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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체첸반군 극장 인질극 원인과 전망 - 국제사회 관심끌기 전략

    모스크바 심장부에서 일어난 인질극은 체첸사태가 해결됐다고 공언하던 러시아 당국의 자존심을 산산이 무너뜨리고 세계의 이목을 다시 한번 체첸사태로 집중시키고 있다. ◆끝나지 않은 체첸 사태 인질범들은 이번 인질극의 목적이 체첸에 주둔하고 있는 러시아군을 철수시키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러시아군의 체첸 점령 사태를 이슈로 재점화시켜 이에 대한 국제적 관심을 모으려는 게 일차적 목표인 듯하다. 체첸 반군 지도자 모프사르 바라예프가 주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이번 인질극에서 인질범들은 1주일의 시한을 제시하고 체첸내 러시아군의 즉각적인 군사작전 중단과 철수를 요구하고 있다. 94년부터 96년까지 1차 체첸전에서 러시아군을 몰아낸 체첸공화국은 97년 1월 대선을 실시,러시아와의 평화협상을 이끌었던 아슬란 마스하도프 전 반군 사령관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그러나 이 자치정부는 얼마 안가 무정부 상태에 빠졌고 러시아와의 유혈충돌은 계속됐다. 이후 99년 모스크바의 연쇄 아파트 폭발사건을 계기로 러시아군은 당시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의 지휘 아래 체첸 북부에 진입,대대적인 공세를 취하면서 분쟁은 격화됐다.이때 촉발된 2차 체첸전이 4년째 계속되고 있다. ◆계속되는 인권유린 지난해 11월 러시아와 체첸 대표가 처음으로 직접 대면,평화정착을 위한 협상을 벌이는 등 러시아 정부와 체첸 반군간 접촉이 이뤄졌지만 체첸사태는 여전히 해결의 실마리를 보이지 않고 있다.인구 80만명의 체첸은 이미 두 차례의 전쟁으로 6만여명의 사상자와 20만여명의 난민이 발생,폐허로 변했다.체첸에서는 여전히 러시아군에 의한 강간·납치·살인이 자행되고 있다.국제인권단체 ‘헬싱키 인권연맹’은 최근 매달 80여명의 체첸 청년들이 러시아군에 납치,살해되고 있다며 러시아군의 인권유린 실태를 고발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해 미국에서 발생한 9·11테러 이후 체첸에 대한 러시아의 과잉 공격과 인권유린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난과 압박은 크게 줄었다. 특히 미국은 체첸 지도부가 알카에다와 연루돼 있다는 러시아의 주장을 인정하고 러시아군의 대대적인 체첸반군 소탕작전을 묵인하고 있다. ◆사태 장기화 전망 러시아 당국은 일단 대화로 해결한다는 원칙을 세워놓고 있다.극장 곳곳에 설치된 폭발물과 너무 많은 수의 인질 때문에 무력진압을 시도할 가능성은 현재로서는 희박하다. 그러나 체첸공화국의 독립이나 자치 요구는 절대로 들어줄 수 없다는 것이 러시아 정부의 확고한 입장이다. 협상의 여지가 많지 않아 협상 조건을 놓고 쌍방의 지루한 줄다리기가 이어지는 등 사태가 장기화할 가능성이 높다. 현재 미국·일본·인도네시아 등 각국은 어떤 형태의 테러도 용납할 수 없다며 러시아에 지지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러시아는 앞으로 제기될 국제 여론에 부담을 느끼고 있다.사태가 장기화하면 체첸 내의 인권유린 실상이 부각돼 러시아에 국제사회의 비난여론이 쏟아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질범들이 어느 정도 정치적 목적을 달성한 시점에서 러시아 정부가 인질범들의 무사귀환을 보장하는 선에서 타협점을 찾을 것이란 관측이 조심스레 제기되고 있다. 강혜승기자 1fineday@ ■체첸사태 주요일지◆91년 11월 구소련 육군장성 두다예프 체첸 독립선언 ◆94년 12월 러시아군 체첸 침공 ◆95년 6월 러시아 부뎬노프스크 병원서 인질극 100명 사망 ◆96년 1월 키즐야르 병원 인질극 78명 사망 ◆96년 8월 휴전.러군 11월 철수 ◆99년 8월 크렘린궁 주변 쇼핑몰 폭발 41명 부상 ◆99년 9월 다게스탄의 러장교 아파트 폭탄차량 돌진 64명 사망 ◆99년 9월 모스크바 아파트단지 폭발 93명 사망 ◆99년 10월 러군,테러 차단 빌미로 체첸 재진입 ◆2001년 8월 체첸반군,러 헬기 격추 118명 사망 ■체첸 어떤 나라 체첸 공화국은 러시아 남부 코카서스 산맥 북단에 위치한 나라다.우리나라 경상북도만한 영토(1만 9000㎢)에 인구도 120만명에 지나지 않는 작은 나라지만 석유자원이 풍부하다.석유뿐 아니라 코카서스 지역의 영향력 유지를 위해서도 러시아는 체첸의 독립을 보고만 있을 수 없는 입장이다. 주민들 대부분이 독실한 이슬람(수니파) 교도들이라 중앙아시아 공화국들과 가까울 뿐 아니라 인근 터키,이란과도 친하며 현재도 강한 씨족사회를 형성하고 있을 만큼 민족정신이 강하다. 1859년 제정 러시아에 강제 편입된 이후 러시아인에 대한 사무친 원한을 갖고 살아왔다. 1932년 스탈린에 의해 언어·문화가 다른 잉구시인들과 체첸·잉구시 자치공화국으로 강제병합된 뒤 러시아에 대한 반감은 더 커졌으며,2차대전 당시 그로즈니 문턱까지 들어온 독일군에 협조할 정도였다. 80년대 후반에 이르러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가 시작되기 무섭게 소련군 공군 소장 출신인 조하르 두다예프를 중심으로 민족 주권운동이 일어났다.옛 소련 붕괴의 혼란기를 틈타 각 공화국이 분리독립을 추진하던 91년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선출된 두다예프는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포했고 92년 잉구시와도 결별했다. 내부 사정으로 정면 대응하지 못하던 러시아는 94년 12월 체첸에 전면공격을 가해 수도 그로즈니를 함락시키는 등 13개월간 전쟁을 벌여 양측을 합해 3만여명이 희생되기도 했다.97년 두다예프가 러시아군에 의해 암살된 뒤 혼란은 계속되고 있다. 박상숙기자 alex@
  • 체첸軍 50명 모스크바 극장 점거 1000명 인질로 러軍 대치

    (모스크바 외신종합)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24일 러시아 보안군에 체첸전쟁 종식을 요구하는 체첸 반군에 잡혀 있는 최대 1000명의 인질들을 구출할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푸틴 대통령은 인질극이 발생하자 독일과 포르투갈은 물론 주말로 예정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참석까지 모든 순방 계획을 취소하고 긴급대책회의를 가진 후 처음으로 인질극에 대해 공식언급하면서 “이는 러시아뿐 아니라 세계에서도 유례없는 최대 인질극”이라고 말하고 “인질극의 배후에는 외국 테러리스트의 중심세력이 있다.”고 비난했다.푸틴 대통령은 그러나 인질들의 안전 확보가 최우선이라고 강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편 러시아 당국은 이날 인질범들과 첫 대화를 시작했으나 특별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당국은 이날 이리나 하카마다 부의장과 이오시프 코브존,보리스 넴초프 등 국가두마(하원) 의원 외에 국제 인권단체 대표들을 내세워 사건 해결을 모색했으나 접점을 찾지 못했다. 사건 초기 주요 정치인들과 면담을 요구했던 무장 괴한들은 이제 입장을 바꿔 푸틴 대통령이나 아흐마드 카디로프 체첸 대통령 등 러시아와 체첸의 책임있는 당국자들과의 담판을 원하며 여전히 체첸전의 조속한 종결을 계속 요구하고 있다고 의원들은 전했다. 그러나 인질범들은 대화 시작 직후 영국인 1명과 러시아인 4명을 석방해 유화적 제스처를 보였다. 한편 이타르타스 통신은 이날 인질범들이 극장 진입 직후 한 여성 인질에게 총을 쏴 이 여성이 숨졌다고 보안관계자들의 말을 인용,보도했다.이에 앞서40∼50명의 체첸 무장군인들은 23일 밤 ‘돔 쿨투르이’(문화의 집) 극장에 난입,최대 1000여명의 인질을 억류했다.이들은 24일(현지시간) 극장 진입을 시도하던 경찰 1명을 사살했으며 7일 안에 러시아가 체첸에서 철수하지 않을 경우 극장을 폭파할 것이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이들은 자신들을 체첸군 21사단 소속 ‘스메르트니크(죽음의 전사)’라고 밝혔다. 러시아 당국은 사건 발생 직후 현장 주위에 탱크 수대를 배치하고,경찰과 내무부 산하 병력 및 특수부대 병력과 저격수들을 동원,극장 건물을포위했다.인질범들은 극장 점거 직후 어린이와 여자들을 포함한 인질 100여명을 밖으로 내보냈으며 러시아 경찰이 극장진입을 시도할 경우 인질들을 살해하겠다는 경고를 외부로 전달했다. 극장에서 풀려난 인질들은 모스크바 에코 라디오 방송과의 회견에서 40∼50명가량의 반군들이 폭발물을 몸에 두르고 자동화기와 수류탄으로 무장하고 있다면서 거의 모든 건물 주변에 폭발물이 매설돼 있다고 전했다. 당시 극장에서는 뮤지컬 ‘노르드 오스트(북동쪽)’를 공연중이었고 극장안에는 관람객 700여명과 공연배우 등 모두 1000여명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인질중에는 독일인 3명,영국인 3명을 포함해 다수의 외국인이 포함돼있으나 주러 한국대사관은 한국교민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모스크바 경찰은 외국인 인질이 최소 30명 이상이라고 밝히고 있으며 한 인질은 외국인 인질이 모두 17개국에서 62명에 달한다고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 새 영화/ K-19/결함투성이 핵 잠수함 운명은…

    ‘K-19’(10월3일 개봉)는 냉전으로 동서가 갈라졌던 60년대초 옛 소련의 핵잠수함을 배경으로 한 영화다.액션스릴러 ‘폭풍 속으로’에서 역동적인 화면 연출로 호평받았던 여성감독 캐슬린 비글로가 메가폰을 잡았다.‘폭풍속으로’의 패트릭 스웨이지,키아누 리브스처럼 해리슨 포드와 리암 니슨이라는 거물급 스타를 대비시켰지만 결과는 감독이나 배우 이름값에 못미치는 범작. 액션은 평이하고 중반 이후부터 긴장감 없이 늘어지는 갈등구조는 하품이 나온다.소품·의상 등 디테일한 고증은 철저하지만(러시아 악센트가 섞인 영어를 쓰는 러시아인들이라니!) 단지 그뿐.해리슨 포드의 연기는 탄탄하지만 평면적인 캐릭터 탓에 밋밋하게 느껴지고,리암 니슨의 기품있는 연기와 어우러져 이야기구조의 주된 추진력 중 하나인 두 사람의 갈등관계를 지루하게 만든다.러시아 키로프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배경음악은 수준급이지만,내내 신파조로 징징거려 나중에는 짜증이 날 지경이다. 옛 소련 최초의 핵잠수함 K-19는 급조된 터라 결함투성이다.당은 계속 잠수함의 미흡한 준비상태를 문제삼는 함장 미하일(리암 리슨)을 부함장으로 강등시키고 알렉세이(해리슨 포드)를 새 함장으로 영입한다.당의 명령을 최우선시하는 알렉세이와 승무원들의 안전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미하일.둘 사이에 미묘한 알력과 긴장은 계속 커지기만 하는데…. K-19는 미국 연안에서 핵 시위를 벌이기 위해 순항하지만 원자로 냉각기에 누출사고가 생긴다.함내 승무원들이 위험해진 것은 물론 핵전쟁 촉발의 위험마저 떠안게 되었다.이제 알렉세이와 미하일의 대립은 표면으로 드러난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는 지난 7월 미국 개봉 당시 “옛 소련인의 애국심에 관한 영화를 왜 미국이 만들었냐.”는 등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상영시간 2시간15분. 채수범기자 lokavid@
  • 한국문화 향기 러시아서 ‘솔솔’

