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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 주체예술/세습 정당화 도구로 이용

    ◎60년대 김정일이 사회주의리얼리즘에 속도전 이론 접목/혁명가극­집단창작 통해 김일성 신격화/김정일 직접지도… 후계자능력 인정받아 김정일은 지난 60년대 후반부터 김일성 주체사상을 선전·선동하는 방편으로서 북한의 문예활동을 선도해 왔다. 73년 9월 북한의 당 중앙위원회 제5기 7차 전원회의에서 조직 및 선전·선동 담당 비서로 선출되면서 그는 김일성의 후계자로 부각됐으나 이미 67년 당 중앙위원회 제4기 15차 전원회의를 계기로 각종 문화분야에서 이른바 「지도」를 본격화했다. 특히 김정일은 김일성이 내세우는 마르크스·레닌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예관을 북한 특유의 주체문예관으로 변경시켜 김일성의 신격화운동을 직접주도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먼저 연극분야에서 1970년대초 김정일은 『연극혁명을 일으켜 낡은 연극에 종지부를 찍고 혁명연극의 새 시대를 열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혁명가극의 시대를 개척했다. 항일 유격대원의 이야기를 다룬 가극 「피바다」를 71년 초연하기위해 김정일의 지도가 있었다. 김일성을 비롯한 빨치산 출신의 당시 북한 권력층 원로들이 이 「피바다」 공연을 보고 김정일의 능력을 크게 평가,후계자로 정하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영화로도 제작되어 김일성 신격화 작업의 상징으로 평가되고 있다. 김정일은 1980년 혁명연극 「혈분만국회」를 직접 제작할 정도로 열의를 보였다. 미술 부문은 1970년대에 김정일의 지도에 따라 주체미술의 대전성기를 맞았다고 북한은 선전해 왔다. 그때까지 역사적 사실 속의 한 인물로 형상화되던 김일성이 70년대 북한의 회화에서는 현실적이며 인민에게 친근한 모습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또 혁명적 기념비 미술은 거의 김정일의 업적으로 소개되고 있다. 조선 노동당 창립 30주년 기념으로 1975년부터 5년에 걸쳐 만들어진 「왕재산대기념비」의 경우 김정일이 비행기까지 동원하는 관심 속에 진행되었다. 70년대의 「평양 지하철 벽화」,「삼지연 대기념비」등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주체사상탑」,「개선문」등 80년대의 혁명적 기념비 미술로 이어진다. 음악의경우 혁명가극 「피바다」가 혁명의 무기로 생산 현장에서 공연됐다. 김정일의 음악관이 비교적 늦게 정립된 탓인지 87년 「행복의 노래」와 88∼89년 평양예술단이 창조한 민족가극 「춘향전」등이 김정일의 지도에 따라 무대공연 형식으로 발표됐다. 김은 오케스트라연주중 연주자의 반음 착오까지 지적할 정도로 조예가 깊다. 김정일은 또 4.15창작단,왕재산창작단,백두산창작단등을 만들어 문학분야에 집단창작제를 제도화시켜 「조선의 별」등의 대하소설을 기획하게 했다. 그는 『우리가 건설해야할 새로운 혁명문학은 명실공히 수령을 형상화한 문학을 말한다』고 역설했다. 무용에서도 「피바다식 가극무용」이 보통명사로 사용될 만큼 가극 「피바다」에서 구사된 수법이 정형으로 자리잡았다. 북한에서 4대 명무용의 하나로 꼽는 「키춤」은 원래 「피바다」의 3장 2경에서 물방아간 가무로 나오는 것을 떼어 내 72년에 군무로 개작한 작품이다. 이처럼 북한의 각종 예술활동을 지도해온 김정일은 특히 김일성의 주체사상에 입각한 속도전이론등을 가미한 새로운 문예이론을 만들어 부자 세습에 대비한 신격화운동에 문화 예술을 적극 활용했다.
  • 6·25의 비극 다시는 없게해야/홍성유(남북정상회담에 바란다)

    언젠가 어느 잡지에서 「만약 젊어질 수 있다면」하는 제하의 앙케트성 원고를 청탁받은 일이 있다.정말 젊어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잠시 허망한 망상을 굴려본 일이 있지만,다음 순간 내가 겪은 젊음을 또 다시 되풀이 하는 대가로 젊어지는 것이라면 구태여 젊어질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나의 젊음이 유달리 참담했기 때문은 아닌 것이다.나의 젊음이 참담했었다면 그것은 순전히 6·25전쟁 때문이었다.그 비극이 얼마나 끔찍한 것이었는가는 여기에 새삼스레 늘어놓을 수가 없지만 바꾸어 말하면,6·25전쟁을 또 다시 되풀이 하는 대가로 젊어지는 것이라면 구태여 젊어질 것도 없겠다 싶은 것이다. 그렇다.6·25와 같은 비극을 또 다시 되풀이 해서는 안된다.어떠한 대가,어떠한 희생을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이를 막아야 한다. 조국분단 반세기만에 첫 남북정상회담이 오는 7월25일 평양에서 열리게 되었다. 국제적인 기류의 급격한 변화와 남북 모두의 국내적인 정세변천을 실감하면서 그 첫번째 회담지가 하필이면 평양이냐 하는 다소의 불만과북측의 정상회담 제의가 유엔의 대북제재를 일시적이나마 회피하려는 술책이 아닐까 하는 일말의 기우심을 가지면서도,우선은 민족적 화해의 장에 한발짝 다가선게 아닌가 싶어 환영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으로 조국의 평화적 통일의 기틀이 마련되는 것이라고 믿지도 기대도 하지는 않지만 동족상잔의 비극을 또 다시 되풀이 해서는 안된다는 절대절명의 명제가 있기 때문에,그나마의 환영의 빛을 보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하지만 그동안 북측이 완고하게 닫았던 철문을 빠끔히 열어 보였다고 해서 이번 정상회담으로 남북간의 오랜 대결의 앙금이 단번에 풀리리라고 기대하지는 말자. 핵문제로 야기된 한반도의 위기가 단숨에 해소되리라고도 기대를 하지 말자. 이산가주의 고통이 아무리 뼈아픈 것이라 할지라도 재결합의 기쁨이 바로 눈앞에 있는 것처럼 미리부터 흥분을 하지 말자. 하지만 우리는 정상회담이 가져 올 화해를 바탕으로 남북간에 가로놓여 있는 여러가지 난제를 하나씩,둘씩 조심스럽게 그리고 슬기롭게 해결할 방법을 찾아 나가야 한다고한가닥의 희망을 걸어 본다. 남북정상회담 합의의 보도를 접하고 그 의외성에 놀랐으면서도,이를 전적인 낭보로 받아 들이지를 못하고 떨떠름하게 환영의 빛을 보이는 데에는 나로서는 나름대로의 까닭이 있다. 「서울 불바다」를 회담장에서 서슴없이 뇌까린 북측이,카터의 방북을 계기로 무슨 쑥덕공론이 있었는지 돌연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해 온 저의를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그만큼 우리는 북측에 속아 왔으니 말이다.그 단적인 예가 6·25다.꾸준히 면밀하게 전쟁준비를 하고 있으면서 조만식선생과 이주하·김삼용을 교환하자는 평화적인 제스처를 부리고 돌연 남침해 온 것이 그 좋은 예다. 마르크스­레닌주의가 붕괴되었고 붕괴되어 가고 있는 현재와,당시는 상황이 다르다는 의견이 있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역사의 거센 흐름이 냉전의 시대에서 화합의 시대로 흐르고 있다는 것도 알고는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이념은 종언 되었는지는 몰라도 이른바,「주체사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끝나기는 커녕,극히 소수일 망정,남한땅에서까지 「주체사상」을 부르짖는 세력이 있는 판국이다. 아마도 북측은 미군만 철수하면 남한쯤은 어깨만 툭 치기만 해도 뒤로 나자빠질 것처럼 여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77년 당시 카터대통령의 미군 철군정책에 반대했다가 해임된 싱글로브 전 미8군 참모장의 경고를 참고할 필요가 있겠다. 북한의 김일성이 잘하는 일은 전쟁준비 뿐이며 『남한에 대한 적화야욕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우리가 허점을 보이면 그만큼 도발위험이 높아진다』고 경고한 것이다. 다행히 정상회담에 임할 김영삼대통령은 『한개의 원자탄이 아니라,반개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아래 굳건한 안보의식과 한·미유대를 다짐하고 있으니 김일성이 아무리 노회할지라도 민주화운동으로 산전수전 다 겪은 문민정부의 대통령으로서 꿀리지 않는 의연한 솜씨로,조국의 평화 정착에 크게 기여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 국제화추진 위원장 김경원씨(인터뷰)

    ◎“통일 대비하는 국제화전략 필요”/국민합의 바탕 「민간 싱크탱크」 만들터 『우리 사회에서 국제화의 당위성에 대한 컨센서스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국무총리 자문기구로 8일 발족한 「국제화추진위원회」의 위원장에 위촉된 김경원사회과학원장(58)은 뒤늦게나마 국민들 사이에 국제화의 필요성이 인식되고 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말했다. 김위원장은 그러나 『국제화는 본질적으로 변화와 개혁을 의미하기 때문에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고 전제한뒤 『특히 민족의 주체성을 전제로 하지 않은 국제화는 무의미하고 위험하다』고 말해 위원회가 추구하는 작업의 어려움을 강조했다. 김위원장은 27살에 미국 하바드대에서 정치학박사를 따낸 수재.캐나다 요크대,미국 뉴욕대에서 교편을 잡은 것을 비롯해 대통령국제정치담당특보·비서실장,주유엔대사,주미대사등을 거치며 평생동안 국제관계를 다루어 왔다.최근에도 사회과학원장으로 국제세미나등을 자주 열고 우리의 국제화를 어떻게 추진하느냐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그는 이날 위원회 첫회의에서 국제화의 개념정립부터 명확히 하자는 제안이 나온데 대해 『그러려면 상황이 너무 복잡해진다』고 단순한 출발을 희망했다.『영어권에서는 고립과 국제주의라는 두 상반된 개념을 상정하고 있으며 우리는 더불어산다는 국제주의를 선택했다는 것을 위원회 활동의 출발점으로 삼을 것』이라고 밝혔다. 김위원장은 특히 우리의 국제화 추진은 통일시대에도 적극적으로 대비하는 전략이라고 말했다.그는 『북한은 마르크스주의와도 다른 스탈린식의 시대착오적 체제를 갖고 있다』고 단정짓고 『이러한 북한의 국제화를 돕는 것도 우리의 임무』라고 강조했다. 이날 첫회의에서 쏟아진 의문은 『위원회에서 제기된 국제화 관련 아이디어들이 얼마나 충실히 정부정책에 반영될 것인가』였다.이어령전문화부장관,서경석경실련사무총장등은 『과거 여러 위원회가 그랬듯이 형식적 모임이라면 뜻이 없다』고 말했다. 이에 이회창총리는 『국제화추진위는 이 시기를 놓쳐서는 안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만든 것』이라면서 『위원회의 건의내용이 반영되지 않는다면 국제화의 가망이 없다고 보아야 되는 것 아닌가』라고 강한 실천의지를 피력했다.김위원장도 『위원 여러분의 의욕을 보니 위원회가 명목적으로 그치지는 않을 것같다』면서 「국제화추진위」가 국가적 과제로 등장한 「국제화」를 향한 「민간 싱크탱크」의 역할을 충실히 하겠다고 다짐했다.
  • 「전문」이란 이름의 오만과 안주/김진현(시론)

