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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리뷰] 극단 차이무 ‘통일 익스프레스’

    정부의 북한 포용정책인 ‘햇볕정책’이 조심스런 행보를 계속하고 있는 가운데 ‘반통일 세력’을 다룬 연극 한편이 찾아와 눈길을 끈다. 극단 차이무(차원이동무대선의 뜻)가 18일부터 정보소극장 무대에 올리는‘통일 익스프레스’(오태영 작·이상우 연출)는 통일을 무겁게 바라보지 않고 가볍게 접근한다.분단으로 이익을 보는 가상의 집단을 다루면서 음성적으로 존재할지도 모르는 ‘분단 고착’세력을 양지로 끌어내 웃음거리로 만든다. 무대 연습 첫날인 지난 11일 대학로 정보소극장.이제 막 얼굴을 드러낸 세트에서 연출을 맡은 이상우씨는 “리듬을 끊지 말고 대사가 없는 간격을 놓치지 말고 계속 움직여라”고 주문하는 등 세부 연기를 다듬으며 배우들과뒹굴고 있다. 동작의 틈을 없애라는 요구는 이 작품의 성격이 슬랩스틱 코미디(치고 받는 희극)란 점과 무관하지 않다.시선을 끌면서 계속 웃음을 주려면 대사 틈새를 동작으로 메우고 동작이 이어져야 하기 때문. 무대는 분단을 가정한 ‘이상한 나라’의 분계선에 자리잡은 ‘조통면옥’가게.간판은 위장이고 냉면도 팔지않는다.사장 우보(민경진)와 안내책 갑산(박원상)은 돈벌이나 특수 임무로 분계선을 넘나드는 사람을 중개해 주며 ‘검은 돈’을 긁어 모은다.보통은 편도 ‘특’은 왕복 손님이다.이들의 상술을 통일사업으로 찰떡같이 믿는 점원 옥화(전혜진)는 때론 수비대에 몸을 제공하여 비밀통로를 확보해 준다. 그러다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으면서 돈벌이를 위협받은 우보와 갑산,그리고 이 가게를 이용하던 관료(민복기)와 재벌2세(최덕문)가 모여 ‘통일 반대’음모를 꾸민다. 쉴새 없는 대사와 넉살좋은 연기가 돋보인 민경진과 개그우먼 뺨치는 몸짓·북한 억양으로 무대를 통통 튀어 다니는 전혜진의 대조적 분위기는 극을생생하게 이끌었다.박원상과 최덕문은 ‘비언소’‘강거루 群’등 극단 차이무의 다섯 작품에서 익혀온 팀워크로 웃음의 ‘조미료’역을 톡톡히 해냈다. 이상우씨는 오태영의 대본을 본 순간 “이건 내 작품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함남 흥남 태생이자 북녘에 삼촌과 외삼촌이 있는 이산 가족인그는 이 작품에 거는 남다른 기대를 전한다. “통일을 두려운 것으로 세뇌시키는데 앞장 서온 세력을 상정하고 ‘쥐새끼’같은 이들을 소재로 한바탕 웃을 수 있는 자리로 만들고자 한다.이런 다양한 시도를 통해 통일이 멀고 낯설지 않게 되었으면 한다”. 세태에 대한 점잖은 풍자와 코미디로 관객을 사로잡아 온 ‘연극 지킴이’의 ‘웃음 폭탄’은 4월25일까지 이어진다.(02)762-0010
  • TV리뷰-SBS ‘생방송 아주 특별한 사랑’

    지난 일요일 밤,특별한 방송프로 한 편이 시작돼 눈길을 끌었다. 7일부터 매주 일요일 밤 0시10분에 방송되는 SBS ‘생방송 아주 특별한 사랑’은 일요일 밤이란 악조건을 역으로 이용한 자선모금 방송이다.물론 ARS를 이용한 자선모금 방송특집은 새로운 것은 아니다.과연 이런 프로가 자정시간대에 가능할까 하는 우려를 자아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첫 회는 성공적이었다.참여전화가 5만5,155통으로 1통당 평균 2,000원씩 모두 1억1,031만원이 모금됐다.황금시간대의 모금액과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방송계에선 드문 예이다.성금은 결식아동들에게 나눠줄 도시락공장설립기금으로 사용될 예정이다. 이 프로의 첫 출발이 순조로운 것은 단순한 성금모금 방송이 아니라 고품격 뮤직 쇼와 연결된 새로운 형식을 취했기 때문이다.탤런트 이영애와 가수 윤종신에게 진행을 맡김으로써 음악을 단지 구색용으로만 동원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또 밤늦은 시간,생방송에 참여한 탤런트 김혜자를 비롯 출연자들의 따뜻한 마음이 읽혀졌고 ‘전화 한 통화로천사가 되자’는 말도 공감을 부르기에 충분했다. 강부길 담당PD는 그동안 모금을 위한 특집방송등에서 특별한 아이디어를 앞세워 성가를 높여왔다. 그는 “무작정 동정을 강요하기보다 가슴에 호소하도록 화면을 꾸몄다”고말하며 이같은 제작의도가 시청자에게 제대로 전달된 것같다고 밝혔다.밤과음악,인간의 선의를 하나가 되게 한 심야시간대의 뮤직 쇼+모금방송은 참신한 시도로 보인다. 許南周 yukyung@.
  • 프리뷰-극단 작예모의 창작극 ‘찬탈’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연극판에서 세칭 ‘돈 안된다’는 창작극을 꾸준히무대에 올리는 극단들이 있다.소극장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이들 극단중의 하나인 ‘작예모’(작은 몸짓, 예술사랑, 인간모임의 뜻)가 창단 5주년 기념작으로 ‘찬탈’(이희준 작·김운기 연출)을 공연하고 있다. 이 작품은 ‘역사의 블랙홀 속으로’라는 부제에 걸맞게 시공간을 초월한다.‘유리왕’을 지키는 토우(土偶)들이 가상극을 만들 모의를 한다.원혼으로구천을 떠도는 ‘치희왕비’의 한을 달래기 위해 역사에 인위적으로 개입한다.억울하게 죽은 아들 해명태자로 하여금 원수를 갚고 왕위를 잇게 하려는것이다. 이쯤되면 관객은 교과서에서 본 적이 있는 고구려의 ‘황조가’를 떠올릴수 있다.그렇다고 이 작품이 꾀꼬리의 노래를 흉내 내는건 아니다.다만 인물만 끌어왔다.역사에 가정은 없다.타임머신을 소재로 한 숱한 작품이 보여주듯 ‘찬탈’도 역사의 수레바퀴를 뒤로 돌리지 못했다.‘해명태자(정유석)’는 왕이 되지 못하고 권력을 둘러싸고 거듭되는 궁중 암투의 희생물이된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아무리 이성적으로 각본을 꾸며도 이상 사회는 불가능하다는 메시지를 담고 싶었다”고 작가 이희준은 말한다. 그러나 조명이 꺼진 뒤 남은건 주제뿐이라는 느낌이다.시간이 짧아서인지가상극은 구성이 성기고 충신‘두로장군’의 모의 결심 과정에 대한 설명부족 등 비약이 곳곳에 보였다. 제관 ‘사비’로 나오는 고물상(김유경류 봉산탈춤 전수자)의 안정된 연기와 딸 ‘수아(성여진)’의 차분한 배역소화는 돋보였다.권력의 화신 ‘화희왕비(천정명)’와 대신 ‘설지(이경희)’는 열정적 연기에도 불구하고 힘이달려보였다. 하지만 어떠랴.아직 덜 익었지만 ‘작예모’의 무대엔 예술에 대한 아름다운 고집이 배어있지 않은가.회를 거듭할 수록 질적 도약도 ‘약속된 땅’일것이다.4월4일까지 동숭아트센터 소극장.월∼목 오후 7시30분 금·토 오후 4시30분·7시30분 일 오후 3시·6시. 李鍾壽
  • [리뷰]손숙의 ‘어머니’

