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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르시아 ‘단판승부 귀재’…SBS인비테이셔널 스킨스골프

    ‘스페인의 희망’세르히오 가르시아가 SBS인비테이셔널 스킨스골프대회(총상금 18만달러)에서 가장 많은 상금을 획득했다. 가르시아는 21일 경남 양산아도니스CC(7,026야드)에서 열린 18홀 스킨스게임에서 막판 짜릿한 역전극으로 ‘스웨덴의 기인’예스퍼 파네빅,‘한국의 간판’최경주(슈페리어),‘일본의 자존심’마루야마 시게키를 따돌리고 모두 9만5,000달러의 상금을 거머쥐었다.파네빅은 8홀의 스킨을 따내며 6만달러,최경주는 스킨 3홀로 2만5,000달러를 각각 건졌다.마루야마는 단 1홀의 스킨도 따내지 못했다.스킨의 주인을가린 홀은 희비가 엇갈렸다. ◆8번홀(파4·341야드) 1번홀에서 첫 버디의 행운을 잡은 최경주가 5,000달러의 스킨을 획득한 뒤 2번홀부터 누적된 상금만 4만5,000달러가 걸린 초반 최대의 승부처.모두 티샷부터 조심스러운 자세가 역력했다.하지만 마루야마의 티샷은 왼쪽 벙커로 직행하는 등 운이 따르지 않아 스킨을 포기한 가운데 나머지 3명은 무난히 2온에 성공,퍼팅에 승부를 걸었다.그러나 홀컵에서 가장 먼 최경주와 가르시아의 버디퍼팅은 모두 아깝게 홀컵을 살짝 비켜갔다.남은 것은 파네빅의 3m짜리 버디퍼팅.미국프로골프(PGA) 통산 4승,올시즌 상금 8위의 노련함은 결진 승처에서 빛이났다.퍼터 페이스를 떠난 파네빅의 볼은 그대로 홀컵안으로 빨려 들어간것. ◆10번홀(파4·398야드) 9번홀의 상금 1만달러를 포함해 2만달러의스킨이 걸렸다.이번에는 최경주가 주인공이었다.마루야마는 이번에도 티샷을 벙커에 빠트린뒤 2온에 성공했지만 파에 그쳤고 가르시아의세컨드샷은 그린을 지나 벙커로 들어가 스킨을 일찌감치 포기한 상황. 결국 승리는 파네빅과의 맞대결에서 버디를 낚은 최경주의 몫이었다. ◆13번홀(파5·512야드) 가르시아의 행운이 따른 홀.12번홀부터 누적된 3만5,000달러의 스킨이 걸린 홀로 모두 3온에 성공,상금을 다음홀로 넘기는듯 했다.하지만 최경주와 파네빅이 3퍼팅으로 보기를 범했고 마루야마가 간신히 파세이브에 그쳐 버디퍼팅을 성공시킨 가르시아의 첫 스킨 획득. ◆18번홀(파4·446야드) 및 연장 15번홀부터 누적된 가장 많은 6만달러의 상금이 마지막홀까지 남아있었지만 모두 2온 2퍼트로 파를 세이브,결국 연장에 돌입했다.연장은 가스리아와 최경주의 맞대결.마루야마는 세컨드샷이 그린을 벗어났고 파네빅은 벙커에서 벙커로 급격히난조를 보여 일지감치 탈락.가르시아는 세컨샷을 홀컵 4.3m에 붙인뒤버디를 성공시켜 명성을 과시했다.최경주는 가르시아 보다 훨씬 가까운 홀컵 2m거리의 버디퍼팅을 남겨놓아 무승부를 만들수 있는 기회를잡았으나 아슬아슬하게 홀컵을 빗겨나 아쉬움을 남겼다. 곽영완기자 kwyoung@
  • ‘한국의 자존심’ 최경주 세계 정상들과 한판승부

    한국 남자골프의 ‘간판’ 최경주(슈페리어)가 세계 정상급 골퍼들과 맞대결한다.무대는 오는 21일 경남 양산의 아도니스CC에서 18홀스킨스게임으로 펼쳐질 SBS인비테이셔널대회(총상금 18만달러). 스킨스게임의 상금은 1∼6번홀은 홀당 5,000달러,7∼12번홀은 1만달러,13홀∼18번홀은 1만5,000달러로 모두 18만달러가 걸려 있다. 최경주는 ‘일본의 자존심’ 마루야마 시게키,‘스페인의 희망’ 세르히오 가르시아,‘스웨덴의 기인’ 예스퍼 파네빅 등 3명과 극동과 유럽의 자존심 경쟁을 벌인다. 최경주는 이미 미국프로골프(PGA) 투어에서 이들과 여러차례 같은대회에 출전한 경험이 있었지만 맞대결은 이번이 처음이다. 가르시아는 지난해 PGA챔피언십에서 준우승하며 세계를 놀라게 한데이어 올 8월 타이거 우즈와의 매치플레이를 승리로 이끌어 우즈의독주를 견제할 ‘차세대 기수’로 평가 받고 있다. 마루야마는 올 2월 뷰익인비테이셔널에서 준우승하는 등 총상금 약 120만달러로 PGA상금 37위에 오른 만큼 안정된 기량을 펼치고 있다.6월 US오픈 예선에서는 비공인 한 라운드 PGA 최저타 타이기록인 13언더파를 낚았었다. 골프팬들에게 모자창을 세운 패션으로 잘 알려진 파네빅은 PGA투어통산 4승에 올시즌 약 241만달러의 벌어 상금 랭킹 8위를 차지,설명이 필요없는 정상급 골퍼. 이에 비해 올시즌 PGA에 데뷔했던 최경주는 상금순위 134위로 내년풀시드권을 따는데도 실패하는 등 초라한 기록을 갖고 있다.하지만 9월 에어캐나다 챔피언십에서 ‘톱10’에 진입하는 등 시간과 비례해서 적응력을 보이고 있는 최경주는 한국 남자골프의 간판으로서 결코후회없는 한판 대결을 펼치겠다는 각오다. 한편 20일에는 프로암대회로 이들의 스킬즈챌린지(아이언샷,벙커샷,칩샷,퍼팅,롱드라이브)도병행해 열린다. 곽영완기자
  • 90년대 여성 작가 비판 고조

    90년대 여성작가들에 대한 비판이 한층 거세지고 있다.평단 일부의일방적인 성원 속에 대중적 성가가 높은 이들 문학을 ‘속빈 강정’으로 꼬집은 평문들이 나타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그 지적과 비판의 강도가 날로 강렬해져 주목된다.여러 비판 가운데 작가신경숙과 전경린에 관한 평문이 특히 눈길을 모으고 있다. 평론가 정문순은 문예중앙 가을호에 ‘통념의 내면화,자기위안의 글쓰기’란 제목으로 올 초 발간된 신경숙의 소설집 ‘딸기밭’을 분석하면서 작가의 ‘속 비어있음’을 날카롭게 적시하고 있다.그는 신경숙의 표절 의혹을 제기하기도 한다. 정문순은 90년대 문단의 바로미터로 보아도 무방한 신경숙의 소설이80년대 문학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에 둥지를 틀고 있다는 데서 문제의 뿌리를 보고 있다.신경숙 등 90년대 문학은 비판적으로 계승할 힘같은 것이 있어 80년대 문학을 대체한 것이 결코 아니라 그저 운좋게 ‘무주공산을 점령하는’ 식이었다는 것이다. 사회변혁,민주화 등 80년대 거대 담론에 억눌려 말해질 수 없었던 삶의 다양성이나 개인의 내면성 등이 신경숙의 개성적인 문체에 힘입어 표현된다고 얘기되어 왔지만 신경숙이 집착하는 자의식과 내면의 세계는 자신과의 치열한 고투에서 나온 산물은 아니라고 그는 강조한다.신경숙의 내면성 추구 문학은 현실과의 사투없는 고분고분함에 불과한데 80년대 문학의 적극적·낙관적 세계관에 배반당하여 무력감에젖어들던 90년대 문단이나 평단 일부가 스스로를 위로할 셈으로 이를과도하게 높이 샀다는 것이다. 아무튼 90년대 신세대 문학은 근본적으로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패배의식에서 나온 자기 방어적 성격을 벗어나지 못했으며 그런 만큼신경숙 등 이들의 작업을 90년대 문학계의 대안으로 평할 수 없다고정문순은 못박는다.그러면서 그는 이전부터 제기돼 온 여러 신경숙작품에 대한 표절 의혹을 신경숙 문학의 본질적인 문제로 다시 거론하고 있다.단편 ‘딸기밭’은 편지 부분에서 남의 문장을 무더기로옮겨놓은 것으로,‘작별인사’는 일본 마루야마 겐지의 ‘물의 가족’을 본딴 것으로 지적되어 왔다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작품‘기차는 7시에 떠나네’는 패트릭 모디아노,최윤,윤대녕과의 관련성이 언급된 바 있고 단편 ‘전설’은 명백히 일본의 극우 작가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의 표절작이라고 정문순은 말한다.그러면서 그는 “문단이 실력보다 무늬가 큰 작가를 자기네 취향과 상품성을 고려하여 띄워준 점이 과연 표절을 낳은 요인과 무관하다고 볼 수 있을까”라고 묻고 있다. 한편 평론가 이명원은 ‘작가’ 가을호에서 대표적 90년대 여성작가의 한 명인 전경린의 장편 ‘내 생에 꼭 하루뿐인 특별한 날’을 매섭게 비판하고 있다.불륜을 다룬 이 소설에 대해 이명원은 윤리적 일탈에 대한 가치판단에서가 아니라 불륜을 ‘서사화’하는 과정에서의 생에 대한 인식과 제도에 대한 비판의식과 관련,‘본격문학의 외양을 두른 함량미달의 낯뜨거운 연애담에 불과하다’고 통박한다. 본격문학의 외양 속에 대중문학의 기제들을 무차별적으로 유입시켜소설의 가독성을 높이고 소설의 상품성을 고조시키면서도 표면적으로는 뭔가 심오하고 비의적인 의미를 탐구하고 있다는 뉘앙스를던져준다는 것이다.즉 무늬만 그럴듯한 ‘의사(擬似)-본격문학’이란 것.이같은 비판들은 90년대 여성작가 작품을 그저 재미있게 읽은 독자들한테 다소 의외로 들릴 수도 있으나 문학을 삶과 세계에 대한 치열한이해로 보고자 하는 독자들에겐 수긍되는 대목이 많을 것으로 보인다. 김재영기자 kjykjy@
  • 마루야마·가토 대담집 ‘번역과 일본의 근대’

