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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꽂이]

    ●전기(傳奇)(배형 지음, 최진아 풀어씀, 푸른숲 펴냄) 전기란 기괴하고 신기한 일을 다룬 이야기를 말한다. 중국 당나라 시대는 어느 왕조보다도 일상을 벗어난 ‘기(奇)’에 관심이 많던 시대였다. 중국 각지의 민담과 설화를 채록한 이 책엔 원숭이 아내, 물고기가 둔갑한 미인, 바다속 신선국, 동굴 속 낙원 등 기이한 소재의 이야기 31편이 실렸다.1만 5000원.●하늘 아래 기와집을 거닐다(박선주 지음, 다른세상 펴냄) 한국 전통 건축을 전공한 저자(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가 전국 한옥 22곳을 둘러보며 느낀 단상을 담은 에세이집. 담양 소쇄원, 영천 매산종택, 예산 추사고택, 양동 관가정, 논산 윤증 고택, 안동 학봉 종택, 구례 운조루, 상주 양진당, 함양 정여창 고택 등이 소개된다.9800원.●불량정권(재스퍼 베커 지음, 김구섭·권영근 옮김, 기파랑 펴냄) 김정일과 북한 정권의 본질을 분석한 연구서. 영국 BBC방송 중국 특파원을 지낸 저자는 북한을 ‘죽음의 수용소 군도’‘마르크스주의 절대왕조 국가’로 규정한다.1만원.●조선의 화가 조희룡(이성혜 지음, 한길아트 펴냄) 조선문인화의 새로운 지평을 연 선비화가 매수(梅) 조희룡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조명한 평전. 조희룡의 문학론과 화론, 예술론을 다뤘다. 저자(경성대 교수)는 조희룡의 문학예술은 19세기 여항문화의 대미이자 20세기 새로운 문화예술의 시작점이라고 말한다.1만 5000원.●인도를 읽는다(사카키바라 에이스케 등 지음, 정택상 옮김, 황금나침반 펴냄) “코끼리는 움직임이 굼뜨다. 그러나 일단 달리기 시작하면 큰 걸음에 가속도가 붙어 아주 빠르다.” 맘모한 싱 인도 총리가 최근 인도의 경제성장과 관련해 한 말이다.‘잠자던 코끼리’ 인도가 깨어나 달리기 시작했다.‘아시아의 거인’ 인도 진출을 위한 전략이 담겼다.1만 2000원.●천지가 다정하니 풍월은 끝이 없네(마에노 나오아키 지음, 윤철규 옮김, 학고재 펴냄) 중국 고전 속에 나타난 자연에 관한 이야기들을 묶었다. 당·송대의 시가와 소설, 신화의 세계를 넘나들며 자연과 인간의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원제는 송나라 시인 소식의 ‘적벽부’에서 유래한 ‘풍월무진(風月無盡)’.1만원.●소로우와 에머슨의 대화(하몬 스미스 지음, 서보명 옮김, 이레 펴냄) 미국 정신사의 두 영웅인 소로우와 에머슨의 25년에 걸친 비밀스러운 우정 이야기. 소로우보다 열네 살 위로 언제나 멘토의 역할을 자임했던 에머슨이 소로우의 성장을 달가워하지 않았다는 일화가 시선을 끈다.1만 2000원.●마음이 머무는 풍경(최진연 지움, 대산출판사 펴냄) 문화재신문 기자인 저자가 20여년간 그리운 풍경, 우리 옛것을 찾아다니며 사진과 글로 남긴 기록을 묶었다.1만8000원.●수첩 속의 풍경2(중앙 일간지 여행전문기자 지음, 한국관광공사 펴냄)경가도 여주 해여림식물원, 제주도 동거문오름 등 전국 유명 여행지 39곳의 독특한 색깔과 사연을 원색 사진과 함께 실었다.1만원.
  • [김형효 교수의 테마가 있는 철학산책] (1) 욕망과 세상보기의 혁명

    [김형효 교수의 테마가 있는 철학산책] (1) 욕망과 세상보기의 혁명

    모든 것들은 자연세계에서 서로 관계를 지으려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다. 물리학적으로 모든 것들은 만유인력의 법칙으로 서로 잡아당기고 있다. 생물학적으로 모든 존재자(있는 것)들은 상생하거나 상극한다. 일방통행은 없고 다 쌍방적인 관계로 만물의 존재방식이 이루어지고 있다. 상생과 상극이 서로 별개의 것으로 다른 것이 아니라, 한 개의 사실이 이중적으로 작용한다. 예컨대 내륙으로 이동하는 활어 탱크에 넣어둔 물고기들은 이동 도중에 지쳐 거의 다 죽는다고 한다. 그런데 거기에 그 물고기들을 잡아먹는 천적을 넣어두면 한두 마리가 잡아먹히지만, 나머지 물고기들은 싱싱하게 활어로서 살아 있다고 한다. 상생적 삶과 상극적 죽음이 서로 별개의 다른 사실들이 아니고, 동전의 양면처럼 한 사실의 이중성인 셈이다. 자연계에서 생물만 그렇지 않고 무생물도 역시 이중성의 법칙으로 상호관계를 맺는 것 같다. 예컨대 물과 불은 서로 상극적인데, 그 물과 불이 상호 보완하면서 지구상의 모든 생명의 에너지원이 된다. 죽음이 빈자리를 만들어 주지 않으면, 새로운 생명이 태어날 빈 여지가 없어진다. 죽음은 새 생명의 탄생을 도와 준다. 산정에 솟은 거대한 암벽도 주위의 지질을 안정시켜 주는 역할을 한단다. 이처럼 자연의 일체는 다 상생과 상극의 작용을 동시적으로 수행한다. 자연의 존재 방식은 상생과 상극의 상관관계의 얽힘이다. 이런 얽힘을 우리는 자연의 존재론적 욕망이라 부른다. 왜냐하면 그 욕망은 사회생활을 하는 인간처럼 무엇을 소유하기 위한 탐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욕망은 상생의 아름다움과 상극의 처절함을 동시에 함유하고 있다. 우리는 자연을 소박한 낭만주의적 심정으로 너무 아름답게만 표상하는데, 자연은 아름다움의 이면에 처절한 죽음의 장송곡을 연주하고 있다. 자연이 죽음을 연출하지만, 그 죽음은 자연의 새 삶을 가능케 하는 자기 정화작용을 포함한다. 인간이 가한 외적 사고사(事故死)가 아닌 경우에, 자연은 죽은 시체의 모습을 거의 보이지 않는다. 자연은 스스로 정화한다. 이것이 곧 자연의 완전 교환방식을 암시한다 하겠다. 상생과 상극의 얽힘 관계도 자연의 완전교환의 존재방식의 다른 이름이겠다. 생명은 다 죽기 싫어하지만, 죽어서도 그 시체를 타자에게 준다. 노자(老子)는 이런 자연의 교환적 존재방식을 일컬어 여러 가지의 비유로 표현했다. 그 중에서 몇 가지만 열거하면, 요(·오고 감), 혼이위일(混而爲一·뒤섞여 하나로 존재함), 승승(繩繩·새끼 꼬이듯이 이어짐), 만물병작(萬物竝作·만물은 자타가 함께 지음) 등등이라 하겠다. 그런데 인간은 이런 자연생활에서 떨어져 나오면서 사회생활을 하게 되었다. 사회생활이 인간의 생존방식인데, 존재론적인 욕망방식에서 소유론적 욕망방식으로 미끄러져 온 과정이 인류 생존방식의 과정이다. 사회생활도 인간들의 상관관계의 얽힘이므로 욕망이 그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그러나 인간들의 사회적 욕망은 소유론적 욕망으로 점철돼 있기에, 여기서 모든 인간사의 드라마가 생긴다. 시장이 인간사회 욕망의 교환을 상징하는데, 시장의 교환은 자기의 이익을 더 많이 남기기 위한 교환이므로 불완전한 교환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시장은 자연의 존재론적 교환과 다른 소유론적 교환의 탁월한 양식이다. 사회주의적 도덕론자들은 이 시장의 소유론적 교환법칙들을 이기심의 타락 현상으로 규탄하나, 그것은 단순한 도덕적 판단의 소관이 아니고 더 근원적으로 인간 욕망의 운명과 직결된다. 잠깐 인류학적으로 이 운명을 생각해 보자. 바로 20세기 프랑스의 구조주의 사상가인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이론이다. 교환은 인간집단의 생존방식이다. 이 교환의 생존방식을 인류는 아득한 옛날 토템 제도로 시행했다는 것이다. 토템은 원시인들의 유치한 종교신앙 형태가 아니라, 종족집단간의 차이를 표시해 서로 물물교환의 거래를 이루기 위한 방편이다. 자연의 만물이 서로 다르기에 상생과 상극의 교환을 이루듯이, 인간집단도 서로 차이를 띠어야 교환의 거래가 이루어진다. 그래서 곰 토템은 곰을 잡지 않고 호랑이를 잡고, 호랑이 토템은 호랑이를 보호하고 그 대신 곰을 잡는다. 이것이 상호교환의 제도다. 이 토템 제도는 노자가 갈파한 완전한 상호교환 제도로서의 요()나 만물병작(萬物竝作)의 의미와 상통한다 하겠다. 그런데 이런 완전교환 방식의 토템 제도가 어느 날 불현듯 불완전한 교환방식인 카스트로 미끄러졌다는 것이다. 카스트 제도는 우열의 비교가 집단 사이에 등장하게 됐음을 말한다. 그래서 우수 집단이 열등 집단을 지배하고 불평등한 거래관계가 형성되면서, 집단이기심이 생기게 됐다는 것이다. 토템의 존재론적 교환양식이 카스트의 소유론적 교환양식으로 방향을 틀게 되었다. 이것이 인류의 역사적 운명이라는 것이다. 이 운명을 알려주는 신화가 구약의 창세기에 나오는 금단의 열매를 먹은 원죄에 비유된다 하겠다. 금단의 열매를 먹었기에 인류는 원죄를 지었고, 그 대가로 선악과 호오(好惡)를 분별하는 지능을 얻게 됐다는 것이다. 이런 원죄의 신화가 불교에서도 등장하고 있다. 인간이 아득한 옛날에 모든 것이 하나로 서로 회통되던 이 세상을 문득 지능으로 분별하는 무명(無明)이 생기면서 이 세상을 하나로 보는 마음이 조각조각나게 됐다는 것이다. 기독교와 불교는 서로 같은 내용을 약간 다르게 표현했을 뿐이다. 소유론적 욕망의 등장은 인간의 마음에 선악과 호오의 구별을 느끼는 마음의 등장과 궤적을 같이한다. 선악과 호오의 개념들은 여기서 서로 같은 차원이다. 싫고 좋은 것을 구별하는 마음과 개인적 또는 집단적 이기심이 함께 등장한다. 이 이기심이 사회생활에서 남들에 대해 비교우위를 쟁취하려 한다. 역사에서 주인과 노예의 계급이 생겼고, 그 계급 싸움이 인류사에서 희비극의 드라마를 잉태시켰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본 통찰력이다. 동시에 그 이기심의 드라마가 인류문명의 과학기술적 진보와 경제성장을 촉진하게 된 원동력이라는 것이다.18세기 독일의 대철학자 칸트는 이 이기심의 드라마인 소유론적 욕망을 인류사에 있어서 불의 발견과 유사하다고 간주했다. 위에서 언급된, 금단의 열매를 먹은 사건이나 또는 인간의 마음에 홀연히 호오의 분별력을 갖게 된 사건이나 다 인간이 지능을 소유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이 지능이 문제다. 이것이 인간의 문명을 있게 한 원동력이고, 또 이것이 인간 세상을 추악하게 한 원흉인 셈이다. 칸트는 전자를 보아 지능을 찬양했고, 마르크스는 후자를 보아 지능의 이기심을 저주했다. 지능이 생물적 본능을 대신해 등장하게 된 이유는 이렇다. 동식물은 본능적으로 생존의 방식을 펼쳐 나간다. 그러나 인간은 이런 본능이 극히 미약해 본능만으로 생존을 유지할 수 없다. 이것이 인간의 역사적 운명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모자라는 본능을 대신하는 지능의 개발이 필수적이었다. 이 지능이 과학기술을 불러온다. 과학기술은 소유론적 욕망의 표현이다. 그런데 동식물의 본능은 존재론적 상생과 상극 이외의 것을 모르지만, 인간의 지능은 이기심에 근거한 소유욕을 아울러 진행시켰다. 이 지능이 인류사의 모든 것을 설명해 준다. 인류사는 개인적, 종족적 이기심의 소유욕을 만족시키기 위한 투쟁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노자의 토템적 자연의 존재론적 욕망이 마치 역사 현실의 실제와는 맞지 않는 것처럼 간주해 도피적이고 둔세적인 사상이라고 오해했다. 그러나 앞으로 계속되는 전개에서 우리는 노자의 도(道)가 그런 현실도피의 철학이 아님을 보게 될 것이다. 아무튼 마르크스나 도덕적 이상주의자들은 이 이기심의 해악을 알고 있기에 이 이기심을 뿌리 뽑기 위한 도덕-정치적 투쟁을 벌였다. 정신문화적으로 인류사를 개관해 보면, 인류사는 경제기술적인 소유적 편리와 사회도덕적인 반(反)이기적 정의의 투쟁처럼 보인다. 인류사의 진리는 편리와 정의의 두 가지 상반된 요소로 시소게임을 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사회도덕적 반이기적 정의의 진리는 반소유론적이기에 자연적 토템의 교환거래와 유사한 것처럼 보인다. 토템적 교환은 마르크스가 본 원시공산사회의 유형과 유사하다. 그러나 지능의 등장으로 그 사회는 이미 상실한 낙원과 같다. 마르크시즘과 도덕이상주의자들의 착각은 크게 봐서 두 가지다. 하나는 이기심을 능위적(능동적·인위적)으로 노력하면 뿌리째 뽑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저들은 이기심의 상징인 사유재산제도를 억압하거나 철폐해 이기심이 인간사회에 등록되지 않게끔 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거짓이다. 성욕으로 종교적 수행에 방해를 받은 이가 그의 성욕을 나타내는 성기를 절단한다고 성욕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성욕의 소유욕은 더 깊은 무의식의 차원이기에 도덕의식적 각오와 그 수준에서 해결이 안 된다. 둘째로 그들은 반이기적 정의론을 주장하여, 이것이 반소유론적 존재론의 토템적 교환을 역사상에 부활시킨다고 주장했다. 역시 이것도 거짓이다. 그들의 반이기적 정의론도 역시 다른 형태의 소유론적 욕망의 주장이다. 왜냐하면 소유론적 욕망은 경제기술적 물질적 소유욕 이외에 정신적 형이상학적 지배욕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어떤 반이기적 도덕의 캐너피(canopy)로 사회를 포장하겠다는 의지도 역시 사회를 도덕적으로 장악하겠다는 소유론의 결의와 다르지 않다. 거기에는 토템에서와 같은 자연적 교환의 자유도 이미 사라진다. 그래서 사회도덕주의는 시장경제뿐만 아니라, 모든 경제적 기제(機制)마저도 파괴한다. 말하자면 인류가 경험한 두 가지의 큰 혁명인 산업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은 다 소유론적 혁명의 세상보기나 다름없다. 그래도 저 혁명들은 인류에게 두 가지의 학습을 가져다 주었다. 하나는 경제기술적으로 편리한 세상을 만들었다는 것과 또 하나는 이기심의 독성을 알려 주었다는 점이다. 이제 인류는 제3의 혁명을 모색해야 할 그런 시절 인연에 이르렀다. 그것은 편리와 정의가 상충하지 않는 존재론적 혁명의 길이다. 존재론적 혁명의 길은 소유론적 이전의 혁명과 아주 다르다. 그것은 세상이 아니고, 세상을 보는 마음을 혁명하는 일이다. 계속 우리는 이런 길을 걸어갈 것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철학)
  • [‘2006 日우경화 전망’ 특별인터뷰] “日 전쟁허용 개헌 시민운동으로 저지할 것”