    한국인들이 추석 차례상을 준비하느라 분주했을 지난 20일 러시아의 동쪽끝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의미있는 행사가 열렸다.연해주를 대표하는 아르세니예프 주립박물관에 러시아에서는 처음으로 한국실이 문을 연 것이다. 30평 남짓한 크기의 ‘한국민족문화실’이 꾸며진 곳은 아르세니예프박물관 국제전시센터.극동함대가 있는 군사도시답게 제2차세계대전 때 12척의 독일함정을 격침했다는 S-59잠수함을 전시한 잠수함박물관이 불과 100여 m 떨어져 있는 요지이다. 한국실 개관은 지난해 국립민속박물관이 연해주 6개 도시에서 연 ‘한국문화로의 초대’전이 계기가 됐다.이곳에 사는 고려인들에게 민족의 정체성을 심어주고,러시아와의 활발한 문화교류 토대를 만들어 보겠다는 취지가 이제 제대로 결실을 맺은 셈이다. 한국실은,전시공간을 아르세니예프박물관이 제공했을 뿐 우리 민속박물관이 전시내용을 구상하고 전문인력을 파견해 꾸몄다.비용 3억원도 우리가 부담했는데,주정부의 예산지원이 끊긴 아르세니예프박물관의 사정이 감안됐다. 개막식은 민속박물관 관계자들이 들뜬 표정을 짓기에 충분할 만큼 성황이었다.400여 참석자는 대부분 러시아인들로,음악가 바로닌이 이끄는 앙상블이 플루트와 러시아 전통악기 발랄라이카로 ‘고향의 봄’‘아리랑’을 연주한 것도 한국문화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관심을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전시는 ‘한국의 전통생활 문화와 역사’를 주제로 과거와 현재 한국인의 삶을 보여주려 했다.전시실을 들어서면 먼저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 도자기와 인쇄,금속공예 기술이 눈에 들어온다.이어 혼례복과 평상복,해주반과 놋쇠 반상기,반닫이와 평상 등 의식주 생활의 단면이 소개된다.사물놀이의‘사물’과 가야금 등 악기로 대표되는 놀이문화,무당의 신복·장군칼·작두 등 한국인의 신앙생활도 단편적으로 보여준다. 무엇보다 러시아인들의 시선을 잡아끈 것은,스크린에 손을 눌러가면 훈민정음의 창제원리를 러시아어·영어와 비교하여 보여주는 ‘한글 터치 스크린’.콤팩트디스크(CD)에 담긴 한국전통음악을 이어폰으로 듣는 ‘한국음악 체험’도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인기 코너였다. 갈리나 알렉시우크 아르세니예프박물관장도 이 점이 마음에 드는 듯 “민속박물관의 전시기법이 세련되고 전시기술 수준이 매우 높은 데 놀랐다.”면서 “한국실 개관을 계기로 한국 박물관과 더욱 긴밀하게 협력관계를 발전시켰으면 좋겠다.”고 만족스러워했다. 한국실 개관은 한국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는 더욱 뜻깊은 듯했다.인가 파시코(18·극동대 한국학과 2년)는 “모두 재미 있지만 특히 한복이 아름다웠고,북같은 악기들도 흥미 있었다.”고 말하고 “같이 온 러시아친구들이 둘러보고는 한국학을 공부하는 나를 부러워하는 것 같았다.”며 웃었다.한편 이번 한국실 개관을 주도한 이종철 민속박물관장은 개막식에 앞서 시베리아의 관문이자,한민족의 발원지라고 할 수 있는 이르쿠츠크의 유서깊은 향토박물관을 방문하여 관계자들과 한국실 개설 방안을 타진했다. 이 관장은 “시베리아횡단철도(TSR)의 시발점인 블라디보스토크에 한국실이 마련됨으로써 러시아에 한국문화를 알리는 교두보가 확보됐다.”면서 “앞으로 이르쿠츠크와 모스크바,상트 페테르부르크 등 TSR의 거점 도시마다 한국실을 만들어 한국문화를 더욱 폭넓게 알릴 계획”이라고 밝혔다. 블라디보스토크(러시아) 서동철기자 dcsuh@
  • 북·러 정상회담 안팎/ 푸틴, 철도연결 사업 ‘열성’

    [블라디보스토크 김상연특파원] 1년만에 이뤄진 23일 김정일(金正日) 북한 국방위원장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만남은 당초 예정보다 무려 1시간30분을 넘긴 3시간30분이나 걸렸다. 이 때문에 회담장 주변에선 한때 뭔가 ‘큰 것’이 나올 것 같다는 관측이 오갔다. 그러나 정작 회담 직후 푸틴 대통령의 입을 통해 밝혀진 두 사람의 합의 내용은 그다지 손에 쥐어지는 ‘알맹이’가 없었다. 무엇보다 러시아측이 강하게 의욕을 보였던 시베리아횡단철도(TSR)-남북한종단철도(TKR) 연결과 관련,구체적 진전이 이뤄진 게 없었다.푸틴이 밝힌 내용이라곤 “TSR와 TKR를 연결할 수 있는 여러가지 방법에 대해 김 위원장과 논의했다.”는 것뿐이었다. 이는 1년전 두 정상이 모스크바에서 합의한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밖에도 북한이 관심을 보여온 러시아의 대북 전력 및 첨단 무기 지원 문제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 북·미관계 개선이나,북한의 미사일 개발 유예기간(2003년) 연장 등 ‘뜨거운’문제 역시 발표되지 않았다. 푸틴의 발표 내용중 그나마 의미를 부여할 만한 대목은 “러시아가 한반도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 나서겠다는 점을 밝혔고,김 위원장이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는 부분이다. 이같은 언급을 놓고 블라디보스토크 현지에서는 김 위원장이 서해교전 등으로 지체되고 있는 남북한 경제협력 속도에 대한 의지를 간접 피력한 것 아니냐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김 위원장 자신이 남한을 향해 직접 언급하기 힘든 사안을 정상회담이란 형식을 빌려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전략을 구사했다는 것이다.푸틴의 발표내용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러시아측으로서는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다. 푸틴 대통령은 이날 정상회담에 앞서 연해주 지역관리들에게 “우리가 TKR-TSR 사업을 제대로 추진하지 않으면 중국에 빼앗기게 될 것이다.이것이 바로 내가 김 위원장과 만나는 이유”라고 강한 의욕을 내비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러시아에 비해 적극성을 덜 띤 것은 북한의 내부 사정상 선뜻 받아들이기가 힘든 사안이기 때문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영토의 전면 개방을의미하는 철도 연결사업의 진전을 위해서는 군부의 반발과 미사일 문제 등의 해결이 선행돼야 하는 문제가 걸려 있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이날 회담시간이 예상보다 길었던 사실을 들어 양측간 공개되지 않은 이면합의가 있었던 게 아니냐는 관측도 있으나,그리 설득력은 없어 보인다. 그보다는 김 위원장이 이번 방문의 성격을 굳이 ‘비공식 방문’으로 규정했던 사실을 들어 애당초 이 정도 수준을 예견했다는 분석이 더 그럴 듯하다. 한편에서는 김 위원장의 이번 방문은 북한이 지난달부터 시작한 ‘경제개혁’조치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대내외에 과시하고,러시아 경제를 견학하는 차원에 불과하다는 해석도 있다. carlos@ ■이모저모/ 김정일 “방문결과 1000% 만족” [블라디보스토크 김상연특파원] 김정일(金正日) 북한 국방위원장은 23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끝으로 4박5일간의 러시아 극동지역 방문 일정을 사실상 마무리했다. 지난 20일 러시아 방문을 시작한 김 위원장은 24일 오전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오후 6시(현지시간)쯤 북·러 접경 도시 하산에 도착,환송행사를 받은뒤 7시30분쯤 북한으로 돌아갈 것으로 알려졌다. ●4시간의 만남= 푸틴 대통령은 23일 오후 5시 정상회담장인 연해주 정부 영빈관으로 김 위원장이 들어서자 얼싸안고 뺨을 부비는 등 반가운 마음을 표시했다. 지난해 8월 모스크바 정상회담 당시 김 위원장의 적극적인 포옹사례에 다소 어색한 모습을 보인 것과 대조적이었다.푸틴 대통령은 “그동안 김 위원장의 극동 방문 일정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여행이 어땠느냐.”고 질문을 건넸고,김 위원장은 “1000% 만족한다.”고 대답했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해 러·북 교역이 (전년에 비해) 10% 증가했으며,전체교역 규모의 70%는 북한과 극동 지역간 거래가 차지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오늘 오전 극동 지역 주지사 등과 한반도종단철도(TKR)와 시베리아횡단철도(TSR) 연결 문제를 논의했다.”면서 “러시아는 남북 협력에 관심이 있고,그 과정에 계속 기여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정상회담과 만찬은예정보다 2시간을 넘긴 오후 9시쯤 끝났다. ●경제에 관심= 앞서 김 위원장은 이날 오전 특별열차편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북한에서 열차에 싣고온 전용 벤츠 리무진을 타고 이동하면서 쇼핑센터와 무역항,빵공장 등을 꼼꼼히 둘러봤다. 김 위원장은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의 한 쇼핑센터를 방문,30여분간 구석구석을 돌면서 점원들에게 “하루 손님은 얼마나 되느냐.”“러시아 물건의 비율은 어느 정도인가.” 등의 질문을 쏟아냈다. 한 러시아인 상점 주인은 “김 위원장이 북한 특산품을 어떻게 상품화할지에 특히 관심이 많은 것 같더라.”고 귀띔했다. 김 위원장은 쇼핑센터 사장으로부터 러시아 정교회 전통 성화 ‘이콘’을 선물받고 “평양에 정교회 성당을 지어 보관하겠다.”고 약속했다. ●체력 호평= 최근 나흘동안 김 위원장의 극동 방문 일정을 동행 취재한 기자들은 이날 이타르타스 통신과 회견에서 “김 위원장은 산업시설 시찰을 위해 높은 곳도 마다 않고 재빨리 올라가는 체력을 과시했다.”고 밝혔다. 기자들은 또 “김 위원장은 평소승마와 수영을 즐기는 것으로 안다.”면서 “그는 전 세계 정상들 가운데 인내심과 체력이 가장 좋은 사람”이라고 털어놨다.
  • [임영숙 칼럼] 韓·中, 과거 10년 미래 10년

