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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간과 자연의 공존”…식물과 동물을 돌보는 일에서 얻는 생생한 교훈

    “인간과 자연의 공존”…식물과 동물을 돌보는 일에서 얻는 생생한 교훈

    우리와 부쩍 가까워진 동물과 식물을 보다 깊이 들여다보고 연구하는 일을 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각각 독자들과 만나고 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는 또 다른, 늘 동물과 식물과 함께하며 마주한 현실과 고민,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아야 할 자연과 생명에 관한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한다. ●‘동물을 돌보고 연구합니다’ -장구 지음/김영사/292쪽/1만 5800원 15년 이상 동물의 임신과 관련된 연구와 진료를 해온 서울대 수의학과 장구 교수가 과학자의 눈으로 연구하고 수의사의 손으로 돌본 동물들을 통해 동물과 과학, 그리고 인간의 길을 돌아본다. 특히 연구실 안 실험동물들의 이야기가 눈길을 끈다. 100년 전 당뇨병 치료제인 인슐린을 발견하고 개발하는 과정에 도움을 준 개, 암의 발생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탄생한 면역 결핍 쥐, 인류에게 최초의 백신을 선사한 소, 신약 개발 임상실험 대상인 원숭이 등 수많은 실험동물의 희생으로 인간이 많은 질병에서 자유로워졌음을 알린다. 그러면서도 “동물병원에 내원하는 반려동물은 살리기 위해 애쓰면서 실험동물의 희생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게 수의사들의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는 안타까움도 말한다. 지난 1월 세계 최초로 미국에서 사람에게 이식을 성공한 돼지 심장이 인간 체내의 거부반응을 피하도록 설계된 다중 유전자 조절 돼지였다는 점과 줄기세포로 만들어진 장기 유사체라고 할 수 있는 ‘오가노이드’라는 새로운 학문 분야가 동물실험을 줄이는 획기적인 방법이라는 점 등 계속해서 세상을 바꿀 동물학자의 연구실 속 장면들은 미래를 가늠케 한다. 수의사로서 돌보는 동물들의 이야기는 더욱 친근하게 읽힌다. 반려동물을 각별히 아끼는 보호자와의 만남, 새벽 2시에 병원으로 나가 개를 분만해야 했던 응급상황 등의 사연들을 통해 동물을 돌보는 연구자이자 수의사로서 갖는 진심을 엿볼 수 있다. 다채로운 이야기를 전한 저자는 “동물을 연구할수록 동물과 인간이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돼 있는지 깨닫게 된다”고 말했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에서 보듯, 전염성 질병은 사람과 동물을 가리지 않는다면서 “지구상 모든 생명체가 건강해야 그 안에서 사람도 안전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것이 그가 진료실과 연구실을 오가며 동물을 돌보고 연구하는 이유라면서다.●‘가드너의 일’ -박원순 지음/도서출판 날/240쪽/1만 5000원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하다 식물에 매료돼 20년 넘게 가드너로 일한 저자가 정원에서 많은 식물들과 함께해 온 시간들을 풀어낸다. 꽃을 다루는 우아하고 고상한 직업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화단에 자갈과 흙을 깔고 스스로를 ‘백공’이라 부를 만큼 다양하고 고된 ‘노동’을 해야하는 가드너의 진짜 이야기가 펼쳐진다. 봄을 준비하는 가을부터 ‘자연의 시간’인 여름까지 사계절로 구성된 책에서는 가드너들이 1년 동안 정원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 자세하게 설명한다. “가드너의 기본 임무는 흙에서 식물을 길러 내는 것”이라 육체노동의 비중도 크지만 정원 디자인 같은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정신노동 역시 중요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1년간 하는 일이 “최소 365가지 이상”이라고 할 만큼 다양한 일들을 바쁘게 해내지만 “정원 일에는 매일 같은 것이 없다”는 원동력으로 늘 새롭게 식물을 만나고 가꾸며 돌보는 일을 해나갈 수 있다고도 한다. 정원을 꾸밀 눈사람이나 요정들이 사는 나무집 등 조형물도 순수 만들어 철물점도 수시로 드나드는 가드너들의 일상도 흥미롭다. 저자는 정원에서 식물과 함께하는 삶을 통해 정원에 궁극적으로 생명력을 부여하는 ‘자연’의 경이로움을 거듭 되새긴다. “가드너는 식물들이 신에게서 부여받은 자생력을 기반으로 더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게 아이디어와 디자인을 가미할 뿐”이라면서 자연 앞에 한껏 몸을 낮추기도 한다. 또 “아름다운 정원은 지구에서 인간이 만들 수 있는 최고의 걸작이자 안식처”라며 “기후 변화로 인해 전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는 요즘 ‘사람은 반드시 한 조각의 땅이라도 가꾸며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 체코의 작가 카렐 차페크의 말이 더 와닿는다”고 말한다. 책에는 또 인류 역사와 함께했던 정원의 역사와 그 역사를 뒤흔든 ‘가든 논쟁’, 저자에게 큰 영감을 준 세계적인 가드너 5인의 삶과 가드너로서의 철학 등의 지식도 전달하며 더욱 깊이있게 인간과 자연의 공생에 대한 고민과 희망을 그려낸다.
  • “러시아는 악마” 러 국영TV 방송 사고…‘親푸틴’ 출연진 일동 당황

    ‘친(親) 푸틴’ 성향의 진행자가 이끄는 러시아 국영TV 프로그램에서 러시아군의 민간인 학살 현장 영상이 방영되는 방송사고가 발생했다. 7일(현지시간) 미국 온라인매체 데일리비스트에 따르면, 이날 방송사고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열렬한 지지자인 블라디미르 솔로비요프가 진행하는 러시아 국영TV 로시야1의 ‘솔로비요프와 함께하는 저녁’ 프로그램에서 발생했다. 당시 방송에서 솔로비요프는 “우크라이나 나치 세력들과 이들 대열에 합류한 조지아 용병들이 우리 러시아 포로들을 어떻게 대우하는지 보여주겠다”며 영상 하나를 소개했다. 하지만, 제작진의 실수로 인해 솔로비요프의 말과는 정반대의 영상이 공개됐다. 방송된 영상에는 우크라이나 병사들이 “우크라이나에 영광을”, “러시아는 악마”라고 외치며 러시아군의 민간인 학살 현장을 돌아다니는 모습이 담겼다. 사망한 러시아 병사로 보이는 시신이 흐릿하게 지워진 모습도 있었고, 우크라이나 병사가 카메라를 바라보며 “우리 땅을 넘보지 말라”고 경고하는 모습도 담겼다. 예상치 못한 방송 사고에 솔로비요프와 초대 손님들은 크게 당황했다. 솔로비요프는 “다른 영상이 있는데 왜 이 영상이 상영됐는지 이해가 안 된다”면서 “우크라이나 군이 우리 포로들을 향해 총을 쏘는 영상이 있다”고 제작진을 향해 소리쳤다. 솔로비요프는 초대 손님들과 대화를 나누며 제작진이 제대로 된 영상을 준비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었다. 그러면서 그는 수시로 “영상은 준비됐나”고 확인했다. 하지만 결국 이날 솔로비요프가 원한 영상은 방송되지 못했다. 이후 로시야1 홈페이지에는 방송 사고 장면이 완전히 삭제된 영상이 업로드됐다.
  • [STOP PUTIN] ‘우크라 병사가 러군 포로 사살하는 동영상’ BBC 체크 결과는

    [STOP PUTIN] ‘우크라 병사가 러군 포로 사살하는 동영상’ BBC 체크 결과는

    이번에는 우크라이나 군인으로 보이는 병사가 생포한 러시아군 포로로 추정되는 이들을 총으로 쏴 살해하는 모습이 담긴 동영상이 나와 충격을 더하고 있다. 7일(이하 현지시간) 영국 BBC는 러시아 군복을 입은 네 남성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동영상이 지난달 30일 텔레그램에 처음 공개됐는데 그 중 한 명은 손이 뒤로 묶여 있었다고 전했다. 세 사람은 머리에 상처가 있고 피를 많이 흘린 채 거의 움직이지 않았고, 나머지 한 명은 가쁜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화면에 나타나지 않는 남성이 욕설을 섞어 “버리고 가자”라고 말하자, 다른 사람이 “그냥 두고 가고 싶지 않다”고 답한다. 이어 숨을 헐떡이는 남자를 향해 여러 발의 총을 쏘고, “러시아 방어군이 여기 있다”고 말한다. 카메라는 이어 턱수염을 기른 남자를 비추는데 화면에 나오지 않는 남성이 “우크라이나에 영광을”이라고 외치자 턱수염 남성도 “영웅에게 영광을”이라고 화답한다. 러시아어로 조지아인을 뜻하는 “그루지니”라는 말도 들리고 “우리 땅에 오지 마라”는 외침도 들린다.BBC는 영상을 분석한 결과 수도 키이우 서쪽 드미트리우카 외곽 도로에서 촬영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드미트리우카에서 이르판과 부차를 연결하는 도로였다. 지난달 31일 구글 스트리트 뷰로 촬영한 사진과도 맞아 떨어진다. 도로의 핏자국까지 일치한다. 방송의 리얼리티 체크 팀은 동영상이 촬영된 날이 언제인지 밝혀내지 못했다면서도 도로의 그림자 위치 등을 봤을 때 같은 달 29일 저녁이나 조금 앞선 시간에 촬영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총격을 가한 이들이 우크라이나 군인인지, 희생된 이들이 러시아군 포로가 맞는지 따로 확인할 방법은 없다. 다만 바닥에 쓰러져 있는 두 사람의 팔에는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일부 지역에서 사용하는 흰색 완장을 차고 있다. 그런데 흰색 완장은 우크라이나 일부 지역에서 민간인들에게 찰 것을 권했던 것이기도 하다. 반면 서 있는 군인은 팔에 우크라이나군을 상징하는 파란색 완장과 우크라이나 국기가 붙여져 있다. 이것만으로 총격을 가한 군인이 우크라이나 쪽이고, 죽임을 당한 군인이 러시아임을 확인할 수는 없다. 모두가 러시아어를 쓰는데 우크라이나인들도 모두 두 언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어 국적을 가릴 단서가 되지 못한다. 또한 영상에는 우크라이나 쪽으로 보이는 사람 중 턱수염이 있는 남자의 얼굴이 선명하게 잡혔는데, BBC가 컴퓨터 알고리즘을 활용해 분석한 결과 그는 한 조지아인의 얼굴과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조지아는 우크라이나의 우방이자 대표적인 반(反) 러시아 국가다. 방송은 이 조지아인의 이름을 파악했지만 확인 절차가 끝나지 않아 밝히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드미트로 쿨레바 우크라이나 외무장관은 이날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외무장관 회의에 참석한 뒤 기자회견을 통해 “그 동영상을 보지 못했지만 그런 영상이 있다는 말을 듣긴 했다”며 “우크라이나군은 전쟁 규칙을 지킨다는 것을 확인해 주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규칙을 위반하는 개별 사건이 있을 수 있으며 그들에 대한 조사가 이뤄질 것”이라고 밝혔다. BBC의 분석 결과는 아직 단정할 만한 내용이 없다는 것인 듯하다. 우크라이나 국방부의 코멘트를 구하기 위해 노력 중이며 계속 확인되는 내용이 있으면 업데이트를 하겠다고 약속했다.
  • “우리 땅 오지마”…‘우크라軍, 러시아 포로 사살’ 영상 유포

