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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미혜의 발길따라 그림따라] 레스토랑의 번성

    [이미혜의 발길따라 그림따라] 레스토랑의 번성

    춥고 배고플 때 따끈한 국물 한 사발만큼 기운을 북돋아 주는 특효약이 있으랴. 레스토랑은 애초에 식사를 제공하는 장소가 아니라 원기를 회복시켜 주는 국물을 의미했다. 1765년 파리 루브르궁 근처에 근대적 식당이 문을 열었다. 여기서는 고기 국물로 만든 맑은 수프와 몇 가지 요리를 내놓아 인기를 끌었는데, 사람들은 이 수프를 레스토랑이라 불렀다. 레스토랑 파는 곳이 하나 둘 늘면서 문 앞에 그날 먹을 수 있는 요리를 알리는 표지판을 내걸고, 테이블에 앉은 손님에게는 작은 표지판을 제공해 음식을 고르게 하는 아이디어도 등장했다. 레스토랑이 만개한 것은 19세기의 일이었다. 1789년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나자 귀족들은 목숨을 잃거나 파산하거나 망명길에 올랐다. 그들이 거느린 요리사들은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됐다. 이들은 까다로운 귀족의 입맛에 맞추느라 갈고 닦은 솜씨를 무기로 식당을 열었다. 부르주아 계층은 요리별로 가격이 매겨진 메뉴판을 보고 원하는 것을 골라 식사하는 데 재미를 붙였다. 1830년대 파리에는 식당이 2000여개로 불어났다. 레스토랑은 수프가 아니라 식당을 의미하는 어휘가 돼 프랑스 아카데미사전에 올랐다. 제르벡스는 불로뉴공원 안에 있는 레스토랑 ‘프레 카탈랑’의 한때를 보여 준다. 1905년 파리시는 이곳에 카지노와 고급 레스토랑을 건설하려는 계획을 추진했다. 카지노 건설은 무산됐으나 레스토랑은 문을 열자 곧 명소로 떠올랐다. 신고전주의풍으로 지어진 레스토랑은 식당이라기보다 상류층 사교클럽 같은 분위기다. 주렁주렁 드리워진 샹들리에가 앞마당까지 훤히 밝히고 있다. 테이블에 앉아 있는 손님들은 당대 사교계를 주름잡던 인사들이다. 앞마당에서는 초록색 드레스를 입은 애너 굴드, 그녀의 남편, 화가의 부인이 인사를 나누고 있다. 미국 부호의 딸인 애너는 막대한 지참금을 싸들고 대서양 건너 시집을 왔다. 사람들은 “애너의 예쁜 데는 등뿐”이라고 농담을 했다. 등(dos)과 지참금(dot)의 발음이 같은 데 착안한 말장난이다. 화가는 짓궂게도 그녀를 뒷모습으로 그려 넣어 이 농담에 동조했다. 이 사치스런 레스토랑은 오늘날도 건재하다. 미술평론가
  • 메이크업아티스트 겸 서양화가 장소영,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진출

    메이크업아티스트 겸 서양화가 장소영,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진출

    메이크업아티스트 겸 서양화가 장소영 작가가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서 매년 개최하는 ‘2019 카루젤 드 루브르’(Carrousel du Louvre Art Shopping)의 최연소 초청작가로 선정돼 오는 5월 24일부터 부스 개인전을 연다. 카루젤 드 루브르 아트쇼핑은 다양한 예술작품을 대중들에게 소개해 예술에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현대 미술계의 노력의 일환으로, 세계 각국의 유명 작가들을 초대해 루브르 박물관 내의 카루젤 드 루브르관에서 진행한다. 세계 각국의 유명작가들이 모이는 자리인 만큼 신진작가가 초청되는 건 드문 경우라 미술계의 더욱 많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장소영 작가는 “세계 3대 박물관 중 하나인 루브르 박물관에서 전시를 갖게 되어 매우 뜻깊고 정말 감사하게 생각한다”며 “이번 기회를 통해 지속적으로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시장에 작품을 선보이겠다”고 소감을 전했다. 특히 장소영 작가는 지난 12월 1일 프랑스 파리의 ‘갤러리 뷰테 두 마르탱 칼르메’(galerie beaute du matin calme)에서 열린 ‘The end and the beginning 展’ 초청전시회에서 많은 평론가들로부터 색채에 대해 호평을 받으며 첫 유럽 시장 진출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메이크업아티스트 겸 서양화가라는 독특한 이력 때문에 ‘추상미술계의 이단아’라고 불리는 장소영 작가는 미술과 뷰티를 넘나들며 다양한 활동을 하며 뷰티와 미술계로부터 뜨거운 주목을 받고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창고형 마트처럼…수장고 속 ‘생얼’ 작품을 만나다

    창고형 마트처럼…수장고 속 ‘생얼’ 작품을 만나다

    옛 연초제조창 577억원 들여 재건축 지상 5층 규모 1만 1000여점 수용 가능 김복진 ‘미륵불’·백남준 ‘데카르트’ 등 큐레이터 기획 없이 날것 그대로 관람 미술품 보존·수복도 직접 볼 수 있어 안내·진입로 미비… 내년 중반 ‘완전체’“기존의 기획 전시장이 백화점이라면 여기는 ‘코스트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박미화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 길이 14m, 높이 3.8m의 철제 수장대 1·2층에 한국 근현대를 대표하는 조각품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흡사 코스트코, 이마트 트레이더스 같은 대형 창고형 할인마트의 매대 같다. 지난 26일 개관 하루 전 기자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이다. 청주관은 충북 청주시 청원구 내덕동의 옛 연초제조창(담배 창고)을 재건축해 약 2년간의 건축 과정을 거쳐 완성됐다. 과천, 덕수궁, 서울에 이은 네 번째 국립현대미술관 분관이다. 공사비 총 577억원을 투입해 연면적 1만 9855㎡, 지상 5층 규모로 건립됐다. 수장 공간(10개), 보존과학 공간(15개), 기획전시실(1개), 교육 공간(2개), 라키비움(조사 연구 공간) 및 관람객 편의시설 등을 갖췄다. 청주관의 가장 큰 특징은 ‘국내 최초 수장형 미술관’이라는 점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1300여점과 미술은행 소장품 1100여점을 옮겨 왔으며 총 1만 1000여점까지 수용 가능하다. 1층과 3층에는 관람객들이 직접 들어가 작품들을 둘러볼 수 있는 ‘개방 수장고’와 유리창 너머로 관람이 가능한 ‘보이는 수장고’를 운영한다. 이는 전시를 위해 바깥에 나오는 게 아니면 일생을 수장고에서 보내는 미술관 소장품들의 한계와 수장고 포화 문제를 대응하기 위한 조처다. 장엽 개관준비단 운영과장은 “미술품은 보통 대중들에게 큐레이터의 연구 기획, 즉 ‘셀렉션’이라는 과정을 통해 공개되는데 그 과정에서 큐레이터의 관점·시각에 맞는 작품만 보여지는 경향이 있었다”며 “작품과 관람객 간의 직접적 만남을 모색하는 게 세계적인 추세”라고 설명했다. 스위스의 샤울라거를 비롯해 영국의 V&A(Victoria&Albert) 박물관, 프랑스 루브르 랑스(Louvre-Lens) 박물관 등이 이에 속한다.미술관 측 설명처럼 1층 개방 수장고에서는 김복진의 ‘미륵불’, 김종영의 ‘작품 58-8’, 서도호의 ‘바닥’, 백남준의 설치미술 ‘데카르트’ 등의 작품들을 ‘한국의 근현대 작품’이라는 두루뭉술한 카테고리 외에는 별다른 설명 없이 맞닥뜨리게 된다. 미술학도나 연구자들에게는 엄청난 혜택이겠지만, 일반인에게는 좀 어렵기도 하다. 코스트코 같은 창고형 할인마트에서도 특정 히트 상품들을 아는 사람들이 수월하게 쇼핑하는 것과 같은 원리다. 수장고 속에서 빛을 못 보는 것보다는 나은 것 같지만 특정한 분류 없이 놓여 있기 때문에 기획 전시보다 상세한 설명과 교육 프로그램이 필요해 보인다. 수장형 전시실에서 느끼는 ‘불친절’은 5층 기획전시실에서 다소 해소된다. 5층에서는 현재 개관 특별전 ‘별 헤는 날: 나와 당신의 이야기’가 열리고 있다. ‘일상 속에 숨겨진 보석같이 반짝이는 소중한 순간’이라는 취지 아래 강익중, 김수자, 김을 등 한국 현대미술 작가 15인의 작품 23점을 전시했다. 옛날 연초제조창이 미술관으로 재생되기까지의 역사와 청주 시민들의 기억을 조망하는 설치 미술, 세계 8개 도시의 거리를 촬영한 영상 작품 등 큐레이션의 기획에 따라 묶인 작품들이 훨씬 쉽게 받아들여진다. 기획전시실은 개방 수장고의 구조상 회화 같은 평면 작품을 진열하는 데서 오는 어려움을 해소하는 역할도 한다. 청주관의 또 다른 특징은 국내 최초의 ‘미술품 종합병원’이라는 4층의 보존과학실이다. 관람객들은 유화 보존처리실, 유기·무기 분석실 등에서 미술 작품의 보존·수복 과정을 투명한 창을 통해 직접 볼 수 있다. 전에 없던 ‘실험’을 여럿 선보였지만 청주관은 아직도 갈 길이 멀다. 개관 하루 전날에도 청주관 안팎으로는 도시 재생사업의 일환으로 계속되는 공사에 분진이 날렸다. 진입로 공사는 여전히 진행 중이며 주차장 완비도 늦어졌다. 기자간담회의 한 참석자는 “이곳을 찾느라 30분을 헤맸다”며 “들어오는 입구도 못 찾겠고 안내판도 없어 외부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에 대한 준비가 안 돼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개관 일정이 너무 촉박했던 것 아니냐’는 지적에 박위진 국립현대미술관장 직무대리는 “미술관 예산은 2018년으로 기간이 정해져 있고 지역민과 국민들에게도 2018년에 개관하기로 약속했다”며 “보완할 사항이 있으면 계속 보완해 가면서 운영하는 게 맞다고 본다”고 했다. 내년 6~9월쯤에야 조각 공원 등의 공사를 마친 ‘완전체’ 청주관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글 사진 청주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특파원 생생리포트] 中 최대 온라인 여행사 씨트립이 바꾼 관광산업

