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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연정 붕괴 조짐/중동회담에 암운

    【예루살렘 로이터 AFP 연합】 이스라엘의 보수강경파인 아리에 데리 내무장관이 9일 사퇴의사를 표명함에 따라 이츠하크 라빈 총리가 이끄는 이스라엘 연정이 붕괴위기에 직면했으며 그가 추진해오던 중동평화회담도 중대한 영향을 받게됐다.데리 장관은 지난 5일 라빈총리가 알로니 교육장관을 해임하지 않을 경우 자신이 각료직을 사퇴하는 것은 물론 샤스당의 나머지 당원 5명도 의원직을 사퇴할 것이라고 통고했었다.
  • 라빈의 대팔 양보책에 불만/샤스당 연정탈퇴 위협 안팎

    ◎강경보수파 반격의 신호탄/군소정당 횡포 가능한 정치제도도 문제 이스라엘의 보수우파 종교정당인 샤스당의 데리당수가 「연정탈퇴위협」 카드를 사용하게 된 표면적인 이유는 진보좌파정당 메레츠당 소속 알로니교육장관(여)이 유태교를 무시하는 발언을 일삼아 국민교육을 오도하기때문에 해임돼야한다는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데리내무장관에 대한 국고유용혐의 수사와 중동평화회담에서의 「지나친」 양보에 따른 불만도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샤스당은 점령지 완전반환을 주장하는 메레츠당과 달리 영토와 평화의 교환이라는 중동평화회담의 기본구도 자체를 거부하는 보수세력의 정서를 대변해왔다는 점에서 이번 연정탈퇴위협은 그동안 밀려온 보수세력의 반격의 신호탄으로도 받아들여지고있다. 전체의석수 1백20석 가운데 5%에 불과한 6석을 차지하고있는 샤스당이 이처럼 큰 소리를 칠 수 있는 것은 완전비례대표제를 채택함으로써 군소정당의 횡포를 가능케 한 현정치제도의 구조적 취약성에 기인한다.「한지붕 세가족」연정을구성하고있는 중도 노동당이 44석,메레츠당이 12석으로 샤스당이 탈퇴하면 과반수에 미달한다.그렇다고 아랍계의원 5명을 연정에 참여시키기는 어렵다.이스라엘에서는 건국이래 45년간 단한번도 절대다수당을 낸적이 없고 지난해 총선에서도 10개정당이 의회에 진출하는 난맥상을 보였다. 이번 연정붕괴위기는 샤스당이 정부로부터의 자금지원혜택에 크게 의존하는 종교정당이라는 약점 등을 고려할 때 타협점을 찾을 공산이 크다.그러나 알로니장관이 보직변경에 대해 꽤 강경한 거부입장을 보이고있어 단언하기에는 이른 상황이다. 모처럼 활기를 띠고있는 중동평화회담은 이번 위기의 극복여부에 관계없이 진전속도를 늦출 수밖에 없을 전망이다.
  • 옐친,“보스니아 응징 자제” 촉구/“내주 주민투표까지 연기를”

    ◎“세르비아계 제재는 안보리서 결정해야”/회교계,제파 등 비무장지대화 거부 【모스크바 로이터 연합】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은 8일 보스니아가 유엔 평화안을 받아 들일지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내주 주민투표를 실시하기까지 국제사회의 무력 응징이 자제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옐친 대통령은 모스크바를 방문중인 브라이언 멀로니 캐나다 총리와 회담한 후 공동 기자회견에서 이같이 지적하면서 투표가 끝난 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원국이 외무장관 회담을 통해 추후 대책을 논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국제사회가 안보이를 통한 대보스니아 제재 이상의 조치를 취해서는 안될것으로 본다고 강조했다. 옐친 대통령은 투표가 유엔안을 승인하길 기대한다면서 그러나 반대 결과가 나올 경우 러시아가 어떤 조치를 취할지에는 언급하지 않았다. 【사라예보 AFP 로이터 연합】 보스니아내 회교세력 정부는 8일 세르비아계의 거듭된 공략으로 함락위기에 처한 제파와 고라제등 보스니아동부 2개 회교도 거점도시를 비무장화시켜 「안전지대」로 만들자는 유엔측 평화제의를 거부했다고 회교정부의 알리자 이제트베고비치대통령이 밝혔다. 유엔측의 비무장협정 제의에 대한 회교정부의 거부조치는 보스니아파견 유엔평화유지군의 필립 모리용사령관과 보스니아 세르비아세력등 양자가 이 협정에 서명한지 불과 수시간만에 나온 것이다.
  • 대한매일신보에서 서울신문까지(겨레의 맥박으로 89년:17·끝)

    ◎지령회복의 정당성/서울신문기원은 1904년 7월18일/「항일선봉」·「친일곡필」 모두 인정해야 정직/최고의 역사… 오늘로 28764호인셈/45년 혁신속간땐 지령 계승… 59년 41년간의 족적 삭제 서울신문은 조국광복과 함께 매일신보의 지령을 계승하여 속간되었다.또한 일제시대 통감부 기관지이던 매일신보는 한말의 구국지이자 민족대변지이던 대한매일신보의 지령을 계승해 발행된 신문이다.따라서 서울신문은 그 뿌리를 한말 최대의 구국민족지이던 대한매일신보에 두고있는 셈이다. 서울신문의 뿌리 대한매일신보(이하 신보)는 항일언론의 최선봉에서 국권회복을 위해 가장 과감하게 언론구국운동을 전개한 대표적인 신문이었다. 이 신문은 런던의 크로니클 통신기자였던 영국인 배설(ErnestThomasBethell)과 한말 언론을 주도했던 논객겸 우국지사 양기탁등 민족진영의 인사들이 합세해 창간했다. 창간 날짜는 1904년 7월18일이다. ○일 국권위협에 맞서 이 무렵은 일본의 한국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이 증대되어 고문정치를 통한 외교 및 내정을 간섭하는등국운이 풍전등화 상태에 놓이던 시기였다.신보는 이러한 암울한 시기에 창간되어 통감부의 기관지로 매수되기까지 일제의 온갖 회유와 핍박에도 불구하고 국권수호운동에 앞장서온 것이다. 신보의 국권수호를 위한 언론구국운동은 동시대 다른 신문과는 현저히 다를만큼 특징적이었다. 창간호부터 항일논조로 일관,갖가지 폭로 고발기사로 사라져 가는 민족혼을 일깨우는데 횃불을 당겨온 것이다.일제의 황무지개관권 요구에 대한 부당성을 지적,한반도 침략음모를 널리 알린 일이며 황성신문의 정간 및 장지연의 구속사건 대서특필,일제의 날조와 허위를 폭로한 고종의 밀서사진 전재등은 그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그뿐만이 아니다.민족지들의 방향을 주도하는 일방 친일지와 친일파,매국노와 친일매국단체에 대해서도 준엄하고 통렬한 규탄을 서슴지 않았다. 신보의 언론구국운동은 이러한 비판 및 고발에 그치지 않고 민족의 애국투쟁정신을 고취하는데에도 매우 적극적 이었다.고종량위반대·정미7조약반대의 시위운동고취를 비롯해 장인환,전명운의 친일미국인 스티븐스(통감부 고문)처단과 안중근의 이등박문처단을 애국의사의 애국투쟁으로 보도,민족의 분발과 투쟁운동의 치성을 고취한 것이다. ○국채보상운동 주도 또 백년대계의 교육구국운동이며 의병운동,그리고 국권회복을위한 애국계몽운동에까지 나서 선각민족언론으로서의 소임을 적극 전개한 점도 빼놓을수 없다.특히 애국계몽운동의 하나인 국채보상운동은 직접적인 대국민캠페인을 통한 거족적 국민운동이었다는 점에서 신보의 언론구국정신을 한눈에 가늠케 하는 것이다. 신보가 이처럼 과감한 구국운동을 전개할수 있었던 것은 이 신문의 발행인이 외국인이어서 치외법권의 보호를 받은때문이다.그러나 양기탁 박은식 신채호 장도빈등 애국민족투사들의 구국정신이 그같은 논조와 운동을 주도했다는데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민족진영의 언론보루로서 국권수호운동을 펼치던 신보는 그러나 일제 통감부의 집요한 탄압끝에 배설의 상해옥살이와 양기탁의 구속으로 풀이 꺾이기 시작했다.그리고 영·일간의 외교문제를 꺼리던 주한영국총영사 헨리보나르와 통감부의 회유 및 압력을 받아 끝내 통감부에 매각되기에 이른다.국권회복의 상징적 존재였던 대한매일신보가 마침내 종언을 고한 것이다. 이때의 지령은 제1461호(국한문판)였다.그뒤 대한매일신보는 한일합병 이틋날인 1910년 8월30일부터 제호 가운데 국가를 상징했던 「대한」의 두자를 잘렸다.결국 「대한」을 빼앗겨버린 「매일신보」는 일제의 의도대로 통감부의 기관지로 변신된 것이다.그러면서도 「매일신보」는 「대한매일신보」의 국한문판 종간호인 제1461호(1910년 8월28일)의 지령을 계승,제1462호부터 국한문판을 발간했다. 이 날짜의 사설제목 「동화의 주의」가 상징하듯 얼굴을 바꾼 매일신보(이하 매신)는 일본 제국주의 식민정책의 첨병으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당초 매신은 총독부 일문 기관지인 경성일보에 흡수 통합,경일편집국의 한부서로서 운영되었으며 철저하게 일제의 입장에서 만들어져 편집방향은 「내선일체」를 고수했다.이를위해 총독정치의 선전과 홍보가 위주였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일제의 한반도 침략을 합리화하고 식민통치의 모순을 은폐하는 한편 일제에의 복종과 충성을 강요한 것이다. 민족말살을 호도,한국과 일본을 순치의 관계로 묶어서 주장한 민족동화의 논리는 물론 식민통치의 기반구축을 위해 사회환경의 일본식 개량 또한 부추겼다.또 식민경제수탈을 위해 산업의 개량과 일본경제체제로의 예속화,그리고 한국의 자주성 및 전통문화를 단절시키기위한 문화말살에도 앞장섰다.이밖에도 학교와 사회,가정에 이르기까지 「황국신민화」를 위한 식민지교육을 강화하는 한편 독립운동 탄압에 가세하는등 식민논리로 일관했다. ○해방조선 대변자임 매신은 이처럼 각 방면에 걸쳐 일제의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고 이를 선전하는등 총독부 기관지로서의 대변역활을 수행한 것이다. 이와같은 일제옹호논조는 매신이 기구를 확대해 경성일보에서 분리,1938년 4월16일 독립언론기관으로서 제호를 매일 「신」보로 개제해 출발한(지령은 매신을 계승)이후에도 변함없이 이어져 왔다. 그러나 일제는 패망했다.그리고 매신은 지난날 오욕의 역사를 청산하고 「해방조선의 대변기관」으로서 「서울신문」으로 거듭 나기위해 대대적인 개편수술을 받게된 것이다.서울신문으로의 개편작업이 본격화하기는 1945년 11월10일 미군정청이 매신에 정간명령을 내리면서였다. 이날이 바로 치욕의 매신이 종간된 날로서 지령은 제13737호로 돼있다.그뒤 새로운 간부진용이 구성돼 매신의 시설과 사옥은 물론 6백여 사원을 그대로 흡수,「서울신문」제호의 혁신호를 이땅에 선보였다.초대 사장은 지조 높은 선각언론인이자 애국지사인 위창 오세창이었다. 이날이 1945년 11월22일(발행날짜는 11월23일)이었으며 지령은 매신을 그대로 계승해 제13738호로 기록되어 있다.이 발행호수는 서울신문이 매일신(신)보의 발행기록 12276호와 그 이전 대한매일신보의 발행기록 1461호를 합친 숫자를 기준삼아 지령을 계산한데 따른 것이다.이는 매일신(신)보가 대한매일신보의 지령을 계승한데 따른 자연스런 결과였다.이에따라 서울신문은 이 두신문의 종합지령을 승계한 제13738호로 기록하게 된것이다.서울신문이 대한매일신보­매일신보­매일신보의 계보위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속간된 것이다. 이 지령은 1959년 3월22일까지 그대로 계승,제18214호를 기록하기에 이른다.그러나 서울신문은 지금 이 지령을 쓰지않고 있다.59년 3월23일 당시 사장이던 고 손도심이 근대 신문사에 대한 자체적인 사적평가를 진행하고 회사전체의 의견을 종합,그동안 사용해오던 구지령을 버리기로 결정한 것이다.이에따라 1945년 11월23일자로 된 속간호를 제1호로 기산,이날짜(1959년 3월23일)의 지령을 제4477호로 쓰게됐다 ○속간호 1호로 기산 서울신문은 이로써 저 멀리 대한매일신보로부터 이어온 지령 13737호와 41년의 역사를 스스로 잘라버렸다.그러나 이는 서울신문 역사의 기원을 그르치는 사실왜곡에 다름 아니었다.근대사에 각기 공과 과의 지울수 없는 족적을 남긴 두 신문과 서울신문의 맥락은 앞에서 보듯 연면히 이어져온 때문이다. 역사는 정직해야 한다.서울신문이 스스로 도려낸 구지령을 되찾아 바로 잡는 것은 역사에 정직하기 위한 길이다.이는 서울신문의 역사뿐만 아니라 한국언론사의 재정립이라는 면에서도 그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다.따라서 서울신문 역사의 기원은 1904년 7월18일 제1호로 창간된 대한매일신보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이날을 기준으로 역산하면 서울신문의 역사는 현존하는 한국의 신문중 가장 오래인 89년이 된다.그리고 잘라버린 지령 13737호를 다시 이으면 오늘 1993년 5월5일자로 제28764호가 되는 것이다
  • 재즈색소폰 주자 이정식 콘서트/30일 호암아트홀서