    왜 기술선진국이 추락하는가.내가 좋아하는 일본 게이오대학의 야쿠지치(약귀사태장)교수는 세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는 기술의 강적이 등장하는 경우이다.대개 기술소국이 모방과 개량을 통한 「에뮬레이션」(경쟁)에 성공하는 경우이다.오늘의 일본이 미국을 이기고 미국이 영국을 이기고 영국이 프랑스를 이긴 기본 동인은 이 경쟁에 있었다. 두번째는 자국내의 「극단의 경제합이주의」만연이다.대개 대국이 되기 까지에는 방대한 자원이 필요하고 그 자원은 경제적 합리성을 기초로 배분되게 마련이다.이런 경제적 합리성이 습관화 되어 극단으로 치닫거나 단기적 합리성으로 치우치면 경제적으로 비합리성이 높은 연구개발투자는 쉽게 삭감된다.오늘의 미국의 기업이 분기마다의 이익을 지표로 경영해서 연구개발투자가 축소되고 일본은 장기전략 중심의 경영으로 해서 미국의 기술을 이겼다.미국의 GE사의 진공관 사업부가 트랜지스터 생산을 거부하고 일본의 소니가 생산한 것은 유명한 예라 하겠다. 세번째는 「기술편협주의」이다.기술대국이 된 나라는자신이 세계 제일이라는 자만이 오만으로 변하고 세계 기술개발동향에 눈이 어두워지는 현상이 계속된다. 야쿠지치교수는 지적하지 않았지만 내가 하나 더 든다면 지나친 기술분업과 분업전문가들의 전문에의 안주나 오만이다.피터 드러커교수가 앞으로 경쟁에서 승리하는 기술자는 연구실장(Research Director)이 아니라 기술관리자(Technologz Manager)라야 한다고 경고한 것은 음미 할 만한 일이다.자기 영역의 연구에 충실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동종의 연구에 대한 정보와 다른부문의 관련된 연구에 대한 정보와 협력 그리고 응용에 까지 능력을 발휘해야 성공적인 연구개발이 된다고 했다. 일본의 연구개발이 미국보다도 훨씬 적은 돈과 사람으로도 끝내 민생기술분야에서 미국을 앞지른 것은 바로 이 연구개발의 통합방식,연구조합방식의 성공에 있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세계에 내놓을 만한 원천기술이 없다.우리같이 군사력이나 자본력,또는 문화력으로 강대국과 협상할 만한 카드가 없는 한 하루 빨리 결정적 기술력을 가져야 한다. 그러려면 기술종사자들이 경쟁력에 치열하고 창조의 열정으로 가득차야 한다.이것이 알파요 오메가이다.그러기위하여 재정은 사무적 편리성 극단의 경제합리주의로 연구개발비를 다루어서는 안된다. 최소한 연구개발비의 안정성확보를 위해 지출을 매년 승인을 받더라도 프로젝트기간 통틀어서의 장기수권예산제도가 확립되고 연구소별 대학별 부처별 연구성과 중심의 경쟁이 가능토록 예산의 인센티브제도가 「실제」로 작동되어야 한다. 그대신 기술편협주의와 전문안주가 청산되어야 한다.우리나라 특유의 문화행태의 소산으로 과학기술계 뿐 아니라 모든 부문에서 감투주기 위한 분할과 전문영역간의 폐쇄성이 너무 강하다.이런 곳에서 효률과 창조를 기대하기 어렵다.전문의 효율은 열린데서 즉 경쟁에서 나오는 것이지 전문이란 이름의 영역나누기나 오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그 유명한 독일의 마르크스 프랑크연구소장은 과학기술자 아닌 법학자이며,MIT공대기계공학과에는 심리학의 의학전공의 정교수가 있다. 요새 우리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은 선진국에서 특히,미국유럽 심지어 일본에서 까지 학위 마치고 착실한 연구경험까지 쌓고 돌아온 유능한 젊은 과학자 기술자들이 대학과 연구소에서 자리를 못잡고 1년여씩 방황하다 다시 외국으로 되돌아 가는 현상이다.역U턴현상이 일어나는 가장 큰 원인은 선배들이 자리를 비워주지 않기 때문이다. 대개 이런 선배들일 수록 연구 자체에는 흥미가 없고 과학기술계의 감투경쟁으로 잡음을 일으키고 창의와 경쟁이라는 과학기술의 본원적 토대를 약화시키는 분들이다. 지금 우리 능력으로는 우리 스스로 거시적 합이성으로 재원을 활용하며 러시아·동구·중국 심지어 미국 영국의 일급 과학자 엔지니어까지 데려다 쓸수 있다. 문제는 우리안의 일부 선배 지도자들이 닫혀 있기 때문이다.후배들에게 큰 역사적 세대적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국제화 개방화 경쟁촉진에 과학기술계가 앞장나서기를 당부한다.
  • 베트남대에 미국학강좌 부활/미군 사이공 떠난지 20년만의 변화

    ◎호치민시립대서 「과거의 적·월남전 실상」 강의/금수해제조치와 때맞춰 젊은이들이 큰 호응 베트남 패망으로 미군이 사이공을 마지막으로 떠난지 20년.이제 베트남에 미국이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런 현상은 특히 대학 강의실에서 더욱 실감나게 느낄수 있다. 베트남의 수도 호치민시(구 사이공)에 위치한 호치민 시립대학에서는 최근 공산정권 수립이후 최초로 「미국학」강좌를 개설,「과거의 적」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12월 개설된 이 강좌는 2년과정으로 미국의 역사,문화,정치 경제적 구조및 문학등을 학생들에게 가르칠 예정이다.이 강좌에서는 또 간략하게나마 베트남전쟁에 대해서도 다루게 된다. 이 대학에는 이미 한국,중국,일본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국가및 호주를 연구하는 강좌를 개설하고 있는데 국제사회에서 가장 비중이 높은 미국에 대한 연구를 빼놓을수 없어 미국학 강좌를 개설하게 됐다는 것이 이 대학측 아시아·태평양문제 연구소 소장인 레 녹 트라교수의 설명이다. 이같은 변화는 한편으로 베트남인들의 현대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점차 바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베트남인들은 지금까지 베트남전쟁을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사관에 따른 역사발전의 한 단계라는 이념적 시각으로만 보아왔다. 그러나 이제 베트남인들도 이같은 시각이 자신들의 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된 것이다. 미국학 강좌에 참여한 구옌 단 탄 교수는『베트남인들은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에 대한 해묵은 견해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그러나 우리는 전쟁의 정치적인 성격보다는 전쟁중에 일어난 사건이나 구체적인 실상에 강의의 초점을 맞출 생각』이라고 말했다. 베트남은 또 전쟁이 끝난이래 지금까지 내부적인 문제로 갈등을 빚어왔다.베트남 남부지역의 주민들은 1975년의 공산화를 겉으로는「해방」이라고 부르고 있으나 북쪽이 남쪽을 지배하게된 사실에 대해서는 크게 불만을 가져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호치민시립대에 미국학 강좌가 개설된 것을 계기로 베트남인들은 과거 총을 맞대고 싸웠던 적들에 대한 그동안의 편견과 고압적 자세를 완화하기 시작했으며 미국과의갈등도 과거지사로 돌리려는 변화된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본래 미국학 강좌는 공산주의 사상이 보다 깊게 뿌리박고 있는 베트남 북부 하노이의 대학에서 개설될 계획이었다.그러나 베트남 정부는 아직 시기상조라는 이유를 들어 난색을 표명하고 있다. 베트남에 미국학 강좌가 개설된 것은 미국이 지난 4일 19년만에 대베트남 금수해제 조치를 취한 것과 때를 같이해 큰 호응을 얻고있다. 이로써 대부분 베트남전쟁 이전에 태어나 사진이나 영화,팝 뮤직을 통해서만 미국을 알아오던 베트남의 젊은이들은 이제 직접 미국을 접할 기회도 갖게될 것이다.또한 베트남인들은 미국을 연구함으로써 세계사회의 일원이 되는 길도 터득하게될 것이다.
  • 탁월한 백제공장들(백제를 다시 본다:4)

