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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지도력의 산실 백악관(美國의 대통령 문화:21·끝)

    ◎‘모든 사람의 집’ 백악관 매년 관광객 수백만명 다녀가/1800년 애덤스 첫입주후 40명 거쳐/“정직 현명한 이들만 살게 하소서”/라이브러리룸 등 6개 20분 소요/시대 초월한 국민과의 교감 피부로 【워싱턴=羅潤道 특파원】 미국 대통령문화의 산실인 워싱턴DC에는 미대통령의 체취를 느끼려는 수백만의 관광객들이 매년 몰려든다.‘펜실베니아 애브뉴1600번지’라는 별칭으로도 알려진 백악관,스미스소니언 초상화박물관의 대통령실 등은 차치하고라도,워싱턴기념탑,링컨기념관,제퍼슨기념관,프랭클린루즈벨트 기념관,시어도어 루즈벨트 기념관 등 개인 기념관에 이르기까지 도처에 역대 대통령들의 기념물이 널려 있기 때문이다. 포토맥강과 잔디광장 ‘더 몰’이 어우러져 이뤄내는 아름다움 사이로는 또 케네디센터,윌슨센터,조지 워싱턴 대학,루즈벨트 브릿지,린든 B.존슨 기념공원,제임스 매디슨 빌딩 등 대통령의 이름이 붙은 시설물들도 많아 시내곳곳 어디를 가도 대통령을 만날수 있다.특히 백악관은 미대통령의 권위를 상징함과 동시에 세계 지도력의산실로 역대 미대통령의 삶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어 가장 인기를 끄는 곳이다. 이곳은 내국인이건 외국인이건 누구에게나 개방된다.백악관 남쪽의 ‘방문자센터’에 가서 줄을 서기만 하면 된다.그러나 백악관 방문을 원하는 사람은 누구보다 부지런해야 한다.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일 아침 7시부터 선착순으로 줄을 선 사람들에게 3천매,단체관광객에게 1천500매 등 모두 4천500장의 입장권을 나눠준다.대부분의 경우 입장권 분배를 시작,30분이면 동이난다. 입장은 당일 상오10시부터 정오까지만 허용되며 지하1층의 회랑을 통해 첫 방인 라이브러리 룸에서 출발하여 지상1층의 국가만찬장까지 모두 6개의 방만 일반에 공개된다.전체 20여분의 투어다. 백악관은 보통 관광객들이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남쪽에서는 4개층으로,정문쪽인 펜실바니아애브뉴 쪽에서는 3개층으로 보인다.따라서 관광객들은 지하1층 동쪽 회랑의 출입문으로 입장하여 첫방인 ‘라이브러리’만을 본후 지상1층으로 올라가게 된다.지하1층의 다른 방으로는 금도금한 은제품들을 진열한 ‘버메일(금도금)룸’,대통령의 식기 세트를 진열한 ‘차이나룸’,중앙의 ‘외교사절 영접룸’,그 좌측에 2차대전시 루즈벨트 대통령이 전황을 체크하기 위해 사용했던 ‘맵(지도)룸’ 등이 있다. 지상1층에는 리셉션이 열리는 가장 큰 방인 ‘이스트룸’,응접실인 ‘그린룸’과 ‘블루룸’,퍼스트레디들의 응접실인 ‘레드룸’,연회실인 ‘국가만찬장’ 등이 있고 이들 5개의 방은 모두 공개된다.또한 이들 방을 연결하는 중앙회랑에는 대통령들의 흉상과 퍼스트레디들의 초상화들로 장식돼 있다. 그러나 대통령의 집무실과 침실 등 사적 공간이 있는 2,3층은 공개되지 않는다.중앙의 거실인 ‘옐로 오벌 룸’을 중심으로 양측에 대통령의 서재와 조약체결시 사용하던 ‘트리티룸’이 있고 그 양측 옆으로 대통령의 침실과 손님방으로 사용되는 ‘링컨룸’이 있다.대통령 집무실인 ‘오벌 오피스’와 각료회의장인 ‘캐비닛룸’은 서쪽 부속건물에 있다. 1792년 초대 워싱턴 대통령의 임기중 착공된후 1800년 11월,2대 존 애덤스 대통령이 퇴임 2개월여를 남기고 미완성인채로 입주함으로써 시작된 백악관에서의 대통령 스토리는 오는 2000년 200주년에 이르게 된다.그동안 워싱턴을 제외하고 클린턴 대통령까지 40명의 대통령을 거쳐오며 조금씩 증개축되어 오늘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거주기간은 윌리엄 해리슨(9대)의 1개월부터F.루즈벨트(32대)의 12년까지 다양하다.임기중 사망한 대통령은 모두 8명으로 4명은 암살,4명은 병사로 기록돼 있다. 한편 클리블랜드 대통령은 이듬해 득녀,백악관에서 자녀를 얻은 유일한 대통령이 됐다.자녀수가 가장 많은 대통령은 타일러로 전처와 후처로부터 모두 8남6녀를 얻었다.다음은 윌리엄 해리슨으로 6남4녀를 기록하고 있다.가족대통령으로는 존 애덤스와 존 퀸시 애덤스(6대)가 부자관계 였고 윌리엄 해리슨과 벤자민 해리슨(23대)은 조부와 손자 사이로 유명하다. 워싱턴에서 또하나 빼놓을수 없는 대통령문화의 본거지는 국립초상화박물관 이다.2층의 대통령실에는 역대 미대통령들의 사진과 흉상,부조 등이 전시돼 있다.언제라도 대통령의 미소를 접하고 그 숨결을 느낄수 있는 곳이다. 시대를 초월한 국민과 대통령의 교감은 이같이 바로 민주주의의 근원을 이루는 또하나의 현장이기도 하다.백악관 ‘국가만찬장’의 벽난로 위에 새겨진 애덤스의 글귀는 긴 여운으로 남는다.“정직하고 현명한 사람들만이 이지붕 아래 살게 하소서.”
  • 제임스 먼로(美國의 대통령 문화:18)

    ◎‘먼로 독트린’ 천명… 미 외교정책 기틀 확립/재임전 국무­전쟁장관 자격 영과 전쟁서 승리/성실과 결단력으로 재선… 평화­번영시대 열어 【프레데릭스버그(美 버지니아주)=羅潤道 특파원】 미국의 제5대 대통령 제임스 먼로(1817­1825)는 1823년 유럽 열강으로부터의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간섭 배제를 천명한 ‘먼로 독트린’을 통해 신생 미합중국의 독자적 외교정책 기틀을 확립한 것으로 유명하다. 독립전쟁의 영웅으로 독립초기 신생국의 체제정비에 심혈을 쏟았던 버지니아왕조의 막내이자 건국세대(Founding Fathers)의 마지막 대통령을 역임한 그는 두차례 임기 내내 국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특히 그는 신생국가로써의 국내외적 불안정을 씻고 평화와 번영을 가져온 ‘호감의 시대’(Eraof Good Feelings)를 전개시켜 미국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준 대통령으로 평가되고 있다. ○대학중퇴 독립전쟁 참전 영국으로부터 독립의 기운이 무르익던 1758년 버지니아주 웨스트모어랜드의 개척농 아들로 태어난 그는 총명했으며 16세 되던 해에윌리엄스버그에 있던 당시 버지니아 식민지의 최고 명문이던 윌리엄&메리 대학에서 수학했다.그러나 2년후 독립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대학을 중퇴하고 대륙군 소위로 참전,뉴욕전투,저먼타운전투 등에서 용맹을 떨침으로써 특진을 거듭,1778년 전쟁이 끝날때는 계급이 중령까지 올랐다. 특히 먼로는 당시 버지니아 주지사 토머스 제퍼슨(3대 대통령)에 의해 남부 미군의 현황파악을 위한 연락관으로 임명받아 활약했으며 이후 줄곧 제퍼슨의 오른팔 역할을 했다.전쟁이 끝난후에는 제퍼슨의 지도로 변호사 시험에 합격,프레데릭스버그에서 개업했다.제퍼슨과 먼로의 우정은 16년의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죽을때까지 계속됐다. 이어 먼로는 1782년,24세의 약관에 버지니아 주의회 의원으로 당선돼 정계에 입문했으며 이듬해에는 대륙회의 의원으로 선출돼 3년간 활약한뒤 잠시 정계를 떠나 변호사일에 주력했다.그러나 1790년 연방 상원의원에 진출,제퍼슨,매디슨(4대 대통령)과 함께 민주공화당을 결성,알렉산더 해밀턴의 연방주의당에 맞섰다. 그는 프랑스와 영국주재 대사를 맡는등 외교관으로 활약했으나 이렇다할 결실은 거두지 못했다.1794년 초대 워싱턴 대통령에 의해 프랑스대사로 임명돼 프랑스와의 관계강화에 노력했으나 프랑스혁명 신봉자인 그의 노골적인 친프랑스 언동은 워싱턴의 분노를 사게돼 2년만에 소환되고 말았다.그는 다시 1803년 제퍼슨 대통령에 의해 영국대사로 임명됐으나 역시 본국정부 의도와 다른 무역협상을 벌임에 따라 다시 소환되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후에 먼로는 제퍼슨에 의해 루이지애나 식민지 구매협상 대표단장으로 프랑스에 파견됐다.1천500만달러에 당시 미국영토 2배에 달하는 영토를 구매토록하는 협상을 나폴레옹과의 담판에서 성사시킴으로서 협상력을 과시했다.또 매디슨에 의해 국무장관에 임명된 그는 1812년 영국에 선전포고,전쟁에 돌입했다.그러나 워싱턴이 함락되는등 전세가 불리해지자 자신을 전쟁장관에 임명해줄 것을 요청,국무와 전쟁 겸임장관이 된 그는 탁월한 지휘역량을 발휘,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전쟁이 끝난후 매디슨 행정부 말기는 전례없는 평화와 번영을 누리게 됐고 그 주역인 먼로의 인기는 치솟았다.대사로 프랑스·영국을 오가는 사이사이에 두차례 버지니아 주지사를 역임한 경력도 갖춘 그는 자연스레 민주공화당의 대통령후보로 1816년 선거에서 당선,매디슨의 뒤를 잇게 됐다. 59세에 대통령에 취임한 그는 어느 대통령보다도 다양한 공직경험을 갖추고 있었으며 거기서 생성된 그의 정치감각은 탁월한 각료 임명으로 나타났다.국무장관 존 퀸시 애덤스(6대 대통령),전쟁장관 존 칼훈,재무장관 윌리엄크로포드,법무장관 윌리엄 워드 등은 지성적이고 뛰어난 능력과 함께 단합이 잘돼 환상의 진용으로 평가됐다.더우기 먼로 자신의 최선을 다하는 성실함과 굳센 결단력은 모든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게 했다. 먼로는 남부와 서부 등을 광범위하게 여행하며 국민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그의 인기는 더욱 치솟아 1820년 실시된 두번째 선거에서는 232표중 231표를 얻어 만장일치로 당선된 조지 워싱턴에 이어 최다 득표로 재선되는 기록을 세웠다. 먼로는 퇴임후 리스버그의 오크힐에서 거주했으나경제적 어려움으로 고통을 겪었으며 5년후 부인 엘리자베스가 죽자 뉴욕의 딸 집으로 옮겨 쓸쓸한 말년을 보내다 1831년 7월4일,73세를 일기로 숨을 거뒀다. ○퇴임후 곤궁… 사저 매각 먼로의 유적으로는 현재 프레데릭스버그의 박물관,사저이던 샬롯빌의 애쉬론,리스버그의 오크힐 등이 보존돼 있다.변호사 사무실이 있던 건물에 들어선 박물관은 먼로독트린을 초안하던 책상 등 다양한 유품들이 진열되고 있다.또한 애쉬론 사저는 퇴임후 경제난으로 팔았던 것을 1931년 박애주의자 제이 존스가 구입,일반에 공개했다.1974년 존스 가족은 그의 모교인 윌리엄&메리 대학에 이를 기증,이 대학이 박물관과 함께 관리하고 있다. 먼로는 제퍼슨,매디슨과 매우 가깝게 지냈으며 특히 제퍼슨은 자신의 사저인 샬롯빌의 몽티첼로 인근에 ‘지적공동체’(intellectual community)마을의 설립을 위해 이들을 모여살도록 권고,애쉬론을 먼로에게 소개했으며 매디슨의 사저 몽펠리에도 이 부근에 있다. ◎먼로 지명/도시·학교·산·교회 등 238개/워싱턴·링컨과 함께 도시지명 ‘빅3’ 【프레데릭스버그(美 버지니아주)=羅潤道 특파원】 미국의 도시들은 역대 대통령의 이름을 딴 지명들이 많다.신대륙으로의 이주자들이 정착,새 도시를 건설할때마다 자신들이 좋아하는 대통령이나 위인들의 이름을 붙였기 때문이다.먼로 지명은 워싱턴,링컨과 함께 미대통령 가운데 도시명으로 가장 많이 쓰인 ‘빅3’로 알려져 있다. 워싱턴 지명이 49곳으로 가장 많고,링컨은 45,먼로는 44,제퍼슨은 41 순으로 나타나 있다.이 숫자는 미자동차협회(AAA)가 최근 발행한 ‘로드 아틀라스’에 나타난 지명을 기준으로 한것이기 때문에 산·강·호수 등 자연의 이름과 학교·역 등 공공기관의 이름까지 합하면 실제로 대통령 이름이 사용되고 있는 경우는 훨씬 많다. 먼로박물관이 펴낸 먼로 지명 연구 책자인 ‘먼로,USA’에 따르면 미국내 ‘먼로’가 들어가는 지명은 모두 238개에 달한다.그리고 미국 해방흑인들이 세운 아프리카 라이베리아의 수도 ‘먼로비아’와 남극해의 먼로섬 등 미국 밖에도 존재한다. 미국내 50개주중 36개주에 흩어져 있는먼로 지명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은 도시이름으로 26곳이 있다.인구 40명인 노스 다코타주의 소읍에서부터 인구 5만5천인 루이지애나주의 먼로시까지 다양하다.우리의 군에 해당하는 카운티 이름은 모두 18곳으로 인구 9천명의 미주리주 먼로카운티에서 인구 71만명의 뉴욕주 먼로카운티까지 그 규모가 제각각 이다. 먼로 지명이 가장 많은 주는 오하이오로 35곳이 있고,다음은 인디애나 23,일리노이 19,미주리 17,아이오와·펜실베이니아 13,버지니아 11 순을 기록하고 있다.자연지명으로는 강·호수명 10곳,산 6,숲 2,협곡 2,다리·전망대 1곳 등이 있고 교회 7곳,학교 3곳 등도 있다.
  • 앤드루 존슨(美國의 대통령 문화:16)

