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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념 상관없이 남북 단결하자/김일성 정 총리에 강조

    【평양·판문점=김인철·김수정기자】 북한의 김일성주석은 20일 상오 평양 주석궁에서 정원식국무총리와 비공개 별도면담을 가진 자리에서 『천도교 예수교 기독교 유교 마르크스주의에 상관없이 과거는 백지화하고 단결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주석은 또 『지금은 해방후와 달라 친미도 친소도 친중도 없다』며 남북의 민족이 한마음 한뜻으로 속히 통일을 해야한다고 거듭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남북고위급회담의 우리측 이동복대변인은 21일 상오 평양에서 개성으로 향하는 열차속에서 김주석과 정총리의 별도 면담내용을 일부 공개하면서 이같이 밝혔다.
  • 정 총리­깅리성 「단독면담」 공개

    ◎“과거는 묻지 말고 단합합시다”/김일성/“통일의 첫걸음… 실천이 중요”/정 총리 남북고위급회담 우리측 이동복대변인은 21일 상오 평양에서 개성으로 달리는 열차 속에서 20일 주석궁에서 있었던 김일성북한주석과 정원식국무총리간의 비공개 별도 면담내용을 공개했다. 다음은 이대변인이 전한 대화요지. ▲정총리=서울을 떠나기전 노태우대통령께서 각별한 안부를 전해달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노대통령께서도 이번 「남북합의서」와 「비핵화공동선언」이 발효된 것을 기뻐하고 계십니다.이는 두분 정상의 지도와 결단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주석=정총리를 만나게 돼서 반갑습니다.돌아가시면 노대통령께 감사한다는 인사를 전해 주세요.나 역시 이번 「남북합의서」와 「비핵화 공동선언」이 발효돼 기쁩니다. ▲정총리=연형묵총리의 노고가 컸습니다. ▲김주석=이번 회담은 성공적인 회담으로 생각합니다.이제부터 합의서들이 효과를 발생하게 됐고 이로써 민주 대단결의 시대로 들어갑니다. ▲정총리=합의도 중요하지만 실천이 더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김주석=대결의 시대는 이제 끝났고,협력 합작하고 교류하고 불가침하는 시대가 시작됐어요. ▲정총리=그렇습니다.반목과 대결의 시대가 끝나고 화해 협력의 시대가 개막됐습니다. ▲김주석=통일이 되면 우리나라는 큰 나라요.통일만 되면 발전된 나라보다 우리가 못할 이유가 없지. ▲정총리=남북민족이 7천만인데 큰 민족이지요.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은 자랑스러운 문화와 기술을 가지고 있는 민족입니다. ▲김주석=나도 같은 생각이오.문제는 속히 통일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통일합시다. ▲정총리=이제 통일을 향한 첫걸음을 내디뎠습니다. ▲김주석=이제 합의서를 근거로 더 좋은 결실을 거둬야 하갔지요.자주하고 민족단결합시다. ▲정총리=이번 합의서에도 7·4공동성명 정신에 입각,우리 문제는 외세와 상관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기로 했습니다. ▲김주석=외세 간섭없이 우리끼리 해야 합니다. ▲정총리=그렇습니다.평화적으로 해결해야지요.바로 그런 관점에서 이제는 동질성을 회복하기 위해 공동으로 노력해야 합니다.▲김주석=민족은 달라진게 없어요.말도 글도 피도 하나요.신앙도 초월해야 합니다.내가 최근 민족대단결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는데 여하간에 과거는 묻지말아야 합니다.그리고 서로 만나고 단결해야지요. ▲정총리=그러한 원칙에 입각해서 서로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주석=지금은 해방후와 달라서 친미도 친소도 친중도 없어요.한마음 한뜻으로 통일을 해야 합니다.통일을 원치 않는 사람은 극소수요. ▲정총리=분단은 우리의 뜻에 반해 이뤄졌지만 통일은 우리 손으로 이뤄져야 한다는게 우리의 신념입니다. ▲김주석=협력은 단결이 되면 저절로 이뤄집니다. ▲정총리=문제는 쌍방간에 불신을 하루속히 씻는 것이지요. ▲김주석=불신도 단결하면 씻어집니다.불가침문제가 해결됐으니 자주단결하고 자주 통일해야 합니다.천도교 예수교 기독교 유교 마르크스주의에 상관없이 과거는 백지화하고 단결해야 합니다.노대통령께서 어제 합의서 발효에 즈음한 특별담화를 발표했더만.나도 오늘 성명을 발표해야겠습니다. (이어 김주석은 일어나 별도 면담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던 남북 양측대표단을 만난뒤 성명을 발표했다)
  • 오출신 작가/츠바이크 재조명 활발/불서 서거50년 맞아 출간러시

    ◎전후 좌파득세로 「평가절하」 반성/“인간성 상실시대 고뇌의 증언” 평가 오스트리아 태생의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18 81∼19 42) 사후 50년을 맞아 금년초 파리에서는 중·장편 소설과 전기·기행문 등 4권의 책이 한꺼번에 번역 출간돼 나옴으로써 그의 인도주의적 문학에 대한 집중적인 재조명이 이루어지고 있다. 츠바이크는 한국에도 작품이 여러 편 번역 소개되어 있는 금세기의 주요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그러나 이상하리만큼 프랑스에서는 그가 죽은 이후 거의 잊혀진 인물로 돼 있었다.더구나 그는 후일 브라질로 가기까지 프랑스에서 지내는 동안 유명인사로 대접받았으며 로맹 롤랑 등 많은 프랑스 문인들과 교류했던 터였다. 그가 사후에 재대로 평가되지 않은 것은 전후 프랑스 지성계의 좌파적 분위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타당성 있게 들린다.19 45년 이후 프랑스에 군림한 마르크스주의 경향의 대가들은 츠바이크를 합스부르크가의 몰락을 애석해 하는 왕정주의자 쯤으로 경멸하였으므로 그에 대한 진정한 평가가 내려질 기회가 없었다는 것이다.나치의 희생자와 반나치 투쟁자가 찬미되던 전후에 철저한 나치 혐오자 츠바이크가 남긴 문학이 외면당해야 했던 아이러니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가 다시 프랑스인의 관심을 끄는 데는 50년이라는 세월이흘러야 했다.벨퐁 출판사 등이 그의 저작들을 이번에 출간함으로써 살육과 인간성 상실의 위협으로 얼룩진 20세기 전반기를 고뇌속에 증언한 그의 사상과 문학 그리고 작가로서의 삶이 재발견되고 있다.「특출한 시대의 증인」「사상과 문학의 귀족」「마지막 휴머니스트」등은 그에게 붙여지고 있는 새로운 칭호들이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이른바 빈 상징파의 한 사람으로서 문명이 높았던 그는 나치가 야망을 드러내자 국외로 망명하여 다시는 조국 땅을 밟지 못했다.전쟁 없는 세계를 갈망한 평화주의자 츠바이크는 병영 탈주와 전투회피를 호소했으며 스위스와 스웨덴 방식의 중립을 옹호했다. 1940년 생명의 위협이 없는 브라질에 정착했으나 그가 본 제2차 세계대전의 전세는 가망이 없었고 그의 심리상태 또한 황폐해갔다.그는 예감 능력과정신적 상처를 함께 지녔던 클라이스트·횔덜린·니체(이 세 사람은 미치거나 자살했다)를 연구한 바 있는데 그 자신도 그들을 닮아 신경쇠약과 분열증세에 시달렸다. 그는 1942년 2월23일 싱가포르가 나치 독일의 동맹국인 일본에게 함락된 뒤 유럽의 마지막 희망인 영국의 패배에 상심하여 망명지 브라질에서 자살했다.브라질 정부는 국장으로 그를 예우했다. 이달에 파리에서 불역돼 나온 4권의 책은 ▲중편소설집 「리옹에서의 결혼(벨퐁출판사)▲장편소설 「클라리사」(〃)▲전기 「아메리고」(〃)▲기행문학 「브라질,미래의 땅」(에디시옹 드 로브출판사)이다. 중편소설집 「리옹에서의 결혼」의 작품 7편은 츠바이크가 생전에 발표했으나 책으로는 이번에 처음 묶여진 것이다.그 7편은 ▲「리옹에서의 결혼」(자코뱅주의와 공포정치를 비난함)▲「눈속에서」(유태인 박해를 다룸)▲「레만호반에서」(전쟁의 불조이성을 고발)▲「억압」(〃)▲「박탈의 역사」(전제권력 아래서 파멸돼 가는 개인의 운명을 그림)등이다. 미완의 장편소설 「클라리사」는 전쟁과 인플레이션으로 어려웠던 19 20년을 시대배경으로 하여 한 여인의 운명과 재난을 보여줌으로써 츠바이크의 반전사상을 드러내고 있다. 「아메리코」는 콜럼버스가 서인도라고 믿었던 곳이 아시아의 일부가 아니라 전혀 다른 대륙이라는 것을 밝혀낸 이탈리아 사람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일대기로서 츠바이크의 전기작가적 역량을 한껏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다. 「브라질,미래의 땅」은 자신이 여생을 의탁한 브라질에 대한 찬가이다.기행문학의 백미로 꼽히는 작품이다.서해동포주의자 츠바이크는 자신이 찾던 평화를 이 나라에서 발견한다.『빼어난 혼혈의 나라,브라질에서보다 더 나은 해답을 줄 곳이 어디 있으랴.인종·계급·살빛·신앙·신념 등 온갖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함께 살 수 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서』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신앙과 신념 또는 민족 문제로 불안과 갈등이 다시 높아지고 있다.꼭 사후 50년이 아니라도 츠바이크가 재조명되어야 할 이유는 충분한 시점인 셈이다.
  • 80년대이후 주체문학에 변화 조짐(북한 문화실상:6)

