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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르비,미에 “냉전부활” 경고/미의 대소정책 변화에 우려 표시

    【모스크바 AP UPI 연합】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은 5일 소련에 대한 미국의 정책이 불리하게 변화되고 있음을 감지하고 있다고 우려를 표명하고 이같은 변화가 냉전의 부활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한 것으로 소련 관영 타스통신이 보도했다. 타스통신은 이날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호주의 방송·출판왕인 루퍼드 머도크와의 면담에서 미국의 대소정책 변화에 대한 우려를 밝히면서 이같은 변화가 미국이 발표하고 있는 성명서뿐만 아니라 일부 경제·정치적 조치에서도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이 통신에 따르면 고르바초프는 미소 관계가 현재 매우 중요한 순간에 있으며 조심스럽게 처리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그는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와 부시 행정부에서 성취된 것들이 위험에 빠진다면 세계는 다시 심각한 냉전이나 혹은 반냉전,그렇지 않을 경우 적어도 국제공동체 전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정치적 실의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고르바초프는 이어 소련에서 나타나고 있는 무질서는 『모든 국가 특히 우리와 같은거대한 국가가 완전히 새로운 국가로 탈바꿈하는 과정에서는 불가피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소련의 「혼란적 요소」들에 대해 강압정책을 행사할 생각을 갖고 있지 않다고 지적하고 『단순히 이들을 억압하는 것은 파멸을 가져오는 과거로의 반전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 구설수에 오른 미 전직 대통령가

    ◎레이건가/“낸시,백악관 시절에 시내트라와 밀회”/케네디가/가족별장서 강간사건… “용의자는 조카” 로널드 레이건 전 미 대통령 부부는 레이건이 캘리포니아 주지사로 있던 시절 함께 마리화나를 피운 적이 있으며 낸시 여사는 백악관 안주인으로 있을 때 인기가수 프랭크 시내트라와 오랫동안 밀회를 즐긴 것으로 7일 공개된 한 전기에서 밝혀져 충격을 주고 있다. 키티 켈리라는 작가가 집필한 『낸시 레이건,허가받지 않은 전기』라는 책은 자기중심적이고 변명일색이며 도량이 좁은 전직 퍼스트 레이디 낸시의 생활에 관한 비밀스럽고 때로는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며 뉴욕 타임스를 비롯,주요 신문들은 이 전기를 1면에 대서특필했다. 이 책은 또 레이건 전 대통령이 낸시 여사의 임신으로 함정에 빠져 결혼에 이르게 된 것으로 생각했으며 결혼 후에도 여배우 크리스틴 라손을 비롯,다른 여성과 계속 사귀었다고 주장했다. 이 책에 따르면 백악관 안주인 시절 전국적인 마약퇴치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던 낸시는 한때 알프레드 블루밍데일사가 주최한 어느 파티에서 남편 레이건 대통령과 함께 마리화나를 피웠다는 것이다. 블루밍데일의 전직 임원인 셀던 데이비스는 낸시 여사와 시내트라와의 관계는 레이건이 캘리포니아 주지사로 있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 수년간 지속됐으며 레이건이 대통령으로 재직하는 동안 시내트라는 자주 뒷문을 통해 백악관을 출입,낸시와 만나 수시간 계속되는 점심을 함께하곤 했을 뿐만 아니라 시내트라와 함께 있는 시간에는 대통령의 호출을 포함 어떤 방해도 허용되지 않았다고 이 전기는 주장했다. 미국 제1의 정치가문으로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을 비롯,끝없이 크고 작은 화제를 뿌리고 있는 케네디가가 이번에는 플로리다에 있는 가족 별장에서 일어난 강간사건으로 또다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지난달 30일 새벽 플로리다주 팜 비치의 케네디가 별장지역에서 새벽 3시30분과 4시30분 사이에 근처에 살고 있는 29세의 한 여인이 강간을 당했다고 경찰에 신고함으로써 문제는 시작됐다. 이 여인은 약간의 부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했으나 곧 퇴원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그녀 변호사의 얘기로는 피해자가 이번 사건이 법정에서 진상이 가려지기를 원한다면서 굳게 입을 다물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언론들이 밝혀낸 내용에 따르면 피해자는 사건 발생 전날인 29일 밤 한 나이트클럽에서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 의원과 그의 아들 패트릭,조카인 윌리엄 케네디 스미스를 만났다는 것이다. 피해자와 자리를 함께한 이들 세 사람 중 케네디 상원 의원의 누이의 아들인 스미스가 이번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을 받고 있다. 올해 30세의 스미스는 조지타운 의과대학의 4학년 학생으로 자신이 용의자로 부각되자 지난 3일 짤막한 성명서를 발표하고 결백을 주장했다. 그는 머리카락과 혈액샘플을 경찰에 제공할 것이라고 밝혔다. 피해자의 친구이자 술집 종업원으로 이 사건의 주요 증인이 될 것으로 보이는 마이클 카손(27)양은 그날 밤 나이트클럽에서 케네디 상원 의원 부자를 만났고 혼자 그녀 차로 케네디 별장에 간 뒤 그곳에서 이들 두 사람과 술을 마셨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 「유엔가입」 초청외교 전개/정부,월말 스파이어즈차장 초청

    ◎8월 케야르총장 남북한방문 교섭 정부는 이달말 유엔의 로널드 스파이어즈 총회담당사무차장 등 3명의 유엔 고위인사들을 초청하는 것을 시작으로 우리나라의 연내 유엔가입 실현을 위한 본격적인 초청 및 방문외교를 펴기로 했다. 정부의 한 고위소식통은 18일 『이상옥 외무장관 등은 전 미 국무차관인 스파이어즈 사무차장 등 방한하는 유엔 고위인사들과 면담을 갖고 한국의 유엔가입문제 및 가입후 국제평화에 기여방안 등을 협의할 것』이라며 『이들의 방한은 지난해말 제45차 총회의 유엔가입지지 분위기에 이어 한국의 유엔가입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스파이어즈 사무차장은 오는 4월2일 서울 서초동 외교안보연구원에서 국제연합 한국협회(회장 유창순)가 주최하는 강연회에 참석,「새로운 국제질서와 유엔의 역할」이라는 제목의 연설을 할 예정이다. 한편 유종하 외무차관은 이날 상오 서울 시내에서 야나기 겐이치(유건일) 주한일본대사와 만나 우리의 유엔가입문제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고 이에대한 적극적인 협조를당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이와함께 우리의 단독유엔가입에 앞서 남북한 동시가입 노력의 일환으로 북한의 유엔가입권유를 위해 오는 8월쯤 페레스 데 케야르 유엔사무총장의 남북한 동시방문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 지미 카터/세계평화 조성자로 맹활약(특파원코너)

