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로프
    2026-06-23
    검색기록 지우기
  • 수성
    2026-06-23
    검색기록 지우기
  • 타결
    2026-06-23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7,527
  • 「동북아개발 전망과 한국 역할」/가나모리 히사오

    ◎러 자원·중 노동력·한일 기술력 상환 보완/연변의 80만 한인도 경제발전의 활력소 가나모리 히사오(금삼구웅)일본경제연구센터 이사장이 세계경제연구원과 한국국제교류재단의 공동초청으로 1일 롯데호텔에서 「동북아 개발전망과 한국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강연회를 가졌다.「세계경제의 부침」「안정적인 일본경제」등 20여권의 저서를 낸 가나모리 이사장은 UNDP(유엔개발계획)가 주관하는 「두만강 개발」프로젝트에 초창기부터 참여하는등 동북아 개발협력문제에 많이 기여해온 국제적 권위자이다. 동북아경제권에 대한 자금조성과 관련,한국측이 제안한 「동북아개발은행」이 활발히 논의되고 있어 구상단계에서 실행단계로 접어든 느낌이다.미국도 석유,천연가스개발등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호주도 진출채비를 서두르고 있다. 일본도 현재 포화상태인 동남아지역에서 「동북아경제권」쪽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이는 최근들어 동북아지역의 정치적 관계가 개선됨으로써 경제권이 형성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동북아경제권은 동해연안을 중심으로 한 6개국,즉 러시아의 극동지역,중국의 동북지방(흑룡강성·길림성·요령성),몽고,북한,한국,일본등 6개국에 의해 형성되는 경제권을 말한다.이 경제권은 지리상 가까운 이질적 국가들간에 서로 부족한 것을 교환해 발전하자는 자연발생적 성격이 강하다.이들 지역의 경제규모는 5조달러 정도로 EU(유럽연합),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NAFTA(북대서양자유무역협정)등과 대등하거나 우월한 위치에 있다. 일본에서는 특히 동해연안의 지방자치단체가 동북아경제권에 대한 관심이 높다.이는 태평양전쟁 이후 일본의 경제가 태평양연안을 위주로 발전이 이뤄져 상대적으로 낙후된 이치가와,니가타등 동해연안의 지방자치단체들이 경제적 번영을 꾀하기 위해서이다.역사적으로도 동해연안지역은 한국,중국,러시아등 주변 국가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동북아경제권에 참여하는 국가들은 러시아의 천연자원,중국의 노동력,한국과 일본의 기술과 자본력등 강점이 서로 달라 경제적으로 상호보완성이 강하기 때문에 협력이 구체화되면 커다란이익을 얻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동북아경제권 구상이 발표된지 7년이 지남에 따라 그 성과가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그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중국인과 러시아인간의 비자없는 국경무역이다.하바로프스크를 중심으로 과열조짐을 보이자 양국이 제재를 가해 최근들어 주춤한 상태이지만 장기적으로는 크게 확대될 전망이다.이와함께 합작기업의 설립도 사회간접자본의 미비로 인해 많은 어려움이 있기는 하지만 잘 진행되고 있다. 가장 흥미있는 것은 두만강 지역 개발계획으로 이것도 지난 90년에 발족된 이후 착실하게 추진되고 있다.현재 중국의 방천에 항구(두만강변의 항구)를 조성하는 방법,두만강 하구에 홍콩과 유사한 국제도시를 만드는 방안 등이 나오고 있다.이것 역시 인프라의 미비,자금부족,시장경제에 대한 경험부족등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판단하고 대응해 나가야 할 것이다.두만강지역 개발에 대한 UNDP의 추계에 의하면 앞으로 20년간 3백억달러,중국측은 50년간 1천억달러가 필요한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동북아경제권의 형성은 경제 뿐만아니라 문화와 안보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하므로 각국이 적극적으로 협력할 필요가 있다.막대한 경제력을 갖고있는 일본은 동북아경제권 형성을 위해 자금,기술등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야할 것이다. 한편 한국에 대한 기대도 크다.이 지역 두만강 북쪽에 위치한 중국 연변 조선족 자치구에는 80여만명의 조선족이 거주하고 있는데 과거 화교들이 동남아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것처럼,동북아 경제권형성에 조선족들이 적극 참여토록 하는 방법을 모색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 BAM 철도(시베리아 대탐방:33)

    ◎지도에 없던 「극비 철도」… 스탈린이 계획/타이셰트∼콤소몰스크나아무르 총 3,200㎞/일제위협 대비 41년 착공… 84년 전구간 개통 이르쿠츠크에서 북으로 우스치림스크댐까지 거대한 인공호수가 돼있다가 이후부터 실제로 강의 모습으로 흐르기 시작하는 앙가라는 북으로 주경계를 넘어 크라스노야르스크주로 들어가 서쪽으로 가서 에니에시강과 합쳐진 다음 북극해로 들어간다.크라스노야르스크주의 보쿠차느이시가 있는 지점의 앙가라강에는 지금 제4의 댐건설이 한창 진행중이다. 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 이르쿠츠크까지는 시베리아여행중 제일 친절한 승무원을 만나서 비교적 유쾌한 여행을 즐겼다.모스크바교외에 산다는 이 젊은 여승무원은 한번 기차를 타면 2명이 1조가 돼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왕복 15일 밤낮을 쉬지 않고 교대로 일한다고 했다.그 다음 2주일을 쉬고 다시 2주일 동안 기차를 타는 것이다.보통 체력과 인내심이 없이는 지탱하기 힘든 직업임에 틀림없다.왜 많은 승무원들이 하나같이 불친절하고 신경질적이었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기도했다. ○바이칼호 북단을 지나 이르쿠츠크주 초입에 있는 타이쉐트는 20세기 최대의 대공사로 러시아인들이 자랑하는 BAM(바이칼∼아무르철도)철도의 시발점이다.이곳에서 시작된 BAM철도는 동쪽으로 거의 직선거리로 진행해서 바이칼호수 북단 위쪽을 지나 종착역인 하바로프스크주의 콤소몰스크나아무르시까지 이어진다.총길이 3천2백㎞에 달하는 구간이다.이곳에서 지선으로 남쪽의 하바로프스크를 통해 다시 대시베리아횡단철도와 연결되는 것이다. 이 철도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건설계획을 세우기 시작한 것은 30년대 중반 스탈린이었다.가장 큰 이유는 바이칼호수 남단을 우회하는 대시베리아철도가 당시 일본의 점령하에 있던 만주국경과 너무 가까워 안보면에서 문제가 크다는 것이었다.이후 계획을 완성해 착공한 것은 41년이었다.바이칼호 북쪽은 바위·험로가 첩첩한 난공사구간이다.당초 대시베리아철도가 호수남단을 우회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첫번째 구간으로 아무르주의 스코보르디노∼튄다 사이의 공사가 시작됐다.일차적인 목적은 남쪽의 기존 시베리아횡단철도역인 스코보로딘을 통해 치타주로부터 공사장비·인력 등을 실어나르기 위해서였다. 이 구간은 2차대전 발발 직전인 41년 완성됐으나 이후 전쟁으로 모든 작업이 중단됐다.모든 물자·인원을 모두 서쪽 전선으로 보냈기 때문이다.종전 직전인 45년 공사가 재개돼 콤소몰스크나아무르에서 태평양연안의 군항인 소베츠카야 가반항까지 구간이 착공됐다.블라디보스토크가 일본군에 의해 점령될 경우에 대비해 태평양함대를 이곳으로 옮길 준비를 갖추기 위해서였다. ○태평양함대 이동 목적 그 다음부터 본격적인 구간공사가 시작됐다.46년이전에 타이쉐트∼브라츠크구간은 완공돼있었다.브라츠크의 목재·메탈·철 등을 서쪽으로 실어나르기 위해서였다.따라서 BAM공사의 실제 시발점은 브라츠크인 셈이다.46년부터 이후 51년까지 브라츠크에서 동쪽으로 계속 공사가 진행됐다.브라츠크에서 강항인 우스트구트까지 구간이 완공됨으로써 BAM철도는 레나강과 연결되게 됐다.레나강을 통해 실어온 주변의 목재들은 우스트구트에서 철도로 실어 러시아 각지로 운반해 나갔다. 이후 브레즈네프시절인 77년 콤소몰스크나아무르에서 튄다까지 구간이 완공돼 BAM의 동쪽구간이 완성됐다.당시 중소관계가 악화돼자 중국국경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안전철도 건설의 필요성이 높아졌다고 판단,공사에 박차를 가한 때문이다.BAM은 일명 「젊은 영웅들의 철도」라고 불린다.기차에서 만난 튜멘주의 건설노동자같이 젊은 콤소몰 청년들이 대거 건설현장으로 동원됐기 때문이다. 지난 84년 처음으로 동서 전구간이 연결돼 기차가 운행했다.그러나 토넬느이에 있는 터널 1곳은 아직 미완성인 채 우회로를 통해 기차가 다니고 있다.현재 미완성 구간은 토넬느이∼탁시모간 15㎞이다. 스탈린시절 BAM철도 건설은 1급비밀로 속해 지도상에 나타나지 않았다.물론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수용소 죄수들이 동원됐다.이 철도가 지도상에 처음 나타난 것은 55년이었다고 한다.브라츠크발전소 건설을 발표하면서 이곳에 철로가 있으며 이 철로를 이용해 발전소를 건설했다고 밝혔다는 것이다. ○복선·전철화작업 진행 현재 BAM은 전구간 복선·전철화 작업이 진행중이다.그러나 아직은 경제적으로 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철도란 건설 뒤 10∼15년 지난 뒤부터 철도주변에 개발효과가 가시화되는 게 보통이기 때문에 조만간 이 지역에도 경제개발붐이 일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이르쿠츠크는 바이칼 덕분에 일찍이 외국인에 개방된 곳이다.바이칼의 외국인 관광객 유치는 이미 1930년대부터 시작됐다.따라서 우리가 묵은 인투리스트호텔은 입구에서부터 서구화된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새벽에 체크인하는데도 교대근무자들이 친절히 맞아주었고 엘리베이터는 금성사제품,객실 세면대에는 한국산 비누·치약·샴푸 등이 깨끗이 준비돼 있는 등 여행중 최고로 쾌적한 인상을 주었다.객실의 냉장고도 다른 지방의 호텔에서 같이 「탱크 굴러가는 듯한」요란한 소음을 내는 러시아제 대신 말끔한 한국산 냉장고가 갖추어져 있다.우리나라 관광객들도 많이 들르는듯 한식당·일식당도 있고 호텔 로비 곳곳에 한국어 안내판이 나붙어 있다. 현재 인구 60만명의 이르쿠츠크시는 1661년남쪽의 몽골·중국으로부터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한 요새로 출발했다. 이후 1686년 군사요새로서의 제한된 역할을 마감하고 정식도시로 재출발했으며 1698년 중국과의 교역이 시작되면서 이르쿠츠크는 매우 중요한 교역중심지로 부상했다.도시가 커지면서 17 64년에는 당시 이르쿠츠크 구베르니(주)의 수도가 됐고 총독의 집무처가 들어섰다.그래서 이곳에는 「벨르이 돔(백악관)」으로 불리는 순백의 당시 아름다운 총독관저가 지어져 지금 빼놓을 수없는 관광명소가 돼있다.가가린프로스펙트에 있는 이 건물은 현재 이르쿠츠크 시립도서관이 입주해 있는데 유명한 이탈리아 건축가 크바렝키가 설계한 작품이다.
  • 새차 안전테스트/충돌시험으로 “마무리”

