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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주의 어린이 책] “아빠, 이가 흔들려요” “소원을 빌어보렴”

    [이주의 어린이 책] “아빠, 이가 흔들려요” “소원을 빌어보렴”

    어느 날 아침/로버트 맥클로스키 글·그림/장미란 옮김/논장/64쪽/1만 2000원혹시 어렸을 때 젖니가 빠진 순간을 기억하시는지요. 물론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 대부분 몹시 놀랐던 기억이 있으실 겁니다. 흔들리는 작은 이를 혀로 건드렸을 때의 낯선 느낌과 결국 빠진 이를 눈앞에서 확인했을 때의 그 공포감이란 아무래도 처음으로 겪어본 느낌이었을 테니까요. 한걸음 성장한 아이를 마주한 부모에게도 특별한 순간이었을 겁니다. 미국을 대표하는 아동문학가 로버트 맥클로스키가 쓰고 그린 ‘어느 날 아침’의 주인공 샐도 어느 날 잊지 못할 순간을 경험합니다. 문득 거울을 봤는데 이가 곧 빠질 듯 흔들리는 거에요. 엄마에게 쪼르르 달려가 물어 보니 더 튼튼한 이가 나기 위해서랍니다. 게다가 빠진 이를 베개 밑에 넣어 두고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니 걱정했던 순간도 잠시, 마냥 신이 납니다. 샐은 하늘을 날아가는 물수리에게, 헤엄치는 되강오리에게, 바다에서 고개를 비죽 내민 바다표범에게 자랑하기 시작하죠. “나 이가 흔들린다!” 소원도 소원이지만 엄마가 ‘이젠 다 컸다’며 대견해하시는 모습을 보고나니 왠지 모르게 뿌듯해졌거든요. 하지만 아빠에게 이가 흔들린다는 걸 자랑하려던 순간 이가 이미 빠져버렸다는 걸 깨달아요.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먹게 해달라는 비밀 소원을 빌지도 못했는데 말이죠. 울음을 꾹 참아낸 샐은 빠져버린 이 대신 갈매기 몸속에서 빠져나온 깃털에 대고 소원을 빕니다. 샐이 이를 잃어버리고도 담대하게 행동할 수 있었던 건 아마도 이가 빠진 빈자리에 솟아난 새로운 기쁨과 희망 덕분이었겠죠. ‘잃어야 결국 얻을 수 있다’는 중요한 깨달음은 비단 아이에게만 해당되는 건 아닐 겁니다. 그나저나 샐은 소원을 이뤘을까요.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배우 박하선, 출산 후에도 변함 없는 미모 ‘ 첫딸을 품에 안고~’

    배우 박하선, 출산 후에도 변함 없는 미모 ‘ 첫딸을 품에 안고~’

    배우 박하선이 출산 후에도 한결같은 미모를 자랑했다.11일 배우 박하선(32)이 자신의 SNS를 통해 근황을 전했다. 박하선은 이날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태우 실장님과 따뜻한 작업”이라는 내용의 문구와 함께 사진 한 장을 공개했다. 사진 속 박하선은 딸을 품에 안고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다. 특히 박하선은 출산 후에도 예전과 같은 청순한 모습을 자랑해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를 본 네티즌은 “여전히 아름다우시네요”, “옆모습이 어쩜...여신같아요”, “살짝 보이는 아이도 엄마도 모두 행복하시길”, “천사가 따로 없네요”, “완전 동안...더 예뻐졌어요”라는 반응을 보이며 박하선의 변함없는 미모에 감탄했다. 한편 박하선은 지난해 1월 동료 배우 류수영과 결혼해, 그해 8월 첫딸을 출산했다. 사진=박하선 인스타그램 연예팀 seoulen@seoul.co.kr
  • 나비와 나방, 정설보다 7000만년 앞당겨진 2억년 전부터 진화

    나비와 나방, 정설보다 7000만년 앞당겨진 2억년 전부터 진화

    나비와 나방은 정설로 알려진 1억 3000만년 전보다 훨씬 오래 전인 2억년 전부터 지구에 존재해왔다는 새로운 주장이 나왔다. 독일 하노버에서 발굴된 고대 암석 가운데 먼지 덩이만큼 아주 작은 나비 화석을 연구한 결과 곤충 중에서도 가장 각광받고 많이 연구되는 나비목의 기원과 초기 진화에 관해 많은 새로운 정보가 나왔다고 영국 BBC가 11일 전했다. 나비와 나방은 워낙 부러지기 쉬운 종이라 화석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이례적인 일로 여겨진다.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대학 연구진은 산(酸)을 이용해 고대 암석을 잘게 쪼갠 뒤 초기 나방과 나비의 날개들을 완벽하게 보존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이 대학의 바스 판데 슈트브뤼헤 박사는 “이 정도 크기의 형태에서도 완벽한 유기체를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흥미롭게도 이들 나비와 나방들은 과즙을 잘 삼킬 수 있는 스토로 모양의 혀를 갖고 있어 오늘날의 그것과 같은 종에 속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판데 슈트브뤼헤 박사는 “이번 발견으로 우리는 혀나 (곤충의) 입을 갖고 있는 종의 진화를 거의 7000만년 가까이 앞당길 수 있게 됐다”고 말한 뒤 “꽃과 함께 진화해온 것으로 추정되는 이 종자가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오래 전 독자 생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쥐라기는 공기 중의 꽃가루를 잡아 단 과즙을 생산할 수 있는 송백류(松柏類·conifers) 같은 겉씨식물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였다. 원시 곤충은 이 과즙을 먹고 자랐을 것이며, 꽃을 피우는 식물이 1억 3000만년 전 출현하면서 나비가 함께 진화했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이번 연구에 함께 하지 않아 조금 더 객관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는 영국 맨체스터 대학의 러셀 가우드 박사는 휘감긴 입 부위가 이들 동물들이 꽃가루를 옮기면서 진화했다는 것이 정설이었다며 “새로운 증거들은 아마도 휘감긴 입 부위는 꽃식물이 진화하기 전 다른 역할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저널 사이언스 어드밴시스에 실린 이번 연구는 또 어떻게 나비와 나방이 전 세계에 살아남아 남극만 제외하고 모든 대륙에서 살아남았는지를 밝힐 단서를 제공했다. 초기 나비목들은 지구의 많은 다른 생명체들을 휩쓸어버린 트라이아스기(삼첩기·三疊紀) 말에도 살아남았다. 공동 논문의 대표 저자인 티모 판엘지크 박사는 현재 인공적으로 기후를 변화시키려는 노력이 곤충류와 그들의 진화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 폭넓은 정보를 제공할 것이라며 현대의 종 보호 노력에 대해 많은 지식을 알려줄 것이라고 말했다. 과학자들은 지금도 현대 나비, 나방의 유전자 증거를 통해 생명의 진화 과정을 파악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을 받고 있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김재원 “물고기와 교감하는 중” 갯바위서 두 손 뻗는 모습 포착

    김재원 “물고기와 교감하는 중” 갯바위서 두 손 뻗는 모습 포착

    배우 김재원이 ‘도시어부’에 출연해 물고기와 교감한다.11일 방송되는 채널A ‘나만 믿고 따라와, 도시어부‘(이하 ‘도시어부’)에서는 대마도에서 긴꼬리 벵에돔 낚시에 도전한 김재원의 모습이 공개된다. 김재원은 갯바위에 올라 두 손을 바다로 뻗는 등 물고기와의 교감을 시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김재원은 진지하게 “물고기와 교감하는 중이다”라고 말하며 ‘4차원 매력’을 뽐내 현장을 웃음바다로 만든다. 그러다 잠시 후 실제로 입질을 받고 낚싯대를 움켜쥐어 이덕화와 이경규, 마이크로닷을 긴장하게 만든 것으로 알려져 본 방송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다. 한편, 김재원이 출연하는 채널A ’도시어부‘는 이날 오후 11시에 방송된다. 사진=채널A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악어를 구조하기 위해 스스로 물에 빠진 남성

    악어를 구조하기 위해 스스로 물에 빠진 남성

    한 미국 남성의 믿기 어려운 놀랄만한 ‘직업 정신’이 화제다.  10일(현지시각) 외신 케이터스 뉴스 에이전시를 통해 소개된 영상엔 지난 6월 초 악어가 득실대는 물 속으로 뛰어든 제이슨 맥도날드(34)라는 용감무쌍한 사람의 사연이 담겨 있다.  콜로라도 악어 농장에서 일하고 있는 제이슨은 농장 주위를 둘러보다 물 속에서 부상당한 악어 한 마리를 발견했다. 악어는 앞쪽과 뒤쪽 다리에 깊은 상처를 입은 상태였으며 그는 악어의 상처가 즉시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농장 주위를 어슬렁 거리고 있었는데 물 속에서 악어 한 마리가 수면 위로 튀어나왔다. 악어에게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또한 “밧줄이나 최소한의 보호 장비가 없었기 때문에 악어를 잡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장비를 갖추고 다시 악어에게 접근하면 물속으로 잠수해 사라질 것이 분명했고 그러면 잡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칠 것 같았다”며 당시의 긴박한 상황을 설명했다.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물 위에 쳐진 슬랙라인(Slackline) 위에서 ‘그놈’을 잡기 위해 물속으로 점프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는 아슬아슬 슬랙라인을 타고 가다가 악어 위로 온 몸을 던졌다. 그리고 안전하게 물 밖으로 악어를 꺼냈다. 그는 순간의 공포가 기쁨이 됐음은 물론 ‘기념 촬영’까지 무사히 마쳤다.  “당시엔 농장이 악어 번식철이었다. 많은 악어들이 자신의 영역을 차지하기 위해 싸웠다. 이 놈은 크기가 큰 편이 아니기 때문에 아마도 자기보다 몸집이 큰 악어에게 공격당해 상처를 입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또한 “물속 악어를 잡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며, 난 악어를 잡기 위해 물속으로 뛰어든 최초의 사람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외신은 제이슨의 ‘놀라운 노력’ 덕에 상처 입었던 악어의 건강은 현재 회복된 상태며 콜로라도의 멋진 햇살 아래에서 즐거운 삶을 보내고 있다고 전했다. 사진·영상=STORYTRENDER by Caters TV/유튜브  영상팀 seoultv@seoul.co.kr
  • 美국무 “남북회담 이은 북미대화 가능성은 아직 이르다”

    美국무 “남북회담 이은 북미대화 가능성은 아직 이르다”

    렉스 틸러슨 미국 국무장관은 5일(현지시간) 다음주 열리는 남북 첫 고위급 회담에 따른 북미 대화 가능성에 대해 “그들(남북) 대화의 결과가 어떨지 좀 기다려 볼 필요가 있다. 지켜보자”고 말했다.틸러슨 장관은 이날 CNN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이번 남북대화 재개가 북미 대화 내지 핵 협상의 시작인가’라는 질문에 “아직 말하기는 너무 이르다고 생각한다”며 이같이 밝혔다. 그는 “어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문재인 대통령과 좋은 통화를 가졌고, 나도 그 자리에 있었다”며 “한국의 계획은 올림픽에 대해 대화하는 것이다. 이번 올림픽과 북한의 참석이 당연히 한국에는 매우 중요한 이벤트인 만큼, 우리는 이 부분이 만남의 내용일 것으로 이해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틸러슨 장관은 “따라서 지금 상황에서 어떤 결론을 내리기는 조금 어렵다”고 덧붙였다. 그는 ‘북한이 좀 더 대화에 관여하겠다는 긍정적 신호일 수 있지 않은가’라는 질문에도 “글쎄, 지켜보자”라고 답했고, ‘다음 (대화의) 순서는 당신 아니냐’는 질문에도 “지켜보자”고만 했다. 특히 틸러슨 장관은 “아마도 어떤 이들은 이번이 그들(북한)이 채널을 열려는 첫 번째 노력이라고 추측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며 “그러나 아시다시피 우리는 일정 기간 북한에 채널을 열어뒀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우리와의 대화에 관여할 준비가 돼 있다면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와야 할지 알고 있다”고 말했다. 또 “우리의 정책은 여전히 완전하고 검증 가능한, 불가역적인 한반도의 비핵화로, 이는 중국, 러시아 등 이웃 지역의 모든 나라와 국제사회가 함께 하는 바”라며 “궁극적으로 어떻게 완전한 비핵화에 도달할 것인가. 그건 좀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우리가 어떻게 대화를 시작할지에 대해선 아직 결정되지 않았지만, 그러나 북한이 대화가 그 결론(비핵화)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걸 이해한다는 신호를 분명히 보내야 한다”며 “그 결론에 어떻게 도달할 것이냐에 대한 경로, 그것이 협상의 본질이다. 그러한 목적을 성취하려면 일정한 ‘주고받기’가 있어야 할 것이다. 목표는 결코 바뀌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북한이 자신들을 위한 더 안전한 미래와 주민을 위한 더 번영한 미래를 설계할 수 있게 되는 것도 이러한 대화를 통해서”라며 “이러한 대화를 통해 북한과 지역 안전을 위한 매우 긍정적인 결과가 나올 것이다. 이것이 협상의 본질”이라고 덧붙였다. 틸러슨 장관은 또 “트럼프 대통령이 매우 분명히 해왔듯 우리의 목표는 외교적 노력을 통해 비핵화를 성취하는 것이지만, 이러한 외교적 노력은 필요하다면 강력한 군사적 옵션에 의해 뒷받침된다는 것”이라며 “그것(군사적 옵션)이 첫 번째 선택은 아니며 트럼프 대통령도 그게 자신의 첫 선택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 왔다”고 밝혔다. 그는 “그러나 모든 국가 뿐 아니라 북한도 우리의 외교적 노력이 충분히 지지받도록 노력해 나가는 일이 얼마나 위험부담이 큰일인지 알아야 한다”며 “미사일과 핵실험을 계속한다면 북한은 제재, 그리고 다른 조치들이라는 관점에서 그들에 대한 징벌이 계속되고 더 혹독해질 것이라는 걸 명심해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 틸러슨 장관은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면 군사행동이 대통령과 당신이 계속할 방식이라는 소리로 들린다’고 지적하자 “그런 식으로 규정하도록 두겠다. 나는 우리의 모든 패를 다 보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서울광장] 서민 잡는 ‘답정너’ 교육 정책/황수정 논설위원

    [서울광장] 서민 잡는 ‘답정너’ 교육 정책/황수정 논설위원

    모르겠다. TV 장수 드라마 ‘전원일기’의 웃긴 장면이 왜 생각났는지는. 양촌리 마을회관의 고장 난 스피커가 아침저녁 삑삑 파열음을 낸다. “아, 아, 마이크 테스트.” 얼치기 이장은 의욕 하나는 끝내준다. 마을을 살리겠다며 동분서주 원맨쇼다. 그런데 뭔 생각을 하는지 위태위태하다. 아침저녁 터뜨리는 말이 중구난방. 선무당이 사람 잡을라. 밥숟갈 들다 말고 동네 사람들, 밥맛이 똑 떨어진다.이 코믹 시퀀스의 얼치기 이장이 지금 교육부다. 전국 유치원과 어린이집의 방과후 영어 수업을 내년부터 금지하겠다고 한다. 예고편도 없이 지난주 불쑥 꺼냈다. 영어 조기 교육을 막겠다는 ‘좋은’ 취지다. 그렇건만 학부모들의 성토는 폭탄급이다. 월 3만원짜리 수업을 막겠다면 비싼 영어학원에 보내라는 말이냐, 제정신이냐 등 원색적 비난이 빗발친다.정책은 사람이 하는 일이다. 판단이 흐릴 수 있다. 하지만 오판도 오판 나름이다. 선행학습금지법에 따라 교육부는 이미 초등 1, 2학년 영어 수업을 전면 금지했다. 새 학기부터 초등 방과후 영어 수업이 중단된다. 사실은 그게 더 말이 안 되는 문제다. 초등 방과후 수업을 누가 듣나 따져 보자. 학원 보낼 형편이 안 되는 저소득층, 방과후 돌봄이 필요한 맞벌이의 자녀들이 열에 아홉이다. 영어학원은 꽉 차서 문이 안 닫히는데, 영어 공부 흉내라도 내겠다는 아이들한테 선행학습 불가라며 정색하는 꼴이다. 이런 퇴행 정책을 소매 걷고 만든 사람이 누군지 궁금하다. 정책 실명제가 이럴 때는 절실하다. 취지만 저 높은 곳에서 홀로 반짝거리는 정책은 민생을 되레 고달프게 한다. 없느니만 못할 수 있다. 교육부 사람들은 초등 3학년 영어 교과서를 보기나 했나 모르겠다. 영어 회화 문장을 3학년이 되면 갑자기 무슨 수로 읽어 내나. 취지를 살리겠다면 교과서부터 바꾸는 실질을 챙겨 줘야 앞뒤가 맞다. 현실감각 없이 독야청청인 교육정책에는 민생이 이런 아이러니를 겪어야 한다. 성난 댓글 하나 퍼왔다. “서민은 못 하는 게 왜 자꾸 많아지나. 사법시험 못 치지, 금수저 전형(학종)이라서 대학 가기 힘들지, 이제는 학교에서 영어까지 못 배우나.” 영어 방과후 수업이 교육의 근간을 흔들 일은 없다. 비판이 계속 부글거리면 내일이라도 교육부는 없던 일로 돌릴 수 있다. 답답한 것은 하나를 보면 열을 알기 때문이다. 대책 없이 선의(善意)의 칼날만 잔뜩 벼리는 진보 교육의 해법이 점점 난감하다. 공교육 살리기와 교육 평등주의는 박수받을 가치다. 그렇다고 불편한 현실은 외면하고 머리만 파묻는다면 그건 타조다. 타조는 날기를 포기해서 자꾸 뇌용량이 작아지는 새 아닌 새다. 지금 정부의 교육정책은 장마당 좌판마냥 어수선하다. 뭣 하나 해결하지 않고 건드려만 놓고 있으니 교육 현장은 그저 처분만 기다린다. 입이 쓰지만, 자사고와 특목고를 죽이는 게 최선이라고 결정했다면 단칼에 해결해 줘야 했다. 비겁하게 말려 죽이기 작전으로 방향을 튼 바람에 똥바가지는 학생들이 뒤집어쓰고 있다. 올해 특목·자사고의 막차를 탄 중3들은 모 아니면 도의 마음으로 진학한다. 내년부터 특목·자사고와 일반고 신입생을 한꺼번에 뽑겠다는 폭탄 정책에 중학교는 혼돈의 도가니다. 특목고 떨어져 정원 미달 일반고가 없으면 고입 재수를 각오해야 한다. 외줄 타기 진학 베팅이다. ‘답정너’(답은 정해졌으니 너는 대답만 해라). 진보 교육 정책을 꼬집는 말이다. 대형 정책들이 공론화 없이 일방통행으로 결정돼 폭탄 터지듯 하니까 그렇다. 지난주에야 출범한 국가교육회의에도 안됐지만 기대가 크지 않다. 특목·자사고 처리, 대입 절대평가 확대 여부 등이 정해진 밑그림대로 진행될 거라는 예상이 시중의 대세다. 김상곤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친(親)전교조 진보 교육감들과 다른 목소리를 내줄 것 같지 않다. 평등주의 교육의 선의가 덮어 놓고 언제나 최선일 수는 없다. 하고 싶은 것만 하지 말고 제발 인터넷 댓글이라도 좀 보라고들 아우성이다. “꽃가마도 싫고 꽃방석도 싫다”는 말이 정작 교육 서민들 입에서 나오고 있다. 진짜 문제 아닌가. sjh@seoul.co.kr
  • [노주석의 서울살이] 런던, 로마 그리고 서울