    [‘2006 日우경화 전망’ 특별인터뷰] “日 전쟁허용 개헌 시민운동으로 저지할 것”

    |도쿄 이춘규특파원|다와라 요시후미(俵義文·65) ‘어린이와 교과서 전국네트21’ 사무국장은 “일본 국민은 아직 정치가만큼은 우경화되지 않았다. 정치가의 헌법·역사인식과 국민의 생각은 다르다.”면서 국민의 생각·정서와 정치인들의 의식 흐름은 별개라고 강조했다. 그런 일본 국민들의 의식에 따라 우익의 지지를 받는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이 10% 이상 채택률을 호언했지만 역사교과서는 0.39%, 공민교과서는 0.19%라는 저조한 채택에 그쳤다는 것이다. 새역모의 기세가 채택 직전까지 워낙 거세, 채택반대 시민운동 역량이 의심받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다와라 사무국장은 2005년 새역모가 집필한 후소샤판 역사왜곡 교과서 채택 저지의 1등 공신이었다. 그는 최근 네트21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통해 2009년 채택(4년마다 한번씩 검정)에 대비한 교과서 운동의 방향과 관련,“현장교원들의 목소리들이 역사교과서 채택에 반영되도록 제도 개선 투쟁을 해나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특히 “2006년은 전쟁을 할 수 있는 국가로 일본을 변화시키려는 개악 세력과 이를 저지하려는 시민운동 세력의 투쟁이 전개되고, 그 분기점이 되는 매우 중요한 한 해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역사교과서 0.4%, 공민교과서 0.2%라는 후소샤 교과서 채택률에 만족하는가. -최종 채택률은 역사 0.39%, 공민이 0.19%다. 그렇게 만족하지는 않지만 상황이 알려진 것만큼 나쁘지도 않다. ▶아쉬움이 많다는 것인가. -그렇다. 도쿄도 스기나미구와 도치기현 오타와라시 등이 채택했다. 물론 도쿄도 교육위원회의 인적 구성을 보면 이런 결과를 짐작할 수 있었다. ▶후소샤 교과서 저지의 원동력은. -시민운동의 힘, 특히 한국·일본의 시민운동의 힘이 컸다. 중국에선 전문가들만 움직였다. ▶협박 등의 어려움은 없었는가. -(우익들의) 방해나 괴롭힘은 아주 많았다. 그러나 협박은 없었다. ▶한국과 일본의 시민단체 교류는. -점점 연대가 강해질 것이다.(2005년) 12월 초 서울에서 한·중·일 대표가 모여 3국 공통역사교재 ‘미래를 여는 역사’에 대해 협의했다. 오는 6∼9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리는 역사 관련 포럼에서도 이 문제를 협의한다. ▶제1야당인 민주당 마에하라 대표가 헌법 9조 2항(군대보유 금지) 개헌을 주장하는 등 정계의 보수화가 심화되고 있다. 교과서 운동이 어려워지는 것 아닌가. -우리는 교과서만을 문제삼는 것은 아니다. 교육 전반과 헌법개정 등에 대한 감시운동도 우리가 하는 일 중 하나다.1990년대 중반 이후 우경화는 진행됐지만 특히 2002년 북한이 납치문제를 인정한 뒤 이같은 경향이 고조됐다. 하지만 우경화가 심각한 상황이라고 단언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9·11총선에서 자민당이 압승했지만 소선거구 득표율은 50%에 못 미쳤다. 자민당은 소선거구에서 47.8%를 득표했지만 제도의 혜택으로 의석은 무려 73.0%나 획득했다. 헌법 9조 개헌에도 60% 이상의 국민이 반대한다. 마에하라는 원래 가장 극우적인 ‘일본회의 국회의원 간담회’ 회원이다. 아베 신조(관방장관), 아소 다로(외상) 등 매파들이 모두 같은 모임의 멤버다. 마에하라는 아베와 같은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 나는 마에하라에게는 어떤 기대도 하지 않는다. 민주당에도 마에하라 같은 이들이 많다. 그래서 대표가 됐다. 그러나 국민여론은 아직 정치가만큼은 우경화되지 않았다. 그래서 후소샤 교과서 채택이 저지된 것이다. 국민의식이 자민당·민주당 의원들의 수준과 같았다면 문제의 교과서에 대한 채택이 많았을 것이다. 일본 사회가 건강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아직은 괜찮다. ▶아베 신조 관방장관이 총리가 되면 교과서 문제가 더욱 심각해질 것으로 보나. -그렇다. 그는 지금도 새역모 활동을 지지하고 있다. 관방장관이 되고 나서도 안 바뀌었다. 그것이 그의 역사인식, 정치 자세 아닌가. ▶2008년 검정,2009년 중학 교과서 채택에 대비한 준비는. -하고 있다. 교과서 채택 제도를 개선하는 데 가장 힘을 집중하고 있다. 교육위원들의 투표로 교과서를 채택하는데 과반수 위원이 찬성하면 채택된다. 교육현장에 있는 교원들의 의견이 반영되도록 해야 한다. 일부 지역에선 이번에도 현장 목소리가 반영돼 문제의 교과서 채택을 저지할 수 있었다. ▶지금의 정치상황에서는 채택 확산을 막기 어렵지 않나. -문부성과 교육위원들이 열쇠를 쥐고 있다. 교육위원들이 지역주민 의견을 수용하도록 노력하고 있다. ▶역사교과서 파동은 10년,20년 계속될 것으로 보나. -일본 정치상황, 사회분위기의 변화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새역모 교과서를 채택한 학교들도 앞으로 채택을 변경할 수 있는가. -가능성은 낮다. 다만 시민 의식을 확산시키기 위해 스기나미구, 오타와라시에서 “이런 교과서로는 학생들에게 잘못된 생각을 불어넣는다. 학생이 위험하다.”는 서명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새역모 교과서의 영향이 다른 교과서에도 미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97년에 비하면 전반적으로 각 출판사의 교과서 내용이 나빠지고 있어 문제다. 이 또한 제도 결함에서 생기는 문제이기도 하다. 교육위원들이 결정권을 갖는 제도 아래서 출판사들이 전쟁문제나 식민지 시대 문제에 전향적 기술을 피하려는 상황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를 보면서 다른 출판사들도 (판매를 위해)우경화된 교육위원들이 싫어하는 내용은 피했다. 반드시 현장 교원의 목소리가 반영돼야 한다. ▶올해 일본 사회의 전망은. -헌법 개악이 시도되는 해가 될 것이다. 전쟁을 할 수 있는 국가로 만들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교육기본법 개악, 헌법개악 등을 시민운동을 통해 저지하려고 한다. 올 한 해는 개악과 저지투쟁이 전개되는 ‘분기점’의 해가 될 것이다. ▶한·일, 중·일 계속 불편할까. -정부 차원에서는 그렇다. 현재 상황에선 개선이 있을 수 없다. 일본이 역사 및 교과서 문제에서 입장을 바꾸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 집권세력이 하는 것은 미국과의 일체화다. 전쟁을 할 수 있고 전쟁하는 나라로 만들려고 한다. 그 노선을 추진하는 이상 한국과 중국, 아시아 국가와 국민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다만 시민단체 차원에서는 우호가 강화될 것이다. ▶새역모가 중간에 활동을 포기할 가능성은 없는가. -없다. 그들은 교육운동이 아니고 정치운동을 벌이고 있다. 새역모는 그들의 판단이 아니라 자민당과 재계 판단에 따른다. 전쟁하는 국가를 만들기 위해 그들의 역할이 충분히 있다고 보기 때문에 그들의 활동은 계속될 것이다. ▶자민당과 기업이 계속 지원할까. -그럴 것이다. 재계 인사 다수가 새역모를 지원한다. 올해 중국 등에서의 불매운동 영향으로 기업인들의 이름은 공개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 ▶새역모가 2008년을 대비해 벌써 준비에 들어갔다는 보도도 있는데. -새역모 총회에도, 회보에도 그런 내용은 없다. 내부 방침을 흘렸나 보다. ▶네트21 회원의 상황은. -매월 증가하고 있다.5550명이며 지역 네트워크도 50개나 된다. ▶‘미래를 여는 역사’라는 한·중·일 3국 공통역사교재 판매상황은. -한국이 5만부, 일본이 7만부, 중국 13만부 정도다. 일본에서는 5만부 정도를 생각했는데,7만부 팔린 것을 보면서 일본 사회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새로운 공통교재도 만드는가. -막 시작된 공통교재의 개정 문제를 협의하고 있다. 여러가지 채널에서 이러저러한 시도를 하고 있다. ▶한국의 역사교과서를 본 적 있나. 문제는 없던가. -문제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번역판을 봤는데. 자국 중심의 역사교과서였다. 어린이의 역사인식 형성을 위해 충분하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 3국 공통역사교재(미래를 여는 역사)를 만들었다. 그걸 참고해 그 나라의 교과서에 반영, 개선해야 한다. 그리고 한국과 중국에도 자신의 교과서를 개선해야 한다는 자체 움직임이 시작됐다. ▶한국 시민단체도 역할이 있었나. -후소샤판 채택 저지에 한국 시민의 역할도 컸다. 한국 시민들이 이런저런 역할로 협력해 준 데 대해 마음으로부터 우러난 감사의 뜻을 표시하고 싶다. ▶한국 시민들의 구체적인 도움은. -‘아시아평화와 역사교육연대’(교과서운동본부)가 앞장섰다. 대표단을 일본에 보내 지역 시민단체와 연대해서 운동을 했다. 특히 일본 지방자치단체와 자매관계인 한국 지자체 사람들이 편지도 보내고, 도움이 되는 많은 활동들을 해주었다. taein@seoul.co.kr ■ 다와라 요시후미 국장은 누구다와라 요시후미 사무국장은 1941년 1월 후쿠오카에서 11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독학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주경야독으로 주오대 법학부를 다녔다. 일본에서도 강하다는 ‘규슈 사나이’의 전형으로 통한다. 1960년 안보투쟁의 격랑 속에서 대학생활을 시작했고 사회과학연구회에서 활동하며 마르크스와 노동법에 심취했다. 출판사 취직 후 노조 활동에 적극 참여,1988년 출판노련의 중앙집행위원이 돼 교과서 대책 활동 등 교과서 왜곡문제에 깊게 관여하기 시작했다. 98년 역사교과서 왜곡을 막기 위해 ‘어린이와 교과서 전국네트21’을 조직했다.2001년 4월 2000명이던 회원 수는 현재는 5550명으로 늘었다.‘네트 21’은 회원이 내는 회비로 운영된다. 다와라 사무국장은 2001·2005년 자민당과 우익 인사들의 지원을 받는 새역모 교과서의 부당성을 알리기 위해 전국을 불철주야 뛰어다녔다. 지역주민, 시민단체, 학부모들의 공감대를 넓히는 일도 주도했다. ‘역사검증 무엇이 문제인가’ ‘철저 검증-위험한 교과서’ ‘검증-15년전쟁과 중·고 역사교과서’ ‘다큐멘터리-위안부 문제와 교과서공격’ 등 저서가 30여권이나 된다.
  •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당선작] ‘유령’ 작가의 진실/조연정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당선작] ‘유령’ 작가의 진실/조연정

