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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큐닉스/컴퓨터 제조/매출액 8% 연구개발비 투입(앞서가는 기업)

    ◎「기술 제일주의」세계제패 야심/「글마당」으로 성장발판… 트린터 30종 생산 「세계 컴퓨터업계에 떠오르는 별」.미국의 월 스트리트 저널은 지난 89년 큐닉스컴퓨터를 이렇게 격찬했다. 서울 강남구 청담동 고갯마루에 자리잡은 큐닉스컴퓨터는 국내 전산학박사 1호로,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로 재직하던 이범천회장(45) 등 5명이 5천만원을 모아 81년에 설립했다.지금은 4백30여명의 직원에 자본금 65억원,매출액 7백억원,순이익 9억7천만원의 중견업체다. 성공비결은 연구개발이다.매출액의 8%를 연구개발비로 투자한다.직원의 35%인 1백50여명이 연구원이다.「연구소기업」인 셈이다. 이 회장은 『손쉽게 들여온 외국기술보다는 시간이 걸리고 투자비가 많이 들더라도 원천기술을 개발해야 한다』며 『이것만이 기술을 세계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지름길』이라고 단언한다.기술제일주의가 모토인 셈이다. 성장과정을 보면 이 모토에 조금도 손색이 없다.81년 8비트 컴퓨터인 M8000 개발에서부터 작년에 선보인 사무자동화용 잉크젯 프린터까지 대부분을자체기술로 일궈냈다. 큐닉스는 컴퓨터보다는 프린터업체로 더 잘 알려져 있다.매출액의 절반이상이 프린터에서 나온다.그러나 오늘의 큐닉스로 일궈낸 것은 한글·영문·한자용 워드프로세서인 「글마당」이다.82년에 개발됐다. 첫 개발품인 M8000은 컴퓨터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던 시기에 나온 제품이라 기대에 못미쳤다.창업멤버들은 컴퓨터 마인드를 넓히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그래서 개발한 글마당은 정부와 기업들이 사무자동화에 관심을 가지면서 인기를 얻었다. 글마당이 인기를 끌고 프린터 등 다른 하드웨어들도 기술력을 인정받아 컴퓨터업체로는 처음 83년 동탑산업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85년부터 경쟁제품이 쏟아지고 16비트 컴퓨터가 등장하며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84년 53억원이던 매출액이 85년과 86년에는 40억원대로 줄었다. 큐닉스는 이 당시 변화에 대한 적응력을 키우는 쪽으로 전략을 바꿨다.첫시도로 중점사업을 프린터로 돌렸다. 85년 국내 최초의 그래픽 레이저 프린터인 「Q LBP 1000」을 개발한 데 이어 지금까지 30여종의 프린터를 선보이며 그 때마다 성공을 거뒀다.90년 국내 처음으로 도트 프린터가 KS규격을,92년에는 큐닉스의 모든 프린터가 Q마크를 획득했다. 다각화에도 힘써 88년 소프트웨어유통업체인 「인포텍」을,91년 「정보기술연구소」를 세우고 92년에는 장외시장에도 등록했다.올 매출액은 작년의 2배 가까운 1천3백억원으로 잡았다. 이 회장은 『올해 이미 멀티미디어(다중매체) PC와 최신 컴퓨터기종인 펜티엄을 선보였고,5월에는 개인용 컬러 잉크젯 프린트를 내놓을 계획』이라고 말했다.간단없는 연구개발과 투자로 세계제패를 꿈꾸고 있다.
  • 자식에의 유산은 「사람됨」으로(박갑천 칼럼)

    어버이 주검 누여놓은채 상속재산싸움 벌이는 일쯤 이젠 「고전」이 되었다.그거 「얼른」 타내기 위해 어버이를 죽이는 세상으로까지 되잖았는가.재화는 재화라 했던가.세상은 점점 선거운 쪽으로 흘러가는구나 싶기만 하다.이 기막힐 현실을 두고 임의로운 친구끼리는 이런 농담도 한다.『자네,제명 제대로 살려거든 가진것 좀 나에게 떼어넘기라고』 사재 김정국이 황모라는 사람에게 써보냈다는 편지내용이 「송와잡설」에 실려있다.『그대가 살림모으기를 그만두지 않는다는 말을 서울에서 들었소.사실이 그렇다면 이젠 그만하고 고요하게 천명에 순응하며 사느니만 못할 것이오.…나와 그대가 상수를 누린다 해도 불과 10년 남았는데 뭣 때문에 남의 궂은소리 들어가며 안달이란 말이오』 기쓰고 벌어봤자 저승노자도 못 가지고 가는 인생임을 깨달으라는 충고였던 듯하다.이 편지는 자기(김정국)가 가지고 있는「없을수 없는것」 열가지를 이렇게 들어놓고 있다.『…서적(책)한시렁,거문고 한벌,벗 한사람,신 한켤레,잠을 청할 베개 하나,환기하는 창 하나,햇볕쬘 마루 하나,늙은몸 의지할 지팡이 하나,봄경치 찾아다닐 나귀 한마리』.검소해야 함을 강조하려면서 들었다는 것뿐 그밖에 다른 것이 없었다고야 하겠는가.어쨌거나 이런 청빈에게 변변한 유산이 있었다고 할 수는 없겠다. 애면글면 벌어서 자식에게 재산 물려주는 것은 재산과 자식을 함께 버리는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재산뿐 아니라 어버이의 권세·명성도 그렇다.그에 의탁하여 호가호위하려 들때 스스로는 게을러지기가 쉽다.그들은 그 「약기운」이 떨어지면 절망하고 좌절해 버린다.홍만종은 「순오지」에서 그런 귀유자제들이 『…패가망신할 지경에 이르고서도 깨닫지 못하니 슬픈일』이라면서 백거이(백거역)의 자경시를 소개해 놓고 있다.『누에는 늙어가며 고치를 만들건만 제몸을 가리지 못하고/벌은 굶어가며 꿀을 익혀도 마침내 남의 손에 돌아가네/늙어가며 집안걱정하는 사람들 모름지기 깨달을지니라/저 두벌레처럼 헛되이 신고하는 것임을』 언젠가 이 난에서도 소개한바 있는 「유산 안 남기기운동」이 이번 대학교수의 살부사건을계기로 더 확산되어 간다고 한다.재산에 대한 생각들을 달리하면서 「사람됨」을 물려주어 나가게 돼야겠다.
  • 경주 영묘사 출토 기와인물상(한국인의 얼굴:22)

    ◎도톰한 입술·광대뼈 “전형적 신라인”/눈·코·입 윤곽 뚜렷… 콧마루 긴 들창코/만면에 웃음… 온화한 여성적 이미지 우리나라 고대유물 중에는 인물상이 들어간 기와가 있다.흙인형 인물상처럼 흙으로 빚은 얼굴이다.다만 흙인형과 같이 인체 또는 머리부분 전체윤곽을 형상화한 조소와는 달리 양각의 릴리프형식을 빌려 얼굴을 표현했다.인물상 기와로는 삼국시대의 영묘사와 미륵사 절터 출토품,통일신라시대의 황룡사 절터 출토품 등이 전해 내려온다. 이들 유물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얼굴은 경북 경주시 성건동 영묘사 절터에서 나온 인물상 기와다.흔히 「신라인의 얼굴」로 회자되어 요즈음의 각종 서적이나 유물도록 표지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상은 수막새 기와 마구리에 들어있다.얼굴 왼쪽의 볼 밑부분과 턱이 일부 떨어져 나갔으나 인물을 알아보기에는 별다른 지장을 주지 않는다.뒷부분에는 수키와 흔적을 남겨 절집의 지붕을 이는데 실제 사용된 기와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얼굴은 활짝 밝다.눈 언저리며 입가에 웃음을 머금어 더욱 밝아보인다.맑게 갠 서라벌 하늘을 배경으로 휘청하니 굽은 절집 지붕에 썩 어울렸을 막새기와의 얼굴.다른 귀신얼굴의 기와(귀면와)와는 대조를 이룬 온화한 얼굴이거니와 여성적 이미지를 강하게 풍긴다.눈과 코,입의 윤곽이 뚜렷하다.눈꺼풀이 두꺼워 보이나 흉하지 않고,조금 벌어진 입술이 도톰하다. 콧마루를 위로 서서히 올려 눈썹과 연결시켜 놓아 코가 유난히 길다.자연스럽게 내놓은 콧구멍은 그 기다란 코를 부드럽게 잡아주어 얼굴인상 전체가 순한 모습으로 다가온다.광대뼈가 살짝 도드라진 이 얼굴은 오늘도 길에 나가면 만날 수 있는 인물이다.대가람추녀 끝에 매달려 잡귀를 물리쳤다(벽사)는 막새기와속의 얼굴이 그토록 잔잔할까.그 해답은 인물상 기와가 나온 영묘사의 역사적 분위기를 통해 얻어내야 할 것이다. 영묘사는 당대의 신라 고승 양지의 작품이 가장 많았던 절이다.선덕여왕대에서 문무왕대에 걸친 7세기 중반쯤에 활동한 승려로 추정되는 양지의 이야기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온다.이들 사서는 재예를 겸비한 그가 영묘사불사에 적극 참여한 것으로 기록했다.특히 영묘사에서 그가 장육삼존상을 만들 당시 장안의 선남선녀가 다투어 흙을 날랐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나온다. 양지는 그 불사현장에서 노래(공덕가)를 지어 선남선녀들에게 부르도록 했다고 한다.「왔도다/왔도다/공덕을 닦으러 왔도다」라는 내용의 노래다.예술적 감각은 물론이고 높은 수행력으로 덕이 가득했던 양지의 불사에 자진해 나온 많은 사람들은 공덕가를 합창했을 것이다.여기서 양지는 모든 불사의 공덕을 이들 민중에게 돌렸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영묘사 출토 막새기와의 인물상은 민중의 한 사람인지 모른다.또 민중 모두를 뭉뚱그려 표현한 전형적 신라인의 얼굴일 수도 있다.그래서 막새기와 속의 얼굴에는 민중의 힘을 빌려 재난을 막고자 한 뜻이 담겼을 것이다.
  • 농촌 주거환경 크게 개선/96.6%가 상수도·자가수도 갖춰