    ◎인체 흡사 마네킹 태워 시속 56㎞로 “꽝”/1백회 반복… 시뮬레이션 기법 이용도 소비자들이 자동차를 선택하는 데 있어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안전성이다.신차가 나오기까지는 여러 단계를 거치지만,이 가운데서도 충돌테스트는 가장 어려운 과정이다.신차에 대한 최종적인 안전도 테스트이기 때문이다. 각 자동차 업체는 주행 중에 발생할 수 있는 자동차 충돌사고에 대한 안전성능을 평가하기 위한 충돌시험 시설을 갖추고 국내는 물론 안전도 규제가 까다로운 북미·유럽·일본 등의 기준에 충족하는 지를 철저히 시험한다. 충돌테스트는 어떻게 이뤄질까.정면충돌시험,차량이 엎어질 때 탑승한 승객 안전을 확인하는 동적 전복시험,차량 뒷면이 상대차량과 충돌할 경우 승객의 안전과 연료누설을 확인하는 후방 충돌시험,에어백이 제대로 작용하는지를 체크하는 시험 등 매우 다양하다. 충돌시험을 위해서는 약 2주의 준비기간이 필요하다.먼저 충돌 구동장비를 비롯해 이동벽,경사벽,동적·정적 전복시험장치,데이터 계측장비,고속촬영 장치 등 각종 장비를 점검한다. 장비점검이 끝나면 테스트에 들어간다.실제로 자동차의 충돌시험을 위해서는 구동모터에 설치된 와이어로프에 시험차량을 연결하여 시험하고자 하는 속도까지 주행로에서 가속시킨 다음 고정벽 앞에서 연결장치를 풀리게 해 고정벽에 차량을 충돌하게 한다. 이 때 차량의 속도는 보통 시속 30마일(48㎞)에서 35마일(56㎞).이 경우 고정벽에 부딪치는 것이므로 차량과 승객이 받는 충격의 정도는 실제 도로상에서는 그 두배인 시속 1백㎞로 다른 차량과 충돌했을 때와 맞먹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차량 충돌시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보통 마네킹과 인형으로 알려진 더미(Dummy).더미는 사람과 같은 모습으로,5백여개의 부품으로 돼 있다.크기와 구조,표면재질(피부) 등이 인체와 비슷하다.보통 더미 2개를 운전석과 그 옆자리에 놓고,안전 테스트를 한다. 성인용 더미는 1억2천만원,아동용은 6천만원이다.이처름 가격이 바싼 것은 더미의 머리·가슴·허벅지 등 각 부위마다 고감도 센서가 장착돼 충돌할 때 승객이 당할 피해를 측정할수 있도록 설계됐기 때문이다.충돌시 1만컷까지 촬영할 수 있는 고성능 카메라가 충돌장면을 체크한다. 최근에는 임신한 더미도 사용해,충돌 테스트를 하는 등 인체구조와 유사한 더미를 만드려는 노력이 계속 이뤄지고 있다.더미는 대부분이 미국 제품이다. 신차가 나오려면 보통 1백여 차례의 충돌 테스트를 거쳐야 한다.테스트 용으로 이용되는 차는 자동차 생산라인에서 대량 생산되는 차가 아닌 시작차.수작업을 해야 하고,몇대 생산되지도 않는 차이므로 대당 가격은 1억원을 넘는다.더미도 테스트를 하다보면,손상되므로 충돌테스트에만 약 1백50억원 정도가 들어간다. 요즘 충돌테스트의 특징은 컴퓨터를 통한 시뮬레이션을 활용하는 점이다.기아자동차가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지난 91년 미국의 크레이사로부터 슈퍼컴퓨터를 도입,세피아에 대한 차량 충돌 테스트에 이용했다.시작차로 충돌 테스트를 할 때보다 정밀하고 완벽한 데이터를 얻을 수 있고 비용도 훨씬 절감된다는 게 기아측의 설명이다. 지난 달 18일 쌍용자동차의 송탄공장.김석준 그룹회장,손명원 자동차 사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신차인 이스타나의 최종 충돌테스트가 이뤄졌다.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의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이스타나가 시속 50㎞로 벽면을 향해 돌진했다.유리창의 파손도 별로 없었고,차체 앞의 찌그러진 정도도 심하지 않아 참관자들은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다른 회사의 경우도 신차가 나오기 전에 이런 「행사」를 갖는다.산고를 거쳐야 신차가 탄생할 수 있는 것이다.
  • 중 “핵실험 두번 더 실시”/일본에 통고

    ◎새달 올 3번째 실험 가능성 【도쿄=강석진 특파원】 중국은 포괄적 핵실험금지조약(CTBT)이 체결될 때까지 앞으로 핵실험을 두 번 더 실시한다는 방침을 일본 정부에 통고해 왔다고 도쿄(동경)신문이 25일 보도했다. 도쿄신문은 정부 소식통을 인용,중국의 핵실험 목적은 군사기술 향상에 있으며 올 가을에 금년들어 세번째 핵실험을 실시할 예정이며 종전과 같이 신강 위구르 자치구의 로프누르(나포박)에서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시기적으로 올들어 세번째 핵실험은 9월하순에서 10월초가 될 가능성이 크다. 중국측은 남은 또 한차례의 핵실험은 CTBT가 체결되기 전인 내년중에 실시할 것이라고 신문은 설명했다.
  • PC 신제품 판매경쟁/IBM 곧 발매… 인텔도 CPU 선봬

    ◎윈도우 95 해적판 유럽·아주서 팔려 미 마이크로소프트사가 새 PC운용체제인 윈도우 95의 본격시판에 나섬으로써 전세계적인 PC및 관련제품 판매전쟁이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다. 전문가들은 윈도우95의 출현을 계기로 마이크로소프트와 인텔,그리고 IBM·모토롤라·애플 등 3사 제휴세력이 전세계의 PC및 관련제품 판매시장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게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인텔은 오는 11월 P6으로 명명된 신세대 CPU를 발매할 계획인데 전세계 중앙처리장치(CPU)시장의 80%를 점유하고 있으며 마이크로소프트는 PC운용체제 시장에서 비슷한 시장점유율을 확보하고 있다. 한편 IBM­모토롤라­애플 제휴세력은 올 여름중 최첨단 파워 PC마이크로프로세서를 내장한 신세대 컴퓨터를 선보인다. 업계는 「윈도우 95」의 판매량이 올 연말까지 2천만개를 돌파하고 몇년안에 1억개에 이를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윈도우 95는 몇달전부터 유럽과 아시아컴퓨터시장에서 시험용 해적판이 팔리고 있는 것으로 23일 알려졌다. 해적판방지단체인 비지네스 소프트웨어얼라이언스의 로빈 버튼 유럽 대변인은 런던에서 『우리는 시험용 복사판 수천개가 나돌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최근 말한 바 있다.
  • 평양행 열차(시베리아 대탐방:32)

    ◎매주 한차례… 객차 1∼2량 연결/블라디보스토크 가기전 우수리스크서 분리/승무원은 북한 보안요원… 철저한 감시속 운행 평양행 열차 시베리아에는 스탈린시절 도처에 강제수용소가 산재해 있었다.그리고 강제수용소 죄수들이 노동자 대신 극지에서 위험한 건설작업을 했다.「굴락」이라고 부르는 이 강제수용소는 흐루시초프가 집권한 뒤 56년 이를 폐지키로 함으로써 90%이상이 문을 닫았다.지금 수용소자리는 늪지로 변해 자취를 감춘 곳이 태반이다.하지만 야말반도·튜멘북부 등지에 있는 옛 수용소자리에서는 지금도 간간이 사람의 유골들이 발견된다고 했다. 튜멘북부에서 온 이 노동자는 자기 일터에서 조금만 더 가면 낚시·사냥을 즐길 수 있고 아직도 「춤」이라고 부르는 이동천막에서 사는 야말 넨츠족·한티 민시족의 사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며 꼭 한번 자기집에 오라고 청했다.여름에는 모기가 너무 많고 10월이면 추워지니 9월이 제일 좋다고 꼭 한번 오라는 것이었다. ○북극행 철길 다시 건설 이 건설노동자는 요즈음 노브이 우렌고이에서 끝난 철길을 북극 가까이에 위치한 노릴스크시까지 연장건설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철길 바디는 스탈린시절 수용소 죄수를 동원해 이미 만들었고 이후 스탈린 사후 중단됐다가 최근 다시 공사가 재개됐다고 한다.그러면서 그는 우스갯소리로 그곳에서는 지금은 낮에만 일하고 겨울에는 밤에만 일한다고 말했다.북극 가까운 곳이라 여름철에는 심한 백야현상으로 밤이 거의 없고 겨울철에는 반대로 낮이 거의 없기 때문이라는 뜻이었다.8살난 자기 딸은 집을 떠난 뒤 줄곧 『밤에 어두워 잠을 못자겠다』고 불평한다고 했다. 이르쿠츠크주로 들어서면서부터 스탈린시대 수용소자리가 많이 나타난다.물론 가장 악명높은 강제수용소는 동북쪽의 야쿠츠·마가단 등지에 있지만 이르쿠츠크부터 수용소가 도처에 건설됐다.이르쿠츠크시 진입직전에 만나는 앙가르스크시도 스탈린시절 수용소 죄수가 건설한 대표적인 도시중 하나다.인구 27만명에 이르는 비교적 큰 도시로 51년 대규모의 유화 콤비나트가 세워졌다.앙가르스크 직전 역은 우솔리예 시비르스코예(소금저장소)라는 재미있는 이름을 갖고 있다.한때 아시아 각지로 소금을 수출하던 러시아 최대 소금산지던 곳이다.아울러 러시아전역에 공급되는 「바이칼」이란 이름의 성냥 생산지로 유명하다.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가는 특급 「러시아2호」열차는 격일로 매 홀수날 출발한다.그런데 부정기적이지만 1주일에 한번씩은 이 열차에 평양행 객차가 1∼2량씩 붙는다.취재팀은 중간도시에 계속 내렸다 다시 타는 일을 되풀이했기 때문에 언제가 한번은 이 평양행 「쿠페」를 만나게 돼 있었다.평양행은 하바로프스크에서 블라디보스토크 중간의 교차역인 우수리스크에서 곧바로 남으로 빠져 하산을 거쳐 두만강철교를 넘는 것이다. ○하산거쳐 두만강 넘어 모스크바를 출발한 지 꼭 10일째 되는 날 상오10시45분 기차가 이르쿠츠크주의 일란스카야역에 도착했을 때 처음으로 북한승객을 만났다.20분을 정차하기 때문에 플랫폼에 내려가 바람을 쐬다가 삼삼오오 모여 담배를 피우며 잡담을 나누는 동포를 만난 것이다.기차 제일 뒤쪽에 붙은 객차였는데 「모스크바∼평양행」이라고 행선지표지가 붙어 있었다.몇 사람과 수인사를 한 뒤 기차가 출발하면서 자연스레 그들이 탄 객실로 가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평양으로 가는 객실은 우선 러시아승무원이 아니라 군복을 입은 북한승무원이 배치돼 있는 게 특이하다.1주일이상을 여행하기 때문에 승무원 6명이 2인1조로 교대근무한다고 한다.승객수는 정원 80명인 객실이 꽉 들어찬 것 같았다.모두 4인1실로 된 방이었다. 책임승무원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박영철이라는 사람은 보안요원인 듯 유난히 「꽉 막힌」사람이었다.별로 유쾌하지 않은 이날의 대화내용중 그가 한 말을 몇 대목만 소개한다.그는 대뜸 김일성 사후 조문건과 평양축전을 가지고 남한정부 욕을 잔뜩 늘어놓았다. 『김영삼 그 사람,정말 그럴 수가 있어.세계지도자가 모두 다 애도를 표하는데 같은 동포끼리 그럴 수가 있어』 『그리고 기자선생.평양축전에는 안오면서 와 쓸데없이 이런데 돌아다니고 있어.평양축전때 말이야 남조선기자는 한명도 안왔더만.그런데 좀 와서 취재보도하면 얼마나 좋아.다 왔는데남조선기자만 안왔어』 가만 놔두면 이런 식으로 끝이 없을 것같아 『그런 말 하기 시작하면 피차 피곤하니 평양동포 사는 이야기나 들려달라』며 말을 막았다. ○북요원,승객면담 차단 그랬더니 더 가관이다.『그말 잘했어.당신 의식주란 말 알디.우리 그거 걱정 안하고 살아.그러면 되는 거 아냐.남조선은 언제 그럴 수 있갔어』 한번더 말을 바꾸어보려고 나이가 얼마냐고 물었더니 50살이라고 했다.그래서 나이보다 젊어 보인다고 해주었더니 반응이 걸작이다.『당연하디.김정일장군 영도하에 그저 아무 걱정 없이 잘사니 젊을 수밖에』… 내내 이런 식이었다.『통일이 멀지 않았으니 기자 똑바로 하라』는 등 「훈계」도 잔뜩 늘어놓았다. 그들과 헤어지고 나온 뒤 한동안 우울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다음 정차역부터 평양행 승객은 휴식시간에 한명도 객차에서 내리지를 않았다. 현지시간 하오9시경 모스크바로부터 4천6백77㎞라는 푯말이 붙은 지점에 니즈니우딘스크역이 지나갔다.「우다강 하류」라는 뜻의 마을이다.플랫폼의 키오스크에는 한국산 과자류,중국산 장난감·일용품이 잔뜩 진열돼 있다.현지시간 상오5시37분 마침내 이르쿠츠크역에 도착했다.도착직전 앙가라강 철교를 지났고 역에 내리면 바로 맞은편에 앙가라강이 마치 호수처럼 잔잔히 펼쳐져 있다. 수백개의 강이 바이칼로 흘러드는데 오직 이 앙가라강만이 바이칼에서 흘러나가는 것으로 유명하다.앙가라는 총길이 1천7백79㎞로 바이칼에서 발원해 북으로 예니세이강으로 연결되며 이 지역의 산업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강이다.3개의 큰 댐이 건설돼 있기 때문이다. 이중 제일 크고 중요한 것은 61년 건설된 브라츠크댐이고 그 다음 규모는 이르쿠츠크시내에 있다.그리고 세번째가 주북단의 우스치림스크댐.그래서 주북단의 우스치림스크에서 주하단에 위치한 이르쿠츠크시내까지 앙가라강은 사실상 주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거대한 댐이다.
  • 러시아주지사 접견