    최근 서울 정동극장엔 눈물 마를 날이 없다.객석 여기 저기에서 훌쩍이는소리가 들린다.감상의 중심에는 손숙 주연의 연극 ‘어머니’(이윤택 작·연출)가 자리잡고 있다. ‘어머니’의 품에는 도대체 무엇이 담겼을까. 작품을 이루는 축은 두 가지다.어머니 일순(손숙)의 회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빠른 장면교차와 그 속에 어긋매끼는 웃음과 눈물이다. 무대 중간에 설치된,자동문처럼 열리는 창문을 경계로 작품은 현실과 환상을 오르락내리락 한다.이윤택은 더 나아가 현실과 환상을 직접 만나게 하는재기를 부린다.어린 일순(이현아)이 현실의 일순과 어깨를 맞대게 하여 당시의 감정을 ‘생생’하게 살아나게 하거나 기억 속의 시어머니(이명주)가 부르는 ‘알뜰한 당신’에 현실 인물이 장단맞춰 춤추게 하여 추억이 ‘화석(化石)’으로 고정되지 않고 현실처럼 춤추게 한다.어느 한쪽에 치중하여 지루해지기 쉬운 함정을 잘 벗어나고 있다. 무엇보다 ‘어머니’가 갖는 큰 미덕은 ‘공감’이다.굳이 작품의 배경인일제시대에서 6·25가 아니더라도 그 속엔이 땅의 어머니라면 누구나 한번쯤 맛보았을,신산스런 삶이 잘 녹아있다.그것은 절절한 사연 하나쯤은 가슴에 묻고 살아온 어머니들이나 그런 어머니를 기억하고 있을 자식들을 가슴찡하게 만드는 힘이다. 눈물만이 아니라 ‘못먹어도 배불렀던’ 정겨운 옛 풍경을 섞어 자연스런웃음을 자아내기도 한다.‘미국놈 믿지말고 소련놈에 속지마라 일본놈 일어선다’든가 ‘하늘엔 김창남 땅엔 엄복동’등의 대사,무대를 찾은 원로배우고설봉씨가 감탄할 정도의 철저한 고증도 작품을 살갗에 다가오게 만든다. 무르익은 연기로 토해 내는 손숙의 청승스러움은 바로 ‘어머니’였고 김학철(아들)은 ‘어머니’가 신파에 머무르지 않게 균형을 잡아주었다.하용부(돌이)는 권위로 뭉친 아비의 전형을 잘 보여주었고 1·4후퇴때 학질에 걸려죽은 아들 찬성으로 나온 류진의 연기도 눈물샘을 자극하는데 한몫했다. 막이 내리면 모처럼 잘 만든 서정시 한편 읽은 느낌을 준다. 아쉬운 점은서정만 넘치고 서사가 너무 모자란다는 것이다.정작 일순에게 무한한 인내를 강요한 사회의 얼굴은 볼 수 없다.여성에게 억눌린 삶을 강요한 사회구조에 대한 설명을 요구한다면 무리일까. “이 땅 어머니의 전형을 보이겠다”는 연출가 이윤택의 장담이 어찌보면맞았고 한편으론 부족했다고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4월25일까지.(02)773-8960
  • [제2공화국과 張勉](4)경제개발 5개년 계획(中)/아이젠하워

    張勉정부는 집권 직후인 1960년 9월 제1차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시행하겠다고 발표한 데 이어 곧바로 미국에 재정지원을 요청하는 외교문서를 보낸다. 그것이 ‘한국의 경제개혁 비망록’(Aide Memoire on Economic Reform Measures in Korea)이다. 25쪽 분량인 이 문서는 구성상 통상적인 외교문서와는 큰 차이가 있다.張勉정부는 단순히 원조를 요청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국사회의 실정과 이에 따른 경제개발 필요성,5개년계획의 윤곽,그리고 張勉정부의 개혁의지 등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예컨대 한국은 지금 ▒노동가능 인구 940만명 가운데 130만명이 실업자이고 ▒농촌인구의 65%는 가난과 저생산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3년간(1957∼1959년) 무역적자는 연평균 3억4,800만달러에 달한다고 밝혔다. 따라서 장기적인 경제개발이 절실하다고 강조하고 미국이 원조를 해준다면장면정부도 국군 5만명 감축,일본과의 국교정상화,환율 정상화 등을 이루겠다고 약속했다.말하자면 ‘우리가 이러저러하게 개혁을 해나갈 터이니 대신경제 지원을 해달라’는 식이었다. 실무자로서 비망록을 작성한 李起鴻(당시 부흥부 기획국장)은 “외교문서에 공무원 봉급을 현실화해 공직사회 부패를 없애겠다는 다짐까지 했으니 자주독립 정부로서 최소한의 자존심마저 버린 문서였다”고 회고했다.그는 張총리에게 결재받으러 갔더니 힘없이 그러나 인자한 표정으로 몇마디 묻고는 사인하더라면서 “張총리가 그 내용에 공감했다기보다는 金永善재무장관을 믿고 결재하는 듯했다”고 기억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굴욕적이기까지 한 ‘경제개혁 비망록’이 꼭 필요했을까.그 무렵은 국가재정의 절반 가까이를 미국원조에 의존하는 상태였고 게다가 李承晩정권의 실정(失政)으로 국고는 텅 비어 있었다.60년 8월6일 許政과도정부가 발표한 李정권의 ‘외화 낭비’규모를 보면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낭비액’은 미화 3억3,000만달러,영국돈 286만4,000파운드,일화 1억4,600만엔 등이었다. 이 비망록은 당시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필요악이었을 것이다. 金永善장관과 車均禧부흥부 사무차관은 미국을 방문,10월4일 비망록을 허터 국무장관에게 수교한다.이 문서는 국제사회에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유력한 경제지인 ‘파 이스턴 이코노믹 리뷰’의 윌슨 편집국장이 직접 한국에와 金永善장관과 李起鴻국장·李漢彬재무부 예산국장 등을 인터뷰해 그 내용을 10월27일자 커버스토리로 싣는다. ‘도약을 위한 한국의 탄원’이란 이 기사에서 윌슨은 “일단의 젊은 관료들이 체면불구하고 미국에 매달려 경제적 도약을 하겠다고 공개 탄원했다”고 보도했다.아울러 한국의 사회상이 한심스럽지만 희망을 가지고 경제발전을 지켜볼 만하다고 기대를 걸었다. 나라의 체면마저 저버린,그래서 도리어 張勉정부의 경제개발 의지를 더욱분명하게 보여주는 이 비망록은 1983년 11월에야 외교문서로 정부에 정식등록된다.부흥부에서 작성해 총리의 결재를 받고 재무장관이 미국에 전달할 때까지 외무부의 손을 전혀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만큼 파격적인 외교문서였다고 할 수 있다. 경제지원에 관한 張勉정부와 미 행정부간의 협의는 순조롭게,그리고 바삐돌아간다.60년 10월13일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경제회담에서 한국은 4억2,100만달러를 61∼65년에 걸쳐 원조해 달라고 미국에 정식 요청한다.이 액수는‘경제개혁 비망록’에서 한국이 밝힌 5개년계획의 미국측 지원규모 그대로다. 이 회담에서는 또 환과 미국의 달러화 환율을 61년부터 1,000대1로 끌어올리기로 합의한다.11월26일에는 매카나기 주한 미국대사가 張총리를 방문,비망록에서 밝힌 요청에 기본적으로 동의한다는 허터 미 국무장관의 공한을 전달한다. 미국의 적극적인 지지는 친한파인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관심에도 크게 힘입었다는 사실이 최근 발굴된 미국 외교문서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별도기사 참조] 張勉정부는 미국의 경제지원을 얻느라 부단히 애쓰는 한편 국내에서도 기업인과 국민에게 장기 경제개발의 당위성을 알리고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내고자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대표적인 예가 60년 12월5일부터 닷새 동안 열린 ‘종합경제회의’다. 정부가 경제정책에 관한 각계 의견을 수렴하고자 마련한 이 회의에는 경제·기술·언론·학계 인사들과 각 지방 독농가까지,당대의 오피니언리더 200여명이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張총리는 “4월혁명의 진정한 과업은 민생안정을 바탕으로 한줄기찬 경제발전 없이 실효를 거둘 수 없다”고 강조하고 “새해부터는 실업과 민생문제에 적극 대응해 나갈테니 온국민이 자조자립의 정신으로 동참할수 있게끔 도와달라”고 당부했다. 이 자리에서 나온 金永善장관의 발언은 사회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金장관은 한국이 경제면에서 북한보다 3∼5년 뒤져 있음을 산업별 수치를들어 솔직히 밝히고 “북한과의 경제전쟁에서 뒤떨어진 현실을 극복하려면땀과 피,희생과 인내,그리고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불과 몇달 전까지 ‘반공’을 국시로 내건 李承晩정권 하에서 언제라도 ‘북진통일’이 가능하다고 믿던 국민에게는 이보다 더한 충격이 없었을 것이다.이와 함께 ‘金永善 발언’은 ‘국민에게 사실을 알리고 대화를 통해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한다’는 張勉정부의 기본방침을 명확하게 보여준 사례이기도 하다. 종합경제회의에서 간사로 일한 金立三(77·전경련 고문)은 지금도 “張勉정부는 경제발전에 관한 뚜렷한 청사진을 가지고 있었다”고 회고하면서 “그점에서는 張勉정부가 자유당정권은 물론 5·16 군사정부보다도 월등히 앞섰다”고 평가했다. 1961년으로 해가 바뀌면 민간 경제계도 한국경제협의회를발족하는 등 경제개발에 동참할 채비를 갖춘다.아울러 산업개발위원회가 준비하는 제1차경제개발 5개년계획 안이 완성 단계에 이른다. 李容遠 ywyi@ - 아이젠하워 한국경제 큰 관심… 개발 적극 독려 1960년 9월은 張勉정부가 경제개발계획을 공표하고 ‘경제개혁 비망록’을준비하는 등 숨가쁘게 돌아가던 때다.이 무렵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일시 귀국한 매카나기 주한 미국대사를 만나 한국문제,특히 경제개발에 관해깊이 상의한다. 이같은 사실은 미국 정부문서간행처(USGPO)가 발행한 FRUS 18권 691쪽에 수록된 자료 ‘아이젠하워 대통령과의 회의록’(A)에서 확인할 수 있다.아이젠하워는 처음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인 1952년 12월과 두번째 임기중인 60년 6월 등 두 차례 방한한 친한(親韓)인사다. 9월14일오전 9시 아이젠하워를 만난 매카나기는 “한국에서 많은 진전이있었고,張勉정부는 잘 해나가고 있다”고 보고한다.또 “파벌싸움이 있기는하지만 이는 동양에서 흔히 있는 일”이라고 말한다.이어 본인이 이번 방문에서 확실하게 추가원조를 얻어올 것이라고 한국인들이 기대한다고도 보고한다. 이에 대해 아이젠하워는 자신이 한국인들에게 얼마나 탄복하고 있는가를 설명하면서 “그들 스스로 경제 단계를 끌어올리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아이젠하워는 한국인들이 듣기 싫어하겠지만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않는 한 주권국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깨닫도록 해야 한다고 말하고 한국의경제발전이 시급함을 재차 강조했다. 그 무렵 한국에 대한 미국의 정책은 1960년 8월12일 파슨스 국무부 극동담당차관보가 매카나기에게 보낸 편지(B)에 잘 나타나 있다. 파슨스는 “한국사회와 경제를 자유롭고 안정되게 유지한다는 미국의 기본입장은 적어도 공산주의자들이 줄 수 있는 것보다 우위에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며,크게는 한국에서 사회정의와 경제발전을 실현함으로써 아시아에 자유세계의 이념이 구현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전시장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밝힌다. 따라서 미국은 한국사회에 늘 존재하는 불화와 반목,광범위한 혁명적잔재의 위협을 극복하고 미국 경제학자 로스토가 제시한 ‘도약단계’로 전환하도록 지도와 격려,지원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만일 그렇지 않을 경우“우리의 공산주의 경쟁자들에게 그들의 방식을 시도할 기회를 주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는 논리다. 파슨스의 관점에서도 엿보이듯 미국의 대한(對韓)정책 기조는 냉전논리에서 비롯된 것이다.그러나 張勉정부에 대해 더욱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은까닭은 ‘李承晩독재’를 무너뜨리고 들어선 張勉정부야말로 미국이 자유세계의 모범생으로서 키울 만한 가치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전상숙(梨大강사·정치학박사)
  • 日 나카지마 가오로씨 암웨이 ‘특급 판매원’

