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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나치피해 추가보상/2백억불/수년간 유태인등에 지급

    【본 AFP 연합】 독일정부는 앞으로 수년간에 걸쳐 유태인을 포함한 나치 피해자를 위한 추가보상으로 3백5억마르크(미화 약 2백억달러)를 지불할 예정이라고 독일재무부가 5일 발표했다. 이로써 독일정부가 이미 지불한 9백30억마르크를 포함,유태인과 여타 히틀러 피해자들에게 지불하거나 지불할 보상액은 모두 1천2백40억마르크에 달한다. 추가보상법은 지난 50년대에 마련된 것으로 앞으로 단계적으로 지불될 예정이다. 독일은 서방국가에 이미 9억7천7백만마르크를 나치 피해보상으로 지불한 바 있으며 폴란드에는 5억마르크,러시아와 우크라이나및 벨로루시에는 10억마르크를 지불했다.
  • 불 리옹시/영화관람료 “인하전쟁”

    ◎작년 45프랑서 올 18프랑으로 출혈경쟁/관람객 즐거운 비명… 이웃주민도 몰려와 프랑스 리옹에서는 영화 관람료 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프랑스에서 영화 한편 보는데는 보통 45프랑정도가 든다.한화로 환산하면 약 6천7백원이 되는만큼 그리 싼편은 아니다. 극장주들은 어쩌다 시장조사에 나섰다가 영화관람료가 비싸다고 관람객들이 불평을 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시설투자에만 전력을 기울여 왔다.요금인하보다는 시설투자로 다른 극장과의 경쟁에 승부를 걸어왔던 것이다. 그러나 리옹의 루시앙 아리다라는 개인극장이 관람료인하를 단행하면서부터 대형 체인극장들도 잇따라 내리고 있다.루시앙 아리다극장은 지난해 초부터 영화 관람료를 45프랑에서 29프랑(한화 약4천3백원)으로 35% 인하했다. 이극장은 이때문에 지난 92년 5%에 불과했던 시장 점유율이 올들어서는 15%로 크게 늘어난 것으로 분석됐고 다른 대형 체인극장들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리옹에서 가장 큰 체인극장은 위제세(UGC)로 45%의 시장을 점유하고 있으며 그다음이 27%의파테극장. 루시앙 아리다극장의 급성장에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인 곳은 시장점유율이 20%로 떨어진 파테극장.이극장은 지난 여름부터 30프랑으로 관람료를 낮춰 반격을 시도했다.그러자 루시앙 아리다극장측은 29프랑에서 다시 25프랑으로 요금인하를 단행해 맞대응을 했다. 영화 관람료 인하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위제세도 급기야 9월1일부터 시내 고급 극장은 22프랑,일반극장은 18프랑(2천7백원)으로 파격적인 인하를 했다.정상적인 요금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값이다. 파테극장은 이에따라 9월14일부터 모든 영화를 20프랑으로 낮췄으며 요금인하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파테극장측은 『2차 요금인하로 시장점유율을 간신히 27%로 끌어 올렸다』고 털어 놓고 있다. 이런 경쟁적인 요금인하 탓으로 그르노블등 주변 도시의 주민들이 리옹에 영화를 보러 찾아 오고 있어 9월들어서면서 1주일새 3만명의 영화관람객이 늘어났다.마치 리옹에서 「영화 축제」가 열리고 있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프랑스에서 영화관람료 인하는 처음있는 일은 아니다.소형또는 개인극장이 불황을 이기기 위해 가끔씩 요금인하를 단행하지만 대형극장의 맞대응으로 번번이 참패로 끝나고 말았다. 위제세측은 『관람료를 내린 것은 가격 덤핑에 대응하기 위한 것일뿐』이라며 언젠가 다시 원상복귀시킬 태세임을 밝히고 있다.그러나 영화계에서는 침체에 빠진 영화산업을 부흥시키려면 전반적인 요금인하가 불가피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 프라하에서 보낸 편지:7/민병석 주체코대사(굄돌)

    오늘날 체코는 바츨라브(Vaclav) 두명이 끌고 간다는 이야기가 있다.이것은 바츨라브 하벨 대통령과 바츨라브 크라우스 수상의 이름에서 나온 말이다.이름은 같지만 이 두사람의 지도자적 성향과 역할내용은 이름만큼 비슷하지는 않다. 내각책임제에서 대통령직을 맡고 있는 하벨을 체코의 양심이라고 한다면,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크라우스 수상은 체코의 두뇌라고 할수 있다.하벨 대통령은 국익보다는 초국가적 가치로서의 정의를 더 중히 여기는 발언을 자주하며,크라우스 수상은 이때마다 국가의 실익보호를 위해 대통령 발언의 후유증을 수습하느라고 동분서주한다. 그 대표적인 예로,제2차 세계대전 직후 체코에서 빈몸으로 쫓겨난 독일인들에 대한 대통령의 동정적 발언,회교국들로부터 규탄을 받고 있는 영국 작가 루시디의 초청,체코무기의 구입차 방문중인 칠레의 전 군사독재자 피노체트에 대한 공개비난 등을 들수 있다.이때마다 수상실은 발칵 뒤집혔다.가해국이자 부국인 독일에게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거나 회교국과의 관계는 도외시하고 작가의 표현자유만 중시하여 초청을 하는 소행은 대통령으로서 무책임한 일이 아니냐,찾아온 고객을 무안을 주어 쫓아 버리는 행위를 하는것은 말도 안된다는 등 볼멘 소리가 수상실 근처에서 터져 나왔다.그리고는 「하벨 대통령의 개인적 의견」,「사적 초청」,「정부와 협의 없는 발표」 등으로 얼버무려 수습하느라 애를 먹는다. 이런 상황이 일견 대통령과 수상간의 불협화음으로 보이지만 실은 이 두 지도자의 조화 때문에 체코는 명분도 살리고 실익도 챙길 수 있다.하벨 대통령의 양심적 언행 때문에 서유럽 국가들이 긍정적 체코관을 갖게되고,크라우스 수상의 현실적 정책 때문에 회교국과도 우호를 유지하며 무기 해외판매의 실익을 보게된다. 체코의 양심과 두뇌로 상징되는 이 두 바츨라브 중 하벨은 1992년에 방한했고 크라우스는 내달초에 방한한다.우리는 체코의 양심에 이어 두뇌를 만나게 될 것이다.이기회에 우리도 한국의 「양심」과 「두뇌」를 조화시키는 방법을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
  • 야당대표 실종(외언내언)

    정치인을 불신의 대명사로 하는 말은 너무나 많다.「흐루시초프」옛소련 수상이 미국을 방문했을때 『정치인들이 강도 없는 곳에 다리를 놓아주겠다고 약속하는 것은 어느나라나 같다』라고 했다는 말은 고전이다. 『자기 자리를 보전하기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할수있는게 정치인이다.심지어는 애국자가 되는것도 서슴지않는다』는 빈정거림도 있다.그런가하면 『정치인은,그가 하는 행동과 정반대의 말을 함으로써만 평형을 잡을 수 있는 곡예사』라는 말도 있다.「드골」전프랑스대통령은 『정치인이란,자신의 말을 믿지않기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그말을 믿는것을 놀라게된다』고 까지 말했다. 그런 말에 비추어보면 요즘 어느 야당대표가 닷새째 실종되었다는 우리 정가의 화제는 대단한 일이 못된다.정확하게 말하면 사표를 내고 연락두절인 상태다.정승보다 더한 자리도 자기 싫으면 그만이긴 하지만 그가 속한 정당은 물론이고 우리정치의 모양이 우습게된 것은 사실이다. 그 자신 국회의원이고 다른 국회의원 15명을 거느린 공당의 대표로서 이번이 네번째라는 그 잠적의 이유가 최소한 국민을 대신한 목숨을 건 투쟁같은 것 때문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그보다는 당내의 권한다툼 때문이라는 풀이들이다.그러자 그 당의 사람들은 사표수리문제를 두고 연일 다투고 있고,또 다른 야당에서는 연락불능을 빌미의 하나로,야권통합논의를 어물어물 없던 일로 하기로 한 모양이다. 도무지 국민들은 안중에 없다는 자세들이다.매년 한사람 평균 1천원 가까운 돈을 내 이런 정당들을 먹여 살리고있는 국민들은 우롱당한 기분이다. 마침 우리나라 여론선도층 네사람중 한 사람인 25·4%가 현국회의원중에 존경할만한 사람은 세명도 안되는 1%미만이라고 응답한 조사결과가 나왔다.정치를 게임으로만 하는 그런 행태와 무관하지않을 것이다.국민이 외면하는 정치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정치인들이 모르고있다면 보통 일이 아니다.
  • 미 11월 중간선거/무소속 돌풍 예고/「엉클 샘」투표성향에 큰변화

    ◎20주 의원·지사 입후보… 일부 당선 가능성/동북부선 지지율 40%… 민주·공화에 “경고” 오는 11월 미국의 중간선거를 앞두고 거센 무소속바람이 일고있다.미국의 선거풍토에서 기존의 양대정당인 민주·공화당후보가 아닌 제3당이나 무소속 후보가 승리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중간선거에서는 그 어느때보다 많은 무소속,또는 제3당(전국조직을 갖춘 정당들이 아니기때문에 사실상 무소속이나 매한가지) 후보가 많을 것으로 보이며 최근의 여론조사결과도 과거보다 양대정당후보를 지지하지 않겠다는 비율이 크게 높아가고있다. 29일 워싱턴포스트지 보도에 따르면 최근 선거전문기관의 여론조사결과 유권자들이 자신의 정당선호와 관련,양대정당 지지가 아니라 「무소속」이라고 자처하는 이들이 지역에 따라 많게는 40%까지 나타나고있다는 것이다. 공화당의 여론조사전문가인 윌리엄 맥인터프는 3년전 유권자가운데 20%가 무소속을 지지한다고 응답한 것을 보고 깜작 놀랐는데 두달전엔 무소속지지가 30%로 늘어났다고 말했다.특히 동북부의 일부 주에서는 40%로까지 올라갔다는 것이다. 민주당의 여론조사자인 실린다 레이크는 과거 무소속후보의 득표율을 보면 1∼2%가 고작이었으나 최근엔 10%선을 웃돌고있다면서 2년전 상·하원의원선거에선 지난 30년대 대공황이후 가장 높아 50개 하원의원선거구에서 10%이상의 득표율을 기록했다고 설명했다.레이크는 금년 중간선거에서 무소속의 득표율이 더욱 높아질 것으로 전망했다. 2개월여 앞으로 다가온 이번 중간선거에서는 거의 20개주에서 상원의원후보나 주지사후보로 무소속,제3당후보가 나설 것으로 전망되고있다.이들 가운데 일부는 당선가능성도 점쳐지고있다. 무소속후보 출마가 예상되는 지역의 하나는 버지니아주.상원의원선거에서 민주당의 현역인 찰스 롭의원과 공화당의 올리버 노스후보(이란·콘트라사건 핵심으로 레이건당시 백악관안보회의보좌관이었던 노스중령)가 격돌하고 있는 가운데 전민주당소속의 주지사 더글러스 와일더,전공화당소속의 주법무장관인 마셜 콜맨이 무소속으로 등장,한판승부를 다짐하고있다. 주지사선거의 무소속후보로는 메인주에서 앤거스 킹,펜실베니아주에서 펙 룩크식(4년전 공화당후보지명탈락),뉴멕시코주에선 녹색당후보로 부지사 로베르토 몬드로간이 출마준비를 하고있다.또 하와이주에선 전민주당소속으로 호놀룰루시장을 지냈던 프랭크 파시가 무소속으로 출마,현재 여론조사에서 양당후보와 근소한 차로 3위를 하고있다.또 뉴욕,오레곤주에서도 제3당후보가 나설것으로 보이며 수도 워싱턴의 시장선거에도 무소속후보가 출마할 가능성이 크다. 이같이 무소속후보의 출전이 예년보다 크게 늘고있는 원인은 민주·공화 양당에 대한 싫증,당리당략차원의 정파주의와 기존 워싱턴정치권에 대한 불신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지난 92년 대통령선거당시 무소속 로스 페로 후보의 선거운동을 계기로 무소속바람이 고조된 것도 사실이다.그러나 여론조사전문가들은 유권자들의 투표행사에 대한 근본 인식이 최근들어 서서히 변화하고있다고 지적한다.즉 전통적으로 무소속후보에 표를 던지는 것은 바로 사표로 간주되었으나 오늘의 유권자들은 무소속 투표를 민주·공화 양대정당에 대한 경고메시지 전달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했다.
  • 파리하수도2천㎞ 컴퓨터통제추진/프랑스에선:3(녹색환경가꾸자:71)