    일본의 메이지 시대는 번역이 홍수를 이룬 시대였다.불과 6∼7년 사이에 거의 모든 영역에 걸쳐 수만 권의 책이 번역돼 나왔다.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과 함께 근대법의 주요 고전으로 꼽히는 헨리 휘턴의 ‘만국공법’(Elements of International Law)’은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이 책은 중국에서는 관청에나 비치돼 있는 정도였으며,한국에서는 아직 번역도 되지 않았다.일본인들이 ‘근대’에 얼마나 발빠르게 대응했는가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번역은 근대화 과정의 일본 사회와 문화에 무엇보다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일본 학계의 천황’으로 불린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와 문예비평가 가토 슈이치가 주고받은 문답을 엮은 ‘번역과 일본의 근대’(임성모 옮김,이산 펴냄)는 이러한 인식 아래 씌어진 ‘번역의 사상사’다. 메이지 시대 번역서들이 양산된 것은 가토의 표현대로 “졌다고 생각하면 바로 상대국에 유학생을 보낸다”는 일본인들의 극적인 사고방식에 힘입은 바 크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토 히로부미나 이노우에 가오루 같은인물도존왕양이론(尊王攘夷論)을 주장하다 미국·영국·네덜란드·프랑스등 4개국 연합함대에 패배한 조슈 번(藩)이 영국에 파견한 유학생이었다.가토는 “일본이 패전을 겪고 하루 아침에 변하는 것은 실로 극적일 정도”라고 말한다.이것은 서양에 졌다고 스스로 깨달은 순간,존왕양이의 쇄국 이데올로기를 버리고 막부를 몰아낸 메이지 유신의정신과도 일맥 상통한다. 이 책은 번역은 재창조의 과정임을 보여준다.우리가 사용하는 번역어는 우리의 독자적인 번역과정을 거친 것이라기보다는 일본어와 외국어 사이의 일대일 대응관계를 그대로 빌려 온 것이 대부분이다.일본에서 소사이어티(society)의 번역어가 정착되기까지는 근대 일본의정신적 궤적 만큼이나 복잡한 과정을 거쳤다. 하지만 우리는 그 과정을 건너뛴 채 소사이어티=사회라는 하나의 공식 같은 결과만을 받아들인다.그런 만큼 ‘계약관계에 의해 성립된인간집단’이라는 고유한 의미를 제대로 알기 어렵다.단어대 단어가아니라 의미대 의미의 번역이 중요하다고 한 키케로의 말은 귀기울일만하다. 메이지 초기에는 서양문화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번역밖에없다는 번역주의가 팽배했다. 늘 그렇듯이 그때에도 오역이 적지 않았다.이 책에서는 사회진화론을 제창한 영국의 보수적인 사상가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정학(Social Statics)’이 엉뚱하게 ‘사회평권론’으로 번역되면서 급진적인자유민권운동가들의 성전이 된 일화가 소개된다.번역의 오류를 경계하기 위해서다. 또한 번역주의보다 한층 과격한 주장인 모리 아리노리의 ‘영어국어화론’에 대해서도 언급한다.일본어의 뼈대인 야마토 말에는 추상어가 없기 때문에 야마토 말만으로는 서양문명을 일본 것으로 만들 수없다는 게 그 요지.‘영어공용화론’이 공공연하게 제기되고 있는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시사하는 대목이다.이 책은 번역은 단순한 어학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언어의 문화를 주체적으로 수용하는 과정임을새삼 일깨워준다. 김종면기자 jmkim@
  • 톱랭커 대반격…브리티시 오픈 2R

    톱 랭커들의 반격이 시작됐다. 21일 오후 스코틀랜드 세인트앤드류스의 올드코스(파 72·7,115야드)에서속개된 브리티시오픈골프대회(총상금 440만달러) 2라운드는 첫날과 달리 신예들의 하락세가 뚜렷한 가운데 톱클라스의 선수들이 선전을 펼치며 상위권을 장악했다. 22일 0시 현재 단독 1위는 미국의 데이비드 톰스.전날 3언더파를 쳤던 톰스는 이날 5언더를 보태며 합계 8언더파 136타로 선두를 달리고 있다. 그러나 상위권에서 가장 눈에 띈 선수는 스페인의 ‘천재 신성’ 세르히오가르시아.1라운드에서 4언더파로 공동 4위를 달린 그는 이날도 3언더파 69타를 쳐 합계 7언더파 137타로 스티브 프레시,타이거 우즈와 함께 공동 2위로뛰어올랐다. 1라운드에서 버디만 5개를 낚아 공동 2위에 랭크됐던 타이거 우즈는 2라운드 들어서도 4번홀까지 버디 2개를 낚는 호조로 합계 7언더파를 유지하고 있어 막판 상승세가 이어질 경우 선두로 뛰어오를 가능성이 커졌다. 첫날 6언더의 호조로 단독 선두에 나섰던 남아공의 어니 엘스는 이븐파에그쳐 합계 6언더파 138타로 프레드 커플스와 함께 공동 6위로 밀려났으나 선두권과의 격차가 크지 않아 여전히 우승 가능성을 남겨 놓았다. 또 지난해 홈그린의 폴 로리에게 연장 전전 끝에 패했던 프랑스의 장 반데발드도 이날 4언더의 집중력을 발휘하며 합계 5언더파 139타로 공동 8위를달리고 있다. 한편 첫날 상위권을 차지했던 인디언 골퍼 비게이 3세는 2라운드 4번홀까지 타수를 줄이지 못해 합계 3언더파로 공동 25위를 달리고 있으며 역시 첫날10위권 내에 포진,일본의 희망으로 떠올랐던 시게키 마루야마도 9번홀까지 1오버파에 그쳐 공동 25위로 추락했다. 곽영완기자 kwyoung@. *이모저모. ◆브리티시오픈 1라운드에서 어니 엘스가 예상 밖의 선전으로 단독 선두에오르자 이번 대회에서 그가 타이거 우즈를 꺾을 수 있을 지에 대해 관심이고조. ◆당초 타이거 우즈의 독주가 예상됐던 브리티시오픈의 초반 판도가 안개속으로 흐르자 대회장의 열기는 한결 후끈해지는 분위기.엘스가 6언더파로 단독 선두에 올랐으나 50위권 선수와의 격차가 5타차 이내이고 3타차까지도 25명의 선수들이 몰려 있어 남은 라운드에서의 경쟁이 더욱 치열해졌기 때문. 순위 변동도 심해 우즈,노타 비게이 3세,스티브 플레시 등 5,6명의 선수들이하루종일 1,2위를 오가며 엎치락 뒤치락했다. ◆브리티시오픈 1라운드에서 가장 어려웠던 홀은 로드홀로 불리는 17번홀(파4)인 것으로 확인. 대회조직위원회가 밝힌 결과에 따르면 1라운드에 참가한 156명의 선수중 17번홀에서 버디를 잡은 선수는 4명에 불과한 반면,파는 54명,보기 70명,보기이하도 28명에 달했다. 세인트앤드류스(스코틀랜드) 외신종합
  • 우즈, 7연승 물거품 “미켈슨 미워 미워”

    투어 7연승 사냥에 나섰던 ‘골프천재’ 타이거 우즈가 파죽의 연승행진을마감했다. 우즈는 14일 캘리포니아주 라 호야의 토리파인스골프장(파 72)에서 끝난 미프로골프(PGA)투어 뷰익인비테이셔널대회에서 4라운드 합계 14언더파 274타를 쳐 일본의 마루야마 시게키와 공동 준우승에 그쳤다. 우즈의 7연승행진을 가로 막은 것은 왼손잡이 ‘미남골퍼’ 필 미켈슨. 2라운드까지 5언더파로 22위까지 쳐졌던 우즈는 3라운드에 들어 보기없이 5언더파를 몰아 치며 선두 미켈슨의 애간장을 태웠다.현지 갤러리들의 반응도 우즈의 역전을 믿어 의심치 않은 분위기.하지만 미켈슨은 전혀 흔들림없는예상 밖의 복병이었다.앞 조의 우즈가 13번홀에서 버디를 잡으며 공동선두에 오르자 티샷을 페어웨이 왼쪽 러프 나무 밑으로 날리는 위기를 맞고도 침착하게 버디를 낚아 오히려 우즈를 조급하게 만들었다.아니나 다를까.우즈가 14번홀 들어 어이없는 실수로 첫 보기를 범하자 미켈슨은 기다렸다는듯이 1.5m 버디퍼팅을 차분히 밀어 넣으며 3타차로 달아났다. 웬만하면 흔들릴만도 한데 끄덕없는 미켈슨에 내심 화가 치민 우즈는 16번홀(파3)에 들어서도 티샷한 볼을 벙커에 빠트리며 또다시 보기. 하지만 미켈슨은 17·18번홀에서 연속버디를 잡으며 뒤돌아 보는 우즈에게얄미운 미소로 답했다. 미켈슨이 18언더파 270타로 완벽한 우승을 일궈 내는 순간이었다. 박성수기자
  • 우즈 “7연승 포기 아직 일러”

    ‘6타 남았다’.‘이번에는 양보할 수 없다’.필 미켈슨이 미국 프로골프(PGA)투어 뷰익 인비테이셔널대회에서 단독선두에 나선 가운데 PGA투어 7연승을 노리는 타이거 우즈가 6타 뒤진 공동 4위로 껑충 뛰어올라 추격의 고삐를당겼다. 2라운드까지 5언더파 139타로 공동 22위에 그쳤던 우즈는 13일 캘리포니아주 라 호야의 토리 파인즈GC(파 72·7,033야드)에서 벌어진 대회 3라운드에서 보기없이 5언더파를 몰아쳐 합계 10언더파 206타를 기록,선두권에 성큼다가섰다. 2라운드 공동선두였던 미켈슨은 5언더파를 더해 중간합계 16언더파 200타로3언더파에 그친 일본의 마루야마 시게키(14언더파 202타)를 2타차로 앞섰다. 3위는 11언더파인 데이비스 러브3세. 한편 첫날 이븐파로 기대를 모았던 한국의 최경주는 12일 2라운드 경기에서2오버파로 부진,중간합계 2오버파 146타로 100위권 밖으로 밀려나 3,4라운드진출에 실패했다. 이로써 최경주는 데뷔전인 소니오픈,AT&T 페블비치 내셔널프로암대회에 이어 3연속 컷오프 탈락했다. 류길상기자
  • [정직한 역사 되찾기](33)재일 친일파 거두 박춘금

