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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끊이지 않는 지구촌 분쟁] ( 7)북아일랜드 신·구교도 갈등

    21세기를 불과 20일 앞둔 지난해 12월12일 세계는 북아일랜드를 주목했다. 북아일랜드에 신·구교도를 망라하는 자치정부가 들어선 이날 400여년간 지속됐던 신·구교간 갈등이 끝날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새천년의 희망이 채 가시기도 전인 지난 2월 구교도계 아일랜드공화군(IRA)의 폭탄테러와 최근 신교도의 전통적 행사인 ‘드럼크리 행진’으로 신·구교가 충돌,북아일랜드 평화에 암운이 드리워졌다. ◆분쟁 배경 16세기 영국의 헨리 8세가 구교를 믿는 아일랜드를 침략,아일랜드인의 토지를 몰수하고 신교로의 개종을 강요하면서 분쟁이 시작됐다.구교도들의 저항이 거세지자 영국은 17세기 초 북아일랜드에 신교도를 대거 이주시켜 신교도를 믿는 영국인이 주민의 다수를 차지하게 됐다.게다가 영국은구교도와 신교도 사이의 차별화 정책을 펴 대부분의 구교도들은 소작농으로전락하고 참정권까지 빼앗기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1801년 영국은 아일랜드를 합병했다. 1905년 구교도를 대변하는 신페인당이 탄생하고 1919년 IRA가 창설되면서구교도들은테러를 동반한 독립운동을 조직화했다. ◆북아일랜드 분리독립 운동 1차대전이 한창이던 1916년 남부 아일랜드는 더블린에서 발생한 무장봉기를 비롯,저항을 계속한 끝에 1922년 영국으로부터독립하게 된다.그러나 얼스터지방 등 북아일랜드 6개주는 여전히 영국의 지배 아래 남아 분쟁의 불씨가 꺼지지 않았다.즉 북아일랜드에 거주하는 구교도는 북아일랜드가 독립국인 아일랜드에 편입되기를 원했고,신교도는 영국의지배하에 계속 놓이거나 영국으로 합병되기를 원했던 것.이때부터 신·구교간은 북아일랜드 지위를 놓고 끊임없는 대립을 하게 된다. 69년에 발생한 폭동 등 영국을 상대로 한 구교도의 테러가 계속되자 영국은72년 북아일랜드를 직접통치로 강화했다.그후에도 구교도는 영국과 영국을지지하는 신교도를 상대로 무장투쟁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최근까지 3,200여명이 사망했다. ◆일시적 평화 97년 7월20일 IRA는 휴전을 선언,북아일랜드에 서광이 비치기시작했다. 그해 10월13일에는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와 게리 애덤스 신페인당 당수가 만나 평화정착의 발판을 마련했다. 98년 4월 신·구교도는 극적으로 ‘굿 프라이데이’ 평화협정을 체결했고협상의 주역이었던 북아일랜드 존 흄 사회민주노동당(SDLP) 당수와 데이비드트림블 얼스터 통일당(UUP) 당수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그리고 지난해 12월12일에 드디어 초당적인 북아일랜드 자치정부가 구성됐다. 그러나 두달도 채 안된 지난 2월6일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교외의 한 호텔에서 IRA의 소행으로 보이는 폭발사건이 또 발생했고 영국은 이를 이유로 북아일랜드의 자치권을 박탈했다. ◆향후 전망 북아일랜드 신·구교도는 물론 영국도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피의 역사를 종식시키려는 의지가 어느때보다 높다.영국이 지난 2월 북아일랜드 자치권을 박탈했다가 3개월여만인 5월30일 자치권을 이양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지난 5일 드럼크리 행진에서의 충돌로 영국 보안군이 2년만에 다시배치되기도 했지만 북아일랜드 자치정부는 신교파의 대표적인 테러리스트 마이클 스톤을 석방하는 등 평화정착에 대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강충식기자 chungsik@. *북아일랜드 분쟁일지. ◆1600∼1700년 신교도 북아일랜드에 이주◆1801년 아일랜드,영국의 속국으로 전락◆1905년 신페인당 결성◆1919년 아일랜드공화군(IRA) 창설◆1922년 아일랜드 영국으로부터 독립◆1997년 7월20일 IRA 휴전 선언◆1997년 12월13일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와 게리 애덤스 신페인당 당수 회동◆1998년 4월 ‘굿 프라이데이’ 평화협정 체결◆1999년 12월12일 북아일랜드 자치정부 수립◆2000년 2월6일 벨파스트에서 IRA의 소행으로 보이는 폭탄테러 발생◆〃 5월30일 영국,북아일랜드에 자치권 이양◆〃 7월5일 신교도의 전통행사인 드럼크리 행진으로 신·구교도 충돌 *신페인당 당수 게리 애덤스. 게리 애덤스 신페인당 당수(52)는 아일랜드공화군(IRA)의 전사로 혁명적 노선을 걷던 인물.69년 불법 무장투쟁단체인 IRA에 투신,강경파로 알려진 IRA벨파스트연대의 핵심인물로 활동하면서 투옥과 암살 위협에 굴하지 않고 무력투쟁을 벌여 ‘1급 위험인물’로 지목되면서 수차례 투옥되기도 했다.그가합법적 정치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대화파’로 변모한 것은 83년 신 페인당의 당수로 취임하면서부터.평화 이외는 대안이 없다는 그의 주장이 북아일랜드 신·구교도에 받아들여지면서 97년 총선에서 신페인당을 북아일랜드 3위 정당으로 끌어올리며 3선 의원이 됐다. 94년 앨버트 레이놀즈 아일랜드 총리,97년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와의 회담을 통해 북아일랜드 분쟁을 테러에서 대화로 바꾸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평화를 위해 IRA의 무장해제도 가능하다는 입장 때문에 구교도 강경파로부터 심한 반발을 샀다.최근 IRA 무기의 사용권을 외부에 둔다는 절충안으로 한발 물러섰지만 북아일랜드의 평화정착에는 필수적 인물로 꼽힌다. [강충식기자] *아일랜드 공화국(IRA). 영국에 대한 무차별적인 폭탄테러로 악명이 높은 구교도계 아일랜드공화군(IRA)은 아일랜드의 완전한 독립을 목적으로 1919년에 탄생했다.‘우리 스스로’란 뜻으로 1905년 조직된 신페인당이 IRA의 정치적 대변자 역할을 맡고있다.1940년대 이후 북아일랜드에서 구교도에 대한 유화정책으로 세력이 크게 위축됐던IRA는 1960년대 말 구교도들의 공민권 운동을 계기로 신·구교도간 갈등이 첨예화되면서 다시 세력을 확장했다.게다가 1970년 영국군이 구교도들의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북아일랜드에 진주하자,IRA는 무장 투쟁을본격화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IRA는 리비아로부터 밀수한 수십t의 플라스틱 폭탄을 앞세워 폭탄테러를 자행하고 있다.테러는 자신들의 주장을 알리는 최선의 수단으로,무장은 생존의 문제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무기 구매는 해외거주 아일랜드 출신 주요 인사와 자체 모금을 통해 이뤄진다. 다시 말해 무기는 아일랜드 동포들의 피와 땀인 셈이다.때문에 무기는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는 신성한 재산으로 여겨지고 있다.IRA가 여러차례 무장해제하고 무기사찰을 받겠다고 밝혔지만 이행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축구대표팀 시드니8강 담금질

