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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급간 타협이 ‘시장발전의 원동력’

    계급간 타협이 ‘시장발전의 원동력’

    마르크스와 베버. 흔히 자본주의의 ‘기원’을 따지다 보면 이들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마르크스는 생산력과 생산관계라는 경제 개념(궁핍)을, 베버는 프로테스탄트 윤리라는 문화 개념(절제)을 답으로 제시했다. 후대에 다양한 버전이 이어졌지만 큰 틀에서는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 주장이 자본주의 기원과 발전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끊임없이 나왔다. 독일의 정치경제학자이자 네오마르크스주의자 하르트무트 엘젠한스의 목소리를 빌려 그 비판을 정리한 책이 나왔다. 바로 성균관대 사회과학부 이국영 교수의 ‘자본주의의 역설:계급균형과 대중시장’(양림 펴냄)이다. 책의 요지는 “자본주의가 불평등을 전제로 한 체제라는 생각은 역사적 사실과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외려 “평등해야 발달할 수 있는 게 바로 자본주의 체제”라고 정의한다. 우리의 상식과 근본적으로 궤를 달리한다. 방법은 비교정치학이다. ●계급‘차별’이 아니라 계급‘평등’이 자본주의의 원동력 ‘원조’ 자본주의 국가는 영국이다. 그렇다면 영국은 자본주의로 바뀔 당시 유럽 최고의 국가였을까. 아니었다. 오히려 식민지 개발에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에, 생산기술이나 국가주도의 산업정책에서는 프랑스에 한참 뒤져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들 모두를 추월했는가. 엘젠한스는 ‘계급간 균형’을 그 원인으로 짚는다. 다른 나라들은 지배계급이 강대했다. 그러다 보니 신분제를 바탕으로 피지배층을 잔인하게 착취할 수 있었다. 손쉽게 돈을 번 지배층은 사치와 향략으로 이를 탕진해버렸다. 포르투갈·스페인·프랑스가 재정흑자를 바탕으로 강력한 산업진흥정책을 폈다곤 하지만, 생산물은 지배계급을 위한 사치품뿐이었고 피지배계급은 소비력이 전혀 없었다. 자본의 축적이니, 시장이니 하는 개념 자체가 성립하지 못한 것이다. 그나마 혁명으로 이런 상황을 돌파한 프랑스는 자본주의의 길로 접어들었지만 그렇지 못했던 포르투갈·스페인은 3류국가로 전락해버렸다. 이에 반해 영국은 잇따른 역병과 전쟁 때문에 지배계급의 지배력이 크게 약화됐다. 피지배계급을 착취하려 들었다가는 국가 자체가 붕괴될 지경이었다. 이 때문에 피지배계급에게 양보를 거듭하는데 이것의 정점이 바로 명예혁명의 실체라는 설명이다. 착취 안 하고 임노동 계약을 맺는다는 것 자체가 지배계급으로서는 큰 양보라는 것. 간단히 생각해 보아도, 돈 있는 사람이야 권력을 끼고 앉아 땅이나 사고 매점매석하는 게 속 편하지, 애써 공장 지어서 뭘 만들고 노동자들과 씨름하는 게 나을 리 없다는 것이다. 즉, 자본주의는 자본가의 혹독한 착취(마르크스) 때문도 아니고, 유달리 종교적이고 근면성실한(베버) 유럽인의 특징 때문이 아니라 피지배계급과 지배계급간 타협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못 가진 자의 시기와 질투가 곧 성장엔진이다 기원에 대한 이런 설명은 자본주의 발달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우리나라의 성장주의자들은 분배니, 평등이니 하는 개념을 못마땅히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일부 보수언론의 칼럼에서는 이를 ‘못 가진 자들의 시기와 질투’로 매도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나 엘젠한스의 논리에 따르자면 ‘못 가진 자들의 시기와 질투’, 여기에 이은 계급간 갈등, 그리고 타협이야말로 자본주의 성장의 원동력이었다. 엘젠한스는 이 메커니즘을 ‘대중시장’이라 이름붙였다. 쉽게 말해 ‘노동자들이 월급 올려달라고 또 파업하네.’라고 말하는 것은 자본가 시각의 1차원적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임금 상승은 생산비를 늘리지만 동시에 그만큼 소비자의 구매력도 강화시킨다. 이런 신진대사가 일어나는 과정이 바로 대중시장인 것이다. 이는 박정희시대 고속성장의 원인에 대해서도 해명의 실마리를 던져준다. 박정희시대를 다른 나라와 비교한 국제비교연구 결과를 보면 고속성장에도 불구하고 분배는 그럭저럭 괜찮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보수주의자들은 성장 위주 정책 때문에 ‘떡고물’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졌다고 설명하지만, 엘젠한스 논리에서는 정반대다. 박정희시대 고속성장은 상대적으로 양호했던 소득분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냉전과 독재의 영향도 있었다.2차대전 이후 복지국가 정착과 함께 세계적 호황이 찾아왔다는 사실도 하나의 증거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 kr
  • 암스트롱 7연패 대기록

    그는 변함없었다. 올해도 프랑스 파리 샹젤리제 거리에서 ‘노란 사이클복’을 입고 결승 테이프를 끊은 이는 지난 6년과 같은, 바로 그 사람이었다. 암을 극복한 ‘사이클 황제’ 랜스 암스트롱(33·미국)이 2005투르 드 프랑스(프랑스도로일주사이클대회) 에서 7연패 위업을 달성했다. 암스트롱은 25일 코르베이 에손에서 파리에 이르는 대회 마지막 21구간(144㎞)에서 악천후로 48㎞를 남겨두고 진행원이 경기 종료를 선언,2시간39분26초를 기록하며 종합기록 85시간13분31초로 ‘5차례 우승자’ 이반 바소(이탈리아)와 ‘영원한 2인자’ 얀 울리히(독일)를 따돌리고 정상에 올랐다. 전날 생테디엔에서 열린 20구간(55.5㎞)경기에서 1시간11분46초로 이번 대회 첫 구간우승을 차지한 여세를 몰아 흔들림없이 정상으로 질주한 것. 이번 대회를 끝으로 은퇴를 선언한 암스트롱은 이로써 지난 99년 이후 7차례 연속 우승이라는 당분간 깨지기 힘든 위대한 기록을 남기고 사이클복을 벗게 됐다. 통산 22차례의 구간 우승 기록에 종합선두에게 주어지는 ‘노란 사이클복’ 착용 구간도 83개로 벨기에의 에디 마르크스(111개)에 이어 두번째 기록.23일 동안 3607㎞ 대장정을 마친 암스트롱은 “최고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은 스포츠맨으로서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라며 담담한 우승 소감을 밝혔다. 지난 96년 생존율 40%를 밑도는 고환암 판정을 받았으나 좌절하지 않고 끊임없는 자기 채찍질로 부활에 성공,99년 투르 드 프랑스를 제패하며 세계를 감동시켰던 암스트롱의 질주가 역사속으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이재훈기자 nomad@seoul.co.kr
  • 저우언라이 평전/리핑 지음

    ‘만년 2인자’란 말에 담긴 이미지는 그렇게 긍정적이지 않다.1인자가 누구이건 그 비위를 맞추며 권력의 단물을 탐하는 사람이란 부정적 이미지가 강하다. 그래선지 1인자가 아닌 2인자로서 역사적으로 크게 주목받는 인물을 찾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30년 가깝게 중국 총리를 지내면서 ‘영원한 2인자’란 수식어를 달고 다닌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사후에도 긍정적 평가를 훨씬 많이 받는 대표적 인물이다. 중국에 대한 평가에 극도로 인색했던 작가 헤밍웨이조차 그를 만나고 후일 “저우언라이는 내가 중국에서 만난 사람중 유일하게 좋은 사람이다. 중국 공산당원들이 모두 그와 같다면 중국의 미래는 분명히 그들의 것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저우언라이 평전’(리핑 지음, 허유영 옮김, 한얼미디어 펴냄)은 사후에도 ‘영원한 인민의 벗’으로서 중국 인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저우언라이의 일대기를 충실하게 담아낸 저작이다. 저자 리핑은 중국 중앙문헌연구실 저우언라이 연구팀장을 역임한 이력에 걸맞게 풍부한 문헌자료와 당대 저우언라이와 교류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기록물들을 통해 저우언라이의 일생을 밀도있게 재구성했다. 저우언라이는 철저한 마르크스주의자이자 애국자였다. 국공내전 시기 충칭에서 미국 ‘뉴욕타임스’ 기자가 그에게 “중국인과 공산당원이라는 신분 가운데 어떤 게 더 중요합니까?”라고 질문하자, 저우언라이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야 물론 중국인의 신분이지요.”라고 답한다. 이념이나 권력에 앞서 인민과 애국을 앞세운 그의 자세는 공산혁명 시기부터 1976년 사망할 때까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지속된다. 그의 혁명 이력은 청년 시절 5·4운동 참여, 광저우 코뮌 조직, 대장정 참가, 국민당과의 항일연합전선 구축 등으로 이어진다.1949년 중국 정권 수립 경제의 근대화, 자주적인 외교, 지식인들과 문화에 대한 각별한 애정, 소수민족 문제 등 그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분야는 없었다. 문화대혁명 기간중 그는 홍위병들을 대상으로 한 연설에서 “건국 이래 17년 간, 당과 정부의 업무는 과오보다 성과가 많았다. 설령 방향과 노선을 잘못 제시한 과오가 있다고 해도 그것이 혁명을 하지 않았다거나 반혁명이라고 몰아붙일 수는 없다.”고 비판했다. 그럼에도 저우언라이는 당시 혁명 지도자들중 유일하게 실각하지 않고 살아남아 중국 현대화를 이끈다. 덩샤오핑이 주도적으로 진행한 ‘4대 현대화’노선은 이미 저우언라이에 의해 주창된 것들로, 저우언라이는 실용주의 노선에 입각해 중국 현대화의 초석을 깔았으며, 마오쩌둥 이후를 준비했다. 결국 1976년 저우언라이와 마오쩌둥의 죽음 이후 중국은 실용과 개방으로 나아가며 오늘의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중국의 경제성장 하면 덩샤오핑 이후 모든 게 이루어진 것처럼 이야기되지만, 사실 저우언라이가 총리로 재직했던 1949년부터 1975년까지 덩 이후의 경제성장에 필요한 물질적 기초가 이루어졌다. 이 기간 식량 생산량이 두 배 이상 증가했으며, 철강재와 전력 생산량은 각각 50배,45배 넘게 증가했다. 핵무기 개발과 인공위성 발사 등을 통해 군사적, 과학적 강대국으로 자리매김한 것도 이때였다. 하지만 저우언라이를 향한 중국인들의 존경심은 이같은 외양보다는 그의 절대적 청렴·봉사·희생정신 때문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그는 평생 자신의 옷을 수선해 입었으며, 홍수 등 자연재해가 발생하면 가장 먼저 현장으로 달려가 인부들과 함께했다. 군용기를 타고 가다가 위급상황이 닥쳤을 때 자신이 메고 있던 낙하산을 벗어 울고 있는 아이에게 건네주기도 했다. 임종시엔 자신을 화장해 고향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남으로써 단 한 뼘의 땅도 자신을 위해 쓰이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다른 지도자들이 권력이 바뀌면 1인자인 마오쩌둥, 덩샤오핑 등의 휘장으로 바꾸어 달 때 ‘인민을 위해 봉사한다’라고 적힌 휘장만을 평생 가슴에 달고 다닌 이가 바로 저우언라이였다. 영원한 2인자였던 그가 진정으로 충성을 바친 대상은 1인자가 아닌 인민과 국가였던 것이다.2만 5000원.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논술이 술술] 소비의 사회/ 장 보드리야르 지음