    ◎가스사용 96%/보일러 설치 85%/입시부엌 70%/수세식 화장실은 24%로 저조/농진청 2천2백가구 조사 농가의 주거환경이 급속하게 좋아지고 있다. 농촌진흥청이 지난해 9월 전국 46개 군의 농가 2천2백8가구를 대상으로 표본 조사한 농촌의 주거환경 실태에 따르면 여름에는 95.7%인 2천1백13가구가,겨울에는 93.9%인 2천74가구가 가스를 취사 연료로 쓰고 있다. 짚과 나무 등의 농림 부산물을 쓰는 농가는 여름에 1%,겨울에 1.5%뿐이다.지난 82년에는 80.7%가 부산물을 취사 연료로 썼었다. 난방 방식은 66.1%인 1천4백59가구가 기름 보일러이고 그 다음이 연탄 보일러(18.8%),재래식 아궁이(8.5%),연탄 아궁이(6%)의 순이다.87년에는 재래식 및 연탄 아궁이를 사용하는 농가가 81.7%였다. 부엌은 싱크대를 설치하고 바닥에 마루나 비닐 장판을 깔아 실내로 가꾼 완전 입식이 62.7%,싱크대는 설치했으나 바닥이 시멘트나 타일로 된 입식은 7.1%이다.개량하지 않고 그대로 쓰는 농가는 29.3%이다. 급수시설은 상수도 26.7%,간이 상수도 29%,자가 수도 40.9% 등으로 96.6%가 비교적 위생적이고 편리한 시설을 갖추고 있다. 목욕실이 있는 농가도 87년의 17·1%,90년의 29%에서 61.3%로 크게 늘었다.그러나 화장실은 수세식이 23.7%,농촌형 3조식이 18.6%로 42.3%만이 위생적인 화장실이다. 화장실의 위치는 옥내 24.2%,울타리 안 62.2%,울타리 밖 13.6% 등이다.38%의 농가는 화장실 개량을 원하고 있다. 응답자의 67%는 최근 일부 지역에 보급하는 농촌형 연립주택의 경우 구조가 농촌 실정에 맞지 않고 답답하며 또 창고 등의 시설이 없다는 점 때문에 입주할 생각이 없다고 대답했다.
  • 일 여당 대북교섭 주도권 다툼/3당대표단 28일 방북 성사 안팎

    ◎당내 헤게모니와 맞물려 이전투구 양상 일본의 연립여3당 대표단이 28일 북한을 방문한다.북·일 국교정상화 교섭의 재개를 위한 것이라는 설명이지만 일본 정계는 대북한 교섭을 놓고 주도권 경쟁을 벌이는 세 거물의 막후 움직임에 커다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최대의 관심을 모으는 것은 가토 고이치(가등굉일) 자민당정조회장.지난 22일 여당 정책담당자들이 모여 북한 노동당과 합의할 공동선언문 초안을 마련하는 자리.가토 회장은 문구 하나하나에 의견을 내놓는 등 적극적 자세를 보였다.한 회의참석자는 『그가 삽입한 말 가운데는 「자민당답지 않은 용어」가 많았다』면서 『이미 북한 노동당과 상당한 협의를 거친 것 아닌가』라고 추측하기도 했다. 사실 가토 회장은 지난 몇달동안 여당대표단의 북한 파견을 성사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한 흔적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일본의 도쿄신문은 그가 지난 1월 비밀리에 이홍구총리를 만나 대표단 파견을 위한 환경을 정비했다고 전한다.이어 2월에는 정조회장 대리인 호리 고스케 전 문부상을 싱가포르에 보내 북한측과 교섭을 갖도록 했다. 가네마루 전의원 등 다케시타파가 독점해온 대북한 접촉 분야에 미야자와파인 가토 회장이 적극적으로 나서자 당내에서는,특히 다케시타파의 후신인 오부치파에서는 「일 추진이 서투르다」,「왜 서두르는지 모르겠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불도저처럼 밀어붙여 끝내 성사시키고 말았다.이에 대해 정계에서는 그가 「새 실력자」의 이미지를 강하게 심고 오부치파를 공략한다는 계산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대표단장인 와타나베씨도 의욕적.북·일 국교정상화 교섭은 그의 외상 시절 중단됐다.그는 이번 기회에 자신의 손으로 매듭을 풀기를 희망하고 있다.요즘 그는 외무성도 놀랄 정도로 북한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부총재까지 역임하다 지난해 탈당 소동을 벌여 입지가 약화됐다.이번 일은 재기의 좋은 기회.지난 23일 고노 총재와 만난 그는 「정부교섭재개 의사전달」 역할 이상의 재량권 부여를 요청했다.그는 여3당 방문시 결정되는 사항을 정부가 이행할 것을 담보하라고 요구할 태세다. 구보사회당서기장도 주도권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북한은 사회당 몫이라는 등식이 깨진데 대해 착잡하지만 자민당에 내맡기기만 할 수는 없다.북한은 이미 자민당과의 직접 교섭에 발벗고 나선 인상이다.이번 여당대표단의 북한 파견 문제도 북한은 조총련과 사회당을 거치지 않고 자민당과 직접 교섭했다.사회당의 대표단 참가여부로 양보를 얻어낸 그는 요즘 자신의 역할을 놓고 또 다시 장고에 들어가 있다.
  • 도쿄 지하철 「독가스테러」/15개역에 「사린」·겨자가스 뿌려

    ◎6명 사망… 3천9백명 중독/마스크 쓰고 범행… 40대 용의자 추적 【도쿄=강석진 특파원】 20일 상오 8시쯤 러시아워로 혼잡한 도쿄 중심가 지하철역과 전동차안에 죽음의 독가스 사린과 겨자가스를 살포한 테러사건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독가스에 중독된 지하철 승객등 6명이 숨지고 3천9백여명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으며 이 가운데 6백3명이 입원했다.그중 16명은 중태로 사망자는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일본경찰에 따르면 출근시간대인 이날 상오 8시가 조금 지나 도쿄 지하철 히비야(일비곡)선의 쓰키지(축지)역,지요다(천대전)선의 가스미가세키(하관)역 등 15개 역과 전동차안에 청산가리보다 5백배나 독성이 강한 사린가스가 흘러나와 출근길 사람들이 쓰러지고 병원으로 옮겨지는 대소동이 벌어졌다. 목격자들은 갑자기 심한 냄새가 전동차안에 퍼지면서 호흡이 곤란해지고 눈이 캄캄해 졌으며 이어 여기저기서 승객들이 졸도하는 사태가 잇따라 일어났다고 말했다. 사건발생 직후 현장조사를 실시한 도쿄 소방당국은 전동차안에서 사린을 담은 상자를 발견했으며 마스크를 쓴 1백70∼1백75㎝의 40대 남자가 이 상자를 전동차 바닥에 놓는 것을 보았다는 승객들의 진술에 따라 경찰은 이 용의자 등 범인을 추적하고 있다. 일본경찰은 이날 10여개의 전철역에 동시에 독가스가 살포됨에 따라 이사건을 「조직적인 살인사건」으로 파악하고 3백여명의 전담요원을 투입한 수사본부를 설치,적극적인 수사에 나섰다. 가메이 운수상은 이 사건과 관련,『단속범행이 아니다. 심각하다』고 말했다. 당국은 사건직후 히비야선을 비롯, 마루노우치선,지요다선 등 3개 지하철의 운행을 잠정 중단 시켰으며 자위대의 화학대 등은 독가스 제거작업을 했다. 한편 한국인 사망자는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 외부인 청부살해 가능성 높다/학원이사장 피살 수사방향

    ◎“채취 3개지문 가족것 아니다” 판명/부검결과 “단한차례 급소 찔러 절명” 금용학원이사장 김형진씨 피살사건을 수사중인 경찰은 당초 내부자의 원한 또는 재산관련 범행에서 사건발생 나흘째가 되면서 외부자의 청부살인 가능성으로 수사 방향을 확대,다각도로 수사를 하고있다. 이는 이번 사건의 의문점이 해결되지 않아 경찰 수사가 혼선을 빚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큰 의문점은 범인이 건물에 잠입한 시간과 도주경로.경찰도 범인이 낮시간에 사무실손님을 가장해 경비원의 눈을 피해 미리 빌딩옥탑에 잠입한뒤 안방옆 욕실창문을 뜯고 침입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보고 있다.그러나 불과 10여분이란 짧은 범행시간동안 외부로 통하는 유일한 출입구인 1층출입문을 경비원을 비롯해 사건발생당시 근무하고 있던 5층 S디자인회사직원들의 눈에 띄지 않고 빠져나갔다는 점은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내부인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의문점은 범인이 흘린 것으로 보이는 안방욕실창틀에서 아들 성복씨방의 창틀까지 바깥쪽 베란다에떨어져 있는 6∼7방울의 핏자국. 아들 성복씨는 마루의 핏자국은 사건발생직후 어머니가 아버지의 상처를 타월로 감싸는 것을 보고 자기방으로 가서 이불을 갖고와 지혈시키는 과정에서 떨어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하지만 바깥쪽에서 자신의 방 창틀까지 떨어진 핏자국과 자신의 방 벽지와 커튼에 튄 핏방울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15일 사건을 접수한 서울 성동경찰서는 재산관리를 둘러싼 상속을 노린 치밀한 준비에 의한 범행,원한관계에 의한 내부자의 소행등으로보고 수사에 착수했다.경찰은 15일 안방욕실창문틀,아들방 창문틀,5층에서 6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쇠창살문등에서 5개의 지문을 발견하고 숨진 김씨의 손톱에서 혈흔을 찾아내 수사는 급진전할 것으로 기대했다.그러나 16일 지문감식결과 5개의 지문중 3개는 가족들의 것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고 2개는 희미하게 찍혀 지문감식 자체에 실패하고 별다른 단서를 찾지 못해 일단 전문청부살인업자의 소행으로 보고 수사를 강화하고 있다. 안방욕실창문틀,아들방 창문틀,5층에서 6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쇠창살문등에서 채취한 5개의 지문 감식결과,가족들의 것이 아닌것으로 밝혀짐에 따라 외부인이 침입했을 가능성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16일 사체부검결과 범인은 김씨의 오른쪽 목부분 급소를 예리한 흉기로 단 한차례만 찔러 절명케한 것으로 드러났는데 경찰 수사관계자들은 전문 청부살인업자의 소행이 아닌 일반인의 우발적인 살인일 경우 보통 여러군데의 찌른 상처를 남긴다고 말한다.
  • 일 자민­사회 방북 싸고 갈등/북­일 물밑 접촉 안팎

