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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백여 이민족 연방/오늘의 소련 국세

    ◎2천만㎢ 면적에 인구 2억9천만명/12국과 접경… 한인 50만명 거주 추정/개혁추진속 침체경제·민족분규 몸살 한때는 붉은 곰·철의 장막·동토의 나라를 먼저 연상케했던 소련이 노대통령의 방소를 계기로 우리에게 성큼 다가오고 있다. 15개 공화국과 1백개 이상의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연방국가 소련은 유라시아대륙의 북부에 위치,세계 육지면적의 6분의 1이나 되는 2천2백40만㎢의 광활한 땅덩어리를 차지하고 있는 대국이다. 동유럽에서 북아시아 및 중앙아시아에 걸쳐 동서로는 1만1천㎞,남북으로는 5천㎞에 달하는 광대한 이 나라는 세계 최장의 국경선을 가지고 있으며 유럽과 아시아지역에서 모두 12개국과 접경하고 있다. 인구는 90년 현재 2억8천9백만명으로 중국과 인도 다음의 세계 제3위이며 인구밀도는 1㎢당 13명을 약간 웃돈다. 정식명칭인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 연방이라는 국호가 공식채택된 것은 1917년 11월 혁명으로 제정이 무너진후 22년 12월30일에 개최된 제1차 전소련 소비에트대회에서 였다. 처음에는 러시아연방,자카프카즈연방,우크라이나공화국,백러시아공화국 등 4개 사회주의국가 연방으로서 성립했다. 그뒤 일부 연방의 해체에 따른 새 공화국의 탄생,그밖의 공화국의 가입과 통합 등을 거쳐 지금은 15개의 공화국(러시아 우크라이나 백러시아 우즈베크 카자흐 그루지야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몰다비아 키르기스 타지크 투르크멘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이 소비에트 연방을 구성하고 있다. 이들 15개 공화국의 통치구역내에는 각기 상이한 소수민족들이 자치권을 인정받아 20개의 자치국,8개의 자치주,10개의 민족관구를 형성하고 있기도 하다. 민족구성은 러시아인(51%)·우크라이나인(15%)·우즈베크인(6%) 등 12대민족이 전체 인구의 89%를 차지하고 있으며 대개는 유럽계이지만 아시아계도 상당수 혼재해 있다. 현재 소련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의 수는 50여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이는 1백여개 이상의 소수민족 가운데 수적으로 29위를 차지한다. 소련의 공용어는 러시아어이지만 민족수와 거의 같은 숫자의 언어가 민족어로 사용되고 있다. 소련은 1917년 11월7일의 혁명으로 로마노프왕조를 무너뜨리고 탄생한 최초의 사회주의국가이다. 24년 레닌이 죽자 대권을 잡은 스탈린은 28년부터 2차대전까지 3차례의 5개년 계획을 실시,국민경제의 사회주의화와 공업화를 이룩했으며 농업을 집단화 했다. 오늘날 소련이 가진 강대한 군사력과 경제력은 이때 형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4년말부터 38년까지 대숙청을 단행한 스탈린은 2차대전 이후 동유럽과 아시아에서 태동한 사회주의국가들의 대부가 됐다. 그후 흐루시초프(53∼64년),브레즈네프(64∼82년),안드로포프(82∼84년),체르넨코(84∼85년) 등을 거치며 가쁜 숨을 몰아쉬던 세계 공산권의 종주국 소련은 85년 3월 현 대통령 고르바초프의 시대를 맞으면서 개혁과 개방의 탈바꿈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헌법개정을 통해 공산당 일당독재를 포기하고 사유재산권을 인정하는 등 일련의 대개혁조치를 추진한 것이다. 그러나 소련은 지금 이같은 개혁조치에도 불구하고 침체된 경제문제와 각 공화국의 분리 독립요구,민족문제등 소 연방체제의 운명을 좌우할 양대난제에 직면해 있는 실정이다. 동구 대변혁의 기적을 만들었던 고르바초프는 민족분규의 확산과 군부의 동요로 정치적 입지가 크게 흔들리고 있으며 고르비의 개혁을 지원하려는 EC 등 서방측은 소련의 취약한 경제구조와 예측할 수 없는 정치적 불확실성 때문에 구체적 지원을 망설이고 있다. 특히 심각한 생필품 부족현상은 국민들의 불만을 더욱 고조시키고 있는 실정이며 70년대 이후 계속 하강곡선을 그리고 있는 경제성장률,노동생산성의 저하,낮은 투자효율 등은 86년부터 시작된 제12차 5개년경제계획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기도 하다.
  • 공산권무역 대부 미 해머옹 사망

    ◎소에 의약품·식량지원… 레닌 신임 얻어/유전개발로 자수성가… “평화의 해결사” 미국의 석유재벌이며 철의 장막을 넘어 세계평화의 중재자 역할을 했던 아먼드 해머 미 옥시던틀 석유회장이 10일 92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옥시던틀석유사 대변인은 『해머회장이 10일 밤(현지시간) 로스앤젤레스 자택에서 잠시동안 병석에 누워 있은 후 숨을 거뒀다』고 발표했다. 러시아 이민가정에서 태어나 자수성가로 거부가 된 고 해머회장은 막대한 돈을 암퇴치를 비롯한 사회봉사활동에 기부했으며 미술관을 운영하는 등 문화사업에도 헌신했다. 해머회장은 미소가 대립했던 냉전시대에 공산권을 상대로 기업활동을 하며 큰돈을 벌기도 했다. 미국의 대 공산권무역 대부였던 해머씨는 1921년 소련에 많은 의약품과 식량을 지원하면서 레닌의 두터운 신임을 받기 시작했다. 해머씨는 레닌의 신임으로 소련에서 처음으로 기업경영을 허가받은 외국인 자본가가 됐으며 레닌의 지원하에 소련에 많은 상품을 판매했다. 해머씨는 그 이후 스탈린·흐루시초프·브레즈네프·고르바초프 등 소련 지도자와 두터운 개인적 친분을 유지하는 한편 등소평 중국 최고지도자와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이를 바탕으로 활발한 대 공산권 기업활동을 벌였다. 해머씨는 이같은 대 공산권 무역으로 크렘린으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자본가」「무역의 키신저」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이같은 폭넓은 친교를 바탕으로 공산권 정보에 가장 밝은 사람이 됐는데 고르바초프의 등장과 등소평의 재기를 정확히 예측하기도 했다. 해머씨는 1957년 파산직전의 옥시던틀 석유회사를 인수,의욕적인 유전개발에 성공하며 이 회사를 오늘날의 거대한 석유재벌로 성장시켰다. 해머회장의 활약은 단순히 기업경영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케네디 대통령 이후 역대 미국 대통령의 대 공산권 외교상담역 역할을 맡아 미소 지도자간의 가교역할을 하며 국제정치에도 적지않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지난 88년에는 중국산 석탄의 판매를 위해 한국을 방문,한중 경제교류의 중재자 역할도 했었다.
  • 모스크바·겨울·노태우 대통령/이재근 본사 논설위원(서울칼럼)

    일반적으로 미국인은 실용주의적이고 소련인은 이데올로기적이라고 보지만 사실은 정반대이다. 개인생활이나 정치면에서도 미국에는 이상주의자,도덕주의자가 훨씬 더 많고 소련에는 냉소적인 현실주의자,실용주의자가 더 많다는게 소련 연구가들의 분석이다. 소련정치도 겉으로는 이데올로기적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공산주의 이상에 따라 움직여 왔으며 대부분의 경우 현실적인 국가주의의 이해와 여러 사회집단의 이해관계에 따라 운영돼온 것이다. 도의적인 이상이나 이데올로기에 좌우되는 현상은 소련보다는 미국의 정치에서 찾을 수 있다는 설명도 있다. 국민성도 그러하다. 소련 연구가들의 관찰이나 많은 여행기들을 살피면 소련 국민들,특히 러시아 국민들처럼 솔직하고 개방적인 생활태도를 갖고 있는 민족도 드물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서민의 생활과 대인관계를 자세히 관찰해보면 그들은 대개 자연스런 감정으로 솔직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소개되고 있다. 스탈린시대의 거칠고 얽매인 통제사회를 거치면서도 사람들의 행동은 거기에 물들지 않았고구김살없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전후 시베리아에 억류되었던 한 일본인 작가는 그 저서에서 러시아인들을 이렇게 소개했다. 『러시아인은 밖에서 세사람만 모이면 노래를 부른다. 그들이 부르는 합창소리가 바람에 실려 내가 있는 곳까지 들린다. 정말 소비에트식의 밝고 낙천적인 풍경이다. 소비에트권력의 침울한 어둠과 민중의 밝고 낙천적인 감성사이에는 도대체 어떤 관계가 있을까. 「볼가의 단가」에서 느껴지는 애조띤 감성은 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점이다』 그렇게 볼때 오늘날 저들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공개)는 이 러시아적 소련 민족성의 필연적인 귀결이라 할 수 있다. 고르바초프라는 한 탁월한 지도자에 의해 그것이 시대적으로 표출됐을 뿐이라는 것이다.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트로이카 노선을 천명한 최대의 이유는 한마디로 말하면 소련적 사회주의가 막다른 곳에 달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페레스트로이카의 기둥은 당연히 경제개혁이다.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고르바초프의 모든 개혁정책은 결국은 경제활성화를 위한 것이라고 해도 좋다. 60년대의 전반까지도 대부분의 소련국민은 소련의 사회주의 체제가 인류보편의 가치를 갖는다고 믿고 있었다. 60년대 중반이후 일부 자유주의적인 지식인들이 체제비판의 소리를 높인바 있었으나 극히 한정된 소수였다. 특히 경제전문가 사이에서는 이미 50년대 후반부터 경제개혁의 문제가 제기되어 60년대초에는 「이윤의 도입」을 둘러싼 경제논쟁도 빚어졌다. 65년에는 이른바 「코시긴 개혁」이 실시되는등 스탈린체제를 뜯어고칠 필요가 있다는 점이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자각되고 있었으나 일반적으로는 60년대까지는 사회주의와 그 이데올로기의 신앙이 무너지지는 않았다. 70년대가 되자 소련체제가 병에 걸렸다는 사실이 이제 누구의 눈에도 분명해졌다. 60년경 허풍쟁이 흐루시초프는 『70년에는 미국을 따라잡는다. 80년대에는 능력에 따라서 일하고 필요에 따라서 취하는 풍요한 공산주의 낙원이 도래한다』고 세계에 선언했다. 당강령에도 그렇게 기록하게 했다. 그런데 70년대가 되어도 소련에서는 고기나 소시지,기타 기본 필수품을 입수하기 위해 서민은 뛰어다니고 긴 줄을 서고 악전고투 하지 않으면 안될만큼 경제상태가 나빠졌다. 지방에서는 육류가 몇년씩 상점에서 자취를 감춰버린 사태로까지 되었다. 사람들은 드디어 큰 환멸을 느꼈다. 70년대에 이르러 공산주의는 급속히 퇴색하고 풍화되어 버렸다. 당의 지도자가 아무리 사회주의체제의 우월성을 설득해도 매일처럼 생필품을 사는 행렬꽁무니에 몇시간씩 서있어야 하는 서민들은 냉소했다. 많은 지식인들이 독주 보드카에 탐닉하며 울분을 풀고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대신할 가치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소련을 우리는 어느만큼 아는가. 어느 사람의 표현대로 「무서운 속도」로 북방으로 달려간 우리에게 있어 소련은 정말 어떤 존재인가 생각해봐야 한다. 아직 그들에게 느끼는 우려,당혹,두려움은 어디에 기인하는 가도 잘 살펴야 한다. 그것은 무엇보다 우리가 상대를 너무 모른다는 데서 오는 것이다. 구한말의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직접 그들과 교류한 역사가 없고 특히 냉전체제하에서는 원천적으로 접촉이 불가능했다. 더구나 고르바초프 정권하에서는 최근 몇년동안 그들 자신이 너무 급격하게 변하는 중이어서 마치 움직이는 표적을 맞히는 것 같은 어려움도 있다. 그들이 대국이라는 콤플렉스도 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들이 「진짜 크렘린」같은 사람들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 소 수교가 이뤄졌다. 거기에다 노태우 대통령이 소련을 방문한다. 전후 처음으로 아니 사상 처음으로 우리의 국가원수가 모스크바 크렘린궁에 「입성」하는 것이다. 노대통령은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회담할 것이고 붉은 광장을 거닐 것이며 크렘레프스카야 제방도로를 달려 톨스토이가를 지나칠 것이다. 무엇보다도 붕괴된 대제국 오늘의 소련 대통령과 한 소간 정치·경제·문화협력을 논의하다가 때로는 과거를 바탕으로 역사도 얘기할 것이다. 바로 그 대목이 중요하다. 그럴적에 대통령은 반드시 다음과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 조용히 얘기해야 할 것이다. 즉 멀리는 노일전쟁으로부터 시작하여 일제에 의한 한반도흥정,구러시아제국과 구한말의 관계에 이르러야 한다. 이어볼셰비키혁명을 전후한 한반도의 소용돌이에도 언급될 것이고 그 완전한 식민지화도 회상돼야 할 것이다. 전후 해방·독립·분단에 언급한데 이어 드디어 6·25 동족전쟁에서의 소련의 책임도 지적돼야 할 것이다. 82년의 무자비한 대한항공(KAL)여객기 격추사건은 또 어떻게 언급될 것인가. 나흘간의 짧은 일정속에 이 「모든 것」을 담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 소 관계의 진정한 개선과 앞으로의 전개를 위해서는 그 「모든 것」이 역사와 우호협력의 이름으로 반드시 여과돼야 한다. 그것이 한 소 관계의 진전과 노대통령의 모스크바 입성을 지켜보는 국민의 눈초리인 것이다.
  • “돌풍” 티민스키는 누구