    일제강점기 친일파는 조선내는 물론 일제의 영향력이 미치는 전 지역에서 활동하였다.만주사변 이듬해인 1932년 수립된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이나 일본 본토도 그들의 주요 활동무대였다.이들은 대개 군부나 행정기관 등 일제의 권력기관에서 일제통치의 수족으로 활동하였다.만주군관학교나 일본 육사를 나와 고급장교로 활동한 친일 군인들이 이에 속하며 또 일본이나 만주국의 고등고시에 합격하여 고급엘리트 관료로 활동한 자들을 들 수 있다.한 단계 낮은 직급에서는 밀정이나 행동대원 등 앞잡이로 활동한 자들을 거론할수 있겠다. 일본 본토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친일파로 박춘금(朴春琴·1891∼1973)을 들수 있다.그는 조선인으로서 일제의 심장부인 도쿄에서 두 번씩이나 대의사(代議士·국회의원)에 당선된 사람이다.그의 친일성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극력 친일파 가운데 일제말기 일제가 임명한 귀족원 의원을 제외하면 일제통치 전 기간을 통해 일본 국회에 진출한 사람은 그가 유일하다. 박춘금은 여러 형태의 친일파 가운데서상당히 드문 유형에 속한다.친일파 가운데는 지식을 팔아 일제에 아부한 집단이 있는가하면,경제적 기반을 일제통치에 제공한 대가로 기득권을 보전하고 일제와 유착관계를 형성해온 부류도 있다.그러나 박춘금은 그도저도 없는 자였다.그는 오직 몸뚱이 하나로친일대열에서 성공한 자였다.그는 수하에 폭력조직을 거느린 소위 ‘정치깡패’ 집단의 우두머리였다.예나 지금이나 권력의 하수인으로 폭력집단이 존재해 온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나 식민지시절에도 이같은 집단이 존재했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주먹으로 친일배의 정상에 오른 그의인생역정을 더듬어 보자. 박춘금은 1891년 경남 밀양 태생으로 본관도 밀양이다.부 박금득(朴今得)과 모 박차연(朴且連)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자세한 가계는 알려져 있지 않다. 청년시절 그는 일본인 술집에서 심부름을 하며 일본말을 배운 것을 밑천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막노동판에 뛰어든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가 일본으로건너간 시기 등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도 자세하지가 않다.다만 그가 한 연설에서 토로한 말에 따르면,일본에 도착할 당시 수중에 가진 돈은 1원 49전뿐이었으며 당시 일본에는 관비유학생 50명인가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했다. 1920년경 그가 이기동(李起東) 등과 함께 도쿄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을 모아 ‘상구회(相救會)’라는 단체를 조직한 사실은 확인된다.이기동은 오랫동안 그와 함께 활동한 대표적인 재일 친일파다.상구회는 1921년말 ‘상애회(相愛會)’라는 사회사업단체로 개편되는데 23년 요코하마·나고야·오사카 등에 지부를 조직,조직을 확대하였다.그럴듯한 이름의 간판을 내건 이 ‘상애회’가 바로 박춘금 일당의 일본내 친일활동의 모태가 된다. 막노동판의 주먹패 박춘금이 일제로부터 인정을 받아 재일 조선인 사회에서 두각을 드러내게 된 결정적인 사건은 1923년 9월 1일 도쿄 인근 지역을 강타한 ‘관동(關東)대지진’이었다.수 십만 명의 인명피해는 물론 재산피해도 엄청났던 이 천재(天災)를 맞아 일제는 동요한 민심을 수습하고 조선인을탄압할 목적으로 당국의 개입하에 유언비어를 유포하였다.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거나 방화를 일삼는다는 것이 그것이다(여기에는 미즈노(水野鍊太郞) 당시 내무상의 조선인에 대한 개인감정이 개입됐다는 지적도 있다.미즈노는 1919년 9월 사이토(齋藤實)총독을 따라 정무총감으로 조선에 부임하기 위해 서울역에 첫 발을 디뎠다가 강우규(姜宇奎)의사의폭탄세례를 받은 인물). 이에 일본인들은 자경단을 조직,관헌과 함께 조선인에 대한 무자비한 체포와 학살을 자행하였는데 최소 6,000명이 이때 희생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바로 이때 박춘금은 상애회 회원 300여명을 동원,‘노동봉사대’를 조직하여 조선인 희생자 시체처리와 복구작업을 자청하였다.이 무렵 박춘금 일당은이미 일제당국의 비호를 받고 있어서 상호 자연스레 교감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 일을 계기로 박춘금은 일제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아 상애회 본부 사무실을 마련하는 등 입지를 넓혀갔다.28년 박춘금은 상애회를 재단법인으로 만들고는 이사장에 총독부 경무총감 출신의 마루야마(丸山鶴吉)를 영입했다.회장에는 이기동을 앉히고 자신은 부회장으로 있으면서 사실상 실권을 행사하였다.이 무렵 상애회는 일본내 주요도시에 지방본부를 설치하였고 회원수도 2만명을 헤아렸다.이듬해 29년 상애회관을 지어 사무실도 독립하였고 마루야마 취임 1주년때는 사이토를 기념식 행사장에 초청하는 등 그 위세를 과시하였다. 재일조선인 사회에서 세력가로 부상한 그는 상애회 조직을 바탕으로 정계진출을 추진하였다.32년 2월 실시된 제18회 총선때 그는 도쿄 5구(區)에 출마,처음으로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었다.놀라운 것은 조선인 유권자가 1,236명뿐인 이곳에서 6,966표를 얻었다는 점이다.그의 열렬한 친일성이 일본인 유권자들을 설득시킨 점도 있지만 그 이면에는 일본정계 실력자들의 후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거직후인 2월 23일자로 그가 사이토 전 조선총독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불초 이번에 중의원 의원에 당선의 영관(榮冠)을 얻게 된 것은 모름지기 귀대(貴台,손위사람의 높임말)의 두터운 정과 성원을 입은 것이라 여기며 깊이 감사드립니다…”라고 한데서 이같은 점을 엿볼 수 있다.이후 그는 한 차례 낙선했다가 40년 제20회 총선에서 재선하였으나 그의 정치인생은 여기서 막을 내렸다.이후 그는 활동무대를 조선으로 옮겨 친일대열의 선봉장을자처했는데 이 시기가 바로 그의 친일활동이 절정을 이룬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인 학생들에 대한 학도병 징집이 시작되자 그는 매일신보 주최 학병격려대연설회에 참석하여 “고이소(小磯)총독이 (조선)군사령관 시절 군사령부를 방문,내선일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반도인에 대한 병역의무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고 밝히고는 “(학도병)4천이나 5천이 죽어 2천5백만 민중이 잘 된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또 있겠는가”고 외쳤다(매일신보 1943.11.19). 당시 일제가 학도병을 전선으로 내몬 것은 그 이면에는 조선의 미래의 지식분자를 제거하려는 의도가 숨겨진 것이었다.그가 이같은 일제의 의도를 대변한 것인지의 여부는 확인할 수는 없으나 그에게는 그런 혐의를 둘만한 사건이 하나 있다. 8·15 해방을 불과 50일 앞둔 1945년 6월 25일.그는 경성부민관(현 서울시의회 청사)에서 당대의 내로라하는 친일파들을 동원,대의당(大義黨)을 결성하고 그 자신이 당수에 취임하였다.당시 전세는 이미 기울어 일본은 패퇴를거듭하였고 미군의 일본 본토공격이 임박한 시기였다.대의당은 바로 이 때‘최후결전’의 자세로 결성된 것이다. 대의당은 ‘강령’에서 “모든 비(非)결전적 사상(事象)에 대해서는 단연이를 분쇄한다”고 밝혔는데 여기서 ‘비결전적 사상’이란 ‘반전·반일’의 총칭이다.해방후 친일파들의 죄상을 조사,폭로한 ‘민족정기의 심판’에따르면 대의당은 항일·반전 조선민중 30만명을 학살하려 했던 ‘살인단체’였던 것으로 드러났다.이는 당시 총독부 경무국이 세운 ‘요시찰인에 대한조치계획’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해방후 그는 살길을 찾기 위해 수하를 시켜 건국준비위원회 등에 돈봉투를보내기도 했으나 여의치 않자 일본으로 밀항하였다.이 때문에 그는 반민특위의 체포,조사를 피할 수 있었다.특위에서는 여러 경로를 통해 그를 송환하려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는 모두 3번 결혼했는데 첫째,둘째 부인은일본여자였고 66년 75세때 세번째로 결혼한 여자는 당시 60세의 한국여자(82년 사망)였다.두번째 일본인부인과 사이에서 태어난 그의 장남 박춘남(朴春男·89년 일본에서 사망)은일본 릿교(立敎)대학 3학년 재학중 자진하여 학도병에 출진했었다. 일제당시 일본에서 박춘금과 교류한 적이 있다는 한 일본군 장교출신 제보자의 증언에 따르면,그의 후손 가운데 한 사람은 마약중독으로 거의 폐인이돼버렸다고 한다.73년 3월 31일 박춘금은 일본 게이오대학 병원에서 사망,현지에 묻혔다.친일 반민족자 박춘금의 일생은 그제서야 막을 내렸다.죽어서도 그는 고국보다 일본을 택한 것인가,아니면 죽어서도 고국으로 올 수가 없었던 탓일까. 정운현기자 jwh59@
  • 반론문-바른역사가 밝혀지길 고대하며