    “나는 소비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이같이 표현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현대인에게 소비는 삶의 가장 커다란 목적이자 이유로 자리잡고 있다. 오늘날 인간의 삶에서 ‘소비’는 더 이상 생존을 위한 필요의 범주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현대인들에게 행복과 사랑과 같은 매우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가치들의 내용까지 규정하고 있다. 나아가 부모로서, 연인으로서, 친구로서의 역할과 행동 방식까지를 교육하고 지시하는 절대적 규범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계층 차이를 만들어내는 사회적 역할까지도 맡고 있다. 보드리야르는 ‘소비의 사회’에서 현대인을 지배하고 있는 소비주의 사회 체제와 가치 구조를 날카롭게 분석하고 있다. 마치 마르크스가 자본의 운동과 증식 과정에 숨겨진 비밀을 파헤치듯 그는 1970년에 발표된 이 책에서 자본과 상품이 어떻게 현대인들의 의식과 가치 체계를 형성하고 지배하고 있는지를 ‘소비’를 매개로 체계적으로 밝힌다. 이같은 점에서 이 책은 현대 사회의 원리와 가치에 대한 훌륭한 통찰이자 비판으로서 힘을 지닌다. 현대인은 과거 어느 시대보다도 서비스 및 물적 재화의 증가에 따른 소비의 풍부함을 누리며 살고 있다. 하지만 인간들은 풍요로울수록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아니라, 사물들과의 관계에 의해 지배를 받는다. 새롭게 개발되고 생산되는 상품들의 리듬과 끊임없는 연속에 따라 사람들의 삶도 끊임없이 변화한다. 또 이에 맞춰 인간들도 더욱 사물 의존적이고 기능적인 존재로 전락해가고 있다. 현대는 말 그대로 상품이 지배하는 시대, 곧 소비를 학습하고, 소비에 대한 사회적 훈련을 사회화의 주된 내용으로 하는 ‘소비사회’인 것이다. 현대 소비의 가장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소비자와 사물의 관계가 변화했다는 점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사물들이 갖고 있는 특수한 유용성 때문에 상품을 사지 않는다. 세탁기, 냉장고, 아파트 등의 상품들은 개별 사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제품을 생산한 기업의 이미지와 광고, 상표 등과 결합, 그 도구적 유용성을 뛰어넘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받으며, 소비자들을 보다 복잡한 소비의 동기로 유도한다. 결국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사물 자체를 소비하지 않는다. 자신과 타인을 구별짓는 기호로서 상품을 소비한다. 또한 상품들은 사회적 의미를 지니는 것을 생산하고 조작하는 사회 구조적인 힘에 의해 만들어지고 지배받는다. 현대 일상생활에서 나타나는 소비는 대부분 유도된 소비로서 존재하며, 궁극적으로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생산성’의 명령에 복종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상품들이 아무리 풍부하다고 해도 인간 활동의 산물이며, 또한 교환 가치의 법칙, 곧 이윤 증식의 목표와 원리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보드리야르의 말처럼 “자본의 기호 하에서 생산성이 가속도로 상승하는 과정 전체 역사의 도달점이라고 할 만한 소비의 시대는 근원적인 소외의 시대이기도 하다. 오늘날에는 상품의 논리가 일반화되어, 노동과정이나 물질적 생산물뿐 아니라, 문화 전체, 성 행위, 인간 관계, 환각, 개인의 충동까지도 지배하고 있다. 모든 것이 이 논리에 종속돼 있는데, 그것은 단순히 모든 기능과 욕구가 객체화되고 이윤과의 관계에 있어서 조작된다는 의미뿐 아니라 모든 것이 구경거리가 되는, 즉 소비 가능한 이미지, 기호, 모델로서 환기, 유발, 편성된다고 하는 더 커다란 의미에서 그러하다.” 유니드림 대학입시연구소(www.unidream.co.kr) ■ 독서지도시 참고사항 -대상 학년:고1∼3 -관련 교과:고등 사회, 윤리와 사상, 사회문화, 도덕 -함께 읽어 볼 책:소유냐 존재냐(에리히 프롬·범우사), 고독한 군중(리즈먼·홍신문화사), 사물의 체계(보르리야르), 작은 것이 아름답다(슈마허), 월든(소로) -기출논제:고려대 2003학년도 수시1학기 논술, 이화여대 2004학년도 정시 논술, 경희대 2003학년도 정시 논술, 건국대 2001학년도 정시 논술 ■ 생각해보기-현대 사회에서 나타나는 소비의 특징을 써보자. -물질적인 부가 인간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지닐까. -‘육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사회적 배경과 원인은 무엇일까.
  • ‘진짜’ 판타스틱한 영화를 만난다

    리얼판타스틱영화제(운영위원장 김홍준)가 새달 14일부터 23일까지 서울 종로구 낙원동 서울아트시네마와 필름포럼에서 열린다. 올해 상영될 작품은 총 61편. 개막작으로는 1924년 소련이 제작한 SF 무성영화 ‘아엘리타’가 선정됐다. 전체주의 국가인 화성으로 우주선을 타고 날아간 남자가 독재자의 딸 아엘리타와 사랑에 빠지고, 노예 반란으로 혁명이 일어난다는 줄거리. 야코프 프로타자노프 감독의 작품으로 개막식에서는 작곡가 송현주가 영화를 위해 특별히 작곡한 음악이 함께 선보인다. 부천국제영화제의 대안적 성격을 띤 이번 영화제에서 가장 주목해볼 부문은 ‘마르크스의 침공!!! 동구권 SF영화 특별전’. 개막작을 비롯해 ‘오존 호텔에서의 8월말’(얀 슈미트·1966년),‘섹스미션’(율리우스 마슐스키·1983년) 등 13편이 상영된다. 또 다른 주요 부문인 ‘판타스틱 영화세상’ 섹션에서는 일본영화 ‘느린 남자’(시바타 고)와 ‘휑’(빈센조 나탈리),‘노는 회사, 라이엇’(킴 핀) 등 15편을 만날 수 있다.‘코리안 판타지’ 섹션에는 ‘달콤한 인생’(김지운),‘혈의 누’(김대승),‘말아톤’(정윤철),‘알 포인트’(공수창),‘브레인 웨이브’(신태라) 등 7편이 선보일 예정. 단편 섹션 ‘짧지만 판타스틱’에서는 ‘사다리를 들고 다니는 남자’(안드레아스 리이저),‘기적’(고수진),‘영원한 일상’(디디에 퐁탕) 등 국내·외 작품 24편이 소개된다. 올해 초 발견된 해방 전 기록영화 ‘조선’과 ‘해방뉴-쓰’가 특별상영작으로 선정됐다. 지난해 연말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김홍준 집행위원장이 해촉되면서 영화제의 스태프들이 따로 떨어져 나와 대안적 성격인 리얼판타스틱영화제 개최를 추진해왔다. 이 영화제는 부천국제영화제와 같은 기간에 열린다.www.realfanta.org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日파친코회사 ‘마루한’ 한창우 회장

    日파친코회사 ‘마루한’ 한창우 회장

    |도쿄 이춘규특파원|1945년 10월22일 밤 11시 일본 시모노세키 해안. 얼굴에 보송보송한 솜털이 남아있던 열다섯살 한국 소년이 주위를 살피며 밀항선에서 조심스럽게 내렸다. 손에는 고향의 모친께서 쥐어준 쌀 두 말과 영어사전 뿐이었다. 그것으로 거친 일본생활을 헤쳐가야 했다. ‘일본 파친코 제왕’으로 불리는 재일교포 1세 한창우(75) 마루한 회장의 60년 전 모습은 이랬다. 상전벽해. 일본어판 포브스지는 지난달 순자산 1200억엔(약 1조 2000억원) 이상 되는 일본의 거부 명단을 발표했다. 한국계로는 정보통신(IT) 재벌 손정의 소프트뱅크 사장이 순자산 4730억엔으로 8위였고, 한 회장은 1210억엔으로 24위에 랭크됐다. 한 회장은 포브스가 지난 3월 발표한 전세계 갑부 순위에서도 584위를 기록한 바 있다. 지난해 마루한의 매출은 1조 2778억엔, 순이익은 210억엔이었다.2010년 매출목표는 5조엔이다. ●도쿄 한복판에 우뚝 선 밀항소년 스스로를 “한국의 보트피플 1호”라고 말하는 한 회장이 도쿄 한복판에 우뚝 섰다. 도쿄역이 발아래 내려다 보이는 초현대식 빌딩의 28층에 있는 마루한 도쿄 본사에서 그를 만났다. 건물 벽면이 대형유리로 돼 있어, 일왕궁도 일부 보이는 요충지다. 임대료가 평당 4만 4000엔인 일본의 심장부에 밀항소년이 우뚝 서있는 것이다. 그의 경상도 사투리는 구수하고, 유창했다.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시고, 지금 고향 삼천포에는 동생이 살고 있다.3남 2녀 중 차남으로 일제 때 징용으로 끌려가 벽돌쌓기 일을 했던 형을 따라 밀항선을 탔다. 한때 사천시로 변경됐다가 삼천포라는 옛 지명을 되찾은 것을 모른 그는 “삼천포라는 명칭을 왜 없애냐고 고향의 선·후배들에게 따졌다.‘삼천포로 빠졌다.’는 것보다 ‘삼천포에 가자.’라는 긍정적인 면을 선전하면 오히려 지역발전에 도움이 될 것 아닌가. 그게 내 철학”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말을 들으며 차별이 심한 일본사회에서 역경을 이겨낸 긍정적 사고방식을 느낄 수 있었다. 밀항 뒤 혼란스러운 일본에서 검정고시로 고졸 자격을 딴 뒤, 호세대학 경제학부를 마쳤다. 호세대학은 당시 일본내 마르크스경제학의 총본산이었다. 그도 마르크스나 엥겔스, 레닌, 마오쩌둥을 접하며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래서 귀국해 정치가가 되겠다는 꿈도 있었지만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접어버렸다. 이후 관심도 마르크스에서 패션으로 옮겨갔다. 대학을 졸업한 뒤 취직하려 했지만 안돼 프랑스로 패션 유학을 떠나기 위해 교토의 미네야마에서 파친코를 하던 매형을 찾아간 것이 인생 항로를 바꿔버렸다. 여비를 빌리러 갔다가 매형이 한사코 파친코 일을 돕게 하는 바람에 주저앉았다. 업체간 경쟁이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매형이 사업을 그만두려고 하자 “성공하면 두배로 드리겠다.”며 인수했다. 그것이 마루한의 모태가 됐다. 이후 미네야마에서 클래식 음악다방도 개업해 성공했고,1967년에는 당시 인기를 끈 볼링장 사업에도 뛰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이 시련이 될 줄은 까맣게 몰랐다. ●“매일 자살하려 했었다” “시즈오카에 120레인 볼링장을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볼링 열기가 식으면서 경영상태가 악화됐고,5년 뒤에는 60억엔이라는 천문학적인 빚을 지고 말았다. 빚 독촉은 심하고, 갚을 길은 없어 매일 자살을 생각했지만 아이들 얼굴을 보니 못하겠더라.” 마음을 다잡았다. 택시운전이나 라면가게라도 해서 빚을 갚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행히 채권은행측이 “독촉을 안할 테니 천천히 갚아라. 신용·노력을 인정한다.”고 해 인감까지 은행에 맡겨놓고 뛰어다녔다. 새 사업을 물색하던 중 나고야 교외의 수천평 벌판에 주차시설까지 갖춘 파친코를 보고 힌트를 얻어 교외형 대형 파친코를 열기로 했다. 볼링장을 처분한 돈과 사채와 곗돈 등으로 시작했다. 자동차시대 도래를 정확히 예측한 사업 전략 덕분에 히메지, 고베 등에 세운 파친코점에 손님들이 물밀듯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호사다마일까. 이즈음 미국으로 영어연수를 갔던 당시 고교 2학년이던 장남이 요세미티 국립공원 계곡서 탁류에 휩쓸려 숨지는 액운을 당한다. 충격으로 열흘 정도 식음을 전폐하다시피하고 울고 또 울었다. 충격은 2년가량 이어졌다. 그래도 사업은 급성장,10년만에 60억엔 부채도 청산했다. 파친코의 선입견을 바꾼 영업전략이 주효했다. 손님을 최우선적으로 배려했다. 돈을 많이 잃은 고객에게는 구슬을 융통해주고 담배로 위로했다. 담배냄새 제거시설이나 샤워시설도 갖춰 카페식 분위기를 연출했다. 입소문이 퍼지면서 급성장,1995년에는 도쿄 입성의 꿈을 이루고 현재는 전국 180여개 점포에 종업원만 7000명에 달한다. 이 중 한국인은 100여명. 도쿄증권거래소에 상장도 추진 중이다. ●파친코, 이제는 폭력배와 무관 “파친코 하면 폭력조직과 검은돈을 연상한다.20∼30년전만 해도 폭력배들이 귀찮게 했었다. 청소해줄 테니 한 달에 얼마씩 달라는 정도가 있었지만 10여년전 법이 한층 강화되면서 그마저도 없어졌다. 가끔 행패를 부리려는 폭력배가 있지만 즉각 체포된다.” 한 회장은 파친코의 이미지를 바꿔 거대기업 반열에 올려놓은 인물로 평가받는다. 파친코 사장중 한국계가 70%라고 소개했다. 매년 250∼300명의 신입사원 중 대졸이 200여명에 이르고, 도쿄대 출신도 도쿄 본사에만 3명이 근무하고 있는 것은 파친코의 이미지가 바뀐 방증이란다. 그는 일본내 차별을 뛰어넘기 위해 수익금의 1%는 지역사회 봉사용으로 내놓는다.3년 전 일본에 귀화했지만 ‘한국계 일본인’으로 만족한다. 조국에 대한 끈끈한 정은 여전해 1년에 서너차례는 꼭 한국을 찾는다.22일에는 도쿄 인근 지바에서 한국인 150여명 등 7000∼1만명을 초청해 대규모로 ‘매출 1조엔 돌파 기념행사’를 갖는다. 비용만 15억엔이나 들였다. 7남매를 낳아 현재 딸 둘, 아들 넷인 한 회장은 교토의 저택에서 부인, 막내 아들(31)과 함께 살고 있다. 손주들만 7명으로 다복한 편이다. 파친코 제왕의 파친코 실력은 얼마일까. “7∼8번 가볍게 해 본 경험밖에 없다.”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taein@seoul.co.kr
  • [오일만특파원 베이징은 지금] 中 보수파 천윈 ‘이유있는 추모’

