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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카테린브르크(시베리아 대탐방:23)

    ◎「러」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일가의 슬픈역사 간직/4자녀·부부 함께 볼세비키들에 의해 처형 당해 비참한 최후맞은 통나무집 자리엔 추모비만/우랄산맥 벗어나 서시베리아로 다시 끝없는 평원이… 굳이 에카테린부르크를 찾은 이유중 하나는 볼셰비키들에 의해 참혹한 최후를 맞은 비운의 러시아 마지막 황제일가의 모습을 되돌아보기 위함이었다.비록 왕정주의자가 아니더라도 어린 자녀 4명과 함께 유배지의 지하실방에서 처형당한 차르 니콜라이부부의 비극은 마음을 아프게 한다. 택시기사는 이 비극의 장소를 쉽게 찾아냈다.그러나 황제일가가 최후를 맞았다는 2층 통나무집은 옐친대통령이 이곳 당제1서기를 할 때 허물어버려 지금은 흔적도 없고 대신 그 자리에 작은 목조교회와○옐친이 건물 허물어 추모비가 들어서 있다.황제일가가 처형당했다는 지하실방으로 통하는 입구는 흔적이 남아 있으나 쇠줄로 출입구를 봉쇄해놓았다. 추모비는 「순교비」로 명명돼 있었고 황제일가의 죽은 시각을 19 18년7월17일부터 18일 사이의 새벽으로 밝히고 있다.그리고 차르 니콜라이,차르비 알렉산드라와 함께 황태자 알렉시,공주인 올가·타치아나·마리아·아나스타시아의 이름이 나란히 새겨져 있다.왕정에 향수를 가진 미국·유럽인 사이에 아나스타시아공주가 당시 기적적으로 살아나 외국으로 도피했다는 억측이 끊이지 않고 있으나 이곳 사람들은 이를 터무니없는 낭설로 일축했다.미국영화 「아나스타시아」에 나오는 황제일가의 살해장소도 사실은 영화속같이 완전 지하실방이 아니라 우랄식 반지하방이었다. 당시 이곳 지방 볼셰비키들은 옴스크에 있던 백군 콜차크부대가 진격해온다는 소식을 듣고 혁명직후 튜멘주의 토볼스크를 거쳐 이곳에 유배돼 있던 황제일가를 서둘러 처형했다.이 처형을 레닌이 직접 명령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들었으나 확인하지는 못했다.그 수일 뒤 7월25일 에카테린부르크는 백군부대가 점령했다. 이외에 에카테린부르크에는 러시아기계공업의 자존심으로 일컬어지는 「우랄마시」가 있다.에카테린부르크가 자랑하는 것 두가지만 꼽으라면 이곳 사람들은 서슴없이 「우랄마시」와 우랄 돌을 꼽는다.우랄마시,즉 우랄중공업기계공장은 지난 28년 소련정부가 제1차경제개발계획의 핵심사업으로 시작해 33년 완공한 러시아 최대 중공업공장이다.냉장고에서부터 탱크·우주선부품까지 다 만들어내는 공장인데 길이가 공장정문에서 맞은 편으로 5㎞,좌우로 각각 5㎞라니 공장규모를 가히 짐작할 만하다. 우랄마시와 관련,재미있는 것은 시내중심가에서 5㎞ 떨어진 이 공장정문앞의 「1차 5개년계획 광장」주위에 세워져 있는 노동자숙소다.공장을 세우면서 이곳에 노동자숙소를 함께 건설했는데 노동자수가 늘어나며 30년대·40년대·50년대의 전형적 아파트건물이 나란히 세워져 당시 사회주의 건물양식을 한눈에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곳의 명물인 우랄 돌의 진수를 감상하려면 지난해 개통된 지하철역 구내 플랫폼의 장식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각종 우랄석으로 바닥·벽·천장을 장식해 마치 우랄석 전시장에 온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그리고 역마다 실내장식을 다른 종류의 돌로 해놓았다. 우랄의 최고대학으로 꼽히는 키로프종합대학도 이곳의 자랑거리다.1916년 독일이 폴란드를 점령할 때 바르샤바에서 이곳으로 옮겨온 유서깊은 대학이다.정문앞에 서 있는 대형 키로프의 동상을 보며 늙수그레한 택시기사는 대뜸 이렇게 말을 거들었다.혁명 뒤 키로프는 레닌·스탈린과 함께 혁명의 심벌이었는데 스탈린이 그를 죽였다며 『그것은 물같이 분명한 사실』이라고 잘라 말했다.스탈린은 자기보다 똑똑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모두 수용소로 보내거나 죽이고 아니면 망명을 보냈다는 것이었다. 출발 3일째 되는 날 모스크바시간으로 하오8시30분 옴스크행 열차를 탔다.시베리아인을 뜻하는 「시베리야크」호였다.옴스크까지는 꼭 12시간이 걸려 다음날 아침에 도착하게 된다. 여행중 신통하게 느껴지는 일중 하나는 기차칸의 좁은 침대가 안락한 호텔방보다 더 평안하고 깊은 잠을 가져다준다는 점이었다.그래서 중간기착지에 들러 호텔에서 밤을 지내노라면 어서 빨리 기차를 다시 타고 싶은 생각이 늘 따라다녔다. 기차여행에도 물론 맹점이 있다.가장 큰 문제는 밤중에 잠자는 시간에 지나가는 역이나 풍경은놓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그렇다고 낮에만 이동하고 밤에는 기차에서 내려 호텔신세를 지는 것도 여의치는 않다.구간별로 낮에만 이동하는 열차편이 따로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그래서 어떤 특정구간은 별도리없이 밤에만 지나갈 수밖에 없다.이날도 오일의 수도로 일컫는 튜멘주를 밤중에 통째로 지나가게 됐다. ○어느덧 서시베리아에 우랄산맥을 벗어나 서시베리아로 들어서면서 다시 끝없는 대평원이 이어지고 있다.어둡기 전 1905년 오데사혁명 때 반란을 일으킨 수병들의 유형지이던 카뮈실로프역이 지나갔다.인구 3만3천명에 불과한 소읍이지만 우랄과 서시베리아간 옥수수의 주거래지로 이름높은 곳이다. 잠자는 도중 튜멘시와 데카브리스트들의 유형지이던 얄루토로프스키역등이 지나갔다.튜멘은 인구 50만명의 도시로 북부의 석유·가스전을 총괄하는 소위 시베리아석유의 수도다.16세기 이반 그로즈니시대때 서시베리아를 차례로 정복한 예르마크장군이 건설한 도시다.서시베리아 절반을 이 사람이 정복했다.그래서 당시 이곳에 살던 카자흐인은 지금도 그를 민족 최대의 적으로 간주한다.철도가 놓이기 전 이곳의 교역은 투라강을 오가는 증기선을 이용해 이루어졌다.튜멘을 출발,투라강을 따라 북동진하면 타볼강으로 이어진 다음 타볼스크시까지 갈 수 있다.이 타볼스크시는 19세기초까지 교역중심지로서 서시베리아의 수도역할을 했다. 그러던 것이 1885년 에카테린부르크에서 튜멘까지 철도가 놓이면서 이 도시의 역할은 끝났다.철도건설이 도시를 죽인 또 하나의 좋은 예인 것이다.지금은 역할이 많이 줄어들었지만 길이 1천30㎞의 투라강은 우랄에서 발원해 타볼을 거쳐 이르티시강으로 연결된다.그리고 타볼강은 카자흐스탄에서 발원해 옴스크의 이르티시강까지 1천6백㎞를 흐르는 장강이다. 새벽 6시경 시끄러운 사람의 소리에 잠을 깨 창밖을 보니 우유·스메타나·빵 등 먹을 것을 파는 상인이 열차문 밖마다 새까맣게 모여들어 있다.나지바예프스카야역이었다.
  • 기관총 40정 선적 한국에 밀수기도/러해경,러어선 적발

    【블라디보스토크 이타르타스 연합】 러시아 해안경비대는 12일 훔친 기관소총 40정을 한국의 부산으로 밀수출하려던 러시아의 저인망어선 한척을 적발했다고 이타르타스통신이 보도했다. 이 통신에 따르면 해안경비대는 선원들이 하바로프스크지역의 한 군부대에서 칼라시니코프 기관소총을 훔쳤다면서 이 어선은 바니노항을 출발,한국의 부산으로 향하던중 러시아 극동 태평양연안 올가만에서 체포됐다고 말했다. 이 어선의 선장은 40정의 밀수용 총을 싣고 있었다는 사실을 시인했으나,해안경비대가 추적하는 것을 보고는 내다 버릴 것을 명령했다고 해안경비대는 밝혔다.
  • 우랄산맥을 넘어(시베리아 대탐방:22)

    ◎유럽·아시아의 분수령… 정상엔 경계비 우뚝/모스크바 떠난지 30여시간만에 첫 기착/140만 인구 에카테린부르크에 여장 풀어/2차대전뒤 군수공장 대거 이전… 산업 중심지로 우랄의 역사는 곧 옛날 러시아 정복자들의 침략사다.침략은 15세기에 시작돼 16세기에 마무리됐다.철길 대신 카마강의 물길을 따라 동진해온 러시아 정복자들은 페름주와 스베르들로프주의 경계지대인 우랄 산자락까지 와서 그곳에서 산맥을 넘었다.그리고 우랄북쪽에서부터 도시들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첫번째 도시는 카마강변의 솔리캄스크.「카마강의 소금채취장」이란 뜻을 가진 마을이다.우랄산맥을 넘어 에카테린부르그 북쪽에 베르하투라가 두번째로 건설됐다.「투라강 상류의 마을」이란 뜻.정복자들은 이후 투라강을 따라 동남진하며 70∼80여개의 도시를 건설해나갔다.피터대제는 메탈 매장량이 많은 이곳에 작은 금속공장을 계속 만들었다.튜멘주의 수도 튜멘은 투라강이 시베리아철도와 교차하는 지리적 요건 덕분에 융성한 대표적 도시가 됐다. ○피터대제 부인 이름 따 도시건설은 두 갈래 방향에서 추진됐다.하나는 메탈공장 건설이고 다른 하나는 상업중심지를 만드는 것이었다.1720년대에만 17개의 새 공장이 우랄에 건설됐다.스베르들로프스크주의 두번째 도시 니즈니타길도 이때 건설됐고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가 되는 페르보우랄스크도 이때 세워졌다.그러다가 드디어 1723년 모든 우랄공장의 총괄본부로 에카테린부르그가 건설됐다.정숙한 피터대제의 부인 에카테리나의 이름을 딴 것이다. 에카테린부르그로 진입하기 전 만나게 되는 명물은 페르보우랄스크의 유럽·아시아 분수령에 서 있는 대리석 경계비. 우랄의 산정역 베르시나역을 지난 뒤 5㎞,모스크바에서 1천7백77㎞ 떨어진 지점에 이 오벨리스크는 서 있다.철로에서 불과 10여m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높이 7∼8m의 수수한 돌조각물 상단에 「아시아·유럽」이라고 쓰인 선명한 글씨가 두 대륙의 경계를 알린다.승객들은 차창가에 몰려 이 역사적 기념물을 카메라에 담느라 법석이다. 러시아인들도 이 산정 경계를 우리와 똑같이 「바다라즈젤(분수령)」로 부른다.산정에서 물이 한쪽은 유럽으로 다른 한쪽은 아시아로 흘러들어가는 말뜻 그대로 분수령인 것이다.추사바야강은 왼편 유럽으로 흘러들어가고 타길·네바·살바·투라강 등은 아시아로 흘러들어간다. 페르보우랄스크에는 유난히 금속튜브공장이 밀집돼 있는데 1920년대 우랄에서 첫번째 튜브생산품이 이곳에서 나오자 이를 기념해 「페르보우랄스크(우랄에서 첫번째)」라고 부른 것이 그대로 도시이름이 됐다. ○금속튜브 공장들 밀집 이곳에서 50㎞를 더 나아가 마침내 스베르들로프주의 수도 에카테린부르그역에 도착했다.모스크바를 출발한지 꼭 29시간30분만에 처음으로 짐을 꾸려 기차에서 내렸다.이웃들이 모두 복도로 몰려나와 작별인사를 나누었다.91년 도시이름을 스베르들로프스크에서 에카테린부르그로 바꾸면서 주이름은 그대로 두어 다소 혼란을 일으킨다.이름을 바꾼 이유는 스베르들로프가 볼세비키의 이름을 딴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도시는 혁명 뒤 볼셰비키들의 총애를 받아 번창한 전형적 사회주의 행정·산업중심지이다.현재 인구가 1백40여만명에 이르는 우랄의 비공식 수도이다.1723년 이셰치강변의 작은 메탈공장으로 도시가 출범한 이래 우랄지역 각종 광산들의 관리소가 이곳에 들어섰다.그러나 혁명 전까지 우랄의 행정·지리적 수도는 페름이었고 이곳은 단순한 산업도시 기능만 했다.이를 볼세비키들이 혁명 뒤 모든 행정·문화중심을 이곳으로 옮겨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그것은 옛 전통을 끊고 프롤레타리아의 새 전통을 만들어나가기 위한 정치적 계산에서 나온 것이었다. 특히 이곳은 반혁명부대인 체코백군의 본거지가 됐던 곳이다.혁명 뒤 23년 이곳을 우랄의 행정수도로 정하면서 볼셰비키들은 그 이듬해 도시이름을 스베르들로프로 바꾸었다.그 뒤 극장·박물관·대학·과학아카데미·연구소 등이 줄이어 들어서기 시작했다.2차 대전중 모스크바,레닌그라드 등 유럽쪽에 있던 군수공장들이 대거 이곳으로 피난와 본격적 산업중심지로 자리잡았다. 소비예트 시절 시베리아에는 크게 두가지 타입의 도시가 존재했다.하나는 오랜 학문·예술전통을 가진 도시들로서 페름·옴스크·톰스크 등이 바로그들이다.이들은 혁명 뒤 볼세비키정권에 의해 무대 뒷전으로 밀려나 과거의 명성을 잃게 된다.다른 하나는 새로 각광받은 노동자 도시들이다.에카테린부르그·노보시비르스크·이바노바 등이 단적인 예이다.오랜 정치·문화·학문전통을 억누르고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전통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에서 일어났던 거역할 수 없는 판도의 역전이었다. ○옐친이 태어난 곳 지금 크렘린의 안방을 차지한 사람들은 「스베르들로프 마피아」들이다.옐친 대통령을 비롯해 일본의 옴진리교로부터 뒷돈을 받고 이들을 러시아로 진출시켜주었다는 로보프 안보위서기와 부르불리스 장관 등이 그 멤버들.이외에 15∼20명의 이곳 출신 인사가 현재 옐친 주위에서 일을 하고 있다.옐친 대통령은 에카테린부르그에서 동쪽으로 1백㎞ 떨어진 스탈리차에서 출생해 이곳에서 학교를 다녔고 에카테린부르그시당 제1서기,주당 제1서기를 거친 다음 고르바초프가 불러올려 모스크바시당 제1서기를 지냈다. 에카테린부르그는 예부터 돈많은 광산주들이 많았던 탓에 대부호의 저택들이 유난히많이 남아 있다.또 전형적인 우랄 통나무집들도 곳곳에 보존돼 있다.이들 전통가옥들이 스탈린시대 때 건설된 웅장한 대리석 건물들과 조화를 이뤄 매우 아름다운 도시풍경을 만들고 있다.전형적인 우랄 통나무집은 보통 2층인데 1층은 반지하로 만들어 시멘트,돌 등으로 아주 견고하게 만든 것이 특징이다.겨울에 얼었던 땅이 녹으면서 지반이 흔들리는데 대비하기 위함이다.거기다 창문주위에 갖가지 문양을 새긴 나무장식을 해놓아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한다.우랄사람들은 이 창문장식을 「날리치니키(얼굴)」라고 부른다.집의 얼굴이라는 뜻. 쨍쨍 내리쬐는 5월의 햇살 속에 거리구경을 하는데 갑자기 굵은 소나기가 한바탕 지나갔다.우리가 「여우비」라고 부르는 이 자연현상을 우랄사람들은 「버섯비」라고 불렀다.이 비가 지난 뒤면 숲의 버섯이 쑥쑥 자라기 때문이다.
  • 러­체첸 평화협상 재개/반군측 “실패땐 테러” 경고