    한국 축구국가대표팀이 시드니올림픽 8강 진출을 위한 마무리 전력점검에들어갔다.새 대표팀은 프로리그 주말 경기 일정을 마치고 전원이 합류한 이번주부터 본격적인 전술훈련-실전테스트의 과정을 밟기 시작했다. 첫번째로 치르게 될 실전테스트는 오는 28일의 한·중전.국가대표팀간 경기(A매치)로 치러질 이번 대결은 새 대표팀이 중국전 무패행진을 이어줄 것인가에 관심이 모아진다. 한국은 중국과의 A매치 전적에서 20전 13승7무의 우위를 지키고 있다. 그러나 이번에야말로 쉽지 않은 통과의례를 겪을 전망이다.우선 유고출신보라 밀루티노비치 감독의 지휘를 받는 중국이 올림픽을 앞두고 ‘공한증(恐韓症)’에서 벗어나기 위해 총력전을 펼칠 것이 분명하기 때문.중국은 국가대표와 올림픽대표팀간 경기(6전 1무5패)를 통틀어 한국에 한번도 이겨보지못한 한을 만회하려는 기세다. 지난 5월 유고전과 달리 적지에 뛰어들어 경기를 치른다는 점과 와일드카드 후보 6명이 가세함으로써 생긴 팀컬러의 변화도 한국에게는 부담스럽다.따라서 홈팀 중국의 거친 플레이와 팀내 노소간 부조화를 얼마나 매끄럽게 극복하느냐가 관건이다. 한국대표팀은 중국전에 이어 다음달 27일 청소년대표(19세 이하)와 한차례,8월29일과 9월1일 나이지리아 대표팀과 홈 2연전을 치른다.당초 추진했던 리비아대표팀 초청경기는 리비아의 사정으로 무산됐다. 한·중전 경기는 28일오후 8시40분부터 SBS가 생중계한다. 박해옥기자 hop@
  • 美공화 ‘정권교체’본격 장정

    [워싱턴 최철호특파원] 미 공화당은 조지 W.부시 미 공화당 대선후보의 러닝 메이트로 24일 딕 체니 전 국방장관(59)을 내정하고 8년만에 백악관 재탈환을 위한 본격적인 대장정에 나섰다. 공화당은 29일부터 8월4일까지 필라델피아에서 열리는 전당대회에서 부시-체니 두 사람을 정부통령 후보로 정식 지명하고 11월 대선을 향한 전국적인유세를 시작한다.부시 후보는 25일(현지시간)부통령 지명자를 공식 발표할예정이다. 부시는 풍부한 워싱턴 경험과 보수주의자로 공화당내 존경을 유지해온 체니를 선정함으로써 새로운 인물 선정에서 오는 위험부담을 줄이고 당내 신뢰확보를 노렸다고 평가된다. 그의 선정에 공화당 의원들은 “대선가도에서 공화당쪽에 무게가 더 실렸으며 유권자들에게 대통령 후보로서 신중한 선택을 내렸다는 인상을 보여줬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34세때 포드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것을 비롯,연방하원 공화당 원내총무,부시 전 대통령 때 국방장관으로 ‘사막의 폭풍작전’ 성공 등의 경력은 워싱턴과 외교 경험이 없는 부시에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 확실하다. 무엇보다 부시가 그를 선호하게 된 요인은 풍부한 식견과 경험에도 불구하고그가 제2인자로서 자세를 낮출줄 아는 충직한 인물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공화당내외 긍정평가에도 불구하고 체니 전 장관을 선택한 데 대한우려와 반론도 만만찮다. 우선 정통보수주의자인 그가 자유성향의 공화당 표를 어떻게 확보할지 관심이다.존 매케인 애리조나주 상원의원이 확보했던 개혁성향의 공화당 유권자들이 하원의원 시절 여성평등권리를 위한 헌법수정을 비롯해 총기제한,교육부 신설,낙태문제 등에 줄곧 반대했던 정통보수주의자인 그를 지지할지 미지수다. 의사들의 건강진단에도 불구하고 3차례 심장발작을 일으켰던 병력에 대한우려도 부담이 될 수 있다.사우디아리비아를 비롯,아시아 곳곳에서 석유시추를 벌이던 핼리버튼사 회장(CEO)이었던 그가 정경유착 가능성의 우려를 떨칠수 있을지도 관심이다. 한편 24일 발표된 ABC-포스트 공동 지지율 조사는 부시 후보가 민주당의 앨고어 후보를 48% 대 45%로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달 부시 후보 44%,고어 후보39%과 비교해 두 후보간 지지율에서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CBS­뉴욕타임스 공동 조사에서도 부시 후보는 46%의 지지율을 얻어 40%를기록한 고어 후보를 5%이상 차이로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부시 후보는 인간성,지도력,신뢰감,언어구사력,당선시 워싱턴정가 개혁의지등 분야에서 고어 후보를 두자리수로 앞섰다.부시 후보는 감세,경제,범죄등을 다루는 능력에서도 고어 후보보다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고어 후보는 의료보험,환경보호,여성문제 관리능력에서 부시 후보를 앞섰다.교육,사회보장,낙태문제 등에서는 두후보가 무승부를 기록했다. hay@. *러닝 메이트 내정 체니 前국방 '돈보다 권력이 좋다?'. [워싱턴 최철호특파원] 권력은 돈보다 좋은 것인가? 차기 미 공화당 부통령 후보로 내정된 딕 체니 전 국방장관은 현직을 버리고 러닝 메이트로 등장할 경우 상당한 금전적 손실을 감수해야 할 것으로 알려졌다.미국 부통령의 연봉은 수당등을 합쳐 10만 달러(약1억 1,200만원) 정도에불과(?)하다. 반면 그는 현재 중동과 아시아 지역을 대상으로한 석유시추회사인 핼리버튼사 회장(CEO)으로서 상당한 연봉과 성과급을 받고 있다.핼리버튼사는 95년그를 CEO로 영입하면서 연봉 128만달러로 계약,백만장자 회장반열에 올려놓았다.그러나 그는 이외에도 회사 주식의 사정에 따라 740만달러∼1,880만달러에 달하는 스톡옵션을 받고 있으며 지난해에는 64만달러에 달하는 각종 수당을 받았다.거기에 그는 최근 이 회사의 주식을 4,550만달러 어치를 소유,최대 주주로 부상했다.물론 보유주식은 처분하지 않을 수도 있다.그는 이외에도 철도회사인 유니온 퍼시픽사 등 3개사의 이사직을 함께 맡고 있어 부통령직을 맡음으로써 생기는 금전적 손실은 엄청난 상황이다.
  • 아르헨티나, 에콰도르 제압

    [부에노스 아이레스 외신 종합 연합] 아르헨티나가 5연승을 질주하며 단독선두를 지켰다.브라질은 5위로 다시 한계단 떨어졌다. 아르헨티나는 20일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열린 2002년 월드컵축구대회 남미예선 풀리그 5차전에서 에콰도르를 2-0으로 완파했다.아르헨티나는 5전전승(승점 15)을 기록,2위 우루과이와의 격차를 5점차로 벌렸다.에콰도르 2승3패(승점 6). 콜롬비아는 페루를 1-0으로 이겨 2승2무1패(승점 8)를 기록,이날 경기를 쉰브라질을 5위(골득실차)로 밀어내며 4위로 올라섰다. 브라질은 상위 4팀에게주어지는 본선 티켓의 획득마저 장담하기 어렵게 됐다. 볼리비아는 칠레를 1-0으로 누르고 예선 첫승을 올렸다.
  • 리비아, 阿·中東 합작진출 제의

    압델 라흐만 샬감 리비아 외무장관은 13일 한국 기업과 리비아가 합작,아프리카·중동 지역에 공동 진출할 것을 한국측에 제의했다.남북한을 동시 방문중인 샬감 장관은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에서 이정빈(李廷彬) 외교통상부장관과 회담을 갖고 남북정상회담 이후 한반도 정세와 양국간 경제협력 강화방안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이같이 제의했다. 샬감 장관은 “리비아가 한국 기업들의 아프리카·중동 진출을 위한 관문역할을 할 용의가 있다”며 합작진출 방안을 동아건설,현대건설 등 관련업체에 제의했다고 회담에 배석한 외교통상부 당국자가 전했다. 샬감 장관은 또 지난 8일부터 11일까지의 북한 방문 결과를 이 장관에게 설명하면서 “북한도 남북관계 개선에 대해 의지를 갖고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고 밝혔다. 오일만기자 oilman@
  • 미래모습 드러낸 ‘아프리카 연합’