    ◎“6∼7세기 문화선진”… 신라·일에 기술 전원/황룡사 9층탑·안압지 백제장인 손길/와·노반박사 일서 가람 짓고 향로 제조/금속공예·건축기술 당시론 최고수준… 장인들은 관인으로 대우 신라통일기 장인들의 탁월한 기량을 얘기할 때 흔히 거론되는 것이 이른바 만불산이란 공예품이다.신라 경덕왕은 당나라의 대종황제가 불교를 숭상한다는 소문을 듣고 공장에게 명하여 만불산을 만들게 했는데,「삼국유사」에는 그 모양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만불산은 한 발쯤 되는 가산에 험한 바위와 괴이한 돌,동굴을 장치하여 여러 구역을 만들었다.각 구역마다 춤추며 노래하는 사람의 모습과 각국의 산천형상을 새겨넣어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벌과 나비가 날고 제비와 참새가 춤을 추어 언뜻 보면 진짜인지 가짜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고 한다. ○궁남지 본떠 건립 그 뿐이 아니다.그 한가운데는 크고 작은 만불을 안치하고 주위에는 각종 장식품,천여구의 승려 조각과 누각 그리고 자줏빛 종을 벌여놓았다.바람이 불어 종이 울면 승려들이 모두엎드려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고 은은히 염불하는 소리가 나도록 기막히게 장치되었다고 한다.그리하여 이 만불산을 선물로 받은 대종은 『신라의 기교는 하늘의 조화이지 사람의 기교가 아니다』라고 깊이 탄복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같은 신라의 기술은 본래 백제로부터 전수받은 것이었다.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신라의 호국사찰 황용사 9층탑을 제작한 것은 백제의 기술자 아비지였다.신라는 삼국통일 직후 왕궁 옆에 못을 파서 안압지를 만들었는데,그 의장이나 기법은 모두 백제의 궁남지를 본뜬 것이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무왕 35년(634)3월에 궁성 남쪽에 못을 파고 물을 20여리나 끌어들여 궁남지를 만들었는데 못언덕에는 버드나무를 심고 못속에 인공섬을 만들어 방장선산에 비겼다고 한다.뒤에 못가에 망해루를 지어 국왕이 신하들과 더불어 이곳에서 연회를 즐겼다.이기백선생이 추리하듯 백제를 멸망시킨 직후 사비도성에 입성한 신라의 최고지배층은 이 궁남지와 망해루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듯하다. 그리하여 당나라를 상대로 한창 피나는 전쟁을 치르는 긴박한 상황속에서도 서둘러 안압지와 임해전을 축조했다.앞서 얘기한 경덕왕때 황룡사 연기법사의 발원으로 화엄경을 베끼는 사경작업이 진행되었는데,16년전 세상에 공개되어 현재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화엄경사경의 발문을 보면 광주,남원,장성,고부등 옛 백제지역 기술자들이 종이를 만든다거나 경문을 쓰는 일을 맡았던 것이다.백제는 그 지리적 조건에 힘입어 일찍부터 여러 지역의 다양한 문화를 흡수했다.건국 초기에는 북쪽에 인접한 낙낭군을 통하여 중국 한대문화를 받아들였다.낙랑군이 멸망된 뒤로는 고구려와 접촉했다.그런데 고구려는 중국 뿐아니라 만리장성 이북의 유목민족과도 접촉이 많았기 때문에 백제는 고구려를 통하여 야성적인 호주문화까지 받아들인 셈이다. 한편 백제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서해안을 끼고 있어 일찍부터 해상교통이 발달하여 바다 건너 양자강유역의 세련되고 우아한 중국 남조문화와 접촉했다.백제문화의 특징은 이처럼 각지에서 흘러들어온 외래문화에 끊임없이 자신의 독자적인 미의식을 가미하여종합하려고 한 점에 있다.삼국 중 가장 기름진 농경지를 확보하고 있어 비교적 여유있는 생활을 즐겼던 백제였던 만큼 느긋한 마음으로 풍요로운 예술을 꽃피울 수 있었다. ○기술자 박사 칭호 흔히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은 고대의 기술자들을 한결같이 노예계급으로 보면서,삼국시대의 명품들은 어디까지나 지배층에 강제된 노예노동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그러나 이는 명백히 잘못된 견해이다.삼국시대 및 통일기 신라의 기술자들은 국가로부터 전문 박사칭호를 부여받았을 뿐아니라 관등까지 받은 어엿한 관인신분이었다. 일본측 역사서인 「일본서기」에는 실로 많은 백제 기술자들이 등장한다.6세기 초 이래 백제로부터 일본조정에 유교경전이나 의학,역학,역학을 지도하기 위해 전문가들이 끊임없이 파견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일본에 불교를 전해준 뒤로는 사찰건물이나 불상,기와,향로를 제작하기 위해 노반박사,와박사 등이 파견되었다.현재 알려져 있는 수많은 금동제 불상이나 무령왕릉에서 나온 각종 금속제품을 통해서 알수 있듯이 당시 백제의 금속공예기술은 최고수준을 자랑하고 있었다. 서기 588년 일본왕실의 외척으로 권세가였던 소가(소아)씨가 법흥사(일명 비조사)건립에 착수했을 때는 실로 많은 백제의 일급 기술자들이 초빙되어 갔다.당시 일본에 건너간 노반박사 백매순은 덕장이란 관등을 갖고 있었는데,그는 문헌기록을 통해서 확인되는 유일한 백제의 금속공예기술자이다.한편 「원흥사가람연기변류기자재장」에는 그를 「누반사」백매순이라 표기하였는데 이는 그가 다름아닌 누금세공기술자였음을 말해주고 있다.누금세공이란 금판와 금입에 금판을 붙이는 방법이다. 사비시대의 백제는 대외관계에 있어서나 국내정치면에서 실로 다사다난한 때였다.하지만 문화적으로는 백제가 그동안 축적한 기량이 최대로 발휘된 일대 황금시대였다.바야흐로 국교의 지위를 차지한 불교가 이 시기 백제문화의 견인차 구실을 했다.한편으로는 도교사상이 스며들어 전란에 지친 사람들의 마음에 유토피아사상이 싹트게 했다. ○문화 견인차 구실 야심만만한 정복군주였던 무왕은 불교와 도교 모두에 심취해 있었다.그가 궁남지에 인공섬을 만들어 방장선산에 비긴 것은 도교사상에서 영향받은 것이다.한편 그가 전북 익산 금마에 미륵사를 창건한 것은 유명한 사실인데 이밖에도 그는 부소산성과 마주보고 있는 금강 대안의 울성산성 근처에 또 하나의 호국사찰을 완공했다.바로 왕흥사였다. 왕흥사는 오랜 공사끝에 무왕 35년(634)2월에 낙성되었는데,왕은 때때로 이 절을 찾았다.무왕은 먼저 금강 언덕에 있는 바위에서 멀리 부처를 바라보며 예불을 한다음 배를 타고 절에 가서는 법회에 모인 승려들에게 향을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향을 피워 부처와 보살을 공양하기 위해서였다. 삼국시대에 불교가 그토록 융성했음에도 불구하고 향을 피우는데 필수적인 이 시대의 향로가 발견되지 않은 것은 매우 기이한 일이었다.마침 작년 말에 부여 능산리에서 금동향로가 나온 것은 기적같은 느낌이 든다.의장의 풍부함이라든가 현란한 장식성으로 볼 때 문득 신라의 만불산을 연상케 하는 이 진품의 작가 이름을 알 수 없는 것이 끝내 유감일 따름이다. ◎백제 기술집단/노반박사는 금속공예의 명인/와박사도 뛰어난 녹유계통의 토기 만들어 우리는 오랫동안 일본의 기록을 통해 백제의 기술과 공장들의 모습을 가늠해 왔다.그러나 최근 이루어진 고고학 발굴에서 그 생생한 백제 기술의 실상을 비로소 가늠하게 되었다.그 대표적 케이스의 하나가 지난해 연말 부여 능산리 출토 금동용봉봉래산향로라 할 수 있다. 세기적 보물이기도 한 능산리 금동향로의 출현은 백제의 기술과 우선 노반박사의 존재를 떠올리게 했다.「일본서기」등과 같은 일본쪽 기록에 보이는 백제최고 기술집단의 하나인 노반박사는 금속공예의 명장이고,바로 능산리 금동향로를 제작한 기술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이들의 활동은 불교미술에도 큰 영향을 끼쳐 불상이나 탑의 상륜부 등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일본 나라(나양)의 이소노카미(석상)신궁에 비장된 백제전래품 칠지도는 백제의 금속공예술이 이미 상당 수준에 도달했음을 보여준다.새김글씨를 금으로 상감한 4세기경의 칠지도는 금속의 정련과 주조기술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따라서 6∼7세기경 사비시대 백제의 기술은 능산리 금동향로를 만들어낼 만큼 더욱 발전되었다.심미안적 세공에 의해 제작된 틀,소재의 정선,주조술,가공,도금술이 어울려 이룩한 걸작의 종합금속예술품이 능산리 금동향로인 것이다. 그리고 와박사 역시 넓은 영역에 걸쳐 활동한 공장이다.단순히 건축물의 지붕을 덮는 기와 뿐 아니라 테라코타불상,토기 제작에 관여했을 것이다.특히 삼국 가운데 기술적으로 가장 뛰어난 녹유계통의 토기를 만들어 낸 이들도 바로 와박사로 보여진다.녹유토기는 후대 고려청자의 모태를 어느 정도 이루었고,사비시대 백제의 대가람이었던 익산 미륵사 터에서 발견되고 있다.
  • 책사랑의 길/이배영 남북문화교류협회회장(굄돌)

    눈이 내린 후 뜨락에 서서,온누리가 은백색으로 덮인 산야를 바라보면서 우리가 문화유산으로 가꾸어 가야할 것들을 생각해 본다. 불모지나 마찬가지인 국내의 출판환경 속에서 정부는 지난 한해를 책의 해로 지정해 책의 소중함을 널리 알렸다.일반 국민들이 책의 소중함은 인식했지만 독서인구가 실질적으로 증가했는지는 의문스럽다. 원효대사 이황 이이 한용운 석가모니 예수 루소 노자 장자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쇼펜하워 헤겔 칸트 야스페르스 마르크스 레닌 사르트르 헤세 타고르 엘리어트 간디 슈바이처 생텍쥐페리 베토벤 모차르트 다윈 에디슨 아인슈타인….이 지면에 성현들과 철학자,사상가,문학가,예술가등 창조적인 삶을 살았던 이들을 어찌 다 열거할 수 있겠는가.그들의 고독한 삶의 체험은 여러가지 형태로 남아있다.그 중에서도 저서는 그들의 체취를 가장 잘 감지할 수 있는 매개물이다.사람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고,정신을 영유하는 능력이 있어 일하는 동안에 창조하는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이러한 삶의 표본이 앞에서 열거한 선인들이다. 생활의 편리함만을 추구하는 현대인에게 선인들의 금욕정신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창조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의 풍경을 책으로 만드는 여정에서 출판인들은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상업성에 의해 현재 이 나라의 출판풍토는 표류하고 있다.어찌 마음의 양식이 남긴 상품,출판업계에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것을 방치한단 말인가!이것이 출판문화를 가꾸어 가는 중소출판사의 경영인들이 사재를 털어가면서 출판을 하는 이유일 것이다. 책은 독자들에게 건너가면 휴지 한장이 될수도 있고,인생의 항해에서 길잡이를 하는 등대 역할을 하기도 한다.책은 쌓아두기만 한다면 분명 어리석은 소유이다.홀로 방에 앉아 선인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그들의 참사랑을 느낄 수 있다.책사랑의 길은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일이며,우리문화를 더욱 발전시키는 일이며,이것은 자기 자신의 삶의 질을 높이는 지름길이리라.
  • 메이데이 부활(외언내언)

    마르크스가 지상에 내려와 TV출연을 요청했다.방송국측은 내키진 않았으나 딱 한마디만 하겠다는 간청이어서 허락했다.카메라를 향한 그는 이렇게 말했다.『만국의 노동자여 나를 용서해 다오』한때 모스크바서 유행하던 해학이다.『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던 그의 공산당선언을 비꼬는 익살인 것이다. 그 만국의 노동자 단결의 기념일이 5월1일 메이데이 노동절이다.세계노동자가 단결하고 상부상조하는 공동의 목표를 추구하는 것이 나쁠 것은 없을 것이다.중세유럽의 봄축제이던 메이데이를 1886년 노동절로 처음 축하하기 시작한것은 미국이었다.그것이 사회주의 행사로 변질된 것은 옛공산권이 정치선동·선전수단으로 악용했기 때문이다. 결국 서방세계는 5월1일을 피해 별도로 근로자의 날을 정하게 되었다.미국은 9월 첫째 월요일을,일본은 11월 23일,그리고 우리는 한국노총창설기념일인 3월10일을 근로자의 날로 기념했으나 5월1일 메이데이를 고집하던 일부 노조들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도 이젠 지나간 냉전시대의 유물.공산권이붕괴된 지금 메이데이가 갖던 사회주의적 정치선동 선전의 목적 또한 의미를 상실한 지 오래다.5월이라는 좋은 계절의 봄 축제로 되돌아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순리일지 모른다.36년만의 메이데이를 부활시킨 김영삼대통령의 결정도 그런 순리를 따른 것일 게다. 특히 금년엔 국제화·개방화라는 거센 파고의 악조건속에 신한국건설을 위한 제2 한국경제도약의 문을 기어이 열어야 한다.경쟁력제고의 성패가 관건이다.여기에 노·사대결의 상황은 어떤 이유에서건 절대 금물이다. 메이데이 노동절 부활의 보다 깊은 참뜻이 어디에 있는지 우리는 진지하게 헤아려야 할 것이다.「만국의 노동자」가 아니라 「한국의 노·사여 단결하라」는 대통령의 간곡한 당부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 모택동·등소평 관계분석/중국현대사 큰사건 풀이