    「한국의 존 콜트레인」으로 불리는 재즈색소폰 연주자 이정식(32)이 오는 30일 하오 7시30분 호암아트홀에서 단독콘서트를 갖는다. KBS­2TV 심야토크프로 「밤으로 가는 쇼」 시그널음악의 작곡·연주자로 잘 알려진 이정식은 국내재즈계는 물론,세계적 재즈시장인 일본에서도 역량을 인정받고 있는 정상급 색소폰 주자.그는 지난 91년 재즈인이면 누구나 한번쯤은 서보고 싶어한다는 일본무대 「블루 노트」에서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연주했다.지난해 후쿠오카에서 열린 아시아 재즈페스티벌에는 한국대표로 참가,「아시아 출신으로 세계무대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음악인」(아사히신문)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지난 83년 KBS 김강섭악단을 통해 정식 데뷔한후 85∼87년 동숭동 마로니에공원과 예음홀에서 정기공연을 해왔으며 88년에는 올림픽 문화행사의 하나인 한강 재즈페스티벌에도 참가했다. 「재즈의 대중화」를 기치로 내건 이번 공연에서 그는 마이클 볼튼의 「내마음속의 조지아」,베니 골슨의 「블루스 마치」등 고전작품과 자작곡 「밤으로 가는 기차」(KBS­2TV「밤으로 가는 쇼」시그널음악 등을 선사한다.
  • 충격·당혹속「황명수카드」로 신속수습/청와대·정가의「최형우파문」반응

    ◎김 대표의 복수후보중 쉽게 낙점/청와대/“개혁 도덕성 훼손될까” 크게 우려/민자/개인적 비난 자제… 정치적 파장에 촉각/민주 14일 「최형우파문」이 정가를 강타하자 청와대·민자당은 「황명수카드」로 발빠르게 이를 진정시킨 뒤 지속적인 개혁의지를 재천명했다. 이 때문에 모처럼 호재를 만난듯 강도 높은 반격을 준비하던 민주당의 공세도 퇴색한 느낌. ▷청와대◁ ○…후임총장인선은 김종필대표가 복수추천한 후보중에서 김대통령이 황명수의원을 낙점함으로써 쉽게 결론. 이경재청와대대변인은 황의원이 1순위로 추천되었으며 2순위로는 3선의 모의원이 추천되었다고 밝혔으나 이름을 밝히는 것은 거부. 김대통령은 총장인선이 끝난뒤 김대표에게 『개혁을 하기위해 앞으로 나가다보면 돌뿌리도 나오는 것이지만 우리의 목표는 분명한 것인만큼 계속 개혁을 추진해 나가야한다』면서 『대표께서 책임을 지고 개혁추진에 앞장서는 정당으로 이끌어달라』고 격려. ○…김대통령은 이날 임명장을 수여받은 뒤 여의도당사 기자실에서 회견을 하고 있는황신임총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열심히 하도록 격려함으로써 황총장에 대한 각별한 신임을 표시. 김대통령은 전화통화에서 『충남이 지역구이지만 내일 이·취임식도 있고 하니 나의 대전방문에 수행하지 말고 당무나 열심히 집행하라』고 당부했고 황총장은 『열심히 하겠다』고 다짐. ○…최형우사무총장의 차남문제는 지난 12일 청와대에 그 내용이 제보돼 확인작업을 거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청와대측은 제보를 접하고 최총장에게 확인을 구했으나 최총장은 『그런일 없다』고 잘라말해 일단 허위제보로 처리. 최총장측은 언론이 13일 낮 집으로 전화를 걸어 차남의 경원전문대재학여부등을 문의하자 그제서야 박관용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대책을 논의했으나 박실장은 이미 김영삼대통령이 관저로 돌아간 이후여서 아침에야 이를 보고. 김대통령은 최총장이 청와대에서 박실장을 만나고 돌아간뒤 박실장 주돈식정무·김영수민정수석을 본관으로 불러들여 사건의 시말과 대책을 보고받았는데 이 자리에서 김대통령은 입을 꽉다물고 듣기만해 이번사건으로 대단한 충격을 받았음을 시사. ▷민자당◁ ○…민자당측은 이번 파문으로 개혁의 핵심이 오히려 개혁의 대상이 돼버린 아이로니컬한 사태로 악화돼 새 정부의 개혁정책에 도덕적인 치명타를 입게되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 민주계 의원들은 이번 파문을 크게 우려하는 모습이었으나 새 정부의 강력한 개혁드라이브에 은근히 불만을 가져온 민정·공화계 의원들은 다소 여유있는 표정으로 엇갈린 반응을 보여 대조를 이루는 분위기. ○…최총장은 이날 상오 7시 성산동 자택에서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기자들에게 『나중에 당에서 만나자.사실이든 아니든 곧 나의 입장을 밝히겠다』고 말한뒤 황급히 청와대로 출발. 청와대에 도착한 최총장은 박관용대통령비서실장을 통해 『대통령에게 누를 끼쳐 드려 죄송하다』고 밝힌뒤 사퇴의사를 표명. 최총장은 이어 상오9시30분 여의도 당사에 도착,김종필대표의 주재로 열리고 있는 고위당직자회의에 잠시 참석한뒤 곧바로 집무실에 들어가 기자들에게 사퇴를 정식 발표. 최총장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굳은 표정으로 심경을 밝힌뒤 일체의 질문을 회피하며 『청와대에서 대통령을 만났느냐』는 질문에만 『분명히 말해 없다』고 대답. 이어 대표위원 부속회의실에 들러 김대표와 몇마디 얘기를 나눈뒤 집무실에 되돌아와 기자와 비서들과 『그동안 감사합니다』라며 일일이 악수를 나누고는 당사를 나와 승용차를 타고 모처로 향발. ○…이날 상오 10시 열린 당무회의는 최총장이 사표를 내고 불참하는 바람에 권해옥 사무1부총장이 당무보고를 대신한 가운데 침통한 분위기속에 진행. 회의도중 김덕용정무장관과 신경식총재비서실장이 잠시 회의장을 빠져나와 자신들의 집무실에 들어가 문을 굳게 걸어감그고 보도진의 접근을 막은채 모처로 전화. 회의는 한승주외무부장관의 북한 핵개발 관련보고로 비공개로 진행되다가 공개됐는데 참석자 대부분이 침울한 표정으로 회의에 임하는 모습. 특히 김정무장관과 서청원의원‘김수한당무위원 등 민주계 당무위원들은 모두 침통한 표정을 지은 반면 일련의 개혁과정에서 소외돼온 민정·공화계 당무위원들은 다소 표정이밝아 묘한 대조. 한편 백남치기조실장은 『13일 하오 최총장의 아들이 경원전문대 입시부정에 관련된 의혹이 청와대와 당핵심부에 감지됐다』고 말해 전날 최총장의 경질이 결정됐음을 시사. 이 때문에 김대표는 선문답식으로 『남들이 나를 보고 소나 말이라고 하면 내가 소나 말로 보이는 짓을 했을 것이고 그러더라도 나는 사람이고 열심히 살아갈 것』이라는 중국 성현의 얘기를 말한뒤 『심기일전해 끊임없는 행보를 계속해달라』고 당부한뒤 서둘러 회의를 종료. ▷민주당◁ ○…민주당은 당무위원 및 국회의원 연석회의 도중 「개혁실세」인 민자당 최형우사무총장의 사퇴소식이 전해지자 『어떻게 된 것이냐』며 매우 민감한 반응.그러면서 최총장의 사퇴가 몰고올 정치적 파장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는 모습. 김상현·정대철의원등은 『김영삼대통령의 개혁정책에 상당한 부담이 될 것』이라고 전망. 그러나 과거 야당시절의 「동지적」 입장때문인지 개인적인 비난은 자제하는 태도.다만 이를 계기로 수세에 놓인 현상황을 역전시키려는 듯 강도높은대여공세를 시도.박지원대변인은 『놀랍기 그지 없는 일』이라며 『김대통령이 추진하는 개혁의 실체를 보는 것 같다』고 비난. 또 연석회의가 끝난뒤 최고위원회를 열어 당차원의 대응방안을 논의,「경원대입시부정진상 조사단」을 구성키로 하는등 반격의 전기로 삼으려는 태세.
  • “사회적 물의에 진심으로 사죄”/“중도하차” 최형우 전 민자총장