    ◎96년까지 10억프랑 투입… 3차례 완벽 정수/수질검사에 60만개 측정기준 적용… 관련기술 해외수출도 프랑스의 환경보전과 맑은 물 공급을 위한 노력은 하수처리에서부터 시작된다. 프랑스의 하수정책은 정수처리 못지 않게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각 가정과 사무실등에서 버려지는 생활하수를 정수하기 전에 원천적으로 깨끗이 하는 정책은 1세기를 훨씬 넘는다. 파리의 하수도 시설은 완벽한 정도를 넘어서 예술과 화려한 파리의 지상 모습과는 또다른 얼굴로 관광명소의 하나로 꼽힌다.파리사람들이 하수시설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832년부터다. 그해 왕정복고와 혁명의 어수선한 도가니 속에서 콜레라와 페스트가 만연했으며 이 때문에 혁명파의 지도자를 비롯한 수많은 파리사람이 죽어갔다.이로인해 프랑스인들은 냄새나고 병균이 득시글거리는 하수의 처리에 정책적인 눈을 뜨게 됐다. 1850년 오스망 백작이 기술자인 외젠 벨그랑과 함께 하수도를 만들면서 본격적인 하수정책이 전개됐다.그전에도 하수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1370년 파리의 수도원원장인 위그 오브리오라는 사람이 몽마르트가에 하수도를 만들었지만 지상에 노출된 것이었고 나폴레옹시대 연장 30㎞의 최초의 하수도가 만들어지기는 했다. ○하수도 박물관까지 프랑스 하수도의 시조격인 기술자 벨그랑은 총연장 6백㎞에 이르는 하수도를 만들었고 지금도 22프랑(한화 약 3천원)만 내면 구경할 수 있는 파리시내의 하수도박물관에는 벨그랑관이 마련돼 있다.이곳에서는 파리의 환경보전과 맑은 물 공급을 위한 한세기를 넘는 싸움의 역사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벨그랑에 의해 「완벽한 하수도」 시설이 갖춰진 뒤에도 1914년부터 60여년동안 길이 1천㎞의 하수도가 끊임없이 건설됐고 이제는 모두 2천1백㎞에 달한다. 파리에서 터키의 이스탄불까지의 거리에 해당되는 거미줄같이 각 가정에서 연결돼 있는 파리의 하수시설이 세계 최고라는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다. 프랑스의 하수도는 생활하수나 빗물이 그냥 흘러가도록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정수장을 거쳐 센강으로 다시 내보내기 전에 3번에 걸쳐 철저한 정수작업을 거친다. 7백명의 하수처리 종사자들이 쓰레기를 제거하고 모래를 제거하는 작업을 벌이고 있으며 『수백년에 걸친 환경유산을 보존한다』는 이들의 자부심은 대단하다.그리고 환경보존을 위한 노력은 여기서 끊이지 않고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파리시의 물담당 루시앙 피넬 부시장은 『한세기 이상에 걸친 정수작업으로 파리는 아주 특별한 도시로 남아 있다』면서 유산을 보존하기 위해 하수구 현대화및 센강 보존계획을 밝히고 있다. ○첨단기술 총동원 지난 91년부터 연간 2억프랑(한화 약 2백80억원)씩 모두 10억프랑을 쏟아붇는 지하의 환경보존 계획은 96년에 끝난다.이 계획은 모두 6개의 사업으로 이뤄져 있으며 시급한 것이 약 2백㎞에 이르는 내부 벽의 안전시설보완등 노후시설의 교체작업이다. 그리고 모든 시설을 전자동으로 작동하고 중앙에서 컴퓨터로 통제하는 가스파(GAASPAR)계획과 홍수에 대비해 지하수를 지상으로 끌어올려 역류현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마자스 양수공장 건립등이 주요사업으로 꼽힌다. 특히 하수속에 용해된 산소의 수준을파악해 센강의 수질을 감시하는 하수도 수질감시소의 설치는 세계 수질관리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마구 버리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는 하수의 처리에도 첨단 기술과 과학이 동원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철저한 정수작업을 마치면 아르쉐 정수장등 파리 근교의 5곳의 대형정수장으로 하수는 모여진다.이곳에서 처리하는 것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스코레라는 자동정수장치다.정수장들은 처리 능력이 충분하지만 낮이나 비가 많이 올때는 많은 양의 하수가 밀려들어 정밀한 정수가 어렵다는 점 때문에 도입한 것이 스코레다.이는 하수유입량이 많을 때는 컴퓨터로 자동적으로 막아 밤이나 하수량이 줄어든 뒤에 정수하도록하는 첨단 장비다. ○물 종사자 9천여명 파리에는 하수관리 인력과 SAGEP라는 물관리회사를 비롯해 수질연구및 통제센터(CRECEP)등 물과 관련한 직종의 종사자만도 9천여명에 이른다. 특히 지난 87년 SAGEP과 함께 발족한 CRECEP는 60만개의 측정기준을 엄격히 적용해 수질을 검사한다. CRECEP은 이제 수질검사에 만족하지 않고 수질연구와박테리아실험실등을 운영하면서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한다.이 연구소는 최근에는 물리화학적인 반응을 통해 물의 맛을 좋게하는 연구에 착수했다. 미국·일본등의 다른 선진국으로부터 CRECEP에 수질연구생이 몰려들고 있자 「물 과학」에 대한 석사 이상의 과정을 개설했다.프랑스는 우주·항공등과 함께 「물 과학」의 수출국이라고 불러도 무리가 없을 것같다.
  • 슈브니코프(전 평양주재 구소련대사)가 말하는 김정일 부자와 북정권

