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일상사란 무엇인가/뒷골목 소시민이 역사의 주인공
‘평범한 사람들,사소한 일상이 역사를 움직인다?’요즘 각광받는 ‘리더십’이라는 용어처럼 소수의 지도자나 영웅의 역할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다소 의아하게 들릴지도 모를 이 말은 1970년대 말 독일에서 시작된 새로운 역사방법론으로서 ‘일상사(日常史)’의 역사관을 한마디로 요약해 본 것이다.
‘일상사란 무엇인가’(알프 뤼트케 외 지음,이동기 외 옮김,청년사)는 90년대 이후 국내 학계에서도 관심이 부쩍 늘고 있는 ‘일상사’에 대한 다양한 각도의 이론과 연구영역을 소개하고 실제경험적 연구결과도 함께 수록한 순도높은 저작이다.
‘일상사’를 이해하려면 최근 약 150년간의 서양역사학의 전개과정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겠다.근대 서양역사학은 3단계 발전과정을 밟아왔다고 할 수있다.먼저 19세기 레오폴트 폰 랑케로 대표되는 정치사의 시기.이 시기 역사학은 소수 엘리트나 지배계급의 관점에서의 정치 외교사가 유일한 연구대상이었다.
이어 20세기초부터 2단계는 사회경제사 및 지성사의 시기.마르크 블로크,뤼시엥 페브르 등 이른바 아날학파 역사가들은 정치적 사건을 역사의 중심으로 보는 전통적인 역사관을 거부하고 사회·경제를 역사 발전의 동인으로 간주하는 새로운 역사관을 전개하였다.특히 20세기 중반 아날 2세대의 중심인물인 페르낭 브로델은 계량 방법론을 이용하여 역사의 ‘구조’를 파악하고자하는 거시역사학을 주창함으로써 전 세계 역사학의 발전방향을 주도하였다.
세번째 단계는 70년대 이후 포스트모던 시대의 역사학.종전 아날학파의 역사학은 하층계급을 역사의 무대로 불러내는 ‘아래로부터의 역사’라는 훌륭한 결과를 산출하였다.그러나 이들이 주목한 것은 인간의 삶 자체가 아니라 거대한 사회구조 속에 자리잡은,움직이지 않는 장기지속의 바닥 구조가 인간의 활동을 어떻게 제약했고 바꿔놓았는가 하는 것이었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역사학자들은 관심을 인간 그 자체로 돌린다.그동안의 연구결과 사회 구조는 결코 불변적인 범주가 아니라 시공간적으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역사적 존재임이 드러났으며 따라서 역사 행위자들의 문화적 맥락,즉 상징,제의,담론,혹은 문화적 관습 등이 역사 연구의 중요한 대상이 돼야한다는 것이다.이에 따라 미시사(이탈리아),문화사(미국),망탈리테사(프랑스)등 새로운 역사영역이 등장하며 이것이 독일에서 나타난 모습이 ‘일상사’이다.
‘일상사’연구는 사람을 중심에 놓고 사람의 행동,인식,관습 자체를 다루었다.예를 들면 노동자를 다루되 계급운동으로서가 아니라 이들이 술집에서 나누는 이야기들,주당들의 모임 자체에 주목함으로써 그들의 삶을 재구성해내는 식이다.일상사가들은 ‘아래층’에서 이뤄진 일들이 국가·관료집단의 힘보다 사회의 모습을 결정짓는 데 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고 보고 사소한 일,별로 주목받지 못한 하층민,작은 모임,변두리 지역들을 추적한다.
독일의 ‘일상사’연구는 나치 폭력에 암묵적으로 동조한 독일 대중의 일상적 파시즘 연구가 대표적인 성과로 꼽힌다.책에는 독일 일상사가의 선두주자격인 뤼트케가 쓴 서장 ‘일상사란 무엇이며 누가 이끌어가는가’를 비롯해 독일 학자 7명의 글을 실었으며 부록으로 번역자들이 독일에서 가진 뤼트케교수와의 인터뷰도 올렸다.일상사에 관한 이론과 비판,인류학과의 관계,주요한 주제인 심성·이데올로기·남성과 여성·노동자·민중 등의 연구가 어떻게 이루어져 왔는지를 자세히 알 수 있다.이론에 치우쳐 있고 번역이 다소난삽한 것이 흠이다.1989년작.2만8000원.
신연숙기자 ysh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