    ◎문학/남대현의 「청춘송가」 베스트셀러/당선전과 무관한 작품나와 이채/1급작가들은 부수상급 대우받아 북한의 문학활동은 주체문예이론이라는 독특한 문예논리에 따라 이뤄지고 있는 가운데 서서히 변화의 조짐을 내비치고 있다.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문학론에 반영한 주체문예이론은 남북문화간의 이질화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으로서 북한체제에서 문학이 갖는 의미의 온전한 파악없이 그에 대한 이해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당이 제시하는 절대진리를 무조건 따르는 「자주적 인간」의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주체문예이론은 북한에서 숱한 미학논쟁과 숙청 끝에 60년대초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와 마르크스­레닌 사회주의를 뒤잇는 문예이론으로 확고히 자리잡았다.주체문예이론에 입각한 북한문학작품은 김일성이 지도한 항일혁명문학을 근간으로 현장성의 중시와 대중성,낙관주의를 특징으로 하며 집체창작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북한의 「조선문학예술총동맹」(위원장 백인준)과 「조선작가동맹」(위원장 김병훈)등의 단체에는 1천2백여명의 작가가 소속되어 있는데 이들은 지난 90년 한해에 20여편의 중·장편소설과 1백90여편의 단편소설,그리고 2천6백여편의 서정시 및 가사를 포함,총3천3백여편의 문학작품을 창작했다. 작가에 대한 대우는 후해서 1급작가의 경우 부수상급의 생활비에 해당하는 2백원을 받으며 별도로 원고료를 지급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에는 해방이후 북한문단을 주도했던 납·월북문인들이 고령으로 사망하거나 은퇴함으로써 세대교체가 진행되고 있다. 한편 80년대 이후 북한문학에서 나타나는 여러 색다른 징후들은 북한의 주체문학이 완화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지난 87년 발표되어 유례없던 충실한 사랑묘사로 북한에서 베스트셀러가 됐던 남대현의 장편소설 「청춘송가」가 그 한예. 대학 하키선수 출신의 제철소 청년기사 진호와 출판사기자인 현옥간의 애틋한 사랑이야기를 통해 청춘남녀의 이상과 현실,북한사회의 모습과 함꼐 부조리까지도 드러내보인 「청춘송가」는 당의 노선과 젊은이의 사랑을 등가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북한문학사에 큰 획을 긋는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이밖에 「야금기지」「탄부」「소설 김옥균」등 당의 노선을 구현하면서 사랑과 연애문제를 함께 다루는 이른바 복합주제의 소설들이 북한문학을 새롭게 주도해나가고 있다. 또한 당선전과 무관한 작품들이 발표되고 있는 점도 주목된다.예를들어 문예총 기관지인 「조선문학」90년8월호에 실린 김용한의 단편소설 「마지막 낚시질」은 김일성 우상화나 당선전과는 직접적 관계가 없이 현대자본주의의 물질편향을 잔잔한 회고조로 비판하는 작품이다. 이밖에 80년대 이후 김일성 또는 김정일의 교시에서 보여지는 시에서의 서정성의 제고와 생활세부묘사에 대한 강조,평범한 영웅상과 개성 등의 강조도 이같은 북한문학의 새로운 변화의 범주에 포함될 수있다.
  • 보수­진보학계 교류움직임 활발

    ◎한국사연구회·사회학회 새 회장이 적극 주도/학문성과 통합… 연구대상·방법론 확대 모색 사회·역사학계에 보수·진보의 골을 넘어 그동안 양자가 이룩한 성과를 발전적으로 통합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이와같은 움직임은 지난 연말 신임회장을 선출한 한국사회학회와 한국사연구회를 중심으로 구체화되고 있다.이들 두 연구단체는 특히 모두 70년대 진보적인 주장을 해온 중진학자들을 신임회장으로 선출,진보적 입장의 학자군이 더 이상 소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학계의 현주소를 그대로 반영해주고 있다. 역사학계안에서 규모가 가장 큰 한국사연구회의 신임회장으로 지난해 연말 선출된 한양대 정창렬교수(55)는 고려대 강만길교수와 함께 70년대 「민중사학」을 주장해온 학자. 그럼에도 그는 지난해 상반기 「민중사학」에 대해 부분적으로 제기됐던 보수학계의 공식적인 비판을 양자간의 대립·갈등이기 보다는 성향상의 차이로 보고 환영하고 있다.정교수는 80년대가 이들 두 입장간의 차이가 뚜렷해진 시기였다면 90년대는 서로 피하지말고차이를 차이로 인식하는 동시에 「민족으로서의 한국역사」라는 양자의 공통부분을 확대·심화시켜나가는 시기가 될 것으로 내다봤다. 정교수는 앞으로 『월례발표회를 통해 보수는 물론 진보적인 어떠한 주장도 반영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라며 『이와함께 1년에 한번 양쪽 연구자들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주제를 선정,활발한 논의를 거쳐 도출된 결론은 학계에 적극 수용할 수 있는 학술회의도 추진중』이라고 밝혔다.남북역사학계의 교류문제 역시 구체적인 방법과 주제등에 대해 내부적으로 협의중이라고 말하는 정교수는 1920년대 이전의 한국사는 어떤 것을 주제로 선택하더라도 남북학자들이 합의점에 이를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이에앞서 지난해 연말 한국사회학회 신임회장으로 취임한 서울대 한완상교수는 취임연설에서 90년대 한국사회학의 적합성 위기를 정통 마르크스주의 사회학의 위기로 파악,진보학계에 자기변신노력과 보수학계와의 대화를 공식적으로는 처음으로 촉구하고 나서 학계의 관심을 모았었다.
  • 노동자당 추진위/위원장등 셋 영장

    경찰청 보안국은 18일 「노동자정당건설추진위원회」위원장 주대환씨(37·서울대종교학과졸)등 3명을 국가보안법위반(이적단체구성등)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주씨 등은 지난해 7월 대전 유성온천여관에서 「인천지역 민주노동자연맹」「삼민동맹」「노동계급그룹」등 3개 단체를 통합,마르크스·레닌주의 국가건설을 주장하는 지하이적단체인 「한국사회주의노동당」을 결성한 뒤 서울·부산 등 전국 11개 지역에 지하당을 구축해 활동해온 혐의를 받고 있다.
  • 권력승계 정지 한창/「김정일의 사람」은 누구