    [특파원 생생리포트] 中 최대 온라인 여행사 씨트립이 바꾼 관광산업

    싫든 좋든 인구 대국인 중국 관광객이 세계 관광산업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며 이는 앞으로도 쉽사리 바뀌지 않을 것이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최근 세계 최대 해외 관광객 배출 국가인 중국 뒤에 있는 중국 최대 온라인 여행사 씨트립에 대해 집중 분석했다. 중국 상하이에 본사를 둔 씨트립의 직원은 모두 3억 명에 이르는 이용자들을 빅데이터를 이용해 응대하고 있다. 소비자 한 명이 구매 결정을 하면 씨트립 본사에 있는 거대한 중국 지도에서 하나의 불빛이 반짝인다. 상대적으로 발전한 중국 동부 해안은 많은 불빛으로 밝지만 서부 지역은 암흑에 머물러 중국의 지역에 따라 불평등한 발전 상황을 보여준다. 씨트립의 직원 숫자는 4만 명으로 콜센터에서 일하는 1만 4000명은 점점 채팅 로봇으로 대체 중이다. 현재 중국 13억 인구 가운데 여권을 소지한 비율은 6%에 불과하며 중국 정부는 매년 1000만 개의 신규 여권을 발급하고 있어 앞으로 중국의 관광 수요 증대는 폭발적일 것으로 전망된다. 올 상반기 중국인의 출국 횟수는 7130만회로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5% 성장한 것이다. 중국인들이 해외에서 쓴 돈은 약 2600억 달러로 추산된다. 국내 수요는 더 커서 지난해 중국인의 국내 여행 횟수는 50억회에 쓴 돈은 7200억 달러에 이른다. 홍콩,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 태국의 해변 등은 이미 넘쳐나는 중국인 관광객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씨트립 측도 중국인 관광객이 무례하고 시끄럽다는 이유로 현지인들의 혐오 대상이란 점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중국인들이 해외여행을 더 많이 떠날수록 점점 더 나아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제임스 량 씨트립 회장은 “씨트립에서 예약 등은 80%가 모바일로 이뤄지며 스마트폰을 통한 결제는 점점 더 늘어나는 추세”라고 소개했다. 이어 씨트립은 여행지에서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소개한 팸플릿을 여행 정보와 함께 제공한다고 강조했다. 20년 전 중국이 처음 해외여행을 허가했을 때는 단체여행을 떠나는 중장년층이 많았지만 이제는 에펠탑에서 셀피를 찍는 것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며 외국어에 능숙한 젊은이들이 해외로 떠난다. 7일에 3개국을 도는 것보다 한여름 내내 한 장소에서 머무는 것을 선호하는 중국 젊은이들의 여행 문화가 확산하면 중국 관광객에 대한 편견도 해소될 것이라고 씨트립 측은 내다봤다. 씨트립은 미국과의 무역전쟁으로 인한 영향은 거의 없다고 밝혔지만 중국 중앙(CC)TV에 따르면 미국행을 택한 중국인 숫자는 올 상반기에 전년보다 9% 감소했다. 단체관광을 국가 정책의 무기로 쓰는 것도 씨트립 측은 제한적이라고 주장했지만 한국, 필리핀 등은 중국의 관광제한 정책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씨트립은 사드(고고도미사일 방어체계) 보복 이후 한국 단체관광 상품 판매를 재개했다가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몇 시간 만에 취소한 바 있다. 베이징 윤창수 특파원 geo@seoul.co.kr
  • ‘노란조끼’ 시위 주말에도, 에펠탑과 루브르 내일 하루 휴관

    ‘노란조끼’ 시위 주말에도, 에펠탑과 루브르 내일 하루 휴관

    프랑스 파리의 명물이자 자랑거리인 에펠탑이 8일(현지시간) 폐쇄된다. 유류세 인상에 반대하며 정부의 도입 방침을 철회시킨 노란조끼 시위대가 주말에는 교육개혁을 요구하는 젊은이들이 거리에 쏟아져 나오는 등 더 큰 규모의 가두시위를 벼르고 있는 데 따른 조치다. 지난 주말 개선문의 조각상이 파손돼 파리시 당국은 유명한 관광 명소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조치를 취하고 있다. 에두아르드 필리페 총리는 프랑스 전역에 8만 9000명의 경찰 인력과 무장 차량을 배치하겠다고 밝혔다. 파리 시에는 8000명의 경찰이 배치된다. 경찰은 샹젤리제 거리의 가게들과 식당들도 이날 휴업할 것을 권고하고 있으며 보통 노천 카페에 쓰이는 의자와 탁자 같은 것도 거리에 내놓지 말라고 채근하고 있다. 프랭크 리에스터 문화부 장관은 루브르와 오르세이 박물관, 오페라 하우스들과 그랑팔라 단지 등이 폐쇄될 것이라고 밝혔다. 내무부 관료들은 좌파와 우파 모두 파리 도심 시위와 집회를 계획하고 있어 “상당히 심각한 폭력 사태”가 빚어질까봐 바짝 긴장하고 있다고 AFP통신에 밝혔다. 이에 따라 파리-몽펠리에, 모나코-니스, 툴루즈-리옹, 생테티엔-마르세유 등의 프랑스 프로축구 리그앙 경기들이 연기됐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렘브란트 지문’ 찍힌 예수 초상화 경매…예상가 88억 원

    ‘렘브란트 지문’ 찍힌 예수 초상화 경매…예상가 88억 원

    네덜란드 황금시대의 대표적인 화가인 렘브란트 반 레인(1606-1669)의 것으로 추정되는 지문이 찍힌 작품이 경매에 나온다. 영국 가디언 등 해외 언론의 21일 보도에 따르면 이 작품은 렘브란트가 353년 전인 1655년 경에 예수를 모델로 그린 초상화(작품명·Study of the Head and Clasped Hands of a Young Man as Christ in Prayer)로, 높이 25㎝의 비교적 작은 그림이다. 이 그림이 수집가들의 관심을 더욱 사로잡은 것은 해당 그림에 렘브란트의 것으로 추정되는 지문 2개가 찍혀있기 때문이다. 엄지손가락 지문 2개는 2011~2012년 미국과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 전시를 앞두고 복원 및 안료 검토 차 실시한 엑스레이와 적외선 검사를 통해 발견됐다. 지문은 물감으로 이뤄진 겉면 아래쪽에 찍혀 있었으며, 렘브란트의 다른 작품에서는 아직까지 이러한 흔적이 발견된 적은 없다. 전문가들은 렘브란트가 그림을 그린 뒤 손가락을 이용해 그림 아래쪽을 잡고 들어 올리면서 지문이 찍혔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해당 지문이 실제 렘브란트의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문가들도 확실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림이 채 마르기도 전에 그림이 들어 올려지면서 지문이 찍혔고, 작품이 완성되자마자 작품에 손을 댄 사람은 작가인 렘브란트가 가장 유력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경매를 맡은 소더비 측은 “그림을 그린 거장의 지문이 찍힌 작품은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면서 “예상 경매 낙찰가는 780만 달러(약 88억 620만원) 수준”이라고 전했다. 이번 경매는 다음달 5일 영국 런던에서 열린다. 송현서 기자 huimin0217@seoul.co.kr
  • ‘노출 심한 의상’ 탓에 루브르 박물관 입장 거부당한 女

    ‘노출 심한 의상’ 탓에 루브르 박물관 입장 거부당한 女

    호주의 한 여성 모델이 노출이 심한 의상 때문에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입장을 거부당했다고 주장했다. 미국 폭스뉴스 등 해외 언론의 9일 보도에 따르면 호주에서 모델 및 작가이자 팔로워가 24만 7400명에 달하는 SNS 스타인 뉴샤 시예(25)는 최근 자신의 SNS에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서 겪은 일을 상세히 적었다. 이 여성의 주장에 따르면 여행 차 루브르 박물관을 찾은 그녀는 박물관 입구에서 경비원들에게 입장을 거부당했다. 가슴 부분이 깊게 파이고 밑단이 피부가 비치는 시스루 소재의 드레스를 입었다는 이유에서다. 박물관 측은 ‘복장 규정을 준수하라’며 여성의 입장을 막아섰고, 이 여성은 끝내 박물관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의 SNS에 “루브르 박물관의 경비원은 매우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제스처와 얼굴 표정으로 나의 박물관 입장을 막았다”면서 “박물관 경비원은 나에게 신체를 가리라면서 입장과 관련한 복장 규정을 운운했지만, 알고보니 그런 규정은 없었다”고 강조했다. 또 영국 일간지 더 선과 한 인터뷰에서는 “예전에도 비슷한 의상을 입고 루브르에 간 적이 있었지만 문제되지 않았었다. 이것은 경비원의 완전한 개인적인 견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루브르 박물관 웹사이트에는 방문객들에게 수영복이나 나체, 맨발, 가슴을 드러낸 상태로의 입장을 금지한다“는 가이드라인이 적혀 있지만, 위 여성이 이 가이드라인에 해당하는지를 두고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녀의 SNS 게시물을 본 네티즌들은 “박물관 측의 처사가 무례하고 고루했다”며 이 여성을 두둔했지만, 일각에서는 “대와 장소에 맞는 복장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며 박물관에 손을 들어주기도 했다. 한편 루브르 박물관 측은 공식적인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송현서 기자 huimin0217@seoul.co.kr
  • 루브르 박물관 입장 거부당한 호주 여성, 그 이유가?