    중국 대륙에 때아닌 ‘천윈(陳雲) 바람’이 불고 있다.13일 천윈 전 부총리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중국 전역에서 천윈 추모 열기가 고조되고 있다. 지난 3일부터 베이징의 국가박물관에서 ‘천윈 탄생 100주년 기념 전시회’가 시작됐고,8일엔 상하이(上海) 칭푸(靑浦)에서 동상 제막식을 가졌다.기념 주화·우표는 물론 각종 관련 출판물 간행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당과 인민일보 등 관영 언론들이 집중적으로 ‘천윈 띄우기’에 나섰다. 천윈은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덩샤오핑(鄧小平)에 맞서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고집했던 골수 보수파였다.‘새(경제)는 새장(계획경제)에 가둬야 한다.’는 ‘조롱 경제론(鳥籠經濟論·새장경제론)’을 설파했고 공산당의 대표적 경제전문가로 마오쩌둥(毛澤東) 시절부터 계획경제를 진두지휘한 인물이다.그는 1995년 사망할 때까지 개혁·개방정책의 발목을 잡았던 덩샤오핑의 최대 정치 라이벌이기도 했다. 이런 맥락에서 덩샤오핑의 공식 후계자인 후진타오(胡錦濤) 당총서기의 4세대 지도부가 개혁·개방의 반대자를 찬양하고 나선 것은 다소 의외로 볼 수 있다.하지만 천윈 추모는 후 당총서기가 의욕적으로 펼치고 있는 ‘공산당 집권 강화’ 차원에서 보면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인민일보 13일자 사설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을 전면적으로 실천했던 천윈 동지를 본받자.”고 강조했다. 평생을 청렴한 공산당원으로 생을 마쳤다고 강조한 대목에선 부정부패에 물들어 있는 공산당을 향한 준엄한 비판이다. 최근 대대적으로 펼쳐지고 있는 당원 정화운동과도 맥이 닿는다. 후진타오 시대의 최대 과제는 개혁·개방 이후 사회주의 이념이 후퇴하는 상황에서 경제성장과 집권력 강화라는 두마리 토끼 모두를 잡는 것이다. 천윈 추모는 다소 견강부회한 느낌도 없지 않지만 자신의 반대자마저도 집권 강화에 활용하겠다는 중국 지도부의 ‘실사구시’ 정신엔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oilman@seoul.co.kr
  • [내 인생의 등대] 이춘식 서울시 정무부시장

    [내 인생의 등대] 이춘식 서울시 정무부시장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내가 하기 싫은 것을 남에게도 시키지 말라’는 뜻입니다. 논어(論語) 안연편에 나오는 구절이죠. 평생 이 말을 가슴에 새기고 살아왔습니다.” 서울시 이춘식 정무부시장은 시 공무원들 사이에서 온화하고 친화력 있는 간부로 정평이 높다. 이는 절반 이상이 경북대부속고 재학 시절 탐독했던 논어 덕분이다. 그가 논어에 손을 댄 것은 많은 이들이 공자를 말하면서도 정작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논어는 이 부시장에게 일종의 ‘지적 충격’이었다.‘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지 못함을 걱정하라’(不患人之不己知,患不知人也),‘군자는 화합하지만 부화뇌동하지 않는다.’(君子和而不同) 등의 귀절은 한창 예민하던 청소년 시절의 이 부시장에게 오롯이 새겨졌다. “요즘도 매일 잠들기 전 ‘남을 위해 충실했나, 벗에게 믿음직스러웠나, 가르침을 익히지 못하지 않았나’라고 세 번 반성(日三省)하곤 합니다.” 그에게 있어 논어는 종교를 떠나 사람과 사람의 올바른 관계를 설명해 주는 교과서다. 논어를 통해 공자가 들려주는 삶의 지침은 오랜 정당과 공직 생활에서 올바른 방향을 비추는 ‘등대’가 됐다. 이 부시장은 원래 대학(연세대 행정학과) 졸업 후 일반 회사에 취직했다. 그러나 ‘개인의 발전에 상응하게 사회에 기여해야 한다.’는 생각에 회사를 그만두고 민정당에서 당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바쁜 정당 생활에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특히 청년국에서 일하던 80년대 말에는 마르크스 원전이나 김일성 저작 등 사회주의 서적도 탐독했다. 민주화운동에 헌신하던 청년들과 대화를 하기 위해서였다. 불교, 기독교는 물론 힌두교, 이슬람, 조로아스터교 등 동서양의 종교 서적도 섭렵했다. 요즘은 서강대 장영희 교수의 ‘문학의 숲을 거닐다.’에 한창 빠져 있다. 그는 “‘사랑하는 것, 그리고 견뎌내는 것,…이것만이 인생이고, 기쁨이며, 왕국이고, 승리이다.’라는 셸리의 시구에 매혹됐다.”고 밝게 웃었다. 이 부시장이 요즘 자주 떠올리는 단어는 이순(耳順)이다.49년생인 그는 아직 예순을 몇 해 남겨뒀지만 ‘무슨 말을 들어도 귀에 거슬리지 않는다.’는 자세를 익히려 하고 있다. 이 부시장은 “‘어떤 말이라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먼저 생각하는 게 공복의 자세”라면서 “어디에 있건 앞으로도 사회에 봉사하는 자세는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 스피박 넘기/스티브 모튼 지음

    ‘등 따습고 배부른 부르주아 아주머니들의 투덜거림’. 고차원적 이론 비판에서든 저급한 인상비평 수준이든 페미니즘 비판에서 끊이지 않는 단골 메뉴다. 그런데 이런 비판은 정작 페미니스트들이 스스로 불러들인 측면이 크다. 9·11테러 뒤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한 미국이 제일 먼저 한 일은 ‘부르카’를 벗어던진 여성 아나운서가 방송을 진행토록 한 것이다. 우리에게도 사례는 있다. 몇해 전 논란이 됐던 여성계의 ‘박근혜 지지’ 문제도 있었고, 공창제와 같은 현실적 접근은 아예 무시한 채 추진한 집창촌 일제단속도 있다. 이것의 문제점은 질문을 조금만 진전시키면 금방 드러난다. 미국의 아프카니스탄 침공은 여성해방인가? 페미니즘은 ‘생물학적 여성’이면 다 오케이인가? 고마워해야 할 성매매 여성들은 왜 페미니스트들을 ‘현실은 쥐뿔도 모르는 것들’이라 부르나? 현실의 정치·경제적 맥락을 무시한 채 시선을 오직 여성에게만 고정시킬 경우 빠질 수 있는 위험에 대한 경고들이다. 이런 맥락에서 페미니스트 가야트리 챠크라보르티 스피박을 본격적으로 다룬 ‘스피박 넘기’(스티브 모튼 지음, 이운경 옮김, 앨피 펴냄)가 출간된 것은 반가운 소식이다. 스피박은 흔히 ‘포스트 식민주의 페미니스트’로 불리는데 인도 출신 여성으로 미국 컬럼비아대학 교수로 일하고 있다는 배경이 작용했다. 동시에 스스로의 표현대로 ‘사회주의 이상과 식민유산 사이에’ 갇힌 인도의 역사적 경험 탓도 있다. 이런 부분에서 공유할 대목이 많아 국내 학자들의 이런저런 글에 곧잘 인용되지만 정작 스피박 관련 책은 거의 없다.2년여전 나온 ‘다른 세상에서’가 전부다. 마르크스적인 접근법에다 데리다의 해체이론, 페미니즘 이론까지 복잡하게 얽혀 있어 어렵기 때문이다.‘스피박 넘기’는 이를 쉽게 풀어주고 있다. 스피박 이론에서 가장 재미있는 점은 스피박 스스로 자신에게 붙은 ‘포스트 식민주의’ 딱지를 거부한다는데 있다. 서구 백인 중심의 포스트 식민주의란 식민주의의 또 다른 변형일 수 있다는 반전이다. 이는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으로 쌓아올린 여성들의 울타리도 부정한다. 지난해 모 일간지를 통해 진행된 스피박과 한국의 한 여성학자간 대담이 초점에서 어긋난 듯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동시에 원서와 달리 출판사가 스피박 ‘넘기’라고 제목을 붙인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마침 제9차 세계여성학대회가 오는 19일부터 24일까지 이화여대에서 열린다.90여개국에서 2500여명이 참가해 2100여편의 논문을 발표하는 매머드 행사다. 우리 여성학은 혹시 서구 백인의 이론에 매몰돼 지금 이 땅의 현실은 외면하는 지적 태만을 저지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피박의 시선으로 지켜보는 것도 포인트가 될 듯하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제2회 서울국제문학포럼]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

    [제2회 서울국제문학포럼]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

    “현대엔 다양한 가상현실이 동시다발적으로 존재합니다. 전통적 역사개념, 즉 한 개의 현실이 보다 나은 현실을 향해 나간다는 개념의 역사는 정지 또는 단절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같은 현상이 꼭 비관적이지만은 않지만 마르크스적 낙관론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1982년 저작 ‘시뮬라시옹’에서 현대를 ‘시뮬라시옹(모사)의 시대’로 규정했던 장 보드리야르(76)는 24일 인터뷰에서 “현대 사회에서 현실이란 없다. 진실이나 원본도 없고 그 모사물(시뮬라크르)이나 모사물의 모사물만이 존재한다.”며 특유의 시뮬라시옹 이론을 전개했다. 그는 또 이같은 동시다발적 가상현실이 ‘예측불가능한 현실이면서 두려운 현상’이라고 표현했다. 보드리야르는 ‘인간의 삶 자체가 변화·발전의 이어짐 아닌가. 지나치게 비관적인 시각이 아닌가.’라는 질문에 대해 “점진적 변화는 인정하지만 그것이 더 나은 것으로의 변화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답했다. 또 “진실과 그 모사물과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인위적 가상현실만 존재하면서 분열과 분절이 일어나고 있다.”며 “하지만 이에 대해 무조건적 거부와 비관보다는 새로운 형태의 존재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남북 분단상황에 대해 그는 “한반도 분단상황은 분명 낡은 개념이고 삘리 해소되기를 희망한다.”면서도 “그러나 분단이 사라진다고 반드시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베를린 장벽의 예에서 보듯 동일화로 인해 예전에 겪지 못했던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에 이에 대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현대의 트렌드인 세계화는 부와 재화, 인력 교류를 통해 국경과 분단을 무너뜨리고 있지만 동시에 새로운 형태의 빈자와 부자를 만들고 있다.”고 지적하고 “그룹간 종교간 등에서 보이지 않는 다양한 차별이 생기면서 테러리즘이 파생되고 있다.”고 세계화의 부작용을 경계했다. ‘시뮬라시옹’이란 독특한 현실인식 이론을 만든 장 보드리야르는 프랑스의 현존 최고의 사상가로 평가받고 있으며,‘사물의 체계’(1968),‘생산의 체계’(1975),‘완전범죄’(1995) 등의 저서를 통해 현대문명의 가상성과 기술문명의 폐해를 비판해 왔다. 글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사진 안주영기자 jya@seoul.co.kr
  • 유대인의 역사1, 2, 3/폴 존슨 지음