    일본인 나카지마 가오로(46).세계에서 암웨이 제품을 가장 많이 파는 사람이다.일년에 4분의 1을 외국에서 지내는 그는 일본 도쿄에 정착하기 위해 도쿄외곽 고급주택가에 대지 370평의 집을 짓고 있다.암웨이에 입사하기 전 그는 반에서 꼴찌를 맴돌던 고졸 출신의 샐러리맨이었다. 암웨이 디스트리뷰터(Distributer 소비자를 방문해 자사상품을 파는 사람)의 소개로 암웨이에 발을 들인 순간 그의 삶은 완전히 변했다. 다단계 판매를 채택한 암웨이의 사업방식과 제품의 수준,함께 일하는 사람을 직접 고를 수 있다는 매력에 빠진 그는 암웨이가 일정 금액 이상을 판 디스트리뷰터에게 주는 등급의 최단기 기록을 깨기 시작했다. “암웨이에서 등급이 올라간다는 것은 나 혼자 잘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나와 함께 하는 사람도 성공해야만 하지요.서로의 성공을 위해 배려해 주는 것,그것이 내가 암웨이에 17년간 몸담고 있는 이유입니다.” 현재 그는 전 세계에서 단 한명 있는 암웨이 더블 크라운 앰버서더(doublecrown ambassador)다.그의 그룹에 속한 사람은 70만명으로 이들의 매출액은일년에 900억엔(약 90조원)에 이른다. 그는 “내가 돈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실감해 본 적이 없다”며 정확한 수입을 밝히기를 꺼린 그는 “수입의 일부를 맹견연구회에 기부하고 있고 디스트리뷰터들의 크고 작은 모임비용에 쓰고 있다”고 소개했다. 일을 하면서 실패한 적이 없었느냐는 질문에 “일반 사람들이 실패라고 말하는 것을 나는 실패라 말하지 않는다.그저 곤란한 일이 생겼고 이로 인해더 배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대답했다. 그는 아직 미혼이다.짓고 있는 집이 완성되는 대로 결혼할 예정이다. 사귀는 여자는 없지만 그때쯤이면 이상형이 눈앞에 나타날 것이라 믿는 ‘선천적 낙천성’이 현재의 그를 만들었을 것이다. 동경┑全京夏
  • 리뷰-극단 현빈의 ‘선택’

    지난해 굿을 처음으로 연극화해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선택’이 다시 문예회관 소극장 무대에 올랐다.여성을 비하하는 주제로 ‘반페미니즘’ 논쟁을 불붙게 했던 이문열의 동명 소설을 소재로 한 작품. 첫 공연 때 벌어진 논쟁의 앙금이 남은 탓일까.주인공 장씨부인의 넋이 들려주는 얘기는 ‘반페미니즘’에 대한 우려를 말끔히 씻어낸다.대신 요즘 사위어 가는 ‘어미의 아름다움’에 대한 ‘일갈’이 굿판을 채우고 있다.지난 공연 때는 ‘소박이냐 현모양처냐’를 놓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제하는 극단적 상황을 설정해 여성계의 반발을 불렀었다.이번에는 선택의 문제를 아예 피하고 대신 동서고금을 아우르는 ‘자식키우기’라는 보편적 미덕을 강조한다. 장고 해금 징 바라의 우리 가락이 흐르는 가운데 장씨부인(이용이)은 시종일관 판을 압도한다.흐드러진 춤과 함께 때론 나무라고 때론 눙치는 대사로관객을 자유자재로 울렸다가 웃긴다.‘사람됨을 키우는 모성’이 사라져간다고 따금하게 꼬집기도 한다.‘남자 황진이’를 맡은 이원종의 걸죽한연기와 만신(여자 무당)역을 맡은 김영화 김연재 김경숙 등의 추임새도 굿판으로의 몰입을 돕는다. 구경꾼은 둘째 마당에 이르면 객이 아니라 주인이 된다.만신의 떡을 사거나 나눠 먹은 뒤 무대로 나가 같이 절하고 춤춘다.더불어 어울리는 신명 나는거리(굿의 한 장면)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어느덧 굿판은 장씨부인의 극락천도를 비는 ‘베가르기’ 장면에 이른다.시간 가는줄 모르고 있다가 막바지에 다다른다.관객이 장씨부인을 따라 베를가르며 서서히 나아가는 길은 ‘겸허’로 이어진다.“햄버거와 피자가 제사상에 오를지도 모르는 세상”에서 “사람이나 귀신이나 나눠먹는게 도리”라는 장씨부인의 넋두리는 요즘 사람들의 자세를 꾸짖는 것이다.굿판은 21일까지 이어진다.(02)764-6010李鍾壽
  • 리뷰-키타옌코 지휘 KBS교향악단

    새 상임지휘자 드미트리 키타옌코가 이끄는 KBS교향악단이 놀랄 만큼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새 선장을 맞은 이후 처음으로 지난 4일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가진 KBS교향악단의 정기연주회가 대성공이라는 평을 받고있다.지난해 4월 정명훈씨가 떠난 이후 10개월만에 KBS교향악단이 활기를 되찾은 것이다.악단의 소리가 예전보다 힘찼으며 전체적인 조화도 잘 이뤄졌다.키타옌코에게 건 기대가 틀리지 않았음을 실감할 수 있었고 지휘자의 중요성을 새삼 확인한 자리였다. 첫 곡은 ‘아라비안 나이트’를 음악화한 ‘셰헤라자데’.키타옌코는 한국에서의 첫 지휘가 다소 긴장되는 듯 지휘봉 놀림이 약간 빠른 느낌을 주었다.연주 시간을 체크해 보니 예정인 45분보다 3분여 정도 일찍 곡이 끝났다. 그러나 두번째 곡부터는 거장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냈다.피아니스트 백건우와 협연한 두번째 곡인 프로코피에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 2번’에서는“거장과 거장의 만남이란 이런 것이구나”하는 감탄사가 절로 터져나왔다.이 곡은 타악기를 치듯 피아노 건반을 두드려야 하기 때문에 연주가 힘든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백건우는 트레이트 마크인 신음소리를 가끔 내면서 왼발의 페달을 거칠게 밟는 등 격정적인 장면을 연출했다.키타옌코는 피아노 소리를 조금이라도 거스르지 않기 위해 세심하게 배려했다.백건우가 몇번의 오타를 저질렀다는 전문가들의 지적도 있지만 거장들의 신들린 연주·지휘는청중을 몰입시키기에 충분했다. 특히 키타옌코는 마지막 곡인 라벨의 왈츠곡 ‘라 발스’가 빠르기와 강약조절이 어려운 무곡임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로 침착하고 여유있게 곡을소화했다. 키타옌코가 KBS교향악단 지휘봉을 잡은 것은 지난 1일.거장들은 1∼2번의리허설만으로도 단원들의 특성과 오케스트라의 문제점을 파악한다고 한다.오랜 연륜에서 나온 여유와 자신감,부드러우면서도 강한 리더십으로 청중을 매료시킨 그의 모습에서 KBS교향악단의 소리가 세계적인 수준으로 도약할 날이멀지 않았음을 예감할 수 있었다.
  • 프리뷰-연극세상‘물고기 남자’