    “우리 땅 오지마”…‘우크라軍, 러시아 포로 사살’ 영상 유포

    우크라이나군으로 보이는 병사가 생포한 러시아군 포로로 추정되는 이들을 총으로 쏴 살해하는 모습이 담긴 동영상이 유포됐다. 7일(현지시간) BBC, CNN 등에 따르면, 해당 영상에는 러시아 군복을 입은 4명의 남자가 바닥에 쓰러져 있고 이 중 1명은 팔이 뒤로 묶여 있다. 3명은 머리에 상처가 있고 피를 많이 흘린 채 움직이지 않고, 나머지 1명은 숨을 헐떡거리고 있다. 화면 밖의 한 남성이 욕설을 뱉으며 “버리고 가”라고 하자, 다른 사람이 “그냥 두고 가고 싶지 않다”고 답한다. 이어 헐떡이는 남자를 향해 여러 발의 총을 쏘고, “러시아 방어군이 여기에 있다”고 말한다. 카메라는 턱수염을 기른 남자를 비추고 화면 밖의 남성이 “우크라이나에 영광을”이라고 외치자 이 남성도 “영웅에게 영광을”이라고 답한다. 러시아어로 조지아인을 뜻하는 “그루지니”라는 말도 들리고 “우리 땅에 오지 마라”는 외침도 들린다. 이 영상은 지난달 30일 텔레그램에 처음 공개됐다. BBC는 분석 결과 이 동영상이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서쪽 드미트리우카 외곽 도로라고 설명했다. 총격을 가한 사람들이 우크라이나 군인인지, 살해 당한 피해자들이 러시아군 포로인지는 분명하지는 않다. 다만,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 중 2명의 팔에는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일부 지역에서 사용하는 흰색 완장을 차고 있다. 반대로 서 있는 군인은 팔에 우크라이나군을 상징하는 파란색 완장과 우크라이나 국기가 붙어 있다. 또한 영상에는 우크라이나측으로 보이는 사람 중 턱수염이 있는 남자의 얼굴이 선명하게 잡혔는데, BBC가 컴퓨터 알고리즘을 활용해 분석한 결과 그는 한 조지아인과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조지아는 우크라이나 우방이자 대표적인 반(反)러시아 국가다. 드미트로 쿨레바 우크라이나 외무장관은 이날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나토 외무장관 회의에 참석한 뒤 기자회견을 통해 “나는 그 동영상을 보지 못했지만 그런 영상이 있다는 말을 듣긴 했다”며 “우크라이나군은 전쟁 규칙을 지킨다는 것을 확인해 주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규칙을 위반하는 개별 사건이 있을 수 있으며 그들에 대한 조사가 이뤄질 것”이라고 전했다.
  • [STOP PUTIN] ‘쉰들러 리스트’ 붉은 코트 소녀, 30년 뒤 우크라 피란민 도와

    [STOP PUTIN] ‘쉰들러 리스트’ 붉은 코트 소녀, 30년 뒤 우크라 피란민 도와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 중 하나로 손꼽히는  ‘쉰들러 리스트’의 붉은색 코트를 입은 소녀로 출연한 폴란드 여성이 우크라이나 피란민을 돕는 데 앞장 서고 있다고 야후! 엔터테인먼트의 블로그 데드라인이 7일(이하 현지시간) 전했다. 화제의 주인공은 올리비아 다브로브스카(32)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1993년 작품에 출연했을 때 세 살이었다. 그녀가 연기한 소녀는 나치의 유대인 집단수용소 게토에 갇힌 신세였다. 그 소녀의 죽음을 목도한 독일인 사업가 오스카 쉰들러가 유대인들의 목숨을 구해내겠다는 결심을 하는 만큼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캐릭터였다. 하지만 너무 어린 나이라 올리비아는 영화 촬영하며 있었던 일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다. 30년이 흘러 올리비아는 지금 녹색 조끼를 입은 채 국경에 몰려 오는 우크라이나 피란민을 돕는 자원봉사자들을 조직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그녀가 처음 자신의 활동을 세상에 알린 것은 지난달 9일이었다. 영화에 자신이 나온 장면, 흑백에 유일하게 컬러로 표현됐던 소녀의 붉은색 코트를 푸른색으로 바꾼 사진을 소셜미디어에 올렸다. 우크라이나 국기의 노란색과 푸른색을 상징하기 위해서였다고 그녀는 털어놓았다. 올리비아는 “그녀는 항상 희망의 상징이었다. 그녀가 다시 그녀이게 하라”고 적었다. 며칠 뒤 올리비아는 국경으로 가 난민들을 돕는 한편, 소셜미디어에 그들을 대신해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국경에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하다. 어떤 조그마한 것도 도움이 된다. 물질과 재정 기부가 필요하다. 직접 돕겠다고 자원할 수도 있다. 상황은 극적이다. 나도 이곳에서 자원봉사 중이다. 내 눈으로 직접 이 모든 것을 목격하고 있다.”러시아군의 공습도 직접 목격했다. “오늘 러시아가 야보리우를 공습했다. 폴란드 땅으로부터 20㎞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너무 가깝다! 겁이 났지만 난민들을 돕겠다는 의욕이 더욱 솟구쳤다.” 두 자녀를 데리고 독일 국경에 가까운 아주 먼 도시로 갈 방법을 찾아달라고 애원하는 우크라이나 어머니를 만났다. “통상 우리는 난민들을 우리 지역에서만 수송하곤 했다. 이번에는 ‘안 된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너무도 간절하게 자매 곁으로 가고 싶어했다. 애들이, 맙소사, 난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내가 본 모든 것을 말할 수가 없다. 마음에는 떠오르는데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해서다. 누구도 이런 모습을 보지 못했을텐데 그들의 눈에 담긴 악몽을 상상조차 할 수 없더라.” 올리비아는 간만에 6일 새 소식을 알렸다. 어머니와 함께 우크라이나 병사들에게 응급구호 키트를 전달하는 데 진전을 이뤘으며 기부 체계를 만들어 “난민들을 오프라인이나 온라인으로 돕는 데 능동적으로” 일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일하게 컬러로 스크린에 구현된 붉은색 코트의 소녀는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던 것일까? 스필버그 감독은 개봉 25주년인 2018년 미국 NBC 뉴스 인터뷰를 통해 학살에 반대하는 행동이 필요함을 전달하고자 했다고 털어놓았다. 어쩌면 지금 올리비아가 몰두하는 일인지 모른다. 당시 스필버그 감독의 답이다. “토머스 케닐리의 책에 오스카 쉰들러는 크라코우 게토를 박살내는 동안 그 어린 소녀가 걸어온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으로 나온다. 모두가 트럭에 실리거나 거리에서 총격을 받고 있었다. 붉은색 코트를 입은 소녀는 나치친위대(SS)조차 알아보지 못한다. SS가 모두를 끌고가는데 어쩐 일이지 그 거리에 가장 밝은 옷을 입은 여섯 살 아이가 산책하는데도 알아보지 못한다. 내겐 루즈벨트와 아이젠하워, 아마도 스탈린과 처칠 같은 사람들이 홀로코스트에 대해 분명히 알고 있었다는 의미로 다가왔다. 잘 간직된 비밀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걸 막기 위한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 내게 (붉은색 코트는) 누구나 보고 있었고, 알아볼 수 있었던 반짝이는 붉은 깃발 같은 것이었다.”
  • [씨줄날줄] 카틴 숲과 부차/임병선 논설위원

    [씨줄날줄] 카틴 숲과 부차/임병선 논설위원

    소련을 침공한 나치 독일은 1943년 4월 13일 서부 스몰렌스크 근교 카틴 숲에서 무려 4400명이 묻힌 무덤을 발견했다. 또 메드노예에 6300명, 벨라루스 민스크에 3870명, 우크라이나 하리코우에 3800명의 집단 매장지가 있었다. 키이우와 헤르손에서도 비슷한 무덤들이 발견됐다. 신원을 확인했더니 1940년 9월 소련군에 끌려간 폴란드군 장교와 경찰, 지식인들이었다. 1939년 8월 23일 불가침 조약을 맺은 나치와 소련은 중간에 낀 폴란드를 유린하게 됐다. 나치는 그해 9월 1일 침공을 시작해 폴란드 서쪽으로, 소련은 같은 달 17일 폴란드 동쪽으로 쳐들어갔다. 바르샤바가 함락되자 폴란드군은 나치보다 그래도 공산 혁명을 표방한 소련이 낫겠다고 판단해 그들에게 항복했다. 소련군은 사병들은 풀어 줬지만 장교 등은 사상이 불온하다며 자국의 코젤스크·스타로벨스크·오스타슈코프 수용소로 이송했다. 이렇게 2만 2000명이 끌려갔다. 독일은 수용소로 이송된 포로들을 소련군이 처형한 것이라며 침공의 당위성을 선전했다. 소련은 폴란드 포로들이 1941년 스몰렌스크 공사에 투입됐는데 나치가 몰살한 것이라고 맞섰다. 독일을 패망시키려면 소련의 협력이 절대적이었던 영국과 미국은 못 들은 척했다.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소련군의 잔학한 행위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고 소련 주장대로 폴란드 땅을 넘겨줬다. 소련 정부가 진실을 고백한 것은 1990년 고르바초프 서기장 때였다. 지난 주말 러시아군이 퇴각한 키이우 외곽 부차, 모티진 등에서 두 손을 뒤로 결박당한 채 머리 뒤에 총알이 박힌 민간인 시신들이 나왔다. 카틴 숲 참사와 닮았다. 한 시신은 눈과 코가 드러날 정도로 묻어 망자(亡者)에 대한 예도 차리지 않았다. 어제는 길을 가는 민간인에게 러시아군 탱크가 발포하는 동영상이 공개됐다. 폴란드가 포로들 어디 있느냐고 물었더니 스탈린이 만주로 달아났다고 거짓말했는데 지금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동영상을 조작했다고 오리발을 내밀고 있다. 우리처럼 단일 민족으로 분단된 폴란드가 겪은 아픔을 원자력발전소는 있지만 핵무기와 핵물질 농축을 포기한 우크라이나가 되풀이하고 있다.
  • [마감 후] 뜨겁게 태어난 그 아이를 보호하려면/조희선 사회2부 기자