    ◎미 대통령 퇴임 이후의 발자취를 보면/에티오피아 내전·시리아문제 등 협상 중재/인권·빈민구제 등 16개난제 해결노력 계속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지미 카터 전미국 대통령은 10년전 대통령 재선 실패의 상처를 씻고 재기에 성공했다. 그는 미국서 가난한 사람을 위한 주택건설에 앞장서다가 어느새 아프리카로 달려가 내전종식 협상을 중재하고 중미의 위험지역에서 선거 감시역을 담당하는 등 세계를 상대로 동분서주하고 있다. 백발과 눈가의 주름이 66세라는 나이를 감추지 못하게 하는 이 독실한 침례교 신도는 초헌법적 역할을 통해 훌륭한 전직 대통령상을 만들어 가고 있다. 그는 다루기 어려운 인류문제에 조용히,그리고 조직적 방법으로 달라붙어 레이건­부시 시대를 살아왔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전직 대통령의 새로운 행동규범을 보여주었고 미 민주당의 자유주의 유산에 자신의 족적을 다시 남겼다. 카터를 제외한 다른 전직 대통령들은 한결같이 자기 이익을 추구하며 말년을 보내고 있다. 1980년 선거에서 카터를 패배시킨 로널드레이건은 전직 대통령의 「딱지」로 일본에서 2백만달러를 챙기는 탐욕성을 드러냈고 카터의 전임자인 제럴드 포드는 사기업 중역실에 이름을 걸어 놓고 연 1백만달러의 수입을 올리고 있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불명예 퇴진한 리처드 닉슨은 염치없게도(?) 원로 정치인으로서의 명망 회복을 노려 두번째 책을 펴냈다. 이들은 또 자신의 정치역정을 기리는데만 봉사할 기념도서관을 건립하면서 부자나 저명인사와 어울려 골프로 소일하고 있다. 물론 카터도 자신의 공식 기록물을 보관할 도서관을 건립중이다. 그러나 이 도서관은 역사물 이상이 될 것으로 보이며 다른 어느 전직 대통령의 기념도서관 보다 일찍 개관될 예정이다. 카터는 한걸음 더 나아가 이타적인 정치문제를 다룰 기구도 세웠다. 연 1천7백50만달러의 예산과 1백10명의 요원을 거느린 카터 센터가 그것이다. 지난 10년간 그는 기념도서관 및 카터센터 건립기금으로 1억5천만달러 이상을 모금했다. 조지아주 아틀랜타시에 소재한 카터센터는 인권·교육·빈자문제 및 중동·중남미·아프리카의지역분쟁 해결지원 사업 등을 벌이고 있다. 아동 생명구출특별대책반,지구촌 2000년 국제협상망(INN) 자유선거정부 수뇌회의 등의 명칭을 가진 이 사업들은 카터로 하여금 선거정치의 제약을 받지 않는 대통령처럼 활동케 한다. 카터 일가는 이 센터내에 작은 아파트를 두고,한달에 닷새는 고향인 조지아주 플레인스의 사저를 떠나 여기서 머문다. 플레인스 집엔 백악관,국무성 직통 보안전화가 가설돼 있어 카터는 부시 행정부와 비밀사항을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다. 레이건 시대와는 달리 최근 그는 부시 대통령 및 베이커 국무장관과 정기적인 접촉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카터가 조지아에 없을 때면 흔히 그는 각계의 헌금자가 마련해준 비행기를 타고 외국에 가 있다. 지난 봄 그는 중동문제 해결을 위한 3번째 여행에 나서 시리아의 하페즈 아사드 대통령을 만났다. 그후 그는 야세르 아라파트 PLO(팔레스타인해방기구) 의장을 만나 이스라엘을 화나게 했다. 작년에 그는 두차례 아프리카로 날아가 근 30년간 계속되고 있는 에티오피아 내전을 종식시키기 위한 협상을 중재했다. 카터가 니카라과 좌익 정권의 다니엘 오르터가 대통령에게 선거결과에 승복하도록 설득했던 일은 잘 알려진 일이다. 이에 앞서 그는 파나마에서 선거부정을 자행하는 마누엘 노리에가의 부하들에게 『너희들은 정직한 국민이냐,도둑이냐』라고 호통을 쳐 주의를 깜짝 놀라게 했다. 카터의 뒤에는 세계 각국의 인권을 감시하는 2명의 상근 참모가 있다. 카터는 이들로부터 한달에 한 두차례 브리핑을 받는다. 국제사면위나 휴먼 워치 등의 인권단체에 카터는 그들의 청원이 통하지 않는 난제를 풀어주는 「귀중한 무기」다. 카터와 그의 부인 로절린은 각국의 인권문제에 개인적으로 개입,매년 30∼40명의 구속자를 대신해 해당국 정부 수뇌에게 전화를 걸거나 편지를 쓴다. 그결과 몇몇은 생명을 건졌고 수백명의 수감자가 조용히 풀려났다. 카터는 어려운 문제의 해결에 기꺼이 자기 개인의 위신을 걸고 덤벼든다. 하이티가 좋은 예다. 얼마전 거기서 그는 이 나라 최초의 공명선거를 실시하기 위한 협상을 시도하면서 1주일을 보냈다. 카터는 선거가 실시될 수 있으며 유엔이 대규모 선거 감시단을 보낼 경우 극도로 부패된 이 나라에서도 공명선거가 가능하다는 확신을 갖고 귀국했다. 그후 유엔은 카터가 말한대로 충분한 선거 감시단 파견기금을 마련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있거나 하고 있는 분야에는 손을 대지 않는다. 공백을 메우는 것이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이다』 카터가 최근의 한 인터뷰에서 한 얘기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과 같은 국제분쟁의 해결을 위해서는 유엔이라는 광장이 마련돼 있지만 에티오피아 내전이나 레바논 내전,그리고 팔레스타인 문제와 같은 내부분쟁의 해결을 돕는 광장은 없다. 이 간격을 메우기 위해 카터는 아틀랜타에 국제협상망(INN)을 세웠다. 지금 INN은 전세계에 걸쳐 약 16개의 내전·혁명·기타 내부 갈등을 예의 주시하면서 적대세력들간의 협상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다. 카터가 전화기를 들어 수단의 반군지도자 존 기랑이나 에티오피아 국가수반 멩기스루를 찾으면 아무도 통화를 거부하지 않는다. 카터의 철저한 중립성 견지가 이들에게 「카터는 정직한 브로커」라는 인식을 심어줬기 때문이다. 카터에게 정치적 야망은 없다. 그의 가장 야심적인 목표는 「세계평화 조성자」로 봉사하는 것이다.
  • 대처의 “위대한 퇴진”/곽태헌 국제부기자(오늘의 눈)

    「철」은 녹이 슬기를 거부했다. 「철의 여인」인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 그녀는 역시 비범한 정치인이었다. 대처는 22일 보수당 당수직 사임의사를 천명,15년간의 당수 및 11년간의 총리 재임에 종지부를 찍는 용단을 내려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대처 총리는 지난 20일의 보수당 당수 경선에서 2백4표를 획득,1백52표를 얻은 마이클 헤즐타인 전 국방장관의 도전을 52표차로 따돌렸으나 2위와 15%의 표차를 내야 된다는 규정에 밀려 재선에 실패했었다. 물론 대처는 오는 27일의 2차투표에 나설 경우 승리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으나 현직 총리가 1차투표에서 이기지 못한 데 대한 정치도의적 책임을 지고 스스로 물러난 것이다. 「상처뿐인 영광」보다는 자신과 보수당,나아가 영국을 위해 출마포기라는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대통령의 임기에 제한이 있는 우리의 대통령제와는 달리 영국의 의원내각제에서는 총리의 임기에 대한 제한이 없으며 총선에서 승리할 경우 계속 집권이 가능하다. 대처가 집권하기 전 영국은 재기불능의 나라처럼 보였다. 「대영제국」의 영광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늙고 병든 땅이었다. 심한 인플레와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되는 「영국병」 노조파업으로 경제는 파탄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더욱 큰 문제는 국민의 사기였다. 1등국민의 자존심은 사라진 지 오래였으며 미국 등지로 이민하는 사람들이 급증하고 있었다. 대처는 집권하자 단호하고 강력한 리더십으로 노조와 전면대결을 벌였다. 그는 끝내 「영국병」을 치유하는 데 성공했고 82년 포클랜드전쟁에서의 승리는 영국민의 사기를 되살려주었다. 국영기업의 과감한 민영화와 자유시장경제 시책으로 경제에 활기를 불어 넣었으며 로널드 레이건 전 미 대통령과 함께 신보수주의를 대변하는 쌍두마차로 자유세계를 이끌었다. 그런 대처도 시대의 흐름을 이겨내지는 못한 것 같다. 동구가 무너지고 독일이 통일되며 유럽이 한지붕 아래 모이는 역사의 격랑 속을 헤쳐나가기에는 「대영제국의 영광」만으로는 부족했는지 모른다. 이제 「철의 장막」의 해체와 함께 「철의 여인」도 밀려나고 있다. 이것이 역사의흐름이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물러나야 할 때 물러날 줄을 안 위대함을 다시 한 번 보여주었다. 지금 기자는 우리의 「이승만」과 「박정희」,그리고 오늘의 정치지도자들을 생각하고 있다. 이 겨울이 지나면 이 땅에도 봄이 오리라.
  • 용퇴로 더 빛나는 11년의 치적(막내린 「대처 영국」:중)

    ◎단호한 외교·내치로 「대영긍지」 회복/포클랜드전 승리·북아일랜드 이탈 저지/국영기업 민영화… 80년대 번영 구가 마거릿 대처 영국총리의 사임이 발표되던 날 영국증권시장에서는 주가가 올랐고 유럽외환시장에서 파운드화가 모처럼 강세를 보였다. 대처의 사임이 증시에서 호재로 작용되고 있는 것이다. 뭔가 좀 풀리지 않겠는가 하는 기대감 때문이라고 증권전문가들은 분석했다. 이는 다시 말해 대처로 인해 영국사회가 막히고 죄어있었다는 얘기로 풀이할 수 있다. 주민세의 신설,실업률의 증가,인플레,국제수지적자누증­이런것들이 대처집권 11년의 공과를 평가하는 데 있어 과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이다. 지난 88년 사회보장제도를 개혁하면서 노동자들에게 없던 세금을 하나 더 물렸는데도 그때는 별일없이 넘어갔는데 올봄 주민세법을 만들면서는 대대적인 저항에 부딪혔다. 야당인 노동당은 주민세를 「새로운 인두세」라고 몰아붙였고 거리에서는 연일 반대시위가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대처는 특유의 고집으로 이를 그냥 밀어붙였다. 그리하여 대처의 인기는 그녀가 집권한 이래 최악의 상태인 23%선으로 급락했다. 이번에 대처의 당권에 도전,파란을 일으킨 장본인인 마이클 헤즐타인의 대표적인 집권공약이 「주민세의 즉시 전면재검토」인 것을 보면 말썽많은 주민세의 강행이 결국은 화를 부른 것임을 잘알 수 있다. 또 그럭저럭 견뎌 나오던 대외교역사정도 나빠져 지난해에는 2백70억달러의 무역수지 적자를 기록,나라살림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이같이 내치부문에 형성된 악조건들과 함께 외치에서는 유럽(EC)통합과 관련한 대처의 유연하지 못한 대응자세가 지적사항으로 기록되고 있다. EC통합에 원천적으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대처는 다른 회원국들이 한걸음씩 EC통합을 위해 새로운 단계를 밟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보조 맞추기를 거부해 왔다. 안으로는 나라살림에 주름살이 잡히기 시작했고 국민생활이 다시 빛을 잃어가고 있으며 대외적으로는 자칫 잘못하다가는 고립된 섬나라로 내동댕이쳐질 염려가 있다는 주장들이 대처사임 당위론의 줄거리이다. 하지만 그런저런이유만으로 총리가 바뀌어야 하는가에 대해 아쉬움을 표시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대처 11년에 대한 평점을 공쪽에 더 많이 쳐주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른바 「영국병」으로 만신창이가 된 영국을 다시 일으켜 국민들에게 자부심과 긍지를 되살려준 게 바로 대처리즘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대처의 사임이 발표된뒤 한 런던시민은 『대처리즘을 박물관에 넣기는 너무 이르다』고 했고,보수당 중진인 존 윌킨스 의원은 『영국사람들 모두가 서운하게 생각한다』고 전했다. 대처는 집권기간동안 「전쟁」으로 표현되는 큼직한 과제들을 강철같은 의지와 신념과 추진력으로 밀고 나가 멋진 해결책을 찾아내곤 했다. 그는 집권하자마자 좌익 노동당의 장기집권으로 찌든 국가사회를 바로잡기 위해 자유시장경제를 바탕으로 하여 과감한 개혁조치를 단행했다. 그동안 사회주의 경제체제아래서 국영으로 운영되던 영국석유회사,브리티시 에어라인,브리티시 텔레콤 등 굵직한 회사들을 민영화했다. 정부를 쥐고 흔들던 노조에 정면대결을 선언,1년여씩이나 끌던 장기파업에도 불구하고 노조의 파워를 약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포클랜드전쟁에서의 승리(82년)는 영국사람들의 사기를 한껏 드높였음은 물론이다. 북아일랜드 분리주의자들이 보수당 전당대회장에 폭탄을 터뜨려 자신을 암살시키려 했고 단식투쟁으로 그들이 10명씩이나 목숨을 끊어도 눈하나 깜짝 않았다.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첫 손님이기도 했던 대처는 고르바초프는 물론 로널드 레이건,조지 부시,프랑수아 미테랑,헬무트 콜 등 거물들과 수시로 만나고 어깨를 나란히 함으로써 국제정치무대에서 자신의 위상은 물론 영국이 차지하는 위치를 한껏 고양시켜 왔다. 이같이 대처 11년이 쌓아온 업적들은 최근에 지적되는 몇몇 악재들을 상쇄하고도 남는다는게 대처의 퇴임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는 사람들의 주장인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정변도 아니고 총선에서 패배한 것도 아니며 돌이킬 수 없는 실정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도 스스로 권좌에서 물러난 대처의 행동은 또한번 「철의 여인」다운 용기와 결단력을 보여준 것이라고 평하고있다.
  • 데이브드 S 브로더 미 정치평론가(해외논단)