    중국의 국보급 작가 바진(巴金)도,원로 화가도,문화부 부부장(차관)도 한성신문(서울신문) 문화부 차장의 인터뷰 요청에 선뜻 응해주었다.한·중 수교가 이루어지기 두해 전 중국에서였다.비보도를 전제로 인터뷰에 응한 문화부 부부장은 자신이 조선족이며 월북 무용가 최승희의 제자로 6·25전쟁 때종군 위문공연단의 일원으로 서울에 왔다가 퇴각하는 북한군과 함께 걸어서 돌아갔다는 사실까지 밝혔다. 당시 베이징에서 만난 중국 지도층 인사들이 조심스럽게 표출했던 한국에 대한 관심은 일반 서민들에겐 코리안 드림으로 바뀌어 한·중 수교 10주년(24일)을 맞는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한·중 관계는 크게 발전했다.특히 경제교류가 급속히 늘어나 중국은 한국의 첫번째 투자 대상국이자 두번째 수출 대상국이며 세번째수입 대상국이 됐다.두 나라의 인적교류는 올해 안에 연간 200만명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남북 관계에 있어서도 중국의 역할은 크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난 10년이 아니라 앞으로 10년이다.지금까지 한국과중국은 상호 보완적인 관계로 ‘윈-윈 10년’을 보냈다.베이징 올림픽이 열릴 오는 2008년에는 한·중 교역 규모가 현재의 3배를 넘는 1025억 달러에이를 것이라는 게 정부 당국의 전망이다.그렇더라도 한·중의 밀월 관계는 이미 끝나가고 있으며 새로운 조정단계에 접어들었다. 중국은 벌써부터 맹렬한 기세로 한국을 추격하고 있다.이미 중국이 한국을 넘어섰다는 분석도 없지 않다.세계시장 점유율 1위 품목이 지난 3년사이 중국은 32%(1997년 554개에서 2000년 731개) 늘어난 데 반해 한국은 오히려 5%(85개에서 81개로) 줄었다는 자료를 한국무역협회가 최근 내놓았다.지난해 상하이에서 만난 코트라(KOTRA) 관계자는 “우리가 중국에 팔 수 있는 품목이 매년 줄어들어 10년 뒤엔 무엇이 남을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우리 기업의 경쟁력 유지와 함께 한·중 관계를 심화시키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다.마늘 분쟁이나 중국 공안들의 한국대사관 난입·외교관 폭행사건,한국의 월드컵 4강 진출 이후 불거진 두 나라 국민 감정의 악화는 경제교류 확대만으로는 한·중 관계가 더 이상 진전되기 어려움을 보여준 셈이다. 관계의 심화는 상호 이해와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그러나 이해의 측면에서 한국은 중국에 뒤진다.중국은 북한과 특별한 관계 속에서 많은 한국 전문가를 지니고 있다.반면 중국 전문가 양성에 우리 기업이나 정부가 얼마나 노력을 기울였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싱가포르의 고촉통(吳作棟) 총리는 며칠 전 TV연설을 통해 “중국의 성장을 이용하기 위해 중국 전문 엘리트를 적극 육성하겠다.”고 밝혔다.우수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해 중국의 일류대학으로 유학 보내 중국에 통달한 인재를 키우는 동시에 중국의 장래 지도자가 될 학생들과 ‘꽌시’(인적 네트워크)를 맺겠다는 구상이다. 지난 94년 성수대교가 무너지기 전 서울 시장을 초청했던 베이징시는 그 사건으로 시장직에서 물러났음에도 불구하고 ㅇ씨를 계속 초청했다.‘죄인’의 심정으로 그 초청에 응할 수 없었던 ㅇ씨에게 “우리는 당신을 서울시장으로서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존경해서 초청한다.”며 끈질기게 설득했다.결국 1년여가 지난 후 조용히 중국을 찾은 그를 베이징시는 현직 시장처럼 융숭히 대접했다. 지난 10년간 한국은 중국의 현재 지도자,그리고 장래의 지도자들과 얼마나 ‘꽌시’를 맺었는가.한·러 수교 이후 러시아인들이 느꼈던 ‘얄팍한 한국인’에 대한 실망감을 중국인들에게 또 안겨주어서는 안될 것이다.성급함을 버리고 길고 크게 앞을 내다보며 중국인들의 마음을 열어야 하는 것이다. 아울러 국제사회에서 급부상하는 중국에 일방적으로 끌려다니지 않고 당당한 외교전략을 펴면서 중국이 미국처럼 국제사회의 지도적인 국가로 연착륙하는 데 도움을 주는 역할을 지혜롭게 맡는다면 한국과 중국은 상생관계로 동반상승할 수 있을 것이다. 임영숙 /미디어연구소장 ysi@
  • 화마에 무너진 ‘몰도바人 꿈’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는 고국으로 당장 돌아가고 싶습니다.하지만 몸은 화상을 입었고 비행기표를 살 돈도,여권도 없어요.”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국땅을 밟았다가 동료들을 잃고 부상마저 입은 몰도바인 바실리 지리노프스키(45)와 세르게이 비쿠(35)는 눈물로 자신들의 곤경을 호소하고 있다. 바실리와 세르게이가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국땅을 밟은 것은 지난 2000년 10월.이들은 ‘한국에 가면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러시아인 브로커의 꾐에 빠져 2000달러를 주고 관광비자를 발급받아 한국에 들어왔다.동료인 드미트리 부리우힘(30),에밀 티가나스(46)과 함께 곧바로 전북 김제시의플라스틱 맨홀을 생산하는 공장에 취업하는 행운을 잡았다. 하지만 취업 2개월만인 12월24일 이 공장 숙소에서 발생한 불의의 화재는‘코리안 드림’의 꿈을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들었다.잠자던 숙소에 누전으로 불이 나면서 드미트리와 에밀이 숨지는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바실리와 세르게이는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온몸에 화상을 입어 병원치료를받는 등 1년8개월여간 정신적·육체적 고생을 겪어야만 했다.설상가상으로 화재 당시 여권이 불에 타버려 고국인 몰도바로 돌아갈 수도 없는 처지에 놓였다. 지난 3월 간신히 중국 주재 몰도바 대사관에서 1개월짜리 여행증명서를 발급받아 한국을 떠날 수 있었지만 산재보험 처리 문제로 출국시한을 넘겨버렸다. 여행증명서를 재발급받는다 해도 그동안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해 무일푼이어서 몰도바행 비행기 티켓을 구입할 형편이 안돼 주위를 더욱 안타깝게 하고있다. 연락처 전주 외국인노동자선교센터 이지훈국장 011-836-0598. 전주 임송학기자 shlim@
  • 톨스토이 결혼 140돌… 후손들 한자리에

    ‘전쟁과 평화’‘안나 카레리나’ 등으로 유명한 러시아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사진·1828∼1910)의 후손 300명 중 90여명이 해후 모임을 갖기 위해세계 곳곳에서 러시아로 모여들고 있다고 2일 AP통신이 보도했다. 이번 모임은 톨스토이와 부인 소피아의 결혼 140주년과 톨스토이의 데뷔작‘유년시대’ 출판 150주년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모스크바에서 남쪽으로 200㎞ 떨어진 야스나야 폴랴나에 있는 톨스토이 생가에서 열린다. 후손들은 러시아는 물론 스웨덴,독일,프랑스,영국,미국 등에서 출발해 모스크바에 일단 모인 다음 2일 특별열차편으로 야스나야 폴랴나로 이동하게 된다고 생가 관리자이며 현손인 블라디미르 톨스토이는 말했다. 이 모임에는 아직까지 생존해 있는 몇 안되는 손자녀 중 한명인 타티아나 파우스(87) 할머니도 스웨덴에서 노구를 이끌고 참가한다. 톨스토이는 가장 뛰어난 러시아 문호로 추앙받고 있으며 평화주의와 사회개혁을 실천한 인물로 러시아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임병선기자 bsnim@
  • 러시아 농지매매 85년만에 자유화

    (모스크바 연합)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25일 제정 러시아 시대이후 처음으로 농지 매매를 허용하는 농지 사유화 법안에 서명,공식 발효시켰다. 이에 따라 러시아인들은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후 처음으로 농지를 자유롭게 사고 팔 수 있게 됐다.국가두마(하원)와 연방회의(상원)는 각각 지난 6월26일과 7월10일 이 법안을 압도적 다수로 통과시켰다.농지 사유화법이 이날 공식 발효됨에 따라 러시아 전 국토의 24%인 4억 600만㏊의 농토가 자유롭게 거래될 수 있다.대부분의 농지들은 91년 소련 붕괴 이후 폐허로 방치돼왔다. 외국인들의 러시아 농토 매입은 금지되며 대신 49년 동안 임차해 사용할 수 있다.또 농지 매매 절차 등과 관련,지방 정부의 재량권을 상당 부분 인정하고 있어 본격 시행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앞으로 적지 않은 시간이 더 필요할 전망이다. 러시아 정부는 현재 전체 농지의 6%에 불과한 사유지에서 농업 생산량의 40%가 나오는 점에 비춰 앞으로 농지 사유화가 진척되면 농업 생산성이 크게향상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세계최대 영토를 자랑하는 러시아의 전체 토지값은 80조∼100조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들 농지의 대부분은 현재 비효율적이고 막대한 부채에 허덕이는 집단농장이 관리하고 있다.
  • 세계 포르노그라피 품위있게 훔쳐보기

    그들,특히 여자는 고속도로에서 차를 세워 타는 히치하이킹을 통해 기대 이상의 쾌락을 얻었다.그것은 그들이 ‘일상’이라는 경계에서 벗어나서 맛볼수 있는 최상의 기쁨이었다.그러나 그들이 지불한 대가도 값비쌌다.그것은 어떤 노력으로도 이전의 자신을 복원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그들은 서로 동의해 ‘게임’에 빠져 들었지만 남은 것은 ‘상처입은 현실’뿐이었다. 놀이를 통해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욕망을 거침없이 발산하는 두 남녀의 ‘있을 수 있는 게임’을 그린 밀란 쿤데라의 소설 ‘히치하이킹게임’은 이렇듯 그로테스크한 인간심리의 이면을 들춰 보인다. ‘포르노그라피’ 혹은 ‘에로티시즘’이라는 테마에 맞춰 모은 세계 각지의 글을 한 자리에서 읽는 것은 확실히 의미있는 작업이다.‘품격’을 수반하는 ‘재미’라는 게 그리 흔한 일은 아니므로.이런 점에서 밀란 쿤데라와‘설국’의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중국의 진염과 러시아의 아나톨리 김 등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은 작가들의 에로틱한 단편소설을 엮은 ‘히치하이킹게임’(현암사)은눈길을 줄 만하다. 외국어대 외국문학연구소가 선정,번역한 12편의 에로티시즘 소설을 한 권으로 묶었다.엄마의 친구에게서 성적 충동을 느끼는 소년,마에스트로의 지휘에 흥분한 아가씨 등 성(性)을 전면에 내세운 인물들의 심리와 성적 환상이 각각 개성 있는 문체로 그려졌다. 표제작인 ‘히치하이킹 게임’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널리 알려진 체코출신 작가 밀란 쿤데라의 단편소설.휴가를 얻어 여행길에 나선 남녀가 벌이는 섹스게임을 통해 이성과 본능,억제와 발산의 충동이 상충하는 인간의 이중적 심리를 ‘가능한 현실’로 구성해 냈다. 오랫동안 결핵을 앓는 바람에 몸과 마음의 사랑이 따로일 수밖에 없었던 숨진 남편에 대한 미련,그리고 새로운 남편에 대해 느끼는 사랑의 감정을 심리적 갈등구조로 엮어낸 일본의 노벨상 수상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물의 달’도 수작이다.병과 죽음,결혼,광기,생명의 문제가 무척 섬세하게 묘사됐다. 스페인의 중견작가 카비에르 케르카스가 쓴 ‘엄마의 친구’는 ‘사랑에는 법칙이 따로 없다.’는 예외적인 상황의 고백이다.엄마 친구와의 상상적 결합을 통해 흥분하고 좌절하면서 겪는 혼돈과 모순이 사회적 통념에 대한 거부감으로 구체화된다. 중국의 여류작가 진염의 ‘침묵하는 좌측 유방’은 중국 사회를 지배해 온 전통적 관념에 맞서 스스로의 성적 정체성을 깨우쳐 가는 한 여성의 ‘세상과의 의사소통’을 다룬 작품이다.제목이 암시하듯 작가는 여성의 유방과 좌측이 갖는 상징성,그리고 그 좌측 유방의 침묵을 들춰 역설적으로 ‘결코 침묵하지 않는 좌측 유방’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호주의 패트릭 화이트,오스트리아의 후고 폰 호프만슈탈,한국계 러시아인 아나톨리 김,터키의 세르칸 으슨의 작품도 만날 수 있다.책을 읽기 전에 D H로렌스의 이 지적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우리가 진실로 갈망하는 ‘순수’와 ‘고결’의 에로스는 없다.각각 격이 다른 가면의 에로스만 있을 뿐이다.” 심재억기자
  • 월드컵/ ‘성숙한 응원’ 더 빛났다

    한·미간 열전이 벌어진 10일 서울 광화문과 시청 앞 광장에 모인 30여만명의 ‘길거리 응원단’은 선진 응원문화의 전형을 전 세계에 보여줬다. 당초 우려한 반미 시위나 자극적인 구호는 없었으며,소방방재본부에는 단 1건의 구조·구급 신고도 접수되지 않았다.굵은 빗줄기에도 응원단의 대열이 흩어지지 않았으며,주변 사람을 고려해 우산도 펴지 않고 비옷 차림으로 ‘대∼한민국’을 외쳤다. 경기가 끝난 직후 시민들은 응원 장소를 자발적으로 청소한 뒤 질서정연하게 해산하는 등 성숙한 모습을 보였다.일부 응원단은 인근 빌딩에서 청소 도구를 빌려 비에 젖은 신문지 등을 치우기도 했다. 도심 지하철역과 버스 정류장에도 경기 직후 한꺼번에 인파가 몰렸지만 큰 혼잡은 없었다.일부 응원단은 지하철역 구내에서 무리를 지어 안정환 선수의 ‘쇼트트랙골 세리머니’를 흉내내는 등 열기를 만끽했다. 이날 경찰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미대사관에 7개 중대를 집중 배치하고 대사관 주변을 경찰 버스 27대로 에워쌌지만 불상사는 없었다.주한 미대사관관계자는 “하루종일 긴장했지만 처음부터 한국 시민들의 질서의식을 믿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상암동 평화의 공원 전광판을 통해 경기를 지켜본 러시아인 대학생 알렉스(29)는“경기는 비겼지만,응원에서는 한국팀이 멋진 승리를 거뒀다.”고 말했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쇼트트랙용 노란 모자를 쓰고 응원한 최재철(25)씨는 “감정을 자제하고 축구를 즐기는 것이 진정한 애국심”이라면서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미국에 빼앗겼지만 대한민국은 성숙한 시민의식과 정정당당한 스포츠정신으로 더 값진 승리를 일궈냈다.”고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창구기자 window2@
  • [기고] 한국인 저력 과시한 한·미전