    [노주석의 서울살이] 런던, 로마 그리고 서울

    지난 연말 런던과 로마를 다녀왔다. 모스크바보다 추웠다는 서울에 비하면 가을 날씨였다. 브리티시뮤지엄이나 바티칸뮤지엄을 줄 서지 않고 입장하는 건 비수기 여행의 특권이다. 두 곳 다 한국어 오디오가이드를 귀에 대고 여유작작했다.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성당 프레스코화를 30분이나 느긋하게 감상하는 사치도 누렸다. 사진 촬영을 금하는 성당에 들어와 천장 한 번 올려다보고 빠져나가는 단체 관광객들이 불행해 보였다.근대의 종주도시 런던과 고대도시의 원형 로마를 오가는 일정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새로 건설되다시피 한 현대도시 서울과 비교해볼 기회였다. 가능한 한 걸었다. 도시는 걸어야 보이고, 발바닥으로 느껴야 한다는 지론을 입증하고 싶었다. 휴대전화 만보기에 찍힌 ‘37576’을 임계점으로 하루 평균 2만보 이상 강행군했다. 런던은 걷기 좋은 도시였다. 지하철과 버스가 촘촘하게 연결하는 도심은 쾌적했고 활기로 가득했다. 캐리어를 끌고 다니는 여행자 처지에서 보면 무장애 도시에 가까웠다. 로마는 20여년 전 첫 여행 때와 별반 달라진 게 없었다. 어수선하고, 지저분하고, 접근성이 떨어졌다. 자동차가 사람보다 먼저고, 웬만한 도로에는 보행신호등조차 없다. 무장한 대테러 병력과 경찰이 관광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하지만 누가 로마를 미워할 수 있으리. 두 곳 중 선택하라면 서슴없이 로마를 꼽을 것이다. 불멸의 역사와 열정의 문화가 지배하는 이 도시가 좋다. 습하고 각진 런던보다 체질에 맞다. ‘칩스앤드 피시’와 맥주에 만족해야 하는 런던과 달리 로마의 길거리에는 젤라토와 돌체, 에스프레소, 피자, 와인이 넘쳐난다. 여행하면 식도락 여행 아닌가. 검은 사각돌 보도를 걷는 재미도 쏠쏠하다. 변하지 않는 게 로마의 매력이다. 여행혁명이 진행형이다. 지도를 들고 다니는 여행자는 좀처럼 보기 어렵다. 다들 각자의 휴대전화 속 구글맵을 따라다닌다. 통역앱으로 웬만한 소통이 가능하다. 한국말글로 안내하는 구글맵에 현지의 지하철과 버스 시간이 나오니 조작법만 알면 못 찾아 갈 곳이 없다. 그래서인지 로마나 런던에는 기본적인 안내판만 드문드문 있었다. 사람들이 갖고 다니는 여행서적도 세분화, 전문화돼 있었다. 바티칸은 로마와 별개 책자로 다뤄지고 있었고, 국가별 여행서적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 와중에 런던의 여행 전문서점 돈트북스 진열장에 전시된 한국 책 8권 중 서울 여행 책자는 3권뿐이었다. 걷기 측면에서 서울은 두 도시와 비교하면 어중간하다. 편의성은 갖췄지만 런던의 모던함이나 로마의 클래식함을 따라잡지 못한다. 걷는다는 것은 분위기에 젖는 것인데 도시의 정체성이 분명하지 못한 서울에는 두 도시에서 느껴지는 그런 독특한 분위기가 없다. 게다가 보행을 가로막는 노상 적치물은 최악이다. 가게에서 내놓은 진열대와 물건들이 보도의 절반을 차지한다. 갈 곳을 잃고 도로와 보도를 횡행하는 자전거는 보행 환경을 더 어지럽힌다. 갈수록 늘어나는 안내판은 요령부득이요 시대역행적이다. 불행하게도 현대도시 서울은 근대 산업도시 런던이나 고대 제국도시 로마가 가진 고유한 색깔과 향기를 갖지 못했다. 런던은 새로 만든 테이트 모던과 17세기 세인트폴 대성당이 균형을 이루며 근대와 현대가 어울렸다. 로마도 기원전 62년에 세워진 파브리치오 다리와 기원후 80년에 완공된 콜로세움을 중심으로 2000년의 역사가 살아서 넘실댔다. 서울은 어떤 도시로 정립할 것인가.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깎아지른 듯한 두 봉우리가 먼저 중국의 사신을 맞았네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깎아지른 듯한 두 봉우리가 먼저 중국의 사신을 맞았네

    ‘아침 밀물을 타고 항해해 군산도에 정박했다. 열두 봉우리의 산이 잇닿아 성과 같이 둥그렇게 둘러 있다. 배 여섯 척이 맞이하는데, 무장한 병사들을 태운 채 징을 울리고 호각을 불며 호위했다. 따로 작은 배에 탄 초록색 도포 차림의 관리가 홀(笏)을 바로 잡고 배 안에서 읍(揖)했다.’중국 북송(北宋)의 사절단을 태운 배가 군산도에 들어오는 장면을 묘사한 ‘고려도경’의 한 대목이다. 북송의 휘종은 1123년(인종 1) 로윤적(路允迪)과 부묵경(傅墨卿)을 정·부사로 고려에 국신사(國信使)를 파견한다. 이 외교 사절단에는 북송 당대 서화(書畵) 모두에서 높은 평가를 받던 서긍이 수행원으로 참여했다. 그가 글과 그림으로 남긴 일종의 사행(使行) 보고서가 ‘고려도경’으로 잘 알려진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이다. 모두 40권으로 바닷길은 34~39권에서 다루었다. 서긍은 이렇게 이야기를 이어 간다. ‘배가 섬으로 들어가자 100명 남짓이 연안에서 깃발을 잡고 늘어서 있었다. 동접반(同接伴)이 편지와 함께 아침상을 보내왔다. 정·부사가 국왕선장(國王先狀)을 보내니 접반이 배를 보내 군산정(群山亭)으로 올라 만나주기를 청했다’‘국왕선장’이란 사신이 국왕과 만나기 전에 자신들이 도착했음을 알리는 일종의 통고문이라고 한다. 동접반은 외교사절단을 맞이하는 총책임자, 접반은 실무책임자다. 당시 동접반은 우리도 잘 아는 인물이었는데, 바로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金富軾·1075~1151)이다. 서긍은 고려의 인물을 다룬 제8권에서 ‘동접반 통봉대부 상서예부시랑 상호군 사자금어대’라는 직함을 길게 나열하면서 김부식을 별도의 항목으로 다루었다. ‘풍만한 얼굴과 큰 체구에 얼굴이 검고 눈이 튀어나왔다’고 묘사하면서 ‘그러나 널리 배우고 많이 기억하여 글을 잘 짓고 고금의 일을 잘 알아 학사(學士)들의 신망을 누구보다 많이 받았다’고 호평했다.환영행사가 벌어졌을 군산정은 이렇게 설명했다. ‘군산정은 바다에 다가서 있고 뒤에는 봉우리가 둘 있는데, 나란히 우뚝한 봉우리는 절벽을 이루고 수백 길이나 치솟아 있다. 문밖에는 10칸 남짓한 관아 건물이 있고, 서쪽 작은 산에는 오룡묘(五龍墓)와 자복사(資福寺)가 있다.’ 서긍이 말한 군산도는 고군산군도(古群山群島) 한복판의 선유도, ‘두 봉우리’는 선유도의 상징과도 같은 망주봉((望主峰)이다. 당시는 고군산군도를 이루는 섬을 통틀어 군산도라 불렀던 듯싶다. 고군산군도는 야미도·신시도·무녀도·선유도·장자도·방축도·관리도를 비롯한 63개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고려시대에는 수군진영을 두어 군산진(群山鎭)이라 불렀는데, 조선 세종시대 군산진을 육지로 옮기면서 땅이름까지 가져가고 남은 섬들에 옛 ‘古’(고)자를 넣은 새 이름을 주었다는 것이다.선유도는 서해안에서 가장 인기 있는 피서지의 하나다. 마침 지난해 12월 28일 새만금방조제에서 신시도·무녀도·선유도·장자도를 잇는 자동차 도로가 개통됐다. 연결 교량 건설로 과거 배를 타고 한 시간이나 걸리던 고군산군도의 주요 섬들이 사실상 육지가 된 것이다. 무녀도에서 새로 지은 선유교를 건너면 선유도의 남섬이다. 조금 더 달려 오른쪽으로 좁은 산길을 따라가면 선유도해수욕장이 눈앞에 펼쳐진다. 북쪽을 바라보면 활 모양으로 크게 휘어진 해수욕장의 모래사장 너머로 북섬 초입에 인상적인 모습의 벌거벗은 바위 봉우리 두 개가 시야에 들어온다. 망주봉이다. 망주봉에 가까이 가면 길가에 군산정과 관사, 자복사, 오룡묘, 숭산행궁(?山行宮)이 있었음을 알리는 안내판을 볼 수 있다.망주봉 일대에서는 2011년 지표조사 이후 발굴조사가 이어지고 있다. 군산대 박물관은 2014년 군산정 터를 확인하고 외교사절 접대에 썼음직한 최상급 청자와 당시 기와를 여럿 수습했다. 학계는 대체적으로 군산정과 관사가 두 봉우리 사이의 남쪽, 자복사와 숭산행궁은 봉우리 동쪽에 자리잡았던 것으로 보고 있다. 망주봉 동쪽 기슭에 오룡묘가 남아 있는 것은 다행스럽다. 서긍이 ‘뱃사람들은 그것에 퍽 엄숙하게 제사를 올린다’고 했던 그대로 오룡묘는 고군산군도가 삶의 터전인 사람들이 해신(海神)에게 제사 지내는 기능을 지금껏 이어 오고 있다. 오룡묘에 오르면 국신사 일행을 태운 배가 정박했을 선유도의 잔잔한 내해(內海)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오룡묘 뒤편에 있었을 자복사는 불교국가 고려의 관아 부속 사찰이었다.군산정 앞바다는 서북쪽으로는 선유도의 북섬과 남섬, 남동쪽으로는 무녀도가 에워싸고 있다. 동쪽의 일부만 바다가 열려 있는데 그것도 신시도가 호위하듯 멀리서 가로막고 있다. 서긍이 ‘열두 봉우리의 산이 잇닿아 성과 같이 둥그렇게 둘러 있다’고 묘사한 그대로다. 망주봉 일대 유적을 돌아보고 섬을 나서는 길에 여유가 있다면 선유교 바로 건너 주차장에 잠깐 차를 세우기를 권한다. 선유교에 올라 망주봉을 바라보면 일대가 군사기지로서는 물론 먼바다를 건너온 외교 사절에 환영행사를 베푸는 데 최적의 장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학계에서도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숭산행궁이다. 우리가 아는 행궁(行宮)이란 왕이 궁궐 밖으로 행차할 때 머무는 별궁이다. 지역에서는 글자 그대로 고려시대 행궁이 있었을 것으로 믿는 분위기다. 하지만 서긍은 ‘큰 수풀 가운데 작은 사당이 있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숭산신의 별묘라고 한다’고도 했다. 따라서 학계는 숭산행궁이 숭산별묘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숭산은 개성의 진산인 송악을 가리킨다. ‘임금이 계신 곳을 그리워한다’는 뜻을 가진 망주봉의 이름과도 상통한다는 점에서 일리가 없지 않다. 고려와 북송의 외교와 교역은 애초 산둥반도와 대동강 하구를 거쳐 예성강을 잇는 북로(北路)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거란이 중국 북방을 휩쓸자 고려와 북송은 1074년(문종 28) 남쪽의 명주에서 서해를 건너 흑산도~군산도~마도~자연도~예성항을 잇는 남로(南路)를 이용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 경로에 외교사절 접대에 필요한 시설을 마련하는 작업도 이때부터 본격화됐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서긍은 흑산도를 지나며 ‘옛날에는 이곳이 사신의 배가 묵는 곳이었다. 관사도 아직 남아 있다’면서도 ‘그런데 이번 길에는 정박하지 않았다’고 했다. 흑산도 관사 유적은 1987년부터 2000년까지 목포대 팀이 벌인 세 차례 지표조사에서 흔적을 찾았다. 이후 전남문화재연구원이 2013년과 2014년 두 차례 발굴조사를 벌여 건물터를 확인하고 기와와 청자, 희령통보를 비롯한 송나라 화폐도 수습했다. 마도의 환영행사는 안흥정에서 열렸다. 마도라면 최근 앞바다에서 고려시대 침몰선이 다수 발견되어 수중고고학의 보고로 떠오른 태안 앞바다의 섬이다. 안흥정이 세워진 것은 1077년(문종 31)이라고 한다. 자연도는 인천국제공항이 들어선 지금의 영종도다. 자연도에도 사신을 접대하는 경원정이 있었다. 우리에게 ‘외교 유적’이란 흔치가 않다. 선유도 연륙교의 개통으로 높아질 망주봉 유적에 대한 관심이 흑산도·마도·영종도 유적의 실체 확인으로 이어졌으면 좋겠다. 글 사진 dcsuh@seoul.co.kr
  • 中 6자 수석 “한·미 훈련 연기는 사실상 쌍잠정”

    中 6자 수석 “한·미 훈련 연기는 사실상 쌍잠정”

    “한반도 안정적 방향으로 가는 데 도움 北 평창 참가 환영… 남북 지속 교류 희망 北이 南과 소통할 수 있도록 촉진할 것” 쿵쉬안유 중국 외교부 부부장 겸 한반도사무특별대표는 5일 한국과 미국이 평창동계올림픽 기간 연합군사훈련 연기에 합의한 데 대해 “사실상의 ‘쌍잠정’(한·미 군사훈련과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을 잠정적으로 중단)”이라고 평가했다.쿵 부부장은 이날 서울 외교부 청사에서 이도훈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 한·중 북핵 6자회담 수석대표 협의를 한 뒤 기자들과 만나 “한국 측은 ‘쌍잠정’이라고 말하지 않아도 되지만, 사실상 쌍잠정이다. 내 생각에 이는 한반도 정세가 안정적인 방향으로 가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쌍잠정은 ‘쌍중단’으로 불리는 중국의 북핵 해법이다. 쿵 부부장은 “북한 측이 동계올림픽에 대표단을 파견한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양팔을 벌려 환영해야 하지 않나”라면서 “우리는 전적으로 지지하며 평창올림픽이 끝난 이후 남북이 지속적으로 교류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이어 ‘일이 잘 풀려 시작하자마자 성공을 거둔다’는 의미의 4자 성어 ‘마도성공’(馬到成功)을 인용해 성공적 회담을 기원했다. 북핵 6자회담 재개 가능성에 대해서도 그는 “우리는 그 방향으로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북·중 대화 여부에 대해서는 “우리는 북측과 대화하고 있다”며 “북한이 신년사에서 표명한 것처럼 한국 측과 소통할 수 있도록 촉진하겠다”고 말했다. 쿵 부부장은 수석대표 협의 모두발언에서도 최근 남북 대화 분위기에 대해 “한반도 정세 속에서 긍정적 요소가 나타나고 있고 복잡한 도전에도 직면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외교부는 한·중 6자회담 수석대표가 남북 관계 개선이 비핵화 대화 재개 여건 마련에 기여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고 밝혔다. 이경주 기자 kdlrudwn@seoul.co.kr
  • [사설] 北 평창 참가와 한·미 공조 동전 이면 아니다

    우리 정부는 이제 북한의 평창동계올림픽 참가를 기정사실화하는 분위기다. 평창올림픽조직위원회는 나아가 “북한 선수단이나 응원단, 문화예술단이 참여할 것에 대비해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면서 “이번 올림픽은 참여하는 선수단과 각국 정상급 인사 모두 역대 최대 규모가 될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다. 통일부의 남북고위급회담 제안에 북한은 23개월 동안이나 끊어졌던 판문점 연락 채널을 그제 다시 열었다. 어제도 전화를 걸어왔다니 정부가 이런 분위기에 휩싸이는 게 무리도 아니다.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로 사실상 전쟁 직전 상황에 내몰린 한반도다. 이런 위기에서 평창올림픽이라는 남북 사이의 한 가닥 ‘소통의 끈’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다행스럽다. 하지만 북한이 평창올림픽에 참가한다고 난마처럼 얽히고설킨 핵·미사일 문제의 매듭이 풀리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분명하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은 신년사에서 평창올림픽 참가 문제를 언급하면서 분명한 노림수를 심어 놓았다. 우선 “대표단 파견은 ‘용의’가 있으며, 이를 위해 ‘만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의도된 중층(重層)의 소극적 제안으로 남북고위급회담이라는 우리 정부의 적극적 역제안을 이끌어 내는 데 성공했다. 평창올림픽을 한반도 위기 해결의 실마리로 삼으려는 정부로서는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미국을 향한 “핵단추가 내 책상 위에 있다”는 발언의 파장에는 정부도 숙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 평창올림픽을 매개로 한 남북 대화 분위기에 미국의 심기는 “좋은 소식일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언급처럼 복잡하기만 하다. 아마도 미국의 진의(眞意)는 “이번 신년사는 한국과 미국을 멀어지게 만들려는 단순한 접근에 목적이 있다고 본다”는 허버트 맥매스터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의 발언 내용에 있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우리는 북한의 평창올림픽 참가를 논의하기 위한 남북 대화에 미국이 어떤 방식이든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본다. 하지만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남북 대화가 진전되면 한반도에 평화를 불러올 수 있다는 우리 사회 일각의 주장 또한 환상에 불과하다는 지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북한의 평창올림픽 참가와 관련해 국민 50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응답자의 76.7%는 ‘남북 관계 개선과 한반도 평화를 위해 찬성한다’는 답변을 내놨다고 한다. 반면 20.3%는 ‘제재와 압박이 선행돼야 할 사안이므로 반대한다’고 답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미 동맹이 굳건히 유지된다는 전제에서 북한이 아무런 전제조건 없이 평창올림픽에 참가하는 상황이라면 반대하는 사람은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다. 어떤 상황에서도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한·미 공조에 빈틈이 있어서는 안 된다. 북한도 아무런 반대급부 없이 ‘평화의 제전’에 참여하는 당당한 모습을 국제사회에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
  • “1444일 노숙 끝내지만… 도박 대책 아직 부족”

    “1444일 노숙 끝내지만… 도박 대책 아직 부족”

    “건강한 삶 파괴 정책 용납 안돼…월평동 화상경마장도 폐쇄를” 용산 화상경마장 폐쇄를 끌어낸 용산 화상경마도박장 추방대책위원회(대책위)가 노숙농성 1444일째인 4일 마침내 해단했다.대책위는 이날 서울 용산구 한국마사회 용산지사(화상경마장) 앞 농성장에서 해단식을 열고 투쟁 종료를 선언했다. 대책위는 “이제 꿈에 그리던 일상으로 돌아간다”면서 “시민의 건강한 삶을 파괴하는 정책을 용납해서는 안 되고 아이들의 미래를 이윤과 바꿀 수 없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명제가 학교와 마을의 끈질긴 투쟁을 통해 마침내 현실이 됐다”고 말했다. 이어 “도박 피해를 막기 위한 대책은 여전히 부족하다”면서 “대전 월평동 화상경마장을 2021년 1분기까지 운영하겠다는 마사회의 계획은 용인돼서는 안 된다”면서 “문재인 대통령이 학교 앞 화상경마장 문제를 국정과제로 제시한 만큼 월평동 화상경마장도 빨리 폐쇄해야 한다”고 말했다. 해단식에 이어 5년간의 투쟁 과정을 발자국과 촛불로 형상화한 폐쇄 기념 조형물 제막식이 열렸다. 조형물은 화상경마장 건물 앞 인도에 설치됐다. 앞서 마사회는 서울 용산역 옆에 있던 화상경마장을 학교·주거지역과 가까운 현재 위치로 이전을 추진했다. 그러자 주민과 인근 학교 교사들은 대책위를 꾸려 2013년 5월부터 반대 운동을 벌였다. 이듬해 1월 22일부터는 화상경마장 앞에서 노숙 농성을 시작했다. 마사회는 결국 지난해 8월 연말까지 화상경마장을 폐쇄키로 대책위와 합의했고, 지난달 31일 폐쇄를 실행했다. 박재홍 기자 maeno@seoul.co.kr
  • “손흥민 희생 플레이, 메시 옆에서 뛰는 셈”

    “손흥민 희생 플레이, 메시 옆에서 뛰는 셈”