    ◎당·정·군의 핵심인물을 살펴보면/우리에 낯익은 얼굴… 남북교류 담당/연형묵/10년간 군참모장 역임… 김 왼팔 자처/오극렬/고위회담의 경제대표 정일과 동갑/김정우/영역없는 대남정책 분야의 2인자/전금철/대서방·유엔 관련업무 진두서 지휘/강석주/합영법 제정등 개혁주도… 한때 밀려/강성산 북한은 구랍 24일 당6기 제19차 전원회의에서 김정일을 군최고사령관에 추대한데 이어 김정일의 측근을 영전시키는 인사를 단행,김정일 권력승계를 위한 정지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또 이와 때를 같이해 김정일은 평양시 당책임비서실겸 인민위원장에 김일성의 외종제인 강현수를,양강도 당책겸 인민위원장에 자신과 만경대혁명 유자녀학원 동창생인 이길송을 임명하는 등 4개 시·도의 당책겸 인민위원장을 자신의 인물들로 교체했다. 남북간 「합의서」와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의 채택으로 남북한관계가 급진전되고 있는 가운데 이루어진 최근의 북한권력층의 자리이동을 계기로 향후 북한을 이끌어 나갈 각 분야 「김정일의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본다. 현재 북한에서 「김정일의 사람」으로 꼽히고 있는 인물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전문지식을 갖춘 테크너크랫이란 점이다. 북한의 테크너크랫은 정권수립 이후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교육과정을 통해 정책적 차원에서 양성돼 왔는데 통상 「민족 엘리트」로 불린다. 이들은 한결같이 만경대혁명 유자녀학원이나 김일성종합대학 졸업→소련 및 동구 유학이라는 엘리트코스를 밟고 귀국후 군·당정·산업기관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의 숫자는 대략 1백50만명으로 추산되고 있으며 현재 북한의 변화를 주도해 나가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만경대혁명 유자녀학원은 47년 김일성과 함께 항일 빨치산 활동에 나섰던 혁명 1세대의 자녀들을 특별히 양성하기 위해 설립한 특수학교인데 김정일에 충성을 바치고 있는 측근들의 대부분이 이 학교 출신이란 점은 특히 주목을 끈다. ●군부 북한은 지난 80년 10월 6차 당대회 이후 혁명2세대 등 신진세력들로 세대교체를 했는데 김정일은 당군사위원회에 자신과 만경대학원 동창인 오극렬·김강환(부총참모장)·김일철(해군사령관)·최상욱(포병사령관)·이봉원(군정치국 부국장)을 충원시킴으로써 자신의 군지휘체계를 더욱 공고히 한바 있다. ○빨치산 오중흡의 아들 ▷오극렬(63)◁ 79년부터 88년까지 10년 동안 군총참모장으로 「장기집권」. 김일성과 항일빨치산 동료로 지금도 「충성심」의 대표적인 영웅으로 칭송되는 오중흡(32년 전사)의 아들이다. 만경대혁명학원을 1기로 졸업,김일성대학과 소련 공군대학에 유학한 대표적인 군엘리트. 64년 공군연대사령관(소장),67년 중장진급·최고인민회의(4기) 대의원,70년 당중앙위원,71년 공군사령관을 거쳐 79년 인민군 총참모장과 당정치국 후보위원이 되는 초고속 출세가도를 달린 오는 김정일의 「왼팔」을 자처하며 당시 총정치국장인 이용무,무력부 부부장 장정환 등을 반당·반혁명분자로 몰아 김정일세력을 탄탄히 굳히는데 큰 몫을 했다. 80년 상장진급 직후 6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정치국원,당군사위원으로 선출됐으며 85년 대장으로 진급. 차기 인민무력부장으로 점쳐지기도 했으나 이에 대한오진우의 견제로 88년 군총참모장 자리를 최광에게 내주고 쫓겨났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30위 밖으로 밀려난 낮은 서열에도 불구,현재까지 그가 군부내 혁명2세대의 선두주자라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다. 지난해 5월12일 발표된 허담의 장례위원 명단에 그의 이름이 3년4개월만에 처음으로 공식 거명됨으로써 그가 여전히 권력핵심권 안에 끼어 있음을 시사했다. 북한은 앞으로 오극렬·김두남(노동당 군사부장·대장)과 같은 김정일의 측근 군엘리트를 포진시켜 세습과도기의 불안과 남북관계의 전향적 변화에 따라 이뤄지게될 군축과 관련한 군부내 반김정일 움직임을 미연에 제어,내부정리를 해나갈 것으로 보인다. ●정무원 ○혁명2세대 선두주자 ▷연형묵총리(67)◁ 지난해 12월 제5차 남북 고위급회담에서 역사적인 「합의서」를 이끌어낸 인물로 북한 행정실무를 총지휘하는 권력서열 4위의 대표적인 태크너크랫. 만경대혁명학원 출신으로 50년 6·25직전 소련 우랄공대에 유학,금속기계공학을 전공했으며 55년 귀국후 당중앙위 조직지도부 지도원으로 당정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조직지도부 책임지도원,중공업부장 등 경제 및 조직분야의 요직을 두루 거치며 급성장. 74년 김정일의 친위대인 3대혁명 소조를 지도감독하는 「혁명소조 중앙지도부 책임자」역을 맡아 김정일의 믿음직한 보좌역이자 혁명2세대 선두주자의 자리를 굳혔다. 85년 정무원 금속기계공업 위원장을 거쳐 제3차 7개년 경제계획 초기인 88년 12월 총리에 기용된 이래 온건·실용파로 남북고위급회담 북측 대표의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만경대학원 수석졸업 ▷강성산(66)◁ 연형묵에 앞서 정무원총리(84∼88)를 지낸 강성산역시 만경대혁명학원을 수석으로 졸업한 엘리트. 73년 권력의 핵심부인 당정치국 후보위원에 오른뒤 이종옥의 6차내각때 부총리로 기용됐다. 80년 6차 당대회에서 권력 18위의 정치국위원으로 선출됐고 84년 총리로 기용된후 합영법제정 등 만3년간 경제개혁을 주도했으나 개혁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총리직에서 도중하차. 오진우에 이어 권력서열 4위였던 강은 현재 14위로 밀려나 함북도당 책임비서겸 인민위원장에머물고 있긴 하나 노동당 정치국 정위원으로 여전히 김부자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다. 강은 특히 북한 경제개방의 상징인 두만강지구 개발과 관련,함북도 당위원장으로서 현지 실무책임을 맡게 될 것으로 관측된다. ○동독 유학한 학자출신 ▷김환(63)◁ 항일 빨치산활동시 일경에 포로가 된 김일성을 구하고 대신 죽은 것으로 전해져 북한에서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김혁의 아들. 만경대혁명학원을 졸업하고 61년 동독 카를마르크스공대에 유학,귀국후 중공업부 산하 화학공업연구소 부연구원으로 출발한 학자출신이다. 83년이후 부총리직을 맡고 있으며 87년 화학 및 경공업위원장 시절 김정일에 일종의 토지임대제도인 「가족책임제」를 건의했다가 직위박탈과 함께 권력서열 30위권 밖으로 떨어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북한이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에게 합작제의를 해오는 등 내부의 경제변화를 모색하고 있는 현 시점에서 김환처럼 경제를 아는 개혁지향적 테크너크랫의 재기용은 불가피할 것이라는게 전문가들의 관측이다. ○문선명교주초청 주역 ▷김달현(52)◁ 정무원 부총리이자 대외경제위원회 위원장과 무역부장을 겸임하고 있는 김달현은 88년 2월 국가계획위원장,89년 북한경제 대표단장 자격으로 소련과 스위스를 순방하는 등 명실공히 경제담당 부총리로서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지난해 통일교의 문선명교주를 자신의 명의로 초청,윤기복 조평통 부위원장에 이어 연쇄회담을 갖고 문·김일성 면담때도 배석해 경원을 언급,그가 현재 북한내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을 과시한 바 있다. ○고위급회담 4회 참가 ▷김정우(50)◁ 김정우 대외경제협력 부부장은 90년 9월,1차 고위급회담때부터 4차 남북고위급회담때까지 북한의 경제문제 전담대표로 참석한 경제통. 특히 지난 제4차 평양고위급회담때 남측 기자들과 스스럼없이 만나 남북경제교류 협력에 대한 전망을 피력함으로써 관심을 모았는데 경제교류가 활성화될 경우 큰 활동이 기대되는 인물이다. 김일성대 경제학부 출신으로 김정일과 동갑. ●대남분야 ○이론과 실무 모두 능통 ▷전금철(57)◁ 윤기복 조평통 부위원장과함께 17명의 부위원장 가운데 가장 실무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통일문제연구소장과 사회과학원 부위원장을 겸하고 있으며 72년 남북조절위 대변인으로 떠오른 이래 85·88년 국회회담 예비접촉 북측대표단장,90년 7월 범민족대회 예비회담 북측 대표단장으로 나선 이론과 실무를 겸한 대남통. 전은 북한이 내세우고 있는 대남접촉인사 가운데 윤기복에 이은 2인자이지만 「당국」 「국회」 「민간」 등 남북대화 성격에 관계없이 관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대남정책에서의 위상은 뚜렷하다. 지난해 3월 베를린 범민족 3자회담 참가와 관련,조용술목사 등 참가자 3명에 대한 공판에서 증인으로 채택되자 수락의사를 밝혀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외교분야 ○북한대표로 유엔연설 ▷강석주(53)◁ 지난해 9월17일 46차 유엔총회에서 북한대표로 유엔가입 연설을 한 강석주 외교부 제1부부장은 김영남 외교부장과 함께 북한의 외교정책 결정과 집행에 깊숙히 관여,내외의 주목을 받고 있는 인물. 6차 당대회 직전인 80년 7월 당중앙위 국제부 과장으로 선임됐으며 84년 정무원 외교부가 외교정책을 주도하기 시작한 시점에 부부장으로 승진·전보했다. 북한이 서방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87년 4월부터 북한 외교부의 제1부부장으로 대서방,유엔관련 업무를 진두지휘해오고 있다. 유엔총회에서의 연설외에도 대미관계 개선과 관련,미아시아협회 대표단과 회담(91년 5월),로버트 스미스 미 상원의원과 「미군유해송환공동위」 구성에 합의(91년 6월)하는 등 두드러진 활동을 보이고 있다. 특히 지난해 10월 방중때 김일성을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9월 유엔총회에서의 연설을 통해 북한관리로는 처음으로 『김일성주석이 남북정상회담을 희망하고 있다』고 발언,북한 내부에서 특별한 비중을 갖은 인물임을 시사한 바 있다. 급변하는 정세가운데 대서방관계 개선에 힘쓰고 있는 북한에서 향후 강석주의 활약은 더욱 두드러질 것으로 보인다.
  • 백두산 양도세/“김일성 중국에 할양”