    삶은 살아가는 것이지, 이야기하는 게 아니거든 -‘부넝숴(不能說)’ 중에서 ●편집자주:원고의 각주는 편의상 모두 본문 안에 삽입했습니다. 1. 형식에서 정서로, 혹은 인식에서 믿음으로 김연수는 똑똑하고 성실한 작가다. 이것은 물론 그의 작품이 증명해 주는 바다. 이미 첫 장편 ‘7번 국도’의 하이퍼텍스트적 글쓰기에서 그것이 예고되었고,‘굳빠이, 이상’에서는 그의 ‘좌뇌’가 승한 글쓰기가 과도하다 싶을 만치 절정을 이뤘으며, 최근의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에서는 논픽션적 자료의 편집으로 픽션을 제작하는 방식의 글쓰기(이에 대해서는 김연수 심진경 류보선의 좌담 ‘작가-되기, 혹은 사라진 매개자 찾기’, 문학동네 2005년 가을호 참고)가 일가를 이뤘다고 할 만하다. 새로운 소재와 생생한 묘사라는 ‘발로 쓰는’ 글쓰기가 유행하는 가운데, 김연수는 그 나름 ‘읽고 쓰는’ 글쓰기의 장을 적극적으로 열고 있다고나 할까? 예컨대,‘공야장 도서관 음모 사건’의 보르헤스식 모티프에서 ‘연애인 것을 깨닫자마자’에 나오는 경성제대 이어철 박사의 ‘냉수를 마셔라’라는 자료에 이르기까지, 또 휘트먼의 시에서 한시에 이르기까지 그의 레퍼런스는 실로 화려하다. 때문에 그의 작품은 비록 대중적이지 않을지는 몰라도 읽을 만하다. 읽을 만하다는 것은 그 자료적 풍부함과 형식적 공들임이 해석의 욕망을 자극한다는 말이다. 비슷한 시기에 등단한 김영하나 백민석이 “이런 이야기를 할 수도 있다.”라는 소재적 새로움을 문단에 던져줄 때, 김연수는 “이런 식으로도 이야기할 수 있다”라는 형식적 새로움을 마련해 주고 있다. 그는 자칭 “현학적인 문학근본주의자”인 것이다. 더불어 김연수는 시대적 상처와 유관한 작가다. 첫 단편집 ‘스무 살’의 ‘구국의 꽃, 성승경’에서 투신하는 학생 운동가라든지,‘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의 ‘첫사랑’에서 수배자의 고백이라든지,‘그 상처가 칼날의 생김새를 닮듯’의 배경이 되는 광주항쟁과 지역감정의 문제라든지, 이처럼 80년대적 상황과 사회적 투쟁의 상처는 89학번 김연수에 의해 소설 안으로 계속해서 호출된다.“세대의식과 소설가적 자의식을 맞세우며 자신의 소설적 지평을 지속적으로 갱신했다.”는 평가는 그래서 나온 것이다. 물론 김연수가 등단했던 1990년도는 집단의식보다는 ‘나’가 문단의 화두였다. 한편에서는 윤대녕, 신경숙이 ‘나’를 돌아보며 내면으로 침잠할 때, 다른 한편에서는 김영하가 그 ‘나’를 파괴하겠다며 나르시스트의 ‘거울’을 부수고 있었고, 백민석의 주인공들이 엽기적인 행각을 서슴지 않았으며, 여러 문화적 코드들이 혼종된 작품들도 마구 쏟아져 나왔다. 억눌렸(렀)던 개인의 욕망이 불거져 나오기 시작했고, 왜곡된 방식으로 사회의 모순된 구조가 드러났으며, 그 와중에 대사회적인 투쟁이나 고민은 이미 유행지난 옷가지처럼 옷장 깊숙이 처박힌 애물단지가 되어버렸다. 그래도 김연수의 주인공들은, 학생운동의 과잉진압으로 죽은 ‘성승경’의 동생 ‘승진’이 죽은 누나의 원피스를 입고 유령처럼 밤거리를 헤매듯, 그 유행지난 옷가지들을 자꾸 꺼내서 입어본다. 그는 자칭 “80년대에 가까운 작가”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 옷은 역시 유행에 걸맞지 않는 터라, 더불어 이 부채의식이라 할 만한 것에 짓눌려 있기에 작가의 상상력의 궤적이 너무나 크고 그의 지적 발랄함이 너무나 경쾌한지라 “김연수에게 문학적 글쓰기는, 자신의 진실을 고통스럽게 토로하는 것보다는 상상력을 통해 세계를 재구성하는 쪽에 훨씬 더 가까이 있다.”(서영채,‘유토피아 없이 사는 법’, 문학동네 2002년봄,p328)라는 지적이 폭넓은 공감을 얻기도 했다. 김연수 식 예의 그 경쾌한 글쓰기는 ‘사랑이라니, 선영아’라는 재치있는 연애소설에서 그 빛을 발하고, 결국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에서 편집자, 주석가, 번역가로서의 그의 재구성 능력이 우연과 필연, 진실과 거짓에 관한 통찰까지 얻음으로써 한층 업그레이드된다. 이렇게 본다면 김연수에게 80년대적 상황 혹은 세대 감각, 그리고 그의 작품들을 관통하고 있는 다소 우울한 정서의 문제는 작가가 초지일관하고 있는 형식적 구성력에의 관심, 또 그에 값하는 작가의 능력에 의해 묻혀 버리게 된다. 따라서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에서 징후적으로 등장하는 시대적 배경들과 그 소설집 전체를 관통하는 고독과 비애의 정서는 “이 소설만큼은 연필로 쓰기로 결심했다.”라는 작가의 고백과 함께, 김연수의 작품 목록에서 특이한 것으로서만 간주될 위험을 안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집의 독특함 혹은 이질성에 대한 평가는 뒤이어 나온 ‘유령작가’의 형식적 강렬함에서 더 힘을 얻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최근 장편 연재를 시작한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문학동네,2005년 겨울호)에서 김연수는 다시 80년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끌고 오면서 전후 한국 현대사를 거론하고, 그러면서 인간의 문제에 집중하고 있어서 흥미롭다. 그렇다면 김연수는 어디로 가려는 것일까? 이쯤 되면, 김연수의 ‘변전’(김형중),‘기획력’(심진경), 혹은 ‘문턱 넘기’(김연수)는 여전히 한쪽에는 세대의식, 한쪽에는 작가의식을 놓고 그 양극 사이를 진동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아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연수 소설에서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 것은 무엇일까? 이 글은 이러한 질문에서 시작한다.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김연수는 애초에 인간에 대한 관심이 지대한 작가라는 것이다. 그가 유지해 왔고 벌써 정점에 도달한 듯 보이는 포스트모던적 글쓰기나 불가지론적인 사고에는 세계에 대한 냉철한 인식의 차원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 있다. 그의 세계인식이 “그러므로 진실은 없다.”는 냉소나 허무주의가 되지 않고,“진실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곧바로 이어지는 것도 바로 인간에 대한 끝없는 관심 때문일 텐데, 그것은 어떤 ‘정서’의 집약을 통해 스며 나오기도 하고,‘의지’ 혹은 ‘믿음’으로 실천되기도 한다.“아프지 말아라, 너무 아파하지 말아라”(‘노란 연등 드높이 내걸고’,‘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문학동네,2003,p.194. 이하 본문에서 이 책을 인용할 경우 1:페이지수)라는 식의 위로와 “나도 어디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텨보기로 했다”(‘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창작과 비평사,2005,p.28. 이하 본문에서 이 책을 인용할 경우 2:페이지수)라는 의지 같은 것들이 김연수를 해체적 허무주의자라는 평가로부터 지켜낸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그 한복판에 항상 ‘언어’에 대한 고민이 놓인다는 점이다. 소설집의 제목에 ‘작가’라는 말을 대놓고 쓸 만큼, 또 작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품 목록이 다수에 해당할 만큼 그에게 언어의 운용은 중요하다. 김연수 소설의 인물들이 흔히 무엇을 쓰거나 말하거나 읽고 있다는 사실도 그 증거가 된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언어 수행 행위를 바탕으로 해서, 김연수만의 진정성과 고민의 내용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답하는 과정으로 이 글은 쓰여진다. 그의 형식적 기발함과 재치와 성실성에 묻혀 버린 김연수의 진정성은 무엇이고, 그가 멈추지 않는 질문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는 그 질문을 지금껏 어떻게, 어디까지 해결했나? 2. 기억으로 말할 수 없는 것, 말로 기억할 수 없는 것-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작가가 그렇듯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의 인물들은 끊임없이 말하거나 쓴다. 김병익이 지적했듯,‘나는 유령작가입니다’의 작품들은 이제 무엇에 대해 쓰기 시작하겠다는 말을 먼저 밝히는 것으로 서두를 뗀다.(김병익,‘(해설)말해질 수 없는 삶을 위하여’, 위의 책)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의 ‘나’는 스스로는 인식하지 못한 채 혼잣말을 계속하고, 그의 이혼한 아내는 꿈꾼 것을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사람이다.‘부넝숴’와 ‘이렇게 한낮 속에 서 있다’의 화자는 아예 독자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한편 ‘거짓된 마음의 역사’는 일방적인 편지 형식이며,‘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의 ‘그’는 세상과 단절된 채, 여자 친구의 자살 원인을 알기 위해 ‘소설’을 쓴다. 유서에 자신에 대한 단 한 줄의 언급도 남겨 놓지 않은 여자친구에게 자신의 존재는 도대체 무엇이었고,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기는 한 것일까라는 처절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그는 ‘너’의 흔적을 그리고 ‘우리’의 흔적을 더듬는다. 문제는, 그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혼잣말이며,“사랑한다고 해서 한 인간의 꿈 속까지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며,“삶은 살아가는 것이지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며, 편지에는 답장이 없다는 것이며, 소설 속의 인과관계 안에서는 어떤 진실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그들의 언어는 장애를 지니고 있다. 말은 할수록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새였을까, 네즈미’에서처럼 단어 몇 개로밖에 소통할 수 없는 말하기가 더 단호하고 정확하게 들릴 수 있다. 그렇다면 결국 계속해서 말을 하고 글을 쓴다는 것은 허무한 일인가. 그래도, 여하튼, 침묵은 비겁하다. 그래서 인물들은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또 말하고 쓴다. 전작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의 인물들도 그랬다. 그렇지만 그들은 타인과 소통할 수 없음에 대해서는 무신경하다. 아니 그 점에 대해서는 일부러 외면하고 있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왜일까? ‘첫사랑’의 ‘나’는 수배중이다. 자수할 시간이 임박한 상황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하는 일은 첫사랑 ‘정인’에게 편지를 쓰는 일이다. 그 편지 내용이란 건 거창할 게 없다. 삶의 기로에 서 있는 사람에게 역설적으로 아주 사소한 기억들이 떠올려지듯 ‘나’는 어린 시절의 몇 가지 사건을 떠올리고 그에 대해 고해성사를 해나간다. 자신의 관심이 무시당하자 정인의 뺨을 때린 일, 혜지누나에게 화풀이하듯 “남의 잔에 술이나 따르는 더러운 년이 일식은 무슨 일식”(1:114)이냐며 결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일 등을 얘기한다. 그런 고백의 사이사이에 “판문점 도끼만행사건”,“데프콘 발동”,“직선제 개헌”과 같은 정치적 사건들을 무심히 끼워 넣는다. 그런데 그 편지는 단지 자신의 지난날을 정리하고 “아름다운 것을 보고 망쳐버리는 동물은 사람뿐이야.”(1:114)라는 뒤늦은 뉘우침을 고백하기 위한 것이었을까? 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군가에게 이런 얘기를 남겨야만 한다는 초조한 마음”(1:98)에 사로잡혀 편지를 쓰고 있다는 사실이며, 따라서 특별히 그 대상이 ‘정인’이어야 할 것도 없다는 점이다.‘정인’의 주소는 짐 정리를 하다 우연히 발견되었고, 정인에 대한 기억도 따라서 우연히 떠올려 졌을뿐이다. 결국 고백을 들어줘야 할 그 ‘누군가’는 바로 자기 자신이다. 그는 지난날의 기억을 되짚어가며 스스로를 용서하고 위로하는 과정이 필요했을 뿐이다.“너를 다치게 하지도 않으면서 너를 놓치지도 않는 방법을”(1:105) 연구하던 어린 시절의 ‘나’는 이제 “나를 다치게 하지도 않으면서 너를 놓치지도 않는 방법”이 바로 자기 안에 머물기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까닭 없는 슬픔과 한없는 기쁨과 막연한 불안감이 하늘을 떠도는 먼지 알갱이처럼 내 안에서 서로 섞여서 하나의 거대한 원으로 바뀌는 동안, 조금씩 둥근 원이 태양 속으로 밀려들기 시작했지. 눈물 방울처럼 검은 유리판에 새겨진 그 아름다운 노란빛. 언젠가 보았던 너의, 또 혜지누나의 눈물 맺힌 눈동자처럼 한쪽 부분부터 흔들리는 그 둥근 빛. 그러나 결코 부서지거나 망가지지 않을 그 소중한 동그라미. 무한히 수축됐다가 다시 온 우주로 퍼져나가는 그 노란 물결.(1:118) 이 소설집 전체를 관통하는 이미지를 둥근 노란빛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그 이미지는 이 작품에서 특히 일식을 보는 장면에서 두드러진다. 아버지를 따라 나간 시위에서 처음 본 ‘펄럭거리는 노란빛’, 어린 시절 나를 사로잡았던 그 노란빛,‘나’는 그게 꿈이었고,‘사랑’이었다고 정의 내리고 이제 일식을 보면서 자기 자신을 용서한다. 그렇지만 검은 유리판을 통해서만 볼 수 있고, 태양에 의해 완벽하게 가려진 그 노란빛은 꿈도 사랑도 아니다. 어쩌면 꿈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실재(real)를 가리고 있는 환상일지도 모른다. 어둠 속에서 예쁘던 반딧불이 실은 끔찍한 벌레에 다름 아니었듯 말이다. 이렇게 ‘나’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내 안에서 사랑하고 내 안에서 꿈꾸고 그렇게 자신을 스스로 용서하고 있는 것이다. ‘하늘의 끝, 땅의 귀퉁이’에서 ‘게이코’는 어떤가. 이 작품에서도 편지는 중요한 모티프다.‘태식’과 ‘김씨’가 크리스마스 날 케이크 판 돈을 갖고 사라진 게이코를 찾으러 가는 데는, 게이코가 받았던 펜팔 편지가 중요한 단서가 된다. 게이코의 아버지는 월남 가서 실종됐고, 엄마는 자살을 했고, 따라서 그녀는 ‘천애고아’나 다름이 없다. 그래서,‘엄마’라는 단어 대신 ‘모친’이라는 단어를 쓰는,“하루에 열 마디 이상을 하지 않고”,“말한다고 해도 더듬기 일쑤”(1:29)인 ‘게이코/경자’는 ‘서유진’이라는 이름으로 ‘수잔’에게 펜팔 편지를 쓴다. 답장도 받았고 게이코는 얼굴도 모르는 그 누군가와 서로 소통하는 듯 보이지만, 그 답장은 ‘게이코/경자’에게 온 것이 아니며,‘게이코’가 만들어낸 또 다른 나인 ‘유진’에게 온 것일 뿐이다. 그런데 그녀가 편지에 털어놓는 이야기란,“펜팔 가이드”의 예문대로, 자신은 다니지 않는 학교 얘기, 자신은 가본 적 없는 캠핑 얘기일 뿐이다. 학교와 캠핑, 날씨에 대한 안부를 묻는 것 등이 ‘게이코’ 또래가 누려야 할 삶의 전형이어야 하는 것이다. 말더듬이 게이코는 지구의 반대편에 있는 ‘수잔’에게 일지라도 자신이 그런 삶과는 거리가 먼 빵집에서 일하는 말더듬이 고아라는 것을 이야기할 리 없다. 아니 어쩌면 언어의 장벽 때문에 자기의 이야기를 완벽하게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수잔’을 대화 상대로 택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녀가 말을 더듬는다는 것도 말하기 싫다는 무의식적인 의지의 표명일 수 있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게이코’는 왜 편지를 쓸까. 그 편지 역시 ‘첫사랑’의 편지처럼 타인에게 자신을 이해받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녀는 빵집에서 여전히 빵처럼 둥근 그 노란 빛 아래서 편지를 쓰면서, 그렇게 자기를 원하는 방식대로 꾸며내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러나 그런 식으로라면 그녀가 빵집 창문에 다 못 쓰고 간 ‘New Year‘는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편지를 쓰지만 여전히 자기 안에 머물러 있듯, 게이코의 행방의 단서가 되었던 편지는 당연하게도, 그녀가 간 곳을 정확히 알려주지 않는다. 이처럼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의 인물들에게 쓰는 행위는 적극적으로 소통하지 않으려는 행위이며, 결국 상처를 견디는 방식이다. 그들은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또 다른 상처가 될 만한 것들을 차단한다. 단지 각자의 기억을 더듬고 각자의 이야기를 할 뿐이다. 이처럼 그들의 쓰기/말하기/읽기는 자기 충족적이다. ‘리기다소나무숲에 갔다가’의 삼촌과 도라꾸 아저씨가 끊임없이 ‘만담’을 하는 것도 ‘나’의 궁금증에 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치유의 과정에 가깝다. 카페 여자와 딴 살림을 차렸다가 그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자살 소동으로 시내를 떠들썩하게 했던 삼촌은 내 “인간 연구”의 대상이다. 나는 왜 “인간 연구”에 골몰할까? 대학 1학년 때 분신 장면을 목격한 나는 “죽을 게 뻔한 길인 줄 알면서 걸어갈 수밖에 없는 심정”(1:151)이 무엇일까 라는 숭고한 질문에 대해 생각하고, 그런 질문은 삼촌에게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여하튼 삼촌에게 “물망초 여자 진짜로 사랑했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즉 내 질문에 대한 답은 애초에 삼촌으로부터 나올 수 없다. 삼촌 역시 ‘나’에게 답하고 있다는 자의식 없이 그저 자신의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떠든다. 그들 사이에는 질문과 답의 형식이 있기는 하지만 진정한 소통은 없다. 삼촌은 넋두리를 늘어놓듯 자신의 로맨스를 말하기 시작하고, 도라꾸 아저씨는 옆에서 “하이고, 조카 듣는데 창피하지도 않나? 뭔 사설이 그래 기나?” 라는 식의 추임새를 넣어 준다. 가히 ‘만담’ 수준이지만, 혼잣말에 가깝다. 이 ‘만담’ 속에서 나는 삼촌을 이해했고, 삼촌은 공감을 얻었을까? 이해는 앎에서 오는 것만은 아니다. 앎이 이해와 치유의 첫 걸음일 수는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하지만 이해받는 것과 이해하는 것이 다 무슨 소용일까? 삼촌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미 그 길은 가지 않은 길이고, 여전히 삼촌은 ‘리기다소나무 숲’ 안에서만, 혹은 자신 안에서만, 지난 날 부르던 로버트 프로스트의 ‘더 로드 낫 테이큰’을 읊조리는 수밖에 없는 것을. 삼촌과 도라꾸 아저씨가 ‘만담’을 하는 동안,‘노란 연등 드높이 내걸고’의 ‘봉우’는 그야말로 시답지 않은 ‘농담’을 만들어 내고 있다. 전국낙서문학회 지역지부에서 ‘나대로’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는 봉우에게 삶이란 ‘만반의 준비는? 5천. 평생동지는? 12월 22일’ 따위의 말장난으로만 파악할 수 있는 것에 불과했다. 방위 근무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주간지의 독자페이지에 이런저런 낙서를 지어서 투고하는 일에 열을 올리면서 봉우에게 삶은 더더욱 우스꽝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봉우가 만든 최고의 낙서는 바로 ‘인생이란? 픽션에 불과하다’였다. 어두운 산길을 걸어가는 자신의 망상이 빚어낸 허상과 직면하니 그야말로 인생은 픽션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1:192) 뱃 속에서 죽은 아이를 위해, 자신의 상처를 달래기 위해 절에 들어가 아이의 배냇저고리를 만드는 ‘예정’은 “시답지 않은 주간지에 아무 짝에나 소용없는 낙서 따위나 투고하는”(1:197) 봉우에게 세상을 모르는 ‘멍청이’,‘어릿광대’라고 소리친다. 봉우는 그야말로 상처와 대면하는 것이 두려워 ‘나대로’ 그 상처를 외면하고 살았던 것이며, 그 외면의 방식이 바로 ‘낙서질’이었던 것이다.“아기가 죽으면서 봉우의 마음속에서도 뭔가가 죽어나갔고” “그 자리가 아프지 않을 수 없었지만”(1:198) 봉우는 낙서질을 통해 아픔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고 있었다. 그러나 피하는 일이 상책일 수는 없다. 예기치 못하는 순간 자기를 보호하던 그 ‘노란 빛’은 꺼져버릴 수도 있고,‘리기다소나무 숲’에서 넋두리만 늘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봉우 역시 “자기만은 어두운 산길에 혼자 버려지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믿었지만” 산에서 길을 잃고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낀다. 프로이트 식으로 말한다면 봉우의 그 두려움은 세상과 단절된 느낌이고,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불괘 감정으로서의 불안(불안과 증상에 대한 논의는,S. 프로이트,‘억압, 증상, 그리고 불안’,‘정신병리학의 문제들´, 열린책들,2003)에 다름 아닐 텐데, 그 불안은 ‘나대로’의 낙서라는 증상을 극복하고 상처와 맞설 때 비로소 해결될 수 있다. 예정이 자기 안의 ‘노란빛’을 밖으로 드높이 내걸 듯, 혹은 게이코가 빵집을 나와 어디론가 첫걸음을 내딛듯 말이다. 그렇게 했을 때 “노란 꽃잎 가장자리가 흐려지면서 노란색과 초록색과 진회색이 서로 경계도 없이 뒤엉켜”(1:181) 버리듯,“꼭꼭 막아둔 마음의 가장자리도 그렇게 풀리게” 된다. 이제 자기 밖으로 나와 그렇게 풀린 ‘노란빛’은 ‘첫사랑’에서와 달리,‘사랑’도 될 수 있고,‘꿈’도 될 수 있고 뭐든 될 수 있다. 최소한 그럴 가능성은 있다. 이처럼 증상과의 타협에서, 증상에의 만족에서 나오는 첫걸음이 도달해야 하는 것은 결국에 “병에 걸리는 원인을 제거하는 일”(1:229)이며, 이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대비책”이다. 그 원인을 밝히는 일이 어떤 위험을 동반하든 그 알 수 없는 세계 속으로 들어가 보는 일이 필요하고, 그것이 비로소 윤리적인 행위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그들의 상처, 그 병의 원인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이 도출된다. 상처는 분명 어떤 ‘좌절’에서 기인할 텐데, 일단 우리는 각각의 서사 속에 끼워져 있는 시대적 배경들을 통해 그 상처가 밖으로부터 투사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한 경향이 가장 두드러지는 작품은 ‘그 상처가 칼날의 생김새를 닮듯’이며, 이 작품은 일가족의 이야기라는 점에서도 특이하다. 물론 여기에서도 쓰기와 말하기에 값하는 ‘읽기’를 통한 상처치유의 행위가 지속된다. 전라도 출신 아버지가 시대에 무기력했던 자신을 용서하고 그 시대 자체를 용서하는 방식은 바로 ‘신문 스크랩’이다. 그리고 ‘내’가 그 초라한 아버지에게 다가가는 방식도 아버지의 그 신문 스크랩 ‘읽기’이다. 오렌지빛 가로등 불빛에 기대 나는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천천히, 붙여 놓은 기사를 읽었다.(중략)다 읽은 뒤에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글자와 글자 사이, 문단과 문단 사이, 생각과 생각 사이를 읽었다. 아무리 읽어도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그 여름 내내 도서관 한쪽에 앉아서 도대체 무엇을 읽었던 것일까? 누구를 용서했던 것일까? 파도와 파도 사이, 바람과 바람 사이, 달빛과 달빛 사이 이런저런 생각이 오갔다.(1:65∼66) 주목할 점은 이 작품에서만큼은 읽기의 방식이 자족적이고 자위적인 행위에 그치지 않고 소통을 위한 매개가 된다는 점이다. 물론 아버지는 여전히 자기 안에 머문 채로 그 상처를 짓누르고 있지만, 그 ‘신문 스크랩’은 ‘나’로 하여금 초라한 자신의 아버지에게 다가가려는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아버지의 신문 스크랩을 아무리 읽어도 그 아버지의 마음에 가 닿을 수는 없지만 여하튼 나는 “고작 딸이 집을 나갔다고 눈물을 흘리는” 아버지를 조금은 이해할 듯하고, 아버지에게 묻고 싶은 게 생기고, 전화를 하기로 마음먹는 것이다.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에서 전적으로 회상에 의존한 작품은 ‘뉴욕제과점’이라는 자전소설 밖에 없다고 작가가 밝혔듯, 우리는 이 소설집을 단순히 회상 형식을 통해 잃어버린 과거의 기억을 더듬는 ‘추억의 보고서’ 또는 ‘반성의 기록’(정선태,‘(해설)빵집 불빛에 기대 연필로 그린 기억의 풍경화’,‘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문학동네,2003,p.295)으로 읽을 수 없다. 그 속에는 분명,‘언어’에 대한 작가의 관심과 통찰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스며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작가가 ‘언어’의 불가능성, 즉 언어 자체로는 어떤 진실에도 가 닿을 수 없고, 소통은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해묵은 해체적 사고를 재확인하고 있는 것은 아니리라. 가라타니 고진에 따르면, 언어와 비극은 반복될 수 없는 일회성의 성격을 지녔다는 점에서, 즉 구조로 회수될 수 없는 다수성과 사건성이라는 점에서 서로 관련된다. 비극적 인식이란 바로 그러한 언어 안에 놓인 인간 조건을 발견하는 일이며, 이처럼 다시는 반복할 수 없다는 언어에 의한 고통은 인간이 결코 ‘아이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마르크스의 비유로 확인된다.(가라타니 고진,‘언어와 비극’, 조영일 역, 도서출판b,2004,pp65∼86)그런데 고진은 ‘아이’가 단지 비유가 아니며, 아이는 이미 어른 이상으로 인생을 알고 있는 존재, 어떤 순수한 비애와 부조리감을 깨닫고 있는 존재라고 말한다. 이런 논의에 기댄다면,‘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의 전편을 감도는 슬픔과 비애의 정서는 충만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 혹은 잃어버린 기억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반복될 수 없는 ‘기억’, 반복될 수 없는 ‘언어’적 조건과 관련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김연수는 “기억이나 회상을 기본적으로 불신”하며 “글쓰는 순간만의 진실”(김연수 외 좌담, 앞의 글,p.81)을 믿는다고 말했다. 애초에 우리가 ‘기억’해 낼 것은 없고 ‘언어’로 표현해야 할 것도 없고, 믿을 수 있는 것은 순간 순간의 진실일 뿐이라는 말인 듯싶다. 그 일회적인 언어에 의존하여 쓰고 말하고 읽음으로써 자신의 상처 안에 거주하는 방식으로는 상처가 완벽히 치유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작가는 말해주고 있다. 이는 “삶은 살아가는 것이지,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2:61)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의 세계를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3.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넘어서는 몇 가지 방식-‘나는 유령작가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최근작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으로 돌아가 보자. 이 소설에서 화자인 ‘나’의 할아버지는 죽기 전 두 개의 글을 쓰고, 하나의 글만 남겨둔다. 남겨둔 글은 “世上萬事 一場春夢 돌아보매 無常ㅎ구나”로 시작되는 203행의 대서사시로서,“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태평양전쟁, 한국전쟁,4·19,5·16 등 한국 현대사의 최중심지를 관통해온” 한 남자의 생애를 담은 것이다. 물론 겉으로 드러난 그 한 남자의 생애는 또래의 다른 남자의 생애와 크게 다르지 않아, 그 서사시는 한 인간의 내밀한 역사를 다룬 것이라기보다는 시대의 역사를 다룬 시라고 봄이 정확하다. 할아버지는 그 역사를 증명하는 ‘한 남자’일 뿐인 것이다.“할아버지의 또 다른 글은 누구도 읽어보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죽기 전 자신과 관련된 모든 것을 불태우면서 그 다른 글 역시 태워버렸다. 그 글에는 서사시에서 볼 수 없는 다른 것이 들어 있을 테고, 그것은 인간의 가장 사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일 테니 다른 사람은 엿볼 수 없는 게 당연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4·4조의 정형적인 형식처럼 그 서사시가 어떤 일관되고 형식적인 구조에 속하는 추상화된 개인의 삶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면, 불태워진 할아버지의 그 비망록은 여전히 ‘언어’로서도 ‘기억’으로서도 도달할 수 없는 개개인의 진실을 의미한다.“한 개인의 진실이란 깊은 밤, 잠자리에 누워 아무도 몰래 끼적이는 비망록에나 겨우 씌어질 뿐이고”,“서로 살을 비비며 살아가는 부부라고 하더라도 옆에 누운 사람의 비망록을 들여다보지는 못하는 것이니” 할아버지의 그 두 글 사이의 거리는 엄연한 것이고,‘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에서 인과관계의 구조로 엮어진 ‘그’의 소설이 현실(reality)과도, 실재(the real)와도 멀어진 거리와 같다. 실재와 구성화된 그것 사이의 거리는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에서 지도에서 비워진 행로로 상징된다. 일년 전 이혼한 아내와 우연히 재회한 ‘나’는 아내를 따라 인사동 거리를 걷는다. 아니 함께 걸었다기보다는 아내를 따라 걸었던 것인데, 그 ‘길’은 한 개인의 진실로 들어가기 위한 끝없는 여정을 뜻한다. 꿈 얘기를 좋아하는 아내는 애초에 그런 소통의 의지를 지니고 있었지만, 꿈따위는 잠에서 깬 다음 바로 잊어버리는 사람이었던 ‘나’는 그런 아내의 의지조차도 간파하지 못했던 것이다. 깨달음은 언제나 사후적으로 찾아오는 것이라, 그는 이제 그 아내의 진실, 아니 그녀와 자신의 진실을 알아보기 위해 지적도를 사고 그날을 행로를 그려 본다. 하지만 기억의 행로는 언제나 불완전한 것이고, 지형도가 아닌 ‘지적도’일지라도 그것은 실재의 ‘유사물(le semblant)’일 뿐이므로, 그 유사물 속에서는 모방된 진실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바디우(Alain Badiou)에 따르면 진리는 언제나 특수한 상황의 진리(S. 지젝,‘진리의 정치, 혹은 성 바울의 독자로서의 알랭 바디우’,「까다로운 주체」, 이성민 역, 도서출판b,2005,pp.208∼218)이다. 하나로 이어진 선 안에서는 그 다양한 상황의 진리들은 모두 지워져 있을 수밖에 없다. 서로 연결될 수 없음에도 그어지는 그 많은 선들은 다 무슨 의미일까? 역사의 인과관계가, 혹은 지나간 일들의 진실이 도중에 사소하고 우연적이고 꾸불꾸불한 과정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단숨에 긋는, 그런 선과 같은 것이라면, 우리가 그날 걸어간 복잡하고 우연에 가까운 행로의 의미는 무엇일까?(2:19) 따라서 ‘나’의 생각이 미치는 지점은 모든 삶의 행로는 우연이고, 그 안에서 진리는 발견될 수 없고, 나의 불행도 그저 불운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삶의 우연성을 인식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우연에 가까운 행로의 의미를 따져 묻는다. 그리고는, 결국엔,“오랜 시간이 흐르고 하면 지금의 우연한 일들도 모두 필연이 된다”(2:28)는 정답을 얻어낸다.“우리가 만난 것도, 헤어진 것도, 그날 길 잃은 아이들처럼 골목길을 한 없이 걸어다녔던 일들도 필연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게 거대한 ‘농담’일 수는 있지만 자신에게 일어난 우연을 필연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나’는 윤리적 행위의 첫 발을 내딛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바디우는 ‘사건에의 충실성’이라는 말로 윤리를 설명한다.(A 바디우,‘윤리학-악에 대한 의식에 관한 에세이’, 이종영 역, 동문선,2001)그가 정의하는 ‘사건’이란 인식 범위 밖에서 발생하며,‘공식적’ 상황이 ‘억압’했던 것을 가시적이게 만드는, 언제나 어떤 특수한 상황의 진리이다. 따라서 사건에의 충실성이란 사건의 견지에서 ‘인식’의 영역을 횡단하고, 그 속으로 개입하고, 사건의 기호를 찾는 지속적 노력을 가리킨다.(이하 한 단락의 내용은 S. 지젝의 앞의 글을 참조하여 정리한 것임) 지젝의 해석에 따르면, 이러한 바디우의 논의는 “범역적 우연성이라는 조건 속에서 (보편적) 진리의 소생”을 문제 삼는다는 점에서, 실재 사물과의 모든 열정적 조우가 환영일 뿐이라는 해체주의적 사고와 대립된다. 요컨대, 후근대적 해체주의자들이 비관주의의 한계 내에 머물러 있을 때, 바디우는 “기적은 실로 일어난다.”는 전적으로 정당한 사유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영원성과 불멸성에 대한 이와 같은 바디우의 추구는 물론 개별적인 상황, 다양성의 상황의 전제로 하는 열린 개념이다. 다소 길게 인용된 바디우의 논의를 따라,‘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에서 결국 내가 삶의 모든 길은 우연이고 진실은 알 수 없다는 회의주의에 빠지지 않고 “결코 질문을 멈추지 않을 작정이었다. 나도 어디 버틸 수 있을 때까지 한번 버텨보기로 했으니까.”라고 말하는 것을 ‘진리’를 위한 행위이고,‘사건에의 충실성’을 담지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자기 안에 머무는 회피나, 삶은 우연에 불과하다는 회의에 빠지지 않고 한 개인의 진실, 혹은 삶의 진실에 가 닿으려는 ‘행위(act)’를 시작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 태도는 분명, 자기 안의 둥근 노란빛에 의지하여 자폐적으로 말하고, 쓰고, 읽던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속 인물들의 태도와는 차별되는 모습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에서 ‘그’가 쓴 소설의 첫 문장이 “패배는 내 안에서 온다. 여기에 패배는 없다.”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그들은 패배주의자가 아니라, 고투하고 있는 인물들임에 분명하다. 그 고투의 방식을 몇 가지 단계로 분류해 보자. 첫 번째는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에서와 같이 진실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끝없이 질문하고 소통에의 의지를 표명하는 방식이다.‘그것은 새였을까, 네즈미’에서 세영과 네즈미가 지도를 보고 찾아간 길이 잘못 된 길이었지만, 세영이 “돌아갈 수 없어, 네즈미. 우린 계속 가야 해”라고 말하는 것도 이 첫 번째 방식 안에서 설명된다. 잘못 들어선 길이 “공로가 아니라 사유지”라는 것도 상징적이다. 구조화되지 않은 상황의 진리, 혹은 개개인의 사적인 비망록을 들여다 보는 일을 멈추지 않겠다는 의미인 것이다. 두 번째는 ‘말’이 아닌 ‘몸’으로 다가가는 방식이다.‘부넝숴’를 한번 보자. 지평리 전투에 투입되었던 중공군 ‘나’는 들판을 가득 메운 매화꽃잎들처럼 지평리를 가득 메우고 있던 전사자들 틈에서 한 조선인 여성 구호원에게 구조된다. 그들을 실어 나르던 트럭이 전복되고 그 둘은 외딴 농가에 고립된다. 날짜가 어떻게 가는 줄도 모르고, 먹을 것도 없고, 죽음을 지척에 둔 상황에서 그들은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그들이 한 일은 두 가지이다. 몸을 섞거나 시를 읊거나. 지금도 잊혀지지 않아. 그때의 일은. 살아 있다는 건 그토록 부끄럽고도 황홀하고도, 무엇보다도 아픈 일이더군. 아프다는게. 소리를 지를 수 있다는 게.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게 그 순간만큼 기뻤던 적이 없었어. 그래서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는데도 계속하라고 채근할 수밖에 없었던 거야. 우리는 쉬지 않고 몸을 섞었어. 죽음이 지척이었으니까.(2:71) 그들은 살아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죽음과도 같은 아픔을 느끼면서 몸을 섞는다. 이 장면은 그야말로 ‘고통 속의 향유(jouissance)’를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만하고 그 향유의 끝장을 보는 ‘죽음충동’을 보여준다고 할 만하다. 그들은 그렇게 “몇 번이나 해가 뜨고 저물었는지, 몇 번이나 달이 둥글어졌다가 다시 여위어졌는지”(2:75)도 모른 채, 수색대가 왔다가 그들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그냥 돌아가는 것을 “죽어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의식만 살아서 지켜보고 있는지”(2:75)도 모른 채 죽음과 삶의 경계를 넘나든다. 결국 ‘그녀’는 죽고 ‘‘나’는 살아남는다. 살아남은 ‘나’는 이제 점쟁이가 되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라캉이 ‘죽음 충동’과 관련하여 ‘두 죽음 사이의 영역’(위의 책,pp.251~265)이라고 말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닌가. 라캉에 따르면 그곳은 상징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 사이의 영역으로서 존재의 질서 너머에 있는 유령적 환영의 영역이다. 그곳은 ‘죽음 너머의 삶’이 갑작스레 출현한 장소이고, 상징화되지 않는 ‘불가분의 잔여’이기 때문에 기괴하고 공포스럽다. 예컨대, 그 형상은 운명을 이행한 이후의 오이디푸스, 즉 ‘과도하게 인간적’이고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자, 어떤 인간적 법칙들이나 고려 사항에도 묶여지지 않는 존재에서 찾을 수 있다.‘그녀’의 피를 1000그램이나 수혈받고 죽음의 경계를 넘은 ‘나’는 이 ‘산죽은-파괴불가능한’ 유령적 대상과도 같다. 운명을 보아버린 ‘나’는 이제,“도저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야기”,“세상에서 믿기 어려운 얘기”(2:77) 속에 진실이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산죽은’ 존재인 것이다. 이와 같은 두 번째 방식, 온몸으로 인간을 사랑하는 방식이 성공적이라면 그 순간 상징적 질서로 편입되는 어떠한 ‘언어’도 소용 없게 된다. 그렇다고 그 방식이 성공했는가. 그 둘이 함께 ‘몸’을 통해 ‘유사-죽음’을 경험했더라도, 여하튼 현재 ‘그녀’와 ‘나’ 사이에는 역설적으로 ‘죽음’이라는 경계가 놓여 있지 않는가? 여기서 굳이 라캉의 ‘성관계는 없다’는 공식을 끌어올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세 번째로 취할 수 있는 방식은 무엇일까? 그것은 타인의 행위를 아예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다. 설령 그게 죽음일지라도. 그것은 소통에의 ‘의지’를 드디어 ‘실천’으로 관철하는 일이며, 반복될 수 없는 ‘언어’의 한계,‘기억’의 한계,‘몸’의 한계를 극복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그것은 새였을까, 네즈미’의 세영이 5년 동안 한결같이 사랑했던 남편에게 자신이 절대로 이해 못하는 다른 삶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이해하는, 아니 극복하는 방식이 바로 그것이다. 어떤 식이냐 하면, 가장 가까운 사람을 배신하는 사람의 기분이 어떤 것인지 알기 위해 언니의 동거남,‘네즈미’와 섹스를 하는 방식이다. 네즈미에게 “다른 사람의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드는” 세영의 방식이 “무모한 열정”으로 보이지만, 세영의 그 무모한 열정은 끝장까지 간다. 자동차 사고로 남편이 죽어가는 상황에서 2시간 동안 울기만 했던 세영, 그렇게 다른 삶이 있었던 남편의 죽음을 방조했던, 아니 어떤 행동(action)도 하지 않음으로써 적극적으로 행위(act)했던 세영은 결국 ‘자살’한다.(정신분석은 행동과 행위를 분리한다. 행위는 그것의 담지자(행위자)를 근본적으로 변형시키다는 점에서 행동과 다르다. 행위 이후에 나는 ‘전과 동일하지 않다’. 행위 속에서 주체는 무화되고 뒤어이 다시 태어난다는 점에서, 라캉은 ‘자살’을 모든 (‘성공적’) 행위의 전형으로 파악한다. 알렌카 주판치치,‘실재의 윤리’, 이성민 역, 도서출판b,2004,p.133∼134) 세영의 방식이 극단적이고 무모하다면,‘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의 ‘그’는 어떠한가. 이 작품에는 소통 불가능성과 그 불가능을 넘어서는 시도와 그 결론이 모두 담겨 있다. 그것은 “사랑의 모든 국면을 다 경험”함으로써,“심지어 죽음까지”도 경험함으로써만 가능한 결론이다. 여자 친구가 마지막으로 읽은 ‘왕오천축국전’을 읽고 나서도,‘소설’ 쓰기를 통해서도 애인을 이해할 수 없었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다. 첫째, 그녀와 자신의 삶에,“어떤 진실도, 상상도, 이해도 없는”(2:151) 가장 합당한 주석을 달며, 그저 “짐작을 하며”,“그 사이를 원래 그대로 틈으로 남겨두고 살아가는 일”(2:143)이거나, 둘째,“지도에서 비워진” 그 곳으로 직접 가보는 일이다.‘그’는 두 번째 방법을 선택한다. 그것이 “서로를 속이는 것도, 속는 것도 없는” “인간에게 누구나 있는 어두운 구멍”(2:43)을 들여다보는 유일한 방법인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의 인물들이 ‘아직 가지 않은 길’이고,‘의지’의 방식을 택한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의 ‘나’가 ‘결국 가야하는 길’이고,‘부넝숴’의 ‘나’가 ‘덜/더 가버린 길’이다. 당연히,‘그’가 낭가파르바트 정상을 향해 가는 것은, 이처럼 ‘몸’으로도 ‘언어’로도 이해 불가능한 그녀를 이해하는, 아니 자신의 진실을 이해하는 마지막 방법이다. 그는 자신과 함께 걸어가는 검은 그림자의 친구와 농담을 주고받으며 껄껄거린다. 여기인가? 아니, 저기. 조금 더. 어디? 저기. 바로 저기.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바로 저기. 문장이 끝나는 곳에서 나타나는 모든 꿈들의 케른,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할 바가 없는 수정의 니르바나, 이로써 모든 여행이 끝나는 세계의 끝.(2:154) 그곳을 설명할 수 있는 말은 많다. 현실과 꿈이 뒤섞인 공간, 육체의 한계를 넘어선 공간, 어떤 논리도 거부하는 공간, 죽음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공간 등등. 그러나 어떤 말도 소용없을지 모른다. 그곳은 가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 ‘실재’와 대면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현실의 힘으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용기’이다. 그 길을 가는 ‘그’에게는, 그가 고등학교 시절부터 노트를 사면 항상 옮겨 적던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용기다. 아주 기이하고도 독특하고 불가해한 것들을 마주할 용기”(2:111)라는 릴케의 문장이 떠올랐을 것이다. 용기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삶의 진실에 도달하고자 하는 자에게 그 용기를 갖는 일은 의무이다. 낭가파르바트 등반은 원정대장이 역설한 바대로 “분명히 의의가 아니라 임무”(2:117)인 것이다.“그 꿈이 제아무리 압도적이라고 해도 원정대는 그곳을 ‘정복’해야만 한다.” 불가능한 것을 자신의 ‘의무’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오로지 ‘의무’ 때문에 ‘행위’한다는 점에서 ‘그’는 분명 윤리적 주체(‘의무’와 윤리적 행위의 관계에 대해서는, 위의 책,5장 참고)이다. 4. 진실은 어디에,“대뇌와 성기 사이”(김연수,‘모두인 동시에 하나인’, 문학동네 2005년 겨울,p.158)그 어디쯤 ‘유령작가’라는 말에 대해 말들이 많았다. 김연수는 그 의미가 ‘대필작가’ 쯤이 된다고 말했고, 대부분의 논자들은 그 안에서 작가적 자의식을 찾아냈다.‘유령’이라는 말에 방점을 찍어보면 어떨까? 이 글을 마무리 하면서 우리는 김연수의 최근 두 소설집을 이렇게 정리하고 싶다. 죽음을 넘어선 그 어떤 영역을 살펴보고 ‘유령’이 되어버린 작가가,‘아직’ 언어와 기억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아이’에 머물고 있는 상처받은 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고 말이다.“아프면 그 아픔을 고스란히 다 느끼라고. 아픈데도 아프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왜 그런 거짓말을 하는가 하면 죽기 싫어서다. 그래서 눈물은 조롱거리가 되고 아픔은 비난받고 두려움은 무시되며 믿음은 당연하다고 여긴다.”(2:117). 우울은 도덕적 쇠약함이며, 죄라고 라캉이 말했던가?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의 ‘그’가 위와 같은 말에 의지하여 낭가파르바트로 갔듯이 우리도 각자가 넘어야 할 산 하나쯤은 마음 속에 있을 것이고, 그 산을 넘기 위한 ‘용기’를 지녀야 한다. 그것의 우리의 ‘의무’이다. 그렇지만 ‘죽음’이 윤리적 행위의 전형이라며, 그 죽음을 통해서만 우리는 타자의 진실, 나의 진실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현실의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김연수는 이런 질문을 던져준다. 현실에서 이해는 필연적으로 오해가 되고, 살 부비는 부부 사이에서조차 서로의 마음 속 비망록을 들여다 보는 일이 불가능하다면 해결은 한 가지다. 그 “대뇌와 성기 사이” 그 어디쯤에 있을 ‘마음’으로 진실을 그저 믿는 것이다. 김연수의 세계인식과 작가의식은 이제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 모아지고 있는 듯 보인다. 결국 “모든 사람은 단 한 사람”이라는 보르헤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말이다(위의 책,p.121)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제 어떻게 들려줄지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의 장편 연재가 기대된다. <끝> ■ 당선소감 “조금은 자신 갖고 내목소리 낼수 있을것” 글쓰기는 나에게 공포다. 학교에서 몇 개월째 학부생들의 리포트 상담을 하고 있지만 난 과연 내가 누군가에게 글쓰기에 관하여 조언을 해 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에 대해 항상 회의적이다. 여전히 나는 무엇을 써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안절부절 못하고, 하얀 모니터 앞에서 머릿속까지 하얗게 비워지곤 하는 걸…. 그렇지만 여하튼 읽는 일은 행복하고, 쓰는 일은 나에게 작은 희열을 맛보게 해준다. 그래서 그 일들을 멈출 수가 없다. 혼자 품고 있던 그 공포와 행복 사이에 용기를 채워 준 이번 당선이 정말 기적 같다. 여전히 막막하고 두렵지만, 이제 조금은 자신을 갖고 내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와 온전히 만날 수 있기를 고대한다. 턱없이 부족한 글이라 몹시 부끄럽다. 앞으로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 스스로 열심히 공부하시는 모습만으로도 더없이 많은 것을 일깨워 주시는 신범순 지도교수님과 국문과의 모든 은사님들께도 깊이 감사드린다. 꽃비 내리는 자하연을 몇 번이고 함께 맞이했던 1동의 동료, 선·후배들의 자극에도 빚진 바 크다. 함께 공부하던 그 시절이 마냥 그립다. 그리고 나이 서른을 앞에 두고서도 여전히 철없고 무심한 자식을 믿어 주시는 부모님과 가족들께도 감사의 말을 전한다. 마지막으로, 어렸을 적부터, 성실히 읽고 쓰는 일을 너무도 당연한 일상으로 여기게끔 해주신 아버지께 감사드린다. 좋은 글로 보답하겠노라고 다짐해 본다. ●약력 ▲1977년 서울 출생 ▲서울대 국문과 박사과정 수료 ■ 심사평 “‘글쓰는 순간이 진실’ 작가의 본질 파헤쳐” 응모작 총 20편은 작가론이 대부분이었고, 김현론을 비롯한 문학사적인 쟁점을 다룬 게 3편 있었다. 작가론 중에는 시인·소설론이 거의 반반씩이었다. 아마 최근 신춘문예 평론의 주류가 작가론으로 정착된 느낌이다. 특히 전후문학 세대는 말할 것도 없고,4·19세대 작가론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오늘의 작가론 중심으로 이뤄져 있다. 그중 시선을 끈 글은 ‘말하기와 글쓰기의 행복한 공간-김현론’(김윤정),‘몸의 형이상학, 모성적 관능과 타자없는 육체 사이-김선우론’(함돈균),‘속도에 저항하는 시의 모험-김기택론’(강영준)‘‘틈’을 바라보는 시선-배수아 소설을 중심으로’(김나영),‘고독의 의무, 소설의 의무-윤성희 소설집 ‘거기, 당신?’론’(이은주),‘‘유령’작가의 진실-김연수의 최근작을 중심으로’(조연정) 등이었다. 김현론은 정직한 글쓰기의 자세를 보여준 진솔한 비평적 자세가 돋보였으나 개인적인 체험에 너무 함몰된 점이 아쉬웠다. 김선우론은 인문학적인 거시적 시각으로 시인에 접근하면서 미세한 현대적 환상과 성담론을 분석한 점이 돋보였으나 일반론적인 해설위주에 그쳐서 아쉬웠다. 김기택론은 성실한 독법이긴 하나 해설론에 그친 한계가 있었다. 배수아론은 라캉의 틈 이론을 중심으로 작품을 분석하려 했으나 결론이 너무 조급해 보였다. 최종적으로 윤성희론과 김연수론은 우위를 다툴 정도였다. 윤성희론은 반 루카치적인 소설론을 전개한 점이 시선을 끌었지만 문장력이 치밀하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쉬웠다. 김연수론은 탈구조주의적인 이론의 틀에 너무 얽매인 느낌이 있으나 기억이나 회상을 불신하고 글쓰기의 순간만이 진실이라는 이 작가의 본질을 정확하게 파헤친 점이 높이 평가되었다. 김윤식 임헌영
  • [책꽂이]