    영국 일간 가디언이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토트넘에서 뛰는 손흥민(사진ㆍ26)의 활약과 인성에 높은 점수를 매겼다.가디언은 2일 “손흥민은 토트넘의 ‘전천후 사나이’ 역할에 적합하다”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손흥민의 활약상을 조명했다. 신문은 손흥민이 2015년 8월 토트넘 합류 이후 75경기에 선발 출전했고 그중 53차례 교체됐다면서, 손흥민이 그라운드에 나섰다가 도로 들어가는 장면은 토트넘 경기의 특징이 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항상 이어지는 또 다른 장면이 있다. (교체돼 나온) 손흥민이 숨넘어갈 듯한 얼굴로 의자에 무너지듯 앉는 점”이라며 “너무나 자명한 사실은 손흥민이 그라운드에서 모든 것을 쏟는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 “손흥민의 성실함은 마우리시오 포체티노 감독과 동료들이 그를 사랑하는 큰 이유”라며 “또 다른 이유는 그의 태도”라고 분석했다. 쉽지 않았던 첫 시즌 이후 토트넘이 손흥민의 거취를 놓고 고민했지만, 손흥민은 교체되거나 명단에서 제외될 때도 전혀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신문은 손흥민의 저평가를 안타까워하던 포체티노 감독의 발언을 전하며 “아마도 손흥민은 자신의 이타적이고 유연한 플레이의 희생양일 수도 있다”고 평가했다. 포체티노 감독은 이날 기자회견을 통해 “손흥민은 꾸준한 플레이를 펼치며 많은 골을 넣고 있다”면서 “그러나 해리 케인 등 엄청난 활약을 하는 팀 동료들에 밀려 주목도가 떨어진다. 리오넬 메시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옆에서 뛰는 것과 같다”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포체티노 감독은 또 “손흥민은 제 포지션 이외의 역할도 잘 수행하는 선수다. 전술을 짜는 데 큰 도움이 된다”며 “데이비드 베컴이 세계적인 아이콘인 것처럼 손흥민도 (한국에서) 그런 위치에 있지만 그는 이곳에서 매우 겸손하다. 이게 그를 더 크게 만드는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최병규 전문기자 cbk91065@seoul.co.kr
  • [2018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당선작] 그림자 필경사 (이철주)

    [2018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당선작] 그림자 필경사 (이철주)

    1. 눈먼 자의 윤리 때론 그림자가 더 많은 말을 건넨다. 긴장 가득 훈련된 표정을 지어도, 무시당하지 않으려 허리를 꼿꼿이 세워도, 불안은 그림자에 투영돼 존재를 누설한다. 가끔 속내를 들켜도, 환멸에 사로잡혀 생이 부대껴도 그림자는 결코 존재를 떠나지 않는다. 뒤틀리면 뒤틀린 대로, 어리석으면 어리석은 대로 한 생을 바쳐 따라다닌다. 삶과 함께 태어나 울고 웃고 몸부림치다 사라진다. 그러곤 어디에선가 누군가를 닮은 모습을 하곤 쓸쓸히 흘러다닌다. 생을 반복하고 따라하며 생이 이곳을 떠나도 홀로 남아 존재를 증거한다. 그림자의 이 헌신엔 쉽게 이름 붙일 수 없는 어떤 맹목이 있다.한편으로 그림자는 왕성한 식욕의 소유자다. 표정도, 색깔도, 음성도, 촉각도, 냄새도 모두 집어삼킨 채 존재의 맹점을 현상한다. 감각이 보증하는 확실성을 제거하고 정체불명의 검은 얼룩을 펼쳐 놓는다. 그림자는 시각 속의 동공이며 감각을 배반하는 충동이다. 그러니 그림자란 본디 외경의 대상인 것이다. 감각과 관념에 잘려 나간 세계가 역으로 이쪽을 바라볼 때, 맹목의 관계는 뒤집힌다. 그림자에 감염되어 마음을 빼앗긴 사람들은 기이한 갈증을 느끼며 한 생을 바쳐 따라다니는데 그들을 시인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들도 그림자와 함께 태어나 울고 웃고 몸부림치다 사라진다. 수억의 생들을 베끼고 반복하며 처연히 이해해 간다. 그림자의 맹목과 시인의 맹목. 어찌할 수 없음으로밖에는 풀이될 수 없는 이 눈멂은, 그러나 역설적으로 가장 진실한 이해의 방법이 된다. 불가해한 생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따라하며 존재의 자세를 닮아 버리는 것. 그 충분한 대가를 치르기 전까진 함부로 대상을 떠나지 못하는 무능이 그들이 가진 윤리이며 능력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한국 시가 과연 이 충분한 맹목의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2000년대 이후 이어진 일련의 실험적 시들이 관습적 문법의 경계를 뒤흔들고 시의 외연을 확장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다만 그 의지와 선언이 너무 앞선 나머지 관념과 이론이 시를 대신 살아 버린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유행하는 철학적 담론을 잘 소화한 시가 좋은 시가 아니듯, 시와 비평이 근거로 삼은 담론의 윤리성이 시의 윤리와 덕목을 설명해 주는 것은 아니다. 말과 삶에 대한 치열한 응시와 질문. 좋은 시의 윤리와 덕목은 언제나 여기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김소연의 시는 바로 이 점에서 시의 본연에 충실하고 있어 반갑고 소중하다. 무엇보다 우리는 위태로운 추락의 한 시절을 통과하는 중이다. 좁고 피폐한 삶을 지켜 내기 위해 일말의 어둠도 쫓아내기에 급급한 지금, 육박해 오는 생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는 당당한 목소리가 절실하다. 이 눈 맑은 시인은 삶의 도처에 엎어져 있는 상흔을 읽어 내고, 고통의 결과 깊이를 삶의 구체적 언어로 더듬으며 섬세히 응시한다. 그림자가 한 생을 바쳐 삶과 동행하듯, 그의 시 역시 수억의 생을 바쳐 그림자에 한없이 가까워진다. 세상의 모든 그림자들을 성실히 몸에 새겨 넣으며 깊고 단단해진다. 그림자란 본디 맹점이며, 어떤 확신도 불가능하게 하는 절대적 무지의 영역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림자를 보았다고, 보인다고, 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림자로부터 ‘시선’의 능력을 빼앗았기 때문이며, 닮았다는 이유로 전부 이해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속여 온 탓이다. 마음의 눈꺼풀은 그렇게 굳게 닫힌 채 존재가 퍼붓는 질문으로부터 안전하게 물러난다. 김소연의 시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한다. 그림자에게 외경을 되돌려 주고, 세련되고 아름다운 이론과 개념들이 생의 그림자가 될 수 없음을 몸소 증거한다. 김소연은 그림자의 시인이다. 그림자의 언어로, 그림자의 시선에 응답하며, 그림자가 남겨놓은 파문들을 뼛속 깊이 묻는다. 2. 그림자양식장 김소연의 시에서 그림자는 자아 내면의 복수적 형상으로 나타난다. 이를테면 그림자들의 양식장이라 부를 만한 공간에서, 시인은 말들을 먹이로 던져 주며 내면의 그림자들이 불러일으키는 파문을 응시하고 있다. 그림자의 차가운 비늘이 말에 닿아 번지고 마침내 말을 삼켜 버리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끊임없이 불화하는 내면에로 깊이 침잠한다. 차가운 환멸과 단호한 자기 부정은 김소연 시의 근본을 이루는데, 여기에는 뼈아픈 목도만이 있을 뿐 화해의 축이 부재한다. 타협 불가능한 절대적 자세로 삶의 피폐를 건넌다. 무참한 추락이 아무렇지도 않게 전시되는 이곳의 삶에 당당히 맞서 고통의 극한을 살아 낸다. 뜨거움과 차가움을 모두 통과한 그의 목소리는 가장 뜨거울 때조차 차가움을 예감하고, 가장 차가울 때조차 뜨거움을 끌어안는다. 이 현격한 열의 낙차가 일상의 무감각한 관성을 깨뜨리는 뇌관으로 작동한다. 사월은 차갑다/사월의 돌은 더 차갑다/사월의 돌을 손에 쥔 사람은 어째서 뜨거운가/그는 어째서 가까운가//마루 아래 요정이 산다고 믿은 적이 있다/잃어버린 세계는 거기서 잘살고 있다/이 사실만으로도 뜨거워질 수 있다//하나의 문장으로도 세계는 금이 간다/이곳은 차가우므로 더 유리하겠지 - 「열대어는 차갑다」 부분 (『아침』) 돌은 사월의 뜨거움을 기억하기에 더 차갑다. 가장 찬란하고 아름다워야 할 날들이기에, 그렇지 못한 현실을 더 비극적으로 비춘다. 화자는 마루 아래라는 가시성 바깥의 공간에 망각된 세상의 온기를 풀어놓고 있다. 현실과 ‘너머’의 세계가 빚어내는 처연한 온도차를 뜨거움으로 명명하는데, 그러므로 “이 사실만으로도 뜨거워질 수 있다”는 선언은 설익은 화해의 제스처로 읽혀선 안 된다. 세계에 금이 가는 이유는 이곳과 너머 사이의 아득한 거리 때문이지 희망과 열정 같은 추상적 개념 때문이 아니다. 불화를 불화로서 보존하되, 이들이 빚어내는 떨림과 파열을 섬세히 기록하는 것. 김소연 시의 이와 같은 분명한 자세는 화자가 실족의 경험을 구체적으로 노출하는 장면에서 더 아프게 현상된다. 서로가 서로의 치부를 헛짚고 세계의 성감대를 헛짚은. 내리 빗나가던 선택들. 말하자면 기다림으로 독이 남는 자세. 시효를 넘긴 고독. 일종의 모독. 기다려온 우리는 치사량의 관성이 있을 뿐. 부패 직전의 끝물이다. - 「끝물 과일 사러」 부분 (『극』) 말의 파편들이 ‘끝’이라는 날카로운 선 앞에까지 밀려나 있다. 각 행의 끝엔 더 이상 남은 공간이 없다. 마침표조차 제대로 찍히려면 스스로가 끌어온 말들을 다시 과거로 밀어내야 한다. 미루고 미뤘던 삶의 초라한 진실이 단정하고 건조하게 한마디를 건넨다. “우리도 끝물이다.” 단단하게 요약된 이 사랑의 문장은 아프다. “치사량의 관성”으로 버텨온 관계의 맨얼굴, “끝물 과일”이 화자를 바라본다. 언어가 감정을 헛짚고, ‘사랑해’가 ‘미안해’를 대신하며 살을 찌워 갈 때, ‘끝’은 이렇게 언어의 은밀한 구석에 날카로운 뼈를 현상한다. 이럴 때 언어는 잔혹해진다. 한없이 위태로워 길들이지 않을 수 없는 짐승이 된다. 과녁에서 벗어난 말들의 사체가 한동안은 무심히도 쌓였을 것이다. 시인은 이 사랑의 폐허를 떠나는 중이다. 그러나 화자는 이를 “끝물은/아주/달아.”라는 감각적 긍정으로 전환해 낸다. 허위로, ‘헛짚음’으로 유지된 일상을 ‘끝물’에 비유하는 순간, “치사량의 관성”은 역으로 서로의 치부와 세계의 성감대를 더욱 선명하게 발설한다. 부재하는 여기를 정면으로 직시함으로써 몰락한 꿈의 순간들을 발굴해 낸다. 폐허엔 여전히 지독한 허기와 갈망이 어리겠지만 이를 부정하지 않고 생의 언어로 감각해 냄으로써 끝물은 버려야 할 것이 아니라, 도래해야 할 것으로 변모된다. 어떤 환상도 희망도 없이 뜨거움과 차가움을 반복하며 그의 문장은 단단하고 견고해진다. 그가 “차례차례 사랑이었던 것들과 한꺼번에/달디단 혼숙을 하는 것”(「달디단 꿈1」, 『극』)이 꿈이라며 부드럽게 말할 때에도 “이 조용한 숨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게/치욕스럽다”(「학살의 일부12」, 『극』)며 “중무장된 평화”(「학살의 일부1」, 『극』)가 학살이라 선언할 때처럼 단호하게 들리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의 시는 끊임없이 스스로의 불화와 혼숙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한 사람은 나를 바로 보지 않는다/소파와 구별되지 않게 소파 속에 있거나/반쯤 열린 문틈 안에서 베개를 돋워 돌아눕는다//한 사람은 나를 보다가 나를 태운다/그 온도는 태양과 다름없고/내 운명은 종이와 마찬가지라/돋보기 같은/그의 눈빛에 나는 새까맣게 타들어간다/대체로 나는 그 앞에서 나는 재만 남는다//또 한사람/꿈을 보기 위해/눈꺼풀을 오려냈다는 이 사람/밤새 두 손을 소담히 오므려서/잠든 두 눈을 나는 덮어주곤 했다// (중략) //축하보다는 축복을 받고 싶은 시월 아침에/오만 잡병의 숙주가 된 육체/속옷 벗듯 벗어둔 채/마음끼리 살을 섞는다 - 「세 사람과 한집에 산다」 부분 (『눈물』) 화자는 텅 빈 폐허 같은 방 안에서 자신의 갈라진 그림자를 응시하고 있다. ‘나’에게는 두 명의 폭군이 있는데, 하나는 나를 지우고 다른 하나는 나를 재로 만든다. 비록 관계의 양상은 다르나 결과적으로 나를 비존재로 만들어 버린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리고 여기에 ‘또 한 사람’이 더해진다. ‘꿈을 보기 위해 눈꺼풀을 오려 냈다는 사람’은 나에게 어떤 힘도 강제하지 않는다. 하지만 유일하게 나를 존재로 만들어 준다. 화자는 눈꺼풀을 오려 낸 눈이 꿈에 잡아먹히지 않도록 잠든 눈을 가만히 덮어 준다. 이 시가 평범한 시였다면, 이 세 번째 사람에게 시의 전권을 부여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 세 개의 그림자로부터 한발 물러나, 이 셋과의 공평하고도 평등한 혼숙을 명명한다. 물론 이는 화해라는 낭만적 해결과는 거리가 멀다. 세 개의 그림자와 나 사이엔 살을 섞어도 결코 화해될 수 없는 아득한 거리가 여전히 냉정하게 놓여 있기 때문이다. 김소연의 문장은 자신을 거쳐간 수많은 그림자들을 마음에 풀어 놓고 그들이 일으키는 파문들에 눈을 충분히 단련시킨 자만이 얻어 낼 수 있는 ‘말’들을 건져 올리고 있다. 이 위태롭고 어려운 일을 그는 차분하고도 안정된 걸음걸이로 해낸다. 굉장한 내공과 섬세한 마음의 섭생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지나간 마음에 눈을 빼앗겨서도 안 되고, 잊어서도 안 되며, 섣부른 성찰로 도망쳐서도 안 된다. 꼬이고 뒤틀린 존재들이 서로를 밀어내고 뒤엉키며 팽팽한 긴장을 잃지 않는 것. 어떤 불화도 해소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해결될 수 없으리라는 삶의 진실 앞에 스스로를 담담히 열어 놓는 것. 김소연의 시는 이 선명한 규율들을 가슴에 품은 채 치열하면서도 아름다운 보폭으로 사유의 어긋남과 욕망의 비틀림 사이를 뚜벅뚜벅 걸어 나간다. 3. 유실영(影)보호소 김소연 시의 한 축이 자아 내부에 도사리는 복수적 그림자들의 불화를 매개하고 내부의 균열과 긴장을 풀어 놓는 데 있다면, 다른 한 축은 타자의 삶에 깃든 그림자에 대한 섬세한 응시로 나타난다. 그의 시에서 그림자는 철학적이고 개념적인 사유로 환원되지 않는데, 이는 무엇보다 그의 시가 삶의 구체적 실상과 인간의 유한한 조건들에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림자는 새로운 삶을 위해 전시해 놓은 그럴듯한 기념물이 아니라, 매일의 몰락을 견뎌 온 숨겨 온 자세들이 어쩔 수 없이 노출되는 장소이다. 단단하게 고정시켜 놓은 표정들과는 달리 불가피하게 삶의 피폐가 누수되는 공간이며, 모두가 공평히 그런 누수 속에 강제되는 사건이다. 시인은 그렇게 누군가 흘려 버린 그림자들을 데리고 와 사라져 가는 존재들을 거두고 보호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상처의 내력을 짚어 보며 삶이 사라지고 난 이후에도 남아 이곳을 떠도는 그림자들을 위무한다. 그녀는/바다에서 용이 머리를 치키고 올라올 때와 같이/담배 연기를 코로 뿜는다 여의주처럼/담배를 물고 앉아서/성긴 이빨을 자꾸 드러낸다// (중략) /그 노파는 세상 사람들이 그어놓은 줄들을/그런 모양으로 무시하듯 질펀히 앉아서 살아왔다//노오란 양지는 노파를 점점 비켜간다/노파는 그저 햇볕 안에 가만히 앉아 있었는데/햇볕이 얼굴의 반을 부시게 하더니/점점 비껴서/이제는 그늘 안에 노파를 가둔다 - 「학살의 일부 10-이빨이 성긴 노파」 부분 (『극』) 노파는 퇴락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자신감 넘치는 태연함 속에 있다. 어느 누구도 함부로 개입할 수 없는 추락의 상흔이 이빨이 성긴 노파의 얼굴에 현상된다. 자신감 넘치는 낡은 몸 안에, 아무도 관심 없던 폐허 몇 개쯤 담담히 갖고 있을 노파의 눈빛이 화자를 응시한다. 함부로 이해해선 안 될 외경이 노파의 그림자에 어린다. 김소연이 “그 얼굴은 얼굴 외에 또 다른 것들이 겹쳐 있었다”(「1937년생」, 『극』)고 말할 때나, “우리 뒤에 깔린 반듯한 비단길을 아무도 걷지 말거라/벼랑 끝 노을이 우리 이마에 새겨주는 불립문자를/아무도 읽지 말거라”(「당신의 저쪽 손과 나의 이 손이」, 『빛』)고 진술할 때, 그가 끌어올린 그림자엔 어찌할 수 없는 외경이 실려 있다. 그가 외경을 표하는 그늘들엔 어쩐지 피 냄새가 짙다. 그늘은 찬란한 빛에 의해서만 어둠을 풀어내고, 어둠이 풀려날 때마다 추락은 반복된다. 수없이 깨지고 터져도 결연히 몸을 털고 일어난 생들은 하나같이 여전히 뜨거운 어둠을 품는다. 그 어둠의 무게가 어깨와 허리를 휘게 만들고, 그림자는 삶을 견디는 그들의 자세를 닮아 버린다. 