    ◎자민/대표단 파견시기·단장선정 주도/사회/“초청장 안와… 성급하다” 비판 일본 여당대표단의 방북문제를 놓고 자민당과 사회당간에 미묘한 갈등이 흐르고 있다. 여당대표단의 방북은 지난해 시도된 바 있었다.그러나 90년 가네마루의원과 다나베의원이 북한을 방문해 북한 노동당·자민당·사회당 3당공동선언으로 전후보상을 인정한 것과 관련,자민당이 이를 백지화하려 하자 북한이 반발하면서 대표단 파견이 무산됐었다. 자민당은 그러나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가 발족된 만큼 북한과 대화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면서 9일부터 갑자기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지난 2월 호리 고스케(보리경보)전문부상을 싱가포르에 보내 북한측과 접촉을 갖고 이 문제를 협의하는 등 그동안 북한과의 물밑 접촉을 전개해 온 바 있는 자민당은 KEDO발족을 기회로 10일에는 대표단 단장에 와타나베 미치오전외상(자민당)이 적절하다고 인선까지 아퀴를 짓고는 이를 사회당과 신당 사키가케에 제시,추인을 받아내는 등 급박하게 몰아가고 있다. 방북단의 파견시기도9일에는 「이달중」이었던 것이 10일 상오에는 「다음주중」으로,10일 하오에는 「16일」로 급속히 구체화되고 있다. 하지만 이번 대표단 파견은 지난해와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지난해에는 사회당이 창구였으나 이번에는 자민당으로 바뀐 것이다.모리간사장은 『북한이 자민당을 통해 이 문제를 협의해 왔다』고 말하고 있다.또 북한이 자민당을 통해 식량도 지원 요청해 놓고 있다는 것이다.그래선지 자민당은 『북한이 3당공동성명을 의제로 꺼내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사회당의 구보서기장이 단장을 맡도록 돼 있었는데도 자민당은 이번에 대장상과 외상의 경험이 있는 중량급 정치인 와타나베의원이 적절하다고 정하고 이를 사회당에 통보,동의를 받아내는 형식을 밟고 있다.주도권을 단단히 틀어 쥐려는 자세다. 떨떠름한 것은 사회당.지난해 자민당때문에 파견이 무산됐는데 갑자기 주도권은 물론 대표까지 차지하려하는데 대해 속이 편치 않다.그동안의 물밑접촉도 자민당은 전혀 사회당에 알려주지 않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기도 하다.사회당의 한 간부는 『북한에서 초청장도 오지 않았는데…』라면서 자민당이 서둘고 있다고 불평하기도 한다. 구보서기장은 『3당공동선언은 당의 대표들이 합의한만큼 존중해야 한다』면서 자민당의 자세를 비판하고 있다. 단장을 맡게 될 가능성이 큰 와타나베의원에 대해서는 북한이 호감을 갖고 있지 않다는 말도 있지만 정작 와타나베의원은 『3당선언을 받아들이라고 하면 가지 않겠다』고 배짱을 부리고 있고,북한이 사회당보다는 영향력이 큰 자민당 정치인을 선호하고 있다는 말도 흘러나오고 있다. 3당선언에 대한 양당의 입장차와 주도권을 둘러싼 갈등때문에 대표단이 방북하더라도 얼마나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 의문시하는 목소리가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 런던과 서울(외언내언)

    시가지 조성을 연구하는 학자나 담당 실무자들은 런던시를 표본으로 삼는 때가 많다. 여러가지 대도시 문제를 제일 먼저 경험하고 그 대책에 대해서도 가장 많은 노하우를 가지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요즘 대도시 기성시가지 정비에서도 런던 도심부 계획은 여러나라에 좋은 참고서가 되고 있다. 런던 도심부에는 「역사적 건축학적 특수지역의 보전 및 고층빌딩건설 억제 시책」이라는 것이 적용되고 있다.도심부 신규개발은 될수있는 대로 억제하고 불가피하게 개발하는 경우에도 역사적 건축학적으로 특성있는 건축물주변은 건축물과의 조화,스카이라인 보호에 신경을 쓴다. 정부청사나 광장 공원 궁성 문화재 주변은 고층건물이 들어서서는 안될 1급지역으로 지정돼 있다.「이 지역에는 예외란 있을수 없다」고 못박고 있다.그 다음은 산마루등 전망점과 템스강변의 특정지역 건축학적 보전지역등을 「고층건물이 들어서면 충격이 큰 지역」으로 지정하고 있다.이곳에 있는 기존건물을 헐고 새집을 지으려면 자치구 평의회까지 거치는 까다롭고 지루한 심의를거쳐야 한다. 서울은 6세기동안 수도로 이어온 곳이다.지구상에는 도시연령 6백년이상수도가 10여개 된다지만 서울같이 수도로만 이어온 곳은 흔치 않다.문화재도 많고 역사명소 역사인물 관련지역도 많은 곳이다.그중에서도 사대문안 도심 궁궐은 1급 역사보전공간이다. 미국대사관이 덕수궁옆 구경기여고부지를 되팔고 송현동 숙소에 대사관을 신축키로 하면서 용도변경과 고도제한 해제를 요구하고 있다 한다.러시아측도 대사관 부지로 내정된 옛배재고터에 대한 5층고도제한 해제를 희망했다. 모두들 덕수궁과 경복궁 인근 지역이다.일대 주민들도 모두 재산권 제한을 받고 있는 곳이다.서울 도시계획법에 없는 조치를 해달라는 것이다.서울시는 당연히 「안된다」고 말해야 한다.
  • 서울대 서당 바람/인격도야 주안점… 도덕경 등 동양고전 강의

    ◎오늘 문여는 천인대동서당 1백여명 몰려 첨단지성을 추구하는 서울대에 전래의 「서당」붐이 일고 있다. 동양고전을 원서로 강의하는 2곳의 「서당」이 수강생을 모집,고전의 가르침을 통한 인격도야와 한문지식을 습득하려는 학생이 대거 몰려들고 있다. 9일 문을 여는 「천인대동서당」에는 8일 현재 1백여명이 등록을 마쳐 학생들의 높은 관심도를 보여줬다. 훈장은 서울대 법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김지수(36)씨. 대만유학시절 동양고전을 통해 커다란 깨달음을 얻었다는 그는 91년 「자기를 바르게 하여 남을 교화하고 타인과 함께 선을 행하여 천하를 두루 착하게 만든다」는 취지로 서당을 열었다. 그동안 4차례 논어강의를 마쳤으며 이번 학기부터 노자의 「도덕경」을 가르친다. 수업은 문구의 뜻을 풀이해주고 학생들이 토론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지만 무엇보다 인격도야에 주안점이 두어진다.회초리만 없을 뿐 예전 훈장어른의 엄격함을 그대로 보여준다.학습태도나 평소 품행이 나쁘면 남이 보는 앞에 일으켜 세워놓고 얼굴이 빨개지도록 호통을치는 게 원칙이다. 수강생에게는 호도 하나씩 지어준다.지난해 논어를 배운 뒤 함진(티끌을 머금다)이라는 호를 받은 박근정(20·법학2)양은 『두루두루 많은 사람을 겪으며 고통을 나누어야 한다는 의미로 생각하며 작은 실천이나마 힘쓰겠다』고 말했다. 인문대학 교수를 주축으로 다음달 1일 문을 여는 또하나의 「자하서당」에도 하루 10여통의 문의전화가 쇄도하고 있다. 수강대상을 학부 2학년생으로 제한하고 있으나 대학원생의 신청도 빗발칠 정도로 인기 있다. 이 서당은 강의실을 마루식으로 꾸민 뒤 학생을 앉혀 「강」(문구를 암송하는 전통적인 학습방식)을 시키는 등 옛 서당의 풍취도 재현할 방침이다.
  • 카자흐 자치주 이리계곡(서역 문화기행:12·끝)