    김일성이 사망한지 40여일이 넘었으나 북한은 김정일체제 공식출범을 미룬채 핵관련 미­북대화만을 진전시켜나가고 있다.그들은 남북대화등 대남정책에 있어서는 아직까지 이렇다할 긍정적 변화조짐을 보이지 않고있다.김일성사후 김정일의 위상과 그가 그리고 있을 남북관계 청사진등 북한의 향후 진로와 내부동향등에 대한 궁금증만 커가고 있다.또 김정일의 자질과 성격등에 관해서도 여러 엇갈리는 견해가 제시되고 있는 실정이다.본지 이기동 모스크바특파원은 최근 북한사정에 정통한 미하일 슈브니코프 전평양주재 구소련대사(70)를 만나 김부자의 행적,향후 북한정권의 장래에 관한 그의 견해등을 들었다.통산 13년간 평양대사관에서 근무한 북한통인 슈브니코프 전대사는 특히 소­북한관계가 원만한 82∼87년 평양주재대사로 근무,김일성부자와는 매우 가까운 사이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1924년 러시아 툴라시에서 출생한 그는 소련군사외국어학교를 졸업했고 소련공산당 중앙위 국제부 한국(남북한)과장을 역임했으며 외교관으로선 주로 북한관련 업무를 담당했었다.슈브니코프 전대사는 인터뷰에서 김일성의 모스크바 비밀방문,김정일의 사생활과 주변인물등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얘기들을 털어놓았다.그러나 특별한 개인적 유대 때문인듯 그의 김부자 평가는 비교적 후하다는 인상을 주었다.이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북한사정에 밝고 특히 김부자를 가까이서 지켜보았던 전직 구소련고급외교관의 북한평가와 분석은 향후 「김정일 평양」의 향방을 가늠하는데 도움이 될 귀기울여 볼만 한 것들이었다. ◎평양식사회주의 미래가 없다/김일성 추모기간 끝나면 권력승계 무난/핵탄제조 능력… 플루토늄 보유량 적어 ­북한주재 대사로 근무했던 80년대는 소련과 북한관계가 밀월과도 같은 순탄한 시기였던 것으로 아는데 평양근무는 얼마나 했는지. ▲60년부터 3년간 첫번째로 평양대사관에서 근무했다.그리고는 본국으로 돌아와 당중앙위 국제국 한국과에서 일했고 69년부터 73년까지 다시 평양근무를 했다.모스크바로 돌아와 당중앙위 국제국 한국과장으로 일하다 82년 12월 북한주재 대사로 발령받았다.87년 12월까지 대사로 근무했으니 평양대사관에서만 13년을 일한 셈이다. ○13년간 평양에서 근무 나의 북한대사 재임기간이 소련­북한 양국관계가 가장 우호적인 시기였다는 점에 동의한다.이 기간중에 김일성주석이 모스크바를 두번 방문했다.나는 그중 한번은 김주석을 직접 수행,1개월에 걸친 기차여행을 함께 했다.60년 이후 그는 모스크바를 방문한 일이 없다.주재국 대사인 나 개인으로서는 좋은 기회였던 셈이다. ­김주석의 모스크바방문의 구체적 시기는 언제였는가. ▲첫번째는 체르넨코 서기장 재임시인 84년이었고 두번째는 고르바초프 서기장 때인 86년이었다.이중 84년 방문때 내가 모스크바까지 김주석과 동행했었다.1개월간 기차로 시베리아를 거쳐 모스크바로 왔다가 귀국 때는 벨로루시,우크라이나,몰도바,루마니아를 돌아 평양으로 갔다.모스크바는 공식방문이었지만 나머지는 비공식방문이었다.86년 방문 때는 비행기편을 이용했는데 나는 동행치 않았다. ­김주석은 고소공포증으로 비행기여행을 극히 꺼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고소공포증은 아니다” ▲그가 비행기여행을 피한 것은 사실이다.하지만 그것은 척추에 문제가 있으니 비행기여행은 피하라는 의사들의 권유 때문이었다.비행기 착륙시의 충격이 허리에 무리를 줄수 있다는 것이었다.그가 서 있는 모습을 보면 알수 있겠지만 그는 항상 허리를 똑바로 펴고 꽂꽂이 서 있었다.그것은 조금이라도 굽히는 자세가 되면 척추에 통증이 왔기 때문이다. ­김주석은 말년에는 심장질환을 앓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사망원인도 심근경색으로 발표되었다.평소 그의 심장병 병세는 어느 정도였는가. ▲나이가 들면서 심장에 이상이 생긴 것은 사실이다.80년대 중반에 심장발작을 한차례 겪었다.내가 대사로 있을 때였는데 소련의사를 보내달라는 부탁도 자주 있었다.대부분 김정일이 직접 찾아왔고 외교부장을 보낼 때도 있었는데 그때마다 나는 본국에 요청해 의사를 보내주었다.하지만 당시 러시아의사들의 최종진단은 『심장질환의 증세는 있으나 집무에는 지장이 없고 나이에 비해 건강하다』는 것이었다. ○북서 모반 있을수 없다 ­김주석 사망과 관련,한때 자연사가 아니고 정치적 변고와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돌기도 했다. ▲1백% 불가능한 이야기다.자연사가 분명하다.김일성 주변을 보면 모반은 불가능하다.절대 불가능하다.김일성 주변의 인물은 김정일이 모두 통제하고 있다.그리고 김일성·정일 부자의 관계는 어떻게 보면 부자지간 이상이었다.김정일은 정실 소생의 장자다.김일성은 그를 끔찍이 아꼈다.김일성이 김정일을 못마땅하게 여긴 때가 많았다는 얘기가 있지만 내가 아는한 그렇지 않다.텔레비전을 통해서 보니 김주석 사망후 김정일의 얼굴이 아주 못쓰게 됐던데 무엇보다 부친의 죽음에 대한 슬픔이 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물론 김주석 사망으로 받는 정치적 중압감도 큰 짐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추모기간 지나면 승계 ­김일성 사망 1개월이 훨씬 지났는데 아직 김정일이 주석과 당총서기직을 승계했다는 발표가 없다.다소 이상한 일 아닌가.후계구도에 진통이 있는게 아니냐는 추측도 나오고 있는데. ▲김정일은 70년대 중반 공식 후계자로 확정되면서부터 실제로 국가경영 실습을 해왔다.70년대 당중앙위원으로 들어간 뒤 이후 정치국원,그리고 4∼6인으로 구성되는 정치국 상임위원이 됐고 김주석 사망당시는 군최고사령관이었다.그리고 요로에 자신의 심복들을 배치해놓고 있다.부친과 같은 세대인 원로들로부터 한결같은 지지를 받고있다.그래서 그의 권력승계는 별 문제 없이 이뤄질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김일성 추모기간만 끝나면 주석직 승계와 함께 국가지도자로서의 일을 시작할 것이다.당총서기는 정치국에서 이미 선출해놓고 발표만 미루고 있을수도 있다.당대회소집 등의 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다시 말해 김정일은 이미 「경애하는 지도자」였고 군통수권자였다.부친 사망과 함께 자연스럽게 제1인자가 되도록 미리 치밀한 장치가 돼있었던 셈이다. ○김일성 음주 극히 자세 ­김정일이 아버지와 같은 카리스마도 없고 세습승계에 대해 일반주민은 물론 권력층 내부에도 반발이 있을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지 않겠는가.김정일은 과연 북한 최고지도자가 될만한 인물인가. ▲대사로 근무할 당시 김정일을 비교적 자주 만나 가깝게 지냈다.그는 수시로 나를 불러 식사도 하고 술도 함께 마셨다.당시 그는 술을 아주 조금 마셨다.김일성도 술은 극히 자제했다.이점에 대해 외부에서는 잘못 알고있는 것 같다. ○카레이스·영화 큰 관심 내가 겪은바로는 김정일은 말이 적은편이다.지나치게 자기 생활을 드러내지 않으려 하는 점이 특징이다.북한 같은 사회에서 2명의 지도자가 존재할 수는 없다.그래서 그는 의식적으로 부친의 그늘에 숨어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던 것으로 생각한다.때때로 『이 사람은 진짜로 권력 정상에 오를 생각이 없는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김정일은 부친과 사진을 함께 찍는 것에 대해서도 신경을 많이 쓸 정도로 몸조심을 했다.소련대표단이 그렇게 북한에 자주 갔는데도 김부자와 함께 사진을 찍은 것은 단 한번 뿐이었다. 젊었을 때 김정일은 여러 스포츠를 즐겼다.특히 카 레이스를 좋아했고 영화·음악등에 관심이 많았다.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차츰 성격이 조용하고 신중한 쪽으로 바뀌었다.부친의 영향 때문으로 볼수도 있지만 어떻게 보면 보통사람들이 겪는 인격성장 과정과 같다고 할수 있다.김일성대학 철학부에 다닐때 성적은 좋은편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고 외국에서 공부한 일은 없는 것으로 안다. ○손혜림,손성필의 친척 알콜중독자라느니 성격적으로 문제가 있다느니 하는 말을 나로서는 이해할수 없다.그와 자주 낚시도 다녔는데 나라문제에 대해 비교적 잘 알고있고 또 나름대로 정치에 대한 철학도 가지고 있는 교육받은 사람이란 인상을 받았다.그의 사생활등을 무조건 비난하는 것보다 그가 어떤 인물인지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그의 경력은 물론 부친이 만들어 준것이 사실이다.그러나 김일성이 5자녀중 그를 후계자로 택한 것은 장남이기 때문만은 아니지 않겠는가.나름대로 그의 능력을 평가하지 않았겠는가. ­김정일의 가족관계는 잘 알려져있지 않은데.몇차례 이혼했다는 얘기도 있고. ▲가까이 지내면서도 그의 집에는 한번도 가본적이 없다.부인이 있고 자녀가 2명 있다는 사실만 안다.내가 평양에 대사로 있을 당시 그의부인 이름은 손혜림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모스크바주재 대사 손성필과 친척인 것으로 안다.김정일은 자신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고 북한에서는 이것이 비밀사항으로 돼있다.그는 60년대초 부친을 따라 모스크바를 방문한 적이 있고 80년대 중반 북경에 간적이 있으나 그외 외국이라고는 나간 적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한때 동독 방문설이 있었으나 루머임이 확인됐다. ­아웅산 폭파사건,대한항공기 폭파사건,그리고 여러차례의 한국인 납치사건의 배후에 김정일이 있었다는 것이 정설로 돼있다.대사가 그의 성격등에 대해 잘못 알고있는 것 아닌가. ○소·동구 붕괴에 위기감 ▲솔직히 말해 그 사건들의 배후에 대해 나는 들은 것이 없다.한국에 적대적인 세력이 저지른 사건임은 분명하지만 당시 소련정보기관들은 추가정보를 전혀 얻지 못했었다.북한 정보기관의 소행이었더라도 그들의 속성상 비밀사항이 외부에 새나오지는 않는다. ­앞으로 김정일이 어떤 정책을 취할 것으로 예상하는지. ▲국내정책과 대외정책을 포함,모든 정책방향이 김일성생존시와 동일할 것으로 보면 된다.다소의 변화가 있더라도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고 본질적으로 동일할 것이다.지금 북한에서 정책을 바꾼다면 체제변화가 불가피하다.김정일은 소련,동구의 예를 지켜보았다.체제변화를 쉽게 용납지 않을 것이다. ­경제난 때문에 결국 정책변화가 불가피한 시기가 올것이라는 견해에 대해서는. ○김영주도 정일을 아껴 ▲북한은 폐쇄경제체제를 유지하고 있다.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라는 것은 사실이다.북한경제는 소련에 의존한 체제였는데 지금은 그 관계가 단절됐다.지금 러시아지도자들은 북한에 대해 강경한 정책을 취하고 있다.그러나 북한은 외부세계가 그들을 고립시킬수록 더 주체체제를 강화하는 특성이 있다.경제적으로 어려워도 그들은 살아간다.북한은 지금도 철저한 분배사회다.그래서 사회안정면에서 본다면 어쩌면 러시아보다 낫다고도 할수 있다. 예를들어 현재 러시아에서는 소비재가 상점에 넘쳐나지만 주민 90%가 이를 살 능력이 없어 불만이다.북한은 그렇지 않다.그들은 아예 가난하지만 주민 모두가 이를 참고 사는데 익숙해있다. 다시 말해 북한을 고립시키는 정책은 좋은 결과를 낳기 힘들다는 것이다.한국을 비롯한 서방세계는 북한의 개방을 유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물론 김정일은 한국과의 협력이 북한사회의 내부붕괴를 초래할 것이라는 점을 알기 때문에 신중하게 대응하겠지만 그들을 고립시키는 것보다는 이 개방을 유도하는 정책이 더 효과적일 것이다. ◎북,내부붕괴 우려 개방 신중/“주석,정일 매우 아껴… 부자관계 이상”/후처소생 평일은 대권 넘볼수 없다/김정일 나이들며 술적게 마시고 신중/김일성 항공여행 기피,척추통증 때문/80년대 중반에도 심장발작… 자연사 확실 ­삼촌인 김영주,이복동생 김평일은 개인적 야심이 없겠는가. ▲그들은 김정일과 같은 라인이라고 생각한다.나는 김영주와 아주 가까운 친구로 지냈다.그는 모스크바대학을 나왔는데 김정일을 매우 아끼는 것으로 느껴졌다.김평일은 후처소생이어서 어차피 북한사회에서 김정일과는 격이 다르다.김일성은 생전에 김정일내외,그리고 거기서 난손자들을 특히 귀여워하며 아꼈다. ○불만있어도 표현 못해 ­북한에 반정부,반체제세력이 있는가.김정일에 대한 군부의 충성은. ▲심각한 반대세력은 없다.인텔리겐차,교육받은 계층가운데 다소 불만이 있을 것이라는 점은 상식적으로 짐작할수 있는것 아닌가.그러나 어떤 사람이고 그런 생각을 드러냈다가는 엄청난 불이익을 당한다.조심해야 한다.따라서 사회전반에 질서가 유지되고 있다. 군부의 김정일 지지는 확고하다.오진우는 김정일의 젊은 시절 스승이었고 그를 아주 좋아한다.오진우가 언젠가 심한 교통사고를 당했을때 김정일이 직접 내게 찾아와 모스크바로 보내 치료를 받게 해달라고 부탁해 그렇게 해준일이 있다.후일 오진우와 술자리를 함께 했는데 그는 김정일과 내게 진심으로 감사했다.오극렬도 김정일을 매우 아끼는 사람이다. ­반정부 시위,주민들의 봉기가 일부 있었다는 얘기도 간혹 들리는데. ▲북한은 그런 일이 가능한 사회가 아니다. ­김정일의 여성편력이 널리 알려져 있는데 대사의 견해는. ▲물론 내가 그의 사생활을 다 안다고는 할수 없지만 그런 유의 얘기는 잘못된 정보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사회주의국가 간부들은 끝없이 밀려드는 일거리들로 숨돌릴 틈도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김정일이 오래전부터 실질적 국가경영을 맡아왔다고 볼때 방탕한 생활에 할애할 시간이 많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북한은 핵무기를 만들 능력과 의사가 있다고 보는가. ▲영변의 핵단지는 연구·훈련용으로 규모도 매우 작다.물론 핵폭탄을 제조할수 있는 인력과 기술은 갖고 있고 운반수단도 가지고 있다.그러나 핵폭탄제조에 필요한 플루토늄을 북한은 갖고있지 못한 것으로 알고있다.그들을 밀어붙이기 보다는 협력의 장으로 이끌어내기 위한 화해의 정책이 바람직하다고 본다.북한은 이론적으로는 핵무기를 만들 능력이 있지만 실제로 이를 현실화할 능력은 없다고 본다. ○핵탄 현실화 어려울것 ­대사의 평양근무 기간은 소련이 한국과의 관계개선을 모색하던 시기였는데 북한당국의 항의나 섭섭함의 표시는 없었는가. ▲공식적인 항의는 없었다.당시 소련지도부는 한반도의 평화를 원했다.그러나 그 방법에 있어서 북한정부와 차이가 있었다.우리는 국제사회가 모두 문을 활짝 열고 살아야 한다는 입장이었으나 북한은 주체사상을 고수했다.소련지도자들은 주체에 대해 반대했고 이것이 양국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그러나 북한당국이 주체사상을 굳이 고집하는 데는 우리로서도 별다른 대책이 없었다. ­가까이서 본 김일성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66년에 조·소 정상회담 ▲ 그가 취한 정책의 옳고 그름은 일단 논외로 하자.우선 분단,남북대치등의 어려운 상황에서 50년 가까이 집권한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블라디보스토크에서 있었던 브레즈네프와 김일성간 양자회담을 4시간 가량 지켜본 적이 있는데 그는 참모의 도움없이 회담을 잘 이끌어나갔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그런 회담이 있었다는 것은 금시 초문인데. ▲외교비밀인데 실수로 발설한 것 같다.66년 그런 회담이 열렸었다.당시 소원했던 양국관계 정상화를 위해 두 지도자가 비밀리에 만났고 그후 양국관계는 급속히 좋아졌다.양국관계사에 매우 중요한 회담이었다.이 자리에서 공식 협정체결 같은 것은 없었으나 주로 경제분야에서 많은 원조약속이 이루어 졌고 군사원조를 포함한 군사협력,기술지원 약속도 이뤄졌었다. ­공산주의,특히 북한 공산주의체제의 장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러시아에서는 70년이나 되는 실험이 실패로 돌아갔다.여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나는 사회주의가 지향하는 인간의 삶에 대해 지금도 신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그러나 북한이 하고있는 사회주의는 미래가 없다고 본다.전혀 없다.남한을 방문한 적은 없지만 체제경쟁에서 북한이 졌다.그러나 그들이 굳이 그렇게 살겠다면 그렇게 놓아두고 그들이 스스로 변화를 택할 때까지 도와줄수 밖에 없지 않은가.
  • 그라나다/알함브라 궁전(아랍서 지중해까지:11)