    ◎자신 둔 죄… 변명은 하고싶지 않다 개혁의 선봉장역할을 톡톡히 하던 최형우민자당사무총장이 14일 차남의 경원전문대부정입학의혹이라는 불의의 일격을 맞고 물러났다. 그는 상오9시30분쯤 민자당 자신의 방에서 기자들과 만났다. 『어제 아이에 대한 상황을 간접적으로 전해들었다』고 침통한 표정으로 말문을 연 최전총장은 『아버지입장을 떠나 공인으로서 대통령과 국민,김대표를 비롯한 전당원에게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결과야 어떻든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데 대해 몸둘 바를 모르겠다』며 『어젯밤 한숨 붙이지 못하고 여러가지 생각을 했는데 누구를 탓할게 아니라 자식을 둔 죄라는 것을 알았다』고 괴로운 심경을 토로했다. 최전총장은 『30년 이상 정치의 외길을 달리다보니 가정에 대한 애정·사랑·관심·분위기조성에 등한시 했다는 것이 가장 아버지로서 마음 아프다』고 애틋한 부정을 나타내고 『처(원영일여사)가 사실이라면서 미안하다고 얘기했을때 처음으로 등을 두드려주며 「모든게 나의 책임」이라고 했다』면서 굳은 표정을 지었다. 당의 한 관계자는 최전총장이 『아들의 입학시점이 3당합당협상이 추진되는 과정이라 정신이 없어 가정문제에 소홀할 수 밖에 없었다』면서 『그 아들은 지난70년대초 우리부부가 연행될때 백일맞이였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고 전했다. 최전총장은 『사내대장부가 구질구질하게 변명하고 싶지않다』면서도 『그러나 나는 교수를 만난 적도 없고 이 사건에 대해 아는 바도 없다』고 해명했다. 그는 결론적으로 『개혁을 추진하는 대통령에게 심려를 끼친데 미안하고 국민들에게도 송구스럽다』는 입장과 함께 『순수하게 내스스로 판단해 사무총장직을 그만두기로 했다』고 사퇴의 변을 밝혔다. 최전총장은 『여러분들도 자식을 둔 입장이기에 질문을 말아달라』는 말을 끝으로 총장실을 총총히 떠났다. 그는 특히 재산공개파문에 따른 의원직사퇴처리과정에서 「안화복지호」(화가 될지 복이 될지 어찌 알겠느냐)라는 말을 자주 인용했는데 아이로니컬하게도 이번에 그가 「화」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앞으로 그의 정치적 거취도 많은이들의 관심거리일 수 밖에 없다.일부에서는 김대통령이 도덕적 불감증을 질타한 마당에 의원직마저 사퇴해야 되는 것 아니냐는 매몰찬 의견까지 내놓고있다.하지만 최전총장이 의원직을 유지하더라도 다시 중용될 가능성은 희박하다는게 대체적인 전망이다.
  • 스페인화가 리아도/풍경화·초상화 넘나드는 천재

    ◎일 전시회서 유화 등 최신작 65점 선보여/“현대인상파의 거장” 입모아 「현대인상파의 천재」로 불리는 스페인 화가 토렌츠 리아도의 작품전시회가 일본에서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지난 90년에 이어 두번째로 일본 개인전을 열고 있는 리아도는 꽃 나무 수련등 자연을 대담한 구성과 정열이 넘치는 색채로 묘사,현대 인상파의 전재적인 화가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그런가 하면 카롤로스 스페인국왕부처,캐롤라인 모나코공주등 세계적인 왕족과 귀족등 저명인사의 초상화를 더이상 나무랄데 없이 완벽하게 그려내 최고의 초상화가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현대적 감각이 온화면에 넘치는 풍경화와 완벽한 테크닉으로 그려내는 초상화등 서로 상반되는 2개의 흐름을 높은 완성도로 표현하는 예술가로 평가되고 있으며 이같은 점이 그의 최대의 매력이라고 미술평론가들은 격찬한다. 올해 47세인 리아드는 스페인 동쪽 작은섬인 마졸카에 아트리에를 마련,지중해의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그는 46년 카타로니아에서 출생,9살때 벌써바르셀로나 아카데미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등학교때는 각종 상을 휩쓸어 명성을 날린끝에 19살때 모교의 조교수로 지명될 정도로 천재적이었다.22살때인 68년부터 미국 각지를 돌며 개인전을 열어 격찬을 받았으며 텍사스시는 86년 그에게 명예시민의 영예를 안겨주었다.88년에는 프랑스언론협회가 해마다 그해에 가장 뛰어난 활약을 한 예술가에게 주는 「올해의 인물」상을 받았다.스페인화가로는 밀로,달리에 이어 새번째 수상이었다. 포시즌스호텔 특설 전시장에서 열리고 있는 이번 도쿄전시회에는 그의 최신작품을 중심으로 유화 40점과 판화 25점등이 전시되고 있다.전시기간은 지난19일부터 4월11일까지.
  • 집권당 당수출마 캠벨 가 국방(뉴스인물)

    ◎인기절정… 캐나다 첫 여성총리 유력 오는 6월이면 캐나다에 첫 여성총리가 등장할 것 같다. 바로 킴 캠벨 현 국방장관(45)이다.그녀는 25일 고향인 밴쿠버에서 오는 6월11일에 열릴 집권 진보보수당 당수선거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했다.캠벨이 당수로 선출되면 지난달 사퇴할 뜻을 밝힌 브라이언 멀로니의 총리직을 바로 이어받아 캐나다의 첫 여성총리가 된다.이는 세계 주요 선진국에 빌 클린턴 미국대통령에 이어 40대지도자가 한명 더 늘어남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당수선거까지 두달도 더 남았지만 다음 총리로 그녀가 확실해 보이는 이유는 그녀의 국민적 인기가 매우 높은 데다 아직까지는 당내에 적수가 될만한 인물이 없기 때문이다. 캠벨은 지난 90년 법무장관으로 입각한 뒤 캐나다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정치인으로 자리를 굳혀왔다.지난해말까지만해도 20%를 밑돌던 보수당의 인기도 그녀가 올해 1월 첫여성국방장관으로 임명되자 덩달아 40%까지 치솟았다. 최근의 여론조사에서는 『캠벨이 당수가 되면 11월에 있을 총선에서 보수당을 지지하겠다』는 국민이 43%나 된다.이는 자유당(25%)과 신민주당(11%)에 대한 지지율을 크게 앞서는 것이다.그녀의 인기는 무엇보다 그녀가 진보적이고 적극적인 사고를 갖춘데서 비롯된다.「캐나다정계의 마돈나」로 불릴 만큼 자유분방한 사생활과 빼어난 외모까지도 인기상승요인으로 이어지고 있다. 법무장관으로 있을 때는 성범죄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고 동성연애자들의 권리를 넓히는 등 진보적인 정책을 폈다.이를 통해 침체된 국가분위기를 되살렸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런던대학 경제학과에서 러시아문제를 전공한 캠벨은 줄곧 변호사로 일하다 86년 브리티시컬럼비아 주의원으로 정계에 들어섰다. 그녀는 25일 출마의사를 발표하면서 멀로니총리의 당정운영방식을 비난한뒤 자기 스타일대로 국민과 보다 가까운 정부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다.오는 7월 도쿄에서 열릴 선진7개국정상회담에서는 대처 전영국총리에 이은 새로운 홍일점을 보게 될 전망이다.
  • 「북한 핵금탈퇴 철회」 총력외교/정부

