 신문도 안 본다는 사람들도 있다. 이렇게 물어본다.“보수쪽에 있던 이들이 이해가 가느냐. 오죽하면 잃어버린 10년이란 소리까지 했겠는가. 그렇다고 당신도 그들과 똑같이 앞으로 5년은 잃어버린 세월이라 말할 테냐.”고. 한편으로 보수쪽에서는 이번 대선이 국민의 심판이며 현명한 선택이라고 강조한다. 과연 국민은 어리석은 것일까. 아니면 현명한 선택을 한 것일까. 함석헌 선생이 생각난다. 그 분은 ‘씨알’이 궁극적으로 선하고 의롭고 역사를 발전시킨다고 믿었다. 국민 한사람 한사람은 욕심 부리고 바보스러울 수 있지만 그래도 명예며 돈, 권력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조건 자체로 역사발전의 주인이 된다고 했다. 하지만 ‘씨알’이란 개념도 하나의 이데올로기란 생각이 든다.5년마다 돌아오는 선거는 시대정신의 반영이다. 유권자로서의 ‘씨알 ’은 그저 선거를 통해 지난 5년을 거울처럼 비추어 평가할 따름이다.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판단되는 가치를 선택한다. 이러한 이기적 선택을 가지고 선이나 현명 여부를 따질 계제는 아니다. 이번 선거도 그렇다. 노무현 정권이 진보를 내세워 당선되었음에도 부동산, 교육, 노동 등 서민생활과 직결된 분야 중 어느 하나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 이에 대해 ‘씨알’이 싫다고 평가를 내린 것뿐이다. 그래도 역사는 ‘씨알’의 이기적 선택을 통해 노예제를 없애고 노동자의 권리도 보장하고 동성애자 같은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없애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 역사는 궁극적으로 어디를 향하는 것일까.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모두가 한 뿌리 한 몸임을 알게 되는 것. 노예와 주인이 하나요, 노동자인 너와 사용자인 내가 사실은 하나요, 태안 앞바다에서 죽어가는 게와 조개며 시꺼멓게 기름범벅이 된 바위와 자갈도 모두 한 뿌리의 다른 모습임을 알아가는 일. 이것이 역사발전이요 진보의 길이라 여겨진다. 많은 개신교인들은 이 아무개 장로가 대통령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또 다른 이들은 그 반대편을 위해 빌었을 게다. 진화 생물학자 도킨스는 ‘만들어진 신(God Delusion)’이란 책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한다. 앰브로즈 비어스라는 이가 ‘기도하다’라는 동사에 대해 이렇게 정의를 내렸단다.“지극히 부당하게도 한명의 청원자를 위해 우주의 법칙들을 무효화하라고 요구하는 것”. 그렇다. 서민을 위한다는 정파가 세계화며 신자유주의며 부자들을 위한 정책을 폈다. 그래 놓고는 또 선거에서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지극히 부당하게도 그 청원자를 위해 역사의 법칙을 무효화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서민들은 이번 선거에서는 정반대로 아예 돈과 효율을 선택했다. 헤겔의 변증법은 정·반·합의 역사발전을 이야기한다. 마오쩌둥의 ‘모순론’도 같은 이치를 말한다. 그런데 이번 선거에서 진보는 진보 자체의 모순 때문이라기보다는 진보가 진보답지 못해서 무너졌다. 그래도 지난 10년, 진보라는 가치를 통해 남북관계가 진전되고 권위주의가 해체되고 사회가 투명해진 것은 분명하다. 진보가치가 가져온 이러한 진전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이번에 새로 들어선 정권은 보수의 성격상 경쟁, 효율, 규제철폐 등의 가치를 더욱 강하게 밀어붙일 것이다. 그 나름대로 우리 사회에 긍정적 역할을 다하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결국 그 가치에 내포되어 있는 모순이 스스로 드러나 거꾸로 보수 자신을 심판할 게다. 진보와 보수가 각기 순기능을 통해 사회를 발전시키고, 또 스스로의 모순에 의해 스러져가는 게 역사발전이다. 역사에서 ‘잃어버린 세월’은 없다. 김형태 변호사
