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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임스 먼로(美國의 대통령 문화:18)

    ◎‘먼로 독트린’ 천명… 미 외교정책 기틀 확립/재임전 국무­전쟁장관 자격 영과 전쟁서 승리/성실과 결단력으로 재선… 평화­번영시대 열어 【프레데릭스버그(美 버지니아주)=羅潤道 특파원】 미국의 제5대 대통령 제임스 먼로(1817­1825)는 1823년 유럽 열강으로부터의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간섭 배제를 천명한 ‘먼로 독트린’을 통해 신생 미합중국의 독자적 외교정책 기틀을 확립한 것으로 유명하다. 독립전쟁의 영웅으로 독립초기 신생국의 체제정비에 심혈을 쏟았던 버지니아왕조의 막내이자 건국세대(Founding Fathers)의 마지막 대통령을 역임한 그는 두차례 임기 내내 국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특히 그는 신생국가로써의 국내외적 불안정을 씻고 평화와 번영을 가져온 ‘호감의 시대’(Eraof Good Feelings)를 전개시켜 미국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준 대통령으로 평가되고 있다. ○대학중퇴 독립전쟁 참전 영국으로부터 독립의 기운이 무르익던 1758년 버지니아주 웨스트모어랜드의 개척농 아들로 태어난 그는 총명했으며 16세 되던 해에윌리엄스버그에 있던 당시 버지니아 식민지의 최고 명문이던 윌리엄&메리 대학에서 수학했다.그러나 2년후 독립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대학을 중퇴하고 대륙군 소위로 참전,뉴욕전투,저먼타운전투 등에서 용맹을 떨침으로써 특진을 거듭,1778년 전쟁이 끝날때는 계급이 중령까지 올랐다. 특히 먼로는 당시 버지니아 주지사 토머스 제퍼슨(3대 대통령)에 의해 남부 미군의 현황파악을 위한 연락관으로 임명받아 활약했으며 이후 줄곧 제퍼슨의 오른팔 역할을 했다.전쟁이 끝난후에는 제퍼슨의 지도로 변호사 시험에 합격,프레데릭스버그에서 개업했다.제퍼슨과 먼로의 우정은 16년의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죽을때까지 계속됐다. 이어 먼로는 1782년,24세의 약관에 버지니아 주의회 의원으로 당선돼 정계에 입문했으며 이듬해에는 대륙회의 의원으로 선출돼 3년간 활약한뒤 잠시 정계를 떠나 변호사일에 주력했다.그러나 1790년 연방 상원의원에 진출,제퍼슨,매디슨(4대 대통령)과 함께 민주공화당을 결성,알렉산더 해밀턴의 연방주의당에 맞섰다. 그는 프랑스와 영국주재 대사를 맡는등 외교관으로 활약했으나 이렇다할 결실은 거두지 못했다.1794년 초대 워싱턴 대통령에 의해 프랑스대사로 임명돼 프랑스와의 관계강화에 노력했으나 프랑스혁명 신봉자인 그의 노골적인 친프랑스 언동은 워싱턴의 분노를 사게돼 2년만에 소환되고 말았다.그는 다시 1803년 제퍼슨 대통령에 의해 영국대사로 임명됐으나 역시 본국정부 의도와 다른 무역협상을 벌임에 따라 다시 소환되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후에 먼로는 제퍼슨에 의해 루이지애나 식민지 구매협상 대표단장으로 프랑스에 파견됐다.1천500만달러에 당시 미국영토 2배에 달하는 영토를 구매토록하는 협상을 나폴레옹과의 담판에서 성사시킴으로서 협상력을 과시했다.또 매디슨에 의해 국무장관에 임명된 그는 1812년 영국에 선전포고,전쟁에 돌입했다.그러나 워싱턴이 함락되는등 전세가 불리해지자 자신을 전쟁장관에 임명해줄 것을 요청,국무와 전쟁 겸임장관이 된 그는 탁월한 지휘역량을 발휘,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전쟁이 끝난후 매디슨 행정부 말기는 전례없는 평화와 번영을 누리게 됐고 그 주역인 먼로의 인기는 치솟았다.대사로 프랑스·영국을 오가는 사이사이에 두차례 버지니아 주지사를 역임한 경력도 갖춘 그는 자연스레 민주공화당의 대통령후보로 1816년 선거에서 당선,매디슨의 뒤를 잇게 됐다. 59세에 대통령에 취임한 그는 어느 대통령보다도 다양한 공직경험을 갖추고 있었으며 거기서 생성된 그의 정치감각은 탁월한 각료 임명으로 나타났다.국무장관 존 퀸시 애덤스(6대 대통령),전쟁장관 존 칼훈,재무장관 윌리엄크로포드,법무장관 윌리엄 워드 등은 지성적이고 뛰어난 능력과 함께 단합이 잘돼 환상의 진용으로 평가됐다.더우기 먼로 자신의 최선을 다하는 성실함과 굳센 결단력은 모든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게 했다. 먼로는 남부와 서부 등을 광범위하게 여행하며 국민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그의 인기는 더욱 치솟아 1820년 실시된 두번째 선거에서는 232표중 231표를 얻어 만장일치로 당선된 조지 워싱턴에 이어 최다 득표로 재선되는 기록을 세웠다. 먼로는 퇴임후 리스버그의 오크힐에서 거주했으나경제적 어려움으로 고통을 겪었으며 5년후 부인 엘리자베스가 죽자 뉴욕의 딸 집으로 옮겨 쓸쓸한 말년을 보내다 1831년 7월4일,73세를 일기로 숨을 거뒀다. ○퇴임후 곤궁… 사저 매각 먼로의 유적으로는 현재 프레데릭스버그의 박물관,사저이던 샬롯빌의 애쉬론,리스버그의 오크힐 등이 보존돼 있다.변호사 사무실이 있던 건물에 들어선 박물관은 먼로독트린을 초안하던 책상 등 다양한 유품들이 진열되고 있다.또한 애쉬론 사저는 퇴임후 경제난으로 팔았던 것을 1931년 박애주의자 제이 존스가 구입,일반에 공개했다.1974년 존스 가족은 그의 모교인 윌리엄&메리 대학에 이를 기증,이 대학이 박물관과 함께 관리하고 있다. 먼로는 제퍼슨,매디슨과 매우 가깝게 지냈으며 특히 제퍼슨은 자신의 사저인 샬롯빌의 몽티첼로 인근에 ‘지적공동체’(intellectual community)마을의 설립을 위해 이들을 모여살도록 권고,애쉬론을 먼로에게 소개했으며 매디슨의 사저 몽펠리에도 이 부근에 있다. ◎먼로 지명/도시·학교·산·교회 등 238개/워싱턴·링컨과 함께 도시지명 ‘빅3’ 【프레데릭스버그(美 버지니아주)=羅潤道 특파원】 미국의 도시들은 역대 대통령의 이름을 딴 지명들이 많다.신대륙으로의 이주자들이 정착,새 도시를 건설할때마다 자신들이 좋아하는 대통령이나 위인들의 이름을 붙였기 때문이다.먼로 지명은 워싱턴,링컨과 함께 미대통령 가운데 도시명으로 가장 많이 쓰인 ‘빅3’로 알려져 있다. 워싱턴 지명이 49곳으로 가장 많고,링컨은 45,먼로는 44,제퍼슨은 41 순으로 나타나 있다.이 숫자는 미자동차협회(AAA)가 최근 발행한 ‘로드 아틀라스’에 나타난 지명을 기준으로 한것이기 때문에 산·강·호수 등 자연의 이름과 학교·역 등 공공기관의 이름까지 합하면 실제로 대통령 이름이 사용되고 있는 경우는 훨씬 많다. 먼로박물관이 펴낸 먼로 지명 연구 책자인 ‘먼로,USA’에 따르면 미국내 ‘먼로’가 들어가는 지명은 모두 238개에 달한다.그리고 미국 해방흑인들이 세운 아프리카 라이베리아의 수도 ‘먼로비아’와 남극해의 먼로섬 등 미국 밖에도 존재한다. 미국내 50개주중 36개주에 흩어져 있는먼로 지명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은 도시이름으로 26곳이 있다.인구 40명인 노스 다코타주의 소읍에서부터 인구 5만5천인 루이지애나주의 먼로시까지 다양하다.우리의 군에 해당하는 카운티 이름은 모두 18곳으로 인구 9천명의 미주리주 먼로카운티에서 인구 71만명의 뉴욕주 먼로카운티까지 그 규모가 제각각 이다. 먼로 지명이 가장 많은 주는 오하이오로 35곳이 있고,다음은 인디애나 23,일리노이 19,미주리 17,아이오와·펜실베이니아 13,버지니아 11 순을 기록하고 있다.자연지명으로는 강·호수명 10곳,산 6,숲 2,협곡 2,다리·전망대 1곳 등이 있고 교회 7곳,학교 3곳 등도 있다.
  • 제임스 녹스 폴크(美國의 대통령 문화:17)

