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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디밴드 ‘두 번째달 바드’의 아일랜드 음악여행

    인디밴드 ‘두 번째달 바드’의 아일랜드 음악여행

    아일랜드 인디 밴드의 음악영화 ‘원스’가 화제다. 지난 9월28일 개봉한 이 작은 영화는 두 달간 장기 상영 중이다. 독립영화로는 최다 관객인 16만명이 몰렸고 극장 수도 처음 2개로 시작해 16개관으로 늘렸다. 반전도, 스펙터클도, 스타도 없는 이 영화가 뜨고 있는 이유는 정직하다. 가난한 음악인들의 조건 없는 열정, 순수함과 진실성 있는 음악의 힘 때문이다. 그런데 ‘원스’의 개봉 한 달 전, 국내 음악인들도 아일랜드의 거리에서 연주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다큐멘터리에 담아왔다. 아일랜드 정통음악을 선보이는 인디 밴드 ‘두 번째달 바드’의 두 번째 아일랜드 여행이었다.‘바드(bard)’는 켈트족의 말로 방랑시인이다. 지난 8월, 아일랜드의 밤바람은 매서웠다. 아일랜드 정통음악 축제를 보러 나선 길. 여행은 8월 9일부터 27일까지,19일간의 단꿈이었다. 이름도 낯선 도시 7∼8군데를 돌았다. 처음 이틀은 가져간 돈으로 충당했다. 이후는 버스킹(길거리 연주)과 현장 음반 판매로 번 돈으로 살았다.7월에 낸 새 앨범 200장을 팔았다. 매일 하루에 서너번씩 공연했다. 비가 오면 비를 피해 펍으로 들어갔다. 펍에서는 돈 대신 공짜 기네스를 양껏 얻어 마셨다. 작년에는 ‘두 번째달’ 멤버인 김현보(35)씨와 박혜리(27)씨만 떠났다. 이번에는 지난 1월 새로 결성한 ‘바드’의 멤버 김정환(27), 김진영(27), 박정민(29)씨도 함께했다. 카메라도 따라붙었다. 내년 개봉할 ‘귀신 이야기’의 음악감독으로 있던 김현보씨가 감독을 꼬드겼다. 아일랜드에 가는데 ‘동영상’ 좀 찍어달라고. 그래서 임진평(39) 감독과 김요환 프로듀서(33)가 합류했다. 이들은 60분짜리 테이프 30개에 담아온 음악과 바드, 아일랜드를 62분으로 압축했다. “작년에 전통음악을 듣고 싶어 페스티벌에 갔는데 거창한 멋이 아니라 소박한 멋이 있었어요. 그곳 사람들은 ‘리빙 트레디션(살아있는 전통)’이라고 하더라고요. 우리는 전통이라는 게 다 죽었잖아요. 그래서 이런 음악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 다시 갔어요.‘원스’의 첫장면에 나오는 거리에서도 연주했죠.”(현보)돈이 다 떨어져 경찰서에서 노숙을 하면 동네 사람들이 손짓했다.“우리집에서 자고 가라.”고.“처음엔 무서워서 안 따라갔는데 이젠 그 맘을 알고 가서 자고 그래요. 상인들도 달라요. 인사동 같은 데서는 가게 앞에서 연주하면 잡상인 취급하곤 하는데 거기는 연주하면 고맙다고 하더라고요.”(혜리) ‘바드’는 범켈트족 음악축제인 월드 플라에서 경쟁 부문 3위도 따냈다.“사실 4,5등이 훨씬 잘했어요.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처음 보니까 상을 준 것 같아요. 일본만 해도 아일랜드 음악을 하는 그룹이 많거든요.”(현보) 작년 툴레모에서는 1만 5000명이 사는 도시에 25만명이 몰렸다.‘바드’ 일행에게 그 광경은 충격이었다. 발에 밟히는 게 음악인이고 몇 천 명이 같은 곡을 한꺼번에 연주하는 광경도 펼쳐졌다. 택시 아저씨도, 청소부 아저씨도 ‘연주자’였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한국 밴드의 아일랜드 음악 연주를 어떻게 들었을까.“저희 공연을 보고 있던 어떤 여자분은 노래를 듣다 갑자기 울더라고요. 며칠 전에 아빠가 돌아가셨다고요. 그러면서 엄마가 이 노래를 들으면 좋아할 것 같다고 CD를 사갔어요.”(혜리) 임 감독은 아일랜드에 호기심이 많았다. 원래 아일랜드 영화를 좋아한데다 미국인인 매형의 고향이 아일랜드였기 때문이다.“처음에는 소박하게 시작했어요. 그런데 이왕 가는 거니 제대로 찍자 해서 판이 커진 거죠.” 내년 개봉할 영화 ‘귀신 이야기’의 감독이자 탁재훈 주연의 영화 ‘어린 왕자’의 각본을 맡은 임 감독은 내내 자신을 ‘상업영화 하는 사람’이라고 구분지었다. “처음에 아일랜드에 간다고 했을 때 사실 우리는 상업영화 하는 사람이니까 스폰서를 받아볼까 했어요. 그런데 현보가 싫다고 하더라고요. 밴드는 음악하는 과정의 하나로 가는 건데 자금을 받게 되면 우리도 뭘 요구해야 되고 스스로도 부담이 되니까요. 우리가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도 부담을 느끼더라고요. 그곳 사람들한테 뭘 하러 온 것처럼 보일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저희가 이번에 함께 간 건 밴드와 다큐 작업 사이의 ‘절충’인 것 같아요.” “‘원스’에 나오는 인디밴드처럼 가난한 건 선택을 해서 사는 거예요. 어떤 예술인들은 우리가 이거 하니까 나라에서 돈을 줘야 한다고 하는데 그건 말이 안 돼요. 그것까지 선택이 됐어야죠.”(현보) “한국영화가 늘 심각하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이번에 바드를 따라가면서 다른 걸 느낄 수 있었어요. 몇십억 들어가는 상업영화라 해서 잘 되는 거 아니잖아요. 바드는 음반도 직접 만들고 유통까지 해요. 지금 같으면 그런 방식이 더 맞다는 생각이 들어요. 다큐도 그렇게 만든 거죠.”(진평) 음반업계가 줄초상인 이 시점.‘바드’는 올해 호황이란다.1집은 2만장이 넘게 팔렸고 공연에서만 파는 이번 앨범은 1000장 찍었는데 다 나갔다.10월 감행한 전국 투어도 멤머당 45만원씩이나(?) 수익을 남겼다고 혜리씨는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내년에도 앙코르 공연을 하고 앨범도 낼 생각이다. 다큐멘터리의 이름은 ‘두 개의 눈을 가진 아일랜드’. 바드를 통해서 본 아일랜드, 음악을 통해서 본 아일랜드, 일상을 통해서 본 아일랜드라는 복합적인 의미를 담았다.24일 인천에 있는 영화공간 주안에서 상영회도 갖는다.“바드의 음악과 더불어 펍에 가든 축제에 가든 늘 기본적으로 그곳의 음악이 배경으로 깔려 있어요. 음악을 즐길 수 있는 다큐로 받아들여주면 좋을 것 같네요.”(요환) “아일랜드 하면 ‘기네스’라고 하지만 그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리빙 트레디션이 진짜죠.”(현보) “몇년 전까지 충무로에선 음악영화는 안 된다고 했어요. 그러나 그 속설이 맞는 게 아니라 제대로 된 음악영화를 본 적이 없었던 거죠. 이번 다큐는 소박하게 하고 싶은 얘기를 담았어요. 그만큼의 가치만 인정받으면 몇십억짜리 영화 한 것보다 마음으로는 더 큰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극장에서의 화질은 원스보다 우리가 더 좋아요.(웃음)”(진평) 정서린기자 rin@seoul.co.kr
  • 도일가수, 접대부? 가수?

    도일가수, 접대부? 가수?

    『나는 가수이지「호스테스」는 아니었어요』 이는 최근 일본 각지의「나이트·클럽」공연을 마치고 귀국한 햇병아리 가수 L양이 실토한 사연-. 한국「싱어」들의 이른바 재일교포위문공연의 한 단편을 비쳐준 말이다. 다음은 L양이 일본 공연차 가서 겪은 것을 옮긴「고백기」. 이를 계기로 우리나라 가수들의 일본공연 실태를 진단해보기로 한다. 「스케줄」에도 없는「바」에서 노래 부르고 술도 따르게 가요계의 초년생인 L양은 일본의 흥행회사와 관계를 맺고있는 한국의 N흥행회사가 구성한 도일공연단「멤버」에 끼게 되었다. 무명의 가수가 일본의 무대로 진출한다는 것은 생각만해도 가슴 뿌듯한 일. 가수·무용수들 20여명으로 구성된 공연단과 함께 먼저 도착한 곳이 재일교포가 많이 거주하고 있는「오사까」. 이곳에는 재일교포가 운영하는「나이트·클럽」이 많아 마치 한국가수들의 주무대처럼 여겨졌다. 일본에 도착하기가 바쁘게 여장도 풀 새 없이 이튿날부터 이 단체를 주선한 우리나라의 N흥행회사와 계약을 맺은 그 곳 흥행사의「스케줄」에 따라 일본 각지의「나이트·클럽」공연이 시작되었다. 대부분 재일교포가 운영하는「나이트·클럽」무대에 섰는데 그야말로 피곤한 공연이 되어 몇번이고 철부지모양 발을 동동 굴렀고 일본공연을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다음 공연자를 위해서라도 시정되어야 한다며 털어놓는「L양의 고백」을 옮겨보면-. L양의 고백 「요꼬하마」 S「클럽」에서 공연을 가졌을때다. 밤공연을 끝낸 2시쯤 되었을 때, 나이가 많은 이「클럽」의 재일교포 사장이『공연도 끝나고 했으니 옆「바」에가서 좀 있으라』고 권유해서 그의 말대로 발을 옮겼다. 잠시후 사장이「바」로 들어서더니「스케줄」에도 없는「바」의 손님을 위한 노래를 불러달라는 것이었다. 몸도 피로했고 좀 불쾌하긴 했으나 노래 한곡 쯤「서비스」는 이해하고 응해주었다. 노래가 끝나자 사장은 이번엔 한 술 더떠『저, 손님 좌석에 가서 술 좀 따르지…』하고 응당히 그래야 하는듯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태연히 권유했다. 어이없고 불쾌한 생각이 들기에 앞서 어떤 두려움 마저 느껴졌다. 가수가 아니고 완전히「호스테스」취급인 것이다. 단골한테 계약 결혼시켜…날짜 어기자 금품빼앗고 『술을 어떻게 따라요?』하고 거부했다. 그러자 사장은 단번에 인상이 이그러지며『이봐. 너의 사장(흥행회사)과는 그렇게 약속이 돼 있어 왜 어기지. 그럼 좋아. 우리「클럽」에선 그런 사람 필요없으니 나가주지』하고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한밤중에 단체숙소인「오사까」까지 차편도 모르고 막막한 기분에 잠겼다. 그러나 끝내 사장과 한바탕 말다툼을 벌이고 간신히 난경을 묘면했다. 이로 인해 6일간 공연을 모두 채우지 못하고 도중 하차하게 됐다. 나는 이를 흥행회사쪽에 항의했다. 『가수가 노래외에 술따르는 것까지 공연「레퍼터리」속에 끼여 있으냐』고 했더니 회사쪽은『전혀 그런 사실이 없다』고 딱 잡아뗀다.「나이트·클럽」업자의 얘기와 정반대이니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모를 일이었다. 「히로시마」의 N「클럽」공연을 치를때다.「쇼·걸」들에 대한 불미스런 잡음이 얼굴을 화끈하게 만들었다. 하루는 이「클럽」의 영업부장이 먼저 공연을 치르고 거쳐간「쇼·걸」의「스캔들」한토막을 전해주는 말인즉-. 한 가수가 이「클럽」에 드나드는 단골 손님에게 값진 반지와 돈을 받고 10일간 계약(?),「호텔」에서 지냈다는 것. 그런데 이 가수가 10일 계약에서 9일동안 지내고 단 하루를 어겼다고 해서 그 손님은 사준 물건과 돈을 다시 뺏더라는 것이다. 이통에 그 가수는 몸버리고 망했다는 얘기인데 사실처럼 믿어지지는 않았으나 처음보는 영업부장이 공연한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기도 어려운 일. 어쨌든 일본에서의 망신스러운 한국가수들의 소문이었다. 이와 비슷한「케이스」는 또 있었다.「오사까」S「클럽」의 Y사장은 어떤 목적 때문이었는지는 모르지만 S라는 가수에게 일화 현금 1만「엔」과「쉐터」2벌을 사주고 나더니 이튿날「골프」치러 가자고 제의하더라는 것. 가수·무희를 물건 팔고 사듯 흥정하기도 S가수는「골프」는「골」자도 모르기도 하지만 연일 공연으로 몸이 피로하고 해서 사양했더니 Y사장은 아이들 눈깔사탕 줬다 뺏는 식으로 모두 다시 뺏더라는 것이다. 이런 얘기들은 그래도 병으로 따지면「경증」에 속할지 모른다. 간혹 손님들 사이엔『저 무용수와 어쩌구 저쩌구 인연을 맺었다』는 등 마치 공연단원과 어떤「관계」가 있었던 것이 자랑이나 되듯 소문을 퍼뜨리며「아무게 가수는 얼마」「아무게 무용수는 얼마」하는식으로 무슨 물건처럼 가격까지 붙이고 지껄이기도 했다. 특히 심하다고 느껴진 곳이「후꾸오까」 의 S「클럽」, 역시 재일교포가 운영하는「나이트·클럽」이었다. 이「클럽」공연에선 소문으로만 듣던 아슬아슬한 위기를 겪었다. 이「클럽」의 사장은 공연만 끝나면 꼭 손님좌석에 나갈 것을「의무」처럼 종용했다. 만약 거부하면 일은 험악해 진다. 욕이 나오는 통에 그 압력에 못이겨 잠시 타의에 의한「호스테스」가 돼야했다. 솔직이 말해서 거부하면 쫓겨날 두려운 생각에 이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래가 끝나면 손님 좌석에 앉기 시작했다, 첫날「테이블」에서 마주쳤던 손님이 매일 나타났다. 좌석을 함께 할 때마다 2천「엔」이나 하는「주스」를 대접받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주스」한잔 매상 올리는데 일금 5백「엔」의「팁」의 이 나에게 돌아왔다. 한달이면 그것도 적지 않은 수입.「나이트·클럽」은 매상 올려 장사되고 가수는 가외로 수입 올리고, 이래서 업주는 시키고 가수는 응하게 되는지 모른다. 한잔의「주스」를 통해「친선」(?)이 맺어진 한 중년 신사는 어느날「쇼핑」을 해주겠다는 제의를 해왔다. 그러나 이를 미끼로 어떤 대가를 바라는… 여러「나이트·클럽」공연서 밥먹듯 들어온 불미스런 잡음이 머리에 떠올랐다. 흔히 연예인을 유혹하는「코스」가 한잔의「주스」로 시작해서「쇼핑」이나 길안내 등으로 비롯된다는 것은 피부로 느끼는듯했다.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그 손님의 호의아닌 호의를 점잖게 거절해버렸다. 어떤「클럽」은 돈이 많은 단골손님을 놓치지 않기 위해「쇼·걸」과의 사이를 좁혀주는「펨프」(?)노릇까지 해주는 느낌이 들었다. 어쨌든 화려하게만 생각했던 일본공연이 그렇지 못했고 한마디로 많은 문젯점을 지니고 있다고 느껴졌다. [선데이서울 71년 3월 21일호 제4권 11호 통권 제 128호]
  • “창작 뮤지컬로 승부”