    가난과 내전,질병 등으로 찌든 아프리카 국가들이 유럽연합(EU)을 거울삼아뭉치기 시작했다. ‘단합’만이 아프리카의 미래를 보장할 수 있다고 판단한것이다. 아프리카단결기구(OAU) 30개 회원국 정상들은 12일 토고 로메에서 연례정상회의를 갖고,EU를 모델로 하는 ‘아프리카 연합 창설법’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아프리카 의회와 집행위원회,사법기관을 갖춘 다소 느슨한 형태의 EU식 아프리카 연합을 만들겠다는 뜻이다.전체 53개 OAU 회원국들 가운데 최소한 3분의2 회원국이 30일내에 창설법을 비준해 발표하면 1963년의 OAU 헌장을 대신하게 된다. 창설법은 아프리카 연합의 본부를 현 OAU 본부가 위치한 에티오피아의 아디스아바바에 둔다고 명시하고 있으며 그 창설은 “평등과 주권 및 영토 보전,국경존중,상호 내정불간섭,상호불가침 등의 원칙에 근거한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비합헌적 정권의 변동’을 규탄하고 지난 91년 채택됐으나 전혀 이행을 하지못한 아프리카 경제공동체 설립에 관한 OAU 헌장도 포용할 것임을다짐하고 있다. 이같은움직임은 리비아 국가원수 모아마르 가다피가 지난해 9월 리비아에서 열린 OAU 연례정상회의에서 미국모델의 ‘아프리카 합중국’ 창설안을 제기하면서부터 가시화됐다. 이번 아프리카 연합안은 합중국안보다실현 가능성은 높지만 장애물도 많다. 어떤 형태로든 뭉쳐 서구열강의 입김으로부터 벗어나겠다는 명분에는 공감하지만 그 방법과 절차를 놓고 국가간에 이견이 심하기 때문이다.특히 일부 아프리카 국가들이 서로 전쟁중이거나 내전에 시달리고 있는 것도 연합 창설을가로막는 요인이다. 이같은 이유로 OAU 정상들은 이번 회의에서 아프리카 연합 창설법은 채택했지만 구체적 일정에 합의하지 못해 아프리카 연합 창설은 결국 내년 OAU 연례정상회의로 넘어갈 것으로 보인다. 강충식기자 chungsik@
  • 샬감 리비아외무 남북직항로로 입국

    11일 방한한 압델 라흐만 샬감 리비아 외무장관이 외국 인사로는 사상 처음으로 남북한 직항로를 통해 입국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당국자는 12일 “샬감 장관이 탄 전세 특별기가 동해의 공해 상공을거쳐 서울공항에 도착했다”며 “외국 사절이 남북간 항로를 이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밝혔다.이는 남북정상회담 이후 한반도에서 진행되고 있는 화해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으로 향후 남북 항공로 이용이 더욱 활성화될것으로 보인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지난달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사상 처음으로 서해의공해 상공을 거쳐 북한을 방문한 뒤 귀경했었다. 외교통상부는 남북한을 잇달아 방문한 샬감 장관이 남북 항공로를 통해 입국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시해옴에 따라 통일부·국방부·서울지방항공청 등관계부처의 협조를 요청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교류협력법상 남북 항공로 이용은 통일부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 과거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지난 94년 핵위기 타개를 위해 한국을 거쳐 북한을 다녀온 적이 있으나 판문점을 이용한 육로방문이었다.지난 8일북한을 방문했던 샬감 장관은 14일까지의 방한동안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을예방하고 김윤기(金允起)건설교통부장관,이정빈(李廷彬)외교통상부장관과 회담을 갖고 한반도 정세 및 양국간 경제협력 강화 방안을 논의한다. 오일만기자 oilman@
  • 건설산업 현주소/ ‘진흥촉진대회’ 계기 긴급진단

    ‘2000 건설진흥촉진대회가 이한동(李漢東) 국무총리,김윤기(金允起) 건설교통부장관,장영수(張永壽) 대한건설단체연합회장 등 정부 및 건설관련 단체인사 1,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4일 오후 서울 논현동 건설회관에서 열렸다.이날 건설진흥촉진대회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건설산업의 재도약을 다짐하기 위한 것으로 김윤규(金潤圭) 현대건설 사장과 양인모(梁仁模) 삼성엔지니어링 사장 등 건설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자 107명이 정부로부터 훈포장 및 표창을 받았다.건설진흥촉진대회를 계기로 건설산업의 현주소를 조명해 본다건설산업이 흔들리고 있다.지난 50여년 동안 건설산업은 줄기찬 성장으로 국민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해왔다.그러나 똑같이 금융위기를 겪었지만 타 산업이 회복기에 접어든 것과 달리 건설산업은 오히려 ‘지금 IMF(국제통화기금)위기를 겪고 있다’는 말이 나올 만큼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올들어 상반기에만 60여개가 넘는 업체가 부도를 냈다.제도가 바뀌면서 업체는 늘어난반면 공사물량은 오히려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금융위기 못벗어나=금융위기 이전인 90년대 중반까지만해도 국내총생산(GDP)에서 건설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11%대를 유지해왔다.그러나 금융위기 이후인 98년 10.1%로 떨어지더니 지난해에는 8.8%로 급락했다.타 산업에 비해금융위기의 타격을 크게 받고 있다는 얘기다. 건설업은 다른 산업에 비해 고용 유발효과가 높다.건설업의 고용유발효과는 투자액 1억원 대비 1만6,217명으로 제조업 1만2,135명,농림어업 9,020명에비해 휠씬 높다.전체 산업취업자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건설산업은 147만6,000명으로 7.3%나 된다.물론 지난 95년 9.3%에 비하면 무려 2% 포인트나 떨어진 것이다.금융위기 직후 42만6,000여명이었던 건설실업자수가 올들어 4월현재 59만9,000여명으로 늘어나 국내 전체 실업자(109만2,000여명)의 55%나차지하고 있다. 이처럼 건설산업이 어려움을 겪는 과정에서 많은 건설업체들이 쓰러졌다.금융위기가 밀어닥친 97년 135개를 시작으로 98년 522개로 최고치에 달했다.지난해에는 112개로 줄었지만 올들어 상반기에만 벌써 60여개가 넘는 건설업체가부도를 내 오히려 올해 부도업체가 늘어날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이 대두되고 있다. 한때 연평균 17.4%(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기간)의 경이적인 성장세를보였던 건설산업이 새 천년을 맞아 최대의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일감 줄고 업체는 늘어=지난해 건설업계 총 수주액은 51조1,000억원.97년의 70% 수준이다.올해는 이보다 늘어난 60조9,000억원 가량이 예상되지만 이 역시 97년의 80% 수준에 불과하다. 공사물량이 줄어든 것과 달리 건설업체수는 크게 늘었다.지난 96년 12월 건설업면허가 수시발급제로,99년 4월 등록제로 각각 바뀐데다 올 4월부터 10억원 미만의 소규모 공사에 대해 실적평가를 하지 않기로 하면서 건설산업의시장진입이 한결 쉬워졌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지난 97년 3,896개에 불과했던 건설업체수는 지난해말 5,137개로 증가한 뒤 올 6월말 현재 5,691개에 달하고 있다.당연히 업체당 평균 수주액도 97년 192억3,000만원에서 지난해에는 99억6,000만원으로 절반 수준으로 줄었다. 늘어난 업체끼리 줄어든 물량을 놓고 경쟁하다보니 덤핑수주 등으로 경상수익률이 97년과 98년 각각 마이너스 1.0%와 3.0%로 떨어졌다. 지금까지 건설업체들은 국내 공사가 부진하면 해외공사 수주에서 돌파구를찾았다.그러나 올들어 상반기 해외공사 수주액은 모두 53건에 26억8,700만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59건,46억8,800만달러)의 57.5%에 불과,해외시장마저 여의치 않은 실정이다. ◆그래도 앞날은 밝다=지금은 어렵지만 건설업체의 앞날은 밝은 편이다.금융위기 이후 급격히 몰아친 구조조정의 여파로 지금은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완만하나마 회복기미를 보이고 있고,또 최근 남북화해 분위기로 인해 북한특수도 기대되기 때문이다. 건설업계에서는 남북경협에서 사회간접자본(SOC)시설 구축에 모두 70조원가량의 사업비가 순차적으로 투입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같은 수요의 일정량을 국내 건설업체들이 수주한다면 심각한 수주난에 시달리고 있는 건설업계에 제2의 부흥기가 올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이를 위해 대한건설협회는 ‘대북건설협력지원단’을 구성하는 등 북한 진출을 위한 준비를 진행중이다. 그러나 대북특수는 중장기적인 전망이라고 할수 있다.따라서 어려움에 처한 건설업계를 돕기 위해서는 정부가 SOC투자를 늘리는 등 공사물량을 늘리려야 한다는 주장이다.건설업체 역시 정부의 지원만 바라보는 과거의 관행에서 벗어나 최근의 어려움을 경쟁력 강화의 계기로 삼는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주장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김성곤기자 sunggone@. ***금탑산업훈장 영광의 두얼굴. *梁仁模 삼성엔지니어링 대표이사. 기자출신으로 지난 78년 삼성건설로 자리를 옮겼으며 전업에 성공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삼성종합건설 해외사업본부장,아남건설 사장 등을 거쳤다. 삼성의 대표적 전문경영인이며 오랫동안 국제영업부문에서 일해온 해외수주통으로 꼽힌다.중동 및 중남미 등 미수교국을 포함,해외 신규시장 개척에서도 발군의 실적을 냈다. 98년 이후 어려운 수주환경에도 불구하고 이집트 유화플랜트,말레이지아 올레핀플랜트,멕시코 살라만카·툴라,인도 정유플랜트,사우디 석유화학플랜트등 15억달러상당의 공사를 연이어 수주하기도 했다. 96년 삼성엔지니어링 대표이사로 선임된 이후 97년 엔지니어링업계에 대한최초의 대외기관 평가에서 건설경영대상 및 최고 경영자 대상을 수상한 바있다. 국내에서는 굴지의 건설업체들과 치열한 경쟁을 벌여 서울 상암동 2002월드컵 주경기장 공사를 수주,현재 순조롭게 공사를 진행중이다.환경과 안전에도 남다른 관심을 기울여 95년 이후 삼성엔지니어링이 정부에서 발표하는 건설업체 무재해율 조사에서 4년 연속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김성곤기자 . *金潤圭 현대건설 대표이사. 지난 69년 입사 이후 현대건설 53년 역사 가운데 30년동안 건설일선에서 뛰었다. 해외에서는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알코바 담수공장.얀부 석유항만시설 건설공사와 리비아 라스나루프 항만공사,국내에서는 평택화력,소양강댐,현대조선소,영광원전 1,2호기 등 국내외 굵직굵직한 건설현장에서 잔뼈가굵었다. 이 과정에서 국내외 공사수주와 신기술 개발,품질개선 등의 분야에서 남다른 능력을 발휘했다. 금융위기 이후에는 최고 경영자로서 현대건설의 신용도와 기술력을 배경으로 미국 유럽 싱가포르 등지에서 90억 달러 가량의 외자를 유치,국가경제가금융위기의 파고를 넘는데 일조했다. 이 자금으로 율촌 민자복합화력발전소,인천국제공항 철도사업 등 초대형 사회간접자본(SOC) 건설사업을 추진하기도 했다. 특히 대북 전문가로서도 성가를 발휘하고 있다.현대아산㈜의 대표이사로서지금까지 북한과 북경을 무려 26차례나 다녀왔다. 앞으로 활발해질 남북 경협사업에서 이같은 경력이 현대건설은 물론 국내건설업체의 북한 진출에 큰 보탬이 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 美 對쿠바 ‘햇볕정책’