    ◎천산 산맥자락 초원… 기마민족의 터전/18세기 들어 영·러 등 열강 각축… 중,54년 자치주 선언/아편전쟁 승리 이끈 임칙서 장군 동상 혜원성에 남아 밤낮을 부리나케 보름을 달리면서 겨우 서역의 중로와 남로를 말 타고 꽃 보듯 하였다.이제 남은 것은 사막에 논을 일구고 초원을 비단으로 가꾼,그래서 서역의 낙원으로 불리는 북로를 결코 빠뜨릴 수 없었다. 우루무치에서 이닝(이령)까지 공로 한시간은 정말 미의 여로였다.중로나 남로가 백색 아니면 적갈색의 질식적인 영토였다면 북로는 적갈색이 마르고 청록색이 살 찌는 낙원이었다.멀리 아이비호와 사이리무(새리목)호의 쪽빛 물결이 굽어 보이고 카자흐의 팔카스호로 흘러가는 이리강의 굽이치는 맥류조차 역력히 보인다.그보다는 하얀 만년설의 천산산맥과 파란 초원과 바둑판인양 구획 정리된 논밭들을 보면서 그 장관과 풍요를 읽고 있을 때 저 땅에 흥망과 공방이 오갔던 역사,그 소용돌이가 들리는 듯했다. ○꼬마들도 말타고 사냥 여기는 기원전 6세기경부터 흑해로부터 동점한 스키타이들이 유목하면서 행국을 형성하던 곳.기마민족의 마당은 초원이었었다.따라서 초원위에서 꼬마조차 말을 타고 새를 쏜다는 흉노와 한무제때부터 동맹을 시도했던 오손과의 밀고 당기던 싸움이 끊이지 않았던 땅이다.그래서 눈물겨운 이야기도 있었다. 기원전 110년부터 기원전 105년 사이의 일이었다.한무제의 사신 장건이 오손의 곤막왕을 찾아 명마 천필을 요구하자 오손왕은 한왕조의 공주를 소망하였다.오손과의 동맹으로 흉노를 치고 명마 천필을 위해 이를 응낙하였다.무제 조카의 딸인 세군공주를 구천리밖 오손에게 보냈다.공주가 왕의 우부인이 되었지만 멀지 않아 곤막조차 노환으로 죽었다.오손의 풍습대로 곤막의 손자에게 다시 시집을 가서 딸 하나를 두었다지만 고향을 그리다가 끝내 백조가 되어 환고향하겠다는 슬픈 시를 남겼었다. 아름다운 이리계곡에 싸움은 쉬지 않았다.18세기에 들면서 이슬람교도의 반란으로 야기된 서터키스탄의 무장 침입을 비롯,영국·러시아등 열강의 침노로 영일이 없었다.19 54년 중국 중앙정부가 이닝에다 「이리지역카자흐자치주」를 선포하면서 안정을 되찾고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니까 이리강 유역은 뎅구리(카자흐말로 하늘이란 뜻)신앙에 뿌리 깊은 기마민족과 세계최대의 농업민족인 한족과 교전으로 얼룩진 「화성」이요,「백양성」이다. 「사기」,「대원전」에 따르면 오손은 흉노보다 작은 행국으로 준갈분지의 남역과 천산북로를 무대로한 천산유목민이었다.그들은 늘 몽골 고원으로부터 침노하는 흉노나 서쪽으로부터 밀려오는 대월씨,대원등과 쫓고 쫓기면서 혼혈을 거듭하였다.그래서 옛날 오손국을 점거한 카자흐사람이 혈맥상 오손의 후예일 가능성도 없지않지만 유목적인 생활모형만은 오손의 계승자임이 틀림 없다. 이닝지역의 인구는 비록 카자흐·위구르·한의 삼분천하였지만 카자흐의 자치주인 만큼 카자흐의 색깔이 진했다.거기서 손을 뻗치면 옛날 소련연방이었던 카자흐공화국과 맞닿는 국경이다.텁수룩한 수염에 뾰죽하면서도 결코 높지 않은 코.형상은 사뭇 위구르사람을 닮았지만 살갗은 흉노쪽,역시 알타이가 가까워선지 모르겠다. ○위구르사람 얼굴 닮아그러한 카자흐사람을 보면 옛날 한나라때부터 이곳에 죽치고 살았던 터주들임에도 그들이 뽐내는 천마를 기르고 천산 산마루나 초원을 질풍처럼 달리면서 함성을 지르는 기마술 말고 그들 스스로의 역사는 쓸쓸하리만큼 한산하다. 1978년 북경의 고고학자들이 이닝의 서쪽 고을 신웬(신원)에서 오손의 무덤을 발굴했다는 소식을 들은 바 있었다.필자는 그때 의아했었다.유목민에게는 성토해서 봉분을 만드는 습속이 없어서였다.오손족은 그만 두고 천하를 휩쓸었던 칭기즈칸의 무덤조차 알 길이 없지 않았던가? 그들은 시신을 풀밭에 묻고 그 위로 말이 달리고 새풀이 돋아서 아무렇지도 않게 풀밭이 되었었다. 그럼에도 차푸차알(찰포사이)에 있는 시보(석백)족 자치현에 오손 고분이 있다는 말을 듣곤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그 고분이 있는 진첸(김천)읍은 이닝의 동남쪽 4.8㎞지점.진쳰읍 이라치뉴루(의랍재오록)마을엔 크고 작은 고분 2기가 있었다.그들은 모두 만두모양의 대머리 무덤,그 위에는 풀 한포기 없는 황토의 언덕이었다. 진쳰 씨앗공장뒤편에 있는큰 무덤은 그 높이가 10m에 직경이 25m쯤,거기서 서쪽으로 4백m지점인 시보중학교 교문옆에 있는 작은 무덤은 큰 무덤의 3분의 1 크기였는데 동네 꼬마들의 놀이터임은 마찬가지였다.다만 아무 곳에도 2천년전의 오손 무덤임을 증명하는 기록은 없었다.1978년,신웬고분의 발굴조사에서 이미 밝혀진대로 비록 2천년의 연조는 밝혀졌지만 그 속에서 고작 유골과 약간의 목기만 출토되었다는 사실로도 알 수 있다. 그렇게 다만 흙 둥주리뿐인 오손 고분을 답사하고 돌아오면서 결코 허행이 아니었다는 생각은 차푸차알에 들러 시보족들의 마음을 참관하고서였다.그곳은 이닝 남쪽 20㎞지점,서역에서는 유일하게 시보족이 집단 거주하는 촌락이었다.그 마을 이름이 시보말로 「곡식의 창고」라는 뜻,그만큼 풍요로운 땅이었다. 필자가 서역을 떠돈지 스무날,이제 귀로에 올랐는데 뜻밖에도 타관서 동향을 만난 설렘이 있었다.글세,차푸차알을 거닐다가 거리에서 만난 얼굴들은 몹시 낯이 익었었다.작은 키에 둥글 넙죽한 얼굴,낮은 코에 가는 눈.그뿐이랴? 그들의 민속촌에서는 울긋불긋한 과녁에 활쏘기와 장사들의 씨름판이 벌어지고 있었다.거기다 서너근이 될법한 무와 빈대떡 비슷한 밀떡을 부침질하는 소리가 요란했다. ○2년여 남짓 귀향살이 그들은 벌써 백여년전,빈발하는 청로전쟁에 만주로부터 파견된 청군의 후예들이었다.그러니까 우리 민족과 가장 사촌민족인 만주족이었는데 그곳은 중국에서 유일하게 만주어 보존 구역이었다. 그러나 풍운의 현대사가 남아 있는 곳은 역시 중·카국경옆 훠청현에 있는 후이웬(혜원)읍이었다.후이웬은 이닝 북서 40㎞지점.거기는 청대 이리장군(총통이 등진장군의 약칭)의 주둔지였다. 청나라는 1757년,준갈분지의 반란을 평정하여 서역을 재통일하고,1762년,거기다 「이리장군」을 설치하여 신강지역 최고의 행정및 국방의 수장으로 천산산맥의 남북로는 물론 팔카스호 동쪽지구를 총관장했었다.1764년부터 3년에 걸쳐 이곳에다 둘레 7㎞의 성을 쌓았지만 1871년의 러시아침략으로 무너졌던 것을 18 82년에 오늘의 후이웬성으로 복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후이웬성이 역사의 무게를 지니게 된 것은 2백30년에 달한 연조 그 자체보다는 그를 다스리던 사람과 역사와 예술을 한 곳에 응집 표현한 몇채의 건물이 있다.그 사람은 임칙서(1785∼ 1850년)요,그 건물이란 후이웬루(혜원루)와 장군부·장군정이다. 임칙서는 애국의 장군이었다.광동광서의 총독으로 금연운동을 펼치고 아편전쟁을 일으킨 영국군대를 물리쳐 공을 세웠으면서도 면직 당한 채,1842년12월부터 이리장군으로 전임,1845년1월 사면 받기까지 2년남짓 귀양살이하면서도 농지를 확장하고 농산을 장려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그의 자취는 사방에 있었다.후이엔성안에 보존되고 있는 당시 이리장군의 거소요 지휘본부였던 「장군부」와 「장군정」이 중국 남방의 소박한 건축양식과 정원의 풍모를 보여주고 있는가하면 후이웬성 북쪽 5백m쯤엔 임씨가 손수 심었다는 청강수 네그루가 「임공수」란 이름으로 빨간 벽돌담안에 모셔 있었다.거기에 그치지 않았다.이닝시 서북쪽 교외의 경제개발구역에는 이닝시문화국에서 1994년8월에 완공한 「임칙서기념관」이 문을 열었는데 그안에는 임씨의 동상과 사적전시실이 꾸며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리지역을 상징하는 마크는 뭐니뭐니해도 후이웬성밖에 북경의 고루를 본 떠서 1897년에 축조한 「후이웬루」다.벽돌 축대위에 날듯한 처마와 울긋불긋한 기둥의 3층 누각은 어쩌면 중국 서북단을 지키고 카자흐 자치주에 세워진 가장 한족적인 문화의 축도로 서 있다.
  • 록히드 사건/2명에 유죄/최고재판소 선고

    【도쿄=강석진 특파원】 일본 최고재판소는 22일 「록히드 사건 마루베니(환홍)루트」의 고 다나카 가쿠에이(전중각영)전총리의 5억엔 증회(증회)죄 등과 관련한 외환관리법 위반 상고심 판결에서 전 총리의 비서였던 에노모토 도시오(가본민부)피고와 전 마루베니 회장 히야마 히로시(회산광)피고의 상고를 기각,히야마 피고에게 징역 2년6월,에노모토 피고에 징역 1년,집행 유예 3년을 각각 선고했다.
  • 언기국의 고성 사십리성(서역 문화기행:11)