    ◎스페인 최후의 이슬람궁… 신비 가득/나자리왕조가 13∼14세기 건설… 빼어난 건축술­정교한 세공에 숨막혀 그라나다의 구시가 산타 안나 교회앞에는 세 갈래의 길이 있었다. 『알함브라?』 그러자 수염이 텁수룩한 신부님이 긴 소매 속에서 나온 창백한 손으로 언덕길을 가리켰다.세월과 사람들의 발걸음에 닦이어 빤질빤질 윤이 나는 언덕길에서 흘러내리는 빛의 물살이 다리를 휘청거리게 했다.어디서 어떻게 모습을 드러낼지 모르는 알함브라의 신비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길 양쪽으로 늘어선 옛날 집들은 지난날의 비밀을 삼킨 채 그 작은 창문들을 조가비처럼 닫고 있었다.오!벽이 익혀온 시간의 열매들이여. 1층의 연쇄상점들 앞을 지나노라니 캐스터네츠소리가 따다따다 귀를 즐겁게 했고,어둠침침한 어느 상점 안에서는 집시풍의 옷을 입은 여인이 부채로 일으킨 바람을 깊숙이 팬 앞가슴 사이로 밀어넣고 있었다. 휘어진 언덕길 끝에 울창한 삼나무숲 사이로 뚫린 또다른 길이 포개질 듯 기다리고 있었다.서늘한 바람이 계곡속에 숨어 있는 여울물소리를 실어왔다.그 소리가 구르는 듯한 기타 선율로 바뀌면서 알함브라의 슬픈 역사에 젖어들게 했다. ○이사벨여왕에 패퇴 알함브라는 「붉다」는 뜻으로 그라나다 동쪽 언덕에 위치한 무어족의 귀족행정도시의 이름이었다고 한다.13세기에 나자리왕조의 시조인 알 아마르가 자신의 왕궁을 그곳에 지음으로써 그것이 찬란한 알함브라역사의 시초가 되었다.주건물의 대부분은 요세프1세(1353∼1391년)와 그의 아들 모하메드 5세시대에 지어졌고,부분장식들은 레콩키스타(7세기부터 이베리아반도에 유입해온 회교도들이 점거하고 있던 국토를 기독교도들이 되찾기 시작한 운동)의 폭풍에 휘말리면서도 계속되었다.미구에 떠나야 할 것을 예감했기에 왕들은 자신들의 자취로서 아름다움을 그 땅에 영원히 심으려 했다. 이사벨여왕과의 싸움에서 패한 최후의 왕 보아부달은 왕궁을 떠나 시에라네바다의 험준한 고갯길에서 궁전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한편 이 왕궁을 접수한 기독교도들은 그곳을 예배당으로 활용하는 한편 이사벨여왕의 손자인 카를로스5세는 궁전안에 르네상스양식의 또다른 궁전을 건축했다.이를 두고 그라나다 출신의 명상시인 가르시아 로르카는 「알함브라궁전은 자신의 내부에 카를로스5세가 있음을 느끼지 못한다」고 안타까워했다. 경사가 가파라질수록 길은 삼나무숲 깊숙이 파고드는 듯 하더니 갑자기 하늘이 파랗게 열리는 곳에 붉은 성벽과 「심판의 문」이 우뚝 솟아 있었다.말발굽모양의 아치에는 코란 5계명을 나타내는 손가락이 조각되어 있었다. 알히베스광장에 쏟아져내리는 햇빛은 눈부시다 못해 얼어붙는 듯 소름이 끼쳤다.짙은 나무그림자에 돌바닥이 검게 패어 있었다.검은 고양이 한마리가 제 몸보다 더 검은 그림자를 끌고 카를로스5세 궁전 담밑을 따라 모퉁이로 사라졌다. 성채·왕궁·정원·여름별장으로 분리해서 파는 입장권 4장을 샀다.그리고 먼저 궁전의 심장부로 들어가는 첫관문인 메사르홀로 들어섰다.이곳은 기독교도들이 접수한 뒤 예배당으로 활용되면서 기독교식 건축물로 개조되어 본래의 모습이 많이 파괴되었으나 아랍식 문양이 정교하게 세공된 대들보만으로도 그 빼어난 솜씨에 도취되기에 충분했다. 왼쪽의 아치문을 지나 아리야네스(천인화)중정으로 들어갔다.장방형의 긴 못이 중앙에 있는 안달루시안 아랍식 안뜰.속세와 차단된 묵중하고도 투명한 정적이 감돈다.하늘·도금양나무·뜰을 둘러싼 건물의 아치문과 기둥들이 수조의 조용한 물속에 잠겨 행복하고도 덧없는 꿈에 취해 있다.빛과 그늘까지도 그 행복한 꿈에 녹아들어 있다.무엇이 이 꿈꾸는 물의 성채를 침범할 수 있을까.문은 모두 열려 있으나 들어갈 방법을 알지 못하는 세계. ○중앙엔 사자상 분수 왕의 접견실인 대사의 방과 코마레스탑에서 라이온궁전으로 발길을 옮기노라니 등뒤에서 어떤 문이 닫히는 느낌이었다.마치 누군가 되돌아갈 길을 막아버리는 것 같았다. 촛대처럼 가느다란 1백24개의 대리석 기둥들이 떠받치고 있는 장방형 회랑으로 들어섰다.햇빛이 눈을 시리게 하는 뜰의 중앙에 열두마리의 사자에게 둘러싸인 하얀 대리석 분수에서 물줄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이곳은 오직 왕 한사람만 드나들 수 있는 하렘이었다.건물 2층에는왕의 후궁들이 거처했다. 그 옛날 왕족인 아벤세라헤스가문의 한 남자가 하렘의 여자에게 접근한 것이 발각되어 목이 잘린 뒤 그 목이 방의 중앙 분수대 위에 놓여져 목에서 흘러내린 피가 사자의 분수대까지 흘러왔다고 한다. 회랑천장의 정치한 세공으로부터 간신히 눈길을 돌려 자매의 방에 들어섰을 때였다.숨이 턱 막히는 현란한 아름다움 속에 깊숙이 갇혀버리는 것 같았다.벽을 따라 천장까지 미끄러져 올라간 눈길 끝에는 신기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사실 난 이러한 아름다움과의 대면을 두려워해왔다.릴케의 「비가」 중에는 「아름다움이란 우리가 가까스로 견딜 수 있는 무서움의 시작에 불과하므로/우리가 아름다움을 그토록 찬미함은 파멸하리만큼 아름다움이 우리를 멸시하기 때문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파르탈정원을 뒤로 하고 처녀의 탑 앞에 이르른 나는 더이상 발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회랑에 놓여 있는 의자에 주저앉았다.마음 깊은 곳에 상처를 입은 것 같았다.여기 이 자리에서 나이팅게일의 노래를 들으며 생을 마감해도 좋으련만…나에게 있어 알함브라와의 만남은 깊은 상처로 남겨졌다.호텔로 터덜터덜 돌아가 다시 너절한 일상과 마주할 일이 버겁기만 했다. 5월3일,지도조차도 던져버리고 혼자서 호텔을 나섰다.알함브라궁전의 코마레스탑에서 바라본 건너편 산기슭의 하얀 동네를 찾아갈 참이었다.그곳은 아랍인 거주지역으로서 길들이 미로처럼 얽혀 있어 이방인은 길을 잃기가 십상이라고 한다.일을 저질러보려는 내게 그 미로는 너무나 매혹적인 구실이었다. 택시는 나를 산 니콜라광장에 내려놓고 돌아갔다.조약돌이 다닥다닥 박혀 있는 뜰의 돌벤치에 앉아 관광기념품을 팔고 있는 집시아주머니가 캐스터네츠를 치며 다가왔다.그녀에게서 캐스터네츠 치는 법을 10분쯤 배우고 나서 하나를 샀다. 광장에서 건너다 보이는 알함브라궁전의 전경이 슬프도록 아름다웠다.시에라 네바다산의 눈 덮인 흰 능선이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궁전을 감싸고 있었다.서양남자가 광장 한켠에서 이젤을 세워놓고 그 전경을 화폭에 담고 있었다.축대를 걸터듬고 앉아 알함브라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한시간 남짓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친듯이 미로 헤매 니콜라교회를 끼고 오른쪽으로 돌아간 곳에 카르멘이라는 정원을 가진 고급저택이 있었다.우체통구멍으로 들여다본 그 집의 파티오엔 핏빛처럼 붉은 칸나꽃이 가득했다. 벽과 벽 사이의 좁은 미로에서 아랍인의 혼이 스며나와 내 손을 잡아끄는 듯했다.이곳의 옛주민들은 레콩키스타로 그라나다가 기독교인들에게 함락되었을 때 최후까지 저항하여 흰 벽과 돌길이 붉은 피로 물들었다고 한다. 방향을 알 수 없을만큼 미로 깊숙이 들어온 듯했다.혼자뿐인 길 위에 어디선가 발소리가 들려왔다.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다보았다.흑단처럼 검은 머리를 반듯하게 빗어넘기고 검은 진바지에 흰 티셔츠 차림의 여성이 저만큼서 걸어오고 있었다.무심히 바라본 그녀가 지난밤 넵튠이라는 극장식 타블라오에서 만난 플라멩코 무희라는 것을 알아본 순간,나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여러 무희들 중에서 오직 그녀만이 나를 사로잡았다.그녀의 춤에서는 격정과 비애가 동시에 교차하고 있었다.폭발하듯 솟구치는가 하면 검으로 자르듯 끊어지며 다시 폭발하고… 어느 순간 나는 저 춤속에 빠져 죽고 싶다고 생각했다.그것이 그라나다에서 경험한 두번째 마음의 죽음이었다. 그녀가 내 앞에까지 걸어왔다. 『잠깐,당신은 무용수지요』 그녀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어저께 당신의 춤을 봤어요.나는 플라멩코에 대해 아는 것이 없지만 깊이 매혹됐어요.특히 당신의 춤에』 『고맙습니다』 그뿐 우리는 더이상 할 말이 없었다.그녀를 붙잡는 대신 나는 다른 미로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얼마쯤 가노라니 마음이 미어지는 듯 아팠다.몸을 돌이켜 다시 그 장소로 달려가보았으나 그녀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사방으로 뚫려 있는 미로 가득히 닫혀 있는 문들뿐이었다.미친듯이 미로를 헤매었으나 나는 어느 문을 두드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눈을 가린 채 손을 맡기고 어디론가 따라가던중 갑자기 손을 놓아버린 것이다.왜 그랬을까.하지만 여행이 끝난 지금도 나는 여전히 그녀를 찾고 있다.그녀의 이름은 스텔라다.
  • 이,「신포고령」 파문 확산/내무,법안폐기 총리에 촉구