    루브르 박물관 입장 거부당한 호주 여성, 그 이유가?

    호주의 한 여성이 매쉬 드레스를 입었다는 이유로 파리 유명 박물관 입장을 거부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8일(현지시간) 영국 데일리메일은 최근 호주 출신의 25살 뉴샤 시예(Newsha Syeh)가 노출 복장으로 인해 루브르 박물관의 입장을 거부당했다고 보도했다. 인스타그램에서 23만여 명의 팔로워를 거느린 뉴샤는 지난 7일 파리를 여행하며 세계 3대 박물관 중 하나로 손꼽히는 루브르 박물관을 찾았다. 깊게 파인 가슴골과 하체 부분이 메쉬 소재로 이뤄진 검정 매쉬 드레스를 입은 뉴샤가 루브르 박물관을 방문했을 때, 경비원들은 그녀의 입장을 막아섰다. 루브르 박물관 측은 “복장 규정을 지켜라”며 뉴샤의 입장을 거부했던 것이다. 기쁜 마음으로 파리를 찾은 뉴사는 박물관 입장을 거부당하자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그들은 가장 혐오스럽고 끔찍한 몸짓과 표정을 지었고, 나에게 신체를 가리라고 욕했으며 증오에 찬 눈으로 나의 입장을 막았다. 루브르 박물관의 낡은 규정 시행으로 난 상처 받았다. 하지만 알고보니 그런 규정은 없었다”는 글을 남겼다. 실제로 루브르 박물과 웹사이트에는 “입장 시 정해진 복장 규정은 없으며 당신은 루브르 박물관에 당신이 원하는대로 입을 수 있다. 단지 많이 걸어야 하는 것만 기억하세요. 편한 신방을 가져오세요. 양파처럼 겹겹이 옷을 입으세요”란 안내글만 적혀있는 것으로 알려졌다.뉴샤의 인스타그램 팔로워들은 그녀의 글에 동감하며 루브르 박물관 방문 당시의 자신들의 복장에 대한 댓글을 달며 루브르 박물관 측의 태도에 대해 비난했다. 한 여성은 “몇 년 전 여동생과 함께 루브르 박물관에 방문했을 때, 겨울옷과 부츠를 신었는데 약식 복장이라며 입장을 거부당했다. 그들은 너무 무례했으며 당황한 우리가 박물관을 나설 때까지 욕을 했다”며 “뉴샤의 옷은 아름답다”고 전했다. 그리고 또 다른 팔로워는 “경비원들의 반응이 구식이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말문이 막혔다. 사실 거기에 들어갈 때 입을 수 있는 규정들은 없다”면서 “우리는 21세기에 살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여러분이 무엇을 입고 그것을 입는 방식에 대해 적대적인 사람들이 존재한다. 제가 말 주변이 없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댓글을 달았다. 한편 루브르 박물관 웹사이트에는 입장 시 정해진 복장 규정은 따로 없지만 방문자 규정 1조 2항에는 수영복 착용이나 누드 또는 맨발이나 가슴 노출 등을 금지한다고 되어 있다. 사진= 뉴샤 시예 인스타그램 손진호 기자 nasturu@seoul.co.kr
  • 文대통령, 146명 기마대 호위 받으며 샹젤리제 1㎞ 퍼레이드

    文대통령, 146명 기마대 호위 받으며 샹젤리제 1㎞ 퍼레이드

    개선문 환영식 뒤 한국전 참전용사 만나 엘리제궁 공원 걸으며 정상간 환담 나눠 2년 만에 한국 대통령 국빈 방문 이례적 같은 시기 닮은꼴 당선 마크롱 의지 반영 김정숙·브리지트 여사 루브르 함께 방문프랑스를 국빈방문(13~16일) 중인 문재인 대통령은 15일(현지시간) 오후 개선문에서 공식 환영식을 갖고 본격적인 정상외교 일정에 돌입했다. 프랑스는 해마다 국빈방문을 2~3개국만 ‘엄선’해서 접수하는데 앞서 박근혜 대통령이 2016년 프랑스를 방문했던 점을 감안하면 한국 대통령이 2년 만에 국빈 자격으로 이곳을 찾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같은 시기에, 닮은 모습으로 당선된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해석된다. 프랑스 정부 대표들의 영접을 받은 문 대통령은 의장대를 사열한 뒤 무명용사의 묘에 헌화했다. 이어 6·25전쟁 참전용사 기념동판으로 이동해 공식 환영식에 참석한 프랑스의 참전용사와 후손들을 격려하고, 이들의 희생과 헌신에 대해 감사의 뜻을 전했다. 6·25전쟁에 참전한 프랑스군은 3421명으로 이 가운데 262명이 전사했다. 문 대통령은 공식 환영식 이후 프랑스 국가헌병대 공화국수비대 기병연대의 호위를 받으며 샹젤리제 거리에서 카 퍼레이드를 벌인 뒤 대통령궁인 엘리제궁으로 향했다. 146마리의 말로 구성된 기마대와 경찰 차량 28대가 샹젤리제 거리 1㎞ 구간에서 문 대통령을 호위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당초 두 정상은 엘리제궁 이전에 파리 마레지구에 있는 한국전 참전기념비에서 첫 만남을 가질 예정이었다. 100m가량을 함께 걸은 뒤 센강 변의 카페에서 환담을 나눌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날 남프랑스 오드 지방에 폭우가 쏟아지면서 10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등 추모 분위기를 감안해 카페 방문을 취소했다. 대신 엘리제궁 공원에서 친교의 시간을 가졌다. 문 대통령의 부인 김정숙 여사는 이날 브리지트 마크롱 여사와 루브르 박물관을 방문했다. 김 여사는 프랑스의 대표적 브랜드인 샤넬의 검정색 트위드 재킷을 입어 눈길을 끌었다. 청와대 관계자는 “한국 전통문화에 호감을 가진 샤넬 수석디자이너 칼 라거펠트가 2015년 ‘한복에 대한 오마주’를 주제로 서울에서 열었던 무대에 선보였던 의상으로 검정색 바탕에 ‘한국’ ‘서울’ ‘코코’ ‘샤넬’ 등의 한글을 흰색으로 직조한 특별한 원단”이라고 설명했다. 김 여사는 마크롱 대통령 내외의 환대에 사의를 표하고자, 이 재킷을 빌린 것으로 알려졌다. 두 여사는 루브르 박물관이 지난해 전주 한지를 활용해 복원한 18세기 고가구 ‘막시밀리안 2세의 책상’을 관람했다. 과거에는 유사 작업에 일본 화지(和紙)가 사용됐지만, 최근 한지의 우수성이 인정돼 복원에 사용되기 시작했다. 김 여사는 “전주 한지는 닥나무 껍질로 만들어 견고하고 수명이 길다. 앞으로도 활용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김정숙 여사, 빌린 샤넬 입고 마크롱 여사 만난 이유

    김정숙 여사, 빌린 샤넬 입고 마크롱 여사 만난 이유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 프랑스를 국빈방문 중인 김정숙 여사가 명품 브랜드 샤넬 재킷을 입고 15일(현지시각)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부인인 브리지트 마크롱 여사와 루브르박물관을 둘러봤다. 흰색과 검정색이 섞인 트위드 재킷을 입은 김 여사는 비둘기색 원피스 차림의 마크롱 여사와 팔짱을 끼고 다정한 모습으로 박물관 구석구석을 돌아봤다. 김 여사가 입은 재킷은 프랑스를 대표하는 명품 브랜드 샤넬이 한국에서 개최한 2015~2016 크루즈 컬렉션에 소개된 작품이다. 재킷은 검정 배경에 ‘한국’, ‘서울’, ‘코코’, ‘샤넬’, ‘마드모아젤’ 등 한글을 흰색으로 짜넣은 원단을 사용했다. 샤넬의 수석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는 당시 컬렉션을 선보이면서 “한글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글자”라고 칭찬한 것으로 알려졌다.김 여사는 이번 국빈방문에서 마크롱 대통령 부부의 환대에 감사함을 표현하고자 한국과 프랑스의 우정을 상징하는 샤넬의 한글 트위드 재킷을 빌렸다고 청와대는 전했다. 김 여사는 마크롱 여사에게 “한국과 프랑스가 함께할 수 있는 미래와 현재가 무엇인지 생각했다”고 말하면서 “이 옷을 봐 주세요”라며 재킷을 가리켰다. 마크롱 여사는 “정말 아름답다”고 화답했다. 김 여사와 마크롱 여사는 루브르박물관에서 1시간 30분 동안 문화재를 관람했다. 김 여사는 이날 루브르박물관 입구인 유리 피라미드 앞에서 기다리던 마크롱 여사를 만나 박물관에 입장해 ‘모나리자’, ‘루이 14세 초상’을 비롯해 왕조 시절의 왕관과 보석 등 박물관의 주요 소장품을 관람했다.김 여사는 마크롱 여사를 만나 “함부르크에서 만난 후 이 순간을 기다려왔다”고 말했고 마크롱 여사는 “오늘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돼 기쁘다”고 화답했다. 김 여사와 마크롱 여사는 특히, 전통 한지를 활용해 복원한 18세기의 고가구인 바이에른 왕국 막시밀리안 2세의 책상과 관련해 대화를 나눴다. 루브르박물관은 지난해 6월 전주 한지를 이용해 막시밀리안 2세의 책상을 복원한 바 있다. 김 여사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루브르박물관이 문화재 복원에 우리의 전통 한지를 활용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밝혔다.김 여사는 “한지는 나뭇결을 찢어서 떠서 종이처럼 만드는데, 섬유질을 가지고 있어 견고하고 어디에나 잘 어울린다”면서 “그 어려운 것을 찾아 복원하셨다니 정성이 대단하다”고 말했다. 박물관 관계자는 “독일 가구가 프랑스에 있고 한국의 한지로 이를 복원했으니 3개국 작품이다”라고 말해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들었다. 김 여사는 마크롱 여사와 루브르박물관 관계자에게 한지의 우수성을 적극적으로 홍보하면서 앞으로도 한지를 활용한 문화재 복원 사례가 늘어나기를 희망했다고 청와대는 전했다. 김 여사와 마크롱 여사는 ‘아폴론 갤러리’에 도착해 루이 14세와 왕비가 실제로 사용한 왕관 등을 둘러보고 ‘모나리자’도 관람했다. 김 여사는 관람 후 귀빈실에서 마크롱 여사와 별도로 환담했다. 마크롱 여사는 남북정상회담 등 한반도 평화를 위한 문 대통령의 행보를 언급하면서 평화의 길을 걷는 한국에 대해 응원과 격려의 말을 했다고 고민정 부대변인이 서면브리핑에서 밝혔다. 두 여사는 또 여성들의 경력단절, 보육, 고령화로 인한 노인 요양 등 여성들에게 부과된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도 깊은 대화를 나눴다. 오달란 기자 dallan@seoul.co.kr
  • 15억 낙찰 직후 파쇄된 그림…작가 “창조 욕구로 파괴했다”