  • [29일 TV 하이라이트]

    ●걸어서 세계속으로(KBS1 오전 10시) 중국의 남부, 후난성은 중국 현대 정치의 산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오쩌둥, 류샤오치, 펑더화이, 주룽지 등 수많은 정치지도자를 배출했을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를 태동시킨 농민혁명이 바로 이곳을 중심으로 생겨났기 때문이다. 중국의 어제와 오늘을 만나본다. ●로스트(KBS2 오후 1시) 벤의 농간에 속은 잭은 진, 버나드, 사이드가 모두 죽은 줄 알았지만 고물 미니버스를 타고 헐리가 느닷없이 해변에 나타나 순식간에 전세를 역전시킨다. 한편 우여곡절 끝에 방해전파 장비의 암호를 알아낸 찰리는 성공적으로 스위치를 끄고 페니와의 화상전화를 통해 중요한 정보를 데스먼드에게 알려주고 숙명처럼 익사한다. ●깍두기(MBC 오후 7시55분) 방을 뛰쳐나온 사야는 바다 쪽으로 달려가 그대로 물로 들어가려 한다. 사야를 발견한 재우는 뛰어가 사야를 붙잡고 꼭 껴안아준다. 어머니를 찾은 건 크나큰 행운이라며 다독여주는 재우, 하지만 사야는 엄마로 인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한편 사야를 버린 여자의 행방을 묻던 재우는 뭔가 이상한 낌새를 채는데…. ●잘먹고 잘사는 법(SBS 오전 9시) 추운 겨울에 떠나야 더 즐거운 겨울 여행. 올 겨울 꼭 가야 할 여행지 ‘베스트 3’를 공개한다. 스타의 웰빙 노하우 총집합 코너에서는 2007 최고의 웰빙 스타 ‘베스트 3’도 공개한다. 움직여야 사는 집 ‘거꾸로 하우스’. 만사가 귀찮은 세 자매 부부, 과연 그들은 거꾸로 하우스에서 처음 맞는 아침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까? ●명랑주식회사(EBS 오후 9시) 서울시 노원구 상계동의 장애인 구두 가게 ‘사랑의 줄잇기’. 곰처럼 푸근한 인상의 이우기 사장과 영업담당 신보란 간사, 전반적인 사무실 업무를 맡고 있는 장창섭 부장과 사무실 살림꾼 이미경 간사가 구두 가게를 이끌어 가고 있다. 지난 9월에 문을 연 가게 안은 아직도 어수선하기만 하다. ●생생웰빙테크<수면환경보고서 -건강한 잠자기>(YTN 오전 7시25분) 인생의 3분의1을 차지하는 잠. 잠은 내일의 활동을 위한 휴식이자 에너지를 충전하는 시간이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성인 3명 중 1명이 불면증을 겪고 있으며,10명 중 1명은 만성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점점 늘어나는 불면증 환자들. 그 해결책을 찾아본다. ●미디어 포커스(KBS1 오후 10시30분) 지난 대선에서는 어느 때보다 정파적 보도가 두드러졌다. 신정아 사건 보도에서는 경쟁적 선정주의가 누드 사진 게재로까지 치달았다. 한화 김승연 회장 보복 폭행이나 삼성 비자금 의혹 때는 재벌에 약한 언론의 모습이 되풀이됐다. 올 한해 주요 사건들을 통해 언론의 부끄러운 자화상을 들여다본다. ●한국말 요리쇼(EBS 오후 9시30분) 2008년을 맞아 떡국을 만들어 본다. 도전에 나선 손님은 라오스에서 온 케오메리씨. 대전에서 남편과 함께 떡집을 하고 있는 케오메리씨는 워낙 이야기하는 걸 좋아해서, 정규적인 한국어 공부를 하지 않고도 막무가내로 사람들에게 말을 걸면서 한국어를 독학한 경우이다.