이승에서 삼십 년/육신을 빠르게 쓰고 저승으로 이사한 아들 사진을//팔십 년째/육신을 아껴 쓰고 계시는 아버지가/느리게 문갑 문을 열어 만지고 계신다// (중략) //계시는 사진 한 장과 없어진 사냥개 사이엔/벽지처럼 살고 있다/앞모습을 보아선 아니 될/가족의 녹슨 얼굴들이 - 「계시는 아버지」 부분 (『눈물』) 여기에는 경솔히 이해해선 안 될 그늘에 머물기 위해 추락의 깊이를 가늠해 보는 시간이 현상돼 있다. 자식의 죽음을 그대로 안고 살아가기엔 상처는 너무 깊고 치명적이다. 그래도 삶은 이어져야 하기에 멍이 곰팡이처럼 들어선 낡은 방에 벽지를 바른다. 벽지를 뜯어내고 나면 그 자리엔 함부로 보아선 안 될 타인의 맨 얼굴이 저마다의 자세로 들어앉아 있다. 행복한 시절의 낙서처럼, 녹슬어 가는 얼굴들을 마냥 덮어 둔 채 가족의 삶은 이어진다. 벽지에 얼룩진 가족의 그림자는 이따금 마음을 괴롭히다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을 것이다. 그런 그림자의 앞모습을 요구하는 것은 폭력이며 불경이다. “엄마가 갑자기 보이지 않을 때에/아기들이나 지을 법한 표정”(「뒤척이지 말아줘」, 『눈물』)을 훔쳐보았다고 타인에 대해 이해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타인에 대한 이해는 그러한 표정을 숨기고 있을 얼굴을 그림자를 통해서 바라볼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한 번 슬쩍 보고 건네는 동정이 아니라, 그림자를 평생 가슴에 품은 채 그림자가 건네는 추락의 내력을 오래도록 살아볼 때만 허락되는 일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시들이 쓰여진다. 살 수 없는 장소에서도 살 수 있게 된 사람이 있었다/ (중략) //그 창문으로 나는 지금 바깥을 내다본다/이토록 난해한 지형을 가장 쉽게 이해한 사람이/가장 오래 서 있었을 자리에 서서// (중략) /할 줄 아는 말이 거의 없는 낯선 땅에서/내가 느낄 수 있는 건 잠깐의 반가움과/오랜 두려움뿐이다//두려움에 집중하다 보면/지배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지배하고 싶었던 사람이/실은 자신의 피폐를 통역하려 했다는 것을/파리처럼 기웃거리는 낙관을 내쫓으면서/나는 알게 된다 - 「여행자」 부분 (『아침』) 화자는 지금 수십, 수백 년 전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 “이토록 난해한 지형”을 바라보던 누군가의 그늘에 머물러 있다. 누구에게도 발설한 적 없는 그늘을 지키기 위해 어떤 삶은 희망이 불가능한 곳으로 자신을 조용히 밀어 넣기도 했을 것이다. 상처를 애써 부정하지 않아도 되는 저녁을 위해 황무지뿐인 창밖을 오래 바라봐야만 했으리라. 화자는 낙관을 하지 않아도 살 수 있다는, 희망을 품지 않아도 충분히 잘살 수 있다는 마음으로 피폐한 문장들을 건져 올리고 있다. 타인의 전생이 한꺼번에 이곳의 삶으로 현상돼 번지고 부대끼는 일. 화자가 매개하고 있는 이 순간은 스스로를 보호하고 있던 “파리처럼 기웃거리는 낙관”을 포기했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나를 보호하던 관념들을 내려놓은 채 타인의 그늘을 만져 보는 일은 그 이전과 전혀 다른 삶을 살게 한다. 시인이 “기웃거리던 햇볕이 방 한쪽을 백색으로 오려 낼 때//길게 누워 다음 생애에 발끝을 댄다/고무줄만 밟아도 죽었다고 했던 어린 날처럼”(「먼지가 보이는 아침」, 『아침』)이라고 말할 때, 다음 생이란 희망적이고 추상적인 미래의 어느 때를 의미하지 않는다. 타자의 그림자를 밟는 일이란 이미 하나의 생이 끝나고 다른 생이 시작되는 경이로운 순간을 매개하기 때문이다. 김소연의 시는 하나의 그림자에 담긴 무게를 섬세히 읽어 내고 그 무게가 역으로 자아의 무게를 읽어 내는 경계의 순간들을 포착한다. 그의 시를 버림받은 그림자들의 보호소라고 할 때, 화자는 그림자들을 관리하는 주체도 아니고 동정을 베푸는 관광객도 아니다. 그의 시는 하나의 그림자가 다른 그림자를 관통하는 사건의 매개이며, 타인의 그림자로부터 또 하나의 생을 물려받는 상속의 증거이다. 그림자를 이해하며 그림자에 감염되어 스스로 또 하나의 그림자가 되어 간다. 길 잃은 그림자들은 그렇게 다음 생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4. 아포리아인형극 김소연의 시에서 그림자는 배우이고 관객이며, 공기이고 침묵이다. 그림자들에 잠재된 생의 근원적 형상을 발굴하고 혼을 불어넣는다. 잡힐 듯 잡히지 않던 생의 어둠들에 이름을 붙이고, 그들과 연극을 시작한다. 때로는 독백으로, 때로는 방백으로, 그림자인형들 사이에 무형의 그림자가 스미고 번진다. 연극은 비교적 순조롭게 시작된다. 하지만 말이 리듬을 타면 탈수록 그림자는 연출자의 의도를 넘어서 스스로 움직이고 발화하기 시작한다. 오려낸 눈동자의 텅 빈 어둠으로 삶이 역류하기 시작한다. 말에 자기를 꿰뚫리고 거꾸로 그림자에 응시당할 때, ‘이곳’은 어떤 강제성에 내몰린다. 자신에게 찾아온 이 낯선 질문들에 발가벗겨진 채 노출되는 것이다. 일상을 영위하기 위해 몸에 둘렀던 기호와 기표들의 강고함은 물거품이 되어 녹아 버린다. *현재까지 발간된 김소연의 시집은 『극에 달하다』(1996),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2006), 『눈물이라는 뼈』(2009), 『수학자의 아침』(2013)까지 총 네 권이다. 인용할 경우 면수는 생략하고 각각 『극』, 『빛』, 『눈물』, 『아침』으로 표기한다. 세상 모든 것들의 표정은 지워지고/자세만이 남아 있다//이따금 나는 무지막지한 덩치가 되고/이따금 나는 여러 갈래로 흩어지기도 한다//그의 충고를 따르자면/너무 빛 쪽으로 가 있었기 때문이다/여러 개의 불빛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다// (중략) //그림자 없는 생애를 살아가기 위해/지독하게 환해져야 하는/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 「빛의 모퉁이에서」 부분 (『빛』) 그림자 없는 삶을 위해 끌어다 쓴 빛의 피곤이 필연적으로 ‘밤’을 끌어당길 수밖에 없다는 정확한 진술은 이러한 말과 그림자의 본질에 닿아 있다. 단적으로 말해 그림자 없는 삶이란 불가능하다. 가능하다면 그것은 유령의 삶일 것이다. 그림자는 사물의 물성을 증거하면서, 동시에 그 물성을 지워 버린다. 그림자 없는 물성이 불가능하다는 말은 그만큼 물성이라 믿어 왔던 존재의 본질이 허약하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림자를 통해서만 사물의 사물됨을 알 수 있고, 말을 통해서만 자신의 자신됨을 실감할 수 있다. 그림자 없는 물성이 유령의 것이라면, 말을 부여받지 못한 내면 역시 비존재로 내몰린다. 그러나 어떤 그림자로도 어떤 말로도 존재의 본질은 포착되지 못한다. 오히려 그림자와 말은 환영 혹은 오류가 되어 존재의 본질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뿐이다. 그림자가 지닌 이 이중성. 존재의 물성을 실감하게 하면서 오히려 그 실감을 내파해 버리는 모호성에 삶과 말이 지닌 진실이 깃들어 있다. 그러니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림자를 수도 없이 베끼며, 그림자들 사이에서 진동하고 있는 어떤 목소리들에 귀 기울이는 일뿐이다. 밤마다/그녀였던 당신이었던/수많은 아이들이 찾아와요/거친 바람처럼 문을 흔들며 칭얼대요/하나같이 눈은 퉁퉁 부었고 손끝은 차고/고개는 숙였어요// (중략) //지낼 만한 노곤함과/돌아갈 만한 차비를 두 손에 움켜쥐고/칭얼대고 칭얼대다 사라지죠//들어줍니다 두 귀를 여행 가방처럼 활짝 열고서/쓰다듬지요 두 손을 세계지도처럼 판판히 펼쳐서 위로합니다 긴 밤을 꼬박 앉아서// (중략) //번번이 한 아이가 남아 있어요/벽에 걸어둔 시커먼 외투처럼 등 뒤에서/이 아이, 자기가 엄마라고 우깁니다// (중략) /누워서 그녀는 자기 젖을 빨아요/그러면 그녀는 잠이 오지요 - 「그녀의 생몰 연도를 기록하는 밤」 부분 (『눈물』) 김소연의 시에서 그림자는 햇볕이 내리쬐는 한낮보다도 밤의 시간에 더 스스로의 본질에 가까워진다. 낮이 강제하는 빛의 윤곽으로부터 풀려남으로써 그림자는 비로소 ‘경계’의 영역에 서기 때문이다. 그녀였던 당신이었던 수많은 그림자들은 태양의 폭정이 사라지고 난 뒤에야 이미 반쯤은 사라지고 투명해진 모습으로 찾아와 말을 건넨다. ‘그녀’가 그 수많은 그림자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곤 젖을 물리며 그림자들의 해갈될 수 없는 결여에 응답하는 것뿐이다. 이 고된 노동. 그림자들을 위무하기 위해 역시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그녀’가 스스로의 젖을 빨 수밖에 없다는 운명론적 진술은 삶의 피폐성을 요약한 아포리아에 가까워진다. 그의 시에 잔혹동화와 같은 모티프들이 자주 동원되는 까닭 역시 동화가 압축해 내고 있는 생의 근원적 형식 때문이다. 그가 변용한 동화들 속에서 캐릭터는 오직 ‘자세’만으로 요약되는데, 무수히 많은 말들로 흘려보내도 끝끝내 남아 되돌아오는 ‘그림자’의 맹목적 갈망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 준다. 암늑대가 숲속에서 바람을 간호하는 밤이었대. 바람은 상처가 아물자, 숲을 떠나 마을로 내려갔대. 암늑대가 텅 빈 두 손을 호호 불며, 우듬지에 앉은 지빠귀를 올려다보는 밤이었대. 섭생을 위해서 살생을 해야만 하는 운명에 처한 늑대 이야기에, 한 아이는 밑줄을 긋고 있었대. 바람은 그 지붕 위를 저벅저벅 밟고 다녔대. 암늑대는 노란 지빠귀를 올려다보고, 노란 지빠귀는 늑대를 내려다보았대. 둘은 눈을 떼지 않고 서로를 쳐다보았대. 그래서 겨울밤은 감옥이 되기 시작한 거래. - 「눈물이라는 뼈」 부분 (『눈물』) 아이의 성장통을 비유하고 있을 이 시는 어떤 노래의 전승을 기록하고 있다. 새하얀 벽 위로 그림자들이 생을 공연한다. 섭생을 위해 지빠귀를 노리는 암늑대의 자세는 낮고 단단하다. 단 한 번의 도약으로 먹잇감을 낚아채기 위해 거추장스러운 마음은 모두 잘라낸 채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늑대의 눈빛에 어리는 검은 허공의 시간. 그 시간이 서서히 늑대를 물들여 간다. 암늑대를 내려다보는 지빠귀 역시 흔들림 없이 다가올 운명 앞에 눈감지 않는다. 공포에 몸을 맡겨 둔 채 자신도 그 시간의 일부가 되어 간다. 그리고 이들의 비극을 슬퍼하며 눈물 흘리는 바람과 아이가 있다. 이들이 빛과 어둠 사이에서 얽히고설키며 삶을 요약해내는 동안, 그 단단한 함축을 받아 먹고 돌들이 자란다. 하나의 비극이 있었음을,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생의 굴레에 의연하게 걸어 들어가 견뎌낸 그늘이 있음을 증거하고 제의한다. 김소연의 시는 그림자로 펼쳐 낸 한 편의 아포리아 인형극이다. 이 연극에는 무수히 많은 그림자들이 등장하지만, 주인공은 부재한다. 주인공이라 일컬을 수 있다면 아마도 그건 생 자체일 것이다. ‘삶’이 그려 내는 다양한 스펙트럼과 다변성 속에서도 결코 인간을 놓아 주지 않는 묵직한 생의 중력을 그의 시가 잘 포착해 내는 건 그림자야말로 생의 본질임을 잊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림자는 원상의 형상을 얼마든지 왜곡도 하고 때론 숨어 버리기도 하지만 결코 달아나지 않는다. 원상 내부의 상처와 질곡에 악착같이 달려들어 생의 모서리를 현상해 낸다. 삶을 자유롭게 하겠다는 무수한 그림자 기표들이 망각하고 있는 것은 그림자란 본디 원상의 것도 아니며, 원상과 무관한 것도 될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 그림자란 한 편의 활시위와 같다. 원상의 중력과 그 중력을 넘어서려는 두 힘이 팽팽하게 긴장하며 휘어질 때, 그림자는 필연적으로 생의 근원에 가까워진다. 김소연의 문장이 지닌 안정된 흡인력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한다. 5. 판화적 글쓰기 인간이 맹점의 존재를 잘 느끼지 못하는 건 맹점에 의한 시야의 어둠을 다른 눈의 시각을 통해 메우기 때문이다. 언어의 눈, 그림자의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빛을 가득 채워 존재가 현현하는 곳을 봉쇄할 때, 우리의 삶은 점점 더 벼랑 끝으로 내몰린다. 감정과 생각이 어긋나고, 말과 빛이 허용하는 사유만이 폭거하는 메마른 불모지로 변모한다. 동일성의 사유에 항거하는 최근의 숱한 철학적 사유들이 그 윤리적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삶의 언어를 구원해 내지 못하는 건 이들 이론과 이미지의 현란함이 맹점의 파쇄가 아닌, ‘보완’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삶의 언어로 충분히 구체화되지 못한, 자신의 손과 발로 직접 일구어 내지 못한 이미지의 언어들은 스스로가 올바른 대체시각이며, 이 강렬한 빛으로 맹점과 어둠을 몰아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이 또한 뒤틀린 자만이며 확장된 동일성이다. 그러나 맹점은 우리 삶의 조건이며, 그 종착지이기도 하다. 인간의 조건은 부정되거나 개선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직시하고 함께 살아가야 할, 세계와 인간 사이에 놓인 고유한 매개 방식이다. 그림자가 아무런 음성도 없이 지상에 잠시 내려앉은 검은 입으로 말을 건넬 때, 이를 가장 섬세하게 들어줄 수 있는 방법은 어둠을 어둠인 채로 내버려 두는 일이다. 시선의 한구석에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어둠을 받아들이고, 그 어둠과 대화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어쩌면 인간은 영원히 이 조건을 벗어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렇다하여도 그림자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들은 유령처럼 태어나고, 그 절망적인 시도를 되풀이하며 말의 어긋남 속에서 더 진실한 말 하나를 길어 올린다. 이는 시인의 숙명이며, 시의 본질이기도 하다. 이를 김소연의 시적 방법론을 빌려 말하자면 판화적 글쓰기라고 명명해 볼 수도 있겠다. 이 성실하고도 마음 따뜻한 그림자 필경사는 그림자에 각인된 어둠의 지문을 숨죽여 더듬으며 그 굴곡과 깊이를 음화로 찍어 낸다. 어둠의 언어로, 어둠을 끌어안은 채, 어둠 속에서야 비로소 보이는 삶의 근원적 자세들을 현상해 낸다. 안전한 거리에서 시각의 윤곽을 따 옮기는 것이 아니라, 삶의 언어로 어둠에 밀착해 어둠을 살아 내면서 몸으로 찍어 내는 것이다. 그의 판화적 글쓰기에서 그림자는 언제나 모상(模像)이 아닌 원상(原象)일 수밖에 없는데, 시선의 권력을 그림자에게 돌려줌으로써 주체가 만들어 낸 일련의 위계상을 단번에 해체해 버리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시가 지향하는 바와 전략이 너무도 명확한 만큼 쉽게 ‘코드’로 환원될 수 있다는 약점으로 비춰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의 시는 ‘코드’로 읽히지 않는다. 그림자를 통해서 ‘무언가’를 말하려 하기보다는, 언제나 그림자 ‘속’에서 그림자 자체를 경험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의 시는 구체적인 삶의 시공간을 결코 가벼이 여기지 않는다. 삶의 실경이 굳건하게 뿌리박고 있는 시적 공간에서 그림자의 우화로 그림자의 눈빛에 노출되도록 만들 뿐이다. 태양에 흑점이 많을 때는, 역설적으로 태양의 활동이 가장 ‘극에 달했을’ 상태라고 한다. 내부의 격렬한 균열과 폭풍이 열의 흐름을 방해하여 상대적으로 어둡고 온도가 낮은 부분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라고. 어쩌면 그림자에 대해서도 그와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그림자들은 가장 격렬한 생을 통과한 내상들이며, 그 내상이 건네는 말의 뒤틀린 방식이라고. 김소연의 시는 현실 너머의 추상적 피안이 아니라, 뜨거움과 차가움을 절실히 통과한 이후의 ‘이곳’을 그림자의 형상을 통해 추적해 낸다. 삶을 가장 치열하게 마주한 자의 뜨거움으로 그늘이 품은 울음을 읽어 내고 위무한다. 그러므로 그의 시를 일컬어 이렇게 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생의 흑점들로 이루어진 점자들이며, 생의 근원적 자세를 찍어 낸 판화들이라고.
  • [2018 서울신문 신춘문예 희곡 당선작] 가난 포르노 (최고나)