    10일 열린 월드컵 경기 한국과 미국의 대전은 한국측이 시종일관 우수하게 이끌었음에도 불구하고 골운이 따르지 않아 결국 비기고 말았다.전 국민의 초조와 안타까움,기다림과 아쉬움 속에서 달구벌 경기장에서의 싸움은 끝났다. 내용상으로 한국측이 분명히 승리한 경기라고 한다면 과장일까.나아가 세찬 빗줄기 속에서 전 국민이 한마음으로 질서정연하게 보내준 응원까지 더한다면,월드컵역사에 길이 남을 만큼 축구문화를 훌륭하게 빛낸 경기였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숱한 기회를 놓친 상태에서,전반 24분에 매시스 선수에게 어이없게 한 골을 허용한 뒤 후반 33분 안정환 선수가 헤딩슛으로 동점 골을 얻을 때까지,그 한시간 남짓은 한국인이 체험한 가장 긴 시간이었다.선수들의 이마에 흐르는 피와 땀방울은 보석보다 더 빛난 반면 히딩크 감독의 타는 입술은 백지장 같았다. 스탠드에 걸린 플래카드에는 ‘우리에게 꿈이 있다.’는 영문글씨가 선명했다.‘대∼한민국,대∼한민국’을 연호하는 응원단과 전 국민의 목소리는 고조선 이후 가장 굳건한 민족적 통합을 상징하는 함성이었다.대등한 체력을 보이면서도 아직 스피드가 뒤지는 모습은 선수의 역량 차이라는 냉엄한 세계를 되새기게 했다. 경기를 보면서,만약 한국이 지게 되면 일부 젊은이들이 흥분한 나머지 서울 광화문의 미국 대사관에 침입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떠올랐다.러시아에서는 일본에 패한 것에 분노한 국민이 현지 일본인들에게 행패를 부렸고,또 난동 끝에 러시아인 두 사람이 사망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우리나라에서도 난동이 일어나리라는 이러한 선입관이나 예측은,말 그대로 일부의 우려이거나 자국민에 대한 지나친 폄하에서 빚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그런 청년들이 한둘 있을 수도 있다.그러나 오늘 한국인들이 보여준 성숙한 질서의식과 거국적인 스포츠 사랑의 태도야말로 지금까지의 기우를 씻어주고도 남음이 있다.안정환 선수가 동점골을 넣고 나서 의연하게 보여준 세리머니,‘쇼트트랙 위의 김동성 모션’을 미국인들은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경기장에서,거리에서 그리고 직장과 가정에서 온 국민이 한마음으로 응원하는모습을 보면서,한편 우리의 답답하고 부끄러운 정치현실이 문득 머리를 스치기도 했다.정치도 축구처럼 할 수 없을까.정정당당한 경쟁,깨끗한 승복,그에 따른 아름다운 명예 이것이 축구의 세계가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 여야 지도자들도 축구처럼 미래의 꿈을 가지고 맨 몸으로 청빈하게 경쟁하면서,아름다운 민주주의 건설을 위해 진심으로 헌신할 수는 없는 것일까.정치생활의 끝은 언제나 그처럼 수치스럽고 비겁하며 변명으로 일관하는 불명예의 길이어야 하는가.‘대∼한민국’을 연호하는 국민의 목소리를 진정 듣지 못하는 오만과 무지가 정말 야속하게만 느껴진다. 오늘의 대전은 전 세계에 한국인의 저력을 유감없이 보여준 한판이었다.세계는 숨을 멈추고 우리를 지켜보았고 우리는 그들에게 정직한 실력과 순수한 열정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한국이 어디에 있는 나라이고 한국인이 어떤 국민인지 분명히 보여주었다.무엇보다도 미국인들에게 우리의 참모습을 깊이 인식시킨 것은 물론 단군 이래 전민족의 공동체 의식을 고양한 것이 이번 대회의 가장 큰 성과로 평가된다.말 그대로 월드컵을 통해 ‘거족적인 축제’를 이룬 것이다.48년 만에 얻은 값진 성과이지만,기다림의 철학은 앞으로 더욱 큰 성과를 가져다 줄 것으로 믿는다.기다림과 맹훈련의 인내,열정과 침착의 조화,깨끗한 질서와 아낌없는 성원이야말로 월드컵을 통한 우리 문화의 내적 성숙을 가져오는 왕도라고 생각한다.최후까지 우리선수들에게 영광이 함께하기를 기원한다. 서연호/ 고려대 교수 연극평론가
  • [데스크칼럼] 美 흔들리는 ‘멜팅 폿’

    미국의 많은 식자들이 스스로 미국 사회를 가리켜 ‘멜팅 폿(melting pot·도가니)’이라고 부른다.사실이 그렇다. 오늘의 미국을 건설한 것은 잉글랜드계 백인 기독교도들만의 힘이 아니다.무엇보다 아프리카 흑인들의 절대적인 희생과 힘이 있었고 거슬러 올라가면 중국인 철도노무자,아일랜드인,러시아인,독일인,사탕수수밭 인부로 진출했던 한국인이 있었다. 각양각색의 피부색과 종교,이질 문화가 쇳물처럼 녹아들어 오늘의 미국을 이루게된 것이다.종교간 불화가 끊이지 않는 중동과 달리 회교사원과 유대교 시나고그,불교 사원과 기독교 교회가 동네마다 자리를 같이하는 게 미국사회다. 9·11테러 이후 이 ‘멜팅 폿’에 금이 가고 있다.미국인들은 9·11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그런데 이 만행을 향한 분노와 증오가 이슬람에 쏟아지며 아랍계 아메리칸들이 ‘담장 밖’으로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테러 이후 미국의 크고작은 도시에서 아랍인들은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혔고 멀쩡하게 잘 지내던 어린 학생들까지 급우와 교사들에게서 경원당하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테러 정보와 첩보를 제때 입수해 대처하지 못한 당국은 자신들의 태만과 부주의를 모면하려는 듯 이 증오심에 기름을 붓는 조치들을 계속 내놓고 있다. 미국을 방문하거나 미국땅에 사는 수십만명의 아랍인들이 지문날인과 거주신고를 하도록 강요받게 된다.그리고 20만명에 가까운 요원을 거느리고 국가안보에 관련된 모든 정보를 총괄하는 국토안보부가 만들어진다.여야가 반대하지 않으니 이르면 연내에 이 ‘빅 브라더’가 예정대로 출현할 것이다.이 거대 조직의 임무는 쉽게 말해 미심쩍어 보이는 이슬람교도들을 모두 추적,조사하는 것이다. 이런 조치가 얼마나 무모하고 비효과적인지는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다.20만명 아니라 200만명이 나선다고 죽기를 작정한 테러범을 다 막을 수 있을까.그 과정에서 죄없는 시민들이 영문도 모르고 겪어야할 불편함과 부당함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일차적인 대상은 아랍인들이지만 결국은 아시아인을 포함한 모든 유색인들이 잠재적인 범죄자 취급을 당하게 될지 모른다. 테러범들을 향한 증오심이 이렇게 미국의 위정자,식자층,일반 시민들의 눈을 멀게 하고 있다.이런 조치들은 미국내 테러범들의 은신처를 더 비옥하게 만들고 더 많은 동조자를 양산하는 부작용을 가져온다는 것을 왜 모를까.증오는 더 큰 증오를 낳을 뿐이다. 타이거 우즈,오프라 윈프리,콜린 파월,그리고 이란 이민의 딸인 걸출의 방송기자CNN의 크리스티안 아만푸르…미국의 많은 유색인 젊은이들이 이들을 보며 자신의 미래를 키운다. 지금이라도 미국은 미국에 증오심을 가진 이들의 마음을 치유하는,보다 근원적인 작업에 눈을 돌려야한다.친이스라엘 일변도의 외교를 바로잡고 이슬람에 대한 뿌리깊은 편견을 고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그것이 아랍인들의 지문을 모두 찍는 것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다. 안타깝게도 지금 미국은 ‘멜팅 폿’이 아니라 그 반대인 해체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 이기동/ 국제팀장yeekd@
  • [제정러시아 외교문서 새 발굴 대한제국 비사] (8)군사교육 지원의 전모