    김영삼 대통령은 22일 상오 청와대에서 러시아의 빅토르 이사예프 하바로프스크 주지사의 예방을 받고 우리나라와 러시아 극동지역간 협력증진방안에 관해 의견을 교환했다. 이사예프 주지사는 경상현 정보통신부장관의 초청으로 16일부터 23일까지 우리나라를 방문중이다.
  • BAM철도 시발지/타이셰트(시베리아 대탐방:31)

    ◎마을 간격 수백㎞… 끝없는 삼림지대로/쿠즈바스탄전 연결 철도,지난 65년 건설/9월초까지 휴가시즌… 가족 여행객 많아 시베리아 여행중 관광지마다 졸업여행을 온 단체학생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중학교만 졸업하면 여학생의 경우는 곧바로 결혼적령기(16∼18세)가 되고 남자는 어엿한 사회인이 되니 졸업여행이다 사은회다 해서 요란하게 기념식을 갖는 것이다. 모스크바를 떠난지 꼭 열흘째 되는 날 현지시간으로 상오10시10분 크라스노야르스크역을 떠났다.모스크바에서 출발한 특급 「러시아2호」를 다시 탔다.다음 행선지는 세계최대의 담수호를 만날 이르쿠츠크.시베리아여행중 최고의 경관을 구경할 구간을 지나게 된다.이르쿠츠크주로 진입하면서 모스크바와의 시차는 5시간으로 늘어나 마침내 한국과 같은 시간대가 됐다.모스크바와 한국과의 시차는 원래 6시간이지만 러시아전역에서 3월말부터 9월말까지 서머타임을 실시하기 때문에 시차가 지금은 5시간이다. ○차창밖은 초봄 풍경 크라스노야르스크 역을 벗어나며 차창으로 펼쳐지는 풍경은 본격적인 타이가지대이다.크라스노야르스크 이전에 나타난 타이가는 숲이 아주 촘촘했다.반면 이제는 아주 성긴 숲이 계속되고 있다.베료자는 아직 잎을 달지 못해 헐벗은 겨울나무 풍경이다.체료무하도 꽃을 달지 못했고 타이가 침엽수 「리스트니차」는 이제 갓 연푸른 잎을 내밀기 시작했다.크라스노야르스크 시내를 벗어나며 차창밖으로는 갓 초봄의 정경이 펼쳐지고 있다.숲의 밀도가 떨어진 타이가 곳곳에 산불흔적이 보이고 철로변 양지쪽의 잔디밭에는 점심휴식시간인듯 철도노동자들이 삼삼오오 모여앉아 초봄의 따스한 햇살을 즐기고 있다.동시베리아로 접어들며 느끼는 여행의 또다른 맛은 곧은 철길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기차는 구릉과 산허리를 이리저리 휘감으며 나아가 전혀 지루함을 느낄 수 없다.서시베리아에서는 그저 막막한 숲,대지만 보며 길이 일직선으로만 나있었다. 차창밖 타이가지대에는 사람의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시베리아 인구의 80%는 중소,대도시에 모여있다.그래서 철로변에도 인가를 보기가 점점 더 힘들어진다.타이가지대로 들어가면 작은 마을들이 같혹 있지만 마을간 간격이 보통 수백㎞씩 된다.대시베리아철도가 완공되기 전인 18 90년 시베리아횡단여행을 했던 작가 안톤 체호프는 여행기에서 『타이가의 위력과 신비는 그것의 무서운 침묵이 아니라 그 끝을 알고 있는 생명체가 철새들 뿐 이라는 사실에 있다』고 썼다. 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 탄 열차는 객실 한칸에 양옆 2층으로 된 4명이 타는 침대차였다.2명씩 타는 최고급보다는 한결 서민적이고 값도 싸다.그런 탓인지 양옆으로 러시아인 이웃들이 많이 탔다.대부분 휴가를 받아 다른 도시의 부모친척을 만나러 가는 가족단위 여행객들이었다.러시아에서 휴가철은 보통 5월말부터 시작해 9월초까지 이어진다.직장마다 차이는 있지만 1개월∼2개월씩의 휴가가 주어진다. ○최고 2개월간 휴가 출발 30분만에 남부 아바칸에서 BAM철도의 출발점인 타이셰트로 연결되는 지선과 만나는 우야르역을 지났다.우야르에서 타이셰트까지는 두 선로가 1백㎞거리를 두고 거의 평행되게 달려가 타이셰트에서 합쳐진다.남쪽의 이 아바칸­타이셰트선은 시베리아철도가 붐비면서 지난 19 65년 건설됐는데 서쪽으로 쿠즈바스탄전과 연결되는 매우 중요한 산업철도다.아바칸에서 서쪽으로 사이아나산맥을 넘어 쿠즈바스까지의 구간은 많은 터널을 지나며 주변 경관이 빼어난 것으로 특히 유명하다. 아바칸을 지나고 얼마 안 있으면 칸스크역이 나타난다.「칸강변의 마을」이라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인구 10만명 내외의 작은 마을이지만 16 28년 요새로 건설돼 매우 오래된 마을로 유명하다.처음에는 변경수비를 맡은 에니세이 코작이 살았으나 17 17년부터 모스크바∼이르쿠츠크를 연결하는 시베리아 트랙(길)이 통과하면서 급작히 발달했다.「스파스카야」「페트로파블로프스카야」등 유서깊은 교회건물들이 많은데다 섬유·양초·비누 생산지로 꽤 이름높은 곳이다.아울러 이글스트롬·모자렙스키·살라비요프·발렌베르크등 이름난 데카브리스트들이 이르쿠츠크 유형길에 머문 것으로도 유명해진 마을이다. ○바이칼호 부근 도착 이튿날 상오8시30분 마침내 「자(뒷쪽)오제르느이(호수)」지역에 진입했다.드디어 바이칼호수와 연관된 이름이 나타난 것이다.낮12시40분에 클루치역을 지났다.모스크바로부터의 거리는 44 67㎞를 가리켰다.클루치는 「열쇠」라는 뜻으로 크라스노야르스크주가 끝나는 마지막역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마침내 여행을 시작한 뒤 13번째 주인 이르쿠츠크주로 들어섰다.비류사강을 지나며 곧바로 타이쉐트역을 지났고 이어서 기차는 다시 방향을 틀어 이르쿠츠크까지 한동안 남진을 계속한다.차창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도 훨씬 따뜻해졌다. 옆칸에는 북극해에 연한 튜멘주 영토내 야말­네네츠키 자치구에서 일하는 노동자 일가족이 타고있었다.부부가 8살난 딸아이를 데리고 있었는데 휴가를 맞아 하바로프스크에 사는 노부모를 찾아가는 길이라고 했다.47살이라는 이 건장한 노동자는 북부 혹한지대에 사는 노동자들의 애환과 생활을 재미있게 들려주었다.사진을 찍자고 하니까 기다리라고 한 뒤 문을 걸어잠그고는 무려 30분 이상 전가족이 옷치장을 하고난 뒤에야 사진촬영에 응하는 순박한 사람들이었다. 그는 지난 77년 콤소몰(청소년동맹)로부터 튜멘북부 건설현장에 참여하라는 요청을 받고 그곳에 간 뒤 도로·철도·공항건설·유전·가스개발등에 참여했는데 점점 더 북쪽으로 올라가 지금은 거의 북극해 바로 밑인 노브이 우렌고이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당시 오지 건설공사장 참여자들은 「까라차예바」라고 불렀는데 모두들 건설영웅 대접을 해주어 우쭐한 기분으로 일했다고 했다.지금도 「시베리아 나트바브카」라고 부르는 오지 특별수당 덕분에 타지역에 비해 월급이 2백50%나 된다.그러나 그동안 힘들게 벌어 저축한 돈이『최근 몇년 사이의 인플레로 제로가 됐다』고 그는 한탄했다. 그곳은 지금도 겨울이면 영하 50도를 밑도는 날이 많다고 했다.반면 한여름에는 영상 40도나 되는 무더위에 모기가 들끓어 일하기가 보통 힘드는 게 아니라고 했다.겨울에는 자고 나면 눈치우는 게 제일 큰 일이고 공기중 증기가 얼어붙어 불과 2∼3m앞도 내다볼 수 없는 날이 많다고 한다. 이런 오지에 살면서도 전가족이 구김살 없이 활달하고 친절한 심성을 지키고 있는 게 퍽 인상적이었다.발랴라는이름의 어린딸은 학교에서 배운 푸슈킨의 시를 졸졸 외워보였다.
  • 서울신문 주최 「해외 독립운동 유적지 순례」 단장 박성수