    ◎3개의 국적 가진 백만장자/자유노조 분열로 “어부지리” 폴란드 역사상 첫 직선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해 25일 실시된 1차선거에서 바웬사에 이어 2위를 차지,결선 선거에 진출하게 된 스타니슬라브 티민스키는 과연 누구일까. 동구권에서는 물론 폴란드내에서조차 잘 알려진 일이 없는 무명정치인의 뜻밖의 부상에 세계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올해 42세의 한창나이인 티민스키는 지난 69년 폴란드에서는 돈을 벌 수 없다는 이유로 바르샤바공대를 중퇴하고 무일푼으로 이민,스웨덴을 거쳐 캐나다와 페루에서 컴퓨터와 케이블TV사업으로 백만장자가 된 매우 특별한 인물로 알려지고 있다. 캐나다와 페루시민권을 갖고 있는 티민스키는 지난달 대통령출마를 위해 귀국했으며 폴란드내에서는 물론 현지의 이민사회에서도 정체가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는 수수께끼의 인물. 그는 선거유세기간동안 폴란드의 피폐된 경제를 외국에서 돈을 번 경험으로 빨리 회생시킬 것이며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에게 이익이 신속하게 돌아가도록 하겠다는 공약만으로 갑작스레 지지층을 확보했다. 폴란드인들이 정체불명의 사나이 티민스키의 이러한 말에 현혹(?)된 것은 폴란드의 민주주의가 일천하고 인플레를 억제하기 위해 올 1월부터 도입된 마조비에츠키총리의 긴축경제정책 등 오늘의 폴란드 살림살이 전반에 대한 국민의 불만이 얼마큼 큰가를 반영하는 단적인 증거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자유노조 투쟁과정에서 꾸준히 동지적 관계를 유지했던 바웬사와 마조비에츠키가 대권경쟁을 통해 상호 비방하는 등 자유노조가 분열된 모습을 보인 것도 티민스키에게 어부지리를 안긴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티민스키는 올해 의석수가 1석도 없는 캐나다의 군소정당인 자유주의자당의 총재란 직함을 가지고 있는데 지난 21일 발표된 여론조사결과 마조비에츠키를 제치고 2위로 급격히 부상,이번 선거에서의 이변을 예고했다. 『정신질환을 앓은 적이 있다』『남미의 마약조직과 관련이 있다』는 등 각종 악성루머에 시달리고 있는 티민스키가 결선선거에서 승리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지만 그가 일으킨 이번 「이변」이 바로 오늘의 동구가 안고 있는 현실이란 점에서 여운을 남긴다. 폴란드어를 모르는 페루출신부인과의 사이에 4명의 자녀를 두고 있다.
  • “북한정권은 스탈린이 세워줬다”/소 주간지 「뉴타임스」 주장

    ◎“김일성에 의한 정권수립” 정면 부정/“중ㆍ소 지원 받아 6ㆍ25남침”거듭 확인 소련의 유력 정치주간지 노보에 브레미아(뉴타임스)는 최근호에서 북한이 전후 동독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스탈린이 세운 사회주의국가」라고 주장,북한의 정통성을 부인하고 나서 주목되고 있다. 9일 소련 관영 모스크바 방송에 의하면 노보에 브레미아지는 한소 수교와 관련된 기사에서 이같이 강조함으로써 북한의 「김일성에 의한 정권수립」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한편 『평양의 후계자(김일성을 지칭)는 자기 선배(스탈린을 지칭)보다 훨씬 오래 살아 남았을 뿐 아니라 스탈린주의의 실행에서 보다 큰 열성을 발휘했다』고 강조,김일성의 장기독재권력체제를 비판했다. 이 잡지는 이어 6ㆍ25와 관련,흐루시초프의 회고록을 인용,『1949년말 김일성이 남침계획안을 갖고 모스크바로 찾아 왔다. 그는 스탈린과 모택동의 허가를 받고 4백만명의 생명을 앗아간 그 전쟁을 시작했다. 스탈린은 무기로만 김일성을 뒷받침해 준 것이 아니다. 그는 소련항공사들과 기타 군사고문단들을 파견해 주었는데 그들도 역시 죽음을 당하게 됐다』고 밝혀 6ㆍ25가 김일성이 소중의 지원으로 일으킨 남침전쟁이었음을 거듭 확인했다. 이 잡지는 한소 수교에도 언급,북한을 포함,일부에서 소련이 북한의 「구식경제」로는 도움이 되지 않지만 일본을 뒤따라 잡으려고 하는 한국에 의해서는 경제적 뒷받침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한국과 수교한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으나 한국의 대소 경제지원이 한소 수교의 주요동기는 아니며 세계평화와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나라와 정상관계를 발전시킨다」는 소련의 「신사고」외교정책에 의거,한국을 자주국가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잡지는 전후 한반도에서의 두개 한국이 발생하게 된 것이 두개 독일발생과 그 원인을 같이 하고 있다고 전제,소련이 서독과는 일찍부터 수교를 하고서도 오랫동안 북한은 우호국ㆍ동맹국으로,한국은 「미국의 괴뢰나라」로만 취급해 오다가 뒤늦게 한국과 수교한 사실을지적,스탈린∼흐루시초프∼브레즈네프로 이어지는 소련 수뇌부의 대 한반도정책이 잘못되었음을 비판하기도 했다. 또한 이 잡지는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장관이 한소 수교에 즈음,뉴욕에서 북한과 「기존의 선린ㆍ우의에 기초하여 관계를 발전시킬 예정」이라고 말한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평양쪽으로 무릎을 꿇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강조,소련이 북한에 대해 의연히 대처해야 한다는 점을 역설했다. 이 잡지는 이어 지난 9월 초 북한을 방문한 셰바르드나제가 소련 장관급 인사로서는 처음으로 김일성을 접견하지 못했다고 밝히고 셰바르드나제가 평양을 떠난 후 『김일성은 중국을 비밀리에 방문,심양에서 중국 최고지도자 등소평과 만나 그로부터 중국이 북한의 대외 정치노선에 대해 변함없이 지지한다는 공약을 받아냈다』고 김일성의 중국 방문설을 확인하면서 향후 북한이 소련에 대한 의지에서 탈피,중국과의 관계를 보다 공고히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편 이 잡지는 김일성이 중국 방문 직후 북한을 방문한 일본 자민당의 가네마루 신(금환신) 전부총리를 접견,오는 11월에 북 일수교문제 논의를 위한 회담을 갖기로 합의한 사실을 지적,북한이 일본과 관계개선을 함으로써 주한미군 철수를 촉진시키려 꾀하고 있다고 평가하고 극동지역에서 북한의 이같은 움직임은 「자기 자리」를 상실하지 않으려는 노력이라고 논평했다. 나아가 이 잡지는 김일성이 『48세가 된 자기 아들 김정일을 후계자로 공식 발표했다』고 강조,권력세습을 꼬집으면서 『자기 후계자에게 공고한 자리를 넘겨주려는 소망이 그로 하여금 한소 수교에 주는 대답으로 외교적 차원에서 새 보조를 취하도록 하는 것 같다』고 평가,김일성이 김정일로 이어지는 후계체제를 보다 공고히 하기 위해 한소 수교에 대응,대일 수교를 가속화시켜 나가고 있는 것으로 분석했다.
  • 스탈린,49년 김일성에 남침 승인/흐루시초프 회고록서 밝혀져