    “창작 뮤지컬로 승부”

    ‘주유소 습격 사건’‘신라의 달밤’등을 제작한 영화계의 큰손 싸이더스 FNH의 김미희(43) 대표. 서울 충무로 그의 사무실 한편에는 뮤지컬 포스터 10여개가 줄지어 서 있다.‘저지 보이’‘메리 포핀스’‘사춘기’‘위키드’…. 모두 김 대표의 마음 속에 ‘간택’된 작품들이다. 영화판의 실력가인 그가 뮤지컬 제작에 손을 뻗쳤다. 첫 작품은 11월2일부터 사다리아트센터에서 선보이는 뮤지컬 ‘샤인’. 공연기획사 이다엔터테인먼트와 함께 만든 작품으로 2002년 KBS 2TV ‘인간극장’에 방영된 ‘성탄이의 열두번째 크리스마스’를 무대로 옮겼다. “저는 평생 영화인이에요. 그런데 요즘 보면 영화보다 뮤지컬에 더 관객 반응이 큰 것 같아요. 가능성 있는 시장이죠. 산업화가 될 만한 곳엔 돈이 먼저 가죠. 그리고 좋은 인력이 갑니다. 지금 뮤지컬이 그래요.1980년대 영화판에 대기업이 들어왔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에요.” ●“영화보다 뮤지컬이 반응 더 좋아” 그에게 영화와 뮤지컬은 닮은꼴이기도, 다른꼴이기도 하다.“영화는 시나리오 보면 대충 나오잖아요. 이 감독과 이 배우가 붙으면 이렇게 나오겠다. 그런데 뮤지컬은 공연 전까진 감을 못 잡겠어요. 영화는 찍고 나서 편집하면 또 다르지만 공연은 현장에서 볼 때마다 매번 달라요. 위험하지만 매력 있는 이유죠.” 스토리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 무에서 유를 창조해나가는 과정은 닮은꼴이다. 영화는 작가주의적인 요소가 들어가면 관객들이 짜증을 내는 반면 뮤지컬은 관객 만족도가 오히려 높아진다고 김 대표는 덧붙였다.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형태는 영화와 뮤지컬이 비슷한 시기에 나란히 올라가는 것. 시너지 효과로 산업을 키워보자는 계산에서다.‘샤인’도 내년 영화 촬영에 들어간다. 내년 4월 조승우가 출연하는 영화 ‘불꽃처럼 나비처럼’도 내후년쯤엔 대형 뮤지컬로 올릴 예정이다. 전용관 설립도 논의 중이다. ●라이선스보다는 창작 김 대표는 한 해에 세 작품은 꾸준히 만들 생각이다. 라이선스보다 창작 위주로 갈 것이라고 귀띔한다.“제가 프로듀서 출신이라 창작이 훨씬 재미있어요. 라이선스는 많이 바꿀 수도 없고 그걸 보고 투자하는 건 말이 안 되는 선택이죠.” 가슴에 와닿는 대중적인 코드, 감동을 줘야 할 때 사람들에게 쉽게 안기는 장면으로 뭉친 뮤지컬이 그가 만들고 싶은 모델이다. 정신지체인 어머니, 거리에서 노래하는 아버지를 돕는 그들의 선물 같은 아이, 성탄이 이야기를 고른 것도 그 때문이다. 성탄이에 대한 개인적인 애정도 있었지만 자극적인 소재나 로맨틱 코미디가 아닌 다양한 장르의 작품이 성공해야 한다는 소박한 소망이 작용했다. 뮤지컬을 잘 모른다며 손사래 치던 김 대표였지만 그의 지적은 예리했다.“창작의 비율이 너무 적어요. 지금의 한국영화도 창작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 아닌가요.” 창작 인력이 부족하고 박스 오피스의 투명성이 적다는 점, 제작자와 창작자 간의 신뢰가 깊지 않고 투자자들이 투자를 하면서 ‘원금 보장’이라는 족쇄를 채워놓은 것도 그가 우려하는 대목이다. 올해 개막한 작품을 거의 다 봤다는 그가 영화판의 신화를 뮤지컬판에서도 이어갈 수 있을지 주목된다. 정서린기자 rin@seoul.co.kr
  • [현장 행정] “IT 실력 키워 내꿈에 날개 단다”

    [현장 행정] “IT 실력 키워 내꿈에 날개 단다”

    “저요, 저요.” 컴퓨터에서 그래픽 카드를 꺼내 “이것이 무엇인지 아세요.”하고 선생님이 묻자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손을 든다. “저기 끝에 있는 어린이 대답해 보세요.”이모(10·사근초등학교)군이 벌떡 일어나 씩씩하게 “몰라요.”한다. 교실은 웃음바다가 된다. 성동구청 정보통신팀이 지난 12일 사근동사무소 2층에 마련된 ‘방과후공부방’에서 실시한 ‘찾아가는 U공부방’ 첫날 수업 모습이다. ●저소득층 어린이 대상 ‘U교육’ 17일 성동구에 따르면 20개 동사무소에 1개씩 마련된 ‘방과후공부방’은 학교가 끝난 오후 일터에 있는 부모들 대신 저소득층 자녀들을 모아 공부를 도와주는 곳이다. 자원봉사자와 구청의 공무원으로 구성된 97명의 강사진은 이들에게 국어·영어·수학 과목의 학습을 도와주고, 가끔 현장으로 견학을 가기도 한다. 방과후공부방이 첨단 노트북컴퓨터로 무장하고 ‘U공부방’으로 업그레이드됐다. 이 교육은 일반 학생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뒤지는 저소득층 어린이들의 정보기술(IT)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마련됐다. 부모가 못하는 것을 구청이 나서서 도와줘 이들이 경쟁에서 뒤지지 않도록 하자는 취지다. 노트북컴퓨터 20대를 마련해 구청의 정보통신팀 직원 4명이 공부방을 순회하며 교육을 한다. 한 공부방마다 일주일에 3일씩 6주간 집중교육을 실시한 뒤 다른 공부방으로 옮겨간다. 이호조 구청장은 “내년에는 저소득층을 위해 노트북을 더 사서 각 공부방마다 1년에 한 번씩은 IT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하드웨어에서 UCC동영상까지… ‘U방과후공부방’에서는 저소득층 자녀들을 대상으로 컴퓨터의 작동원리와 구조, 각종 디지털 매체 활용방법, 악성댓글이나 바이러스 퇴치법,UCC 제작법 등 6주간 상세한 IT교육을 실시한다. 교육을 끝날 때쯤엔 IT기술박람회의 관람이나 선진 IT기업체 방문 프로그램도 준비돼 있다. 이날 수업에서는 정보통신팀 김유식(통신7급) 주임이 초등학교 1·2·3학년생 11명을 대상으로 컴퓨터 본체를 해부한 뒤 부품 하나하나를 꺼내 어린이들에게 설명을 한 후 만져보게 했다. 이런 교육과정이나 설명은 어린이 앞에 한 대씩 놓인 노트북을 통해 상세히 전달된다. 사근초등학교 2학년 김모(9)양은 “노트북 컴퓨터로 공부하니 너무 좋다.”며 이리저리 뒤집어 보는 등 호기심을 보인다. 뒤에서 지켜보는 정보통신팀 직원들은 행여 노트북이 손상되는 것은 아닌지 하고 근심스러운 눈길을 보내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김 주임은 “정보화 수준 등에서 상대적으로 뒤진 저소득층 어린이들을 가르치면서 보람을 느꼈다.”면서 “좋은 교육 프로그램인 데다가 아이들도 좋아하는 만큼 앞으로 더욱 활성화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글 김성곤기자 sunggone@seoul.co.kr
  • [여성&남성] 가을 타는 ‘외로운 걸’ ‘고독하 군’