    미국이 쿠바에 대한 식품과 의약품의 수출을 허용하는 등 제재를 완화하기로 한 것은 그동안 미 외교정책의 한 구석에 끈질기게 자리잡고 있던 냉전적구도가 이제서야 사라지게 됐음을 뜻한다.이는 앞으로 미국 외교정책의 변화를 예고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미국이 쿠바에 제재조치를 가한 것은 1962년.피델 카스트로 쿠바 대통령을고립시키려는 ‘쿠바 봉쇄’ 정책이 채택되면서부터다.그 후 40년 가까이 꼼짝 않던 미국의 쿠바정책이 변화의 첫발을 디딘 것이다. 이는 쿠바에 대한 오랜 제재에도 불구,미국이 기대했던 만큼의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강경 일변도의 제재에서 벗어나 온건한 유화정책으로 쿠바의 변화와 민주화를 유도해 보겠다는 계산이그 바탕에 깔려 있다. 이같은 정책 변화는 쿠바 뿐만 아니라 북한과 리비아,이란 등 이른바 ‘불량배 국가’들에 똑같이 적용될 수 있기 때문에 주목된다.미국은 실제로 쿠바와 동시에 북한,이란,리비아,수단에 대한 제재도 일부 완화했다.특히 남북정상회담 이후 미국과 북한의 관계개선 움직임이 가속화하는 상황에서 이같은 정책 변화가 이뤄져 북-미 접근에도 영향을 미칠 게 틀림없다. 이처럼 외교정책의 변화라는 측면에서 볼 때 27일의 제재 완화 조치는 큰의미를 갖는다.그러나 실제로 미-쿠바 교역에 미칠 영향은 극히 미미해 경제적으로는 상징적 의미 밖에는 갖지 못할 것이다.미국은 쿠바로의 수출은 허용하면서도 쿠바로부터의 수입은 여전히 금지하고 있다.또 쿠바는 수출대금을 반드시 현금으로 결제하도록 했다. 미국 정부나 민간 은행이 쿠바에 신용을 공여하는 것도 금지하고 있다.쿠바가 외화가 부족한 점을 감안할 때 쿠바의 구매력에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어 수출 규모가 미미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미-쿠바 경제위원회는 앞으로 1년간 미국의 대쿠바 수출은 약 2,500만∼4500만달러 정도에 그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쿠바에 대한 제재 조치로피해를 입고 있는 미 농부들을 위해 제재를 완화했다지만 농부들이 입을 혜택도 별게 없다는 얘기다. 유세진기자 yujin@
  • [외언내언] 북한의 코카콜라

    코카콜라는 햄버거·플레이보이지(誌)와 함께 미국자본주의를 대표하는 3대상품으로 꼽힌다.특히 과거의 코카롤라 모스크바 진입은 공산주의의 몰락을가져와 역사를 바꾼 상징적 상품으로 지목된다.세계인에게 친숙한 산타클로스의 빨간 옷과 하얀수염은 코카콜라 광고를 담당한 화가 선드블론이 코카콜라 이미지를 홍보하기 위해 그린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코카콜라가 진출해 있는 나라는 북한과 이라크·리비아 3개국을 제외한 195개국으로 하루 30억병 소비된다.1985년 미국우주인이 지구 밖에서 처음 마신청량음료도 코카콜라이다.영화‘혹성탈출’에서 인류멸망 후 지구를 지배한원숭이들이 콜라병을 보고 인류문명을 알게 되는가 하면 ‘부시맨’에선 콜라병이 아프리카 오지인에게 문명사회로의 초대장으로 묘사된다. 1893년 챈들러라는 사업가가 소다에 갖가지 약재를 섞어 만든 ‘달콤한 소화제’의 제조법을 약국주인 펨블튼으로부터 사들여 상표등록함으로써 출현한 코카콜라가 미국을 상징하는 브랜드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미국의 힘이었다.세계대전 중 미군병사들은 코카콜라를 행운을 가져다 주는 수호신으로 여겨 미군이 있는 곳엔 반드시 코카콜라가 따랐다.북아프리카 작전중 아이젠하워장군은 콜라 300만병을 공급해 달라는 긴급전문을 보낼 정도였다. 2차대전 후 코카콜라는 ‘승자의 음료수’로 세계로 퍼져나갔고 공산국가들은 서둘러 수입금지 조치를 내렸다.미국정부는 경제봉쇄조치로 맞섰으며 코카콜라는 이념의 장벽마저 무너뜨리는 힘을 발휘했다.코카콜라는 이제 자유분방한 미국인 생활방식이나 가치를 상징하고 있으며 인종과 국경을 초월한종교처럼 세계인의 생활과 의식을 지배해 코카콜로니즘(코카식민주의)이라는말에서 알 수 있듯이 미국자본주의의 전초병으로 군림하기에 이르렀다. 미국의 대북 경제제재 완화조치 이후 코카콜라가 미국상품으로는 처음으로북한에 공식 진출했다.코카콜라 북한 입성은 예상된 일이나 이를 계기로 미국상품의 북한 진출이 잇따를 것으로 보여 관심을 끈다.‘우리는 이렇게 허리띠를 조이면서도/서양의 코카콜라는 얻어마시지 않았다/시뻘건 흙탕물을마실지언정 제나라 물을 마시었다’ 북한 「조선문학」 1월호에 게재된 ‘조선사람들’이라는 시에서 코카콜라에 대한 북한의 종전 인식이 엿보인다. 코카콜라가 80년대 말부터 북한 내 외화상점이나 외국인호텔에서 팔렸다고는 하나 이는 제3자가 제품을 구입해 북한에 흘러든 것으로 이번 직접판매형식과는 성격이 다르다.큰 변화가 아닐 수 없다.코카콜라의 북한 진출은 역사적 사건임에 틀림없다.세계는 지금 평양의 개방에 주목하고 있다. 이기백 논설위원.
  • 北韓 ‘불량국가’호칭 변경