    본보 3월1일자 13면 “정직한 역사 되찾기;친일의 군상”연재물 26회는 ‘민족대표 33인중 1인 李甲成’편을 “先애국 後변절 … 日帝 고급밀정 활동의혹”제목으로 다뤘다.이에 대해 유족대표 李在賢씨는 반론문을 다음과 같이 보내왔다. 삼일운동 33인중의 한 분인 이갑성옹의 후손인 우리들은 매년 삼일절이 다가오면 가족 전체가 노이로제에 걸린다.‘선애국,후변절’,‘일제 고급밀정의혹’이라는 특별 기획물이 어느 언론 매체에 또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이다.그 내용은 항상 창씨개명,상해 망명시 밀정행위,중국 신경에서 일본회사에취직,총독부 고위관리의 촉탁을 했다는 것이다.먼저 이러한 주장이 모두 터무니 없는 이야기임을 밝힌다. 이갑성옹의 상해에서의 활동은 관련 인사 대부분이 이미 작고하셨기 때문에 직접적인 증인을 세울 수가 없다.그러나 세상이 다 알다시피 상해 임정의주요 인물로 끝까지 독립운동을 하신 신익희선생이 해방 직후 서울에서 이옹과 함께 공개적으로 정치활동을 하셨는데 그렇다면 신익희선생이 상해에서일제 밀정으로 널리알려진 사람과 해방직후 손잡고 일을 했다는 있을 수 없는 이야기가 된다.신익희선생께도 큰 누가 되는 이야기다. 다음,이옹이 거주한 적이 전혀 없는 신경에서의 일본회사 취직,평생 일어를 안하고 사신 이옹이 한국말을 못하는 총독부 경무국장 마루야마(1922∼23서울근무)의 촉탁으로 취직(이옹은 이 당시에도 일제감옥에서 수형 생활 중이었음)했다는 주장도 사실처럼 이야기되고 있으니 우리 후손들은 가슴을 칠일이다. 이중 그래도 인정할수 있는 것은 창씨개명이 되어있다는 사실뿐이다.우리가 이옹에게 직접들은 이야기는 이옹은 자신이 창씨 된 것을 전혀 몰랐으며 이러한 사실을 이옹 자신이 생전에 직접 공개한 바도 있다(대한일보67년5월12일자). 이옹에 대한 이러한 음해성 험담의 연원은 1960년대 초부터다.독립운동 유공자 모임인‘광복회’설립과정에서 튀어나온 이 문제는 이옹이 그 초대 회장으로 선임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제기되어 급기야는 경쟁자간의 성명서 전쟁으로까지 비약되었다.이러한 와중에서 광복회 회장으로는 치명적인 결격사유가 되는 일제밀정문제 등을 상대측에서 조작 유포시킨 것이었다.그후 1967년에 2대 회장으로 재 선임되자 상대측에서 이 문제를 재 제기하여 결국은법정까지 비화했었다.당시 서울지검에서 조사한 결과,그러한 혐의를 전혀 찾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를 종료했다. 이옹 때문에 일제 35년을 힘들게 살아야했던 우리 후손들은 터무니없는 음해 때문에 해방된 내 나라에서 다시 마음고생을 하면서 살고 있다.수차 보훈처에 조치를 요구하고 항의도 해 보았다.보훈처에서는 이갑성옹의 독립운동족적에 어떠한 흠결도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국가에서 수여한 훈장이나 대우에 전혀 변화가 없다는 이야기다. 지난 30여년간의 추적에도 불구하고 이옹은 물론 그 가족 누구도 어떠한 친일 행적도 수혜 사실도 발견되지 않았다.단순히 해방후 단체장 선거 때 상대측이 선거용으로 주장한 혐의만이 있을 뿐이다. 사실이 아닌 것도 혐의라는 명목으로 자주 거론되고 크게 보도되면 사실처럼 된다.사실이 아닌 이갑성옹에 대한 흠결을 혐의라는 제목으로 재탕하고삼탕,사탕할 것이 아니라 그리한 혐의가 사실인지 누명인지를 규명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유족대표(장손)이재현
  • [정직한 역사 되찾기] (26) 민족대표 33인중 1인 李甲成

    올해로 ‘3·1 만세의거’ 80주년이다.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전민족 차원의독립운동으로 기록되고 있는 ‘3·1의거’는 4월 하순까지 조선 8도에서 모두 1,214건의 시위에 참가자는 110만명에 달했다.또 당시 만세시위에 나섰다가 일경의 총칼에 목숨을 잃은 자가 7,500여명,검거된 자는 4만7,000여명에달했다. 구한말 의병항쟁 이후 일제말기의 광복군에 이르기까지 항일대열에 참가한애국지사는 수십만을 헤아린다.그러나 이들 가운데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받은 사람은 99년 2월 현재 8,524명이다.아직도 상당수 애국지사들이 훈장을 받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보훈당국이 야박해서만은 아니다.독립운동 공적은 인정되나 훈장급에는 미치지 못하거나 독립운동을 입증할만한 구체적인 거증자료를 찾지 못한 때문이다.독립진영의 비밀요원으로 활동한 사람들의 경우 증거자료를 확보하기가 쉽지 않다.자료찾기가 어려운 것은 일제의 비밀요원인 ‘밀정’ 역시 마찬가지다. 지난 93년 5월 국가보훈처는 역대 독립유공자 가운데 재심사 대상자 8명의명단을 국회 비공개회으에서 공개하였는데 그 가운데에는 ‘3·1의거’ 당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사람이었던 이갑성이 포함돼 있었다.그에게 씌어진 혐의는 ‘밀정’으로 요샛말로 하면 일제의 스파이노릇을 했다는 것이다.광복회장까지 역임하면서 81년 사망 당시 사회장이 치러졌던 그가 ‘변절자’였다는 의혹은 62년 이래 줄기차게 제기돼 왔다.그동안 제기된 의혹과 논란을 통해 그의 친일혐의를 추적해보자. 연당(硏堂) 이갑성(李甲成)은 1889년(명치 22년) 대구에서 태어났다.대구에서 보통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온 그는 경신학교를 졸업하고 1913년 세브란스의전(醫專) 약학과 3학년 재학중 중퇴하였다.이 해부터 세브란스병원 사무원으로 일하던 그는 남강 이승훈(李昇薰)의 권유로 기독교계 대표로 3·1의거에 참여하였다.당시 민족대표중 가장 어린 나이였던 그는 외국인및 학생측과의 연락,독립선언서 배부,해외연락 업무를 맡아 의거를 성공으로 이끄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3·1의거 당일 태화관에서 일경에 체포된 그는 재판과정에서도 의연한 자세를 잃지않았다고 한다.또 감옥안에서도 3·1의거 기념 만세를 주동하였다. 이로 인해 다른 민족대표들이 가출옥한 뒤인 22년 5월 뒤늦게 출옥했다.출옥후 이듬해 세브란스 의약회사 지배인으로 재직하던 그는 그 해 11월 ‘민립대학 기성발기총회’에서 중앙부 집행위원으로 선출돼 전국을 돌며 민립대학 설립의 필요성을 선전·강연하다가 체포돼 다시 6개월간 감옥살이를 하였다. 24년 11월 이승만이 주도한 ‘동지회’의 서울지부격인 ‘흥업구락부’의간사로 피선된 그는 25년 조선중앙기독청년회(현 YMCA) 이사로 피선돼 활동했다.그는 또 좌우(左右) 민족운동세력의 통합체인 ‘신간회’ 창립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29년 11월 광주학생의거 직후 ‘신간회사건’으로 6개월간 복역하였다.출옥후 30년경 경성공업주식회사 지배인으로 있다가 이듬해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그를 둘러싼 친일의혹은 그가 상해행에 오른 후 37년 일경에 체포돼 본국으로 압송될 때까지 7년간의 행적이다.생전에 그는이 시기의 활동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했다. 한편 이갑성에 대한‘친일논쟁’은 62년 그가 건국훈장을 수훈할 무렵 불거져 나와 65년 광복회장에 취임한 직후,그리고 81년 그의 사망직후 한 잡지에서 그가 일제때 사용하였던 명함을 공개하면서 다시 논란이 됐었다.그의친일경력을 처음으로 공식 거론한 사람은 임시정부 서무국장 출신의 임의탁(林義鐸·건국훈장 독립장)씨.그는 ‘대한일보’(67.5.11)에 게재한 광복회비상총회 명의의 ‘성명서’에서 ▒민족대표 33인중의 한사람으로 솔선하여창씨개명을 한 점 ▒상해에서 임정에는 출입을 못하고 상해 조선인거류민회회장이자 유명한 친일파인 이갑녕(李甲寧)만 접촉한 사실 ▒총독부 산업국장의 주선으로 일본 미쯔비시(三菱)회사 신경(新京)출장소장으로 임명된 사실▒총독부 경무국장 마루야마(丸山鶴吉)의 촉탁을 지냈다는 주장 등 충격적인 내용을 폭로하였다. 또 유관순(柳寬順)열사의 오빠로 3·1의거에 참여했던 유우석(柳愚錫·건국훈장 애국장)씨는 이갑성이 “일제말기 일본인도 하기 어려운 경성공업사(군사공업)의 중역을 지냈다”고 증언하였다.두 사람 모두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 받은 애국지사들로 이갑성의 친일문제와 관련,상당히 구체적인 내용을 증언하고 있다.독립유공자 가운데는 같이 활동했던 동지들의 증언만으로도 훈장을 받은 사례도 있다.독립운동가들의 증언은 사료(史料)가치를 인정받고있다. 한편 임·유씨의 증언에 대해 이갑성은 반박성명을 통해 두 사람의 증언내용을 모두 부인하였다.그러나 몇 가지 사항을 검토해보면 이갑성의 반박은별로 설득력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우선 창씨문제.이갑성은 자신이 이와모토(岩本正一)로 창씨개명한 사실(호적서류 참조)을 두고 당시 자신은 해외에 있어서 모르는 일이라고 주장했다.그러나 창씨는 호주(戶主)만이 할수 있었기 때문에 당시 호주였던 그가 자신의 창씨 사실을 몰랐다는 얘기는 말이안된다.33인 가운데 그를 포함해 정춘수(鄭春洙,禾谷春洙),최린(崔麟,佳山麟)등 3명이 창씨개명을 했다. 다음으로 이갑성이 미쯔비시회사의 신경출장소장을 지냈다는 주장.현재로서는 확인된 바는 없다.그러나 그가 ‘주식회사 일만산업공사(日滿産業公司)전무취체역’을 지낸 사실은 확인됐다.(명함사진 참조) 또 이갑성이 상해 임정에 출입을 못했다는 주장.이에 대해 임정 총무과장 출신 K씨는 “당시 이갑성은 임정요인과 교류가 없었으며 임정 청사에 출입을 못했다”고 증언한바 있다. 독립운동가 김성수(金聖壽·건국훈장 독립장)는 자신의 경험담을 들어 이갑성이 상해에서 제중(濟衆)약국을 경영하면서 밀정행위를 했다고 사망직전에증언한 바 있는데 이갑성이 약국을 했을 가능성은 크다.우선 그가 약학을 공부했고,서대문형무소 수감시절 일경이 작성한 자료에 그가 상해로 도피하여약종상(藥種商)을 했다고 기록돼 있기 때문이다.그가 경무국장 마루야마의촉탁을 지냈다는 주장도 아직 확인된 바는 없다.이밖에도 그가 친일을 했다는 증언은 수없이 많다.독립운동가 사회에서는 그의 ‘친일’이 공공연한 비밀로 돼 있다.다만 그가 생전에 역대 정치권력과 깊은 유대를 가지고 독립운동가 사회의 상징적인 인물로 행세해왔기 때문에 나서서 언급하기를 꺼려왔을 뿐이라는 것.해방 직후부터 정치권에서 활동하면서 한때 이승만을 추종하던 그는 1961년 5·16이 발생하자 ‘…국가와 민족의 앞날을 위하여 크게염려하던 군인들에 의한 군사혁명이 일어난 것은 다행한 일로…군사혁명 정부가 완전히 성공하도록 물심양면으로 깊이 협조해 주기를…’ 호소하였다. 이듬해 62년 그는 해방후 첫 독립유공자 포상에서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받았으며 공화당 창당과정에서 발기위원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65년에는 초대 광복회장에 취임하였고 이어 3·1동지회 고문,이준열사기념사업회총재 등 민족단체의 대표적 인물로 활동하였다.또 63년 그는 독립유공자 공적심사에도 참여하였는데 당시 이름만 써내면 훈장을 주었다는,소위 ‘백지사건(白紙事件)’에 그가 깊이 관련돼 있다는 혐의도 받고 있다. 이갑성의 일제하 행적에 대해서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상당수 있다.33인 출신으로 일제당국에 신분이 노출된 상태에서 어떻게 상해를 자유롭게 드나들며 또 거기서 활동을 할 수 있었는지,37년 국내에 압송돼 와서 1년만에 가출옥한 배경이나 이후로도 수 차례 투옥된 이유는 무엇인지 등등.33인중 최후의 생존자로 매년 3·1절이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던 이갑성은 81년 3월 타계후 국립묘지에 안장됐다.그의 공과에 대한 냉정한 평가와 진실규명 차원에서도 그의 행적에 관한 자료조사는 앞으로도 계속돼야 할 것이다. 鄭雲鉉 jwh59@
  • 친일의 군상:11/여자 밀정 裵貞子(정직한 역사 되찾기)