    가을은 남자의 계절일까. 남자만 고독하고 옛 추억이 생각날까. 남녀에게 ‘가을, 이럴 때 나는 센티멘털리즘(sentimentalism·감상주의)에 빠진다.’는 질문을 한 결과 ‘남녀 모두 옛 사랑의 추억이 떠오를 때와 외로울 때 가장 감성적이 된다.’를 공통적으로 답했다. 그러나 여자들은 푸른 하늘을 보며 감성적인 외로움을 느끼지만 남자들은 옛 사랑을 떠올리며 아픔을 달랬다. 깊어지는 가을. 비슷하지만 차이가 나는 남과 여의 ‘센티멘털 스토리’를 들어봤다. ●“첫사랑과의 가을여행, 아름다웠던 그 시절” 회사원 김모(28)씨는 길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마주치는 낙엽과 단풍을 보면 대학교 1학년 때 첫사랑과 함께 떠났던 설악산 가을 여행이 떠오른다. 그녀와의 풋풋한 첫사랑은 설악산의 가을 단풍만큼이나 불타(?)올랐다고 했다. 그는 “지금까지 그녀만큼 나에게 잘해준 사람은 없어 아직도 기억에 오래 남는다.”면서 “당시에는 돈도 없고 힘들게 걷기도 많이 걸었지만 당시 둘이 갔던 여행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냥 행복하다.”고 말했다. 회사원 유모(29)씨는 가을에 대한 추억을 묻자 “가을 바람에 기온이 내려갈 때면 대학 시절 사진 동아리 활동을 하던 시절이 떠오른다.”며 나름의 감정을 잡는다. 가을 사진이 ‘센티멘털리즘(감상주의)’의 극치라고 말한 그는 지금도 가을이면 사진기를 들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다. 그러나 그는 “회사에 얽매여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하므로 옛 추억을 생각하며 인터넷으로 가을 여행지를 검색하고는 대리만족을 하고 만다.”면서 “인터넷 속의 가을풍경 사진들은 언제나 나를 감성적으로 만든다.”고 말했다. 그는 “사진이 그렇듯이 동아리 시절이 떠오르면서 좋았던 기억들, 누군가를 좋아했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를 때면 정말이지 무언가가 무작정 그립다.”고 덧붙였다. ●가을, 남자는 고독하다 취업 공부를 하다 보면 가을엔 정말 고독하다는 대학생 염모(25)씨는 도서관에서 한밤에 나와 교내 벤치 위에 누워 별을 보곤 하는 습관이 있다. 그는 “요즘은 날씨가 청명해서 그런지 유난히 별이 자주 보인다.”면서 “듣는 사람은 유치할지도 모르지만 교환 학생으로 영국에 간 애인도 저 별을 함께 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한다.”면서 슬며시 웃었다. 염씨에 따르면 별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취업에 대한 걱정들이 사그라진다. 그는 “여름에 벤치에 누우면 더워 그런 거 같고 겨울에는 추운데 이상한 사람 같지만 가을만큼은 이런 행동을 허용해준다.”고 말했다. 그러나 남자의 고독은 유씨와 같이 황홀하게 다가오는 것만은 아니다. 대학생 허모(23)씨는 혼자 서울에 올라와 자취 생활을 하는데 가을은 환절기 감기와 함께 자신의 인간 관계를 돌아보게 한다. 그는 “가을에 주로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드는데 찾아주는 친구가 없으면 좀 센티멘털해지고 내 인간관계를 돌아보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환절기라 감기에 걸려 고생하고 있는 요즘 주변에서 아픈 것을 아무도 몰라주니 고독하고 우울하기 그지없다.”고 심경을 고백했다. 회사원 박모(25)씨는 고독한 가을밤 자취방에서 홀로 ‘미드방(인터넷의 미국드라마 게시판)’에 들어가 미국 드라마나 다운받고 시청할 땐 정말 고독해진다. 미국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나 ‘CSI’를 즐겨보는 그는 회사 동료들은 회사에서 내내 보니 지루하고 여자 친구는 생길 기미도 안보인다. 그는 “대학 친구들마저 밤 12시 퇴근이 다반사라 한밤의 외로움(?)에 지쳐 잠이 든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바람(?) 잘 날 없는 가을 유부남인 회사원 신모(37)씨는 총각 시절 자신의 가을은 ‘바람(?) 잘 날이 없었다.’고 회상한다. 고독해지는 가을, 그는 쓸쓸한 마음에 당시 애인 몰래 바람을 피우며 고독을 달랬다는 것. 신씨는 지금도 가을 저녁에 멋지게 차려입은 늘씬한 아가씨가 공원 등에 혼자 있으면 감성적인 마음에 말을 걸어 보고 싶은 충동을 받기도 한다. 그는 “물론 실제로 말을 건네지는 않는다.”면서 “하지만 가을은 많은 총각들에게 평소에 좋아하던 여성에게 다가가는 용기를 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회사원인 김모(30)씨는 센티멘털 역시 일의 연속선 상에서 느끼게 된다. 해외 고객들을 상대로 바이어를 하는 김씨는 한달여를 준비한 자료를 가지고 고객에게 심사를 받는 긴장된 시간들이 지나가면 잠시 머리가 비면서 애인과 ‘가을 전어’라도 먹으러 갈까 하는 생각을 몇분간 한다. 그러나 저녁에는 접대 자리가 남아 있고 감성적인 순간은 그렇게 찰나로 지나간다. 김씨는 “하나의 프로젝트가 끝나고 감성적인 여유를 느낄 시간이 오면 가을의 상념에 젖어들지만 곧 앞으로 다가올 프로젝트 생각으로 자연스레 옮겨간다.”면서 “추억이 문제가 아니라 현재 애인에게 할애할 시간도 부족해 미안하다.”고 말했다. 김씨는 “하지만 이번 프로젝트가 끝나면 정말로 시간을 내 애인과 드라이브를 하겠다.”고 의지를 다졌으나 곧바로 “이번에도 생각으로 그칠 것”이라면서 한숨을 쉬었다. 이경주기자 kdlrudwn@seoul.co.kr ●“남친 없는 가을, 내 속은 시든 단풍처럼 까맣게” 회사원 김모(26)씨는 유난히 이번 가을이 우울하다.25년 넘게 ‘가을탄다.’는 말의 뜻조차 몰랐던 그였지만 최근 3년을 사귀던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난 뒤부터 ‘비 맞고 찢겨 나뒹구는 낙엽’의 심정을 깨닫게 됐다고 한다. 평일에는 회사 일로 바빠 가을인지 아닌지 생각할 겨를도 없지만 주말이 돼 시간적·정신적 여유가 생기면 텔레비전과 사랑에 빠진 자기 자신이 너무 불쌍하게 여겨진다고. “오락프로그램을 보며 웃다가도 다 보고 나면 ‘귀중한 주말에 나 혼자 TV 앞에서 무슨 헛짓이냐.’는 자책감이 강하게 밀려와요. 친구들 대부분이 남친과 있어 연락도 못하고. 올 가을엔 내 마음도 단풍들고 있어요. 까맣게….” 대학 졸업반인 오모(22)씨는 일주일에 한두 번은 청계천을 찾아가는 ‘청계천 마니아’지만 최근 이곳을 찾을 때면 가슴 한구석이 아려오곤 한다. 도심에서 보기 힘든 개울과 수풀 사이를 걸을 때 느끼던 상쾌함이 가을이 되면서부터는 반감되고 있다.“가을이 되면서 연인들의 모습이 더욱 부러워요. 예전 커플 시절이 떠올라 상념에 젖기도 하고요. 명동이나 강남역 주변을 걷다 보면 온통 커플들만 다니는 것 같아서 더 외로워요.‘나는 왜 남자 친구가 없을까.’를 생각하면 인생이 더 우울해져요.” ●“이렇게 또 한해가 저무는구나…” 취업 준비생 박모(25)씨는 또다시 찾아온 ‘취업의 계절’이 우울하기만 하다. 이미 졸업한 학교 도서관에 앉아 영어책과 씨름하고 있는 자신이 그렇게 초라해 보일 수밖에 없다. 지난해 이맘때 ‘올 가을에는 당당하게 취업해 내년에는 멋진 ‘킹카’와 단풍길을 걸으며 ‘셀카’를 찍어야겠다.”던 다짐이 허망하다 못해 한스럽기까지 하다. “단풍이 들면 사람들과 함께 가을을 즐기고 싶다는 생각이 왜 안 들겠어요. 하지만 취업을 준비하다 보면 마음의 여유 자체가 없는 거죠. 차라리 가을에는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게 나아요. 그래야 아예 가을을 못 즐기니까 제 마음이 덜 서운하잖아요.” 밤을 새우는 경우가 부지기수인 컨설턴트 이모(28)씨는 새벽에 라디오 프로그램을 들을 때마다 ‘가을을 탄다.’고 느낀다. 늘 일에 묻혀 사는 이씨다 보니 밖에서 느낄 겨를이 없지만 새벽 2시쯤 듣는 라디오 DJ의 조용한 톤의 목소리에서 어느새 차가운 가을을 알게 된다고. 가끔 새벽녘 사무실 스탠드 불빛 아래서 친구들과 동료들의 미니 홈피를 보며 어느새 길어져 있는 사진 속 친구들의 옷소매가 가을을 알게 해 준다고 한다. “한 해가 다 갔다는 느낌에 우울해지면 라디오 프로그램을 들어요. 예전에는 정지영 아나운서의 프로그램을 좋아했는데요. 요즘에는 문지애 아나운서를 좋아하게 됐어요.‘브라운 아이드 소울’의 노래도 우울한 가을과 잘 어울리죠.” ●“하늘만 봐도 우울해지는 나,‘4차원’인가?” 여행사에 다니는 이모(34)씨는 요즘 하늘만 봐도 ‘센티멘털’해진다고. 유난히 파란 가을 하늘이 이상하게도 마음을 슬프게 한다. 특히 아침에 출근하려고 현관문을 열 때마다 느껴지는 서늘한 가을 바람은 울고 싶은 기분을 더욱 ‘업’시켜 하루 일을 못하게 하기도 한단다. 이씨는 최근 그다지 나쁠 일이 없다. 기존 직장보다 훨씬 좋은 조건으로 회사도 옮겼고 몇 년째 ‘남친’ 없이 살고 있는 현실에도 완벽히 적응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가을이 되면 ‘아무런 이유 없이’ 우울해지는 이 상황을 이씨도 어찌 설명할 방법이 없다고 한다. “가을 하늘을 볼 때 느낌은…, 뭐랄까, 처음에는 마음이 안정되면서 조용해지다가 어느 순간부터 온갖 잡다한 생각이 다 드는 거예요. 헤어진 남자 친구에서부터 갖가지 일상사가 다 떠오르면서 우울해지는 거죠. 요즘에는 이런 성향을 ‘4차원’이라고 하던데, 저 역시 그런 유의 인간 같아요.” 자신을 전형적인 ‘된장녀’라 말하는 디자이너 조모(30)씨는 하루 종일 ‘미친 듯’이 일하고 나서 사무실 통유리 밖으로 느껴지는 오후의 가을 햇살에 진짜로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조씨는 가을 오후 남은 햇살을 한몸에 받으며 혼자 사무실에서 마시는 커피 한 잔에 세상 온갖 근심을 다 안고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일이 한창 많은 오후 3∼4시쯤이 되면 햇살이 가득 사무실로 들어오는데요. 주황빛을 띤 그 햇살을 느낄 때마다 ‘일하기 싫다.’는 욕구가 솟구쳐 올라요. 세상에서 저 혼자 가을 타는 것처럼 맘 속에서 난리가 나요. 그럴 때는 미니 홈피에 접속해 게시판과 다이어리에 글을 써 ‘일촌’들에게 공개하거든요. 그러고는 다음날 제정신으로 돌아오면 다시 ‘비공개’로 바꿔 놓죠. 꼭 술 먹고 밤새 연애 편지 써 놓은 뒤 자고 일어나서 아침에 보면 민망함과 유치함에 찢어버리고 싶은 것과 같은 기분이랄까요.” 류지영기자 superryu@seoul.co.kr
  • LG, 팔색조 글로벌 전략 “곳에 따라 달라요”

    LG, 팔색조 글로벌 전략 “곳에 따라 달라요”

    “탁월한 제품과 서비스로 LG브랜드를 새로운 가치 창출의 상징으로 만들고, 가치를 전달하는 방법도 세계 최고수준으로 해야 한다.”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올해 신년사에서도 ‘글로벌 경영’을 강조했다. 구 회장은 최근 매년 신년사에서 ‘글로벌 경영’을 빼놓지 않는다. 또 해마다 열리는 ‘글로벌 최고경영자(CEO) 전략회의’를 통해 경영진에게도 글로벌 관점을 주문한다.LG는 지역별로 차별화된 전략을 통한 ‘글로벌 톱 브랜드’ 도약을 가속화하고 있다. ●북미·유럽에서는 프리미엄전략 북미·유럽 등 선진시장에서 LG의 전략은 ‘프리미엄’전략이다. 프리미엄 제품 판매를 통해 LG브랜드의 위상을 높여가고 있다. 선봉장은 LG전자다.LG전자는 올해 북미시장에서 ‘매출 100억달러 시대’를 연다는 계획을 세웠다. 성과는 나오고 있다. 초콜릿폰·샤인폰·프라다폰 등 잇따른 성공으로 올해 3세대(G) 휴대전화 판매량이 처음으로 200만대를 넘었다. 또 호텔·관공서 등 미국 상업용 TV시장에서 시장점유율은 1위다. 지난 2·4분기에는 세탁기 ‘트롬’이 시장진출 4년만에 드럼세탁기 시장에서 1위를 차지했다.LG전자 북미지역 총괄 안명규 사장은 “고객 중심의 제품과 디자인 경쟁력, 현지 마케팅을 토대로 미국 시장에서 프리미엄 브랜드로 인정받았다.”고 말했다. LG화학도 2005년 국내 석유화학업체로는 처음으로 미국에 인조대리석 생산공장을 준공했다. 특히 지난 7월 LG화학의 미국내 중대형 전지 연구법인은 미국 GM사가 추진하는 휘발유와 전기로 달리는 하이브리드 차량에 들어갈 배터리 개발사로 선정됐다. 유럽에서도 ‘첨단 프리미엄 LG 브랜드’ 이미지를 높여 나가는 데 주력하고 있다. 영국 런던의 최고급 백화점인 ‘헤롯백화점’은 물론 히스로 공항로 등 곳곳에서 광고를 하고 있다. 또 영국 프리미어리그 축구팀 풀럼 후원과 LG 암스테르담 축구대회 개최 등 다양한 마케팅도 펼치고 있다. LG는 특히 지난 5월 업계 최초로 폴란드에 액정표시장치(LCD) 산업단지(클러스터)를 완공했다. 총 47만평 규모의 산업단지에서는 LG전자의 LCD TV완제품 등을 생산한다. 파주(135만평), 중국의 난징(62만평)에 이어 세번째로 크다. 준공식에 참석했던 구 회장은 “한국, 중국, 폴란드를 잇는 글로벌 3대 LCD 클러스터를 구축함으로써 세계시장 공략에 날개를 달게 됐다.”고 말했었다. ●신흥시장은 철저한 현지화 LG는 브라질, 러시아, 중국, 인도 등 신흥시장에선 철저한 현지화로 승부를 벌이고 있다. 연구개발·생산·판매·인력채용 등 모든 것을 현지에서 해결하는 ‘현지 완결형 사업구조’다. 이같은 전략에 따라 중국, 러시아에서 LG전자는 ‘국민기업’으로 통한다. 지난해 중국 베이징의 심장부라 하는 장안제(長安街)에 중국사옥인 ‘베이징 트윈타워’를 완공했다.LG전자 관계자는 “중국에 투자한 500대 외국기업 중 장안제에 사옥이 있는 곳은 LG전자가 유일하다.”고 말했다. 러시아에서는 TV와 오디오, 비디오, 에어컨 등 8개 부문에서 시장점유율 1위를 달리고 있다. 아울러 활발한 사회공헌 활동을 통해 ‘동반자로서의 LG’이미지를 확고히 하고 있다. LG화학은 중국에서 정보전자소재와 기능성 창호 등 고부가 산업재 사업을 집중 육성하고 있다. 러시아에서는 2004년 지사를 설립, 건축자재에서 연 70% 이상의 매출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중동·아프리카에선 자원시장 선점 신흥 시장으로 급부상하는 중동ㆍ아프리카 지역에서는 LG화학과 LG상사가 자원시장 선점 전략을 가속화하고 있다.LG화학은 나이지리아 등에 폴리염화비닐(PVC), 폴리올레핀(PO) 등 석유화학제품 수출을 대폭 늘리고 있다.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리는 월드컵을 계기로 건축경기가 활발해질 것으로 보고 산업건자재 시장 진출도 모색 중이다.LG상사도 지난해 오만 국영석유회사의 12억달러 ‘플랜트 프로젝트’를 수주한데 이어 예멘에서 3억 4000만달러의 정유플랜트 건설 계약을 맺는 등 중동의 ‘오일 달러’를 잡기 위해 나서고 있다. 김효섭기자 newworld@seoul.co.kr
  • [2007 남북정상회담] “통큰 투자를” “3通해결부터”

    [2007 남북정상회담] “통큰 투자를” “3通해결부터”