    ◎미의 강공 겁내 막판에 지원 포기 지난 71년 사망한 흐루시초프 전 소련 공산당서기장은 최근 발간된 그의 3번째 회고록에서 『김일성은 49년 소련을 방문했을때 완전히 남침계획을 준비,스탈린의 승인을 얻었다』고 밝혔다. 미 리틀브라운사가 발간한 흐루시초프의 3번째 회고록인 「글라스노스트테이프」에서 그는 『전쟁은 김일성동지의 주도로 시작 됐으며 스탈린과 그밖의 많은 사람들이 이를 지원했다』고 말하고 『남침의 최종 결정사실은 스탈린별장에서 열린 북한대표단을 위한 만찬석상에서 처음 공개됐다』고 밝혔다. 회고록에 따르면 김일성은 49년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남침을 위한 완벽한 계획서를 가지고 왔다. 그는 남한상황을 잘알고 있었으며 남한에 거대한 공산주의 세포망도 세워놓고 있었다. 김일성은 한국통일을 위해 행동을 개시할 날짜로 1950년 6월25일을 제안했으며 스탈린은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스탈린은 한국전쟁으로 북한군에 배치된 소련군사고문단이 포로가 될 지도 모르는 상황을 원치 않았고 소 고문단의 존재로 소련이 한국전쟁에 참여했다는 비난거리를 미국에 제공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국방장관인 불가닌에게 소 고문단의 철수를 명령했다. 이 때문에 김일성은 전쟁발발후 스스로 모든 부담을 감당할 수 밖에 없었으며 특히 전쟁의 마지막 단계였던 부산근처의 최후저지선에선 힘이 떨어질수 밖에 없었다. 김일성은 탱크 1개사단만 더 있었더라도 전쟁을 끝낼 수 있었지만 스탈린은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해 북한이 전쟁에서 패배한 한 원인이 된 것이다. 김일성은 그후 상황이 악화되자 『미국이 확실히 북한을 점령할 것』이라며 울면서 스탈린에게 지원을 호소했지만 스탈린은 이미 마음속으로 북한을 포기했다. 스탈린은 애당초 김일성을 지원했고 도움도 주었으나 상황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고 미국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스탈린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미군의 북한점령이 불가피하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즈음 중국이 50만명이라는 대병력으로 북한을 돕겠다고 제의하고 참전함으로써 한국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한 것이다.
  • 영ㆍ이란 복교합의/「악마의 시」 파문 이후 18개월만에

    【유엔본부 AP 연합 특약】 영국과 이란은 18개월전 샐먼 루시디의 「악마의 시」 사건으로 단절됐던 양국간의 외교관계를 재개하기로 합의했다고 27일 발표했다. 양국간의 외교정상화 결정은 허드 영국 외무장관과 벨라야티 이란 외무장관이 유엔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뉴욕에 있는동안 이루어졌다.
  • 「주체사상의 꿈」 깨지 못했다(평양의 변화 이렇게 본다:2)

    ◎“폐쇄의 화석” 비난 모면하려 표피적 개방 추구 지난 5월 북한은 최고인민회의 선거와 그에 따른 권력구조의 개편을 끝내고 일련의 정세변화에 대응하는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다. 만물지중 오직 홀로 고정불변을 유지하는 존재는 없다고 한 유물론은 누구보다도 혁명적 변화의 인위적 추구에 일생을 바쳐온 김일성이 더 확신하는 진리일 것이다. 스스로의 「주체사상」이란 이념적 환상을 버리지 않은 채 개방압력에 대역함이 없이 가능한 변화를 보이려는 것이다. 남이 보기에 김일성은 맹목적 옹고집이 아니라 봄이 오면 봄옷을 챙길 줄도 아는 위인이며 어쩌면 그 솜씨가 비범하다는 평가까지도 놓치지 않으려는 과욕의 주인공일지도 모른다. 지난번 서울에서의 남북한 총리회담만 하더라도 북한은 총한방 쏘지 않고 상대방으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것은 모두 얻어내기를 원했다. 마치 적진에 뛰어들어 한바탕 혁명투쟁이라도 벌이자는 태세로 무례하게도 거친 주장을 마구 펴놓고 상대방의 신문방송으로 하여금 이것을 전파케 하는 이익이라도 얻으려는 듯이 작태하고 있었다. 물론 반세기의 오랜 분단사에서 총리회담은 처음있는 일이니 만큼 누군들 그 의의를 평가하는데 인색했겠는가. 그러나 따지고 보면 북한의 본질은 변한 것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단적으로 옥중의 「동지」들을 만나야 한다고 마지막까지 버티지 않았는가. 이것은 스스로의 본질과 원리를 조금도 버리지 않은 데서 나오는 행동이다. 소위 주체사상의 제1의 특징으로 꼽는 일관성의 원칙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북한은 지금 가능한 변화의 자세를 취하면서 그것으로 본질의 불변성을 지키려고 한다. 필요하다면 왕당파와도 손을 잡아야 한다는 전통적 수법을 버리지 않고 있다. 말하자면 그 악수를 악마와의 향연이라고 속으로는 다짐하면서도 적에게 악수를 청하는 것이 공산당이다. 내달 16일부터 19일까지 평양에서 두번째 총리회담이 열리기로 일정까지 잡혀있다. 이 대좌가 악마와의 정치적 향연이 아니라 민족적 융합을 위한 만남이 되기 위해서는 북한은 주체사상의 낡은 환상부터 그들의 생활에서 떼내버려야 한다. 북한은 평양총리회담을 통해 자기네는 결코 폐쇄의 화석이 아니라는 평가를 얻기 위해 또는 서울보다는 평양이 더 평화의 세력이라는 점수를 따기 위해 어떤 대담한 민족적 용의라도 가지고 있는 듯이 행동할는지 모른다. 예컨대 미소는 다같이 한반도 분열의 책임이 있으니 이를 함께 배격하고 남북 융합으로 통일하자는 배미배소의 선언과 민족통일전선을 촉구할는지 모른다. 이렇게 하는 것은 곧 범민족의 통일전선을 유도함으로써 「역시 김일성이다」는 민족적 성가를 확보하자는 것이다. 이른바 주체사상의 일관성을 가지고 변화창출이 묘를 얻자는 것인지 모른다. 북한은 이미 김영남비망록을 통해 대소도전을 시작했다. 비망록 내용에는 『한소 수교는 전체 조선인민들,특히는 남조선 인민들의 통일의지를 막는 것으로 된다. 남조선 인민들 속에서 그 어느 때보다 통일열망이 고조되고 있는 시기에 소련이 남조선과 외교관계를 설정하면 그것은 통일에 대한 열망에 찬물을 끼얹고 어두운 그림자를 던지는 것으로 된다』고 했다. 이것은 「조선혁명의 주인은 조선인민이다」를 의식하고 하는 말이다. 따라서 이 주장의 논리는 남한인민들의 통일열망을 위해 북한은 배소투쟁을 불사하겠으니 모든 민족적 세력은 배미투쟁으로 협동하여 새로운 범민족 통일전선을 결성하자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북한은 과연 변했는가. 굳이 변하고 있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주체사상의 일관성」을 그대로 고수하면서 「변화를 모색하는 변화」를 보여주고 있는 중이라고 할 것이다. 북한은 60년대 초 모택동의 반 흐루시초프체제 투쟁에 가담하여 『소련은 일부 직장을 복구건설해준 대가로 국제시장가격보다 훨씬 비싼 값으로 설비와 강판을 비롯한 자재를 우리에게 주고 그 대신 우리에게서 수천t의 금덩어리와 다량의 고귀한 금속과 원료를 국제시장가격보다 훨씬 헐값으로 가져갔다』고 신랄히 대들었다(64년 9월7 「로동신문」). 시기적으로 보아 이 도전은 61년 9월 김일성 일인독재체제를 등장시키고 김일성에 의한 민족통일을 노골적으로 준비하는 단계에 들어간 것과 때를 같이하는 모험적인 것이었다.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그러나 김일성 일인체제 확립을 위해 소련파를 제거하고 반소노선을 택했던 60년대초의 사정과 오늘날 일련의 외압에 의한 김일성 체제의 붕괴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배소노선도 불사한다는 사정은 어쩐지 유사성이 있을 것도 같다. 만일 북한이 「범민족」의 배소노선으로 「역시 김일성이다」는 식의 들뜬 민족적 감정을 사로잡을 수 있다면 그 기세를 밀고 나아가겠다는 것이 범민족적 통일전선에 의한 통일투쟁이다. 북한의 최대 약점은 이름은 비록 인민공화국이지만 실제로는 전제적 군주국가라는 데 있다. 북한을 개방하라는 객관적 요청의 압력은 김일성을 전전긍긍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김일성 스스로도 폐쇄의 한계를 느끼고 인민에게 가능한 양보를 보이면서 통치해야 하는 시점에 이르렀다는 것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오늘날 북한의 사회문화 전반을 세심히 주목하는 사람들은 「어떤 변화가 오더라도 조국을 배반하지 말라」는 투의 경구를 느끼게 될 것이다. 이와 함께 체제수호의 정치사상교양사업에 열중하고 있는 광경도 알고 있을 것이다. 이것은 앞으로전개될 일련의 객관적 정세가 자기네에게 불리할 것을 내다보고 취하는 대책이다. 71년 11월 자유중국이 유엔회원국에서 추방되고 그 자리를 중공이 차지하게 될 것을 내다본 장개석총통은 「처변불경,장경자강」을 국민앞에 호소했다. 어떤 경우에도 놀라지 말고 남의 힘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든든해지라는 것이다. 김일성은 이점을 모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남북 스포츠교류와 대화를 거듭하면서 민족융합의 길이 트이기를 간절히 바랄 뿐 아니라 북한이 대일ㆍ대미 접근으로 고립을 풀고 정상적인 국제생활에 나서는 것을 환영한다. 그러자면 무엇보다도 스스로를 폐쇄와 고립으로 몰아넣는 「주체사상」의 이념적 환상부터 버려야 한다는 것을 권고하는 바이다.
  • 모스크바건물 수백채 붕괴위기(세계의 사회면)