    ◎안보리제재전 평화해결 적극 추진/중국 등 대상 북 설득 요청/한 외무,월말 방미/한 미 공동대응책 모색 정부는 북한이 유엔 안보리의 제재조치 결의 이전에 핵확산금지조약(NPT)탈퇴 선언을 철회하도록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이 큰 국가들을 상대로 한 외교에 총력을 기울이기로 했다. 정부는 특히 국제사회의 대북한 강경조치 채택 움직임을 주시하면서 북한핵문제가 안보리 표결에 부쳐질 경우 거부권 행사 방침을 시사하고 있는 중국을 설득하는데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정부는 이같은 노력의 일환으로 지난 12일 북한의 NPT 탈퇴선언 직후 주중대사관에 훈령을 보내 이붕 총리와 전기침외교부장 등 중국의 고위관계자들은 물론 외교부 실무자들과의 접촉을 강화하는 한편 우리 정부의 입장을 설명하도록 지시했다. 정부는 이 지시에서 중국이 지금까지 한반도의 비핵화,특히 북한의 핵개발에 반대해왔던 점을 부각시키는 한편 북한을 궁지에 몰아넣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북한핵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기존의 입장을 적극 홍보하라고 강조한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이와함께 이달 하순 한승주외무부장관을 미국에 보내 북한의 NPT 탈퇴 선언에 따른 한미간 공동대응책을 논의토록 할 계획이다. 이에따라 한장관은 오는 25일을 전후해 약 2박3일간의 일정으로 미국을 방문,워싱턴에서 워런 크리스토퍼 미국무장관과 새정부 출범후 첫 외무장관회담을 갖고 양국간 외교현안 전반에 관해 논의할 예정이다. 한장관은 이 회담에서 북한이 전쟁도발과 같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지나친 강경제재조치보다는 국제사회의 설득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는 정부 입장을 설명할 것으로 알려졌다. 한장관은 워싱턴에 머무는 동안 가능하면 클린턴대통령과의 면담도 추진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한장관은 이어 유엔본부가 있는 뉴욕에서 안보리 의장인 오브라이언 유엔주재 뉴질랜드대사와 만나 이같은 정부의 입장을 전달하고 국제사회의 대응책에 대한 지지의사를 표명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장관은 또 미국방문에 앞서 캐나다를 방문,멀로니수상과 통상마찰등 현안에 관해 논의하고귀로에는 일본에 들러 와타나베 미치오(도변미지웅)외상,오와다 히사시(소화구항)외무성 사무차관과도 만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종 한편 외무부는 이날 신기복 제1차관보 주재로 권병현 외교정책기획실장,정태익미주국장,금정호 국제기구국장,유명환 대변인과 담당과장등이 참석한 가운데 실무대책반 회의를 열어 해외공관으로부터 입수된 북한의 NPT 탈퇴선언 이후의 움직임과 관련된 정보와 주재국 정부의 반응,북한방송 청취결과 등을 종합 분석한다. 이날 회의에서는 이같은 분석을 토대로 유엔 안보리를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의 대응과 북한측의 입장에 관한 전망,예상가능한 시나리오에 대한 대책이 논의된 것으로 알려졌다. 회의가 끝난뒤 한 참석자는 『북한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 북한이 자포자기상태에서 전쟁을 일으키도록 해서는 안된다는데 의견이 모아졌다』고 밝혔다. 외무부는 이 회의에서 논의된 내용과 대책을 15일 열리는 국회 외무통일위에 보고하는 한편 16일로 예정된 대통령에 대한 업무보고때 서면으로 제출할 예정이다.
  • 서울대 유태우교수,「7주금연법」개발 보급 나서

    ◎7주만에 60%가 금연 성공/첫 2주동안 흡연량 7개비로 줄여/금단현상땐 수분 많이 섭취토록/“「의지금연법」보다 성공률 12배 높아” 우리나라 성인남자의 75%가 습관적 흡연자인 것으로 밝혀지고 있는 가운데 행동의학에 기초를 둔 과학적 금연방법이 소개돼 관심을 끌고 있다. 서울대의대 유태우교수(46·가정의학)는 13일 서울대병원 강당에서 열린 「담배를 끊읍시다」라는 건강세미나에서 자신이 개발한 「7주 금연법」을 발표했다.유교수에 따르면 습관적인 흡연자 3백명에게 7주 금연프로그램을 적용한 결과,60%라는 매우 높은 금연효과를 기록했다는 것. 유교수는 『무턱대고 담배를 끊으려 하는 「의지금연법」은 실패확률이 95%나 되는 반면 「7주 금연법」은 단계적인 행동변화를 통하기 때문에 비교적 고통을 덜 받으면서도 높은 금연효과를 거둘 수가 있다』고 밝혔다. 이날 건강세미나에서 유교수가 강의한 「7주 금연법」의 방법과 흡연의 폐해를 소개한다. ▷7주금연법◁ 「7주 금연법」은 금연준비기(2주),금연일,금단증상기(2주),금연유지기(3주)등 4단계로 구성된다.금연을 하는 2개월동안 술좌석 및 여행계획이 없고 스트레스가 예상되지 않는 시기를 택하는 것이 좋다. ■금연준비기(2주)=흡연량을 하루 7개비 정도로 줄이고 저니코틴 담배를 피우도록 한다.왼손으로만 담배를 피우고 라이터와 성냥을 갖고 다니지 않아야 한다.금연일을 종이에 써서 집이나 직장의 잘 보이는 곳에 붙여두고 은단 및 껌을 항상 휴대한다. ■금연일=금연일은 생일이나 결혼기념일,「금연의 날」(5월31일)등 특별한 날을 택한다.갖고 다니던 담배·라이터·성냥은 모두 버리고 세탁하여 담배냄새가 배지 않은 옷만 입어야 한다.가족 및 동료에게 금연에 관한 협조를 요청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금단증상기(2주)=담배를 끊으면 오심·두통·근육통·변비·설사등의 금단증세가 나타나며 불안·불면증·건망증·집중력감소·시간인지력장애 등이 수반된다.금단증세는 금연뒤 2∼4일째 가장 심하며 저녁에 주로 나타난다. 따라서 이 기간엔 커피·콜라 등 보다 과일·주스 등을 통해 수분을 많이 섭취해야 한다.또 술좌석은 피하고 입이 심심해지면 이쑤시개를 물거나 은단 및 껌을 씹는다.식사후 곧바로 양치질을 하고 가벼운 산책등 규칙적인 운동을 하는 것이 좋다.흡연충동이 오면 냉수를 한잔 들이켜고 손을 씻거나 세수를 하며 심호흡을 10회정도 하도록 한다.또 손목에 고무줄을 차고 있다가 흡연충동이 있을 때마다 한번씩 튕겨 마음을 바로 잡는 노력이 필요하다.어떤 경우든 「한대는 괜찮겠지」하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한다. ■금연유지기(3주)=흡연갈망은 줄지만 스트레스,동료의 흡연,음주 등으로 다시 흡연하기 쉬운 시기. 따라서 금단증상기에 익힌 방법으로 계속 금연을 하고 금연후에 건강의 회복효과를 음미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또 흡연의 굴레에서 벗어났다는 자신감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사교상 주는 담배도 과감히 거절하고,오히려 동료의 흡연을 만류하는 새습관을 익히도록 해야한다. ▷흡연의 폐해◁ 담배연기는 타르·니코틴 등 4천여종의 화학물질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몰로니움등의 방사선 물질과 니트로사민 등 수백종에 이르는 발암물질,그리고납·수은·니켈등 30여종의 중금속도 함유되어 있다.일반적으로 흡연자의 사망률은 비흡연자보다 70%이상 높고,3명의 흡연자 가운데 1명은 비흡연자에 비해 21년이상 단명하게 된다. 흡연으로 인해 가장 문제되는 질환은 뇌졸중 및 심근경색·만성감기·위장병·호흡기 이상.흡연은 심박수와 혈압을 높여 심장에 부담을 주고 혈소판 응집및 혈액응고를 촉진시켜 동맥경화를 유발한다.또 호흡기내의 섬모운동과 대식세포기능을 억제하고 기관지점막 세포의 증식과 핵변화를 촉진한다.이에따라 흡연자는 비흡연자보다 뇌졸중 발생률이 3배,만성기관지염 및 폐기종 발병률은 20배이상 높다. 또 흡연과 암은 불가분의 관계를 지녀 흡연자의 발암가능성은 폐암이 17배,구강암 13배,후두암 11배,식도암 6배,방광암은 2배이상 큰 것으로 밝혀졌다. 여성흡연자의 경우 폐경기이후 골다공증에 걸릴 확률도 3배가량 높다.이밖에 간접흡연의 폐해도 매우 심각해서 상습흡연자를 남편으로 둔 아내는 폐암발생률이 30%,심장병 발생률이 50%이상 높아진다.
  • “멀로니 캐나다총리 사임”/작년 개헌실패로 입지 약화