    【파리=박강문특파원】 프랑스 일간신문 르 피가로는 6일 『중국이 충직하게 마르크스주의 국가로 남아 있는데 대한 감사의 표시로 김일성이 최근에 백두산을 양도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했다. 르 피가로는 부시 미국대통령의 한국방문에 즈음하여 게재한 판문점 르포기사에서 이 백두산 양도설을 언급했으나 더 자세한 내용은 밝히지 않았다.
  • 고르바초프의 선물/LE FIGARO(해외사설)

    역사에는 아이러니가 있는 법이지만 역사는 크리스마스에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소련의 종말에 도장을 찍게 만들었다.행운에 대한 기대는 어긋나지 않았다.그의 사임으로 인한 공산주의 몰락의 공식화는 「죽은」 소련의 「죽은」대통령이 전세계에 안긴 선물이었다. 앞으로 수년동안 옛소련의 미래가 밝지 못하리라는 것이 분명하지만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죽음은 더할 나위없는 기쁜 소식이다.오늘날의 민주주의 혁명의 격변을 달갑지않게 보는 이들이 이따금 옛질서에 향수를 느끼지 않을까.그러나 상관하지 말자. 고르바초프씨가 자신의 사임 조건과 관련하여 행한 주도면밀한 거래를 비난하지 말자.철두철미하게 옛소련의 대통령은 체제의 인물이었다.그것이 그의 힘이었고 한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의 세대에게 고르바초프는 금세기의 긍정적인 위인의 한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다.확실히 그는 드골이나 처칠 또는 요한 바오로 2세처럼 영감을 지닌 예견자는 아니었다.그러나 그는 성취한 사람이다.체제내부에서 처음으로 공산주의에 치명적인 일격을가한 것은 그였다.양보를 계속하여 체제를 폭파해버린 것도 역시 그였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그는 전체주의를 파괴한 공산주의자다.그는 『역사란 그것을 따를 줄 모르는 사람을 빻아 버린다』고 말했다.그는 역사를 따랐으나 역사는 그를 빻아 버렸다. 이렇게 된 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우선 한가지는 고르바초프가 국민의 짐을 덜어주려 하다가 그들을 봉기하게 한 것이다.국민들은 한가지 개혁뒤에는 언제나 또 다른 개혁을 요구하면서 마침내 어느날 봇물처럼 터져 버린다. 그리고 폐쇄체제인 공산주의로는 개혁이 안된다는 점 때문이다.공산주의와 시장경제를 결합해 보려고 고르바초프는 살아날 것 같지도 않은 체제에 예방주사를 놓았던 것이다.여전히 자유는 가장 큰 힘이다. 마지막 까닭으로는 겉보기와는 달리 공산주의란 이 세상에서 가장 취약한 제도라는 점을 들 수 있다.「소비에트 사람」밑바탕에는 항상 러시아의 가슴이 뛰고 있었다.속박이 한번 풀리면 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최초의 일격에 체제는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마르크스주의자의 전체주의는 자체의 「완고성」때문에 결국 망했다.『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되도다.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느니라』성경에 있는 말씀이다.
  • 「서사연」사건 잇단 유죄판결 의미

    ◎“「학문의 자유」보다 체제 우선” 선언/분단국에서의 법적 한계 규정/「이적적 주장」 깔린 의식에 쐐기 서울형사지법이 26일 서울대사회과학연구소 연구원 신현준피고인(29)의 국가보안법위반사건에 대해 유죄판결을 내린데 이어 27일에도 권현정피고인(27·여)에게 다시 유죄를 선고한 것은 분단국가에서의 학문의 자유에 대한 한계와 범위를 규정한 것으로 의미가 크다. 이른바 「서사연」사건으로 불렸던 이사건은 『체제가 우선이냐』 『학문의 자유가 우선이냐』하는 논쟁을 불러 일으켰었다.이에대해 법원은 전문영역이 아닌 일반적인 지식수준을 판단기준으로 해 『아무리 학문의 자유를 내세운다 하더라도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한다는 인식이 있으면 책자나 행위의 이적성이 인정된다』고 유죄판결을 내렸다.즉 『피고인이 발간한 책자와 유인물이 객관적으로 민중민주주의·사회주의 혁명이론및 북한의 대남선전과 동일하다고 보여 유죄가 인정된다』는 것이다. 이번 사건에서 당국이 주목한 부분은 지난 4월20일 도서출판 민맥에서 출판한 「사회주의 정치경제학논쟁의 재검토」가 『한국사회를 변혁시키기 위해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노동운동을결합,민중민주주의 혁명을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부분등이었다. 또 신피고인의 「한국에서의 자본주의 발전」이란 학위논문에서는 『민중민주주의 혁명으로 한국사회를 변혁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등 학술활동및 논문형태를 빌렸을 뿐 분명한 이적행위를 했다는 것이 검찰의 지적이었다. 그러나 이에대해 학술단체협의회소속 전국교수협의회 등은 『진보적 학술운동전체에 대한 탄압이며 학문자유의 위기』라고 주장했다. 법원은 이에대해 『헌법에 보장된 학문의 자유는 순수한 진리탐구를 의미하는 것으로 무제한적이 아니며 국가안전보장 질서유지 공공복리 등의 필요에 의해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하지 않는한 제한이 가능하다』고 못박았다. 때문에 법원으로서는 「순수학문에 대한 제한」이라는 차원이 아닌 토론·연구수준을 넘어선 「이적성주장이 짙게 깔린 내용에 대한 제재」라고 풀이하고 있다. 실정법에 따라 학문의 자유에 대한 첫 판례가 된 이번 공판에서 신피고인등에게 유죄판결을 내리면서도 형의 집행을 유예시킨 것은 체제우선을 선언하되 학문의 자유를 가능한한 침해치 않으려는 또하나의 배려로 풀이되고 있다.
  • “「소련 74년」이 남긴건 굶주림 뿐”(특파원수첩)