    15억 낙찰 직후 파쇄된 그림…작가 “창조 욕구로 파괴했다”

    “파괴의 욕구는 창조의 욕구이기도 하다.”지난 5일(현지시간) 영국 런던의 소더비 경매 현대미술 판매전에서 15억여원에 낙찰된 직후 저절로 찢어져 화제가 된 회화 작품 ‘풍선과 소녀’의 작가 뱅크시가 하루 만에 사건이 자신의 소행임을 밝혔다. 영국 출신의 ‘얼굴 없는’ 거리예술가인 뱅크시는 전 세계 도시의 거리와 벽에 기발한 그래피티(길거리 그림)를 남기거나 런던 테이트미술관, 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 등 유명 미술관에 자신의 작품을 몰래 걸어 두는 등 파격적인 행보로 유명하다. 뱅크시는 6일 자신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파괴하고자 하는 욕구도 창조적인 것”이란 파블로 피카소의 발언을 인용하며, 액자에 파쇄기를 설치하는 모습과 경매장에서 낙찰 직후 그림이 잘려나가는 영상을 올렸다. 그는 “몇 년 전 나는 이 작품이 혹시 경매에 나갈 경우를 대비해 비밀스럽게 파쇄기를 설치했다”고 말했다. 앞서 경매장에 등장한 뱅크시의 작품은 수수료를 포함해 104만 2000파운드(약 15억 4000만원)에 팔리자마자 잘게 분쇄됐다. 뱅크시가 액자 프레임 뒤에 설치해 놓은 기계 장치를 리모트컨트롤을 활용해 작동시킨 것이다. 이 사실을 몰랐던 경매 참가자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소더비의 유럽 현대미술 책임자인 알렉스 브랜식은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뱅크시’에 당했다”면서 “이런 경험은 우리도 처음”이라고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뱅크시의 전력에 비춰 볼 때 현대미술 시장의 거래 관행을 조롱하고 예술의 파괴와 자율의 속성을 보여주려 한 기획으로 해석된다. 해당 작품의 운명에도 관심이 쏠렸다. 손상이 가해진 만큼 낙찰자는 구매 의사를 철회할 수 있지만 사상 초유의 이벤트로 작품의 가치는 오히려 올라갈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최훈진 기자 choigiza@seoul.co.kr
  • [조성룡·심세중의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통하는 길·공존하는 삶… 사람 품은 도시, 근대 문화를 낳다

    [조성룡·심세중의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통하는 길·공존하는 삶… 사람 품은 도시, 근대 문화를 낳다

    한결 선선해진 서울 광화문의 한밤, 하수도 정비 공사 소리가 늘 같은 고요를 비집는다. 노숙자가 모로 누운 화강석 벤치, 한 칸 건너 형광색 조끼를 입은 인부들이 어둠 속에 잡담을 뿌린다. 어제는 가로등을 정비하더니, 맞은편에는 물청소차가 천천히 지난다. 폭염도 폭우도 갔나 보구나. 내일이 밝으면 또 몇 군데 크고 작은 시위가 있을 것이고, 이 가을에도 광화문 모서리에서 몇 구절 시구가 태어날 테지. 이 익숙한 도시의 밤 풍경은 150년 전 프랑스 제2제정 시대(1852~1870년) 파리에서 시작되었다.나폴레옹 3세의 독재 치하에서 오늘날 파리의 밑그림이 그려졌고, 당시 파리 시장(정확하게는 센(Seine) 구의 수장)을 맡았던 외젠 오스만의 과감한 개조 사업에 따른 것이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편이다. 그 소개에는 언제나 시위대가 바리케이드를 못 치게 하려고 대로를 뚫은 독재의 조력자, 빈민가를 순식간에 철거하고 집세를 급등시킨 자본주의 첨병이라는 평가가 덧붙는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오스만이 잘못했다고 배웠어요. 노동자들을 쫓아내고 철거민을 만들고 부자들 좋도록 재개발을 했으니까. 그런데 요즘 돌이켜 보니까 당시에 오스만이라는 사람이 그나마 생각을 많이 했어요. 물론 오스만이 처음은 아니고, 나폴레옹 때부터 그런 구상을 했다고 해요. 파리를 유럽의 수도로 만들자. 나폴레옹 3세도 좋은 도시가 되려면 어떻게 돼야 하는가를 나름대로 연구했어요. 독재를 하면서 시위 진압하기 편하게 하려고 시작했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그거로 끝나지 않고 결국에는 좋은 도시가 되게 하려고 노력했거든요.” 그러나 여전히 찜찜하다. 독재자가 독재적 방법으로 만드는 것이 좋은 도시일 수 있는가? 좋은 도시라는 것은 무엇인가? “좋은 도시라면, 우선 통해야 돼.” 음, 스승의 가르침은 이렇게 간단한 것인가? 발자크와 위고의 소설에 등장하는 파리의 골목이라고 하면, 종로의 피맛골 같은 대로의 뒷골목을 상상하곤 하지만, 사실 1850년까지 파리라는 도시의 거의 모든 길은 평균 폭이 1~2m에 지나지 않았다. 4층 넘는 건물이 빽빽한 인구 백만의 도시에, 곧은 길이라고는 없이 구불구불하고 막다른 데다가 가장 넓은 도로라고 해 보았자 폭이 5m도 되지 않았으니 파리에는 오로지 골목밖에 없었다. 마차나 수레가 드나들지 못했다. 당시 한 보고서에 따르면 5㎡짜리 옥탑방 한 칸에 23명의 어른과 어린이가 바글바글 살면서 그 생활 오물과 폐수를 그냥 길 앞에 내다버렸으니, 하루 종일 해도 바람도 들지 않는 좁은 골목 환경이란, 사람들이 하수구 속에 사는 꼴이었다. 콜레라가 창궐한 것은 그 하수가 그대로 상수에 섞여들고 집들이 너무 다닥다닥했기 때문이다. 도시 생활을 견디지 못한 성난 민중들이 집앞 바닥 포장돌을 파내서 쌓으면 바로 기마대를 막을 수 있었으니 그것이 혁명기에 고안되었다는 바리케이드의 정체였다.파리를 개조해야 한다는 제안은 18세기부터 꾸준히 있었다. 그러나 어떤 전제 군주도 손댈 생각 없었던 도심을 가꾸기 시작한 것은 나폴레옹 황제였다. 콩코르드 광장부터 루브르를 지나는 리볼리 가를 닦기 시작했지만 마치지 못했다. 나폴레옹의 실각으로 유년기를 유럽 여러 나라를 전전하며 보냈던 조카 루이 나폴레옹은 자유주의에 관심을 가졌고, 영국 런던에 머물면서 그 도시 경관에 크게 감동했다. 그가 1848년 선거에서 압도적 지지를 받으며 초대 대통령에 당선된 데에는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의 향수에 더해 서민의 삶을 개선하겠다는 공약에 힘입은 바 컸다. 파리는 프랑스의 심장이고 위대한 도시라고 열을 올리며 불로뉴 숲을 런던 하이드 파크를 능가하는 공공 공원으로 조성하고 삼촌이 못 마친 리볼리 가의 연장 공사에 착수했지만 사업이 더뎠다. 임기 내에 공약을 이행하지 못할 형편이 되자 재선이 불투명해졌고 불안감에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종신을 선언한 나폴레옹 3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신임 파리 시장을 찾는 것이었고, 그때 배짱과 열정에 충만한 오스만을 만났다. 1853년 취임 첫 주인 오스만에게 파리 지도를 펼쳐 보이며 “통하게, 통합되게, 그리고 아름답게” 만들어 보라고 명했다.“오스만이 처음에 한 일이 동서하고 남북으로 대로를 십자(그랑 크로아제)로 내요. 이렇게 하면 도시가 고르게 발전되죠. 그다음에 동서남북 네 길 끝에 역을 연결하고 도시를 순환하는 대로를 내요. 모든 게 연결되도록 만든 거지.” 6년 만에 1단계 사업이 완료되자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파리 시민들은 환영했다. 나폴레옹 3세는 오스만에게 어째서 같은 건축가와 계속 작업했는데 제대로 되지 않던 사업이 갑자기 순조로워졌는지 오스만에게 물은 적이 있는데, 자신만만하게 ‘시장이 다른 사람이니까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대로는 정말 독재자가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서 뚫은 것일까? 나폴레옹3세 치하 파리에서 진압할 만한 봉기는 일어난 적이 없었다(파리 코뮌은 정작 실각 후다). 오스만은 훗날 보수적 의회에서 예산을 따낼 명분으로 내세웠을 뿐이라고 변명한 바 있다. 실로 오스만은 치밀했다. 폭 20m가 넘는 대로는 시위꾼 노동자들이 우글거리는 불량 주택만 없앤 것이 아니었다. 교통 정체와 오물과 매연도 사라졌다. 거기에 인도가 생겼고, 빛과 바람과 가로수가 도로를 채웠다. 오스만의 파리 개조에서 더 중요한 것은 대로의 지하, 보이지 않는 데 있었다. “첫 번째, 위생이다. 그래서 파리의 하수도 계획이 선 거예요. 굉장히 잘한 거죠.”파리 인구 전체에 배분될 분량을 계산해 상수원을 끌어왔다. 새로 판 거대한 하수도는 가스등과 다음 세기에 지하철이 지날 관이기도 했다. 시에서 받은 제복을 입은 인부들이 매일같이 하수에 모인 빗물로 도로를 청소하고 수만 그루의 가로수를 다듬고 가스등을 켜고 끄는 도시 풍경이 처음 탄생했다. “두 번째, 도시에 빈 데가 많아야 된다. 사람들이 숨 쉴 수 있는 공원도 숲도 만들었죠. 관통하고 호흡하게 만든 거예요. 오페라 극장이며 에펠탑도 서는 건 그다음이죠. 그렇게 함으로써 지금의 파리가 탄생했습니다.” 오스만은 공원 울타리, 벤치, 신문 가판대, 공중 화장실, 광고판 같은 도시의 공공시설을 하나하나 세심하게 설계하고 도시 전체에 고루 일관되게 적용했다. 그것은 상하수도처럼 시민 모두가 누릴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 중요한 것은 가로변에 철거한 다음 새로 지은 건축물들이었다. 같은 길에 면한 건물들은 서로 주인이 달라도 모두 하나로 이어져 보이도록 짓게 했다. 실내에서야 아무리 개성적으로 호화판으로 살든, 대로변 외관에 건축주의 부를 뽐내는 조각품이나 맥락을 끊는 디자인은 엄격히 금했다. 외벽 마감은 인근에 흔한 석재로 통일하고, 같은 형태의 테라스 난간을 설치하게 했다. 모든 건물은 최소한 10년에 한 번씩 일제히 보수하고 청소해야 했다. 사소한 데까지 꼼꼼하고 일관된 규제 속에 지어져 ‘오스만 건축’이라고 불리게 된 이 건물들은 하나하나 튀지는 않지만 방문객을 파리의 장대한 원근법으로 초대한다. 그러나 그것은, 관광용 유물이 아니라 삶의 풍경이다. 대로변 건물의 2~3층은 가족이 많은 부유층의 아파트고, 5층이나 6층에는 독신자나 노동자, 학생들이 살았다. 도시 전체가 상가이자 동시에 주택가고, 빈부가 한 지붕 밑에 공존했다.파리 도심에는 고층 아파트가 없지만 인구 밀도는 1㎢당 2만명이 넘어 서울보다 훨씬 높다. 근대의 수도, 파리 시민들은 추리닝 차림으로 자가용을 끌고 외곽의 대형 쇼핑몰을 가는 대신에 차려입고 1층에 끊임없이 이어지는 작은 가게들을 산책하며 쇼핑하고, 길이 끝나는 데서 저녁의 오페라를 즐긴다. 위정자의 영광을 향한 길이 아니었다. 오스만은 파리의 오래된 역사적 건축들이 돋보이는 각도로 새 길을 냈고, 도시의 구마다 고르게 크고 작은 녹지 공원과 광장을 조성했다. 이 대대적 사업을 순식간에 시행하기 위해서 권력을 등에 없고 법을 개정하고, 자본가의 도움을 빌어 투자 회사를 설립했으며 수만 명의 노동자를 동원했다. “일을 끊임없이 벌이고 세금 많이 걷으니까, 결국 오스만은 그래서 실각하죠. 자동차 시대를 예견했는지는 모르지만, 모던한 도시 계획인 거고, 유럽의 근대 도시가 여기서 출발하는 겁니다. 미국 시카고, 워싱턴, 바르셀로나, 빈…, 그런 대도시가 다 파리를 따르거든요. 그 기틀이 뭔지 자세히 봐야 할 거예요. 여러 사람을 괴롭혔지만 결과적으로 도시를 문화적으로 굉장히 성숙하게 만들었어요. 사람들이 불도저 김현옥 시장을 오스만하고 비슷하다고 말하지만, 그렇게 쉽게 말할 게 아니에요. 그리고 그들은 한 세기 전에 오스만이 해 온 것을 비판도 하지만 새로 연구하고 근사하게 이어받아서 라데팡스를 만들었어요. 그러면 정도전이 만들어 놓은 서울이 확장될 때 우리는 무엇을 놓친 건가….” 르코르뷔지에를 위시한 모더니스트들이 비난을 퍼부은 오스만의 파리 개조가 왜 모던한 도시의 출발인가. 데이비드 하비는 모더니즘의 본질을 획일적 전통에 대한 ‘창조적 단절’이라고 말한다. 황현산 선생이 평생 연구했듯, 누구나 뻔히 공감할 완결된 서정성을 과감하게 뚫는 아이러니가 프랑스 상징주의의 모던한 시 정신이고, 그 정신이 제2제정기의 파리에서 태동했다. 1960년대 쿠데타 이후 반세기, 서울이 낳은 시와 도로를, 서울이 남긴 역사와 어둠을 지운 야경을 떠올려 본다. 격자 대로를 가도 가도, 600년 전 북악과 광화문에 맞먹을 비스타를 마주칠 일이라고는 없는 강남과 여의도에서 터전을 닦은 중산층은 이제 그들이 세운 도시를 깨끗이 철거하고 역사를 지우는 데 바쁘다. 폭염이 지나자 여기저기서 재개발과 폭등과 재생이 터져 겨루는 서울은 어떤 미래를 꿈꾸는가. 기획 수류산방 조성룡 건축가·도시건축 대표 심세중 수류산방 편집장
  • [그 책속 이미지] 만화 덧입은 세계 명화들