    ◎솔즈베리저 「… 황제들」 번역서 출간/두사람의 인간면모·고뇌 상세묘사/“왕조시대 황제같은 통치자”로 평가 지난달 26일은 모택동탄생 1백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이날을 전후해 중국 곳곳에서는 모택동추모행사가 성대하게 열려 중국의 현대사를 연 고인의 업적을 기렸다. 이에 곁들여 「혁명의 천재이며 중국 건국의 아버지」인 모택동과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백성의 먹고 입는 문제를 해결한 부국의 선각자」인 등소평(90)을 놓고 누가 더 위대한가를 비교하는 기사가 신문지면을 장식했다. 그런가 하면 중국공산당이 개최한 「모택동 탄생 1백주년 기념행사」에 참가하지 않으려고 등소평이 「일부러」 예년보다 한달 빨리 북경을 떠나 휴가길에 올랐다는 외신보도도 있었다. 모택동과 등소평은 중국혁명을 함께 이끈 동지이면서 혁명후에는 현대화방법론을 놓고 심하게 갈등한 정적사이였다. 그 두사람의 관계에 초점을 맞춰 중국현대사의 큰 사건들을 풀이한 책이 「새로운 황제들」이란 제목으로 나왔다.(다섯수레 간) 지은이 해리슨 솔즈베리는 뉴욕타임스의 모스크바특파원을 지낸 구소련및 중국문제전문가로 지난 84년에는 모택동과 홍군이 50년전 치른 대장정코스를 되밟아 중국오지를 7천4백마일 여행했다. 이와 함께 모택동과 등소평의 가족,측근은 물론 적대세력과도 폭넓은 인터뷰를 함으로써 모와 등의 인간적인 면모,각 사건에 맞닥뜨렸을 때 그들이 겪은 고뇌,그리고 택한 행동등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그렇다면 솔즈베리가 본 모와 등의 모습은 어떠한가. 그는 모택동이건,등소평이건 역대 중국의 통치자들과 한치도 다름없는 「황제」라고 평가했다. 왕조시대의 황제들이 고전과 사서에 의존해 백성을 다스렸듯이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얇은 베일 뒤에 숨은 모와 등도 똑같은 통치이데올로기를 사용했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모와 등은 「새로운」황제라는 게 지은이의 결론이다. 그러나 「황제」라는 칭호가 억압적인 통치자의 의미로 쓰인 것은 아니다. 지은이는 11세기에 편찬된 사서 「자치통감」에 나오는 『폭력을 방지하고 해악을 제거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님으로써 백성의 생활을 보호하며,선행을 보상하고 악행을 벌함으로써 재앙을 피할 수 있는 자,이런 사람이라면 가히 황제로 불릴만하다』는 대목을 인용,그들의 역할을 긍정했다. 이 책은 발간이후 전문가들로부터 「모와 등 두사람에 대한 개인적인 기술을 통해 중국현대사를 전체적으로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번역은 박병덕전북대교수와 박월라씨(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부설 지역정보센터 중국담당)가 나누어 맡았다.
  • “백제역사·미술·음악사의 총합체”/「금동용봉향로」발굴의의를 말한다

    ◎“불교·도교사상에서 신앙·풍속까지 포용/“퇴폐로 내부붕괴” 기존의 시각 완전 불식/정밀투시촬영 통해 명문 찾아내면 획기적 자료 고대왕국 백제의 신비를 간직한 금동용봉봉래산향로의 출토는 무녕왕릉에 이은 백제강역 최대의 고고학발굴 성과로 꼽히고 있다.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인 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에서 출토된 이 향로는 특히 백제 후기 시대사연구의 귀중자료로 부각되었다. 이와 더불어 미술사 및 음악사·사상사·민속연구 등에도 큰 도움을 줄 것으로 학계는 전망했다. 그래서 서울신문은 이 향로의 발굴성과를 정리하고 학술적 의미를 부여하는 전문학자의 대담을 마련해보았다. ▲최몽용교수=한해가 저물어가는 마당에 부여에서 소위 박산로가 하나 나왔습니다.삼불 김원용선생이 돌아가신 것과 함께 올해 역사·고고학계의 큰 일로 기억될 것같습니다.이 박산로는 철저히 파괴되었으리라는 마지막 도읍지 부여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전혀 예기치 못했던 물건이 아닌가 합니다.해외에 내보내도 정말 손색이 없는 유물 하나를 건진 셈입니다.무령왕릉 발굴이후 최대의 경사입니다.그러나 나온 물건이 워낙 대단하다보니 유물에만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느낌입니다.박산로가 나온 배경도 좀 살펴봐야하지 않을까요. ▲이기동교수=그렇습니다.그동안 백제말기의 분위기는 퇴폐적인 것으로 묘사되곤 했습니다.그런데 문화는 국력에 비례하게 마련이지요.백제말기에 이런 탁월한 공예품이 나왔다는 점에 미루어보면 백제가 노쇠기에 접어들어 내부붕괴가 가속화되는등 지리멸렬해져 멸망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고구려의 경우도 말기인 6·7세기의 벽화를 보면 웅혼한 기상이 살아있어요.국력이 쇠퇴하면 미술이나 공예도 타락상을 보이는 법입니다.그러나 고구려나 백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특히 백제의 경우는 비록 전성기는 아니라 하더라도 한창 국력이 뻗어나가려는 즈음에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았다고 보아야 합니다. ▲최교수=중국 한대에 박산로는 왕통을 잇는다는 상징성을 지닌 물건이었습니다.태자를 지명할때 박산로를 주었지요.또 박산로는 귀족도 아닌 왕의 무덤에서만 출토됐습니다.이렇게 볼때 비록 7백여년의 시차가 있지만 능산리 박산로는 백제의 왕과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박산로가 출토된 곳은 나성의 동문밖입니다.발굴유구를 보면 이 박산로는 그 자리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국가존망의 위기가 아니었으면 그런 곳에 묻혀있을리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이때문에 의자왕이 나당연합군에 패주하다가 묻었을 것이라는 추정이지요.당시의 다급했던 모습이 눈앞에 선합니다. ▲이교수=이 박산로의 제작시기는 6세기후반이라기보다는 7세기전반으로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물론 만들어놓고 오랫동안 간직했을 수도 있어요.하지만 백제말기에 해당하는 무왕과 의자왕시대는 사원의 건축이 활발했을뿐 아니라 공예도 융성했던 시기였습니다.박산로가 만들어진 시기도 그 연장선상에서 보아야할 것같습니다. ▲최교수=어떻습니까.이 향로가 앞으로 여러 방면의 학자들에게 일거리를 제공하지 않겠습니까. ▲이교수=그렇습니다.얼핏 생각해도 역사학과 미술은 물론 수많은 주악상은 우리 음악사를 규명하는데도 큰 도움이 되겠지요.여기에 불교와 도교사상등 신앙과 풍속까지를 포함했기 때문에 향로 하나가 수많은 과제를 안기고 있습니다. ▲최교수=얼마전 스위스에서 발견된 청동기시대의 미이라 하나가 생활연구에서부터 해부학까지 연구에 큰 진전을 가져온 것과 비슷하군요.이 박산로로 또 「백제의 얼굴」을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지금까지 백제인의 얼굴이 드러나 있었던 것은 서산마애불과 산경문전 뿐이었어요.백제인의 얼굴이 부드러운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던 것도 이때문이지요.부처님 얼굴이었으니까요.그런데 이 박산로의 인물상을 보면 악기를 타면서도 얼굴표정이 약간은 경색되어 있어요. ▲이교수=향로의 제작연대 추정과 무관치않은 지적입니다.그 시기는 결국 삼국항쟁의 마지막 고비였어요.장기간에 걸친 전란속에서 먹느냐 먹히느냐는 사활이 걸린 상황에서는 사람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나타나게 마련입니다.문화는 사회상을 반영하니까요. ▲최교수=한대 박산로가운데는 한사군설치의 주역인 무제의 형인 중산정왕의 능에서 1972년에 발굴된 것이 있습니다.기원전 154년에 즉위했다가 기원전 113년에 죽었지요.이것을 하한으로 이후 것은 중국에서는 나오지 않고 있어요.국립중앙박물관에는 유력자가 중국에서 얻어온 것으로 추정되는 낙랑시대 박산로가 있습니다.이것이 한반도에서 유일한 것으로 알려졌지요.한대 박산로와 능산리의 그것은 약 7백70년의 공백이 있습니다.둘은 몸체는 비슷하지만 뚜껑 위쪽의 봉황과 다리부분의 용은 완전히 다릅니다.그렇다해도 앞으로 능산리 박산로가 백제 것이냐 수입품이냐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결국은 백제가 그 주역으로 결론이 내려지리라는 생각입니다만.백제의 공예기술이 뛰어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은 이교수께서 깊이 연구하셨지요. ▲이교수=청동기시대의 청동기 장인은 왕이나 귀족에 버금가는 신분으로 대접받았습니다.신라의 경우에도 성덕대왕신종이나 황룡사종을 주조하는 전문기술자에게는 관직을 부여할 만큼 우대했어요.그들은 당당한 관인이었습니다.마르크스는 이들 기술자를 노예라고 생각했지만 절대 그렇지 않아요.제가 알기로는 백제의 경우는 공예가들에 대해 더욱 남다른데가 있어요.백제하면 와당이 떠오르지요.일본측 기록을 보면 6세기말 백제의 와박사와 노반박사를 초청했다는 대목이 있어요.노반박사는 뛰어난 금속공장에 대해 국가가 부여한 지위입니다. ▲최교수=사실 신라는 백제기술자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지요. ▲이교수=신라의 1급문화재라고 하는 것은 대부분 백제의 도움을 받았지요.황룡사탑을 백제의 아비지가 세웠다는데서도 알 수 있지요.경주의 안압지도 사실 사비성시대 부여의 궁남지를 모방해 만든 것입니다. ▲최교수=결국 그같은 백제의 기술자육성정책이 뛰어난 박산로를 만들 수 있게 했다는 결론으로 자연스럽게 이끄는군요.이제부터 문제는 박산로가 백제문화의 정수를 아낌없이 보여주었지만 그 기원을 어디서 잡아야 하느냐는 겁니다.냉정하게 백제문화가 어디까지가 본질적인 것이고 외부로부터는 얼마만큼의 영향을 받았느냐는 것을 따져보아야 하겠습니다. ▲이교수=백제의 역사나 문화에 있어 중요하게 고려해야하는 것은 그 지리적 위치입니다.육로로는 고구려를 통해 북방문화를받아들이고 바다로는 중국 특히 양자강이남 오·월의 문화를 받아들였어요.중국의 문화를 수입하는데도 북쪽의 야성적인 호주의 문화와 우아하고 섬세한 한주의 문화를 받아들여 융합시켰어요. ▲최교수=박산로에서도 백제적 요소가 많이 드러나지요.연화문과 산경문이 특히 그렇습니다.이것들은 백제의 심벌과도 같은 것이지요. ▲이교수=이 박산로를 보면 도교신앙이 의외로 백제의 민간이나 지배층에 유행하고 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고구려의 경우 연개소문이 도교에 깊이 빠지는등 번창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백제나 신라는 남아있는 기록이 없어요.그러나 백제에서 도교가 성행했다는 것은 여러가지 자료를 통해 추측만을 했을 뿐이지요.근초고왕의 북진의욕에 대한 막고해장군의 『분수를 알고 나아가지 말자』는 진언이 그것입니다.또 무령왕릉 지석의 「불종율령」도 좋은 예가 되지요.「불종율령」은 「왕은 법을 초월하는 존재」라는 식으로 글자 그대로 해석하기도 했지만 사실은 마치 「수리수리마수리」와 같은 상투적인 도가적 주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일본의 우에다교수같은 학자는 일본의 고대도교도 백제에서 건너갔을 것으로 생각하더군요.능산리 박산로는 그 관계를 밝히는 유력한 물적자료가 될 것입니다.이처럼 사상적으로 볼때에도 이 향로는 백제의 진수를 보여주는데 모자람이 없습니다. ▲최교수=무령왕릉은 발굴결과 기록과 부합되었지요.이 향로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이교수=아직은 명문이 발견되지 않았다지요.그러나 명문이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칠지도와 일본 하치망의 인물화상경에서도 뒤늦게 명문이 발견됐지요.일본에 있는 가야의 환두대도에도 명문이 새겨져 있습니다.금속제품에는 이처럼 명문은 새기는 것이 상례입니다.능산리 박산로도 꼭 정밀투시촬영을 해보아야 합니다.여기서 명문이 확인된다면 그야말로 미술뿐 아니라 역사를 구성하는데도 아주 긴요한 자료가 될 것입니다. ▷긴급대담◁ □이기동 ◇서울대문리대 사학과 동대학원졸업 ◇경북대교수 ◇현 동국대교수 ◇저서:「신라골품제 사회와 화랑도」등 많음 □최몽용 ◇서울대문리대 고교학과 동 대학원졸업 ◇미하버드대 대학원(석,박사) ◇현 서울대교수 ◇저서:「한국문화의 기원을 찾아서」등 많음
  • 중국 젊은이 우상이 바뀌고 있다