    ◎흔들리는 「보수정권」… 고민하는 미ㆍ영/부시ㆍ대처,인기ㆍ신뢰 떨어져 위기직면/“후계 부재속 같은 운명” 차기집권 암운 미 공화당의 하원 원내총무로서 얼마 전 대통령의 세금인상안에 반대,부시 대통령에게 정면으로 반기를 들어 파문을 일으켰던 뉴트 깅글리히와 지난 1일 부총리직에서 사임,영국 보수당과 마거릿 대처 총리 정부를 발칵 뒤집어놓은 영국의 세련된 외교관 제프리 하우경을 비유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터무니없어 할 것이다. 그만큼 두 사람 사이에는 많은 차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하우 전 부총리는 그가 가장 화가 나 있을 때라도 깅글리히가 가장 조용하게 얘기하는 것보다도 더 조용히 얘기하는 사람이다. 또 깅글리히가 흔히 자신과 의견이 다른 상대방의 주장을 「부도덕하다」는 식으로 매도하는 데 비해 하우경은 기껏해야 「나를 조금 화나게 한다」는 것 이상의 표현을 쓴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 보수당의 운명과 미 공화당의 운명간에 유사점을 간파한 사람이라면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거의 비슷한 시기에 미ㆍ영 두 나라의 집권당에서 일어나는 내부분란의 조짐에 흥미를 갖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미국의 중간선거가 치러지기 바로 직전 대처 영 총리는 두 가지 큰 충격을 받았다. 하나는 당선이 확실하다고 생각되던 보궐선거에서 보수당 후보가 참패를 당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앞서 얘기한 하우 부총리의 사임이다. 유럽 경제통합에 대한 대처 총리의 경직된 태도에의 항의가 하우 부총리의 사임이유. 그의 사임으로 대처는 첫 집권당시의 제1세대 각료들 중 현재까지 내각에 남아 있던 마지막 1명이자 영국내 보수주의자들 중 가장 인기있는 한 사람을 잃게 됐다. 이는 또 대처자신의 판단력과 지도력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지게 됐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편 이와 비슷한 시기에 중간선거를 앞두고 치러진 미국내 여론조사 결과는 부시 대통령과 그가 이끄는 공화당에 대한 지지가 지난 2년내 최저수준으로 떨어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정치적 협력관계를 유지해온 미ㆍ영 두 나라의 역사를 되돌아볼 때 이처럼 두 나라의 집권당이동시에 인기를 잃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으로 돌릴 수만은 없을 것 같다. 대처 총리는 지난 79년 국내경제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 노동당 정부를 누르고 보수당의 집권을 이끌었다. 당시 제임스 캘러헌 총리는 또 노동당내의 좌익세력들에 대한 통제력도 잃고 있었다. 그로부터 1년 뒤 로널드 레이건이 스태그플레이션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민주당을 누르고 공화당의 승리를 이끌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지미 카터 역시 영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민주당내 좌익세력들로부터의 내부도전에 고전하고 있었다. 대처와 레이건은 모두 과거와 급속히 단절함으로써 기업투자를 위한 부의 축적을 격려하고 복지국가의 기능을 억제하는 쪽으로 나라를 이끌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레이건과 대처는 또 보수주의 그리고 보수당과 공화당의 대중적 이미지에 대해 새로운 정의를 내리게 됐다. 대처와 레이건은 첫 임기중 모두 경제적 곤경에 직면했다. 그리고 대처와 레이건은 모두 군사전략의 성공으로(대처는 83년의 포클랜드전쟁,레이건은 84년의 그레나다 침공) 재선에 큰도움을 받았다. 지난 87년 대처의 선거유세를 취재했을 때 나는 부시가 88년의 미 대통령선거 후보로서 어떤 문제점을 안고 있는지에 관계없이 공화당이 미국내에 조성되고 있는 「이제는 변화를 추구할 때」라는 여론을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 지도자에 대해 싫증을 느끼는 것으로 치면 레이건­부시로 이어지는 미국의 치어리더식 지도력에 미국민이 느끼는 것보다 대처의 강압적인 지도스타일에 영국민이 느끼는 반발이 훨씬 강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처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것은 노동당이 집권을 위한 일관된 계획의 추진여부는 별개로 치더라도 영국내의 모든 반보수당 여론을 하나로 모으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88년 미국의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도 역시 똑같은 결점을 나타냈으며 결국 모처럼의 기회를 이용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영국 노동당의 닐 키노크 당수가 추진한 정책 개선과 공보활동의 강화는 매우 인상적이다. 또 워싱턴에서도 미 상하원내의 민주당의 새 지도자들이 영국에서와마찬가지로 당의 새로운 이미지 구축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90년 가을을 맞아 이제 우리는 대처 영국총리가 유럽의 급속한 경제통합 움직임과 관련,당내부로부터 중요한 내분에 직면해 있듯이 부시 미 대통령은 예산적자문제를 처리하는 대통령의 방식과 관련,당내부의 반발세력으로부터 거센 비난에 봉착했음을 보고 있다. 또한 미국과 영국은 모두 경제가 심각한 문제들로 몸살을 앓고 있는 실정이다. 인플레와 실업률은 미국보단 영국이 훨씬 더 높지만 그렇다고 부시의 경제정책이 대처의 경제정책보다 더 효율적이라고도 결코 할 수 없다. 또 한 가지 영국 보수당과 미 공화당 사이에는 매우 중요한 유사점이 있다. 대처 총리에 대한 많은 불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다음 선거에서 또다시 보수당 후보로 나설 것을 결심한다면 보수당내에서 대처를 대신할 사람을 찾기가 어려울 것이다. 마찬가지로 공화당내에서도 오는 92년 대통령선거 때 어느 누구도 자신의 자리를 내놓고 부시의 후보 재지명에 도전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영국의 보수당이나 미공화당은 모두 현지도자에 대한 국민들의 판단여하에 따라 부침을 겪게 될 것이다. 심판은 대처 총리의 보수당이 먼저 받게 될 것이다. 대처 총리는 92년 6월 선거를 치러야 하는데 만일 정황이 호전됐다고 생각되면 선거일정을 좀더 앞당길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대처 총리가 승리한다면 부시의 재선도전 전망도 한층 밝아진다고 할 수 있다. 반대로 보수당이 패배한다면 이는 공화당에겐 심각한 경고가 될 것이다. 정치적인 운명론을 주장하자는 건 아니다. 그러나 미ㆍ영 두 나라 정치의 변천과정이 너무도 오랫동안 비슷한 과정을 겪었기 때문에 두 집권당 사이의 유사점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주목하면 다음번엔 워싱턴에서 그와 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다.
  • 「독일과 한반도의 통일방식」 세미나 중계