    ◎주민들,이념의 공백속 불확실한 미래에 초조 『고르비가 물러가고 소련이 없어지고 옐친이 부상하고…,다음은 어떤 차례이지요』 25일 하오TV를 통해 미하일 고르바초프대통령의 사임연설을 지켜보던 블라디미르 쿨라긴씨(45·블라디보스토크지기자)는 마치 퀴즈게임하듯 기자에게 반문한다.담담한 그의 말씨가 나타내주듯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표정이다. 『벌써 10일째 휘발유 판매가 중단돼 자동차들은 발이 묶였고 빵 한조각을 사려면 영하30도의 추위속에 새벽3시부터 빵가게 앞에 긴 줄을 서야하는 마당에 누가 대통령이 되든,떠나든 국민들의 큰 관심사는 아닙니다』 그는 이미 지칠대로 지쳐있는 국민들은 오로지 어떻게 이 겨울을 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발등의 불 이라고 얘기한다. 지난 86년 고르비가 블라디보스토크 선언을 발표했던 시영빈관은 하룻밤 1백20달러를 받고 외국인들을 재워주는 호텔로 둔갑해 소련의 몰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그때 고르비를 시중들던 여종업원들은 달러를 갖고와 거들먹거리는 자본주의나라 비즈니스맨들의 비위를 맞추는 신세가 됐다. 하지만 일반시민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지난 74년간 자국민들에게는 억압과 공포의 절대지배자였고 서방세계에는 막강한 핵무기로 무장한 「예측불능의」 위험한 상대였던 소련의 몰락이 갖는 의미는 크다. 소련의 소멸은 무엇보다 소련이라는 이름으로 대변되던 공산주의이념과 그에 입각한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완전몰락을 의미한다. 아울러 이는 그 체제가 있음으로 해서 가능했던 지난 한 세대 동안의 동서대결체제가 명실상부하게 종언을 고한 것이라 할 수 있다.소련의 붕괴는 이데올로기면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두 체제의 우열을 확연하게 가려내준 역사적 이벤트임에 틀림없다.전통적 의미에서 이념대결시대는 이제 더이상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소외도 빈부의 격차도 없고 그리고 눈물 없고 착취 없는 위대한 사회주의 건설의 약속이 소련국민들에게 남긴 것은 기아와 눈물 뿐이었다』 이 대목을 얘기하는 쿨라긴씨의 목소리는 자못 흥분되었다.자본주의는 자체모순으로 인해 무너질 수 밖에 없다는 카를마르크스의 「위대한 예언」은 빗나갔고 오히려 정반대로 사회주의가 내부의 힘에 의해 스스로 그 막을 내렸다고 그는 단정했다. 물론 앞으로 사회주의가 물러난 과거의 소련땅에서 자본주의가 쉽게 그 자리를 대신하리라고 속단하기는 어렵다.소련국민 대부분이 지난 70년동안 사회주의 외에 어떤 이념도 접해보지 못한 사람들이다.사회주의가 사라진 이념의 공백상태가 무엇으로 채워질지 지금으로서는 그 누구도 정확히 점치기 어려운 상황이다. 러시아·벨로루시·우크라이나로 대표되는 슬라브민족주의가 당분간은 이들을 묶어주는 큰 유대역할을 할 것이고 여타 군소 공화국들도 나름대로 국가의 결속을 유지해 나갈 것이다.그 테두리 안에서 민족간 갈등과 경제난이 어우려져 혼란도 가중되는 상황이 당분간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제 인류는 전혀 새로운 미지의 새로운 실험을 눈앞에 두고 있다.긴장된 양자대결상태에서 어느 한쪽의 소멸은 나머지 한쪽에도 필시 변화를 가져오게 마련이기 때문이다.그 변화의 모티브는 「대결」 「완승」 「패배」「공멸」등과 같은 과거세대의 수식어가 아니라 공존을 전제로한 평화의 장에서 찾아야 한다. 미국이 과거 냉전기간동안 소위 「공포의 균형」관계를 유지해왔던 소련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러시아를 소련의 상속자로 신속히 인정한 것은 바람직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미국도 자신들의 일차적인 과제가 구소련땅에서 일어나는 불안정,불확실성을 최소화하는데 있다는 것을 인식한 것같다. 과거엔 소련의 강대화가 서방세계의 위협이었는데 이제 반대로 서방은 소련의 불확실성을 더 두려워하게 된 것이다. 앞으로 소련의 상속자가 된 러시아가 언제쯤 다시 기력을 회복하게 될지 또 어떤 성격의 국가로 등장할지 지금으로선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하지만 근대적인 산업국가로서의 국가경영기법을 도입해 재건에 나설 경우 그 장래가 크게 어둡다고만 볼 것은 아니다. 쿨라긴씨는 조국의 엄청난 변혁을 담담하게 맞으면서도 소련의 몰락은 한 세대동안 지속돼온 반목과 갈등의 대결구도를 청산하고 인류에게 「공존의 장」을 만들어갈 호기를 마련해준 『역사적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라는 기자의 견해에는 쉽게 동의를 표했다.
  • 고르비/「해빙」을 부르고 「개혁」에 지다