    [워싱턴 최철호특파원] 미국은 테러지원국 명단에 오른 북한 등 7개국을 지칭해온 ‘불량국가’라는 용어 대신 ‘우려대상국’이라는 표현을 사용키로했다. 미 국무부 리처드 바우처 대변인은 19일 ‘불량국가’로 불리던 북한,이란,이라크,리비아,시리아,수단,쿠바 등 7개국중 일부 국가의 행동이 변화를 보임에 따라 이들 국가에 융통성있게 대처하기 위해 폭넓은 개념인 ‘우려대상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키로 했다고 밝혔다. hay@
  • 국제유가 또다시 치솟나

    국제유가가 증산한계선을 돌파했음에도 불구,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증산약속을 이행할 의지를 보이지 않음에 따라 원유가가 다시 치솟을 조짐을 보이고 있다. OPEC측은 주요 국제유가 바스켓인 ‘기준유가’의 20일 평균치가 7일 배럴당 28달러선을 돌파했다고 밝혔으나 이에 따른 아무런 실질적 조치를 취하지 않아 시장을 요동치게 하고 있다.앞서 OPEC 석유장관들은 3월 회의를 통해OPEC 기준유가의 20일 이동평균선이 22∼28달러 박스권에서 벗어날 경우 원유 생산량을 자동 증·감축하기로 하는 ‘가격밴드제’도입에 합의한 바 있다.이에 따르면 20일 평균 기준유가가 증산한계선을 뚫고 28.08달러를 기록한 7일 당일에만 50만배럴이 증산됐어야 한다. OPEC에 대한 신뢰가 사라진 시장에서는 8일 뉴욕,런던 시장의 7월분 유가선물이 각각 48센트와 5센트 오른 30.4달러,29.27달러까지 치솟는 등 현·선물에 걸쳐 고공행진이 이어졌다. ‘가격밴드제’의 실효성은 그러나 도입 당시부터 의문시 돼왔던 것이 사실.이는 OPEC 회원국이 공식적으로 조인한 합의문이 아니라 비공식 신사협정이었던 데다가 합의 내용도 명백하게 알려지지 않아왔기 때문.기준유가가 20일간의 단순평균을 의미하는지,20일 이동평균(20일 단순평균을 다시 20일치 평균낸 것)인지조차 불명확했다. 전문가들은 복합적 요소에 의해 움직이는 원유수급을 가격요소 하나만으로통제하는 것이 불합리하다는 점을 지적해왔다.가격밴드제의 지지자로 알려진 알리 로드리게스 OPEC 의장 겸 베네수엘라 석유장관도 7일 “무조건적 증산 이전에 최근의 유가동향이 수요증가 등에 따른 본질적인 것인지,미·유럽의 가솔린 공급감소 등 부차적 요인에 의한 것인지,장기적일지,단기에 그칠 것인지 등이 충분히 검토돼야 한다”고 한발 물러났다.또한 50만배럴 증산이라는 목표치가 국제적 석유재고에 비해 지나치다는 지적도 있다.OPEC내부 이견도 해소되지 않고 있다.사우디아라비아,베네수엘라 등 증산에 우호적인 일부 국가들을 제외하고는 증산한계선을 보다 높여야 한다는 보수론이 거센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결국 증산의 구체적 윤곽은 빨라야 21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릴 OPEC 석유장관 회담때나 나올수 있을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손정숙기자 jssohn@. *‘증산한계선'이란. 올 3월 이란,이라크를 제외한 OPEC 9개국 석유장관들이 원유의 ‘가격밴드제(price band)’ 도입에 합의하면서 정한 원유가의 상한선. 이에 따르면 주요 국제유가들을 가중평균해서 OPEC 자체적으로 산출한 기준유가의 20일 이동평균선이 28달러를 뚫을 경우 하루 50만배럴이 자동증산되도록 했다. 반대로 22달러를 밑돌경우 같은 양만큼 자동감산토록 돼있다.그러나 산유국들간의 이견 등으로 이는 아직 제대로 가동되지 않고 있다.사우디 등은 증산한계선이 25달러까지 내려가도 괜찮다는 입장인데 반해 이란,리비아,인도네시아,알제리 등은 적어도 30달러 이상은 돼야 한다는 강경론을 고수하고 있다.
  • 美, 팬암기폭파 이란배후설 조사

    [워싱턴 연합]미국은 98년 스코틀랜드 로커비 상공에서 폭파된 팬암기 사건이 현재 재판을 받고 있는 리비아인 2명의 소행으로 믿고 있으나 그 배후 조종국이 리비아가 아닌 이란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조사하고 있다고 미 국무부가 5일 밝혔다. 국무부의 필립 리커 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에서 이란의 한 고위 정보관리가팬암기 폭파를 위해 리비아인들을 훈련시킨 것은 이란이었음을 입증하는 문서를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는 보도와 관련,그같이 말했다.
  • 美·러 “미사일방어체제 공동개발”

    [워싱턴 최철호특파원] 미국과 러시아가 서로 미사일 방어체제의 공동개발을 제의해 주목되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1일 미 NBC 방송과의 회견에서 이른바 ‘불량배 국가’들의 핵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미사일 방어체제를 미국과 러시아가 공동개발할 것을 제의했다.미국도 전역미사일 방어와 조기경보체제 분야에서 러시아에 서로 협력할 것을 제의했다고 케네스 베이컨 국방부 대변인이 1일 밝혔다. 베이컨 대변인은 또 미국이 현재 논란 속에 추진중인 국가미사일방어(NMD)체제 분야에서도 러시아와 방위기술을 공유하겠다고 제의할 가능성을 배제할수 없다고 말했다.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4일 러시아를 방문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다. 베이컨 대변인은 미국은 전역미사일 방어 분야에서 러시아와 협력할 것을이미 제의했으며 그 일환으로 두번의 군사훈련을 실시했다고 밝혔다.전역미사일 방어는 지상의 병력을 미사일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시스템이다. 미국은 또 러시아가 북한과 중동을 감시하는조기경보레이더를 재구축하는것을 지원하겠다고 제의한 바 있다. 한편 미국의 NMD 계획에 대한 세계 각국의 비난이 거세지면서 개발 명분을잃어 NMD 계획 자체가 궁지에 몰리고 있다. 유럽 방문에 나선 클린턴 미 대통령은 ‘미사일 개발기술 공유’를 제의하면서까지 NMD 계획에 대한 비난을 막아보려 애썼지만 유럽쪽은 이같은 클린턴의 호소를 냉정히 외면했다.또 게하르트 슈뢰더 독일총리와의 개별회담(1일)에서도 클린턴은 NMD에 대한 ‘우려’를 전해들어야 했다. 모두 300억달러를 들여 6차례 실험까지 마친 NMD가 세계로부터 외면받는 이유는 명분면에서 약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냉전 이후 군비축소를 외치면서 리비아 시리아 북한 등 이른바 ‘불량배(rogue)국가’들의 미사일 개발을 저지해왔다.그런 미국이 새로운 첨단기술 체제 무기를 개발한다는 것은 러시아와 맺은 탄도탄요격미사일(ABM)협정을 지적하지 않더라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다.로스앤젤레스 타임스도 1일 “NMD 옹호자들이 개발 이유로 거론하는 ‘불량배 국가’들의 공격은자살을 전제로 한 것으로 가능성이 없다”고 강조했다. 결국 NMD 계획은 방위 목적보다는 상업적 목적이 크다는 분석이 힘을 얻고있으며 이와 함께 NMD에 대한 비난은 더욱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hay@
  • 北 신형스커드미사일 시리아·리비아에 판매