    ◎“항일투쟁 현장서 조국 소중함 실감”/독립선언문 낭독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인상적 서울신문과 스포츠서울, LG전자는 광복50주년을 맞아 지난 2∼12일 독립운동 유공자 후손인 대학생 20명과 함께 애국선열들의 숨결이 배있는 중국과 러시아의 해외독립운동 유적지를 순례하는 행사를 가졌다. 순례단의 단장이었던 박성수 한국정신문화연구원교수의 답사기를 싣는다. 광복 50주년을 맞아 독립유공자 후손20명이 중국과 러시아의 독립운동 유적지를 돌아본 것은 다른 어느 행사보다도 뜻있는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지난날의 전승국이요 열강이었던 중·소 두나라가 체제선택의 잘못으로 인하여 반세기도 못가서 빈민대국이 되거나 거의 황폐화되다시피 조락해버린 현실을 직접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게 된 것은 여간 큰 성과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상해의 임정청사와 홍구공원 연변의 청산리·봉오동 전투현장,그리고 하얼빈의 안중근의거 현장 등 책에서만 보던 항일투쟁의 생생한 자리를 보고 학생들은 다시는 나라가 망해서는 안되겠다는 교훈을 가슴에 새겼다. 중국을 거쳐 러시아 땅을 밟았을 때 학생들은 엄청난 주검의 도시들을 목격하고 놀랐다.우리가 처음 도착한 하바로프스크 공항에는 날지 못하고 버려진 러시아제 여객기 10여대가 눈에 띄었고 우수리스크로 가는 유명한 시베리아 전도열차는 6·25때 피란열차를 연상케 하는 빈민들의 고철 객차였다. 위도 48선에 자리한 하바로프스크는 왕년의 발해 12부의 하나로서 알고 보니 옛날 우리 땅이었다.영하 40도까지 내려간다는 한대까지 우리 조상들이 북상하였다고 생각하니 새삼 우리들 후손이 낯뜨거웠다. 시베리아 철도는 우수리강을 따라 남하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 닿게 되는데 우수리강의 어원이 오수리요 한강 상류의 소양강이 바로 우수리강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드물다.지금도 우수리강에 살던 예맥의 후예가 춘천시 우수촌에 살고 있다.그러고 보니 시베리아는 우리들에게 낯선 땅이 아니었다. 그러나 차창 밖에 펼쳐지는 끝없는 시베리아 벌판이 잡초로 우거져 있으니 이 땅을 차지한 러시아인들의 대욕과 태만을 질타하지 않을 수 없었다.하다못해 콩이나 옥수수라도 심어 놓는다면 가축에라도 먹일 양식이 생길텐데 그들은 지금 보드카에 취해 있을 뿐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우리를 가장 놀라게 한 도시는 극동의 홍콩 블라디보스토크였다.19세기말 우리의 조상들이 가서 피와 땀으로 건설한 금강만 항구에는 녹슨 군함과 상선들이 빽빽히 들어차 있는데 움직일줄을 모른다.기름도 없고 갈곳도 없는 배들의 행렬위에 어둠이 깔리면 전등불 하나 없는 암흑의 항구가 된다. 블라디보스토크 중심가에 자리한 개척리(개탁리)거리와 쫓겨난 달동네 신한촌에는 그 옛날 우리 고려인들이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던 건물 하나가 외롭게 남아 있다.1937년 냉혈한 스탈린의 명령으로 강제수용 화차에 실려 머나먼 타슈켄트까지 추방되던 비극의 정거장 블라디보스토크 역사도 지금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학생들에게는 온통 빈민굴로 화한 이 도시의 낡은 건물과 잡초로 우거진 거리가 역사의 교훈으로 더 인상 깊었던 것이다.무엇을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를 다시 생각게 하는도시 블라디보스토크를 마지막으로 우리는 서울을 향해 날아 가는 정든 우리 여객기에 몸을 실었다.
  • 크라스노야르스크(시베리아 대탐방:30)

    ◎절경의 스탈브이 자연공원… 기암 40개/일군 포로가 지은 스탈린식 건물 곳곳에/19세기 화가 「수리코프」는 이 고장의 자랑/예니세이강 유역에 목재 콤비나트 줄이어 목재산지 예니세이강의 도심 선착장 대합실은 49년 당시 소련에 억류돼있던 일본군 전쟁포로들을 동원해 지었다는 전형적인 스탈린식 건물이다.시베리아 전역에서 전쟁포로들을 동원해 지은 건물들을 많이 볼수 있었다.치타·연해주 등 동시베리아쪽에서는 일본군 포로들이 동원됐고 서부지역에서는 독일군 포로들이 동원됐다. 일제때 학병으로 끌려간 우리나라 사람들중에도 소련군포로가 돼 러시아땅에서 강제노역을 당한 사람들이 많다.김영삼대통령의 단골 러시아어 통역인 유학구씨도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포로로 잡혀 하바로프스크에서 무려 4년여 강제노역을 했던 사람이다.그는 그곳에서 좌익활동을 해 전후 일본으로의 송환을 거부하고 소련시민이 됐다.이후 그는 소련의 연구소에서 한반도관계 일을 맡다가 한소수교 뒤 다시 한국국적을 취득해 지금 서울에서 살고 있다. ○유학구씨도강제 노역 그와는 달리 학술원회원인 동완 선생은 하바로프스크에서 유학구씨와 함께 포로생활을 했으나 일본으로 되돌아간 경우다.그는 어릴 때 부친을 따라 만주에서 성장하며 배운 유창한 러시아어 때문에 관동군 통역장교로 참전했다고 한다. 귀국 후 그는 오랫동안 한국외국어대 러시아어학과에서 후학을 가르쳤다.이 두 사람의 인생유전도 우리 근대사의 한 비극을 압축해 보여준다. 크라스노야르스크 동쪽의 이르쿠츠크는 시베리아 유형자들의 종착지였다.그래서 유형자들의 수도라고 불린다.따라서 그 직전 도시인 크라스노야르스크는 유형자들의 마지막 중간 기착지였던 셈이다.그리고 많은 유형자들은 이곳에서 유형생활을 마감하기도 했다.「파크로프스크(첫눈)」라는 이름의 18세기 사원을 지나면 시립 공동묘지가 있는데 데카브리스트(12월당원)들을 비롯,유형자들의 묘지가 대거 눈에 띈다.「파크로프스크」라는 이름은 첫눈 내리는 10월1일에 착공됐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보통 10월1일 첫눈이 내리면 이듬해 4월까지 겨울이 계속되고 1월 평균기온이 지금도 영하18∼20도로 내려간다.지난 겨울에는 예전같은 혹한은 줄어들었지만 대신 폭설이 많이 내렸다고 한다. 크라스노야르스크의 가장 자랑거리는 뭐니뭐니해도 자연공원 「스탈브이」봉이다.수력발전소로 가는 길 중간에 있는 약 40개의 기암 봉우리로 이루어진 자연공원이다.우리의 설악산에 비할바는 못되지만 산이 귀한 시베리아인들은 이 스탈브이를 한번 가보는 게 평생 꿈이라고 할 정도로 유명한 산이다.산세도 산세지만 사회주의 나라들의 공원은 역시 사람의 발길이 뜸해 오염되지 않은 게 제일 장점인 것같다.무료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공원입구 매표소 여직원은 엽서·안내책자 등을 종류대로 다 사고 싶다는 말에 신이 나서 먼지가 뽀얗게 쌓인 서랍을 이리저리 뒤졌다.이곳의 안내책자들은 사진기술은 괜찮은데 하나같이 종이질과 컬러 인쇄술이 조잡한 게 흠이다.얼음같이 찬 계곡물에 잠시 발을 담그니 쌓인 여행의 피로가 말끔히 씻겨지는 기분이다. ○유형자들 중간 기착지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특히 「클레시」라고 부르는 해충을 조심해야한다.작은 벌 모양으로 생겼는데 한번 물리면 뇌·신경조직에 치명적인 해를 가한다고 한다.공원 입구는 물론,크라스노야르스크 시내 곳곳에 클레시를 조심하라는 경고판이 나붙어 있다.스탈브이를 내려오면 예니세이강을 끼고 시내 초입까지 내내 목재 콤비나트가 줄줄이 들어 서 있다.뗏목으로 이동해온 목재들을 이곳에서 가공해 시베리아철도를 이용해 각 도시로 공급하는 것이다. 이곳 사람들의 문화적 자랑거리로는 19세기에 활동했던 이곳 출신 화가 수리코프를 빼놓을 수 없다.시내 한복판에 있는 전형적인 동시베리아 목재집을 박물관으로 꾸며 그가 쓰던 가구와 그림들을 전시해 놓았다.시베리아의 자연풍경과 여인·가족,특히 자연속의 사람을 즐겨 그린 수리코프에 대한 이곳 사람들의 자긍심은 대단하다. 크라스노야르스크가 우리에게 비교적 낯설지 않게 들리는 이유중 하나는 지난 88년9월 고르바초프가 이곳에서「크라스노야르스크 선언」이라는 새 아시아 군사외교노선을 천명한 때문이기도 하다.아시아에 탈냉전의 바람을 불어놓는 선언이라며당시 우리 언론들도 대서특필 했었다.고르비가 당시 이 선언을 발표했던 주당위원회 건물은 지금 주정부·주의회가 입주해 있고 정작 거리의 시민들은 이 선언에 관해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다.하기야 고르비마저도 거의 잊혀진 인물이 됐으니. ○고르비 “탈냉전” 천명한 곳 시베리아에서 5월말은 졸업시즌이다.크라스노야르스크의 중심가인 칼 마르크스거리의 불러바르(도보)에는 졸업을 앞둔 여중생들이 들뜬 기분에 10여명씩 무리를 지어다니는 모습이 눈에 띈다.11학년제이니까 15∼16살쯤 되는 나이들이어서 화장도 짙게 하고 모두 숙성한 모습들이다.우리를 보더니 『우리는 졸업한다』『사진을 찍어달라』는 등 명랑하게 재잘거리며 지나간다. 러시아는 지금 학제도 큰 변혁기에 있다.지금까지는 국민학교 5년에 중학교는 6년,합쳐서 11년제였다.우리와 달리 국민학교·중학교가 따로 있는 게 아니고 같은 학교에 있으며 제도만 분리돼 있을 뿐이다.국민학교는 담임교사가 학급을 책임지고 모든 과목을 다 가르치는데 중학교로 가면 과목별 교사가 따로 있다.가장 큰 차이는 국민학교에는 시험이라는 게 전혀 없다가 중학교로 가면 과목별로 시험이 생겨난다는 점이다. 요즈음은 이 공립학교 대신 김나지움이나 리세라는 엘리트학교가 많이 생겨나고 있다.일명 「뉴(new)러시안」이라 불리는 신흥 부자들의 자녀들이 다니는 곳이다.시설도 좋고 교육의 질이 매우 좋지만 월학비가 5백∼1천달러에 이르니 일반국민들에게는 그림의 떡일 뿐이다.이들 학교학생들과 일반 공립학생간의 위화감이 사회문제로 언론에 종종 등장하기도 한다. 중학교를 졸업하면 취직을 하거나 아니면 대학으로 진학한다.요즈음은 너도나도 취직하는 게 유행이다.대학은 우리같이 학부 4년,대학원 2년이 기본이다.그러나 의대의 경우는 예과 2년,인턴 2년을 합쳐 모두 7년제이고 공대 6년,법대 5년등 다양하다.이를 모두 미국·유럽학제로 일원화하는 문제가 요즘 큰 논란거리다.
  • 전기의 도시 크라스노야르스크(시베리아 대탐방:29)