    [2018 서울신문 신춘문예 희곡 당선작] 가난 포르노 (최고나)

    무대 쪽방촌 느낌의 골방. 원근감을 주기 위해 사선으로 놓인 방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다. 관객석에서 앞쪽 방은 들어찰 곳 없이 빽빽한 쓰레기(보기에 따라서 생활용품으로 보일 수도 있다)가 들어차 있으며 몸 하나 간신히 뉘일 정도로 좁은 공간이 쌓아 놓은 물건들을 중심으로 둥그렇다. 그 옆방은 그에 비해 제법 집의 형태를 갖추었다. 티브이도 있고 버너도 있고 조그만 냉장고와 작은 침대도 있다. 앞쪽 방 위쪽으로 CCTV가 연결되어 있다. 그 화면은 뒷방 티브이를 통해 볼 수 있다.남자, 휴대폰을 귀에 대고 옆집을 살피는 듯 창밖을 힐끔 본다. 남 (통화 중) 모르긴 해도 강남에 빌딩 두어 채는 가지고 있을 거라니까. 구라 아니야. 몇 달간 이 몸이 뭐빠지게 고생해서 알아낸 거지. 원래 있는 사람들이 지 꺼 꽉 쥐고 안 쓰잖아. 그 할매 골골거리는 꼴이 길어봐야 두 달이야, 두 달. 두 달 후면 여기 청산하고 우리 가족 넷이서 알콩달콩…. 만삭의 여, 양손 가득 짐을 가지고 들어선다. 손이 모자라 휴대폰은 어깨로 귀에 댄 채다. 여 꼭 이렇게까지 해야 돼? 남 얘기 다 끝났잖아. 나도 좋아서 이러는 거 아니거든? 그냥 우리 지금은(여자의 배 내려다 보며) 알콩이랑 달콩이만 생각하자. 여 알콩하고 달콩한 그 기간이 두 달 남았다는 건 확실한 사실이구? 남 그럼! 당연하지! 여 (짐 내려놓고) 당연은 무슨! 지금 상황만 봐도 그래. 너랑 나랑 아침부터 저녁까지 죽어라 살펴봐도 삼시세끼 꼬박 챙겨 드셔, 새벽기도 빠짐없이 참석하셔, 아침마다 정정하게 일 나가셔, 도대체 어느 부분에서 너랑 알콩달콩인데? 남 너 오빠, 못 믿어? 여 응. (사이) 그러다 천수해로 하면 어쩌려고? 남 확실하다니까. 걷는 폼이 골골한 게 먹는 약도 확연히 늘어났고, 새벽에 잔기침도 엄청나게 심해졌어. 길어봐야 올해 설까지야. 여 그래도…. 남 (여자의 말 막으며) 어쩔 수 없잖아. 여 (흘겨보며 짐 내민다) 이거나 받아. 남 (물건 받아들며) 이게 뭐야? 생활비도 없다면서. 여 복지관에서. 겨울이라고 이것저것 챙겨주네. 확실히 강남이 좋긴 좋아. 나눠주는 것부터가 격이 달라. 쌀 하나를 줘도 꼭 이천 쌀만 준다니까. 남, 문 옆으로 쌀가마니랑 받아 온 물건들을 차곡차곡 쌓아 놓는다. 여, 봉투 안을 뒤적거리다 과자 봉지를 꺼내든다. 여 (과자를 우적거리며 바닥 짚는다) 아직 한 겨울도 안 됐는데 벌써부터 바닥이 냉골이네. 남 수도관 동파가 올해는 좀 빨리 됐어. 그래도 나는 여기 몇 년 살았다고 금방 적응되는 거 있지. (걱정스러운) 자기, 많이 불편해? 여 아냐. 나도 전에 살던 고시원보단 백밴 나은데 뭐. 거긴 주방을 공동으로 썼는데, 꼭 내가 사놓은 김치만 훔쳐가던 놈이 있었어. 의심 가는 놈이 있긴 한데 확실하게 단정은 못 짓겠구. 그렇다구 무턱대고 범인으로 몰수도 없고. 그래서 나중엔 김치를 아예 안 샀었지. 자기, 김치 없는 라면 먹어 봤어? 진짜 (고개를 저으며) 사람이 할 짓이 못 돼. 남 그 자식은? 가만 뒀어? 여 가만 두긴. 나중에 여자 속옷 훔치다가 덜미 잡혀서 개망신 당하고 쫓겨났어. 어찌나 속이 시원하던지. 남 미친놈이네. (침대 가리키며) 자기야, 여기 앉아. 여긴 좀 나을 거야. 여 (침대 위로 올라간다.) 할머닌 괜찮을까? 뜨거운 물은 고사하고 입 안에서 김이 나와. (호호 불며) 자기야, 이거 보여? 남 (옷장을 뒤적거려 커다란 점퍼를 뺀다. 이때 짐이 쏟아져 문 앞에 약간의 옷들이 쌓이게 된다. 자신도 입고 여자에게도 두꺼운 점퍼 하나를 건넨다) 이거 입어. 괜히 감기 걸리지 말구. 여 (점퍼를 입으며 침대 위 이불 안으로 들어간다.) 내가 워낙 건강 체질이라 웬만한 추위에는 꿈쩍도 안 하는데 자기랑 살림 합치고부터 몸이 약해졌어. 임신 때문인가 아침부터 삭신도 쑤시고 목도 아프고 머리도 지끈거리는 게 조만간 감기가 올 것 같아. 남 (버럭) 감기? 그러게 독감예방접종 하랬잖아! 여 삼만 팔천 원이야. 그걸 어떻게 맞아? 남 그러다 약값이 더 나는 거 몰라? 그깟 돈 몇 푼 아끼려다가 병원비, 약값 더 나가는 거라고! 진짜 짜증 나게! (바닥에 쌓인 비닐봉지를 걷어찬다) 여 야! 남 뭐! 여 너 지금 뭐 하는 짓거리냐? 남 짓거리? 짓거리? 다시 한번 말해 봐. 남편한테 짓거리? 여 그래. 짓거리라 했다. 남 말하는 본새하곤. 그러니까 네가 어디 가서 고등학교 중퇴자란 소릴 듣는 거야. 여 고졸인 넌 뭐 얼마나 그렇게 대단한데? 남 이거 왜 이래? 나 전문대까지 휴학했어. 너하곤 완전 급이 달라. 이번에 네가 임신만 안 했어도 나 학교 복학했다. 여 얼씨구? 등록금은 있냐? 남 …. 까짓것 벌면 되지. 여 (코웃음 친다) 퍽이나 벌겠다? 지 앞가림도 제대로 못 하는 게. 남 으이구! (자신의 머리 때리며) 그날 밤 내가 왜 술을 마셨는지 그날 밤이 내 인생 천추의 한이다, 한! 이래서 몸 굴리는 애들하곤 함부로 노는 게 아닌데. 여 (벌떡 일어나 노려본다) 그 몸은 나 혼자 굴렀냐? 애는 나 혼자 만들었고? 한 번만 자달라고 졸라 될 땐 언제고. (배 만지며) 알콩아, 달콩아, 봤지? 네 아빠가 저렇게 병신 같은 놈이란다. 남 (애써 누르며) 됐다, 됐어. 말을 말자, 말을 말아. 내가 저 고등학교도 못 나온 년이랑 무슨 얘길 하냐? 남, 옷을 추려 입고 밖을 나가려는데, 기계음이 들린다. 기계음 김복임 할머니가 들어오셨습니다. (기계음은 내내 남과 여의 집에서만 들린다) 여, 재빠르게 리모컨 집어 티브이를 켠다. 남, 언제 그랬냐는 듯 잽싸게 달려와 티브이 앞에 선다. 티브이 화면 가득 노파의 집이 한눈에 들어온다. 여 (티브이 화면에서 시선 떼지 않는다. 언제 싸웠냐는 듯) 다리를 절고 있네. 남 (티브이 화면에서 시선 떼지 않는다. 언제 싸웠냐는 듯) 빙판길에 넘어졌나? 노파, 문을 열고 들어선다. 머리 위에 짐을 얹고 양손에도 한 가득 짐을 들고 있다. 다리를 절며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여 (티브이 화면에서 시선 떼지 않는다.) 양 손에 짐이 한 가득이야. 남 (티브이 화면에서 시선 떼지 않는다.) 어디 폐지 같은 거나 주워 오는 거지. 남, 눈치 보며 슬금슬금 여의 옆으로 다가가 앉는다. 여, 기다렸다는 듯 남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과자를 우적거리며 영화 감상하듯 나란히 모니터에 집중하는 두 사람 여 저런 건 도대체 어디에서 줍는 거야? 남 아파트 쓰레기통, 상가 앞, 식당 뒤, 구석구석 뒤지겠지. 여 저게 진짜 돈이 될까? 남 진종일 쌔빠지게 고생하면 끽해야 하루 5천 원 정도? 여 그렇게나 적어? 남 몸만 죽어나는 거지. 노파, 가져온 물건들을 겹겹이 쌓아 올린다. 금방이라도 쌓인 물건들이 넘어질 듯 위태하다. (혹은 넘어져도 무방하다) 여 저러다 정말 큰일 나시겠다. 쓰러지면 어쩌려고. 남 저런 게 바로 궁상이야. 사는 거 자체가 민폐 인생. 여 너무 그러지 마. 찾아오는 가족도 없다는데 안 됐잖아. 남 아들이 하나 있긴 한데 연 끊은 지 꽤나 된 거 같아. 여 하나밖에 없는 자식새끼, 금이야 옥이야 길렀는데 머리 커서 귀찮다고 외면하고? 남 뻔한 스토리지. 여 사람들은 왜 늘 뻔한 것에 속는 걸까? 남 견디려고 그러는 거지. 그래야 견딜 수 있거든. 여 그래서 수집하나? 헛헛한 마음을 물건으로. 남 마음이 물건으로 대체될 수 있다는 그 생각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거야? 여 오빠. 남 응? 여 난 저렇게 살기 싫어. 남 (여자의 배 쓰다듬으며) 내 자식도 저렇게는 살면 안 돼. 천장에서 쿵쿵쿵 하는 소리가 들린다. 여 (하늘 올려보며 남자의 곁으로 바짝 붙는다) 뭐지? 남 저놈의 쥐새끼들. 여 쥐야? 남 사람 없을 땐 내내 조용하다가 꼭 들어오면 저 난리지. (둘러보다 빗자루를 집어 천장을 하늘로 쿵쿵 찌르면 이내 조용해진다) 조용히 해, 새끼들아! 여 (번뜩 뭔가 생각난 듯 남자의 빗자루를 빼앗는다) 오빠, 줘 봐. (천장 환기구를 열어 그 안을 기웃거린다.) 남 뭐해? 여 (이내 뭔가를 손에 쥐고 내려온다) 잡았다! 남 (여자에게 멀찍이 떨어지며) 잡았다구? 쥐를? 여 (의기양양) 응. 남 뭐하려고? 여 할머니 갖다 주게. 남할머닐? 여 적을 알고 나를 알면 그때부터 백전백승! 게임 끝이야. 여, 남자가 말릴 새도 없이 후다닥 밖으로 나간다. 남 야! 자기야! 여, 어느새 옆집으로 넘어갔다. 노파 집 대문을 두드린다. 남, 티브이를 통해 그 모습을 지켜본다. 여 할머니! 노파 목소리 뉘슈? 여 저어, 옆집인데요. 잠깐 문 좀 열어주실래요? 노파, 절룩거리며 느리게 현관 앞을 걸어간다. 기계음 김복임 할머니가 외출하셨습니다. 노파 (문 살짝 열고 고개만 삐죽 내민다. 경계하는 느낌이다.) 뭔디 그랴? 여 수도관이 동파 돼서 걱정 돼서 한 번 와봤어요. 많이 추우시죠? 노파 겨울인디 추운 건 당연하지. 여 그래서! (쥐 내밀며) 이거라도 가지고 계시라고요. 만져보세요. 노파 (떠밀리듯 받아들며) 이게 뭔디? 여 쥐요. 노파 쥐? 여 살아있어요, 아직 따뜻하구요. 노파 (의심스러운) 애기 엄만 안 춥가니? 똑같이 사람으로 태어난 몸땡아리, 애기 엄마도 솔찬히 추울 텐디. 여 전 괜찮아요. 옆에 남자친구도 있구, (배를 내려다보며) 뱃속에 아기도 있잖아요. (돌아가려면) 노파 (문을 처음보다 조금 활짝 연다) 저기, 색시! 여 (돌아보면) 네? 노파 나 그런 사람 아녀! 여 뭐가요? 노파 선물을 받았으면 은혜를 갚아야지. 쪼매만 기다려. 뭐라도 줄 거 없나 찾아 볼랑게. 난 천성이 신세 지곤 못 사는 성격이여. 노파, 집 안으로 들어간다. 기계음 김복임 할머니가 들어오셨습니다. 노파, 물건들 사이를 뒤지기 시작한다. 둘러보다 한 묶음의 짐 보따리를 내밀며, 기계음 김복임 할머니가 외출하셨습니다. 노파 이불 있어? 여 네? 노파 새댁 집에 이불 있느냐고? 여 (생각하다) 하나 있긴 한데 그게 사계절용이라 그렇게 따뜻하진 않지만 그럭저럭 쓸 만해요.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낫잖아요. 추우면 우리 자기랑 꼬옥 껴안고 있기도 하고…. 노파 (자랑스럽게) 날도 추운디 한 사람당 두 개 정돈 덮어야지. 우리 집엔 이불 엄청 많아. 이것 말고도 여덟 개나 더 있는디? 여 (받아들며 감동이다) 감사합니다, 할머니. 할머닌 정말 마음이 따뜻하시네요. 노파 세상 혼자 살간? 서로 돕고 사는 기 세상이지. 추워. 얼른 가. 노파, 먼저 들어간다. 기계음 김복임 할머니가 들어오셨습니다. 여, 자신만한 커다란 이불을 가지고 들어온다. 여 (한숨 길게 내쉰다) 아후, 안 되겠어. 도저히 못하겠어. 남 (이불을 받아들며) 왜 또 그래? 여 백퍼센트 코튼 마크잖아. 오리털도 아닌 거위털이야. 이게 얼마나 비싼 건지 오빠가 알기나 해? 남 할머니가 주신 거야? 여 그래. 저쪽 집에 엄청 많대. 남 자기야, 이럴 때일수록 마음을 강하게 다져야 해. 생각해 봐, 저 할머니 돌아가시면 그게 전부 우리 거야. 이불 깔고 덮고 지지고 볶고 뭐든지 다 할 수 있다니까. 여 몰라. 암튼 기분이 안 좋아. 양심의 가책이 느껴져서 도저히 그 일은 못하겠어. 이건 옳은 짓이 아냐. 우리도 그냥 남들처럼 평범하게 취직 같은 거 해 보는 거 어때? 남 아니. 구직은 더이상 희망이 없어. 여 오빠, 그러지 말고 일용직이라도 구해 보자. 남 (여자의 배를 내려다보며) 이 몸을 해 가지고? 여 우리 사정 얘기하면 받아주는 데가 있을 거야. (남자의 손 잡으며) 오빠…. 남 …. 여 제발…. 남 …. 넌 그럼 빠져. 이번 일은 나 혼자서 할 테니까. 여 그런 말이 어디 있어? 우린 한 몸이야. 이 아이들 낳기로 결정한 날 잊었어? 뭐든 함께하기로 약속했었잖아. 남 그랬었지. 여 우린 그때 너무 힘들었어. 남 알아. 여 집도 없고. 돈도 없고. 부모도 없고. 빽도 없고. 남 아무것도 없었지, 우린. 여 그래도 행복했었잖아. 남 사랑만이 전부였던 시기였지. 여 극복하자. 할 수 있어. 노력하면 어떤 일도 다 이뤄낼 수 있다니까. 남 개소리야. 여 오빤 옆집 할머니 보면 친할머니 생각 안 나? 오빠도 할머니가 키워 주셨다며? 남 그때 생각 따윈 하고 싶지 않아. 여 난 가끔 그 시절이 그립던데…. 아무것도 몰랐던 그 시절,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던 그때가 나았던 거 같아. 너무 많이 아는 지금은…. 남 할머닌 나를 학대했어. 여 학대? 남 어린 꼬마였지. 아빠 손에 이끌려 왔던 날, 아빠 등 뒤로 숨었던 날, 할머니의 우악스런 손아귀가 나를 질질 끌고 갔어. 그리곤 내가 아빠 인생을 망쳤다며 끝없는 폭언과 폭력을 휘둘렀지. 여 오빠, 옆집 할머닌 오빠네 할머니와는 달라. 이렇게 이불도 주고 정말 좋으신 분이라고. 남 아무리 그래도 나쁜 점은 분명 있을 거야. 옆집 할머니의 나쁜 점을 한 번 생각해 봐. 여 할머니의 나쁜 점? (생각하다가) 예를 들면…? 남 예를 들면…. (생각났다) 저장강박! 저렇게 쓰지도 못할 거 쟁여만 놔서 이웃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잖아. 저것도 일종의 정신병이라고 티비에서 본 거 같아. 기억 안 나? 전에 복지관에서 도배 새로 해준다고 했을 때…. 여 (조금 솔깃하다) 아, 그때! 난리부르스도 아니었지. 문 앞에 대자로 쫙 드러누워가지고. 남 그래! (좀 장황하게) 물건들 좀 치우려고 그러면, “차라리 날 밟고 가라! 이것들아! 내 두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저 물건들 못 뺏는다!” 아니, 지가 무슨 이순신이야? 잔다르크야? 저 중에 쓸 만한 물건이 어디 있다고 저 난린지. 저런 건 욕심이 많다는 반증이야. 여 욕심? 남 그래. 스크루지보다 더 지독한 짠순이. 집에 물건들은 숨기면서 정작 중요할 땐 나 몰라라 외면하지. 저러다 결국 저 쓰레기 더미에 깔려 돌아가실 거야. 자기 꺼 꽉 움켜쥐고 남의 거 야금야금 훔치면서. 여 (놀라) 저 물건들이 훔친 거야? 남 훔친 거지. 박스 뒤지고, 남의 물건 뒤지고, 더 가난한 사람들 기회 뺏으면서. 여 (동조됐다) 몰랐어. 할머니가 그런 사람인 줄. 남 (여자의 손 잡으며) 자기야, 그러니까 마음 약해지면 안 돼. 우리도 남들처럼 살아야지. 혼인신고도 제대로 하고, 애들 호적도 제대로 올리고. 남들 사는 만큼 딱 그만큼만 살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만큼만. 기계음 김복임 할머니가 외출하셨습니다. 노파 (노크 소리) 색시, 안에 있어? 여 누구지? 남 할머니다! 노 파색시! 여 왜 온 거지? 혹시 우리의 계획을 눈치채신 건가? (남자를 쿡 찌르며) 오빠! 오빠가 나가봐. 얼른. 남 (경계하며 문 쪽으로 다가선다.) 누구시죠? 노파 옆집이외다. 색시 있슈? 여, 겁에 질려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남 잠깐 이 앞에 나갔는데요. 왜 그러시는지…? 노파 구청에서 라면 한 박스를 선물로다 줬는디. 내가 밀가리를 먹으면 위가 쓰려. 남 (여전히 경계하며) 그래서요? 노파 색시 먹을랑가 물어볼라고 그러지. 남 무슨 라면인데요? 노파 진라면이랑 너구리랑 짜파게티랑 뭐 이것저것 섞였는디? 남, 여자를 바라보면 여, 세차게 고개를 끄덕인다. 남 (찜찜하지만 문을 살짝 연다) 뭘 이런 걸 다 주시고…. 노파 (고개 들이밀며) 애기 엄만 어디 멀리 갔수? 여 (잽싸게 이불로 머리를 덮는다) 남 슈퍼 갔어요. 라면 사러. 노파 아이고, 잘 됐고만. 내가 그 시간에 딱 맞춰 왔네. 얼른 전화혀서 라면 사지 말고 오라 그랴. 신혼부부들이 무신 돈이 얼마나 있다고. 얼른 전화혀. 남 네에. 그럴게요. 노파 (가려다가 돌아본다) 임신했을 땐 특히 남자가 잘해야 혀. 먹고 싶다는 거 있담 다 멕이구, 짜증내도 것도 일절 받아주고. 남편이 잘해야 그 기운에 평생 살아. 늙은이 말이라고 무시허지 말구 새겨들어. 알겄지? 남 네, 그럴게요. (하다가) 근데 겨울엔 딸기를 못 구하잖아요. 노파 색시가 딸기가 먹고 싶대? 남 네에. 노파 딸인가 보네. 딸기가 땡기는 걸 보니. 남 (헤벌쭉, 딸 생각에 기분 좋다) 딸이래요, 딸. 것도 쌍으로다. 노파 둘씩이나 들어 있어? 남 (헤벌쭉) 네에. 그렇다네요. 노파 아이고, 장해라. 장해. 참말로 장하네 그려. 남 (꾸벅 인사하며) 할머니, 라면 잘 먹을게요. 감사합니다. 남, 라면박스를 입구 옆에 놓는다. 기계음 김복임 할머니가 들어오셨습니다. 여 (뒤집어쓴 이불 밖으로 빠져나오며) 갔어? 남 (복잡하다) 응. 여 할머니 정말 나쁜 사람 맞아? 남 (찜찜하다) 그렇다니까. 여 이렇게 이불에 라면까지 주셨는데도? 남 (멈칫) 의도를 생각해야지. 왜 이런 조건 없는 나눔을 베푸는지. 여 조건 없는 나눔? 남 세상엔 공짜란 없는 법이야. 본디 그렇게 세상은 굴러가게 돼 있어. 근데 이거 봐봐. 할머니가 주신 것들. 이게 뭘 의미하는 건지 모르겠어? 여 (생각하다 머리를 쥐어 잡으며) 정말 모르겠어. 남 중졸인 네가 이해하기엔 좀 어려운 문제일 거야. 좀더 깊게 생각해 봐. 여 (생각하다) 할머니에게 실망했어. 남 (환희에 차) 생각났어? 여 임산부에게 라면을 먹으라니. 딸기는 못 줘도 라면을 먹으라고 권하는 건 아니잖아. 라면은 성인병 고혈압의 원인이야. 과다한 나트륨 함량으로 내 아이들이 아토피를 일으키는 원인이 될 수도 있지. 남 그래! 바로 그거야! 여 (여자 뭔가를 깨달은 듯 놀라 입을 막는다) 설마 할머니가 이 모든 걸 꾸민 거야? 남 그, 그런 거지. 여 꼴랑 라면 하나 주면서 생색은 있는 대로 다 내면서? 남 드디어 깨달았구나. 여 오빠 말이 맞았어. 저 할머닌 나쁜 사람이야. 남 그럼. 난 언제나 네 편이야. 여 내 앞에선 위해주는 척, 순진한 척하면서 뒤로는 엄청난 계략을 꾸미고 계셨던 거야. 남 이제 말이 통하는구나. 여 할머니 재산이 얼마라고? 남 한 십억쯤 되려나? 여 확실한 거야? 남 (당황스러운) 그냥, 사람들 얘기가…. 그러지 않겠느냐. 풍문이지, 풍문. 여 강남에 빌딩이 두 개라며? 설마 그것밖에 안 되겠어? 아아, 할머니가 빨리 뒈져버렸음 좋겠어. 남 걱정 마. 조만간 그렇게 될 테니까. 그전에 우리는 먼저 선수 치고 튀자. 할머니 재산 홀라당 챙겨가지고. 여 몇 주 후에나 발견되시겠지? 이참에 단단히 한몫 챙기자고. 남 우리가 먼저 발견한 걸 고마워할지도 몰라. 여 무연고니 찾아오는 사람도 없을 테니까. 남 장례식은 고사하고, 저 많은 짐들 정리하려면 국가도 고생이지. 여 맞아. 저 중에 쓸만한 건 전부 처분하고 할머니 통장이랑 국가보조금 남은 거랑 이것저것 모아서 한몫 단단히 챙기자고. 남 그 돈으로 알콩이랑 달콩이 피아노랑 발레를 가르치는 건 어때? 여 피아노랑 발레? 남 내 오랜 로망이거든. 알콩이는 피아노를 치고 달콩이는 그 옆에서 발레를 하고. 나랑 넌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완벽하지 않니? 여 (상상하다 흐뭇한 미소가 지어진다) 죽이자! 남 (놀라) 뭐? 여 할머니가 죽을 때까지 도저히 못 기다리겠어. 지금 당장 죽이자! 시간이 얼마 없어. 좀 있으면 알콩이와 달콩이가 태어날 거라고! 남 그래도 지금은 너무 이르잖아. 여 이르긴 뭐가 일러? 당장에 실행에 옮겨야지. (찬장을 뒤져 식칼을 꺼낸다. 금방이라도 실행에 옮길 듯 위협적인 표정이다) 남 자, 자기야. 왜 그래? 여 시간이 얼마 없다니까. 우리 애들은 우리처럼 자라게 할 순 없잖아. 오빠. 남 그래도…. 여 일단, 최고급 산후조리원부터 예약해줘. 거기에서 인맥을 쌓아야지. 남 결심이 선거야? 여 응! 남 양심의 가책 같은 건 사라지고? 여 그딴 거 개나 주라 그래! 남 그래도 좀 그렇잖아. 살인과 고독사는 엄연히 다른 문제라고. 여 (비장하다) 아니, 나는 해야겠어. 이제는 행동으로 옮길 때야. 여, 성큼성큼 현관을 향해 걸어가는데 남, 급하게 현관문을 막아선다. 남 자! 잠깐! 여 왜 이래? 비켜. 남 어쩌면 우리 할머니보다 옆집 할머니가 조금은 더 나은 사림일지도 몰라. 여 무슨 소리야? 언제는 나쁜 사람이라며. 자기보다 가난한 사람 등쳐 먹는. 남 그건…. 그냥 내 생각인 거고. 여 아니. 아무리 자기가 진실을 외면해도 그건 명백한 사실이야. 남 자기야. 진정하고 조금만 기다리자. 여 뱃속의 아이가 세상 구경을 하고 싶어 한다니까. 남 알아! 그건 나도 알지. 하지만 얼마 안 남았어. 금방 돌아가실 거야. 여 알콩달콩이도 시간이 없어. 남 그래도 애들은 어리니까 아직 세상에 대해서 잘 모르잖아. 어쩌면 돈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고 믿을지도 몰라. 여 위선 좀 그만 떨어. 알콩이 달콩이도 우리처럼 살게 할래? 우리처럼 거지 같은 옷 입고 거지같은 방 안에서 지내면서. 입에서 김 나와서 겨울이면 끔찍하고. 여름이면 뜨거운 선풍기 끌어안고 지내면서. 거지 같은 학교 졸업해서 쥐꼬리만 한 월급 못 받을까 전전긍긍하고. 외식은커녕 맨날 돈돈 거리면서 지내겠지. 남들 다 다니는 학원 한 번 못 보내고, 학교도 간신히 졸업하고, 어쩜 못할지도 몰라. 그렇게 눈치 보며 살게 할 거야? 남 돈만 있다고 행복한 건 아니잖아. 우리 둘이 사랑하는 모습 보여주고 우리가 떳떳하면 자식들도 언젠간 알 거야. 언젠간 부모의 노력과 수고를 이해하는 날이 오겠지. 여 떳떳해? 우리가 뭐가 떳떳한데? 복지관에서 공짜밥 얻어오는 게 떳떳한 거야? 예방접종비용 비싸 못 맞는 게 떳떳한 거야? 정확히 어떤 부분에서 떳떳한 지 알려줘 봐. 내 손에 싸구려 반지라도 하나 끼워주고 남들 하는 만큼 결혼식도 제대로 올리려면 그 망할 놈의 돈이 필요하다고 난! 네가 뭐라고 떠들던 간에 난 오늘 저 할머닐 죽여야겠어! 여, 남자를 밀어낸다. 남, 막았던 자리 무너지듯 자리를 비켜선다. 여, 밖으로 성큼성큼 걷는다. 거칠게 현관문을 두드린다. 한 손엔 칼을 숨기듯 쥐고 있다. 여 할! 머! 니! 노파, 느리게 현관으로 다가온다. 노파 옆집 색신가? 기계음 김분임 할머니가 외출하셨습니다. 노파 (문을 활짝 열며) 색시, 마침 잘 왔어. 들어와 봐, 어여. 여, 무시무시한 얼굴이다. 성큼성큼 노파 집 안으로 들어간다. 좁은 집 안, 서로를 마주 보고 간신히 선 노파와 여자 그 가운데 딸기 한 팩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여, 칼을 빼들고 찌르려다 딸기를 보고 멈칫하는데, 노파 먹고 싶었다며? 여 네? 노파 신랑한테 다 들었어. 딸기 먹고 싶다 그랬다며. 여 (냉랭한) 그런데요? 노파 요리하다 온겨? 여 뭐여? 노파 지금 칼 들고 서 있잔여. 여 (칼을 숨기며) 대파 있으세요? 노파 대파? 여 라면에 넣으려고 보니 대파가 마침 똑 떨어져서요. 노파 글씨. 대파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겄네. 혼자 사는 노인네라 집 안에 마땅한 게 없어. 배고프면 먹고 안 고프면 굶고 그러니께. 노파, 쭈그려 앉아 냉장고를 연다. 이것저것 뒤적거린다. 여, 딸기 팩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노파 (냉장고 뒤지며) 찬물에다 밥이나 말아먹지. 음식이 변변찮해. 대파가 있을라나 모르겄네. (돌아보며) 대파 대신 양판 안 되야? 여 그거라도 주시면 고맙구요. 노파, 양파를 한 망 건네준다. 계란, 버섯 이것저것 한 움큼 들려 있다. 여, 얼떨결에 받아든다. 노파 딸이라매? 여 네? 노파 남편이 많이 좋아하드라고. 여 그 자식이 임신한 걸 좋아해요? 노파 가장의 위치가 원래 그런 거여. 좋으면서 티도 못 내고 맘속 복잡허고. 섭섭하고 서운한 게 있더라도 자네가 넓은 맴으로다 이해혀야지. 여 싫어하는 줄 알았어요. 노파 한 인간을 다른 인간을 완전히 이해하기란 쉽지 않제. 용기 잃지 말구 악착같이 살어잉. 여 …. 노파, 딸기를 까 여자의 입에 넣어준다. 노파 어뗘? 맛이? 여 달아요, 아주. 노파 내가 샥시가 딸기 좋아하는 걸 우찌 알았겠어? 신랑이 챙겨주고 싶은디 맘처럼 되지 않응게 속상한 겨. 색시도 알지? 신랑이 많이 노력하고 있다는 거. 여 네에. 노파 겨울엔 딸기가 없어. 비싸기도 하고. 우리 같은 사람은 먹기 쉽지 않제. 맴이야 그렇지 않겄지만 그래도 너무 서운해하덜 말어. 여 (맛있게 딸기를 먹는다) 할머닌 안 드세요? 노파 난 늙어서 식욕도 읍서. 뭐가 맛난지도 모르겄고 배만 차면 그만이여. (딸기 팩 건네며) 가져가서 신랑이랑 맛나게 나눠 먹어. 여 자꾸 이렇게 주시기만 하면 제가 너무 감사하고 죄송하잖아요. 노파 아녀, 아녀. 내가 뭐 바라고 그런 것도 아닌디. 여, 딸기 팩 챙겨들고 느리게 돌아서면, 노파 샥시. 여, 멈춰 선다. 노파 내가 쪼매난 부탁 하나만 혀도 될까? 여 (다시 경계한다) 부탁이요? 노파 뭐 거시기한 건 아니고. 내가 만약 죽거들랑 내 시신 처리 좀 해돌라고. 그냥 보다가 요 며칠 안 보이면 구청 같은데다 연락 좀 햐줘. 그 짝에서 알아서 잘 해줄 텐게. 여 할머니. 그런 말씀 마셔요. 오래오래 사셔야죠. 노파 암만 그래도 아가들도 있는디 시체 냄시 풍기며 마무릴 할 순 없지 않겄어? 죽는 날을 내가 택할 수 있으면 좋겄지만 살아보니 그것도 내 맘대로 안 되고. 시상에서 제일 나쁜 게 지 목숨 지가 끊는 거라 그럴 수도 없고. 얼마 안 되지만 이 콧구녕만한 집구석도 여기저기 뒤져보면 쓸 만한 게 있을 거여. 마지막 부탁 들어준 보답이다 생각하고 부담 갖지 말고 가져. 보니께 나도 이제 얼마 안 남은 거 같더라고. 세상천지 아는 사람이라곤 자네가 준 요 쥐새끼랑 자네 집안 식구들이 전부니께. 여 할머니, 그런 말씀 마세요. 그러면 저희가 너무 죄송하잖아요. 노파 죄송하긴 뭐가 죄송해. 내가 오히려 미안허지. 나, 한 번만 만져 봐도 되나? 노파, 여자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여자의 배에 손을 지그시 댄다. 노파 꼼틀거리는구만. 생명이. 한 생명이 가믄 또 다른 생명이 오겄지. 그것이 자연의 섭리니께. (여자의 배에 대고) 환영하네. 이 세상에 온 걸. 여, 노파가 준 딸기 팩을 가지고 도망치듯 그 집을 빠져나온다. 여, 급하게 집 안으로 들어선다. 남 어떻게 됐어? 여, 딸기 팩을 남자에게 집어 던진다. 너부러진 딸기들 남 뭐야, 이게? 여 입양 보내. 남 뭐? 여 그렇게 해. 남 뭔 소리야? 여 막달이라 지우진 못하겠구, 그냥 입양이나 보내자구! 남 지긋지긋하다, 정말. 또 그 소리냐? 여 네가 듣고 싶어 했던 말이잖아! 남 난 어떻게든 살고 싶어서 그런 거야. 여 (노려보며) 미친 새끼. 할머니가…. 할머니가….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린다) 기계음 김복임 할머니가…. 김복임 할머니가…. 김복임 할머니가…. 김복임 할머니가…. 김복임 할머니가…. (반복 재생된다) 남과 여, 동시에 옆집을 돌아본다. (암전) >>등장인물 남자 여자 노파
  • [2018 서울신문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 플랫폼 (김민수)