    [마감 후] 뜨겁게 태어난 그 아이를 보호하려면/조희선 사회2부 기자

    “새해에 아기들이 해님처럼 둥글둥글 태어납니다. 가난하고 슬픈 우리 한국 나라에도. 그러나 아기들은 별처럼 자랍니다. 꽃처럼 키가 큽니다. 뜨겁게 뜨겁게 키가 큽니다.” 아동문학가 권정생(1937~2007)이 1974년 ‘여성동아’에 발표한 ‘새해 아기’의 마지막 문단이다. 아기 곰, 아기 옥토끼, 아기 다람쥐, 송아지, 망아지 등 작은 짐승들과 하느님이 지켜보는 가운데 아기가 탄생한다. 해님같이 뜨거운 기운을 품고 태어난 아이는 여러 아기 동물과 하느님의 축복 속에 넓고 환한 사람 세상으로 향한다. 온 누리에 향기를 퍼뜨리는 아름다운 꽃이 되리라는 기대를 한껏 받은 채. 짧은 동화에는 작고 귀한 존재가 이 땅에 다가오는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아무리 어려운 시절이라고 해도, 아무리 절망적이라고 해도 아기는 뜨거운 관심 속에 무럭무럭 자라야 마땅한 법이다. 안타깝게도 오래된 동화 속에 나온 이 당연한 사실은 현실 속에서 잊힐 때가 많다.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이유로 사랑보다 아픔을 먼저 경험하는 아이들이 있다. 부모가 성인이 되기 전에 세상에 태어나서, 집이 가난해서, 부모로부터 정신적·신체적 괴롭힘을 당해서, 부모가 장애를 겪고 있어서, 부모가 징역살이를 하고 있어서 떨어져 사는 ‘보호대상아동’이 한 해 5000여명에 이른다. 보호아동은 주로 아동양육시설(보육원)에서 성장 시기별로 각각 다른 어려움을 마주하며 삶을 견딘다. 하루에 세 번씩 바뀌는 ‘보육사 엄마’의 보살핌 속에서 아이는 ‘엄마들’의 시선을 한 번이라도 더 받기 위해 갖은 애를 쓴다. 한창 공부를 해야 할 때, 여건이 녹록지 않아 배우고 싶은 것도 마음껏 배우기 어렵다. 나이가 차서 시설을 나와도 당장 세금을 어떻게 내는지, 청약 통장을 어떻게 만드는지 몰라 막막하다. 한 아이의 몸과 마음이 온전히 자랄 만큼 충분한 온기가 더해지지 않은 까닭이다. ‘보호대상아동’이라는 법적 용어는 국가가 이 아이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쏟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현실은 어떤가. 원칙적으로 가정과 유사한 형태, 즉 입양이나 위탁 가정에서 보호받아야 하는 아이들은 대부분 시설에서 집단생활을 한다. 시설의 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마음의 병’을 앓는 아이 중 다수는 제대로 된 심리 치료를 받지 못하고 방치돼 있다. 심지어 지자체의 재정 상태나 관심도에 따라 해당 지역 시설 아동이 받을 수 있는 복지의 양과 질도 달라진다. 어느 지역, 어느 시설에 사느냐에 따라 보호 아동의 삶도 달라진다는 뜻이다. 오죽하면 아이들에게 투표권이 있었으면 지자체의 관심이 지금과 같지는 않았을 거라는 이야기가 나올까. 정부는 2019년 ‘보호가 필요한 아동은 국가가 확실히 책임진다’는 내용의 ‘포용국가 아동정책’을 발표했다. 각 지자체를 컨트롤타워로 삼고 아동 보호 전 단계에 적극 개입하겠다는 선언이다. 다만 중요한 게 빠졌다. 인력과 예산이다. 정책을 지속적으로 시행할 수 있는 인적·물적 인프라가 여전히 부족한 상황에서는 결국 아이들의 삶만 메말라 간다. 자주 인용되는 이 문장만큼 지금 우리가 뼈아프게 받아들여야 할 말이 또 있을까.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 한 아이를 돌보는 일을 한 가정이나 개인에게만 떠밀 수 없다. 국가와 사회의 따사로운 보살핌이 보태질 때 아이는 뜨겁게 키가 큰다. 정부의 선언이 허언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새해마다 뜨겁게 태어난 한 아이를 보호하려면 우리의 온 힘이 필요하다.
  • 군산 K맥아·홍천 K홉… 이거다, 진정한 K맥주 [심현희 기자의 술 이야기]

    군산 K맥아·홍천 K홉… 이거다, 진정한 K맥주 [심현희 기자의 술 이야기]

    술은 농업의 산물입니다. 알코올을 뽑아낼 수 있는 과일이나 곡물 등 술의 원료가 농산물이기 때문이죠. 당연하게도 프랑스 와인은 프랑스 땅에서 수확한 포도로, 독일 맥주는 독일의 보리와 홉으로 만듭니다. 그런데 한국 맥주는 국내 농업과의 연결고리가 거의 없습니다. 맥주의 핵심 원료인 맥아(싹튼 보리)와 홉을 전량 수입해 양조하고 있어선데요. 최근 맥아와 홉을 국산화해 ‘진정한 국산맥주’를 만들어 보자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답니다. K맥아와 K홉을 쓴 K맥주가 널리 상용화된다면 국내 농가들의 수익뿐만 아니라 한국의 ‘로컬 맥주’라는 관광 상품으로도 가치가 있어 기대가 큽니다. 지난달 31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대한민국 맥주산업 박람회에서도 홉, 맥아, 효모 등 맥주 원재료의 국산화 가능성을 진지하게 탐색하는 세미나가 열렸고요. 먼저 K홉은 강원 홍천에서 자라고 있답니다. 서늘한 기후에서 잘 자라는 홉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강원 지역을 중심으로 생산되곤 했지만 우루과이라운드로 수입 농산물 시장이 개방되면서 수지 타산이 맞지 않아 자취를 감췄습니다. 수십년이 흐른 2010년대 중반 버려진 홉밭에서 한 농부가 자생한 홉 넝쿨을 발견합니다. 놀라운 마음에 이 홉을 가져가 DNA 분석을 맡겼더니 전 세계 어디에도 없는 ‘토종 홉’인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다년생 덩굴 식물의 꽃인 홉은 커피 원두처럼 산지마다 홉이 뿜어내는 향미의 특성이 달라 홉의 품종이 맥주 스타일을 좌우한답니다. K홉은 홍천군의 적극적인 지원을 통해 최근 수확됐는데요. 망고 등 달콤한 열대과일향이 풍부해 홉의 아로마 캐릭터가 주인공인 페일 에일이나 인디아 페일 에일(IPA) 스타일에 적합합니다. K홉을 사용해 맥주를 만든 김성환 홍천 브라이트바흐 이사는 K홉이 “맥주 맛의 치트키로 불리는 미국의 애머릴로 홉과 비슷하다”고 하네요. K맥아의 무대는 전북 군산입니다. 군산은 주로 보리를 생산하는 지역인데요. 2012년 이후 보리 수매 중단으로 보리 재배에 위기가 오자 지방자치단체와 지역 농부들은 부가가치가 높은 맥아용 보리(두줄보리)로 눈을 돌렸습니다. 단백질이 적은 두줄보리에 싹을 틔워 맥아로 전환해 팔면 일반 곡물 보리보다 가격이 2~3배 높기 때문에 돌파구가 될 수 있을 거라 판단한 것이죠. 시는 예산을 투입해 맥아공장과 양조장을 지었고, 지역 농가들이 생산한 보리를 전량 매수해 양조장에서 청년들이 맥주를 생산해 판매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습니다. K맥주 성장의 걸림돌은 막혀 있는 ‘온라인 판로’입니다. 주세법상 술의 핵심 원료들이 특정 지역 농산물이면 지역특산주로 분류돼 온라인으로 판매가 가능해 가격 경쟁력을 높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맥주는 관련 농업이 이제 막 기지개를 켠 데다 원료의 특성상 홉과 맥아 모두 같은 지역에서 생산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매년 맥주산업박람회를 개최하는 이인기 비어포스트 대표는 “맥아와 홉 가운데 하나라도 국내산 원료로 만든 맥주를 지역특산주로 인정해 주는 제도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 베델로 왔다가 ‘배설’로 묻힌 영국인… 그는 왜 대한독립을 외쳤나 [김별아의 도시 기행문-서울을 걷는 시간]

    베델로 왔다가 ‘배설’로 묻힌 영국인… 그는 왜 대한독립을 외쳤나 [김별아의 도시 기행문-서울을 걷는 시간]

    ●매혹과 공포 공존한 이방인 향한 시선 ‘한민족은 단일민족’이라고 배웠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한국말을 잘하는 외국인을 보면 신기해하고 길에서 마주치면 주춤하거나 흘깃거리던 때가 언제인가 싶다. 세상이 바뀐 건 확실하다. 텔레비전만 틀면 유창한 한국말을 구사하는 외국인들이 등장해 퀴즈를 풀고 노래도 하고 전통시장과 오지 마을까지 간다. 여전히 외부자의 입을 통해 듣는 한국 사회의 이모저모에 부끄러워하거나 뿌듯해하는 시선이 교차하지만, 회회아비가 쌍화점에서 만두를 팔던 고려 이래 도래자(渡來者)가 보통 사람들과 가장 밀착해서 살아가는 시대는 지금이 아닌가 싶다. 낯선 존재, 이방인에 대한 감정에는 매혹과 공포가 공존한다. 외부와의 접촉이 제한됐던 전근대에 이방인은 수준 높은 문명의 전파자로서 경외의 대상이었다. 신라의 왕이 된 박·석·김이 알에서 태어났다는 난생신화는 새로운 세력에 대한 경계심을 풀고 매혹의 빛을 더하는 신비의 장치였다. 반면 19세기 중반 조선은 “양이가 침범하여 싸우지 않으면 화친을 하는 것이고, 화친을 하면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라는 기치를 드높인 난공불락 국가였다. 서양 오랑캐, 양이(洋夷)로도 모자라 서양 귀신, 양귀(洋鬼)라는 비속어가 공공연해질 정도로 이방인에 대한 공포가 컸다. 대한제국, 이름은 드높았으나 위상은 그에 반비례했던 때에 세계를 향한 문은 열렸다기보다 ‘벌려’졌다. 불가항력적인 개방의 회오리바람을 타고 돈과 명예와 이국적인 문화 향유와 귀족 같은 생활과 열등한 인종을 문명화시키는 사명감 등등을 좇는 이방인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외교관과 선교사와 대한제국의 고문(顧問)부터 박물학자와 여행가와 도굴꾼까지, 제각기 품은 욕망에 따라 할딱할딱 숨이 넘어가기 직전인 나라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랐다. 경멸과 연민, 그 또한 매혹과 공포만큼이나 간극이 컸다.●머나먼 브리스틀에서 온 한 남자 세계 지도에서 잉글랜드 남서부의 작은 도시 브리스틀을 찾아본다. 과거 대영제국의 무역 거점이자 노예무역의 전초기지였던 그곳은 현재 인구 46만명으로 제주시나 경기도 파주 정도의 규모다. 서울에서 가려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경유해 비행기로 13시간 이상 걸린다. 낯설고 머나먼 그곳에서 태어난 한 사람이 1904년 대한제국에 닿았다.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Ernest Thomas Bethell)로 태어나 배설(裵說)이라는 이름으로 한국 땅에 묻혔다. 국한문·한글·영문 3종을 동시에 발행한 최초의 신문인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데일리뉴스(KDN)를 창간한 베델은, 한국의 독립과 언론 자유를 위해 싸운 공적을 인정받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보도문이나 기사문을 쓰는 기본 원칙인 육하원칙은 ‘누가,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어떻게, 왜’이다. 37년이라는 길지 않았던 베델의 생애에 대해서는 바로 이 지면, 대한매일신보의 후신인 서울신문에 수차례 특집·기획기사가 나간 바 있다. 기사를 통해 육하원칙 중 다섯은 상세히 밝혀져 있을진대, 4월 7일 신문의 날을 기억하며 베델의 흔적을 찾아다니는 동안 내가 품었던 의문은 ‘왜’라는 마지막 수수께끼였다. 왜, 무엇 때문에, 그는 한국인들을 도왔을까? 스스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라고 독려하며 응원했을까? 돈벌이로 삼는 대신, 구경거리로 여기는 대신, 경멸과 혐오 대신, 값싼 동정을 베풀고 등 뒤에서 비웃음을 흘리는 대신.꽃샘잎샘이 알알한 날, 특별한 이방인을 만나는 여행길에 올랐다. 집을 나서기 전 지도를 펴 놓고 방문할 순서를 정하는데 아무래도 동선이 꼬인다. 삶의 궤적을 좇자면 집터를 확인하고 일터에 들렀다가 사망지와 박물관을 방문하는 순서가 좋을 듯한데, 걸어서 움직이기에는 지하철역 근방에서 시작하고 끝나는 게 맞춤하다. 하긴 언제라고 마음먹은 대로 삶의 행보가 딱딱 맞아떨어지던가? 아버지의 사업을 돕기 위해 일본에 갔던, 축구를 좋아하는 천생 영국인이 생뚱맞게 종군기자가 돼 조선에 왔다가 신문을 창립하고 항일운동을 벌인 것처럼 말이다. 급발진하는 운명의 수레바퀴는 애당초 안전 운행의 용도로 만들어지지 않았으니, 무릇 인생길이 꽃길보다는 울퉁불퉁 돌길이거나 질퍽질퍽 진창길에 가깝기 때문이다.●베델 만나러 가는길… 홍난파 가옥도 서울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3번 출구로 나와 길을 건너 사직터널 위로 난 오르막길을 따라가면 1933년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홍난파가 소프라노 이대형과 재혼해 새살림을 차린 붉은 벽돌집이 나타난다. 이 집에 사는 동안 홍난파는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돼 고문을 받은 끝에 전향했고, 이후 대동민우회에 가입해 친일 행적을 이어 가다 1941년 고문 후유증으로 죽었다. 선과 악, 옳고 그름을 두부모 베듯 자를 수 있다면 좋으련만 인간이란 그런 존재가 아니다. 누군가에게 홍난파는 나라 잃은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진 ‘봉선화’와 ‘고향의 봄’의 작곡가일 테고, 누군가에게는 친일파 ‘모리카와 준’일 테다. 그런가 하면 시시비비에 염증이 난 누군가는 열여덟 살의 홍난파가 처음 쓴 곡이자 한국 최초의 야구 응원가인 ‘야구가’로 그를 기억할지 모른다. ‘배팅 들고 썩 나서니 원 스트라이크. 다시 한번 갈겨 보아라, 홈런으로. 세컨드야 주의해라 공 굴러간다. 어화 홈인이로다!’ 홍난파 가옥을 끼고 돌면 오래된 빌라들 사이로 한양도성의 복원과 함께 주변을 정비해 만든 월암근린공원 입구가 나타난다. ‘어니스트 베델 집터’ 표석은 인터넷 지도의 표시와 다르게 공원으로 들어오는 오르막길 왼편, 성벽 아래쯤에 자리하고 있다. ‘어니스트 베델 집터: 1904년 조선에 온 영국인 베델(한국명 배설, 1872~1909)은 이해 7월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여 항일 언론 활동을 힘껏 지원하였다. 이곳은 그가 조선에 와서 정착해 사망할 때까지 가족과 함께 산 한옥 터이다.’●국적·인종 떠나 ‘양심적 삶’ 오롯이 조선인들을 선동했다는 치안 방해 혐의로 열린 재판의 결과가 6개월 근신에 그치자, 영일동맹으로 일본과 한편이었던 영국은 기어이 국채보상운동 의연금을 유용했다는 공금 횡령 혐의를 덧붙여 베델에게 3주간의 실형을 선고한다. 조선에는 영국인을 구금할 시설이 없어 선편으로 중국 상하이까지 실려가 수감 생활을 한 베델은 급격히 건강이 나빠진 채 돌아왔다. 베델의 생애를 연구해 온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명예교수에 따르면 베델의 집에는 다른 외국인들이 살던 서양식 가옥이 갖추고 있던 전기와 수도 시설이 없었다. 서울역 연세재단빌딩에 있던 세브란스병원에서 통원 치료를 받기 위해, 베델은 병원 가까운 호텔에 방을 얻고 ‘홍파동 2-16번지’ 집을 떠난다. 그리고 살아서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지 못한다.베델이 마지막 시간을 보낸 정동 애스터하우스 호텔 터에는 농협중앙회 본점이 자리하고 있다. 직장인들이 점심을 먹은 뒤 테이크아웃 커피를 들고 한가로이 오가는 거리에서 1909년 5월 1일 조선인들에게 둘러싸인 채 죽어 간 서른일곱 살 젊은 영국인의 흔적은 찾을 길 없다. 화단에 지지대를 짚고 위태롭게 서 있는, 수령이 오백 살은 족히 돼 보이는 아름드리 회화나무는 혹시 기억하려나. 영국인도 한국인도 아닌, 그저 양심적인 한 인간이었던 그가 마지막 가쁜 숨을 몰아쉬며 동지인 양기탁의 손을 잡고 남긴 짧은 유언을. “내가 죽더라도 대한매일신보는 영원히 살아남게 해 한국 동포를 구해 주오!”(㉻에 계속) 소설가
  • ‘휠체어 출근’ 진성준, 大자로 ‘꽈당’ 했다(영상)