    ◎美 영토 2배로 확장해낸 ‘전쟁 영웅’/멕시코와 3년전쟁서 텍사스州 등 7개州 점령/중앙銀 개설­관세인하 등 국가재정 안정 주력 【콜럼비아(美 테네시주)=羅潤道 특파원】 “인내의 술잔은 이제 비었습니다.멕시코는 우리의 영토를 침범했고 미국인의 피를 미국 땅 위에 흐르게 했습니다.” 1846년 5월12일,텍사스병합을 위해 멕시코의 선공을 기다리고 있던 11대 미국대통령(1845­1849) 제임스 녹스 폴크는 선전포고를 위해 의회에 보낸 교서의 앞부분에서 이같이 단호한 결의를 나타냈다. 미역사상 유일하게 하원의장 출신인 그는 미국의 기존 영토를 두배로 확장,서부 경계를 미시시피강에서 대서양으로 바꾸어 놓았으며 동시에 미국을 대륙국가로 만든 용감하고 뚝심있는 대통령으로 미국민들에 기억되고 있다.폴크는 7대 대통령으로 대중의 시대를 개막시키고 영토확장의 불을 당겼던 앤드루 잭슨의 열렬한 추종자로 ‘영 히커리’(Young Hickery)라는 애칭으로 불렸다.잭슨의 강인함을 히커리나무에 비유해 붙여졌던 ‘올드 히커리’에서 따온 것이었다.○40세때 연방하원의장 피선 1795년 노스 캐롤라이나주 멕킨버그 카운티에서 스코틀랜드인 후손 농장주의 아들로 태어난 폴크는 10살때 아버지를 따라 테네시주 콜럼비아로 옮겨살게 됐으며 그후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을 다닌 것을 제외하고는 줄곧 이곳을 무대로 활동했다.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다시 테네시로 돌아와 당시 하원의원이던 필릭스 그룬디의 지도로 법학을 공부,24세에 변호사 자격을 획득하여 콜럼비아에서 개업했다. 폴크는 스승이 앤드루 잭슨의 친한 친구였던 것을 계기로 잭슨과 교류를 갖게 됐으며 민주당에 입당하게 됐다.그는 주하원의원을 거쳐 연방하원의원에 당선된후 1835년에는 하원의장에 선출됐다.나이 40세때 였다.168㎝로 미국인으로서는 작은 키에 체격이 다부져 ‘땅딸보 나폴레옹’이라는 별명도 갖고 있던 그는 7선의원으로 두차례 하원의장을 역임한뒤 39년에는 테네시주지사에 당선됐다.그는 자연스레 반 뷰렌 대통령후보의 러닝메이트로 지목됐으나 지명도가 낮다는 이유로 민주당 전국전당대회는 그의 후보지명을 거부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는 연거푸 주지사 선출에서 고배를 마시게되자 마치 그의 정치생명은 끝난듯이 보였다.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노력했으며 마침내 44년 볼티모어 민주당 전국전당대회가 그에게 행운을 안겨주었다.당시 치열한 접전을 벌이던 반 뷰랜과 루이스 캐스가 끝내 승자를 가리지 못하자 9차 투표에서 당의 화합을 이룰 인물로 폴크가 극적으로 부상,후보로 지명됐던 것이다. 정치생명이 끝난 것으로 알려져 있던 폴크의 지명에 대해 헨리 클레이를 후보로 지명했던 상대편인 휘그당은 해보나마나한 게임이라며 냉소를 보였다. 그들은 ”제임스 녹스 폴크가 누구지?”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폴크가 대통령에 부적격자라는 점을 집중 강조했다.반면에 폴크는 당시 미국민들의 영토확장 욕구를 간파,“텍사스와 오레곤의 병합”을 구호로 내세웠다. 그리고 자신은 단임으로 그 약속을 이룰 것임을 공약했다. 선거결과는 예상과는 달리 폴크의 승리로 끝났다.대통령에 당선된 그는 취임사에서 ‘한 당의 대통령’이 아닌 ‘국민의 대통령’임을 강조,소신있는 통치를 위해 당의 영향력에 분명한 선을 긋는 단호함을 보였다. 그는 취임 이듬해부터 3년간 계속된 멕시코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텍사스에 이어 뉴멕시코,아리조나,캘리포니아,네바다 유타주까지 승승장구를 거듭한 것은 물론 멕시코시티까지 함락했다. ○스페인령 쿠바도 구입 시도 폴크는 멕시코 전체를 미국령으로 만들고 싶은 욕망까지도 있었으나 48년2월 강화조약으로 전쟁은 끝났으며 멕시코정부는 1천500만달러라는 헐값에 오늘날 미국땅의 7분의1에 달하는 1천300만㎢의 땅을 미국에 양도해야 했다. 폴크는 스페인으로부터 쿠바를 구입,멕시코만을 내해로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성사단계에 이르렀으나 의회의 반대로 쿠바 구입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오늘날 미국사가들이 당시 폴크의 선견지명을 따랐다면 오늘날처럼 미국이 쿠바로 인해 골치를 썩이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중간선거 이후에는 여소야대 정국으로 휘그당이 다수당이 되는 바람에 집권 후반기 정국운영에 많은어려움을 겪어야 했다.그런 가운데서도 그는 관세 인하를 위한 새 관세법과 워싱턴에 중앙은행,주요도시에 국유은행을 설치하는 독립은행법을 통과시키는등 국가의 재정안정을 위해서도 노력했다. ‘일벌레 폴크’라고 불릴 정도로 몸을 돌보지 않고 일에만 몰두하는 스타일의 폴크는 1849년 대통령 퇴임후 콜럼비아의 사저로 돌아와 3개월만에 과로와 콜레라로 54세의 나이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19세기 상류층 생활용품 집대성”/임기중 최초 우표발매­첫 야구경기 개최도/존 스탠위치 폴크 박물관 큐레이터 【콜럼비아(美 테네시주)=羅潤道 특파원】 테네시주 주도(州都) 내슈빌에서 남쪽으로 60㎞ 떨어진 인구 3만의 콜럼비아시는 11대 대통령 제임스 폴크의 체취가 곳곳에 서려 있다.웨스트 스트리트 7가에 위치한 폴크 대통령의 사저는 폴크 생전의 유품들을 잘 정리해놓고 있었으며 큐레이터 존 스탠위치씨는 폴크 관련 22개소의 위치와 사연을 기록한 ‘폴크 따라 걷기’라는 소책자를 주며 한차례 돌아볼 것을 권했다. ­먼저 이 소책자에 관해 설명해달라. ▲시내에 산재한 폴크가(家)와 관련된 유적들을 걸어다니면서 체계적으로 볼수 있게 만든 것이다.폴크가의 집들과 부친 새뮤얼 폴크가 딸인 나오미의 결혼기념으로 선사한 집.폴크의 변호사 사무실,당시 법원,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돌아온 폴크의 환영대회가 열렸던 스테이트 뱅크 앞 광장,그들이 출석하던 교회,학교 등 모든 것이 나타나 있다. ­박물관으로 꾸며진 사저의 소장품은 어떤것들이 있나. ▲이 집은 1816년 폴크가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에 공부하러 가있을때 지은 집으로 폴크가 대통령 퇴임후 돌아와 숨질때까지 살았다.퇴임후 백악관에서 가져온 집기들과 19세기 테네시 상류층이 사용하던 생활용품들이 잘 보관돼 있다.그 가운데 특히 폴크가 부인에게 선사한 취임기념 부채,폴크의 선거포스터 등은 매우 귀중한 것이다. ­부인 사라 폴크는 어떤 유형의 퍼스트 레이디 인가. ▲사실상 폴크의 보좌관으로 매우 적극적인 활동을 했다.폴크 못지 않게 부인도 일을 좋아했다.그들이 백악관에 들어온후 백악관 내에서 술과 파티와 카드가사라졌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이들은 오락은 일에만 탐닉했다. ­소개할만한 폴크의 또다른 업적은. ▲잘 알려지지 않은 그의 업적이 많다.스미소니안 박물관 개관,최초의 우표 발매,미국내 최초의 야구시합 개최 등도 그의 임기중 일이다.
  • 유전성 작은키/陳東奎 삼성서울병원 소아과 교수(전문의 건강칼럼)

    키가 어느 정도까지 부모의 영향을 받는지 명확한 답은 없다.일반적으로 부모 키의 중간 정도에,남녀에 따라 일부 가감함으로써 예상되는 최종 성인키를 나타낼 수도 있다.골연령(뼈의 나이) 그리고 다른 내분비 호르몬의 조절을 받기 때문에 이러한 요인을 포함시키기도 한다.어쨌든 부모의 키는 아이의 키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된다. 최근 IMF한파로 자녀의 키가 작다고 해서 병원을 찾는 경우가 일부 줄어들기는 했으나 10여년전에 비하면 아주 많아졌다. 같은 또래의 옆집 아이는 키가 쑥쑥 크고 자기 집 아이보다 머리 하나는 더 차이가 난다 싶으면 부모로선 한 번쯤 병원을 찾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더욱이 시대가 변해서 미인을 판단하는 기준이 아담하고 예쁘장한 여인에서 점차 키가 큰 여성으로 변하는 경향이 있어서 그런지 특히 키가 작은 여아들은 본인이 졸라 병원을 찾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저신장 혹은 성장부전이란 증상은 같은 또래 같은 성별의 키를 기준으로 할 때 100명중 3번째 이하로 키가 작고 연간 성장속도가 4㎝이하인 것을말한다.부모의 영향이거나 특별한 이유가 없이 키가 작거나 체질적으로 늦게 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그러나 약 20% 정도는 만성질환이나 내분비적인 문제,염색체 이상 등이 있는 경우가 있는데 이들은 적절한 시기에 치료를 받지 못하면 키가 아주 작아질 수도 있으므로 이들을 찾아내는 것이 소아 내분비를 전문으로 하는 의사들의 주임무인 셈이다. 만일 특별한 이유 없이 키가 작은 아이로 진단되면 무엇보다도 심리적으로 위축될 필요가 전혀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굳이 나폴레옹을 들지 않더라도 진정한 위인은 정신세계의 ‘키’가 큰 사람이다.작은키 때문에 열등감을 가질 게 아니라 이를 극복하고 장점으로 활용하는 지혜를 키우도록 격려해 주는 부모와 의료진의 배려가 필요할 것이다.
  • 시오노 나나미/신명나게 풀어 본 전쟁 3부작

    ◎콘스탄티노플 함락∼레판도 해전/문명간의 대결 균형있게 묘사/‘성자필쇠’의 잔잔한 역사 교훈 “…‘일리아스’를 통해 지중해 세계에 매료되었기에 전쟁을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여느 전쟁이 아니라,‘일리아스’에 묘사된 것 같은 다른 문명간의 대결로서의 전쟁을…” 일본태생의 재 이탈리아 여성작가 시오노 나나미(61)는 그의 나이 열여섯살에 품은 이꿈을 세개의 전쟁이야기에 담았다.‘콘스탄티노플 함락’‘로도스섬 공방전’‘레판토 해전’이 그것이다.시오노의 이 전쟁 3부작이 전쟁사 연구가 최은석씨의 번역으로 도서출판 한길사에서 나왔다. 시오노는 영국의 이른바 ‘내러티브 히스토리언(narrative historian)’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이는 굳이 우리말로 옮기자면 ‘이야기체 역사가’로 에드워드 기번·매콜리·칼라일·J.R.그린·트리벨리언·토인비·폴 케네디 등이 이에 속한다.요컨대 시오노는 기번을 비롯한 앵글로 색슨류의 역사서술 장르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할 수 있다.시오노의 글에서 드러나는 또하나의 두드러진 특색은 성자필쇠론이다.그의 이런 입장은 1천년 동안 공화제를 지키다가 1797년 나폴레옹의 말발굽 아래 사라져간 베네치아공화국의 멸망을 온갖 시련과 질병 끝에 천수를 다하고 죽는 인간의 자연사에 비유한 대목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번에 소개된 전쟁 3부작에는 이러한 시오노의 역사인식이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시오노는 ‘전쟁’이야기를 다룰 때 가장 신명이 난다.그는 마치 진중의 야전사령관처럼 힘있게 전투의 고리들을 풀어간다.첫째권 ‘콘스탄티노플 함락’에서는 동로마 제국 비잔틴의 수도로 천년의 영광을 누려온 콘스탄티노플이 1453년 함락되기까지를 다룬다. 바빌론 붕괴나 트로이 멸망에 비견되기도 하는 콘스탄티노플 함락이야말로 작가 시오노의 상상력에 불을 붙이기에 충분한 소재.작가는 비극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의 입장에서,때론 투르크의 술탄 메메트 2세의 진영에서,때론 베네치아의 젊은 의사 니콜로의 눈을 통해 전쟁을 그린다.또 어떤때는 베네치아의 해군장수 트레비사노의 흉중으로 살며시 들어가 그 운명의 실타래를 풀어젖힌다. 2부 ‘로도스섬 공방전’은 ‘서구문명의 총화’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거대 동방제국을 형성하며 서진하던 오스만 투르크의 대제 술레이만 1세와 성 요한 기사단의 장렬한 공방전을 다룬다.에게해의 작은 섬 로도스는 이슬람 세계에 맞선 기독교 세계의 최전진기지.10만 군세로 밀고 들어오는 술레이만 1세의 물량작전과 이에 맞선 ‘몰락하는 계급’으로서의 기사들의 분전이 처절하도록 아름답게 그려진다.2부는 콘스탄티노플 함락과 레판토 해전 사이의 기간을 설명하는 막간극인 셈이다. 이어 3부작의 완결편인 ‘레판토 해전’에서는 문명의 교체기를 살다간 남자들의 이야기를 그린다.동지중해의 레판토 바다 위에서 목숨을 걸고 자신의 신념을 지켜낸 베네치아의 해군장수 바르바리고,불같은 성격의 베니에로,스페인의 왕자이자 오스트리아공으로 연합함대를 총지휘한 돈 후안,피흘리는 전장의 다른 편에서 피흘리지 않는 전쟁을 치러낸 콘스탄티노플 주재 베네치아대사 바르바로….작가는 더할나위 없이 다양한 인간군상의 삶을선명한 색깔로 되살려 낸다.3부의 압권은 펠리페 2세가 이끄는 서구 연합 함대가 1571년 동방의 무적 투르크를 격파하는 대목.콘스탄티노플 공략부터 헤아려 118년만에 대투르크제국이 품어온 지중해 세계 제패의 야망이 마침내 궤멸된 것이다.그러나 이와 함께 전쟁을 승리로 이끈 해양 도시국가 베네치아와 역사의 주무대였던 지중해의 해도 기울기 시작한다.바로 이 ‘결정적 전투’를 전환점으로 해 역사의 무대는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옮겨지고 만 것이다. 시오노는 지난 64년 이탈리아로 건너가 30년 넘게 그곳에 머물고 있다.그러나 그는 결코 기독교 문화에 무작정 빠져들지 않는다.그 한 예로 시오노는 ‘로마인 이야기’를 쓰면서 에드워드 기번을 포함한 후세 사가들의 로마사는 기독교인의 눈으로 본 역사라고 해서 대부분 참고문헌 목록에서 배제했다. 이 전쟁3부작 역시 이러한 엄정한 사관에 입각해 쓰여졌다.시오노의 전쟁3부작은 서구와 대치하는 이교도 문명,곧 이슬람 문명과의 충돌을 불편부당한 입장에서 다룸으로써 유럽의 역사를 객관적인거리에서 보게 한다.이것은 특히 유럽 중심의 세계사에 젖어 지낸 우리에게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역사평설가로서의 시오노 나나미는 역사를 심판하지 않는다.다만 역사과정을 추적할 뿐이다.
  • 고야/홋타 요시에 지음(화제의 책)