    [2018 서울신문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 플랫폼 (김민수)

    사비는 순서를 기다린다. 복도의 고요함은 일부러 꾸며진 듯하다. 문이 닫히는 소리. 누군가 사비를 지나쳐 간다. 전에 본 적 없는 얼굴이지만, 그를 향한 적의가 있다. 사비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다. 깜빡 졸았던 걸까. 그의 이름이 들린다. 관료, 학자들. 권위로 데워진 공기가 거북하다. 사비가 의자에 앉고도 그들은, 한참 동안 파일을 뒤적거린다. 넘어갔다가 돌아오고, 다시 구겨지는 문서들. 무작위적인 리듬으로, 자기 역할에 몰입한 자들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 사비는 그게 잘 안 된다. 침묵을 깨야 한다면, 그만한 무게를 지녀야 한다. 위원이 말한다. “우리는 첫째로 근무자들의 파견지 이탈 건을 조사하기 위해 당신을 불렀어요. 이 문제에 관해 우리는 당신에게 형식상의 협조를 바랄 뿐입니다.”반응할 틈을 주지 않고 다른 위원이 말한다. “둘째로 최근 보고된 인간 반출 사건을 조사할 겁니다. 이 경우 당신의 위치는 썩 좋지 못해요.” 기관의 배려를 기대했던가. 그래도 사비는 동요하지 않는다. 마음 작용의 세부사항들을 잃어버린 지는 이미 오래다. 그는 위원들의 질문에 답한다. 일정한 어조로 이어지는 질문들. 때로는 위원들의 질문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이탈과 반출. 그것은 사비의 언어가 아니다. 사비와 위원회는 서로에게 원하는 것을 주지 못한다. 위원회는 사비를 의심하고 있다. 그가 아는 만큼 말하지 않고, 교묘하게 말을 돌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비는 그들만큼이나 아는 게 없다. 오히려 그에겐 새로운 질문거리만 가득하다. 심문은 계속될 것인가? 사비는 구금되지 않는다. 위원회에 그럴 권한은 없다. 즉석에서 다음 출석을 예고받는다. 서명하고, 가도 좋다는 허락을 얻는다. 그의 뒤로 문이 닫힌다. 이미 어두워진 복도. 그는 천천히 걸어 나간다. 무수히 많은 창문이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곳을 지나기가 두려워진다. 그는 골목길을 택한다. 그 길은 비밀스럽다. 불규칙한 계단을 내려가고, 곳곳에서 오래된 그림자들을 본다. 골목이 끝나는 지점은 다른 골목과 맞닿아 있다. 사비는 다른 골목에 들어설 때마다 주변을 살핀다. 담벼락은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 같다. 왼편 불 밝힌 상점에, 진열대 사이로 점원이 보인다. 그녀는 웃고 있다. 웃음은 준비된 기호다. 그녀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미소는 신비한 제안 같아서, 사비는 다른 생각에 물들지 못한다. 달콤하다. 그냥 지나쳐 갈 수는 없다. 진열대에 술병이 빼곡하다. 사비는 화려한 단어들을 본다. 덧붙은 상징들도. 갖가지 색과 형태의 차이를 구별하기 어렵다. 모두 똑같이 중요한 동물들과 도형들. 그는 방향감각을 잃고, 발을 헛디뎌 술병을 모두 깨뜨리게 될 것만 같다. 땀이 맺힌다. 손등으로 땀을 닦는데 불쑥 인사말이 들린다. 사비는 점원의 입을, 눈을 본다. 그리고 미처 감추지 못한 수동성을 엿본다. 그녀의 조화롭지 못한 목소리가 거슬린다. 사비는 짧은 사이 실망을 내비쳤는지도 모른다. 그는 일부러 들릴 듯 말 듯 대꾸한다. 점원은 한발 물러나 웃음으로 돌아간다. 어떻든 그녀는 변함없다. 그녀가 사람이었다면, 사비는 다른 반응을 기대해도 좋았을 것이다. 선택이 한정되어 있고, 외부에서 주입되었더라도 온전히 그녀만의 것으로 머무는 감정들을. 손가락으로 아무 병 하나를 가리킨다. 그녀는 상품을 스캔하고, 가져가 버린다. 사비는 그런 행동이 그녀만큼 시늉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포장이 사비의 손에 들린다. 그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상점을 나선다. 사비는 단조로운 풍경을 내다본다. 버스가 이미 지나온 길도 다시 훑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느리고, 목적지에 갈 마음이 없는 것 같다. 모로를 만나려면 한참 더 외진 곳으로 가야 한다. 그곳은 도시 외곽도 아니고, 마을이라 부르기에도 어중간하다. 기억이 맞는다면 이쯤에서 내려야 한다. 버스가 떠나자 어두워진다. 멀지 않은 곳에 파도가 친다. 사비는 도로를 벗어나 흙길로 들어선다. 길가를 내려다보니 경사가 가파르다. 풀이 자라지 않은 길을 골라 내려간다. 해안이 있고, 움푹 들어간 형태로 숲을 등진 주거지가 보인다. 집은 몇 채 되지 않는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사비는 알 것 같다. 그 집은 모로의 성향과 닮아 있다. 작고, 뽐내지 않는다. 문을 두드려 본다. 모로. 기척이 없다. 사비는 집 주위를 돈다. 창문에 얼굴을 대지만, 안을 볼 수 없다. 사비는 모래사장을 거닐기로 한다. 불을 밝힌 집이 몇 채 보인다. 이편은 어둠이다. 사비는 구두를 벗어 손에 든다. 파도 소리가 불쾌하다. 발가락 사이로 파고드는 차갑고 부드러운 감촉. 그는 갑작스럽게 고향의 선율을 느낀다. 단조로운 흐름이다. 어떤 이유로 연상되는 것일까. 선율은 감각에 새겨졌고, 때때로 통증처럼 거기에 있다. 흐릿하게. 불빛 속에 남자가 보인다. 그는 작은 고깃배 옆에 앉아 그물을 손보고 있다. 사비는 그와 눈이 마주친다. 남자는 그물을 놓고 일어선다. “오늘은 너무 늦었는데.” 사비는 그를 살핀다. 심술궂은 눈. 주름들. 그리고 들쭉날쭉한 억양. 하지만 흐릿하게나마 장난기가 비친다. 관리자의 인상이다. 확신할 수는 없다. “그쪽으로 가봤자 아무것도 없을 거야.” 사비는 고개를 돌려 어둠을 본다. 그의 말이 너무나 당연하게 들린다. “초입에 있는 작은 집을 찾아왔는데 아무도 없어서.” 사비는 손가락을 들었지만, 어떤 것도 가리키지 못한다. 남자는 고개를 젓는다. 실수인 것처럼, 그의 뒤로 현관문이 조금 벌어져 있다. 그가 오랜 시간 홀로 지내왔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남자는 그물을 추스른다. “나도 이곳 사람들에 관해 별로 아는 게 없지만.” 그는 사비를 훑는다. 사비의 손에는 술병이 있다. “들어오겠나?” 그를 따라 들어간다. 다른 차원에 들어서는 것 같다. 사비는 아직도 그런 경험을 잘 설명해낼 수 없다. 테이블과 낡은 의자들과 벽에 붙은 계획표. 책장 위에 술병을 놓는다. 사비는 그가 의자를 권할 때까지 기다린다. 남자는 부엌의 작은 문을 열고 그물을 던져 넣는다. 책장의 지저분한 책들이 눈길을 끈다. 사비는 대부분의 책 제목을 알아보지 못한다. “거기 앉아.” 남자는 술을 따른다. 그는 두꺼운 책을 고른다. 그의 손은 책을 옭아매는 성긴 보금자리 같다. 사비는 술잔을 들어 입을 적신다. 책을 들고 있는 남자의 손마디를 살펴본다. 가늘고 긴 손가락에서 노동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짐작과는 다르다. 어쩌면 그는 오랜 세월 학자로서 지내왔을지도 모른다. 무엇에 관한 학자인가. 언어들? 비밀스럽고, 신비 가득한 형태로 눈을 어지럽히며 우리를 넘어서는 의도를 품고 있을 것 같은 바깥 세계의 소란. 막연히 우상화되는 시인들. 남자는 책장을 넘긴다. 미간을 찌푸린 그가 눈을 치켜뜬다. 사비는 어서 그가 무슨 말이든 해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남자는 다시 책을 읽는다. 한동안 책장이 넘어가지 않는다. 심각한 그의 얼굴이 곧 부서져 버릴 것 같다. “요즘 이곳은 어때?” 사비는 말을 꺼내는 게 도움이 될 거라 믿는다. 남자는 책을 내려놓는다. “예전에는 좋았지. 지금은 뭐라 말하기 어려워.” 흔해 빠진 의견. “여길 떠나는 자들이 늘었지. 그게 뭘 말해주겠나? 전보다 좋아졌다고는 말할 수 없을걸.” 사비는 마지못해 수긍한다. “자네도 누군가를 찾아왔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그런 건 핑계에 불과해. 난 많이 봐와서 잘 알지. 결국엔 떠나는 거야.” “아마 그렇게 되겠지.” “그렇다면 잘 선택한 거야. 여긴 매력을 잃었어. 다신 돌아오지 말게.” 남자는 다시 책을 펼쳐 든다. 사비는 침묵 안에서 흔들린다. 마음을 다잡기 어려워진다. 바깥 그리 멀지 않은 물밑 어딘가에서 불분명한 형체가 지상으로 올라온다. 모래사장에 다다랐을 때 그것은 모습을 드러낸다. 상상조차 해본 적 없던 심해의 생명체가 몸을 비틀며 기어온다. 호흡하는 비늘과 가시들을 과시하면서. 성미 급한 놈이다. 거대한 입속으로 겹겹이 덧난 이빨에는 독이 흐른다. 놈은 모래를 파헤쳐서 구덩이를 만들고 그 속으로 숨는다. 구덩이 위를 지나는 자들을 모두 집어삼키려고. 놈의 입과 뱃속에서 희생자들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모로의 흔적도 그곳에 걸려 있다. 대기는 신음으로 가득해 질식해 버릴 것 같다. 사비는 술잔을 내려놓고, 남자의 구겨진 얼굴을 다시 한번 본다. 그는 가끔 입술을 달싹이는 것 말고는 움직이지 않는다. 사비는 자신의 손과 발을 내려다본다. 시간을 체감하는 신체기관이 있다면, 그건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흉물스럽게 늘어졌을 것이다. 확장된 외연으로서 발에 차이고 목을 휘감았을 것이다. 사비는 말한다. “그래도 난 언젠가는 돌아와야 해.” “쉽지 않을 거야.” 사비는 그에게 나약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한다. “가서 준비해야겠어. 언제 다시 방문하면 될까?” 남자는 손을 내젓는다. 조금 더 기다려 보지만 그뿐이다. 현관을 나선 사비는 바깥 공기에 압도당한다. 사비는 이보다 더 적은 자극을 원한다. 사비의 생각은 몇 차례나 분절된다. 구덩이라니. 잠을 자고 싶다. 잠을 자야만 벌어진 틈을 이어 붙일 수 있다. 그러지 못하면 정신은 점점 파편화되어, 말라죽은 나무의 껍질처럼 떨어져 나간다. 다른 가능성이 물꼬를 튼다. 모로의 작은 집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 환하다. 아니, 그 집은 모로의 집보다도 좀더 넓고 안락해 보인다. 그럼에도 사비는 그 집이 여전히 모로의 집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사비는 정원을 가로질러 간다. 잘 손질된 정원수. 초인종을 누르자 미소 짓는 점원이 나타난다. 사비는 놀라지 않는다. 그는 초대받은 사람처럼 집 안에 들어선다. 집은 거대한 하나의 침실이다. 사비는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그녀의 유년 시절과 일상, 갈등과 고민에 관한 이야기 속 세부사항을 통해서 그녀가 가짜가 아니라는 점을 확신하고 싶다. 그러나 그녀는 깊은 상처를 간직한 사람처럼 모든 이야기로부터 달아나 버린다. 그녀는 이미 이 세계의 어떤 이야기에도 관심이 없다. 그녀는 오직 행위의 화신으로, 사비에게 미끄러져 들어간다. 그녀가 드리운 그림자 아래에서 근심 따위는 느낄 수 없다. 시간은 이렇다 할 결론을 내지 못한다. 오래도록 평화롭다. 그러나 그녀의 품에서 사비는 결코 잠들지 못한다. 사비는 얌전히 눈을 감고 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의식이 또렷하다. 그는 속으로 진짜를 흉내 낸 것들을 모조리 비웃고 있다. 사비는 구두를 손에 들고 주거지의 불빛들을 지난다. 움푹한 해안선은 인위적이거나, 자연을 뛰어넘는 힘이 가해진 것처럼 보인다. 사비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힘의 작용. 가령 겨울이 길어지고, 낮 동안의 빛은 더욱 희미해지는 것. 예측할 수 없던 변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마땅한 이유를 찾아 나서게 한다. 그러나 사비는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고 싶다. 고향에서는 더 자주 메시지를 보내왔다. 의구심을 품은 자들은 모두 돌아오라고. 사비는 그래도 아직은 끝을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다시 작고 허름한 집이 보인다. 짐승은커녕 곤충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사비는 문틈에 얼굴을 대고 문을 밀어본다. 열릴 듯이 삐걱거린다. 그뿐이다. 절망이 버티고 있는 것처럼. 다른 감정들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인기척이 있다. 보드라운 목구멍을 갓 넘어온 따뜻한 숨결이 거기에 있다. 사비는 창문을 들여다본다. 소용없는 짓이다. 물러서서 구두를 던진다. 창문이 깨지고, 깨진 틈으로 모로를 찾는다. 아기 울음소리가 들린다. 사비는 창문을 넘는다. 유리 조각에 옷자락이 긁힌다. 사비는 벽을 더듬으며 나아간다. 울음소리가 벽을 타고 온다. 한쪽 구석이다. 구석에서 소리가 난다. 사비는 다가가 몸을 기울인다. 그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기계 아기가 불가능할 것 같은 방식으로 몸을 일으켜 세우는 것을 본다. 그것은 기다렸다는 듯 울음을 멈추고, 감춰두었던 예리한 날로 그의 목을 긋는다. 사비는 목을 부여잡고, 고개를 숙이고 움직이지 않는다. 이 순간 생동하는 가능성을 모두 외면하기로 하자. 이미 어둠 안에 놓인 눈앞이 캄캄해진다. 사비는 자세를 낮춘다. 바닥에 무릎을 대고 거의 엎드린다. 아기를 섬기려는 것처럼, 천천히 손을 가져다 댄다. 아기는 울음을 멈춘다. 시큼한 냄새가 난다. 따스하고 보들보들한 감촉이, 놀랍도록 위안을 준다. 손을 떼고 싶지 않다. 파도 소리가 바람에 묻히기도 한다. 사비는 그를 흔드는 손길에 의해 깨어나 돌아본다. 모로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다. 짓누르려는 듯이. 사비도 모로를 본다. “사비. 왜 이렇게 늦었어?” 예상했던 반응은 아니다. “창문을 깨고 들어오면 어떡해.”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어.” 그러나 아기는 없다. 감정들이 고스란히 흘러 나간다. 그는 거울을 보는 것 같다. “일행은?” “혼자야. 모두 흩어졌어.” 모로는 실망을 감추지 않는다. “모로, 아기가 실제로 있어?” “있어.” “어디에?” “내 몸에.” 사비는 모로와 아기를 동시에 생각해 본다. 틀림없다. 그리고 이번에는 모로가 실수한 거라고 소리 지르고 싶다. “어쩌려고?” “데려갈 거야.” “그걸 왜?” “왜라니. 기념해야지.” “기념하기 위한 거라면 다른 걸 가져가. 더 적합한 것으로.” 하지만 사비는 더 적합한 것을 떠올리지 못한다. “그냥, 인간들을 내버려 두자.” “이제 와서 그럴 순 없지.” 어떤 말을 해도 소모적일 것 같다. 사비는 문을 열고 내다본다. 반드럽게 깔린 살굿빛 사장과 바다 위로 드넓은 하늘의 풍광이 우연처럼 놓인 것 같다. 관리자의 집은 생각보다 멀지 않다. 고깃배는 보이지 않는다. “모로. 관리자를 만났어? “아니. 그는 통 잠들질 않아.” 그래서 모로는 여태껏 사비를 기다려왔는지도 모른다. 관리자는 찌푸린 눈으로, 어째서 그것이 기념이 되느냐고 묻겠지만. 물러서지 않고 나아가야 한다. 사비는 그에게 이해를 구하지 않고, 그와 멀어져야 한다. 그가 현실의 무미건조함에 사로잡혀 있을 때, 사비는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수평선까지 배 한 척 보이지 않는다. 관리자는 그 작은 배를 타고 어떻게 플랫폼까지 가는 것일까. 사비는 문을 열어 둔다. “그가 거절할 수도 있어.” “넌 그저 꿈에서 깨어나 배를 기다리면 돼.” “이게 얼마나 대책 없는 짓인지 알고는 있는 거야?” “플랫폼에서 만나자.”