    ●프로메테우스(갈리나 I. 세레브랴코바 지음, 김석희 옮김, 들녘 펴냄)‘자본론’의 저자인 칼 마르크스의 생애를 담은 대하소설.16년 전 출간된 초판을 보완한 개정판이다. 마르크스와 더불어 고뇌하고 경쟁했던 실존 인물들과 작가가 상상력으로 빚어낸 가공의 인물들을 통해 19세기 유럽의 격동적인 사회상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전 7권, 각권 1만원.●수탉(고진하 지음, 민음사 펴냄)‘얼음수도원’ 이후 4년 만에 내놓은 다섯번째 시집. 담벼락 아래 민들레에게서 ‘한해살이 생의 심연’을 발견하고, 우듬지 끝이 휘어진 나무에게서 모진 ‘생의 욕망’을 바라보는 등 자연에서 찾아낸 생명의 다양한 모습을 노래했다.7000원.●언젠가 내가 돌아오면(전경린 지음, 이룸 펴냄) 지난 여름 독일 외무성 초청으로 뮌스터 근처 예술인촌에 머물렀던 저자가 소설 ‘황진이’ 이후 1년 만에 내놓은 신작. 도덕과 규범, 제도를 거스르는 불륜의 사랑을 통해 삶의 숨은 진실을 성찰한다.9500원.●3번 출구(표명희 지음, 창비 펴냄)2001년 ‘창작과 비평’ 신인소설상으로 등단한 저자의 첫 소설집. 삶의 장벽을 넘지 못하고 눈앞의 이기심이나 엉뚱한 자기 표현으로 장벽 안에 갇히는 인물 등 우리 사회 여성들의 문제를 사실적으로 형상화한 소설 8편이 실렸다.9500원.●수상한 식모들(박진규 지음, 문학동네 펴냄)올해 문학동네 소설상 수상작. 단군신화 속 곰이 신의 뜻을 따른 대가로 여성의 시조가 됐다면, 호랑이는 신에게 복종하는 것을 거부하고 스스로 여자가 된 짐승이라는 설정에서 출발해 호랑이의 후예들인 ‘호랑아낙’들의 활약상을 그린 유쾌하고 황당한 역사소설.9500원.●시인 박물관(손현숙·우찬제 글·김신용 사진, 현암사 펴냄)‘꽃’의 김춘수에서 ‘햇빛 속에 호랑이’의 최정례까지 한국 현대시에 방점을 찍은 시인 58인을 엄선해 사진작가가 찍은 사진과 짧은 산문을 함께 묶었다.‘현대시학’ 연재물에 문학평론가 우찬제의 시인론을 덧붙였다.1만 8000원.
  • 슘페터著 ‘경제발전의 이론’ 완역출간