    ◎‘근대회화의 시작’ 고야의 인생역정 이탈리아의 미술사가 아돌포 벤투리는 “고대의 시가호메로스에서 출발하듯이 근대 회화는 고야에서 시작된다”고 말했다. 에스파냐 아라곤 지방 출신의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1746∼1828).그는 벤투리가 적절히 지적했듯이 근대 유럽을 뒤흔든 거대한 변혁의 물결을 자신의 작품들을 통해 적나라하게 증언하고 있는 영원한 현재진행형의 화가다. 이 책은 고야의 극적인 인생역정과 그가 겪은 시대의 참혹상을 그의 분신과도 같은 작품들을 매개로 그려낸 일종의 전기소설이다. 고야는 나폴레옹 군대에 짓밟힌 조국의 참상을 목격하고 자신을 덮친 병마와 싸우면서도 인간의 욕망과 악마성을 냉철하게 관찰함으로써 미술의 새 경지를 개척했다.하지만 붓 하나를 무기로 입신출세의 계단을 숨가쁘게 올라간 그는 결국 조국을 떠나 망명지인 프랑스 보르도에서 82세의 나이로 객사한다. 일본 최고의 아쿠타가와상(개천상)과 오사라기지로상(대불차랑상)을 수상한 홋타 요시에(굴전선위)는 고야에 관한 이러한 전기적 사실을 활달한 필력으로 형상화한다. 출세지향주의자이자 쾌락주의자였던 고야는 47세에 성병을 치료하기 위해 사용한 수은에 중독돼 죽을 고비를 넘기고 귀머거리가 됐다.그러나 죽음의 심연을 겪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세계로 들어갔을 때부터 고야는 비로소 미래의 장막,현대회화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는 선구가 될 수 있었다. 지은이는 이러한 점을 특히 동시대인인 베토벤의 청력상실과 비교하는 데많은 지면을 내준다. 또한 고야에게 평생 따라다녔던 에스파냐의 참혹한 현실 곧 음모와 전쟁,혁명과 반혁명 등이 그를 깨어있는 시대의 증언자로 몰고갔음을 강조한다. 김석희 옮김 한길사 전4권 각권 1만4천500
  • 서울대 논술 ‘동물농장’ 인용

    ◎“성실한 근로자 희생과 사회 문제점은”/면접선 박찬호 병역 등 질문 서울대 등 ‘나’군에 속한 67개 대학이 12일부터 논술 및 면접,실기고사 등의 전형에 들어갔다. 서울대 논술은 영국 소설가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1945) 중 성실하게 일하던 ‘복서’라는 늙은 말이 부상하자 농장 지배자인 ‘나폴레옹’이 그를 도살장에 팔아넘기고 ‘복서’의 죽음을 이용해 독재체제를 강화하려 한다는 대목을 지문으로 제시한 뒤,‘복서’의 죽음을 통해 암시되는 인간사회의 문제점을 글의 내용에 근거해 서술하고 ‘복서’의 죽음에 대한 수험생들의 의견을 묻는 비교적 평이한 문제가 계열별로 구분없이 출제됐다. 이어 총점의 1%(8점)가 반영되는 서울대 면접시험에서는 논쟁에 대한 찬반 의견을 묻었던 지난해와 달리 ▲혈연 중심의 사회가 공직사회에 끼치는 해악 ▲IMF시대의 과소비 극복 ▲여성취업 확대 등의 대책이나 해결책을 묻는 질문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박찬호는 군대에 가야하는가’(법학),‘고전 시조 한 수를 외워보라’(국문), ‘풀만으로에너지 섭취가 가능한 이유는’(자연과학부),‘외계인이 있다면 우리와 같은 논리를 가지고 있을까’(원자핵공학),‘풍랑 때문에 배에탄 승객 몇 명을 바다에 던져야 하는데 어떻게 대처하겠는가’(사회교육) 등 엉뚱한 질문들도 많았다. 13일에는 동국대 등 3개대 ▲14일 중앙대 등 4개대 ▲15일 서강대(나군 분할모집)등 2개대 ▲16일 고려대(나군 분할모집)등 2개대가 논술고사를 치른다.
  • 핵은 공포가 아니다/불 피에르 탕기 박사(미래를 보는 세계의눈)

    ◎핵 에너지의 필요성과 당위성 강조/유일한 대체 에너지로 인류의 미래 보장/“국가 발전·환경보존에 가장 효과적” 역설 【파리=김병헌 특파원】 세계적으로 환경문제가 최대의 이슈로 떠오르고 있는 현시점에서 보면 다소 이색적인 책이다.어떤 면에서는 저자 피에르 탕비가 아주 소신있는 인물로 비치기도 한다.‘핵은 공포가 아니다’라는 책의 제목에서도 금방 느낄 수 있다.핵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강조하면서 인류의 미래를 보장하는 에너지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저자가 이같은 결론을 이끌어 가는 과정은 환경보호론자들에게 무모한 도전장을 던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저자의 일관성있고 논리적인 이론 전개는 차치하고 저자의 화려한 핵관련 경력만 봐도 그의 의견을 일과성의 소수 의견으로만 치부할 수 없다는 느낌이다. 저자는 프랑스 최고 엘리트학교인 에콜 폴리테크닉과 미국 매사추세츠 기술연구소를 나와 핵기술에 있어 세계 최고수준인 미국과 프랑스의 관련기관에서 최고 책임자를 지냈다. 지난 78년부터 85년까지 미국 원자에너지위원회 핵에너지 및 안전문제 연구소(IPSN)소장으로 있었고 85년부터 94년까지는 프랑스전력공사 핵에너지실장을 역임했다.책의 서두에서부터 스스로도 핵에너지 관련분야에서 30년간 일한 ‘세계최고의 전문가’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을 정도다. “핵에너지의 필요성에 대한 인류의 각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책을 썼다.민주주의 사회에서 다중의 여론에 밀려 핵에너지에 대한 본질이 호도되고 있는 부분을 바로잡기 위해서다”. 저자는 환경보호론자의 일방적 주장에 밀려 진실이 왜곡되고 있는 핵에너지에 대한 새로운 논쟁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그래서인지 전문과학 서적치고는 일반인들도 이해할 수 있게 30년간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매우 쉽게 썼다.환경보호론자들이 주장하는 핵의 위험성과 이에따른 환경파괴 우려에 대한 반박,그리고 에너지로서의 핵의 필요성과 당위성 등을 설명하며 자신의 논리를 풀어나가고 있다. 저자는 핵만큼 안전하고 깨끗한 에너지는 없다고 주장한다.그러나 ‘안전 및 환경문제에 관한 인프라가 있으면’이라는 단서를달고 있다. 환경보호론자들의 주장은 일면만 보고 있다는 논리다.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 발전소사건도 인프라의 문제라는 지적이다.92년 리우환경회의 이후 환경보존에 대한 세계의 각성이 대두되고 있지만 인류의 희망이 환경보존이라면 핵에너지의 사용이 가장 환경보존에 효과적이라는 다소 역설적인 주장까지 하고 있다. 저자는 핵방사능의 인체에 대한 유해정도를 따져봐도 자신의 주장은 전혀 설득력을 잃지 않는다고 말한다.핵개발이후 핵사고로 사망한 수와 자연 방사능으로 인해 그동안 각종 질병을 통해 사망한 인구를 철저히 비교 조사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에너지 환경공해부분에 있어 지금까지 최대 산업에너지원인 석탄이 지구온난화의 주범중의 하나라는 점을 감안할때 오히려 핵이 더 깨끗하다고 설명한다.핵은 안전보장을 위한 인프라를 통해 공해를 줄일 수 있지만 석탄은 불가능하다는 주장이다.핵 에너지의 위험은 에너지 생산체계에 관한 문제이지 그 자체가 위험하다고는 보지 않는다.그러나 핵안전을 위한 인프라부분에 대해서는 논리자체가 다소 비약해 보인다.자신의 경험을 논리의 바탕으로 깔고 있는 탓인 것 같다. 그래서 핵 인프라의 능력이 있는 선진국들만이 핵에너지를 이용해야한다는 특이한 해법을 내놓고 있다.여기에 개발도상국들도 시도해 볼 만하다고 덧붙이고 있다.힘의 논리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느낌이 없지는 않다.그러나 최근들어 에너지 생산에 있어 그 위험과 오염에 대해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니 에너지의 중요성을 망각하고 있다는 대목은 매우 설득력을 지닌다.책 전편에 흐르는 태양 조수 등 무공해 대체 에너지의 실용화가 요원한 현실로 미루어 핵에너지만이 유일한 대체 에너지라는 주장이 현실적으로 간과되고 있는 측면이 많기 때문이다. 저자의 논거에는 인류에게 보다 중요한 것은 에너지의 환경오염 문제보다 에너지자원의 고갈문제가 더욱 심각하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실제 국제 에너지기구들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과학이 발달될수록 에너지 사용량의 증가는 엄청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현재 후진국의 경우 에너지 사용량이 중세 수준에 미치고 있다는 사실은 앞으로 세계의 에너지 사용량 증가를 예견해 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는게 냉엄한 현실이다. 저자는 그래서 에너지문제는 세계적인 경제문제라고 말한다.그러나 이것이 지나치면 정치문제로 비화될 수가 있다는 것이다.대표적인 에너지전쟁으로 지난 70년대의 석유파동이나 지난 91년의 걸프전을 예로 들었다.‘21세기의 가장 큰 인류의 공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미래의 가장 큰 위협은 핵전쟁이라는게 일반적 견해이다.이 부분에 저자도 동의한다. 피에르 탕기는 산업화 미래화의 원동력인 에너지가 풍족하다면 전쟁은 일어날 수 없다고 본다.미래의 전쟁은 에너지전쟁이며,핵에너지의 사용통제가 핵 에너지의 전쟁을 부를 수 있다는 논리다. “에너지는 모든 국가 발전의 절대적인 변수로 작용할 것이다.에너지가 미래를 보장한다.핵에너지의 사용은 옵션이다.그래서 나는 이 문제를 공론화시켜 논쟁을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다.민주주의는 교육이기 때문이다” .‘리스크 제로의 유토피아는없다’.피에르 탕기가 밝히는 논리의 출발점이다. 원제 Nucleaire pas de panique.프랑스 뉘클레옹 출판사.158쪽.68프랑.
  • 추울땐 따뜻한 영화가 좋다/‘변검’‘콜리야’등 3편 잇달아 개봉