    ◎伊藤博文의 꼭두각시로 매국·배족 선봉에/1885년 도일… 이등박문 만나 ‘스파이 교육’ 받아/러 견제·고종퇴우 막후활동… 만주지역서 독립운동가 탄압/태평양전쟁때 韓人 부녀자 100여명 위안부로 내몰아/해방후 반민특위에 체포된뒤 후회의 눈물/시골 아전의 딸로 출생 대원군 실각후 집안 몰락/어릴때부터 조정에 반감/한때 官妓여승으로 전전 1949년 2월 초.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姜明珪 조사관 일행이 서울 성북동 언덕길을 급히 오르고 있었다. 한 양옥집 앞에 다다른 姜조사관 일행은 백발의 한 노파를 끌어내 수갑을 채우고 남대문로 반민특위 사무실로 연행했다. 그 노파의 나이 79세. 겉으로 보기엔 여느 노인들과 마찬가지로 늙고 초라한 모습이었다. 그가 반민특위로 잡혀오자 특위 요원들이 이 노파의 얼굴을 보려고 姜조사관 주위로 모여들었다. 무슨 죄를 얼마나 지었기에 그 나이에 수갑에 채워져 끌려왔을까? 과연 이 노파는 누구인가? 裵貞子(1870∼1952). 흔히 이름 앞에 ‘요화(妖花)’라는 수식어가 붙어다니는 배정자가바로 그 노파였다. 정사(正史)에서는 그의 이름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는 한국근대사의 이면사(裏面史)에 ‘일제의 앞잡이’로 기록돼 있다.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배정자급(級)에 드는 친일파는 몇 안된다. 한말 일제의 ‘을사조약’ 강제체결에 협조하였고 ‘한일병합’ 후에는 만주로 건너가 조선인 항일세력 탄압에 앞장섰었다. 친일파 가운데 우두머리급에 드는 친일파였다. 해방후 반민법 위반으로 반민특위에 잡혀온 여성피의자는 총 6명. 그들중 첫번째로 잡혀온 사람이 바로 배정자였다. 흔히 ‘여자 스파이’의 대명사로 ‘마타 하리’를 든다. 고급창녀 출신의 마타 하리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스파이로 활동한 혐의로 1917년 프랑스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됐다. 배정자를 바로 이 ‘마타 하리’에 비유하기도 한다. 배정자는 1870년 경남 김해 고을에서 아전노릇을 하던 裵祉洪의 딸로 태어났다. 아명은 분남(粉男). 부친은 1873년 대원군 실각후 그 졸당(卒黨)으로 몰려 대구 감영에서 처형되었다. 모친은 이 충격으로 눈이 멀어버렸다. 그가 세살때의 일이었으니 그의 초년은 순탄치 못했다. 이후 그는 모친과 함께 유랑 생활을 하다가 밀양에서 관기(官妓)로 팔렸으나 도중에 뛰쳐나와 양산 통도사에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우담(藕潭)이란 승명(僧名)으로 목탁을 두들기던 그는 2년만에 다시 절을 뛰쳐나와 배회하다가 밀양 관청에 체포됐다. 여기서 우연히 은인을 만났다. 당시 밀양 부사 鄭秉夏는 그의 부친과 알고 지내던 사이로 그의 딱한 사정을 듣고는 일본으로 가서 살도록 주선해주었다. 1885년 15세 되던 해 그는 일본인 밀정 마쓰오(松尾彦之助)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에게 뜻밖의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으로 건너간 배정자는 갑신정변 실패후 일본에 망명해 있던 개화파 인사 安경수를 만나게 되었고 그를 통해 金玉均과도 알게 되었다. 그의 인생에서 결정적인 물굽이를 틀어준 사람은 바로 이 김옥균이었다. 김옥균은 당시 일본 정계의 실력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게 그를 소개해 주었다. 그의 빼어난 미모에 끌린 이토는 하녀 겸 양녀로 자기 집안에들여앉히고 ‘다야마 데이코(田山貞子)’라는 일본이름을 지어주었다. 裵貞子의 ‘貞子’는 여기서 생겨났다. 이토는 재색(才色)을 겸비한 그를 장차 고급 밀정(스파이)으로 키울 요량으로 수영·승마·사격술·변장술 등을 가르쳤다. 소위 ‘밀봉교육’을 시킨 셈이다. 일본으로 간지 9년만인 1894년 배정자는 조선으로 돌아왔다. 공식적으로는 신임 공사(公使)로 부임하는 하야시(林權助)의 통역이었으나 본분은 일제의 밀정. 첫 임무는 당시 조선황실 내의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는 것이었다. 그는 일본공사관에 머물면서 기회를 노리다가 엄비(嚴妃·고종의 계비)의 친인척을 통해 황실과 선을 댔다. 고종(高宗)은 미모에다 출중한 일본어 실력을 갖춘 그를 총애하였다. 당시 한 신하가 고종에게 “비기(秘記)에 가로되,갓 쓴 여자가 갓 쓴 문(門)으로 출입하면 국운이 쇠한다 하였습니다. 통촉하옵소서”라고 아뢴 바 있다. 양장에 모자(갓)를 쓴 그가 대안문(大安門·덕수궁의 정문으로 현재 명칭은 ‘大漢門’임)을 뻔질나게 드나드는 것을 꼬집은 것이었다.러일전쟁 직전 친러파는 고종의 신변안전을 위해 ▲평양 천도 혹은 ▲고종의 블라디보스토크 천거(遷居)계획을 세운 적이 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사전에 비밀이 누설돼 일본측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고종으로부터 이 정보를 빼내 일본공사관에 제공한 장본인은 바로 배정자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이듬해 3월 이토가 초대 한국 통감으로 부임하자 배정자는 그의 인생에서 최대의 전성기를 맞았다. 오빠 裵國泰는 한성판윤(현 서울시장)으로,동생은 경무감독관(현 경찰청장)으로 승진하였다. 이토를 등에 업은 그는 밀정이자 막후 권력자로 행세하기 시작했다.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이 발생하자 그는 일제와 함께 고종에게 퇴위 압력을 넣기도 했다. 이 무렵 그는 ‘흑치마’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하늘을 찌를 듯한 그의 기세는 1909년 이토가 통감자리에서 물러나고(6월) 다시 4개월 뒤 하얼삔에서 安重根 의사에게 살해됨(10월26일)으로써 한풀 꺾이고 말았다. 이토 사망소식을 접하고는 며칠간 식음을 전폐하였다. 그런 그에게 새로운 구세주로 등장한 사람은 ‘한일병합’후 부임한 조선주둔 헌병사령관 아카시(明石元二郞)였다. 아카시는 배정자의 과거 밀정경력을 높이 평가하여 헌병대 촉탁으로 채용하였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일본이 시베리아에 출병하자 그는 일본군을 따라 시베리아로 가서는 이 지역에서 수년간 군사첩자로 활동하였다. 그 후 봉천(奉天·현 瀋陽)주재 일본영사관에서 촉탁으로 근무하면서 만주지역 거주 조선인들의 동향을 정탐,귀순공작을 담당했었다. 배정자는 1920년 일제가 옛 일진회(一進會)의 잔당들을 규합,만주지역 최대의 친일단체인 ‘보민회(保民會)’를 창설할 때 배후인물로도 활동하였으며 나중에 이 단체의 고문을 맡았다. 이 단체는 일제가 독립운동가 탄압과 체포를 위해 조직한 무장 첩보단체로,초대회장 崔晶圭는 대한제국 시절 참위(소위)출신이었다. 매국노 李容九의 한일합방 청원을 지지했던 崔는 보민회에서 활동한 공로로 나중에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한편 만주지역에서의 맹활약(?)으로 독립투사 진영에서 처단대상자로 지목하자 배정자는 1922년 신변에 위협을 느껴 조선으로 돌아왔다. 조선총독부에서는 경무국장 마루야마(丸山鶴吉)가 그의 귀국을 기다리고 있다가 경무국 촉탁으로 다시 고용하였다. 나중에 그는 총독부로부터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600여평의 토지를 받기도 했는데 은퇴한 뒤에도 총독부로부터 월급을 받으며 지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일본군 위안부 송출업무에도 발을 들여놓았다. 그는 70 노구에도 불구하고 조선여성 100여명을 ‘군인위문대’라는 이름으로 남양군도까지 끌고 가서 일본군 위안부 노릇을 강요하였다. 해방후 그는 반민특위에 체포돼 마포형무소에 수감됐다. 취재차 형무소를 찾은 한 기자에게 그는 “따끈한 장국밥 한 그릇 먹는 것이 소원”이라고 애걸하였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배정자’의 모습은 흔적도 없고 한낱 늙은 죄수의 모습으로 전락해 있었다. “이제와서 전비(前非)를 어찌 변명하겠습니까? 저는 오늘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어떤 벌을 내리신대도 달게 받고 가겠습니다. 다만 제 아들 무덤 앞에서 죽는 것이 소원이라면 소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법정 최후진술을 통해 뒤늦게 자신의 죄과를 후회했다. 배정자의 형량과 얼마동안 징역을 살았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의 죽음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다만 종로구청에 보관돼 있는 호적에 한국전쟁 와중인 1952년 2월27일 서울 성북동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묘하게도 그가 죽은 날짜는 그의 출생일과 같은 날이었다. 어릴 때 조정(朝廷)에 대한 증오 때문에 조국을 배반,매국녀(賣國女)가 된 배정자는 해방후 조국에서 81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裵貞子의 남성편력/빼어난 미모에 화려한 경력 소유/결혼·동거 등 거쳐간 남자 7∼8명 裵貞子는 빼어난 미모와 화려한 경력에다 연령·민족을 불문한 ‘남성편력’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첫남자’는 田在植. 한 때 관기로 있을 때 대구 중군(中軍) 田道後의 아들 전재식을 만나 사랑에 빠졌었다. 배정자의 일본행으로 두 사람은 헤어졌다가 전재식이 일본으로 유학을 가면서 재회,결혼했다. 이 사이에서 田有和라는 아들 하나를 두었다. 그러나 경응의숙(慶應義塾)에재학중이던 전재식이 병사하자 두 사람의 인연은 끝이 났다. 두번째 남편은 일본공사관의 조선어 교사였던 玄暎運. 1895년 당시 외부(外部·현 외무부) 번역관(주임관 6등)이던 현영운은 배정자의 도움으로 10년만에 육군 참장(종2품·현 준장)으로 승진,농공상부 협판(차관)직을 맡았다. 배정자는 현영운과 1년 가까이 살다가 이혼하였다. 그리고는 현영운의 후배인 朴榮喆(일본육사 15기 졸업,함북도지사·중추원 참의 역임)과 결혼하여 5년간 동거하다가 또 이혼하였다. 이후 일본인 오하시(大橋),은행원 崔모,전라도 갑부 趙모,대구 부호의 2세 鄭모 등과도 끊임없이 관계를 맺었다. 대륙전선에 투입됐을 때는 중국인 마적 두목과 동거한 적도 있다. 1924년 57세로 밀정생활을 은퇴한 후에는 25세의 일본인 순사와 동거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 고종의 자금 지원(다시 태어난 ‘대한매일’:9)