    ◎지반 약한데다 건축방식 조잡… 관리도 허술/볼쇼이국장ㆍ레닌도서관등 포함/재원ㆍ전문인력 모자라 보수못해 모스크바시내에 산재해 있는 유서깊은 역사유적물들이 원래 지반이 약한데다 관리소홀로 대부분 붕괴될 위험에 놓여 있다. 이러한 사태는 건축물자체의 운명뿐 아니라 빨리 손을 쓰지 않을 경우 그안에 소장돼 있는 귀중한 예술품ㆍ장서들까지 손상될 위험을 안고있어 대책마련이 시급하다. 근착 미시사주간 「뉴스위크」는 붕괴 위기에 처한 모스크바의 건축물들을 소개하면서 현재 이런 건물들이 모스크바 시내에 수백개에 이른다고 적고 있다. 모스크바의 상징처럼 돼있는 붉은광장의 성바실리성당도 거의 무너지기 직전에 와있다. 최근 크렘린궁에 속한 건축물들의 안전검사를 마친 한 소련지질학자는 『붉은광장에서 탱크 퍼레이드가 한번만 더 벌어지면 바실리성당은 무너져내릴지도 모른다』는 진단을 내렸다. 이반대제의 종탑을 비롯한 여러 곳의 대성당들도 같은 진단을 받았다. 건축물들이 무더기로 이같은 지경에 이르게 된것은 원래 건축방식이 조잡한데다 건물의 지반이 대부분 늪지대ㆍ웅덩이ㆍ지하수층 등으로 약하기 때문인 것으로 지적됐다. 물론 보수를 제대로 하지 않은 탓도 크다. 모스크바시 당국은 2년전 건물보존위원회를 구성해서 우선적으로 3백2개의 대상 건물을 선정,보수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현재까지는 재원마련과 전문인력확보의 어려움 때문에 별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들에게 재정 및 기술지원을 요청하고 있다. 스탈린ㆍ흐루시초프시절에 무모하게 지은 대형 건축물들도 마찬가지 운명을 맞고 있다. 붉은광장 한쪽 구석에 있는 대형 레닌묘는 매년 4㎜씩 광장쪽이 내려앉고 있다. 한 전문가는 레닌묘가 물구덩이를 진흙으로 메워서 기술공사를 한 자리에다 웅장한 시멘트 구조물을 세웠으니 내려앉는 것은 당연하다고 지적한다. 크렘린궁 내에 있는 각료회의 건물도 붕괴위험에 처해있는데 주범은 스탈린이 이 건물 지하에다 만든 지하벙커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다. 1961년에는 흐루시초프의 지시로 크렘린궁내에 초현대식 대형 인민대회궁전이 건설됐는데 이 건물의 기초공사를 하면서 지하를 무리하게 파내 주변의 유서깊은 대성당들이 피해를 보았다. 소련지도자와 소련을 방문하는 외국정상들의 회담장으로 자주 이용되는 19세기 건축물 크렘린 대궁전도 인민대회궁전의 피해자이다. 우스펜스키성당은 지하수로 지반이 약해져 내려앉는 케이스이다. 크렘린궁 가까이 있는 레닌도서관 건물은 옆에 보로비츠키 지하철역이 들어서면서 지반이 내려앉아 붕괴위기를 맞고 있다. 레닌도서관에는 역사적인 기록문서와 대문호의 저작물을 비롯,각종 국보급 장서들이 소장돼있다. 당국에서는 우선 급한대로 장서 3천만권을 옮길 장소를 물색중이나 서둘러야 할 형편이다. 시 중심가에 있는 말리극장은 시멘트 기초공사가 제대로 안돼 현재 철재 버팀목으로 건물이 유지되고 있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볼쇼이극장은 지반에 지하수가 스며들어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건물 오른쪽이 내려앉기 직전에 와 있다. 구모스크바는 피터대제때 성외곽을 둘러싼 해자를 메워 그 위에 건설됐는데 이후 지하수가 차오르면서 해자를 메운 모래와 자갈이 씻겨내려가 지반전체가 내려앉고 있다는 설명이다. 1872년에 세워진 폴리테크니칼 박물관은 피터대제의 해자위에 세워진 대표적인 건물로 급속도로 건물이 내려앉고 있다. 트레티야코프미술관,제르진스키광장의 구KGB청사도 모두 같은 경우이다. 시 당국자들은 요즘 이런 넋두리를 한다. 『마르크시즘은 무너졌다.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다음은 모스크바의 건물들이 무너질 차례이다』
  • 소 공산당,대 군부 입김 아직도 막강/페레스트로이카 이후의 통제실

    태◎정치장교 8만명… 인사ㆍ복지문제도 간여/“군 체질개선” 등 일부선 개혁도입 움직임 레닌그라드와 핀란드 국경사이에 있는 공산청년동맹의 훈련기지에는 『당의 요구대로,레닌의 가르침대로 봉사하자』라고 쓴 포스터가 아직도 붙어있다. 소련에서 5개월전 야당이 합법화된 이후 군에 대한 공산당의 통제가 완화되기 시작했으나 아직은 시작에 불과하다. 정치장교인 레오니드 아크수이타대령은 『현 단계에서 군은 다당제가 먹혀들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4백만의 소련군 가운데 약 8만명에 달하는 정치장교들은 지난 수십년간 군에서 당의 명령을 수행해 왔다. 정치장교 출신 가운데 이름난 인물로는 니키타 흐루시초프와 레오니드 브레즈네프가 있다. 한 정치장교는 지난 3월 공산당의 권력독점을 보장하는 헌법조항이 폐기된 이후 공산당이 공식적으로는 군인사문제에 대한 통제를 자제하고 있으나 그 영향력은 여전히 줄지 않고 있다고 시인했다. 그러나 변화는 분명히 일어나고 있으며 정치장교들은 심리학과 홍보와 같은 분야에서 새로운 역할을찾고 있다. 아직도 모든 부대에는 공산당 위원회가 그대로 존재하고 있으며 이 위원회가 전투훈련에서부터 장교숙소문제등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제에 관여하고 있다고 한다. 지난 7월에 열린 공산당대회에서 개혁주의자들이 이 위원회의 철페를 시도했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외에도 각 부대의 부사령관은 정치장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당내 개혁주의자들은 이 자리도 없애려고 시도했으나 결국 정치장교들이 정치 교육보다는 군의 사기ㆍ규율및 여가와 같은 보다 실질적인 문제를 전담하도록 한다는 선에서 주저앉았다. 소련지상군 사령관이자 공산당 고위간부인 발렌틴 발겐니코프 장군에게도 정치장교가 배속돼 있는 실정이다. 폴란드 국경지대에 있는 한 공수부대 장교의 부인은 『남편이 공산당원이 아니면 부대사령관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군에 대한 공산당의 통제는 워낙 광범위한 분야에 미치고 있기 때문에 다당제 민주주의의 이점이 군에 도입되기까지는 수년간의 기간이 걸리게 될 것이라고 취재중에 만난 소련장교들과 사병들은 털어놓았다. 소련 국방부 홍보국의 이반 스크릴니크는 『나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 모두가 똑같은 가치관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3개 공화국의 4개 군사기지에서 만났던 소련군 병사들은 소련군에 비공산 정당이 생겨날 가능성을 한마디로 일축했다. 레닌그라드 지역군 부사령관 블라디슬라프 리소프스키장군은 『98%의 하사관들과 장교들이 공산당원이기 때문에 10년안에 군부내의 비공산 정당결성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모든 정치장교들이 공산주의자들이기 때문에 정치장교들의 역할을 당을 대표하는 것으로부터 정부를 대표하는 것으로 바꾼다 해도 당장에 별다른 차이는 생겨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레닌그라드 기지의 장치장교 파벨 일라리오노프대령은 『사람들이 3년전과는 다르며 정치 논쟁의 길도 열려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 7월에 열린 당대회가 정치장교들에 대한 당노선교육을 중지하고 그들의 임무를 일반적인 병사들의 복지문제에만 전념시키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정치장교들의 임무가 앞으로 더 크게 변화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군관계자들은 현재 많은 정치장교들이 심리학과 사회학 학위를 받기 위해 대학에 다니고 있고 또 일부는 공보장교로서 새로운 임무를 맡아 일하고 있다고 전했다.
  • 이란,영과 복교시사

    【니코시아 AP 로이터 연합】 하셰미 라프산자니 이란대통령은 4일 이란은 샐먼 루시디의 소설 「악마의 시」를 둘러싼 외교분쟁으로 단절된 영국과의 외교관계를 회복할 것이라고 말했다. 니코시아에서 수신된 이란의 IRNA통신은 라프산자니대통령이 이날 개최된 국가안보회의에서 외무부에 영국과의 외교관계를 회복시키도록 지시했다고 보도했다. 양국은 이 사건으로 지난해 3월 단교했었다.
  • 스페인 유색인이민 몰려와 “골머리”(세계의 사회면)

    ◎불법체류자등 외국인 80만명/국민들,“범죄우려”적대감 팽배/영ㆍ불선 「문호개방」압력… 북아프리카인등 이주 계속 늘듯 「출국이민의 왕국」스페인이 최근들어 점증하는 입국이민자 처리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과거 5백여년동안 라틴아메리카와 북아프리카 등 신대륙과 북구로 수백만명의 이민을 내보냈으면서도 아랍인과 유태인 등 외국인들의 입국을 철저히 봉쇄해오던 스페인의 이민정책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지난 86년 유럽공동체(EC)에 가입하면서부터. 경제성장에 따른 인력소요로 제3세계위주의 외국인들이 속속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현재 4천만 스페인 인구중 외국인은 2%수준인 80만명 정도밖에 안되지만 이같은 외국인 증가현상에 대한 스페인 국민들의 불만은 대단하다. 아랍인 아프리카인 라틴아메리카인 등 외국인들은 각종 범죄증가의 원인제공자로 인식되고 있고 유색인종에 대한 경찰의 가혹행위도 늘어만 가고 있다. 지난 6월에는 스페인에 정치적 망명을 요청한 나이지리아인 8명이 시내 거리에서 잠자다 10명의 경찰관들로부터뭇매를 맞았는가하면 수십명의 모로코인들은 경찰의 불법 이민자에 대한 난폭한 심야 기습단속을 피해 아예 공원에서 잠을 자고 있다. 피부색깔 때문에 취업을 거절당한 예는 부지기수. 한 모로코인은 『신문에 밀입국자 얘기만 나오면 경찰이 우리를 찾아와 못살게 군다』며 『세상 어느 나라에서 이런 탄압이 정당화될 수 있느냐』고 분개했다. 이에 대해 사회당정부는 스페인이 이민에 따른 인종차별주의 및 외국인 혐오증이 극에 달한 프랑스등의 전철을 밟지는 않을 것이라고 공언하면서 소수민족들에게 인내를 요구하고 있다. 유색인종 입국자에 대한 적대감이 날로 팽배해가자 최근들어 스페인에선 30만명에 달하는 불법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보호운동이 교회 및 노동단체를 중심으로 일고 있다. 지난 5월에는 인권단체들이 장기불법체류자에 대한 사면을 내용으로 하는 외국인법 개정을 요구하며 마드리드 시내에서 가두행진을 벌이기도 했다. 밀입국한지 얼마 안되는 외국인과 수년동안 스페인에서 취업해온 외국인은 구별돼야 하며 외국인법 자체는진보적이지만 일방적인 적용이 문제라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스페인내의 인종차별주의는 과거 흑인이 없었을 때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이제 세태변화가 이뤄진 상황에서도 생겨나서는 안되며 그렇지 않을 경우 해외에 나가있는 무수한 동포들이 현지에서 인종차별을 당할 때 무슨말을 할 수 있겠느냐고 뜻있는 이들은 반문한다. 스페인의 실업률이 15%나 됨에도 불구,외국인들은 스페인 국민들이 기대하는 직종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스페인 정부관계자들도 잘 알고 있다. 안달루시아 및 카탈로니아 유전ㆍ아스투리아탄광ㆍ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의 건축공사장등 중노동이 필요한 곳에선 외국인들이 법정 최저 임금이하의 저임금에 만족하며 일하고 있다. 스페인은 현재 EC통합을 앞두고 보다 엄격한 이민정책을 실시하고 있는 프랑스와 영국으로부터 북아프리카 및 라틴아메리카인 입국자들에 대해 비자발급제를 실시하도록 압력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이민을 엄격히 통제해 나간다 하더라도 스페인과 북아프리카와의 근접성,라틴아메리카와의 문화적유대관계 때문에 입국이민자수는 줄어들지 않으리란 것이 공통된 전망이다.
  • 외언내언