    ◎현지 언론보도/후임에 캠프벨국방 등 각축 【오타와 로이터 AP 연합】 브라이언 멀로니 캐나다총리가 24일 상오(현지시간)취임 8년여만에 사임한다고 캐나다 언론들이 보도했다. 캐나다통신(CP)은 집권 진보 보수당의 한 소식통의 말을 인용,멀로니총리가 얼마전 사임결정을 내렸다고 밝히면서 이같이 전했다. 지난 10년동안 진보 보수당을 이끌어온 멀로니총리는 이날 상오 당간부회의에서 자신의 사임을 공식 발표할 예정이라고 이 통신은 전했다. 진보 보수당의 대변인은 이날 멀로니총리의 사임설을 23일 하오에 전해들었다고 밝히면서 대부분의 국민들은 멀로니총리가 조기총선 실시보다는 사임쪽을 선택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캐나다 2대 텔레비전 방송인 CTB와 CBC방송은 저녁 뉴스시간에 멀로니총리의 사임 임박설을 크게 보도했으나 이를 확인하지는 않았다. 멀로니총리는 불어권인 퀘벡지역 분리독립문제의 해결을 겨냥한 헌법개정안을 놓고 지난해 10월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패배한 이후 줄곧 그의 장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확산돼왔다.아일랜드계인 멀로니총리는 지난 84년 퀘벡분리문제의 해결을 내걸고 출마,압도적인 승리로 당선됐으나 지난 8년간의 집권기간에 경제침체와 심각한 실업률등으로 가장 낮은 지지도를 기록한 지도자중의 한 사람으로 전락했다. 진보 보수당은 오는 6월 지도부 선출을 위한 관계회의를 열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 경선에는 킴 캠프벨 국방,마이클 윌슨통상,페린 베티통신,진 차레스트 환경장관등이 치열한 경합을 벌일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 개혁은 「세」로 하라(김호준/정치평론)

    김영삼차기대통령의 개혁추진을 지켜 보느라면 무언가「갈증」을 느낀다.본격적인 개혁은 취임후 단행할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그 열기의 불길은 진작부터 화끈하게 지펴 나갈수 있으련만 그렇질 않아 아쉽다는 얘기다. 지나간 일이긴 하나 지난 1월 청와대 개방론이 나왔을 때가 좋은 예일듯 싶다.대통령 경호와 보안 등을 이유로 무장군경에 의해 둘러싸인 청와대와 그 주변을 문민시대 출범에 즈음하여 국민에게 개방하고 돌려준다는 건 상징성이 크다.세계에서 적이 제일 많다는 미 대통령의 관저 백악관도 도심 한복판에 노출돼 있는데 천연의 요새 북악산이 옹위하는 청와대를 개방 못할 이유가 없다.또한 청와대 개방에 따로 큰 예산이 드는 것도 아니어서 개방론 동의에 주저할 필요도 없다고 본다.그러나 차기대통령은 가타부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만일 그가 자신의 민주적 청와대론까지 곁들여 즉각 이를 지지하고 나섰더라면 그의 개혁 구도에 대한 궁금증이 지금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차기대통령의 과묵한 품성을 반영하듯 이제까지 그에게서 나온 개혁 관련 메시지는 선거공약 수준의 원론적인 것이 대부분이다.진전된 구체안이 없다는 건 아니나 개혁의 총체적 구도를 유추하기엔 큰 부족을 느낀다.그나마 단편적인 몇가지 메시지가 그의 적확한 문제의식과 투철한 해결의지를 국민들에게 확인시켜 주고 이로인해 개혁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가 여전히 높다는 건 다행이라고 하겠다. 차기대통령의 개혁추진,특히 부패추방과 관련하여 지금까지 발표된 새 구상 가운데 신선미는 없어도 괜찮게 여겨지는 건 청와대 사정비서관 폐지와 감사원 기능 강화론인 것 같다.차기대통령이 부패척결의 우선적 과제로 윗물맑기운동을 주창하면서 사정기능을 강화하지는 못할망정 축소하겠다는 건 얼핏 앞뒤가 맞지않는 얘기처럼 들린다.그러나 아이로니컬하게도 사정을 막는게 사정비서관의 주요 임무였다는 과거의「내막」에 접하면 차기대통령의 폐지 의도가 이해된다.언제부터인지 몰라도 고위층 주변인사들의 비리가 드러나면 불똥이 고위층에게까지 튈 것을 우려하여 사정관계자들이 그 비리를 덮는 일에 관여했다는 건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공개된 비밀이다. 우리의 경험법칙에 의하면 법과 제도가 미비해서 개혁을 못하고 기구가 부실해 부패를 척결하지 못한다는 건 맞지 않는 얘기다.제3공화국은 초법적 비상조치를 몇차례나 발동했는데도 왜 부정을 뿌리뽑지 못했으며 5공화국에선 서슬이 시퍼런 사회정화위원회가 가동됐는데도 왜 대형비리가 잇따랐는가.문제는 의지다.기존의 법과 기구조차 제대로 활용할 의지도 없으면서 부패척결을 장식품처럼 내건 국민기만이 되풀이 되어선 안된다.그런 점에서 차기대통령의 감사원 기능 강화론은 신뢰감을 준다.감사원은 헌법기구이며 부총리급인 감사원장 밑엔 11명의 차관급 감사위원이 포진하고 있다.이처럼 강력한 사정기구를 두고 또 무얼 만든다면 그야말로 번쇄한 옥상옥일 것이다. 이제 새정부가 출범하기까진 불과 2주일밖에 남지 않았다.그럼에도 아직 대다수의 국민들이 새정부가 추진할 개혁의 청사진에 대해 단편적 정보에나 만족한채 실체에 접하지 못하고 있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개혁은 「세」로 하는 것이다.군사통치시대엔 총검과 계엄령·비상사태·긴급조치등으로 세를 잡았다면 문민시대의 세는 대통령의 리더십과 국민의 지지로 일궈 나가야 한다.그러자면 국민에게 할 말은 하고 알릴건 알려서 개혁에 대한 공감대와 동참의 폭을 넓혀야 한다. 우리는 정치사를 통해 김영삼차기대통령의 민주화 의지를 확인할수 있으나 그가 우리 국가의 발전목표와 현재의 발전단계에 대해 어떤 신념을 갖고 있는지는 확실히 읽지 못한다.부패척결없인 선진국 진입이 불가능한 이상 개혁을 강조하며 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하려하는 그의 의지는 충분히 이해할수 있다.그러나 대통령의 정책의지를 분명히 보여주는 맥과 수순,즉 개혁의 청사진으로 세를 장악하지 않곤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는 걸 알아야 한다.솔직히 말해 새정부의 개혁추진 행보는 좀 느리고 모호하다.
  • 클린턴 시내조깅에 원서/통행제한에 시민불편…“백악관서 뛰어라”요구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새벽 조깅이 워싱턴 주민들에게 불안한 마음을 갖게 하고 생활에도 불편을 주고 있다. 그의 조깅이 워싱턴 시민들에게 불안한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은 이 도시가 미국 대도시들 가운데서도 살인등 범죄가 가장 많은 도시의 하나이기 때문이고 생활에 불편을 끼치는 이유는 그가 조깅을 할때면 경찰·비밀 경호원·기자등 많은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몰려 다니느라 통행이 제한되기 때문이다. 새벽 6시라면 보통때 같으면 워싱턴의 거리가 한산할 때.그러나 클린턴 대통령의 새벽 조깅으로 이 시간에 그가 조깅을 하는 거리를 지나던 시민들은 대통령을 취재하는 보도기관 및 경호원들의 차량,그리고 대통령 전용차등의 행렬에 막히는 뜻밖의 교통혼잡을 겪는 것이다. 대통령의 조깅으로 교통혼잡을 치른 로니카 콜라보라는 간호원은 『대통령의 조깅행렬을 자주 만나면 직장에서 쫓겨나기 십상이겠다』 면서 『왜 시민들에게 불편을 주지않는 백악관안 같은데서 조깅을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고 불평했다. 택시 운전기사 프레드 시몬스씨도『참 골칫거리』 라고 말하고 『우린 그들의 행렬에 막혀 멈춰 서있을때 마다 많은 돈을 빼앗기고 있다』 고 핏대를 세웠다.
  • 산장서 돌아와 최종 잔무처리/이임준비에 바쁜 부시