    【모스크바 AFP 로이터 연합】 러시아와 체첸 반군은 6일 양측 병력간에 교전이 벌어지는 사태에도 불구하고 수도 그로즈니에서 3일만에 평화협상을 재개했다. 이타르타스통신은 비아체슬라프 미하일로프 신임 민족문제장관이 이끄는 러시아측 3인 대표단이 이날 하오 2시30분(한국시각 하오 7시30분) 그로즈니에서 체첸반군 사령관인 아슬란 마스하도프 일행과 회동했다고 보도했다. 이번 회담은 그러나 러시아측에서 반군이 요구하는 주요 조건가운데 하나인 독립국지위를 부여하지 않을 방침임을 고수하고 있어 잠정적인 휴전을 대체할 평화협정이 마련될 수 있을지 여부는 불투명한 실정이다. 한편 지난달 부됴노프스크에서 대규모 인질극을 주도한 체첸 반군 지휘관 샤밀바사예프는 이날 AFP통신과의 회견에서 이번 협상이 실패할 경우에는 생물무기나 방사능 물질을 사용한 무차별 공격을 감행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 옐친,올 가을 중·인니·호 방문/부총리 잇따라 방한

    【모스크바 이타르타스 연합】 보리스 옐친 대통령이 오는 가을 중국방문에 나서는등 러시아의 아시아·태평양 중시정책에 따라 러시아와 아시아·태평양 지역국가들간의 외교접촉이 본격화 될 것으로 보인다. 4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 지역국 주재 러시아 공관장 회의 자료에 따르면 옐친 대통령은 중국 방문에 이어 인도네시아나 호주 등지를 방문할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밖에 총리와 부총리,외무장관등 정부 고위관리들은 물론 의회지도자들도 역내국 방문을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옐친 대통령의 중국 방문에 앞서 양국 외무장관들의 회합이 있을 예정이다. 이와 함께 빅토르 체르노미르딘 총리는 조만간 우즈베키스탄 공화국을 방문하며 유리 야로프 부총리는 4일 인도 방문길에 올랐다. 또 비탈리 이그나텐코 부총리와 올레그 다비도프부총리는 이번주와 다음주 각각 한국을 방문한다. 러시아 하원인 국가두마의 이반 리프킨의장도 8월초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며 상원의 블라디미르 슈메이코의장은 다음주 그루지야와 아제르바이잔을방문한다.
  • 우랄의 옛도시­페름시(시베리아 대탐방:21)

    ◎인구 1백만… 우랄 최대의 문화중심지/「러」 3대 발레극장·베르샤긴 미술관이…/실바강 따라 1시간동안 절경 펼쳐/별장 지붕위 “매물” 페인트 표시 눈길끌고 페름시에 도착하면서 여행출발 이후 처음으로 인구 1백만명이 넘는 대도시를 밟아보게 된다.이곳은 프리 우랄 최대의 문화중심지로 혁명전까지 우랄의 행정수도는 에카테린부르크가 아니라 페름이었다.우랄의 공장지대에서 생산된 각종 물품들은 육로로 이곳까지 와서 배로 카마강∼볼가강을 따라 러시아중부의 각 도시로 운반돼 나갔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발레단(키로프발레단의 새이름),모스크바의 볼쇼이와 함께 러시아 3대 발레극장으로 꼽히는 페름발레단이 이곳에 있다.그러나 너무 추운 환경탓에 우수한 발레리나들이 서쪽도시로 빠져나가 지금은 그 명성이 많이 바랬지만 전유럽에 명성을 날렸던 발레학교는 지금도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그리고 20세기초 화가 베르샤긴의 작품 60여점을 소장한 베르샤긴미술관을 자랑한다.특히 이 도시는 카마강변의 언덕위에 건설돼 체코의 프라하 같이 언덕위에서 강을 내려다보는 정경이 일품이다. ○5㎞ 얼음동굴로 유명 페름은 또한 역대 소련 외상들 중 가장 유명했던 몰로토프가 이곳에서 혁명운동을 한 인연으로 40년부터 57년까지 시 이름이 몰로토프였다.러시아 전역에는 유명한 볼셰비키라면 어김없이 그의 이름을 딴 도시·대학이 5∼6개는 되는 게 보통이다.57년 도시 이름이 페름으로 바뀐 것은 몰로토프가 카가노비치·쉬필로프등과 함께 반흐루시초프 음모에 가담했다가 실각했기 때문이다.카가노비치는 스탈린 때 철도상을 지낸 스탈린의 최고 심복중 한명으로 이름난 킬러.러시아인들은 지금도 그를 가리켜「아이언(철혈) 카가노비치」라고 부른다. 페름역을 출발해 조금 나아가면 실바강이 나오고 강과 철길이 만나는 지점에 쿵구르역이 있다.쿵구르인들은 러시아에서도 손재주가 좋기로 이름난 사람들이다.쿵구르 구두·쿵구르 케이크·쿵구르 악기등 손재주가 필요한 정교한 제품들로 이름난 도시다.1759년까지는 우랄전체자보드(공장)의 행정본부가 있었을 정도로 번창했던 도시였으나 이후 시베리아철도가 건설돼 다른 도시가 커지며 상대적으로 쇄락의 길을 걷고 있다.이곳을 제일 유명하게 만든 것은 바로 「쿵구르스키 리제나야 피쉐라(쿵구르 얼음동굴)」라는 지하동굴이다.길이 5㎞가 넘는 동굴안에 60여개의 호수가 서로 연결돼 있는데 항상 영하의 기온으로 얼어 있는 곳이다. ○야생능금꽃 눈부셔 길이 5백㎞의 실바강을 따라 1시간여 동안 그림같은 우랄의 절경이 펼쳐진다.강,강안의 바위,그위의 나무숲….페름주에서 우랄의 중심부에 위치한 스베르들로프스크주로 넘어가기 전 마지막 역은「코르간」이다.입산신고대란 뜻의 이름인데 숲이 많은 우랄지대라 이런 마을 이름이 유난히 많다. 왼편 차창밖으로 맑게 내리쬐는 5월 햇살아래 폭 1백여m의 실바강이 보석처럼 빛나고 있다.우랄산맥의 정점에 있는 유럽·아시아 분수령에서 발원해 유럽쪽으로 흘러내리는 강이다.시베리아횡단열차구간중 최고로 꼽히는 절경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강변에는 잎이 갓 돋아나 연두색을 띤 베료자와 겨울을 지나 검붉게 뻗은 소나무·옐나무들이 같은 비율로 뒤섞여 고도로 세련된 색의 하모니를 연출해내고 있다.강변에 늘어선 별장 지붕에 흰 페인트로 커다랗게 「프로다유(팔겠다는 뜻)」라고 써놓은 글씨가 눈길을 끈다. 기차가 산정을 향해 숨가쁜 행진을 계속해 본격적으로 우랄의 수중으로 들어서자 지금껏 보이지 않던 새로운 수종들이 나타났다.야생능금꽃이 눈꽃을 덧씌운 것처럼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1시간여를 달린 뒤 스베르들로프 경계를 넘어 첫번째 역인 샬랴역을 지나갔다.갑자기 잎을 달지 못한 베료자나무들이 나타나 산 곳곳이 민둥산처럼 보이기 시작했다.우랄은 아직 봄의 첫문턱을 넘지 못한 것이다. 우랄산맥은 서쪽으로는 페름주의 쿵구르에서 시작해 동쪽으로 에카테린부르크시 직후 산세가 끝이나며 동서거리의 최장은 2백㎞,남북길이는 2천㎞에 이른다.전체적으로 완만한 산세를 보이지만 북쪽 코미공화국에 있는 최고봉 나로드나야산은 해발 1천8백95m에 이른다. 페름에서 에카테린부르크로 연결되는 현재의 직선노선은 1905년에 건설됐다.그 전에는 1875년에 건설된 북쪽 우회도로가있었을 뿐이다.이 직선노선이 건설되기전 우랄과 모스크바를 잇는 노선은 에카테린부르크에서 남으로 첼리야빈스크를 경유해 서쪽으로 사마라를 거쳐 모스크바로 연결됐다.따라서 시베리아횡단열차노선도 첼리야빈스크에서 동쪽으로 쿠르간∼페트로파블로프스크(카자흐영토)∼옴스크로 이어졌다. 현재 이 북부 카자흐경유 노선은 매우 아름다운 절경을 지나긴 하지만 승객들이 기피하는 노선이다.카자흐스탄으로 들어가고 나오는 양국 국경세관에서 거의 1시간 이상씩 짐검사를 해 승객들을 귀찮게 굴기 때문이다.러시아인들은 노비자이지만 외국승객의 경우 이 노선을 이용하자면 미리 카자흐정부로부터 통과비자를 얻어야한다. ○희귀금속 무진장 매장 마침내 러시아 최대 산업지구 우랄지구로 들어섰다.우랄은 최대 공업지대이면서 메탈·희귀금속의 최대 매장지다.이 금속들을 발달된 기계공업기술로 묶어 아주 밀접한 단일 경제지대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현재 우랄로 통칭되는 이 산업지대에는 페름주·코미자치공·스베르들로프주·첼리야빈스크주를 비롯해순수농업지대인 쿠르간주·바시코르토스탄주·우드무르티공화국등이 속한다. 우랄의 가장 큰 자랑은 역시 무궁무진한 금속이 매장돼 있다는 것이다.지질학적으로 오래된 산은 완만하지만 희귀석·메탈·알루미늄 등 귀중한 자원이 풍부하게 매장돼 있고 반면 지진대로 분류되는 신생 산맥은 산세가 가파르고 아름다운 반면 자원이 매장돼 있지 않다.우랄은 전자의 전형적인 예이다.
  • 「삼풍」 발굴·잔해제거 한달이상 걸려

    ◎추가붕괴위험·사체보전 고려 작업 신중/건물충격 최소화 위해 중장비 사용 자제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의 현장수습은 언제쯤 마무리될 수 있을까. 사고발생 1주일째를 맞고 있지만 사체 발굴 및 복구를 완료하는 데는 앞으로 2주일이나 한달 더 걸릴 것이라는게 사고대책 관계자들의 전망이다. 생존자의 구출을 위해 조심스레 진행되던 현장작업은 지난 3일부터 사체발굴쪽으로 방향을 선회하면서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하지만 2차 붕괴의 위험등으로 앞으로도 적지않은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현장수습의 큰 장애물은 우선 추가 붕괴의 위험이다.백화점 A동은 매장건물이 무너지면서 외벽부분이 남아있으나 언제 넘어질지 모르는 상황이다.사고직후 2∼3㎝가량 기울어진 이 벽을 H빔을 이용한 삼각받침대로 중심을 잡고 와이어 로프로 윗부분을 동여맸지만 5일에도 동쪽으로 15㎜,남쪽으로 17㎜ 기우는 등 붕괴위험이 계속되고 있다.또 B동의 경우도 붕괴된 부분과 맞닿은 벽면에 금이 가는 등 안심할 수 없는 상태다. 앞으로 사체가 어느정도 발굴되느냐도 현장수습의 시일을 결정하는 주요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매몰된 사체가 발견될 경우 구조작업은 사체의 온전한 보존과 발굴을 위해 작업중단이 불가피한 실정이다. 특히 생존자가 있을 것으로 보일때는 현장수습은 중단할 수 밖에 없다.생존자의 안전한 구출을 위해 무너진 콘크리트를 다시 뜯거나 통로를 새로 만들어야 하는등의 작업을 먼저 해야한다. 이와함께 붕괴되지 않은 건물에 충격을 주지 않기위해 중장비의 사용을 자제해야 하는 것도 복구를 느리게 하는 요인이다.잔해 철거작업을 서두르기 위해 중장비를 집중 투입할 경우 지반에 충격을 주어 나머지 건물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분석이다.자칫 철거작업에 참여하는 4백∼5백여명에 이르는 구조대원들의 안전에도 영향을 줄 수 있어 신중한 복구는 불가피하다는 해석이다. 이밖에 구조작업을 위해 투입된 미군 생체탐사장치(일명 스톨스)와 국산 땅굴탐지기인 시추공탐사기 등 첨단장비 등도 효과보다는 수습만 더디게 했다는 게 현장주변의 공통된 해석이다. 따라서 잔해정리와 구조작업의 시일은 앞으로의 위험성·돌발사태의 정도와 이에대한 대처능력에 따라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 우랄의 시작(시베리아 대탐방:20)