    ‘창조적 파괴’ 개념으로 유명한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의 저서 ‘경제발전의 이론’(박영률출판사 펴냄)이 완역 출간됐다.한신대 박영호 교수의 4년간 작업의 성과물이다. 슘페터는 마르크스 대항마로서 케인스와 함께 20세기 초반의 위대한 경제학자로 평가받는다. 공황이 터져 자본주의는 결국 망한다는 게 마르크스의 주장이라면, 자본주의는 ‘기업가 혁신(Innovation)’으로 불황을 돌파한다는 게 슘페터의 생각이다. 자본주의를 긍정하는데다, 오너들의 위상까지 드높일 수 있으니 슘페터는 한국에서도 인기가 높다. 이런 해석은 사실 슘페터의 진면목과 다르다. 거칠게 말하자면 마르크스가 ‘자본주의가 망해서 사회주의가 들어선다.’고 봤다면, 슘페터는 정반대로 ‘자본주의가 성공해서 사회주의가 들어선다.’고 보는 입장이다. 자본주의 발달로 사회가 합리적으로 변해갈수록 사회적 관리체제 발달이 불가피할 수밖에 없고, 자본주의 그 자체를 공격하는 비판이론들이 대거 등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이렇게 보면 재계가 그렇게 껄끄러워해 마지않는 참여연대 등 재벌개혁세력의 등장이 바로 한국 자본주의의 발달을 보여주는 사례가 된다.자본가들을 담합이나 일삼는 더러운 장사치로 비판했던 애덤 스미스가 자유시장의 수호자로만 알려진 것만큼이나 슘페터도 오해받고 있는 것이다.‘경제발전의 이론’은 기업가 혁신 개념 정립에 충실한 책이다.2만 3000원.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책꽂이]