    [그 책속 이미지] 만화 덧입은 세계 명화들

    모니카와 떠나는 세계 명화 여행 박우찬 지음/마우리시우 지 소우자 그림/지에이북스/168쪽/1만 3000원백마에 올라탄 꼬마 세볼레옹의 눈은 졸린듯 반쯤 감겼다. 오른손을 들고 ‘나를 따르라!’고 외치지만 말마저도 웃긴 모양이다. 극적인 장면을 연출한 자크루이 다비드의 명화 ‘알프스 산맥을 넘는 나폴레옹’이 이렇게 재밌는 그림으로 바뀌었다. 브라질 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만화가 마우리시우 지 소우자는 1983년 루브르 박물관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감상하다 전 세계 명화에 자신의 만화를 덧입히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책은 명화 51점에 그의 만화 ‘모니카와 친구들’ 캐릭터를 입힌 그림을 담았다. 고대 이집트의 ‘투탕카멘 미라의 마스크’를 따라 만든 ‘치칸카멘’부터 산드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을 바꾼 ‘모니카 비너스의 탄생’ 등이 보는 이를 미소 짓게 한다. 김홍도의 ‘서당’과 신윤복의 ‘단오풍정’도 실었다. 원본이 된 명화들에 관한 해설도 놓치지 않았다. 브라질에서 열기 시작한 ‘모니카와 떠나는 세계 명화 여행전’은 세계 8개 도시를 순회하며 관람객 150만명을 모았다. 한국 전시회가 다음달 26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서 열린다. 자녀와 보러 가는 것도 좋겠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파리 지하철 6개역 대표팀 감독과 골키퍼 이름으로

    파리 지하철 6개역 대표팀 감독과 골키퍼 이름으로

    파리 메트로(지하철)가 프랑스의 러시아 월드컵 우승을 축하하기 위해 잠정적으로 6개 역의 이름을 바꾸기로 했다. 시는 20년 만에 통산 두 번째 우승을 일군 대표팀을 맞기 위한 대대적인 환영 행사를 기획하고 있다. 먼저 두 역 이름이 프랑스 대표팀 감독의 이름을 따 붙여진다. 노트르담 데 샹 역이 노트르 디디에 데샹 역으로 바뀌고 센트럴 노선 역 가운데 하나의 이름이 데샹젤리제 클레망소 역으로 바뀐다. 빅토르 위고 역은 골키퍼이자 주장 이름에 착안해 빅토르 위고 요리스 역으로, 베르시 역은 베르시 뢰블레 역으로, 샤를 드 골 에뚜왈 역을 On a 2 Etoiles(별이 둘이야) 역으로 바뀐다.두 차례 월드컵 우승을 별 둘에 빗댄 것이다. 대표팀 유니폼 상의 오른쪽에 별 둘을 새긴 최신 유니폼을 사려는 긴 줄이 파리 도심의 스포츠 판매점 앞에 형성됐다. 루브르 박물관은 전시된 작품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모나리자가 별 둘을 새긴 나이키 유니폼을 입고 있는 디지털 이미지를 트위터에 올려놓고 “세계가 놀랐다”고 적었다.대표팀 선수단은 16일 오후(현지시간) 뚜껑 없는 버스를 탄 채로 파리 도심의 센트럴 어배뉴를 따라 카퍼레이드를 벌인다. 전날 밤 축하 분위기에 도취된 일부 시민들이 파리와 리옹, 스트라스부르와 루앙 등에서 폭력 시위와 집회로 변질돼 최루탄이 난무하고 간헐적으로 진압 경찰과 충돌하는 등의 불상사가 이어졌다. 샹젤리제 거리의 가게에 침입해 와인과 샴페인을 훔쳐간 젊은이들도 수십 명이 됐다.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20년 만에 결승 진출의 꿈을 이룬 크로아티아 선수단을 환영하는 퍼레이드가 거의 같은 시간 수도 자그레브에서도 진행된다. 시 당국은 대중교통 수단을 무료로 이용하게 해 더 많은 이들이 축제를 즐기게 할 계획이다. 3위를 차지한 벨기에 수도 브뤼셀은 아르-루아 역을 플레이메이커 에덴 아자르의 이름을 따 아자르-루아 역으로 바꾼다. 벨기에 대표팀 선수들은 15일 브뤼셀 도심에서 환영 행사를 가졌다. 영국 런던에서는 피카딜리 라인 사우스게이트 역이 1990년 자국 대회 4강에 이어 28년 만에 4강으로 이끈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 개러스 사우스게이트의 이름을 따 개러스 사우스게이트 역으로 재단장했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세계 평화 상징물에 덕지덕지… 이게 예술인가