    ◎하루 넘게 달려도 평원과 숲의 행진이…/지역주민의 절반이 우그리언 혈통/열차내 용수,중간역서 새 물로 교환/달리는 화물열차 1백량엔 석탄이 가득가득 늦은 아침을 들기 위해 글라조프역에 내려 먹을 것을 샀다.갓 구워낸 빵,오이,토마토,삶은 감자,그리고 가장 인기품목으로 찐만두의 일종인데 상할 것을 우려해 속을 고기 대신 감자로 채워넣은 「피로시키」라는 것이 있다.잠깐씩 플랫폼에 내려 신선한 공기를 쐬며 먹을 것을 구하고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도 여행중 빼놓을 수 없는 재미중 하나이다. 우드무르치족은 아주 옛날부터 이 지역에서 살았는데 타타르의 지배를 받다가 1558년 러시아에 점령당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옛이름은 보티야키였으며 1920년 자치주 지위를 얻었다가 36년 스탈린 때 우드무르티공화국으로 승격됐다.지금은 자치기운이 드높아 자체 국기,언어,대통령까지 뽑아놓고있다.현재 러시아전역에 모두 71만명의 우드무르티인들이 있으며 이중 50만명이 이 공화국에 살고 있다. ○핀­우그리어 민족 많아 이들 우르무르티인들은 핀­우그리 어족으로 핀어와 매우 흡사한 언어를 사용하고있다.프리 우랄지역에는 이 핀­우그리어를 사용하는 민족이 특히 많은 것이 특색이다.옛소련 지역에서는 에스토니아를 비롯해 몰도바,마리아,북쪽의 한티­만시족,카렐리아,코미족들이 이 핀­우그리어족에 해당한다.같은 발트3국이면서도 라트비아,리투아니아는 랩란트어족으로 에스토니아와 전혀 다른 언어구조를 갖고있다. 옛소련지역에는 이 핀­우그리어족 외에도 크게 슬라브어족과 터키어족등 3대 어족이 살고있는데 슬라브어족으로는 러시아,우크라이나,벨로루시인이 있고 터키어족에는 카자흐,키르기즈,우즈벡등 중앙아시아인 대부분이 해당된다. 모스크바도 사실은 9세기에 러시아인들이 점령하기 전까지 핀­우그리인들의 땅이었다.당시 러시아인들은 지금의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에 본거지를 두고 있었으며 8,9세기에 걸쳐 북동으로 계속 영토를 확장시켜 나갔었다.9세기에 모스크바를 점령한 러시아인들은 11 47년 모스크바를 도시로 정식 출범시켰다.그래서 오는 97년은 모스크바시 건설 8백50주년이 되는 해이다.금년 2차대전 승전 50주년식에 이어 또 한바탕 요란한 잔치가 벌어질 것이 분명하다. 글라조프역에서는 우랄산맥에 위치한 스베르들로프스크주 제2의 도시 니즈니타길에서 모스크바로 가는 열차가 반대편 선로에 정차해있었다.우랄산 보석이름인 「말라히트」라는 열차이름이 우랄의 분위기를 한껏 전해준다.글라조프를 출발해 남부 이조프스크시로 연결되는 교차점을 지나 곧바로 쳅차강을 넘으면서 기차는 페름주로 들어갔다.쳅차강은 불과 폭10m의 작은 강이었다.페름주부터 모스크바와의 시차는 2시간으로 늘어났다. ○열차비품 승객에 팔아 남자 승무원이 방안으로 들어오더니 쇠로 만든 유리잔 받침대를 사라고 한다.「티탄」에서 뜨거운 물을 받아 차이(다)나 커피를 타마시는데 꼭 필요한 물건이어서 3만 루블을 주고 2개를 샀다.사고 보니까 받침대는 여기저기 우그러져있고 함께 산 유리잔은 온통 금간 투성이다.승객들에게 나누어주어 쓰게 한 다음 내릴 때 회수토록 돼있는 물건을 이렇게 팔아치우는 것이다.승무원들의이런 크고 작은 비행은 여행 내내 지겹도록 계속됐다.어쨌든 이렇게 안면을 튼 덕분에 모스크바에서 가지고 간 전기솥으로 승무원방에서 편법으로 라면까지 끓여먹을 수 있는 특혜를 받기도 했다. 상오 10시 15분 페름주의 첫역 바라둘리노에 도착하면서 마침내 프리(pre) 우랄이 시작됐다.페름 역시 「먼 땅」이라는 뜻의 핀­우그리어에서 유래된 이름이다.페름과 스베르들로프주등 우랄 일대에 사는 주민들 절반은 우그리언 혈통이 섞여있다고 한다.플랫폼에 오가는 사람들 얼굴을 보니 일리가 있는 말같기도 하다.스베르들로프주 출신인 옐친 대통령의 얼굴에도 우그리언의 얼굴형태가 남아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페름 도착 전 「크라스노 캄스크」라는 아름다운 이름의 역을 지났다.「카마강변의 아름다운 마을」이란 뜻이다.주민 6만명 미만의 소읍이지만 러시아화폐용지를 찍어내는 유명한 셀룰로스 콤비나트가 있는 마을이고 거기다 매년 러시아씨름인 삼보 대회가 이곳에서 열린다. 반대편 선로에 화물열차가 지나가는데 매달고 가는 화차수를 세어보니 1백개가 넘는다.모두 석탄을 가득 싣고있다. 러시아의 최대 산업지대,우랄의 위력을 알려주는 전초같이 느껴졌다.아울러 우랄로 접근하며 스위스 못지 않은 절경들이 펼쳐지기 시작했다.만 하루 넘게 계속되던 평원,숲의 행진이 마침내 끝이 나고 있었다.시베리아철도여행의 참맛은 관광을 위해 굳이 중간에 내릴 필요가 없다는 데도 있다.여행 내내 자석처럼 차창에 붙어앉아 철로변을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산천풍경,나무,그리고 사람들을 보고있으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조금 과장한다면 단지 샤워를 하고 제대로 된 더운 음식을 먹기 위해 중간도시에 내려 호텔신세를 질 필요가 있을 뿐이다. 현지시간 낮 2시20분 페름역에 도착했다.페름시로 진입하며 철길위에서 내려다본 카마강은 한때 이름높던 푸른 강물이 아니라 다소 흙탕물이다.교각이 8개에 철교길이 1㎞가 넘는 큰강이다. ○푸른 카마강은 흙탕물 페름역에서는 35분간이라는 비교적 장시간 정차를 하는데 열차내의 물을 교환하기 때문이다.식당칸이나 화장실에서 쓰는 물을 비롯해 열차내모든 물을 기차밖으로 쏟아내고 대신 카마강에서 길어올린 신선한 새물을 기차에 가득 채워넣는 것이다.플랫폼을 따라 설치돼있는 쇠파이프에 두개의 구멍이 달려있는데 그곳에 고무 호스를 끼워서 한쪽으로는 물을 뽑아내고 다른 한쪽으로는 새물을 채워넣는다. 이 시간을 이용해 잠시 역사 바깥으로 나가보았다.모스크바도 마찬가지이지만 러시아의 철도역은 역개찰구에서 표검사를 하지 않는다.대신 객차마다 배치된 승무원이 승객의 타고내리는 것을 체크하는 것은 물론 여행중 모든 사항을 책임지도록 돼있다.그래서 역사를 드나드는 것은 자유다.역사에는 러시아의 공통적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술취해 긴나무의자에 쓰러져 자는 노인,그옆에 쪼그리고 앉은 손녀인듯한 여자아이등,3층짜리의 제법 규모있는 역사이지만 내부는 완전 슬럼,쓰레기 천지였다.
  • 미 애틀랜티스­러 밀르 도킹 성공

    ◎75년 아폴로­소유즈 랑데부 20년만에 【케이프 커내버럴·칼리닌그라드 로이터 AP 연합】 미국 우주왕복선 애틀랜티스호가 29일 러시아의 우주정거장 미르호와의 역사적인 도킹에 성공,냉전종식후 미·러시아간 우주협력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이번 미·러시아 우주선도킹은 지난 75년7월 미 아폴로호와 옛서련 소유즈우주선의 첫 도킹이래 20년만에 이뤄진 것이다. 애틀랜티스호는 이날 하오10시(한국시각) 러시아와 몽골이 국경을 맞대고 있는 중앙아시아 지역 4백㎞ 상공에서 미르호에 천천히 접근,1m의 도킹터널을 펼친 다음 이를 미르호의 모듈에 연결시켰다. 애틀랜티스호의 로버트 깁슨선장은 도킹성공 2시간여만에 해치를 열고 미르호로 들어가 블라디미르 데주로프 미르호선장과 악수를 나눴으며 이후 미국인 우주비행사 6명과 러시아 우주비행사 4명 등 모두 10명은 미르호에서 기념촬영과 환영행사를 가졌다. 깁슨선장은 도킹에 성공한뒤 휴스턴기지와의 교신에서 『성공이다.모든 것이 안정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 마치 폭격 맞은듯 완전 폐허화(삼풍백화점 붕괴/현장 표정)

    ◎철골 잔해 자를 절단기 모자라 구조 지연/가족 생사확인… 병원마다 전화 빗발/골조 파편에 근처 차량 수백대 파손/“막을수 있는 사고였다”… 고객들 분통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현장에서는 민간인과 군·경 등이 포클레인과 크레인 등 중장비를 동원,1명의 매몰자라도 더 구하려고 밤샘 구조작업을 벌이는 한편 사상자가 실려간 각 병원은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려고 몰려든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며 사망을 확인한 유족들의 울음이 이어졌다. ○헌혈자 즉석 모집 ○…사망자와 부상자의 명단이 내걸린 강남성모병원 로비에는 유가족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리고 가족의 생사를 미처 확인하지 못한 사람들이 발을 구르는 등 안타까워하는 모습.사체 4구와 부상자 1백70여명이 있는 영동세브란스병원도 가족의 생사를 확인해달라는 사람들로 붐벼 응급실 진입을 제지하는 병원 관계자들과 심한 몸싸움을 벌이기도. ○병원 로비 북새통 ○…사망자 2명을 포함해 40여명의 사상자들이 후송된 서울 강남성모병원에서는 의사 1백여명과 간호사 2백여명이 중상자들의 수술에 들어가고 병원 마당에도 간이침대를 펴놓고 부상자들을 치료. ○…사고현장에는 백화점 붕괴소식을 듣고 달려온 직원 가족들이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며 현장에 접근하려 했으나 B동의 2차 붕괴위험 때문에 경찰이 접근을 철저히 차단. 서울 노원구 상계동 당고개에 사는 길종례씨(53·여)는 『셋째 딸 최미영(24·백화점 종업원)·최종길(20·백화점 아르바이트생)등 자식들의 생사를 확인할 수 없다』며 구청 공무원들을 붙잡고 생사를 알려달라며 애원.또 서초구 방배동에 사는 신종희씨(22·여)는 현장 주변에 서 있는 구급차에 매달려 하오 7시쯤 백화점 앞에서 만나기로 한 어머니 길정아씨(49)의 생사를 몰라 발을 동동 구르며 수소문. ○…삼풍백화점 직원들은 오래전부터 건물붕괴를 예고하는 여러가지 징후들이 발견됐으나 회사측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고 성토. 백화점 4층에 근무하는 김모씨(31)는 『5년전부터 비가 내리면 물 떨어지는 소리가 건물 바깥벽에서 들렸고 최근에는 건물이 흔들리는 진동을느낄 정도로 불안했다』고 증언. 1층 잡화부 직원 곽모양(19)도 『평소 건물 4·5층에서 벽 균열현상 등 심각한 이상이 발견됐는데도 회사측은 대책을 마련하지는 않고 숨기는데 급급했다』고 울분을 토로. ○…이홍구 국무총리는 이날 하오 7시50분쯤 김용태 내무장관과 함께 사고현장에 도착,『서울시내에서 이용가능한 기중기 등 모든 중장비를 동원해 조속히 구조에 임하라』고 긴급지시. 이에 앞서 도착한 최병렬 서울시장은 『이런 곳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 부끄럽다』고 개탄한 뒤 수행한 시 관계자들에게 『조속한 사고수습에 만전을 기하라』고 침통한 어조로 지시. 또 이양호국방장관은 이날 하와이 미군사령부에 지하에 매몰된 생존자들의 음성을 감지할 수 있는 특수장비를 긴급히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고 설명. ○“인명구조 급선무” ○…조순 서울시장 당선자는 하오 9시20분쯤 이해찬 부시장내정자 등 민주당 관계자들과 함께 사고 현장을 방문.조 당선자는 현장에 나와 있던 최시장과 함께 현장 지휘차량인 소방용마이크로 버스에 올라 최시장으로부터 사고상황과 인명구조 작업 등을 설명받고 침통한 표정.조 당선자는 『이번 사고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지금 이 순간에는 인명구조와 사고수습이 급선무』라고만 답변. ○…현장구조반은 겹겹이 쌓인 철재와 건물 잔해를 절단기로 자른 뒤 부상자를 구조하고 있으나 절단기가 모자라 구조작업이 지연되자 TV 등을 통해 절단기 등을 지원해줄 것을 호소. KBS 등 TV 방송사는 이날 밤 구조작업을 생중계하면서 「시민협조사항」이라는 자막과 함께 절단기와 들것,랜턴 등이 부족해 부상자 구조작업이 늦어지고 있으니 이들 물품을 보유하고 있는 시민은 구조반에 급히 지원해 달라고 요청. ○…사고 현장에는 경찰과 군,119구급대가 투입돼 무너진 건물 더미에 묻혀있는 사상자들을 구조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으나 내부에서 불길이 치솟고,남아있는 건물의 붕괴 가능성 때문에 한동안 구조에 어려움을 겪었다. 군·경은 굴착기와 크레인을 현장에 투입한데 이어 헬기 2대와 수도경비사령부 소속 특공대원들도 건물 내부를 잘 아는직원들의 안내를 받으며 응급환자나 사망자들을 병원으로 후송. 그러나 구조대원들은 무너진 건물더미에 묻혀있는 사상자들을 구조하기 위해 건물안으로 들어가려다 7시10분쯤 남아있는 건물 일부분이 다시 무너져 서둘러 철수하기도. 하오 7시10분쯤 수방사 35특공대 요원 10여명이 로프 등 구조장비를 갖고 무너진 백화점 건물내로 진입한 것을 시작으로 한승의 수방사령관 지휘로 군병력이 현장구조및 진입로 통제작업을 전개. 군은 이어 구조헬기 3대를 동원,형체가 남아 있는 백화점 옥상에 구조요원 20여명을 내려놓은 뒤 상공을 맴돌며 현장상황을 점검하면서 지휘. 밤이 깊어지자 구조대는 현장 주변 곳곳에 서치라이트를 비추고 밤샘 구조작업을 벌였다. 구조에 나선 서초소방서 소방관 박종규씨(42)는 『건물이 그대로 내려앉아 마치 시루떡처럼 되어 있었으며 건물바닥과 무너져내린 천장 사이에 사체와 생존자들이 뒤엉켜 있었다』고 현장상황을 설명. ○불길 치솟아 어려움 ○…이날 많은 시민들이 자원봉사자로나서 인명구조활동을 펼치거나 군·경찰·소방대원 등으로 이뤄진 정부 합동구조반원들에게 음식과 음료수를 제공하는 등 헌신적인 봉사활동을 전개. 40∼50대 주부들로 구성된 자원봉사단은 음식과 음료수를 준비,먼지와 연기로 가득찬 콘크리트더미속에서 사상자 구출활동을 벌인 뒤 밖으로 나오는 구조대원들에게 일일이 나눠주며 격려. ○…삼풍백화점 근처 반경 50m이내의 차도와 인도에는 여자용 신발,화장품,액세서리 등 백화점에서 진열했던 상품과 손님들의 소지품 등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으며 사고 현장 근처에 주차해 있던 차량 수백대도 붕괴당시 튕겨져나온 콘크리트 조각에 맞아 대부분 파손되는 등 아수라장을 방불. 붕괴된 삼풍백화점 뒤쪽에 자리잡은 15층짜리 삼풍아파트 주민들은 긴급대피 방송을 듣자마자 일찍 귀가한 자녀들을 데리고 간단한 생필품 등을 챙겨 건물 바깥으로 신속히 대피. ○…붕괴된 삼풍백화점은 마치 폭격을 맞은듯 지하 3층까지 내려앉아 지반이 20∼30m가량 파여 있는 상태.백화점 건물은 콘크리트 골조기둥 6개만 앙상하게 남기고 무너졌으며 엿가락처럼 휘어진 철근과 상수도관 등이 무너진 건물 옆벽으로 삐져나와 흉칙한 모습. 한편 사고가 나자 이웃 주민들의 안부를 묻는 전화 등 전화사용이 하오 7시부터 갑절이상으로 폭증,밤늦게까지 이 일대 일반전화와 핸드폰의 통화체증이 극심.이날 사고는 일본과 호주 등 해외에서도 주요 뉴스로 보도됐는데 한국에 있는 친지들에게 피해여부를 묻는 교포들의 국제전화가 쇄도.
  • 고도 키로프(시베리아 대탐방:19)