    ◎에니세이강 2개수전… 1억2천만㎾ 발전/풍부한 전력 바탕 알루미늄 콤비나트 형성 크라스노야르스크주(주)로 접어들면서 드디어 동시베리아가 시작된다.이 주경계는 밤중에 지나갔다.동시베리아로 들어서며 느껴지는 가장 큰 변화는 지리적인 변화이다.크게 높지는 않지만 마침내 바위도 있고 얕은 계곡도 있는 산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크라스노야르스크는 오블라스치(주)보다 더 큰 행정구역인 크라이(대주)이다.크라이는 우선 영토도 크지만 통상 그안에 의무적으로 민족공화국,민족 자치구(오크루그)등이 몇개씩 포함돼 있다는 점에서 오블라스치와는 구분이 된다.크라스노야르스크 크라이에도 하카시아 공화국,북부의 에벵키 자치구,타이미르스키 자치구를 포함하고 있다. 현재 러시아전역에는 알타이,크라스노다르,크라스노야르스크,프리모르스키(연해주),하바로프스크등 모두 6개의 크라이가 있다. 러시아의 행정구역은 이외에도 21개의 공화국,49개의 오블라스치,1개의 자치 오블라스치(아르항겔스주),10개의 자치구,1천8백56개의 라이온,그리고특별시격으로 모스크바,상트페테르부르크등 2개의 연방도시가 있다.이렇듯 행정구역이 보통 복잡한게 아니라 전문가라도 쉽게 설명하기가 힘들게 돼있다. ○주민고작 2만7천명 혁명 전에는 전국이 일률적으로 「구베르니」라는 행정단위로 구분돼 있었는데 레닌이 이렇게 복잡하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그래서 최근에는 이 행정구역을 다시 단순화하자는 논의가 일고 있다.그러나 워낙 큰 땅덩어리라 행정구역 개편 자체가 쉽게 손댈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자칫 잘못 손대다간 또다른 엄청난 혼란과 논란을 몰고올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크라스노야르스크주의 첫역은 보고톨.1893년 철도역으로 시작된 주민수 2만7천명의 작은 마을이다.아친스크시가 있는 주 서부지역에서부터 칸스크시가 있는 동부지역까지는 유명한 노천 갈탄산지이다.철로변 주변이 모두 갈탄 산지인 것이다.크라스노야르스크주는 장강 예니세이강에 건설돼 있는 국내 제1,제2의 수력발전소 2곳에서 전력을 생산해내 시베리아 각 도시로 공급한다.서쪽으로 쿠즈바스탄전과 노보시비르스크시로,그리고 동쪽으로는 이르쿠츠크등 양방향으로 전기를 공급하는 것이다. 모스크바 시간으로 상오 1시에 크라스노야르스크역에 도착했다.동시베리아에 접어들며 모스크바와의 시차는 4시간으로 늘어나 현지시간은 상오 5시를 가리켰다.새벽공기를 마시며 호텔을 찾아가는 길에 강폭이 한강의 1.5배는 됨직한 예니세이강 위로 일출이 시작되고 있었다.시베리아여행을 시작한지 처음으로 도시 뒤로 제대로 모습을 갖춘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는 것을 보았다.산중턱에 다차와 마을이 길게 늘어선 모습이 독특하다.강의 범람에 대비하고 임업이 주업임을 알려주는 마을배치였다. ○작은 요새가 도시 변모 크라스노야르스크는「아름다운 계곡」이란 뜻의 이름이다.이름과 같이 원래 예니세이강변의 계곡 위에 작은 요새로 시작된 도시이다.러시아의 정복자들은 마을을 정복하면 주변에 이 마을을 지키기 위한 작은 요새를 짓고,그리고 그 요새를 거점으로 주변 원주민들로부터 「애삭」이라 부르는 주민세를 거둬들였다.시베리아에서 이 주민세는 주로 담비,밍크등 모피였다. 1823년 예니세이스크 구베르니(주)가 창설되고 그 주도가 북쪽의 예니세이스크시에서 이곳으로 옮겨오며 크라스노야르스크는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다.시베리아철도의 건설은 수운의 중심지던 에니세이스크시의 중요성을 떨어뜨리며 철도역인 이 크라스노야르스크의 역할을 크게 부각시켰다.1899년에는 도시를 관통하는 예니세이강 다리가 건설됐다. 크라스노야르스크의 역사는 예니세이강과 함께 한다.이 강을 막아 러시아 최대의 수력발전소를 건설했고,이 강을 따라 목재를 날라 국내 최대의 목재 산지가 됐다.예니세이는 본류만 따져서 3천4백87㎞에 이르는 장강인데 지류까지 합하면 4천1백1㎞에 달한다.몽골국경 부근의 아사야나산에서 발원,시베리아를 종단해 북극해로 흘러들어간다.강상류에 건설된 아사야나 슈센스코에 발전소는 러시아 최대의 수력발전소이다.이곳과 크라스노야르스크 발전소를 합치면 발전용량이 1억2천만외㎾에 달한다. 따라서 크라스노야르스크는 시베리아 전기의 수도인 셈이다.이렇게 풍부한 전력 때문에 이곳에는 러시아 최대의 알루미늄 콤비나트(생산단지)가 조성돼있기도 하다.알루미늄은 특히 전기가 많이 소모되는 공업이기 때문이다. ○레닌,1년간 유형생활 크라스노야르스크 역시 시베리아철도가 건설되며 흥한 대표적 도시이다.원래 이곳은 1628년 러시아정복자들이 남쪽 유목민들의 침략을 막기 위해 건설한 작은 요새로 출발했다.방어의 주목적지는 북부 예니세이강에 건설될 예니세이스크시였다.당시 동시베리아의 교역중심로는 예니세이스크시를 중심으로 예니세이강과 앙가라강을 거쳐 모스크바로 연결됐다.이곳에서 베어낸 목재는 뗏목을 만들어 강하류 어느 곳으로든 운반해간다.러시아에서 소비되는 종이는 아르항겔스,볼로그다에서 그 절반을 생산하고 나머지 절반은 크라스노야르스크지역에서 생산된다. 시내에서 서쪽으로 35㎞ 지점에 위치한 크라스노야르스크 수력발전소는 1967년 공사를 시작해 80년 중반에 완공됐다.이 발전소가 완공된 뒤에는 장비·인력이 곧바로 슈센스코에 발전소건설에 투입 됐다.발전소 조금 못미처 당시 노동자들의 노고를 기리는 기념조형물이 건설돼 있는데 하단에 당시 공사장 흙을 실어나르는 데 동원된 트롤리트럭이 8백42대,운전사가 1천1백20명이라고 적혀있다. 시내 강변 선착장에는 레닌이 1898년 이곳에서 유형생활을 떠날 때 탄 증기선 「CB(성) 니콜라이」호가 박물관으로 개조돼 전시돼 있다.레닌은 아내 크룹스카야와 함께 이 배로 예니세이강 상류를 4백㎞ 거슬러 올라가 슈센스코에에서 1년 유형생활을 했다.당시 유형자들은 중죄인을 제외하고는 주거제한만 받았지 가족과 함께 가서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을 했다.물론 중죄인은 가족을 데려갈수 없음은 물론이고 감옥생활을 하며 카타르가라고 부르는 둥근 쇳덩어리를 손발에 차고 중노동까지 했다.증기선 박물관은 금년 여름 재개관을 목표로 현재 내부수리가 한창이었다.
  • 현대 추상화 창시 칸딘스키 연작전

    ◎미 LA 시립미술관서 새달 3일까지 열려/1910∼1939년 콤포지션 변화 한눈에/습작·부분화·스케치 등 밑그림도 전시 현대 추상회화의 창시자 바실리 칸딘스키(1866 ∼ 1944)가 생전에 남긴 「구성(콤퍼지션)」 연작을 한데 모은 전시회 「칸딘스키­콤퍼지션」이 미국 LA 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지난달 초 개막,9월 3일까지 계속되는 이 전시회는 최초의 추상적 수채화로 일컬어지는 「무제」가 발표된 1910년부터 세상을 떠나기 5년전인 1939년까지 그린 「콤퍼지션」 10점 가운데 남아있는 7점(3점은 2차대전중 소실)과 콤퍼지션 제작을 위한 드로잉,스케치 등을 처음으로 총집결해 보여준다. 칸딘스키에 관해서라면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82년과 83년,85년 3차례에 걸쳐 열린 전시회를 통해 미국의 미술 애호가들에게 이미 보여 줄 것은 다 보여 준 것으로 여겨졌었다.그러나 이번 전시회는 뮌헨시절,파리시절,러시아와 바우하우스 시절로 나누었던 앞서의 전시회들과는 색다른 예술적체험을 미술애호가들에게 선사한다. 뉴욕 현대미술관의 회화부문 부수석 큐레이터인 막달레나 다브로프스키가 기획한 이번 전시회는 30년이라는 세월을 거치면서 변화하는 「콤퍼지션」 시리즈를 통해 기하학적 추상의 발전단계를 보여준다.또 많은 습작과 부분화,스케치는 그의 작품이 즉흥적인 붓질과 색의 나열이 아니라 주도면밀한 형태에 대한 분석과 준비작업,그리고 수정에 수정을 거듭한 결과임을 확인시켜 준다. 초기 작품인 콤퍼지션 Ⅳ∼Ⅵ은 바그너의 오페라와 독일의 아름다운 전래동화,코사크 지방의 영웅담,옛 러시아의 민요 등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1차대전이 시작돼 러시아로 돌아가기 전인 1913년 제작된 콤퍼지션 Ⅶ은 이전의 작품보다 도상들이 더욱 복잡해 지고 있으나 구조적으로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연구에 연구,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며 30점에 가까운 드로잉과 습작을 거친 결과다. 독일로 돌아와 바우하우스에서 교편을 잡던 시기에 그려진 콤퍼지션 Ⅷ(1923년작)에서는 기하학적 형태와 여백의 사용등이 두드러진다. 그는 전쟁과 혁명 등을 거친 후 마지막 체류지인 파리 근교에 머물면서 36년과 39년 콤퍼지션 Ⅸ와 Ⅹ를 완성했다.특히 완결편이라고 할 수 있는 콤퍼지션 Ⅹ(뒤셀도르프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예술관 소장)은 바탕을 검은 색으로 처리한 점이 독특하다.그에게 있어 검은 색은 다른 모든 색을 끌어안는 강렬한 에너지를 지닌 모태와 같아 새로운 탄생을 의미하는 색이었다. 미술에 대한 기존의 관념을 깨고 새로운 예술을 창조하고 다듬어 가는 한 위대한 예술가의 생애가 담긴 긴 서사시와 같은 전시회였다.
  • 미 교포 선교사 살해/북한인 의문의 석방/러 경찰

