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명품 중독자의 반성문
‘오늘 버스 안에서 우연히 정말 예쁜 여자를 보았다. 커다란 검은 눈동자와 매혹적인 입술, 그리고 숱이 풍성한 검은 머릿결을 가진 여자였다.…버스가 정류장에 서자 사람들이 우르르 내리는 바람에 자리에 혼자 앉은 그 여자의 전신이 들어왔다. 그런데, 아이고 맙소사, 이게 웬 끔찍한 일! 푸마 운동화를 신고 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브랜드는 우아하고, 모험을 좋아하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찾지만, 이 운동화를 신은 사람들은 절대로 모험을 할 만한 용기도 없고 그럴싸한 재주도 없는 사람들이다.…그렇게 아름답게 보이던 여자의 매력이 온데간데없이 다 사라져 버렸다.’
영국의 이벤트 프로모터로 ‘명품중독자’였던 닐 부어맨이 주위 사람들을 판단하는 기준은 늘 이런 식이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은 그가 어떤 브랜드를 걸치고 있는가가 근거가 됐고, 대체로 그 평가는 어긋나지 않는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주관적이기 그지없는 일이지만,‘아디다스’ 운동화에 ‘충성’을 바치던 그에게 경쟁상표인 ‘푸마’의 이미지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날 자신이 맺고 있는 인간관계 가운데 이런 부질없는 것을 바탕으로 한 것이 얼마나 많을까 자문하기 시작한다.
다른 많은 것을 제쳐두고 운동화의 브랜드로 사람을 평가하는 동안 소중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기회를 얼마나 많이 날려보냈겠느냐는 자각이었다.
‘캘빈 클라인’ 속옷과 ‘리바이스’ 청바지를 입고,‘랠프 로렌’ 양말과 ‘아디다스’ 운동화를 신은 뒤 ‘트렉’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여 가판대에서 ‘에비앙’ 생수를 집어들고 ‘루이 뷔통’ 지갑을 꺼냈던 부어맨은 삶을 바꾸어 보기로 했다. 그는 지난해 9월17일 런던 도심의 한 광장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브랜드 제품을 모조리 불태웠다. 이 광경은 BBC TV를 비롯한 각종 대중매체에 보도되어 대중의 찬반양론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왜 루이비통을 불태웠는가?’(최기철·윤성호 옮김, 미래의창 펴냄)는 부어맨이 명품 브랜드로부터 벗어나고자 분투하는 과정을 담은 기록으로 소비주의와 물질만능주의에 대한 반성문이기도 하다. 나아가 체험을 바탕으로 오늘날의 소비문화가 원인을 추적하고 우리에게 끼치는 영향을 분석했다.
부어맨은 무엇보다 명품 브랜드에 대한 허상을 신랄하게 꼬집는다. 최고의 명품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는 ‘루이 뷔통’과 대중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는 ‘푸마’는 같은 공장에서 생산한다. 이처럼 명품 브랜드의 상당수는 더 낮은 이미지의 브랜드와 같은 설비와 기술을 이용하여 만든다는 것이다.
또 몇몇 브랜드는 지리적인 신뢰성을 강조하는 전략을 쓰는데,‘이탈리아풍’의 파스타 소스인 ‘돌미오’가 실상은 이탈리아가 아니라 멀리 떨어진 영국에서 생산된다고 설명한다.
과학적 성과로 제품에 부가가치를 더해 준다는 선전도 실제로 공인된 기관에서 검증된 사례는 드물다고 지적한다.‘질레트’의 ‘마하3’면도기의 5중 면도날도 일반적인 1단 면도날보다 피부에 더 밀착된다거나 안전하다는 사실은 입증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특정 브랜드의 광고에 등장하는 유명인들이 실제로 그 브랜드를 사용하는 사례는 많지 않은데, 수천만달러의 재산을 가진 연예인 모델이 염색약 광고에 출연했다고 해서 그 염색약을 사다가 집에서 직접 머리를 염색하는 것은 아니지 않으냐고 반문한다.
부어맨은 “아무리 유혹적인 광고일지라도 강제로 소비하게 만들지는 못하는 만큼 명품 브랜드의 수요와 공급의 법칙을 작동하게 만든 공범은 우리 자신”이라면서 “스스로 이런 문화를 만들어 냈으니, 우리가 원한다면 바꿀 수도 있는 것”이라고 강조한다.1만 2000원.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