    ‘휠체어 출근’ 진성준, 大자로 ‘꽈당’ 했다(영상)

    민주당 휠체어 이용 챌린지 도중진성준, 오르막길 뒤로 크게 넘어져박홍근·고민정 등도 체험에 동참이준석 “평소에 지하철 타시는게”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휠체어 이용 챌린지’에 나선 가운데, 진성준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완만한 경사를 오르다가 뒤로 넘어지며 아찔한 장면이 연출됐다. 진 의원은 2일 오전 6시30분쯤 가양역 9번 출구 인근에 있는 엘리베이터로 휠체어 바퀴를 굴리며 이동하다 지상 엘리베이터로 들어서는 경사로에서 휠체어에 탄 채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경사로와 연결된 보도블록의 홈에 오른쪽 휠체어 바퀴가 걸린 것이다. 진성준 의원실 관계자는 “뒤통수와 어깨, 등 부분을 크게 땅에 부딪혔지만 큰 부상은 없었다. 진 의원이 병원 내원을 원치 않아 그대로 출근했다”고 했다. 챌린지를 마친 진 의원은 페이스북에 “평생 처음 타보는 휠체어다. 장애인들이 일상에서 이동에 얼마나 큰 불편을 겪고 있는지 그야말로 몸소 체험하고 알게 됐다”고 적었다. 이어 진 의원은 “오늘의 경험으로 막연한 배리어프리가 아니라 보다 꼼꼼하고 세심한 배리어프리가 필요하다는 점을 깨닫게 됐다”고 덧붙였다.박홍근 원내대표를 포함한 더불어민주당 의원 20여명은 휠체어를 타고 국회로 출근하는 ‘휠체어 지하철 출근’ 챌린지에 동참했다. 박 원내대표는 “장애인 권리 예산을 요구하는 장애인 단체의 지하철 시위는 잠시 멈췄지만 해결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여야는 물론 인수위원회가 함께 지혜를 모아야 한다”고 했다. 고 의원은 “강변역에서 국회의사당역까지 휠체어로 출근했다”며 “겨우 딱 하루 휠체어를 몰았는데도 두 팔이 욱신거린다”고 했다.고민정 휠체어 출근에…이준석 “평소 지하철부터 이용하시라” 보수 진영에선 “쇼”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고 의원 사진을 공유한 뒤 “휠체어로 지하철 타는 체험을 하기 전에 평소에 지하철을 자주 이용해보는 게 우선 아니겠느냐”고 꼬집었다. 이 대표는 앞서 장애인 이동권 등을 요구하며 출근길 지하철 시위를 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를 향해 “시민을 볼모로 삼은 투쟁방식은 문제가 있다”며 지적했고, 이에 고 의원은 “저급한 의도”라며 이 대표를 비난했다. 이 대표는 이날 고 의원을 비롯해 민주당 국회의원들이 ‘휠체어 출근 챌린지’에 동참하며 장애인 이동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밝힌 데 대해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이렇게 밝혔다. 전여옥 전 새누리당 의원은 “문재인 정권 5년, 오로지 일은 제끼고 쇼만 했다”며 “마지막 쇼 내지 마무리 쇼”라고 비판했다.
  • 부동산 투기 구미시 의원 항소기각

    부동산 투기 구미시 의원 항소기각

    차명으로 땅을 사들인 뒤 부동산투기를 한 혐의로 구속기소된 기초의원의 항소가 기각됐다. 대구지법 형사항소1부(이상균 부장판사)는 7일 안장환 경북 구미시의원에 대한 항소심에서 피고인과 검사의 항소를 모두 기각했다. 안 시의원은 대구지법 김천지원에서 한 1심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항소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고인이 시의원으로 획득한 정보로 범죄를 저질러 엄하게 벌해야 하는데도 일관되게 범행을 부인하고 반성하지 않는 점 등을 감안하면 원심이 선고한 형이 무겁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또 “범죄로 얻은 재산상 이득이 몰수나 추징돼 국고에 귀속될 것으로 보이는 점 등을 종합했다”고 덧붙였다. 안 시의원은 2020년 초 구미 꽃동산 민간공원 조성예정지 땅을 차명으로 사들인 뒤 시의회에서 관련 사업안 통과를 주도해 매입 가격의 3배 가까운 차액을 챙긴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 “러軍 75명, 체르노빌 방사능에 대량 피폭...병원 후송” 日교도통신

    “러軍 75명, 체르노빌 방사능에 대량 피폭...병원 후송” 日교도통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초기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를 점령했던 러시아군 가운데 약 75명이 방사능에 심각한 수준으로 노출돼 치료를 받고 있다고 우크라이나 당국자가 밝혔다. 일본 교도통신은 6일 “우크라이나의 할시첸코 에너지장관이 5일 러시아군이 개전 초기 점령했던 체르노빌 원전 인근에서 75명가량의 러시아군 병사가 피폭을 당해 인접국 벨라루스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교도통신은 할시첸코 장관에 대한 화상 인터뷰를 통해 이렇게 전하고 “이는 심각한 방사능 피폭이 발생했음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할시첸코 장관에 따르면 체르노빌 원전 주변에는 1986년 폭발사고에 따른 고강도 방사능 오염지역들이 있으나 러시아 군인들은 방어용 참호를 구축하기 위해 오염지역 조사나 방호장비 없이 마구잡이로 땅을 갈아 엎었다. 할시첸코 장관은 “방사능 오염지역의 땅을 파내라는 지시를 내린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러시아군의 명령 체계를 비난했다. 앞서 러시아군은 지난달 31일 체르노빌 원전 통제권을 우크라이나에 반환하고 병력을 철수시켰다. 2월 26일 이곳을 점령한 지 한달여 만이다. 앞서 우크라이나 국영 원전기업인 에네르고아톰도 러시아의 체르노빌 철군 직후 “러시아군이 원전 인근에 있는 통제구역인 ‘붉은숲’에서 참호를 파는 등 무리한 군사작전을 강행하다 많은 병사들이 피폭된 것으로 보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붉은숲은 원전 폭발 사고 이후 방사선에 피폭된 소나무들이 고사해 붉은색으로 변한 지역이다. 이곳의 시간당 방사선량은 세계 평균의 5000배가 넘는다. 로이터통신은 “보호장비를 착용하지 않고 붉은숲에서 방사능 먼지를 일으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다”는 전문가의 말을 전했다.
  • “16살 아들 스스로 삶 마감” 푸른나무재단 설립 이유