    ●역사가 기억을 말하다(전진성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 1980년대 이래 국제 역사학계의 주요한 흐름이자 방법론으로 결국 역사학의 전환을 이끌어낸 신문화사 연구로 이어져오고 있는 ‘기억문화’의 이론과 실제를 소개한다.2만 3000원.●우리말에 대한 예의(이진원 지음, 서해문집 펴냄) 우리가 일상에서 무심코 저지르는 우리말의 오용과 오류의 사례들을 바로잡고, 잘못된 말글살이에 대한 따끔한 비판과 함께 이를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을지 방안들을 제시한다.1만 1900원.●철학, 역사를 만나다(안광복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플라톤의 이상 국가와 ‘제자백가의 시대’로 불리던 춘추전국시대부터 프랑스 혁명과 마르크스 시대를 거쳐 비트겐슈타인의 ‘그림이론’에 이르기까지,2000여년에 걸친 철학의 주요 장면을 세계사와 함께 읽어나간다.9800원.●소리의 자본주의(요시미 야 지음, 송태욱 옮김, 이매진 펴냄)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축음기, 전화, 라디오로 대표되는 음향미디어가 사회적으로 형성되고 수용되는 과정을 다양한 집단, 계급, 젠더 사이의 다툼 속에서 살펴본다 . 1만 8000원.●우리는 지금 빙하기에 살고 있다(더그 맥두걸 지음, 조혜진 옮김, 말글빛냄 펴냄) 45억년에 달하는 지구역사에서 빙하기가 언제, 몇번이나 뒤덮었고, 지구의 생명과 세상을 어떻게 창조하고 멸종시켰는지, 빙하기는 인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살펴본다.1만 7000원.●대교약졸-마치 서툰 것처럼 보이는 중국문화(박석 지음, 들녘 펴냄)‘‘도덕경’에 나오는 ‘큰 솜씨는 마치 서툰 것처럼 보인다.’는 뜻의 대교약졸의 관점에서 상고시대부터 현대까지의 중국 문화사를 살펴보고, 현대 자본주의 문제점을 찾아 제시한다.2만 1000원.●인디고 서원, 내 청춘의 오아시스(아람샘과 인디고 아이들 지음, 궁리 펴냄) 16년간 부산에서 독서토론 교실인 ‘아람샘 소행성 612호’를 운영하면서 아이들의 문화공간인 ‘인디고 아이들’과 ‘인디고 서점’을 운영해온 허아람씨와 아이들의 책 읽기 이야기를 담았다.1만 8000원.●전복적 스피노자(안토니오 네그리 지음, 이기웅 옮김, 그린비 펴냄) 과거 ‘범신론’에만 주목했던 스피노자 연구에서 벗어나 그의 인식론·존재론·정치철학 모두에 주목하는 ‘스피노자 르네상스’ 관점에서 스피노자 철학이 갖는 정치적 의미를 현재의 문제로 끌어들인다.1만 4900원.●성경과 코란(오아힘 그닐카 지음, 오희천 옮김, 중심 펴냄) 모두 구약성서에 뿌리를 갖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상반되는 입장을 취하게 되었는지 그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고, 기독교와 이슬람 문화의 유사성과 차이를 보여줌으로써 서로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1만 5000원.
  • 우리에게 공동체란 어떤 의미인가

    미국의 흑백갈등을 비판해 왔던 프랑스가 무슬림 청년들의 폭동으로 한 달여 진땀을 흘려야 했다. 이는 유럽식·미국식 사회통합 모델 가운데 어느 것이 옳으냐를 두고 이런저런 촌평을 낳았다. 또 이라크전으로 보복 폭탄테러를 겪었던 영국은 테러범이 영국 국적 이슬람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영국민 내부에 불신이 생길까봐 걱정했다.이처럼 서구에서 근대민족국가 구성은 오랜 화두였다. 국가로서 개별 사람들을 국민으로 포섭한다는 것, 동시에 개별사람들이 국민으로서 소속감을 느낀다는 것의 의미에 대한 질문이다. 이런 문제의식이 단일민족주의 전통이 강한 한국에서는 숨겨져 왔으나 최근 슬슬 고개를 들고 있다.‘방귀깨나 낀다.’는 분들의 원정출산 문제나 황우석 교수 윤리문제에 대한 네티즌들의 극단적 반발에서부터, 최근 유도선수 추승훈이나 골프선수 미셸 위·김초롱의 국적을 둘러싼 논란들이 그 증거다. 왜 원정출산은 분노를, 추승훈은 연민을, 미셸 위·김초롱은 자부심과 묘한 반감을 함께 불러일으키는가. 무엇이 황 교수 윤리문제를 두고 네티즌들을 격발시켰는가. 나에게 대한민국이란 과연 무엇인가. 이런 관점에서 참고할 만한 책이 나왔다.‘공동체를 이루고 산다는 것’의 의미, 즉 ‘공동체론’을 두고 프랑스의 두 석학 모리스 블랑쇼와 장뤼크 낭시가 주고받은 글을 묶은 ‘밝힐 수 없는 공동체/마주한 공동체’(문학과 지성사 펴냄)다. 알려졌다시피 블랑쇼는 기인으로 알려진 지식인. 최근 프랑스철학의 주요 경향인 ‘니체 르네상스’를 선도했던 인물이다. 낭시는 현재 가장 영향력 있는, 마르크스주의의 재정립을 꿈꾸는 급진 철학자다. 블랑쇼의 관심은 공동체라는 것이 ‘공동의 무엇’을 전제하는 순간 전체주의로 흘러가지만, 동시에 인간은 공동체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는 문제를 어떻게 해소할 것이냐다. 그는 낭시의 ‘무위의 공동체’에 대한 답글인 ‘밝힐 수 없는 공동체’에서 이 문제를 집중 거론한다. 이어진 낭시의 ‘마주한 공동체’는 블랑쇼의 ‘밝힐 수 없는 공동체’에 대한 대답이다. 여기서 낭시는 공동체는 ‘공동의 무엇’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가 인간의 조건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번역자 박준상 박사의 해설과 함께 자크 데리다의 글까지 함께 실려 있어 이해를 돕는다.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차라리 詩없는 세상 왔으면” 고은 시인 서울대서 강연

    “차라리 詩없는 세상 왔으면” 고은 시인 서울대서 강연

    ‘만인보’의 고은(72) 시인이 24일 서울대 강단에 섰다. 노벨문학상 수상이 무산되고 외부 행사를 자제하다 처음으로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고은 시인은 이날 오후 멀티미디어강의동에서 열린 ‘관악초청강좌-시는 어디에 있는가’에서 “시가 죽었다는 위기담론은 거품”이라면서 “본질적으로 시를 믿고 있으면 밀물과 썰물처럼 드나드는 현상적인 부분에 대해 민감할 필요가 없다.”고 강조했다. 시인은 우선 “시는 시집이나 책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가슴에서 매일같이 새로 만들어지는 ‘심장의 뉴스’”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시는 살아있다. 시는 죽을 수도 없고 살 수도 없지만, 인간이 시를 부르니 살아 있는 것”이라면서 “시를 비롯한 순수문학이 외면 받고 있다는 위기론은 독선”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시를 이끈다고 하는 이들에게는 위기라고 느껴질지 모르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이름없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시를 만나고 있다.”고 했다. 또 “시는 그동안 장기간에 걸쳐 농경사회에서 정서를 얻는 등 농업에서 길러졌지만, 지금은 농촌정신이 사라지고 전산문명으로 교체되는 시기”라면서 “환경이 변하면 그때에 맞는 시의 형식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고은 시인은 “나는 차라리 이 세상에서 시가 없는 듯 하는 때가 왔으면 좋겠다.”고도 했다. 시가 사라지면 사람들이 시를 갈망하게 되고, 그러면 시가 다시 사람에게로 오게 된다는 것. 그는 “그렇게 시는 지구가 끝나는 마지막 날까지 살아있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시인은 또 자본주의 시대에 시까지 상업화되는 경향을 우려했다. 그는 “자본의 시대는 모든 정신적인 영역을 상품화하고 있으며, 칼 마르크스도 체 게바라도 자본주의 장식물이 돼 버렸다.”면서 “시 역시 광고 메시지와 같은 자본주의에 휘말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60년대에 마릴린 먼로가 시를 발표하며 시는 누구나 쓸 수 있다고 했는데, 이는 가슴에 와닿는 진리”라고 했다. 덧붙여 “어떠한 시의 영향을 받는 것은 그 시인의 운명의 극히 일부분이며, 그것이 시인의 전부가 되면 바보나 마찬가지”라면서 “시에는 교사가 없고 자신이 교사”라고 조언했다. 이어 “50년 가까이 썼는데도 아직도 시를 만날 때는 처음으로 만난다.”면서 “시의 길은 나에게도 익숙하게 펼쳐져 있지 않고, 늘 미지의 세계로 남아 있다.”고 말했다. 이날 강의동에는 학생과 교수 100여명이 참석해 진지한 표정으로 2시간동안 강연을 경청했다. 애주가로 알려진 고은 시인이 반농담으로 “강단에 있는 물이 소주였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자 학교측에서 즉석에서 준비한 포도주 1잔을 반색하며 그자리에서 들이켜 좌중에서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유지혜기자 wisepen@seoul.co.kr
  • [열린세상] 고도 지식사회의 대학정책/김민환 고려대 신문방송학 교수

    며칠 전 미국의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가 95세를 일기로 타계했다.20세기 경영학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로 평가 받는 드러커는 경영학뿐만 아니라 사회과학 전반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지식사회의 도래를 예언한 그의 통찰력은 혀를 내두를 만하다. 그는 1950년에 ‘새로운 사회’가 오고 있다고 내다봤다. 그 후 수많은 저서를 통해 그는 고전경제학과 마르크스경제학에서 가치의 생산수단으로 중시한 자본과 노동 대신에 지식이 미래사회에서 가치를 창출하는 핵심적인 수단이 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1950년의 드러커의 예언은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의 잠꼬대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때 자본주의는 2차대전의 터널에서 겨우 빠져나와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곧이어 한국전쟁이 터져 우리나라는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었다. 비슷한 규모의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세계 도처에 널려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자본 대신에 지식을 강조한 경영학 이론은 보통사람들에게 현실감을 안길 수 없었다. 그러나 50여년이 지난 지금 그의 예언은 멋들어지게 적중했다. 지식이 곧 최대의 자본이라는 명제는 상식화된 지 오래다. 드러커는 그의 명저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한국을 ‘부존자원이 없는 후진국으로서 교육을 통해 성공적으로 산업사회에 진입한 대표적인 국가’로 들었다. 밀레니엄이 바뀌기 직전에 내가 만난 미국의 어느 한국학 교수도 지식이 자본이라는 드러커의 가설을 거증하는데 우리나라만큼 딱 들어맞는 나라는 없다고 주장했다. 식민지 치하에서 영국적인 모든 것을 거부한 인도와는 달리 한국은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도, 그리고 미국의 군정통치하에서도 근대성을 열심히 습득했고, 그것이 결국 한국에서 자본주의가 활짝 꽃필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이 제국주의의 침략성과, 그로 인해 배태된 한국 자본주의의 병폐를 과소평가한 것이긴 하지만, 최악의 조건에서도 자식만은 잘 가르쳐야 한다는 교육열이 우리나라에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두 과제를 한꺼번에 풀게 한 저력의 원천이었음은 아무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1961년에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박정희 정권이 5개년 경제계획을 처음으로 세우면서 당면한 풀기 어려운 숙제는 5년 후의 지표를 실현 불가능할 정도로 높게 잡아도 북한의 지표에 턱 없이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하기야 GARIO,ECA,CRIK,UNKRA,ICA에 PL480까지 마치 비밀번호 같은 다양한 이름의 원조자금으로 구구도생(區區圖生)해온 나라에서 경제계획을 세운다는 것 자체가 비웃음을 사기에 족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교육을 통해 구축한 값싸고 질 좋은 노동력을 바탕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다. 한국 자본주의는 20세기 말 이후 세계를 또다시 놀라게 하고 있다. 가난을 이긴 신흥공업국의 이미지도 벗어던지고, 반도체 전자 조선 철강 자동차 등 핵심 분야에서 선두주자로 올라섰다. 정보산업이나 사회의 정보화 지수에서도 선도적인 위치를 자랑하고 있다. 이런 질적인 도약을 몇 번만 되풀이하면 우리나라는 그야말로 선진국으로 우뚝 설 것이다. 이런 단계에서 우리에게 절실한 것이 무엇일까? 역시 교육이다. 가난에서 벗어나게 한 동력이 교육이었듯이 교육만이 고도 자본주의로의 도약을 담보한다. 그러나 교육은 육체근로자 시대의 그것과 같은 것이어서는 안 된다. 과거에는 평준화 교육이 값싸고 균질한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었지만 이제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지식사회에서 지식생산성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초우수자에 대한 과감한 투자를 병행해야 한다. 특히 대학 몇 개쯤은 세계 50대 대학에 낄 수 있도록 집중 육성할 필요가 있다. 여기 찔끔 저기 찔끔 나눠주는 대학교육 정책은 이제 접을 때가 왔다. 김민환 고려대 신문방송학 교수
  • 이근식 서울시립대교수, 이번엔 ‘상생적 자유주의’

    이근식 서울시립대교수, 이번엔 ‘상생적 자유주의’

    ‘자유주의’는 폭넓은 단어다. 그러다 보니 그냥 자유주의 하면, 그 내용물을 짐작키 어렵다. 그래서 ‘고전적’,‘신(新)’,‘질서’,‘공동체’와 같은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그런데 이번에는 ‘상생적’ 자유주의다. 서울시립대 경제학부 이근식 교수가 ‘자유와 상생’(기파랑 펴냄)에서 제시한 개념이다. 상생적 자유주의는 무엇인지 들어봤다. “개인주의 위에 서 있는 자유주의는 사회적 공론에 소홀할 수 있습니다. 이를 보완하겠다고 나온 것이 ‘공동체적 자유주의’인데, 이 단어는 마치 양복 입고 갓 쓴 모양새입니다. 자유주의는 개인주의인데 ‘공동체’라는 단어가 어울릴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동시에 ▲공동체 자유주의는 공동체 내부의 문제는 해결하더라도 공동체간 갈등은 해결할 수 없고 ▲공동체가 사람들의 모임이다 보니 환경문제 등에도 대처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그래서 공동체적 자유주의의 폭을 더욱 넓힐 수 있는 ‘상생적’이라는 단어를 고안했다는 설명이다.‘상생적’은 또 다른 의미도 있다.“개인적으로 존 스튜어트 밀을 좋아하는데 그는 ‘갈등하는 영향력’을 강조합니다. 저는 그것을 상충되는 목표를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자유·평등, 분배·성장, 진보·보수, 이것들이 서로 적절하게 균형을 이뤄야 둘 다 나태와 안일에 빠지지 않고 생명력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자유주의의 개념이 왜 이리 혼란스러운지 물었다. 사실 이 교수는 책에서 지금의 시대정신을 자유주의로 규정한 뒤 자유주의를 정치적 자유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로 구분하고, 정치적 자유주의에 높은 점수를 줬다. 그러나 정치적 자유주의도 모호하다. 실제 좌파 정치학자들 일부는 정치적 자유주의를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조정과 재분배’로 해석하기도 한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마르크스도 정치적 자유주의자다. 이 교수는 선을 그었다.“그건 ‘자유’가 너무 좋은 단어라 그렇습니다. 대표적 좌파학자인 월러스타인은 자유주의를 ‘대중에 대한 유화주의’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사기라는 것이지요.” 이 교수는 오늘날 우리의 자유주의가 혼란스러운 이유로 두 가지를 꼽았다.“자유주의가 일본과 미국에서 들어왔는데 식민지배와 광주사태의 기억으로 어떤 거부감이나 선입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거기에다 자유주의에 대한 제대로 된 소개가 없습니다.” 이 교수가 ‘자유와 상생’을 펴낸 것도 ‘대학 나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자유주의를 이해하도록 하겠다.’는 책임감 때문이다. 덕분에 목차만 봐도 감을 잡을 수 있을 정도로 대단히 체계적인데다 서술도 쉬워서 읽는 데 부담이 전혀 없다. 이 참에 ‘이근식 자유주의 총서’라는 타이틀로 내년까지 아예 5권을 내놓을 생각이다.‘자유와 상생’은 그 첫번째 결과물이고 ‘애덤 스미스’,‘존 스튜어트 밀’,‘서독의 질서 자유주의’,‘신자유주의’까지 줄줄이 예정되어 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염주영 칼럼] 진화하지 않는 이념은 공해다