    ◎‘세기의 부동산거래’ 러서 알래스카 사들여/‘無學의 양복장이’서 링컨 피살뒤 대통령 승계/재임중 남북전쟁 수습·국민상처 치유에 헌신 【그린빌(美 테네시주)=羅潤道 특파원】 “저는 9살때부터 양복일을 배웠습니다.정치를 해오면서 나 자신이 양복쟁이 출신임을 감추려한적은 한번도 없습니다.왜냐하면 마름과 재단의 정확성,솔기솔기 마다의 세심한 주의,또한 고객과 약속 날짜의 준수 등 양복쟁이로서 몸에 익힌 사항들이 정치생활의 원칙에도 그대로 적용돼야 했기 때문입니다.”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암살로 갑작스레 대통령직을 승계,미국의 17대 대통령(1865­1869)에 취임한 앤드루 존슨이 취임후 기자들에게 자신의 직업과 관련해 한 말이다. ○의회 도전 강력하게 맞서 동부 테네시의 소도읍 그린빌에서 양복점을 경영하며 정치인으로 성장한 존슨 대통령의 존재는 전임자의 탁월한 업적에 가려 잘 드러나지 않고 있다.그러나 그는 남북전쟁으로 갈기갈기 찢겨진 미국민들의 상처를 치유하는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으며 또 의회의 도전에과감히 맞서 대통령의 권한을 수호해냈다.세기의 부동산 거래라고할 러시아로부터 720만달러에 알래스카 구입도 그의 재임중 일이다. 무엇보다도 무학(無學)의 양복쟁이에서 미합중국 대통령에 오른 그의 입지전적 생애는 일반대중 모두에게 ‘희망의 메시지’로 널리 기억되고 있다. 1865년 4월14일 밤,워싱턴 DC 한복판의 포드극장에서 연극 관람중 남부 과격주의자인 존 부츠에 의해 링컨 대통령이 피격된지 하룻만에 사망하자 남북전쟁의 전후처리문제로 시끄럽던 미정국은 혼돈의 와중에 빠지게 됐다.재선된 링컨의 임기가 시작된지 불과 40일만 이었다. 15일,뜬 눈으로 밤을 지샌 부통령 존슨은 링컨이 눈을 감은 극장앞 3층집의 옆방에서 각료들이 모인 가운데 대법원판사 새몬 체이스 앞에서 취임선서를 했다.그는 링컨의 정책을 계승하면서 자유정부의 원칙과 대중의 권익보호에 압장설 것임을 강조했다. 당시 최대 현안은 항복해온 남부 주들의 재건문제 였다.링컨과 마찬가지로 존슨은 현 지도자들에게 주정부를 맡기는 점진적인 재건계획을 지지했다.또한 남부에 취해졌던 해상봉쇄령을 풀고 대사면령도 내렸다. 같은 공화당 내에서도 점령군의 입장에서 남부 반란자들을 혹독하게 다룰 것을 주장해온 북부 중심의 과격파들은 이같은 존슨의 유화책에 크게 반발했다.의회는 남부 전역에 군사정부를 설치하고 400만 자유노예를 위해 강력한 자유노예위원회를 설치하는 내용의 법안을 통과시켰다.그러나 존슨은 거부권으로 맞섰다. 대통령의 유화책을 악용한 남부의 기득권층들은 여전히 실질적인 힘을 행사하며 흑인들에게 사적인 형벌을 가하는 등 사회는 혼란에 빠지게 됐다. 대통령과 의회와의 불협화음은 점차 심화됐으며 이는 양자간에 보다 큰 권력장악을 위한 힘겨루기 양상을 띄어갔다.마침내 중간선거에서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 급진파는 자신들의 주장이 대통령의 거부권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자 존슨의 축출을 모의하게 됐다.그러던 차에 존슨이 급진파와 가까운 국방장관 애드윈 스탠턴을 해임하자 상원 동의 없이 대통령 임의로 각료를 해임할수 없다는 공직신분보장법 위반을 구실로 대통령 탄핵안을 표결에 부쳤다. 두달여의 논란 끝에 68년 5월,탄핵안은 하원에서 128대 47로 통과 됐다.이어 상원의 표결로 존슨의 대통령직 존속 여부가 결정되는 순간 이었다.그러나 전체 54명중 35명만 찬성,3분의 2 선에서 1표가 모자람으로 존슨은 아슬아슬하게 미 역사상 최초의 탄핵을 면할수 있었다. ○이웃 구둣방집 딸과 결혼 69년 대통령 퇴임후 존슨은 고향으로 돌아와 연방의회 진출을 다시 도모했다. 두차례 하원의원 선거에서 낙선했으나 74년 마침내 상원의원으로 선출돼 뜻을 이뤘다.그러나 7개월후 66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말았다. 1808년 노스 캐롤라이나의 랠리에서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존슨은 3세에 부친이 죽자 생활이 어려워진 모친이 돈을 받고 9세때 양복점집으로 보냈으며 어깨넘어로 양복일을 배우게 됐다.그러나 양복점 주인과 어머니와의 계약이 21세때까지라는 사실을 알게되자 그는 15세때 그곳을 도망쳐 여러곳을 전전하다 18세때 그린빌에 정착,양복점을 개업하게 됐다. 그는 성실하게 일했고 솜씨 또한 좋아 이내 유명해졌으며 이듬해에는 이웃 구두방집 딸인 엘리자 메카들과 결혼해 자리를 잡게 되었다.메카들은 남편에게 글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매사에 열심인 존슨은 남다른 학구열을 보였다. 그의 양복점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활발한 토론을 벌이는 마을의 사랑방이 되었다.마을 사람들의 신뢰를 얻고 있던 그는 20세에 시의원으로 선출됐으며 2년후에는 시장으로 선출됐다.그후 주하원,주상원의원을 거쳐 연방하원에 진출했으며 테네시 주지사,상원의원을 역임하기도 했다.그는 모든 선출직을 단계적으로 거쳐 링컨의 러닝메이트가 됐던 것이다. ◎“노력하는 서민 대통령으로 인식”/사적지 박물관·옛양복점·私邸·묘지 등 보존/“생전에 쓰던 재단기구서 존슨의 숨결 느껴”/카렌 래핑웰 존슨사적지 안내 담당관 【그린빌(美 테네시주)=羅潤道 특파원】 애팔래치아 산록 구릉에 위치한 그린빌시가지 한복판에 자리잡은 앤드루 존슨 국립사적지의 카렌 래핑웰 안내담당관은 “앤디(존슨 대통령의 애칭)가 양복지을때 사용하던 가위,다리미,골무 등을 볼때마다 그의 숨결이 느껴진다”면서 “지금도 양복점 건물 안으로 앤디가 들어설 것같다”며 구석구석을 안내했다. ­존슨 사적지는 어떻게 구성돼 있는가. ▲비지터 센터를 중심으로 박물관과 옛양복점,옛집 등이 있고 메인스트리트에 사저가 있으며 시가지 남쪽에 앤드루 존슨 국립묘지가 있다.특히 앤디가 경영하던 양복점은 목조건물로 부식돼가고 있기 때문에 1958년 국립공원국의 관리로 되면서 건물 외부에 기념관을 지어 실내건물로 만듦으로써 이건물을 영구보존 할수 있게 됐다. ­존슨의 양복점에 얽힌 에피소드는. ▲앤디는 18세때 개업해서 12년 동안 양복점을 운영했다.시의원,시장,주하원의원 때까지 그의 직업은 양복쟁이 였다.그의 양복점은 매우 장사가 잘됐던 것으로 전해진다.양복점을 그만둔 후에도 자신의 옷은 손수 지어 입었으며 주지사 시절 우정의 표시로 이웃의 켄터키 주지사에게 양복을 지어 선물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린빌 시민들의 존슨 대통령에 대한 반응은 어떠한가. ▲앤디 생존시의 그린빌은 인구 500명 이었으나 오늘날은 1만4천명의 큰도시가 됐다.그러나 대통령의 도시에 사는데 대한 시민들의 자부심은 대단하다.비지터 센터 옆 길모퉁이에의 동상과 도시 남쪽에 우뚝 솟은 국립묘지의 중앙에 높은 기념탑을 세운 것은 이곳 시민들이다. ­존슨 대통령의 업적에 대한 평가는. ▲링컨의 그늘에 묻히고 의회의 강한 견제로 라이딩스의 대통령 평가 순위는 41명중 39위로 바닥권이다. 그러나 그는 서민대통령으로 노력하는 대통령으로 미국민들에게 심어져 있다.
  • IMF 파고 넘어 세계로 세계로…/우리 공연작품 해외 진출 열기

    ◎‘명성황후’ ‘피고지고…’ 등 줄줄이/외국 공연물 국내 초청 격감과 대조적 ‘IMF 파고를 딛고 세계로,세계로…’ 올 들어 뮤지컬·연극·무용 등 국산 공연예술작품들의 해외 진출이 눈에 띄게 활발하다.특히 교류나 홍보,행사참가 등 예전의 아마추어 차원이 아니라 작품 자체의 경쟁력을 바탕으로 세계시장에서의 흥행에 도전하는 상업적 진출이 활기를 띠고 있다.이들 해외진출작들은 대부분 이미 국내에서 성공을 거둔 한국적 체취가 물씬 풍기는 국적품들인 것이 특징이다. 이같은 해외 진출의 첫 테이프는 프로발레단인 유니버설발레단이 끊는다.유니버설은 14일 로스앤젤레스 공연을 시작으로 뉴욕 등 미국 11개 도시와 캐나다 1개 도시를 누비며 50여일간 총 27회의 순회공연을 갖는다.공연 레퍼토리는 클래식발레 ‘백조의 호수’와 창작발레 ‘심청’.유니버설측은 이번순회에 10억원 이상의 경비가 들지만 그동안 11차례 해외공연에서 쌓은 경쟁력으로 성공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자신하고 있다.특히 ‘심청’은 유니버설이 2002년 월드컵 한국 개최때까지 자체의 트레이드 상품으로 위치를 굳힌다는 목표를 삼고 있는 야심작.이번 공연에서 ‘심청’을 충분히 알린다면 그것만으로도 성공이라는 판단이다. 지난해 주방용기와 사물을 접합시킨 한국적 넌버벌 퍼포먼스 ‘난타’로 선풍을 일으킨 극단 환퍼포먼스는 올 중순 동남아 진출을 시작으로 해외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계획이다.이미 대만·싱가포르쪽과 매공연당 일정의 개런티를 받는 조건으로 7월말에서 8월초 사이 공연을 갖기로 합의했고 현재는 외환위기를 겪고 있는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태국 등과 일정을 협의중이다.환퍼포먼스는 또한 싱가포르 기획사와 합작으로 11월 영국 런던공연도 추진중이며 내년 4월의 호주페스티벌과 8월 영국 에딘버러페스티벌에도 초청을 받아놓은 상태다.이중 에딘버러페스티벌은 호주의 ‘탭덕스’가 세계적 공연상품으로 도약한 계기가 된 무대로 환퍼포먼스측의 의욕과 기대가 크다.이달말 ‘난타’의 서울 재공연을 갖는 환퍼포먼스는 이번 공연을 ‘98 난타 해외판’으로 삼아 작품을 개작하는 등 앞으로갖게 될 해외공연의 준비무대로 삼는다는 방침이다. 지난해 뮤지컬 ‘명성황후’의 뉴욕공연으로 국산뮤지컬 수출의 문을 연 에이콤은 올 중순부터 해외에서의 투자비 회수에 발벗고 나선다.이미 7월28일부터 3주일간 지난해 찾았던 뉴욕 링컨센터에서의 재공연이 확정된 상태이며 이어 곧바로 로스앤젤레스에서의 3주일 공연도 추진중이다.하반기에는 영국 런던과 프랑스 파리,일본의 도쿄와 오사카 공연 등도 가능한한 성사시킨다는 방침.지난해 첫 도전에서는 신규 제작비와 홍보 부족,시행착오 등으로 공연은 성공하고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이제부터는 흑자공연이 분명하다는게 에이콤측의 설명이다. 이밖에 국립극단의 연극 ‘피고지고 피고지고’(뉴욕·3월),국수호 중앙디딤무용단의 춤국 ‘명성황후’(도쿄·10월) 등 국내 공연단의 해외공연이 잇따라 예정돼 있다. 이같은 공연작품들의 활발한 해외진출은 외환위기 이후 외국 무대공연물의 국내공연이 자취를 감추고 있는 현상과 대조를 이루며 우리 공연상품의 본격적인 수출시대를 예고하고 있다.
  • 취임축가/이세기 사빈 논설위원(외언내언)

    지난 93년,16년만에 민주당 정권을 탄생시킨 미국 클린턴 대통령 취임행사 첫날에는 백악관앞 광장과 링컨기념관에서 다이애나 로스,레이 찰스,퀸시 존슨 등 인기가수들의 축하공연이 있었다.다음날은 케네디센터에서 ‘어린이들을 위한 갈채’‘청소년을 위한 갈채’공연과 저녁엔 캐피털센터에서 바브라 스트라이샌드가 국가인 ‘신이여 미국을 축복하소서’를 열창했다.제42대 미국대통령으로 취임하는 날에는 메조소프라노 마릴린 혼이 역시 국가를 불렀고 웨이크 포레스트대학 교수인 흑인시인 마야 안젤라가 축시를 낭독했다.유명작곡가나 시인에게 따로 작사나 작곡을 의뢰하지 않고 ‘애국가’와 ‘축시’를 취임축가·축시로 쓰고 있다. 내일이면 우리도 50년만에 처음 이룬 여야 정권교체로 야당출신의 김대중 대통령당선자가 취임식을 갖게된다.나라 안팎이 IMF몸 살로 어수선한 형편이라 호화취임식은 엄두도 못내지만 어쨌든 다른때에 비해 그 절반 수준에서 검소하게 치러질 모양이다.그래선지 지금까지 유명작곡가에게 의뢰했던 취임축가 없이 KBS가주관한 ‘겨레의 노래’공모에서 당선한 ‘아,동방의 아침의 나라’가 취임축가를 대신하고 있다. ‘아,동방의 아침의 나라/햇빛이 찬란하다/반만년 역사속에 갈고 닦은 슬기로움/새시대 열리는 이땅위에/우리 모두 힘을 모아 나아가자’로 시작되는 전주는 아침햇살이 떠오를 때의 찬란한 느낌과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국민들에게 희망과 전진,힘과 용기를 주는 멜로디가 신선하다.한평생 교직에 몸담았던 69세의 김경희씨가 ‘새벽기도후 받은 영감’을 노랫말로 적었고 바로 그의 따님인 임준희씨가 작곡,소프라노 조수미가 서울시향의 반주에 맞춰 노래부른다.우리의 취임식은 국가적 난국을 극복하려는 장중하고 맑고 힘찬 분위기로 국민적 화합과 용기를 북돋우는 자리일 수밖에없다.지난번에는 최영섭 작곡의 ‘해뜨는 아침의 나라’가 취임축가로 창작됐으나 그날 하루 일회성으로 그치고 말았다.오늘의 축가는 ‘겨레의 노래’로 만들어진만큼 국민화합을 다짐하는 노래로 계속 불려져도 괜찮을 것같다.
  • 토머스 제퍼슨(미국의 대통령 문화:11)