    ◎“제정러시아의 유형지 ”… 아픈 역사 간직/옛이름은 비아트카… 숙청된 「키로프」 이름따/강건너 딩코보는 전통 진흙 인형으로 유명/카스트로마주의 치즈·버터는 러시아 최고의 명품 야로슬라블주가 끝나고 카스트로마주가 시작되고 있다.카스트로마주는 유원건설이 러시아 군인아파트를 짓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지난해 10월부터 모스크바의 유원건설 사무소 직원들은 조만간 준공식을 할 예정인데 그때는 모스크바에 상주하는 우리 특파원들을 초대해 볼가강에서 뱃놀이도 하자고 했었다.그러나 러시아측에서 준공검사를 잘 안해주고 애를 먹인다는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그러다가 해를 넘겼고 연초 서울에서 유원건설 부도소식이 들려왔다.잘 마무리가 돼 유원건설 직원들이 객지에서 고생한 보람이 결실을 맺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기차에서 첫밤 맞아 카스트로마는 카잔 타타르의 공격을 막기 위해 1536년 러시아군 요새로 시작된 도시다.유명한 데카브리스트(12월당원) 샤르아입스키가 시베리아 유형길에 잠시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그러나 카스트로마주에서 가장 손꼽히는 것은 역시 치즈·버터다.카스트로마 중북부 일대를 일컫는 볼로그다지방의 버터와 카스트로마 치즈는 단연코 러시아의 최고 명품이다.거기다 나무에 형형색색의 원색으로 채색해 만드는 독특한 인형·조각의 주산지인 추흘라마시도 이곳에 있다. 기차에서의 첫날밤이 지나갔다.몸이 고단한 탓인지 기차바퀴가 레일 위를 구르는 규칙적인 소리가 도움이 됐는지 쉽게 잠들 수 있었다.이튿날 아침 5시,현지시간은 6시에 키로프주의 수도 키로프역에 도착했다.주의 수도는 그 주의 이름을 쓰는게 원칙이다.예외로 레닌그라드주의 주도는 레닌그라드였는데 91년 주도 이름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바꾸면서 주 이름은 그대로 두어 약간 혼란을 주기도 한다.스베르들로프주 주도도 스베르들로프였는데 주도 이름만 에카테린부르크로 바뀌었다. ○모스크바서 1.600㎞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우랄산맥으로 연결하는 중요한 기능을 하는 페테르부르크­비아트카선 기차 한대가 맞은편 선로에 정차해 있다.이 노선은 1906년에 건설됐으며 우랄의 에카테린부르크를 출발해 키로프,부이,볼로그다를 거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연결된다. 비아트카는 키로프의 옛이름이다.20년대 중반부터 레닌그라드 제1서기로 노동자들의 사랑을 받던 흘리노프 키로프는 당시 당서열 3위의 인물이었다.키로프발레단도 그의 이름을 딴 것이고 러시아 전역에 그의 이름을 딴 대학,도시가 수없이 많다.그러나 스탈린이 그에 대해 경쟁의식을 갖게 되면서 그의 운명은 끝났다.35년 그가 피살됐을 때 그게 스탈린의 짓이었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키로프의 죽음은 당시 스탈린의 정적숙청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 도시 이름은 그가 피살된 직후 그의 이름을 따서 고쳐지은 것이다.공산당 멸망 이후 다시 이름을 고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주민들이 반대해 그대로 두었다.키로프는 또다른 역사의 아픈 기록도 남겨준다.제정 러시아 시절부터 시베리아유형의 시발점이 바로 이곳이었다는 점이다.혁명가 게르첸,소설가 살티코프 시체드린이 이곳에서 유형생활을 했다. 이런 역사의 기록과는 달리 이 도시를 흐르는 비아트카강 건너편 마을인 슬로보다 딩코보는 어린이 장난감 인형인 딩코보인형으로 유명한 곳이다.진흙으로 빚은 전통의상 차림의 인형인데 입으로 불면 예쁜 소리를 낸다. 키로프역을 지나 조금 더 달리면 프리 우랄,즉 우랄 앞마당으로 불리는 우드무르스키공화국으로 들어선다.이곳에서부터 사실상 우랄이 시작되는 것이다.지리적으로는 페름주부터 우랄이 시작되지만 경제적으로는 이곳부터 우랄로 간주한다.경제적으로 우랄쪽에 밀접히 관련됐기 때문이다.물론 산은 아직 나타나지 않는다.오직 평야·숲만 보면서 하루를 달려왔다.체료무하꽃은 이제 막 연두색 잎을 달고 꽃망울을 터뜨리는 참이다.이곳에서는 봄이 갓 시작되고 있다. 이른 아침 차창 밖은 온통 짙은 안개천지다.날씨가 차고 습기가 많아 생기는 현상이다.안개 속으로 키로프시민들의 다차지역이 촘촘히 보인다.초원이 좋아 우유산지로 이름높은 곳이다.철로변의 거리표는 모스크바로부터 1천62㎞를 가리키고 있다.모스크바시간 상오 7시25분.열차는 키로프주의 마지막 역인 팔룡키를 지나 우드무르스키공화국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우드무르스키공화국의 첫역은 「야르」라는 이름의 작은 역이다.「작은 계곡」이라는 뜻의 이 이름은 쳅차강과 레크마강 하구가 만나는 작은 계곡 마을이라는 뜻에서 붙은 것이다.예를 들어 동시베리아에 있는 크라스노야르스크는「아름다운 작은 계곡」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다.우드무르스키공화국에서 두번째 만나는 도시인 러시아 최대 버섯산지 글라조프도 「눈(글라즈)」이라는 뜻에서 유래한 재미있는 이름의 도시다.도시가 언덕 위에 건설돼 사방을 다 볼 수 있다는데서 붙은 이름이다.20세기초 고리키·체호프와 함께 활동했던 우크라이나 작가 코롤렌코가 유형생활을 했던 마을이다. ○전형적 시베리아 도시 더 재미있는 곳은 이 공화국의 수도 이조프스크다.시베리아 도시들의 전형적인 탄생 여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18세기 에카테리나2세 여제때 이곳에 작은 메탈공장이 건설됐고 이 공장을 애워싸고 자보드(공장)라고 부르는 작은 마을이 시작됐다.「이조프스키 자보드」가 탄생한 것이다.이렇게 만들어진 도시들은 철도·도로가 놓이고 지리적 이점의 여하에 따라 융성하기도 하고 몰락하기도 한다. 인구 4만5천명에 불과하던 이조프스키마을은 2차대전중 모스크바·레닌그라드 지역에서 많은 군수공장들이 피란해옴으로써 결정적인 융성의 계기를 맞았다.전시 군수산업책임자인 우스티노프 원수가 이곳에 상주하며 이 피란공장들의 운영을 총괄했다.그래서 한때 이조프스크는 그의 이름을 따 우스티노프시로 불리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 이조프스크시는 민족공화국인 이곳 우드무르족들의 문화·민족중심지이면서 동시에 산업도시인 복합도시가 됐다.이조프스크에서 동쪽으로 조금 나아가면 차이코프스키의 고향 보트킨스키가 있다.시바강을 끼고 있는 이 작은 고향마을 맞은편 큰 호수의 반대편 기슭에는 이 작곡가의 이름으르 딴 차이코프스키마을도 있다.60년대 카마강에 수력발전소를 건설하며 도시를 만들어 그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 볼가강(시베리아 대탐방:18)

    ◎3,530㎞ 굽이마다 러시아제국 정취가…/유람선·주변 성벽 어울려 한폭의 그림/8∼9월 2주간 뱃놀이 코스는 환상적/섬유도시 이바노바시는 “남소여다” 문제점 노출 모스크바를 출발한지 4시간25분만에 야로슬라블역에 도착했다.모스크바에서 2백90㎞ 떨어진 도시다.블라디보스토크 도착 때까지 오른쪽 철로변에 작은 말뚝에다가 매 ㎞마다 모스크바로부터의 거리표시가 돼있다. 주민 63만명의 비교적 큰 도시인 야로슬라블은 1010년 당시 키예프에 있던 러시아왕국의 왕 야로슬라블 무드리히(현명한 야로슬라블)가 건설했다.그뒤 러시아가 여러 왕국으로 갈라지면서 1280년 야로슬라블왕국이 세워졌다가 이후 1463년에 다시 모스크바왕국에 합쳐져 지금까지 남아있게 된 것이다. 이 도시가 러시아인들에게 유명한 것은 이런 역사적 배경보다도 이곳에 러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이 있기 때문이다.물론 페테르부르그,모스크바에도 당시 극장이 있었지만 야로슬라블극장은 유독 클래식만 무대에 올린 극장이었기 때문에 이를 제일 오래된 것으로 꼽는다. ○옛러시아의 왕도 혁명 뒤 볼셰비키들은 오랜 종교전통을 가진 야로슬라블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그래서 영국의 맨체스터 같이 순수 섬유노동자 도시인 남동쪽 2백50㎞ 지점의 이바노바시를 집중육성했다.재정러시아 때 유명한 섬유공장이 건설됐던 야로슬라블과 이바노보는 이렇게 해서 한때 경쟁관계에 놓였으나 이바노보가 판정승을 거두었다.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섬유도시로 볼셰비키의 총애를 받은 이바노보는 섬유노동자들인 여자들의 도시가 되다보니 요즈음 많은 사회문제에 직면하고 있다고 한다.여자가 많고 남자 수가 적음에 따라 생길 수 있는 갖가지 문제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야로슬라블부터 모스크바와 1시간의 시차가 벌어진다.야로슬라블역을 출발한지 꼭 5분만에 한강 정도의 강폭을 가진 푸른 볼가강이 차창밖으로 펼쳐졌다.모스크바에서 2백93㎞ 떨어진 지점이다.강 한쪽에는 요트 수대가 매어 있고 그뒤로 휴양지가 꾸며져 있다.볼가강.볼가강의 뱃놀이를 해보지 않고는 러시아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북부 트베르스카야주와 노보고르드스카야주 경계 지점에서 발원해 트베르,야로슬라블,카스트로마,니주니노브고로트,카잔,사마라,사라토프,볼고그라드 등 혁명전 러시아제국의 심장부를 두루거쳐 카스피해의 아스트라한으로 흘러들어가는 길이 3천5백30㎞의 장강이다. 8월 말에서 9월 초사이 모스크바에서 증기유람선을 타고 아스트라한까지 2주간의 볼가강 뱃놀이를 떠나는 것을 러시아인들은 최고의 여행으로 꼽는다.도중에 각기 다양한 크렘린(성벽),교회를 갖고 있는 도시들을 구경하며 내려가 마지막 아스트라한에서 9월이 최고 적기인 아스트라한 수박을 맛본 뒤 비행기로 모스크바로 돌아오는 것이다.아스트라한 수박 5덩이만 먹으면 신장병은 깨끗이 낫는다는 속설도 있다. 야로슬라블의 볼가강 다리가 건설된 해는 1903년도인데 이 지역의 철도건설연도는 1873년이다.30년동안 열차 승객들은 볼가강까지 와서는 페리로 강을 건넌 다음 기다리고 있는 다른 열차를 타고 여행을 계속해야 했다. ○8∼9월이 여행 적기 볼가강을 건너자 사스나,옐 등 드디어 침엽수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타이가의 전조인 것이다.비슷하게 생겼지만 사스나는 모래땅에서 자라고 옐은 진흙땅에서 자란다.볼가강을 넘으면서 열차는 진짜 러시아의 품으로 들어간다.모스크바는 여러 잡다한 문화,사람이 뒤섞인 메트로폴리탄일 뿐 러시아가 아니다.모스크바에서 멀어질 수록 진짜 러시아인 것이다.볼가강을 넘어 계속 북으로 올라가면 철로는 다닐로프역에서 양쪽으로 갈라진다.북으로 곧장 가 볼로그다를 거쳐 아르항겔스크로 가는 선과 동으로 돌아 시베리아로 진행하는 선등 2개 노선이 갈라지는 것이다.다닐로프시는 16세기에 건설된 버터,치즈의 주산지이지만 가장 중요한 역할은 시베리아행 열차의 전동차를 교환하는 일이다. 시베리아행 열차는 매 3백∼4백㎞마다 전동차를 바꾸고 전동차 운전사를 교대해주는데 다닐로프는 모스크바에서 3백50㎞ 떨어져 있어 그 첫번째 순번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20분을 정차하는 동안 모스크바에서 달고온 국방색 전동차는 날씬한 붉은색의 체코제 전동차로 바뀌었다.객차는 몸체와 내부의 시설들이 모두 동독제,화물전동차는그루지아의 트빌리시에서 만든다고 한다. 우리가 탄 객차의 복도 한쪽 끝에는 「티탄」이라고 부르는 물 끓이는 대형티포티가 마련돼 있는데 컵을 들고가서 꼭지를 틀면 항상 뜨거운 물이 나온다.한켠에 온도표시가 돼있는데 보니까 90도∼1백도 사이를 가리키고 있다.우랄에서 생산되는 티탄으로 만든 용기인데 그 이름이 그냥 용기의 보통명사가 된 것이다.식성이 까다로운 승객이라면 컵라면을 준비해가서 언제든지 뜨거운 물을 부어먹을 수 있다. ○전동차 새로 교체 오랜 기차여행중 맛볼 수 있는 작은 즐거움중 하나는 이렇게 장시간 기차가 정차할 때 플랫폼으로 내려가 걸으며 맑은 공기를 듬뿍 마시는 것이다.기차의 스팀 내뿜는 소리가 「슉슉」 나고,식당칸의 물 쏟아내는 소리,쇠망치를 들고 기차 아래쪽을 툭툭 치며 지나가는 나이든 노동자,저녁 요깃거리를 준비하라고 외치며 지나가는 상인들…하나 같이 여행의 맛을 더해주는 소중한 장면들이다. 다닐로프를 지나며 기차는 북진을 끝내고 동으로 방향을 틀어 드디어 본격적인 시베리아행을 시작한다.저녁을 들기 위해 식당칸을 찾았다.옛날 소련 시절에는 음식값도 싸고 사람도 많았다는데 너무 비싼 탓인지 사람들도 별로 없다.다만 한쪽켠에 우리 옆칸 손님들인 덴마크인,영국인,독일인 승객들이 언제 친구가 됐는지 한 테이블에 둘러앉아 벌써 술이 거나해 있다.덴마크 사람들이 이렇게 술을 잘 마시는 줄은 처음 알았다.밤늦게 보드카를 마시는 것을 분명히 봤는데도 이튿날 좋은 구경거리가 생겼다 하면 어김없이 비디오 카메라를 들고 방에서 뛰어나오는 사람들이었다.
  • 중·북한군 사기 저하(6·25내막/모스크바 새 증언:18)