  • [씨줄날줄] 정풍운동/이목희 논설위원

    10·26 사태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운명을 달리하자 공화당에서 정풍운동이 일어났다. 이후락·김진만씨 등 부패정치인을 일소하자는 취지였다. 오유방·박찬종씨 등 10여명의 소장 의원들이 주도했다. 오씨는 중학교 선배인 남재희씨를 합류시키려 했다. 남씨와 오씨는 맥줏집에서 대면했다. 남씨는 대의에 동감하면서도 세가지 의문을 제시했다. 첫째, 일본 자민당의 젊은 그룹이 만든 신자유클럽처럼 ‘딴살림’을 노린 것은 아닌지, 둘째 신군부와 맥이 통한 것은 아닌지, 셋째 결국 김종필(JP)씨를 표적으로 한 것은 아닌지. 오씨는 “첫째가 사실이 아님을 맹세합니다.”라고 맥주병을 바닥에 던져 깼다. 그러면 남씨가 “그 맹세 확인하지.”라며 잔을 다시 던지는, 병·잔 깨기 활극이 이어졌다.(‘언론·정치 풍속사’, 남재희 지음) 10·26 직후의 정풍운동 말고도 우리 정치사에서 비슷한 움직임이 몇차례 있었다. 하지만 뜻한 바를 이룬 적은 별로 없다. 동기의 순수성을 의심받았고, 구성원들의 생각이 각각이어서 기득권을 깰 힘이 모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10·26 후에도 오씨는 순수성을 강조했지만, 박찬종씨는 다르게 비쳐졌다. 정풍은 삼풍정돈(三風整頓)의 줄임말. 당조직 정돈, 당원 교육, 당기풍 쇄신으로 중국 공산당을 키워온 마오쩌둥의 전략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1960년대 문화혁명은 국가 전체를 피폐하게 만드는 부작용을 불렀다. 마오쩌둥의 과도한 권력욕은 정풍운동에 부정적 이미지를 덧씌우고 말았다. 대선에서 참패한 대통합민주신당에서 초선 의원들을 중심으로 정풍운동 바람이 일고 있다.“당해산까지 각오하고 인적 청산과 쇄신을 하자.”고 외친다. 나락으로 떨어진 상황에서 나올 법한 주장이다. 그럼에도 순수성을 의심받으면 정풍운동은 동력이 떨어진다. 벌써 손학규씨의 당권 장악을 위한 바람잡기라는 비아냥이 나온다. 타깃은 대선패자 정동영씨를 비롯, 참여정부 핵심인사들. 정씨 스스로가 7년전 ‘천·신·정’의 협공에 앞장서 권노갑씨를 밀어낸 전력이 있다. 정풍운동이 구악을 일소하는 과거청산에 이르지 못하고, 당권·공천 다툼에 머물곤 하는 현실이 아쉽다. 이목희 논설위원 mhlee@seoul.co.kr
  • 장제스, 불명예스러운 귀향?

    공산당에 맞서다 섬으로 밀려나며 중국 통일의 꿈을 접었던 타이완 장제스(蔣介石·1887∼1975년) 전 총통의 유해가 대륙으로 옮겨진다. 이장 시기는 결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장제스 전 총통의 유해가 본토로 옮겨지면,1949년 타이완으로 쫓겨난 뒤 소원하던 조국통일이 아니라 단독국가로 독립을 좇는 후세들에 의해 ‘불명예스러운’ 귀향을 하게 된다. 24일 dpa통신에 따르면 유족들은 그와 아들 장징궈(蔣經國·1906∼1988년) 전 총통의 유해를 고향인 중국 저장성(浙江省) 펑화현(奉化縣)으로 이장할 계획이다.