    ◎걸프사태 대처하랴 막판까지 분주/가까운 친구와 함께 고별파티 열어 조지 부시 미대통령은 퇴임을 이틀 앞둔 18일 캠프 데이비드 산장으로부터 백악관으로 돌아와 퇴임에 앞선 마지막 잔무처리에 들어갔다. 헬기로 백악관 남쪽 뜰에 도착한 부시 대통령은 기자들에게 『우리는(이라크 폭격이라는)정당한 일을 했다』면서 『새대통령이(이번 공격을)확고히 지지한데 대해거듭 감사한다』고 말했다. 그는 서방측이 전달한 「크고 분명한 메시지」가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에게 전달됐기를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부시 대통령은 주말을 워싱턴에서 1백20㎞ 떨어진 캠프 데이비드 산장에서 머물면서 브렌트 스코크로프트 안보보좌관과 브라이언 멀로니 캐나다 총리와 많은 시간을 함께했다. 그러나 걸프지역 위기로 인해 세계 주요 지도자들과 백악관 상황실과 계속 연락을 취하는등 분주한 시간을 보냈다. 68세의 부시 대통령은 자신의 나이보다 3분의1정도 어린 해병들과 잠시 「월리볼경기(실내 코트에서 각각 4명씩 참가하는 배구경기)」를 잠시 즐기기도했다. 한편 오는 20일 정오(한국시간 21일 새벽2시)에 공식 퇴임하는 부시 대통령은 18일 저녁(현지시간)가까운 친구들과의 고별파티를 준비했다. 부시 대통령은 보통 매주 목요일에 댄 퀘일 부통령과 오찬을 함께해 왔으나 이번에는 화요일 오찬으로 일정을 앞당겼다.부시 대통령과 바버라 여사는 이 오찬에 이어 내셔널 지오그래픽지와 「백악관 생활」이라는 주제로 녹화를 할 예정이다. 새 대통령 취임식이 끝난후 부시 대통령부부는 이제 보통사람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앤드류 공군기지에서 공군 1호기를 타고 텍사스주 휴스턴으로 출발한다.
  • 2차공습땐 범위 확대 가능성/충돌위기 고조되는 이라크사태

    ◎「쿠」 파병 미군본진 곧 작전지역 배치/바그다드,2만명 후세인 지지시위 ○초소철거 시한넘겨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16일 이라크가 쿠웨이트 영내 경비초소 철거요구 최후통첩 시한을 이미 넘겼음을 니자르 함둔 유엔주재 이라크 대사에게 경고. 함둔 대사는 이날 하타노 요시오 안보리 의장과 만난 자리에서 경비초소 문제는 부수적인 사안에 불과하며 경비초소 철거시한도 공식 통보받지 못했다고 항변. ○백악관 “모르는 일” ○…이라크에 대한 다국적군의 2차 공습이 원래 지난 15일로예정돼 있었으나 존 메이저 영국총리가 보류를 요청하는 등 몇가지 이유로 취소됐다고 미국의 CNN방송이 16일 보도. CNN은 소식통을 밝히지 않은 채 만약 이라크 공습이 재개된다면 그 시기는 17일 하오(미국시간)가 될 가능성이 높고 또 지난번과는 달리 공격범위가 북위 32도 이남의 비행금지구역에 국한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이 보도와 관련,백악관측은 모르는 일이라고 부인하면서 조지 부시 대통령이 서방 및 유엔측과 공습재개문제를 협의중이라고만 밝혔다. ○유엔반응에 관심 ○…캠프 데이비드 산장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는 조지 부시 미국대통령은 16일 캐나다의 브리안 멀로니 총리와 환담하면서 이라크가 내놓은 새 제안에 대해 『지금 아무런 대응안도 없다』고 말하고 『우리는 유엔이 어떤 반응을 보일 지에 관심이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라크의 새 제안과 관련, 『모든 사실을 알기전까지는 기다려 봐야 할 것』이라며 신중한 자세를 보이면서 자신이 결코 호전적인 사람이 아님을 강조. 부시는 그러나 『이라크가 유엔 사찰단의 입국을 허용하겠다는 뜻으로 알아들었다』고 말해 그같은 제안에 대해 다소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시사. ○“문제 의도적 혼동” ○…타리크 아지즈 이라크 부총리는 16일 미국은 군사공격의 구실을 만들고자 「비행금지 구역」문제와 유엔 사찰단 항공기의 비행,이라크의 군장비 회수 등의 문제를 의도적으로 혼동시켰다고 비난하고 이들 문제가 서로 구분돼야 한다고 주장. 이라크는 처음부터 유엔측에 남부와 북부의 비행금지구역을 거쳐 이라크 영공에 들어서는 것에 대해 여러차례 우려를 밝혀왔다고 덧붙였다. ○걸프전 2주 맞아 ○…이라크는 17일 걸프전 개전 2주년 기념일을 맞아 수천명이 사담 후세인 대통령 지지 시위행진을 벌였다. 시위자들은 이날 수도 바그다드시 일원에서 후세인의 초상화를 들고 후세인 지지 구호를 외치는 한편 조지 부시 미대통령을 비난하면서 그간 위해공작을 펼쳤음에도 불구,후세인 대통령은 패전한지 2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건재하다고 조롱했다. ○“안보리결의 준수를” ○…이집트는 이라크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을 준수할 것과 걸프지역의 긴장을 고조시키는 행동을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고 카이로에서 발행되는 알 아흐람지가 아므르 무사 이집트 외무장관을 인용,16일 보도. ○1천1백명 도착 ○…걸프 지역 정세의 악화에 따라 미국 본토에서 쿠웨이트로 긴급 파병된 미군 1천1백명의 대부분이 17일까지 쿠웨이트에 도착했다. 이번에 쿠웨이트에 파병된 미군 파견대의 대변인 네드 롱스워스중령은 파병 병력의 본진이 쿠웨이트에 도착했으며 앞으로 수일간탱크와 브래들리 경전차의 작전지역 배치를 완료할 것이라고 이날 말했다.
  • 후세인의 도발은 고도의 전략행위(해외사설)

    사담 후세인이 저지른 것은 미친짓인가 전략전인가.걸프전쟁 2주년을 앞두고 1991년1월에 일어났던 똑같은 문제에 대한 응수도 그때와 똑같다.즉 미국의 군사적 개입이다. 한달전부터 거듭되어 온 이라크 독재자의 도발은 조지 부시에 대한 적개심이 가장 큰 이유다.바그다드에서 볼 때 부시의 선거 패배는 신의 심판이 었다.사담 후세인은 임기말의 부시가 반격할 힘이 없으리라고 보았기 때문에 쿠웨이트를 빼앗아간 인물을 모욕하는 즐거움을 뿌리치기 어려웠을 것이다.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다.정치적 계산과 개인적 감정을 구분하지 않는 그는 결코 속죄하는 일이 없으며 오로지 복수에 몰두했다. 사담 후세인은 광신자인 듯하다.그는 자신을 마호메트의 직계로 만든 가승을 공표했고 걸프전쟁 동안에는 꿈에 마호메트가 나타났다고 발표했다.그는 자신을 같은 고향 출신으로 십자군 전쟁때의 영웅이던 살라딘과 동일시했다.그는 기원전 6세기의 바빌로니아 왕이며 위대한 정복자인 나부쇼도노소르의 후계자로 자처했다.이 왕이 후세인의 손을 잡은 모습을 보이는 거대한 그림이 바그다드 성벽들에 있다. 지난 몇주의 사태 진전에 대해 설명하자면 길어진다.우선,대외적인 동기가 있다.사담 후세인은 조지 부시를 벌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빌 클린턴을 시험하려고 했을 것이다.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이라크 언론들은 미국의 새대통령을 줄곧 헐뜯어 왔다.임박한 클린턴의 대통령 취임을 바그다드­워싱턴 관계의 새로운 출발점으로 본 것이었다. 친미 아랍 세력들이 군대 파견을 내켜하지 않는 상황도 이라크에는 좋은 기회로 보였을 것이다.특히 사우디 아라비아와 이집트의 정부는 서방측의 군사 보복이 무엇보다도 결과적으로 회교 교조주의자들을 고무하게 될것을 겁내고 있다.오늘날 진실로 위협적인 존재는 이란이기 때문이다. 내부적 동기는 다음과 같다.사담 후세인은 외적의 힘입이라는 유령을 흔들어 군을 장악하고 있다.그는 군의 전선을 외적 쪽으로 돌려 놓아야 한다.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과녁이 될 수 있다. 또한 그는 경제 제재로 점점 고통이 심해지는 국민들에게 그 책임이 자신에 있지 않고 아랍 세계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이라크를 해치는 서방의 악마에게 있다는 것을 보이려 했다.그는 미국이 새로운 전쟁에 빠져들지 않을 것이므로 자신을 뒤엎지 못할 것은 뻔하고 단순한 보복 폭격 정도라면 자신의 권력을 더 튼튼히 해준다는 역설적 결과를 계산했다.이라크 국민의 저주 대상은 그들의 대통령이 아니라 미국이 되니까. 사담 후세인에게 딱 맞는 앵글로색슨의 속담이 있다.『그는 미쳤지만 여우같다』
  • 대한매일신보에서 서울신문까지(겨레의 맥박으로 89년:3)