    역사상 가장 많은 위인을 배출했으면서도 가장 많은 적대자들을 만났던 사람들은 누구일까? 장구한 세월 세계 각지를 떠돌며 박해를 받았으면서도 가장 강력한 고유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이 정도 질문만으로도 보통 상식의 소유자라면 ‘유대인’이란 답을 찾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예수, 마르크스, 프로이트, 스피노자, 하이네, 샤갈, 아인슈타인, 벤야민, 나치, 홀로코스트, 록펠러, 모건,GE, 이스라엘, 중동분쟁…. 사람이든, 사건이든, 기업이든, 과거든, 현재든 모든 분야에서 유대인의 역사는 세계사의 가장 큰 줄기를 이루고 있다는 것도 새삼스럽지 않은 상식이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도대체 무엇이 유대인들로 하여금 2000년이 넘는 세월동안 고통과 핍박을 견디며 위대한 성취를 거둘 수 있게 했는지에 대해서는 대부분 너무 무지하거나 피상적인 이해에 머물고 있지 않나 싶다. 영국의 지성 폴 존슨의 ‘유대인의 역사1,2,3’(김한성 옮김, 살림 펴냄)은 그에 대한 비교적 충실한 답을 찾을 수 있는 저작이다. 폴 존슨에 따르면 유대인의 역사는 아주 특별한 세계사다.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무시무시한 적대자들을 만났으면서도 자신들만의 고유한 동질성을 잃지 않고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20세기 이스라엘 건국에 이르기까지 4000년에 걸친 이들의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피해자의 입장에서 조망되는’ 새로운 시각의 세계사를 만나게 된다. ●피해자 입장서 조망된 새로운 세계사 폴 존슨은 옥스퍼드 대학을 나와 ‘뉴 스테이츠먼’ 편집장 등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며 인문·종교·역사 분야에서 왕성한 저술활동을 해왔다. 그가 유대인의 역사에 특별히 관심을 가지게 된 시초는 앞서 나온 그의 저서 ‘기독교의 역사’를 저술하면서부터다. 기독교가 유대교에 커다란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이 강한 호기심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인류 최초로 인격적 유일신 개념을 창조했다. 그리고 신의 뜻을 헤아리기 위한 ‘지적 통찰’에 몰두하게 된다. 훨씬 뒤에 시작된 기독교가 오랜 역사를 가진 유대교라는 유일신교에 새로운 해석을 첨가한 종교라는 것뿐만 아니라 동시에 유대교의 교훈과 교의신학, 각종 의식, 성물, 그리고 근본적인 개념들을 공유하고 있는 것도 유대인들의 지적 통찰 덕분이라는 것이 지은이의 생각이다. ●인류 최초로 인격적 유일신 개념 창조 중요한 것은 이같은 지적 통찰이 신에 대한 사상에만 머무르지 않고 학자(랍비)에 의해 다스려졌던 유대인 공동체사회를 통해 다양한 지성인 배출의 장이 됐다는 점이다. 유대인들은 중세에 자신들을 강제 격리시키기 위해 만든 게토 안에 거주할 때도 오히려 자신들의 신앙과 전통을 지켜가며 지성의 탑을 쌓아올렸다. 19세기 게토에서 해방되자 이들은 끊임없이 지성의 거인들을 쏟아냈다. 마르크스, 프로이트, 아인슈타인이 대표적 인물들. 인간을 바라보는 인류의 시각을 전복시켰던 마르크스와 프로이트 이론들도 사실은 천재들의 독창적 사유라기보다는 유대적 전통에 기인한 바 크다고 폴 존슨은 말한다. 이를테면 마르크스의 경우 진보개념에 관해 헤겔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의 역사관은 기본적으로 유대적인 것이었고, 그의 공산주의 천년왕국론도 유대인의 종말론과 메시아주의의 변주였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끊임없는 박해 속에서도 정체성을 잃지 않고 경제적 번영이 가능했던 것에 대해 지은이는 ‘장소의 이동’이 주는 혜택이라고 설명한다. 유대인들은 역사적으로 언제 공동체로부터 추방당하거나 재산을 몰수당할지 모르는 위험을 안고 살았다. 때문에 이주에 있어서 전문가들이었고, 그 와중에서 특히 부에 집중하는 기술 습득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유가증권, 무기명채권 등 새로운 방식의 유동재산 제도를 만들어냄으로써 그런 불리한 상황을 극복하고 현대 자본주의에 가장 쉽게 적응해갈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을 끊임없이 괴롭혔던 반유대주의의 실체는 무엇인가? 지은이는 유대인들이 단순히 세상을 떠도는 이주자들이 아니라 선택받은 민족으로서 이방인들과 스스로를 구별하게 되면서 거꾸로 그들로부터 격리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분석한다. 복합적인 인종과 민족들로 구성된 사회를 중시했던 그리스인들에게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고집하는 유대인들은 ‘사람을 싫어하는’ 민족으로 보였으며, 중세에도 음식과 도살, 할례 등 독특한 율법으로 인해 비정상적인 사람들로 간주되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유대인들은 ‘꼬리를 감춘채 살아간다, 하혈로 고생한다, 악마를 섬긴다, 중세시대 흑사병은 유대인들이 마실 물에 독을 탔기 때문이다.’ 는 등의 루머와 음모에 시달려야 했다. 이같은 음모는 20세기에 이르러 유대인들이 세계정복을 꾀하고 있다는 내용의 ‘시온의정서’에서 그 절정에 달했다. 지은이는 ‘역사가 하나의 목적을 지니고 있고, 인류는 하나의 운명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을 유대인들만큼 강력하게 주장한 민족이 없다고 말한다. 처음부터 자신들이 신의 계획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과 인류에게 그 계획에 대한 안내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명 아래 갖은 고난을 뚫고 살아왔다는 것이다. 사실 이같은 사명감 때문에 어느 시대, 어느 영역에서나 유대인들의 통찰력은 그 빛을 발했다. 지은이는 전 인류적 관점에서 이들의 노력이 추구할 가치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무익한지에 대한 답을 내지는 않는다. 이는 결국 유대인들의 역사를 추적한 이 책을 읽고 독자가 스스로 찾아야 할 몫이다. 각권 1만 5000∼1만 8000원.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방현석교수의 테마로 읽는 호찌민] ⑤호찌민의 꿈과 ‘도이머이’

    [방현석교수의 테마로 읽는 호찌민] ⑤호찌민의 꿈과 ‘도이머이’