장징궈 전 총통의 며느리인 팡츠이는 “유해를 타이완에 두는 걸 정부가 반대하기 때문에 유해를 넘겨받을 예정”이라면서 “중국으로 평화롭게 이장되는 것은 부자의 소망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앞서 천수이볜(陳水扁) 타이완 총통은 장 전 총통 부자의 무덤에 배치된 인력을 철수하도록 지시했다.천 총통이 이끄는 민주진보당 정부는 지난해부터 장제스의 호를 딴 중정(中正) 공항을 타오위안(桃園) 공항으로, 중정기념당을 민주기념당으로 명칭을 바꾸고 장제스의 동상을 철거하는 등 ‘장제스 지우기’에 온 힘을 쏟고 있다. 이에 대해 중국 당국은 아직 공식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하지만 저장성 관리들은 이장을 환영한다는 입장을 여러 차례 밝혀왔다. 장제스 전 총통은 마오쩌둥(毛澤東)이 이끄는 중국 인민해방군에 패해 1949년 타이완으로 건너왔으며 아들 장징궈 전 총통은 부친의 뒤를 이어 78년부터 88년까지 집권했다.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책꽂이]

    ●고향 하늘 아래 노란꽃(류전윈 지음, 김재영 옮김, 황매 펴냄) ‘핸드폰’으로 널리 알려진 중국 작가 류전윈(劉震雲)의 데뷔작. 쑨원의 신해혁명부터 마오쩌둥의 문화혁명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한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중국 정치권력의 변동 과정을 풍자한 소설.1만 2000원.●한달 후 일년 후(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최정수 옮김, 소담 펴냄) ‘슬픔이여 안녕’으로 유명한 프랑스 여성 작가의 소설. 일본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서 여주인공 조제가 좋아한 책으로 화제가 됐던 작품이다. 각자 애인이 있음에도 다른 사람을 가슴에 품는 아홉 남녀의 이야기를 통해 사랑의 본질과 인생의 덧없음을 그렸다.9000원.●절벽(장석주 지음, 세계사 펴냄)시와 소설, 산문과 평론의 경계를 넘나들며 글을 써온 시인의 13번째 시집.‘그믐밤이다, 소쩍새가 운다.’‘작약 꽃대가 두 뼘 넘게 올라왔다.’‘산 자들이 내는 울음소리가 풍년이었다.’등 56편이 실렸다. 살아 있는 것들의 ‘죽음을 인식한 삶’과 관련된 시어가 자주 등장하는 점이 특징.6000원.●자전거 소년기(다케우치 마코토 지음, 권영주 옮김, 비채 펴냄) 자전거를 매개로 꿈과 사랑을 찾아가는 소년의 삶을 그린 청춘 성장소설. 스포츠 저널리스트의 꿈을 안고 도쿄로 올라온 18세 소년 쇼헤이의 인생 여정을 그렸다.“실연, 좌절, 눈물 따윈 자전거 타고 언덕을 올라가듯 넘어가버리는 거야”라는 메시지가 울림을 남긴다.9500원.●가타부츠(사와무라 린 지음, 김소영 옮김, 한스미디어 펴냄) 평범한 일상 속에 선과 악, 사랑, 양심 등의 문제를 다룬 단편 모음집.‘주머니 속의 캥거루’ ‘무언의 전화 저편’ 등의 글이 실렸다. 제목은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 사람, 착실하고 품행이 바른 사람이라는 뜻.9500원.