    ◎“「흡수통합」보다 「협의통일」 바람직”/미ㆍ소 관계 변화,대북 영향엔 한계/북방정책ㆍ유엔 단독가입은 평양 더욱 고립시켜/김일성 사후에나 실질대화 가능 독일이 통일된지 한달이 넘었다. 독일의 분단과 통일은 한반도의 분단과 곧잘 비교돼 왔으며 분단 반세기동안 조국의 분단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우리에게는 독일통일 과정에 대한 정밀한 비교 분석이 요구되고 있다. 5일 한국 국제문화협회는 「분단국가의 통일­독일과 한국의 비교」라는 주제로 힐튼호텔에서 국제학술회의를 열었다. 5일 회의에는 7편의 논문이 발표됐는데 이 가운데 로널드 A 모스의 「한국의 통일:계획할 수 없는 것을 계획하며」는 독일통일방식의 한반도적용 가능성을 제기해 주목을 끌었고 요제프 요페의 「독일통일:방법과 이유 그리고 왜 지금인가」라는 논문은 독일과 한국의 차이점을 강조해 앞의 논문과 크게 대비됐다. 또한 서대숙교수(미 하와이대)는 「북한의 변화와 남북한 관계」라는 논문에서 남북한 관계가 당분간 진전되기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모스박사(프린스턴대 역사학박사ㆍ미 경제전략연구소 부소장)는 ▲급격한 동독의 변화와 동서독 통일의 패턴이 한반도에서도 재현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고 ▲김일성주석의 고려연방제와 콜총리가 지난해 밝힌 독일 재통일방안 사이에는 유사점이 있으며 ▲한반도의 통일과정에서 일본의 역할이 증대될 것이며 ▲동북아시아의 집단안보를 위한 새로운 협력체제가 한반도통일에 도움을 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김주석의 제안과 콜총리의 방식은 위로부터의 혁명,연방제방식의 채택,경제협력ㆍ운송ㆍ통신분야의 교류를 촉진시키고자 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모스박사는 『일본 장기신용은행의 추정에 따르면 한반도가 통일될 경우 10년동안 연간 1백50억달러 내지 2백억달러의 「통일비용」이 소요되는데 한국의 부담능력은 그리 크지 않다』며 『거의 유일하게 이 비용을 부담할 수 있는 나라가 일본이어서 통일 후 한반도에서 일본의 역할이 커질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그는 따라서 한국인들이 통일 후 일본에 대한 경제예속성이 심화될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그러나 동독 정권해체의 주요 요인이 두 체제간의 큰 소득격차와 뚜렷한 생활수준 차이였다면서 이런 면에서 남한은 북한인들에게 독일의 경우보다 더 적은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도 아울러 지적했다. 요페박사(하버드대교수)는 베트남도,독일도 한반도통일에 대답을 줄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독일 통일이 무력사용없이 가능했던 것은 안전이 보장됐기 때문이라면서 한반도에서는 전쟁이 있었기 때문에 「무력사용포기」와 「실제적인 위협의 부재」라는 독일의 여건이 결여돼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분단된 독일은 동서냉전의 중심지로서 미소 관계의 변화에 따라 양독관계가 변화하게 됐지만 한반도는 독일과 같이 직접적으로 미국과 소련이 대치하고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미소 관계의 변화가 독일과 같은 극적인 변화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주장했다. 또 89년 동구의 혁명이 보여주듯이 동독 또한 혼자만의 힘으로 설 수 없었고 소련이 원조를 중단하자마자 패망했지만 북한은 독재적인 구조를 확립하고 있으며스스로의 힘으로 버티고 있다는 점을 그는 지적했다. 그는 결국 한반도의 통일은 『또다시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남북한의 협의하에 통일을 하는 수 밖에 없고 그러려면 동등한 조건이라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한편 서대숙교수는 독일통일과 남북한총리회담개최 등으로 한국인들의 통일에 대한 기대가 전례없이 높아졌지만 『북한과의 실질적인 대화를 위해서 남한은 김일성이 사라지고 김정일이 북한의 새 지도자로 부상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교수는 최근 북한에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근본적인 변화는 전혀 일어나고 있지 않다고 진단했다. 그는 남한이 북한 사회를 개방해 고립상태를 종식시키고,조국통일을 추진할 수 이게 되기를 원하는 만큼 북한도 한국에서 미군을 몰아내고 남한 인민들을 해방시켜 조국통일을 달성코자 원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서교수는 『북한의 대남전략에 변화가 없는 한 남한의 경제발전과 외교적 성공을 통일로 연결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라면서 남한의 북방정책이 그 목적과는 달리 북한을 고립시키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북한이 강력하게 반대하는 한 교차승인,남한의 유엔가입노력 등이 어떤 성과를 거둘 것인지에 의문을 표하면서 남북한의 실질적 대화는 김일성 사후에나 가능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 미ㆍ소 남녀 짝짓기사업 번창(세계의 사회면)

    ◎국제 중개없소 문열자 청혼신청 쇄도/이달 모스크바서 수십쌍이 첫선 모임 냉전종식으로 미소관계가 호전됨에 따라 두 나라의 남녀들을 맺어주는 국제중매사업이 호황을 누리고 있다. 『두 나라 사이에는 오랫동안 강한 증오심과 적대감이 존재해 온 만큼 오해도 많았다』고 동업자 로널드 롤밴드와 함께 「미소간 짝짓기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는 소련 이민 진 캔터는 개업 취지를 밝힌다. 양국 사람들은 이 서비스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가까워질 수 있다고 그는 자신한다. 개업 6개월째를 맞은 이 국제중매소에는 주로 여성들인 소련인 약 1천명과 주로 남성들인 미국인 약 2백명이 짝짓기 신청을 해 왔다. 두 나라의 경제력을 감안할 때 상대적으로 우세한 입지에 있는 미국인들이 상대방에 선택될 확률이 소련인들 보다 10배는 높다는 것이 캔터씨의 설명이다. 지금까지는 신청자들의 사진,간략한 이력,신상소개서 등만이 교환되는 정도이지만 10월부터는 모스크바에서 10∼40쌍이 처음으로 맞선을 볼 계획이다. 캔터는 1973년 소련을 떠난후 처음으로 지난 3월 고국을 방문한 것을 계기로 양국 남녀 짝짓기 사업에 착안했다. 그때 소련에 새로 등장하고 있는 기업인들이 이러한 아이디어를 귀띔해 주었을 때만 해도 캔터는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나 미국에 돌아와서 주변사람들에게 이에 대한 의견을 물어 좋은 반응을 얻었다. 특히 「미소간 짝짓기」라는 이름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등록비 25달러를 내는 사람들에게는 짝짓기 신청자들의 사진과 짤막한 소개서가 수록된 보기좋은 소책자가 제공된다. 소련인들의 등록비는 50루블이다. 소련쪽에서는 한 코페라티브가 이 짝짓기 서비스를 담당하고 있다. 소련의 신청자중 여성이 75%이고 남성은 25% 밖에 안된다.
  • “양독,평화통일의 「모범답안」보였다”/통독조약 조인… 각국의 반응

    ◎“통독여정에 새 이정표 세워” 서독/“전후시대 마감… 신 질서 구축” 소/“유럽통합 가속화될 것” 확신 불 헬무트 콜 서독총리는 12일 독일통일조약의 서명을 『통독으로 가는 길에 놓여진 또 하나의 새로운 이정표』라고 환영하면서 통독조약 승인에 대해 광범위한 만족의 뜻을 표명했다. ○콜 총리,만족 표시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장관은 통독조약이 서명된 모스크바에서 『우리는 2차대전의 결과를 넘어서게 됐다』고 말했다. 롤랑 뒤마 프랑스 외무장관은 『프랑스는 이제 프랑스와 독일이 함께 중심적인 위치에 서서 유럽통합을 가속화시키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콜 총리는 본에서 이날 미리 준비한 성명을 통해 『이번에 서명된 문서들은 우리 스스로가 협상에서 설정해 놓았던 목표들을 대폭 반영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이 최종 합의문서는 또한 90년 독일통일이 우리의 모든 우방들과 이웃들의 합의아래 실시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난 5월22일 있은 예멘의 평화적 통일을 간과하고 있는듯 『이것은 전쟁과 고통 그리고 분쟁과 새로운 쓰라림없이 평화적으로 이뤄진 근대역사상의 첫번째 통일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동서 양독이 화생방 무기의 보유를 포기하고 통독의 군사력을 45% 삭감,37만명 수준으로 제한하기로 약속함으로써 협상과정을 가속화시켰다고 말했다. 한스 디트리히 겐셔 서독 외무장관은 『정말 행복한 날이다. 감사의 날이며 영원히 기억해야할 날이다』고 기쁨을 표시하고 『우리는 우리에게 지워진 책임을 알고 있으며 그 책임에 부응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소의 신사고 반영 그는 이어 『우리는 과거에 있었던 전쟁과 전제주의의 희생자들,특히 유태인들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면서 『통일된 새로운 독일은 평화를 위해 헌신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겐셔 장관은 또 미ㆍ소ㆍ영ㆍ불 2차대전 4개 전승국들이 동서독과 함께 서명한 통일독일조약이 관계 6개국의 의회에서 승인을 받을 때까지 기다리기 보다는 오는 10월3일 독일의 전면적인 주권을 회복시켜 주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한편 최근 사임한 동독외무장관의 대행 자격으로 이번 조약에 서명한 로타르 드 메지에르 동독 총리는 『이번 조약이 냉전시대의 종식을 알리는 것이며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의 용기있는 페레스트로이카 정책과 신사고를 반영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동독 관영 ADN통신이 전했다. 또 베를린을 방문중인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은 『통일독일이 이렇게 빨리 일어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고 놀라움을 표시했다. 이번 조약은 모스크바시의 한적한 곳에 위치한 한 공산당 호텔에서 조인됐는데 언론에 보도가 별로 되지 않은 탓으로 이곳을 지나는 모스크바 시민들은 조약 서명 사실을 대부분 모르고 있었다. 이 조약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모스크바 시민들 대부분은 『그들이 원한다면 통일이 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 「인질 덫」에 걸린 미의 중동작전/“좁아진 선택”… 부시의 딜레마