    ***“6000精兵 양성” 러 군사교관단 2차례 파견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러시아를 방문한 민영환(閔泳煥) 특명전권공사는 1896년 6월13일 외무장관 로바노프를 만났다.이 자리에서 민영환 특사는 러시아군대 파견,군사교관단 파견,차관제공,재정고문 초빙,전신선가설 등 5가지 요청 사항을 제시했다.이중 러시아군 및 군사교관단 파견요청에 대해 두 사람이 주고받은 문답은 다음과 같다. 고종의 호위를 위해 러시아 군대를 조선에 파견해 줄 수 있는가.(민영환).왕이 러시아 공사관에 있는 동안 러시아 해군이 호위할 것이다.공사관에 체류하고 싶은 만큼 체류할 수 있다.(로바노프).조선군대를 훈련시키는 동시에 왕을 호위할 군사교관 200명을 파견해 줄 수 있는가.(민영환).군사교관은 파견할 것이나 빠른 시일안에는 곤란하다.(로바노프) 당시는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 피신해 있던 아관파천(1896년2월11일∼1897년 2월20일)기간중이었고 러시아가 조선의 국사를 쥐락펴락하던 시기였다.고종은 자신의안위를 보호해줄믿을 만한 군대가 절실하게 필요했고 러시아군이 그같은 역할을해줄 것으로 여겼다.고종은 일본인 특히 일본 군사고문단의 한반도 진출을 꺼려했다.일본 군사고문단 대신 러시아 군사교관단을 초청하고 싶었다.하지만 군사교관단의 파견은 러시아의 의지만으로 해결될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열강을 동원한 일본과 친일파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러시아로서도 극동주둔 군사력의 대(對)일본 열세를 잘 알고 있었고 당시 군사교관단의 파견은 군대 파견의 전제조건이자 러시아의 확고한 한반도 지배의사로 해석되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1896년 2월23일 일본 군사무관 보각 대령은 참모본부 학술위원회에 보낸 전문에서 “조선의 군사교관단과 재정고문 파견요청에 동의하면 일본을 자극하게 될 것이다.이 경우 일본 정계에서 조선문제에 관해 러시아와 협력을 하려는 분위기를 파국으로 이끌거나 아니면 일본의 적극적인 개입을 불러올 수 있다.”고 주장하는 등 러시아 군 내부에서도 반대여론이 팽배했다.이 때문에 러시아정부는 파견결정을 차일피일미뤘고 주한 베베르 대리공사와 대립각을 세우기도 했다.결국 군사고문단의규모를 대폭 축소하는 선에서 ‘생색내기용’파견이 이뤄졌다. 조선의 불안한 정세로 보아 군사교관단과 재정고문 파견문제를 고종과 협의하기는아직 시기상조이다.(1896년 3월1일 로바노프 외무장관이 스페이예르 서울주재 공사대리에게) 가능하면 신속하게 군사고문단을 파견해야 한다.그것이 왕권강화,질서회복 그리고일본견제책의 유일한 수단이다.(같은해 3월20일 베베르가 외무부에 띄운 보고문)국방부에서 검토한 결과 고종의 시위대는 러시아인 장교를 지휘관으로 한인 1개 대대로 구성하고 교관은 위관급 5명,상사 4명,하사관 10명과 소총 1000정이 적합하다고 한다.(1896년 4월28일 외무장관이 베베르에게).고종은 무기와 교관단 파견결정에 감사를 표했다.조선군은 4000명이기 때문에 왕의 시위대외에 서서히 다른 부대의 교육도 위탁하고자 한다.(같은해 같은달 30일 베베르가 외무부에) 1896년 11월22일 러시아 하바로프스크에서 민영환 특사와 청국주재 군사무관이던푸차타 대령 사이에 제1차 군사교관단초청 계약서가 체결됐다.계약에 따르면 초청기간은 1년이며,인원은 장교 2명,하사관 10명,군의관 1명,악장 1명 등 모두 14명으로 돼있다.조선측은 장교급에겐 매월 150엔,사병에게 20엔의 월급과 숙소를 제공키로 했다.제물포까지의 여비와 부임수당 등도 별도로 부담하는 조건이었다.이들 중악장을 제외한 13명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그레마쉬호를 타고 제물포항을 통해 입국했다. 곡절끝에 13명의 제1차 러시아 군사교관단은 1896년 10월24일 조선땅에 들어왔다.고종이 요청했던 200명에는 턱도 없이 모자란 숫자였지만 군사교관단의 한반도 파견의 의미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무게를 갖고 있었다. 러시아는 군사교관단의 파견과 함께 푸차타 대령을 군사교관단장에 임명했다.또 1896년 1월 동부 시베리아 제2보병여단 소속 스트렐비스키 중령을 서울주재 러시아공사관 군사무관(軍事武官)으로 임명했다.1895년 6월17일 아무르군관구 참모부장이 외무장관에게 “이제 서울에도 별도의 상주 군사무관이 필요하다.앞으로극동의분쟁에서 조선의 무력이 큰 변수로 등장할 것이 분명하다.”라고 강력하게 주장한데 따른 후속조치였다.스트렐비스키 무관은 1902년 라벤 중령과 교체될 때까지 서울에서 근무했다. 조선은 청·일전쟁(1894∼1895)이전까지는 지리적 특성으로 러시아 우수리지방의중요한 국경을 보호해 주는 방벽구실을 했다.현재 독립국가로 인정을 받고 있지만앞으로는 어떤 운명을 맞게 될 것인지 예상하기 어렵다.그러나 조선의 최근 역사를 분석해 볼 때 아마도 국내의 혼란으로 인해 정치적 욕망이 많은 열강,특히 일본의 세력각축장으로 변하게 될 것임이 틀림없다.(푸차타 군사교관단장의 1897년 수기)조선은 6000명의 상비군을 보유해야 국내 질서가 안정될 것이다.고종은 유럽식으로 군사교육을 받은 3000명의 정병(精兵)이면 충분하다고 말하지만 현실에 맞지 않다.…6000명 정병양성은 조선의 영토나 국민수로 보아 외국의 의심을 사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조선과 병력양성문제에 관한 조약을 체결한 뒤 일본과 협의를 해야 할것이다.군부에 만연돼 있는 부패를 척결하고 공정한 예산집행이 이뤄져야 한다.(1897년 6월17일 푸차타의 비밀보고서) 푸차타의 이같은 조선군대 증강계획안에 대해 일본은 거세게 항의했으며 러시아 내부에서도 논란이 일었다.증강계획을 포기하든지 일본과의 전쟁을 불사해야 할 것이라는 의견이었다.전쟁은 러시아에 불리하기 때문에 이 계획에 착수하면 돌이킬수 없는 우를 범할 것이라는 경고도 나왔다. 제1차 군사교관단의 대한제국군 군사조련은 일단 성공적인 것처럼 보였다.1897년6월9일 고종과 각부 대신 그리고 주한외교사절단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조선군 의장대 사열식은 참석자들에게 큰 감격을 안겨주었다.대한제국군중 러시아교관단 산하부대로 들어오려는 경쟁도 치열했다. 당시 서울에는 대한제국군 5개 대대병력 4000여명이 있었지만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30대의 젊은 한국인 대대장이 부대에 출근할 때는 부하들의 부축을 받으며 ‘영감행세’를 하기 일쑤였다.병력중 많은 숫자가 ‘유령 병력’이었다.식비를 횡령하기 위해 숫자를 부풀린 탓이다.대부분이 군인 신분을 창피하게 여겨 밖에 나갈 때는 사복으로 갈아 입었다.교관단은 이중 1600여명을 선발해 2개 대대로 조직했다.이들은 궁정을 경비하는 시위대 요원이었다.따라서 훈련과목에는 궁중 예절과 궁중 호칭법 등도 포함돼 있었다. 러시아정부는 대한제국 군대의 개편을 포함,재정지원을 제공하고 제2차 군사교관단을 또다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장교 3명,하사관 10명,사관학교 교관·병기병·군악대지휘자 각 1명,군악대원 3명,위생병 2명 등 총 21명이다.(1897년 5월15일 베베르가 무라비요프 외무장관에게) 1차 군사교관단의 성공에 고무된 러시아가 제2차 군사교관단을 파견했다.2차 교관단의 장교와 하사관 등 13명은 아무르군관구에서 차출됐으며 나머지 기능직은 예비역중에서 선발됐다.하지만 독립협회의 활동과 친일파의 득세 등으로 인해 대한제국내 정세는 급격하게 반(反)러감정이 확산되고 있었다.급기야 1897년 8월14일 푸차타 군사교관단장이 본국으로 소환되면서 알렉세예프 중위에게 교관단 통솔권이 위임됐다.푸차타 대령의 야심찬 조선군 증강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지만 그는 이후 소장으로 진급,아무르지사로 임명되는 등 출세가도를 달렸다. 최근 여러 보고서로 미뤄볼 때 대한제국의 정세가 매우 불안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관직에 있는 사람이나 모든 당파가 러시아에 적대적이며 친러적인 성향을 갖고 있는 고종황제 역시 매우 의심스럽게 되었다.이러한 상황 때문에 러시아가 대한제국 국내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없는 것이다.니콜라이 황제께서 고종황제와 대한제국 정부가 향후 러시아의 지원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지 문의하라고 하셨다.대한제국의 요청으로 파견된 군사교관단과 재정고문이 필요치 않다면 러시아는 마땅히 소환하겠다.(1898년 3월3일 외무장관이 스페이예르 대리공사에게) 대한제국 정부가 공식적인 회답을 보냈다.현재 러시아의 군사 및 재정고문(알렉세예프)이 더 이상 필요 없다고 했다.러시아는 모든 외국인 고문의 파면을 요청하고 최근 통역관(김홍륙)살해 음모자 처벌을 요구해야 한다.대한제국 정부가 거부하면 공사관 기를 내리고 원산을 점령해야 한다.(같은해 3월12일 스페이예르의 회신) 평소 거칠고 직선적인 언사 때문에 초대 대리공사 베베르가 10년동안 한국에서 닦아놓은 외교적 성과를 물거품으로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은 스페이예르는 ‘공사관철수 후 한반도 북부 무력 점령’이라는 극단 처방을 내놓았다.니콜라이 2세는 1898년 5월4일 대한제국에서 군사교관단과 재정고문의 철수를 허락했다. 러시아 군사교관단이 철수한 이후 대한제국군의 조직은 일본의 수중에 넘어갔다.일본에서 군사교육을 받은 20명의 한국인 장교들이 교관이 되었다.1901년 1월 당시 대한제국군은 장교 372명에 사병 1만 5200명이었고 군대예산은 360만엔이었다. 1,2차 러시아 군사교관단의 한반도 파견과 철수시기를 전후해 일본과 러시아는 1896년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모스크바 프로토콜)체결,1898년 로젠-니시협정(러·일특별협정) 등 대한제국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협정을 맺었다.러시아가 일본과 일련의 협정체결과 함께 군사교관단을 철수시킨 것은 대한제국을 지배하려는 야심을 사실상 접은 것이나 다름없었다.고종은 이후 국내외 압력에 밀려 러시아교관단이 철수하도록 등을 떼민 자신의 ‘우둔한’결정을 한없이 후회했지만 때는 늦었고 돌이킬 수 없었다.‘눈엣가시’러시아군이 떠나자 일본의 한반도 점령 프로젝트 추진에는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노주석기자 joo@ ■'거문도 사건' 러 대응 1885년 4월15일부터 23개월 동안 영국의 극동함대가 거문도(전남 여수시 삼산면)를 무단 점령한 사건은 러시아의 태평양진출정책을 경계한 열강,특히 영국의 극동에 대한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부딪친 사건이었다. 새로 발굴된 러시아문서보관소의 비밀외교문서에 따르면 러시아 군부는 거문도 점령 당일 외무부에 급보를 띄워 대책마련을 촉구하는 한편 서울점령 등 강공책을 제시하는 등 급박하게 움직였다.하지만 영국의 무력시위 앞에 러시아는 다소 유약한 모습을 보였다.이 과정에서 영국과 청의 비밀거래설도 제기돼 주목된다. 블라디보스토크호가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귀국하는 길에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거문도를 방문한다.거문도를 점령한 영국의행위는 러시아에 적대적인 것이다.러시아의 태평양함대사령부와 인접한 지역에 위치한 영국의 군사기지를 폐쇄하도록항의해야 한다.영국과의 협상에서 카스피해 동부지역과 조선이나 일본의 항구를 점령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해야 한다.(1885년 4월15일 해군부관리관이 기르스 외무장관에게 보낸 비밀문서). 만일 영국이 거문도를 합병한다는 소문이 사실이라면 러시아 순양함대는 동해에서완전히 군사적으로 봉쇄당하게 된다.또한 일본군이나 청국군이 서울을 점령하게 되면 러시아군이 그들을 몰아내고 아예 서울을 점령해야 한다. (1885년 4월18일 아무르 동부지역 총독 코르프가 황제의 시종무관장에게 띄운 암호전문). 러시아는 정보라인을 총동원,영국의 점령의도와 군사력 등을 파악했다.거문도점령 9일후인 4월23일 일본 나가사키에 파견된 코스틸예프가 외무부에 보낸 전문에는“거문도에는 1척의 영국전함이외에 2척의 소형함정이 있다.오늘 식료품을 실은 기선이 거문도로 출발했다.그곳에는 상륙병 50명이 있으며 나가사키에 있는 영국군함에는 200명의 수병이 승선하고 있다.”.라고 보고했다. 또 베이징주재 러시아 공사 파포프는 1885년 9월20일 외무부에 보낸 전문에서 “청국의 이홍장(李鴻章)은 영국의 거문도점령을 결코 찬성하지 않는다.그는 종속국인 조선의 보호를 의무로 여기고 있다.청국의 거문도철수항의를 영국이 수용하게 될지는 모르지만 거문도 때문에 전쟁까지는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러시아가 거문도를 점령하지 않겠다는 보장을 하면 영국은 거문도를 떠날 것으로 확신하고 있으며 영국의 거문도점령은 러시아의 남하를 경계한 결과로 분석된다.”라고정확하게 분석했다.청국주재 군사무관 시누에르는 1885년 11월17일 참모본부학술위원회에 보낸 보고서에서 “확증은 없지만 청과 영국의 비밀거래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있다. 이홍장의 한 측근은 나에게 ‘영국은 러시아와 전쟁시 거문도를 요새로 사용하고 전쟁후에는 시설물 일체를 청국에 팔기로 했다’고 귀띔했기 때문이다.”라고 보고해 영국과 청의 거래관계를 의심하고 있다. 결국 북양대신 이홍장의 중재에 의해러시아는 한국영토의 어느 지점도 점령하지 않겠다는 확약을 했고 영국함대는 1887년 2월27일 자신들이 헤밀턴섬이라고 이름붙인 거문도를 떠났다. 노주석기자
  • 에듀토피아/ 모스크바 유일의 한민족교육기관 1086학교 엄넬리교장