    【모스크바 연합】 지난 4월 하바로프스크에서 피살된 재미교포 추현이 선교사부부 살해범으로 체포됐던 북한벌목공이 최근 별다른 이유없이 석방돼 현지 북한대표부에 인계됐다고 러시아의 일간 「시보드냐」지가 10일 보도했다. 시보드냐지는 이날 하바로프스크발 기사를 통해 사건직후 현지 경찰에 체포돼범행을 자백했던 북한 벌목공이 『법정 수사기간이 끝났으며 자백외에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 때문에 석방됐다』고 밝혔다.
  • 쿠즈바스 탄전/주인구 2백만… 절반이 광부(시베리아 대탐방:28)

    ◎석탄생산 연 1억2천만t,러 최대 산지/「광부파업」은 연례 행사… 생산량 감소 상오10시(현지시간은 하오1시) 크라스노야르스크로 가기 위해 노보시비르스크역을 출발했다.크라스노야르스크주부터는 동시베리아가 시작된다.월요일 이어서인지 아니면 1주일 전부터 기차요금이 1백50%로 인상된 영향 탓인지 침대칸에는 취재팀 외에 다른 승객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옆의 일반칸으로 가보니 그곳엔 빈자리가 없는 것으로 미루어 아마도 인상된 요금이 큰 부담을 준 게 틀림 없는 듯하다. 3시간여를 달려 열차는 서시베리아의 마지막 주인 케메로프스크주로 진입해 첫번째 역인 유르가에 도착했다.케메로프스크주는 러시아의 최대 석탄산지이다.주인구 2백만명중 절반이 광부이고 연간 생산량이 1억2천만t에 달하는 러시아 최대 석탄산지다.케메로프스크는 행정구역상의 이름이고 경제적으로는 「쿠즈네초프 바신」,줄여서 「쿠즈바스」탄전이라고 부르는 곳이다.소연방 해체 전까지는 우크라이나의 돈바스가 1천명의 광부를 거느린 최대 석탄산지였으나 우크라이나가 떨어져나간 뒤 러시아산업에 있어 이 쿠즈바스의 중요성은 한층 더 높아졌다. ○석탄산업 중요성 실감 유르가역은 톰강에 위치한 석탄교역로의 도시다.케메로보시,노보 쿠즈네츠크시 등 남부 쿠즈바스탄전에 위치한 모든 유명한 광산들이 모두 이 톰강을 끼고 있다.북부의 톰스크는 톰강에서 따온 이름이다.유르가역은 톰강이 교차하는 외에 시베리아 순환철도가 톰스크∼쿠즈바스탄전을 잇는 산업철도와 만나는 지리적 요건 때문에 존재하는 순수 철도역이다.쿠즈바스 탄전에서 캐낸 석탄들은 일부는 이 유르가역을 거쳐 노보시비르스크 등으로 수송되고 나머지 일부는 남부 탄전쪽에서 서쪽으로 직접 연결되는 산업철도를 이용해 곧바로 노보시비르스크로 운반된다. 주경계를 넘기 전 노보시비르스크시 경계를 벗어나는 지점까지는 시외곽과 도심을 연결하는 순환철도가 교외의 절반이상을 감싸고 있었다.다차에 다녀오는 시민들이 역마다 모여서 교외선을 기다리는 모습이 인상적이다.모두들 크고작은 보퉁이를 잔뜩 들고 있다.나무 묘목을 들고 있는 사람들도 보인다. 노보시비르스크 시민들에게 이 교외순환선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바로 동쪽에 접한 케메로프스크주에 있는 러시아최대의 석탄산지 쿠즈바스탄전 때문이다.이곳에서 생산된 석탄의 수송열차들과 알타이공화국등 주변 동서시베리아의 산업지대에서 드나드는 화물열차들 때문에 기존의 시베리아철도는 거의 포화상태가 돼있어 시민들이 이용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그래서 시외곽 반경 1백여㎞를 따라 이 반원형 순환선이 건설된 것이다. 주경계를 넘고 유르가역을 지나 톰강을 건너기 직전,푯말에 쓰인 모스크바로부터의 거리는 3천4백49㎞를 가리키고있다.케메로프스크주는 19 43년까지는 노보시비르스크주의 일부였다.그러다 2차대전중 이곳의 전시 석탄수송체계를 보다 원활히 하기 위해 행정구역을 분리시킨 것이다.케메로보를 행정수도로 삼아 남부 탄전에서 캐낸 석탄을 신속히 서쪽의 노보시비르스크등으로 실어나르기 위해서였다.지금도 이 케메로프주의 행정수도는 케메로보이다.그러나 실질적인 산업수도는 남쪽의 노보쿠즈네츠크다.주민수도 그쪽이 더 많다. 노보쿠즈네츠크는 주산업이 석탄채광이지만 대규모의 메탈 콤비나트가 들어서 있는 곳이기도 하다.1차로 메탈 콤비나트가 건설된 것은 스탈린시절이었다.당시 노보쿠즈네츠크의 이름은 스탈린스크시였다.스탈린은 이곳에 「우랄스크­쿠즈네츠크」메탈 콤비나트를 건설해 우랄로 연결시켰다.그뒤 2차대전 종전 후 2차로 메탈 콤비나트가 추가로 건설됐다.따라서 현재 시베리아의 메탈수도는 바로 이 노보쿠즈네츠크다. ○2차대전때 행정 분리 그외 케메로보시와 동쪽의 메주두레친스크시(톰강과 우사강 등 두 강을 낀 도시라는 뜻)에도 메탈 콤비나트가 건설돼 있다.따라서 쿠즈바스지대는 석탄중심지일 뿐 아니라 메탈,화학,낙농,임업 등의 주산지로 러시아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산업지대인 셈이다. 유르가 다음 역은 타이가역이다.실제로 타이가지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곳이다.이곳을 지나면 곧바로 왼쪽 차창으로 타이가의 남단 경계가 펼쳐진다.타이가는 이곳에서 북으로 2천㎞나 계속 이어진다.오른쪽 차창으로는 멀리 곳곳에 탄전과산더미 같이 쌓아놓은 석탄더미들이 지나간다.기차는 쿠즈바스탄전의 북부지대를 관통해 지나간다. 모스크바시간으로 하오1시에 도착한 유르가역에는 남부의 노보쿠즈네츠크에서 출발한 석탄화물차가 정차해 있는 것이 보였다.역시 화차수가 1백개는 됨직하다.유르가역은 북부 톰스크와 남부의 석탄산지를 잇는 남북 철도가 시베리아철도와 만나는 교차역이어서 항상 이렇게 대기하는 석탄차들이 있고 역의 규모도 마을 규모에 비해서는 엄청나게 크다. ○엄청난 역 규모에 놀라 지금은 기능이 크게 떨어졌지만 1900년부터 혁명전까지 쿠즈바스탄전 전체 석탄생산량의 98%를 차지했던 곳이다.남쪽의 노보쿠즈네츠크지대가 본격개발되면서 지금은 탄광기능을 거의 잃고 열차역 구실만 하는 정도가 됐지만 한때 중부의 케메로보,남부의 노보쿠즈네츠크와 함께 쿠즈바스탄전의 중추를 이루었던 곳이다. 이렇듯 중요한 탄전지대이지만 쿠즈바스는 러시아의 만성 광부파업으로 유명하기도 하다.채탄기계와 기자재의 부족,광부들의 누적된 임금체불,거기다 개선되지 않는관료들의 병폐,세금제도 등이 겹쳐 80년대 이후 줄곧 생산량 감소를 겪고 있기도 하다. 옛날 타타르인들의 이름이 분명한 「야야」라는 이름의 작은 강이 지난다.폭 30m의 야야강 맑은 물에 낚시를 드리운 마을 남자들의 모습이 한가롭다.체료무하꽃이 마을어귀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고 맞은편 철로위로 1백개는 됨직한 화차에 석탄이 가득 실려 지나간다.이어서 칭기즈칸의 러시아 침략사를 쓴 작가로 유명한 치빌리헨의 출생지인 마린스크역이 지나간다.주민 4만2천명에 불과한 소도시이나 16 98년에 건설돼 시베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로 꼽힌다.케메로보주의 마지막 큰 역이다.
  • 스릴 속의 낙하 번지점프/15일 대전서 첫선

    ◎엑스포 과학공원에 높이 21m 점프대 설치/1회 1만8천원…에어백 깔아 안정성 높여 아파트 8층정도의 높이에서 떨어지며 아찔한 공포감을 맛보는 스릴 만점의 이색레포츠「번지점프」를 국내서도 즐길 수 있게 됐다. 레저이벤트업체 점보클럽은 미국 스포츠 타워사가 제작한 번지점프대를 도입,대전 엑스포과학공원내에 「번지점프장」을 설치해 오는 15일 첫 선을 보인다. 이 점프대는 T자형으로 비교적 안정감을 주는 높이인 21m의 점프대로 2명이 동시에 점프할 수 있다.점프대의 재질이 대부분 철골로 이뤄졌고 로프는 특수 고무로 제작됐다. 또 이 점프대는 양허리에 거는 고리와 앉은 자세 점프장치 뿐만아니라 낙하지점에 설치된 높이 3m·가로 7m·세로 8m의 거대한 에어백 등 안정성에 최대 역점을 두고 제작됐다. 현재 미국·캐나다·일본 등 40여곳에 설치돼 47만5천여회를 점프했지만 단 한 건의 사고도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외국의 경우 바다나 강물위로 낙하하는 번지점프를 볼 수 있으나 우리나라는 적절한 장소가 없어 지상용 점프대가 도입했다. 번지점프를 하기 위해서는 우선 몸무게를 잰다.몸무게가 36∼1백9㎏사이의 사람만이 이용할 수 있다.체중에 따라 분홍 파랑 초록 오렌지 등 4가지 색상으로 구분된 스티커를 받은 뒤 스티커 색상과 일치하는 「하네스」(암벽등반때 허리에 착용하는 안전벨트)를 몸에 묶고 대기한다. 운영요원의 『셋 둘 하나 번지』라는 구령에 따라 점프해 18m정도를 자연낙하하다 로프의 탄력으로 상승과 하강을 2∼4차례 반복한뒤 멈춘다.짧은 시간에 극도의 공포감과 짜릿한 스릴을 만끽하는 것이다. 번지점프는 칡의 일종인 번지로 만든 기다란 끈을 한쪽 발목에 매고 다른 한쪽은 나무나 다리난간 등에 묶은 채 아무런 예방조치없이 뛰어내리는 오세아니아일대 원주민들의 성년식 등 담력시험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80년대들어 뉴질랜드·프랑스·미국 등지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한 뒤 최근에는 1백m이상의 고공 점프로 확산되고 있다. 점보클럽은 번지점프 도입을 기념,15∼20일까지를 「제1회 점보 번지점프축제」기간으로 정하고 다채로운 이벤트행사를 곁들인다. 점보클럽은 번지점프의 안전성을 1백%로 보장하지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이용료에 보험료를 포함시켰으며 1회 점프의 요금은 1만8천원이다.
  • 남해안/기름 흡착포 곳곳에 쌓여/폭우땐 2차 오염 우려