    ◎후세인,「응징결의 약화」 노려 신경전/「카터·레이건 전철」 우려,신중 대응/“국익이 우선” 일부선 강경책 주장 미국정부가 가장 바라지 않던 사태가 전개되고 말았다. 이라크가 서방의 공격을 막는 방패로 외국인을 이용하겠다는 선언과 더불어 미국인을 주축으로 한 이라크와 쿠웨이트외국인 「인질」들을 주요 군사및 민간시설에 분산 배치하기 시작한 것이다. 조지 부시 미대통령과 사담 후세인 이라크대통령은 지금 이들 외국인의 운명이 이라크군의 쿠웨이트 철수를 요구하는 국제 결의를 약화시킬 것인가의 여부를 놓고 투쟁속의 투쟁을 벌이고 있다. 후세인에게 외국인 인질은 유엔의 경제봉쇄조치에 대항하는 무기다. 그는 이라크와 쿠웨이트에 잡혀 있는 미국인 3천명을 비롯한 2만여명의 서방외국인의 안전을 위협하면서 미국과 그 우방들에 대해 페르시아만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라크와 쿠웨이트에는 현재 34개 외국인 약 2백만명이 머물러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후세인이 인질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은 미국등 대이라크 군사제재에 나서고 있는 나라 사람들이다. 부시는 인질들의 운명이 페르시아만 사태를 좌우하는 결정적 요인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또 잡혀 있는 미국인에 대한 동정의 여론이 미국의 대이라크 대결의지를 약화시키지 않도록 이의 확산도 막아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라크와 쿠웨이트에 자국 국민이 잡혀 있는 영국과 프랑스도 미국과 마찬가지로 이같은 도전에 직면해 있어 이들의 대응책은 상호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백악관은 이번 사태의 초기부터 이라크와 쿠웨이트에 갇힌 외국인들에 대해 「인질」이란 용어를 쓰지 않으려고 비상한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이들의 사정을 2차적인 문제로 간주하기 위해 이라크의 인질위협에 대한 언급을 애써 자제해왔다. 또 국무부는 이 문제가 미국사회에 「인간의 얼굴」로 투영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이라크와 쿠웨이트에 갇혀 있는 미국인 명단의 공개를 거부하고 있다. 페르시아만에 전운이 감도는 와중에 부시가 굳이 휴가를 떠난 배경의 일면에도 후세인에게 부시의 진의를,즉 부시는 지미 카터와 달리 인질을 구출해야겠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지도 않고 페르시아만 사태에 무력 개입한 미국의 기본목표도 잊지 않고 있다는 점을 보여 주려는 의도가 깔려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과거 미국이 인질사태에 부딪쳤을 때 부시의 전임자인 카터와 로널드 레이건은 미국인 인질의 생명을 그것보다 큰 정책목표의 하위에 둘 수가 없었다. 카터행정부와 레이건행정부는 인질석방 노력때문에 다같이 정치적 타격을 받았다. 카터는 이란내 미국인외교관을 구출하려다 실패했고 레이건은 레바논내 미국인 석방을 시도하다가 이란­콘트라사건에 휘말렸다. 어떤 면에서 카터와 레이건의 딜레마는 단순한 것이었다. 카터와 레이건에게 있어 인질사태는 납치자들이 강요한 것이었으며 중심적인 문제는 인질의 운명이었다. 보다 큰 문제가 있었다면 그것은 미국이 테러리스트나 납치자들과 협상함으로써 인질납치를 조장할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부시의 경우는 상황이 다르다. 부시에게 있어 중심적인 문제는 국제질서를 유지하고 미국의 사우디아라비아내 경제이익을 보호하기위해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을 원점으로 되돌리려는 것이다. 부시가 곧 정면으로 부딪칠 문제는 과연 이라크와 쿠웨이트내 미국인의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이같은 큰 목표를 추구할 것이냐다. 이 문제로 인해 부시는 「미국인의 생명은 보살폈지만 국가이익과 관련한 냉정한 정책결정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는 적합치 않은 대통령」이라는 소리를 듣게 될지도 모른다. 현시점에서 부시가 선택할 수 있는 방안가운데 매력적인 것은 별로 없다. 부시는 이라크의 인질 이용확대에 대해 유엔의 규탄을 모색하는등 지금처럼 자제하면서 대응해 나가는 방안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구출작전 시도는 아주 위험하다. 미국인들이 여러 지역에 산재해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작전시도가 이라크의 외국인 학대와 전면전 반발을 조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방안으론 미국내 이라크시민및 외교관의 억류를 생각해 볼 수 있으나 미국관리들은 「후세인의 술책을 답습하는 것이기 때문에 적절치 않다」며 이를 배제하고 있다. 결국 사태가 확대되면 부시는 국가이익을 미국인 인질들의 안전보다 선행시키는 최강경책이외엔 선택의 여지가 없을지 모른다.〈워싱턴=김호준특파원〉 □쿠웨이트와 이라크체류 외국인 국가 쿠웨이트 이라크 미국 2,500 600 영국 4,000 500 서독 290 450 프랑스 270 290 이탈리아 150 340 일본 150 230 인도 170,000 10,000 소련 882 7,791 터키 2,500 3,000 이집트 200,000 1,000,000 필리핀 50,000 5,000 파키스탄 90,000 10,000 팔레스타인 350,000 170,000 폴란드 300 2,500
  • 백악관 떠난 부시의 여유/김호준 워싱턴특파원(오늘의 눈)

    중동사태로 세계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조지 부시 미대통령이 긴 25일간의 여름 휴가에 들어갔다. 공포의 화학무기를 보유한 이라크군과 대치할 미군들이 아라비아 사막으로 속속 파견되고 있는 「전쟁전야」에 한가롭게 무슨 휴가냐는 따가운 눈총속에 부시대통령은 예정대로 10일(한국시각 11일) 백악관을 떠났다. 부시는 자기 별장이 있는 메인주 해변의 케네벙크포트로 향하는 기상에서 『당신(기자)들도 알지만 내 골프 카트와 보트에는 전화가 달려 있지 않느냐』고 상기시키며 워싱턴 밖에서도 대통령직 수행을 가능케 하는 현대적인 통신장비들이 자신을 따라다니고 있기 때문에 휴가를 강행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부시는 『앞으로 수일간 전화 회담을 할 외국 지도자 명단을 갖고 떠난다』면서 『말이 휴가지 백악관에 못지 않게 바쁜 일과를 보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필요하면 언제든지(비행기로 1시간반 거리인) 워싱턴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휴가중 부시의 집무실은 별장내및 별장구내의 영빈관에 마련되며,보좌관들은 1마일 떨어진 한 모텔에서 백악관 교환대에 연결된 통신시설과 보안장치가 된 전화를 이용해 근무한다. 작년말 미군의 파나마 침공사태 때도 부시는 휴가중이었다. 1980년 이란 인질사건에 얽매어 백악관을 떠나지 못했던 지미 카터 대통령의 경우를 제외하면 미국대통령들은 국제사태 때문에 휴가중 백악관에 갇혀있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고 있다. 1983년 소련의 KAL기 격추사건 때도 백악관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캘리포니아에서의 휴가일정을 단축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텔레비전이 승마를 즐기는 레이건 대통령과 슬픔에 젖은 KAL기 희생자 유가족의 모습을 대비시켜 방영하자 레이건은 황급히 휴가일정을 바꿔 워싱턴으로 돌아왔다. 이번에 부시의 참모들은 「전쟁전야에 피서를 즐기는 대통령」의 노출을 최소화하고,그대신 「휴가중에도 일하는 대통령」을 국민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노력할 것으로 알려졌다. 부시는 오는 15일 휴가를 일시 중단하고 워싱턴으로 돌아와 펜타곤에서 군사상황에 관한 종합 브리핑을 받을 예정이다.언론들이 『이 브리핑은 왜 별장으로 가져가지 않느냐』고 꼬집고 있는 데 대해 한 백악관 관리는 『이 판국에 대통령이 휴가를 가는 게 옳으냐 그르냐의 차원으로만 문제를 보지 말라』 응수했다. 섭씨 50도를 오르내리는 열사의 전장에 군대를 보내놓고 대통령은 휴가를 간다는 일을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으나 휴가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미국 사람들은 그럴 수도 있는 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 G7 정상회담 통해본 위상변화(특파원수첩)

    ◎미 영향력 퇴조… 떠오르는 다극체제/바기구 해체뒤 전쟁억지력 효능 상실/기술ㆍ경제력 우세한 일ㆍ서독 위상 격상/“미ㆍ일ㆍ독 3극시대 임박”… 불ㆍ영선 초조 지난 2주일 사이에 런던과 휴스턴에서 잇따라 열린 서방 정상회담은 냉전종식과 더불어 변화된 강대국간 역학 관계와 다극화된 세계의 새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동서 대결시대에 서방측 맹주 노릇을 했던 미국은 단지 세계를 이끌어 가는 여러 강대국 중의 하나로 그 위상이 바뀌기 시작했다는 것이 미국의 많은 국제문제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조지 부시 미대통령은 나토 정상회담(런던)과 서방7개국 경제정상회담(휴스턴)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선택적으로 행사 했을뿐 전면적으로 강요하지는 않았다. 그는 휴스턴에서 농산물 보조금 감축 협상의 진전을 위해 애를 썼고 런던에서는 나토의 군사 독트린과 전략 재정립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정치 강국으로 부상중인 두 경제대국 서독과 일본이 소련­중국에 대한 경제원조 문제에서 자국의 이해를 추구하겠다는 결의를 드러내자 부시 대통령은순순히 두 나라의 뜻에 따랐다. 부시대통령은 『이런 문제에 모두 빡빡하게 대처하면 일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우린 과거와 전혀 다른 시대에서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강조하며 『종전엔 동서간의 군사 대결이 만만치 않았지만 지금은 바르샤바조약기구가 거의 해체된 가운데 철수하는 병사의 모습과 민주주의가 전체주의 체제를 대체하고 있음을 보고 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이러한 시각은 부시의 전임자인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소련의 위협에 대처하는 미국의 우월적 지위를 세계에 강조하면서 집권했던 1980년대의 접근법과는 상이한 것이다. 레이건은 맹방들에게 미국의 노선을 따르도록 강요했다. 예컨대 1981∼82년에 레이건은 소련의 천연가스 파이프 라인 건설에 협력하는 서구 기업체에 대해 제재를 가하려고 들었다. 그러나 소련 위협의 감소와 세계경제의 변화는 이러한 에피소드를 먼 옛날 이야기처럼 만들어 버렸다. 부시대통령은 미국이 맹방들과 경제적 정치적 파워를 공유함으로써 세계가 다극화 시대로 복귀하는 것을 고무하겠다는 입장이다. 영국의 마거릿 대처총리는 최근의 국제질서 변화에 주목하며 『휴스턴 회담에선 미국의 달러,일본의 엔,서독의 마르크 화에 각기 바탕을 둔 3대 국가 그룹이 있었다』고 말했다. 프랑스의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은 『미국이 언짢게 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면서 『그건 사건이 아니라 소련권위협의 감소와 더불어 유럽이 자신의 개성을 내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휴스턴에 모인 7개국 가운데 자기주장이 가장 강했던 나라는 서독과 일본이었다. 서독의 헬무트 콜총리는 독일통일에 대한 소련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재빨리 소련에 차관을 제공하고 서방 각국의 동참을 역설했다. 또 일본의 가이후 도시키 총리는 천안문 사건후 중단된 대중국 차관을 재개키로 결정하고 58억달러 규모의 차관사업 계획을 가져왔다. 미국이 두 나라의 뒤를 따르지는 않았지만 부시는 두 나라에 대해 하고 싶은대로 하라는 청신호를 보냈다. 설령 부시가 서독과 일본의 제의에 동참하기를 원했더라도 돈이 많이 드는 새로운 국제의무를 짊어지는것을 허용치 않는 미국의 방대한 재정 적자 때문에 이에 쉽게 응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카터 미행정부에서 국가안보담당 보좌관을 지낸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다극화로 나아가는 맹방 관계의 변화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며 1970년대의 지미 카터 및 제럴드 포드 대통령 시절에도 유사한 변화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때와 아주 크게 다른 것은 일본이 단지 경제 초강국으로만 머물지 않고 조심스럽게 정치 초강국으로 발돋움하고 있으며 프랑스와 영국이 정치적 리드를 서독에게 빼앗겼다는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냉전의 소멸이 이러한 변화의 주요 원인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바르샤바 조약기구가 사실상 해체됨에 따라 전쟁 억지력에서 나오던 미국의 영향력은 줄어들 수밖에 없고 기술이나 경제력과 같은 다른 요소들이 더욱 중요해졌다고 브레진스키는 말한다. 그렇다고 미국의 역량을 과소평가하거나 새 시대엔 미국의 지도적역할이 끝났다고 보아서는 안된다고 브레진스키는 덧붙였다. 부시는 미국의 영향력 퇴조를 내다보는 견해에 동조하지도않지만 영향력 유지를 위해 어떤 희생도 감수하겠다는 입장도 아니다. 냉전 이후의 새 질서가 확산될 경우 어떤 종류의 정책이 전개될 것인지,예컨대 통일된 독일과 일본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를 지금 헤아리기엔 불확실성이 많다. 가장 불확실한 것은 소련의 향방이다. 많은 전문가들은 소련이 눈을 안으로 돌려 경제위기 해결에 전념하는 한 이 시대의 또하나의 긍정적인 부산물로서 전세계에 걸쳐 지역분쟁이 줄어들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카네기 국제평화재단의 레너드 스펙터는 이라크처럼 강력한 지역국가로 성장한 일부 국가들이 미국의 이해에 도전할지 모르나 소련으로부터 과거와 같은 지원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위험하진 않을 것이라면서 세계의 다극화 속에서도 소련의 위축에 따라 미국은 여전히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 닉슨기념관 “개관 준비 끝”(세계의 사회면)