    ◎독립선언서 기초한 ‘미 건국의 일등공신’/“지도자의 민중 불신은 정부 불신 초래” 철학 실천/직접설계 건축한 사저 세계문화유산 지정 보존 【샬롯빌(미버지니아주)=나윤도 특파원】 “언론이 자유스럽고 모든 사람이 그 언론에 접할수 있을 때 우리 모두는 안전해진다.”미국 건국의 1등 공신으로 추앙받는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은 열렬한 자유언론의 신봉자였다. 특히 그의 정치철학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민중에 대한 신뢰’사상은 미대통령의 국민사랑과 국민존중 정신의 기원이 되고 있다. 그는 국무장관 출신으로 후임 대통령이 된 제임스 메디슨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의 자유를 보존하기 위해 확실히 의존할수 있는 유일한 것은 민중뿐”이라고 강조하며 “지도자의 민중에 대한 불신은 민중의 정부에 대한 불신을 가져온다”는 소신을 피력했다. 특히 책을 좋아해 ‘걸어다니는 도서관’이라는 별명을 얻기까지한 그는 자신의 집에 넓은 도서관을 만들어 6천여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이 책들은 1814년 영국군의 워싱턴 침공으로 불탄 미의회도서관을 재건할때 밑거름이 됐다. ○‘걸어다니는 도서관’ 별명 버지니아 서부 셰난도 밸리의 아름다움을 뒤로하고 펼쳐진 샬롯빌은 버지니아 중서부 최대의 도시로,명문 UVA(버지니아대학)가 위치한 교육도시이자 건국초기 3명의 대통령을 배출시킨 미 역사의 중심지로 유명하다. 워싱턴에서 서남쪽으로 뻗어나간 29번 도로를 따라 2시간 가량 달려가면 샬롯빌에 이르러 제퍼슨의 사저인 ‘몽티첼로’가 나온다.그 인근에는 미헌법의 아버지인 4대 대통령 매디슨의 사저 ‘몽펠리에’와 유럽 간섭을 배제하고 자주외교를 천명한 몬로독트린으로 유명한 5대 제임스 몬로의 ‘애쉬론’농장 등이 자리잡고 있어 이 일대는 조지 워싱턴을 비롯 모두 8명의 대통령을 배출,건국초기 버지니아왕조라는 말을 탄생시킨 현장이기도 하다. 1776년 미독립선언서의 기초자로 유명한 제퍼슨 대통령은 역대 42명의 미대통령중 가장 재능이 많고 지식이 풍부했던 대통령으로 꼽히고 있다.그는 건축가이자 발명가로 유명했으며 또 저술가,음악가로도 당대 최고의 경지를보일 정도로 다양한 능력의 소유자 였다.정치경력 측면에서도 주의원,연방하원의원 등 의회직을 비롯,주지사,대사,국무장관,부통령 등을 역임한 가장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 이태리어로 ‘작은 산’ 이라는 뜻의 몽티첼로는 제퍼슨이 어린시절 뛰어놀던 자신의 농장 한가운데 있는 작은 언덕에 우뚝 서있다.그가 직접 설계하여 지은 이 집은 인간의 삶과 주거공간을 가장 이상적으로 결합시킨 건축물로 평가되고 있다.집과 정원과 농장이 함께 어우러져 조화를 이룬 몽티첼로는 그의 또하나의 걸작품인 UVA의 아카데미 빌리지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보존되고 있다. 미독립의 기운이 싹틀 무렵인 1743년 버지니아의 부유한 개척농가에서 태어난 제퍼슨은 당시 명문이던 윌리엄&메리 칼리지를 졸업하고 24세에 변호사 시험을 패스한뒤 10년동안 주의원으로 활약했다.75년부터 76년까지는 대륙회의에 버지니아 대표로 참석,독립 달성을 위해 결정적 역할을 했으며 그후 버지니아 주지사와 프랑스대사를 지냈다. ○퇴임후 버지니아대학설립 특히 프랑스혁명을 현지에서 직접 겪은 제퍼슨은 귀국후 인간의 권리를 더욱 강화하는 ‘권리장전’ 등 헌법수정안을 통과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 대통령이 된 그는 국민들로부터 사랑받는 좋은 정부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그가 생각한 좋은 정부는 국민들이 자기사업을 자유로이 영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가능한한 작고 약한 정부라고 생각했다.그리고 영국군과의 전쟁을 치르면서 눈덩이처럼 불어난 국채의 상환을 위해 엄격하게 내핍하는 간소한 정부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29세때 결혼한 부인 마르타의 10년만의 죽음은 그에게 큰 마음의 상처를 안겨주었으며 이후 평생을 독신으로 살며 1남5녀의 자식을 키웠다.그는 백악관에 홀아비로 입성한 첫대통령이었으며 큰 딸 마르타가 8년동안 퍼스트레디의 역할을 맡았다. 대통령 퇴임후 몽티첼로로 돌아온 제퍼슨은 후세 교육에 각별한 관심을 보여 버지니아대학을 설립했다.그는 가장 이상적인 아카데미 빌리지의 설계뿐아니라 교수진 선발,커리큘럼 등도 만들었으며 초대 총장을 역임했다.특히 후임 대통령이 된 메디슨과 몬로 등 고향 친구들과는 한동네에 살며 버지니아대 총장까지도 돌아가며 할 정도로 한평생 교분을 나누며 살았다. 그는 말주변이 없어 연설에는 곤혹을 치렀지만 뛰어난 문장력으로 글쓰기를 좋아해 퇴임후에도 1년 평균 1천통이 넘는 편지를 주고 받았다.정부통령으로 있으면서도 경쟁관계로 사이가 나빴던 2대 대통령 존 아담스와는 나중에 화해하여 다시 친하게 지냈으며 독립선언 50주년이 되던 1826년 7월4일 같은날 죽는 우정을 과시하기도 했다. 제퍼슨은 자신의 묘비명에 미독립선언서의 기초자,버지니아 종교자유장전의 기초자,버지니아대학 설립자를 기록해줄것을 유언으로 남겼다.그는 대통령으로서의 역할보다도 이들 역할에 더큰 자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건축가로도 탁월한 능력”/“인간의 삶­주거공간 이상적 조화/불 대사 재직시절 독학으로 터득”/제퍼슨 기념재단 이사장 다니엘 조던 【샬롯빌(미버지니아주)=나윤도 특파원】 몽티첼로를 관리하고 있는 토마스제퍼슨 기념재단 이사장 다니엘 조던 박사는 버지니아대 역사학과 교수로 제퍼슨 연구의 최고 권위자로 알려져 있다. ­대통령 제퍼슨에 대한 평가를 설명해달라. ▲라이딩스의 조사에 따르면 42명의 미대통령중 4위로 나타났다.다른 조사들도 빅 쓰리(링컨,워싱턴,프랭클린 루즈벨트)와 비슷한 높은 평가를 내리고 있다.마운트 러시모어의 4명의 대통령상에도 포함돼 있다.워싱턴이 건국의 아버지라면 제퍼슨은 건국의 1등공신 이다. ­제퍼슨의 능력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무엇인가. ▲건축가로서의 능력을 제일로 꼽을수 있다.프랑스대사로 파리에 있는 동안 독학으로 터득한 그의 건축에 대한 안목은 인간의 생활 양태와 주거공간의 조화를 실현시킨 것으로 탁월한 것이었다.몽티첼로의 집안 및 정원 배치,버지니아대 아카데미 빌리지의 학문공간과 생활 공간과의 연계는 뛰어난 것이다.피라미드,만리장성 등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보호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그는 7개국어를 이해할 정도로 해박했다. ­제퍼슨의 몽티첼로 생활은. ▲1772년부터 1826년 사망때까지 54년을 살았다.퇴임후에는 독서와 발명에 몰두하며 농부로서 정원가꾸기에 심혈을 기울였다.그러나 다소 사치스러운 생활로 곧 생활의 어려움을 겪게 됐으며 의회도서관 화재시 책을 2만4천달러에 판것도 그 때문이다.그는 메디슨,아담스 등 친구들과의 서신교환을 좋아해 모두 1만9천여통의 편지를 남기고 있다. ­워싱턴의 제퍼슨 기념관은 언제 건립됐나. ▲1943년 4월13일 제퍼슨의 200주년 탄생일에 봉헌됐다.워싱턴 포토맥강가에 제퍼슨의 동상과 어록 등을 새겨놓은 둥근 기념관이 우뚝 서 있으며 수많은 관람객으로 붐비고 있다.
  •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미국의 대통령문화:10)

    ◎한국전 휴전 등 성사… ‘국제평화의 전도사’/후르시초프 방미 실현… 냉전해소 노력/동남아조약기구·IAEA창설 결정적 역할 【애빌린(미캔자스주)=나윤도 특파원】 “I like Ike”(나는 아이크를 좋아한다.)1952년 34대 미 대통령선거전에 나선 공화당 후보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장군의 선거 캐치프레이즈는 오직 이 한마디 였다. 2차대전의 영웅으로 이미 탁월한 지도력이 입증된 아이젠하워 후보를 온국민들은 풀 네임보다도 애칭으로 부르기를 좋아했다.그리고 그들은 빨강·하양·파랑 바탕에 이 글귀가 쓰인 캠페인 뱃지를 자랑스럽게 달고 다녔다. 이같은 아이젠하워의 치솟는 국민적 인기는 일리노이 주지사 출신인 민주당 아들라이 스티븐슨 후보의 풍부한 행정력과 지식,재치,세련된 언변,화려한 공약 등을 두차례나 무용지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당선자 신분 한국전선 시찰 선거결과는 선거인단수 442대 89라는 아이젠하워의 압도적인 승리로 나타났다.더우기 공화당에 상하양원의 압승까지 안겨주어 루즈벨트­트루만으로 이어지는 민주당 집권20년의 종지부와 함께 새로운 공화당 시대의 개막을 가져왔다. 20세기 들어 대공황­2차대전­냉전­한국전쟁의 사슬에 얽매여 한시도 긴장을 풀수 없던 미국민들은 하루빨리 정상상태로의 복귀를 열망했고 아이젠하워는 이같은 기대를 충족시켜줄 최적의 인물로 추대됐던 것이다.아이젠하워는 또 39세의 젊은 캘리포니아 출신 상원의원 리처드 닉슨을 런닝메이트로택함으로써 62세로 상대적으로 고령이던 자신의 나이에 대한 국민들의 우려를 불식시켰다. 당시 선거에서 최대의 이슈는 수많은 미군 사상자를 낸채 교착상태에 빠져있던 한국전쟁의 종식과 관련된 것이었다.아이젠하워는 이를 공약으로 내세웠고 선거가 끝난후 당선자 신분으로 아직 포화가 멎지 않고 있던 한국전선을 방문,국민과의 약속을 실천하는 대통령의 모습을 보였다. 취임연설에서는 “국제평화 유지를 위해 모든 국가와 협력하겠다”고 강조,평화를 갈망하던 국민들의 염원에 답했다.실제로 그는 한국전쟁의 휴전을 성사시켰으며 미군의 베트남전 참전을 반대했다.또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역설,국제원자력위원회(IAEA)의 결성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소련과의 대화도 시도했으며 장차 군산복합체 대두에 대한 위험성을 경고하기도 했다. 그는 국내적으로는 방만한 정부 예산의 감축을 위해 국방비의 절감,감세,정부사업의 축소,각종 규제의 완화 등 연방정부의 활동을 대폭 축소시키는 방향으로 정책을 이끌어갔다.그리고 전임 대통령들과 달리 대통령보좌관을 선임,그에게 상당부분의 권한을 위임하고 자신은 세세한 문제에는 관여치 않는 당파를 초월한 정치를 추구했다. 미시시피강 서부 대평원의 중앙에 위치해 있는 인구3천명의 캔자스주 애빌린은 아이젠하워의 도시로 유명하다.도시 중앙에 위치한 아이젠하워센터에는 중앙에 그의 동상을 중심으로 성장기의 집과 묘소,박물관,도서관이 자리잡고 있어 커다란 역사공원을 이루고 있다.1898년부터 46년까지 아이젠하워 패밀리가 살았던 사저는 캔자스의 평범한 시골집의 정형을 이루고 있다. 센터 입구에 ‘명산의 집’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교회형태로 생긴 그의 묘소는 경건의 장소로 일반에 공개되고 있으며 박물관은 2차대전및 냉전시대의 전쟁박물관으로,도서관은 아이젠하워 대통령 8년간은 물론 그가 군사령관으로 남긴 것까지 모든 자료의 집대성을 이루고 있다.특히 아이젠하워와 맥아더가 주고받은 편지들도 보관돼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편지에서 아이젠하워는 맥아더를 항상 ‘장군님’이라고 존경의 호칭을 사용했고 맥아더는 ‘사랑하는 아이크’라고 적고 있는등 두사람의 인간적인 관계는 계속됐던 것으로 보인다. 대륙횡단 철도가 지나기 때문에 텍사스등지에서 동부로 수송을 위해 수백만마리의 젖소들만 몰려들던 황량한 시골마을인 이 도시는 오늘날 인구 3천명의 소도읍으로 성장했으며 아이젠하워를 키워낸 자부심에 가득차 있다. 19세기에 출생한 마지막 미대통령인 아이젠하워는 1890년 텍사스 데니슨에서 출생했으나 어려서 부친이 애빌린으로 이사하는 바람에 초,중·고등학교를 이곳에서 다니는 등 애빌린을 실질적인 고향으로 간주해왔다.낙농업에 종사하던 부친의 사업부진으로 대학진학은 엄두에 두지도 못하던 아이젠하워는 21세때 뒤늦게 웨스트포인트에 진학,군생활을 출발하게 됐다. ○흑백차별엔 단호한 입장 1차대전때 군훈련교관을 역임하고 파나마운하 주둔군으로 활약하던 그가 두각을 나타낸 것은 1930년초 필리핀 주둔군사령관 이던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의 보좌관으로 발탁되면서부터 였다.41년 일본의 진주만 폭격 이후에는 조지 마샬 참모총장에 의해 전쟁성의 태평양전략 담당관에 임명돼 탁월한 기획능력을 발휘했다.마침내 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시켜 히틀러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안겨줌으로써 연합군측의 승리를 이끌어낸 그는 국민적 영웅으로 칭송받게 됐다. 전쟁이 끝난후 군을 떠나 콜럼비아대학 총장으로 잠시 외도한 그는 트루만 대통령에 의해 51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사령관으로 다시 군에 복귀했다.52년 대통령 선거가 다가왔을때 트루만 대통령의 불출마 선언에 따라 공화,민주 양당에서 그에게 대통령 후보를 타진해 왔으나 그는 공화당을 택했고 압승을 거두게된 것이다. 아이젠하워는 재임중 사회복지문제에 관심을 기울여 이를 담당할 보건부,교육부,복지부 등의 부서를 창설했다.특히 흑백차별 문제에는 단호한 입장을 표명했다.57년 아칸사스주 리틀록의 백인 고등학교에서 흑인들의 입학을 거부하고 주지사가 민병대까지 동원,이를 옹호했다.이에 대해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1천명의 낙하산부대를 투입,흑인학생들을 호위 등교케하고 한학기 동안 학교를 순시케 하는 등 단호히 맞서 마침내 차별론자들을 굴복시켰다. 대외정책은 존 덜레스 국무장관에게 위임시켜 행하게 했으며 동남아조약기구(SEATO),를 창설하는 등 공산주의 확산을 막는데 크게 기여했다.또 후르시초프의 방미를 실현시키고 소련에 영공 공개와 공중 군사설비 조사에 관한협정 제안등 냉전해소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아이젠하워는 남북전쟁의 격전지 였던 펜실바니아주 게티즈버그에 농장을 짓고 퇴임후 그림을 그리며 말년을 보냈다.오늘날 애빌린 못지 않게 게티즈버그의 아이젠하워 하우스에도 많은 관광객이 몰려들고 있으며 이곳에는 링컨 워싱턴 등 인물화와 각종 풍경화 등 그가 남긴 수십점의 작품들이 진열돼 예술가대통령으로서의 푸근함 또한 느끼게 하고 있다. ◎다니엘 홀트 아이젠하워 도서관장/“정치인·군인 모두 성공적 삶”/“62년 도서관 개관… 220만점 소장 한국전쟁 관련 자료도 상당수 보관” 【애빌린(미캔자스주)=나윤도 특파원】 아이젠하워 도서관의 마틴 티즐리 관장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정치인으로서 군인으로서 두가지 생을 모두 성공적으로 마친 훌륭한 대통령으로 국민적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대통령의 하나로 소개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가장 큰 업적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센터 중앙에 있는 그의 동상에는 ‘평화의 챔피온’이라는 글귀가 써있다. 그는 전쟁에 피곤해있던 미국민들에게 평화를 심어주려 노력했다. ­도서관의 연혁및 활동은. ▲대통령 도서관으로는 네번째로 1962년 개관됐으며 초기 120점 이던 소장 자료가 이제 220만점으로 증가됐다.주로 2차대전과 관련된 것들이 많으며 400여명의 등록 학자들을 비롯 수많은 연구자들이 찾고 있다.특히 NATO 콜렉션은 미국내 최고를 자랑하고 있다.한국전쟁 관련 자료도 상당수 보관돼 있다. ­지역에의 기여는 어떤 것이 있는가.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탄생일과 2차대전* 각종 기념일 등에 다양한 추모행사를 갖고 있으며 애빌린 주민들의 참여도는 매우 높다.특히 묘소가 있는명상의 집은 주민들의 경건의 장소로 널리 활용되고 있다.국립문서보관소에서 모든 운영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주민들의 헌신적인 자원봉사자로서의 참여가 없다면 상당히 어려울 것이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국민들과의 관계는. ▲TV시대가 개막될 무렵이어서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도 국민들과 접촉이 많았던 대통령으로 볼수 있다.특히 그는 골프와 낚시 등 스포츠를 좋아했으며 대통령과 아놀드 파머와의 골프경기는 국민들의 가장 큰 관심사의 하나였다.
  • 드러커의 충고­대통령 수칙/김호준 논설주간(정치평론)