    세계 평화 상징물에 덕지덕지… 이게 예술인가

    佛전시회 연 거리예술가 정태용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메시지” 독일에서 기증받은 원본에 낙서 동·서독 통일 기원 글 등 지워져 중구 “문화재 훼손 수사 의뢰 검토”독일 베를린시가 서울시에 기증한 베를린장벽이 지난 8일 밤 그라피티 아티스트의 낙서로 훼손됐다. 예술행위가 아니라 문화재 훼손 범죄라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해 3월 ‘히드아이즈’라는 복합예술브랜드를 론칭한 그라피티 아티스트 정태용(테리 정·28)씨는 지난 8일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서울 중구 청계천로 한화빌딩 앞에 있는 베를린광장에서 찍은 사진을 게시했다. 정씨는 “전 세계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분단국가인 대한민국의 현재와 미래를 위하여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며 베를린장벽에 스프레이 페인트로 그린 그림을 소개했다. 높이 3.5m, 폭 1.2m, 두께 0.4m의 베를린장벽은 1961년 동독에서 설치했던 것으로 독일이 통일되면서 1989년 철거돼 베를린시 동부 마르찬 휴양공원에 전시됐던 것이다. 베를린시는 우리나라의 통일을 바라는 뜻에서 2005년 9월 베를린장벽을 서울시에 기증했다.베를린장벽의 서독 쪽 벽면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었기에 이산가족 상봉과 통일을 염원하는 글, 그림 등이 새겨져 있다. 반면 동독 쪽은 깨끗한 콘크리트 면이다. 동독은 시민들의 장벽 접근을 제한했고, 벽면을 L자로 꺾어서 바닥에 턱까지 만들어 차량으로 서독을 향해 탈주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이처럼 원형을 그대로 간직한 3폭의 베를린장벽은 독일에도 별로 남아 있지 않아 역사적 보존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정씨의 그라피티 탓에 서독 쪽 벽면에 있던 역사의 흔적은 형형색색 페인트로 뒤덮여 형체를 알아보지 못하게 됐다. 자유와 거리가 멀었던 동독 사회 분위기를 짐작게 해주는 맞은편 벽도 정씨가 남긴 글귀로 훼손됐다. 정씨는 2014년 파리 루브르박물관 아트살롱페어에 초대 전시회를 여는 등 거리예술계에서 주목받는 작가로 알려졌다. 예술적 의도였다 해도 그라피티는 엄연한 범죄행위다. 형법상 재물 손괴죄 등으로 처벌받을 수 있다. 베를린광장이 서울 중구 소유인 점을 감안하면 공용물 파괴죄로 1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형도 가능하다. 정씨는 문화재 훼손이라는 논란이 제기되자 인스타그램을 탈퇴했다. 베를린광장 관리 업무는 서울시에서 중구로 이관된 상태다. 서울 중구 관계자는 “현장관리팀이 매일 순찰하는데 미처 낙서를 발견하지 못했다”면서 “내부적으로 경위를 파악한 뒤 수사 의뢰를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글 사진 오달란 기자 dallan@seoul.co.kr
  • 청계천 베를린장벽에 한밤중 낙서…예술인가 범죄인가

    청계천 베를린장벽에 한밤중 낙서…예술인가 범죄인가

    그라피티 아티스트 정태용씨 “한국 위한 메시지”인스타그램에 올렸다 논란되자 계정 탈퇴 서울 중구청 “경위 파악한 뒤 수사 의뢰할 것”형법상 공용물 파괴죄로 처벌될 수 있어독일 베를린시가 2005년 서울시에 기증한 베를린장벽이 지난 8일 밤 그라피티 아티스트의 낙서로 훼손됐다. 예술행위가 아니라 엄연한 문화재 훼손 범죄라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해 3월 히드아이즈(HIDEYES)라는 문화예술브랜드를 론칭한 그라피티 아티스트 정태용(테리 정·28)씨는 지난 8일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서울 중구 청계2가 한화빌딩 앞에 있는 베를린광장에서 찍은 사진을 게시했다. 정씨는 “전세계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분단 국가인 대한민국, 현재와 앞으로 미래를 위하여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며 베를린장벽에 스프레이 페인트로 그린 그림을 설명했다.서울 시내 한복판에 자리한 베를린 광장은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가인 우리나라의 통일을 염원하는 의미로 지난 2005년 9월 조성됐다. 서울시가 100㎡ 크기의 부지를 마련하고 조성 비용은 베를린시가 부담했다. 높이 3.5m, 폭 1.2m, 두께 0.4m의 베를린장벽 3폭은 1961년 동독에서 설치했던 것으로 독일이 통일되면서 1989년 철거돼 베를린시 동부 지역에 있는 마르찬 휴양 공원 안에 전시됐던 것이다. 베를린장벽은 당시 부산항을 통해 배편으로 국내에 도착했다. 베를린시는 100년 이상 된 공원 가로등과 벤치, 바닥 포장까지 서울시에 보냈다. 독일 그륀베를린사 기술고문인 롤프 비저가 직접 서울을 방문해 직접 공사감독을 시행하는 등 양쪽 시의 세심한 노력 끝에 작지만 의미 있는 베를린광장이 탄생했다. 이 베를린장벽의 서독 쪽 벽면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었기에 이산가족 상봉과 통일을 염원하는 글과 그림 등이 새겨져 있다. 반면 동독 쪽은 깨끗한 콘트리트 면으로 남아있다. 동독은 시민들의 장벽 접근을 제한했고, 벽면을 L자로 꺾어서 바닥에 턱을 만듦으로써 차량으로 서독을 향해 탈주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이런 원형이 그대로 보존된 베를린장벽은 그 자체로 역사적 가치를 담은 문화재인 셈이다.하지만 정씨의 그라피티로 인해 서독 쪽 벽면에 있던 당시의 흔적은 파랑, 분홍, 노랑, 은색의 페인트로 뒤덮여 형체를 알아보지 못하게 됐다. 자유와는 거리가 멀었던 동독 사회 분위기를 짐작케 해주는 맞은 편 벽도 정씨가 남긴 글귀로 훼손됐다. 정씨는 2014년 파리 루브르 박물관 아트살롱페어에 전시회를 열고 2015년 10월 국내에서 첫 개인전을 여는 등 거리문화 예술계에서 주목받는 작가로 알려졌다. 최근 패션브랜드 반스, 디즈니, 푸마 등과 협업(컬래버레이션)도 한 것으로 전해졌다. 정씨는 만화에서 화가 난 인물의 이마에 그려넣는 이른바 ‘빠직’ 무늬와 한자 삼(三)을 합친 고유 패턴을 즐겨 사용한다. 그는 과거 인터뷰에서 “화가 나더라도 세번은 참아야 한다는 뜻을 담은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정씨는 이 무늬를 베를린장벽 서독쪽 면에 은색 페인트로 잔뜩 그려넣었다. 그는 인스타그램에서 “히드아이즈의 페이션스(patience·인내) 패턴과 태극기 네 모서리의 4괘를 담아 표현했다”며 “태극기의 4괘와 히드아이즈 패턴이 조화롭게 이뤄져 우주와 더불어 끝없이 창조와 번영을 희구하는 한민족의 이상인 의미를 담아 그 뜻을 내포했다”고 적었다.정씨는 문화재 훼손이라는 논란이 제기되자 인스타그램을 탈퇴했다. 그러나 정씨 게시물을 저장해 둔 네티즌들이 9일 다수의 온라인커뮤니티에 ‘서울시 베를린장벽 낙서 대참사’라는 제목의 글을 옮기며 화제가 됐다. 정씨의 예술적 의도에도 불구하고 그라피티는 범죄 행위다. 형법상 재물손괴죄로 처벌될 수 있다. 형법 제366조에 따르면 타인의 재물, 문서, 또는 전자기록 등 특수매체기록을 손괴 또는 은닉 기타 방법으로 그 효용을 해한 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7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다. 베를린광장이 서울시 중구 소유인 점을 감안하면 형법 제143조에 따라 공용물파괴죄에 해당돼 1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형을 받을 수도 있다. 실제 지난해 7월 우리나라에 입국해 지하철 1호선과 6호선 전동차에 그라피티를 남긴 영국인 20대 형제는 공동주거침입, 공동재물손괴 혐의로 법원에서 징역 4개월을 선고받기도 했다. 베를린광장 관리 업무는 서울시에서 중구청으로 이관된 상태다. 서울 중구청 관계자는 “청계천 주변 녹지관리와 환경미화를 하는 현장관리팀이 매일 순찰하는데 미처 낙서를 발견하지 못했다”면서 “내부적으로 경위를 파악한 뒤 수사 의뢰를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오달란 기자 dallan@seoul.co.kr
  • 문화재 보수에 전주한지 사용한다

    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에 이어 국립전주박물관도 소장 문화재 보수에도 전주한지를 사용하기로 했다. 전북 전주시는 석지 채용신 (1848~1941)의 작품인 ‘조선전기 문신 공양공 김관영정’ 등 전주국립박물관에서 보관 중인 대표유물의 보존처리에 전주한지가 활용된다고 17일 밝혔다. 이는 양 기관이 지난 3월 맺은 전주한지 사용 업무협약 이행을 위한 첫 번째 성과다. 최근 전주시는 국립전주박물관의 요청을 받아 전주한지장인에게 유물 보수용 전주전통한지 440여장(63x93cm)을 주문했다. 전주한지산업지원센터도 가장 적합한 한지가 문화재 보수용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시험성적서를 작성하는 등 협조했다. 전주시는 이번을 시작으로 국내 국립 및 공립 박물관 소장품 보수재료로 전주한지의 활용도를 높여나간다는 계획이다. 전주시 관계자는 “이번에 전주박물관이 전주전통한지를 보수재료로 채택한 것은 그 우수성을 인정한 것으로 앞으로 전주한지 산업화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주 임송학 기자 shlim@seoul.co.kr
  • [이덕일의 새롭게 보는 역사] 평양 낙랑군 유물을 가는 곳마다 발견한 ‘신의 손’ 일제 학자