    ‘배우 중심’의 모토를 내세운 극단 ‘연극세상’이 오는 5일부터 성좌소극장에서 공연하는 ‘물고기남자’는 연극 외적인 요소로도 눈길을 끈다.상업성 강한 뮤지컬이나 재공연이 주류인 근래 연극계 풍토에 ‘세태 풍자’라는 정공법으로 대학로를 찾아왔고 ‘풍자극의 귀재’인 연출자(이상우)와 극작가(이강백)가 처음 만난 것이다. 정통연극이라고 해서 ‘딱딱하거나 무겁다’고 미리 판단할 필요는 없다.이대연 김갑수의 톡톡 튀는 연기와 박지일 조재현의 진지함이 어울리면서 풍자의 가벼움과 사색의 무거움이 균형을 이룬다. 브로커(김갑수·고인배)에게 속아서 양식장을 인수한 이영복(박지일)김진만(이대연)이 적조로 물고기가 떼죽을 당한뒤 이를 헐값에 사들이려는 브로커의 제의를 놓고 고민한다.그때 대형 여객선의 침몰로 시체를 인양하는 ‘신종 아르바이트’가 횡행하자 진만도 바다에서 한 남자(조재현·노승진)를 건진다. 실종됐다고 보도된 남자의 시신을 건져야 보험금을 빨리 탈수 있는 아내(최혜원)는 거금을 내걸고 이를 안 진만은 ‘무서운기대’에 빠진다.남자가 죽어야 좋은 아내와 진만,이를 반대하지만 적극적으로 말리지도 못하는 영복의 갈등을 지켜보던 남자는 “내가 죽으면 기뻐할 사람이 더 많다”는 이유로수조(水槽)로 들어가 ‘물고기 남자’가 되는데…. ‘칠수와 만수’‘비언소’로 풍자극의 묘미를 보여준 바 있는 연출가 이상우씨는 “관객이 즉자적으로 느낄 수 있는 일차적 의미와 행간의 숨은 뜻을찾으며 캐낼 수 있는 문맥이 있다”면서 “돈 때문에 인간성이 마모되는 여러 세태를 보여주면서 근본적 대안을 찾지는 못하지만 ‘느림의 선택’으로‘광속의 속도’를 늦추려는 의도를 담고자 한다”고 말한다. 지난 29일 대학로 배우협회 건물. 연극세상은 늦은 밤까지 ‘느림의 중압감’과 씨름하고 있었다.연극세상 김갑수대표는 “얼핏 무겁게 보일지 모르는주제를 연출자가 재미있게 풀어 주었다”고 말한다.연우무대의 ‘마지막 손짓’,산울림의 ‘슬픔의 무대’에 이어 세번째로 호흡을 맞추는 박지일과 이대연은 “사색과 행동을 상징하는 상호보완적 캐릭터인 영복과 진만의모습을 일상적이고 편하게 풀어가겠다”고 의욕을 비춘다. 한 장면 한 장면을 고쳐가는 이상우씨의 경륜과 귀기울이며 연습에 임하는배우들의 열기는 이번 작품이 순항할 것이란 예감으로 이어졌다.李鍾壽 vielee@
  • 리뷰-극단 실험극장 ‘카사블랑카여‘

    극단 실험극장의 ‘카사블랑카여 다시 한번’(우디 알렌 원작·김성노 연출)은 재미있다.영화 속 세계에 푹 빠져 몽상을 즐기는 한 소시민이 현실에서 좌충우돌하며벌이는 익살스런 과정을,그저 보고 즐기면 된다.험프리 보가트를 동경하는한 소심한 시민(영화 자유기고가)의 자아찾기라는 주제는 뒷전으로 돌려도좋다. 주인공 알란의 캐릭터를 잘 살린 강태기의 연기는 자연스럽게 웃음을 자아냈다.실험극장 무대에서만 알란 역을 세번째 맡는 경험을 잘 익은 과일맛으로 빚어냈다.‘강태기식 연기상표’인 생활력 없는 몽상주의자는 극중 알란과 잘 어울려대사와 몸짓 하나하나에 반영되었다. 작품은 이혼,아니 아내에게 일방적 버림을 받은 알란의 상처를 달래기 위해 친구 딕크(김인수)와 린다(차유경)부부가 여러 여자를 소개해주는 과정을다룬 것이다. 험프리 보가트로 가득 찬 ‘밀실’에 갇힌 알란과 부동산 치부라는 ‘광장’에 사는 친구 딕크는 보완재로 우정을 다져온 사이다.서로 다른 두 세계의 징검다리는 딕크의 아내 린다.꿈과 현실의 줄을 능숙하게타던 린다가 잠재워 두었던 ‘자신’을 찾는 순간 몽상쪽으로 몸이 기운다.알란과 일군 ‘하룻밤 사랑’.그러나 남편 친구와의 어긋난 사랑도 추하지 않았다.관객을 몽롱한 알란의 편에 머물게 했다. 차유경도 차분하고 진지한 연기로 자칫 웃음에만 머무르기 쉬운 무대의 중심을 잡으며 잃어버린 꿈을 되찾으려는 린다의 내면적 고민을 잘 끄집어냈다.알란의 상상속 인물인 험프리 보가트(남우성)도 해설자 역할을 잘 해냈다.현실과 상상을 오락가락하는 장면마다 불숙 튀어나와 한마디씩 던졌다.‘이것은 상상이니 거리를 두어라’라고. 그런데 린다가 갑자기 딕크로 돌아가겠다는 상황에서 너무 튀어버렸다.남편의 ‘광장’으로 돌아가려고 고심하는 과정이 너무 축약돼 어색했다.밀실도 광장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에서 조명이 꺼져 뒷맛이 개운치 않았지만 시종일관 웃음을 안겨준,아늑한 자리였다.
  • TV리뷰-KBS2 ‘공개수배 사건25시’

    K2TV ‘공개수배 사건25시’가 달라졌다. 각종 범죄를 폭력적·선정적·충격적으로 재연해 모방범죄를 조장하고 있다는 비난을 사고 있는 이 프로는 지난해 두 차례 방송위원회의 제재를 받기도 했다.특히 타 방송사가 범죄 재연프로를 없앴음에도 이 프로는 폐지되지 않아 더욱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중이었다. 그런데 20일 방송된 사기사건 특집은 프로의 존재이유를 설득력있게 보여주었다. 따뜻한 이웃이자 좋은 시민으로 기억되던 사람들이 어느날,가난한 이웃의전 재산을 긁어 사라져버린 사건은 분노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사건의후유증으로 전국 곳곳의 마을들이 집단 히스테리를 앓고 있는 모습은 경각심을 일깨워주기에 충분했다.생활정보지를 이용한 10만원대 사기사건부터 대규모 부동산 사기사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수법과 이를 피하는 지혜를 정리한 점도 눈에 띄었다. IMF와 경제침체,거품경제에서 비롯된 한탕주의의 여파로 지난해,전국에서는 하루에 사기사건이 무려 500건씩이나 일어났다. 이 사건들은 서민의 생활터전을 붕괴시키고,삶의의욕은 물론 신뢰를 무너뜨림으로써 공동체 전반에 불신풍조가 만연되고 있는 현재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범죄의 재연에 신중하고 인권침해 소지가 없도록 주의한다면 범죄재연프로도 순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許南周 yukyung@.
  • 리뷰-국립발레단 김용걸-김지영 2인무

    국립발레단과 무용단이 무대를 함께한 ‘99,1월의 춤’ 공연이 국립중앙극장에서 16,17일 펼쳐졌다. 입석까지 포함해 매일 1,800여명의 관객이 대극장 홀을 메웠다.이번 공연의 꽃은 지난해 11월 파리 국제발레 콩쿠르에서 듀엣부문 대상을 차지한 김용걸-김지영 2인조의 춤이었다.파리 콩쿠르에서 상을 탄 뒤 국내 무대에 처음서는 김-김 듀엣 조는 일반 관객들의 탄성을 되풀이해 자아냈다.7개의 작품을 모아 짠 프로그램은 이 듀엣의 출몰을 기본 축으로 삼고있어 관객들의 호기심을 미리 계산한 통속성이 엿보였지만 이 편성은 묘하게 기승전결의 울림을 가지고 전개되었다.시간이 갈수록 김­김의 개별적인 춤솜씨가 아니라 춤이란 ‘야릇한’ 현상 자체에 매혹되는 것이다. 70분 발레공연의 첫 작품인 ‘차이코프스키 파드되’에서 듀엣의 첫 춤은관객들이 금방 리듬을 타기엔 너무 강력하고 자신만만해서 조금 떨어져 해답을 구해보고 싶은 수수께끼처럼 보이는 데 그쳤다.두번째 등장 작품인 돈키호테 중 ‘결혼식 그랑 파드되’에서 관객들은 그 근원을 알아챌 듯 싶으면서도 도무지 알 수 없을 듯한 김용걸의 파워에 압도당해 한가하게 수수께끼운운할 틈을 갖지 못한다.동시에 김지영의 물처럼 부드럽게 공간에 스며들고 날카로운 칼처럼 시간을 파는 다리 동작에 휩쓸려 어디론지 떠내려 가고 마는 것이다.듀엣의 마지막 출연작인 ‘파키타’는 긴 데다 군무가 자주 뒤섞여 산만한 감을 면치 못했다.그러나 일반 관객들은 동작이 결코 자연스럽다고 할 수 없는 발레에 대해 공연 전보다 더 너그러워지고 더 알고 싶어하는그런 표정이었다.
  • 브라질 금융위기 중남미 확산 조짐