    ◎모택동대신 성룡·유덕화 등 스타 더 인기 중국 젊은이들의 우상이 바뀌고 있다.마르크스 레닌 모택동대신에 성용 유덕화 임청하등 홍콩의 인기스타들이 청소년들의 심중을 사로잡고 있다. 배우나 탤런트 가수등 인기스타를 따르고 흠모하는 열기가 어찌나 거센지 「추성주」이란 신조어까지 생겨났다.10대 후반의 중고등학생들이 대부분인 이들 추성주은 중국보다는 홍콩이나 대만의 인기 연예인들을 흠모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게 특징이다. 중국사회가 탈이념화 탈정치화를 추구하면서 서방세계 어디서든 쉽게 볼수있는 이같은 청소년문화가 사회주의 중국에서도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젊은이들은 왜 자신들이 배우에게 흠뻑 빠져드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중국청년보에 따르면 홍콩배우 유덕화를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한 중학생은 한참 생각하더니 『그것은 그가 머리를 수그릴때의 온유함때문이다.낮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다가 홀연히 머리를 돌릴때가 가장 매혹적이다』고 대답했다.정지화를 좋아하는 것은 『사람과 노래와의 조화때문에』,곽부성은 『멋있게 생겼기 때문에』등등 이유도 갖가지다. 『왜들 학생들이 추성주이 되고 있느냐』는 물음에 한 여학생은 『1천명의 추성족에게는 1천가지 이유가 있다』고 대답했다.연예인들은 모두 각자의 특징과 서로 다른 경력,흥취,애호를 가지고 있다.심지어 하나의 눈길,하나의 미소가 추성족을 양산해내는 이유가 된다. 청소년들 가운데서 스타들의 면모,예를들어 나이 별명 체중 취미 식성 등등의 분야를 잘 알고 있으면 친구들로부터 인기를 독차지할수도 있다.그래서 적지않은 청소년들이 「스타신상명세표」를 만들어 휴대하고 다닌다.스타로부터 친필서명을 받았다하면 그 학생의 위신은 백배나 높아진다.그래선지 요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가장 숭배하는 인물을 조사해보면 모택동이나 주은래등 정치인은 거의 찾아볼수 없고 대신 인기스타들로 가득 채워지고 있으며 장래희망을 조사해봐도 60%가량이 스타가 되는 것이라고 대답한다고 중국신문들은 전하고 있다. 중국대륙에도 많은 유명가수와 배우들이 있다.하지만 홍콩이나 대만의 명배우가 한번 중국대륙에 발을 디뎠다하면 거대한 파문을 일으킨다.이곳 신문들은 『광기』라고까지 표현하고 있지만 그 이유는 『그들은 포장이 좋다』는등 특별한게 거의 없다.그저 좋으니 좋다는 정도다. 중국사회과학원의 왕숭광박사는 『요즘 청소년들이 찾고 있는 것은 직관적인 형식이지 추상적인 이념이 아니다.상업성이 농후하고 속식주의인 항대문화가 청년들의 구미에 잘 맞는다』고 설명한다.그런가하면 중국예술연구원의 한 간부는 『변혁의 시기에 금전만능주의등 일부 불량한 사회풍기의 영향으로 가치관이 확립되지 못한 청소년들이 홍콩이나 대만의 문화나 생활방식에 신선감을 느끼고 흠모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요즘 중국신문들을 펼쳐보면 청소년들의 머리속에는 「명성」(인기스타)밖에 없어서 평상시의 생활이나 학습이 큰 영향을 받는다고 개탄하는 소리가 많아지고 있다.중국공산당의 이론지로 불리는 광명일보는 최근 『하필이면 추성인가』라는 한 사회중심 이슈 분석기사에서 『많은 학교와 학부모들이 관심을 두는 것은 학생들의 학습성적과 건강에 그치고 있다.정상적인 문화오락활동마저 제대로 경험할수 없으니 그들의 개성이나 가치관을 어떻게 키워갈 것인가』고 개탄했다.또 당기관지 인민일보도 독자투고란을 통해 홍콩이나 대만가수들이 중국TV에 너무 범람하고 있는데 대해 자제하도록 권고하는 서신을 소개하기도 했다.
  • 중 보수파/「등사상」 반발 탄원서 제출

    ◎일부 원로들/“지나친 격상,헌법기반 결여”/당단합위해 처벌않기로 【홍콩 연합】 중국 보수파 원로들의 산실이었던 중국공산당 중앙고문위원회 소속 보수파 원로들이 「등소평사상」에 강력히 반발하는 대담한 탄원서 2건을 정치국에 제출해 파란을 일으켰다고 홍콩의 권위있는 영자지 사우스 차이나 모닝포스트가 4일 크게 보도했다. 보수파 원로들은 이들 탄원서에서 「등소평사상」의 지나친 격상에 불만을 표시하면서 『등소평의 이론과 저작들이 모택동과 마르크스와 레닌의 저작과 이론들과 똑같은 지위로까지 격상된다면 헌법과 당헌을 개정해야 한다』고 말하고 개혁파들의 등소평 숭배는 헌법적 기반이 결여돼 있음을 지적했다고 포스트지는 말했다. 포스트지는 이같은 탄원서들이 지난달 「등소평문선」제3권이 발간되자 곧 정치국에 제출됐으며 중국공산당이 마르크스주의·레닌주의·모택동사상의 중요성을 강조한 「4항기본원칙」을 엄격히 준수해야 할 것임을 촉구했다고 전했다. 정치국은 보수파 원로들의 탄원서들을 접수해 조직과 규율담당인정치국 상무위원 호금도가 처리토록 조치했으며 호는 사안을 검토한후 원로들이 당내에 수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있는 점을 감안,당의 단합을 위해 처벌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포스트지는 말했다.
  • 러 공산당 “뜻밖의 선전”/모스크바=이기동(특파원코너)

    ◎총선 보름앞… 지지율 5∼10% 확보 보름 앞으로 다가온 러시아 총선의 주관심은 옐친지지후보들이 의석의 과반수를 차지,정치안정을 이룰 수 있을지와 새 헌법채택 여부라고 할 수 있다.하지만 선거라는 게 늘상 그렇지만 이와함께 「부차적」인 흥미거리는 얼마든지 있다.그중의 하나가 선거에 참여한 13개 정당의 하나인 공산당의 선전여부이다. 지금까지 「러시아공산당」은 기대 이상의 선전을 하고 있다.매주 일요일 저녁 방영되는 텔레비전 주간뉴스 시사프로그램 「이토기」에서 발표하는 지지율에서 이들은 꾸준히 3위권을 지키고있다.전국의 유권자 1천2백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이 지지도에서 금주 1위는 지난주에 이어 가이다르총리가 이끄는 친옐친정당 「러시아의 선택당」이 차지했다.이들은 지난주 16%에서 22%로 지지율이 껑충 뛰었다.2위는 9%를 기록한 야블린스키당,그다음 「러시아공산당」이 5% 내외의 지지율로 3위권을 지키고 있다. 러시아에서 공산당 간판을 단 단체들은 7개가 있었으나 이중 6개는 옐친대통령의 특별포고령에 의해 이번총선참여가 금지됐다.유일하게 남아 총선에 참여하는 것이 구소련공산당 선전국장 출신의 겐나디 주가노프(49)당수가 이끄는 「러시아공산당」이다.이들이 선전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으나 가장 강점은 역시 고정 지지세력이 있다는 점이다.이들은 전국에 50만당원을 확보하고 여러 여론조사에서 5∼10%의 지지율을 항상 유지하고 있다.다른 정당들이 표를 모으기 위해 좌우노선 구분없이 잡다한 공약을 내세우는데 반해 이들이 내세우는 노선은 선명하다.「임금·가격동결,국가통제경제로의 복귀,사회복지제도 확충,소수의 부자들이 다수의 민중을 착취하는 개혁 반대」등 마르크스식 논리로 무장해 소위 소외계층의 일관된 지지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현재 비교적 노선이 유사한 「농업당」과 후보단일화에 합의했고 극우민족주의자 바부린이 이끄는 「러시아인민연합」을 비롯,군소정당들과 후보 단일화를 모색중이다.내로라하던 반정부 공산주의자들이 모두 총선출마가 금지됐기 때문에 지명도가 현저히 약화돼 이들과의 연대는 세확장에 상당한 기여를 할 것이라는 분석들이다. 이들 공산주의자들의 최대목표는 폴란드나 발트국가들에서와 같이 권력을 재탈환하는 것이다.물론 러시아에서 공산당이 재집권할 것이라는 분석은 현재로서는 현실성이 없다.그러나 개혁이 지지부진해 소외계층이 계속 늘어난다면 「혁명은 필연적으로 또 일어난다」는 게 이들의 신념이다.그 혁명의 합법적인 교두보 마련이라는 점에서도 이들의 의회진출은 관심거리다.
  • 사회주의 시장경제 「비법」 전수/강택민 「20시간 쿠바방문」 배경