    ◎창간부터 각별한 후원… 항일 필봉 독려/배설에 특허장 하사 등 감시속 유일하게 지원/통감부 보고서 등 기록/자금지급 사실 뒷받침/이토 ‘궁금령’으로 훼방/돈끊겨 힘겨운 싸움 대한제국 황실과 대한매일의 관계는 각별한 것이었다. 고종 황제는 대한매일 창간 때부터 裵說 등 그 주역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졌고 은밀한 후원을 통해 독려,신문 논조가 지속적으로 강한 항일 색채를 갖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일제 강점기 거센 언론탄압 속에서 유독 대한매일이 황실 지원을 받았음은 당시 그 위상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다.고종은 발간 지원의 방편으로 배설에게 특허장을 써주기도 했으며,일제가 이같은 지원을 막고자 궁금령(宮禁令)까지 내린 것은 유명한 일화다. 황실이 창간 때부터 대한매일을 지원했음은 여러 기록에서 추측할 수 있다.토마스 코웬은 배설이 러일전쟁을 취재하려고 입국했을 때 동행한 영국 데일리 크로니클지의 동료기자였다.그와 배설이 함께 해임된 뒤 두 사람은 영자신문을 공동창간하려고 했다. 코웬이 대한매일 창간 며칠 전인 1904년 7월10일 일본 저팬타임스 사장인 즈모에게 보낸 편지는 고종의 지원의사를 보여주는 자료다.“코리아타임스라는 신문을 창간해달라는 중요한 주문을 받고 있다.이 신문은 한국 궁정으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을 것이고,반일적인 것이 돼야 한다”는 내용이다. 또 대한매일 창간 후인 그해 10월3일 주한 영국공사 조단이 본국에 보낸 보고서는 “이 신문이 孫澤이라는 독일 여인을 통해서 황제의 지원금을 쓰고 있다고 믿을 만한 충분한 근거를 갖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인쇄시설조차 갖추지 못해 인쇄소에서 신문을 찍고,불과 200여호를 발행한 뒤 휴간한 사정을 보면 창간부터 1905년 초까지는 고종으로부터 거의 지원을 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배설이 외부 도움 없이 신문을 계속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특히 1905년 8월11일부터 국문판과 영문판을 각각 4면으로 별도 발행했는데,이같은 확장과 인쇄시설 마련이 고종에게서 보조금을 받았기 때문임을 보여주는 자료가 많다. 1905년 10월11일 주한 일본군 헌병대가 한국 주둔군 참모장에게 보낸 보고서는 “白時鏞이 고종과 배설 사이에 중개를 주선한다는 사실을 확실한 소식통에게서 들었다”고 밝히고 있다.백시용은 당시 예식원의 회계과장으로 황제의 신임이 두터웠다.또 1907년 1월18일 경무고문 마루야마가 통감대리인 하세가와에게 보낸 보고서에서는 “대한매일이 한국 황실로부터 매월 500원을 지급받고 있다”고 액수까지 밝혔다. 1907년 8월27일 통감부의 경무 와타나베가 마루야마에게 보낸,궁내부 전무과 기사 沈雨澤에 대한 심문조서는 고종의 보조금지급 사실을 명확히 보여준다.“작년 손탁은 폐하에게 ‘대한매일은 유독 한국 및 황실에게 이익되는 것을 기재해 왔으나 유지곤란으로 이번에 일본에 매도한다는 소문이 있으니 폐하의 일고를 바란다’고 주상했다.폐하는 출판을 계속할 것을 희망하여 어느 정도의 금액을 지출하고 또 매월 1,000원 정도를 하사해왔다.” 대한매일 한글판이 재창간된 것은 이해 음력 4월이므로 고종은 대한매일 한글판 창간에 특별자금을 하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또 신문발간에 편의를제공받도록 고종이 배설에게 특허장을 준 것이 1906년 2월10일자였으므로 고종이 재정지원을 적극적으로 해준 것도 이 무렵부터라고 봐야 한다. 그러나 고종이 끝까지 보조금을 지급하기는 어려웠다.이토 히로부미는 1906년 7월2일 고종을 만나 ‘궁중의 위엄과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드나드는 사람들을 통제할 특별병력이 궁중에 주둔해야 한다’고 강요했고 7월6일자로 궁금령을 공포했다.당시 각지에서 일어나는 의병들이 고종에게서 내밀하게 고무받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토가 고종을 고립시켜 두려는 속셈이었다.특히 반일적인 배설이 고종과 내통하는 것을 막기 위한 계산이 깔려 있었다. 결국 궁금령 공포와 엄격한 출입통제로 고종은 포로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1년 후 고종이 퇴위하고는 재량껏 쓸 수 있는 내탕금도 제한됐고,일본측 감시도 철저해졌다.이때부터 지원이 끊겨 대한매일은 더욱 힘겨운 싸움에 나서야 했다. ◎황실과 대한매일신보/극도보안속 재정지원 타언론 비해 자금난 덜해/헤이그·을사조약생생한 보도/강경한 항일노조 유지 큰 힘 고종 황제의 경제적 지원은 대한매일이 일관된 논조를 유지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이 되었다.당시 대부분의 민족지들은 일제의 집요한 탄압 탓에 경영난에 허덕였고 논조도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이에 비해 대한매일은 황실 지원에 힘입어 상대적으로 재정 곤란을 덜 겪었다. 대한매일의 굽히지 않는 필봉의 원천은 물론 배설이라는 영국 발행인에게 있다.그가 치외법권을 인정받아 직접적인 탄압을 비켜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그러나 대한매일도 어려운 경영상태에 빠져 대중적인 지원을 호소하는 사태가 있었음을 감안하면 황실의 지원이 큰 힘이 됐음을 부인키 어렵다. 황실과 대한매일의 관계는 철저하게 베일에 쌓여 있었다.당시 일제가 정부 구석구석까지 완전히 장악한 사실을 볼 때 황실의 지원은 사적으로,극도의 비밀을 유지한 채 이루어졌을 것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대한매일의 고종 관련기사는 항상 강경하고 직접적인 상황을 여과없이 부각하는 생생한 것들이다.1905년 을사늑약(勒約)체결과이에 대한 고종의 완강한 거부를 공개한 1905년 11월18일자의 ‘칙어엄정(勅語嚴正)’,을사조약의 부당성을 만국에 알린 고종 친서를 전문게재하고 이와 관련해 쓴 1907년 1월23·24일자 논설,그해 6월 헤이그밀사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한 것 등 끝이 없다. 이는 고종의 대한매일에 대한 관심과 지원을 그대로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다른 신문들이 보도한 기사와는 큰 차이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선 ‘칙어엄정’만 하더라도 을사조약 체결 과정을 일반에게 알린 최초 보도였다.또 고종친서사건과 헤이그밀사사건은 각각 고종의 입지를 좁히고 결국 폐위로 연결된 직접적 사건이었다.초기부터 황실과 대한매일의 관계를 끈질기게 추적해온 일제 입장에선 양쪽 관계를 더 이상 유지케 할 수 없다고 결정하는 데 결정적인 단초로 작용한 것들이라고 볼 수 있다.
  • 일본문학의 정체는 무엇인가/문학과 지성사간 ‘일본 현대문학사’

    ◎1920년대부터 현재까지 체계적 정리/요시모토 바나나 등 소장작가도 탐구 무라카미 하루키나 무라카미 류 등 일본 작가들의 소설은 국내 젊은 독자층에게 큰 인기를 얻고있다.일본문학이 이처럼 우리 독서시장에 적잖은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이를 비판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토대는 거의 마련돼 있지 못한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최근 문학과지성사에서 펴낸 ‘일본 현대문학사’(전2권,호쇼 마사오 등 지음,고재석 옮김)는 일본문학의 정체를 밝힌 역사개설서로 독자들의 관심을 끌만하다. 이 책은 지난 90년 일본 쇼가쿠칸에서 간행된 전35권의 쇼와문학 전집중 별권인 ‘쇼와문학사’를 우리말로 옮긴 것.1920년대의 다이쇼(대화)시대부터 반세기를 넘는 쇼와(소화)시대,그리고 오늘의 헤이세이(평성)시대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현대문학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했다.일본에서는 1955년 이후 기존의 문학사 기술방법과는 달리 주관주의를 배제하고 현상을 객관적으로 관찰,기술하는 새로운 조류가 싹트기 시작했다.이 책은 기존의 실증적이고 문단사적인,틀에 박힌 문학사에서 벗어나 문화사적이고 정신사적인 문학사를 지향한다.그런 점에서 그 시각은 사뭇 도전적이다. ‘쇼와문학사’의 저자인 히라노 겐(평야 겸)은 쇼와문학을 프롤레타리아 문학과 ‘신감각파’에서 비롯된 모더니즘 문학,그리고 사소설의 3파 정립구도로 파악한다.이러한 도식은 특히 1935년을 전후한 일본 순문학의 상황을 적절하게 보여준다.이 시대 문학의 두드러진 특징은 전향문학에서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사소설로 되돌아간 것처럼 모더니즘을 계승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사소설로 기울어진 모습을 볼 수 있으며,나아가 사소설로 흡수되는 형태로 3파가 접근했다는 것이다.요코미츠 리이치 등의 신감각파가 소설을 지적이고 관념적으로 구성하려고 했다면 이토 세이나 아베 도모지,호리 다츠오로 대표되는 쇼와 초기의 모더니즘은 외국 소설의 기법을 받아들여 소설의 내면화와 의식화를 더욱 밀고 나갔다는 사실도 밝힌다.이 책에서는 또한 1921년에 나온 잡지 ‘씨뿌리는 사람’(종시く인)에까지 소급해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수맥을 더듬는다. 이책은 히카리 아가타·아오노 소·마루야마 겐지·미타 마사히로·고바야시 교지·요시모토 바나나 등 90년대 신세대 작가들을 ‘감수성과 감성의 역사’라는 주제 아래 다룬다.이 책에서는 특히 ‘키친’으로 ‘해연’문학상을 받은 요시모토 바나나를 적극적으로 평가한다.1980년대 말엽,쇼와문학의 말기는 바로 ‘요시모토 바나나 현상’으로 그 대미를 장식했다는 것.대개 젊은 여성들이 화자로 나오는 요시모토 바나나의 작품은 소설이라기 보다는 현대인의 이야기 또는 우화로 읽힌다.이단이나 이화성을 제거한 지극히 평범한 감성과 감수성이 그의 소설의 또다른 특징이다. 일본의 소장 학자들은 일본의 ‘근대’와 ‘문학’,그리고 ‘기원’을 고찰하기 위해 우리 문학에 주목하고 있다.우리 학계에서도 그에 못지않는 연구가 이뤄지고 있는지는 미지수이다.이와 관련,역자인 동국대 국어교육과 고재석 교수는 “일본문학사를 모르는 한 한국 근·현대문학사의 기원과 생성을 본격적으로 살펴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지적한다.
  •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마루야마 마사오(화제의 책)