    【로마 로이터 연합】 로베르토 마로니 이탈리아내무장관은 16일 부패혐의자에 대한 치안판사의 체포권한을 다시 복권시키지 않는다면 사임하겠다고 말함으로써 이탈리아정가에 새로운 정치쟁점으로 부상했다. 부패척결의 선봉에 선 북부 리그출신의 마로니장관은 수뢰와 부패혐의등 일련의 범법혐의자들이 과거와는 달리 예방차원에서 수감되지 않아도 되게끔 조정된 신포고령이 수정이 아니라 완전히 폐기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만약 실비오 베를루시코니총리가 이를 수락치 않는다면 사임하겠다고 밝혔다.
  • “북한붕괴 사실상 시작됐다”/아르바토프(특별인터뷰)

    ◎김정일 권력 잡지만 결국 몰락할것/주민들 외부와 교감땐 변화 불가피 □아르바토프 약력 ­1923년 우크라이나 공화국서 출생. ­소련 육군사관학교 출신 장교로 제2차 세계대전 참전. ­모스크바국제관계연구소서 역사학 박사 학위 받음. ­고르바초프 외교참모 역임. ­소련과학원 정회원. 김일성 사후 북한의 장래는 어찌 될 것인가.독재자의 죽음 뒤에 그 체제의 몰락이 오게 돼있는 것은 스탈린 등의 예에서 보듯 필연적이나 김정일의 권력 승계까지는 일단 순조롭게 이루어지리라는 것이 러시아의 게오르기 아르바토프 미국·캐나다연구소장의 견해다.북한의 내부사정에 정통한 그를 이기동 모스크바 특파원이 인터뷰했다. ­김일성 사후 북한의 변화방향에 대해 여러가지 가설들이 제기되고 있다.변화가 일어난다면 그 폭과 속도는 과연 어느 정도일지.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동구의 변혁과정을 북한에 곧바로 대입할 수는 없다.극단적인 예로 루마니아의 경우를 비교해 보자.그곳에서는 독재자 차우셰스쿠에 반대하는 큰물결이 선행됐다.그것은 반혁명에 가까운 것이었다.그러나 김일성은 단순히 노령으로 죽었다.그리고 오랫동안 자신의 죽음을 준비해 왔다.오래 전부터 자신의 아들에게 권력이양 준비를 차근차근 해두었다.물론 정부내에서 몇가지 갈등이 있을 것이지만 적어도 최고권력은 순조롭게 김정일에게 넘어갈 것이다. ­김일성이 죽은지 수일간의 평양 분위기를 보면 주민들이 진정으로 이 지도자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이런 것을 보더라도 김정일이 자기 부친의 정책을 급격히 바꾸려들지는 못할 것같은데. ▲평양의 애도분위기는 솔직히 묘한 데가 있다.설사 김정일의 반대세력이 있다 하더라도 지금같은 분위기에서는 다른 생각을 하기 힘들 것이다.확실히 북한은 독특한 나라이다.여기에는 아시아 국가들이 지닌 독특한 전통도 분명 작용한다고 생각한다.그러나 한가지 명심해야할 것이 있다.체제에는 문화적,전통적 관습을 뛰어넘는 그 자체의 보편적 논리가 있다는 것이다.예를 들어 모택동 사후 중국을 보자.당시 서방 전문가들 사이에선 유교적인 가부장 전통과 모택동이 생전에 누린 독특한 카리스마 때문에 그의 사후 중국에서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기는 힘들 것이라는 분석이 우세했다.그러나 모의 유지를 이어받은 소위 4인방의 운명이 어떻게 됐나.그후 지금까지 계속돼온 등소평의 개혁정책을 보라. ­북한에서도 변화는 필연적으로 일어난다는 이야기인가. ▲이런 체제의 논리는 독재국가일수록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전체주의 체제의 국가경영방식은 역피라미드를 연상하면 된다.제일 아래쪽에 최고지도자 1인을 기반으로 하고 그가 내리는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모든 국가조직이 그위에 존재한다.제일 아래쪽 최고지도자가 사라지면 그위의 모든 조직은 필연적으로 무너지게 돼있다.알렉산더 대왕 이후 마케도니아왕조의 몰락,가까이는 1956년 헝가리에서 최고지도자 사후 몰려온 변혁의 소용돌이,체코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소련에서도 스탈린이라는 독재자가 죽은 뒤부터 사실상 몰락의 과정이 시작됐다. ­스탈린체제의 소련과 김일성의 북한체제의 비교는 북한의 장래를 점쳐보는데 유용한 잣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스탈린 사후 모스크바의 애도분위기는 지금 평양보다 더 애절했다.정치범 수용소(굴락)의 수감자들이나 이 독재자의 죽음을 기뻐했지 일반국민들은 그에게 마지막 조의를 표하기 위해 시신이 안치된 곳으로 수백만명이 몰려들었다. 경찰과 군대가 동원돼 질서를 유지하려 했지만 결국 수백명의 압사자까지 생겼었다.그러나 그가 죽은 뒤 불과 2년이 지나면서부터 언론에 그에 대한 비판기사가 실리기 시작했다.그리고 3년뒤 제20차 당대회에서 흐루시초프가 역사적인 스탈린 비판연설을 했다.이 당대회에서 스탈린은 거의 범죄자 취급을 받았다. 김일성은 거의 절대적인 전체주의 체제를 북한에 세웠다.그는 자기의 권좌를 유지하기 위해 정적은 물론 조금이라도 이견을 말하는 사람은 가리지 않고 제거했다.이를 위해 심지어 동족전쟁까지 감행했다.국민들은 외부세계와 완전 격리됐다.북한의 변화는 그곳 주민들이 외부세계와의 교감을 시작하고 국민들이 보다 자유롭게 사고하기를 배우는 순간 체제발전의 논리가 작동을 시작할 것이다. ­북한은 김일성 장례후 미국과의 고위급회담을 재개하겠다고 했다.이를 김정일을 중심으로 한 새 지도부가 외부세계와의 관계발전에 주도적으로 임할 것이라는 징조로 풀이할 수 있는지. ▲만약 새 지도층 내부에 변화를 주장하는 세력이 있어 권력내부에 갈등을 유발시키고 이들의 목소리가 힘을 얻는다면 자연적인 체제발전 과정이 촉진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 새지도부는 단기적인 과제로는 경제개선,고립탈피,핵문제의 종식,남한과 정상회담 개최등에 착수할 수 있을 것이다. ­김일성 사후 러시아는 북한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있는가. ▲솔직히 말하면 러시아는 새북한의 변화에 대해 어떤 구체적인 정책프로그램도 갖지 않고 있다. 경제난,군사개혁등 산적한 국내문제 때문에 한반도문제에 깊이 신경쓸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한반도 문제와 관련한 러시아 정부의 최근 입장은 한반도 문제를 포괄적으로 다루기 위한 국제회의를 열자는 것이다.하지만 우리가 지금도 이 주장을 고집하는지 북한이 이를 받아들이는지는 확실치 않다. ­한때피살설,정변설등 김일성의 죽음과 관련,여러 소문들이 나돌았는데. ▲그의 죽음과 관련된 의혹들은 잘못된 정보라고 본다.그는 오랫동안 심장질환을 앓았고 누구든 그 정도의 고령이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것 아닌가. ­남북정상회담등 남한과의 관계개선도 북·미회담과 같은 맥락에서 계속 추진될 것으로 보는지. ▲권력내부에 갈등만 없다면 남한과의 대화는 조만간 재개될 것이다.새 지도부는 전세계를 상대로 남한과 대화할 의사가 있다는 것을 과시할 필요가 있다고 느낄 것이다.역사적으로 볼때 새지도자는 국민들에게도 새것,변화,과거와는 다른 희망을 심어주고 싶은 의욕을 갖는 게 순리이다.그것이 대외정책에도 나타날 수 있다. ­군부의 역할이 변수가 될 것으로는 보지 않는지. ▲스탈린 사후 군은 당·KGB·군지도부에 절대복종을 맹세했다.북한의 군도 지금 똑같은 상황이다.특히 김일성은 군대를 거의 완벽하게 통제했다.돌발사고가 없는한 군내부에서 반대세력이 표면화하기는 힘들 것이다. ­새 북한지도부가 핵게임을 계속할 것으로 보는지. ▲그러기는 힘들 것이다.다른 할일이 많기 때문이다. 흐루시초프는 스탈린이 죽고 권좌에 오른지 몇개월 뒤 곧바로 주민복지를 개선시키기 위해 대대적인 사업을 펼쳤다.전국에 값싼 아파트를 건설했고 국민연금도 6배로 올려주었다.무언가 새것,좋은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물론 김정일이 자기 아버지가 고수해온 노선을 하루아침에 비난하거나 뜯어고치려고 나서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독제체제의 발전논리로 본다면 새정책은 불가피하다.더구나 북한은 경제난이 극도에 달했고 그로 인한 사회적 불만이 팽배해 있다.북한도 결국은 예외가 될 수 없을 것이다.
  • 장례위원장이 후계자 유력/공산국가 권력승계 사례