    현대경영학의 대부로 불리는 피터 드러커는 지난 반세기동안 많은 경영인과 고위관리들에게 스승이자 충고자의 역할을 해왔다.올해 89세인 드러커는 특히 사회·경제적 힘에 대한 예리한 이해력과,어떻게 하면 지도자가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현실적 통찰력을 겸비한 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드러커가 5년전에 쓴 ‘대통령이 지켜야 할 6가지 규칙’은 역대 미국 대통령을 소재로 한 이야기지만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그는 아무리 무능한 사람이라도 이 6가지 규칙을 준수하는 동안에는 효과적으로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아무리 강력한 대통령이라도 실패했다고 주장한다. 드러커가 제시한 수칙 제1조는 아주 단순하다.“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고 자문하는 것이 대통령이 할 첫번째 일이라는 것이다.그리고 그것이 비록 위험하고 골치아픈 일일지라도 단 하나의 과제를 선택해야 한다고 그는 강조한다.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이다. 트루먼이 유능한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국제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했기 때문이라고 드러커는 말한다.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대통령에 취임한 트루먼은 전쟁에서 국내문제로 눈을 돌려 전임자인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뉴딜정책을 적극 추진하기로 마음을 먹었다.그러나 스탈린이 팽창주의로 나오자 즉각 대소정책을 최우선 과제로 추진함으로써 장차 자유세계를 이끄는 미국의 리더십 확보에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 수칙 제2조는 “관심을 여기저기 분산시키지 말고 한 곳에 집중하라”는 것이다.60년대에 존슨 대통령은 월남전쟁과 국내빈곤문제라는 두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으려다가 결국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1981년 인플레이션 진정을 최우선 과제로 삼은 레이건 대통령의 정책은 불경기를 이유로 많은 반대에 부딪쳤다.실제로 실업률은 수개월만에 7.5%에서 10%로 뛰어올라 대공황 이래 최고치를 기록했다.그럼에도 인플레이션 진정은 실효가 컸다.레이거노믹스로 불린 공급중시의 레이건 경제정책은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일자리를 창출하는 기초를 다졌고 그 결과 레이건은 임기말까지 기분좋게 대중적 인기를 누릴 수 있었다. 수칙 1·2조에 관한한 김대중 당선자는 이미 ‘합격’판정을 받았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경제살리기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국가적 최우선 과제로 자리잡은 데다가 김당선자 자신도 당선직후부터 지금까지 오직 경제살리기 하나에 매달려 진력하고 있으니 말이다. 세번째 수칙은 “뻔한 것에 승부를 걸지 말라”는 것이다.불발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취임초 클린턴 대통령은 동성연애자의 입대금지를 철폐하는 법안의 통과가 당연한 것이라는 입장을 취했다.그러나 국민들은 클린턴의 제안을 동성연애자에 대한 권리를 보장하려는 것으로 인식하지 않고 군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그 결과 클린턴은 갓 임기를 시작한 대통령으로서는 최악을 기록할 만큼 인기가 급락했다. 문제는 뻔한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다.지나고 보면 분명하게 드러나지만 당시에는 국민과의 인식차이를 깨닫기 어려운 것이 정치적 결단이다.그래서 정치에는 위험이 따르는 것이다.노태우 정부의 중간평가 유보가 “뻔한 것에 내기를 걸지 말라”는 교훈을잘 이용한 사례였다면 김영삼 대통령의 노동법강행처리는 그 반대였다고 하겠다.김대중 당선자의 경우 당면 현안인 정리해고제는 노사정 대합의를 끌어내 넘어간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자민련과의 약속인 내각제에 대해서는 과연 어떻게 승부를 낼 것인지가 주목된다. 네번째,“현명한 대통령은 사소한 일에 깊이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존슨과 카터 대통령의 평판이 떨어진 것은 자신이 직접 모든 일을 챙기려 했기 때문이다.현명한 대통령이라면 사소한 것을 꼼꼼히 챙기고 싶은 유혹을 거부해야 한다고 드러커는 충고한다.대신 조율이 잘된 소수의 실무팀을 확보하고 있어야 하며,그 구성원들은 자기가 맡은 분야에 명백한 관리책임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10명의 각료 가운데 국무장관을 제외한 9명을 모두 테크노크라트로 충원했다.그리고 주요정책 결정은 자신이 하고 다음 일은 각료에게 맡겼다.그 결과 루스벨트는 전례없는 큰 권력을 행사하면서도 가장 오랫동안 스캔들 없이 대통령직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이 수칙대로라면 매사를 꼼꼼하게 챙기기로 정평이 난 김당선자의 경우 변화가 있어야 할 것이다. “대통령은 정부내에 친구를 두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다섯번째 수칙이다. 백악관 사상 가장 사교적인 대통령이었던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그의 수많은 친구들 가운데 단 한사람도 정부요직에 앉힌 일이 없다고 한다.링컨의 좌우명이기도 한 이 수칙을 어긴 어떤 대통령도 남은 생애를 후회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고 드러커는 말한다.대통령 주변의 호가호위와 비리,그리고 그 말로를 최근까지도 숱하게 목격해온 우리에게는 이 경고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그러나 오랜 정치생활로 누구보다도 주변인물이 많은 김당선자가 이 수칙을 얼마나 준수할지는 온 국민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정말로 인사가 만사임을 보여주기를 바란다. 여섯번째는 트루먼이 대통령당선자 케네디에게 준 충고,“대통령에 당선됐으면 이제 캠페인은 그만 두라”는 것이다.드러커는 이 수칙에 대해 더 이상 부연설명을 안했지만,뜬 인기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민심의 저류를 읽으며 역사와 승부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 민주주의 전도사 에이브러햄 링컨:하(미국의 대통령 문화:7)

    ◎남북 대화합 이룬 ‘정직의 대명사’/“연방통일이 헌법보다 우선” 주독립 불가 역설/국민에 전쟁 수행 독려… 당대엔 인기 못 얻어/최악의 상황 유일한 탈출구는 일상화된 유머감각 【스프링필드(미 일리노이주)〓나윤도 특파원】 1861년 2월11일 일리노이주 주도 스프링필드의 중앙역인 그레이트 웨스턴역.취임식 참석차 워싱턴으로 떠나기 전,플래트홈에 마련된 연단에 오른 링컨 대통령 당선자는 군중들의 환호에도 불구하고 자못 침통한 표정으로 무겁게 입을 열었다. “친구 여러분,내 입장에 있지 않은 여러분 어느 누구도 이 이별의 순간에 솟구쳐 오르는 나의 슬픈 감정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나는 4반세기를 이곳에서 살면서 모든 것을 빚진 채 지금 고향을 떠납니다.이제 가면 언제 돌아올 것인지 혹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지도 모릅니다.나에게는 워싱턴에 부여된 일보다도 더욱 무거운 일들이 앞에 놓여 있습니다” 과거 역사자리에 선 ‘링컨 디폿 뮤지엄’에서 상영하는 링컨의 24년동안 스프링필드에서의 생애를 담은 30분짜리 비디오는그가 비장한 연설을 남긴 후 그의 일행을 태운 기차가 이곳을 빠져나가는 장면에서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죽음으로 국가 구해 이미 6개주가 연방을 탈퇴해서 독자 정부를 수립한 최악의 상황에서 연방대통령직 수행은 그 자체가 엄청난 형극의 길임을 링컨은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다.그는 자신의 우려대로 살아서 다시 고향땅을 밟지 못했다.그러나 자신의 죽음으로 국가를 구했다.주검으로 고향에 돌아온 그는 시가지 북부 오크리지 묘지 중앙에 우뚝 서 스프링필드 시가지를 내려다보고 있다. 스프링필드는 링컨이 변호사로,주의원,연방하원의원 등 공직생활을 하며 정치적 입지를 키운 곳이다.시 중심지 연방청사에서 5블럭 떨어진 곳에 위치한 그의 사저일대가 국립역사공원으로 지정돼 있으며,그의 변호사 사무실인 링컨­헌돈 로 오피스(law office),그가 출석하던 제일장로교회에는 그의 가족들이 즐겨 앉던 자리가 보존돼 있는 등 미 전역 10여개 도시에 흩어져 있는 링컨 사적지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잘 보존돼 있다. 특히 링컨이 연방분열을 경고한 ‘분열된 집안’이라는 연설로 유명한 옛 주의사당인 올드 스테이트 캐피틀에는 오늘날 미국내 최대의 링컨자료실이있는 일리노이 주립박물관이 들어서 있다.헨리­호너 링컨 콜렉션이라 이름지어진 이 박물관 내의 링컨 자료실은 소장하고 있는 관련 자료의 방대함은 물론 희귀자료를 가장 많이 보관하고 있어 미국내 링컨니아나(링컨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센터 역할을 하고 있다. ○취임 37일만에 전쟁 발발 대통령 취임후 불과 37일만에 남북전쟁이 발발함으로써 링컨은 임기 내내 전쟁을 이끌어야 했다.이 기간중 링컨은 줄곧 참모들로부터 또는 많은 북부의 국민들로부터도 전쟁종식의 압력을 받았다.그러나 링컨의 신념은 확실했다.전쟁의 종식은 연방의 분열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그것은 미합중국의 존립 이유를 뿌리채 흔드는 것이었다.링컨은 기회있을 때마다 미 건국역사에서 ‘연방’은 ‘헌법’보다도 앞선 것임을 주장했다.그리고 몇몇 주의 영원한 분리는 불가능함을 강조하며 남부측에 타협을 호소했다. 그러나 미시시피 상원의원 출신의 남부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 역시 물러설 수 없었다.특히 그는 웨스트포인트 출신으로 멕시코전쟁에서 지휘관을 역임한 바 있는 전략가였다. 당초에는 남부의 여러가지 수치상 열세로 전쟁이 수개월내 끝날 것으로 예측됐다.그러나 초기 ‘불 런’전투에서 북부군의 대패는 전쟁의 장기화를 예고했다.전쟁 내내 링컨은 남북 양측 군대의 주전선이 메릴랜드주와 버지니아주 경계의 포토맥강을 중심으로 형성됨에 따라 야전군 지휘소처럼 변해 버린 워싱턴에서 북부군의 전략수립과 지휘관 찾기에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전쟁관련 도서 탐독 미시시피강을 서쪽 경계로 해 동쪽으로 애팔래치아산맥 사이에 광범위하게 형성된 전선에서 서부에는 율리시즈 그랜트 장군과 티컴셰 셔만 장군 등이 있었지만 동부전선에는 남부군의 용장,로버트 리 장군과 스톤월 잭슨 장군에 맞설만한 지휘관이 없었던 것이다.그는 또 군사전략 수립을 위해 의회도서관에서 전쟁의 기술에 관련된 책들을 빌려다 닥치는 대로 읽었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링컨은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에 부닥치게 됐다.전쟁의 시작은 노예문제에서 비롯됐지만 그 목표설정에 관한 것이었다.일부 공화당 의원들은 궁극적으로 노예해방까지 가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민주당을 비롯한 대부분의 분위기는 연방회복으로 제한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노예제도가 남부의 경제적 부의 원천이라고 생각했으며 따라서 남부를 패배시키기 위해서는 노예제 폐지를 선결과제로 간주했다.62년 여름,그가 내각에서 노예해방 선언의사를 밝혔을 때 많은 각료들이 반대했다.그러나 링컨은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그해 9월 앤티담 전투에서 북부군이 승기를 잡자 바로 이튿날 준비했던 노예해방선언을 감행했다. ○노예해방 북부도 반대 노예해방선언은 그러나 남부는 물론 북부의 반대도 불러 일으켰다.북부 공업지대의 많은 근로자들이 노예들의 해방으로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길 것을 두려워 했기 때문이다.또한 북부의 승리가 확실시 되면서 남부주들을 포용하기 위해 내놓은 링컨의 온건한 화합정책들은 응징과 처벌을 요구하는 북부 과격파들의 건센 반발 가져왔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가정의 연이은 비극은 링컨에게 더 큰 시련을 안겨주었다.부인 메리 토드 여사와의 사이에 둔 네아들중 한 아들은 일찍 죽었고 백악관에서만 두 아들이 병으로 죽게 되자 메리 여사는 심한 정신적 충격으로 한때 정신과 치료를 받기까지 할 정도였다.오직 한 아들 로버트만이 성장하여 후에 가필드 행정부에서 전쟁장관을 지냈다. 링컨이 이같은 암담한 안팎의 불행을 이기고 남북전쟁과 노예해방에 정열적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탈출구는 일상화된 그의 유머감각 이었다고 역사가들은 지적한다.그는 아무리 심각한 회의도 조크와 유머로 시작했으며 순간적인 재치로 스트레스를 풀곤 했다.그가 엄숙하게 노예해방선언의 의사를 물었던 각료회의도 유머 한토막을 읽는 것으로 시작했다는 것은 유명하다. 링컨은 당대에는 국민들에게 그리 인기있는 대통령은 아니었다.전쟁 수행을 위해 끊임없이 국민을 독려하고 재촉해야 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정직한 에이브’라고 그의 이름이 정직의 대명사가 될 정도로 그는 국민에게 솔직했으며 결국 그는 192㎝의키에서 뿐 아니라 미 역대 대통령중 가장 우뚝 선 대통령으로 남게 된 것이다. ◎킴 바우어 미 일리노이 주립박물관 헨리­호너 링컨자료 실장/링컨의 인간평등 정신 역사에 우뚝/학자 800명·기관 50개 링컨학회 결성/“대통령학 가장 흥미있고 미래 지향적” 【스프링필드(미 일리노이주)=나윤도 특파원】 미국내 최대 링컨 관련자료 소장 도서관으로 알려진 일리노이 주립박물관의 링컨자료실장 킴 바우어 박사는 “링컨 대통령은 많은 학자들의 새로운 연구를 통해 해가 갈수록 그 업적이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되고 있다며 대통령학이야말로 가장 흥미진진하고 미래지향적 학문”이라고 강조했다. ­모든 조사에서 링컨 대통령이 미국 역대 대통령중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부동의 자리를 점하고 있는 이유는. ▲우선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끝내 연방을 지켜낸 그의 소신과 노예해방을 가져온 그의 투철한 인간평등 정신 때문으로 볼 수 있다.더우기 그의 어려운 성장환경과 정직한 성품은 누구에게든 자신감과 신뢰감을 안겨 준다. ­미국내 링컨 연구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링컨은 켄터키의 통나무집 시절서부터 인디애나를 거쳐 일리노이 스프링필드에 이르기까지 많은 곳에서 성장했다.그리고 백악관 생활과 남북전쟁 당시 여러차례의 전장 방문 등 많은 자료들이 광범위하게 흩어져 있기 때문에 학자들의 상호보완 연구가 중요하다.현재 800여명의 학자와 50개 소장기관으로 에이브러햄 링컨 학회가 결성돼 있고 매년 심포지움과 학회지 등을 통해 200편 이상의 논문과 책들이 나오고 있다. ­헨리­호너 링컨자료실은 어떤 곳인가. ▲모든 분야의 링컨 자료를 소장하고 있지만 링컨의 대통령 이전 자료는 최대의 소장처로 알려져 있다.현재도 개인적인 링컨 자료 소장자들이 많이 있으며 그들로부터의 기증이나 구매 등을 활발히 하고 있다.지난해만 해도 일리노이의 기업가 클레망 스톤씨로부터 200여점,미니애폴리스 공공도서관으로부터 200여점,최대 여성 수장가인 제인 하만드 여사로부터 링컨의 어린시절유품 수십점을 기증받는 등 계속 소장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대통령학은 과거지향적 학문이 아닌가. ▲과거 대통령에 대한 철저하고 정확한 연구는 현재와 미래의 국민과 대통령에게 과거의 경험을 부여해 준다는 측면에서 미래지향적 학문으로 볼 수 있다.
  • 민주주의 전도사 에이브러햄 링컨:상(미국의 대통령 문화:6)