    북한은 사거리가 700㎞에 달하는 신형 스커드D 미사일을 시리아와 리비아에판매했으며 이집트와도 판매협상을 벌이고 있다고 이스라엘의 하아레츠 신문이 29일 1면 머릿기사로 보도했다. 북한은 그동안 시리아 등 중동국가들에 사거리 500㎞인 스커드C 미사일을판매해 왔으나 사거리가 훨씬 늘어난 스커드D 탄도미사일을 개발,이미 시리아와 리비아에 판매한 것으로 믿어진다고 신문은 전했다.북한의 스커드D 미사일 개발 사실은 최근에야 알려졌다.시리아는 기존의 스커드C 미사일로도이스라엘 전역을 공격권에 넣을 수 있지만 내륙 깊숙이에서 이스라엘을 겨냥하기 위해 스커드D 미사일을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고 신문은 분석했다. 카이로 연합
  • [끊이지 않는 지구촌 분쟁] (2)독립요구 거센 比모로족

    필리핀 제2의 섬 민다나오.천혜의 자원과 비옥한 토양,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민다나오는 그러나 지난 30여년간 폭탄테러와 납치로 얼룩진 ‘살상의 섬’으로 각인돼왔다.민다나오섬 남부와 인근 바실란섬 술루제도에 근거를 둔이슬람 교도 모로족의 이슬람 독립국 수립을 위한 반정부 무력투쟁이 끊이지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필리핀 공산 반군 신인민군(NPA)도 민다나오섬에근거를 두고 반정부투쟁을 계속하고 있다.지난 30년간 사망자는 10만여명.수백만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재연되는 테러,인질극. 지난 4월 이후 필리핀 이슬람반군의 유혈 폭탄테러,납치극은 극에 달하고있다.정부군과 반군의 시가전도 급증하고 있다.수도 마닐라에서도 테러와 교전이 벌어졌다.지난달 20일과 23일 이슬람 무장단체 아부 사이야프는 잇따라두건의 인질극을 벌였다. 바실란 섬에서 50명의 현지인을 납치,부분적으로석방했으나 가톨릭 신부 4명은 처형됐다.23일엔 19명의 외국인을 포함한 21명의 인질을 인근 휴양지 시파단섬에서 납치,자신들의 근거지 홀로섬에 억류했다.국제문제로까지 비화된 이 사건은 27일 전격적으로 이뤄진 반군과 필리핀정부의 협상 결과 인질 석방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점쳐지고 있으나 최종결과는 두고봐야 한다는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배경. 원래 민다나오는 독립된 이슬람 국가였다.1521년 필리핀이 스페인에 정복되면서 민다나오 섬도 함께 복속됐다. 이후 1898년 미국 식민지로 전락한 이후 1946년 독립할 때까지 미국과 필리핀 정부의 모로족 차별정책이 계속됐다.본토 로존섬에서 토지없는 농민을 의도적으로 민다나오섬에 보내 경제적 부를 축적해왔다.특히 모로족과 이주민사이에 무장 충돌이 발생한 1971년 필리핀 정부의 모로족 학살을 계기로 대정부 투쟁으로 발전했다. 770만 인구가운데 가톨릭 인구는 83%,개신교는 9%이며 이슬람은 5%에 불과하다.민다나오섬을 비롯한 모로족 주 거주지역의 경제적인 낙후,상대적인 박탈감이 모로족의 이슬람국가 수립을 부추기는 커다란 배경이다. ◆모로 이슬람 반군 단체. 최근 인질극을 벌인 아부 사아야프와 MILF등 5개 조직이 있다.아부 사아야프는 ‘신의 검객’이란 뜻.조직원은 200여명에 불과하다.하지만 각종 테러와 납치에 관한한 최고 정예부대란 평이다.지도자는 카다피 잔하라니. 72년 결성된 모로민족해방전선(MNLF)은 조직원 1만5,000명으로 최대규모다. 96년 8월 당시 라모스 대통령과 MNLF의 미수아리 의장의 남부 자치주 주지사자리를 조건으로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등 정치 참여 노선을 택하고 있다.이에 반기를 들고 파생된 조직이 MILF.조직원 1만3,000여명.지도자는 살라마트하심이다. 이밖에 모로이슬람개혁집단(MIRG)이 있다.이들 반군단체들은 특히리비아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등 회교권 국가들로부터 지원을 받아왔다. ◆전망. 필리핀 조지프 에스트라다 대통령 정부를 곤혹스럽게 하고 있는 반군 문제앞날은 한마디로 어둡다.심화되고 있는 경제난,지역 경제성장 불균형 등 문제가 해결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30일 MILF측과 평화협상을 갖기로 돼있지만 만남 자체가 성사될지도 미지수다.미수아리 등 온건파 지도자들의 노선에불만을 품은 젊은 모로 청년들이 늘고 있는 것도 평화정착의 걸림돌.게다가필리핀 정부로서는 노선을 달리하는 개별 반군들과 각각 협상을 진행해야한다는 한계가 있다. 김수정기자 crystal@. *모로족은. ‘모로(Moro)’족은 사실은 인종적으로 필리핀인들과 다르지 않다.16세기중반 필리핀을 정복한 스페인이 필리핀 남부의 이슬람교도들을 이베리아 반도의 이슬람교도와 동일하게 ‘모로’(영어로는 무어)라 부르면서 정착된 말이다. 모로라는 말에는 원래 이슬람교도를 경멸하는 뜻이 담겨있지만 이들은 모로족이라고 불리는 것에 상당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필리핀인들과 달리 자신들만이 갖고 있는 문화,전통생활 양식 등에 강한 애착을 갖고 전승시키려 한다.언어학적인 분류로 10개 부족으로 나눠져있다.거주지는 민다나오섬과 술루제도,팔라완섬,바실란섬 등.이들은 이 거주지를 통틀어 ‘모로랜드’라 부르고 이슬람 독립 국가건설을 위한 꿈을 키워가고 있다. 모로족과 지배집단과의 갈등,투쟁,이른바 모로 지하드(聖戰) 역사는 수세기를 걸친 지난한 것이었다.모로 이슬람해방전선(MILF)의 살라하크 하심의장은최근 한 이슬람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필리핀땅에 가톨릭을 옮겨 심은 스페인과의 성전은 1시기(1521∼1898년),미국에 대해 투쟁한 1898∼1946년은 2시기 성전”이라고 구분했다.이어 필리핀 가톨릭 세력과 전면전에 들어선 1970년부터 현재까지가 제3기 성전으로 “성전에서 승리할 때까지 투쟁은 계속된다”고 밝혀 필리핀 정부를 움찔하게 만들었다. 모로 이슬람교도들의 입장에서 필리핀 정부군은 스페인,미국과 같은 외국제국주의 세력과 마찬가지인 ‘적군’인 것이다. 2차대전후 해외 이슬람국가로 유학떠났던 종교지도자들이 이집트 이란 리비아 등 범 이슬람권과의 연계 속에 귀국한뒤 독립국가 수립을 향한 총구를 내려놓지 않고 있다. 김수정기자
  • [역사를 바꾼 정상회담](7.끝)살레 이스마일 회담