    ◎「영욕의 7년」 집권서 퇴장까지/「통독의 문」 여는등 냉전종식을 주도/냉전장악 실패·「빵」 해결못해 “몰락 길” 세계사의 흐름을 바꿔놓은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이 마침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고르바초프는 지난 85년 3월11일 최연소 정치국원으로 제8대 소련공산당 서기장에 선출돼 6년9개월의 집권기간동안 철저한 현실노선에 입각한 정책으로 「제2의 소련혁명」이라 불릴만한 엄청난 변화를 소련과 국제사회에 몰고 왔었다. 그가 권좌에 오르면서 동토의 소련국민들은 볼셰비키혁명 68년만에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자유를 되찾았다. 이어 89년에는 사상최초로 복수정당후보를 상대로 한 선거가 치러졌다. 90년 2월 공산당은 일당독재를 포기했고 고르바초프는 헌법을 개정,대통령에 취임했다.서구민주주의 개념을 도입,당과 정부의 국가경영에 국민들의 의견을 수용하겠다는 생각에서 이루어진 조치다. 이에 바탕을 둔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정책은 국제정치면에선 세계사의 변혁을 주도해 왔다.대외정책에 있어 그는 항상 군비축소와 주권존중이라는 「신사고 외교」를 원칙으로 삼았다. 고르바초프는 집권한지 8개월만인 85년11월 제네바에서 당시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비난하던 레이건 미국대통령을 만나 화해의 악수를 나눔으로써 양국간의 적대관계를 청산했다. 87년 중거리핵전력(INF)협정체결을 비롯,88년 동유럽주둔군 50만 감축,91년 전략무기 감축협정(START)등 그의 혁신적인 군축정책은 『탱크를 녹여 쟁기를 만든다』는 말을 유행시켰다. 이 과정에서 지난 45년 얄타협정으로 출발한 미소 양극체제의 동서냉전시대는 종언을 고하기 시작했다.이와함께 고르바초프시대의 최대업적인 독일통일과 동구권의 대변혁이 이루어졌다. 그는 또 88년5월 아프가니스탄주둔 소련군의 철수를 단행했다. 89년12월 몰타에서 열린 미소정당회담에서는 정식으로 냉전시대의 마감을 선언했다. 이런 가운데 한국·중국·이스라엘등 갈등관계 혹은 적대관계에 있던 나라들과도 새로운 협력의 시대를 연 것도 다름아닌 그의 신사고 외교의 결과였다. 고르비는 셰계를 움직인 정치인답게 다양한 별명도 갖고있다. 「철의 이빨을 가진 사나이」「세계의 대도박사」 「기적의 마술사」등 경탄스런 수식어가 붙는가하면 「금세기들어 가장 탁월한 소련지도자」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그는 지난해 노벨평화상을 수상할 당시 『고르비가 상을 받은게 아니라 오히려 노벨상에 무게를 더해주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정책은 「신사고 외교」의 바탕이 되어 탈냉전·군축등에는 괄목할 성과를 거두었으나 정작 「빵」문제는 해결하지못해 그를 몰락의 길로 재촉했다.그 이유는 고르바초프 자신이 사회주의에의 미련을 끝까지 버리지 못했으며 개혁의 속도를 끝내 스스로 통제하려고 했기때문이다.그는 사유화등 급진적인 경제개혁을 거부했다.그리고 경제적인 비상조치를 취할수 있는 포고령 발동권을 갖는등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켰다. 그러나 위로부터의 개혁에는 한계가 있었다. 90년 여름 급진적인 내용의 경제개혁안인 「샤탈린의 5백일 개혁안」을 거부하면서 개혁파인사들과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으며 이 과정에서 보수파들이 득세했다.상황이 이렇게 바뀌게되자 그해 12월 그의 측근이었던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외무장관이 독재출현과 쿠데타를 경고하며 사임했다. 급기야는 지난 8월 보수파들의 쿠데타가 발생,고르바초프는 이들에 의해 연금을 당했다. 이 쿠데타는 3일천하로 끝나기는 했지만 고르바초프와 연방정부의 권위에는 돌이킬 수 없는 치명상을 입혔다.그는 쿠데타이후 공산당 활동도 정지시키고 보수적인 색채의 내각도 물갈이했다.원성의 대상이었던 국가보안위원회(KGB)도 숙정했다.그리고 발트해3국의 독립도 승인했고 각 공화국에 폭넓은 권능을 부여하는 내용의 신연방조약도 제안했다. 그러나 이미 연방정부의 권위는 회복될 수가 없었다.지난 1일 우크라이나의 독립선언으로 소련방과 고르바초프에게 결정타를 안겼다.그 뒤를 이은 러시아·우크라이나·벨로루시 등이 주축이 된 독립국 공동체 구성은 소련연방의 사망신고서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결국 고르바초프는 소련을 환상적 꿈에서 깨트려 현실적 사회로 되돌리려 했으나 70여년간 경직될 때로 경직된 공산체제의 「현실」의 벽에 부딪쳐 끝내 실각을 자초하고 말았다. 1931년 3월2일 러시아 공화국 남쪽 스타브로폴지역의 프리폴노예라는 마을에서 태어난 고르비는 학비 때문에 고등학교를 3개월이나 휴학하는등 어려운 청소년기를 경험했다. 그는 고교시절 집에서 16㎞ 떨어진 읍에서 방 한칸을 얻어 자취하면서 주말이면 고향집에 내려가 농사일을 돕는 모범학생이었다.이때만해도 그가 훗날 세계를 움직이는 정치인으로 성장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후 모스크바 국립대학 법대에 입학,마르크스·레닌저작 외에도 로마법,로크의 정부론,루소의 사회계약론 등을 읽으며 사고의 폭을 넓혀 나갔다.심지어 법대에는 미국헌법까지도 열람이 허용됐는데,이같은 서구사상을 담은 「금서」들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스탈린 치하에선 하나의 큰 행운이었다.이때의 지식들이 현실정치와 접목되어 뒷날 페레스트로이카로 체계화 된다. 1954년 대학재학시절에 만난 라이사 티타렌코와 결혼한 고르비는35세의 나이에 고향인 프리폴노예 시당위원장이 됐고 4년후엔 보다 넓은 지역인 스타브로폴지구 위원장으로 승진했다. 이때 그는 다시 대학에서 농업경영학을 공부,학위를 얻고 농업문제전문가로 등장했다. 고르바초프는 1978년 농업담당 당서기가 되면서 중앙무대인 모스크바로 진출하게된다.그가 모스크바로 올라오게된 계기는 농정실패에 책임을 느낀 쿨라코프가 자살함으로써 농업담당 당서기가 공석이 됐기 때문이다.그에게는 확실히 소련 역대지도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관운이 따르고 있다는 평도 받고 있다. 그러나 소련사회에 평화와 자유의 지평을 넓힌 위대한 개혁가 고르바초프의 몰락은 역사의 아이러니임에 틀림없다.동토의 땅에 개혁의 문을 열어젖힌 그는 결국 그 문으로 퇴장한 것이다.
  • 「이데올로기 전쟁」마침내 종언(대변환 지구촌 ’91:1)

    세계공산주의 맹주노릇을 해오던 소련공산당의 소멸과 소련방의 해체라는 대사건을 경험한 1991년은 동서이념대결종언의 원년이며 세계사에 큰획을 그은 한해로 기록될 것이다. 모스크바 크렘린궁에 새해부터는 더이상 낫과 망치의 소련기가 휘날리는 모습을 볼수없게 됨으로써 1917년 레닌의 볼셰비키혁명 이래 세계의 절반을 붉은 이데올로기로 지배해오며 전쟁과 증오와 대립을 야기시켰던 「소련왕조」는 이제 종말을 고하게 된것이다. 80년대 후반 고르바초프대통령의 페레스트로이카정책 실시로 도래한 「민주화」는 왕조의 가장 충실한 동맹국이었던 동구제국을 비롯,제3세계권의 추종국가들을 이탈시켰다.더욱이 올해들어서는 지난 8월 강경보수파의 쿠데타 실패 이후 발트3국이 독립해 나가는등 왕조자체의 해체작업이 가속화되더니 마침내는 붕괴의 운명을 맞고 말았다. 이로써 1848년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선언」으로 본격화됐던 국제공산주의운동 또한 1백43년만에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됐다.결국 그들이 추구하던 유토피아의 건설은 공산주의방식으로 즉 혁명찬미의 방식으로는 더이상 불가능함이 확인된 것이다. 단지 이같은 공산주의 몰락의 벼랑에서 아직도 중국을 비롯한 북한·쿠바·베트남등 잔존 공산주의 국가들이 체제유지를 위해 발버둥치고 있으나 그들이 역사의 흐름을 역류시키기에는 역부족임이 이미 여러가지 측면에서 판명된 상태이다.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사회학자인 다니엘 벨이 50년대말 자신의 저서 「이데올로기의 종언」에서 선언한 소련이데올로기와 서구이데올로기 대립의 종식이 실제 이뤄지기까지는 30여년의 세월이 걸렸다.『이데올로기의 종언이 유토피아의 종언은 아니다』며 이데올로기의 함정을 알고 거기서 유토피아 논의를 다시 시작할것을 강조한 벨의 혜안이 다시금 돋보이는 91년이었다. 21세기의 진정한 유토피아 건설을 위해 새해부터는 그동안 이데올로기에 쏟아온 인류의 정열을 공존과 화해의 휴머니즘 고양에 쏟아야 한다.
  • 외언내언

    비식엄엄.숨이 곧 끊어질 것같은 모양을 표현하면서 쓰이는 말이다.이 말은 다시,한때 내로라 하고 권세를 자랑하던 사람이 궁지에 빠져 기진맥진해 있는 모습을 가리키며 쓰이기도 한다.◆에리히 호네커 전동독 공산당 제1서기.친구들이 그림동화집 속에 묻혀 있을 때 탄광부 아버지한테서 마르크스 이론을 교육받은 사람이다.지금 그의 비식이 엄엄하다.베를린장벽 탈주자에 대해 발포명령한 혐의로 법정에 서게 된 것을 피해 지난 3월 모스크바로 은신했다.그러나 러시아 공화국측에서 내린 비정한 출국통첩.그는 칠레대사관으로 옮겼다.하지만 그 또한 마음 편한 곳은 못된다.통일독일이 어디 만만한 나라인가.◆소비에트연방의 와해가 호네커의 입장을 난처하게 했다고도 하겠다.고르바초프대통령은 이때껏 「도의적 이유」로 호네커를 보호해 왔던 것.하지만 이젠 그 자신의 위치마저 편치 못한 처지가 아닌가.그런 판에 「남의 발등」까지 돌아볼 여유가 없다.18년 동안이나 동독을 지배했던 사람 호네커.어쩌다 그 말로가 이렇게 비참한 것으로 되고 말았는가.◆외신은 호네커가 북한·중국·쿠바 등에 「망명」을 요청했고 북한이 받아들이기로 했다고도 보도한다.결과는 어떨지 모르지만 있을 수 있는 일.88∼90년 북한주재 동독대사였던 한스 마레키씨가 술회한 바에 의하면 호네커는 이미 저승사람이 된 차우셰스쿠와 함께 김일성예찬론자이다.비슷한 체제의 수령인 그들로서는 반세기 가까이 끄떡없이 통치해 오는 김주석이 선망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으리라.호네커와 김은 동갑내기이기까지 하다.◆한 나라의 지도자를 지낸 사람답지 못하다는 인상을 짙게 풍기는 호네커.영화도 누리고 살만큼 산 나이 아닌가.구차한 행각 그만두고 떳떳하게 법정에 서서 법의 심판을 받는 게 훌륭한 인생황혼의 모습이련만….
  • 외언내언