    ◎모,스탈린에 “장기전 대비책 강구” 요청/연합군 재반격에 “수년간 싸울 준비 필요” 전문/모스크바,중의 게릴라 전법 비판… 전술적 이견 제4차 공세작전을 펼 뜻을 나타낸 모택동의 전문을 받아본 스탈린은 이틀 뒤인 51년1월30일 모택동 앞으로 답전을 보내 그의 입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밝혔다.서울과 제물포는 반드시 사수하고 공격작전은 계속돼야 한다는 내용이었다.같은 날 스탈린은 모택동과 김일성 두사람 앞으로 같은 내용의 전문을 보내 다음 사항을 함께 논의하자고 제의했다.북조선군 사단수를 대대적으로 축소,재편성하자는 충격적인 제의였다(소련군총참모부 제8총국.전문번호 N651). 1.현북조선사단은 지난해 여름의 사단보다도 전투력이 떨어짐.당시 북조선사단은 10개 사단에 충분한 장교가 있었고 잘 훈련된 병력을 확보하고 있었음.현재 북조선은 28개 사단에 이중 19개 사단은 전선에,나머지 9개 사단은 만주에 주둔중임.이렇게 사단수가 많으면 장교를 충분히 배치시킬수 없음.이것이 지금 북조선사단들의 산만하고 불안정·비효율적인 주원인임.북조선측은 사단수에만 집착,질이 중요하다는 점을 잊고 있음. ○“5개사단 감축” 제의 2.따라서 사단수를 23개로 줄이는 것이 바람직함.줄어드는 5개 사단 소속 장교와 병력은 나머지 취약한 사단에 보충시킬 것.4개 인민군 여단도 전투력이 미미하기 때문에 장교·사병을 사단강화용으로 전용시킬 필요가 있음. 3.현단계에서 병단사령부를 별도 설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음.병단을 지휘할 장교수가 태부족이고 또한 군사령부가 이미 설치돼 있기 때문임.각각 4개 사단으로 구성되는 5개 군사령부를 조직하는 게 더 바람직함.이럴 경우 인민군은 5개군(총20개 사단)과 3개 예비사단으로 구성됨.이 3개 사단은 총사령관 직접지휘하에 두어 작전기간중 다른 군 소속 사단을 지원케 함.물론 시간이 지나 지휘관들이 충분한 경험을 쌓고 숫자도 늘어나면 그때 병단체계로 돌아갈 수 있음.이 군조직개편은 지금 당장 하는 게 아니라 작전이 끝난 뒤 휴식기간중에 추진하자는 것임. 그러나 이 전문을 받은 평양의 소련대사관은 이를 김일성에게 곧바로전달하지 못했다.1월31일 내각 부수상 김책의 사망으로 김일성의 심기가 매우 불편해 있었기 때문이다.대신 평양주재 소련대사가 자신의 견해를 보내왔다.모두 13개 항목으로 정리된 이 전문내용을 요점만 소개한다(전문번호 N500316sh). 스탈린동지의 북조선군 전력에 대한 평가는 전적으로 타당함.인민군내에서 이미 사단수 감축조치가 진행중임.북한군이 사단수에만 집착,질이 형편없다는 스탈린 동지의 지적은 타당하나 현상황에서 이들을 도와줄 적절한 방도가 없음.가장 심각한 쪽은 해군임.불과 3척의 함정을 보유하고 있으나 모두 소련에 정박중이고 이를 운용할 해군병력·장교수가 태부족임.특히 북조선에서는 매사를 차근차근 따져보지 않고 무계획적으로 진행하는 습관이 있음.병단 체계는 종전 후에 도입하는 게 바람직함… 이 답전을 받고 스탈린이 만족할 리가 없었다.그는 2월3일 평양주재 대사관으로 다시 전문을 띄워 인민군 편재개편에 관해 보낸 1월30일자 전문을 조속히 김일성에게 직접 보여주고 그의 반응을 보고하라고 재촉했다.이튿날 평양대사관은 김일성과 만난 회담결과를 즉시 스탈린 앞으로 보고했다.예상대로 김일성은 스탈린의 제의에 별다른 이견을 달지 않았다.특기할 점은 김일성이 여기서 다음 공세작전시기를 51년 2월7일부터 13일사이로 잡아 스탈린에게 보고했다는 점이다.김일성은 이 공세작전 이후 사단·군 감축등 추가군편제개편을 단행하자고 스탈린에게 건의했다. ○“미 소모전 전개 예상” 그러나 이후 연합군의 반격이 보다 조직적으로 전개됨에 따라 북한쪽의 사기는 크게 위축되기 시작했다.2월10일소련군 해군사령관은 스탈린 앞으로 보낸 전문을 통해 미군의 상륙작전개시가 임박했다는 정보보고를 올렸다.2월7일부터 미해군 극동사령부와 한국 근해에 파견된 해군전선 사령관들 사이의 전파교신횟수가 급속히 늘어났고 2월9일에는 동서해안에 많은 수의 미군전함이 출현했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가운데 모택동은 3월1일자로 스탈린 앞으로 장문의 전문을 보내 상황의 심각성을 상세히 알리고 이에 대한 대책마련을 요청했다.그 대책은 다름아닌 장기전에 대비하자는 것이었다(전문번호 N17255). 필리포프 동지께.현재 북경에 잠시 머물고 있는 팽덕회 동지로부터 들은 조선상황과 관련,본인의 입장을 전하는 바임. 1.심대한 패배를 당하지 않는 한 적군은 조선에서 물러날 것같지 않음.그리고 이들에게 큰 패배를 안겨주기까지는 다소의 시간이 필요할 것같음.장기전이 전개될 가능성이 생겼으며 최소 2년은 더 싸울 대비를 해야 할 것같음.적은 우리를 소모전으로 몰고가려 하고 있음.적의 목적은 한편으로는 전선에서 우리 병력이 휴식을 취하거나 전력재정비할 여유를 주지 않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우세한 무기를 이용해 소모전으로 이끌려는 것임.동시에 해군함대를 이용해 조선해안을 쉴새없이 공격하고 있고 아군 통신시설에 대한 적의 공습이 계속되고 있음.전선에 대한 물자보급이 60∼70%만 당도하고 나머지는 모두 적의 공습에 도중 파괴되고 있음.추가병력은 전선에 투입되지 못하고 전선병력은 물자보급을 받지 못해 앞으로 1개월 반 후면 적군이 38도선 지역에서 공격작전을 다시 전개할 수 있을 것임. 2.장기전에 대비해중국군은 중단없는 병력투입(편집자주:인해전술)전술을 구사하겠음.이에 대비해 이미 의용군 3개 그룹을 결성해 1개 그룹씩 차례로 전선에 투입키로 결정했음.현재 조선에서 전투에 참가중인 9개 병단(30개 사단)이 제1그룹임.중국내에 있는 6개 병단과 조선에 주둔중인 다른 3개 병단을 합쳐 9개군단(27개 사단) 제2그룹을 만듬.현재 중국영토에 있는 10개 병단(30개 사단)으로 제3그룹을 만들어 6월경 전선에 투입할 예정임.지금까지 4차례의 작전에서 중국군은 전사·부상등 합쳐 10만명의 인명피해를 입었음.이를 보충하기 위해 12만명을 새로 충원할 예정임.금년도와 내년도에 중국군 30만명의 추가인명피해를 예상하고 있음.병력 계속투입을 위해 30만명을 추가차출할 계획임. 인민군조직과 관련,팽덕회는 김일성에게 현재의 8개 병단을 6개 병단으로 줄일 것을 권유했음.각병단은 1만명으로 구성되는 3개 사단으로 짜도록 권했음.아울러 해안·주요도시 방어를 위해 5개 여단을 창설하도록 요청했음. ○지상군의 열세 인정 3.오는 4월초 의용군 제2그룹의 9개군단이 전선에 투입되기 전까지 지상군 우위는 적이 차지할 것같음.따라서 그때까지는 공격작전을 펴지 않는 게 좋음.이 기회를 이용해 적이 1개월 내지 1개월 반 뒤에 공격을 취할 가능성이 있음.만약 적이 다시 서울을 장악하고 38도선을 넘어올 경우 곤란한 상황이 벌어질 것임.미리 이에 대비할 필요가 있음. 4.현재 우리가 고전하는 주이유는 적이 화력우위를 점하고 있기 때문임.우리는 보급수송이 취약해 보급물자의 30∼40%가 적의 공습을 받아 도중에 유실됨.4∼5월중 10개 항공여단이 전투에 투입될 것으로 기대함.지금까지는 조선에 마땅한 비행장이 없음.지상에 눈이 쌓여 있어 아직 보수작업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음. 결론적으로 우리는 수년간에 걸친 장기전에 대비해야 함.미군을 몰아내지 않고서 조선문제는 해결될 수 없음. 당신의 지시를 기다리며.볼셰비키의 인사를 전하는 바임.모택동. 그러나 이 간곡한 청원을 받은 스탈린은 무려 보름 뒤인 3월15일에야 답전을 보냈다.모택동의 공군지원요청을 마지못해 수락하면서 스탈린은 끝까지 소련공군기를 전선에 직접 투입하는 것은 피했다.즉 중국 안동지역에 전투기 1개 사단을 보내줄 테니 그곳에 있는 중국공군 전투기 2개 사단을 전선으로 빼내가라는 것이었다.안동에 있는 이 중국군 전투기 2개 사단도 사실은 벨로프장군이 지휘하는 소련 전투기사단이었다. 이 무렵 스탈린·모택동 두사람은 전술문제를 놓고 다소의 이견을 빚고 있다.즉 모택동이 전선에서 치고빠지는 식의 게릴라전법을 구사하겠다고 한 데 대해 스탈린이 이를 한반도사정에 적절치 않다는 이유를 들어 매우 신랄히 비판한 것이다. ◎새로 밝혀진 사실/북 28개 사단중 9개사단 만주 주둔/스탈린·모 「연합군 대응전술」 마찰 51년 1월30일의 스탈린 전문을 보면 북한군의 당시 시점에서의 병력의 규모와 위치가 나타나 있다.총 28개사단이다.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28개 사단중 9개사단이 만주에 주둔중이라는 사실이다.중국군의 참전 이후 북한군은 전쟁의 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하였을 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군대가 만주로 이동하였었다.전면적으로패퇴한 북한군은 이 만주를 근거지로 하여 재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그동안 미군의 정보문서에만 나타나 있었을 뿐 소련과 북한은 물론 중국의 공식문서에서는 비밀로 취급되어오던 사실이었다.이러한 내용이 이번 자료를 통하여 처음으로 밝혀진 것이다.이번 회에서 우리는 병력의 가장 구체적인 편제까지 스탈린이 장악,지시하고 있다는 사실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또한 모택동이 51년 초부터 장기전에 대비하려 하였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이미 51년 3월에 모는 『2년은 더 싸울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수년간에 걸친 장기전에 대비해야 한다』고 언명하고 있는 것이다.흥미롭게도 실제의 전쟁은 이로부터 2년을 더 끈 뒤에 종결되었다.끝으로 스탈린과 모택동 사이에 대응전술의 이견이 존재하였다는 점도 처음 밝혀진 사실로서 앞으로 많은 규명을 요하는 부분이다.그들은 소련공군과 무기의 지원문제만이 아니라 실제의 전쟁수행방식을 놓고도 이견을 보였던 것이다.물론 이러한 내용 역시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 황금의 관광코스 「골든 링」(시베리아 대탐방:17)