    「스탈린이라면 당장에 그를 총살해버렸을 것이다. 흐루시초프였다면 연금생활자로 만들어 시골 별장에 유폐했을 것이고 브레즈네프였다면 어딘가 먼 나라의 대사로 보내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웠을 것이다. 그러나 고르바초프는 그를 자신의 주변에 둘 생각인 모양이다. 소련개혁의 향방은 이 두 사람의 기묘한 줄다리기에 따라 좌우될 것이 틀림없다」 ◆지난 6월초 소련공산당 급진개혁의 「민주강령파」 지도자 옐친이 러시아공화국 최고회의의장에 선출됐을 때 미 시사주간지 뉴스위크가 옐친을 두고 한 말이다. 방미 길의 캐나다에서 소식을 들은 고르바초프는 『대결의 양상이 보여 걱정이다. 그가 정치적 장난을 하려 든다면 우리는 아주 곤란한 시기를 맡게 될 것』이라는 반응을 보였었다. ◆그가 12일 마침내 공산당 탈당의 폭탄선언을 했다. 고르바초프와의 타협과 협력을 비치기도 하고 갑자기 그를 공격하기도 하는등 종잡기 힘든 태도를 보여온 그가 마침내 정치적 장난을 치기 시작한 것인지 모른다. 이번 공산당대회에서 고르바초프가 수적 우세의 보수파에 밀려 당대회를 보수파가 원하는 방향의 타협으로 마무리해가는 데 대한 반발이요 견제의도임에 틀림없다. ◆고르바초프의 개혁을 지원하는 효과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동유럽에서와 같은 공산당의 완전 몰락을 원하는 것이 옐친의 「민주강령파」들이다. 개혁의 가속화를 위한 것이라 해도 당장의 소 공산당 몰락은 위험천만의 모험일 것이다. 소련은 동유럽과 다르고 너무 크고 복잡한 나라다. 서방세계도 점진적인 고르바초프 방식을 동정하는 눈치다. ◆작년에 13만6천6백명,금년 1·4분기만 8만2천여명이 탈당했지만 아직도 1천9백여만 당원의 소 공산당이다. 민주강령파는 50만 당원의 사회민주당 창당을 표방하고 있으나 대중기반이 약하다. 지난 2월 공산당 1당독재 포기 후 소련엔 이미 60여개 군소정당이 생겨났으나 공산당과는 상대가 안되는 잡당들이란 평이다. 옐친과 민주강령파의 탈당이 공산당을 상대할 수 있는 강력 야당을 탄생시킬 것인지 주목거리다.
  • 닉슨기념관 “개관 준비 끝”(세계의 사회면)

    ◎출생지 가주에 1만평 규모/전시관 등 꾸며 19일 문열어/생가 복원,집념어린 정치역정 생동감 있게 비디오로 재현도 워터게이트 스캔들의 상처 속에 대통령직을 도중하차한 리처드 닉슨 전 미국대통령의 기념관이 개관을 약 2주 남짓 앞두고 요즘 마지막 손질이 한창이다. 대통령직을 도중 하차한 유일한 제37대 미국대통령인 닉슨. 그는 이 기념관으로 불명예를 씻어보려는 듯 마지막 열정을 쏟고 있다. 닉슨기념관이 세워지는 곳은 그의 출생지인 캘리포니아주 오렌지 카운티의 요바린다시. 닉슨은 1913년 이곳에서 태어나 9살까지 살다가 이웃 위티어로 이사했다. 앞으로 관광명소의 하나가 될 이 닉슨기념관은 10만 한국교포가 모여사는 캘리포니아내 제2의 코리아타운에서 불과 10여분 거리에 위치해 있다. 약 9에이커(1만1천여평)의 대지위에 2천만달러의 비용을 들여 세워지는 닉슨기념관은 그의 생애를 보여주는 기록전시관과 도서관으로 이뤄진다. 특히 그의 성장과정을 엄격한 고증을 거쳐 복원한 생가에서 볼 수 있도록 설계돼 있다. 기념관이 개관되는 오는 19일 요바린다시는 몰려드는 관광객(약 2만5천명으로 추산)으로 일대 혼잡을 이룰 것으로 예상,그 대책수립에 부심하고 있다. 특히 이날 개관기념식에서는 조지 부시 현 대통령을 비롯,제럴드 포드,로널드 레이건,장본인인 닉슨 등 4명의 전ㆍ현직 대통령들이 만나게 돼있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시 관계자들은 이날의 큰 교통혼잡에 대비,일대의 주요 거리를 차단해 아예 주차장으로 사용하면서 셔틀버스로 관람객들을 수송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고인이 된 닉슨 전 대통령의 부모가 되살아난다면 대통령이 된 아들 어린 리처드를 키우던 바로 그 옛집으로 영낙없이 착각할 만큼 그의 생가가 옛모습 그대로 복원됐다는 게 그의 계수 클라라 닉슨 여사(70)의 말이다. 이 생가에는 닉슨이 태어났던 바로 그 침대와 그의 형제들과 함께 사용했던 침대들,소년시절의 그의 손때가 묻은 피아노ㆍ책상ㆍ등 높은 의자 등이 그대로 진열된다. 그의 방 침대 머리맡에는 그의 어머니가 걸어주었던 「엄마의 기도」라는 시구가 액자에 담겨 결린다. 벽에 새겨진 닉슨의 동상을 보며 들어가도록 설계된 이 기념관에는 그가 5년반동안 대통령 재임시에 받은 약 3만여점의 각종 선물도 전시된다. 그의 젊은 정치가 시절을 보여주는 전시품 가운데서는 그가 미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돼 워싱턴의 정가로 출정케하는데 기여한 49년도형 포드사의 머큐리 승용차가 눈길을 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밑에서의 부통령,케네디 대통령과의 대결에서 패배,특히 케네디 대통령과의 네차례에 걸친 정치대토론회의 비디오 테이프가 기념관 내에 설치된 TV세트를 통해 방영되도록 설계돼 있어 그의 집념어린 정치역정을 생동감 있게 재현해 주고 있다. 이 기념관 전시품중의 「하이라이트」는 닉슨이 가장 좋아하는 10인의 세계 정치지도자의 방. 실물크기의 석고상에 그린색 수지가 입혀진 이 「지도자들의 방」에는 윈스턴 처칠,샤를 드골,니키타 흐루시초프,레오니드 브레즈네프 등 내노라 하는 10명의 세계 지도자들이 한 칵테일 파티장에서 담소하는 실물크기의 모습으로 꾸며져 있다. 이 기념관의 끝 출구 근처에서는 닉슨을 백악관에서 물러나게 한 소위 워터게이트사건의 육성이 담긴 테이프가 관람객들에게 직접 당시의 상황을 들려주고 있어 역시 미국다운 일면을 보여준다. 이 밖에도 이 닉슨기념관에는 대통령 재직시의 4천4백만 페이지의 각종 기록들이 전시된다. 집념어린 정치역정 못지 않게 올해 77세의 닉슨은 대통령 도중하차 후에도 8권의 베스트 셀러를 저술하는 저력을 보이면서 「외교전문가」로서 국가에 기여하려 노력하고 있다.
  • 남로당총책 박갑동씨의 「체험적 6ㆍ25론」

    ◎“공산주의로 잘 산다는건 꿈” 뒤늦게 자각/휴전 임박해서 박헌영과 함께 연금생활/후퇴길에 평양보고 “거지공화국” 실망 6ㆍ25 동란당시 38선 이남지역 남로당 지하총책이던 박갑동씨(72)가 27일 한국전쟁기념사업회(회장 이병형)주최로 하얏트호텔에서 열린 6ㆍ25 40주년 국제학술대회에서 6ㆍ25체험담을 발표했다. 박씨의 체험담 요지는 다음과 같다. 50넌 6월 25일은 일요일이어서 나는 남로당 비밀아지트에서 쉬고 있었다. 아지트를 경비하는 사람이 외출후에 돌아와 전쟁이 터져서 피난민들이 미아리고개로 넘어오고 있다고 보고했다. 나는 순간 『김일성 이놈이 죽일놈』이라고 말하고 전신에 힘이 모두 빠져나갔다. 28일 새벽에 북한군이 탱크를 몰고 서울시내에 들어왔다. 나는 서대문 교도소에 갇혀있는 동지들을 구하기위해 나서며 비서에게 지하당원은 소공동 조선정판사빌딩에 모이도록 지시했다. 교도소에 갔다가 정판사빌딩에 가보니 비서 혼자 서있으면서 이승엽이 평양에서 전권을 가지고 서울시청에 와 당의 명령을 듣지않는 박갑동을 총살시키겠다고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어이가 없어 이승엽을 만나러 서울시청에 가서 정태식을 만났다. 그는 나를 보자 이가 매우 화를 내고 있어 주위사람들이 말리고 있으니 잠깐동안 몸을 피하고 있는 것이 좋겠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이때부터 김일성과 이승엽에게 밉게 보여 지위가 점점 낮아져갔다. 나는 복간된 해방일보 논설위원으로 명맥을 유지해가다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하자 북으로 쫓기게 되었다. 유엔군이 북쪽에 가기도 전에 북쪽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인민위원회를 습격하고 약탈하고 있었다. 10월이 되자 북쪽은 상당히 추웠는데 대부분의 북한사람들이 얇은 여름옷을 입고 이불도 못덮고 생활하고 있었다. 나는 『이놈의 나라가 인민공화국이라고 선전하고 있으나 거지공화국이 아니면 간부공화국』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김일성이 5년동안 사회주의를 건설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사회주의의 실상인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평양에 도착해서 소위 인민시장에 가보았다. 국영상점 이외에 협동조합상점과 개인상점도 있었는데 생필품이 부족했다. 고무신점에 가보니 여자고무신이 두 종류 있었는데 하나는 흰색이고 하나는 회색인데 주인이 흰색은 남한제품이라며 품질이 아주 좋다고 말했다. 포목점에 가보니 옥양목은 짜지 못하는지 조악한 광목밖에 없었다. 국영정육점에 가보니 점원이 세수도 하지 않은 얼굴과 손으로 고기를 자르고 있었다. 개인정육점에 가니 20세가량되는 처녀아이가 쇠고기1㎏을 정확히 한번에 잘라주는 것을 보고 국영상점과는 경쟁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개인상점은 매일 매일 무거운 과세를 함으로써 국영상점을 우대했다. 국영상점 점원은 공무원이기때문에 손님에게 친절할 필요도 없고 많이 판다고 월급이 많아지는 것도 아니니 성의가 전혀없었다. 사회주의 경제는 상품생산과 유통시장이 존재하는 경제가 아니었다. 상품이란 소비자가 소중한 돈을 주고 사고싶은 물품을 사는 상행위가 기본이어야 하는데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욕망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최저 최소의 생필품을 국가가 배급을 해주는것이 현실이었다. 휴전이 가까워지자 북한은 남로당계 인사를 출당하는 대대적인 숙청을 해 나는 박헌영과 함께 체포되어 56년 3월까지 감금생활을 했다. 56년 2월 소련공산당 20차대회에서 흐루시초프가 스탈린비판을 한뒤 석방되어 북경을 경유,공산권에서 탈출했다. 57년에 북경에 갔다. 중국은 사회주의도 자유주의도 아닌 대국주의ㆍ제국주의였다. 조선인민을 자기들이 도와서 미제국주의를 타도했다는 자부심으로 전국이 덮여있었다. 유엔군이 중국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았으나 국경을 지키기 위해 출병했다는 것이다. 세계강대국이 모두 그런 생각을 한다면 지구상에는 하루도 전쟁이 그칠날이 없겠다는 생각과 함께 약소민족의 서러움과 비애를 느꼈다. 모택동의 소수민족정책이라는 것도 자세히 보면 일본제국주의가 만주국을 통치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었다. 소련은 명목적이나마 공화국을 수립해주고 연방으로 묶어 통치하지만 중국은 소수민족의 공화국은 금지하고 직접 통치하고 있었다. 50년대 후반의 중국 공산주의는 정말로 「독점」「독선」「배신」의 연속이었다. 나는 공산주의가고상한 도덕이며 인도주의라고 믿어왔는데 실제로 공산주의가 실천되는 현장을 보니 정치적으로는 중세기 암흑세계이고 경제적으로는 기술이 낙후하여 자본주의 생산성에 도저히 따라 갈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일본제국주의 식민지하에서 독립을 해서 경제를 급속히 발전시키기위해 공산주의자가 되었는데 공산주의 국가 북한과 중국에 가서 앞날이 없는 공산주의 사회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다. 내자신이 부끄러워서 일본에 망명하여 성명을 바꾸고 일개 노동자로 일평생을 살아가려고 했다. 그리하여 나는 일본에 망명하여 오키나와 사람이라고 속이고 고무공장 노동자를 몇해 하면서 숨어서 살아왔다. 당시 오키나와는 미군점령하에 있어 일본경찰이 본적을 조회할 수 없었다. 지금 여러분 앞에 나와있는 것이 정말 부끄럽다. 선조가 남겨주신 유산으로 일본유학까지 해서 당시로서는 조선최고의 인텔리의 한사람이 그 능력을 옳게 발휘하지 못한 것을 뼈저리게 뉘우치는 바이다.
  • 북한 고위관리 지낸 재소동포의 「6ㆍ25증언」