    ◎노예 사슬 풀고 갈라진 연방 재통합/노예제 폐지 강력 주장 대통령 당선/취임전 남부6개주 연방 이탈 ‘시련’/전쟁초기 북­23 남­11주 절대 우세/해방선선임 영·불 불개입 끌어내 승기/연임 취임 40일만에 흉탄에 쓰러져 【게티즈버그(미펜실베이니아)〓나윤도 특파원】 “87년전 우리의 조상들은 이 대륙에,자유를 숭상하고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전제를 신봉하는 새로운 국가를 탄생시켰습니다.… 이같은 건국의 신조를 지키기 위한 싸움에서 우리 병사들은 위대하게 목숨을 바쳤습니다.… 이제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더욱 헌신할 것을 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 아래서 이 나라가 자유의 새탄생을 맛보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인민의,인민에 의한,인민을 위한 정부는 이 지상에서 사라져 없어지지 않도록해야 합니다.” 1863년 11월19일,피비린내가 가시지 않은 게티즈버그 벌판의 골짝 골짝으로 퍼져나간 링컨 대통령의 이 짧은 연설은 모든 청중들을 사로 잡았다. 펜실베이니아주 남쪽 메릴랜드와의 점경에 위치한 게티즈버그는 미남북전쟁 최대의 격전지로 그해 7월1일부터 3일까지 사흘 동안의 전투에서 5만1천여명의 사상자를 기록하며 남부군의 기세를 꺾고 북부군 승리의 전기를 마련한 곳이다. 이날 링컨이 게티즈버그의 전투지 일대를 국립묘지로 지정하는 봉헌식을 올리면서 강조한 이 연설은 미국 민주주의 정신을 가장 잘 요약한 명연설로 오늘날까지 미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매년 수백만명의 관광객이 모여드는 게티즈버그 국립묘지 안에는 링컨의 연설장소에 세워진 링컨 스피치 메모리얼을 비롯,전몰병사기념탑 등 많은 남북전쟁 기념물들이 산재해 있다. 또한 게티즈버그 시가지에는 링컨이 연설 전날 묵으며 연설문을 가다듬었던 링컨 스퀘어의 호텔방을 그대로 보존,‘링컨 룸 박물관’으로 공개되고 있다. 또한 역대 대통령들의 밀랍인형으로 꾸며진 ‘프레지던트 홀’,링컨 열차 박물관 등 링컨의 체취가 그득하다. 분지형태로 된 격전지는 투어버스로 사흘동안의 전쟁상황을 상세히 안내해 주고 있다. 켄터키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정규교육도 받지 못한채 독학으로 28세때 변호사 자격을 획득,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에서 변호사를 개업했다. 또 주의원을 거쳐 연방하원 의원을 지내는 등 정치인으로서의 역량을 키워온 링컨은 당시 미전역에 걸쳐 가장 큰 이슈로 돼있던 노예문제에 있어 강력한 반대 입장에 섰고,1860년에는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54년 창설된 공화당으로서는 6년만에 대통령을 탄생시키는 쾌거를 이룩한 것이다. 그러나 11월 링컨의 대통령 당선으로부터 이듬해 3월초 취임때까지 4개월간 미연방은 노예제도를 둘러싼 남북 주들간의 첨예한 이해대립으로 극심한 혼란기에 빠졌으며,당시의 상황은 대공황 탈피의 책임을 지고 취임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보다도 더 심각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40%에 불과한 지지도 역시 링컨에게는 상당한 부담이 되었다. 당시 심각한 레임덕현상을 겪고 있던 무능한 뷰캐넌 대통령은 이같은 분열상황에 아무런 대책도 강구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링컨의 취임전인 2월,사우스캐롤라이나 미시시피 루이지애나 플로리다 앨라배마 조지아남부 6개주가 ‘남부연합’을 결성,연방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들은 새정부를 앨라배마의 몽고메리에 두고 미시시피 출신 상원의원인 제퍼슨 데이비스를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따라서 그가 취임할 때는 남부의 분리독립 선언으로 그는‘반쪽대통령’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의 취임 이후에도 연방탈퇴 행렬은 계속돼 4월초 본격적인 남북전쟁 발발 당시 북부와 남부의 세력 차이는 북부가 23개주에 2천2백만명,남부가 11개주에 9백만명으로 남부가 열세였다. 남북전쟁은 1861년 4월12일, 피에르 뷰리가드 장군이 이끄는 사우스캐롤라이나 국민군 부대가 찰스턴 항구 앞의 연방군 요새 섬터를 포격하면서 시작됐다. 링컨은 즉시 반란사태를 선포하고 3개월간 복무를 조건으로 7만5천명의 지원병을 모집,전선에 투입했다. 초기에는 남부군의 맹렬한 기세에 북부군이 밀리는듯 했다. 그러나 1862년 9월 앤티담 전투에서의 승리를 계기로 전투는 서서히 북부군측에 유리하게 전개됐다. 약간 상황이 유리해지자 링컨은 힘을 배경으로 노예해방을 선언했다. 이 선언은실제로 당장의 노예해방에는 기여를 못했지만 전쟁에 영향을 미치는 두가지의 결과를 초래했다. 첫째는 북부군에 유리한 것으로 영국과 프랑스가 그때까지의 양다리 외교를 끝내고 마침내 남부연합불승인 방침을 확정한 것이다. 왜냐하면 남부연합을 승인하면 정치적으로 인기없는 노예제를 지지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었다. 둘째는 남부군에 유리한 것으로 북부 백인노동자들의 전쟁에 대한 관심을 감소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들은 당초에는 연방의 보전을 위한다는 명분아래 자원했던 것이나 노에해방으로 해방된 노예들이 장차 자신들의 일자리를 뺏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서 였다.어쨌든 전쟁은 계속됐고 게티즈버그전투를 계기로 전황은 완전히 북부군에 유리하게 전개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부군의 저항이 좀처럼 수그러들줄 몰라 많은 전투들이 도처에서 계속됐다. 이같이 극심한 남북전쟁의 와중에서도 1864년 미국은 총선거를 실시하게 된다. 일부에서는 전쟁으로 인한 선거 연기주장도 있었지만 링컨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꺾을 수 없었다. 그는 “선거를 행하지 않으면 우리들은 자유스런 정치를 해나갈수 없다. 만약 반란을 이유로 총선거를 중지하거나 연기해야 한다면 반란자는 그때 이미 우리를 정복하고 파괴했다고 서슴없이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링컨은 압도적인 표차로 재선 관문을 통과했다. 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그는 아직 전투가 완전히 끝나지 않았지만 전쟁으로 인한 ‘상처’를 싸매는 일에 몰두했다. 그러나 2기 취임 1개월 열흘만에 그는 남부지지자의 총에 맞아 운명을 달리하면서 미역사상 최초로 재임중 암살당한 대통령으로 기록되게 됐다. 비록 링컨은 남북전쟁의 완전한 종전은 보지 못하고 사망했지만,미연방의 분열을 막고 재통합시킨 것과 노예를 해방시킨 그의 업적은 그를 미역사상 최고의 대통령으로 랭크시키고 있다. 라이딩스의 미대통령 랭킹에 따르면 업적 및 위기관리와 개성 및 집중력이 각각 1위,지도력과 정치력이 각각 2위,용인술 3위로 종합순위 1위를 차지하고 있다. ◎링컨 연설모음 발췌/“우리는 적이 되어선 안됩니다”/“악의는버리고 모든 사람을 관용하며 정의로운 평화 보전위해 할일 다하자” 링컨대통령은 국민들의 심금을 울리는 연설로 유명했다. 다음은 그의 중요연설 가운데 일부를 발췌 소개한다. ▲스프링필드 연설 ‘분열된 집안’(1858. 6.17)=이 정부가 영구히 반쪽은 노예주의 이고 반쪽은 자유주의라면 오래갈 수가 없습니다. 나는 연방이 와해되기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나는 의회가 넘어가기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나는 분열이 끝나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찬성쪽에 서든지 그렇지 못하면 모두 반대쪽에 서야 합니다. 노예제를 반대하는 쪽에서는 노예제가 더이상 확산되지 않도록 막고,종국적인 근절을 위하여 국민을 계도해야 할것입니다. 그것을 옹호하는 쪽에서는 더 강력하게 밀고 나가서 새 주 묵은 주 할것 없이,남부 북부 할것 없이모든 주에서 똑같이 합법화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첫 대통령 취임사(1861. 3.4)=나는 모든 것을 끝내기를 원치 않습니다. 우리는 적이 아니고 친구입니다. 우리는 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감정은 비록 긴장하고 있지만 그것으로 우리의 사랑의 유대가 끊겨서는 안됩니다. 모든 싸움터와 애국투사들의 묘지에서부터 지금 이 넓은 대륙에 흩어져 삶을 누리는 우리들의 가슴과 대대로 이어 내려온 신비스런 화음의 기억은 우리들의 천사같은 성품의 숨결을 타고 다시 한번 미합중국의 대합창으로 우렁차게 울려퍼질 것이 틀림없습니다. ▲두번째 대통령 취임사(1865. 3.4)=악의는 버리고 모든 사람을 관용하며,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권리를 굳게 지키면서,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과업을 마무리 짓는 일과 나라의 상처를 싸매는 일,전장에서 희생된 사람들과 그들의 미망인·유자녀들을 보살피는 일,그리고 우리들 안에서뿐 아니라 다른모든 나라들과 더불어 정의로운 평화를 성취하고 그것을 영구히 보전하는 일,이런 모든 일들을 위하여 우리 모두 분발합시다.
  • 뉴딜정책 기수 프랭클린 루즈벨트:하(미국의 대통령 문화:5)

    ◎2차대전 적극 개입… 1천만 실업자 구제/전후 평화 정착 기대속 4선 당선 영광/대통령 문화 요람 도서관 시스템 도입/부인 일리노어 적극적 사회 활동/헌신·박애정신 국민 마음속 각인/동상 선 세계 최초 퍼스트 레이디 【워싱턴〓나윤도 특파원】 대공황의 질곡에서 미 국민을 구출할 희망의 상징으로 32대 대통령에 취임한 프랭클린 루즈벨트(애칭 FDR)는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강력한 뉴딜정책을 추진했다.테네시강 개발사업,국가부흥청 설립,농업조정법 제정,사회보장제도 도입,노동조합 활성화 등 100일 입법을 통한 새행정부의 의욕적인 정책추진은 무기력과 절망에 빠졌던 국민들에게 ‘할 수 있다’는 신념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뉴딜정책 평가를 위한 국민투표의 성격을 띤 1936년 대통령선거에서 FDR은 선거인단수 523대 8의 미 역사상 최대의 표차로 재선고지에 오를 수 있었다.그러나 활기찬 뉴딜정책의 추진에도 불구하고 대공황으로부터의 탈출은 요원했다.36년 다소 회복되는 듯 하던 경기는 37년 중반부터 다시 불경기로 돌아섰으며 38년에는 최악의 상태로 떨어져 실업자가 전체 노동력의 5분의 1인 1천만명에 달할 정도였다. 당초부터 실험적 성격이 강했던 뉴딜정책의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사방에서 FDR에 대한 비난의 소리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그러나 그는 천운을 타고난 듯,뜻하지 않은 방향에서의 해결책이 마련됐다. FDR의 대통령 취임과 같은 해인 33년 독일의 권력을 장악한 아돌프 히틀러가 국제연맹을 탈퇴,인접국들에게 과거 독일영토의 반환을 요구하며 전쟁준비에 광분하면서 유럽에는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마침내 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2차대전이 시작되었다. 미국은 마침내 전쟁에 개입하게 되었고,이로 인해 군수산업이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면서 미국의 경제상황은 대공황에서 탈피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전후 세계 최대의 경제대국으로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었다.전쟁이 미국을 구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전쟁이 악화일로를 치닫고 있던 40년,미 대통령선거의 최대쟁점은 참전문제였다.초기 FDR은 재선한 대통령으로서 명예로운퇴진을 생각하고 있었으나 전쟁에 직면한 위기상황에서 민주당은 전폭적으로 그를 또 다시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그는 참전반대 의사를 명확히 했으나 미국이 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막강한 군대가 필요함을 역설했다.미 국민은 그를 미 역사상 최초의 3선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전쟁 초기 FDR은 곤경에 처한 영국을 도우려 했지만 고립주의자들로 가득찬 미 의회의 거부로 소규모 제한적인 원조밖에는 할 수 없었다.그러나 그는 “미국은 민주주의의 거대한 무기고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며 의회와 국민을 설득,마침내 ‘무기대여법’을 통과시켜 본격적인 지원에 나설 수 있었다.39년 10월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핵폭탄에 관한 서신에 접한 FDR이 즉시 비밀계획팀을 만들어 연구에 착수,마침내 원자탄을 만들어내게 한 것도 이같은 그의 의지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던 중 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격은 미국의 본격적인 참전 계기가 됐다.참전은 모든 미국 경제를 전시경제로 돌아서게 했고 미 전역의 공장들로부터 막대한 양의 군수물자들이 쏟아져 나왔다.1천만에 달하던 실업자가 방위산업 증강에 따른 구인수요와 군입대로 사라지게 됐다.또한 FDR의 활발한 전시외교는 그를 자연스레 국제지도자로 부상시켰다. 44년 11월,아이젠하워 장군 지휘하에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시킨 연합군이 최후의 승리를 위해 독일로 진격하고 있을 때 미국은 다음 대통령선거를 치렀는데,FDR은 공화당의 토머스 듀이를 물리치고 4선 대통령에 당선됐다.전쟁의 마무리 뿐 아니라 전후평화에 있어서도 미 국민은 그의 영도력에 큰기대를 걸었던 것이었다.그러나 격무에 시달리던 그는 취임 3개월도 못된 4월12일 조지아주 웜스프링 휴양지에서 뇌출혈로 숨졌다.그의 나이 63세. 라이딩스의 대통령 순위에 따르면 FDR은 지도력과 정치력에서 각각 1위,업적 및 위기관리와 용인술에서는 각각 2위,성격 및 집중도에서는 15위를 기록해 전체 순위에서는 링컨에 이어 2위로 나타나 있다. 당시 육군참모총장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과의 일화는 그의 지도력 및 용인술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첫대통령 취임 직후 FDR의 군예산 대폭 삭감계획에 불만을 품은 맥아더 육군참모총장이 조지 던 전쟁장관과 함께 백악관을 방문했다.대통령과 부딪히는 것을 꺼리고 있던 던 장관을 제치고 맥아더가 국가안보의 중요성을 강조하자 FDR은 빈정거리는 투로 평화시에 많은 군대를 유지할 필요가 있느냐고 답했다.두사람 사이에는 다소 설전이 오갔다. 마침내 맥아더가 자제력을 잃고 “만일 다음 전쟁에서 미국이 져 미국 병사들이 적의 군화발에 짓밟힌다면 그들은 맥아더가 아닌 루즈벨트를 원망할 것입니다”라고 대들었다.그러자 FDR 역시 화를 버럭내며 “당신이 대통령 앞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라며 고함을 질렀다.잠시 침묵이 흘렀다.맥아더의 생명은 끝난 것과 다름 없었다.군통수권자에 대한 모욕은 군법회의 감이었다.그는 사과를 한 후 총장직 사의를 표하고 뒤돌아 나왔다. 맥아더가 막 집무실 문을 나서려는 순간 뒤에서 대통령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더글라스,어리석은 짓 말게.여기 당신의 목과 예산안을 함께 가져 가게” FDR의 정치생애에서 가장 주목을 받아야할 사람은 부인일리노어 여사라는데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는다.그녀는 남편의 투병중 세심한 간호는 물론 그가 주민들로부터 잊혀지지 않도록 정치활동을 대신,남편의 정치적 재기를 가능케 했다.또 퍼스트 레디가 된 후에도 신문에 ‘마이 데이’라는 칼럼을 정기적으로 썼으며 적극적인 사회활동으로 현대적 퍼스트 레디상을 정립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FDR이 죽은후 그녀는 남편 생가의 옆동네인 바킬의 고향집에서 17년을 더 살았으며 트루만 대통령의 요청으로 6년간 유엔총회 미국대표단장을 역임하는 등 공직생활을 하기도 했다.62년 78세로 생을 마감한 그녀는 국민들 마음에 헌신적이고도 박애적인 영원한 퍼스트 레디로 깊이 각인됐으며 지난 여름에는 워싱턴에 동상이 선 첫 퍼스트 레디가 됐다. FDR의 업적 가운데 주목받는 것으로는 대통령도서관 시스템의 도입이 있다.역사기록의 중요성과 대통령직 수행 자체가 국민의 위임에 의한 것임을 자각했던 그는 1기 임기가 끝났을 때 자신의 모든 자료들과 하이드파크의 생가를 국가에 기증,대통령도서관을 만들어 국민들이 언제라도 편하게 접할 수 있게 했다.현재 미국내 존재하는 대통령도서관은 모두 11개로 국립문서보관소(National Archives)의 관할 아래 제31대 후버 대통령부터 41대 부시 대통령까지 주로 생가에 건립돼 있으며 미 대통령문화의 요람이 되고 있다. ◎수잔 쿠퍼 미 국립문서보관소 대통령도서관 담당/“대통령직 관련 자료 보존·열람 FDR 투철한 역사의식서 시작” 미 국립문서보관소의 수잔 쿠퍼 대통령도서관 담당관은 “미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대통령직 수행과 관련된 자료들을 한데 모아 보존하고 열람시키는 전통을 수립한 것은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투철한 역사의식에 의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대통령도서관의 설립 동기는. ▲1939년 두번째 임기중이던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하이드파크의 생가일부와 소장하고 있던 모든 자료들을 연방정부에 기증하고 그 관리를 의뢰하면서부터 시작됐다.도서관 건물은 이듬해인 40년 후원회에서 건립후 국가에 헌납했다.1955년 ‘대통령도서관법’이 제정돼 도서관의 건립은 대통령후원회 등 개인이 맡고 관리만 국립문서보관소에서 하도록 돼 있다. ­이전에는 대통령문서가 어떻게 보존돼 왔나. ▲대통령마다 의회도서관 또는 출신대학,거주지 도서관 등에 기증하거나 혹은 후손에 남기는 등 가지각색이었다.그래서 팔려나간 경우도 있고,훼손·분실되는 일도 많았으며 여러군데 흩어져 있는 경우도 많았다. ­현재 대통령도서관 현황은. ▲최근 텍사스 A&M유니버시티 내에 개관한 부시도서관을 포함 모두 11개이다.루즈벨트에 이어 트루만(미주리 인디펜던스),후버(아이오와 웨스트브렌치),아이젠하워(캔자스 애빌린),케네디(매사추세츠 보스톤),존슨(텍사스 오스틴),포드(미시간 앤아버),카터(조지아 애틀란타),레이건(캘리포니아 시미 밸리)도서관 등이 있다.워터게이트로 물러난 닉슨의 도서관은 캘리포니아 요루바린다에 있으나 의회명령으로 방대한 양의 워터게이트사건 관련 문서들은 아직 국립문서보관소의 닉슨자료실에 보관돼 있다. ­대통령 도서관에 전시되는 자료들의 내용은. ▲대통령이나 비서진에 의해 공식적으로 만들어진문서,국내외로부터 받은 문서 및 서신,취임전후의 자료,사진·필름 등 각종 오디오 비디오 자료,유품 등 개인소장물품과 공식선물 등이다.
  • 뉴딜정책 기수 프랭클린 루즈벨트:중(미국의 대통령 문화:4)