    ◎중­소분쟁이후 오랜 앙숙관계 청산/군중 열렬한 환영,「오늘의 동지」 과시 ○최고의 훈장 받아 아·태경제협력체(APEC)정상회담에 참석했던 강택민 중국 국가주석이 다음 행선지인 브라질 공식방문에 앞서 잠시 쿠바에 들러 하룻밤을 묵는 동안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중국 TV에서는 강주석이 쿠바 최고의 영예인 호세 마르티 훈장을 받는 모습으로부터 피델 카스트로 대통령과의 뜨거운 포옹,공항주변 연도에 나온 수많은 군중들의 열렬한 환영모습 등을 비춰주고 있어서 불과 몇년만에 세상이 많이 바뀌었음을 실감케 했다. ○카스트로와 포옹 소련과 동구에서 사회주의체제가 흔들리기 이전까지만 해도 중국과 쿠바는 견원지간이었다.카스트로가 혁명에 성공한 직후인 60년 중국이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 가운데 처음으로 쿠바와 국교를 맺을 정도로 양국관계는 처음에는 좋게 출발했으나 곧이어 시작된 중소분쟁의 와중에서 쿠바가 철저하게 친모스크바 노선을 추종하자 서로 등을 돌린채 살아왔었다.그래서 카스트로는 중국을 「이단자」로 공격하기도 하고심지어는 비동맹회의에서 세계의 불행이 미국과 그 동맹국인 중국에 있다고 까지 비난했을 정도였다. 그토록 매정하게 중국을 매도하던 바로 그 카스트로가 지난 21일밤 아바나의 혁명궁에서 벌어진 강주석 환영 리셉션에서는 『영원불멸의 마르크스 레닌주의 사상을 중국 현실에 맞도록 영명하게 적용시켰다』고 극구 찬양하는가 하면 중국인구가 거대함을 들어 『아직도 세계 인구의 5분의1 이상이 사회주의 깃발 아래 살고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미­중 싸잡아 비난 하지만 중국의 진짜 속마음은 무엇일까.북한 베트남 등과 함께 얼마 남지 않은 사회주의 국가들을 모아 맹주 노릇을 꿈꿀 것인가.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게 중론이다.쿠바로서는 붕괴된 소련 대신 중국을 맏형으로 모셔 의지하고 싶은 생각이 있을지 모르지만 중국으로서는 그게 오히려 부담이 될 수도 있다.이런 점에 비추어 얼마 남지 않은 사회주의 국가들이 더 이상 붕괴되지 않은채 견디어 주기만을 바라고 있는게 중국의 속마음인지도 모른다.그래서 사회주의체제를 허물지 않고도시장경제체제를 받아들일 수 있는 비법을 전수하는게 가장 큰 쿠바방문 목적중의 하나가 되지 않을까 추정되고 있을 정도다. ○위싱턴방문 좌절 강주석의 쿠바방문이 불과 20시간에 불과하고 그것도 시애틀 APEC회담 이후 워싱턴을 방문하려던 당초의 희망이 「한국과의 선약」을 이유로 미국측이 반대하는 바람에 아바나 기착이 결정되지 않았나 하는 인상마저 주고 있기 때문이다.
  • “공산주위에도 「진실의 씨앗」”/교황 요한 바오르2세,회견서 강조

    ◎「공동체에대한 관심」 긍정 평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2일 방종한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 공산주의가 많은 결점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인 면과 보존돼야할 「진실의 씨앗들」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요한 바오로 2세는 이날 보도된 이탈리아 토리노의 라 스탐파지와 기자회견에서 전체주의가 인간의 정신과 창의력, 시민으로서 책임의식같은 것들을 파괴시켰으며 『그것이 사회주의든 공산주의든 불의한 전체주의 체제에 맞서 싸우는 것은 정당한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그는 사회주의가 「일부 진실의 씨앗들」을 내포하고 있으며 『이들 씨앗들이 파괴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밝혔다. 교황은 『자본주의가 개인주의에 치우치는 반면 공산주의에는 공동체에 대한 관심이 있다』면서 그러나 사회주의 국가에서 『이같은 관심은 국민생활의 많은 분야가 퇴보하는 값비싼 대가를 치렀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많은 국가들이 노동자들의 보호를 위해 사회적 안전망을 도입했기 때문에 19세기말과는 다른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그러나 아직도 몇몇국가들은 19세기말과 거의 비슷한 정도로 「원시적인 자본주의」를 실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교황은 오늘날 보다 인간적인 자본주의는 「상당부분 사회주의적 사고」와 노조의 투쟁 덕분에 발전해왔다고 강조했다. 지난 89년 조국 폴란드의 공산주의 몰락에도 큰 영향을 끼쳤던 교황은 또 동구권국가들이 발전되고 물질주의적인 서구와 접촉함으로써 생길 득실에 대해 『주저없이 손해가 많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하고 그 이유로 『동구권 국가들은 전체주의체제를 거치면서 쌓은 경험을 통해 스스로의 주체성이 무르익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같은 주체성이 공산주의를 통해 완성됐느냐는 질문에 대해 『오히려 자위와 마르크스 전체주의에 대한 투쟁을 통한 것』이라고 답변했다. 교황은 이어 『극단적 자본주의 신봉자들은 공산주의가 이룩한 좋은 것과 실업에대한 투쟁,가난한 사람에 대한 관심을 어떤 형태로든 무시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덧붙였다.
  • 러시아 정교회의 시련/이성은 원불교 기획실장(굄돌)

    러시아 정교회가 최근 심각한 고뇌의 늪에 빠져 있는 것 같다. 1천년 가까이 러시아 제국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 온 정교회는 19 17년 혁명 이래 교회재산을 공산당에 몰수 당하고 성직자는 공민권을 제한 당하는 박해를 받아 왔다. 1985년 「고르바초프」의 개방개혁 정책이 수행될 때까지 종교는 이름만 있을 뿐이었다. 공산체제가 무너지면서 소련의 종교들은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마르크스­레닌」사상을 대신해서 종교가 국민의 정신적 공백을 메우고,자주적 인간으로서의 행동을 인도할 수 있는 새로운 힘의 역할을 하고자 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러시아 정교회를 비롯한 구 소련 내의 각 종교들이 재정비를 서둘렀다.그러나 잠에서 막 깨어나자마자 또 다른 시련이 닥쳐왔다. 러시아 종교들의 힘보다 돈의 위력이 더 강했던 것이다.특히 재력을 앞세운 서방세계 선교사들의 무분별한 선교 공략에 러시아 종교들은 속수무책인 것 같다. 지난 10일,한국과 CIS 종교인 회의 참가차 한국에 온 플라톤 대주교는 『러시아는 지금 양심없는 사람들이 주인으로 등장했다』면서 서방 선교사들의 선교 공세를 비난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평화와 사랑을 가져다 주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며 신앙의 기초인데,신앙을 옹호하는 자들이 형제적 관계의 모범을 보여주지 못하고 실용주의적 원칙에 얽매이는 것은 슬픈 일이라고 개탄하였다. 『러시아는 선교사들의 활동무대가 되는 그 무슨 벽지가 아니라 천년의 역사를 가진 전통적인 교회들,그리고 역사적 종교의 영향으로 꽃을 피운 독창적인 문화를 자랑하는 나라이므로 그 종교들을 도와주고 극히 정중하게 대해 주어야 할 것』이라는 그의 요청은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말에는 외국 선교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한국의 종교인들도 귀를 기울여야 할 것으로 느껴졌다. 러시아 정교회가 겪는 오늘의 시련은 어쩌면 과거 우리나라 전통 종교들이 겪었던 시련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 중국,21세기 「중화경제권」 꿈꾼다(심층취재)