    “우리가 심고 가꾼 코스모스 꽃길…,친구들과 함께 걸어갑니다.” 초등학교 4학년생인 러시아인 이고리(9)양은 한국어책에나오는 ‘꽃길’이라는 시를 또박또박 읽어 나갔다. 러시아 모스크바의 남서쪽 베젠스키가에 위치한 1086학교(교장 엄넬리)에서는 한국어수업이 한창이다. 1086학교는 모스크바시가 운영하는 공립 학교이자 유일한 한민족(韓民族) 학교이다.또 95년 유네스코가 선정한 러시아내 소수 민족 8대 우수학교이며 대학 진학률이 평균 98%에 이르는 모스크바의 제일 명문이기도 하다. 1086학교는 지난 92년 9월 교포 4세인 엄넬리(62·여) 교장의 피나는 노력끝에 세워졌다.때문에 엄 교장의 삶은 곧 1086학교나 다름없다.엄 교장의 한국 이름은 엄복순(嚴福順)이다. “소련 해체 이후 고려인들의 자녀들에게 한민족의 뿌리와 얼을 일깨워 줘 당당하게 러시아 시민으로 살아가도록교육할 필요성을 절감했지요.그래서 러시아 교육부와 모스크바시를 드나들며 차관과 시장을 설득한 끝에 승인을 받아냈습니다.”엄 교장의 설립 당시에 대한 설명이다.학교의 운영비는 전액 모스크바시에서 댄다. 엄 교장은 학교를 설립할 당시 한국말을 제대로,아니 거의 못했다.하지만 지금은 전혀 막힘이 없다.한국어 수업을 맡을 정도로 유창하다.교육학 박사학위도 3년전에 취득한 학구파다. 엄 교장은 현재 스스로 한국어를 터득한 경험과 100여권의 한국어책을 토대로 한국어 교본을 제작,조만간 발간할예정이다. 전체 798명의 학생들은 50여개 민족으로 이뤄졌다.고려인이 55∼65%,러시아인 35%이다.일본·미국·중국·베트남의 학생들도 50여명에 이른다.한국인의 자녀도 43명이나 다닌다.공립인 만큼 일정 비율은 고려인이 아닌 타민족의 학생에게 할애되고 있다.교사는 56명이다. 엄 교장은 “상당수의 고려인 학생들은 이 곳에서 배우기 위해 멀리 우즈베키스탄이나 카자흐스탄,타지키스탄 등에서 왔다.”면서 “입학을 희망하는 고려인 학생들이 많은데 모두 수용하지 못해 마음이 너무 아프다.”고 말했다. 1086학교의 교육과정이 설립 취지대로 한민족적이다.수업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차임벨도 ‘아리랑’으로 되어 있다. 방과후 특별활동에는 태권도와 민속무용 시간도 들어 있다.태권도를 가르치는 사범은 ‘차렷,준비,앞차기…’ 등 모든 용어를 한국어로 쓴다. 4평 정도의 온돌로 된 예절방도 갖췄다.차 마시는 법,절하는 법 등 한국의 예절을 가르치기 위해서다. 미술실에는 한복과 함께 러시아의 전통의상이 걸려있다.학생들은 자매결연한 서울시교육청 등에서 보내준 한복을입고 교육을 받는다. 한국어 시간도 1∼4학년까지는 주 2시간,5∼7학년까지는주 3시간이나 편성됐다.학생들은 수업 시작에 앞서 선생님들에게 한국말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한다.다른 민족의 학생들도 전혀 거부하지 않는다.오히려 자연스럽다. 중학교 1학년인 함올가(11)양은 “처음에는 낯설었지만지금은 재미있다.”고 짧게 한국말로 말했다. 1086학교에 입학하려면 해마다 평균 10대 1 이상의 경쟁을 뚫어야 한다.이를 증명하듯 지난해 졸업생 56명 가운데 러시아 최고 명문인 모스크바 국립대에 10명,모스크바 국제관계대에 21명,바우만공대에 6명이 입학했다.한명만을 빼고 나머지 모든 졸업생들이 대학에 들어갔다.모스크바 3600개 공립학교 가운데 최고 성적이다. 엄 교장은 지난 97년 교육자로서 최고의 영예인 러시아연방 최우수교장 훈장을 받았다.부상은 아파트 한채였다.77년 레닌훈장을 받은 적도 있다.때문에 모스크바시의 어떤 학교에 비해서도 학생 선발이나 독자적인 교사 임용 면직권 등 파격적인 우대를 받고 있다.월급도 많다. 하지만 월급은 우수 교사들의 보너스로 나눠주는 등 학교재정으로 고스란히 들어간다. 엄 교장은 “한민족의 긍지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민족·인종 차별을 받지 않고 떳떳하게어깨를 펴고 교문을 들어서는 학생들을 보면 더없이 뿌듯합니다.”라며 2평 남짓한 교장실로 발길을 옮겼다. 모스크바 박홍기 특파원 hkpark@ ■러시아 교육제도는 러시아는 초·중·고교를 비롯,대학까지 모든 교육의 무상교육을 표방하고 있다.하지만 국가의 재정난 탓에 대학은 사실상 국가 지원이 중단된 상태이다. ◆유치원=2000년 기준,5만 6639곳에 437만명이 다닌다.7세 이하의 어린이는 지역내 유치원에 언제든지 들어갈 수 있다.구 소련의 유아교육 강화에 따라 시설이나 교육내용이우수하다. ◆초·중등학교=7만 3123개교에 2445만명이 재학중이다.학제는 기본적으로 1∼11학년제이다.수업 연한은 초등학교의 경우,3∼4년,중학교는 5년,고교는 2∼3년이다.학교명은개교 연도와 설립 목적에 따라 아라비아 숫자로 표기한다.모스크바 No.1086학교가 그 예이다. 영재교육을 목적으로 한 특수학교는 수학·과학·음악·미술·체육 등 해당 분야의 우수학생들이 입학하고 있다. 보통 중등교육을 마친 학생 중 30%는 대학 진학,55%는 취업을 위한 직업 훈련,15%는 공공봉사기관에서 직업과 학업을 병행한다. ◆고등교육기관=국립대 587개교,사립대 334개교에 모두 355만명이 재학중이다.러시아의 대학은 전통적으로 학사와석사과정을 통합한 5년제이다.90년대 중반부터 대학과정을 4년제로,석사과정을 2년제로 개편하는 대학이 늘고 있다. 종합대학은 대도시에 45개교가 있다.단과대학은 공학·의학·경영·항공·외국어 등 전문 분야로 특성화됐다.종합대학과 단과대학간의 질적인 차이가 없다.대학 졸업생들은 개인 사업이나 외국계 회사 취업을 선호한다. ◆교원=교원 보수의 빈약으로 우수 인재의 교원기피 현상이 심각하다.초·중등교원은 미화로 월 50∼100달러,대학교수 역시 50∼150달러 수준이다.따라서 첨단 과학인력·외국어 분야의 전문인력들이 해외로 나가는 추세가 해마다 늘고 있다. ◆학비=최신 시설을 갖춘 기숙사형 학교의 학비는 연 8000∼1만달러,일반 사립학교는 연 3500∼6000달러,외국 학교는 연 1만2000∼2만1000달러 선이다. ◆한국 유학생=지난해 11월 현재 1200여명에 달한다.지역별로는 모스크바에 700명으로 가장 많다.모스크바 국립대에 230명,마치항공대에 53명,차이코프스키음악원에 53명,그네신음악원에 36명이다.상트 페테부르크에 230명,블라디보스토크와 사할린 등 극동지역에 122명이 있다.
  • 러 농지매매 허용법 검토

    [모스크바 AFP 연합] 러시아 국가두마(하원)가 16일 1917년 볼셰비키혁명 이후 처음으로 농지매매를 허용하는 농지 사유화법안에 대한 첫 검토작업에 착수했다. 의원들이 토지 사유화 법안을 심의하는 동안 의사당 주변에서는 약 100명의 시위대가 붉은 공산당기를 걸친 채 '토지매각은 범죄행위'라고 쓴 플래카드를 흔들고 정부의 퇴진을 요구, 항의시위를 벌였다. 러시아 정부가 입안한 농지사유화 법안은 외국인들의 농지 소유를 제한, 비러시아인들이 국경지역의 농지를 매입할 수 없도록 하고 있으나 매매금지 해당지역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 [제정러시아 외교문서 새 발굴 대한제국 秘史] (3)러 거주 한인들의 수난과 투쟁사

    한인들의 러시아 이주문제가 표면화된 것은 1860년 러시아와 청국이 북경조약을 체결,광활한 우수리지역이 러시아영토로 편입되면서부터였다.이때 비로소 조선과 러시아는두만강유역을 경계로 국경선을 맞댔기 때문이다. 이번에 새롭게 발굴된 러측 극비문서에 따르면 1884년에러시아 거주 한인은 대략 1845가구 9000여명에 달했으며남우수리지방의 포시에트에 15개 마을을 형성하고 있었다.독신으로 넘어와 품팔이를 하던 것이 점차 가족을 동반한집단이주로 본격화됐다는 것이다.물론 러측 문서에 나타난 이같은 한인이주는 이전부터 이곳에 거주하던 발해유민등 한인 원주민은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한인이주문제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1863년 조선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포시에트지역에 가족단위 이주민이옮겨온 이후 이주민 숫자는 매년 증가추세를 보였다.당시상황은 이와 같은 한인 이주민이 크게 도움이 됐다.(1908년 3월8일 아무르 동부지역 총독 운테르베르게르가 내무부장관에게 보낸 보고서) 한인이주문제는 아무르동부지역 총독부에서 내무부장관에게 보낸 보고서에 주로 등장한다.이주의 원인으로 대한제국 북부의 토질이 나쁘고 흉년이 계속된 데다 관헌의 파렴치한 착취에 따른 탈출로 분석했다.또 대한제국 국경에서 가까운 남우수리 지방은 습기가 많고 해양성 안개가 자주 끼어 러시아 농민들은 농지로 적합치 않다며 떠나 버렸지만 한인들은 이곳의 기후와 토질이 한반도와 유사해 벼농사에 적합하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러시아 행정당국에서도 한인 이민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였으며 이들은 러시아군대와 도시민들에게 농산물을 재배,공급하는 한편 도로개설과 보수 및 짐마차 부역노동 등에 동원했다.한인 이주가 급증한 것은 1870년 초 조선에 흉년이 겹쳤기 때문이다.많은 국민이 빠져나가자 조선정부에서자주 항의를 해왔다.1884년 한·러수호통상조약체결이전에이주해 온 한인은 러시아국민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이민온 조선인은 러시아국적을 소지하고 있으며 정교회를믿었지만 이들이 러시아인화할 것이라는 믿음은 근거없는추측이다.남우수리에 거주하는한 한인가족은 40년을 살았지만 조선식으로 살고 있다.극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한인들이 그렇다.러시아가 청국이나 일본과 전쟁을 하게될경우 한인의 충성심을 믿어서는 안된다.이곳은 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이때문에 일본은 한인의 러시아 이민을 장려하고 있다.(상기 문서와 출처동일) 러시아 중앙정부나 지방당국은 한인들의 습관이나 생활풍속이 러시아인에 동화되지 않으며 황인종이 극동지방에 많을 경우 해롭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하지만 우선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를 차단하는 정책의 시행을 차일피일 연기했을 뿐이었다.1891년 두홉스키 아무르 총독은 오히려 적극 정책을 폈다.한인의 러시아 동화를 독려하는 한편 2년간 러시아잔류허가를 받은 한인이 만기를 넘겨도 추방하지 않았고 새로 오는 이민자도 거부하지 않았다.그 결과 1904∼1905년 러·일전 기간중 한인수는 ▲남우수리 2500명▲하바로프스크와 우드스크에 7500명▲아무르에 3만 3500명에 달했다. 카자흐부대가 관리하는 지역에 살고 있는 한인 18명의 가옥 8채를 철거하지 말고 한인이 경작하는 농토를 몰수하지 말 것.15년간 병역의무를 면제해주고 고국의 가족을 초청,러시아국적을 취득하게 해 줄 것.(1897년 8월16일 타반트 마을 촌장 이성삼외 18명이 카자흐부대 사령관에게 보낸진정서).가족을 초청,농업에 종사한다면 러시아국적취득에 동의하며 국적취득후에는 이들을 카자크관할 마을로 편입시킨다(카자흐 사령관의 회답) 카자흐란 15∼17세기 과중한 세금과 압제를 피해 러시아의 중앙부에서 남방변경지방으로 도망친 농노 및 그 자손들을 총칭하지만 주로 카자흐인들로 구성된 비정규군 둔병(屯兵)을 지칭한다.이들은 정부로부터 토지를 지급받는 대신 유사시에 징집될 의무를 갖고 있었다.한인 이주자들도카자흐인과 마찬가지 취급을 받았던 것이다. 러시아는 한인들에게 미개간지를 개척하게 한 뒤 또 다른 미개척지로 밀어내고 개척지에는 러시아인들을 이주·안착시켰다.1937년에는 이민족을 국경지역에서 소개(疏開)시킨다는 명목아래 중앙아시아의 오지(奧地)로 강제이주시켰다.러시아가 추진한 한인 이주정책의 정체를 알 수 있게하는 대목이다. 이범윤을 중심으로 대한제국의 정치 이민자들이 노보 키예프스크(두만강 넘어 남우수리지방에 있던 소도시)를 활동거점으로 삼고 있다. 일본이 우리의 우방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조치를 취해야할지 유보하고 있다.(1908년 4월5일 남우수리지방 국경행정관 스미르노프가 연해주 주지사 플루그에게 보낸 통신문).한인 의병조직에 관심도 갖지 말고 처벌도 하지 말 것.그러나 격려하지는 말 것.(같은해 4월19일 플루크가 스미르노프에게 보낸 답신전문). 러시아 극동지역은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부터 러시아혁명이 일어난 1917년까지 항일민족운동의 중심지였다.이후 러시아혁명정부가 빨치산부대를 해체하는 1922년까지는 공산주의운동의 본거지가 되었다.이곳이 항일운동의 근거지가 된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다.우선 만주와 간도,연해주 등 국경을 맞대고 있어 한·러·청 3국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 때문이었다.이와 함께 간도와 연해주지역에 살고 있는 한인 이주민들의 풍부한 인적·경제적 자원을 활용할 수 있었다. 러시아내 한인들을 한인의용군으로 편성해 러시아에 공헌케 하는 방법으로는 산악지방에서 빨치산활동으로 일본군을 교란하게 하는 등의 방법이 있다.…함경남북도에서 6000명의 모병이 가능하며 소총 2300정이 확보가능하다.…부대는 3개 연대로 구성하며 소대장이상 지휘관은 러시아인으로 한다.(1904년 11월3일 코르프 남작이 제안한 러·일전쟁시 한인의용군 편성계획). 일본 외무성이 다음과 같이 전해왔다.조선정부로부터 간도관리사(間島管理使)라는 직책을 부여받은 이범윤은 200명의 동지를 모아 통감부하의 현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이들은 불라디보스토크에서 다량의 무기를구입하고 대한제국으로 침투하기 위해 노보 키예프스크에집결해 있다. 이들중 일부는 육로를 통해 경성(서울)으로 갔으며 또 다른 일부는 선박편으로 대한제국 북부로 떠났다.(1908년 7월9일 도쿄주재 러시아대사 말레비치가 외무부에 보낸 비밀전문). 만주에서는 상인들이 빨치산 대원을 도와 무기와 돈을 지원해 주었다.총대장은 이범윤이며 그는 4000명의 빨치산을 지휘하고 있다.그중 1000명은 총으로 무장하고 있으며 나머지 3000명은 길림과 봉천지방 주민들의 지원을 받아 무장을 획책하고 있다.빨치산의 거점지역은 러시아와 청국국경지대에 일부 있으며 또 다른 일부는 간도에 있다.(1911년 11월11일 하바로프스크 아무르군관구 참보부가 총참모부 관리본부에 보낸 비밀첩보보고서) 1905년 러·일전쟁의 패배로 타의에 의해 대한제국에서손을 떼게 된 이후 한일합병을 전후한 시기까지 러시아의비밀문서에는 이범윤과 관련된 항일투쟁활동이 유독 많이거론되고 있다.유인석·홍범도 등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이 없다.러시아는 항일의병을 겉으로는 ‘강도단’‘폭도단’‘빨치산’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한반도 북부에 대한 영향력 유지를 위해 활용하거나 일본군의 두만강쪽 국경침범을 저지하는 데 이용하려는 속셈을 갖고 있었다. 노주석기자 joo@ ■이범진·이범윤·이위종 3인의 항일 역정 러시아 문서보관국에서 발굴된 극비문서에는 이범진(李範晋·1852∼1910),이범윤(李範允·1856∼1940),이위종(李瑋鍾·1887∼?) 3인의 이름이 유독 많이 등장한다. 이들이 구한말 한·러관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요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하지만 세사람의 관계와 비극적인 인생유전에 대해서는 국내에 거의 알려진 바 없다. 세사람은 피로 맺어진 혈연관계였다.페테르부르크주재 대한제국 공사였던 이범진과 헤이그밀사로 파견된 3인중 한명이었던 이위종은 부자지간이었다.만주와 연해주땅을 오가며 평생 항일의병활동을 한 간도관리사 이범윤은 이범진의 6촌 동생이었다.이같은 사실은 이범진의 손자 이원갑(李元甲·65)씨에 의해 확인됐다. 또 고종이 같은 전주이씨인 이범진을 ‘조카’라고 호칭한 점으로 미뤄 이들은 이씨 왕가의 먼 일족이었던 것 같다.이범윤은 일제의 핍박에 시달리던 고종을 연해주로 망명시키려는 시도를 한 사실도 문서 곳곳에서 드러난다. 고종의 측근이었던 이범진은 아관파천의 주역이었다.친러내각이 무너진 뒤 주미공사를 거쳐 주러공사로 부임했다. 고종은 “짐은궁중에서 일본의 포로로 잡혀있지만 북쪽러시아를 바라보며 짐과 백성을 자유롭게 해주리라는 희망을 걸고 있다.짐의 사랑하는 조카,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겠지만 그곳에 남아 니콜라이2세 황제에게 도움을 청하라.짐이 운명한 뒤에도 그곳에 남아있으라.일본이 수입과 지출을 통제하고 있으니 송금할 수가 없다.”(1908년 1월31일)는 서신을 보냈다. 조국으로부터의 재정지원이 끊긴 뒤 이범진은 러시아측이 제공하는 월 100루블의 정치성 생활보조금을 지원받고 연명하면서도 조선정부와 일본의 귀국종용을 거부했다.러시아 외무부차관이 소모프 서울 총영사에게 보낸 1910년 5월의 전문에는 “이범진은 귀국할 경우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으며 러시아를 떠나지 말라는 고종황제의 어명을 지키느라 귀국을 거부하고 있다.”라고 기술했다. 한일합병이후 ‘친러파’로 낙인찍힌 이범진이 일본에 복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살이었다.그는 1911년 1월16일 “우리의 조국은 이미 죽었습니다.전하께서는 모든 권리를 빼앗겼습니다.소인은 적에게 복수할 수도,적을 응징할 수도 없는 무력한 처지에 처했습니다.자살이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라는 내용의 유서를 고종에게남기고 목을 매달았다.그의 시신은 페테르부르크 교외 우즈펜스키 묘지에 안장됐으나 지금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이범진의 둘째 아들 이위종의 일생은 더욱 기구하다.그는 7살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영국,프랑스,러시아를 전전하면서 3개 외국어를 익혔다.프랑스 샹생 육군사관학교를 중퇴,러시아로 들어가 주러공사관 참사관으로 일했으며 러시아의 귀족 놀켄 남작의 딸과 결혼할 정도로 엘리트 외교관이었다.1907년 고종의 밀서를 지니고 이준,이상설과 함께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하지만 그가 만국기자협회에서 행한 일본규탄 연설은 세계에 일본의 잔학상을 최초로 알린 쾌거였다. 그는 생활고와 울분 등으로 러시아인 부인과 이혼한 뒤여기저기를 떠돌았다.1908년에는 군자금 1만루블을 관리하던 최재형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났으며 이범윤과 함께독립운동을 꾀했지만 러 당국에붙잡혀 추방당했다.1차대전때 러시아군 장교로 참전한 사실과 1917년 러시아 혁명이후 이름을 바꾸고 시베리아일대에서 살았다는 기록이 조선인국제공산당원의 한 보고서에 나와있다.이후의 행적은묘연하다. 이범윤은 1903년 조선정부로부터 간도관리사라는 직책을부여받은 뒤 한때 5개 대대의 무장병력을 거느렸다. 대한제국으로의 진격계획을 세우기도 했다.그는 니콜라예스크에서 검거돼 이르쿠츠쿠로 추방됐지만 이곳에서도 1925년까지 항일운동을 폈다.연해주와 만주를 오가며 평생을 조국을 위해 투쟁했던 그는 노년에 거의 폐인이 돼 비밀리에입국,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노주석기자
  • [러 외교문서로 밝혀진 구한말 비사] (1)초대 대리공사 베베르의 수기