  • [데스크시각] ‘한자통일’ 어떻게 할까/김종면 문화부장

    중국 음식에 도삭면(刀削面)이란 게 있다. 밀가루 반죽을 칼로 얇게 썰어 끓는 물에 삶아 만든 국수를 가리킨다. 국수 면(麵) 자를 쓰지 않고 얼굴 면(面) 자를 쓰니 중국 사람이 아니면 이 유명한 음식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 칼로 얼굴을 베어 낸다는 끔찍한 상상도 할 수 있다. 정체자인 번체자(繁體字) 대신 필획을 간략하게 줄인 간체자(簡體字)를 사용하는데 따른 ‘원죄’라고나 할까. 한·중·일·타이완 4개국 학자들이 글자의 형태를 통일한 5000∼6000자의 표준 상용한자를 만들기로 합의했다고 한다. 얼마전 베이징에서 열린 제8회 국제한자회의에서다. 번체자를 중심으로 하되 해당 글자에 간체자가 있을 경우 함께 표기한다는 것이다. 알다시피 한국과 타이완은 정체자를, 중국은 간체자를 쓴다. 일본에서는 의사(擬似) 한자라 할 국자(國字)를 사용한다. 서로 다른 형태의 한자를 쓰니 불편과 혼란이 불가피하다.‘한자통일’을 위한 국제한자회의는 1991년 그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 지금까지 17년 동안 이어져오고 있다. 표의문자인 한자는 표음문자와 달리 글자 수가 엄청나게 많다.5만이니 6만이니 할 정도다. 중국 상대(商代)에 한자가 등장한 이래 3000여년, 그 유구한 세월을 거치며 한자를 개혁하려는 노력이 어찌 없었겠는가. 중국 근대 문학을 확립한 작가 루쉰은 “한자를 폐지하지 않으면 중국은 반드시 망한다.”고 했다. 이 난해한 네모 문자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몇 천년 동안 문맹의 고통을 겪고 중국은 흉악한 몰골로 뒤처졌다는 얘기다. 마오쩌둥 또한 한자는 반드시 개혁돼야 한다며 로마자 사용을 기본으로 한 한자의 표음화·간략화 운동을 추진했다. 그러나 루쉰의 말이나 마오의 지시는 중국 인민의 식자율(識字率)이 워낙 낮은 데서 나온 고육책일 뿐, 한자의 도저한 본래면목을 무시한 것은 결코 아니다. 한자 혹은 중국어는 지금 단순한 문자나 언어 이상의 가치를 인정받으며 그 영토를 넓혀가고 있다. 중국은 이번 한자회의에서 베트남,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홍콩, 마카오를 새로운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간체자 체제를 고수하며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던 중국이 왜 이처럼 한자 통일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일까. 중국의 심상찮은 움직임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중국은 이번 회의에서 한자가 ‘동아시아 공통의 문화유산’이라기보다는 ‘중국의 것’임을 유독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소댕 보고 놀란다는 속담도 있듯, 무방비 속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동북공정의 악몽’을 떠올리면 슬며시 의심이 가기도 한다. 경제성장에 따른 신중화(新中華) 의식의 발로는 아닌가.‘문자제국주의’의 혐의는 없는가…. 중국측이 내세운 것이 이른바 ‘번(繁)·간(簡) 화평 공존’ 원칙이다. 그동안 금과옥조로 여기던 간체자 정책에 유연성을 보인 것은 정체자 문화에 익숙한 우리로선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이참에 오롯이 정체자에 기초한 동아시아 공통 표준한자를 제정하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 최근 중국 출판물을 보면 역사서나 고전문학서 등의 경우 정체자를 쓰는 예가 적잖다. 중국 지식인 사회에서도 정체자를 쓰는 이들이 점점 늘고 있다.‘번체자 부활’이라면 지나친 표현일까. 중국어 전문 번역가인 김태성 호서대 겸임교수는 “조자(造字) 원리상 정체자를 배우면 간체자는 저절로 해결된다.”며 “차제에 중국측을 설득해 완전한 정체자 통일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제9회 국제한자회의는 내년 서울에서 열린다. 한자문화권의 당당한 한 축인 우리가 ‘한자 종주국’을 자임하는 중국에 우이 잡히지 않기 위해선 한자통일 작업이 학계 일각의 관심사에 머물러선 안 된다. 정부와 민간이 함께 공청회라도 열어 논의를 보다 적극화해야 한다. 우리 말의 70% 가까이가 한자어임을 감안하면 한자에 대한 관심은 아무리 더해져도 오히려 부족하다. 김종면 문화부장