    [염주영 칼럼] 진화하지 않는 이념은 공해다

    지난달 양측은 맥아더 동상 철거를 둘러싸고 한판 붙었다. 그 불길이 이번 달에는 강정구 동국대 교수에게로 옮겨갔다. 그가 맥아더 동상 철거 주장을 옹호하는 칼럼을 썼는데 ‘6·25는 통일의 목적을 수행한 통일전쟁’이라고 주장한 것이 불씨가 됐다. 불씨가 던져지자 양측은 다시 격렬하게 타올랐다. 처음에는 강교수라는 특정 개인의 사법처리 문제로 다퉜다. 그러나 검찰의 정치적 중립이라는 거대이슈로 확대포장되는 데는 단 며칠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검찰총장이 사표를 던졌고, 법무장관도 물러나라는 요구가 제기되다가 지금은 주춤한 상황이다. 이번에는 대통령 탄핵론까지는 안 가는 모양이다. ‘맥아더 동상’과 ‘강교수 칼럼’이 몰고온 두개의 파동이 확산되며 우리 사회를 흔들어대는 것을 지켜보았다. 왜 이렇게 일이 커지기만 하는지 혼란스럽다.‘6·25전쟁은 통일전쟁’이라는 강교수의 주장은 불쾌하고 공감이 가지 않지만 왜 학문의 잣대로 검증하지 않고 굳이 법의 잣대를 들이대고 구속하려 하는가. 맥아더가 싫으면 싫다고 말하면 되는데 왜 실력으로 동상을 철거하려고 하는가. 이런 의문들 속에서 한가지는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증오하는 두 극단의 이데올로기가 서로 격렬한 전투를 벌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데올로기는 합리적인 판단력을 마비시키고 집단적 광기를 유발하는 속성이 있다. 시대 변화를 따라가지 못해 퇴화될 위기에 놓인 낡은 것일수록 그런 속성이 강하다. 우리 부모세대들은 낮에는 ‘반동’이, 밤에는 ‘빨갱이’가 설치는 세상을 살았다. 지금까지도 습관성 이념중독자들이 곳곳에서 철 지난 낡은 브랜드의 이념들을 팔기 위해 밤낮으로 확성기를 틀어댄다. 광복 후 60년이 흐른 지금에는 좀 달라질 수도 있지 않은가. 진화하지 않는 이념은 공해다. 이념은 시대상황과 역사의 변천에 따라 진화하고 발전해야 한다. 그리하지 못한 이념들은 모두 도태됐음을 역사에서 배울 수 있다.1990년대 초반 일본계 미국인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자유민주주의가 인류의 이데올로기 진화의 종점이 될 것이라며 ‘역사의 종언’을 선언했다. 그러나 유럽의 지식인들은 사회주의 붕괴 후 제3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이보다 훨씬 앞서 마르크스는 공산주의가 이념 진화의 종착역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지만 공산주의 실험은 실패로 끝났다. 진화하지 않는 이념은 공해이며 퇴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분단·대결 시대의 이념으로 교류·화해의 시대를 열 수 없다. 불필요한 이념갈등을 피하려면 언론과 정치권의 각성이 필요하다. 일부 언론과 정치권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불을 지피고 대량생산해내는 이념갈등의 확대재생산 구조는 고쳐져야 한다. 이념도 필요하고, 이념논쟁도 필요하다. 다만 그것이 통합의 기능을 수행해야지 분열과 갈등을 증폭시키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정치권은 표를 모으기 위해 이념갈등을 이용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 학자의 주장은 학문의 자유와 책임의 범주 안에서 학문적 논쟁을 통해 개진되는 것이 좋다. 그리고 이를 검증할 책임 또한 학자사회에 있다. 학자들은 지금까지 그 책임을 소홀히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사회에 직접적인 위해가 되지 않는 한 나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사회에서 추방하라고 하는 것은 민주사회의 구성원이 취할 태도가 아니다. 이념논쟁은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그 바탕 위에 타협을 모색할 수 있어야 한다. 시대상황과 단절된 낡은 이념의 전쟁이 아니라 시대상황을 반영한 이념논쟁이 펼쳐지기를 기대해본다. 수석논설위원 yeomjs@seoul.co.kr
  • 儒林(455)-제4부 百花齊放 제2장 性善說(31)

    儒林(455)-제4부 百花齊放 제2장 性善說(31)

    제4부 百花齊放 제2장 性善說(31) 그러고 나서 맹자는 공명의(公明儀)의 말을 인용한다. 공명의는 노나라 사람으로 증자(曾子)의 문인이라고도 하고 자장(子長)의 학인이라고도 하는데, 어쨌든 유가에서 태어난 현인 중의 한 사람인 것이다. “일찍이 공명의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임금의 푸줏간에 살진 고기가 있고, 마굿간에 살진 말이 있는데도 백성들에게 굶주린 기색이 있으며, 들에 굶어죽은 시체가 있으면 이는 짐승을 몰아 사람을 잡아먹게 하는 짓이다.’ 마찬가지로 양주와 묵자의 도가 없어지지 않으면 공자의 도는 드러나지 않는 것이니, 이는 사악한 이론이요 백성을 속이는 것이며, 인의를 꽉 막아버리는 것이다. 인의가 꽉 막힌다면 짐승을 거느리고 사람들을 잡아먹게 될 것이며, 사람들도 서로 잡아먹게 될 것이다.…(중략)…사악한 이론이 마음에 작용하게 되면 그는 일에 해를 끼치게 될 것이고, 그것이 일에 작용하게 되면 그 정치에도 해를 끼치게 될 것이다. 성인이 다시 나오신다고 해도 내 이 말은 절대 고쳐지지 않을 것이다.…” 묵자와 양자에 대한 맹자의 공격의 키포인트는 두 사상 모두 임금도 없고, 아비도 없는 금수, 즉 짐승의 논리라는 것이었다. 특히 맹자는 묵자가 주장한 박장(薄葬)을 집중 공격하였다. 묵가는 자신이 유가에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특히 유가의 사치스럽고 과도한 장례를 비난하였다. 묵자는 절검(節儉)이야말로 나라를 다스리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주장하고 ‘누구든 부지런히 일하고 서로 돕는 한편 물자를 절약하고 검소하게 지낼 것을 강조’하기 위해 묵자의 책 속에 ‘절검’이란 항목을 따로 만들어 이를 묵가의 중요한 교리로 가르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청말의 대사상가였던 양계초가 묵자를 ‘작은 예수(小基督)’로 지칭하는 한편 경제사상면에서는 ‘큰 마르크스(大馬克思)’라고 부른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던 것이다. ‘공맹(公孟)편’에 보면 묵자가 정자(程子)라는 사람에게 ‘천하를 망치게 하는 유가의 도 네 가지가 있다.’고 하면서 그 네 가지를 ‘하늘과 귀신을 믿지 않는 것, 악무(樂舞)를 즐기는 것, 운명이 있다고 믿는 것과 함께 지나치게 사치스럽고 번잡한 장례의 폐해’를 열거하면서 특히 장례의 폐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부연설명하고 있다. “…또 후하게 장사를 지내고 오랫동안 복상하여 관을 무겁게 하고 많은 수의를 마련하여 장사가 지내는 것을 이사가듯 한다.3년 동안 곡하고 울어서 부축해준 다음에야 일어설 수 있고, 지팡이를 짚은 뒤에야 다닐 수 있으며, 귀로 들은 것도 없고, 눈으로 보는 것도 없게 된다. 이것은 실로 천하를 망치기에 충분한 것이다.” 맹자는 묵자의 이러한 장례에 대한 공격을 오히려 역이용하고 있었다. 이러한 맹자의 모습은 ‘등문공 상편’에 나오는 이지(夷之)와의 대화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이지는 묵자를 좇는 묵가였는데, 맹자의 제자인 서벽을 통해서 맹자를 뵙기를 요청하여 왔다. 이때 맹자가 말하였다. “나는 정말 만나고 싶으나 지금 나는 병중이오. 병이 나으면 내가 가서 만날 것이니 이지가 오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겠소.”
  • [어제는 한길 오늘은 딴길](6)김충환 vs 심상정

    [어제는 한길 오늘은 딴길](6)김충환 vs 심상정

    서울대 독서토론회 ‘청넝쿨’에서 태동한 연합서클 ‘대학문화연구회’(대문)의 진화(?)과정은 우리 학생운동사의 한 단면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그 속에는 자연발생적이고 리버럴한 분위기에서 만들어진 독서토론회가 차츰 목적의식적이고 사회변혁운동을 지향하는 집단으로 탈바꿈하면서 나타나는 다양한 갈등과 몸부림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한나라당 김충환 의원과 민주노동당 심상정 의원의 만남과 헤어짐, 재회라는 인연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만남:독서회 선후배로 조우 정치학과 73학번인 김 의원이 사회복지학과 동기 성경륭(국가균형발전위원장)과 함께 만든 독서토론회 ‘대문’에 역사교육과 심 의원이 78년 가입했다. 당시 대학원 2년생이었던 김 의원은 신입생 심상정을 이렇게 기억한다.“얼굴이 귀엽고 인상이 좋았어요. 붙임성도 있어 선배들을 잘 따랐죠.” 심 의원은 ‘독서회 원로’인 김 의원에 대해 “서클 미팅 때 1기 선배로서 참석하곤 했는데 세련되고 원숙한 모습이었습니다. 엘리트 코스를 걸어온, 장래가 촉망되는 이미지였죠. 노선 갈등을 겪는 순간에도 ‘다양성’을 강조하며 통합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헤어짐:행정고시 vs 노동운동 79년을 고비로 ‘대문’은 노선투쟁에 휘말린다. 심 의원과 국사학과 동기 최민(옛 제헌의회그룹 중앙위원) 등이 중심이 된 78학번 후배들이 ‘대문’ 선배들의 나이브한 자세를 비판하면서 지식인으로서 사회변혁에 앞장설 것을 주장한 것. 독서, 폭넓은 사고 등 ‘교양’을 강조한 선배들에 맞서 마르크스·레닌주의 등 ‘운동성’을 강조한 후배들은 ‘대문’ 풍토를 바꾸었다. 결국 ‘대문’은 사회주의노동자동맹을 이끈 백태웅, 총학생회장을 지낸 김민석 전 국회의원 등 ‘참여파 후배’들로 맥을 이어갔다. 여학생회를 세우며 학생운동에 몸을 담던 심 의원은 80년 말 노동현장으로 ‘존재 이전’을 감행했다.‘대동전자’ ‘남성전기’ 등에서 노동자로 일하며 관념이 아닌, 실제 ‘블루 칼라’로 거듭난다. 이후 85년 구로 동맹파업, 서울노동운동연합 결성,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 발족 등에 큰 역할을 하면서 정통 노동운동가의 길을 걸었다. 1984년부터 10년간 수배를 받았던 심 의원은 “구로동맹파업 당시 전태일기념사업회에서 일하고 있는데 텔레비전 화면에서 ‘1계급 특진에 500만원 포상금’이 걸린 제 얼굴을 봤습니다.”라며 “국가보안법·쟁의조정법 등 9가지 죄목이 걸려 있더군요.”라고 회고한다. 반면 김 의원은 78년 행정고시에 합격한 뒤,6년 동안 소비자 보호 운동에 몸담았다.‘소비자 보고서’ 잡지를 발행하고 부정기업 조사, 불매운동 등을 추진했다. 이후 정통 관료 코스를 밟다가 지자체 선거 1·2·3기에서 서울 강동구청장을 역임했다. 딴 길을 걸은 두 사람은 ‘대문’ 정기 모임에서 간헐적으로 만났지만 데면데면한 관계였다. 김 의원은 “상정이의 말수가 많이 줄었더라고요. 확고한 신념에 따라 금속노조 사무총장 등 노동운동에 온 몸을 던져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기특하면서도 존경심마저 들더라고요.” 심 의원은 “정기모임을 통해 ‘대문’ 식구들의 안부를 확인하곤 했는데 아마 제가 가장 ‘변종’이었을 겁니다. 그래도 김 선배는 이념적 성향을 가리지 않고 많은 후배들에게 각별한 애정을 갖고 늘 격려했습니다.” ●재회:17대 국회에 정계 입문 비록 삶의 한 길목에서 주류와 비주류로 갈라섰지만 두 사람은 그 속에서 정통 코스를 밟아오다가 17대 국회 초선의원으로 조우했다. 김 의원은 첫해 당 지방자치특위 위원장을 맡아 행정중심복합도시 등 굵직한 사안에서 당론의 틀을 세웠다. 올해 정기국회부터는 문화관광위로 옮겨 맹활약하고 있다. 민주노동당 의원단 수석부대표인 심 의원은 당의 ‘얼굴’ 노릇을 하면서 경제 관련 토론회에 단골로 참석했다. 최근 두 사람은 북한을 앞다퉈 방문하기도 했다. 2년째 접어든 의정활동을 놓고 선배는 후배에게 “소수인 민노당에서 여러가지 일을 맡아서 눈부시게 활동한다.”라고 덕담을 건네면서도 “계속 정치활동을 하려면 끊임없이 공부하는 노력도 필요할 것”이라고 조언한다. 후배는 선배에게 “비록 세계관이나 실천공간은 달라졌지만 강동구청장 3선이라는 풍부한 행정경험을 바탕으로 활발한 의정활동을 할 것”이라고 기대감을 비친다. 이종수기자 vielee@seoul.co.kr
  • 故 정운영씨 장서 2만권 모교 기증

    지난 24일 61세를 일기로 타계한 대표적 좌파 경제학자 겸 언론인 고 정운영 경기대 교수의 장서 2만여권이 서울대에 기증된다. 정운찬 서울대 총장은 29일 “고 정 교수의 뜻에 따라 장서의 처분권한을 위임받은 윤소영 한신대 교수가 고인이 소장했던 책 2만여권을 서울대에 기증하겠다고 제안해 이를 받아들였다.”고 말했다정 총장은 “한국을 대표하는 지성인 중 한 명이자 동문이었던 정 교수의 장서가 우리 학교에 기증되는 것은 매우 뜻깊은 일일 뿐 아니라 도서관과 학생들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고 정 교수는 주류 경제학이 아니라 소수파인 좌파 경제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장서의 종류가 매우 다양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대는 ‘정운영 컬렉션’을 만들어 장서를 별도로 관리하는 방안을 추진키로 했다. 정 총장은 “고인은 상대 상학과 64학번이고 나는 상대 경제학과 66학번이었는데 정 교수는 대학 시절부터 ‘상대 신문’에서 활동하는 등 유명한 분이었다.”고 회고했다. 대학원 졸업후 한국일보와 중앙일보 기자로 일했던 고 정 교수는 1981년 벨기에 루뱅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고 한신대 교수로 재직하다 86년 겨울 해직된 뒤 서울대, 고려대 등에서 정치경제학을 강의한 한국의 대표적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겸 언론인이다.유지혜기자 wisepen@seoul.co.kr
  • [neo PSAT와 함께 하는 실전 강좌]