    “16살 아들 스스로 삶 마감” 푸른나무재단 설립 이유

    김종기 명예 이사장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재단을 설립한 이유는 먼저 세상을 떠난 아들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학교 폭력과 27년간 싸운 푸른나무재단의 설립자 김종기 명예 이사장은 6일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했다. 김종기 이사장은 푸른나무재단을 세우기 이전 S그룹 비서실에서 근무하다가 S전자 홍콩 법인장을 한 인물. 20년 넘게 회사 생활하다가 갑자기 회사를 그만둔 이유를 묻자 망설이던 그는 “1995년, 27년 전에 제가 사랑하는 아들이 있었는데 아들이 16살 고1때 학교폭력으로 자기 삶을 스스로 마감했다”고 털어놨다. 김종기 명예 이사장은 “그 뒤로 모든 직장을 버리고 나와 학교 폭력 예방 활동에 뛰어들게 됐다. 아들 죽음을 말한다는 게 자랑도 아니고 부모로서 힘든 일이다. 스스로 아파트에서 투신을 해서, (바로) 죽은 게 아니라 5층에서 뛰어내려 살았다. 다시 걸어서 아파트에 걸어올라가 다시 투신해 그 아이가 죽었을 때 부모의 심정은 이루 형언할 수가 없다. 저는 평생 그 아들을 가슴에 대못 박듯이 묻고 살게 됐다”고 회상했다. 이어 “베이징에 일이 있어 출장을 갔는데 어쩐지 밤에 잠이 안 오고, 새벽에 감이 이상해 아내에게 전화했는데 아내 목소리가 안 나온다. 한참 침묵 속에 있다가 갑자기 폭포처럼 ‘여보 대현이(아들)가 죽었어’ 하며 우는데 저는 그때 호텔이 폭파되고 땅이 무너지는 침통에 모든 일정을 중단하고 영안실로 돌아왔다. 그때도 우리 대현이가 왜 몸을 두 번이나 던져 어린 나이에 삶을 마감했나 영문을 모르고 있었다. 너무 원통하고 한심하고 내 스스로 죄책감, 회한. 아들을 돌보지 못하고 회사에 몰입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고 당시를 전했다. 그는 “지나고 보니 그런것 같다. 출장길이 1995년 6월 6일이었다. 뭘 놓고 와 5층에 불러 ‘아빠 것 좀 가져다줄래’ 하는데 얼굴이 어두웠다. ‘야 힘내’하고 공항에 나갔다. 돌이켜보니 대현이가 죽음을 준비하고 있던 게 아닌가. 그래서 그날 밤 6월 8일 투신했는데 낮에는 엄마가 장을 보는데 찾아와서 엄마가 물건 산 것을 조용히 들어 집에다 놔주고 인사하고 나갔는데. 그게 엄마에 대한 자기 마지막 효도가 아니었나. 자기 스스로 신변을 정리했더라. 죽은 다음 보니 모든 물건이 정리되어 있어 더 부모로서 비통한 마음. 무엇이 우리 아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나 하는 통한의 슬픔이 깔려 있었다”고 토로했다. 김종기 명예 이사장은 짐작 갈 만한 상황이 없었냐는 질문에 “학교 폭력 당했다는 건 구체적으로 모르고 옷 찢겨오고 흙 묻혀 오고 안경 부러지고 오고 상처입고 왔다. 애가 덩치가 크다. 저보다 잘생기다. 학교서 반장도 하고 대현이 팬클럽도 있었다. 상급생으로부터 맞은 거 같은데 그 얘길 안 하고 육교 지나다 깡패를 만나 맞았다, 넘어져 다쳤다 해서 파출소 가서 따진 적이 있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밤에 삐삐가 오면 불려나가 놀이터, 노래방에 가서 힘든 시간이 반복되어 왔던 거 같다. 입학해서부터 몇 달 지나온 거다”라고 밝혔다. 그는 당시 영안실에서 겪은 황당한 일도 전했다. 때린 가해 학생들이 나타나 ‘대현이 죽어 골치 아프게 생겼구나’라며 술 취해서 행패를 부렸다고. 그는 “그보다 결정적인 건 대현이가 삐삐가 있었는데 계속 문자가 온다. ‘천사야 잘가, 도와주지 못해 미안해’ 끊임없이 몇달을 왔다. 그래서 대현이가 폭력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상급생에게 폭력을 당했는데 그 사실을 진실을 아빠에게 말하지 못한 거다. 말했다간 선배들에게 더 힘들까 봐”라며 마음 아파했다. 유재석은 가해자가 마땅한 처벌을 받았는지 물었다. 이에 김종기 명예 이사장은 “그러기 전에 우리 대현이 친구들을 그 가해자들이 엄청 폭행한 사실을 알았다. 내가 이건 도저히 참을 수 없다. 내가 얘들을 수단방법 안가리고 없애버리고 한국을 뜨겠다, 한 명씩 빵집에서 만나 왜 그랬나 했다. 여러 얘기하는데 걔들이 벌벌 떨더라. 측은한 마음이 들더라. 복수를 하려했다. 하지만 복수가 능사가 아니라 하늘에 맡기자 싶더라. 하늘이 처벌해주고 다시는 이런 비극적 죽음이 이 땅에서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제2의, 제3의 대현이가 없어야겠다고 선회했다”고 했다. 이어 “너무나 한스럽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함 빠져있다가 기자회견을 자처했다. 세상이 뛰어들어 바꿔야 하는 거 아니냐, 그게 신문 한페이지에 보도되니 엄청난 반향이 일어났다. YMCA에 창구를 만들었는데 전화가 쇄도해 YMCA도 놀랐다. 88올림픽보다 더 많이 왔다더라. 전화오신 분 중 각 분야별 5분을 모아 학교에도 경찰에도 맡길 수 없으니 우리 스스로 잘 맡아 키우자 해서 시민 모임으로 출발했다. 그것이 현재의 푸른나무재단의 전신이 됐다”고 고백했다.
  • 사유·명상하는 10만평 수목원… 관람객 80%가 수도권 20~30대[윤창수 기자의 지방을 살리는 사람들]

    사유·명상하는 10만평 수목원… 관람객 80%가 수도권 20~30대[윤창수 기자의 지방을 살리는 사람들]

    생각하는 정원이라는 뜻을 지닌 사유원은 10만평의 대지에 조성된 수목원이다. 지난해 9월 사전예약제로 문을 열어 하루 140명의 입장객만 받고 있는데, 개장 첫날부터 예약 경쟁이 치열했다. 3시간 관람에 입장료가 5만원으로 다소 비싼 편이지만 식사까지 합해 사유원에서 하루 10만~20만원을 쓰고 가는 사람들도 있다.●日 팔려가는 모과나무 안타까워 시작 산으로만 둘러싸인 소담스런 언덕에 인상 깊은 장소를 만든 이들은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인 승효상 이로재 건축사무소 대표와 포르투갈의 알바로 시자 등이다. 베니스 비엔날레 황금사자 건축상을 두 차례나 받은 시자는 ‘건축의 시인’이라 불린다. 풍경의 일부가 되는 그의 건축물을 소개하고자 CNN 여행 채널에서 사유원이 문을 열기도 전에 취재 의뢰가 왔을 정도다. 승 대표는 “사유원의 모든 건축물을 땅으로 집어넣거나 숨겨서 수목원의 배경처럼 만들었다”면서 “새들의 수도원과 물탱크에 조성한 전망대만 드러나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승 대표는 생태 화장실과 스마트 가로등, 벤치까지 사유원의 대부분 시설을 설계했다. 새들의 수도원은 맨 위층에 새들이 기도할 수 있도록 스테인드글라스까지 달았지만 의심 많은 새들이 날아오지 않아 아직은 새가 깃들이기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다.사유원에서 가장 인기 있는 그의 작품은 물과 돌이 삶의 의미를 묻는 명정이란 공간이다. 물이 똑똑 흘러내리는 벽을 지나면 붉은색의 벽이 이국적인 풍광을 낳는다. 건축가는 이곳을 세상을 떠나기 직전의 사람처럼 묵상하는 장소로 설계했다. 사유원을 찾는 관람객의 80% 이상은 수도권에서 온 20~30대들인데 이들은 명정에서 인생 최고의 사진인 ‘인생샷’을 찍느라 여념이 없다. 인스타그램 등 소셜미디어에 올라오는 사진은 최고의 홍보 수단인 셈이다. 비싼 대관료에도 패션 화보의 촬영장으로 인기가 높다. 승 대표는 야외 공연과 명상을 즐길 수 있는 장소로 이곳을 만들었지만 젊은이들은 자신만의 방법으로 공간을 즐기고 있다. 좌식 양변기는 없지만 대한민국 최고의 풍광을 즐길 수 있는 화장실과 언덕길을 오르내리는 수고로움을 기꺼이 감수하면서 사유의 공간을 맘껏 받아들이는 것이다.사유원이란 이름은 설립자인 태창철강의 유재성 회장과 25년 지기인 승 대표의 교감 속에 지어졌다. 승 대표는 자신보다 여섯 살이 많은 유 회장을 처음 만났을 때 서로 인상이 별로 좋지 않아 10년 동안 만나지 않다가 그의 대구 집을 설계하면서 다시 만났다고 털어놓았다. 일반적인 수목원이 아니라 사유하고 명상하는 수목원을 짓자는 승 대표의 제의에 그 자리에서 유 회장이 사유원이란 이름을 내놨다. 태창철강은 대구에 있는 기업으로, 유 회장은 일본에 팔려 가는 모과나무가 안타까워 땅을 사고 수목원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40년간 나무를 모아 사유원을 일군 유 회장은 일본으로부터 나무를 지켜 낸 곳으로만 수목원을 바라보는 시선은 부담스러워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사유원에 있는 6개의 생태 화장실에 다불유시(多不有時·WC) 같은 이름을 직접 붙일 정도로 지극한 애정을 쏟았다. 마스터플랜처럼 완벽한 계획 없이 조성돼 아직도 미완성인 수목원을 지금도 조금씩 손수 고쳐 나가고 있다. ●수억원짜리 소나무 곳곳에 자태 뽐내 수백년 된 모과나무는 풍설기천년이란 이름의 언덕에 108그루가 자리잡고 있다. 나무는 매년 4t의 모과 열매를 맺는다. 이 열매로 사유원 입구에서 거대한 저수지와 마주보고 있는 카페 몽몽마방의 몽몽에이드를 만들어 팔고, 태창철강 직원에게도 나눠 준다. 모과나무뿐 아니라 재선충병을 이겨 낸 한 그루당 수천, 수억원을 호가하는 한국형 소나무도 사유원 곳곳에서 굽은 자태를 뽐내고 있다.카페 자리에는 승 대표가 설계한 호텔이 들어설 예정이다. 빈민촌인 달동네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세상의 끝에 있는 수도원에서 건축의 이상향을 보는 이 건축가는 사유원의 호텔을 마치 수도원처럼 설계했다. 50개의 호텔 객실에는 텔레비전도 없이 작은 싱글침대 하나만 들여놔 계절마다 풍경이 다른 수목원을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승 대표의 바람과 달리 비용 문제 등 여러 사정으로 아직 착공은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세계적인 건축가 알바로 시자의 명성은 1966년 포르투갈 해변의 암석 위에 세워져 바다와 하나가 된 듯한 팔메이라 수영장으로 시작됐다. 한국에서는 2006년 안양예술공원에 위치한 안양파빌리온을 처음 설계했고, 이 건물은 아시아에 최초로 들어선 시자의 작품이기도 하다. 사유원 방문객은 시자가 설계한 건물인 소요헌에서 땅과 하나가 된 건물로부터 엄청난 에너지를 느낀다고 입을 모은다. 소요헌은 긴 상자 같은 두 개의 구조물을 와이(Y) 자 모양으로 연결했을 뿐 장식이 없는 고요한 공간이다. 어두운 입구를 지나 빛과 함께 마주한 자연은 사유원을 찾은 이들의 경탄을 자아낸다. 시자의 건축 작품을 보려고 포르투갈이나 이탈리아 여행객이 개장 전에 무작정 사유원을 찾은 일도 있었다. ●서대구 기차역 생겨 교통 더 편리해져 군위군은 소보면에 대구·경북 통합 신공항이 들어서게 되면서 대구시로 편입하는 과정에 있다. 지역 간 합의로 행정구역 통합이 이뤄지는 첫 사례가 될 예정이지만 국민의힘 소속 경북 지역구의 일부 의원이 반대하고 있다. 군위군에 있는 사유원이 대구시로 편입되면 그 가치도 10배 이상 오를 것으로 전망된다. 별다른 관광 자원이 없는 군위에서 야심 차게 만든 삼국유사테마파크는 코로나19 기간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사유원은 예약이 꽉 찼다. 지난달 31일 서대구 기차역이 개통되면서 사유원으로 가는 교통은 더 편해졌다. 규모 면으로 따지면 국내 다섯 번째 정도지만 민간에서 조성한 수목원으로는 경기 양평의 세미원 다음으로 면적이 넓다. 경북도와 대구시 등 지자체는 젊은 사람들이 많이 찾는 사유원에 대해 매우 호의적이다. 대구 수성구청은 구청장 주도로 전체 공무원이 사유원을 관람했으며, 경북도는 도로 개설 등에 도움을 크게 줬다. 승 대표는 사유원을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이 일상에서 벗어나 일상의 경계 밖에서 시간을 보냈다가 일상으로 돌아가는 에너지를 얻는 곳”이라고 정의했다. 특히 반드시 직접 가 보고 이해해야만 하는 건축은 지역 가치를 한없이 높이는 작업이며, 좋은 건축을 통해 지방이 살아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돈 많은 기업가나 생각 없는 지자체장이 외국의 건축을 그대로 가져온다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땅에 어울리지 않는 건축물은 장소성을 구현하지 못하고 생명력이 소멸된다고 밝혔다. 대표적인 사례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로, 설계자인 자하 하디드는 땅에 대한 이해와 주변의 역사적 맥락을 무시한 채 건축이 아니라 공산품을 낳았다고 했다. 그는 “사유원은 존재 자체로 군위란 지역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자랑스러운 장소”라며 “사유원에서 건축은 중요하지 않으니 나무를 흘깃 보지 말고 대화하도록 노력하라”고 귀띔했다.
  • 굽이굽이… 너만의 이야기가 돋았다