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어.” 모로는 보이지 않는다. 사비는 동작을 되감는 것처럼 자리로 돌아가 눕는다. 눈을 감고 하늘을 본다. 이해할 수 없는 거짓이다. 인간의 생에 남겨진 일이라고는 끊임없는 불만족뿐이다. 그런 그를 일부러 고통과 마주하게 할 필요는 없는데. 기념이라고? 사비는 잠에서 깨어나 주위를 둘러본다. 게다가, 인간은 우리의 고향에선 살아남을 수 없다. 감각이 환경을 따라가지 못한다. 그렇지만 사비는, 모로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모로는 사비의 첫 작품이다. 모로는 사비와 같으면서도, 그의 바깥에 있다는 점에서 서로 다르다. 모로는 흉내에 불과한가? 모로를 볼 때면 사비의 심정은 늘 복잡하다. 그는 권리를 주장할 수 없지만 막대한 책임감을 느낀다. 모로는 자유롭다. 그건 사비가 줄 수 없는 매혹적인 개념이다. 고깃배가 가까워진다. 사비는 몸을 일으킨다. 관리자가 배에서 내린다. 그의 허리까지 물에 잠긴다. 배 안에는 손님이 있다. 그는 몸 대부분을 가리고 있다. 생김새는 물론 그의 형태마저 제대로 알아볼 수 없다. 먼 곳에서 왔으리라. 손님은 땅에 발을 딛는다. 체구가 크다. 사비는 사구에 올라선다. 그러나 손님은 사비를 의식하지 않고 사구를 돌아나간다. 그는 사비가 그랬던 것처럼, 휴식도 없이 곧바로 어떤 목적을 좇는다. 관리자가 사비에게 손짓한다. 사비는 그를 도와 배를 끌고 올라온다. “인사를 나눴나?” 사비는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다. 대답하는 대신에 눈으로 먼 곳을 좇는다. “뭐, 상관없겠지.” 관리자가 앞서 배를 끌고 간다. 사비는 고물을 민다. 경사진 모래언덕이 난감하다. 사비는 배를 홀로 떠받들고 있는 것 같다. 닳고 부서지고 덧댄 흔적을 본다. 사비로서는 짐작조차 못 할 물밑의 진실을 견디는, 볼품없는 배다. 사비는 때때로 뒤를 돌아본다. 모래사장에는 깊은 족적이 남는다. 관리자는 모래도 털지 않고 그대로 현관을 넘는다. 그는 부엌의 작은 문을 열고 그물을 던져 넣는다. 먼지 앉은 잔에 술을 따르고, 계획표에 문자들을 휘갈겨 쓴다. 사비는 문틀을 붙잡고 관리자의 집 안을 들여다본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적응하려면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그는 계단에 버티고 서서 말한다. “우릴 플랫폼에 데려다줘.” 관리자는 반응하지 않는다. “가능한 한 빨리 떠나는 게 좋겠어.” 그 말은 관리자에게 닿기도 전에 허물어진다. 사비는 문턱을 넘는다. 그와 동시에 부엌의 작은 문이 닫힌다. 하지만 관리자는 부엌을 돌아보지 않는다. 관리자의 널찍한 등은 굳어서 움직이지 않는다. 옆에서 본 그는 매끈한 석상이다. 사비는 그를 찔러보고 싶다. 사비는 부엌으로 다가간다. 작은 문 너머로 속삭이는 소리, 고약한 획책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굴욕감이 드는 순간, 사비는 성급하게 문고리를 돌린다. 방 안에는 그물과 비린내와 모래가 뒤엉겨 있다. 굴욕을 만회할 수는 없다. 관리자는 펜을 놓고 돌아선다. “곧 출발할 수 있겠어.” 관리자는 계획표를 보란 듯이 손바닥으로 친다. 사비로서는 내용을 이해할 수 없다. 관리자가 묻는다. “규모는?” “나와 내 동료 모로, 그리고 아기 하나.” 관리자는 술을 한 모금 삼키고 말한다. “인간?” “작은 인간.” “인간은 안 돼.” 가라앉은 관리자의 말투에는 파고들 틈이 없다. “아무 문제 없을 거야.” “얼마 전이라면 그랬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아까 배 타고 들어오는 손님 봤지. 방침이 바뀌었어.” 방침. 애초에 그런 건 없었다. “어디서 온 손님인데?” “무례한 질문이야. 더 나은 질문을 해봐.” 사비는 그가 계속 말을 이어 가도록 내버려 둔다. “이제 단 하나의 인간도 바깥으로 나갈 수 없어. 모두 모아놓고서, 조용히 끝낼 거야. 원래 그랬던 것처럼. 그게 그가 하려는 일이야.” 생각보다 일찍 다가온 절멸 소식이 놀랍다. 그리고 그것이 벅찬 화려함 가운데 섬광처럼 오는 게 아니라 배를 타고 천천히, 거적때기를 뒤집어쓰고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당혹스럽다. 사비는 미소 짓는 점원을 떠올려 본다. 인간이 아닌 것들은? 그들은 함께 사라지거나, 새로운 주인이 되겠지. 아마도 이 계획에서 기계들은 고려되지 않았을 것이다. 감정들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머물게 하는 능력은 인간 고유의 것일까. 그렇더라도 이제는 그것의 모방만이 넘쳐나겠지만, 그런대로 나쁘지 않다. 그렇게 받아들여야 한다. “아무도 모를 거야.” “인간은 안 돼.” 그 말은 하나의 구호처럼 들린다. 관리자는 거의 즐기고 있다. 짧고 단단한 문장에 부딪혀 박살 나 버리는 다른 빈약한 문장들. 탈취와 도주의 이미지들이 의식에 흘러가도록 내버려둔다. 사비는 이보다 더 큰 말썽에 휘말릴 자신이 없다. 관리자는 벌써 이 일을 문제 삼지 않는 것 같다. 그는 책을 고른다. 그가 신경 쓰지 않기로 한 것은 실제로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관리자는 무한히 여유롭다. 그러나 사비는 그렇지 않다. 사비는 시간을 구체적으로 감각할 수 있다. 사비로서는 관리자와의 불균형 상태를 극복할 수 없다. 작은 인간의 무게가 그만큼 그를 누른다. 몇 가지 짧은 생각이 든다. 작은 인간이 기계로 변환될 수 있는 기술적 가능성은 얼마 없다는 사실. 그리고 손님의 행방. 관리자가 손짓하며 사비의 주의를 끈다. 그는 사비가 마주 앉기를 바란다. 팔걸이가 있고, 등받이가 짧은 의자를 권한다. 그리고 사비에게 술잔을 건넨다. 사비는 한동안 의자에 꺼질 듯이 파묻혀 있다. 그는 턱을 괴고, 손가락으로 얼굴을 문지른다. 알코올 냄새가 올라온다. 어떤 생각을 재촉하려는 듯이. 그는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있다. 관리자가 말한다. “그런데 네 동료는 지금 어디 있지?” “자기 집에서 기다리고 있어.” “난 그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왜냐하면. 사비는 말을 아낀다. 관리자는 사비에게서 대답을 기대하지 않는다. 사비는 부엌의 작은 문을 본다. 아무래도 누군가 더 있는 것 같다. 거기서 감각을 희롱하는 미세한 자극들이 흘러나온다. 관리자는 무릎 위로 책을 펼친다. “이 책을 알아볼 수 있나?” “전혀.” “이건 아주 형편없어. 두서없는 소리로 가득해.” 관리자는 손끝으로 문장을 긋는다. “그런데 여기. 이 대목을 봐.” 처벌에 관한 기록이다. 오래전 일이다. 여기에 선대 관리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지워졌다. 그는 기계에 관한 독특한 관점을 지니고 있다. 무차별. 그것은 경력을 망가뜨리는 불온한 생각이 될 수 있다. 어느 날 해변을 거닐던 선대 관리자는 도망쳐 나온 도시 기계를 맞닥뜨린다. 기계는 인간과 똑 닮아 있으나, 두려움의 표현이 어설프다. 도시 기계는 이보다 더 멀리 도망갈 수 없다. 헤엄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한계를 극복할 수 없다. 선대 관리 자는 도시 기계를 데려와 별장에 숨겨준다. 그는 거기서 인간처럼 지낸다. 먹고 읽으며, 잠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를 추적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피 행각은 발각된다. 선대 관리자는 인간으로부터 원성을 듣는다. 도시 기계의 죄목은? 언급되지 않는다. 고향에서는 적극적으로 나서서 선대 관리자와 인간을 중재한다. 간단하게 합의된 결과로 선대 관리자와 도시 기계가 같은 처벌을 받게 된다. 선대 관리자는 도시 기계로 이식되고, 성공적으로 결합한 그것은 도시로 보내진다. 그것을 뭐라고 부를 것인가?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후 관리자의 관할이 분명해진다. “뭐라고 쓰여 있는데?” “이 글은 읽을 수 없는 언어로 쓰였다는군.” 관리자는 책을 덮는다. “그럼 지금 읽은 건 뭐야?” “그건 말일 뿐이지.” 너의 꿈속에 있는 것처럼 실체 없는 경험들이지. 눈이 감긴다. 사비는 희미하게, 부엌의 작은 문이 열리는 것을 본다. 배를 타고 들어온 손님이다. 그가 그물을 끌고 사비에게로 다가온다. 사비는 마지막으로 묻는다. 이것은 가능성인가? 손님은 도심에 다다른다. 한낮의 공터에서, 그가 주목받을 이유는 없다. 그는 쪼그려 앉아 동그란 통을 내려놓는다. 단순하게 생긴 물건이지만, 잠금장치가 달려 있다. 그는 잠금을 풀고 뚜껑을 비스듬히 걸쳐 놓는다. 그것은 흐릿한 기운을 방출한다. 화산재가 분화되는 것처럼, 시간이 흐를수록 심각해진다. 바다 한가운데에 어색하게 솟은 지면이 있다. 사비는 생각하지 않고도 그것을 알아본다. 플랫폼이다. 간소하고, 누구도 이용한 적 없는 것처럼 깨끗하다. 사비는 배를 타고 있다. 배는 젓지 않아도 나아간다. 플랫폼 위로 모로와 유모차가 보인다. 모로는 배에 탄 사비가 플랫폼에 오를 수 있도록 돕는다. 사비는 아래를 본다. 수면에 비친 얼굴은 분명 자신의 것이 맞다. 그러나 그 모습은 불안정해서, 곧 다른 얼굴로 바뀌어 버릴 것 같다. 그는 수면을 내려다보지 않기로 하고 발을 디딘다. 플랫폼에 어렵게 올라선다. 그가 타고 온 배는 점점 멀어져 간다. 모로가 말한다. “저걸 타고 여기까지 온 거야?” “그래.” “재주도 많네.” 사비는 뒤돌아본다. 그것은 배가 아니라 가시 돋은 심해의 생명체다. 어떻게 날카로운 등 위로 올라탈 수 있었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모로의 얼굴은 테두리가 불분명하다. 잘못 손대는 바람에 윤곽이 번진 것 같은 모양이다. 그러나 모로를 다른 무엇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모로란, 언제나 모로와 가장 근접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비가 말한다. “이상한 일을 겪었어.” “말해봐.” “배를 타고 들어온 손님을 봤어.” 그런데 사비는 이야기할 의욕을 잃어버린다. 이야기는 선형적으로 정돈될 수 없다. 어느 부분을 이야기하더라도 머리와 꼬리와 몸통이 뒤섞일 거란 확신이 든다. 사비가 무언가를 이야기해야 한다면, 오직 그런 확신에 관해서만 이야기할 수 있다. 모로는 이야기를 기다린다. 사비는 모로의 기다림은 신경 쓰지 않는다. “그게 끝이야?” “그건 아니지만. 이야기할수록 이상해질 거야.” “말해봐. 천천히, 한 마디씩.” 아기 울음소리가 들린다. 유모차의 바퀴가 앞을 향해 움직인다. 그렇게 가다간 바닷속으로 고꾸라질 것 같다. “그는 함정을 팠어.” 플랫폼이 기울면서 경사가 진다. 유모차는 빠르게 굴러간다. “어쩌면 내가 그에게 붙잡혀 있는지도 모르지.” 모로는 지면이 기울어도 휘청거리지 않고 서 있다. 모로는 사비보다 더 큰 목소리로 묻는다. “그가 원하는 게 뭔데?” 유모차가 바다에 빠진다. 사비는 모로를 밀치고 뛰어간다. 물 위로 빈 유모차만이 떠다닌다. 사비는 조금 더 가까이 보기 위해 엎드린다. 아기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사비의 얼굴은 더는 수면에 비치지 않는다. 사비는 물속으로 뛰어든다. 그는 수영하는 법을 익히지 못했다. 숨을 참는 것도 서툴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 되지 않는다. 사비는 물속에서 자신의 몸이 거추장스럽다고 느낀다. 부품을 해체하듯, 그의 기관들을 하나씩 벗어던져 버리고 싶다. 유영에 매혹된 그는 모든 의지를 멈추게 하고 싶다. 사비는 바람 없는 골목을 걷는다. 길가에는 부랑자들이 누워 있거나 벽에 기대어 앉아 있다. 추위와 굶주림에 떠는 그들은, 사비의 구두를 본다. 그의 손에 들린 술병을 본다. 그들은 달그락거리며 바닥을 기어온다. 천천히 손을 뻗어서, 닿지도 않는 사비의 외투 자락을 당긴다. 아버지. 그들 가운데에서 들리는 말. 지금 뭐라고 했소? 사비는 그 말을 잡으려고 성큼 다가간다. 부랑자들의 넝마를 걷어차고 깡통을 뒤집는다. 형제여. 누구요? 사비는 그중 한 명의 머리채를 잡아 올린다. 그늘진 얼굴이 드러난다. 그는 사비다. 사비는 그 점을 단번에 알아챈다. 사비와 그를 구분 짓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재능, 어떤 노력을 발휘해도 알아낼 수 없다. 그는 구두를 벗어던지고, 넝마를 주워 든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에 눕는다. 몸을 웅크리고 얼굴을 가린다. 모로가 이곳을 지난다면, 등을 돌리고 눈을 감으리라. 물속으로 거대한 손이 들어와 사비를 건진다. 사비는 플랫폼에 한쪽 어깨를 걸친다. 관리자가 그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이제 가야 해.” 물속에서 몸을 완전히 빼내기가 힘들다. 도둑맞은 기분. 사비는 주위를 둘러본다. 플랫폼이 갈라지고, 돌덩어리가 솟아올랐다. 은은한 광택을 내는 검고 길쭉한 돌이, 누런 연기에 가려 희미해진다. 안개인가? 아니, 매캐한 냄새가 난다. 벌써 시작된 걸까. 관리자는 분주하다. 사비는 말한다. “내 동료가 여기 있었어.” 관리자는 사비를 플랫폼 위로 끌어올린다. “아니. 우리 둘뿐이야.” 관리자는 사비를 잡아끌어 그의 몸을 돌덩어리에 밀착시킨다. 돌덩어리에서 온기가 느껴진다. 관리자는 긴 벨트로 사비의 몸통을 돌덩어리에 묶는다. 그가 벨트를 잡아당길 때마다 사비의 몸이 들썩인다. 플랫폼의 조각난 지면이 맥없이 물속으로 가라앉는다. 관리자는 돌덩어리의 반대편으로 돌아가 같은 벨트로 자신을 묶는다. 그가 돌을 두들기며 소리친다. 사비는 알아듣지 못한다. 돌덩어리가 한 뼘 정도 떠오른다. 돌의 회전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사비는 처음 이곳을 둘러본 이래로 자신이 추락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는 점점 수가 느는 모조들의 대열을 우려스럽게 바라본다. 이곳을 떠나게 된다면 그 느낌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돌의 깊은 곳으로부터 빛이 새어 나온다. 납빛이다. 그는 순식간에 삼켜지고, 튕겨 나간다. 지면에 부딪힐 때 그는 몸이 조각나는 것 같은 충격을 받는다. 사비는 홀로 엎드려 있다. 얼어붙은 해변이다. 돌덩어리는 보이지 않는다. 몸을 일으키자 이명을 느낀다. 그의 감각들이 적응하지 못한다. 그래도 그는 놀라지 않는다. 사비는 곧장 걸어간다. 해변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걸음걸이에 여유를 가져야 할까. 길가에 자라난 풀들을 본다. 저택을 가리는 담벼락, 교차로에는 행상들이 있다. 사비는 그들의 생기 잃은 표정을 보고 고향에 왔음을 실감한다. 그는 단지 직관만으로 걸어갈 방향을 정한다. 이곳은 그다지 넓지 않아서 금방 목적지를 찾을 수 있다. 훼손된 집들이 눈에 띈다. 그럼에도 몇몇 구조물을 알아볼 수 있다. 그의 보금자리에는 폐기물이 쌓여 있다. 상상력을 발휘해 보면, 그곳이 한때는 집터였음을 어렵게 알 수 있다. 그는 쓰레기 더미에 기대어 앉는다. 그는 시간의 위력을 실감한다. 잠들길 바라지만. 축축하고, 악취가 올라온다. 빗방울의 점성이 높다. 모로는 없다. 사비는 경련을 일으키며 깨어난다. 그 아기다. 그의 발치로 아기가 기어온다. 어렴풋이 전해지는 작은 인간의 의도. 사비는 자세를 낮춘다. 아기는 귓속말로 그에게 꿈에 출석할 것을 통보한다. 흠잡을 데 없는 억양이다. 그러잖아도 사비는 위원회의 통보를 각오하고 있었다. 어쨌든 그는 돌아왔지 않은가. 사비는 아기를 앞장세워 꿈으로 향한다. 아기의 목덜미에는 번호가 적혀 있다.
  • [새해 기획| 황금 개띠 해] 인간의 충성스런 친구…재앙 막는 용맹한 수호동물