    *79년 남·북예멘 회담. 5월22일 통일 10주년 기념일을 앞두고 옛 남예멘 수도 아덴에서 100㎞ 떨어진 다라라는 곳에서 14일 폭탄이 터져 민간인 1명이 숨지고 여러명이 다쳤다. 통일과 함께 석유개발로 경제적 번영이 기대됐지만 여전히 전체 인구의 40%가량이 가난과 싸우고 있는 등 통일 예멘은 정치·경제적으로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1990년 5월22일 합의로 통일된 지 4년만에 내전이 발발,무력으로 재통일을이룬 예멘의 분단 역사는 1857년 영국의 아덴 점령으로 거슬러 올라간다.이후 1962년 북예멘에서 자유주의를 신봉하는 젊은 장교들이 쿠테타를 일으켜예멘아랍공화국을,남예멘에서는 민족해방전선이 1967년 남예멘인민공화국을세우면서 분단이 고착됐다.남예멘 독립후 예멘인들은 통일을 추진했지만 남북예멘 정치인들의 이해대립과 사우디 아라비아와 소련의 개입으로 통일은요원하게만 보였다. 1세기를 넘는 분단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기까지는 아랍 ‘형제국’들의 중재와 80년대에 불기 시작한 동서화해바람과 냉전체제의 붕괴가 주효했다.18년간의 남북예멘간 통일논의는 1972년 9월 국경분쟁 이후 리비아를 비롯한 아랍 국가들의 적극적 중재로 같은해 10월 28일 카이로 정상회담이 개최되면서 시작됐다.77년까지 5차례의 정상회담을 갖는 동안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않던 통일 논의는 79년 전기를 맞았다. 79년 2월 2차 국경분쟁때 아랍연맹은 ‘남북 예멘간 전쟁종식을 위한 평화안’을 가결한 뒤 양국에 이를 따를 것을 종용하는 등 보다 적극적으로 중재에 나섰다.3월28일부터 3월30일까지 쿠웨이트에서 아랍연맹에 떠밀린 알리압둘라 살레 북예멘 대통령(현 대통령)과 압둘 파타 이스마일 남예멘대통령이 얼굴을 맞대고 앉았다.군 출신인 살레 대통령과 남예멘사회당을 창당한좌익 성향의 이스마일 대통령은 카이로협정,트리폴리 성명에 기초한 통일국가 수립을 재확인하고 4개월이내에 통일국가 헌법안을 마련하자는데 합의,통일논의를 가속화시켰다. 살레-이스마일 대통령의 쿠웨이트 정상회담을 계기로 특사의 상호방문이 이뤄졌고 급기야 81년 살레 북예멘 대통령의 남예멘 방문이 이뤄지면서 통일에관한 합의가 구체화됐다.문화·예술단체들의 상호 방문도 허용됐다.경제교류·협력도 정부차원에서 본격적으로 추진됐다.언론자료의 개방과 공보 출판물의 교환,단일 역사교과서의 사용 등 사회통합을 위한 움직임의 출발점이됐다. 80년 이스마일 남예멘 대통령이 권력투쟁에서 밀려 모스크바로 망명을 떠나면서 정상회담의 파트너가 바뀌었지만 남북예멘간 통일논의는 79년 합의내용을 토대로 흔들림없이 이어졌다. 80년대 중반 소강기에 접어들었던 통일논의는 국경지역에서 대규모 석유가매장된 사실이 밝혀지면서 다시 활발해졌다.석유를 공동발굴함으로써 통일이양측에 경제적 번영을 가져다 줄 것으로 확신했기 때문이다.88년 5월3∼4일살레 대통령과 예멘 사회당 서기당 알비드는 북예멘 사나에서 정상회담을개최,국경지대의 석유를 공동개발키로 합의하기에 이르렀다.사나 정상회담은그때까지 반복돼 온 통일 논의와는 달리 2년 뒤 실질적인 통일로 이어지는이정표가 됐다. 90년 통일을 일궈낸 예멘은 4년이 지났는데도 남북예멘 정치인들간에 상호불신을 해소하지 못하고 결국 전면적인 내전을 치뤘다. 1994년 7월7일 살레대통령의 북예멘 군대가 남예멘 수도 아덴을 함락함으로써 무력으로 재통일됐다. 김균미기자 kmkim@
  • 이번엔 ‘슈퍼버그’ 온다

    [런던 연합] 전세계 컴퓨터를 유린한 ‘러브버그’보다 더욱 무서운 컴퓨터바이러스 ‘슈퍼버그’가 곧 찾아온다고 영국 일요신문 옵서버가 7일 예언했다.‘러브버그’가 첨부파일을 개봉했을 때만 감염되는데 비해 ‘슈퍼버그’는 메일보기만 클릭해도 컴퓨터를 고철 덩어리로 만드는 바이러스로 그 파괴력이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것. 지난해 11월 한 컴퓨터 보안회사 컴퓨터에 출연한 바이러스가 이의 한 유형. 네트워크어소시에이츠라는 이 회사 한 연구원이 받은 ‘버블보이 돌아오다(Bubbleboy is back!)’라는 e-메일이 그것으로 첨부파일을 열어야 오염되는지금까지의 컴퓨터 바이러스 작동원리에서 진일보,메일 수신 그 자체로 치명적인 감염을 야기시킬수 있도록 설계돼 있었다. 문제는 버블보이의 침투력을 지닌 슈퍼바이러스가 러브버그의 속도나 지난해 4월 등장한 체르노빌 등 파괴적 바이러스와 결합할 때이다.체르노빌 원전사고 날짜에 맞춰 작동하도록 설계된 체르노빌 바이러스는 아시아,중동지역에서 수십만대의 컴퓨터에 저장돼있던 자료를 삭제하고 컴퓨터를 부팅시키는BIOS를 파괴한 바 있다. 전문가들은 바이러스 전문가들이 이처럼 해로운 내용들을 결합한 ‘슈퍼 바이러스’를 이미 만들어냈다고 공언하고 있다.이미 50여종의 슈퍼버그가 인터넷에서 발견됐으나 일부 작동하지 않고 일부 바이러스방어망에 퇴치됐다는것.그러나 나머지 일부가 살아남아 공공,일반 대중을 공격할 경우 최악의시나리오가 우려되고 있다. ‘다크 탠전트’라는 이름의 해커는 슈퍼바이러스가 빠르면 내주에라도 나타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미국 등 서방각국은 테러리스트 조직들이 정치적요구의 관철이나 자금마련 등을 위해 슈퍼바이러스를 유포할 경우 후유증이어마어마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또다른 위협요소는 적성국가들.미국 국방부는 리비아,이라크,크로아티아,세르비아 등 사이버안보에 심각한 위협이 되는 국가들이 120여국에 이르는 것으로 분류하고 있다.
  • 팬암기 폭파 용의자 11년만에 재판

    1988년12월 스코틀랜드 로커비 상공에서 폭발,승객과 승무원 259명과 지상에서 11명 등 270여명의 목숨을 앗아간 팬암기 폭파사건의 용의자 2명에 대한 재판이 3일 사건 발생 11년5개월만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인근에 있는전 미공군기지 캠프 자이스트에서 막을 올렸다. 스코틀랜드 법에 따라 스코틀랜드 판사가 주재하는 이번 재판에는 모두 1년정도의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그러나 ‘누가 팬암기 폭파를 계획·지시했고 그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최대 의문에 대해서는 대답을 내놓지못할 것으로 보인다.용의자로 지명된 압델 바세트 알리 알-메그라히(48)와라멘 칼리파 피마(44) 두 리비아인이 유·무죄 여부만을 가리기 때문이다. 사건 당시 미국은 그해 7월3일 미 해군함 빈센스호가 이란 민항기를 전투기로 오인,미사일을 발사해 격추시킴으로써 290명의 사망자를 낸 사건에 대한보복으로 이란이 직접 테러를 저질렀거나 팔레스타인 테러조직에 팬암기 폭파를 청부한 것으로 추측했었다.그러나 사건현장에서 발견된 폭탄의 시한장치가 리비아 테러리스트들이 사용하는 것과 같다는 점 때문에 폭탄이 들어있던 가방이 처음 실린 몰타에 근무하던 이들 2명을 범인으로 지목하게 됐다.리비아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86년 미국이 트리폴리와 벵가지를 폭격한데 대한 보복으로 리비아가 팬암기를 폭파시켰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오랜 조사기간에 걸쳐 1만5,000여명을 심문하고 18만여건의 증거를수집,유죄판결을 이끌어낼 자신이 있다는 검찰측 주장에도 불구하고 실제로이들 2명의 용의자가 유죄판결을 받을지는 확실치 않다.변호인측은 검찰측이유죄를 단정한 최대 증거로 꼽고 있는 폭탄의 시한장치가 사고 한참 뒤 현장에서 25㎞나 떨어진 곳에서 발견됐다는 점을 들어 리비아에 죄를 씌우기위해 시한장치를 그곳에 갖다 놓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또 용의자 2명이리비아 정보요원이라는 증언도 미국에 망명한 리바아 전테러리스트가 한 것으로 신빙성이 높지 않은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게다가 지난 2월에는 주임검사가 재판에서 패배할 가능성이 크다며 사퇴하기도 했다. 희생자 유가족들은 재판을 통해팬암기 폭파사건의 모든 진상이 밝혀지기를기대하고 있지만 이들의 기대가 충족될지는 분명치 않다.재판 참관을 위해암스테르담에 온 한 유가족은 “나는 진실과 정의가 구현되길 바란다.그러나솔직히 2개중 하나라도 이뤄질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고 밝혔다. 무죄를 주장하고 있는 용의자들은 “재판에서 모든 것이 밝혀져 7년간 리비아에 330억달러에 달하는 댓가를 치르게 한 제재 조치가 완전히 해제되기를기대한다”고 말하고 있다. 한편 이번 재판은 지난달말 영국 외무부의 존 커 차관이 리비아를 방문,리비아와의 관계개선을 논의하고 미국도 리비아에 대한 여행금지 해제를 고려하는 등 정치적으로 민감한 때에 열린다. 유세진기자 yujin@
  • [역사를 바꾼 정상회담](4)사다트 베긴 회담