    ●유형가이드-생략된 정보의 추리 추리·추론은 주어진 내용을 바탕으로 새로운 정보를 논리적으로 잘 이끌어내는지를 측정한다. 이 중 생략된 정보를 추리하는 유형은 언어 평가 도구에 널리 사용되는 매우 고전적인 것으로, 이른바 ‘괄호넣기’이다. ●예시유형 주어진 글의 내용을 토대로 문장·어구·단어 등을 채워 넣는 유형이다. ●해법 이 유형은 훈련을 통한 고도의 독해 감각을 요구한다. 문맥파악이 핵심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생략된 내용과 인접한 문맥의 파악이다. -접속사를 비롯한 각종 연결어를 통해 중요한 단서를 얻을 수 있다. -직전 문장 혹은 직후의 문장이 추리의 근거가 된다. -단락의 요지, 단락 간의 관계를 통해 생략된 내용을 추리할 수 있다. -단어나 어구가 생략된 경우에는 중심 어구 또는 핵심어를 추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생략된 정보가 다수일 경우, 쉽게 추리 가능한 것부터 해결한다. ●문제 다음 빈칸에 들어갈 내용을 (보기)에서 찾아 순서대로 나열한 것 중 가장 적절한 것은? ‘문화’라는 개념은 일상생활에서 복잡하고 모호하고 혼탁하게 사용되지만, 편의상 크게 형이상학적, 평가적, 분류적, 이데올로기적이라는 네 가지 의미로 분류해서 이해할 수 있다. 첫째, 형이상학적인 뜻으로의 문화는 자연과 대조되어 사용된다. 가령 (ㄱ)___ 그것들은 자연 현상이 아니라 인간이 의도적으로 만들었고 또한 오직 인간 사회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이때 ‘문화적’이란 말은 (ㄴ)___. 둘째,‘문화’라는 말은 평가적인 의미를 가지며 형이상학적 뜻으로 분류된 문화현상의 질적 고급성을 지적하는 데 사용된다. 예컨대,(ㄷ)___. 이때 ‘문화적’이란 말은 (ㄹ)___ 이 자리에서 우리가 한국을 총체적으로 지칭하는 개념으로 ‘한국의 문화’라고 할 때의 ‘문화’ 개념은 물론 평가적이 아니라 서술적 의미만을 갖는다. 하지만 ‘문화’라는 개념으로 서술한 한 사회 혹은 한 시대가 평가되고 그 평가된 가치가 서로 비교될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문화가 선택의 대상인 만큼 그것은 경우에 따라 반드시 평가되어야 한다. 셋째,‘문화’는 문화현상의 분류적 개념인 특수한 문화현상을 지칭한다. 가령,(ㅁ)___ 이러한 뜻에서 ‘문화’는 한 사회의 전체가 아니라 한 측면만을 지칭하는데, 이때 ‘문화적’이란 말은 (ㅂ)___ 이같이 분류적으로 어떤 부분을 지칭하는 뜻의 ‘문화’는 한국을 총체적으로 표현하는 ‘한국문화’라는 말을 할 때의 ‘문화’의 뜻과 결코 같을 수 없다. 넷째, 좀 더 포괄적으로 쓰일 때 ‘문화’는 이데올로기와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 예컨대 (ㅅ)___ 그러나 더 넓은 의미로는 불교, 기독교와 같은 종교 혹은 플라톤적 관념론·마르크스적 유물론과 같은 사념 철학적 체계 등과 같은 총체적 신념체계를 뜻하기도 한다. 이때 ‘문화적’이란 말은 (ㅇ)___. (보기) (가)‘문화국민’‘문화인’‘문화시설’‘문화행사’‘문화활동’‘문화재’ 등의 표현은 ‘문화’라는 말이 긍정적으로 통용되는 사례다. (나)문화는 과학서적과 구별되는 문학 텍스트, 사무실이나 공장과 구별되는 미술관이나 박물관, 직공·기술자·사무원·과학자·학자·기업가 등과 구별되는 예술분야에 종사하는 이들 등을 지칭한다. (다)가족관계, 음식, 교통, 놀이, 교육, 예절, 윤리규범, 의식, 정치 등 모든 인간적 활동·제도·관습뿐만 아니라 건물, 의복, 화장품, 도서 등도 다 같이 문화적 존재다. (라)도구적인 것 또는 물질적인 것과 대립되어 그 자체가 가치있는 것 또는 정서표현적으로 인식되는 현상을 가리킨다. (마)문화는 전체주의, 민주주의와 같은 정치적 신념이나 사회주의, 자본주의와 같은 경제사상을 지칭한다. (바)‘인간 고유의 속성을 띤’이란 뜻을 갖는다. (사)‘야만적’‘원시적’‘미개한’‘중요성이 없는’ 등의 개념과 대조된다. (아)그 사회를 지배하는 관념적 세계관의 구체적 표현을 지칭한다. (1)(가)-(사)-(다)-(바)-(나)-(라)-(마)-(아) (2)(나)-(라)-(마)-(아)-(다)-(바)-(가)-(사) (3)(나)-(바)-(가)-(사)-(다)-(라)-(마)-(아) (4)(다)-(바)-(가)-(사)-(나)-(라)-(마)-(아) (5)(다)-(바)-(나)-(라)-(마)-(아)-(가)-(사) ●해설 빈 칸 앞에 ‘가령’ 또는 ‘예컨대’와 같은 접속어와 ‘이때 문화적이란 말은’과 같은 지시어가 놓여 있음을 유념해 볼 때 각 단락마다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하는 진술((ㄱ),(ㄷ),(ㅁ),(ㅅ))과 이를 바탕으로 ‘문화’ 개념을 일반화하는 진술((ㄴ),(ㄹ),(ㅂ),(ㅇ))이 들어가야 한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에서 예시 문장과 일반화된 진술을 하고 있는 문장 사이에 호응하는 쌍을 먼저 확인하고, 단락의 문맥을 고려해 빈 칸에 들어갈 적절한 내용을 찾으면 된다. 둘째 단락에서 ‘오직 인간 사회에서만’이라는 표현을 참고할 때 (ㄴ)에는 (바)와 (다)가 알맞다. 셋째 단락의 ‘질적 고급성’ 및 ‘평가되어야’ 할 개념이라는 표현을 통해 (ㄹ)에는 (사)와 (가)가 맞다. 다섯째 단락에서 ‘이데올로기’ 및 ‘총체적 신념체계’라는 표현을 고려하면 (ㅇ)에는 (아)와 (마)가, 넷째 단락에는 (나)와 (라)가 들어간다. 따라서 정답은 (4). 출제:김병구(숙명여대 교수 국문학 박사)
  • 儒林(431)-제4부 百花齊放 제2장 性善說(7)

    儒林(431)-제4부 百花齊放 제2장 性善說(7)

    제4부 百花齊放 제2장 性善說(7) 그중에서 맹자에게 가장 무서운 맞수는 바로 묵자(墨子)였다. 맹자가 대적하였던 수많은 무림고수들은 나름대로 필살기(必殺技)의 무술을 지닌 강적들이었다. 그러나 그중 최고의 상수는 맹자가 묵적이라고 부르던 묵자, 그 사람이었다. 맹자가 이미 대적하였던 고자를 비롯하여 농가, 순우곤과 같은 세객, 장의와 같은 종횡가들은 묵적에 비하면 그야말로 ‘새발의 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사상가라기보다는 세치의 혓바닥으로 천하를 농락하였던 떠돌이 궤변론자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묵적은 달랐다. 맹자가 살았던 전국시대 때에는 유가의 사상보다 묵적의 사상, 즉 ‘묵가’가 천하를 휩쓸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맹자가 ‘어찌하여 스승께서는 사람들과 논쟁하기를 좋아하십니까.’라는 제자 공도자의 질문에 ‘내가 어찌 논쟁하기를 좋아하겠느냐. 어쩔 수 없이 그런 것이다.…양주와 묵적의 언론이 세상에 가득 차서 천하의 언론은 양주에게 돌아가지 않으면 묵적에게 돌아간다.…양주와 묵적의 도가 없어지지 않으면 공자의 도는 드러내지 않으니 나는 이 때문에 두려워하여 돌아가신 성인(공자)의 도를 지키고, 양주와 묵적을 막으며, 방자한 말을 몰아내며, 사설을 내세우는 자가 나오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란 대답을 하였던 맹자의 단호한 의지를 보면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맹자의 이러한 비장한 각오는 그 무렵 천하를 휩쓸고 있는 묵적과 양주의 도에 대해 사생결단의 싸움을 벌여 유가로서의 순교자가 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엿보게 하는 장면인 것이다. 이를 통해 맹자가 가장 두려워했던 대상은 바로 묵적과 양주였음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묵적, 즉 묵자의 사상은 맹자가 공자에게 사제지간으로서 보은을 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거꾸러뜨려야 했던 당대 제일의 검객이었던 것이다. 묵자. 그의 생몰연도는 정확치 않으나 대충 BC 479년에서 BC 381년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기는 공자의 탄생시기보다는 70여년 정도 늦고, 공자가 죽은 바로 그 무렵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묵자가 죽은 바로 그 무렵에 맹자가 태어났으니, 묵자는 공자와 맹자사이의 1.5세대에 해당하는 과도기적 인물인 것이다. 이에 대해 사마천은 사기에서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언급하고 있다. “…묵적은 송나라의 대부로서 성을 잘 지키고 비용을 절약하였다. 어떤 사람은 그를 공자와 동시대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공자 이후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분명치는 않다.” 이처럼 묵자의 생존시기는 사기의 기록처럼 불분명하지만 어쨌든 춘추시대의 말엽에서부터 전국시대에 이르는 그 시대적 격변기에 살았던 사람이라는 점은 분명한 사실인 것이다. 묵자가 태어난 것도 송나라 혹은 초나라라는 설도 있지만 대체로 공자가 태어난 노나라라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청말의 계몽사상가이자 문학가였던 대학자 양계초(梁啓超:1873∼1929)가 묵자를 ‘작은 예수(小基督)’라고 하고 사회적으로나 경제사상면에서는 ‘큰 마르크스(大馬克思)’라고 부르고 있다는 점이다.
  • [코드로 읽는책]세계종교로 보는 죽음의 의미/조 바우커 지음

    죽음을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끝에는 종교가 있다. 종교는 일반적으로 죽음을 부정하고 영원한 생명을 제시하는 것으로 존재의 의미를 찾는다. 죽음과 불멸에 대해 종교가 가장 많은 말을 해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현대의 대표적인 종교학자인 조 바우커가 쓴 ‘세계종교로 보는 죽음의 의미’(청년사 펴냄, 박규태·유기쁨 옮김)는 종교의 기원이 죽음을 부정하는 것으로 시작됐다는 통상적인 이해를 뒤집는다. 그동안 종교학자들이 펴낸 죽음에 관한 책들과 맥을 달리하는 것. 저자는 종교가 영원한 생명을 제시한다는 ‘보상설’을 반박하고, 새로운 시각에서 죽음에 대한 세계종교의 해석들을 보여준다.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의 교의와 의례에 대한 꼼꼼한 분석을 통해 죽음에 대한 세계종교의 해석들이 마르크스나 프로이트 등 사상가들이 주장한 보상설로 환원될 수 없을 만큼 풍부하고 다양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저자가 던지는 질문은 ‘과연 죽음이 없다면 종교도 없었을까.’이다. 이같은 문제의식은 종교의 기원과 맞닿아 있다. 따라서 각 종교의 뿌리에 무엇이 놓여있는지 탐색하고 죽음의 궁극적인 의미를 성찰한다. 저자는 희브리 성서와 초기 불교, 신·구약성서, 힌두교 베다 등은 결고 보상이나 사후세계의 실체를 말하지 않았음을 입증한다. 오히려 사후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오래된 종교사는 종교의 기원이 사후의 가치 있는 삶을 제공하는 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고 결론짓는다. 여기에서 종교의 기원을 이론적으로 일반화해 탐색해온 마르크스와 프로이트 이론의 맹점이 드러난다고 주장한다. 종교로부터 사후 보상을 제거해야만 죽음에 대한 본질을 알 수 있다는 것. 그렇다면 저자가 말하는 죽음의 본질은 무엇일까. 오래된 종교적 시도들은 보상개념보다는 ‘희생’에보다 근본적인 의미를 둔다고 강조한다. 유대교 경전은 ‘피흘림’을, 기독교 신약성서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불교는 민속신앙의 희생 제의를 탈바꿈시켜 일찍이 희생이라는 범주를 죽음과 연결시켰다. 저자의 또다른 질문은 죽음에 대한 세속적인 해석과 종교적인 해석이 어떻게 만나는지다. 이를 풀기 위해 많은 현대과학 담론을 끌어들이고 고고학과 인류학·현상학 등 인접 학문의 다양한 죽음담론을 펼친다. 이 결과 저자는 ‘희생’이야말로 양쪽 해석이 만나는 지점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두 해석은 생명의 필요조건인 죽음에 높은 가치를 부여해 서로를 강화한다는 것이다. 종교와 죽음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만남과 동시에 동서양 종교 전통의 해박한 지식 속에 빠져들게 하는 책.1만 8000원.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마르크스, 뉴욕에 가다/윤길순 옮김

    여러분, 저의 1인극을 보러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누군지는 알고 오셨겠지요. 네, 그렇습니다. 마르크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그렇게 떠들어대던 바로 그 사람입니다. 아, 물론 나는 죽었습니다. 하지만 100년 넘게 온통 내 사상이 죽었다고 떠들어대는 걸 듣자니 도저히 가만 있을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딱 한시간의 여행을 허락받았습니다. 명예를 회복하려구요. 아, 그런데 좀 착오가 있었나 봅니다. 내가 살았던 런던 소호로 가려고 했는데 이렇게 뉴욕 소호로 와버렸군요. 그럼 이제 변론을 시작할까요? 먼저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닙니다. 위성처럼 내 말 주위만 빙빙 돌며, 내 말을 왜곡하고 또 그걸 무슨 광신자처럼 무조건 옹호하는 마르크스주의자와 나는 상관이 없습니다. 내 아내이자 동지인 예니는 ‘자본론’을 보더니 ‘독자들이 읽다가 잘거야.’라고 하더군요. 좋아요. 세계 역사에서 지금껏 나의 잉여가치론을 이해하는 사람이 백명밖에 안 된다고 칩시다. 그래도 그건 분명히 맞는 이론입니다. 미국인구 1%가 전체 부의 40%를 장악하는 현실을 보십시요. 저들은 소비에트가 붕괴되었으니 공산주의도 죽었다고 합니다. 스스로 공산주의자나 사회주의자라고 말하면서 깡패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이 공산주의가 뭔지 안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내가 말한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뭔지 알고 싶으세요?그럼 파리 코뮌을 보십시요, 그게 진짜 민주주의입니다. 자본주의가 승리했다고요? 미국 어린이의 4분의1이 빈곤에 허덕이며 살고 있는데도요? 하지만 고백하건대, 나는 자본주의가 용케 살아남는 재간이 있다는 것은 미처 고려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자본주의니 사회주의니 하는 말은 하지 맙시다. 그냥 이 지구의 엄청난 부를 인류를 위해 쓰자고 합시다. 자, 이제 가야 할 시간이군요. 그전에 나를 연극무대에 설 수 있게 한 극작가를 소개하겠습니다. 미국의 행동하는 지성 하워드 진 박사입니다. 이분 덕에 1995년 워싱턴DC의 처치스트리트극장에서 처음 공연한 후 지금까지 미국 전역을 순회공연하고 있습니다. 윤길순 옮김, 당대 펴냄.9800원.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高유가가 ‘세계화’ 종말 부른다

    21세기 세계경제의 가장 큰 특징으로 지적돼온 ‘세계화’가 그 수명을 다했다는 분석이 제기돼 관심을 끈다. 영국 일간 가디언과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WSJ)은 4일 ‘변칙인 세계화의 수명이 다 됐다.’는 제임스 쿤슬러의 기고와 ‘현상황이 1914년과 매우 흡사하다.’는 분석기사를 각각 싣고 세계화의 한계를 지적했다. 두 신문은 1870∼80년에서 1차대전이 터진 1914년까지를 1차 세계화 시대, 석유 의존도가 높은 현재를 2차 세계화 시대로 각각 규정했다.1차 세계화 시대가 열강들의 석유 주도권 싸움에 따른 세계대전으로 끝난 점을 지적하며, 석유 확보를 위해 전쟁까지 불사하는 현재의 상황이 그때와 비슷하다는 점을 세계화의 수명이 다했다는 근거로 제시했다. 쿤슬러는 1870∼1914년을 석탄과 증기기관에 기반한 ‘제1차 세계화 시대’로 칭했다. 도로 등 건설이 붐을 이루고 대륙간 교역이 번성했다. 석탄은 고갈될 조짐이 없었고, 원자재 공급도 원활했다. 중산층이 늘어났고, 다양한 금융상품들이 개발돼 활발한 거래가 이뤄졌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제1차 세계화 시대는 1914년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페르디난드 대공이 암살되면서 막을 내렸다. 쿤슬러는 1차 세계화 종언의 진짜 이유는 석유 주도권 싸움이었다고 분석했다. 세계경제가 석탄에서 석유 경제로 옮겨가면서 석유를 확보하기 위한 열강들간의 다툼이 본격화되면서 지정학적 불안이 고조됐다는 것이다. WSJ는 1914년과 현재는 자본시장 규제완화와 저인플레, 원자재가격 상승, 새로운 지역맹주 부상, 정부가 지원하는 테러 급증, 열강들의 재정적 어려움, 민주화 확대, 세계 강국간 경쟁 심화라는 점에서 매우 유사하다고 지적했다. 니올 퍼거슨 하버드대 경영학과 교수는 “100년 전에는 마르크스가 세상을 두렵게 했는데 요즘은 오사마 빈 라덴이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면서 테러가 극성을 부리고 각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것, 테러를 빌미로 안보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모습이 1914년과 흡사하다고 강조했다. 쿤슬러는 값싼 석유에 의해 지탱돼온 현재의 세계화는 최근 유가가 폭등하면서 근간이 흔들리고 있다고 주장했다.따라서 석유를 확보하기 위한 미국과 강대국들의 경쟁은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문제는 석유의 3분의2가 서방세계, 특히 미국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보유하고 있다는 것. 미국과 영국은 특정 국가가 아닌 초국가적인 종교 이념으로 무장한 세력들과 싸워야 하는 국면이다. 더욱이 중국이 석유 확보전에 가세하면서 갈등요소가 커졌다는 것이다.김균미기자 kmk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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