    굽이굽이… 너만의 이야기가 돋았다

    경남 창녕에 아름다운 옛길이 있다. 꽃가람을 따라 걷는 ‘남지개비리길’이다. 명색이 국가 문화재(명승)다. 화려한 볼거리는 없지만 길에 깃든 옛이야기를 곱씹으며 걷는 맛이 제법 웅숭깊다. 봄의 낙동강은 예쁘다. 남지개비리길 입구까지 5㎞ 남짓, 10리가 넘는 강변이 죄다 벚꽃이다. 둑방길 아래 둔치에선 노란 유채꽃이 화사하게 제 자태를 드러내는 중이다. 꽃이 있는 강을 두고 선조들은 ‘꽃가람’이라 표현했다지. 이 표현이 정확히 들어맞는 장면이다.●산 절벽 강가 벼랑에 난 ‘꽃가람’길 남지개비리길은 경남 창녕군 남지읍 낙동강변의 마분산(馬墳山·180m) 바위 절벽에 난 벼랑길을 일컫는다. 용산리 용산마을에서 신전리 영아지마을까지 편도 약 3㎞ 거리다. 원점 회귀하지 않고 마분산 등산로로 우회해 돌아올 경우 왕복 6.4㎞ 정도 된다. 이름은 ‘강가(개) 벼랑(비리)에 난 길’이라는 뜻이다. 현지 사투리를 그대로 썼다. ‘개가 다닌 벼랑’이라는 견해도 있다. 모성 가득한 어미 개가 새끼에게 젖을 먹이기 위해 오가던 벼랑이라는 내용인데, 개연성은 다소 떨어져 보인다. 오래전엔 소금과 젓갈을 등에 진 등짐장수가 이 길을 오갔고, 주민들이 장을 보러 갈 때나 남지읍으로 통학하는 학생들이 등굣길로 쓰기도 했다. 대동여지도 등 조선시대 고지도와 일제강점기 지형도에 옛길 경로가 기록됐을 만큼 유서가 깊다. 지난해 말 명승으로 공식 지정됐다. ●임진왜란 승전지·6·25 최후의 전선 들머리인 남지수변 억새전망대 앞은 남강이 낙동강과 합류하는 곳이다. 이 구간만 따로 ‘강이 갈라진다’는 뜻의 기음강(岐音江) 혹은 기강(岐江)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기음강은 임진왜란 당시 홍의장군 곽재우와 의병들이 왜선을 격파하며 첫 승을 거뒀던 곳이다. 6·25전쟁 때는 국군이 낙동강 최후 저지선으로 삼았던 곳이기도 하다. 들머리에서 용산양수장까지 1㎞ 정도는 평탄한 길이다. 낙동강을 눈높이에서 보며 걸을 수 있다. 길 양옆으로 수양벚꽃이 늘어서 봄의 정취를 느끼기에도 그만이다. 다만 이 구간에 사유지가 몇 곳 있어 차량이 오가는 것이 흠이다. 실질적인 개비리길은 용산양수장을 지나 곽재우 장군의 고사가 전하는 ‘홍의장군 붉은 돌 신발’ 어름에서 시작된다. ●곽재우 애마의 이야기 깃든 마분산 개비리길은 산과 강을 거스르지 않고 난 길이다. 강물이 산을 안으면 같이 돌고, 휘어지면 같이 물러나 걷는다. 강 너머 마루금을 좁힌 산들과 너른 낙동강의 품도 시원하다. 벼랑 위의 마분산은 ‘말 무덤’을 뜻한다. 곽재우 장군이 자신의 애마에 벌통을 달아 적진에 뛰어들게 한 뒤 왜적이 놀라 허둥댈 때 기습해 대승을 거뒀다. 하지만 이 와중에 말이 죽고 말았다. 의병의 시신과 말을 수습해 산 정상에 묻은 이후 마분산으로 불리게 됐다. 마분산에는 줄기가 여럿인 소나무가 많다. 이를 마분송이라고 부른다. 곽재우 장군은 마분송에 옷을 입혀 의병 수를 많아 보이게 했다고 한다. 이처럼 길 곳곳에 옛이야기들이 풍성하게 담겨 있다. 벼슬아치의 탕건에 장식된 ‘옥관자 바위’, ‘벼슬길에 오른 층층나무’, 조상의 슬기를 엿볼 수 있는 ‘여양진씨 감나무 시집보내기’, ‘영험한 팽나무 연리목’ 등 하나하나 읽으며 걷는 맛이 일품이다. 이 길이 문화재 반열에 오르는 데엔 이런 풍성한 역사 자료가 큰 몫을 했을 것이다.●풍성한 역사 이야기로 명승 반열 남지개비리길 주변에 볼거리가 많다. 진입로 주변의 강변길 전체가 벚꽃이다. 제방 아래 둔치에는 남지유채꽃 단지가 조성됐다. 무려 110만㎡(약 34만평)가 노란 유채꽃이다. 한반도 튤립정원, 태극기 정원 등 다양한 포토존도 갖췄다. 코로나19 탓에 올해도 유채꽃 축제는 취소됐지만 꽃밭 진입을 막지는 않는다. 낙동강을 가로질러 놓인 남지철교는 등록문화재다. 1933년 완공된 근대식 교량으로 형태가 매우 유려하다. 6·25전쟁 때 중앙 부분 25m가 폭파됐다가 1953년 복구된 아픈 역사도 갖고 있다. 현재는 도보와 자전거로만 오갈 수 있다. 다리를 넘으면 함안 땅이다.●고분부터 석탑까지 ‘작은 경주’ 창녕 창녕읍내엔 ‘작은 경주’라 불릴 만큼 역사 유적이 많다. 벚꽃이 만개한 요즘 가 볼 만한 곳은 만옥정공원이다. 신라 진흥왕 때 세운 신라진흥왕척경비(국보)가 늙은 벚꽃들의 호위를 받으며 앉아 있다. 창녕객사, 퇴천삼층석탑 등도 볼거리다. 공원 아래엔 술정리 동 삼층석탑이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석탑으로 국보다.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은 필수 방문 코스다. 5~7세기에 걸쳐 형성된 비화가야 지배층의 무덤군으로 알려졌다. 봉긋한 무덤의 유려한 선을 타고 흐르는 풍경이 눈부시게 아름답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 중이다. 고분군 맞은편은 창녕박물관이다. 송현동 15호 고분에서 나온 뼈를 토대로 복원한 소녀 ‘송현이’ 등이 전시돼 있다. 1500여년 전 열여섯 나이로 순장됐다가 첨단과학의 도움으로 되살아난 가야 소녀의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다.
  • 파주 美캠프 그리브스, 숙박형 역사공원으로

    경기 파주 임진강 북쪽 민간인출입통제선(민통선) 안에 있는 옛 주한미군기지(캠프 그리브스) 소유권이 경기도로 이전돼 숙박이 가능한 역사공원 형태의 관광거점으로 만들어진다. 민통선 안에 관광객 숙박 시설이 만들어지는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임진각·제3땅굴·판문점·도라전망대 등 비무장지대(DMZ) 관광이 더 활성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경기도는 6일 캠프 그리브스를 국방부로부터 넘겨받고, 국방부에 대체시설을 주는 형태의 ‘기부 대 양여 사업’의 최종 합의각서를 최근 체결했다고 밝혔다. 이번 합의로 2012년 10월 도와 국방부 간 캠프 그리브스 활용에 대한 양해각서를 체결한 지 10년여 만에 그리브스를 역사공원으로 조성하는 사업을 본격 추진할 수 있게 됐다. 도는 이달 중 국방부에 대체시설 기부를 건의하고 오는 7월 전까지 소유권 이전을 마칠 방침이다. 이어 올 하반기부터 화장실, 음식점 등 편의시설과 상하수도 등 기반시설 공사를 우선 시작하고, 이르면 내년 하반기 중 공식 개장할 예정이다. 임진각관광지(임진강) 북쪽인 파주 군내면에 자리잡은 캠프 그리브스는 본래 주한미군이 6·25 전쟁 직후인 1953년 7월부터 2004년 이라크로 파병되기까지 50여년간 주둔했던 민통선 내 유일한 미군 반환 공여지다. 현재 임진각관광지에서 임진강을 건너 캠프 그리브스 후문까지 곤돌라가 운행되고 있다. 임진강 이북지역인 민통선 안에는 대성동 통일촌, 해마루촌 등 민간인이 거주하는 마을은 있으나 관광객이 숙박할 수 있는 체류형 시설은 없다.
  • 이젠 ‘民의 땅’… 상춘재·녹지원은 포토존, 내부 구경은 다음 기회에