    ◎“김일성,6ㆍ25새벽 내각 소집… 남침비준 강요”/4월초 군관학교간부 전선에 미리 배치/전쟁 한달전 강동학원서 통치요원 육성/폐쇄적인 북한체제는 「수용소적 사회주의」로 불러야 한때 북한의 권력 핵심에서 활약하다가 소련으로 망명했던 재소교포 18명이 분단이후 처음으로 조국을 찾아왔다. 이들의 대부분은 6ㆍ25전쟁 전후 북한의 고위직에 있었으나 50년대말부터 60년대초까지 김일성 1인지배체제에 반발,소련으로 망명했던 「역사의 증인」들이다. 대부분이 70을 넘긴 고령인 이들은 22일 MBC시사토론에 참석,북한정권의 성립과 6ㆍ25전쟁의 발발 그리고 김일성 1인통치체제의 구축과정 등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이날 토론에 나온 사람은 강상호(80ㆍ전 북한 내무성차관) 장학봉(71ㆍ전 북한 군관학교부교장) 박병률(82ㆍ전 북한 강동정치학원원장) 송진파(76ㆍ전 북한 문화성국장) 정상진(73ㆍ전 북한 문화성차관)등 5명이다. ­6ㆍ25당시 그리고 소련으로 망명하기전까지 북한에서 어떤 일을 했는가. ▲박병률=47년 12월부터 50년 6월25일까지 남로당원 양성기관이었던 강동정치학원 원장으로 일했다. 당시 훈련시킨 제자는 3천명에 이르는데 지리산 빨치산대장이었던 이현상과 제주도 폭동주역인 김달삼도 포함돼 있다. ▲강상호=김일성과 마찬가지로 해방후 소련에서 북한으로 돌아왔다. 6ㆍ25당시 내무성 차관이었는데 북한의 내무성은 경찰권 탐정권등의 권한을 행사했다. 나는 여러명의 차관중 당정치교양사업ㆍ문화사업을 맡았으며 김일성을 도와 북한정권수립에 참여했다. 당시 내무성장관은 현사법상인 방학세였다. ○「김정권」수립에 참여 ▲정상진=6ㆍ25직전 김일성종합대학에서 러시아문학을 강의했다. 해방전에는 소련에 있었으며 45년 3월에서 8월까지 소련해병대원으로 5개월간 훈련을 받고 소련의 대일전쟁에도 참여했다. ▲장학봉=군관학교부교장으로 군장교양성교육사업을 맡았으며 6ㆍ25전쟁이 일어나자 당시 상좌(우리의 준장)계급장을 달고 전투에 참가했다. 1988년까지 남한의 소식을 거의 듣지 못했는데 포항제철,울산자동차공장 등을 둘러보니,경제ㆍ문화적으로 세계에 내세울 수 있는조국임을 실감,자부심을 느끼게 되었다. ○콘크리트장벽 없어 ▲송진파=북한의 문화성국장,잡지 「새조선」의 주필을 맡았고 망명후에는 소련에서 발행되고 있는 한글신문 「레닌기치」의 주필을 맡았으며 현재는 은퇴했다. ­휴전선도 돌아보았을텐데 콘크리트장벽을 보았는가. ▲정상진=북한에서 선전하는 콘크리트장벽은 만리장성을 연상시키는데 대전차장벽은 있었으나 다른 것은 없었다. 그러나 콘크리트장벽이 있고 없고는 중요하지 않다. 베를린장벽과 같은 물리적 장벽을 무너뜨리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심리적 장벽」이 문제이다. 몇년전만해도 한국에 대해 잘 몰랐으나 고르바초프등장이후 소련언론이 진실을 보도하기 시작해 정세를 바로 알게됐다. ­올해는 6ㆍ25발발 40주년이 된다. 6ㆍ25에 대한 연구도 많고 주장도 엇갈리는데 당시 내각에 참여한 사람으로 진상을 말해 달라. ▲강상호=그때 나는 병으로 평양중앙병원에 입원해있었으며 6월25일은 퇴원하는 날이었다. 그런데 중앙당비서가 그날 새벽전화를 걸어와 퇴원즉시 내각에 참석하라는 연락이 있었다. 내각회의에는 국가보위상인 최용건만 빠지고 전원이 참석했다. 회의에서 김일성은 『지금부터 2∼3시간전 38선 전역에서 남조선괴뢰군이 북침을 해왔다. 나는 최고사령관으로 즉시 반격을 명했다. 전쟁과 평화에 관한 사항은 내각의 비준이 있어야 하니 이를 비준해 달라』고 말했다. 김일성의 이 제안은 토론없이 1백%찬성으로 통과했다. 그리고 나에게는 지금 곧 원산행차에 올라 강원도당회의를 열고 전쟁에 대비한 과업을 수행하라고 지시했다. 이어 서울이 해방됐다는 소식과 함께 3ㆍ8선이 남의 강원도를 책임지라는 지시가 있어 춘천으로 출발했다. 이때 나는 북침이 아닌 남침이라는 생각을 처음 갖게 됐다. 그 이유는 첫째 3ㆍ8선을 넘어 산굽이를 돌면서 국군포대를 관찰해보니 국군의 포와 포탄이 흩어져 있었는데 탄피는 몇개 없었다. 북침을 했다면 숱한 사격의 흔적이,공격의 증거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둘째 전선지대의 이북 농촌에는 파괴된 집도 없었으며 농민들은 들판에서 김을 매고 부녀자들은 길거리를 오가고 있었는데 국군의 포격이 있었다면 그럴수 있겠는가. 셋째 미국무장관 덜레스가 이승만에게 북침을 명령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미국이 왜 하나의 사단도 남겨놓지 않고 군대를 철수했으며 딘소장이 포로가 될 정도로 전쟁초반에 패퇴했는가 하는 것이었다. ▲박병률=김일성이 도발한 것이라는 구체적 자료를 갖고 있지 못했지만 감지할 수는 있었다. 남한에서 월북한 사람들이 전쟁발발 1개월전부터 강동학원장인 내게 보내져 집중 훈련을 받았다. 또 전쟁이 발발하기 몇시간전에 서울 함락후 서울시 인민위원회위원장을 맡았던 이승엽이 『자기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면서 강동학원을 떠났다. ○스탈린이 전쟁 묵인 ▲장학봉=당시 군관학교에는 인민군지도자 25명의 그룹반이 있었는데 50년 4월에 이미 이 그룹반이 해산돼 소속원들 모두가 전선으로 배치됐다. 50년 8월까지 북한의 신문 라디오 등 모든 선전기관은 남조선이 북침을 했고,북한이 이에 반격을 가했다는 선전을 거듭했고 나 또한 전선에 나가지않아 이를 그대로 믿었었다. 8월초 전선에 투입됐을 때는 정의의 전쟁에 참가한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싸웠다. 그러나 흐루시초프의 회고록이 나오면서 진실이 밝혀지게 됐다. 이 회고록에 따르면 김일성은 50년이전에 스탈린에게 수차례 전화를 걸어 남조선해방과 전조선의 자유를 위해 남침을 호소했으나 스탈린은 남조선침입의 대가로 미국이 참전하면 다음은 소련이 이에 대응해야 하는데 준비가 안됐다며 이를 반대했다. 그후 6ㆍ25발발 5∼6일을 앞두고 김일성은 이 문제를 다시 스탈린에게 제기,스탈린은 「좋다 나쁘다」는 의사를 표시하지 않았으며 묵인했다. 이와 관련,흐루시초프는 내가 스탈린의 입장이었더라도 작은 나라가 통일을 하겠다는데 대해 어떠한 승인도 지시도 않았을 것이라고 술회했다. 전쟁이틀후 열린 유엔안보이사회에서 소련대표가 유엔군의 참전결정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고 퇴장한 것은 내막을 뻔히 아는 스탈린의 고육지책이었다고 볼 수 있다. ­북한정권 수립때의 실정은 어떠했는가. ▲강상호=김일성일파가 만주에서 유격활동중 일본군의 토벌강화로 상황이 어려워지자 중국공산당이 소련측에 이들의 보호를 제의했다. 김일성부대는 소련정찰여단으로 편입돼 아무르강유역의 비밀지역에 있었고 해방후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원산으로 귀국했다. 나는 소련 제25군 정치부 지도원이어서 김일성을 해방전에는 본 적 없었는데 해방후 소련군 상위(대위)로 귀국한 김일성을 본적이 있다. ­이 자리에는 김일성 1인독재체제를 구축하는데 도움을 주신분들이 많은데(일동 웃음) 지금 북한 체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정상진=김일성은 북한에 들어오면서부터 정권에 욕심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개인숭배주의자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1956년 소련 공산당 20차전당대회에서 스탈린격하운동이 벌어졌다. 이 대회에 북한 노동당대표로 참석한 최용건이 돌아와 귀국보고를 했을 때 김일성은 우리 당에는 과거 박헌영이란 개인숭배자가 있었지만 지금은 개인숭배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뒤 연안파 윤공흠 이필규 등이 반김일성 움직임을 보였는데 이들은 곧 숙청됐다. 이후 김일성은 「이단」숙청을 결심,대대적인숙청작업에 나섰고 1인지배체제를 구축했다. 6ㆍ25당시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군고위간부ㆍ당간부 등이 모두 숙청당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도 반당분자로 몰렸고 이것이 우리가 소련으로 망명하게 된 이유다. ▲박병률=김일성은 북한체제를 「주체주의적 사회주의」라고 주장하지만 나는 북한체제를 「수용소적 사회주의」라고 부르고 싶다. ○남측서 통일 주도를 ­북한에 있을때 남로당출신들을 많이 만났을텐데…. ▲정상진=당시 나는 문화성차관 및 문학예술총동맹 부위원장이어서 홍명희 이태준 김남천 임화 최승희 등 많은 남쪽예술인들과 알고 지냈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이 비참한 운명을 맞았다. 작곡가 김순남선생은 전쟁전 박헌영외상 취임 축하파티에서 피아노를 쳤는데 이것이 죄가 됐다. 김순남선생이 궁지에 몰렸을 때 나를 찾아와서 「이제 어떻게 해야되느냐」라고 탄식하면서 춘향전을 가극으로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이것이 마지막 만남이었고 그 분은 모든 창작활동이 금지된 채 숙청되고 말았다. ­마직막으로 남북통일을 위해 앞으로 어떤 일을 하겠는가. ▲장학봉=화해의 물결은 그 누구도 억제할 수 없다. ▲강상호=오늘날에는 무력으로 누구를 굴복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국이 세계적 여론을 일으켜 북한측에 평화통일의 압력을 가해야 한다. 남북통일을 하루라도 지연시키는 것은 정치지도자들의 죄악이며 우리도 이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 노대통령 방미외교 3박4일 취재비화