    ◎매신의 인걸들/선각자들 결집… 「국권회복」 구심체로/영국인… 일제탄압에 울타리역할/배설/총무 맡아 항일논조 사실상 주도/양기탁/박은식·신채호는 주필로 민족자부심·독립정신 고취 대한매일신보가 민족의 대변지로서 국권회복운동의 정신적 구심점이 된데는 여러가지 요인이 있다.그 가운데 하나가 이 신문에 관련 또는 종사했던 사람들의 면면인데 국적과 신분을 뛰어넘어 매우 다채로운 인물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이 신문을 이끈 주역은 영국인 사장 배설과 양기탁 박은식 신채호 등 논객이자 사학자이며 항일투사였던 국내 인사들로 돼있다.배설(Ernest T Bethell)은 1872년 11월3일 영국 브리스톨시 북부 애쉴리에서 태어났다.극동상대의 무역상이던 토머스 헨콕과 전도사의 딸인 마서 제인 홀름의 다섯 남매중 장남으로 브리스톨의 머천트 벤처러스스쿨을 나왔다. 이 학교를 졸업한뒤 열다섯살 때인 1888년 일본에 건너와 1904년초까지 16년동안 고베(신호)에 살면서 무역업에 종사했다.1899년에는 동생들과 함께 「베델 브러더스」라는 무역상을설립했다.이 회사는 지금도 런던에 있다.어떻든 배설은 한때 돈을 많이 벌어 러그(rug·깔개)공장을 차리기까지 한것을 보면 사업수완이 대단했던 인물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일인들의 방해로 실패,재산을 모두 날렸다.졸지에 삶의 기반을 잃게 된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성대로 늘 활달한 쾌남아의 풍모를 잃지 않았다고 한다.그는 수영 크리켓등 스포츠를 좋아했으며 특히 음악에는 타고난 감수성의 소유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체계적인 음악교육은 받지 않았으나 청중들 앞에서 곧잘 노래를 부를만큼 빼어난 가창력도 지녔다. ○늘 활달한 쾌남아 서양장기를 잘 두었으며 술과 담배 또한 즐기는 편이었다.뿐만 아니라 자신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전개하는 문장력도 여간 뛰어난 인물이 아니었다. 학력은 비록 고졸에 그쳤으나 이처럼 다채로운 그의 재능과 기질은 언론인으로서 훌륭한 잠재력을 지녔던 것으로 평가된다.이윤추구가 최대의 목표인 무역업보다 다양한 가치를 추구하고 창의성을 발휘,정치 사회에 직접 영향을 미칠수 있는 사업인 신문발행이그에게는 적격이었던 셈인지도 모른다. 그가 언론과 인연을 맺은 것은 러그사업에 실패한 직후 영국 데일리 크로니클지의 특별통신원이 되어 한국에 온 것이 계기가 됐다.그리고 그는 불과 4개월 1주일만에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할 수 있었다.배설의 언론입문은 그의 자질이나 성격과 결코 무관치 않다.당시 한국의 실정 역시 배설과 같은 언론인을 절실히 필요로 한 시대이기도 했다. 그가 양기탁을 만나 대한매일신보의 견본판 「양자신문」을 만들기는 1904년 6월29일이었으며 실제로 신문을 창간하기는 20일 뒤인 7월18일이었다.그로부터 1909년 이 땅에 뼈를 묻히기까지 줄곧 한국인의 편에서 일제에 맞선 항일언론의 선봉장으로 또 신보를 이끌고 지킨 울타리 역할을 다 해냈다. 배설이 신보를 지킨 울타리였다면 양기탁은 신보를 떠받친 기둥이요 대들보로 비유해도 좋다.그는 신보사의 전무와 주필 그리고 편집국장을 겸한 위치인 총무로서 제작 및 운영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항일논조를 사실상 주도한 신보의 분신이었다. 양기탁은 호가우강으로 1871년 4월2일 평양태생이다.배설보다는 1년7개월 먼저 태어난 셈이다.부친은 한학자로 그 지방에서 널리 이름이 알려졌던 양시영이었다.어려서부터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는데 사람됨이 매우 총명하여 보기드문 소년 문장가로 꼽힐 정도였다. 그가 서울에 오기는 배설이 일본에 갔던 같은 나이인 15살 때였다.상경직후 동학및 유림의 명망가이자 우국지사인 나현태를 알게 됐다.이후부터 여러 우국지사들과 접촉하면서 그들의 애국사상에 감화를 받게 되었고 동학당과도 관계하면서 견문과 사상을 확고히 다지게 되었다. 외국과의 교섭이 점차 확대되던 국내외 정세에 영향을 받은 그는 한성외국어학교에 들어가 반년동안 영어를 배우기도 했다.따라서 그의 지식과 사상은 어려서 배운 한학의 토대위에 양학문과 기독교 정신이 접목된 것이 아닌가 한다.또 동학과도 관계함으로써 민족주의 사상의 기틀을 다지게 됐다.일제의 가슴에 예리한 비수를 들이대는 듯 했던 신보의 반일논설 필봉은 그의 이런 사상과 학식에 바탕한 것이다. 그는 한때 부친과 함께 캐나다의 선교사 게일(James S Gale)이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한영사전을 편찬하는 일에도 참여했다.이 한영사전은 1897년 6월에 출판됐는데 인쇄소는 요코하마에 있는 복음인쇄합자회사였고 발행소는 서울야소교서회로 되어 있다. 그는 신보를 이끈 항일지사형 언론인의 전형적 인물이다.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 신민회를 결성,그 총감독으로 활동한 바도 있으며 나라를 빼앗긴뒤 서간도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일제에 대항케한 열혈투사이기도 했다.여러차례의 옥고끝에 만주로 도피한 그는 상해에서 광복운동에 종사하던중 1933년 김구에 의해 법무담당 국무위원에 임명,1년4개월간 재임했다.강소성 담양현에서 그 파란의 삶을 마쳤는데 그 해가 1938년이다. 백암 박은식은 황해도 황주태생의 이름높은 성리학자로서 본래 황성신문의 논설기자였다.이 신문이 정간된 뒤 양기탁의 추천으로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논설기자)로 자리를 옮겨 정력적인 항일언론 활동에 나섰다. ○신민회에도 참여 신민회가 결성되자 그 원로회원으로서 교육 및 출판부문을 담당하기도 한 그는 신보를 통해 주로 애국계몽에 관한 글을 집필했다.신교육구국사상·사회관습개혁사상·애국사상·대동사상 등 애국계몽사상을 설파,국권회복운동을 적극 고취하는데 앞장섰던 것이다.한일합방뒤에는 상해로 가서 독립운동에 나서는 한편 「한국통사」「한국독립운동지혈사」등 많은 역사 저술을 통해 민족적 자부심과 독립투쟁정신을 심는데 크게 공헌을 한 인물이었다. 박은식의 뒤를 이어 신보의 주필로 활동한 단재 신채호는 충남 대덕출생으로 명성 높은 사가였다.역시 황성신문의 논설기자였다가 양기탁의 천거로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이 됐다.민중계몽 및 정부편달 중심의 시론과 우리나라 역사관계 사론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1910년 망명할 때까지 그는 대한매일신보에 「일본의 3대충노」「이십세기 신국민」「서호문답」「금일 대한국민의 목적지」등의 논설과 「독사신론」「수군 제일위인 이순신전」등 역사관계 논문및 시론등을 연재,민족의식을 일깨웠다. 신민회조직에 참여했고 국채보상운동에도 가담했다.한마디로 그는 신보의 국권회복운동을 이끈 주역의 한사람으로서 일제에 대한 저항의 논리를 구축하고 민족운동의 방향을 제시한 사람이었다. 이밖에 대한매일신보를 이끌어온 사람들로는 임기정 이교담 옥관빈 강문수등이 있다.이들은 주로 업무분야 종사자들로 신보의 조직을 통해 일본세력을 몰아내려 했던 사람들이다.
  • 러,생필품값 다시 통제/자유화실시 1년만에/국가가격위

    ◎기업이윤 10∼25%수준 억제 【모스크바=이기동특파원】 러시아는 빵과 우유 등 11개 기초 생필품에 대해 다시 가격을 통제,치솟는 물가를 억제하기로 결정했다고 러시아 국가가격위원회가 5일 밝혔다. 이같은 조치는 예고르 가이다르 전총리대행의 개혁정책을 이어 나가겠다고 빅토르 체르노미르딘 신임총리가 거듭 밝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혁정책의 상당한 후퇴를 시사하는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국가가격위원회의 블라디미르 사포노프 부위원장은 이번 정부 포고령은 해당 기업들의 이윤을 판매가의 10∼25% 수준으로 묶어두기 위한 것이라면서 물가가 현 수준에서 안정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그는 빵,우유,고기와 기타 식료품을 생산하는 기업의 이윤을 이처럼 제한키로 한 것은 『심각한 시장상황으로 볼 때 아주 부드럽고 유연한 개입』이라고 말하고 따라서 러시아가 시장경제로의 이행을 그만둔다는 뜻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체르노미르딘총리도 이날 지난달 총리직을 맡은 후 가진 첫 정책연설을 통해 러시아가 「사회지향 시장경제」(Socially oriented Market Economy)창설을 겨냥한 개혁에서 어떠한 후퇴도 있을 수 없다고 밝혔다. 1월1일자로 발효된 이 포고령에 따르면 가격이 규제되는 품목에는 빵·마카로니·차·소금·설탕·우유·고기·버터·소시지·유아용 식품·보드카 등 기초 식료품 11개품목도 들어있다. 한편 가이다르 전총리대행하에서 러시아 정부는 지난해 1월2일 대부분의 상품에 대한 가격통제를 없애 수십년간에 걸친 정부의 시장규제시대를 마감했었다. ◎물가 20배 오르는 등 급진개혁 실패/새 내각,정책노선의 대수술 불가피(해설) 빅토르 체르노미르딘 신임 러시아 총리가 기본생활필수품의 가격을 다시 통제하겠다고 밝힌 것은 그동안 급진개혁노선을 따르던 러시아의 경제정책이 점진적인 개혁으로 바뀌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는 곧 예고르 가이다르 전총리서리가 지난 91년 연초부터 추진해온 급진적 가격자유화정책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며 앞으로는 현실적인 개혁정책이 추진될 것임을 뜻하는 것이다. 체르노미르딘 총리는 5일 의회연설을 통해 『지금까지의 개혁정책은 국민들에게 고통만을 강요할 뿐』이라고 지적하고 『앞으로 사치품을 제외한 생필품에 대해서는 정부가 개입하는 것만이 물가의 안정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러시아의회 등에서 제시한 각종 자료에 따르면 지난 1년동안 러시아경제의 규모는 약 5분의1 정도가 줄어든 반면 인플레이션은 2천%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이는 급진개혁정책의 부작용이 매우 심각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체르노미르딘 총리의 이번 조치는 그동안 가이다르 전총리서리가 개혁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국가통제의 철폐와 생산자들에 대한 정부보조금의 철폐를 주장한 것과는 상반되는 것이다.생산자에게 보조금을 지원하고 최소한이나마 정부가 개입하기로 한데서 앞으로 개혁정책의 전반적인 노선변경도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체르노미르딘 총리는 이미 이같은 정책노선의 수정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으로 조만간 내각을 소집,「개혁 2개년계획」을 마련할 예정이다.이 계획안에는 생산량의 증대,군산복합체의순수민간업체로의 전환등을 포함한 모든 경제정책의 우선순위를 새로 정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체르노미르딘 총리가 이같은 정책을 집행해 나간다면 가이다르 전총리서리 때와는 달리 의회와 행정부 사이의 마찰이 그리 크지 않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체르노미르딘 총리가 추진하게 될 점진적인 개혁이 경제를 얼마나 회생시켜 국민들의 생활수준을 높여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확답을 하기가 어려운게 오늘 러시아의 형편이다.
  • 대한매일신보에서 서울신문까지(겨레의 맥박으로 89년:2)