    ◎가족·부부간의 끈끈한 정 묘사 몸도 마음도 추울 때는 역시 ‘가슴 따뜻한’ 영화가 좋다? 네살바기 아이의 시선으로 삶과 죽음을 다룬 ‘뽀네뜨’가 지난달 개봉,큰인기를 얻은데 이어 인간애를 다양하게 묘사한 영화 ‘변검’ ‘콜리야’ ‘로잔나 포에버’ 등이 이달 중하순 잇따라 선보인다. 이 영화들은 핏줄에 상관없이 새 가족관계로 맺어지거나(‘변검’과 ‘콜리야’), 부부간의 끈끈한 애정(‘로잔나 포에버’)을 보여줌으로써 관객을 훈훈한 감동에 젖게 하는 작품들.세편이 각각 중국.체코.이탈리아를 무대로 할리우드영화 문법과는 또다른 독특한 감성을 전달하는 것도 장점이다. ‘변검’은 대를 잇기 원하는 노인과 여자아이라는 이유로 버림받은 소녀가 엮어가는 드라마. 집안에 전해내려온 가면극 ‘변검’의 일인자인 변검왕은 후손이 없음을 우려,구와를 양손자로 받아들인다.그러나 구와가 여자임이 밝혀지자 노인은 아이를 내쫓고 아이는 할아버지의 사랑을 되찾으려 애쓴다.남존여비 사상이 팽배한 20세기 초 중국이라는 시대상황을 배경으로 인간의 정과 의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이 작품은 96년 도쿄영화제를 비롯 국제영화제 10여군데에서 각종 상을 받았다.오는 25일 서울 호암아트홀.뤼미에르 등지에 오른다. ‘콜리야’의 무대는 소련의 압제에 놓인 1988년의 체코.독신 첼리스트인 루카는 용돈을 벌고자 소련여자와 계약결혼을 했다가 곤경에 빠진다.여자가 5살난 아들 콜리야만 남기고 서독으로 도망간 것.어쩔수 없이 아이를 떠맡게된 50대 남자가 아이와 정들어 가는 과정이 영화의 줄거리. 올해 아카데미와 골든글러브 외국어영화상을 휩쓸었다.13일 서울 시네코아를 비롯,전국 40여 영화관에서 개봉. 이에 견줘 ‘로잔나 포에버’는 부부간의 짙은 애정을 유머러스하게 펼쳐낸 작품.지중해변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마르첼로는 동네사람들이 혹시 죽을까봐 걱정이다.병약한 아내는 딸의 묘지 곁에 묻히고 싶어하는데 교구 공동묘지에 남은 자리는 셋뿐이기 때문.따라서 3명이 아내보다 먼저 죽으면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한다.마르첼로는 동네사람들이 사고를 당하지 않도록 일일이 간섭한다. 지중해변의 풍광이 뛰어나지만 눈물겨운 아내사랑은 더욱 아름답다.‘레옹’으로 깊은 인상을 남긴 장 르노가 이번에는 정깊은 남편으로 변신했다. 13일서울 코아아트홀 등 개봉. 한편 ‘뽀네뜨’는 가족단위. 주부 등 폭넓은 층의 호응에 힘입어 한달이 채안되는 사이에 서울에서 7만 관객을 끌어모았다.
  • 뉴욕 자연사박물관/세계 유명 다이아몬드 한자리에 전시 ‘눈길’

    ◎나폴레옹3세 부인·테일러 소장품 등 포함/치장주인공 얽힌 이야기·세공기술도 수록 ‘다이아몬드와 인류 역사는 불가분의 관계’인가.지난달부터 미국 뉴욕의 자연사 박물관에서는 ‘다이아몬드의 세계’라는 주제로 지구상에서 존재하는 유명다이아몬드를 한자리에 집합시켜 전시하고 있어 세인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이 전시회는 다아아몬드라는 보석이 같는 매력도 매력이거니와 형태나 크기는 물론,각각의 다아아몬드에 얽힌 뒷얘기까지 함께 엮어놓고 있어 마치 인류역사를 보는듯 해보는 이들로 하여금 전시의미를 더욱 깊게 하고 있다. 이 전시회를 주최한 박물관직원 조지 할로우는 “다이아몬드 자체가 이미 생성되기까지 27억년이란 긴 세월이 지난 것인데다 지표면에 노출돼 사람들이 이를 캐내는 것,치장하는 것,치장한 주인공에 얽힌 얘기가 역사의 한부분이다”고 전시회의 의미를 간략히 말한다.일례로 남아프리카 요하네스버그의 ‘다이아몬드 러시(RUSH)’와 인도의 ‘다이아몬드 세공 러시’ 등이 이 전시회가 인류역사의 중요한 한장으로 무게를 부여하는 한 부분이기도 하다.전시회의 한쪽에서는 인도에서 다아아몬드 세공과 관련된 수공인들의 애환과 극한 생활모습등도 보여주고 있다. 이 전시회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것은세상에서 가장 큰 다이아몬드들이 각종 형태로 장식된 전시 코너.여기에는 나폴레옹 3세의 부인 유제니가 착용했던 대형 다이아몬드를 비롯해 러시아 피오트르 대제가 사용한 금장과 은,루비,애머랄드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된왕관에 박힌 다이아몬드,그리고 리차드 버튼이 엘리자베드 테일러에게 바쳤던 크루프다이아몬드 등이 눈길을 끌고 있다. 흥미를 끄는 사실은 세상에 빛을 보는 다이아몬드가 모두 보석으로 장식되는 것이 아니라 약 80%가 다이아몬드 강도의 특성에 따라 다른 물질을 자르는 절단도구나 각종 기계의 부품으로 사용된다는 전시회의 설명. 또 세계의 각종 다이아몬드에는 갖가지 전설이 담겨있어 어떤 것은 악마가 씌웠다거나 어떤 것은 행운을 준다는 것등인데,실례로 다이아몬드의 모양에 변화를 주면주인을 보호해주고 아픔을 낮게 해주는 신통력이 사라진다고 믿었던 고대 로마인들은 다이아몬드의 모양을 발굴당시 거친 모습 그대로 장식품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이 전시회에서 볼 수 있다. 이번 전시회는 이같이 기존의 전시회 처럼 단지 다이아몬드만 늘어놓은 것이 아니라 이와 관련된 200여개의 세계문화를 함께 보여줌으로써 문화전시의효과를 극대화시켜 관람인들의 지적 욕구를 한껏 채워주고 있다.
  • 이탈리아 민족부흥운동사/루이지 살바토렐리 지음(화제의 책)

    ◎이탈리아 통일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 ‘사상과 행동의 합일’이라는 마치니적 체취를 물씬 풍기는 이탈리아 역사가 살바토렐리의 대표적 저서.이탈리아 관변 역사가들의 역사해석에 맞서 이탈리아의 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운동,곧 민족부흥운동을 새로운 시각에서 분석한다.그동안 리소르지멘토 과정에 대한 해석은 사보이아가가 이탈리아 통일에 결정적인 기여했다는 것이 대부분이었다.그러나 살바토렐리는 사보이아가에 의한 이탈리아 통일은 단지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하나의 계기로만 작용했을뿐 본질적으로는 18세기 계몽주의 사상을 계승한 이탈리아 사상가들에 그 핵심적인 맥이 닿아 있다고 본다.밑으로부터의 민주혁명을 이룩하려 했던 마치니와 위로부터의 입헌군주제 개혁을 상징하는 인물 카부르의 관계와 관련,그는 기존의 획일적인 변증법 논리를 타파한다.경험적 합리주의에 기초한 살바토렐리의 견해에 따르면 그들은 서로 다른 세계관을 지니고 있었으며,현실적으로 승리한 쪽은 카부르였고 패배한 쪽은 마치니였다. 살바토렐리의 논쟁적인 성향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나폴레옹 3세에 대한 평가에서 잘 드러난다.그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보편적인 혁명이념을 수출해 유럽 각국에 독립정신을 고취시켰으며,특히 이탈리아의 경우 봉건제 폐지와 교회재산 몰수 등 이탈리아가 근대국가로 가는데 필요한 기초를 닦아 주었다는 논리에 반기를 든다.이것은 물론 무솔리니가 나폴레옹을 우상화한데 따른 반작용의 소산으로도 볼 수 있다.한편 폭군이나 변절자 정도로만 인식되어온 나폴레옹 3세에 대해서는 그를 단순히 우익 보수주의자로만 간주할 수 없다는 견해를 보여 눈길을 끈다.곽차섭 옮김,한길사 1만원.
  • 불 영화 세계시장서 사라지나

    ◎마지막 보루 일서도 할리우드산에 밀려 퇴조/작년 48편에 관객 68만뿐… 95년비 32% 줄어/불 영화관계자 “영화관 보다 TV·비디오시장 노려야” 프랑스 영화는 완전히 세계영화시장에서 사라질 것인가. 프랑스영화가 해외시장에서 명맥을 유지하는 마지막 보루였던 일본에서마저 미국영화에 밀리고 있다.프랑스영화계는 “이러다간 세계 영화시장에서 프랑스영화가 완전히 사라지는게 아닌가”하는 위기의식으로 가득차 있다. 일본은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벨기에,스위스,캐나다 퀘벡지역을 제외하고는 가장 많은 프랑스영화가 상영되고 있는 국가로 프랑스 영화의 전통을 이어오는데 한몫을 했다.매년 상영영화횟수도 40여편에 달했다.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관객수가 줄고 영화수입배급업자들도 프랑스영화를 외면하고 있는 추세다. 지난해 일본에서 상영된 프랑스 영화는 모두 48편이었지만 관람객은 지난 95년의 1백만명에서 68만5천명으로 크게 줄었다.영어로 번역돼 상영된 뤽 베송 감독의 ‘레옹’이 50만명의 관객을 동원한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 47편의영화가 끌어온 관객은 모두 합해 20만명이 채 되지 않는 셈이다. ‘여왕마고’,‘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 등을 수입,배급한 일본 에이스픽처스사의 카요 요시다 사장은 “1억3천만명 인구의 일본에 영화관이 1천70여개에 불과하고 영화팬 대부분이 도쿄에 집중돼 있어 영화산업이 크게 발전하지 못한 점도 있지만 프랑스 영화의 고전은 미국영화에 관객들을 점차 뺏기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실제로 일본 영화관람객의 60%를 미국영화가 쓸어가고 있고 30%는 국내영화가 끌어가 프랑스 영화가 설 자리는 점차 사라지고 있다.일본에서 개봉되는 프랑스 영화의 편당 상영관은 평균 5개,하지만 관객수가 5만명을 넘는 경우는 거의 없다.장 폴 라프노 감독의 ‘지붕위의 기병’은 도쿄의 한 곳을 포함,전국에서 모두 11곳의 영화관에 올려졌으나 6만명도 들지 않았다.앙드레 테치네 감독의 ‘도둑들’은 두곳의 영화관에서 상영됐지만 겨우 1만여명만이 관람,크게 망신을 당했다. 그런데도 프랑스영화의 수입단가는 몇년전보다 크게 올라 수입배급업자들의 외면을 부채질하고 있는 실정이다.3년전 편당 평균 57만프랑(8천9백만원)이던 수입가격은 지금은 2∼3배에 이르고 있다.알랭 베르리네 감독의 ‘장미빛 인생’의 경우 올해 무려 2백30만프랑(3억5천9백만원)에 수입계약이 체결됐다. 지난해 일본전역에 110개의 새 영화관이 문을 열어 일본영화산업 활성화에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이지만 프랑스영화 부흥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이들중 상당수가 ‘토호’나 ‘쇼치쿠’ 등 일본의 거대영화기업과 ‘워너’ 등 미국영화기업들이 투자해 만든 대형영화관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영화가 일본에서 살아남는 길은 영화관에서의 흥행보다 안정적이고 대규모 자본투자가 필요없는 TV나 비디오 시장쪽을 노리는 것밖에 없다는게 프랑스영화업계의 분석이다.그러나 이도 여의치 않다.일본 TV방송사의 편성에서 영화프로그램은 보통 110분,미국영화의 길이는 짧아 별 문제가 되지 않는 반면 프랑스영화는 이를 훨씬 넘는 것이다.시간에 맞추어 잘라내기에도 프랑스영화의 속성상 미국영화보다 힘들다는게 일본영화 관계자들의지적이다.
  • 모스크바 크렘린(세계 문화유산 순례:45)