    ◎절대권력자 죽음 철저히 비밀에 부쳐/지도자간 권력안해 합의뒤 “사망” 발표 김일성 북한주석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후계자가 누가 될 것인지에 대해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북한은 공산국가중에서도 유례없는 세습체제를 도입한 나라인데다 김정일 후계체제에 대한 반발도 꽤 있는 것으로 전해져 있다.더욱이 옛 소련의 붕괴로 절대독재권력을 휘두르던 공산국가들이 사실상 사라진 지금 북한은 유일하게 「철의 장막」이 걷히지 않은 나라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의 경우는 과거 소련이나 중국·베트남 등 공산국가들과는 여러 분야에서 다른 측면들이 있는게 사실이다.그러나 이들 국가의 권력승계 과정이 북한 내부사정을 추측하는데 참고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과거 공산독재국가의 경우 절대권력자의 죽음은 우선 비밀에 부쳐지는 것이 일반적인 예였다.지도자의 죽음에 따른 혼란을 막기 위해 철저한 비밀 속에 몇몇 지도자들이 모여 후계자 문제 등에 관한 사후 권력안배에 대한 합의를 마친 뒤에야 사망 사실이 발표됐던 것이다. 이같은 예는 스탈린이 사망했을 때부터 흐루시초프나 브레즈네프,안드로포프 등으로 이어지는 옛 소련의 지도자들의 죽음에서 두드러진다. 스탈린은 1953년3월5일 뇌출혈로 사망했다.스탈린의 후계자리를 놓고 치열한 권력다툼을 벌이던 베리야,말렌코프,몰로토프는 아무도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하지 못해 3명이 함께 집단지도체제를 형성했다.그러나 이들 3자간에 3두체제가 합의될 때까지 스탈린의 사망소식은 베일 속에 가려져 있어야만 했다.베리야가 3개월만에 스탈린 개인숭배와 관련,체포·처형됨으로써 집단지도체제가 막을 내리게 됐다. 브레즈네프가 죽었을 때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브레즈네프는 82년11월10일 사망했는데 그의 후계자리를 놓고 막후에서 치열한 경합을 벌이던 안드로포프와 체르넨코의 권력다툼에서 소련비밀경찰(KGB)의 막강한 힘을 등에 업은 안드로포프가 국장위원장에 선임돼 후계자의 위치를 사실상 확정한 11일에야 사망소식이 발표됐다.김일성주석의 경우와 같이 사망 하룻만에 발표된 것이다. 중국 모택동의 경우도 사망발표까지 걸린 시간이 조금 짧다는 것을 제외하면 크게 다르지 않다.모는 76년9월9일 사망했는데 그의 사망 발표는 사후 16시간만에 이뤄졌다.중국은 모의 사망을 발표하면서 장례위원회의 위원장으로 화국봉이 장례위원장을 맡는다고 발표했다. 모택동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거의 주목을 끌지 못했던 화국봉은 장례위원장을 맡는다는 발표와 함께 주목을 받기 시작,끝내는 모택동의 뒤를 잇는 중국의 지도자로 선정됐다.이는 브레즈네프의 장례위원장직을 맡았던 안드로포프가 체르넨코를 밀어내고 소련의 실권을 잡게된 것과 마찬가지다. 화국봉이나 안드로포프의 경우에서 공통되는 점은 이들 국가에서 절대권력을 가진 지도자의 후임으로 장례위원장을 맡는자가 유력한 후보로 부상했다는 것이다.이같은 점은 북한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과거 소련이나 중국에서와 같은 권력승계 과정이 북한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가정한다면 김일성주석의 사망을 발표하면서 김주석의 장례위원장직을 그의 아들 김정일이 맡는다는 북한당국의 발표는 앞으로 북한의 진로를 추측하는데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이는 김일성주석이 생전에 그토록 다져오려고 노력한 후계세습을 북한지도부가 받아들였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이는 또 김정일이 김일성주석의 후계자 자리를 굳히는데 있어 북한내부의 반발을 이미 극복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북한 자체로서는 너무도 큰 충격일 수 밖에 없는 김일성주석이 사망한지 불과 하룻만에 북한내부에서 김정일체제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면 이는 김일성 사후체제에 대한 북한내부의 준비가 생각보다도 훨씬 많이 이뤄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김주석의 사망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대외정책에는 큰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소식은 이같은 북한의 준비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북한의 권력승계 절차/국가 주석 최고인민회의서 선출/총비서는 당중앙위 전체회의서/장례끝난뒤 소집… 공식 추대할듯 북한 김일성의 사망에 따라 김정일의 권력승계 절차가 관심이 되고 있다. 권력승계가 확실시 되는 김정일이 김일성으로부터생전에 물려받지 못한 직책은 노동당 총비서 및 국가주석이다.이같은 2개 직책중 당총비서는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통해,그리고 국가주석은 최고인민회의에서 선출토록 규정하고 있다.당규약 제24조에는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해당시기에 당이 직면한 중요문제 등을 토의,결정하며 당중앙위원회 정치국과 정치국 상무위원을 선거한다.또 당중앙위원회 총비서와 비서를 선거하고 당중앙위원회의 비서국과 군사위원회를 조직한다」고 명시돼 있다.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6개월에 1회이상 소집토록 되어 있고 가장 가깝게는 지난해 12월 6기 21차 전원회의가 열렸다.그리고 최고인민회의의 권한을 명시한 사회주의 헌법 제91조5항을 보면 최고인민회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을 선거 또는 소환한다」고 규정 돼 있다.따라서 북한은 김일성의 장례절차가 끝난 직후 당전원회의와 최고인민회의를 소집, 김정일을 당총비서와 국가주석으로 추대할 것으로 예상된다.다만 이번의 경우는 김일성의 돌연한 사망에 따라 이같은 절차에 관계없이 김정일이 김일성의 권한을 사실상 대행할 것으로 관측 되고 있다.
  • 대륙연,「안중근 기념농장」 새달 5일 기공

    ◎삼강평원 개발 “대역사 시동”/1억1천만평… 여의도의 1백30배/96년 완공,중국과 백40년 공동경영/연간 콩7만t·밀 13만t 생산… 국내도 반입 중국의 흑룡강성 삼강평원에 여의도 면적의 1백30배나 되는 대규모 농장이 우리나라와 중국의 합작에 의해 개발된다.조국의 광복을 꿈꾸며 우리의 독립투사들이 「말 달리던」 대평원에 중국 사람들과 손잡고 농사를 짓게 되는 것이다. 대륙연구소 및 대륙종합개발주식회사 장덕진 회장은 25일 기자회견을 갖고 『흑룡강성 농업개발건설 총공사와 합작으로 삼강평원에 농장을 개발하기로 합의하고 오는 7월5일 현지에서 기공식을 갖는다』고 밝혔다. 삼강평원은 백두산 천지에서 발원한 송화강과 중국이 발원지인 흑룡강 및 우수리강 등 3개의 강이 만나 이뤄진 평원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10㎞를 달려도 지면의 높낮이 차이가 1m 밖에 안되는 대평원으로,과거 일본도 이 곳을 왕도락토라 부르며 개발을 추진하다 포기한 세계 3대 흑토지대에 속하는 비옥한 땅이다. 오는 96년 완공을 목표로 하는 삼강평원 농장의 면적은 3만8천㏊(1억1천4백만평)로 우리나라의 해외 농업투자 중 가장 큰 규모다.올해에는 1만3천㏊를 개발한다. 대륙종합개발과 흑룡강성 농업개발건설 총공사가 절반씩 투자하며 총 투자규모는 2천8백54만달러(2백28억원)다.총 투자액 중 1천8백76만달러는 차관으로 조달한다. 농장의 이름은 「안중근 기념농장」으로 정했으며,개발이 끝날 무렵엔 흑룡강성이 제공하는 대지에 안중근 기념관도 세운다. 합작기간은 중국법에 따라 우선 70년으로 하되,양측은 최소한 1백40년 이상을 공동으로 경영하기로 했다.평당 개발비는 1백67원으로 우리나라의 평당 농지 개발비인 1만5백90원의 50분의 1 정도다. 농장에는 10∼20m의 폭으로 1천4백96㎞의 배수로와 대당 25만평에 물을 줄 수 있는 최신식 원형 스프링클러가 설치된다.농장 안의 교통 및 수송을 위해 총 연장 2백41㎞의 도로와 1백20회선의 유선 및 무선 최첨단 통신설비,1천㎾ 용량의 변전소도 건설된다. 노동력은 흑룡강성에 사는 동포 45만여명과 흑룡강성 부금시 관내의 42만 인구 및 삼강평원 내 54개 기존 농장의 인력을 활용할 계획이다. 개발이 끝나면 우리나라가 거의 수입에 의존하는 콩과 밀을 재배하는데,대륙종합개발은 연간 생산량을 콩 7만t과 밀 3백93만t으로 추산하고 있다.우리나라의 수입량(92년)은 콩의 경우 1백23만1천t,밀 3백92만6천t이다. 생산량의 50%는 우리나라나 제 3국에 수출할 수 있고,농기계·비료·농약·비닐 등의 소요 자재도 우리나라에서 우선 구매한다. 대륙종합개발은 농사를 본격적으로 짓기 시작하면 차관의 원리금 상환기간(20년)에는 연간 3백2만달러,상환이 끝난 뒤에는 5백52만달러의 수익을 올릴 것으로 보고 있다.수익금은 흑룡강성 농업개발건설 총공사와 절반씩 나눈다. 이밖에도 우리 기업이 흑룡강성·요령성·길림성 등 중국의 동북 3성에 진출하는 교두보 역할을 하고,한·중간의 협력 증진에도 큰 영향을 끼칠 전망이다. ◎장덕진 대육연구소회장 인터뷰/동북아경제권 형성 주춧돌역할 확신/여생바쳐 개발… 죽으면 농장에 묻힐터 『선조들의 숨결이 어려있고 삶의 터전이었던 광활한 땅이라 감회가 큽니다』대륙연구소 장덕진회장(전 농림수산부장관)은 『농장이 10년안에 동북아 경제권을 형성하는 데 주춧돌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남의 나라인데 잘 될까요. ▲가장 중요한 점은 농작물이 계획대로 생산되느냐 하는 것이고,그 다음은 중국에서의 행정적인 문제입니다.우리농장 바로 옆에 중국에서 가장 큰 「우의농장」이 있는데,지난 56년에 흐루시초프가 중국의 식량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 건설한 것입니다.40년 뒤에 개발하는 우리 농장은 각종 첨단시설을 도입하는 데다 인원도 5백여명으로 훨씬 적기 때문에 생산성이 훨씬 높습니다. 또 중국은 모든 것이 법과 제도만으로 해결되는 나라가 아니지만,제가 흑룡강성 부금시의 명예시장과 경제고문을 맡고 있기 때문에 추진 과정의 문제점은 수시로 협의가 가능합니다. ­투자는 얼마나 이뤄졌습니까. ▲우리와 흑룡강성 농업개발건설 총공사가 이미 5백만달러씩 1천만달러를 출자했습니다.나머지 투자액 중 75%는 우리가 차관으로 조달하는데,이 중 1천2백만달러는 수출입은행에서 경협자금으로 5년거치 10년상환에 연리5%로 제공합니다. ­중국의 또 다른 지역에 개발할 구상은 없습니까. ▲농작물의 부가가치를 높이기 위해 흑룡강성 부금시에 오는 96년까지 대두박과 사료 및 제분공장을 세울 계획입니다.여생을 농장을 가꾸는 일에 몰두하다,죽으면 삼강평원 농장 뒤편에 마련해 둔 자리에 묻힐 생각입니다.
  • 브라질 “최악의 연쇄살인”/상파울루서 주말 42명 총기 피살

    【상파울루 로이터 연합】 브라질의 상파울루시에서 11일밤과 12일 사이에 연쇄집단 총기 살해사건으로 21명이 숨지는 등 지난 주말 42명이 피살되는 최악의 살인사태가 발생했다. 총기로 피살된 희생자들은 특히 대부분 바닥에 일렬로 엎드려 머리에 손을 얹은채 머리에 총을 맞아 숨지는 등 처형방식으로 살해됐다. 이 살해현장에서는 한 희생자가 품고 있던 생후 5개월의 유아만이 극적으로 살안 남았다.
  • 푸슈킨시 낭송에 모스크바대생 환호(김 대통령 방북여로)