    “통 크게 대북 투자를 늘려주시라요.”(북측) “자유로운 통행과 통신 보장을 해야 투자를 더 할 수 있지요.”(남측) 남북 경제인들이 경제협력 방안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 등 6명의 국내 기업 대표들은 3일 오전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북측 한봉춘 내각참사 등 6명의 경제인과 1시간30분여 동안 간담회를 가졌다. 남측에서는 정 회장 외에 구본무 LG그룹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이구택 포스코 회장,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재계 실세들이 참석했다. 북측에서는 한봉춘 내각참사를 단장으로 남북 경협을 주도해 온 민족경제협력연합회(민경협) 출신들이 대거 모였다. 장우영 민경협 부회장 겸 명승지종합개발지도국장, 리철·한인덕 민경협 참사, 계봉길 민경협 연구원이 배석했다. 조현주 민경협 책임참사는 간사역할을 맡았다. 이날 1시간여 동안 진행된 회의에서 참석자들은 대북경제협력, 투자확대 방안 등 남북 경제협력 활성화를 위한 구체적 청사진 마련에 의견을 모았다. 남측은 통행, 통관, 통신을 일컫는 이른바 ‘3통(通) 문제’가 향후 대북사업 확대 및 남북 경협 강화를 위한 필수 선결과정임을 강조했다. 북측 대표단은 “이제는 경협의 수준이 한 차원 높아져야 한다.”고 한 목소리를 냈다.1차 산업과 임가공 중심의 경제협력을 생산적인 투자협력 단계로 올려야 하며, 민족 공동번영과 이익을 고려해 투자 규모를 결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북측의 한 대표는 “통 크게 사업을 추진해 주길 바란다.”면서 대기업의 전향적인 대북투자를 요청했다. 이에 대해 남측 대표단은 “투자 확대를 위해서는 북측의 제도적 조건과 투자 환경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한호 광업진흥공사 사장은 “북측에 풍부한 지하자원이 매장돼 있으나 세계적 수준의 제조기술을 보유한 남측은 자원의 대부분을 해외수입에 의존하고 있다.”며 “지하자원 개발이 민족경제협력에서 실현 가능성이 높고 양측 모두에 이익이 되는 좋은 분야”라고 말했다. 김재현 토지공사 사장은 “개성공단 2단계 사업의 조기 착수를 위해 사전 준비를 완료한 상태”라며 “개성공단 1단계 탈락기업 200여개 업체의 입주 수요와 4년여의 공사기간을 감안할 때 사업의 조기 착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 사장은 “추가적인 경제특구 개발과 관련한 당국간 협의가 성과있기를 기대한다.”면서 “토지공사는 개성공단 개발 경험과 북측의 신뢰를 바탕으로 공단 2단계와 추가 특구 건설에 참여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권홍사 대한건설협회 회장은 건설분야의 별도 협의채널 구성을 제안했다. 평양 남북정상회담 공동취재단·이영표기자 tomcat@seoul.co.kr ■사회단체·언론분야 - 베이징 올림픽 남북 단일팀 합의 남북의 사회단체·언론인들은 사회단체·언론분야 간담회를 열고 내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남북단일팀을 구성하기로 합의했다. 정세현 민화협 상임의장은 간담회 직후 “남과 북은 2008년 베이징올림픽 때 남북단일팀을 5대5 원칙으로 구성하되 선수들의 능력을 감안해 구성하자는 데 의견을 접근을 보았다.”면서 “실무적인 문제는 계속 협의해 나가기로 했다.”고 밝혔다. 남측은 또 개성에 남과 북이 공동으로 영화 방송 세트장 혹은 영화 제작센터를 만들자고 해 긍정적인 답을 얻었다. 언론부문에서 남측은 서울과 평양에 상주 특파원제도를 도입하는 방안과 함께 평양에 프레스센터를 건립하자고 제안했지만 결론은 보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평양 남북정상회담 공동취재단·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정치분야 - 남북국회회담 정례화 등 논의 정상회담 정치분야 특별수행원인 김원기 전 국회의장 등 국회·정당 관계자들은 3일 만수대 의사당에서 최태복 최고인민회의 의장 등 북측 정당 관계자들과 간담회를 갖고, 남북 국회회담 정례화 문제 등을 논의했다. 남측 단장을 맡은 김 전 의장은 기조발언에서 남북 국회회담의 조속한 개최를 요청했다. 김 전 의장은 “이번 정상회담에 맞춰 남북 관련 제반 법제 제·개정 요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며 “남북 국회회담에서 남북관계 발전에 부합하는 법제 현안들을 시의적절하게 조율해 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북측 단장인 최태복 의장은 6·15공동선언에 대한 남북 국회의 공동지지 선언을 제안했다. 양측은 자주 만나 신뢰의 폭을 넓혀 가야 한다는 데에는 공감했으나 각자의 제안에 대해서는 결론 없이 회담을 마쳤다. 간담회에는 남측에서 김 전 의장과 배기선 국회 남북평화통일특별위 위원장, 김낙성 국민중심당 정책위의장, 문희상 대통합민주신당 남북정상회담지원특위 위원장, 이상열 민주당 정책위의장, 천영세 민주노동당 원내대표 등이 참석했다. 북측에서는 최태복 의장과 김완수 조국전선중앙위 서기국장, 성자림 김일성대 총장, 리경훈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부부장, 김지선 사민당 중앙위 부위원장 등이 참석했다. 평양 남북정상회담 공동취재단·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종교 분야 - 평화주간 공동행사 제의 북측 긍정 반응 남북의 종교인들이 모인 종교분야 간담회에서 남측은 평화주간을 정해 남북의 문화·예술·체육 행사 등과 함께 종교별 공동행사를 하는 방안을 제시했고 북측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날 간담회에서 남측은 종교단체간 인적 교류와 북측의 종교시설 복원 등을 의제로 삼았고, 북측은 민족성과 민족문화 전통을 고수할 것을 강조했다. 남측 종교인들은 올해 안에 남측에서 ‘종교인 평화대회’를 열어 종교인 평화선언을 채택할 것과 남북 종교시설 상호방문과 확충 필요성을 제기했다. 남측에서는 이성택 원불교 교정원장, 장익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지관 조계종 총무원장, 권오성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 등이 참석했다. 북측에서는 유영선 조불련 중앙위원장, 강지영 카톨릭교연맹 중앙위 부위원장, 오경우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중앙위 서기장, 김영철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중앙위 부원 등이 참석했다. 평양 남북정상회담 공동취재단·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여성분야 - 북 “남측의 탁아 지원사업 동의” 인민문화궁전에서 열린 정상회담 특별수행원 여성분야 간담회에서 남측 단장인 김화중 한국여성단체협의회장은 “다른 분야에 비해 여성 교류가 상대적으로 미진해 구체적 사업을 통해 여성교류를 정례화하자.”고 제안했다. 김 회장은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여성교류가 다시 가속화되면서 ‘일본군 성노예 전범 국제법정’에 남북이 공동으로 일본 천황을 기소하는 성과와 함께 올 7월에는 미국 하원에서도 일본군위안부 결의안이 통과됐다.”며 “여성과 아동의 영양, 건강관리 등 의료를 포함해 사회, 문화, 예술분야 등 전문분야별로 교류하고 협력해 상호협력과 통일과업에 큰 기여를 할 수 있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북측 단장인 김영옥 여맹 중앙위 부위원장은 “6·15선언 이후 북남관계가 큰 전진을 했다.”며 “남측의 탁아지원 사업 등에 대해 동의한다.”고 말했다. 간담회에는 남측에서 김화중 회장과 정현백 한국여성단체연합 대표, 김홍남 국립중앙박물관장이, 북측에서 김경옥 부위원장과 서옥선 조선여성협회 상무위원, 정명순 중앙방송위 국장, 김인옥 6·15북측위 여성분과위원, 박영희 민화협 여성부장이 참가했다. 평양 남북정상회담 공동취재단·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문화·예술분야 “백두산 소나무를 광화문 기둥으로”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열린 문화·예술·학계 간담회는 의미있는 합의는 없었지만 각종 아이디어를 교환하며 공감대를 형성했다. 남측 간사인 김근식 경남대 교수는 “북한에는 있지만 남측에 없는 이만희 감독의 ‘만추’ 필름을 교환하자는 문성근씨의 의견에 북측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특히 “조선 소나무를 백두산에서 베어 뗏목을 만들어 압록강에서 서해까지 가지고 오는 아이디어에 대해서도 북측은 좋은 생각이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전했다. 이 같은 소식에 문화재청 관계자는 “백두산 소나무를 광화문 기둥으로 쓸 수 있다면 상징적 의미가 대단할 것”이라며 반겼다. 이수훈 동북아시대위원장은 남북간 국책연구소장 교류를 제안했다. 이날 행사에는 남측은 단장인 이세웅 예술의전당 이사장 등 10명, 북측에서는 단장인 리종혁 조선통일연구원 원장 등 총 8명이 참석했다. 평양 남북정상회담 공동취재단·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 “전담 애널리스트가 모자라요”

    펀드 시장이 급성장하면서 펀드 담당 애널리스트들이 귀해졌다. 급팽창했던 까닭에 관련 인력을 키울 시간적 여유가 적었다.2010년 퇴직연금 도입이 의무화되면 펀드 시장이 더욱 커질 전망이라 증권사들은 펀드 관련 직원 확보에 애를 쓰고 있다. 현재 활동중인 펀드 전담 애널리스트들은 20명이 채 안된다. 21일 자산운용협회에 따르면 전체 펀드의 순자산 총액은 지난 19일 300조원을 넘었다. 세계 14위 규모로 지난해 말에 비해 23.5%나 늘었다. 국내에서 출시된 펀드수는 1만개가 넘는다. 재간접펀드(펀드오브펀드)로 국내 자금이 투자되는 해외펀드까지 합하면 숫자는 더욱 커진다. 펀드 전담팀이 있는 증권사는 한국투자·굿모닝신한·삼성·메리츠증권 등 소수다. 한국투자증권이 2005년 6월 업계 최초로 3명으로 구성된 펀드분석팀을 만들었다. 매주 자료를 발간하고 국내외 금융·자산시장 분석에도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일년 지난 뒤에 굿모닝신한증권에 3명의 펀드분석팀이 만들어졌다. 한달에 한번 특정 주제를 심층 분석한 자료를 내며 간접투자시장의 전반적 흐름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곧바로 삼성증권도 2명의 전담팀을 가동시켰다. 고객 자산을 어떻게 배분하는지에 대한 조언이 주요 초점이다. 지난 3월에는 메리츠증권이 펀드평가사 출신의 애널리스트를 스카우트해 매주 펀드보고서를 내고 있다. 최근에는 대한투자증권과 대신증권도 펀드팀을 구성했으나 인력 확보에 애를 먹은 것으로 알려졌다. 펀드애널리스트들은 바쁘다. 각 지점에서 주최하는 설명회나 고액자산관리자(PB) 상대 설명회에서 강의를 해달라는 요청이 쇄도한다. 일주일에 2∼3번 외부 강의는 기본이다.한 펀드애널리스트는 “펀드시장이 덩치는 그치만 이제 막 시작단계인 셈이기 때문에 펀드 관련 인력 충원 노력과 인력 품귀 현상은 더욱 심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전경하기자 lark3@seoul.co.kr
  • [종교·신념따른 대체복무 허용] “집총 거부하다 주검으로…”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정부에서 양심적 병역 거부자에 대한 대체복무를 허용하겠다는 소식이 어찌나 고마운지 몰라요. 앞으로 이들은 우리 사회에 보다 많은 기여를 하게 될 테니까요.” 18일 정부가 양심적 병역 거부자에 대해 대체복무를 허용하겠다는 소식을 들은 자영업자 김윤태(54)씨의 눈가가 촉촉히 젖어들었다.20여년 전 종교적 신념으로 집총을 거부하다 입대 뒤 하루만에 숨진 동생 선태(당시 22세)씨의 모습이 아련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1981년 2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장사를 시작한 선태씨는 갑작스레 군입대 통지서를 받고 같은 해 8월14일 서울 태릉의 모 사단 훈련소에 입소했다. 그러나 ‘여호와의 증인’ 신도였던 그는 군사훈련 일체를 거부했고, 다음날 부내 내에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됐다. “입대한 다음날 아침 동생이 죽었다는 전화를 받고 온 가족이 부대로 달려갔어요. 주검을 보니 온 몸에 타박상 흔적이 나 있고 특히 가슴과 엉덩이에 시커멓게 멍이 들어 있었어요. 유서도 없었는데 군 당국은 이렇다 할 해명 한 마디 없이 ‘자살했으니 확인서에 서명하라.’는 요구만 했어요.” 당시 군 당국은 “자살 확인서에 서명하지 않으면 당신도 구속해 버리겠다.”며 선태씨와 같은 이유로 군 입대를 기피하던 김씨를 위협했다. 결국 확인서에 서명이 끝나자 동생은 곧바로 화장됐고, 김씨도 석달 뒤 병무청 직원들에게 이끌려 강제 입영된 뒤 병역 거부로 3년 1개월간 수감 생활을 했다. “동생이 죽은 뒤로 집안은 완전히 풍비박산이 났어요. 억울한 사연을 알리고 싶었지만 당시는 군사정권이 들어서 ‘계엄상황’이다보니 함부로 말할 수도 없었어요. 어머니는 화병 때문에 8년 전 돌아가셨고요. 저 역시도 수감 후유증으로 몸도 가누기 어렵고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는 등 괴로움은 말로 다 할 수 없었어요. 취직도 안 돼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요.” 그동안 ‘먹고 사느라’ 정신이 없었던 김씨는 지난해에야 동생의 사인 규명을 위해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문사위)에 진정서를 접수했다. 김씨는 이번 정부 방침이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이 전과자가 되지 않고 사회에 온전히 기여할 수 있게 되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류지영기자 superryu@seoul.co.kr
  • 뿌리를 돌아보는 이파리처럼_김경인 시인

    뿌리를 돌아보는 이파리처럼_김경인 시인

    취재, 글 이미현 기자 ┃ 사진 한영희 “오래 기다렸던 첫 시집이라 그런지 시원섭섭하네요. 한 편 한 편 작품을 쓸 땐 몰랐는데 한 권의 책으로 묶여 나오고 보니 제 한계가 보이는 것 같아 부끄럽기도 하고요.” 얼마 전 첫 시집 <한밤의 퀼트>를 낸 시인 김경인 씨(36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퀼트’라고 하면 색색의 조각천들이 모여 만들어낸 기하하적이고 아름다운 무늬가 떠오른다. 과연 그의 삶은, 문학은 어떤 색과 무늬의 조각들로 짜여져 있을까? 그의 시를 읽다 보면 수줍고 소심하며 겁에 질린 것처럼 커다란 눈망울을 가진 소녀의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한밤중 혼자 침대에 누워 천장 벽지의 무늬, 창가에 비친 그림자, 방구석에 앉아 있는 인형들로 온갖 기괴한 상상을 하는 소녀…. “그래요? 어릴 때부터 멍하니 앉아 공상을 즐기긴 했어요. 덕분에 엄마한테 많이 혼났죠.” 그는 상상의 공간에서 환상과 현실, 의식과 무의식, 자신의 여러 얼굴들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며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다. 김경인 시인이 문학의 길로 들어서게 된 계기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의 할아버지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감자’ ‘배따라기’를 쓴 소설가 금동 김동인의 손녀다. 금동의 아들·딸(6명), 손자·손녀(20명) 가운데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문학의 길을 걷는 사람은 그가 유일하다. “어릴 때 할머니와 일본식 구옥에 살았는데, 거실이 온통 책으로 가득 차 있었어요. 중앙에는 김동인 문학전집이, 그리고 양쪽으로는 할아버지의 작품이 수록된 한국문학전집이 빽빽이 꽂혀 있었죠.” 할아버지의 초상화, 가끔 할머니와 인터뷰를 하기 위해 찾아왔던 기자들, 한 달에 한 번 인세 정산을 위해 찾아왔던 출판사 직원, 마룻바닥에 누워 바라보던 출판사 직원의 발톱에 칠해진 새빨간 매니큐어…. 1년에 한 번 동인문학상 시상식에 가는 날은 으쓱한 기분으로 예쁘게 차려입고 가는, 의젓하게 보여야 하는 날이었다. “할아버지는 내게 혈연적 유대라기보다는 숨 쉬고 생활하는, 나를 둘러싼 공기 같은 존재였던 것 같아요.” 유달리 책 읽고 글쓰기를 좋아하는 그를 보며 어른들은 말하곤 했다. “너는 나중에 자라서 할아버지 같은 작가가 되거라.” 그에게 그건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와 다름 아닌 말이었다. “우리 가족에겐 이미 할아버지라는 훌륭한 사람이 있었으니까요.” 할아버지를 현실적으로 인식한 것은 중학교 국어시간 교과서에서 소설 ‘붉은 산’을 읽었을 때였다. “낯설기도 하고 흥분도 되는, 복잡한 심경”이었다고 그는 말한다. “내 안에서 ‘나는 뭔가’ 자문하며 부끄러워하는 나와, 내 존재의 근원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는 내가 충돌하는 것을 느꼈다”는 것이다. 중·고교 시절까지만 해도 산문을 즐겨 썼던 그가 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던 건 대학에 들어와 김수영의 시를 접하고부터였다. 이런 발화가 가능하구나, 이렇게 짧은 말로 많은 의미를 담아낼 수 있구나…. 그러다 대학원에 들어와 시를 공부하면서부터 비로소 진지하게 시를 쓰기 시작했다. 2001년 그가 <문예중앙>으로 등단하기 전까지 아주 가까운 사람들조차 그가 시를 쓴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가족들조차도 그의 등단 소식에 “너 시를 썼었니?” 할 정도였다고. “어린 시절부터 막연하게 이런 생각은 했던 것 같아요. ‘글을 쓴다면 정말 잘 써야겠다. 내 글을 읽는 독자들은 할아버지를 함께 떠올릴 거야’라고요. 우습죠?” 할아버지는 그를 있게 한 토양이었지만, 그에게는 하나의 벽이기도 했던 것. “어쩌면 죽을 때까지 사람들은 저를 ‘김동인의 손녀인데 시를 쓰는 사람’으로 기억할지 몰라요. 한 발 한 발 내딛을 때마다 그런 선입견들에 부딪히겠죠. 하지만 이젠 알아요. 결정지을 수도 없고, 벗어날 수도 없는 이파리의 숙명이라는 걸.” 이파리는 뿌리로부터 나왔지만 또 다른 뿌리가 되기를 꿈꾼다. 그러나 끊임없이 뿌리를 돌아볼 수밖에 없는 것이 이파리의 운명이기도 하다. 그는 언젠가 유족의 입장에서 할아버지에 대한 기록들을 정리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응당 제가 맡아야 할 몫이라고 생각해요. 워낙 연구가 많이 되어 있어서 되려 연구자들의 도움을 받아야 할 부분도 많겠지만요.” 100세에 가까우신 할머니와 비교적 할아버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억을 많이 가지고 있는 큰고모의 구술 자료들도 조금씩 모으는 중이다. “불이 난 적이 있어서 가족들도 할아버지의 자료를 거의 가지고 있지 않아요. 헌책방에 부탁해 소설 초판본을 비롯한 자료들을 하나하나 사들이고 있는 실정이랍니다.” 그는 할아버지와 관련된 자료를 소장한 분이 있다면 연락을 주셨으면 한다는 간곡한 부탁의 말을 남겼다. 시인. 가톨릭대 국문과 졸업. 한양대 국문학 박사. 2001년 <문예중앙>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WBA라이트플라이급 세계챔피언 김주희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WBA라이트플라이급 세계챔피언 김주희