    ◎탑·성곽·성당 어우러진 ‘종합건축의 완성품’/이반3세,512년전 통일러시아 과시위해 건립/탑높이 20∼95m… 나폴레옹 침입땐 진군나팔 크렘린을 어디서부터 얘기할 것인가.무척 힘든 일이다.고딕양식인 20개의 크고 작은 탑,바로코와 로코코양식을 대표하는 4개의 대성당,1천45개의 총안을 가진 둘레 2천235m의 성벽 등 모두가 값진 보물이다.모스크바 강 건너편에는 고성의 탑들이,붉은광장에는 아름다운 성벽들이,성벽사이로는 금장의 돔들이 여기 저기 솟아올라 저마다 색다른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크렘린의 유적군을 굳이 분류한다면 탑,성곽,성당건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이 가운데 크렘린다운 상징건조물은 진홍빛의 크고 작은 탑과 노란 성곽이다.탑들은 15세기 이탈리아의 유명한 건축가 마르코 루포와 알레비오소 프리아지네 등이 설계했다.단순히 외장의 아름다움 뿐만 아니라 전투용,평시용등 그 쓰임새가 다양한 건조물이다.관광객들이 입장권을 끊고 나서 가장 먼저 들르는 곳은 쿠타퍄 탑이다.그리고 총안무늬의 다리를 지난 다음 트로이츠카야 탑에 다다른다.모두 5개이상 전투용 총구를 가진 이들 탑 지하2층에는 크렘린방어용 탄약을 비축하도록 설계됐다.16∼17세기에는 러시아 다른 지역의 탑들과 마찬가지로 죄수를 가두는 감옥역할도 해냈다.이들 탑 맞은편 스파스카야 탑은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들을 맞는 개선문으로도 사용됐다.19세기 초 나폴레옹 군이 진입할 때 진군 나팔소리를 울렸던 곳도 여기다.높이가 20∼95m까지 다양한 이들 탑을 지을 당시 용도는 전투용의 감시초소였다. ○성벽둘레 2,235m 1937년 스탈린시대 크렘린은 사치가 대단했다.건축물에 박힌 루비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큰 루비가 크렘린안의 5개 탑 꼭대기에 설치됐기 때문이다.대형 별 모양의 이 보석은 당대 러시아 최고의 건축설계사인 표드르 페도로브스키가 제작한 것이다.가장 큰 루비별은 니콜스카야와 스파스카야 탑 꼭대기에 설치됐다.직경이 3·75m,무게는 1·5t이 넘는다.이처럼 엄청난 무게의 붉은 별보석은 바람이 부는대로 돌도록 설계됐다. 크렘린 성곽에는 노란빛이 감돌았다.원래 크렘린의 벽은 갈참나무였으나 13세기 몽고 침입후 한세기쯤 지나 화강암으로 바꾸기 시작했다.크렘린을 한때 ‘흰돌도시’로 부른 것도 이 때문이다.탑과 탑사이를 잇는 크렘린 벽에는 모두 1천45군데의 총구가 있다.총구는 가로 세로 2m나 돼 적들이 크렘린을 둘러싸면 총구를 나무방패로 막았다.그 대신 이웃의 작은 구멍을 통해 화염을 내뿜었다고 한다.성벽의 두께는 3.5∼6.5m로 현대식 화기에도 끄덕없다는 것이다. 12세기 유리 돌고루키 왕자때 시작된 크렘린 역사는 1382년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이때 타타르족의 침입으로 모든 것이 불에 탔다.그래서 재건에 들어가 이반3세 때인 1485년쯤 오늘의 크렘린이 완성됐다.성곽은 벽돌로 다시 치장됐고 우스펜스키 성당 등 내부 주요건물이 1백여년간에 걸쳐 복원됐다.이반3세가 크렘린을 전력투구해 복원한 까닭은 통일 러시아의 힘을 대외에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탑은 전투용 감시초소 이반3세는 블라디미르와 같은 전국 각지에서 토목기사·건축가들을 동원했다.그리고 르네상스 최고의 건축가로 꼽히던 이탈리아의 아리스토텔레 피오라반테,피에트로 안토니오 솔라리,마르코 루포등을 러시아로 불러들였다.이 가운데 12세기 러시아건축물의 대표격인 우스펜스키 성당은 바로 피오라반테가 감독한 건축물이다.이반3세는 피오라반테에게 러시아 전국을 여행시켜 주며 러시아식 건축양식으로 성당을 짓도록 독려했다.우스펜스키 성당은 조밀한 아름다움을 지녔으면서도 현대식 공법이 아니면 뽑아내기 힘든 넓은 내부공간을 지금도 자랑하고 있다. 크렘린 안 4개의 대성당은 모두 르네상스시대에 와 있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화려했다.르네상스양식의 벽화와 성화,금은 상들리에로 가득차 있다.12세기의 성화 ‘세인트 조지’‘삼위일체’,11세기 비잔틴양식으로 그린 ‘블라디미르의 여인’등은 크렘린 관광객을 사로잡는다.아르항겔스키 성당,블라고베쉬첸스키 성당에는 복원하지 못한 각종 프레스코와 성화가 아직도 많다.크렘린역사 수백년이 지난 지금도 르네상스시대 예술품 복원이 한창이다.이 대성당들은 화려했을 뿐더러 사치를 한껏 누렸다.1812년 나폴레옹이 크렘린을 점령했을 때 부하들이 마굿간에서 대량의 금·은괴를 약탈할 정도였다. ○4개 대성당 내부 화려 옛소련과 러시아정부의 크렘린 복원노력은 대단했다.재미있는 사실은 레닌조차도 혁명후 1918년 포고령으로 크렘린안의 모든 건축물과 예술품울 보호하는 노력을 기울였다는 사실이다.제2차 세계대전이후 스탈린 시대에는 5개의 주요 탑 상층부 모두에 금과 구리를 입혔다. ◎여행가이드/대회의당서 ‘백조의 호수’ ‘호두까지 인형’발레 관람 크렘린은 붉은 광장과 바로 이웃했다.내부정원은 물론이지만 붉은 광장,모스크바 강위에 세워진 교각에서 크렘린을 보는 경치는 각별하다.밤시간의 조명도 화려해 모스크바 강 수면 위로 드러나는 야경 또한 일품이다.그리고 러시아에 관한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옐친대통령이 근무하는 ‘대통령궁’에도 관광객들이 15m 전방까지 접근할 수 있을 만큼 자유롭다.크렘린내 대회의당은 발레프로그램을 직접 관람할 수 있게 해놓은 유명한 극장 가운데 하나.크렘린 관광객들은 여름 휴가철만 빼놓고 ‘백조의 호수’‘호두까기 인형’ 등 러시아 고전발레도 직접 감상할 수 있다.
  • 이집트 룩소르(세계 문화유산 순례:40)