    ◎작년 무역고 세계11위… 그 저력은/개방정책 15년째… 연평균 8.9% 성장/각국자본 유치… 배불리 먹는 「온포」 달성/홍콩 등 세계 3천만 화교와 연계… 경제대국 줄달음 다가오는 21세기 아시아·태평양시대의 주역은 어느나라가 맡게 될까.요즘의 중국경제를 현장에서 바라보느라면 적어도 아시아권에서는 일본과 중국이 다음 세기를 이끌어갈 쌍두마차가 되겠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물론 현단계에서 중국의 경제발전수준이나 국민소득 등을 보면 아직도 후진국범주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하지만 지난 79년부터 시작된 개혁개방을 통한 경제건설이 열매를 거두어 경제적 도약단계에 접어든데다 방대한 국토의 엄청난 자연자원,전세계인구의 22%를 차지하는 인력자원,이미 세계경제의 선두를 달리는 홍콩·대만·싱가포르를 비롯,전세계 곳곳에서 상권을 쥐고 있는 3천만 화교들과의 경제적 유대,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중국인들의 불타는 경제건설욕망 등을 보면 멀지않아 세계경제의 중심이 중국대륙으로 이동해가지 않을까 하는 느낌마저 들게 한다. ○경제특구 4곳에 사실 중국에서 실용주의자 등소평이 등장,마르크스­레닌주의식 경제운용방식을 멀리하면서 오는 2000년까지 농업·공업·국방·과학기술 등 4개부문의 현대화를 달성하겠다고 선언한 78년말만 해도 그들의 경제력은 보잘것없었다.그들 스스로가 10년내 온포(배불리 먹는 문제)단계를 거쳐 20년안에 소강(여유있는 생활)단계로 넘어가겠다는 게 목표였다.그리고 그 목표는 무난히 달성돼가고 있다.현재 11억7천만 인구의 먹고 입는 문제가 해결됐는데,이는 중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등소평의 개혁개방은 이웃의 경험을 이용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우선 다행인지 불행인지 중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나라중엔 북한·러시아·아프간·인도·미얀마·베트남 등 어느 하나 잘사는 나라가 없다.다만 중국이 자기네 영토라고 주장하는 몇몇 지역만이 잘살고 있다.이들 잘사는 지역중 홍콩부근의 심수,마카오주변의 주해,대만 건너편의 하문,그리고 홍콩 최대갑부 이가성의 고향인 산두 등을 80년에 경제특구로 선정,자본주의식기술과 경영기법이 대륙으로 흘러들도록 했다. 그후 아무래도 해외문물을 접하기 쉬운 연해도시들을 개방한데 이어 9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턴 내륙지방에 대한 본격개방이 시작됐다.내륙에서는 우선 양자강을 끼고 있는 이른바 연강도시들에 이어 철로교통요지들인 연선지역,국경을 접하고 있는 연변도시들이 개방대열에 합류하게 됐다. 지금까지는 이같이 연해·연강·연선·연변도시들을 대상으로 한 이른바 4연개방을 주축으로 개혁개방을 추진해오고 있는 것이다.이를 통해 중국은 그동안 연해지구와 내지,동부지구와 서부지구로 갈라져 현격한 차이를 보이던 경제격차를 해소하는 동시에 내지 곳곳에 위치한 자연자원밀집지구로 개혁개방열기가 스며들도록 하고 있다. 개혁개방을 추진해오는 동안 시련도 많았다.79년부터 지난해까지 연평균 8·9%라는 고도성장을 이룩한 반면 개혁개방으로 자본주의의 부패타락이 들어오고 빈부격차로 계층간 갈등이 심화되며 결국은 서구자본주의국가들의 화평연변정책으로 체제붕괴를 초래할 것이라는 비난까지도 감수해야했다.무엇보다도 큰 시련은 89년의 6·4천안문사태와 그후 일어난 소련·동구의 체제붕괴를 들 수 있다.다행스럽게도 중국은 등의 개혁개방 덕분으로 다른 사회주의국가들과는 달리 붕괴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을 뿐아니라 오히려 요즘은 시장경제체제도입과 더불어 경제건설에 완전 자신감을 갖게 됐다.멀지않아 GATT(관세무역일반협정)체제에 가입함으로써 자유세계 경제권에 합류할 준비를 하고 있으며 그동안의 수출드라이브정책이 성공,지난해 무역액이 한국을 제치고 세계11위로 도약했다.그런가 하면 홍콩기업체중 36%가 중국에 공장을 갖고 있을 정도로 홍콩·마카오·대만을 비롯한 해외화상들과의 연계가 깊어져 중화경제권 형성도 시간문제일 뿐이라고 국제경제전문가들은 예고하고 있다. ○GATT 곧 가입 요즘은 시장경제를 도입,정착시키는 데 여념이 없다.그동안 시장경제적 요인을 많이 도입했으나 지난해말 당대회에서는 사회주의시장경제 도입을 그들의 당헌에까지 삽입했다.다만 시장경제 앞에 「사회주의」라는 접두어를 붙인 것은 앞으로도소유방식이 공유제를 주로 하고 사유제를 보완적 수단으로 활용하겠다는 뜻을 갖고 있다. 현재 소유형태별 생산규모를 보면 국영기업이 55%,향진기업이나 주식회사등의 집체기업이 35%,개체호나 3자기업등 사영업체가 10%를 각각 점하고 있다.이는 81년 당시 78.3%,21%,0.7%등과 비교하면 사유부문의 대폭증가를 보여주고는 있으나 아직 공유부문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다. 이같이 공유부문이 주종을 이루고 분배방식도 주주에게 이익금을 나눠주는 자본분배보다는 노임과 같은 노동분배를 주가 되도록 유지해나가겠다는 게 바로 사회주의시장경제이며 중국특색의 사회주의라고 중국신문들은 설명하고 있다. 중국이 시장경제를 추진하면서 중앙계획경제분야가 대폭 줄어들어 상부의 간섭이 없어지고 거의 모든 상품가격도 시장가격으로 결정되고 있다.이제는 기업체가 마음에 안드는 노동자를 해고할 수도 있고 마음에 드는 기술자를 초빙할 수도 있으며 일을 잘하면 노임을 올려주고 그렇지 않으면 깎아내릴 수도 있다.그래서 사회주의하에서 일을 잘하든 말든 똑같은 대우를 받던 「그 좋던 시절」은 이제 사라지고 있다. 시장경제추진과 더불어 지난해부터 3차산업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지고 있다.시장경제를 제대로 추진하자면 이 분야를 발전시켜야 하는 것으로 이해한 것 같다.올해 1·4분기중 3차산업 투자가 전년 동기비 1백25%나 늘어나고 있는 것은 수송·금융·정보·식음·유통등 3차서비스산업에 대한 일반주민이나 당국의 관심이 얼마나 지대한지를 엿볼 수 있다.요즘 중국에서는 「하해」라는 말이 크게 유행하고 있다.이는 자기본래의 직업을 버리고 시장경제라는 바다속에 뛰어들어 장사에 손을 댄다는 뜻으로 수많은 젊은이들이 이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 ○물가고가 난제로 중국경제가 발동이 걸려 잘 움직여가고는 있으나 여기에도 장애요인은 얼마든지 있다.그것은 아직도 남아 있는 관료주의와 무사안일주의적 근무태도,전체 국영기업의 3분의 1이 적자에 허덕이고 있는 점,여기에다 그동안 사회간접자본투자에 소홀했던 점도 큰 짐이 되고 있다. 지금까지는 연해지역에 대한 개발이 많아 육로수송에별문제가 없었으나 현재 철도화물적체율이 40%에 이르고 수송에너지·통신·원자재분야에 병목현상이 예상되고 있어서 이 분야의 막대한 투자가 필요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이와 함께 경제건설에서 소외되게 마련인 농민문제가 남아 있다.최근 사천성에서 각종 잡부금문제로 농민소요가 발생한 것은 그만큼 전국적으로 농민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다는 반증이라고 서방관측통들은 분석한다. 올해 들어서는 경제과열이 또다시 문제로 등장하고 있다. 88년 하반기부터 실시된 경제안정화정책(치이정돈)이 끝나기가 무섭게 지난해 12.8%의 경이적인 고도성장을 이룩한 데 이어 지난 1·4분기에는 14·1%라는 과열경제양상마저 나타나고 있다.불과 3개월만에 전국 평균소비자물가가 8.6%나 오른데다 전국 35개 주요도시의 생계비는 15.7%,국영기업의 고정자산투자 70.7%,2차산업투자 38.1%등등을 볼 때 확실히 과열징후를 보이고 있어서 당국에선 이자율인상등 조치를 취하며 다소간 열기를 식히려 하고 있다. 중국당국은 과열경기를 진정시켜 연 10%안팎의 성장을 유지해갈 것으로 보인다.과거 천안문사태 직후처럼 강력하게 경기진정책을 쓰지는 못할 것이라는 얘기다.그것은 아직도 중국의 최고실권자로 평가되는 등소평이 최근 『경제발전의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라』며 고도성장을 당부한 말을 함부로 어길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 지식암기보다 지혜·창의력에 중점/유태민족 영재교육 본받자

    ◎한국우주정보소년단 심포지엄/이스라엘,교육예산 37% 꿈나무 육성 투자 이스라엘은 천연자원도 없고 인구도 우리의 8분의1 밖에 안된다. 세계 인구의 0.4%도 안되는 유태인들이 노벨상 제정이후 경제부문에서 65%,의학 23%,물리학 22%,화학 11%,문학 7%나 휩쓴 배경은 무엇일까. 올해는 과학교육의 해.과학교육의 해를 보내며 한국우주정보소년단(총재 이상희)은 26일 서울교육문화회관에서 「이스라엘 영재교육을 중심으로 한 정보·과학 꿈나무육성 심포지엄」을 개최,이스라엘 교육을 모범삼아 21세기 정보화사회에 대비한 우리 청소년들의 과학교육 향상을 꾀해 나가야 할것임을강조했다. 이날 세미나에서 이상희박사는 『2000년대 한나라의 훌륭한 자원은 교육의 경쟁력』이라고 전망,『이스라엘민족이 과학기술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등의 세계적 인물을 배출한 데는 한마디로 가정을 중심으로 한 어머니의 자녀교육과 영재육성을 위한 체계적 학교교육에 있다』고 강조했다.이스라엘의 어머니는 예를들어 자녀에게 「종이」를 가르칠 때 단순히 이름(지식)만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제조과정과 역사,종류 등 종이에 대한 전반적인 「지혜」를 알려준다.유태인인 아인슈타인은 만년에 회고하기를 『나는 천재가 아니다.다른사람보다 호기심이 많았고 지적탐구를 위한 모험을 즐겼을 뿐』이라고 했다.소아마비 왁친을 발견한 에드워드 소크는 『나는 왁친을 발견하기까지 수천번의 실험을 했다.내가 이같은 실험정신을 갖기까지에는 어머니가 매일 새로운 요리를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고 밝혔다.유태인 어머니는 자녀의 창의력과 모험심을 길러 주기 위해 매일 먹는 음식도 메뉴를 달리할 정도로 작은 부분까지 무척 신경을 쓴다.미국의 학교들에서 끈질기게 질문하고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은 유태인인 경우가 많다고 할 정도인 것. 이날 세미나에서 아나하임 주한 이스라엘대사는 『유태인의 높은 업적과 성취동기는 교육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밝혔다.이스라엘 정부는 매년 교육예산의 37%를 어린이 영재교육 부문에 투자하고 어머니의 자녀교육을 돕기 위해 중앙정부와 학교,지역사회간의 협조도 긴밀하다.정부는 영재교육전담부서를 두어 10여개의 영재교육 특수학교를 운용한다.이 학교는 전체 학생의 성적상위 15%만 시험을 보게 하고 그 가운데 1∼3%를 특수 프로그램에 참여시킨다.영재학생들은 1주일에 5일은 보통학생과 마찬가지로 지역학교에 다니면서 사회성을 기르고 하루만 영재프로그램이 있는 중앙학교에 나간다.영재과목은 수학,화학,미생물학,예술과 미술조각,신문학,유전공학,컴퓨터 등 20여개이다. 이날의 세미나에서 참석자들은 물리학자 뉴턴이나 상대성원리의 아인슈타인,고흐,자멘호프,수소폭탄의 아버지 오펀하이머,마르크스(유물론)등은 바로 전통적 유태 교육을 배경으로 키워진 인물들임을 재인식,우리도 국가의 자원빈곤을 극복하고 생존전략을 갖추기 위해서는 과학꿈나무를 널리 키워 나가는 영재교육에 보다 힘을 쏟아야한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 문민정부 개혁의 이념적 성격/김병익 문학평론가(정경문화포럼)