    이젠 ‘民의 땅’… 상춘재·녹지원은 포토존, 내부 구경은 다음 기회에

    분수 지나 춘추관, 왼쪽엔 여민관 녹지원엔 170년 한국산 반송 감상관저 뒤뜰선 ‘석조여래좌상’ 구경 대통령 침실 등 건물은 추후 개방 ‘완전 개방’ 북악산 남측 등산 추천앞으로 한 달 뒤면 청와대 안에 아무렇게나 들어갈 수 있다. 윤석열 당선인이 대통령에 취임하는 다음달 10일 청와대 문이 국민에게 열리는 것이다. 미리 예약하거나 검문검색을 거칠 필요 없이 동네 공원처럼 청와대 경내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 918년 전 청와대 터가 역사에 등장한 이래 그곳은 왕조, 일제, 미군정, 국가수반이 자리한 관(官)의 땅이었다. 앞으로는 국민 누구나 방문할 수 있는 민(民)의 땅이 된다. 정부는 6일 임시 국무회의를 열고 대통령 집무실 용산 이전을 위한 예비비 360억원 지출안을 의결했다.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5월 10일부터 청와대를 개방하겠다고 약속하고 인수위 홈페이지에 구체적인 계획을 적시했다. 그 계획에 따라 상상으로 청와대를 미리 방문해 본다. 5월 10일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3번 출구 앞에서 버스를 타고 두 개 정류소를 지나 효자동에 내렸다. 청와대 밖 분수를 지나쳐 춘추관의 춘추문을 통해 경내로 들어섰다. 남녀노소, 외국인 모두 신분증을 보여 줄 필요가 없다. 청와대로 들어갈 수 있는 문 가운데 정문과 연풍문, 시화문을 지나 춘추문에 도착했다. 춘추문을 통해 왼쪽으로 들어서면 보이는 것이 대통령과 청와대 직원들이 업무를 보는 여민관이다. 여민1~3관까지 세 개 건물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여민 1관은 전날까지만 해도 대통령 집무실·비서실장실·정무수석실, 2관은 경제수석실·민정수석실, 3관은 홍보수석실 등이 있었다. 다만 청와대의 모든 건물 내부는 당분간 들어가 볼 수 없어 아쉬웠다. 전날까지 문재인 대통령과 비서진이 사용했기에 자료와 설비가 아직 치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민관 뒤쪽으로 녹지원과 상춘재가 보인다. 넓은 잔디밭에서 아름드리나무와 각종 꽃나무가 손짓한다. 170년 된 한국산 반송(盤松)도 눈에 들어온다. 2013년 청와대는 ‘청와대 3대 나무’를 선정했는데, 그중 하나가 반송이다. 소반을 거꾸로 뒤집어 놓은 듯한 모습이 특이하다. 대통령이 주요국 정상 등 특별한 손님을 대접할 때 이용하는 상춘재를 직접 보니 실감이 안 난다. 상춘재는 1983년 완공된 한옥 건물로, 200년 이상 된 춘양목을 사용했다.상춘재와 녹지원을 지나 10분 남짓 걸었을까. 역대 대통령들이 숙소로 썼던 관저에 도착했다. 한옥 건물 안에 있는 대통령의 침실, 주방, 식당 등을 무척 보고 싶었지만 당장은 들어가 볼 수 없어 아쉬웠다. 관저 뒤뜰에 보물로 지정된 석조여래좌상이 보인다. 경주에 있던 보물이 일제강점기 총독관저였던 이곳으로 옮겨 왔다고 한다. 1993~1994년 서해 페리호 침몰, 성수대교 붕괴 등 참사가 줄을 이었는데 기독교 신자인 김영삼 전 대통령이 불상을 치워 버렸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자 공개된 바 있다. 이어 본관에 도착했다. 노태우 대통령 당시인 1991년 완공된 건물로 왕궁건축기법을 사용했다. 15만장의 푸른 기와가 얹힌 팔작지붕 덕분에 웅장해 보인다. 100㎡(약 32.5평)에 달하는 대통령 집무실, 국무회의가 열리던 세종실, 연회장 용도의 인왕실 등은 추후 건물 내부가 공개되면 관람할 수 있다. 본관을 나와 서쪽으로 걸어가면 영빈관이 보인다. 1978년 지어진 현대식 건물로 18개의 돌기둥이 있는데, 그중 전면 네 개의 돌기둥은 바위를 통째로 깎아 이음새가 없다. 마지막으로 사랑채에서 기념품을 구경하면서 청와대 관람을 끝냈다. 이대로 청와대를 떠나기 아쉬운 시민들이 청와대 북쪽으로 이어진 북악산 남측면을 등산하는 모습이 보였다. 청와대 춘추관에서 백악정을 거쳐 숙정문, 서울성곽길을 통해 창의문 안내소까지 이어진다고 한다. 고려시대인 1104년 남경(서울)의 이궁(수도 밖 별궁)으로 역사에 처음 등장한 청와대 터는 조선 태조 4년(1395년) 경복궁이 창건되면서 궁궐의 후원으로 조성됐다. 임진왜란 후 폐허가 됐다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며 이 자리에 경무대를 뒀는데, 인재를 등용하는 과거 시험장 기능을 했다. 조선총독부는 이곳에 건물을 지어 총독관사로 이용했고, 그 건물은 1945년 해방 후엔 미군정 사령관 관사로 쓰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며 경무대라는 이름을 붙이고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사용하게 된 것이 대통령 집무실로서 청와대 역사의 시작이다. 이 전 대통령을 시작으로 윤보선·박정희·최규하·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까지 12명의 대통령이 사용했다. 전직 대통령들이 하나같이 불행한 말로를 겪었다는 점에서 청와대는 권력자들에게 선망하면서도 기피하는 곳이 됐다. 그래서 몇몇 대통령은 청와대 집무실 이전을 시도했지만, 경호와 대안 부재 등 한계 때문에 번번이 무산됐다. 그래서인지 윤 당선인은 아예 처음부터 청와대에는 단 하루도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했고, 결국 그 약속을 관철하게 됐다. 이전 비용과 안보 공백, 시민 불편 등의 이유로 대통령 집무실 이전에 대한 여론은 현재로서는 썩 호의적이지 않다. 하지만 윤 당선인 쪽에서는 청계천 복원과 경부고속도로도 처음엔 반대가 많았지만 결국은 호평받았다며 막상 청와대가 개방되면 여론이 호전될 것이라는 기대가 나온다. 반면 청와대는 단순히 권력자의 거처라는 의미를 넘어 대한민국의 상징물과 같다는 점에서 국민들이 상실감을 느낀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어느 쪽 견해가 맞는지는 결국 시간이 알려주겠지만, 어쨌든 이것도 대한민국의 운명이다. 918년의 역사도 하루아침에 바꿔 버리는 대한민국, 말 그대로 ‘다이내믹 코리아’다.
  • 5월 10일 청와대 문 열리면…신분증·예약·검문 없이 구경 [INTO]

    5월 10일 청와대 문 열리면…신분증·예약·검문 없이 구경 [INTO]

    앞으로 한 달 뒤면 청와대 안에 아무렇게나 들어갈 수 있다. 윤석열 당선인이 대통령에 취임하는 다음달 10일 청와대 문이 국민에게 열리는 것이다. 미리 예약하거나 검문검색을 거칠 필요 없이 동네 공원처럼 청와대 경내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 918년 전 청와대 터가 역사에 등장한 이래 그곳은 왕조, 일제, 미군정, 국가수반이 자리한 관(官)의 땅이었다. 앞으로는 국민 누구나 방문할 수 있는 민(民)의 땅이 된다. 정부는 6일 임시 국무회의를 열고 대통령 집무실 용산 이전을 위한 예비비 360억원 지출안을 의결했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5월 10일부터 청와대를 개방하겠다고 약속하고 인수위 홈페이지에 구체적인 계획을 적시했다. 그 계획에 따라 상상으로 청와대를 미리 방문해 본다. 5월 10일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3번 출구 앞에서 버스를 타고 두 개 정류소를 지나 효자동에 내렸다. 청와대 밖 분수를 지나쳐 춘추관의 춘추문을 통해 경내로 들어섰다. 남녀노소, 외국인 모두 신분증을 보여 줄 필요가 없다. 청와대로 들어갈 수 있는 문 가운데 정문과 연풍문, 시화문을 지나 춘추문에 도착했다. 춘추문을 통해 왼쪽으로 들어서면 보이는 것이 대통령과 청와대 직원들이 업무를 보는 여민관이다. 여민1~3관까지 세 개 건물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여민 1관은 전날까지만 해도 대통령 집무실·비서실장실·정무수석실, 2관은 경제수석실·민정수석실, 3관은 홍보수석실 등이 있었다. 다만 청와대의 모든 건물 내부는 당분간 들어가 볼 수 없어 아쉬웠다. 전날까지 문재인 대통령과 비서진이 사용했기에 자료와 설비가 아직 치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민관 뒤쪽으로 녹지원과 상춘재가 보인다. 넓은 잔디밭에서 아름드리나무와 각종 꽃나무가 손짓한다. 170년 된 한국산 반송(盤松)도 눈에 들어온다. 2013년 청와대는 ‘청와대 3대 나무’를 선정했는데, 그중 하나가 반송이다. 소반을 거꾸로 뒤집어 놓은 듯한 모습이 특이하다. 대통령이 주요국 정상 등 특별한 손님을 대접할 때 이용하는 상춘재를 직접 보니 실감이 안 난다. 상춘재는 1983년 완공된 한옥 건물로, 200년 이상 된 춘양목을 사용했다.상춘재와 녹지원을 지나 10분 남짓 걸었을까. 역대 대통령들이 숙소로 썼던 관저에 도착했다. 한옥 건물 안에 있는 대통령의 침실, 주방, 식당 등을 무척 보고 싶었지만 당장은 들어가 볼 수 없어 아쉬웠다. 관저 뒤뜰에 보물로 지정된 석조여래좌상이 보인다. 경주에 있던 보물이 일제강점기 총독관저였던 이곳으로 옮겨 왔다고 한다. 1993~1994년 서해 페리호 침몰, 성수대교 붕괴 등 참사가 줄을 이었는데 기독교 신자인 김영삼 전 대통령이 불상을 치워 버렸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자 공개된 바 있다. 이어 본관에 도착했다. 노태우 대통령 당시인 1991년 완공된 건물로 왕궁건축기법을 사용했다. 15만장의 푸른 기와가 얹힌 팔작지붕 덕분에 웅장해 보인다. 100㎡(약 32.5평)에 달하는 대통령 집무실, 국무회의가 열리던 세종실, 연회장 용도의 인왕실 등은 추후 건물 내부가 공개되면 관람할 수 있다. 본관을 나와 서쪽으로 걸어가면 영빈관이 보인다. 1978년 지어진 현대식 건물로 18개의 돌기둥이 있는데, 그중 전면 네 개의 돌기둥은 바위를 통째로 깎아 이음새가 없다. 마지막으로 사랑채에서 기념품을 구경하면서 청와대 관람을 끝냈다. 이대로 청와대를 떠나기 아쉬운 시민들이 청와대 북쪽으로 이어진 북악산 남측면을 등산하는 모습이 보였다. 청와대 춘추관에서 백악정을 거쳐 숙정문, 서울성곽길을 통해 창의문 안내소까지 이어진다고 한다. 고려시대인 1104년 남경(서울)의 이궁(수도 밖 별궁)으로 역사에 처음 등장한 청와대 터는 조선 태조 4년(1395년) 경복궁이 창건되면서 궁궐의 후원으로 조성됐다. 임진왜란 후 폐허가 됐다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며 이 자리에 경무대를 뒀는데, 인재를 등용하는 과거 시험장 기능을 했다. 조선총독부는 이곳에 건물을 지어 총독관사로 이용했고, 그 건물은 1945년 해 방 후엔 미군정 사령관 관사로 쓰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며 경무대라는 이름을 붙이고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사용하게 된 것이 대통령 집무실로서 청와대 역사의 시작이다. 이 전 대통령을 시작으로 윤보선·박정희·최규하·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까지 12명의 대통령이 사용했다. 전직 대통령들이 하나같이 불행한 말로를 겪었다는 점에서 청와대는 권력자들에게 선망하면서도 기피하는 곳이 됐다. 그래서 몇몇 대통령은 청와대 집무실 이전을 시도했지만, 경호와 대안 부재 등 한계 때문에 번번이 무산됐다. 그래서인지 윤 당선인은 아예 처음부터 청와대에는 단 하루도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했고, 결국 그 약속을 관철하게 됐다. 이전 비용과 안보 공백, 시민 불편 등의 이유로 대통령 집무실 이전에 대한 여론은 현재로서는 썩 호의적이지 않다. 하지만 윤 당선인 쪽에서는 청계천 복원과 경부고속도로도 처음엔 반대가 많았지만 결국은 호평받았다며 막상 청와대가 개방되면 여론이 호전될 것이라는 기대가 나온다. 반면 청와대는 단순히 권력자의 거처라는 의미를 넘어 대한민국의 상징물과 같다는 점에서 국민들이 상실감을 느낀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어느 쪽 견해가 맞는지는 결국 시간이 알려주겠지만, 어쨌든 이것도 대한민국의 운명이다. 918년의 역사도 하루아침에 바꿔 버리는 대한민국, 말 그대로 ‘다이내믹 코리아’다.
  • 5월 10일 청와대 문 열리면 신분증·예약·검문 없이 구경 [INTO]

    5월 10일 청와대 문 열리면 신분증·예약·검문 없이 구경 [INTO]