    ◎일 대표적 지성인의 획일적 역사 비판 「학계의 텐노(천황)」「마루야마 텐노」로 불리며 일본 지성계의 흐름을 주도했던 지은이의 대표적 저서.마루야마는 일본인의 사유체계와 근대화정신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한편 「이데올로기의 정치학」「정치적인 것과 그 한계」 등 현대정치사의 주요 쟁점에 대해서도 논한다.「근대화」의 논리로 점철된 일본의 현대사는 맹목적일 정도로 한 방향으로만 진행된 획일적 역사였다는게 이 책의 출발점.그 최대의 비극적 결말이 제2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나타났으며,이는 천황제의 허상을 그들 스스로 각인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마루야마는 일본의 근대화가 잘못된 방향으로 진행돼 왔음을 시인한다.일본인들은 일본을 서구의 한 부분으로 여겼으며 아시아적 전통보다는 서구적 전통에 심취,서구의 기술과 실용적 학문을 수입했다.이러한 흐름이 천황제의 교묘한 논리와 맞물려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으로 현실화됐으며 일본열도를 광기의 역사에 휩싸이게 했다는게 마루야마의 지적이다.김석근 옮김 한길사 2만5천원.
  • 낯뜨거운 문화유산 보존실태/황규호 문화부 기자(서울논단)

    세계 몇몇 나라의 고고학자들이 지난 주말 동해안에서 만났다.시골 읍소재지 양양문화원이 주최한 국제학술회의가 그 만남의 자리였다.강원도 양양군 손양면 오산리 유적을 중심으로 주변 동아시아지역 신석기문화를 살펴보기 위해 마련한 학술회의다.다섯 나라 학자들이 참가한 비교적 덩치 큰 국제학술회의였다. 그런데 부끄러운 일이 생겼다.외국학자들이 오산리유적을 높이 평가한 것 까지는 좋았으나,자국의 문화유산 보존 현실을 소개한 대목에 와서 그만 부끄러워진 것이다.자랑도 아니고 그저 담담하게 이끌어낸 유적보존 사례는 한편으로 부럽기도 했다.우리 쪽에서 참가한 학자들은 물론이고 참관한 사람들도 주눅이 들고 말았다. ○외국사례 부러워 일본 학자는 아오모리켄(청삼현) 아오모리시 야구장 이야기를 아주 자연스럽게 꺼냈다.지난 1993년 야구장 건설공사 중에 신석기유적이 발견되어 건설계획 자체를 전면 백지화했다는 것이다.2·3루 스탠드 공사를 마무리한 상태에서 건설계획을 취소해버린 용기가 놀라웠다.그 자리는 바로 산나이마루야마(산내환산)신석기 유적인데,양양 오산리유적과 거의 같은 위도선상의 동해건너에 있다. 그뿐이 아니다.지난 1975년 후쿠이켄(복정현)에서도 공업단지 조성과정에 신석기유적이 나와 공사를 중단했다.그 이후 도리하마(조빈)신석기유적으로 가꾸어 국민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선견지명이 보였다.엄청 많은 관람객들이 몰려온다고 했다.산책하다 쉬고 또 산 지식도 섭취하는 일본의 명소가 되었다.우리 경제력만도 못한 중국에서도 선사유적지 마다 유적관을 지었다는 것이다. 우리 현실과는 너무 거리가 멀었다.그 국제학술회의 개최지 양양에 있는 오산리유적은 학계의 보존노력에도 불구하고 11년째나 방치되어 왔다.동아시아 최고의 신석기유적으로 6천∼7천년전 문화상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였다.구미 여러나라 고고학사전에 소개된 세계적 유적이기도 하다. ○오산리유적 방치 그 유명한 유적이 보존·복원은 커녕 훼손 위기를 맞고 있다.한 건설업체가 호텔과 콘도를 짓기 위해 바로 길 건너 산을 통째로 밀어붙였다.그리고 파낸 흙을 오산리유적과 조화를이룬 쌍호라는 이름의 늪에다 버리고 있다.유적 훼손을 부추기면서 천혜의 생태계마저 파괴시키고 있는 것이다.아주 최근에는 정부의 허가를 받아 학계가 구제발굴키로 한 경부고속전철구간에 든 유적이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이 역시 건설업체가 의도적으로 뭉개버린 것이다. ○보존함으로써 개발 그런 현실을 대할 마다 국제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가 채택한 한 권고를 음미해 보았다.「문화유적 및 자연유산 국내 보호에 관한 권고」가 그것인데,「보존함으로써 개발한다」는 취지를 담았다.자못 형이상학의 논리가 엿보인다.그러니까 문화유산 보존은 개발 이상의 실익이 가능한 정신적 재산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정부는 마침 내년을 「문화유산의 해」로 정하고 지난 23일 조직위원회 현판을 달았다.반짝 빛나고 마는 이벤트 행사보다는 문화유산을 가꾸고 보존하는데 필요한 청사진 밑그림을 확실히 그려주기 바란다.그리고 내년을 새로운 인식에서 출발한 문화유산보존 원년으로 삼아 제도보완에 따른 의견도 폭넓게 수렴해야 할 것이다.
  • 일본 대표명저 12권 나왔다/한림과학원 일본학연 총서1차분 완간

    ◎“일본 바르게 알기” 취지… 일반인에 보급/문화론·소설집 등 98까지 50권 발간 한림대 부설 연구기관인 한림과학원 일본학연구소(소장 지명관)에서 발간하는 일본학총서가운데 1차분 12권이 최근 완간됐다. 일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몇년째 비평서와 연구서,문학작품등 다양한 일본관련서들이 쏟아져 나오지만 이 「총서」는 권위있는 연구기관에서 체계있게 구성해 간행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또 일본의 대표적인 저서를 문고본 형태에 담아 일반인을 상대로 보급하는 것도 특징이다. 그동안 나온 책은 1권 「일본문화의 숨은 형」(가토 슈이치 등 지음)을 비롯 「일본적 자아」(미나미 히로시),「중국사상과 일본사상」(쓰다 소키치),「근대 일본인의 발상 형식」(이토 세이),「다도와 일본의 미」(야나기 무네요시),「일본사회의 인간관계」(나카네 지에)등 일본인·일본문화론이 주를 이룬다. 아울러 「일본의 불교」(와타나베 쇼코),「근대 일본정치사」(오카 요시타케),「무교회주의자 내촌감삼」(스즈키 노리히사)등 분야별 명저와 「소설의작법」(오에 겐자부로),「폭풍우 외 7편」(시마자키 도손),「재일 동포작가 단편선」(양석일 등)같은 문학작품도 들어 있다. 이 가운데 「일본문화의 숨은 형」은 지난 81년 「일본문화의 원형을 생각한다」는 주제로 열린 연속 강연회에서 일본의 원로학자·작가 4명이 발표한 내용을 묶은 것. 지난해 국내에서도 출간된 「일본 정치사상사 연구」의 저자 마루야마 마사오 동경대 명예교수등 쟁쟁한 인물들이 참여했다.일본문화의 본질에 대한 자체 분석이 깊이 있으면서 강연이라는 쉬운 형식에 담겨 있다. 「달은 어디에 떠 있나」로 근년에야 알려진 양석일을 제외하곤 국내에 거의 소개되지 않은 작가 6명의 작품을 모은 「재일 동포작가 단편선」이나,김교신·함석헌의 스승인 우치무라 간조의 전기 「무교회주의자 내촌감삼」도 관심을 끈다. 일본학연구소는 광복 50주년인 지난해 5월 「진정한 한일관계를 정립하려면 일본을 바르게 알아야 하며,이를 위해 일본의 양서를 소개한다」는 취지로 일본학총서 발간을 시작해 1년만에 12권을 냈다. 앞으로도정치·경제·대중문화 등 각 분야에 걸쳐 권위있는 책들을 골라 올해안에 15권을 더 출간할 예정이다.재일작가 이회성의 「죽은 자가 남긴 것」,에드윈 라이샤워의 「일본근대화론」등이 곧 나온다.「총서」는 98년까지 50권으로 마무리된다. 일본학연구소는 이밖에 올 하반기에 ▲일본 암파서적과 제휴하는 계간지 「사상」과 ▲국제적인 일본학 저널지 등 잡지 두가지를 더 발간할 계획이다.〈이용원 기자〉
  • 한국고고학 세계화의 발판마련/동양고고학회 오늘 하와이서 창립총회