    프라우다가 마침내 11일 간판을 내렸다.소련 공산당이 문을 닫았으니 당기관지가 문을 닫는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인 듯싶다.◆1912년 레닌의 주도하에 창간된 프라우다의 본뜻은 「진실」이나 지금껏 진실보다는 당의 지침에 따라 선전·선동의 도구로 사용되었으며 한때는 1천2백만부를 발행,전세계의 소련 전문가들은 이 신문의 행간을 읽으며 크렘린 장벽 내부를 탐색분석해야 했던 시절도 있었다.◆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로 그 위력이 약화됐던 프라우다는 지난 8월 보수파 쿠데타 발생때 국가비상사태위의 각종 성명을 게재,쿠데타세력에 협조한 반면 정부기관지 이즈베스티야는 검열을 무시하고 쿠데타를 규탄하며 옐친 성명을 실어 시민항거를 유도함으로써 「쿠데타속의 쿠데타」를 성공시킨 1등공신이 됐다.◆옐친의 개혁파가 승리하자 프라우다는 7일간 정간당하는 수모를 당했고 복간과 더불어 제호밑에 싣던 「소련공산당 중앙위 산하기관」이라는 어구와 함께 레닌 초상화,「만국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는 마르크스의 구호도 자취를 감췄다.◆그후 프라우다는 스스로 서기위해 보수 야당지를 자처하며 1면에 광고를 싣는등 자구노력과 함께 직원수를 줄이고 3년전에 35명이었던 해외특파원도 29명으로,다시 내년에는 10명으로 줄이는 계획을 세우는등 애를 써왔다.◆그러나 옐친이 주도하는 러시아공화국정부는 프라우다의 자금원을 막고 10일에는 프라우다 건물과 인쇄시설을 옐친계의 3개 신문과 공동으로 사용하라는 지시와 함께 전화선과 송전선을 끊어버렸다.이제야 「진실」이 무엇인지를 프라우다 직원들은 알게됐을 것같다.
  • 외언내언

    흔히 인민을 위해서라고 한다.지상낙원의 이상향을 건설하기 위해서라고도 한다.인민이 원하고 요구하는지 물어보지도 않는다.자기들 멋대로다.인민을 위해 인민을 탄압하고 감시하며 투옥·추방하고 처형한다.그리고 그들은 정의의 사도요 혁명의 투사다.그것이 우리가 보고 경험해온 현실의 공산당·공산주의자들이었다.◆세계 혁명사상 공산혁명만큼 과격하고 극악무도한 혁명은 없다고 한다.소련에서 동구에서 북한에서 우리는 그것을 보아 왔다.공산혁명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것이다.그러나 그중에서도 특히 처절하고 비참했으며 적나라하게 세상에 알려진 것은 역시 인도차이나의 캄보디아 공산혁명이 아니었던가 한다.오죽하면 「킬링 필드」(살륙전)의 상징이 되었을까.◆그 킬링 필드 대부의 한사람인 키우 삼판(60)이 27일 겁도없이 프놈펜에 입성했다가 성난 인민들의 돌팔매를 맞고 8시간만에 쫓겨났다.철모를 쓰고 유혈이 낭자한 모습으로 도망쳐 갔다.그를 동정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그는 인민이 원하지 않는 짓을 했기 때문이다.그것은 캄보디아국민의 자유로운 의사표시인 것이다.◆이로써 캄보디아의 평화에 그늘이 드리울지 모른다는 우려도 있다.그래도 역시 캄보디아인민은 정당했다.살아 있었다.인간으로서의 원한이 너무 컸는지도 모른다.7백30만인구의 2백만을 죽였다고도 하고 3백만을 학살했다고도 한다.총알이 아깝다고 찌르고 자르고 찢고 질식시키고 생매장해 죽였다고 한다.◆혁명·인민·마르크스·레닌·사회주의 등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다.보복과 저항의 불씨말살이 최대의 목적이었다.그러고도 뻔뻔스럽게 지분을 찾아 돌아왔다.돌아와서 행복하다는 그를 어떻게 그냥둘 수 있겠는가.한국의 우리도 후련함을 느낀다.차우셰스쿠의 말로를 생각한다.호네커·카스트로는 어떻게 될까.김일성이 키우 삼판이 되어 서울 아니 평양에 돌아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 아시아 공산주의의 앞날(서울신문 46돌 특별기고)