    ◎출생지 가주에 1만평 규모/전시관 등 꾸며 19일 문열어/생가 복원,집념어린 정치역정 생동감 있게 비디오로 재현도 워터게이트 스캔들의 상처 속에 대통령직을 도중하차한 리처드 닉슨 전 미국대통령의 기념관이 개관을 약 2주 남짓 앞두고 요즘 마지막 손질이 한창이다. 대통령직을 도중 하차한 유일한 제37대 미국대통령인 닉슨. 그는 이 기념관으로 불명예를 씻어보려는 듯 마지막 열정을 쏟고 있다. 닉슨기념관이 세워지는 곳은 그의 출생지인 캘리포니아주 오렌지 카운티의 요바린다시. 닉슨은 1913년 이곳에서 태어나 9살까지 살다가 이웃 위티어로 이사했다. 앞으로 관광명소의 하나가 될 이 닉슨기념관은 10만 한국교포가 모여사는 캘리포니아내 제2의 코리아타운에서 불과 10여분 거리에 위치해 있다. 약 9에이커(1만1천여평)의 대지위에 2천만달러의 비용을 들여 세워지는 닉슨기념관은 그의 생애를 보여주는 기록전시관과 도서관으로 이뤄진다. 특히 그의 성장과정을 엄격한 고증을 거쳐 복원한 생가에서 볼 수 있도록 설계돼 있다. 기념관이 개관되는 오는 19일 요바린다시는 몰려드는 관광객(약 2만5천명으로 추산)으로 일대 혼잡을 이룰 것으로 예상,그 대책수립에 부심하고 있다. 특히 이날 개관기념식에서는 조지 부시 현 대통령을 비롯,제럴드 포드,로널드 레이건,장본인인 닉슨 등 4명의 전ㆍ현직 대통령들이 만나게 돼있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시 관계자들은 이날의 큰 교통혼잡에 대비,일대의 주요 거리를 차단해 아예 주차장으로 사용하면서 셔틀버스로 관람객들을 수송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고인이 된 닉슨 전 대통령의 부모가 되살아난다면 대통령이 된 아들 어린 리처드를 키우던 바로 그 옛집으로 영낙없이 착각할 만큼 그의 생가가 옛모습 그대로 복원됐다는 게 그의 계수 클라라 닉슨 여사(70)의 말이다. 이 생가에는 닉슨이 태어났던 바로 그 침대와 그의 형제들과 함께 사용했던 침대들,소년시절의 그의 손때가 묻은 피아노ㆍ책상ㆍ등 높은 의자 등이 그대로 진열된다. 그의 방 침대 머리맡에는 그의 어머니가 걸어주었던 「엄마의 기도」라는 시구가 액자에 담겨 결린다. 벽에 새겨진 닉슨의 동상을 보며 들어가도록 설계된 이 기념관에는 그가 5년반동안 대통령 재임시에 받은 약 3만여점의 각종 선물도 전시된다. 그의 젊은 정치가 시절을 보여주는 전시품 가운데서는 그가 미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돼 워싱턴의 정가로 출정케하는데 기여한 49년도형 포드사의 머큐리 승용차가 눈길을 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밑에서의 부통령,케네디 대통령과의 대결에서 패배,특히 케네디 대통령과의 네차례에 걸친 정치대토론회의 비디오 테이프가 기념관 내에 설치된 TV세트를 통해 방영되도록 설계돼 있어 그의 집념어린 정치역정을 생동감 있게 재현해 주고 있다. 이 기념관 전시품중의 「하이라이트」는 닉슨이 가장 좋아하는 10인의 세계 정치지도자의 방. 실물크기의 석고상에 그린색 수지가 입혀진 이 「지도자들의 방」에는 윈스턴 처칠,샤를 드골,니키타 흐루시초프,레오니드 브레즈네프 등 내노라 하는 10명의 세계 지도자들이 한 칵테일 파티장에서 담소하는 실물크기의 모습으로 꾸며져 있다. 이 기념관의 끝 출구 근처에서는 닉슨을 백악관에서 물러나게 한 소위 워터게이트사건의 육성이 담긴 테이프가 관람객들에게 직접 당시의 상황을 들려주고 있어 역시 미국다운 일면을 보여준다. 이 밖에도 이 닉슨기념관에는 대통령 재직시의 4천4백만 페이지의 각종 기록들이 전시된다. 집념어린 정치역정 못지 않게 올해 77세의 닉슨은 대통령 도중하차 후에도 8권의 베스트 셀러를 저술하는 저력을 보이면서 「외교전문가」로서 국가에 기여하려 노력하고 있다.
  • 한국전 40돌 맞아 재조명 미 유에스 뉴스지