    베트남은 이미 외국인들 생각처럼 전쟁의 상흔으로 얼룩진 가난한 나라가 아니다. 중국과 함께 아시아에서 가장 역동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하고 있다. 베트남정부가 발표한 2005년도 예상 경제성장률은 8.5%다. 지난 97년 동아시아 경제위기를 넘어선 다음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해온 베트남이 이 목표를 달성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금년 1월부터 4월까지 베트남은 96억 5000억달러의 수출실적을 올렸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3.2%가 늘어났다.1·4분기 동안 베트남에 유입된 외국자본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배 늘어난 15억 6000만달러였다. 경제발전에 따른 내수시장의 성장도 두드러진다.1·4분기 베트남의 자동차 내수판매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6%가 늘어난 6930대에 달했다. 관광산업 성장도 폭발적이다. 특히 미국 관광객의 숫자는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23%가 늘어난 9만 5000명을 기록했다. 총 대신 달러를 들고 돌아온 미국인들을 상대하기 위해 베트남은 새로운 전선, 수출전선에 무역전사를 대거 투입하여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베트남은 미국을 2004년도 최대 수출국으로 만들었다. 동시에 베트남은 단순 투자대상국에서 해외 투자국가로 변하고 있다.2억 3000만달러를 해외에 투자한 베트남은 97만달러를 들여 한국에도 농기계부품을 생산하는 합작회사를 설립했다. 2005년 베트남 국가운용계획의 핵심은 8.5% 경제성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법과 제도의 정비, 국영기업의 구조조정에 맞추어져 있다. 국제기준에 맞지 않는 법령을 개정하고 내·외국기업에 통일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새로운 투자법을 마련 중이다. 2002년 1월 미국과의 무역협정을 발효시킨 베트남은 2006년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위한 외교전을 펼치고 있다. 유럽연합(EU)에 이어 일본도 베트남의 WTO 가입에 지지의사를 표했다. 베트남의 변화는 경제분야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지난 4월30일, 항미 승전 30주년을 맞아 베트남 국영TV는 특집 방송의 일환으로 사이공정권의 마지막 대통령이었던 즈엉반민이 생전에 남긴 인터뷰 화면을 내보냈다. 즈엉반민은 2001년 미국에서 죽은 사람이니 그렇겠거니 했던 사람들도 이어지는 인터뷰화면을 보고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도 살아서 활동하고 있는 응우옌까우끼가 국영TV에 등장한 것이다. 응우옌까우끼는 사이공정권에서 총리를 지낸 인물이다. 이미 시장경제가 일상 구석구석까지 파고들었지만 정치문제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매우 완고했던 베트남이다. 공산당 일당이 지배하는 사회주의를 엄연한 국가체제로 삼고 있는 베트남이 종전 30주년을 맞아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또 한 번의 정치적 변화를 예상케 하는 것이다. 지난 뗏(설)에는 20여만명의 재외동포들이 베트남을 방문했다. 여기에는 응우옌까우끼와 열렬한 반공주의 작곡가였던 팜주이 등이 있었는데 이들 다수는 프랑스와 미국의 편에 섰던 사람들이다. “만약 우리가 호찌민사상이 아닌 다른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들은 베트남에 오지도 않았을 것이고, 올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사이공 당 서기장을 지낸 쩐박당은 전쟁 후에 베트남이 비교적 적은 후유증을 앓으며 민족통합을 이루고 도이머이를 통해 경제재건을 이룩할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이 호찌민사상에 있다고 단언했다. “많은 지도자가 있었지만 호찌민만이 베트남의 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호찌민의 사상만이 베트남을 다 담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통일은 말입니다, 절대 힘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에요.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정신과 문화가 있어야 합니다.” 1975년 개방한 호찌민영묘를 참배한 사람이 지난해 연말 집계로 4000만명에 달한다.1990년 개관한 호찌민박물관을 관람한 관광객의 숫자는 1500만명이다. 지난 한 해 동안 250만명을 불러들인 베트남 관광사업의 성공은 다른 나라를 압도하는 자연이나 기반시설에서 비롯되지 않았다. 베트남은 비록 부자나라는 아니지만 자부심을 가진 나라다. 베트남은 그들의 자부심을 문화적 매혹으로 드러내는 데 성공해왔다. 문화는 역사와 정치, 경제, 사회, 무엇보다 인간의 수준과 품격에 관계하는 것이다. 호찌민은 여기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 부자는 아니지만 자부심이 있는 나라인 이유를 호찌민박물관 우옌티딘 관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호찌민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거예요. 호찌민 자체가 문화니까요. 호찌민은 단순히 정치, 사상적인 차원이 아닌 우리의 문화적 차원에서 존재합니다. 베트남 사람들은 어떤 판단을 할 때 생각하게 됩니다.‘호 아저씨였다면 어떻게 했을까.’하고 말이죠.” 호찌민은 죽었지만 그가 추구했던 삶의 양식은 오늘날 베트남 문화의 일부로 수용되어 있다. 베트남인들의 가치판단 과정에서 호찌민의 생애는 어떤 형태로든 관계한다고 우옌티딘 관장은 덧붙였다. “호찌민이 만약 단순히 정치·사상적인 차원에서 존재했다면 이미 잊혀졌을지 모릅니다. 그의 삶은 어떤 정치, 사상을 실현하기 위해 바쳐진 것이 아니었어요. 인간이 품격을 유지하며 살 수 있는 방법으로 정치, 사상을 받아들였을 뿐입니다. 그것도 독창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호찌민의 그런 면모는 국제사회에 모습을 드러낸 초기부터 나타난다.1924년 6월23일, 제5차 국제공산당대회 제8차회의에서 호찌민은 식민지문제에 무관심한 서구 공산주의자들의 태도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서구사회는 공산주의 운동의 요람이기도 했지만 세계에 식민지를 거느린 제국주의 국가들이기도 했다. “동지들은 식민지 문제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 필요하다면 나는 최대한의 기회를 이용해서 이 문제를 제기하고, 반드시 동지들을 각성하게 만들고야 말 것입니다.” 호찌민의 맹렬한 비판은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세계 공산주의 진영의 막강한 지도자들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한 무명 아시아청년이 보여준 당돌한 태도 때문만은 아니었다. 인도차이나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던 그들은 식민지 문제에 아무런 견해도 없었기에 더욱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 프랑스 공산당 총서기장이었던 엠 토레는 훗날, 그 당시 유럽에서 유일하게 식민지문제에 대한 자기 입장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 호찌민이었다고 고백했다. 1924년 모스크바에서 독일혁명가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호찌민은 한층 더 분명하게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인도차이나 사회는 서구와 다르다. 현재 인도차이나의 계급투쟁은 서구처럼 격렬하지 않다. 마르크스는 뛰어난 이론으로 자기 학설을 세운 사람이지만 그 학설은 일정한 역사적 토대 위에서 수립된 것이다. 그런데 그 역사란 어떤 역사인가. 유럽의 역사다. 유럽이 매우 중요하긴 하지만 유럽이 인류 전체는 아니다.” 이런 호찌민의 견해는 그가 창당한 베트남공산당에 반영됐다. 그가 직접 기초한 강령과 노선은 레닌 이후 코민테른을 장악한 스탈린이나 그의 정적 트로츠키 어느 쪽과도 일치하지 않았다. 호찌민은 당시 식민지 베트남에서 혁명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제국주의자와 반민족세력을 제외한 모든 계급 및 정파와 연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호찌민의 대통합노선은 반공주의자들의 폄하처럼 전술적 차원의 ‘술수’가 아닌 확고한 원칙이었다. 호찌민은 많은 혁명가들이 간과하고 있는 통합의 가치와 기능에 대해 깊이 주목했다.1941년,30년 만에 조국으로 돌아온 호찌민이 까오방성의 팍보에서 창건한 반외세 통일전선조직인 베트민. 통합을 지향하는 확고한 원칙 없이 술수적인 차원에서 베트민을 운영하였다면 단일한 항불전선은 결코 유지되지 못했을 것이다. 단결 단결 대단결, 호찌민은 그 슬로건의 상징이고 증거였다. 단결을 지향하는 호찌민의 지도력은 베트남 통일의 정신적 토대였다. 그러나 소망한다고 해서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서로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한다. 서로의 운명이 일치한다고 믿을 수 있을 때 단결할 수 있다. 너의 행복이 나의 불행일 때, 나의 행복이 너의 불행일 때 단결은 이루어질 수 없다. 내가 울 때 네가 웃고, 내가 웃을 때 네가 울어야 한다면 절대 뭉칠 수 없다. 그 증거 가운데 하나가 한국보다 50년 전에 호찌민이 벌인 금 모으기 운동이다. 1945년, 호찌민은 독립국가를 출범시켰지만 베트남 경제는 완전히 피폐해 있었다. 프랑스에 이어 베트남을 차지한 일본의 착취는 가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통킹델타와 메콩델타라는 세계의 곡창지대가 있었지만 여기서 나온 쌀과 곡식은 모조리 수탈당했다.1944년에서 1945년까지,1년 남짓한 일본의 통치기간 동안 굶어죽은 베트남인들은 무려 200만명이었다. 그러니 독립을 얻었어도 국고는 텅 비어 있었다. 인민들은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었다. 끔찍한 시간은 계속되었고 인민들은 예전과 다름없이 굶주리며 죽어갔다. 이 참담한 때에 독립정부를 만든 호찌민은 민생해결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그는 두 가지 운동을 궁리해냈다. 금식운동과 금 모으기 운동이다. 일주일에 하루 굶기 운동을 통해 아사자 구제에 나섰고, 호찌민은 그 운동을 제일 앞에서 실천했다. 그리고 다른 하나가 금 모으기 운동이었다. ‘금 주간’을 선포하고, 가지고 있는 금붙이를 모으자는 호찌민의 호소에 인민들의 호응은 뜨거웠다. 국가재정을 확보하고 굶주리고 있는 동포를 구제하기 위한 이 운동에 각계각층의 인민들이 참여했다. 대를 물려온 반지를 내놓은 농촌의 가난한 부인네, 끼니를 굶으면서도 처분하지 않았던 결혼 패물을 내놓은 중년의 노동자 부부…. 금 기부의 행렬은 끊어지지 않았다. 그때 놀랄 만한 기부자들이 나타났다. 참파왕조의 공주 출신인 우옌티템은 황금관과 황금목걸이를 모두 내놓았다. 포쩐짱 왕의 마지막 후예인 우옌티템 공주는 빼앗긴 나라를 되찾았으니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놓아도 아깝지 않다고 말했다. 하노이의 한 부자는 수백 돈이 넘는 금덩어리를 기꺼이 내놓았다. 이때 걷힌 금은 이제 막 출범한 독립정부를 움직일 수 있게 하는 재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항불·항미항전의 마지막 시기까지 중요한 밑천이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금 모으기 운동의 최대성과는 50년 뒤 한국에서처럼 모아진 금붙이 그 자체가 아니었다. 어려움을 함께 헤쳐 나가자는 전국민적 결의와 연대감의 확보, 공동체에 대한 자부심의 회복이었다. 베트남인민들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자신의 조국이 목숨을 바쳐서 지킬 가치가 있는 공동체라고 느낄 수 있었다. 호찌민의 지도력은 이러한 통합의 힘을 바탕으로 한 결단과 선택을 통해 발휘되었다.8월혁명 당시 남부베트남혁명위원장을 지낸 쩐반이유는 호찌민의 가장 탁월한 능력을 인내와 결단력으로 꼽았다. “너무 큰 나라와 붙어지내며 세계 최강대국과 싸워야 했던 베트남이 가장 잘하는 일은 우리가 언제 강해져야 하는지, 또 언제 싸워야 하는지를 선택하는 일입니다. 호찌민은 우리가 기다려야 할 때 기다릴 줄 아는 인내를 가르쳤고, 우리가 싸워야 할 때 주저하지 않는 용기를 심어준 지도자지요.” 변화하는 베트남이 어떻게 호찌민의 정신과 연결되어 있는지에 대해서 묻는 나에게 남부베트남 혁명의 최고지도자였던 쩐반이유는 이 한마디로 대답했다. “내 안의 불변으로 만변하는 세계에 대응하라(以不變 應萬變).” 이 말은 호찌민이 협상을 위해 프랑스로 떠날 때 후인툭캉에게 주석직 대행을 맡기면서 한 말이었다. 여러 문제점이 뒤따르고 있지만 베트남은 지금 만변하는 세계에 비교적 성공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그러나 호찌민이 지니고 있었던 ‘내 안의 불변’하는 정신을 지키는 데 성공하고 있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bang80@jowoo.co.kr ●자료 사진을 협조해주신 주한베트남대사관과 베트남통신사(VNA) 관계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특히 애써주신 베트남통신사 부주이흥 서울지국장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 박현채선생 누구인가

    1934년생인 박현채 선생의 인생을 결정지은 것은 10살 남짓한 나이에 겪은 해방정국이었다. 중학생 때 이미 마르크스 이론서를 섭렵하고 16살의 나이로 빨치산 활동에 뛰어들었다. 잘 알려졌다시피 조정래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위대한 전사 조원제’가 바로 박현채다. 조정래는 ‘조원제’를 두고 ‘내가 쓴 박현채 전기’라고 표현했다. 그 뒤 서울대를 거쳐 농업문제 연구가로 이름을 떨쳤다. 박정희가 쿠데타 직후 국내자본을 동원해 경제개발을 계획했을 때 박현채가 속한 ‘국민경제연구회’는 요즘 말로 ‘싱크탱크’였다. 그러나 박정희가 미국의 압력으로 한·일외교정상화를 통한 외자 도입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관계가 헝클어졌다. 그 대가는 가혹했다.6·3사태가 발생하자 중앙정보부는 1964년 1차 인혁당사건을 ‘창조’해냈다. 공안검사들마저 기소를 거부했던 이 사건의 여파는 컸다. 빨치산 경력에 인혁당 사건까지 겹쳐 그는 1989년 조선대 교수직을 얻을 때까지 재야 ‘경제평론가’로 살아야 했다. 그러나 영향력은 강단학자보다 더 컸다.71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내놓은 ‘대중경제론’이 사실상 박현채 작품이라고 볼 정도였다.78년 펴낸 ‘민족경제론’은 ‘전환시대의 논리’와 함께 대학생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으로 꼽힌다. 민족경제론은 국민경제 단위 내에는 민족적 이익에 보탬이 되는 민족자본과 해를 끼치는 매판·외국자본이 공존한다고 보는 이론이다.85년 계간지 ‘창작과 비평’에 발표한 ‘현대 한국사회의 성격과 발전단계에 관한 연구’는 그 유명한 ‘사회구성체 논쟁’의 불길을 당겼다. 그러나 90년대 현실 사회주의권의 붕괴로 그 불길은 곧 꺼졌다. 어떤 이들은 문화운동으로 방향을 틀었고, 또 다른 이들은 ‘80년대 소련제 국정교과서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며 ‘포스트’ 이론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런 시대변화 속에 차츰 잊혀져 가던 박현채는 1995년 숨을 거두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열린세상] 정신이 불구인 사회/이덕일 역사평론가