    ◎비바람에 크게 훼손… 한·수 유물 출토/당대부터 관개시설 발달… 보리·배·사과 등 풍성/인근엔 거대한 담수호… 연간 4백여t 고기잡아 서역에 오직 하나뿐인 지방철도 남강선은 우루무치에서 동남쪽으로 천산산맥의 북록을 넘어 쿨라까지 4백70㎞.쿨라는 그 남강선의 종점이며,서역의 몸통격인 타림(탑리목)분지의 동북단에 위치한 시발점이기도 하다. 그곳은 서한때 서역에 열립했던 36국중의 하나인 거리의 도읍이었지만 동한때엔 언기나라에 합병되었던 곳이다.한·당의 서역도호부였던 오루(오뢰)·윤대·쿠차 등이 모두 쿨라의 남쪽에 위치했다. 언기는 쿨라의 서북 50㎞밖에 있었다.오늘은 비록 쿨라가 이 지역 몽골자치주의 도읍으로 그 정치적인 위상이 높지만 청나라 이전까지만도 언기의 지위가 높았다.따라서 한나라때는 「언기」,위진때는 「오이」,당나라때는 「아기니(아기니)」,송원대에는 몽골사람과 위구르족이 정착하면서 「카라사알(객라사이)」로 불리었던 언기에는 역사의 유적도 많았다.그것은 한나라때 언기국의 세가 거리국의 그것보다 우월했음을 말해주었다. 현장법사가 쓴 「대당서역기」에는 언기를 국방에 유리한 요새지요,관개가 발달하여 보리 기장 대추 포도 배 사과가 풍성한 농산지요,가람이 10여곳에 승려가 삼천을 넘는 불교의 본산이라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오늘의 언기읍은 이슬람교를 믿는 회족의 취락일뿐 아무런 역사 유적이 없었다.가장 상징적인 유적은 언기현에서 중국 최대의 내륙 담수호인 보스텅(박사등)호로 가는 길옆의 「사십리성」이었다. ○개원통보가 당대확인 그것은 필자가 서역에서 보았던 많은 고성중에선 가장 규모가 작고 풍화와 손괴의 정도가 심한 데다 출토된 유물조차 적어서 그 연대를 단정하기에 어렵게 했다.필자는 정문을 통해 고성에서 불룩한 언덕으로 올랐다.둘레의 길이가 3㎞ 남짓한 정방형의 고성,성안에는 비록 그 형체를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부서졌지만 판축된 토벽의 두께와 높이로 보아 장대한 요새는 아닐지언정 어느 관아의 건축이나 창고등의 용처로 보였다. 19 63년,「사십리성」의 탐사 발굴때 출토되었던 도기 동경 철검 동전 등으로 이 땅이 한대로부터 북조를 거쳐 수당에 이르기까지 그 역사와 생활이 묻혔던 현장임을 믿게 되었다.특히 그속에는 당대의 주전인 「개원통보」가 그러한 확신을 주기도 했었다. 청대 서송이 쓴 「서역수도기」는 이곳을 한대에 존립했던 언기국의 도읍지인 「원거」성으로 추정한 바 있었다. 그 「원거」는 둥근 도랑이란 뜻,지금 황막한 사막속에 당치도 않은 말로 보이지만 지금도 사십리성의 둘레를 살피면 지형이 움푹한 데다 멀지 않은 곳에 관개의 수로가 출렁거려 어쩌면 당시의 호성하였을지도 모른다.더구나 여기서 불과 20리밖 남쪽엔 58㎞의 길이에 28㎞ 너비의 호수,그래서 「서해」로 불리는 보스텅호가 있었다. 보스텅호 선착장.우거진 갈대숲에 서서 함박눈처럼 분분한 갈매기를 보면 낙동강 하구의 을숙도쯤 서 있노라는 착각을 오래 오래 씻을 수 없었다. 연간 4백여t의 어획고를 자랑하는 선창.거기엔 갈대의 늪을 이어주는 판교도 여러 군데 있었다. 옳지! 여기서 정동으로 4백㎞를 훌쩍 날면 거기엔 또 하나의 담수호 로프·노오르(나포박)늪이 있다.거기는 비록 중국이 첨단무기를 시험하는 척박한 땅이지만 그 언저리엔 지금부터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 330년까지 4백년동안 선선의 왕조가 떵떵거리고 영화를 누리다가 어느 날 갑자기 몰아닥친 풍사에 덮인 채 춘몽처럼 사라진 누란의 땅이 아닌가? 필자가 연민하는 그 누란의 유적지,그 길은 너무 험했다.다만 가장 가까운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서방기선 통천하 기록 보스텅호에서 쿨라로 돌아가는 황혼,다시 언기현을 관통,언기산을 굽어 돌 때 휘몰아치는 가을 바람에 뽀얗게 모래가 일면서 시야가 흐렸다.이 때 10세기 말 송나라 시인이었던 심료의 시 「언기행」이 생각났다.세월은 천번이나 바뀌었어도 이 계절 이 고장을 그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언기산두모연자. 오량성단행인지. 평사풍급권한봉, 천사궁로월여수」(후략) (언기산 산마루엔 자줏빛 저녁연기, 소·염소 움막 들고 인기척도 끊겼네. 사막에 모진 바람,쑥풀을 날리고, 하늘은 천막이요 달빛은 물이네) 언기산 너머로 서울의 안양천만한 강이 흘렀다.이름하여「개도하」.비록 천리를 굽이치는 장강은 아닐지라도 수십m의 강폭에 훤칠한 다리.그것은 공작강(공작하)에 합류되어 로프·노오르로 유입하는 강줄기였다.이를 두고 사람들은 「서유기」에 나오는 「통천하」라고 했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 명작을 남긴 현장으로 「철문관」만한 곳이 없다.당대의 변새시인 참삼(음참·714 ∼ 770)은 여기서 「철문관누각에 쓰노라(제철문관루)」와 「철문관 서관에 자면서(숙철문관서관)」등 두편의 명시를 남겼다. ○3층누각 철문관 우뚝 철문관이란 언기현과 쿨라를 연결 짓는 협곡인 바,공작강 상류에 있으면서 망망 수천리의 타림분지로 들어가는 목이다.그래서 「철관곡」으로 불리는 험관이다.무엇보다 참삼의 「철문관누각에 쓰노라」가 12 00년전의 당시를 생생하게 투시해서 철문관 시로는 아무도 그를 따르지 못한다. 「철관천서애,극목소행객. 관문일소이,종일대석벽. 교과천인위,노반양애착. 시등서루망,일망두욕백」 (철관 서쪽으로 아득한 하늘/눈을 휘둥거려도 사람 그림자 뜸하네. 관문에 문지기,해 지도록돌벼랑 마주보네. 천길 낭떠러지에 놓인 다리와 두 벼랑 사이에 가물거리는 길. 어렵사리 그 서루에 올라,휘­둘러보면 머리조차 희겠네) 철문관은 쿨라시 북쪽 10㎞지점.쿨라시의 오아시스를 벗어나자 키질천불동이나 자오후리사원유적을 찾았을 때나 마찬가지의 숨막히는 적갈색 암벽의 산들.협곡을 돌고 돌아 차가 멈춘 곳엔 웬걸 즐비한 청사들,한눈에 무슨 관아의 건물 같았다.공작강 수력발전소요 공작강 댐의 관리 사무소였다.거기서 왼쪽으로 냇물이 흐르고 그 냇물위쪽으로 3층 누각이 보였다.그게 「철문관」이란다. 철문관뒤로 정말 천길 낭떠러지가 공작강을 중심으로 양쪽에 깎아세운듯 했다.그 동쪽이 쿠루크산(고로극산),서쪽은 허라산(하랍산).지금은 그 협곡을 잇는 다리와 낭떠러지에 가물거리는 길은 물론 온 종일 석벽을 마주 보던 문지기를 만날 까닭은 더구나 없었다. 필자는 중국문학에 출현하는 관문중 최서단의 철관문과 거리의 도읍이었던 쿨라를 떠나면서 뜻을 이루지 못한 사람인양 아쉬웠다.그것은 쿨라나 언기가 누란의 인근이었고,필자에게도 당나라의 유명한 변새시인 왕창령(692∼757)이 그의 「종군행」에서 「누란을 공략하지 못하면 돌아가지 않으리(불파루란종불환)」하면서 비장하게 그 개선을 맹세했던 마음이 있었기에 말이다.
  • 뮤지컬(브로드웨이 “새바람”:5)