    │뉴욕·부에노스아이레스 AP 연합│ 브라질 미나스 제라이스주가 지난주 중앙정부에 대해 모라토리엄(지불유예)을 선언한 이후 브라질 금융위기가 중남미 전체로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11일 오후 4시50분(현지시간) 중남미물 미국 예탁증서(ADR)의 뉴욕은행지수가 71.30으로 3.36% 떨어졌다.뉴욕증시에서 텔레브라스 주가가 68달러로 6.8%나 내리는 등 브라질물 ADR가격은 급락세를 보였다.또 아르헨티나 석유 대기업 YPE의 주가는 2.2%,칠레항공사 란칠레 주는 6.7%,칠레의 슈퍼마켓 체인 디스트리뷰시온 이 세르비시오 주는 14.9%나 떨어지는 등 중남미물 ADR가격이 전반적인 하락세를 나타냈다.
  • 대한매일 秘史(12회)-통감부 기관지와의 싸움

    서울 프레스의 발행인으로 이토 히로부미는 즈모토(頭本元貞)를 서울로 불 러왔다. 즈모토는 이토의 영어 공보비서였고,1896년에 일본 내각의 기관지로 창간된 재팬 타임스의 초대 사장을 맡았던 사람이다.이토는 대한매일과 영문판 코 리아 데일리 뉴스를 무력화하기 위해서는 즈모토가 가장 적절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던 것이다. 즈모토는 이토가 수상이었을 때에 그의 개인비서로 임명되었다가 1897년에 는 재팬 타임스를 창간하여 그 초대 사장이 되었다.재팬 타임스는 일본인들 이 발행한 최초의 영어 일간지로서 이토의 지원으로 발행되었다.즈모토는 한 국에 오기 전 러일전쟁 기간 중에는 영국 스탠더드(Standard)지 특별 통신원 을 맡았었다.그의 영어실력은 영국사람들도 ‘뛰어나다’고 칭찬할 정도였으 며,주일 영국대사관과도 관계가 매우 좋았다. 즈모토는 한국에 온 뒤에 처음에는 주로 통감부의 해외홍보 업무를 맡았다. 1906년 7월 26일에는 그의 주최로 신문 기자들을 초청하여 연회를 베풀었고, 그 직후에 발행된 코리아 리뷰 7월호에 주한 일본헌병대가 고종 측근 5명을 체포하여 심한 고문을 가했다는 기사가 실리자 이에 항의하는 공개 편지를 헐버트에게 보낸 적도 있다. 이토는 일찍부터 서구 열강의 여론에 신경을 썼고,해외홍보의 중요성을 깊 이 인식한 사람이었다.재팬 타임스의 창간도 이토의 그와 같은 생각을 반영 한 것이었다.특히 일본의 한국 침략정책은 열강국들과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 었으므로 대외홍보에 큰 비중을 두지 않을 수 없었다. 즈모토가 서울 프레스를 일간으로 발행하기 시작한 것은 1906년 12월 5일자 부터였다.즈모토는 서울 프레스를 통해 대한매일과 헐버트의 코리아 리뷰를 사사건건 비난하고 일본의 침략을 선전하였다. 즈모토는 한국에서 외국인들이 발행하는 출판물들을 향하여 독(毒)기를 품 고 모략중상만 일삼는 구역질 나는 것들이라고 비난하고,선정적이고 사기협 잡꾼이라는 등으로 인신공격을 가하였다.서울 프레스는 또 헐버트를 향해 국 가 정책과 이익에 배치되는 반대운동에 자신을 팔아넘김으로써 자신들이 태 어난 나라까지 망각할 수도 있는 가련한 인간들이라는 등의 갖은 욕설을 퍼 부어 대었다.헐버트는 즈모토의 이러한 공격을 조목을 들어 맹렬히 반박했다 .헐버트는 1906년 12월호 코리아 리뷰에서도 서울 프레스 12월 26일자 논설 「안정을 위한 호소」(Plea for Peace) 등을 신랄히 비판하고 있다. 당시에 발행된 대한매일과 코리아 리뷰를 보면 서울 프레스가 어떤 논조로 발행되었는가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이 신문은 일본의 한국침략 정책을 적극적으로 선전하고 홍보하는 한편으로 일본의 정책을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독기 서린 공격을 퍼부었던 것이다. 서울 프레스는 지면을 확장하는 동시에 일본의 재팬 타임스와 편집·경영 양면에서 긴밀한 협조관계를 강화했다.서울 프레스는 1907년 3월 8일자 사설 「오도된 애국심」(Misguided Patriotism)은 당시 국내에서 불붙기 시작한 국채보상운동까지도 비난하면서,마지막으로는 ‘펜과 혀를 놀려’ 이 운동을 격려하고 돕는 한국의 ‘친구들’을 공격했다.서울 프레스는 또다시 9일자 사설 ‘한국의 친구들’(Korea‘s Friends)에서 한국에와 있는 반일적인 외 국인들을 헐뜯었다.이들 논설에서 구체적으로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 펜과 혀를 졸리는 한국의 친구들’이란 대한매일(배설)과 코리아 리뷰(헐버 트)임을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서울 프레스와 공동보조를 취한 신문은 도쿄에서 발행되는 재팬 타임스였다. 서울 프레스의 3월 8일자 논설을 받아 재팬 타임스는 ‘한국의 적들’(Korea ’s Enemies)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3월 15일자로 실었다.이 사설은 서울 프 레스를 그대로 인용하면서 “어떤 경우건 反日的인 한국의 십자군들이 한국 의 敵이라는 사실을 세계는 지켜보고 있다”고 주장했다. [鄭普錫 외대교수·언론사 ] '대한매일 秘史'를 오늘로 접습니다.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
  • 이세기의 인물탐구-연극 평론가 李泰柱

    연극평론가 李泰柱의 모습은 푸른 산처럼 청청하다. 자신의 소신을 피력할 때도 물과 불을 가리면서 명쾌한 논리를 전개하기 때문에 연극평론가·교육 자로서 탁월하다는 평을 듣는다. 언제나 시대의 선두에 서서 활기차게 달려 가는 그를 보면 ‘새로운 의욕이 용솟음친다’는 무용가 최현씨의 말은 그를 두고 적절하다. 그러나 행동파 이전의 그의 내면은 완벽주의자로서 섬세한 서정성과 낭만이 두드러진다. 그가 가지고 다니는 노트와 수첩에 보면 프랑 스 영화배우 장폴 벨몽도의 영화 ‘레미제라블’에서 ‘인생에서 행복한 날 은 아직도 오지 않는다’와 일본의 사진작가 호시노 미치오가 ‘살아있는 한 꿈으로 향해 걸어간다’는 구절이 그의 겉모습과는 대립되는 일면을 보여준 다. 그는 지금도 꿈을 향해 걸어가고 있으며 자신의 꿈은 완성되지 않았다고 믿는것 같다. 연극평론 분야에서 여석기 오화섭으로 시작되는 제1세대가 주로 전통을 사 수하는 보수주의적 사실극평에 치중했다면 그를 비롯한 유민영 이상일 한상 철 김문환등은 제2세대로서 60년대 초반에 연극계에 개혁의 회오리바람을 불 러일으킨 주역들이다. 모든 예술분야는 평론이 뒷받침하지 않고는 발전할 수 없다는 신념에서 ‘연극은 무엇을 할수 있는가’, ‘내가 생각하는 연극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내걸고 우리 연극의 미비점과 취약점을 그때마다 지 적하고 이를 보완하는 방법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 나라의 전성기 에는 연극 중흥이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르고 있었으며 연극의 빈약은 사회전 반에 위축을 가져온다는 것이 그의 일관된 논지다. 따라서 리얼리즘 연극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연출·연기·극작·관객의 개혁이 이루어져야한다는 신념 에서 연극전반을 철저하게 진단하고 해부하는 작업에 뛰어들었다. 이 운동은 한때 침체된 연극계에 찬반 양론의 열기를 고조시켰고 이에 반대하는 층과 팽팽하게 맞서지 않으면 안될 고전을 겪기도 했다. 지난 72년에는 연극평을 좀더 활발하게 펼 수 있는 장을 만들기 위해 혼자 힘으로 국내 최초의 연극 평론지인 계간 ‘드라마’를 창간, 폴란드의 연출가 그로토프스키의 ‘가난 한 연극’ 이론을 바탕으로 한 ‘20세기 부조리극은 시대의 위기를 비추는 날카로운 충격’으로 호평한 반면 ‘국립극단의 연극은 행사적 연극’이라고 비판한 것이 화근이 되어 원로 연출가 이진순씨의 분노를 사는 바람에 한국 연극협회에서 제명당한 일도 있다. 그렇다면 그가 주장하는 연극은 어떤 것인가. 시대가 처한 정치적 상황과 실생활에서의 모순, 인간 위선의 갈등을 무대에 거울처럼 비춰 메스를 가해 야 한다는 시각이다. 이와 관련하여 뉴욕타임스지 연극리뷰에 난 피터 셰퍼 의 ‘에쿠스’ 기사를 보고 실험극단 창단 기념 공연작품으로 이 연극을 추 천한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무대에서 말이 펄펄 날뛰는 폭발적인 행동은 당 시 국민들의 울적한 정서와 맞아 떨어졌고 공연열기가 불붙어 오르자 당국이 공연제제를 가하려 한 것은 70년대 연극사의 사건으로 손꼽힌다. 그런 한편 으로는 연극전문교육의 필요성을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일련의 셰익스피어 작 품을 공연해야만 연출·연기·극작술의 완벽을 성취할 수 있다는 논평, 기업 의 문화예술계 참여와과감한 투자권유를 한것도 그의 공적으로 돌릴수 있다 . 그 방법으로 미국의 아더발레의 희곡발전연구소(OADR)를 소개하고 이 연구 소는 연간 1,200여편의 희곡을 읽고 125편의 희곡을 선정해서 록펠러재단이 이를 적극 지원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지난 78년에는 신극 30주년을 맞아 신극사 선구자들의 자료가 전무하다는 사실을 개탄하고 그가 몸담고 있는 단국대에 연극박물관 설립을 건의하면서 직접 카메라를 메고 공연사진을 찍기 시작한것도 그의 결연한 의지가 아니면 누구도 쉽게 흉내낼수 없는 실천력일 것이다. 이러한 경험이 축적되어 지난 해엔 아마추어 사진작가로서 사진 그룹전에 두번이나 출품하고 있다. 그의 식을줄 모르는 정열은 어느 자리에서나 씩씩하게 옳은 말을 하지만 호평 일 변도는 자제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그의 주변에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 여들고 젊은 제자들에게 각별한 존경을 받는 것은 사감이 깃들이지 않은 순 수한 정의감과 학문의 연찬(硏鑽)에서 오는 온오(蘊奧)의 경지때문이다. 평북 청진에서 태어나 해방 후 부모를 따라 부산으로 갔다가 서울에서 경복 고와 서울대 영문과에 다녔다. 가족은 연극을 좋아하는 부인 陳英淑씨와 1남 2녀, 아들(동일씨)이 아버지를 이어 미국 미네소타주립대에서 연극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금 이태주의 꿈은 연극박물관을 세우는 일과 셰익스피어 4대 사극공연을 실천하는 일이지만 재정적 여건상 어느 극단에서도 엄두를 내지 못하는 현실 이 그를 안타깝게 한다. 그러나 호시노 미치오의 말처럼 그는 끊임없이 꿈을 향해 걸어가고 있으며 완성때문이 아니라 꿈에 대한 확신때문에 처음과 같 은 청년의 기백을 잃지 않는다. 행동파·실천파로서의 그의 만리심(萬里心) 은 결국 가장 찬란한 꽃을 피우기 위해 가장 화려한 봄날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그의 주변에서는 확신하고 있다. 그의 길 1934년 부산출생 1956년 서울대 문리대 영문과졸업 1966-67년 하와이대 조지타운대 대학원 연수 1968-74년 숭전대 교수 1979-87년 단국대영문과교수 1980년 한국 연극학회장 1990년 국제극평론가협(IATC)집행위원겸 동아시아·태평양지역센터 위원장 1995년 현재 예술의 전당 이사 1996년 한국연극학과교수협의회장 1997년 현재 단국대영문과교수,한국연극교육학회장, 국제극예술협(ITI)한국 본부 상임위원 [ sgr@daehanmaeil.com] **끝** (대 한 매 일 구 독 신 청 721-5544)
  • 고종밀서 보도의 충격(대한매일 秘史:11)