    *77년 이집트·이스라엘 정상회담. “20세기 가장 위대한 외교적 승리의 하나이자 역사적 이벤트였다.우리는전혀 새로운 평화에의 여정을 창조했다” 1977년 11월19일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의 이스라엘 방문에 외무장관으로 동행한 부트로스 부트로스-갈리 전 UN사무총장은 당시를 이같이 회상했다. 사다트의 이스라엘 방문 및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와의 만남으로 촉발된 화해 기류는 누구도 녹일 수 없을 듯하던 중동의 얼음장 하나를 쩍 갈랐다.양국 정상간 대면은 최초의 평화조약 체결로 이어져 중동평화 여정에 거대한 초석을 놓게 됐다. 애초에 사정은 결코 좋지 않았다.4차례 전쟁을 통해 국토를 강탈해간 이스라엘에 아랍권은 유혈투쟁을 불사해왔다.이집트 역시 67년 전투에서 이스라엘에 시나이반도를 뺏겼고 73년 이를 둘러싸고 또한차례 격전에 휘말리는 동안 감정이 상할대로 상해 있었다.설상가상으로 이스라엘에선 초강경 테러리스트 출신 베긴 정권의 탄생으로 세계가 경악했다. 그러나 한편 피비린내 가시지 않는 30년 무력충돌에 대한 넌더리가 중동 민중들 사이에 확산되고 있었다.국제사회의 압력도 날로 거세갔다.이스라엘은무력점령한 땅을 반환하라는 UN 결의안 242조를 마냥 무시할수 만은 없었으며 극도의 민생 피폐상에 시달려온 이집트에는 미국이 ‘평화분담금’ 명목으로 제시해온 경제원조가 절실했다.이 시점에서 사다트는 결단을 내렸다.77년 자국 의회에서 “중동평화를 위해서는 어디든 간다.이스라엘 의회까지라도”라고 연설,강한 평화의지를 피력한 것.여기에 이스라엘이 즉각 초청장을 보내 화답했다.그리고 사다트가 무조건 이를 수락함으로써 아랍지도자 최초의 역사적인 이스라엘 방문은 이뤄졌다. 이 자리에서 양국 정상은 3차례 회담에도 불구,평화조약이 아닌 “평화를원하며 대화를 계속하자” 정도의 원론적 합의성명서 한장을 달랑 내는데 그쳤다.30년간 반대편을 보고 달려온 양국간 입장 차는 클 수 밖에 없었다.베긴 총리는 평화보장을 전제로 한 시나이반도 반환은 받아들였으나 요르단강서안 등 팔레스타인 지위와 관련된 사항에는 한치도 양보할수 없다고 버텼다.양국은 향후 1년여를 무수한 중재회담으로 소모하고서도 접점을 찾지 못해미국의 개입을 불러들여야 했다.78년 9월 카터 미 대통령은 양국 정상을 캠프 데이비드로 불러 배수의 진을 친 상태에서 협상조율에 들어갔다.2주만인17일 천신만고 끝에 역사적인 합의문이 엮어져나왔다.골격은 ▲시나이 반도의 이집트 반환 및 이스라엘-이집트 수교 ▲5년내 요르단강 서안 및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 자치 보장 원칙 등 크게 두가지였다.협정이 체결되기까지는 그후로도 반년이 흘러야 했다. 어렵사리 싹튼 중동평화였지만 부작용 역시 상상 이상이었다.양국 모두 국내의 거센 반발에 맞닥뜨렸으며 사다트는 동포를 버린 배신자로 아랍권에 낙인찍혀 리비아,시리아 등으로부터 단교당하기도 했다.미국을 불러들인 반쪽정상회담의 한계 등으로 팔레스타인인들의 실제 자치권 회복까지는 문서에약속된 몇배의 세월이 흘러야 했다. 그러나 이런 문제점들이 이스라엘-이집트 협정의 의미 자체를 희석할 수는없다.미국이 중도개입했으나 협상의 촉발점이 된 사다트의 예루살렘 방문이상당히 독자적 행보였다는 점에서 이는 중동문제를 자력으로 인식한 최초의사례가 아닐 수 없다.유대-아랍간 30년 적대관계를 청산한 이 회담이 없었다면 93년 오슬로협정,98년 와이리버협정 등 향후 중동평화의 모든 괄목할 만한 성과들도 나올 수 없었다.78년 사다트와 베긴은 그 공로로 나란히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그러나 81년 사다트는 과격파 총탄에 희생돼 중동평화의 첫 순교자가 됐다. 손정숙기자 jssohn@. *사다트 당시 이집트 대통령. 반식민,반봉건주의자에서 중동평화 개척자로.사다트 전 이집트 대통령의 일생은 드라마틱하기까지 하다. 1918년 영국 통치하 이집트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카이로 사관학교에 입교,정치 역정을 시작한다.영국 통치에 저항한 자란,터키 오토만 왕정을 무너뜨린 케멜 아타투르크,비폭력운동의 간디,그리고 히틀러로부터 영향을받았다. 38년 졸업과 함께 배치된 후방에서 후일 이집트 초대대통령이 된 아브델 나세르를 만나 정치적 동지가 된다.52년 나세르가 이끄는 비밀조직이 왕정을무너뜨리고 집권하자 그 밑에서 18년간 홍보장관,집권당 사무총장,국회의장,총리 등을 지내다 70년 나세르 사망으로 대통령직을 물려받았다. 72년 소련군 추방,73년 대 이스라엘 반격 등으로 외교적 성과를 쌓아가던중 77년 이스라엘과의 평화계획을 제시,전세계의 관심권 안으로 부상했다.그러나 이에 대한 내부 반발을 철권통치로 억누르다 81년 자국군 내부 회교원리주의자 총탄에 숨졌다. * 베긴 당시 이스라엘 총리. 중동평화의 또다른 축 메나헴 베긴 전 이스라엘 총리는 한때 시오니스트 무장단체를 이끌며 테러를 자행,목에 현상금이 걸렸던 인물. 1913년 옛 소련(지금의 벨라루시) 브레스트-리토브스크에서 목재상의 아들로 태어나 바르샤바 법대를 졸업했다.2차대전 홀로코스트에 부모형제를 잃은 뒤 과격분자로 변신,예루살렘의 영국군 사령부 숙소였던 한 호텔을 폭격,100여명을 사망케 해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혔다. 이스라엘 건국 이후 원내투쟁으로 선회,20여년간 극우 야당을 이끌다가 73년 리쿠드당을 창당했으며 77년 만인의 예상을 뒤엎고 총리로당선됐다. 그는 78년 캠프 데이비드 평화협정 체결로 중동에 평화를 부른 주역으로 각광을 받았지만 81년 이라크 핵수로 폭격,82년 레바논 침략 등으로 강경 이미지를 재확인시키며 국제사회에서 또다시 비난을 사기도 했다.그러나 83년 자진 은퇴한 뒤에는 92년 사망 때까지 정치를 등지고 칩거했다. 손정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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