    “발톱 모으기가 취미죠. 히히히.” 앳된 처녀의 고운 입에서 나온 대답이라곤 정말 상상 밖이었다. 무슨 ‘본 콜렉터’도 아니고…. 그럴 만한 사연이 있겠지. 지난해 11월이었다. 오른쪽 엄지발가락에서 시작된 염증이 어느새 발목까지 퍼졌다. 나중에는 온몸에 고열까지 생기는 등 증상이 심해졌다. 워낙 낙천적 성격인 데다 아버지 병수발 등으로 차일피일 미룬 것이 화근이었다. 감당해 내기가 너무 고통스러웠지만 혼자 끙끙 앓았다. 그러던 어느날 ‘그래, 저 산꼭대기에 오르는 거야. 그럼 하느님이 낫게 해주시겠지.’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곧바로 서울 도봉산으로 향했다. 막상 산을 오르려니 이날따라 초겨울 찬 바람과 오른쪽 발·다리 통증으로 인해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하지만 운동화끈을 단단히 동여매고 산을 타기 시작했다. 절룩절룩, 걷다가 풀썩 주저앉고 또 주저앉고…. 그러기를 여섯시간 만에 겨우 정상에 다다랐다. 평소 같으면 두 시간도 채 안 걸리는 높이였다. 몸은 지칠 대로 지쳤고 정신이 몽롱해져 한참을 드러누웠다. 그러면서 ‘하느님이 있다면 제게 의지를 주십시오. 제발 몸을 낫게 해주십시오.’라고 간절히 염원했다. 잠시후 몸을 일으켜 앉았다. 이때였다. 눈앞에 ‘복서’라는 글자가 크게 들어왔다. 아니?! 갑자기 기운이 생기면서 그쪽으로 절뚝절뚝 걸어갔다. 그런데 가까이에서 봤더니 그것은 ‘북서, 남서’라는 방향표지판 글씨였다.‘북서’를 ‘복서’로 착각했던 것.‘피식’ 하는 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어 허공을 향해 “그래, 나는 복서야 복서, 죽어도 링에서 죽을 거야.”라고 크게 외쳤다. 비로소 ‘복서는 나의 운명’이라는 강한 메시지를 받는 순간이었다. ●‘골수염´ 딛고 따낸 세계챔피언 그는 이날 등산객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산을 내려왔고 이튿날 병원에 입원했다. 골수염으로 발가락 뼈를 잘라내는 등의 수술을 받았다. 하루 20㎞ 이상 달리는 심한 훈련 등으로 염증이 생겼던 것. 이로 인해 빠진 발톱을 자주 찾다 보니 취미가 됐다. ‘얼짱’ 효녀복서로 알려진 김주희(21)가 바로 주인공이다.2004년 12월 최연소 나이로 국제여자복싱협회(IFBA) 세계챔피언에 올라 주목을 받았다. 이후 파죽지세로 3차방어까지 성공한 그는 지난달 24일 세계권투협회(WBA) 라이트플라이급 초대 챔피언 결정전에서 일본의 사구라다 유키를 TKO로 이겨,IFBA와 WBA 양대 기구를 석권하는 또 한번의 대기록을 세웠다. 그는 이날 경기가 끝난 직후 소감을 묻는 질문에 “다시 링에 올라선 제가 정말 믿기지 않습니다.”라며 한동안 울먹여 주위 사람들의 눈시울을 적시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5개월 동안 250여회 연습스파링 등의 고된 훈련, 이로 인해 발톱이 빠지고 뼈를 잘라내는 수술에도 불구하고 어렵게 링에 오른 일, 또 뇌경색으로 쓰러진 아버지를 극진히 병수발하는 숨은 효행 등이 자연스럽게 알려졌다. 보통 또래 같으면 대학생활의 낭만을 한참 즐길 나이였기에 이런 사연은 안타까움과 진한 감동으로 전해졌다.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의 한 체육관에서 흔치 않은 인생 드라마의 주인공을 만났다. 체육관 입구에는 ‘작은거인 김주희 세계 챔피언 획득’이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그는 시합 뒤에 따르는 회복훈련을 하는 중이었다. 첫인상이 복서라는 느낌은 전혀 안들었다. 화장기 없는 ‘생얼’에 모자쓴 모습이 영락없는 평범한 20대 초반의 앳된 처녀였다. 화장을 안 하느냐는 질문에 “화장품도 없고, 또 화장할 줄도 몰라요. 피부가 하얀 것은 새벽에 운동해서 그래요.”라는 즉답이 돌아온다. 그런데도 얼짱이라고? 눈치를 챘는지 “얼짱이라는 말에는 ‘얼짱구’와 ‘얼짜증’도 포함돼 있어요.”라고 재치있게 웃어 넘긴다. ●“얼짱요? 얼짱구 아닌가요?” 몸상태가 어떤지 궁금했다.“발가락 절단수술로 근력이 떨어지다 보니 걷는 게 힘들어 제대로 운동을 못하고 있어요.”라면서 “지난번 시합 때 발가락 부상 부위를 피해 복사뼈 쪽으로 복싱 스텝을 밟다가 오른쪽 발목 인대가 늘어났어요. 요즘 인대를 조이는 운동도 병행하고 있지요.”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의사의 거듭된 권유로 인대수술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선천적으로 빈혈이 조금 있었지만 요즘에는 많이 나아졌다고 덧붙였다. 수술하면 아버지 병수발은 어떻게 하느냐고 했더니 “깁스하고서라도 해야죠. 또 직장다니는 언니도 있고요.”라고 대답했다. 그의 부친은 IMF 외환위기때 실직과 이혼을 겪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고혈압과 당뇨가 심해졌다. 심지어 뇌경색으로 여러번 쓰러져 현재 말도 제대로 못하는 중환자 신세다.. 김주희는 이런 아버지를 손수레에 태우고 일주일에 2∼3차례 꾸준히 병원엘 다녀 동네에서는 소문난 효녀로 칭찬받는다. 아울러 그는 세계 챔피언이 된 뒤 대학(대학원까지 장학생 혜택)에 들어갔고 얼마 전에는 가난한 셋방살이에서 8평짜리 장애인 아파트로 이사를 하는 등 가장노릇도 톡톡히 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링은 사실상 삶의 전부나 다름없는 셈이다. “원래는 육상선수였어요. 솔직히 육상보다 더 거친 복싱을 좋아하게 될 줄 미처 몰랐지요. 중학1년 때 말수가 점점 적어지고 자신감이 떨어지는 저를 보고 언니가 불쑥 복싱을 권유하더군요. 그래서 언니가 주유소에서 야간 아르바이트를 할 때 그 옆 복싱 체육관에서 시간을 보내게 됐지요.” ●저돌적 기교파, 복부공격이 특기 이렇게 해서 복서의 길로 들어선 그는 때마침 당시 관장(현 정문호 스프리스체육관장)의 배려깊은 지도로 이어지면서 숨은 재능과 실력이 일취월장, 발전을 거듭했다. 김주희 자신도 복싱에 재미를 붙여 하루 다섯 시간 이상 잠을 자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지독한 연습벌레가 됐다. 중3 때 프로테스트에 무난히 합격했으며 고1 때인 2001년 6월 일본의 사와이미와 선수와 시합(무승부)을 통해 정식 프로선수로 데뷔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그는 중학생 때부터 교내매점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충당하면서 자립심은 물론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강한 근성을 스스로 길렀다. 이후 2002년 9월에는 첫 KO승을, 그리고 11월에는 이인영 선수에게 첫 KO패를 당하는 쓰라림을 맛보았다.2003년 3월 국내 플라이급 챔피언에 오른 데 이어 2004년 12월 드디어 IFBA 주니어플라이급 세계챔피언에 등극했다. 지금까지 12전 10승 1무1패(3KO)의 전적이 말해주듯 저돌적으로 파고드는 기교파. 특히 여자선수가 하기 힘든 복부 가격을 주특기로 한다. “흔히 복싱을 무식한 운동이라고 하잖아요. 맞아요. 몸을 사리지 않고 그저 열심히만 하기 때문이죠. 자격증도 어렵게 따야 전문가가 되잖아요. 저는 세상을 살면서 성실이 최상의 무기라고 생각해요. 잘하지 못하지만 열심히 하는 사람한테는 못당해요.” IFBA와 WBA 등 두번에 걸친 세계 챔피언 자리에 오르면서 김주희는 더욱 성숙된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다.“프로는 방어가 아닌 다양한 공격을 통해 관중들에게 이것저것 많은 재미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나름대로의 복싱철학을 피력했다. 아울러 “모든 시합에서 마음만 제대로 먹으면 반은 이긴 것”이라고 강조했다. 장차 결혼도 하고 가정을 꾸려야 하지 않겠느냐며 은퇴시기를 언급하자 “도봉산 꼭대기에 있는 방향 표지판의 ‘북서’글씨가 제대로 보일 때가 아니겠어요.”라며 활짝 웃는다. 인물전문기자 km@seoul.co.kr 사진 손형준기자 boltagoo@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86년 서울 출생. ▲2005년 영등포여고 졸업. ▲01년 프로데뷔. ▲03년 한국 플라이급 챔피언. ▲04년 한국주니어플라이급 챔피언,IFBA 주니어플라이급 세계챔피언. ▲06년 IFBA 주니어플라이급 3차방어 성공. ▲07년 8월 WBA라이트플라이급 세계챔피언. ▲현 대전중부대학교 엔터테인먼트학과 2학년 재학중. ▲전적 12전 10승1무1패(3KO승).
  • [20&30] 이럴때 학력위조 유혹 느낀다