    ◎13∼16C 아름다운 교회건물 오지에 산재/볼셰비키 혁명때 대도시 건물 거의 파괴/소도시선 보존 완벽… 종소리 화음 기막혀/볼가강 지나며 특급열차는 진짜 러시아품으로 하오 4시. 모스크바주와는 작별을 고하고 블라디미르주의 첫 역이며 모스크바 교외선 전철의 종착역인 알렉산드로프역을 지나간다. 주민이 불과 6만8천여명인 소도시이지만 16세기 후반 폭군 이반 그로즈니가 마치 피터대게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천도를 결행했던 것처럼 모스크바의 반대세력들을 피해 이곳에서 비밀 개혁세력을 만들었던 유서깊은 곳이다. 당시 이반 그로즈니가 거처했던 궁들은 지금 박물관으로 꾸며져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기차역 3천개 넘어 시베리아철도가 달리는 길은 바로 광포했던 러시아 역사가 달려온 길과 일치한다. 타타르·몽골인들이 세운 제국을 짓밟고 동진하며 러시아의 정복자들은 마을을 정복하면 그곳에 요새를 짓고 교회를 세웠다. 그뒤 그 요새는 도시가 됐다. 그리고 그 도시에 공장을 세우면서 철길이 놓여졌다. 시베리아 철도는 또한이 도시들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철도가 들어서며 흥한 도시도 있고 반대롤 철도 때문에 무대뒤로 사라져간 도시들 또한 숱하다. 끔찍했던 러시아 현대사의 자취 또한 이 철길과 같은 길을 걸었다. 숱한 유형자들이 이 길을 따라 동으로 이동했고 혁명 뒤 내란중에는 백군·적군이 서로 이 철도를 자어악하기 위해 철길 전구간을 따라가며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세르기예프 파사드를 지나 조금 더 달리면 오른편으로 플레세예보 호수가 보인다.피터대제가 16세 소년일 때 이곳에서 배를 만들며 조선술을 익혔다는 곳이다.이때 익힌 조선술을 바탕으로 그는 후일 북부 아르항겔스크에서 본격 대함대를 건설했다.그러니까 러시아함대의 출발지가 바로 이 호수인 셈이다.이곳에서는 해마다 여름이면 러시아해군 함대창설일을 맞아 대단한 잔치가 벌어진다. 북으로 좀더 올라가면 19세기까지 야르마르카라고 부르는 러시아 3대시장중 하나이던 로스토프역이 나온다.당시 니즈니노보고르드에 있는 니즈가롭스크시장,우랄에 있는 이르비츠카시장,그리고 목재·교회성물을거래하던 이 로스토프시장이 러시아의 3대시장이었다.특히 금속박스에 특수에나멜을 입혀 장식하는 피니프치라고 부르는 교회장신구를 만들어내는 곳이 바로 로스토프다.러시아인은 지금도 아주 큰 시장을 야르마르카라고 부르는데 모스크바에도 서너개의 야르마르카가 있다. 야로슬라블에 도착하기까지 4시간여동안 기차는 한번도 정차를 하지 않는다.특급열차이기 때문이다.특급열차·완행열차·교외선역을 다 치면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역수만 3천개가 넘는다고 한다.특급열차가 서는 역은 이중 2백∼3백개에 불과하다. ○20년대말 파괴 극심 습지가 많아지면서 체료무하향기가 차창을 넘어 들어온다.남녀의 사랑을 노래하는 러시아의 유행가에도 자주 등장하는 체료무하의 흰꽃 역시 북으로 가면서 추위가 끝났다는 신호기역할을 한다.모스크바시 남쪽의 마피아 많기로 소문난 체료무시키시장은 실상 이 낭만적인 꽃이름 체료무하에서 따온 이름이다. 피터대제의 이름을 딴 페트롭스카야역이 지나간다.한때 야로슬라블이나 모스크바보다도 더 화려한 명성을 날리던 도시이나 지금은 완전히 쇄락했다.오직 종교적인 도시로 건설됐으나 철도가 교차하거나,강을 끼고 있거나 하는 지리적 강점이 하나도 없어 세월이 지나며 자연 쇄락의 길을 걸었다.도시의 흥망에 지리적 여건은 피할 수 없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모스크바에서 멀어질수록,시베리아땅으로 들어갈수록 훌륭한 교회들이 더 잘 보존돼 있어 흥미롭다.혁명 뒤 볼셰비키들은 종교를 혁명의 주적으로 삼고 교회파괴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였다.그중 20년대말과 1931년,32년이 가장 치열했다.특히 수도·주도(주도)·대도시에서는 예외없이 철저히 교회를 파괴,폐쇄했다.그런데 도시라도 주도가 아닌 곳의 교회는 그냥 두었다.그 덕분에 시베리아 오지에 훌륭한 교회가 많이 남아 있게 된 것이다. 하나하나 지나고 있는 블라디미르·수즈달·야로슬라블·로스토프·알렉산드로프·세르기예프 파사드등을 가리켜 언제부터인지 러시아인들은 「골든 링」이라고 부르고 있다.특별히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그룹은 아닌데 훌륭한 교회건물이 많아 황금의 관광코스라는 의미로 붙인 것이다.어쨌든 이들 도시에는 교회가 참 많다.차창밖으로 어림잡아 봐도 수㎞마다 반드시 교회마을이 나타난다.13∼16세기 사이 이들 교회를 건설할 때 일부러 12∼20㎞를 넘지 않도록 지어 종소리로 서로서로 연락이 가능하도록 배려했다고 한다.해동하고 눈이 녹아 진창이 되거나,혹은 눈으로 길이 막힐 때,마을에 길흉사가 생길 때는 종소리로 약속한 특수전보로 서로 소식을 알렸다는 것이다.아름다운 러시아의 종소리교향곡은 아마 이렇게 해서 시작됐는지 모른다.지금도 이들 교회에서는 종탑 하나에 보통 10여개의 크고 작은 종이 매시각 기막힌 화음을 연출해낸다. ○철도변 습지대 형성 곳곳에 습지대가 이어지고 있다.습지라고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저지대습지는 더럽고 해충의 서식처가 되지만 고지대습지는 맛있는 딸기가 자라는 곳이다.산언덕 약간 움푹한 곳에 물이 괴어 습지가 되면 그곳에 베료자꽃씨가 바람에 날려와 뿌리를 내려 자라면서 습기를 빨아먹고 세월이 지나면 물렁물렁한 고지대습지가 생겨난다.그곳에서 클류크바라는 맛있는 고지대 딸기가 자라는 것이다.러시아인들은 이 딸기를 따다가 잼을 만들어놓고 긴 겨울밤 차이(다)를 마실 때 함께 숟가락으로 푹푹 떠먹으며 한담을 즐긴다. 자세히 보니 철로변을 따라서는 반드시 습지대가 형성돼 있다.이는 철길을 보호하기 위해 철로변의 나무를 베어내면서 생긴 인공습지다.철로변 1백m 안쪽땅은 철길·전선줄등을 보호하기 위해 철도청 노동자들이 정기적으로 나무를 베어주는데 땅의 습기를 빨아먹을 나무가 없어짐에 따라 물이 땅에 괴어 습지가 형성된 것이다. 야로슬라블주에 들어서면서 카스트라스카야시·포세호니시등 혁명 전 6백여종의 치즈를 생산해 유럽에까지 수출하던 러시아 최고 치즈산지가 나온다.지금은 여러가지 어려운 사정탓에 40여종의 치즈를 생산,주로 러시아국내시장에서 소비하고 있다.「세미 브라타바(7형제)」라는 재미있는 이름의 시골역이 차창밖으로 지나가고 체료무하 흰꽃이 만발해 봄이 이곳까지 밀고 올라왔음을 알린다.모스크바의 체료무하꽃은 우리가 떠나기 전에 이미 시들기 시작했었다.러시아는 참 큰 땅이다.지금 흑해에서는 수영을 하고 있는데 북부에서는 아직 스키를 탈 수 있다.아르항겔스크·볼로그다에는 아직 체료무하꽃이 피지 않았을 것이다.
  • 제2부 시베리아 횡단철도/“출발” 모스크바(시베리아 대탐방:16)

    ◎총길이 9,288㎞… 러시아의 대동맥/시경계 벗어나면 별장 「다차촌」이 눈앞에/출발 1시간만에 차창밖은 침엽수림으로/철길따라 늘어선 「베료자」 숲은 “러시아인의 정서” 서울신문 창간50주년기념 특별기획연재물 「시베리아 대탐방」은 지난 주 15회로 1부를 끝내고 이번 주 16회부터 제2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시작한다. 본사 이기동 모스크바특파원과 사진부 송기석 특파원이 20여일동안 이 열차를 탑승,철도주변의 모습과 자원,자연환경 등을 컬러사진과 함께 재미있고 생생하게 전할 예정이다. 시베리아 대탐방 제2부는 주2회 수요일과 목요일에 연재한다. 하오 2시 정각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기점인 모스크바의 야로슬라블역을 출발했다.출발한지 불과 35분만에 북부시경계를 벗어나 모스크바주(오블라스치)로 들어서자 곧바로 확트인 대지가 차창밖으로 모습을 드러낸다.그리고 대지와 숲 사이로 러시아인들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재산목록 1호 「다차」촌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다차는 굳이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별장」이지만 호사스런 별장이 아니라 그곳에서 남새도 키우고 신선한 공기속에 이웃들과 보드카도 실컷 마시는 주말농장같은 곳이다. 다차의 어원은 러시아어 「다바치(받다)」에서 유래된 것.제정 러시아시절 황제 차르가 총애하는 귀족들에게 땅떼기를 선사한데서 나온 말이지만 소비에트시절 일반노동자들에게 골고루 보급돼 지금은 모스크바시민 70∼80%가 다차의 주인이다.5월부터 겨울이 시작되는 9월까지 매주 금요일 하오만 되면 다차로 향하는 시민들로 모스크바시의 외곽도로는 지독한 교통체증을 빚을 정도다.물론 주말이면 모스크바 시내는 완전히 빈도시가 되다시피 한다. 다차 마당에 나와 감자를 심는 사람들의 모습이 간간이 보인다.러시아인들은 봄 5월15일을 기준으로 감자씨를 뿌리기 시작한다.특별한 이름이 붙은 절기는 아니지만 이날이 지나면 혹독한 추위는 더 이상 오지 않는다는 속설 때문이다. 다차촌이 시작되며 러시아인들의 정서적인 심벌,「베료자」나무들이 나타난다.목재로 쓸 수 있는 나무는 아니지만 시베리아끝까지 줄곧 길동무가 될 나무들이다.우리의 백양목과 비슷한데 우랄에서 동시베리아까지 광범위하게 분포돼 있고 겨울이 물러가면서 연푸른 잎을 달기 시작하기 때문에 우리의 시베리아 횡단길에 계절의 경계를 알려주는 「잎의 화신」역할을 하게된다.우리에게는 베료스카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이는 베료자에 예쁘고 귀여움을 나타내는 접미사 「카」가 덧붙은 말이다. 다차촌은 모스크바 시경계를 중심으로 반경 2백50㎞까지 계속된다.그리고는 황량한 대지와 베료자숲이 계속되다가 다음 도시의 다차촌이 또 나타난다.대도시 주위에는 반드시 다차촌이 형성돼있다. 출발 한시간이 지나자 푸슈킨의 이름을 딴 푸슈키노역이 지나고 역한편에 증기기관차 시절의 유물인 사일로같이 생긴 물탱크가 지나간다.높이 20여m에 붉은벽돌과 나무로 만들어 지나는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던 시설이다. 시베리아철도는 현재 공사가 진행중인 하바로프스크∼블라디보스토크간을 제외 하고는 전구간이 전철화됐다.따라서 물태크는 이제 역할이 없어진 철도의 장식품에불과하다. 우리가 탄 차는 종착역이 블라디보스토크인 「러시아2호」특급열차.방 하나에 침대 2개가 마련돼 있어 객차 한칸에 승객수는 20명안팎에 불과한 최고급 이다.격일로 홀수날만 모스크바를 출발하는데 종착역까지 계속 갈 경우 6박7일이 걸리기 때문에 좋은 이웃을 만나는게 보통 복이 아니다. 모스크바에서 야로슬라블까지를 시베리아철도의 제1구간으로 부르는데 이는 건설기간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이 구간은 두단계로 나누어지는데 첫째 구간은 모스크바에서 세르기예프 파사드까지로 1862년에 건설됐다.모스크바에서 시베리아로 뻗는 최초의 철도인 것이다.이 선은 1870년에 2단계로 야로슬라블까지 연장됐다.세르기예프 파사드는 당시 러시아제국의 종교적인 수도였다.지난 91년 이름이 바뀌기 전까지 볼셰비키의 이름을 딴 자고르스크로 불렸으며 모스크바에 들르는 한국인 관광객들이 반드시 들르는 명승지다.그 다음 야로슬라블은 종교적인 의미 외에도 모스크바에 있는 공장들을 볼가강으로 연결시키기 위한 산업적인 고려 때문에 건설됐다.이구간이 개통됨으로써 모스크바에서 생산된 각종 공산품들은 당시 가장 가까운 볼가강 항구인 이 야로슬라블을 통해 카스트로마·니즈니노보고르드·체복사리·카잔등 볼가강변의 크고 작은 도시들로 공급될 수 있었다. 그래서 한동안 시베리아행 열차의 종착역은 야로슬라블이었는데 이 때문에 모스크바의 시베리아철도 출발역 이름은 야로슬라블역이다.모스크바의 역 이름은 모두 행선지 이름을 따서 만든게 재미있다.예를들어 레닌그라드로 향하는 열차가 출발하는 역은 레닌그라드역이다.키예프로 가는 열차는 키예프역,백러시아로 가는 열차는 백러시아역…하는 식이다. 출발 1시간이 지나면서 차창의 풍경이 달라지기 시작한다.침엽수림이 나타나기 시작하며 침엽수·활엽수의 혼재상태가 이어진다.벌써 타이가(삼림지대)의 분위기가 나타나는 것이다.모스크바에서 멀어질수록,그리고 타이가에 가까워질 수록 침엽수의 몫이 더 많아진다. 계속되던 다차촌은 세르기예프 파사드를 기점으로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20년대 최대 출판단지(콤비나트)였던 프라우다신문이 종업원들을 위해 만든 다차촌 「프라브딘스키」역을 지나면서 다시 막막한 베료자숲이 대지를 수놓기 시작했다. ◎횡단철도란/수도 모스크바서 극동 블라디보스토크 연결/1891년 첫삽,25년만에 완공… 6박7일 걸려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모스크바에서 시작해 시베리아대지를 가로질러 극동의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총길이 9천2백88㎞에 달하는 세계 최장의 철로이다.특급열차로 달릴 경우 꼬박 6박7일이 걸리는 거리다.지구둘레의 3분의 1에 가까운 거리며 시간이 바뀌는 시간대만도 7개나 지난다.일명 「대시베리아철도」로도 불리는 이 철도는 제정러시아 때인 1891년5월19일 착공돼 25년만인 1916년 쿠즈네츠∼하바로프스크 구간을 끝으로 완공됐다.물론 많은 구간은 기존 노선을 보완해 연결했다.이 철도의 등장과 함께 지구의 최대 자원보고인 시베리아도 본격개발의 계기를 맞았다.인구유입이 촉진돼 철로변을 중심으로 잇따라 대도시가 등장했고 대학·도서관·극장등이 들어서 문화적 대변혁을 가져왔다. 특히 2차세계대전중 모스크바·레닌그라드등 유럽쪽에 있던 많은 공장·문화기관들이 이 철도를 따라 대거 시베리아로 옮겨져 이 지역의 현대화에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지금은 최대 공업지대인 우랄지구·쿠즈네츠탄전·북부의 석유·가스산지를 유럽쪽으로 연결해 주는 러시아의 산업 대동맥 구실을 하고있다. 2차대전 종전 직후부터 전노선의 전철화가 시작돼 75년 거의 마무리됐으며 현재 공사가 진행중인 하바로프스크∼블라디보스토크구간을 제외한 전구간이 전철화됐다.현재 대시베리아철도는 연방철도부 산하에 반독립기구로 우랄철도부·옴스크철도부·사할린철도부 등 약 20개의 지방 철도부가 나누어 운영하고 있다.앞으로 전구간 복선화·전철화,그리고 바이칼∼아무르구간(BAM철도)완공과 함께 만성 적자를 탈피하기 위한 서비스 개선,경영합리화 등이 과제로 남아 있다. 현재 유럽으로 가는 우리나라 화물의 일부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 철도를 이용해 육로로 값싸고 빠르게 운송되고 있다.앞으로 남북관계가 원만히 풀리면 직접 육로로 유럽까지 연결해줄 철도가 바로 시베리아 철도라 이 철도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더 하다.
  • 로프(영화탄생 100년/감동의 명화)