    [이덕일의 새롭게 보는 역사] 평양 낙랑군 유물을 가는 곳마다 발견한 ‘신의 손’ 일제 학자

    제국주의 고고학이란 말이 있다. 영국의 대영박물관에는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5세(서기전 205~180)에 대해서 기록한 로제타스톤이 전시되어 있다. 이집트에 있어야 할 스핑크스와 수많은 미라들도 프랑스의 루브르박물관에 있다. 제국주의 시대 강탈해 간 유물들로 제국주의 고고학의 산물들이다.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일본이 제국주의 고고학을 수행했는데, 앞의 나라들과도 사뭇 다르다. 영국, 프랑스 등은 유물은 강탈했지만 그 나라들의 역사를 바꾸지는 않았다. 반면 일본은 고고학을 한국사 조작의 용도로 악용했다. 더 큰 문제는 일본의 고고학자 니시카와 히로시가 ‘일본 제국주의 아래에서 조선고고학의 형성’(1970년)이란 논문을 쓴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일본인들이 한국 고고학을 시작했는데, 아직도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조선총독부에서 시작한 한국의 고고학 교토대 교수인 고고학자 요시이 히데오는 ‘식민지 지배에 있어서 일본인의 고고학적 조사’(2005)라는 강의를 했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이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가짜로 만들기 위해서 만든 용어인 ‘원삼국’(原三國) 같은 용어를 사용하는 문제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가 강의에서 ‘식민지 시기 조선의 고적 조사사업’을 세 시기로 나눈 것은 음미할 만하다. 첫 시기는 ‘일본인에 의해 본격적인 조사 사업이 시작된 시기’(1900~1908)인데, 두 명의 고고학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한 명은 조선왕실의 유물을 보관하던 이왕직박물관에도 근무했던 도쿄제국대학 인류학연구실 소속 야기 소우사부로(1866~1942)이고 다른 한 명은 지금도 한국고고학계에서 크게 높이는 세키노 다다시(1868~1935)다. 세키노는 원래 도쿄공대에서 조가학(造家·건축학)을 전공한 건축학도였다. 그러나 고대 야마토왜(大和倭)의 수도였던 나라(奈良)의 고건축들을 연구하고, 평성경(平城宮) 유적을 발굴하면서 고고학자를 겸하게 되었다. 그는 백제인들이 망국 후 서기 665년 후쿠오카 북부에 쌓은 조선식 산성인 기이성(基肄城·기이조)도 발굴했으므로 고대 야마토왜가 백제인들의 담로(擔魯·제후국)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세키노는 1902년부터 한국에 여러 차례 와서 유적들을 발굴하는데, 이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한나라 및 낙랑 유물을 ‘우연히’ 발견하는 ‘신의 손’이 되었다.●‘조선고적도보’를 마구 나눠 준 군인총독 요시이가 분류한 ‘식민지 시기 조선의 고적 조사사업’의 두 번째 시기가 ‘조선총독부 주도의 조사체계 확립’의 시기로 세키노가 조선총독부의 자금으로 한국 각지의 고적을 조사하고 다녔다. 조선총독부는 1915년에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개관하고 이듬해 ‘고적조사위원회’를 설치했다. 표면적으로는 한국 내의 유적, 유물들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보존하는 사업처럼 보이지만 요시이가 “한반도의 고고학적 조사는 조선총독부와 관련 있는 일부 일본인들로 제한했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일본인들의, 일본인들에 의한, 일본인들을 위한’ 고고학이었다. 세키노는 가는 곳마다 낙랑 유물을 발견하는 ‘신의 손’이 되고, 일본이 이를 대대적으로 선전함으로써 세계적인 주목까지 받게 된다. 세키노는 1915년부터 1935년까지 조선총독부 간행으로 초호화판 ‘조선고적도보’(1915~1935)를 발간했다. 여학교 교원들에게도 칼을 차고 교실에 들어가게 했던 초대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총독실에 ‘조선고적도보’를 쌓아 놓고 국내외의 내외빈들에게 마구 뿌렸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군인이었다는 육군대장 데라우치가 고고학을 얼마나 중요한 식민통치의 일환으로 삼았는지를 말해 주는 일화이다.●검증받지 않은 정설, 세키노 다다시 세키노의 발굴 결과에 대해서 남한 학계는 아직 단 한 번도 본격적인 검증 작업을 하지 않고 이른바 ‘정설’로 떠받들고 있다. 낙랑군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오영찬 이화여대 교수는 이렇게 썼다. “낙랑군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와 함께 구체적인 역사상이 정립된 것은 일제강점기 이후의 일인데, 여기에는 고고학 발굴 조사 자료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낙랑고분 발굴 조사는 1909년 도쿄제국대학 건축학과 세키노에 의해 개시되었다.”(오영찬, ‘낙랑군 연구’, 사계절, 2006년, 16쪽) 2016년쯤에는 이른바 젊은 역사학자들이 ‘역사비평’에 조선총독부를 계승한 강단의 기존 학설을 열렬히 옹호하고 나서서 조선일보로부터 ‘국사학계의 무서운 아이들’이란 칭찬을 받았다. 이들은 그 내용을 ‘한국 고대사와 사이비역사학’(역사비평사·2017)이란 책으로 묶어냈는데, 위가야는 “이후 1920년대 중후반에 이르기까지의 (세키노의) 조사를 통해 확인된 유적과 유물들은 낙랑군의 중심지가 평양이었음을 확인시켜 주는 핵심적인 증거로 인정받았다”(124쪽)고 서술하고 있다. ‘낙랑군=평양설’의 뿌리가 세키노의 고고학이란 논리다. ●세키노 다다시의 양심고백? 그런데 세키노가 한국에서 이런 높은 평가를 받는 것에 흡족해할지는 미지수다. 세키노는 조선총독부에서 심혈을 기울인 ‘조선고적도보’의 편집책임자였으면서도 이 책의 내용에 의문도 제기했기 때문이다. ‘조선고적도보’는 평안남도 대동군 대동강면 토성동을 낙랑군을 다스리던 조선현의 군치(郡治)가 있던 ‘낙랑군지치’(樂浪君治址)라고 표기했는데, 세키노는 그 뒤에 물음표를 달아서 의문을 표시했다. 황해군에 있었다는 대방군지치에도 마찬가지 물음표를 달아 놓았다. ‘조선고적도보’의 두 핵심 내용은 ‘낙랑군=평양설’과 ‘대방군=황해도설’인데, 왜 굳이 ‘과연 그럴까?’ 하는 물음표를 붙여 놓았을까. 세키노는 또한 ‘낙랑=평양설’의 결정적 증거라는 ‘효문묘 동종’(孝文廟銅鐘)을 비롯해 자신이 발견한 낙랑군의 주요 유물들마다 ‘우연히 발견했다’고 꼬박꼬박 덧붙여 놓았다. 게다가 우연이 거듭되면 필연이라는 속설을 입증하는 내용을 ‘세키노 일기’(關野貞日記)에 남겼다. 문성재 박사는 ‘한사군은 중국에 있었다’(2016)에서 세키노의 일기를 몇 대목 공개했는데 1918년 북경에서 쓴 일기에 이런 구절들이 나온다. ①대정(大正) 7년(1918) 3월 20일 맑은 베이징, “(베이징) 유리창가의 골동품점을 둘러보고,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위하여(朝鮮總督府博物館ノ爲メ) 한대(漢代)의 발굴품을 300여엔에 구입함” ②대정 7년 3월 22일 맑음, “오전에 죽촌(竹村)씨와 유리창에 가서 골동품을 삼. 유리창의 골동품점에는 비교적 한대(漢代)의 발굴물이 많고, 낙랑 출토품은 대체로 모두 잘 갖춰져 있기에(樂浪出土類品ハ大抵皆在リ) 내가 적극적으로 그것들을 수집함” 세키노는 베이징의 골동품 거리인 유리창가에서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위하여’ 한나라 유물들과 낙랑 출토품을 적극적으로 사들였다. 세키노는 왜 평양에 있었다는 낙랑군의 유물을 베이징에서 사서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보냈을까. 낙랑군 유물은 왜 평양이 아니라 베이징에서 거래되었을까. 낙랑군은 평양이 아니라 중국 사료들이 말하는 것처럼 베이징에서 그리 멀지 않은 현재의 하북성 노룡현(盧龍縣) 지역에 있었기에 베이징 골동품가에 시장이 형성된 것이다. 낙랑군 유물을 평양이 아닌 머나먼 베이징에서 사서 조선총독부로 보냈다는 세키노의 고백이야말로 ‘만들어진’ 제국주의 고고학의 실체를 증언해 준다.
  •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5000년, 세월이 지나 시간으로 남다 - 국립중앙박물관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5000년, 세월이 지나 시간으로 남다 - 국립중앙박물관