    1884년 첫 수교,1990년 재수교….한국과 러시아가 외교관계를 맺은지 118년이 지났지만 한·러 관계사는 아직도 많은 부분이 베일에 가려져 있다. 첫 수교 이후 한일합방에 이르기까지 러시아의 대한(對韓)정책은 일본과 더불어 38선 남·북 분할점령,한반도 전역 무력점령 및 보호국화,독립국가 유지안을 중심으로 변화해왔다.남·북 분할점령안은 해방 및 6·25전쟁 이후 현실화됨으로써 한국민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대한매일은 박종효 전 모스크바대학 교수가 지난 10년 동안 러시아 각지에 흩어져 있는 20여개 한국관련 문서보관소를 샅샅이 뒤져 수집한 3000여건의 외교,정치,군사,경제관계 보고서 중 1884년 수교 이후부터 1910년 한일합방을전후한 시기의 미공개 외교문서 1000여건을 해제해 최초로 공개한다. 100여년만에 햇볕을 본 이 극비문서에는 조선주재 초대러시아 대리공사였던 베베르의 수기를 비롯,1·2차 군사고문단 파견의 실상,고종과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2세가 주고받았던 친서,러시아측의 기획외교로 인한 헤이그밀사 파견 실패 등 국내에 소개된 적이 없는 새로운 내용들로 가득차 있다. 주 2회씩 10회에 걸쳐 계속되는 이번 연재물은 그동안 미흡했던 한·러 관계사의 복원은 물론,우리 근세사에서 잘못 알려진 부분들을 바로 잡는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러시아문서보관국 서고에 묻혔다가 100년만에 햇볕을 본베베르의 수기 ‘1898년 전후 대한제국’은 러시아의 대한(對韓)정책의 실상과 당시 우리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로 평가된다. 베베르는 수기 전반부에서 자신이 공사로 재임했던 1898년 이전의 대한제국의 실정과 러시아의 극동정책에 관해기술했다.후반부에서는 1903년 고종재위 40년을 맞아 경축 러시아특사로 다시 찾은 대한제국이 일본의 경제식민지로 전락한 상황을 상세하게 기록했다.모두 144쪽 분량으로된 이 수기는 자필로 작성됐지만 이를 보고받은 러시아 외무부가 황제에게 보고하기 위해 타이핑했다. 1895년 10월8일 민왕후가 일본인에 의해 잔인하게 시해된 사실이 알려지자 복수를 위해 전국적으로 봉기가 일어났다.민왕후가 시해당한 후 수개월동안 고종왕은 일본군의감시아래 포로처럼 대궐에 갇혀 있었다. 베베르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전말을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았다.그는 사건 발생 당시 현장을 목격한 러시아인 건축기사이자 궁궐경비원이었던 사바틴의 증언서와 자신의목격담을 난수표 암호전문 형식으로 러시아 외무부에 잽싸게 보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니콜라이2세 황제는 이 보고서를 읽고 친필로 “천인공노할 사건이니 좀 더 자세히보고하라.”고 지시했다.이어 극동지역에 주둔하던 아무르군관구 사령관에게 비상경계에 들어가도록 지시했다. 민왕후가 시해당한 후 수개월동안 일본군의 감시하에 포로처럼 대궐에 갇혀있던 고종은 1896년 2월11일 아침 7시30분 여인복장으로 변장하고 왕세자와 함께 부인용 가마 두 대에 앉아 공사관으로 피신해오는 데 성공했다.뜻밖의 정변이 발생한 것이다.고종의 탈출소식을 들은 수천명의 군중이 공사관 담벽 아래로 몰려와 국왕의 탈출을 만세로 환호했다.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해온 이후 모든 국사는 러시아제국의 국기가 게양된 러시아공사관에서 경비해군 160명의 호위 아래 행해졌으며,각부 대신들은 공사관건물 안에 병풍을 친 임시 사무실을 사용했고 본인과 협의하라는 왕명을 받으면 어떤 사건이든 대신과 단둘이서 논의할 기회가 주어졌다. 고종이 러시아공사관 옆에 위치한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할 때까지 1년동안 자신이 대한제국의 국사를 사실상 좌지우지했음을 드러낸 대목이다.이때부터 러시아는 이전에일본이 누리던 영향력을 대신했다.베베르가 분석했듯이 러시아는 1884년 수교 이후 10여년간 대한제국 문제에 무관심했다.당시 러시아의 주된 관심은 청국이었으며 시베리아의 경제 여건을 호전시키는 데 있었다.따라서 러시아공사관의 임무는 청과 일본이 대한제국을 ‘독식’하지 못하도록 소극적으로 방어하는 데 있었다.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한 1년은 베베르와 러시아에는 더할 나위 없는 호기였지만 고종에게는 암울한 시기였다.당시 러시아공사관 서기였던 쉬테인은[“그는 두개의 방에 왕세자와 각각 따로 앉아공사관 뜰을 무심히 바라보기도 하고 때로는 서서 방안을 이리저리 거닐었다.가끔씩은 두려움에 떨며 이웃 궁궐(경운궁)에 계신 노대비(명헌태후)에게 문안을 드리려고 몰래 세자와 함께 가곤 하셨다.그리고 남은 시간은 방안에 은둔하고 앉아 계셨다.”]고 외무부에 보고했다.고종의 공사관 생활은 수인(囚人)과다를 바 없었다는 증언이다. 청·일전쟁 후 지방세가 서울로 납입되지 않아 국고는 텅 비어 있었다.일본인 재정관리자와 고문관이 떠나버리자국고에 잔액이 얼마 남았으며 어디에 보관되어 있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관리들의 월급,특히 군인과 경찰관에게 제때 월급을 지불하기 위해서는 탁지부(재무부)의 재정실정을 밝혀야 했다. 베베르는 영국인 해관총무사 브라운을 재정고문으로 천거해 이 일을 맡겼다고 밝혔다.브라운은 지방에서 올라온 수입을 올바르게 수령,장부에 기입하고 지출을 줄여 관리들에게 월급을 지불할 수 있었으며,이때부터 관리에 대한 통제가 이뤄졌다고 기록했다.1896년말 국고는 1,660만엔의여유가 생겼으며,일본에서 차관으로 들여온 300만엔 중 100만엔을 상환하고 이듬해 가을 또 100만엔을 갚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고종이 환궁한 후 신변안전책으로 단행된 조선군의 개편작업에도 베베르가 깊숙이 개입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고종왕의 요청을 받아들여 시베리아에 주둔하고 있던 러시아군에서 2차에 걸쳐 군사교관단을 초청,대궐시위대 2개 대대를 교육시켰으며 러시아식 군운영체계를 도입했다.여타의 대한제국군들은 러시아교관단이 관리하는 대대로 들어오려고 애를 쓰기도 했다. 베베르는 러시아국가회의 체제로 의정부의 개편,13개 도와 342개 군으로의 행정구역 분할,범법자에 대한 처벌 법규 시행,재정고문 알렉세예프 파견 요청,러시아어학교 개교,러청은행 지점 개설 등 자신의 업적을 열거했다.이 기간동안 서북 석탄광개발과 압록강,두만강변의 벌목이권을러시아가 따낸 사실도 털어놨다. 그는 대표적인 친한파인사로 알려졌지만 고종과 황실인사는 물론,한국과 한국인을 혹평하기도 했다. [대한제국을 떠난 지 5년만에 다시 와보니 거리의 남루한복장은 이전보다 두배나 많았다.…고종황제는 무당을 불러 굿을 하는 엄비(嚴妃)를 따라 미신을 신봉하고 있었다.…정치적인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있었다.일본인들이 다시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한국인은 러시아,일본 기타 열강의 국제관계 및 그들의 정치적 의도를 제대로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나라가 어떤 처지에 놓였는지제대로 몰랐다.…강대국과 종속관계에 놓여 독립심이 박약하고 의타심이 강하다.…고종은 아주 호감을 주는 인품이지만 많이 쇠약해졌으며,공적과 능력에 따라 관직에 임용되지 않고 뇌물의 액수에 의해 결정됐다. 1903년 다시 서울에 와보니 일본인들은 대한제국의 독립을 보장한다면서도 정치,경제적 예속화를 촉진시키는 데모든 수법을 동원하고 있었다.한국인들은 일본의 속셈을알지 못했고,러시아는 법적으로 그런 정책을 중지시킬 권한을 보유하고 있지 못했다.일본은 은밀하면서도 조직적으로 대한제국의 조정과 국민자산을 잠식하고 있었다.] 그는 일본의 영향력이 확산될 수밖에 없는 7가지 이유를열거하면서 대한제국이 조만간 일본의 정치적 속박을 받게 될 것이라고 예고했다. 대한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은 2만명을 넘으며,일본인 1인당 한인 5명이 식모,사무실 서기,잡부,납품상인 등으로고용되다시피 했다.…대한제국 연간 무역액의 72%를 일본이 차지할 정도였다.…1898년 9월 경부선철도 부설권 협정서 중 ‘철도에 필요한 역사,창고 등 대한제국측이 제공하는 부지는 철도회사에 귀속되며 역사는 필요한 곳에 건설하되 역 앞에는 일본인 이외 타민족의 거주를 금한다.’는 불평등 조항 때문에 철도부설과 동시에 대한제국의 철도및 역사주변 땅은 일본의 소유물로 전락했다.…일본은 대한제국과 다른 국가들이 통신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서울∼부산∼일본해저 전신선을 통제했다.…개항지마다 일본은행이 개설돼 일본엔화가 시장을 지배하고 있었다. 노주석기자 joo@ ■베베르는 누구 우리나라에 부임했던 역대 외교관 중 초대 러시아 대리공사 겸 총영사였던 베베르만큼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한외교관은 없었다. 베베르는 1885년부터 1897년까지 12년 동안 공사로 재직하면서 고종의 최측근 인사로 통했다.그는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 머문 1년 동안 친러시아내각을 출범시키는 등 대한제국의 국정을 사실상 좌지우지했다. 고종은 베베르가 멕시코 공사로 발령나자 ‘이임이 유감스럽다.장기간 유임시켜달라.’는 친서를 니콜라이2세에게 보냈다.니콜라이2세는 고종 재위 40주년 경축식(1902년)에 당시 야인이던 베베르를 사절단장으로 특파하기도 했다. 이번에 발굴된 문서 중에도 ‘베베르는 고종과 개인적으로 친분이 두텁고 한국인들에게 지금도 좋은 평가를 받고있다.’‘베베르를 경축사절단장으로 결정한 것은 고종황제에게 가장 기쁜 일이 될 것’이라는 내용이 나온다.고종은 서울에 온 베베르를 자문역으로 붙잡기 위해 니콜라이2세에게 서울체류 연장을 요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베베르에 대한 학계의 연구실적은 전무하다시피하다.그의 출생연도와 학력,수기 등도 이번의 문서 공개를 통해 처음 알려지게 됐다. 베베르는 1841년 6월5일에 태어난 독일계 러시아인.부친은 루터교 선교사였다.페테르부르크 제국대학 동양어학부를 졸업하고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5년동안 중국어 공부를 했으며 이후 톈진영사와 일본 총영사를 거쳐 조선주재초대 대리공사로 부임했다. 베베르는 러시아 외무부와 중국,일본 등 주변국 외교가에서 ‘친한파’로 낙인찍힌 데다 수뢰사실(2만엔)이 외무부에 알려지는 바람에 서울을 떠나게 된 것으로 전해졌다. 노주석기자 ■박종효 前모스크바대 교수 “러 문서국 20곳서 10년간 자료 뒤져” “러시아에 산재한 20여개의 국립문서보관소에는 한국과관련된 방대한 양의 비밀문서가 먼지를 뒤집어쓴 채 방치돼 있습니다.러시아가 한국 근대사와 현대사에 미친 영향을 감안하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러시아 문서수집 및 번역 부문에서 국내 최고의 권위자로 꼽히는 박종효(朴鐘孝·65) 전 모스크바대학 교수는 지난 90년 한·러 재수교 직후 러시아문서보관소가 외국인에게도 개방되자 가장 먼저 그곳으로 달려갔다.문서보관소는전세계에서 몰려온 학자들로 만원사례를 이뤘지만 한국관계문서를 찾는 학자는 박 전 교수뿐이었다. “문서보관소에 소장된 문서를 조사,열람한 뒤 복사하려면 기록부에 이름을 남기게 되는데 한국 학자들의 이름은본 적이 없어요.” 러시아어와 러시아사,한국사,한·러관계사를 동시에 소화할 수 있는 학자들이 드문 탓도 있었지만 소장된 문서가외교,군사,경제 등 전문 분야의 필사본이어서 웬만한 학자들은 엄두를 내기도 힘들었다.산더미처럼 쌓인 문서보관소의 서고를 뒤져 한국관련 문서를 찾아내기란 숨은 그림찾기나 마찬가지였다.최근에야 러시아어와 역사를 전공하는소장학자 몇명이 한국관련 자료 수집작업에 합류했다. 박 전 교수는 99년부터 2년 동안 국제교류재단으로부터연구비를 지원받아 문서찾기와 번역,해제작업을 해왔으며,조만간 ‘러시아국립문서국 소장 한국관련 문서 요약해제집’이란 책을 펴낼 계획이다. “러시아국립문서보관소에 소장된 비밀문서의 목록을 총망라,문서목록해제집을 간행하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드문일입니다.제정러시아 대외정책문서보관소,군사문서보관소,연방문서보관소의 서고에 숨겨져 있던 문서들을 분석해 보면 러시아가 견지해온 한반도정책의 과거는 물론,현재와미래까지 유추할 수 있습니다.” 박 전 교수는 러시아측의 공개 제한조치로 ‘극비문서’들이 소장된 크렘린문서보관소와 KGB문서보관소에 접근할수 없었던 점을 아쉬워했다.그는 한국외국어대 러시아어과를 졸업한 뒤 소련 아카데미 러시아역사연구원에서 박사학위와 교수자격(독토르)을 땄고 모스크바대학 객원교수로대학원생들에게 한·러관계사를 강의했다. 노주석기자
  • 벤처업계 외국인 채용 붐