    ◎‘대공황’ 늪서 미국 건진 행동주의자/‘공황탈출’ 정열적 활동… 수백만 실업자 환호/국민에 새정책 배경·방향 설명… 전폭적 신뢰 허드슨강변 언덕에 위치한 프랭클린 루즈벨트 사적지 한복판에 위치한 루즈벨트 도서관에 들어서면 첫 전시실은 ‘대공황’(Great Depression)실이다.한 실업자가 일자리를 달라는 피켓을들고 서있으며 그 옆으로는 대공황과 관련된 각종 사진자료들이 가득 차있다.이같이 루즈벨트는 많은 업적 가운데서도 미국을 대공황의 늪에서 ‘탈출’시킨 대통령으로 대부분의 미국민들에게 기억되고 있다.이는 링컨 대통령이 미국을 남북 분열의 위기에서 구출한 업적에 버금가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1932년 11월8일.‘뉴딜’바람을 몰고온 FDR(프랭클린 루즈벨트의 애칭) 뉴욕주지사가 32대 미 대통령으로 당선됐다.그러나 그의 당선 자체가 사태 해결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선거전문가들은 “유권자들이 루즈벨트를 선택한것이 아니라 후버를 반대했던 것”이라고 선거결과를 분석했다.사회의 암울한 분위기는 가시지 않았다.새대통령의 취임식이 거행될 이듬해 3월까지 아직 4개월이 남았으며 이 기간은 29년부터 시작된 대공황이 최악의 상황에 처했을 때였다.실업율이 최고로 치솟았고 대부분의 기업은 도산됐으며 설상가상으로 농산물 가격까지 급락했다.바닥을 모르고 추락하는 경제상황은 사람들의 마음까지 포함한 모든 것을 꽁꽁 얼어붙게 했다. 당시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든 것은 현직대통령 후버와 당선자 루즈벨트사이의 불화였다.자신의 신념에 대한 편집증적인 고집을 갖고 있던 후버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힘으로 공황을 극복해보려 했다.그래서 루즈벨트 당선자에게도 그같은 자신의 입장에 대한 지원만을 구하려 했다.그러나 루즈벨트는 국면전환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후버에게 협조함으로써 국민들에게 자신이후버의 실정에 개입된 인상을 줄것을 두려워해 소극적인 자세로 임했다. 정권이양기 4개월 동안 현직 대통령과 당선자와의 공식적인 만남은 두차례로 기록돼 있을 정도로 두사람의 사이는 소원했다.당선 2주후인 11월22일 가진 첫만남에서 후버는 당면 경제현안이 아닌 ▲유럽의 대미 전쟁채무상환 ▲제네바 군축회의에서의 미국역할 ▲세계경제회의 개최 등 대외문제에 대한 지원을 구했다.대공황의 원인을 세계 경제침체 등 대외적 요인때문으로 생각한 후버는 대외문제 해결을 통한 공황 탈피를 추구했다.그것도 후임자에게 협조를 구하는 태도가 아니었고 자신의 견해를 강요하려 했다. 따라서 공황극복의 해결책을 국내적 문제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던 루즈벨트와는 협조가 불가능했다.마침내 두사람은 힘겨루기 양상을 보였다.의회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루즈벨트는 자신의 임기전이라도 균형예산과 농민지원을 위한 입법을 추진하려 했다.그러나 번번이 후버의 거부권에 부딪혔다.그때까지도 정부개입의 최소화만을 고집했던 후버의 입장에서는 정부의 적극적 개입을 의미하는 루즈벨트의 보수주의 회귀를 비난하며 뉴딜정책 공약의 포기 압력을 가해왔다. 두사람 사이의 관계개선을 위해 당시 헨리 스팀슨 국무장관은 외교문제의 협조를 구실로 하룻길이 넘는 백악관과 허드슨파크를 몇차례 오가며중재에 나섰다.그 결과 이듬해 1월20일 두번째 백악관 회동이 성사됐다.그러나 이자리는 두사람의 서로 다른 입장만을 확인하는 자리가 됐다.후버는 레임덕현상에도 불구하고 퇴임날까지 스스로 끌고 나가겠다고 다짐했으며 루즈벨트는 냉각기를 갖기위해 측근들과 11일간 플로리다 크루즈여행을 떠났다. 후버는 그해 2월18일 루즈벨트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 뉴딜정책의 포기를 다시한번 권유했다.지난해 여름까지 상승세에 있던 경기가 지난 겨울부터더욱 악화된 것은 루즈벨트와 민주당의 새로운 정책에 대한 국민들의 불안감 때문이라는 것이었다.그러나 이 편지는 답장도 없이 묵살됐다. 사태는 더욱 악화돼 후버의 대통령 퇴임 1주일전에는 은행 인출이 급증,전국의 은행이 파산 위기에 몰리는등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그는 사흘전인 3월1일 다시 루즈벨트에게 편지를 보냈다.은행의 지불유예 선언을 위한 지지 부탁이었다.취임식을 위해 루즈벨트가 워싱턴에 도착한 2일까지도 사람을 보내 그 선언에 동의해줄 것을 간청했다.그러나 루즈벨트는 완곡히취임전의 모든 정치적 행동을 사양했다. 이들 두사람의 인연은 1차대전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해군성 차관보로 있던 루즈벨트는 당시 상무장관을 역임하고 있던 8살 위인 후버를 존경,1920년 그가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나서주기를 원할 정도였다.후버가 공화당을택한 후에도 루즈벨트의 그에 대한 존경은 계속됐다.그러나 28년 선거과정에서 두사람의 사이는 갈라지기 시작했으며 후버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더욱 벌어졌던 것이다. 33년 3월4일 미국의 제32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루즈벨트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라는 것,후퇴에서 전진으로 돌아서려는 우리의 노력을 마비시키는 공포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라며 온국민의 ‘두려움’에서의 탈출을 강조했다.그리고는 먼저 은행을 살리기 위한 특단의 조치로 다음날인 5일부터 4일간의 전국적인 ‘은행휴업’(bank holiday)를 선포했다.국민들은 51세의 보다 젊고 힘있는 새대통령의 자신에 찬 목소리를 환호했으며 그가 펼칠 새정책에 대한 기대를 갖는 모습이 역력했다. 루즈벨트는 그동안 은행개혁입법을 마련,9일 의회를 소집해 통과를 얻어냈다.그리고는 보완을 위해 은행휴업을 13일까지 연장했다.12일에는 첫 라디오연설 ‘노변정담’에서 이번 조치에 대한 배경및 경과를 설명하고 다음 단계의 추진방향을 밝히면서 국민들의 협조를 구했다.국민들은 진솔한 대통령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으며 전폭적인 신뢰를 보냈다.이같은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는 다음날 은행이 업무를 재개하자마자 끝없는 예금행렬로 나타났다.첫날 예금 수신고는 수년내 최초로 인출액을 앞섰으며 그같은 현상이 계속되면서 은행들은 정상영업으로 돌아서게 됐다. 루즈벨트는 9일 시작되어 6월16일까지 계속된 의회의 특별회기 동안 뉴딜정책의 골격이 된 수많은 법안들을 만들었다.국민들에 대한 대통령 자신의 직접 설득도 계속됐다.의회의 심의 속도도 훨씬 빨라졌다.이같은 ‘100일’동안의 행정부와 입법부의 박력에 찬 행동주의는 기업가들 뿐 아니라 대공황의 가장 밑바닥에서 희생돼온 수백만 실업자들로부터도 큰 환영을 받게됐으며 국민적인 자신감을 회복하는 계기가 됐다. ◎FDR 취임 100일 주요입법 내용/청년 30만명 자원보존 업무 투입/조직범죄 양산하는 금주법 폐지/예금보험공사 설립… 저축자 보호 1933년 3월 FDR의 대통령 취임직후 소집된 100일 동안의 의회 특별회기중 통과된 뉴딜정책의 핵심이 된 대표적인 입법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민간자원보존단(CCC)창설:18∼25세의 빈민가정 청년 30여만명을 1차적으로 전국의 각지에 파견,도로건설·식목·홍수통제 등 자원보존 업무에 투입.뒤에 300만명까지 확대됨. ▲연방긴급구호법(FERA):주정부와 시정부 등에 빈민 구제사업을 위한 자금으로 5억달러를 직접 지원. ▲금주법 폐지:그동안 술의 제조와 판매를 급지함으로써 밀수와 밀주제조 및 유통을 둘러싼 조직범죄를 양산하는 등 사회문제화 됨.맥주 판매 개시. ▲테네시계곡 개발공사(TVA):독립된 공사인 TVA에게 테네시강 유역 7개주의 홍수관리시설 개발권을 부여,댐과 발전소를 건설하고 삼림보호,수운확보,토양개선,싼 전기공급 등의 사업을 하도록 함. ▲국가산업부흥법(NIRA):이 법의 시행을 위해 국가부흥청(NRA)을 설립,정부 감독하에 산업의 자율적인 규제를 통해 경제를 소생시키려 했음.규제에 대한 협력의 상징으로 ‘푸른 독수리’(Blue Eagle) 마크를 붙이도록 했으며 이 마크가 없을 경우는 불매하도록 함. ▲농업조정법(AAA):정부가 농산물에 대한 가격통제를 할 수 있고 과잉생산을 막기 위해 생산량을 조절할 수 있도록 함. ▲연방예금보험공사(FDIC):은행의 파산시 일반 저축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 ▲주택소유자 자금 대부회사(HOLC):저당권에 대한 재융자 및 저당물 반환권 상실 예방을 목적으로 함.
  • “투표는 총알보다 강하다”했으니(박갑천 칼럼)

    매사추세츠주지사를 지낸 브래드퍼드가 든 ‘정치가의 조건’이 있다.“코뿔소가죽의 얼굴·코끼리 기억력·바다삵(비버)의 집념·잡종개의 친화력·불도그의 인내력·바다거북의 건강·타조의 위·사자의 용기·영양의 속력·세인트버나드의 친절·까마귀의 유머…”. 들고있는 동물들에 그같은 능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갖추어야할 조건들이라고는 하겠다.그는 거기에 다시 원리원칙의 측면에서는 당나귀의 완고함도 지녀야 한다고 덧붙인다.그러나 그뿐일까.동물의 비유가 옳을지 어쩔지는 몰라도 ‘제비의 변설’에 ‘여우의 응구첩대’도 갖추어야할 조건같아 보이는게 선거전양상이다. 응구첩대의 능력은 이번 대통령선거부터 등장한 텔레비전토론을 보면서 생각하게 된 조건이다.대규모 군중집회에 갈음하여 나온 텔레비전토론은 선거문화의 새로운 장을 여는 혁신이었다.‘그레이트 커뮤니케이터’라는 별명을 얻은 레이건 대통령의 빼어난 ‘연출력’을 필요로하는 선거전이기도 했고.특히 한문제를 놓고 벌이는 토론은 본인의 기본철학이 없으면 순발력있는 응구첩대에서 꼭 뒤눌릴수 밖에 없는 점이 눈에 띄었다. 지금 우리는 IMF한파 속에 견디기 어려운 터널로 들어가고 있다.그래서 눈밝고 머리맑은 지도자가 그 어느때보다 절실해진다.“집안이 가난할 때 훌륭한 아내를 생각하고 나라가 어지러울때 훌륭한 재상을 생각한다”(【사기】 위세가편)는 말 그대로.18일은 앞장서서 어려움속을 헤쳐나가야 할 그 훌륭한 재상­대통령을 뽑는 날이다. 투표를 앞두고 “투표(ballot:밸럿)는 총탄(bullet:불릿)보다 강하다”는말을 떠올려 본다.철자와 발음이 비슷한 말인데 총탄에 쓰러진 링컨 대통령이 맨 먼저 썼다니 얄망궂다.한데 이 두말은 뿌리가 같아서도 흥미롭다.ballot은 베네치아 방언(ballota:작은공)에서 왔는데 옛 도시국가에서 투표때 흑백공을 썼던데 연유한다. bullet도 프랑스말 공(boule)의 지소어(boulette:작은공)에서 왔고.둘다 힘을 상징하지만 ‘온유­투표’와 ‘완력―총탄’의 차이를 느끼게 한다.위 격언은 그래서 평화로운 민주정치가 독기서린 철권정치보다 강함을 뜻한다고 하겠다. 빠짐없이 투표장으로들 나가자.높은 투표율이 민주정치의 바탕으로 된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서.
  • ‘건국의 아버지’ 조지 워싱턴(미국의 대통령 문화:2)