    [20&30] 이럴때 학력위조 유혹 느낀다

    학력 위조 파문이 계속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신정아 전 동국대 교수의 학력 위조 이후 학력 위조 파문은 학계, 예술계, 연예계 등 사회 각계 각층을 뒤흔들고 있다. 이러한 학력위조 논란은 자연스럽게 학벌만 중시하는 사회 풍조를 비판하는 것으로 모아진다. 그러나 유명인이냐 아니냐일 뿐이지 학력 위조는 우리 주변에 만연돼 있다. 학력 위조 유혹을 느낄 때는 더 일상적이다. 직장에서 ‘짧은 가방끈’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거나 무시를 당할 때, 명문대 재학생으로 포장하면 과외 등을 더 쉽게 구할 수 있을 때 학력위조의 유혹을 느낀다.20&30이 직면하는 학력위조 유혹에 대한 생생한 목소리를 들어봤다. ●유혹은 차별을 타고… 많은 사람들이 학력 때문에 차별을 받을 때 학력위조 유혹을 느낀다. 최근 불거진 학력위조 논쟁에 대해서도 ‘나도 학력위조했으면 지금보다 훨씬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을 텐데….’라는 묘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정보통신(IT)분야 벤처기업에서 과장으로 일하는 정모(32)씨는 창립멤버임에도 고등학교 졸업 학력 때문에 숱한 불이익을 받고 있다고 믿는다. 근속연수가 10년에 이르지만 과장 승진 심사에서도 두 번이나 떨어져 창립멤버 중에서 가장 늦게 과장이 됐다. 자기보다 나중에 입사한 사람 중 상당수가 자기보다 직위가 높다. 대학 졸업하고 첫 직장으로 입사한 동료들 초임이 자기보다 많은 경우도 있었다. “대놓고 말은 안 해도 내가 고졸이라는 것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애초에 대졸이라고 속이고 입사했으면 지금보다 대우가 훨씬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죠.” 모 대학 지방캠퍼스를 졸업한 임모(33)씨는 사회 생활을 하고 나서 자신의 학력 때문에 좌절한 적이 적지 않다.“전에 일했던 회사에서는 동료 50명 중에서 지방대 출신이 5명이 안 됐어요.35살이 되기 전에는 대학원에 가서 석사학위라도 받아야겠다는 마음이 저절로 들더라구요. 공부를 해야겠다는 게 아니었어요. 오로지 ‘가방끈’을 늘려야겠다는 생각인 거죠.” 모 정당 정책연구원으로 일하는 한모(36)씨도 비슷한 의견이다. 그는 “능력도 있고 경력도 있는데 단지 박사학위가 없다는 이유로 연구책임자가 못 되죠. 정작 일은 제가 다 했는데 보고서에 대표 집필자 이름은 박사학위자로 나갈 때 솔직히 짜증스럽죠.” ●잊고 싶은 학력위조(?) 경험 차별을 피하기 위해, 혹은 더 좋은 대우를 받기 위해 실제 학력을 위조해 봤다는 이들도 있다. 학력을 위조해 교수가 된다는 식으로 사회적 지위를 얻는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학력을 둘러싼 이중잣대는 오늘도 사람들을 학력위조로 내몰고 있다. 이모(23·여)씨는 그 날을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린다.A대학 한문학과 수업 시간, 다른 학과 학생으로 보이는 이씨를 향해 담당 교수가 “무슨 과에서 왔느냐.”고 물었다. 이씨는 이 대학 지방 캠퍼스 출신이지만 이중전공 신청을 본교로 한 학생. “서울 캠퍼스와 지방 캠퍼스는 학과 이름이 달라요. 그런데 지방 캠퍼스에서 온 티가 날 것 같아서 걱정이 되는 거예요. 결국 서울 캠퍼스에 있는 과 이름으로 얼버무려 말해버렸죠.” 거짓말은 오래가지 못했다. 며칠 뒤 출석부를 보던 교수가 “우리 학교에 이런 과도 있나?” 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바람에 지방 캠퍼스 출신인 게 들통나버렸기 때문.“그 때 사람들이 ‘어쩐지’ 하는 표정으로 절 쳐다보던 표정을 생각하면 아직도 진땀이 나요.” B대학 경제학과에 다니는 정모(24)씨도 비슷한 유혹에 빠진 적이 있다.“복학하면서 용돈도 벌 겸 과외를 구하려고 했지만 잘 안 되더라고요.” 고민 끝에 정씨는 서울대생이라고 프린트 된 전단지를 뽑아서 인근 아파트에 붙였다.“어차피 철저하게 확인하지 않는 데다 서울대라고 하면 평균 과외비부터 달라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전단지를 보고 연락이 왔을 때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바쁘니 다른 대학 후배를 소개시켜 주겠다.”고 말을 바꾸긴 했지만 정씨는 과외 시장에서 학벌이 차지하는 위상을 실감했다.“요즘 과외 연결 업체에서 학생증, 재학 증명서까지 요구하는 것도 이런 유혹 때문에 학벌을 속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인 것 같아요.” ●학력만 좋으면 만사 OK? 직장인 장모(28)씨는 대학시절 학력위조(?)를 한 경험이 있다. 방학 때 돈도 벌 겸 학원강사를 하려고 했지만 대학생을 받아주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설령 있더라도 처우가 열악해 벌이가 시원찮았다. 결국 장씨는 “군대를 갔다 오고 대학도 졸업했다.”고 속여 학원 강의를 시작했다. 장씨는 학원이야말로 ‘학력위조의 천국’이라고 느꼈다고 한다. 학원에서 명문대 출신을 선호하다 보니 대부분의 동료 선생들이 자신의 대학을 거짓으로 속이는 경우가 태반이라고 말했다.“선생님들 대부분이 이력서에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를 나왔다고 써요. 그런데 실제 나온 대학은 그게 아니죠. 학생들을 끌어 모으는 게 목적이니 학원 측에서 알더라도 쉬쉬하는 분위기가 강합니다.” 출신 대학에 관계없이 ‘계급’이 신분을 결정하는 군대에서도 취업준비생 박모(26)씨는 학력 위조의 유혹을 받았다. 자대로 배치되고 행정병을 선발한다는 얘기를 듣고 손을 번쩍 들었지만 Y대학을 나온 동기에게 밀렸던 것. 결국 박씨는 힘들다는 포병으로 군생활 2년을 마쳤다.“가장 먼저 물어보는 게 ‘어느 대학 나왔냐.’더군요.” 박씨는 대학 이름을 속일까 망설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결국 사실대로 말했고,Y대학을 다니고 있는 동기에게 행정병 자리가 돌아갔다. 박씨는 이 순간만 생각하면 아직도 억울하다고 말한다.“별 생각을 다 했습니다.‘차라리 S대학 나왔다고 말할걸. 그러면 행정병으로 뽑힐 수 있었을 텐데….’ 학벌이 중요하지 않다는 군대도 이런데 사회 나가면 어떨까 실감을 많이 했습니다.” ●유학생은 학부 졸업 숨겨 미국에 유학했다 얼마 전 귀국한 한모(35)씨는 미국 대학원에 다니는 한국 유학생들 사이에서는 국내 대학(학부) 학력은 밝히지 않는 게 관례라고 말한다. 서로 부담스러우니까 ‘학력 숨기기’를 하는 셈이다. 물론 학부 학력을 드러내놓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서울 강남에서 초등학교를 나왔거나 명문대를 졸업한 사람들 얘기다. “일종의 콤플렉스죠. 학력 위조라기보다는 학력 숨기기입니다. 보통 자기가 졸업한 대학을 얘기하지 않고 물어보지도 않습니다. 나이도 물어보지 않는 게 불문율이지요.” 한씨는 “그런 와중에도 지방대 출신들은 웬만하면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 대충 알게 되기 때문에 유학생들 사이에서 지방대 출신은 업신여기는 분위기가 있다.”고 말했다. 결국 자신이 졸업한 학부보다 석사 학위를 받은 대학이 더 좋은 경우 후자를 강조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같은 명문대를 나와도 서울 강남 출신들은 자기들끼리 반창회를 할 정도”라면서 “미국에서도 학벌 풍조는 그대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강국진 이경원기자 betulo@seoul.co.kr
  • 나라 없는 사람/커트 보네거트 지음

    “나는 모든 사람의 머리가 쭈뼛 설 만큼 무시무시한 리얼리티 프로를 구상하고 있다. 제목은 ‘예일대 C학점’이다. 조지 W 부시는 주변에 C학점 상류계급 학생들을 끌어모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1)역사와 지리를 전혀 모르고 (2)백인 우월주의를 노골적으로 표출하고 (3)이른바 기독교도이며 (4)정말 놀랍게도 정신병자, 즉 영리하고 번듯하게 생겼지만 양심은 전혀 없는 자들이다.” 커트 보네거트는 이런 식이다. 웃긴다. 웃기되 ‘실소’가 아닌 ‘블랙유머’다. 목에 착 달라붙어 컥컥대게 하는, 가시뼈가 폴폴 돋은 웃음이다. 그의 유머는 사회적 약자를 위로하나, 강자의 의식은 칼로 베고 창으로 찌른다. 읽는 이에 따라 유쾌하고도 불쾌하다. ●마지막 작품이자 유일한 회고록 보네거트는 지난 4월11일에 죽었다. 미국 버지니아공대 총기난사 사건이 일어나기 엿새 전이었고, 여든네 살이었다. 보네거트는 순수문학과 장르문학의 경계를 넘나들었고, 반전운동가였으며, 히피의 대항문화를 선도했다. 무엇보다 ‘초거대 제국’ 미국의 광기를 사납게 공격했다. ‘나라 없는 사람’(문학동네)은 그의 마지막 작품이자 유일한 회고록이다. 그가 수석편집인으로 있던 잡지 ‘인디즈타임스’에 5년간(2000∼2005년) 연재했던 글을 묶었다. 보네거트는 “어떤 웃음은 두려움에서 나온다.”고 썼다. 그는 2차대전 막바지였던 1943년 연합군으로 징집됐고, 그 연합군에 의한 독일 드레스덴 폭격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나치의 아우슈비츠 학살만큼이나 연합군의 드레스덴 학살(13만 5000명)에 치를 떨었던 사람이 보네거트였다. 살아 남았을 때 터져나온 건 소름끼치는 웃음뿐이었다고 보네거트는 말했다. 그의 유머는 죽음의 문턱을 경험한 사람만이 구사할 수 있는 맹렬한 유머다. ●“정신병자·비양심적” 맹공격 그래서다. 전쟁을 일으키는 인물들에게 보네거트는 무섭게 분노한다. 부시 미 대통령과 그 참모들을 “정신병자들” “양심도 동정심도 수치심조차 없는 사람들”이라 쏘아붙인다.“베트남 전쟁은 백만장자들을 억만장자로 만들었으나, 오늘날의 전쟁은 억만장자들을 조만장자로 만들고 있다.”고 일갈하고,“미국 지도자들이 권력에 취한 침팬지라고 말한다면 나는 중동에서 싸우다 죽어가는 우리 병사들의 사기를 꺾는 매국노가 되는 걸까?”라며 정색하고 묻는다. 특히 ‘문명’과 ‘지성’의 이름으로 ‘반문명’과 ‘무지’를 타자화하는 식자(識者)들에게 치를 떤다. “‘슈렙널’이라 불리는 유산탄은 ‘슈렙널’이라는 이름의 영국인이 발명했다. 여러분도 그런 발명품에 자기 이름을 붙이고 싶은가? 네이팜탄은 하버드에서 발명됐다. 진리란 그런 것인가?” ‘나라 없는 사람’이란 책 제목은 이렇게 해서 탄생한다. 보네거트에게 미국은 “내 나라요.” 외칠 조국이 아니었다.“내가 사랑하는 미국”이 아닌 “내가 사랑했던 미국”이라 말하는 사람. 커트 보네거트는 ‘나라 없는 사람’으로 살았다.1999년 한 인터뷰에서, 그는 저무는 20세기의 묘비명을 이렇게 쓰고 싶다 말했었다.“아름다운 지구여! 우리는 그대를 구할 수 있었지만, 너무나 속악하고 게을렀도다.” 9500원.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주말탐방] 국가기록원 보존복원센터의 세계

    [주말탐방] 국가기록원 보존복원센터의 세계

    시간여행을 하는 소녀의 모험담을 그린 영화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는 수복사(修復士)라는 직업이 나온다. 훼손된 고미술품을 원본과 같은 상태로 복원하는 사람이다. 우리나라 국가기록원에도 ‘수복사’가 있다. 사실 기록물을 복원하는 이들의 정식 명칭이 없지만 ‘보존복원처리사’라 부르는 게 적당할 것 같다. 수복사와 다른 점이라면 복원 대상이 미술품이 아니라 기록물이라는 점이다.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물에 젖거나 찢겨서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종이 기록물이 이들의 손을 거쳐 마치 마법처럼 되살아난다. ●고도의 인내와 끈기를 요구하는 작업 대전 정부청사 국가기록원 6층에는 현대식 건물과 어울리지 않게 마룻바닥에 창호지를 바른 전통 창문이 달린 방이 있다. 보존복원센터이다. 이곳에서 6∼7명의 보존복원처리사들이 수백년 전 낡은 문서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을 하고 있다. 방안은 간혹 종이가 부스럭거리거나 분무기로 물을 뿌리는 소리만 들릴 뿐 적막감이 느껴질 정도로 조용하다. 한쪽 끝에 앉아 있던 김경은(28)씨가 작업을 마쳤는지 마지막 붓질을 마치고 오랫동안 굽혔던 허리를 폈다.“종이 재료마다 두께나 성질이 다 달라요. 어떤 종이는 물에 젖으면 그냥 찢어질 만큼 약한 것도 있죠. 한지나 트레싱지(기름종이처럼 비치는 종이)가 작업하기 가장 까다롭지만 어떤 종이도 작업하기 쉽지는 않아요.” 문서 복원 작업을 하는 곳은 우리나라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용인대 정제문화연구소가 있기는 하지만 주로 그림이나 문화재 복원을 한다. 손으로 하는 복원 작업이라는 것이 찢어진 곳을 잇고, 없는 곳은 비슷한 종이로 메우고, 그걸로도 모자라면 종이를 덧대서 힘을 주는 것이 전부다. “엄밀히 말하면 복원은 아니죠. 원래와 가장 비슷한 형태로 만들어 보존기간을 늘리는 게 최선의 작업입니다.”(나미선 연구사) 보통 설계도면 같은 문서 한 장을 복원하는 데 2∼3일 정도가 걸리지만 손이 익숙해지면 하루만에 끝내기도 한다. 대형 문서는 3∼4명이 매달려 함께 작업하기도 한다. 여러 날에 걸쳐 종이를 덧대 복원했는데 원본이 너무 낡아 배접한 가장자리가 찢어져버리는 사례도 있다. 그 중에서도 책을 복원하는 것은 최고의 난이도를 요구한다. 여러 장이 붙어 있으면 떼어내는 데에만 며칠이 걸린다. 고도의 인내와 끈기가 필요하다. ●“판타스틱” 외국인도 놀라고 간 복원 실력 수작업이 불가능할 정도로 문서의 훼손 정도가 심각할 때는 ‘초음파 엔 캡슐레이터’라는 기계의 힘을 빌린다. 비닐 사이에 종이를 넣고 열을 가해 누르는 코팅기법과 비슷하지만 종이에 직접 열을 가하지 않고 초음파를 사용하기 때문에 종이에 부담을 적게 준다. 한대에 5000만원이 넘는 고가의 기계다. 올 초에 이 기계를 고안한 외국인이 복원실을 찾았다가 이곳의 복원 실력을 보고 “판타스틱”이라며 감탄사를 연발했을 정도로 복원실의 실력은 최상급이다. 지난해 몽골과 파키스탄에 기술을 전수하기도 했다. ●“박봉의 열악한 조건… 그래도 보람 때문에” 보존복원처리사들이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아니다. 한국미술 등 관련학과를 나온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관련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도제식으로 배운다. 하루종일 고개를 숙이고 종이를 들여다보고 있으니 시력저하, 목·허리 디스크 등 직업병도 가지가지다. 종이를 누르기 위해 아령이나 프레스기 같은 무거운 물건을 늘 옮기다 보니 손목 관절염도 있다.“오래된 종이엔 균이 많아 피부질환도 잘 걸려요. 이 일을 시작하고 얼마 안돼 얼굴에 여드름이 생기기 시작하더라고요. 죽어서 해부를 하면 한지 섬유가 폐에 가득할 것이라는 농담도 하죠.”(김경은 보존복원처리사) 보존복원처리사들이 받는 돈은 한 달에 100만원이 채 안된다. 교통비나 식비 등 복지혜택도 없다. 이들의 신분이 정식 공무원이 아닌 일반 사무보조원이기 때문이다. 불안정한 신분 때문에 도중에 그만두는 사람도 많다. 그래도 이들이 이 일을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는 자긍심과 보람 때문이다.“일제시대 때 강제징집자 명단을 복원했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죽은 문서가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효용가치가 있을 때 비로소 살아 있는 문서가 되는 거죠. 그게 바로 복원의 이유랍니다.”(최민숙 보존복원처리사) 윤설영기자 snow0@seoul.co.kr 사진 도준석기자 pado@seoul.co.kr
  • [여성&남성] 한국인-외국인 커플 사귀어보니…