    벤처기업에 외국인 채용 붐이 일고 있다. IT(정보기술)분야의 석·박사 학위를 가진 러시아인이 특히 ‘상한가’다.국내 중소·벤처기업에서 일하면서 정부지원을 받는 50여명의 외국인 중 60% 가량이 러시아인이다. 외국인들의 국내 벤처 진출은 업체나 외국인 모두에게 ‘윈-윈카드’다.업체는 같은 수준의 국내 연구원을 쓸 때보다 많게는 50% 비용을 줄일 수 있다.중소기업청이 지난해 6월부터 외국인 연구인력을 고용하는 중소기업에게 1명당 매달 120만원씩 6개월간 지원해주는 덕이다. 외국인들에게도 9·11 미국 테러 이후 미국이나 캐나다 등선진국에 진출하기 어려워진 상황에서 IT환경이 발달한 한국의 벤처는 매력적인 직장이다. 수출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정부의 지원 없이 자체적으로외국인을 고용하는 곳도 있다.모바일 게임으로 각광받는 노리넷에는 일본인 가네코 마사노리(23)와 호주인 다나비 브랜드(27)가 정식 직원으로 근무하고 있다.일본 규슈 정보대학원 출신인 이들은 일본과 한국을 오가면서 마케팅업무를하고 있다. 오대규(吳大圭)사장은 “일본 바이어와 상담할 때 느끼는문화적 차이도 쉽게 감지하기 때문에 큰 도움이 된다.”면서 “올 하반기 준비중인 중국 진출 때도 외국인 직원을 추가로 고용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내시경,맥진기를 개발하는 벤처업체 메디미르에는 러시아국적의 고려인 4세 의사 김 세르게이 박사(32)가 지난해 12월부터 일하고 있다.그는 내시경 등 이 회사가 개발한 신제품에 대해 의사로서의 임상경험을 토대로 자문을 해주고 있다.정부에서 지원받는 120만원과 회사에서 부담하는 240만원으로 월급을 주고 있다. 보안솔루션 전문벤처 이네트렉스에도 20대 러시아 직원 3명이 활약하고 있다.이론물리학,컴퓨터,암호학 등을 전공한석사출신으로 연봉 3000만원을 주고 원룸아파트를 별도로지원한다.회사측은 기초과학이 발달한 러시아 출신 연구원과 응용분야에서 앞선 우리 기술진이 기대 이상의 시너지효과를 내고 있다고 흡족해 한다.다음달에는 박사출신 러시아직원 1명이 합류한다. 전자상거래 업체인 월드아트넷에도 석사출신 빅터(27)가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일하고 있다.영어로 대화해야 하는 불편이 있을 뿐 프로그래머로서는 손색이 없다는 평가다.이회사도 이달말 러시아 직원을 한명 더 뽑는다. 처음에는 외국인 직원을 반신반의했지만 일을 같이 해보니제품개발 등 실질적으로 큰 도움이 된다는 평가가 업계에서주류를 이루고 있다.중소기업진흥공단 국제협력팀 반정식(潘正植)과장은 “업체들의 호응이 좋아 지난해까지 한 회사에 1명까지 보조금을 주던 것을 올들어 2명으로 늘렸다. ”면서 “외국인 고급인력을 원하는 업체가 점점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김성수기자 sskim@
  • 러 국민 72% “소련붕괴 유감”

    8일로 옛 소련이 해체된 지 10주년을 맞았다.소연방은 1991년 8월19일 보수 쿠데타 실패,이어서 그해 9월 발트해 연안3국의 독립등으로 급격히 해체의 길에 들어섰다.마침내 12월8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벨로루시등 3대 공화국이 독립국가연합(CIS) 창설에 합의함으로써 소연방은 공식적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지난 8월19일 쿠데타 불발 10주년 때와 마찬가지로 러시아는 매우 조용하게 소련 붕괴 10주년을 맞았다.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단 한마디 공식 논평조차 내놓지 않았다.러시아 국민 대다수는 10년간 이룩된 개인의 자유와 민주주의 시장경제의 발전에도 불구,옛 소련에 대한 향수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러시아 국민의 72% 소련 붕괴 유감] 러시아 최대의 독립 여론조사 기관인 ‘로미르’는 8일 러시아 국민 2,000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72%가 ‘소련 붕괴를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답했다고 발표했다.반면 소련 해체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응답자는 10.4%에 불과했다.또 57.6%는 소련 붕괴를 막을 수 있었다고 답한 반면 붕괴가 불가피했다는 응답은 30%에 그쳐 러시아인들의 옛 소련 체제에 대한 미련을 반영했다. 소련 붕괴의 원인에 대해 44%가 ‘지도자들의실수 등 인간적 요소’를 꼽았다.17.2%가 ‘옛소련 공화국들의 독립 열망’을,12.9%가 ‘사회·경제적 위기’를 각각 들었다. [남은 유산] 러시아는 개혁정책의 실시로 자유와 시장경제가 발전했지만 부패 만연과 높은 인플레이션 등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다른 공화국들도 10년간 독자노선을 추구하는 등 정체성을 되찾으려 노력했지만 경제적 어려움과 부패,권위주의적인 독재체제,잇단 민족 분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미국 주도 아프가니스탄 보복전에 협조한 보답으로 경제지원을 약속받았다.장기적으로 러시아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나가고 있지만 정치·경제적인 면에서 독립국의 지위를 누리기까지는 갈길이 멀다. 김균미기자 km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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