    ◎이토 “밀서는 가짜” 억지주장/로이터통신 타고온 스토리기사/韓·中·日 신문들 뒤늦게 게재/대한매일 증거사진 싣자/통감부 ‘오보’ 정정요구 탄압 스토리가 중국에서 타전한 을사조약이 무효라는 내용의 고종의 밀서가 런던의 일간지 ‘트리뷴’에 실리자 주영 일본 대사관은 스토리의 기사가 전혀 사실과 다르다고 즉각적으로 부인하였다. 고종이 조약에 날인하지 않은 것은 일반적인 외교관례라는 주장이었다. 영국과 일본이 영일동맹을 체결할 때에도 영국의 에드워드왕이나 일본의 천황이 직접 날인하지 않고 양국의 대표자들이 서명한 것을 보더라도 한국과 일본의 대표가 서명한 을사조약은 외교적인 관례에 따른 것임을 증명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에 한국 정부가 외국에 주재하고 있던 공사와 영사를 모두 철수시킨 것은 황제가 이 조약에 동의했음을 뜻한다는 억지 주장도 폈다. 일본이 애써 부인하였지만 ‘트리뷴’지에 실린 고종의 밀서는 로이터통신을 타고 거꾸로 동양으로 되돌아와 한국,일본,중국의 신문들에 다시 실렸다. 서울에서는 대한매일과 코리아 데일리 뉴스가 1907년 2월28일자 논설란에 트리뷴의 기사를 보도했고,헐버트가 발행하는 영문 잡지 ‘코리아 리뷰’도 일본에서 발행된 신문을 인용하여 한국 황제가 을사조약의 신빙성을 공개적으로 부인했다고 보도했다. 이렇게 되자 을사보호조약 체결을 강요한 장본인이었고,한국에 통감으로 와있던 이등박문도 팔장을 끼고 있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는 일단 고종의 밀서가 가짜라고 단언했다. 이등박문은 밀서에 대해 고종에게 자신이 직접 물어보았는데,황제는 즉석에서 부인하더라고 말하면서 이 문서가 아마 궁중 근처에서 나오기는 했겠지만 고종이 수교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등방문으로서는 자신이 이러한 변명을 해야 하는 사실 자체가 몹시 곤혹스러웠다. 을사조약은 결코 일본의 강요에 의해서 체결된 것이 아니고,한일 양국이 자발적으로 합의한 것이라고 주장해 온 근거가 흔들렸던 것이다. 그런 논란이 1년 가까이 계속되는 상황이었는데 대한매일이 고종의 밀서를 사진판으로 실었던 것이다. 지금까지는 한국의 독자들이 이러한 논쟁을 기사를 통해서 겨우 알 수 있었는데 대한매일은 고종의 밀서를 한 페이지의 좌우를 가로지르는 큰 사진판으로 실었기 때문에 국민들에게 미친 충격도 컸던 것이다. 당시의 신문은 사진을 거의 싣지 않는 때였다. 통감부는 하는 수 없이 한국 정부 외사국장(外事局長) 이건춘(李建春)을 시켜서 고종의 밀서 사진은 사실무근이니 이를 정정하라고 요구하는 공문을 대한매일에 보냈다. 그러나 대한매일은 밀서가 진짜라는 주장을 끝까지 굽히지 않았다. 대한매일은 밀서가 거짓이 아님을 믿을 수 있는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으나 그 증거를 제시하면 관련된 한국인들에게 일본의 보복이 떨어질 것이므로 이를 내놓을 수는 없다고 말하면서 이건춘의 명의로 온 기사 정정 요구를 일소에 부치고 묵살했다. 그러나 통감부로서는 대한매일을 통제할 방법이 없었다. 고종의 밀서 사건은 이와같이 1년에 걸쳐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영국을 비롯하여 한국과 일본의 신문과 통신에 실리면서 이등박문의 입장을 난처하게만들었다. 일본은 이 사건이 일어난 후에 대한매일에 대한 근본적인 방안을 더욱 적극적으로 강구하였다. 일본의 대응방법은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하나는 대한매일에 더욱 강력한 탄압을 가하는 것이고 한편으로는 대한매일의 논조를 무력화하고 마침내는 폐간시키려는 작전을 실천에 옮긴 것이었다. 통감부는 친일적인 한국어 신문을 지원하면서 하지(Hodge)라는 영국인이 발행하던 서울 프레스를 매수하여 통감부의 기관지를 만들어 대외홍보를 강화하였다.
  • 한국 교수 ‘光波가설’ 세계학계 주목/포항공대 權五大 교수 논문

    ◎세계 최고권위 학술지 게재/기존 양자물리학계 통설/대체할 수 있어 관심 집중 포항공대 權五大 교수(52·전자전기공학과)가 새롭게 제기한 ‘광파(光波)가설’이 국제 물리학계로부터 일단 인정받아 초미의 관심사로 부각되고 있다.양자물리학계의 정설로 프랑스 물리학자인 드브로이에게 노벨 물리학상을 안겨줬던 ‘물질파 가설’을 대체할 수 있는 획기적인 연구결과여서 앞으로 세계 물리학계가 ‘광파 논쟁’에 휩싸일 것으로 예상된다. 14일 權교수에 따르면 미국물리학회가 발간하는 세계 최고권위의 학술지 ‘피지컬 리뷰 레터’(PRL)는 최근 “내년 1월 중 ‘광파 가설’을 게재키로 최종 결정했다”고 權교수에게 통보해 왔다. 權교수는 지난해말 ‘꿈의 기술’로 불리는 광(光)컴퓨터와 광교환기 개발에 결정적 전기가 될 마이크로 암페어(μA)급 반도체 레이저인 광양자테 레이저를 세계 최초로 개발(본지 1월14일자 21면 보도)했다.
  • 캄보디아 내전종식 ‘눈앞’