    “단지 외국인과 사귄다고 해서 삐딱한 시선으로 보거나 호기심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국내 대학으로 교환학생 혹은 유학을 오는 외국인들이 급증하면서 자연스럽게 ‘다국적 캠퍼스 커플’도 늘고 있다. 외국인 이성 친구를 사귀고 있는 한국 학생들의 진솔한 얘기를 들어봤다. 경희대 대학원에 재학 중인 K(28)씨는 교내 교환학생과 유학생들을 돕는 도우미로 활동하다 지금의 폴란드인 여자 친구(26)를 만났다.6개월 동안 한국에서 공부하다 폴란드로 돌아갔던 여자친구는 1년 뒤 다시 한국에 돌아와 공부하고 있다. K씨는 “외국인이기 때문에 한국 여자들과 다른 점이 있지만 그것 때문에 만나는 것은 아닙니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고 뭐든지 대화로 해결하려는 사고방식이 좋아서 만날수록 마음에 들었습니다.”라고 털어놓았다. 2년 정도 사귀었지만 여전히 외부 요인 때문에 힘들 때도 있다.K씨는 “한국 사람들은 아직도 외국인에 대해 열린 태도를 가지지 못한 것 같습니다. 특히 한국 남자가 외국 여자와 다닐 때 이상한 눈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아요. 또 금발에 파란 눈이라고 해서 모두 영어권이 아닌데도 장난스럽게 영어로 인사를 건넬 때는 여자친구도, 저도 불쾌한 기분이 듭니다.”라고 말했다. 고려대에 다니는 A(22·여)씨 역시 외국 학생을 돕는 봉사프로그램에서 캐나다인 남자 친구(21)를 만났다. 한국 말을 배우고 싶어하던 남자 친구와 삼청동이나 경복궁 등을 돌아다니거나 한국 전통음식을 먹는 등 한국문화를 체험하도록 돕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연인으로 발전했다. A씨는 “남자친구의 경우 캐나다에 살 때도 주변에 한국인들이 많아서인지 한국 문화에 낯설어하지 않았고 거부감도 없었어요. 저도 어릴 때 8년간 유럽에서 산 경험이 있고요. 물론 나라가 다르기 때문에 문화적 차이는 있지만 외국인이기 때문에 느껴지는 부담은 없는 셈이죠.”라고 설명했다. A씨 역시 외국인 남자친구를 만나면서 봉변을 당한 경험이 있다.A씨는 “네덜란드인 친구가 본국으로 돌아갈 때 홍대 앞 술집에서 송별회를 했는데 바라보는 시선이 따갑더라고요. 어떤 사람이 괜히 시비를 걸었는데 싸움이 커져서 6명한테 맞았어요. 사소한 말다툼이었는데 주변 한국 사람들이 다 달려들었던 거죠.”라며 진땀나던 순간을 떠올렸다. “남자 친구와 같이 다니면 사람들이 말을 걸 때가 있어요. 지하철이나 버스정류장에서 제 남친이 한국말을 못 알아듣는 줄 알고 ‘한국여자 좋아?’ ‘한국 어때?’ ‘한국말 잘 해?’라는 식이죠. 얼마나 낯 뜨거운지 몰라요. 이젠 그런 일은 좀 없어졌으면 좋겠네요.”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사인 받기 성공 노하우는 화장실 길목 지키기”

    수십년 동안 국내·외 유명인사들의 사인을 빠짐없이 받아온 국내 최고의 ‘사인맨’이 있어 화제다. 주인공은 히딩크와 아드보카트 감독에서 고르바초프와 클린턴 전 대통령까지 국내·외 유명인사들의 사인은 전부 받은 신현식(61·경기 여주)씨. 16세때부터 40여년 동안 유명인 1000여명으로부터 사인을 받은 그의 집에는 유력 정치인에서부터 스포츠 스타와 인기 연예인에 이르기까지 각 분야에서 이름을 날린 인물들의 사인과 사진이 빼곡하다. ●클린턴 사인 받으려 4일동안 추격전“처음 사인을 받은 건 16세때였어요. 동네 교회에 미국인 선교사가 와서 설교를 했는데 더듬거리는 한국말로 어찌 재미나게 잘 하던지…. 종이와 몽당연필을 갖고 가서 내밀었더니 성경책에다 사인을 해 그 당시에는 아주 귀했던 만년필과 같이 주시더라고요.” 생애 첫 사인을 받고 감동을 느낀 신씨는 이후 유명인들과의 만남의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사인을 받기 시작했다. 같은 해 윤보선 대통령에게서도 사인을 받았는데 대통령은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커서 훌륭한 사람이 돼라.”는 말까지 해주었다고 한다. 이후 사인 마니아가 된 신씨는 사인을 받기 위해서라면 바다도 건너고 몇 시간, 며칠의 기다림도 마다하지 않았다.“히딩크 사인만 6번을 받았어요. 경주에서 경기가 있었을 때는 그의 차를 1시간이나 쫓아가 결국 사인을 받아냈죠. 그는 경기에서 이겼을 때와 졌을 때 사인이 달라요. 이겼을 때는 글씨 끝이 위로 올라가고 졌을 때는 내려가죠.” 2000년에는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사인을 받기 위해 한국에서 워싱턴으로 또 다시 뉴욕으로 이동하며 4일간의 ‘추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결국 영부인이었던 힐러리의 사인만을 받는데 만족해야 했다.3년 후에는 방한한 클린턴 전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사인을 받아냈다.‘사인맨’에게는 철통 경호와 발디딜 틈 없는 인파 속에서도 당당히 사인을 받아내는 성공률 100%의 노하우가 있다.“눈치도 동작도 빨라야 돼요. 그리고 적절한 타이밍이 포착되면 펜과 종이를 상대방의 턱 밑으로 바짝 들이대는 거죠. 멀찌감치 떨어져서 해달라고 하면 절대 안 해줘요.” “유명인들도 사람인지라 화장실은 꼭 가거든요. 이럴 때 화장실 부근에 가서 딱 지키고 있다가 시간이 되면 다 오게 돼 있어요. 일 보고 나올 때 자연스럽게 가서 사인해 달라고 하면 백발백중이죠.” 일정 체크는 기본이다. 매일 아침 5시면 라디오와 TV 뉴스를 꼭 듣고 신문에서는 인물 코너를 눈여겨 본다. 그리고 사인받고 싶은 사람의 일정을 달력에다 꼼꼼히 표시한다. ●영국 여왕 사인 못 받은 건 못내 아쉬워그러나 그에게도 받지 못한 사인이 있고, 사인과 결별한 시간도 있었다. 몇 년 전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이 내한했을 때인데, 경호가 어찌나 심한지 도저히 받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사인을 끊은 적도 있다.“군대를 갔다 왔는데 어머니가 집안 청소를 하시면서 그동안 받아 놓은 사인들을 거의 다 버린 거예요. 하도 속이 상해서 7∼8년은 사인을 받으러 다니지 않았죠. 하지만 또 시간이 지나니까 사인을 받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더라고요.” 여주 윤상돈기자 yoonsang@seoul.co.kr
  • 학력세탁 처벌 잣대 그때그때 달라요!

    ‘신정아 쇼크’가 사회적 파장을 불러오고 있는 가운데 허위학력의 당사자들에 대한 사법적 잣대는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판단은 사건의 종류와 당사자의 신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게 결론이다. ●국회의원 징역 1년 선고 받기도 정치인의 경우 학력을 위조하거나 허위기재하면 대부분 형사처벌받는다. 선거기간 중 허위학력을 명함 등에 새겨 나눠주거나 자신의 홈페이지 등에 올린다면 허위사실 유포(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 위반)혐의가 적용된다. 열린우리당 이상락 전 의원은 학력을 속이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고교 졸업증명서를 TV토론회에 제시해 징역 1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지난해 열린우리당 강남구청장 후보로 출마한 이모씨는 6개월 과정의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내 국가정책과정을 이수했지만, 이 대학을 졸업하고 총동창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는 것처럼 기재해 허위사실공표 혐의로 기소돼 벌금 80만원의 형을 받았다. 영어 등 어학원 강사의 처벌은 더 엄하다. 지난달 서울중앙지법은 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한 것처럼 위조한 학력 증명서로 비자를 발급받고 국내 영어학원에 취업했다 적발된 캐나다 영어강사 J씨에 대해 징역 6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검찰 관계자는 “일반인이 졸업장을 위조했을 때 학교의 법인 성격에 따라 공문서 또는 사문서 위조 등 혐의로 기소한다.”고 말했다. ●근로자와 교수들은 행정사건으로 분쟁 해결 허위학력 기재는 형사사건 외에 행정사건·가정사건 속에서도 나타난다. 서울 인문계 고교를 졸업하고 서울 모 대학 사범대에 진학해 1998년 졸업한 김모(36)씨는 2000년 말 안산의 중소 자동차부품업체에 입사원서를 내면서 고졸자를 대상으로 생산직 사원을 뽑는 입사전형기준에 따라 최종 학력을 고졸로 표기했다 4년 뒤 학력 허위기재 사실이 드러나 해고됐다. 서울행정법원도 “학력을 은폐해 입사했다 학력 허위 기재 사실이 들통나 퇴직당한 것은 정당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같은 허위학력은 이혼사유가 되기도 한다. 법원은 “학력에 대한 거짓말은 혼인생활 중 배우자에 대한 신뢰감을 갖기 어렵게 하는 원인을 제공한다.”며 학력에 대한 거짓말을 이혼사유 중 하나로 꼽기도 했다. 물론 학력에 대한 거짓말이 자격박탈의 기준이 되지 않는 예도 있다. 경기도의 한 골프장에선 회원가입을 하며 작성한 카드에 학력과 보증인을 허위로 기재한 정모씨의 회원자격을 박탈했다. 그러나 법원은 “허위기재 사실은 인정되지만 회원자격요건에 학력을 규정하고 있지 않은 점 등을 들어 이미 이사회의 승인에 따라 획득한 자격을 클럽 내부의 회원관리지침에 의해 박탈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오이석기자 hot@seoul.co.kr
  • [비하인드 뉴스] 美, 쇠고기 위생조건 “그때 그때 달라요”

    ●미국의 ‘제멋대로 원칙론’에 정부내 반론 목소리 지난달 31일 열린 국무회의에서는 사정에 따라 달라지는 ‘미국의 원칙’에 대해 적잖은 반론이 제기된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은 그동안 “테러세력과 타협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내세워 아프가니스탄의 한국인 인질과 수감자 맞교환을 요구하는 탈레반의 주장을 일축했다. 하지만 미국산 쇠고기에서 광우병 특정위험물질(SRM)인 척추뼈가 나오자 “국제수역사무국(OIE)은 현재 척추뼈를 SRM에 포함시키지 않고 있다.”는 입장을 우리측에 전했다. 정부 관계자는 2일 “미국이 대테러 전쟁에선 자기들 원칙을 강조하면서 미국산 쇠고기 문제에는 원칙을 비껴가려 한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3월 한·미간 합의로 만들어진 수입위생조건에는 척추뼈가 SRM에 포함됐다. 때문에 미국이 좋아하는 원칙을 적용하면 수입중단은 불가피하고, 미국측도 할 말이 없을 것이라고 이 관계자는 말했다.●‘반값 골프장’ 실효성 논란에 재경부·농림부 ‘네탓’공방 농지를 현물출자하는 ‘반값 골프장’ 건설에 대한 실효성 논란이 일자 당초 ‘내 아이디어’라고 자랑했던 재정경제부와 농림부가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식의 반응을 보이고 있다. 박홍수 농림부 장관은 지난 6월21일 노무현 대통령에게 한·미 FTA 농업대책의 일환으로 “농지를 출자하는 대중 골프장 건설 방안을 재정경제부와 논의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당시 농림부는 “농업인이 각종 개발 이익을 공유하는 방안의 일환으로 내놓았다.”고 말했다. 이에 재경부는 “농지를 전용해서는 안 된다는 농림부를 설득한 게 누구인데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볼멘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수도권에는 그럴 만한 농지가 많지 않고 지방에 건설하면 골프를 치려는 사람이 적을 것이라는 비판이 일자 농림부는 “재경부가 아이디어를 내 밀어붙인 결과”라고 발뺌했다. 재경부는 “한·미 FTA 보완대책으로 대통령에게 보고한 게 누구인데 쓸데없는 소리를 하느냐.”며 반박했다.경제부
  • [내가 바로 으뜸 공무원] 강서구청 예산팀 최기웅씨

    “여보세요. 홈지기님이시죠. 여기 ○○군 예산 담당자인데요. 예산결산하고 1원 단위로 남는 것은 어떻게 처리하나요.” 26일 강서구청 기획공보과 예산팀에 근무하는 최기웅(44·행정7급)씨는 하루 3∼4통씩 다른 지방자치단체에서 걸려오는 문의전화를 받느라 분주하다. 전화가 오는 곳은 광역시부터 외딴 섬의 면사무소까지 다양하다. 대부분 예산이나 회계 실무자들이 아리송하게 느끼는 문제들이다. 업무시간이 끝나면 카페 Q&A난에 올려진 질문에 답글을 단다. 최기웅이란 이름보다 ‘홈지기’란 아이디가 더 유명한 그는 온라인상에서 ‘예산·회계의 달인’으로 통한다. 예산회계실무(cafe.naver.com/gangseogu.cafe)와 ‘사업예산제도 포럼’(cafe.naver.com/ebudget) 등 그가 운영하는 예산관련 인터넷 카페 때문이다. 최씨의 예산관련 경력은 고작 3년. 전문가라 부르기엔 소박하지만 10년 넘은 베테랑들도 막히면 그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인터넷 카페를 운영하며 예산과 회계분야 업무를 집요하게 공부한 덕이다.2004년 5월 그는 예산팀으로 발령받은 지 한달 만에 ‘예산회계실무 카페’를 만들었다. “제가 잘 모르니까 서로 묻고 대답하며 공부하자는 뜻이었어요. 그런데 자꾸 관심을 갖다 보니 자연스럽게 많이 보고 배우는 계기가 됐어요.” 처음에는 강서구청 직원들이 전부였지만, 입소문이 나면서 지금은 전국 지자체에 근무하는 직원 640명이 회원으로 등록돼 있다. 카페엔 공무원이면 누구나 알아야 할 예산 및 회계에 관한 실무 중심의 자료와 업무처리 요령 등의 노하우가 이어진다. 그의 카페활동은 예산분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구청마라톤동호회, 구청공무원자원봉사단, 서울시 예산동아리 바른셈, 지자체공기업포럼 등도 그가 만든 인터넷 커뮤니티. 회원 수가 무려 1600명을 육박한다. 지난해 6월부터 한국보건복지인력개발원에서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매달 두 차례 ‘예산절차와 회계실무’에 대한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특히 직접 제작한 예산교재와 실제 사례를 바탕에 둔 강의는 인기 상종가다. 그의 억척스러움은 소문이 파다하다. 일직근무 중 흉기를 들고 슈퍼에 잠입한 강도를 직접 검거해 경찰에 넘긴 일화는 유명하다. 자원봉사담당으로 근무할 때에는 ‘자원봉사 문자메시지(SMS) 번개시스템’을 개발해 2003년 태풍 매미,2004년 폭설피해 지역 등에 모두 21회에 걸쳐 1100명의 자원봉사자를 파견했다. 당시 전국자원봉사센터 가운데 최대규모였다. “입사해 동사무소에서만 근무하다 1996년 청소행정과로 발령이 났는데 능숙하게 일처리를 못하는 제 자신이 얼마나 무능하고 한심하게 느껴졌는지 몰라요. 업무를 따라잡으려고 거금을 주고 노트북을 구입해 집에서 새벽까지 공부했어요. 힘들다고 느낄 땐 초심을 생각하곤 합니다.”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20&30] 비정규직의 애환과 희망