    ◎「팬태스틱스」 35년째 공연 “세계최장”/작년 내한 「캐츠」도 13년째 막올려… 인기는 여전/감미로운 선율·치밀한 구성에 관객 갈채/서쪽 소호·그리니치 빌리지 지역 소극장 몰려/연기·노래·춤 어우러진 총체적 공연예술 워싱턴 스퀘어(광장)를 중심으로 한 그리니치 빌리지의 겨울 낮 동안은 매서운 추위와 수북한 눈덩이 속에서 모든 것이 고요하기만 하다.그러나 날이 저물면 밤의 열기로 거리는 뜨겁게 달아오른다. 남쪽으로 커낼 스트리트에서 북쪽으로 14 스트리트에까지 이르는 브로드웨이 서쪽의 소호와 그리니치 빌리지는 수많은 화랑과 소극장·라이브 하우스들이 한데 어우러져 독특한 예술의 거리를 이룬다. ○예술기행의 필수 코스 브로드웨이의 예술은 뮤지컬로 대표된다.워싱턴 스퀘어 아래쪽 설리번 스트리트의 플레이하우스에서 공연되고 있는 뮤지컬 「팬태스틱스」는 브로드웨이 공연예술 기행의 필수 입문코스다. 『9월을 기억해 보세요,생명이 서서히 익어가는/9월을 기억해 보세요,풀은 파랗고 곡식은 누렇게 변해가는/9월을 기억해 보세요,당신이 부드럽고 가냘프던 때를/기억해 보세요,기억이 나거들랑 그대로 따르세요…/12월이 깊어지면 기억하기 좋을 거예요,상처가 없는 가슴은 공허 뿐인 것을/12월이 깊어지면 기억하기 좋을 거예요,우리를 익게 한 9월의 열기를/12월이 깊어지면 우리의 가슴은 기억해야 해요,그리고 따라야 해요』 이 뮤지컬의 극중 해설자인 로버트 스미스가 고음으로 부르는 주제곡 「기억해 보세요」(Try to Remember)의 감미로운 선율은 눈덮인 브로드웨이의 겨울에 한송이 눈꽃으로 피어 있다. 그리니치 빌리지 한 모퉁이에서 19 60년 공연을 시작하여 세계 최장수 뮤지컬의 명성을 얻고 있는 이 극은 극장이 위치한 설리번 스트리트 도로표지판 위에 팬태스틱스 레인(골목)이라는 표지판을 하나 더 달게 할 정도로 기념비적인 존재로 남아 있다. 시골의 한 마을에 사는 16살의 소녀와 20살 청년의 사랑이야기인 단순한 내용에 등장인물 8명으로 오프 브로드웨이(브로드웨이 외각을 뜻하며 이곳의 소극장들은 브로드웨이 극장들보다는 규모가 작고 실험적인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경향이 있다)의 작은 극장에서 시작한 평범한 뮤지컬임에도 한 장소에서 한 세대를 뛰어넘어 관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설리번 스트리트 플레이하우스는 10m도 채안되는 폭에 길이 50여m의 작은 극장.관람석은 둥그렇게 무대가 자리잡은 중앙부분에는 세줄 밖에 놓일 수 없고 양쪽 옆으로 놓인 7∼8줄을 포함,모두 1백52석에 불과하다.브로드웨이 대형극장의 오케스트라 역할은 무대 뒤와 옆에 놓인 피아노와 하프 한대가 맡는다. 세트는 네개의 쇠기둥이 달린 마루판과 소품을 꺼내기도 하고 등장인물이 드나들기도 하는 커다란 검은 상자 두개와 의자 하나가 고작이다.좁은 무대에서의 공간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해 이 극에는 검은 옷에 마술사 모자를 쓴 무언배우(Mute)가 등장,유연한 몸짓으로 담장이 되기도,나무가 되기도 하며 눈도 뿌리고 배우들에게 소품을 공급해주는 등 바쁘게 오간다. 반대하는 척 하면서도 속으로는 아들과 딸의 결합을 원하는 양측 아버지들이 연극을 꾸며 극적인 해피 엔딩의 결합을 가져오게 하는 이 극에는 브로드웨이 뮤지컬 「캐루젤」과 「캐츠」의 주연으로 활동한 바 있는 소녀역의 리자 메이어와 「오클라호마」,「쇼보트」 등에서 명성을 날린 해설자역의 로버트 스미스 등으로부터 오프 브로드웨이 무대의 신인인 남자역의 조시 밀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경력의 배우들이 등장하고 있다. ○주제곡 40여명이 불러 이 극은 또 35년동안 공연해 오며 온갖 기록을 보유한 브로드웨이의 산 역사로 남아 있다.70여개국 1천여회의 외국 공연을 포함,모두 1만4천여회를 공연했으며 현재 브로드웨이에서 활동하는 유명배우들 대부분이 이 극을 거쳐갔다.소년의 아버지 허클비로 나오는 65세의 고든 존스는 브로드웨이 최고령 배우이며 늙은 배우 헨리역의 브리안 헐은 한 극에서 14년 연속출연이라는 진기록을 지니고 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비롯한 9명의 역대 미국대통령이 관람한 기록도 갖고 있는 이 극은 특히 주제곡 「기억해 보세요」와 「곧 비가 내릴 거야」(Soon It’s Gonna Rain)를 에드 에임스,앤디 윌리엄스 등 40여명의 가수들이 레코드로 취입,공전의 히트를 시킨 기록도 갖고 있다.이 극장의 2층은 조그만 박물관으로 각종 사진자료들과 4달러에서 현재의 33달러에 이르기까지의 입장료 변천사 등이 진열돼 있다. 61년부터 이 극에 출연,뮤트역과 인디언역 등을 거쳐 현재 무대감독을 맡고 있는 제임스 쿡씨(58)는 『이 극의 제작자인 탐 존스와 하베이 슈미트는 50년초 서로 시기를 달리해 한국전에 참전하면서 편지를 통해 대본과 음악을 함께 만들었기 때문에 전쟁에의 공포가 없는 인간 본연의 순수한 사랑을 주제로 하고 있다』면서 『젊은층과 노년층,미국인과 외국인,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쉬운 내용과 제한된 상황에서의 치밀한 무대 구성이 장수의 비결이라면 비결』이라고 설명했다.그는 또 『일본에는 세차례나 가서 공연했는데 한국은 막상 한차례도 갈 기회를 갖지 못해 아쉽다』고 덧붙였다. 「팬태스틱스」 다음으로 현재 공연중인 작품 가운데 브로드웨이와 오프 브로드웨이를 통틀어 장수의 기록을 갖고 있는 작품은 「캐츠」다.지난해 한국에서도 공연된 이 작품은 1982년의 첫공연 이래 13년동안 브로드웨이 50 스트리트의 윈터 가든 극장에서 공연되고 있으며 「지금 그리고 영원히」라는 캐치프레이즈처럼 아직도 그 인기가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지난해 9월29일 5천회 공연기념으로 맨해튼의 국민학생 1천명을 초청해 기념공연을 가진 「캐츠」는 지금까지 브로드웨이 최장기 공연 기록을 갖고 있는 슈버트 극장의 「코러스라인」(6천1백37회)과 에디슨 극장의 「오! 캘커타」(5천9백59회)의 기록을 깨는 것이 시간문제로 돼있다. ○일정한 대사없이 진행 뮤지컬의 황제로 일컬어지는 로버트 웨버의 대표적인 영국 뮤지컬인 「캐츠」는 시 「황무지」로 유명한 티 에스 엘리엇의 고양이에 대한 단편들을 모아 각색한 것이다.관람석을 포함한 무대 전체를 타이어 등이 쌓이고 지저분한 쓰레기가 널려 있는 폐차장으로 꾸민 무대장치에서 파격미가 느껴진다.일정한 대사도 없고 20여곡의 노래로만 진행된다. 제각기 독특한 의상을 차려 입은 의인화된 고양이들이 매력적인 춤과 노래로 재미 있거나 때로는 슬픈 과거를 회상하는 이 뮤지컬에는 하루종일 앉아 있기만 하는 늙은 굼비,신비의 힘이 있는 매캐비티,철도변에 사는 스킴블레생크,바지선을 타고 여행하는 난폭한 그롤티거,매력적인 그리자벨라 등 수많은 고양이들이 등장한다. 무대 벽면이 앞으로 내려와 거대한 배로 변하기도 하고 또 바퀴와 기관·연통 등을 제각기 갖고 나와 기차를 만들기도 하는 등의 다양한 무대변화가 극의 흥미를 더해준다. 특히 그리자벨라가 올라탄 타이어가 로켓처럼 불을 뿜으며 공중으로 치솟아 하늘에서 내려온 계단과 연결돼 그리자벨라가 하늘로 오르는 장면은 다양한 현대 무대예술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리자벨라 고양이로 분한 리즈 콜라웨이가 두차례 간절한 목소리로 부르는 이 뮤지컬의 주제곡 「메모리」는 관객들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하다.바브라 스트라이샌드와 주디 콜린스가 이 노래로 음반을 제작,선풍적인 인기를 불러 일으켰다. 브로드웨이와 오프 브로드웨이의 최장수 뮤지컬의 주제가는 공교롭게도 아름다운 회상을 주제로 하고 있다.그러나 연기와 노래와 춤이 한데 어우러진 총체적 공연예술의 메카 브로드웨이는 끊임없는 변신의 몸부림으로 더욱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 두만강유역 공동 개발/러­일 합작사 설립/호텔건설 등 추진

    【도쿄=강석진특파원】 일본의 식품·목재 관련 중견회사인 도쿄 마루이치사는 두만강유역 개발을 위해 러시아 연해주의 상업항인 자루비나항의 항만기업인 하산상업항사와 합작회사 「극동상업정보센타」를 설립하기로 했다고 일본의 산케이신문이 3일 보도했다. 자본금 10만달러의 극동상업정보센타는 본사를 자루비나항에 두고 이달 안에 러시아정부의 인가를 받는 대로 활동에 들어가게 된다. 자루비나항은 두만강개발계획에 따라 개발이 진행 중인 북한 중국 러시아 3개국의 국경지역의 가운데 위치한 주요 항구로 중국의 길림성과의 철도 건설도 추진되고 있다. 극동상업정보센타는 자루비나항을 국제상업항으로서 정비 확충하기 위한 기획,필요자금의 조달수단,호텔 등 숙박시설의 건설,주변지역 종합개발 등을 추진할 계획이다.
  • 만학도(외언내언)

    고고미술사학자로 유명했던 삼불 김원용교수가 나이 50이 넘어 영국에서 1년동안 유학한뒤 수상집을 펴냈었다.책이름이 「노학생의 향수」.뒤늦은 유학생활의 신산함과 외로움을 진솔하게 담아 화제가 됐었다. 그중에 이런 글이 있다.하숙방에서 책을 보고있는데 난데 없는 개미떼들이 줄을 지어 문틈으로 행진하더란다.무료한 판에 개미군단을 따라 가 봤더니 복도를 지나 어느 문틈으로 사라지더라는 것.마루바닥에 얼굴을 대고 열심히 관찰하고 있는데 벌컥 문이 열리면서 얼굴이 뻘개진 하숙집 여주인이 나타났다.아뿔사! 그건 여주인의 목욕탕이더란 얘기였다. 학문의 「늦깎이」는 정상보다 몇배나 힘들고 어려운 도정을 걸어야한다.그러나 그런 난관을 극복하고 대성한 이들은 많다.우리 여성계의 거목인 이태영여사도 서른다섯에 서울법대를 졸업,38세에 사법고시에 합격했던 만학도.작고한 여류조각가 김정숙도 33살때 조각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대학에 들어갔다.국어학자 일석 이희승도 직장생활하다 44살에 도쿄유학생이 되었다.최근에는 팔순의 시인 미당 서정주의 러시아 유학이 화제가 됐었다. 서울에 주부들만을 대상으로한 주부중·고교가 있다.20대 후반서 60대가 넘은 할머니학생까지 있지만 어찌나 향학열이 높은지 수업시간에 교사들이 쩔쩔 맬 정도라고.「못배운 한」을 풀어보려는 주부들의 열기가 그렇게 뜨거울수 없다고 한다. 지금은 평생교육시대.대학마다 평생대학원이 부설돼 주부나 노인학생들이 몰리고 있다.「성공적인 노후의 삶」「죽음의 준비」등 과정도 있다고 한다.서강대 편입시험에 정년퇴직한 67세와 61세의 「노익장」이 합격을 했다.산전수전 다겪고 손자뻘대학생들과 어울려 학문의 길에 들어선 그 결단과 의지가 놀랍기만 하다. 「배우고 또 수시로 익히면 그 또한 즐겁지 않으랴」(논어)의 경지가 아닐는지 모르겠다.
  • 군내무반에 수류탄 투척/구타불만 사병이… 6명 중상

    지난 18일 새벽 5시45분쯤 강원도 고성군 소재 육군 제22사단(사단장 김일갑소장·육사24기)55연대에서 보초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김용구이병(21)이 상급자들의 구타에 불만을 품고 내무반에 수류탄을 던져 잠자던 김상범일병(21)등 동료사병 6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날 내무반에는 김일병등 14명이 잠을 자고 있었으나 수류탄이 침상에 떨어지면서 폭발,파편이 위로 날아가는 바람에 다행히 사망자는 없었다. 그러나 김일병과 신동석일병(22)등 2명은 각각 머리와 허벅지를 크게 다쳐 군헬기편으로 서울수도통합병원에 후송됐다. 육군에 따르면 김이병은 평소 김일병등 상급자 4명이 『동작이 느리다』 『군기가 빠졌다』면서 걸핏하면 구타하는등 괴롭히자 이같은 짓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육군조사결과 김이병은 이날 새벽 야간경계근무를 위해 지급받았던 수류탄 1발을 방한장갑에 숨겨 내무반에 들여온뒤 침상위로 던진 것으로 밝혀졌다.이 수류탄은 잠자던 김일병과 신일병 틈새 마루바닥에 떨어진뒤 폭발했다.
  • 타클라마칸사막 동남단 호탄(서역 문화기행:7)