    ◎크메르 루주 마지막 잔당 정부군에 전면 투항 【프롬펜 방콕 AFP 연합】 캄보디아의 반군단체인 크메르 루주의 마지막 잔당이 정부군에 전면 투항,30여년에 걸친 캄보디아 내전 종식이 눈앞에 닥쳤다고 5일 ‘파 이스턴 이코노믹 리뷰’지의 네이트 타이어기자가 전했다. 크메르 루주 소식에 정통한 타이어기자는 캄보디아 정부와 투항협상을 벌이고 있는 크메르 지도자 켐 누온이 자신과의 전화회견에서 이같이 밝혔다고 말했다. 누온이 이끄는 크메르 루주측 대표단은 이날 캄보디아 북부 접경지역 프레아비헤아 궁에서 미즈 소피즈 군 참모차장이 이끄는 정부대표단과 만나 협상을 벌인 끝에 전면 투항 및 보유무기 반납에 합의했다고 타이어기자는 밝혔다.
  • 高宗 밀서사건(다시 태어난 ‘대한매일’:10)

    ◎을사조약 강제성 낱낱이 들춰/영지게재 6개 조항 1면 논설통해 소개/일제 정정요구 거부/밀서 사진으로 전재 “고종 진의 확인” 공개 1905년 을사조약 체결 뒤 발생한 ‘고종 밀서사건’은 언론을 통해 을사조약의 강제성과 대한제국의 주권을 세계에 알린 역사적인 것이다.한국침탈을 강행한 일제는 이 사건으로 이미지를 크게 손상받았고 한반도 정책에서 더욱 강경책을 시도하게 된다. 특히 이 사건은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국내에 대대적으로 알려지면서 반일감정을 급속히 확산시켰고 결국 일제가 대한매일 등 민족지를 탄압하고 노골적인 침략정책을 진전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던 것이다. 고종 밀서사건은 대한제국 황실과 영국의 런던트리뷴 특파원인 더글러스 스토리 간에 극비리에 진행된 일종의 작전이었다.스토리가 일본 요코하마에서 주한 미국공사 모건을 만나 을사조약 체결전말을 들은 뒤 고베에서 통감부 총무장관으로 새로 임명된 스루하라 일행과 함께 한국에 온 것은 1906년 초. 서울의 지인들과 두루 접촉한 끝에 고종을 만난 스토리는1906년 1월29일 고종의 밀서를 전달받는다.밀서는 모두 6개 조항으로 고종이 ▲조약에 조인·동의하지 않았고 ▲조약을 일본이 반포하는 데 반대했고 ▲독립권을 한치도 타국에 양여할 수 없고 ▲이 조약의 외교권도 근거가 없으므로 내치상 한건도 인준할 수 없고 ▲통감의 주둔을 허락하지 않는 동시에 황실권도 외국인에 허가하지 않고 ▲세계열강이 한국을 집단보호통치하되 그 기한은 5년이 넘지 않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고종의 붉은 옥쇄가 찍힌 이 밀서는 고종의 측근들이 일본측 정탐꾼들 눈을 피해 바짓가랑이 속에 감추고 나온 것이다. 스토리는 이 밀서를 대한매일 사주 裵說에게 보여준 뒤 일본군의 경계망을 뚫고 제물포에서 노르웨이 배에 올라 2월7일 중국 지부에 도착한다.영국영사 오브라이언 버틀러를 찾아가 고종의 밀서사실을 알리고 밀서내용 기사를 런던트리뷴 본사로 송고했다. 다음날 트리뷴 3면 머리에 이 기사가 실렸다.“을사조약은 고종의 재가를 받지 않았고 고종은 실질적으로 포로의 신세”라는 내용이었다.을사조약 체결 경위와밀서 6개항이 영문으로 함께 번역 게재됐다. 일본은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주영 일본대사관은 트리뷴의 보도가 전혀 사실무근임을 주장하고 나섰다.또 고종이 보호조약에 날인하지 않은 것은 일반적인 외교관계로 오히려 고종이 이 조약에 동의했다고 억지를 부렸다.그러자 스토리는 2월10일자 또 다른 기사로 일본의 주장을 반박했다.일본이 한국 황제와 대신들을 협박해 보호조약을 체결하게 된 상세한 전말을 고종 측근의 말을 인용해 썼다. 이 기사는 트리뷴에 실린 뒤 로이터 통신을 타고 세계 각국으로 퍼져나갔다.대한매일은 2월28일자 1면 논설 ‘保護’에 트리뷴의 기사를 소개했고 코리아 리뷰도 일본에서 발행된 신문을 인용,한국황제가 을사조약의 신빙성을 공개적으로 부인했다고 보도했다. 이처럼 고종 밀서사건은 영국·일본·중국·한국 신문에 계속 보도됐고 1907년 1월부터 한국의 분위기를 확 바꿔놓는다.스토리는 1906년 10월부터 트리뷴에 ‘동양의 장래’란 시리즈를 연재했는데 다섯번째로 12월1일자에 문제의 밀서를 크게 실었고 대한매일은 이 밀서 사진을 1907년 1월16일자에 그대로 올렸던 것이다. 이때부터 통감부가 적극 나서기 시작한다.밀서가 근거없는 것이라는 주장이 무색해졌고 고종의 진의를 한국민들이 확실하게 알게 됐기 때문이다.통감부는 “고종이 밀서를 준 일이 없다”고 강력 부인한 뒤 대한매일에 제동을 걸었다.裵說 추방책을 영국정부와 타진하기 시작했다.먼저 “밀서는 불순한 자들이 한일 양국의 친의(親誼)를 해치려고 날조한 것”이라는 내용을 1월21일자 관보에 실었다.또 한국정부 외사국장 李建春을 시켜 “대한매일에 실린 밀서기사는 사실무근이니 이를 정정하라”는 공문을 裵說에게 보냈다. 몇몇 친일계열 신문이 관보에 실린 내용을 게재했지만 대한매일은 오히려 밀서가 진짜라는 주장으로 맞섰다.1907년 1월23일자에 “이 밀서가 거짓이 아님을 믿을 수 있는 증거까지 갖고 있으나 그 증거를 제시하면 관련 한국인들에게 보복이 떨어질 것이므로 이를 내놓을 수 없다”는 기사를 싣고 기사정정 요구를 무시했다. ◎고종 밀서 전말/한국의 중립화 목표/미·러 협조 실현안돼/외지에 일 음모 고발 고종의 밀서사건은 국내 반일감정 악화에 따른 통감부의 여론통제 방침을 더욱 강경하게 만든 결정적인 사건이다.통감부는 밀서사건 뒤 곧바로 대한매일 등 항일 민족지의 논조를 희석시키고 통감부의 정책을 그대로 대변할 수 있는 친일지들을 만들어 갔다. 그러면 이처럼 일제를 자극한 고종의 친서는 어떻게 해서 나온 것일까.외세 강점기 이 밀서가 나오기까지 고종의 생각은 한국이 시종일관 중립화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고종은 일제 강점을 막기 위해 이미 오래전부터 여러 방향으로 열강의 협조를 구했고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세계 각국에 이를 알리기 위한 비밀문서까지 만들어주게 된 것이다. 밀서사건 때까지 고종의 이같은 노력은 수차례에 걸쳐 추진됐었다.1900년 주일 한국공사 李夏榮이 처음 제기한 ‘한국의 중립화’안은 러일간에 고조된 긴장상태로 실효를 거두지 못했던 것이 사실.그리고 4년 뒤인 1904년 1월21일 고종의 명을 받은 외부대신 李址鎔이 한국의 엄정중립을 명기한 성명을 냈다.각국 주재대표 11명이 각국 정부에 이 선언서를 알렸지만 결국 2월23일 한일의정서가 체결됐고 이같은 중립화 정책은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말았다. 여기서부터 고종은 열강의 힘을 본격적으로 빌리기 시작한다.1905년 2월 고종은 러시아 육군소장 데시노를 통해 러시아 황제에게 원조를 요청하는 밀서를 보냈다.이 밀서는 주한 러시아 공사였던 파블로프를 통해 러시아로 전달됐다.또 을사조약 직전인 그해 10월에는 헐버트를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냈다. 프랑스 주재 한국공사 閔泳瓚을 미국에 보내 미국의 개입을 요청한 것도 유명한 사건이다.민영찬은 12월초 현지에 도착해 미 국무장관 루트에게 을사조약의 무효를 주장했으나 미국은 무심한 입장표명을 했다. 결국 고종은 이같은 노력들이 실패로 돌아가자 국내에 와있던 외국기자를 통해 만국에 알리는 방안으로 밀서를 쓰게 됐던 것이다.
  • 풍전등화의 대한제국과 창간(다시 태어난 ‘대한매일’:2)