    ◎절제·조화의 지도력 후세의 귀감/3연임 사양 민주주의 초석 다져… 국부 추앙/고향 마운트버논서 매년 귀향 환영연 재현 “여러분은 오늘 저녁 장군님의 추수감사절 만찬에 초대되셨습니다.칠면조를 즐기시고 장군님과 함께멋진 촛불 잔치로 결실의 기쁨을 감사하십시요” 안내원의 따뜻한 환영을 받으며 들어선 다이닝 룸의 대형식탁 위에는 잘 쪄낸 통통한 칠면조를 중심으로 갖가지 음식들이 차려져 있다.벽 주위 창가에는 촛불들이 환하게 켜져 있다. 200여년전 미 독립전쟁 영웅 조지 워싱턴 장군의 두차례에 걸친 역사적인 귀향을 맞이하던 때처럼 마운트 버논에서는 지금도 매년 추수감사절부터 크리스마스까지 밤마다 촛불 향연이 펼쳐진다. 조지 워싱턴의 첫번째 귀향은 1783년 12월.8년 동안의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총사령관이었던 그는 왕으로 추대하려는 자기 부하들의 간청과 합중국의 새정부를 이끌어야 한다는 국민들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홀연히 대륙회의에 군통수권을 반납하고 고향인 마운트 버논으로 돌아온다.원칙에 투철했던 그에게 총사령관 임명 당시 “전쟁이 끝나면 돌아가리라”던 자신의 약속을 지키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물론 정치인보다 농부로서의 삶을 더 갈구한 그의 본성도 작용했다. 두번째 귀향은 1797년 3월.8년의 대통령 두 임기를 마친 직후였다.혼신의 열정으로 불안했던 신생 미합중국을 확실한 독립국가로 기틀을 잡아놓아 변함없이 국민적 영웅으로 열광을 받는 그는 온국민들로부터 계속 재임하라는 압박을 받았다.그러나 그는 단호히 거부하고 다시 마운트 버논으로 돌아왔다.이처럼 마운트 버논은 워싱턴에게는 신비스런 힘의 원천이면서도 늘 회귀본능을 자극해왔다. 국민들과의 아쉬움속에서의 작별은 워싱턴을 국부로 추앙케 했다.또한 그의 강렬한 시민민주주의 정신은 미국의 기본정신이 되었고 그가 남긴 절제의 지혜와 조화의 지도력은 후세 미 정치지도자들에게 훌륭한 귀감으로 자리매김 해왔던 것이다. 1732년 워싱턴DC 남쪽 포프스 크리크라는 곳의 담배농장주 아들로 태어난 워싱턴은 11세의 어린 나이로 부친을 여의고 모친과 함께 농장과 다섯 동생을 돌봐야 했다.정규교육은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그는 성실하고 근면했으며 수학을 좋아했고 16살부터는 측량기사로 취직생활을 했다.군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세때 버지니아 민병대에 가담,영국군의 프렌치-인디언 전투에 참가하면서부터였다. 6년간의 민병대 생활을 마치고 민간인으로 돌아온 그는 버지니아 시민의회 의원,대륙회의 의원 등으로 활약하다 영국과의 사태가 악화되면서 75년 대륙회의에 의해 대륙육군 총사령관에 임명된다.이후 그는 엄청난 열세의 군대를 이끌고 강인한 인내와 탁월한 지도력으로 막강한 영국군을 끝내 물리치고 전쟁영웅으로 부상한다.그러나 그는 명예로운 은퇴를 택했으며 그로부터 6년후인 1789년 만장일치로 대통령에 추대된다. 이무렵 미국땅에 타오른 국민주권주의 불길은 그해 말 전제정치의 억압에 신음하던 프랑스로 번져나가 프랑스혁명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마운트버논 맨션 현관에는 프랑스혁명의 도화선이 된 바스티유감옥의 열쇠가 기증돼 벽에 걸려 있어 미국민의 자존심을 한껏 높여주고 있다. 이 혁명을 주도한 파리 국민군사령관 라파예트 장군은 이듬해 이 열쇠와 바스티유 함락도를 워싱턴대통령에게 선사하면서 편지를 동봉했다.“친애하는 장군님,제가 함락을 명했던 바스티유의 파괴된 그림과 그 열쇠를 기증합니다.이것들은 제가 장군님께 빚진 덕에 얻어진 것입니다” 당시 전달을 맡았던 토마스 페인은 “미국의 원리와 원칙들이 유럽에 이식되어 거둔 첫열매가 프랑스혁명 입니다.그것들이 바로 바스티유감옥을 열리게 했습니다.그러므로 이 열쇠는 있어야 할 제자리로 온 것입니다”라고 후에 기록했다. 워싱턴은 이같이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존경을 받았으며 이는 신생 미합중국의 위상을 드높이는 계기가 됐다.또한 그의 두번 임기 정신은 2차대전중의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4선 연임을 한 것을 제외하고는 이후의 대통령들에게 불문율의 전통으로 남게 됐다.미국 대통령은 1789년 초대 조지 원싱턴의 취임을 시발로 현재의 42대 빌 클린턴 대통령까지 208년 동안 모두 41명.대수와 명수가 틀린 것은 22대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이 한 임기를뛰어 24대 대통령을 또 역임했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순위 매기기를 좋아하는 미국인들은 이들 역대 대통령에 대해서도 예외는 아니다.국부로 떠받들여져온 워싱턴은 대통령랭킹 조사에서 에이브러햄 링컨,프랭크린 루즈벨트와 함께 빅3로 불린다.어떤 조사던 상위 셋은 이들이 차지하고 있다.올봄 719명의 역사학자들을 대상으로 ▲지도력 ▲업적및 위기관리능력 ▲통치기술 ▲인재등용 ▲퍼스낼리티 등 5개분야로 나누어 점수를 매기고 종합점수를 산출한 라이딩스&매키버 조사에 따르면 1위는 링컨(16대),2위는 루즈벨트(32대),3위가 워싱턴으로 돼있다. 4위는 토마스 제퍼슨(3대),5위 테어도어 루즈벨트(26대),6위 우드로우 윌슨(28대),7위 해리 트루만(33대),8위 앤드류 잭슨(7대),9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34대),10위 제임스 매디슨(4대) 순으로 나타나 있다. 97년의 또 다른 조사인 위팔드의 조사와 96년 슐레진저 조사에는 10위까지에 매디슨 대신 제임스 폴크(11대)가,95년 닐의 조사에는 로널드 레이건(40대)이 포함되는 등 약간의 차이가 있을뿐 각 조사가 대체적으로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라이딩스 & 매키버 조사에서 워싱턴의 랭킹을 분야별로 보면 인재등용에서만 1위를 기록했고 퍼스낼리티 2위,지도력과 업적및 위기관리 3위,통치기술 7위를 보이고 있다.역사가들은 워싱턴의 토마스 제퍼슨 국무장관,알렉산더 해밀턴 재무장관,존 제이 대법원장 등 선택을 가장 환상적인 인선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당선 당시 국민적 성원을 한몸에 안고 취임했던 이들 대통령들에 대한 재임 4년후 혹은 8년후 국민들의 반응은 천차만별로 나타났다.워싱턴,프랭클린 루즈벨트와 같이 재임을 강요받을 만큼 성원을 받은 대통령이 있는가 하면각료들의 부정부패로 손가락질을 받은 워렌 하딩(29대)이 있고,무능한 대통령의 대표로 꼽히는 프랭클린 피어스(14대)는 고향주민들로부터 귀향 환영식조차 거부당할 정도로 배척된 대통령도 있다. 그러나 한가지 공통적인 것은 그들의 업적,능력,평판에 관계없이 미국의 대통령들 모두는 당대 역사의 주인공으로 한결같이 귀한 대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그들의 생가와기념관,도서관 등에 생애 모든 자료들을 집대성 해둔채 잘 보존하고 있으며,미래의 교훈으로 훌륭히 활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하이오대 역사학 교수 데이비드 스테베니/“역대 대통령 행태 분석 필요”/순위매김 바람직한 상정립에 무의미 미국의 대통령학을 연구하고 있는 오하이오대학 역사학 교수 데이비드 스테베니는 대통령랭킹 조사에 대해 회의를 표시했다. ­대통령들에 대한 순위조사는 언제부터 행해졌는가. ▲1948년 트루만 대통령의 첫임기가 끝날 무렵,아서 슐레진저 교수가 55명의 탁월한 역사학 교수들을 선정,그들에게 역대 대통령에 대한 평가를 요구한데서 시작됐다.당시 슐레진저는 취임후 수개월내에 사망한 윌리엄 헨리 해리슨(9대)과 제임스 가필드(20대)를 제외한 30명에 대해 훌륭함,보통훌륭함,평균,평균이하,그리고 실패 등으로 순위를 매기도록 했다. ­이같은 순위조사의 신뢰도는 얼마나 있다고 보는가. ▲대통령 자신의 능력과 시대적 상황,또한 업적 등에 대한 측정 기준이 모호한 가운데 순위를 매긴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또한 조사대상에 따라서도 차이가 심하다.한예로 역사학자들을 대상으로 할 때와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할 때 많은 차이가 난다.존 F.케네디(35대)나 레이건의 경우 학자들의 평가는 그다지 높지 않은데 시민들의 평가는 매우 높다. ­대통령들의 평가 순위가 변하는 이유는. ▲근본적인 큰 변화는 없지만 퇴임 이후의 업적이나 시대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늘 유동적이다.허버트 후버(31대)의 경우는 대공황의 여파로 초기에는 낮은 평가를 받았으나 퇴직후 32년동안 생존하면서 국제구호단체를 통한업적 때문에 평가가 좋아졌다. ­국부로 추앙받는 워싱턴이 링컨에게 순위에서 항상 밀리는 이유는. ▲그것은 응답자들이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달려 있다.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워싱턴의 건국 자체보다는 링컨의 국가 분열을 막은 업적에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있다. ­순위조사의 필요성이 있는 것인가. ▲순위 자체의 의미보다 바람직한 대통령상의 정립을 위해 과거 대통령들의 행태를 비교분석하는 일은필요한 일이다.
  • 러시모어 ‘큰바위 얼굴’(미국의 대통령 문화:1)

    ◎바위산에 숨쉬는 ‘민주주의 유산’/워싱턴 등 국가초석 다진 지도자 4명 각인/매년 순례객 300만명… 민주주의 전당으로/조각가 보글럼부자의 대이은 대역사… 17년만에 완성 미국의 민주주의를 지탱하고 있는 정치문화는 ‘대통령문화’로 요약할 수 있다.독립선언 이후 연방헌법제정까지 10여년간의 과도기를 거쳐 1789년 역사상 최초의 대통령제로 출범한 미합중국은 200여년 동안 41명의 대통령을 배출하며 줄곧 민주주의를 발전시켜 왔다. 대통령은 ‘국민의 나라’로,국민은‘대통령의 나라’로 간주하는 신뢰를 바탕으로 한 이 미국의 민주주의는 20세기말,인간이 선택한 최선의 정치제도라는 타이틀을 거머쥔 채 21세기를 준비하고 있다. 오는 12월 치러질 15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본지는 미국의 대통령문화 대탐방을 시작한다.역대 대통령의 출생지와 박물관을,대통령도서관을,또 역사의 현장들을 찾아간다.대통령은 국민을 위해 헌신하고,국민들의 마음속에는 대통령이 살아 숨쉬는,미국땅 구석구석에 보석처럼 빛나는 참 민주주의의 전통은 50년 민주주의 역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워나가야 하는 ‘한국대통령문화’에 좋은 방향을 제시해줄 것으로 기대한다. “아메리카의 역사가 끝없는 능선을 따라 영구히 펼쳐질 바로 이곳에 워싱턴,제퍼슨,링컨,루즈벨트와 같은 위대한 지도자들을 높이 새깁시다.위대함이 넘쳐나는 그들의 말과,그들의 얼굴을.그 기록들은 바람과 비만이 닳아 없앨뿐 영원히 보존될 것입니다.” 1927년 8월10일,미중부 대평원 사우스 다코타주 서남부에 우뚝솟은 블랙힐즈산맥의 러시모어 산기슭 마을 키스톤에서는 4명의 위대한 역대 대통령상을 바위에 새기는 20세기 미최대 역사의 착공식이 진행되고 있었다.당시 최고의 조각가로 명성을 날리던 거츤 보글럼의 음성은 6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힘찼으며 새 꿈에 가슴벅차 했다. 이 꿈은 경제대공황을 거치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마침내 이뤄졌다.70이 넘은 나이에도 가파른 바위를 나르듯 오르내리던 보글럼은 비록 완공 7개월을 남겨놓고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대를 이어받은 아들 링컨 보글럼이 마무리 지었다.41년 10월31일,그가 러시모어산 꼭대기에서 마지막 드릴을 갖고 하산함으로써 완공됐다. 1천7백m 바위산에 매달려 강풍과 추위 등 온갖 악조건속에서도 오직 후세대에게 자유와 민주주의의 유산을 전해주겠다는 보글럼의 신념으로 완성시킨이 위대한 조각은 이곳을 ‘민주주의의 전당’(Shrine of Democracy)이라고 불리게 하는 불후의 기념비가 됐다.이곳은 미 대통령문화의 진원으로 매년 3백만 순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보글럼은 당초 인디언 전사 등 이 지역 전설적 인물들의 암각을 의뢰받았으나 전국적 인물,특히 미국가건설과 민주주의의 초석이 됐던 대통령들을 새길 것을 권고했다.따라서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받던 조지 원싱턴과 독립선언서 기초및 대양국가 개념 확립의 토마스 제퍼슨(3대),연방 구출및 노예해방의 에이브러함 링컨(16대),미국민에 가장 호감을 준 대통령으로 미국의 국제세력으로의 발돋움에 기여한 시어도어 루즈벨트(26대)가 선정됐다. 코 길이만 6m로 얼굴 전체의 높이가 18m인 이 암각은 얼굴 하나하나가 이집트의 스핑크스보다도 더큰 규모로 돼 있다.이들은 모두 동쪽을 향하고 있어 해돋이 무렵의 얼굴 모습은 마치 갓 세수를 하고 면도를 끝낸듯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산중턱에 마련된 주차장에는 확장공사가 한창이며 바위밑의 반원형 야외극장까지 연결되는 진입로공사 역시 내년초 완공 목표로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야외극장 뒤편으로 연결되는 2Km의 트레일은 조각으로 무너져내린 돌위로 나무통로를 해놓은 부분도 있어 바로 밑에서 올려다보는 대통령들의 얼굴 모습은 그 규모는 물론 조각의 정교함에도 압도되지 않을 수가 없다.특히 트레일 옆으로 있는 작은 동굴의 어둠속에서 머리위 돌 틈으로 보이는 워싱턴과링컨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입을 열어 말을 할듯한 착각에 사로 잡히게 한다.이곳의 파크레인저(공원경찰)로 10년째 일하고 있는 밥 크리스맨(42)은 “이곳에 근무하다 보면 대통령들의 얼굴이 매일 다른 모습으로 보이는 것을 느낄수 있다.”면서 “봄이 되면 조각에 올라가 해빙된 후 벌어진 크랙(틈)을 메꾸는 작업을 하는데 콧잔등에 올라서서 작업을 할 때는 숨소리가들리는 것같다”고 설명했다.그는 또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처음에는 보글럼의 두상을 그냥 지나치지만 대통령들의 조각에 감탄하고난 다음 나올 때는 찬찬히 뜯어보게 된다”며 진입로 입구에 세워진 아들에 의해 조각된 보글럼의 두상을 가리켰다.그 맞은편에는 조각에 참여했던 360여명의 인부들 명단이 벽에 새겨져 있었다.대부분이 인근 금광의 광부였던 이들은 보글럼으로부터 바위조각을 배웠으며 공사가 끝났을때는 모두 훌륭한 조각가들로 변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조각에 얽힌 보글럼의 신화같은 이야기들은 산기슭 마을인 키스톤에 있는 ‘러시모어-보글럼 스토리’박물관에 잘 보존돼 있다.수의사인 듀에인 팬크라츠 박사가 전재산을 털어 79년에 세운 이 박물관 역시 대통령문화를 가꾸고 지키는 사람들의 좋은 예가 되고 있다.미국의 대통령문화를 말할때 선구자로 빼놓을수 없는 사람은 워싱턴 대통령의 사저인 마운트버논을 지켜낸 앤 파멜라 커닝햄(1816-75) 이다.남북전쟁의 와중에서 폐허가 돼가고 있는 마운트버논을 지키기 위하여 마운트버논부인협회를 결성한 그녀는 평생을 처녀로 살며 여성들의 힘을 모았다.그녀의 선구자적인 노력은 미국민들에게 유적보존의 가치를 일깨워주었으며 전국적인 여성조직으로 확산돼 각주에서도 비슷한 운동이 전개됐던 것이다. 현재 미국 전역에 흩어져 있는 역대 대통령의 직접적인 사적지는 모두 88곳.게티즈버그 등 전적지까지 포함시키면 100곳이 넘는다.이들 사적지는 생가와 묘소가 주를 이루고 있으며 주성장지 혹은 주활동지에 개인박물관이 있다.31대 후버대통령 이후에는 국립문서보관소(National Archives)의 관할 아래 직전대통령인 부시 대통령까지 모두 11개의 대통령도서관이 주로 생가에 건립돼 있다. ◎보글럼스토리 박물관장 듀에인 팬크라츠/“보글럼 삶에 매료돼 개인박물관 설립”/사비로 유물수집·운영비 충당 마운트 러시모어를 가기전에 반드시 들러야 하는 필수코스인 보글럼스토리박물관.수의학박사로 400여Km 떨어진 프리맨에서 가축예방약 생산공장을 경영하며 주말이면 이곳 박물관으로 날라오는 설립자 듀에인 팬크라츠 박사(55)를 마침 만났다. ­보글럼 박물관을 세운 동기는. ▲여섯살때 처음 이곳에 왔을때 대통령들 모습이 무척 감동적이었다.특히 조각가가 그 어려운 작업을 왜 했는지를 알고 싶었는데 아무도 설명해주지 못했다.성장한 후에도 그 의문이 계속돼 관심을 갖다보니 여기까지 왔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다고 생각하는가. ▲보글럼은 훌륭한 조각가,화가 이면서 미래를 내다볼줄 아는 탁월한 안목의 소유자였다.무형의 대통령문화를 유형으로 남겨 설득력을 배가시켰다.미국의 역사를 수백권으로 설명하는 것보다 이들 위대한 대통령의 얼굴에서 더잘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 보글럼에게 깊이 빠져든 이유는 무엇인가. ▲보통 사람은 생을 정리할 때인 60세에 그는 엄청난 새 일을 시작했다.그는 “할 수 없다”는 말을 가장 싫어했다.모든 역경을 헤치고 결국 해냈고 그것도 최고의 작품으로.이같은 그의 정신을 젊은이 늙은 할 것 없이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박물관을 설립,운영하는 경비 조달은 어떻게 했는가. ▲예방접종약 공장에서의 수입을 이곳에갖다 쓰고 있다.입장료 6달러로는 기본 운영도 어렵다.박물관을 운영하자면 큐레이터 등 직원 봉급 외에 유물수집 등에 비용이 많이 든다. ­주정부에서도 기념관을 짓고 있는데 앞으로의 계획은. ▲정부차원에서 진작에 했어야 할 일인데 이제라도 다행이다.그곳과는 서로 보완하는 협력관계를 유지할 것이고 장차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는 보글럼의 조각 40여점을 더 구입해 박물관옆 개울가에 조각공원을 세울 계획이다.
  • 링컨의 유령… “나를 잊지말라”인가(박갑천 칼럼)

