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읽는 동화]화려한 월계관 -한윤이-
기린봉 골짝 계곡에서 시작되는 물줄기가 마을 앞에 이르면 물이 넉넉한 개울을 이룬다. 개울은 여름날, 아이들이 멱을 감고 물고기를 잡고 모래성을 쌓으며 노는 즐거운 놀이터였다.
오늘도 한 차례 멱을 감고 나온 아이들은 풀섶에 벗어놓았던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으며 철이와 봉섭이의 싸움을 입에 올렸다.
“철이하고 봉섭이하고 도대체 게임이 되는 상대냐고?”
“우리가 말려도 소용없어. 하여간 빨리 가보자. 시작할 시간이야!”
마을 뒷동산엔 벌써 몇몇 아이들이 철이와 봉섭이 주위에 둘러서 있었다. 단오날 그네를 맸던 소나무 아래였다. 그 뒤 잡목쪽 숲에서 싸움의 시작을 알리기라도 하듯 뻐꾸기가 ‘뻐꾸욱 뻐꾹! ’ 목청을 높였다.
얼굴이 굳어진 철이와 봉섭이가 마주 서 있고, 조금 경사진 위쪽에 6학년인 인수가 심판처럼 떡 버티고 서 있었다.
“철이야, 오늘은 싸울 것 없이 그냥 항복해라.”
“난 절대로 항복하지 않아!”
철이는 힘주어 큰 소리로 말했다. 쏘아보는 봉섭이의 눈초리가 두려움을 주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봉섭이, 너는 물론 항복 않겠지?”
“하늘 끝까지 해 보라지. 내가 저 자식한테 지는 일은 없어.”
인수의 말을 받아 봉섭이가 야무지게 내쏘았다.
철이는 가슴이 죄어듦을 느끼었다. 눈앞에 화난 형의 얼굴이 떠올랐다. 여기서 그만두면 형이 날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철이는 세상 없어도 이기고야 말겠다는 마음을 다시 다졌다.
“그럼 붙어 봐야지….”
인수는 “하나, 둘, 셋!”하고 싸움의 시작을 알렸다.
철이는 이를 악물고 봉섭이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그러나 어느새 봉섭이의 억센 손은 철이 손목을 잡고 있었다. 철이는 울고 싶었다. ‘절대로 항복할 수는 없다. 절대로….’ 마음 속으로 되뇌면서 젖먹던 힘을 다해 봉섭이의 손을 뿌리치며 공격 자세를 가다듬었다.
며칠 전 일이었다.
학교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다가 서로 공을 차지하려고 맞붙어 겨룰 때였다. 공을 빼앗기게 되자 봉섭이가 철이의 앞정강이를 발로 세차게 차는 바람에 둘 사이에 시비가 붙어 싸움이 시작되었다. 황소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힘이 센 봉섭이한테 체격은 물론 힘이 달리는 철이는 그날 실컷 얻어맞았다.
진 것이 분해서 어쩔 줄 몰라 서성일 때 고등학교에 다니는 형이 학교에서 돌아 왔다. 철이는 형을 보자마자 울움을 터뜨렸다. 형은 태권도 선수였다. 얼굴에서 싸운 흔적을 발견한 형은 대뜸 철이의 턱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임마, 너 누구한테 얻어터졌구나.”
“봉섭이… 봉섭이 새깽이가…. 축구에서 지가 반칙을 해 놓고…엉엉….”
철이는 우느라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형이 금방이라도 달려나가 봉섭이 놈을 때려 줄 것을 바랐고 또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 그런데 형은 철이의 생각과는 엉뚱했다.
“뭣이라고? 봉섭이가!”
형은 꽁! 소리가 나도록 철이의 머리통에 알밤을 먹이더니 명령했다.
“가서 회초리 가져 와!”
울상을 한 철이는 느릿느릿 현관 벽에 걸려 있는 회초리를 내려다 주었다.
“종아리 걷어! 회초리를 왜 쓰게 되는지 알지?”
철이네 집에선 누구든 바르지 못한 일이나 잘못된 일을 하면 ’사랑의 채찍‘으로 이름 붙인 회초리로 사건을 일으킨 사람을 벌주게 되어 있었다. 가족회의에서 온 가족간에 약속된 사항이었다.