    앞으로 한 달 뒤면 청와대 안에 아무렇게나 들어갈 수 있다. 윤석열 당선인이 대통령에 취임하는 다음달 10일 청와대 문이 국민에게 열리는 것이다. 미리 예약하거나 검문검색을 거칠 필요 없이 동네 공원처럼 청와대 경내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 918년 전 청와대 터가 역사에 등장한 이래 그곳은 왕조, 일제, 미군정, 국가수반이 자리한 관(官)의 땅이었다. 앞으로는 국민 누구나 방문할 수 있는 민(民)의 땅이 된다. 정부는 6일 임시 국무회의를 열고 대통령 집무실 용산 이전을 위한 예비비 360억원 지출안을 의결했다.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5월 10일부터 청와대를 개방하겠다고 약속하고 인수위 홈페이지에 구체적인 계획을 적시했다. 그 계획에 따라 상상으로 청와대를 미리 방문해 본다.5월 10일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3번 출구 앞에서 버스를 타고 두 개 정류소를 지나 효자동에 내렸다. 청와대 밖 분수를 지나쳐 춘추관의 춘추문을 통해 경내로 들어섰다. 남녀노소, 외국인 모두 신분증을 보여 줄 필요가 없다. 청와대로 들어갈 수 있는 문 가운데 정문과 연풍문, 시화문을 지나 춘추문에 도착했다. 춘추문을 통해 왼쪽으로 들어서면 보이는 것이 대통령과 청와대 직원들이 업무를 보는 여민관이다. 여민1~3관까지 세 개 건물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여민 1관은 전날까지만 해도 대통령 집무실·비서실장실·정무수석실, 2관은 경제수석실·민정수석실, 3관은 홍보수석실 등이 있었다. 다만 청와대의 모든 건물 내부는 당분간 들어가 볼 수 없어 아쉬웠다. 전날까지 문재인 대통령과 비서진이 사용했기에 자료와 설비가 아직 치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민관 뒤쪽으로 녹지원과 상춘재가 보인다. 넓은 잔디밭에서 아름드리나무와 각종 꽃나무가 손짓한다. 170년 된 한국산 반송(盤松)도 눈에 들어온다. 2013년 청와대는 ‘청와대 3대 나무’를 선정했는데, 그중 하나가 반송이다. 소반을 거꾸로 뒤집어 놓은 듯한 모습이 특이하다. 대통령이 주요국 정상 등 특별한 손님을 대접할 때 이용하는 상춘재를 직접 보니 실감이 안 난다. 상춘재는 1983년 완공된 한옥 건물로, 200년 이상 된 춘양목을 사용했다.상춘재와 녹지원을 지나 10분 남짓 걸었을까. 역대 대통령들이 숙소로 썼던 관저에 도착했다. 한옥 건물 안에 있는 대통령의 침실, 주방, 식당 등을 무척 보고 싶었지만 당장은 들어가 볼 수 없어 아쉬웠다. 관저 뒤뜰에 보물로 지정된 석조여래좌상이 보인다. 경주에 있던 보물이 일제강점기 총독관저였던 이곳으로 옮겨 왔다고 한다. 1993~1994년 서해 페리호 침몰, 성수대교 붕괴 등 참사가 줄을 이었는데 기독교 신자인 김영삼 전 대통령이 불상을 치워 버렸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자 공개된 바 있다. 이어 본관에 도착했다. 노태우 대통령 당시인 1991년 완공된 건물로 왕궁건축기법을 사용했다. 15만장의 푸른 기와가 얹힌 팔작지붕 덕분에 웅장해 보인다. 100㎡(약 32.5평)에 달하는 대통령 집무실, 국무회의가 열리던 세종실, 연회장 용도의 인왕실 등은 추후 건물 내부가 공개되면 관람할 수 있다. 본관을 나와 서쪽으로 걸어가면 영빈관이 보인다. 1978년 지어진 현대식 건물로 18개의 돌기둥이 있는데, 그중 전면 네 개의 돌기둥은 바위를 통째로 깎아 이음새가 없다. 마지막으로 사랑채에서 기념품을 구경하면서 청와대 관람을 끝냈다. 이대로 청와대를 떠나기 아쉬운 시민들이 청와대 북쪽으로 이어진 북악산 남측면을 등산하는 모습이 보였다. 청와대 춘추관에서 백악정을 거쳐 숙정문, 서울성곽길을 통해 창의문 안내소까지 이어진다고 한다. 고려시대인 1104년 남경(서울)의 이궁(수도 밖 별궁)으로 역사에 처음 등장한 청와대 터는 조선 태조 4년(1395년) 경복궁이 창건되면서 궁궐의 후원으로 조성됐다. 임진왜란 후 폐허가 됐다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며 이 자리에 경무대를 뒀는데, 인재를 등용하는 과거 시험장 기능을 했다. 조선총독부는 이곳에 건물을 지어 총독관사로 이용했고, 그 건물은 1945년 해 방 후엔 미군정 사령관 관사로 쓰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며 경무대라는 이름을 붙이고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사용하게 된 것이 대통령 집무실로서 청와대 역사의 시작이다. 이 전 대통령을 시작으로 윤보선·박정희·최규하·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까지 12명의 대통령이 사용했다. 전직 대통령들이 하나같이 불행한 말로를 겪었다는 점에서 청와대는 권력자들에게 선망하면서도 기피하는 곳이 됐다. 그래서 몇몇 대통령은 청와대 집무실 이전을 시도했지만, 경호와 대안 부재 등 한계 때문에 번번이 무산됐다. 그래서인지 윤 당선인은 아예 처음부터 청와대에는 단 하루도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했고, 결국 그 약속을 관철하게 됐다. 이전 비용과 안보 공백, 시민 불편 등의 이유로 대통령 집무실 이전에 대한 여론은 현재로서는 썩 호의적이지 않다. 하지만 윤 당선인 쪽에서는 청계천 복원과 경부고속도로도 처음엔 반대가 많았지만 결국은 호평받았다며 막상 청와대가 개방되면 여론이 호전될 것이라는 기대가 나온다. 반면 청와대는 단순히 권력자의 거처라는 의미를 넘어 대한민국의 상징물과 같다는 점에서 국민들이 상실감을 느낀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어느 쪽 견해가 맞는지는 결국 시간이 알려주겠지만, 어쨌든 이것도 대한민국의 운명이다. 918년의 역사도 하루아침에 바꿔 버리는 대한민국, 말 그대로 ‘다이내믹 코리아’다.
  • [STOP PUTIN] 1940년 러시아 카틴숲, 82년 뒤 우크라이나 부차

    [STOP PUTIN] 1940년 러시아 카틴숲, 82년 뒤 우크라이나 부차

    영화가 시작하면 1939년 9월 17일 안개가 걷힌 폴란드의 어느 다리 위다. 나치 독일의 침공에 밀려 동쪽으로 피란 가는 이들의 눈에 자신들을 향해 달려오는 이들이 들어온다. 세상에나, 전쟁이 터졌는데 이쪽으로 달려오다니, 저 사람들 정신나갔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동쪽에서 소련군이 침공해 피란 오는 이들이었다. 그 해 8월 23일 나치 독일과 소련은 불가침 조약(몰로토프-리벤트로프 협약)을 맺었다. 이를 빌미로 두 나라는 중간에 낀 폴란드를 마음껏 유린할 수 있었다. 나치는 커즌 선(線) 서쪽의 폴란드 땅을, 소련은 같은 선 동쪽의 폴란드 땅에 쳐들어갔다. 해서 앞의 다리 위에서와 같은 비극이 연출됐다. 폴란드 군은 소련의 공세에 압도돼 일찌감치 항복해 버렸다. 수천명의 장교가 포로 신세를 자처했다. 개죽음을 면해 훗날을 도모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소련의 코젤스크·스타로벨스크·오스타슈코프 수용소에 이송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장교들을 비롯해 경찰, 지식인, 엘리트 등 2만명을 훨씬 넘겼다. 그런데 나치가 1941년 6월 소련까지 침공했다. 폴란드 포로들의 행방이 묘연했다. 영국 런던에 있던 폴란드 망명정부가 육군을 재조직하느라 수소문했더니 중국 만주로 달아났다거나 중동으로 이송됐다는 등 소련의 해명이 엇갈렸다. 재조직된 육군의 소집에 응한 것은 448명뿐이었다. 소련에서 1942년 새로 창설된 폴란드 육군이 중동으로 이동했지만 여전히 포로들의 행적을 찾을 수 없었다. 소련과 독일이 국경 획정을 놓고 입씨름을 한창 벌이던 1943년 4월 13일, 독일이 스몰렌스크 근교 카틴숲에서 커다란 무덤을 찾아냈다고 발표했다. 독일은 시신들이 1940년 4월 이전 코젤스크 포로수용소에 수용됐던 폴란드 장교들이라며 소련군이 그 다음달 포로들을 처형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틀 뒤 소련 정부는 폴란드 포로들이 1941년 스몰렌스크 서쪽 건설공사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독일이 그해 7월 이 지역을 점령한 뒤 포로들을 사살한 것이라고 맞섰다. 카틴에서만 4400명의 시신이 나왔는데 민스크에서 3870명, 하리코우에서 3800명, 메드노예에서 6300명이 묻혀 있었다. (지금의 우크라이나인) 키이우와 헤르손에서도 학살극이 있었다. 1943년 4월 25일 소련 정부는 폴란드 망명정부와 단교했다. 폴란드가 조사해보니 소련 보안당국이 이들을 살려두면 폴란드 군이 재건돼 방해가 될 뿐이라는 독일 관리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1940년 봄에 집단 처형한 것으로 확인됐다. 하지만 당시 독일을 패망시키기 위해 소련의 협력이 긴요했던 영국과 미국 정부는 못 들은 척했다. 폴란드인들의 진상 규명 요구가 독일을 위협하는 연합전선의 대오를 흐트러뜨린다며 소련의 요구를 받아들여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폴란드와의 국경을 커즌 선으로 합의했다.폴란드의 명감독 안제이 바이다의 2007년 작품 ‘카틴’을 보면 실제 감독의 부친이 포로로 억류된 이후의 일들을 꼼꼼히 기록하는 폴란드 장교로 묘사돼 있다. 그의 모친은 다리 위에서 남편의 행방을 수소문하는 안나란 여성으로 그려진다. 수용소에서 카틴 숲으로 이송되는 버스로 향하던 장교들이 귀향하게 됐다며 좋아하다가 시체들로 가득한 구덩이를 보고 절망해 성호를 긋는 장면, 아무런 표정 없이 그들의 뒤통수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소련군 병사의 표정이 사뭇 충격적이다. 폴란드 장교들의 참담한 운명도 운명이지만, 거의 2만 2000명의 목숨을 앗아간 소련이 독일 패망을 앞당길 수 있다며 미국과 영국이 카틴숲 학살의 책임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소련의 주장대로 국경을 획정한 사실이 그야말로 어이없기만 하다. 소련이 진실을 고백하는 데는 훨씬 더 오랜 시간이 흘러야 했다. 1990년 고르바초프가 소련군이 이오시프 스탈린의 명령을 받고 저지른 집단살육이었을 뒤늦게 인정하고 사과했다. 영화에 많은 후원을 한 레흐 카친스키 폴란드 대통령이 학살 70주기인 2010년 스몰렌스크의 추모비를 참배하려다 항공기 추락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것도 안타까움을 더한다.그런데 다시는 되풀이되지 말아야 할 일이 되풀이되고 있다. 지난 2월 24일 우크라이나 정부의 탈나치화를 목표로 침공(자신들 주장으로는 특별군사작전)한 러시아군이 지난달 30일 퇴각한 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외곽 부차, 모티진 등에서 두 손을 뒤로 결박당한 채 머리 뒤쪽에 총알 자국이 박힌 민간인 시신들이 “개들이 (흙을 파내) 먹어치울 수 있을 정도로” 묻는 시늉만 한 채로 묻힌 사진이 여러 장 나와 충격을 주고 있다. 처형하듯 총격을 가한 것은 80여년 전 카틴 숲에서의 모습과 똑닮았다. 한 청년은 코와 눈이 모래 밖으로 훤히 나와 있을 정도로 죽은 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도 차리지 않았다. 러시아 정부가 우크라이나 당국과 군이 조작, 연출한 것이라고 오리발부터 내미는 것도 80여년 전 소련 당국의 해명과 똑닮았다. 우리처럼 단일민족에 분단의 아픔을 겪은 폴란드, 망명정부가 얼마나 허망한지는 어느 시인의 시구에서도 잘 드러난다. 원자력발전소는 있지만 핵무기와 핵물질 농축을 포기한 우크라이나가 당하고 있는 고통도 못지 않다. 힘없는 민족에게 닥친 불행은 되풀이된다, 이것이 교훈이라면 역사는 너무 잔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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