    ‘이방인’이란 소설로 유명한 노벨문학상 수상자 알베르 카뮈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예언자는 칼 마르크스가 아니라 ‘악령(惡靈)’을 지은 도스토예프스키라고 갈파한 적이 있다. 칼 마르크스가 혁명 이후 유토피아의 수립을 예언했다면 도스토예프스키는 ‘악령’으로 혁명 후 그 반대의 사회를 예언했던 것이다.‘악령’은 1868년 제정 러시아에서 발생한 네차예프 사건을 모티브로 쓴 소설인데, 이 사건은 당시는 물론 2003년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J M 쿠시가 도스토예프스키를 소설 속에 끌어들여 ‘페테르부르크의 대가’라는 소설을 썼을 정도로 유명한 사건이다. 제정 러시아를 전복하기 위한 비밀 혁명결사에서 탈퇴하려는 인물을 네차예프와 그 동료들이 살해한 것이 사건의 개요이다. 이 소설을 쓰기 전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른바 혁명의 동조자였다.1846년 발표한 처녀작 ‘가난한 사람들’에서 도시의 뒷골목에 사는 소외된 사람들의 사회적 비극과 심리적 갈등을 그려낸 도스토예프스키는 3년 후인 1849년 페트라세프스키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감형되어 시베리아 유형 생활까지 했던 전력까지 있었다. 그러나 ‘악령’이 발표되자 그를 동지라고 생각했던 많은 인물들이 비난하고 나섰다. 그중 한 명인 막심 고리키는 “오늘날 러시아인에게 보여 줄 필요가 있는 것은 스타브로긴(‘악령’에 등장하는 허무주의자)과 같은 인물이 아니고…에너지원(源)인 민주주의와 민중과 사회성과 과학에의 복귀다.”라고 비판했다. 러시아 혁명이 성공한 후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이 금서가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러나 역사가 E H 카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이런 반응을 예상했음을 말해 준다. 그는 “문학 작품을 항상 그 정치적 경향으로서 판단하는 나라에서 젊은 세대가 ‘악령’의 작가에게 분노를 느낀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도스토예프스키를 동지라고 생각했던 만큼 그 분노는 더욱 치열했다. 그러나 청년들의 노여움을 샀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별반 놀랄 일은 아니었다. 그는 그러한 결과를 미리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라고 말했는데,‘악령’ 출간 이후의 ‘결과를 미리 짐작하고 있었던’ 도스토예프스키는 혁명 이후의 결과도 미리 짐작했던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예언대로 혁명 이후 현실 사회주의는 스탈린주의라는 인류 역사상 희대의 좌파 전체주의로 현실화하면서 역시 인류 역사상 희대의 우파 전체주의인 나치와 함께 인류에게 무수한 고통을 주었다. 현재도 이런 역사적 과오를 애써 외면하는 일부 경직된 좌파들은 도스토예프스키를 슬라브주의 민족주의적 성향의 반동 보수파로 낙인찍고 있지만 그는 보수와 진보를 넘어 인간과 사회의 본질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악령’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개인적인 여러 문제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러시아의 대문호로 대접받고 있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인물을 우리 사회에서 찾기는 어렵다. 우리사회도 E H 카의 말대로 ‘문학 작품을 항상 그 정치적 경향으로서 판단하는 나라’이기는 마찬가지지만 우리사회의 많은 작가나 지식인들은 인간과 사회의 진실보다는 자신이 속한 진영의 반쪽짜리 진실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좌파와 우파를 막론하고, 정치권과 경제계·노동계 그리고 언론계·학계를 막론하고 우리사회는 모든 분야에서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인’ 이중 잣대와 반쪽짜리 정의가 횡행하고 있다.‘철새’가 날아들면 선거 때가 가까운 것이라는 한국정치 불변의 법칙 또한 전혀 변하지 않았음을 이번 재보궐선거는 또 보여 주었다. 이를 뛰어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 같은 찬 샘물이 정수리를 치지 않는 한, 이런 성찰에 우리사회가 화들짝 놀라 반성하지 않는 한 우리사회는 점점 겉은 멀쩡하지만 정신은 심각한 불구 상태가 될 것이다. 치료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 [클릭 이슈] ‘태백산맥’·’최장집 교수’ 로 본 이적성 기준

    [클릭 이슈] ‘태백산맥’·’최장집 교수’ 로 본 이적성 기준

    이적표현물은 ‘시대의 면류관’인가, 아니면 ‘국가 전복의 도화선’인가. 검찰은 지난달 31일 소설 ‘태백산맥’과 고려대 최장집 교수를 무혐의 처분했다. 그러나 대한민국건국회 등은 지난 28일 검찰의 태백산맥 결정에 불복, 서울고검에 항고하면서 이적표현물 판단에 대한 논란이 다시 떠올랐다. 이적표현물이란 과연 무엇일까. 판단 기준은 시대에 따라 오락가락하고 있다. ●1990년대 이전,‘반정부=이적표현물’ 1981년 무협소설 ‘무림파천황’을 쓴 대학생 박모씨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처벌됐다. 정파(正派)와 사파(邪派)의 대결 구도로 변증법을 설명했다는 이유다. 마르크스의 ‘자본론’ 등 사회주의 서적과 김지하와 리영희씨의 저서들도 대표적인 ‘불온 고전’이다. 올 광복절에 독립 유공자로 추서될 예정인 장지락(일명 김산)의 일대기 ‘아리랑’도 마찬가지다. 당시 대법원은 합법적으로 판매되는 서적이라도 일부 반국가단체의 활동을 찬양, 고무하거나 동조하는 내용이 있다면 처벌했다. ●1990년대 중반,“적극적이고 공격적으로 체제 위협해야.” 하지만 이적표현물의 기준도 변하기 시작했다.1991년 정치권의 합의에 따라 국보법 제7조 1항에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라는 문구가 추가된 이후부터다. 대법원은 1992년 이후 판례를 통해 이적표현물은 “체제를 위협하는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밝혔다. 그렇지만 북한 관련물들은 여전히 된서리를 맞았다.1990년대 초 대학가를 중심으로 시작된 ‘북한바로알기운동’의 일환으로 알려진 ‘꽃 파는 처녀’등 북한의 4대 소설과 황석영씨 등의 북한방문기도 이적표현물로 분류됐다. ●1990년대 후반, 경직된 이적성 판단 북한 김일성 주석이 1994년 사망하자 남북 관계가 급랭했다. 이적성 판단도 경직됐다. 경상대 교재 ‘한국 사회의 이해’와 ‘태백산맥’도 이때 검찰의 심판대에 올랐다. 하급심의 무죄 판결들이 대법원에서 번복되는 사례가 잇따랐다. 대법원은 1998년 북한 소설인 ‘용해공들’ 등에 대해 “김일성 개인에 대한 찬양과 미화가 심한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정도여서 적극적이고 공격적이지 않다.”는 원심의 판결을 깨고 이적표현물로 인정했다. 또 신학철 화백의 그림 ‘모내기’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뒤집었다. 당시 재판부는 “그림 내용이 민중민주주의 혁명과 연방제 통일 등 북한 공산 집단의 주장과 같다.”고 밝혔다. ●2000년대, 이적성 판단에 ‘봄바람’ 2000년 정상회담 이후 남북 관계에도 해빙기가 찾아왔다. 대법원은 2001년 제주 4·3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영화 ‘레드 헌터’가 이적표현물이 아니라고 판결했다. 대법원은 지난달 11일 ‘한국사회의 이해’에 대해 검찰이 기소한 지 11년만에 무죄를 선고했다. 법원은 송두율 교수의 저서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고 현재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검찰도 소설가 조정래씨와 최장집 고려대 교수에 대해 남북 관계를 감안했다며 무혐의 처분했다. ●식지 않는 이적성 논란 이적표현물에 대한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1992년 이적표현물에 대한 전원합의체 판결 당시 이회창, 이재성, 배만운 등 세 명의 대법관은 “판단 기준이 애매모호하다.”는 취지의 소수의견을 제시했다. 법원 관계자는 “예전의 이적표현물들을 다시 심판한다면 변경될 여지도 있다.”고 말했다. 검찰은 최근 무혐의 결정을 통해 2000년대 중반 판단 기준을 살짝 내비쳤다. 남북 관계와 대중성(태백산맥)그리고 학문과 순수 예술성(최장집)등이다. 검찰 관계자는 “시대에 따라 법적용은 변한다.”면서 “국보법이 폐지돼 내란·외환의 예비음모죄로 이적표현물을 처벌한다면 남용의 소지가 크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송호창 변호사는 “법원과 검찰의 이적성 판단은 매우 자의적”이라면서 “사회가 미숙해 국보법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국보법이 사회의 성숙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박경호기자 kh4right@seoul.co.kr
  • 식민지 근대화론 발끈만 할 일인가

    식민지 근대화론 발끈만 할 일인가

    일본 역사·공민교과서 왜곡 파동과 한승조·지만원·조갑제 같은 인사들의 극우 발언 퍼레이드 등 뒤에는 ‘식민지근대화론’이 똬리를 틀고 있다. 일제 식민지 기간 동안 착취·수탈당했다는 것은 허구이자 신화이며 외려 그 기간 동안 오늘날과 같은 경제발전과 근대화의 토대를 닦았다는 이론이다. 우리로서는 발끈하지 않을 수 없지만 이론의 세계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기본적으로 ‘근대’에 경도된 물량주의적 접근이라는 비판이 가능하지만 이 비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물량주의와 수치화·계량화는 기본적으로 ‘과학’의 방법론이기 때문이다. 과학에는 과학으로 대응해야 한다. 그래서 충남대 허수열 교수가 수치화·계량화라는 ‘과학적 방법론’으로 식민지근대화론을 반박했지만 온전한 반박이라 하기에는 이르다. 근대화란 단순히 경제개발뿐 아니라 법·제도·문화 등 상부구조적 요소까지 포함하기 때문이다.‘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는 유의, 서구 미시사의 영향을 받아 최근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1930년대 식민지조선에 대한 연구 결과들은 일제시대임에도 ‘불구하고’ 근대화가 먹물처럼 한반도를 물들여나가고 있었음을 찬찬히 보여준다. 식민지근대화론이 만만치 않은 것은 또 하나의 버팀목이 있어서다. 바로 ‘자본주의체제 이행논쟁’이다. 이 주제는 1930년대 모리스 돕과 폴 스위지의 역사적 대논쟁에서 보듯 좌파 경제학의 핵심 쟁점 가운데 하나다. 알려졌다시피 모리스 돕은 ‘경영형 부농의 등장’을, 폴 스위지는 ‘시장관계로의 편입’을 중세봉건에서 자본주의로 넘어가는 체제 이행의 원인으로 꼽았다. 흔히 전자는 내부동력을 원인으로 본다는 점에서 내인론, 후자는 외부로부터의 충격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외인론으로 불린다. 아주 단순화하자면 식민지근대화론은 ‘일본 근대화=모리스 돕 논리’로,‘한국·중국 근대화=폴 스위지 논리’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점은 이론적 배경이 이렇기에 한국 식민지근대화론자의 대부로 꼽히는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의 원래 학문적 출발점은 종속이론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배경 때문에 식민지근대화론을 ‘친일파의 논리’로만 치부하는 것은 그야말로 ‘국내용 립서비스’로 전락할 위험을 안고 있다. 우리 학자들이 해외 학술대회에 참가했을 때 부딪히는 벽도 여기에 있다. 한국식 민족주의적 접근법을 펼치면 외국학자들은 ‘학술논리’로 받아들이기보다 ‘제3세계 정치운동’쯤으로 이해하면서 “아직도 저런 철 지난 소리를 하느냐.”는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다. 서양사학자들을 중심으로 국제학술계에서 인정받기 위해서라면 민족주의를 과감히 버려야 한다는 주장도 여기에 근거한다. 그런 의미에서 찬반을 떠나 식민지근대화론의 실체를 들여다보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작업이다. 때마침 적합한 책이 나왔다. 일본의 경제사학자 나카무라 사토루 명예교수가 쓰고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정안기 연구교수가 번역한 ‘근대 동아시아 역사상의 재구성’(혜안 펴냄)이다. 안병직 명예교수가 식민지근대화론자로 변신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 사토루 명예교수라는 점도 또 하나의 주목거리다. 일단 1992년에서 2000년 사이 발표한 논문을 모아놓은 이 책의 기획은 야심차다.‘서구 중심의 자본주의 발전사’에 맞서 ‘동아시아 자본주의 발전사’를 정립하겠다는 것이다. 사토루 명예교수의 출발점은 경영형 부농이 서양에서 가장 뚜렷했고 일본이 그 다음이었고 그 외 동아시아지역이 뒤를 잇는다는 데 있다. 이 차이점이 향후 동아시아 근대화의 방향을 결정한다. 일본은 서구의 충격과 내부의 동력이 동시에 작용한, 이를테면 외인론(폴 스위지)에 내인론(모리스 돕)을 더한 복선적 발전모델을 걷는 반면, 그외 동아시아 국가는 서구의 충격이라는 외인론적 모델에 더 가깝다. 전체적인 그림이 이렇게 그려지면 일본제국주의가 무조건 부정적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외려 급격한 봉건잔재 청산으로 근대화가 더 빨리 자리잡을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됐다고 본다. 이는 마르크스가 말하는 ‘본원적 축적’에 가깝다. 이제 민족의 문제로 파악했던 식민통치의 폭력성은 자본주의 근대화의 일반적 폭력성으로 대치된다. 본원적 축적이라는 점에서 ‘개발독재시대’ 역시 도덕적으로 재단해서는 안되는, 어떤 의미에서는 피할 수 없는 단계로 설정된다. 식민시대와 박정희시대에 대한 한국과 일본 우익의 시각이 비슷한 까닭이다.‘그 때는 먹고 사는 게 급했다.’,‘그래도 그 덕에 이만큼 먹고 살게 됐다.’는 화법을 떠올리면 된다. 사토루 명예교수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일본 경제성장을 연구했을 때 경영형 부농층에 이어 형성된 100인 미만의 중소규모 기업이 경제성장의 핵심동력이었다고 평가한 것이다. 한국 등 동아시아 국가들의 성장도 마찬가지였다. 또 서양 자본주의 발달사에도 일부 이런 대목이 보인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아예 중소규모기업보다 대규모 공장제 생산을 강조했던 서양경제사의 통설을 실증적으로 재검토해보자고 제안한다. 이론적인 측면에서 일본의 ‘역공’이 시작된 셈이다. 사토루 명예교수의 논의는 경제발전과 근대화에 관한 일반이론이지만 일본에는 근대화의 내재적인 싹이 있었다는 일본 중심적인 관점이 전제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고려대 아세아硏 정안기교수 “우리는 미시적인 경제사회학 연구를 얼마나 축적했나.” 나카무라 사토루 명예교수의 저서를 번역한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정안기 연구교수는 사토루 교수의 논의를 ‘친일 대 반일’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로 바라보는 것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나타냈다. 정 교수는 “사토루가 기본적으로 일본 중심의 시각을 유지하고 있다는 데는 비판의 여지가 있을지 모르겠다.”면서도 “그러나 식민지근대화론이라는 좁은 틀로만 해석하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원래 남미와 아프리카는 동아시아보다 높은 수준의 발전단계를 보였으나 지금은 완전히 뒤바뀌어 있다.”면서 “그렇다면 후발 주자들의 성공적인 근대화에 기여한, 뛰어난 흡수능력은 무엇이냐라는 게 바로 사토루의 주된 관심사”라고 말했다. 그렇기에 사토루의 연구는 “세계사적 전망 속에서 동아시아의 성장을 서구의 경제발전론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경제발전론으로 설명하려는 것”이라는 평가다.‘개발 없는 개발’이라는 저서를 통해 일제시대 경제성장은 신기루라고 주장한 충남대 허수열 교수의 논의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정 교수는 “경제사적 연구에서 ‘민족’이라는 키워드를 개입시킬 수 있는지는 의문”이라면서 “이해는 하지만 역사라는 것은 현재와 미래의 전망에 필요하다는 점에서 그 주장이 학술적으로 얼마나 유효한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서울대 안병직·이영훈 교수로 대표되는 낙성대경제연구소의 연구성과에 대해서는 “평가는 한다.”면서도 “그게 전부는 아니다.”고 말했다. 전부가 아닌 이유로는 두 가지를 들었다. 기본적으로 경제사학계만의 논점을 제공하기보다 기존 역사학계와 논란을 벌이는 것 자체가 비효율적이고 경제사에 대한 기본 연구성과도 없이 한 연구자가 조선후기·식민지·근대 모두 연구하는 것은 난센스라고 비판했다. 학문적 결론에 대한 찬반 논쟁 자체보다, 제대로 된 논쟁에 이를 만한 경제사적 연구 기반조차 없다는 게 더 심각한 문제라는 지적이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송두율칼럼] 큰 미국,작은 미국