    [새해 기획| 황금 개띠 해] 인간의 충성스런 친구…재앙 막는 용맹한 수호동물

    ●용맹과 충성, 수호와 벽사(辟邪) 첫 번째 개가 짖자 두 번째 개가 짖고, 세 번째 개가 따라 짖는다(一犬吠 二犬吠 三犬亦隨吠). 특이한 것을 보고 놀라는 것은 당연하지만, 개는 어찌 아무것도 없는데 저리도 짖을까? 짖는 것에는 분명 연유가 있는데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이니 아이에게 어서 문을 닫으라 한다(見非常有理宜驚 犬乎何事無爲吠 吠固有意人不識 說與兒童門速閉).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경전(李慶全·1567~1644)이 지은 시 ‘견폐‘(犬吠·개 짖는 소리)에 등장하는 시구이다. 적막한 밤, 한 마리의 개로 시작하여 온 동네 개가 모두 동참하여 짖어대는 소리가 마치 실제로 귀에 들리는 듯하다. 개는 본디 자신의 영역에 대한 경계 본능이 강해서 그것을 지켜내는 데 대단한 용맹성을 보여 준다. 낯선 것에 대하여는 강한 경계심을 갖지만 주인에 대해서는 깊은 충성심을 발휘하기도 한다. 개의 이러한 생태적 특징은 수호 동물로서 개의 모습을 더욱 믿음직스럽게 여기게 한다. 또한 앞의 시구에서 ‘개의 짖음에는 사람이 알지 못하는 연유’가 있다고 한 것처럼 개는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는 동물로 여겨졌다. 사귀(邪鬼)나 재앙을 감지하여 물리치고 막아내는 힘이 개에게 있다고 생각하여 정초에 세화(歲畵)로 개 그림을 대문에 붙이거나 ‘눈이 셋 달린 개 그림’[三目狗]을 부적처럼 지니기도 했다. ●신성함에서 천함까지, 폭넓은 상징 십이지의 열두 번째 상징 동물로 등장하는 개는 서북서(西北西) 방향을 지키는 방위의 신이자 오후 7시에서 9시, 달[月]로는 음력 9월을 담당하는 시간의 신이다. 불교 행사에 사용되는 도량장엄(道場裝嚴)의 하나인 십이지신번(十二支神幡)에는 개가 불법(佛法)을 지키는 십이야차대장(十二夜叉大將) 중 술신(戌神) 초두라대장(招杜羅大將)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초두라대장은 일체 중생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면하게 하려는 소망을 가진 신장(神將)이다. 아울러 개는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매개의 역할을 하는 동물로도 여겨졌다. 제주도의 굿에서 구송되는 서사무가로, 제주 특유의 무속신화를 담은 ‘본풀이’에는 신화의 주인공이 이승과 저승을 오갈 때마다 도움을 주는 개들이 등장한다. 이러한 개의 신성한 상징성과는 극도로 대비되는 것이 있으니 바로 ‘개’를 접두사로 하는 수많은 단어들이다. ‘개’자가 앞에 붙으면 모두 질이 떨어지거나 ‘헛된’, 혹은 ‘쓸데없는’이라는 의미로 변하게 되는 상황이 개에게는 무척 억울한 일일 것이다. 우리나라의 속담에서도 하찮음, 흉함, 어리석음, 게으름, 우둔함 등 부정적 이미지의 용례에 개가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험구(욕)에 등장하는 ‘개’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근간 개를 앞에 붙여 부정적인 의미가 아닌 ‘매우’, ‘몹시 ~하다’라는 뜻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어 이 또한 재미있는 현상으로 여겨진다. ●사육에서 애완을 넘어 반려로 개는 지구상의 어떤 동물보다 인간과 가까운 존재이다. 예로부터 개가 인간과 공존하자면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개만의 역할이 필요했을 것인데, 사냥을 돕거나, 집을 지키는 것은 기본이거니와 특유의 명랑함과 온유함으로 궁중과 반가에서 애완용으로도 인기가 높았다. ‘조선왕조실록’ 세종13년(1431) 7월 17일의 기사에는 경기도에 66마리, 충청도에 9마리, 경상도에 42마리, 전라도에 59마리, 황해도와 강원도에 각각 13마리, 평안도에 11마리, 함길도에 3마리의 강아지를 배정하고 기르게 하여 왕실 및 사신들에게 진헌할 수 있도록 한 기록이 등장한다. 일반 농가에서 개는 가축이었다. 여름내 고된 농사일로 지친 몸을 복달임으로 달래는 시기에 개를 잡아 구장(狗醬)을 끓여 먹기도 하였으니 말이다. 개는 소나 돼지를 잡을 풍족하지 않은 환경에서 상대적으로 구하기 쉬운 영양 보충원이었다.요즈음 사람 곁에 자리한 개들은 바야흐로 ‘반려’의 대상으로까지 격상되어 가족의 일원으로 대접받고 있다. 반려견과 관련된 각종 산업이 빠르게 발전함은 물론 예쁜 개 이름을 지어 주는 작명소까지 있다고 하니, 개는 바뀌지 않았으나 개와 공존하는 사람들의 생활방식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개 이름 바둑이, 동문유해 ‘바독’서 유래 개가 가족의 일원이 되면서 생겨난 가장 큰 변화는 호칭이 아닐까 한다. 반려견의 이름도 ‘검둥이’, ‘누렁이’ 등으로 통일되던 과거와는 달리 다양해졌다. 그럼에도 가장 정겨운 개 이름은 바로 ‘바둑이’일 것이다. 기다림에 설레던 초등학교 입학 후 처음으로 받은 국어 교과서에 등장하는 개 이름이 ‘바둑이’였음을 많은 사람이 기억할 것이다.‘바둑이’라는 명칭이 한글로 가장 먼저 등장하는 기록은 1748년에 편찬된 ‘동문유해’(同文類解)로 보인다. 동문유해는 역관들이 편찬한 만주·몽골어 어휘 학습집이다. 그 내용에 화구(花狗)라는 한자 표기와 함께 ‘바독개’라는 명칭이 적혀 있다. ‘바독개’의 ‘바독’은 바로 ‘바둑’을 의미하는데, 바둑판 위에 흰색과 검은색의 바둑돌처럼 무늬가 있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그 ‘바독개’가 개 이름 ‘바둑이’의 원형이다.바둑이가 교과서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48년 문교부에서 발행한 최초의 국정교과서이자 이후 교과서의 모본이기도 한 ‘바둑이와 철수[국어1-1]’였다. 이 교과서 이후로 우리는 대부분의 교과서 표지에서 철수, 영희와 어울려 놀고 있는 바둑이의 모습을 보며 초등학교를 다녔다. 만약 그 삽화에서 바둑이가 빠졌다면, 아마도 그림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던 생동감 있고 명랑한 분위기가 반감되었을 것이다.●2018 무술년, 60년 만의 황금 개띠의 해 요즈음 무술년 개띠 해를 맞이하여 ‘황금 개띠의 해’라는 말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한 해를 구분하여 명명하는 방법으로 활용하고 있는 육십갑자는 열 개의 천간(天干)과 열두 개의 지지(地支)를 순서대로 조합하여 사용하는데, 그 총합이 60개를 이룬다. 그러므로 천간지지의 조합으로 이름 붙이는 모든 해는 60년마다 돌아오기 마련이다. 또한 열 개의 천간은 각기 두 개씩 묶어 방위를 나타내는 다섯 가지 색깔과 조합을 이루는데, 여기에서 천간의 다섯째와 여섯째인 무(戊)와 기(己)는 중앙을 나타내는 색깔인 ‘황색’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무술년은 ‘황색 개띠의 해’이다.황색을 황금과 연결 지어 생각하는 것에 대하여 황금색을 좋아하는 중국의 영향이거나, 혹은 마케팅의 영향이라고 보는 경우도 있는 듯하다. 그러나 비록 학술적 근거는 없는 이야기라고는 하지만, 새로 찾아온 올해가 지난 다른 해보다도 특별하고 의미 있는 해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의 발로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김창호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 안타깝지만 웃음 나오는…英동물구조단체 ‘올해의 사례’ 공개

    안타깝지만 웃음 나오는…英동물구조단체 ‘올해의 사례’ 공개

    올 한해 역시 세계 여러 나라에 있는 동물보호단체들은 위기에 처한 동물들을 구하느라 바빴다. 그런데 이렇게 도움이 필요한 동물들을 구하다 보면 안타깝긴 하지만 어쩔 때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웃음이 나오는 상황도 있다. 영국 메트로 등 현지매체는 27일(현지시간) 최근 영국의 동물보호단체 RSPCA가 공개한 올 한해 동물 구조 활동 중에 있었던 기억에 남는 사례를 소개했다. 올해 초 웨스트미들랜드주(州) 월솔에서는 아기 고양이 한 마리가 공동 쓰레기통 배수 구멍에 머리가 낀 채 발견됐다. 아마도 먹이 찾다가 이런 사고를 당한 듯싶다. 다행히 고양이는 근처를 지나던 행인에게 발견돼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사진 속 아기 여우는 학교에 가고 싶었던 것 같다. 생후 3, 4주 된 이 여우는 지난 4월 영국 서리주(州)에 있는 타드워스 초등학교의 철조망으로 된 울타리에 머리가 낀 채 발견됐다. 근처에는 어미 여우가 차마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사람들을 경계하며 숨어 있었다. 다행히 한 시민의 신고로 출동한 자원 봉사자들 덕분에 아기 여우는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6월에는 다 큰 여우 한 마리가 봉변을 당했다. 워릭셔주(州) 레밍턴스파에 있는 한 교회 앞 묘지에서 이 여우는 두 묘비 사이 좁은 틈에 머리가 낀 채 주저앉아 있었다. 철푸덕 앉아 있는 뒷 모습은 그야말로 처량맞다. 설마 자기 몸이 틈에 끼겠느냐는 생각에 틈새를 지나가려고 했던 듯싶다. 다행히 여우는 어떤 상처도 없이 무사히 구조될 수 있었다. 지난 7월 런던 인근 치슬허스트에 있는 한 가정집에서는 갑자기 들려오는 정체불명의 동물 울음소리에 온 식구가 겁에 질리고 말았다. 집 주인은 욕실 하수구 구멍 밑에 쥐 한 마리가 끼여 있다고 생각하고 RSPCA에 신고했다. 그런데 거기서 나온 동물은 쥐가 아닌 아기 박쥐였던 것이다. 어린 박쥐가 어떻게 이곳까지 들어가게 됐는지 밝혀지진 않았지만 며칠 뒤 건강하게 야생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8월에는 켄트주(州) 벡슬리히스의 한 가정집에서 반려견 한 마리가 실종되는 소동이 있었다. 견공은 근처 공원 울타리에 몸이 낀 채 발견됐는데 만일 이렇게 되지 않았다면 도로에서 더 큰 사고를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같은 달 컴브리아주(州) 울버스톤의 한 가정집에서는 야생동물 한 마리가 구조됐다. 개구리 한 마리가 양변기를 연못으로 착각했는지 그 속에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집 주인의 신고로 구조된 개구리는 근처 연못으로 돌아갔다. 지난달에는 웨일스 포트탤벗에서 어린 물개 한 마리가 자원 봉사자들의 도움으로 구조됐다. 물개는 암석과 바위 틈에 끼여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서로 힘을 합쳐 1t이 넘는 바위를 옮겼고 다행히 물개는 무사히 자연으로 돌아갔다. 이달 그레이터 맨체스터 호크쇼에서는 양 한 마리가 커다란 나무 몸통에 난 구멍에 머리가 낀 채 발견됐다. 이 역시 자원봉사자의 도움으로 무사히 구조됐고 양은 무리로 돌아갈 수 있었다. 사진=RSPCA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금요 포커스] 디지털 딜레마, 영화 보존의 과제/류재림 한국영상자료원장

    [금요 포커스] 디지털 딜레마, 영화 보존의 과제/류재림 한국영상자료원장

    영화 산업이 필름에서 디지털로 완전히 바뀌었다. 국내에서는 2013년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를 마지막으로 더이상 필름으로 제작된 영화가 없다. 해외에서는 여전히 필름 카메라로 촬영하는 경우가 있으나 제작 공정 전반이 디지털화된 것은 꽤 오래전부터다. 한때 수많은 스크린을 수놓았던 필름이 디지털 기술의 발전과 함께 영화의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디지털 기술이 영화 제작과 배급, 상영과 관람에 있어 편리함을 가져다준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특히, IPTV나 온라인 VOD, 모바일 등 극장 외에 다양한 영화 관람 창구가 생겼다는 것은 디지털 기술의 편의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혹자는 영화의 보존(archiving) 역시 디지털 기술로 인해 간소화되고 편리해졌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국내에서 제작되는 모든 영화를 보존 관리하고 이를 후대에 물려주어야 하는 공적 임무를 지닌 한국영상자료원의 입장에서 디지털 기술의 발전은 마냥 반길 일이 아니다.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 영상자료원은 여러 가지 이유로 ‘디지털 딜레마’에 빠져 있다. 우선, 디지털 기술의 발전 속도가 너무 빨라 영상의 보존 방식을 단정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게문제다. 예컨대 20년 전 3.5인치 플로피 디스크가 파격적으로 선보였을 당시 이를 보존 매체로 단정하여 대규모 투자를 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10년 뒤 외장 하드와 USB가 등장하면서 대대적인 시설, 장비에 대한 재투자를 해야만 했을 것이고, 다시 5년 뒤 클라우드 기술이 등장하면서 또 다시 막대한 비용과 노력을 들여 보존 방식을 바꿔야 했을 것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상영 기술 역시 보존과 함께 고민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영화는 박제될 때가 아닌 관객과의 만남을 통해 비로소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상영 기술의 구형화로 작품 감상이 어려워진다면 영화를 보존하는 작업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후대에도 언제든 작품과 세상이 만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려면 항상 보편적인 저장 매체를 탐색하고 기존 데이터를 이에 적용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다음으로, 디지털 저장 매체는 매우 불안정하다. 누구나 한번쯤 컴퓨터로 문서 작업을 하다가 에러로 인해 애써 작업한 문서를 통째로 ‘날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런 아찔한 경험은 영상자료원이라고 피해 갈 수는 없다. 디지털 저장 매체는 그 편의성에 비해 안정성 측면에서 취약하다는 약점이 있는 것이다. 지진 등 천재지변으로 물리적 충격이 가해질 경우 필름에 비해 디지털 자료의 손실 위험은 상당히 크다. 이러한 이유로 동일한 자료를 각기 다른 공간에서 보관하는 이원(二元) 보존이 필수이나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비용이 발생한다. 한국영상자료원에 축적된 디지털 자료의 용량은 4.5 페타바이트(1페타바이트가 1000테라바이트)이며, 2017년 한 해에만 제작된 한국 영화는 400편을 훌쩍 넘었다. 현재 영화 한 편당 디지털 용량이 1.5테라바이트(TB) 정도이나 나날이 개선되는 영상 화질로 미루어 볼 때 향후 축적될 데이터의 용량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것은 분명하다. 이에 반해 데이터 복본(複本)제작에 활용할 수 있는 예산과 인력은 한정적이며, 이 때문에 모든 데이터에 대해 복본을 하나씩 생성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작업이다. 영화는 당대의 사회, 문화와 생활 풍습, 시대정신을 가장 잘 보여주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한국영상자료원은 문화 유산으로서의 영화를 온전히 보존하기 위해 디지털 영상 매체의 급변과 데이터의 무한 증식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방안을 끊임없이 모색하고 있다. 2019년, 한국 영화는 탄생 100주년을 맞는다. 지금 디지털 자료에 대한 안전하고 올바른 보존 방식을 고민하고 과감한 연구와 투자를 하지 않는다면 다가올 100년간 미래 세대가 짊어져야 할 비용과 노력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마음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 ‘I loved it all’ 병마도 이기지 못한 부부의 사랑

    ‘I loved it all’ 병마도 이기지 못한 부부의 사랑

    아내가 죽기전까지 유방암 치료 단계들을 빠짐없이 사진으로 남겨 진실한 사랑을 실천한 한 남자가 있다.사진작가인 안젤로 메렌디노와 지금은 오래전 세상을 떠난 그의 아내 제니퍼가 그 주인공이다. 2005년 8월 더운 여름 어느날 당시 일자리를 찾고 있었던 안젤로는 제니퍼와 마주쳤다. 그는 즉시 그녀가 자신의 짝이라는 것을 알았고 만난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가족과 가까운 친구들만 초대해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결혼 5년 만에 아내 제니퍼가 유방암 진단을 받게 됐다.제니퍼의 병세가 점점 심해지면서 안젤로는 큰 결심을 했다. 그는 아내의 암투병과 치료과정을 사진으로 담기로 결정했고 이 세상 그 어떤 사진보다 아름답고 의미있는 순간들을 남겼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어가는 순간순간을 카메라에 담는 것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슬픔이지만 아내에게 ‘암의 얼굴’도 인간적인 모습으로 보이게 하고 싶었다. 결국 제니퍼는 2005년 40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안젤로는 아내를 기리기 위해 비영리 단체인 ‘Love You Share’를 설립다. 현재 이 단체는 유방 암 치료를 받는 여성들을 돕고 있다.사진·영상=KevOnStage/유튜브 영상팀 seoultv@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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