    ◎“초인사상 비판한 가장 히치콕적 작품”/하나의 공간서 연속적 촬영기법 도입한 걸작 히치콕 감독의 영화 53편가운데 일반적으로 가장 뛰어나다고 인정받는 작품은 단연 「현기증」이다.물론 나도 그렇게 생각할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 이 세상 영화중 으뜸으로 치고 있을 정도다.말하자면 만장일치인 셈인데 영화의 신으로 추앙받는 히치콕에게도 과소평가받는 영화가 있다면 좀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바로 「로프」가 그렇다.역사상 전무후무한 실험에 관해서만 언급할 뿐 누구도 이것이 위대하다고 하지는 않는다.하지만 「로프」야말로 가장 히치콕적인 영화,내가 보기엔 걸작중의 걸작이다. 전설적인 형식실험이란 이런 것이다.보통 영화는 평균 700∼800개의 쇼트로 이루어져 있는데 「로프」는 단 하나로 찍혔다는 점,단일한 공간에서 극중 시간과 상영시간이 일치되면서 벌어지는 이 이야기는 한번도 필름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방식으로 전개된다.실제로 이렇게 촬영하는 일은 우선 카메라에 장전되는 필름의 양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불가능한데 히치콕은 교활하다고 볼 수밖에 없는 재치로 이 제한을 극복해낸다.즉 필름이 다 떨어질 때쯤 되면 인물의 등짝이나 가구의 옆면으로 카메라를 가까이 들이대면서 화면을 시커멓게 가리게 한 다음 필름 교환을 하고 바로 거기서부터 새로 시작하는 것이다.이렇게 해서 사실은 열개의 쇼트이지만 화면에서는 하나로 보이는 기적이 이루어진다. 바로 이런 트릭의 교묘함에 정작 작품의 사상이 가려져 안타깝다는 말이다.히치콕이 여기서 시도했던건 니체를 필두로 한 초인사상에 대한 비판이었다.지적으로 우월한 소수의 인간에게는 열등하고 타락한 자를 살해할 특권이 주어진다는 논리를 추종한 두 게이가 실제로 일을 벌이고 나서 자기들에게 그 사상을 전수한 선생을 초대해 파티를 벌인다는 내용은 전범재판이 한창이었던 48년 상황에서 심장한 의미를 지니지 않을 수 없었다.누가 초인이고 범인이란 말인가.그런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선생은 자기가 뿌린 씨앗이 낳은 결과를 보면서 절규한다.이 질식해 버릴 것만 같은 아파트 공간속에서 인물들은 자기네신념과 행위의 로프에 묶인 나머지 끔직한 폐소공포증에 시달린다.시체를 눕혀놓은 고리짝을 뷔페용 식탁으로 사용한다는 지독한 조크는 식욕과 성욕,권력욕을 잇는 로프로 작용하면서 영화를 시종 음울한 가운데 씁쓸한 유머가 가득한 분위기로 몰고 간다.히치콕이 온 정성을 다해 마련한 이 만찬을 뉘라서 거부하겠는가.닭고기 접시아래 누운 존재만 잠시 잊을 수 있다면….박찬욱(영화감독)
  • 체첸반군 러 관청 습격/부데노프스키시/시민·경찰등 41명 사살

    【모스크바 AP AFP 로이터 연합】 체첸반군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무장괴한 1백여명이 14일 러시아 남부의 부덴노프스크시를 공격,시민과 경찰 등 최소한 41명을 죽이고 1백60여명의 인질을 잡고 체첸공화국 방면으로 도주했다. 박격포와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이들 괴한들이 이날 정오께(현지시간) 2대의 트럭과 2대의 버스에 나눠타고 체첸공화국에서 북쪽으로 70㎞ 떨어진 인구 10만명 규모의 부덴노프스크로 진입해 시의회,은행,경찰서 등 주요건물을 공격하고 전화선을 끊는 등 주요 관공서들을 공격했다. 러시아군은 이와 관련,북부 카프카스지방의 군대에 비상경계령을 내렸으며 수도 모스크바의 정부기관 등 주요시설에 대한 경계 강화를 지시했다. 이타르타스통신은 올레그 소스코베츠 러시아 제1부총리가 관계기관의 비상대책회의에서 이들 테러분자가 러시아정부의 체첸공화국에 대한 군사개입 중지를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고 보도했다. 【모스크바 연합】 지난 14일 러시아 남부 부데노프스크시의 대형병원을 점거한 체첸분리주의자테러범들이 억류하고 있는 인질의 숫자는 1천여명에 달한다고 이타르타스통신이 15일 스타브로폴 지방정부 관리들을 인용해 보도했다. 이타르타스통신은 하룻밤을 테러범들에게 붙잡혀 있는 병원내 인질의 숫자는의사와 간호사 등 직원 4백여명과 입원중인 환자 5백여명을 포함해 모두 1천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전했다. ◎러,인질협상 【모스크바 AFP AP 연합】 니콜라이 예고로프 부총리를 비롯한 러시아 고위관리들은 15일 체첸반군으로 보이는 무장괴한들이 러시아군이 체첸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붙잡고 있는 60여명의 인질들을 모두 살해하겠다고 위협하고 있는 가운데 러시아 남부 부데노프스크에서 무장괴한들과 협상에 들어갔다고 이타르타스 통신이 보도했다. ◎체첸,대러 테러 배경과 전망/거점잃은 반군,민간인 테러로 보복/러 소탕작전에 저항… 최대규모 습격 부데노프스크시 테러사건은 체첸사태 발생이후 체첸공화국 영토 밖에서 벌어진 최초의 대규모 테러라는 점에서 많은 우려를 자아내게 한다.러시아 정부는 특히 이번 사건이 13일 체첸영토내 저항군 거점에 대한 막바지 소탕작전을 끝낸 바로 이튿날 일어났다는 점에서 크게 당황하고 있다.가장 우려해왔던 최악의 시나리오,즉 러시아영토내에서 민간인을 상대로 한 체첸저항군들의 무차별 테러가 현실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6월초 체첸저항군의 산악거점 사령부가 위치한 베데노지역이 러군 수중에 들어간 뒤 저항군은 그동안 몇개 그룹으로 나뉘어 산발저항을 계속해왔다.지휘체계도 일원화되지 않아 두다예프가 지휘하는 그룹과 체첸군 총사령관인 아슬란 마스하도프,그리고 샤밀 바사예프 사령관이 이끄는 조직 등으로 흩어졌다.이런 상황에서 13일 최후저항거점인 샤토이,노자이­유르트에 대한 러군의 대규모 공격이 감행됐던 것이다. 사건 배후가 아직 분명히 가려진 것은 아니지만 러시아 텔레비전이 내보내는 화면 등을 보면 체첸저항군 일파가 저지른 것이 분명한 것같다.이제 체첸군도 러시아군과 정상적인 화력대결을 벌일 단계는 지났다고 판단한 듯하고 이는 두다예프가 여러차례 호언해온 마지막 수단인 민간인에 대한 테러의 신호탄인 셈이다. 그러나 이런 위협에 굴복해 러군이 체첸영토에서 물러날 가능성은 거의 전무하다는 게 이곳 군사전문가들의 공통된 분석이다.당초 체첸에 무력을 투입해 군사작전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보여주었듯이 옐친정부가 민간인 희생을 두려워해 군대를 철수할 리는 없다는 것이다. 결국 이번 사건은 군사적으로 궁지에 몰린 저항군 일부가 저지른 단발적인 성격이 짙다.따라서 사태의 파장을 보는 시각도 대체로 체첸측에 대해 부정적인 쪽이다.
  • 한반도 통일여건 진단과 전망/한·러·일·중 4개국의 시각

    광복 50주년을 맞아 지난 50년을 뒤돌아 보고 한국통일의 현단계와 전망을 짚어 보는 국제학술회의가 지난 12∼14일 고려대학교 언론대학원과 프레스센터 공동주최로 서울 호텔신라에서 열렸다.한국을 비롯,미국 러시아 중국 일본의 학자와 언론인들이 참석,「한반도 분단의 역사적 재조명」「한반도 통일여건의 진단과 전망」「세계속의 통일한국 위상」등 3개 주제로 나누어 주제발표와 열띤 토론을 벌였다.이 세미나의 「한반도 통일여건의 진단과 전망」주제 회의에서 발표된 한반도 통일에 대한 미국·러시아·일본·중국의 시각을 요약 소개한다. ◎미국/북한은 계몽적 협상대상/대화로 평화적 해결 희망/톰 레이드 워싱턴포스트 동경지국장 미국인들이 한국 통일에 대해 갖고 있는 견해를 일반 대중과 학자,그리고 관리나 공무원들의 입장으로 구별해 말할 필요성을 느낀다. 우선 일반인들은 대부분 주변에서 흔히 마주치는 부지런하고 검소한 한국인 이민자들을 단지 한국인들로 알 뿐 남한인으로 알고 있지 않다.이것은 한국이 분단국가라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즉 이들은 한반도의 분단이 일시적인 상태로 언젠가는 통일될 것으로 믿고 있으며 통일을 미국에 대한 위협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학자들은 대개 통일방식과 통일 후의 형태와 관련해 대개 두 그룹으로 나뉘어 한국을 바라 본다.그럼에도 양측 모두 남한은 국제사회에서 신뢰할 만한 국가이며 합법적인 정권을 구축했다는 점에서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에 대해선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하는 측과 무모한 독재국가로 보는 측으로 양분된다.전자의 경우 북한이 통일 후 중요한 역할을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편이며 후자는 한반도 통일이 독일과 마찬가지로 공산주의 국가가 더 크고 부유한 민주국가로 흡수 통일돼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한편 정치인이나 공무원들은 대부분 이 민감한 한국통일 문제에 대해 통일은 불가피하며 바람직한 것이라는 일치된 견해를 보이고 있다.미국의 관리나 외교관 가운데 한국의 영구분단을 주장하는 사람은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 한국문제에 대한 논쟁은 대 북한관계에서 시작된다.현재의 클린턴 정부처럼 북한을 이란과 쿠바처럼 계몽적인 협상이나 강·온 정책을 병행해야 할 나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과 적으로 간주하는 주장이 그것이다.이들 관리나 공무원들은 대부분 학자들의 주장을 따르는 편인데 클린턴 정부측의 견해는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대화와 협상을 통해 해결하자는 측이고 또 북한을 적으로 간주하는 측은 독일처럼 흡수통일을 택해야 한다는 주장에 경도돼 있는 분위기다. ◎러시아/파격적인 경제계획 수립/안정된 국제환경 조성을/세르게이 곤차로프 역사학자 러시와와의 관계에 있어서 남한은 북한보다 빠른 발전상황을 보여왔다.현재 러시아와 남한은 연대관계에서 민감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안을 발견한 것으로 보인다.그 예는 한국전쟁에 대한 소련 문서자료들을 김영삼 대통령에게 제시하는 것과 관련한 신사협정이다. 러시아와 남한간의 관계수립과 발전은 양측 모두에게 이익을 주었지만 기대했던 것이 모두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일반적으로 말해 남북한과 러시아의 관계에 있어서 러시아는 혁명적이고 폭력적이기보다는 현실적이고 평화로운 과정을 택한다.북한과의 정상관계를 유지하고 남한과의 연대를 진척시킴으로써 러시아는 한반도에서의 상황의 안정성과 예측 가능성에 기여할 수 있었다. 러시아는 극동아시아의 다른 주요세력들과는 달리 한반도 통일의 결과에 대해 우려할 것도 잃을 것도 없다.예를 들어 일본에서는 통일한국이 경제·군사적인 면에서 이 지역에서의 일본의 경제 군사적인 역할에 도전할 수 있다는 우려가 대두되고 있다.또 남북한 경제교류가 빠르게 발전한다면 중국에 행해지는 남한 투자의 몫이 북한쪽으로 기울게 된다.미국에 있어서도 한반도 통일은 남한내 군사주둔의 문제를 해결하는 어려운 과업을 제기하고 그것은 불가피하게 일본과 미국간의 안보 유대의 재평가를 필요로 할 것이다.그러나 러시아는 그 모든 문제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형편이다. 한반도 통일의 전개는 무엇보다도 남북간 정치·안보 대화를 비롯한 경제 문화 인도주의적 교환에서부터 남북한과 지역내의 주요국들을관련시키는 파격적인 경제 사회적 계획들을 이행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또한 한반도 주위의 안정적인 국제 환경을 보장하기 위해 북동아시아에서의 다각적인 안보계획을 점진적으로 전개하는 조치가 동시에 진행돼야만 한다. ◎일본/남한 여유자본 많지 않아/통일후 재건비 준비해야/다오카 순지 아사히신문 아에라지 부편집인 일본이 한반도 통일에 관해 갖고 있는 이미지는 대체로 독일 통일에 대한 것과 비슷하며 일본의 안보 이해관점에서 볼 때 그런 형태의 한반도 통일은 3가지의 긍정적 측면이 있다. 우선 일본이 결코 무관심할 수 없는 이웃국가의 전쟁 가능성이 사라진다는 점이다.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 날 경우 일본의 고도로 조직화된 운송 시스템이 상당한 부담과 혼란을 겪게 되고 한·일 합동전쟁 노력을 방해하기 위한 북한 특공대의 공격을 예상해야 하며 일본으로 이주하는 한국민들의 처리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뿐만 아니라 일본 정부는 일본내 미군에 상당량의 재정적 지원을 제공해왔다는 측면에서 한반도의 평화로운 통일은 두번째 한국전쟁의 가능성을 제거한다는 점에서 일본인들에겐 훨씬 더 반가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통일을 독일과 비교할 때 통일 후 한국이 더 어려운 측면이 많을 것으로 점쳐진다.우선 통일후 남한인 2명이 북한인 1명을 부양해야 할 정도의 인구비율이 큰 문제점으로 작용할 것이며 남북의 극심한 빈부격차도 어려운 과제가 될 것이 뻔하다.이와 함께 가장 심각한 문제랄 수 있는 것은 남한이 북한을 재건립하는데 이용가능한 여분의 자본을 적게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다.이는 통일전 서독이 세계 최대의 차관 대여국이었던데 비해 남한은 현재 1백억달러가 넘는 채무가 있음을 볼 때 심각성을 더해 주며 일본 투자가와 금융가들이 통일 한국이 겪어야만 할 경제적 난관에 대해 가장 우려하게 만드는 부분이다. 만일 한국이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데 실패한다면 수백만의 북한 주민들은 북한의 산업이 남한의 산업과 경쟁할 수 없기 때문에 불평많은 실직자가 될 것이므로 통일직후 북한내에서 신속한 경제발전 프로그램을 시작해야만 할 것이다.또 일본 측에서도 통일후 거대한 양의 원조와 차관을 제공하기는 어려운 형편으로 일본이 얼마나 「과거의 북한」을 돕기 위해 부담을 질 것인가는 두 국가간의 우호적 관계에 달려 있다고 보아야 한다. ◎중국/미 북 핵타결 긍정적 효과/신뢰 쌓아 점진적 교류를/구오시민 인민대 명예교수 중국은 한반도와 가까운 이웃이다.북한과는 국경이 맞닿아 있으며 한국과는 서해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다.양국 국민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한 긴 역사를 갖고 있다.한때는 파시스트와의 전쟁에서 서로를 지원했다. 한국과 중국은 완전한 외교관계를 수립하였고 지난 3년동안 모든 측면에 있어서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다.경제분야에서는 서로 매우 보완적이며 광범위한 협력을 하고 있다.양국 교역량은 지난 92년 50억6천만 달러에서 94년 1백17억2천만 달러로 늘어났다.이제 중국은 한국에 있어 3번째,한국은 중국에게 6번째로 큰 무역 상대국이 되었다.또 한국이 중국에 투자한 액수는 17억 달러,투자종목은 2천개가 넘는다.중국은 한국의 투자를 가장 많이 유치한 국가가 되었다.양국 국민간 교류나,문화·교육·과학·기술 분야의 협력과 교류도 빠르게 늘어 났다. 한반도에서 핵이 사라지고 평화 및 안정을 실현하는 것은 중국의 꾸준한 입장이다.중국은 한반도 국민들과 선린관계 및 우호관계를 오래 갖기를 진심으로 희망한다.중국 인민은 반세기 전의 분단 때문에 한반도 국민들이 겪은 고통을 이해하며 그들의 자체 노력으로 통일이 실현되기를 원한다.중국은 양쪽이 참을성있고 진실한 대화와 조언을 통해 끊임없이 노력하여 현존하는 문제를 해소하기를 바란다.또 양쪽이 과거의 증오심을 버리고 서로 신뢰를 향상시킴으로써 스스로 주도권을 갖고 평화통일 이루기를 희망한다. 북한과 미국이 핵문제에 대한 기초적 합의에 서명한 뒤 한반도 상황은 긍정적 방향으로 발전되고 있다.비록 큰 차이가 몇가지 남아 있긴 하지만 모든 관련 당사자들은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임을 인식하게 되었다.현재 남북 양쪽도 평화통일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으며 주변국들은 한반도에서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고 싶은 공통 희망을 갖고 있다.한반도 상황은 완화된 상태로 유지될 것이며 점진적 통일은 시대의 추세가 될 것이다.
  • 지하철역 폭행 미군/2명 불구속 기소