    ◎“잊혀진 전쟁”6ㆍ25… 「공산화 도미노」막았다/동ㆍ서 이념대립서 군사충돌로 급선회/「값비싼 희생」은 동구민주화와 연계성/“전쟁의 물적ㆍ심리적 유산은 한국인 모든 세대에 깊이 자리” 미국의 시사주간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지는 6ㆍ25 40주년을 맞아 「잊혀진 전쟁」을 재조명하고 이 전쟁이 남긴 유산과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남북대결의 현실을 분석하는 특집기사를 6월25일자 카버스토리로 다뤘다. 장장 14쪽에 이르는 유에스 뉴스지의 특집기사를 요약한다. 지금부터 꼭 40년전 장마비가 내리는 아침에 시작돼 그후 37개월동안 이미 수탈당한 아시아 변방의 반도를 뒤흔든 야만적인 투쟁은 마지막 전쟁(제2차 세계대전)의 후기인 동시에 다음에 일어날 전쟁의 서문이었다. 이것은 갑자기 열전으로 변한 냉전이었고 공산주의 사상 가장 담대한 「국제해방전쟁」이었으며 유엔으로서는 처음이자 아마도 마지막일 「경찰업무」였다. 판문점이라는 무인지대의 황량한 「휴전마을」에서 교착상태로 끝날 때까지 이 전쟁에는 22개국이 참전했고5백만명의 인명이 이로 인해 희생됐으며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정치적ㆍ경제적 소요를 탄생시켰다. 그러나 발발 40년이 지난 지금 한국전쟁은 미국인들의 기억속에 미국의 킬링필드였던 안개낀 산들만큼이나 아물거리는 존재로 남아있다. 폭찹힐이나 하트브레이크 리지에서,또는 장진호에서 퇴각하는 길에 쓰러진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에 값하는 기념비는 어디에 있는가? 베를린 장벽이 유럽 분단의 상징이라면 남북한을 가르는 경계선은 아시아의 베를린 장벽이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과 한국의 노태우대통령이 2주전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났을때 이들은 냉전의 가장 뚜렷한 흔적인 한국의 분단상태를 언젠가는 끝낼 수도 있을 해빙작업을 시작한 것인지도 모른다. 더구나 아시아에서 화해의 봄이 무르익고 있는 지금 공산주의 양대 종주국인 중국과 소련은 자신들이 지난 1950년 파괴하려 했고 그후 40년간 무시하고 비난하고 전복시키려 애써 왔던 한국과의 외교재개를 위한 새로운 조치들을 취하고 있다. ▷냉전의 모델◁ 한국전은 유럽일변도였던 미국의 관심을 태평양쪽으로 되돌렸다. 2차 대전후 극동에 대한 미국의 관심은 약화되기 시작했었다. 트루먼행정부는 「중공」과의 타협에 접근하게 된다. 당시 칼럼니스트 월터 리프먼은 『아시아는 서방의 군사적 영향력,경제력 통제 및 사상적 영향력에서 벗어나 있다』고 기술했다. 한국전이 중국과 소련간 불화의 서막이었다는 증거가 현재 나타나고는 있지만 당시 한국전은 획일적 공산주의의 이미지를 강화했으며 미정책입안자로 하여금 이때문에 오랜기간 골머리를 앓게 해왔다. 한국전은 무엇보다도 냉전을 정치ㆍ이념적 성격에서 군사충돌로 변모시켰다. 이는 전후 봉쇄정책의 촉매일뿐 아니라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표현한대로 「군사산업 복합체」를 형성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1951회계연도 미군사예산은 1백40억달러(책정기준)에서 53회계연도에는 5백40억달러로 상승된다. 보다 놀라운 점은 미국의 대외 원조계획의 군사화이다. 1950회계연도의 경우 군사원조가 대외원조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2%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는 60회계연도에 41%로높아졌다. 한국전은 또한 냉전기간을 통해 미국의 외교정책을 괴롭혀온 기본적인 모순을 가져다 주었다. 미국은 한편으로 국내에서 악의에 찬 반공주의에 반대하는 것처럼 행동하면서 한편에서는 공산주의 침략이 이루어지는 세계 어디서고 이를 퇴치한다는 결의를 다짐하도록 만들었다. 50년 9월30일 북한이 남침을 시작한지 3달째가 되는 날 트루먼은 국가안보회의문서 68호에 서명한다. 이 문서는 『소련의 강대국 부상을 막기위해 미국은 희생이 어떠하더라도 국내외에서 민주주의를 수호할 결의를 갖추어야 한다』고 언급한다. ▷미 극우세력의 득세◁ 다른 수준에서 한국전은 핵시대(소련은 전쟁발발 3개월전 첫 핵실험에 성공했음을 발표한다)에서 전쟁이 가열돼서는 안된다는 점을 상기시켜준 전쟁이었다. 이같은 새로운 「제한전」의 개념은 그러나 중국을 핵공격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온 더글러스 맥아더장군에게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 51년 3월 맥아더는 중국 로비스트였던 조셉 마틴하원의원에게 보낸 서한에서 트루먼의 제한전 개념을 공개적으로통박한다. 그는 『공산주의가 세계무대 장악을 위해 준동하는 지역이 아시아』임을 상기시키면서 『아시아가 떨어지면 유럽도 공산화를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명령에 순종하는 외에는 대안이 없었다. 트르먼은 마침내 맥아더를 해임하나 공산주의 「격퇴」에 관한 논란은 끊이지 않는다. 맥아더가 밀려난데 자극받아 존 맥가시상원의원은 공산주의 동조세력이 트루먼 행정부안에 도사리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게 된다. 그로부터 13년후 피그만사건이 있고난후 미국이 아시아에서 또다른 제한전으로 치달을 무렵 배리 골드워터상원의원은 64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자유방위를 위한 극단주의는 악이 아니다』라고 선언함으로써 맥아더를 상기시켰다. 이같은 우익노선은 마침내 로널드 레이건에 의해 미국의 정책으로 채택된다. ▷잊혀진 전쟁◁ 한국전의 여파가 오래 지속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에 관한 한 가장 놀라운 것은 거의 잊혀졌다는 사실이다. 한국전에서 전사한 미군 병사수는 5만4천여명으로 한 세대후의 베트남전의 미군희생자 5만8천명에 거의 육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 미국인들의 한국전에 대한 기억은 뚜렷한 것이 없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일본으로부터 무조건 항복을 받아낸 사람들에게 북한과 중국을 상대로 싸운 전쟁에서 비겼다는 사실은 결코 달갑지 않는 일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트루먼대통령은 ▲징집연장 ▲세금인상 ▲임금ㆍ물가 통제부과 등을 취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상황에 비교하면 국내의 피해는 극히 미미했다고 하겠다. 또 베트남전이 TV를 통해 대대적으로 소개된 것에 비하면 한국전은 신문에나 조금 보도되는 등 일반인들의 관심밖의 일이다. 한국전이 끝난지 40년이 지난 지금 냉전이 종식되고 있는 현실을 되돌아 보건대 한국의 산하에서 치른 희생과 최근 프라하,바르샤바,부다페스트에서의 민주주의 태동은 분명한 연계성을 갖고 있다. 미국의 봉쇄정책은 성공했으며 미국과 우방국들은 한국에서 공산주의의 침공을 저지하기 위한 값비싼 희생을 치른 것이 분명하다. 최종적인 결과를 볼때 그 희생이 가치 있는 것이었다고 역사는 결론을 내릴 것이 분명하다. ▷계속되는 남북대결◁ 한국전쟁은 총성이 멈춘지 1세대가 지났지만 아직도 남북한 국민들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국이 경제기적을 거두고 한소 정상회담이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물적ㆍ심리적 유산은 모든 세대와 사회계급에 걸쳐 깊이 자리잡고 있다. 도쿄에서 발행되는 친북한신문의 편집인 손진형씨는 『전쟁은 민족 최대의 비극』이었다고 말한다. 휴전된지 37년이 되도록 남북한은 아직도 기술적으로 전쟁상태이며 1백51마일 휴전선에는 1백만의 병력이 마주 대하고 있다. 한국의 영화관에서는 영화상영전에 간첩과 공산주의자를 113으로 신고하라는 자막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북에서는 김일성이 또다른 전쟁 가능성을 내세워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 모든 북한주민은 매년 열리는 한미 합동군사훈련 기간동안 전투비상체제하에 놓인다. 김일성은 『미제국주의자와의 전쟁경험은 금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경험』이라고 말했다. 남쪽에서는 전쟁이 재벌이라는 신흥기업군이 자랄 수 있는 혼란스럽고 독점적인 시장을 마련해 주었다. 전쟁은 남북을 합쳐 1백50만명의 사망자와 실종자를 낳았으며 수백만명의 인구가 고향을 떠나게 만들었다. 인구의 대량이동은 도시화를 촉진시켰다. 전쟁이 미친 가장 큰 영향은 남북 모두 군인들이 정치권력을 쥐도록 만든 점이다. 남에는 장성출신의 대통령이 3명이나 되고 그중 2명은 쿠데타로 집권했다. 북에서는 전현직 고위 장교들이 김일성의 강력한 지지그룹을 형성하고 있으며 당의 고위직에 앉아 있다. 경희대 나종일대학원장은 『전쟁은 우리가 정치적으로 성숙되지 못했음을 보여줬다. 우리는 우리의 문제들을 군사적인 수단과 독재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라고 지적한다. 아직도 남북 모두에게 분단상황은 마음속에 굳게 자리잡고 있으며 남한은 독일통일방식의 단계적 통일을,북한은 1국2체제 방식을 내놓고 있다. 한국전쟁의 사회적 영향을 연구한 서울대 김경동교수는 『전쟁이 왜,어떻게 발발했는지 분명히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우리는 당시 전쟁을 막을 통제능력이 거의 없었다』라고 진단한다. 전쟁이 한국민들에게 가치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적어도 남한은 자신들이 1950년에는 갖지 못했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할 힘을 갖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 주한 미7공군사령관 포글만중장을 임명

    조지 부시 미국대통령은 주한 미7공군사령관에 로널드 포글만 중장(48)을 임명했다고 주한 미 공군사령부가 1일 발표했다. 토머스 A 베이커 전임사령관은 버지니아주 래너레브공군기지에 본부를 둔 미 전술공군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전보됐다.
  • “한국전 참전기념비 세우자” 미서 1천만불 모금운동

    ◎부시도 참여… 5백50만불 이미 모아/링컨기념관부근에 93년까지 완공 【워싱턴=김호준특파원】 미국의 한국전 참전기념비 건립을 위한 모금 만찬이 1일 저녁(미국시간)워싱턴의 옴니 쇼람호텔에서 조지 부시 대통령및 상ㆍ하의원 40여명을 비롯한 미 정ㆍ재계 고위인사 1천여명과 이 모금행사를 지원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등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부시대통령은 축사를 통해 『한국전은 공산주의의 조류를 최초로 되돌린 전쟁이었으나 역사에 의해 종종 무시돼 「잊혀진 승리」로 불려지고 있다』고 회고하며 『이 기념비가 세워지면 미국인들은 미국의 용감한 아들 딸들이 침략을 저지하면서 부딪쳤던 자유의 시험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부시대통령은 『오늘날 우리가 전 세계에 걸쳐 목도하고 있는 민주주의의 행진은 한국전에서의 자유수호가 그 기초를 놓은 것』이라고 강조했다. 1백만달러의 모금을 목표로 마련된 이날 행사에는 왕년의 명코미디언 보브 호프와 여가수 로즈메리 클루니가 여흥을 맡아 한국전 당시를 회고케 했으며 한국전을 배경으로 한 「3일의 약속」이란 소설을 출간,그 판매대금 20만달러를 기념비 건립기금으로 기부한 교포의사 정동규씨도 참석했다. 한국전 참전기념비 건립위원회(위원장 리처드 스틸웰 전주한미군 사령관)는 모금 목표액 1천50만달러 가운데 이날 만찬전까지 총 10만명으로부터 5백50만달러를 모금했다고 밝히고 1만달러이상 기부자 가운데는 포드자동차,크라이슬러사,IBM,두폰,필립 모리스 등 미국굴지의 기업과 현대 포철 대우 등의 미 현지법인들이 포함돼 있다고 공개했다. 위원회는 6ㆍ25동란 발발 40주년을 맞아 워싱턴 뉴욕 로스앤젤리스 등 미국 각지에서 80여건의 모금운동이 활발하게 진행중이라고 설명하고 91년 10월까지 모금을 완료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모금은 지난 86년 10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미 의회를 통과한 기념비건립법안에 서명한 뒤부터 착수됐다. 기념비는 휴전협정 40주년 기념일인 오는 93년 7월27일까지 완공될 예정이다. 링컨기념관 부근 2천4백평 부지위에 세워질 한국전 참전기념비는 한국의 38선을 상징하는 무장병사 38명의 행군 입상이 중심을 이루며,이곳을 찾는 참배객들은 병사들의 조상 사이를 걸어서 대형 성조기가 게양된 경배구역에 다다르도록 설계돼 있다.
  • 가시방석에 앉은 서독의 미군/미 감군발표하자 철수요구 잇따라