    ◎“한·러 개혁 동반… 21세기 아태 이끌자”/“해국풍습 간직 감명” 위민지원 다짐 김영삼대통령은 모스크바 출발을 하루 앞둔 3일(이하 현지시간) 모스크바주재 한국특파원들과 조찬간담회를 가진뒤 모스크바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고 러시아 각계 인사들과 잇따라 만나는등 바쁜 일정을 보냈다. ▷모스크바 교민리셉션◁ ○…김대통령과 부인 손명순여사는 이날 하오 모스크바에서의 사실상 마지막 일정으로 프레지던트호텔에서 열린 현지 교민들을 위한 리셉션에 참석. 약1백80명의 교민들이 참석한 리셉션장에 도착한 김대통령은 행사장을 돌며 참석인사들과 인사를 나눈뒤 헤드테이블에 앉아 동석자들과 잠시 환담. 이어 정흥식연방하원의원(43)이 교민들을 대표해 김대통령의 러시아방문을 환영한다고 인사.정의원은 러시아이름이 「정 유리 미하일로비치」로 사할린 출신이며 현재 지역구는 시베리아의 이르쿠츠크. 연설에서 김대통령은 지난 89년과 90년 소련방문 때는 외교관계가 없어 어려움이 많았고 교민들도 마음대로 만날 수 없었다고 소개하고 『오늘 민주국가로 다시 태어난 러시아의 국빈으로 이곳에 오게되어 참으로 감회가 깊다』고 소감을 피력. 김대통령은 또 『교포사회가 여러가지 역경에도 불구하고 100년이 넘는 동안 한국의 문화와 풍습을 간직하고 있는 것에 감명을 받았다』고 말하고 『대한민국이 여러분의 든든한 후원자가 될 것』이라고 교포사회에 대한 지원을 다짐. ▷공식환송식◁ ○…김대통령 내외는 이날 하오4시30분 크렘린궁을 방문,옐친대통령내외의 공식환송을 받고 모스크바에서의 공식일정을 마무리. 김대통령내외는 승용차편으로 팡파르가 울리는 가운데 크렘린궁에 도착해 현관에서 쉐브첸코 러시아의전장의 영접을 받고 환송식이 열린 게오르기예프스키홀에 입장. 홀 중앙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던 옐친대통령내외는 김대통령내외가 들어오자 반갑게 악수를 나누었으며 양국정상들은 나란히 서서 기념촬영. 이어 양국국가가 연주됐고 김대통령내외는 쉐브첸코의전장의 소개로 러시아측환영인사들과,옐친대령내외는 신두병의전장의 소개로 우리측 수행원들과 작별인사.15분동안의 공식환송식이 끝나자 양국정상내외는 홀 입구에서 악수로 아쉬운 작별인사를 교환. ○…김대통령은 이날 공식환송식 참석직후 다닐로프수도원을 방문,러시아정교의 알렉세이대주교와 20여분동안 환담. 김대통령은 이어 수행원 숙소인 프레지던트호텔에서 옛소련의 대표적 반체제인사인 사하로프박사의 미망인 일레나 보네르여사를 접견. ▷한·러경제인오찬◁ ○…김대통령은 이날 낮 러시아의회와 정부및 경제계지도자와 양국 기업인등 80여명을 메트로폴호텔로 초치,오찬을 나누며 미래지향적 경제협력관계를 강조. 김대통령은 이날 「한·러 경제협력의 새로운 도약을 위해」라는 제목의 오찬사에서 『양국이 정치·사회뿐 아니라 경제분야에서 추구하고 있는 변화와 개혁은 냉전종식과 UR타결이후 새로이 형성되고 있는 국제질서속에서 공동번영할 수 있는 초석이 될 것』이라고 역설. 김대통령은 『양국은 90년 수교이후 교역과 투자가 꾸준히 증가하면서 경제협력형태도 과학기술협력,자원협력,건설협력 등으로 다양화되고 있다』면서 『그러나우리는 결코 이 정도 결과에 만족해서는 안되며 한차원 높은 협력을 위해 노력하자』고 강조. 김대통령은 두나라 경협에 대해 『바로 눈앞에 있는 조그만 이익보다는 장기적이고 미래지향적 협력관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보다 큰 이익을 중시해야 한다』면서 『21세기를 내다보면서 인내를 갖고 당면과제를 하나 하나 풀어갈때 비로소 경제협력이 결실을 볼수 있다』고 상호보완적인 협력관계를 강조. ▷모스크바대 학위수여식◁ ○…모스크바대학에서 이날 낮 명예정치학박사학위를 수여받은 김대통령은 학위수여를 기념하는 「새로운 문명을 향하여 자신과 용기를」이란 제목의 연설을 통해 『양국 청년들이 우정과 협력을 통해 유러시아협력의 아름다운 가교를 건설해달라』고 소망. 사도브치총장으로부터 소개를 받고 단상에 오른 김대통령은 『한국국민들은 톨스토이의 인도주의에 감명받고 있고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을 통해 러시아 국민과 예술적 영감을 함께 나누고 있다』고 러시아 문화 칭송으로 연설을 시작. 김대통령은 『본인이 어려울때마다 러시아의 위대한 국민시인 푸시킨의 시를 낭송했다』면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지 마라.성내지 마라.설움의 날을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옴을 믿어라』라는 싯구를 인용하면서 이날 연설을 마쳐 학생들로부터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연설을 마친 김대통령은 대학측이 마련한 리셉션장에서 대학관계자들과 잠시 환담. 사도브니치총장은 『김대통령의 방문은 모스크바대학사에 새로운 페이지를 장식하는 것』이라고 환영의사를 표현. ▷모스크바시장접견◁ ○…김대통령은 이날 상오 숙소인 영빈관에서 유리 루시코프 모스크바시장을 접견. 김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방문동안 모스크바 시민들이 보여준 환대에 감사의 뜻을 표시. 김대통령은 『역사와 문화의 도시인 모스크바를 방문할 때마다 매번 새로운 느낌을 받지만 세번째 방문인 이번에는 특히 모스크바 거리 곳곳에 넘쳐있는 생동감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면서 『새롭게 태어나고 있는 러시아와 신한국은 앞으로 좋은 동반자가 될 것』이라고 인사. 루시코프시장은 『모스크바에 대한 김대통령의 각별한 애정에 감사한다』면서 『김대통령의 이번 방문이 두나라의 우의와 신뢰를 깊게 하는 전기를 마련했다』고 답례. 루시코프시장은 모스크바시는 물론 연방정치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친옐친계 실력자로 매년 모스크바강에서 펼쳐지는 겨울수영에도 빠짐없이 참가한다고. 김대통령은 이어 노벨물리학 수상자로서 러시아 과학아카데미산하 일반물리연구소장인 알렉산드르 프로코예프박사를 접견하고 양국의 과학기술발전과 협력문제에 관해 환담. 알렉산드르 프로코예프박사는 올해 78세로 60년대말 레이저 분야 연구로 노벨상을 수상했으며 한국과의 과학기술협력문제에 적극적인 세계물리학계의 거물. ◎한국어학습 둘러보며 격려 ▷손여사 한국학교방문◁ ○…대통령부인 손명순여사는 이날 상오 모스크바시내에 있는 한국학교를 방문,모스크바 주재원 자녀들의 유치원 및 국민학교수업을 살펴보고 학생들을 격려. 손여사는 김석규주러시아대사 부인과 함께 한국학교에 도착,이문직교장 등 교사들의 환영인사를 받고 방명록에 「밝고 맑고 아름답게」라고 서명한 뒤 요리실습과 글짓기학습을 받고 있는 1,3,4학년 수업을 참관. 한편 손여사는 이날 낮 숙소인 영빈관에서 우리 대사관 직원부인들과 점심을 함께 한데 이어 하오에는 옐친대통령의 부인 라이나여사의 안내로 모스크바의 한 아파트단지에 있는 탁아소를 방문.
  • 스페인의 기타리스트 앙헬 로메로/27일 세종회관서 서울시향과 협연

    스페인 출신의 세계적인 기타리스트 앙헬 로메로가 서울시립교향악단의 협연자로 27일 하오 7시30분 세종문화회관대강당 무대에 선다. 앙헬은 브리태니카백과사전에 「20세기에 고전기타를 부흥시킨 스페인의 기타 연주가 가문」 이라고 소개되어 있는 로메로가의 막내아들.아버지 셀레도니오(1918년생)를 리더로 셀린(1940년생),페페(1944년생),앙헬(1946년생)등 4부자가 모두 세계 기타계를 주름잡는 명연주자들.스페인의 대표적인 작곡가 호아킨 로드리고는 1967년 유명한 「4대의 기타를 위한 안달루시아 협주곡」을 작곡해 이들에게 헌정하기도 했다. 앙헬은 「천사」라는 이름답게 뛰어난 테크닉을 바탕으로 한 깨끗하고 아름다운 음색을 자랑한다.이번 연주회에서 아버지 셀레도니오가 작곡한 「말라가 협주곡」과 로드리고의 「아란후에즈 협주곡」을 들려줄 예정.서울시향은 이밖에 브리튼의 「청소년을 위한 관현악 입문」과 에네스코의 「루마니아 광시곡」1번과 2번을 연주한다.지휘는 서울시향의 상임지휘자 원경수.문의는 3991­630.
  • 우크라와 “결별” 러에 “손짓”/크림자치공 새헌법 채택안팎

    ◎주민70% 러인… 오래된 마찰 표면화/흑해함대 위치… 분규확산 우려 증폭 20일 크림자치공화국이 사실상 독립을 의미하는 기본헌법을 통과시키자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사이에 크림반도를 놓고 충돌위기가 고조되고 있다. 크림자치공화국이 「독립」을 선언한 배경에는 여러 요인이 있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우선 지난 91년 구소련 붕괴이후 많은 크림주민들이 우크라이나 경제에 실망,러시아로 다시 복귀하려는 움직임을 보인 점을 들 수 있다.또 2백70만여명 주민의 70%가 러시아인이어서 실제 행동양식이나 관습이 우크라이나보다는 러시아에 가깝다는 것도 한 요인으로 꼽히고 있다. 이 때문에 크림주민들은 러시아와 다시 합병을 할 경우 생활이 지금보다 나아지지 않겠느냐는 기대감이 직접적인 「독립」선언의 계기였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가 크림자치공을 붙잡아두려는 것은 크림자치공이 과거 흑해함대가 위치해 있는 전략적 요충지인데다 통제권을 놓칠 경우 현재 소유권을 둘러싸고 러시아와 분쟁을 빚고 있는 흑해함대를 고스란히 러시아에 물려줘야 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크림자치공화국은 1239년 타타르족에 의해,1475년에는 오스만 터키,1783년에는 러시아에 의해 각각 정복당했으며 러시아혁명후 공산치하에서 흐루시초프가 「외교적 선물」로 우크라이나에 넘겨주면서 우크라이나에 복속됐다.이후 크림은 91년 자치를 선포한데 이어 92년 4월 우크라이나로부터 자체의회와 헌법을 마련토록 권한을 부여받았으나 자치권한을 확대시키는 과정에서 줄곧 우크라이나와 마찰을 빚어왔다.
  • 뇌물받고 세금 탈루/공무원 등 8명 적발/감사원

    민원인으로부터 금품을 받고 소득세와 양도소득세등 8억5천2백여만원을 탈루시켜준 서울 노원세무서 공무원 7명과 세무사 1명이 적발됐다. 감사원은 7일 전 노원세무서 세무서기 김모씨가 신모씨로부터 『양도소득세 조사를 잘 해달라』는 부탁과 함께 1백50만원을 받고 양도소득세 1천1백여만원을 덜 내도록 해준 사실을 적발했다. 감사원은 또 세무사 이모씨가 민원인으로부터 1천7백만원을 받아 70만원을 조사공무원 김모씨에게 건네주고는 토지대장을 위조하는 수법으로 소득세 6천6백여만원을 안 내도록 해준 사실도 밝혀냈다.
  • 신팔균선생/항일비밀결사 「대동청년단」 이끌어(이달의 독립운동가)