    백악관에 유령 나타난다는 얘기는 가끔씩 전해진다.특히 잘 나타나는게 링컨 대통령.지난달말께도 그 얘기가 전파를 탔다.더구나 듬쑥해야할 자리의 마이크 맥커리 대변인까지 “나도 이 사실을 믿고 있다”고 밝혀 “이 난만한 과학시대에…?”하는 의구심을 안긴다. 31일의 핼러윈데이를 앞두고 나온 ‘얘기’같기도 하다.고대 켈트력에서는 이날이 1년의 마지막날이었다.그래서 미국 등 몇몇나라에서는 갖가지 놀이를 펼쳐온다.이튿날,즉 11월1일의 핼로마스는 ‘모든 성인의 날’.그걸 시새워선지 이 그믐날밤엔 마녀들의 파티가 열린단다.그런 유래로 해서 미국어린이들은 귀신탈쓰고서 이리저리 쏘다니는 모양.백악관유령설도 그와 관계돼 보인다. 링컨 대통령은 눈감은지 130년이 지나도 원통해서 백악관을 맴도는 것일까.이번에 서성댄 곳은 ‘링컨 베드룸’께였다.링컨은 암살되기 10일전 자신이 암살된 꿈을 꾸었다고 전한다.밤늦게까지 집무실에 있다가 꾸뻑 졸았는데 곡성이 들렸다.서둘러 이스트룸까지 가자 누여있는 주검이 보였다.누구냐니까 암살된대통령 시신이라고 쭝덜거리더라는것.그의 유령이 백악관에 잘 나타나자 후세인들이 지어낸 듯도 하다. 유령많은 나라다하면 영국을 꼽는다.한 조사에 의하면 영국인 7명중 1명은 유령을 만난 일이 있다고 응답한다는 것이다.그런 만큼 헨리8세의 둘째왕비로 비참하게 간 앤 불린의 유령은 처형장인 런던탑뿐 아니라 소녀시절을 보낸 노퍽주 브루클린홀에도 나타난다.그 영향은 문학에도 미쳐 이를테면 셰익스피어의 ‘햄릿’이나 ‘맥베스’에도 보이고있고. 재미있는 것은 이들 유령이 사람들에게 섬뜩한 느낌은 줄망정 지더리게 굴거나 해를 끼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백악관 유령들도 마찬가지다.한데 그들 말의 역사에 그럴수 있는 그림자가 어린다.‘유령’을 뜻하는 ghost(고스트)의 고대영어(gast)는 ‘숨·영혼’이란 뜻으로 쓰였다.그건 ‘생명있는 곳’이었다.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근본교의를 나타내는 말인 홀리 스피리트(Holy Spirit:성령)도 14세기 이전에는 홀리 고스트(Holy Ghost)라 했던 터.‘영혼=유령’이었으니 결코 두려워해야할 존재는아니었다. “나를 잊지말라”는 확인의 속종이 유령으로서 나타나는걸까.그건 역사의 교훈이자 경고랄수도 있다.링컨의 유령은 언제까지 나타날건고.〈칼럼니스트〉
  • 백악관,항의시위 의식 최대 환대/강택민 방미 이모저모

    ◎강 주석,링컨연설문 영어로 암송/방미 길 일 왕실에 “번영 기원” 전문 【워싱턴·월리엄스버그 외신 종합】 ○…미국을 국빈방문하고 있는 강택민 중국국가 주석은 적지않은 항의시위에 직면하고 있지만 미국정부로 부터는 화려하고 따듯한 환영을 받고 있다. ○…강 주석의 이번 방문은 지난 95년의 실무 방문 때와는 격이 다른 ‘국빈 방문’이어서 백악관 주변의 펜실베니어 애비뉴에는 중국의 오성홍기가 내걸렸으며 체류기간동안 갖가지 화려한 행사와 예우가 제공된다.강 주석은 29일(현지시간) 백악관 잔디밭에서 21발의 예포가 울리는 가운데 빌 클린턴 미국대통령의 따듯한 환영을 받았다. ○…강 주석과 클린턴 미국대통령은 29일 상오(한국시간 30일 상오) 백악관에서 정상회담을 가졌으며 이에앞서 클린턴 대통령은 28일 밤 강 주석을 백악관 관저로 초청,비공식 회담을 가졌다. 정상간의 보다 친밀한 관계를 위한 비공식회담은 28일 하오 9시15분(한국시간 29일 상오 11시15분)부터 1시간30분동안 백악관 관저 2층에 있는 옐로 오벌 룸(Yellow Oval Room)에서 편안한 분위기속에 진행됐다. ○…클린턴 대통령은 비공식회담에 앞서 15분동안 강 주석을 백악관 1층에 있는 역사관으로 안내,그에게 링컨 대통령의 게티스버그 연설문 사본을 보여주었다.링컨 대통령의 연설문을 인용하기 좋아하는 강 주석은 게티스버그 연설문의 시작부분을 영어로 암송. ○…부인과 약 80명의 수행원을 대동하고 있는 강 주석은 28일 워싱턴 방문에 앞서 경유한 버지니아주의 유서 깊은 도시 윌리엄스버그에서 행한 만찬 연설을 통해 “이곳은 미국인의 반식민·독립투쟁에 큰 기여를 했다”며 반식민 투쟁의 공통점을 강조. ○…강 주석은 윌리엄스버그,워싱턴 등 방문지역에서 항의시위에 직면.28일 백악관 앞에서는 30여명이 ‘자유 티베트’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망명중인 중국반체제인사들과 인권운동가·환경보호주의자 및 종교단체들은 29일 강 주석과 클린턴 대통령의 정상회담에 맞추어 대규모 항의시위. ○…강택민 중국 국가주석은 미국 방문길에 일본 왕실 앞으로 “일본 왕실 앞으로 “일본의 번영과 국민의안녕,일왕의 건강을 빈다”는 내용의 전문을 보내왔다고 일본 외무성이 29일 밝혔다. ○…미국을 방문중인 강택민 중국 국가주석이 29일 상오 10시5분쯤(현지시간) 리무진을 타고 백악관에 도착하자,미리 나와 있던 빌 클린턴 미 대통령부부와 앨 고어 부통령부부,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전기침 중국 외교부장 등 양국 관련자들이 열렬한 환영. 양국 관계자들과 약수를 나눈 강택민 중국 국가주석이 클린턴 대통령과 함께 연단에 오르자,미국국가가 울려퍼지며 강 주석의 미국 방문 축하행사가 공식적으로 시작,이어 축포와 함께 강 주석과 클린턴 대통령은 의장대 사열. 의장대 사열이 끝난뒤 빌 클린턴의 강 주석 미국방문 환열 연설과 이에 답하는 강 주석의 연설로 공식 환영행사는 종료,환영행사를 끝낸 클린턴 대통령과 강 주석은 11시부터 정상회담에 들어갔다.도도쿄=김재영 특파원> □미·중 정상회담 주요 의제 ▲양국관계 증진:정상회담의 연례화를 포함,정부간 회담의 정례화 등. ▲핵협력 문제:중국이 이란,파키스탄 등에 핵기술을 이전하지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미국이 85년 체결된 미·중 핵협력협정을 이행키로 보장. ▲대만문제:‘하나의 중국’ 원칙을 재확인.중국은 대만에 대한 미국의 무기수출을 중단할 것을 요구.미국은 중국에 대해 대만과 대화를 재개하라고 요구. ▲인권문제:미국은 중국내 정치범들의 석방을 요구했으나 중국은 인권문제는 국내문제라는 입장을 고수. ▲국제문제:북한측의 거부로 교착상태에 빠진 4자회담의 진전을 위해 노력하기로 하는 등 한반도 문제를 논의.중국은 또 미·일간의 새 방위협력지침이 중국을 겨냥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장하라고 요구.
  • 강택민의 방미행보/나윤도 워싱턴 특파원(오늘의 눈)

    강택민은 누구인가.이번주 미국민들의 관심은 12년만에 처음으로 미국땅을 밟은 중국 국가원수에 쏠려 있다.그는 영어를 말하고,민주주의의 기본원리를 설파한 링컨 대통령의 게티즈버그 연설을 줄줄 외우며,팝송 ‘러브 미 텐더’(Love me tender)를 즐겨부른다.어렸을때는 마크 트웨인의 ‘톰 소여의 모험’을 읽고 상상의 나래를 폈고,40∼50년대 헐리우드 영화를 두루 섭렵했으며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전기를 탐독하기도 했다. 확실히 그는 72년 미·중 수교 이후 미국을 찾았던 등소평,이선념 두 국가원수는 물론 역대 어느 누구보다도 미국을 잘 아는 중국 지도자임에 틀림없다.더우기 그는 최근 전대에서 등 사후 힘의 공백에서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자신의 입지까지 확고히 했다. 미국민들이 강주석의 방미에 어느때보다도 높은 관심을 나타내고 있는 것은 바로 이같은 그의 지미에 대한 기대 때문일지도 모른다.이를 간파했는지 그의 미국방문은 하와이에서 2차대전의 원혼들을 달래는 일부터 시작됐다.다음에는 미 이민의 첫 상륙지인 윌리엄스버그로 가서 300년 역사에 경의를 표했다.그리고 정상회담 후에는 미민주주의의 발상지인 필라델피아의 인디펜던스 홀을 방문한다. 이같이 그의 방미일정들은 미국민들의 감성을 향한 이른바 ‘부드러운 터치’로 일관돼 있다.불법선거자금 유입,무역역조 심화,핵기술 이전,인권침해,종교탄압,강제노동문제 등으로 인한 중국에 대한 미국민들의 분노가 무차별 쏟아질 전장터로 향하는 장수의 얼굴표정 치고는 지나칠 만큼 다소곳하다. 그를 맞는 미국내 표정들은 제각각이다.행정부는 국익을 이유로 살살 달래기 위한 당근을 준비중이다.그러나 의회는 강제노동에 의한 중국제품 거부,종교탄압 중국관리들에 대한 비자발급 거부 등 반중국 입법 11개라는 몽둥이를 준비하고 있다.인권운동가들의 데모와 달걀세례도 준비돼 있다.다소곳한 강주석에게 숨겨논 또다른 얼굴이 있는지 궁금해진다.
  • 미 네브래스카 식육업체들 대장균 관련 한국조치 촉각

    【링컨(미 네브래스카주) AP 연합】 미 네브래스카주의 식육가공판매업체들은 한국정부가 대장균이 검출된 네브래스카산 쇠고기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할 것인지 초조하게 지켜보고 있으며 연방정부와 주(주)정부 관리들은 대장균 검출과 관련한 추가정보를 요구하고 나섰다.
  • 미·말련 비행기 3대 추락/3곳서 이·착륙중 17명 사망

    【콸라룸푸르·링컨·레이진빌 외신 종합】 말레이시아와 미국 등에서 6일 3건의 비행기 추락사고가 발생,모두 15명이 사망하고 1명이 크게 다쳤다. 승객과 승무원 10명을 태우고 브루나이 수도 반다르 세리 베가완을 출발한 도르니에 228기가 말레이시아 동부 사라와크주 미리시 근처 람비르 힐에 추락,승객 전원이 사망했다고 베르나마통신이 7일 보도했다.사고원인은 즉각 알려지지 않았다고 이 통신은 말했다. 한편 미국 노스 아일랜드주의 노스 센트럴공항에서 6일 하오 5시(현지시간)스카이다이버들을 태우고 이륙을 시도하던 비행기 1대가 추락,5명이 사망하고 1명이 중상을 당했다고 현지 경찰이 밝혔다. 사고기는 세스나항공의 단발 엔진을 장착한 182기종으로 지상에서 60m 지점까지 이륙한뒤 왼쪽으로 90도가량 기울었다가 공항 활주로 근처의 나무와 충돌,추락했다.공항의 비행교사 존 로안씨는 사고기의 연료탱크가 터져 두차례 폭발이 발생,이를 진화하던 소방수들도 부상을 입었다고 전했다. 또 미 미시간주 레이진빌의 한 고속도로상에서 이날 2차대전 당시의 기종인 P­51 무스탕기가 착륙을 시도하다가 추락,조종사와 승객 1명 등 2명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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