    [송두율칼럼] 큰 미국,작은 미국

    “미국은 오류(誤謬)다. 굉장하나 그러나 하나의 오류임에는 틀림없다.” “100% 미국인 가운데 이의 99%는 멍청이다.” 미국과 미국인을 향해 이렇게 심한 평가를 내렸던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정신분석학을 창시한 지그문트 프로이트(S Freud)와 극작가 버나드 쇼(B Shaw)였다. 이러한 평가와는 극히 대조적으로 칼 마르크스는 미국을 “가장 어리지만 서방의 가장 강력한 대변자”로서, 그리고 사회민주주의의 대 이론가 칼 카우츠키(K Kautsky)는 “자본주의권(圈)의 가장 자유스러운 나라”라고 평가한 적이 있다. 미국은 이렇게 넓은 의미의 문화적 영역에서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지만 자본주의의 모순을 혁명이나 개혁을 통해서 극복하려 했던 사상가들로부터는 오히려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이러한 평가는 ‘10월 혁명’을 거친 소련에서도, 또 나치독일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났다. 가령 재즈나 스윙음악을 소련에서는 ‘부르주아적 퇴폐문화’로서, 나치독일에서도 ‘흑인과 유대인적인 천박성’으로 공격받고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술과 산업분야에 있어서 미국이 보여준 창발성이나 현대성은 열심히 따라 배워야 할 모범으로 간주되었다. 미국의 대량생산 조직방식인 ‘테일러주의’와 ‘포드주의’가 소련에서는 ‘과학적 노동조직’으로 개칭되어 적극적으로 도입되었고, 독일의 자동차 개발연구자 포르셰(Porsche)는 1936년 디트로이트의 포드 자동차공장을 견학하고 독일의 국민차 대량생산 체제를 준비하였다. 이렇게 ‘좌냐 우냐’라는 일반적 통념에 따라 재단될 수 없는 미국에 대한 평가의 핵심에는 미국은 물질적으로는 풍요하지만 정신적으로나 문화적으로는 빈곤하다는 판단기준이 대체로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평가는 유럽에서만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19세기 중엽부터 본격화된 서세동점(西勢東漸)이라는 불리한 정세는 동북아에서도 비슷한 유형의 반응을 낳았다. 동도서기(東道西器)적 발상이 바로 그러한 예이다. 즉고매한 동양의 정신을 계속 함양시켜 이를 근본으로 삼으면서 이에 서양(미국)의 산업과 기술을 잘 결합시킨다면 동양은 서양(미국)이 낳은 개인주의와 물질주의를 극복해서 모순 없는 진정한 의미의 근대성을 인류 앞에 제시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의 대표적인 예가 40년대 일본에서 나타났던 ‘근대의 초극(超克)’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와 비슷한 사고유형은 오늘날에도 우리 주위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이는 물질도 정신도 미국의 그것을 그대로 복사해 보겠다는 태도와는 분명히 다르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지금까지 보여준 사회상은 특히 유럽의 정신사 속에서 항상 긍정과 부정, 그리고 애증(愛憎)을 기록해 왔으며 지금도 이는 마찬가지다. 무엇보다도 미국의 심장부를 강타한 ‘9·11’은 개인의 자유, 다원주의 그리고 관용을 기초로 한 미국의 민주주의 장래에 비관적인 전망을 낳고 있다.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J Baudrillard)는 그와 같은 엄청난 사태는 힘을 자제할 줄 모르는 초대강국 미국 스스로가 초래했으며 이는 사람들의 본능 속에 내재하고 있는 상상력의 폭력이지만, 그러나 타인의 불행을 보고 생기는 어떤 고소한 감정까지도 묘하게 자극하고 있다고 솔직히 표현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전에 대서양을 넘나들며 미국과 유럽을 연결했던 미국의 거대한 상선회사가 ‘세계는 작다, 오직 미국만이 크다’라는 광고문구를 사용했던 적이 있는데 이는 오히려 ‘세계화’로 표현되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에 보다 더 적합한 내용일 수도 있다. 동서냉전 종말이후의 미국은 이 지상의 어떠한 나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막강하다. 그러나 전체 인류가 지향하는 보편적 가치에 비추어 볼 때 미국도 여전히 하나의 작은 나라일 수밖에 없다. 미국과 비교할 때 한국은 분명 작은 나라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민주주의와 평화의 실현이라는 인류의 보편적인 큰 가치 앞에 미국과 함께 서 있다. 미국은 우리에게 주어진 기성품은 결코 아니다. 우리의 바람직한 미래를 위해서 항상 다시 발견되고 또 비판적으로 새롭게 구성되어야 할 미완성품일 뿐이다.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시사 평론가 정범구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시사 평론가 정범구