    ◎“정상회담장 극비 예약자는 고르비”/소 겉으론 “덤덤” 안으론 “치밀한 준비”/라이사도 한인 점포서 “계산된 쇼핑”/성과 없었으면 두 대통령 기념촬영 못했을 듯 노태우대통령의 지난 3박4일간에 걸친 샌프란시스코ㆍ워싱턴 일정은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고 전후 냉전체제의 마지막 유산인 분단 한반도를 어느날 갑자기 화해와 협력의 세계물결의 중심부에 실어 놓았다. ○끝난 뒤에 겨우 촬영 노대통령은 한미 정상회담이 끝난 뒤 주미대사관저에서 수행기자단,워싱턴주재 한국특파원들과 오찬을 함께 하면서 『우리가 세계변화의 중심에서 세계의 변화를 만들고 있다』 『힘이 없어 강대국의 분단을 감수해야 했던 과거는 가고 이제 우리 스스로의 운명을 우리가 개척하고 결정하는 시대가 왔으며 그 누구도 우리의 가는 길을 막지 못할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지난 4일 샌프란시스코 페어몬트호텔 신관 23층 스위트룸에서 있은 노­고르비 대화는 아직도 많은 비화를 간직하고 있다. 정상간의 만남은 물론 모든 국가간의 회담은 외교관행상 포토세션(기념촬영의 의전절차)은 언제나 회담직전에 이뤄진다. 그러나 노­고르비 대좌의 기념촬영은 회담이 끝난뒤 가까스로 이뤄졌다. 한소 양측의 공식 기록사진사 1명씩 2명이 회담시작 전부터 회담장 바깥 다른 방에서 대기하고 있었으나 소련측 경호원들은 회담이 시작되어도 촬영을 허용치 않았다. 1시간여에 걸친 회담이 끝나자 그들은 소련측 사진사만 들여보냈다. 이에 우리측 배석자 한 사람이 『우리 사진사는 왜 안 들어 오느냐』고 재촉하자 우리측 촬영사를 들여보내 역사적인 장면을 찍을 수 있었다. 우리 사진사가 두 대통령에게 악수하는 포즈를 취해달라고 하자 노대통령은 고르비에게 손을 내밀었고 고르비도 미소를 지었으며 노대통령은 다시 왼손으로 고르비의 허리를 감싸는 듯한 포즈를 취했다. 소련측은 두 정상의 만남을 사진기록으로 남기는 데 반대했으나 우리측은 「사진 안 찍으면 회담은 무효다. 누가 그런 회담을 믿느냐」고 완강하게 버텼다는 것. ○총영사관저등 주장 우리측 수행원의 한 사람은 노­고르비회담의 결과가 성공적이지 못했다면 그들은 회담후에도 기록촬영을 거부했을 지 모른다고 피력. 소련측은 겉으로는 한소 정상회담이 세계적인 뉴스의 초점이 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은 듯 회담직전까지도 회담성사가 유동적인 인상을 주려고 했으나 내부적으로는 노대통령과의 회담을 치밀하게 준비했던 증거들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우선 회담장소문제인데 소련측은 노대통령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기 전날까지도 샌프란시스코 소련총영사관이나 총영사관저를 주장했다. 우리는 「미국내 소련영토」인 총영사관은 불가하다면서 제3의 장소를 주장했다. ○23층 스위트룸 추적 우리 실무팀들은 온갖 정보채널을 동원,회담장소를 물색하던 끝에 페어몬트호텔이 보유하고 있는 국가원수급이 사용하는 스위트룸의 예약상황을 점검했다. 4개의 스위트룸은 노대통령 숙소(본관 7층과 그 위층)와 IMF총회에 참석중인 미 재무장관,스위스은행연합회장의 숙소 등으로 3개는 예약자가 파악이 되었으나 나머지는 전혀 파악이 되지 않았다. 호텔측이 극비에 부친 나머지 한개의 스위트룸 예약자는 바로 고르비였다. 소련측은 회담장소를 고르비의 숙소인 소련 총영사관저나 총영사관을 주장하면서도 그이전에 이미 노대통령과의 회담을 위해 신관 23층 스위트룸을 예약해둔 것이었다. 또 하나의 증거는 당초 노­고르비회담이 시작될 것으로 예상됐던 4일 하오 4시무렵 고르바초프대통령 부인 라이사여사가 샌프란시스코 시내에 있는 한국인 점포에 우연히 들르는 것처럼 해 한국상품을 사면서 「보드카는 얼마나 팔리느냐」고 묻는등 한국에 대한 친근한 제스처를 보였던 것도 그 실례가 된다. ○소 외무부 소외된 듯 소련수뇌부의 의사결정은 고르바초프대통령과 대통령궁의 핵심막료들에 의해 결정되고 있으며 이번 한소정상회담 추진도 거의 막판까지 고르비와 두 핵심참모등 3사람만이 알고 있었다. 이 핵심참모는 이번 회담에 배석한 5명의 소련측 인사가운데 두 사람이라는 것. 배석인사는 마슬리코프 경제담당정치국원,프리마코프 대통령위원회위원(전 연방최고회의의장),도브리닌 대통령외교고문(전 주미대사),체르니아예프대통령안보보좌관,말케비치 연방상공회의소장 등인데 도브리닌과 체르니아예프가 그 두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고. 도브리닌은 30년간 주미대사를 했기 때문에 서방측에 잘 알려진 인물이지만 체르니아예프는 골수당료 출신으로 고르비와는 40년동안 친분을 유지했으며 흐루시초프때부터 개혁을 주장한 인물. 안보보좌관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고르바초프대통령이 대통령제로 체제를 바꾸면서 신설한 최근접보좌관 4명 가운데 1명으로 정식 직함은 자본주의국가담당 대외정책보좌관인 것으로 전해졌다. ○수준높은 화술 구사 이번 회담에 셰바르드나제외상이 배석에서 빠진 것은 유럽지역의 국가와 외상회담이 사전에 약속이 돼 있었기 때문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사실은 한소 정상회담이 한소 외무성도 모르는 가운데 추진됐기 때문에 외무성이 외상회담 일정을 따로 잡아놓았을 것이란 분석들. 노대통령은 이번 고르비와의 회담때 매우 수준높은 대화술을 구사,고르비와의 친근미를 돋보이게 했다. 회담장소가 태평양을 바라보고 있는 사실을 들어 한소 두 나라가 태평양국가임을 자연스럽게 지적했고 방한공연했던 레닌그라드교향악단 지휘자의 「고르비대통령은 너무 바빠 우리 교향악단공연을 관람한 적이 없으나 한국의 대통령은 관람해줘 고맙다」는 말을 인용함으로써 대소우의를 표시. 노대통령은 고르비와의 회담에 대비,러시아 속담 슬라브 속담을 섭렵했고 고르비대통령도 아무런 서류파일이 필요 없을 정도로 한국을 공부하고 임했다는 것. 이번에 노대통령을 수행 취재하면서 느낀 것은 「우리 대통령이 어느새 이렇게 커져버렸나」하는 것이었다.
  • 북한,한ㆍ소 급속접근에 “불쾌감”/손성필 주소대사 왜 소환했을까

    ◎외교관계 격하등 감정적 대응 어려워/알맹이 없는 대남 선전공세 강화 예상 북한이 지난달 25일 손성필주소대사를 본국으로 소환한 것으로 밝혀짐에 따라 한소정상회담과 관련,급변하는 한반도정세에 대응해 북한이 어떤 정책을 내세우게 될지 비상한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손성필은 귀국에 앞서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소련외무장관과 만난 것으로 알려져 북한측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한소정상회담 개최 사실에 대해 소련측으로부터 미리 통보를 받았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분석되고 있는데 남북대화 및 외교통인 손성필의 소환은 북한이 앞으로 전개할 대소ㆍ대남정책 등 대외정책노선과 관련지워져 주목을 끌고 있다. 이와 관련 ▲한소정상회담에 충격을 받고 있는 북한이 모스크바 주재대사의 격을 낮추고 재소유학생들을 소환하는 등 감정적인 대응조치를 취할 것으로 예상되며 손성필의 급거귀국은 이같은 맥락에서 해석된다는 분석과 ▲지난달 하순 북태평양에서 몰래 연어와 송어를 잡다 소련당국에 붙잡힌 북한선적의 어선 12척 나포사건을 본국과협의했을 것이라는 분석 ▲한소정상회담에 대한 다각적인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 등이 일부 외신을 통해 보도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북한문제전문가들은 『소련으로부터 정치ㆍ경제ㆍ군사적으로 절대적인 지원을 받고 있는 북한이 외교관계의 격을 낮추는 것과 같은 노골적인 반소투쟁을 벌이리라고는 예측되지 않는다』면서 손성필의 귀국은 한소정상회담에 따른 충격을 줄이는 한편 이후 전개될 급격한 국제정세에 대한 다각적인 대응책모색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북한이 지난 2월 손성필(63)을 주소대사에 임명한 것은 서울과 모스크바에 영사처가 개설되는등 한소의 급격한 밀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양정고보출신으로 지난 85년 북한의 적십자회담 및 고향방문단대표 자격으로 서울을 방문하는등 남북대화의 창구역을 맡았으며 최고인민대회의 부의장 자격으로 각종 국제회의에 북한대표로 참여했던 경력을 지닌 그의 소환은 북한이 보다 적극적인 대남제의 등을 모색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윤병익교수(통일연수원)는 『북한은 지난해 한국과 헝가리가 수교했을때 김평일 주헝가리대사를 소환,북한과 헝가리의 외교관계를 대리대사급으로 낮추는등 강력히 반발했으나 이후 한국과 동구권국가들의 수교가 계속 이어지자 현실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입장을 정리하기 시작했었다』고 지적하면서 한소정상회담의 충격이 매우 크고 이에 따른 북한의 불쾌감도 대단하겠지만 결국은 이를 현실로 인정하는 선에서 새로운 대응책을 마련할 수 밖에 없으며 손성필의 소환도 이같은 정책전환에 따른 문제점을 협의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북한이 획기적인 대남제의를 내놓으리라는 징후는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 소련의 개방압력을 수용하는 데는 좀더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게 윤교수의 설명이다. 김창순씨(북한연구소 이사장)도 『모택동과 연계해 벌였던 60년대초의 반흐루시초프투쟁과는 달리 실익도 없고 후원자도 없는 김일성의 감정적 반소투쟁에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고 말하고 북한은 손성필대사의 소환을 통해 한소정상회담에 대해 일단 불쾌감을 표시하는 동시에 국제적인 고립화를 모면하기 위해 「형식적이고 선전적인」차원에서 각종 대화제의를 「보다 자주 보다 강도있게」제기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씨는 또 북한의 대남정책은 「전민족통일전선」을 구축한다고 못박은 최고인민회의 제9기 1차회의의 김일성시정연설에서 이미 정리된 것으로 해석된다며 한소 정상회담이 가변적인 요소이기는 하지만 획기적인 모종의 대남제의를 내놓는 등 큰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주장했다. 즉 북한은 남북고위급 예비회담등 4개로 정리된 정부당국간 회담을 발전시키는 동시에 남북노동자연합대회,남북농민연합대회 등 갖가지 대화 채널을 통해 한국의 범야ㆍ운동권세력과의 연계를 도모,전민족적인 통일전선을 형성하겠다는 것이 기본 대남 정책인 만큼 이를 실현하기 위한 각종 제의가 쏟아져 나올 것으로 보이지만 실질적인 결실을 가져올 정도의 제안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설명이다.
  • 「샌프란시스코 정상대좌」의 파장