    ◎실크로드 남로 중심… 명주·옥의 명산지/한때 열국우전의 수도… 토기·벽돌 파편 널려/동보고승 법현이 도닦은 찬목묘 유명… 바로 옆엔 이슬람 예배당 우루무치부근을 떠돈지 엿새째,지구의 지붕으로 불리는 천산산맥언저리이건만 또 한번 서역의 깊숙한 벽지로 날고싶었다.호탄(화전)을. 호탄은 곤륜산맥의 북쪽 기슭에 자리잡은 타클라마칸사막의 동남단.세갈래의 실크로드,그중 가장 환상의 코스인 남로의 중간지점이자 한나라때 서른여섯개의 열국중,남로의 최강국이었던 우전나라의 도읍지였고,「한서」의 「서역전」에선 「서성」으로 불렸던 곳이다. 우루무치에서 직항 2시간10분에 도착한 호탄비행장은 온통 잿빛 모랫벌이었다.과연 33만㎦에 달하는 중국 최대의 사막인 타클라마칸사막의 동남단답게 끝이 없는 모랫벌이 이어져 있으며 그 모래는 콩가루같은 미립자로서 바람이 부는 날이면 활주로조차 묻혀 이착륙이 어렵다고 했다. 호탄시내까지 11㎞의 공항로를 달리면서 필자는 깊은 생각에 잠겼었다.창밖에 하늘을 뚫는 포플러나무와 자작나무가서 있는데 그 잎새는 한결같이 잿빛으로 모랫바람이 휩쓸고 지난 자국들이었다.이런 모랫바람속 그 어디쯤에 화사한 꽃들이 피어서 꽃 따는 사람을 불렀고,또 이 사막 어디쯤에 꽃다운 비단을 짜 낸 뽕밭이 숨었을까? 그리고 이렇게 삭막한 모랫벌 그 어디쯤 깊숙한 골에 하얀 구슬,푸른 구슬이 묻혔을까? 그런가하면 인도에서 불경을 구하여 장안으로 돌아가던 현장법사가 기원645년에 이곳을 지났는데 그들의 발길과 그들의 말방울이 울렸던 곳은 어딜까? ○화향 5천여명 수도 수나라때의 시선집인 「전수시」에는 「우전에서 꽃 따기(우전채화)」라는 무명씨의 시가 이렇게 실려 있다. 「산천수이소,초목상동춘. 역여진유지,자유채화인.」 (산천은 비록 멀리 떨어졌지만,초목의 봄은 마찬가지. 하남땅 진이나 유지처럼,여기도 꽃 따는 사람 있어라) 그런가하면 현장의 「대당서역기」에 기록된 호탄은 1백여군데의 절에 5천여 화상들이 불도를 닦던 대승불교의 중심지로 그 사방을 둘러싼 뽕밭이 화려한 명주와 주단의 생산지임을 밝혔고,반고의 「한서」「서역전」엔 우전국이 장안으로부터 9천6백70리(4천8백35㎞)떨어진 곳에 3천3백의 호구와 1만9천3백명의 인구를 지닌 나라,특히 옥의 산지로 중원에 알려졌었다.「우전옥」,또는 「곤륜옥」으로 불리는 호탄옥의 성가는 1968년 하북에서 발굴된 한나라 중산왕의 「금루옥의」로 더욱 증명되었다.기원전 154년 2천4백89장의 연녹색 옥판으로 얽어 맨 시의,그것들이 몽땅 호탄의 옥이라 했다. 그래서인지 호탄을 에워 싼 두줄기의 강,백옥강과 묵옥강이 각각 동쪽과 서쪽을 흘렀다.옛날엔 이 두줄기 중간에 또 하나의 강 녹옥강이 있었다고 하니 강 이름으로 미루어서도 백옥·청옥·흑옥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호탄시내에 도착한 필자는 처음으로 이방감을 느꼈다.우선 거리에서 만나는 십중팔구가 까무잡잡하면서 무성한 수염을 단 위구르사람들,그들의 오똑한 콧마루에 쌍꺼풀,달걀모양의 갸름한 얼굴에 푸르딩딩한 눈동자,거기다 다혈질의 말씨에 굴뚝처럼 뿜어대는 담배연기를 보면서 어리둥절했다. 필자는 서역땅에 들어 처음으로 필자가 서 있는 곳이지금 중국의 강토이면서도 중국의 한족이 아닌 서역의 원주민속에 깊숙이 들어왔노라는 사실과 이곳 서역의 남로 도처에서 최근 민족갈등의 충돌이 가끔 일어난다는 생각때문에 얼른 여관문을 두들겼다. 이튿날 우전국의 고도를 찾기로 했다.한나라때는 36개부족국가의 하나였지만 당나라때는 「안서사진」의 하나였던 그 도읍지는 아직도 확실치 않았다.혹자는 호탄시 남쪽 25㎞지점 카스강 서쪽언덕에 지금도 남아 있는 높이 6m,둘러 60m의 석탑근린을 두고 말하는가하면 혹자는 호탄시 서쪽 10㎞지점 요트칸(약특간)마을이라는 설이 있다. 그 두군데가 모두 우전국 도읍일 가능성은 있었다.거기에 남아 있는 폐허는 물론 거기서 지금도 출토되고 있는 기와조각·벽돌·질그릇·철제농구등이 그를 증언하고 있는데,특히 요트칸 유적지의 개울물에선 지금도 벽돌이나 질그릇 파편쯤은 쉽게 주울 수 있다는 말이었다. ○요트칸 유적지 찾아 필자는 그 말에 혹하여 요트칸을 찾기로 했다.호탄시에서 서쪽으로 10㎞라지만 아주 기름진 오아시스.가느니 굽이 굽이 농로요,농로를 따라 출렁이는 관개로,곤륜산에서 녹아 내리는 설수는 파랗고 차가웠다.게다가 농로는 자작나무가 목책처럼 늘어 섰거나 포도덩굴이 푸른 터널을 지어서 홀연 여기가 사막임을 잊게했다. 이윽고 「허톈셴바허치공사(화전현파합기공사)」라는 팻말이 보였다.거기서 좌로 돌아 또 한번 농로를 달렸다.마찬가지로 우거진 자작나무요 포도덩굴인데 길가엔 맨발의 개구쟁이가 흙투성이가 되어 뒹굴고,관개의 수문에는 빗장이 걸린 채 그 안으로 물살이 출렁거렸다.그 무렵 난데없이 「요트칸유적지」란 안내판이 보였다.필자는 습관처럼 사방을 둘러 보았지만 산 한자락도 보이지 않는 편편한 언덕일 뿐이었다. 마치 환토하느라 새흙을 옮겨놓은 논바닥을 방불케 여기저기 울퉁불퉁한 지면이었다.아닌게 아니라 버드나무 사이로 개울이 흘렀다.필자는 얼른 그 개울물에 손을 담았다.어렸을 적 뱀장어나 게를 잡았던 그 몸짓으로 개울을 뒤졌는데 당장 손끝에 잡히는 것은 빨간 토기의 파편이었다.풀잎무늬의 얇은 토기였다.또 한번 소매를 걷어 올리고 개울을뒤졌더니 월척의 붕어를 잡듯 큼직한 벽돌 하나가 잡혔다. 호탄박물관의 설명에 따르면 요트칸일대 10㎦의 유적지에는 그런한 영세한 파편들이 널려 있다고 했다.더구나 그 일대는 일찍이 홍적기의 침적된 지질인만큼 겨우 3m내지 6m의 지층속에는 상당한 질량의 박물이 잠겼을지 모른다고 했다.그동안 발굴된 도기·옥기·전폐등 특히 개원통보 같은 엽전이나 인면·수면의 도기로 보아 기원 3세기로부터 8세기에 이르기까지 중고시대의 궁궐이나 도시의 유적으로,그리고 당시의 주민들이 황색의 한족이 아닌 긴 얼굴,긴 눈썹에 푸른 눈,황갈 피부의 회골족,곧 오늘의 위구르족임을 추정하기에 충분했다. ○인도수행길 머물러 비록 묻히고 무너졌지만 정치의 유적을 답사한지라 이젠 우전국의 종교 유적지를 찾기로 했다.그것은 「커커마르무」(극가마일목)유적,한족들은 「찬목묘」라고 부른다. 그것은 동진때의 고승 법현(337?∼422?)이 기원399년 인도에 갈때 여길 경유하면서 불법을 닦다가 그렇게 명명했다는 작은 암자였다.호탄시에서 남으로 36㎞지점,바로파랗게 굽이치는 카라카스강 동쪽,80m의 벼랑위에 있었다.그 벼랑을 오르느라 그 산의 북쪽을 우회하여 나무 한그루 없는 능선을 탔는데 거기서 굽어보는 카라카스강 유역은 정말 스펙터클한 장관이었다.파랗게 강이 굽이치고 강가로 푸른 오아시스,오아시스는 젖줄 따라 허리띠처럼 뻗는데 그 배경은 온통 황갈색의 구릉들.그림으로는 단조로운 삼원색,그러나 영원의 구도였지만 지세로는 찬목묘가 천혜의 요새였다.발밑으로 벼랑,벼랑아래로 강물,강물밖으론 사막.그렇게 무한히 펼쳐진 곳에서 상과 무상은 날마다 피부로 오득했을 지 모른다. 찬목묘는 천연의 작은 2층석굴이었다.석굴의 높이 겨우 6m남짓,그 한쪽에 사다리를 가설했는데 그 2층까지 기어올라간 필자의 눈에는 침침한 골방 하나쯤의 공간,그러나 아무런 시야도 없었다.법현이 책상다리하고 앉았을 때 그 귓전에 들렸을 법한 강물 소리,유사의 소리를 생각하면서 사다리를 내려섰다. 그 석굴밖으로 이슬람교의 예배당인 마자(마찰) 두어칸이 있었고,산 허리를 돌아 카라카스강가에도 몇군데의 마자가 보였는데,여기 호탄 실크로드에 우뚝 선 커커마르무는 지금 종교의 금석을 한눈에 보여주는 박물관이었다.곧 불교의 유적에 이슬람의 마자가 공존한 사실말이다.바로 기원 10세기를 전후해서 불교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했던 것이다.
  • 캉자스먼쯔의 신산(서역 문화기행:6)