    ◎“내고장서 먼저”주민들,연방정부에 압력/“집지어 동독난민에 제공”새사업 발표도 서독 주둔 미군의 일부 철수안이 발표된 후 서독 각주 당국은 다른 지역보다 먼저 미군들을 내보내기 위해 온갖 로비활동을 벌이고 있다.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이 25만 주독 미군중 5만7천명의 우선 철수안을 발표한 뒤부터 최대규모의 미군이 주둔중인 헤세주와 라인란트­팔츠주에서는 과거 같았으면 「반미주의」라고 비난받았을 희색을 감추지 않고 미군감축과 함께 착수할 새 사업을 구상하기에 바쁘다. 프랑크푸르트시의 사민당출신 시장은 미군이 철수하고 나면 방대한 규모의 군대용 상가지역을 주택개발에 사용하겠다고 눈독을 들이고 있다. 이밖에도 서독인들이 빨리 되찾고 싶어하는 곳은 비트부르크 공군기지로 이곳은 로널드 레이건 전 미대통령이 지난 85년 전범 묘지를 방문함으로써 세계적 비난을 받았던 곳이다.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많은 서독인들은 동유럽에 대한 소련의 위협이 사라지고 있으며 따라서 미군도 철수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달 서독과 미국의 여론조사기구들이 공동으로 실시한 조사결과는 서독인의 56.5%가 미군의 전면철수를 환영한다고 밝혔으며 38.6%는 전면철수에는 반대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비트부르크시 부시장 한스 야콥스는 과거 같으면 사람들이 이같은 말을 입밖에 낼 경우 「반미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았을 것이라고 서독의 분위기를 설명한다. 야콥스 부시장은 당장 미군이 철수하면 이 시가 경제적 몰락을 겪을 것이지만 이제 소수의 미군만이 남은 상태에서의 미래를 그려볼 때가 왔다면서 우선 주민수보다 많은 1만3천5백명의 미군이 훨씬 줄어들면 관광객 수가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많은 서독인들은 이처럼 대규모의 미군이 존재하는 것은 서독의 완전한 주권에 장애가 되는 것으로 생각해왔지만 이들이 미군의 철수를 고대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보다 단순한 것으로 동독에서 밀려드는 수십만명의 난민들에게 보다 나은 주택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란 점이다. 5만9천명의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헤세주의 발터발만지사는 최근 연방정부에 프랑크푸르트와 인근 에르벤하임시에서 미군을 철수시켜 달라고 아주 직접적으로 호소했다. 콜총리와 같은 기민당출신의 발만지사는 더 나아가 라인란트­팔츠주와 마인주에 걸쳐 위치한 프랑크푸르트시 외곽의 미군기지를 서독측에 넘겨달라고 촉구했다. 미국 정부와 긴밀한 유대를 갖고 있는 기민당 소속 정치인이 이같이 노골적인 요구를 한다는 것은 불과 수 개월전만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프랑크푸르트시는 유럽 통합 이후 유럽중앙은행을 유치,금융도시로서 보다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려는 야심에 부풀어 있다. 폴커 하우프 프랑크푸르트시 시장은 미국인들이 상가지역을 포기하면 이 지역을 시의 주택개발지역으로 삼으려고 구상중이다. 라인란트­팔츠주의 칼 루드비히 바그너지사는 오래전부터 보다 노골적으로 폐쇄대상으로 12개 미군기지 및 시설을 지목,미국과 서독간의 철군협상에 대해 자세한 정보를 제공할 것을 연방정부에 요구해 왔다. 이 지역 주둔 미군의 수는 6만8천명이며 이들의 가족이 7만5천명,기지와 관련을 맺고 있는 민간인이 9천명이고 미군 관계 직업에 종사하고 있는 서독인의 수는 2만1천5백명에 달한다. 그러나 주 내무부의 한 고위 관리는 미군이 이 지역 경제에 주요한 요소임을 시인하면서도 빈 철군협상이 체결되면 미군은 서독이 민간용으로 전용할 수 있도록 가능한한 조속히 기지를 떠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 뿐만 아니라 극좌파 녹색당도 최근 대대적인 미군감축 운동을 강화하고 있어 이래저래 서독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들은 가시방석에 앉은 셈이다.
  • “한반도 군축협상 북한 자세가 관건”/미 군축국장

    【파리연합】 한반도의 긴장완화를 위한 군축협상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북한측이 얼마나 성의있는 협상자세를 갖추느냐가 중요한 관건이될 것이라고 로널드 레만 미군비관리군축국장이 2일 지적했다. 최근 한국등 동아시아 우방국을 순방한 레만 군축국장은 이날 보도된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지와의 회견에서 아시아ㆍ태평양지역의 군축가능성에 언급,이 지역이 유럽과는 다른 상황임을 전제하는 가운데 그러나 대규모 지상병력이 대치하고있는 한반도상황만은 유럽과 매우 흡사하다고 밝혔다. 레만국장은 아시아ㆍ태평양지역에서 군축필요성의 우선지역으로 한반도를 지적하면서 그러나 군축분야에서 진전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북한이 실제적 군축조치를 위해 한국측에 대해 얼마나 성의있는 대화자세를 갖추느냐가 관건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레만국장은 유럽에서와 마찬가지로 한반도에서의 신뢰분위기 조성을 위해 한미 양국이 북한측에 팀스피리트훈련 참관을 초청했으나 이를 거절한 사실을 지적,당장의 북한측 자세에 비관적 견해를 표명했다.
  • 동서군축 가속화 여파/암거래 무기값 폭락

    ◎소 신예탱크 1백만불… 첨단장비도 등장/정국불안한 개도국 국지전 자극 우려도 『탱크 야포 소형화기 탄약 군인 기타 전쟁도구들을 싼값에 팔거나 대여합니다』 성능 좋은 이들 무기가 매물로 나오는 이유는 40년간의 전쟁 계획 끝에 유럽에 평화가 왔기 때문이다. 무기 전문가들은 현재 빈협상에서 논의되고 있는 동서 재래식군사력의 대폭 감축과 기타 분야의 군축으로 세계 각지의 국지전에 원치 않는 결과가 초래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이들은 군축으로 남아도는 군사장비들이 암시장,또는 합법적인 길을 통해 개발도상국에 헐값에 팔리거나 불평을 품고 있는 직업군인들이 역시 같은 루트로 제3세계에 침투함으로써 그렇지 않아도 불안정한 상태에 있는 지역의 국지전을 가열시킬 수도 있다고 분석한다. 『바로 지금 모든 사람들이 앞으로 일어날 일을 대기하고 있다. 무기 거래상들은 새로운 물건이 쏟아져 나오고 값이 크게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바르샤바조약기구의 군사장비를 전문으로 취급하고 있는 웨일스의 무기상 이언 맥그리거의 말이 이러한 우려를 뒷받침한다. 맥그리거는 지난 1∼2년 사이 이미 무기값이 하향추세를 보여왔고 이제는 보다 현대적인 무기들이 시장에 출하되고 있다고 전한다. 불과 몇년전까지만 해도 출고 20년 이하의 물건들은 보여주기 조차 않으려했던 소련인들이 이젠 공장에서 갓 나온 물건들을 팔게 될 것이라고 맥그리거씨는 로이터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만약 신품T­72 탱크(소련의 주력전차)를 원한다면 1백20만 달러에 3주내에 영국으로 인도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북대서양조약기구와 바르샤바조약기구는 유럽재래식 무기감축조약(CFE)에 따라 수천기의 탱크 장갑차 대포등을 폐기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정확한 폐기의 정의에는 아직 최종적인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또 관련 정부들이나 무기거래상들이 허점을 이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NATO외교관들은 지적한다. 브뤼셀에 본부를 둔 유럽정책연구소의 무기통제 전문가인 볼프강 하이젠베르크씨도 이 문제를 우려하고 있다. 브뤼셀 NATO 본부의 한 외교관은 탱크를 예로 들면서 만약 포좌로서의 탱크를 폐기하기로 합의됐을 경우 폐기에 앞서 우선 탱크에 실려 있는 탄약,통신장비등 매우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부대장비들을 분리제거해가지 못하도록 하는 명문규정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설사 탱크 항공기 야포를 완전폐기하는데 합의한다 해도 이들이 폐기되기에 앞서 손을 뻗치는 파렴치한 무기상들이 있을 것이라고 일부 전문가들은 내다본다. 동서 양진영중 어느쪽도 이러한 일이 발생하지 못하도록 조약이행을 1백%검증할 수는 없다고 NATO외교관은 우려한다. 금년중 조인될 것으로 예상되는 CFE조약은 또 미소양국의 중부유럽 주둔군을 각각 19만5천명으로 감축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와는 별도로 소련은 이미 군대와 군장비를 일방적으로 감축하기 시작했는데 이중 대부분이 유럽배치 군사력이다. 중장비는 논외로 친다 하더라도 기관총 박격포 대전차무기 등이 얼마든지 있다고 무기통제협상에 깊이 개입하고 있는 NATO관계자는 말한다. 미군비통제군축국장 로널드 레먼도 남아도는 소련과 바르샤바조약군의 군사장비들이 특히동구국가들의 절실한 외화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시장으로 유출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한다. 이같은 레먼의 견해를 불필요한 파당적 시각이라고 보는 전문가들도 있으나 어느 정도로 완벽한 검증방안이 마련되느냐,그리고 관계국 정부들이 어느정도의 결의를 갖고 불법 무기거래를 차단하느냐에 문제는 좌우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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