  • ‘2억 1800만원’짜리 희귀우표 中서 공개

    우표 한 장 가격이 2억 1800만원? 최근 중국에서 2억 1800만원 상당의 우표가 공개돼 우표 수집가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지난 5일 중국 허난(河南)성 장거(長葛)시에서 열린 우표전시회에는 중국내·외 수천장의 진귀한 우표가 전시돼 눈길을 끌었다. 그 중 가장 주목 받은 우표는 180만위안(한화 2억 1800만원)상당의 ‘전국산하일편홍’(全國山河一片紅). 이 우표는 중국미술가협회 위원이자 유명한 우표디자이너인 완웨이성(萬維生)선생이 만든 것으로 1968년 9월에 첫 선을 보였다. 이때는 중국의 문화대혁명(1966년~1976년까지 중국의 최고지도자 마오쩌둥에 의해 주도된 사회주의운동)시기로 중국 전역의 성(省)·직할시 혁명위원회 수립을 기념하기 위해 이 우표가 디자인되었다. 따라서 이 우표는 그림의 작품성과 더불어 중국의 매우 특별한 역사를 기록했다는 점 때문에 높게 평가되어 왔다. 특히 가로 6cm, 세로 4cm의 큰 크기가 일반 우표규격에 맞지 않는다는 것과 인쇄된 지도가 정확하지 않다는 이유 등으로 미 발행돼 그 가치가 더욱 높아졌다. 우표를 만든 완선생의 뜻에 따라 한번도 전시된 적이 없었던 이 우표는 이번에 열린 우표전시회 주최측의 끈질긴 권유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한편 이번 전시회에는 ‘전국산하일편홍’을 비롯해 1만 8800위안(한화 약 228만원) 상당의 중국 최초 우표 등도 함께 전시돼 눈길을 끌었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홍순영칼럼] 북핵문제와 통일한국

    [홍순영칼럼] 북핵문제와 통일한국

    북한의 핵문제는 이미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은 1992년 말에 남북정부 간에 합의된 바 있었다. 주한미군의 전술핵무기 전면적인 철수 선언과 맞물려 체결된 이 비핵화공동선언은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최초의 중대한 약속이었다. 그후 1994년에 북한은 미국과 함께 제네바 기본합의서에 합의한 바 이는 북한의 영변 핵원자로, 핵재처리 공장을 동결하고 궁극적 해체를 약속하는 것이었다. 이때에 핵시설에 대한 제한폭격론, 선제공격론 등의 가상시나리오까지 거론되는 등 심각한 긴장감이 있었다. 이 제네바 합의는 북한의 고농축우라늄 개발에 관한 시비의 와중에서 2002년에 파기됐다. 북한은 핵시설 재가동을 선언하고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다시 선언하였다.2005년 2월에 북한은 핵무기를 소유하고 있다고 공식 선언하였고 그 후 2006년 10월에 핵실험을 실시하였다. 이로써 북한은 핵무기 제조 능력을 세상에 과시하였다. 북한이 소유한 핵무기의 유형과 숫자 그리고 핵무기 재료의 종류와 수량에 관하여는 확실한 판단이 아직 불가능하다. 6자회담에서는 북한의 핵시설과 핵무기의 동결과 해체의 과정, 북한에 대한 안전보장과 경제지원, 북·미관계의 정상화, 한반도 평화체제, 동북아 평화안보체제의 제도화 등을 주요과제로 삼고 있다. 이러한 제반항목은 상호 연계되어 있고 검증 확인 절차가 있기 때문에 해결의 시한을 전망하기 어렵다. 이것을 두고 핵위기 장기화를 우려하는 견해가 아직 강하다. 북한의 핵개발 의지는 언제부터인가. 북한은 이 핵개발에서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북한의 핵개발 의지가 언제부터인가를 짐작하기는 어려우나 그 의지가 확고히 된 것은 1980년대 탈냉전의 시대, 미·소공존의 시대, 그리고 공산주의 퇴조의 시대였다고 추측이 되고 있다. 소련의 분열, 동구권 국가들의 민주화, 중국의 시장경제 노선, 독일통일 등의 큰 역사적 변혁에 대응하여 북한정권은 주체사상과 군사제일주의를 더욱 강화하여 공산주의 독재체제를 수호한다는 큰 정치노선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힘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마오쩌둥의 철학에 따라 경제개발보다는 군사력 강화(선군정치)에서 나라의 안전과 정통성을 구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한 군사제일주의 입장에서 보면 북한의 핵무기 개발은 미국의 가상적 공격에 대한 억지력이요, 북한 주민을 단합시키고 충성하게 하는 권위의 상징이요, 남한과 미국, 그리고 인접국가들에 대한 협박과 흥정의 수단이 되어 있다. 