철이는 형이 “알지?”하고 말했지만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철이는 한 번도 회초리를 써 먹은 적이 없었다. 물론 형을 벌주고 싶은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동생이라서 그것도 쉽게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임마! 4학년이나 되었으면서 우는 것도 창피한데, 친구끼리 다투다가 얻어맞았다고 고자질을 해? 못난이 짓이 부끄럽지도 않니? 몇 대 맞을 거야?”
철이는 ‘고자질’이라는 단어를 뇌까리며 검지와 중지손가락을 펴 내밀었다.
“두 대? 고자질이 얼마나 나쁜 건데 겨우 두 대야?”
형은 그러면서 다섯 대나 때리는 것이었다. 철이와 여섯 살 차이인 형은 부모님이 안 계실 땐 형이 부모 대신이라는 할머니 말씀을 내세우며 늘 굉장한 어른 노릇을 하려고 들었다.
“너, 봉섭이가 항복할 때까지 해 봐! 알았어!”
그날 밤 철이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봉섭이한테 힘이 달려 진 것도 분통이 터지는데, 그것 때문에 형한테 매를 맞은 것을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았다.
“엄마라면 이럴 때 어땠을까? 하지만 두고 봐! 반드시 이겨서 항복을 받고 말 거니까!’
철이는 하늘나라의 어머니를 생각하며 뒤척거리다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철이는 봉섭이에게 말했다.
“봉섭이, 너 나한테 항복해!”
“뭐? 내가 뭣 땜에 너한테 항복을 하니?”
“네가 내 공을 억지로 빼앗았잖아. 그리고 발로 나를 찼잖아? 분명히 네가 반칙을 한 거야.”
“시합은 왜 하는데? 상대팀이 가지고 있는 공을 빼내 오는 것도 기술이야. 웃기고 있네, 자식!”
“날 강제로 넘어뜨리고 찼잖아. 그건 반칙이야. 항복해!”
“축구하면서 기술적으로 공 빼내온 사람보고 잘못했다고? 그리고 넘어뜨렸다고? 발로 찼다고? 억지 부리지 마.”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는 봉섭이가 얄밉기 그지없었다. 철이는 싸움을 걸었고 결과는 철이의 완패였다. 철이는 눈물을 훔쳤다. 진 것도 분했지만 형이 봉섭이를 편들고 있는 것 같아 더 서러웠다. 그러나 울지 않은 척 시치미를 떼고 뚜벅뚜벅 집으로 들어섰다. 철이를 보자마자 형이 말했다.
“오늘 싸웠냐?”
철이는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그래서 네가 이겼냐?”
철이는 대답을 못했다.
“졌구만. 그래 울었어, 안 울었어?”
철이는 꿀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울었어, 안 울었어? 울었지? 빨리 말해, 임마!”
철이는 무겁게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런 바보! 또 울었어? 회초리 가져 와!”
형은 또 다섯 대를 때렸다.
철이는 어른도 아닌 고등학생 형한테 내가 왜 이렇게 꼼짝 못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형의 매는 어제보다 더 아팠지만 철이는 찔끔거리지 않았다. 어쩐지 형이 때리는 회초리가 시원스럽게 생각되었다.
다음 날, 철이는 봉섭이와 또 싸웠지만 역시 철이의 패배였다.
“오늘 싸움은 어땠냐?”
형은 잊지 않고 물었다.
“무승부여…….”
철이는 비로소 대답할 수 있었다. 울지 않았기 때문에 졌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랬어! 내일 또 해봐!”
형은 철이를 때리지 않았다.
토요일인 어제도 싸웠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싸울 때마다 철이는 봉섭이 밑에 깔려 버둥거렸다.
“오늘은 어땠냐?”
형은 또다시 물었다.
“무승부여.”
“그래. 내일도 싸울래?”
철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싸워 봤자 힘이 부족한 내가 봉섭이를 이길 자신은 아무래도 없었다.
“왜, 자신 없어? 임마, 항복을 받을 때까지 해야지. 내일은 꼭 항복을 받아 와! 알았어?”
형은 멍히 서 있는 철이의 머리통에 꽁! 하고 알밤을 쏘았다. 철이는 찔끔 눈물이 솟았다.
바람이 소나무를 흔들고 지나갔다. 뻐꾸기가 또 뻐꾹, 신호하듯 울었다.
“철이 너 이제 항복하고 끝내지 않을래?”
인수가 싸움이 지겹다는 듯 맥없이 말했다.
“봉섭이가 항복하기 전엔 난 절대로 항복하지 않아!”