    ◎고대 애 최대신전 ‘아몬라’ 우뚝/길이 260m 탑문너비 65m ‘거대한 궁전’/1천개의 스핑크스 좌우로 3㎞ 행렬 ‘장관’ 고대 이집트의 부와 영화는 기원전 1600년부터 기원전 1100년 사이의 신왕조때 절정에 이르렀다.이 번영기때 이집트의 영토는 북으로 유프라테스강에서 남으로는 지금의 북수단에 이르렀다.그리고 람세스왕조 때처럼 걸물의 파라오들이 등장해 태평성대를 구가했다.불세출의 파라오 람세스 2세도 이 기간중인 기원전 1279년부터 기원전 1212년까지 67년을 재위했다.그래서 아부 심벨 신전을 비롯한 숱한 신전과 기념물들을 남길수 있었다. 이 1천여년동안 왕조의 수도는 바로 나일강 상류에 위치한 테베이다.그리스의 작가 호머도 람세스 2세의 배려로 이집트에 머물렀다.호머는 대서사시 ‘일리야드’에서 테베를 ‘1천개의 출입문을 가진 도시’라고 묘사했다.파라오들은 공들여 신전을 지었다.외부의 적으로부터 왕국을 지키고 왕권을 넘보며 끊임없이 음모를 꾸미는 내부의 적들로부터 왕권을 지키기 위해서였다.그래서 파라오들은 신전건축을 가장 중요한 국사중 하나로 삼았던 것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해가 솟는 동쪽은 생명과 번영의 땅이었다.대신 해가 지는 서쪽은 죽음의 땅으로 여겼다.풍요와 재생의 상징인 신들의 거처를 나일강 동쪽에 세웠던 까닭도 여기 있다.파라오들의 최후의 안식처인 ‘왕들의 계곡’,‘왕비들의 계곡’,피라미드는 나일강 서안에 세웠다.수도 카이로에서 나일강 동안을 따라 남쪽으로 700㎞에 위치한 테베는 운하로 양분돼 있다.그 운하 북쪽에 신전들의 도시 룩소르가,남쪽에는 역시 신전들로 들어찬 카르낙이 자리했다. 오늘의 현대 도시 룩소르에서도 지난날 영광의 흔적을 볼 수 있다.가장 대표적인 곳은 ‘신들의 왕’인 태양신 아몬 라의 신전이다.고대 이집트인들이 ‘아몬신의 남쪽 궁전’이라고 불렀던 곳이다.출입문에서 뒷편 끝까지의 길이가 260m에 달하는 고대 이집트의 최대 신전인 것이다. 신전 출입문은 필론이라는 탑문으로 장식됐다.탑문 좌우의 너비는 65m에 달한다.탑문에는 람세스 2세를 기리는 그림과 글씨가 들어 있다.히타이트인들을물리친 유명한 카데슈 전투장면을 릴리프로 처리하면서 그의 전공을 상형문자로 새겼다.출입구 좌우에는 높이 25m의 쌍동이 오벨리스크를 나란히 세웠는데 지금은 왼편 것 하나만 남았다.1833년 나폴레옹군대가 뺏아간 오른쪽 오벨리스크는 지금 파리의 콩코드광장 중앙에 서있다.탑문 앞쪽에는 역시 람세스 2세의 거대한 대리석 석상을 세웠다.왕비 네페르타리와 공주 메리타몬의 석상도 세웠으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오벨리스크가 서있는 신전 입구에서 북쪽 카르낙의 신전에 이르는 3㎞는 ‘스핑크스의 길’이다.사자의 몸에 양의 머리를 한 1천개의 스핑크스들이 좌우로 늘어섰다.양은 신들의 왕인 아몬신을 상징하는 신성한 동물이었다.지금 이 스핑크스 거리에 나온 유물은 먼저 출토한 일부 출토품에 지나지 않는다. 카르낙의 신전도 태양신 아몬 라에 바쳐진 것이다.테베에 있는 신전들 중 가장 오래된 신전이다.거대한 돌기둥들이 숲을 이루고 있는 카르낙 신전은 모두 3부분으로 구분됐다.주신전은 신들의 왕인 아몬 라의 신전,왼편으로 그의 아들 혼슈,맞은편 것은 아몬의 부인 무트신의 신전이다.고대 이집트의 주신들은 이후 탄생한 기독교 교리의 성부·성자·성신처럼 성가족을 이루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카르낙 대신전은 기둥의 숲이다.세계 최대의 기둥 신전이기도 한 카르낙 대신전은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보다도 더 큰 규모다.그 위용을 짐작할 만하다.길이 102m,너비 53m에 달하는 홀에는 높이 23m에 이르는 사암 돌기둥 134개가 서있다.활짝 핀 파피루스 꽃모양의 기둥머리 장식을 한 돌기둥들인데 기둥머리 위쪽에는 대형 돌 원판을 얹어놓았다.기둥의 웅장함과 기둥 사이를 통해 간간히 들어오는 햇빛,그리고 그 햇빛이 만들어내는 돌기둥의 그늘이 신비스런 분위기를 연출해낸다.파라오 세티 1세때 증축을 시작해 그의 아들 람세스 2세때 완성한 신전으로 8만여명이 넘는 석공들이 동원됐다고 한다. 신전의 돌기둥과 벽면을 장식한 그림들은 매우 독특한 기법으로 처리됐다.신체를 그릴때 이집트 화가들은 상형문자에서 아이디어를 따왔다.신체 각부분을 하나의 독립된 상형문자처럼 그렸다.그리고신체 각부분은 화가 자신들 눈에 가장 잘 들어오는 쪽에서 그렸다.머리는 측면,어깨와 상반신은 전면,신체는 허리에서 약간 틀어져 배꼽이 보이도록 했다.다리와 발은 측면에서 바라본 행태로 그렸다.신체 각부분을 여러 면에서 보이는대로 그렸기 때문에 전체적으로는 매우 신비스런 인상을 안겨주었다. 돌기둥의 숲 옆에는 신들의 호수를 만들었다.한변의 길이가 120m에 달하는 인공호수는 창조주 아몬신이 소유한 ‘영원의 대양’을 상징한 것이다.매일 아침 신관들은 이 신들의 호수에 몸을 담그고 제의를 올렸다.신전을 축성하는데도 이 호수물을 썼다.이집트는 신들이 다스리는 왕국이었고 파라오는 신의 대리인이자 살아있는 신이었다. ◎여행 가이드/나일강변 유적 즐비… ‘왕들·왕비들의 계곡’ 볼만 나일강 상류 일대에는 ‘살아있는 역사’라고 할 정도로 수많은 유적들이 산재돼 있다.수도 카이로에서 아부 심벨사원이나 카르낙·룩소르로의 여행은 항공편을 이용하는 게 좋다.카이로 공항에서 카르낙을 왕복하는 항공편이 수시로 있다. 소요시간은카이로 공항에서 아스완까지 약 1시간 30분.다시 남으로 30분쯤 내려가면 아부 심벨이다.아부 심벨 공항에서는 약 1시간 정도 기착하는데 이 시간을 이용해 아부 심벨 신전을 구경한다.기다리는 비행기를 타고 다시 40분 정도 올라가면 룩소르 공항에 도착한다.룩소르에서는 각자의 여행 사정에 따라 주변에 산재한 유적들을 돌아보면 된다.카르낙에서 나일강 건너편 사막지대로 들어가면 ‘왕들의 계곡’ ‘왕비들의 계곡’등 수많은 무덤들이 있다.투탄카멘왕의 무덤,네페르타리 왕비의 무덤 등이 도처에 분포됐다. 여유가 있으면 아스완 하이댐과,이 댐으로 생겨난 인공호수 낫세르호의 위용을 돌아보는 것도 좋다.
  • 독선과 아집의 역사/바바라 터크먼 지음(화제의 책)

    ◎권력욕에 사로잡힌 통치자들의 탐욕 세계의 권력자들에 의해 자행된 숱한 어리석음의 역사를 기록.권력욕에 사로잡힌 통치자의 탐욕과 독선이 어떻게 한 나라를 망치고 역사의 비극을 부르는가,또 그로 말미암아 국민들이 어떤 고통과 불행을 겪게 되는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아둔함의 전형을 보여주는 트로이의 목마 이야기,개혁보다는 타락을 택한 르네상스시대의 교황들,야당과 여당의 정쟁으로 날을 지새다 미국을 잃어버린 대영제국,정권 재창출에 골몰하다 베트남전쟁에서 패배한 존슨과 닉슨 등 세계사의 네가지 결정적인 사건을 다룬다. 조지 3세 치하의 영국 내각은 왜 식민지 아메리카와 평화롭게 지내지 않고 억압하는 쪽을 택해 화를 자초했으며,카를 12세와 나폴레옹 그리고 히틀러는 역사상 되풀이된 비극적인 결과를 알면서도 왜 러시아를 침공했을까,장개석은 왜 숱한 경고와 개혁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려 하지 않았을까….지은이는 이 책에서 통치자의 독선과 아집이 악정을 낳았던 사례들을 낱낱이 소개한다.이를 통해 통치라는 가장 중요한 정치행위가 어떻게 국가와 국민의 이익에 반하는 정책을 낳는지,그 현상과 원인의 메커니즘을 파헤친다.조민·조석현 옮김,자작나무,전2권 각권 7천800원.
  • 과학자들 존중하는 사회/류재천 KIST 책임연구원(굄돌)

    미국의 화성탐사선 패스파인더가 무사히 화성에 착륙하여,약간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순조롭게 화성탐사를 하고 있다는 소식과 함께 몇 년 후에는 유인 화성 탐사선이,그리고 또 얼마후에는 인류의 화성여행이 가능해지리라는 매우 밝은 뉴스들이 우리를 즐겁게 해주고 있다.이러한 일이 가능할 수 있었던 절대적 힘은 물론 과학기술의 힘이었을 것이다.나폴레옹은 여러곳을 원정다닐때 여러 과학자들을 대동하고 출정하여 그 지방에 관한 연구조사를 철저히 했다고 하며 그의 원래 꿈이 과학자여서 과학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고 한다.최근엔 생식세포가 아닌 체세포를 이용하여 복제양을 탄생시킨 영국 로슬린 연구소의 연구자들이 인간혈액의 주성분들을 양과 같은 동물체내에서 생산,분리하여 여러 의학적 용도로의 이용 가능성 타진을 하고 있다는 외신을 접한바 있다.또한 앞으로 멀지 않은 미래에 1백억명에 도달할 전 인류를 먹여살릴수 있는 식량의 유일한 해결책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도 유전공학기법을 이용한 과학기술이라는 결론을 내린 사람도 있다. 이렇듯 과학기술의 중요성은 가깝게는 일상생활에서의 편리함,품질,가격이란 의미들로서 우리 주위에 늘 있으며,길게는 미래 국가 경쟁력의 원천으로서 또 우리 인류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는 유일한 대안으로서 역설되고 있는 것이다.먹느냐 먹히느냐 하는 무한 경쟁이란 말을 많이 한다.과학기술력이 뒷받침되어야 무한경쟁에서 살아남을수 있다.우리나라 내부에서야 경쟁력 제고의 일환으로 무한경쟁을 한다 하더라도,국가간의 먹느냐 먹히느냐의 차원에서 생각해보면,뼈 아픈 과거의 치욕을 갖고 있는 우리로서는 과학기술에서뿐 아니라 다방면에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일이다. ‘There is no great genius without some touch of madness’ 즉 무엇엔가 미치지 않고서는 위대한 천재가 될 수 없다는 말이 있다.획일화된 기존의 잣대와 변하지 않는 시선보다는,미친짓 같아 보이더라도 보다 넓은 사고와 다양성을 가질수 있도록 자유도(degree of freedom)를 넓혀 주어 날로 성숙하고 발전하는 우리 과학기술자를 포용해 주자.우리 과학기술자들의 밝은 웃음과 끊임없는 노력에 이제는 우리나라의 밝은 미래에 대한 큰 기대를 해도 되지 않을까?
  • 독일 뷔르츠부르크(세계 문화유산 순례:37)