    ◎충북 진천에 사립학교 세워 인재 양성/만주망명후 독립군 총지휘… 일 괴롭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1910년이후 수많은 선열들이 국권회복을 위해 줄기차게 항일투쟁을 벌여왔다. 동천 신팔균선생은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조국광복의 제단에 바친 대표적인 애국선열로 손꼽히고 있다. 선생은 김좌진,홍범도,김동삼등과 함께 만주를 무대로 항일독립전쟁을 전개한 무장이다. 선생은 부친이 한성부판윤과 좌변포도대장등을,조부가 금위대장·삼도수군통제사·형조와 병조판서를 지낸 명문가출신으로 임오군란이 일어나던 1882년 서울 정동에서 출생했다. 가문의 전통에 따라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교한 선생은 육군참위로 임관,강계 진위대에서 첫 근무를 했다. 선생은 1909년 대한제국군대가 해체되자 인재양성에 힘을 쏟기로 하고 충북 진천에 사립 보명학교(현 이월국교 자리)를 세웠다. 이와함께 전국 각지의 애국지사들과 긴밀한 연락을 갖고 80여명으로 항일비밀결사 대동청년단을 결성,항일무장독립운동을 위한 기반을 구축하는데도 성공했다. 대동청년단은 국권회복을 위한 지하단체로 광복때까지 은밀한 활동을 벌였다. 이 단체가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철저한 보안 때문이었다. 이들은 처음 단체를 출범하면서 단원이나 단명등에 관한 사항은 일절 문자로 표시하지 않으며 경찰등에 체포될 경우 다른 단원을 연루시키지 않는다는 「피의 서약」을 맺었다. 선생은 1910년 마침내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이 종지부를 찍고 일제통치가 시작되자 무장항일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선생은 일단 만주로 망명,독립운동 단체 중광단에 가입했으며 3·1운동에 앞서 만주 동삼성의 민족지도자 38인 가운데 1인으로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 선생은 이어 만주 서간도의 독립군 양성학교인 경학사의 후신인 한주회 소속 독립군단 서로군정서에 가입,군단무관학교인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후진교육을 맡았다. 당시 교관으로는 일본육사출신인 지청천과 김경천,한말 무관출신인 김창환등이 학생을 지도하고 있었다. 이 학교 졸업생들은 청산리독립전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선생을 비롯한 애국투사들의 이같은 노력에 힘입어 3·1운동을 전후해 만주지역에는 50여개의 독립군단이 조직됐으며 이들은 각각 일제에 전쟁을 선포하고 일제 주재소와 헌병대등을 습격하는등 맹렬한 독립투쟁을 전개했다. 선생도 서로군정서의 독립군을 이끌고 수시로 일제 군경과 치열한 총격전을 가졌으며 친일주구들을 처단하는등 용맹을 떨쳤다. 독립군부대는 그러나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서 1천여명의 병사를 잃은 일제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만주지역의 한인들을 무차별 살육하는등 초토화작전으로 맞서자 어쩔 수 없이 근거지를 이동하게 된다. 당시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의 독립군 연합부대는 북만으로 옮겼으며 선생이 활약하고 있는 서로군정서,대한독립단등은 남만의 홍경현으로 이주했다. 1922년 봄,남만에 있던 독립군부대들은 강력한 독립군단의 조직을 위해 기존 부대를 해체,대한통군부를 결성했으며 이 통군부는 그해 가을,북만의 독립군부대까지 결합시켜 대한통의부로 새로 출발했다. 선생은 1923년 대한통의부 의용군사령관에 임명돼 독립군병력을 총지휘하게 된다. 이 의용군은 5개중대와 유격대,헌병대로 조직됐으며 각 중대는 5백∼9백명의 병력으로 구성됐다. 의용군은 당시 압록강 접경에서 일제와 치열한 접전을 펼쳤으며 국내에도 잠입,게릴라전으로 일제를 괴롭혔다. 남아있는 기록을 보면 이 의용군은 1923년 1월 유격대원 7명이 평북 창성군 후평주재소를 습격,일경을 사살하는등 무수한 전과를 남겼다. 선생은 그러나 1924년 7월 홍경현 밀림에서 야외군사훈련중 중국 마적 3백여명의 급습을 받고 총격전을 벌이다 총에 맞아 쓰러져 42세로 운명했다. 선생은 『일제와 싸우다 죽으려했더니 중국사람과 싸우다 죽는구나』라고 외치며 안타까워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선생을 숨지게 한 마적들은 사후 일제의 사주를 받은 장작림 군벌부대와 경찰들로 밝혀졌다. 한편 선생이 순국할 당시 서울 셋방에서 만삭의 몸을 이끌며 살고 있던 부인 임수명여사는 남편의 전사소식을 듣고 쓰러져 운명,일가족이 조국독립에 몸을 바친 셈이 됐다. 정부는 선생의 공적을 기려 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추서했다.
  • 코리안심포니 혼/서울 플루트 포스/관악중흥 내걸고 의욕적 새출발

    ◎코리안/두 주자해외서 영입… 27일 출범연주/서울/실력파 여류 5인 내1일 재창단 공연 독주나 실내악보다는 오케스트라에 속해 연주하는 경우가 더 많은 두 관악기 주자들이 각기 모여 앙상블 활동을 선언하고 나섰다.코리안심포니 혼 4중주단과 서울 플루트 포스(Seoul flute force).혼 4중주단은 27일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창단연주회를,플루트 포스는 5월1일 호암아트홀에서 각각 연주회를 갖는다.플루트 포스는 2번째 공연이지만 매니지먼트사인 서울예술기획이 전속단체로 영입한뒤 갖는 첫번째 공연으로 사실상 재창단 연주회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국내 관악기 분야는 피아노나 현악기에 비해 절대적으로 연주인구가 적다.연주회 자체가 적은 것은 물론 잘 알려진 몇몇 곡을 제외하면 들어볼 기회조차 적다.오케스트라 단원이 되는 길 이외에는 연주 기회도 거의 없다.그런만큼 관악기에 대한 매력은 잘 알려지지 못했고 관악기를 하겠다는 사람도 적다.연주인구의 빈익빈부익부 현상은 개선될 기미없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연주인구가 적은 만큼 연주능력도 뒤진다.이런 상황에서 두 단체의 본격적인 활동은 관악연주자들이 자신의 음악적 갈증을 해소하는 것과 더불어 관악기의 입지를 넓히는 노력의 하나로 평가될수 있다. 코리안심포니 혼 4중주단은 이름이 일러주는대로 코리안심포니 혼 주자들의 모임이다.수석인 벨로루시 출신의 알렉산드레 아키모프와 부수석인 미국인 마이클 해크로우,그리고 변동호와 김만식으로 구성됐다.이들은 롯시니의 혼 4중주 「사냥」과 호밀리우스의 「혼 4중주」,체레프닌의 「4개의 소품」등 흔히 들을수 없는 혼 중주곡들을 연주한다. 혼은 사실 국내교향악단에서도 「사각지대」에 가깝다고 할 만큼 다른 악기들에 비해 연주력이 뒤떨어지는 분야이다.코리안심포니가 이런 상황을 가벼이 여기지 않고 뛰어난 두사람의 혼 주자를 해외에서 영입,4중주단을 출범시킨 것은 코리안심포니의 존재의의를 다시 한번 보여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플루트 포스는 이혜경과 배재영 김영미 이미선 송영지등 솔로이스트로,혹은 교향악단의 주요멤버로 활약하고 있는 여류플루티스트 5사람이 모인 단체.모두가 각자의 개성을 지닌 실력파인 만큼 국내에서 호흡을 맞춘뒤 해외로 진출하겠다는 꿈을 갖고 있다.서울예술기획이 첫번째 전속단체로 영입한 것도 이들이 국내는 물론 국제무대에서도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한다.이번 연주회에서는 쿨라우와 멘델스존과 함께 김성기의 창작곡 「5개의 플루트를 위한 5중주」등을 연주한다. 이 단체들이 지닌 공통의 고민은 자신들의 악기편성에 맞는 곡이 적다는 것.한정된 레퍼토리만 가지고는 청중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키기 어려운 것은 물론 연주회 자체도 자주 갖기 힘들다.따라서 음악인들은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대중적인 곡들을 포함해 기존의 곡들을 자신들의 성격에 맞도록 과감하게 편곡해 레퍼토리를 넓히고 새로운 곡을 끊임없이 위촉해야 한다고 충고한다.악기는 다르지만 비슷한 고충을 안고 있는 베를린필하모닉 첼로앙상블이나 5명의 첼로주자로 구성된 프랑크푸르트첼리시모앙상블이 그 성공사례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 카뮈 유작 「최초의 남자」 햇빛

    ◎60년 교통사고 현장서 수습한 원고 딸이 34년만에 출판/알제리에서의 유년기 담은 자전소설/전재의 폐해·보조리에 대한 관념 토로 알베르 카뮈의 알려지지 않은 미완의 유고작이 발간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1960년 카뮈가 47세의 나이로 교통사고로 숨진지 34년만에 빛을 보게 된 작품은 「최초의 남자(LEPREMIER HOMME)」.교통사고 현장에서 수습한 1백44페이지의 핏자국 어린 원고를 딸 카트린 카뮈가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가 이번에 3백35페이지의 책으로 펴 냈다. 이 작품이 주목되는 것은 카뮈의 문학세계를 더욱 깊이 이해하게 하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자전소설 「최초의 남자」에서 카뮈는 처음으로 자신의 유년기에 대해 털어놓고 있다. 이 작품에서 그는 아버지,어머니,할머니,자신이 다니던 국민학교와 알제리의 고등학교,유년시절 쓰던 방등을 그대로 그리고 있다.믿을수 없을 정도로 생생하게 그려진 어린 시절의 이야기에서 당시 알제리의 부조리한 상황을 이해하게 된다. 카뮈는 1953년 세인트 브리유에서 이 소설을 구상했다.어머니 카트린셍테는 그해 어느날 40세이던 카뮈를 세인트 브리유에 있는 그의 아버지 무덤에 데려 간다.29세로 생을 마감한 그의 아버지의 묘비에 씌어진「1885∼1914」를 보는 순간 카뮈는 아버지의 일을 알고 싶어진다.카뮈는 제2장에서 이 소설을 쓰게된 배경을 이같이 밝히면서 『어머니는 더이상 아버지에 애착이 없는 듯 보였다』고 회고했다. 카뮈는 곧바로 부모가 생활했던 알제리로 가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더듬는다.1913년 젊은 부부가 작은 이륜마차에 가재도구 몇개만 줄로 엮어 매달고 알제리 사막의 한 마을에 도착하는 장면에서 소설은 시작된다.만삭인 젊은 부인이 도착 하자마자 낳은 아이가 바로 알베르 카뮈다. 아버지 루시앙 카뮈는 알베르 카뮈가 태어난뒤 얼마 되지 않아 전쟁터로 나간다.카뮈는 모로코 전선등에 투입된 아버지를 통해 전쟁의 공포에 대해 간접 경험을 하게 된다.비참하게 숨진 병사를 목격하고 악몽에 시달리던 아버지의 체험은 소설 「이방인」에서 나타난다. 그의 아버지는 마른 전투에서 숨졌다.너무 어렸던 카뮈는 아버지에 대해 단편적인 순간밖에 기억하지 못하는데다가 어머니는 언어장애로 거의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카뮈는 이런 침묵의 상황을 작품속에서 매우 강하게 얘기하고 있다. 『젊은 어머니는 청춘의 병을 앓고 있었고 그것때문에 들리지도 않아 언어장애를 앓게 됐다.당시 할머니는 어머니가 장티푸스를 앓고 있다고 했다.잃어버린 시간들을 잘 간직하기 위해서는 더이상 기억해내려 하지 말아야 한다』 카뮈는 어머니가 알제리의 한 셋집에서 날이 어둑어둑 해 졌는데도 램프를 켜지 않은채 의자에 앉아있던 장면들을 기억하고 있다. 「최초의 남자」 문장마다에서 그는 어머니에 대해 독자를 강하게 감동시키고 있다.어머니가 살던집이 폭격을 받았을때의 상황에 대해 카뮈는 『맹목적인 테러도,어머니를 마구 두들겨 패는 것도 모두 싫다.정의도 좋아하지만 어머니도 좋아한다』고 묘사하면서 부당함과 부조리에 대한 관념을 밝히고 있다. 이 작품에서 카뮈는 앞에는 망망대해가 펼처져 있고 뒤에는 끝없는 산이 놓인 가운데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상황으로 과거를 회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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