    [20&30] 비정규직의 애환과 희망

    외환위기를 거치며 확산된 ‘비정규직’은 20대와 30대에게는 미래의 슬픈 자화상이다. 이달 초 비정규직보호법안 시행과 이랜드 파업 사태 등을 거치면서 비정규직 문제가 화두로 떠올랐다. 그렇다면 ‘장밋빛 꿈’을 안고 살아야 할 ‘2030’ 젊은 세대에게 비정규직이란 과연 어떤 의미일까. 삶의 최일선에서 현재 비정규직으로 살아가고 있는 20∼30대들의 애환과 희망을 함께 들어봤다. ●차별과 냉대라는 보이지 않는 벽 회사원 황모(28·여)씨는 비정규직이다. 취업난이 한창이던 2004년 겨우 지금 회사에 ‘업무 보조’라는 이름으로 입사해 일을 해오고 있다. 정규직 업무와 별반 차이가 없지만 그는 심한 ‘차별’을 실감하고 있다. 노조 가입도 하지 못하고, 정규직들이 다 받는 상여금 한 번 받은 적도 없다. 최근 회사가 큰 폭의 흑자를 내면서 성과급을 지급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지만 그씨에게는 먼 나라 얘기일 뿐이다.“상여금은 회사 이익 창출에 기여한 사원들에게 이익의 일부를 배분하는 거잖아요. 비정규직은 회사를 위해 기여한 게 아무것도 없어서 성과급이나 상여금에서 배제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소속감을 못 느끼는 건 당연한 거죠.” 2005년부터 올해 1월까지 계약직으로 일하다 그만두고 직업전문학원에 다니는 권모(24·여)씨는 계약종료 한 달 전부터 ‘매년 재계약을 할 수 있을까.’라는 부담감 때문에 마음이 조급해지는 경험을 되풀이했다고 털어놨다. “지난해 9월부터 회사 사정이 많이 안 좋아졌어요. 한 번은 밀린 월급 일부를 지급한다고 해서 좋아했는데 정규직한테만 급여를 주더라고요. 항의를 했더니 업무처리 과정에서 일어난 단순한 실수 때문이라고 해명하면서 바로 입금해 주기는 했죠. 하지만 지금 생각해도 정말 불쾌해요. 차별받는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죠. 솔직히 항의를 안 했으면 안 줬을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나마 그 회사는 ‘양반’이었다. 이전 회사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월급날도 달랐다고 한다.“정규직이야 노조가 있다 보니 회사 사정이 어려워도 월급날을 어긴 적이 없어요. 하지만 비정규직에게는 ‘회사에 돈이 없다.’는 이유로 1∼2주씩 지나서 월급을 주는 일이 다반사예요. 평생을 이렇게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답답해져요.” ●정규직이 꺼리는 ‘3D 업무´ 떠맡아 수많은 차별은 물론 비정규직들은 오히려 정규직 업무에 ‘플러스 알파’의 업무도 떠맡는다. 정규직들이 하기 싫어하는 3D(어렵고, 더럽고, 위험한) 업무도 비정규직들의 몫이다. 한 대기업에 비정규직으로 입사해 사보 교열업무를 보던 박모(37)씨는 지난해 회사를 그만두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이다. 처음에 그가 맡기로 한 일은 교열업무뿐이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일이 하나둘씩 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통신사 뉴스의 재가공과 취재 기자의 초벌기사 정리는 물론 나중에는 사보의 한 섹션을 맡기며 직접 취재에 나설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나중에는 취재에 교열까지 하다 보니 사내 취재기자들보다 하는 일이 더 많아지더라고요. 나한테는 취재비도 안 주면서 취재하라는데 정말 참기 힘들었어요. 정규직 직원의 절반도 안 되는 급여를 받으며 내 돈 써가며 취재까지 해야 하는 현실이 많이 비참했어요.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했더니 제 상관이 ‘조금만 더 성실한 모습을 보였으면 정규직으로 전환해줄 수도 있었는데 자네 복이 여기까진가 보다.’라며 오히려 저를 힐난하더군요. 전 속으로 ‘사람 마음속에 피멍 들게 한 당신은 얼마나 오래 회사에 남아있나 두고 보겠다.’고 생각했죠. 근데 진짜 그 상관도 저 그만두고 3개월 뒤에 실적부진을 이유로 ‘잘리고’말더라고요.” 비정규직 김모(32·여)씨는 정규직과 똑같은 일을 한다. 그럼에도 회사 간부들은 김씨에게 바닥 청소를 시키기도 한다. 정규직에게는 커피 심부름을 시키지 않는다. 정모(30·여)씨는 1년 계약 후 정규직으로 전환해 주겠다는 약속을 믿고 한 공연기획사에 들어갔다. 입사하고 11개월이 되자 회사는 자신의 본업인 디자인 업무 대신 티켓 관리 업무를 맡겼다.‘그만두라.’는 무언의 압력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정씨는 꾹 참고 두 달을 버텼지만 결국 제 발로 회사를 그만뒀다. 기초자치단체에서 기간제 근로자로 일하는 신모(30)씨는 “사무실 앞에 붙여놓는 직원명단은 보통 이름과 직급을 쓰는데 유독 내 이름 옆에는 ‘계약직’이라고 써 놨다.”면서 “정규직 공무원들은 그런 식의 표현이 기분 나쁠 거라는 생각을 안 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계약직은 연말에 연봉재협상을 하도록 돼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해 12월 내부게시판에 연봉협상이라는 제목으로 이름과 액수가 올라왔어요. 개인정보 유출도 그렇지만 연봉협상을 한 적도 없는데 결정이 다 돼버린 거예요. 담당 계장은 고의가 아니라 실수였다며 사과를 했습니다만 기분은 정말 씁쓸했지요.” ●“직장이동 자유로워… 다양한 경험 쌓아 좋기도” 비록 소수이기는 해도 비정규직이라는 신분을 오히려 ‘인생의 기회’로 여기는 사람도 있다. 현재 사업을 준비 중인 대학생 황모(27)씨는 용산전자상가, 반도체 수입업체, 홍보대행사, 영업사원 등 다양한 ‘비정규직’을 해왔다. 황씨는 지금껏 일궈온 경험을 밑천삼아 대학 졸업 뒤 자신의 사업을 시작하고 싶어 한다.“만약 정규직 직원이 10년 동안 직장을 10번 넘게 옮겼다면 다들 그를 ‘사회 부적응자’로 보겠지만 비정규직에게는 그런 통념에서 자유로운 면이 있거든요.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 있다는 점은 오히려 비정규직의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그는 비정규직이 각 기업의 노하우를 단기간에 배울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편의점 운영노하우를 알고 싶어 편의점 ‘알바’도 3개월가량 해봤다고 한다. “예전에 일본의 한 맥주회사 사장이 맥주맛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유럽의 한 맥주회사에 청소부로 취직해 결국 맥주제조 기밀을 훔쳐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우리 사회는 정규직보다 비정규직이 많은 사회로 알고 있어요. 즉 대부분은 원치 않아도 어쩔 수 없이 비정규직에서 일해야 한다는 뜻이잖아요.‘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도 있듯 현 상황에서 비정규직을 할 수밖에 없다면 차라리 “미래에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위해 경험을 쌓는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해요. 적극적으로 회사의 노하우와 핵심역량을 배워 두면 결국 내 자산이 되잖아요.” 강국진 류지영기자 betulo@seoul.co.kr ■ 민노총 비정규직 활동가 박종민씨 “노동계의 양대 산맥인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은 자신들의 기득권에 안주해 사회적 약자인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큰 죄를 짓고 있습니다. 정부와 기업들이 외면한 이들을 도울 수 있는 곳이 사실상 노총밖에 없는데 이마저 두 개로 쪼개져 정규직 노동자들의 기득권 보호에 안주하는 단체로 전락해 버렸어요. 양대 노총이 진정 우리 사회의 미래를 진지하게 고민한다면 지금이라도 조직과 이념을 넘어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에 적극 협력해야 합니다.” 지난 22일 서울 서초구 잠원동 뉴코아 강남점 앞에서 지난 20일 공권력에 의해 강제 연행된 뉴코아·홈에버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지지하기 위한 ‘매출타격투쟁’을 마치고 돌아가는 박종민(32·민주노총 비정규실 활동가)씨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바람이 가득 차 있었다. 2001년 중앙대 총학생회장을 지낸 박씨가 비정규직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지난해. 대졸자의 절반가량이 비정규직으로 평생 고용불안과 불평등 계약 속에 힘들게 살아가야 한다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후배들이 학교를 졸업 뒤 비정규직의 설움과 고통 속에 살아야 하는 현실을 눈감아야 한다는 사실을 제 양심이 허락하지 않더라고요.” 지난해 민주노총에서 전업 활동가로 일하기 시작하면서 비정규직 문제에 매달려온 박씨. 그동안 뉴코아 강남점에서 점거농성 조합원들의 지지 시위를 벌여온 그는 최근 공권력 투입을 통한 정부의 사태 해결을 바라보며 착잡한 심정을 감출 수 없다고 토로한다. “전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고 제 예비 장인도 목사님이십니다. 기독교인의 관점에서 볼 때도 ‘기독교기업’을 자처하는 이랜드의 태도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전 교회에서 늘 기독교인은 약하고 가난한 자의 편에 서라고 배워 왔는데 왜 이랜드는 사회적 약자인 비정규직의 희생을 통한 성장을 당연하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어요. 어떤 때는 ‘약자에 대한 위선적 태도를 취하는 게 기독교의 본질이 아닐까.’라는 회의론이 들기도 해요.” 끝으로 박씨는 현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양대노총의 대승적 협력과 정부의 적극적 참여를 촉구했다. “비정규직은 ‘밥줄’을 지키기 위해 자기의 ‘밥줄’을 걸고 싸워야 합니다. 이번 사태에서도 알 수 있지만 점거농성 등 극단적인 방법을 쓰기 전에는 들은 척도 않는 정부의 무성의한 태도가 비정규직을 더욱 극단으로 내몰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2002년 대선 당시 인간 노무현을 대통령 노무현으로 만든 시대적 사명은 ‘양극화를 해소하고 사회적 약자들을 보호하라.´는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시대적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정부뿐 아니라 양대 노총도 손을 맞잡고 나서야 합니다. 지금도 눈물 흘리고 있는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안 보이시나요.” 류지영기자 superryu@seoul.co.kr ■ ‘단식 18일째’ 한혜주 KTX승무원 “비정규직 하면 ‘서글프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떠올라요. 다른 사람들 보기에 별난 사람처럼 보일까봐 부담스럽기도 하고요. 가끔 ‘나는 비정규직이 아니라 계약직이다.’라면서 자기 일이 아니니 귀찮게 하지 말라는 사람도 있어요. 어떤 사람은 ‘그래도 나는 월급 잘 받고 있다. 데모할 생각 말고 성실하게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말하죠. 그런 말을 들을 때는 정말 마음이 아파요.” 지난 20일 오전 서울역광장 농성장에서 만난 한혜주(26·여)씨는 인터뷰 내내 물병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단식 18일째라고 했다. 노조 홍보차량에서 나오는 안내 방송에 목소리가 묻힐 정도로 기운이 없어 보였지만 한씨는 자신의 생각을 또박또박 털어놨다. 그는 “신문에 얼굴사진이 최대한 예쁘게 나오게 ‘뽀샵질’을 해야 한다.”는 농담을 건넬 정도로 여유있는 모습이었다. 2004년 KTX가 개통하면서 승무원으로 입사할 때만 해도 한씨는 ‘준공무원’이 될 수 있다는 꿈에 부풀었다.“채용 공고도 공무원 분야로 돼 있었고요. 회사에선 ‘자회사이긴 하지만 철도청이 공사로 바뀌면 직접 고용과 정규직화가 될 것’이라고 얘기해 우리도 그렇게 믿었죠.” 한씨에겐 대학을 졸업한 뒤 첫 직장이었다. 하지만 환상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2005년에 공사로 바뀌었지만 승무원들은 여전히 저임금에 시달리며 1년 단위로 계약서를 새로 써야 했다. 한씨는 “병가 때문에 일을 쉬거나 하면 사측에서는 ‘이런 식으로 나가면 내년 계약에서 불이익이 있을 것’이라고 협박하곤 했다.”면서 “시간이 지나면서 준공무원 대우라는 말이 말짱 거짓이었음을 알게 됐다.”고 말한다. 입사 초기에 가졌던 자부심은 속았다는 분노로 바뀌었다. 노조라고 다 같은 노조가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노조가 자신들을 보호해 주지 않자 승무원들은 철도노조 KTX승무지부로 노조를 옮겼다. “처음엔 노조가 뭔지도 잘 몰랐죠. 어려운 일이 생기니까 자연스레 노조에 가입하게 됐죠.” ‘투쟁’을 시작한 지 500일이 넘었다. 한씨는 부모님께 가장 미안하다.“부모님이 마음고생이 심했어요. 처음엔 반대도 많이 하셨죠. 지금은 기왕 하는 거 맘 편하게 하라고 하셔요. 부모님이 저보다 더 속상하시겠죠.” 남자친구 얘길 꺼내자 한씨 표정에 미소가 번진다.“처음에는 소신을 갖고 하는 거니까 잘될 거라고 했어요. 나중에는 몸과 마음이 힘드니까 그만했으면 좋겠다는 말도 하더라고요. 지금은 제발 단식만은 말아 달라고 하죠.” 한씨는 인터뷰 말미에 “이철 철도공사 사장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가 있다.”고 했다.“칼자루는 사장이 쥐고 있습니다. 자신의 정치적 야욕을 위해 그 칼자루를 사용하지 말아 주세요. 원칙을 그렇게 따지시는데, 철도를 이용하는 시민과 노동자를 위한 원칙도 세워 보시기 바랍니다.‘한때’ 민주화 투사라고 하던데 그런 열정은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네요.”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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