    ◎한·미·중·영 등 30여 국학자 참석/한국 임효재­박양진교수 등 10여명 참여 세계의 고고학자들이 참여하는 동양고고학회가 8일 미국 하와이에서 창립된다.한국학자 10여명이 이 학회의 창립멤버로 참여하며 8∼10일까지 하와이 힐튼호텔에서 열리는 창립기념 국제학술회의 5개 발표주제 가운데 한 주제를 한국학자들이 전담키로 했다. 이 학회에 참여할 국가는 모두 30여개국으로 아시아에서는 한국과 중국,일본이 주축을 이루고 미국과 영국 등 구미 여러나라의 학자들도 공식멤버로 참가한다.지금까지 동양고고학은 개별 독립학문이라기 보다는 아시아학회(ASS)역사분야에 부수되어 영역이 불분명했으나 이번 학회창립을 계기로 아시아학회의 독립된 회원학회 자격을 얻게되었다.회장은 영국 듀함대 지나 번스 교수,총무는 미국 덴버대 넬슨교수,간사는 하버드대 박양진 박사로 내정되었다. 동양고고학회 본부는 미국 콜로라도 덴버대에 두기로 했다.그리고 국가별로 연락간사를 선출키로 했는데 한국에서는 이인숙씨(서울대)를 이미 내정해놓았다.한국의 공식멤버로 창립총회에 참가하는 서울대 임효재 교수는 『최근 한국과 중국,일본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진 고고학발굴과 연구성과 축적이 학회 태동을 북돋웠다』고 학회창립 배경을 밝혔다. 그는 이어 『한국고고학이 학문적으로 세계화 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는 말로 학회활동을 기대했다. 동아시아 고고학은 유럽고고학이 우월권을 주도해온 통에 사실상 소외되어 왔다.특히 선사고고학의 경우 유럽과 아프리카,서아시아 유적에 밀려 동아시아 선사문화는 사실상 뒷전으로 밀려나기도 했다.유럽의 일부 학자들은 동아시아 구석기문화에서 주먹도끼문화가 없다고 극언할 정도였다.그러나 이는 중국 북경 교외 주구점유적,한국 경기도 연천 전곡리유적 등이 학술적으로 발굴됨으로써 부정되었다. 그리고 강원도 양양 오산리유적,일본 아오모리 산나이마루야마(산내환산)유적,중국 배리칸(배이강)유적,시베리아 연해주지역의 보이즈만유적 등 최근 동아시아 신석기문화도 속속 드러났다.이밖에 역사유적발굴도 활발히 진행되어 시대별로 연구성과를 골고루 축적했다. 이번 창립기념 국제학술회의 주제는 ①아시아문화의 중심과 변방 ②동아시아 고고학역사 ③한국과 중국과의 고고학적 관련성 문제 ④중국의 옥 ⑤일본사회의 인종과 문화의 전망 등 5개분야.이 가운데 한국은 3주제 「한국과 중국과의 고고학적 관련성 문제」를 맡아 7명의 학자들이 주제발표에 나서기로 했다. 한국의 발제 및 발표자는 ▲신석기시대의 한중문화교류=임효재(서울대) ▲백제와 중국의 관련성=최몽룡(””) ▲원삼국시대와 중국의 관련성=최성락(목포대) ▲후기 청동기시대문화와 중국과의 관련성=이청규(영남대) ▲한국과 중국의 곡옥=이인숙(서울대) ▲부여·옥저의 동예사회와 중국의 관련성=박양진(하버드대) 등이다.〈김성호 기자〉
  • “방치 10년” 신석기 유적/황규호 문화부 부국장급(오늘의 눈)

    부끄러운 유적보호 강원도 양양군 손양면 오산리.문화의 달 10월이 거의 가고 단풍이 절정을 이룬 지난 주말,설악산을 찾는 관광객과 수학여행 학생들을 실은 버스가 꼬리를 물고 지나갔다.그 버스속의 사람들은 지나쳐 버린 오산리에 동해를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지역 최고의 신석기유적이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을 것이다. 그런 잊어버린 유적에 모처럼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양양문화원이 오산리유적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마련한 국제학술심포지엄에 참석했던 한·일 두나라 고고학자가 그들이다.바다 바람을 지킨 늙은 소나무 몇 그루가 서 있을 뿐 밋밋한 모래언덕에 불과했다.지난 1977년에 발견되어 85년까지 서울대박물관이 5차례의 발굴을 마친 이후 자그마치 10년 동안을 방치해두었기 때문이다. 세계 고고학계를 깜작 놀라게 한 신석기 문화층은 그 모래언덕안에 있다.이 유적에서 출토된 테라코타 인물상이 그렇듯 기원전 6천년쯤 오산리에 살던 신석기인들은 생각(사유)하는 사람들이었다.14기의 집자리에서는 화덕이 발견되어 추위를불로 이겨낼 줄도 알았다.집자리 밖에는 마을이 공동으로 쓰는 취사용 화덕을 따로 만들었다.집단 사냥이나 고기잡이에서 얻은 먹거리를 바베큐로 만드는 데 사용했을 것이다. 오산리 신석기인들은 동해로 회귀하는 연어와 같은 큰 물고기를 낚으려고 동아시에서 처음으로 결합식 낚시를 만들어 썼다.과학적 분석에 의해 백두산에서 가져온 것이 분명한 흑요석 덩어리가 발견되어 먼 지역과 교류하는 모험도 서슴지 않았다.뾰족밑 토기와 납작밑토기 등을 시베리아와 바다 건너 일본 보다 앞서 만들어 전파시킨 사람들이 오산리 신석기인이다.돌로 톱을 만들어 나무를 자르는 지혜도 지니고 있었다. 그럼에도 유적을 가꾸어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기는 커녕 사적으로 지정하지도 않았다.그 무관심은 우리를 부끄럽게 했다.일본에서 현장을 보러온 산나이마루야마(산내환산)유적 발굴책임자의 말을 듣고는 더욱 부끄러웠다.혼슈(본주)최북단 아오모리(청삼)의 산나이마루야마 신석기유적은 19 92년부터 발굴에 들어갔으나 이미 유물전시관이 건립되었다는 것이다.기본골격을 갖춘 야구장건설을 현지사가 중단시키고 보호조치한 유적이라니 부러운 이야기다. 이날 위안이 있었다면 지역의 선사문화를 알리려는 작은 문화원의 힘겨운 노력을 본 것이라고나 할까.양양문화원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 일 학자 선사문화의 「동아시아 공통성」 제기

    ◎강원 양양문화원서 국제 학술 심포지엄/오산리 유적 BC 6000년대 조성… 역내서 최고/“결합식 낚시·원형 움집터 한반도서 전파” 인정 한반도 동해안의 선사문화가 최근 새롭게 떠 오르고 있다.이러한 상황에서 「한·일 선사문화 교류와 양양 오산리 신석기유적의 위치」를 중심으로 한 국제학술심포지엄이 20∼21일까지 강원도 양양문화원에서 열렸다.동해안 양지역의 선사문화와 바다건너 일본 선사문화와의 연결을 시도한 이번 국제 학술행사를 지방의 작은 문화원이 주최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끌었다. 이 국제학술 심포지엄에서 검토대상으로 삼은 동해안의 신석기시대 유적은 강원도 양양군 손양면 오산리유적과 현남면 지경리 유적,그리고 동해 저편의 일본 아오모리겐(청삼현) 산나이마루야마(산내환산)유적이다.오산리유적의 중요성은 서울대 임효재 교수(고고학)가 「동아시아에서 오산리 신석기유적의 위치」를 통해 부각시켰다.오산리유적은 동해변에서 2백m 떨어진 자연호수 동북쪽 모서리 모래언덕에 있는 유적이다. 임교수는 오산리유적 맨아래층의 하한 연대가 탄소연대 측정에서 BC(기원전)6000년으로 나와 지금까지 알려진 신석기유적 가운데 가장 높다는 사실을 우선 중시했다.이는 한반도 신석기문화의 기원지로 여겨온 시베리아 연해주지역 보다 1천∼2천년이 앞선 연대라는 것이다.그리고 지난 1981년 이후 5차에 걸친 발굴에서 14기의 원형집자리가 발견되는 한편 납작밑토기,돋을무늬토기,결합식낚시,돌톱,흙요석,인물상 테라코타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소개했다. 이들 유물들 가운데 돋을무늬토기는 일본 대마도 고시다카(월고)유적에서,결합식낚시는 규슈(구주)북부에서도 출토되고 있다고 밝힌 임교수는 이를 한반도에서 전파한 선사문화의 흔적으로 보았다. 강릉대 백홍기 교수(한국사)는 「중부 동해안지역의 신석기문화」를 주제로 한 발표에서 올해 발굴한 양양군 현남면 지경리유적을 오산리유적 다음 단계의 선사문화로 보았다.특히 지경리유적 집자리에서 나온 납작밑토기 계열에 속하는 새로운 모양의 토기를 주목했다.이 납작밑토기 계열의 지경리유적 출토품은 오산리유적 맨 아래층에서 나온 납작밑토기의 전통을 계승했다는 것이다. 일본 산나이마루야마 유적 소개에 나선 아오모리 매장문화재센터 미우라(삼포규개)실장은 이 유적의 형성연대를 BC3,500∼2,000년 사이라고 밝혔다.「동아시아속의 산나이마루야마」라는 발제를 통해 이 같이 밝힌 미우라실장은 산나이마루야마 유적의 대표적 토기문화로 원통형토기를 꼽았다. 그러나 돌을 갈아 만든 도끼,뼈 연모,칠기 등의 유물과 돌무덤,흙구덩무덤,움집터 등의 유적에서는 동아시아 전체의 공동요소가 발견된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이는 결국 교류와 교역을 기반으로 한 광역문화 현상이라는 것이 미우라실장의 해석이다. 그리고 도쿄국립박물관 선사실 마츠우라(송포유낭)실장도 「신석기시대 일본과 주변지역과의 관계」에서 한·일간의 밀접한 교류를 강조했다.이 밖에 일본의 저명한 고고학자인 규슈대 니시다니(서곡정)교수와 부산대박물관장 정징원 교수(고고학)등 9명의 한일학자들이 토론자로 참여했다.
  • 일본 정치사상사 연구/마루야마 마사오 지음(화제의 책)

    ◎일 근대화의 바탕 이룬 정신세계 해부 일본 정치사상의 흐름,특히 근대화를 이룬 사상적 바탕을 밝힘으로써 현대일본 연구의 필수도서로 꼽히는 명저.지은이는 일본 학계에서 「마루야마천황」이라고 불릴 정도로 권위를 인정받는 인물이다. 한국·중국 등 동양 제국이 근대화에 실패,구미 열강의 식민지 또는 반식민지로 전락한데 비해 일본이 명치유신을 계기로 근대화를 이룩한 정신적 배경이 무엇인지를 분석했다.일본 유교가 전통적인 주자학에서 국학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자연」과 「작위」라는 개념의 대립에서 탄생한 국가제도,국민국가 형성 초기의 성격들을 다룬 논문 3편으로 구성됐다.40∼44년에 발표한 논문들임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치사상사 연구에서는 아직 이를 뛰어넘는 저술이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동양사상 연구에 몰두하는 김용옥 전고려대교수가 책에 곁들인 해제 자체도 읽어 볼 만하다. 그는 『우리 학계에는 철학사만 있고 사상사가 부재한다』고 비판하고 『이를 극복한 동아시아문명권 최초의 저서이며 일본사상사 연구의 출발점』인 이 책을 꼭 읽도록 권하고 있다. 김석근 옮김,통나무 1만5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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