    ◎“한­소 충격파”… 북한 「주체외교」 흔들/대중 밀착… 서방채널 다변화 할 듯/외풍 막으며 유일체제 고수 예상 한소 두 정상의 만남에 따른 북한의 대응에 세계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는 가운데 북한은 지난 31일 외교부대변인의 인터뷰 형식을 빌어 한소 정상회담을 비난하고 이 회담의 즉각 중지를 요구하는등 즉각적인 반응을 나타냈다. 북한은 또 같은날 남북회담 공식대표들의 공동성명을 통해 『단절된 남북대화가 지체없이 재개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북한은 중앙인민위원회ㆍ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ㆍ정무원연합회의를 개최하고 미국에 대해 주한미군 철수문제등을 협의하기 위한 미ㆍ북한 직접협상이나 남북한과 미국이 참여하는 「3자회담」에 호응할 것을 촉구하면서 남북한의 병력을 10만명선으로 축소하자는 군축안을 제의했다. 이와관련,대부분의 북한문제 전문가들은 『북한이 보인 이같은 일련의 반응은 한소 정상회담에 대응한 논리적인 제안이라기 보다는 최고인민회의 제9기 1차회의에서 발표한 김일성의 시정연설에 기초한 선전공세의 차원으로 해석된다』고 지적하면서 북한이 현재의 정책을 고수할지 또는 일대 전환을 모색할지는 한소 정상회담이 몰고온 충격의 여파가 일단 진정되고 또 일정기간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가시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문제 전문가들은 일시적으로 북한과 소련의 관계가 급속히 냉각되는 반면 북한과 중국의 관계는 보다 밀착되고 내부적으로는 강력한 문단속이 이뤄질 것이라는 데는 의견을 같이하면서도 북한이 장기적으로 어떤 정책을 선택할 것이냐에 대해서는 분석을 달리하고 있다. 전인영교수(서울대)는 『북한이 원칙적으로는 주체적 사회주의노선을 견지한다는 기본적인 입장을 표명하겠지만 그냥 앉아서 원칙이나 찾기에는 너무나 급박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음을 스스로 잘알고 있을 것』이라고 전제하고 북한은 어떤 형태로든 정책조정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구체적으로 소련의 압력에 대응하기에는 힘의 한계를 느끼고 있기 때문에 대미관계에 적극성을 보이는 한편 UN공동가입안에서 한발짝 물러서 현실에 맞는 제안을 내놓는등남북관계에도 접촉을 다변화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내부체제 또한 강경파의 득세로 경색화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유연한 자세로의 전환이 불가피하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김창순씨(북한문제연구소 이사장)는 『대세에 거역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 형식적인 대화제의는 무성할 것으로 보이나 실질적인 성과를 가져올 대화는 없을 것』이라고 내다보고 대내정치에 있어서도 이념을 강조하는 유일체제를 더욱 강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소관계에 있어서는 60년대초 흐루시초프의 등장과 함께 스탈린 격하운동이 벌어졌을때 소련을 등졌으나 이 결과 소련의 경제원조 중단을 초래,제1차 7개년 경제계획을 3년이나 연장시켰던 뼈아픈 경험때문에 이번에도 두나라의 관계가 삐꺼덕거리겠지만 급속도로 악화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서병철교수(외교안보연구원 본사논평위원)는 『단기적으로는 외교채널의 다변화와 대내적인 강압정치가 예상되지만 소련이 실리를 추구하면서 두개의 조선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명백한 의사를 표시한 이상 북한도 더이상 폐쇄적인 자립노선을 고수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이에따라 서방측과의 관계개선을 모색하기 위한 다각적인 외교정책을 펴는 동시에 한국과의 대화에도 적극성을 띨 것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북한관계와 관련해서는 ▲북한의 외채중 80%가 소련에 대한 채무이며 ▲고도군사장비와 석유등을 공급받고 있고 ▲핵개발문제에 있어서도 대소 의존도가 절대적인 상황에서 북한이 소련에 취할 수 있는 외교적인 대응조치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한편 북한은 침체에 빠진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획기적인 대남 군축안을 내놓으리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는데 북한이 지난 31일 제안한 「한반도평화를 위한 군축안」은 이같은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는 것. 그러나 오관치박사(국방연구원)는 이제까지 북한과 소련의 경제협력은 소련이 북한의 자립경제건설을 위한 기계와 자본 기술의 제공등 일방적인 대북지원이었는데 최근 소련내부에서조차 균형된 경제교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등 북한이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국면을 맞고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북한의 경제가 곧 군사경제라는 점을 감안할때 군사부문의 급격한 감축이 초래할 정책적 혼란을 생각해서라도 그같은 변화를 기대하는 것은 성급하다고 지적했다. 한편 윤병익교수(통일연수원)는 『북한의 대중국 밀착이 심화되고 대미접촉 또한 강화될 것이지만 대미접촉의 경우 평화협정체결및 주한미군철수를 목표로한 기존의 기본전략을 고수하는 것이상의 새로운 변화는 어려울 것』이라고 설명하고 대남정책에 있어서도 남북대화재개나 군축안을 내놓고 있으나 이또한 기존의 통일전선전략에서 진전된 것으로 볼 수는 없다고 말했다. 전인영교수는 북한의 대중국,대미관계와 관련,『중국이 이번 한소 정상회담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면 북한이 급할 때면 늘 써먹던 「중국카드」도 이제는 무용지물이 될 것이고 서로의 필요에 의해 진전되는 한소관계와 달리 북한과 미국의 관계개선은 「급할 것이 없는」 미국의 사정상 빠른 속도로 진행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분석하고 북한은 스스로 바뀌는 것외에 다른 대응책을 찾기는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 미수교국 정상회담 모두 20차례/한ㆍ소대좌 계기로 본 「전례」

    ◎상대국 방문 13회,제3국 회담 7회/미 닉슨,72년 북경 전격방문/일 다나카,모 만나 수교달성 이번 한소 정상회담은 양국 정상간 회담이 미수교상태에서 이뤄지는데다 제3국에서 개최되는 만큼 외교관례상 흔한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는 한소 정상회담이 양국간 수교이후에나 상호교환방문을 통해 이뤄질 것으로 전망돼 왔다. 외무부도 그동안 『한소 정상회담은 양국간 수교이전에 개최될 가능성은 없다』고 누누이 강조한 바 있다. 그만큼 이번 정상회담은 빠른 시일내에 수교를 달성하려는 양국 정상들의 굳은 의지가 크게 작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미수교국 정상간의 회담과 관련,상대국 방문을 통해서나 제3국에서 정상회담이 이뤄진 경우는 지금까지 모두 20차례에 이르고 있다. 우선 미수교국상태에서 상대국 방문을 통해 정상회담이 이루어진 사례는 모두 13차례. 이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미국과 중국간의 정상회담. 닉슨 미 대통령은 72년 2월21일 중국을 방문,북경과 상해에서 모택동주석과 한차례,주은래총리와 여섯차례의 정상회담을 갖고 양국 관계정상화를 위한 상해공동성명을 발표했다. 포드 미 대통령도 같은해 12월 중국을 방문해 모와 한차례,등소평 당시 외교담당부총리와 가진 세차례 회담을 통해 상해공동성명을 재확인한 바 있다. 이같은 양국 정상회담을 거쳐 양국은 73년 4월 연락사무소를 교환설치했고 79년 1월1일을 기해 역사적인 수교를 달성했다. 양국간 수교 연도보다 무려 8년전에 양국 정상회담이 이뤄진 셈이다. 일중관계도 비슷한 방식을 택했다. 다나카(전중) 일 총리는 수교전인 72년 9월25일 방중,모및 주와 정상회담을 갖고 양국간 국교정상화 공동성명을 발표,72년 9월29일 양국간 수교를 달성했다. 중동의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현재까지 미수교국상태이지만 13년전 양국 정상회담을 가진 바 있다. 사다트 당시 이집트대통령은 77년 11월 이스라엘을 방문,베긴 이스라엘총리와 정상회담을 갖고 중동평화방안을 논의하는 한편 이스라엘의회에서 아랍권 국가원수로는 처음으로 연설하기도 했다. 베긴 이스라엘총리도 이집트를 답방,사다트 이집트대통령과 두차례 정상회담을가졌다. 지금 한창 통독열기로 들끓고 있는 동서독은 브란트 당시 서독총리의 「동방정책」에 힘입어 이미 20년전 정상회담을 가진 바 있다. 브란트총리는 70년 3월 동독을 방문,쉬토프 동독총리와 양독의 국제적 지위ㆍ유엔동시가입문제등을 폭넓게 협의한 데 이어 쉬토프 동독총리도 답방,동서독은 72년 12월 기본조약을 체결했으며 74년 6월 상설대표부를 설치하기까지 했다. 서독은 소련과도 이같은 방식으로 수교를 달성했는데 아데나워 서독총리가 55년 9월 방소,흐루시초프 당시 소 서기장과 정상회담을 가진 끝에 56년 3월 수교를 이룩했다. 이밖에 싱가포르와 대만,폴란드와 로마교황청,남북예멘,남아공과 모잠비크,남아공과 잠비아등도 미수교상태에서 정상간의 상대국 방문을 통해 양국간 관계진전을 논의한 바 있다. 미수교국 정상이 제3국에서 회담을 가진 사례도 일곱차례나 된다. 망데스 프랑스총리와 주은래 중국총리는 54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정상회담을 가졌고 아데나워 서독총리와 메이어 이스라엘총리는 60년 미국 뉴욕에서 회담을 갖고원조및 수교문제를 논의,65년에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또 쿠바와 칠레는 브라질에서,남아공과 모잠비크는 나미비아에서,이집트와 이스라엘은 78년 카터 당시 미 대통령 초청으로 미국에서 각각 정상회담을 가진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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