    ◎13세기 축조 거대한 성채요새 우뚝/왕족겸 주교가 외세막기위해 강언덕에 세워/70여년 걸쳐 건설한 사찰관 ‘레지덴츠’ 한눈에 모차르트는 말년에 독일 중남부 뷔르츠부르크(Wurtzburg)를 들른 적이 있다.‘진혼미사곡’을 작곡하고 숨을 거두기 2년전인 1789년의 일이다.자신의 활동무대 비엔나를 떠나 레오폴드 2세의 황제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길이었다.지친 말을 갈아 타고 커피나 한잔하면서 휴식을 취할 요량이었는데,그만 1년동안을 뷔르츠부르크에 눌러앉고 말았다. 모차르트 자신이 뷔르츠부르크에 머물렀다기보다는 이 도시의 강렬한 인상이 그의 발목을 잡았는지 모른다.뷔르츠부르크에 매료된 사람이 어디 모차르트 뿐이겠는가.12세기초 문인 고트프리트 폰 비에트로는 뷔르츠부르크를 ‘지상낙원’이라고 찬양했다.또 헤르만 헤세가 1930년 “만일 내가 출생지를 선택할 수 있다면 당연히 뷔르츠부르크를 택할것”이라고 부러워했던 곳도 여기다. ○모차르트의 휴식처로 여름 한 철을 빼고는 잿빛 하늘로 뒤덮인 뷔르츠부르크.그러나 ‘지상낙원’으로 꼽혔던 까닭을 뷔르츠부르크에 들어서면 곧 바로 알아 차릴수 있다.풀잎이라는 뜻의 ‘뷔르츠(Wurz)’와 언덕이라는 의미의 ‘부르크(burg)’에서 알 수 있듯 뷔르츠부르크는 ‘풀잎이 많은 언덕’이다.마인츠 강이 도시의 중심을 가로 질러 흐르고 풍요로움을 자랑하는 포도나무는 옛날 약초언덕의 명성을 그대로 떠올려 주었다. 뷔르츠부르크에 들어서면 산위에 우뚝한 마리엔부르크 요새가 사람들을 압도한다.1천200년전 성모 마리아를 기리기 위해 만든 고성이기도 한데,옛 이름은 뷔르츠부르크요새였다.그러니까 요새는 뷔르츠부르크라는 도시 역사의 시원이다.요새의 주인은 당시 세력을 떨치던 왕족이면서 주교직을 겸한 이른바 ‘왕족­주교’들이었다.일반 시민들이 감히 그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을 정도의 위세를 누렸던 그들은 위세와 명성에 걸맞는 거처를 필요로 했다.그래서 1253년 거처이자 성채이기도 한 요새를 축조했던 것이다. 마리엔부르크 성채의 권력자들은 물론 주민들을 호령했고 성채는 행정보다는 튼튼한 요새의 성격이 강했다.마리엔부르크 성채는 중세 유럽의 암흑기에 빈번했던 외적의 침입을 막기에는 더할 나위없는 요새였지만 유지비 조달과 주민 통치에 불편에는 많은 문제점이 뒤따랐다.그러는 사이 분열된 독일연방이 안정을 되찾으면서 침입자의 위험성도 점차 사라졌다. 그래서 요새의 권력자들은 산에서 내려왔다.마리엔부르크 요새에서 내려다 보면 도심 한 가운데 성당으로 둘러싸인 레지덴츠가 한 눈에 들어왔다.왕족 출신의 쇤보른 주교가 1719년부터 1795년까지 70여년동안에 걸쳐 평지에 건설한 새로운 권력의 아성이다.주민들의 부역과 막대한 세금이 들어갔다는 레지덴츠의 위용은 지금도 대단하다. 레지덴츠 입구의 분수대는 무심히 넘길수 없는 유적이다.분수대에는 레지덴츠를 만든 건축가와 화가·조각가들이 서 있다.중세풍의 고압적이고 투박한 여느 건축물과는 달리 레지덴츠는 우아한 바로코풍을 자랑한다.오죽했으면 프랑스의 나폴레옹황제조차 혀를 내둘렀을까.레지덴츠에 들러 하루밤을 보낸 황제는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제관”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는 것이다. ○‘풀잎이 많은 언덕’으로 건축가 빌타자르 노이만이 기둥없는 특수공법으로 건축한 레지덴츠는 20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도 건축가들로부터 격찬의 대상이 되고 있다.레지덴츠 입구에서 50마르크짜리 지폐를 새삼스레 꺼내 보았다.왜냐하면 그 속에 독일이 자랑하는 대표적인 건축가 노이만의 얼굴이 들어있기 때문이다.뛰어난 음향효과를 가진 황제의 방에서는 지금도 모짜르트 음악만을 주제로 한 연주회가 열리고 있다. 티에폴로는 당대의 미켈란젤로와 쌍벽을 이루는 화가였다.미켈란젤로가 로마 중심의 화가였다면,티에폴로는 독일을 주무대로 활약했던 거장이었다.티에폴로가 천정화를 만드는데 사용된 비용은 요즘 독일 화폐로 따져 150만마르크(한화 약 7억5천만원)로 추산됐다. ○나폴레옹 황제도 감탄 정원을 거닐다 만나는 조각들은 거의가 틸만 슈나이더의 작품이다. 우아하고 섬세한 선을 조화롭게 표현한 독일 후기 고딕시대의 대표적인 조각가의 작품인 것이다.왼팔이 떨어져 나간 ‘아담과 이브’에서는 슈나이더의 뛰어난 손길을 느낄수 있다.지금은 레지덴츠와 함께 세계문화유산의 하나로 등록돼 마리엔베르크성의 박물관에 보관됐다.레지덴츠는 지난 1945년 2차세계전쟁 당시 전파됐으나 독일이 갖고 있던 자료로 거의 원상에 가깝도록 복원해 해놓았다. ◎여행가이드/프랑크푸르트서 동남쪽 100㎞ 위치 프랑크푸르트에서 남동쪽으로 약100㎞ 떨어진 뷔르츠부르크는 유명한 로만티크가도의 시발점.로만티크가도는 낭만가도라는 뜻이 아니라 알프스 산을 넘어 로마에 이르는 통상로라는 의미이다.하지만 오스트리아와의 접경 마을 퓌센까지 350㎞에 이르는 로만티크 가도는 낭만에 젖어있다. 뷔르츠부르크 시내의 넘치는 활력은 독일 도시라는 느낌을 전혀 주지 않는다.노상 카페가 늘어선 거리는 독일이라기보다는 프랑스에 와있다는 착각을 전해줄 정도이다.성자들의 석상이 늘어서 있는 돌다리 알테마인다리(18세기초) 아래로는 뷔르츠부르크의 낭만이 흐른다.
  • 「우리시대의 어른」은 정녕 없는가(박갑천 칼럼)

    얼마전 한 백화점이 올해 「성년의 날」에 성년이 되는 남녀 200여명에게 설문조사한 내용이 알려졌다.그 가운데 우리 시대에 참다운 어른은 없다는데 많은 응답이 나와서 주목을 끌게 한다.여기서의 「어른」은 「사회지도자」를 뜻한다. 성년이 되는 우리 젊은이들은 임란때의 구국영웅 이순신 장군을 염두에 두었을수 있다.외국사례긴 하지만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에 점령당하여 기죽어있는 독일국민에게 횃불을 비친 피히테를 생각했던건지도 모른다.그는 서슬퍼런 총칼앞에서 「독일국민에게 고함」이란 논제아래 14번에 걸쳐 강연하는 가운데 독일혼을 불어넣었다.그후 베를린대학 초대총장이 되고서 독일해방전쟁이 일어났을땐 종군을 자원했던 실천의 지식인이었다. 그렇긴해도 그들의 행적은 국난속이었기에 상대적으로 더 도드라졌다고 할수도 있다.이는 일제강점 35년을 뒤돌아보면서도 느낄수 있는 일.「어른」으로 받들어 고개숙여야할 이름은 한둘이 아니잖은가.하나,개중에는 흠은 가리워진채 공적만 돋보이게된 경우도 없진 않을 것이다.「존경받을어른」은 그렇게 시대상에 관계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학의 자세로 학의 소리내는 어른.우리 새 성년들이 느낀 그대로 그런 어른 찾기 어려운게 오늘의 현실이긴 하다.하지만 우리사회 풍토가 그같은 어른의 자리를 뺏어버리고 있는 측면은 없는지.고독한 패배자로 만들어 내치거나 지기를 빼내고 속진으로 멱감기는 분위기.그래서 참다운 어른은 악화에 쫓긴 양화로서 「여항의 산속」에 숨어들어 가뭇없어진것 아닐까. 아니,사실은 우리곁에서 빛을 뿜고있건만 이욕에 찌든 눈들이 제대로 못보고 있을수도 있다.준마도 태마속에 섞이면 밝은 눈이 없는 한 옴나위없이 노마신세 면치못하는 법.옛날 한명이라는 세객이 춘신군에게 했던 말도 그것이다.천리마(기)가 짐말과 함께 소금짐 나르노라 땀흘리며 산길을 오른다.마침 그곳을 지나던 백락이 보고서 눈물흘리며 제옷을 벗어 입혀준다.기쁨에 거늑해진 이 준마는 히힝 큰소리쳐 운다(「전국책·초」).이 천리마같은 어른을 우리가 못보는건 아닌지. 어른을 기구있게 받들 줄부터 알아야 한다.그런 가정·사회만이 어른을 제대로 볼 수 있고 그 소리도 들을수 있다.없다고 한 눈으로 우리 마음자리를 살펴보자.가정의 달도 이울어가누나.〈칼럼니스트〉
  • 이집트 피라미드:중(세계 문화유산 순례:30)