    ◎진보주의 열정지닌 정통보수 지향/건전한 자본주의로의 복귀가 목표 정치권으로부터 관계와 교육계,이제껏 성역으로 치부되어온 군부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쇄신 작업을 벌이고 있는 새 정권의 정력적이고 강경한 개혁의 정책이 결과적으로 타격을 가한 곳은 기득권을 지키려는 특혜의 보수층만이 아니다.오히려 더 깊은 상처를 입고 그 존재의 근거까지 동요되고 있는 곳은 김영삼 세력을 포함한 보수층과 보수주의를 공격하고 현실의 변혁을 주장하며 실천운동을 벌여온 재야와 진보주의 세력권일 듯싶다.부정과 부패를 자행해온 지도층에 대한 가혹한 해체과정을 지켜보며 격려와 지지를 보내는 시민들이 또한 대학생들이든 야당이든 혹은 어떤 단체든 80년대식의 비판이나 시위를 하는 데에 대해서도 눈살을 찌푸리는 반응을 보낼 만큼 진보적 혹은 급진적 세력이 동조를 얻기 힘든 상태가 되어버렸다.아니 지난 시절에 변혁 운동에 앞장섰던 많은 지도자들과 중심 단체들이 「신한국 건설」에 동참하겠다고 선언하고 나서기까지 한 것이다.겨우 두 달 사이에 주체할 수 없이 터지고 파급되며 새 일이 발표되고 시행되는 이런 일련의 급격한 변화들을 바라보면서 곱씹어보는 나의 갖가지 생각들 중의 하나는 그것들의 이념적 양상에 관한 것이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펼쳐지기 시작한 우리 사회의 다양한 변화들의 근본적인 성격은,기왕의 왕성했던 이데올로기적 측면으로 보자면 여전히 보수주의적인 것으로 판단된다.이 변화들은 체제의 변혁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현실의 개혁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며 그 개혁들은 우리가 고수해온 시장자본주의와 시민민주주의의 이념과 틀을 더욱 강화해주고 있기 때문이다.집권층의 개혁에의 집념은 강력하고 도전적이지만 그들은 법을 바꾼 것도 아니고 제도를 고친 것도 아니다.그것은 부패한 관행의 파괴이며 그나마 위로부터의 집권층의 시도이다.체제의 이념적 표현에서 가장 핵심을 이루는 경제 정책에서도 통치자는 「성장」에 목표를 두었고 그러기 위해서 복지나 평등 대신 「고통의 분담」을 외치며 그것에 노동자들도 참여해주기를 요구했다.정확히 말하면 타락해서 무능력해진 자본주의를 바로잡아 건강하고 효율적인 시장 경제를 성취하는 것이 정책의 목표이고 그런점에서 보수주의의 논리를 관철하는 것이 이 개혁의 이데올로기적인 뼈대이다.부패 구조를 통해 특혜를 받아온 기득권층을 제외한,그럼에도 오랜 이력으로 보수적 성향을 완강하게 지켜온 대다수 시민들이 이 변화를 적극 환영하는 것은 실제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이념적으로도 자연스런 일이다. 새 정부가 보수적이고 그 개혁의 방향이 정통 보수주의로의 희귀임에도 몇해전만 해도 기승을 떨치던 진보 혹은 좌파의 세력들은 이제 왜 비판을 가하지 않고(아니면 못하고)오히려 그것에 동참까지 선언하는가.물론 여러 원인이 있을 것이다.동구권의 해체와 자본주의·사회주의간의 갈등 해소를 통한 지구상의 이념적 지각 변동이 우선 외적 작용을 가했을 것이다.거기에 마르크스의 논리 구조가 오늘의 정보화 사회에서는 적절치 않거나 수정되지 않을 수 없다는 정체경제론 및 노동과 삶의 질적 변모로부터도 그 영향을 입었을 것이다.그러나 군부독재와 유신,산업화로 이어져오는 지난 한 세대 동안 점점 더 급진화로 에스컬레이트되어온 진보적 이념과 실천 운동에는 현실과 현실 정치에 대한 비판과 저항이 상당 부분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도 못지않게 중시되어야 할 것이다.그 비판과 저항은 몸은 비록 진보주의에 합류해 있지만 이념적으로는 자유­보수주의에 귀속될 것이었다. 이렇다는 것은 재야권 인사의 통치권 합류와 함께 새 정부의 개혁 중에는 진보주의적 정책도 포함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이인모씨를 북한으로 돌려보낸 것이나 전교조 대표들이 교육부 당국과 협상을 시작한 것,노조에 부당 행위를 한 기업주에 조처를 가하며 국제 노동절 행사를 허용한 것이 그런 양상의 한 모습들일 것이다.어떤 현실 정책에도 순수한 보수주의가 있을 수 없으며 그 역도 마찬가지임을 생각할 때 이런 정도의 이념적 전향성은 양념 정도에서 그칠지도 모른다.그러나 여기서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개혁이 비록 보수주의 지향이라 하더라도 그 양상과 급격성은 변혁적인 것이며 그 변혁성이 진보주의의 그것과 비슷한 이상주의적 정열을 느끼게 한다는 점이다.언론에 더러 「혁명」이란 말이 나오는 것이 그런 시민적 정서의 표현일 것이다.그러니까 우리는 지금의 과정을 보수파주의에서 정통 보수주의로의 개혁,타락하고 부패한 자본주의에서 건강하고 건전한 자본주의로의 변혁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며 진보주의적 열정을 지닌 보수주의이며 혹은 보수주의를 관철하기 위한 진보(주의적이 아닌)적 변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그래서 중산층은 이 이념적 지향성에 안도감을 가질 것이며 서민층은 그 개혁에의 열정에 공감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의 이러한 일련의 변화가 건강한 시민 사회와 참여적 민주주의로 결과되기를 바란다.그 사회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도덕적으로 성숙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융합된 사회이다.그런 사회에서는 정통 보수주의가 이념적 정당성을 획득하고 진보적 이상주의가 현실적 유효성을 발휘할 수 있게 될 것이며 억압없는 이상주의의 추구가 가능하고 콤플렉스가 작용하지 않는 보수파의 주장이 살아날 것이다.그럴 수 있을때 오늘의 우리의 진보주의도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변혁의 대안을 마련할 수 있게 될 것이며 그를 위한 급진적 사유와 이상주의적 꿈도 자유로이 피어날 것이다.오늘의 보수주의 정권의 개혁은,잘 이루어진다면 진보주의적 실천 운동에도 좋은 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53)

    ◎길림시절:12/가공조직 「공산청년동맹」/56년 연안파 숙청뒤 중공게경력 은폐/“조선공산당 산하서 청년활동” 꾸며내/중국공산당원생활 7∼8년 과거 지우기 공청날조 제2기가 되는 1950년대 중반부터 60년대 중반까지 김일성은 「공청가입」에 관한 표현을 아래와 같이 하고 있다. 58년…「김일성원수는 1926년에 벌써 공산청년동맹에 가맹하였다」이나영의 「조선민족해방투쟁사」337면 61년…「김일성동지는 길림육문중학교에 입학한 후 1926년 8월에 공산청년동맹에 가맹하였다」「조선근대혁명운동사」287면 이밖에 64년에 나온 박상혁의 「조선민족의 위대한 영도자」도 비슷한 표현을 쓰고 있다. 해방후 중국공산주의청년단이란 조직이름을 이리저리 변형해 가면서 자신이 마치 26년에 중공계통이었던 것 같이 비치고 있었던 김일성은 50년대 후반에 들어서자 이러한 허위를 새로운 허위로 전환하였다.그는 우선 52년에 사용한 「공산주의청년회」란 조직명칭에서 「회」를 「동맹」으로 다시 돌리고 중공계통이란 냄새를 없앴다.그 다음 「공산주의」에서 「주의」를 빼고 「공산청년동맹」이란 새로운 가공조직을 만들었던 것이다. ○허위사실 또 변조 그런데 이러한 변조작업의 정치적 배경에는 1956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8월 전원회의 이후의 연안파,소련파 숙청이 있었다.중국공산당 계통이었던 연안파를 몰살하면서 김일성은 「주체」적인 방법으로 자기 경력에서 중공계통이란 냄새를 지워버린 것이다.원래 북한에서 사용하는 「주체」란 말에는 김일성만은 무슨 일이든지 제멋대로 할 수 있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그런데 「공산주의 청년동맹」을 「공산청년동맹」으로 명칭변경한 김일성의 행동에는 중공계통이었던 자기를 조선공산당 계통으로 왜곡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1925년에 서울에서 창건된 조선공산당은 그 산하 청년단체를 고려공산청년회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이외에도 「공산청년회」라고 생략할 수 있는 조직명칭으로 조선공산청년회가 있는데 이 문제는 다음에 말하겠다. 한국에서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공산주의자를 자처하고 있는 김일성이 통치하고 있는 북한에서는 25년에 창건된 조선공산당에 대한 평가는 문자 그대로 최악이다.56년 8월 종파사건 이후 처음으로 나온 역사서적 「조선민족해방투쟁사」에서 저자 이나영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1925년 4월 조선공산당이 창건되었다.그러나 이는 파벌투쟁을 극복,청산한 토대위에서가 아니라 주로 화요·서울 양파간의 격렬한 대립투쟁의 와중에서 화요파가 중심이 되고 이에 북풍회파·상해파의 일부가 참가하여 결성되었다.같은 시기에 공청도 화요파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이나영의 이러한 기술은 한마디로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는 「종파분자」들의 소굴이고 종파의 연합이면서 그 종파들이 대립하고 투쟁하는 집합체에 지나지 않는다는 혹평이다. ○“종파투쟁 집합체” 이것이 과연 조선공산당 창건에 관한 정당한 평가인가 어떤가는 별문제이다.다만 여기서 우리가 상기해야 할 것은 이나영이 퍼붓는 욕설은 그것이 단순한 욕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책이 나올 때까지 북한에서 진행된 국내파,남노당파,연안파,소련파가 숙청되는 가장 중요한 구실이었다.그리고 이러한 딱지를 제공한 자는 김일성 자신이었다.그는 화요파였던 박헌영,서울파 출신인 최창익 등을 과거의 행적까지 「종파」로 규정하여 숙청한 인물이다. 김일성은 그들을 일망타진한 후 조선노동당의 역사적 정통성을 조선공산당에 두지 않고 「과감하게」중공 항일빨치산파로 옮겨버렸다.그는 1958년 2월8일 조선인민군 열병식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하게 되는 것이다. 「항일빨치산투쟁의 전통을 계승하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했지 나쁜 것은 없습니다.반당 종파분자들은 무엇때문에 이것을 반대합니까? 그들의 목적은 지난날 우리나라 역사에는 아무런 투쟁업적도 없었다고 하며 또 만일 있다고 하면 고루 한몫씩 나눠먹자는 것입니다.그들의 비방은 아무런 근거도 없습니다」 「우리가 계승해야 할 유일한 전통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깃발 밑에 근로인민의 이익을 옹호하여 투쟁한 항일유격대의 혁명전통입니다」「우리가 전통을 계승한다고 해서 오가잡탕을 다 계승할 수는 없습니다」 ○동만주서 유격대 김일성은 해방전인 1930년대,동만에서 성장한 중공유격대에 몸을 담아 7∼8년간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따라서 이 기간의 대부분 그는 중국공산당 당원이었다.그는 그후 45년 8월까지도 명명백백한 중공당원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그가 50년대 중반부터 60년대 중반까지 약 10년의 세월을 소비하여 한 것은 중공에 조속한 자기의 과거를 지워버리는 작업이었다. 그 전형적인 작업이 30년대의 어떤 시기에 중공공청에 소속하고 있었던 경력을 26년으로 앞당겨,마치 자기가 조선공산당 산하의 청년조직에 있었던 것처럼 공청 경력을 바꾸는 일이었다. 그는 이런 작업을 20년대에 조선공산당의 정수분자였던 인물들을 모조리 없애버리는 피비린내 나는 숙청을 거의 완성한 후에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①「조선민족해방투쟁사」58년 간 2백78면 ②「김일성 저작선집2」7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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