철이는 팔을 걷어붙였다.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봉섭이를 넘어뜨리고 싶었다.
처음에 아이들은 두 편으로 나뉘었었다. 싸움의 발단이 된 축구 시합 때 봉섭이 팀이었던 아이들은 봉섭이 편으로, 철이와 뛰었던 아이들은 철이 편으로 자연스럽게 나뉘어서 서로가 옳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싸움이 거듭되면서 맨날 봉섭이 밑에 깔리는 철이를 보는 아이들의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제 이편저편 없이 싸움을 끝냈으면 했고, 은연중에 힘이 센 봉섭이의 양보를 생각하였다.
‘오늘은 저 봉섭이 자식을 폼나게 때려눕혀야지. 그리고 형한테 얘기해야지. 형! 오늘, 기어코 내가 이겼어!’
철이는 죽어도 봉섭이를 때려눕혀야 될 것 같았다.
철이는 쏘아보는 봉섭이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리면서 돌진해 들어갔다. 엎치락뒤치락하더니 기어코 철이가 봉섭이 아래 깔렸다.
“항복해, 새끼야!”
철이의 가슴을 깔고 앉은 봉섭이는 주먹을 휘두르며 말했다.
철이는 있는 힘을 다해 봉섭이 발을 끌어안고 옆으로 뒹굴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막 일어서려는 봉섭이 허리를 발로 찼다. 화가 난 봉섭이는 다시 철이를 쓰러뜨리면서 목을 졸랐다. 숨이 막혔다. 철이는 용을 쓰며 몸을 비틀면서 봉섭이 손가락을 물었다. 봉섭이가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난 죽어도 항복 안 한다. 너나 항복해!”
철이는 악을 썼다. 결코 울지 말아야지. 울지 말아야지…….
철이는 몸부림을 쳤다.
다시 봉섭이의 큰 손아귀가 철이의 팔목을 비틀며 덤빌 때였다.
“임마, 너희들 이제 그만해!”
철이의 형이었다. 언제 왔는지, 형은 둘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철이는 눈앞이 캄캄했다. 내가 지는 걸 형이 봐 버렸네…….
“일어서!”
둘을 일으켜 세운 형은 철이를 향해 싱긋 웃었다.
“됐어! 잘들 했어. 너희 둘이 다 씩씩해서 좋아….”
그리고 형은 비탈진 쪽 덤불 밑에서 무엇인가 꺼내 들고 왔다. 꽃목걸이 같았다.
“월계관을 씌워주마. 두 사람의 승자를 위해 형이 준비한 선물이다.”
분홍색이 고운 자귀나무 꽃으로 만든 머리띠였다. 댕댕이덩굴로 끈을 꼬아 자귀나무 잎과 자귀꽃으로 만든 왕관 같은 머리 띠! 올림픽 때 마라톤 우승자에게 씌워주는 월계관도 저보다는 못할 것 같았다.
아이들은 자귀꽃 월계관을 쓴 둘의 모습에 입을 딱 벌리고 “우와! 근사하다!” 탄성을 질렀다.
“내가 옳다고 주장하는 걸 상대방이 받아들이게 하려면 상대방을 설득시켜야지, 싸움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이번에 너희들은 훌륭한 공부를 했구나.”
철이는 형의 뜻을 쉽게 몰랐지만 형의 말을 듣는 순간 그 동안 무거웠던 마음속이 뻥 뚫리는 듯 시원해짐을 느끼었다. 그것은 봉섭이나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은 홀가분한 기분으로 다같이 노래라도 부르듯 소리쳤다.
“자, 이제 우리, 멱 감으러 가자!”
뻑뻐국! 숲에서는 뻐꾸기가 노래하고, 높은 하늘엔 한가로이 구름이 떠가고 있었다.
●작가약력
197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 작품집 ‘하늘을 오르는 사람’ ‘동전을 만드는 돌층계’ ‘저녁노을’ ‘종이배와 물총새’ ‘다섯손가락 끝의 무지개’(장편) 외 다수. 현재 한국여성문학인회 이사.
●작가의 말
어린이들은 싸우면서 큰다는 말이 있다.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길이 뚫리면 쉽게 접근하고 이해하는 게 어린이들이다. 여름날 시골에서 멱 감고 그네 뛰고 고기 잡으며 시커멓게 그을린 건강한 어린이들의 발랄한 모습이 어른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