    ◎돌덩이 230만개 입체퍼즐 짜맞춘듯/직선과 각에만 의존하여 영원을 향해 쌓아올린 돌계단/그 완벽한 설계는 불가사의/파라오의 5천년 동행자 「공포의 아버지」 스핑크스는 현대 공해앞에 기력을 잃고… 쿠푸왕의 대피라미드가 안겨주는 불가사의함은 무덤의 내부로 들어가 돌들이 짜맞춰 쌓여진 구조를 보면서 점점 더 생생하게 실감하게 된다.대피라미드에는 북면에 단하나뿐인 입구가 나있다.출입구가 발견된 경위에 대해서도 여러 설이 있으나 기원후 9세기 이슬람에 정복됐을 당시 마아문이라는 칼리프(왕)의 명령으로 찾아내 내부통로를 막은 돌들을 치웠다는게 정설이다.현재 이 출입구는 봉쇄돼있고 그밑에 관광객들이 드나드는 임시출입구가 나있다. 내부에서 보면 피라미드를 쌓은 돌들이 일정한 규격으로 다듬은 다음 차곡차곡 쌓은게 아니라 돌의 크기가 제각각임을 알수 있다.서로 크기가 다른 돌들을 사방으로 이가 맞물리듯 짜맞추어서 구조물의 안정성을 크게 높였다.돌의 기울기도 바깥쪽을 안쪽보다 조금 높게 쌓아 바깥으로 무너짐을 막았다.그래서 전체적으로 돌을 쌓은 방식은 마치 입체 퍼즐을 짜맞추어 놓은 것같은 느낌을 준다.그렇다면 퍼즐조각을 준비하듯 애초에 완벽한 설계도를 가지고 일을 시작했다는 말인가.피라미드와 관련된 여러 불가사의중 좀체 풀리지 않는 의문 중 하나이다. 출입구부터 난 통로는 가운데 무덤방인 현실까지 이어진다.가로세로 1.2m쯤 되는 정사각형 통로를 한참 들어가면 통로 높이가 9m정도로 높아진 뒤 이어 「왕비의 방」이라 부르는 작은 방이 하나 나온다.현재까지 확인된 바로는 피라미드에는 현실을 포함해 모두 3개의 방이 만들어져 있다.이 「왕비의 방」은 원래 파라오의 현실로 만들었는데 왕이 예상보다 오래 살게 되자 피라미드를 확장하고 현실 위치도 더 높은 곳으로 옮기며 빈방으로 남게 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파라오의 시신이 안치됐던 현실은 지상에서 42m높이에 자리하고 있다. 이 묘실은 「왕비의 방」에서 긴 회랑을 통과해서 올라가게 돼있다.묘실의 천정은 총중량이 400t에 이르는 9개의 석재들이 수직으로 놓여져 있는데 이 엄청난 부하를분산시키기 위해 위쪽에 따로 떨어진 모두 5개 층의 격실을 만들어 놓았다.왕의 석관은 평편한 돌조각을 깐 바닥위에 놓여져 있다.원래 이 석관안에는 쿠푸왕의 미라가 안치됐다. 미라는 값진 목걸이와 보석 장신구들로 화려하게 치장하고 황금가면을 썼다.주위에는 파라오가 저 세상에서 먹을 식량도 준비했고 가구까지 준비해 두었으나 지금은 모두 도굴당해 뚜껑도 없이 텅빈 석관만 한구석에 덩그러니 놓여있다. 석관이 놓인 위치는 바로 무덤의 모든 기가 한곳으로 모이는 자리라고 한다.종이 따위로 소형 피라미드 모형을 만든 다음 무딘 면도칼을 바로 이 위치에 놓으면 날이 날카롭게 선다는 사실이 실험으로 증명된바 있다고 안내인은 말하나 사실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장례의식이 끝나면 묘실입구는 커다란 바윗돌로 막았다.신관들은 수직 갱을 통해 밖으로 나왔으며 갱은 안쪽에 미리 마련해둔 커다란 바위돌로 차례차례 막아 외부에서는 다시 묘실로 들어갈 수 없게 만들었다.피라미드 내부의 미로같은 통로들을 오르내리다 보면 오줌 지린내같은 심한악취가 나는데 관광객들이 내뿜는 숨과 땀등이 돌벽에 부딪쳐서 일으키는 화학변화 탓이라고 한다.돌 표면에 붙은 이 화학물질들을 제거하는 작업을 수개월에 한번씩 해주는데 이 작업기간중에는 관광객들의 피라미드 내부 출입을 막는다. 기자의 대피라미드들은 고대 이집트인들이 인간의 불멸에 대한 자신들의 상상력을 총동원해 만든 돌 구조물이다.이 돌 구조물들은 단순함과 장엄함이 어우러져 흠잡을데 없이 완벽한 조화를 연출해내고있다.직선이 이처럼 완벽히 다스려져 표현된 건축물이 언제 또 있었던가.고대 이집트인들은 오직 직선과 각에만 의존해 차곡차곡 영원불멸을 향해 올라가는 돌 계단을 차곡차곡 쌓아올렸다. 3개의 거대 피라미드를 완성시킨뒤 이집트인들은 이것이 인간의 손으로 만든 것임을 알리고 싶어서였던듯 지상의 존재들을 형상화시킨 거대한 석상을 그 앞에 만들어 세웠는데 그것이 바로 「스핑크스」였다.가운데 피라미드의 주인공인 케프론왕의 얼굴과 용맹의 상징인 사자의 몸체를 가진 이 돌조각의 일차적인 임무는 피라미드의수호신이었을 것이다.이 수호신은 역사의 여명부터 지금까지 5천여년 동안 파라오의 동행자였고 한편으로는 신의 위치에 있었던 파라오 자신이었다. 스핑크스는 기자 모래언덕의 석회암 바위돌을 깍아 만든 것으로 표면을 장식한 돌 타일조각이 떨어져나가 몸통 곳곳에서 지층이 그대로 드러나있다.원래 무슨 이름으로 불렸는지 기록은 없지만 이곳에 들어온 아랍인들은 「아블 홀(공포의 아버지)」로 불렀고 스핑크스란 이름은 사람과 사자 「둘이 합쳐진 것」이란 뜻으로 그리스인들이 붙였다.지금은 코와 턱 일부가 떨어져 나가고 입술도 절반이 짤려나간 흉한 모습이지만 높이 20m,머리에서 다리끝까지의 길이가 78m에 이르는 위풍당당한 수호신이다.얼굴 폭만 4m15㎝에 이른다. 스핑크스가 손상된 첫째 원인은 무엇보다도 서부사막에서 불어오는 세찬 모래바람이었다.이 모래바람에 덮여 한때 스핑크스는 몸체 전부가 땅속에 파묻여 있었는데 후세에 이를 발굴해 지금의 모습으로 보존하게 된 것이다.역설적이지만 스핑크스를 5천년이 넘도록 지켜준 것도 바로이 사막의 모래바람이었다.주위에 쌓인 모래로 하중이 분산돼 무너져내림을 막았고 풍화에 의한 마모도 막아주었기 때문이다.모래를 치운뒤 외기에 노출되고 하중을 수직으로 받으면서 이 돌조각은 급속히 마모되고 곧곧에서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아울러 인근 마을에서 쏟아내는 생활하수들이 지하암반으로 스며들고 관광객들을 실어나르는 자동차의 진동과 매연,그리고 서울 못지 않게 지독한 카이로의 대기 오염이 한번씩 비가 올때마다 내려않아 스핑크스의 수명을 단축시키고 있다고 한다. 파라오와 함께 5천년을 여행해온 존재.알렉산더,시저,나폴레옹등 기자의 모래언덕을 지나간 숱한 정복자들의 꿈이 낙엽처럼 사막에 나뒹굴 때도 기자 언덕을 지켜온 「공포의 아버지」가 현대의 공해 앞에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이다.오늘도 밤이 되면 스핑크스는 화려한 인공조명과 음향속에 피라미드를 배경으로 장엄하게 버티고 서서 세계 각지에서 모여드는 관광객들을 맞이한다.
  • 무성의·동상이몽… 「청문회는 춤춘다」(박갑천 칼럼)

    1814년 나폴레옹이 허방친 러시아 원정끝에 가라앉자 유럽 여러나라의 임금하며 장관들이 오스트리아의 빈에 모여든다.전쟁의 뒷수쇄를 위함이었다. 러시아의 알렉산드르1세,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 등등이 그사람들이다. 그들에게는 나름대로의 꿍꿍이속이 있었다.이기회에 영토를 넓혀 보겠다는,혹은 배상금을 좀더 많이 울거내겠다는 따위. 이를테면 프랑스대표 탈레랑같은 경우는 각국 대표들의 사이를 가리틂으로써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 들었다. 그러니 낮에는 사냥이나 하고 밤이면 무도회를 열면서 뒷거래흥정에 타울거릴뿐 회의가 제대로 진행될리 없었다.그러구러 그해가 저물자 지칠대로 지친 그들은 『회의는 크게 춤춘다. 그리고 나아가진 않는다』는 명언을 만들어낸다. 이해가 다르면 함께 자면서도 꿈이 달라진다. 같은 곳에서 같은 목표의 일을 하건만 손발이 맞지 않는다.이게바로 동상이몽. 이말은 진양의 「주원회에게 드리는글」에 나온다.원회는 주희(주자) 의자. 함께 일을 하면서도 생각이 다르면 옛날의 성인 주공(이름은단)이라해도 그속 마음을 헤아리지 못할 것이라면서 빗대어 썼다.회의를 춤추게 한 것은 그같은 동상이몽 때문이었다. 이른바 한보청문회가 보여주는 것이 무엇인가.이를 지켜보는 국민들은 문득 동상이몽이란 말을 떠올린다. 답변하는 쪽은 더 말할 것이 없지만 질문하는쪽 또한 이해의 엇결 때문인가, 「꿈」이 다른 냄새를 풍기면서 파사현정의 명분을 엷게 만든다. 증인들의 성의없고 방자한 태도도 그런 분위기와 무관하다 할 수는 없을 것이다.「청문회는 춤춘다」는 인상을 지울수 없게 하잖은가. 그옛날의 「회의는 춤춘다」회의는 그래도 몇가지 결정을 본다. 유럽을 프랑스혁명 이전의 상태로 되돌릴 것,유럽의 황폐해진 정신을 제자리로 되찾고 도량하는 자유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신성동맹을 맺자는 따위. 이 유명한 회의는 1백여년이 흐른 1933년 독일에서 그를 주제로한 영화 「회의는 춤춘다」 가만들어지면서 더 유명해진다. 그리고 지금도 불리는 주제가가 「단한번,두번은 없지」. 그런데 단한번이 아닌 우리의 두번째 열린 청문회는 어떤 결과를 낳을건지. 어째,쓰렁쓰렁한 냉소가 가장짙은 앙금으로 처지는 것만 같다. 국민들 마음엔 어느새 불쾌와 불신과 울분이 한켜 더 쌓여버린것 아닌가.
  • 큰 물결/미 데이비스 피셔(미래를 보는 세계의 눈)

    ◎역사를 「물가혁명」 4단계로 분석/인플레 시작→악화→사회불안→질서붕괴 구분 「큰 물결」이라는 제하에 수세기에 걸친 역사적 관점속에서 현재를 파악하면서 미래에 닥쳐올 수 있는 위기를 헤쳐나가려고 시도한 책이 나와 관련학자들에게 흥미와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미국 브랜다이스대학의 역사학교수인 저자 데이비드 해킷 피셔는 이 책에서 물가혁명(Price Revolution)의 결과로써 각 사회와 정치문화가 겪은 내적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불평등사회 단계적 진행 피셔에 따르면 세계는 지금 1896년에 시작한 물가혁명의 후반단계에 있다고 진단한다.그는 물가혁명은 4단계를 거쳐 진행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먼저 급격한 인구성장과 기대치의 상승으로 인한 수요증가에 의해 인플레이션이 유발됨으로써 물결이 일기 시작한다.2단계로 물가는 안정기동안 오르내리던 한계치를 벗어나게 되고 사회는 인플레이션을 자연스런 현상으로 받아들이며 각 정부들과 개개 시민들은 자신의 단기적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행동한다.그러나 물가의 상승과 통화공급의 팽창은 인플레이션을 악화시킨다. 세번째 단계는 이같은 상황을 맞아 부자가 자신의 이익을 더 잘 지킬 수 있기 때문에 사회적 불평등은 증가하고 또한 불안정이 잇따른다.마지막으로 물결은 최고조에 달하고 부서지면서 기존의 사회질서도 붕괴된다. 「큰 물결」의 주된 관심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물가혁명에 있다.피셔는 세계는 현재 확산되고 있는 불안정의 단계에 있으며 위기에 처해있는 것 같다고 진단하고 있다.그는 따라서 사회질서의 붕괴를 이끄는 불평등의 심화를 막기 위한 활발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그는 과거를 이해하는 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재난을 피할수 있게 하도록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재앙을 사전에 예방할 수 있다는 그의 사고는 물결의 가장 커다란 상승이 물결로 표현되는 역사분석에서 물결의 후반기에 오기 때문에 일리있는 것이다.그는 재난을 피하는 한 방법으로서 정부가 단기적인 물가통제정책을 인위적으로 실시하고 비축된 상품들을 방출해야 한다는 주장을 강력하게 하고 있다.그는 또한 이같은위기를 극복키 위한 방법의 하나로서 교육의 개선을 제안하고 있다. 피셔가 역사적 자료들을 계량적으로 분석한 이 책에 따르면 물가가 상승한 뒤 문화를 뒤흔드는 위기가 닥쳐와 구질서가 붕괴되고 그 이후 물가상승의 다음 물결이 일기 시작하기 전까지 단기간의 안정된 시기와 사회적 발전이 찾아오는 것이 일반적 패턴이다.그는 과거 약 800여년간의 시기를 연구·분석,이 기간을 4개의 시기로 나누고 있다. 중세의 물가혁명은 1180년에 시작돼 페스트가 창궐하던 때인 1350년에 폭발했으며 그 이후에는 르네상스라는 안정기가 뒤따랐다.그 다음에 온 물가물결(Price Wave)은 1470년에 비롯돼 1680년에 끝난 30년전쟁(독일 신·구교도간의 종교전쟁)과 함께 종막을 고하고 계몽주의시대라는 안정기가 도래했다.세번째 물가혁명은 1730년에 시작돼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으로 종막을 고한뒤 빅토리아시대의 안정기를 가져왔다. ○가족붕괴도 물결서 연유 피셔는 범죄의 물결과 가족의 붕괴를 최종적인 위기가 도래하기 전인 불안정단계의 증거로서 제시하고 있다.그는 한편으로 공산주의의 몰락을 최종단계와 관련된 구질서붕괴의 긍정적인 일부분으로 제시하고 있다. 뉴욕 타임스는 피셔의 분석이 완전하고 정확한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뉴욕타임스는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에 새로운 통찰력을 주는 흥미있는 질문을 불러일으키는 방식으로 피셔가 과거와 현재를 기술하고 있다고 평하고 있다.이 신문은 다른 어떤 역사가가 이보다 더 나은 기여를 할 수 있겠는가고 반문하고 있다.원제는 「The Great Wave」,뉴욕의 옥스퍼드대 출판부 간행,30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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