    서울지검 형사6부 김영철 검사는 9일 서울지하철 충무로역 미군 집단폭행 사건과 관련,프랭크 골리나 병장(31)과 그로프 그랜트 상병(24)을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 혐의로 불구속기소하고 골리나 병장의 부인 소희 골리나씨(24)와 도어 게리 병장(28)은 벌금 1백만원과 1백50만원씩에 약식기소했다.
  • 소의 「북영토 포기」 시나리오(6·25내막 모스크바 새증언:12)

    ◎스탈린,「평양정권 중·소로 완전 철수」 검토/“계속 저항 무의미… 모든 병력·장비 후송” 전문/중군군 참전 결정따라 당일 철수명령 백지화 스탈린이 3번째로 생각한 대안은 보다 충격적인 것이다.바로 김일성정권 자체를 몽땅 철수시키겠다는 아이디어였던 것이다.50년 10월13일 스탈린은 김일성 앞으로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10월13일 스탈린이 김일성 앞으로 보낸 전문) 『저항을 계속하는 게 무의미하다고 생각함.중국동지들은 군사개입을 거부하고 있음.이런 상황에서 귀하는 중국·소련으로 완전철수를 준비해야 함.모든 병력과 군사장비를 모두 가지고 나오는 것이 매우 중요함.이와 관련한 활동계획을 상세히 보고할 것.향후 적과 맞서 싸우기 위한 역량을 유지시켜야함』.슈티코프대사는 이 전문을 같은 날 즉각 김일성·박헌영에게 전달했다.슈티코프는 두사람과의 면담결과를 이렇게 보고했다.(10월14일 슈티코프가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 ○김일성,불만속 동의 『10월 13일 김일성과 박헌영을 만났음.김일성과 박헌영은 이 전문내용을 전해듯고 의외라는 반응이었음.그러나 김일성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정이기는 하지만 스탈린 동지가 그런 충고를 한다면 이를 이행하겠다고 답했음.김일성은 스탈린의 충고를 다시한번 읽어달라고 요청한 뒤 박헌영에게 이를 받아적도록 지시했음.김일성은 이와 관련한 준비작업에 필요한 지원을 해줄 것을 요청했음』 그러나 김일성정권 자체를 북한에서 철수시키겠다는 이 구상은 같은 날 잇따라 전달된 다른 전문에 의해 백지화됐다.바로 중공군의 참전결정을 알리는 긴급전문이었다.김일성에게 정권과 군대를 모두 데리고 북조선에서 철수하라는 전문을 보낸 직후 스탈린은 다음과 같은 긴급전문을 슈티코프앞으로 내려보냈다. 『평양.슈티코프대사앞.김일성에게 전달할 것. 모택동으로부터 중국공산당이 상황을 재검토,조선동지들에게 군사원조를 제공키로 결정했다는 전문을 받았음.중국군의 불충분한 무기사정에도 불구하고 이같이 결정을 내렸다고 함.본인은 모택동으로부터 상세한 정보를 기다리고 있음.중국지도자들의 새 결정에 따라 어제 날짜로 보낸 북조선군을 북조선 북쪽으로 철수시키라는 명령의 전문은 실행을 보류할 것. 1950년 10.13. 핀시(편집자 주:스탈린의 가명)』 중공군참전이 결정된 직후인 11월 2일 김일성은 스탈린 앞으로 다음의 전문을 보냈다.(전문번호 N60 06 03sh 50년 11월 2일.스탈린이 슈티코프에게 보내는 전문) ○군사고문단 잔류요청 『중국동지들과의 합의에 따라 인민군 병력이 향후 전투에 대비 만주영토로 이동배치됐음:9개 보병사단,1개 사관학교,1개 탱크연대,훈련비행연대 1개를 포함한 항공사단.아울러 6개 전투사단이 규모가 상향조정돼 조선영토에서의 전투준비에 임하고 있음.본인은 경애하는 핀시동지(스탈린의 가명)에게 위 병력의 훈련지도를 위해 소련군사고문단을 잔류시켜줄 것을 강력히 요청합니다』 한편 11월 11일 소련국방부 보고에 따르면 당시 인민군 병력현황은 다음과 같다.(쿠드리야초프 중장의 보고.11월 11일.대통령문서소.p.51) ⑴만주지방:제6군(제18·제68·제36 보병사단).사단별 병력 1만명씩.제7군(제13·제32·제37보병사단).사단별 병력 1만명.제8군(제42·제45·제76보병사단).사단별 병력 1만명.사관학교 병력 1만 5천명. ⑵조선지역:제1군(제8·제46·제47 보병사단.제17기계화사단).각 사단병력 1만명.제3군(제1·제3·제15 보병사단,제26보병여단,제105탱크사단,제10사단,제6여단).제5군(제1·제12·제38·제24 보병사단).그외 4개의 독립사단(제2·제4·제5·제7)등 총20여개의 사단. ⑶적의 후방에 잔류병력.제2군(제31보병사단,제27보병여단,그외 독립 해병여단). 종합하면 총병력 25만∼27만명.8개군.25개 보병사단,3개 보병여단,1개 탱크사단,1개 기계화사단,해병여단 1개,독립보병연대,1개 독립탱크연대,사관학교 1개등이다. 한편 4번째 시나리오인 향후전투준비편을 살펴보자. 50년 9월 9일 김일성은 슈티코프 대사를 통해 스탈린 앞으로 다음과 같은 서신을 전달했다.(슈티코프가 김일성의 서신을 첨부해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전문번호 N60 03 82sh). 『미제국주의자들은 이제 조선영토 전역을 점령해 이를 향후 극동침략의 군사교두보로 만들기 위해 어떤 행동도 서슴지 않을 것임.독립·자유·국가주권을 확보하기 위한 우리 인민의 투쟁은 장기화되고 매우 어려워질 것 같음. 미군과 싸우기 위해 우리는 조종사,탱크운전요원,통신전문가,기술장교를 시급히 훈련시켜야 함.이와관련,다음 사항을 요청함. ⑴소련에서 수학중인 북조선학생중 2백∼3백명을 선발해 조종사로 훈련시키는 것을 허락해줄 것. ⑵재소한인중에서 1천명의 탱크운전요원,조종사 2천명,통신요원 5백명,기술장교 5백명을 양성토록 허락해줄 것』 바로 이튿 날인 10월 10일 모스크바주재 주영하 북한대사는 안드레이 그로미코 외무차관을 찾아가 소련에서 유학중인 북조선학생 전원(남학생 6백69명,여학생 69명)을 모두 항공학교로 전학시킬 것을 건의했다.다만 통신전문대학에서 수학중인 학생들은 군사무선학교로 전학시켜달라고 요구했다.(그로미코차관과 주영하와의 대화록.외교문서). ○북,공군1개 연대 창설 한편 10월 20일 그로미코차관은 스탈린에게 보낸 보고서를 통해 주영하 대사를 통해 받은 요청과 슈티코프 대사가 보내온 요청내용이 서로 다르다고 보고했다.(그로미코가스탈린에게 제출한 보고서.N255­GE.50년 10월 20일)즉 주대사는 항공학교와 무선학교 양쪽에 학생들을 보내달라고 한 반면 슈티코프가 전문으로 보낸 요청서에는 항공학교 한곳만 적혀있다는 것이었다.그로미코차관은 주대사가 이 경우 슈티코프 대사의 보고내용을 따르라고 말해 그대로 시행했다고 보고했다. 한편 11월 11일 소련군사고문관 자하로프 장군은 모스크바로 보낸 전문을 통해 11월 1일자로 훈련시킨 29명의 조선조종사들로 공군1개 연대를 창설했다고 보고했다.그리고 11월 1일 이 연대소속 전투기 8대가 완주방면으로 최초출격,B­29기와 무스탕등 2대를 격추시켰다고 보고했다.야크­9기를 타고 출격한 조선조종사들은 귀환하지 못했다고 보고했다.자하로프 장군은 안동지역에 리 파르트장군이 지휘하는 조선인 혼성사단이 창설됐다고 이 보고서에서 밝혔다.(자하로프 장군이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N26 416.50년 11월 11일) 11월 13일 모스크바 주재 주영하 북한대사는 소련국방부의 E 쿠르두노프 국장서리를 찾아가 소련유학중인 조선인 학생들에게무선훈련을 가르치는 문제를 재차 요청했다.주대사는 이밖에도 재소한인들중에서 조종사,탱크운전요원,무선요원을 선발해 교육시키는 문제를 김일성이 이미 요청했음을 상기시켰다.김일성은 이 문제를 서둘러 실행에 옮겨줄 것을 요청했다고 주대사는 전했다.(E 쿠르드노프 국방성국장서리와 주영하 북한대사의 대화록.50년 11월 13일) ○연해주서 조종사 훈련 11월 20일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보낸 전문을 통해 조선인 조종사 훈련계획에 동의하며 다음과 같이 밝혔다.(전문번호 N75 835)『1.조선유학생 2백∼3백명을 선발해 훈련시키는 계획은 만주 양지에 있는 조종사학교에서 시행될 예정임.소련교육관을 파견하겠음.2.폭격기 2개 연대에 배속될 조종사 훈련은 만주주둔 소련군 사단중 한곳에서 실시할 수 있음.훈련은 미그­15를 이용하고 훈련을 마친 뒤 미그­15를 조선조종사들에게 제공하겠음. 폭격기 조종사 훈련은 연해주에 있는 조종학교에서 실시하는 것이 편리함.TU­2 폭격기가 폭격연대에 제공될 것임』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완전철수 위기에까지 몰렸던 김일성정권은 중공군의 참전결정으로 이렇게 다시 반전의 계기를 마련,대반격에 나설 준비를 갖추어갔다. ◎새로 밝혀진 사실/북한군 9개사단 만주이동 첫 공식 확인/재소한인·유학생 군사훈련→참전 드러나 전세가 결정적으로 기울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역시 북한정권의 생존문제였다.이 문제와 관련하여 이번 자료에서는 중요한 사실 한가지가 새로이 밝혀져있다.19 50년10월13일 『저항을 계속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면서 『중국·소련으로 완전 철수를 준비해야 한다』는 스탈린의 전문은 이 시점에서 소련이 북한영토를 완전히 포기하려하였음을 분명하게 증거한다.이 시점은 김일성과 북한정부가 평양을 막 탈출한 직후 시점이었다.전쟁을 일으키도록 동의,지원해 놓고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북한을 버리려 하였던 것이다.이는 스탈린식 이중전술이었다.이 사실은 앞으로 한국전쟁및 소련의 대북한정책 연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해석점을 재공해줄 것이다.물론 이러한 사실 자체는 기존의 연구와 자료에서도 일부는밝혀졌던 것이지만 그것이 자료를 통하여 자세하고도 구체적으로 확인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김일성은 이러한 스탈린의 제의에 대해 못마땅해하였으며,그러면서도 결국은 어쩔 수 없이 동의하였음도 처음으로 밝혀졌다.중국측의 자료에 따르면 김일성은 전세 역전에 직면하여 산악으로 이동하여 빨치산 투쟁을 하려 계획하고 있었다.그러나 스탈린이 『지원불가­철수』를 통고하자 이를 이행하려하였던 것이다.이러한 철수계획이 중국군의 참전결정으로 당일날 변경되었다는 점도 아주 흥미를 끄는 새로운 사실이다. 한편 50년11월 현재 만주와 북한내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북한군의 병력 분포현황도 처음으로 공개되는 사실이다.만주지방으로 대규모의 북한군이 이동하였음을 공식적으로 확인해주는 이 자료는 공산측 자료를 통해서는 최초로 공개되는 흥미있는 내용이 아닐 수 없다.또한 이번 회에는 재소한인을 훈련시켜 참전케한 사실도 새로이 밝혀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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