    ◎데이비드 첸(홍콩언론인 정치평론가) 국제기류 분석/당분간 중국중심의 「블록」형성할듯/국익추구를 앞세워 점차 해체 전망/북한·동남아 3국과 밀착 가능성 높아/서방·주변국 경협통해 개방 유도해야 최근 몇년동안 세계는 소란스런 변화의 물결에 휩쓸려왔다. 동구 공산체제는 거의 붕괴됐으며 차우세스쿠가 즉결 처형했다. 대부분의 동구공산당이 불신임받아 권력을 잃은 대신 민주적인 정치체제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이같은 이데올로기의 좌절때문에 중국의 위상은 크게 변했다. 거기에다 지난 걸프전때 보여준 줏대없는 처신으로 또 한차례 체면이 손상됐다. 보다 큰 결정타는 지난 8월 고르바초프 대통령에 대한 소련 보수파의 쿠데타 실패였다. 소 공산당은 이를 계기로 불법화됐으며 국제공산주의운동을 주도해온 이 나라의 사회주의 체제가 하룻밤 사이에 와해됐던 것이다. 이로써 중국은 아직도 사회주의체제를 고수하는 유일한 강대국으로 남게 됐으며 넝마처럼 갈기갈기 찢겨진 잔존공산세계를 이끌어가는 역할을 떠맡게 됐다. 이같이 움츠러든사회주의 세계의 앞날이 밝아질 가능성은 전혀 없다. 이런 정세하에서 중국은 지난 10여년간에 걸쳐 남방국경 일대에서 티격태격 다투어온 3개 공산국가의 존재를 새롭게 인식하게 됐으며 동부국경지역에는 아직 완전히 신뢰하기는 어렵지만 옛 전우인 북한을 재평가하기에 이르렀다. 과거의 불편했던 관계에도 불구,공동의 적을 앞세두고 이들 주변국가들과 같은 배를 탄채 민주주의가 압도해가는 오늘의 세계에서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정세하에서는 자연스레 다음과 같은 의문들이 나올 수 있다. 즉,이들 잔존공산국가들은 각기 뚫기 어려운 곤경과 난제들을 안고 있음에도 현재의 정치체제를 지속시킬 수 있을 것인가. 변화가 생겨난다면 이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어떻게 개척해나갈 것인가 등등. 이렇게 사태를 진단한 것은 두가지 이유때문이었다. 첫째,중국은 경제적으로 소련보다 훨씬 강하다. 지난 10년간의 경제개혁은 11억인구의 생활수준을 향상시켰으며 이같이 비교적 풍족한 사회에서는 정권당국뿐 아니라 인민들도 경제성장을 계속할 수 있는 사회안정을 더욱 갈망하게 된다. 89년 6월의 학생운동이 실패한 주요원인은 그들의 활동무대가 도시에 국한된 채 농촌주민들은 대체로 현실에 만족해서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둘째,미국을 비롯한 주요 서방국가들은 중국에서도 소련과 유사한 사태진전을 기대하면서도 소련에서 발생한 새로운 문제들에 너무 몰두했었다. 분명히 말하자면 미국은 중국이 소련과 같은 방식으로 와해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것은 중국주변지역에는 비록 소규모일지라도 중국난민의 유입을 달가워하는 나라들이 없었기 때문인 듯 하다. 따라서 중국은 당분간 북한·베트남·라오스·캄보디아 등과 함께 공산체제를 유지해 갈 수 있을 것 같다. 북한의 처지는 누가 보아도 분명하다. 김일성은 허구의 거창한 비전이나 제시하면서 인민을 틀어쥐는 전체주의 통치방식이 공산체제의 종맒을 더욱 앞당길 뿐이며 인민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는 것만이 정권생존의 지름길임을 알아야 한다. 동구와 소련 공산체제 붕괴로 김은 이제 중국을 이용한지렛대를 잃었으며 따라서 자신이 스스로 북경과 가까워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이같은 상황속에서 중·북한 양국은 스스로 새로운 결속을 다지고 있다. 북경의 공산정권은 1940년대 공산혁명의 결실을 유지하기 위해 미래의 지도자는 원로혁명가들의 자손들중에서 나와야 한다고 믿고 있는 것 같다. 이같은 생각은 점차 구체화되고 있어서 당원로의 자녀들이 당·정·군부의 요직에 서서히 기용되기 시작했다. 중국과 베트남도 양국간의 울타리를 낮추고 긴장관계를 완화시켜야 할 필요성을 느낀 것 같다. 두 나라는 79년과 88년에 두차례나 단기전을 벌였으며 이같은 지난달의 상흔은 아직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럼에도 이달초 두 모이 베트남 당총서기의 공식 북경방문 이후 어제의 증오가 우호협력관계로 바뀌었다. 국제상황변화에 덧붙여 소련의 지원중단과 경제적인 문제들이 하노이 당국자들로 하여금 대중국 적대감을 버리게 한 주요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이같은 관계개선으로 베트남은 중국 모델의 경제개혁을 추진할 수 있을 것으로보인다. 라오스와 캄보디아는 북한이나 베트남과는 좀 다른 처지에 놓여있다. 자원이 빈약하고 소국인 라오스는 전략적 고려대상이 되기 어렵다. 캄보디아의 경우 새로운 연정을 구성한 4개 정파중 2개가 공산국가로 부르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이 나라는 민주적인 나로 모습을 갖춰갈 것 같으며 지역협력 측면에서도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쪽으로 접근해갈 듯하다. 캄보디아를 제외한 채 중국을 핵심으로한 아시아 공산블록은 서서히 구체화되고 있다. 그러나 블록은 과거 수십년간 지탱해온 소련블록과는 아주 다르다. 초강세력도 아니며 패권을 추구한다거나 공세적일 수도 없다. 그렇다면 이 새로운 공산블록의 장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에 대한 해답은 공산체제의 생존여부보다는 국가이익이란 측면에서 찾아야할 것이다. 문제의 초점은 자연 중국과 그 지도자들에게 돌아가게 된다. 지난 10여년동안 중국 정계를 장악해온 등소평·진운·팽진 등과 같은 원로들일 정치무대를 떠나는 주요변화는 2년대에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강택민 총서기를 중심으로한 현 당지도체계가 그대로 존속될지의 여부는 의문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공산주의 체제를 옹호하려할 것이다. 그들은 모두가 이 체제의 수혜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르크스주의를 엄격하게 고수하려 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공산주의와 그 조직은 중국처럼 각양각색의 산만한 국가를 통치하기에는 가장 좋은 수단이다. 시간이 지나면 그들의 사고방식믄 점차 민족주의 색채를 띠어갈 것이며 따라서 국제공산주의운동도 이들 블록내에서는 단지 흉내나 내는 정도로 바뀔 것이다. 즉각 답변하기가 매우 옹색한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중국의 공산체제는 동구와 같은 방식으로 갑자가 붕괴할 것인가,아니면 소련에서처럼 보다 극적으로 무너질 것인가? 이는 지역뿐 아니라 다른지역 정치지도자들에게도 망령처럼 따라 붙으며 괴롭히는 문제다. 중국의 경우 전세계인구의 4분의 1을 포용할 정도로 너무 방대한 국가여서 정치체제에 어렵다.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다면 의심할 바 없이 대혼란을 초래할 것이며 그 결과는 주변지역뿐 아니라 전세계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킬 것이 분명하다. 아마도 최선의 해결방안은 잔존 공산국들이 자체 경제개발을 보다 잘 추진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격려하는 것이 될 것 같다. 생활수준의 향상에 따라 주민들은 보다 향상된 생활의 질과 보다 높은 포부를 가지려 하며 이는 결국 지도자들을 조용히 효과적으로 설득시켜 나갈 수 있다. 그 지역이 중국이 든 북한이든 혹은 베트남이든,또 그 명칭이 공산주의든 아니면 다른 용어를 사용하든 보다 자유롭고 민주적인 통치방식을 도입토록 설득시켜 나갈 수 있다는 얘기이다. □데이비드 첸 ▲중국 상해출신 ▲사우스 차이나 모닝포스트 중국 및 국제부장 ▲사우스 차이나 모닝포스트 고정 칼럼니스트 ▲국제정치평론가·중국문제전문가
  • 이적활동 「해방예술가연」 적발/경찰·기무사

    ◎대학생·군복무 휴학생 12명 검거/시위현장서 볼온 연극­투쟁가요 공연 경찰청 보안국은 13일 「서울지역 대학생 노동해방 예술가연맹」의장 김현성군(23·동국대 국문과4년)등 6명을 국가보안법위반(이적단체구성 등)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하고 배광석군(23·동국대 철학과3년 제적)등 2명을 같은 혐의로 입건했다. 이와함께 국군기무사는 이들과 함께 활동해 온 육군 모부대 소속 유창석이병(23·동국대 법학과4년)등 군복무자 4명을 같은 혐의로 입건,조사하고 있다. 「노동해방문예혁명가」를 자처하고 있는 김군등은 지난해 8월 마르크스­레닌주의 폭력혁명론에 입각한 「민족민주혁명」(NDR)노선아래 「서울지역 대학생 노동해방 예술가연맹」을 결성,각종 시위현장에서 연극 및 노래공연을 해 온 혐의를 받고 있다. 이들은 「연맹」최고의결기관으로 중앙위원회를 두고 중앙위 밑에 편집기획국,정치국등 7개국과 「사회주의 학생문예예술연구소」를 운영하는 한편,중앙위 직속기관으로 집행위원회를 두고 그 밑에 장르분과위원회와 지역조직분과위원회를 구성하고 서울대 덕성여대 동국대등에서 지부를 운영해 온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은 조직의 문예전술 지침에 따라 자본주의의 계급적 모순을 폭로하고 정권타도투쟁을 대중화하기 위해 「단 한번 승리를 위하여」라는 연극을 국민대와 동국대등에서 공연해 온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은 또 강경대군 치사사건뒤 폭력시위를 10차례 주도하고 각종 집회에 참가,「노태우정권타도노래」「계급투쟁노래」등 12종의 노래를 유포시켜 온 혐의도 받고있다. 영장이 신청된 사람은. ▲김현성 ▲최형(25·서울대 천문학과3년·중앙위원) ▲김련지(20·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3년·중앙집행위원) ▲한소영(21·서울대 수학교육과4년·서울대노래분과위원장) ▲장은영(23·서울예전 문예창작과졸·서울예전 지부문화분과위원) ▲김경옥(21·서울예전 문예창작과2년)
  • “중국 보­혁 세력간/10년내 계급 투쟁”/국무원 공안부장

    【홍콩 연합】 중국은 앞으로 5∼10년내에 4개 기본원칙(공산당지도,인민민주독재,사회주의,마르크스 레닌주의와 모택동사상)과 자산계급 자유화를 각기 견지하려는 세력간의 대립으로 나타나는 계급투쟁이 벌어질 수 있을 것으로 중국정부 각료가 예상했다고 홍콩의 명보가 5일 보도했다. 명보는 중국 국무원 공안부장 도사구는 4일 북경에서 개막된 제18차 전국공안회의에서의 공작보고를 통해 이같이 예상하고 이같은 계급투쟁의 초점은 인민민주 독재를 지속하느냐 아니면 폐지 또는 약화시키느냐 하는 문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 “아키노 비 대통령/내년 선거 불출마”/공보비서 밝혀

    【마닐라 AFP 연합】 코라손 아키노 필리핀 대통령은 내년에 6년의 임기를 마치고물러날 것이며 마르크스 전대통령의 부인 이멜다가 출마할 가능성이 있다고 해도 마음을 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토머스 고메스 대통령 공보비서가 27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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