    ◎매신의 구국활동/국채보상운동 주도… 항일 선봉에/「황무지 개간」반대·의병항거 대서특필/일제탄압불복… 식민정책 부당성 고발/박은식·신채호 등 반일언론인 포진… 절대적 국민신뢰 확보 노일전쟁이 일어난 1904년부터 한일합방이 되던 1910년은 일본이 한반도에서의 독점적 우위를 확보하고 침략정책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던 시기이다.바로 이러한 격동기에 발행되어 항일구국의 최선봉에 섰던 가장 대표적인 신문이 있다면 대한매일신보를 꼽지 않을 수 없다. 이 신문의 소유자이자 발행인은 영국인 배설(ErnestThomasBethell)이었으나 신문발간의 실질적인 책임자는 양기탁이었다.배설은 노일전쟁 취재차 한국에 왔던 영국 데일리 크로니클의 통신원이었으며 양기탁은 당대의 언론을 이끌던 논객이자 우국지사로 추앙받던 인물이다. 민족의 대변지 대한매일신보는 이들의 혈기와 의기가 합쳐져 1904년 7월18일에 창간됐다.영문 코리아 데일리 뉴스(The Korea Daily News)와 함께 창간된 대한매일신보는 당초 한호 6면으로 이중 2면은 한글 전용이었고 4면은 영문판으로 할애했다. ○장지연사건 실어 파문 이 무렵은 일본의 한국 황무지개간권 요구를 반대하는 국민운동이 전국에서 분출되던 때이기도 했다.당시 한국과 일본의 신문들은 제각기 황무지개간권 요구를 비판하거나 옹호하고 나섰다.이런 시기에 더구나 민족진영이 가세해 창간된 대한매일신보가 이를 좌시할리 만무였다.논조는 당연히 반일이었다. 대한매일신보는 일본의 황무지개간권이 한반도의 영구식민지화를 꾀하려는 책동임을 지적,그 부당성을 널리 알리는 것으로 첫 포문을 열었다.이를 시발로 「장삼씨의 문뎨 □론」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일본 시사신보의 개간권 옹호론을 예리한 필치로 찔러버렸다. 창간초부터 반일논조의 중심에 서서 항일민족운동을 고취하는데 앞장에 나선 것이다.그러나 이 신문은 창간시 미비했던 시설을 갖추느라 5개월의 휴면기간을 거치지 않을 수 없었다.다시 속간되기는 이듬해 8월11일이었다.속간하면서 한글전용을 국한문 혼용판으로 바꾸는 한편 영문판을 분리해 2종을 발행했다. 새모습으로 재출발한 대한매일신보의 반일언론은 다시 불을 뿜기 시작했고 이를 눈의 가시로 여긴 일본은 외교적 탄압으로 배설추방공작을 폈다.일본인들이 발간하던 한성신보·대동신보·대한일보등이 대한매일신보를 비방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그러나 대한매일신보의 반일논조는 더욱 뜨거워져 황성신문이 정간당한 사실과 장지연의 구속을 대서특필하는등 일관된 자세를 고수했다.이러한 항일논조에 대해 고종도 은밀히 격려,지원을 아끼지 않았다.1906년 2월10일 고종은 「대한매일신보 사장 배설로 신문급 통신에 전권자로 특히 위임할 사」라는 친필 특허장을 내리는 한편 매월 1천원을 신문사 운영비로 보조해준 것이다. 용기백배하게된 대한매일신보는 일본의 집요한 탄압에도 불구,또다시 일본을 궁지에 몰아넣는다.런던 트리뷴지에 실렸던 고종의 밀서사진을 전재,밀서가 근거없다고 주장해온 일본의 허위를 폭로(1907년 1월16일자)한 것이다. 대한매일신보는 그 직후 국채보상운동의 총합소가 되어 구국운동의 새지평을 연 신문이기도 했다.이 운동은 대한제국이 일본으로부터 빌린 돈 1천3백만원을 국민들의 성금으로 거두어 갚자는 자발적인 민중운동이었다.대구에서 시작된 이 운동의 취지는 많은 국채를 나라의 재정으로는 상환할 길이 없으니 장차 한국의 강토가 일본의 예속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국민의 성금으로 이를 갚자는 것이었다. 그 취지서를 크게 실어 전국적인 호응을 얻게 한것이다.고종도 호응하여 담배를 끊었다는 보도를 낸뒤부터는 여기에 자극받은 지도급 인사는 물론 부녀자들까지 참여,반지와 패물을 다투어 성금으로 내는등 적극적인 성원을 이끌어 냈다. 당초 이 운동은 전국적인 조직체를 가지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따라서 각처에서 거두는 성금을 통합된 조직으로 일원화해 적립해야한다는 논의가 일게 됐고 그결과 결성된 것이 국채보상지원금 총합소였다.1907년 3월에 설립된 이 총합소는 임시사무소를 신보사에 두기로 했으며 양기탁이 재무를 맡아 대한매일신보사는 이 운동의 실질적인 본부가 되었다. 이 운동은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는 민족의 일대 각성이었으며 그 역량의 과시였다.국채보상운동의 중심기관이 되면서 사세를 크게 신장하게된 대한매일신보는 이해 5월23일 한글전용판을 다시 발간,기존의 국한문판·영문판과 함께 3종의 신문을 발행하게 되어 미상불 영향력있는 최대의 민족지로 성장했다. 이때의 발행부수는 3종을 합쳐 1만부를 넘어섰다.이는 한국언론사상 기록적인 최고의 부수였으며 이해 하반기에 접어들면서부터는 더욱 늘어나 서울에서 발행되던 신문 전체의 발행부수를 앞지를 정도였다. 사세가 이처럼 커지면서 대한매일신보는 일본의 대한정책을 더욱 날카롭게 비판,헤이그 밀사사건과 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고종이 퇴위한 사실을 세상에 알렸다.이어서 고종퇴위 직후의 대한제국 군대해산과 이에 불만을 품은 군인들의 항거운동을 낱낱이 보도했다.이같은 보도는 전국의 많은 의병들에게 무장항쟁을 촉발시키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주기도 했다. ○고종퇴위·군해산 보도 일본의 입장에서 대한매일신보의 이러한 끈질긴 항일언론이야말로 한반도 식민지화정책을 수행하는데 있어 가장 큰 장애요인이었다.특히 이 신문의 필진이 지닌 칼날같으면서도 설득력 짙은 필봉은 일본인들의 가슴을 서늘하게 하고도 남는 것이었다. 더구나 당시 대한매일신보가 갖는 국민적 신뢰도는 거의 절대적이었으며 인기 또한 높아 한부의 신문을 여러사람이 돌려가며 읽을만큼 사회적 영향력은 막강했다. 『한국내 신문이 가진 권력이란 비상한 것이라 이등의 백마디 말보다 신문의 일필이 한인을 감동케하는 힘이 매우 크다.그중에도 지금 한국에서 발간하는 일외국인의 대한매일신보는 확증이 있는 일본의 제반 악정을 반대하여 한인을 선동함이 연일 부절하니 이에 관하여는 통감이 책임을 질밖에 없다』 이렇게 개탄한 초대 통감 이등박문의 말을 재음미하면 대한매일신보 지면 한장한장마다에는 모두가 민족의 독립함성이 응고 되었음을 익히 알수 있다.일본의 강압속에서도 대한매일신보가 항일논조와 구국운동의 구심점이 될수 있었던데는 이 신문이 영국인 소유여서 치외법권을 누린 탓도 물론 있다.그러나 신문제작을 총괄했던 양기탁을 비롯,박은식·신채호등 민족사상에 투철했던 항일언론투사들이이 신문을 그렇게 이끌었다는 사실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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