    시대를 풍미한 3인의 용사가 있었다. 에라스무스는 ‘우신예찬’으로 중세교회의 부패를 지적했다. 토머스 모어는 ‘유토피아’로 영국사회를 비판하면서 이상적 평등사회를 주창했다.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로 중세의 기사도를 풍자했다. 이들은 사상가로서의 업적도 많이 남겼지만 ‘시사평론가’라는 공통점에서도 눈길이 모아진다. 톨레랑스(Tolerance)라고 했던가.‘당신의 정치적·종교적 신념과 행동이 존중받기를 바란다면 우선 남의 신념과 행동을 존중하라.’는 뜻이다. 독선의 논리로부터 자기 스스로 벗어나길 요구한다. 이는 과거에도 그랬지만 이 시대의 고민이기도 하다. 한 무당이 있었다. 한때는 국회의원을 지냈다. 세상의 온갖 잡신을 접했다.‘언제나 처음처럼’을 깨달았다. 다시 무당으로 돌아왔다. 수준이 한 차원 높아졌다. 톨레랑스를 생각한다. 흑백 논리에 빠지는 지식인 문화를 우려한다. 이 때문에 늘 합리적 토양 위에 서 있으려 한다. 정범구(52)씨. 개혁 성향의 진보논객, 대표적 시사평론가, 방송인 등으로 불린다. 지난해 4월 변호사 출신 오세훈씨와 함께 17대 국회의원 선거 불출마를 선언했다. 이때의 신선한 충격은 아직도 생생하다. 꼭 1년이 지났다. 그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우선 정치권과 거리를 완전히 두었다. 다소의 후유증과 유혹이 있으련만 말끔히 극복해냈다. 아울러 시사프로그램을 맡아 ‘시사평론가’로서 왕년의 명성을 되찾고 있다. 대표적으로 CBS 라디오에서 ‘정범구의 뉴스매거진 오늘’(김갑수 연출, 월∼토요일 오전 9시∼ 11시30분)을 맡았다. 또 CBS-TV ‘정범구의 누군가’(최영준 연출, 매주 금요일 오전 10시15분),EBS ‘TV정치교실’(김현 연출, 매주 목요일밤 11시40분∼ 12시40분) 등을 진행하고 있다. 이 가운데 ‘뉴스매거진 오늘’의 경우 ‘생활 밀착형 뉴스’라는 독특한 방식으로 많은 인기를 끌고 있다. 교육제도와 청소년 문제, 웰빙뉴스 등 주부들의 눈높이에 맞춰 청취율을 높였다는 평가다. 홈페이지 게시판에 ‘국민들의 궁금증과 해결책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코너라 참 좋은 것 같다.’는 글이 자주 올라올 정도다. 서울 양천구 목동의 ‘현대41타워’ 스카이라운지에서 정씨를 만났다. 그는 ‘시사평론가’를 무당으로 비유했다. 떠돌아다니는 여러 잡신을 자신의 몸속에서 꽁꽁 엮어매 국민 각자에게 올바른 결론을 내릴 수 있도록 전달자 역할을 해주는 것이란다. 아울러 타자(他者)와 공존할 수 있는, 즉 상호간의 의사소통을 위해 합리성과 사물을 입체적으로 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고 부연했다. ●‘脫정치 1년’… 평론가 명성 되찾아 “지난 1년은 개인적으로 볼 때 정말 편한 시간이었습니다. 유시민 의원이 (정계)은퇴하는 저를 보고 공익근무를 마치고 복귀했다고 하더군요. 늘 긴장해 있다가 시민사회로 돌아온 자유인이라고나 할까요.” 정씨는 4년(16대 국회)을 회고하면서 “어항 속의 물고기로 일거수일투족이 주시될 수밖에 없는 삶이었다.”고 말했다. 또한 정계 은퇴의 속사정을 묻는 질문에 ‘박수칠 때 떠나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새천년)민주당이 분당되는 것을 보고 스스로 비장함이 생겼다고 술회했다. 이울러 이라크파병 동의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많은 비애를 느꼈다고 했다. 그렇다면 왜 정계에 입문했을까. 지난 1997년 대선때 민주당에서 몇 차례 러브콜이 있었지만 거부했단다. 얼마 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아침식사를 하자며 정씨를 불렀다. 이 자리에서 김 전 대통령은 “나이는 정 박사보다 많지만 개혁의 열정은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말로 정씨를 설득했다. 결국 다가온 운명이려니 하면서 비바람이 몰아치는 ‘정치 운동장’에서 뛰어보자고 마음을 정했다고 했다. 덕분에 국가가 어떻게 운용되는지 등을 현장에서 경험할 수 있었다. 현재의 정치구도에 대해 시사평론가로서 어떤 전망을 하는지 궁금했다. 그는 “우익보수인 한나라당과 좌익진보인 민노당, 그리고 중도정당인 열린우리당 등이 있지만 양극화되다 보면 중도정당은 자연히 세력을 잃고 말 것”이라고 내다봤다. 또한 오는 30일 국회의원 보선이 끝나고 내년 지방선거를 치른 후에는 열린우리당은 동요할 수밖에 없으며 좌파인 민노당과 우파인 한나라당이 대립하는 구도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어린시절부터 사회의식에 눈떠 “인생의 미래는 흥미로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무대에서 어떤 배역이 주어질지 알 수 없을 뿐더러 세상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거든요.” 과거의 정치는 모르는 것을 통괄했지만 지금은 확연히 다르다면서 “현재의 심정에서 정치할 생각은 전혀 없다.”고 다짐했다. 그러면서 논객으로, 시사평론가로 할 일이 많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정씨는 충북 음성에서 태어났지만 선친이 미8군 군무원이었던 까닭에 어린 시절을 경기도 평택에서 지냈다. 초등학교 졸업 무렵에는 동두천으로 이사했다. 이런 연유로 어린 시절에는 미군부대 주변의 유흥업소 종사자, 춥고 배고픈 사람들과 자주 접했다. 인권의 사각지대를 몸소 체험한 것. 이같은 주변 환경 때문인지 ‘왕눈이’라는 별명답게 초등학생 때부터 일간 신문을 읽는 등 사회의식에 눈길을 던졌다. 지난 75년 경희대를 졸업한 직후 첫 직장으로 서울기독교청년회(YMCA) 사회개발부 간사 공채 1기로 취직했다.4년 뒤에는 강원룡 목사 등의 권유로 독일 개신교에서 추진하는 ‘기독교 사회운동가’라는 장학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된다. 숨막히던 유신말기여서 독일유학은 탈출구나 다름없었다. 독일 유학 20일 만에 10·26사건을 접했다. 이후 5·18 광주민주화 항쟁에 이르기까지 한국 소식이 독일 매스컴의 톱뉴스를 차지했다. 젊은 그에겐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한국 사회의 모순이 과연 뭔가.’라는 물음을 던지면서 심각하게 고민했다. 마르크스의 서적에 빠지기도 했다.‘너희가 나를 따르려거든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예수의 삶을 체험한다는 각오로 자동차 공장, 식당, 막노동 등 온갖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때 그는 유럽지역의 유학생 민주화운동에 가담했다. 손학규 경기도지사, 김세균 서울대 정외과 교수, 박호성 서강대 정외과 교수, 김대환 노동부장관, 송두율 교수 등 여러 인사와 함께 한국 사회의 주요 현안에 대해 세미나를 열었다.80년 5월에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독일 전국청년조직 대회에 한국 유학생 대표로 참석했으며, 이때 대회 의장을 맡은 슈뢰더 현 독일총리와 자연스럽게 만났다. 11년 동안의 유학생활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토양이 됐다.90년 귀국한 그는 경희대 충남대 한남대 등에서 강사를 하다가 94년 기독교방송에서 시사프로그램 ‘시사자키 오늘’을 맡으면서 시사평론가로서의 명성을 쌓았다. ●11년 유학생활이 인생의 가장 소중한 토양 특히 97년 대선 당시 대통령 후보 합동 TV토론의 사회를 맡아 일약 유명인사가 됐다. 이후 98년 KBS라디오 ‘안녕하십니까 정범구입니다’를 비롯해 KBS-TV ‘정범구의 세상읽기’‘정범구의 시사비평’ 등을 진행하던 중 2000년 16대 국회(경기 고양 일산갑)에 들어갔다. 최근에는 승마를 즐기고 있다. 정치권에서 묻은 먼지를 털어내듯 말을 타고 달리노라면 위풍당당해지고 스트레스가 확 풀린다고 했다. “요즘 정치를 보면 어떤 희생양을 만든 다음 그에 대한 역작용을 통해 개혁에너지로 끌고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족 구성원 사이에도 이해관계가 다르듯 4800만명을 끌고가는 리더는 분열과 경쟁이 아니라 통합과 평등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대열의 뒤를 돌아보고 낙오자가 있으면 손잡아 이끌어줘야 하지요.” 인터뷰를 마치면서 인근 소주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술잔을 기울이면서 “정치를 그만둔 뒤 아내와는 다시 연애하는 기분으로 돌아왔다.”며 활짝 웃었다. 김문기자 km@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54년 충북 음성 출생 ▲71년 성동고등학교 졸업 ▲75년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76∼79년 서울기독교청년회(YMCA) 사회개발부 간사 ▲79년 독일 유학(마르부르크필립대학) ▲90년 귀국, 경희대·충남대·한남대 강사 ▲92∼94년 현대경제사회연구원 정책연구실 실장 ▲94∼2000년 기독교방송 시사프로그램 ‘시사자키 오늘과 내일’ 진행 ▲97년 12월 대통령 후보 합동TV토론 사회 ▲98년 KBS라디오 ‘안녕하십니까 정범구입니다’진행 ▲98∼99년 KBS-TV ‘정범구의 세상읽기’ 진행 ▲2000∼2004년 제16대 새천년민주당 국회의원(경기 고양일산갑) ▲2004년∼현재 기독교방송 ‘정범구의 뉴스매거진 오늘’‘정범구의 누군가’ EBS ‘TV정치교실’ 진행 ▲저서 정치개혁 시민운동론(공저·92년), 현대의 위기와 새로운 사회운동(공저·94년),21세기 프론티어-전환의 물결과 신발전모델(공저·94년), 정범구의 세상읽기(98년)
  • 동·서양 巨視史서 읽는 역사와 미래

    최근 서점에서 역사 관련 서적들을 둘러보면 종전에 나왔던 역사서와 달리 다루는 주제가 너무도 다양해졌다는 점이 눈에 띈다. 왕조나 전쟁·정복, 혹은 주요 정치인 위주의 역사 서술에서 벗어나 여성(과부·마녀), 농부, 소시민 등이 역사책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지 오래다. 최근에는 똥, 오줌 등 공개적으로 언급하기를 금기시하던 소재까지 다룬 서적이 줄을 잇고 있다. 바로 미시사 열풍이다. 이전 역사에서는 버려지고 매장됐던 소소하고도 별 볼일 없는 이야기들이 ‘역사’라는 명패를 달기 시작한 것이다. 이 틈을 비집고 일부 대중역사서 수준의 서술이 ‘미시사’로 포장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어쨌든 미시사(이탈리아), 문화사(영미권), 일상사(독일) 등 용어의 차이는 있지만 역사를 ‘진보’나 ‘계급투쟁’,‘민족의 자서전’으로 보지 않겠다는 점은 공유하고 있다. ●미시사와의 대화 시도 역사를 보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점에서 가치 있지만 그럼에도 약간의 찜찜함은 남아 있다. 너무 개별적인 사안에 매몰되다 보니 전체적인 지평을 놓치는 것 아니냐는 반론이다. 특히 서구와 달리 우리는 아직 ‘제대로 된’ 근대성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미시사를 일종의 ‘퇴행’으로 받아들이는 비판론도 만만치 않다. ‘미래를 보는 눈-거시사의 세계’(노영숙 옮김, 우물이 있는 집 펴냄)는 이런 비판적 시각 위에 서 있으면서도 미시사와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톡특한 책이다. 출판사 역시 미시사에 대해 서문에서 “놓쳐왔거나 애써 외면해왔던 많은 것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긍정적인 면”이 있지만 “아시아적·세계체체적 상상력의 필요성에는 답을 하지 못한다.”고 평했다. 노르웨이의 석학 요한 갈퉁과 파키스탄 미래학자 소하일 이나야툴라가 함께 쓰고 편집한 이 책은 거시사가 무엇인지, 왜 필요한지를 설득하는 작업으로 비친다. ●선형적 역사 vs 순환적 역사 저자들은 20명의 거시사가를 다룬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스미스, 스펜서, 마르크스, 토인비 외에 사마천과 할둔, 비코 등 동양 학자들도 다루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저자들은 이들을 크게 서구적, 발전론적 사관으로 알려진 ‘선형적인 역사모델’과 동양적, 운명론적 사관으로 알려진 ‘순환적인 역사모델’로 구분하고 이들의 논의와 장단점을 세세하게 논의하고 있다. 이어 10가지 기준으로 이들 20명의 거시사가들에게서 공통점과 차이점을 뽑아낸 뒤 이들 이론에서 절충점을 찾을 수 있는 지점은 어디인지 되묻는다. 이를 통해 5∼6장에서는 ‘사회거시사’를 통해 개인미시사와 세계거시사가 대화할 수 있다는 희망을 내비친다. 저자들의 문제 의식은 각 학자들의 주장과 이에 대한 후대 학자들의 주석이 아니라 거시사가들의 논의에서 우리가 무엇을 배울 것이냐 하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성령에 귀 기울일 따름” 추기경들 침묵의 맹세

    265대 교황을 뽑는 ‘비밀스러운 여정’이 18일 오후(현지시간) 드디어 시작됐다. 콘클라베에서 언제, 어떤 절차를 거쳐 어떤 교황이 뽑혔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시스티나 성당 굴뚝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고 종소리가 울릴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 이날 벌써 5000여 순례자와 관광객들이 굴뚝을 바라볼 수 있는 성베드로 광장에 모여들었고 교황이 선출될 것으로 점쳐지는 20일을 전후해 절정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유력한 차기 교황으로 거론되는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은 이날 오전 성베드로 성당에서 콘클라베에 앞서 마지막으로 개최된 특별미사를 집전하며 가톨릭에 닥친 위협에 대해 경고했다. 보기에 따라선 다소 위험한 발언이다. 라칭거 추기경은 “‘절대 진리는 없다.’는 상대주의의 전횡이 자행되고 있다.”며 “오늘날 근본주의라는 모략을 당하는 교회의 신조에 기초해 명확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신앙에 대한 위험으로 간주한 것은 분파주의,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이데올로기, 자유주의, 무신론, 불가지론과 상대주의였다.AP는 라칭거 추기경이 콘클라베에 들어가기 직전 다른 114명의 추기경과 주교들, 일반 신도들에게 경고성 발언을 날린 배경에 의아하다는 반응을 내놓았다. ●미사를 마친 추기경들은 콘클라베 개최 장소인 시스타니 성당으로 이동, 오후 4시30분(한국 시간 오후 11시30분) 침묵의 맹세를 하고 투표권이 없는 원로 추기경으로부터 신성한 의무에 관한 강론을 들었다. 그후 라틴어로 “에스트라 옴네스(모두 나가달라.)”라고 외치는 소리가 울려퍼짐으로써 콘클라베가 시작됐다. 첫날 추기경들이 투표에 곧바로 들어갔는지는 분명치 않다. 추기경들이 다음날로 연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추기경들은 전날 숙소로 쓰이는 산타 마르타 호텔에 들어서면서 기도책과 숙소에서 먹을 스낵 외에 CDP와 헤드폰까지 지참한 경우가 있었다고 일간 라 스탐파가 보도했다. 이들 품목은 긴장 해소용으로 반입이 허용됐다. 추기경들은 일절 취재진과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러나 17일 오전 일요미사를 드렸던 몇몇 추기경은 취재진에 콘클라베에 임하는 마음가짐을 내비쳤다. 플로렌스 대주교인 엔니오 안토넬리 추기경은 “새 교황은 이미 하느님에 의해 선택됐다. 우리는 다만 누구인지 알게 해달라고 기도할 뿐”이라고 말했다. 한편 브라질 언론은 LA타임스를 인용해 콘클라베에서 힘을 합치는 유럽의 추기경들과 달리 중남미 출신 추기경들은 분열된 양상을 보이며 유럽 추기경들의 편에 서는 것에 만족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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