    ◎피해 어민들 “보상 증거물” 회수 거부 【여천=남기창 기자】 씨 프린스호에서 유출된 기름을 걷어낸 흡착포와 수거한 기름이 남해안 피해지역의 선착장 곳곳에 쌓여 큰 비가 내릴 경우 바다로 휩쓸리는 2차 해양 오염이 우려된다. 전남 여천군 남면과 돌산읍,화정면 등 피해 지역의 선착장마다 어민들과 군경이 기름 제거에 사용한 흡착포와 수거한 기름을 담은 비닐부대 수백t이 쌓여있다.어민들이 기름제거에 투입된 어선의 용선비와 인건비 청구및 수산피해 보상의 증거물 확보를 위해 폐기물 처리 회사가 가져가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사고 10일째인 1일 추가 피해 신고가 없는 가운데 민·관·군 3천여명과 방제선 등 선박 80여척이 동원돼 사고 해안과 경남 거제 등 오염 확산 해역에서 방제 작업을 계속해 50여t의 기름을 수거했다. 여천군은 이 날 오염 해안은 길이 4만6천9백23m,면적 21.8㏊이며 남면과 돌산읍,화정면 등 3개면 39개 마을 1백54곳이라고 밝혔다. 전남도와 수산청 여수수협 등 14개 기관으로 구성된 피해조사 협의회는 조사의신뢰성을 높이기 위해 여수수산대 최규정 교수 등 3명을 조사반에 참여시켰다. 한편 사고선박 인양작업 중인 고요마루호는 와이어로프로 씨 프린스호를 단단히 묶는 작업을 마치고 이 날부터 빈 원유탱크 등에 공기와 물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 1953년 3월5일(모스크바 새 증언:28)

    ◎“스탈린 사망”… 소 「휴전협상 조기타결」 급선회/크렘린 새 지도부,북한·중국에 “입장 변경” 급전/모 “더 싸울수 있다” 몇차례 이견 표명후 곧 동의 전선현황을 일일이 보고받아 전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더 잘알면서도 스탈린은 무슨 연유에서인지 무슨 신념같이 휴전협상에서 이같은 강경입장을 절대 바꾸지 않으려 했다.그러나 이에 아랑곳하지 않는듯 북한은 스탈린이 라주바예프대사 앞으로 훈령을 보낸 바로 그날,51년 11월 19일,박헌영이 라디오방송을 통해 이같은 제의를 발표할 예정이었다.화가 머리끝까지 난 스탈린은 이튿날 정치국 이름으로 다시 한번 평양주재 라주바예프대사 앞으로 전문을 띄워 엄청난 질책을 퍼부었다.(51년 11월20일.N334/93) 『우리는 조선동지들이 조속한 휴전성사를 위해 유엔에 청원하겠다는 건과 관련,대사가 취한 태도를 용납할수 없음.대사는 조선이 유엔에 청원할 의사가 있음을 11월 18일에서야 보고했음.귀하는 북한의 이러한 청원이 우리의 공식입장에 위배되지 않는지 문의했음. 그러나 귀하는11일,18일자로 귀하가 보낸 전문에 대한 답을 듣기도 전에 바로 같은날(11월 19일) 박헌영이 라디오방송을 통해 그 청원내용을 발표할 예정이라고 보고했음.도대체 누가 그것을 작성했는지 캐내 보고하라는 거듭된 훈령을 묵살하고 대사는 그것이 라디오로 방송될 예정이라는 사실만 보고했음. 따라서 조선동지들은 이같은 유해한 청원을 우리의 승인없이 내놓았음.…중략…귀하는 매우 경솔히 행동했고 조선동지들이 이 청원을 중국과 사전협의했는지 조사해 보고하라는 훈령도 묵살했기 때문에 귀하의 죄는 더 가중됐음. 모든 비판을 받아들여 후일의 교훈으로 삼을 것』 ○주북대사에 질책 전문 이런 식의 논란이 그뒤 1년간 계속된 것이다.그런 소동이 벌어진 지 1년 뒤인 52년 12월 17일 모택동은 마침내 스탈린의 생각을 바꾸기 힘들다고 판단한듯 휴전협상이 지연되니 장기전에 대비해야한다며 소련의 추가무기원조를 요청했다.(전문번호N26499) 『휴전협상이 지연되고 또한 미국은 군사행동을 중단할 정도로 전력손실이 크지 않으니 최소한 1년정도는 전투가 치열해질 것에 대비해야함.아이젠하워는 취임과 동시에 작전을 개시할 의도로 전투준비를 하고 있음.적은 우리 방어망이 견고한 전방을 공격하기보다는 후방에서 상륙작전을 펼칠 가능성이 높음. 적의 상륙작전은 내년 봄,빠르면 2월에 감행될수 있음.가장 큰 과제는 이 상륙작전을 어떻게 하면 성공적으로 막을 것인가 하는 것임.지난해 8월 적의 대공세를 막아낸 이후 전황은 다소 안정적임.이 기간 동안 아군은 전방 방어선과 해안방어망을 강화했음. 아군은 전술적 공격을 감행해 58개 적의 진지를 뺏았고 9월­10월중 우리가 집계한 적의 피해는 미군 4만명을 포함,사상자수가 11만명에 달함.10월중순 적은 2개 사단을 동원해 아군 진지 2곳을 공격했으나 이를 격퇴했음. 이같은 진지쟁탈전이 계속됨에 따라 포탄소모량이 크게 늘었음.최근 3개월간 아군은 총2백40만발의 포탄을 썼음.하지만 현재 포 보유대수는 적이 1만4천문인데 비해 우리는 1만3천문임.그리고 적은 대부분 중포 및 탱크포인데 비해 우리는 경포가 주류임.또다른 문제는 현재 아군은 소련제 포 2천문을 보유하고 있는데 소련제 포탄을 비롯,포탄이 크게 부족하다는 것임.만약 적이 우리의 실정을 알아채고 조기공세를 감행할 경우 우리는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할 것임.소련제 포탄 추가공급이 최우선 과제임』 모택동은 이 전문에서 또한 앞으로 중국은 새로 의용군을 모집해 이듬해 25만명을 한국전에 추가투입하겠다고 밝혔다.모는 또 북한에 철도,도로건설등 각종 시설을 무상으로 건설해주고 식량을 비롯,모두 미화 6천만달러에 상당하는 각종 물품을 3년동안 매년 북한에 공급키로 했다고 밝혔다.그외 전쟁고아도 대거 중국으로 데려가겠다고 모는 호언했다.이렇게 잔뜩 장황설을 늘어놓은 뒤 모는 『그렇지만 이 일들을 수행하는데 어려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며 본론인 소련의 도움을 거듭 요청했다. ○“미 대공세없다” 반박 모가 가장 시급하게 요청한 품목은 포탄이었다.스탈린은 이 요청에 대해 12월27일 다음과 같이 답전을 보냈다.스탈린은 기본적으로 미국이 대공세를 취할 것이라는 모택동의 지적에 이의를 달았다.아울러 그가요청한 추가 무기지원에 대해서도 난색을 표했다.다음은 이 답전의 주요내용. 『미국이 1953년 봄 공세를 취할 것이라는 동지의 분석은 현 트루만정권의 계획을 기초로 한 것임.하지만 아이젠하워가 취임하면 한국전에서의 긴장을 훨씬 완화하는 쪽으로 전략이 바뀔 가능성이 매우 높음.물론 최악의 경우에 대비해 미국의 상륙작전을 가정하는 것은 좋은 생각임. 동지가 요청한 53년도분 추가 무기지원내역은 우리의 능력한도를 넘는 양임.53년도에 20개 사단용 이상의 무기,탄약은 공급하기 곤란함.다시말해 동지가 요청한 양의 4분의 1밖에 공급할 수없음』 그러나 모택동은 끈질기게 추가원조를 요청했다.이듬해인 53년 1월12일에는 모의 요청에 따라 소련군사고문단의 바실리예프스키장군과 소콜로프스키장군 이름으로 추가무기요청 전문이 스탈린 앞으로 전달됐다.(대통령문서소.전문번호N738343)이 전문에서 중국은 53년 1월부터 4월 사이에 6백24문의 각종 포와 탄약 2백35만5천발을 시급히 요청했다. 이 전문에서 모는 이전에 약속한 20개 사단용 무기공급을 53년3월부터 시작해 매월 2개사단분씩 보내줄 것을 부탁했다.모는 이와함께 무기공급의 구체적인 스케줄까지 다음과같이 적어보냈다. 기간 탄약 포 1월 20만발 166 2월 20만발 166 3월 18만발 132 4월 18만발 132 5­12월 8만발 132 (매월) 휴전협상을 둘러싼 중·소간의 강온 의견대립은 53년 3월5일 스탈린의 사망과 함께 사정이 급변했다.크렘린의 새지도부는 한국전쟁의 조속히 끝내기로 입장을 굳혔다.중국·북한도 곧바로 이같은 크렘린의 새 결정에 동의했다.물론 모택동은 한두차례 자기는 좀더 싸울수 있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지만 순순히 전쟁조기 종결에 동의했다. ○소각료들은 결의문 채택 53년 3월19일 소련당국은 스탈린 사망에 따른 긴급각료회의를 소집하고 한국전에 관한 정부입장을 변경시키기로 하고 이같은 결정을 중·조 양국정부에 통보했다.다음은 당시 소련각료회의의 결의문.(N858­372cc) 『소련정부는 현재의 전쟁 상황과 최근의 사태발전을 면밀히 검토했음.그 결과 소련정부는현재의 정책을 지속하는 게 옳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했음.정책방향을 현정치정세에 맞게,그리고 소련,중국,조선 인민들의 이익에 부합되게 바꾸어야함.우리 인민들은 전세계에 평화가 강화되기를 원하며 한국전의 조기종결을 위해 항상 노력해왔음』 스탈린이 그렇게 맹목적으로 추구해왔던 전쟁계속 노선이 하루아침에 돌변하고 우리 민족의 최대비극이 마침내 마감되는 순간이기도 했다.이 결의안은 「영·미 블록의 침략적인 제국주의정책」을 비난한 뒤 다음과같이 계속됐다. 『우리는 중·조 국민들의 기본적인 이익과 여타 평화애호 국민들의 이해를 고려해 이 전쟁을 끝내야한다.우리는 다음 사항의 조속실현을 주장함. 1.김일성과 팽덕회는 클라크장군이 2월27일자로 제시한 환자·부상포로의 교환에 관한 제의에 긍정적인 회신을 보낼 것. 2.김일성과 팽덕회의 답신이 발표된 직후 중국당국의 대표(가장 적임자는 주은래임)가 북경에서 역시 긍정적인 성명을 발표할 것.이 성명에서는 환자 및 부상포로교환을 포함,포로문제 전반을 긍정적으로 해결할 것과 한국전쟁의 종결 및 휴전협정을 체결할 시기가 됐다는 점을 지적할 것. 3.북경 당국자의 성명에 때맞춰 평양에서는 북조선 대표 김일성이 위 중국대표의 성명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정치연설을 할 것. 4.우리 역시 북경과 평양에서의 당국자 성명이 발표된 직후 소련외무장관 연설을 통해 이 두 성명을 전적으로 지지할 것을 고려중임. 5.위에 언급한 4가지 조치에 발맞춰 유엔주재 소련대표는 이러한 새로운 정치적 조치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임』. ◎“전쟁 계속하되 무기지원 감축”/모스크바­북경 종전까지 갈등 스탈린과 한국전쟁의 관계는 어떠한 것이었는가? 우리는 그동안 공개된 자료를 통해 전쟁의 기원과 결정에서는 이미 그의 역할을 알고 있었다.그러나 전쟁의 전개과정에서의 역할은 이번에 공개되는 자료가 최초로 그의 역할을 상세하게 알려주고 있다. 이번 회에서는 종전과 관련된 그의 역할이 상세하게 나와 있다.그것은 그의 죽음이었다.1952년 12월 17일과 27일의 모택동과 스탈린의 전문은 전쟁의 종결이 임박한 시점에서까지도 이들의 입장이 조정이 안되었음을 보여준다.특히 스탈린의 전문은 전쟁을 계속하되 중국이 요청한 무기를 그대로 지원할 수는 없다는 그의 인식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는 다만 요구한 양의 4분의 1만을 제공하겠다고 단정적으로 통보하고 있다.이 답변은 그동안의 모택동의 끈질긴 요구에 대해 약간 신경질적인 반응을 담고 있기까지 하다.53년 1월 12일의 모택동의 전문은 스탈린의 거부가 계속되자 아예 지원무기의 월별 필요 양까지 명기하고 있다.이는 종전시에 이르러서는 둘 사이의 긴장과 내적 갈등이 더욱 심각한 수준이었음을 보여준다. 3월 5일의 스탈린의 사망은 한국전쟁을 둘러싼 둘 사이의 갈등에 종지부를 찍었다.그것은 전쟁의 종결을 의미했다.스탈린이 사망한 지 10여일이 지난 3월 19일의 소련각료회의의 결의문은 스탈린의 사망이 전쟁의 종결과 직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지금까지 공개된 것 중 최초의 문건이다.즉 스탈린의 사망과 한국전쟁의 종결이 직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최초의 문건인 것이다.거기에는 『현재의 정책을 지속하는게 옳지 않다』는 분명한 지적이 나온다.소련지도부 전체의 종전정책으로의 극적 전환이었던 것이다. 거기에 실려있는 다섯가지의 권고사항은 스탈린이 전쟁을 계속하려한 이유가 얼마나 비평화적이고 무모한 것이었는가를 스스로 폭로하고 있다.이 권고사항들은 실제의 종전과정과 일치하는 내용이다.스탈린은 자신의 죽음으로써만 이 참혹한 전쟁의 종결을 도울 수 있었을 뿐임을 이 자료는 처음으로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 매트레이교수(뉴멕시코대) 미 참전비 제막기념 세미나서 주장