    ◎붉은 암벽에 모계사회 생식숭배 그림/기원전 2∼3세기 카자크족 원주민들이 새겨/무도회·인구번식회에 인물 2백명… 여성이 대부분 우고,그들과 싸워서 이기기 위해서라도 생식의 필요는 절실하다. 수렵과 유목을 위해서는 심산유곡과 만경초원이 안성맞춤이다.우랄·알타이산맥 남쪽으로 천산산맥과 곤륜산맥을 등지고,팔카스호 동쪽으로 아라호·아이피호·이리강·카스강·마나스강등을 낀 신강의 서북지대가 바로 최적의 지대로 꼽힌다. 그 지대를 기원전 7세기부터 누빈 것은 오손(오손)·강거(강거)·엄채등 돌궐어족인데,그들은 모두 오늘날 하사크족의 원조민족이었다.지금도 중국 서역에는 백만명을 헤아리는 카자크족이 신강의 서북지역을 물 따라 풀 쫓아 유목하고 있다. 그 유목하는 곳엔 카자크족이 살고 카자크족이 사는 곳,그러니까 팔카스호 동쪽의 초원에는 암화(암화)가 많았다. 지금 독립연합국의 하나인 카자흐스탄을 비롯,신강의 이리강과 초하유역인 쿨자파스산상에는 기원전 6세기에서 3세기로 추정되는 동물암화가 많다.다시 동쪽으로이동하면서 비록 연대는 기원전 3세기 이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리강유역의 훠청(휘성)현 베이간(북간)계곡을 비롯,니러커(이근극)현의 훙광목장등 하미(합밀)의 남산에 이르기까지 적어도 50여군데에서 발견되었다. ○초원에 천마 노닐어 그중에 위민(유민)현 팔타쿨(파이달고이)과 후투비(호도벽)의 캉자스먼쯔(강가석문자)의 암화도 포함되었지만 여느 암화와 다른 모계사회의 생식숭배를 보였다 한다.특히 최근에 발견된 캉자쯔먼즈의 그것이 보다 사실적인 데다 화면이 또렷하다는 신강사범대학 중문과의 황천(황천)주임의 권고와 안내로 그곳으로 머리를 돌렸다. 우루무치에서 캉자쯔먼즈까지 1백50㎞.위구르말로「도깨비 고을」이라는 후투비까지 70㎞는 시원한 아스팔트길이었지만,후투비에서 그 이름도 시골스런 추이얼거우(최예구)향에 있는 현장까지는 험한 산허리를 뚫고 천산산맥 서쪽의 어디쯤을 덜컹거릴 수 밖에 없었다. 깔딱 어느 고개를 넘어설 때,황주임은 별안간 차를 멈추게했다.일행이 내려서 멀리 산맥을 굽어 보았다.시뻘건 바위산맥이 서남쪽으로 꿈틀거리며 이어져 있는데 그 기상은 수십척의 함대가 파도를 가르며 행진하는 모습이었다.그 산맥은 적어도 20∼30㎞를 쪽빛 하늘밑으로 이어져 있는데 그 한복판에 활짝 열린 대문을 방불케 웅장한 바위가 보였다.그것이 바로 생식 숭배의 암화 현장이라했다.결코 소풍하는 산등성이가 아니라 출렁이는 산맥,어디를 보아도 기운이 넘치는 그러한 암맥들이었다. 후투비에서 거의 80㎞를 달려서 이윽고 골짜기의 초원에 도달했다.초원에는 낙타와 천마들이 떼를 지어 풀을 뜯고 있었다.신산의 어귀에 갔을 때,동그랗고 커다란 눈에 텁수룩한 수염을 기른 청년이 길을 막았다.입장하는 표를 사라했다.아직은 알려지지 않아서 관객은 물론 관리자도 없을 줄 알았는데.그들의 재빠른 상혼이 놀랄만 했다. 문제의 암화가 있는 바위는 깎아 세운듯한 암벽이었다.그 암화는 비록 동서 14m,상하 9m의 크기,화면면적이 1백20㎡쯤되어 보이는 분사암에 그려졌지만,그 암화의 모체는 동서 1백50m쯤에 상하 50여m의 엄청난 바위였다. 필자는 마치 방을 보는 수험생처럼 고개를 들고,마치 숨은 그림을 찾듯 훑었다.거기에 등장하는 인물은 족히 2백명은 넘었다.보이는 대부분이 여성으로 이곳이 모계중심의 사회였음을 알게 했다.높은 모자를 눌러 쓰고 모자위에는 두개의 깃털을 꽂은 여성이었다.풍만한 가슴에다 둥실한 엉덩이,갸름한 얼굴에 높은 코,커다란 눈에 작은 입술,가느다란 목에 끊어질 듯한 허리,긴 다리에 섬섬옥수.첫눈에 모던한 서구의 처녀들을 연상케했다. 그 화면은 무질서하게 많은 군상이 여기저기 불거져 나왔는데 가만히 살피면 몇가지 화폭으로 분별할 수 있었다.약간 좌측엔 아홉명의 여인이 한결같이 오른팔은 올리고 왼팔을 내리면서 춤의 동작을 보였는데,어찌보면 벌거숭이요,어찌보면 오늘의 발레복처럼 성감적인 복장이었다. ○남자는 까까중머리 윗 그림을 「누드의 무도회」라 한다면 그 좌측으로 「혼무도(혼무도)」에 상당한 그림이 있었다.남녀 각각 10여명씩 춤을 추는데 여성은 위에서와 마찬가지지만 두팔을 모두 내렸고 남성은 모자도 깃털도 없이 까까중머리에다 홀쭉한 배에 뾰족한 그것을 기운 차게 달고 있었다.여기 저기 동체가 달아난 얼굴이 몇개 있는데 가필한 그림이거나 다른 상징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보다 특기할 일은 남성의 가슴과 여성의 가슴에 각각 한 사람의 이성을 품고 있는가 하면 그러한 혼무의 마당을 향해 호랑이 두마리가 달려들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선명한 주제의 그림이 우측 가장자리에 보였다.한 사내가 발기된 길고 둔탁한 그것을 한손으로 들면서 계집의 하체에 조준하고 그 아래로 성숙한 여인 하나와 50명의 꼬마가 상하단으로 나뉘어 마치 기차놀이하듯이 이열 횡대로 서 있는 그림이었다.인구의 번식을 노골적으로 기구하는 강렬한 포스터같았다. 암화에 등장하는 여성은 대체로 갸름한 얼굴에 깊은 눈,높은 코,가는 목,긴 다리,그리고 높은 모자에 깃털,남자는 높은 코에 기다란 생식기,가냘픈 하체에 긴 다리,두건식의 모자에 동그란 얼굴이 인상적이었다.이러한 외모와 복식으로 미루어 한(한)족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카자크의 체모에 가장 근사할 뿐 아니라 그러한 암화가 아직도 카자크족의 집거 부락에서 발견되고 있었다. ○금속도구 이용 음각 마지막 궁금한 것은 연대였다. 현지의 문화국이나 박물관에선 아직 뚜렷한 연구결과를 발표한 게 없다지만 카자흐스탄 팔카스호 동쪽에서 발견되고 있는 카자크족의 암화,그 대부분이 기원전 6세기에서 3세기 사이,더구나 동점(동참)하였다는 사실 외에도 캉자스먼쯔의 암화가 금속도구에 의한 음각이란 방법으로 미루어볼 때 신석기시대의 말기에 시작해서 청동 및 철기시대였음을 단정할 수 있겠다.그렇다면 기원전 2,3세기의 작품으로 추정하는데 무리가 가지 않는다. 이러한 암화를 작품시하는 데도 그 나름의 의의가 있다.첫째는 그 구성이 부호나 도안처럼 단순하지만 감성적이고 질박하다는 것이요,둘째는 그 표현이 비록 과장적이지만 주장이 선명하다는 것이요,셋째는 그 내용이 조잡하지만 당시의 생활을 생생하게 반영한 역사의 단편들이란 점이다. 필자는 돌아오는 길,캉자스먼쯔 바위에 생식 숭배를 그림으로 새긴 그 후손들을 만나고 싶은 충동이 있었다.조금전 들어갈 때,인민폐 몇푼을 쥐어 준 그 청년을찾기 위해 돌아오는데 난데없이 「시집 가는 날」을 만났다.말 세필에 영감과 할멈이 혼수를 실은 행렬.어쩌면 선발대격인듯,영감은 앞에서 말을 끌고 할멈은 말을 타고 깡마른 언덕을 넘고 있었다. 그 청년은 서른여덟살의 마이무라치라고.형제가 다섯인데 모두 분가해서 한마을을 형성했다 한다.조심스럽게 재산정도를 묻자 스스럼없이 대답했다. 『염소 1백50마리에 낙타·말·황소를 합해서 50마리』라고. 그리고 염소 한마리의 값은 큰 것은 2백위안(한화 2만원상담). 짓궂게 통혼사정을 묻자 그 대답은 자못 단호했다. 위구르족이나 회족,시부족과 통혼할지언정 한족과의 통혼은 싫다고 했다.왜냐면 한족은 이슬람교를 믿지 않기 때문이란다. 주인은 우리 일행을 그들의 흙집에 안내했다.사방이 흙벽,마루나 침대가 따로 없다.물론 안방과 건넌방의 구별도 없이 밋밋한 헛간 비슷한 구조였다.
  • 「가상현실」 모델하우스 세운다/특수안경·장갑끼면 현실로 느껴

    ◎동아건설 8월 첫선 항공기 조종연습과 전자오락 등에 이용되는 「가상현실장치」가 아파트의 모델하우스에도 적용된다.전자안경과 전자장갑을 끼고 특수제작된 의자에 앉아서 화면을 보며 실제와 같은 시각과 촉각·청각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든 장치다. 동아건설기술연구소는 4일 총 21억원을 들여 국내 최초로 가상현실장치를 적용한 모델하우스를 개발,오는 8월쯤 첫선을 보인다고 밝혔다. 「가상현실모델하우스」가 실용화되면 지금처럼 아파트를 세울 때마다 2억∼3억원을 들여 모델하우스를 지을 필요가 없어져 그만큼 쓸데없는 비용을 줄일 수 있다. 가상이지만 입체화면을 통해 모델하우스의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마루와 각 방의 구조를 둘러보고 외벽과 벽장 등 각종 내장재도 실제촉각을 느끼며 만져볼 수 있다.또 원하는 평형을 선택,가구와 장식물 등을 마음대로 배치해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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