평양정권의 입장에서 보면 핵무기 개발은 성공한 도박일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북한은 남한을 엄숙한 대화와 협력의 동반자로 존중하지 아니하고 미국을 외교와 군사의 상대국으로 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언제까지 이 역사의 흐름, 다시 말하면 자유화, 시장경제, 세계화의 큰 흐름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인가. 언제까지 북한정권이 이웃나라와 관계를 끊고 고립하여 홀로 생존할 수 있는가. 그럴 경우 북한 내부에서 오는 항거와 저항은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북한 내부의 항거와 저항은 어떤 형태로 올 것인가. 북한 정권은 얼마나 오래 이 비핵화·자유화로의 결단을 지체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우리가 대비하여야 할 비상사태이다. 우리는 그동안에 더욱 모범적인 자유민주주의 국가, 시장경제의 나라로 성장하여야 한다. 대북관계에서는 자유의 가치와 시장경제의 원칙을 전파한다는 큰 원칙을 기본으로 삼아야 한다. 대북지원은 북한주민의 자유와 인권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이것이 통일한국의 기초를 닦는 일이다. 통일한국에의 길은 서울에서 시작한다. 이 원칙과 전략을 세계공동체에 널리 선포하여 지지·지원을 구하여야 한다. 통일한국은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이 있어서 추구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전 외교부·통일부 장관
  • [씨줄날줄] 중국정치의 진화/구본영 논설위원

    중국이 오늘 무인 궤도선회 달탐사선 ‘창어1호’를 발사한다. 창어(嫦娥)는 달에 산다는 전설속 선녀로, 중국 인민의 ‘반만년의 꿈’을 쏘아올리는 셈이다. 그러나 발사 시점이 제17차 공산당 전국대표대회 직후라 다른 해석이 나온다.‘중화인민공화국’의 부흥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서란 것이다. 달탐사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개혁·개방 30년만에 중국은 적어도 양적으로는 눈부신 성취를 거뒀다. 총량기준으로는 세계 4위 경제강국으로 부상했다. 엊그제 폐막된 17대에서 후진타오 당총서기는 “중국은 이제 거인처럼 세계의 동방에 서게 됐다.”고 그런 자신감을 확인했다. 문제는 중국식 시장경제가 이룬 성취에 비해 정치발전의 보폭은 터무니없어 보일 정도로 ‘만만디’라는 점이다. 후 총서기는 17대 정치보고에서 60여차례나 ‘민주’라는 단어를 입에 올렸다. 하지만, 그는 경제발전이란 하나의 중심과 개혁·개방 및 ‘4항원칙’이라는 2개 기본점을 반드시 고수하겠다고 선언했다. 덩샤오핑이 제기했던 4항원칙이란 마르크스·레닌 및 마오쩌둥 사상, 사회주의 노선, 인민민주 독재, 공산당 영도의 견지를 뜻한다. 이는 복수정당제와 자유선거제 도입 등 정치 선진화의 길이 아직 요원함을 가리킨다. 그렇지만, 중국의 정치적 민주화가 소걸음이지만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보는 전문가들도 많다. 이번 17대에선 시진핑 상하이시 당서기와 리커창 랴오닝성 당서기가 나란히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올랐지만, 종전과 달리 누가 차기 당총서기감인지에 대해선 구체적 언급이 없었다. 안인해(고려대) 교수는 이를 “5세대 지도자가 복수로 올라 경쟁체제로 들어간 것은 당내 민주화의 징후”라고 분석했다. 당선자보다 후보자를 많이 내는, 이른바 ‘차액’(差額)선거로 중앙위원을 뽑은 것도 그 일환으로 보았다. 마오와 덩의 카리스마가 물러간 빈자리를 집단지도체제로 메우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중국정치가 뒷걸음이나 게걸음하지 않고, 진화하고 있다니 그나마 다행이라 해야겠다. 중국이 경제적 성장가도만을 질주하는 무서운 공룡이 아니라 그에 상응해 정치적 민주화를 이뤄가는 선린이기를 간절히 바란다. 구본영 논설위원 kby7@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