    ◎한국전은 내전·내란 아니다/소련·중 허락 없인 북 남침 불가능/공산당 비밀자료 고애로 국내원인론 종언 워싱턴 한국전참전비 제막을 앞두고 미국의 코리아소사이어티와 조지타운대는 24일 「한국전:역사적 기록의 재점검」이란 국제 학술회의를 개최했다.여러 발표문중 한국전을 내란적 성격으로 주장해온 수정주의 시각을 반박한 제임스 매트레이 미 뉴멕시코대 역사학교수의 견해를 소개한다. 십여년 전에 한국전을 내전·내란으로 성격짓는 것이 역사가들의 유행이었다.학자들은 한국전의 국내적 기원을 강조하는 학설이 타당하다는 뜻을 점점 더 강하게 피력했는데 국내 원인론은 급기야 국제적 요소의 전적인 배제로 이어졌다. 그러나 최근 그동안 비밀로 분류돼온 구소련 및 중국의 문서 자료들이 공개되면서 이같은 콘세서스의 돌출은 갑작스런 종말을 고했다.그래서 몇년전엔 시도되기 힘들었던 한국전에 대한 정통적 설명의 부활이 다수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이같은 분석의 방향전환이 보편성을 띠어가는 가운데 『19 50년에 북한이 소련의 허락및 지휘없이 공격할 수 있었다는 견해는 이제 심각하게 논의될 가치가 없다』는 말이 여러 권위있는 학자들에게서 나오고 있다 『육상경기에 비유하자면 선수들이 땅바닥에 손을 대고 몸을 구부린다고 해서 경기가 시작되는 건 아니다.출발요원의 스타트 신호가 떨어져야 비로소 시작되는데 스탈린이 한 일이 바로 이것이다』고 애담 울람 교수는 캐더린 위더스비 교수의 정통론을 평하면서 이같이 말했다. 한국전 수정주의 학자들은 이같은 발언을 저주로 여길 것이 틀림없다.그러나 중국과 러시아에서 유출되는 소량의 고문서 문건은 회고록과 인터뷰의 거대한 증거들과 묶어져 한국전을 고전적인 내전으로 해석하고 규정해온 학설들의 유효성을 크게 손상시키고 있다. 브루스 커밍스는 지난 81년 「한국전쟁의 기원」 첫째권을 출간하면서 수정주의자들의 「수령」이 되었다.그는 한국전의 기원은 19 45년부터 50년까지의 사건들과 식민지 시절부터 한국에 자리잡아온 힘들을 통해 규명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그는 미국이 한국의 내전에 개입하지 않았다면 급진개혁에 대한 민중적 요구는 결국 공산주의 정부 지배하의 통일한국을 창출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한국이 북한의 공격을 유도했거나 공격을 먼저 시작했다고 주장한 90년 9백20쪽에 달하는 커밍스의 둘째권은 많은 독자와 전문 학자들로부터 부정적인 평을 받았다.이와 함께 북한에 관해서 단 한 장(chapter)만 쓴 첫째권에 대해서도 비판이 쏟아졌는데 비밀문건들의 공개러시로 잘못된 해석을 공산당측 문서의 부족이라는 핑계대온 관행은 더이상 먹혀들지 않게 됐다. 존 윌츠교수는 93년 저서에서 커밍스의 논거는 철저하게 정황적일 따름이지 문서 증거라곤 단 한토막도 찾을 수 없다고 맹박했다.하오 유판과 자이 지하이 교수가 지난 80년대말 공개된 중국 과거문서를 토대로 한국전 기원을 설명한 첫 학자들인데 이들은 「김일성은 49년부터 자신의 한반도의 무력통일론을 스탈린에게 강력 피력했으며 스탈린만이 정확한 공격시일들을 보고받았다」는 논지를 폈다.이어 첸 지안교수는 여기에 새로 공개된 중국문서와 광범위한 인터뷰를 통해 이같은 「우파적 수정주의」 시각을 강화했다. 『모택동은 한국전 개입을 개전초에 이미 결정했으며 중국 지도자들은 김일성의 공격계획을 알고 있었을 뿐아니라 공격을 열렬하게 동의해줬다』고 그는 결론내린다.막 출범한 중국의 국내외적 이해를 살펴보면 한국전 개입을 피할 아무런 이유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중국문서에다 소련 공개문서를 바탕으로 세르게이 곤차로프·존 루이스·수에 리타이 교수는 『공격날짜를 잡은 것은 김일성이나 공격은 스탈린과 그의 장군들에 의해 사전계획되었으며 모택동은 스탈린의 거듭된 요청에 못이겨 이를 지원했다』고 밝혔다. 보리스 옐친대통령이 한국의 김영삼대통령에게 94년6월 전달한 2백건의 구소련 한국전관련 문서를 면밀히 검토한 위더스비교수등 많은 학자들은 김일성이 빠르면 49년5월 소련방문때 자신의 남침계획을 스탈린에게 승인해줄 것을 졸랐으며,50년4월 스탈린은 미국이 개입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에서가 아니라 김일성의 주장을 근거로 미국은 북한이 한국을 정복하는 것을 저지할 시간적 여유가 없으리라는 계산에서 김일성의 계획을 승인했다고 정리하고 있다. 이제는 한 세대동안 한국전 연구를 초장부터 구속시켜온 전통주의 대 수정주의의 해석적 양극에서 벗어날 때다.국제정치 상황에 대한 재검토가 요구되지만 이를 정통론의 승리로 간주되어서는 안되며,한국전의 이해는 국내기원적 요인의 인정을 요구하기도 한다. 결론으로 한국전에 대한 국내기원론의 타당성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내란이란 용어는 전쟁을 그다지 잘 설명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특히 한국전을 설명하는 데는 더욱 그렇다.
  • “러,체첸 독립 동의”/양측대표 밝혀

    ◎분쟁종식 협정 오늘 서명할듯 【그로즈니 AP 연합】 체첸분쟁 종식을 위한 협정이 22일(한국시간 23일) 조인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러시아와 체첸측 협상대표들이 밝혔다. 러시아의 비야체슬라프 미하일로프 협상대표와 체첸의 우스만 이마예프 대표는 이날 협상시작에 앞서 『오늘 정치협정에 서명할 것으로 본다』며 이같이 말했다. 양측 협상대표단은 전날 협상의 최대 장애물이었던 체첸의 장래 지위문제에 관한 합의에는 도달했으나 협정조인에는 실패했었다. 체첸 분리주의자들은 지난 수주동안 협상을 교착상태에 빠뜨렸던 체첸 지위문제와 관련,러시아정부가 지난 91년 선포된 체첸의 독립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반면 러시아는 체첸이 러시아 연방의 일부로 남아 있어야 한다면서도 올 가을로 예정된 체첸선거 및 신헌법 국민투표가 끝날 때까지 이 문제를 보류할 수 있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영 BBC도 보도 【런던 AFP 연합】 체첸과 평화협상을 벌이고 있는 러시아가 체첸의 독립에 동의했다고 영국의 BBC 방송이 인테르 팍스통신에보도된 우스만 이마예프 체첸대표단대표의 말을 인용해 21일 보도했다.
  • 러 소총 부산반입 기도 조직/마피아연계 검사가 주범

    【도쿄=강석진 특파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경찰이 내무성소속 군부대에서 칼라슈니코프 자동소총(AK­47)등을 훔쳐 한국에 밀수출하려던 일당을 검거,조사를 벌인 결과 마피아와 연관된 그룹의 소행임이 밝혀졌다고 일본의 도쿄신문이 19일자로 보도했다. 도쿄신문은 블라디보스토크발 기사에서 주범은 현직검사이며 마피아와 관계를 맺어온 것으로 드러났다고 전했다. 이들은 하바로프스크 이웃지역인 소비에츠카야 가와니읍의 내무성 경비대에서 50정의 칼라슈니코프 자동소총과 3정의 기관총을 훔쳐내 한국에 밀수출하려 한 것으로 조사됐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