    ◎‘排日護國’ 민족혼 일깨운 횃불/여론조작 친일紙 득세하던 1904년/치외법권 혜택 裴說 발행인 내세워/첫호부터 日 야욕 고발한 민족지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이하 대한매일)가 한국사 무대에 등장한 1904년은 일본의 한반도 병탄 야욕이 막바지에 달한 때였다.그해 2월8일 일제는 인천항에 정박한 러시아 군함 2척을 격침해 러일전쟁을 도발한다. 이를 빌미로 서울을 점령한 일본군은 한일의정서 체결을 강요,한반도에 주둔하면서 자유롭게 군사활동을 하는 권한을 획득한다.이어 7월20일에는 ‘군사경찰 훈령’을 공표해 ‘집회나 신문이 치안을 방해한다고 인정할 때는 그 정지를 명령하고 관계자를 처벌할 수 있다’는 규정을 마련한다. 배일(排日)민족언론의 숨통을 죌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이같은 올가미가 드러나기 이틀 전인 7월18일 대한매일은 그 거대한 족적의 첫걸음을 내디뎠다.당시 국내에는 한국인과 일본인이 발행하는 신문이 뒤섞여 있었다.한국인 신문(민족지)으로는 ‘황성신문’‘제국신문’이,일본인 신문(친일지)으로는 ‘한성신보’‘대한일보’‘대동신보’가 대표적이었다. 그러나 민족지들은 일본군 주둔 이후 갖가지 탄압에 시달려 활기를 잃은 반면 수적으로도 우세한 친일지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일제는 19세기 말 한반도 침략을 시작하면서 여론 조작수단으로 일본인 경영의 신문을 많이 발간했다.1881년 이래 한반도 전역에서 발간한 한글·일본어·영자 신문이 총 30여종에 이를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대한매일 창간은 한민족에게 한줄기 빛과도 같은 희망을 주었다.발행인인 배설(裴說)이 치외법권을 누리는 영국인이어서 일제의 검열을 피할수 있을 뿐더러 발간 즉시 ‘한민족과 대한제국의 편에 서서 일제침략에 맞서는’태도를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한매일의 영문판인 코리아 데일리 뉴스(The Korea Daily News)는 당시 유일한 일간 영자지여서 한반도 정세를 국제사회에 널리 알려 지지를 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크게 작용했다. 대한매일 창간 무렵 한민족의 관심이 집중된 사건은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였다.일본은 6월6일 ‘한국인이 명백하게이용·경작하는 토지를 제외한 전국토’를 개간해 50년 동안 경영하는 권리를 달라고 대한제국 정부에 요구했다.표면상 개간권을 요청한 자는 일본 각료 출신인 나가모리(長森藤吉郞)였지만 실제로는 일제의 치밀한 ‘식민지화’ 계획의 하나로 추진된 것이다. 이 일이 알려지자 한반도는 당연히 들끓었다.요구를 받아들이면 적어도 국토의 6분의 1(당시 일본 외상의 발언)에서 많게는 3분의 2(윤치호 주장)까지 일본에 넘어가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아울러 황무지 개간을 내세워 일본인들이 떼지어 한반도로 몰려올 것도 불보듯 뻔한 사실이었다. 민족지들은 일제히 일본의 야욕을 비난했고 농광회사(農鑛會社),보안회(保安會)등의 단체가 생겨나 조직적인 반대운동을 시작했다.이같은 상황에 제동을 걸고자 일제는 ‘군사경찰 훈령’을 공표하기에 이른 것이다. 대한매일도 당연히 ‘황무지 개간’건 보도의 일선에 나섰다.현재 대한매일의 창간호부터 15호까지는 남아 있지 않고 제16호(1904년 8월4일자)가 가장 오래된 지면이다. 그 날짜 영문판 톱기사는일본의 영자지 ‘고베 크로니클’의 논설 ‘프로텍팅 코리아(Protecting Korea)’를 절반 가까이 전재했다.‘일본 정부는 외국인의 토지 소유를 허용하지 않으면서 코리아에는 부당한 요구를 한다’는 기사를 자세히 소개한 뒤 대한매일은 ‘이같은 고발에 대해 일본 정부는 무슨 말로 대답할 것인가’라고 비판했다.이어 16일자에도 ‘나가모리 어게인(Nagamori Again)’(18일자 한글판 제목 ‘장삼씨의 문제 갱론이라’)이란 톱기사로 이 문제를 계속 거론한다. 대한매일이 배일 논조를 뚜렷이 하자 친일지들은 즉각 대한매일과 배설(裴說)을 비방하는 기사를 실었다.대한일보 10월5일자는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이 신문은 ‘영국인 배설이 경성에서 발행하는 대한매일신보는…번번이 일본이 패전한다는 설을 논하고,러시아의 제2군이 이미 일본군의 후방을 차단하여 포위했으므로 머잖아 일본군이 대패하리라는 등의 거짓말을 싣고 있다’고 비난했다.이어 ‘이 영국인은 (일본)고베에서 장사꾼으로 생활하던 천인(賤人)이기로 전국(戰局)을 알 리가 없다’고 인신공격을 달았다. 이 신문은 이밖에도 11월10일자,12월23일자 등에서 대한매일을 ‘일본에게 공정하지 못하다’거나 심지어 ‘친러시아 기관지’라는 등의 악의에 찬 비난을 거듭 퍼부었다. 창간하자마자 민족지의 대표로 떠오른 대한매일신보.민족과 국가의 명운을 두 어깨에 짊어진 대한매일이 6년여 동안 일본제국주의를 상대로 벌인 대전쟁은 이처럼 막을 올렸다. ◎대한매일신보 발행 체제/영문·순한글 6면 합쇄/타블로이드판으로 출발 대한매일신보(1904.7.18∼1910.8.28)는 6년여 동안 4가지 체제로 발행됐다.창간시에는 영문판인 코리아 데일리 뉴스(The Korea Daily News) 4면과 순한글판인 대한매일신보 2면 등 모두 6면을 합쇄 형태로 냈다.지면 비율로는 2대1일이지만 영문판 4면 가운데 2면은 광고였으므로 처음부터 한글·영문 기사의 비중은 같게 출발했다.판형은 타블로이드판이다. 그즈음 영문으로 나온 정기간행물은 미국인 헐버트(Homer B.Hulbert)가 내는 월간지 ‘코리아 리뷰(Korea Review)’뿐이어서 일간지인 코리아 데일리 뉴스는 처음부터 널리 주목받았다. 영문·한글판 합쇄 체제는 다음해 5월10까지 이어졌으나 인쇄시설에 문제가 생겨 다섯달 동안 휴간한다.1905년 8월11일 속간하면서는 영문판과 국한문혼용판을 분리해 발행했다.2년쯤 뒤인 1907년 5월23일에는 한글판을 부활해 영문판·국한문혼용판·한글판 세 가지가 동시에 나왔다.우리 언론 사상 유일한 사례다. 裴說이 영국인 만함(Alfred Weekly Marnham)에게 신문사를 넘긴 며칠 뒤 영문판 발행이 중단돼 1908년 6월1일부터는 국한문판과 한글판 2종만을 내었다.영문판은 이듬해 복간되지만 곧 사라진다. 이같은 발행체제의 흐름을 살펴보면 초기에는 독자층이 넓어지면서 국한문판·한글판으로 점차 확대하다가 후기에는 일제의 압박이 거세지면서 영문판이 사라짐을 알 수 있다.1900년대 초 시대요구에 부응해 다양한 독자층의 욕구를 수용한 대한매일의 발행체제는 진실로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대한매일신보 연구 현황/韓末 담아낸 시대그릇/각 분야별 연구 활발 대한매일신보에 대한 연구는 100여년 한국 언론사 연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대한매일신보가 이같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첫째 정치적 압력에 굴하지 않고 언론의 소임을 다한,우리 언론사에 거의 유일한 신문이었다는 원론적 의미에서다.둘째는 한말 우리의 사회상과 국제정세를 가장 정확하게 알려주고 있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대한매일에 대한 지금까지 연구는 우리 언론사 연구에서 항일과 관련,독립적으로 다뤄져온 부분도 많다.언론 자체 문제뿐 아니라 한말 우리의 시가(詩歌),한글,산업진흥,광고,자주의식,국제 외교사 등 다양한 분야로 연구 영역이 확대돼왔고 특히 80년대와 90년대 들어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현재 대한매일신보만을 독립적으로 다룬 단행본은 △‘제국주의와 언론­배설·대한매일신보 및 한·영·일 관계’(구대열·이화여대출판부 1986) △‘대한매일신보 연구’(이광린 유재천 김학동 공저·서강대출판부 1986) △‘대한매일신보와 배설’(정진석·나남 1987) 등이 있다. 한말 저항시가연구서는 가장 많아 ‘대한매일신보 가사연구’(조현경·전남대 석사논문 1995),‘대한매일신보소재 가사문학연구’(유정선·이화여대 〃 1990),‘개화기의 저항시가연구’(박을수·경희대 박사논문 1984),‘우국가사 연구­대한매일을 중심으로’(김준태·고려대 석사논문 1980) 등이 있다.한글 신문에 대한 연구로는 ‘대한매일신보 국문판 연구’(오선화·이화여대 〃 1988)가 있다. 한말 대한매일신보가 산업진흥을 역설한 논설들에 대한 연구로 ‘대한매일신보의 논설에 나타난 실업진흥론’(이윤정·서울시립대 〃 1997)이,당시의 신문광고에 대한 연구로는 ‘대한매일신보에 나타난 광고에 관한 연구’(김영희·효성여대 〃)가 있다. 그밖에 ‘대한매일신보의 항일 자주의식연구’(김영애·성신여대 〃 1979),‘대한매일보에 나타난 의병 동향’(윤경숙·인하대 〃 1988),‘대한매일신보의 항일 언론활동’(권만용·건국대 〃 1993) 등이 있다. 또한 한말 국제관계를 다루는 논문들에는 특히 영국과 일본과의 관계에서 대한매일신보와 배설을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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