    “피의 유물(blood antiquities, 블러드 앤티크)” 전쟁과 침략은 모든 것을 바꾼다. 그 중 수천 년 동안 한 민족의 얼과 혼이 담긴 문화재들은 최악의 상황을 맞게 된다. 최근 이슬람 국가(Islamic State), 즉 IS라고 불리는 테러 집단이 점령했던 시리아의 고대 로마, 비잔틴 유적지인 아파메아(Apamea)의 경우 위성으로만 보아도 5,000여개 이상의 도굴 흔적이 확인 된다. 실상은 이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 IS가 쓸고 간 시리아 지역에서 약탈된 피의 유물(blood antiquities, 블러드 앤티크)은 현재 추정조차 되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도 별반 다르지 않다. 조선 시대 임진왜란 및 각종 전란, 일제 강점 및 6.25 한국전쟁을 거쳐 수탈된 우리 문화재는 확인된 것만 8만 7천여 점이 넘는다. 국가도 다양해서 일본이 거의 80%이상을 점유하고 있으며 이외에도 미국 워싱턴 스미소니언박물관, 영국 대영박물관,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을 비롯해서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박물관 등지까지 우리나라 박물관에 당연히 있음직한 귀한 우리의 문화재들이 고스란히 전시중이다. 1965년 한일협정 당시 일본에 반환을 요구했던 공공기관 소장 한국문화재만도 4천4백79점이었으며 이중 일본 정부 소유 1천 3백여 점만이 1966년 5월에 반환되었고, 1967년에는 조선총독부가 동경박물관으로 반출했던 창령 고분 출토유물 1백6점만이 돌아왔을 뿐이다. 여전히 문화재 반환 노력은 진행 중이지만 해결은 쉽지 않다. 말 그대로 ‘로마는 로마에 있지 않고 프랑스와 영국에 있다’라는 말처럼 조선은 서울에 있지 않고 동경과 파리에 있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천 년 역사의 풍파 속에서 남은 흔적을 모으고 모아, 규모면에서는 세계 6대 박물관에 들어간다는 국립 중앙 박물관으로 가 보자. 2005년에 용산에 이전한 국립 중앙 박물관은 생각보다 규모나 전시품들이 훌륭하다. 당연히 대한민국 최고라는 점은 말할 것도 없고, 소장 유물만으로도 약 33만 점이 넘는 규모이니 관람객 수 기준으로는 아시아 1위는 분명하다. 지금의 국립 중앙 박물관의 연혁은 1909년 대한제국의 제실박물관에서 시작한다. 이후 일제 강점 시기 조선총독부 박물관과 이왕가박물관 기간을 거쳐 1946년에 덕수궁 안의 석조전 건물에서 지금의 박물관 모양새를 갖추게 된다. 이후 중앙청 건물과 경복궁 내 건물 등에 옮겨 다니다 2005년에 용산에 제대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의 상설전시장은 총 6개의 관과 50개의 실로 구성되어 12,044점의 유물을 전시하여 제공하고 있다. 국보 3호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를 비롯해서 다양한 국보급 문화재들과 보물 등이 외부전시일정 및 유물의 보존 상태를 위하여 주기적으로 교체 전시되고 있다. 우선 중앙 로비인 으뜸홀을 기준으로 1층에는 구석기 시대부터 통일신라, 발해 시기까지의 선사 고대관과 고려, 조선, 대한제국의 역사자료가 있는 중, 근세관이 있다. 2층에는 개인 소장품들을 전시하는 기증관과 서화와 불교 회화, 목칠 공예 등을 전시하는 서화관이 자리잡고 있다. 마지막으로 3층에는 중국, 일본, 중앙아시아의 문화재를 전시하고 있는 아시아관과 고려청자와 조선백자 등의 도자 공예 등을 관람할 수 있는 조각 공예관이 있다. 또한 이러한 상설전시 외에 특별전시회 등도 시기마다 다채롭게 열리고 있어 1년 365일 볼거리가 가득한 박물관임은 분명하다. 오천 년의 세월을 지나 시간의 흔적으로 남은 귀한 유물들을 통해 다시금 우리 역사와 문화의 소중함을 새삼 느끼는 시간을 국립 중앙 박물관에서 가져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특히 봄하늘 미세먼지 공습으로 인한 바깥나들이가 여의치 않다면 국립중앙 박물관은 훌륭한 체험 장소임은 분명하다. <국립 중앙 박물관에 대한 여행 10문답> 1. 꼭 가봐야 할 정도로 중요한 여행지야? - 당연하다. 한 번이 아니라 수 십 번이라도 방문을 해도 좋다. 상설전시는 무료다. 2. 누구와 함께? - 어린이 박물관 시설이 아주 훌륭해서 가족 동반 나들이 장소로도 훌륭하다. 3. 가는 방법은? - 4호선 / 경의중앙선(문산-용문) / 이촌역 2번출구 방향 '박물관 나들길’ 4. 감탄하는 점은? - 교과서에서 사진으로나마 보았던 실물 유물들, 3층 아시아 문화관. 5. 명성과 내실 관계는? -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처럼 너무 유명해서 사람들이 많지 않다. 주중은 한산한 편. 6. 꼭 봐야할 장소는? - 1층 대한제국실, 3층 고려 청자실 7. 먹거리 추천? -인근에 이태원이나 경리단길에 훌륭한 식당들이 많다. 8. 홈페이지 주소는? - www.museum.go.kr/site/main/home 9. 주변에 더 볼거리는? - 이태원 거리, 경리단 거리, 전쟁박물관, 한글박물관 10. 총평 및 당부사항 - 한 국가가 지닌 문화의 힘은 박물관에서 나온다고 한다. 박물관 나들이는 생각보다 지루하지 않고 실내 나들이 공간으로는 최고의 장소임에는 분명하다. 봄나들이 적극 추천! 글·사진 윤경민 여행전문 프리랜서 기자 vieniame2017@gmail.com
  • [시론] ‘한국형 新중동정책’의 길/송웅엽 주이라크 대사

    [시론] ‘한국형 新중동정책’의 길/송웅엽 주이라크 대사

    중동이 변하고 있다. 변화의 핵심은 ‘이슬람주의(Islamic Fundamentalism)의 퇴조와 위로부터의 개혁’이다. 중동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고, 이 변화는 어떤 가능성을 말해 주는가. 우리는 중동을 상반적 가치로 인식한다. 사우디 왕자와 시리아 난민, 두바이 마천루와 요르단 난민촌, IS 테러와 UAE 루브르박물관, 테러 같은 자극적인 뉴스는 중동을 이해하는 한계일지 모른다. 중동을 이해하려면 이슬람주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을 통해 뿌리내린 이슬람주의는 아프간에서 소련에 대한 지하드(성전)를 통해 성장하다 1991년 제1차 걸프전을 계기로 악명 높은 테러단체 알카에다를 키웠다. 2011년 시작된 아랍의 봄이 좌절된 후 IS라는 돌연변이를 낳았다. 2014년 6월 아부 바르크 알바그다디는 시리아 락까와 이라크 모술을 IS의 정치와 경제 수도로 선포하고, 스스로를 ‘칼리프’라 칭했다. IS 수립은 1916년 사이크스피코협정에 따른 자의적 국경선 설정 이후 처음으로 이슬람 공동체라는 염원에 다가섰다는 희망을 일부에게 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의 극단적인 정책들은 이슬람 내부에서도 반발을 샀고, 지난해 12월 이라크에서 완전 격퇴되면서 수립 3년 반 만에 몰락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제 이슬람주의는 역사의 대세에서 밀려난 형국이다. 그리고 그 자리를 새로운 시도가 채우고 있다. 바로 탈석유 산업다변화와 온건한 이슬람 국가로의 개혁을 추구하는 사우디가 대표적이다. 2016년 4월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는 ‘비전 2030’을 발표했다. 사우디 경제의 석유 의존도를 낮추고, 신산업을 육성하는 것이 핵심이다. 홍해 연안에 5000억 달러 규모의 첨단 미래도시 ‘네옴시티’를 건설하고, 첨단기술과 신재생에너지, 엔터테인먼트 산업 등을 유치할 계획이다. ‘미스터 에브리싱’(Mr. Everything)이라 불리는 이 젊은 왕세자는 지구상 가장 보수적인 이슬람 왕국을 온건한 이슬람 국가로 만들겠다고 선언하며, 왕족들의 특권을 제한하고, 여성의 운전금지 등 종교적 규제들도 풀기 시작했다. ‘아부다비 경제비전 2030’, ‘마스다르 시티 프로젝트’, ‘카타르 국가 비전 2030’, 그리고 두바이의 ‘이슬람 경제수도 계획’과 같이 중동에서는 탈석유, 포스트 이슬람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대대적인 개혁이 일어나고 있다. 혁신을 통한 산업 고도화와 미래를 대비한 전략과 패러다임을 추구하는 가운데, 금융, 문화, 교육, 보건, 관광 허브를 만들어 국가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모색하는 것이다. 40여년 전 중동 사막에서 흘렸던 우리 근로자들의 피땀이 우리 경제발전의 동력을 제공했다면, 지금 중동의 변화는 우리에게 다시 기회를 준다. 지난 3월 문재인 대통령의 UAE 방문에서 확인한 바와 같이 중동의 우리에 대한 인식은 매우 우호적이다. 우리의 성장을 좋은 경제발전 모델로 인식하고 있으며, 드라마와 케이팝을 통해 우리 문화에 공감하고 있다. 특히 건설산업에서 보여 준 열정과 책임감은 큰 자산으로 자리 잡고 있다. 건설이라는 하드파워에 서비스와 디지털산업이라는 소프트 파워를 겸비한 한국의 ‘스마트 파워’는 그 위상이 높다. 중동 개혁은 고부가가치 산업과 고급 인력 진출이라는 새 시장을 우리에게 줄 수 있다. IS 퇴출 과정에서 발생한 이른바 ‘상처 입은 늑대’(IS 잔존세력)를 끌어안고 피해를 복구하는 재건산업도 우리 기업이 관심을 가질 만하다. 이라크 재건사업만도 세계은행 추산에 따르면 882억 달러에 이른다. 이처럼 경제 성장과 정치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우리의 경험은 중동의 변화와 함께하면서 세계의 화약고 중동을 새로운 화합의 장으로 변화시키는 데 일조할 것으로 확신한다. 이것이 바로 중동의 근본적인 변화와 함께할 우리의 새로운 외교정책, 이른바 ‘한국형 신(新)중동정책’의 핵심 방향이 될 것으로 본다. 이는 우리의 세계사적 기여이자 책무다. 우리 싱크탱크와 국민들의 지혜가 모여 세계사에 기여할 한국형 신중동정책의 각론이 충실하게 쌓여 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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